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는 취했다
그녀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조안나가 자기 무리로 돌아가자마자 무어라 이야기를 하더니 그 무리의 사람들이 릴리 쪽을 쳐다보며 떠들기 시작했다. 사람이라는 게 그렇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들리지 않아도, 자신을 쳐다보며 이야기를 한다면 그게 좋은 이야기보다는 나쁜 이야기일 거라 상상하게 된다.
르시엔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사람을 소개시켜 주었지만, 릴리는 이미 사람들이 그녀를 보는 시선에서 꺼림칙함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 시선은 가엾다는 듯 동정 어린 시선과 경멸스럽다는 시선이 미묘하게 섞여 있었다.
대체로 어린 영애들은 대놓고 싫은 표정이었고, 영식들은 그나마 싫은 표정은 아니었지만 역시 태도가 좀 이상했다.
“르시엔 경, 잠시 쉬고 싶어요.”
릴리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처음에 따뜻하게 맞이해주던 부인들마저도 그녀가 르시엔의 약혼자라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태도가 바뀌었다. 차갑고 싸늘한 시선에 릴리는 덜컥 겁이 났다.
르시엔은 선수답게 그녀의 울적한 기분을 진작 파악했다. 양심 없는 그로서도 미안할 따름이었다. 릴리만이 자신이 왜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을 받는지 몰라 어리둥절하고 침울해 보였다.
르시엔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도에서 최고로 떠들썩했던 파혼 사건의 주인공이었다. 그는 엘레나 공작 영애를 혼전 임신시켜 약혼하고도 다른 여자와 붙어먹는 모습을 보여 그녀를 유산시켰다. 공작 영애가 제 아비에게 매달려 울지만 않았더라면, 아무리 르시엔이었더라도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만큼 큰일이었다. 워낙 자극적인 사건이라 공작가의 눈치를 살피느라 앞에서는 쉬쉬해도 뒤에서는 모두 신이 나 떠들어댔다.
그로 인해 그의 약혼녀라는 위치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업신여겨지는지 그가 어떻게 제 입으로 말하겠는가?
저야 워낙 이 바닥에서 잔뼈 굵고 뻔뻔한 놈이니 한동안 잠적하고 있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다닐 수 있었다. 이 바닥이 워낙 고상해서 면전에 대고 욕하는 일은 없으니 그도 뻔뻔하게 다닐 수 있는 것이다.
솔직히 이 사건 전에도 워낙 화려한 여성 편력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이 사건이 그의 이미지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그가 여자 밝히는 것을 모르는 이가 있을까?
르시엔은 평판과 별개로 인기가 좋은 사내였고, 그래서 그를 흠모하는 여인들이 많았다. 엘레나와 약혼했을 때만 해도, 엘레나 루체비스타는 공작가의 금지옥엽에, 집안의 권력과 유연한 사교술로 입지가 두터웠다.
질투하는 이가 있더라도 그녀에게 결코 티 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천사 같은 공작 영애가 매력적인 바람둥이를 사로잡았다며 대체로 호평이 오갔었다. 실상은 혼전 임신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약혼이었지만, 그 당시엔 대외비였으니 그랬다. 귀족 사회에서 최고로 뜨거운 화제였다. 동화 같은 이야기라며 많은 이들이 환호했다.
릴리의 경우는 달랐다. 엘레나와 친분이 있는 이들은 르시엔의 약혼녀가 달가워 보일 리가 없었고 그녀는 사교계의 한 축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세력이 컸다. 그리고 엘레나와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릴리를 좋게 볼 리도 없었다.
귀족 사회에서 최고의 망나니이자 루체비스타 공작의 분노를 산 르시엔이었다. 공작 영애를 유산시킨 쓰레기에게 소넬가의 돈과 권력만 보고 딸을 시집보내는 건 모양새가 몹시도 좋지 않았다. 그걸 감수하고서라도 소넬가와 연을 맺고 싶어 하는 의도가 귀족들에게는 빤히 보였다. 아무리 딸자식을 재산 취급하더라도 가문의 명예란 것이 있었다.
릴리는 바르딘 자작에게 유용한 카드이자 버리는 패였다. 그녀는 귀족사회에서 황금만능주의의 상징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실제로 황금이 만능이라 여기더라도 티는 내지 말아야 했다. 그들은 제 뱃속만 중시하는 속물적 근성을 눈으로 보는 것이 불쾌했다. 그것은 동족혐오였고, 그것이 그들이 추구하는 고상함이었다.
릴리라는 사람 자체야 어쨌건 상관없었다. 이미 무도회장에선 그녀가 시골 출신에 영지도 없는 무늬만 귀족인 것이 퍼지고 있었다. 늘 씹을 거리가 필요한 심심한 귀족들에게 그녀는 안성맞춤의 안줏거리였다. 르시엔에게 배신당하고 유산한 엘레나는 귀하신 영애였고, 르시엔의 가문은 최근 엄청난 부를 거머쥔 터라 만만한 게 릴리였다.
르시엔은 지친 얼굴로 쉬고 싶다고 말하는 릴리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틸리안도 보이지 않아서 릴리는 헤매다 가까스로 휴게실을 찾았다.
“르시엔 경의 약혼녀 보셨어요?”
“수치도 모르고 르시엔 경의 에스코트를 받고 있더군요.”
“멍청한 건지 뻔뻔한 건지 모르겠어요.”
“엘레나 양이 불쌍해요.”
릴리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휴게실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대체 왜? 억울한 마음에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녀는 엿듣는 짓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걸 알았지만, 자신이 왜 이런 취급을 받고 있는지는 알아야 했다.
“못 배운 계집이 돈만 보고 덤볐을 거예요. 천박하게도 촌뜨기 어미를 졸라 수도로 보내 달라고 했겠죠.”
“가난한 시골뜨기가 이런 혼처 아니면 감히 수도에 올라올 수나 있었겠어요?”
“마차 삯도 못 낼 텐데요. 마부에게 몸을 던지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죠!”
“바르딘 자작가도 참, 얼마나 급했으면 저런 천박한 여자를 수양딸로 데려왔을까요.”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귀한 신분을 가진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거침이 없었다.
처음엔 억울했지만, 차차 분노가 차올랐다. 저들이 뭐라고 저따위로 함부로 말하는가? 그들에겐 릴리를 비난할 자격도 권리도 없었다. 저들은 본 적도 없는 자신의 부모까지 싸잡아 깎아내리고 있었다.
화가 나서 뭐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아직은 모호한 부분이 있었다. 자신이 가난한 시골뜨기 영애 출신이라고 해서 그들이 저렇게까지 비난할 일은 아니었다. 중간중간에 다른 영애의 이름도 들리는 것을 보아 다른 사람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르시엔 경에게 연인이 있었던 걸까?
휴게실에서 쉬려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릴리는 눈물이 차오르는 눈을 위로 치켜뜨고 손부채로 눈물을 말렸다. 울더라도 집에 가서 울어야 했다. 눈물 자국이 남아있는 얼굴로 다른 사람을 마주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조롱거리가 될 터였다.
무도회 직전의 수업에서 하이드가 자신에게 무언가 말할지 망설였던 것이 떠올랐다. 그는 기대에 가득 찬 그녀를 보며 한숨 쉬었다.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그는, 그녀에게 경고를 해 주고 싶었던 걸까? 자세한 말은 아끼면서도, 그는 무도회가 생각했던 것과 다를 수 있다고, 그렇더라도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하이드는 언제나 자신의 말과 행동에 확신 있어 보였으니까.
하이드가 하려던 말이 이거였을까? 그때는, 그녀가 황궁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커서 실망할까 봐 그런 말을 하는 줄 알았는데, 하이드는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오늘 그녀가 어떤 취급을 받을지.
그녀는 미리 알려주지 않은 하이드가 못내 원망스러웠지만, 원망할 대상은 따로 있었다.
그러나 용기가 나지 않았다. 릴리는 큰소리 한 번 내본 적 없이 살아왔었다. 화가 나도 금방 풀려버리는 성격이라 누군가와 싸워본 적도 없었다. 이처럼 노골적인 적의를 받아본 적도 없었다. 릴리는 벽에 뒤통수를 기대고 눈을 꾹 감았다. 휴게실 문밖으로 여전히 그녀에 대한 조롱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후…….”
릴리는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온 한숨을 내쉬고 휴게실 복도에서 걸어 나왔다. 그녀의 생애에서 술을 즐겼던 역사가 없었지만, 오늘만큼은 알코올의 힘을 빌려보기로 했다. 도저히 제정신으로 사람들을 볼 용기가 없었다.
릴리는 침울한 얼굴로 가면 쓴 시종들에게서 술을 건네받았다. 긴장해서 자그마한 안줏거리에도 전혀 손대지 않고 빈속에 냅다 술을 쏟아 부었다. 뒤에서 천박하고 수치도 모르는, 돈만 밝히는 여자라고 손가락질받고 있는데 제정신으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연거푸 잔을 비우는 지금도 손이 벌벌 떨렸다. 위장이 화끈해졌다.
혼자서 술잔을 비우는 릴리를 눈여겨보는 사내들이 있었다. 황실의 연회는 규모가 큰 만큼 초대되는 사람의 숫자도 어마무시했다. 모두가 그녀를 아는 것은 아니어서 아직 그녀에 대해 모르고 호감을 가지고 다가오는 이들도 있었다.
시종이 들고 다니는 술은 다양해서 도수가 낮은 샴페인은 물론, 꽤 독한 와인도 있었다. 릴리는 눈대중으로 술을 구분할 만큼 술을 잘 알지 못했다. 적당히 빛깔이 고와 마음에 드는 잔들을 골랐더니 금세 취기가 올랐다.
“이름 모를 아가씨, 그렇게 마셔도 애주가는 아니신가 봅니다. 혼자서 마시는 술보다 둘이서 마시는 술이 더 맛있다는 건 모르시니까요.”
“그럼, 당신은 술꾼이신가 봐요?”
“외로운 아가씨의 술 상대를 해드릴 만큼은 된다고 자부합니다.”
릴리는 배시시 웃었다. 웃을 일도 없는데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가 누군지 알면 이 사람도 저 멀리 가버리겠지? 상황이 우스웠다.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일 생각을 버리니 마음이 편했다. 자신이 누군지 모르면 사람들은 여전히 친절했다. 릴리는 침체되어 있던 기분이 나아지는 걸 느꼈다. 이 맛에 술을 마시는구나.
슬픈 얼굴로 홀로 청승맞은 분위기를 풍기며 술을 마시던 그녀가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자 다른 남자들도 용기를 내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처음 뵙겠습니다. 엘테른 알토 백작입니다. 아가씨의 존함을 알 수 있을까요?”
“반가워요, 알토 경. 저는 지금은 누군가의 여식이 아니라 저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제 이름은 제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신다면 알려드릴게요.”
“아름다움에 신비까지 더해지니 애가 타는군요. 정말 알려주시지 않을 겁니까?”
그녀를 둘러싼 신사들은 그녀가 누군지 알고 싶어 끈질기게 물었지만, 릴리는 고개를 도리질 치고 웃기만 했다. 그들도 나중엔 결국 그녀가 누군지 알게 되겠지만, 지금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어떻게 그동안 이렇게 아름다운 분을 몰랐을 수가 있을까요? 대체 어디에 숨어계셨던 겁니까?”
“경께서 다른 곳에 한눈을 파느라 저를 보지 못한 게 아닐까요? 수도엔 사람이 많으니까 모르는 사람도 있을 수 있죠.”
“좋은 곡입니다. 아가씨의 춤 솜씨마저 비밀에 부치진 말아주십시오. 같이 추시지 않겠습니까?”
“죄송하지만, 제가 비밀이 많아요. 춤은 다음 기회에 추도록 해요. 그보다 저는 대화를 나누고 싶어요.”
릴리는 의도하진 않았지만, 언변에 있어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하이드와 르시엔에게 단련된 사람이었다. 게다가 술기운으로 평소의 수줍음도 자취를 감췄다. 그런 그녀에게 무난한 수작질이나 평범한 아부는 아무런 여파도 없었다.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을 거리낌 없이 내뱉으며 대화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영식들이 신나서 그녀에게 끊임없이 술잔을 건네준 것이 한몫했다. 릴리는 취기를 몰아내려 애쓰며 은근슬쩍 화제를 전환했다.
“르시엔 경이 이번에 약혼녀를 데려온 거 보셨나요?”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만, 얘기는 들었습니다. 아가씨도 그자에게 관심이 있으신 건가요?”
“그 자식에게 아가씨의 관심은 아깝습니다! 그런 놈이 반반한 얼굴을 믿고 벌써 돌아다닌다는 게 말이 안 되지요.”
사내들은 릴리가 르시엔에게 행여나 관심을 가질까 봐 걱정되는지 묻지 않아도 술술 그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뒤에서 욕을 먹는 게 저만은 아니다 싶어 조금 위안이 되면서도 씁쓸했다. 르시엔 경에게 미묘한 동지애마저 생겨나는 것 같았다.
“그 자식은 분별없는 난봉꾼이에요. 아가씨처럼 순수하신 분은 눈에도 담지 마시길 바랍니다. 결혼 전의 유희라고 해도 지나쳤어요. 그 일만큼은 정당한 대가를 치렀어야 했어요.”
“그 일이라뇨?”
“모르십니까?”
“네. 제가 지방에서 요양을 하다가 얼마 전에 올라왔거든요.”
릴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하는 자신에게 놀랐다. 죄책감이 들었지만, ‘그 일’은 중요한 얘기일 것 같았다. 비교적 차분해 보이는 사내였다. 그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뺨이 따끈하게 달아오르니 없던 패기도 생기는 것 같았다.
“좋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괜히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도 좋지 않고요. 아가씨의 귀를 더럽힐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제가 모르는 이야기를 하는 게 싫어요. 제게 소외감을 안겨주실 건가요?”
릴리는 눈앞의 사내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옆으로 고개를 돌려 울적한 표정을 지어냈다.
사내에게서 고민하는 기색이 느껴지자 릴리는 그의 팔을 잡고 가련해 보이길 바라며 그와 더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다른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가자고 했다.
점잖은 체 하려고 애쓰고 있지만, 손으로 가린 사내의 입꼬리가 귀에 걸릴 듯 올라갔다.
두꺼운 커튼으로 가려진 테라스가 가까이에 있었다. 릴리가 그를 붙잡고 테라스로 향하자 주위에 있던 영식들이 죄다 닭 쫓던 개처럼 허탈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릴리와 영식이 커튼을 열고 둘이서 테라스로 들어갔다. 무도회에서 남녀가 단둘이 테라스로 들어가는 이유는 빤했다. 적어도 사내는 그리 생각했다.
* * *
커튼 틈 사이로 술에 달아오른 젊은 남녀가 사라졌다. 두툼한 커튼은 커다란 샹들리에의 빛도 사람들의 소란스러운 말소리도 차단하기에 충분했다.
릴리는 마치 첩자라도 된 기분이라 조금 들떴다. 들뜬 기분에 개구쟁이처럼 웃는 릴리를 보며 사내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저는 아까 말해주신 그 얘기가 궁금해요. 해주실 거죠?”
릴리는 테라스의 난간에 기대어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선선한 저녁 바람이 뺨을 식혀주는 게 기분 좋았다. 사내는 조금 난감한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말하기 꽤나 곤란한 사항이었나 보다.
릴리는 그에게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갔다.
“이게, 사실 꽤나 민감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얘기를 주고받은 걸 알면 루체비스타 공작의 화를 피하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다들 알면서도 쉬쉬하며 입조심하는 거죠.”
“이미 다른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기란 거잖아요? 저만 모르고 바보 취급 당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당신이 제게 얘기해준 걸 모르잖아요. 그래서 지금 여기에 단둘이 있잖아요? 릴리는 그의 가슴팍 위에 가볍게 손을 올리고 그를 올려보았다.
릴리는 이런 게 미인계일까, 취기 오른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오늘 하루 동안 예쁘단 말을 하도 많이 듣다 보니 그녀는 약간의 자신감이 붙었다. 그냥, 물어보는 것뿐이니까 나쁜 짓 하는 건 아니야…….
정말 그녀의 미인계가 통하는지 사내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 릴리는 이건 조금 이상한걸, 생각하면서도 춤출 때도 이 정도의 접촉은 있으니까 넘어가기로 했다. 지금은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했다.
“그, 르시엔 경은 원래 엘레나 양의 약혼자였습니다. 워낙 난봉꾼이었던 터라 공작 영애와의 약혼이 화제가 됐었죠. 엘레나 양 정도는 되어야 저 남자를 사로잡는구나, 이런 식으로요.”
릴리는 놀라지 않았다. 이미 이 정도는 예상했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궁금한 것은 공작 영애와 약혼했던 그가 어째서 지금 자신과 약혼한 것인가였다.
“네, 그런데요?”
“그런데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다른 여자와 애정 행각을 하고 있는 걸 엘레나 양이 딱 목격해버렸지 뭡니까. 충격을 받고 계단을 뛰어 내려가던 도중에 넘어지셔서, 그게…….”
“크게 다치신 건가요?”
“두 분 사이에 아기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사고로 유산을……. 그래서 당장 파혼하고 루체비스타 공작님께서 르시엔 경에게 경을 치려던 것이 엘레나 양의 중재로 말려졌습니다. 공작가에선 이 일을 덮기 위해 꽤나 노력했지만, 워낙 자극적인 소식인 탓에 빠르게 퍼져버렸죠. 다들 알면서도 입에 올리지만 않고 있습니다.”
“꽤나……, 충격적인 이야기네요.”
간단하게 요약된 이야기만으로도 상황을 파악하기엔 충분했다. 술기운이 단번에 사라졌다. 확실히 소넬가는 그녀에게 과분한 혼처였다. 그녀가 바르딘가에 입적했어도 마찬가지였다. 르시엔 소넬에게 흠이 없었더라면, 그랬다.
사람들이 그녀를 쳐다보는 시선도, 자신이 르시엔과 결혼하게 된 이유도 이해했다.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슬프지는 않았다. 그저 납득이 가서 씁쓸했다. 모르는 편이 나았을까?
하지만 릴리는 자신이 이 일을 알아도 달라질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정략결혼이다.
릴리가 조용히 생각에 잠겨있자 사내는 역시 당신의 귀를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며, 어차피 남 일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그녀의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을 주어 릴리를 끌어안았다.
릴리는 멍한 상태에서 상대의 접촉에 화들짝 놀라 손으로 가슴을 밀며 벗어나려고 했지만, 남자는 그것을 앙탈로 받아들인 듯했다.
“아직도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을 생각인가요? 뭐, 괜찮아요. 밤은 기니까.”
그는 손으로 그녀의 등과 허리를 쓰다듬으며 릴리의 귓가를 입술로 지분거렸다. 릴리는 이럴 생각이 아니었다고, 이제 아까 사람들과 얘기하던 곳으로 가자고 말하며 그에게서 떨어지려고 애썼다. 그러나 남자는 그녀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그녀에게 괜찮다고 중얼거리며 하던 행동을 이어갈 뿐이었다.
릴리는 그제야 제가 읽었던 연애 소설들이 생각났다. 테라스에 단둘이 있고 싶다고 말하는 게 어떤 의도로 비쳤을지도.
그야말로 난감한 상황이라서 릴리는 속으로 어쩌지, 어쩌지 하며 공황 상태에 빠졌다. 남자는 그녀가 싫다고 해도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맨 살갗에 닿는 타인의 입술이 끔찍하도록 불쾌했다. 목덜미를 핥는 혀가 소름 끼쳤다. 그녀의 몸이 덜덜 떨리는데도 불구하고 허리에 있던 손은 점점 기어 올라왔다.
“그만하시라고요!”
릴리가 남자를 밀치며 소리를 꽥 질렀다. 릴리를 껴안고 있던 팔이 풀어졌지만, 그는 바로 얼굴을 구기며 릴리의 손목을 잡았다. 릴리는 겁이 덜컥 났다. 어떡해!
쾅
“그만하라잖아.”
커튼을 젖히고 웬 사내가 들어와서 남자의 멱살을 잡고 난간으로 밀쳤다. 사내는 시종의 옷차림이었다. 다른 시종들과 마찬가지로 가면을 쓰고 있어서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멱살이 잡힌 사내는 감히 시종이 제 멱살을 잡은 것에 분노한 듯 험한 욕을 내뱉으며 당장 놓으라 명령했지만, 시종은 그의 말에 코웃음 치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난간에 걸쳐져 있던 상체가 난간 밖으로 밀리자, 남자는 시종의 팔을 붙잡으며 미쳤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릴리는 그제야 깜짝 놀라 시종을 말려야 할지 응원해야 할지 고민하며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네까짓 게 감히 아가씨를 건드렸으니 뒷감당을 잘해야 할 거야.”
“놔! 노, 놓으라고! 미친 게냐? 너야말로 뒷일이 무섭지 않느냐?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시종 따위가!”
“살려주는 걸 고맙게 여겨. 여자의 싫다를 앙탈로 받아들이는 멍청한 새끼.”
시종은 남자를 들어 상체를 난간 밖으로 휙 밀었다가 끌어당겨 놓고 손을 놓았다. 그가 더러운 것을 만졌다는 듯 손을 터는 동안 남자는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릴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시종에게 손목이 붙잡혀서 테라스를 벗어났다.
연회장에서는 흥겨운 무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릴리는 바이올린의 경쾌한 선율을 따라 걸었다. 그녀는 그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얼굴을 가리고 있어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시종의 옷을 입고 있어도 누구보다 멋졌으니까.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 속 왕자님보다도 더. 그녀의 인생에 이런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가면 쓴 사내가 그녀의 손을 놓아준 것은 인적이 없는 복도에 도착했을 때였다. 릴리는 사내가 손을 놓자마자 그 품에 뛰어들어 안겼다.
“선생님!”
“하……. 아가씨, 알고 계셨습니까? 모르고 따라오는 거였으면, 험한 일 당하고도 정신 못 차렸다고 혼을 내주려고 했습니다.”
“어떻게 몰라요. 제가, 제가 어떻게 몰라봐요……. 흐아앙.”
하이드는 웃으며 하는 말에 릴리가 울음을 터트렸다. 그를 만나기 전 연회에서 겪었던 일에 대한 설움이 복받쳤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엔 괜찮았는데,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를 보니 긴장이 풀려서 울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릴리는 아이처럼 엉엉, 울음을 놓았다.
그녀는 왜 이제야 나타났느냐며, 왜 알면서 말해주지 않았냐고 두서없는 원망을 늘어놓으며 하이드의 가슴과 팔뚝을 마구잡이로 때리고 훌쩍였다.
하이드는 전혀 아프지 않았지만 난감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엉망으로 울고 있는 릴리를 내려다보았다. 얼굴이 눈물범벅이었다. 그녀가 우는 얼굴은 늘 그를 꼴리게 했지만, 이렇게 우는 상황은 별로였다.
“아가씨.”
“왜, 왜, 여기 있어요, 흑, 지방에 간다고 했으면서, 흐윽, 이렇게 올 거였으면, 나랑. 나랑 같이 오든가. 흐앙.”
“릴리 아가씨.”
하이드가 그녀를 진정시켜보려 이름을 불렀지만 릴리는 그의 셔츠가 구겨지든 말든 옷깃을 붙잡고 흔들어댔다. 하이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함이 느껴지는 긴 한숨이었다.
릴리는 그의 한숨 소리에 울음을 참으려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훌쩍대며 그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손바닥으로 닦았다. 눈가를 거칠게 문지르는 손길에 하이드는 한 번 더 깊은 한숨을 쉬며 그녀의 손을 잡고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울고 불며 때릴 땐 언제고 기가 죽어서 울음을 그치려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하이드는 릴리를 당겨 제 품에 가두곤 그녀의 고개를 가슴에 기대게 했다. 어린아이 달래듯 등을 토닥이자 릴리는 다시 울음이 터져 그의 옷자락을 적셨지만, 그따위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가씨. 대체 어디 계셨습니까? 얼마나 찾았는지 아십니까?”
“……저를 찾으셨어요?”
“그래요. 제가 누구 때문에 이 꼴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릴리가 그의 품에서 고개를 들자 하이드는 얼굴을 가렸던 가면을 가리키며 인상을 찌푸렸다. 릴리는 미간을 잔뜩 좁힌 그의 얼굴에 이상하게 안심이 되어서 빨개진 눈을 하고 배시시 웃었다.
엄청 흉한 몰골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어쩐지 그게 걱정되지 않았다. 하이드는 아닌 척하면서 그녀에게 다정했으니까. 하이드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손수건으로 상냥하게 닦아주며 잔소리를 퍼부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셨습니까? 그리고 아가씨의 잘난 오라비는 대체 어디 두고 혼자 다닌 겁니까? 제가 사내새끼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르쳐드리지 않았던가요.”
그는 말하면서 슬슬 화가 나는지 성질을 죽이기 위해 심호흡했다. 릴리에게 잘못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하이드가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올랐다.
“오라버니는……, 중간에 헤어졌고, 르시엔 경이 사람들에게 저를 소개해 줬는데, 그게, 흐윽, 혼자 있고 싶었어요…….”
하이드가 알만 하다는 듯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는 그녀의 두서없는 설명에도 상황을 완전히 이해했다. 제르시스 황자에게 그의 탄생일 연회에 시종에게 가면을 씌우라는 어이없는 부탁을 할 당시만 해도 자괴감이 상당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이곳에서 그녀를 만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망할 자식들. 대체 한 게 뭐야.’
릴리를 에스코트하겠다고 나섰으면 그녀 혼자서 이따위로 울 일을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 역시 빨리 쓸어버려야겠다고 다짐하며 하이드가 이를 갈았다.
“릴리 아가씨. 기껏 예쁘게 꾸며놓고 이렇게 울면 어떡합니까. 우는 얼굴도 예쁘지만, 그건 침대 위에서만 보여주시는 게 좋습니다. 다른 사람 때문에 우는 꼴을 보니 속이 뒤틀리는군요.”
눈이 살짝 부어서 눈가가 붉었다. 엉엉 울었던 것치고는 그럭저럭 수습이 가능한 얼굴이었다. 하이드는 그녀의 턱을 붙잡고 이리저리 돌려보고는 빈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녀를 앉혀두고 잠시 나갔다 들어온 손에는 분과 연지가 들려있었다.
황궁에서 사내가 대체 어떻게 저런 걸 구해오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하이드의 얼굴이 워낙 험악했기에 릴리는 얌전히 앉아있었다.
“제가 모든 걸 잘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이건 아가씨께서 직접 하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요…….”
릴리는 이제야 엉망으로 우는 모습을 보인 게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졌다. 눈물에 씻겨나간 분을 다시 바르고 연지를 새로 바르니 그럭저럭 볼만했다. 애초에 화장을 연하게 해서 번진 것도 별로 없었다.
“이제 아가씨도, 그 개차반에 대해서 알게 되신 것 같은데…….”
“저는……, 괜찮아요.”
“……괜찮, 다고요.”
“달라질 건 없으니까요. 그저, 결혼이라는 게 정말, 생각 이상으로 속물적이구나, 생각할 뿐이에요.”
릴리가 씁쓸하게 웃었다. 하이드는 그녀의 말을 통해 자신이 기대했던 반응이 이런 방향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릴리가 분노하며 이 약혼을 파기하길 기대했던 걸까?
하이드는 마냥 순진하고 해맑은 줄만 알았던 릴리의 의외의 모습에 기분이 이상했다.
그녀도 결국은 뼛속까지 귀족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동화를 믿는 철없는 소녀에서 벗어나길 바란 건 자신이었으면서도 모순적이게 그녀만은 해맑은 모습으로 남아있길 바랐던가?
스스로에게 조소하며 하이드가 문을 열었다.
“릴리 아가씨, 이제 나가셔야지요. 무도회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하루가 끝날 때도 된 것 같은데, 연회는 이제 시작이나 다름없었다. 방을 나와 보니 사람들이 짝을 지어 춤을 추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곳에 섞여 있었지만, 지금은 너무도멀어 보였다. 하이드는 다시 가면을 쓰고 구겨진 셔츠를 정돈했다. 릴리는 그의 셔츠 앞자락이 축축하게 젖어있는 걸 힐끔 보고 자괴감에 빠졌다.
아까 자신이 왜 그를 때리고 원망했는지 모를 일이다.
그가 잘못한 것은 없는데…
수도에 없다고 거짓말하기는 했지만, 결국 그녀를 찾으러 와주었다. 그녀의 약혼자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은 것은 원망스럽긴 하지만, 틸리안도 해주지 않았던 얘기다. 그녀가 모르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새신부가 알아서 좋을 이야기는 아니지 않은가.
릴리는 하이드의 옆에서 눈치를 보며 쭈뼛대다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선생님, 그런데 왜 시종 옷을 입고 계세요?”
“피치 못할 사정으로 당분간 저를 아는 사람을 마주쳐선 안 되거든요.”
“선생님은 첩자시거나, 암흑 조직의 일당이거나 그러신가요?”
하이드의 걸음이 뚝 멈췄다. 젠장.
그래, 그녀가 바보가 아닌 이상 충분히 의심할 만했다. 비밀로 할 거였다면 좀 더 철저히 그녀와의 거리를 유지해야 했다. 그는 늘 애매하게 화제를 피했다. 그녀에게 거짓말하는 죄책감을 덜고 싶다는 것은 알량한 핑계에 불과했다. 자신은 그저 릴리 앞에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싶었던 것일까.
“무슨 이야기를 읽고 그런 추측을 하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닙니다. 저는 아가씨의 가정교사죠.”
“어떤 가정교사가 황궁에 신분을 숨기고 시종으로 변장을 하나요?”
“제가 낯가림이 심해서 이처럼 사람이 많은 곳에서 얼굴을 드러내기가 꺼려지는 터라 그렇습니다.”
“왜 거짓말하셨어요? 영지에 할 일이 있으시다면서요?”
“생각해 보니 제가 굳이 갈 필요가 없는 일이더군요. 게다가 아가씨도 걱정되던 참에 보러온 것뿐입니다.”
“결국, 선생님은 제게 육체적인 관계 말고는 아무것도 가르쳐주실 생각이 없으시다는 거죠? 됐어요! 저도 더 이상은 안 물어볼 거예요!”
릴리는 그보다 앞장서서 걸어가 휙 고개를 돌려 그를 째려보고는 그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릴리는 자신이 큰소리 낼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가 자신을 바보 취급하는 것 같아서 화가 났다. 그의 신비주의에 신물이 났다. 그놈의 비밀! 비밀!
흘끔 돌아봤지만, 그는 그 자리에 멈춰서 있었다. 그녀를 따라오지도 않는 모습에 더 화가 났다.
마침 틸리안이 보였다. 릴리가 그를 향해 걸어가자 틸리안이 그녀를 발견하곤 거의 뛰듯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릴리! 대체 어디에 있었던 게야!”
“잠깐 혼자 쉬다 왔어요.”
“내가 너를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아느냐? 너는 대체…….”
“제가 잘못한 건가요?”
그녀를 두고 가버린 것은 그면서 그녀를 탓하는 목소리에 릴리는 또 억울함이 삐죽 솟았다.
술기운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일까, 오늘따라 유난히 감정 기복이 심했다.
틸리안은 릴리의 물기 어린 목소리에 놀라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발간 눈가가 눈에 들어왔다. 다 알게 되었구나. 알케인에게 한참을 붙잡혀 있다 돌아가니, 릴리는 온데간데없고 사람들이 그를 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에게 대놓고 눈길을 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틸리안은 그들의 입에서 오가는 릴리의 이름만은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틸리안은 르시엔을 찾아 그녀의 행방을 물었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휴게실을 가리켰다. 릴리는 휴게실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릴리가 구석진 곳에서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틸리안은 반쯤 미칠 것 같았다. 정작 그녀를 추잡스러운 구설에 오르게 한 남자는 웃으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틸리안은 르시엔에게 주먹을 갈기고 싶었지만, 필사적으로 참았다. 오늘 그녀의 에스코트를 맡은 것은 자신이었다. 그녀의 곁을 떠나는 것이 아니었다.
겨우 발견한 릴리의 눈가가 붉었다. 술 냄새도 나는 것 같았다.
‘릴리…….’
그녀를 걱정하며 찾아다니느라 화났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틸리안이 굳은 얼굴로 릴리에게 자신이 미안하다, 잠깐 자리를 비웠는데 없어져서 걱정했다고 말하며 안절부절못했다.
그는 속상해서 울었을 그녀의 기분을 달래주고 싶었지만, 그에겐 여자를 대하는 재주가 없었다. 고민하다가 춤을 추자고 제안했지만, 릴리는 내키지 않는 태도로 말없이 그의 손을 잡았을 뿐이었다.
“네가 좋은 시간을 보내길 바랐는데, 내가 제대로 오라비 노릇을 못한 것 같구나.”
“저를 정말로 생각해주신다면, 미리 언질해 주시지 그러셨어요.”
느린 왈츠곡이었다. 잔잔하고 가녀린 선율은 둘 사이의 침묵을 메꿔주지 못하였다. 릴리의 씁쓸한 얼굴에 틸리안은 입술을 달싹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릴리는 죄책감 가득한 그의 얼굴을 보고 이내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원망할 생각은 없어요. 그런 얘기는 말하기도 민망하고, 알아도 달라질 게 없으니까요. 제 처지가 마냥 운 좋은 신데렐라는 아니었다는 걸 알아서 개운하기도 한걸요.”
“……차라리 원망하거라.”
그녀를 알기 전에는 아무런 죄책감도 없었고, 오히려 이 혼처가 그녀에게 좋은 자리라고까지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그녀의 약혼을 말리지 못하는 것이 괴로웠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의 관심도 흐려질 거예요. 오늘 속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차차 나아지겠죠.”
릴리는 긍정적인 전망을 말했지만, 사실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닥부터 시작한 그녀의 첫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단 말인가?
“릴리……. 네가 원한다면 파혼할 수 있도록 힘써보마.”
틸리안의 말에 릴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수로요?”
“내가 아버지 마음에 들도록 더 잘하면 된다. 사업에 참여해야겠지.”
“저한테, 오라버니를 희생시키란 말씀이신가요?”
“이따위 결혼에 너를 희생시키는 것보다 나아. 그리고 희생이랄 것도 없다.”
사실 틸리안도 그가 잘한다고 해서 바르딘 자작을 설득할 수 있으리라고는 확신하지 못했다. 그는 이미 이 이야기를 꺼내고 나서 노성을 들었으니까.
“……절 위해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어요. 그리고,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란 거 아시잖아요.”
“정 안되면, 내가 널 데리고 도망이라도 치마.”
“오라버니가 그런 실없는 소리를 하실 줄은 몰랐어요.”
잔뜩 굳어있는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한 말이었지만, 완전히 농담은 아니었다. 릴리는 틸리안의 진지한 눈빛을 모른 척하고 박자에 맞춰 한 바퀴 돌았다. 결혼이라는 경제적이고 실리적인 계약에서 그녀의 감정은 가장 우선순위가 낮은 고려 대상 아니던가. 오라버니의 말은 그녀에게 적잖은 위로가 되었지만,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파혼하고 난다면 그 뒤는? 릴리가 갚아나가야 할 것들이며, 파혼이라는 불명예와, 부모님이 느낄 죄책감은? 줄줄이 딸린 동생들은?
오로지 그녀 하나가 마음을 추스르는 쪽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다.
틸리안이 착잡한 마음으로 그녀의 차분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고 느린 왈츠가 끝나고, 둘은 말없이 자리로 돌아갔다. 릴리를 향해 르시엔이 반가운 미소를 띠며 다가왔다. 틸리안은 얼굴을 와락 구겼지만, 그 이상의 표현을 할 수는 없었다. 보는 눈이 많았다.
“릴리! 휴게실에 가봐도 없더군요. 그대가 날개를 달고 저를 떠나가 버린 줄 알았습니다.”
“아, 르시엔 경…….”
릴리는 웃지도 울지도 않는 미묘한 표정으로 그를 맞이했다.
대체 이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그녀로서는 솔직히 르시엔에게 있지도 않던 정이 떨어진 참이었다. 르시엔은 릴리의 표정을 보고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했다. 그는 약삭빠른 남자다. 이런, 낭패로군,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표정은 생글생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어차피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었다. 르시엔은 자신 때문에 우는 여자를 달래는데 이골이 나 있는 남자였다. 그의 지난 여인 중에는 그가 바람피우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도 그를 만났던 여자가 여럿 있었다. 어쨌건 엘리나의 유산 사건은 이미 지나간 일이지 않은가.
지금의 르시엔은 정말 만나는 여자가 없었으며, 약혼녀인 릴리에게 한동안 몰두할 생각이었다. 부끄러운 과거를 반성하며 괴로운 척 좀 하고, 그녀의 발치에서 자신은 그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죄 많은 사람이라며 가련하게 눈물 몇 방울쯤 흘려주면 될 것이다.
그는 알고 있었다. 사내들이 여자의 눈물에 약한 것보다 배로 여자가 사내의 눈물에 약하다. 처음에는 조금 받아들이기 힘들어할 수도 있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도 순응할 것이다.
자신은 그녀의 약혼자다. 그러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대는 제 옆을 너무 오래 비워두셨습니다. 이제 그대의 약혼자와도 한 곡 춰주시지요.”
“그래요. 르시엔 경과 할 얘기도 있으니까요.”
릴리는 복잡한 마음으로 르시엔의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밝은 분위기의 곡이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보며 수군거리는 것 같았다. 손이 차게 식어있었다. 릴리는 춤을 추러 나가기 전, 급하게 받은 한 잔을 다 비웠다. 도수가 있는 술이었는지 식도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릴리, 그대가 걱정되는군요. 제가 없는 동안 술을 많이 마시셨습니까?”
“걱정 마세요. 오라버니가 있으니 르시엔 경께는 피해를 끼치지 않아요.”
“무슨 섭섭한 말씀이십니까? 저는 당신이 제게 기대어 주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릴리는 차가운 얼굴로 춤을 추었다. 그녀는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르시엔은 유독 그녀에게 자주 대답을 듣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뻔뻔한 그도 조금 무안할 지경이었다.
그는 할 말이 있다고 해놓고 술을 들이켜고 나서도 아무 말 없는 릴리 때문에 바짝 애가 탔다. 차라리 화를 내는 편이 나았다. 화를 내거나 울면 안고 다독여주기라도 하지, 접근을 거부하는 차가운 태도가 난감했다.
“제게 하실 말씀이라는 게 무엇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대의 고운 목소리를 듣지 못하니 너무도 괴롭군요.”
“소넬 경께서 무슨 생각으로 제게 친근하게 구시는지 모르겠지만, 그럴 필요 없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릴리. 우리는 약혼한 사이입니다. 저는 그대와 가장 친밀한 사이가 되고 싶은걸요.”
“모든 부부가 친밀한 사이는 아니잖아요? 예의 정도만 지켜주세요.”
르시엔은 한숨 쉬지 않았다. 르시엔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음악에 맞춰 그녀의 허리를 잡고 들어 올렸다 내려놓았다. 그는 생긋 웃으며 릴리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의 분명한 의사 표현에 릴리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녀는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수 있는 강건한 성격이 되지 못했다.
“음악이 너무 기네요.”
“저는 릴리와 춤을 추고 있는 이 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어요.”
“르시엔 경은, 세간의 시선이나 평가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신가 봐요?”
“비교적 그런 편이긴 합니다. 릴리, 그대가 제게 바로 마음을 열긴 힘들 거라고 생각해요.”
“알긴 아시는군요.”
“양심은 있으니까요. 하지만 당신이 저의 과거보다 지금의 저를 봐주길 바라는 것은 욕심일까요?”
릴리는 양심이 있으셨나요? 하고 샐쭉거리고 싶은 것을 참고 입술만 삐죽였다. 르시엔은 그녀의 대답을 기대도 하지 않았는지 하하 웃으며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릴리, 그대는 정말 어려운 것 아십니까?”
“다른 숙녀분들의 마음을 다 사로잡은 것만으로는 모자라시나요? 저 하나쯤은 내버려 두세요.”
릴리는 상체를 뒤로 빼며 말했다. 이 사람이랑 있으면 기운이 빠르게 고갈되는 것 같았다.
술기운은 그녀를 솔직하게 만들었다. 릴리는 자신이 평소보다 훨씬 더 과감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르시엔은 짜증 어린 릴리의 얼굴에 웃음이 나왔다.
착하고 소심한 줄로만 알았는데 제법 앙칼졌다. 그는 털을 부풀린 새끼 고양이를 보는 것 같았다. 아, 이게 왜 이렇게 귀엽지?
“제가 다른 여성분들의 애정을 받았던 과거를 부정하진 않겠습니다만, 저는 이제 릴리 당신만 보고 싶습니다. 부디 제 이런 마음만큼은 의심하지 말아 주세요.”
“르시엔 경……. 그냥 제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던 신경 쓰지 말아주세요.”
마침 곡이 끝났기에 릴리는 먼저 자리를 피했다. 그녀는 이 모든 상황이 짜증 났다.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망나니 약혼자도, 멀리서 제 눈치를 보는 틸리안도, 아무것도 모르면서 저를 얕잡아보는 사람들도 다 꼴 보기 싫었다.
대체 선생님은 또 어디로 사라진 거야?
하이드는 자신을 걱정하는 것처럼 굴며 제멋대로 찾아와 구해줄 때는 언제고, 또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달짝지근한 와인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잔뜩 취하고 싶었다. 릴리는 말없이 술을 홀짝였다. 둥둥둥, 콘트라베이스의 빠른 박자에 맞춰 심장이 기분 나쁘게 뛰었다.
자꾸 그녀를 말리는 틸리안과 르시엔이 짜증 나서 릴리는 혼자 있고 싶으니 따라올 생각하지 말라고 일갈하고는 비틀대며 정원을 향해 걸었다.
릴리는 정원 한쪽에 놓여있는 파고라에 앉았다. 뺨이 따끈따끈했다. 남녀가 정원의 구석진 곳으로 향하는 게 보였다. 익숙하지 않은 알코올이 몸을 지배했다. 고개가 자꾸 바닥으로 떨어졌다. 반쯤 졸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릴리! 당신은 대체…….”
“우음, 하이드? 하이드 선생님?”
“아가씨……,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군요.”
“어디 있다가 이제 나타나요, 왜 나랑 춤추자고 안 해요…….”
“저는 멀리서 계속 아가씨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쓸모없는 자식들은 아가씨처럼 자그마한 여자 하나 챙기지 못하더군요.”
“그러니까아 왜 시종으로 변장하고 지켜보기만 하냐고요오…….”
“후……, 릴리 아가씨, 대체 얼마나 마셔댄 겁니까? 저는 아가씨가 이렇게 술꾼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만?”
“선생님도 모르는 게 있어야 공평하죠…….”
릴리는 하이드의 어깨에 무거운 머리를 기댔다. 내 머리가 무거워서 선생님이 땅으로 꺼지면 어떡하지. 걱정되지만 도무지 머리를 들 수가 없었다.
“아가씨의 오라비를 불러와야겠군요. 저택에서 주무십시오.”
“선생니임, 아직 집에 안 갈래요. 저 하고 싶은 거 있어요.”
“네에, 네에. 아가씨 하고 싶은 거 다 하셔야지요. 우리 릴리 아가씨. 제 말은 하나도 안 들으시고, 하고 싶은 거 다 하시죠.”
릴리는 하이드의 비아냥에도 그를 보고 있는 것이 마냥 즐거운지 얼빠진 웃음소리를 내며 그에게 달라붙었다.
“우리도 정원 구석으로 가요. 저랑 야한 거 해요.”
릴리의 눈이 해맑게 휘었다. 긴장감 없이 잔뜩 풀린 눈이 하이드를 몽롱하게 응시했다.
저어기, 무도회가 열리면 눈 맞은 연인들이 구석에서 그으렇게, 어, 한다면서요? 수도식 연애……, 이런 게 그거니까요. 음, 이것도 가르쳐주셔야죠? 릴리가 흐물흐물한 몸을 하이드에게 바짝 붙이며 말했다. 저리로 가요, 선생님.
“하, 아가씨. 저는 만취한 사람은 건드리지 않습니다.”
“거어짓말. 여기는 아니라는데요?”
릴리가 꺄르륵 웃으며 하이드의 부푼 아랫도리 위에 손을 올렸다. 하이드의 턱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는 왼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숨을 참고 있었다. 릴리는 조바심이 나는 듯 하이드의 어깨 위에 두 팔을 두르고 하이드의 턱 아래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방비한 얼굴로 네? 네? 하고 졸랐다.
“후우, 저는 그런 애교는 가르친 적이 없는데, 대체 이런 건 누구한테 배우셨습니까?”
“저어는 선생님의 수제자인걸요. 하나를 가르치며언 열을 알지요오.”
“나중에 기억 못 하면, 각오하십시오.”
하이드가 릴리를 번쩍 들었다. 하이드는 릴리를 어깨 위에 들쳐 매고 미로 같은 정원을 성큼성큼 걸었다. 꺄르륵 웃음을 터트리는 릴리와 반대로 하이드는 전쟁이라도 치르러 가는 듯 험악한 얼굴이었다.
황궁의 정원은 컸다. 울창한 숲속으로 들어가면 무도회의 요란한 소음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빽빽한 나무들이 두 연인을 가려주었다. 하이드가 릴리를 내려놓았다. 두 남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매달려 입을 맞췄다.
몰아치는 기세에 퉁, 릴리의 등이 나무에 부딪혔다. 몽롱한 정신은 성급하게 쾌락을 갈구했다. 릴리는 하이드의 혀를 감고 빨면서도 부족한지 으응, 안타까운 소리를 내며 그에게 매달렸다.
달빛 아래 입맞춤에선 달짝지근한 과실주의 맛이 났다.
하이드는 옷 위로 그녀의 엉덩이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는 그녀의 엉덩이를 강하게 쥐었다 놓으며 그녀의 다리 사이로 자신의 허벅지를 밀어붙였다. 릴리는 하이드의 목을 강하게 감싸며 그의 허벅지를 강하게 조였다.
하이드는 길고 긴 입맞춤을 주고받고 나서 숨이 차 할딱이는 릴리의 귀를 핥았다. 릴리는 선생님, 선생님, 하고 하염없이 그를 불렀다.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흥분이 식지 않고 점점 더 커지기만 했다.
엉덩이를 벌렸다 놓는 손길에 음부가 짜릿했다. 일찌감치 젖은 아래가 움찔거리며 더 큰 자극을 기대하고 있었다. 귀로 곧바로 전해지는 젖은 소리가 너무 야했다.
“하응……, 아으, 아.”
귀 안쪽을 핥는 축축하고 뜨거운 혀에 찌르르 전기가 통하는 것 같았다. 하이드는 느긋하게 허벅지로 그녀의 음부를 자극하며 릴리의 반응을 즐겼다. 그가 목덜미의 여린 살을 살짝 빨아들이자 여린 몸이 파르르 떨었다. 그녀가 스스로 허리를 움직이며 자극을 갈구하는 몸짓이 앙큼했다.
릴리의 흐려진 눈은 그에게 취해있었다. 하이드는 평소보다 예민하게 반응하는 몸을 여유롭게 요리했다. 그녀가 가냘프게 저를 부를 때면 온몸의 피가 아래로 몰렸다. 당장이라도 젖은 틈을 가르고 밀어 넣고 싶었지만, 하이드는 온종일 그의 애를 바짝 태운 그녀에게 쉽게 쾌락을 선사할 생각이 없었다.
“선생님, 만져주세요. 네? 몸이 너무 뜨거워요.”
“지금 만져주고 있지 않습니까, 욕심쟁이 아가씨.”
“엉덩이 말고요, 앞에…….”
릴리가 그의 턱 아래에 이마를 비비며 졸랐다. 싫습니다, 아가씨. 아가씨도 제 말은 안 듣지 않습니까? 하이드는 냉정하게 말했다. 하이드는 그녀의 간절한 눈빛을 무시하고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끌어내렸다. 성가신 속옷을 아래로 끌어내리고 그의 두 눈을 만족시키는 통통한 가슴을 쥐었다.
거친 애무였다. 강하게 가슴을 주무르는 손에 아릿한 감각이 피어올랐다. 마냥 부드럽고 달콤하지만은 않은 손길에 오히려 애가 달았다. 손바닥에 유두가 쓸릴 때마다 릴리가 으응, 우는 소리를 냈다.
숲의 차가운 밤공기도 연인의 열기를 식히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흥분을 여실히 드러내는 유두가 하이드의 입 안으로 사라졌다. 그가 유두를 빨아들이자 릴리는 강렬한 감각에 왈칵 눈물이 고였다. 입으로 빨아들이고 손으로는 반대쪽 유두를 꼬집고 문지르는 통에 그녀는 정신없이 이성을 녹이는 쾌감을 견뎌내야 했다.
릴리는 달아오른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제 가슴을 빠는 하이드의 머리칼을 흩트렸다. 머릿기름을 발라 깔끔하게 넘겼던 머리가 엉망으로 망가졌다. 릴리는 눈을 뜨지도 못하고 그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간헐적인 신음만을 내뱉었다.
“앗, 아, 아으, 앗”
“하아, 좋아요?”
릴리가 참지 못하고 그의 고개를 들고 입술을 찾았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몇 가닥이 이마를 덮은 그는 더 야성적으로 보였다. 잡아먹고 싶어 하는 눈이다. 릴리는 그의 뜨거운 눈빛에 전율했다.
서로를 탐하는 남녀에게 절제는 없었다. 릴리가 하이드의 셔츠를 쥐었다. 그녀는 서툰 손으로 급하게 단추를 풀었다. 그의 맨 살갗이 델 듯 뜨거웠다. 이곳이 야외라는 자각도 없었다. 오직 둘만이 중요했다. 풀벌레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뱉는 서로의 숨소리만이 둘 사이를 메꿨다.
릴리가 하이드의 가슴팍을 더듬으며 훌쩍였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취기인지 열기인지 모를 것이 사고를 흐렸다. 감각만을 추구했다. 그녀는 그가 만져주지 않아 애끓는 곳으로 그의 손을 이끌었다. 그의 손이 릴리의 속옷을 파고들었다.
미끄럽고 뜨거운 피부가 그의 손을 반기며 달라붙었다. 갈라진 틈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가르고 들어가 빨갛게 충혈되어있는 음핵을 살살 어루만졌다. 릴리가 자제할 줄 모르고 비명을 내질렀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의 손길을 기대했던 부위가 그의 손길에 자지러졌다. 손바닥으로 감싸 단순하게 문지르는 동작에도 그녀는 무너졌다.
“하아앙! 선생님, 하윽, 이제……, 응……?”
지탱할 곳이라고는 등 뒤의 나무뿐이었다. 나뭇등걸에 상체를 기댔지만 반쯤 풀린 무릎은 점점 힘이 빠지고 있었다. 릴리는 하이드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뜨겁고 부드러운 살점이 흐물흐물 녹는 것만 같았다. 눈앞이 눈물로 흐렸다.
흐아, 아, 아흑, 단어가 되지 못한 웅얼거림이 짐승의 소리와 다를 바 없었다.
“선생님, 선생니임, 앗. 하앙, 이제 손 말구요, 흑, 네? 못 참겠어요.”
릴리가 훌쩍이며 하이드의 어설프게 앞섶을 더듬었다. 그녀가 힘겹게 꺼낸 그의 성기 또한 급해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하이드는 제 성기를 문지르는 그녀의 손에 억눌린 신음을 내뱉었다. 사실 그도 거의 한계였다. 단단한 성기는 기대감에 이미 끝이 젖어 있었다.
“욕심쟁이 아가씨, 제 좆이 그렇게 먹고 싶으세요?”
하이드가 그녀를 뒤로 돌려 나무를 붙잡게 한 후 엉덩이 사이에 남근을 비볐다. 넣어주진 않고서 잔뜩 달아오른 아래에 성기를 문지르며 자극하는 행위에 릴리는 애가 탔다. 하이드는 앞으로는 손을 뻗어 퉁퉁 부운 음핵을 쓰다듬고 뒤로는 여린 음순을 굵은 기둥으로 짓이기며 그녀를 자극했다.
“대답하세요, 릴리. 이 아랫입으로 제 좆을 삼키고 싶으십니까?”
이렇게 단정치 못하게 꿀물을 질질 싸면서, 말하는 건 부끄러워요? 하이드가 그녀를 희롱하며 애를 태웠다. 모든 감각이란 감각이 그의 남근이 문지르는 부위에 쏠려있었다. 귀두가 예민한 부위를 누를 때마다 죽을 것 같았다. 금방 절정에 도달할 것 같은데 하이드의 느릿한 허리 짓에 애가 닳아 릴리가 엉덩이를 뒤로 빼도 하이드는 결코 그녀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았다.
결국 릴리가 고문 같은 쾌락을 견디다 못해 속살거렸다.
선생님 게 너무 먹고 싶어요.
하이드는 원하는 것을 얻자 상을 주듯 그의 굵은 성기를 삽입했다. 그녀의 하얀 엉덩이를 잔뜩 벌리고 붉은 속살을 파고들자 잔뜩 애태운 보람 있게 내벽이 그를 잘근잘근 씹어댔다. 릴리는 그의 기둥이 내벽을 긁듯이 삽입하는 것만으로 절정에 도달했다.
내벽이 요동치며 그의 남성을 조였다. 하이드는 윽, 인상을 쓰며 거칠게 움직였다. 막 절정에 도달한 그녀의 사정 따위는 봐주지 않는 허리 짓이었다. 그는 전부 뺄 듯 나갔다가 그녀를 부술 듯 강하게 성기를 박았다. 그의 움직임에 맞춰 릴리가 앗, 앗, 신음을 흘렸다.
그녀의 허리를 잡고 거칠게 쳐올리는 몸짓에 릴리는 끔찍할 정도의 쾌락을 느꼈다. 야외에서 둔부를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마저 불안이 아닌 자극이었다. 바람이 예민하게 달아오른 피부를 달콤하게 핥으며 지나갔다. 그의 타액으로 젖은 유두가 차가운 밤공기에 노출돼 꼿꼿하게 서 있었다.
통통한 엉덩이를 철썩이며 부딪치는 하이드의 하체가 미치도록 좋았다. 무서울 정도의 쾌락이었다. 애액이 허벅지까지 흘러내렸다. 취하면 더 예민해지는 것일까? 릴리는 지나칠 정도로 느끼고 있었다.
릴리는 또다시 빠르게 절정에 도달했다. 파르르 떨며 무너진 그녀를 하이드가 다시 서로를 마주보고 안았다. 아랫도리가 욱신거릴 정도로 예민해진 상태였다. 하이드는 늘어져서 자신을 끌어안는 릴리의 들고 제 허리에 감게 했다.
갑자기 몸이 들려서 놀란 릴리가 꺅, 소리를 질렀다.
“서, 선생님…….”
“다음번엔 제 마음대로 하라고 한 건 릴리 아가씨입니다.”
저는 아직 멀었어요. 하이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하이드는 그 상태로 서서 그녀의 허리를 들었다 놓으며 성기를 삽입했다. 체중으로 더 깊이 삽입되는 통에 그녀는 성기가 턱까지 차오른 것 같았다. 너무, 너무 깊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하이드의 머리카락을 파고들었다. 그가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귀두가 그녀의 몸을 가를 듯 파고들었다. 몸이 전부 성기가 된 것 같았다. 너무 좋아서 이상했다. 심장이 쿵, 쿵 뛰었다. 하이드는 그녀의 엉덩이를 강하게 움켜쥐고 주무르며 그녀를 들었다 놓았다.
찔꺽거리며 그의 남근이 속살을 파고드는 소리가 났다.
부족했다. 무서울 정도의 감각이 그를 덮쳤지만, 그는 더욱더 그녀를 원했다. 그녀의 작은 몸뚱이가 그를 블랙홀처럼 끌어당겼다. 그를 삼키는 요망한 아랫입은 그를 잡고 놔주지 않았다. 달라붙고 오물거리며 마치 생명체처럼 그를 삼켰다.
하이드는 자신을 끌어안고 쾌락에 흐트러진 그녀가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오직 그만이 그녀를 가진 이 순간이 붙박힌 채 영원하길 바랐다. 그녀의 관능을 저만이 알고 싶었다.
하이드의 얼굴에 여유가 없었다. 그는 짐승처럼 그녀를 탐했다. 거칠기 짝이 없는 태도가 오히려 그녀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가 더, 더, 세게 그녀를 원할수록 그녀의 내벽이 기쁨으로 움찔거렸다.
“하윽, 릴리, 아가씨, 윽, 그만 조여요.”
“그치만, 앗, 너무……, 흐읏.”
그녀의 말은 문장이 되지 못했다. 하이드가 그의 재킷을 바닥에 깔고 그녀를 눕혔다. 그는 릴리의 가녀린 다리를 어깨에 걸친 채 퍽, 퍽,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움직였다. 하이드의 남근이 빠져나갈 때마다 애액이 튀었다. 옷을 반쯤 걸친 남녀가 짐승처럼 사랑을 나누는 모습은 외설 그 자체였다.
활짝 벌려진 다리는 그녀의 속살을 가리지 못했다. 애액으로 번들거리는 검붉은 성기가 그녀의 아래로 들락날락하는 모습이 하이드의 눈에 적나라하게 들어왔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릴리의 벌어진 입에서 울음소리가 나왔다. 릴리는 내벽이 조여들며 허리가 절로 휘는 것을 느꼈다.
하이드가 어깨에 걸쳐진 그녀의 다리를 내리고 그의 허리를 감게 했다. 릴리는 그녀의 위에서 인상을 쓰고 있는 사내가 너무 좋았다. 그가 주는 열락도 좋았다. 그녀가 또다시 할딱이며 절정에 도달했다. 그는 그녀를 사정없이 몰아붙였다. 성기가 더 커지면서 더 깊이, 깊이 자신을 넣기 위해 용을 썼다. 꿀렁거리며 그의 것이 제 열정을 토했다.
릴리는 얼얼한 사타구니를 느끼며 까무룩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