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화났다
하이드는 생크림을 핥아 먹듯 그녀의 목덜미를 핥았다. 느긋하게 혀로 목덜미를 희롱하고 귓바퀴를 빨자 릴리가 분한 와중에도 느끼는 듯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귀를 핥는 뜨거운 혀에 아랫배가 조여 오며 몸이 확 달아올랐다.
릴리는 하이드의 무례한 행동에 화가 났으면서도 손쉽게 함락되는 자신의 몸이 원망스러웠다. 반항해보려 해도 고개를 젓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이드는 작품을 감상하듯 릴리를 내려다보았다.
원망이 서린 눈초리, 숨 쉴 때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젖가슴, 그에 의해 구속된 양팔…….
마음에 드는 풍경이었다. 그는 릴리가 열락에 빠져 달콤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했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사실 아랫도리가 뻐근하도록 좋았다.
저만을 바라보는 눈과, 저에게 갇힌 몸. 스스로도 취향이 나쁘다는 것쯤은 자각하고 있었다.
“릴리 아가씨는 왜 화가 났습니까? 제가 틀린 말을 했나요?”
“선생님은 바보예요.”
릴리는 억울한 듯 씨근덕대더니 기어이 눈꼬리에 눈물을 매달았다. 울음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있는지 코가 빨개지고 입매가 풀어졌다.
그런 얼굴로 훌쩍이며 내뱉는 말이 겨우 ‘바보’였다. 얼마나 맹탕인 여자인지. 뭇 사내라면 이 가련한 얼굴에 마음이 사르르 녹아서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고 싶어지겠지만, 하이드는 평균을 한참 웃도는 나쁜 놈이었다.
하이드는 그녀가 울면 더 울리고 싶고 괴롭히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를 엉망진창으로 울리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누가 바보입니까?”
“저는 선생님 주장처럼 그렇게 음, 음탕하지 않아요.”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확인해 보죠.”
귀에 대고 속삭여지는 낮은 저음이 릴리의 음부를 찌르르 울렸다. 이 사내는 심하게 야했다. 굵고 낮은 남성적인 목소리는 원래도 매혹적이었지만, 이렇게 은밀한 분위기에서는 그 정도가 심했다. 겨우 속삭임 정도로 자신을 허물었다. 릴리는 억울했다. 늘 이렇게 자신만이 매혹당했다.
평소보다 사나운 하이드는 계속 그의 눈을 희롱하던 젖가슴을 강하게 쥐었다. 그러면서 입으로는 릴리의 숨통을 틀어막을 듯 거세게 입을 맞추었다.
강한 자극에 릴리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의 혀가 온 입 안을 휘저었다. 입안의 여린 점막이 유린당하는 질척한 감각이 그녀의 반항을 잠재웠다. 얇은 실내복의 천 위로 가슴을 강하게 쥐었다 놓는 통에 아릿하면서도 달콤한 열기가 그대로 아랫배에 고였다. 입 안에서 신음이 뭉개졌다. 호흡이 모자라 머리가 몽롱했다.
하이드가 릴리의 손을 놓아줬지만, 그녀는 그를 밀치지 않고 그의 격정적인 입맞춤에 호응하며 그의 뒷목을 끌어안았다.
그는 그녀의 입 안을 정신없이 탐하면서도 손으로는 착실하게 그녀의 옷을 벗기고 있었다. 가슴을 옥죄는 속옷의 끈이 풀어지자 풍만한 가슴이 쏟아질 듯 속옷 밖으로 튀어나왔다. 맨피부에 그의 거칠한 손바닥이 닿자 릴리는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유두를 꼬집고 누르는 자극에 몸이 착실하게 반응했다. 허벅지 사이가 욱신거리며 젖어 들고 그녀는 더 강한 자극을 바라며 훌쩍였다.
“이렇게 야하면서, 음탕하지 않다고 했습니까?”
하이드는 자신의 손바닥에 가슴을 비비는 그녀를 보고 낮게 웃었다. 그가 만져주기만 하면 이렇게 금방 달아오르면서. 쾌락에 약한 몸이다.
손을 풀어주고 나면 어깨를 두드리며 때릴 줄 알았더니 그녀는 그를 끌어당기며 달콤하게 신음했다. 요부 같으니. 릴리는 순진한 얼굴로 남자를 미치게 할 줄 알았다.
“이건 하이드가, 만지니까 그런, 흐윽…….”
“똑바로 말하세요. 제가 만지니까 흥분된다고요? 아랫입이 근질거려서 못 참겠습니까?”
아, 정말로 그랬다.
감각을 지배하는 열기가 음부에 뭉쳐서 그녀를 안절부절못하게 만들었다. 릴리는 가슴을 주무르던 손을 잡고 그녀의 얼굴로 끌고 와 그의 손에 제 뺨을 비볐다. 그녀는 애타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바라는 바가 분명한 얼굴이었다.
“약혼자에게도 이랬나요? 응? 그 자식에게 만져달라고 졸랐습니까?”
“아!”
하이드가 성급하게 그녀의 원피스 자락을 들추고 속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이미 질척거리며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그곳은 평소보다 거친 움직임에도 자지러지며 황홀한 자극을 느꼈다. 릴리는 비명 같은 신음을 내지르며 울먹였다.
왜 자꾸 약혼자 얘기를 꺼내는지 알 수 없었다. 결혼 전에 연애를 배우고 싶어 그에게 도움을 청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그녀는 결혼을 피하고 싶어 밤새 고민하지 않았던가.
데면데면한 약혼자와 자신을 음담으로 엮는 것이 싫고 억울했다. 하이드는 자신이 정말 누구의 여자가 되든, 그녀가 누구와 성관계를 맺든 상관이 없는 것 같았다. 그것이 신경 쓰이고 억울한데, 하이드는 그녀가 딴생각에 빠지면 기가 막히게 알아채고서 그녀의 이성을 해체했다.
그의 손이 음부의 틈을 파고들어 미끈거리는 애액으로 음핵을 문지르면 모든 생각이 날아가 버렸다. 릴리는 그가, 그가 만져주는 것이 좋아서 미칠 것 같았다.
“하이드, 하이드으…….”
“선생님이라고 부르셔야죠.”
“선, 선생님, 저도 만지고 싶어요. 네?”
릴리는 훌쩍이고 신음하며 흐물거리는 팔을 들어 하이드의 가슴께를 더듬었다. 부드러운 천 아래 단단한 근육이 느껴졌다. 자신만이 흐트러져서 애무를 받는 건 싫었다. 하이드도 그녀처럼 허물어져서 그녀를 원하길 바랐다.
“하아……, 릴리……. 당신은 남자를 너무 몰라. 응? 저는 지금 아가씨의 질척거리는 구멍에 내 좆을 처박고 싶은 걸 겨우 참고 있다고요.”
“해줘요. 그렇게 해주세요, 선생님.”
흥분으로 흐트러진 얼굴로 릴리가 그의 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하이드는 순간 굳었다가 이내 깊은 한숨을 쉬고는 무섭도록 뜨거운 눈으로 릴리를 바라보았다.
“난 참으려고 했어.”
“참는 거 싫어요. 저한테 다 가르쳐주시기로 했잖아요.”
* * *
그 뒤로는 빠르게 진행됐다. 하이드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녀의 옷매무새를 대충 다듬어주고는 그의 재킷을 벗어 그녀의 머리 위에 둘렀다. 그녀의 손을 잡고 저택에 세워둔 그의 마차로 뛰어갔다. 그녀가 재킷을 뒤집어쓰고 거의 납치당하는 수준으로 그에게 끌려가는 것을 메리가 발견했다. 그녀가 커다래진 눈으로 소리를 지르려는 것을 릴리가 보고 눈빛과 손짓으로 말렸다.
하이드가 릴리를 안아 들어 마차에 태우고 마부에게 가까운 고급 호텔 이름을 소리치듯 부르고는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았다. 그들은 마차를 타고 달렸다.
마차 안은 둘뿐이었다. 마차 안의 공기가 달고 뜨거웠다. 릴리는 자신이 숨을 쉬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하이드의 눈이 너무 뜨거워서 전신이 데일 것만 같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맞췄다. 습한 소리를 내며 오가는 서로의 타액이 신이 마신다던 넥타르보다 달콤했다.
* * *
“최고로 좋은 방으로.”
하이드는 평소의 신사 같은 태도를 갖다 버린 채 안내하는 이를 잡아 죽일 것처럼 말했다. 분명 일주일 치 숙박비를 훨씬 웃돌 금액이 직원에게 주어졌다.
릴리는 수도에서 가장 비싸다는 호텔의 최고로 좋은 방에서 그 호화로움을 채 감상하지도 못하고 침대로 쓰러졌다. 하이드는 그녀의 옷을 찢어버릴 기세로 벗겼다. 그리고 빠르게 제 옷도 벗어 던졌다.
단추가 두어 개 뜯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의 남근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부풀어있었다. 그러나 릴리는 생전 처음 보는 남근에 놀랄 겨를도 없었다.
여유 따위는 진작에 집어 던진 하이드는 게걸스럽게 그녀의 음부를 핥고 빨았다. 여리디여린 점막에 가혹할 정도의 쾌락이 가해졌다. 아앗, 하는 릴리의 신음이 멈추지 않고 방안을 채웠다. 빨개진 눈가엔 눈물방울이 맺히고 유두가 딱딱하게 곤두섰다. 그녀는 이대로 녹아서 사라져버릴 것 같아 무서워서 울었다.
울면서 그의 머리를 떼어내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엉덩이가 축축할 정도로 젖었는데도 하이드는 멈추지를 않았다.
“너무 달아. 미칠 것 같아.”
“하이드, 제발, 제발 그만.”
그가 머리를 들어서 안심하던 찰나에 굵고 긴 손가락이 비좁은 그녀의 내부로 들어왔다. 제멋대로 휘저으며 들어갔다 나오는 감각이 너무 적나라했다. 있는지도 몰랐던 부위가 제 몸의 전부인 것처럼 온 감각이 쏠렸다. 하이드는 그녀가 고개를 저으면서도 착실하게 느끼는 것을 보며 웃었다. 질척거리는 물소리가 적나라했다.
“그만하라고? 아랫입이 더 먹고 싶다고 이렇게 움찔거리잖아. 손가락 장난 그만하고 좆이 먹고 싶습니까?”
“선생님, 그런 말…….”
뒷말은 신음과 함께 뭉개졌다. 손가락이 착실히 개수를 늘려가며 릴리의 질구를 자극했다. 그녀는 짐승처럼 쾌락만을 쫓았고 하이드도 평소의 여유 따위는 없었다.
릴리가 앗, 앗 하고 끊어지는 신음을 내뱉더니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는 그녀가 절정을 느끼는 순간에도 자비 없이 빠르게 굵은 손가락을 왕복하며 그녀가 느끼는 부위를 자극했다. 찔꺽거리는 소리와 함께 애액이 튀었다.
“혼자만 가버리다니, 아가씨는 버릇없는 학생이로군요.”
릴리는 절정의 여운에 빠져 몸을 잘게 떨며 넋이 나갔지만, 하이드는 그런 그녀를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선단이 젖어있는 굵은 성기가 그녀의 허리께에서 꺼떡거렸다. 하이드가 릴리의 허벅지를 잡고 다리를 벌렸다. 도톰한 음부가 빨갛게 익어서 그 속살을 드러냈다. 이 여자는 어떻게 여기도 예쁘지.
하이드는 그녀의 음부에 남근을 짓이길 듯 문지르며 미끈거리는 애액을 묻혔다. 험악한 얼굴로 그녀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이 너무 야했다.
잔뜩 굳어있는 얼굴에서 짙은 남성미가 풍겼다. 그의 눈이 오롯이 그녀만을 담고 있는 것이 좋으면서도 알몸으로 다리를 벌린 채 그곳을 적나라하게 내보여 수치스러웠다.
아래를 문지르는 남근이 너무 뜨거웠다. 하이드는 얼굴을 가리는 릴리의 손을 잡아 내리고 가리지 마, 명령하듯 내뱉었다.
굵은 성기가 그녀를 꿰뚫었다. 하이드가 그녀를 녹진녹진하도록 풀어줬음에도 거대한 성기에 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것 같았다. 고여있던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릴리의 애달픈 신음에 하이드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금 안쓰럽게 여기는 듯했으나 여전히 무자비한 기둥은 그녀의 아래에서 제 영역을 넓혔다.
가벼운 입맞춤이 릴리의 얼굴 여기저기로 떨어졌지만, 그녀의 긴장은 쉬이 풀리지 않아 하이드의 남근을 끊을 듯이 조여댔다.
“윽, 힘 빼십시오. 힘주면 더 힘들어집니다.”
“흐윽, 선생님, 아파요. 아파서…….”
그의 눈빛과 그의 손길, 그가 그녀에게 주는 것들은 모두 달콤하기만 했는데, 어째서 고대하던 관계는 이리도 고통스러운 걸까?
릴리는 바들바들 떨며 무의식적으로 하이드를 밀어냈지만, 그는 밀리지 않고 점점 더 그녀 안으로 파고들었다. 하이드는 끊임없이 그녀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 맞추며 가슴 끝을 어루만지고 꼬집으며 자극했다. 애액이 흥건한데도 몹시 비좁아 하이드도 괴로울 지경이었다.
이제 다 들어온 것 같은데도 더 들어오던 남근이 마침내 다 들어왔다.
하이드는 릴리의 다리를 잡고 활짝 벌린 채 빨갛게 충혈되어 부어있는 음핵을 엄지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릴리가 자지러지며 하이드를 바짝 조여댔다. 그는 릴리가 자신의 가슴팍을 밀어내건 할퀴건 아랑곳하지 않고서 그녀의 음핵을 문지르며 천천히 내부를 왕복했다.
날카롭게 꿰뚫는 아픔이 시간이 지나며 차츰 둔해지고 아릿한 둔통 속에 차츰 달콤하고 애달픈 감각이 느껴졌다. 하이드는 그녀의 골반을 단단히 틀어쥐고 비좁은 내부를 왕복하며 붉은 속살이 자신의 성기를 따라 딸려 나왔다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는 악마처럼 미소 지었다.
애액이 다시금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애액으로 번들거리는 붉은 속살이 제 성기를 오물거리는 광경은 끝내주게 야했다.
릴리는 야릇하고 간질거리는 감각이 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가 제 밑을 물고 빨았을 때와는 다른 감각이었다. 릴리가 얕은 신음을 흘리며 느끼자 하이드는 보기 드물게 인내심을 발휘한 스스로를 칭찬하며 끊어질 듯 가늘어지던 인내를 집어치우고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가씨, 아가씨는 타고난 요부군요. 처음인데도 좆이 그렇게 좋아요?”
“흐윽, 아니야……. 하아, 앗, 앗”
그녀가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도 못하지만, 하이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희롱했다. 그녀는 흥분과 수치로 몸이 너무 뜨거워서 죽을 것만 같았다.
하이드는 두툼한 끄트머리까지 빼냈다가 강하게 박아대며 배부른 야수처럼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탐했다. 망측하게 생긴 남근이 게걸스럽게 그녀를 찍어 눌렀다. 그가 자궁에 닿을 것처럼 끝까지 내부를 찍을 때마다 뇌에서 불꽃이 튀었다.
천천히. 천천히 해주세요, 릴리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웅얼거렸지만 신음에 섞여 잔뜩 뭉개진 발음 때문인지 하이드는 들리지 않는 것처럼 강하게 그녀를 안을 뿐이었다.
눈물이 고여 흐려진 눈에 비치는 하이드는 맹수처럼 형형하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거친 숨소리를 내며 흐트러진 그의 모습은 낯설고 외설스러웠다. 릴리는 그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혀 닦아주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그의 움직임에 폭풍우를 만난 배처럼 흔들리며 그를 끌어안는 것이 고작이었다. 신음 소리, 젖은 살이 부딪히는 소리, 거친 숨소리가 방안에 켜켜이 쌓여 밀도를 높였다.
“아가씨가 좋다고 질질 싸서 제 배까지 튀었잖아요. 조신하지 못하게.”
하이드는, 초반의 여유 없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쉬지 않고 그녀를 괴롭혀댔다.
아래로는 하반신을 밀어붙이며, 위로는 그녀의 귀에 음탕한 말을 속삭이거나 출렁이는 그녀의 가슴을 빨았다. 얼마간의 몰아붙임 끝에 릴리는 또다시 전율하며 절정에 올랐다.
수축하며 사정없이 조였다 풀어지는 내벽에 그는 인상을 쓰면서도 사정없이 박차를 가했다. 그녀가 앙앙대며 고개를 도리질했다.
릴리는 강렬한 절정의 감각에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 내벽이 미친 듯이 조여대자 하이드도 그녀를 부술 듯 강하게 박아댔다. 굵은 성기가 부피를 늘리며 꿀렁대는 감각이 선연했다.
바르르 떨리던 몸이 진정되자 몸 안에 남아있는 하이드의 성기가 민망해 릴리가 꿈틀거렸다. 릴리의 움직임에 여운을 즐기며 그녀의 뺨을 쓰다듬던 하이드는 다시금 부피를 늘렸다.
“선생님, 이제 빼도 될 것 같은데…….”
“뭘 말입니까. 제 좆을 말하는 거라면, 아가씨 음탕한 구멍이 놔주질 않고 조여대니 그렇겐 못 하겠는데요.”
그의 말에 릴리는 사색이 되어 뭐라 말을 더하려고 했지만, 하이드가 입을 맞추며 말을 막았다. 남녀가 다시 불붙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게다가 아직 한낮이었다.
“뒤돌아서 엎드려요.”
“왜, 왜 커져요?”
“내가 그동안 얼마나 참았는지 알아? 한 번으로 끝날 리가 없잖습니까.”
“앗.”
하이드는 릴리를 뒤집어놓고 다시금 부피를 키운 성기를 움직였다. 한쪽 입꼬리를 올려 눈을 가늘게 뜨고 웃는 그는 지나치게 매혹적이었다. 이 달콤하고 진득한 유혹을, 어찌 감히 뿌리칠까.
울퉁불퉁한 핏줄과 두툼한 끄트머리가 내벽을 긁는 감각이 아찔했다. 릴리는 저도 모르게 끙끙대며 뜨거운 감각에 빠져들었다. 절정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예민한 몸은 그의 얕은 움직임에도 지극한 쾌락을 느꼈다. 하이드는 강약 조절을 해가며 그녀에게 쾌락만을 선사했다. 뇌를 녹이는 뜨거운 열기에 릴리는 자신이 짐승이 된 것 같았다.
릴리는 무릎을 세우고 엎드린 채 그의 물건을 받았다. 긴 머리카락이 등 위에 흩어져서 땀에 적셔지고 한 줌밖에 안 되는 잘록한 허리는 그의 손에 잡혔다. 하이드가 허리 짓을 할 때마다 릴리의 가슴이 출렁이며 하이드의 눈을 즐겁게 했다.
그녀의 엉덩이에 고환이 닿을 때마다 젖은 피부에서 철썩거리는 소리가 났다. 내벽을 짓이기며 들어오는 찔꺽거리는 소리와 철썩이는 소리가 정신을 어지럽혔다. 끝날 것 같지 않은 낮이었다. 영원히 해가 지지않을 것만 같았다.
* * *
릴리가 집으로 돌아온 것은 이미 별이 총총한 한밤중이었다. 마차를 저택의 뒷문에 멀찌감치 세워두고 좀도둑처럼 살금살금 방으로 들어갔다. 들킬까 봐 불안해서 심장이 쿵쿵 뛰는데도, 그녀의 얼굴은 재밌는 장난을 친 꼬마처럼 웃음기가 가득했다.
방에 도착해 침대에 뛰어든 그녀는 킥킥대는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잔뜩 상기되어있었다. 소리를 죽이기 위해 구두를 벗고 계단을 오른 터라 하얀 비단 스타킹의 발바닥이 까맣게 더러워졌지만, 그녀를 아랑곳하지 않고 발을 동동거리며 기쁨을 만끽했다.
아래가 쓰리고 골반과 허벅지에서 불편감이 느껴지지만 행복했다. 그녀는 순결을 잃었지만, 모순적이게도 그 사실에서 더없는 충만함을 느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런 일을 하고 산다는 것이 놀랍고, 여전히 자신이 저지른 일이 믿기지 않았다. 나쁜 짓을 한다는 죄책감이 들기도 했었으나, 죄책감은 배덕의 짜릿함과 함께 왔다. 말 잘 듣는 얌전한 딸로 평생을 살다가 처음 해본 일탈이다.
“릴리 아가씨!”
불 꺼진 방에는 분명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저를 부르는 소리에 놀라 릴리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쉿! 조용히 하세요! 정말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이렇게 늦게 들어오시면 어떡해요.”
“메리…….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아가씨는 그렇게 대책 없이 나가서 이 시간에야 돌아오셨는데, 들킬 걱정은 안 하셨어요?”
“했지, 했는데……. 그래도 상관없었어.”
릴리가 눈을 예쁘게 휘며 웃었다. 아이처럼 해맑은 얼굴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메리는 잔소리하려던 마음이 쏙 들어갔다. 저런 얼굴을 보고 누가 화를 낼 수 있으랴.
“정말, 들키셨으면요, 온 저택이 뒤집혀서 아가씨를 찾느라 난리였을 거예요. 어쩌면 하이드 경은 납치범으로 잡혀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라고요! 그 얌전하던 아가씨가 대체 어떻게 이런 대범한 짓을 하셨어요?”
릴리는 잔소리하는 메리의 목소리가 누그러지고 염려하는 마음이 느껴져서 또 웃었다. 메리는 상냥한 아이였다.
“아이 차암, 그렇게 웃지 마세요. 안 그렇게 생기셔서 정말 여우시라니까. 저 없었으면 정말 큰일 났을 거예요. 제가 아가씨를 얼마나 헌신적으로 모시는지 알아주셔야 합니다.”
“응, 정말로 고마워. 그런데 어떻게 안 들킨 거야?”
메리는 릴리가 옷 갈아입는 걸 도와주며 화내던 것도 잊고 의기양양해져서 자신의 활약상을 떠들었다. 릴리는 수도에 온 이후로 가장 행복한 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릴리의 행복은 채 하루도 되지 않아 흩어졌다.
“릴리.”
“네, 오라버니.”
틸리안은 매일 보던 릴리가 하루 만에 어딘가 달라졌다고 느꼈다. 방긋거리며 웃는 얼굴은 해사한데, 어딘지 낯설었다. 얼굴이 밝아 보여 어제 몸이 안 좋다고 한 게 맞나 싶었지만, 확실히 몸짓은 불편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틸리안은 릴리가 어제 저녁 식사에 모습을 비치지 않은 것이 몸이 안 좋아서 그런 것으로 알고 있었다.
메리가 귀가하지 않고 있는 릴리를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릴리가 자작가에 오자마자 크게 앓아누웠었기 때문에 틸리안은 릴리가 몸이 아주 약하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오늘은 몸이 좀 괜찮으냐?”
“네에, 오라버니께서 걱정해주신 덕에 씻은 듯이 나았어요.”
확실히 릴리는 평소보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앉은 자세가 어색했지만, 그녀 말마따나 다 나았다고 하고 얼굴도 밝았기에, 틸리안은 며칠 전부터 고심했던 외출을 제안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오후에 나들이에 갈 수 있겠군.”
“네? 나들이요?”
“그래. 네가 수도에 올라온 이후로 시간이 꽤 흘렀지만, 변변찮은 외출 한번 없었지 않았으냐. 많이 갑갑했을 텐데 내가 그간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이 들어 시간을 내보았다.”
“아…….”
릴리의 동공이 당황으로 흔들렸다. 오늘은 오후에 하이드가 수업을 오는 날이었다. 수업이 끝난 후에 외출을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아직도 아랫도리가 불편해 마차를 탈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온몸이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근육통이 상당했다.
그러나 이것을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방금 몸이 멀쩡하다고 해놓고, 사실은 마차를 탈 상태가 아니라고 한다면, 틸리안은 분명 의원을 불러야겠다고, 구체적으로 어디가 아픈 거냐고 물을 것이다. 자신을 걱정하는 그에게 어디가 불편한지 털어놓을 바엔 차라리 혀를 깨무는 것이 나았다.
“다른 날에 외출을 가면 안 될까요, 오라버니? 오늘은 오후에 수업도 있어서 밖에서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없잖아요.”
“수업이라면 그 작자가 하는 미술 수업 말이냐?”
릴리는 생각했다. 어디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 신사들이―하이드와 틸리안―어째서 이렇게 다른 신사분들을 부를 때면 호칭이 ‘그 자식’, ‘그 작자’가 되는 것일까?
“네. 하이드 선생님의 회화 수업이요.”
“아직 오전이니 전보를 보내 오늘 수업은 취소한다고 전하면 될 것이다. 그림이야 오늘이 아니라 언제라도 배울 수 있으니 그런 얼굴 하지 말거라.”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나 보다.
릴리는 어제 사랑을 나누고서 같이 밤을 보내지 못하고 서둘러 집으로 가버린 게 너무 아쉬웠다. 그렇기에 더더욱 오늘 하이드를 보고 싶었다. 수도 구경이야말로 언제 하든 상관없지 않은가. 막 사랑을 시작한 릴리에게 일주일에 두어번밖에 없는 그와의 수업 시간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이었다. 오라버니가 제멋대로 갑자기 취소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저는 당일 오전이 되어서 수업을 취소하는 것이 도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해요. 가르침을 받는 입장에서 그런 식으로 예의 없이 행동하는 건 수업의 질을 떨어뜨릴 거고요. 저는 그렇게까지 해서 외출을 하고 싶지는 않아요.”
릴리의 단호한 대답에 틸리안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틸리안의 기준으로는 그림 수업의 중요도가 희박한지라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오늘 일정도 취소하였는데, 외출하고 싶어 할 줄 알았는데, 수업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하고 두서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울려댔다. 틸리안은 정말로 릴리의 반응에 충격을 받았다. 얼굴에서 핏기가 가신 틸리안이 말없이표정만 굳히고 있자 릴리가 그의 눈치를 봤다.
‘설마 화나셨나?’
틸리안은 긴 생각 끝에 깨달았다. 릴리는 자신과의 외출이 그 자식과의 시간을 취소할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다는 것을.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좌절과도 같은 상실감, 그리고 터무니없이 커다란 타격감에 틸리안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에 이렇게까지 충격적인 일인가?
“……그래. 네가 그리 말한다면 내 너의 수업을 방해하지는 않겠다. 다만, 그 수업이 얼마나 훌륭하기에 네가 그리도 그 선생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구나.”
“저는 그저, 도리가 아니라고 했을 뿐이에요, 오라버니.”
릴리의 목소리가 수그러들었다. 틸리안의 표정은 아주 심각해 보였다.
“오라버니……, 화나셨어요……?”
“아니. 아니다. 신경 쓰지 말거라.”
틸리안은 심각한 얼굴로 대답하더니 곧바로 방을 나가버렸다.
릴리는 자신이 너무 매정하게 굴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틸리안은 이미 화가 났는지 그녀에게 다시는 외출을 제안하지 않을 것처럼 돌아서서 나갔다. 저에게 다정하게 대해주려 노력한 것뿐인데 그 은혜를 저버렸으니 그녀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 * *
곧 있으면 하이드가 올 시간이었다. 그는 시계처럼 정확하게 약속 시간을 지키는 남자였다. 그가 보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하며 5초에 한 번씩 시계를 쳐다보았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가 오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시간이 너무 더디게 가기에 우리 집 시계는 고장이 난 것 같아 릴리 아가씨댁의 시계를 보려고 왔습니다. 고장 난 건 저였나 보군요.”
“바보 같아요.”
릴리가 꺄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하이드는 평소보다 30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시간 약속을 엄수하는 그로서는 무척이나 예외적인 일이었다. 릴리는 하이드가 자신을 빨리 보고 싶어서 일찍 온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의 능글맞은 말투도 오늘따라 더욱 달았다.
바보 같다며 타박하면서도 배시시 웃는 얼굴이 익어가는 복숭아처럼 사랑스러웠다. 1분 전만 해도 전전긍긍하던 게 우습게도, 릴리는 하이드를 보자마자 행복해졌다.
“음, 혹시 제가 보고 싶어서 일찍 오셨어요?”
“시계가 고장 난 것 같아서 확인하러 왔습니다만.”
릴리는 벅찬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그의 품에 뛰어들어 안기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하이드는 릴리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쳐다보면서도 정중하게 손등에 입을 맞추어 주고는 거리를 유지했다.
눈빛과 둘 사이의 거리감이 주는 괴리감에 심장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 마음이 따끔거렸다. 자신과 그의 마음의 크기는 이토록 차이가 났다. 둘은 연인 사이가 아니니까.
그러나 어제 둘의 모습은 밀회를 보내는 연인 그 자체이지 않았는가? 릴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발전의 여지는 있으니까, 제가 하이드에게 앞으로 더 잘 배우면 그만이다. 또, 메리의 조언도 잘 새겨들어 어제의 급진적인 발전을 이루지 않았나.
하이드는 시계가 고장 났는지 확인하러 왔다는 실없는 소리의 숨겨진 뜻도 파악하지 못하고 배시시 웃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진 게 귀여웠다.
릴리는 때때로 놀랄 만큼 도발적이고 대담하면서 이렇게 눈치 없는 점이 귀여웠다. 의도하는 귀여움이 아니라서 더 놀려주고 싶었다. 하이드는 그녀가 바라는 말과 행동을 알면서도 결코 해주지 않았다.
자신으로 인해 시무룩해지는 반응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확실히 자신 같은 놈은 이런 보드라운 아가씨에게는 맞지 않았다.
이런 아가씨는 저 같은 나쁜 놈이 아니라 상냥하고 다정한, 그리고 안정적인 가정을 꾸려줄 남자가 어울리겠지. 그러면 뭐 하나. 그녀는 개새끼를 끌어당기는 자석이라도 되는 양 약혼자는 난봉꾼에 저 같은 놈이 선생이라고 붙어있는 것을.
“몸은 괜찮습니까?”
“아, 그……, 염려해주신 덕에 좋아졌어요.”
그가 걱정하는 부위가 어딘지 알 것 같아서 릴리는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괜찮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일상생활을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렇게나 회복이 빠르시다니, 아가씨께서는 타고나셨나 봅니다. 아가씨처럼 야한 몸뚱이를 가진 분을 만족시키려면 제가 더욱 힘내야겠네요.”
“더 이상 힘을 내시면, 저는 정말 죽어요…….”
그가 정말로 더 힘을 낼까 봐 겁난 듯 릴리는 울상이었다. 어제의 그는 정말로 절륜하였고, 릴리는 모든 연인의 정사가 이토록 격하고 긴지 의문이었다.
두 남녀가 모두 지난밤을 떠올리고 있는지, 마주치는 눈빛이 뜨거워질 무렵 하녀 메리가 들어왔다.
“아가씨, 저…….”
“메리? 무슨 일이야?”
“틸리안 도련님께서 이제부터 아가씨가 수업받는 동안 자리를 지키며 선생님께서 수업하시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하라고……. 하셨어요. 어, 저는 여기에 서 있을 테니 없다고 생각하시고 하던 거 마저 하세요.”
“오라버니께서?”
“네에……, 필요한 거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메리는 하이드를 흘긋, 쳐다보며 멋쩍은 얼굴을 했다. 이 아이는 왜 선생님의 눈치를 볼까?
메리를 따라 하이드의 얼굴을 쳐다보니 굳어있던 얼굴이 가면을 씌우듯 사교적인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라버니가 자신이 선생님을 각별히 챙긴다는 것을 알고 특별히 신경써주는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짠했다.
오전에 자신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아 보였음에도 이렇게 챙겨주시다니……저는 동생 노릇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정도 붙이지 못했는데…….
‘오라버니에게 잘해야겠어. 화낸 것도 사과하고, 꼭 같이 나들이를 가자고 하자.’
반면 하이드는 기분이 몹시도 더러워졌다. 일부러 릴리의 얼굴이 빨개질 법한 농담으로 그녀를 골려 주며 상승되었던 기분이 단박에 바닥을 쳤다. 정말, 별의별 것들이 방해를 하는군.
바보 같은 제 아가씨는 틸리안의 쪼잔한 속도 모르고 감동한 얼굴이었다. 아, 대책 없이 눈치 없는 여자 같으니. 제 기분이 이렇게 엿같은데 제 오라비 생각을 하는 게 분명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련님께 나중에 따로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겠군요. 우선 정원에서 꽃을 준비해주시겠습니까? 되도록 많이요. 오늘은 꽃을 그려보려고 합니다.”
“네, 얼른 준비해드릴게요.”
“아니요. 되도록 천천히 가장 아름다운 꽃송이만을 골라주시기 바랍니다.”
메리가 서둘러 방문을 닫고 나갔다. 하이드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릴리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피아노를 배울 적 자주 보이던 그 눈빛이었다.
“아가씨께서는 참, 눈치가 없으십니다. 그리 눈치가 없으셔서야 사내들의 구애도 못 알아봐서 다 떨어져 나가겠습니다.”
“제가 눈치가 없다고요? 선생님한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네요. 저처럼 섬세한 사람이 보기에 선생님이야말로 눈치가 없다 못해, 무심하셔요.”
릴리가 샐쭉거리며 말했다. 내가 누굴 좋아하는지도 모르면서!
하이드가 어째서인지 평소보다 모난 소리를 해대는지 모르겠다. 모난 소리를 하는 건 자기면서도 마치 릴리가 섭섭하게 군다는 태도다.
“둘만 있고 싶어서 이리도 애를 쓰는 제가 안쓰럽지도 않으십니까?”
“네?”
릴리는 몇 초가 지나고 나서야 그 뜻을 이해했다. 하이드가 메리를 내보내기 위해 꽃을 준비시킨 거였구나. 뺨이 타오를 듯 뜨거웠다. 제가 생각해도 저는 여우 같은 여자는 못됐다. 바보 같아. 그래도 기뻤다. 둘만 있고 싶어 한 것이 저뿐만이 아니라서. 분홍빛으로 달아오른 뺨을 하고서 릴리가 해사하게 웃었다. 그를 알게 될수록 웃음이 많아지는 것 같다.
* * *
애석하게도, 메리는 일찍 꽃을 따왔고, 잘 가꿔진 정원의 꽃들은 하나같이 흠잡을 데가 없었다. 하이드는 릴리에게 사내를 기쁘게 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설명할 기회조차 없었으며, 음탕한 말로 제 아가씨를 희롱하고 괴롭히지도 못했다.
회화수업에 필요한 것이라고 해봐야 이미 다 준비되어있었다. 불편할 것이 무엇이 있다고 이제 와 사람을 붙인단 말인가? 이것은 명백한 감시였다.
저택에서 우연찮게 마주칠 때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노려보던 틸리안인지 띨띨인지, 그 자식은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릴리를 보는 눈이, 오라비의 눈이 아님은 분명했다.
하이드는 어리숙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가 바르딘 자작가의 사업을 조사하고 있는 판국에 틸리안과 반목하려고 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하이드가 틸리안에 대한 아니꼬움을 드러내기도 전에 틸리안이 하이드를 향해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더랬다.
하이드는 정말로 어이가 없었다. 하이드와 틸리안이 서로 처음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하이드는 릴리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틸리안은 마치 하이드가 좀도둑이라도 되는 것처럼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곤 했던 것이다.
남자는 남자가 알아본다고 하던가?
하이드는 틸리안의 감이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기사 수행을 하면 감이 발달하나 보지?
하이드가 무언갈 털어갈 생각으로 이 저택에 들어온 것은 사실이었으니, 틸리안의 본능적인 적대감은 정확하다고 볼 수 있었다. 다만 하이드가 훔치려는 것은 틸리안과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예쁘장한 아가씨가 아니었고 몇 가지 서류와 정보였다―그땐 그랬다는 것이다, 지금은 아니지만―.
감은 좋은데 몸만 써서 머리는 둔한 거지, 바르딘 자작가의 도련님은 제 마음도 모르는 눈치였다. 하이드는 그가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고 릴리 주위를 맴도는 꼴이 정말로 같잖았다. 하이드의 조사에 따르면 틸리안은 황궁의 부기사단장으로 승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창 바쁠 때였음에도 종종 릴리의 수업 시간이 끝날 시간에 맞춰 찾아와 하이드에게 얼른 사라지라고 눈치를 주고 있었던 것이다.
틸리안이 릴리를 쳐다보는 눈길은 노란 솜털이 보송보송한 병아리를 보는 암탉처럼 역겨울 정도로 따사로웠다. 맹한 아가씨는 틸리안의 친절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눈치였고, 아둔한 사내는 제 맘을 모르니 시간이 지나 릴리가 결혼을 하면 멍청한 도련님은 땅을 치고 후회할 일만 남았군, 정도가 하이드의 소감이었다.
맘씨 좋은 아가씨와 건실한 청년의 사랑이 이뤄지는 행복한 결말은 없으리라. 하이드는 예술 분야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지만, 희극보다는 비극을 선호하는 확고한 취향은 있었다.
바르딘 자작가는 명문가도 아니고 위세가 드높은 것도 아니었으며 전통적으로 기사를 배출한 가문도 아니었다. 듣자 하니 자작의 반대 또한 상당했다는데, 오로지 걸출한 능력 하나로 선발된 드문 인재였다. 공격적으로 사업 확장에 뛰어들며 흙탕물을 온 사방에 튀기고 있는 바르딘 자작에게서 저런 아들이 나오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오호통재라. 구정물에서 피어난 연꽃 같은 청년은 제 아비로 인해 빛나는 출세 가도를 걷기는 글렀다. 인재 등용의 관점에서라면 혀를 찰 일이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안타까운 일이고 하이드 개인적인 심정으로는 틸리안은 그저 마음에 안 드는 자식이었다. 저가 못 오니 하녀로 감시를 붙여놓은 지금은 더더욱.
* * *
하이드는 결국 별 재능도 없는 그림 실력으로 수업 시간 내내 정말 건전하게 그림만 가르쳤다. 촉촉하고 말캉한 연분홍빛 입술 한번 삼키지 못하고, 옷 속에 가려져 있는 통통한 엉덩이 한번 쥐어보질 못했다. 분통 터지는 일이다.
릴리는 열 받아 죽으려는 자기 속도 모르고 모범생답게 꽃 그리기에 심취해서 그것도 또 화가 났다. 하이드는 어제 제 밑에서 앙앙대며 매달리던 여자가 누구였는지, 태연하게 붓질이나 하고 있는 이 여자가 맞는지 헷갈릴 지경이다.
한 번 하고 나서 무심하게 구는 사내들에게 상처받는 여인네들의 심정을 저가 공감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 * *
“진짜 좆같네.”
“아니, 우리 귀한 도련님 입에서 어찌 그런 험한 말이 나오십니까? 쇤네 놀라 자빠져버리겠습니다요!”
“웃기지도 않는 짓거리 집어치우시지.”
“거참, 기분파라니까.”
“기분이 좋아도 네놈한테 친절하게 군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그건 그래, 하고 더글러스는 중얼거렸다.
언제나 농담 한 번 받아준 적 없는 매정한 동업자 놈은 몇 년간 얼굴을 맞대고 있으면서도 정이 안 갔다. 더글라스는 저 성질 더러운 놈이 필요할 때면 유들유들하고 교양 있는 귀공자 행세를 거리낌 없이 하는 것이 매번 놀랍고 징그러웠다.
때로는 그 징그러운 귀공자 행세가 더 잘 어울려서 소름이 끼칠 때도 있었다.
“그런데 대체 왜 이렇게 질질 끌고 있는 거야? 증거를 이 정도로 모았으면 그분께서도 만족하실 텐데.”
“안 돼. 부족해. 그분은 그저 문제를 해결하고 경고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실지 모르겠지만, 난 이 기회에 아주 짓밟아버릴 생각이거든.”
“너무 개인적인 감정으로 일하는 거 아니야? 너 소넬가에 무슨 원수졌냐? 설마 소넬가 장남의 약혼녀 때문이야?”
믿기지 않는다는 듯 더글라스가 물어보았지만, 하이드는 대답하지 않고 미간을 찌푸린 채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너어, 그럼 더더욱 그럼 안 되지. 네가 그 아가씨를 맘에 들어 해서 뺏기는 게 싫다곤 해도, 그 가여운 아가씨는 결국 그 집에 시집갈 텐데, 그 집이 망해버리면 어쩌냔 말이야. 그리고 난 이제 이 일에서 손 떼고 싶다고. 자꾸 캐물으니까 거래처에서도 슬슬 의심하는 눈치야.”
“네 몫으로 따로 더 챙겨줄 테니까 조용히 시킨 일이나 해. 그리고 누가 그딴 자식이랑 결혼해?”
“아니, 그럼 네가 그 아가씨랑 결혼할 거야?”
“……못할 것도 없지.”
“허어, 난 모르겠다. 그 아가씨도 자기가 너랑 결혼하게 될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냐?”
뭐든 잘하는 재수 없는 자식이라도, 결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구만, 하고 숫총각 더글라스는 생각했다. 그러나 제 알 바는 아니다. 더글라스는 귀족들은 하나같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꼬리를 자르고 도망치지 못할 결정적인 증거가 있을 거야. 이런 자잘한 뒷거래들 말고 큰 건을 잡아야 하는데, 의외로 보안이 철저해서 외부인들은 물론이고 사용인들도 들어갈 수가 없더군.”
“그럼 그 아가씨한테 도와달라고 해봐. 네가 정말 그 아가씨와 결혼할 거라면 도움받아도 되지 않겠어?”
“그 입 닥쳐.”
하이드가 싸늘하게 대꾸했다. 더글라스의 경험상 이럴 때의 하이드는 건드리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더글라스는 아무것도 모르고 보쌈당할 것이 분명한 아가씨의 행운을 빌었다. 저런 살벌한 남자에게 코가 꿰이다니, 어지간히도 운 없는 여자다.
“뭐, 네가 너 이런 자식인 걸 비밀로 하는 게 좋다는 거엔 나도 동의한다. 그래도 도움받는 쪽도 생각해봐.”
“더글라스!”
더글라스는 빠르게 문을 닫고 사라졌다. 요리조리 회피하는 능력 하나 만큼은 끝내주는 녀석이다. 그래서 더 열 받지만.
릴리의 도움을 구한다고?
저는 아주 높고 고귀하신 분의 개로 일하며 시궁창 냄새를 좇으며 살고 있습니다. 아가씨 댁에 구린내가 진동하는데 한번 살펴봐 주시겠습니까?
이딴 말이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말도 안 되지.
* * *
“릴리. 곧 제 2황자님의 생신 연회에 가야 하니 다른 가문에 얕보이지 않도록 단단히 준비해야 한다. 네가 더 이상 촌구석 남작가의 셋째 딸 릴리가 아니라 바르딘 가의 일원임을 늘 명심해야 해.”
“네, 자작님.”
제2황자, 제르시스의 생일 연회는 릴리의 수도 무도회의 첫 등장 겸 르시엔 소넬의 약혼자로 알려지게 될 날이었다. 릴리는 데뷔탕트를 치를 나이는 지났지만, 수도의 무도회라고 하니 마음이 떨렸다.
바르딘 자작은 그녀의 치장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가 고향 집에서 들고 온 모든 옷가지를 합쳐도 이곳에서 자작이 사준 드레스 한 벌 값에 지나지 않았다. 무려 황실의 무도회에 약혼발표나 다름없는 자리다. 얼마나 값비싼 옷가지들을 걸칠지 상상만 해도 기가 질렸다.
처음에는 고향 집에서 누리지 못했던 사치스러운 레이스와 공단 리본들에 마음이 설레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자신을 겹겹이 둘러싼 부드러운 비단과 보석이 버거울 정도로 무거웠다.
바르딘 자작가에서 자신의 위치는 소넬가와의 연을 맺기 위해 데려온 계집이고, 사치스러운 장신구들은 그녀가 아니라 가문의 결합을 위한 투자였기에 그랬다.
만약 자신이 결혼을 거부한다면―그것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이것들을 갚아낼 길이 아득했다.
어쨌거나 그녀의 어머니는 자신이 바르딘 자작가에서 실내복으로 입는 드레스가 릴리가 데뷔탕트때 입었던 것보다도 좋은 소재임을 본다면 분명 기뻐하리라. 그것만이 릴리의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새로 연회용 드레스를 맞추러 갈 때, 같이 가주시겠어요, 오라버니?”
“나는 여성의 드레스를 보는 재주는 없다.”
릴리의 수줍은 제안에 틸리안은 냉소적으로 대답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했던 것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
“그래도 수도의 유행에 대해서는 저보다 잘 아실 거잖아요. 오라버니가 아니라면 누가 제게 진실된 조언을 해줄 수 있겠어요? 저는 이곳에 친구도 없는걸요.”
릴리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속눈썹 아래로 틸리안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릴리는 애교가 없는 편이었지만, 가끔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약한 표정을 지어 보이곤 했었다. 그리고 가만히 있어도 어여쁜 그녀가 작정하고 가련하게 쳐다보면 사람들은 마음이 녹아내려 뭐든 들어주곤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절대 안 된다고 말했던 제인네 가족과의 여행을 허락했었고, 그녀의 첫째 오빠는 릴리와 제인을 로제리 마을의 축제에 데려가 주었다.
언제나 효과적이었던 이 방법은 이번에도 통했다. 틸리안이 귓불을 물들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스럽게도 오늘은 릴리도 틸리안도 일정이 없어서 바로 외출을 나갈 수 있었다. 화사한 레몬색 드레스에 하얀 보닛을 쓴 릴리는 레몬이 사람이 된 것처럼 상큼했고, 오랜만에 제복이 아닌 사복 차림의 틸리안은 평소보다 편안해 보였다.
틸리안은 릴리가 햇살 아래에서 반짝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람이 반짝여 보인다는 상투적인 표현이 정말로 실감이 나서 헛웃음을 흘렸다. 릴리의 들뜬 미소가 눈부셨다. 틸리안은 그럴듯한 칭찬 한마디 건네지 못하는 자신의 하찮은 말재주가 진심으로 애석했다.
“밖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로구나.”
“고향에서는 자주 외출을 했거든요. 이웃집에도 자주 방문했고, 교외로 나들이도 가고, 제인과 매일 숲을 산책했어요. 아, 제인은 제 가장 친한 친구예요.”
“그래? 그렇다면 이곳에서 많이…….”
외로웠겠군.
틸리안은 뒷말을 삼켰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바르딘 가문의 이득을 위해 릴리를 외롭게 만든 것이나 다름없으니 할 말이 없었다.
저택에서는 조금 울적해 보인다 싶었던 릴리였다. 릴리가 밖에 나와 또래 처녀들처럼 발랄해진 모습이 틸리안의 죄책감과 책임감을 자극했다. 그는 릴리를 처음 보았을 때의, 그녀에게 최고로 잘해주리라는 다짐을 지키지 못했던 것 같아 속이 쓰렸다. 릴리를 볼 때마다 가슴이 따끔거리는 것은 분명 양심의 가책이리라.
릴리는 옷가게에 들어오고 나서야 틸리안이 여성의 드레스를 보는 눈이 없다는 것은 핑계가 아닌 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틸리안은 점원이 소개하는 드레스마다 “괜찮군.”, “잘 어울리겠어.” 하면서 그녀에게 죄다 입혀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쁘다는 것이지 그저 봐줄 만하다는 뜻인지도 알 수 없는 그 의사 표현을 점원만은 찰떡같이 알아듣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오라버니. 저는 오늘 무도회용 드레스 한 벌을 맞추러 온 것이지, 가게를 털어 옷장을 새로 채우려고 온 게 아니에요.”
“많을수록 좋은 것 아니냐? 네가 오기 전까지는 집에 여자가 없어 잘은 모르지만, 영애와 귀부인이 있는 집은 매달 의복에만 상당한 지출을 한다고 들었다. 그간 쓸 일이 없어서 아꼈던 돈을 지금 아니면 언제 또 쓰겠나.”
“그렇지만, 이건 너무 과한 것 같아요…….”
릴리는 인형 놀이하듯 갈아 입혀진 옷들이 죄다 주문서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울상이 되었다.
“과하지 않다. 다 예ㅃ, 아니 흠, 잘 어울렸어.”
제가 과하다는 건 오라버니의 씀씀이에요.
릴리는 차마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 거기서 더 모자랐는지 틸리안은 디자이너에게 그녀를 위한 맞춤옷을 더 주문했다.
이곳은 다른 손님과의 접촉과 시선이 차단된 방에서 개인적으로 접객을 하는 수도의 최고급 의상실이었다. 그런 곳에서 수석 디자이너에게 맞춤옷을 여러 벌 맞춘다는 것은 돈을 물 쓰듯 펑펑 쓰고 있다는 뜻이었다.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었다. 자작 가라도 수도의 귀족은 급이 다르구나. 새삼 틸리안이 달라 보였다. 그녀의 고향 집은 무늬만 귀족이었던 것이다.
“아가씨는 워낙 본바탕이 아름다우셔서 어떤 디자인을 해도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 아가씨의 꿀 같은 눈동자와 머리칼이 마구 영감을 주고 있어요. 기대하세요. 무도회장에서 다들 아가씨만 쳐다보게 될 거예요.”
“말씀만이라도 고마워요.”
릴리는 점원의 말을 빈말 정도로 여기면서도 수줍은 미소로 답했다. 이곳을 방문한 손님들은 전부 그녀보다 귀한 댁 아가씨였을 것이다. 릴리는 자신보다 고운 여성들을 많이 보았을 텐데도 점원이 이렇게 칭찬을 해 주는 것이 고마웠다.
의상실의 수석 디자이너는 릴리가 그 유명한 르시엔 소넬의 약혼녀라는 것을 알고 나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의상실은 워낙 많은 귀족이 오고 가는 곳이라 영애와 부인들을 접객하며 수다를 들어주다 보니 모르는 소식이 없었다. 그래서 르시엔 소넬의 악명과 그의 약혼자가 될 영애에 대한 온갖 추측과 악의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 청초한 미녀는 무도회장에서 가장 가련한 먹잇감이 될 예정이었다. 그녀와 같이 온 둔한 오라비도, 드높은 권세의 약혼자도 방패막이 되기엔 역부족이었다. 릴리는 수도의 콧대 높은 귀족들과는 다르게 순수하고 겸손해 보였다. 이 바닥에서 내공 있는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그녀의 사랑스러운 성격이 장점보다는 약점이 되리라는 것을.
유약한 심성의 숙녀들이 처신을 잘하지 못하면 기가 센 여자들 틈바구니에서 가루가 될 때까지 다져지는 것이 흔한 일상이었다.
그렇기에 적어도 겉모습만은 가장 아름답게, 누구도 얕보지 못할 만큼 화려하게 꾸며주리라! 수석 디자이너는 다짐했다. 게다가 개인적인 동정과는 별개로 일단 릴리는 훌륭한 뮤즈였다. 예술혼이 타올랐다.
* * *
릴리는 녹초가 되어 의상실을 나왔다. 틸리안, 이 둔한 사내는 릴리가 건장한 사내의 체력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을 전혀 배려해주지 못했다. 틸리안이 장신구를 보러 가자고 하는 것을 의상이 나오는 것을 보고 맞추자고, 릴리가 울고 싶은 마음으로 말렸다.
식사를 하기엔 애매한 시간이라서 틸리안이 어디로 갈지 고민하고 있을 때 릴리가 하이드와 갔었던 카페를 제안했다. 틸리안은 릴리가 익숙하다는 듯 자리 잡는 것을 보고 이런 곳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신기해하며 물었다. 릴리의 대답에서 하이드의 이름이 언급되자 틸리안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팍 구겨졌다.
“릴리, 너는 가정교사 그 작자와 거리를 둘 필요가 있어. 그가 너에게 무슨 엄한 마음을 품고 있을지 모르지 않느냐.”
“네? 무슨 말씀이세요. 하이드 경이 그럴 리가 없잖아요.”
“릴리, 너는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오라버니께서는 걱정이 많으세요.”
“릴리, 너는……!”
가끔 틸리안 오라버니는 릴리가 열 살 꼬마처럼 보이는 듯, 이처럼 말하곤 했다. 릴리는 자신이 사내를 알만큼은 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틸리안이 생각하는 만큼 순진하지는 않았다. 그는 릴리가 그녀의 가정교사에게 어떤 것들을 배우고 있는지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오라버니, 엄한 마음은 제가 품고 있어요.’
“어떤 사내가 관심도 없는 여인과 단둘이 외출을 한다더냐?”
“관심을 가져주신다면 고마운 일이죠.”
“릴리. 네가 생각하는 관심과 사내들의 관심사가 다를 거라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느냐?”
틸리안은 착잡한 얼굴로 탁자에 팔꿈치를 기댔다. 내뱉는 한숨이 유난히 깊었다. 그의 생각에 릴리는 너무 착하고 순하고 다정했다. 반면 그녀의 가정교사는 마치 뱀처럼 유들유들했다. 틸리안 눈에 하이드가 릴리를 날름 삼키고 싶어 하는 것이 빤히 보였음에도 릴리는 마냥 그자를 두둔하고 들었다. 그의 속이 바짝 타들어 갔다.
“알겠어요. 조심할게요.”
릴리는 해사하게 웃으며 오라비의 걱정을 넘겼다. 제가 보기엔 틸리안이 더 순진했다. 틸리안이 몇 마디 더 하이드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내는 것을 릴리가 방어적으로 잘라냈다. 릴리는 틸리안이 말하는 음흉한 목적과 흑심들이 제 마음을 겨냥한 것 같아 양심에 찔렸다. 그녀는 곧 있을 무도회로 말을 돌렸다.
“황궁의 연회는 분명 엄청나겠죠? 수도에서의 첫 연회가 황실의 연회라니 긴장돼요.”
“어딜 가나 연회라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규모가 클 뿐이야.”
“규모가 크다니까 더 긴장되는걸요.”
“내가 옆에 있을 테니 걱정 말거라.”
“오라버니께서 에스코트 해주시려고요?”
“……싫으냐.”
릴리가 눈이 동그래져서 묻자 틸리안이 저번의 외출 거절을 떠올리고 자그맣게 물었다. 그녀가 에스코트마저 거절한다면 자신은 도저히 회복하지 못할 것 같았다.
“싫을 리가요. 너무 좋아요. 그냥, 오라버니께서 저 때문에 다른 숙녀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까 걱정되어서 그러지요.”
릴리가 웃으며 대답하자 틸리안이 안심하고 작게 따라 웃었다.
“나 때문에 마음 아파할 사람은 없을 거다.”
“네? 왜요? 오라버니는 이렇게 훤칠하시고 능력도 출중하시잖아요.”
“그……, 그렇지는…….”
릴리의 칭찬에 틸리안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릴리는 진귀한 모습에 눈을 깜빡이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틸리안은 정말로 훤칠하고 건장한 사내였다. 야외훈련으로 그을린 얼굴에 홍조가 들자 얼굴이 거의 진흙 색이 되었다. 그는 릴리의 웃음소리에 화끈해진 얼굴을 커다란 손바닥으로 덮어 가렸다.
“오라버니는 의외로 수줍음을 타시네요.”
“오라비를 놀리지 마라, 릴리.”
* * *
집에 돌아오니 소넬 가의 종자가 르시엔 소넬의 편지를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산들바람처럼 제 곁을 맴도는 릴리 아가씨께
릴리 아가씨를 뵌 뒤로 아가씨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지지가 않습니다.
아가씨의 아리따운 자태가 저의 곁을 늘 맴돌고 있어요.
저는 이토록 아리따운 당신의 환영이 실물보다 못한지 더 미화된 것인지 헷갈릴 지경입니다. 그대를 너무 오랫동안 뵙지 못했어요.
그대를 매일 나의 집에서 볼 수 있는 나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참을 수가 없어 내일 아가씨의 낮 시간을 방해하려고 합니다.
지나친 실례가 아니라면 찾아가도 될지요.
답신은 종자에게 맡겨주십시오.
그대가 저에게 감당하기 힘든 슬픔을 안겨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포로가 된 르시엔 소넬」
릴리는 르시엔의 편지지에서 나는 꽃향기를 맡으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이곳의 신사들이란, 정말 여자를 잘 유혹하는구나. 번드르르한 칭송의 말은 단순한 빈말로 치부하기에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참신한 구석이 있었다.
릴리는 약혼자가 만남을 청하는 것을 거부할 수 없었다. 릴리는 그의 편지에 담긴 성의에 화답해야할 것 같아서 머리를 굴렸지만, 도저히 르시엔처럼 거창한 말은 생각나지 않았다. 결국, 릴리는 짧고 간결하게 「내일 뵙겠습니다, 릴리 바르딘.」이라 적은 답신을 종자에게 전해주었다.
릴리는 종자를 보내고 방에 틀어박혀서 하이드 생각을 했다.
그에게도 정혼자가 따로 있을까? 그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연인을 두었을까? 그의 미모와 능숙한 태도, 개방적인 연애관을 보면 분명 수많은 여성이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깊이 생각할수록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에잇, 선생님의 과거 연애는 생각하지 말자.’
릴리는 그의 연애 말고도 궁금한 점이 많았다. 숨기는 게 많은 남자였다. 그런 점이 신비스러운 매력이 더하였고 또 그녀의 위험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아무것도 상관이 없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조차.
하이드는 저에게 잘해주긴 했지만, 릴리는 그가 좋은 사람일지는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이드는 사실 그녀에게 수도식 연애를 가르쳐준다는 명목 하에 그녀의 몸을 갖고 노는, 나쁜 남자일지도 모른다.
사실 릴리는 그가 나쁜 남자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하이드는 몸은 나누면서 사랑을 말하지 않았고, 그녀의 마음은 쉽게 훔쳤으면서 그의 마음 한 자락 보여주지 않았다. 메리가 보여준 소설 속에 나오는 전형적인 나쁜 남자들이 꼭 하이드 같았다. 릴리는 책을 읽으며 여주인공들이 왜 저런 사내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지금은 그녀들에게 절절하게 공감했다.
하이드는 수렁 같은 남자였다. 그것도 아주 관능적이고 달콤한. 릴리는 그에게서 빠져나갈 수도 없었고, 빠져나가고 싶지도 않았다. 릴리는 하이드의 삐뚜름하게 끌어올린 입꼬리와 갸름하게 내려 뜬 눈이 너무 좋았다. 그가 그런 얼굴을 하고 릴리를 끌어당기면 그녀는 속절없이 그의 가슴에 무너졌다. 악마의 품이라도 좋았다.
릴리는 제가 사랑한 남자가 정말로 악마라고 하여도, 그래서 자신이 타락한다 하여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이렇게까지 유혹적일 수는 없을 테니까.
그래서 릴리는 분발하기로 결심했다.
* * *
릴리는 제인이 좋아라하며 추천했을 때도 읽지 않았던 연애 소설들을 잔뜩 빌려와서 읽었다. 메리가 릴리를 어른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엄선한 책들이었기 때문에, 아주 엄했다.
수도식 연애는 정말 하이드의 가르침대로 순애보다는 성애에 가까운 것이었나 보다. 연애 소설의 내용은 이러했다. 귀부인이 남편 휘하의 기사와 눈이 맞고 이내 배가 맞았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때와 장소를 달리하며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눴다.
남편의 눈을 피해 저택에서, 정원에서, 때로는 무도회의 테라스에서도!
릴리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녀는 자극적인 어휘와 묘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릴리는 얼마 전 성관계를 경험하긴 했지만, 경험치는 바닥을 겨우 벗어난 정도였다. 릴리는 노련하고 농염한 성애를 간접적으로 접하며 부족한 경험을 상상으로 메꿨다. 자신이 이제 무지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멀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유혹적이지 못했는지를 떠올렸다.
소설 속 여인들은 격정적이고 강렬하게 욕망을 표현했다. 릴리처럼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스스로 옷을 벗으며 사내를 유혹했다. 성기를 표현하는 각양각색의 단어들이 책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이렇게 하는 거구나!
릴리는 그동안 하이드가 아주 짓궂고 성급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는 잠자리에서도 비교적 신사적으로 그녀를 기다려준 것이었다. 책에서는 눈이 맞으면 거의 바로 성기를 삽입하다시피 하지만 그는 그녀가 녹아내릴 때까지 풀어주지 않았나.
물론 그 이후로는 그녀가 울거나 말거나 한계까지 밀어붙였지만, 책을 보니 보통 그 정도는 하는 것 같았다.
메리는 빨개진 얼굴로 흥미진진하게 책을 읽고 있는 릴리를 흐뭇한 얼굴로 보았다. 메리가 골라준 책은 수위 문제로 금서가 된 책도 있었다. 그러나 수위가 문제라고 해봐야 조금 풍기 문란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래야 재밌는걸.’
“메리, 그런데 나는 좀 자신이 없어.”
“뭐가요?”
“여기 나오는 여자주인공들은 전부 너무 매력적이잖아. 나랑은 달라.”
“아이, 아가씨! 무슨 소리예요. 아가씨가 얼마나 매력적이신데요!”
“그야, 그건 네가 날 좋게 봐주니까…….”
메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가씨. 아가씨가 생각하는 미인의 기준은 어디가 삐뚤어져 있거나 엄청나게 높거나 둘 중 하나인 것 같아요. 저처럼 보편적인 심미안을 가진 사람은 아가씨 같은 사람을 절세미인이라고 부른답니다.”
메리의 칭찬에 릴리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직도 노골적인 칭찬에 면역이 없었다.
“음, 게다가 신사분들은 으레 풍만한 몸매를 좋아한답니다.”
메리가 릴리의 가슴께를 흘끔 쳐다보며 말했다. 릴리가 그 눈길에 뺨이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아 볼에 손을 올려놓고 열을 식혔다.
민망하긴 했으나 릴리가 듣기에도 메리의 말에 일리가 있기는 했다. 하이드는 그녀의 가슴을 뚫어져라 보고 핥고 물고 빨고……, 하였으니 말이다. 그는 확실히 다른 부위에 비해 압도적으로 가슴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정말 풍만한 몸매를 좋아하실까? 절세미인이 아니라도 되는 걸까?”
“아가씨 혹시 듣고 싶은 말을 유도하시는 건 아니죠? 아가씨가 절세미인이잖아요!”
메리는 정말로 답답했다. 어떻게 시력 멀쩡하고 방에 커다란 거울을 두고 사는 사람이 스스로가 예쁜 줄도 모른단 말인가? 하루에도 열 번씩은 예쁘다는 칭찬을 듣고 살 텐데! 매일 들으면 실감이 나지 않는 걸까?
메리는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가 가끔 나사 하나가 빠진 것처럼 굴 때마다 신기했다. 대체 어떤 곳에서 살다 오면 사람이 저렇게 순하고 맹할 수 있을까? 내가 저 얼굴이었으면 정말 야무지게 써먹었을 텐데. 아가씨는 지나치게 무해하셔.
아가씨의 연인 될 남자는 여우는 무슨, 구미호가 따로 없던데. 메리는 아가씨가 걱정이었다.
“아가씨, 남자는 단순해요. 머릿속에 그것만 들어있다고 보면 돼요.”
“그거?”
“네, 그거요.”
말하고 나서 메리가 흠흠 헛기침을 했다. 메리는 이 순진해 빠진 아가씨가 과연 제 말을 알아들었을까 싶었지만, 릴리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리는 것을 보니 알아들은 것 같았다.
“……그렇지는 않을 거야.”
릴리는 틈만 나면 그녀를 잡아먹으려고 드는 하이드를 떠올리며 소극적으로 부정했다.
“아닌 사람들도 있고, 그 정도가 사람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대체로 그럴걸요?”
메리는 열변을 토했다. 남성들은 자신들을 ‘이성적인 동물, 여성들은 비합리적인 감성의 동물이라 주장하지만, 그것은 전혀 맞지 않는다. 남성은 이성이 아닌 욕망의 지배를 받는 짐승이다.’라는 게 그 내용이었다.
“메리, 그……, 러니까 남자들은 보통 성욕이 많은 게 정상이라는 거지?”
“으음,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질문인가요.”
메리의 질문에 릴리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의 푹 숙인 고개가 대답을 대신했다. 메리는 지난날, 하이드가 납치하듯 릴리를 마차에 태우고 갔다가 밤늦게 돌아왔을 적에 이미 릴리가 거사를 치렀으리라고 짐작하긴 했었지만, 오늘에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흐음, 그럼 이 책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네요. 열 번 읽는 것보다 한 번 경험하는 게 더 빠르지 않나요?”
“그렇지만 난 모르는 게 많으니까…….”
메리가 릴리의 수줍은 대답에 씨익 웃었다. 오호라.
“우리 아가씨께서 궁금한 게 아주 많으시군요. 아이, 그럼 저한테 물으시죠. 책이 아니라!”
메리가 신이 나서 뭐예요? 뭐가 궁금하세요? 뭘 알려드릴까요? 하고 방정을 떨었다. 그녀는 제가 모시는 주인이 뒤늦게 성에 관심을 가지는 게 귀여워서 죽을 것 같았다.
“아가씨는 잠자리에서 상대를 기쁘게 해주고 싶으신 거죠?”
릴리가 망설이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메리와 정이 많이 들기는 했지만, 릴리는 어린 하녀와 이런 얘기를 나누는 것이 옳은지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나 결혼하기 전의 성교육은 유모가 해 주는 게 관례이지 않나. 메리가 그녀의 유모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역할 대신이라고 여기면 되지 않을까?
“나는 가만히 받기만 하는 거 같아서……, 나도 뭔가 해야 하지 않나 하고…….”
“좋은 마음가짐이에요. 기술이 부족해도 적극적인 태도만이라도 충분해요. 입으로 하는 게 서툴러도 손으로 해줄 수도 있고요.”
“입? 손으로 뭘 하는데?”
“아하…….”
릴리의 어벙한 되물음에 메리가 침을 삼켰다. 그 가정교사가 자신의 생각보다 신사적이었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릴리는 인체의 신비를 막 깨닫고, 무궁무진한 성의 세계에는 겨우 발만 담근 모양이었다. 메리는 고민했다. 애무가 A부터 Z단계까지 있다면 과연 릴리에게 적합한 단계, 혹은 메리가 언급해도 되는 단계가 어디까지일지 감이 오지 않았다.
“흠흠, 남자의 성감대가 어딘지는 아시죠? 여자랑 똑같아요. 좀 더 집중적이기는 하지만.”
“으응.”
“그러니까, 거시기를……. 아니, 고간을? ……아휴, 답답해. 단어를 가려 쓰려고 하니까 너무 답답해요. 아가씨가 양해해주세요. 흠, 남자들은 아랫도리를 만져주면 좋아한다 이거예요.”
메리가 잘 익은 토마토처럼 빨간 릴리를 생각해 단어를 고르고 골랐지만, 메리는 당최 무엇이 괜찮고 무엇이 저속한 말인지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메리는 고상한 귀족 나으리들처럼 돌려 말하는 영 재주가 없었다. 대화하는 내용은 성인용이었는데, 단어는 전체연령가로 맞추려니 쉽지가 않았다. 하이드가 릴리에게 늘어놓는 음담패설을 메리가 들었다면 아마 입이 쩍 벌어졌을 것이었다.
“만져준다고? 어떻게?”
“밀가루 반죽하듯이 주무르면 안 되고, 기둥을 위아래로 쓸어준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 이후로 메리는 릴리에게 맞춤식 성교육을 한참 이어갔다. 릴리는 민망해하면서도 눈을 반짝이며 메리의 교육에 경청했다. 메리는 양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가며 무지한 아가씨에게 기술을 설명해주었다.
“이런 걸 하면 좋아하는 마음이 커지는 거야?”
“어……, 그건 쪼끔 다른 문제 아닐까요?”
“그래……?”
릴리의 얼굴이 실망으로 흐려지자 메리가 황급히 말을 꺼냈다.
“릴리 아가씨! 그래도 도움이 될 방법이 있기는 해요.”
“그게 뭔데?”
메리가 야비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전적인 밀당 기술이죠.
“음, 그러니까 아가씨가 가정교사 신사분을 꼬시고 싶다면, 먼저 유혹을 하다가 휙 도망가세요.”
“뭐? 왜?”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못하면 안달 날 테니까요. 이런 걸 밀고 당기기라고 해요.”
“메리. 너는 대체 이런걸 어디서 배우는 거야?”
“제가 보기와는 다르게 경험이 많아요. 이 분야에선 제가 아가씨의 선배랍니다. 그러니 제 말을 믿으세요.”
하이드에게 배울 때는 저도 모르게 자연스러운 그의 흐름에 몸을 맡겼다면, 메리는 설득력이 있었다. 메리의 강한 자신감과 입담에 릴리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그녀의 가르침을 되새겼다.
“알겠어, 메리. 나 노력해볼게.”
릴리는 다른 무엇을 공부할 때보다 의욕적으로 책을 읽었다.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은 메리에게 물어보며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릴리는 평소처럼 성실한 제자였다.
하이드가 릴리 때문에 애간장 타들어 갈 나날이 머지않았다.
* * *
릴리는 약혼자를 맞이하기 위해 아침부터 공들여 치장을 했다. 실상 그녀는 가만히 서 있거나 앉아있었고, 하녀들이 분주했다. 커다란 전신 거울 앞에 서 있는 고혹적인 미녀는 따분한 표정이었다.
‘어차피 결혼은 정해진 것인데, 잘 보이는 게 무슨 소용이람?’
뺨 옆에 돌돌 말린 애교머리가 거슬렸다. 한껏 틀어 올린 머리채도 무거웠다. 속눈썹을 불에 달군 막대로 말아 올리는 것은 겁이 났고 피처럼 붉은 입술연지는 부담스러웠다.
약혼자의 취향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고혹적인 차림새는 그녀에게 퍽 어울렸으나 릴리는 내키지 않았다. 릴리는 깊이 파여있는 가슴팍이 허전해 평소에는 잘 하지도 않는 목걸이를 걸쳤다.
그나마 저번처럼 치렁치렁한 옷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답장이 온 이후 시간이 멈춘 것처럼 답답하던 마음이 릴리 아가씨를 보니 활짝 개는 것 같습니다.”
“반가워요, 르시엔 경.”
“르시엔이라고 불러주세요. 릴리.”
르시엔은 은근슬쩍 호칭을 내려놓았다. 릴리. 참 예쁜 이름이다. 입안에서 굴리는 어감이 좋았다. 르시엔은 몸에 딱 붙는 드레스를 통해 드러난 릴리의 실루엣을 흐뭇하게 감상했다. 풍만한 가슴이 시원하게 트여서 뽀얀 속살을 다 드러냈다. 참 마음에 들었다.
르시엔은 햐안 가슴살에 제 잇자국을 새기는 상상을 하며 릴리에게 의례적인 안부를 물었다.
“곧 있으면 황궁에서 연회가 열리죠. 의상은 무슨 색으로 맞추셨나요? 물론 릴리라면 어떤 색이든 그대를 위한 색인 것처럼 어울릴 것 같습니다.”
“음, 아직 정해지지 않았어요. 디자이너의 재량에 맡기려고 해요. 저보다 전문가의 의견을 따르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요.”
“그런가요? 정해지면 알려주세요. 릴리의 옷 색과 같은 색으로 맞춰 입고 우리 사이를 자랑하고 싶으니까요.”
“아, 르시엔 경, 이번 연회는 틸리안 오라버니께서 제 짝이 되어주시기로 했어요.”
“……그렇습니까? 저는 저희가 약혼하고 처음으로 참여하는 연회이기 때문에 릴리를 에스코트하는 영광이 제게 오리라 기대하고 있었는데요.”
르시엔은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아니, 진짜 오라비도 아니면서 무슨 짓거리야?
눈치가 없어도 더럽게 없군. 이 연회에서 약혼을 알리기로 계획된 터라 더 어이가 없었다. 자작이 그걸 놔뒀다고? 부자가 쌍으로 눈치를 말아먹었나?
“음, 틸리안 오라버니께서는 미처 경을 고려하지 못하신 게 아닐까요? 그리고 앞으로는 경과 함께 가게 될 테니, 마음 풀어주실 거지요?”
“흐음, 그렇지만 저는 우리의 약혼을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리고 싶습니다. 릴리, 당신이 저의 피앙세라는 걸 모든 이들에게 알려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아요. 다른 이들이 그대를 탐내면 어떡합니까?”
“계속 오라버니와 붙어있는 것은 아닌걸요. 같이 춤은 추실 거잖아요?”
릴리는 르시엔이 갑자기 죽고 못 사는 연인처럼 구는 것이 의아했다.
그들은 사랑해서 결혼을 약혼한 사이가 아니라 정략결혼이 계획된 사이였다. 저번에 한 번 만났던 것이 전부이면서 르시엔은 그녀에게 반한 남자처럼 굴었다. 정말 자신에게 반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릴리는 자신이 허영심 많은 성격이었다면 그런 허황된 착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만큼이나 달콤한 태도였다.
“그대는 타들어 가는 제 마음을 전혀 몰라주는군요. 릴리, 사내를 불지옥으로 던져놓고 즐기는 아름다운 마녀 같네요.”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애매한 말에 릴리도 애매하게 대답을 흐리며 웃었다.
마녀? 내가 무엇을 하였다고 마녀 소리를 듣고 있는 거지?
릴리는 처음에는 르시엔이 공손하고 예의 바른 청년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그가 조금 부담스러워졌다. 하이드로 인해 제법 단련된 촉이 무의식중에 작용하는 것이다. ‘이 남자는 너를 집어삼키려고 수작을 부리는 거야’, 하고 말이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우리 사이에 만남의 이유가 필요할까요? 물론 그대를 에스코트하는 영광을 허락받고자 왔지만, 그보다 중요한 이유는 그대가 보고 싶어서입니다.”
“…….”
릴리는 이 시점에서 예의상 무언가 말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구애가 낯설었다. 이유도 없이 맹목적인 호감을 표현하는 사내가 너무도 이상했다. 인간관계란 자고로 순서도 있고 과정도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던가?
여태껏 그녀에게 구애를 하는 남자는 없었다. 그 비슷한 기억을 어찌 끄집어 올리면, 어렸을 적 제인의 오빠가 볼을 붉히며 릴리에게 장미꽃이 어울린다며 정원의 꽃을 꺾어다 주었던 것 정도가 있었다. 사춘기가 지나고 나서는 그나마 알고 있던 남자들과 사이가 데면데면해져서 이런 일조차 없었으니, 그녀에겐 남자의 호감 표시가 낯설 수밖에 없었다.
릴리는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남자들이 첫눈에 반할만한 타입의 여자가 아니었다. 축 쳐져 보이는 우울한 인상에 봐줄 만한 것이라고는 밝은 금발뿐이다.
교양은 남들도 다 배운 수준이고, 성격이야 얌전하고 착하다는 말은 듣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사기당하기 딱 좋은 성격이라는 말도 들었다.
릴리가 생각하는 사내를 홀리는 팜므파탈은 좀 더 호방하고 똑똑하고 야무진 성격에 붉은 머리칼에 고양이상의 미녀였다. 자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릴리? 무슨 생각해요?”
감히 나를 앞에 두고.
르시엔은 그녀가 정말 이상했다. 르시엔은 보기 드문 미남이었다. 여자들은 아름답고 화려한 것에 사족을 못 쓰는 종족이라서, 제 얼굴에 껌뻑 죽었다. 그녀들은 자신의 화려한 여성 편력을 모르면 모르는 채로, 알아도 모르는 척 그에게 넘어왔다.
그는 연애에 있어서 늘 갑의 위치였고, 유혹은 그의 존재 자체였다. 르시엔은 사실 지금처럼 열렬한 약혼자 행세를 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릴리는 곧 완벽한 그의 소유가 될 테니까. 그러나 르시엔은 릴리에게 조금 흥미가 동했다.
첫 만남에서도 요리조리 그를 피하고, 절절한 편지에 업무 편지보다 무뚝뚝한 답신을 보내는 이 여자를 얼른 함락시키고 싶었다. 게다가 릴리는 엄청나게 그의 취향이었다!
바르딘 자작이 가문의 완벽하게 그의 취향인 여자를 물색해 양녀로 데려온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깊이 파인 옷깃 사이로 골짜기를 이루는 가슴살이 릴리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릴 때마다, 르시엔은 그녀를 자신의 위에 앉히고 성기를 처박아 그녀의 가슴이 출렁거리게 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아랫도리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최근에 굶은 것도 영향이 컸다.
르시엔은 조바심이 났다. 어차피 제 것인데, 결혼 전에 건드려도 상관없지 않나?
릴리는 르시엔의 핥듯이 쳐다보는 눈길에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르시엔은 릴리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속으로는 그녀를 눕히고 덮치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순진한 처녀라 처음에는 반항도 하고 울겠지만 일단 쾌락을 맛보여주면 신음을 내지르리라. 게다가 두 사람은 약혼 관계가 아니던가? 르시엔은 당당했다. 결혼 전에 천천히 길들이면 결혼식을 치를 때쯤이면 제 위에서 허리를 흔들며 성기를 조여댈 것이다. 꽤나 구미가 당기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어쩐지 몸부터 탐하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르시엔은 강압적으로 하는 성관계보다 여자가 매달리는 쪽을 선호하기도 했고, 릴리는 약혼녀이기도 하니 나름 대접도 해주고 싶다는 갸륵한 마음도 조금 있었다.
무엇보다 르시엔은 릴리가 겁먹고 울며 반항하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찜찜할 것 같았다. 어차피 그녀는 금방 자신에게 몸도 마음도 내주게 되지 않겠는가? 르시엔은 조바심을 삼키기로 했다.
게다가, 새로운 여자를 무너뜨리는 것, 이것은 르시엔이 최고로 좋아하는 유흥이었다.
르시엔은 릴리가 순진해 보이기에 쉽게 넘어오리라 생각했었지만, 그녀는 지나치게 순진한 탓인지 경계가 유난히 심했다. 지금으로서는 그녀의 벽을 무너뜨리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 재미있었다. 공들인 만찬을 기대하는 심정이랄까.
어차피 한동안 자숙의 기간을 가져야 했던 차이니 약혼녀에게 몰입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게다가 이것으로 인해 난봉꾼 이미지를 쇄신한다면 겸사겸사 좋겠지.
“조금, 당황스러워서요. 르시엔 경, 우리는 지금이 두 번째 만남이 아닌가요? 혹 우리가 그전부터 알고 있던 친밀한 사이였는데, 제가 기억을 잃어버린 걸까요?”
릴리는 할 말을 찾지 못해서 솔직한 마음을 말해버렸다. 적당히 돌려 말했지만, 그가 지나치게 친한 척을 해서 혼란스럽다는 뜻은 분명히 전해졌을 것이다.
릴리는 그에게 조금 미안했지만, 도저히 그와의 대화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릴리, 저는 당신을 아주 옛날부터 알고 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마치 운명 같아요.”
“저는, 르시엔 경이 아주 새롭게 느껴지는데, 우연이네요.”
르시엔이 릴리의 손을 잡아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려는 것을 릴리가 손을 빼내어 다른 손으로 감쌌다. 대체 저 사람은 나한테 왜 저러는 거지? 릴리의 얼굴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렇게 노골적으로 다가오면 맹한 릴리도 모를 수가 없었다. 이 남자는 자신을 유혹하고 있었다!
대체 왜? 어차피 둘은 결혼할 텐데? 그는 그녀를 유혹할 이유가 없었다. 릴리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의심의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눈앞의 남자를 살폈다. 그는 미남이었다. 여자를 다루는 것도 능숙해 보였다. 도저히 릴리 같은 여자를 좋아할 남자가 아니었다. 그라면 더 매력적인 여성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르시엔은 의심스럽다는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는 릴리가 귀여워 더 진득한 미소를 지었다. 연약한 새끼 고양이가 털을 부풀리며 잔뜩 경계하는 모양새였다. 자신을 경계하며 겁먹은 모습이 신선하지 않겠는가?
그는 위압감을 풍기는 남성이라기보다는 우아하고 부드러운 미남이지 않은가? 여자에게 겁을 줄 만한 인상이 아니라 릴리처럼 경계하는 여자는 처음 보았다.
이를 어쩐담?
보통 이렇게 꿀처럼 달콤하게 열렬한 구애를 하면 좋아라했다. 자신이 공주라도 된 양 고양감에 들떠서 그가 보여주는 애정에 취해 금세 자신의 마음을 열었다.
자신의 화려한 여성 편력을 아는 여자들은 처음엔 경계하고 믿지 않다가도 그녀가 믿어주지 않아 가슴 아픈 척, 과거를 반성하는 척 등의 불쌍한 척을 하며 애절한 편지라도 남기면 눈물을 흘리며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자신만은 다를 것이라 믿는 것이다.
르시엔은 여자에게 잘 먹히는 방법을 썼는데 오히려 역효과를 내버렸다. 그는 그녀가 이전까지와 다르게 공략이 어려운 여자임을 인정해야 했다. 그래, 결혼할 여자라면 이 정도 난이도는 되어야지.
르시엔이 부담스러워 벽을 세우려는 릴리의 행동이 자꾸만 그의 마음에 벽을 허무는 결과로 돌아왔다. 이것이 득이 될지 해가 될지는 이 시점에선 아무도 몰랐다.
* * *
르시엔은 할 말이 없어서 곤혹스러워하는 릴리가 보이지도 않는지 30분을 더 머물다가 겨우 아쉬운 표정으로 일어났다.
릴리가 그를 배웅하기 위해 문밖으로 따라나섰다. 르시엔은 한참을 붙어있어 놓고도 여전히 아쉬운지 무어라 말을 건네며 거의 혼이 나가 있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르시엔은 그녀의 손을 제 입으로 가져가 말캉한 입술의 촉감이 그녀의 손등에 새겨지도록 꽤 오랫동안 입 맞추었다.
릴리가 민망함에 눈을 돌려 정원을 바라보다 우연히 하이드를 발견했다. 하이드가 건물 바로 옆에 있는 나무 뒤에서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릴리는 그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 입을 떼었지만, 하이드가 조용히 해달라는 손짓을 취했기 때문에 그녀는 뻐끔거리던 입을 다물었다.
르시엔은 질릴 정도로 오래 입술을 추근대고 나서야 만족했는지 상큼한 얼굴로 자작가를 떠났다. 그의 마차가 저택 밖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하이드가 나무 뒤에서 나와 얼빠진 얼굴로 서 있는 그녀에게 다가왔다.
“대체 왜 숨어계셨어요?”
“제가 저 자식과는 사이가 좋지 않아서 말입니다. 만나서 서로 기분 좋은 일이 없거든요.”
“전에는 르시엔 경을 잘 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잘 알기야 하죠. 그러나 사이가 좋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릴리는 좀 전에 르시엔은 배웅하고 있을 때 하이드가 그들을 살벌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기분 탓이 아니었구나.
두 사람이 사이가 나쁘다고 하더라도 나무 뒤에 그가 숨어있던 것은 조금 이상했다. 생각해 보면 하이드는 늘 저택에서 다른 귀족들을 만나길 꺼려했던 것도 같았다.
하이드가 바르딘 자작가에 방문할 때면 수업이 대부분 그녀의 방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가 다른 사람을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게다가 그는 시간대를 잘 조절해 자작가를 방문했기 때문에 다른 손님을 만날 일도 없었다. 여기까지는 의심할 구석이 없었다.
하지만 곰곰이 떠올려보면 릴리는 자작의 다른 손님이 복도를 지나갈 때 하이드가 구석에서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별 일 아니라고 여겼던 것이 지금에 와서는 이상하게 느껴졌다. 릴리는 주저하다가 입을 뗐다.
“선생님은, 저의 가정교사인 것이 부끄러우신가요?”
확실히 남자가 가정교사로 일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귀족인 경우는 더더욱 그러했다. 보통 여성 귀족이 가정교사를 맡는 일이 많기도 했고, 남자는 기사나 영지 관리, 사업 혹은 성직자로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정교사는 물려받을 유산이 없거나 벌이가 마땅찮아 하는 일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때문에 남성 가정교사는 아주 학구적인 사람이거나, 아주 높으신 분의 교육을 담당하는 경우가 아니고서야 굉장히 드물었다.
릴리는 제가 그런 아주 높으신 분도 아니니 그가 가정교사라는 일에 당당하지 못할 수 있음을 이해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가 자신과의 연결고리를 부끄러워해 숨기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니 슬퍼졌다. 그와 관련된 일이면 지나치게 감상적이 되는 것 같았지만 서글픈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게 아닙니다, 아가씨. 그저…….”
하이드는 할 말을 골랐다. 지금 신분을 속이고 잠입 수사 중이기 때문에 자신의 얼굴을 아는 귀족을 만나면 곤란하기 때문에 그렇다, 라는 말을 어떻게 돌려서 전한단 말인가?
“그저?”
“때가 되면 알려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