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28)

아가씨는 유혹해

“정말 알려주실 건가요?”

“그럼요. 제가 아가씨께 무얼 숨기겠나요.”

하이드는 거짓말이 능숙한 사람이었다. 살면서 했던 수많은 거짓말을 떠올린다면, 이 정도 수준은 숨 쉬듯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었다. 울상으로 그에게 묻는 릴리의 얼굴에서 기대보다 체념이 짙게 묻어나와, 하이드는 양심이 조금 따끔거렸다.

“오늘도 일찍 오셨네요.”

“수업 시간이 되자마자 득달같이 감시꾼이 붙으니, 아가씨와 둘만 있으려면 일찍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릴리가 말을 돌리려고 한 말에 하이드가 꽤나 다정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방금 전까지 르시엔의 낯 뜨거운 구애의 말을 들어서인지, 릴리는 하이드의 태도가 조금 섭섭하게 느껴졌다. 하이드가 르시엔처럼 그녀에게 반한 것처럼 군다면 얼마나 좋을까?

“더러운 게 묻어서.”

‘망할 놈의 개새끼답게 침을 질질 흘리고 다니는군.’

하이드가 멍하니 생각에 잠긴 릴리의 손등을 손수건으로 벅벅 문질러 닦았다. 속으로는 르시엔에 대한 쌍욕을 퍼부으면서도 하이드의 표정은 말끔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문지르는 통에 릴리의 손등이 빨개졌다.

“그만 닦아도 될 것 같은데……. 이제 따가워요.”

“죄송합니다. 순간 열 받아서.”

하이드는 사과하며 빨개진 릴리의 손등 위에 제 것이라고 낙인이라도 찍듯 제 입술을 내리 눌렀다. 스스로도 낯선 소유욕이었다. 자신이 사람에게 이토록 집착한 적이 있었던가?

르시엔이 릴리 옆에 있는 걸 본 순간 기분이 급격하게 불쾌해졌다.

그들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 아니라 제대로 숨었어야 했는데, 눈길이 떨어지지 않아 결국 그녀에게 들켜버렸다.

“우리 오늘 수업 땡땡이칠까요?”

“네에?”

릴리는 땡땡이라는 말을 처음 들은 사람처럼 놀라 되물었다.

“감시꾼이 붙어서야 혈기왕성한 우리 아가씨 욕구를 채워줄 수가 없잖아요.”

릴리가 볼을 붉히며 하이드의 팔뚝을 찰싹 때렸다. 하이드는 ‘아가씨께서 저를 때리시다니, 아직 그건 안 가르쳐줬는데 진도가 빠르시네요.’하고 뜻 모를 소리를 하며 얄밉게 웃었다. 하이드는 그녀를 놀릴 때 가장 즐거워하는 게 분명했다.

“그치만 오라버니께서 제가 그린 그림을 보고서, 수업의 진도가 너무 안 나가는 것 같다며 의심하고 계신걸요.”

“하, 참……, 같네요”

하이드는 릴리가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낮게 욕설을 읊조렸다. 릴리 주위의 남자들은 다들 하이드를 방해하기로 작정한 것처럼 거슬리게 굴었다. 황녀를 만나는 게 차라리 더 쉬울 것 같았다. 망할 임무가 끝나면 다 쓸어버릴 놈들이니 참아보려고 해도 상당히 짜증이 났다.

하이드는 이 와중에도 제 짜증 난 표정에 안절부절못하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릴리가 귀여워서 더 얄미웠다.

“제 그림 실력이 형편없어서 그래요. 오라버니한테 화내지 마세요.”

그 귀여운 입으로 하는 말은 전혀 귀엽지 않아서 문제지.

하이드가 보기에 릴리는 틸리안의 가족 행세에 완전히 넘어갔다. 릴리는 다 좋은데 눈치가 더럽게 없었다. 제가 무엇 때문에 더 화가 나는지도 모르고 틸리안이 오빠 행세하며 그녀를 살살 구슬리는 의도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녀가 질투심을 유발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서 더 열 받고 속이 터졌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하는 짓들이 어떻게 이렇게 앙큼한지.

하이드는 기회가 된다면 릴리를 뒤집어 놓고 맨 궁둥이를 때려주고 싶었다.

“제 좆은 아가씨한테 화가 났습니다.”

하이드는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릴리의 손을 제 아랫도리로 가져다 댔다. 그의 말은 사실인지 천 아래로 그의 남성이 단단하게 부풀어 오른 것이 느껴졌다. 릴리는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놀라 손을 떼려고 했지만, 하이드는 오히려 제 손을 그녀의 손 위에 겹쳐서 위 아래로 남성을 문질렀다. 릴리는 빨개진 고개를 돌려 그의 남성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손, 손 빼주세요…….”

“손으로 빼주겠다고요?”

저야 좋죠, 하고 하이드는 그녀의 손을 잡고 그대로 빈방으로 끌고 갔다. 릴리는 하이드가 어떻게 자신보다 저택의 구조를 더 잘 아는지 궁금했지만, 궁금증에 집중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웠다. 그녀의 손바닥에 그의 단단한 촉감이 남아있는 것 같아 릴리의 뺨이 화끈해졌다.

좁은 방은 손님용인지 침대가 있었다. 하이드는 침대를 보고 입맛을 다셨지만, 하녀가 오기 전에 끝낼 자신은 없어서 아쉬운 대로 릴리에게 남자를 기쁘게 하는 법을 가르쳐 줄게요, 하고 말했다.

하이드는 침대 머리맡의 베개에 등을 기대고 편하게 앉아서 릴리를 보며 미소 지었다. 낮인데도 커튼이 반쯤 쳐져 있는 방은 어둑하니 은밀한 분위기를 풍겼다. 눈을 갸름하게 내려 뜨고 웃는 하이드의 얼굴엔 여유가 넘쳤다. 그녀는 어째서 그걸 바라보는 자신이 긴장되고 조바심 나는지알 수 없었다.

꿀꺽.

그녀는 침 삼키는 소리가 너무 크게 나서 민망했다.

그의 얼굴에 매혹된 듯 릴리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하이드는 그녀가 다가오자 팔을 잡아당겨 그의 벌어진 두 허벅다리 사이에 앉혔다. 침대에 쓰러진 릴리의 얼굴 앞에 툭 불거진 앞섶이 놓였다. 하이드는 릴리가 몸을 세우기도 전에 단추를 풀어 성기를 끄집어냈다.

저번에 한 번 본 적이 있었지만, 릴리가 보기에 그의 남성은 여전히, 애정을 담아보아도 망측하고 흉측하게 느껴졌다. 우아하고 세련된 미남인 하이드지만 성기만큼은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제 몸에 들어갔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굵직한 그것은 혈관이 우둘투둘 돋아나 흉흉해 보였다.

“그렇게 먹고 싶어요?”

“무, 무슨 소리예요!”

“그야, 아가씨가 제 좆을 먹고 싶다는 듯이 쳐다보기에 하는 말이죠.”

고 예쁜 입술로 먹어주면 좋고, 음탕한 아랫입으로 먹어주면 더 좋죠, 하이드는 덧붙이며 제 성기 기둥을 잡아 그녀의 뺨에 문질렀다.

릴리는 얼굴이 빨개져서 상체를 세웠지만, 그에게서 도망갈 수는 없었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뺨을 붉힌 채 저도 모르게 뚫어져라 남근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시선에 남근은 자꾸만 그 부피를 더했다.

“아가씨는 수업을 빼먹지 않는 성실한 제자 아니었나요? 이건 교육입니다, 릴리 아가씨. 연애를 잘하려면 남자를 기쁘게 하는 법을 배워야겠지요.”

“어, 어떻게요?”

하이드는 우물거리는 연분홍빛 입술을 가르고 좆을 쑤셔볼까 했지만 그녀가 두 눈을 반쯤 감은 흐린 눈으로 그의 성기를 보고 있는 모습에 참기로 했다. 자신은 참 릴리에게 무르게 굴었다. 그녀가 알아주면 좋겠는데, 그녀는 늘 그를 악독한 심술쟁이 보듯 봤다.

“손으로 감싸 쥐고 위아래로 움직이세요.”

하이드가 릴리의 손으로 제 성기를 감싸도록 하고 그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서 움직였다. 릴리는 뜨겁고 부드러우면서 단단한 감촉에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떻게 살덩이가 이렇게 딱딱할 수 있지? 메리가 가르쳐준 것을 이렇게 빨리 써먹게 될 줄이야. 릴리는 그녀의 설명을 떠올리며 자그마한 손으로 단단한 기둥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신기해요.”

“저는 이걸로 아가씨 밑구멍을 찌를 때, 아가씨가 위아래로 질질 싸는 게 더 신기해요.”

“선생님!”

릴리가 분해서 손을 꽉 쥐자 하이드가 윽, 낮게 신음했다. 릴리는 제가 아프게 했나 싶어 그의 얼굴을 살펴보았지만 아파 보이진 않았다. 미간을 찌푸린 얼굴이 미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릴리는 좀 더 적극적으로 손을 놀렸다. 그가 시키는 대로 위아래로 고환 바로 위 기둥부터 툭 도드라진 귀두까지 문지르듯 쓸었다. 그녀의 손길로 성기가 점점 커져 가는 것이 신기했다.

‘아가씨, 남자 거기가 젖어오면 미끈거리는 걸 이용해서 끝을…….’

“흐읏.”

릴리는 하이드의 선단이 젖어 드는 것을 보고 손바닥으로 뭉툭한 끝을 감싸고 비볐다. 하이드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릴리는 그녀에게 아래를 맡긴 채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그를 홀린 듯이 쳐다보았다. 관능에 몸을 내맡긴 사내는 지독하게 매력적이었다.

‘아, 선생님 얼굴 야해…….’

분명 만져지고 있는 것은 그인데도 릴리의 몸이 후끈하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의 절제된 숨소리가 미친 듯이 선정적이었다. 릴리는 이 상황을 즐기기 시작했다. 하이드의 남성을 쥐고 있자니, 그의 작은 일부만으로 그를 지배하는 기분이었다. 자신으로 인해 좌지우지되는 그를 보는 것이 너무나 짜릿했다. 하이드가 삽입하기 전에 그녀를 진득하게 괴롭히는 마음이 이해가 가는 것 같았다.

하이드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릴리는 적극적으로 그의 남근을 어루만졌다. 열심히 두 손으로 왕복 운동을 하는 손짓은 서툴기 짝이 없었지만, 하이드는 무척 흥분했다. 릴리의 하얗고 고운 손으로 자신의 검붉은 성기를 만지게 하는 것에서 오는 배덕감이 황홀했다.

게다가 어설프기는 했지만, 기둥만 문지르는 데 그치지 않고 끄트머리와 아래의 고환까지 슬쩍슬쩍 건드리는 게 예사롭지 않았다. 제 아가씨는 과연 남자를 유혹하는데 타고났단 말인가? 능숙한 여인들처럼 노골적으로 기술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애가 탈 정도로만 가볍게 건드려서 더 괴로웠다. 으윽, 하이드가 괴로운 숨을 내뱉었다.

“기분 좋아요, 선생님?”

“아가씨가 가슴을 보여주면 더 기분 좋을 것 같습니다.”

그의 짙어진 눈이 그녀의 파여있는 옷자락 사이를 핥듯이 쳐다봤다.

‘메리의 말대로, 남자들은 정말로 가슴을 좋아하는 것 같아.’

릴리는 하이드를 유혹하고 싶었다. 지금 이 기분이라면 그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릴리는 바짝 올려 묶여있던 머리의 리본을 풀어 긴 머리카락을 등에 늘어뜨렸다. 그리고 가슴팍을 여미고 있던 단추를 두어 개 끌러 아슬아슬하게 가슴골을 드러낸 상태로 그의 다리 사이에 더욱 바짝 당겨 앉았다.

릴리는 은근슬쩍 팔을 모아 가슴골을 부각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면서 속으로 나는 야하다. 나는 예쁘다, 하고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세뇌시키지 않는 한 민망해서 그를 볼 수가 없었다. 정말 효과가 있는지 하이드의 얼굴이 멍했다. 릴리는 용기가 샘솟았다.

하이드는 그야말로 넋을 잃고 릴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보다 더한 노출도 본 적 있었지만, 지금의 릴리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요염했다. 릴리의 얼굴만 봐도 사정감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존나게 꼴렸다. 나를 죽이고 싶은 걸까? 인내가 바닥날 것 같았다.

‘씨발, 그냥 지금 여기서 할까?’

하이드가 진지하게 고민하는 동안에도 릴리는 그를 애무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는 열이 올라 보기 좋게 발그레해진 뺨을 하고서 혀를 살짝 내밀어 아랫입술을 핥았다. 그 모습을 하이드가 탁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하이드가 그녀에게 팔을 뻗으려는 찰나, 릴리가 상체를 숙여 그의 얼굴에 가볍게 입 맞추었다. 그가 그랬듯이.

한 손으로는 여전히 성기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릴리의 입술이 뺨에서 목덜미로 내려가자 하이드가 깊은숨을 내뱉으며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당겨 거칠게 혀를 섞었다.

금세 전세가 역전되었다. 릴리는 몰아치는 입맞춤에 앓는 소리를 냈고, 하이드는 어느새 그녀를 눕힌 채 올라타고 있었다. 그녀의 얇은 드레스 위로 하이드의 딱딱한 성기가 문질러졌다. 하이드는 그녀를 한입에 잡아먹을 기세였다.

숨이 막히도록 열정적인 입맞춤이었다. 머리가 몽롱했다. 그녀의 눈이 욕망으로 흐려졌다. 하이드는 그녀가 흥분한 것을 알아채고 치맛자락을 배까지 걷어 올렸다. 얇은 속옷이 젖어서 투명하게 속살을 내비쳤다.

하이드는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릴리를 내려다보며 그녀의 속옷을 옆으로 젖히고 제 성기를 그녀의 은밀한 점막에 문질렀다. 릴리가 신음을 내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하앗, 응, 선생님.”

음부를 비비고 있는 흉흉한 성기가 금방이라도 그녀를 꿰뚫을 것 같았다. 그를 정복하려던 릴리의 야심한 계획이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예민한 속살을 적시는 강렬한 감각에 그저 몸을 맡기고 싶었지만, 그래서야 평소와 달라진 게 없지 않나.

“아, 안 돼요.”

릴리는 열기로 녹아내리던 이성을 붙잡고 겨우겨우 몸을 일으켰다. 잔뜩 흐트러진 채 가슴과 아랫도리를 내놓은 민망한 차림새였지만, 릴리는 아직까지 옷을 입고 있다는 점을 위안으로 삼았다. 릴리는 숨을 헐떡거리며 그녀의 애액과 쿠퍼액으로 미끈거리는 하이드의 남성을 다시 쥐고 문질렀다.

“제가 할 거예요. 선생님, 오늘은 남자를 기쁘게 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잖아요.”

릴리가 하이드의 어깨를 떠밀어 다시 눕혔다. 그녀의 힘은 가당찮을 만큼 미약했지만, 하이드는 그 깜찍한 짓거리에 놀라 그녀의 손길에 쉽게 쓰러졌다.

릴리는 잔뜩 흥분한 하이드를 눈치채고 그의 사정을 이끌기 위해 손을 빨리 움직였다. 사실 팔이 조금 아팠지만, 하이드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기운이 불끈 솟았다. 그녀의 손길이 빨라지자 하이드가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선생님, 제 손에 싸주세요.”

릴리가 조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얼굴도 그와 마찬가지로 흥분에 젖어있었다. 하이드는 그녀답지 않은 야한 말에 정통으로 당했다. 어이없을 정도의 자극에 하이드가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감자 굵직한 기둥이 부풀어 오르며 릴리의 손에 희뿌연 액체를 내뱉었다.

손바닥 아래로 핏줄의 꿀렁거림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가 사정을 하고 나서야 릴리는 제가 낯 뜨거운 짓에 모자라 낯 뜨거운 말을 했다는 자각에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그녀는 죽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워졌지만 내색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정액은 그녀의 손은 물론이고 하이드의 바지에도 조금 튀었다. 그녀는 헤헤, 해맑게 웃으며 손수건으로 그것을 닦아냈다. 릴리의 표정엔 뿌듯함이 가득했다. 사내의 정기를 홀랑 빼먹은 여자치고 지나치게 해맑은 얼굴이었다.

‘이렇게까지 귀여운 건 반칙 아닌가.’

“좋았어요? 헤헤”

“하……아가씨. 저를 이렇게 혼자 보내놓고 무사할 거라 생각해서 웃으시는 건가요?”

하이드는 아직도 발기가 풀리지 않은 성기를 꺼떡이며 어이없다는 듯 험악한 얼굴로 말했다. 그는 정말로 어이가 없었다. 아무것도 몰라 제 품에서 울먹이던 아가씨가 언제 저런 요물이 된 건지. 그는 그녀가 자신을 홀리기 위해 나타난 마녀가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순진무구하던 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말갛기만 했다. 그래서일까, 이 말간 눈망울이 열기로 흐려질 때의 괴리감이 그를 미치게 했다.

릴리는 다시금 커지기 시작하는 그의 아랫도리를 흘끗 보고서 벌떡 일어나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녀는 메리에게 밀당을 배우지 않았던가. 릴리는 배움을 착실히 실천하기 위해 그를 달궈놓고 내빼기로 했다. 치마의 주름을 편 릴리가 배시시 웃으며 하이드의 뺨에 가볍게 뽀뽀했다.

“선생님, 다음에 해요. 다음엔 선생님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그녀는 그럼 먼저 방에 가 있을게요, 하고 말끔하고 상큼한 얼굴로 방을 나섰다. 하이드를 방에 내버려 두고 떠나는 발걸음이 유독 가벼워 보였다. 릴리는 제가 그를 유혹하는 데 성공한 것 같아 뿌듯한 마음으로 그림 그릴 준비를 했다.

하이드는 혼자 남겨져서 이를 갈았다. 그래, 도망간다 이거지?

그는 앙큼한 제자의 도발에 완전히 넘어갔다.

* * *

릴리는 먼저 방으로 돌아가서 번진 입술을 닦고 아무 일도 없던 양 하이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따라 텅 빈 캔버스가 사랑스러웠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 준비해둔 꽃도 마음에 들었다.

하이드는 릴리의 앙큼하고 괘씸한 작태를 어떻게 혼내줄까 고민하며, 말끔해진 모습으로 방에 들어왔다. 릴리는 붓을 이리저리 돌리며 구도를 잡고 있었다. 하이드는 그 태연한 모습이 얄미워 일부러 발소리를 크게 내며 들어왔다. 하녀가 지켜보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뺨을 꼬집고 흔들었으리라.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릴리가 활짝 웃었다. 창으로 해가 들어와 활짝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반달처럼 휘어진 눈 위에 속눈썹이 길게 드리우고 부드러운 꿀빛 눈동자가 햇빛 아래 투명하게 반짝였다.

그녀의 장난스러운 미소에 하이드는 일순 숨이 멎었다.

흐드러지게 핀 작약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이드는 속이 울렁거리는 이상한 기분에 왼손으로 입가를 쓸었다. 릴리를 보면 해주려던 말이 새하얗게 증발해버렸다. 호전적이었던 기분이 착 가라앉아서 하이드는 멍하니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릴리는 생각보다 얌전한 그의 태도에 의아하던 것도 잠시, 앞에 놓인 꽃에 대해 종알거리며 그림을 그리는 것도 생각보다 즐겁다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이드는 창가에 앉아 재잘대는 릴리의 옆모습을 보며 그녀가 하는 말들을 흘려들었다.

그에게는 이 순간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광경이 굉장히 비현실적이었다. 따사롭고 찬란한 햇볕, 빛에 반짝이는 사랑스러운 여인, 나를 보며 웃는 미소, 생기 있는 연분홍빛 볼, 두 눈에 가득 담긴 애정.

하이드는 그 따위 것들이 자신을 향하는 것이 이상하고 낯설었다.

“선생님?”

릴리가 하이드의 대답이 들리지 않는 것에 의아해하며 그를 부르고 나서야 하이드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곤 평소처럼 여상하게 대답했다. 짧은 순간이었고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도 황자님의 생신 연회에 참석하시겠죠?”

“애석하게도, 저는 그날 지방에 내려갈 예정입니다.”

“지방이요? 무슨 일로 가시는 거예요?”

릴리는 그가 연회에 오지 않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녀는 실망스러운 내색을 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녀는 감정을 숨기는 데에는 영 재능이 없었다. 그에게 되묻는 목소리가 축 쳐져 있었다.

“재미없는 업무 때문이지요. 저는 아가씨를 지루하게 만들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재미없지 않아요. 궁금해요. 저는 선생님 얘기가 듣고 싶어요.”

“아가씨께선 수업을 중시하는 분 아니었나요?”

“눈으로는 꽃을 보고, 손으로는 붓질을 하고, 귀로는 선생님께 귀 기울일게요. 저는 선생님의 생각보다 유능해요.”

하이드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쳐다보았지만, 릴리는 집요했다. 그녀는 그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도 없었다. 하이드는 전혀 대답할 생각이 없다는 듯 수업 중임을 강조하였지만, 릴리는 평소처럼 그를 배려하여 호기심을 덮어두고 싶지 않았다.

“흔한 영지 관리 일입니다.”

“선생님의 영지는 어디쯤 있나요?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음, 얀델 근처에 있습니다. 아, 여기 원근감을 살리셔야지요.”

“여기요?”

“네. 그런데 연회에는 누구랑 가기로 하셨나요?”

“감사하게도 오라버니께서 절 에스코트 해주시기로 하셨어요.”

“그렇습니까? 그것참…….”

하이드는 능숙하게 화제를 전환하며 자신에게 쏠린 관심을 무도회로 돌렸다. 사실 지방으로 갈 일 따위는 없었다. 황자의 생일 연회가 열리는 날, 그는 수도에 있을 예정이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궁금증이 많은 것은 이해가 갔지만, 그렇다고 그 호기심을 채워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남들에게 하는 것처럼 그럴듯하고 체계적인 거짓말로 그녀를 납득시키기보단, 차라리 거짓도 진실도 주지 않는 것을 선택하고 싶었다.

‘흐으음, 약혼자 대신 오라비라.’

말을 돌리려는 목적이긴 했지만, 르시엔 개자식이 그녀를 에스코트하는 게 아니라는 것은 진심으로 다행이었다. 릴리가 그 개자식에게 팔을 얹고 붙어 다닐 것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으니까. 그렇다고 틸리안이 그녀를 에스코트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도 않았다.

‘틸리안, 재수 없는 놈…….’

이놈이나 저놈이나 하이드에게 열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릴리와 한집에 사는 것도 모자라서 손쉽게 파트너 자리를 차지한 그를, 곱게 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자신은 무도회에서 그녀와 당당하게 춤을 신청하지도 못하는 처지기에 더욱더.

게다가 걱정인 것은 어쨌거나 르시엔 그 자식도 연회에 참가할 것이기 때문에 릴리와 만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후…….’

하이드는 아직 수도에 정체를 드러낼 수 없었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가능했겠지만.

릴리의 피아노 수업이 끝났을 무렵, 그의 작업도 마무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초기 목표는 불량 총기 폭발 사고의 전말을 캐내어 바르딘 자작가와 소넬 백작가의 치솟는 위세를 저지하고 제2황자의 공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이드는 이제 그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더 큰 증거를 잡아야 했다.

초기 계획대로였다면 그는 지금쯤 사건을 마무리하고 수도 정계에 진출하여 황자의 측근으로 사교계에 진입해있었겠지만, 목표가 바뀌었기 때문에 아직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당분간은 지금처럼 신분을 속이고 있어야 했다.

그로서도 황실 연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더러운 일을 맡는 윗분의 개로써 당당하게 나설 수 없음은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가끔은 그 점이 엿 같았다.

이 바보 같은 여자가 뭐라고.

“말도 안 되는 건 알지만, 저는 선생님의 팔을 잡고 황실에 들어가는 상상을 했어요. 잠깐이지만요. 아마 고향을 떠난 이후로 늘 선생님께 의지했기 때문인가 봐요. 이곳의 사람들을 만나는 건 처음이니까, 저도 모르게 불안해서…….”

“그러셨습니까.”

“선생님이 제게 춤도 가르쳐주셨다면 좋았을 텐데, 이런 생각도 했어요. 어쩐지 선생님과는 같이 춤을 출 일이 없을 것 같거든요.”

“릴리 아가씨께서 그렇게 섭섭하게 말씀하신다면, 지금 바로 바르딘 자작님을 뵙고 제 춤 실력을 인정받고 오겠습니다. 제가 춤 선생에도 소질이 있을 것 같군요.”

릴리의 굳어있던 얼굴이 하이드의 능글맞은 답변에 살짝 풀렸다. 그녀가 그와 춤을 추는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 어렴풋했던 예감이 정확히 적중하는 것에 릴리는 씁쓸함을 느꼈다. 애써 누르려고 했던 기대감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계속 아쉬워하면 선생님이 곤란하시겠지.

무도회장에서는 선생과 제자 관계를 벗어나 어엿한 성인 남녀로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미혼 남녀가 당당히 볼 수 있는 곳은 한정적이었다. 하이드와 밖에서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지만, 부풀었던 마음에 실망으로 가득 찼다.

하이드는 빈말이라도 다음에 무도회에 같이 가자. 그때 그녀의 파트너가 되고 싶다, 하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다정했지만, 결코 그녀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는 않았다. 그의 차갑고 견고한 벽에 부딪힐 때면, 릴리는 사랑을 앓고 있는 것은 오로지 그녀뿐임을 절절하게 통감했다. 두고 보라지. 릴리는 쓰린 속을 달래며 하이드의 마음을 뺏고야 말겠다고 의지를 불태웠다.

“선생님, 얄미워요.”

“제가 말입니까? 아가씨를 위해 기꺼이 춤 선생도 되겠다는 저 말씀이십니까?”

네. 정말 정말로 미워요, 선생님.

저는 선생님이 절 좋아하게 만들기 위해서, 유혹하기 위해서 밤새도록 책도 읽고 공부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선생님은 다정한 척은 잔뜩 하면서도 제 마음을 받아주진 않으시잖아요.

릴리는 속마음을 삼키며 그에게 새침하게 눈을 흘기고 캔버스에 붓질하는 데집중했다.

“그렇게 새침하게 눈을 흘기시면, 아까 아가씨께서 예뻐해 주셨던 그 친구가 아가씨를 또 뵙고 싶어 한다고 전해달랍니다.”

릴리는 한 박자 늦게 그의 말을 이해하고는 메리의 눈을 피해 그의 허벅지를 찰싹 때렸다. 하이드는 씩 웃으며 그를 때린 손을 붙잡고 그대로 허벅지에 붙여 안쪽으로 끌고 갔다. 그녀의 손바닥 아래의 묵직함이 그가 방금 한 말을 증명해주었다. 릴리는 당황으로 눈이 떨리고 있었지만 하이드는 태연하게 눈웃음을 쳤다. 릴리는 이 잘생긴 낯짝을 찰싹찰싹 때려주고 싶었다.

메리가 그들과 같은 방 안에 있음에도 하이드는 긴장하는 법이 없었다. 물론 커다란 이젤이 그들의 앞을 가리고 있었지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못 알아챌 거리는 아니었다. 다행스럽게도 메리는 감시자라는 의무에 소홀한 편이었고, 그녀는 지금 고개를 꾸벅이며 졸고 있었다.

“저도 이 친구도 아가씨를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릴리 아가씨께서 몰라주시니 서운하네요. 계속 그렇게 몰라주시면, 알게 해주는 수가 있습니다.”

“저는 하나도 안 궁금해요!”

릴리는 그의 손아귀에서 손을 빼내며 재빨리 붓을 잡았다. 물감을 잔뜩 묻힌 붓을 그를 향해 들고 졸고 있는 메리와 그를 번갈아 쳐다보며 경고하듯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메리한테 들키면, 정말 큰일 날 줄 아세요!’

물론 릴리의 하찮은 경고에 하이드는 전혀 겁먹지 않았다.

그녀는 겁주는 모습도 같잖게 깜찍했다. 자신이 그러면 무서울 거라고 생각하는 게 더 귀여웠다. 하이드가 보기에 릴리는 완벽한 초식동물이었다. 그것도 아주 작고 털이 뽀송한 종류의. 가련한 자태도 자태지만, 성격이 너무 유순했다. 놀라울 정도로 물러터진 데다 사람을 잘 믿어서 딱 사기 치기 좋은 타입이었다.

‘귀엽긴 한데……, 가끔 속 터진단 말이지.’

하이드는 곧 다가올 연회가 걱정이었다. 그녀처럼 가엾고 유약한 초식동물을 산채로 물어뜯기 좋아하는 맹수들이, 수도에는 즐비했으니까. 불안해서 내버려 둘 수가 있나.

게다가 이번 황실 연회에는 그녀를 중심으로 맹수들의 잔치가 일어날 예정이었다. 그들이 그녀를 향해 입맛을 다시는 소리가 벌써부터 들리는 것 같았다.

* * *

연회는 금방 다가왔다. 릴리는 그녀의 저택에서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로 친절한 디자이너를 맞이했다. 야심 찬 자신작이라며 들고 온 의상은 최고급 의상실의 수석 디자이너라는 명성에 걸맞게 아름다웠다. 릴리는 조금 아연해졌다.

황실의 연회라지만, 릴리는 이런 화려한 드레스는 그녀의 결혼식장에서도 입을 거라 상상하지 못했었으니까.

“릴리 아가씨는 워낙 피부가 뽀얗고 깨끗해서 어떤 색으로 할지 정말 고민이 많았습니다. 연분홍색으로 릴리 아가씨 특유의 사랑스러운 소녀 분위기를 살려, 한 떨기 꽃송이처럼 디자인할까 하다가도, 자칫 무게감이 없어 보일 수 있을 것 같아서 아가씨의 꿀 같은 연한 금빛의 눈동자와 머리칼의 색깔에 맞춰서 옷을 만들어봤습니다.”

수석 디자이너는 말하는 내내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 현란한 움직임이 릴리의 정신을 쏙 빼놓았다.

레몬빛과 황금빛이 적절하게 섞인 금빛의 드레스는 윗가슴 중간부터는 작은 보석들이 빼곡히 수놓아져 빛을 반사했고, 어깨와 팔, 쇄골은 피부가 비치는 투명하고 얇은 천으로 감싸여 은은하고 청순했다.

전체적으로 하얀색 바탕에 금색으로 빛나는 보석들로 황금빛을 표현하여 과하지도 천박하게 화려지도 않았다.

“정말로 예뻐요. 감사해요. 제가 입어도 될까 싶을 정도로, 너무 예쁜걸요?”

“아가씨가 아니면 입을 수 없는 옷이지요. 정말 오래간만에 즐거운 마음으로 작업했어요. 오히려 제가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아가씨는 탁월한 뮤즈세요.”

디자이너는 그녀를 떠올리며 구상한 드레스가 이미 세 벌이나 된다며, 다음 의상도 얼른 만들어서 그녀에게 입히고 싶다며 신이 나서 떠들었다.

그녀는 릴리에게 아주 만족했다. 그녀가 입은 모습을 상상하며 만든 옷이지만, 실제로 그녀가 입은 모습은 더 끝내줬다. 아, 디자이너가 되길 잘했어.

“장신구에 대해서도 제게 맡겨주시면 좋겠습니다. 틸리안 님께 말씀드려 허락을 받았어요. 제가 만든 의상과 릴리 아가씨께 완벽하게 어울리는 것으로 구해오겠습니다. 정말, 너무 기뻐요. 릴리 아가씨, 제가 만들었지만, 참 잘 만든 옷이에요. 그렇지 않나요?”

그녀는 제 작품에 취한 듯, 고객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 스스럼없어진 것조차 자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릴리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그저 좋아 보여 디자이너를 칭찬해주었다.

“이렇게 예쁜 옷을 입고 무도회에 가다니, 저는 운이 좋아요. 적어도 촌스럽다는 말은 듣지 않을 것 같아서 안심이에요.”

“릴리 아가씨! 어떻게 그런 말씀을! 그건 저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 말씀이에요. 아가씨는 연회장의 샹들리에보다 빛나실 거라고요!”

디자이너는 진심으로 충격을 받은 것처럼 새된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녀에게 자신의 옷을 입은 고객이 촌스러움을 겨우 벗어난 수준이라는 말은 모욕에 가까웠다. 이 아가씨는 수도에 지나친 환상을 품고 있었다.

이 아가씨는 아무래도 수도에는 그녀를 뛰어넘는 경국지색 절세가인들만이 산다고 믿는 걸까?

인구가 많으니 상대적으로 미인도 많겠지만, 그만큼 평범한 사람도 많았다. 수도의 귀족이라고 해서 특별히 곱거나 세련된 외모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유행에는 민감하고 세련된 안목을 가질 수는 있더라도 어디 미인이 지방과 도심을 가려 태어나던가? 미인은 고귀한 귀족의 혈통 속에서만 나던가?

그렇지 않았다. 수도의 귀족도 평범한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귀족은 험한 일을 하지 않고 양산을 써 햇빛을 피해 평민들보다 고울 수는 있었다. 그러나 타고나기를 검은 사람, 얼굴빛이 누런 사람, 혈색이 붉은 사람이 있지 않나.

릴리 같은 미녀는 수도에서도 결코 흔하지 않았다. 대체 누가 그녀에게 수도에 환상을 심어주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디자이너는 완벽하게 포장된 상업적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한숨지었다. 귀한 고객님께서 얼른 제 미모를 깨닫길 바랐다.

* * *

“……옷이 잘 어울리는구나.”

예쁘다.

이 간단한 말 한마디가 입 안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 어려운 말이 아님에도, 흔한 인사치레에 불과함에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틸리안은 무뚝뚝한 사람이었지만, 잘 차려입은 숙녀에게 아름답다는 칭송의 말도 건네지 못하는 숙맥은 아니었다. 마음에 없는 빈말도 곧잘 할 수 있을 정도로 나이도 먹었다. 틸리안은 예쁘다는 칭찬 한마디가 어려워 고작 옷이 잘 어울린다, 라고 말한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럼에도 릴리는 웃는 얼굴로 감사해요. 옷이 너무 화려해서, 잘 어울리지 않을까 봐 걱정했거든요. 하고 말했다. 틸리안이 보기에는 지나친 겸손이었다. 릴리 또래 아가씨들은 보통 당연하다는 듯이 칭찬을 받아내곤 했으니까.

“릴리.”

“네?”

“그……. 흠, 잘 어울리는 정도가 아니라……. 무척, 예쁘다.”

틸리안이 한참이나 뜸을 들이다가 겨우 내뱉은 칭찬이었다. 틸리안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게졌다. 그가 귀와 목덜미까지 붉힌 모습에, 덩달아 민망해진 릴리도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마차 안이 숨 막힐 정도로 어색해졌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말없이 조용히 황궁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두 사람은 황궁에 도착한 것은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아름다운 저녁 무렵이었다.

“바르딘 자작 가의 틸리안 바르딘, 릴리 바르딘 님이 입장하십니다!”

황실의 연회라 그런지 사람이 정말로 많았다. 릴리가 살던 마을은 귀족이 많지 않았다. 그녀는 오늘 하루 동안 평생 보아온 귀족보다 더 많은 귀족을 본 것 같았다. 황궁은 어마어마하게 컸다. 둘러보는데 일주일은 걸릴 것 같았다.

마차를 타고 한참을 들어왔는데, 연회장까지 들어가기 위해 황궁 건물 내에서도 한참을 걸었다. 다른 사람들은 익숙한 듯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가는데, 릴리는 황궁의 화려함에 눈이 휘둥그레져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틸리안이 그런 그녀를 보고 귀엽다는 듯 작게 웃었다. 릴리는 부끄러워져서 앞만 보고 걸었다. 최대한 태연하게, 이런 화려함 따위는 익숙하다는 듯 굴어야 했다. 촌티가 이런 데서 나는 것 같아 민망했다.

“이런 연회는 그다지 즐기지 않는 것이냐?”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저는 이 정도로 큰 연회에 온 게 처음인걸요. 그래서 미진한 티가 날까 걱정이 돼요.”

“걱정할 것 없다. 내가 옆에 있지 않느냐. 너는 그저 즐기다 가려무나. 네 또래 숙녀들은 다 연회를 좋아하니, 너도 좋아하게 될 것이다.”

틸리안은 제법 오라비다운 소리를 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릴리는 조금 긴장했지만, 휘황찬란한 광경에 마음이 들떴다.

‘이곳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게 될까? 앞으로 계속 수도에 살게 될 텐데, 곧 좋은 사람들을 만나겠지?’

고향을 떠난 뒤로 마땅히 교류할 사람이 없어서 릴리는 늘 혼자 시간을 보내다시피 하였다. 릴리는 고향의 친구들이 그리웠다. 시답잖은 얘기로 웃고 떠들고 싶었다. 오늘 그녀의 목표는 다른 영애들과 최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공감대가 비슷한 친구를 사귀는 것이었다.

연회장으로 들어서니 이미 많은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부채로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트리는 여인들, 나란히 서서 그런 여인들을 힐끔거리는 사내들, 따분한 이야기를 나누며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특이하게도 시종들은 전부 가면을 쓰고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황궁의 연회는 여러모로 비범하구나.

틸리안이 쟁반을 들고 지나다니는 시종에게서 자연스럽게 샴페인 잔을 받아 릴리에게 건넸다. 황궁의 샴페인이라서 확실히 격이 다른 것이 느껴졌다. 입 안을 상쾌하게 채우는 탄산과 단맛에 기분이 좋아졌다.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바르딘 자작가는 그다지 명망 있는 가문이 아니었지만, 틸리안은 황실 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이었다. 이례적인 고속승진에 그에게 눈도장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와 같은 기사단 소속들도 있었고, 결혼 적령기의 전도유망한 사내를 노리는 아가씨들도 있었다.

틸리안은 사람들에게 일일이 그녀를 자신의 동생이라고 소개하고 인사시켜주었다. 사람들은 외동이던 그에게 난데없이 여동생이 생긴 것에 놀란 듯하다가 이내 능숙하게 미소 지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릴리는 낯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당황했지만, 틸리안이 그녀의 옆에서 잘 챙겨주었기에 이내 안심하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틸리안을 보고 다가왔던 신사들은 릴리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져 자기네들끼리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틸리안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그에게 이런 미인을 동생으로 두고도 소개 한 번 안 시켜주었다고 핀잔을 하기도 하고, 틸리안의 친구라며 넉살 좋게 릴리의 손등에 입 맞추기도 했다. 틸리안의 미간이 점점 더 좁아졌다.

신사들은 릴리를 소개받고 그녀의 아름다움에 대해 낯뜨거운 칭송을 늘어놓았다. 처음 뵈었지만, 단숨에 제 마음을 사로잡은 미인이다, 그녀의 금빛 머리칼과 눈동자가 태양처럼 눈부시게 빛난다, 틸리안이 여신의 손을 잡고 나온 줄 알았다, 등등 노골적인 찬양은 릴리의 뺨을 붉히기에는 충분했다.

신사들은 순진하게 뺨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의 릴리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몸도 마음도 동하게 하는 여자였다. 진작 바르딘 가와 친분을 쌓아둘걸, 후회하는 사내들도 있었다.

“릴리! 존함도 그대처럼 아름답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대를 보고 나니 그간 아름답다고 여겼던 모든 것들에 배신감이 느껴집니다! 그것들은 하잘것없었어요.”

“맞습니다. 꽃도 릴리 아가씨를 보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일 것입니다.”

“릴리 아가씨, 이따 그대와 함께 춤을 추는 영광을 하사해주시겠습니까?”

틸리안은 은근슬쩍 그녀에게 수작질하는 이, 그녀가 부끄러워하며 당황하는 모습이 귀여워 부러 더 과하게 칭찬하는 이들의 작태에 짜증이 치솟았다. 릴리가 당황하는 모습에 그들을 내치고 싶었지만, 그도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있는지라 그조차 마땅찮았다.

“어머. 틸리안 경, 표정이 너무 딱딱해요.”

“저분들이 경의 동생을 잡아먹을 일은 없을 테니까 안심하고 이쪽에 집중하시지 않겠어요?”

“흐응, 저렇게 어여쁜 동생분이 있으셔서 그렇게 눈이 높으셨던 걸까나?”

틸리안을 둘러싼 그녀들은 그의 팔뚝을 끌어당기면서 릴리만 쳐다보고 있는 그의 집중을 돌리려 애를 썼다. 릴리는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견디다 못해 틸리안을 애처롭게 쳐다보았다. 릴리의 치친 표정에 그가 싸늘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정중하게 릴리를 데리고 자리를 피했다.

“릴리는 남자들에게 익숙하지 않아서 당황스러울 걸세. 잠시 쉬어야 할 것 같군.”

딱딱한 그의 태도에 지인들은 핀잔을 했지만, 뭇 여성들은 세심하게 여동생을 보살피는 모습에 감탄하며 틸리안에게 후한 점수를 매기기도 했다. 그의 팔뚝을 잡았던 아가씨들은 다른 영애들에게 귓속말로 그의 몸이 참 탄탄하다고 얘기하며 숨죽여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틸리안은 자신이 릴리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들을 능글맞게 내뱉으며 릴리의 뺨을 상기시키는 자식들이 아니꼬웠다. 제가 소개해 주고도 후회가 되었다.

릴리는 수도의 신사들이란 모두 기본 교양으로 칭찬하는 법이라도 배우는 것인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어떻게 저런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을까. 릴리는 저 사람들이 자신을 놀리는 것인지 칭찬하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두 사람은 겨우 사람이 없는 한갓진 곳을 찾아냈다.

“오라버니의 지인분들이라서 그런지 제게 과할 정도로 친절하시네요.”

“과하지 않아. 마땅한 말이지.”

기운이 빠진 릴리가 민망하게 웃으며 하는 말에 틸리안이 진지하게 대꾸했다.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말이라 아까보다 더 민망한 말이었음에도 그는 의식하지 못한 듯했다. 릴리만이 고개를 숙여 빨개진 얼굴을 가렸다.

틸리안은 진심이었다. 릴리는 황녀처럼 떠받들어짐이 마땅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온갖 사내들이 그녀를 칭송하며 껄떡대는 꼴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늑대들 틈바구니에 갓난아기를 데려다 놓은 것처럼 마음이 불안했다. 릴리는 상냥해서 그들이 치근덕대더라도 매섭게 쳐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몸도 약한 애가 무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됐다. 지금도 그녀의 얼굴은 벌겋게 열이 올라있지 않나.

“릴리? 열이 나는 것 같은데……, 혹시 어디 아픈 것 아니냐.”

“아, 아녜요. 이건 그냥…….”

‘오라버니가 너무 낯부끄러운 말을 하시니까…….’

틸리안이 그녀의 이마에 손을 올려놓고 열을 재다 감이 안 오는지 고개를 숙여 이마를 맞댔다.

갑자기 그가 다가오자 놀란 릴리가 눈을 들자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앗, 저…….”

“난, 열이 나는 거 같아서…….”

“전 정말 괜찮아요. 정말로요.”

“그래, 흠, 열은 없는 것 같구나.”

가까이서 눈이 마주치자 두 사람 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당황해서 얼굴이 빨개졌다. 틸리안은 그녀의 당황한 얼굴을 보고 나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열 오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릴리는 그에게서 몸을 돌려 손등으로 제 뺨을 식히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차에서처럼 어색해진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겨우 대화를 이어나갔다.

“오라버니, 제가 오라버니께 폐를 끼친 건 아닐까요?”

“폐라니, 무슨 소리냐.”

“기껏 오라버니께서 사람들을 소개시켜 주셨는데, 제가 다 망친 것 같아서…….”

릴리는 겉보기엔 가장 번화하고 가장 값비싼 동네에서 나고 자랐다고 생각될 만큼 도회적이고 우아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그녀는 불과 얼마 전까지 이웃이 많지 않은 시골에서 살았던 사람이었다. 이웃 사정을 자기 집처럼 잘 알고 두 다리 건너 모르는 이가 없는 마을에서 살다가 이처럼 낯선 사람이 많은 곳에 오니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정도로 규모가 큰 연회도 난생처음이었다. 아까는 쉴 새 없이 말을 걸어오는 통에 당황해서, 그녀는 자신이 뭐라고 대답했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그 사람들이 다가오니 적당히 인사를 나눈 것뿐이야. 그리고 내가 보기에 사람들은 나보다 너를 보러 온 것 같더군.”

“무슨 소리세요. 영애들이 오라버니께 눈을 못 떼던걸요? 역시 인기 많으신 거 맞네요.”

“그 사람들은 그저 심심하던 차에 날 발견한 것뿐이다. 나는 그런 것보다 릴리, 네가…….”

“네? 제가요?”

“……네가 다른 영애들과 잘 지내면 좋겠구나.”

“저도 그러고 싶어요.”

릴리의 아무 의심 없는 미소에 틸리안은 또다시 가슴에 통증이 번지는 것을 느꼈다. 애초에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기껏 연회에 참가해서 숨어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릴리는 자신을 걱정하는 틸리안을 안심시키고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는 부인들에게 다가갔다.

보이는 사람들은 죄다 공작새처럼 화려했다. 자신도 만만찮게 화려하게 꾸미긴 했지만, 그녀는 수도의 최신유행에는 둔감했으니 스스로가 괜찮아 보이는지 확신이 없었다. 릴리는 마지막으로 창가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부인들에게 웃으며 다가갔다. 틸리안이 부인들만 있는 모습에 표정을 풀고 그녀를 소개시켜 주었다.

“오랜만입니다, 소브 백작부인. 이쪽은 제 여동생 릴리 바르딘입니다.”

“오랜만이에요, 틸리안. 못 보던 아가씨네요? 반가워요.”

“안녕하세요, 부인. 릴리 바르딘이에요.”

틸리안은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어서 그녀들과 교류가 없다시피 했지만, 일단 서로 알기는 했다.

“어쩜, 바르딘 백작님은 어디서 이런 천사 같은 아가씨를 데려오신 거람? 아가씨의 마음씨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생긴 건 영락없는 천사로군요! 그 얼굴로 달콤하게 웃어주면 영식들이 죄다 아가씨에게 영혼을 바치겠어요.”

“영혼을 바치게 하면 더 이상 천사가 아니죠. 부인.”

틸리안이 릴리에게 소브 백작 부인을 소개하던 중 화려한 깃털 부채를 들고 있는 여인들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저희에게도 이 아가씨를 소개해주시겠어요? 멀리서부터 보았는데도 아주 눈에 띄는 아가씨더군요.”

대화는 순조로웠다. 틸리안은 여인들과의 대화에 능숙하지는 못했지만, 릴리는 어려서부터 늘 주위 어른들의 사랑을 받는 얌전한 아이여서 부인들과의 대화에 썩 잘 참여했다. 꽤나 단란한 모양새였다. 여인들은 바르딘 자작이 수양딸에게 생각보다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릴리는 그 정도로 아낌없는 차림새를 갖추고 있었다.

지루한 사교 모임에 새 인물이 들어온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하기엔 충분했다. 게다가 겉보기엔 흠잡을 데 없이 예쁘고 상냥한 아가씨였다. 보는 사람의 마음을 흐뭇하게 만드는 그녀 특유의 분위기에 부인들은 그녀에게 잘해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모양이었다.

게다가 사람들은 이제 와서 다 큰 아가씨를 수양딸로 들여온 바르딘 자작의 의도도 궁금했다. 그자가 외로워서 딸을 들일 리는 없었고, 유용한 카드로 삼을 셈인가 본데, 이 깜찍한 어린애를 어따 써먹을꼬?

사람들은 호감과 호기심을 숨기지 않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고상하게 웃는 원숙한 여인들에게 수줍은 소녀 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릴리는 챙겨주고 싶은 맛이 있었다. 이들은 그녀의 출신이나, 가족 관계 등을 물으면서 그녀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다.

틸리안은 릴리가 생각보다 잘 적응하고 즐거워 보이는 것 같아 안심했다. 그러나 그는 대화에 잘 끼어들지 못하고 겉돌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멀리서 기사단장, 알케인이 그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틸리안 경, 꽃밭에 있으니 향기에 취해 영 정신이 없어 보이는군.”

“단장님.”

“어머, 알카인 경. 꽃밭이라니요. 다른 데 가서도 그런 소리하는 건 아니죠?”

“그래요. 알카인 경. 여자를 꽃에 비유하다니, 그런 진부한 소리를 하는 남자는 예쁨 받지 못한답니다.”

“게다가 틸리안 경은 저희는 안중에도 없고 이 귀여운 아가씨만 보고 있는 거 있죠? 그렇죠, 릴리 양?”

“그렇지 않습니다…….”

알케인은 줄줄이 타박하는 소리에 머쓱하게 웃었다. 졸지에 여동생 바보가 된 틸리안이 릴리 대신 대답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 여기 사랑스러운 분이 바로 릴리 양입니까? 틸리안이 그렇게 아낀다는? 만나서 반갑습니다, 릴리 양. 저는 틸리안 경과 같은 황실 기사단장, 알케인 피르케입니다.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

“반가워요, 알케인 경. 그런데 저를 알고 계셨나요?”

“그럼요. 틸리안 경이 릴리 양 이야기를 얼마나, 윽.”

틸리안이 해맑게 웃으며 말하는 알케인의 발등을 꾹 밟았다. 틸리안은 릴리의 호기심 어린 얼굴과 가벼운 입을 가진 상사를 보고 한숨을 쉬고는 양해를 구하며 자리를 벗어났다. 알케인은 틸리안에게 붙잡혀가며 계속 릴리를 흘끔거렸지만, 그도 부인들이 모여 있는 자리는 버거웠기에 군말 없이 틸리안을 따라갔다.

“다음에 우리 저택에 찾아와 주지 않겠어요?”

“너무 좋아요. 기쁜 마음으로 갈게요.”

릴리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멀리서 르시엔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사람들은 그가 릴리를 부르는 것을 보고 흠칫하고서 그녀에게 르시엔을 아느냐 묻고는 약혼자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자리를 비켜주어야겠네요, 하고는 슬금슬금 흩어졌다.

“릴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그대만이 빛을 발하는군요.”

“르시엔 경, 잘 지내셨나요?”

“당신이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서 하는 일에 집중도 안 되고, 잠도못 잤습니다.”

“저런…….”

릴리는 사과를 해야 할지, 안타깝다고 해야 할지 고민했다. 따지자면 그의 불면이 자신의 탓은 아니었지만, 아예 아닌……, 걸까? 르시엔은 그녀의 대답을 고갈시키는 재주가 있었다.

르시엔은 릴리가 변변찮은 대답을 하더라도 상관이 없는 듯 그녀의 답변과 상관없이 유창하게

대화를 이끌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정말 아름다워요, 릴리. 당신이 나의 피앙세라는 게 너무도 자랑스럽습니다.”

그는 정말로 그녀를 자랑하고 싶다는 듯, 그녀를 데리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인사를 나눴다. 신사들은 르시엔이 새로운 여자를 옆에 끼고 다니는 것을 보고 흥미를 가지더니, 그의 약혼녀라는 말에 탄식했다.

그와 친한 이들은 예의상인지 진심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미인을 차지하다니 불공평하다며 르시엔을 부러운 눈길로 보곤 했다. 릴리는 어째서인지 자신이 그를 장식하는 화려한 꽃장식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에게 다가오는 것은 남자들만이 아니었다. 수군대던 젊은 아가씨들의 무리가 그들을 쳐다보다 그중 한 명이 용기를 내어 다가왔다.

“오랜만에 뵙네요, 르시엔.”

“오랜만인가요? 조안나, 저는 당신을 만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한 달 만이에요. 오랜만이죠.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나던 때를 생각하면.”

“하하, 요즘 조금 바빴답니다.”

르시엔은 사실 조안나의 이름도 가까스로 떠올린 참이었다. 조안나를 매일같이 만나던 때가 있었나? 하긴, 그는 얼마 전까지 매일 수십 명의 여자들을 만났었다. 그가 사고를 치기 전까지는 사교계의 총아로 이름 날리며, 여인네들의 사랑을 독차지하지 않았던가.

어떤 모임에 가더라도 여성들이 그를 둘러싸곤 했으니 따로 만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수많은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 조안나는 그들 중 하나로, 릴리 앞에서도 딱히 켕길 게 없는 사이다, 라고 르시엔은 생각했다.

“르시엔, 옆에 있는 아가씨를 소개해주셔야지요. 대체 어떤 여인이 용감하게도 당신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가요?”

“제 약혼녀 릴리 바르딘입니다. 릴리, 이쪽은 조안나야.”

“안녕하세요? 바르딘 자작가의 릴리 바르딘입니다. 반가워요.”

르시엔의 입에서 나오는 약혼녀 소리에 조안나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르시엔은 그녀의 성도 모르고 어느 모임에서 만났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아 달랑 조안나라고 소개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조안나에게 귀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조안나는 분개했다.

약혼녀? 그 일이 얼마나 지났다고 약혼녀가 생겨?

르시엔은 그녀의 험악한 표정에서 생각이 읽히는 것 같았다. 릴리는 아무런 사정도 모르고 조안나의 험악한 눈초리를 받아내야 했다.

자신이 그의 약혼녀인 게 마음에 안 드나? 그와 어울리지 않아서 화가 난 것일까? 분수도 모르는 시골뜨기라고 생각하는 걸까?

오만가지 걱정이 릴리의 머릿속을 채웠다. 그토록 분명한 적의였다. 마땅한 이유를 찾을 수 없어 더 당황스러웠다. 르시엔을 쳐다봤지만, 르시엔은 조금 난감하다는 얼굴로 릴리를 이끌고 자리를 피했다.

르시엔으로서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조안나가 엘레나와 친했었던가?

그렇진 않았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대체 왜 저렇게 분노한단 말인가? 막말로 자기와 잔 적도 없으면서.

“저, 르시엔 경. 조안나라는 분께서는 저를 보고 나신 후에 기분이 무척 상한 듯 보였어요. 제 기분 탓일까요?”

“그럼요. 봄바람같이 상냥한 릴리를 보고 누가 기분이 상하겠습니까.”

‘그렇지만, 기분 탓이라고 넘기기엔 너무 분명한 적의였는걸요…….’

릴리는 들떴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오늘 하루가 무척 피곤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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