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여로
밤새 두 마리 말을 갈아타며 쉬지 않고 달리고 나서, 세상이 푸르스름하게 밝아지기 시작할 무렵, 그들은 한 오두막에 도착했다.
피로를 쫓아내며 정신을 차린 아를렌을 아젠이 안아 내려 오두막에 들어가자, 안에는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가씨! 무사하셨군요! 아니, 무사하신 게 아닌가? 어찌 이렇게 살이 쏙 빠지셔서…… 아이고 고생이 많으셨…….”
“닐로…….”
“이러실 게 아니라 일단 이쪽으로 편하게 앉으세요. 그동안 고생이 많으셔서, 오시는 길에도 고생이 얼마나 많으셨을까…… 밤새 말을 달려 오신 거죠? 아니 이러실 게 아니라 아예 누우실래요? 몸이 엄청 힘드실 텐데……!”
눈에 눈물까지 글썽이며 호들갑을 떠는 그의 말은 여전히 많고 빨랐다.
한창 호들갑을 떨며 간단한 식사를 차리는 닐로를 옆에 두고, 아젠은 수건에 물을 묻혀 가져왔다.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그가 그녀의 손을 들고 닦으려고 하자, 아를렌은 당황하여 손을 빼내었다.
“내가 할 수 있어.”
“제가 하고 싶어서 그래요.”
그가. 그녀의 손이 빠져나간 자신의 빈손을 거두지 않은 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가씨 시중들 수 있게 된 거, 정말 오랜만 이잖아요.”
그녀가 조용히 침묵하자 수락의 뜻으로 알아들은 그는 다시금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소중하게 잡아 들고는, 경건한 몸짓으로 손가락 하나하나를 닦아 내기 시작했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들을 부드러운 천이 감쌌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천이 오가면서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이 손을 다시 잡을 수 있게 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사이에 고생을 전혀 몰랐었던 부드러운 손가락들은 비쩍 말라 반쪽이 되어 있었다.
지난 1년 동안 너무 많은 것이 망가지고 너무 많은 것이 바뀌어 버렸다. 과연 무엇이 어디까지 회복 가능할지, 가능하긴 한 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래도…… 가능한 데까지는 어떻게든 치유하고, 메우고, 덮어 주고 싶다. 설령 흉터가 남는 것은 피할 수 없더라도. 열려 있는 상처라도 닫아 줘야 한다.
당신의 가슴속에 크게 뚫려 버렸을 구멍을 메꿔 주지는 못하더라도, 다시 살아 숨 쉬고 맥동할 수 있도록 해 줘야 하는데.
열 번째 손가락까지 닦아 낸 그가 다시 한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보고 있던 그녀가, 눈이 마주치자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띄워 보였다.
손으로 쉽게 집어 먹을 수 있는 간단한 음식을 차려 놓고 나서, 닐로가 그녀의 발치에 앉아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기었다.
“하아…… 이거, 오누, 진짜, 어떤 썩을 놈들이 이딴 식으로…….”
닐로가 얼굴을 찡그리자 아를렌은 애매하게 미소 지었다.
“고칠 수 있겠습니까?”
기다리다 못해 아젠이 재촉하자 닐로가 혀를 차면서 대답했다.
“이거 일부러 치료 제대로 안 하고 이딴 식으로 놔둔 거죠? 오누, 진짜 쳐 죽일 놈들이네. 아니 그래도 의사란 놈을 부르긴 불렀을 것 아닙니까. 의사라고 명찰 단 놈이 와서 이렇게 해 놓는다고요? 그딴 놈들은 손모가지를 확 잘라 버려야…… 아이고 암튼 그게 아니고, 관절이 어긋난 건 어긋난 거고, 그보다 더 문제가 이놈들이 일부러 안이 계속 곪아 있게 놔둔 모양입니다. 이 썩을 놈들…… 죄송해요, 너무 오래 곪아 있던 거라 이거 완치는 불가능해요.”
닐로가 엉망으로 얼굴을 구긴 채 한 말에 아젠은 까드득 이를 갈았으나, 아를렌은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매일매일 의사들이 와서 진찰을 하는데도 전혀 발이 낫지 않는 것을 보면서, 아마 일부러 계속 망가져 있도록 조치를 취하고 있으려니 생각했었다.
“……그래도 지금보다는 낫게 해 드릴 수 있어요. 이거 지금 땅에 디딜 때마다 무진장 아프실 것 같은데…… 건드리기만 해도 아프시죠?”
“응.”
“그 우라질 놈들이 발목을 맞춰 놓지도 않은지라 일단 발목을 제대로 맞추는 것부터 해야 할 것 같은데, 많이 아플 거라서요. 진통제라도 일단 드시고 나서…….”
“괜찮아, 진통제도 먹고 나면 효과 드는 데 시간 많이 걸리잖아. 참을 수 있으니까 그냥 해.”
“시간, 있습니다. 그런 시간…….”
아젠이 감정을 간신히 억누른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아를렌이 아젠을 쳐다보았다.
“아가씨가 아프지 않기 위해 진통제를 드실 시간, 그런 거 충분히 있어요. 제발, 드세요.”
몰랐다.
절뚝거리고 제대로 걷지 못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발을 디딜 때마다 고통스럽다는 건 몰랐다. 전생에서도 몰랐고 지금도 몰랐다. 그녀는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그 개새끼는 그런 걸 알아보려고 한 적도 없었으니까.
아마 ‘혼자 돌아다니지 못하게 해.’ 정도의 한 문장을 던졌을 거다. 그리고 의사들은 그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저 가냘픈 발목을 계속 썩어 있게 했겠지.
그 새끼는 그녀가 홀로 걷지 못하게 된 것에 만족했을 뿐, 그 뒤에서 그녀가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는 보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그녀가 자신을 만난 후에 조금이라도 멀쩡해 보이려고 매번 어떻게든 스스로 걸어 다니려고 노력했던 것을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진통제를 먹고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닐로가 아를렌의 발목을 잡고 꺾었다. 우두둑하는 소리가 방 안에 끔찍하게 울려 퍼졌다. 진통제를 먹었음에도 아를렌의 얼굴이 고통에 하얗게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지만, 그녀는 비명 하나 없이 참아 냈다.
그녀는 원래도 엄살을 부리지 않고 잘 참는 편이었지만, 저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도대체 어떻게 저렇게 고통에 익숙해져 버렸는가.
그 후 닐로가 아를렌에게 뭐라 뭐라 계속 말을 하며 발목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는 동안. 아젠은 이를 악물고 있었다. 개새끼. 죽여 버릴 테다. 언젠가 죽여 버리고 말 테다. 너 같은 새끼는 세상에서 가장 처참하고 잔인하게 죽어야 하는데.
“아젠 경? 보고 있어요? 이거 잘 보고 앞으로 아젠 경이 매일 해 줘야 하는데.”
“보고 있습니다.”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았다. 조금의 실수도 없이 모두 외웠다.
“그럼 이제 다시 아젠 경이 한번 해 보세요. 제가 봐 드릴 테니까.”
발목에서 붕대를 푸는 순간, 아를렌이 다시금 미간을 찡그렸다.
“아프십니까?”
“아냐, 괜찮아.”
“……아프시면 아프시다고 말씀해 주세요, 아가씨. 아가씨께서 아프신데 제가 모르고 있는 것은…… 그러다 더 아프게 해 드리는 건, 그런 건 정말 원하지 않습니다.”
아젠이 아를렌을 올려다보며 말하자, 그녀가 잠시금 그의 눈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약간, 아주 약간…….”
아젠은 분노로 인해 손에 힘이 들어가려는 것을 눌러 참으며 천천히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였다. 갓난아기의 발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손 위에 올리고 살살 붕대를 감기 시작하자, 뒤에서 고함이 들려왔다.
“아젠 경! 그건 아무 효과가 없다고요! 아가씨께서 조금 아프시더라도 좀 더 세게 감아 드려야 한단 말입니다! 아이고, 내가 참 답답해서…… 이리 줘 봐요, 내가 다시 보여 드릴게.”
아젠이 붕대 감는 법을 익히고 나자, 닐로는 이런 약 저런 약재들을 잔뜩 풀어놓고 두 사람에게 설명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심지어 닐로가 직접 만든 ‘루테른 아가씨 전용 의학책’까지 있었다.
그 양이 도저히 들고 다닐 양이 아니라서 아를렌은 당황했으나, 아젠은 이미 알고 있었던 듯 담담하게 약들을 살펴볼 뿐이었다.
이윽고, 닐로는 간단하게 아를렌을 진찰하였으나, 머리를 긁적였다.
“일단 몸이 너무 쇠약해져 계시고 불안정하신 상태라…… 그건 확실하네요. 여러모로 모든 부분이 다 불안정하세요. 한두 군데가 문제가 아니네요. 그렇죠?”
아를렌은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을 피했다.
“아니 지금 아가씨 웃어서 넘기실 일이 아니라, 너무 많은 곳이 망가지셔서 솔직히 어디가 얼마나 문제인지도 정확히 진단하기 힘들 지경이라고요. 암튼 전체적으로 일단 몸을 보하셔야 할 것 같으니까 아까 말씀드린 약들 복용하시고, 발목에 염증을 다 없애야 하니까 챙겨 드린 약은 앞으로 3주간 매일 세 번씩 드셔야 하고, 붕대는 걷기 전마다 꼬박꼬박 감고 밤마다 풀어 주시는 거 잊지 마세요. 하루 종일 감고 있으면 오히려 회복이 더딜 수 있어요.”
“응, 알겠어. 고마워 닐로.”
그녀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 미소는 이전처럼 화사하지는 않았고, 상당히 힘이 없긴 했지만, 그래도 억지로 지어 보이는 미소는 아니었다. 어느 정도 마음이 녹아내렸는지, 아니면 옛날에 알던 사람들을 만나자 예전의 습관이 살아 나온 것인지, 그녀는 제법 자연스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 *. *. *. *. *.
닐로가 떠났다.
만일을 대비해, 그들은 서로에게 서로의 행선지나 계획을 전혀 알려 주지 않은 채 헤어졌다. 이제 닐로는 그의 길을 갈 것이고, 아젠과 아를렌은 그들의 길을 갈 것이었다. 서로 전혀 연락하지 않은 채.
닐로를 보내고 난 후, 아를렌은 일단 눈앞에 잔뜩 진열되어 있는 약과 약재들의 양을 보고 기가 질렸다.
“이 많은 걸 모두 어떻게 가져가려고…….”
“여기서부터는 마차로 갈 거니까 괜찮습니다.”
전생에 그 평민 기사는 제법 잘 숨어 추적이 쉽지 않았으나, 결국 꼬리를 잡은 곳은 의원이었다.
그녀는 몸이 약하고, 원래 의사 여럿을 그녀에게 붙여서 연명시키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 도주 생활에서 건강이 악화되어 의사를 찾게 될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의원들을 집중적으로 감시해서 꼬리를 잡는 것은 간단한 판단이었으리라.
그래서, 이번에 그는 의사를 찾을 일을 최소화할 작정이었다.
사실 아예 의사 한 명을 데리고 같이 잠적할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나 목숨을 내걸고 입을 다물 믿을 수 있을 만한 의사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물론 닐로 정도라면 의사 역할을 하면서 기꺼이 도와주리라. 하지만 저 입은 너무 가볍다. 그와 같이 지낸 짧은 시간 동안 내뱉은 말실수가 이미 수십 번이었다.
그의 충심과 의학 지식은 신뢰하지만, 도주와 잠적 생활 동안 저 입은 분명 재앙이 될 것이었다. 그래서 여기서 만나기로는 했을지언정 그 외의 모든 계획은 닐로에게도 모두 비밀로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자신으로 인해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을 더 만들고 싶어 할 것 같지 않았다.
아젠 그 자신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도 얼마나 힘들었던가. 그녀를 데리고 도주하는 게 그에게는 전혀 희생이 아니라는 걸, 오히려 그가 절실히 원하는 일이라는 것을 믿게 하는 데까지, 그는 그녀를 여러 번 만나 설득해야 했었다.
사실, 이번 계획에서 그녀를 위해 위험을 감수한 사람들은 더 있었다. 그녀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고, 레퀴에스가에 원한을 품은 사람들.
아무리 그가 성의 구조는 물론이거니와 젝시온과 함께 들락거렸던 온갖 개구멍들까지 다 파악하고 있다고는 하나, 혼자서 동시에 세 군데에 쉽게 꺼지지 않는 화재를 일으킬 수는 없었으니.
하지만 아젠은 그 사람들에 대해서 그녀에게 알릴 생각이 없었다. 그녀에게 더 이상의 죄책감이나 부담감을 얹어 줄 필요는 없으니까.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그녀뿐이었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느낄 만한 것이라면 모두 숨겨 버리면 그만이다.
“마차로 가면 너무 느려지지 않아?”
“괜찮습니다. 서둘러서 가는 것보다는 조용히 가려 합니다.”
어차피 속도전으로는 절대 그들을 앞지를 수 없다. 그렇다고 그들과 매번 싸우며 갈 수도 없다. 그래서 속도를 포기하고 대신 조용히 숨어들어 지내면서 그들의 경계가 완전히 풀어질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게 약해질 대로 약해진 그녀의 몸에도 더 나을 것이었다.
전생에 그들을 잡은 곳은 동부였다. ‘카쉬엔’이 서부로 출정을 갔었으니 본능적으로 그를 피해 반대쪽으로 갔었던 것이던가. 혹은 베로크로 망명하려는 계획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호위 기사가 무슨 생각으로 어떤 계획을 세웠었는지는 알 수 없으니까.
그는 일부러 서부로 향했다. 카쉬엔이 서부로 가 있는데 그자를 피하는 사람들이 서부로 도망갔으리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것 같기도 했고, 어쨌든 전생에 잡혔던 불길한 곳에 굳이 다시 발길을 향해야 할 이유가 있지도 않았다.
물론 서부라고 길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굳이 그녀가 죽었던 곳으로 향하고 싶지는 않아.’
그렇게 루트를 정한 후, 다른 여러 방향으로 사람들을 보내며 흔적을 남겼다.
초록색 눈을 한 여자들과 보라색 눈을 가진 남자들을.
물론 금발 머리와 갈색 머리라면 금상첨화였으나, 그렇게까지 조건을 맞춰서 사람들을 많이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머리카락이라면 어렵지 않게 염색이 가능하니까, 눈 색을 맞추는 게 더 중요했다.
그래도 초록색 눈은 상대적으로 흔한 반면, 보라색 눈은 드물었다.
빌어먹을 보라색눈…….
뒷골목에서 슬러족 혼혈이라는 이유로 좀 더 학대당하던 어린 시절에도 보라색 눈이 이렇게까지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어째서 자신의 눈은 조금 더 흔해 빠진 색일 수 없었던 걸까.
어쨌든, 그는 보라색 눈을 가진 사내들을 여럿 찾아 고용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을 초록색 눈을 가진 여자들과 짝을 맞춰 여러 방향으로 보내었다.
몇은 말을 타고 가게 했고, 몇은 마차를 태워 보냈고, 일부는 승합 마차를 태워 보냈고, 일부는 배표를 끊게 했다. 여자들은 적당히 발을 절뚝이면서 다녀 줄 것을 주문했다.
그중 몇은 강하게 그리고 몇은 약하게 흔적을 남겨 놓았다. 만약 지금 슈엘에서 추적을 시작했다면 아마 그들을 따라가고 있을 터였다.
물론, 미리 파악해 둔 그 영주 대리인 놈의 성향으로는, 아직까지 추적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가능성이 더 크긴 했다. 운이 매우 좋았다면 그녀가 사라진 것을 밤새 파악도 못 했을 수도 있다.
그 돼지 같은 영주 대리인이 그녀를 폄훼하고 다니는 것은 개같았지만, 하찮게 여기다 못해 지킬 생각도 않는다면 그건 그거대로 유용한 일이었다.
물론 미끼가 된 이들이 언제까지고 계속 그렇게 이동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냥 어느 정도까지만 흔적을 남겨 둔 후, 그 후에는 그들은 자유롭게 헤어지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개새끼들의 초반 추적을 교란하는 데에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초반 추적이 교란된 후에는 추적의 범위가 너무 넓어져 더 이상 이쪽의 흔적을 쫓을 기회는 없으리라.
그 개새끼가 서부에서 돌아와서, 그 모든 사람들을 추적하고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어쨌든 이번엔 미친 듯이 달려서 속도로 떨쳐 낼 생각이 아니었다. 그들의 눈이 다른 쪽으로 쏠려 있는 사이에, 가능한 한 눈에 안 띄게 조용히…….
“아가씨, 그런데,”
“응?”
“죄송하지만…… 괜찮으시다면 머리를 염색해 드릴까 합니다.”
“아.”
아를렌이 자신의 화사한 금색 머리카락을 손으로 집어 올려 쭉 훑어 내리고는, 아젠의 검게 변한 머리를 바라보았다.
“응, 당연하지. 염색하는 법 좀 가르쳐 줘.”
“그럼 일단 염색약을 좀 챙겨 오겠습니다.”
아젠이 일어서서 염색약을 찾아보는 사이에, 그의 뒤에서 무언가 부스럭부스럭하더니 작게 서걱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아젠이 뒤를 돌아보자, 어느 사이엔가 아를렌이 그의 칼을 한 손에 잡고. 다른 손으로는 이미 베어진 머리카락을 한 다발 쥐고 있었다.
“이거…… 어떻게 할까?”
그녀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짧은 머리를 해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태어나서 머리가 길어진 후부터 여태까지 계속 저 빛나는 탐스러운 금발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찰랑이며 다녔을 것이다. 밝은 햇살 아래 저 머리카락이 얼마나 아름답게 빛나며 바람에 흩날렸는지 기억한다.
“태워 버리는 게 좋겠지? 혹시라도 이 오두막까지 추적해 왔다가 머리 다발을 발견하면, 짧은 머리로 바뀌었다는 걸 금방 들킬 테니까.”
그러나 이제 그녀는 아무 미련 없는 듯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머리를 짧게 베어 버리고는, 쓰레기를 어떻게 버릴지를 논하듯 말하고 있었다.
아젠은 메어 오는 목에 침을 한 번 삼키고는 대답했다.
“제가 태우겠습니다. 이리 주세요.”
아젠이 곧 아궁이에 머리카락을 넣고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그녀의 옷 주위로 싸구려 천을 두르고, 짧아진 머리카락에 색을 입히고 있는 동안, 아를렌은 불에 훨훨 타들어 가고 있는 자신의 금발 타래를 바라보았다.
한때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좋아했었다. 바람이 불 때 하늘로 나부끼는 그 느낌이 좋았다. 걸을 때마다 어깨 위로 출렁이는 느낌도, 사락거리는 소리도 좋아했다. 햇빛 같은 색도 좋아했다. 손가락으로 꼬거나 만지작거리는 것도.
그자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일 매만지고 입을 대고 탐을 내기 전까지는.
자신의 짧아진 머리카락을 빗어 내리는 아젠의 손길을 느끼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눈을 뜨면 완전히 다른 모습이겠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으면 좋겠다.
그자가 욕심 낸 적 없는, 손댄 적 없는, 다른 사람.
.*. *. *. *. *. *.
오두막을 정리하고 태울 것들을 깨끗이 태운 후, 준비가 끝난 두 사람은 미리 오두막 옆에 준비해 두었던 마차에 올랐다.
눈에 띄지 않도록, 손질 안 된 거친 나무로 간신히 지붕과 벽을 댄 허름한 마차였지만, 안쪽 한편에는 폭신한 이불과 쿠션이 가득했다.
“한참 더 가야 하니까, 주무세요.”
아를렌은 준비된 이불 위에 누운 채, 마차를 몰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모자를 눌러쓰고, 평범하고 흔한 남색 튜닉 셔츠를 입고 있었다. 아를렌은. 한참 동안 그 곧고 단단한 등을 바라보았다.
마부석 쪽으로 활짝 열려 있는 공간을 통해, 따스하고도 싱그러운 바람이 살랑살랑 들어왔다.
짧아진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그녀는 갈색으로 변한 짧은 머리카락을 조금 집어 들어 눈앞으로 가져왔다.
‘어색해…….’
하지만. 싫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가볍고, 시원했다.
붕대가 감긴 발목을 살짝 매만져 보았다. 아리지만, 확실히 벌써부터 이전보다 통증이 덜해진 느낌이다. 무리하면 안 된다고 했지만 살짝 움직이는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발을 아래위로 까닥여 보았다.
다시 걸을 수 있을까?
열려 있는 공간으로 햇빛이 들어오고,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몇 점 떠다니는 것이 보였다. 다각다각 말이 걸어가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가운데, 가끔씩 새소리와 바람에 나뭇잎들이 흔들리는 소리가 섞였다.
평화롭다…….
그녀는 늦봄의 다사로운 기운에 나른하니 눈을 감았다.
만약, 지금 감은 눈을 다시 뜨지 못한다면,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렇게 기분 좋게 나른하게 눈을 감을 수 있다면…….
그 피에 젖은 손아귀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곳에서.
어쩌면, 그게 현재로서는 가장 나은 마무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평화롭게 저 등 뒤에서 눈을 감을 수 있다면…….
그녀는 다시금 잠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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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군의 대부분을 진압하고 마지막 잔당들을 쫓아 소탕할 계획을 세우고 있던 레퀴에스 대공에게, 루테른 전 공녀의 실종 소식이 전해진 것은 이틀 후였다.
온 방 안에 살기가 쨍하니 퍼졌다. 대공의 이가 부드득 갈리고 손에 들고 있던 펜이 박살 나는 것을 보면서,
하르드는 소식을 가지고 온 전령이 살해당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대공은 차분하게 손에 들고 있던 것들을 책상에 내려놓은 후, 조용히 일어서서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방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살기는 여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기사 훈련을 받아 본 적이 없던 전령을 비롯하여 몇몇 문관들이 대공으로부터 퍼져 나오는 살기로 인해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컥컥대기 시작했으나 그 누구도 뭐라 나서지 못했다.
“하르드.”
“네, 주군.”
여전히 등만 보이는 주군의 입이 열리면서 살기가 약간 가라앉자, 여기저기서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관문에 전령을 보내고, 전 지역에 수배령을 내린다. 특히 국경 관문들에는 바로 연락이 가도록 해.”
“네, 주군.”
“그리고 지금 당장 슈엘로 돌아가 추적을 시작해. 전권을 줄 테니 필요한 자원은 모두 가져다 쓰도록.”
“네, 주군. 반드시 모셔 오겠습니다.”
주군이 당장 모든 것을 때려치우고 슈엘로 돌아간다고 하지 않아서 다행인 한편, 이 일이 잘못되면 어떻게 될 것인지 생각하니 등 뒤로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라니에 경.”
“네, 주군.”
부름에 격식 있는 갑옷을 갖춰 입고 있던 기사가 나섰다.
“반란군을 숨겨 준 자들 또한 반란군이지. 아닌가?”
라니에 경의 몸이 굳었다. 이후로 어떤 명령이 내려질지 짐작이 가서 섣불리 대답하고 싶지 않았으나, 이견을 내세울 분위기가 아니었다.
“……맞습니다.”
다음 날 이어진 반란군 진압은 유례없이 잔혹하게 이루어졌다. 민간인과 반란군을 가리지 않고 잔악하게 이어진 학살에 반란은 빠르게 진압되었지만, 사상자의 수는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
다시는 반란의 싹이 일어나지 못할 정도의 참혹한 본보기를 기다리고 있던 쥬헤드 왕세자에게는 바람직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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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압을 마치고 마무리를 기사단장에게 넘긴 채 서둘러 성으로 돌아온 카쉬엔은 제일 먼저 아이솝 자작을 불렀다.
“커헉……저……저하…….”
바닥에 쓰러져 있는 자작은 자신의 가슴을 짓밟고 있는 가죽 부츠를 어떻게든 치워 보려고 두 손으로 부여잡고 안간힘을 썼으나, 소용없었다. 갈비뼈가 으스러지고 있는 듯했다.
“무능한 놈. 도둑놈들이 들어와서 내 여자를 훔쳐 가는 동안 두 손 놓고 멍청하게 갖다 바쳐? 이 성에서 네놈이 네 하찮은 목숨 따위 열 개씩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것이 바로 그녀였거늘.”
“저,저하, 저는 성을……반란인 줄……컥.”
“반란? 그래서. 반란이라는 게 있었나? 겨우 그깟 하찮은 장난질에 농락당해서, 성안에 누가 든지 아닌지도 모르고, 뭐가 중한지 아닌지도 모른 채 내 것을 두 눈 뜨고 넘겨?!”
카쉬엔이 가슴에서 발을 떼는가 싶더니, 자작을 걷어차 버렸다. 자작은 커억 하고는 구석에 처박혀서 신음했다.
“자신의 책무를 유기한 저 무능하고 멍청한 놈의 작위를 몰수한다. 평민으로 강등시키고 감옥에 처넣어.”
정신을 잃은 자작이 병사들에게 끌려 나가고 나자, 카쉬엔은 다시금 자리에 앉았다. 서늘한 눈으로 방 안을 둘러보던 눈이 다시금 하르드에게 꽂혔다.
“보고해.”
“아, 네. 체포한 방화범 둘을 고문한 결과, 하나는 자결했고, 하나는 자백했습니다. 저희 생각대로 그 아젠이라는 전 루테른 기사단의 기사가 벌인 일이 맞는 것 같습니다.”
더럽고 하찮은 새끼가.
성내에서 죽은 기사들이 검기를 잘 쓰는 상급기사 한 명에게 당한 것 같다는 보고에, 그리고 깨어난 하녀들의 증언에, 아마도 그 새끼일 거라고 추정했다.
수도에서도 그놈을 포착했었다는 보고가 한 차례 들어왔었지만 잡으려 했을 때엔 이미 쥐새끼처럼 빠져나갔었다. 슈엘에 내려온 후에도 한 번 그놈의 기척으로 추정되는 기운을 느낀 적이 있었지. 그때에는 확신하지 못했지만 이젠 확실히 알겠다. 그것도 그놈이었다.
“일단은 배후 없는 단독 범행으로 추정됩니다만, 혹시 모르니 다른 귀족가의 동향도 살펴보게 했습니다. 혹시라도 조력자가 더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방화범들 말인데요, 작년 여름에 성내에서 처형당한 자들의 유가족이더군요. 이런 식의 원한 관계가 아직 더 남아 있을 수 있으니 한바탕 정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딴 놈에게 맡겨서 정리시키고, 너는 추적에 집중해. 추적은 어디까지 진행됐지?”
하르드는 한 차례 숨을 들이마시고 지도를 책상 위에 펼치며 말을 이었다.
“여태까지 네 가지 루트를 추격해서 네 쌍을 잡았습니다만, 모두 미끼였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루트를 추적 중입니다만 아마 대부분이 미끼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미끼들이 정말 아는 게 하나도 없더군요. 잡아도 영양가가 없습니다.”
카쉬엔의 눈이 지도에 그려진 기호들을 훑는 동안, 하르드는 각 기호들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현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도에는 여태까지 추적한 자취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게 무슨 전쟁도 아니고, 적군을 추적하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지도에 상세하게 새겨 가면서 보고하고 있는 상황이 왠지 믿어지지 않았지만. 자신의 주군에게는 이 나라의 왕관보다도 그 여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여, 더 이상 하나하나 추적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추적보다는, 전반적인 검문과 수색을 강화하는 것이 현실적입니다. 이미 저희 관할 영지에는 수배령을 내렸습니다만, 다른 지역에도 협조를 요청해야 합니다. 아, 국경 관문들에는 이미 모두 초상화를 보내 놓았습니다.
미끼들을 꽤 많이 고용한 것으로 보아 어디선가 돈을 꺼내 썼을 것 같아 자금 출처도 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어쨌든, 금품을 하나도 훔쳐 가지 않았으니 도주 자금을 어디선가는 구했을 테니까요.”
“좋아. 그건 그렇게 하고, 기사들도 더 풀어, 흔적도 계속 뒤쫓는다.”
“그런데. 저하, 협조를 요청할 때, 이번엔 지난번과 달리 반역도를 추포하는 게 아니라 일개 도망 포로를 쫓아가는 거라 명분이 빈약합니다.”
“뭐?”
지도에 머물던 카쉬엔의 눈길이 올라와 하르드를 노려보자. 하르드는 자신이 말실수를 했음을 알았다.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그…… 아가씨에 대해 저희 입장과 저쪽 관리들의 입장은 다르니까요. 저희야 아가씨가 귀한 분인 걸 알지만, 남들이 보기엔 그냥 포로 한 명일 뿐입니다. 내세울 명분이 필요합니다.”
카쉬엔의 손가락이 책상을 몇 번 두드리더니, 그의 입이 열렸다.
“……대공비가 납치되었다고 해.”
“……네, 그럼 약혼녀께서 납치되셨다고 하겠습니다.”
하르드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 여자가 돌아왔을 때 감당해야 할 파장이 잠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일단은 잡아 오는 게 먼저였다.
.*. *. *. *. *. *.
집무실을 나온 카쉬엔은 아를렌의 방으로 향했다.
항상 지키고 있던 기사가 없어진 방문 앞에 서서 그는 잠시 망설였다.
문을 열면, 언제나 방 안을 지키고 있는 두 명의 하녀가 인사를 하고, 그 사이로 창가에 있는 의자에 그녀가 앉아 있을것만 같았다.
어쩌면 잠들어 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 하얀 얼굴에는 햇살이 내려앉아 밝게 비추고 있을 것이다.
커다란 손이 천천히 손잡이에 올라갔다.
문을 열지 않으면 그녀가 이 문 너머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지 않을 수 있다……. 그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손잡이를 돌렸다.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언제나 최소한 세 명 이상의 사람이 그를 맞이하던 방이었으나, 지금은 아무도 없었다.
잠시 문가에 서서 텅 빈 방 안을 둘러보던 그는, 천천히 걸어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매끈하게 정리되어 있던 거위 깃털 침구가 그의 무게에 밑으로 푹 꺼지며, 침대가 삐걱였다.
그동안 온몸의 피가 날뛰어 잊고 있던 피로가 순식간에 몰려온 듯했다. 온기가 남아 있지 않은 침대 위에 잠시 조용히 걸터앉아 있던 그가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눈을 감았다.
그녀는 침대를 싫어했지만, 그가 그녀와 가장 오랜 시간을 지냈던 곳은 침대였다.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싫어했던 거였던가.
베개에 고개를 박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나, 이미 하녀들이 한바탕 청소와 세탁을 마친 듯, 아무 체취도 나지 않았다. 이불에서도, 시트에서도, 아무 곳에서도.
깨끗하게 정돈된 침구에는 그녀의 체온도, 체취도, 그 어떤 잔향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무것도.
침대에서 일어서 터벅터벅 걸어간 그가 드레스 룸을 둘러보았다.
그래도 이곳엔 그녀가 입었었던 옷들이 걸려 있었다.
입었던 옷. 입지 않았던 옷. 그가 새로 사서 들여놓은 수많은 드레스들. 한 번도 쓰여지지 않은 채 남겨진. 모자들. 구두들. 새쉬. 레이스. 숄. 스카프. 리본. 머리 장식들. 체인. 보석함에 들어가기엔 사소한 자잘한 브로치, 팔찌, 발찌.
그 모든 것들을 지나, 그의 발길이 보석 수납장 앞에서 멈추었다.
잠시 망설이 던 그가 서랍에 손을 뻗었다.
서랍은 잠겨 있었지만, 그가 힘을 주자 잠금 쇠가 부서지며 열렸다.
……가져가지 않았다.
그래. 가져가지 않았겠지.
그는 초록색 목걸이를 꺼내어 들었다.
움켜쥐었다.
그녀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다. 왕가에 대대로 내려오던, 오로지 왕비만 할 수 있다던 귀한 보물이니,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그녀에게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쟁 중에도 항상 잘 보관하고 다녔었다. 그녀에게 줄 날을 기다렸었다.
그러나 그녀는 가져가지 않았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
그가 준 것은, 아무것도.
허탈하게 드레스 룸에서 나온 그가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녀가 사용하던 물건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사실, 남아 있지 않았다는 말은 틀렸다. 그런 물건은 원래부터 없었다. 그녀는 이 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까.
책을 읽지도 않았고. 글을 쓰지도 않았다. 꽃을 가꾸지도, 그림을 그리지도. 악기를 연주하지도 않았다. 그저 하루 종일 앉아 있었을 뿐.
그의 시선이 창가의 비어 있는 의자에 꽂혔다. 그녀가 즐겨 앉아 있던 의자였다.
터벅터벅 비어 있는 의자로 걸어가서, 그녀의 팔이 걸쳐져 있던 팔걸이를 한 번 쓸어내렸다. 아무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 팔걸이는 서늘했다.
카쉬엔은 주인을 잃어버린 의자에 앉았다. 체온이 남아 있지 않은 의자의 싸늘한 온도가 옷 너머로 전달되어 왔다.
뭘 보고 있었을까.
하루 종일 이곳에 앉아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한 번도 궁금해하여 본 적이 없었다. 이제서야 처음으로 의문을 가져 본다.
그는 그녀가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아서, 그녀가 바라보던 창밖을 내다보았다.
슈엘 성내가 내려다보였다.
중앙대로를 통해 외성 밖으로 나가는 문까지 쫙 트여 있고, 대로 주위로 펼쳐져 있는 번화가에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밖을 그리워하고 있었나.
매일 창가에 앉아서 창밖을 보면서, 저 대로를 타고 성문을 나가는 날을 꿈꿨나.
나의 성 안에서, 내가 준비한 옷을 입고, 내가 마련한 의자에 앉아서, 하루 종일 내 품을 벗어나기만 꿈꾸고 있었나.
문득 맞은편의 소파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 말아줘, 제발…….」
그녀가 기운을 차리고 나서 제일 먼저 했던 일이라는 게 그를 밀쳐 내는 일이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결국, 가진 적이 없었다.
내 성 안에 들여놓고, 내 품 안에서 재웠는데, 수백 번을 그 숨결을 삼키고 그 몸을 안았는데, 가지지 못했다.
가진 적이 없었는데 잃어버렸다.
다 죽어 가기에 살려 줬더니 떠나가 버렸다.
웃어 달라고 풀어 줬더니 날아가 버렸다.
어느덧 그의 커다란 손이 의자의 팔걸이를 우악스레 움켜쥐었다.
콰직.
단단한 나무로 만들어져 있던 팔걸이가 그의 손아귀에서 우그러들었다.
풀어 주지 말았어야 했다.
움켜쥐고 있었어야 했다.
바깥을 볼 수 없게 창이 없는 곳에 가둬 놔야 했다.
밀쳐 낼 기운조차 없도록 힘을 빼 놨어야 했다.
방문 밖으로 한 걸음도 못 나가게 가둬 놨어야 했다. 창도 발코니도 그 무엇도 없는 곳에. 오로지 나 외에는 볼 것이 아무것도 없는 곳에. 오로지 나만을 바라보도록. 오로지 나만을 생각하도록.
하루 종일 잠만 자는 게 뭐가 어떻다고. 나의 성 안에서, 나의 방 안에서, 나의 침대 위에서 자면 그만인 것을.
웃어 주지 않는 게 뭐가 어떻다고. 그 새끼에게 웃어 줄 바에야 차라리 아무에게도 웃어 주지 않는 게 나은 것을.
그래, 너는 저 멀리 바깥 어딘가 내 손이 닿지 않고 내 눈으로 볼 수 없는 곳에서 웃고 있을 것이 아니라. 차라리 지금 이곳 이 방 이 침대에서 눈을 감고 잠들어 있어야 했다.
설령 다시는 눈을 뜨지 않더라도, 여기 이 자리에 누워 있어야 했다.
내가 보고, 만지고, 느끼고, 그 체취를 들이마실 수 있는 곳에.
그게 당연한 일이다. 원래부터 그래야 했던 일이다.
원래부터 너는 내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더러운 새끼가. 감히. 너를. 나의 너를.
콰드득.
점점 더 힘이 들어가는 손아귀에, 팔걸이가 완전히 부서져 내렸다.
그 새끼 때문이다.
그 새끼가 없었다면, 그녀가 계속 나의 성 안에 있었다면, 언젠가는 나를 보게 되었을 텐데, 언젠가는 내게 다시 웃어 주었을 텐데, 그 새끼가 모든 것을 망친 거다.
감히 나의 그녀에게 손을 댄 그 새끼를 절대 가만두지 않으리라.
그녀의 눈앞에서 그 새끼를 도륙 낼 것이다. 사지를 찢어 짐승에게 먹이고 뼈는 들판에 내다 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가장 깊숙하고 깊숙한 곳에, 햇빛도 들지 않는 가장 안전하고 깊숙한 곳에 보관해야겠다. 오로지 나만이 볼 수 있고 나만을 볼 수 있는 곳에.
너는 나의 유일한 고통이니까. 너만이 나의 세상이니까.
나의 것이니까.
.*. *. *. *. *. *.
그녀는 헉 하는 소리와 함께 경기하듯 몸을 떨며 눈을 떴다가, 뜨여진 눈 바로 앞에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이 보이자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밀쳐 내었다.
아를렌의 힘없는 손에 밀쳐진 사람은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잠시 움츠리고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떨던 그녀의 시야가 확보되기 시작하자 자신의 앞에 있던 사람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 아젠……?”
“괜찮으세요 아가씨? 악몽을 꾸시는 것 같아서…….”
그녀의 가파르던 숨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몸이 식은땀에 젖어 있는 것이 느껴졌다.
“미안해, 착각했어……악몽을 꿔서…….”
“……네, 괴로워하시는 것 같아서 깨워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아젠은 그녀와 약간의 거리를 유지한 채, 저릿한 가슴을 내리누르며 애써 미소 지었다.
무슨 악몽인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 누구와 착각했는지도. 사실 그게 착각만은 아니라는 것도…….
그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킨 후에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좀 더 가면 마을에 도착합니다. 다시 주무시겠어요?”
“아니야, 일어날게. 맨날 나만 자고 있어서……
“아가씨는 몸을 회복하셔야 하니 당연합니다. 지금은 몸을 회복시키는 것만 생각하세요.”
그러나 어찌 되었건 그녀는 상체를 일으켰다. 아직도 몸이 떨려 왔다. 잠들었다가 행여나 다시 악몽을 꾸게 될까 봐 두려웠다.
“나도 바람 좀 쐬고 싶어. 마부석에 같이 앉아도 돼?”
“그럼요. 일단 얼굴 좀 다시 봐 드릴게요.”
아를렌이 눈을 감고 조용히 얼굴을 내맡기자, 아젠은 그녀의 얼굴에 이것저것을 발랐다. 짧은 갈색 머리에 적당히 먼지를 바르고, 가뜩이나 야윈 얼굴 역시 손보고 나니, 귀하디귀한 그녀는 전혀 귀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일부러 그렇게 꾸민 것이고, 그래야만 하는 상황이었지만, 스스로 그녀를 낮춰 나가는 손가락 끝이 씁쓸했다.
“지금 붕대를 감아드릴까요?”
“응, 부탁해.”
아젠의 커다란 손 위에 아를렌의 하얀 발이 얹혔다. 작은 발, 가냘픈 발목이었다.
이 작은 발을 손에 쥐고 꺾는 데에는 별다른 힘도 필요하지 않았었다. 가볍게 잡고, 한 번 우드득. 5초 정도였다.
그러나, 되돌리는 데에는 평생이었다. 아니, 평생 동안 매일매일 붕대를 감고 약을 바른다 한들 완전히 되돌릴 수는 없을 거라 했다.
한 번 조용히 눈을 감았다 뜬 아젠은 입을 다물고 약을 바르고 붕대를 잡아당겼다.
닐로의 처치는 제법 괜찮았다. 혼자 걸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건 불가능했지만, 붕대로 압박을 해 놓은 상태에서 짧게 몇 걸음 걷는 정도는 절뚝거리지 않고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한 달은 무리하면 안 된다기에 자주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필요할 경우 지팡이를 짚으면 약간은 혼자서 걸어 다닐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건 정말 요긴했다. 수배령에 발이 불편한 여자라고 명시되어 있기라도 한 건지, 가끔 경비대원이 발걸음을 확인해 볼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것을 미리 알고 떠나기 전에 발부터 고치려고 한 걸까…….’
마부석에 앉은 아를렌은 바로 옆자리에서 마차를 몰고 있는 아젠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종종 눈을 깜빡거리면서 앞을 열심히 보고 있었다.
“……왜요?”
시선을 느낀 아젠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돌아보았다.
“아니 그냥, 참 많은 것을 준비해 놓은 것 같아서…….’
“……이전…… 같은 일은, 다시는 원치 않으니까요.”
아젠의 얼굴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지난여름의 일을 말하는 걸까. 떠올린 아를렌의 마음도 같이 가라앉았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 후, 침울해진 분위기를 깨고 싶어진 아를렌이 다시금 가벼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오늘은 편하게 잘 수 있겠네.”
오랜만에 마을에 들르는 참이었다. 마을에 들르는 것은 아직도 조심스러운 일이라 가급적 피하고 있기는 했으나, 사람들이 의외로 그들을 알아보지도 주목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부터는 처음처럼 두렵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침대에서 주무시는 게 더 나으시죠?”
“음, 그래도 마을에는…… 도적은 없으니까…….”
그녀가 며칠 전 노숙하다가 만났던 산적을 떠올린 듯, 살짝 떨며 말끝을 흐렸다.
별놈들은 아니었다. 훈련도 받은 적 없는 농민들이 도망쳐서 도적이 된 경우였고, 숫자만 믿고 들이닥쳤다가 두세 명이 쓰러지고 이쪽이 기사라는 것을 눈치채자 바로 도망쳤다. 시체를 눈에 띄지 않게 처리하는 것이 귀찮았을 뿐, 전혀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젠이 칼을 뽑아 들고 싸우러 나가자 그것만으로도 아를렌은 공포에 질렸다. 지난여름의 일이 트라우마로 남은 것 같았다. 오들오들 떨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그녀를 토닥이고 진정시켜 주며, 그 역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지난여름은 그에게도 다시는 돌이키고 싶지 않은 상처이자 실패였다. 그의 실패로 인해 끌려갔던 그녀가 지난 1년 사이 얼마나 많이 다치고 망가졌는지를 떠올리면 더더욱 그랬다.
그래서 이번엔 그렇게 일방적으로 쫓기고 당하며 도망치다 몰리지 않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하긴 했지만…….
“그런데 눈은 어떻게 하는 거야?”
화제를 돌리고 싶은지 그녀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 역시 그가 눈에 물약을 몇 방울 넣는 것을 본 적은 있으나, 어떤 약인지 자세히 설명을 들은 적은 없었다.
“……머리카락 염색하는 것처럼 물들이는 거예요.”
“나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아무래도 초록색 눈에 발을 저는 여자는 눈에 쉽게 띄잖아.”
아젠이 잠시 움찔했다가 그 기색을 금방 지워 내고는 가볍게 말했다.
“약간 독해서요. 저는 튼튼하니까 괜찮지만 아가씨 몸은 다르니까 아가씨께는 쓰지 말라고 했습니다.”
“……눈도 튼튼할 수가 있어?”
“기사의 눈이니까요.”
그가 웃으며 말하자, 아를렌은 잠시 의아해했지만, 이내 수긍했다. 기사들이란, 특히나 검기를 다루는 기사들이란, 그녀의 몸과는 많이 다를 테니까.
아젠은 웃는 표정을 얼굴에 계속 띄운 채로, 전방을 응시했다.
완전 거짓은 아니었다. 검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기사라면 누구나 몸에 검기를 돌려 가며 미미하게나마 회복을 돕는다거나 독기를 억누른다거나 하는 법을 익히니까. 미미해서 크게 도움이 안 되지만, 없는 것보다야 훨씬 낫다.
눈을 뜨고 있는 것이 괴로웠다. 자기도 모르게 한 번 더 감았다가, 그녀가 이상하게 느낄까 봐 금방 다시 떴다. 불에 달궈진 쇳가루들이 눈 속을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티 내지 않고 웃는 얼굴로 버틸 수 있었다. 이제 몇 번 사용해 본지라 제법 익숙하기도 했다.
「아무리 해독제를 같이 쓴다고 해도, 이거 자꾸 쓰면 분명 실명한다니까요! 이거 실험해 본 동물들 중 절반 정도는 눈이 멀었다고요! 보세요, 이 토끼도 눈이 멀었잖아요!」
만들어 놓고는, 절대 쓰지 말라고 외치던 닐로의 고함이 귓가에 울렸다.
하지만 별수 없었다. 수배령에는 분명 발을 저는 녹안의 여자와 함께, 자안의 젊은 남자가 올라와 있을 것이다. 초록색 눈은 흔하니 괜찮지만, 보라색 눈은 분명 눈에 띈다.
자주는 아니지만 마을에 피치 못하게 들를 때만큼은 아무리 위험한 약일지언정 사용하는 것이 사용하지 않는 것보다 나았다.
물론 그도 실명을 감수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가 앞을 볼 수 없으면 누가 그녀를 지킨단 말인가. 그래서 최소한으로만 사용하고 있었고, 닐로가 따로 챙겨 준 해독제도 꼬박꼬박 사용했다. 만약 눈에 이상이 느껴지기 시작하면 바로 다른 방법을 강구해 볼 생각이었다.
그래도, 지금으로서는 이것이 최선이었으니, 그리고 아직까지는 시력이 떨어지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으니, 아직은 괜찮았다. 통증을 티 내지 않고 참아 내는 것이 고역이었지만, 할 수 있었다. 이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도 멀쩡히 칼을 휘두르는 게 기사니까.
덕분인지, 두 사람의 여정은 여태껏 원만했다.
그들은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로서 여행을 했다. 노숙을 할 때에도 이전처럼 밤이슬을 맞으며 흙바닥에서 잘 필요 없이 편안한 마차 안 포근한 이불 속에 그녀를 재울 수 있었고, 가끔이지만 필요할 때에는 마을에 들러 편안한 여관에 머무르며 물자를 보충했다.
종종 이것저것을 바꾸었다. 탈것을 바꾸거나, 역할을 바꾸었다. 보통은 남매 역할을 했지만, 때로는 부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종종 가발이나 염색을 바꾸어 머리 길이와 색을 바꾸었다.
마을에 들르면 새 마차를 구하면서 헌 마차를 고의적으로 도둑맞았다. 뱃길이 있는 곳에서는 오로지 행적을 나눌 목적으로 배표를 사 두기도 했다.
분명 번거로웠지만. 큰 문제 없는 여정이었다.
아슈네란은 넓다. 그중 어느 방향으로 향했는지조차 짐작할 수 없도록 할 수 있는 조치는 모두 취해 두었다. 탈주를 준비하던 동안, 일부러 멀리 동부까지 가서 어음을 쓰고 온다거나, 남부로 가서 부동산을 사 두기도 했었다.
이런저런 지역에서 시간차를 두고 잘못된 밀고를 하도록 심부름꾼들을 고용해 두었다. 그들 중 일부는 돈만 먹고 튀었겠지만, 그중 몇만 계약을 지키더라도 충분히 혼선은 줄 수 있었다.
아무리 그들이 뻗을 수 있는 손이 많다고 해도, 지역은커녕 방향조차 특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왕국 전역에 수색을 강화하는 건 한계가 있으니까.
애초에, 거리낄 것 하나도 없이 당당하고 사이좋은 시골 오누이로 보이는 그들의 모습은, 수배령에 써져 있는 납치된 귀부인과 잔악한 납치 범이라는 조합에서 사람들이 떠올리는 이미지와 전혀 부합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의심하지 않는 자들을 속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처음엔 검문을 받을 때마다 긴장하는 그녀였지만, 몇 번 무사히 검문을 통과하고 나자 이제는 상당히 안정을 되찾았다. 여전히 악몽에 시달리긴 했지만 그 빈도는 줄어들고 있었고, 표정도 훨씬 자연스럽게 풀려 가고 있었다.
그 모든 상처는 결코 완전히 나을 수 있는 상처는 아닐 것이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다면…… 상처가 흉터로 남더라도, 그래도 새살이 돋고 아물 수가 있다면…….
마부석에 앉아 마차를 몰고 있던 아젠은, 자신의 옆에 앉아 있다가 따뜻한 햇볕에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아를렌을 바라보았다.
평화롭게 졸고 있는 모습이 마치 안마당에 나와 햇살을 받고 있는 병아리같이 사랑스럽지만, 얼마나 몸이 힘들면 그렇게 자고도 또 졸릴까 싶어서 안쓰러웠다. 이번엔 마차를 주로 이용하고 있으니 온종일 걷거나 말을 타야 했던 지난번보다는 낫겠지만, 계속해서 흔들리는 상태가 저 약해진 몸에 결코 좋지는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아무래도 평생 타고 다니던 고급 승용 마차가 아니라 허름한 짐마차를 주로 타고 다녀서인지, 그녀는 이전에 없던 마차 멀미에까지 시달렸다.
오늘은 여관 침대에서 편하게 재울 수 있겠지.
“아가씨 편하게 기대세요.”
“으응.”
그녀가 졸다가 행여나 떨어질까 위태해 보여서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잡았다. 그녀의 몸이 그에게로 기울어지며 그녀의 고개가 그의 어깨 위로 안착했다.
같이 말을 탈 때마다 항상 그녀의 허리를 휘감아 꼭 끌어안고 다녔는데도, 뭉클하게 닿아 오는 그녀의 몸은 언제나 그를 긴장하게 했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그 움직임에 잠이 살짝 깬 것 같았다.
“여기가 카릴 지방인 거지?”
“네. 와 보셨나요?”
“음, 아니. 하지만 예전에 젝시온이 머물렀었잖아.”
“아…… 그랬었죠. 3년 전이었나요. 기억납니다.”
“응, 여기 살구가 맛있다고 잔뜩 보내 줬었는데, 막상 받아 보니 다 물러 터져 있었지.”
아를렌이 키득 웃으며 말했다.
“주방장 푸메 씨가 황당해하셨던 게 기억납니다. 큰 박스로 여러 개 보내셨는데 다 물러 터지고 벌레까지 꼬여서 그중에 멀쩡한 것 몇 개를 골라내 보겠다고 고생했었죠.”
“응,결국은 다 버렸잖아.”
“제일 맛있는 걸로 보내신다고 다 익은 것들로만 가득 채워 보내셨으니까요.”
“아무튼 젝시온은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었어…… 맨날 사고만 치고…….”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울음을 참는 듯, 약간씩 몸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젠은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고 있던 손을 올려 조용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참 동안 말발굽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그녀의 떨림이 조금 멎어 가는 것 같자, 아젠은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살구. 사드릴까요?”
그녀가 아젠을 올려다보았다. 살짝 젖어 있는 눈망울이었지만, 웃어 보인다.
“응. 멀쩡한 걸로 사 먹자.”
비록 눈물이 맺혀 있을지언정 마주치고 웃어 보이는 그녀의 눈을 보고 있자, 아젠은 어느덧 고통이 사르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눈물 고인 눈이 아니라, 환하게, 화사하게, 정말 해맑게 웃는 모습이 보고 싶다. 그런 날이 다시 올 수 있을까.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내 눈 따위야 영원히 불타는 고통 속에 있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