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넘기다
이제 막 시작하는 풋풋한 두 연인은 밤하늘 아래 오붓하게 누워 있었다.
별들이 쏟아질 듯 가득한 밤하늘을 지붕으로, 풀 내음 가득한 땅을 바닥으로, 그리고 어디선가 꽃향기를 가득 싣고 살랑이는 바람을 벽으로…….
아젠은 한쪽 팔을 그녀의 머리 밑에 둘러 베개로 삼고,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등허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간지러워.”
그녀가 키득거리며 움찔거리자, 그도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녀가 맑게 반짝이는 투명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은 발그레한 두 뺨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그는 다시금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춥지 않으세요?”
열기가 찬찬히 가라앉으면서, 아까는 몰랐던 추위가 슬그머니 올라오기 시작했을 것이다. 아무리 여름이라지만 숲의 밤이다. 그는 그녀의 몸을 덮고 있던 망토를 다시 한번 꼼꼼히 둘러 주면서, 다시금 그녀를 끌어안았다.
“네가 따뜻해…….”
그녀가 그의 품 안으로 쏙 들어와 안겼다. 부드러운 피부가 밀착되며 물컹 둥그런 살이 눌려 오자, 그는 다시금 아찔해지는 것을 꾹 참았다.
가능한 한 천천히, 부드럽게, 조심스럽게 그녀의 몸에 입 맞추고 어루만졌었다. 유리처럼 약한 그녀의 몸이 놀라지 않도록, 아프지 않도록, 힘들지 않도록
그를 뜨겁게 바라보는 눈. 그를 원하여 끌어당기는 손. 발갛게 달아오른 뺨. 향긋하게 유혹하는 체취. 흐드러진 머리카락. 달콤하여 모두 삼켜 버리고 싶던 입. 말랑말랑하고 보드라운 그 하얀 몸. 달뜬 목소리로 부르는 그의 이름. 그를 부르고 초대하는…….
그 모든 것이 너무나도 달콤하고 자극적이어서 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서두르지 않고 본능에 집어삼켜지지 않으며 천천히 시간을 들여 가며 그녀의 모든 것을 음미하고 숭배하는 것은 참을 수 없이 힘들면서도 지독하게 황홀했다.
그녀의 약한 몸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녀를 너무 무리시켰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여태까지의, 그리고 앞으로 더 험난해질 여정을 생각하면, 그 연약한 몸에 절대로 더 이상의 무리를 가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오늘도 온종일 이동했다. 그녀는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는 끓어오르는 자신의 정염을 애써 내리눌렀다.
애초에, 그녀처럼 귀하고 아름다운 사람을 이런 흙바닥에 천 하나 깔고 눕혀 놓았다는 것부터가…….
그는 안쓰러운 마음에 그녀의 볼을 어루만졌다. 그의 품 안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그녀가, 그 손길에 고개를 쏙 밖으로 빼더니 그와 눈을 맞추고는 사르르 미소 지었다.
사랑스러운 사람.
이렇게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당신을…… 내가 어떻게 놓을 수 있을까.
“나중에…….”
그녀가 살짝 갸웃하며 듣는다.
“나중에 상황이 좀 정리가 되면,”
그가 목울대를 한 번 꿀렁이고, 잠시 숨을 고른 후에서야 말을 이었다.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그녀의 눈이 잠깐 크게 떠지는가 싶더니, 가늘게 휘어지며 웃는다.
“응.”
그녀가 그의 품으로 고개를 묻었다.
심장이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녀를 왈칵 끌어 안았다.
그녀가 그를 마주 끌어안고 등을 살살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닿는 곳마다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전생에 그녀는 언제나 그를 보면 공포나 혐오에 질렸었고, 손끝이라도 닿을까 파들파들 떨며 두려워하고 뒷걸음질 치다가, 결국 어느 사이엔가 아무 감정도 없는 시체 같은 인형의 모습이 되어서야 그에게 안겨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가 그를 원한다. 그녀가 그를 받아들이고, 허락한다. 그녀가 그를 부른다. 사랑스러운 눈으로 마주 보며.
이런 환상적인 일이 정말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믿기 힘들었다. 현실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를 손으로 쓸고 또 쓸었다. 손가락에 느껴지는 감촉이 따뜻하고 생생했다.
그렇게 그가 환희에 젖어 떠다니고 있을 때,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가 그를 순식간에 현실로 내동댕이쳤다.
“어머니아버지도……. 좋아하실 거야.”
그녀는, 신분 같은 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며, 너를 사랑하고 아껴 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괜찮다고 말하던 그녀의 부모님을 떠올렸다.
정작 본인은 받을 생각도 없는 영지를 놓고 아버지와 레트비안이 열심히 토론하던, 어느 날의 평화롭던 저녁 식사. 그때는 그냥 평범한 일상인 줄 알았던. 그러나 이제는 그립고 그리운……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를 순간.
그녀가 일부러 웃으며 덧붙였다.
“젝시온은 화낼지도 몰라. 분명 너랑 대련하겠다며 덤빌 거야. 그땐 좀 봐줘.”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의 등을 쓰다듬던 손길이 멈춘 것을 느끼고,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이 참담한 표정을 하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젠. 나는 괜찮아.”
그래도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멈춰 있던 손을 천천히 다시 움직여서, 조용히 그녀의 등을 쓰다듬다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품 안으로 꼭 끌어안았다.
.*. *. *. *. *. *.
‘진작 죽여버렸어야 했어.’
질주하는 말 위에서 카쉬엔은 중얼거렸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 그냥 그때 그 온실에서 죽여 버릴 걸 그랬다.
그날 그 온실에서 그놈을 본 순간부터 죽이고 싶었다. 감히 그녀에게 그런 눈빛을 받은 것을 본 순간부터.
그 순간 죽여 버릴 것을. 뒤처리 따위야 어떻게든 되었을 텐데.
「미셰룬 근처에서 그분으로 추정되는 두 사람에 대한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카쉬엔은 오늘 아침, 하르드가 올린 보고를 듣자마자 바로 말에 올라타서 달리기 시작한 터였다.
「여자 한 명과 남자 한 명인데, 여자는 얼굴을 완전히 가리려고 했었지만, 소동 중에 후드가 벗겨지면서 금발 머리가 드러났었다고 합니다.」
「남자는 갈색 머리에 보라색 눈이었고, 기사 같았다고 하더군요. 그들이 떠나는 것을 막으려던 다섯 명의 마을 주민을 순식간에 살해하고 도주했다고 합니다.」
「추격에 나섰던 기사 한 명도 숨진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검기를 사용한 흔적이…….J
처음에 루테른 공작저에서 놓쳤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는 분개했지만, 곧 사방팔방으로 추적망을 깔고 기사들을 보냈다. 여기저기 수색 전단을 붙였다. 당연히 조만간 꼬리가 잡힐 거라고 예상했다.
그들이 탈출한 것으로 보이는 하수구가 검기로 잘려 있다고 했고, 확인한 시체 중에 그놈이 없었다고 할 때부터, 그놈이 그녀를 훔쳐 갔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보고를 들으니 머리가 녹아내릴 것 같은 분노로 잠식되었다.
그 하찮은 놈이 감히 내 여자를 훔쳐 갔다.
둘이 같이 있을 거라는. 오로지 둘만이 같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폐가 뜨겁게 달아올라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그놈이 감히,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의 곁을 차지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어쩌면 감히 나의 그녀에게 그 더러운 손을 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이 뒤집힐 것 같았다.
그러나, 가라앉혀야 한다.
괜찮아. 곧 되찾아 올 수 있다. 곧 그녀는 내 품에 들어오고, 내 저택 안에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그놈은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여 버릴 테다.
.*. *. *. *. *. *.
아를렌은 숨어 있었다.
도대체 이것이 몇 번째 반복되는 일인지.
지난 마을에서 꼬리가 잡힌 후 이쪽으로 수색의 포위망이 좁혀졌는지, 그 후로 그들은 계속 기사와 병사들을 피해 숨어 다니고 도망쳐야 했다.
그러다가 도저히 뿌리칠 수 없을 정도로 가까워지면, 아젠은 그녀를 수풀 속에 숨겨 놓고 혼자서 칼을 들고 뛰쳐나갔다.
혼자 숨어 있는 것은 끔찍이도 절망스러웠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게 숨죽이고, 아무 기척도 나지 않게 움직이지 않으며 가만히 있는 것.
그렇게 가만히 있으면서, 멀리서 들려오는 칼 소리와 누군가가 죽어 가는 비명을 듣는 것.
이제 더 이상, 바로 저 앞에서 누군가가 죽고 있다는 것에 대한 감상을 가지지도 못했다. 그저, 저기서 죽어 가고 있는 사람이 아젠이 아니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덜덜 떨면서, 바라고 바라고 또 바라면서 그저 시간을 흘려보낸다.
그가 돌아와서 ‘아가씨.’ 하고 부를 때까지, 그저 숨죽이고 웅크린 채 불안해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력한 시간.
바스락바스락,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자, 아를렌이 숨을 멈추고, 소리가 나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우거진 수풀 때문에 누가 다가오는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거침없이 풀을 헤치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가씨?”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긴장이 탁 풀린 아를렌이 그동안 참았던 숨을 한 번에 내뱉고는 일어섰다.
“여기 있어.”
그녀의 대답에 저쪽에서도 안도의 한숨이 들려왔다.
하지만 아직도 안심하기는 일렀다. 아를렌은 조용히 그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그의 모습이 나타날 때까지 다가갔다.
이윽고 아젠의 모습이 드러나자, 아를렌은 기쁨의 미소를 띠기 전에 얼른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샅샅이 그의 모습을 살폈다.
늘어난 상처의 개수를 가늠하고, 부상의 정도를 가늠하며, 다시금 울상이 될 뻔했지만, 참아 냈다.
“옆구리는 좀 심하게 다친 것 같은데…….”
“스친 겁니다.”
“맨날 스쳤대…….”
“실력이 아직 부족하다 보니 자주 스치네요.”
아젠이 가볍게 웃으며 대답하자, 그녀는 울고 싶은 심정을 억누르며 가능한 한 태연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스친 것일 리가 있나. 검상이다. 원래대로라면 제대로 소독하고 봉합한 후 약을 바르고 안정을 취해야 할 상처들이다. 설령 치열한 전쟁터였다고 하더라도 전투가 끝나고 돌아오면 제대로 치료를 받고, 최소한 몇 시간만이라도 휴식을 취했을 것이다.
숄을 찢어 내어 만든 붕대도 이제 거의 다 써 간다. 거의 다 써 버린 건 둘째 치고, 위생 면에서도 불안하다. 실제로 그의 상처 중 몇 군데는 눈에 띄게 벌겋게 부어오르기 시작했고, 몸에는 미열이 올랐다. 그 어떤 소독도 하지 못하고 깨끗하지도 않은 임시 붕대로 지혈만 하는 정도이니, 여태껏 아무 감염이 되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할 일이다.
아를렌은 목이 메는 것을 참으며 능숙하게 간이 붕대를 감았다.
“……조금만 더 가면 닐로의 집이 나올 거야.”
지금 그들은 이전에 아를렌이 알던 약제사의 집을 향해 가는 중이었다. 아를렌에게 도움을 받아 고아원에 들어간 후, 자라서 슈엘의 큰 병원에서 일하다가, 지금은 마을에서 외떨어진 산속에 혼자 살면서 약초를 공부하러 떠난 사람이었다.
얼마 전, 그 약제사가 머무는 곳이 그들이 있던 곳에서 국경으로 가는 길 근처라는 것을 떠올렸다.
아무 도움을 받지 않고 몸을 피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지금, 그들이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한정되어 있는지라, 그녀는 일단 그에게 약간의 도움을 요청해 볼 생각이었다.
약간의 약. 약간의 치료. 그 정도만…… 제발 그 정도만이라도.
그런 작은 목표라도, 가냘픈 희망이라도 있어야 했다. 그런 희망이라도 없이는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움직일 수 있겠어?”
“그럼요.”
아젠은 일어났다. 하지만, 일어나면서 미간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
그렇다고 해서 쉬었다 가자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시간이 지체되고 걸음이 늦어져 추적이 붙으면 붙을수록 더 힘들어지는 것은 아젠이었기에.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상태는 점점 더 나빠져 갔다.
아젠은 가능한 한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자신의 몸이 점점 더 안 좋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모를 수가 없었다. 물론 체력 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기사의 몸이니 그냥 산을 넘는 것이라면야 무리가 없겠지만, 앞으로 점점 더 많은 추적이 붙을 거라는 사실이 문제였다.
아직까지는 할 만했다. 아직까지는 몸이 많이 망가지지 않았고, 따라붙은 자들도 일반 병사들이거나 하급 기사들이었다. 하지만 곧 검기를 쓸 줄 아는 상급 기사들이 몰려오기 시작하면 지금처럼 쉽게 상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카쉬엔 그놈이 분명 직접 올 텐데…….’
그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자기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 카쉬엔 그놈은 분명 직접 그녀를 잡으러 이곳으로 오고 있다.
몸 상태가 최상일 때에도 승산이 별로 없는 상대인데, 이런 몸으로 그를 상대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놈에게 따라잡히기 전에 국경을 넘어야 한다. 그러나. 그때까지 또 다른 기사들 병사들을 몇 명이나 더 상대할 수 있을까.
어느덧 날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한 걸음도 더 걸을 수 없을 만큼 어두워지기 전에, 그들은 그날 밤 쉴 만한 곳을 찾았다. 근처에서 나뭇가지들과 나뭇잎들을 모아 작은 처마와 잠자리를 만들고, 가방에서 옷가지를 꺼내 모아 놓은 나뭇잎 위에 깔았다.
흔적을 남기는 것은 정말로 꺼려지는 일이었으나, 그녀를 그냥 맨땅바닥에서 밤이슬을 맞게 하며 재울 수는 없었다.
안락함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이미 약도 다 떨어진 상태에서, 몸의 한계를 정신력으로 버텨 내고 있는 그녀의 신체에 가해지는 폭력적인 환경을 조금이라도 줄여야 했다.
그녀를 안쪽으로 눕히고, 그가 그녀의 옆에 바싹 붙어 누웠다.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그녀가 그의 품으로 붙어 들어와 끌어안았다. 처음에는 밤새 잠들기 힘들었지만, 3일째인 지금은 어느 정도 익숙했다.
아니, 익숙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목덜미에 그녀의 숨결이 닿는 것을 느끼며 숨을 멈추었다. 아니, 깊게 들이쉬었다. 그녀의 체향이 물씬 풍겨 왔다. 마치 모든 통증을 잊게 하는 마약성 진통 향 같았다. 아니, 진통제가 아니라 흥분제 같았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그녀에게까지 들릴 것 같았다.
자신을 원하고 끌어안던 그녀가, 그 꿈같이 황홀한 순간이, 머릿속에서 다시금 생생하게 살아났다.
그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자신의 팔 안에서 고요하게 눈을 감고 있는 그녀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품 안에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에, 그 부피감에, 그는 떨리는 손을 천천히 들어, 마치 그녀가 건드리면 터질 물거품인 것마냥 조심스레 그녀의 등을 감쌌다.
눈을 감고 있던 그녀가 작게 입을 열었다.
“……아젠,”
“네, 아가씨.”
그녀는 잠시, 미안하다는 말이 나오려는 것을 다시 목구멍 안쪽으로 삼켰다. 아젠은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기에…….
“……고마워.”
그 말에 아젠은 갑자기 머릿속에 찬물이 쏟아진 듯했다. 목이 메서 침을 삼켰다. 누군가 심장을 쥐어짜는 것처럼 가슴이 저렸다.
당신은 진실을 모른다. 당신이 지금, 이딴 흙바닥에서 제대로 밤이슬을 막아 주지도 못하는 나뭇가지 밑에서 추위에 떨며 자야 하는 이유가 바로 나 때문이라는 것을,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가족들을 무자비하게 도륙 낸것이…….
“……제가…… 제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인걸요.”
그는 그녀를 좀 더 가까이 감싸 안았다. 그녀가 마주 그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가 스스로 자신을 끌어안고 품에 안기는 이 감촉이 너무나도 따뜻하고 황홀하여 가슴이 뛰면서도, 당장이라도 자기 자신의 가슴을 갈라 심장을 뜯어 버리고 싶을 정도의 자기혐오감에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그는 떨리는 손을 천천히 움직여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위선이었다. 그나마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그 자신을 위해, 마치 그녀를 달래듯 등을 쓸어내리고 또 쓸어내렸다.
많이 지쳐 있던 그녀는 어느덧 새근새근 고른 숨을 내쉬며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
이대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싶다.
그는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려 그녀의 얼굴선을 덧그렸다. 푸석푸석해진 얼굴에 거멓게 내려앉은 눈 밑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많이 피곤했던지, 그녀는 그의 손길에도 전혀 미동하지 않고 포근하니 잠들어 있었다.
조용히 그녀의 하얀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
피곤하게 감겨 있는 눈꺼풀에, 거칠어진 뺨에, 한 번씩 입술을 내렸다가, 그녀의 머리카락에 코를 묻고 눈을 감았다.
나는 이 순간 행복을 느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절망을 느껴야 하는 것일까.
왜, 모든 것을 망가트리기 전에는 아무것도 몰랐을까…….
.*. *. *. *. *. *.
아침이 되자, 아젠은 자신의 몸이 확연히 더 무거워진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감염이 더 진행되었나.
왕국 최강의 기사로부터 두 사람이 도망치고 있는데, 두 사람 다 몸이 아프다. 절망스러운 상황에 헛웃음이 났다.
그녀는 아직도 자신의 품 안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그는 잠시 동안 그녀의 얼굴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너무나도 아름답고 사랑스러워. 그저 영원히 이렇게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움직여야 했다.
잠자리가 편할 리 없건만, 이토록 불편한 잠자리에서조차 밤새 뒤척이지조차 못하고 기절하듯 쓰러져 자고 있는 그녀를 깨우고 싶지 않았지만…….
“……아가씨.”
“으응…….”
“아를레네 아가씨, 일어나셔야 합니다.”
그가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공작저에 있을 때에는 매번, 주무세요, 더 주무세요, 쉬세요, 를 입에 달고 살았었는데, 이제는 곤히 자고 있는 그녀를 깨워야 했다.
그녀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지치고 멍한 눈빛이 허공에서 잠시 껌뻑이다가, 아젠과 눈을 맞추자 잠깐 멈추더니, 사르르 웃어 보였다.
“아젠, 좋은 아침.”
일부러 녹아내릴 듯 환하게 웃으며 아침 인사를 하는 그녀의 파리한 안색에 가슴이 아렸다. 그러나 그녀가 왜 그렇게 열심히 웃는 얼굴을 만들려 애를 쓰는지 알기에, 그도 태연하게 아침 인사를 받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가씨.”
그녀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차고 딱딱한 바닥에서 밤새 자서 온몸이 뻐근하고 아픈지, 움직이다가 움찔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아젠은 먼저 일어나서 그녀를 부축했다.
빠르게 주변을 정리했다. 빠른 시간 안에 흔적을 완전히 지우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멀리에서 봤을 때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만 움막을 부수고 흐트러트렸다.
어느덧 익숙해진 아침 루틴에 짐을 챙기고 있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다보던 아젠은, 이내 결심을 굳히고, 그녀를 불렀다.
“아가씨,”
그녀가 그를 돌아본다. 다음 말을 기다리며 믿음이 가득한 눈을 빛내고 있다.
“이걸 가지고 계세요.”
그는 그녀에게 단검을 건네었다.
……단검을 볼 때마다,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라서, 이런 걸 그녀에게 건네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자신의 몸은 점점 더 안 좋아지고, 쫓아오는 자들은 더더욱 강해지는 와중에, 그녀를 무방비하게 맨손으로 놔두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가 자신의 손에 놓인 단검을 잠시 내려다보고, 아젠의 눈을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한번 단검을 내려다보고 손에 꼭 움켜쥐었다.
“응.”
그녀의 표정이 결연하다. 그는 침울하게 말을 덧붙였다.
“쓸 일이 없으셔야겠지만…….”
“응,잘가지고 있을게.”
“……아마,”
그가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그들은 절대로아가씨를…….”
해치지 않을 테니까, 라고 말하려던 아젠은 잠시 멈칫했다. 카쉬엔은 그들에게 아를렌을 무사히 데려오라고 명령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녀를 잡는 것 자체가 그녀를 해치는 일이 아니고 무엇인지.
“……아가씨께는 완전히 방심할 테니까, 한 번 정도는 통할 겁니다.”
“응.”
“방심하고 가까이 왔을 때, 이렇게 쥐고, 한 번에, 절대 망설이지 마시고,”
아젠이 그녀의 손에 단검의 손잡이를 쥐여 주었다.
“망설이실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여 온 놈들이니,”
그들이 죽여 온 사람들에, 당신이 사랑한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절대 인정사정 봐주지 마시고, 걱정하지도 마시고, 그저 있는 힘껏 이렇게 찌른 후 비틀어서…….”
그는 그녀의 등 뒤로 바짝 붙어, 그녀가 단검을 쥔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쳐 잡은 채, 찌르고 비트는 시늉을 했다.
가만히 따르던 아를렌이 문득 뒤를 돌아보아 그를 바라보았다.
“아젠. 손이 뜨거워.”
“아…….”
그가 움찔했다.
그녀가 하얀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짚어 열을 재려 하자, 그가 무의식중에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그녀의 손이 허공에 멈춰 섰다.
“……열이 많이 오른 거지?”
“괜찮습니다. 그 약제사의 집까지는 충분히 버틸 만해요. 일단 출발하지요.”
그가 뒤돌아서 가방을 챙겨 들자, 아를렌이 다급하게 따라붙었다.
“어디야? 어디가 제일 곪은 거야? 상처를 좀 보자.”
“기사의 몸을 얕잡아 보지 마세요, 아가씨. 상처 좀 곪는다고 해도 충분히 버팁니다.”
아젠이 웃으면서 말하자, 아를렌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뭐라고 더 해 보았자 아젠이 받아 주지 않을 거라는 것도, 그리고 설령 상처를 본다 해도 약도 붕대도 무엇도 없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지독한 무력감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서두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뒤에 저놈들이 붙는 것도 곤란하지만, 아가씨 말대로 빨리 도착해서 상처를 치료하고 싶으니까요.”
“응…… 우리가 위치를 제대로 알고 있는 게 맞다면, 오늘 내로는 도착할 거야.”
그녀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몸이 안 좋은 것은 그녀였고, 자신이 그녀의 몸 상태를 걱정하는 입장이었는데, 반대로 그녀에게서 자신의 몸을 걱정받고 있자니 아젠은 어쩐지 웃음이 났다.
“웃음이 나?”
그녀가 핀잔을 주자, 그가 실없이 웃었다.
“아가씨가 제 몸 걱정을 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최근에는 그럴 일이 많았지. 너 지난봄에 슈엘에서도 쓰러졌었잖아.”
“아…… 그랬었죠.”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없어진 줄 알았던 자신의 과거가 그를 질척하게 찾아와 문을 두드렸던 그 날.
“……저는 괜찮습니다.”
“괜찮긴, 이젠 온몸에 검상이 가득 곪아 가잖아. 그땐 의사라도 있었지. 지금은 네가 나보다 더 환자야.”
그녀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아젠을 돌아보았으나, 아젠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가요, 아가씨. 오늘 내에는 도착해야지요.”
그들은 말을 타고 숲길을 걸었다. 얼마 동안은 무탈하게 산을 탔지만, 그닥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어지러운 와중에도 감각을 예민하게 곤두세우고 있던 아젠이 멈춰 서자, 아를렌 역시 멈춰 서서 아랫입술을 깨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또다시 시작될 일을 예감하자, 벌써부터 절망스러운 무력감이 몰려왔다.
그녀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아젠이 멈춰 선 것은 분명 누군가의 기색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대 기사 역시, 이쪽의 기색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아를렌은 아젠이 입을 열 때까지 숨죽이고 가만히 멈춰 있었다.
이윽고 아젠이, 한쪽을 바라보며 발검하고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숨으세요.”
“응”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를렌은 망설이지 않고 아젠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의 반대쪽으로 달려갔다.
아젠은 검을 뽑아 들고 긴장하여 기다렸다. 아를렌의 기척이 멀어진 후 옅어졌다. 무사히 숨을 곳은 찾아 몸을 숨긴 모양이다.
훈련받은 기사의 기척이 하나, 그리고 병사들의 기척이……일곱 정도?
따라붙은 기사가 아직도 하나뿐이라는 사실은 다행이긴 한데…….
그가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손등으로 훔쳐 냈다.
이제 열이 제법 많이 올라서 어지럽다. 할 수 있을까? 아직 평범한 기사 하나 정도는 상대할 수 있겠지만, 그냥 이기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한 놈이라도 빠져나가기 전에 놓치지 않고 모두 다 죽여 버리면서. 자기 자신은 이다음에 올 다른 기사들을 상대할 수 있도록 멀쩡해야 했다.
설령 자신이 쓰러지더라도 그녀 혼자서라도 무사히 도망칠 수 있으려면 최소한 지금 쫓아온 저놈들은 한 놈도 안 놓치고 확실하게 다 죽여야 할 텐데.
다시금, 절벽에 홀로 앉아 있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런 것이었을까?
그때 그녀가 혼자가 되었던 이유.
“찾았다!”
누군가 외쳤다. 저쪽에서도 스릉스릉 칼들을 뽑는 소리가 들렸다.
아젠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가 여기서 쓰러지면 그녀가 혼자가 된다. 그리고 어쩌면, 그녀는 자기 자신을 내걸어서 그를 살리려고 하겠지. 그때처럼.
‘그건 안되는데.’
그가 이 자리에서 죽더라도, 그녀는 멀리멀리 도망쳐야 하는데.
미리 말을 해 뒀어야 했는데. 왜 그 말을 미리 안 했지? 내가 죽거나 움직일 수 없게 될 경우, 그냥 나를 버리고 혼자 도망치라고. 하지만, 그녀가 혼자서 국경을 넘는 건 힘들 텐데. 내가 도와줘야 하는데.
이번 생에는, 끝까지, 지켜 주기로 했는데.
그래서, 무사히 국경을 넘어가서 정착할 곳을 찾으면……그때에는…….
“네가 그 아젠이라는 기사냐. 공녀는 어디 있나.”
기사로 추정되는 상대가 검을 겨누며 물었다. 어차피 그쪽에서도 답을 바라고 묻는 것은 아닐 거다.
아젠은 그냥 피식 웃었다. 말로 서로 도발하고 할 기력조차 아까웠다.
저쪽에서 그 이름 모를 기사가 손짓을 하자 병사 세 명이 옆으로 돌아서 빠져나가려 했다. 하, 내 발은 잡아 두고 그녀를 수색하려고?
그의 몸이 단숨에 뛰어올랐다. 병사들이 미처 뒤를 돌아보기도 전, 순식간에 한 명의 목이 꿰뚫렸다.
“으악!”
옆에 있던 병사가 비명을 지르며 칼을 휘둘렀으나, 공포에 질려 아무렇게나 내지르는 눈먼 칼 따위 아젠은 손쉽게 쳐 내고 그자의 배를 갈라냈다. 세 번째 병사를 베어 내려는 순간 저쪽에서도 기사가 도약해 왔다.
캉?!
검기와 검기가 요란하게 맞부딪치며 작은 폭발이 일었다.
‘검기……제기랄.’
벌써 검기를 쓸 줄 아는 기사가 따라붙었나. 빨리 이놈을 해치우고 저 병사들을 다 죽여야 하는데.
약속이나 한 것처럼, 기사가 아젠에게 달려들기 무섭게 남은 병사들이 주변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가 거세게 상대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빨리 이놈을 치워 버리고 저 병사들을 쫓아가야 했다.
강하게 검기를 실어 거칠게 기사를 뿌리친 아젠이 재빠르게 등을 돌려, 그녀를 찾아가려던 병사의 등을 쫓아가 베었다.
비명과 함께 피가 튀기면서, 그는 바로 다시 뒤돌아 닥쳐오는 칼을 막아 냈다.
‘앞으로 넷.’
그는 재빠르게 주위를 살피며 남아 있는 병사의 수를 세었다. 빌어먹을 놈들. 저 상급 기사 놈을 한번 상대할 때마다 병사들이 점점 더 멀어진다. 차라리 저 병사들이 그를 향해 덤벼들었다면 쉬었으리라.
숲에는 요란하게 검기가 떨리는 소리와 칼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간신히 기사를 떨쳐 내고 병사들을 따라잡은 아젠의 칼이 공기를 가를 때마다, 병사들의 피가 확 튀며 나무줄기들 위로 쏟아져 내렸다.
‘이제 둘…….’
아젠이 마지막으로 베어 낸 병사의 시체에서 재빠르게 칼을 거둬들이고 다시 방어 태세를 갖추며 다시 한번 숫자를 세었다. 이미 부상이 늘었다. 힘겨웠다. 종종 머리가 핑 돈다. 하지만 이제 몇 남지 않았다.
“많이 지쳤을 텐데. 듣던 대로 실력이 장난 아니군.”
상대 기사도 피를 흘리고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이름이 뭔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다. 하지만 상대는 아젠에 대해 퍽 잘 아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충성심이 잘못되었어. 우리는 지금 공녀를 해치러 온 게 아니다. 공녀를 생각한다면 무사히 모시고 갈 수 있게 도와주는 게 맞을 텐데.”
모시고 가서 유린하고 말려 죽이겠다고…… 헛웃음이 났다.
아젠은 다시 그에게 달려들었다. 캉 하고 강하게 두 검기가 충돌하는 소리가 나며 주위로 작은 폭발이 일었다.
“공녀는 몸도 약하다면서, 편하게 성안에서 호의호식할 수 있는 분을 이런 숲속에서 언제까지 노숙시킬 셈이냐?!”
호의호식? 값비싼 옷을 수의로 삼아 죽어 가는 게?
하지만 굳이 쓸데없는 대답으로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이제 하나……분명 하나가 남았을 텐데.’
기사 놈을 상대하면서 아젠은 재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시간이 없었다. 이건 언제나 그에게 불리한 싸움이었다. 아무리 거의 다 해치운다 한들, 하나라도 놓치면 의미가 없었다. 자기가 이 기사 놈을 상대하고 있는 사이에 남은 병사 놈이 그녀를 발견하면 끝이었다.
부수는 것은 그토록 쉬웠는데, 지키는 것은 어렵다. 그는 뼈저리게 느꼈다. 전생에 무자비하게 휘둘렀던 힘들이 사무치게 원망스러웠다.
남아 있어야 하는 병사가 주위에 보이지 않는다. 이를 갈았다. 서로 맞붙은 칼날들이 기기기긱 갈리는 동안, 한편으로는 기감을 예민하게 끌어 올렸다.
그녀의 기척 바로 옆에 또 다른 기척을 느낀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콰앙一!
무리해서 급하게 끌어 올린 검기가 폭발하면서, 이름도 모를 기사 놈이 멀리 나가떨어졌다. 머리가 아찔하고 쓰러질 것 같았지만, 어떻게든 버텼다. 그자가 바로 다시 달려들려는 참에, 아젠은 그자를 상대하지 않고 바로 뒤돌아 뛰었다.
더 빠르게 처 리했어야 했는데!
허겁지겁 그녀의 흔적을 쫓아 뛰었다. 뒤로 그 기사가 쫓아오고 있는 걸 알았지만 상대할 시간이 없었다. 그녀에게 이 기사 놈을 끌고 가고 싶지는 않지만, 일단 그 병사를 해치운 후에 이 기사까지 죽여 버리는 수밖에…….
어지럽다. 이명이 울린다. 심장이 자기 멋대로 뛴다.
이 어지러움이 무리를 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불안 때문인지 알 수가 없다.
그녀가 보였다.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는 그 무도한 놈이 보였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손에 들려 있던 칼을 집어 던졌다.
그 더러운 놈이 피를 흩뿌리며 쓰러지고, 그녀가 점점이 뻘건 피가 튄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를 돌아본다.
그리고, 외친다.
“뒤에一!”
그는 뒤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무의식중에 칼로 막아 내려다 손이 비어 있음을 깨닫고 뒤늦게 몸을 굴러 옆으로 피했다.
아니, 피하려고 했다.
피가 튄다.
“아젠一!”
아, 제길…….
“아젠! 아젠!”
그녀가 뛰어온다.
안 돼, 오지 마. 반대쪽으로 뛰어가, 제발…….
기사가 다시금 칼을 들어 올려 바닥에 쓰러져 있는 그의 가슴을 향해 내리찍으려 하자, 아젠은 깊게 베인 복부를 움켜쥔 채 필사적으로 땅을 굴렀다.
살아야 했다.
살아서 그녀를 데리고 국경을 넘어야 했다.
기사가 발로 아젠의 복부를 거세게 걷어차자. 그가 퍽 하고 굴러떨어졌다.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온다.
복부가, 온몸이 불타는 것 같다.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그를 향해 내리꽂히는 칼을 도저히 피할 수가 없겠구나 하고. 자신을 향해 칼을 내리치려는 기사를 바라보는 찰나,
“하아…….”
숨을 몰아쉬었다. 눈앞이 깜깜하고 어지럽다. 그래도 아직 정신을 잃어서는 안 된다.
더러운 놈의 숨통이 완전히 끊긴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아젠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의 아가씨가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더니 허겁지겁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아가씨……괜찮으세요?”
“너는! 어떻게 지금 나를……!”
그의 앞에 주저앉은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찼다.
“상처를…… 상처를 봐. 어떡해…… 어쩌면 좋아…….”
“저는, 괜찮아요.”
숨을 헐떡이느라, 말을 제대로 잇기가 힘들었다.
“그보다 아까, 그 자식이, 감히 아가씨를…….”
“나는! 괜찮다니까!”
그녀가 눈물을 주룩주룩 떨어트리면서 언성을 높였다.
화를 내도 아름다운 나의 아가씨…….
기사가 그대로 멈추었다.
그녀가, 그의 가냘프고 한없이 다정하던 아가씨가, 기사의 뒤에 단검을 꽂아 넣고 온 힘을 다해 비틀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고 구해 주던 그 손으로.
갑작스런 충격에 잠시 멈춰 있던 기사가 본능적으로 뒤에 있는 적을 후려쳤다. 우악스러운 주먹에 맞은 아를렌이 땅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안돼.
아젠이 이를 악물고, 배를 부여잡은 채 일어섰다.
저 개새끼가 그녀를 감히 더 치려는 것인지 아니면 잡아가려는 것인지, 더러운 피를 줄줄 흘리면서 그녀에게 비틀비틀 다가가고 있었다.
아젠은 그놈의 뒤쪽에 아직도 꽂혀 있는 단검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뻗었다. 비틀어 뽑아내자 막혀 있던 피가 줄줄 쏟아져 나왔다.
그놈이 뒤돌아보며 반응했지만, 목줄기에 단검이 꽂히자, 기사는 눈이 뒤집히며 무너져 내렸다.
당신이 나를 걱정해 주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아젠은 급하게 그의 너덜너덜한 셔츠 단추를 풀고 있는 그녀의 피 묻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상냥하고 따뜻하던 손이 온통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내가, 지켜주고 싶었는데.
이번에는,잘 지켜 주고 싶었는데.
내가 더 이상 지켜 줄 수 없게 되면, 당신은 어떡하지.
“……아가씨……."
“응?”
그녀가 간이 붕대를 감는 손을 멈추지 않고, 시선도 올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국경을, 넘어가세요.”
그녀가 그제야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젠은 헐떡이며 말을 이었다.
“제가 없어도…… 웨스란드로 가셔서…….”
이미 루테른가는 멸문되었다고, 그러니 미련 없이 국경을 넘어가서 망명하라고, 말을 해 줘야 하는 걸까?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면 어떡하지?
“그자는……, 레퀴에스 공작은, 절대로 아가씨를, 죽이지……않을 거니까…….”
죽이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 좀 더 안심하고 도망칠 수 있을까?
“죽이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당신을 죽이지는 않겠지만, 포기하지도 않을 텐데. 그걸 알려줘야 할까.
내가 바라는 건 뭐지. 그녀가 무리하게 도망치다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미쳐 버린 성에서 정신을 놓고라도 숨을 쉬고 있는 것을 바라는 걸까.
하지만 그자의 손에 들어가면 어차피 당신은 말라 죽지 않던가. 그자는 당신을 직접 죽이지는 않을지 몰라도 부서트리고 망가트리는 짓은 서슴지 않지.
아니 어쩌면. 이 모든 것은 그냥 핑계이고, 나는 여전히 끔찍하게도 이기적인 미친놈이라서, 그냥 당신이 과거의 나든 누구든 다른 남자에게 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게 아닐까…….
제기랄.
어느 쪽이 당신에게 더 좋은 건가. 아니, 더 좋은 게 남아 있기는 한가.
당신의 가족들이 모두 도살된 순간부터,
아니, 그 짐승 같은 자가, 내가, 이 괴물이, 당신을 각인한 순간부터.
아아, 사실은,
당신하고 같이 무사히 국경을 넘어가면,
이번엔, 그렇게 둘이 서로 마주 보고 웃으면서 행복하게 살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잠깐 그런 헛된 꿈을 꿨다.
이번엔, 그런 일이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했어.
파렴치하게도 내가 저질렀던 모든 일들을 뒤로하고, 당신이 잃어버린 사람들을 뒤로하고, 설령 당신이 오래 살지 못하더라도, 그래도 마지막까지.
당신이 내게 마지막까지 웃어 주는 그런 과분한 일이 감히 나 같은 죄인에게 용납될 리가 없었나.
문득, 아젠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던 그녀가, 생긋 웃는다.
“아젠, 걱정하지마.”
그녀가 눈물이 가득 쏟아져 내리던 얼굴에, 퍼렇게 질려 있고 굳어 있던. 공포에 젖어 있던 얼굴에, 무언가를 결심한 듯 미소를 가득 만들어 냈다.
당신의 곁에 10년을 붙어 있었다. 당신이 억지로 만들어 내는 미소를 구분하지 못할 리가 없잖아.
그렇게, 걱정하지 말라고, 괜찮다고, 주장하려고 열심히 웃어 보았자…….
“괜찮아, 아젠. 모든 것이 잘될 거야.”
그녀가 활짝 웃는다.
그 웃음을 보고 있자니, 모든 것이 따뜻해진다.
속는 걸 알면서도, 가짜 웃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정말로 모든 것이 잘될 것 같은 환상이…….
아니. 하지만,
안되는데…….
그녀가 절벽에 홀로 앉아 있다.
생기 없는 눈으로 이쪽을 쳐다본다.
희미해지는 정신에 스르르 눈이 감겼다.
아젠이 정신을 잃고 옆으로 쓰러지려고 하자, 아를렌이 빠르게 그를 부축해서 눕혔다.
아까 그 기사에게 얻어맞은 후로 아직도 머리가 울리고 한 걸음 한 걸음이 흔들렸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꼼꼼하고 탄탄하게 붕대를 감은 후, 그녀는 숨겨 놓았었던 말을 데려왔다. 친하지도 않은 말을 달래고 달래어서 바닥에 앉혀 놓은 다음에서야 간신히 그 위에 끙끙대며 아젠을 올려놓을 수 있었다.
복부에 크게 부상당한 사람을 이런 식으로 말 위에 걸쳐 놓아도 될지 염려가 되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가야 했다. 빠른 시간 내에. 지금 그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죽어 가는 것도 나 때문…….’
그녀는, 말 위에 죽어 가는 아젠을 싣고, 한 손에 고삐를 꼭 움켜쥔 채 홀로 걸었다.
결연한 표정에 어울리지 않게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울면 안 도부 우는 것도 기력 낭비야. 계속해서 되뇌었지만. 멈추지 않고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닐로를 만나면, 치료할 수 있어. 치료하면 괜찮아질 거야.
괜찮아질까? 정말?
괜찮아지면? 그다음에는? 계속 이렇게 또 쫓기고 싸우고 다치고? 또 죽을 위기에 처하고?
나 때문에?
나 하나 때문에?
어차피 잘 도망쳐 봤자 오래 살지도 못할 나를 살리겠다고?
……태어나기부터…….
태어나서부터, 약한 몸 때문에 가족들을 걱정시키고, 울리고, 고생시켰다. 행복하고 단란하던 가정에 암울의 구름이 드리운 것은 모두 자신이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제 이런 자신을 살리겠다고 멀쩡하던 사람들이 죽어 간다. 정확히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는 못해도, 공작저에 있던 사람들이 자신을 빼내기 위해 어떤 희생을 치렀을지 짐작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제 아젠까지…….’
바람이 스산하게 불어왔다. 온몸이 덜덜 떨려 왔다.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는 아를렌의 얼굴이 온기를 잃어 갔다.
.*. *. *. *. *. *.
한 청년이. 작은 오두막 옆의 텃밭에 쭈그려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는 텃밭에 자라나고 있는 풀잎들을 관찰하고. 만져 보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뭐라 뭐라 중얼거리더니 그 옆에 있는 풀잎으로 옮겨 갔다.
심란한 마음을 가누기 위해 텃밭에서 약초들을 돌보고 있지만, 그래도 최근 들은 소식에 뒤숭숭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그는 문득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일부러 사람을 피해 인적이 드문 산속에 살고 있던 터라 찾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인근 마을의 의사나 약제사에게서 병이 치료되지 않은 사람들이 간혹, 혹시나 하고 새로운 약제사를 찾아오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아마 이번에도 가망이 없는 환자를 데려오는 거겠거니 하며 다가오는 사람의 정체를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말을 끌고 걸어오고 있는 사람의 안색도 환자의 것이고, 말 위에 얹혀 있는 사람은 살아 있는지 의심스러운 행색이었다.
“누구세요?”
환자인 것이 뻔했지만 일단 물었다.
“아…… 저, 닐로……?”
말고삐를 쥐고 힘겹게 걸어오던 아가씨가 입을 열었다.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 어디서 본 것 같은……?
“어…… 설마, 루테른 아가씨?!”
닐로는 경악했다.
곱디곱던, 귀하시던 아가씨가,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한 얼굴에, 누더기에 가까운 차림을 하고, 말고삐를 잡은 채 힘겹게 걸어오고 있었다.
게다가, 말 위에 죽은 듯이 얹혀 있는 사람은…….
“아젠 경?!”
그는 펄쩍 뛰면서 얼른 말고삐를 낚아챘다.
“얼른 들어오세요. 세상에, 세상에! 아니,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만 이게 무슨…….”
순식간에 말고삐를 빼앗겨 버린 아를렌은 뭐라고 입술을 달싹달싹하다가, 서둘러 집 안으로 아젠을 데리고 들어가는 닐로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미안, 미안해, 너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는데…….”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그러잖아도 소식 듣고 얼마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여기까지 무사히 오셔서 다행. 아니, 무사하신 건 아닌가…… 아무튼 절대로 폐가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제가 쫓아가서 구해 드리지 못한 게 죄송할 뿐인데…….”
닐로는 아젠을 침대에 옮겨 놓으며 허둥지둥했다.
“세상에, 부상이…… 아니, 아가씨도 얼른 앉으셔야죠. 아가씨 상태도 너무 안 좋아 보이셔서…….”
“나는 괜찮아.”
“아니, 일단 앉으세요, 앉으세요. 아니, 누우세요. 침대가.”
“아니야, 앉아 있을게.”
허둥지둥 어쩔 줄을 모르는 닐로의 모습에, 아를렌이 일단 근처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닐로는 서둘러 아젠을 침대에 눕힌 후, 일단 아를렌의 상태를 빠르게 살폈다.
“나는 괜찮으니 일단 아젠부터…….”
“일단 아가씨 약만 잠깐 챙겨 드릴게요. 세상에. 아가씨, 이게 어쩐 일이랍니까.”
닐로가 급하게 아를렌의 체온을 재고 혈색과 눈 등을 확인하며 그녀의 몸 상태를 살피는 동안, 아를렌은 입을 다물었다.
오면서 걱정했다. 받아 주지 않으면 어쩌지, 억지로 받아 주긴 받아 주지만 싫어하면 어쩌지, 혹은 아예 신고해 버리면 어쩌지. 하지만 그런 걱정이 모두 날아가고, 따뜻하게 맞아 주는 닐로에, 무사히 아젠을 치료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안도감이 온몸의 얼음을 녹여 버리는 듯했다.
녹아서 흘러내리는 물처럼, 눈에서 눈물이 다시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오. 아가씨, 울지 마세요. 제가 다 치료해 드릴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니야. 닐로, 이건…… 그냥, 너무 고마워서 그래.”
“고맙다뇨. 제가 아직 해 드린 것도 없는데…….”
닐로는 빠르게 이런 약 저런 약을 아를렌의 앞에 늘어놓은 후, 서둘러 아젠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오는 길이 정말 험하셨나 보군요. 그래도 용케 여기까지 살아서 도착하셔서…… 아이고 내 입. 입. 그래도 아젠 경이 한몫을 하긴 했군요. 처음에 슈엘에 와서 아가씨를 지키겠다 어쩐다 할 때에는 꼬맹이였잖습니까. 진짜로 아가씨를 지켜 냈네요.”
아를렌은 앞에 놓인 약을 먹으며 묵묵히 들었다.
닐로가 아젠의 옷을 벗기고 부상을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하자, 그의 온몸에 가득한 상처를 한눈에 담게 된 아를렌의 눈에 또다시 눈물이 고였다.
저 부상 하나하나가,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하고 곪아 버린 모든 상처 하나하나가. 모두 자신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아이고 맙소사, 몸이 완전 너덜너덜해졌네요. 이 상태로 용케도 살려서 데려오셨…… 아니, 그게 아니고. 암튼 그래도 제때 저희 집에 오셔서 다행이에요. 특히 이 복부 상처는 빨리 봉합하지 않았으면 큰일 났을 텐데……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어떻게든 해 볼게요.”
“응,고마워.”
닐로는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상처의 독기가 몸까지 이미 퍼져서, 이를 어쩌나…… 그래도 강철 같은 기사의 몸이니 약 먹고 치료하다 보면 나아질 수도 있어요. 오, 이거 다 아가씨께서 붕대 감으신 거죠? 꼼꼼하게 잘 감으셨네요. 전에 슈엘에서 뵈었을 때보다 솜씨가 더 느셨는데요.”
닐로는 능숙하게 상처를 소독하고, 봉합했다. 지금은 산골에 틀어박혀 살고 있다지만. 한때는 슈엘에서 제일 바쁜 병원에서 일하던 몸인지라 상처를 치료하는 그의 손은 능숙했다.
“살릴 수……있는 거야?”
“시간을 두고 봐야 해요. 일단 앞으로 2~3일이 고비이고…… 아니, 아니, 제 말은, 2~3일 후에는 깨어날 거예요. 다행히 장기 손상이 심한 건 아니라서 봉합은 문제없이 다 되었는데, 지금 피까지 독기가 다 스며들어서 그걸 이겨 내는 게 관건이거든요.”
“…….”
“그래도 이게 어디 보통 몸이랍니까. 보통 사람이면 몰라도 기사들은 몸 자체가 워낙 다르니까 괜찮을 거예요. 전에 병원에서도 이런 경우를 여럿 봤었는데 기사들은 살아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일단 독기를 몰아내고 깨어나면 그때부터는 요양 좀 하면서…….”
“그럼. 이동은 언제쯤 가능할까?”
“이동이요? 아이고 살아나기만 해도 다행, 아니, 암튼 최소한 일주일 후? 그 전에는 못 움직여요.”
일주일…… 지금도 바로 추적이 붙어 있을 텐데, 어떡하지. 아를렌이 주먹을 꽉 쥐었다. 일주일이나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 자신과 아젠은 물론이거니와 닐로까지 위험해진다.
닐로는 아젠의 부상 하나하나마다 적절한 처치를 하고 약을 바르면서 등 뒤의 아를렌에게 계속 떠들었다.
“그래도 아가씨라도 살아 계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수도에서 그 난리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던지…… 세상에 그게 무슨 날벼락이랍니까.
공작님 일가가 아가씨 빼고 모두 다 반역죄로 처형당하셨다는 소식에 천지가 뒤집어진 줄 알았습니다요. 심지어 일개 사용인들까지 모두 처형했다기에…… 잔인한 놈들……! 하늘이 무섭지도 않은지, 어찌 그런답니까?
그 소식을 들은 저도 속이 뒤집혀서 하루 종일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던데, 공작령 전체가 발칵 뒤집혔겠죠. 어쩜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답니까. 세상에 루테른 공작님처럼 좋은 영주님이 어디 계시다고…….”
그는 아젠의 상처를 보느라 바빠, 그의 뒤에서 아를렌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 채로 계속 말을 이었다.
“잔악무도한 놈들 같으니…… 그 좋은 분들을 어떻게 몽땅……! 그나마 아가씨께서 도망치셨다는 소식을 들어서 기대를 놓지 않았는데, 이렇게 무사히 살아 계셔서 정말 얼마나 안도했는지. 아이고, 이 상처는 완전히 곪아 터졌네. 이러고도 용케도 움직였네요.”
그는 뒤가 조용해졌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채 한동안을 혼자 떠들었다.
“그래도 이 녀석이, 아니 아젠 경이, 아가씨를 무사히 구해 와서 고맙네요. 아가씨가 아니셨으면 전 애저녁에 죽었을 목숨인데, 제 생명의 은인을 아젠 경이 구하고, 제가 아젠 경을 구했으니, 세상의 이치가 다…….”
모든 상처를 꼼꼼하게 소독하여 봉합하고 약을 바르고 깨끗한 붕대를 감고, 무의식중에도 입 안에 흘려 넣는 약을 다행히도 삼키는 아젠에게 약을 먹일 대로 다 먹인 후, 닐로는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어, 아가씨?”
창백하게 질린 아를렌의 얼굴에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려, 이미 가슴팍까지 모두 젖어 있었다.
“아가씨, 죄송해요. 제가, 제가, 이놈의 주둥이를…… 제가 조심했어야 했는데, 아이고 이놈의 주둥이를…….”
닐로가 허둥지둥 어쩔 줄 모르자, 아를렌이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손등으로 얼굴을 닦아 내기 시작했다.
“……그랬었구나…… 벌써. 모두…….”
“아이고, 아가씨는 모르셨군요. 제가 이놈의 주둥이를…….”
닐로가 자기 입을 찰싹찰싹 때리기 시작하자, 아를렌이 고개를 저었다.
“알려 줘서 고마워. 계속 알고 싶었어. ...... 그렇구나…… 그랬구나…… 다들…….”
“아가씨…….”
아를렌은 평소처럼 억지로 웃는 표정을 지어 보려고 노력했지만, 지어지지 않았다. 눈물을 멈춰 보려고 했지만, 멈춰지지 않았다.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다고 운다는 게 감춰지지 않는다는 것은 알았다. 그래도, 그래도, 도저히 앞을 보고 있을 수조차 없어 고개를 숙이자, 뺨을 타고 흘러내리던 눈물이 이제 눈에서 바로 후두두둑 무릎으로, 무릎 위에 꼭 쥐고 있는 주먹 위로 쏟아져 내렸다.
닐로는 귀하신 아가씨의 몸에 감히 손을 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 두지도 못하고 어쩔 줄 모르며 우왕좌왕하다가, 병원에서, 마지막 임종을 앞두고 마음을 정리하는 유가족들에게 혼자 있을 시간을 주던 스승님을 떠올리고, 결국 자리를 비우기로 하였다.
그 자리에서, 아를렌은,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다.
그동안 계속 참아 왔던 울음이 모두 터져 나왔다.
앞에는 중상을 입은 아젠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고,
뒤에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아를렌은, 어쩌면 철이 든 후 처음으로, 정신없이 펑펑 울었다.
울면 가족들이 슬퍼하는 걸 알기에, 아무리 아파도, 아무리 무서워도, 가능한 한 울음을 참고 웃어 왔다.
하지만 이제는 슬퍼해 줄 가족들도 없는 걸. 참아야 할 이유도 없는 걸.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희생했을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자신이 살아 있기를 바랄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하지만, 더 이상 가족들은 없고, 자신을 살리기 위해 죽어 가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만 가는데,
어차피 이 길지도 못할 목숨을 고작 몇 년 더 연장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살 수 있는 사람들을, 아젠을 계속 희생시켜야 하나?
스스로는, 혼자서는 살지도 못하는 목숨이, 다른 사람의 목숨에 기생하여…….
한참을 펑펑 울던 아를렌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아젠을 바라보았다.
“일주일…….”
일주일은 쉬어야 한다고 했다.
어떻게 해야 일주일을 벌고, 그를 살릴 수 있을까.
.*. *. *. *. *. *.
아젠은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아직 천진난만한 소녀의 모습으로 초록색 리본을 그에게 묶어 주면서 해사하게 미소 짓다가, 꽃밭에서 사뿐사뿐 춤을 추고 빙글빙글 돌며 밝은 웃음을 얼굴 가득 피워 내다가, 토너먼트에서 그에게 화관을 받고 다시 한번 아름답게 활짝 웃었다.
그러고는, 그의 목에 두 팔을 감아 끌어당기고는, 그 달콤한 입술을 겹치고 또 겹치다가, 입술을 떼어 내고 뺨을 발갛게 물들인 채로 고개를 숙이고는 수줍어하며 미소 지었다.
억지로 만들어 낸 웃음이 아닌, 진심으로 행복하고 기뻐서 짓는 웃음.
그 웃음이 그의 가슴도 간질간질하게 만들어서, 그의 기분도 하늘에 붕 떠 있는 듯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녀가 점점 멀어졌다.
어디 가?
쫓아가도 쫓아가도, 점점 더 멀어졌다.
가지 마.
기다려.
같이 가.
분명 그녀는 천천히 걷고 있고, 그는 전력으로 달리고 있는데도, 점점 거리가 멀어졌다. 어느 사이엔가 그녀는 작아질 대로 작아져서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주위가 어두웠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울음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펑펑 서럽게 우는 소리가 간장을 녹일 듯이 애절했다.
그녀가 울고 있다.
가서 달래 줘야 하는데. 안아 줘야 하는데, 아무리 헤매도 멀리서 들려오는 작은 울음소리가 가까워지지를 않았다.
서러운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그는 그녀를 찾지 못한 채 계속 헤매었다.
나는 당신을 달래 줄 수조차 없는 건가.
어느 사이엔가 울음소리마저 점점 더 작아져서,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는 암흑 속에 홀로 남았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녀를 찾아가야 하는데…… 아직도 울고 있을 텐데…….
문득, 다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디지?
그가 그녀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그녀를 찾아가야 했다.
「나, 그대에게서 검과 방패를 거두노니,」
……뭐?
「그대의 책임과 의무는 더 이상 루테른에 있지 아니하고, 그대의 충성과 명예는 더 이상 루테른에 있지 아니한다.」
그만둬, 그러지 마.
「그리고, 우리의 서약을 파기하니, 그대의 명예는 더 이상 내게 있지 아니하다.」
그러지 마. 날 버리지 마, 제발.
「너는 자유야.」
.*. *. *. *. *. *.
아를렌一!
아를렌은, 닐로의 집에서 찾은 종이와 펜으로, 모든 충성 맹세와 서약을 파기하는 문서를 남겼다. 나중에 그가 깨면 발견할 수 있도록.
루테른 공작가는 아마 이미 작위를 환수당하였겠지만, 어찌 되었건 아를렌이 유일하게 살아 있는 직계 후손인 이상, 그녀가 루테른의 가주였다.
가주는 기사를 파문할 수 있다.
물론, 기사가 파문을 당하거나, 레이디로부터 서약을 파기당하는 것은, 그 이상 갈 수 없는 최고의 불명예였다. 그런 오욕을 감수하고 싶어 하는 기사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반역자의 가문, 반역자의 여식이다. 반역자의 집안에 매여 있는 것보다는 풀려나는 게 낫겠지.
설령 불명예라 하더라도, 그 불명예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살아 있기를 바라…….
그녀는, 잠들어 있는 아젠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는, 한 번 크게 숨을 들이켜고, 조용조용히 맹세의 파기를 선언하기 시작했다.
당신은 지금 잠들어 있으니 듣지 못하겠지만…….
아니, 듣지 못해서 다행이지만…….
먼저 루테른의 기사로서 루테른가에 바친 충성 맹세를 파기한후, 레이디에게 바친 명예의 서약을 파기했다.
가을 하늘이 파랗던 그 날,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서약을 청하던 그의 모습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주위에서 환호성을 지르던 사람들의 모습도…….
아 그래, 그렇게 아름답고 평화롭던 시절도 있었더랬지. 사실은, 서약을 청해 주어서 너무도 기뻤었어.
하지만, 내가 지금 가려는 길에는 당신은 오지 않았으면 해.
문득. 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진다.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아름다운 밤하늘 아래, 그가 수줍게 꺼냈던 그 한 문장이 가슴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게 고작 며칠 전의 일인데, 이제는 까마득한 옛날의 일인 것처럼 느껴진다.
도망 다니는 것조차 스스로 하지 못하고 그에게 안겨 다녀야 하는 무능한 죄인 주제에, 도대체 어디까지 욕심을 부렸던 걸까.
나의 그 헛된 욕심 때문에 너는 지금…….
그녀는, 충성 맹세와 서약을 파기한 후, 울렁거리는 가슴을 한 손으로 지그시 누르고는, 잠시 침묵을 지킨 후에 힘들게 입을 열었다.
“너는 자유야.”
당신이 혼자라면 안전한 곳까지 훌훌 날아갈 수 있을 테지.
그녀는 한참 망설이다가, 그가 완전히 잠들어 있음을 보고, 그의 입에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일어섰다.
가방에서 보석과 금붙이들을 모두 꺼내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이제 더 이상 그녀에게는 쓸모없을 것들이었다.
아까 닐로가 꺼내 놓았던 약병들을 보고, 약장에 있는 약들도 살펴본 후, 몇 병을 꺼내었다. 진통제와 각성제를 비롯한 약들을 몇 병 연거푸 들이켠 후. 세 병을 품 안에 더 챙겨 넣었다.
어차피, 앞으로 하루 정도만 정신을 차리고 있으면 된다. 그 이후의 일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하루 정도는 확실히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했다. 그것도 무리한 여정으로…….
그녀는 두꺼운 망토를 몸에 두르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잠들어 있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고 나서는, 문을 나섰다.
“어, 아가씨.”
“닐로.”
그녀가 미소 지었다. 울 것을 다 울어 내고 결심을 굳혀서인지, 다시금 미소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고마웠어. 아젠을 부탁해. 그들은 아마 여기로 오지 않겠지만, 그래도 만약 누가 여길 찾아와서 뭘 물어보면 사실대로 모두 다 얘기해. 아니, 어쩌면 여길 빨리 떠나는 게 좋을지도 몰라. 미안해.”
“아가씨?”
닐로가 당황했다. 그는 당연히 아를렌이 이곳에 몸을 숨기고 의탁해 있다가, 아젠 경과 함께 다시 망명의 길에 오를 줄 알았었다.
그러나 아를렌은 닐로가 그녀를 붙잡기 전에 바로 훌쩍 말에 올라탔다.
“아젠이 깨어나면, 나 혼자 먼저 멀리멀리 도망갔으니까 아젠도 혼자 도망치라고 전해 줘. 테이블 위에 금품을 좀 놔뒀으니까, 닐로도 필요한 대로 쓰고.”
“아가씨, 혼자 가시게요?”
“응. 혼자 가야지.”
그녀가 잠시 먼 곳을 바라보고는. 다시 한번 되뇌었다.
“혼자 가야지.”
처음부터 혼자 갔었어야 했다. 지금이라도…….
“잘 지내, 닐로. 고마웠어. 행복하게 잘 살아.”
그리고 그녀는, 한 번 더 웃어 주고는, 그대로 휙 말 머리를 돌려서 달려 나갔다. 오늘은 그녀에게 매우 긴 날이,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 날이 될 것이었다.
.*. *. *. *. *. *.
아를렌은 달렸다.
일단 가장 가까이 있는 마을까지 말을 타고 내달렸다.
약을 과용한 몸에 호흡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고 심장이 이상할 정도로 세차게 뛰고 있었다. 괜찮았다. 그렇게 해서 이렇게 달릴 수 있다면.
어쩌면 도리어 기분이 좋은 것 같기도 했다. 아마도 약 중에 마약 성분이라도 들어 있었던 게지. 다행이다. 최소한 약효가 돌고 있는 중에는 공포에 질려 멈추지는 않을 테니까.
이 인위적인 흥분감이 사라지고 두려움에 잠식되어 포기하고 싶어질 때쯤에는, 이미 충분히 멀어져 있을 거니까.
아마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탈진해서 쓰러질 것이 뻔했지만, 괜찮았다,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린 후에 쓰러진다면. 어차피 한나절 정도만 버티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보다 더 멀리 갈 수 있으면 더 좋겠지만, 기대하지 않았다.
후드를 벗어 금발을 바람에 흩날리며 마을에 들러서 일부러 흔적을 잔뜩 남기고는, 다시금 달렸다.
가능한 한 더 멀리까지 가야 했다.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능한 한 그 오두막에서 먼 곳으로. 몸이 버텨 주는 데까지 멀리멀리.
다음 마을에도 잠깐 들러 금발 머리와 초록색 눈을 보이고, 누군가 잡으러 따라 나오기 전에 바로 다시 달렸다.
그렇게 일부러 흔적을 잔뜩 남기면서 달리다가, 약효가 조금 약해지는 것 같으면 챙겨 온 약을 추가로 마셨다.
달리고 또 달리는 동안, 점점 해가 지고, 하늘이 어두워져 갔다.
말은 여전히 멈추지는 않고 있었지만, 속도는 현저히 줄어 있었다. 위험한 수준으로 약을 과용하고 하루 종일 말 위에서 시달린 그녀의 몸도 전혀 정상이 아니었지만, 온종일 교대 없이 달려야 했던 말 역시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푸르르.
말이 크게 흔들리더니 멈춰 서서 투레질을 했다.
“아…….”
아를렌은 떨어질 뻔한 것을 간신히 붙잡고 균형을 잡았지만, 이내 곧 말에서 내려왔다.
“미안해, 너무 고생시켰지.”
그녀는 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마워, 데려다줘서. 이제 너도 자유야. 잘 가.”
여태까지 수고해 준 고마운 말에게 인사를 마친 그녀는, 이내 말에게서 돌아섰다.
충분히……충분히 멀어졌을 거야. 괜찮아. 잘했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는 기다릴 시간이다.
.*. *. *. *. *. *.
그녀는 돌로 된 난간 위에 무릎 하나를 세우고 걸터앉아 다리 아래를 바라보았다.
다리 밑을 거세게 흐르는 급류가 검푸르게 내려다보였다. 상류에서 비라도 내렸던 것일까. 시꺼멓게 흐르는 물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순식간에 사라지게 할 것 같았다. 마치 저승의 강처럼…….
튼튼하게 돌로 지어진 다리의 난간은 그녀가 앉아 있기에 충분할 만큼 넓긴 했지만. 흔들려서 몸의 균형이라도 잃어 저 밑으로 떨어지면 시체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특히나 이런 밤중엔.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
하지만 아직은 안 돼.
그녀는 시선을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두움에 익숙해진 눈에, 달빛이 내리비추어, 넓은 들판이 검푸르게 내려다보였다. 들판 위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들꽃들이 달빛을 받아 푸르스름하게 흔들렸다.
지금은 비어 있는 드넓은 들판이지만. 아마도 곧 기사들이 말을 타고 오겠지.
바람이 그녀를 휘감았다. 풀어 헤친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미안해요.”
시선을 내리깐 그녀가 작게 속삭였다. 어떻게든 그녀를 살려 보겠다고 목숨을 던졌던 이들에게.
어떻게든 그녀를 살리겠다고 목숨을 걸었던 아젠에게.
그래도, 더 희생을 늘리는 것보다는 여기서라도 멈추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녀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니, 처음부터, 진작 이렇게 했었으면 더 나았을 것을…….
그녀가 무거운 고개를 힘없이 무릎에 기대고, 다시 한번 새까만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괜찮아, 가족들이 모두 먼저 가 있는 걸. 나를 살리려고 애썼던 사람들도 먼저 가 있는 걸. 원래부터 내가 제일 먼저 갈 줄 알았던 곳인 걸.
물론, 이렇게 비참하게 가게 될 줄은 몰랐지만.
시선을 올리자,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구름 한 점 없이 검은 장막이 넓게 드리워진 깜깜한 밤하늘에 은청색 달이 요요하게 빛나고, 주위로는 빛 가루들이 흩뿌려진 듯 별들이 반짝였다.
아를렌은 멍하니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사랑하고 아끼던 사람들이 모두 죽어 나간, 그리고 아젠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 자신 역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이때에, 달빛을 푸르스름하게 받고 있는 광활한 밤의 들판 위에 아름답게 펼쳐진 밤하늘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냥, 왠지, 다 괜찮게 느껴졌다.
괜찮아.
약간은…… 아주 약간은 무섭긴 하지만, 괜찮아.
……그라도 살려서 보낼 수 있으니까, 괜찮아.
그는 일주일 후면 완전히 회복될 거야. 그때쯤이면 나의 처형은 이미 끝난 후일 거고…… 그 혼자라면 산맥도 쉽게 넘고 국경도 거뜬히 넘을 거야. 웨스란드에서는 유능한 기사인 그의 망명을 환영할 거야. 그는 전도유망한 기사니까.
깨어나면, 화를 내겠지. 많이 화내겠지.
잠깐 피식 웃고는, 무릎을 감싼 팔 사이로 고개를 파묻었다.
지쳤다. 무자비하게 들이마셨던 약 기운은 떨어진 지 오래였다. 온몸이 덜덜 떨리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손발이 심하게 저렸다.
그래도 아직은 정신을 놓을 수가 없었다. 아직은. 그들이 올 때까지는.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지는 것이 더 힘들다.
손에 쥐고 있는 단검의 손잡이를 매만졌다.
어서 와.
어서 와서 나를 데려가.
그냥, 데려가서,
가족들에게…….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고 있던 그녀의 등 뒤에, 바스락, 인기척이 났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뒤를 돌아보았다.
낯익은, 그러나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이 서 있었다.
“카쉬엔…….”
어두운 밤, 검은 머리에 검은 망토를 두르고 창백한 달빛을 받은 그의 모습은 마치 사신 같았다.
그가 저벅저벅 다가오자, 아를렌은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난간 뒤쪽으로 바짝 몸을 물리면서 웅크렸던 몸을 세워 앉았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공작이나 되는 사람이, 2왕자의 오른팔일 사람이, 어째서 자기 같은 별 비중 없는 사람을 잡는 데 직접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루테른가의 마지막 직계 혈육이라서? 하지만 어차피 후계자도 아닌데.
아니면 그래도, 어린 시절의 정이 남아 있어서? ……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저택에 쳐들어온 쪽은 레퀴에스 쪽이었습니다.」
그녀는 아젠의 말을 떠올렸다. 카쉬엔이야말로 제일 앞장서서 자신의 부모 형제 지인들을 살해한 사람이었다.
그가 점점 더 다가오자, 그녀는 단검을 꺼내었다.
아젠은 그녀에게 자기 자신을 지키라고 준 단검인데, 이런 용도로 쓰는 걸 알면 더 화내겠지.
그녀는 단검을 자신의 목에 겨누었다.
그가 한 걸음 더 다가오자, 그녀가 손에 힘을 주어 목을 살짝 그었다. 따끔하니 소름 끼치는 감각과 함께,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걸음을 멈추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칼, 내려.”
아젠은 그들이 그녀를 죽이지 않을 거라고 했다. 왜인지는 말해 주지 않았지만, 그동안 아버지와 함께 여러 일을 진행해 왔던 그는 그녀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던 만큼, 아무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살려서 데려가 신분을 확인한 후 공개적으로 처형을 해야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루테른의 마지막 직계이니, 루테른 공작가를 완전히 끝장내었다는 본보기가 필요한 걸지도 모르겠다. 살아남아서 반항할지도 모를 가신들을 제압하기 위해서라도.
어쩌면, 살려 가서 알아내야 할 것이 있어서일 수도. 가문의 모두를 벌써 다 죽여 버렸다고 했으니, 무언가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가문의 숨겨진 재산이라든가, 장부라든가, 협력자라든가…….
어느 쪽이건, 웬만하면 살려서 데려오는 게 더 낫다 정도이지, 꼭 살려야 한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그녀의 시체는 필요하겠지. 반역도로 몰살당한 공작가의 마지막 직계 후손이다. 죽었다는 증명이 필요할 것이고. 살려서 데려가지는 않더라도 죽은 시체라도 가져가서 완전히 대가 끊겼음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자신의 생명이, 혹은 하다못해 죽은 몸이라도, 아주 약간의 가치라도 있는 거라면, 무리한 요구는 할 수 없겠지만 이 정도의 작은 거래는 가능하지 않을까하고…….
“나만 데려가.”
“뭐?”
그녀가 침을 한 번 삼켰다. 정신이 뚜렷하지 않아서인지. 몸이 온전치 않아서인지, 혀가 잘 움직이지 않았다. 입 안이 바짝 말라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말해야 했다. 그녀가 말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이번이 마지막일 테니까.
“반역자의 핏줄은 나뿐이잖아. 나만 데려가면 되잖아.”
그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안 되는 건가. 그녀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구는 찰나, 마침내 그의 입이 열렸다.
“널 여기까지 끌고 와서 버린, 그 빌어먹을 새끼 얘기를 하는 건가. 널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혼자 튄 새끼를 살려 달라고 하는 건가, 지금?”
……아젠은 날 버리지 않았어. 내가 그를 버렸지. 죽어 가면서까지 나를 살리겠다고 나더러 혼자서라도 포기하지 말고 도망치라고 하던 그를. 그가 그렇게 간절히 바라던 것을 저버리고, 배신했다.
하지만 아젠이 더 이상 내게, 루테른에, 반역자의 집안에 충성하지 않는다고 보이는 편이 그에게 훨씬 더 안전하겠지.
“그래, 반역자의 핏줄을 내다 버린 사람은 굳이 잡아갈 필요 없잖아.”
스스로 거듭하여 ‘반역자’라는 말을 내뱉는 입이 쓰다. 나의 가족은, 나의 부모님은, 나의 형제들은, 반역자가 아니었는데.
어지럽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다. 하지만, 하던 이야기는 끝내야 했다.
“나는 죄인이니까.”
그녀가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그녀는 죄인이 아니었지만, 저들이 정의한 바에 따르면 죄인이었다.
“나는 반항 안 하고 따라갈 테니까.”
고작 해 봐야 자신의 목에 칼을 긋고 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반항의 전부였지만…….
공작저에 들이닥친 것은 레퀴에스 기사단이었다. 왕궁에서 벌어진 살육에는 분명 저 남자가 직접 관여했었을 것이다.
그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강력한 기사라고 했다. 아마 왕궁에서 그는 직접 그 손에 칼을 들고, 그 자리에 있던 귀족들을 죽였으리라.
그녀는 자신의 가족들과 지인들을 죽였을 그 커다란 손을 한번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엔…… 그때에는, 작고 상처가 가득해서 그녀가 몇 번이고 약을 발라 주었던 손이다.
지금은 저렇게 커져서, 바로 그 손으로 그녀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의 피를 가득 채웠다.
가슴이 산산이 부서져 가루가 되어 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저자에게. 부모님의 원수에게, 어린 시절의 우정을 이렇게까지 잔혹하게 배신해 버린 자에게, 약한 애원의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정에 기대어서 아젠을 살릴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일 수 있다면…….
그녀는 힘들게 입을 열었다.
“부탁이야.”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그는 대답이 없었다.
평기사 한 명 놓쳐 주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인가? 아니면 역시 내 몸은 인질로서의 가치가 별로 없는 것인가? 하지만 아젠은 가문도 권력도 없는 일개 평기사일 뿐이잖아. 하나쯤 놓쳐 주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텐데.
다시금 현기증이 몰려왔다.
시야가 가물가물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잠깐 휘청이다 난간 너머로 넘어갈 뻔하던 몸을 간신히 세웠다. 움직일 때 목이 잘못 베였는지 더 커진 통증과 함께 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의 양이 확연히 늘어난 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대로 쓰러지면 안 되는데. 아직은…….
“알겠어.”
드디어 원하던 대답이 들려왔다. 그녀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정말이야?”
“약속한다. 너만 데려가겠다. 그러니까 그 칼은 내려놓고 이리 와.”
“약속한 거야?”
“약속한다.”
그 어떤 서명도 없다. 문서도 없다. 약속을 지키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카쉬엔은 기사였다. 비록 끔찍한 가족의 원수이지만, 그래도 그는 기사였다. 명예와 신의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기사가, 기사의 입으로 한 약속을, 그것도 세 번이나 거듭한 약속을 어기지는 않으리라 믿었다.
믿고 싶었다.
자신이 걸어 본 마지막 거래가, 그나마 가치가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가, 아젠이, 안전할 거라고 믿고 싶었다.
한 줌도 되지 못할 이런 빈약한 목숨을 넘겨서 그라도 살릴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그녀의 손에서 힘이 풀리면서 아젠이 주었던 단검이 다리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새까만 강물에 순식간에 삼켜져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제 됐어. 할 일은 다 했어. 이제 더 이상 버티지 않아도 돼.
이제 그냥,
저쪽으로가서…….
그냥…….
그녀의 몸이 허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