소설리스트

10화 (10/28)

선생님은 수상해

릴리와 하이드는 정석처럼 연인의 밀회 장소를 방문했다.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조용한 카페를 방문한 다음에는 입소문 난 식당의 정식을 먹었고, 그다음은 오페라 극장이었다. 당연히 가서 자리를 예매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하이드는 직원과 소곤대더니 곧이어 당연하다는 듯 안내를 받으며 깊숙이 위치한 전용석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선생님, 여기는…….”

“릴리 아가씨를 모시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과했다. 정말로 과했다. 오페라 극장의 전용석은 대개 연 단위로 계약하고 그 자리를 사는 것이었다. 무대와 가까운 곳에 다른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고 은밀하게 자신의 자리를 가질 수 있는 것이 전용석의 매력이었지만, 전용석은 상상 이상으로 비쌌다. 때문에 전용석을 가지는 귀족은 극소수였다.

성공한 자산가나 가문의 위세를 전시하고 싶은 명문가 혹은 황가가 그러한 사람들이었다. 사실 지금 하이드와 릴리가 앉아있는 전용석도 그러했다. 하이드는 제르시스의 전용석을 멋대로 사용하면서도 죄책감은 없었다. 어차피 사용하지 않으면 비워둘 자리였다.

“오페라를 즐겨 보십니까?”

“부끄럽게도 이번이 첫 관람이에요. 제가 살던 곳은 이런 문화생활과의 접근성이 마땅찮았거든요.”

“그렇습니까? 저도 오페라를 관람하는 것은 처음입니다.”

하이드는 문화생활 영위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타인의 흥망성쇠를 지켜보는 쪽이 어지간한 희극보다 희극적이고 대부분의 비극만큼이나 비극적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한가롭게 극장에 앉아있을 시간이 있다면 그는 다른 일을 할 사람이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여서 곧 시작될 애절한 사랑 이야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릴리는 기대감을 숨기지 못하고 무대를 바라보며 두 손을 꼭 모으고 있었다. 하이드는 오로지 그녀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오페라 극장에 온 것이었다.

“아가씨, 즐거우신가요?”

“네?”

릴리는 오페라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하이드의 말을 듣지 못했다. 하이드는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보람찼던 조금 전의 자신을 비웃었다. 그녀가 옆에 있으면 자꾸만 욕심을 부리게 된다. 보기만 해도 좋다가, 닿고 싶어지고, 닿으면…….

전부 그녀의 탓이었다. 릴리는 그에게 뭐든 내줄 것처럼 사랑스럽게 웃어주니까, 호박색 눈동자의 온기가 오로지 그만을 위한 것처럼 순수한 애정을 드러내니까. 욕심이 나잖아.

그는 릴리의 허리께에 팔을 둘러 끌어당기며 그녀의 뺨에 입술을 지분거렸다. 평소라면 부끄러워하며 그의 가슴에 손을 올려 밀거나 얌전히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댈 릴리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녀의 영혼이 무대로 빨려 나간 것 같았다.

무대 위는 여배우의 아리아가 한창이었다. 하이드는 사람이 돌고래처럼 고음을 내뱉는 게 대단하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여배우의 연기에 동화되어서 눈물을 글썽이는 릴리가 훨씬 더 신기했다. 하이드는 연기에 불과한 것들에 빠져들 수 있는 그녀가 놀라웠다.

지금 절망을 노래하는 여배우도 오페라가 끝난 후에는 지친 얼굴로 화장을 지우고 그녀의 삶으로 돌아갈 것 아닌가. 그런 것을 생각하면 하이드는 전혀 몰입이 되지 않았다. 그는 진짜도 아닌 것에 감정을 소모할 만큼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 아니었다.

“즐거우신지 여쭤보았습니다.”

“네. 저는 정말 좋아요. 선생님은 재미없으세요?”

릴리는 전용석에 앉아있음에도 다른 사람에게 들릴까 봐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흐음, 저는 아무래도 오페라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연인들이 왜 오페라 극장에 오는지는 알겠지만요.”

하이드는 오페라에 아예 흥미를 잃고 릴리를 만지작대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릴리가 오페라에 푹 빠져있는 것이 보여서 적극적으로 방해하지는 못했다. 욕구불만으로 속이 드글드글 끓는데도 이 밀폐된 공간에서 그녀를 맛볼 수 없어 통탄할 따름이었지만, 하이드는 그녀에게만큼은 되도록 신사이고 싶었다. 그의 손길은 이미 신사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릴리는 오페라에 푹 빠져있다가 하이드가 그녀를 끌어안고 입술을 지분대고 여기저기를 쓰다듬어대는 통에 집중이 흐트러졌다. 그녀도 그의 손길이 싫지는 않았지만, 결국 그녀에게 신비주의를 고수하는 하이드가 얄미워서 애써 반응하지 않고 오페라에 집중하는 척을 했다.

그녀가 꿋꿋하게 무대에 시선을 고정시키자 하이드는 그녀의 귓가에 숨을 불어넣고 머리칼에 입을 맞추고 허리께의 손을 슬쩍 내려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다정하면서도 마냥 순수한 의도는 아닌 접촉에 릴리는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조건반사처럼 그가 몸에 손을 대기만 하면 흥분하게 된다.

그녀의 몸은 하이드가 주는 쾌락을 기억하고 있어서 그를 거부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무대에서 시선을 떼고 하이드를 돌아보고 그에게 입 맞춘다면 이곳은 곧장 극락이 될 터였다.

“선생님, 그만 하세요.”

“무엇을 말입니까?”

“이렇게 만지는 거요.”

“아가씨, 저에게 이 이상의 인내를 요구하시는 것은 정말 잔인한 일입니다.”

“선생님이 뭘 참으시는데요?”

“아가씨가 그렇게 새침하게 굴면 더 꼴리는 거 아십니까?”

릴리는 그가 말하는 내용이 르시엔의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현명하게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신사들은 왜 그렇게 남 탓하기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그들은 자기 마음대로 그녀를 욕망하고서 그녀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하이드는 그녀가 새침하지 않고 상냥하게 굴더라도 비슷하게 말했을 것이라고, 그녀는 강하게 확신했다.

“그렇게 하고 싶으세요?”

릴리는 하이드가 그러는 것처럼 나른하게 유혹적인 자태를 취했다. 그녀는 가느다란 검지로 그의 남자다운 턱을 쓸고, 예쁘게 눈을 휘며 그의 부풀어 오른 바지 앞섶에 시선을 두었다.

“저는 언제나, 거의, 항상 아가씨와 뒹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답니다.”

하이드가 그녀의 유혹에 놀란 듯 헛숨을 들이켜더니 이내 눈동자를 번들거리며 여유롭게 웃었다.

릴리는 하이드의 말에 뺨을 붉혔지만 꿋꿋하게 그의 허벅지 위에 손을 올리고 탄탄한 감촉을 느끼며 쓰다듬었다. 릴리는 그의 짙은 눈빛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며, 제 손길 아래서 허벅지 근육이 긴장하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손이 안쪽을 느릿하게 쓸며 파고들자 그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선생님은 정말로 음탕해요. 여기는 공공장소랍니다?”

릴리는 잔뜩 굳어있는 하이드의 턱에 가볍게 입 맞추고는 그의 몸에서 손을 뗐다. 릴리는 짓궂은 장난을 친 아이처럼 해맑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도 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평소처럼 그의 장단에 휘말릴 생각은 없었다. 하이드가 그녀를 희롱한 것에 대한 소소한 복수였다.

* * *

릴리는 하이드와의 외출을 끝내고 돌아와 고민에 빠졌다. 침대에 정자세로 누워서 미동도 없이 눈만 깜빡이는 그녀를 메리가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아가씨, 눈 뜨고 주무세요?”

“생각 중이야.”

“아가씨는 고민도 얌전하게 하시네요.”

“으응…….”

릴리는 생각에 잠겨 메리의 시선도 의식하지 못했다. 릴리는 오늘 하이드를 떠볼 생각이었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하이드는 그의 알맹이 위로 아름답고 견고한 막을 씌우고 누구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물어보고 싶었던 것은 하나도 물어보지 못했다. 바보처럼 그의 다정한 연인 행세에 목적이 흐려져서 추궁다운 추궁도 못 하고 시시덕대다 돌아온 것이 분했다. 그의 유년기의 조각을 알게 되었지만, 그녀는 아직도 그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여전히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메리, 비밀이 많은 남자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까?”

“아가씨, 비밀이 많은 남자는 대체로 나쁜 남자랍니다. 켕기는 구석이 많으니까 그러는 거예요. 어떻게 대할지 고민하지 마시고 그냥 버리세요.”

릴리는 하이드가 나쁜 남자라는 생각에 아직 완전히 찬성도 반대도 하지 못하고 애매하게 보류한 상태였다. 그가 자신을 속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나쁜 쪽은 총기를 불법으로 유통하려는 세력이 아니겠는가.

“……버리지 못하면?”

“내 팔자 내가 꼰 거다, 포기하고 받아들여야죠.”

“꼭 포기할 필요는 없지 않아……?”

“포기를 못 하면, 엄청나게 어려운 길이 있어요.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 골라 쓰는 것이라고들 하지만, 만분의 일의 확률로 고쳐지는 사람이 있긴 할 테니까요.”

“어떻게 해야 해?”

“뭐어, 뒤라도 밟고 바람 현장을 검거해야 하지 않겠어요? 딱 들이닥쳐서 두 연놈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흔들어서 반 죽여 놔야죠. 가끔 매가 약인 놈들이 있어요. 쓰레기를 개과천선 시키려면 그 정도는, 아니 그런데 아가씨 애인분이 바람피우세요?”

“잠깐, 메리. 나는 바람이라고 한 적 없잖아?”

메리는 남자가 바람피우는 거 아니면 비밀로 할 게 뭐가 있냐며 물었지만, 릴리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메리의 해답은 그녀의 경우와는 전혀 근접하지 않았지만, 확실히 도움이 되기는 했다.

릴리는 도끼눈을 하고서 ‘아가씨, 그분이 그렇게 안 봤는데 쓰레기인가요?’라고 물으며 전투 의지를 불태우는 메리에게 아니라고 손사래 치며 내보냈다. 메리는 분명 그녀보다 어렸지만 어떤 경험을 쌓았는지는 몰라도 가끔 보면 너무 조숙했다.

* * *

릴리는 곧바로 행동에 돌입했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 있어서 이렇게 적극적일 때가 있었나 싶었다. 흐르는 강물에 구태여 저항하지 않고 사는 것, 강물이 되도록 깨끗하고 그 물살이 거칠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여인의 삶의 태도이자 미덕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떠다니던 것을 멈추고 일어섰다.

“더글라스!”

“흐업……!”

“왜 그렇게 놀라?”

“어휴, 뒤에서 갑자기 부르니까 놀라지. 저택에서 되도록 아는 척하지 말아 줄래, 아가씨?”

“내가 아는 척하는 게 싫었으면 들키지 말았어야지.”

“그래, 그건 아가씨 말이 맞아. 어휴, 잘못은 하이드가 했는데 왜 내가 곤욕인지 모르겠다.”

“본인 앞에서 상대하는 게 곤욕이라고 말하는 건 무례야.”

릴리는 웃으며 농담을 던졌지만, 더글라스는 귀족 아가씨를 상대하는 것이 영 어려운지 당황하며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더글라스, 있지, 부탁이 있어.”

“아무것도 부탁하지 마세요.”

더글라스는 존댓말까지 해가며 그녀의 부탁을 사전에 거부했다. 더글라스는 릴리와 몇 번 대면하고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자신은 릴리에게 굉장히 약했다. 그녀가 부탁을 한다면 자신은 분명 거절하지 못하리라. 거친 사내에게는 얄짤 없는 자신이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미인계에 약한 줄도 몰랐었다.

“내가 무슨 부탁을 할 줄 알고 그래? 어려운 부탁은 안 할게. 응?”

“무슨 부탁인지 듣기만 할 거야. 난 들어준다고 안 했어.”

“하이드가 어디서 일하는지만 가르쳐줘.”

“미쳤어, 아가씨?”

더글라스는 험한 말을 내뱉고서 릴리의 눈치를 보았지만, 정작 그녀는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안심하고서 릴리를 설득하기 위해 입을 뗐다.

“아가씨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몰라서 그래? 위험해. 게다가 아가씨 같은 사람이 갈 수 있는 데도 아니라고.”

“나 같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데?”

“피를 보면 기절할 것 같은 사람?”

릴리는 더글라스의 말에 정면으로 반박하지는 못하고, 망설이다가 ‘기절 같은 거 안 해. 그런 건 책 속의 여리디여린 귀부인들이나 하는 거야!’라고 말했지만, 목소리가 떨렸기 때문에 설득력은 없었다.

“아무튼 그건 안 돼. 그런 부탁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했어?”

“네가 부탁을 들어준다면 내가 하이드의 비밀을 알아낸 게 될 거지만, 들어주지 않는다면 네가 알려준 게 될 거야.”

“아가씨 정말 무섭다, 무서워, 정말.”

더글라스는 오늘로 미인이 얼마나 무서운지도 알게 되었다. 릴리는 앙증맞은 머리통으로 무시무시한 생각을 품고서 그를 협박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아아! 겉보기로 사람을 판단한 자신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릴리가 원하는 것은 하이드가 더 이상 상황을 회피할 수 없도록 그가 일하는 현장을 잡아내는 것이었다. 더글라스의 협조를 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더글라스는 릴리를 설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아가씨. 대체 무슨 꼴을 보려고 이러는 거야. 진짜 나 죽는 꼴이 보고 싶은 거야? 진짜로?”

“내가 우연히 발견한 걸로 할 거야. 네 이야기는 하나도 안 할 거야. 다른 건 안 바라. 너는 그저 시간과 장소만 알려주면 돼.”

“하이드가 그걸 믿겠어? 아무것도 모르는 귀족 아가씨가 그 자식이 일하는 곳에 우연히 나타나는 게 말이 돼?”

“우연히 마주친 걸 안 믿으면 내가 미행한 걸로 할게. 네 이름은 절대 말하지 않을 거야. 더글라스, 부탁해. 내가 너 말고 누구에게 부탁을 하겠어? 제발.”

더글라스는 두 손으로 자기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릴리는 진심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니 죄책감에 양심이 따끔거렸지만, 그녀는 간절했고, 그렇기에 더더욱 더글라스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릴리는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그를 설득하고, 그녀의 도움을 받고 싶다면 그 또한 그녀를 도와야 하지 않겠냐고 회유했다.

“더글라스! 네가 안 도와주면 나도 어쩔 수 없어! 나는 네가 들킨 사실을 하이드 경에게 알리지 않고 싶어 하는 줄 알았지만, 내가 잘못 알았나 보네. 나 하이드 경에게 너한테 다 들었다고 솔직하게 말할 거야!”

“아아아악! 진짜 이 아가씨가 나랑 원수졌나 봐! 미치겠네!”

더글라스는 들리지 않는다며 두 손으로 양 귀를 막고 릴리를 피해 빠른 걸음으로 달아났다. 키가 훤칠하게 큰 청년인 더글라스를 릴리가 종종걸음으로 따라다니며 소리쳤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저택의 아가씨가 하인을 쫓아다니며 구애라도 하는 모양이라며 착각할만했으나 실상은 청년의 반 토막만 한 아가씨가 그를 협박하는 중이었다.

결과적으로 더글라스는 릴리를 적극적으로 돕게 되었다. 버들가지처럼 낭창한 여자가 고집은 쇠심줄이었다. 더글라스가 회피하기를 포기하고서 겁주고 애원하고 설득해도 릴리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더글라스가 보기에 릴리는 그들에게 협조할 의사가 차고 넘쳤다. 그녀의 협조를 얻으려면 릴리가 하이드에게 솔직하게 그녀가 알게 된 사실을 털어놓기보다는 차라리 그녀에게 정체가 탄로나 그녀의 말을 들어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편이 나았다. 무언가 약점이 잡히지 않는 이상 하이드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을 게 뻔했으니까.

그녀가 자신의 목숨을 지켜줄 수 있기를 바라며, 더글라스는 울며 겨자 먹기로 하이드에게 예정된 일정을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햇병아리도 아니고 알껍데기 속의 노른자 같은 아가씨한테 당하다니. 내가 이 바닥에서 몇 년을 굴렀는데! 진짜 아가씨 보통 아닌 거 알아?”

“칭찬인 거지? 더글라스, 너한테는 정말로 미안하다고 생각해. 고마워.”

더글라스는 한참을 더 구시렁대고 생색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릴리의 구김살 없는 사과와 감사에 머쓱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더글라스는 릴리의 한 점 그늘도 없는 말간 웃음이 낯설고 간지러웠다.

그는 전설 속 뱀처럼 사악한 하이드가 릴리에게 맥을 못 추고 흐물거리는 까닭을 이해할 수 있었다. 빛에 내성이 없는 어두침침한 족속들에게 릴리는 너무 밝았다. 하이드에게 코가 꿰일 아가씨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던 그는, 어쩌면 코가 꿰이는 것은 하이드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릴리는 더글라스에게 정말로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완벽한 계획을 짜기 위해 골머리를 앓았다. 그녀가 생각해도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 같았다. 그녀가 저번에 더글라스와 하이드의 밀회 장면을 엿들을 수 있었던 것은 기적에 가까운 우연이었다.

하이드는 총기 거래처를 직접 쫓아다니지 않았다. 그는 현장에서 일하기보다는 지시를 내리고 보고를 받았다. 릴리가 거래 현장에 나타나 그에게 아는 척하며 ‘어머, 선생님. 지금 화륜의 화승총을 사신 거 맞지요? 요즘 불법 거래가 기승이라던데! 역시 선생님은 바르딘 자작님을 속이고 불법 유통을 조사하신 거죠? 제 말이 맞죠?’ 따위의 허술한 계획은 옳지 않았다.

하이드의 저택에 숨어 들어가 그가 밀정을 통해 작성한 서류를 찾아내 그의 앞에 흔들며 ‘선생님은 절 속였군요! 선생님은 첩자였어요!’ 하는 것 또한 덧없는 망상에 불과했다.

그녀가 하이드가 발뺌하지 못할 상황을 발견하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더글라스는 아예 자신이 그녀에게 정보를 제공한 것을 들킬 각오까지 했다. 두 사람은 저택에서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방에 들어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우연을 가장하여 그녀가 중요한 순간을 포착하고 더글라스는 죽지 않는, 그런 기똥찬 상황을 만들어내야 했다. 그리고 릴리는 기어코 만들어낼 생각이었다.

* * *

“선생님! 선생님!”

릴리는 하이드의 뒷모습을 보고 그를 이미 두어 번 불렀지만, 하이드는 잠깐 걸음을 늦추었을 뿐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걸음을 재촉했다. 릴리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치맛자락을 붙잡고 그를 좇아갔다.

“릴리?”

하이드는 종종 들리는 환청이겠거니 하고 릴리의 목소리를 무시했으나 또각또각, 그녀 특유의 가볍고 경쾌한 구두 소리가 커지자 그제야 진짜인가 싶어 뒤돌아보았다. 정말로 그녀가 하이드를 보고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하녀도 거느리지 않고 혼자 계시다니요.”

“옷 구경을 나왔어요. 선생님이 보이길래 불렀는데. 안 들리셨나요?”

“……아가씨의 목소리가 이곳에서 들릴 거라고 생각을 못 해서 다른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하이드가 릴리의 목소리를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그는 릴리의 발걸음 소리로 뒤돌아보지 않았나. 다만, 이 작은 여자가 자신에게 미치는 커다란 영향력에 대해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르시엔이었다면 냉큼,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아가씨가 돌아다니고 저를 부르시니, 이번에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 했겠지만, 하이드는 그것이 사실임에도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선생님을 밖에서 우연히 마주치다니, 반가워요. 어딜 가는 길이세요?”

“약속이 있어서 사람을 만나러 가던 길이었습니다.”

릴리는 평소의 귀족다운 차림이 아니라 수수하고 단순한 형태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색이 칙칙한 갈색에다 거친 면직물로 만들어진 이 옷은 그녀가 이날을 위해 특별히 메리에게 부탁해 장만한 것이었다. 하이드의 뒤를 밟기에 그녀가 바르딘 자작가에서 입는 옷들은 너무 눈에 띄어서 평민들이 입는 옷으로 차려입은 것이었다.

하이드는 그답지 않게 몹시도 당황한 상태여서 그녀의 옷차림을 의아하게 여기지 않았다. 물론 평소보다 수수하고 그녀의 취향답지 않다고는 생각했으나 릴리는 변함없이 아름답기에 큰 괴리감을 느끼지 못했다.

“어디서 만나세요? 가까운 곳이면 가는 데까지 같이 가요. 저도 그쪽에 있는 모자 가게에 들르려고 했거든요.”

“아가씨를 가게에 데려다 드리고 나서 약속 장소에 가도록 하죠.”

하이드는 차마 같이 가자는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릴리가 하녀 한 명 대동하지 않고 나왔기 때문에 그녀가 걱정되기도 했고, 가는 방향이 같은데 같이 가자는 말을 거절하는 것도 수상해 보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무슨 약속이신가요? 일찍 끝나신다면 저녁 식사를 같이하지 않으실래요?”

릴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하지만 기대감을 내비쳐 그가 거절하기 어렵도록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녀가 아무렇지 않아 보이기 위해 애를 쓰는 티가 났기 때문에 오히려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하이드는 긴장하고 불안해하는 것이 자신의 거절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오해했다.

사실상 오해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하이드와의 저녁 식사를 염두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긴장은 그의 약속 장소에 그녀가 나타나도 모자를 일찍 골라 그를 찾다 ‘우연히’ 그를 발견한 것으로 하기 위함이었다.

“제가 아가씨와 시간을 보낼 기회를 거절할 리가 없죠.”

하이드는 나른하게 웃으며 그녀의 손등을 들어 올려 가볍게 입 맞추었다. 릴리는 자신의 계획을 모르고 이처럼 다정하게 대해주는 하이드를 속이는 것이 미안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도리질하며 죄책감을 덜어내려고 애썼다. 릴리는 하이드에게 진실을 말할 기회를 여러 번 주었다. 그녀가 그를 속이게 만든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를 속이고도 번번이 기회를 걷어찬 하이드였다.

“그럼 저는 천천히 구경하고 있을 테니 이따 뵈어요. 선생님의 약속 장소가 어디라고 하셨죠?”

“저쪽의 카페입니다. 재미없는 약속은 금방 끝내고 갈 테니 여기서 기다려주십시오.”

“네. 좋은 시간 보내세요.”

릴리는 이곳에서 기다릴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손을 흔들며 그를 배웅했다. 하이드는 그가 가리킨 카페에서 사람을 만나지 않을 것이었다. 평민들의 주택가의 허름한 가정집 중 하나가 그들의 접선 장소였다. 릴리는 음침한 뒷골목이면 어떡하나 걱정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은밀한 일은 평범한 곳에서 이뤄지는 쪽이 눈에 띄지 않는다며 하이드가 가정집 하나를 샀다고 더글라스가 가르쳐주었다.

‘더글라스도 심술쟁이라니까. 평범한 가정집이면서 괜히 피를 본다느니, 위험하다느니 겁을 주다니.’

더글라스는 겁을 줘서라도 그녀를 좌절시키고 싶었을 뿐이었다. 릴리는 그의 의도대로 한껏 겁을 먹었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이드에게 걸리지 않기 위해 그와 시차를 두고 천천히 걸어가며 주택가의 풍경에 내심 안심하고 있었다.

릴리는 눈에 띄는 화려한 금발 머리카락을 모자 속에 집어넣고 챙이 넓은 모자를 푹 눌러써 얼굴을 가렸다. 평민의 주택가에서도 튀지 않을 옷을 골라 입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녀에게 특별히 시선을 두지 않았다.

하이드가 그녀의 기척을 눈치챌까 봐 두려워 늦게 출발하기도 했고, 비슷비슷하게 생긴 아담한 주택들이 줄줄이 있는 까닭에 길을 헤매느라 그녀는 예상보다 늦게 도착했다. 릴리는 마음이 급해졌지만, 차분하게 행동했다.

더글라스가 미리 뒷문을 열어두었기 때문에 릴리는 조용히 건물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아가씨. 뒷문으로 집에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부엌에서 왼쪽 방이야. 아가씨가 발소리를 내는 순간 황자가 모습을 감추거나 칼을 날려버릴 수도 있어. 아가씨가 원하는 순간을 잡기 위해서는 숨소리도 내지 말라고. 알겠어?”

황자가 이 사건을 조사하고 있다는 것은 대외적으로 비밀이었기 때문에 제르시스는 이곳에 방문할 때 그의 호위 기사들을 대동하지 않고 혼자서 왔다. 물론 최측근 한둘은 저택의 근처에 은신해 있었지만, 황자가 부르지 않는 이상은 오지 않을 터였다.

릴리는 더글라스의 신신당부대로 숨소리도 내지 않고 구두를 뒷문 앞에 벗어두고 발끝으로만 걸었다. 이 작은 집은 하이드의 수많은 이름 중 하나의 명의로 되어있어 하이드, 제르시스, 더글라스 이 셋밖에 모르는 곳이기 때문에 하이드와 제르시스는 비교적 편한 분위기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포르게이의 기술자들을 포섭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정착에 어려움이 없도록 신경 써주면 될 것 같습니다. 슈츠 구의 외곽에 공장을 사들였습니다.”

제국에서 총기는 군대를 제외하고선 유통도 소지도 금지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웃 나라에서 알음알음 들어오고 있는 상황이었고, 그것을 소넬과 바르딘에서 주도하여 가속화하고 있었다.

시대가 변했다. 총기는 전쟁에서 필수적인 무기가 될 것이었다. 아직 황제는 총기의 유용성에 대해 실감하지 못하고 자국의 군사력에 자신하고 있었지만, 하이드와 제르시스는 곧 총기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소넬과 바르딘에서 들여오는 화륜의 화승총은 불발탄이 잦고 사용이 용이하지 않았다. 하이드는 소넬과 바르딘을 무너뜨린 뒤 자신이 주도하여 포르게이식 머스킷 총을 군대에 보급할 계획이었다. 제르시스는 하이드의 뒷배가 되어주고, 하이드는 그의 자본력이 되는, 아름다운 동업이었다.

“바르딘의 저택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서류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바르딘의 개입이 그다지 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소넬가에도 사람을 심지 않았어?”

“그런데 르시엔 소넬은 방에 가만히 있는 꼴을 못 본다고 합니다. 전보다는 집에 오래 있지만, 특별히 일을 하는 낌새가 없어요. 밖에 나갈 때 미행을 붙여도 보통 도박장에 가거나 비슷한 유의 유흥거리에 시간을 쏟는다더군요.”

“아아, 르시엔 경이 일을 열심히 할 타입은 아니지. 그래도 유심히 지켜봐. 너, 그 자식과 관련하면 유난히 감정적인 것 같으니까 말이야.”

릴리는 문밖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벽에 바짝 붙어서 인기척을 죽이고 있자니 탐정소설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주인공보다는 악당에 가까운 모습이지만.’

릴리는 쿵쾅거리는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모습을 드러낼 적기를 재고 있었다. 어느 때 나타나더라도 하이드가 놀라기는 마찬가지일 터라 그녀는 더 이상 엿듣기는 포기하고 문을 두드렸다. 비겁하게 숨어서 엿듣더라도 문을 두드리고 나서 여는 것이 그녀다운 방식이었다.

* * *

똑똑.

“뭐지?”

하이드와 제르시스가 문소리에 곧바로 일어났다. 하이드는 검을 쥐고 문 앞으로 다가갔고 제르시스는 창문을 열고 호위를 부를 준비를 했다. 이곳에 올 사람이 없었다. 바깥에서 보기에 이 집은 주인 없는 폐가였고, 이곳을 아는 셋 중 둘이 여기에 있고, 다른 하나는 문을 두드리는 기본예절도 모르는 놈이었다.

“……릴리 아가씨?”

“저어, 안녕하세요. 음, 모자가 마음에 드는 게 없어서 선생님의 약속 장소 근처에서 기다리려고 했는데…….”

그녀가 말끝을 흐리고 입을 다물자 방 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제르시스는 릴리를 보고 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깜빡거리다 하이드가 릴리의 이름을 말하자 탄식하며 그녀를 알아보았다. 하이드도 그녀의 존재가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이드는 방문을 두드리기 전까지 그녀의 기척 하나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주로 두뇌파였으나 하는 일이 일이다 보니 인기척에 무척 예민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작정하고 숨기지 않는 이상 발소리도 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저를 미행하신 겁니까?”

“아녜요! 저는 그저, 선생님의 뒤를 따라왔……어요.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가요?”

릴리는 믿기지 않는다는 하이드의 목소리에 강하게 미행을 부정했으나 뒤를 따라왔을 뿐이라는 말이 미행과 다르게 들리지 않는 것에 절망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대로 지금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기는 했으나 그들의 대화 내용은 그녀의 미행따위는 사소하게 느껴질 정도로 커다란 것이었으니까.

“제가 거기서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혼자 이곳까지 오다니요. 아가씨는 정말,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어이, 하이드. 지금 그걸 걱정할 때가 아니지 않아?”

제르시스는 이 상황이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릴리를 쳐다봤다. 천하의 하이드를 매료시킨 여자는 역시나 평범하지 않았다. 무언가 알고 그들을 쫓아온 것이 분명했다.

릴리는 두 손을 꼬옥 힘주어 쥐었고, 온몸의 근육이 잔뜩 긴장된 모습이었다. 어떤 각오로 왔는지는 몰라도, 어쭙잖은 일로 황자의 일을 방해했다간 그녀도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을 것이었다.

“하이드 경의 애제자라고 들었네. 나는 그대도 알다시피 이 나라의 제2황자네. 그대가 문밖에서 쥐새끼처럼 무슨 내용을 엿들었는지 알 수 있겠는가?”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황자 전하. 저는 바르딘 가의 릴리 바르딘입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제르시스의 서늘한 눈빛에 릴리는 숨을 크게 들이켜고 칙칙한 갈색의 치맛자락을 들어 올려 배워온 예법대로 인사를 올리고 말을 이어나갔다. 애초에 그들이 자신을 환영하리라 생각하지는 않았기에 그녀는 이 정도 살벌한 눈빛을 받는 것은 마음의 준비를 해두었다.

“포르게이의 머스킷 총 기술자를 포섭한 것, 하이드 경이 바르딘 가에 잠입하여 화륜과의 거래 내역이 담긴 서류를 찾았으나 실패하셨다는 것, 그리고 소넬 가에도 바르딘 가와 마찬가지로 첩자를 심고 르시엔 경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래. 그대는 이 형편없이 얇은 문짝 너머로 황자에게 올리는 중대하고 은밀한 보고를 죄다 주워들었군. 하이드 경을 따라와서는 그에게 방문을 알리지도 않고 문 뒤에서 말이야. 응?”

“네. 우연히 듣게 된 이야기가 너무 충격적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제가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외람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릴리.”

“하이드 경, 조용히 해. 나는 이 숙녀가 어떤 당돌한 소리를 할지 궁금하니까. 자, 더 말해 보게나, 어째서 그대의 방문이 외람되지 않은지 말이야.”

“황자 전하와 선생, 아니 하이드 경이 지금 하고 계시는 임무와 소넬가와 바르딘가의 조사에 제가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인물이니까요. 저는 바르딘가에 입적한 수양딸이고 르시엔 경과의 결혼이 예정된 약혼녀예요. 제게는 이야기를 들을 자격이 충분하지 않, 않나요?”

릴리는 대범하기 위해 애썼지만, 주먹을 쥔 손이 떨리고 오금이 저렸다. 황자는 당장 그녀를 구속하지도, 위협하지도 않았으나 그의 냉혹한 눈빛은 그가 제국의 가장 높은 곳에서 군림하는 황실의 피를 증명하고 있었다. 평탄한 삶을 살아온 시골 아가씨인 릴리가 감당하기에는 벅찬 위엄이었다.

“그래, 그대가 안타깝게도 두 가문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음은 내 익히 알고 있어. 하지만 그것이 면책 사유가 되지는 않지. 게다가, 그대가 그 인연을 소중히 여겨 나를 방해하려 들지도 모르는데, 내가 비밀을 알게 된 그대를 살려둘 성싶은가?”

비밀을 엿들었으면 차라리 꽁무니 빠지게 도망가지 그랬어, 제르시스는 조용히 덧붙이며 차갑게 웃었다.

제르시스가 릴리를 죽일 수도 있다는 듯 입을 놀리자 하이드가 릴리의 뒤에서 무시무시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소리 내지 않고 입 모양만으로 무슨 험악한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온갖 육두문자를 섞어서 하는 통에 영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전하의 현명함과 총명함은 온 제국민이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 도움이 될 인재의 목숨을 그렇게 낭비하시지는 않으리라고 믿습니다.”

제르시스는 릴리의 진지한 눈빛을 보며 속으로 ‘오호라,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었군.’하고 쾌재를 불렀지만, 겉보기로는 여전히 냉랭한 반응만을 내비쳤다. 조그마한 여자는 말하면서 벌벌 떨고 있었지만, 심지는 단단해 보였다.

“전하, 이 숙녀분께서는 이 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니, 제가 이만 저택으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전하께는 제가 내일 찾아뵙겠습니다.”

“선생님! 저 바보 아니에요. 다 들었어요. 그런데도 관련이 없다고 하실 건가요? 저는, 저는…….”

“이봐, 하이드…….”

“릴리 아가씨. 이건 아가씨가 끼어들 일이 아닙니다. 지금 많이 놀라셨겠지만,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여전히 바보 취급이군요.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을 거잖아요. 선생님에 대해, 제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제가 모르길 바라시잖아요!”

“저기?”

제르시스는 자신의 존재를 까먹은 것인지 서로 다투는 두 사람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의외로 쪼끄만 아가씨가 강세였다. 릴리는 하이드에게 언성을 높이다가, 그와의 대화를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고는 한층 침울해진 얼굴로 제르시스에게 다가갔다.

“황자 전하, 하이드 경을 물려주시겠어요? 전하께 제안해 드릴 것이 있습니다.”

릴리는 옆에 있는 하이드를 잔뜩 의식하여 한껏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말했다. 긴장하고 떠는 기색은 여전해서 당당한 위세는 없었지만, 하이드를 열 받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들었지? 하이드 경, 잠시 자리를 비켜주겠나?”

“황자 전하……, 저의 아가씨를 부디 오래 붙잡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녀가 이쪽과는 거리가 먼, 귀한 숙녀임을 꼭 명심하십시오.”

하이드는 황자의 명을 거스르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행동한다고 해도 놀랍지 않을 만큼 불손한 얼굴로 내뱉었다.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는 살벌할 정도로 음산하게 들렸다.

갑작스럽게 진행되는 상황에 하이드는 놀라기보다 어이가 없었다. 자신의 맹한 아가씨가 어떻게 뒤를 밟았는지도 알 수 없었고, 아가씨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당돌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하이드의 정체를 알고도 놀란 기색이 없었고, 황자의 앞에서 하는 말들은 분명 충동적인 것이 아니라 미리 정리된 것이었다.

하이드는 이제야 그녀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추궁하듯 물어오던 것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그녀가 협조를 구했을 만한 인물의 이름을 스산하게 중얼거렸다.

“더글라스……, 후…….”

* * *

“그래, 그대는 내게 무엇을 제안하려는가?”

릴리는 하이드가 사라지자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이드가 그녀를 이 일에서 배제하려고 드는 게 밉고 원망스러워서 내보내 달라고 하였으나 그가 없으니 불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릴리는 한결 순해진, 평소의 그녀다운 모습으로 조곤조곤 그녀가 생각해온 말들을 꺼냈다.

“전하, 저는 제국에서 소문난 망나니인 약혼자와의 결혼을 원하지 않아요. 그러나 혼약의 날은 얼마 남지 않았고, 결혼을 전제로 바르딘 자작가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물질적인 지원을 받은 저는 이 약혼을 무를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릴리는 이어서 그녀가 일방적으로 파혼을 선언하면 형편이 넉넉지 못한 그녀의 부모가 바르딘 자작에게 그녀가 받은 것들을 갚을 능력이 없다고, 슬프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전하와 하이드 경이 소넬가를 법으로 처단해주신다면, 자연스럽게 파혼이 진행되겠죠. 바르딘 자작님께서 그것을 제 탓으로 돌리시지는 않을 거예요. 바르딘 자작가 또한 황자님의 엄벌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제가 그것을 안타깝게 여기지는 않을 거고요.”

자업자득이니까요. 릴리는 작게 덧붙였다.

“그래, 아가씨는 자연스럽게 망나니 약혼자와 파혼하고 싶다, 이거지. 아가씨가 득 볼 게 있으니 입을 다물 수는 있겠지. 겨우 그걸로 내게 도움이 될 거라 입을 놀린 건가?”

제르시스가 관심 없다는 듯 무심하게 뇌까렸다. 릴리는 숨을 들이켜고 내내 속으로 대뇌였던 말을 내뱉었다.

“아뇨. 저는 전하가 원하시는 자료를 찾을 사람이에요. 바르딘 자작과 르시엔 소넬 경의 의심을 사지 않고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 저니까요. 서류를 찾는 데 도움을드릴 테니 전하께서는, 저의 파혼을 도와주세요.”

“내게 필요한 서류가 있는지는 어찌 알았는가?”

“……대화를 통해 짐작했어요.”

“좋아. 그대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어.”

제르시스가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냉랭하던 표정을 풀었다. 그는 릴리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이 일에 가담하고 비밀을 지킬 사유가 충분했고, 제안은 유용하고 실효성이 있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오늘 엿들은 것 이상을 알고 있는 눈치였지만, 그것이 제르시스에게 곤란함보다는 유능함으로 다가왔다.

“감사합니다.”

“내가 감사할 일이지. 그래, 파혼 외에 달리 바라는 것은 없는가?”

“없습니다. 다만, 하이드 경과 전하의 약속을 방해하고 귀한 시간을 뺏은 것에 대해 용서해주시겠어요? 제가 주제넘고 무례했다는 것을 알지만…….”

“하. 진심인가? 황자에게 청탁이나 보수를 바랄 기회는 많지 않을 텐데?”

릴리는 눈에 띄게 풀어진 얼굴로 황자에게 사과를 구했다. 당돌하고 대범한 척은 할 수 있어도, 본디 심성이 여린 사람인 티가 났다.

“거래라고 말을 하기는 했지만, 하이드 경과 전하께서는 하시는 일에 제가 득을 보는 것뿐인걸요.”

“그으래, 그대가 그리 말하니 보수는 내가 알아서 챙겨주도록 하지. 다만 문밖의 심통한 사내는 그대가 설득해야 할 거야.”

황자는 릴리의 무방비하기 짝이 없는 얼굴에 혀를 찼다. 얼마나 곱게 자랐는지는 몰라도 그녀에게는 하이드와 자신에게 없는 미덕이 있었다. 이 와중에 저런 사과나 하고, 바라는 것도 없는 그녀의 소박함이 어이없기도 하고 갸륵하기도 했다. 그녀는 볕 잘 드는 양지의 사람이었다.

제르시스는 하이드가 그녀에게 끌리는 것이 납득은 갔으나 그 자신은 어쩐지 그녀가 꺼려졌다. 저 나이쯤이면 이 수도에는 뱃속에 구렁이 한두 마리쯤 안 키우는 사람이 없었다. 아마 자신의 뱃속에는 수십 마리의 뱀들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복잡하게 얽혀 똬리를 틀고 있을 것이었다.

“앗.”

“괜찮은가?”

쾅!

릴리는 안심하고 나자 쌓였던 긴장감이 확 풀려 무릎이 꺾였다. 릴리가 비틀대며 주저앉자 가까이 있던 제르시스가 그녀의 양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넣어 부축했다. 하이드는 방음이 형편없는 문짝 너머로 대화를 듣고 있다가 릴리가 넘어지는 소리에 문을 부술 듯이 열어젖혔다. 그리고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껴안을 듯 붙어있는 두 남녀를 형형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지금, 이게…….”

“미친놈. 어느 안전이라고 눈을 부라려? 네 아가씨 안 건드려! 넘어지는 걸 부축한 거다.”

하이드는 제르시스의 말을 듣는 시늉도 하지 않고 성큼성큼 두 사람에게 다가가 릴리를 뺏어 들듯 챙겨 품에 안았다. 황자의 앞에서 자신을 안는 하이드의 행동에 릴리는 부끄럽고 민망해 얼굴이 빨개졌지만, 여전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그에게 기대있을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저 이제 괜찮아요.”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면서 말입니까?”

“전하께서 보고 계시잖아요.”

“그래. 하이드 경. 내가 보고 있잖아.”

릴리는 겨우 두 손을 들어 빨개진 얼굴을 감추고 짓궂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제르시스의 눈을 피했다.

“전하, 이야기가 끝나셨다면 아가씨는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그리고 이 제안은 없던 걸로 하세요. 그녀가 이 일에 관여할 일은 없을 겁니다.”

“선생님!”

“릴리. 조용히 하세요. 제 인내심은 여기까지가 한계니까요.”

릴리를 끌어안고 있는 하이드의 팔은 다정했으나 표정은 살벌했다.

-다음 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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