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부서지다 (7/13)

7. 부서지다

덜컹덜컹.

몸이 계속 흔들리고 있었다.

아를렌은 혼미한 정신 속에서 흐릿하게 눈을 뜨려 했지만, 앞이 가물가물하고 잘 보이지 않자, 포기하고 다시 감았다.

계속 흔들리고 있는 이곳은 아마도 마차 안인 것 같다.

눈을 제대로 뜨면 알 수 있겠지만, 눈을 뜰 기운이 없었다. 지독한 두통이 머리를 헤집었고, 온몸은 마치 수천 개의 바늘로 찌르는 듯 아파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여기가 어디였지, 지금 뭐 하고 있었더라. 얼른 일어나야 하는데,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휘저었지만, 일어나기는커녕 눈을 뜨기도 힘들었다.

누군가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듯했다.

어머니인가…… 수도에 가던 중이었던가…… 아닌가? 어머니랑 손길이 다른 것 같은…….

그녀는 다시금 정신을 잃었다.

그렇게 몇 번을 정신이 희미하게 들었다 잃었다를 반복하던 중에, 그녀는 생각했다.

정신 차리고 일어나야지. 오늘 하루도 많이 이동해야 할 텐데. 이렇게 계속 누워서 자고 있을 시간이 없을 텐데.

눈을 떴다.

앞이 흐릿하니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몇 번 깜빡깜빡하고 있다 보니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마차 안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바닥에 두툼하게 깔린 이불 위에 누운 채로 눈만 멍하니 뜬 채 마차 안을 보고 있었다.

다그닥다그닥. 말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차 안은 조금씩 계속 흔들렸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그녀의 귀에, 바깥에서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무언가 소란스러웠다. 사람들이 많은 곳을 지나가는 듯,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물속에 잠긴 것처럼 먹먹하게 들려 왔다.

“대공 저하시다, 통과!”

마차 바로 옆에서 외치는 소리에 아를렌은 몽롱하게나마 정신이 들었다.

말을 듣지 않는 몸을 간신히 일으켜, 창문에 가까스로 손을 뻗었다.

창문을 옆으로 밀었다. 조금, 손가락 한두 마디 정도밖에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작은 틈새로 바깥이 보이기 시작했다.

낯익은, 그러나 낯선 풍경…… 분명 바에룬의 풍경인데, 사람들의 모습이 낯설었다. 모두가 경직되어 있고, 병사와 기사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지독한 악취.

그녀는 눈앞에 보인 광경에 흠칫하며 창가에서 물러 났다가, 잠시 후 되레 창문에 달라붙었다.

수십 번 수백 번 드나들었던 광장이다. 저 아름다운 분수대 주위엔 유랑 악단이 와서 연주하고, 주위에는 노점상들이 가득했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활기차게 돌아다녔고, 열기가 넘쳐나는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분수대 주위를 빙 둘러 명패와 죄목을 단 장대들이 수십 개가 꽂혀 있고, 그 장대마다 머리가 하나씩 꽂혀 흉물스럽게 썩어 가고 있었다. 위에는 까마귀들이 수도 없이 모여 앉아 머리를 뜯어 먹고 있었고, 아래에는 피 웅덩이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검갈색 얼룩들이 찐득찐득하니 말라 가고 있었다.

아는 얼굴들이, 알았던 얼굴들이, 알아볼 수 없게 변하여 썩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지옥 한가운데에,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던 그들이 있었다.

[역적 루테른의 장남]

[역적 루테른의 차남]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우리 공주님은 잘 쉬고 있어.」

마지막으로 웃으면서 볼에 쪽 입을 맞춰 주고 떠나던 모습이, 저런 참담한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항상 환하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오라비들이, 많은 아가씨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던 그 수려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참혹하게 썩은 채 날짐승들에게 파먹히고 있었다.

창틀을 쥐고 있는 아를렌의 손 마디마디가 새하얗게 변했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가는 와중에, 깨물린 아랫입술에서는 피가 터져 흘러나왔다. 온몸이 벌벌 떨렸으나, 완전히 얼어붙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차는 계속 움직여 광장에서 멀어졌고, 창문의 작은 틈새로 더 이상 분수대도 그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게 되었으나, 그녀는 여전히 꼼짝하지 못하고 못 박힌 듯 굳어 있었다.

그리고, 그 작은 틈으로 2곽 성벽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다시금 악취가 진해졌다.

한때에는 매우 화려하고 고급스러웠을 연회복 차림의 시체들이, 성벽에 대롱대롱 매달려 썩는 물을 뚝뚝 흘리고 온통 어두운 색의 얼룩에 뒤덮인 채, 까마귀에게 먹혀 가고 있었다.

한때 해산일을 손꼽으며 행복하게 웃고 있던 친구는, 이제 명판이 없다면 알아보기 힘든 기괴한 모습을 한 채 자신의 남편 옆에 같이 걸려 있었다.

새파랗게 질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는 아를렌을 태운 채, 마차는 게이트 앞에 도달했는지 점점 속도를 늦추더니 이윽고 멈췄다.

게이트의 바로 옆. 가장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

「정말 엄마가 가도 되겠니? 엄마도 같이 남아 있을까?」

멈춘 마차의 창틈에서 생생하게 마주 보이는 곳에,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그리워하던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었다.

「어머니, 예쁜 드레스가 구겨지겠어요.」

낯익은 드레스가 얼룩지고 찢어진 넝마가 된 채 바람에 흔들렸다.

「잘 쉬고 있으렴. 가능한 한 일찍 돌아올게.」

밧줄에 대롱대롱 목을 매단 채 천천히 흔들리고 있는 그 썩은 시체들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아니 어쩌면, 삐걱거리며 썩어 가고 있는 것은 그녀의 영혼이었을지도 모른다.

높게 째지는 이명이 귀를 찔러 왔다. 어쩌면 누군가의 비명 소리인 것 같았다. 무언가가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아를렌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 *. *. *.

레퀴에스 대공저의 사용인들 사이에는 윗사람들 몰래 쉬쉬 온갖 소문이 다 돌았다.

북부를 평정하고 돌아온 개선영웅인 그들의 주인은, 이번엔 반역을 평정하는 데 최고의 공을 세워 대공으로 승작되어 최고위 귀족이 되었다.

솔직히 왕위 계승전의 정당성 따위는 아무도 믿지 않았고, 그 과정의 잔인함은 모두를 공포에 질리게 했다. 한때 개선영웅으로 불리던 주인은 이제 피의 대공이라는 별명을 새로 얻었다.

많은 이들이 대공이 태어날 때 받았다던 저주를 머릿속으로 떠올리기도 하였으나, 서슬 퍼런 시국에 차마 그 말을 입 밖에 내지는 못했다.

어쨌든 중요한 건 그들의 주인이 이제 엄청난 권력가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 한들, 대공저의 사용인들은 그 폭풍 속에서 안전하게 권력의 부스러기를 받아먹을 수 있었고, 그저 주인의 심기를 거스르지만 않으면 되었다.

왕과 왕비는 완전히 허수아비가 되어 반쯤 유폐되었고, 1왕자파들은 완전히 숙청되어 거의 다 살해되었다. 2왕자였던 쥬헤드 왕자는 이제 왕과 다름없는 왕세자가 되어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고, 그런 왕세자를 세운 사람,

그런 왕세자가 유일하게 눈치 보는 사람이 레퀴에스 대공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았다.

그런 그가 모든 일을 다 뒤로하고 한 여인을 쫓아 밤새 말을 타고 달려갔다는 것은, 단연 모두의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 여인은 반역죄로 숙청당해 몰살된 집안의 여식.

그래도 반역도를 처형하러 쫓아가는 것에 함부로 입방정을 떨었다가 같이 목이 달아나고 싶지 않아 참고 있던 입들이, 그들의 주인이 고급스러운 마차에서 손수 여인을 안아 들고 내려 대공비를 위해 준비되어 있던 방으로 데려가고, 최고의 의사들을 붙이기 시작하자, 본격적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마차도 일부러 개조하신 거라고 하더라. 편하게 누워서 올 수 있게. 내가 봤는데, 안에 의자를 떼어 내고 완전 고급스럽고 푹신한 이불을 몇 겹씩 쫙 깔아서 움직이는 침대를 만들어 놨던걸.”

경력 있는 사용인들은 말을 아꼈지만, 어린 하녀들은 거리낌 없이 화제를 입에 올렸다.

“방도, 원래 그 방은 대공비 방이잖아. 데려오시자 마자 바로 대공비 방에다가 떡하니 눕혀 놓으실 줄 누가 알았겠니? 어쩐지 방 준비시킬 때에도 꼭 누군가 방 주인이 따로 있는 것처럼 까다롭게 준비 시키시더라니, 방 주인이 정말 이미 있었어. 그 방이 주인님 방보다도 훨씬 더 좋은 거 알아?”

“멜리가 그 방 준비했었잖아. 그냥 빈방 준비하는 게 아니라 주인님이 직접 하나하나 뭐든지 다 최고급으로 하라고 꼼꼼하게 지시하셨다고 하더라고. 전망도 제일 좋고 가구도 제일 좋고 소품 하나하나까지 다 엄청나게 신경 썼었대.”

“그럼 그때부터 최고로 꾸며 놓고 계속 기다리다가 데려오신 거야? 와, 소설 같아. 부럽다.”

“아니. 근데, 루테른가 아가씨라며. 그…… 그래도 되는 거 맞나? 그 집안 완전히 다 몰살당했잖아. 게이트 바로 앞에 제일 먼저 걸려 있는 게 루테른이잖아. 요즘 그 근처 지나다니는 것만 해도 소름 끼치게 무서워서 그쪽으로 얼씬도 안 하는데…….”

“지금 아슈네란에서 주인님께서 원하시면 안 되는 게 뭐가 있어. 주인님이 좋으시다는데. 암튼 저 아가씨는 주인님 덕분에 목숨 건진 거지.”

“그러고 보면 주인님이 수도에 오신 후로 온갖 아가씨들이 관심을 보였었는데 주인님은 한 번도 거들떠본 적도 없으셨잖아. 그게 다 이미 연인이 있어서 그러셨던 거였구나.”

“그러고 보니 몇 달 전에도 루테른 공작성에 방문 하셨었잖아. 그때 정적 가문에 왜 방문하는지 사람들이 의아해했었는데, 그때도 사실 저 아가씨 보러 가셨던 거네! 정적 간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던 거야. 아,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자 사랑하는 여인이라도 구하시려고 밤새 말을 달려서…… 꺄아?”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를 좋아하는 어린 하녀들이 바로 지척에서 벌어지는 로맨스에 흥분하며 온갖 추측을 내놓았다.

“근데…… 따지고 보면 아무리 그래도 부모 형제 다 죽인 사람인데 괜찮을까?”

“쉿, 입 다물어, 그러다 네 목도 달아난다.”

대화가 선을 넘으려 하자 사용인들이 스스로 입을 단속했다. 어쩌다 보니 말이 나와 버렸지만, 말을 내뱉은 하녀도 아차 싶어 얼른 입을 가렸다.

“……어쨌든 그래도 주인님 덕에 자기 목숨은 건진 거잖아. 고맙겠지. 게다가 원래라면 살아도 감옥에 가야 할 걸 이렇게 금이야 옥이야 대접해 주시는데.”

“그렇지. 원래라면 루테른가 몰살당할 때 같이 죽었을 건데 주인님이 살려 주신 거잖아. 그냥 살려만 주셨나? 저리 애지중지 떠받들어 주시고. 요새 저택 안에 계실 때에는 하루 종일 그 병상을 지키고 계신 거 알아? 조만간 대공비 되는 거 아닐까?”

“반역가의 여식인데 대공비가 가능해? 정부면 모를까.”

“방금 네가 지금 아슈네란에 주인님이 못 하시는 게 어딨냐며? 주인님이 왕세자 저하께 가서 저 혼인하겠습니다, 하면 그냥 끝나는 거지. 대공비 삼으실 게 아니라면 감히 그 방을 내주셨겠어?”

“아무튼 저 아가씨는 주인님 같은 분께 열렬히 사랑받아서 좋겠다. 지금 아슈네란 전체를 통틀어서 주인님보다 더 잘난 신랑감이 어딨니. 그 지위, 그 권력, 그 무력, 게다가 그 얼굴에 그 몸매! 그런데 이렇게 순정까지 바치시다니……!”

잠시 하녀들이 하아아 하며 부러움의 탄성을 뱉었다.

“근데 그것도 다 깨어났을 때 얘기지. 지금 며칠째 정신을 못 차리고 앓고 있잖아. 의사들이 뒤에서 쉬쉬하며 하는 말이, 깨지 못하고 저대로 죽을 수도 있다던데? 의사들이 지금 그것 때문에 걱정이 많더라고. 저 아가씨 잘못되면 자기네들도 같이 잘못되는 거 아니냐며…….”

하녀 한 명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조심해,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말고. 주인님 지금 엄청 날카로우시다고. 그 아가씨가 무사히 깨어나는 게 우리 신상에도 좋을 걸.”

“근데 우리 그 아가씨를 뭐라고 불러야 해? 아가씨라고 계속 불러도 되는 거 맞아? 멸문당한 반역 가문의 여식인데? 원래는 공녀였다지만 지금 신분이…….”

아무도 답을 몰랐다. 원래는 귀한 공녀였다지만 지금은 역적의 자식인데, 하지만 대공이 애지중지하고 있는 여인이다. 그들은 대공의 눈 밖에 나고 싶지도 않았지만, 역적의 자식을 잘못 높여 말했다가 목이 잘리고 싶지도 않았다.

“일단은 의사들도 다 아가씨라고 지칭하고 있는 것 같던데…….”

한 명이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주인님 앞에서 아가씨라고 지칭하고 있는 걸 보면 그게 맞는건가 봐.”

“뭐, 이 저택 안에서야 주인님 뜻이 곧 법이지.”

하녀들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하던 일을 마저 하면서 수다를 이어 나갔다.

.*. *. *. *. *. *.

레퀴에스 대공저, 그중에서도 가장 깊고 가장 안전한 곳에서 엄중하게 지켜지는 대공비의 침실.

그 안에서 그녀는 오랫동안 눈을 뜨지 않고 누워 있었다.

그간 고생이 많았는지 입술은 터지고 피부는 트고 머리카락은 푸석해졌지만, 그래도 며칠간 하녀들이 지극정성으로 닦고 향유를 발라 주고 한 덕인지 조금 나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안색은 여전히 너무 좋지 않았고, 심박은 매우 불규칙했다. 체온이 미친 듯이 올라갔다가, 온몸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먹는 게 없으니 이미 앙상해진 몸에는 살이 오를 수가 없었다.

퀭하니 감겨 있는 눈에서는 종종 눈물이 흐르고, 가끔 알 수 없는 헛소리와 신음이 계속되었다.

의사들은 별로 도움 되지 않는 말들만 계속했다.

원래도 몸이 워낙 약했던 것 같은데, 그간 너무 고생을 많이 하고 충격을 받은 데다가, 결정적으로 이런저런 약들을 지나치게 남용한 것 같다고.

일단 지금은 안정을 취하게 하면서 체온을 다스리고, 틈날 때마다 약을 먹이며 기다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가뜩이나 살벌하던 대공은 그 말에 살기에 가까운 기운을 뿌렸지만, 의사들은 안정이 필요한 환자 옆에서 흥분하는 것은 좋지 않다며 간신히 그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 어떤 의사도 감히 그녀가 다시 눈을 뜨지 못할 가능성에 대해 입을 열 수 없었다. 어쨌든 최선을 다해 살려 내야 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여러 의사들의 분투가 있고 나서야, 사경을 헤매던 그녀의 상태가 약간씩 안정되어 갔다. 그녀는 여전히 의식이 없었지만. 그래도 이제 며칠 전과는 사뭇 다른 안정적인 모습이라는 것을 의학을 전혀 모르는 카쉬엔도 알 수 있었다.

그제야 그는 조금 안심할 수 있었고, 더불어 의사들 역시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침상 옆에 앉아 있던 카쉬엔은, 눈을 뜨지 않고 있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 끝으로 만지작거렸다.

……그녀를 잃는 줄 알았다…….

역시 그 날, 연회가 있던 밤에 그녀부터 무사히 데려왔었어야 했다. 계획대로 그날 그녀부터 확보 했었다면 안전하게 이 방에 데려다 놓았을 것이고, 괜히 도망치느라고 그렇게 고생할 일도 충격받을 일도 없었을텐데.

몸도 약한 그녀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고 무서웠을까.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얼마나 고생이 심했기에 몸이 이 지경이 된단 말인가.

그녀를 데리고 도망쳐 결국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어 놓은 그 평민 기사놈은, 역시 용서할 수가 없다.

감히 내 것을 훔쳐 달아나고 탐한 것으로 모자라 이렇게 쓰러지게 만들다니……! 그러고서 혼자 살겠다고 그녀를 내버리고 도망쳐?

그놈을 놓쳐 버린 것이 통한했다. 그녀를 확보한 후 기사들이 주위를 수색했지만, 근처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그녀의 행적을 한참 되짚어 나가고 나서야 아무래도 그들이 머물렀던 것이 아닌가 싶은 오두막을 뒤늦게 발견했지만, 이미 비어 있었고, 그 이상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언젠가 그놈을 마주치게 되면, 가장 잔인하게 천천히 죽여버리겠어.’

으드득 이를 갈던 그는. 문득 그녀의 머리카락을 쥔 자신의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을 느끼고, 힘을 풀었다.

자신이 마련한 방 안에서 자신이 준비한 침대 위에 온전히 누워 있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속의 모든 것이 풀리는 듯했다.

어찌 되었건, 그녀는 이제 이곳에 있다.

정말 오래 걸렸지만, 드디어 데려왔다. 그의 성으로. 그의 방으로. 그의 곁으로.

그가 머리카락을 만지던 손을 옮겨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한때는 뜨겁거나 차가웠던 뺨이었으나, 이제는 기분 좋게 따뜻해진 체온이 손을 타고 옮겨져 왔다.

그 적당한 온기에 가슴이 녹진하게 녹아내린다.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쉬었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달콤한 체취를 흠뻑 들이마셨다.

나의 아가씨. 나의 빛, 나의 세상.

어서 눈을 떠, 그 맑게 빛나는 초록색 눈으로 나를 보고, 내게 웃어 주길.

네가 내 옆에서 내게 웃어 준다면, 나는 네게 무엇이든 다 갖다줄 테니까.

내 옆에서 웃어 준다면.

.*. *. *. *. *. *.

오랫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다는 걸 아를렌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가물가물한 의식에, 가끔씩 수면 위로 올라오듯 희미하게 정신이 들었다가, 다시 물속으로 깊이 잠겨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의식을 잃고 있는 동안 심장을 쥐어짜듯 고통스럽고 정신이 파괴될 듯 괴로운 악몽이 계속되었다. 숨이 막히고 가슴이 얼어붙어 죽을 것 같고, 어떻게든 외면하고 싶은데, 절대로 외면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꿈을 깨고 정신이 들기를 바라다가도, 자신마저 그들의 마지막 모습에서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차마 악몽에서 벗어나려 하지도 못했다.

그러다 희미하게라도 정신이 들면 육체의 고통이 그녀를 맞이했다. 눈을 떠도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머리가 깨질 듯 아프고 온몸이 벌벌 떨렸고, 누군가가 입에 무언가를 대어 주면 받아먹다가 다시금 정신을 잃었다.

그러기를 한참을 반복한 끝에, 그녀는 겨우 눈을 떴다.

아직도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지만, 고통은 덜했다.

하지만 눈을 뜨고 보인 광경이 그녀의 예상과 너무 달라 그녀는 잠시 눈을 깜빡이며 멍하니 침대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고급스러운 나무에 섬세하게 새겨져 있는 부조들은 나라에서 손꼽히는 유명 장인의 솜씨라 해도 믿을 만했고, 그 주위로 두껍고 광택이 흐르는 캐노피 천이 우아하게 주름진 채 늘어져 있었다.

부드러운 이불. 포근한 침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화려하게 장식된 기둥이 네 개 세워져 있는 침대에, 금은사로 섬세하게 수놓인 캐노피 커튼 너머, 금장이 입혀진 호사스러운 벽지와 유려한 곡선을 자랑하며 세밀하게 조각된 가구들, 그리고 우아하고 호화로운 장식품들이 보였다.

‘감옥이……아닌…….’

매우 고급스럽고 화려한 방이었다. 그녀에게 익숙한 루테른가의 공작 부부 침실보다도 더 화려한 모습에 아를렌은 잠시 아연해졌다.

“어머, 아가씨, 정신이 드셨어요?”

누군가가 그녀가 눈을 뜨고 고개를 돌린 것을 보고 깜짝 놀라 호들갑을 떨며 다가왔다. 아를렌은 그녀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정말 다행이에요! 일단 물부터 드세요.”

하녀로 추정되는 여자가 아를렌의 상체를 일으키는 것을 도왔다. 아를렌은 잠시 어지러워하면서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는, 하녀가 입에 대어 주는 물을 두 모금 받아 마셨다.

“아가씨께서 깨어나셨다고 주인님께 알릴게요, 잠시만요.”

“……주인님……?”

“주인님께서 정말 많이 걱정하시고 기다리셨어요. 이렇게 깨어나신 것을 보면 정말 기뻐하실 거예요.”

하녀는 그대로 방을 나가 버렸다. 아를렌은 그 ‘주인님’이 누구인지, 이곳이 어디인지 모른 채, 베개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여전히 머리가 어지럽고 핑 돌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눈을 뜨면 지하 감옥일 거라고 생각했다. 운이 나쁘면 고문실로 끌려가거나, 운이 좋으면 감옥에 잠시 있다가 빠르게 처형장으로 보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기는 어디란 말인가.

곧 문이 쾅 열리며 누군가가 화급히 들어왔다. 아를렌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카쉬엔…….”

왜 여기에…….

내 부모 형제를 죽여 그리 비참하게 매달아 놓은 네가.

왜, 내 목을 베어 그 옆에 같이 전시해 놓지 않고…….

문을 열고 잠시 멈춰 서서 그녀를 바라보던 그가, 다시금 성큼성큼 걸어와 침대로 다가왔다.

쭈삣 신경이 곤두섰다. 그녀는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치는 공포에 뒤로 물러섰다. 침대에 간신히 상체를 세우고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버겁던 그녀가 도망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그저, 침대 구석까지 몸을 피하는 정도가 전부였다.

언덕에서 그를 봤을 때까지만 해도, 가족들을 저자가 죽였다는 생각에 치가 떨리게 원망스럽긴 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공포스럽고 혐오스럽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가족들의 처참한 시신을 직접 두 눈으로 보는 것은, 그들이 처형당했다는 말을 전해 듣기만 한 것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가 눈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고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아를렌이 공포에 파랗게 질려 허덕이기 시작할 때 즈음, 다행히 그는 더 이상 가까워지지 않고 침대 옆에 있던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녀 자신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이 조금 내뱉어졌다.

카쉬엔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관찰하듯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아를렌은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혀서 시선을 밑으로 내려 피했다.

악취…… 광장에서 맡았던 그 지독한 악취가 코끝에 맴돌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으나,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사히 깨어나서 다행이야. 걱정했어.”

“……감옥에 갈 줄 알았는데…….”

“여긴 나의 집이야. 앞으로 너는 여기에 계속 머물 거야.”

등골이 섬뜩해졌다. 어지러운 머리로 생각을 하기가 힘들었지만, 무언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은 모를 수가 없었다.

“부모님은……가족들은 모두,”

그녀가 잠시 숨을 삼켰다. 눈을 질끈 감았다. 광장에 꽂혀 있던, 성벽에 매달려 있던, 그들의 처참한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려 심장이 찢어질 것 같았다. 그 참혹한 광경을 단순히 처형이라는 두 글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처형당했는데, 나는 왜?”

“하사받았어. 이제 넌 내거야.”

그 말에 그녀가 창백하게 질려 굳었다. 머릿속이, 아니 온몸의 피 한 방울 한 방울이 모두 얼어 버린 것 같았다.

전쟁에서 이긴 자가 포로를, 특히 여자 포로를 하사받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지 않았다. 어쩌면, 이 방에서 눈을 뜨고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부터 어렴풋이 짐작했을지도 모르지만, 부정하고 싶었다.

전리품이 되어서 물건처럼 이 끔찍한 자의 소유물로 떨어졌다. 자신의 신체에 대한 모든 권리는 이제 온전히 이자의 것이었다.

그가 부모 형제의 피로 흠뻑 젖었을 잔인한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그를 바라보게 하였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무 걱정 하지 말고 쉬어. 너는 이곳에서 안전할 거야.”

지옥이었다.

.*. *. *. *. *. *.

황폐해진 마음과 상관없이, 시일이 지나면서 그녀의 몸은 조금씩 회복되어 갔다.

그들은 그녀의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의사들이 수시로 방문해서 진맥하고 약을 가져왔고, 하녀들은 수시로 먹을 것을 챙겼다. 모든 것이 부족함 없이 준비되었으며, 언제나 곁에 누군가가 붙어서 시중을 들었다. 매일 뜨끈뜨끈한 물로 목욕을 시키고, 마사지를 해 주었다.

아를렌은 멍한 눈으로 그들이 자신에게 무엇을 하든 그저 끌려다녔다. 반항을 할 기력도 의지도 없었다. 때로 그녀는 자신에게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인식조차 못하는 것 같아 보였다.

가끔 정신이 좀 맑아지면, 오두막을 생각했다. 무사히 회복했을까. 살아서 잘 떠났을까. 설마 내가 어디 있는지 알고 찾겠다고 오는 건 아니겠지.

‘……지금쯤이면 이미 처형당했을 줄 알았는데…….’

그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을 줄 알았었다. 그래서. 그가 일어나서 사실을 알고 화를 내더라도, 그래도 그는 무사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런데…….

그녀는 힘없이 눈을 감았다. 하녀들이 그녀의 어깨에 향긋한 목욕물을 묻혀 부드럽게 스펀지로 문질렀다.

처음에는 반짝이는 눈을 하며 이런저런 말을 붙이던 하녀들은, 하루 이틀이 지날수록 점점 말수가 줄어들고 조심스러워지며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녀가 정신을 잃고 누워 있었을 때에는 복숭아 향을 폴폴 풍기며 ‘아가씨와 주인님은 어떤 관계일까? 아가씨가 깨어나시면 슬쩍 물어볼까?’ 하며 꺄아꺄아 거리던 하녀들은, 정작 아가씨가 오랜 잠에서 깨어난 후에는 새파랗게 질려 덜덜 떨고 있는 사람에게 그런 이야기를 꺼 낼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러 밤새 말을 타고 달렸다던 장밋빛 이야기는, 어느덧 공포에 질린 여인을 강제로 끌고 와 가둬 둔 무서운 이야기로 바뀌었고, 하녀들이 밝은 빨래터에서 얼굴 붉히며 즐겁게 나누던 수다는, 깊은 밤 방문 안에서만 소곤소곤 소리 낮추어 은밀히 나누는 이야기로 변했다.

「방문은 물론이거니와 창문과 발코니 문까지 모두 항상 잠겨 있잖아.」

「왜? 도망칠까봐?」

「그 아가씨 아직 혼자 걷지도 못하는데 5층 창문으로 탈출이 가능하겠니. 그게. 자살……할까 봐 그러는 거 아닐까 싶어. 솔직히 지금 보면 언제 갑자기 뛰어내린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느낌이라…….J

「그, 목에 칼자국 나 있는 거. 혹시 스스로 그은 자국 아니야?」

「무섭다. 그럼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여자를 억지로 끌고 온 거야? 이러다 송장 치르고 우리까지 치도곤당하는 거 아냐?」

하지만 어쨌든 그들의 주인은 대공이었고, 그들은 주인의 명에 따라 아가씨를 모셔야 했다. 거기에서 그것이 그들이 모시는 분이 바라는 일인지 아닌지는 상관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대로 그녀를 깨끗이 씻기고 꾸미고 치장시켜 방으로 데리고 나왔다.

요 며칠 항상 그랬듯, 방에 저녁상이 차려져 있고 맞은편 의자에는 카쉬엔이 앉아 있었다.

어차피 아를렌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권한이 없기에, 하녀들의 손에 이끌리는 대로 의자에 앉았다.

그는 그녀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주 맛있는 음식을 보는 듯 매우 만족스럽고 배부른 표정으로 행복하게 바라보는 그 모습에 아를렌의 등골이 서늘해 졌다.

“오늘 하루는 어땠지?”

그녀가 아무 대답이 없자, 뒤에 서 있던 하녀 애나가 잠시 기다리더니 대신 대답했다.

“오늘은 거동이 많이 좋아지셨어요. 부축받지 않고 방 안을 돌아다니실 수 있으셨습니다. 점심도 어제보다 많이 드셔서 그릇을 반 이상 비우셨습니다. 의사 말이 순조롭게 회복되시고 있다고 합니다. 하루 종일 방 안에서 쉬면서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다행이네.”

여전히 아를렌만을 바라보고 있던 그가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그도 매일같이 의사에게 자세한 보고를 받고 있었던 터라, 그녀의 몸이 많이 회복되고 있다는 얘기는 전해 들었었다.

물론 그 회복되고 있다는 것이 완전히 다 나았다는 의미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매일매일 그 전날에 비해 확실히 안색이 나아 보였다.

그녀가 표정도 사라지고, 말수도 줄어들었다는 것은 안타까웠지만, 아직 몸이 좋지 않고 갑작스레 모든 것이 바뀌어 버린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그런 것이니, 시간이 지나면 다시 회복될 거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녀는 지금 그가 마련해 놓은 방 안에, 그가 준비해 놓은 의자에 앉아 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었다. 그는 기다릴 수 있었다.

“들지.”

그가 포크를 들며 아를렌에게 말했다. 옆에 서 있던 시종이 능숙하게 오늘의 메뉴에 관해 설명을 읊고, 카쉬엔이 식사를 시작하고 나서야, 아를렌은 천천히 포크로 손을 뻗었다.

이런저런 약재를 섞어 곱게 다진 연어 요리는, 주방장이 의사의 조언을 받아 최고의 식사재를 사용해 심혈을 기울여 조리한 것이었겠지만. 그녀는 아무 맛도 느낄 수 없었다. 그나마 그닥 씹어 삼켜야 하는 것이 아니기에 목구멍을 넘어가기는 했다.

그래도, 이걸 다 먹어야 저 남자가 떠난다. 며칠간 학습한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릇을 비운 후에도 카쉬엔이 떠나지 않았다. 그는 오랜 시간에 걸쳐 힘겹게 그릇을 비운 아를렌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시종에게 손짓했다.

그녀의 눈에도 낯익은 검은 벨벳 상자가 돌아왔다.

그는 상자를 열어 목걸이를 꺼내고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뒤로 걸어갔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하녀가 거리를 벌리며 뒤로 물러났다.

“이번에는 받아줄 거지?”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별로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녀의 목에 목걸이를 드리웠다. 걸쇠를 채운 후, 그녀의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목걸이에서 빼내다가, 머리카락 한 웅큼을 조심스럽게 손에 쥐고는 쓸어내렸다.

며칠간 하녀들의 정성스러운 손질로 이제 어느 정도 빛을 되찾은 머리카락이 그의 손에서 샤르륵 흘러내렸다.

잔뜩 경직된 그녀가 그에게 먼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고 작게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무서워?”

그 말에 그녀가 흠칫했다.

그가 손을 그녀의 목덜미에서 어깨로 내려가며 쓰다듬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살결…… 하지만 그녀가 이내 몸을 떨며 그의 손길에서 벗어나려 하자, 그는 피식 웃으며 손을 떼었다.

“가엾은 나의 아가씨…… 날 무서워하지 마. 나는 절대 너를 해치지 않아.”

머리에서 향긋한 냄새가 난다. 그의 얼굴이 그도 모르는 사이 그녀의 정수리로 다가가서, 흐음 하고 체취를 맡았다. 그 달콤한 향취에 기분이 좋아지던 참에, 그녀가 고개를 돌려 피해 버리자, 기분이 상했다.

사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이런 반항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어차피 제도적으로도 그녀는 공인된 그의 전리품, 소유물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그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온전한 권리가 있었다.

물론 힘의 차이를 보면 더 심해서, 그가 무슨 짓이건 하려 한다면 그녀가 아무리 온 힘을 다해 반항해 봤자 그는 개미를 손가락으로 찍어 누르는 정도의 수고밖에 더하지 않고 원하는 바를 손쉽게 이룰 것이었다.

지금 카쉬엔이 그녀를 건드리지 않고 있는 것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를 그의 변덕일 뿐.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마음을 바꾸어 죽을 때까지 매질을 하건, 발가벗겨 광장에 매달아 놓건 그것은 온전히 그의 자유였다.

어쩌면 아무런 반항을 하지 않고 고분고분히 구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다가오는 순간 소름이 끼치며 자기도 모르게 도망치게 되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의 손에 사랑하는 사람들의 피와 썩어 가는 살점이 가득 묻어 있는 것 같아 도저히 견뎌 낼 수가 없었다.

다행히 아직은 그의 인내심이 바닥나지 않았는지, 잠깐 미간을 찡그리며 굳어 있던 그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 일어섰다.

“난 가볼 테니, 편히 쉬어.”

카쉬엔은 아를렌의 머리 위로 쪽 입맞춤을 하고는 문밖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그 숨결에 바짝 얼어붙었지만, 어쨌든 그가 떠난다는 것은 다행이었다.

이내 하녀들이 몰려와 테이블을 정리하고 그녀의 잠 시중을 들었다.

그녀의 옷을 갈아입혀 주던 애나가 목소리를 낮춰서 조용히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아가씨, 힘드신 건 알지만, 조금만 마음을 열어 보세요. 산 사람은 살아야지요. 저러다 주인님 마음이 바뀌시기 전에요.”

아를렌이 조용히 고개를 내려, 자신의 치마끈을 풀어 주고 있던 애나를 바라보았다.

……지느와 유모는, 그 시체조차 온전하지 못했겠지.

그녀는 다시금 고개를 돌려 버렸다.

.*. *. *. *. *. *.

하루 일과에 산책이 추가되었다.

언제나 그렇듯, 아무도 그녀의 의사를 물어보지는 않았다. 의사들이 이제 회복을 위해 하루에 한 번씩 가벼운 산책을 하는 게 좋겠다고 제안했고, 그에 따라 그녀는 정해진 시간에 산책에 끌려 나가야 했다.

산책 장소로 대공저의 뒤쪽에 마련된 작은 정원이 그녀에게 허용되었다. 다행히 의사들은 마음의 평화가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고, 그녀는 정원 안을 홀로 걸어 다닐 수 있었다. 물론, 약간 떨어졌으나 절대 멀지 않은 거리에 하녀들이 여럿 따라붙어 있었지만.

그 정원은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고, 들어가고 나갈 수 있는 문이 하나뿐인 곳이었다. 보는 순간, 이곳이 또 다른 새장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안쪽은 정말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초록색 나뭇잎이 우거지고, 다양한 꽃들이 사시사철 쉬지 않고 번갈아 피도록 심어져 있었으며, 장인이 공들여 만든 작은 분수대도 있었다. 나비와 꽃을 좋아했던 그녀를 위해 카쉬엔이 일부러 신경 써서 조경한 곳이었다.

그러나, 분수대를 본 그녀는 얼어붙어 버렸다. 분수대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던 장대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얗게 질려서 분수대를 바라보고 있던 아를렌이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다가, 정원 바깥쪽으로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그저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가씨?”

뒤에 멀찍이 떨어져 있던 하녀들이 얼른 그녀를 쫓아 뛰었다.

딱히 도망가려던 생각은 아니었다. 애초에 도망이 가능할 리가 없다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것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비쳐졌는지, 하녀들은 절박한 표정을 하고 양쪽으로 그녀를 붙들고서 방으로 데리고 돌아왔다.

침실에 그녀를 앉혀 놓은 채 방을 지키는 하녀들은 안절부절못했다.

그들의 주인은 다른 문제에는 무심했지만, 이 아가씨에게 만큼은 과민하게 반응했다. 쉬지 않고 행적을 보고받고, 한 치의 부족한 점도 있지 않도록 과도한 관심을 기울였으며,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다면 바로 치죄했다. 이에 대해 불만을 표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특히나, 누군가 침입하거나 혹은 도망치지 못하도록 여러 겹으로 신경 써 둔 경비는 삼엄했다.

이미 돌발 상황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분명 추궁당할 터였다. 만약 이 아가씨가 도망이라도 친다면 그들은 어떻게 될까…….

드디어, 주인님과 면담을 하고 온 애나가 방 안에 들어섰다. 그녀의 표정은 굳어 있었으나. 그래도 그렇게까지 안 좋아 보이지는 않아서 하녀들은 안도했다.

애나는 조용히 아를렌에게 다가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가씨, 신발을 벗겨 드리겠습니다.”

“……?”

잘 시간도, 씻을 시간도 아닌데 갑자기 신발을 왜 갈아 신긴다는 거지. 하지만 그녀는 어차피 그들이 하라는 대로 따라야만 하는 처지였다. 그녀는 얌전히 발을 내밀었다.

애나는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겨 낸 후, 들고 일어섰다. 당연히 새로운 신발을 신겨 줄 줄 알고 잠시 기다리고 있던 아를렌은, 애나가 새 신발을 가져올 기미가 없자, 그제야 상황을 깨달았다.

더 이상 신발을 신기지 않겠다는 거구나.

그녀는 새삼 다시 한번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며 조소했다.

그녀에게 허용된 공간은 이 화려한 감옥과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작은 정원, 딱 두 군데뿐이었다. 털끝만큼의 자유도 허락되지 않은 채, 이걸 먹으라면 먹고, 저걸 하라면 하고, 이 옷을 입으라면 입고, 저 목걸이를 하라면 하고, 여길 가라면 가고, 저기 있으라면 있어야 했다.

그자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곳에, 원하는 모습으로.

주인에게 지극정성으로 돌봄받고 있는 잘 꾸며진 인형이었다. 주인의 마음이 변하면 언제 갑자기 목이 똑 부러진 채 쓰레기장에 버려질지 모를 인형.

그리고 그날 저녁, 굳은 표정으로 카쉬엔이 들어왔다.

어느 사이엔가 방 전체에 깔린 폭신폭신한 카펫을 한 발 한 발 밟으며, 아를렌이 테이블에 다가와 앉았다. 발바닥에 느껴지는 감촉이 낯설었다.

카쉬엔이 굳은 표정 그대로 조용히 손짓을 하자, 시종들이 재빨리 테이블에 음식을 날랐다.

“들지.”

식사는 조용히 진행되었다. 그는 오늘은 어떻게 지냈냐는 반복되던 질문조차 하지 않았다. 아를렌은 천천히 포크를 움직였다.

조용한 가운데 식사가 진행되다가, 이윽고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가려고 했다던데.”

무언가를 참으면서 말하는 듯한 나지막한 목소리에, 아를렌은 포크를 들고 있던 손을 멈추었다. 그녀는 그의 인내심이 거의 바닥난 상태라는 것을 직감했다. 인형 놀이도 이제 끝이겠구나.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느리게 떴다.

그녀가 가만히 멈추어 있자, 잠깐 기다리던 카쉬엔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여길 떠나려고 했어?”

“……아니……"

그녀가 드디어 입을 열자, 끓는 듯하던 그의 마음이 약간은 녹는 듯했다. 그 짧은 말이나마,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만으로도.

“그럼?”

“…….”

“정원이 마음에 안 들었어?”

“…….”

“응?”

그는 조용히 그녀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서워서.”

“무서워? 뭐가? 정원이?”

“…….”

분수대가.

네가 내 오라버니들의 목을 베어 꽂아 놓았던 분수대가.

아를렌은 입을 열지 못하고 그대로 다물었다.

오랜만에 입을 열었나 했더니 다시 꾹 닫혀 버린 그녀의 입을 한참 바라보던 카쉬엔의 심기가 다시 가라앉았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서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가 한 발짝 다가올 때마다 점점 더 얼어 버리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녀는 분명 이제 나의 것이고, 나의 성 안에, 나의 방 안에, 나의 손안에 있는데, 왜 여전히 내 것 같지가 않을까.

왜 여전히 네가 여기에 있는 것 같지가 않을까.

“아를렌, 나의 아가씨. 난 너를 해치지 않는데, 왜 그렇게 나를 무서워해?”

그가 그녀의 귓가로 높이를 맞추어 속삭이자, 그녀의 고개가 마치 삐걱거리듯 천천히 그에게 돌아왔다. 눈에 눈물이 어려 있는 것을 그녀가 억지로 참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녀가 뭐라고 말할 듯이 입을 움찔거리다가 이내 다시 다물고는, 고개를 앞으로 돌려 그를 피하려고 했다.

“어떻게 해야나를 믿어줄까…….”

카쉬엔이 손을 뻗어 무릎 위에 얌전히 놓여 있던 아를렌의 손을 잡아당기고는. 그 손 위에 부드럽게 입 맞추었다. 그녀가 흠칫하며 손을 빼내려는 듯하자, 강하게 움켜쥐고 쭈욱 빨아들였다. 파르르 떨리는 것이 입술로 전해졌다.

“어떻게 해야 다시 나에게 웃어 줄까. 응?”

그녀의 손가락은 달콤했다. 그래, 이 손가락도 이제 자신의 것이었다. 그의 입은 조금씩 조금씩 그녀의 팔을 타고 올라가, 점점이 팔목에 키스한 후 드레스의 어깨선 위로 드러나 있는 어깨에 닿았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고 외면한 사이, 그의 혀에 와 닿는 동그란 어깨가 매끄러웠다.

그는 그녀가 지금 이 순간을 힘겹게 참고 견디어 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피부에 돋아 있는 소름. 쉬지 않고 이어지는 가느다란 떨림. 어떻게든 반대쪽으로 외면하고 있는 시선.

그는 한 손으로 그녀의 뺨을 잡아 다시 고개를 그에게 돌렸다. 그녀가 피하려고 하는 듯하자 두 손으로 다시 잡았다. 강제로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눈을 감아 버렸다.

고집스럽게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피하는 그녀의 눈이, 더 이상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는 그녀의 입이, 한때는 환하게 빛났으나 이제 미소를 잃은 지 오래된 얼굴이…….

너를 옆에 두면 이 갈증이 해소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이 결핍은 더 심해진다.

어떻게 해야 너를 가질 수 있나.

그가 그녀의 입술을 강하게 집어삼켰다.

“흐읍……!”

그녀가 깜짝 놀라 버둥대며 그를 밀어내려 했으나, 그가 강하게 목 뒤를 잡아 누르자 꼼짝도 하지 못했다.

달라진 분위기에 하녀와 시종들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순식간에 방 밖으로 빠져 나갔다.

그는 잡아먹을 듯이 그녀의 말랑말랑한 입술을 정신없이 탐하다가, 그녀가 놀란 나머지 살짝 벌린 입 틈으로 짓쳐 들어갔다.

그녀의 입 안 구석구석을 헤집고, 혀를 옭아매고, 마치 그녀의 모든 것을 입을 통해 빨아먹을 듯이 정신없이 집어삼켰다. 뜨겁고 부드러운 말랑말랑한 살들이, 아무리 삼키고 삼키어도 부족했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달콤하고 황홀하여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희열을 느꼈지만, 한편으로는 탐하면 탐할수록 더, 더, 더 부족했다. 목말랐다.

그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녀가 파드득 놀라 벗어나려는 듯 몸을 비틀었지만. 그가 단단히 그러쥐는 것만으로도 간단하게 제압되었다.

침대에 그녀를 내려놓고 양팔 사이에 가두자, 그녀가 부질없이 등을 돌리고 얼굴을 시트에 파묻어 숨겨 버렸다.

그 모습이 참으로 가련하고도 못마땅했다.

“그게 숨은 거야?”

그녀가 숨을 몰아쉬며 허덕인다.

“아를렌.”

그녀의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게 하였다. 그녀가 잠시 자신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이내 눈을 감고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문다. 근래 들어 가장 자주 보는 모습이 아닌가. 무언가를 포기하고 그저 견뎌 내려 하는 그 표정.

“나의 아가씨.”

나는 너에게 그저 포기하고 참고 견뎌 내야 하는 대상이 되었나.

“나를 거부하지 마. 나를 좀 봐.”

뺨을 어루만지다가, 방금 전까지 정신없이 맛보았던 보드라운 입술로 손가락이 스르륵 옮겨 갔다. 손가락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말랑말랑한 살점이 눌렸다. 보고 있자니 다시금 갈증이 일었다.

그가 그녀의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머금어 삼켰다. 도톰한 입술을 자신의 입 안에 넣고 혀로 굴리다가 쭈욱 빨아들였다. 이대로 삼켜서 자신의 일부로 만들면 이 갈증이 좀 나아질까.

그녀가 밀어내려고 바둥거리는 손목을 가볍게 잡아 누르고, 도리질 치며 피하려고 하는 그녀를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한참 동안 음미했다.

드디어 길고 긴 입맞춤이 끝나고 그녀의 손목을 놓아주자마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그의 뺨을 거세게 후려치고는 스스로 더 놀랐다. 하지만 곧, 카쉬엔은 조금도 흔들리지도, 눈 하나 깜빡이지도 않고, 전혀 아프지도 않은 듯 여유 있는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일부러 때리게 해 준 거구나, 깨닫자 더욱 비참했다.

어차피 그 어떤 반항도 무의미하다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던 일이다. 하지만 그런 무의미한 반항조차도 이자가 허용해 준 것만 가능하다는 것이…….

아를렌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시선을 외면한 채 숨을 몰아쉬었다. 이자 앞에서 울고 싶지 않은데 지독한 무력감에 바보같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려 시트를 적셨다.

그냥.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갔으면. 이자의 변덕이 빨리 지나가서, 내게 질려서 나를 버려 버렸으면…….

그런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던 카쉬엔이 입을 열었다.

“아를렌, 너의 자리는 이제 여기야. 앞으로 계속. 영원히.”

그가 그녀의 뺨을 쓸어 내렸다.

“나는 너를 어디로도 보내 줄 생각이 없으니, 그만 받아들이고 내 곁에 있어.”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서 하얗고 가느다란 목덜미를 어루만지자. 그녀의 몸이 다시금 빳빳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내가 목이라도 조를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목을 부러트리기라도?

“아를렌, 난 너를 해치지 않아. 내가 너를 얻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리고, 얼마나 많은 일들을 했는데.”

카쉬엔의 손이 아를렌의 목덜미를 지나, 목에 걸려 있는 초록색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북부 전장에 있었을 때, 우릭 왕실의 보물 중에 그가 일부러 골라내 온 후 그녀에게 주기 위해 항상 챙겨 다녔던 것이었다. 그녀의 눈동자 색과 비슷했기에. 대대로 왕비에서 왕비에게로 넘어 내려가던 물건이라고 했다.

“오로지 너 하나를 얻기 위해 한 나라를 정복하고, 이 나라의 왕세자까지 바꾸었는데, 내가 그리 힘들게 얻은 너를 어찌 해칠까.”

그 말에, 그녀가 잠시 숨을 멈추었다.

이상한 말을……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

“너를 내 곁에 두기 위해서라면 난 무슨 짓이든 해. 넌 결코 나를 떠날수 없어. 그러니 이제 받아들여.”

아를렌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그게…… 그게 무슨 말이야.”

카쉬엔은 그대로 손가락을 옮겨 그녀의 쇄골을 쓸어내리며 손가락 끝으로 전해져 오는 매끄러운 피부의 감촉을 누렸다. 평소라면 덜덜 떨면서 어쩔 줄 몰라 했을 그녀일 텐데, 지금은 피부를 쓸고 있는 손가락을 눈치채지도 못한 것 같았다.

“나를 얻기 위해 왕세자를 바꿨다니?”

“아, 그래, 너를 데려오기 위해 왕세자를 바꿨지. 쥬헤드가 왕세자가 된 것은 네 덕이야.”

“…….”

그녀는 창백하게 질려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으나, 여전히 그 눈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그는 흡족한 미소를 띠며 마주 보았다. 실로 오랜만에 마주하는 눈이었다. 비록 그 눈빛이 이전의 빛나는 초록색은 아니었지만…….

“누가 왕세자가 되건 별로 관심은 없었지만, 그 상황에서 너를 데려올 수 있는 방법은 권력 구도를 바꾸는 것뿐이겠더군. 쥬헤드 왕자와 이해득실이 잘 맞았지.”

“나를…… 나…… 때문에? 설마…… 그냥 하는 소리지……?”

“애초에 북부에 군말 없이 갔던 것도 너를 얻기 위해서였어. 작위와 힘을 얻어서 네 손을 얻기 위해. 원래는 왕위 계승 문제까지 끼어들 계획은 없었지만, 북부 원정만으로 부족했으니 할 수 없었지.”

“나를 얻으려고……? 왜? ……도대체 왜? 갑자기 나를…….”

그녀가 혼란이 가득한 창백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그는 헛웃음이 나왔다.

“아, 이런, 아를렌. 그 왕궁의 숲에서부터, 그 나무 밑에서부터, 나는 오로지 너만을 원해 왔는데. 네가 나에게 초록색 리본으로 붕대를 감아 주었던 그 순간부터 너는 이미 내 것이었는데. 정말 몰랐어?”

“…….”

“단지, 너를 데려오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괜찮아, 이제 너는 영원히 내 옆에 있을 테니.”

카쉬엔이 그녀의 뺨을 한 손으로 소중하게 감싸며 미소 지었다.

“내게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어. 유일하게 오로지 너만을…… 너만이 나의 전부이고, 빛이고, 세상이지. 항상 너를 바라보고, 만지고, 듣고 싶었고, 항상 네가 내 품에서 웃어 주기를 원해 왔어. 전쟁이건, 왕세자건, 그 무엇이건, 그를 위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

그는 몸을 숙여, 마치 뜨거운 사랑을 고백하듯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나 아를렌은 귓가에 와 닿는 그 숨이 마치 독 향이라도 되는 양 끔찍하여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숨을 헐떡였다.

전혀 몰랐다, 전혀…….

권력 투쟁에 휩쓸려 멸문당하면서 부수적으로 끌려온 줄 알았다. 원통했지만. 역사 속에서 종종 일어나는 그런 일에 휩쓸려 버린 거라고…….

그런데,

그게 아니라,

“그럼…… 그러면…….”

그게 아니라, 그럼, 처음부터 나 하나 때문에…….

모두가…….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은데. 의사를 부르지.”

새파랗게 질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헐떡이고 있는 아를렌을 보고 카쉬엔이 설렁줄을 당기려고 하자, 그녀가 그의 손을 잡아서 막았다. 그녀가 먼저 그에게 닿은 것은 처음이었기에 카쉬엔이 잠시 놀란 눈으로 그녀의 차가워진 손을 바라보았다.

“그랬으면, 나를 원했으면 정식으로 구혼을…… 혼담을 넣었어야지…… 이러는 게…… 이런…….”

그녀가 헐떡이면서 힘들게 말을 이었다. 카쉬엔은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여기에서 이야기를 더 하는 게 좋을지 아니면 중단하고 의사를 부를지 잠깐 고민하던 그는, 잠시 후 입을 열었다.

“넣었어. 하지만 거절당했지.”

“뭐? 언제…… 아…….”

그녀는 카쉬엔이 개선한 후 슈엘을 방문했던 때를 떠올렸다. 그녀의 생각이 맞다는 듯, 그가 말을 이었다.

“슈엘을 방문했을 때. 네 아비가 거절했지.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아버지와 독대를 하고 난 후 분위기가 급격히 안 좋아졌던 것이 기억났다.

“그래도…… 그렇게까지 원했으면, 다시…….”

“내가 무엇을 가져오면 허락하겠냐고 물었더니, 그 무엇을 가져와도 내게는 절대 허락할 수 없다고 하더군.”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생각해 보면, 아버지 입장에서는 허락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국왕의 가장 큰 지지 세력인 루테른가에서 국왕이 가장 경계하는 폐왕자와 혼맥을 맺어 힘을 더 실어 주고 의심을 사서도 안 되었겠지만, 거기에다가 임신 출산을 절대 감당할 수 없는 그녀의 건강 때문도 컸을 것이다.

아를렌의 약한 몸으로 아이를 가지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에, 그녀의 부모는 아를렌을 귀족가의 가주나 후계자와 혼인시킬 의사가 전혀 없었다. 왕실을 제외하고는 오로지 적통만이 작위와 성을 물려받을 수 있는 아슈네란에서, 고위 귀족가의 안주인은 후계 생산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까.

특히나 레퀴에스 공작위는 이번이 초대 공작인지라 작위를 물려줄 방계가 전무했다. 초대 작위를 받은 카쉬엔의 적통 후계를 낳지 않으면 작위도 영지도 모두 왕실로 환수될 상황. 설령 가주 본인이 괜찮다고 하여도 따르는 가신들이 후계 문제를 들고 일어나지 않을 리가 없는 자리였다.

아버지께서는 그래서 거절하셨을 거다. 딸을 위해.

그녀의 감긴 눈꺼풀 밑으로 다시금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네 아비는 심지어 너에게 내 혼담에 관한 말을 전하지조차 않은 모양이군.”

그건…… 그건, 내가 상처받기를 원하지 않으셔서. 다른 또래 아가씨들은 당연하게 여기는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살고 있는 내가 혹시라도 상처받을까 봐 그런 이야기는 항상 숨기셨으니까…….

“나도 좀 더 우아하게 너를 데려오고 싶었지만.”

카쉬엔이 아쉬운 듯 말을 덧붙였다.

아니,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고작. 혼담이 거절당했다고 해서, 고작…… 고작…… 그런 이유로?

고작. 나 때문에?

정말, 이 모든 것이나 때문에?

내가 어렸을 때 이자에게 어설프게 붕대를 감아 주었기 때문에?

내가 나의 가족에게, 그 많은 사람들에게, 이 괴물을 불러들인 거라고?

내가. 내 손으로…….

그녀의 감긴 눈에서 눈물이 옆으로 흘러내려, 침대 시트를 축축하게 적셨다.

문득, 그때 마지막 배웅을 나갔을 때, 그가 음습하게 바라보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조만간 데리러 올게, 나의 아가씨.」

“그럼…… 그때, 조만간 데리러 오겠다는 말이…….”

“그런 말을 했었던가. 혼담이 성립되건 아니건, 반드시 널 데려올 거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긴 했지.”

“그때부터…….”

“생각보다 오래 걸렸지. 하지만 괜찮아, 결국 너는 이렇게 나에게 왔으니.”

그가 그녀의 눈가를 손가락으로 쓸며 눈물을 닦아 내었으나, 눈물이 쉬지 않고 흘러내려 별 차이가 없었다.

“울지 마, 나의 상냥한 아가씨.”

그가 그녀의 눈가에 입술을 내려 그 눈물 위에 키스했다.

그의 아가씨는 너무나도 상냥하여, 죽어 버린 사람들을 애도하며 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감정이 풍부하고 다정한 아가씨니까.

그녀는 상처받았을 것이다. 그건 카쉬엔도 알고 있었다. 우아하게. 상냥하게, 상처를 주지 않고 데려올 방법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방법이 없었으니, 거친 과정에서 상처를 주면서라도 데려오는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녀는 그의 것이었고, 데려와야 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다 보면, 받아들이고, 익숙해지고, 다시 웃어 주는 날이 오겠지.

그녀에게 좋은 것만 보고 입고 먹고 즐기게 해 주리라. 상처를 모두 잊고 다시 웃을 수 있도록.

가족을 잃어서 슬프다면, 그가 그녀의 새로운 가족이 되어 줄 것이다. 그녀의 세계에 단 하나뿐인, 소중한 존재가 되어. 그녀가 그에게 그렇듯이.

그러고 나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이다. 언젠가 그녀는 다시 그에게 그 맑은 초록색 눈을 반짝이며 웃어 줄 것이고, 그는 그녀의 따뜻한 손길을 오롯이 독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조금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괜찮았다. 이제 그녀는 계속 그의 곁에 있을 것이고, 시간은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내 옆에 있어. 무엇이든 다 줄 테니까.”

그가 그녀의 눈물 젖은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하얗게 굳어 버린 그녀는 그저 계속 숨을 허덕허덕 몰아쉬며, 감겨 있는 눈에서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나의 가엾은 아가씨.

손가락으로 눈물을 흩어 주던 그가, 어느덧 그녀의 눈물을 혀로 핥았다.

짭짤하면서도 달콤했다. 어쩌면 이렇게 달콤하고 향긋할 수 있을까. 이토록 부드럽고 따뜻할 수 있을까. 너무나도 오랫동안 갈망해 왔던 것이다. 황홀한 감각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그녀의 체취를 흠뻑 들이마셨다.

그녀의 몸이 회복될 때까지 조금 더 기다리려고 했지만, 이미 오랜 시간을 기다려 온 그녀의 하얀 살결이 너무나도 유혹적이었던지라, 어느 사이엔가 그 하얀 목을 혀로 음미하기 시작했다. 그 가날프고 말랑말랑한 몸을 꼭 끌어안았다.

목을 어루만지던 손이 어깨로 내려갔다. 동그란 어깨를 어루만지면서, 손끝에 와 닿는 부드러운 살결과 온기를 탐했다. 그의 손길을 따라 넓게 벌어진 앞섶이 점점 더 벌어지며 밑으로 내려갔다.

오랫동안 꿈꿔 왔던, 그러나 한 번도 실제로 본 적이 없었던 그녀의 하얀 맨살이 점점 더 드러났다.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황홀해, 그는 자기도 모르게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그 달콤한 살결을 한껏 삼켰다. 그러나 한 입 가진다고 하여 한 모금 갈증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었다. 보면 볼수록 더 보고 싶고, 느끼면 느낄수록 더 느끼고 싶었다. 갈망은 점점 더 강해져 그를 완전히 삼켜 버렸다.

너를 밤새도록 안고 나면 이 갈증이 사라질까. 너를 모두 집어삼키면 온전히 나의 것이라 느껴질까.

그 밑에서 아를렌은 아무 반응도 하지 못하고 그저 숨을 헐떡이고만 있었다.

정말. 모든 것이 나로 인해.

내가 한 일 때문에,

이 모든 것이 나 때문에 벌어진, 내가 불러들인 일이었다고…….

공작저에서 도망치던 그날 밤, 열에 몽롱한 정신 속에 들리던 비명 소리들을 떠올렸다.

광장에 즐비하게 꽂혀 있던 머리들을, 성벽에 줄줄이 매달려서 흔들리던 시체들을 떠올렸다.

그 가운데에서 썩어 가던 오라버니들과, 친구들과, 어머니 아버지를 떠올렸다.

가족들이 행복하기를 바랐다. 가족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것이, 그것만이 그녀의 삶의 목표이고 희망이었다.

워낙에 약한 몸으로 무언가를 익히기도 힘들었고, 무언가 공부해 봤자 그것을 펼칠 수 있을 때까지 살아남을지 의문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당장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좋은 딸 좋은 아가씨가 되는 것을 택했다.

가족들이 그녀를 자랑스러워하기를 바랐다. 그녀를 보면 행복해지기를 바랐다. 그녀를 좋은 기억으로 추억해 주기를 바랐다. 사람들이 그녀를 보고 자기 가족들을 좋아해 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고 다녔던 거고, 나무 밑에서 만났던 소년에게 친절을 베풀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녀 때문에, 그녀가 어린 시절 어설프게 베풀었던 친절 때문에, 가족들은 비참하게 몰살당하고도 모자라 그 시체조차 안식을 찾지 못하고 까마귀에게 뜯어 먹히고 있었다.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무것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렇게 쓸모없이 태어나서는 밖을 돌아다니지도 말고, 어설프게 뭘 해 보겠다고 하지 말고,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방 안에서 숨만 쉬다가 갔었어야 했는데.

약도 먹지 말고, 차라리 그냥 오래 살려고 노력하지 말고 일찍 죽었어야 했는데. 그럼 가족들이 슬퍼했을지는 몰라도, 이렇게 비참하게 몰살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녀는 자신의 몸을 탐하고 있는 카쉬엔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이딴 쓸데없는 몸뚱이, 얼마 살지도 못할 허약한 가치 없는 몸뚱어리 때문에, 고작 이깟 것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을. 그 소중하고 귀중한 사람들을……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 수 있었을 사람들을…….

지금도, 그들은 시꺼먼 까마귀 떼에게 뜯어 먹히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잔인하게 찢기고 파먹히는 동안.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 놓은 자신은…… 혼자 살아서…….

아, 그런가.

나도 지금 뜯어 먹히고 있는 거구나.

저 시꺼먼 괴물에게, 내 몸도 물어뜯겨 먹히고 있는 중이구나.

그녀는 눈을 감았다.

자신의 몸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마치 머나먼 어디에선가 남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인 것처럼 아득하니 멀고 뿌옇게 느껴졌다. 자신이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존재하지 않기를 바랐다.

이딴 저주받은 몸뚱어리 따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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