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도주
카쉬엔은 피처럼 붉은 와인이 가득 든 와인 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무도회장을 둘러보았다.
분명 아까 루테른 공작 일가가 입장한다는 안내를 들었으나,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조금 늦게 들어오는 것인가 하고 기다리며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여전히 찾을 수 없었다.
이윽고 루테른 공작 일가가 국왕을 배알하고 선물을 건네는 절차에서까지 그녀가 보이지 않자, 정말로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연회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기는 하였지만, 국왕 탄신 연회에는 참석할 거라고 들었는데. 잘못된 정보였나.
꿀꺽, 와인이 목울대를 넘어 내려갔다.
이제, 오늘 밤만 지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다. 와인 따위로는 채워지지 않는 이 갈증도.
애초의 계획대로라면 더 오랜 시간을 기다렸어야 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1왕자파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쉐롬이 움직였어.」
쥬헤드 2왕자의 말에, 카쉬엔은 심드렁하니 대답했었다.
「쉐롬 왕세자도 눈치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움직이겠죠.」
이미 2왕자가 왕세자파에 첩자 여럿을 성공적으로 심어 두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기에, 전혀 놀랍지 않았다. 정보를 알아낸 정도가 아니라 일부러 그렇게 움직이도록 유도했다고 하더라도 놀랍지 않으리라.
「가우스 백작가 연회를 치려고 한다더군.」
「좋은 계획이로군요. 우리 쪽 핵심 인원은 다 모여 있을 테고, 그 저택 구조도 포위하고 습격하기에 좋은 편이라…….J
「쉐롬이 나름 소심한 녀석이라. 시즌 중에 피를 보고자 할 줄은 몰랐는데. 자식이 생기면 좀 달라지는 모양이야.」
「흐음. 좀 더 소심했으면 좀 더 오래 살았을 것을…….J
카쉬엔은 술잔을 빙글 돌리고 한 모금 넘기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전에 치자는 얘기군요.」
「그렇지. 그들은 일단 거사 날짜를 정해 놓고 나면 그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을 테니.」
「좋군요.」
카쉬엔의 입꼬리가 올라가자, 쥬헤드 왕자가 술잔을 내밀어 가볍게 건배를 청했다.
「자네의 그 아가씨도 더 빨리 데려올 수 있을 테고.」
그리하여 정해진 장소가 이곳 왕궁, 정해진 일시가 바로 이날, 국왕 탄신연회였다.
이날을 위해 쥬헤드 왕자는 왕실 근위 기사단을 포섭하려고 공을 많이 들였다. 왕세자파는 전혀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겠지만, 세 개 근위 기사단 중 두 개 기사단이 이미 쥬헤드 왕자의 편으로 돌아서 있었다.
그의 입장에서야, 기다림이 줄어드는 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원래대로라면, 먼저 연회장에서 그가 직접 그녀를 확보한 후에 일을 시작할 계획 이었으나…….
“하르드,”
“네, 각하.”
카쉬엔은 바로 옆에 대기 중이던 보좌관을 불렀다.
“정예 기사들 일부 먼저 루테른 공작저로 보내, 공녀를 확보해.”
“……네.”
“안전하게. 잘. 확실하게.”
하르드는 살짝 못마땅했으나, 불만을 표하지 않고 명령을 이행했다. 북부 전선에 있었을 때부터 카쉬엔을 따랐던 그는 자신의 주군의 비정상적인 집착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측근이었다. 그 공녀가 주군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 만큼, 충분한 수의 기사를 보내야 하리라.
하르드가 잠시 명령을 전달하러 사라졌다가 돌아온 후, 카쉬엔은 빈 와인 잔을 내려놓았다.
쥬헤드 2왕자가 신호를 보내오는 것이 보인다.
이제 움직일 시간이었다.
.*. *. *. *. *. *.
“……떡해…… 이게 ……해서…….”
머리가 울린다. 어지러워. 주위가 소란스러웠다. 아를렌은 어렴풋이 정신이 들었다.
“대충…… ……챙겨, ……시간 ……어.”
유모의 목소리다. 유모하고 지느인가? 벌써 아침인가? 아니, 아직 밤인 것 같은데…….
“아가씨, 아가씨, 일어나셔야 해요, 아가씨!”
모른 부인이 급하게 깨운다. 열에 들뜬 정신이 몽롱하다. 어디선가 사람들의 고함 소리와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은데, 마치 물에 잠긴 듯이 흐리다.
“……유모……?”
“아가씨, 죄송하지만 지금 시간이 없어서, 얼른 옷을 대충이라도…… 아, 열이…….”
모른 부인의 얼굴이 심각하다. 정신을 차려야 할 것 같은데 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
잠시 고민하나 싶던 모른 부인이 이내 결심한 듯 겉옷들을 슈미즈 위로 덮어 입히기 시작했다. 아를렌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가늠하지 못한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문이 쾅 하고 열렸다.
“준비됐습니까? 서둘러야 해요.”
아를렌이 멍한 눈으로 문 쪽을 바라보았다. 몇 명의 기사들이 서 있다. 아젠이다. 무엇이 그렇게 급했는지, 머리가 엉망이었다.
모른 부인이 난처한 얼굴로 아젠을 돌아보았다.
“열이 좀 높으신데…… 약병을 몇 개 넣어 놨으니 일단 출발해요.”
그 말에 아젠의 얼굴도 굳었다. 아젠이 성큼성큼 다가와서 잠시 이마에 손을 올렸다. 시원한 손길이 닿으니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무언가 상황이 심각한 것 같은데. 혼자 이렇게 해롱해롱하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아,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실례하겠습니다, 아가씨.”
아젠이 아를렌을 덥석 안아 들고 뛰다시피 방을 뛰쳐나갔다. 안겨 있는 아를렌의 고개가 밑으로 축 떨어졌다. 모른 부인이 가방을 들고 쫓아 나가 랄프 경에게 건네주었다.
나가는 아가씨와 기사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지느는 훌쩍훌쩍 울먹이며, 아를렌의 드레스 룸의 문을 열었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드레스들부터, 부드럽고 가벼운 천으로 만들어졌지만 별다른 장식이 없는 수수한 옷들까지 가득 걸려 있었다.
지느는 흐느끼면서 천천히 옷들 사이를 거닐다가, 결심을 굳히고는 드레스를 하나 골라내었다. 평소 동경하던 파란색 드레스였다. 그녀는 잠시 드레스의 부드러운 천을 눈물 젖은 손으로 쓸어 보다가, 빠르게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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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통로를 빠져나갈 때에는 기사가 셋이었으나, 나오고 얼마 안 되어 들키는 바람에 둘이 적을 상대하느라 빠지고, 결국 아젠 혼자 아를렌을 안고 하수구로 뛰어들었다.
열이 높아 정신을 놓고 있는 그녀를 더럽고 차가운 물에 닿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성문이 장악된 상황에서 수도를 빠져나가는 방법은 하수구밖에 생각나는 것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이나마라도, 빠르게 움직이지 않으면 그들이 언제 여기까지 막을지 몰랐다.
아젠은 아를렌이 가능한 한 젖지 않도록 높이 안아 들었지만, 치맛자락이 흠뻑 젖어 들어가는 것은 피할 수가 없었다. 애당초 이쪽 하수구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대신 매우 작아서, 몸을 제대로 세우기도 힘든 판이었다.
정신 잃은 아를렌을 높이 안아 든 채 한 손으로 녹슨 창살을 잘라 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출구를 막고 있는 창살 따위, 검기를 마음껏 발휘하면 쉽게 잘라 낼 수 있을 테지만, 정신을 잃고 있는 그녀를 물속에 내려놓을 수도 없고, 안고 있는 상태에서 함부로 검기를 발산했다가 그녀가 다칠 수도 있었다.
이를 악물고, 한쪽 어깨에 그녀를 올려 둔 후, 한 손에 약하게 검기를 실었다. 소리를 듣고 누군가 달려올까 두려웠지만, 방법이 없었다. 될 때까지 미친 듯이 휘둘러 대서 창살을 잘라 낸 후, 빠르게 빠져 나왔다.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막지 못했다.
스스로의 가슴을 쥐어 뜯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자신의 무능이 경멸스러웠으나, 지금 당장 이 상황에서 자신이 아니면 아를렌을 지킬 사람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그는 참고 있었다.
그리고 그자, 그놈, 자기 자신, 카쉬엔에 대한 증오…….
왕궁 연회장의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직 알지 못한다. 공작과 공작 부인, 그리고 소공작과 둘째 공자는 모두 연회장에 있었다. 그들이, 성벽에 매달렸던 전생과 달리 무사하기를 바라지만, 연회에서의 모반이 실패로 끝났기를 바라지만, 감히 그걸 기대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지느와 모른 부인은 아가씨의 옷을 입고 미끼가 되겠다고 자처했다. 일부러 눈에 띄게 미끼가 되어 시간을 끌겠다고 했으니 아마 그들은 이미 죽었거나, 살아서 잡혔다 한들 곧 처형당할 것이다.
같이 비밀통로를 빠져나왔던 랄프 경과 모데오 경은, 단둘이서 열댓 명의 기사가 쫓아오는 걸 막아 보겠다고 돌아섰다. 그들도 이미 죽었을 것이다.
아젠의 얼굴에 두 줄기의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와 경멸, 증오가 뇌를 녹여 버릴 듯했다.
과거의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베어 버리고 목을 매달아 놓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발목에 무겁게 매달려 있었다.
아를렌, 그의 소중하고 소중한 아가씨는, 더러운 하수구 물에 젖은 채 온몸을 벌벌 떨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어두운 밤에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숲속 깊이 들어가 어느 정도 추격에서 잠시 시간을 벌었다고 판단이 된 후에, 그는 가져온 가방을 풀었다. 가방도 일부 젖어 있었으나, 다행히 그는 젖지 않은 옷을 찾을 수 있었다.
차마 옷을 갈아입힐 수는 없었다. 푹 젖어 있는 치맛자락을 짧게 잘라 내고, 두꺼운 겉옷을 입히는 것으로 타협했다. 그래도 그나마라도 하고 나자 벌벌 떨리는 것이 조금 잦아진 듯했다.
약…… 약을 먹여야 하는데……. 그가 가방 속에서 약병을 훑었다. 빠르게 각종 약병들을 훑은 그가 바라던 것을 찾아내었다. 알약이었다.
그녀의 입을 열고 약을 넣어 주었지만. 당연히 삼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급했던 그는 결국 마음을 먹고 그녀의 입에 자신의 입을 포개었다.
이번 생에 처음으로 그녀와 입을 맞대어 보는 것이었다. 촉촉하고 말랑말랑할 그 장밋빛 살덩이를 얼마나 욕망하고 얼마나 참았었던가. 한번 닿아 보고 싶다고 얼마나 소망했던가.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의 입맞춤에서는 그 어떤 희열도 없이 그저 비참함뿐이었다.
그가 그려 왔던 입맞춤은, 그러면서도 차마 하지 못하고 아껴 두었던 첫 입맞춤은, 이런 게 아니었다.
건강한 그녀가 볼을 발긋하게 붉힌 채로 수줍게 그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눈을 감고 기다리면, 부드럽게, 살포시 입술을 대어 보는 것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겠지. 그녀의 심장이 콩콩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서 살짝 입술을 떼어 내면, 그녀가 다시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볼 것이다. 상기된 표정으로 그를 예쁘게 바라보고 있으면, 다시 한번 입을 겹쳤을 것이다.
아마도 보라색 룬달 꽃이 가득한 언덕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머리 위에는 화관이 씌워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수줍어하면서도 해사하게 웃었을 것이고, 그 맑은 초록색 눈에는 부끄러워하는 자신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으리라.
이렇게, 지인의 시체들을 밟으며 사지를 간신히 빠져나와, 어두운 숲속에서 추위에 벌벌 떨면서. 오수에 젖어 사경을 헤매고 있는 그녀의 메마른 입술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것이 아니었다.
마른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을 대고, 어떻게든 그녀의 목구멍을 자극하여 알약이 그녀의 목 안으로 넘어가게 하기 위해 애썼다. 알약이 잘 넘어가지 않고 계속 입 안에 남아있고, 입맞춤이 길어질수록, 그의 절망도 점점 더 커져 갔다.
드디어 알약이 꿀꺽 넘어가자, 그가 입을 뗐다. 그녀의 입술에 타액이 묻어 있었다. 아름다운 추억의 자취가 아니라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어떻게든 살려 보려는 처절한 몸부림의 흔적이었다.
그녀의 입술을 손등으로 닦아 낸 그가, 그의 품에 안겨 있는 그녀의 파리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알고 있었는데도 바꾸지 못했다.
바꿔 보려고 애를 썼는데, 전혀 바꾸지 못했다.
지독한 무력감과 자괴감이 해일처럼 그를 덮쳐 쓰러트렸다.
도대체 자신이 뭘 할 수 있나. 신이 기회를 주신 것이 맞기는 한가.
과거에 겪었던 그 지옥을 다시 그대로 또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어쩌면 더 나빠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그를 몸서리치게 두렵게 했다.
앞날을 보느니 이대로 여기에서 멈추는 것이 차라리 나을 정도로 앞으로 닥쳐올 일들이 두려웠다.
하지만.
여기에서 멈추고 무너져서는 안 되었다.
설령 그녀가 무너지더라도 그는 포기해선 안 되었다.
그에겐 그럴 자격도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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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아질 때까지 밤새 숲을 건넜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밤중에, 한 사람을 업고,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신경 쓰며 밤새 지나는 길은 쉽지 않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언제 꼬리가 잡힐지 알 수 없었다.
중간중간 멈춰서 그녀에게 약을 먹이고, 땀을 닦아 주었다. 무언가 음식도 먹이고 싶었지만 먹일 수 있을 만한 것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등 뒤로 느껴지던 불덩이 같던 체온이 어느 사이엔가 조금씩 내려가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정상 체온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고비는 넘긴 것 같았다.
목 뒤로 느껴지던 불안정하던 호흡도 조금씩 새근새근 안정된 숨소리로 바뀌어 갔다. 그것이 그의 마음에 점차 안정을 되찾아 주었다.
그는 애써 낙관적인 전망을 떠올리려 애써 보았다.
꼭 과거와 같이 진행되었으리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그들의 위험에 대해 충분히 경고했었고,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어쩌면, 왕궁에서 그들이 실패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오히려 그들을 역으로 제압했을 수도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무사히 도망쳤을 수도 있다.
앞날을 기대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대로 일단 얼마간 숨어 있다가, 상황이 해결되면 다시 나와서 공작가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기를 바라지만…….
“……아젠……?”
뒤에서 문득 들려오는 가느다란 목소리에 아젠이 멈춰 섰다. 순간, 너무 듣고 싶은 나머지 환청을 들었나 했다.
“내려 줘…….”
그는, 떨어트리면 깨질 섬세한 유리 공예품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그녀를 땅으로 내려놓았다. 하룻밤만인데, 그녀의 뜨인 눈을 보는 것이 너무나도 오랜만인 것 같았다.
“괜찮으세요? 일어나셨으니 일단 약을 좀 더 드리겠습니다.”
아젠이 가방을 풀어 약을 꺼내는 동안, 아를렌은 잠시 나무에 기대어 앉아 쉬며 퀭한 눈으로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알약을 하나 꺼내 건네자, 조용히 받아서 힘겹게 목으로 넘겼다.
“……어디로 가는거야?”
“일단 남서쪽으로 가 보려고 합니다. 저들이 분명 슈엘로 추적을 보냈을 테니 슈엘로 바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루테른가의 영향력이 강하고, 우리가 잘 알고 저들이 모르는 곳으로 가는 게 아무래도 더 안전할 듯싶어…….”
“그래.”
아를렌은 가만히 고개를 기울였다. 낮게 깔린 시선이 달빛이 어린 땅을 물끄러미 훑었다.
잠시간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조용히 내려앉은 눈으로 가만히 상념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우리는 지금 왜 여기에 이러고 있는 거냐 같은 물음은 하지 않았다. 아무리 정치에서 멀리 떨어져서 자유롭게 살아왔다고는 해도 그녀 역시 공작가의 일원이었다. 돌아가는 정치적 상황에 대해 모르고 있지도 않았고,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몸은……좀 괜찮으십니까?”
아젠이 습관적으로 손을 그녀의 이마로 뻗었다.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고 그 손을 받다가, 다시금 그 눈을 뜨고 아젠을 바라보았다.
“조금 나아졌어. 걸을 수는 있을 것 같아.”
“아직 무리입니다. 제가 업고…….”
“지금은 괜찮아. 잠깐만 걷다가 무리인 것 같으면 다시 업힐게.”
그녀가 애써 웃으면서 말하고는 나무에 손을 짚고 일어섰다. 살짝 휘청이는 모습에 재빠르게 아젠이 부축했으나 이내 혼자 섰다.
그들은 조용히 걸었다. 아젠은 아직 불안정한 아를렌의 상태를 신경 썼지만, 아를렌은 어쨌든 쉬자고 하지도 않고 걸었다. 밤새 사지를 뚫고 나오느라 지쳐 있는 사람과 사경을 헤매다가 정신을 차린 지 얼마 안 된 사람의 걸음은 느렸지만. 그래도 멈추지는 않았다.
“……왕궁은…….”
오래도록 조용하던 아를렌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왕궁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는 거지?”
“……네…….”
“2 왕자파?”
“……저택에 쳐들어온 쪽은 레퀴에스 쪽이었습니다.”
레퀴에스 공작이 2왕자의 최측근이라는 것은 아를렌도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우정이란 것은, 권력 다툼 앞에서는 지나가던 바람보다도 못한 것이로구나, 그녀가 속으로 짓씹었다.
다시 고요가 이어졌다. 나뭇잎을 밟고 가는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만이 조용히 숲속에 울려 퍼졌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파도 소리처럼 들려왔다.
아를렌은, 몇 번이나 목 위로 올라오려 하는 질문들을 애써 삼켜 넣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는? 레트 오라버니는? 젝시온은? 유모는? 지느는? 기사들은? 하녀들은? 시종들은? 다른 사람들은?
묻고 싶다. 알고 싶다. 울고 싶다.
하지만 자신의 옆에서 완전히 지친 상태로도 전혀 지치지 않은 척, 경계를 잔뜩 세우고 길을 찾고 있는 이 사람도, 자신만큼이나 모르고 있고. 알고 싶어 하고, 답답해하고 있을 거라는 걸 아니까. 물어봤자 더 난처하게 할 뿐이라는 걸 아니까.
한없이 가라앉는다.
공작저의 상황은 아마도 매우 안 좋았을 것이다. 자신만은 어떻게든 살려서 내보내 보겠다고 필사적이었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들이 어떻게 되었을지 감히 미루어 짐작하고 싶지 않았다.
왕궁의 상황은 전혀 모르겠지만…… 그들이 미리 만반의 준비를 하고 일을 벌인 거겠지만, 그래도 어쩌면 공작저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제발, 더 나았어야 할 텐데.
그녀에게는, 부모님이나 오라버니들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은, 전혀 해 볼 수조차 없는, 절대 열어서는 안 되는 금지된 상자였다.
항상 자신이 걱정받는 입장이었다.
항상 자신이 먼저 떠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떠난 후에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어서 노력했다.
자신이 그들을 기억하고 추억해야 하는 그런 날이 올 수 있다는 건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아젠이 그녀를 붙잡고 있었다.
“아.”
아를렌이 정신을 차렸다. 한 걸음 한 걸음을 조심해야 하는 참에, 우울한 상념에 젖어 있는 건 도움이 되지 않는데.
“미안, 조심할게.”
“조금만 더 가면 마을이 나올 겁니다. 거기에서부터는 무언가 탈것을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응. 추적이 얼마나 가까이 붙었을 것 같아?”
“……저희가 도성을 빠져나올 때,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잊혀진 하수구 통로를 따라 나왔습니다. 그들이 그걸 언제 발견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만약 발견한다면 바로 그쪽으로 나왔다는 것을 눈치채긴 할 겁니다.”
창살을 그렇게 잘라 놓고 나왔으니. 누가 봐도 검기에 베인 자국이 남아 있을 거다.
“일부러 숲길을 타고, 흔적이 남지 않도록 신경 썼습니다만, 완벽하지는 못해서…….”
그녀를 업고 가는 길이라 혼자 다닐 때처럼 완벽하게 흔적을 지우지는 못했다.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들이 눈치를 챘을 때 가능한 한 멀리 있는 게 좋을 테니까요. 아무래도…… 그들의 속도가 저희의 속도보다는 훨씬 빠르니까요.”
“응. 중간에 포기해 주면 좋을 텐데. 어차피 나는 가주도 후계자도 아니니까, 아마 추적이 집요하지는 않을 거야.”
그녀가 웃는 표정을 어떻게든 만들어 보이려 애쓰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모른다.
‘그자’가 이 일을 벌인 것은 오로지 그녀를 잡기 위해서라는 것을.
다른 모든 가주와 후계자를 놓치더라도 그녀만은 쫓아올 거라는 것을.
그것을, 알려 주는 것이 좋을지 알려 주지 않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전생에서의 그때, 전생의 그가 그녀를 절벽에서 찾았을 때, 그녀는 혼자 있었다.
그 호위 기사는 어디에 있었던 거지?
그때는 그 보잘것없는 평민 기사가 그녀를 버려두고 혼자 도망쳤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기사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그 기사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그녀를 지키려고 했고, 잠들어 있던 그녀에게 자신이 참혹하게 살해당하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기 위해 온몸에 칼날이 꽂혀 들어와도 비명 한 번 지르지 않고 참던 사람이었다.
그 자신이 ‘아젠’의 삶을 살아 보니 알겠다. 뒷골목에서 혼혈 고아라고 박해받다가 그녀에게 구해져서, 오로지 그녀만을 빛으로 보고, 그녀를 지키기 위해 기사가 되어 살아왔던 사람일 것이다. 아마 최후의 순간까지, 조금이라도 더, 그녀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었을 것이다.
‘그럼 그때 그녀는 어째서 혼자 있었던 거지?’
그때 그녀가 어땠었는지를 떠올려 본다. 분명 지금보다도 더 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도 상당히 상태가 안 좋아 보이지만, 그때 그녀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분위기에, 입술에는 피가 터져 말라붙어 있었고, 눈에는 빛이 하나도 없어서…….
그녀의 처참하던 몰골을 떠올리던 그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했다.
그런 상태의 그녀를 두고 그 충직하던 기사가 스스로 떠났을 리가 없다.
‘그럼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였나?’
잠깐 길을 찾으러 갔다 온다거나, 먹을 것을 구하러 다녀온다거나, 하는 식으로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절벽은 너무 열려 있어시, 발각되기 쉬운 위치 였다.
‘그런 곳에 그녀를 그렇게 방치해 두고 자리를 비웠다고?’
그럴 리가. 만약 잠깐이라도 자리를 비울 일이 생겼다면 그녀를 가장 안전한 곳에 깊숙이 숨겨 놓고 갔었을 것이다.
어쩌다 길이 엇갈리면서 헤어지게 되었던 걸까? 손을 놓쳐서 잃어버리고 다시 만나지 못했던 걸까? 그럼 그때에는 그녀 홀로 산속을 헤매다가 지쳐 있었던 거고?
아젠은 문득 바로 뒤에서 자신을 따라오고 있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그를 마주 쳐다본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지금 이렇게 바로 옆에 있는 상황에서도 불안하고 애처로운데, 만약 그녀를 놓치게 되고, 몸도 좋지 않은 그녀가 어두컴컴한 숲속을 혼자 헤매면서 추격을 피하려고 애를 쓴다면…….
“손을…… 잡고가시지요.”
아젠이 손을 뒤로 내밀었다. 아를렌이 잠시 그 손을 내려다보다가, 살짝 웃으면서 손을 잡았다. 밤새 추위와병에 시달렸던 그녀의 손이 차가워서 안타까웠다. 아젠은 그 손을 강하게, 그러나 아프지 않게, 꼭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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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손을 놓아야 하는 일은 그의 생각보다 훨씬 더 이르게 찾아왔다. 어째서 그 호위 기사가 그녀와 항상 손을 잡고 있을 수 없었는지 금방 깨닫게 되었다.
아무리 밤새 수도에서 멀어지기 위해 걸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수도와 가까운 곳이었다. 마을에 두 사람이 같이 들어가는 일은 위험하다고 판단하였기에, 아젠은 아를렌을 안전한 곳에 숨겨 놓고 홀로 마을에 들어가 말 두 필과 식료품 등을 얻어 와야 했다.
이런 일이 자주 벌어지면 언제고 그녀를 놓치게 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들었으나, 그렇다고 그녀와 함께 마을에 들어갔다가 발각되거나 잡히는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괜찮다며 웃고 있는 그녀를 수풀 사이에 숨겨 놓고 자리를 비우려니, 홀로 절벽 앞에 처연하게 앉아 있던 과거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주먹을 꾸욱 쥐었다.
지독한 자괴감에 자기 자신을 해치고 싶은 충동이 밀려왔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말을 구한 후에는 그래도 사정이 좀 나아졌다. 그녀가 홀로 말을 몰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에, 아젠은 그의 말에 그녀를 같이 태운 후, 후드를 머리에 씌워 주고, 담요를 그녀의 몸에 꼭꼭 둘러 주고, 그녀가 정신을 놓아도 떨어지지 않을 수 있도록 한쪽 팔로 그녀를 꼭 휘감아 안았다.
밤새 업고 다녔던 것이 무색하게도, 품에 온전히 들어 안긴 그녀의 부드러운 몸이 느껴지고, 그의 얼굴 바로 아래에 위치한 그녀의 머리에서 향긋한 체취가 올라오자, 그는 한 번 숨을 크게 내쉬었다. 몸이 떨려 왔다.
미친놈.
이 상황에.
숨을 한 번 더 크게 내쉬고, 다시 한번 자신의 왼팔 안에 안전하게 그녀가 잘 감싸져 있는지 확인했다.
“제가 꼭 잡고 있을 테니, 주무시고 싶으시면 언제든 주무세요. 수도에서 좀 더 멀어지고 나면 마차를 구해 보겠습니다.”
“말도 충분히 사치인 걸. 고마워.”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갈라진 것이 느껴졌다.
몸이 아직 많이 안 좋은가. 사실 그새 몸이 좋아졌을 리가 없다. 밤새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차가운 하수에 들어갔다 나와서는 밤이슬을 맞았다. 그러고 나서 약간 기운을 차리자마자 한참을 또 걸었다.
지금 이렇게 정신을 차리고 있다는 것이 신기한 상태였다.
어쩌면, 위기 상황을 인식한 몸이 미래의 힘까지 뽑아다 쓰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사실 지금은 그런 힘조차 필요한 상황인 것이 맞았지만, 이러다가 어느 순간 희망을 잃거나 긴장이 풀리는 순간 갑자기 악화되어 쓰러지게 될 것이 걱정되었다.
……희망을 잃는 순간…….
그의 아가씨에게 유일한 희망, 가장 소중한 것이 그녀의 가족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과거에, 그가, 그의 손으로 잔인하게 없애 버렸던 것.
어쩌면, 아마도, 이번 생에도 이미 벌어졌을지도 모르는 그일.
말을 달리며 아젠은 아무리 귀한 보약을 먹이고 산해진미를 차려 놓아도 그저 서늘하게 죽어 가던 전생의 그녀를 떠올렸다.
‘당연하지.’
그녀의 생의 의미이자목적이 가족이었다.
그래, 그녀의 옆에 10년을 붙어 있었던 지금은 확실히 알고 있다. 그녀가 그 가느다란 생명을 웃으며 이어 가고 있는 이유이자 목적은 오로지 가족들의 행복이었다.
그런 가족들을 모두 도륙을 내어 놓고 그녀더러 왜 웃지 않느냐는 망발을 했었던…….
그가 이를 짓깨물었다. 아드득 갈리는 이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
어쨌든 지금은 달려야 했다. 그놈으로부터 멀어져야 했다. 일분일초라도 더 벌고, 조금이라도 더 거리를 벌리기 위해.
.*. *. *. *. *. *.
며칠의 도주 생활은 힘겹게, 그러나 다행히 큰 문제는 없이 이어졌다.
수도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후에는, 속도를 조금 줄이고 그녀의 상태를 우선시했다.
다행히 아를렌의 상태는 크게 나빠지지 않았다. 약을 과용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건 어쩔 수가 없었다. 건강한 몸으로도 무리가 갈 만한 여정을 소화해야 했으니까.
그 날도 그들은 어두워진 후에야 한 마을에 들어섰다.
너무 작지도, 그렇다고 크지도 않은 마을이었다. 일부러 그런 마을을 골랐다. 너무 작은 마을에서는 눈에 띌 우려가 있었고, 너무 큰 동네라면 수도에서부터 사람이 와 있을 수도 있었다.
다행히, 어두운 밤에 후드를 둘러쓰고 주점 겸 여관으로 들어오는 두 사람을 딱히 눈여겨보는 사람은 없었다. 화사한 금발 머리가 단 한 올도 후드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게 단단히 정돈하고 후드를 눌러쓴 아를렌을 뒤로 두고, 아젠이 주인에게 다가가 가벼운 흥정을 했다.
방은 작고 허름했다.
생각보다 더 작았다. 물론, 이런 마을의 이런 허름한 여관에서 좋은 방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방을 두 개를 잡기엔 불안했다. 그녀를 혼자 두는 일은 지난번 한 번으로도 너무 많았다. 갑자기 그놈들이 들이닥치거나 하면 급하게 창문으로 탈주해야 할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일단 식사를 가져오겠습니다.”
“아, 응.”
가방을 정리하던 아를렌이 아젠의 말에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저건 그냥, 보여 주기 위한 웃음이다. 난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 라고 주장하는. 저럴 땐 사실 하나도 괜찮지 않다. 10년을 옆에 붙어 있었는데 모를 수가 있나. 그는 씁쓸하게 문을 닫고 주위를 꼼꼼하게 살핀 후, 빠르게 1층으로 내려갔다.
“주인장.”
아젠의 부름에 다른 손님과 수다 중이던 중년 여인이 아젠을 돌아보았다.
“아, 손님~ 뭐 필요한 거라도 있으신가요?”
“간단한 식사를 두 개, 방으로 가져가고 싶습니다만…….”
“아이고, 아직까지 저녁도 못 드셨나 보h 일정을 너무 무리하게 잡으셨구먼. 난 또 벌써 어디서 먹고 오셨다고…… 얼른 챙겨 드릴게요. 근데 밑에서 드시는 게 나을 텐데요? 방에는 식사를 할 만한 공간이 충분치 않을 텐데…….”
확실히 방에 식사를 할 만한 테이블 같은 건 없었던 것 같지만…….
“말씀하신 대로 일정을 너무 무리하게 잡았더니 동생이 너무 피곤해해서요. 방에서 간단하게 먹이고 재우려고 합니다.”
“아하. 하긴 아까 보니 동생은 몸이 작아 보이던데. 그나저나 동생이었구먼요? 난 또 부부인가 했지.”
“…….”
“암튼 기다려 봐요, 내가 금방 만들어 줄 테니까.”
주인이 콧노래를 흥얼흥얼 부르며 주방으로 들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젠은 근처 의자에 자리 잡고 앉았다. 아무리 건장한 기사의 몸이라지만, 제대로 자지 못하고 몸을 혹사한 지 며칠인지. 아직 긴장을 풀면 안 되는 상태였지만, 이 탈주가 앞으로도 계속될 거라는 것을 감안하면, 조금이라도 쉴 수 있을 때는 쉬어 두어야 했다.
지켜야 할 사람이 있으니까.
상대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아젠’보다 훨씬 강하고, 기사단과 병사들을 수없이 부릴 수 있다. 왕국 전역에 권력의 손을 뻗칠 수 있다. 어떻게 해야 지킬 수 있을까…….
전생에 그토록 마음껏 휘두르며 그녀를 쫓는 데 사용했던 힘이, 이제는 그와 그녀의 목을 조르는 힘이 되었다.
아젠은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잠깐 의자에 앉아 있다고 또다시 온갖 상념이 머리를 어지럽힌다.
그때 그의 귀를 뚫고 들어오는 어휘가 있었다.
“……수도가…….”
그는 고개를 들고, 소리가 나온 쪽을 쳐다보았다. 한 테이블에 몇몇 사내들이 모여서, 신나게 떠들고 있는 여행자의 말을 듣고 있는 모양이었다.
“완전 피바다였다니까. 나 참, 그런 끔찍한 참상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 봤네. 어렸을 때 우리 마을에 역병 돌았을 때도 그렇게 끔찍하지는 않았다니까.”
“아니 그래도 어떻게, 국왕 전하가 계시는데 어떻게 그렇게…….”
“왕이고 뭐고, 지금은 이미 2왕자의 천하가 되었다니까. 하루아침에 그렇게 뒤바뀔 줄 누가 알았겠어? 2왕자 마음에 조금이라도 안 드는 사람들은 죄다 성벽에 줄줄이, 무슨 추수절 장식 엮어 놓듯 걸어 놨다니까. 광장에 내다 꽂아 놓은 대가리들이 도대체 몇십 개인지…….”
벌써 수도에서 여기까지 여행자가 당도할 만한 시간이 되었나. 아젠은 수도의 상황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성벽에 걸어 놨다는 거야. 아니면 광장에 꽂아 놨다는 거야?”
“둘 다! 둘 다라니까! 성벽에도 줄줄이 수십 개의 시체들이 매달려서 까마귀밥이 되고 있고, 광장에도 수십 개의 목들이 줄줄이 꽂혀 있는데, 와 정말 말 그대로 피바다가 되어서 걷는 걸음걸음이 다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더라니까? 성 밖에 그냥 막 갖다 버린 시체들도 한 무더기래.”
“으아, 듣기만 해도 끔찍하네.”
“그러니까, 나도 너무 끔찍해서 수도에 들어가자마자 눈치 보다가 바로 다시 빠져나와서 꽁지가 빠지게 여기까지 달려온 거잖아. 어휴, 그렇게 끔찍한 장면이라니, 오는 내내 아직도 떨쳐 낼 수가 없어. 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무슨 정신으로 살고 있나 몰라.”
“근데 그럼 설마 왕세자 저하도 성벽에……?”
“왕세자 저하라니, 아직까지 그런 단어 썼다가 너도 광장에 목이 꽂힐라.”
“아니아니, 우리 같은 평민들은 심지어 광장에 꽂히지도 못해. 내가 들어 보니까 그나마 성안에 내걸린 사람들은 귀족들이고, 평민들은 너무 많이 죽어서 전시도 안 해 놓고 그냥 어디에 한꺼번에 묻어 버렸다던가 내다버렸다던가…… 어휴, 말하면서도 소름이 돋네.”
“아무튼 그래서 그럼 왕세, 아니, 1왕자는 어떻게 된 거야?”
“1왕자고 공작이고 뭐고간에 다 성벽에 내걸렸다니까. 제일 잘 보이는 곳에 1왕자랑 왕자비랑…… 어휴, 그 몰골이 너무 참담해서 말도 못 해. 왕족으로 고귀하게 태어나는 것도 못할 짓이야. 죽어서도 어떻게 그런 꼴로…….”
주위 사람들의 얼굴도 일그러졌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어쨌든 태어나서 평생을 왕족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살아오던 사람들이다. 고귀하디고귀한 왕세자 부부의 참담한 결말은 그들로서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그 옆에 둘베르 공작 부부랑 루테른 공작 부부도 나란히 걸렸고…….”
“둘베르 공작가면 왕비 전하 친정 아니야?”
“그러니까 더 그랬겠지. 왕세자, 앗차, 1왕자 외가잖아. 왕이 그토록 신임한다던 루테른 공작도 그 옆에 나란히 걸렸고…… 암튼 그 명문 세가들도 다 한 번에 몰락이야 몰락. 우리 영주님이 2왕자 저하파였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어 그러게, 우리 영지 바로 옆이 루테른 공작령이잖아. 그럼 루테른 공작령은 어떻게 되는 거야? 소공작이 물려받나?”
“소공작이고 뭐고 하나도 남은 게 없다니까? 아까 내 말 뭐로 들었어? 공작 부부고 아들들이고 뭐고 다 죽어서 내걸렸다니까. 완전 멸문이라니까?”
“그쪽 사람들이 자기네 영주님 좋다고 그렇게 자랑했었는데…….”
“정말 대대손손 잘나가던 하늘 같던 가문들이 하루아침에 멸문이라니. 권력이고 푸른 피고 함부로 받을게 아닌 가 봐.”
“위에서 그렇게 피바다면 우리 같은 평민들이야말로 정말 하루아침에 마을이 통째로 몰살당하는 거 일도 아니야. 입 한 번 잘못 놀리면 즉살당할 수도 있다고…….”
한동안 묵묵히 듣고 있던 아젠은. 곧 주인이 쟁반을 들고 돌아오자, 그것을 받아 들고 조용히 방으로 올라갔다.
그녀는 이미 침대에 쓰러져 잠들어 있었다. 약병이 옆에 놓여 있는 것을 보니, 이미 가방에서 꺼내어 먹은 듯했다.
아젠은 약병을 들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약이 떨어져 간다.
애초에 나올 때 급하게 나오느라, 그리고 짐을 많이 챙겨 올 수 없기에, 충분히 많이 가지고 오지도 못했다. 오는 길에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느라 너무 과용하기도 했다.
안 그럴 수가 없었다. 수도에서 가능한 한 빨리 멀어져야 하는 일이 더 급했으니까.
그가 한숨을 쉬며 손으로 머리를 헝클었다.
전생에 이 시각에 이 자리에 앉아 있었을 보라색 눈의 기사를 생각했다.
그 기사는 어떻게 했었을까. 몸이 이렇게 안 좋은 아가씨를 모시고 어떻게 도망치려고 했을까.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긴 했을까? 하지만 결국 실패했지.
아젠은 그녀의 몸에 허름한 이불을 잘 덮어 주었다. 거칠어진 피부에 안 좋은 안색, 메마른 입술이 내려다보였다.
그녀는 지금쯤 그녀를 아껴 주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폭신폭신한 거위 깃털 침대에서 부드럽고 포근한 이불을 덮은 채, 아기 때부터 그녀를 돌봐 준 주치의의 치료를 받으며, 그녀의 입맛을 제일 잘 아는 주방장이 정성 들여 만든 보양식을 먹고 편안하게 누워 있었어야 했다.
그놈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아니었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하나…….
이미 이렇게 되었을 거라는 것을 어쩌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전생에 한 번 겪어 본 일이니까. 아니길 바라고 또 바랐지만, 결국은 이렇게 되었을 거라고…….
그래, ‘그’는 결국 또 해냈구나. 해 버렸구나. 저질러 버렸구나.
미친 자식. 개자식. 찢어 죽일 새끼.
미쳤냐? 그녀가 웃어 주는 게 그렇게 좋다면서, 그녀의 가족들을 도륙 내? 그래 놓고 보석만 한 아름 안겨 주면 된다고 생각했어?
네가 아무리 이기적으로 탐욕스럽다고 하더라도, 네가 바라던 게 그녀의 미소였다면, 너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라도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되는 거였어.
어떻게 그런 기본적인 생각도 하지 못할 수가 있었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나.
그리고 난 왜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지? 무능력한 쓰레기. 다 알면서도 하나도 바꾸지 못하는 이 쓸데없는, 쓸모없는……!
기회를 다시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과연, 다시 그녀를 웃게 할 수 있는 실낱같은 가능성이나마 남아 있을까?
……이 사실을 그녀에게, 알려야 하나?
.*. *. *. *. *. *.
아를렌이 정신을 차린 것은 한밤중이었다.
그녀는 요새 밤낮의 구분이 별로 없었다. 낮에도 말 위에서 정신을 잃다시피 잠들 때가 태반이었는가 하면, 밤에도 잘 자지 못하고 깰 때가 많았다.
말 위에서도 잠들어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서인지, 갑자기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서인지, 온몸을 강타하는 통증이 너무 괴로워서인지,
아니면 그저 너무나도 불안한 마음을 억누를 수 없어서인지…….
어떻게든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해 보던 그녀는, 한참을 뒤척여도 잠이 다시 오지 않고 불안감만 더해 가자 결국 조심스럽게 욱신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옆을 돌아보자, 푸르스름하게 보이는 어두운 방 안에, 그녀의 기사가 보였다.
그는 문에 등을 기대어 앉은 채 칼집을 품에 안고, 한 손은 여전히 칼자루를 잡은 채 잠들어 있었다.
그녀가 기척을 내지 않으려 애쓰며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조심조심 한 발짝씩 그에게 다가갔다.
평소대로라면 이 정도의 기척이라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건만, 며칠간 밤낮으로 제대로 자지도 쉬지도 못한 채 짐 덩어리인 한 사람을 안고 업고 계속 달려야 했기 때문인지, 곤히 잠들어서 깨지를 못한다.
아를렌은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가지런히 모은 무릎 위로 팔을 감싸고는, 잠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창문으로 스며들어 오는 달빛이 그의 피곤한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거멓게 물든 채 감겨 있는 눈가를 한참 바라보다가, 버석하니 말라서 갈라진 입술을 보았다. 손가락을 뻗어 그 입술에 다가가다가, 닿지는 않고 살짝 떨어진 상태에서 덧그렸다.
그녀는 팔에 고개를 기대고,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았다. 그가 숨을 쉴 때마다 조금씩 어깨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그의 주군의 딸이자, 서약의 레이디였다. 단지 그 이유 때문에 그는 자신을 들쳐 업고 온갖 위험을 감수하며 이 고생을 해야 했다.
사실 당신 혼자였다면, 이미 예전에 훌훌 국경을 쉽게 넘었을 텐데…….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다들…… 괜찮을 거야. 기도하듯 되뇌었다.
그녀 자신도 별로 믿지 않는 소리를 스스로에게 열심히 되새겼다. 사실은. 가주도 후계자도 남아 있지 않던 공작저에까지 기사들을 보냈을 정도면 이미 압도적으로 일방적인 상태였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았다.
괜찮을 거야. 괜찮아야 해. 제발…….
감겨 있는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를렌은 눈을 떴다.
눈물을 흘리면 안 돼. 아침에 아젠이 눈치챌 거야. 나 때문에 고생이 많은데 마음고생까지 더 얹을 수는 없어.
울면 안 돼. 우는 것으로도 기운이 소모되니까. 아프면 안 도H. 이미 짐인데, 여기에서 더 아프기까지 하면 그건 정말 짐 덩어리가 되고 말 거야.
오늘은 오늘 일을 그리고 내일 일을 생각해. 하루하루 살아 내서 보고 싶은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도록.
.*. *. *. *. *. *.
다음 날 아침. 1층에 내려와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아젠은, 흘끗흘끗 자신들을 쳐다보며 조용히 뭐라고 쑥덕이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어쩌면 그냥 외부인을 보고 쑥덕거리는 것일 수도 있고,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단지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응? 무슨 일이야?”
아를렌이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춰서 소곤소곤 아젠에게 물었다. 그녀는 등을 돌리고 있는 터라 다른 사람들을 보지는 못했지만, 아젠의 미간이 미세하게 찡그려진 것은 예민하게 눈치챘다.
“일단 태연하게 식사를 계속하세요.”
“누가 알아본 것 같아?”
그녀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덤덤한 척 식사를 이어 나가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확실치 않지만…… 아무튼 지금 저희를 의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
아젠이 컵을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아를렌은 최선을 다해서 아무렇지 않은 척 식사를 이어 나갔다. 그들에게 어색하게 보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식사를 할 수 있을 때 하는 것 역시 중요했다. 지금 현재 그녀에게 주어진 유일하고도 가장 중요한 책임은 자신의 몸을 관리하는 것이었으니까.
“죄송합니다. 좀, 달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아를렌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당분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영양분을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곧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젠은 흘끗, 그들을 바라보던 무리 중 한 명이 재빠르게 식당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쳇.’
아무래도 그냥 단순히 이방인을 보고 흥미를 느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몸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수상쩍어 보이지 않을 만큼만 걸음을 서둘렀다.
이 마을은 성벽도 없다. 일부러 그런 마을을 골랐다. 말을 타고 달려서 도망치면 그 뿐이다. 기사단이 몰려와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 작은 마을의 어중이떠중이들이 쫓아와 봐야 금방 떨쳐 낼 수 있다.
말만 타면.
여관의 마구간으로 향하는데, 그 무리가 다가와 앞을 가로막았다.
“여행자분들, 어디를 가시오?”
아젠이 미간을 찡그리며 옆으로 피하려고 했다. 가능하면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지나가는 것이 낫다.
“이런 시골에는 무슨 일이신지. 어디 안내라도 해 드릴깝쇼?”
“지나가던 길에 잠깐 쉬러 들렀을 뿐이니 필요 없습니다.”
이런 말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아젠은 대답하며 옆으로 돌아서 가려고 했다.
그러나 애당초 이 무리는 다른 일행이 병사들을 데려올 때까지 앞을 막으려는 것일 테다. 그들이 더 노골적으로 길을 가로막으며 움직였다.
다 베어 버릴까.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추적의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서일 뿐이었다. 저딴 벌레만도 못한 놈들을 다 밟아 죽여 버리는 거야 뭐가 문제 될까.
스르릉.
검이 검집에서 거칠게 뽑혀 나왔다. 왼손에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지만, 놓아 주지 않고 꼭 잡았다.
“안내는 필요 없으니 길을 비켜라.”
그의 눈이 살의로 번득이자 그들이 주춤주춤하며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아젠이 검을 휘두르자, 한 명의 옷깃이 잘려 나갔다.
“히익?!”
아젠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더 이상의 협박을 꺼낼 시간도 아까웠다. 그가 성큼성큼 거침없이 걸어 나가자 그들은 허겁지겁 길을 비키며 멀찍이 물러섰다.
아니. 그러는가 싶었지만,
“헉,”
그녀의 작은 비명에 그가 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아젠에게는 바로 물러섰던 사내 중 하나가 감히 그녀의 후드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으아악-!”
그리고 다음 비명은 그 사내에게서 나왔다. 사내의 손이 팔에서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 후 아젠의 손속에는 자비가 없었다. 어차피 이미 소동은 일어났고, 피를 봤다. 감히 그녀에게 손을 댄 놈들이었고, 어떻게든 그들을 잡아 두려고 했던 놈들이니 놔줘 봤자 후환이 있을 뿐이었다.
애초에 기사와 일반인은 전혀 상대가 되지 않는다. 토너먼트 우승까지 해 본 기사가 일반인들을 베어 버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사방팔방으로 피가 튀기고, 순식간에 여관은 비릿한 피 냄새로 가득 찼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앞다투어 도망쳤고, 감히 그녀에게 손을 댄 무리는 모두 바닥에 쓰러져 피 웅덩이 위를 뒹굴고 있었다.
그러나 그딴 것들을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제기랄.
아젠은 하얗게 질려 움직이지 못하는 아를렌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실례하겠습니다, 아가씨.”
바짝 굳어 있는 아를렌을 안아 들고, 빠르게 마구간으로 달려갔다. 마구간지기는 피범벅이 된 아젠의 모습을 보고 히익 하고는 뒷걸음질 쳤고, 아젠은 안장이 올려져 있는 말 두 필을 찾아내 끌어 냈다.
“타세요.”
아를렌은 창백하게 질려 있는 얼굴이었지만,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말 위로 올라갔다. 아젠은 아를렌이 말 위로 올라가는 것을 도와주자마자 바로 자신의 말 위에 올라탔다.
“서쪽으로 달립니다.”
아를렌이 먼저 박차를 가해 달리고, 그 뒤를 바로 아젠이 따라잡았다.
“속도 늦추지 말고 그냥 질주하세요.”
아를렌은 이를 악물고 말을 몰았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옆을 스쳐 지나가며,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지만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어 참았다. 자신이 망설여서 속도를 늦추면, 그만큼 아젠이 짊어지는 위험이 커지기에, 아무리 울고 싶어도 말의 속도는 늦출 수가 없었다.
아젠은 그녀의 뒤를 바짝 따라붙어 달리며 주위를 살폈다.
평화롭던 마을은 순식간에 흙먼지를 날리며 질주하는 말들과 그들을 피하려던 사람들로 시끄러워졌다.
‘일단은 이대로 이 마을만 벗어나면…….’
소란을 일으켜 흔적을 남겼으니 추적이 이쪽으로 붙을 테지만, 다시 흔적을 지워 나가면서 국경을 넘어가면 된다. 이미 루테른가가 몰살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굳이 아슈네란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었다. 웨스란드로 넘어가서 정식으로 망명을 하든, 시골에 숨어 살든 하면 되리라.
그러나, 마을을 벗어나 한숨을 돌리나 싶었던 아젠은, 뒤를 쫓아오는 것이 시골 마을의 어중이떠중이 치안대가 아니라 제대로 된 군마를 탄 기사라는 것을 발견했다.
젠장.
어젯밤에 이 마을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그러고 보면, 지난밤에 여관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아무도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었는데, 아침에는 그들을 보며 수군거리고 길을 막았었지. 간밤에 기사가 도착해서 수색 전단이라도 붙였던 모양이다. 빌어먹을.
이곳은 수도에서 제법 먼데, 이런 작은 마을들까지 일일이 기사를 보내다니.
승마를 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몸도 좋지 않은 아를렌이 기사가 전력으로 몰아 쫓아오는 말을 따돌릴 수 있을 리가 없다. 심지어 그녀가 타고 있는 저 말은 아무 말이나 안장을 얹고 있는 말을 급하게 골라 온 것뿐, 딱히 준마를 고른 것도 아니었지 않던가.
젠장. 빌어먹을.
“먼저 가세요.”
그는 말을 좀 더 거세게 몰아, 그녀의 옆으로 말을 붙이고 외쳤다.
“아젠?”
그녀가 그를 돌아본다.
제기랄. 벌써 그녀를 홀로 보내야 하게 될 줄이야.
“멈추지 말고 달리세요. 제가 꼭 찾으러 갈 테니까, 먼저 가 있으세요.”
그녀의 눈망울에 온갖 감정이 어린다. 불안함. 걱정, 두려움…… 그래도, 그 눈에 아직 절망은 어리지 않았다. 아직.
“꼭, 아가씨의 곁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녀의 꼭 다문 입이 파르르 떨린다. 그녀가 당장이라도 눈물을 뚝뚝 떨어트릴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말을 멈췄다.
계속해서 달리던 그녀의 말과 순식간에 거리가 벌어졌다. 끝끝내 뒤를 돌아보던 그녀가 이윽고 결심을 굳힌 듯 앞을 보고 달리더니, 작아졌다.
말머리를 돌려. 추격해 오던 기사와 마주 보자, 더 이상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제기랄.
그녀가 보이지 않자, 아까 먼저 가라는 말을 하면서 치솟았던 불안감이 더더욱 온몸을 잠식한다.
절벽 위에 혼자 앉아 있던 그녀의 모습이 다시금 떠올랐다.
혼자 보내고 싶지 않았다. 저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눈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 홀로 놔두고 싶지 않았다. 불안해. 불안하다.
과거의 그 평민 기사는 어떤 식으로 그녀의 손을 놓치게 되었던 건가. 그게 설마 지금 이 순간은 아니었겠지. 다시 그녀를 보지 못한 채로 그 개자식이 그녀를 낚아채 가는 것은 아니겠지.
그는 까드득 이를 갈면서 검을 뽑아 들고는, 말에 박차를 가해 상대 기사를 향해 달렸다.
가능한 한 빨리 정리하고 그녀를 데리러 가야 했다.
.*. *. *. *. *. *.
아를렌은 숲속에 숨어 있었다.
숨었다고 해도, 흔적을 지우지도 못한 채였다. 아니, 지우지 않았다. 그녀는 아젠이 그녀를 발견하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그가 나타나지 않을까 봐.
아무리 기다려도 다시 나타나지 않을까 봐 너무나도 두려웠다.
소중한 사람들이 모두 손 닿지 않는 곳으로 사라져 가는데, 눈앞에서 한 명을 더 잃었을까 봐 두려웠다.
이렇게 숨어 있을 때 갑자기 나타나는 사람이 아젠이 아니라, 쫓아오던 다른 기사일까 봐 두려웠다. 그 기사의 옷에 아젠의 피가 묻어 있을까 봐 두려웠다.
“흑…….”
울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그동안은 잘 참아지던 울음이, 혼자가 되어서인지 자꾸 새어 나왔다.
홀로 숲속에 앉아 있으니, 그동안 참아 왔던 상념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가족들은, 유모와 지느는, 공작저의 많은 사람들은, 과연 무사할까?
……살아 있을까? 정말…… 다시 볼 수 있을까? 정말?
그동안 그토록 불안하고 힘들었어도 이토록 두렵지 않았던 것은 아젠이 옆에 있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10년 동안 한결같이 옆에 있어 주었던 아젠이, 지금도 항상 옆에 있어 주었기 때문에.
‘사실은 널 놔두고 홀로 달려오고 싶지 않았어.’
‘먼저 가세요.’라는 말에 ‘싫어.’라고 외치며 고집부리고 싶었어.
그러나, 그게 얼마나 방해가 되는지 알고 있기에, 자신은 옆에 남아 봐야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가 될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이를 악물고 말을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말의 고삐를 한 손에 움켜쥔 채 바닥에 앉아, 고개를 무릎 사이에 파묻은 채 흐느끼며 간절히 한 사람을 기다렸다.
제발…….
제발 돌아와줘.
제발 무사히 와줘.
제발…….
“아가씨?”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흐려진 시야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금방 오려고…….”
“아젠!”
아를렌은 벌떡 일어나 달려갔다. 아젠이 당황하여 멈칫한 사이에, 그녀가 그의 품에 폭 안겼다.
“으윽.”
그가 무의식중에 작은 신음을 내뱉자, 아를렌이 깜짝 놀라 물러섰다. 아, 그는 상처에 가해진 충격보다, 그녀의 체온이 멀어졌다는 사실이 훨씬 더 아쉬워서, 신음을 참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이내,
“미, 미안해, 다친 걸 모르고…….”
그녀의 눈에 그렁그렁 맺혀 있는 눈물이 주르륵 떨어져 내리며, 그녀가 걱정과 애정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자, 심장이 아려 왔다.
“내가 조심했어야 했는데…… 괜찮아? 어디야?”
그녀가 허둥지둥하며 그의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이미 그의 옷은 아까 마을에서부터 피범벅이었기에. 그녀는 어디가 그의 상처인지 찾지 못했다.
“그냥 가볍게 스친 거예요. 괜찮습니다.”
“거짓말, 아까 신음했잖아.”
“그건 예상치 못했던 충격이었던지라, 저도 모르게…….”
“…….”
그녀의 얼굴이 굳었다. 자신이 그에게 그만한 충격을 주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아니, 아팠다는 것이 아니고, 싫었던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미안해. 내가 너무 생각이 짧았어.”
“아니, 아팠다는 게 아닙니다. 저는 그저…….”
사실은, 너무 좋아서, 당신이 그토록 애절한 눈으로 자신을 보면서 뛰어 안겨 들어온다는 사실이, 너무 좋아서…….
당신을 울려 놓고, 당신을 이렇게 비참한 처지로 만들어 놓고, 그러고도 그거 하나에 마음이 술렁여서, 그래서 방심했던 것뿐이다.
“어디야?”
그녀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다시 한번 물었다.
“왼쪽 어깨 밑입니다만, 살짝 스친 거라 그닥…….”
그녀가 그를 나무에 기대어 앉혀 놓고, 검 띠를 옆으로 치운 후 능숙하게 그의 상의 단추를 풀어 내기 시작했다. 자신의 바로 앞에 바짝 붙어서 글썽글썽한 눈으로 자신의 단추를 푸는 데 열중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숨이 막혔다.
귀에서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옷을 왼쪽으로 걷어 낸 후 팔의 상처를 보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아젠이 보기엔 별것도 아닌 상처였으나, 별거 아니라고 변명하는 것보다 그냥 입을 다무는 쪽을 선택했다.
가방을 뒤져 보던 그녀가 울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럴 때 쓸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
그제야 그는 변명했다.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그냥 놔두면 나아요.”
하지만 그녀는 듣지 못한 듯 가방을 뒤적거리다가 이내 가방 속에 있던 숄의 끝단을 찢어 냈다.
“그래도 어제 여관에서 빨았으니까 깨끗할 거야.”
자신 없는 목소리로, 그러나 이제는 능숙한 손길로 붕대를 감아 내는 그녀를 그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먼 옛날, 그 언젠가가 떠올랐다.
햇빛이 내리비치던 싱그러운 어느 여름날의 숲.
아직 아무것도 망가지지 않았던 그때.
그냥. 순수하게 그 초록색 눈망울을 보고 빠져 버렸던 그 순간…….
그는 바로 코앞에서 살랑이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잠시 아찔해졌다가, 열심히 붕대를 감는 데에 집중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가슴께가 울렁거렸다.
그는. 내리깔고 있는 초록색 눈과, 그 눈을 살짝 가리고 있는 기다란 속눈썹을, 그리고 하얗고 매끄러운 이마를 내려다보다가,
바라보다가,
그리고…….
그녀가 갑자기 굳어서 모든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젠은 그제야 자신의 입술이 그녀의 하얀 이마에 닿아 있음을 깨달았다.
어?
잠깐. 이게, 어떻게…….
아젠이 당황하여 몸을 뒤로 물렸다. 그녀가 동그래진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자신이 더 당황했다.
아니, 언제나 그녀와 닿고 싶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녀의 하얀 피부에 입술을 누르고 그 감촉을 누리고 싶었지만, 손가락에 정중하게 입 맞추는 것 외에는 허용되지 않았었는데, 어째서, 어떻게,
어느 사이에…….
그녀의 촉촉하고 투명한 눈과 마주쳤다. 그녀가 뭐라고 말하려는 듯 입술을 움찔움찔 열었다 닫았다 하다가, 이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이런 시기에……이런 상황에……
이렇게 만들어 놓은 개새끼가 누구인데, 이런 짓을…….
그는 밀려드는 자괴감에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그 순간, 그의 볼에 아주 촉촉하고 따뜻한 무언가가 뭉클하니 와 닿았다.
그가 흠칫하여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볼에 그 작은 입을 맞추었다가 뗀 그녀가,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에 눈동자를 숨기며 떨구고 있었다.
방금 벌어진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가슴이 벅차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저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감정에 온몸이 떨려 왔다.
그가 살짝 떨리는 두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 들어 올렸다. 그녀의 뺨에 닿은 손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천천히 올라온 그녀의 말간 눈이 잠시 그의 눈을 바라보더니, 다시금 내려갔다.
그의 입술이 가볍게 그녀의 입술에 촉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 부드러운 감촉에 손이 떨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 뛰었다.
잠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 그는,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뺨을 붉히자, 이내 다시 그녀와 입을 포개었다. 그녀는 살짝 떨면서도 그를 기꺼이 맞이했다.
한 손이 그녀의 목 뒤를 잡아 바짝 끌어당기고, 다른 손으로는 허리를 휘감았다. 그녀가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에 두르고는 그대로 끌어안았다.
그건, 그의 두 생애를 통틀어 기다려 온 가슴 떨리는 순간이었다.
온몸이 환희로 떨리고, 벅차오르는 행복감으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지금 그들을 쫓아오고 있는 자들이 있다는 것도, 꼬리를 잡혔으니 바짝 추적이 붙을 거라는 것도,
그녀에게 가족의 죽음을 숨기고 있다는 것도,
그녀를 이렇게 나락으로 떨어트린 것이 사실 자신이라는 것도,
잠시 그 모든 것을 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