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그 곁에 내가 없더라도
암흑.
혼란스러운 정신은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머리가 깨어져서 산산조각 난 것 같았다. 아무것도 이어지지 않았고, 모든 것이 어지러웠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 조각 한 조각씩 천천히 붙고 이어지는 것처럼 조금씩 조금씩 인지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와 함께 미칠 듯한 어지러움과 고통은 더더욱 생생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속이 뒤틀렸고,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끓는 물 속에 깊이 빠져 있는 듯한 고통 속에서 불에 타는 듯한 팔다리로 허우적대던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자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눈을 떴다.
“헉…… 헉…….”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을 누군가가 쥐어짜고 있는 듯 숨이 막혔다. 숨을…… 숨을 쉬어야 했다. 어지러운 머리에 구역질이 났다. 위장이 뒤집어진 것 같은 느낌에 속에 있는 것을 모두 쏟아 내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모든 것을 다 게워 내고,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도, 팔다리가 끊어진 것 같은 고통은 가시지 않았다. 토사물이 지나온 입도 불로 지져 댄 듯 뜨거웠다.
그는 부들부들 떨면서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고통에 눈을 감았다. 어지러운 머리가 가라앉을 때까지 숨을 몰아쉬며, 지독한 통증에 부들부들 떨리는 팔을 움켜쥐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앉아서 쉬고 나서야 조금씩 통증과 어지러움이 가라앉고, 드디어 차분하게 눈을 뜨고 주위를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는…….’
숲.
나무가 그닥 빽빽하게 들어차 있지 않아 빈 공간 사이사이로 햇살이 화창하게 내리쬐고 있는, 밝고 평화로운 숲이었다.
무언가 굉장히 위화감이 드는데,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여기에 와 있는 건지. 모든 것이 어지러웠다.
어지러운 머리를 짚으려 손을 들어 올리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내 손이……이랬던가?’
그는 천천히 손을 접었다 폈다.
작은 손. 어린이의 손이다.
어린 소년의 몸인데, 여기저기에 상처가 가득하다. 작은 팔에는 칼에 찔린 상처가 있고, 그 외에도 여기저기 멍과 상처가 가득했다.
그는 잠시 멍하니 피가 흘러나오고 있는 자신의, 혹은 누군가의 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다쳤는데도 그닥 아프지 않다.
아까 느꼈던 환상통은 그토록 지독했는데, 실제 존재하는 상처에서는 느껴지는 통증이 별로 없었다.
이건…….
그는 마치 물속에 잠겨 있다가 서서히 떠오르는 것처럼 점차적으로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몽롱하던 기억이 물 위로 올라오자 점차 선명해지며 모든 것이 뚜렷하게 기억났다.
아. 그래,
늘상 그렇듯 왕비궁의 시종들에게 두들겨 맞은 후, 피해서 왕실 숲으로 들어와서 앉아 있던 참이었다.
어째서 기억을 못 하고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선명한, 방금 전일이었다.
한편으로는…… 방금 전까지 그는 비 오는 진흙탕에서 비참하게 피를 흘리며 죽어 가고 있지 않았던가……?
그리고. 분명, 기사가 하나 달려와서,
……그녀의 시신을 발견했다고…….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누군가 목을 콱 조르고 있는 것처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억센 손아귀가 심장을 움켜쥐고 쥐어짜고 있는 것 같았다.
.*. *. *. *. *. *.
‘에휴, 야단났네…….’
작은 소녀는 덧없이 하얀 모자의 끄트머리만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왕실의 숲은 넓다. 넓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 넓었다. 게다가 사방을 둘러보아도 다 비슷해 보이고 길은 보이지 않았다.
오라버니들을 기다리는 것이 심심하여, 조금만 산책하고 돌아오겠다고 나온 길이었다. 혼자 괜찮겠냐고 몇 번이나 물어보는 것을, 바로 요 근처만 살짝 구경하다 올 거니 괜찮을 거라며 웃는 얼굴로 나왔는데, 바로 길을 잃어버리다니.
다행이라면 숲이라고는 해도 햇빛이 잘 들어와 밝고, 나무가 듬성듬성 있어 시야도 그나마 좀 멀리까지 보인다는 것이겠지만…… 그래 보았자 길을 전혀 모르니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든 길을 찾아보려고 돌아다니면 돌아다닐수록 오히려 더 깊이 헤매게 되는 것 같았다.
자신을 찾으러 왕실의 숲에 수색이라도 들어오게 하는 민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은데…….
거의 울상이 되어 가던 소녀의 앞에, 저 멀리, 어떤 인영이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사람의 모습에 그녀는 반가워서 폴짝폴짝 뛰듯 달려 갔다.
“저기……실례합니다.”
그 인영은 소년이었다. 아를렌 또래의 소년.
그러나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드러난 그 소년의 창백한 몰골에 그녀는 멈춰 서고 말았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소년이,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창백해진 얼굴로 컥컥거리며 바닥에 반쯤 엎어져 괴로워하고 있었다.
“저기, 괜찮아요?”
깜짝 놀란 그녀가 다시금 소년에게 달려가서 등을 토닥였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컥컥거리고 있으니 일단 뭐라도 해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소년이 고개를 들어,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흡…….’
그녀는 순간 몰려오는 섬뜩한 공포에 흠칫 뒤로 물러섰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처음 보는 이 소년의 얼굴에 소름 끼치는 두려움을 느꼈다. 자기도 모르게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반응을 본 소년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것처럼 멈춰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차마 다가오지 못하고 그저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던 소년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또륵 떨어져 내렸다.
‘……어?’
또르륵. 한 방울이 더.
그녀는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서, 자신을 보고 얼어붙은 채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는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느 사이엔가 소년의 얼굴은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지만, 두 사람은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은 채 그대로 서로를 마주 보고만 있었다.
왜 그녀를 보고 우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저 소년이 무언가를 착각한 것인지, 아니면 그녀를 보고 그녀를 닮은 다른 누군가를 떠올린 것인지.
하지만 어쩐지 그 표정이, 마치 그녀가 외면하면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이 절실하였기에.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처음 보는 사람의 이유 모를 반응에 이토록 가슴이 아픈 것은.
그리고,
소년이 천천히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아를렌은 소년의 손이 바르르 떨면서 서서히 그녀의 얼굴로 다가오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상당히 무례한 일이고 피해야 할 이유가 충분히 있었지만, 저렇게 애절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의 손을 차마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소년의 손은 막상 그녀의 얼굴에 닿기 직전에 차마 닿지 못하고 멈춰 섰다. 피부와 피부가 닿지는 않았지만, 손가락 끝에서 발산하는 체온이 뺨의 피부로 느껴지는 거리.
그 거리에서, 소년은 차마 닿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손을 떼지도 못한 채, 우는 얼굴로 그녀를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가슴이 아팠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까는 분명 저 얼굴이 섬뜩하니 무서웠는데, 이제는, 알지도 못하는 소년이 우는데 가슴이 시리도록 아팠다.
그야…… 저렇게 애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우니까…… 마치, 닿지 못하면 숨을 쉬지 못해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으니까…… 아마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얼굴에 닿지 못하고 있던 그의 손을 살짝 잡아 그녀의 얼굴에 가만히 대어 주었다.
처음 보는 사람의 얼굴에 함부로 손대려 하다니, 무척이나 무례하고 무도한 짓인데, 말도 안 되는 일인데. 그래도. 이렇게 해야 네가 숨 쉴 수 있다면.
소년이 움찔하더니 떨리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뺨에 살짝 닿아 있던 손가락이 얼굴선을 따라 눈가로 올라가 어루만지고는, 마치 하나하나 그 존재를 확인하듯 콧대를 따라 내려와 입술에 닿았다.
“흐…… 으흑…… 흐으윽…….”
여태까지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던 소년이 소리 내어 흐느끼기 시작하더니, 어느 사이엔가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아를렌은 헉 하고 작은 신음을 내었다. 가족과 유모 이외의 사람에게 이리 안겨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그 상대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모르는 소년이라니. 당황스럽기도 당황스러운 데다가, 너무 힘이 세어서 눌린 가슴이 아프고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러나, 뭐라고 항의를 하기엔 소년이 너무 처절하게 울고 있었다. 흐느낌으로 시작된 울음은 어느 사이엔가 오열이 되어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기에, 이렇게 처음 보는 여자애를 붙들고 통곡을 하는 것인지, 아를렌의 가슴까지 아려 왔다. 그녀는 숨을 한 번 들이쉰 후, 손을 올려 소년을 마주 안고는, 등을 조심조심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
그녀가 그의 등을 살살 쓰다듬어 주며 말하자, 그의 몸이 한 번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괜찮아.”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
“괜찮을 거야.”
그렇게 한참을 끌어안고 토닥여 주고 나서야 소년의 울음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소년이 정신을 추스른 듯, 그녀를 꼭 끌어안고 있던 팔에서 힘이 풀리며 그녀를 풀어 주었다. 어쩐지 몸으로 들어오는 찬 공기에 약간의 허전함을 느끼며, 그녀는 뒤로 물러나 앉았다.
소년은, 이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어떤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여전히 가끔 훌쩍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더 이상 울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괜찮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소년은 잠시 말이 없더니 뒤늦게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어? 아……아니, 괜찮은데…….”
소년은 답이 없었다. 이렇게 되자 오히려 민망한 쪽은 아를렌이었다. 그녀는 정말 괜찮았는데, 아마 소년은 자신이 저지른 무례에 많이 미안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저러고 있는 거……겠지?
어찌 되었건 소년은 이제 진정된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얼굴을 보여 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그저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
아를렌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뻘쭘해진 모습으로 주위를 좀 둘러보다가, 문득 그가 아직도 상처투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이는 곳 여기저기에 멍과 생채기가 가득했지만, 특히 팔에서는 피가 흘러나올 정도로 날붙이에 베인 상처가 있었다.
아까 처절하게 울던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사연이 많은 것 같아보이긴 하는데…….
“저기,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누구한테 맞았어?”
소년은 조용히 고개만 저었다. 그것이 대답을 거부하는 것이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같이 의사한테 가자. 내가 아는 의사가 있어서, 조용히 치료받을 수 있어.”
이번에도 소년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음,그럼…….”
“그냥.”
마침내 소년이 입을 열자, 아를렌은 살짝 갸웃하며 말을 멈추고 소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냥, 혹시…….”
“응.”
“팔의 상처만 좀 지혈해 줄 수 있을까.”
“응? 하지만 나는 의사가 아닌 걸. 같이 의사에게 가 보는 게 낫지 않을까?”
“……의사에게는 곧 가 볼 거니까…… 그때까지만 잠깐 지혈될 수 있게…….”
“그래, 그럼. 나중에 꼭 의사에게 가서 제대로 꿰매야 해?”
“……응.”
아를렌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살펴보더니, 모자를 벗어 초록색 리본을 풀어내어 손에 둘둘 감았다.
문득 그녀는, 소년이 물끄러미 리본을 응시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거, 오늘 처음 쓰고 나온 모자라서 깨끗하긴 한데…… 지금은 이런 것밖에 없어시. 이거라도 괜찮을까?”
소년은 멍하니 리본만 바라보고 있을 뿐, 답이 없었다.
“저기? 괜찮아? 역시 좀 그래? 다른 걸 찾아볼까?”
“아.”
소년이 문득 정신을 차렸는지 아를렌과 눈을 마주쳤다가, 다시금 시선을 내렸다.
“그걸로…… 좋아.”
어쩐지 미심쩍은 반응이지만…… 아를렌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한 후, 소년의 왼손을 쥐었다. 다시금 그가 흠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앗, 아팠어?”
“……아니…….”
그녀는 곧 왼팔의 상처를 리본으로 붕대처럼 꼭꼭 감았다. 어리고 아직 서툰 손으로 감는 붕대가 꼼꼼하게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깨너머로 보고 배웠던 대로.
아를렌이 그의 왼팔에 리본 붕대를 감아 주고 있는 동안, 그는 홀린 듯이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바로 코앞에서 길게 굽이치는 금발이 살랑거리며 달콤한 체취를 풍겨 왔다.
아직 어리고, 건강하고, 밝고, 생기가 넘치고…… 얼굴에는 살이 부드럽게 차올라 있고, 자기 의지대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그런 아를렌.
절망과 좌절을 모르고, 세상에 대한 믿음이 가득한 눈에는 빛이 꺼지지 않은,
앞으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미래가 있는, 사랑하는 가족들이 따스한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를렌.
그런 그녀가, 부드럽고 따듯한 손을 뻗어 리본을 감아 주고 있었다.
다시금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을 애써 참아 냈다.
마지막으로 느껴 볼 수 있을 온기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싶었다. 팔의 피부를 통해 들어오는 온기가 심장까지 흘러들어 왔다.
이 시간이 끝나지 않고 계속되었으면 했다. 저 리본이 끝없이 길어서, 감고 또 감아도 계속 감아야 했으면 했다.
하지만. 몇 바퀴 감고 난 후 매듭을 꼼꼼하게 묶고 나자, 달콤한 시간은 금방 끝이 났다. 그녀는 금방 손을 떼었고, 그의 쪽으로 기울어져 있던 상체도 금방 멀어져 갔다.
눈앞에서부터 금빛 머리카락이 훌쩍 출렁이며 멀어졌다.
나가는 길을 알려 주자 그녀는, 부서진 적 없는 건강한 왼발로, 한 걸음 한 걸음 마치 나비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연두색 드레스 자락을 나풀거리며 사라져 갔다.
나무들 사이로 그녀가 가려져 안 보이게 될 때까지, 그녀의 발자국 소리가 안 들리게 될 때까지, 그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그녀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사라지고 나서도, 마치 그녀의 그림자라도 남아 있는 양, 계속해서.
「죽은 후에도 다시는 만나지 않게…….」
그는 왼팔에 감겨 있는 초록색 리본을 움켜쥐며 눈을 감았다.
이 정도만 봐줘.
다시는, 다시는 만나지 않을 테니까.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 창백해지는 얼굴로 벌벌 떨며 뒷걸음질 치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무 기억이 없을 텐데도 불구하고, 이 얼굴을 보자마자 섬찟 공포에 잠겼던.
다시는 만나지 않을게.
이번이 마지막이야.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이 정도는…….
.*. *. *. *. *. *.
“어머 아가씨, 아마 폐왕자인 것 같은데, 안 돼요, 안 돼.”
“응?”
아를렌으로부터 오늘 만난 소년의 인상착의를 들은 유모는 손사래를 쳤다.
“두 분 전하께서 아주 싫어하신다고요. 다음부터는 절대 만나지 마세요.”
“하지만, 그냥 불쌍한 내 또래 아이였는 걸. 많이 다친 채로 울고 있었어.”
“그야…… 불쌍하긴 불쌍하죠. 그건 저도 알아요. 아는데…….”
모른 부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금 브러시로 아를렌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그래도 어쩌겠어요. 전하께서 무척 싫어하시는 아이인데 만나서 좋을 게 없어요.”
“왜 그렇게 싫어하시는데?”
“에휴, 아가씨. 바레나 부인이 죽어 가면서 저주를 남기고 죽었다던 폐왕자가 바로 그 아이예요.”
“응?”
“반역죄로 사형당한 바레나 부인 아시죠?”
“응.”
그건 제법 유명한 사건이어서, 아를렌이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아를렌도 알고는 있었다. 자세하게는 몰랐지만, 왕의 지극한 총애를 받던 여인이 알고 보니 왕과 왕비를 암살하러 일부러 접근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 발칵 뒤집혔었다고 했다.
“바레나 부인이 사형선고 받았을 때 왕손을 임신 중이어서 형이 늦춰졌는데, 그때, 배 속의 아이가 태어나서 반드시 왕실 후계를 끊어 놓고 아슈네란에 피바람을 몰고 올 거라고 저주를 했거든요.”
“그게 무슨 저주야, 죽음을 앞둔 사람이 그냥 아무 악담이나 한 거지. 슬러족도 아니고 요즘 저주 같은 게 어디 있어. 그걸 누가 믿어.”
화장대 거울에 비친 아를렌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굳어졌다. 고작 그런 미신 같은 말 때문에 죄 없는 아이가 그렇게 두들겨 맞고 숲속에 숨어 있어야 하다니. 상처가 가득한 몸으로 울고 있던 소년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물론 그 말을 믿을 건 못 되는데…… 애초에 반역자의 자식인 데다가 감옥에서 태어난 목숨이고 두 분 전하께도 단단히 밉보인 아이잖아요. 태어나 보니 울지도 않고 아파하지도 않고, 게다가 그 후로 왕비 전하께서 거듭 유산하시고 그러니까 저주받아서 그렇다 그렇게들 말을 하는 거죠. 사실 누가 그걸 정말 말 그대로 믿어서 그러겠어요.”
“말도 안 돼. 그리고 바레나 부인이 제일 나빴어. 어떻게 자기 자식의 앞날에 그렇게 재를 뿌려 놓고 갈 수 있어?”
“그러게요. 제발 태어날 아이만이라도 예쁘게 봐주세요 라고 하고 가는 게 보통 어미의 심정일 텐데 말이에요.”
“그 아이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 그런데 그렇게 맞고 다치고서 혼자 울고 있었는 걸.”
브러시질을 끝낸 모른 부인은 빗으로 아를렌의 머리카락을 요령 있게 나눠 잡고 땋아 올리기 시작했다.
“그야 저도 안쓰럽게 생각하긴 한답니다만, 반역자의 핏줄이에요. 왕손이 아니었다면 살아 있지도 못했을 텐데, 그나마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이죠. 어찌 되었건 두 분 전하께서도 1왕자 저하께서도 싫어하시고 왕실 사람들 모두 싫어하는 아이를 가까이해서 아가씨께 득 될 일이 없어요. 그러니까 앞으로는 마주쳐도 알은척하지 마세요.”
“…….”
하지만 다쳐 있었어.
게다가 울고 있었어. 정말 처절하게 오열하고 있었는 걸.
결국 그녀는 그다음 날, 약과 깨끗한 붕대, 그리고 이런저런 맛있는 먹을거리를 바구니에 담아 들고 다시 숲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는 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그러나, 전날의 그 자리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소년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한참 동안 나무 밑에 기대어 책을 읽고 있던 소녀는, 결국 해가 뉘엿뉘엿 서쪽으로 넘어가기 시작하자 책을 덮었다.
‘매일 같은 자리에 오란 법은 없긴 하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그녀는 바구니를 나무 밑에 내려놓고 일어섰다.
다음 날, 같은 자리에 다시 새 바구니를 들고 와 본 소녀는, 바구니가 그대로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오지 않았었나? 아니면 자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건드리지 않은 걸까.’
어쩌면, 바구니에 소년의 이름이라도 써 놨어야 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아를렌은 그 소년이 누구인지 몰랐다. 유모는 아마도 폐왕자일 거라고 추측했지 만 확실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그날도 다시 나무 밑에 앉아서 책을 읽으며 기다렸지만, 해가 넘어가도록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혹시 내가 있어서 일부러 안 오는 걸까. 혼자 있고 싶은데 방해가 되어서? 아니면 그날 여기서 만난 것이 그냥 우연인 걸까.’
그렇게 바구니만 몇 번을 바꾸며 여러 번 찾아오던 그녀는, 결국 포기하고, 마지막 바구니를 내려놓고는 그 자리에서 멀어져 갔다.
그녀가 완전히 사라지고 난 후에야, 나무 위에 숨어 있던 한 소년이 내려와서 바구니를 조심스럽게 쓸어 보았다.
마치 바구니에서 온기라도 느끼듯, 천천히 바구니를 손으로 쓸어 보던 소년은, 손잡이에 조용히 입을 맞추었다.
[검은 머리소년에게]
바구니 위에 살포시 올려져 있는 쪽지가, 단아한 글씨체로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달콤하게.
그러나 감히 자신이 탐내어도 되는 것이 아니었다.
바구니도. 이것을 가져온 소녀도. 그녀의 그 무엇도.
잠시 후 소년은 바구니 안의 그 무엇에도 손대지 않고 그대로 자리에서 사라졌다.
어느덧 가을이 오고, 영지로 돌아간 소녀는 그 후로 한 번도 만날 일이 없는 소년에 대해서 잊어 갔다.
그저 어린 시절 어쩌다 한 번 스쳐 지나간 얼굴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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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자는 열다섯 살에 기사가 되었다. 국왕은 폐왕자가 기사가 되기가 무섭게 북부 전선으로 보내 버렸다. 누구나 죽으라고 보내는 길이라고 생각했으나, 폐왕자는 죽지 않았다.
그는 무시무시한 무위를 발휘하며 우릭 지역을 능숙하게 정복하고 개선했다. 그 과정이 어찌나 능숙했던지, 혹자는 마치 벌써 한 번 정복해 본 사람 같다고 평했을 정도였다.
왕은 공작위를 얻어 개선한 그를 여전히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그가 이내 2왕자의 반란을 밝혀내고 손쉽게 진압하며 1왕자의 권위를 공고히 하는 데 큰 공을 세우고 나자 더 이상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 후 그가 아무 포상도 계승권도 요구하지 않고 조용히 북부로 물러나 칩거하며 북부를 다스리는 데에만 전념하겠다고 하자 수도는 조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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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쉬엔은 홀로 말 위에 탄 채, 멀리 보이는 보라색 언덕 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에 소중하게 꼭 쥐고 있는 초록색 리본이 바람에 흔들렸다.
해야 할 일은 다 끝마쳤다.
이번에 북부로 올라가면, 나오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다시는 이곳을 볼 일도 없을 것이고,
다시는 멀리서나마 그녀를 볼 일도… ….
그리고 그녀는 행복하게 살다가, 그녀의 소망대로 사랑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마지막까지 웃으며 눈을 감을 수 있겠지.
그녀가 그토록 사랑하는 가족들이 그녀의 눈을 감겨 줄 것이다.
‘그’도 이제 만족할까.
그는 문득 일전의 루테른 공작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가 기억하고 있던 토너먼트에, ‘아젠’이라는 보라색 눈의 기사는 출전하지 않았다. 그가 멀리서 살펴본 바로도, 아를렌의 주위를 호위하는 기사들은 매번 다른 기사들로 바뀌었지. 특별히 한 명의 호위 기사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언젠가 루테른 공작을 만났을 때, 슬쩍 한번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루테른 기사단에 혹시 아젠이라는 기사가 없습니까?」
「아젠? 글쎄, 기사단의 모든 기사들은 잘 알고 있지만 그런 이름을 가진 기사는 없소만…….」
생각해 보면 ‘아젠’이라는 이름은, 그가 스스로 고른 이름이었다. 그렇다면 ‘그 기사’의 이름은 다른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습니까. 혹시 이름이 다르더라도 보라색 눈의 기사가 있지 않습니까?」
「아니, 보라색 눈은 기사는커녕 사용인 중에도 없소. 찾는 기사가 있소?」
「아니, 제가 다른 기사단하고 착각했던 모양입니다. 별일은 아닙니다. 그냥 괜찮은 재능을 가진 자를 한번 봤는데 어느 기사단이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지라…….」
「흠, 불세출의 기사에게 재능을 인정받은 기사라니, 그 친구가 우리 기사단이 아니라는 게 안타깝구만.」
‘그’는 어디로 갔을까.
생을 되돌아온 후, 모두가 헛소문이고 지나간 옛 미신이라고만 생각했던 슬러족의 저주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이제 더 이상 아무도 믿지 않던 옛날이야기.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 옛이야기에 따르면, 슬러족이 저주를 할 때에는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을 먼저 대가로 바쳐야 한다고 했다. 상대의 부상을 원한다면 자신에게는 더 큰
부상을. 상대의 죽음을 원한다면 더 긴 수명이 남아 있는 자신의 죽음을.
그렇다면, 고작 누군가의 부상이나 죽음 같은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을 바랐던 그 기사는,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이 죽어 가고 있던 그 기사는, 그 대가로 무엇을 바쳐야 했었을까.
그때 그 기사는 분명 영혼을 바치겠다고 말했었지. 그렇다면 정말 그의 영혼은 사라진 것일까.
영혼을, 그 존재 전체를 다 바쳐서라도, 그토록 사모하던 아가씨를 마침내 구해 내게 되어서 만족했을까. 소중하고 소중하던 아가씨의 옆에 붙어 있던 저주스러운 재앙을 기어코 떼어 내고, 결국엔 그녀를 지켜 내게 되어서.
‘그’가 바랐던 대로 그녀가 지켜졌다는 그 사실을 알고는 있을까.
아니면, 알기도 전에 사라졌을까.
존재도, 기억도, 그 이름조차도 남기지 못하고.
이제. 이 넓은 세상 그 많은 사람들 중에,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를 가장 증오하고 ‘그’가 가장 증오하던 사람 한 명밖에 없다.
그녀의 기억에조차…….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잊혀진 것은 ‘그’뿐이 아니지.
그와 그녀가 함께했던 그 모든 시간들도 허공으로 흩어져 사라지고, 아무 곳에도 남지 않았다.
존재한 적 없던 시간을 오로지 그 하나만이 끌어안고 있었다.
사라지는 게 좋은 시간들이다. 알고 있다. 그 시간들이 얼마나 비참하고 처참하게 끝났었는지.
하지만, 그래도, 그 와중에도, 그를 세상 무엇보다도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 정도는, 나 혼자만이라도 기억하게 해 주기를…….
그 기억이라도 품고 살아갈 수 있게 해 주기를…….
그는 손안의 초록색 천을 꾹 움켜쥐었다.
다시 한번 보랏빛 가득한 언덕을 눈에 담았다.
그녀와의 약속대로, 다시는,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멀리서 한 번만…….
.*. *. *. *. *. *.
따스한 햇살이 부드럽게 내리비치고 싱그러운 바람이 머리카락을 살랑살랑 어루만지는 아름다운 봄날, 아를렌은 언덕 위로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겼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었다. 봄이 되어 언덕 가득 보라색 꽃이 피어나, 보이는 모든 것이 보라색으로 보였다. 그 색이 묘하게 그녀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지느는 언덕 위에서 혼자 심심하게 뭐 하시냐고 종종 타박하기는 했지만, 가끔씩 룬달 꽃이 가득한 언덕 위에 올라 혼자 조용하게 지내는 시간은 아를렌에게 무척 소중했다. 어쩌면, 기운을 얻어 가는 것 같기도 하고, 마음에 안정을 주는 것 같기도 하고…….
그녀는 홀로 느긋하게 언덕 위를 올랐다. 오늘은 몸 상태도 좋아서 꽃 사이를 헤치고 옮기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언덕 꼭대기까지 오른 그녀는 슈엘 성내를 내려다보다가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웠다. 귀족가의 아가씨가 이렇게 꽃밭에 그냥 누워 버리는 것은 평범한 일이 아니었지만, 그녀에게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보라색 꽃들 사이에 파묻혀 누워서, 산들거리는 바람을 맞으며, 달콤한 향기를 맡으며, 내리쬐는 햇살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좋았다.
“하늘이 예쁘다…….”
그녀는 하얀 구름이 두세 점 동동 떠다닐 뿐 마치 커다란 아쿠아마린처럼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 렸다.
들어 줄 사람 하나 없이 혼자인데도 불구하고, 어쩐지 소리 내 말하게 되곤 했다. 마치 누군가 옆에 있는 것처럼.
구름도 햇살도 꽃향기도 너무나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는 봄날이었다. 마치 누군가 정성 들여 만들어서 선물해 준 듯한 완벽한 날이었다.
그녀는 한동안 평화롭게 누워서 이 부족할 것 하나 없는 완벽한 날의 기운을 흠뻑 들이마시다가, 이윽고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허밍으로 좋아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꽃들을 꺾어 화관을 만들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자주 만들던 것이기에 손길은 아주 능숙했다. 금방 화관을 다 만든 그녀는 만족스럽게 만들어진 예쁜 화관을 보고는 환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왠지 누군가 자신에게 이런 화관을 건네주었던 것 같은…… 그런 희미한 기억이 떠오르는 것 같아 잠깐 갸웃거렸다. 어렸을 때 그런 적이 있었던가? 주로 이 언덕은 혼자 올라오기는 하는데. 잠깐 기억을 떠올려 보려고 인상을 찡그리며 노력해 보았지만 잘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그녀는 머리 위에 자신이 만든 화관을 썼다.
어쩌면 화관을 받은 후에는 그 사람과 함께 춤을 추었을지도 모르겠다. 왠지 화관을 머리 위에 쓰고 나면 누군가와 같이 춤을 추고 싶어지는 기분이 드니까.
누군가와 같이 마주 보며 웃어야 할 것 같은 느낌.
지느에게 같이 언덕에 올라와서 춤을 추자고 하면 그녀는 흔쾌히 따라오겠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으면서도, 막상 다른 누군가와 같이 언덕에 올라가는 것은 망설여졌다. 그냥 언덕에는 항상 혼자 올라와서 평화로운 시간을 즐기다가 내려가는 것이 좋았다.
잘 떠오르지 않는 옛 기억에 잠깐 고민을 해 보았지만, 막연한 느낌 외에는 전혀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아마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인가 봐.’
그녀는 훌쩍 털어 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름다운 날이었다. 펼쳐진 꽃들 위로 나비들이 꿀을 찾아 하느작하느작 날개를 퍼덕였다. 혼자라도 충분히 좋았다.
아를렌은 화관을 머리 위에 쓴 채로 빙글빙글 돌았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바람에 나뭇잎들이 흔들리는 소리가 음악이 되어 주었다. 어느 사이엔가 그녀는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하기 시작했고, 그 노래에 맞춰 발을 움직였다.
그녀의 발이 닿는 곳마다 꽃들이 흔들렸다. 몸이 움직일 때마다 햇살이 부서져 내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빛의 파도처럼 출렁였다.
노래에 맞춰 그녀가 빙글빙글 돌다 멈추자, 드레스 자락이 활짝 핀 꽃처럼 사르르 펼쳐졌다가, 피어날 날을 기다리고 있는 어린 꽃봉오리처럼 그녀의 다리에 휘감겼다.
어느덧 서쪽 하늘이 석양으로 붉게 물들고, 언덕 위에 반딧불이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할 때까지.
“아를렌一!”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그녀가 움직임을 멈추고 언덕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오라버니.”
화사하게 미소 지으며 맞이하는 여동생의 모습에 레트비안이 마주 미소 지었다. 사랑스럽고 또 사랑스러운 동생의 뺨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지만, 숨을 헐떡이고 있는 모습은 약간 피곤해 보이기도 했다. 아마도 노느라 상기된 것일 테지만, 그래도 워낙 약한 동생인지라 걱정되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레트는 자연스럽게 아를렌의 이마에 한 손을 올려 온도를 재어 본 후, 가볍게 그녀를 안아 들었다. 아를렌이 작게 꺅 하는 소리를 내었지만, 그녀는 곧 익숙하게 팔을 오라비의 목에 감았다. 레트가 아를렌의 이마에 가볍게 촉 입을 맞추고는 웃으며 타박을 시작했다.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하는데 언제까지 놀다 오려고. 오늘은 수도로 떠나기 전에 저녁 만찬이 있는 날이잖니. 젝시온 녀석까지 벌써 도착했던데 말이다. 뭐, 물론 네가 그 녀석 일정에 맞출 필요는 없다만.”
“으응. 금방 내려가려고 했는걸. 젝시온 도착했어? 우리 올라갈 때 같이 올라가는 거지? 근데 젝시온은 부단장까지 되었는데 수도를 이렇게 자주 비워도 되는 거야?”
“뭐, 어차피 우리 내일 수도 올라갈 때 같이 갈 거니까. 그 녀석 분명 부단장 된 거 만찬장에 자랑하러 온 걸 테니 그 정도는 봐주자꾸나. 아무튼 오늘 저녁엔 다 같이 모여서 만찬을 할 거니까 얼른 돌아갑시다, 우리 공주님.”
사랑하는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두 오라버니에,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두 모인 봄날의 슈엘 성.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문득, 그녀는 누군가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언덕 위에서 보라색 꽃들만이 산들산들 바람에 흔들렸다.
……착각이었나?
아를렌은 사랑하는 오라비의 따뜻한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몰려오는 졸음에 조금씩 눈이 감겨 왔다. 동실동실 떠다니는 빛 방울 몇 개가 그녀의 주위에 반짝였다.
“졸리면 자라. 집까지 안전하게 모실 테니.”
“으응…….”
그녀는 눈을 감은 채로,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박자에, 평온하게 잠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웃으면서, 아 행복한 삶이었어 하면서 눈을 감으리라.
그렇게 만들어 줄 것이다.
설령 그 곁에 내가 없더라도.
<完>
by BaaRa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