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폭풍전야 (4/13)

4. 폭풍전야

발 밑에 피의 늪이 질척하게 펼쳐져 있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저 멀리 하느작하느작 하얀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점점 멀어져 가는 작은 인영이 보였다.

그는 달렸다. 어떻게든 잡으려고 했다.

잡으려고 해도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여인을 절박하게 쫓아가다가, 간신히 어깨를 잡고 돌려세웠다.

흐린 회녹색 눈이 힘없이 잠시 그와 마주치는가 싶더니, 위쪽 어딘가로 옮겨졌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바라본 곳에는. 두 개의 인영이 허공에 매달려 불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목이 밧줄로 매달린 채 썩어 가는 두 구의 시체.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시체가, 한때는 고급스러웠을지 모르나 지금은 온갖 오물과 시체 썩는 물로 시꺼메진 예복과 드레스를 걸친 채, 혀를 기괴하게 길게 빼물고, 까마귀에게 파먹힌 빈 눈구멍에 구더기가 득실득실한 채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흠칫하여 뒷걸음질을 치다가, 자신의 손에 잡혀 있는 그녀를 느끼고 멈춰 섰다.

그녀는 시체와 다름없는 얼굴로, 허공에서 삐걱삐걱 흔들리는 두 시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보지 마.”

그가 다급하게 그녀를 돌려세우며 외쳤지만, 그녀의 몸을 돌려도 그녀의 고개는 그대로 흔들리는 시체들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잡고 자신에게로 돌려세웠다.

“보지 마.”

그가 절실하게 부탁하자, 그녀의 텅 빈 시선이 잠시 그를 스쳐 지나가더니, 이윽고 그의 뒤편으로 고정되었다.

그는 섬뜩한 느낌에 뒤를 돌아보았다.

구더기 가득한 머리가 꽂혀 있는 두 개의 장대가 보였다. 젊은 두 남자의 썩어 일그러진 머리가 이쪽을 향해 있었다.

그는 그녀를 깊이 끌어안아, 자신의 가슴에 그녀의 얼굴을 파묻어 버렸다. 이제 더 이상 그녀가 다른 곳을 바라볼 일도, 저런 끔찍한 것을 볼 일도 없도록.

그녀가 무어라 웅얼거리는 소리가 막혀서 잘 들리지 않아, 그는 소리를 잘 듣기 위해 그녀를 조심스럽게 자신의 가슴에서 떼어 냈다.

드디어 그녀가 그 죽어 가는 눈이나마 그에게 돌려 눈을 마주쳤다.

숨이 턱 막혔다. 그녀의 눈에는 원망조차 없었다. 아무런 감정도 느낌도 조금의 생명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갈라질 대로 갈라지고 형편없이 부르튼 푸르스름한 입술이 움직였다.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는데.」

“뭐?”

그녀가 힘껏 자신의 가슴에 단도를 박아 넣었다.

.*. *. *. *. *. *.

아젠은 며칠을 앓았다.

온실에서 쓰러진 후, 그는 며칠 동안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간간이 정신이 들어왔다가도 방을 나서 보지도 못하고 위액을 토해 낸 후 다시 정신을 잃었다.

악몽이 계속되었다.

그녀는 수십 번을 죽었고, 수백 번을 썩어 갔다.

썩어 문드러져 가는 시체들 속에서 그는 허우적거렸다.

정신을 차리고 싶었다. 이 악몽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며칠을 악몽에 시달린 후 겨우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그가 마주한 것은 악몽보다 더한,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카쉬엔.

저주받은 폐왕자.

모두가 꺼리고 경멸하던 자.

자신의 사랑스런 아가씨가 수도에 갈 때마다 종종 돌봐 주었다던 그소년.

어쩐지 들을 때마다 무언가 걸리고 불길하던 이름.

그리고 이제는 왕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부와 무력을 소유하게 된 공작.

‘그게…… 나였어.’

믿을 수 없는, 믿고 싶지 않은 현실.

그러나 며칠간을 앓는 동안 그것 자체는 어느 사이엔가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전생에, ‘과거’에 그가 겪었던 일들, 그가 행했던 그 일들을 ‘그자’가 이제부터 그대로 행하리라는 것인가.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는 그녀의 부모를 성벽에 내걸어 까마귀밥으로 만들고, 오라비들의 목을 쳐서 광장에 꽂아 놓고, 그녀의 발을 꺾어 새장 속에 가두어 죽어 가게 만든 후, 그녀의 눈앞에서 그녀를 마지막까지 지켜 주던 호위 기사를 고문하고, 결국에는 그녀조차 죽음으로 몰아넣을…….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없어진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모두 사라진 일이니 기억할 필요조차 없다고. 그냥 이 순간을 감사히 즐기면 된다고. 그러나, 이게 정말 현실이라면, 그 모든 죄업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지금 모두 되돌아오고 있는 거라면…….

그러나, 그렇다면,

‘그럼. 지금 이곳에 있는 나는 누구지?’

전생…… 전생의 기억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완전히 다른 외양, 다른 출신, 다른 몸, 심지어 성격까지 다른 것은. 새로이 환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환생하는 경우를 들어 본 적은 없었지만. 환생 자체는 이미 많은 사람이 믿고 있는 개념이었고, 어쩌다 보면 기억을 가지고 환생할 수도 있지 하고 받아들였었다.

하지만, 이게 새로운 시간으로의 환생이 아니라면, 과거로 되돌아온 것이라면,

카쉬엔이라는 자신은 멀쩡히 저쪽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면,

여기 이곳에 있는 자신은 누구인가.

……전생의 그녀가 말하던 그 평민 호위 기사, 자신의 손에 참혹하게 죽어 가던 그 호위 기사가‘아젠’이리라.

온실에서 소개를 하던 그 장면은. ‘카쉬엔’으로서의 자신의 기억에도 있었다.

그래…… 그녀의 목에 꼭 채워 주고 싶었기에, 전장에서도 항상 잘 챙겨 보관했던 목걸이였다. 그녀가 한사코 거절하기에,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말들로 간신히 그녀의 목에 걸어 주었었다.

그러고는 한가득 배부르게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목걸이를 목에 걸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흐뭇해하던 참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던 눈과는 사뭇 다른 종류의 애정 어린 눈을 하고 바라보던 그 평민 기사 놈을 소개해 줬던 것은.

그래서 그 평민 기사를 죽여 버리고, 그녀를 오롯이 독점해야겠다는 생각을 시작했었던…….

‘그게……그게 나라고…….’

문득 방 안 저편에 놓여 있는 거울 속의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아마 하녀가 새것으로 바꿔 놓은 듯 멀쩡해진 거울 속의 자신은 보라색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

그는 조용히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래, 이제 조금 떠오르는 것 같다.

그 평민 기사 놈이 이렇게 생겼었던 것 같다.

그녀를 데리고 도망쳤던 놈…… 그저 죽여 버릴 생각만 했었기에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그닥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어차피 제대로 얼굴을 마주했던 것은 마지막 그 순간 정도가 다였고…….

……그러나, 그가 그토록 죽이고 싶어 했던 그놈은 사실, 악마 같던 자신으로부터 그녀를 구해 보려고 발버둥 치던 정의의 기사였던 게 아닌가.

‘하지만 처참하게 실패했지.’

그 정의의 기사는 그녀도 구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도 구하지 못했다. 죽어 가는 그녀의 앞에서 그놈이 절절하게 남겼던 저주가 머릿속을 울린다.

그럼 ‘나’는 누구인가.

‘아젠’인가 ‘카쉬엔’인가.

전생에 그녀를 구하려다가 실패하고 카쉬엔의 손에 죽어 간 자는 자기 자신인가, 아니면 다른 영혼인가.

‘성격이……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지.’

그녀와 작은 접촉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감히 그 이상의 접촉은 탐내지 못하고 언제나 소중하게 지켜 주고 싶던 그 순진한 청년의 마음은,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어떻게든 안전하게 행복하게 지켜 주고 싶어 하던, 숭배에 가깝던 그 마음은,

자신에 의해 죽어 버린 그녀를 보고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폐왕자의 것이었을까,

아니면 흠모하던 아가씨를 지키려다 죽어 간 평민 기사의 것이었을까.

그는 연거푸 마른세수를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생각해야 하고 어디서부터 이해해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이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곳도 알아볼 수 있는 곳도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지금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정말 허황된 망상이 아니라 현실이라면, 자신이 ‘과거’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사실은 ‘미래’라면. 그 모든 일이 다시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절대로 다시는 보고 싶지도 겪고 싶지도 않은 그 일들이…… 없어졌다고 잊어도 된다고 생각했던 그것들이…….

그녀의 무너져 가던 몸체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빛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죽어 가던 그 눈. 스스로 칼을 박고 죽음을 선택해야 했던 그 절망. 썩어 내리던 그 몸.

한참을 얼굴을 쓸어내리던 그는 문득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려 바라보았다.

이것이 그의 손으로 직접 난자해서 죽였던 그 몸인가.

아직 붙어 있었다.

손도 발도, 귀도. ‘자신’이 잘라 내었던 모든 것이 제대로 붙어 있었다.

그녀는…… 그녀도 아직 살아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활력이 넘쳐 났고,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그녀의 발은 나비처럼 가볍게 뛰어다녔고, 항상 감미로운 목소리로 주위 사람들에게 애정을 말하였다.

그녀는 생생하게 살아서 웃고 있었다.

아직. 그녀를 살릴 수 있다.

살려야 한다.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그녀의 삶을, 지켜 줘야 한다.

어떻게 다시 찾은 그녀인데, 다시 잃을 수는 없다.

이게 ‘카쉬엔’의 감정이든, ‘아젠’의 감정이든.

아니, 아마도 두 사람 모두가 간절히 바라는 한 가지.

아무리 혼란스럽고 정신이 없는 상황이라도. 그녀를 다시 잃지 않기 위해 움직여야 했다.

지금 자신은 그녀의 호위 기사이니까.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이것은 아마도 그녀를 잃지 않기 위해 신이 내린 기회일 것이리라.

.*. *. *. *. *. *.

아를렌은 자신의 눈앞에 놓여 있는 녹색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바라보았다.

받을 때는 경황이 없어서 잘 몰랐지만. 아무리 봐도 이 에메랄드는 그 크기도 놀라웠지만, 흠집도 불순물도 하나 없이 맑은 색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것이, 상당히 상급의 물품으로 보였다. 게다가 그 옆으로 찬란하게 반짝이고 있는 저 수많은 다이아몬드들은 또 어떤지.

“아직도 고민하고 계세요?”

모른 부인이 방 안으로 아침 식사가 놓인 카트를 밀고 들어오며 말했다.

“고마워서 보답으로 준 거라고 했잖아요.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받아 넣으시면 될 것을…… 솔직히 다들 외면할 때 유일하게 치료해 주고 북부 전선으로 계속 물품도 보급해 준 사람이 아가씨밖에 더 있나요? 성공했으니 보은한다는 거죠. 사실 그보다 훨씬 더 비싼 보석을 가득 안겨도 모자랄 판이에요.”

모른 부인이 탁자 위에 아침 식사를 능숙하게 탁 탁 내려놓자. 음식들 옆에 놓여 있는 약병을 아를렌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길을 눈치챈 모른 부인이 재빠르게 덧붙였다.

“어제 드셨던 약은 너무 괴로워하시는 게 제 눈에도 보여서…… 제가 아가씨 너무 괴롭지 않으시게 맛도 생각해 달라고 전했으니 오늘 건 좀 나을 거예요.”

어려서부터 밥보다 약을 더 자주 먹어야 했던 그녀는 이제 웬만한 쓴 약도 불만 없이 훌쩍 삼키곤 했지만, 가끔은 그런 그녀조차도 참기 힘들 정도의 쓰고 비린 약이 나오곤 했다.

그녀의 부모도 형제도 모두 손 닿는 데까지 몸에 좋다는 귀한 약재들을 구하려고 혈안이었던지라, 그녀의 몸에 좋을 법한 희귀한 약재가 입수되면 그것은 모두 닥터 헤르트의 손을 거쳐 그녀의 약으로 조제되어 들어갔다. 그 덕에 약의 맛은 항상 일정한 것이 아니라 매번 조금씩 바뀌곤 했다.

어제 먹었던 약은 수도에 있는 젝시온이 무슨 귀한 것을 얻었다고 보내온 덕에 유례없이 비려서, 그걸 참고 목으로 넘기는 데 상당히 애를 써야 했다.

자신을 생각하는 오라버니의 정성이 가득 들어 있다고 여기며, 약을 구하는 사람보다 약을 삼키는 사람이 훨씬 더 쉬운 일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며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넘겼지만, 그 표정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숨겨지지는 않았었나 보다.

아를렌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유모를 바라보았다.

“그…… 고마워 유모. 그…… 몸에 좋은 약인 건 아는데…….”

“아이고 아가씨, 저도 그 약 냄새 맡아 봤어요. 전 냄새만 맡아 봐도 못 참겠던데, 그걸 꾹 참고 다 마신 아가씨가 대단한 거예요. 앞으로는 그런 건 참지 말고 그냥 말을 하세요. 너무 비려 못 마시겠어! 라고 외치세요. 그러셔도 돼요.”

아를렌은 피식 웃고는 약병을 열어 보았다. 여전히 비린내가 올라왔지만, 그 비린내를 숨기기 위해 다른 것들도 섞어 넣은 듯, 이가 시리도록 달콤한 냄새가 더 진하게 풍겨 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달콤함이 너무 강해서 오히려 더 괴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을 위해 일부러 신경 써서 이렇게 만들어 줬을 거라고 생각하니 뭐라 불평할 수가 없었다.

일단 그녀는 다시 약병 뚜껑을 닫고 내려놓은 후, 접시에 놓여 있는 맨치트 빵으로 먼저 손을 뻗으며 한숨을 한번 쉬었다.

“……아젠 경은 어때? 좀 차도가 있어?”

그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유모를 쳐다보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많이 나아졌다고 하더라고요. 아젠 경은 기사잖아요. 아가씨랑은 비교가 안 되게 튼튼하니 걱정 마세요.”

모른 부인은 웃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닥터 헤르트의 말도 왜 차도가 없는지 모르겠다고 했고, 현재 간병을 위해 붙여 놓은 하녀의 말로도, 들어가 보면 종종 자리가 바뀌어 있는 게 정신을 차렸던 흔적은 있지만, 구토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고 했다.

물론 모른 부인도 아젠 경을 염려했다. 그가 풋풋한 소년이었을 때부터 무려 10년간을 곁에서 지켜봤다. 그는 모른 부인의 기준에서도 훌륭한 청년이었다. 아가씨를 열렬히 추종하고 따르지만, 절대 선을 넘지 않고 언제나 아가씨를 지키는 것을 우선시한다는 점에서 특히.

하지만 그녀에게 가장 최우선은 아를레네 아가씨였다. 아가씨를 크게 걱정시킬 만한 이야기는 전하고 싶지 않았다.

“조만간 나아서 인사하러 올 거예요. 아마 며칠 쉬어서 죄송하다고 할 텐데, 그때 아가씨가 건강한 모습으로 맞아 주셔야죠.”

“으응. 하지만 아무래도 며칠째 계속 앓고 있다니 걱정이…… 아젠 경이 이렇게 아파 본 적은 정말 한 번도 없었잖아.”

“아젠 경도 사람이었다는 거죠. 그래도 워낙 튼튼하니까 괜찮을거예요.”

아를렌은 한숨을 쉬었다.

벌써 며칠째인가. 아젠이 슈엘에 온 후 한 번도 이렇게 아팠던 적이 없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람을 보내어 상태를 물어보고 있지만, 직접 확인해 볼 수가 없으니 답답했다.

직접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갈 수 없다. 루테른가에서 절대적으로 지켜지는 수칙이 있다면, 그것은 아를레네 아가씨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기침하는 사용인들도 아가씨의 곁에 오지 않으려는 판에, 며칠을 계속 앓아누워 있는 사람의 근처에 갈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기에, 아를렌은 거기에 순응했다. 자신이 아프면 성 전체가 얼마나 뒤집어지는지, 부모님과 형제들이 얼마나 걱정하고 눈물짓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아를렌에게 있어 건강은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지켜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벌써 며칠째 보지 못하는 아젠이 너무 걱정되고 그리웠다.

“나아지고 있는건 맞는거야?”

“그럼요, 닥터 헤르트가 조만간 멀쩡히 일어설 거라고 했어요. 걱정 마세요.”

아를렌은 아무래도 미심쩍은 얼굴로 식사를 마치고, 괴이쩍은 맛의 약병을 한 번에 비워 냈다. 얼굴을 찌푸리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냉큼 옆에 놓여 있던 사탕을 입에 집어넣었지만, 약이 너무 단 나머지 사탕의 맛도 잘 느낄 수가 없었다.

그때 지느가 방으로 들어왔다.

“아가씨~ 좋은 아침이에요. 벌써 식사 다 하셨어요?”

“안녕, 지느.”

지느는 밝게 웃으며 들어오다가 책상에 꺼내져 있는 초록색 목걸이를 보고 말했다.

“오, 이건 그 공작님이 주고 가신 목걸이군요? 오늘 하시게요?”

“아, 아니야. 그냥 잠깐 살펴보려고 꺼내 봤어. 다시 잘 넣어 줄래?”

“네.”

지느가 능숙한 손길로 쓱쓱 목걸이를 부드러운 천으로 닦아 낸 후 조심조심 상자 안에 넣으며 말했다.

“휘유. 이거 상당히 비싸 보여요. 역시 공작님이 아가씨께 반하신 거 아닌가요?”

지느는 뿌듯한 마음으로 즐겁게 한 말이었지만, 아를렌은 그 말에 미간을 찡그렸다.

사실 그녀도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분명 그냥 보답의 의미로 주는 거라고, 병사들 모두 그녀가 보내 주었던 보급품에 감사했다고 했고, 이 정도도 보답하게 해 주지 않으면 오히려 큰 빚을 지고 있게 되는 거니 곤란하다며, 자신이 힘든 시기에 자신을 잊지 않고 챙겨 준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에게 선물하는 것뿐이라고 했지만…….

그래서 그 말을 믿고 받았지만…….

‘그때부터 분명 좀 이상했지.’

아젠을 소개해 준 이후로 바뀐 카쉬엔의 눈빛을 그녀라고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니었다.

그때에는 경황이 너무 없어서 뭐라고 더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아젠을 소개해 주고, 그의 표정이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을 때 즈음에는 아젠이 쓰러져 버렸다.

그 후로 소리쳐서 사용인들을 부르고, 아젠을 방으로 데리고 가고 닥터 헤르트를 부르고 난 후에는, 이미 티 테이블은 정리가 끝나 있었고 레퀴에스 공작은 보이지 않았다.

저녁의 만찬은 예정대로 이루어졌지만, 뭔가 분위기가 달랐다.

그때엔 아를렌 자신도 아젠 걱정에 반쯤 정신이 없었지만, 카쉬엔도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그래도 그 시선이 끈적하게 그녀의 얼굴에 따라붙어 있었는데, 이전에 그녀를 바라보던 시선과 무언가 다르다는 느낌이었다.

무언가좀더…….

질척하고, 집요한…….

자신의 착각이거나, 과잉 반응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오랫동안 사지에서 고생하다가 이제 간신히 돌아온 사람이니까, 어린 시절과는 당연히 다를 수 있었다. 아마 그 전장에서 6년 동안 겪은 일들을 그녀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테니까.

그와 그의 동료들이 그렇게 고생하고 힘든 일을 겪으며 북부를 지켰기에 그녀는 편안하게 이곳에서 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의 달라진 눈빛은 그녀가 감싸 주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다음 날, 아버지와 카쉬엔이 집무실에 들어가 한참을 독대하고 나온 후 우연히 마주친 그의 표정은…….

‘무서웠어.’

당장 끌려가 잡아먹힐 것 같은 느낌에 그녀는 흠칫 떨었었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그에 대해 저주받았네 혐오스럽네 하던 시절에도 한 번도 그를 꺼린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가 무서운 괴물 같다고 하던 시절에도 한 번도 그를 무섭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그때의 그는 그런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상처받은 어린아이였을 뿐이었는데.

처음으로 그가 무섭다고 느꼈다.

모두가 그를 꺼리던 때에는 괜찮았는데 모두가 그를 칭송할 때에는 무섭다니, 이것도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도대체 아버지와 무슨 이야기를 하고 나왔기에…….’

일단 국왕에게 미움받고 있던 카쉬엔이었고, 국왕의 가장 가까운 오른팔인 아버지였기에, 아마 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아버지도 지금 이렇게 세력을 키운 그에게 함부로 날을 세우지는 않으셨을 텐데 왜 그렇게 틀어졌던 걸까. 그에 대해 나중에 아버지께 여쭤봐도 그냥 미소 지으며 얼버무리시고…….

어떤 내용의 대담이었건, 대담이 틀어진 후 분위기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

손님들은 그 후 금방 슈엘을 떠났다.

손님을 배웅하기 위해 공작 일가가 모두 나와 있었을 때, 카쉬엔은 그녀의 손에 끈적한 키스를 남기며, 그녀의 눈을 집요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조만간 데리러 올게, 나의 아가씨.」

그러고서 지어 보인 그 미소가, 어쩐지 사냥감을 바라보는 맹수처럼 섬뜩해서…….

‘이런 생각 하면 안되는데.’

그녀가 생각을 털어 내려 머리를 털었다.

어린 시절 박해당하고, 좀 큰 후에는 바로 사지로 내쫓겨서 고생하다 이제 간신히 돌아온 사람이다. 섬뜩하다느니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데.

그런 면에서, 자신이 과잉 반응을 보인다고 생각하려 했지만, 그래도 역시 그 시선이 담백한 우정의 시선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만약 정말로 구애를 하는 것이 맞는다면,

‘그럼 깔끔하게 거절을 해야겠지.’

어쨌든 그 누구와도 그런 깊은 관계로 얽힐 생각이 없었다.

자기 한 몸도 건사하지 못하고, 언제까지 이 생을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죄인이, 누군가 또 새로운 사람과 깊은 감정을 나누고, 끊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맺는다는 건…… 그런 짓은 할 수 없다.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었지만, 아를렌은 이내 그 얼굴조차도 털어 버렸다.

‘역시 목걸이는 돌려 보내야겠어. 한 것에 비해 과한 선물이라 부담스럽다고 하면서…… 애초에 그 보급품은 카쉬엔 한 사람에게만 보낸 것이 아니라 북부의 모든 병사에게 보낸 것이었다고…….’

아를렌은 한숨을 쉬며 책상으로 자리를 옮겼다. 생각난 김에 바로 편지를 쓰려던 참이었다.

똑똑.

낯익은 노크 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노크 소리만 듣고도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정말 오랜만이다.

“들어와요.”

반갑게 외치는 그녀의 목소리에 방문이 달칵 열렸다.

“아젠!”

오랜만에 보이는 얼굴이었다. 며칠 만인지, 상당히 수척해 보였다.

“이제 일어나도 괜찮은 거야?”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가씨. 걱정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니 무슨, 죄송하기는…….”

아를렌이 의자에서 일어나서 문가에 서 있는 아젠에게 다가갔다. 그사이에 야윈 얼굴이 너무 안쓰러워서, 아를렌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얼굴에 손을 갖다 대었다. 까칠까칠해지고 살이 빠진 뺨에 아를렌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다들 괜찮다고 걱정 말라고 하던데, 이게 뭐야. 얼굴이 반쪽이 되었잖아.”

아젠은 그런 아를렌의 얼굴을 바라보며 푸스스 미소를 지었다. 뺨에 와 닿는 부드러운 손의 온기를 찾아 얼굴을 기대었다.

당신은 여기에 이렇게 따뜻한 체온을 가지고 살아 있구나. 온몸으로 안도의 온기가 퍼져 나가면서 얼어붙어 있던 몸이 녹아내렸다.

생생하게 살아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니 숨이 조금 트이는 것 같았다.

자신이 며칠을 누워 있었는지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그걸 파악하기도 전에 일단 그녀의 방으로 뛰어 올라왔다. 그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으리란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를 보고 확인해야만 했다.

그녀가,

여전히 이곳에 웃으며 서 있다는 것을.

그 끝없이 펼쳐진 시체 더미들 위에 쓰러져 있던, 계속 반복되는 악몽 속의 그녀와 달리.

한참 아를렌의 걱정 어린 녹안을 내려다보던 아젠이 문득 모른 부인과 지느를 한 번씩 바라보았다. 모른 부인은 민망한 듯 고개를 돌리고 흠 흠 목을 가다듬고 있고, 지느는 기대에 가득 차서 눈을 빛내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두 사람이 어떻게 되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녀에 대한 것을 제외하고는 전생의 기억은 모두 희미했다. 그래서 이번 생과 같은 시간일 거라고 생각 못 한 것도 있다.

하지만 설령 기억이 선명했었더라도, 아마 전생의 카쉬엔은 저 두 사람의 운명 따위는 기억해 두지 않았을 것이다. 카쉬엔의 눈에는 오로지 그녀만이 보였기에, 그녀의 주위에 있던, 그녀가 아끼고 그녀를 아끼던 사람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녀의 가문이 몰살당하면서 사용인들도 어지간한 말단 중의 말단이 아니고서야 모두 같이 살해당했던 것을 생각하면, 저 두 사람도 아마…….

‘죽었겠지.’

아젠의 눈이 한층 더 낮게 가라앉자 아를렌이 걱정스럽게 뺨을 쓰다듬었다. 아젠은 그 손길에 다시 한번 아를렌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운 당신을, 그렇게 무자비하게 망가트릴 수가 있었을까.

이렇게 가냘픈 사람을 그렇게 무참히 꺾어 놓을 수가 있었을까.

아젠은 어느 사이엔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하는 자신의 손을 느끼고 주먹을 꽉 쥐었다.

“그냥…… 아가씨가 잘 계신지 한번 보고 싶었습니다.”

“내가 아팠던 것도 아닌데, 내 걱정을 왜 해. 몸도 안 좋은데 일단 들어와서 앉아요, 아젠 경.”

아를렌이 서둘러 테이블로 다가가며 맞은편 의자를 아젠에게 권했다. 보통 호위 기사들은 의자에 앉지 않지만, 지금 아젠은 휴가 중이기도 했거니와 며칠을 앓고 간신히 일어나 수척해진 사람을 세워 둘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앓고 난 후 정신을 차린다 해도 얼마나 몸에 힘이 없는지를 아를렌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젠은 따르지 않았다.

“아뇨, 그냥…… 뵈었으니 되었습니다.”

그는 그냥 문가에 그대로 서 있는 채로, 아를렌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어쩐지 아련한 눈빛인 것 같아 아를렌은 조금 멋쩍어졌다. 아직 아파서 눈에 힘이 없어서 그런 걸 텐데, 자신이 요새 이래저래 너무 과민한 것 같기도 하다.

“몸은 좀 괜찮아졌어요? 닥터 헤르트가 괜찮대요?”

“음, 닥터는 이제 만나러 가 보겠습니다. 하지만 정말 괜찮아졌으니까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괜찮지 않더라도, 이제부터는 괜찮아야 할 테니까요. 그는 속으로 뒷말을 삼켰다.

“아가씨께서 괜찮으시면 저도 괜찮아요.”

아젠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왜 그 미소가 이렇게 힘겨워 보이는지. 아무래도 아직 아파서 그런 건가, 아를렌은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래도 일단 닥터 헤르트를 만나 봐요. 지느, 닥터 헤르트를 좀 불러다 주겠어?”

“아닙니다, 아가씨. 닥터에게는 제가 혼자 찾아가 보겠습니다.”

아젠의 단호한 말에 아를렌은 다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아를렌의 얼굴을, 처연한 눈빛으로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왜…….”

“네?”

“왜 그렇게……아니, 아니에요.”

몸이 안 좋아서, 눈이 촉촉해서 그런 거겠지. 아를렌은 자신의 경험을 비추어 생각했다. 그리고 활짝 웃으며 얘기했다.

“난 정말 괜찮으니까, 내 걱정 하지 말고 쉬어요. 지금은 아젠 경보다 내가 더 건강한걸요. 도대체 아픈 사람이 왜 날 걱정하는 거예요. 이 성안에서 위험할 일이 뭐가 있다고.”

아젠은 피식 웃더니, 모른 부인과 지느를 다시 한 번씩 바라보고, 다시금 아를렌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마치 그녀를 가슴속 깊이 새기기라도 하듯 한참을 바라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아를레네 아가씨.”

평소답지 않게 말을 잇지 못하는 아젠의 모습에, 아를렌이 눈을 껌뻑껌뻑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죄송하지만. 당분간 호위 임무를 내려놓고 싶습니다.”

그 말에 왜 갑자기 심장이 철렁 떨어져 내리는지.

“어……내가 뭐……실수한 거라도……?”

“그런 게 아닙 니다, 아가씨.”

아젠이 빠르게 아를렌의 말을 부정했지만, 아를렌의 커다란 눈은 당황으로 꿈뻑거렸다.

“제가, 좀 해야 할 일이 있는 것 같아서, 호위에 집중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일단 주군께 허락을 받아야 하지만…… 호위에서 빠지게 되더라도 매일 아침 문안은 드리고 싶은데, 그 정도는 허락해 주시겠지요?”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아를렌은 표정을 가다듬었다. 애써 웃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밝은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다.

“그래요, 아젠 경이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해야지요.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원하는 일을 하러 가요.”

왜 원하는 일을 허락받고도 그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이는지 모르겠다. 아를렌은 마치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아 보이는 덩치 큰 기사를 올려다보다가, 다시금 환하게 웃어 보였다.

아젠은 그런 아를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보드랍고 따뜻한 살결. 매끄러운 피부를 따라 손가락으로 얼굴을 덧그리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손을 떼었다.

하루 종일 그녀와 붙어 있고 싶지만, 그녀를 지키는 방법은 그런 게 아니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녀의 옆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놈을 막아야 했다.

그러나, 일개 평민 기사의 몸으로 무엇을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그놈을 일대일로 상대해서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젠이 강한 기사인 것은 맞으나, 카쉬엔은 비교할 수 없이 압도적이라는 것을 그 스스로가 이미 알고 있었다.

일단은 루테른 공작을 만나 봐야 했다.

.*. *. *. *. *. *.

레퀴에스 공작가의 방문으로부터 몇 주가 지났다.

몸이 회복된 아젠은 기사단에 복귀했다.

루테른 공작과 대화한 후, 그는 아를렌의 공식 호위 인력에서 빠졌다. 그 후로 루테른 공작이나 소공작과 많은 시간을 같이 지내고, 이곳저곳으로 외부 임무를 다니기 시작했다.

몸이 괜찮아졌다는 것은 거짓이 아닌 듯. 그 후 그의 기량에는 변함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훈련 시간을 지독하게 늘려, 기량은 나날이 더 향상되어 갔다.

하지만 그는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가까이에서 아를렌을 바라보고 있는데도 어쩐지 굉장히 멀리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왜 항상 불안해하면서, 어쩌면 그녀가 당장 사라져 버리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는 듯이 바라보는지, 그러면서도 왜 그녀의 곁에 머물려고 하지는 않는지, 아를렌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아젠이 변한 것도 카쉬엔이 방문했을 때부터였다. 카쉬엔 역시 아젠을 본 후로 변했다고 느꼈으니.

‘둘 사이에 무슨일이 있었나?’

다각다각, 수도를 향해 천천히 움직이는 마차 안에서, 젝시온이 보내온 편지를 읽으려 손에 들고 있던 아를렌이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두 사람이 만나서 무슨 일이 있었을 기회는 없었다. 그 둘이 만난 것은 온실에서 한 번뿐이었고, 그때는 아젠이 금방 쓰러져 버려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눌 기회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그 방문 이전에 두 사람이 만날 기회가 있었느냐 하면, 그럴 리가. 슈엘에 온 후로 아젠은 정식 기사가 되기 전까지 줄곧 슈엘에만 있었고. 아젠이 기사가 되어 수도 바에룬에 다니기 시작했을 즈음에는 카쉬엔은 이미 북부 우릭에 있었다.

아젠에게 몇 번이고 혹시 무슨 일 있었냐고 물어보아도 그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대답뿐.

그 방문 이후, 레퀴에스 공작가에서 초대장이 왔었지만 거절했다. 거절의 답신을 보내면서 부담스러웠던 목걸이도 같이 돌려보냈다.

어린 시절의 인연을 잘라 내고. 추억을 도려내는 것 같아서 좀 가슴이 아렸지만, 잘라 낼 것은 잘라 내야 하는 법이니까.

이제 그는 더 이상 상처받고 숲에 숨어 있던 어린아이가 아니라 왕국에서 손꼽히는 고위 귀족이니, 자신 한 명이 인연을 끊어 내는 것은 별 상처가 되지 않기를 바랐다. 앞으로 그는 많은 유력자와 교류할 테고 무수한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갈 테니.

아버지와 독대에서 무슨 내용이 오갔는지 모르겠지만, 결코 얘기가 좋게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게다가 그 후 루테른가와 레퀴에스가의 사이는 정적으로 굳어졌으니, 아무리 개인적인 교류라고 하더라도 더 이상의 친분은 무리이기도 했다.

아를렌은 정치에서 비교적 자유로웠지만 여전히 루테른가의 일원이었고, 카쉬엔은 이제 상처받은 한 명의 어린아이가 아니라 큰 파벌을 이룬 적대적 정치 세력이었다.

‘그 후로 별다른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카쉬엔도 그렇게 받아들인 거겠지.’

아를렌이 한 번 더 한숨을 내쉬자, 맞은편에 수틀을 들고 앉아 있던 지느가 고개를 들었다.

“걱정거리가 있으세요, 아가씨?”

“아냐, 그냥…… 요새 아버지께서 많이 바쁘신 것 같아서.”

“그건 그래요. 주인님께서는 어제도 굉장히 늦게까지 못 주무시는 것 같더라고요. 지금 마차 안에서 좀 주무시고 계실는지…….”

근래, 아버지와 레트비안 오라버니는 바빴다. 원래 수도로 올라가기 전에는 영지의 일을 정돈하고 왕성에 가서 할 일들을 준비하느라 더 바쁘긴 하지만, 평년보다 더 바빠 보였다.

아젠도 종종 아버지와 오라버니와 시간을 보내며 무언가 상의하는 일이 많아졌다. 어쩌면 요즘은 아를렌과 보내는 시간보다 아버지와 보내는 시간이 더 길지도 모르겠다.

성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워낙 유력 가문인지라 원래도 많은 손님이 방문하는 슈엘이지만, 평년보다 좀 더 자주 손님이 오간다는 느낌이었다. 무언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아를렌은 손에 들고 있던 젝시온의 편지로 톡톡 입을 두드렸다.

왕세자 근위 기사단에 있는 젝시온으로부터의 편지도 늘어났다.

아를렌이 받아 보는 편지에는 젝시온다운 시답잖은 농담과 애정 가득한 잔소리가 한가득 채워져 있었지만, 아마 부모님과 레트 오라버니가 받아 보는 편지에는 다른 내용이 오가고 있으리라.

아를렌은 그동안 정치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었고, 가족들도 그녀에게 더러운 정치판의 이야기를 흘리는 것은 꺼렸지만, 대충 돌아가는 판세 정도는 그녀도 알았다.

‘아마도 왕세자 저하와 2왕자 저하 사이에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된 게지.’

아를렌이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해서 한숨을 내쉬는 아를렌을 지느가 걱정스럽게 쳐다보았지만,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창밖만 내다보자, 이내 다시 수틀로 시선을 내렸다.

창밖으로는, 평년보다 훨씬 많이 대동하고 있는 루테른 기사단의 모습이 보였다. 저 앞쪽에 남색 기사단복을 입고 말을 타고 가고 있는 아젠의 뒷모습이 살짝 보였다.

돌아보지 않으려나 하고 잠시 동안 지켜보았지만, 그는 앞만 보고 있었다.

아를렌은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사랑하는 아름다운 슈엘의 정경이 지나가고 있었다.

봄이 완연하여 나무마다 연두색 어린잎들이 가득하고, 아름다운 봄꽃들이 활짝 피어나 향긋한 꽃 내음이 바람을 타고 물씬 풍겨 왔다. 저 멀리 보이는 언덕에는 룬달 꽃이 보라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녀는 그저 그 정치 싸움에서 자신의 부모와 형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슈엘이 다치지 않기를 바랐다.

아름다운 슈엘. 이 아름다운 곳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 수 있다면, 설령 그곳에 자기 자신은 없더라도 괜찮았다. 그냥, 사람들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그래, 예전에 참 예쁜 딸이, 동생이 있어서 좋았었지, 혹은 참 좋은 아가씨가 계셨었지.하고…….

‘안녕, 나의 사랑하는 슈엘.’

아를렌은 매년 봄, 수도로 떠날 때마다 자신의 고향에 건네던 인사를 마음속으로 한 번 더 건네었다.

‘가을에 나뭇잎이 떨어지기 시작할 때 즈음, 다시 돌아와 이 곳을 볼 수 있기를…….’

.*. *. *. *. *. *.

수도 바에룬은 언제나처럼 활기찼다. 시즌을 맞이하여 수도로 돌아온 수많은 귀족들을 맞이한 길거리는 번잡하고 화려했다.

수도에 오랜만에 모인 귀족들 역시 겨울 동안 소원해졌던 친분을 다시 다지고 교류를 하기 위해 바빴다. 이곳저곳에서 연회와 티 파티, 사냥과 뱃놀이가 연일 이어졌다.

더군다나 요즈음은 왕세자와 2왕자 사이에 그동안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던 끈이 끊어지기 일보 직전의 살벌한 상황인지라, 서로 눈치를 보며 여기저기 모이기 바빴다.

왕궁에서는 어렵게 임신한 왕세자비가 불뚝 부른 배를 자랑스럽게 내밀고 연회와 티 파티를 연일 벌이는 한편, 2왕자의 마슈르 대공저에서는 대공비가 어린 자식들을 대동하고 사람들을 불렀다.

수도에 모인 기사들의 수도 평년보다 많이 늘어났는지, 어디를 돌아다니건 기사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아를렌은 그 모든 일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었다.

만약 그녀가 루테른 공녀로서 살아왔다면 그녀는 지금쯤 발이 물집으로 남아나지 않을 때까지 바쁘게 움직였어야 했을 것이다. 그 모든 연회에 참석하고. 모든 모임에 나가서, 왕세자의 파벌을 모으고 결집하는 데에 한몫을 보탰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몸 상태를 핑계로 대부분의 연회에서 빠진 그녀는, 남들과 달리 상당히 여유롭게 수도의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정말 다음 주 둘베르 공작저 연회에도 안 갈 거야?”

아를렌과 함께 방에서 뒹굴거리고 있던 페모나가 말했다. 어느덧 배부른 백작 부인이 되어 있는 그녀였지만, 아를렌의 방에서만큼은 둘 다 귀부인으로서의 체면을 내던지고 침대에서 같이 뒹굴면서 다과를 주워 먹고 있었다.

“응.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도 여독이 다 안 풀려서…….”

“그래, 너 살이 더 빠진 것 같아. 어쩌면 좋니. 내가 네 몫까지 다 먹고 있는 것 같다. 난 요새 너무 많이 먹어서 걱정인데.”

페모나가 자신의 손목을 다른 손으로 쥐어 보며 투덜거렸으나, 이내 그녀의 손은 다시금 몇 남지 않은 무화과 조각으로 향했다.

“아기가 입맛이 아주 좋아. 남들은 입덧하느라 못 먹는다던데 난 평소보다 두 배는 먹는 것 같아.”

“응, 말린 무화과 더 가져오라고 할까? 아니면 다른 것?”

“아니, 됐어. 이보다 더 먹으면 정말 감당 못 해. 가뜩이나 요새 연회가 많은걸.”

페모나는 아무리 많이 먹어 배가 불룩 나와도 다들 아기 배로 봐주는 것 하나는 좋다며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아를렌이 웃으며 친구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절대로 가질 수 없는, 절대로 욕심 낼 수 없는 많은 것들 중 하나였다.

“가을에 태어날 거라니, 그때엔 내가 없겠네.”

“내년 봄에 와서 보렴. 어차피 갓 태어난 아기보다는 좀 더 자란 아기가 더 예쁘대.”

“그러게. 네가 낳은 아기라면 너무너무 예쁠 거야.”

아를렌이 조용히 페모나의 배를 바라보며 미소 짓자, 페모나는 멋쩍어졌다. 아를렌의 건강 상태에 대해 자세하게 아는 몇 안 되는 지인으로서. 페모나는 자신이 괜한 말을 했구나 하는 생각에 민망해져서 화제를 돌렸다.

“그래도 국왕 전하 탄신 연회에는 갈 거지?”

“응, 거긴 가야지. 탄신 연회까지 안 갈수는 없지.”

“그래, 그럼 거기 가기 전까지 푹 쉬고 좀 잘 먹어서 살 좀 찌워 둬. 알잖아, 탄신 연회는 절차도 복잡하고 시간도 길고 사람도 많고, 암튼 엄청 번잡한 거! 나도 몸이 무거워서 잘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집에서 쉬고 싶은데 안 갈 수 없으니 말이지.”

페모나가 투덜거리면서 마지막 무화과 조각을 입에 집어넣었다.

“그럼 다음엔 태양홀에서 보겠네.”

“응,거기서 보자.”

“그래, 그때 보자. 살 좀 찌워 오고!”

페모나는 손바닥에 묻어 있는 끈적이는 과즙을 준비되어 있는 젖은 천에 닦아 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다 자라 어엿한 귀부인이 된 소꿉친구를 배웅하러 나서는 길에, 문가에서 아를렌은 오랜만에 낯익은 얼굴과 마주쳤다.

“아.”

아를렌은 거의 반사적으로 미소 지었다.

“아젠 경, 잘 다녀왔어요?”

어딜 다녀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이제 막 말에서 내리려던 참이었다.

“아를레네 아가씨. 엘람 백작 부인.”

그가 정중하게 기사식으로 인사하자, 페모나가 슬쩍 얼굴을 붉히며 인사를 받았다.

“그럼 전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주군께 보고드릴 일이 있어서요.”

“아…… 그래요.”

정중하게 인사하고 멀어져 가는 아젠의 뒷모습을 아를렌이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 아를렌의 귓가에 페모나가 속삭였다.

“와, 어쩜 저렇게 멋있어졌다니? 나날이 더 멋있어진다. 쫓아다니는 여자들 많겠는데. 그런데 요즘은 네 호위로 안 따라다녀?”

“아, 응.”

아를렌이 멋쩍어하며 대답하자, 페모나는 ‘흐응?’ 하며 슬쩍 한쪽 눈썹을 올렸다.

“조언이 필요하면 언제든 부르렴. 내가 너보다 그쪽은 선배잖니.”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뻔히 보이는 걸.”

페모나는 제법 배가 무거운 듯 등허리에 손을 짚으며 마차 위에 올라탔다.

“뭐,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만, 그래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밀어줄 테니까 말이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페모나의 말에 아를렌이 미간을 찌푸리자 페모나는 웃어 버렸다.

“그럼, 다음에 봐.”

“응, 몸조심하고, 다음에 봐.”

페모나가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어 인사하면서 멀어져 갔다.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다가, 이제 첫아이를 임신까지 한 그녀는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 *. *. *. *. *.

아젠은 신경이 매우 날카로워져 있었다.

아를렌이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을 돌아보았다.

페모나 엘람 백작 부인은, 아마도, ‘죽었던’ 사람이다.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왕세자 편에 섰던 가문 대부분이 몰락했고, 백작 이상 가문은 최소한 가주와 직계 가족들은 몰살당했으니까. 후계까지 임신하고 있는 백작 부인이 살아남았었을 리 없다. 살아남았다면 오히려 기억했으리라.

그녀의 소중한 사람들은 다 죽었다. ‘그’가 죽였다.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일거에 몰살당했고, 마지막 한 면은…….

‘그녀의 눈앞에서 난도질했지.’

그딴 짓을 저질러 놓고 그녀만 어떻게든 옆에 붙잡아 두면 모든 것이 다 괜찮아질 줄 알았었다.

‘미친 새끼.’

지독한 자기혐오로 꽉 쥔 주먹에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갔다.

‘그놈’은 지금 쥬헤드 2왕자의 편에 붙어 있다. 그래, 어린 시절부터 비롯된 쉐롬 왕세자와의 오래된 악연은 둘째 치더라도, 이미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쪽에 붙어 봐야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으니, 2왕자의 편에 붙어서 쿠데타를 돕는 게 빠르게 권력을 획득할 방법이었겠지.

오랫동안 임신하지 못해 후계를 영영 갖지 못할 줄 알았던 왕세자 부부가 드디어 아이를 가진 것을 2왕자가 못마땅해하는 것이야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왕세자와 한배를 타고 있는 루테른 공작가이다. 2왕자가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레퀴에스 공작과 손을 잡았다는 것은, 아젠이 뭐라 말을 보태지 않더라도 루테른 공작가에 이미 충분히 위험한 상황이었다.

왕세자파 역시, 다들 힘을 모으면서 그들을 경계하고, 쳐 낼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아젠은 거기에서, 2왕자파를 선공하여 쳐 내도록 증거를 모으고 상황을 유도하고 조직했다.

애초에, 2왕자파는 분명 이미 반역을 꾀하고 있다. 과거의 그가 그랬으니까. 분명 왕세자파를 단숨에 몰살시키고 2왕자를 왕위에 올릴 계획을 세우고 있다.

분명 일을 도모하고 있을 텐데.

문제는.

‘도대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일을 도모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제나 느끼지만, 전생의 기억은 매우 한정적이고 희미했다. 그녀와의 대화는 하나하나 생생하게 기억하는 한편, 누구나 기억할 만한 굵직한 중대사들은 오히려 기억이 매우 흐렸다.

마치, 일부러 알려 주지 않으려고 숨겨 놓기라도 한 것처럼…….

어느 날 무력을 동원해 뒤집어엎고 왕세자파와 더불어 루테른가 역시 몰살시켰던 건 확실하다.

그런데 그게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인가.

올해인가? 내년인가? 그보다 더 후인가?

올해라면 지금인가? 한 달 후? 두 달 후? 어쨌든 여름이었던 것은 확실한데.

어떻게 그렇게 큰 사건을 기억하지 못할 수가 있나.

기억하고 있다면 손쉽게 쳐 낼 수 있을 것인데, 최소한 대비를 해 둘 수 있을 터인데, 신의 장난인지 그런 쪽으로는 아무것도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불안했다.

‘아냐, 이미 충분히 대비했어.’

2왕자의 측근 중 한 명인 가우스 백작저에서 열리는 연회 때, 그들을 습격해 모두 반역죄로 체포할 준비가 차근차근 되어 가고 있다. 3일 후에 있는 국왕 탄신 기념 왕실 무도회가 지나가고, 그 일주일 후면 그날이다.

‘이제 고작 열흘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긴장을 다스렸다.

열흘. 열흘.

고작 열흘만 지나면 이 모든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다.

그놈을 쳐 내고 나면. 위세 높은 루테른 공작가의 사랑받는 고명딸을 위협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녀는 남은 생을 행복하게 웃으면서 슈엘에서 가족들에 둘러싸여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열흘 후, 가우스 백작저에서, 그놈을 죽인다.

죽일 수 있을까?

그가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죽여야 해.

자신이 죽이고 싶은 그놈이 실은 자기 자신이었다는 사실은 그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니, 아예 의식도 되지 않았다. 그저, 죽일 수 있는 능력이 되느냐의 문제였다.

일대일로 대등하게 붙을 생각은 없었다. 그놈이 얼마나 강했었는지, 지금 자신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자기 자신이야말로 잘 알고 있었으니까. 철없는 투지에 가능성 없는 일을 벌일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함정을 파고 여러 기사단과 병사들이 동시에 습격할 것이니 아마 괜찮으리라.

설령 그놈 하나를 놓치더라도, 2왕자파의 세력을 꺾고 반역으로 엮어 모든 권력을 뺐고 나면 감히 루테른 공작가를 노릴 수 있는 세력은 사라질 것이고. 그녀는 평생 공작가의 철통같은 보호 아래 안전할 것이다.

열흘.

그 후에는 이 불안감을 없앨 수 있다.

하지만, 전생에서 그자는 분명히 이겼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하루 만에 판세를 뒤집어엎고 왕세자와 여러 유수 가문들을 몰살시켰다.

그녀의 가문도. 그녀가 사랑하던 사람들도.

대비를 하고 있으면서도, 이미 벌어졌던 일이 다시 벌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그를 미치도록 불안하게 했다.

.*. *. *. *. *. *.

매년 여름에 개최되는 국왕 탄신 기념 연회는 수도에 있는 모든 고위 귀족들이 다 참여하는 무도회였다.

이날만은 파벌을 떠나 국왕의 신료로서 모두가 충심을 보이는 날이었기에.

탄신 연회에 초대받는 것은 일단 국왕으로부터 직접 인정을 받았다는 의미이기도 하기에, 초대받고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고, 초대받았는데 참가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왕실에서도 가장 크고 가장 화려한 연회를 준비하여 모든 귀족 앞에서 왕실의 위엄을 내세우려 하였기에, 정치적인 의미 없이 그저 연회의 규모만을 보더라도 모두가 참석하고 싶어 하는 1년 중 가장 큰 연회였다.

그래서 웬만한 연회에는 모두 불참하는 아를렌이라 하더라도 탄신 연회에는 매년 참가하였었으나,

“쉬셔야 합니다.”

닥터 헤르트는 딱 잘라 말했다.

“다행히 오늘 하룻밤만 푹 쉬시면 금방 회복될 것 같습니다만, 오늘 연회장은 못 가십니다. 비틀거리면서 연회장까지 모셔 갈 수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연회장에서 쓰러지실 겁니다.”

그래서 공작 부부와 레트비안은 사랑스러운 막내딸을 공작저에 놔두고 왕궁에 들어 가기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정말 엄마가 가도 되겠니? 엄마도 같이 남아 있을까?”

아름다운 드레스를 갖춰 입고 화려하게 성장을 한 공작 부인은, 차마 딸의 침대맡을 떠나지 못하고 망설였다.

“어머니, 예쁜 드레스가 구겨지겠어요.”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아를렌이 애써 웃어 보였지만, 공작 부인의 눈에는 더 안쓰러워 보일 뿐이었다.

“걱정 마시고 다녀오세요. 제가 어린애인가요. 지느도 있고, 모른 부인도 있는걸요.”

공작 부인은 안쓰러운 듯 아를렌의 얼굴을 쓰다듬은 후, 이마에 쪽 입을 맞춰 주었다.

“잘 쉬고 있으렴. 가능한 한 일찍 돌아올게.”

“걱정하지 마시고 충분히 즐기고 오세요. 전 어디 안 가고 여기에 있을게요.”

부인이 미소 짓고 침대맡에서 물러나자, 곧 공작과 소공작도 아를렌의 이마에 굿 나잇 키스를 남겼다.

“사랑스런 우리 공주님, 푹 쉬고 있거라. 금방 다녀오마.”

“젝시온에게 안부 전해 주세요. 놀지 못하고 근위대 근무 선다고 불만이 가득할 텐데.”

아를렌이 웃으며 말하자 레트비안이 투덜거렸다.

“그 녀석은 근무 서는 게 돕는 거야. 비번으로 연회에 참여했으면 또 무슨 사고를 쳤으려고. 아무튼 왕세자 저하 호위로 온다니까 안부는 전해 줄게. 우리 공주님은 푹 쉬고 있어.”

“응, 레트 오라버니도 잘 다녀와요.”

가족들이 떠난 침실은 금세 조용해졌다. 지느는 아를렌이 쉴 수 있도록 방 안의 조도를 낮추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모두 떠나고 어두워진 방에 홀로 누워 있자니 어쩐지 조금 쓸쓸해졌다. 어려서부터 앓아누운 적이 한두 번도 아닌데, 아직 많이 아픈 것이 아니라 쓸쓸해할 정신이 남아 있는가 보다, 그녀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가족들이 어디 멀리 떠난 것도 아니고 무도회에만 갔다가 돌아올 건데, 이런 날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수도에 온 후로 부모님도 오라버니도 다들 일정이 바빴었는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유난히 외로움을 타는지.

‘몸이 안 좋아서 약해졌나 보L 어린애도 아니고.’

한숨을 살짝 집어넣고 눈을 감고 있자니, 금방 정신이 가물가물해졌다.

어쩐지 어지러운 가운데 무언가 악몽이 찾아올 것 같아, 잠이 들기가 두려웠다.

똑똑.

누군가 방문을 조용히 두드렸다.

“……들어와요.”

잠시 정신을 차리느라 답이 늦었지만, 다행히 그사이에 가 버린 것은 아닌 듯, 끼익 문이 열렸다. 열린 문틈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와 아를렌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젠?”

빛 너머로, 여기에 있지 않을 줄 알았던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아를레네 아가씨.”

그가 문을 닫고 조용히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어떻게 여기에…… 부모님하고 같이 왕궁으로 간 거 아니었어?”

“아가씨께서 저택에 계실 거라고 하셔서요.”

“……이제 내 호위 아니잖아.”

어쩐지 말이 샐쭉하게 나와 버렸다. 아, 이렇게 유치하게 굴고 싶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지금 몸이 안 좋아서 유치해진 것이 맞나 보다. 아를렌은 스스로 민망해서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지막한 웃음소리와 함께 아젠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위이든 아니든, 저는 언제나 아가씨를 지키기 위해 살고 있는걸요.”

그리고 그가 그녀의 손 하나를 조심스럽게 쥐더니 쪽 하고 그 손에 입을 맞췄다.

“……넌 참, 어려서부터 낯간지러운 말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잘해.”

“이런 거 좋아하시는 걸 아니까요.”

아젠은 그녀의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레이디에게 서약을 바치는 기사라든가, 토너먼트에 우승하고 레이디에게 화관을 바치는 기사라든가…… 그런 거 좋아하시잖아요.”

아를렌은 답을 하지 못한 채, 방이 어두워서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달아올랐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넌 참…….”

“좋아하시는 것들을 다 해 드릴 수 있었어서 다행입니다.”

“…….”

어째서 이러는 걸까. 한동안 얼굴을 잘 보여 주지도 않더니, 가뜩이나 몸도 마음도 약해져 있을 때 들어와서는 왜 이렇게 또 흔들어 놓는 걸까.

아를렌은 물끄러미 어둠 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아젠의 보라색 눈을 바라보았다.

아, 또 그 눈이다. 언제고 사라져 버릴까 봐 두려워하는 듯한…… 불안해하는 눈.

“……아젠, 불안해?”

“……네. 사실 그렇네요.”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그는 아침부터 불안했다. 오늘따라 어째서인지 불안감에 울리는 심장 박동에 머리까지 울리는 듯했다. 무언가 중요한 걸 놓친 듯한 느낌.

그녀를, 놓칠 것 같은 느낌…….

그래서 그녀를 놓고 왕궁으로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녀의 옆에 붙어 있어야만 했다.

“왜?”

“……그러게요.”

그녀는, 자신의 오른손을 잡고 있는 아젠의 손 위에, 자신의 왼손을 올려서 포개고는 미소 지었다.

“알잖아. 나, 어디 안 가. 오늘 밤, 어디 안 가고 아침까지 여기에서 잘 자고 있을 거야. 걱정하지 마.”

그는 그녀의 손에 다시 한번 입 맞추면서 속삭였다.

“네,그럼요.”

그리고, 스스로에게 들려주듯, 나지막하게 되뇐다.

“그러실 거예요.”

그가 그녀의 손 위에 자신의 다른 손을 마저 얹어, 자신의 두 손 사이에 그녀의 손을 따뜻하게 가두었다.

“제가 지켜 드릴 테니 안심하고 주무세요.”

그에게 잡혀 있는 손이 따뜻하다. 아까 느꼈었던 외로움은 그 온기에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를렌은 닿아 있는 손에서 들어오는 따뜻함이 온몸으로 나른하게 퍼져 나가는 것을 느끼며, 포근하니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날 저녁, 화려하고 웅장했던 국왕 탄신 연회는 피의 무도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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