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재회
겨울바람이 몰아치고 푸르스름한 반달의 빛만이 존재하는 싸늘한 밤, 한 남자가 어둠을 틈타 높은 나무 위에 앉아 있었다.
온통 검은색으로 둘러싼 그의 모습은 어두운 밤 까만 나뭇잎들 사이에 거의 완벽하게 숨겨져 있었다.
그는 맞은편 높은 담장 너머 멀리 보이는 성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중 한 방을. 그 방 발코니의 커다란 유리문 너머를.
그 멀리 있는 방 너머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미동도 않고, 한참 동안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마 아무것도 볼 수 없을 거다. 그도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볼 수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라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모래알 같은 희망 때문에 그는 거의 매일 밤 겨울바람의 추위를 무릅쓰고 이곳에 앉아 있었다.
문득, 발코니 너머 방 안쪽에 하얀 무언가가 어른거렸다.
‘그녀다.’
그는 알 수 있었다.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본능보다 더 강한 무언가가, 강렬하게, 저 흔들리는 하얀 인영이 그녀라는 것을 확신했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저절로 손에 주먹이 쥐어졌다.
선명히 보이는 얼굴이 아니라 하더라도, 너무나도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발코니 문 쪽으로 점점 그녀가 다가왔다.
자기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
확연히 절뚝거리고 휘청거리는 모습이 결코 성한 몸으로 보이지 않았다. 몸뿐이랴, 마음도 성치 않겠지. 저 안에서 그녀가 어떤 꼴로 어떻게 말라 죽어 가고 있을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그가 아니었던가.
분노가 치솟았다. 지금 당장 저 안에 쳐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래 봤자 개죽음당하는 모습을 그녀의 앞에 보여 주기만 할 거라는 이성이 그를 간신히 막았다.
……그건 절대 안 된다. 절대로 안 되는 일이었다. 전생에, 이미 죽어 가고 있던 그녀를 결정적으로 죽인 것은 그 호위 기사가 죽는 모습이었으니까. 그는 결코 그런 짓을 반복시킬 생각은 없었다.
잠시간 분노를 참던 그는, 어쩌면, 그녀가 문을 열고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숨을 멈춘 채 발코니를 주시했다.
드디어 문이 살짝 열리려고 하는 찰나에,
그 뒤쪽에서 다가온 다른 인영이 그녀를 낚아채 안쪽으로 멀어져 갔다.
누군가 심장을 콱 움켜쥐는 듯한 느낌과 함께, 이가 아드득 갈렸다. 주먹 쥔 손에 핏줄이 확 불거졌다.
유리문 너머로 아른거리던 두 인영이 안쪽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 후까지 아젠은 그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 그녀가 휘청거리는데도, 바로 눈앞에서 그놈이 그녀를 낚아채 가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노려보기만 하고 있는 그 자신에 대한 혐오와 좌절에 온몸이 욱신욱신 저렸다.
하지만, 그는 그저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심호흡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실력 좋은 기사들이 겹겹이 에워싸 지키고 있었고, 그가 조금만 방심하면 누군가 그의 기척을 눈치챌 것이기에.
그래, 어쨌든 그녀는 살아 있었다.
살아 있으니까, 일단은, 봤으니까…….
잠시 주먹을 움켜쥐며 분노를 참던 그는, 조용히 나무에서 뛰어내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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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손이 막 발코니 문의 손잡이에 닿던 참이었다.
“어딜 가려고?”
뒤에서 단단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그러나 강하게 휘감아 잡아채었다.
그녀의 등이 카쉬엔의 품 안에 감겨 들어가며, 목덜미 뒤쪽으로 뜨거운 숨결이 와 닿았다.
손잡이를 향해 뻗던 그녀의 손은 손잡이에서 멀어진 채 그 모양 그대로 멈춰 있다가, 마치 꽃잎이 시들어지듯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같이 달구경이라도 할까? 응?”
목덜미에서 카쉬엔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녀는 여전히 미동 없이 멈춰 있었다.
어차피 그런 낭만적인 목적으로 그녀가 발코니를 향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건,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진짜 목적에 대해, 아를렌은 말하고 싶지 않았고, 카쉬엔은 듣고 싶지 않았다.
달빛을 받으며 끌어안고 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속을 모르고 겉으로만 보기엔 제법 로맨틱하게 보였다.
카쉬엔은 잠시 그녀의 머리카락에 코를 댄 채 그녀를 끌어안고 서 있다가, 문득 유리문 밖을 노려보았다. 잠시간 그대로 보이지 않는 저 너머를 향해 대치하던 그는, 잠시 후 거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고 침대로 향했다.
더 이상 그녀는 그의 손이 닿는다고 해서 덜덜 떨지도, 그가 안아 든다고 해서 버둥대지도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전혀 알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는 인형처럼, 그냥 몸을 맡긴 채 중력대로 축 늘어져 흔들릴 뿐.
침대 위에 그녀를 내려놓자 그녀가 마치 본능처럼 돌아누우며 그에게 등을 보였다. 카쉬엔은 조용히 그 옆에 앉아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잠시 기다렸다.
그녀는 금방 잠들리라.
의식을 차리고 있는 시간 자체를 버거워 하고 있는 그녀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순식간에 잠들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금방 잠들었다.
그녀가 잠든 것을 확인하자마자, 그는 성큼성큼 걸어 방문을 열었다. 방문 바로 앞에 대기 중이던 기사가 바로 카쉬엔에게 경례를 했다.
“밖에 경비를 강화해. 기사들 순찰 돌려. 혹시 누군가의 흔적이 남아 있으면 추적해.”
“네, 주군.”
“그리고, 오늘 발코니 문을 제대로 잠그지 않은 하녀, 찾아서 잡아놔.”
기사가 명을 전하러 급히 뛰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그는 다시 문을 닫고 침대로 돌아왔다.
방 안으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달빛에 그녀가 옆으로 누워 있는 실루엣이 그대로 비쳐 보였다. 침대에 올라와 옆에 누운 그의 손이 그 실루엣을 따라 그녀의 귓바퀴부터 목선을 지나 어깨를 타고 내려가며 쓰다듬었다.
가냘프다 못해 앙상해진…….
지난 몇 달 동안, 그녀는 나날이 약해지고 말라가서, 그러잖아도 가늘던 몸은 이제 정말 가볍고 앙상했다.
사람이란 것이 원래 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을 카쉬엔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사람이란, 그 어떤 사람이라도, 칼 좀 맞고 나면 그대로 허무하게 숨이 끊어져 버리는 한없이 약한 존재였다.
하지만 아무 부상도 병인도 없이, 이렇게 그냥 죽어 갈 수도 있다는 것을 그는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근래 그녀는 거의 하루 종일 잠들어 있었고, 서 있는 시간은커녕 앉아 있는 시간조차 드물었다.
품을 빠져나가 절뚝이며 어딘가로 걸어가는 것을 알았음에도 발코니 문을 열려고 하기 전까지는 그냥 두고 보고 있었던 것도, 그녀가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을 너무 오랜만에 보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 보기 드문 그녀의 의지라는 게 항상 삶과 반대되는 쪽을 향한다는 것이 문제였을 뿐.
지난여름과 가을, 수도의 대공저에서 지내던 동안, 그녀의 병세는 나날이 더 안 좋아졌다. 의사들은 계속하여 약의 조합을 바꾸어 보고 의학 서적을 뒤져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해 보았지만, 그녀의 몸 상태는 차도를 보이기는커녕 점점 더 악화되어 갔다.
여러 의사가 쫓겨나고 새로 불리어 온 후 다시 쫓겨나기를 반복했다. 그 와중에 그녀는 음식은 물론 약조차 목구멍을 제대로 넘기지 못하여, 새로 온 의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처방하여 값비싼 약재를 동원해 만든 약들은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버려지기 일쑤였다.
안절부절못하던 의사들은, 겨울이 오기 전에 그녀의 고향인 남부로 돌아가서 요양을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지나치게 약해져 있는 아가씨의 몸이 수도에서 추운 겨울을 버틸 수 있을지 걱정되기도 하고, 병의 원인이 마음에 있으니 낯익은 환경에서 요양하는 것이 아무래도 낫지 않겠냐는 이유였다.
「아무래도 정신적 충격이 너무 크신 것이 원인인지라……. 」
쩔쩔매며 말하던 의사는 결국 말을 흐렸다.
피비린내 가득한 전장에서도 아무렇지 않았던 카쉬엔은 이해하기 힘들었으나…….
‘하긴 작은 토끼들의 경우 놀라서 죽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
그녀는 작고 약하고 섬세한 동물이니까.
굳이 그런 얘기를 하지 말 걸 그랬나 라든가, 어미나 유모 하나 정도는 살려 둘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잠시 들었으나,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어찌 되었건 그런 이유로 수도에 남아 달라는 왕세자의 애원을 뒤로하고 슈엘로 옮겨 왔으나, 그녀는 별다른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낯익은 환경이 더 나을 거라는 말에 일부러 그녀가 살던 슈엘 내성에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때때로는 오히려 더 안 좋아 보이기도 했다.
영양가 가득한 온갖 다양한 음식들로 테이블을 채우고 온갖 명의들과 영약들을 다 긁어모아 바쳤는데 어째서 점점 더 약해져만 가는 거지.
어떻게 해야 널 이곳에 붙들어 둘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의 팔과 다리를 그녀의 작은 몸에 얽어 그의 품 안에 가두어 넣었다. 힘주어 꼭 끌어안자, 가녀린 몸이 그에게 파묻혔다.
그녀는 움찔거리지조차 않았다. 마치 죽은 것처럼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래도, 내 품 안에, 살아 있다. 피부는 부드럽고 향긋했고, 따뜻한 피가 흐르는 혈관에서는 약하게나마 맥박이 느껴졌다. 가슴 속에서 작은 심장이 애써 뛰고 있었다.
……설령 네가 죽는다 하더라도 네 시체도 놔줄 생각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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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군. 왕세자 저하께서 또 파발을 보내셨습니다. 이번엔 정말로 수도에 가 보셔야 합니다.”
하르드의 말에, 카쉬엔은 톡톡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못마땅한 듯 미간에 주름이 잡혀 있었으나, 하르드는 어쨌든 주군도 수도로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여자의 옆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으시겠지만.
주군이 그 여자에게 미쳐 있다는 사실은 북부에 있던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주군이 그 여자에게 눈이 멀어 아둔해진 적은 없었다. 게다가 그 여자를 계속 잡아 두기 위해서라도 권력을 유지하는 게 필요하다는 것도 잘 알고 계실 것이다.
비록 하르드는 이제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는 주군이 그 비쩍 말라 죽어 가는 여자 한 명에게 왜 그렇게까지 집착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찌 되었건 그 여자를 차지하는 과정에서 주군은 최고의 자리에 가까워지고 권위와 권세를 손에 넣었으니, 그 정도는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이 바람직한 신하의 도리일 것이다.
“내일 오후에 출발하도록 하지. 준비시켜. 기사는 열만 데려가고 나머지는 남긴다.”
“……네, 주군.”
물론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 여자를 놓고 가는데 그 정도는 당연히 예상했다. 어차피 그 여자가 사라지기라도 하면 곤란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주군은 다른 일을 모두 내팽개치고 또 그 여자를 쫓아갈 테니. 지난여름처럼 잔당의 뒤처리고 왕세자의 명령이고 뭐고 다 무시하고 그 여자의 뒤만 쫓아 달려가야 했던 일은 그때 한 번으로 족했다.
“그런데 주군,”
자리에서 일어서던 카쉬엔이 하르드를 돌아보았다.
“주제넘은 질문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으나, 미리 계획을 짜 두는 데에 필요해서 여쭙니다. 그 아가씨……를 대공비로 맞이하실 겁니까?”
“……흐음……."
카쉬엔이 잠시 멈춰 섰다.
“……저는 반대하지 않습니다. 루테른 공작령의 남아 있는 가신들과 영지민들을 아무 반발 없이 흡수하기에 괜찮은 방법이기도 하고요.”
비록 하르드는 그 여자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그 여자보다 훨씬 나은 대공비 후보를 여럿 들 수 있었으며, 그 여자를 향한 주군의 집착은 비정상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차피 그 집착을 떨어트릴 수 없다면 차라리 이용하고 계획에 포함시키는 게 나았다. 여태껏 그래 왔듯이.
“아시다시피 루테른 공작가는 워낙 유서가 깊다 보니 영지에 뿌리 깊게 남아 있는 충성심이 있고, 특히 공녀를 향한 여론은 매우 좋았으니까요. 역사적으로도 왕가를 전복하고 나면 신왕이 전왕가의 왕녀와 결혼함으로써 사람들의 반발을 최소화하는 것은 흔한 전략이죠. 다만 미리 알려 주셔야그에 맞춰 계획을…….”
그러나 의외로 그의 주군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글쎄.”
“그럼……?”
“그녀 외의 대공비는 없다.”
“아…….”
하르드는 그럼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어진 말은 다소 의외였다.
“그러나 그녀를 굳이 대공비의 자리에 앉힐 필요는 없지.”
“……네?”
하르드는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카쉬엔은 딱히 더 이상의 설명을 붙여 주지 않고 집무실 밖으로 향했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집사가 바로 따라붙었다.
“집사, 나는 내일부터 며칠간 자리를 비운다. 아를레네를 잘 지키고.”
“물론입니다. 주인님이 계실 때와 다름없이 모시겠습니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서 아를렌의 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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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를렌은 공녀 시절 쓰던 방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다만 달라진 부분들은 분명 있었다.
예를 들면 방문 앞에 언제나 기사가 지키고 있고, 방문 안은 언제나 하녀들이 지키고 있으며, 모든 문은, 방문도 창문도 발코니 문도 항상 잠겨 있다던가, 방 안에는 뾰족한 것도 날카로운 것도 깨질 수 있는 것도 모두 치워졌다는 것 같은…….
그가 방문 앞을 지키던 기사의 인사를 받으며 방 안으로 들어가자. 그는 금방 창가의 의자에 앉아 햇빛을 받으며 잠들어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그가 성큼성큼 걸어 아를렌에게 다가가자, 그녀의 주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녀들이 살짝 거리를 벌리며 물러섰다.
얼굴에 햇빛을 받으며 각로를 발치에 두고 담요를 두른 채 의자에 폭 파묻혀 잠들어 있는 그녀의 모습은 어찌 보면 평화로워 보였다. 안색이 좋지 않으며 살이 내린 몸이 수척해 보인다는 것을 생각지 않는다면.
근래 그녀는 항상 잠들어 있었다.
깨어 있을 의지가 없는 것 같았다. 잠시 깨어나더라도 생기 없는 눈으로 초점을 흐린 채 멍하니 앉아 있다가 다시 잠들곤 했다.
그 와중에도 정신이 들 때마다 움직이기 힘든 몸으로 어떻게든 침대에서 벗어나려 하는 것이 가련하면서도 괘씸했다.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침대에서 편하게 자느니, 불편하게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자는 편이 차라리 낫다는 건가.
어젯밤의 일이 떠올랐다.
물론 위험했던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녀에게는 홀로 무언가를 할 기회를 주지 않으니까. 밤에 잘 때도 그녀를 품 안에 가두고 자고 있으니, 어젯밤에도 그녀가 품에서 벗어나려 하는 순간 바로 알았었고.
그러나 조금이라도 자유를 쥐여 준다면 어떻게 될지.
그러니, 그녀는 안전한 곳에 가둬 놔야 했다. 안전한 방 안에. 나의 성 안에.
그는 문득 하르드의 제안을 떠올리고 삐뚤게 웃었다. 대공비라니, 그렇게 많은 권리와 기회를 쥐여 주고 풀어 줄 리가. 풀어 주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히 아는데.
많은 시간이 지나고 그녀가 온전히 마음을 돌린 후라면 또 모르겠지만.
……그래, 온전히 마음을 돌리면.
옆에서 찬란한 티아라를 쓰고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어 주는 모습을 상상해 보니, 기억도 희미한 가슴 속 어딘가가 물컹하니 느껴진다. 가슴 속이 술렁이고, 심장이 아릿하다.
분명 그런 시절도 있었다. 그 맑게 빛나는 투명한 초록색 눈으로 자신을 마주 보고 활짝 웃어 주던 시절. 그 노랫가락처럼 달콤한 목소리를 쉼 없이 들려주며, 그 따스한 손길로 상처를 어루만져 주던 시절.
그는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만이었나.
「환자 본인이 살려고 하지 않으니 사람의 힘으로는 살릴 수가 없습니다.」
한 의사가 눈을 질끈 감고 벌벌 떨며 내놓던, 이른바 진실이라던 말도 뇌리에 떠올랐다.
잡아 두기만 해서 오히려 잃어버리는 거라면, 살짝 풀어 주는 시늉이라도 해 줘야 하려나.
“뭔가 흥미로울 만한 일이 없나?”
“네?”
주인의 앞뒤 없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한 발짝 뒤에 떨어져서 대기하고 있던 애나는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녀가 흥미를 느끼고 관심을 보일 만한 일.”
“아…… 음…….”
애나는 잠시 더듬거렸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지만, 주인의 의도는 이해했다. 하지만 이 아가씨는 애나가 처음 본 바로 그 날부터 이런 상태였으니까, 무언가를 좋아하거나 관심을 보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 원래 무엇을 좋아했었을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애매한 일반론을 꺼내었다. 일단 주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 정도부터 …….
“보통 이 정도 나이의 귀족 아가씨들은 드레스나 보석 같은 걸 좋아하시곤 합니다만…… 아니면 애완동물을 키운다거나요.”
주인이 가만히 듣고 있자, 조금 더 용기를 낸 애나가 좀 더 생각하던 것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가씨께는 아무래도 외출이 필요합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필요하고요. 의사들도 아가씨께 외출이…….”
“그럼 드레스상을 불러.”
“……네.”
“내일 오전 중에 부르면 좋겠군. 내가 떠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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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테른 공작령의 영도 슈엘은 평화롭고 번성한 도시였다.
슈엘 사람들의 할머니의 할아버지의 할머니 시절부터, 이 땅은 루테른 공작가의 땅이었고, 그들의 영주는 루테른 공작이었다.
그것은 너무 오래전부터 당연한 사실이라, 아무도 의심해 본 적도 없고, 작년에도 그랬으며 올해도 그러하며 내년에도 그럴 것이고, 그들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랬으며 그들이 그랬고 그들의 손자 손녀들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늘이 위에 있고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다행히, 그들의 영주님은 좋은 편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형편이 이웃 영지민들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어차피 영주를 고를 수 없는 입장에서, 좋은 영주님을 만나서 상대적으로 평화롭게 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지난여름, 일단의 기사단과 군사들이 왕명이 적힌 칙서와 함께, 루테른 공작의 인장이 찍힌 명령서를 들고 찾아왔다. 슈엘 성을 지키던 기사들은 의아했지만, 주군의 인장이 찍힌 것을 보고는 성문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을 내성까지 받아들인 후, 그들의 명령에 따라 내성 밖에 머물던 가신들까지 모두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날 밤 내성에서는 학살이 일어났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오랜 세월 아름답고 고고하게 서 있던 성에는 피의 강이 흘렀고, 대를 이어 충성을 바쳐 오던 가신들, 기사들, 그리고 상당수의 사용인들까지 하룻밤 사이에 시체로 변하였다.
하늘이 뒤집히고 해가 서쪽에서 뜨듯, 영주님이 바뀌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건 그 다음이었다. 왕국의 역사보다 길게 이어져 내려오고 앞으로도 왕국보다 더 오래 갈 것 같았던 루테른가가 모두 몰살당하고 효수되었다는 믿을 수 없는 소식이 전해졌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여름이 지나고, 여전히 충격이 가시지 않은 가을이 지난 후, 겨울이 거의 다 되어서야 영지민들은 바뀐 일상에 적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날이 추워지고 겨울이 성큼 다가오던 어느 날, 그들의 영지를 뒤집어엎은 장본인인 레퀴에스 대공이, 그들의 사랑스러웠던 아가씨를 끌고 슈엘에 내려왔다.
영지민들은 우르르 몰려 나가 그 살벌한 정변의 주인공이자 그들의 새로운 영주인 대공의 입성 행렬을 구경했다. 대공의 주위를 그 학살의 주인공인 기사들이 기세등등하게 둘러싸고 있는 한편으로, 삼엄하게 경비 되고 있는 마차가 하나 눈에 띄었다.
살아남았다는 아가씨가 저 안에 들어 있지 않을까 하고 사람들이 기웃거렸지만, 창문은 조금도 열리지 않았고, 아무도 아가씨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시일이 지나도, 영지의 그 누구도 아가씨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내성에서 일하고 있는 사용인들도 아무도 보지 못했다고 했다.
아가씨의 방을 항상 삼엄하게 지키고 있고, 그 안으로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는 것을 보면, 분명 안에 누군가가 있는 것은 맞는 것 같은데 아무도 보지 못했다.
그 방에 직접 드나드는 사람들은 수도 바에룬에서부터 대공이 직접 데려온 사람들뿐인데. 그들은 입이 워낙 무거워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사실 아가씨도 이미 돌아가신 거 아냐? 근데 혹시 반란이라도 일어날까 봐 아가씨라도 살아 있다고 거짓말하고 있는 거 아냐?」
라는 소문까지 돌던 즈음.
예전에 공작가에서 종종 부르던 드레스 상인 푀르 부인이, 성의 새 주인에 의해 오랜만에 내성으로 불리었다.
푀르 부인은 내성에서의 갑작스러운 호출에 급하게 조수들을 불러 모아 드레스와 원단들을 챙겨야 했다.
누구를 위한 드레스인지 언급은 없었다. 그러나 레퀴에스 대공을 대리하여 지난 몇 달간 슈엘과 인근 영지를 관리하고 있던 아이솝 자작에게는 아내도 딸도 애인도 없었고, 그렇다 보니 귀부인을 위한 드레스상을 부른 적도 없었다.
그러니 어쩌면 드레스의 주인은 소문의 아를레네 아가씨가 아닐까 하는 짐작을 하면서, 푀르 부인과 조수들은 몇 달 전에 보았던 아가씨를 염두에 두고 드레스를 준비하였다.
‘어쨌든 정말 살아 계시기는 했던 모양이지.’
푀르 부인과 조수들은 실로 오랜만에 내성 안을 밟았다. 불과 몇 달 전에 학살이 벌어졌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내성은 반짝반짝하고 화려했다. 이전에 비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싶으면서도, 여기저기 이것저것이 변해 있는 것도 눈에 띄었다.
홀 안에 드레스와 원단들을 진열하고 잠시 대기하고 있으니, 잠시 후 대공 저하가 드신다는 말과 함께 문이 열렸다.
그들은 일단 문 쪽을 향해 서서 고개를 조아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면서 본 모습에 헉 소리를 내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이게 무슨…….’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완전히 달라진 아가씨가, 레퀴에스 대공의 품에 안긴 채 들어오고 있었다.
안색도 몸체도 품새도 원래 보던 아가씨와 너무 달라서 처음엔 알아보지 못했을 정도였다. 창백한 안색에 비쩍 마른 모습이 시체를 떠올리게 하였고, 항상 웃고 있던 생기발랄하던 얼굴은 마치 유령의 것처럼 허여멀건 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모습보다도, 대공에게 안겨 들어오는 모습이 더 놀라웠다. 스스로 걸을 수 없을 만큼 몸이 성치 않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손님 앞에서 저렇게 안겨 다닐 리가 없다.
도대체 아가씨의 상태가 얼마나 안 좋길래 저렇게 안겨 다니신단 말인가. 그리고 저 악명 높은 피의 대공은 왜 직접 아가씨를 안고 다니는 것인지.
푀르 부인은 일단 침을 꿀꺽 삼키며 표정을 관리하려 애썼다.
대공이 아를렌을 미리 준비된 장의자에 앉히고 그 옆에 앉더니, 고개를 끄덕여 진행을 독촉했다.
푀르 부인은 능숙하게 웃는 낯을 얼굴에 씌운 후, 우아하게 인사를 하고 조수들을 부려 상품들을 하나하나 보여 주고 설명하면서, 흘끗흘끗 두 귀빈의 모습을 살폈다.
“이쪽은 아가씨께서 즐겨 찾으시던 브루뎅 실크로 만든 외출용 드레스예요. 아무래도 요즘처럼 눈이 오고 추운 겨울날에는 이렇게 백여우 모피를 둘러 주시면 색이 정말 잘어울리죠!”
우선 연푸른색의 드레스를 선보이며 한참 설명을 늘어놓은 푀르 부인은, 다음 드레스로 옮겨 가며 말을 이었다.
“이 드레스는 아가씨께 색이 아주 잘 받을 거예요. 아가씨께서 원래 즐겨 찾으시던 연노란색을 바탕으로 해서 색 조합을…… 이 디자인에 원단만 이렇게 바꿔도……
그러나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몰골의 아가씨는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부인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고, 대공은 애당초 드레스에는 그닥 관심이 없는 듯 아가씨의 머리카락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두 귀빈 모두 관심이 없는 상태에서 열심히 설명을 한 푀르 부인은, 마침내 말을 마치고 질문을 던졌다.
“그럼 무엇을 먼저 입어 보시겠어요?”
여전히 아를렌이 아무런 반응이 없자, 눈치를 보던 애나가 먼저 나서서 옷을 골랐다.
“거기 오른쪽에서 세 번째. 노란색 드레스를 한번 입어 보시지요.”
부인이 빠르게 조수들에게 눈짓하자, 조수 중 한 명이 빠르게 노란 드레스를 모형에서 꺼내어서 들고 다가왔다.
“그럼 아가씨, 이쪽으로……,”
옷을 갈아 입히기 위해 칸막이 안쪽으로 조수가 드레스를 들고 이동하자, 하녀 한 명이 바로 아를렌의 옆에 붙어 부축을 시작했다.
아를렌이 발을 절뚝이며 하녀에게 반쯤 기댄 채 칸막이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자, 흘끗 그녀의 발목을 바라보던 부인이 칸막이 안쪽으로 같이 이동하며 물었다.
“그런데 아가씨 발은 어쩌다 그렇게……”
“쓸데없는 질문은 하지 마세요, 부인.”
뒤에 있던 애나가 바로 자르자, 푀르 부인은 눈을 부드럽게 휘며 맑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내었다.
“아가씨의 몸 상태에 따라 맞춤으로 옷을 권해 드려야 해서요. 아가씨께서 발이 금방 나으실 것 같다면야 별문제가 없겠지만, 앞으로도 계속 발이 불편하실 것 같다면 열 폭 원단을 다섯 겹으로 둘러 만든 무거운 연회 드레스 같은 것은 아무래도 피하시는 게 좋으니까요. 그보다는 가능한 한 가벼운 옷으로 보여 드릴까 합니다. 그리고 드레스에 맞춰서 구두도 권해 드려야 하는데, 발 상태에 맞추어 구두를 고르는 것은 매우 중요하거든요.”
“……아가씨의 발 상태를 고려해서 권해 주세요.”
애나가 카쉬엔을 흘끗 보면서 대답했다. 다행히 주인은 별 반응이 없었다.
한참을 걸려서 드디어 옷을 갈아입고 나온 아를렌을 보고, 카쉬엔은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비록 허리 품이 맞지 않아 옷핀으로 수정을 많이 봐야 했지만, 어찌 되었건 처음부터 아를레네 아가씨 맞춤으로 준비해 온 드레스는 제법 잘 어울렸다.
그리고 애나가 이어 두 번째 시착해 볼 옷으로 연보라색 드레스를 고르자, 이번에는 푀르 부인이 재빠르게 아를렌을 부축하였다. 아를렌을 부축하려고 나서던 하녀는 잠시 주인의 눈치를 보더니 이내 물러섰다.
어차피 푀르 부인이 칸막이 안으로 따라 들어가 옷 품새를 수정해 주고 매무새를 가다듬어 줘야 하니, 부축까지 맡겨도 상관없겠다 싶었다.
그리하여 칸막이 뒤에는 아를렌과 드레스를 들고 있던 조수와, 푀르 부인만이 남았다.
조수가 능숙하게 아를렌이 입고 있던 드레스의 끈들을 푸는 동안. 푀르 부인은 열심히 드레스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이 연보라색 드레스는 아가씨께서 좋아하시던 룬달 꽃 색깔에 맞춰서 일부러 준비한 것이랍니다. 원단은 겨울용으로 좀 두툼하게 해서 따뜻하지만 두께에 비해 워낙 가벼운 원단이라…….”
그 순간 푀르 부인의 손이 조용히 움직여 아를렌의 손을 찾아 쥐고. 아를렌의 눈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별생각 없이 허공을 부유하고 있던 아를렌의 눈동자가, 그제야 부인의 눈을 쳐다보았다.
부인이 빙긋이 미소 짓고는, 아를렌의 손에서 손을 떼었다.
“그래서 아가씨께서 좋아하실 것 같아 가져왔답니다.”
아를렌이 자신의 손을 펴 보았다.
작게 접혀진 하얀 종이 하나.
쪽지가 하나 들어 있었다.
.*. *. *. *. *. *.
상인들이 모두 떠나고, 수도로 떠날 준비를 마친 카쉬엔은 성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아를렌의 방으로 향했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를렌은 늘상 그렇듯 창가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평소와 달리 깨어 있었다. 깨어서, 창밖을 통해 슈엘 성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로 옆에 있는 협탁에 반쯤 비어 있는 수프 그릇이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식사도 어느 정도 한 것 같았다.
옆에 서 있던 하녀가 그를 보고 바로 인사를 하려고 했으나 그가 손을 들어 저지했다.
깨어 있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솔직히 상인을 부르라고는 했으나, 그의 기억에 그녀가 드레스나 보석 같은 것을 좋아하는 모습을 본 기억은 별로 없으므로,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를렌은 그닥 드레스를 보는 것 같지도 않았다. 눈앞에 있던 드레스가 무슨 색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그 상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조수들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처음에는 그나마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초점 없이 흐린 눈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그녀의 눈이 또렷하게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입술이 살짝씩 떨리는 것도.
여전히 표정이 없는 얼굴이었으나, 이전의 그녀의 얼굴이 그저 아무것도 없는 빈 허공 같은 느낌이었다면, 지금의 그녀의 얼굴은 그보다는, 무언가 표정의 한 종류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만한 무표정이었다.
‘원래 단골 상인이었다고 했었지.’
상인을 부르기 전에 물론 카쉬엔은 그 상인이 어떤 상인인지 상세한 보고를 받았었다. 그녀가 공녀였던 지난 시절 애용했던 의상실이었으며, 조사할 시간이 충분치 않았긴 해도 알려진 그 어떤 위험 요소도 없다는 것을 미리 확인했었다.
그녀가 원래 잘 알던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녀가 반응한 것은 드레스보다는 이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의 얼굴이었을 것이다.
그를 그토록 거부하고 마음의 문을 닫아 버렸던 그녀가 고작 상인들의 얼굴 따위에 반응한다는 점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큰맘 먹고 행한 일이 효과를 보였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웠다.
어쨌든 그녀는 자신의 소유였다. 어떤 방법으로든 살아만 있다면 계속 그의 것일 테다. 그 방법이 무엇인지 일일이 신경 쓰는 것은 의미가 없지. 화초에 주는 비료가 무엇으로 만든 비료이든 내 꽃을 피울 수만 있다면 그게 무슨 상관이랴.
“아를렌.”
그가 그녀에게 다가가며 부드럽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가 흠칫하는 것이 보였다. 아, 오랜만에 보는 반응. 이런 것조차 신선하게 여겨질 정도다.
그래, 지난 몇 달간, 설령 덜덜 떨고 무서워하며 피하더라도, 죽은 인형처럼 널브러져 있는 것보다는 그게 차라리 낫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그를 두려워하고 공포에 질려 있던 그녀는 최소한 살아 있었으니까.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 올려 그 손등에 자신의 입술을 누르자, 그녀가 살짝 움찔하는 것이 입술을 타고 느껴졌다. 그가 피식 웃고는 그녀의 피부를 입술 사이로 살짝 빨아들였다가 떼고는, 그 손을 옮겨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내렸다.
“아는 사람을 만나서 즐거웠어?”
아를렌이 눈을 내리깔았다. 영혼 깊숙한 곳까지 깊이 새겨져 버린 공포와 상처가 다시금 온몸을 옥죄고 숨통을 막기 시작했다. 부족한 공기를 들이마시려 허덕이며, 한 손으로 다른 손을 꽉 움켜쥐었다.
왜 물어보는 걸까. 즐거웠다고 대답했다가 그들을 죽이면 어떡하지. 아니라고 대답한다고 그들을 죽이면 어떡하지. 나 때문에 또 누군가 죽으면 어떡하지. 아는 사람들이 다 죽어 버리면 어떡하지.
그녀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한 것을 바라보던 카쉬엔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그녀의 귓바퀴 뒤로 넘겨 주며 말을 이었다.
“즐거웠다고 하면, 또 불러 주려고.”
그 말에 그녀의 떨림이 조금은 잦아들면서 숨이 잠시 멈추는 것을 보았다. 그녀가 잠시 후 숨을 한 번 길게 들이쉬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느리게, 그리고 작게 움직이기 시작했던 고개는, 조금씩 더 빠르고 크게 끄덕였다. 마치, 그가 그녀의 작은 움직임을 놓쳤을까 봐 걱정하듯.
“그래, 나의 아가씨가 원하신다면.”
그가 그녀의 두 뺨을 잡고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실로 오랜만에 그녀가 그를 바라보았다. 두려움이 가득해서, 마치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 안 되도록 협박이라도 받은 양 달달 떨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살아 있구나.
그는 빙긋이 미소 짓고는 그녀의 입술을 길게 빨아들였다.
.*. *. *. *. *. *.
쪽지에 적힌 글자는 단 두 단어였다.
「전 괜찮습니다.」
딱 두 단어였다.
멋지거나 세련되지도. 낭만적이거나 화려하지도 않은, 아주 투박하고 평범한 두 단어.
그러나 그 짧고 투박한 두 단어가, 그 글자들을 그리고 있는 까만 잉크가, 펜을 쥐고 까만 잉크를 펜촉에 묻혀서 이 종이에 그려 내었을 그 누군가의 따뜻한 손이,
무슨 말을 써 넣을까 한참을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결국에는 그녀가 가장 듣고 싶어 했고 가장 기다렸을 말밖에 적어 넣지 못했을 그 마음이,
순식간에 그녀의 마음속에 파고들어 녹여 내며, 숨을 불어넣었다.
무사했구나.
잘 살아났구나.
다행이다. 다행이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은 사경을 헤매며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모습이었다. 그를 살리겠다고 말을 타고 달려 나왔지만, 정작 그 후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살아났기를 바라고 바라고 바랄 수밖에.
그 간절하던 바람과 기원이 뭉쳐서 그녀의 손바닥 위에 내려앉아 있었다.
손 위에 있는 것이 차가운 종잇조각이 아니라 몽글몽글한 솜털 덩어리인 것처럼 따뜻했다.
드레스를 갈아입는 짧은 시간 동안 내내. 아를렌은 쪽지를 보고 또 보았다. 쪽지에 적혀 있는 그 짧은 말과, 그 필체와, 살짝 번져 나간 잉크의 흔적과 종이의 구겨진 자국까지, 그의 숨결이 닿았을 모든 것을.
그렇게 한없이 그리움과 반가움에 젖어 가던 찰나, 문득 그녀의 뇌리에 칼날 같은 현실이 날아와 박혔다.
‘왜…… 왜 그가 아직도 슈엘에 있지?’
이 위험한 땅에.
그녀는 순식간에 다시 얼어붙었다.
국경을 넘어갔기를 바랐는데. 지금쯤은 이미 넘어가 있기를 바랐는데.
아니 사실, 짐작할 수 있었던 일이 아닌가. 내가 처형을 당하지 않았을 때부터, 그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건.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내가, 진작 죽었어야 했던 내가, 아직도 살아 있기 때문에.
넋을 놓고 지내던 동안에는 오히려 그녀를 놔주었었던 고통이 다시금 그녀의 온몸을 휘감아 타고 올라왔다. 귓가에 온갖 비명이 울려 퍼지고, 발밑에는 붉은 피의 물결이 퍼져 가는 것 같아, 그녀의 몸은 어느 사이엔가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푀르 부인이 귀에 작게 속삭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푀르 부인을 바라보았다.
살아있었다.
아는 사람 중에 살아서 이렇게 잘 움직이고 있는 사람도 있다.
옆을 돌아보자, 아를렌의 옷을 정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운 낯으로 그녀의 안색을 살피고 있는 푀르부인의 조수, 세라도 보였다. 이 아이도 살아 있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오늘 살아서 이 성 밖으로 나가려면, 이 쪽지를 써 준 사람이 살아서 슈엘 밖으로 나가려면, 그녀는 단지 얼어붙어서 벌벌 떨고 있기만 해서는 안 되었다.
‘괜…….’
오랜만에 목소리를 내려니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한 번 숨을 들이켰다가 내뱉고 나서 다시금 말을 이었다.
‘괜찮아요.’
괜찮아야 했다. 괜찮아야…….
그녀의 마음이 어쨌든, 최소한 그녀의 머리는 괜찮아야 했다.
푀르 부인과 세라가 그녀의 드레스를 갈아입혀 주고 매무새를 다듬어 주는 동안, 그녀는 한참 동안 쪽지를 바라보았다. 마치 눈 안에 완전히 새겨 넣고, 머릿속에 온전히 각인시키려는 듯.
그러고 나서, 드레스를 다 갈아입고 칸막이 밖으로 나갈 때가 되자, 그녀는 쪽지를 잘게 찢어 입 안으로 삼켜 버렸다.
가지고 나갈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는 단 한 번의 숨을 쉴 수 있는 만큼의 시간조차 감시 없이 주어지지 않았고, 머리카락 한 올을 숨길 수 있는 공간도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남에게 들켜서는 안 되는 편지를 촛불에 태울 수 있는 그런 사치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푀르 부인에게 돌려주는 것도 불안했다. 혹시라도 그들이 나가는 길에 몸수색이라도 당할까 두려웠다.
그 후, 두어 벌의 드레스를 더 갈아입었다. 그 이후에는 대공 측의 하녀가 칸막이 안까지 부축해 들어왔기 때문에 쪽지에 대해서는 아무 대화도 나눌 수 없었다.
오랜만에 움직여야 했던 아를렌의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성치 않은 발목이 부어오르기 시작했기에, 카쉬엔은 상인들에게 그만하고 물러가라고 명했다.
푀르 부인은 우아하게 인사하고 눈을 휘어 웃으며 낭랑하게 말했다.
“오늘 보여 드린 것이 마음에 드신다면, 다음에는 가게로 찾아와 주세요. 가게에서 더 많은 것을 보여 드릴 수 있답니다.”
그 후 방으로 돌아온 아를렌은, 당장 쓰러질 것 같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창가에 앉아 슈엘 성내를 내려다보았다.
저 어딘가에 아젠이 있다.
네가, 살아서, 저 어딘가에…….
저리 바쁘게 살아 움직이고 있는 저 많은 사람들 틈 어딘가, 저 수많은 북적북적한 건물들 사이 어딘가에.
그가 보일 리 없다는 것을 아는데, 아니 오히려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는데도, 한없이 계속해서 건물 사이사이, 사람들 한 명 한 명을 살피며 혹시 그가 있을까 찾아본다.
‘일단, 아젠에게 전해야 해. 나는 여기에서 잘 살고 있으니까, 나를 잊고 혼자 떠나라고. 일단 어떻게든 푀르 부인을 다시 부르고…… 그에게, 나는 여기에서…….’
춥다.
‘나는 여기에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으니까 괜찮다고…… 전해야…….’
벽난로에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고 따뜻한 모피 담요를 두르고 있는데 어째서 이렇게 추운 걸까.
동시에 무리하게 쪽지를 삼켰던 속이 메슥거렸다.
몇 달간 제대로 먹은 것이 없던 빈 위장이었다. 음식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먹은 게 언제 적인지도 모르겠고 건더기가 거의 없는 수프 정도나 조금씩 받아 오던 위장에, 갑자기 종잇조각들이 들어가니 위장이 요동을 치는 것 같았다.
‘토하면 안돼.’
토하면 쪽지가 나온다. 그녀가 무언가 손댈 틈도 없이 하녀들이 바로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의상실의 모든 사람들이 끌려오겠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신체 반응에 많은 사람의 운명이 걸려 있다는 것이 더없이 불안했다.
그때, 하녀 한 명이 트레이를 들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뜨겁지는 않되 식지도 않은 수프가 살짝 김을 피우고 있었다.
“아가씨, 식사를 도와 드릴게요.”
하녀가 늘상 그렇듯, 냅킨을 꺼내 그녀의 앞에 둘러 준 후, 스푼을 들어 그녀의 입으로 가져갔다.
그녀는 잠시 숟가락을 바라보다가 입을 벌리고 받아들여 삼켰다. 다음 숟가락도, 그다음 숟가락도.
제발, 이걸 먹음으로써 속이 좀 가라앉아 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 *. *. *. *. *.
카쉬엔은 수도 바에룬으로 떠났다.
아를렌에게는 다행이었다.
만약 그가 남아 있었다면 평정을 유지했을 자신도, 평시를 연기했을 자신도 없었다. 그 손에 닿고, 그 팔 안에 갇혀서…….
그녀가 스스로의 팔로 자신을 감싸고 부르르 떨자, 하녀가 금방 모피를 들고 다가왔다.
“아가씨, 추우세요? 좀 더 덮어 드릴까요?”
물론 하녀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이미 모피와 담요로 감싸여 있는 아를렌의 위에 모피를 한 겹 더 둘러 주었다. 그들은 이미 그녀의 의사를 물어보지 않은 채 그녀를 ‘모시는’데에 익숙해져 있으니까.
슈엘의 겨울은 많이 춥지 않고, 그중에서도 오늘은 햇볕이 좋고 바람이 잔잔하여 겨울치고 온화한 날이었다. 방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하게 가둬 두던 평소와 달리, 오늘 그녀는 정원에 나와 있었다.
그녀의 사람다운 반응에 기분이 좋아졌던 카쉬엔은, 수도로 떠나기 전에, 그동안 의사들이 몇 번이나 권하였으나 허가하지 않았었던 몇 가지를 더 허락했다. 예를 들면, 산책 같은.
물론 산책이라고 해 보았자, 기사가 그녀를 안아다 정원 내에 이미 마련된 티 테이블에 앉혀 주면, 하녀들이 준비한 따뜻한 차를 호호 불어 한잔 마시며 햇빛과 바람을 쬔 후. 다시 누군가가 안아서 방 안에 데려다주는 식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몇 달 동안 방 밖에 거의 나가 본 적 없는 그녀의 생활에는 큰 변화였다.
처음에 정원으로 산책을 갈 거라면서 기사가 그녀를 안아 들었을 때, 그녀는 인형에 곰팡이가 슬지 않도록 잠시 통풍을 시켜 주는 것인가, 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막상 건물 밖 넓디넓은 파란 하늘 아래로 나와 아직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매만지며 지나간 순간, 자기도 모르게 숨이 탁 트이는 듯한 느낌에 나른한 숨을 내뱉게 되었다.
그러나, 일순간이나마 좋은 기분을 느꼈다는 사실 자체에, 시뻘건 쇳물 같은 자괴감이 밀려들어 와 그녀의 속을 까맣게 녹여 들어갔다.
반년 전까지만 해도 그녀와 가족들의 성이었고 정원이었다.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 추억이 어려 있었다.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아 있는 저 덤불은, 어머니께서 좋아하시던 장미꽃 덤불이었다. 봄이 깊어져 장미가 피어오르기 시작하면, 아무 흠집 없이 가장 화사하게 핀 장미꽃을 딸의 머리 위에 꽂아 주시곤 하였다.
갈색으로 시든 나뭇잎을 드문드문 늘어트린 채 죽은 듯 자고 있는 저 참나무는, 어렸을 때 젝시온과 함께 올라타곤 하던 나무였다. 먼저 올라간 젝시온이 위에서부터 여동생의 손을 잡아당겨 끌어 올리면, 아래에서는 아젠이 밀어 올려 주었지.
그리고 이 테이블은.
그녀는 자신의 바로 앞에 놓여 있는 티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온 가족이 모두 모여 앉아 즐겁게 웃으며 티타임을 가지던, 바로 그 테이블이었다. 이 맞은편에는 아버지가, 그 오른쪽에는 어머니가, 반대쪽에는 레트비안과 젝시온이 앉아 있었고, 주위로는 아기 때부터 항상 보아 오던 낯익은 이들이 웃음을 지으며 서 있었다.
지금은.
그녀는 텅 비어 있는 맞은편 의자들을, 그리고 주위에 서 있는 기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들을 도살한 바로 그 기사들.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무리 오랜만에 바람을 쐬었다고 해도, 아무리 오랜만에 햇빛을 받았다고 해도, 한순간이라도 기분이 풀려서는 안 되는 거였다.
어떻게, 감히, 내가.
잠깐 좋아지나 싶더니 금세 다시 창백하게 질린 아가씨의 얼굴을 본 애나는, 안 되겠다 싶어 일부러 밝게 웃으면서 아를렌에게 다가왔다.
“아가씨, 주인님께서 다른 상인들도 부르는 것을 허락하셨어요. 이번엔 어떤 상인을 부를까요? 지난번에 드레스를 몇 벌 맞추셨으니 이번엔 보석상을 부를까요?”
아를렌은 그 말에 한동안 반응이 없더니.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애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래, 상인을 불러야 했다. 정신 차려야지.
사실 부르고 싶은 것은 푀르 부인이었다. 아젠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바로 얼마 전에 드레스를 보고 나서 오늘 또다시 드레스를 보겠다고 하면 의심스러울 것이다. 푀르 부인을 부르는 것은 나중에. 마치 쇼핑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게 된 후에…….
“그래.”
“네?”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지 않았던 애나는, 작게 들려온 아를렌의 목소리를 놓치고 되묻고 말았다.
“보석상을……불러줄래……?”
“물론이죠, 아가씨! 그럼 보석상을 부르겠습니다. 또 다른 상인도 부를까요?”
오랜만에 들어 보는 아가씨의 목소리에 애나의 얼굴도 밝아졌다. 그녀도 사람인지라,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에게 충성심은 딱히 없더라도 가엽다는 생각은 많이 하고 있었다. 그래도 지난번에 드레스상을 만난 후로 무언가 조금씩이나마 상황이 나아지고 있는 것 같아서 뿌듯했다.
아를렌은 애나의 얼굴에 밝게 미소가 걸린 것을 잠시 올려다보다가, 다시금 시선을 찻잔으로 내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한 모금 더 마시었다. 어느덧 겨울 공기에 차가 식어 있었다.
.*. *. *. *. *. *.
애나는 아가씨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확실히 요 며칠 사이 아가씨가 식사를 남기는 양이 확연히 줄어들기 시작했고, 깨어 있는 시간과 잠들어 있는 시간이 비슷해졌다. 가끔이었지만 목소리를 내는 경우도 생겨났다.
물론 반년에 걸쳐서 망가진 몸이 하루아침에 돌아올 리 없었으나, 어찌 되었건 그녀가 보기에 아가씨는 확실히 나아지고 있었다. 일단 살아갈 의지를 가지기 시작했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이전처럼 멍한 눈빛이 아니라 눈에 초점이 생기기 시작했으니까.
‘역시 사람을 그렇게 방 안에만 가둬 두면 안 되지. 가능하면 외출도 타진해 보아야겠어. 요즘 주인님을 보아하니 잘하면 조만간 외출도 허락해 주실지 몰라.’
애나는 마치 데려다가 돌봐 주던 다친 동물이 나아가는 것을 보는 양 뿌듯한 심정으로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밑에 보석상이 와 있습니다.”
그 말에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아를렌은 조용히 애나를 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기사가 방 안으로 들어와서 그녀의 무릎 밑으로 손을 넣어 그녀를 안아 올렸다. 기사는 계단을 걸어 내려가 1층의 홀 안으로 그녀를 데리고 들어갔다.
홀 안에는 이미 보석상과 그 직원들이 고개를 숙인 채 기다리고 있었다.
기사가 조심스럽게 아를렌을 장의자 위에 내려놓은 후 거리를 두며 물러서고, 하녀들이 두어 명 장의자 옆에 섰다.
그제야 상인들이 고개를 들고 인사를 올렸다.
“아가씨,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를렌은 보석상 올리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이가 어느 정도 들어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중년의 사내는, 낯익은 단골 상인이었다. 그리고 상인의 눈에는 그녀를 향한 염려가 가득 들어 있었다.
물론. 알고 불렀겠지.
그녀가 아무것도 모르고 행복하고 평화롭던 시절 알고 지냈던 사람들이. 지금 그녀의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이제 그녀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어 버렸는지를. 알아서 일부러 단골 상인을 불렀겠지.
그래, 그녀가 사랑하고 아끼던 사람들은 거의 다 살해당했지만, 그래도 영지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살아 있는 것 같았다. 그거나마, 다행이었다.
그녀는 살아서 숨 쉬고 있는 올리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그 옆에 살아서 서 있는 직원들의 얼굴도 둘러보다가,
멈추었다.
그리고 다시금 천천히 고개를 가운데로 돌려, 보석상 올리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연스러웠겠지……?’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혹시 기사들이 이 정도 심박이 올라가는 것도 바로 알아챌 수 있을까? 아닐까? 기사들이 일반인이 느끼지 못하는 기척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느 정도까지 민감하게 포착할 수 있거나 없는지 그녀는 잘 알지 못했다.
괜찮을 거야, 저들은 외부 위협을 경계하고 있는 거지 나를 경계하고 있는 게 아니니까. 나를 보고 있지 않으니까…….
그보다는 하녀들이 나를 보고 있으니까…… 표정…… 표정을 관리해야 해. 요새 계속 굳은 표정이었으니까 계속 굳은 표정으로 있으면…… 아니, 굳은 표정이 어느 정도 굳은 표정이었더라? 이렇게까지 입가에 힘이 들어가 있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아니, 어차피 잘못 본 걸 텐데, 분명 착각한 걸 텐데, 쓸데없이 이렇게 놀라고 긴장할 필요 없을 텐데.
하지만.
만약 정말이면, 정말 맞다면…….
그녀는 다시 한번 직원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둘러본다는 게 어떤 거였더라? 지금 목이 돌아가면서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는 게 아닐까.
‘자연스럽게’라는 필요성이 붙기 시작하자 자신의 모든 움직임이 다 부자연스러운 것 같았다. 무엇이 자연스러운 것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일단 한 사람의 얼굴에 너무 오랜 시간을 들이거나 너무 빤히 쳐다보면 안 된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러니까, 태연하게. 자연스럽게, 한 사람 한 사람을 아주 잠깐씩만…….
그리고 그곳에 그가 있었다.
그녀가 그토록 안전을 기원하던 갈색 머리카락에 보라색 눈을 가진 기사가,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보석상 직원이 되어, 구석에 조용히, 구부정하게, 고개를 살짝 숙여 바닥을 내려보며 서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잠깐의 시선만 주고 바로 다음 직원으로 시선을 넘기었지만, 머릿속에는 그 모습만이 계속 남아 있었다.
‘말도 안 돼.’
숨이 가빠지려고 하는 것을 가다듬었다. 원래 어느 정도의 속도로 숨을 쉬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갑자기 숨이 빨라지면 기사들이 눈치챌지도 몰라.
다시 보석상 올리버를 향해 가운데로 고개를 돌린 그녀는, 다시는 그의 쪽을 쳐다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올리버가 뭐라 뭐라 인사를 하고 무언가를 소개하기 시작하였으나, 그녀의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아젠이 왜 여기에? 그리고, 그 모습은 뭐지.’
흔한 일은 아니지만, 머리카락을 염색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은 들어 보았다.
하지만 눈 색은?
‘아니, 그보다 여기는…… 적진 한복판인데.’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홀 주위 곳곳에 서 있는 기사들을 훑었다. 홀 안에만 해도 네 명, 하지만 바깥에는 더 많을 거다. 그녀는 요즈음 이 성의 방비 상태가 어떤지 잘 알지 못하지만, 레퀴에스 기사단의 상당수가 이 성에 남아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아젠이 아무리 강한 기사라고 해도, 무기도 없이 이 많은 기사들을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올리버가 뭐라 뭐라 보석을 소개하는 말을 하자, 옆에 있던 직원 한 명이 벨벳 상자를 들고 아를렌의 앞에 섰다. 상자 안에는 찬란하게 빛을 발하며 고아한 자태를 뽐내는 다이아몬드 헤드피스와 귀걸이 세트가 들어 있었다.
“한번 착용해 보시겠습니까?”
아를렌이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석에 관심을 보이는 척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너무 갑자기 관심을 보이는 것도 어색해 보이지 않을까? 푀르 부인이 왔었을 때 내가 드레스에 관심을 보였었던가?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다 어색했다.
직원이 아를렌의 옆에 놓여 있는 협탁에 상자를 내려놓고, 장갑 낀 손으로 조심스럽게 아를렌의 머리 위에 헤드피스를 올려 주고 귀에 귀걸이를 달아 주었다.
옆에 있던 하녀가 부리나케 거울을 들고 아를렌의 앞으로 달려왔다.
“어머 아가씨, 너무너무 아름다우세요!”
“마치 아가씨를 위해 준비된 듯 잘 어울리세요.”
하녀들이 모시는 레이디에게 의례적으로 바쳐야 하는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으나, 아를렌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후 헤드피스를 머리에서 떼어 내었다.
뜻을 읽은 직원이 다시 귀걸이도 회수하여 박스 안으로 집어넣고는, 앞에 있는 테이블에 박스를 열린 채로 진열하였다.
“다음으로 보실 작품은 ‘바다의 환희’라는 작품으로, 비드본 광산에서 채굴되어 장인 오테가가 심혈을 기울여 세공한…….”
올리버가 다시 장황한 설명을 시작하였으나, 아를렌은 ‘그’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아무 설명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온 신경이 모두 한쪽으로 예민하게 쏠렸다.
그가 다가온다.
차마 그쪽을 제대로 쳐 다보지도 못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뚜벅 뚜벅 발자국 소리 하나하나가 홀 전체에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모두가 그와 그녀를 의심하며 주시하고 있을 것만 같아, 예민해진 피부가 마치 살갗이 벗겨진 것처럼 따끔따끔 아려 왔다.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얼른 주먹을 폈다가, 행여나 누가 그 장면을 보았을까 봐 긴장했다.
마침내 그가 그녀의 앞에 도달해, 무릎 꿇고 앉아 박스 안을 보였다.
그녀는 일단 박스에 시선을 주었다가,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향해 시선을 살짝 올리기 시작했다.
낯익은 목울대가, 턱선이, 입매가 보이기 시작하고, 코 선을 지나, 마침내 그와 눈이 마주칠 것 같은 순간, 그녀는 차마 고개를 더 이상 들지 못하고 다시 시선을 내렸다.
그래도…… 건강해 보였다. 그건 정말 다행이었다.
“그럼 아가씨, 한번 착용해 보시겠습니까?”
올리버의 말에 그녀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아젠이 박스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목걸이를 꺼내어 들었다. 옆에 있던 하녀 한 명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들어 올려 주자, 아젠이 그녀의 뒤로 돌아와 그녀의 목 앞으로 목걸이를 드리웠다.
그의 손이 얼굴 옆을 스쳐지나 내려가, 목 옆으로 내려앉았다. 차가운 금속과 돌의 감촉이 피부에 내려앉고, 부드러운 장갑의 촉감이 목을 스치었다.
그 순간, 퍼뜩, 그녀의 목덜미에 카쉬엔에 의해 남겨져 있을 순흔이 떠올랐다.
흡, 숨이 막혔다.
보지 마.
보지 마. 제발.
하지만 그녀는 멈추라고 할 수도 없었고, 손을 뿌리치고 일어날 수도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무 일도 없는 듯, 그저 가만히.
그녀는 그대로 굳은 채, 모든 것을 무방비하게 드러내 보인 채 가만히 앉아 있는 수밖에 없었다. 가장 보이고 싶지 않았던 사람에게.
건강한 모습의 그를 보는 데에서 왔던 안도감은 사라지고, 피가 차갑게 식어 내렸다. 머리 위로 얼음물이 쏟아져 내린 듯한 기분이었다. 이 자리에서 이대로 사라져 버리고 싶었으나, 그런 기적은 전혀 기대할 수가 없었다.
온 신경이 모두 목덜미로 쏠렸다. 목걸이를 거는 짧은 시간이 마치 영원히 계속되는 것처럼 느릿하게 느껴졌다.
그의 손길은 조금의 주저함이나 멈칫함도 없이, 그저 부드럽고도 자연스럽게 목걸이를 걸고 체인을 채워 주고 있었다.
잠시 그의 손이 그녀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듯 느릿하게 스쳐 지나갔다. 우연처럼 슬쩍 지나가는 손길은 너무 가볍고 자연스러워서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것 같았으나…….
‘……어쩌면 보이지 않을지도 몰라.’
생각해 보면, 며칠이 지났다. 많이 흐려졌을 테고, 머리카락이 그림자를 드리웠을 테니, 어쩌면 보이지 않고 지나갈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혼자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고 있던 사이, 아젠은 앞으로 돌아 나와 박스에서 팔찌를 꺼내 든 채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가씨, 잠시 손을…….”
익숙한 상황. 익숙한 목소리에 그녀가 무의식중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낯설면서도 낯익은 검은 눈이 그녀를 올려다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당장 울 것 같으면서도 담담하게 미소 지으며.
어쩌면 슬퍼 보이고, 조금은 화나 보이고, 약간은 충혈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다정하고 따뜻한 눈으로,
자신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바라보며 손을 청하고 있는 모습.
그 모습이 너무 낯익고 익숙해서. 마치 이전의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서, 그녀는 홀린 듯이 자신의 손을 그의 손 위에 얹었다.
장갑의 얇은 천 사이로, 그의 체온이 그녀의 손으로 옮겨져 왔다.
아를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손으로 내려왔다.
한겨울의 나뭇가지마냥 앙상하게 뼈대와 뼈마디를 드러내 보이고 있는 볼품없는 손을. 마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인 양 조심스럽게 받아 든 그가, 한 번 꼭 쥐었다가 힘을 풀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팔찌를 조심스럽게 끼워 올리기 시작했다.
손목과 팔꿈치 사이를 마치 끈처럼 아슬아슬하게 연결하고 있는 가느다란 팔뚝에 팔찌가 볼품없이 덜렁거렸다.
이런 걸 보여 주고 싶지 않았는데.
나는 여기에서 잘 살고 있다고, 잘 지내고 있다고, 그렇게 보여 줬어야 했는데.
……어차피 처음에 이 홀에 들어올 때 걷지 못하고 안겨 들어오는 것부터 다 보았겠지. 이미 적나라하게 모든 것을 다 보여 주었구나.
절대 너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모든 것들을.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짓깨물었다.
“어떠십니까?”
올리버의 말에 하녀가 거울을 들고 다가왔다. 아젠이 물러난 자리에 거울이 놓였다.
무심코 들여다본 거울 속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았다.
비쩍 마른 고목나무 같은 목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파란 보석이 덜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얼룩덜룩 눈에 띄는 비참하고 더러운 붉은 자국들…….
그녀는 잠시 멍하니 거울을 바라보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천천히 흘러갔다. 그녀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금 올라왔다. 어쩌면,
거울 속에 있는 비천한 여자의 모습이 그사이 어딘가로 사라졌기를 바랐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여자는 그대로였다.
이윽고, 그녀가 가는 손을 힘겹게 움직여 풀어낸 보석들을 함에 정리해 넣은 아젠은, 테이블 위에 보석함을 잘 보이도록 진열해 놓고 다시 구석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단 한 번도 그를 바라보지 않고 한참 동안 거울 속의 천한 여인을 응시했다.
그 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을 가장하여 몇 개의 보석을 더 소개받고 시착해 본 후. 그녀는 손을 내저었다. 이미 주인에게 물건 구매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았던 애나는, 아가씨에게 어울려 보였던 비싼 보석들을 아낌없이 주문하고는 자리를 마무리했다.
……다행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것만 생각하자.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고,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그가 다치지 않았다.
“아가씨,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부디 몸조리 잘하시어 얼른 회복하시기를 바라옵니다.”
올리버가 대표로 인사를 올리자 그녀는 잠시 그들을 바라보더니, 실로 오랜만에, 경직된 볼 근육을 움직이고 힘겹게 입가를 끌어당겨 미소를 만들어 내었다.
너무 오랜만이라 어색하고 얼굴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지만, 최선을 다해서.
아젠은 바로 그 미소를 알아보았다.
걱정하지 말라고, 나는 괜찮다는 그 표정이, 채 완성되지도 못한 채 아슬아슬하고 힘겹게 걸려 있었다.
.*. *. *. *. *. *.
아젠은 캄캄한 방으로 들어가. 램프에 작은 불을 밝혔다. 보이는 것이 하나도 없던 방이, 희미하게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만 밝아졌다.
그는 후드를 벗고 깨끗하게 손을 닦았다. 눈에 안약을 넣고. 눈을 두어 번 깜빡거렸다. 마치 불에 달군 모래알이 수없이 들어가 있는 듯 꺼끌꺼끌하고 불타는 듯하던 눈에 조금씩 평화가 찾아왔다.
문득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핏발 선 검정 눈에, 짧은 검은 머리를 한 낯선 사내가 거울에서 마주 보고 있었다.
……낯설지만, 꼭 낯설지만은 않은 모습.
얼굴이 다르지만, 짧은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은 그 증오스러운 대공 놈의 모습이었다.
그는 거울의 자신에게 손을 뻗었다.
얼굴이 다르다지만, 결국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은 같은 사람 아닌가.
챙그랑一!
그가 거세게 휘두른 주먹에 거울이 와장창 깨져 내렸다.
죽여 버리고 싶다. 죽여 버리고 싶다. 죽여 버리고 싶다.
말로만 그러면 뭘 하나. 죽여 버릴 능력이 안 된다. 그녀를 지켜 내지도 못했다. 이 무능하고 비루한 새끼. 환생을 하면 뭘 하나. 과거로 돌아오면 뭘 하나. 쓸데없는.
기적이라고, 축복이라고 착각했던 때가 있었지. 바꿀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때도 있었지.
기적은 무슨 거지 같은 기적. 그딴 것을 기대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니. 그 모든 것은 어처구니없이 헛된 착각이었다.
그저, 보고 싶었다.
너무, 너무 보고 싶었다.
잘 살고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살고 있는, 어느 정도는 괜찮은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만약 그런 모습을 보면, 비록 그녀가 행복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알아도 그래도 슈엘 성에 그녀를 놔두고 떠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전생에 그녀가 죽은 것은 결국은 슈엘에서 탈출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니까.
어쩌면, 그녀는 카쉬엔의 손안에 계속 있었으면 시간이 지나면서 무사히 회복되었을지도 모를 것을. 그 기사와 같이 탈출하는 바람에 결국 쫓기다가 죽게 된 걸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그녀가 웬만큼만 살고 있으면, 설령 불행하더라도 죽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보고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과거의 난, 카쉬엔 그놈은 도대체 무슨 짓을 했던 건가.
그의 몸이 어느 사이엔가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바닥에 주저앉은 그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내가, 내 손으로, 그녀를 저렇게까지 망가트렸었나. 그러고도 그걸 몰랐나.
그 맑게 빛나던 눈이 얼마나 퍼석하게 죽어 버리고 모든 빛을 잃어버렸는지 .
그 화사하던 밝은 얼굴이 얼마나 유령처럼 희미해져 버렸는지.
늘상 아프고 열병을 앓고 죽을 고비를 넘기던 와중에도 저 지경까지 마르고 쇠약해진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 나비처럼 가볍게 뛰어다니던 사람의 발을 어떻게 저렇게 무참히 부러트려 버릴 수가 있나.
“흐윽…… 흐으윽…….”
도저히 숨을 쉬기가 힘들어 어느 사이엔가 목을 긁어 대기 시작했다. 심하게 긁힌 목에서 피가 나기 시작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저 모든 것이 보이지도 않았었나?
그녀를 제대로 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기는 했었던가?
그녀가 빛나던 모습에 반해서 그 뒤를 쫓았던 것이 아니었던가? 그리하여 그녀의 빛을 탐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저렇게 모든 빛을 다 꺼트리고 으스러트려 놓고선 뭘 가졌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거야?
그 와중에도 자신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 바짝 굳어 버리는 모습에, 모든 것을 다 때려치우고 끌어안아 주고 싶었다.
그 자리에서 그대로, 아무 대책 없이, 그녀를 안고 뛰쳐 나오고 싶었다.
그러지 못하고 죽어라고 참고 참고 또 참아 내린 것은 오로지, 그렇게 했다가 벌어질 일을 이미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은 내 잘못인데,
모든 것은 그 미친 개새끼 때문인데,
왜 당신이 이렇게 괴로워해야 하나.
어느 사이엔가 그는 꺼억 꺼억 숨을 넘겨 가며 울고 있었다.
심장이 으깨어지는 듯한 고통에 숨을 쉴 수가 없었지만, 그나마도 사치스러웠다. 저 너머에서 자신의 손에 의해 산 채로 죽어 가고 있는 사람을 생각하면.
죽어 버리고 싶고, 죽여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죽어 버려서는 안 되었고, 죽여 버릴 수도 없었다.
어쨌든 지금은, 그가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을 해야만 했다.
그녀를 저 지옥 같은 곳에서 데리고 나와서,
살리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