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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이미, 정해져 있던 (11/13)

11. 이미, 정해져 있던

하르드는 자신이 무능한 것인지 고민해 보기 시작했다.

대공이 가진 수많은 자원과 인력들이 투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초반에 꼬리를 놓쳐 버린 여자를 추적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 평민 기사가 예상외로 상당히 만반의 준비를 해 놓기는 했다. 도무지 아무런 경험 없는 일개 기사 나부랭이의 솜씨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심지어 탈주하기 얼마 전부터 급하게 준비한 것이 아니라, 작년 여름, 그 여자를 잡아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치밀하게 여기저기에 준비를 해 놓기 시작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쪽에서 그 기사는 이미 도망친 것 같다며 방심하고 있던 동안, 그놈은 이미 그 여자를 빼돌리기 위한 밑 작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얼마 동안 얼마나 준비해 놓은 건지. 그렇게까지 치밀해야 할 필요가 있었는지.

아. 물론 그렇게 치밀하게 해 놓지 않았다면 이미 예전에 그 여자는 다시 끌려오고 그 기사는 짐승의 먹이가 되었겠지만.

직접적인 신고나 검문 결과는 모든 지역에서 바로바로 받고 있었지만, 수배범과 직접 관련되지 않은 타 영지의 사소한 사건 정보들까지 모두 받아 보게 되는 데에는 작업과 압박이 좀 필요했다.

물론, 아슈네란에서 레퀴에스 대공의 압박에 버틸 수 있는 귀족은 없었던 데다가 왕세자의 비호까지 더해졌으므로, 결국에는 모두 다 받아 볼 수 있게 되었지만.

그렇게 받아 낸 산더미 같은 정보들을 대공은 손수 훑었다.

한참 동안 모든 정보를 다 살펴본 대공은 마침내 무언가를 결정한 듯. 손에 들고 있던 서류들을 책상 위로 소리 나게 던져 놓았다.

“아주 웃기는 군.”

“네?”

하르드가 반문했으나 카쉬엔은 신경 쓰지 않았다.

마치 정리 안 된 마구간마냥 지저분하게 정보와 흔적과 가짜와 잡음들이 뒤섞인 와중에,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말아야 할지 구분하는 것부터가 큰일이었으나…….

어째서인지, 자신이 그 기사 새끼라고 가정하고, 그 새끼가 자신과 동일하게 판단할 거라고 가정하고 서류들을 보자, 훨씬 많은 것들이 명료해졌다..

처음엔 가볍게 만일 내가 그 상황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보기 시작한 것이, 어느 사이엔가 연결되지 않고 흩어져 있던 서류상의 점들 중 일부가 모여서 모양을 이루고, 쓸데없는 가지들 상당수가 내쳐지자,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착각일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입꼬리에 삐딱한 비소가 걸렸다.

그 빌어먹을 새끼와 자신이 비슷하게 사고하고 행동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만으로도 기분이 아주 더러웠다.

그래, 나와 같이 그녀를 탐하던 놈이지. 그녀를 바라보는 눈이 비슷하니 생각하는 방식도 비슷하다 이건가.

속이 뒤틀렸다. 온몸의 혈관이 뒤틀리는 듯한 느낌에 주먹에 핏줄이 솟아올랐다.

역시 죽여 버려야겠다. 진작에 죽였어야 했는데. 작년여름에 그녀를 손에 넣자마자 그놈부터 바로 추적해서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아니, 그 전에 온실에서 본 순간 죽였어야 했다. 일단 그 자리에서 죽여 놓은 후 뒤처리를 하는 게 나았을 것을.

“저하?”

옆에서 하르드가 조심스럽게 주의를 환기시키자, 카쉬엔은 다시금 정신을 차렸다. 그 새끼를 죽이는 거야 찾은 다음 죽일 일이고, 일단은 찾는 게 먼저다.

그는 깨알같이 정보들이 요약되어 있는 지도를 책상 위에 쫙 펼치더니 펜을 집어 들었다. 지도의 여러 군데에 흩어져 있던 글자들 여러 개가 거침없이 찍찍 그어져 나갔다.

“조건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정보들은 모두 버려.”

“네?”

“어차피 대부분 의도된 가짜일 테니까. 차라리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 정보들 중에 진짜가 섞여 있겠지.”

그러고는 붉은 잉크를 찍은 펜을 집어 들고는 몇몇 군데에 마킹하기 시작했다.

“표시한 곳마다 모두 조사관들 보내. 근처의 모든 의원과 약재상들 조사하는 것 잊지 말고.”

하르드가 지도를 다시 한번 내려다보았다. 붉은 자국 역시 많기는 했지만, 조사할 숫자가 확 줄어들었다. 여전히 다소 흩어져 있기는 했지만, 대체로 서부 쪽으로 편향되어 있는 것을 보니 지도가 아름다워 보일 지경이었다.

“아. 그리고,”

카쉬엔이 여전히 손에 쥐고 있던 붉은 펜으로 톡톡 지도의 한 부분을 두들겼다.

“여기, 숨겨져 있었다던 산적 시체들, 아직 검시가 가능할 것 같으면 검기를 일부러 숨긴 기사가 벤 거 아닌가 확인해 봐. 만약 맞으면,”

지도에 맞닿아 있는 펜촉이 카릴이라고 쓰여 있는 지명을 붉게 물들여 나갔다.

“산적들 몇 잡아서 심문해.”

.*. *. *. *. *. *.

온통 초록색으로 뒤덮인 초여름의 숲. 무성하게 우거진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많이 들지 않아 시원한 그늘을 이루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들이 서로 부딪히며 마치 파도 같은 소리를 내었다.

아젠은 발걸음을 서둘렀다. 등에는 토끼 몇 마리가 들어 있는 자루가 묵직하게 흔들렸다. 딱히 사냥을 목적으로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눈에 보이면 틈틈이 잡고 있었다.

혹시 근방에 인기척이 있지는 않은지, 무언가 변화가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러 나온 참이었다.

깊은 숲속이었다. 근방에는 마을 하나 없었고, 근처에 사람이 다닐 만한 길조차 없었다. 인적이 전혀 없는 곳이기에 들킬 염려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방심하고 싶지는 않았다.

올해 내에는 국경을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일단 여기저기에서 조용히 은둔하며 해를 넘길 생각이다. 한창 그들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삼엄하게 경계하고 있을 지금 시기에, 몸도 좋지 않은 그녀를 데리고 국경을 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들이 저런 경계 상태를 오래 유지할 수도 없을 테니, 차라리 한동안 은둔하면서 그녀의 몸을 회복시키고, 그들이 지치고 방심했을 때 즈음 국경을 넘는 게 나을 것이다.

은둔지는 여러 군데에 미리 준비해 놓았지만, 일단 지금 머무는 곳은 국경에서 많이 멀지도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숲속에 있는 오두막이었다. 미리 준비해 놓은 오두막은 밖에서 보기엔 상당히 낡고 허름해 보였지만, 그녀가 사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미리 많은 것을 준비해 둔 상태였다.

근처에 아무도 없는 데다가, 오두막으로 그 어떤 야생동물도 접근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 두었으니 당연히 그녀는 안전하게 잘 있을 거라고 믿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옆을 비우고 있는 것은 불안했다.

가뜩이나 요즘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그녀가 행여나 쓰러져 있는 것은 아닐지, 혹은 자신이 미처 눈치채지 못한 누군가가 침입한 것은 아닐지, 불안한 마음에 걸음을 서둘렀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돌아가는 발걸음에 자신도 모르게 설레는 마음이 스며드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지금 상황이 들뜰 상황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다 하더라도, 자신이 준비한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며 앉아 있을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면 봄 햇살에 포근히 녹아내리는 듯한 행복감이 차올랐다.

“아가씨?”

오두막 바깥에 나와 앉아 있는 아를렌의 모습을 발견한 아젠이 금방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안에 계시지 왜 나와 계세요.”

“그냥, 날씨도 좋고, 네가 올 때가 된 것 같아서…….”

읽고 있던 책을 덮으면서 그녀가 미소 지었다. 그 미소가 사랑스럽지만, 피곤한 안색을 숨기지는 못했다.

짐 자루를 대충 내려놓은 아젠이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자, 그녀가 익숙하게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살짝 미열이 느껴졌다. 근래 그녀는 미열이 없는 날이 없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 의자 위에 그녀를 내려놓은 아젠이 바로 화덕 쪽으로 이동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일단 약차를 한잔 드릴게요.”

아젠은 순식간에 작은 불을 올리고 주전자를 그 위에 올렸다. 주전자에는 이미 그가 아침에 끓여 두었던 약차가 반쯤 남아 있었다.

금방 데워진 약차를 잔에 따르고 뒤를 돌아보니, 아를렌은 테이블에 몸을 기대어 반쯤 엎드린 채,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뜨거운 약차가 가득 담긴 컵을 테이블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후, 그녀가 몸을 일으키는 것을 도우며, 어차피 같은 답이 돌아올 것을 알면서도 의미 없는 질문을 던졌다.

“몸은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

어차피 괜찮다고 대답할 걸 알고 한 질문이지만, 들을 때마다 속이 상했다.

원래도 굉장히 약해져 있던 몸에, 계속해서 흔들리는 마차를 타고 멀미하며 이동하는 일정이 힘들었으리라.

그래도 그 지옥 같은 곳을 벗어나고 나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했는데, 여전히 그녀는 잘 먹지 못했고, 억지로 권하여 많이 먹이기라도 하면 잠시 후 다 게워 내었기에 더 먹일 수도 없었다. 먹지 못하니 기력도 없어,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다.

그는 자신이 준비해 놓고 갔던 음식들이 얼마나 줄었는지 눈으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별로 줄어든 게 없었지만, 그래도 쉽게 집어 먹을 수 있는 과일 몇 개는 줄어 있었다.

그나마라도 먹은 게 어딘가 싶어서 그녀가 잘 먹은 음식이 무엇인가 머릿속에 기억해 두었지만, 여전히 양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발견한 그녀는 다시금 얼굴에 미소를 만들어 올리며,

“정말로 괜찮다니까.”

하고 웃어 보일 뿐이었다.

“드시는 게 거의 없는데 어떻게 괜찮습니까.”

“하지만 거기선 이보다 더 못 먹었었는 걸. 멀건 수프만 몇 숟갈 뜨다 말고 그랬었어. 나아진 거야.”

“……그거 혹시…… 위로하려고 하신 말씀인가요?”

아젠이 미간을 찡그리며 되묻자, 아를렌은 되레 푸스스 웃었다.

“위로가 되지 않았나요. 아젠 경?”

“될 리가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더 나빠졌다는 말보다 낫잖아, 응? 그렇지?”

“……위안이 되네요…….”

마지못해 대답하는 아젠을 보고 아를렌이 다시금 웃었다.

그래도, 웃으니까.

이전에 성에서 보았던 것처럼 시체처럼 퀭하니 앉아 있는 게아니라, 웃으니까.

그녀가 차를 홀짝였다. 따뜻한 약차가 몸에 들어가자 속이 좀 풀리는지, 표정도 같이 풀리는 것이 보이자 마음이 약간 놓였다.

그녀가 천천히 약차를 마시는 동안 밖으로 나간 아젠은 토끼들을 정리하고, 내친김에 주위를 좀 더 정리한 후 돌아왔다.

제법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그저 가만히 앉아,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며 차만 홀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해졌고, 얌전해졌다.

그간 움직일 수 없었으니까 가만히 앉아 있는 것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 내려놓으면 내려 준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는 삶, 움찔 움직이면 바로 감시가 따라붙으며 경계가 붙는 환경, 그리고 방 바깥으로 한 발짝 나가 보기가 힘든 처지에.

이전에는 그토록 자유롭게 가벼운 발걸음으로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가만히 있지 않았던 사람인데.

아젠은 그녀의 옆으로 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게, 그에게 가장 편한 자세였다. 그녀의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올려다보는 자세. 그러면 그녀는 그 맑은 초록색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그는 올려다보고, 그렇게 시선이 얽히는 자세. ‘아젠’의 자세. ‘아젠’의 위치.

그녀가 편하게 여기면서 내어주는 그녀의 곁.

“주변에 좋은 곳을 찾았습니다. 한번 같이 가 보실래요?”

.*. *. *. *. *. *.

두 사람이 같이 말을 타고 달리기를 잠시, 눈앞에 탁 트인 들판이 나타나고, 곧이어 보라색 꽃으로 가득 뒤덮인 언덕이 나타나자 아를렌의 입이 자기도 모르게 벌어졌다.

“와아…….”

비록 그녀의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작은 감탄사에서 그녀의 표정을 짐작해 낸 아젠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비록 아직도 열이 내리지는 않았기에 조심스러웠지만, 요즘 들어 우울해 보이는 그녀였기에 무리해서라도 나와 봐야겠다 싶었다.

말은 단숨에 언덕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아젠이 먼저 말에서 뛰어내린 후, 두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잡아 살며시 내려 주었다.

“뭔가 깔 것이라도 가져올 걸 그랬네요.”

“괜찮아. 한두 번도 아니고…….”

그녀가 꽃밭 위에 그대로 앉으며 웃었다.

꾸며 내지 않고 진심으로 환하게 웃는 얼굴에 순간 가슴이 술렁였다. 잠깐이었지만, 실로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진짜 웃음이었다.

오래 나와 있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무리해서라도 나오길 잘했다. 아젠의 입꼬리도 부드럽게 올라갔다.

그녀는 가만히 따사로운 초여름 햇빛을 받으며 앉아 있었다. 바람이 시원하게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짧은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지나가는 모습을 아젠은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햇빛을 받아 투명하게 빛나는 초록색 눈이 언덕 아래 넓게 트여 있는 보라색 들판을 아련하게 내려 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말이 없이 조용했다. 가만히 앉아서 먼 곳을, 혹은 모든 곳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들고 앉아 있는 것조차 힘에 겨운지, 무릎을 끌어안은 팔 위로 조용히 고개를 얹어 기대었다.

낯익은 모습이었다. 동시에, 낯선 모습이었다.

이전의 그녀는, 아름답고 긴 머리카락을 바람에 흩날리면서, 이보다 훨씬 더 밝은 얼굴로, 훨씬 더 건강한 모습으로, 월씬 더 생기 있는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 않았다.

저 얼굴 가득히 환한 미소를 채우고 소리 내어 웃는 날이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돌이킬 수 있을까. 아니, 가능성을 따지기 이전에, 해야만 했다.

이미 죽은 이들을 살아 돌아오게 할 수는 없지만, 그 개새끼가 그녀에게 심어 둔 자책감이라도 덜어 주고 싶었다. 그녀를 가장 괴롭게 짓누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에.

그래서 기회가 될 때마다, 모든 것은 그자가 악랄하게 권력을 탐했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며, 그녀는 그저 운이 나빴던 것뿐이라는 식의 말을 흘려 넣곤 했지만, 그녀는 그저 씁쓸하게 흐린 미소를 지으며 ‘응……하고 조용히 넘어갈뿐이었다.

갈라지고 메마른 그녀의 마음에 한두 줌의 물을 붓는다고 해서 금방 회복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녀를 저렇게 망가트린 사람도, 그녀의 미소를 가장 간절히 기다리고 갈망하는 사람도, 모두 그 자신이었으니까.

한참을 우수에 잠겨 있는 그녀를 보던 아젠은, 이내 손을 움직여 익숙하게 꽃을 꺾어 모으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움직여 보는 손은 처음엔 조금 서툴렀지만, 이내 과거의 기억을 금방 되살려 내서 능숙하게 화관을 엮어 만들기 시작했다.

하염없이 보라색 언덕과 들판을 내려다보고 있던 아를렌은, 옆에서 무언가가 가볍게 톡 톡 치는 느낌에 옆을 돌아보았다.

아젠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룬달 꽃을 엮어 만든 화관을 두 손으로 올려 바치고 있었다.

“고귀하신 레이디. 저의 화관을 받아 주시겠습니까?”

그 말에 아를렌의 입가가 자기도 모르게 피식하며 올라갔다. 그녀는 천천히 두 손을 뻗어 화관을 받더니, 잠시 들여다보다가 머리 위에 얌전히 올리고는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아젠은 어쩐지 떨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청했다.

“부디 한 곡의 영광을 베풀어 주시기를…….”

그녀가 생긋 미소 지으며 그 손을 받아들였다. 아젠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당겨서 일으켜 세우고는, 오른팔 위로 안아 들었다.

“잠깐, 아젠. 이건 춤추는 자세가,”

하지만 아젠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오른손과 그의 왼손을 맞잡고, 왈츠를 추려는 것처럼 바깥쪽으로 뻗었다.

“……맞네…….”

아를렌이 사르르 웃고는, 왼팔을 그의 어깨 뒤로 둘렀다.

그녀의 눈이 그를 마주 보고 웃고 있었다. 여전히 시름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휘어진 그 눈매는 꾸며 낸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도 마주 웃었다. 그가 웃는 모습이 그녀의 눈에 반사되어 보였다.

그는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 사이엔가 그녀가 고개를 그의 머리 위로 기대었다. 따뜻한 숨결이 얼굴로 바로 느껴지자, 그의 목울대가 한 번 일렁였다.

이제는 기억 너머 아득해진 그 언젠가처럼, 작은 허밍이 귓가에 들려왔다. 힘없이 가느다란 소리였지만, 달콤하고 아름다웠다. 언덕을 가득 채우고 있는 룬달 꽃에서인지, 아니면 그녀의 허밍 소리에서 퍼져 나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향기가 한가득 풍겨 왔다.

몸이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짧은 머리카락이 출렁이며 목 언저리를 간지럽혔다. 노래에 맞춰 한 바퀴 돌자 그녀가 살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난 1년의 시간이 사라진 듯, 마치 시간이 되돌아간 듯.

“웨스란드로 가면 아예 언덕을 하나 살까요?”

“그게 뭐야, 괜찮아.”

그녀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사실 빈 소리가 아니었는데 그냥 농담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어차피 집은 새로 사야 하니까요. 기왕이면 언덕 딸린 집으로 사면 되지요.”

정식으로 망명하고, 지금은 몰래 찔끔찔끔 끌어 쓰고 있는 은닉 재산들을 당당하게 쓸 수 있게 되면, 언덕이 아니라 작은 장원 하나쯤 충분히 사서 운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기왕이면 룬달 꽃이 가득해서 온통 보랏빛인 곳으로…….”

“없으면 제가 심어 드릴게요.”

“언덕 전체에?”

“네, 언덕 전체가 뒤덮이도록, 언덕 아래 들판까지 모두 뒤덮이도록 가득…….”

초록색 눈과 마주쳤다. 여전히 힘이 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그 두 눈이 부드럽게 웃음 지었다.

.*. *. *. *. *. *.

마부석에 마부가 하나씩, 그 외에는 호위조차 없는 허름한 짐마차 두 대가 연달아 가고 있었다. 짐이 가득 실려 있는지 짐칸이 꽤 컸다.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산적들에게는 꽤나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임에는 틀림없었다.

휙一!

다그닥다그닥 숲길을 느릿느릿 여유롭게 지나가고 있던 짐마차로 화살이 날아들자, 마부석에 있던 자들이 겁먹은 듯 허겁지겁 마차 반대쪽으로 숨어들었다.

바보 같은 놈들, 어차피 마차 전부를 탈취할 건데 마차 뒤편으로 숨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다고. 연이어 화살을 다다닥 쏘아붙인 산적들은 비웃으며 마차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충분한 숫자의 산적들이 마차에 가까워지자, 허겁지겁 숨어들었다고 생각했던 마부들이 갑작스럽게 태세를 전환하여 칼을 빼 들고 일어서고, 짐칸에서 무장한 기사들이 뛰쳐나왔다.

“하……함정……!”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한 산적 한 명이 손에 쥐고 있던 칼을 한번 휘둘러 보지도 못한 채 얼굴에 칼이 박혀 고꾸라졌다.

“죽이면 안 된다니까.”

“아, 참.”

방금 산적 한 명을 죽인 기사가 동료의 지적에 머쓱해하며 옆에 있던 다른 산적의 팔을 여유롭게 잘라 내었다.

잠시간 살점을 베어 내는 칼 소리와 비명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진 후, 바닥에는 산적들만이 피를 흥건하게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여기저기서 울음과 신음이 끊이지 않았으나, 이까짓 거 일도 아니라는 듯 금방 해치운 기사들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칼과 갑옷에 묻은 피를 닦아 내기 시작했다.

“야, 이거 정당방위였다. 너네가 먼저 우리 습격한 거야. 확실히 증언해 줘야 해. 남의 영지에서 시비 걸리기 싫다고.”

기사 한 명이 신음하고 있는 산적 한 명을 발로 툭툭 치면서 말했으나, 한쪽 발목을 잘린 그는 으어어 신음할 뿐 대답하지 못했다.

“장난 집어치우고 얼른 집어넣어. 한 놈도 빠짐없이.”

“네에, 네. 이것들다 들어갈까 몰라…….”

기사들은 더러운 짐짝을 옮기듯 쓰러져 있는 몸뚱이들을 번쩍번쩍 들어 올려 짐칸 안으로 던져 넣기 시작했다.

.*. *. *. *. *. *.

햇살이 눈을 간지럽히는 느낌에, 아를렌이 한 손으로 눈 위를 가리며 뒤척였다.

정신이 마치 수면의 위아래를 가까스로 넘나들 듯 몽롱했다.

어디에선가 규칙적으로 콰직 쿵 콰직 쿵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마도 밖에서 누군가 장작을 패고 있는 것 같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그 규칙적인 소리가 마치 평화로운 자장가처럼 느껴졌다.

아를렌은 잠시 눈을 깜빡이며 나른한 잠의 여운에서 헤매다가 조금씩 조금씩, 마치 물 위로 서서히 올라오듯 정신을 차렸다.

‘또 잠들었었구나.’

그녀가 나지막이 한숨을 쉬면서 상체를 일으키려 하자, 순간 머릿속이 핑 돌며 눈앞이 깜깜해졌다. 잠시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춘 채 시야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나서야 그녀는 상체를 온전히 일으킬 수 있었다.

아젠은 자리에 없었다. 밖에서 장작을 패는 저 소리의 주인공이 아젠이겠지.

그는 바빴다. 당연했다. 그는 혼자서 이 오두막의 살림을 도맡아 하면서, 주위를 경계하고, 정보를 모으고,

거기에다가 이 도움이 안 되는 짐 덩어리의 병간호까지 해야했다.

한숨이 나왔다. 도움이 되지는 못할망정 짐이 되지는 말아야 하는데, 그녀는 언제나 짐이었다.

물론. 이런 생각은 하지 않기로 약속했지만…….

「아가씨는 제게 짐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입니다. 제발 그런 생각은 하지 말아 주세요.」

짐이 되어 미안하다는 말을 하자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잘라 내던 아젠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 미안해하지도 않고, 짐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오로지 열심히 살 생각만 하기로 약속했는데. 몸을 회복시키는 데 전념하기로 했는데.

‘그렇지만 그것조차 못 하고 있잖아.’

몸을 회복시켜야 했다. 그것도 빠른 시간 내에. 일단 이 생활에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기도 했고, 몸이 나아야 도망을 다니든 국경을 넘든 할 수 있을 테니까.

발목을 잡고 싶지 않았다.

만약, 아젠까지 그녀 때문에 죽게 된다면…….

‘아냐, 아냐.’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생각을 털어 냈다. 그런 끔찍한 생각은 머릿속에 단 한 글자도 떠올리고 싶지 않으니까.

일단은 뭔가 먹어야지. 먹어서 기운을 차려야지.

지금 그녀가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은, 일단 먹는 것이었다. 언젠가부터 먹는 것은 큰 과제가 되어 버렸다.

그녀는 옆에 놓여 있던 지팡이를 집어 들고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절뚝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지팡이를 짚고 집 안에서 어느 정도 움직이는 것은 익숙해졌다. 발을 땅에 디딜 때의 통증도 많이 사라져, 요즘은 진통제도 먹지 않았다. 대신 다른 종류의 약들을 먹어야했지만…….

그녀는 천천히 식탁으로 가서 앉았다. 식탁에는 아마도 아젠이 나가기 전에 준비해 놓았을 가벼운 과일들과 비스킷이 놓여 있었다. 그나마 그녀가 좀 먹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녀는 일단 비스킷을 컵에 살짝 넣어 물에 적시고는, 물렁물렁해진 끝을 살짝 깨물어 먹었다. 아주 작은 한 입이었지만, 그나마도 조심스러웠다. 다행히 목구멍을 잘 넘어가는 것 같아 용기를 낸 그녀는 다시 한번, 이번에는 조금 더 크게 깨물어 보았다.

식사는 조심스러웠다. 조금이라도 무리하면 바로 다시 올라왔으니까. 토하는 것 자체는 두렵지 않았지만, 아젠에게 그 모습을 보이는 것은 두려웠다. 그리고, 건강을 회복하지 못해 짐이 되는 것이 두려웠다.

그렇게, 마치 먹고 있다는 사실을 무언가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조심하듯 살금살금 비스킷을 반쯤 먹어 가던 그녀는, 어느 순간 갑자기 올라오는 토기에 입을 틀어막았다.

‘뒷문은 안 돼, 뒷문엔 아젠이 …… 앞문으로…….’

어차피 앞문으로 나가도 곧 들킬 거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바로 눈앞에서 보여 주고 싶지는 않았다.

비틀거리며 앞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옆에 있는 흙바닥에 손을 짚고 엎어져, 얼마 먹지도 못했던 비스킷을 토해 냈다.

그렇게 한동안 토해 낸 후, 손등으로 입가를 대충 닦아 내고 어떻게든 일어서려고 애를 쓰자, 뒤에서 큰 손이 쑤욱 나타나 그녀를 안아 세워 주었다.

“괜찮으세요?”

뒤에서 반쯤 안긴 채로 위를 돌아보자, 걱정이 가득한 표정의 아젠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무의식중에 자신의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닦아 주려다, 문득 흙 묻은 자신의 손이 더 더러운 것을 발견하고는 옷에 손을 문대어 닦아 내었다.

“응, 괜찮아. 그래도 조금은 먹었었는데…….”

그녀가 말을 흐리며 고개를 떨구자. 아젠이 살며시 그녀를 안아 들었다.

“다른 것을 준비해 볼게요. 무리하지 마세요.”

아를렌은 속으로 미안이라는 말을 삼켰다. 그가 그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니까. 그래서 그 대신, 그의 품 안으로 가만히 고개를 기대고 안기었다.

저 깊은 곳에서 불쑥 머리를 내밀곤 하는 불길한 생각은 애써 다시 집어넣은 채.

제발. 몸이 나아졌으면 좋겠다. 그건 그냥 단지 살고 싶다거나 건강해졌으면 좋겠다는 그런 욕구만은 아니었다. 죽음보다도 더 두려운 가정이 그냥 헛된 망상이었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었다.

.*. *. *. *. *. *.

시간이 제법 흘러갔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그 어디에도 잡히거나 쫓기지 않은 채, 숲속 생활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져 갔다.

그러나, 생활에 익숙해졌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졌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아를렌의 발목은 그럭저럭 회복되어 갔으나, 건강은 점점 더 나빠졌다. 시간이 지나면 차츰 나아질 거라는 예상과 달리, 잘 먹지 못하고 시시때때로 토하고, 기력이 없어 누워 있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금방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하루하루 바래 가기 시작했다.

추적보다도 그녀의 건강이 더 큰 걱정거리가 되었다.

준비했던 약들 중에 이럴 때 먹는 약들도 있었지만 이미 다 떨어졌다.

제법 충분한 양의 약을 미리 준비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몸 상태가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사실 지난 10년간의 경험에 비추어 열병을 대비한 약을 주로 구비해 놓았는데, 예상과 달리 다른 쪽의 문제가 불거진 영향이 컸다.

마을에 들르는 일은 가급적 피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주기적으로 가야 했다.

이런저런 물자를 구해야 하기도 했고, 정보도 얻어야 했다. 그 ‘약혼녀’를 찾아 전국에 사람을 보내고 있다는 피의 대공이 이번엔 어디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주기적으로 정보를 얻는 일은 중요했다.

그리고 이번엔 무엇보다도, 약재를 좀 더 구해야 했으니까.

아젠이 구하려는 약재는 공작가에서 사용하던 고급 약재들이 아닌, 평민 누구나 보편적으로 많이들 사용하는 약재들이었다. 이런 변방 마을에는 그런 고급 약재들은 구비해 놓지 않는 경우도 많고, 그런 고급 약재들을 다량 구매하면 바로 눈에 띌 테니.

특히. 공녀 시절 그녀의 주치의가 주로 처방하던 특별한 약재들은 이미 그쪽에서도 파악하여 추적하고 있을 테니 더더욱 사용할 수 없었다.

가장 가까운 마을도 말을 타고 한 시간 넘게 가야 하는 거리였으나 일부러 그보다 더 먼 곳에 있는 마을에 갈 생각이었다. 몸도 좋지 않은 그녀를 놔두고 오랫동안 집을 비우고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정말로 탐탁지 않았으나, 가까이 있는 마을에서 꼬리를 밟힐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다.

아젠은 위를 올려다본 채 눈을 크게 뜨고 눈에 약을 한 방울 넣었다.

눈동자 위로 촛농을 떨어트리면 이런 느낌일까. 타는 듯한 통증이 눈동자 위로 확 번져 들어갔지만, 보라색 눈동자 위로 온전히 동그랗게 검은 물이 들 때까지는 눈을 깜빡이 지조차 않고 기 다렸다.

요즘 들어 해독제를 사용한 후에도 한참 동안 눈이 침침할 때가 가끔 있는지라, 이제 슬슬 사용을 중단하고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할 것 같았다. 그녀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오로지 자신뿐인 상황에서 시력이 손상되는 위험은 감수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찜찜한 것은, 그가 검은 머리 검은 눈으로 있을 때 눈이 마주치면, 일순 흠칫하고 굳는 그녀의 반응이었다.

그녀가 싫어하는 검은색.

그자의 색.

나갈 준비를 다 마친 아젠이 인사를 하고자 아를렌을 찾았을 때, 그녀는 읽던 책을 손에서 놓지도 못한 채 소파 위에 곤히 잠들어 있었다.

책의 페이지는 아침에 보았을 때에 비해 거의 넘어가 있지 않았다. 사실 그녀가 손에 책을 들고 있는 건 오로지 그에게 괜찮아 보이기 위해서일 뿐, 요즘은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 당신은 내게 항상 괜찮아 보이고 싶어 하는 걸까. 아프면 아프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투정 부리고 화를 내도 괜찮은데. 당신은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는데.

그는 조심스럽게 책을 그녀의 손에서 떼어 내어 옆의 선반에 내려놓았다.

이미 그가 마을에 다녀올 거라는 것은 얘기해 두었으니 굳이 깨울 필요는 없겠지.

햇빛을 받은 그녀의 피부가 창백하게 빛났다. 한때는 부드럽게 곡선을 그렸었지만 지금은 야위고 핼쑥해진 그녀의 얼굴선을 살며시 어루만져 보았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그녀가 깨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잡고 그 위에 입술을 살며시 눌렀다.

소중하고 소중한 나의 아가씨, 사랑스러운 아를렌. 부디, 제발, 건강하기를…….

.*. *. *. *. *. *.

한참을 달려 도착한 마을 입구에서 아젠은 잠시 멈칫했다. 마을 입구에서 검문을 하고 있었다.

딱히 걱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여러 마을에서 검문을 아무 문제 없이 통과했었으니까. 그럼에도, 어찌 되었건 검문은 언제나 긴장을 불러일으켰고, 여러 경우의 수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그녀와 함께였을 때에도 별문제 없이 여러 차례 통과했었다. 하물며 지금 여기엔 아를렌이 없다. 그 혼자라면 걱정할 일이 전혀 없다.

그의 몽타주는 정확하지 않다. 초상화 하나 없이 오로지 증언에 의존해 만든 몽타주를 모사하고 또 모사해서 변방까지 내려온 그림이다. 눈 색과 머리색이 완전히 다른데도 불구하고 이목구비 형태 정도가 얼추 비슷해 보인다고 해서 의심을 하기엔 몽타주의 신뢰도가 높지 않았다.

그리고 저 빈약한 경비들이 그를 체포하려고 한다 한들, 그 혼자라면 저따위 경비들을 처리하고 도망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비록 서부에 있다는 것 자체는 들키긴 하겠지만, 이미 도주로는 여럿을 준비해 놓았고, 당장 옮겨 갈 수 있는 은신처도 여럿이다.

“수고하십니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분위기가 빡빡하네요.”

아젠이 웃으면서 경비에게 말을 건네자. 경비가 얼굴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아, 나도 귀찮아 죽겠습니다. 마을 들락거리는 사람들은 심지어 잘 아는 마을 주민이더라도 일일이 다 확인하라고 하니…… 일단 얼굴 좀 봅시다.”

경비는 건성으로 아젠의 얼굴과 손에 들고 있는 종이를 몇 번 오가며 쳐다보았다. 하지만 눈과 머 리 색깔부터 다른 두 모습에, 약간 닮은 점이 있더라도 그닥 의심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약간 닮긴 했네. 이거 신고하면 포상금 받으려나?”

경비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딴에는 농담이랍시고 하는 말 같아 아젠도 웃어넘기며 호들갑을 떨었다.

“어이쿠, 무서운 소리 하지 마십쇼. 괜히 잡혀 갔다 몸이라도 상하면 장사 밑천 나갑니다.”

피식피식 웃으며 경비가 질문을 시작했다.

“어디서 왔습니까? 여긴 왜 왔죠?”

“수도에 가는 길입니다. 국경 쪽엔 요새 일감이 별로 없어서 말이죠. 수도에 가면 뭔가 일거리가 있으려나 하고요.”

“용병이오? 뭐 요새 가끔씩 반란 진압하느라 용병 모집하긴 하는 모양입디다. 오늘 여기서 묵고 갑니까?”

“해 지기 전까지는 열심히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묵는 건 가능하면 다음 마을까지 달린 후에 하려고요.”

“예에 뭐, 요새 길도 깨끗해져서 좀 어두울 때까지 달려도 괜찮을 것 같습디다.”

“……그래요? 무슨 변화가 있었나 보죠?”

아젠은 너무 예민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은근슬쩍 물었다.

“아, 요즘 레퀴에스 기사단이 와서 이 근처 산적들 죄 털었잖아요. 뭔 일인지 왜 여까지 와서 그런지는 몰라도 암튼 우리한테는 잘된 일이지. 우리 영주님이 무시하고 있던 도적들을 남의 영주님이 없애 주고 있으니 말입니다.”

경비는 도저히 여자 한 명을 숨길 구석이라곤 없어 보이는 아젠의 말과 짐을 대충 살펴보며 대답했다.

“그게 잘된 일인가? 그 피의 대공의 악명 높은 기사단인데, 잘못 걸리면 우리 목도 달아나면 어쩌려고. 얼마 전에 반란군 토벌한다고 했던 짓 잊었어?”

옆에 있던 다른 경비가 끼어들었다.

“아니, 눈이 삐어서 레퀴에스 기사단을 건드린 그 산적 놈들이 잘못한 거지. 덕분에 이 근처 산적들 다 털 기세 같던데, 도적들 싹 사라지면 우리야 좋은 거지.”

“그게 정말 산적들 토벌하러 온 거겠어? 사실 그 대공 약혼녀인지 뭔지 하는 여자 찾으러 왔는데 산적 놈들이 잘못 걸린 거겠지. 피에 굶주린 기사단이니 네 이놈들 잘 걸렸다 하고 신나서 칼을 휘둘렀을 걸. 우리 마을에도 와서 여자 내놓으라고 달달 볶으면 어쩌나 싶네. 하긴 옆에 멀쩡한 큰 성 놔두고 이런 마을엔 안 오겠지?”

“아, 그 여자? 그 여자 찾으러 여기저기 다 뒤진다던데, 여기도 뒤지러 올지도 모르지. 뭐, 차라리 빨리 찾아서 돌아갔으면 좋겠네. 그 납치범이라는 놈도 완전 돌아 버린 거 아냐? 어디 건드릴 사람이 없어서…….”

경비가 옆의 경비와 수다를 떠느라 아젠에게 눈도 돌리지 않은 채 그를 통과시켰기에, 그의 얼굴이 살짝 굳은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마을 안으로 말을 천천히 몰아 들어가면서도, 그는 경비의 말을 되씹었다.

걸렸다.

꼬리가 잡혔다. 최소한 이쪽 방향으로 왔다는 건 알아챈 모양이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 시체들, 시간을 많이 들이지는 못했어도 제법 잘 처 리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발견되었었나.

어차피 영원히 방향조차 잡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니까. 그 모든 준비들은 시간을 벌고 추적 범위를 넓혀 틈새를 많이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 산적들을 만났던 곳은 같은 서부이기는 해도 여기에서 제법 떨어진 곳이다. 아직 여유가 있다.

심지어 검문도 아무 문제 없이 통과했다. 검문이 아직도 이렇게 허술하고, 기사가 이 마을에 찾아와 살벌한 눈을 부라리고 있지 않다는 것 자체가, 아직 정보가 부족하고 확신이 없어서 수색 범위를 많이 좁히지도 못했다는 증거겠지.

확정적인 증거가 있었다면 일단 기사가 오고, 그놈이 왔을 것이다. 아직 그놈이 오지 않고 기사단만 왔다는 것은 거리를 벌릴 여유가 있다는 얘기다.

아젠은 애써 긍정적인 면을 떠올리며 긴장으로 뜨거워지는 피를 식혔다.

문득 작년 여름의 실패가 뼈아프게 심장을 헤집었으나, 고개를 털어 냈다.

일단 오늘 약재를 사고, 주점에 가서 정보를 모으고, 떠날 준비를 해야겠다. 다른 방향으로 은거지를 옮겨야…… 그러나, 그녀가 많이 쇠약해진 지금 또다시 장거리를 이동하는 게 괜찮을지 걱정이었다.

그녀의 상태는 점점 더 안 좋아지고 있었으니까.

‘의사를 한번 보기는 해야 하나.’

그러나 그는 금세 고개를 저었다. 분명 그들은 의원들을 감시하고 있다. 모든 마을 전체를 감시할 인력은 없어도, 이 근방의 모든 의사들을 주기적으로 확인해 볼 정도의 인력은 충분할 거다.

상태가 여기에서 더 악화되면 그때엔 어쩔 수 없겠지만, 가능하면 의사를 보는 것은 최후까지 미루고 싶었다.

허름한 진료소. 진료실 구석에 죽어 있던 의사의 시체.

한가운데에서 도륙당하고 있던 호위 기사.

그리고, 멈춰지지 않는 붉은 피를 쏟아 내며 쓰러지던 그녀.

그건. 가슴 깊이 뿌리를 박고 새겨진 공포였다.

.*. *. *. *. *. *.

“웁…… 우욱…… 우우욱…….”

아를렌은 빈 통을 부여잡고 먹은 것을, 혹은 먹지 않은 것까지 모두 게워 내고 있었다. 더 이상 나올 것이 없을 때까지 헐떡이고 있던 아를렌은 그 상태 그대로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이내 탈진하여 바닥에 널브러졌다.

몸이 너무 힘드니까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 제대로 된 생각을 하고 싶어도, 온갖 안 좋은 상념들만이 머릿속을 엉망으로 휘저었다.

성벽에 매달려 있던 어머니 아버지가, 광장에 꽂혀 있던 오라버니들이,

그리고,

「빨리 가을이 되어 아기를 만나면 좋겠어. 나랑 그이를 반반 닮은 아기라니, 너무 신기할 것 같지 않니?」

부른 배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으며 행복하게 웃고 있다가, 성벽에 매달려 흔들리던 친구가.

좁은 창문 틈으로 보였던 그 참상의 잔상에 다시금 토기가 올라왔다. 아를렌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다시금 통을 부여잡고 토했다. 이제는 시큼한 노란 액체만이 흘러나왔다.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두 손으로 간신히 상체를 지탱하고 있던 아를렌이 다시금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텅 비어 버린 눈이 힘없이 허공을 배회하다가 감겼다. 그녀의 가슴이 작게 오르내렸다. 어느덧 물방울이 눈가에 고이더니, 주르륵 옆으로 흘러 내렸다.

아직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아.

아직 아니야.

확인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아니야. 아니어야 해.

……차라리 지금 토해서 다행이야. 지금은 아젠이 없으니까. 일단 다 토했으니 한동안은 괜찮을 거야.

그렇게 한참을 누워 있던 그녀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에 방 안이 붉은빛으로 물들었다가 다시금 푸른빛으로 어두워지기 시작해서야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돌아오기 전에 통을 닦아 두어야지.

아젠은 지금도 내 몸을 걱정하고, 치료 방법을 찾아 헤매면서, 겨울을 무사히 날 계획을 짜고 준비를 하고 있을 거다. 그러니 무엇이든 짐작 가는 것이 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얘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얘기하고 싶지 않다.

아무리 확실하지 않은 거라도, 그런 가능성에 관해서도 얘기하고 싶지 않다.

세상에서 제일 마지막까지 숨기고 싶은 사람.

그녀는 다시금 눈을 감고 숨을 몰아쉬었다. 헐떡이는 숨 사이사이로 울음이 새어 나오려고 하는 것을 억눌렀다.

아직 확실하지 않으니까, 얘기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확실하지 않은 것 맞아?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아니잖아.

사실은 알고 있잖아.

지난여름, 몸이 급격히 안 좋아지면서 월경도 자연스레 멈추었었다.

그러나, 올봄, 다시금 음식을 먹고 살이 붙어 몸이 회복되기 시작했을 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어째서 돌아오지 않았는지.

그게, 사실은, 그때…….

그녀는 생각을 멈추고 숨을 흐느끼듯 들이쉬었다.

‘오늘은 말고, 내일……내일 얘기하자.’

정작 내일이 되면 그 내일은 또 다른 내일이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생각을 털어 냈다. 그 어떤 생각을 할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옆에 있던 선반을 짚고 간신히 몸을 일으킨 그녀가, 한 손에는 지팡이를 한 손에는 통을 들고 방을 나서려던 참에, 창밖으로 작은 불빛들이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홀린 듯이 창가로 다가간 그녀의 손에 반딧불이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현실과 동떨어져 몽롱하게 빛나는 빛 방울들이, 지칠 대로 지친 그녀를 부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가씨의 몸은 절대 임신과 출산을 버텨 낼 수 있는 몸이 아닙니다. 살아남을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이전에 들었던 주치의의 말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그 말을 들었을 때에는 그저, 결혼을 하면 안 되겠구나 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지금은…….

눈에서 눈물이 뚝 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괜찮아. 죽는 건 두렵지 않아.

먼저 가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원래. 내가 제일 먼저 가 있었어야 했던 곳인데. 나 혼자 갔어야 했던 곳인데.

같이 살아가자고 약속해 놓고 혼자 떠나는 것이 미안하고, 남겨질 사람이걱정되지만…….

죽는 건 두렵지 않아.

하지만…… 너에게, 이걸…….

그녀는 눈물 고인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아랫배를 움켜쥐었다.

.*. *. *. *. *. *.

해가 거의 저물고 희미한 잔광만이 남아 있을 무렵, 그늘진 숲속은 상당히 어두웠다.

마을을 나오고 인적이 드물어지자마자 바로 해독제를 사용했음에도, 어두운 밤에 눈이 침침했다. 아젠은 몇 번이고 눈을 깜빡거리며 길을 서둘렀다. 빨리 돌아가서 그녀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 오두막에, 안전하게, 무사하게, 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오두막에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 그는 누군가 집 앞 바위에 걸터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까만 밤의 숲을 배경으로, 그녀가, 공기 중에 떠다니며 희미하게 반짝이는 별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아니, 반딧불이들에.

주위에서 반짝임을 반복하는 빛 알갱이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가만히 앉아 있는 그녀가 마치 홀로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얼굴에 눈물이 보이지 않는데도, 왠지 울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아젠은 말에서 내리고도 한참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선 채 그저 바라만 보았다.

그렇게 잠시간의 고요가 지나가고 나서야, 아를렌이 그를 발견하고 돌아보았다.

“아젠?”

아젠은 그제야 그녀에게 다가가 품에 안았다. 그녀의 작은 머리가 단단한 가슴팍에 들어왔다. 그렇게 추운 날이 아닌데도 몸이 차갑다. 꽤 오랫동안 나와 있었던 것 같다.

“괜찮으세요?”

쓸모없는 질문을 다시금 반복한다.

“응, 괜찮아.”

그녀가 다시금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그녀는 그녀가 지금 만들어 내고 있는 미소가 얼마나 어색한지 알까?

“몸이 차갑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아니야. 조금만 더 있을래.”

그 말에 아젠은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금방 포기하고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익숙한 듯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어왔다.

고요한 가운데 풀벌레 소리만이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작은 빛 덩어리들이 허공에 흩날리며 깜빡이는 와중에, 숲속은 점차 더욱 깜깜해졌다.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반딧불이는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돌아오는 거라고 하셨었거든.”

문득 아를렌이 입을 열었다. 아마, 가족들의 곁을 일찍 떠나게 될까 봐 두려워하던 병약한 딸을 위로해 주려고 했던 많은 이야기들 중에 하나였겠지.

“그래서 나는, 내가 떠난 다음에 반딧불이가 되어서 가족들 곁에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어.”

아젠은 조용히 귀 기울였다.

“좀 커서는 그냥 빛을 내는 곤충이라는 것을 알고는 조금 실망했었지만…… 원래 동심이라는 건 그렇게 깨지는거잖아.”

그녀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한동안 다시 풀벌레 소리만이 적막을 채웠다.

“……나 혼자 남아서 그들을 기다리게 될 줄은 몰랐어.”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녀는 여전히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그의 팔 안에 안긴 채, 그를 의지하고 위안을 받고 있었다. 아젠은 그저 침묵을 지키며 손에 닿는 그녀의 팔을 위로하듯 쓰다듬었다.

“있잖아 아젠, 항상 하고 싶었던 말인데, 내가 벌써 얘기했던가?”

그녀가 다시금 목소리를 밝게 꾸며 내며 입을 열었다.

“날 그곳에서 데리고 나와 줘서 정말 고마워.”

“……아가씨께서 저를 믿고 같이 와 주셔서, 제가 감사한 거죠.”

“그러지 말고. 가끔은 감사를 받아 주시면 안 될까요. 아젠 경?”

장난스러운 말에 그도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정말로. 그곳에서 꺼내 주어서 고마워. 나는. 설령 죽더라도 그자를 벗어나서 죽고 싶었던 것 같아. 응, 설령 눈을 감게 되더라도, 그자의 손아귀 안이 아니라, 네 옆에서 자유롭게 숨 쉬다 떠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녀가 가벼운 듯 꺼내는 ‘죽음’이라는 단어에 아젠의 손이 흠칫 멈추었지만, 이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움직였다.

“벗어나셨으니 오래오래 사셔야죠.”

“……응, 그렇지.”

“여기 생활이 조금 갑갑하시죠? 올해만 참으세요. 국경 넘어가면 꽃이 가득한 언덕을 반드시 찾아드릴 테니까요.”

그녀가 살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응, 그래야지. 언덕 위에 있는 집을 사서…….”

“발목도, 전문의에게 제대로 치료받으면 더 괜찮아질 겁니다.”

“지금도 충분히 나아졌는 걸.”

“아뇨, 닐로 씨가 제법 괜찮은 처치를 해 준 건 사실이지만, 발목 부상만 전문적으로 보는 의사들도 있으니까요. 실력 있는 전문의를 찾으면 더 나아질 수 있을 겁니다.”

반드시, 다시 뛰어다닐 수 있게, 다시 춤출 수 있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가 그 발목을 꺾어 버리기 전처럼.

“그래, 우리 아젠 경이 원하시는 건 다 하게 해 드려야지.”

“아가씨 건강도…… 그때에는 지금보다 나아지시겠지만, 그래도 가면 제대로 된 의사를 봐서 한번 점검을 받으시고요.”

“…….”

“아가씨는 뭐 하고 싶으신 것 없으세요?”

“음…… 글쎄…….”

아를렌은 조용히 침묵에 잠겼다. 하고 싶은 일. 그런 게 있었던 것이 언제 적의 일인지. 전에는 무엇을 즐겼었는지. 무언가를 즐기며 살아가던 시절은 너무나도 멀어, 희미하고 아득하게 느껴졌다.

“……자수를 해서 팔까? 이제 공작가 아가씨도 아닌데 먹고살려면 일해야지.”

아를렌은 가볍게 말했지만, 아젠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전 같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고생하지 않고 사실 정도의 재산은 있으시니까 그런 걱정은 마세요. 그리고 설령 재산이 없다 해도 제가 아가씨를 고생시키진 않습니다.”

그녀가 풋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그럼 아젠이 사냥을 해서 가죽을 내다 팔고, 나는 가끔만 자수를 놓고, 그러면 되겠다.”

그건 기대에 찬 목소리라기에는 무언가 아련하고, 어쩐지 눈물이 어린 듯한 느낌이었지만, 모처럼의 희망적인 대화에 아젠은 위화감을 크게 느끼지 못하고 넘어갔다.

“생각해 보니까 거기 가면 이제 집 안에서만 지내지 않아도 되는 거잖아? 아이들 가르치는 일 같은 걸 해도 좋겠다.”

“……그렇죠.”

“날이 좋으면 바깥에서 가르치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봄에는 꽃이 핀 들판에서, 여름에는 녹음이 우거진 숲에서. 가을에는 낙엽 뿌리고 놀면서 배우는 거야. 괜찮을 것 같지?”

“아이들이 좋아하겠네요.”

아젠은 밖을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던 어린 아를렌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아마 그녀가 어린 시절 꿈꾸던 것을 이야기하는 것일 게다.

“그리고 집에 오면, 둘이 같이 테이블에 앉아 저녁을 먹으면서 두런두런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하는 거야. 너는 오늘 놓친 사슴이 얼마나 예뻤는지 얘기하고, 나는 오늘 아이들이 얼마나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배워 갔는지를 얘기하는 거지.”

“……왜 저만 사슴을 놓치는 겁니까.”

“음, 그건…… 아마 사슴이 너무 예쁘니까. 그래서 차마 잡지 못하고 놓아준 걸 거야.”

“……사냥꾼 말고 다른 걸 하겠습니다.”

“그러게. 내가 토너먼트 우승자를 사냥꾼으로 만들려고 하다니 실수했네. 사실 아젠은 기사 하겠다면 아마 왕실에서부터 모셔 갈 텐데.”

“기사는 안 합니다.”

“왜? 너처럼 훌륭한 기사가…… 아깝잖아.”

“아가씨 말고 다른 주군을 섬길 생각은 없어요. 그리고 아가씨를 놔두고 토벌이나 출정을 나가는 것도 싫습니다.”

“…….”

어쩐지 그녀에게서 대답이 없었다. 무엇을 잘못 건드렸을까?

……그는 문득, 작년 여름의 어느 끔찍한 아침을 떠올렸다. 열과 통증과 그보다 더 끔찍한 악몽과 싸우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린 아침. 사라져 있던 그녀. 덜렁 놓여 있던 잔인한 편지 한 통. 그와의 모든 관계를 끊으려던 무참한 종이 쪼가리.

더 이상 그를 그녀의 기사가 아니게 만들려 했던.

그녀는 그걸 기억하고 있을까? 그 종이 쪼가리는 아직도 유효한가?

왠지 눈이 다시금 따끔거렸다.

“……그런데 있잖아, 아젠,”

그녀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어깨에 기대어져 있는 그녀의 머리가 조금 더 기울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원래 오래 살지 못하잖아. 언젠가는…… 언젠가는 내가 먼저…… 떠날 거 아냐?”

그 말에, 아젠은 마치 머리 위에서부터 얼음물을 맞은 듯했다. 여태까지의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단번에 모두 씻겨 내려갔다.

아젠은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보려 했지만,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만약에…… 만약에 언젠가 내가 먼저 떠나면, 혹시…… 나를 태워서 바람에 날려 줄래?”

온몸의 피 한 방울 한 방울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아, 이게 오늘의 본론이었구나. 그녀는 오늘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구나. 씁쓸한 깨달음이 부서지는 파도처럼 밀려들어 왔다. 방금까지 즐거운 이야기들을 할 때 넘기려 했던 묘한 위화감이 뒤늦게 생생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사실 이런 대화는 처음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자주 하던 대화였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과 그 이후에 대해 자주 생각했고, 차마 가족에게는 말하지 못하던 생각들을 아젠과 나누곤 했으니까. 꽃이 가득 피어 있는 언덕 위에서 나누는 대화에는 항상 밝은 주제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평화롭던 그때 그 시절에도 덤덤히 듣기 힘들었던 이야기가, 이제는 정말 가슴을 날카롭게 저며 내었다.

그는 넘어오는 생각들을 간신히 되삼키고서, 가능한 한 목소리를 떨지 않으려고 애쓰며 되물었다.

“전에는…… 언덕 위에 잠들고 싶어 하셨잖아요.”

“응.”

“꽃도 많고, 햇빛이 내리비치고, 사람들이 많이 찾아올 수 있는곳에…….”

“응, 하지만…….”

그녀가 잠시 숨을 고르고 나서,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자가 찾아내면 어떡해.”

숨이 턱 막힌다. 세상의 모든 공기가 다 얼어붙은 듯, 폐부 깊숙한 곳까지 차갑게 시렸다.

“죽더라도 죽은 몸도 놓아주지 않을 거라고 했었는데…… 진짜로 그러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

“다시는 그 손에 잡히지 않게, 죽은 후에도 다시는 만나지 않게…….”

많이 피곤한지 그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지만, 절실했다.

“아무것도, 단 한 알도 그 손에 잡히지 않도록.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 응? 그냥 만약의 경우에 말이야…….”

“…….”

“……힘들까? ......난…….”

죽는 것보다도, 그자한테 다시 잡히는 게 더 두려워…… 그녀는 아젠이 듣지 못하도록 혼자 작게 중얼거렸지만, 그는 사무칠 정도로 잘 들을 수 있었다.

“……무엇이든, 아가씨께서 원하신다면,”

담담하게 대답하려고 하는데 자꾸 목소리가 떨렸다. 손이 떨리고, 몸이 떨렸다. 아젠은 다시금 눈을 감았다. 숨이 부족하여 공기를 힘겹게 들이마셨다.

“아가씨께서 원하시는 대로……꼭…….”

그녀는 조용해졌다. 고요해진 두 사람 사이에, 아무것도 모르는 풀벌레 소리가 매정하게 울려 퍼졌다.

작년 여름에 헤어졌다가 재회한 후로, 그녀는 무언가 부탁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 그녀가 실로 오랜만에 이토록 절실하게 부탁하는 것이. 이런 것이었다.

그녀의 팔을 감싸고 있는 그의 팔이 자르르 떨렸다. 떨고 있는 것이 그인지 아니면 그녀인지, 잘 구별이 되지 않았다.

문득 그녀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너는 슬퍼하지 말고 좋은 자리를 찾아서 떠나도록 해. 너는 많은 기사단에서 환영할 거니까.”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둠이 그녀의 얼굴의 많은 부분을 흐릿하게 숨겨 주고 있었지만, 어쩐지 그 초록색 눈만은 선명하게 내려다보였다.

“만약에 내가 좀 일찍 죽게 된다고 해도, 아까도 말했지만, 난 그자의 손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이렇게 너의 옆에서 눈을 감게 된 것만으로도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하니까,”

“…….”

“그게 언제가 되었든, 설령 네 생각보다 너무 이른 시점이라고 해도 슬퍼하지 말아 줘.”

그녀가 말하는 ‘너무 이른 시점’이라는 것이, 국경을 넘어가고 행복하게 살고 난 이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자명했다. 숨이 점점 더 막혀 왔다.

“정말로. 정말로 감사하고 있어. 그자에게서 벗어나게 해 주어서. 네가 내 눈을 감겨 준다고 해 주어서. 그러니까, 만약. 만약에, 내가 너와 함께 국경을 넘어가지 못하더라도,”

지칠 대로 지쳐 있고, 포기할 대로 포기했으면서도, 깨끗이 정리하고 받아들인 그 초록색 눈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그건 실패가 아니라는 걸, 너는 이미 나를 구해 줬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요즘 들어 몸이 더 안 좋은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자리를 비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왜 갑자기 이렇게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말하나.

아젠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를 끌어당겨 품 안에 가두듯 끌어안았다.

“아젠, 숨 막혀.”

그녀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가볍게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아니야, 그냥…… 몸이 안 좋으니까 이런저런 생각이 났나 봐.”

“……무슨 일이 있으면 꼭 다 얘기해 주셔야 합니다.”

“응, 그럼.”

“괜찮아지실 겁니다. 오늘 약도 많이 사 왔어요.”

“응.”

“같이 가실 거예요. 같이 가시서…… 행복하게 웃으면서 지내셔야죠.”

“그래. 그래야지.”

담담하게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더 겁이 났다. 어째서 당신 홀로 모든 것을 다 정리한 것 같을까.

“근데, 그래도, 그냥 만약에 말이야.”

아를렌이 살짝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그를 올려다보더니, 한 손을 뻗어서 그의 뺨을 살짝 어루만졌다.

“난 네가 내 눈을 감겨 주면, 그걸로 됐으니까…….”

어째서 당신은 이렇게 벌써 다 포기한 걸까. 난 아직 포기하지 않았는데, 왜.

아젠이 자신의 뺨 위에 얹어진 그녀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갰다.

“……일단 행복하게 오래오래 사신 다음에, 그다음에 눈을 감겨 드릴게요.”

“응.”

어쩐지 그녀가 미소 짓는 것 같았다.

“……고마워.”

그녀가 다시금 그의 품 안에 몸을 기대었다. 차가워진 그녀의 몸을 그가 폭 끌어안았다.

하지만 아젠. 사실은 말이지, 아를렌은 속으로 말을 삼켰다.

사실 나는 이제 하루빨리 눈을 감았으면 좋겠어.

어차피 곧 죽을 거라면, 하루라도 일찍 죽었으면 좋겠어. 내일 아침에 눈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의 발목을 잡기 전에.

너에게 들키기 전에. 숨길 수 없게 되기 전에.

네가. 이 사실을 알게 되기 전에.

내가.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끔찍하고도 가여운 이 생명을 느낄 수 있게 되기 전에.

.*. *. *. *. *. *.

아무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아젠은 그렇게 품에 그녀를 안은 채 한참 동안 허공을 떠도는 불빛들을 보며 앉아있었다.

어느 순간 그녀의 몸이 좀 더 풀리며, 숨소리가 달라졌다. 완전히 잠든 것 같았다.

품에 기댄 그 가벼운 몸의 무게가 그 무엇보다도 묵직하게 느껴졌다.

어느덧 차가워진 밤 숲의 바람이 그의 손을, 몸을, 심장을 차갑게 식혀 내려갔다.

그녀가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

물론, 그녀는 항상 죽음을 대비해 왔다. 태어났을 때부터 항상. 그리고, 지난 1년은 더욱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을 데리고 나온 후에는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다시 이토록 절실하게, 절박하게.

뭐가 더 나아지긴 한 건가. 그 쓰레기 같은 놈 앞에서 죽지 않으니 그걸로 만족하라고?

당신의 눈을 감겨 주겠다고 했었지. 하지만, 정말, 그냥 내가 눈을 감겨 줄 수 있으니 그게 다행이라고?

그가 한 손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쓸었다.

검붉은 피의 웅덩이. 그 위에 쓰러져 있던 그 하얀 몸. 쉬지 않고 쏟아져 나오던 그 질척한 붉은 액체.

그 시체조차도 보내 주지 않았었다. 죽은 후에도 놓아주지 않겠다던 그 말 그대로 그는 그 몸이 다 썩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도 놓아주지 않았다.

그의 추악한 욕심으로 그 아름답던 몸이 흉측하게 썩어 들어가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시체를 붙들고 같이 죽었다. 그녀가 죽은 후뿐 아니라 그가 죽은 후까지도 놓아주지 않았었다.

그녀는…… 그래, 죽어도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겠지. 얼마나 끔찍했을까. 그 증오와 공포. 죽어서도 잡히고 싶지 않았겠지. 그러느니 차라리 재가 되어 사라지고 싶었겠지.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죽은 시체라도 그 손에 잡힐 것만을 두려워하던 그 모습.

하지만 전생에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죽어서도 놓아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다시 태어나서까지 당신을 쫓아왔다. 그런 주제에 당신을 지켜 주지도 못했다.

이런 나를 알면 당신은 나를 얼마나 끔찍해할까.

이번에는, 그 개새끼에게 당신을 넘기지 않고 당신의 소원을 이루어 줄 수 있을까.

……죽게 하지 않아. 최소한 여기서 죽게 할 수는 없어.

국경을 넘어가서, 행복하게 삶을 즐기고 나서, 그 후에 눈을 감겨 줄게. 제발, 벌써 포기하지는 말아 줘.

다시금 눈을 지지는 것 같은 통증에, 그는 눈을 감았다. 한참 전에 해독제를 넣었던 눈에는 분명 아무것도 없는데도, 지긋지긋한 통증이 떨쳐지지 않았다.

.*. *. *. *. *. *.

모건은 이 근방에서 제법 신망 있고 잘나가는 의사였다.

그제도 어제도, 언제나와 같이 진료소에서 환자들의 신뢰 가득한 눈빛을 받으며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 늦은 저녁을 먹고 쉬는 평범한 하루였다.

오늘도 그런 평범한 저녁이 될 예정이었다.

나무 테이블 위에 한 사람분의 저녁 식사를 올려놓고 반쯤 먹어 가던 즈음, 누군가 문을 두드리기 전까지는.

‘응급 환자인가?’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일어섰다. 웬만하면 저녁 이후 시간은 방해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거늘, 그것을 무시하고 문을 두드릴 정도라면 제법 급한 환자인 게 틀림없었다.

“누구시오?”

문을 열자, 퀭한 눈에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환자로 추정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으나, 응급환자를 두고 급하게 달려온 보호자의 대부분이 그런 표정이었으므로 아마도 왕진을 부탁하러 온 보호자려니 했다.

“닥터 모건?”

“맞소만…….”

“봐주셨으면 하는 급한 환자가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모건은 한숨을 쉬며 남자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섰다.

“일단 들어오시오, 짐을 챙겨야 하니까. 어디이고 환자는 어떤가?”

닥터 모건이 주섬주섬 왕진 가방을 챙겼다. 이미 기본적인 것은 다 들어 있는 가방이었지만. 환자의 상태에 따라 몇 가지를 더 챙겨야 할 수도 있다.

“며칠째 심하게 토하고 아무것도 먹지 못하였는데 이제는 정신도 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래부터 몸이 많이 약하고, 심장에도 문제가 있었는데…….”

남자의 목소리가 점점 더 가라앉는 것이, 감정이 격해지고 있는 것 같다. 보호자들의 격한 모습은 많이 봐 왔으므로 모건은 더 이상 자극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흠…….”

하지만 들어만 봐도 안 좋은 경우다. 모건은 몇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여러 가지를 챙겨 넣었다. 짐을 다 챙기고 겉옷을 챙겨 입고, 이제 가세, 어디인가, 라고 말하려던 찰나,

목 뒤로 강력한 타격을 느끼며 세상이 깜깜해졌다.

.*. *. *. *. *. *.

아젠은 침대 옆에 앉은 채 한참 동안 그의 아가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시금 야위어 앙상해진 그녀의 얼굴을 애타게 바라보다가, 잡고 있는 손의 손가락 하나하나에 간절하게 입을 맞추었다.

어지간하면 의사를 데려오고 싶지 않았다. 의사를 데려오는 것의 위험성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의사를 데려오는 순간 추적 범위가 좁혀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어 갔기에 이제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추적을 피하겠다고 그녀를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

과거에, 왜 그 기사가 그녀를 의원에 데려갔다가 잡혔었는지 이제 이해했다. 그때엔 멍청하다고 생각했었지. 병원마다 감시하고 있는데 제 발로 걸어 들어왔다고.

하지만 이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아졌다면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병원에 데려가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때에도 이렇게까지 상태가 안 좋았던가…….

일단 마을로 그녀를 데려가는 것보다는 의사를 납치해 오는 쪽을 선택했다. 진찰이 끝난 후 납치해 온 의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하지만, 최소한 마을로 직접 가는 것보다는 이편이 나을 것은 자명했다.

문득, 거실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젠은 잡고 있던 아를렌의 손을 소중하게 침대로 돌려놓은 후, 천천히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어차피 그녀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그녀를 깨우지 않도록 조용히.

아까 데려온 의사가 정신을 차리고 바둥거리고 있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얼어붙었다.

아젠은 천천히 의사의 앞으로 걸어가 자세를 낮추고 눈높이를 맞추었다.

“닥터 모건.”

“웁…… 웁…….”

공포에 젖은 의사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어떻게 할까.

일단은 정중하게 대하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어쨌든 쓸데없이 거칠게 다뤘다가 제대로 진료를 보지 않거나 거짓말을 한다면 곤란했다.

“제 말을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당신을 해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아까 말했듯 환자를 한 분 봐줬으면 할 뿐입니다. 사정이 있다 보니 거칠게 모셔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죄송합니다. 이제 곧 풀어 드리겠습니다.”

“웁…….”

의사의 눈에서 약간씩 공포가 가시기 시작했다.

“지금 환자가 자고 있으니 조용히 해 주셨으면 합니다. 재갈을 풀었을 때 소리 안 지르고 조용히 계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의사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 재갈을 풀어 드리겠습니다.”

아젠이 재갈을 풀자, 의사가 푸하 하고 숨을 내뱉었다. 입가에 흥건하게 묻어 있는 침을 묶여 있는 손으로 거칠게 닦아 냈다.

“도,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오 환자를 봐달……!”

의사의 목소리가 크자, 아젠이 큰 손으로 살짝 그의 입을 덮어 소리를 막아 버렸다. 그 손에는 전혀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지만 뜻을 알아들은 모건이 입을 다물었다.

“닥터, 조용히, 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건이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자, 아젠이 손을 거두었다. 코가 막힌 적이 없었음에도 모건은 거세게 숨을 몰아쉬었다.

“자꾸 거칠게 모시게 되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도 죄송한 눈빛이 아니잖아! 하지만 모건은 마음의 소리를 밖으로 외칠 수 없었다. 그저 겁에 질려 고개를 끄덕였다.

“보수는 충분히 드리겠습니다. 일이 끝난 후에 집으로 안전하게 모셔다드리고요. 대신, 이 안에서 벌어진 모든 일은 비밀을 지켜 주셔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뭔가 얽히면 안 될 일에 얽혀 버렸구나. 살아 돌아갈 수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집으로 안전하게 데려다주겠다는 말을 온전히 믿을 바보가 어디 있을까. 그러나 그렇다 해도 그 말을 믿는 것 외에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모건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니. 이미 눈물이 줄줄 나오고 있었다. 처자식이 없는 홑몸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는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안에 계신 분이 몸이 많이 약합니다. 음식을 못 먹고 계속해서 토해 낸 지 꽤 되었고, 근래에는 거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계십니다. 진료를 부탁드립니다.”

남자는 검은 눈을 깜빡이지조차 않고 모건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이, 거슬리면 안 된다는 본능을 불러일으켰다. 상급 기사들을 봤을 때 느꼈던 위압감이다.

모건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기사, 그것도 상당히 강한 기사라는 것을 깨달았다. 일반인이 기사를 거스를 수는 없다.

.*. *. *. *. *. *.

방 안에 누워 있는 사람은 젊은 여자였다. 앙상하게 야위고 혈색이 퍼런 것이 확실히 상태가 매우 안 좋아 보였다.

모건은 뒤에 있는 기사의 압박감을 애써 무시하려 애쓰며 환자의 진찰을 시작했다.

그리고, 진찰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바로 문제의 원인을 찾아냈다.

문제는, 그것을 말을 해도 되는 것일지 감이 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사가 지키고 있는 여자. 비밀 유지를 위해 의사를 납치해 온 상황. 여기가 어딘지는 몰라도 근처에 인적은 없을 것 같은 적막.

여자의 손은 앙상하게 말랐을지언정 굳은살 하나 없었다. 분명, 행색은 이래 보여도 무언가 복잡한 사연이 있는 귀한 아가씨일 텐데.

과연, 이 여자가 임신했다고 말해도 되는 것일까? 이게 정답일까 오답일까.

모건은 눈을 질끈 감았다.

“오조입니다.”

“……뭐죠 그게?”

“입덧입니다. 모체가 워낙 약한 상황에서 입덧이 너무 심해서 버티지 못하는…….”

눈앞의 기사는 잠시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한 듯하더니, 잠시 후에서야 깨달은 듯 점차적으로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이어서 참혹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가 아드득 갈리고 핏대가 서는 것이 보였다.

주위 공기가 날카롭게 무거워지기 시작하자 모건은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컥컥거렸으나. 그보다는 누워 있던 환자가 괴로워하며 몸을 뒤트는 모습이 보였다. 기사도 그걸 보았는지 황급히 기운을 갈무리하였으나, 처참하게 일그러진 얼굴은 이미 무너져 내리고 있는 듯했다.

“……그게 정말입니까…….”

피를 토하는 듯 괴로워하며 갈라져 나오는 목소리에, 모건은 살기를 뿜어내어 환자를 위협한 기사를 차마 추궁할 수가 없었다.

모건은 한숨을 한 번 토해 낸 후, 다시 한번 여자를 진찰하기 시작했다. 여자의 몸 이곳저곳을 살피고 소리를 듣고 하다 보니, 여자가 으음 하고 신음을 토해 내고는 천천히 눈을 떴다.

열린 눈꺼풀 사이로 초록색 눈이 마주쳤다.

흐릿한 눈은 천천히 깜빡이더니, 낯선 이를 인식하고는 순식간에 공포에 질렸다.

“아가씨, 괜찮습니다, 아가씨.”

뒤에 있던 기사가 재빠르게 모건과 여자 사이에 끼어들더니 여자를 반쯤 끌어안고 토닥였다.

“괜찮아요, 제가 데려온 사람입니다. 괜찮습니다.”

“아, 아젠…….”

여자가 조금 진정하는 듯 거칠던 숨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하지만 기사가 여자를 진정시키기 위해 이은 말에 그녀는 다시금 공포에 질렸다.

“의사입니다. 진찰만 하고 돌려보낼 겁니다.”

모건은 여자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는 것을 보았다. 여자는 잘 움직여지지도 않는 몸을 움직여 뒤로 피하려고 했다. 별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든 의사에게서 멀어지려고 애를 쓰는 몸짓이 마치 자신을 잡아먹으려는 괴물에게서 도망치려는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알아본 기사의 표정 역시 처참하게 굳어 내렸다.

“아, 저, 진찰은 충분히 한 것 같습니다. 나가 있겠습니다.”

모건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든 부분을 자세하게 들여다본 것은 아니지만, 이미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다 파악했다.

모건은 기사를 돌아보고는 방문 밖으로 나왔다.

거실에 놓여 있는 의자 하나에 주저앉았다. 아아, 얽혀서는 안 되는 복잡하고 심각한 일에 제대로 얽혀 버렸구나.

.*. *. *. *. *. *.

방에는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그녀는 아젠을 외면하고 침대 구석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불을 움켜쥐고 있는 손이 벌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아젠이 뭐라 말을 해야 할지 입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다가 그녀를 달래 주기라도 하려고 손을 뻗자, 그 손에 그녀가 움찔하며 더 뒤로 몸을 물렸다.

참담했다.

그 자신의 정신도 너무나도 뒤엉키고 혼란스러워 정리가 되지 않았지만, 공포에 질려 있는 그녀를 어떻게든 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아가씨…….”

그가 힘겹게 입을 열자, 메마른 목구멍에서 흔들리는 목소리가 기어 나왔다.

“보지 마…….”

“네?”

“보지 마. 싫어, 보지 마!”

그녀가 소리를 지르고는 침대에 쓰러져 울기 시작하자 아젠은 얼어붙었다. 아무리 아프거나 힘든 일이 있어도 단 한 번도 이렇게 소리 지른 적이 없던 그녀였다.

“나가줘, 제발,”

“…….”

“제발, 날혼자 있게 해 줘, 제발…….”

울음이 섞여 있는 처절한 외침에,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굳어 있던 아젠은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그녀를 정말로 혼자 놔두는 게 맞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믿고 싶지가 않았다. 모든 것이 거짓말 같았다.

그는 두려운 것에서 도망치듯 조금씩 뒷걸음질 치다가, 이내 문이 닫히고 나서야 자신이 방문 밖으로 나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머릿속이 빙빙 돌았다. 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을 보면, 그녀는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고,

그래서 죽음을 준비했던 거고,

그러고서도 그에게 숨겼다.

아. 그날 밤의 대화가 무슨 의미였는지 이제, 이제야 알겠다.

하루 종일 옆에 붙어 있었으면서 그것도 눈치채지 못했던 등신 같은 새끼.

미칠 것 같았다.

그 개새끼가…… 그 쓰레기 같은 짐승 새끼가 그녀에게 무슨짓을…….

아젠은 의사의 맞은편에 쓰러지듯 앉고는 한 손으로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아니. 하지만.

전생에는 이런 일이 없었으니까. 없던 일이니까. 그래서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런 일은, 이런 가능성은…….

과거엔 없던 일이었으니까, 이번에도 당연히 없을 거라고…….

정말 없던 일이었나?

과거, 그때, 마지막으로 그녀를 찾은 곳은 분명 의원이었다. 그녀는 차마 보기 힘들 정도로 창백하고 야윈 몰골로 입원해 있었다.

그 기사 역시 마을로 의사를 찾아가는 게 위험하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었을 텐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원을 찾아갈 수밖에 없을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어 있던 그녀.

그녀는 그때 왜 그렇게 죽어 가고 있었나.

설마 그때에도…….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갔다.

“어……저…….”

앞에 앉아 있던 의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자, 그제야 의사의 존재가 다시 떠올랐다.

마치 불 속에서 물속으로 갑자기 처박힌 것처럼, 아직 어지러운 머리가 순식간에 현실로 끄집어져 내동댕이쳐졌다.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인식했다.

그래, 이건 현실이다. 충격받고 무너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는, 앞이 얼마나 진창이건, 똑바로 눈을 뜨고 앞을 봐야 했다. 똑바로 보고 듣고 판단하고 정신 차리고 행동해야 했다. 아무리, 당장 토할 것 같아도, 귓가에 이명이 돌아도.

“얘기하세요.”

“어…… 음…… 아시겠지만, 환자의 몸이 매우 약합니다.”

“…….”

“입덧 때문만이 아니고…… 하긴 입덧을 버텨 낼 수 있을지도 확실치 않은 상태인데요, 근데 입덧이 무사히 지나가더라도 그 후에도 계속 문제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모건은 솔직히 말하고도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약간 거짓을 보태는 게 나을지에 대해 잠시 고민했으나, 눈앞에 있는 기사가 살벌한 눈빛으로 뒷말을 재촉하자 결국 말을 이었다.

“임부와 태아 양쪽 모두…… 생존 가능성이 매우 낮은 상태입니다.”

모건은 조심스럽게 기사의 눈치를 살폈다. 기사는 가만히 눈을 감고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꾹 움켜쥐고 있었다. 목이며 이마에 불거져 나온 핏대가 사납게 서 있었다. 아까 터져 나왔던 살기를 생각하니 두려웠지만, 기사 본인도 어떻게든 억누르려고 애쓰고 있는 것 같았다.

“계속 얘기하세요.”

“그게, 아시겠지만…… 애초부터 모체가 임신을 감당할 수 있을 만한 몸이 아니었던 것 같고…… 지금 모체도 워낙 약하지만, 태아 역시 매우 쇠약한 데다가, 태아를 지켜 줘야 할 아기집이 너무 약해 지금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라…… 결국 조만간 유산이 될 가능성이 높은데, 모체가 도저히 그 충격을 감당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서…….”

알고 있던 얘기다.

그녀가 임신을 버텨 낼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공작 부부는 그녀를 귀족가와 혼인시킬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니까.

매일 주치의의 진단을 받으며 건강식과 보약을 챙겨 먹고 정성으로 건강을 관리하던 시절에도 그랬다. 하물며 지금처럼 심하게 쇠약해진 상태에서는…….

“아이를,”

개새끼가 감히 그녀의 배 속에 심어 둔 더러운 괴물…….

“아이를 없애세요.”

“어,그게, 그것도, 좀……안됩니다.”

“왜 안 됩니까.”

“태아를 없애는 약이 없는 건 아닌데, 모체에게 독을 쓰고 모체가 독을 버티는 동안 태아가 죽는 식입니다. 그러니까 모체가 태아보다 튼튼한 경우에만 가능한 건데…… 저 환자분의 경우는 모체가 먼저 죽을 겁니다. 설령 버틴다 하더라도 그것도 결국 유산의 한 종류라…….”

“제기랄!”

쾅, 아젠이 두 손으로 테이블을 내리치자, 테이블이 부서져 내렸다. 아, 참아야 해, 그녀가 바로 문 너머에 있어, 참아야 해. 아젠은 부들부들 떨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습니까.”

그가 갈라지고 억눌린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꺼내자, 얼어붙어 움츠리고 있던 모건이 목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렸다.

“그게……지금으로서는…….”

“…….”

“일단 유산의 충격을 버틸 수 있는 몸이 아닌지라, 차라리 그냥 이대로 임신을 유지하는 것밖에는…… 가능한 한 유산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되는 데까지 버텨 보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사실 지금 임신을 유지하는 것도 힘든 상황이에요. 몸이 굉장히 약해져 있는 상태에서 임신한후 오조까지 겹쳐서 더 약해진 것 같고, 그리고…… 여태껏 약을 많이 쓴 상태죠?”

약…….

움켜쥔 주먹에서 빠드득 소리가 났다.

그녀의 몸이 안 좋아진 이후 얼마나 많은 약들을 먹여 왔던가. 이 멍청한 새끼…… 내가, 내 손으로 직접…….

그런 아젠의 반응을 보고 모건은 알았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일단 앞으로는 아무 약이나 함부로 먹이지 마시고…… 아무튼 최선을 다해 보는 수밖에요. 잘하면 출산까지는 갈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저 몸으로 출산을 버틸 수 있겠습니까.”

의사는 입을 다물었다.

아젠은 조용해진 의사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금 연거푸 마른세수를 했다. 비실비실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어쩐지 웃음소리가 커져 가는 것 같았다.

앞에서 의사가 자신을 이상한 괴물 보듯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미칠 것같다.

그 모든 게 의미가 없었다.

그녀를 살리고 싶어서 지난여름부터 그토록 열심히 준비해 왔던 모든 것이.

전생의 기억과 대조해 가며 뭔가 다르게 해 보겠다고 아등바등 발버둥 쳤던 것들이.

아무것도 의미가 없었다.

사실 이 모든 것의 끝은, 슈엘을 탈출하기 전에 이미 심어져 있었으니까.

그가 발버둥을 쳐 보기도 전에 이미 결말이 정해져 있었으니까.

.*. *. *. *. *. *.

의사를 살려서 돌려보낸 것에는 그 어떤 윤리적 도덕적 이유도 없었다.

그저, 의사가 실종되면 분명 그들의 철저한 수색이 바로 따라붙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살려서 돌려보내면, 그 의사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바로 자발적으로 달려가서 신고하지 않는 한 최소한 며칠이라도 시간을 벌 수 있겠지. 설령 바로 달려가서 신고하더라도, 실종되자마자 시작될 추적과 큰 차이가 없을 거다. 몇몇 증언이 덧붙기야 하겠지만.

어차피 그 의사는 오는 길에도 가는 길에도 내내 정신을 잃고 있었으니 이곳이 어디인지는 모를 것이다. 그녀의 눈을 보았고 그녀와 나 사이의 대화도 들었으니, 어쩌면 우리의 정체를 이미 눈치챘을지도 모르지만, 제법 이쪽에 동정적인 눈치였으니 어쩌면 입을 다물어 줄지도 모른다.

「어……저……힘내십시오.」

딴에는 쓸데없는 위로까지 하고 가지 않았던가.

그 머릿속으로 무슨 소설을 쓰고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쪽에 유리하면 유리했지 불리한 상상은 아닐 듯해 보였다. 그 상상에 좀 더 힘을 실어 주기 위해 일부러 몇 가지를 더 흘려 넣었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함부로 남에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를 함부로 입에 올리는 자기 자신이 역겨웠지만, 그렇게 해서 이 의사가 같잖은 동정심으로 하루만이라도 더 입을 다물어 준다면, 그거나마 도움이 될 테니까.

의사를 되돌려 놓고 오두막으로 돌아와 보았을 때에는, 이미 동이 트기 시작한 후였다.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해서 그녀의 방문을 천천히 열었다.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여명으로, 침대에 그녀가 쓰러져 있는 것이 비쳐 보였다.

계속 울다가 정신을 잃었는지 얼굴이 엉망이었고, 이불조차 덮고 있지 않았다.

손을 뻗어 저 밑으로 내려가 있는 이불을 끌어 올리려던 참에, 그 손에 그녀의 배가 닿았다.

그는 물끄러미 얇은 슈미즈 밑에 숨겨져 있는 그녀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어느덧 이불을 내려놓은 손이. 조금씩 조금씩 천천히 그녀의 배로 다가갔다.

거칠고 커다란 손이 차마 그 위에 내려앉지 못하고, 허공에 멈춰 섰다.

아직 너무나도 작고 약할 텐데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그녀를 죽여 나가고 있는 ‘그것’이 저 배 속에 웅크리고 숨어 있었다.

그 짐승 같은 애비를 닮아 그녀를 죽이고 있는.

‘아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젠에게 있어 ‘그것’은, 그저 거대하고 불길한 검은 공혈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카쉬엔’은 그녀를 배려해서 조심한 적이 없었다.

되레, 짐승이 영역을 표시하듯, 그녀의 몸 속 깊은 곳까지 자신의 흔적으로 가득 채워 놓고 흡족해했지.

그럴수록 그녀가 자신의 소유로 물들어 가는 것인 양 착각하며.

이전엔 황홀한 줄 착각했던, 그러나 지금은 그 무엇보다도 끔찍해진 기억들에 구역질이 났다. 그 지독한 밤들이 그녀의 영혼을 참혹하게 깎아내리고 죽여 나갔다는 것은 이미 넌더리 나게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말로, 이렇게, 실질적이고도 직접적으로 죽였던 거였던가.

그러고도 아무것도 몰랐었나.

이런 일이 벌어질 걸 정말 몰랐나?

의사들은 뭘 했지? 의사들을 붙여 놓지 않았던가? 분명 하나도 아니고 여럿을…… 그 자식이 그녀에게 그 많은 의사들을 붙여 놓았던 이유가 그녀를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어차피 무엇을 해도, 과거의 기억을 헤집고 많은 의문을 품어도, 아무리 후회해도 이미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새끼의,

나의,

업보.

그의 손은 거두어졌지만, 그는 그녀의 배를 계속 바라보았다.

그의 업보라면, 그 대가는 그에게 왔어야 했다. 그가 치렀어야 했다. 왜 그가 저지른 죄의 업보가 그녀의 안에 들어 있는것인가.

왜, 그의 죄를 그녀가 짊어져야 하나.

“아젠?”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언제 눈을 떴는지, 그녀의 초록색 눈과 마주쳤다.

그녀가 지친 눈으로 잠잠히 그를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한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울지 마.”

울고 있었나. 그는 그제야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닦아 냈다. 손이 흥건하게 젖어 들었다.

“미안해.”

당신이 왜 또 미안해하나. 당신은 정말로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모든 죄는 내가 지었는데 모든 벌은 당신이 받고도 왜 당신이 또 미안해하는 거지.

“제가…….”

그의 뺨에 닿아 있는 그녀의 작은 손에, 그가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 하얗고 작은 손을 꼭 끌어안고 뺨에 비볐다.

“제 잘못입니다. 제가 당신을……이렇게…….”

“아니야, 왜 네가…….”

당신을 이렇게 만든 게 나니까.

당신의 배 속에 저 재앙을 심은 것이 나니까.

당신이 모르는, 몰라야 하는. 영원히 모를…….

그의 목울대가 울렁였다.

“제가…… 더 일찍……

의사는 분명, 두 달 전쯤에 임신이 된 것이라 했다.

좀 더 일찍 그녀를 데리고 나왔다면, 그랬으면 모든 것이 괜찮았을 것이다. 아주 조금만 더 서둘렀더라면.

괜히, 완벽하게 준비를 하겠답시고 시간을 끌었다.

그 시간 동안 그녀는 더 고통받았고, 더 죽어 갔고, 그리고 결국은……결국이렇게…….

“더 일찍 아가씨를 구해 냈었어야 했어요. 봄이 되기 전에, 겨울에, 아니, 수도에 계시던 동안에…… 그랬으면……그랬었으면…….”

“아젠, 아니야. 말했잖아.”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 네가 날 그곳에서 꺼내 주어서 고마워. 안전하게 꺼내 주려고 준비를 많이 한 걸 알아. 덕분에 이렇게 밖에 나와 있잖아. 자유롭게. 네 옆에. 응?”

그는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눈에서 계속 무언가가 나오는지, 그녀가 잡혀 있는 손을 움직여 그의 뺨에서 물기를 닦아 내었다.

“그렇게 많이 애써 줬는데, 같이 가지 못해서 미안해. 이렇게 되어서…… 미리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 도저히…… 도저히 네게 말을 할 수가…….”

“아직 아닙니다, 아직…… 힘들다고 했지 불가능하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건강을 잘 챙기시고 끝까지 버티시다 보면 임신 기간을 잘 넘길 수 있을지도 몰라요. 일단 입덧을 무사히 넘기고, 그 후엔 유산되지 않도록 몸을 조심하면…….”

“아젠,”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바라보자, 아젠은 입을 멈추었다. 그녀가 부르면 그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말은 모두 들어야 했다.

초록색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여태껏 담담히 버티고 있던 눈에 다시금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아젠, 나는…….”

기껏 참아 오던 얼굴이 울상으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나는, 이 아이를…… 이 아이가…… 같이 죽을 수 있을 만큼은 가엽지만, 같이 살아갈 수 없을 만큼은 끔찍해…….”

어느덧 손을 빼낸 그녀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차마 해서는 안 되는 말을 결국 입 밖으로 내뱉은 후, 그동안 참아 오던 모든 것이 터져 나오듯 두 손 사이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나는…… 미안해, 아젠…… 난 이제 너무 지쳤어. 그냥…… 이제 도저히 더는 못 하겠어. 이제 더 이상은 그 무엇도 견뎌 낼 자신이 없어.”

말은 어느덧 흐느낌으로, 흐느낌은 처절한 울음으로 바뀌었다.

“미안해…… 살기로 약속했는데, 난 도저히, 더 이상은…….”

사실은, 그녀는 괜찮지 않았다.

한 번도 괜찮아진 적이 없었다.

가족들이 모두 살육당했을 때 무너져 내렸고, 그 원인이 어쩌면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산산이 부서졌다. 만약 남은 것이 있었다면 그 후 1년간의 감금 생활 동안 완전히 바스러졌다.

모든 것이 다 부서지고 망가져 버린 후, 그 깨어진 파편들을 어떻게든 그러모아 얼기설기 그럴듯하게 이어 놓았을 뿐이었다.

엉성하게 간신히 서로 맞닿아 있는 조각들이 그의 달콤한 말에 의지하여 간신히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건드리는 순간 다시 와르르 무너지게 되어 있었다.

애초에 한 번도 고쳐진 적이 없었다.

사실은 이미 무너져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단지 그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 그냥 애써 가리고 숨겨 왔을 뿐이었다. 스스로에게조차도.

그러나 이제 마지막 조각까지 모두 무너져 내렸고,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무너진 폐허에 바스러진 회색 잔해들, 그리고 서러운 울음 외에는.

울음 사이로, 그녀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새어 나왔다.

“……이제 그만나를 포기해…….”

그가 절대로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을 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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