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돌아갈 곳 (9/13)

9. 돌아갈 곳

보석상이 돌아간 후 방으로 돌아간 아를렌은 한참 동안 거울을 바라보았다.

애나는 그런 아가씨를 보며 드레스와 보석을 보고 나니 외모를 가꾸는 것에 관심이 생긴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기뻐했다. 자기 자신을 꾸미는 데에 관심을 보인다는 것은 매우 좋은 징조가 아닌가.

게다가 그 거울을 보고 입꼬리를 올려 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더더욱이 기뻤다. 아가씨는, 마치 미소 짓는 법을 까먹었다가 연습하는 것처럼, 혹은 자신이 지어 보이는 미소가 자연스러운지 아닌지를 점검하는 것처럼, 혼자 가만히 거울을 들여다보며 미소를 지어 보고 또 지어 보고는 했다.

그날 하루 종일 무언가를 가만히 생각하는 듯 조용하던 아가씨는, 다음 날부터 먹고,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아가씨도 드디어 마음을 돌리신 게지!’

애나는 안도하며 흐뭇하게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 *. *. *. *. *.

스무날 만에 수도로부터 돌아온 카쉬엔은, 그간의 변화를 보고받고 매우 흡족해했다.

아를렌의 식사량은 많이 늘어나 이제 수프 같은 유동식이 아닌 부드러운 음식도 조금씩 곁들이기 시작했고, 깨어 있는 시간도 이전에 비해 길어졌다. 종종 이것저것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고, 말을 하는 경우도 늘었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가끔씩 미소를 지어 보인다고 했다.

비록 사람을 향해서 짓는 미소가 아니라 거울을 향해 혼자 연습하는 거라 한들, 이전의 그녀의 모습과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였다.

그리하여 그가 오랜만에 아를렌을 만났을 때, 그는 이전보다 더 살아 있는 사람 같은 그녀를 보고 퍽 감동했다.

그는 소파에 앉아 있던 아를렌이 자신을 잠시 쳐다보다가 시선을 돌리는 것을 보고는,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가 바로 옆에 앉았다. 소파가 한쪽으로 푹 꺼지면서 그녀의 몸이 순간적으로 카쉬엔 쪽으로 기울어졌다.

기울어진 몸을 일으켜 뒤로 물리려던 그녀의 턱을 카쉬엔이 잡자 그녀가 쭈뼛 멈추었다. 그녀의 얼굴이 자신을 정면으로 향하게 한 후, 상하좌우로 조금씩 돌려 가며 확연히 보기 좋아진 그녀의 얼굴을 즐거운 눈으로 관찰하였다.

물론 여전히 말랐지만, 움푹 파였던 볼이 확실히 이전에 비해 차올랐고, 피부도 조금 더 윤택해졌다. 자신을 피해 밑으로 내리깔고 있는 눈에도 전보다 초점이 생겼다.

알고 지내던 상인 몇을 불러 주었다고 이렇게까지 차도가 있을 줄 알았다면, 진작 불러 줄 것을. 지난 몇 달간 낭비한 시간이 아까웠다.

그가 흐뭇하게 웃으면서 턱을 쥐고 있던 손으로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이윽고 손이 뒷머리로 옮겨 가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 들어갔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감겨드는 매끈하고 시원한 머리카락의 감촉을 즐기며,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아를렌이 피하려고 저항하는 힘이 손에 느껴졌지만, 가볍게 제압하듯 머리를 움켜쥔 채 다른 손으로 허리를 마저 감아 잡아당기고는, 느긋하게 그녀의 입술을 삼키고 만끽했다.

그녀는 여전히 달콤하고, 황홀했다. 이 감촉이 너무나도 그리웠고, 목말랐었다. 수도에서의 일정이 생각보다 너무 길어졌었다. 이게 얼마 만인가.

그리고 충분히 입술을 맛본 그의 입이 점점 내려가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다다랐을 때,

그녀가 그를 힘껏 밀어내며 피했다.

물론 그녀가 힘껏 밀어내는 힘이래 봤자, 팔랑이는 나비의 날갯짓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이렇게 있는 힘을 다해 밀어내는 모습은 실로 오랜만이었기에, 그는 놀랍고도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밀려나는 시늉을 해 주었다.

“기운을 차리고 제일 먼저 하는 일이, 그 기운으로 나를 밀어내는 일인가.”

카쉬엔이 여전히 그녀의 머리카락과 허리에서 손을 풀지 않은 채, 얼굴에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제발,”

그녀의 목소리가 그 작은 입에서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그는 그 상인들의 효과를 다시 한번 실감했다.

“하지 말아 줘, 제발.”

그래 분명 보고서에, 그녀가 요새 목소리를 종종 낸다고 했었지. 그러나 실제로 자신의 귀로 듣는 것은 얼마나 달콤한지. 그 내용과 상관없이.

“최소한, 보이는 곳에는…….”

……상관없지는 않은가.

아는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하니, 그들에게 나의 흔적을 보이고 싶지 않다, 이건가.

그녀는 힘겹게 할 말을 마치고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떨고 있었다. 긴장되나. 긴장되겠지.

그동안 거의 한 번도 반항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해 보면, 그녀로서는 실로 대단한 용기를 낸 것일 테다. 그만큼 기운을 차렸다고 봐야 하나? 혹은 이제 좀 덜 무서운가? 살짝 떨고 있는 걸 보면 여전히 무서워하는 것 같기는 한데…….

카쉬엔은 손가락으로 비스듬하게 올라간 자신의 입술을 매만지며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의사들도, 회복하려면 마음의 안정이 필요하다고 했고…….”

한참을 기다려도 카쉬엔으로부터 아무 반응이 없자, 아를렌이 변명처럼 덧붙였다.

물론, 그녀는 회복되어야 했다. 언젠가 그녀는 자신을 보고 활짝 웃어 주어야 했으니까. 그 맑은 눈으로 자신을 마주 본 채. 언젠가 그 온실에서 그 기사 놈을 보고 웃었던 것처럼…….

그렇게 될 때까지, 그는 그녀를 넣어 둔 새장을 그녀의 취향에 맞게 꾸며 줄 의향이 있었다. 원하는 것 몇 가지 들어주는 시늉 좀 하는 것이 뭐 그리 어려우랴.

상인 몇 불러다 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보다 더한 것도 어쩌면 가능했다. 그녀가 보인 변화가 그에게 제법 자신감과 관대함을 주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그녀가 얌전히 자신의 품 안에 있을 때의 얘기다. 품 안에서 벗어나게 해 줄 생각은 없었다.

그깟 상인들에게 잘 보이겠다고 자신을 밀어내겠다고? 그 상인들을 자신보다 우선시하라고 만나게 해 준 것이 아니다.

“내가 너를 회복시키려고 하는 것은 네가 내 것이기 때문이지, 나를 밀어내라고가 아닌데.”

그녀가 흠칫 떨면서 그의 눈치를 보는 것을 보고, 그는 삐뚤게 웃었다.

그의 고개가 다시금 내려앉으며, 그녀의 목에 달라붙었다. 그녀가 파드득 놀라 피하려 했지만 콱 움켜쥔 후 목덜미를 물었다.

아를렌은 목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여태까지도 그녀가 느낄 통증 따위에 대한 배려는 없던 카쉬엔이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강하고 집요하게 오랫동안 목을 빨아들인 적은 없었다.

살점이 뜯어져 나갈 듯 강한 흡입은 끝을 모르고 지속되었고, 그녀는 아픔에 눈을 질끈 감았다. 눈물이 고였다.

마침내 그녀의 목에서 입을 뗀 카쉬엔은, 그녀의 목에 벌겋다 못해 거의 검어 보일 정도로 진하게 남은 그의 흔적을 퍽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이 흔적이 며칠 동안 남아 있을까를 가늠해 보았다.

그가.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상냥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귀 뒤로 쓸어 넘겨 주고는, 한 손을 부드럽게 잡아 올렸다.

“아가씨께서 원치 않으신다니, 여기까지만.”

천천히 눈을 뜬 그녀에게 미소 지어 보이며. 그는 잡아 올린 그녀의 손에 정중하게 입 맞추었다.

신사답게.

시간이 흘러갔다. 어느덧 슈엘의 공기에서는 겨울의 찬 기운이 많이 가시고, 점차 봄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뭇가지마다 조금씩 잎눈들이 트기 시작했고. 이른 봄을 제일 먼저 맞이하는 꽃의 눈들이 몽글몽글 돋아 나왔다.

그리고 슈엘 주민들은, 가끔씩 대공성에서 화려한 마차가 삼엄한 경비를 받으며 어딘가로 나오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날 마차는 푀르 부인의 의상실을 향하고 있었다.

가볍게 흔들리는 마차 속에서 아를렌은 엄지손톱의 폭 만큼 열려 있는 좁은 창문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았다.

작년 봄에, 이렇게 마차를 타고 슈엘을 떠나 바에룬으로 가면서, 가을이 되면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 기억났다.

그때만 해도, 언제나와 같이 행복하고 평화롭게 떠났다가, 아무 일 없이 가족들과 다 함께 웃으면서 가을의 슈엘로 무사히 돌아올 줄 알았었다.

그리고 가족들과 영지민들과 함께 기사 임명식을 치르고, 가을 추수제를 지내고, 포근하고 아늑한 겨울을 날 줄 알았었지. 드물게 성내에 눈이 쌓이면 젝시온과 눈싸움을 하고. 그러다가 어머니께 걸리면 다 큰 것들이 철없이 감기 걸릴 짓을 한다고 혼나고 방 안으로 끌려 들어오고, 그러면 유모가 따끈따끈한 음료로 몸을 녹여 주고, 지느는 잔소리를 줄줄이 늘어놓았겠지.

그리고 그 뒤에 아젠이 웃으면서 지켜보고 있었을 테고.

그러나 어처구니없게도, 단단한 것 같았던 그녀의 세상은 단 하룻밤 만에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그리고,

‘하나도 변하지 않았네.’

그녀의 세상이 뒤집히고, 무너지고, 가루가 되어 부스러지는 동안, 슈엘은 변하지 않았다.

지느가 좋아하던 빵 가게 앞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모여서 빵을 사고 있었고, 종종 레트비안과 들렀던 가게에 사이좋아 보이는 남녀가 손을 잡고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후원하던 병원 안쪽에 바쁘게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엿보였다. 길거리에는 행인들이 바쁘게 걸어 다녔고, 마차들이 서로를 피해 다녔다. 아이들이 여기저기에서 깔깔거리며 뛰노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마차의 벽에 기댄 채, 눈앞의 좁은 틈 사이로 흘러가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가 살아 숨 쉬지 않고 멈춰 있는 동안에도, 세상은 여전히 아무 문제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가 없어도.

그녀의 가족들이 없어도.

아버지 루테른 공작이, 이 땅의 영주가 없어졌어도.

루테른 기사단이, 이 땅을 지키던 수호자들이 없어졌어도.

그녀가 그토록 사랑하던 슈엘이 멀쩡하다는 사실에 안도를 느끼다가도, 어느덧 가슴속에 커다래지는 구멍으로 시린 바람이 불어왔다.

아버지 루테른 공작은, 레퀴에스 대공의 영지 관리인으로 대체되었고,

루테른 기사단은, 레퀴에스 기사단으로 대체되었고,

나는…….

대체할 필요조차 없구나.

처음부터 존재할 필요조차 없던 사람이, 괜히 태어나서…….

그녀가 조용히 눈을 감자, 누군가가 그나마 조금 열려 있던 창문을 탁 하고 닫았다. 아를렌은 잠깐 눈을 떠 창문을 닫은 카쉬엔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마차 밖의 소음이 안으로 들려오긴 했지만, 안에는 계속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아를렌은 눈을 감고 아무 말이 없었고, 카쉬엔은 맞은편에 긴 다리를 꼬고 앉은 채 그런 아를렌의 모습을 즐거이 관찰했다.

살아있는 아를렌.

잠깐이나마 눈을 뜨고 자신을 쳐다보는 아를렌.

나의 마차 안에 안전하게 존재하는 아를렌.

그것은 무척이나 포만감을 주는 모습이었기에,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두꺼운 레이스 초커가 눈에 거슬렸다.

그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긴 팔을 그녀의 목으로 뻗었다. 이내 그의 손가락이 초커 위에 닿자, 그녀가 흠칫 뒤로 몸을 물리며 눈을 떴다.

그녀가 손으로 목을 가리며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그를 간절히 바라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아를렌.

이 얼마나 마음에 드는 어구인가.

그는 다시 한번 입 속으로 그 말을 굴려 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아를렌.

그래, 이 정도는 봐주지.

그녀는 작고 약한 동물이라, 잡은 손에 너무 힘을 주면 부서진다. 적당히 손아귀 힘을 조절해야 했다. 부서지지 않을 정도로, 그러나 도망가지 못할 정도로.

그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거두자, 아를렌이 다시금 눈을 피하며 손바닥으로 목을 어루만졌다. 초커가 잘 남아 있는지 확인하듯.

.*. *. *. *. *. *.

근래의 변화에 무척이나 만족한 카쉬엔은, 최근 들어 아를렌의 외출을 허가했었다. 물론 그의 동행이 전제된 외출이었다.

첫 외출을 계획했을 때 카쉬엔은 어렸을 적 그녀에게 들었던 것을 떠올리고 말을 꺼냈었다.

「그러고 보니 근처에 네가 좋아한다던 무슨 꽃 언덕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거기로 가 보지.」

그녀가 좋아할까 하고 꺼낸 얘기였으나. 의외로 그녀는, 한참을 침묵하더니 마침내 그 예쁜 입을 열어 다른 장소를 이야기했다.

「……호수, 호수에 가보고 싶어.」

그리하여. 찬 기운이 가시고 제법 따뜻해진 날을 기다려 호숫가로 나갔었다. 물론 근방은 모두 기사들이 통제했고, 호수에서는 좀 떨어져서 멀찍이에서 구경만 하는 식이었다. 뱃놀이 같은 것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직 날이 따뜻하지는 않다는 것도 이유였으나, 언제 갑자기 물속으로 뛰어들지 모를 여자를 데리고 물가에 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주위에 지키는 사람이 많으니 익사할 일은 없겠지만, 아직 물이 차다. 자칫 물에 빠지기 전에 잡지 못하고 놓치기라도 한다면. 찬물에 빠졌다가 건져 내는 것만으로도 아직 몸이 약한 그녀는 위험한 지경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의외로 아를렌은 호수에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그녀 주위에 예민하게 바짝 세워져 있는 경계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물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가만히 앉은 채, 수면에 부서져 내려 물결에 반짝이는 햇빛 조각들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호수에 가 보고 싶다고 말한 것치고 그녀는 주위를 돌아보려 하지도 않았고, 호수에 다가가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냥 처음에 앉혀 준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대로 다시 돌아왔다.

어쩌면 살포시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어쨌든 호숫가에서 햇빛을 받으며 바람에 머리카락을 살랑살랑 나부끼며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찬란했기에, 제법 괜찮은 외출이었다.

비록 그녀가 웃지 않아도. 그 표정이 얼음 같더라도. 그래도 여전히, 그녀는 그의 유일한 색이고 빛이었으니까.

며칠 후, 의상실에서 기별이 왔다. 드레스를 어느 정도 마무리했으니 가봉을 해야 한다고.

당연히 성으로 불러들이려 했지만, 이야기를 들은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가게로 가보고 싶어.」

그래서, 푀르 부인의 의상실은 미리 수색과 점검을 받고, 그 앞뒤 문을 기사와 병사들이 지키고 선 상태로, 대공의 방문을 받게 되었다.

직원들은 모두 문 앞에 도열하여, 슈엘에서 가장 높은, 아니 어찌 보면 현재 이 나라에서 가장 높을지도 모를 손님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사들이 겹겹이 에워싼 채 마차 문이 열리고, 대공이 먼저 내려섰다. 이윽고 마차 문 앞에 아가씨가 나타나자, 대공은 미간을 찌푸리며 아가씨의 허리를 잡아 올려 땅으로 가뿐하게 내려놓은 후, 익숙한 듯 부축을 시작했다.

직원들의 안내를 받아 절뚝거리며 가게 안으로 들어가던 아를렌은, 어느 사이엔가 카쉬엔의 부축을 아무렇지 않게 받고 있는 자신을 보고 실소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물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 괴물의 색에. 이자가 바라던 대로. 꺼멓게…….

의상실 안은 작년에 비해 변한 것이 없었다. 푀르 부인은 생긋생긋 우아하게 미소 지으면서 반쯤 완성된 드레스들을 소개했다.

그와 동시에, 이에 어울리는 소품들이 무엇이 있는지 현란한 말솜씨로 소개하기 시작했다. 드레스에 잘 어울리는 모자나 구두 같은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겨울에 어울리는 두툼한 모피 망토부터 봄에 어울릴 만한 반투명한 얇은 숄까지, 얼마나 많은 종류의 것들을 곁들일 수 있는지 우아하게 손끝을 휘저으며 설명했다.

“그래서, 아가씨의 드레스를 가봉하는 동안, 대공 저하께서는 소품들을 보고 계시는 것이 어떨까요? 유에리, 아까 준비시켰던 것들을 저하께 보여 드리렴.”

그것은 물 흐르듯 진행되어시, 대공은 물론이거니와, 애초에 이런 것에 관심이 없는 대공을 대신해 실질적으로 소품을 고를 애나 역시 의심 없이 자연스럽게 대공의 옆에 남게 되었다.

탈의실로 들어가는 아를렌의 부축은 마치 당연한 듯이 푀르 부인이 직접 담당했다.

그러나, 돌아가는 상황에, 아를렌은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눈치채었다. 푀르 부인이 아주 능수능란하게 처리하고 있지만, 어쨌든 부인의 목적은 명확했다. 대공의 사람이 아무도 탈의실에 따라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

‘푀르 부인도 내가 왜 왔는지 알고 있구나.’

애초부터 그런 일을 바라고 의상실에 오자고 했지만, 막상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때엔, 지난번엔. 카쉬엔이 없었다.

지금은, 카쉬엔의 바로 옆에서…….

이게 과연 잘하는 짓일까.

하지만 이제 와서 멈추면 그게 더 이상할 거다.

괜찮아, 탈의실 안에서 푀르 부인과 잠깐 이야기만 나누면 되니까. 그 정도는 괜찮을 거야. 뭘 들키고 말고 할 것도 없는 걸. 만약 쪽지 같은 것을 또 받게 된다면 또 먹어 버리면 되니까.

하지만 탈의실 문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을 본 순간 아를렌의 심장은 그대로 멎어 버리는 듯했다.

.*. *. *. *. *. *.

“……그래서 지금 아가씨께서 가봉 중이신 초록색 드레스에는 이 구두를 권해 드립니다.”

의상실 직원 유에리가 생글생글 웃으면서 수없이 많은 구두들을 선보이자 카쉬엔은 금방 관심을 잃었다.

그녀를 스스로 걸을 수 없게 만든 후, 그녀의 발바닥에 흠집이 나기를 원치 않았기에 신발을 돌려주기는 하였으나, 어찌 되었건 그녀는 굳이 걸을 필요가 없었다. 그녀 스스로 아무 곳에도 가지 못하고 그가 옮겨 주는 곳으로만 옮겨지는 것이 훨씬 마음에 든다.

오늘만 해도, 그가 안아 내리려는 것을 굳이 거부하고 걸어 들어가고 싶다고 하는 말을 들어주기는 하였으나…… 돌아갈 때에는 그녀가 뭐라고 하든 그냥 안아 들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더 진해졌을 뿐이다.

“……그리고 여기에 어울리는 모자로는…….”

그러나 직원이 모자들을 꺼내 오기 시작하자 카쉬엔은 그중 한 모자에 시선을 두었다.

그 시선을 눈치챈 유에리가 바로 그 모자를 집어 들어 생긋 웃으며 권하였다.

“이 모자가 정말 잘 어울리지요. 일부러 드레스와 같은 원단을 사용해서 초록색으로 포인트를 두어 만들었답니다. 게다가 이 색은 아가씨의 눈 색깔과도 아주 잘 맞는 에메랄드그린이라, 마치 아가씨를 위해 만들어진 것같지 않습니까?”

유에리가 호들갑을 떨며 모자를 건네주자, 카쉬엔이 모자를 건네받았다.

하얀 모자에 곱게 매여 있는 초록색 리본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매끄러운 새틴의 감촉이 손가락 끝에서 미끄러졌다.

똑같은 모자가 아니다.

당연히. 똑같은 모자는 아니다. 리본부터 다르다. 그 리본은 그의 책상 서랍 안에 고이 간직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이 모자는 어린 시절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게 했다.

그녀가 정말 해사하게 웃으면서 그를 바라보던 시절. 처음으로 세상이 찬란한 색채로 물들던 그 순간.

그의 얼굴에 보기 드문 잔잔한 미소가 어렸다.

“이 모자, 사지.”

.*. *. *. *. *. *.

“어떻게, 어떻게 여기에…….”

그녀가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를 죽여 흐느끼듯 말했다.

“어쩌자고 이렇게 위험한 짓을 자꾸 해. 왜, 도대체, 왜…….”

오랜만에 듣는 그녀의 목소리는 힘없이 가냘프게 떨어졌다.

두 손에 얼굴이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아젠은 흐느끼지 않으려고 애쓰는 아를렌에게 한 발 한 발 다가가, 조심스럽게, 건드리면 깨어지는 물거품 방울을 만지듯 살며시 두 팔로 감싸 안았다.

팔 안에 그녀의 몸이 와 닿는 느낌에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너무나도 그리웠던 체취가 물씬 풍겨 와 온 방 안에 퍼지는 것 같았다. 품 안에 가득 들어차 있는 그리운 온기가 그동안 얼어붙어 있던 그를 순식간에 녹여 내렸다.

그리웠다. 보고 싶었다. 안고 싶었다.

당신은 나의 전부인데. 나의 세상인데. 그동안 정지되어 있었던 시간이 다시 흘러가고, 그동안 쉬지 못했던 숨을 다시 들이마실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지막으로 안았을 때와 달리 훨씬 가늘어진 그 몸에 가슴이 욱신거렸다.

차마 잘 지내셨느냐는 말도, 괜찮으시냐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잘 지내지 않고 있다는 걸 알고, 괜찮지 않다는 것을아는데…….

처음엔 조심스럽게 안고 있던 팔은 어느 사이엔가 힘이 들어가, 그녀를 더할 수 없이 꼭 끌어안았다가, 안겨지는 것이 별로 없다 싶을 정도로 가느다란 그녀의 몸에 놀라 다시 힘을 풀었다.

품 안에서 얼굴을 두 손에 파묻은 채 가늘게 떨고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등을 살살 쓸어내리면서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괜찮아요.”

그녀에게 하는 말인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반복했다.

“괜찮아요, 아가씨. 괜찮을 거예요.”

“뭐가 괜찮아. 들키면…….”

“안 들키면 되죠.”

그녀가 고개를 들어 아젠을 쳐다보았다.

“그게 그렇게 마음대로 되었으면…….”

그랬으면 이렇게 되지도 않았겠지, 아를렌은 뒷말을 삼켜 내었다.

하지만 뒷말을 어렴풋이 이해한 아젠은 씁쓸하게 웃으면서 그녀의 등을 살살 토닥였다. 손바닥에 와 닿는 그녀의 자그마한 등에서 조금씩 떨림이 잦아들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시간이 멈추었으면…….

언제까지나 이렇게 계속 끌어안고 토닥여 주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시간이 없었다.

아무리 푀르 부인과 세라가 최선을 다해서 신속하게 옷을 갈아입힌다고 하더라도, 옷을 갈아입는 데에도 시간이 많이 쓰일 것이고, 탈의실 안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낼 수도 없었다.

바로 본론에 들어가야 하는데.

“눈은 어떻게 되었던 거야.”

아를렌이 문득 떠오른 듯. 고개를 들어 아젠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의 머리카락은 여전히 검은색이었지만, 눈은 이제 다시 보라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방법이 있었어요.”

그는 그저 빙긋이 웃으며 대답을 피했다.

“무슨 방법…… 난 눈 색을 바꿀 수 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어. 무슨 위험한 짓을 한 거 아냐? 아니, 그 전에, 왜 이렇게 위험한 곳에 와 있는 거야. 이제 여기가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면서.”

“아가씨야말로…….”

그가 난처하게 웃으며 말을 흐리자, 아를렌이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젠은 조심스레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아랫입술을 매만져 이 밑에서 빼 주었다.

“아가씨야말로, 어쩌자고 저……놈들에게 가셨나요. 저를 버리시기까지 하시면서…….”

“……나는…….”

아를렌은, 차마 죽을 생각으로 갔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아젠은 자신을 살리기 위해 그의 목숨을 걸었다. 아젠뿐이랴, 공작가의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거기에 대고 그런 말을 할 수는…….

“나는 죽이지 않을 거라며…… 네가 그렇게 말했잖아, 날 죽이지는 않을 거라고…….

……그러고 보니,”

어느 사이엔가 그의 옷깃을 두 손으로 꼭 쥐고 매달린 그녀가 다시 아젠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순식간에 그 눈동자가 공포로 잠식되어 있었다.

“……알고…… 있었어? 날 죽이지 않을 거라는 걸?”

예상치 못했던 질문에, 가슴이 갑작스럽게 날카로운 창으로 푹 뚫려 버린 듯 쨍 하는 통증이 퍼져 나갔다.

아젠은 잠시 숨을 멈추고, 침을 꿀꺽 삼켰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이건, ‘그런’질문이 아니다.

그녀가, 자신이 그놈이라는 것을 의심하고 묻는 것일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이라도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혐오와 공포가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증오할 것 같은, 평생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두려움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날 왜 죽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눈물이 어른거리는 그녀의 눈동자가 떨리면서, 무언가를 애원하고 있었다. 옷깃을 잡고 있는 그녀의 두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건.”

정작 아젠이 입을 열기 시작하자 아를렌은 눈길을 피했다. 무슨 말이 나올지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아젠은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래, 그녀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무슨 이유가 나올지.

그녀가, 그 미친놈이 그녀를 가지기 위해 루테른저를 쓸어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구나…….

‘개자식이…….’

그녀의 상처나 절망 따위를 전혀 보지 않는 그 개새끼가, 그녀에게 말해 버린 게다. 그래 놓고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있겠지.

얼마 전 성에서 보석상을 가장해서 보았던 그녀가 얼마나 파리하게 야위어 죽어 가고 있었는지 떠올랐다. 왜 그런 모습이 되었었는지 순식간에 이해했다.

아니라고,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이 모든 건 그놈의 잘못이지 아가씨의 잘못은 하나도 없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제발 너는 몰랐으면 좋겠다고, 다른 이유를 말해 달라고, 애절하게 호소하고 있었다.

아젠은 차마 그 애원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 루테른……가의…… 마지막 핏줄이니까요.”

아젠은 그녀의 머리를 손으로 살살 쓸어내리며 간신히 말했다.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애당초 그는 임기응변 같은 데에 능하지가 않았다.

“여러모로 이용할 수 있는 귀한 핏줄인데, 함부로 죽일 리가 없으니까요.”

아를렌의 눈꺼풀이 떨렸다. 입술이 살짝 달싹이다가 꼭 다물리더니, 다시금 고개를 내려 아젠의 가슴에 파묻었다. 표정을 숨기려는 것인지, 아니면 안정을 찾으려는 것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의 어설픈 거짓말이 과연 통했을지. 아젠은 그저 그녀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으며 침을 삼켰다. 불안하게 뛰는 자신의 심장 소리를 그녀가 눈치채지 않기를 바랐다.

차라리 빨리 화제를 전환하는 것이 낫겠다.

“그보다 아가씨,”

“응…….”

아젠은 고개를 내려 아를렌의 귀에 입을 가까이 붙여서 속삭였다.

“비밀통로를 알려주세요.”

그녀가 일순 굳는 것이 품 안에서 느껴졌다.

“성의 웬만한 구조는 모두 파악하고 있지만, 비 밀통로는 직계 후손에게밖에 내려오지 않으니까요. 아가씨께서 알려 주셔야 합니다.”

그녀가 천천히 그의 가슴에서 고개를 떼었다. 아직 눈물이 아른아른한 눈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잠시 그녀의 입이 살짝 벌려지더니, 깊이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그녀의 손이 옷깃에서 떨어졌다. 아를렌은 잠시 구겨진 그의 옷을 바라보더니. 찬찬히 매만져서 펴 주고는.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일순 그녀가 휘청거리는 듯해서 그가 손을 뻗었지만, 그녀는 넘어지지 않고 똑바로 섰다.

아젠은 무의식중에 그녀의 발을 바라보았다. 발 상태가 절대 괜찮지 않을 텐데, 그녀는 태연한 표정을 가장하고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그림 같은 미소가 올라왔다.

“아젠, 나는 괜찮아. 잘 지내고 있어. 그리고 너도 이렇게 건강하게 잘 있는 모습을 봐서 좋았어.”

“아가씨, 저는,”

“나는 잘 지내고 있으니까, 내 걱정 하지 말고, 아젠은 다른 나라로 망명을 해. 너는 이제 자유잖아. 이렇게 위험한 짓 하지 말고……. ……네가 위험해지는 건 내가 바라는 게 아니라는 걸 알잖아. 오늘 이 얘기를 전하려고 의상실에 왔었어.”

무슨 결심을 하고 선 것인지, 간헐적으로 작은 떨림이 새어 나오긴 하였으나, 그녀는 제법 온화하고도 단호한 표정으로 잘 버텨 내었다.

아마도 오기 전에 많이 준비하고 연습하고 왔으리라.

실제로 그녀는 보석상으로 가장해서 보았을 때보다는 상태가 나아 보였으니까. 아마도 그 후 내게 이 말을 하기 위해 나름 준비를 한 거겠지.

저 발로 저렇게 똑바로 서 있는 것조차 쉽지 않을 텐데.

아젠이 어느 사이엔가 그녀의 발목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눈치챈 아를렌이 살짝 발을 뒤로 숨겼다.

“발은, 전에, 실수로 계단에서 굴렀는데, 잘못되어서…….”

하, 아젠이 속으로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의 손으로 부러트렸다. 그걸 잊을 리가. 그녀의 맨발을 잡고 있었을 때의 그 감촉, 관절이 어긋나는 순간 손으로 전해져 오던 그 느낌, 귀로 들려오던 우두둑 소리. 그리고, 비명조차 없이 신음을 삼켜 내던 당신.

아무 망설임 없이 가볍게 꺾어 버리던 그 무자비한 손.

그 어떤 죄책감도 후회도 없이, 도리어 만족스럽게 미소 짓던 끔찍한 괴물.

그 모든 것이 생생하게 다시 떠올랐다. 구역질이 난다. 아무것도 쥐어진 것이 없는 빈손에, 다시금 당신의 꺾여 버린 발목이 쥐어져 있는 듯.

아젠은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폭 넓은 초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공녀로 살던 동안 한 번도 저런 폭 넓은 초커를 한 적이 없었다.

저 아름답고 새하얀 레이스 천 밑에 그가 저지른 추악하고 역겨운 죄악들이 숨겨져 있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그가 품 안에 갇혀 있는 그녀를 정신없이 탐하며 황홀해하고, 혼자 한없이 희열에 떠 있던 동안, 그녀는 자신의 무게에 짓눌린 채 얼마나 부서지고 너덜너덜해져 죽어 가고 있었을지.

그래, 그 개새끼는 당신을 보지 않았다.

그저, 손에 닿는 당신의 몸을 허겁지겁 더 깊숙이 끌어안는 데에 너무 급해서, 코에 닿는 당신의 체취를 한껏 들이마시고 입에 닿는 당신의 살갗을 정신없이 맛보는 데에 너무 급해서, 그저 그 달콤함을 취하는 데에만도 정신이 없어서, 정작 당신이 얼마나 죽어 가고 있는지 같은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

어렴풋이, 혼자 환희와 감격에 젖어 숨을 몰아쉬고 있는 그의 밑에 갇혀서, 야윌 대로 야윈 그녀가 물기 하나 없이 오로지 체념만이 가득한 눈으로 멍하니 허공만을 보고 있던 것이 떠오른다.

그 와중에도 그가 생각했던 것은 그저 자신을 보아 줬으면 하는 갈망뿐이었지, 왜 그녀가 그렇게 죽어 가고 있었는지가 아니었다.

그렇게 그가 그녀를 죽였다. 매일매일. 매일 밤 갉아먹어 죽여 나갔다. 그녀의 찬란하게 빛나는 생을 탐하여, 갈취하여, 그렇게 그녀는 죽어 갔다.

떠올리고 싶지 않다. 상상하고 싶지 않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었다고 믿고 싶다. 하지만, 벌어졌던 일이고, 지금도 이미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지금도, 저 벽 너머에 뻔뻔하게 기다리고 있을 그 개새끼가…… 당신을…….

펄펄 끓는 오수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숨을 쉬려 할 때마다 폐로 쏟아져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심장을 쥐어뜯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감정을 통제해야 했다. 흐트러져서는 안 된다. 살의를 느껴서는 안 되었다. 지금은 안 된다.

감정이 흐트러지면, 한껏 내리누르고 있는 기척이 흔들려 새어 나올지도 모른다.

분노도 자기혐오도, 그럴 능력과 자격이 있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사치였다.

간신히 마음을 가다듬고 숨을 한 번 내쉰 아젠이, 아를렌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억하고 싶지 않고, 떠올리고 싶지 않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오로지 외면하고 부정하고 싶은 그의 모든 업보가 눈앞에 모여 있었다.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아무 죄도 짓지 않은 그녀가, 그가 저지른 모든 악행과 죄업에 뒤덮인 채,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아슬아슬하게, 그러나 꼿꼿하게 버티고 있었다.

그가 갉아먹은 영혼이, 그가 부러트린 발로, 얼굴에 애써 만든 미소를 지은 채.

……그녀는 내가 이 모든 것을 모르기를 바란다.

이토록 절실하게 숨기고 싶어 하는 것들을, 내가 이미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녀의 얼굴에 올라와 있는 거짓 미소가, 지난번보다 제법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게 더, 아팠다.

“제가…….”

그가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자, 아를렌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제가 괜찮지 않아요, 아가씨…….”

.*. *. *. *. *. *.

유에리의 현란한 홍보에 카쉬엔의 허락이 겹쳐져, 애나는 이미 아를렌을 위해 이런저런 많은 것들을 사들이고 있었으나, 사실 카쉬엔은 소품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애당초, 드레스에도 관심이 없었다.

물론. 그녀에게 최고의 드레스를 휘감아 주고, 최고의 소품들을 씌워 주고, 최고의 보석들을 걸어 줄 것이다. 최고의 것이 아니라면 닿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미 그녀의 방에는 온갖 보물들이 가득 채워져 있는 상태이고.

하지만, 그렇다고 드레스를 직접 고른다거나 구두를 고른다거 나 할 필요를 느끼지는 못했다.

어차피 그녀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잘 어울린다. 무엇을 입어도 아름답고, 빛이 났다. 그녀에게 좋은 드레스를 입히고 싶은 것은 그저 최고의 것들을 가득 안겨 주고 싶다는 것뿐이지, 딱히 어떤 드레스가 더 좋고 어떤 드레스가 더 나쁜지를 구분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로서는 의상실 전체를 사들여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보석상 전체를 사들이는 것도 간단했다. 이런 식으로 외출을 나와서 물건을 보고 고르는 행위 자체가 기분 전환이 된다는 조언을 들었기에 시켜 주고 있는 것뿐.

그럼에도, 그는 모자 하나는 손에 소중하게 들고 있었다. 기분 좋은 표정을 지으며 하얀 여성 모자를 들고 앉아 있는 주군의 모습이 너무나도 낯설었던지라, 수행을 나온 기사들은 어색한 표정으로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이윽고, 탈의실의 문이 열리면서 그녀가 부축을 받아 나왔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아가씨 체형이 지난번과 많이 달라지셔서 가봉하는 데에 시간이 좀 걸렸어요.”

푀르 부인이 미소 지으며 하는 말 따위는 별로 들리지 않았다.

밝은 초록색 드레스를 입고 나온 그녀는 마치 봄날의 숲처럼 화사해 보였다. 그 표정을 제외한다면.

확실히, 지난번에 성에서 시착해 보았을 때보다 살이 올라 더욱더 잘 어울렸다.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 때마다 그녀가 겁을 먹는 것이 보였지만, 괜찮았다.

살짝 고개를 숙이며 그를 외면하고 있는 그녀의 밝은 머 리카락 위로, 하얀 모자가 내려 앉았다.

카쉬엔이 다시 두세 걸음 뒤로 떨어지고는, 그녀의 모습을 감상했다.

바짝 긴장한 채, 두 손을 앞으로 마주 잡고 서 있는 모습이, 무언가 조금 부족했다.

“고개를 들어 봐.”

갑작스러운 말에 그녀가 퍼뜩 놀라는가 싶더니,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잔뜩 겁먹고 긴장한 눈망울이 그를 힘겹게 바라보았다.

“웃어 봐.”

그녀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더니, 어쩔 줄 모르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카쉬엔은 조용히 기다렸다.

이윽고, 그녀가 어색하게 양쪽 입꼬리를 올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삐뚤삐뚤하게 올라가던 입매가, 어느 사이엔가 제법 자연스럽게 호선을 그리더니, 눈매에서도 힘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카쉬엔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약간은 다르지만.

처음 만났을 때에는, 드레스는 이보다 조금 더 노란빛이 도는 밝은 연두색에, 좀 더 기장이 짧았었다. 아무래도 어린 소녀를 위한 외출 드레스니 더 짧았었겠지.

밑으로는 하얀 페티코트가 살짝씩 겹쳐 보였던 것 같다. 하얀 모자는 이보다 약간 더 챙이 넓은 느낌이었고, 약간 덜 매끄러운 재질이었으며, 초록색 리본은 이보다 조금 더 색이 깊었던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표정이 다르고, 눈빛이 다르다. 화사하게 웃는 얼굴에 호의로 가득하던 그 맑게 빛나던 초록색 눈이, 지금은 겁먹은 채 이리저리 흔들리며 어쩔 줄 모르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그때 그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저 모습이, 그 순간을 곧 다시 가져올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들게 했다.

머지않아 그의 손안으로 다시 돌아오게 할 그 모습.

아를렌은 카쉬엔이 도대체 왜 저렇게 미소를 지으며 쳐다보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벽 너머에 있는 사람을 들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애써 계속 그를 바라보았다.

뭐든지, 시키는 대로 얌전히 따를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흐르고, 숨이 막혀 왔다.

아젠의 앞에서는 제법 자연스럽게 연기할 수 있었던 미소였는데, 어째서인지 지금은 입가에 경련이 일 것 같았다.

마주 잡고 있는 손이 어느 사이엔가 땀으로 축축해졌다.

그녀는 손끝을 계속해서 만지작거리며, 그저 바랐다.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빨리 끝나기를.

.*. *. *. *. *. *.

그날 밤, 한밤중에 눈을 뜬 아를렌은 망연하니 누워 있었다.

몇 시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밖은 깜깜했다. 밤새 타오르는 어두운 초 하나만이 희미하게 방 안을 밝혔다.

등 뒤에서부터 그녀를 끌어안아 가두고 있는 남자의 커다란 팔과 다리가, 숨을 쉬지 못하게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온몸이 아리고 욱신거렸다.

카쉬엔은 원래 통증에 무감했고, 다른 사람의 아픔을 먼저 눈치채서 배려해 줄 만큼 섬세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를렌은 그에게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며 배려를 호소할 마음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항상 아프고 고통스러웠지만, 사실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육체적인 고통은 큰 부분이 아니었기에.

침대에 올려질 때마다, 그릇 위에 올라간 고깃덩어리가 되는 느낌이었다.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모두 물어뜯어 죽인 괴물의 식탁에 올라가, 그대로 칼질당하고 입 안에 넣어져 역겨운 타액과 섞여 으깨지고 부서진 후 삼켜져 버리는 고깃덩어리.

그렇게 뭉그러져 삼켜질 거라는 걸 아는데도, 그릇 위에서 도망가지도 저항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날카로운 식기를 몸체에 무자비하게 후벼 꽂아 더러운 입으로 집어넣을 때까지,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그저 기다리고 있어야하는…….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이 끝난 후, 기분 좋게 배가 부른 카쉬엔은 그 억세고 끔찍한 팔다리를 그녀에게 얽은 채 잠들고, 그녀는 이미 부서진 듯한 몸을 끌어안고 산에 잠겨 오랜 시간에 걸쳐 잔인하게 녹아내리는 것이다.

언젠가 완전히 녹아 없어지는 그날이 올 때까지, 매일 반복해서.

온몸에서 악취가 나는 것만 같았다. 이미 그 악취가 몸 구석구석 깊은 곳까지 다 배어들어, 도저히 씻어 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이미 너덜너덜 해어질 대로 해진 심장 따위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줄 알았다.

사실, 남아 있지 않은 편이 나았다.

아무 의식 없이 그냥 잡아먹히는 게, 정신이 멀쩡한 채로 뜯어 먹히는 것보다 나았다.

다시금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 심장이 그녀에게 돌려준 것은 결국 또다시 비참함과 절망이었다.

초점 없이 그저 앞을 향하고 있던 아를렌의 눈이, 어느 사이엔가 살짝 틈이 생긴 커튼 사이로 스며들어 오는 달빛에 와 닿았다.

이제는 비참한 시간들에 가려져 기억의 저 밑으로 가라앉아 있던, 어느 밤하늘 아래의 일이 다시금 수면 위로 잔잔히 떠올랐다.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나지막한, 따뜻한, 그러나 긴장으로 떨리던 그 목소리가 다시 한번 울려 퍼진다.

그리고, 어느 따뜻한 가을날의 바람이 스치우고,

「레이디 아를레네 리시아르 델 루테른께 제 서약을 바치고 싶습니다.」

어린 시절, 아직 기사는커녕 기사 견습생조차 되지 못했던 고아 아이의 그 작은 손이 떠올랐다.

「반드시 강한 기사가 되어서 아가씨를 지켜 드리겠습니다.」

나는 그럴 자격이 없는데, 저런 약속을 듣고 맹세를 받을 자격이 없는데.

이미 나 때문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너까지 죽게 해서는 안 되는데. 너를 떠나보내야 했는데, 이런 위험한 곳에서 얼른 내보내야 했는데.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이런 시간에는 오로지 그 목소리만이 유일한 위안이 되어 붙잡고 싶어지는 것이다.

「제가 괜찮지 않습니다. 아가씨.」

낮에 만났던 그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깨어난 후, 아가씨께서 저놈에게 가셨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제가 왜 그 자리에서 즉사하지 못했는지, 중상을 입었을 때 왜 그 자리에서 자결하지 않았는지 후회하고 또 후회했습니다. 제가 차라리 그 숲에서 죽어 버렸으면 아가씨께서 그러지 않으셨을 테니까…….」

아젠은 감정을 억누르는 듯, 낮게 잠긴, 그러나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아가씨를 희생시켜서 제가 살아남을 바에는, 제 손으로 제 가슴을 가르고

말겠습니다.」

「왜, 그런 끔찍한 소리를 해. 내가 그런 걸 원할 리가…….」

「저도 원하지 않습니다, 아가씨. 저도, 아가씨께서 다치시는 걸 원치 않습니다. 차라리 제가 죽어도. 그런 모습은 원치 않습니다.」

그가 아를렌의 손을 살짝 잡아 자신의 가슴에 갖다 대었다. 쿵 쿵 뛰는 그의 심장 박동이 손바닥을 넘어 전해져 왔다.

「제 심장은 이미 오래전부터 아가씨께 묶여 있었습니다. 아가씨께서 기억도 못 하실 아주 먼 옛날부터. 그건, 서약이나 충성 맹세 이전이에요. 기사단에서 파문을 하시건, 서약을 파기하시건 제 심장은 이미 아가씨의 것입니다.」

「…….」

「왜 위험한 곳에 왔냐고 물으셨지요. 아가씨께서 위험한 곳에 계시니 저도 올 수밖에요. 아가씨께서 지옥으로 가시면 저도 갈 수밖에요.」

그가 어느 사이엔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몸을 낮추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처음부터, 아가씨는 저의 세상 전부였습니다. 어렸을 때 이미, 아가씨의 마지막까지 지켜 드리기로 맹세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10년 동안 늘 그러했던 것처럼, 익숙하게 기사의 예를 갖추어 그녀의 한 손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

「제발, 그러니, 아가씨를 희생해서 저를 살리려고 하지 마세요. 그거야말로 저를 죽이시는 겁니다. 부디, 진정으로 아가씨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세요.」

「아젠, 나는…… 나는 내가 원하는 일을 한 거야.」

그녀는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고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 여름밤. 사경을 헤매고 있던 그를 살릴 시간을 벌고 싶어시, 오로지 그 일념으로 쉬지 않고 말을 달렸었다. 그렇게 해서 그가 정신을 차리고, 추적에서 벗어나서, 국경을 넘어가기를, 그걸 바라고…….

「나는, 너를 살리고 싶었어. 그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이었어…….」

「그럼, 저도 아가씨를 살리고 싶고. 아가씨도 저를 살리고 싶으니, 같이 살아남으면 되잖아요.」

그가 애써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얹어 잡고 있던 그의 손이 움직여, 손가락 사이사이로 파고들었다.

「아가씨께서 정말로 원하시는 것을 말씀해 주세요. 이곳을 떠나고 싶으신지, 아니면 이곳에 남아 있고 싶으신지. 떠나고 싶으시다면 모시고, 남고 싶으시다면 저도 남겠습니다. 그러니까, 아가씨께서 진심으로 원하시는 것을 말씀해 주세요.」

굳은살 박인 그의 손이. 그녀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

「……작년 여름에 우리 벌써 한 번 도망쳐 봤잖아. 그리고 그때 너는……. 」

지난여름, 아젠과 둘이 건너던 그 숲을 떠올렸다.

계속되던 추격과, 무능하게 숨어 있던 자신, 그리고 그 와중에 혼자 피를 뒤집어쓰다 결국 사경을 헤매던 그의 모습이…….

그때엔 그래도 발이라도 멀쩡했었다.

그런데, 지금, 혼자서는 몇 걸음 걷지도 못하는 몸으로, 탈출한다는 게 가당키나 할까.

「그때엔, 기습을 당해 아무 준비가 없었고, 수도는 그들의 영역이었지요. 하지만 슈엘은 우리의 영역이고, 이번엔 확실하게 준비하고 안전하게 떠날 겁니다. 모든 것은 제가 다 알아서 준비할 테니, 아가씨께서는 그냥 비밀통로만 알려 주시고 건강하게 몸을 보전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아젠, 사실 내 발…… 일시적인 거 아니야. 걸을 수가 없어.」

「걷지 않으셔도 안전하게 가실 수 있게 준비했습니다. 아가씨도 저도, 둘 다 정말로 안전하게 갈 거예요. 위험한 일은 절대 벌이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그 발…….」

아젠이 그녀의 발목 쪽을 다시 한번 보며 말을 이었다.

「제대로 치료받으시면 지금보다 훨씬 좋아지실 거예요. 그리고 목발이라도 짚으시면 혼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실 수도 있으실 거고요. 반드시 그렇게 해 드릴 겁니다. 자유롭게.」

「…….」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행복하게 웃으면서 눈을 감고 싶어 하셨지요.」

그가, 그녀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쥔 채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제발, 제가. 아가씨의 눈을 감기게 해 주세요.」

그리고, 그의 눈도 떨리고 있었다. 절실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발. 아를레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그 따뜻한 손을 잡고 싶어진다.

그 손을 잡으라고, 부디 잡아 달라고 부르며 네가 기다리고 있다.

살짝, 눈 감고, 마지못한 척, 한 걸음을 떼어 너에게로 가도 되는걸까.

‘같이…….’

정말, 같이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도 되는 걸까.

.*. *. *. *. *. *.

수도는 카쉬엔의 영역이다.

하지만 슈엘은 나의 영역이다.

아젠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가 수도에 잡혀 있는 동안에는 근처에 접근하기도 쉽지 않았다. 애초에 수도의 성문 안으로 한 걸음 들여놓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어렸을 때 빈민가를 전전한 덕에 개구멍 몇 개를 기억하고 있었지만. 작년에 탈출할 때 썼던 하수구를 들킨 후로 성으로 드나들 수 있는 모든 틈새에 경계가 강화된 듯하였다.

간신히 수도에 잠입한 후, 그는 참담한 수도의 모습에 말을 잃었다.

그는 10년을 함께했던 사람들, 그녀가 사랑하던 사람들, 자신을 아껴 주고 키워 준 사람들의 참혹하게 훼손된 시체들을 마주했다. 과거의 그가, ‘카쉬엔’이, 아무 고민 없이 죽이고 아무 거리낌 없이 내걸어 썩어 가게 만들었던 사람들.

제발, 수도로 끌려온 그녀가 이 모습들을 보지 못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녀는 대공저로 바로 끌려간 후 한 번도 바깥으로 나와 보지 못했으니 어쩌면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게 다행이다 싶었다.

그놈에게 그 어떤 꼬리도 잡혀서는 안 되었기에 시신 수습조차 하지 못했다. 자신의 은인과 동료들이 그렇게 썩어 가고 까마귀와 벌레들에 먹혀 가다가 이윽고 벌판에 한꺼번에 버려져 태워질 때까지 그는 그저 이를 악물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수도에는 온갖 소문이 난무했다.

수도의 분위기는 살벌했고, 사람들은 쉬쉬하며 순식간에 멸문되어 버린 광장의 귀족들과 갑자기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르게 된 몇몇 귀족 가문들에 대해서 온갖 추측과 루머를 교환했다. 20여 년 전의 이야기대로 바에룬에 피바다를 가져온 대공의 저주도 쉬쉬하며 몰래 오르내렸다.

그리고 그중에는, 최고의 권력자로 부상한 레퀴에스 대공이 데려온 여인에 대한 이야기도 많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낭만적으로 왜곡시킨 소문은 차라리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도저히 참아 줄 수 없는 역겨운 헛소문이나 음담패설들이 들려오면, 그 자리에서 그 더러운 입들을 모두 잘라 내고 싶은 충동에 견디기 힘들었다.

다 죽여 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벌벌 떨리는 손으로, 더러운 소리를 들은 귀를 뜯어내 버리고 싶었다.

정작 수도에 올라온 목적이었던 대공저는 접근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제 막 정변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고 피의 대학살이 아직 완전히 마무리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반정의 핵심이자 무력의 상징,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많은 적을 가지게 된 대공저는 왕궁보다 더 삼엄한 경계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분명 자신이 몇 년을 살았었고 빠삭하게 파악하며 직접 경비를 구성했을 대공저일 텐데도 그 구조를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우스운 일이다. 자신이 살았던 대공저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은.

기시감이 일었다. 분명, 레퀴에스 공작의 반정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할 때에도, 자신이 저질렀던 일이고 절대 잊어버릴 수 없는 거대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기억이 그토록 희미하여 도움이 되는 정보는 하나도 얻을 수 없지 않았던가.

어째서 전생의 기억은 이토록 선택적인가. 불리한 만일 신이 이 지독한 환생을 계획한 거라면. 그 빌어먹을 신은 그를 도와주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래, 나 같은 개자식을 도와주고 싶지 않은 건 이해가 되지만…… 그녀는 도대체 무슨 죄로?’

수도에 머무는 동안 그녀의 머리카락 한 을 보지 못하고, 설령 보게 되더라도 무사히 데리고 나올 가능성이 낮다는 사실을 인정한 후, 결국 그는 그들이 슈엘에 내려올 때까지 기다려야지만 기회가 생길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전생의 기억이 전혀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현생의 경험을 이용하는 수밖에.

그래, 전생의 기억이 도움을 준 한 가지가 있다면, 그들이 겨울이 되기 전에 슈엘에 내려올 거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슈엘에 내려올 때 즈음 그녀의 상태가 어떠할지 미리 알고 대비할 수 있다는 것…….

슈엘은, 그의 영역이다. 10년을 매일같이 거주하고, 순찰하고, 탐방했다. 기사들은 누구나 성 안팎의 구조를 숙지해야 했으며, 그녀의 호위 기사가 된 후로는 그 외 몇 개의 도주로를 더 지도받았다.

슈엘 내성과 외성의 구조는 눈 감고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빠삭했고, 근처의 지리도 훤했다. 도움을 받을 만한 인맥도 많았다.

그리고 슈엘에는, 그의 소중한 아가씨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들도 많았고, 레퀴에스가에 원한을 가진 사람들도 많았다. 레퀴에스들은 내성 안의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고, 학살당한 사람들의 가족들은 원한을 품은 채로 여전히 슈엘에 살고 있었다.

전생에 그 호위 기사가 왜 수도가 아닌 슈엘에서 탈출을 시도했는지 이해했다.

하루하루가 미칠 것처럼 길었다. 매일매일이 그녀가 고통받는 하루였고, 그녀가 죽어 가는 하루였다.

그래도, 겨울이 되면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그를 버티게 했었다.

하루하루, 준비를 했다. 그녀를 다시 만날 날만을 기다리며. 완벽하고 철저하게.

그 빌어먹을 신이 그의 편이 아니라 하더라도, 반드시 이겨 보여야 했다.

.*. *. *. *. *. *.

봄이 깊어지고 여름이 서서히 다가올 무렵, 서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카쉬엔은 솔직히 그 반란이 잔챙이들의 몸부림이라고 생각했고, 그가 직접 나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으나, 쥬헤드 왕세자는 그가 몸소 가서 완전히 박살을 내고 본보기를 보여 주기를 원했다.

「앞으로 매번 그대가 갈 필요는 없어. 하지만 이번에는 압도적으로 짓밟아 주어 앞으로 반란이 일어날 여지를 막아야 하지 않겠나. 그대가 적임일세.」

“하…….”

침대 위에서 상체를 일으킨 그는 짧은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리며, 미간을 찡그렸다. 이제 곧 출발해야 했다.

짜증 나는 쥬헤드. 왕관을 퍼다 줬으면 유지는 스스로 해야 할 것 아닌가. 언제까지 사소한 일에 일일이 귀찮게 불러댈건지.

반란을 진압하러 가는 일이기 때문에, 가볍게 수도에 다녀올 때와 달리 기사단과 병력도 다수 데려가야 했다.

물론 그럼에도 일부는 슈엘에 남길 것이지만, 그의 마음에 흡족할 만한 수는 아니었다.

머릿속으로 여정을 점검하다가. 바로 옆에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나신의 여자를 내려 다보았다.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잠들어 있었다. 자신의 체취와 흔적을 온몸에 가득 묻힌 채로. 커튼 사이로 들어와 바닥을 비추고 있는 아침 햇살의 잔재에, 그녀의 가느다란 금실 같은 머리카락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지치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해 보이지만, 이전보다는 많이 나아졌다. 최소한 얼굴에 혈색이 있으니까. 아직도 많이 마르긴 했지만, 더 이상 나뭇가지 같다거나 뼈만 남은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에게서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바짝 말라 시들었다가 물을 맞아 조금씩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한 화초처럼, 조금씩 살아나고 있는 그녀를 볼 때마다 기대가 인다.

그에게 이곳은 마음에 드는 곳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녀를 이곳에 데려온 것은 잘한 일이었던 것 같다. 슈엘에 내려오고 한동안은 더 악화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적도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하루하루 살아났다. 그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어쨌든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하지만 이곳은 그의 땅이 아니었다. 물론, 서류상으로 그의 영지에 편입되기는 하였으나, 어쨌건 그의 터전은 북부였다. 6년간 그가 피 흘려 가며 만든 땅. 그가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지배하는 땅. 그 땅의 성들은 그의 성이었고, 그 땅의 사람들은 그의 말을 따랐다.

이곳은 아니었다.

그녀가 자신이 모르는 시간을 보내던 곳. 그녀가 자신이 모르는 사람들과 만나고 교류하던 곳. 그 쓸데없고 미천한 놈과 만나던 곳.

‘이제 어느 정도 회복된 것 같으니, 데려가야지.’

그의 땅으로 그녀를 데려갈 것이다.

이번 진압만 끝나고 돌아오면. 그의 땅으로 그녀를 데려가서 틀어박혀 살아야겠다. 귀찮은 쥬헤드의 시야에서도 좀 벗어나고.

몸이 약한 그녀에게 북부의 땅이 좀 춥기는 하겠지만, 벽난로에 참나무 장작을 아낌없이 쏟아붓고, 벽과 바닥에도 두툼한 태피스트리와 모피를 아낌없이 깔아 주면 괜찮을 거다. 어차피 밖에 나갈 일이야 얼마 없을 테니 바깥의 날씨 따위야 무슨 상관이랴.

그래도 방 안에 가둬 두기만 하면 시름시름 앓는 것 같으니, 온실을 지어 줘야겠다. 이곳에 있는 온실보다 훨씬 더 크고 멋지게……. 그녀는 꽃을 좋아하니 남부의 꽃모종을 잔뜩 실어다가 온실에 심어 놓고, 나비들도 잔뜩 잡아다가 풀어놓으면 되리라.

그렇게 겨울을 느낄 틈 없이 항상 온화하고 따뜻하게 해 주면 되겠지.

물론 유리는 비싸고, 온실은 굉장한 사치품이었지만, 카쉬엔은 온실쯤이야 얼마든지 거대하게 지을 만한 재력이 있었다.

그가 지어 준 온실 속에 앉아, 꽃과 나비에 둘러싸여 살포시 웃음 짓고 있을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자, 그의 입가도 부드럽게 올라갔다.

그는 그녀의 따뜻한 얼굴을 살살 쓰다듬다가, 얼굴을 살짝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면서 손에 살짝 쥐고 향취를 맡았다. 그녀의 체취에 그의 체취가 더해져 섞여 있었다.

아, 중독적이다.

그의 무미하고 건조한 삶에서, 그녀만이 그의 열이고 색이며 향이었다. 도대체 그녀가 곁에 없던 그 긴 시간 동안을 무엇으로 버텨 왔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또, 그녀가 없는 전장으로…….

물론 이번엔 지난번처럼 몇 년씩 걸릴 일은 아니었지만, 손안에 가져 본 적 없던 것의 부재는, 가져 보았던 것의 부재는 그 차이가 컸다.

가져가고 싶다.

베어 갈까.

그는 침대에서 일어섰다. 무게가 사라진 침대가 출렁였다. 옆에 걸려 있던 가운을 대충 챙겨 입은 그는, 그녀의 손이 닿지 않도록 높은 곳에 올려 두었던 자신의 칼을 꺼내어 들었다.

다시 침대로 성큼성큼 걸어온 그가, 검집에서 스르릉 칼을 뽑아내었다. 용도에 맞지 않게 지나치게 장검이었으나, 이 방 안에 있는 유일한 날붙이였고, 어찌 되었건 제 역할은 할 수 있으니까.

칼날에 한 줄기 햇살이 날카롭게 반사되어 아를렌의 얼굴에 가 닿았다.

그녀가 부스스 눈을 떴다.

자신의 얼굴 바로 앞에 번뜩이고 있는 칼날을 잠시 현실감 없이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을 몇 번 깜빡거리고는 조용히 다시 감았다.

“깼어?”

카쉬엔은 마치 식사 중이거나 책을 읽고 있다가 눈을 마주치기라도 한 것처럼 태연하게 그녀를 본 후, 손에 그녀의 머리카락을 한 줌 휘어 감고, 서걱, 망설임 없이 칼을 움직여 베어 내었다.

다시금 눈을 뜬 아를렌은, 카쉬엔이 자신의 손에 감겨 있는 머리채를 확인하듯 냄새를 맡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칼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고 원래 있던 곳에 되돌려 놓는 동안, 움직이지도 소리 내지도 않고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가 머리 타래를 서랍에 정리해 넣고 침대에 돌아와 옆에 앉자, 그제야 그녀는 움츠리며 이불을 끌어안았다.

카쉬엔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고, 동그랗고 매끄러운 어깨를 어루만지다가, 이윽고 그녀의 목 뒤를 잡고는 몸을 숙여 그녀의 입을 진득하니 삼켰다.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보드라운 살갗을 어루만지며 그녀의 입술을 빨고 깨물고 빨아들이고 나서. 입 안을 헤집고 들어가 온 입 안의 점막을 탐하고 혀를 얽고 숨을 모두 취하는 동안, 그녀는 아무 반항 없이, 그렇다고 그 어떤 호응도 없이. 그저 그렇게 그를 받았다.

입을 떼어 낸 그는 자신의 타액이 묻어 있는 그녀의 입가를 손으로 닦아 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달콤한 숨결을 모두 충분히 취하고 빨아들였는데도, 왜 이렇게 부족한 건지. 왜 취해도 취한 것 갖지 않고, 가져도 가진 것 같지 않은지.

분명 자신의 성 안에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는데, 이제 더 이상 죽음으로 잃어버릴 염려도 덜었는데, 왜 이렇게 자꾸만 손가락 틈 사이사이로 흘러 나가 잃어버릴 것 같은지.

그런데, 문득,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았다.

초점 없이 허공을 바라보는 시야에 우연히 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잠시 하려던 일들을 모두 잊고 그 초록색 눈을, 아직도 말라 있고 옅어졌지만 그래도 조금은 빛이 돌아온 것도 같은 그 눈을 마주 보았다.

두려움에 떨지도 않고, 그를 피하지도 않고, 그저 바라보고 있는 눈.

늘 보아 오던 공포나 증오가 아닌 무언가 다른 감정인 것 같은데,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읽기 힘들었다.

흔들리지 않고 응시하는 눈. 어쩐지 피하기 힘든, 단호하면서도 절실한,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데 그 말을 듣고 싶지 않은 그런 눈.

한없이 빨려 들어갈 듯 마주 바라보던 카쉬엔은, 어느 사이엔가 속이 울렁거리는 듯 어지러운 느낌에 그녀의 눈을 한 손으로 가려 버렸다. 손 너머로 가려진 그녀가 아직도 눈을 뜨고 있을지 아니면 감았을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녀가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 자체가 좋은 일 아닌가. 그는 좋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그녀는 확실히 나아지고 있다. 사라질 것 같다느니 하는 근거 없는 나약한 느낌 따위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내 성 안의 아를렌.

내 성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나의 아를렌.

그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 *. *. *. *. *.

도대체 저자는 나에게서 무엇을 원한 걸까.

어렸을 때엔 그냥 상처받은 어린아이였던 적도 있었는데 어째서 저런 끔찍한 괴물이 된 걸까.

원래 악귀였던 자에게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걸어 들어간 것일까,

아니면 나를 만나서 악귀가 된 걸까.

무엇이 되었든, 이 끔찍한 악연은 제발 여기에서 끊어지기를.

다시는 만나지 않기를.

죽어 다시 태어나더라도. 다음 생에서도.

다시는.

.*. *. *. *. *. *.

시작은 작은 화재였다.

“자작님, 주방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급하게 깨우는 소리에 아이솝 자작은 짜증을 내며 잠자리에서 일어섰다.

본래 레퀴에스 대공의 대리인으로서 슈엘을 관리해 오던 그는, 대공이 내려오면서 뒤로 한발 물러나 있다가, 대공이 반란을 진압하러 떠나면서 장기간 영지를 비울 것 같자 다시 슈엘을 관리하고 있던 차였다.

“화재 크기는……?”

가운을 대충 걸쳐 입으며 그는 방을 나섰다. 아무리 작은 화재라 하더라도 어쨌든 화재는 언제나 큰 위협이었다. 특히 나, 요즘은 날이 제법 건조했다.

“지금 진압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마도 화덕에 남아 있던 불씨가 튀었던 모양인데, 하필이면 아무도 없던 시각이라 일찍 발견하지 못해서…….”

주방으로 향하는 자작을 따르며 병사가 보고했다.

발생해서는 안 되는 일이긴 하지만 종종 발생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자작은 한 손으로 하품을 하는 입을 가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진압하고 뒤처리를 명한 후 다시 잠자리에 들고 싶었다.

그러나, 또 다른 병사가 급하게 뛰어오자 상황이 바뀌었다.

“불이 너무 커지고 있습니다.”

“뭐?”

자작이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진압하고 있다더니?”

“그게…… 발견이 늦어서, 장작더미에 옮겨붙은 데다가. 무언가…….”

자작은 짜증을 내며 걸음을 서둘렀다. 화재는 언제나 가장 무서운 일이었고, 아무리 작은 화재라도 빨리 진압하지 않으면 큰불로 번지는 법이었다.

“사람들은 다 동원했나?”

“사용인들과 병사들을 다 불러 모아서 불을 끄고 있는 중입니다만…….”

성의 주인이 바뀌는 과정에서 이 성에서 오랫동안 일하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죽거나 쫓겨났던지라, 현재 이곳에서 일하는 자들은 오래 일한 사람이래 봤자 여기에 온 지 채 1년이 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위에서 사용인들을 교육시켜야 할 사람도, 밑에서 실질적으로 손발을 움직이는 사람도, 처음 보는 성의 처음 보는 구조에서 응급 상황에 빠릿빠릿하게 체계적으로 대처할 만큼 손발이 맞지 않았다.

“10분 내에 꺼질 기미가 안 보이면 영지민들까지 불러 모아.”

그때, 또 다른 병사가 달려왔다.

“마사에 불이 났습니다!”

“뭐?”

자작이 황당한 듯 돌아보았다.

“화재가 워낙 급격히 번져 일단 말들을 꺼내고 있는 중입니다만, 진압이 쉽지 않습니다.”

“……방화인가.”

자작이 이를 갈았다.

그의 말을 입증하듯, 반대편에서도 병사 한 명이 새로운 화재를 보고하러 달려오고 있었다.

“우연이 아니다. 이건 방화야. 대공께서 자리를 비우신 틈에 반란을 일으키려는 자들이 있다. 비상 체제로 들어간다. 모두 깨워! 반은 화재 진압으로, 반은 방어 체제로 돌입한다. 성문을 걸어 잠가!”

그는 급히 성루 위로 올라가며 계속해서 외쳤다.

“내성 문도 외성 문도 모두 봉쇄해! 화재는 내부에서 진압한다. 공격에 대비해! 그리고 당장 방화범을 찾아내, 또 다른 곳에 불을 내기 전에 얼른 잡아!”

성내에 요란하게 댕댕댕댕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 *. *. *. *.

소파에 누워 자고 있던 아를렌의 귀에도 종소리가 들려왔다.

막 잠에서 깬 그녀의 눈에, 방 안에서 불침번을 서고 있던 하녀 둘이 의자에서 일어나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얼핏 보였다.

“아까부터 시끄럽더라니, 무슨 일 났나 봐.”

“잠깐만, 내가 물어보고 올게.”

한 하녀가 얼른 문을 열고 문밖에 있던 기사와 뭐라 뭐라 얘기하는 것을 보면서, 아를렌은 손으로 소파를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아,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좀 시끄럽죠? 별일 아닐 거예요.”

별일이 아닐 리가. 아직 잠에서 덜 깬 듯 아무 표정이 없는 아를렌은, 손으로 이불을 꼭 움켜쥐었다.

그사이, 문 앞의 기사와 짧은 얘기를 끝낸 하녀가 돌아왔다.

“뭐래?”

“비상이니까 일단 방 안에 있으래. 여기 방 안이 제일 안전할 거라고…… 무슨 일인지 모르겠대. 누가 쳐들어온 거 아냐? 무서워.”

“누가 쳐들어와? 전쟁이 난 것도 아니고, 여긴 국경 지대도 아니잖아.”

“무슨 소리야. 지금 주인님도 반란 진압하러 가셨잖아. 여기라고 반란이 안 일어난다는 법이 어딨어. 여기도 원래는 그 학살당한…… 쩝.”

생각 없이 말하던 하녀가 입을 막았다. 지금 자신이 모시고 있는 아가씨가 바로 그 학살당한 루체른가의 혈육이라는 사실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창밖에서 여기저기 고함 소리들이 들려왔다. 아를렌은 완전히 상체를 일으켜 제대로 앉았고, 그 모습을 본 하녀가 그녀의 슈미즈 위에 숄을 둘러 주었다.

“그럴 게 아니라 제대로 옷을 입고 있자. 비상이라잖아. 갑자기 대피할 일 생기면 어떡해.”

다른 하녀가 그 말을 하며 얼른 겉옷과 신발들을 챙겨 가지고 왔다. 서둘러 아를렌에게 겉옷을 입히고 신발을 신긴 후, 자신들도 겉옷을 걸치기 시작했다.

옷을 다 차려입은 후 한 하녀가 창가에 붙어서 바깥을 내다보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창밖이 매우 시끄러운 것과 대조적으로, 방과 복도는 매우 조용했다. 온 성 안에서 사람들이 뛰어다니고 있었지만. 깊고 깊은 안쪽 내실인 그녀의 방 근처에는 소집된 사람들이 뛰어 지나갈 일조차 없었다.

사람들이 다들 불을 끄러, 그리고 성벽을 지키러 나간 지금 이 근처에 남은 사람은 그저 그녀의 방문 앞을 지키고 있는 기사 한 명과 이 방 안의 하녀 두 명이 전부였다.

소란스러운 고요 속에서 아를렌은 머리카락을 가다듬었다. 자느라 흐트러진 머리의 리본을 풀어 손가락으로 빗질하여 단정하게 모은 후. 간단하게 땋아 내리고는 다시 리본으로 묶었다.

초조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셈하며, 머리카락의 끝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고, 신발 속의 발을 꼼짝거렸다.

아를렌은 후계자가 아니었기에 비밀통로라 하더라도 하나밖에 알지 못했다. 그녀가 알고 있던 비밀통로는 그녀의 방에서 가장 가까운 곳 단 한 군데뿐이었고, 그나마도 오로지 탈출용이었다. 내부에서 외부로 나가는 일방통행로였지,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용도로는 쓸 수 없었다.

그러니까…….

‘무사히 들어올 수 있을까…….’

그녀는 그저 언제든지 바로 나갈 수 있도록 준비를 끝내 놓은 후,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문득 그녀는 눈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왔다 갔다 하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하녀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금 바닥의 카펫으로 시선을 내렸다.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었다. 자신이 사라진 후 저 하녀들이 어떻게 될지 같은 건……. 더 이상 그녀에게는 레퀴에스의 사람들을 걱정할 여유도, 그럴 만한 마음도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그런 마음은, 그녀가 아젠과 함께 도망 다니던 지난여름, 그가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상대 기사의 죽음을 바라던 시간들에, 자신의 손으로 다른 사람의 살을 뚫고 단검을 박아 넣었던 순간에 한 올 한 올 풀려 나가다가, 결국에는 자신이 아끼던 사람들이 거의 다 죽어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던 때에 갈기갈기 찢겨져 사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고요를 뚫고 무언가 이질적인 소리가 방문 밖에서 울려 퍼졌다.

무언가 빠르게 소리들이 교환되더니, ‘억.’ 하는 소리와 함께 쿵 하고 무너지는 소리가 났고, 세 여자가 동시에 문을 바라보고 있는 와중에 방문이 벌컥 열렸다.

소리를 지를 기세였던 두 하녀는 들어온 사람이 낯익은 병사 군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안심한 듯했으나, 그 병사는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더니 곧장 한 하녀의 뒷목을 쳐서 기절시켰다.

그를 본 다른 하녀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하려던 찰나, 순식간에 그 하녀의 곁으로 도약한 병사의 손에 이내 무너져 내렸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누군가 지나가고 있었다면 잠시 고개를 갸웃하고는 그대로 지나갈 법할 정도로 조용하고 신속했다.

병사는 그대로 다시 방문 밖으로 나가, 밖에 쓰러져 있던 기사의 몸을 들쳐 엎고 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방 안 구석에 던져 넣었다.

그러고 나서 야 그는, 소파에 가만히 앉아 그 모든 모습을 녹안에 담고 있던 그의 아가씨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빠르게 한쪽 무릎을 꿇고 한 손을 청해 입을 맞추었다.

“모시겠습니다.”

“응.”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그는 재빠르게 그녀를 안아 들었다. 왼팔과 왼쪽 어깨에 그녀를 살짝 걸치자, 그녀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가는 길이 조금 험합니다.”

“괜찮아.”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긴장되고, 떨리고, 겁이 나지만, 더 이상 아무 후회도 망설임도 없었다.

아젠은 방문을 닫고 나섰다. 복도는 조용하고, 아무도 없었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한둘일 테니 제압하는 데 자신이 있었다. 비밀통로의 입구는 그닥 멀지 않았다. 애초에 루테른 공작이 이 비밀통로를 그녀에게 알려 준 이유가 그녀의 방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 *. *. *. *.

아이솝 자작은 이곳저곳에 난 화재를 진압하는 한편 성의 방비를 단단히 하고 곧 닥쳐올 습격을 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불은 잘 꺼지지 않았다. 미리 사전에 작업을 해 놓고 일부러 불을 지른 것이 틀림없었다. 도대체 언제 어디로 새어 들어온 놈들인지. 기사단이 빠져나간 후로 방비에 구멍이 생긴 틈을 노린 게지.

한창 온갖 사람들이 다들 물통과 모래 통을 들고 뛰어다니고, 비번 없이 모든 기사들이 성벽을 지키고 있던 와중에, 집사가 다가왔다.

“자작님, 혹시,”

“뭐야.”

또 어디서 무슨 사건이 터졌나 하고 자작은 예민해졌다.

“아가씨의 신변은 확인해 보셨습니까?”

“아가씨? 무슨 아가씨?”

“그……루테른 아가씨 말입니다.”

“뭐?”

자작은 기가 막혔다.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 기껏 바쁜 와중에 와서 한다는 소리가…….

“내가 지금 저하의 시침녀 따위의 안부까지 신경 써야 하나?”

“그게 아니라,”

“저하의 연약하신 애첩께서 이 소란 통에 혹시 놀라지 않으셨나 안부라도 여쭤보러 가야 하나? 응?”

“자작님,”

“집사, 제정신인가? 지금 성이 공격받고 있는 게 안 보이나? 모두가 이렇게 바쁜데 집사는 한가해? 성에 화재가 발생하면 총괄해서 진압하는 것이 집사의 역할 아닌가? 여기는 내가 보고 있으니 집사는 마사로 가 보게. 지금 당장.”

그 말을 끝으로 한기를 풀풀 풍기며 몸을 휙 돌려 버리는 자작에게 집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작의 말이 맞기는 맞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기에는 찜찜하지 않은가.

대공이 그 아가씨에게 행했던 모든 조치는 집사의 손을 거쳐 실행되었다. 그 모든 감금도 감시도 호강도 사치도. 그래서 집사는 그의 주인이 얼마나 그 아가씨의 신변에 예민하게 반응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주인님이 여기 계셨다면 불이 오르는 순간 제일 먼저 아가씨에게 기사들을 보내셨을 것이다.

그러나 일개 집사에게 기사들을 다룰 권한 같은 게 있을 리가.

그는 자작의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마사로 향하다가, 마침 옆을 뛰어가고 있던 병사 한 명을 붙잡았다.

“자네는 루테른 아가씨의 방에 가서 아가씨께서 잘 계시는지 한번 확인해 보게.”

.*. *. *. *. *. *.

“괜찮으세요?”

한 손으로는 횃불을 들고, 한쪽 팔에는 그의 소중한 아가씨를 들쳐 안은 아젠은 수시로 아를렌의 안부를 확인했다.

비밀통로는 너무나 어둡고, 공기도 좋지 않았으며, 지독한 냄새가 났다. 그녀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은 온갖 생물들이 횃불이 다가오면 순식간에 도망치는 모습들이 선명했다.

“응, 난 정말 괜찮아. 걱정하지 마.”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괜찮았다.

“오히려, 좋은 걸.”

만약 혼자였다면, 무서워서 한 걸음도 떼지 못했으리라.

만일 카쉬엔과 함께 왔다면, 지옥으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했겠지. 혹은 이미 지옥이라고.

하지만, 지금 끌어안고 있는 사람은 평생 그녀의 곁을 지켜 준 아젠이었다. 이 길은 분명 어둡고 답답하고, 가도 가도 끝이 없었지만, 그를 끌어안고 있자니 이 좁고 어두운 길을 지나는 것도, 마치 산도를 통과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어두운 길을 통과하고 나면. 그 끝에는 빛이 있을 거고, 숨을 쉴 수 있는 세상이 나올 거라는 확신.

그리고, 마침내, 그 끝이 나왔다.

통로는 슈엘 성 바깥의 숲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곳에는 아젠이 미리 준비해 둔 말 두 필과 간단한 짐이 있었다.

아젠은 아를렌을 조심스레 말 위에 올린 후 그 뒤에 같이 올라타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소중하게 안고, 다른 손에는 고삐를 움켜쥐었다. 이내 그들은 힘껏 달려 금방 숲 밖으로 벗어나 들판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아를렌은 밤하늘에 펼쳐져 있는 무수히 많은 별들을 하염없이 올려다보았다.

잊고 있었다. 하늘이 저토록 넓다는 것을. 별이 저토록 많다는 것을.

그동안에도 창가에 앉아서 밤하늘을 올려다본 적이 없지 않은데, 어째서 이토록 다르게 느껴지는 것일까.

“아침까지 계속 달려야 합니다. 제가 꼭 안고 있을 테니 아가씨는 제게 기대어서 주무세요.”

그 말에 아를렌이 조용히 웃었다. 예전에 이미 여러 번 들어 본 말이었다. 시간이 지났어도 너는 언제나 같은 이야기를 하네.

그렇구나. 돌아온 거구나.

이미 돌아갈 가족도 집도 모두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던 사람들은 모두 살해당했고, 애정과 추억이 가득했던 집은 어느 사이엔가 괴물의 아가리가 되어 버렸다.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 내가 돌아갈 수 있는 곳이 한 곳 남아 있었구나.

마지막으로 남은 유일한 곳.

별이 쏟아지는 광활한 밤하늘 아래, 두 사람을 태운 말이 달려갔다.

아를렌은 뒤로 편안하게 기대어, 그 품 안에 폭 안기었다. 아젠의 팔에 힘이 들어가, 그녀를 꼭 끌어안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웠던, 낯익은, 그러나 오랫동안 맡지 못했던 체취에 파묻혀서,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 누가 보아도 불편할 수밖에 없는 잠자리였지만, 그녀는 실로 오랜만에 편안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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