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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지키지 못한 약속 (12/13)

12. 지키지 못한 약속

이제 정말로 이동해야 했다.

어쩌면 그녀의 상태가 조금이라도 좋아질지 모른다는 헛된 희망에 무리해서 하루를 더 기다려 보았지만,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그녀의 상태는 되레 더 악화되어 갔다. 이제는 정말 더 이상 기다릴 여유도 없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마을에서 정보를 들었을 때에는 그 개자식은 아직 수도에 있었지만, 지금쯤은 이곳에 왔겠지. 레퀴에스 기사단이 벌써 근처까지 꼬리를 잡은 상황에서 의사까지 불러 놓고서도 들키지 않았으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를 부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녀가 죽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지만.

상태가 더 악화되어 더 이상 침대 밖으로 거의 나오지도 못하는 그녀를 데리고, 몸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도망친다는 것은 그닥 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의사는 마차의 작은 흔들림조차도 몸에 좋지 않을 거라고 단언했다.

이번 이동은, 어쩌면, 정말 마지막 이동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소원은 죽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자에게 잡히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이라도 들어줘야 했다.

자유롭게.

그자를 만나지 않게.

그리고…….

그는 목에 뜨겁게 걸려 있는 무언가를 힘들게 삼켜 내었다.

마지막 순간에, 눈을 감겨 주어야지.

숲 안 깊은 곳까지 들어올 수 없는 마차는 숲 어귀에 숨겨 놓았었기에, 아젠은 정신을 잃고 있는 그녀를 품에 조심스럽게 안은 채 말을 타고 걷고 있었다.

캐노피 사이로 스며들어 오는 희미한 달빛에 의존해서 걷는 길은 무척 어두웠다. 그의 눈은 종종 그 빛조차 잃었기에 한 걸음 한 걸음이 조심스러웠다. 모든 감각을 다 일깨우고 곤두세워야 했다.

실소가 나왔다.

나는 여태까지 도대체 뭘 해 온 걸까.

도대체 지금 무엇을 위해 발버둥 치고 있는 것일까.

어찌 생각해 보면, 바뀐 것은 별로 없었다.

슈엘 성에서 탈출해서 국경을 넘을 준비를 할 때에도, 국경을 넘어가서 오래 살아 봐야 아마 몇 년일 거라고 짐작했었다. 그래도 그 몇 년만이라도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었다.

그 몇 년이 몇 달로, 국경을 넘어가서 이곳에서로 바뀐 것뿐이다.

결국, 해 왔던 것을 지금도 계속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되뇌었다.

그러나, 그렇게 아무리 되뇌어 봐도, 결국은 달랐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사실 달랐다.

그녀는 더 이상 웃지 못했으니까.

생에 대한 그 모든 의지가 사그라진 그녀는, 눈을 뜨지 않게 되는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녀는, 자기가 눈을 뜨는 하루하루가 죄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제 그녀가 정말로 바라는 건 아젠이 그녀를 버리고 혼자 떠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그녀 역시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차라리 자신이 빨리 죽어 그의 발목을 잡지 않게 되는 날을 기다렸다.

‘이번 생엔 마지막 순간까지 그 미소를 지켜 주겠다고…….’

그의 입에서 비실비실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런 헛된 맹세를 했었더랬다. 그럴 능력도 자격도 안 되면서.

그리고 그 미소를 옆에서 계속 쬐고 있겠다고 욕심내었더랬지. 세상에서 그녀의 미소를 받을 자격이 가장 없는 사람을 꼽으라면 그 자신이었는데.

결국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다.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아무것도.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는데…….」

다시금 떠오르는 그 말.

결국, 자신이 살아 있다는 그 자체를 후회하던 거였을까. 하루라도 더 빨리 죽었어야 했다고…… 자연히 다가오는 끝을 기다리지 말고 진작 스스로 끊었어야 했다고…….

난 하루라도 더 당신을 살리고 싶은데.

아를렌은 그의 품 안에서 한 번 꿈틀거리지도 않을 정도로 완전히 정신을 잃고 있었다. 무리를 주지 않기 위해 가능한 한 천천히 걷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이런 흔들림이 몸에 좋지 않을 텐데…….

이 상태로 국경을 넘을 수는 없다. 아슈네란 안에서 도망 다녀야 한다.

몸에 가해지는 충격을 줄이기 위해 이동은 느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자에게 잡히는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해야 한다.

그리고…….

그가 지끈거리는 눈을 감았다. 몇 번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나서야 그는 다시금 천천히 눈을 떴다. 어둠 속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아 몇 번 더 깜빡거려야 했다.

어느덧 나무들 사이로 가려져 있는 마차가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낮에 미리 준비해 놓았던 푹신한 이불들 위로 그녀를 곱게 내려놓았다. 큰 움직임에 그녀의 눈꺼풀이 조금 열리는 듯했지만 곧이어 다시 닫혔다.

아젠은 잠시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야윈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어두움 속에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기억 속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모습을 완성해 주었다.

“아를렌…….”

작게 속삭여 불러 본다. 그녀는 듣지 못한다. 살며시 그녀의 뺨을 살살 쓸어 보았다. 여전히 그녀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한참 물끄러미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아젠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발해야 했다.

……너무 움직이면 안 된다. 마차 타고 움직이는 것 자체도 무리일 텐데…… 다음 은거지까지 움직인 후, 가능한 한 거기에서 마지막까지 머물러야겠다.

어쩌면 그녀의 마지막 나날이 될지도 모를 날들을.

.*. *. *. *. *. *.

가는 길은 평탄했다.

이쪽 지형이나 길들은 이미 모두 꿰뚫고 있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이동했다. 쫓아오는 사람도 없었고, 길을 막는 사람도 없었다.

조용했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오로지 말발굽 소리와 마차가 흔들리는 소리만이 그의 귀에 들어왔다.

아젠은 그저 마부석에 앉아 조용히 말을 몰았고, 짐칸 안에 잠들어 있는 그녀는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때로는 장례 마차를 끌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에 섬뜩해졌다. 종종 마차를 멈춰 세우고 그녀의 숨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날이 얼마나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러다 보면 정말 몇 안 되는 날이나마 웃게 할 수 있는 날이 올까. 그러나, 이런 의미 없는 날들이나마 단 하루라도 더 연장시키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더 붙들고 싶었다.

설령 이것이 그녀의 절망과 고통을 하루 더 연장시키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래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는 여전히 매우 이기적인 쓰레기일지도 모른다. 그 이기적인 놈이 어디 가지 않고 이곳에 남아, 그녀의 의지에 반해 강제로 그녀를 그의 옆에 붙들어 두려고 하고 있다.

“아가씨, 잠시만 일어나 보세요.”

마차를 세워 놓고 옆에 간단한 죽을 준비한 아젠이 아를렌을 살살 깨워 보았다. 이전 같으면 잠들어 있는 그녀를 깨우는 일은 없었겠지만, 이제는 그녀가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것이 두려워. 종종 끼니를 핑계 대고 그녀를 흔들어 깨워 보곤 했다.

다행히 그녀는 이번에도 눈을 떴다.

이번에는.

다음에는 눈을 뜨지 않으면 어떡하나.

“한 입만 드시고 다시 주무세요.”

그가 애써 웃는 얼굴을 만들어 보려고 했지만, 어쩐지 얼굴 표정이 부자연스럽게 경직되었다. 그녀가 눈을 뜨고 있는 잠시 동안이라도, 웃고 밝은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은데, 그녀처럼 자연스럽게 미소를 만들 수가 없다.

반면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미소 짓지 않았다. 그를 볼 때마다 습관적으로 만들어 올리던 그 괜찮다는 미소도, 말도, 모두 사라졌다. 한때는 가슴 아프게 했던 것들이, 이제는 절실했다.

상체를 일으켜서 베개에 받쳐 놓고, 숟가락에 죽을 한 숟가락 떠서 그녀의 입가로 가져갔다. 그녀가 작게 입을 벌려 받아들이자 안도의 숨이 나왔다.

천천히 천천히, 간신히 다섯 입을 먹이고 나서 그녀가 그 메마른 눈을 들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금 시선을 내렸다.

그래도 이제 구토가 줄어들었다. 어쩌면 구토조차 못 할 정도로 너무 오랜 시간 정신을 잃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한 입 두 입 삼킨 죽들이 다시 넘어오지 않고 그녀의 몸으로 흡수되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이었다.

그럴 때면, 가망 없는, 그러나 절실히 바라는 희망이 어쩔 수 없이 올라오곤 했다. 그녀는 더 이상 희망을 말하지 않지만, 그래도 어쩌면, 어쩌면 끝까지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버텨 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는 내년 이맘때쯤엔 국경 너머에 새로 마련한 언덕 위에 있지 않을까. 셋이서. 무사히.

‘저것’이 예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와 저것의 생명 줄이 끊어질 수 없도록 연결되어 있는 한, 그는 저것이 무사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서 떼어 낼수없으므로…….

아이는, 그 개새끼의 아이이지만, 어찌 보면 그의 아이이기도 했다. 그에 대해 생각하자면 도저히 공존할 수 없는 상반된 두 가지 감정이 어지러이 뒤엉키다가 결국 답을 내지 못하고 사라지곤 했지만.

그녀의 생명을 빨아먹고 있다고 생각하면 배 속의 것은 재앙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지만, 만약 그녀를 해치지 않고무사히 태어나기만 한다면…….

죽 한 입에 그의 희망은 하루에도 몇 번씩 저 위까지 올라갔다가 저 바닥까지 처박히곤 했고, 배 속의 ‘그것’에 대한 감정 또한 하루에도 몇 번씩 증오와 희망 사이를 요동쳤다.

“얼마쯤 왔어?”

생기 없는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거라도 들을 수 있는 것이 가뭄에 단비처럼 반가웠다.

“거의 다 왔습니다. 오늘 밤에는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미안…… 나 때문에…….”

이전에 미안이라는 말을 하지 않기로 했던 약속은 모두 산산이 부서졌는지, 이제 그녀가 드물게 꺼내는 말의 거의 대부분에는 미안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단어는 항상 칼날이 되어 그의 심장을 저며 내었다.

“좀 더 드실 수 있으세요?”

그녀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젠은 한숨을 속으로 삼키며 죽 그릇을 옆으로 내려놓았다. 그래도 다섯 숟가락이나 먹었으니 많이 먹은 편이다.

“잠깐 밖에 산책이라도 해 보실래요?”

그 말에 그녀가 잠시 고개를 들어 마차 밖을 내다보았다. 숲길을 지나고 있던 마차의 밖으로 푸르른 녹음이 엿보였다. 밖을 향한 그녀의 시선에 아젠은 잠시 희망을 가졌지만, 이내 그녀는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그냥 좀 눕고 싶어.”

그녀가 다시금 자리에 드러눕자, 아젠이 이불을 꼼꼼하게 여며 주었다. 아를렌은 그런 아젠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뭐라고 말을 할 듯 입을 살짝 열었다가, 결국 다시 다물었다.

어차피,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보았자, 듣지 않을 것이다. 그녀를 버려도 된다고, 버려 달라고 말해 보았자, 듣지 않을 것이다. 듣지도 않을 말을 괜히 해서 마음만 아프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진심이었다.

이미 끊어졌어야 하는데도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이 질긴 목숨 때문에 만약 아젠까지 안 좋은 일을 당하게 된다면,

‘그때엔 아직까지 살아 있는 나 자신을 절대 용서하지 못할 거야…….’

.*. *. *. *. *. *.

생포한 산적들로부터 상당히 믿을 만한 정보를 얻은 후, 근처 지방의 의사들은 모두 감시하고 있었다. 한 의사가 어느 날 하루 진료소를 늦게 열고, 그날 행동이나 표정이 좀 달랐다는 정도의 보고만으로도 카쉬엔은 바로 그 의사의 이름에 손가락을 짚었다.

연기도 제대로 하지 못하던 순진한 의사는 슬쩍 떠보는 말에 쉽게 넘어갔고, 무슨 수작에 넘어간 것인지 그닥 협조적이지 않더니 몇 차례 두들기고 나서야 술술 모든 것을 불었다.

계속해서 자신은 오가는 내내 정신을 잃고 있었기에 어디인지 정말 모른다 라고 주장했지만. 어찌 되었건 그래도 얻을 것은 있었다.

예를 들면, 그 오두막이 위치한 곳은 숲속이었다든가, 어찌 되었건 그 마을에서 하룻밤 내에 왕복이 가능한 거리 내에 있었다든가,

그놈이 검은 머리였다든가, 그녀가 머리를 짧게 잘랐다든가.

그녀가 많이 아프다든가.

의사는 딱히 병명을 짚지는 않았다. 단지 굉장히 쇠약해져 있어서 많이 걱정되는 상태라고.

하.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분노가 뒷목을 타고 확 올라갔다.

이제 간신히 몸에 살이 좀 붙기 시작했던 그녀였거늘, 그 빌어먹을 새끼가 또 그렇게 몸을 상하게 만들어?

감히. 나의 그녀를.

어찌 되었건, 이런저런 정보를 종합해 그 근처의 숲들을 싹 뒤졌다. 시간은 걸렸으나 결국 찾아냈다.

“떠난 지 하루 이틀쯤 된 것 같은데요.”

화덕의 잿더미를 뒤져 보던 기사가 일어서며 말했다.

“태울 수 있는 흔적들은 모두 태워 놓고 갔군요.”

카쉬엔은 그녀가 한때 누워 있었을 싸구려 침대에 걸터앉아 이불을 손으로 쓸어 보았다. 감히 그녀에게 닿기엔 질이 한참 떨어지는 거칠거칠한 물건에 눈살이 찌푸려졌다가, 문득 이 침대에 그녀가 그 새끼와 같이 누워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피가 역류했다.

이불을 움켜쥔 손에 핏줄이 솟아오르고, 마디마디가 하얗게 돋아났다. 주위로 살기가 퍼져 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이 분노를 삭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놈을 이 손으로 죽이고, 그녀를 당장 가져야 했다.

그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초록색 리본으로 곱게 묶여 있는 금색 실타래처럼 보였다. 그는 그것을 입가로 가져가 향을 흠뻑 들이마시고는, 한 번 입 맞추었다. 이미 그녀의 체향이 거의 사라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게 그에게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들이 이곳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녀는 무척 쇠약해져 있다고 했다. 그들은 어차피 빠르게 이동하지도 못하고 있을 것이고, 조만간 근방에서 또 다른 의사를 찾아갈 것이다.

거의 다 왔다. 이제 며칠 내로 그녀를 다시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잔향이 다 사라져 가는 머리카락 따위가 아니라, 진짜 너를. 진짜로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살아있는 너를.

.*. *. *. *. *. *.

새로운 은거지도 이전에 머물렀던 곳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저 위치를 많이 옮겨 왔을 뿐, 크게 다르지 않은 오두막에서 눈을 뜬 아를렌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는가 하더니, 다시금 스르륵 잠들었다.

그 후로는 고요하고 차분한 일상이었다.

너무 조용해서 가끔 소리를 질러 보고 싶어질 정도로…….

집에 있는 사람은 분명 두 사람이지만, 대부분의 시간 동안 한 사람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녀의 침대 옆에 놓아둔 지팡이는 쓰이는 일이 별로 없었다.

한때 언제나 발랄하게 웃으며 재잘재잘 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풀던 아가씨는 이제 거의 하루 종일 누워 있다가, 가끔씩 토하느라 일어나는 것이 전부였다.

아젠은 매일 그녀의 곁에 혹시라도 그녀가 깨어나면 먹을 수 있도록 물과 죽과 과일 몇 개를 준비해 놓고, 주위를 점검하고, 필요한 것들을 정리했다.

그러고는, 근처에서 발견한 꽃 몇 송이를 꺾어 와 그녀의 창가에 꽂아 두었다.

그녀가 눈을 뜬 순간. 제일 먼저 볼 수 있는 것이 그녀가 좋아하던 보라색 꽃이었으면 했다.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 나날에 웃음이나마 주기 위해서이건, 아니면 조금이라도 삶에 욕심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이건.

그 날도,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깨끗한 숟가락과 전혀 음식이 줄어들지 않은 그릇을 참담한 눈으로 보고, 창가에 아직 채 시들지 않은 꽃을 갈아 준 후, 보슬비에 젖은 몸을 대충 말리고는 그녀의 옆에 앉았다.

나날이 더더욱 야위어 가는 얼굴이, 성에서 보석상으로 위장해서 그녀를 보았던 그때를 연상케 했다.

혹은, 전생에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녀의 얼굴을…….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신이 나의 편이 아니라고 느낀 것은 처음이 아니었지. 그는 분명 전생의 기억을 어느 정도는 가지고 환생했는데, 어째서인지 절묘하게 도움이 될 만한 기억은 모두 막혀 있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왜? 운명이 정해져 있어서? 신이 그걸 바라서?

하지만, 그렇다면, 그녀가 그렇게 비참하게 자결하는 것까지 예정되어 있다고?

그는 이를 악물었다.

이미 더 이상 내려갈 데가 없는 지경까지 왔다. 이보다 더 몰릴 수가 없다. 그녀는 이미 모든 것을 잃었고, 완전히 부서져 내렸다. 예정된 죽음이 그녀의 배 속에서 점점 더 자라고 있고, 그녀는 오히려 그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면 하다못해, 그 죽음이라도 차분하게 맞이할 수 있게 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아무리 무저갱이라 하더라도 바닥이 있어야 했다. 이 이상 떨어트릴 수가 있나. 아무 죄 없는 이에게 이조차 용납하지 않는다면 신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말아야 했다.

아니. 하지만,

그걸 용납하지 않았던 것은 신이 아니라 그 자신이었지.

그녀의 가족과 친구들을 모두 몰살시킨 것도, 그 시체들을 모두 썩어 가게 만든 것도, 그녀를 잡아 와서 말려 죽인 것도, 그리고 끝끝내 그녀를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길로 몰아넣은 것도, 모두 신이 아니라 그 자신이었다.

아. 그 평민 기사가 자신을 얼마나 증오스런 눈으로 노려보았었는지 떠올랐다.

잊을 수 없는 그 눈.

저주했던가. 저주했겠지. 마땅히 그랬어야지. 나도 저주스럽다. 그 개새끼를 저주한다.

그녀가 부스스 눈을 떴다.

“아가씨, 깨셨어요?”

아젠은 빠르게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녀에게는 항상 좋은 모습만 보여 주어도 모자랐다.

그녀는 숨 쉬는 법을 잠시 까먹은 사람처럼 힘겹게 숨을 내뱉고는. 물컵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는 얼른 그녀의 상체를 일으켜 앉혀 주고는 물컵을 입에 받쳐 주었다.

그는 의사가 알려 준 지침들을 성전처럼 따랐다. 탈수하지 않게 충분한 양의 물을 먹일 것. 먹고 토하더라도 조금씩 꾸준히 먹여 볼 것. 물론 가장 좋은 것은 토하지 않을 음식을 찾는 것이었지만.

“다녀왔어? 지금 몇 시야?”

“아직 오후예요.”

아젠은 컵을 받아 들며 그릇에 놓여 있던 살구 한 알을 그녀에게 건네었다. 그나마 그녀가 잘 먹는 음식이었다.

아를렌은 말없이 살구를 내려다보다가, 느릿한 손을 움직여 받아들이고는 한 입 작게 깨물었다. 그녀가 한입을 꿀꺽 목구멍으로 삼키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아젠은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그녀의 눈길이 창가에 새로 갈아진 꽃을 한 번 쓸고는 내려앉았다.

“매번……고마워. 번거로울 텐데.”

“아뇨, 그냥 지나가는 길에 있으니까요.”

그래도, 오늘 그녀는 평소보다 약간 더 안정되어 보였고, 어쩌면 약간 더 기분이 좋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째서인지 조금 더 주위에 관심을 가지는 모습이 속절없이 다시금 희망을 샘솟게 했다.

“바깥은 어땠어?”

“그…….”

“응?”

“나가는 길에 빨간 새를 보았습니다. 토끼도 몇 마리 있어서 잡아 왔고요. 오는 길에는 비가 오기 시작해서…….”

그는 자신이 그녀처럼 좀 더 수다에 재능이 있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였다면, 이전의 밝은 그녀였다면, 아마 어떤 나무에 어떤 새들이 앉아 있었는지, 덤불 사이에 숨어 있던 토끼가 얼마나 귀여운 행동을 했는지, 다람쥐가 얼마나 재빠르게 나무 위로 다다다 달려 올라갔는지에 대해 발갛게 볼을 상기시키며 마치 굉장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음유 시인처럼 이야기했을 것이다.

느지막이 내리기 시작한 보슬비가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에 대해 환하게 웃으면서 얘기했겠지.

하지만 그의 노력은 전달이 되었는지, 그녀의 얼굴엔 희미하고 작게나마 미소가 살짝 맺혔다.

실로 오랜만의.

아젠은 자기도 모르게 멍하니 그녀의 미소를 바라보았다.

“너는 정말…… 말 많이 필요한 직업은 하면 안 돼. 기사가 딱인데……”

“…….”

“나 때문에 안 한다고 했던 거니까, 나 떠난 다음엔 다시 생각해 봐. 넌…… 자유잖아…….”

그는 이제 그녀의 기사도 아니고, 루테른 기사단 소속도 아니니까.

“……아가씨 보낸 후에 저도 바로 떠날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그녀가 안도한 듯 잠시 시선을 내렸다가, 문득 생각난 듯 되물었다.

“어디로 갈 거야?”

“……제가 가고 싶은 곳이요.”

“정한곳 있어?”

“네.”

“어딘데?”

“……비밀입니다.”

그녀는 아젠을 잠시 바라보며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그렇구나 하고 작게 읊조리며 시선을 내리고는, 살구를 작게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읏…….”

문득 그녀가 미간을 찡그렸다. 살구를 쥐고 있지 않던 그녀의 손이 이불을 움켜쥐었다.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어디 아프신 것 아닌가요.”

“괜찮아졌어. 원래 종종 그러던걸.”

그녀가 남은 살구를 그릇에 내려놓고 다시 누우려는 듯해, 아젠은 빠르게 그녀를 다시 눕혔다. 좋지 않다.

태아가 커지면서 가끔씩 배가 당기거나 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고는 했지만, 불안했다.

자리에 누운 그녀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잠들었을까. 하지만 아직 잠든 숨소리는 아니었다. 그냥 힘들어서 눈을 감고 있는 걸까. 결국 오늘 먹은 것도 살구 두입이 다였다.

하지만 살구 두 입이나마 토하지 않고 넘어갔으니 다행이었다. 일단 저것이 조금 소화가 되고 몸에 흡수가 된 것 같을 때쯤에, 다른 것도 다시 권해 봐야지, 그는 생각했다.

짧은 갈색 머리카락이 목을 지나 어깨로 흘러내려 와 있었다. 볼 때마다 가슴이 저릿했다. 그녀의 잘린 머리카락이 그가 무참히 잘라 버린 그녀의 인생 같았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거슬러 올라가면. 어느덧 다시 자라기 시작한 밝은 금색이 엿보이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로 손을 뻗어. 그 가여운 금색을 어루만졌다.

.*. *. *. *. *. *.

불안이 현실로 다가온 것은 바로 그날 밤이었다.

신경을 곤두세운 채 선잠을 자고 있던 아젠은, 무언가 이질적인 소리를 느끼고 눈을 떴다.

사방은 어두웠고, 구름에 가려진 달빛은 희미했다.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많은 소리를 가리고 있었지만, 귀를 곤두세웠다. 고작 빗소리를 구분 못 하고 깼을 리가 없었다. 어쩌면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그의 귀에 가느다랗게 들려온 것은, 다가오는 자의 기척이 아니라, 그녀의 신음 소리였다.

“아가씨?”

그는 살짝 문을 노크하였지만, 아무 대답 없이 계속 신음만이 들려오자, 그는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아흑…… 흐윽…….”

희미한 달빛 아래, 침대 위에서 그녀가 배를 움켜쥐고 온몸을 웅크린 채 신음하고 있었다.

“아가씨!”

그리고 퍼져 오는 비릿한 혈향.

“아가씨, 정신 차리세요, 아, 이게,”

그가 정신없이 달려가 아를렌을 끌어안듯 상체를 받쳐 들자, 그의 손에도 피가 흥건하게 묻어났다. 자신의 손에서 느껴지는 검붉은 액체의 느낌에 머리가 핑 돌았다. 그는 허겁지겁 이불을 젖혀 내었다.

이불도 침대도, 그녀의 하반신을 중심으로 모두 푹 젖어 있었다. 그녀의 몸도, 허리를 타고 등까지 피에 젖어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눈도 뜨지 못한 채 가느다랗게 신음을 계속하며 몸을 웅크렸다.

지잉, 어디선가 찢어지는 귀울음이 들렸다. 시1뻘건 피 웅덩이. 그 위에 쓰러져 있던 그녀가.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아를렌. 아를렌!”

그가 넋을 놓고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흔들기 시작했다.

“제발 정신 차려요, 아를렌!”

이 피가 어디에서 나오고 있는지 혼란스러웠다. 그녀의 가슴에 있지도 않은 단도가 박혀 있는 것 같은 환상이 아른거렸다. 그 와중에도 그 불길하고도 끔찍한 붉은 물이 점점 더 번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가씨, 아를렌, 제발, 제발…….”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은 그녀인데, 그가 더 헐떡이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 그녀는 조만간 떠날 거라고. 그녀도, 그도, 알고 있었고, 암묵적으로 그날을 기다리기 위해 이곳에 왔다. 하지만, 하지만,

“아젠…….”

실처럼 가느다란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가 허겁지겁 그녀의 얼굴을 마치 놓쳐 버릴 듯 바라보자, 그녀의 초록색 눈이 잠시 그의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힘없이 쓸었다.

“미안…… 나…….”

힘겹게 몇 글자를 뱉어 낸 그녀가 다시금 아흑 하고 신음하며 눈을 감고 몸을 움츠렸다. 고통스레 시트를 움켜쥔 앙상한 손에 뼈마디가 돋아났다.

“아가씨, 제발 가지 말아요. 제발…….”

아무리 빌어 보아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아무리 칼을 잘 휘두른들, 이런 상황에서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가지 말라고 붙잡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녀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머리가 젖어 있었다. 땀으로 젖은 것인지 피로 젖은 것인지도 구별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신음조차 하지 못하고 헐떡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피가 번져 가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의 팔도 몸도 모두 피범벅이 되어 갔다.

다시 한번 이런 피 웅덩이 위에 누워 있는 그녀를 봐야 한다고? 이렇게 시1뻘겋게 젖은 채로 죽어 가는 그녀를 또다시 봐야 한다고?

머리가 윙윙 돌았다. 어디선가 누군가의 짐승 같은 울부짖음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누군가, 그의 귓가에서, 그녀의 썩어 가는 시체를 끌어안고 부질없이 울부짖고 있었다.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던가. 그녀가 떠나면, 따라가면 된다고, 그러니 괜찮다고? 그런 게 가능할 수 있을 리가. ‘괜찮다’는 게 가능할 수 있을 리가.

이걸 그냥 보고, 지켜보고만 있는 것이, 가능할 리가…….

그가 이를 아드득 갈고는 그녀의 머리를 다시 한번 꼭 끌어안았다.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는 그녀의 이마에 입 맞추고 곱게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역시 죽게 할 수 없었다. 곱게 떠나보내 줄 수 없었다. 설령 당신이 가고 싶어 한다 하더라도 난 보낼 수가 없다. 제발, 아직은……아직은…….

“의사를 데려올게요, 아가씨.”

떠나려는 그의 옷깃을 무언가가 약하게 붙잡았다. 마치 죽어 가는 나비의 날갯짓처럼 약하디약한 힘이었지만, 그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간신히 뜬 눈으로, 앙상한 손가락으로, 그를 잡고 있었다.

“……가지 마……."

헐떡이는 숨 사이로 가느다랗게 떨려 나오는 목소리였다. 빛을 잃어 가는 눈동자가 흠뻑 젖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말을, 들어야 했다.

그는 그래야 했다.

하지만.

그는 어두운 방 안에 희미하게 비쳐 보이는 검붉은 침상과 그 위에 쓰러져 있는 아를렌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흔들렸다. 도저히 바라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어쩌면 이미 미쳐 있는 것 같았다.

“금방 돌아올게요. 금방…… 제발…… 제발 기다려 주세요.”

급하게 그녀의 손에 키스를 남기고, 그는 밖으로 달려 나갔다. 뒤에 피범벅이 되어 쓰러져 있을 그의 소중한 아가씨를 한 번 돌아볼 틈조차 없었다.

.*. *. *. *. *. *.

낮부터 내리던 보슬비는 어느덧 천둥 번개를 동반한 세찬 폭우로 바뀌어 있었지만, 그는 후드 하나 걸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대로 말 위에 뛰어올라 비 오는 밤의 숲을 지났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 어디였더라. 그는 근방의 모든 마을과 의사들의 위치와 신상을 다 꿰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마을로 가면 왕복 두 시간이면 의사를 데려올 수 있다. 두 시간이면…… 제기랄, 나는 왜 이렇게 마을에서 떨어진 곳에 은신처를 정했던가.

아를렌, 제발 두 시간만 나를 기다려 줘. 제발…….

잘 보지 못하고 피하지 못한 나뭇가지에 할퀴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쩌면 다쳐서 피가 나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딴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거칠어진 호흡 위에 눈앞이 가끔씩 점멸했다. 눈에서 눈물이 아니라 뜨거운 독액이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빌어먹을 나무들. 그동안 그들을 숨겨 주고 있을 때엔 그토록 고맙던 나무들이 지금은 너무나도 방해가 되었다. 그래도,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숲을 벗어나면 전력으로 달릴 수 있다.

그렇게 숲을 벗어나자마자 그는 전력으로 달렸다. 비가 미친 듯이 얼굴을 때렸다. 앞을 보기가 힘들었지만, 어차피 뚫린 길이라 상관없었다. 가끔씩 번개가 쳤다. 말이 힘겨워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쉴 틈을 줄 여유 따위 없었다.

그렇게,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멀게 느껴지는 길을 지나고 나서야, 작은 마을이 보였다.

저 마을의 어느 집이 의사의 집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침침해진 눈에서 빗물을 털어 내고는 바로 의사의 집으로 향했다. 어두운 밤, 쏟아지는 비, 침침한 눈에 주위가 잘 보이지 않았다. 아무런 여유 없이 마음이 급했던 그는 주위를 제대로 살펴볼 겨를도 없었다.

쾅쾅쾅.

문을 계속해서 거세게 두들기자, 안에서 불이 켜지고 빛이 새어 나왔다.

쾅쾅쾅.

그는 쉬지 않고 문을 두들겼다.

“뉘……뉘시오?”

안에서 졸음이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보다 더 반가운 목소리가 있을 수가 없었다.

“급한 환자입니다. 의사가 필요합니다.”

“지금 시간이 몇 신데…….”

“환자가 죽어 갑니다. 급합니다.”

이윽고 문이 열리자, 잠옷 차림에 키 작은 중년 남자가 눈을 비비며 서 있었다. 아젠은 그대로 그 의사의 손을 낚아채서 끌고 나왔다.

“아니, 이보게, 아무리 급해도 가방은 챙겨야 할 것 아닌가!”

의사가 반항하자 그제야 아젠은 손을 놓았다. 정신이…… 정신이 하나도 없다. 제대로 생각을 못 하고 있다. 침착해, 침착…….

“죄송합니다, 마음이 급해서…… 하지만 지금 환자가 죽어 갑니다.”

“증상이 뭔지는 얘기해 줘야지.”

“임신 중인데…… 하혈이 너무 심해서…….”

“아…… 쯧쯧. 하필 이런 날…….”

의사가 안으로 들어가서 이것저것을 챙기는 동안, 아젠은 밖에서 그저 발을 구르고 있었다. 왜 저리 느린가.

당장 끌고 나오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그는 자신의 심장 박동을 고스란히 느꼈다. 셀 수 있을 것처럼 선명하게 귓가에 울렸다. 옆에서 말이 푸르릉거리며 입김을 거세게 내쉬었다.

의사가 왕진 가방을 챙기고 두꺼운 후드를 꼼꼼하게 눌러쓰고 나오자, 아젠은 그를 급하게 훌쩍 안아 들어 말 위로 올리고는, 그 뒤에 올라탔다.

말을 한 마리 더 가져왔었어야 했다는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두 사람을 태우고 이 말이 얼마 동안 더 전력으로 질주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가야 했다. 의사를 기절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의식하지도 못했다.

그렇게 두 남자를 태운 말이 다시금 빗속을 뛰어들어 그녀가 기다리는 숲을 향해 달리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피이이 하는 긴 소리와 함께 무언가 환한 불빛들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하늘이 밝아지고 눈앞이 일시적으로 환해졌다. 빗방울 하나하나가 붉은 빛에 반사되어 보였다.

머릿속이 하얗게 새었다.

세상이 모두 멈췄다.

그는 돌리고 싶지 않은 고개를 삐그덕 뒤로 돌렸다.

길게 소리 내어 우는 명적과 함께, 하늘 높이 불화살들이 비를 뚫고 치솟아 올랐다가 흐려지고 있었다.

이런 시골에서 저리 요란하게 신호를 보낼 일이라고는…….

그가 이를 악물었다.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들었다. 그가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지 이제서야 깨달음이 싸하게 몰려왔다.

미쳤었구나. 돌았었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피에 젖어 있는 모습을 본 후로 완전히 정신이 나갔었다.

정신나간 새끼. 돌은 새끼.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직접적으로 의사에게 달려와서 그리 큰 소리를 내고는,

‘그녀에게 향하는 방향을 그대로…….’

이 방향으로 곧장 달리면 바로 그 숲이다. 그들에게 뻔히 방향을 내주었다. 미친놈. 생각 없는 놈. 정신 나간 놈.

아무리 정신이 나갔어도, 어떻게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자신이 저지른 짓을 믿을 수가 없었다. 머리에서 피가 모두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고삐를 움켜쥔 손에 피가 날 듯 힘이 들어갔다.

히이힝! 급하게 멈춰 세운 말이 크게 울며 앞발을 높이 쳐들자, 앞에 앉아 있던 의사가 비명을 지르며 말의 목을 끌어안았다.

“내려요.”

“뭐…… 뭐라고.”

“당장 내리라고!”

갑작스럽게 빗속에 혼자 우두커니 남겨진 의사는 당혹했지만, 아젠은 그를 신경 쓸 새가 없었다. 그는 말을 되돌려 다시금 마을을 향해 달려갔다. 허리춤의 칼을 손에 쥐고 단숨에 뽑아내었다. 빗방울이 거세게 튀었다.

다 죽여야 했다. 몇이나 있을지는 몰라도. 인근의 모든 마을마다 기사들을 여럿씩 배치했을 수는 없을 테니, 기사는 없거나 있어 봐야 한두 명일 것이다. 저놈들만 금방 잡으면, 이 폭우 속에서 어쩌면 말발굽 흔적 따위는 금방 없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쩌면, 흔적이 남지는 않을 것이다.

그사이에도 불화살이 계속해서 비가 쏟아지는 하늘을 향해 쏘아지고 있었다. 미친놈들, 가엾은 여자 하나 잡겠다고 전쟁이라도 치를 생각인가.

피이一

다시금 명적이 길게 울면서 하늘을 날아갔다. 귀가 멍해졌다. 저 소리가 명적이 내는 소리인지 아니면 자신의 귀에서 나는 이명인지. 혹은,

누군가의 비명인지.

불화살의 빛이 사그라들면, 빗물에 잠겨 들어가는 눈앞이 일시적으로 암흑이 되었다. 지끈거린다. 빌어먹을 눈. 원래 기사의 눈이란 아무리 희미한 어둠 속에서도 분간이 되어야 하는데. 다시금 불화살이 오르면 그 빛에 의지해 사방을 파악하며, 쉬지 않고 질주했다.

고맙게도 그들은 계속해서 화살을 쏘면서 자신들의 위치를 훤히 알려 주고 있었다. 어쩌면, 화살을 쏘는 놈은 한 놈이고 다른 놈들이 다른 곳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어쨌든 화살을 쏘는 놈부터.

시야에 들어온다.

화살을 쏘고 있는 놈이 하나, 그 옆에 말 타고 있는 기사가 하나.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기사 역시 순식간에 칼을 뽑아 들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카쉬엔 그놈이 직접 데려온 놈들이면 시시껄렁한 하급 기사가 아니겠지만. 괜찮다. 한 명뿐이다. 최소한 지금은 한 명뿐이다. 한 명일 때 베어 없애야 한다. 신호를 보고 그들이 몰려오기 전에.

그녀는…….

그녀는, 죽는 것보다도, 그자에게 잡히는 것을 더 두려워했으니까.

아젠은 커다랗게 칼을 휘두르며 그놈에게 달려들었다.

캉?!

허공에서 희미한 빛에 감싸인 칼 두 개가 거세게 맞부딪히며 불꽃을 튀겼다.

시야가 깜빡였다. 아젠은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 떴다.

다시 한번 요란하게 칼들이 부딪치고, 부딪쳤다. 빗물이 거세게 튀었다. 말들이 흥분하여 서로에게 푸릉거렸다.

활 든 병사가 도망치는 게 보인다. 작년 여름의 일이 자꾸 겹쳐져 떠오른다. 눈을 깜빡였다.

채챙!

“죽어!”

어느 사이엔가 그는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제발 좀 죽으라고!”

“미친 새끼!”

부웅 칼이 크게 휘돌았으나 다시금 챙 하고 막혔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는 피를 흘리며 죽어 가고 있을 텐데.

빨리 이놈들을 해치우고 의사를 데려가야 하는데.

그는 미친 듯이 내려치고 내려쳤다. 기사가 조금씩 조금씩 뒤로 밀렸지만, 아직은 성공적으로 방어하며 버티고 있었다.

피이이一

저 빌어먹을 소리. 그는 이를 악물었다. 저 소리가 그를 미쳐 버리게 하는 저주처럼 느껴졌다.

다시금 하늘이 살짝 밝아졌다. 눈이 시렸다.

저 빌어먹을 불화살!

캉!

강력한 일격과 함께 기사의 칼이 휘리릭 날아갔다. 아젠은 전혀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기사의 목에 칼을 찔러 넣었다가 바로 빼었다. 텅 하는 소리와 함께 육중한 몸이 말 밑으로 굴러떨어지며, 다시금 시야가 어두워졌다.

그 기사가 정말 죽었는지 아니면 살아 있는지 확인할 겨를도 없었다. 비에 젖어 질척거리며 눈에 달라붙는 앞머리를 뒤로 넘기며, 그는 아까 도망친 병사를 쫓아 헤맸다.

어딘가에 있을 거다. 이 근처에. 진정해. 그놈은 일개 병사야, 기척을 숨길 수도 없어. 금방 찾을 수 있어. 기척을 감지하면…… 아 제기랄, 사람이 너무 많아, 이 중 누군지…….

그렇게 주위의 기척을 감지하던 중, 순간, 한기가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순식간에 온몸을 덮쳐 올랐다.

감출 생각도 없이 시꺼멓게 일렁이며 타오르는, 모든 것을 순식간에 태워 버릴 강렬한 불길.

……그놈이 왔구나.

절망이 발끝에서부터 스멀스멀 타고 올라오며 온몸을 잠식해 들어왔다. 심장을 잡아먹는다.

칼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가며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순간 번개가 내리치며 세상이 온통 하얘졌다가 다시 까맣게 잠겼다.

그는 시큰거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부릅떴다.

그래도, 일단, 우선, 끝내야 하는 일이…….

그는 병사의 기척을 찾아 달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뒤를 돌아본 병사가 피 칠갑을 하고 자신을 쫓아오는 아젠의 말을 보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으나, 얼마 가지 못해 끊겼다.

아젠은 피가 질척하게 묻은 칼을 시체에서 뽑아내며 피를 털어 내고는,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제.

이제 어떡하지.

찬비가 계속해서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땅을 향해 비스듬히 내려가 있는 칼끝이 떨렸다.

그놈을 피할 수 없다. 그놈도 이미 나를 보았겠지.

이제…….

의사와 저놈을 둘 다 데리고 그녀에게 가는 것과,

가지 않는것…….

목울대가 한 번 출렁였다. 눈이 뜨거웠다.

「다시는 그 손에 잡히지 않게.」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녀는 혼자 있는데.

혼자서 죽어 가고 있는데. 그 피 웅덩이 위에서. 아무도 없는 적막하고 쓸쓸한 방 안에서. 혼자.

금방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었는데.

의사만 데리고 바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어떻게든 치료하고, 살리고, 안 되더라도, 마지막까지 그 손을 잡아 주고 눈을 감겨 줬어야 했는데…….

눈시울이 뜨거웠다.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빗줄기인지 눈물 줄기인지 알 수가 없었다.

「죽은 후에도 다시는 만나지 않게.」

뱉어 낼 수도 없는 불덩어리가 목에 걸려 있는 것 같았다.

가지 말라고 했었는데.

그 힘든 와중에도 가지 말라고 붙잡았었는데. 의사를 데려오는 것보다 마지막까지 같이 있어 주기를 원했었는데.

나는 왜 그녀를 뿌리치고 등을 돌렸던가.

「아무것도, 단 한 알도 그 손에 잡히지 않도록.」

그는 이를 악물고, 달리기 시작했다.

반대 방향으로.

그녀를 다시는 볼 수 없을 방향으로.

그가 이를 악물고, 화끈거리는 눈을 질끈 감으며 깜깜한 밤의 폭우 속을 달리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뒤쪽에서부터 화살이 날아왔다.

지칠 대로 지친 말은 속도를 많이 내지도 못했다.

하.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화살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냈다.

가슴이 심하게 울렁였다. 토할 것만 같았다.

그녀는 지금 혼자서 외롭게 고통스럽게 죽어 가고 있겠지.

아무도 듣지 못하는 신음을 뱉으며. 아무도 듣지 못하는 비명을 지르며, 그 작은 손이 하얗게 될 때까지 홀로 이불을 움켜쥐고, 고통을 견디고 있겠지.

돌아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며.

그 눈을 감겨 주기로 했는데. 그녀가 바란 건 별게 아니었는데. 눈을 감을 때 옆에 있어 주기를 바랐는데.

가지 말라고 했었는데.

금방 돌아오겠다고 했었는데.

그러나 이 길을 아무리 달려도 다시는 그녀에게 닿지 못하겠지. 다시는 그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하겠지.

그녀가 본 나의 마지막 모습은, 그녀의 부탁을 뿌리치고 등 돌려 나가는 모습이었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돌아갈 수가 없었다. 저 재앙을 데리고 그녀에게 가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죽음보다도 더 그녀가 두려워한 것임을 알기에.

그녀에게 저 재앙을 데려가면 어떤 결말이 찾아올 것인지, 이미 겪어 보았기에.

목에 얹혀 있는 불덩어리를 토해 내고 싶었다. 눈 속에 들어 있는 불덩어리를. 온통 뜨거워서 울컥거렸다.

미친 듯이 말을 달렸다. 이미 전력으로 달리고 있는 말의 박차를 차고 또 찼다. 힘겨워서 거의 거품을 물기 직전인 걸 알았지만, 어차피, 너도, 나도, 이게 마지막 질주인 것을.

어느덧 거리가 많이 좁혀진 것이 느껴졌다. 더 이상 도망가는 게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안다. 이 상태로 계속 달려 봤자 금방 따라 잡힐 뿐이다.

아젠은 둥글게 돌아 반대 방향으로 말을 돌려 섰다.

그놈이 보인다.

그놈이, 그 시커먼 말을 타고, 죽음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불길한 기운을 일렁이며.

멈춰 선 아젠을 발견한 카쉬엔도 말을 멈춰 섰다. 어두운 밤에 비까지 쏟아져 내려 서로의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서로를 잘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죽여 버리고 싶었다.

번개가 내리치면서 순간적으로 서로가 창백한 허연 빛으로 비쳐 보였다.

너 하나 때문에.

너 때문에.

너만 없었으면.

칼을 쥐고 있는 손에 아득 힘이 들어갔다. 비에 젖어 차가워진 몸에, 모든 피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듯했다.

다시금 말에 박차를 가했다. 가엽게도 지쳐 있는 말이었지만, 주인의 명령에 복종해 다시금 진흙 위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콰앙一!

질주해 온 두 검이 거세게 부딪히며 검기가 폭발했다. 아젠은 검압에 뒤로 밀려나며 말에서 떨어질 뻔한 것을 간신히 몸을 일으켰으나, 균형을 제대로 잡기도 전에 연이어 칼날이 뻗어 왔다.

빌어먹을.

캉一!

칼을 간신히 막아 내면서 서로 비껴 내자마자 다시 한번 날아 들어오는 칼날에 맞부딪친다.

웅웅 울려 대며 빛을 발하고 있는 칼과 칼 사이로 그놈과 눈이 마주쳤다.

지독한 감정으로 불타오르고 있는 검은 눈. 증오. 혐오. 경멸. 살의.

감히.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딴 감정을 가져!

거세게 칼을 뿌리친 후. 다시금 내리쳐지는 칼이 휙 빗방울을 갈랐다. 칼이 지나가는 궤적마다 빛이 흩뿌려졌다.

미친 새끼. 그래, 눈이 돌아서 그 기사를 죽이려고 쫓아갔던 기억이 난다. 뭐가 중한지도 모르고 그저 제 것을 뺐겼다고만 생각해서 그저 죽이려고 펄펄 뛰던.

죽이는 법만 잘 알고 살리는 법은 모르는.

다시금 말과 말이 부딪히고, 날과 날이 부딪혔다. 쉬지 않고 빛이 어린 칼끼리 부딪힐 때마다 징 하니 손목이 아렸다. 과부하가 걸린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눈앞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스쳐 지나가는 상처에서 피가 튀겼다.

어느 사이엔가 주위를 다른 기사들이 멀찍이서 둘러싸고 여유롭게 구경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 누구도 불안해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주군이 얼마나 강한지 뻔히 알기에, 그저 제법 실력 있던 저 기사가 주군에게 꺾이는 데 얼마나 걸릴지를 내기할 뿐이었다.

카쉬엔은 여유롭게 칼에 검기를 실으며 다시 한번 돌진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우웅一 검 울음이 귀를 어지럽힌다.

거슬리는 소리.

눈앞이 잠시 흐려졌다가 돌아왔다.

이쪽은 점점 칼에서 빛이 흐려지는데, 저쪽은 오히려 더 밝아지고 더 빨라지고 있다. 저 칼을 몇 번 더 막을 수 있을까.

……그래, 저게 나였지.

칼을 쥐면, 모든 것이 쉬웠었다. 주위의 그 누구든 가소로웠었지. 누구든 가벼웠지. 그 누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치건 모두 얼마나 우스워 보였었던가.

눈앞이 자꾸 흐려지려 했다. 심장이 거칠게 박동했다. 빗속에서 진흙탕 위를 한참을 달리고도 전투를 치러야 했던 말에게도 한계가 오고 있었다.

그래도.

후들후들 떨리는 손이 칼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네게는 얼마나 가소로워 보이든, 얼마나 부질없는 짓이든, 나는 끝까지 몸부림칠 수밖에 없다. 내 모든 것이 부서지더라도.

마지막으로 모든 힘을 다해서 검기를 실어 넣었다. 손에 들린 칼이 웅웅 떨면서 울리는 것이 느껴졌다.

“하!”

거세게 박차를 가했다. 불쌍한 말이 비를 뚫고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놈이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마주 달려오고 있었다.

카앙一!

요란하게 검들이 부딪히며 검기의 폭발을 일으켰다. 풍압에 눈을 뜨기 힘든 와중에 연이어 부응 휘둘러 들어오는 칼날을 칼을 세워 간신히 막았다. 이어서 다시금 날카롭게 파고들어 오는 칼들을 막을 때마다 온몸의 관절이 시큰거렸다.

제발 한 번만이라도……!

비를 가르며 그어진 아젠의 칼끝이 카쉬엔의 얼굴에 닿으려는 찰나,

우르릉 쾅!

내리찍는 번개로 사방이 일순간 하얗게 달아올랐다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지끈, 눈앞이 까맣게 번졌다.

순간, 옆구리에 불에 덴 듯 날카로운 통증이 삽시에 치고 들어왔다.

허억 하는 신음과 함께, 아젠은 여전히 앞을 보지 못하는 채로 말을 뒤로 물려 거리를 확보하려 애썼다. 그러나 바로 이어 들어오는 강력한 검격에 밀려 그대로 말에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쿵?!

지독한 통증에 머리가 울렸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기가 무섭게 바로 뒤로 검은 말이 달려드는 것을 보고 그대로 옆으로 뒹굴었다. 그가 방금 전까지 있던 곳에 거대한 말발굽이 내리꽂혔다.

지나간 말은 금세 방향을 틀어 다시 아젠이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아젠은 잘 보이지 않는 눈을 질끈 감으며 다시금 반대 방향으로 몸을 굴렸다.

카쉬엔이 흑마에서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아젠은 옆구리의 상처를 손으로 막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칼이……칼을…….

칼을 찾을 수가 없다.

어둡다. 시야가 몽롱했다. 이것이 눈에 문제가 있어서인지 낙마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신처럼 다가온 카쉬엔이 칼을 내리치며 달려들었다.

“아악!”

자기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팔로 칼을 받아 낸 아젠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카쉬엔은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진흙 튄 부츠로 땅바닥에서 신음하며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남자의 상체를 차서 똑바로 눕히고는 가슴을 짓밟았다.

“흐억…….”

카쉬엔이 자신의 뺨에 그어진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한 손으로 쓱 닦아 낸 후, 그를 내려다보았다.

아. 끝이구나.

그 와중에 실소가 나왔다.

그 모든 발버둥의 끝이, 결국, 고작 이거구나.

그의 시선이 허공을 배회하다가, 자신을 밟고 있는 남자와 마주치자, 참을 수 없는 뜨거운 감정이 가슴에서부터 올라오기 시작했다.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빗물 때문에 눈을 똑바로 뜨고 있기 힘들었음에도, 일렁이는 램프의 불빛들에 비쳐 마치 불에 타오르는 듯 넘쳐흐르는 감정으로 일렁이고 있는 그 눈이 똑바로 마주 보였다.

선명히 교환되는 끝없이 깊은 증오. 불타오르는 살의.

“커헉!”

카쉬엔이 다시금 거세게 가슴팍을 밟고 힘을 주자, 아젠의 입에서 피가 토해져 나왔다.

“건방진 새끼. 감히 눈을 치뜨고…….”

카쉬엔은 아젠의 가슴 위에 올려진 부츠에 지그시 힘을 주어 짓누르기 시작했다.

“어딨어?”

쿨럭 쿨럭, 피가 계속해서 토해져 나와 빗물과 섞였다.

“어디 있어 그녀는.”

피식. 아젠이 피가 섞인 웃음을 흘리자 카쉬엔이 발을 살짝 올렸다 체중을 실어 옆구리의 검상을 힘껏 차 내려 짓밟았다.

지독한 통증에 숨이 막혀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리 급하게 의사를 데려가려 한 걸 보면, 그녀의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것 같은데. 빨리 의사 데리고 가야 하지 않나?”

고통에 허공을 배회하던 아젠의 눈이 다시금 카쉬엔의 눈을 노려보았다.

“나에게 넘기기 싫다고 그녀를 위험에 빠트리기라도 할 셈인가? 응? 의사 데려가야지.”

아젠이 뭐라고 입을 열다가 다시금 피를 쿨럭쿨럭 토해 내자, 카쉬엔은 아젠의 몸에서 발을 떼고, 몸을 숙였다.

“어디야.”

“개새끼……죽어버려.”

목구멍을 긁으며 간신히 나오는 소리에 카쉬엔은 피식 웃고는 그의 옆구리를 노려 걷어차 버렸다. 질척한 땅 위를 비명과 함께 데굴데굴 굴러간 아젠의 몸이 멈추자, 다시 한번 따라간 카쉬엔은 칼을 꺼내 아젠의 허벅지에 꽂아 내렸다.

“아악!”

“말해. 어디야. 그녀에게 의사를 데려가야지. 의사, 급하게 필요한 것 아니었나?”

의사가…… 필요했었지.

그녀는 지금 죽어 가고 있을 텐데.

혼자서 외롭게. 고통스럽게. 그 어두운 곳에서. 축축하게 피에 젖어서.

그럼에도.

“네놈은…….”

“뭐?”

“네놈은 죽어도 안돼.”

그녀가 죽음보다도 더 두려워할 정도로 끔찍했던 악몽. 지옥. 그모든 재앙.

그녀가 이토록 비참하게 홀로 죽어 가게 만든 원흉.

심지어는, 그녀를 그리 죽이고서 죽인 줄도 모르는…….

“허억.”

아젠이 다시금 신음을 뽑아냈다. 카쉬엔은 일말의 동정심도 없이 허벅지에 꽂힌 그의 칼을 마구 비틀어 대었다.

“당장 죽이고 싶은 걸 참고 있으니까, 말해.”

“……죽여.”

“못 죽일 줄 아나? 그리 정신 못 차리고 급하게 의사를 찾아온 걸 보니 여기서 멀지 않은 곳이겠지. 이미 근방은 모두 뒤지고 있는 중이니 이제 금방 찾았다는 연락이 올 거다.”

“죽여. 개새끼야. 죽여. 죽여! 죽이라고!”

그녀는 떠났을까.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아무도 오지 않는 방에 홀로 쓰러져 있을까.

눈을 감겨 주기로 했었는데.

다시는 저 손에 잡히지 않게 바람에 날려 주기로 했었는데.

“나도 죽이고, 다 죽여! 개새끼! 죽여 버려!”

사방으로 피가 튀기고, 다시 비명이 밤을 꿰뚫었다. 카쉬엔이 무자비하게 칼을 휘둘러 그의 다리를 잘라 내 버리자, 온몸을 태워 버릴 듯한 극심한 고통이 머릿속을 새하얗게 불태웠다.

하. 그래. 이런 거였지. 이런 거였었지.

또 뭘 했더라. 손발을 자르고. 귀도 자르고, 혀도 자르고…… 마지막은 눈이었던가.

그래, 그랬었다. 다 내가 했던 짓. 그때 그 기사는 그녀에게 들려주지 않으려고 비명도 지르지 않았었지. 나는 이렇게 비명을 고래고래 질러 대고 있는데.

그래도, 그녀의 앞에서 당하는 게 아니라 좀 나은 건가. 하. 그래, 이 생애에서 그렇게 아등바등 발버둥 친 결과 이것 조금이 달라진 건가. 그녀에게 마지막 남은 단 한 사람마저 고문당하다가 살해당하는 모습을 그녀가 직접 보지는 않게 된 것?

그래서 그녀가 자결하지 않고, 대신 외롭고 쓸쓸히 고통 속에서 떠나게 만든 것?

결국 그토록 고통스러워하다가 비참한 삶을 마감하게 했는데. 뭐가 그리 달라졌단 말인가.

도대체 그녀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그녀는 단지, 불쌍한 소년을 도와준 것뿐인데. 상냥하고 착하고 다정해서, 상처받은 소년을 지나치지 않고 구해 줬던 것뿐인데.

어째서 그녀가 이 모든 고통을 짊어지고 그토록 비참한 삶을 고통 속에서 끝내야 해.

저주스러운 재앙. 저주스러운 괴물.

「저주한다, 네놈을…… 내 영혼을 바쳐 저주할 테다…….」

언젠가, 그 보라색 눈의 기사가 했던 말이 귓가에 웅웅거렸다.

그래, 저주했겠지. 저주를…….

저주를…….

……그런가. 이 모든 게 저주였었던가.

네가 당했던 걸 나도 한번 고스란히 당해 보라고? 그래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그래서 그토록 이 길에서 벗어날 수 있을 그 모든 곁가지를 다 막았던 건가?

네가 걸었던 길을, 네가 당했던 모든 것을, 그대로 그 길을 따라가면서 그대로 다 당하게 하기 위해? 그런 저주였다고?

그래, 그럴 만하지. 나는 개새끼였으니까. 이보다 더 당해도 쌌겠지. 나라도 저주했을 거다. 나도 지금 저 개새끼를 저주하고 싶다.

그러나, 그러면,

그녀는 무슨 죄인데.

그녀는 왜, 나의 죄를 나의 업보를 왜 그녀가 이토록 짊어지고 고통받아야 하는데.

그녀는 왜.

“아아악!”

아젠이 다시금 비명을 내질렀다. 더 이상 새로운 통증을 느낄 여력이 없을 정도로 이미 머리가 고통으로 녹아내리고 있는 중이었음에도, 새로 잘린 자리는 다시금 새로운 고통으로 불타올랐다.

도대체 그 기사는 어떻게 이걸 비명 하나 지르지 않고 버텼나. 그녀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런데, 그토록 대단한 일념으로 어떻게 그녀를 이렇게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트리는 저주를 걸 수가 있나?

“어차피 널 쫓아오기 전에 이미 근처에 사냥개를 풀었어. 너 따위가 버티든 말든, 금방이다.”

“사냥개라니, 미친 새끼.......”

그녀를 그딴 식으로. 사냥개가 물고 오는 사냥감처럼…….

“그딴 식이니 네가 그녀를 죽이는 거야…….”

과다한 출혈 때문인지, 정신이 가물가물해지고 무엇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래도 아젠은 힘겹게, 잘 움직이지 않는 입에서 말을 뱉어 내었다.

“뭐?”

“망가트리고 죽이는 법만 아는 괴물이…….”

그야말로 모든 것을 죽여 버리는 저주받은.

아, 그래.

애초에 태어났을 때부터 저주받았었던가.

반복해서 점멸하는 정신을 부여잡고, 그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뱉어지지 않는 숨을 내뱉어 입을 움직였다.

“그렇게 그녀를 망가트려 놓고, 죽게 하고도, 뻔뻔한 저주받은 새끼, 너 같은 놈은 절대 그녀 곁에 있어선…… 커억.”

갑자기 입 안으로 들어온 칼날에, 아젠은 말을 끝내지도 못했다. 왈칵왈칵 쏟아져 나오는 피가 목구멍을 막았다.

“하찮은 새끼가 어디서 감히 더러운 입을 놀려.”

카쉬엔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끝을 내기로 결심했는지, 칼을 높이 치켜들었다.

아. 이제 진짜로 끝이구나.

어차피 저 칼이 내리쳐지든 아니든, 끝이었다. 잘려 나간 사지에서 계속된 출혈로 인해 정신은 이미 희미해졌고, 시야는 점점 더 어두워졌다.

나는…….

그녀는…….

그때였다.

비를 가르고 급하게 말이 달려왔다.

“주군!”

카쉬엔의 고개가 바로 새로 달려온 기사를 향해 돌아갔다. 아젠은 힘겹게 그쪽을 바라보려 애썼다.

“아가씨를 찾긴 찾았는데…….”

“어디야.”

카쉬엔은, 꿈틀거리며 어떻게든 움직여 보려 애쓰는 아젠에게서 미련 없이 등 돌리고 자신의 말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게 저……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시신을……

흐려지는 시야로, 카쉬엔이 그 자리에 굳은 듯이 멈춰 서는 것이 보였다.

「죽은 후에도 다시는 만나지 않게…….」

비 비린내도 피비린내도 점차 흐려져 갔다.

「난 네가 내 눈을 감겨 주면, 그걸로 됐으니까…….」

아무것도 이루어 주지 못했다.

차가워진 그의 몸 위로 비가 계속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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