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는 열등생
하이드와의 외출은 굉장히 즐거웠다.
릴리가 처음 가보는 고급 레스토랑의 식사는 무척 훌륭했다. 그녀는 하이드의 팔에 손을 얹고 처음으로 수도의 거리를 구경했다. 수도에 올라온 지 몇 달이 지났음에도 오늘이 첫 외출이었다.
수도의 거리는 릴리의 고향과 비교도 되지 않게 활기를 띠고 있었다. 가끔 근교의 큰 도시로 모자를 사러 나가기도 했었지만, 수도는 그곳보다 훨씬 규모가 컸고, 사람이 많았다.
누가 봐도 귀족인 그들에게 몸을 부딪혀가며 지나가는 간 큰 평민들은 없었으나 하이드의 팔을 잡고 있는 손에 자연스럽게 힘이 실렸다. 수도에서 눈 감으면 머리채를 잘라간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거리를 보는 릴리의 눈이 생기로 반짝였다.
바르딘 자작은, 정말로 이 어린 아가씨를 데려와서 집 안에 가두고 신부수업만 시켰나 보군…….
수많은 인파에 기가 질려 그의 팔을 꼭 붙잡고 있으면서도 생글거리는 릴리를 보며 하이드는 턱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바르딘 자작은 처음부터 꼴 보기 싫은 양반이었지만, 알면 알수록 더했다.
릴리의 첫인상이 우울해 보였던 까닭은 진짜로 그녀가 우울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밖에 나온 그녀는 곧잘 미소를 짓기도 하면서 그를 심란하게 하니까.
“거리 구경을 했으니 이제 카페에 가서 좀 쉬실까요, 아가씨?”
“카페요?”
릴리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거의 소리치듯 물었다.
카페라니! 요즘 수도의 번화가에는 카페라고, 귀족과 서민 너 나 할 것 없이 음료를 즐기는 공간이 있다고 소문으로만 들었었다. 처음 마주친 사람들끼리 토론을 하기도 하고 예술가들이 서로 의견을 나누기도 하는 새로운 문화의 공간이라고 했다. 무척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며 언젠가 자신도 갈 수 있을까 꿈꾸던 곳에 가게 된다니. 릴리의 걸음이 빨라져 하이드는 그녀 몰래 웃었다.
하이드는 늘 자신이 어렵고 멀게만 생각하던 것들로 아무렇지도 않게 이끌어주었다. 이런 사람에게 어떻게 설레지 않을 수 있을까.
“릴리 아가씨께서는 달콤한 음료를 즐기시나요, 아니면 커피를 좋아하시나요?”
“오늘은 커피를 마셔보고 싶어요.”
하이드는 릴리에게 차가운 것이 좋은지, 뜨거운 것이 좋은지 묻고 우유가 들어간 것이 좋은지, 크림이 들어가면 좋겠는지 세세하게 물었다. 그는 대답을 듣고 나서 그녀를 볕 좋은 창가 자리에 앉혀둔 채 주문을 하러 갔다. 카페가 수도에서 큰 유행이라더니 정말로 실내에 사람이 많았다.
자신이 아무것도 몰라 촌티를 풍기며 하이드를 피곤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고 있는 릴리는, 남들이 보기엔 우수에 찬 가련한 미녀였다. 홀로 창가에 앉아서 수심에 찬 표정을 하고 있는 그녀를 사람들이 흘긋흘긋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생각에 빠져있던 그녀도 차츰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곤 당황했다. 옷차림에서부터 촌티가 나는 것일까? 왜들 그렇게 쳐다보는 거지? 그녀의 동요하는 눈으로 하이드를 찾으려 할 때, 내내 기회만 노리던 사내가 다가와 자연스럽게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운명의 상대를 마주치기에 모자람이 없는 아름다운 날입니다. 당신에게 마음을 빼앗긴 사내에게 시간을 내어주시겠습니까?”
“저는, 일행이 있어요.”
릴리는 눈에 띄게 동요했다. 고향에서 그녀는 그녀 또래 사내들 모두의 첫사랑이었지만, 서로 코흘리개 시절부터 아는 사이라 이런 노골적이고 번드르르한 수작을 거는 이는 없었던 것이다. 겁먹은 듯 동공이 흔들리는 그녀를 보며 사내는 사냥감을 사지로 모는 듯한 쾌감이 느껴졌다. 저 가련한 자태! 그녀에겐 사내를 흥분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일행분이요? 제가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디 카페란 여러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곳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디, 잘 말씀해 봐.”
주문을 하고 돌아온 하이드가 자신의 자리에 앉은 사내의 어깨를 부러뜨릴 듯 강하게 쥐며 말했다. 릴리의 앞에 서서 등으로 그녀의 시야를 가린 하이드의 얼굴은 몹시 험악하게 구겨져 있었다. 하이드의 악력에 체면이 상하게 으윽, 신음을 내뱉은 사내는 실례했다며 고개를 숙이고서 빠르게 떠났다.
“선생님……!”
릴리는 구세주를 만난 듯이 반가워하며 배시시 미소 지었다. 그녀의 미소에 왜 저런 놈팡이를 상대해주었느냐, 조금 짜증을 내려고 했던 생각이 스르륵 사라졌다. 그녀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자신이 자리를 비우지 말았어야 했다.
“이참에 아가씨께 몇 가지 더 알려드려야겠습니다.”
하이드는 한숨은 속으로 삼키고 미소 지었다.
릴리는 그가 혼자서 커피 주문하는 법을 알려주려나 했지만, 그는 낯 뜨거워질 정도로 그녀를 칭찬했다. 요약하자면 그녀는 몹시도 예쁘고, 사랑스럽고, 귀여우니 낯선 사람들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듣는 내내 릴리는 얼굴이 달아올라 홧홧해서 손부채질을 해야 했다.
“선생님이 관대한 심미안을 가지고 있고, 미의 기준이 남들보다 낮다는 건 잘 알겠어요. 하지만 정말로 사람들이 저를 음, 그렇게 좋게 본다고 한들 그게 어떻게 위험한지는 이해가 가지 않아요…….”
“순결하고 깨끗한 릴리 아가씨의 머릿속을 더러운 것들로 흐리고 싶지 않지만, 사내들은 신사와 무뢰배를 가리지 않고 음습한 욕망을 갖고 있습니다. 달콤한 말로 사랑을 속삭이며 기회를 엿보다 당신의 속살을 파고들 생각뿐이죠. 그저 방식의 차이만이 있을 뿐입니다.”
하이드는 독주를 입 안에 머금었다. 서민들이 즐겨 마신다는 싸구려 독주를 삼키고 목을 타고 불길이 타들어 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내장을 다 태울 것 같은 술보다 그녀를 바라만 보는 것이 훨씬 더 괴로웠다. 그가 말하는 음습한 욕망을 가진 사내들에 그 또한 포함되어있기에.
그는 이곳에서 지금 당장이라도 남들이 흘끔대는 그녀의 쇄골을 핥고 보란 듯이 탐스러운 가슴을 쥐어 뭉개고 싶었다. 그의 사랑스러운 아가씨는 그녀를 지켜줄 기사나 영원한 순정을 맹세할 왕자 따위를 꿈꿨겠지만, 현실에서 기사는 창녀촌에서 땀을 흘리고 왕자는 여러 처첩을 거느리고도 새로운 여인을 찾는다. 그녀는, 꿈속의 상대를 찾기보다 추악한 현실을 즐기는 편이 낫다.
하이드가 그녀의 취향을 파악해 손수 골라준 크림이 가득한 커피는 부드럽고 달콤했다. 커피는 쓴맛이 나고 잠도 빼앗을 정도로 독하다고 했지만, 그녀가 마시고 있는 커피는 그렇지 않았다.
선생님은 어째서 자신에게 겁을 주는 것일까? 그는 모든 사내가 음습한 기회주의자라고 말했지만, 정작 그는 그래 보이지 않았다. 하이드는 그녀가 그려왔던 다정한 연인보다 더 다정했다.
“선생님도 그런가요? 제게 이렇게 잘해주고 있으시면서, 제 옷을 벗길 기회를 노리시고 있나요?”
릴리는 볼을 발갛게 물들이고서 순진한 눈망울로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두 손은 커피잔을 꼭 쥐고 있었다. 창가로 내리쬐는 햇빛에 그녀의 긴 속눈썹이 뺨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는 말간 호박색 눈동자가 호기심과 비슷한 기대를 내보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이드는 저런 순진해 빠진 말간 얼굴로 자신을 도발할 수 있음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리고 흥분했다.
“네.”
씨익, 달큼하게 눈을 접고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은 그는 맞은편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의 왼손을 잡고 그녀의 손바닥을 자신의 엄지로 부드럽게 문지르며 귓가에 숨을 내뱉듯 작게 그의 욕망을 속살거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의 거추장스러운 옷을 찢어발기고 크림처럼 뽀얀 그녀의 젖가슴을 주무르고 젖꼭지를 빨며 아래를 지분거리고 싶습니다. 아가씨가 발정 난 고양이처럼 울면서 조를 때까지 질척거리는 아래를 손가락으로 쑤셔주고 가느다란 허벅지를 활짝 벌려서 제 성기를 꽂고 흔들고 싶어요. 아가씨의 질이 제 성기 모양이 될 때까지요.
아가씨가 아래가 허전해서 못 살겠으니 얼른 박아달라고 조를 만큼, 그 귀엽고 음란한 구멍을 제 것으로 길들이고 싶어요. 저는 항상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따위의 내용이었다.
귀로 들어오는 낮은 중저음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손가락으로 손바닥을 문지르는 것뿐인데 이상하게 외설적으로 느껴졌다.
무례하기까지 한 그의 저속한 속삭임에도 그녀는 기분이 불쾌해지기는커녕 가슴속에 묘한 기대감이 서렸다. 자신은 음란한 여자일지도 모른다. 외출은 즐거웠지만, 밖이 아니라 평소처럼 저택이었으면 그가 속삭임을 그대로 실천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릴리는 음탕한 말에 기묘한 기대와 흥분감으로 몸이 달아오른 것이 느껴졌다. 자신은 지금 그에 의해 타락하고 있는 걸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것이 연애이고 언젠가 겪을 일이라면 그를 통해 배우는 것이 좋았다. 이 이상을 알고 싶었다.
언제까지고 동화 속 왕자님을 그리는 촌뜨기 소녀로 남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곧 모르는 남자를 만나 현실의 결혼을 하게 될 테니까. 그녀는 눈을 꼭 감고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렇게 해주세요.”
“바보 같은 내 아가씨……. 저는 방금 전에 경계하라고 가르쳤는데요.”
“하지만 선생님은 제게 연애를 가르치시고 있잖아요. 모순적인걸요.”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내를 경계하면서 어찌 사내와 어른스러운 연애를 할 수 있겠어요?
그녀가 조용조용히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미간을 좁히고 눈을 피하는 태도에 자신의 말에 대한 자신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하이드가 이 먹음직스러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릴리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선생님의 깊은 뜻을 몰라주며 가르침에 반박하는 버르장머리는 고칠 필요가 있지. 하이드는 남아있는 독주를 한 입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아가씨, 오늘의 외출은 즐거우셨나요?”
“네. 무척이나요.”
“릴리 아가씨께서 즐거우셨다니 저에겐 더없는 영광입니다. 바르딘 자작께서 저택에서 걱정하고 계실 테니 이만 저의 마차로 저택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하이드는 그림 같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마차로 에스코트했다. 마부가 널찍하고 고급스러운 문을 닫자마자 하이드는 답답한 듯 목의 넥타이를 풀어 헤치며 그녀를 푹신한 의자로 넘어뜨렸다.
“저는 대단치 않은 사내지만, 릴리 아가씨에게만큼은 신사적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아가씨께서 이렇게 저의 가르침을 헛되이 여기시니, 말을 안 듣는 학생에겐 벌을 주어야겠지요.”
하이드는 어두워진 눈으로 잡아먹을 듯 그녀를 노려보며 그녀의 위에 올라탔다. 웃음기가 싹 가신 그의 표정은 차가웠지만 두 눈동자만은 무서울 정도로 뜨거웠다.
“사내의 욕망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직접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릴리는 급작스러운 전개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마차의 문이 닫히자 마치 사람이 변한 듯 하이드가 그녀를 밀어 넘어뜨리고서 그 위로 올라탔다. 턱에 힘이 단단히 들어간 그가 넥타이를 풀어 헤치고 그녀를 노려보는 모습은 미치도록 야했다.
무서워야 하는데, 라고 생각하지만 릴리는 그저 그의 조각 같은 얼굴과 평소와 달리 단정치 못한 목덜미를 넋 놓고 쳐다보았다.
도드라진 목울대와 탄탄한 가슴팍에서 그가 그녀와는 다른 성별임이 여실히 와닿았다. 이마를 맞대고 말없이 그녀를 응시하며 그르렁대는 모습이 짐승처럼 사나웠다.
그가 거칠게 내쉬는 숨에 콧잔등이 간지러웠다. 오직 그녀만을 담고 있는 눈동자를 릴리 또한 홀린 듯 바라보았다. 릴리가 손을 들어 그의 뺨에 얹고 살며시 쓰다듬자 하이드는 물어뜯을 것처럼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그의 입술은 무척 뜨겁고 무자비했다. 평소처럼 그녀가 따라오도록 배려하지도 숨 쉴 틈을 주지도 않았다. 두꺼운 혀가 멋대로 그녀의 입 안을 휘젓고 타액을 빼앗아갔다. 하이드는 며칠을 갈증에 시달린 사람처럼 그녀를 갈구했다.
입술은 부드러운데, 입맞춤은 거칠었다.
릴리는 그가 자신을 나락으로 몰아붙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꼭 감고 있는 두 눈을 뜨면 아찔한 절벽 밑으로 떨어질 것만 같아 그에게 절박하게 매달렸다. 뜨거운 진창을 허덕이듯 갈급한 입맞춤에 온몸이 예민해졌다. 그의 손길이 스치기만 해도 몸이 떨리며 예민하게 달아올랐다.
하이드는 숨이 모자라 할딱대는 그녀의 귀를 핥았다. 축축한 혀가 귓바퀴를 지나가는 느낌에 솜털이 곤두섰다. 하이드는 옷 위로 그녀의 가슴을 주무르며 그녀가 가쁜 숨을 내쉬는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언제 보아도 짜릿한 절경이었다.
그녀 자신은 모르겠지만 흥분해서 흐려진 그녀의 눈동자는 그에게 언제나 최고의 흥분을 안겨주었다.
쾌락에 젖어 원초적인 본능을 좇는 그녀의 모습은 그에게 극상의 탐미를 부추긴다. 귀가 예민한 듯 그녀에게서 가냘픈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통통한 가슴을 주무르며 만족한 듯 귓가에 내뱉는 그의 나직한 신음이 릴리에겐 지독히도 자극적이었다.
릴리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다리를 꼬며 더 큰 자극을 원했다. 그러나 하이드는 집요하게 귀를 빨고 핥으며 그는 옷 위로만 유두 부위를 꾹 눌러 자극하고 뭉클한 가슴을 강하게 쥐었다 놓으며 주물렀다. 릴리가 애원하듯 앓는 소리를 내며 그의 머리를 가슴으로 당기자 그제야 그녀의 드레스 어깨를 내려 드러난 가슴을 빨았다.
하이드는 릴리가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매달리거나 조르는 것이 좋았다. 몰아치는 쾌락의 파도에서 그에게 의지하는 모습은 그를 배부른 사자처럼 만족하게 만들었다. 그의 성기가 터질 듯 부풀고 당장 그녀의 옷을 찢어발기고 싶어도, 그녀가 쾌락의 늪에서 자신에게 매달리는 것을 볼 수 있다면 하이드는 참을 수 있었다.
그녀의 가슴은 달았다. 그녀의 체취는 캐러멜과 생크림을 떠올리게 했다. 그런 체취를 맡으며 부드러운 피부를 빨면 정말로 단맛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혀로 유륜을 덧그리듯 핥고 손으로는 다른 쪽 가슴을 주물렀다. 하이드는 유두를 입안으로 빨아들이며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새된 신음 소리를 즐겼다.
릴리는 신음 소리가 작았다. 가냘프고 애처로운 신음은 사내를 달구는 불쏘시개처럼 성애의 흥분을 가증시켰다. 그녀가 작게 비명 지르며 몸에 힘을 주면 그는 자신이 만져지는 것처럼 쾌락을 느꼈다. 하이드의 성기 끄트머리가 젖어 들었다.
릴리는 흐읏, 소리를 죽여가며 흥분을 눌러 참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마차의 좌석에 반쯤 발가벗겨진 채 눕혀져 무자비한 손길에 정신없이 쾌락에 빠지고 있었다. 창문은 닫고 있지만, 말발굽이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마차가 덜컹대는 소리가 들렸다. 거리의 사람들이 그들을 지나쳐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빠져들다니.
하이드는 릴리의 가슴을 정말 맛있다는 듯이 빨았다. 그녀는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가 그녀의 작은 유두를 사탕처럼 입 안에서 굴리고 깨물고 빨아들였다. 몸이 너무 뜨거웠다. 주체할 수 없는 흥분과 열락에 그녀는 흐윽, 우는 소리를 냈다. 살짝 찌푸려진 큰 눈망울은 반쯤 감긴 채 눈물을 아롱아롱 머금고 있었다.
하이드는 그녀의 드레스를 완전히 벗겨 맞은편 좌석으로 거칠게 던졌다. 얇은 속치마와 속바지마저 가볍게 벗겨졌다. 이미 잔뜩 젖어서 갈라진 윤곽을 고스란히 내비치는 얇은 속옷만이 그녀를 가리는 것의 전부였다. 얇고 작은 천 쪼가리로 음부만을 겨우 가린 그녀는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그녀의 알몸을 빨고 주무르는 일련의 행위들은 마치 여신을 범하는 듯한 배덕감을 안겨주었다. 릴리의 몸을 자신이 쾌락으로 물들인다는 사실만으로도 지독하게 짜릿했다. 어떤 여자도 그에게 주지 못한 쾌감이었다.
릴리는 허벅지를 바짝 모으고 두 손으로는 엉망이 된 얼굴을 가렸다. 이미 많은 것을 보였지만 수치심으로 온몸이 연분홍빛으로 달아올랐다. 하이드는 릴리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좋았다.
정확하게는 부끄러워하는 릴리의 저항을 가볍게 저지하며 더욱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모습을 보는 게 아주 즐거웠다. 하이드는 답답한 듯 자신의 셔츠도 벗어 던지고 그녀의 양 무릎을 잡고 활짝 벌리며 그 안에 자리 잡았다.
그녀가 허벅지를 파들거리며 힘을 주든 말든 그에겐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하이드는 그녀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고서 그녀가 손으로 가리고 있는 얼굴 주위에 가볍게 입 맞추며 손으로는 허벅지 안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릴리 아가씨, 다리를 활짝 벌리고 젖은 아랫도리는 훤히 내보이면서, 예쁜 얼굴은 왜 가리시나요?”
그는 웃음기 담긴 목소리로 네? 하며 손으로는 여전히 연한 허벅지 살을 간질이며 자극했다.
“나의 음탕한 아가씨는 아래를 내보이는 것이 더 좋으신가요?”
수치심을 자극하는 그의 말재주에 그녀는 울먹이며 얼굴을 가리던 팔을 풀고 그의 목에 매달렸다.
“선생님……, 안아주세요.”
그녀로서는 마주 안고 있으면 몸이 안 보일 거라 생각해서 한 말이었지만, 하이드는 딱 미칠 지경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그의 가르침 따위 필요 없을지도 몰랐다. 릴리는 타고난 요부였다. 사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그녀는 말을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칭얼거리듯 자신을 끌어안는 릴리가 사랑스러워 가슴이 간질거렸다.
“하아, 아가씨는 정말 야한 몸을 가지셨네요. 만져준 적도 없는데 이렇게 푹 젖었어요.”
하이드는 그녀의 수줍음 많은 성격도, 그와 반대로 솔직하고 예민한 몸도 사랑스러웠다. 정말 한입에 삼킬 수도 있을 것 같다. 잔뜩 달아올라서 얇은 천 위로 가볍게 누르기만 했는데도 그녀의 몸이 벌벌 떨렸다. 그녀의 아래는 속옷 위로도 축축하게 애액이 배어날 정도로 흠뻑 젖어있었다.
“아래를 만져주는 게 좋아요, 아가씨?”
릴리는 차마 대답할 수 없어서 고개를 가로저으며 끙끙 앓았다. 아래를 지분거리는 손길이 미치게 자극적이었다. 온 신경이 아래로 쏠린 것 같았다.
그는 질척거리는 속옷 위로 음부 전체를 감싸듯 덮고 뭉근하게 자극했다. 젖은 천이 손에 달라붙는 느낌이 좋았다. 도톰하고 작은 살집이 뜨겁게 달아올라 있는 것이 느껴졌다. 하이드는 갈라진 틈 위로 중지를 진동하듯 빠르게 움직였다. 아아앗, 달콤한 신음 소리가 공기를 데웠다.
천이 더 흡수할 수 없을 정도로 애액이 왈칵 흘러내렸다. 하이드는 젖은 천 쪼가리를 그녀의 몸에서 벗겨내고 흉흉해 보일 정도로 짙어진 눈으로 그녀의 음부를 바라보았다.
팔뚝에 핏줄이 돋아났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쉬며 뇌를 절절 끓이고 있는 욕망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그녀를 이곳에서 안으면 안 되는 이유를 스무 가지쯤 떠올렸다.
비록 자신이 발가벗겨 놓고 물고 빨고 울렸지만, 그녀는 그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이곳에 있는 게 아니었다. 성욕을 위해 만난 다른 여자들이었다면 마차에서도 거리낌 없이 서로를 탐했겠지만, 자신은 성욕 때문에 그녀를 만나고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의 안에 이름 붙이지 못한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성 경험이 전무했다. 첫 경험을 덜컹대는 마차 안에서 치르게 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그녀를 귀하게 대하고 싶었다. 사주식 침대에 장미 꽃잎을 뿌려주진 못할망정 쿠션조차 적당찮은 마차에서는…….
손가락으로는 부지런히 그녀를 애무하면서도 그는 끔찍할 정도로 절제 중이었다. 도톰한 살점을 벌리자 빨갛게 달아올라 번들거리는 점막이 보였다. 그는 질구부터 음핵까지 애액을 잔뜩 묻힌 손가락으로 아래위로 문질렀다.
그에게 매달리고 있는 팔에 힘이 들어가고 입에선 참을 수 없어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하이드는 아가씨는 너무 잘 느끼시네요. 기분 좋아요? 따위를 말하며 안 그래도 정신이 없는 릴리를 괴롭혔다. 음부가 참을 수 없이 달아올랐다.
그가 만져주는 손길이 혀가 아릴 정도로 달콤했다. 하이드의 손가락이 음핵을 비비며 움직일 때마다 찰박거리는 물소리가 났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그녀를 더욱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그의 손길이 점점 더 빨라지자 그녀는 사지에 몰린 것 같았다. 꼭 감은 눈앞이 하얬다. 입 맞춰주는 하이드의 혀가 구원인 양 매달리듯 빨았다. 아랫배가 파르르 떨리며 점점 죄는 느낌은 차라리 고통에 가까웠다. 아! 하는 순간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흐르며 그녀는 절정을 맞았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온몸에 힘이 빠졌다. 하이드는 릴리가 절정을 맞이한 뒤에도 달콤하게 욱신거리는 음부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허벅지가 덜덜 떨렸다. 그녀는 방만하게 벌어진 다리를 오므리지도, 옷을 걸칠 수도 없었다. 하이드는 몸의 떨림이 잦아들 때까지 그녀를 안아주었다. 맞닿은 맨가슴에서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심장 박동이 거세게 전해졌다.
탄탄한 하이드의 가슴에 릴리의 것이 눌려서 서로의 감촉이 적나라했다. 몸의 떨림이 멈추고 나니 축축한 음부가 의식되었다. 허벅지까지 미끈거리는 애액이 흘러나와있었다.
원래 이렇게까지나 젖는 것일까?
하이드 경의 말대로 자신이 특별히 음란해서 그런 것일까?
하이드는 릴리를 품에 안아 들고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머리칼에 얼굴을 비볐다. 릴리는 이미 더한 일도 한 사이지만 이렇게 아무런 말 없이 끌어안고 있는 것이 새삼스레 부끄러웠다.
그가 주는 열락에 흘린 듯 빠져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면 눈앞의 그가 굉장히 의식되는 것이다. 마주치는 눈에 비치는 온기가 애정과 닮아있었다. 자신의 착각일까?
* * *
피아노를 가르칠 때의 그는 매우 엄격한 스승이었는데, 요즘 그는 굉장히 다정했다. 어쩐지 지금의 그에게라면 조금쯤 어리광을 부려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수도로 올라와 처음으로 정이 든 사람이니 그럴 만도 했다. 지난 몇 달간 그녀를 끌어안아주고 머리칼을 쓰다듬어준 사람은 그가 유일했으니까. 자신이 그에게 무례하게 굴고 있다고 해도 어느 정도는 그의 책임이 있다고, 릴리는 스스로 합리화했다. 하이드는 늘 자신의 여기저기를 만지니까 그녀도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기대는 것 정도는 괜찮았을 것이다.
저택으로 돌아와 뒤늦게 자신의 행실을 돌이켜보는 그녀는 어느 때보다 생기가 넘쳐 보였다. 릴리의 시중을 드는 하녀, 메리는 언제나 릴리가 미인이라고 생각해왔지만, 오늘의 그녀는 유난히 예뻐 보인다고 생각했다. 메리의 아가씨 릴리는 늘 상냥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분이었지만, 어딘가 우울한 인상이었다. 메리는 그것을 으레 우수 어린 미녀의 모습이려니 하고 여겼더랬다.
지금 시중을 받고 있는 릴리는 눈빛은 꿈결 같았고 뺨은 분홍빛으로 상기되어있었다. 목욕 후 수분을 잔뜩 머금은 피부는 도자기처럼 반질거렸다. 도톰한 분홍빛 입술은 젤리처럼 촉촉하고 말랑해 보여서, 여자인 메리 자신도 한번 만져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가씨가 오늘따라 성숙해 보이시네. 정말로 어여쁜 분이셔. 메리는 관리하는 보람이 있다는 생각을 하며 거울 속의 릴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오늘 외출에서 좋은 일이 있으셨나 봐요, 아가씨.”
“뭐?”
릴리는 하이드 경과의 은밀했던 귀갓길을 떠올리리다 지레 찔려서 소리를 높였다. 이내 민망해서 특별한 일은 없었어, 라고 속삭이듯 덧붙였지만, 그녀가 듣기에도 별일이 있었던 사람 같은 대답이었다.
똑똑.
“들어와.”
민망한 상황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반갑게 맞이했더니 노크를 하고 들어온 이는 바르딘 자작의 장자, 틸리안 바르딘의 시중인이었다.
“도련님께서 오늘 저녁 식사를 함께하시자고 전하셨습니다.”
“아……, 이따 내려가겠다고 전해주렴.”
한집에 살고 있고, 명목상 가족이 된 사이지만, 릴리는 바르딘 자작가에 입적한 이후로는 대체로 혼자서 식사를 해왔었다. 그들이 눈치를 주지는 않았으나 그녀는 그들과의 식사 자리가 매우 불편했고, 혼자 먹는다고 하여도 누구도 상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끔 틸리안이 권하기도 했지만, 오늘은 갑자기 왜 자신을 부르는 것일까?
외출도 허락을 받고 나간 것이고, 귀가도 그리 늦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한 것은 없었다. 릴리는 바르딘 부자 앞에만 서면 스스로가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바르딘 자작은 릴리에게 싸늘했고, 무심했다. 릴리는 군식구였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신분 상승하는 처지였으니 그들의 눈치가 보이는 건 당연했다. 바르딘 자작은 남들 눈을 의식해서인지 형식적인 지원은 모자람이 없었지만, 릴리로서는 그에게 정을 붙이기가 힘들었다. 그나마 틸리안이 그녀에게 신경을 써주기는 했었다.
릴리는 틸리안이 자신에게 신경 써주는 이유는 그녀가 바르딘 가문의 사람이 되었으니 그녀로 인해 체면 상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틸리안은 자상했지만, 두 사람의 처지가 다르다 보니 릴리는 그의 호의를 순수하게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어색한 분위기에서 식사할 생각을 하니 붕 떠 있던 기분이 가라앉았다. 릴리는 하이드가 보고 싶었다.
“릴리. 오늘 네 피아노 선생과 외출을 했다더구나.”
틸리안이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나긴 침묵을 깬 첫마디였다. 셋이서 식사하기에 터무니없이 넓은 식탁 위로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릴리는 틸리안이 자신이 외출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웠다.
“네.”
틸리안은 릴리의 간결한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미간을 좁혔다. 릴리는 심기가불편해 보이는 틸리안의 눈치를 보며 소고기를 작게 썰어 겨우 입에 집어넣었다.
“혼례도 치르지 않은 숙녀가 외간 남자와 나돌아 다니는 것이 보기 좋지는 않구나.”
“하이드 경은 저의 선생님인걸요, 오라버니.”
“선생이면 수업만 하면 될 것이지, 함께 외출한 까닭은 무엇이더냐?”
릴리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그녀는 틸리안이 하이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그가 이렇게 대놓고 적대감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 게다가 남녀가 외출 한 번 했다고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릴리는 보수적인 지방에서 자랐지만, 그곳에서도 젊은 남녀가 한두 번의 만남을 가지는 것을 흠으로 삼지 않았었다.
“제가 수도에서 외출을 한 적이 없어 하이드 경께서 신경 써서 시간을 내주신 것뿐이에요.”
릴리가 마냥 순해 보이는 했던 둥그런 눈매를 새초롬하게 뜨고서 대답했다. 목소리에서 뾰로통한 기색이 느껴졌다. 틸리안이 뭐라고 한마디 더 하려 하자 가만히 듣고만 있던 바르딘 자작이 그를 막아서고 중재를 했다. 릴리의 편을 들었다기보다는 불필요한 언쟁이 성가셔서였다.
“그래, 틸리안, 외출 정도는 할 수 있지 뭘 그리 열을 내느냐? 릴리, 너는 네 오라비가 말씀하시면 알겠습니다, 하고 받아들이는 게야.”
“네. 알겠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틸리안 오라버니.”
틸리안은 그 뒤로 조용히 식사에만 집중했다. 바르딘 자작과 릴리 또한 의례적인 말 몇 마디를 주고받았을 뿐, 저녁 식사 자리는 따뜻하고 풍요로운 음식에도 불구하고 삭막하기 짝이 없었다.
식사가 끝나고 바르딘 자작이 가장 먼저 자리를 뜨고 릴리도 방으로 올라가려는 찰나, 틸리안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릴리, 잠깐 나 좀 보자.”
릴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틸리안이 바르딘 자작이 없는 곳에서 자신을 꾸중하려는구나, 짐작하고 느릿하게 틸리안의 뒤를 따랐다. 평소에는 자상하게만 굴던 틸리안이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릴리를 주눅 들게 만들었다.
차가 주홍빛으로 알맞게 우러났다. 찻잔 위로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다 미지근하게 식어갈 때까지,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릴리는 예의상 차를 한 모금 머금었지만, 자리가 불편하여 차를 즐길 기분이 들지 않았다.
틸리안은 맞은편에 앉지도 않고 창가에 기대어 밖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릴리가 먼저 아무 말이라도 꺼내야 할지 고민했지만, 그녀는 틸리안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지 않았으니 할 말이 없었다.
“릴리, 앞으로 외출이 하고 싶다면 나를 부르거라.”
침묵 끝에 나온 말은 릴리의 예상과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틸리안은 그녀가 외출이 하고 싶어서 하이드와 나갔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말씀만으로도 감사해요. 하지만 이 이상 오라버니께 심려를 끼쳐드리고 싶지 않아요.”
“비록 친오빠는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네 오라비다. 완전 남인 하이드 경보다는 나와 외출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릴리의 입장에서는 얹혀 사는 처지에서 집주인의 아들보다는 가정교사가 훨씬 더 친밀하게 느껴졌었지만, 현명하게도 그 생각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제가 외출할 일이 무엇이 더 있겠어요? 오늘 수도 구경은 다 했으니, 더 이상 오라버니가 걱정하실 일은 없을 거예요.”
틸리안은 물끄러미 찻잔만을 바라보며 대답하는 릴리를 바라보았다. 외출을 마치고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는 만개한 꽃처럼 활짝 핀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다시 오므라든 꽃봉오리 같았다.
이른 저녁 릴리는 틸리안을 보지 못한 듯 정원을 지나쳐 걸어갔다. 그녀는 좋은 일이 있었던 듯 해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틸리안은 들뜬 기색이 역력한 그녀가 문 앞에서 비틀대며 넘어질 뻔했을 때는 심장이 철렁했으나 다행히 릴리는 넘어지지 않고 금방 중심을 잡았다.
틸리안은 그제야 자신이 바보처럼 멈춰 서서 넋 놓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어디를 다녀왔는지 마부에게 물었더니 하이드, 그 작자와 외출을 다녀왔다고 했다.
틸리안은 그녀의 뺨을 상기시킨 이가 그 번드르르한 얼굴의 가정교사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초에 부친은 그녀의 교육에 대해 지나치게 무신경했다. 릴리 같은, 순진한 처녀의 교육을 나이 차도 얼마 나지 않는 젊은 남자가 맡는 것은 적절치 않았다.
틸리안도 처음에는 릴리에게 붙은 선생들에게 일일이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틸리안이 출궁하고 돌아왔을 때는 그녀의 수업이 모두 끝난 상태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하이드를 신경 쓰게 된 것은 복도에서 우연히 하녀들이 꺅꺅거리며 하이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들은 후부터였다.
틸리안은 릴리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선생이 잘생긴 젊은 남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서 곧바로 자작에게 찾아가 항의했지만, 자작은 전혀 듣지 않았다. 틸리안은 이것저것 문제 삼으며 정숙한 부인을 교사로 채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자작은 ‘얘가 대체 왜 이러는 거지?’하고 귀찮은 기색을 팍팍 풍기며 그를 내쫓았다.
틸리안이 문제 삼은 것들은 지나친 우려였고, 릴리의 결혼 또한 얼마 남지 않은 차에 우수한 선생을 두고 다른 선생을 찾는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 자작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틸리안의 우려했던 일들이 이미 벌어졌음을 그도, 자작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틸리안은 오랜만에 함께 식사를 하며 릴리에게 오늘 어딜 다녀왔는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정작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릴리를 타박한 모양새가 되어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아니었기에 정정할 생각은 없었다. 틸리안은 식사하는 내내 릴리에게 할 말을 고르고 골랐으나, 막상 둘만 남으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어쩐지 릴리와 마주 앉는 것도 불편해서 창밖을 보는 척 그녀를 힐끔거렸다. 릴리는 자신을 불편해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아까처럼 해사하게 웃어주면 좋으련만.
틸리안은 그녀를 처음 보았던 날을 떠올렸다. 지금보다 추운, 몹시 추운 겨울날이었다.
* * *
릴리가 살던 지방에서 수도는 꽤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릴리는 혼자 떠나는 마차 여행은 처음이라 무척 긴장한 상태였지만, 자신보다 더 걱정이 많아 보이는 부모를 향해 씩씩한 척을 해야 했었다. 릴리는 눈물을 글썽이다 이내 손수건을 적시는 어머니에게 자신은 다 컸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고작 하루 마차 타고 가는데 무슨 일이 일어나겠냐고 그녀를 안심시켰다.
수도에 도착하면 바르딘 자작가에서 사람을 보내기로 했으니 사실상 릴리가 앞둔 고난은 덜컹거리는 마차에서 온종일 멀미를 참아내는 것, 낡은 여관에서의 하룻밤 정도였다.
마차의 문이 닫히자마자 애써 웃고 있던 릴리의 얼굴이 무너져 내렸다. 릴리가 마차에서 혼자 조용히 우는 것도, 우는 어머니를 감싼 아버지의 눈시울이 붉어진 것도 결코 멀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니.
그녀가 떠난 순간부터 릴리는 이 마을, 이 일상과 작별해야 했다. 어린 동생들의 눈곱을 떼어 주며 시작하는 아침도, 익숙한 언덕의 풍경도, 제인의 경쾌한 웃음소리도, 이웃 아주머니의 산딸기 잼도, 단란한 가족의 저녁 식사도 안녕이었다.
모두가 수도의 부잣집에 시집가는 그녀의 행운을 부러워한다 한들 그녀가 이곳을 떠나는 일이 행복할 리가 없었다. 릴리는 자신이 가진 모든 행복을 두고 가는 것 같아 마음이 아려왔다.
릴리가 수도에 도착했을 때 그녀를 마중 나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은 악의마저 느껴지는 우연의 장난이었다. 돌아갈 길이 먼 마부가 말을 사납게 후려치며 재촉한 끝에 릴리는 예상 시각보다 일찍 도착했고, 굵은 눈발이 휘날리는 날씨에 그녀의 도착을 알리는 전보가 늦게 도착했다. 자작은 지난밤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뻗어있었고, 틸리안의 귀가도 눈으로 늦어졌다.
릴리는 수도 방문이 처음이었다. 그녀가 가봤던 가장 번화한 곳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로제리였는데, 수도는 로제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눈이 펑펑 내리는 날씨에도 사람들은 분주하게 어딘가를 향해 걸어갔다. 그녀만이 바람에 휘날리는 연처럼 갈피를 못 잡고 허둥대고 있었다.
“저기요. 잠시 길 좀…….”
마부는 그녀의 짐을 내려두고 쏜살같이 사라졌고, 릴리는 바르딘 자작가의 주소도 알지 못했다. 마중 온다던 사람이 언제 올지도 몰라 자리를 뜨기도, 그렇다고 한겨울에 밖에서 마냥 서 있을 수도 없었다. 사람들은 갈 길이 급해 릴리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채 빠르게 지나쳤다.
시린 바람이 살을 깎아내리는 것처럼 매서웠다.
젊은 여자 혼자서 마차를 빌리기는 쉽지 않았다. 여행으로 단정치 못한 행색을 하고 눈에 잔뜩 젖어 벌벌 떨고 있는 여자라면 더더욱. 마부는 그녀의 행선지가 바르딘 자작가임을 믿지 못해 릴리는 실랑이를 겪어야 했다. 자작가의 손님이 시중인 하나 없이 눈에 쫄딱 젖어있을 리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그녀는 가방을 열어 바르딘 자작의 인장이 찍힌 편지 따위를 보여주고 나서야 마차를 탈 수 있었다.
틸리안이 저택에 도착하고서야 오늘 오기로 했다던 여인이 몇 시간 전에 도착했다는 전보를 받았다. 그가 릴리를 처음 마주한 것은 틸리안이 방금 벗어놨던 외투를 다시 걸치고 급히 대문을 나서자마자였다. 그녀는 찬바람에 벌겋게 언 얼굴을 하고 커다란 가방을 들고서 휘청이며 문 앞에 서 있었다.
조금 촌스러운 꽃무늬가 수놓아져 있는 로제리식 외투. 빨간 코와 뺨. 속눈썹 위에 떨어진 하얀 눈 결정.
이가 맞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덜덜 떨고 휘청이면서도 그녀의 방으로 안내될 때까지 꼿꼿하게 서 있는 릴리의 모습이 틸리안에게는 조금 인상 깊었다.
틸리안은 그녀의 짐을 받아들고 서둘러 그녀를 방으로 안내했다. 바르딘 자작은 그녀가 왔다는 소식에 잠깐 얼굴을 내밀곤, 안쓰럽다 못해 초라한 그녀의 모습에 혀를 차고 쉬라고 전했다. 하인들이 분주히 난롯불을 키우기도 전에 릴리는 겨우 옷을 갈아입고 쓰려졌다.
릴리가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몸살감기를 심하게 앓는 바람에 틸리안이 그녀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로부터 3일이나 지난 뒤였다.
틸리안은 연약한 여성을 한겨울 밖에서 떨게 만들고, 마중도 제대로 가지 못해 그녀 혼자 저택까지 오게 만든 점이 굉장히 미안했다. 릴리의 열이 떨어지지 않고 펄펄 끓어서 자작은 수양딸을 들이자마자 송장 치르게 생겼다고, 건강하다고 들었는데 비리비리한 계집이 왔다고 역정을 냈다.
틸리안은 부친의 태도에 더더욱 릴리에게 미안해져서 하인들에게 그녀를 살뜰히 보살피라고 강조했다.
릴리는 열이 내리고서야 겨우 침대를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여전히 아픈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하고 자작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 자작은 마른 얼굴에 성미가 사나워 보이는 중년이었고, 릴리에게 살갑지도 않았다. 자작은 릴리를 양녀로 삼았지만, 릴리를 그의 딸로 삼으려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결혼으로 소넬가와 사돈을 맺겠다는 의도가 명백해 보였다.
머리카락 위로 하얀 눈을 소복이 쌓고 있던 빨간 얼굴의 여인이 몸살을 겨우 떨쳐내고 틸리안을 찾아왔을 때, 틸리안은 솔직히 무척이나 놀랐었다. 아픈 낯빛과 수수한 옷차림도 그녀의 섬세한 이목구비를 가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틸리안은 자신을 어색해하며 수줍게 인사하는 릴리를 보고 뒤늦게 생긴 여동생에게 정말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 * *
바르딘 자작이 무관심과 냉대, 물질적 후원으로 릴리를 대했다면, 틸리안과 릴리의 관계는 그것보다 조금 더 복잡했다. 비정한 홀아버지 밑에 외동아들로 자라 정붙일 데가 없었던 틸리안은 여동생이 생겼다는 것이 조금은 기뻤다. 그러나 다 커서 마주한 남녀가 서로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고 릴리는 낯선 환경에 주눅 들어 있었으며 틸리안은 황궁 부기사단장으로 승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무척 바빴다.
자신이 생각해도 그녀에게 자상한 오라비가 되어준 적도, 듣기 좋은 말을 한 적도 없으니 그녀가 자신을 불편해하는 것은 이해가 갔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함께 외출해주겠다고 한 것인데 릴리는 틸리안과 외출할 바엔 외출을 아예 포기할 기세였다. 속이 쓰렸다.
“그간 내가 네게 무심했단 걸 안다, 릴리. 그래도 난 네가 내 여동생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우리가 서로를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으나 앞으로는 인연을 생각해다오.”
“알아요, 틸리안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제게 정말 잘해주고 계세요.”
릴리가 설핏 웃었다. 틸리안은 정말로 바르딘 자작과는 닮지 않았다. 똑같이 무뚝뚝해 보여도 틸리안은 훨씬 다정했다. 표현이 서투를 뿐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꾸중을 하려다가도 결국 자신이 그녀에게 잘해주지 못했다며 반성하는 사람이었다.
“알면, 내 말을 좀 들어다오. 나는 네가 그 가정교사와 너무 친밀하게 지내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야.”
“치, 친하게 지낼 수도 있죠…….”
틸리안의 염려에 뜨끔한 릴리가 소심하게 대꾸했다.
“후우. 남자는 남자가 보는 법이야. 그 남자는 조심하는 편이 좋아, 릴리.”
틸리안이 그녀 앞에서 인상을 쓰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릴리는 그의 말투에서 하이드에 대한 반감이 물씬 풍기는 것을 느꼈다. 틸리안이 그를 싫어할 이유는 전혀 없는데 말이다. 실제로 하이드가 파렴치하고 엉큼한 것과는 별개로 틸리안과 자작에게는 깍듯하지 않았나. 릴리는 하이드 대신 자신이 다 억울한 기분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사람 보는 눈은 있으니까요.”
* * *
오늘은 그녀의 인생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최고로 기쁜 날이었다. 우선 처음으로 수도를 구경하였고, 엄청나게 고급스러운 식당에서 만족스러운 식사를 했고, 그토록 궁금해하던 카페에 가서 커피도 마셔보았다. 그 모든 순간이 하이드와 함께였다.
그는 완벽한 신사였고, 그녀가 그에게 대단히 중요한 사람이라도 되는 양 자상하게 대해주었다. 수업과 사제 관계 이외에 처음으로 쌓은 교류였다. 릴리는 처음 방문한 멋진 장소들보다도 그와 사적인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 더 기뻤다. 하이드 경은 그저 야외 수업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그가 카페에서 제게 해준 찬사들이 완전한 진심은 아닐지언정, 그는 자신을 예쁘장한 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태어나서 본 어떤 남자들보다 강하게 그녀를 원했다. 아니, 사실 그녀가 보기에는 그가 그녀를 원한 유일한 남자였다. 그가 그녀와 외출한 목적이 교육이더라도, 그녀를 가르칠 의무가 없는 그로서는 그녀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이다.
자꾸만 그 호의의 바탕이 되는 감정이 무엇인지 상상하게 된다. 호의 이상의 감정의 징후를 찾아보기 위해 그와 있었던 시간을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그럴수록 선명해지는 것은 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었다.
남녀관계로 고민할 일이 없었던 릴리는 이 분야에 한해서 남들보다 성장이 한참은 늦된 소녀였다. 고작해야 ‘사랑’이니, ‘애틋함’이니, ‘연정’ 같은 활자를 보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찰리와 베스가 언덕의 너도밤나무 아래서 몰래 손잡고 있는 모습에 얼굴을 벌겋게 붉히며 제인과 킥킥대는 것이 그녀의 사춘기였다.
릴리는 어린 동생들을 돌보고 책을 읽고 피아노를 치며 보내는 삶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그녀는 낭만 소설 속 연애 사건들을 부러워하지도 않았다. 숨긴다고 숨겨도 다 드러나는 찰리와 베스의 사랑스러운 눈길을 보면서 조금 부러워하기는 했다. 그러나 마을에는 그녀에게 낭만을 알려줄 사내가 마땅찮았던 관계로, 릴리는 막 성인이 된 지금까지 흔한 첫사랑 하나 없었다.
하이드를 기다릴 때의 초조함, 하이드가 자신을 보고 미소 지을 때의 행복감, 하이드가 그녀를 원하는 것을 깨달을 때의 긴장감을 연인에게나 어울릴 법한 단어로 정의 내려도 될지 확신할 수 없었다. 릴리는 그를 생각하기만 해도 알 수 없는 고양감에 들떴다.
그러나 달콤한 고민과 행복한 회상은 틸리안과의 대화로 막을 내렸다. 그녀의 완벽했던 하루는 말 몇 마디로도 손쉽게 무너질 수 있었다. 틸리안이 했던 말들이 귓가를 맴돌았다.
틸리안과 대화를 하며 릴리는 죄책감과 불안감에 속이 울렁거렸다. 약혼남과의 혼례도 치르기 전에 외간 남자와 비밀을 만들었다. 틸리안이 하이드를 경계해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하이드의 잘못이 아니었다. 릴리는 연애에 능통하다는 약혼자에게 흠이 잡히고 싶지 않았고, 수도식 연애에 흥미가 생겼으며, 그보다 더, 사실은…….
‘선생님과 닿는 게 너무 좋은걸.’
한순간의 깨달음에 릴리는 심장이 쿵,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다. 불안감으로 심장이 기분 나쁘게 두근댔다. 틸리안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하이드처럼 잘생기고 젊은 남자를 가정교사로 두는 일은 아주 위험했다. 애써 무시하려고 했던 불안과 걱정, 상념들이 먹구름처럼 몰려와 머릿속을 흐렸다.
이것이 사랑이라면, 그녀는 부정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었다. 약혼자가 있는 몸으로 하이드를 사랑하게 된다면 마땅한 불행이 그녀를 기다릴 것이다. 하이드 경은 연애에 사랑은 선택이라고 했지만, 평생을 함께할 배우자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불행하지 않을까?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고 결혼을 해도 되는 것일까? 애초에 릴리는 약혼자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 하이드에게 연애하는 법을 배우기로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머릿속에 약혼자는 안중에도 없었다. 릴리는 자신이 약혼자가 아니라 하이드의 마음에 들려고 애쓰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래의 그녀였다면 한참을 헤맸을 결론에 빨리 도달했다. 틸리안의 뜻하지 않은 도움 덕이었다.
* * *
릴리는 지난 밤 자꾸만 하이드를 떠올리고, 그가 다가오는 것을 거부하기는커녕 닿고 싶어 하는 자신을 부정하려 애썼다. 달과 별이 그녀의 고민을 들어주었지만, 릴리는 심란함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거무스름한 눈가로 아침을 맞았다.
입맛이 없어 아침상을 물리고 책을 읽으려는 찰나, 틸리안이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 하녀겠거니 하고 들어오라고 했으나 문 앞에 있는 것은 틸리안이었다. 그의 이른 방문이 당혹스러워 릴리는 읽으려던 책을 손에서 놓칠 뻔했다.
릴리가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고 예의를 차리자 오히려 틸리안이 당황한 모습으로 그녀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어제 네게 한 말들은, 너를 탓함이 아니라 너를 위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런 말로 속을 상하게 하지 말거라.”
틸리안이 릴리의 거뭇한 눈가를 보고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어제 한 말에 그녀의 기분이 상했을까 신경이 쓰여서 아침부터 그녀를 찾아온 것이리라. 그가 원인을 제공하기는 했지만, 틸리안이 잘못한 것은 없었다. 틸리안이 세심하게 그녀의 기분을 살피는 모습에 릴리의 속이 쓰렸다.
틸리안의 목소리는 무뚝뚝했지만 다정함이 묻어났다. 릴리는 그가 정말로 나름대로 자신을 신경 써준 것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틸리안이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진 않으면서도 여전히 서 있는 그에게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바쁘신 오라버니께 폐가 되지 않는다면, 차라도 한잔 하고 가시겠어요?”
“그러지.”
“오늘은 출근 안 하셔도 되나요?”
“너와 잠깐 차 한 잔 나눌 시간은 있다.”
릴리는 생각지도 못한 승낙에 떨떠름한 기분으로 하녀를 불러 찻주전자와 다과를 내오라 일렀다. 말과 말 사이에 비어있는 시간이 길었지만, 그녀는 어제보다는 편한 기분으로 틸리안과의 대화에 임할 수 있었다. 그들의 대화는 주로 그녀가 그의 업무나 일상에 대해 묻고 그가 짧게 대답하는 식이었다.
조금 불편한 시간이긴 했지만, 릴리는 이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 몇 명의 가정교사들을 제외하고 만날 사람이 극도로 적었던 릴리는 늘 외로웠다. 릴리는 그동안 틸리안이 자신에게 신경 쓰는 모습을 보며 그저 틸리안 오라버니는 훌륭한 성품을 지니셨구나, 했다.
또한, 그녀는 두 사람의 관계가 다정하거나 정답다기보다는 그들이 같은 성(姓)을 공유하는 관계임을 내보이기 위한, 조금 대외적이고 형식적인 쪽이라고 생각해왔었다. 그러나 조금 삐딱한 관점으로 그를 바라보았던 릴리와는 다르게 틸리안은 그녀를 진심으로 대하는 것 같아서 릴리는 가슴이 간질거려 왔다.
고향에선 북적이는 형제자매들, 마음을 나눌 가까운 친구, 교류가 잦은 이웃들로 둘러싸여 있던 릴리에게 이곳은 너무 적막했다. 그래서 하이드 경의 친절함에 더욱 맘이 간 걸까?
“지금은 웃는구나.”
“네?”
“도통 웃는 얼굴을 보이지 않기에 하는 말이다. 웃어야 복이 온다니 자주 웃거라.”
틸리안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말을 했다는 생각에 민망해졌다. 주위 사람들에게 무뚝뚝한 자신을 놀리듯 하던 말이 세뇌가 되었나 보다. 릴리는 웃어른이나 할 법한 말이 틸리안에게 나온 게 의외였지만 또 생각해 보면 그에게 어울리는 것 같아서 살포시 웃었다.
틸리안은 자신이 웃으라고 말해놓고 막상 릴리가 웃으니 그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는 최대한 그녀에게 잘해주고 싶었음에도 이상할 정도로 릴리를 대하는 게 어려웠다.
“이만 갈 테니 책을 마저 읽거라. 방해가 길었군. 그리고 가끔은 저녁 식사 자리에 함께하자.”
“네, 저녁에 뵈어요, 오라버니.”
릴리는 언제나 마음을 쉽게 열었다. 자작가에서 그녀의 마음을 얻은 사람이 진작에 없었던 것이 놀라울 정도였다. 그녀는 상냥하고 정이 많았다. 그녀 안에서 어려운 자작가의 도련님이었던 틸리안이 하루아침에 표현은 서툴지만 다정한 오라버니가 된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사람을 잘 믿고 금방 정을 붙이는 것이, 릴리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 * *
저녁 시간이 되어 릴리가 내려오자 바르딘 자작은 마침 잘되었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
“르시엔 경이 이틀 뒤에 방문하기로 했다. 오후에 회화 수업이 끝난 후쯤 오실 것 같더구나. 말 안 해도 중요한 일인 걸 알 것이라 생각한다.”
바르딘 자작은 창백해진 릴리가 수저를 전혀 들지 않고 있는 것도 보지 못한 채 말을 이어나갔다.
“내 너를 좋게 봐서 소넬 가와 연을 맺게 해주는 것을 감사히 여겨, 매 순간 은혜를 생각하며 처신을 똑바로 해야 한다. 알겠느냐? 그날은 신경 써서 단장하고. 자작가 여식은 수수한 것도 흠이다.”
“네, 자작님. 자작님의 은혜는 늘 마음에 새겨놓고 있습니다.”
“르시엔 경은 아직 정식 약혼도 하지 않았는데 집에 찾아온다는 겁니까?”
“틸리안, 무슨 바보 같은 소리냐. 소넬가와는 이미 약혼이 성사된 것이나 다름없지. 일주일 내로 약혼반지와 서약서를 주고받기로 하였다. 르시엔 경은 곧 우리 가족이 될 터인데, 지금 당장이라도 찾아온들 그게 무슨 흠이 되겠느냐?”
“……확실히 그자는 겨우 이런 걸로 흠이 될 수준이 아니지요.”
틸리안은 잇새로 짓이기듯 말을 내뱉었다. 릴리안은 그의 어조에서 틸리안이 르시엔 경을 좋게 보지 않는다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릴리의 부모는 그녀가 백작가의 장자와 결혼한다는 사실만으로 감개무량하였고, 그것이 릴리의 인생 최고의 행운인 양 바르딘 자작에게 감사했다.
그녀의 부모들뿐만 아니라 이웃과 친구들마저 이 혼사 하나로 남은 그녀의 인생이 활짝 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곤궁한 남작가 셋째 딸에게 돈 많은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 이상의 성공이 있을까?
모두 그렇게 말하기에 릴리도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다.
잘 배운 귀한 댁 도련님이니 좋은 분이시려니 하면서. 사람들이 말하는 것만큼의 행운, 혹은 행복의 크기가 그녀에게는 와닿지는 않았으나, 나이 든 귀족의 두 번째 부인이 되는 것보다는 이쪽이 훨씬 나은 길임은 분명했다.
“틸리안 오라버니는 르시엔 경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신가요?”
“……그자에 관해선 할 말이 없구나. 나는 그자에 대해 왈가왈부할 만큼 친분이 있지 않으니.”
틸리안은 릴리가 무안해질 정도로 싸늘하게 대꾸했다.
“곧 직접 만나게 될 터인데 급하게 굴 것 없다.”
바르딘 자작은 그것으로 대화에 종지부를 찍었다. 릴리는 어쩐지 두 사람이 르시엔 경에 대해 말을 아낀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궁금증을 해소할 길이 없었다. 그녀가 약혼자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무척 사교적인 성격에 외모도 훌륭하다는 것이었다.
그런 사람이 왜 자신과 결혼을 할까, 고민해 보았지만 결론은 가문 간의 화합을 위해서, 정도였다. 바르딘 가와 소넬 가의 화합을 다지기 위해 그녀가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납득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녀 자체는 별 볼 일 없더라도, 지금 릴리는 바르딘 자작가의 사람이 되었으니까 남들 눈에 구색은 갖춘 셈이었다.
* * *
저녁식사를 마친 뒤, 틸리안은 그의 부친을 따라 서재로 들어갔다. 바르딘 자작은 굳은 얼굴로 자신의 책상 앞에 서 있는 틸리안을 심드렁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릴리의 약혼자 이야기를 꺼냈을 때부터 제 아들놈이 또 시답잖은 소리를 하리라 짐작한 바였다.
“아버지.”
“그래. 내가 니 아비 맞다.”
“릴리를……, 그런 자와 결혼시킬 수는 없습니다.”
“릴리? 틸리안. 네가 뭔가 착각하고 있구나. 그 계집애는 그러려고 데려온 것이다.”
“릴리는 르시엔 소넬이 어떤 놈인지도 모릅니다. 릴리가 알았더라면 이곳으로 오지 않았겠지요.”
“틸리안 바르딘. 너는 아직도 너무 무르구나.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 계집애가 순진하게 생겼다고 정말로 순진할 거라 생각해? 그 애가 이름만 아는 약혼자를 뭐 사랑이라도 해서 결혼하는 줄 알아?”
바르딘 자작이 드물게 언성을 높였다. 그는 제 아들이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틸리안은 자작의 유일한 후계자였다. 남들은 젊은 나이에 황궁의 부기사단장이 된 틸리안을 두고 번듯한 아들을 두었다고 자작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하곤 했지만, 자작의 눈에 틸리안은 한참 부족했다.
자작은 틸리안이 기사가 되는 것도 반대했었다. 틸리안은 바르딘 가의 유일한 후계자였다. 물려받을 작위도 없는 귀족 자제들처럼 기사직에 목을 맬 필요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그는 바르딘 가의 사업을 이어야 했다. 그러나 틸리안은 장래를 위한 교류에 힘쓰기는커녕 사업에는 통 관심을 가지지 않고 수련만 했다. 자작이 틸리안의 행적을 도저히 마음에 들어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틸리안은 자작의 성격을 전혀 닮지 않았다. 자작은 어떻게 저런 놈이 나왔는지 분통이 터졌다. 자작은 아들의 우직하고 고지식한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성품은 기사직에는 더할 나위 없었으나 사업에는 맞지 않았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놈은 마음이 쓸데없이 물러빠져서 수양딸이라고 데려온 계집애한테 정을 붙인 것이 분명했다.
“릴리의 부모가 그자에 대해 알면 이 결혼을 찬성할 것 같습니까? 제 귀한 딸이 고생할 것이 훤한데 말입니다.”
“그자들이 시골 사람이라고 순박할 성싶더냐? 그자들은 딸을 부잣집에 시집보내는 게 가장 큰 목표인 사람들이야. 그리고 난 그걸 도와주었다. 그것도 내 돈을 써가며!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더냐?”
“은혜요? 하……, 이 혼인은 아무것도 모르는 애를 곰이 자고 있는 동굴로 밀어 넣는 짓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틸리안! 내 너의 그 방자한 말버릇을 얼마나 봐주어야겠느냐! 이 어리석은 것. 지참금도 없는 가난한 귀족 여식이 어떻게 되는지 정녕 모른다고 말할 게냐? 응?”
틸리안이 참담한 얼굴로 침묵했다. 그 표정에 바르딘 자작이 쯧, 혀를 차고 말했다.
“그 애는 고작해야 시골 변방에서 애가 줄줄이 딸린 노친네의 두 번째, 아님 세 번째 부인이 되겠지. 그것도 아니면 평생을 남의 집 바느질감을 얻어 겨우 입에 풀칠을 하거나. 그게 네가 그 계집에게 주고 싶은 삶이냐?”
바르딘 자작의 말은 차갑게 들렸으나 그가 일부러 부정적인 전망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충분히 일어날 법한 예상이었다. 틸리안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아서 전보다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소넬 가와 연을 맺고 싶은 아버지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이 방법만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릴리에게는 다른 좋은 짝을 찾아주고…….”
“쯧……. 네가 그 애의 반반한 낯짝에 홀리기라도 한 게야? 나는 자선사업가가 아니다. 틸리안, 가문에 득 되지 않을 사람을 거둘 이유가 없다. 그 애는 남편감을 고르고 수도에 올라온 게 아니야. 안락한 삶을 선택한 거지.”
“하지만……!”
“닥치거라!”
쾅!
틸리안이 더 말을 하려고 하자 자작이 책상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벌게진 얼굴에 자작의 노여움이 선명했다.
“내가 네 어리광을 받아주는 것은 저번이 마지막이라고 했다! 다시는! 다시는 이 일로 내 언성을 높이게 하지 말거라. 알았느냐? 이 모자란 놈 같으니. 꼴 보기 싫으니 나가거라.”
노성을 내지른 바르딘 자작은 손으로 제 이마를 짚으며 눈을 감았다. 바르딘 자작은 틸리안에게 엄했다. 그는 빈말로도 다정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아버지였다. 그러나 바르딘 자작은 제 하나뿐인 혈육을 끔찍이도 아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아들이라고 해도 아내가 죽고 남은 것은 틸리안뿐이었다.
자작은 그가 갖지 못한 권세와 부를 아들에게 주고 싶었다. 무리한 사업 확장도 소넬 가와의 결합도 다 아들을 위한 것이었다.
‘철없는 것…….’
* * *
틸리안은 부친에게 더 말하지 못하고 서재를 나가야 했다. 그는 이미 자작의 기대를 꺾은 전적이 있었다. 자작의 말대로 더 이상의 어리광은 용납되지 않는 것이었다.
틸리안은 진작 사업을 물려받을 준비를 해야 했지만 부친에게 조건을 걸고서 겨우 그 의무를 면하고 있었다. 조건 하나는 기사로서의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기사직을 포기하는 것 외에 부친의 모든 명을 어기지 않는 것이었다.
게다가 바르딘 자작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래서 더더욱 입안이 썼다.
틸리안은 자신의 처지가 한심했다. 그는 릴리를 지켜주고 싶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말갛게 웃던 릴리의 얼굴을 떠올리면 무력한 자신이 끔찍했다. 그러나 틸리안이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는 부친의 명을 어길 용기도, 릴리의 약혼을 막을 힘도, 그녀에게 좋은 혼처를 찾아줄 능력도 없었다. 어쩌면 부친의 말대로 이대로 결혼하는 것이 그녀를 위한 길일지도 몰랐다. 처참한 현실에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 * *
릴리는 평소보다 훨씬 더 단장한 상태였다. 수업 이후에 만날 약혼자 르시엔 경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였다. 바르딘 자작이 나가기 전 그녀의 시중을 드는 하녀에게 당부를 해놨기에 릴리는 여느 때보다 화려했다.
자연스럽게 굽이치는 금발을 불에 달군 봉으로 말아 옆머리는 남기고 뒷머리는 우아하게 틀어 올렸다.
화장도 평소보다 진했다. 눈두덩이에는 전체적으로 연한 분홍색을 칠하고 눈꼬리에는 붉은색을 발랐다. 긴 속눈썹과 모양 좋은 눈썹은 덧그려 진하게 강조했다.
진주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피부에 하얀 분을 발라 보송하게 표현하고 평소보다 진한 붉은 색 연지로 입술을 칠했다. 이렇게 새빨간 색은 릴리의 취향에는 썩 부합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얌전히 앉아있었다.
큼직한 진녹색 에메랄드를 중심으로 작은 연녹색 페리도트가 박혀있는 귀걸이와 목걸이가 그녀의 우아한 목덜미 위에서 고급스러운 존재감을 뽐냈다. 자줏빛 드레스는 깊게 파여 그녀의 윗가슴을 봉긋하게 드러냈다.
잘록한 허리와 대비되게 소매는 넓고 치맛자락은 풍성했다. 가슴팍의 자잘한 주름은 그녀의 풍만한 가슴을 강조했고 소매와 치마의 끝자락에 덧대어진 검은색의 섬세한 레이스 장식이 성숙한 분위기를 풍겼다.
릴리는 주로 청순하고 귀여운 옷차림을 즐겼기에 이런 낯선 차림새가 어색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릴 때마다 돌돌 말린 옆머리가 뺨을 간질였고 귀걸이가 귓불을 잡아당기듯 무거웠다.
지나칠 정도로 꾸민 것 같아서 오히려 부끄러웠다. 약혼자를 저택에서 잠깐 얼굴을 보는 것뿐인데 무도회라도 나가는 것처럼 화려하게 꾸민 모습이지 않나.
* * *
“선생님, 오셨어요.”
“아가씨를 만나는 것은 늘 제 삶에서 가장 큰 기쁨이었으나 오늘은 그 기쁨이 아주 극진하군요.”
“선생님은 늘 유창한 말솜씨로 저를 과분할 정도로 부끄럽게 하시네요.”
“아가씨는 지나친 겸손으로 저를 무안하게 만드시고요.”
하이드는 릴리의 턱 아래에 손가락을 넣고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려 릴리를 자세히 뜯어보았다. 고혹적인 옷차림을 하고 있어도 눈을 내리깐 릴리는 몹시도 순종적으로 보였다. 정말 마음에 드는 얼굴이라고 생각하며 하이드는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추었다.
하이드는 탐스러운 윗가슴을 드러낸 드레스가 썩 마음에 들었다. 화장기가 진한 얼굴이 평소보다 성숙해 보였다. 하이드는 릴리의 색다른 모습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밖에서 만났을 때도 꾸민 모습이 사랑스러웠는데, 자신에게 예뻐 보이려고 오늘도 한껏 신경 쓴 게 아주 깜찍했다.
하이드는 그녀의 완벽한 자태를 잔뜩 흩트리리라 다짐하며 지금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오후에 르시엔 경이 저택에 방문하기로 했어요. 그러니까 오늘은, 음, 흐트러지면 안 돼요.”
“수업이 끝나면, 르시엔 경을 만난다는 말씀이신가요, 지금?”
“네, 약혼을 앞두고 있으니까요.”
“르시엔 소넬을 저택에서 본다고요…….”
하이드는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며 헛웃음 지었다. 그는 급격하게 기분이 나빠졌다.
“걱정 말아요. 흐트러지지 않게만 하면 되니까요.”
하이드는 릴리의 허리를 잡고 들어 올려 옆에 앉혔다. 입가엔 웃음기가 진득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무겁게 가라앉은 눈빛은 그가 화난 것처럼 보이게 했지만 릴리를 대하는 태도는 평소와 하등 다를 바 없었다.
릴리는 어쩐지 실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하이드 경은 자신이 당장 내일 결혼한다고 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축하해줄 것이다. 그녀는 약혼자를 처음 보게 됐는데도 그의 생각에 심란하기만 한데 말이다.
내키지 않는 치장에 릴리가 위안을 두었던 것은 하이드가 예쁘게 꾸며놓은 자신을 보고 조금쯤은 흔들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르시엔 경은, 하이드 경만큼이나 능숙하시겠죠?”
릴리는 찻잔을 우아하게 들어 올리며 물었다. 붉은 계열의 드레스와 선명한 핏빛 입술이 하얀 피부와 대조되었다. 어른스러운 옷을 입어서인지 그녀는 용기가 샘솟는 것만 같았다.
릴리는 화장을 해서인지 자신감도 생긴 것 같았다. 치장을 마치고 나서 메리가 그녀를 보면 누구라도 반할 것이라고 잔뜩 띄워주지 않았는가. 그래서일까 그녀는 답지 않게 조금 도발적인 말을 내뱉어버렸다.
“어떤 부분에서의 능숙함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릴리 아가씨를 기쁘게 해드리는 부분에 있어서는 제가 앞설 것 같습니다.”
하이드는 그녀의 드러난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흔적이 남지 않을 정도로만 얕게 빨아들였다. 릴리는 그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혀가 맨살에 닿자 소름이 돋았다. 하이드가 릴리의 곧게 뻗은 쇄골을 따라 혀를 움직였다. 그녀는 더운 숨을 내뱉었다.
릴리는 그와 마차에서 보낸 시간 이후로 자신이 내내 이런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온몸이 빠르게 달아올랐고, 굉장히 예민했다. 그녀는 아침 일찍부터 공을 들여 치장했기 때문에 옷 위로 가슴을 더듬는 그의 손을 저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건 뜨거운 숨결뿐이었다.
그의 손길이 닿자마자 릴리의 이성이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내내 기다리고 있던 달콤함을 누가 거부할 수 있을까. 가슴을 주무르는 그의 손을 막으려 그 위에 손을 올렸지만 도리어 부추기는 모양새였다.
“안에 속옷……, 입으셨네요.”
드레스와 속옷으로 가로막혀 말캉한 촉감이 온전히 느껴지지 않는 것이 불만인 듯 하이드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갈수록 말을 안 듣는군.
“그치만 다른 사람을 만나는데 안 입을 수는 없잖아요. 그건 제게 지나친 창피를 요구하시는 거예요.”
“창피라……글쎄요. 제가 아는 한 그자 또한 안 입고 있는 걸 좋아할 것입니다.”
하이드는 드러난 윗가슴을 혀로 핥고 손으로는 옷 위로 주무르며 대답했다. 드레스에 눌려 위로 솟은 가슴은 잔뜩 부푼 밀가루 반죽같이 부드러우면서도 탄력적이었다. 릴리의 가슴은 식욕을 닮은 성욕을 불러일으켰다.
“남자들은 전부 그런 식인가요?”
“일반화는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적어도 제가 아는 남자들은 코르셋으로 옥죄고 속옷으로 받쳐진 몸보다는 자연스러운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선호할 것입니다.”
“거짓말 말아요. 야한 짓하기 좋아서 마음에 들어 하는 것뿐이잖아요.”
새초롬하게 눈을 치켜뜨고 말하는 릴리에게 하이드는 대답 대신 달콤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는 주름이 잔뜩 잡힌 빳빳한 드레스와 속옷을 동시에 끌어내려 답답하게 눌려있던 풍만한 가슴을 꺼냈다. 그녀의 유두는 이미 꼿꼿하게 서 있는 상태였다. 그가 옷을 끌어 내리자 당황스러움과 수치심에 릴리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이드는 유륜 주위를 덧그리듯 핥고 입술로 빨아 당겼다. 한 손으로는 가슴을 부드럽게 쥐고 밀가루 반죽하듯 어루만졌다. 두꺼운 혀가 유두에 닿을 듯 스쳐 지나갈 때마다 릴리는 애처로운 신음을 흘렸다.
창백하리만치 뽀얗던 얼굴이 어느새 잔뜩 상기되어있었다. 그녀는 그가 이전처럼 게걸스럽게 그녀를 먹어 치우듯 가슴을 빨아주길 바랐지만, 그는 애태우듯 그녀가 원하는 곳을 피해갔다. 달콤하지만 괴로웠다. 릴리는 아래가 젖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하이드, 하이드으…….”
릴리는 자기도 모르게 애교를 부리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하이드의 뒤통수에 손을 올리고 끌어당겼다. 간드러진 애원에 하이드의 욕망이 부풀었다. 자제력이 완전히 무너지는 것이 느껴졌다.
“하아……. 어떻게 해드릴까요, 아가씨.”
“빨아주세요.”
열락에 취해 눈이 풀린 릴리는 평소라면 부끄러워 내뱉지 못했을 말을 수치도 모르고 속삭였다. 그만큼 그가 제게 안겨줄 쾌락이 간절했다. 애만 태우고 온전히 갖지 못하는 열기는 괴롭기만 했다. 그녀는 하이드가 제멋대로 자신을 진창 같은 쾌락으로 빠뜨려주길 바랐다.
“어디를?”
하이드의 눈이 더욱 짙어졌다. 놀리듯 물었지만 봐줄 생각은 없는 듯, 릴리가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칭얼거리는 소리를 내어도 손가락으로 유두를 지분거리기만 했다.
“선생니임……, 네?”
울먹거리는 릴리는 꽤나 사랑스러워서 그녀의 바람을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오늘 하이드는 그녀에게 착하게 굴 생각이 없었다.
“치마 잡아요.”
하이드는 그녀의 풍성한 치맛자락을 들어 올려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소파에 앉아 치맛자락을 허리께까지 들어 올려 아래를 드러낸 릴리의 모습은 야하기 짝이 없었다.
소매는 손등까지 가리는데 가슴팍은 옷이 끌어 내려져 꼿꼿한 유두와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유방을 드러내고 있었다. 치마와 속치마는 허리께에 뭉쳐져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잡혀 있었다. 무방비하게 드러난 허리 아래로는 얇고 조막만 한 하얀 레이스 속옷이 젖어있어 음부의 윤곽이 선명했고, 가느다란 다리는 하얀 비단 스타킹으로 감싸져 가터벨트로 연결되어있었다.
마음에 들다 못해 그림으로 남기고 싶은 절경이었다. 하이드는 그녀의 다리를 잡아 벌리고 소파 아래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그녀의 다리 사이에 고개를 묻고 얇은 천 위로 그녀의 음부에 입 맞추었다.
“안 돼요! 하지 마세요!”
그녀는 잔뜩 상기되고 흥분으로 풀어져 신빙성이 떨어지는 얼굴로 말했다. 말로는 충분치 않은 것 같아 치마를 잡았던 손을 떼고 그의 머리를 밀어내려 하자 하이드는 낮은 목소리를 더 낮게 깔고 다시 한번 ‘치마 잡아요.’하고 이를 갈 듯 무섭게 말했다.
“빨아달라고 하셨잖습니까? 어딘지 분명히 말씀하시질 않으니 제가 원하는 대로 할 겁니다.”
하이드는 릴리의 허벅지를 잡고 더 넓게 벌리며 말했다.
얇은 속옷은 자극으로부터 그녀를 거의 지켜주지 못했다. 그의 따뜻한 혀가 갈라진 틈을 파고들어 핥자 릴리는 터지는 신음을 막지 못했다. 그는 도톰한 살을 벌려 축축하다 못해 미끈거리는 속옷 위로 마구잡이로 혀를 움직였다.
위아래로 쓸기도 하고 휘젓듯 돌리며 자지러지는 릴리의 반응을 즐겼다. 릴리는 평소처럼 신음을 참지도 못하고 앙앙대며 울었다. 처음으로 겪는 자극이었다.
하이드는 입으로 그녀를 삼킬 듯 빨아들였다. 입에서 천이 거슬리자 하이드는 골반에 걸쳐진 얇은 끈을 잡아 뜯었다. 투둑, 끈이 뜯기는 소리가 나자 릴리가 움찔했지만 하이드는 신경 쓰지 않고 천 쪼가리가 된 속옷을 손쉽게 벗겼다. 흥분으로 달아올라 붉게 상기된 음부는 보는 것만으로도 그에겐 큰 자극이었다. 처음에는 그녀를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 컸으나 지금은 그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그녀를 탐했다.
그곳은 미끈거리는 액체로 온통 젖어서 음란하게 발름거렸다. 혀가 그대로 닿자 릴리는 앗, 앗.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하이드는 두툼한 혀로 음부 전체를 아래에서 위로 쓸어 올렸다.
기분 탓인지 애액이 과실즙처럼 달았다. 그는 그녀의 향과 맛에 취하는 것 같았다. 게걸스럽게 그녀를 탐했다. 잡아먹을 것처럼 여린 살을 빨아들였다. 미끈한 허벅지가 발발 떨렸다. 릴리는 말 그대로 자지러졌다. 그가 음핵을 사정없이 빨자 그렁그렁 맺혀있던 눈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화장으로 이미 붉은 눈가가 촉촉하게 젖었다.
하이드는 애액이 뿜어져 나오는 질구에 혀를 세워 찔러 넣었다. 혀로 질구를 자극하며 넣었다 빼면서도 엄지로는 애액을 잔뜩 묻혀 음핵을 문질렀다. 릴리는 쾌락에 삼켜지는 것 같았다. 온몸의 세포가 질척대는 음부에 집중된 것 같았다.
그녀의 모든 것이 그에게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뇌가 열락에 녹아내린 것처럼 뜨겁고 멍했다. 그녀는 옷자락을 꼭 쥐고 신음하는 것 말고는 버거운 쾌락을 견딜 방법이 없었다.
하이드는 그녀가 절정에 가까워지는 것을 기민하게 알아챘다. 달콤한 애액이 넘칠 듯 흐르고 충혈된 음핵은 잔뜩 부풀어있었다. 하이드는 빠르게 혀를 놀리며 음핵을 빨아들였다. 그러다 릴리가 절정에 다다르려 하자 미련 없이 얼굴을 뗐다. 하이드는 오늘 릴리에게 전혀 친절할 생각이 없었다.
하이드는 미련 없이 일어나 손수건으로 흠뻑 젖어 질척거리는 그녀의 다리 사이를 가볍게 닦아주었다. 다른 의도 없이 정말로 닦아주기만 하고서 아직도 열락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릴리의 옷을 정돈해주었다.
절정 직전에서 멈춰진 아래는 달콤한 열기로 벌름거렸다. 그녀는 해소되지 못한 욕망으로 흐려진 눈으로 하이드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그저 상냥한 얼굴로 웃어주었다.
“선생님, 왜…….”
“무엇이 말입니까?”
하이드는 애타는 릴리의 물음에 그녀의 치맛주름을 손으로 펴주며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릴리는 잔뜩 흥분된 몸을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나 그에게 차마 더 만져달라거나 빨아달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하이드는 눈가가 붉게 달아오른 채로 입술을 달싹이는 릴리를 즐거운 마음으로 감상했다.
제법 어른스럽게 꾸몄어도 그가 보기에 알맹이는 여전히 순진무구한 꼬맹이였다. 잘 느끼는 음란한 몸뚱이를 가졌어도 순결한 입술은 욕망을 말하지도 못했다. 곧 자신이 그것 또한 가르쳐주겠지만.
“아가씨, 지금 무척 예쁜 거 아십니까? 아가씨는 쾌락에 빠져 할딱대는 모습이 제일 예뻐요. 그 작자에게 잘 보이고 싶다면 지금 이 모습을 보여드리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아서요.”
하이드는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지만, 처음 만났을 때처럼 단단한 가면을 덮어씌운 것 같았다.
하이드는 미술 수업을 하는 시늉도 하지 않고 그대로 수업을 끝낸 채 빠르게 떠났다. 그는 시종일관 웃는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둔한 릴리도 하이드의 기분이 나쁜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하이드가 떠나고 잠시 후 시종이 르시엔 경이 찾아왔다고 알려왔다. 릴리는 황급히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치마가 살짝 주름지긴 했지만, 티가 많이 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얼굴은 여전히 상기되어있지만, 눈가만 살짝 번졌을 뿐, 머리 모양도 화장도 거의 그대로였다. 다만 하이드가 속옷을 찢어버려서 아래가 허전했다. 허전할 뿐 아니라 축축하기까지 했다.
릴리는 찢어진 속옷의 행방이 묘연하여 불안했지만, 샅샅이 살펴보아도 안 나오는 걸 보면 하이드가 잘 처리해준 것 같았다.
“후우우…….”
릴리는 뜨끈뜨끈한 뺨에 손을 얹고서 잠시 심호흡을 한 뒤 응접실로 내려갔다. 응접실에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있던 르시엔 경이 일어서며 그녀를 맞이하였다. 르시엔은 짙은 금발에 싱그러운 녹색 눈을 가진, 훤칠한 미남이었다.
그는 그녀를 보자마자 눈을 휘며 웃음 짓고 릴리의 손을 끌어당겨 입 맞추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서글서글한 인상에 매혹적인 미소가 꽤나 매력적인 사내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릴리 아가씨. 르시엔 소넬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르시엔 경.”
“아가씨께서 미인이라는 말씀은 익히 들었으나, 이토록 절세가인이신 줄은 몰랐네요. 이 순간부터 저에겐 아가씨를 제외한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 그 빛이 퇴색될 것입니다.”
“제 딸, 릴리는 확실히 어여쁜 아이입니다. 어여쁘기만 한 것도 아니고 어찌나 교양 있는지 못하는 게 없습니다. 수도에 아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지, 사람들이 알게 되면 너도나도 릴리를 데려가고 싶어 할 것입니다. 일등 신붓감이죠.”
릴리는 민망한 듯 고개를 숙였지만, 바르딘 자작은 르시엔을 바라보며 비굴함을 숨기려는 기색도 없이 속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릴리를 칭찬했다. 바르딘 자작이 릴리를 입에 담을 때 늘 붙던 ‘보잘것없는’, ‘미천한’ 따위의 수식어가 어느새 ‘어여쁘고 교양 있는’으로 탈바꿈되었지만, 그녀의 몸값을 최대한 올려야 하는 게 결혼 시장이니 놀라울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녀를 알아가게 될 일이 무척 기쁘게 기다려지는군요.”
“그날이 멀지 않을 것입니다. 하하.”
그 뒤의 대화는 주로 바르딘 자작과 르시엔 경의 의례적이고 상투적인 말로 채워졌다. 간혹 가다 르시엔이 릴리에게 관심 어린 질문을 던졌고, 릴리는 적당히 예의 있게 대답했다. 바르딘 자작은 약혼 관련 공적인 이야기를 간단히 마치곤 잠시 일이 생겨 자리를 비워야겠다며 둘만 남겨두고 응접실을 떠났다.
릴리에게 눈짓으로 무언의 압박을 주는 것을 보면 일부러 자리를 비우는 것이 분명했다. 릴리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맞은편의 사내에게 민망한 미소를 지었다.
‘역겨운 노인네, 오래도 붙어있는군.’
르시엔은 바르딘 자작이 자리를 비우고 나서야 릴리를 자세히 뜯어볼 수 있었다. 바르딘은 탐욕스러운 성정처럼 추악하게 생기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썩 빼어나다고 할 수는 없는 외모를 지녔다. 그런 자작의 친척에다 변방의 시골뜨기라고 해서 르시엔은 솔직히 릴리에게 일말의 기대조차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온 릴리는 현 사교계의 꽃이라 불리는 마가렛보다도 아름다웠다. 저 정도면 부인이라고 데리고 다녀도 부끄러울 일은 없으리라. 얌전해 보이는 것도 퍽 마음에 들었다. 고상해 보이는 숙녀들이 속살은 더 뜨겁기 마련이다.
“릴리 아가씨께선 말을 지나치게 아끼시는군요. 제가 당신에 대한 호기심으로 말라죽길 바라시나요?”
“그저 낯가림이 심할 뿐이에요.”
릴리는, 수도의 신사들이란 하나같이 말을 휘황찬란하게 한다고 생각하며 조금 웃었다. 좀 전에 보았던 다른 신사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는 응접실에서 오가는 대화에 아까부터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잔뜩 달아오른 몸이 열기를 표출해내지 못해 식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갑게 떠난 하이드에 대한 걱정과 예민하게 달아오른 몸 때문에 그저 방으로 돌아가 쉬고만 싶었다.
자꾸만 그의 격정적인 입맞춤과 애무하던 손길, 그리고 온몸을 녹일 듯한 쾌락이 떠올랐다. 하이드의 말대로 음탕하기 짝이 없었다. 음부에 닿는 뜨겁고 부드러운 혀의 감촉이 아직도 아래에 남아있는 것처럼 생생해 뺨이 식질 않았다.
장밋빛 뺨과 촉촉한 눈을 하고 있는 그녀는, 잔뜩 사랑받은 여자 특유의 색기가 풍기고 있었다. 그녀 몸에 남아있는 쾌락의 잔재가 겉으로도 드러나는 것이다.
르시엔은 이 같은 사정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은연중에 풍기는 색기만은 기민하게 감지했다. 머리로는 인식하지 못해도 본능적으로 느끼는, 사내의 감이었다.
르시엔은 능숙한 사내답게 서글서글한 얼굴로 적당히 그녀를 칭찬하고, 일상에 대한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그녀를 핥듯이 훑어보았다. 동그란 이마와 앙증맞은 코가 그녀를 어려 보이게 했지만 촉촉한 붉은 눈가엔 야한 색기가 묻어났다.
유달리 큰 호박색 눈동자가 수줍게 미소 지을 때면 꿀처럼 달콤해 보였다. 분명, 울리는 보람이 끝내주리라. 가느다란 허리에 터질 듯 부푼 가슴이 탐스러워 보였다. 뽀얀 가슴과 가슴 사이의 깊게 팬 골을 혀로 핥으면 저 가느다란 목소리로 귀엽게 신음하겠지.
르시엔은 그녀의 의심이라곤 할 줄 몰라 보이는 순진한 표정과 얌전한 태도에 대비되는 성숙한 몸매와 은근한 색기가 꽤나 마음에 들었다. 발그레한 눈가와 윤기 도는 피부가 은밀한 상상을 부추겼다. 참 야하게도 생겼다고, 르시엔이 마음속으로 릴리의 첫인상을 평했다.
릴리는 어쩐지 르시엔의 시선이 뜨겁고 버겁게 느껴졌다. 하이드가 자신을 쳐다볼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묘한 열기가 느껴지는 녹색 눈이 그녀의 살갗을 따라 흐르는 것 같았다. 어쩐지 음흉한 시선이 와닿는 것 같아 릴리가 당황스럽게 눈을 깜빡이고 그를 쳐다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싱긋 웃는 얼굴이 상큼하기 그지 없었다.
이유 모를 꺼림칙함에도 불구하고 릴리는 르시엔을 밝고 건전한 사람이라고 판단했다. 말주변도 좋고, 그녀를 대하는 태도 또한 거만하지도, 무심하지도 않고 상냥했다. 귀공자다운 미모에 재산 많고 좋은 가문의 장자이니, 이보다 좋은 신랑감이 없으리라 생각하면서도 릴리는 마음이 어지럽고 쓸쓸했다.
하이드에 대한 생각으로 심란했고, 약혼자를 만나기 전에 하이드과 나눈 뜨거운 행위들이 눈앞의 약혼자에게 조금 죄스럽기도 했다. 수업의 주객전도가 바뀐 것을 인정해야 했다. 약혼자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그녀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자작님께서 아가씨의 피아노 연주가 빼어나다 하셨죠. 저도 한 번 들어볼 수 있을까요?”
“대단치 못한 실력입니다. 경의 귀를 어지럽히더라도 너른 마음으로 용서해주시길.”
릴리는 그와 대화를 하는 것보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이 더 편할 것 같아서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고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꽤 긴 연주곡이었지만 그녀를 어렵지 않게 칠 수 있었고, 르시엔도 지루하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연주가 훌륭하기도 하였고, 그녀의 가늘고 긴 목덜미는 감상하는 맛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작님께선 겸손이 지나치신 분이었군요. 아가씨의 연주는 그저 빼어난 수준이 아니라 아주 훌륭합니다. 당신이 저의 저택에서 매일 저녁 저를 위해 연주해주시면 얼마나 기쁠까요.”
“르시엔 경은 정말 칭찬이 후하세요.”
르시엔의 앞에서 연주한 모든 여인은 한 번씩은 들었을 닳고 닳은 멘트였지만 늘 효과가 좋아서 그녀들은 달콤한 기대를 품곤 했었다. 그러나 릴리는 겸손을 떠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그가 과한 칭찬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매일같이 그녀의 연주를 듣던 하이드가 얼마나 혹평을 했던가. 그녀는 진심으로 자신의 연주는 그저 들을만한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바르딘 자작이 들어와 르시엔이 떠날 때가 되었을 때까지 두 사람은 원만하게 대화를 이어갔으나 르시엔은 썩 마음에 드는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분명 조금만 건드려도 넘어올 것처럼 순진해 보이는데 도무지 틈을 보이질 않았다.
옆자리에 앉으려 그녀 쪽으로 다가가니 일어나서 책장으로 가버리고, 손을 잡으려고 팔을 뻗자 화들짝 놀라 손을 거둬버렸다. 순진한 처녀건 닳고 닳은 창녀건 그의 유혹에 넘어오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그로선 자존심 상할 일이었다.
그런데 열 받지 않고 오히려 흥미가 동하니, 르시엔 스스로도 의외인 일이었다.
그래, 시골에서 왔다더니 꽤나 보수적인 모양이로군. 무너뜨리는 재미가 있겠어.
길어야 한 달일 것이다. 어차피 저 여자는 제 것이 될 것이기에 사실 서두를 것도 없었다. 천천히 함락시키리라. 얌전히 지내던 차에 새로운 오락거리가 생겼다고 생각하면 썩 유쾌하기까지 했다.
* * *
하이드는 기분이 몹시 더러운 상태로 귀가하였다.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서재로 들어가 문을 부서트릴 기세로 쾅 닫고는 등받이 의자에 기대어 한 시간째 고민하고 있었다.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이 맹렬한 짜증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하아…….”
하이드는 이 불쾌함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다만 인정하기가 싫을 뿐이다. 자신이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대체 왜 릴리의 약혼자 따위에게 질투를 하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그는 릴리와 연애를 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릴리를 유혹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릴리는 그의 취향에 딱 들어맞았지만, 그저 그녀를 유혹하고 싶었다면 웃기지도 않는 연애 수업 핑계 따위를 댈 게 아니라 진작에 그녀를 유혹했을 것이었다. 아마도 빌어먹을 씨팔놈의 이름만 듣지 않았다면, 그가 그녀에게 수업을 제안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바르딘 자작은 릴리에게 애정을 가지지도 대외적 체면에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약혼자의 악명은 문제 될 게 없었다. 바르딘 자작은 소넬 가에 줄을 대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으니까. 릴리를 앞세운 두 가문의 결합은 돛단배처럼 순조로울 것이었다.
두 가문에서 오가는 모종의 뒷거래를 조사하기 위해 하이드는 팔자에도 없는 가정교사 노릇을 하며 위장 잠입까지 했다.
아! 그가 맡았던 임무 중 이번 일만큼이나 성가시고 귀찮은 일은 없었다.
신분 세탁이야 어려운 일도 아니다. 수도에 알려지지 않은 변방의 몰락 귀족 가문이야 얼마든지 있으니 적당히 이름을 사고 그럴듯한 이야기를 꾸미는 건 금방이었다.
그러나 가정교사 노릇을 하며 끔찍이도 싫어하는 피아노를 가르치고, 또 따로 조사까지 수행해내는 이중 노동이 그를 몹시도 짜증 나게 했었다. 릴리의 피아노 수업이 싸늘한 분위기에서 진행된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조금 후회되긴 했지만.
그는 피아노가 진저리치게 싫었다. 피아노만 보면 유년 시절의 불쾌한 기억들이 연상되곤 했으니까.
그랬던 그가 조사를 끝내 목적을 달성하고 난 뒤에도 자작가를 드나들며 릴리의 가정교사 노릇을 하고 있다니. 무가치하고 건설적이지 못한 일에 시간 낭비하는 걸 질색하는 하이드에게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처음에는 이 귀엽고 맹한 여자가 르시엔 소넬 따위와 결혼을 앞두고서 행복을 기대하고 있는 모습에 열이 받아 충동적으로 저지른 것이었다. 하이드는 그 꼬락서니가 어이없었고 놀라울 정도로 불쾌했다. 르시엔의 새 신부를 제가 먼저 맛봐 그를 엿먹이겠다는 알량한 복수심도 있었을 테지만, 릴리처럼 순진한 여자가 호색한을 남편으로 들였을 때 생길 갖가지 불행들에 면역력을 키워주고 싶은 마음도 분명 있었다. 릴리는 그깟 놈 때문에 불행해지기에 너무 아까운 사람이었으니까. 정말로 그녀에게 정이라도 들었던 것일지도 모르지.
지금에 와서는 수업을 핑계로 그녀와의 만남을 즐겼다는 것을,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었다. 그녀는 도저히 스스로 즐거움을 좇아갈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아, 그저 남들처럼만 때가 타길 바랐었다. 그가 보아온 대다수 귀족은 남편이 난봉꾼이면 부인도 따로 애인을 두고 적당히 즐겼다. 릴리는 남편이 바람을 피우면 조용히 눈물지을 유의 사람으로 보였다. 그녀는 알지도 못하는 약혼자에게 사랑받는 신부가 되고 싶어 했으니까.
그래서 하이드는 사랑이라는 것이 별 개 아니라고, 남녀의 운우지락은 대단한 열정이나 애정을 갖고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길거리에서 들러붙은 개들처럼 본능에 충실할 따름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어쩌면 삐뚤어진 자신에게는 릴리의 동그란 눈망울의 무지와 순수가 아니꼬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이드는 릴리가 사내가 주는 기쁨을 알고도 그렇게 말간 눈을 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하이드는 릴리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둔한 릴리는 자신이 티를 내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지만, 그녀의 얼굴은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소녀였다.
릴리는 그와 함께 있으면 안절부절못하고 눈이 마주치면 얼굴이 빨개지고, 그가 미소를 지으면 홀린 듯 쳐다보았다. 그녀는 감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투명한 사람이었다. 하이드는 그 얼굴을 보는 게 즐거워 어느새 목적도 핑계도 뒷전이었다.
나는 대체 뭘 하고 있나.
그녀가 화려하게 꾸미고서 약혼자를 본다는 소식 하나로도 침착성을 잃었다. 그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듯 그녀를 탐했다. 자신을 좋아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약혼자를 만난다는 사실에 배신감마저 느꼈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말이다.
하이드는 그녀에게 유치한 심술을 부렸다. 엿같은 기분은 저택에 돌아와서도 기분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릴리가 르시엔 소넬과 단둘이 있을 생각에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가 힘들었다.
릴리가 자신을 향해 수줍게 웃어 보인다고 그녀가 제 것인 줄 알았나?
고작 뽀뽀 하나로 뺨을 붉히는 여인이라 자신을 좋아하면서 약혼자를 만날 일은 없을 줄 알았어?
같잖은 착각이었다. 고작 수업을 핑계로 그녀에게 닿는다고 릴리가 그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곳에선 정부를 두는 것이 흠도 아니라고 말한 것은 자신이었다. 릴리가 약혼자를 만나는 것은 정당하다 못해 당연했다. 그녀가 오늘 하이드로 인해 잔뜩 달아오른 몸을 약혼자에게 내맡긴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은 하나도 없었다. 전혀, 아무것도, 하나도.
하이드와의 관계가 문제 된다면 몰라도…….
지금쯤 릴리가 르시엔에게 그녀의 야하기 짝이 없는 몸을 보여준다는 가정, 하이드는 그것을 말릴 일말의 자격조차 없다는 사실이 그를 미치게 했다.
아, 인정해야겠다.
하이드는 릴리가 갖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