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그의 귀환
여러 계절이 흘러갔다.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었던 눈이 녹기 시작하며, 아슈네란의 수도 바에룬에도 마침내 봄이 찾아왔다.
여기저기 개울들마다 눈 녹은 물이 차올라 졸졸 흘러내렸고, 땅은 진흙이 되어 질척해졌다. 처마에 달린 고드름마다 물방울들이 줄줄줄 떨어져 내렸다. 앙상한 나뭇가지에는 잎눈들이 하나둘씩 올라왔다.
그리고 봄소식과 함께 수도에는 기쁜,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께름칙한 소식이 전해져 왔다.
왕실에서 철저히 버려진 채 자라다가, 열다섯 살에 정식 기사가 되고 토너먼트에서 준우승을 했으나, 그러자마자 왕실의 혈통으로서 모범을 보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북부 우릭 전선에 보내졌던 폐왕자 카쉬엔 경의 개선이었다.
북부의 우릭 전선은 아슈네란의 오래된 골칫덩이였다. 혹한의 날씨에 국경을 지키는 것도 쉽지 않은데, 북쪽 국경 너머에 위치한 우릭은 시시때때로 쳐들어왔다. 그들 역시 아슈네란을 아예 점령할 생각은 없었으나, 따뜻한 남쪽으로 국경선을 조금이라도 더 내리려는 처절한 몸부림은 수십 년을 이어져 왔다.
아슈네란과 우릭 사이의 국경선은 때로는 조금 더 북쪽으로 때로는 조금 더 남쪽으로 조금씩 움직였으나, 그렇다고 지도를 바꿔야 할 만큼 크게 바뀌지는 않은 채 수십 년간 소모적인 분쟁을 이어 왔다. 수없이 많은 병사와 기사들이 혹한의 날씨에 우릭의 전사들과 싸우다 죽거나, 혹은 얼어 죽었다.
그러던 것을, 죽으라고 보냈던 어린 기사가 승승장구하여 우릭의 왕을 패퇴시키고. 그 왕성을 포위하고, 그 자식들을 인질로 잡았으며, 결국 우릭 왕궁을 자신의 발밑에 복속시키고 6년 만에 돌아온 것이다.
그야말로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완벽한 개선이었다.
수십 년을 골치 썩이며 언제나 앓고 있을 것 같던 북부의 정벌 소식과, 그가 우릭으로부터 가지고 돌아온 수많은 보물들에, 아슈네란의 백성들은 모두 환호했다.
이 얼마나 드라마틱한 이야기인가! 열다섯 살에 검기를 내보이고 토너먼트에서 준우승까지 했지만 혈혈단신으로 북부 전선에 내몰리더니, 정복 장군이 되어 금의환향이라니!
그동안 그토록 터부시되고 경멸을 받던 그의 출생조차도, 이제는 저주받은 출생이 아니라 영웅의 비극적인 탄생으로 새롭게 채색되었다.
카쉬엔은 더 이상 북부로 쫓겨난 저주받은 폐왕자가 아니라 극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모두의 선망의 대상이 되어, 눈부신 금은보화와 툴룸 광물, 그리고 희귀한 가죽 모피와 짐승들을 가득 실은 수레들을 끌고, 우릭 유력자들의 아들딸들을 볼모로 데리고 돌아왔다.
국왕도 더 이상 그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원치 않게 참석했던 개선식에서, 웃음이 지어지지 않는 입가를 강제로 씰룩씰룩 움직이며, 그가 가장 혐오했던 그의 아들에게 공작위를 내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우릭 왕국은 소국이지만 툴룸 광산을 가지고 있는 나라였고, 그 한 나라가 카쉬엔의 밑에 복속되었다. 공작위라도 줘서 아슈네란의 밑에 종속시켜 두는 편이, 가만 놔두었다가 우릭의 왕으로 독립한다고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왕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았지만, 카쉬엔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신경 쓰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뿐이었고, 그 한 명은 저 왕이 아니었으니까.
이제 카쉬엔은 더 이상 성조차 이어받지 못한 평민 기사 카쉬엔 경이 아닌, 레퀴에스 공작이 되었다.
성도, 작위도, 막대한 부와 방대한 영지도 생겼다.
북부 전선에서부터 그를 믿고 따르며 목숨 바쳐 충성하는 가신들도 많이 거두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말은, 그도 이제 고위 귀족가에 방문하여 혼담을 넣을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 *. *. *. *. *.
남부에 위치한 슈엘에는 봄이 좀 더 이르게 찾아왔다.
슈엘의 여기저기에 노란색 분홍색 꽃들이 만발하게 피기 시작했고, 그의 아가씨가 사랑하는 언덕은 보라색으로 물들어 바람이 불 때마다 작은 파도처럼 출렁였다.
그러나 아젠의 눈에는, 화사한 연두색의 가벼운 봄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야말로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봄꽃이었다.
재작년에 18세 성인식을 치르고 이제 스무 살이 된 아를렌은 그야말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숙녀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숙녀는 열병에서 일어나서 몸이 회복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성내 상가로 내려와 돌아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어머. 아가씨, 이제 다 나으신 거예요?”
“응,이제 다 나았어. 괜찮아.”
그녀는 낯익은 가게 주인의 말에 환하게 웃으며 가볍게 대답하지만, 사실 정말 위험했었다. 그녀가 정신을 잃고 있던 며칠 동안, 주위 사람들은 이번에야말로 그녀를 보내 줘야 하는 줄 알고 뜬눈으로 밤낮을 지새웠었다.
“하지만 살이 많이 빠지셨어요. 원래도 마르셨는데 거기서 더 빠지셔서 어떡해요. 이번에 정말 많이 아프셨었나 봐요. 그러잖아도 저희 딸내미도 이번에 걸린 열병이 어찌나 독했던지, 이번 겨울은 좀 감기가 많이 독했던 것 같아요.”
네 딸 따위가 걸렸던 감기 따위가 어찌 감히 아가씨의 열병하고 비교가 된단 말인가, 싶었지만 아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뒤에 서 있었다.
“그러게, 좀 독했던 것같아.”
그렇게 가볍게 말하고 웃고 지나갈 상황이 아니었다. 정말로 심장이 철렁했으니까. 평소 그녀가 죽으면 따라 죽으면 되지 라고 생각해 온 아젠이었지만, 막상 그녀가 그렇게 수척해져서 괴로워하며 누워 있으면 심장을 쥐어짜 내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차라리 그가 아픈 게 훨씬 나을 것을…….
그녀는 언제나 행복하게 웃으며, 꽃밭을 뒹굴고, 사뿐사뿐 발을 놀려 우아하게 춤추고, 가족들에게 사랑받으며, 그렇게 평안하게 있어야 하는데.
지난 10년간 아젠은 아를렌의 곁에서 그녀의 밝은 미소를 마음껏 들이마실 수 있었다. 그것은 그를 숨 쉬게 하는 청량하고 부드러운 공기 같았다. 그녀가 미소 짓고 있지 않을 때엔 어떻게 해야 숨을 쉴 수 있는지 모르겠다.
같이 지내면 같이 지낼수록, 그는 더욱더 그녀에게 중독되었다. 이 이상 더 빠질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녀에 대한 의존은 점점 더 심해졌다. 원래도 그녀는 그의 세상이었지만, 지난 10년의 세월을 그녀의 곁에서 지내오면서 그에게 그녀는 살아 숨 쉬게 하는 공기이며 갈증을 해소하는 물과 같았다.
문득 전생의 그가 저질렀던 짓들이 떠오르려 하자 심장이 지끈거렸다. 그는 의식적으로 기억을 털어 냈다.
그 쓰레기 같은 기억들은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절망으로 가득 차 죽어 가던 그녀의 모습도, 스스로 자기 가슴에 칼을 꽂아 넣어야 할 만큼의 고통도, 그리고 썩어 문드러져 가던 그녀의 시체도, 이제 모두 존재하지 않는 일이어야 했다. 그의 기억에서도 사라졌으면 했다.
그러나 그 끔찍한 기억들은 요즘도 가끔씩 악몽으로 찾아오곤 했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자주…….
어쩌면 지금의 그녀가 그때의 그녀의 나이와 비슷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본질이 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다시 태어났으니 분명 다른 몸일 텐데도, 어쩐지 전생에 죽어 가던 그녀의 모습과 요즘 그녀의 모습은 유난히 더 닮아 보여서…….
“아젠 경?”
그가 인상을 찌푸리고 있기라도 했었는지, 아를렌이 의아한 듯 그를 돌아보며 불렀다. 아젠이 정식으로 기사 서임을 받은 후로 그녀는, 둘만 있는 곳에서는 여전히 친근하게 부를지언정,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는 경칭을 하곤 했다.
“무슨 일 있어요?”
“아닙니다.”
그녀의 얼굴을 보자 저절로 아젠의 얼굴이 풀렸다.
“너무 오래 밖에 있었나요? 돌아갈까요?”
아를렌이 그의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그가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이유를 오해한 모양이다. 나오기 전에 오늘은 절대 무리하시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던 것을 기억해 낸 것 같다.
“그러시겠습니까?”
아젠이 환하게 웃으며 마차에 오르는 아를렌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생긋 웃으며 익숙한 손을 잡고 마차에 오르자, 아젠도 금방 따라 올라 문을 닫았다.
“그래도 오늘은 정말로 무리하지 않았는데…….”
눈치를 보며 살짝 투덜거리는 아를렌이 귀여워서 아젠은 피식 웃음을 내보이고 말았다.
“아아제엔 경, 우리 조금만 놀다가 들어가면 안 될까요?”
아를렌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조르며 강아지 같은 눈을 초롱초롱 뜨고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이 이런 표정을 지으면 아젠이 넘어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음이 틀림없다.
“어디로요? 아직 언덕 위에 오르시기에는 바람이 차갑습니다.”
“그래도 잠깐만 쉬다 가면…… 응? 아젠 경~”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아젠이 아를렌의 열을 재 보기 위해 이마에 손을 짚자, 아를렌이 눈을 감았다.
……이 순간이 너무 좋았다. 거의 매일 있는 순간이지만, 수없이 반복된 행위이지만, 그래서 더더욱 그는 매일 이 순간을 기다렸다.
오로지 둘만이 있는 마차 안, 창문으로 햇빛이 따스하게 비쳐 들어오는데, 그녀의 새근새근한 숨소리만이 귀에 들려오고. 그녀의 체온과 살결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져 오는 순간. 그녀와 연결되어 있는 듯한…….
그녀가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조금씩 몸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손으로 전달되어 왔다.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감겨 있는 얇은 눈꺼풀 사이로 그녀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아낌없이 내려다보며.
이 시간을 그대로 액자에 옮겨 영원히 보관할 수 있었으면…….
그의 얼굴이 자기도 모르게 점점 내려와 아를렌의 얼굴과 닿을 듯이 가까워져 있었을 때,
그녀가 눈을 떴다.
숲처럼 청명한 초록색 눈이 온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녀의 숨이 아젠의 얼굴에 바로 느껴졌다.
그녀의 하얗던 얼굴이 점차 붉어지더니, 손바닥에 전해지던 온기가 점차 더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가 내뱉는 따뜻한 숨이 그의 입을 감쌌다. 조금만 잘못 움직이면 서로 닿을 것 같은 거리였다.
그녀는 뒤로 피하지도. 그를 밀어내지도 않았다. 그저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을 뿐.
아젠의 눈길이 그녀의 눈에서 매끈한 코로, 그리고 촉촉해 보이는 입술로 내려갔다. 건드리면 달콤한 과즙이 가득 터져 나올 것 같은 그 모습에 참기 힘든 충동이 밀려왔다.
이대로 실수인 척 조금만 움직이면…….
그녀의 시선이 그의 시선을 따라 살짝 밑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더니,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마를 짚은 손을 통해 그녀의 가느다란 떨림이 전해져 왔다.
그녀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그녀는…… 혹시 기다리는 걸까? 이 떨림은 불안해서일까 기대해서일까.
아주 오랜 시간처럼 느껴지는 몇 초가 그대로 흘러갔다.
하지만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그는 그녀에게 결코 불경한 손을 내밀 수 없다. 단지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제재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젠은 숨을 멈춘 채로 멍하니 햇빛을 찬란하게 받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뒤로 물러났다.
“열이…… 있으신 것 같아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아,아니, 아니, 으, 응, 그래.”
당황하여 다시 눈을 뜨고 허둥지둥 대답하는 아를렌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빨개져 있었다.
“그럼 전 이만……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마차를 두드려 주세요.”
“으, 응, 좀 이따 봐.”
인사를 하고 나와 마차의 문을 닫은 아젠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을 것이 분명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 *. *. *. *. *.
공작성으로 돌아온 아젠은 아를렌을 마차에서 에스코트하여 내려 준 후, 말과 마차를 마구간지기에게 넘기고 뒷정리를 한 후 안으로 들어왔다.
아를렌의 방으로 올라가려던 참에, 마침 마주친 집사가 그를 불렀다.
“아젠 경. 지금 아가씨 방으로 올라가는 겁니까?”
“네,그렇습니다만…….”
“그럼 잠깐 이 편지들 좀 아가씨께 전달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집사가 자기 손에 들려 있는 은쟁반 위로 시선을 옮겼다. 아를렌에게 온 편지들이었다.
“저는 각하께서 부르셔서요.”
“그러지요.”
아젠이 대답하자 집사의 얼굴이 환해지며 편지들이 놓여 있는 은쟁반을 아젠에게 넘겼다.
아젠은 아를렌의 방으로 올라가며 쟁반 위에 있는 편지 봉투에 적힌 이름들을 흘끗 보았다.
수도로 올라간 젝시온의 편지가 제일 먼저 보였다. 나머지의 대부분은 아를렌이 수도에서 지낼 때 교류하는 친구들의 이름이었고, 그녀가 후원하는 고아원이나 학교에서 온 편지들도 있었다. 그리고…….
요즈음 최고의 화제의 이름, 그러나 루테른가를 오가는 편지 봉투에서는 본 적이 없던 거슬리는 이름에 아젠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서신 교환을 하는 사이는 아니었던 것으로 아는데…….’
예전, 그의 아가씨는 작은 소녀였고 그자는 아직 기사조차 아니었던 어린 시절, 아를렌이 수도에 머물 때마다 그자와 교류했던 것은 알고 있다. 주로 그자가 다친 것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한 아를렌이 돌봐 주는 것이었지만.
원래 그의 아가씨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도와주는 성정이었기에, 그녀가 도와주고 다니는 사람들은 많았다. 아젠 자신도 그렇게 해서 그녀를 다시 만났던 것이었고.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이상할 정도로 유독 신경을 거슬리는 이름이었다.
어째서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수도에 다녀온 그녀가 수도에서 있었던 이런저런 일들을 이야기해 줄 때, 수많은 이름들 사이에서 오직 그 이름만이 귀에 걸렸다.
어쩌면 질투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은 아닌……무언가 좀 더…….
그자가 북부로 쫓겨나듯 임명받아 갔을 때, 아가씨는 상당히 분노하고 슬퍼했었지 .
북부 우릭 전선은 원래 가혹하기로 이름 높아서, 가문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 할 수 없이 가거나. 더 이상 선택지가 없어진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가거나, 그도 아니면 죄인들이 강제적으로 차출되어 가는 곳이었다.
그자는, 그 어미의 죄가 있다 한들 그자 본인은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으며, 심지어 15세밖에 안 된 미성년자였다. 설령 나라의 존폐가 달린 전쟁이 터지더라도 열다섯 살은 우선 후위에부터 배치될 나이였다.
그런 소년을 우릭 전선으로 아무 이유 없이 보내 버린 것은 사실 부당한 처사가 맞았으나…….
그러나, 국왕의 명이었고, 왕가의 성은 주지 않았으되 왕실 혈통으로서 국경을 수호하라는 명분까지 쥐어 보낸 것이었다. 게다가 그를 경멸하는 분위기는 이미 수도 귀족들 모두에게 퍼져 있었다. 아무도 그에 대한 불만이 없었다.
그의 작은 아가씨를 제외하고는.
아젠은 아를렌이 그 후로 한동안 상심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사건을 계기로 우릭 전선 쪽의 열악한 보급 환경과, 부당하게 차출되고 징병당해 끌려간 사람들의 처지에 관심을 가지더니, 주기적으로 이런저런 보급품들을 기부하기도 했다.
그 후로 한참을 잊고 지내던 이름이었는데, 어느 날 부터인가 다시 그 이름이 들려오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그는 연이은 승전보를 보내오며 화려한 이름을 달고 개선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아를렌이 안도한 표정을 지어 보인 것이 떠오른다.
하지만 다행히. 그 정도일 뿐이었다. 그의 아가씨는 딱히 따로 그자와 연락하려고 한다거나 찾아보려고 한다거나 하지는 않았었다.
그냥. 아는 사람의 불행에 슬퍼하고, 불의에 분노하고,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위해 구호를 한, 딱 그 정도.
그런데 그 이름이 어째서 지금 그의 손에 들린 은쟁반 위에 놓여 있는지.
그자가 그녀와 친분을 다시 이어 나가려고 하는 것인가. 그것만으로도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냥 단순히 남자 대 남자로서의 질투를 넘어서서, 무언가, 굉장히…….
섬뜩한…….
마치 형체를 볼 수 없는 늪 속의 괴물이 찐득찐득하게 다가오는 듯한…….
“어, 아젠?”
아젠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가씨.”
“어딜 가세요, 아젠 경?”
아를렌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침 아가씨께 편지를 전해 드리러 가는 길이었습니다만. 아가씨는 어디를 가시던 길인가요?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아니야. 그냥 정원에 산책이나 가 보려던 참이었는데, 편지가 왔다니 일단 편지부터 읽어야겠다.”
그녀가 푸스스 웃으며 아젠이 들고 있는 은쟁반에서 편지 봉투들을 집어 들었다.
“고마워요, 아젠 경.”
“영광입니다.”
그녀는 편지 봉투들을 들고 뒤돌아 다시 방으로 가볍게 걸어가기 시작했고, 아젠이 그 뒤를 따랐다.
“오, 젝시온 오라버니가 드디어 편지를 보냈네! 그리고 페모나…… 쥴리아…… 아, 고아원, 이건 한참 기다리던 건데! 그리고…….”
편지 봉투를 하나씩 하나씩 넘겨 가며 누구에게서 온 편지인가 확인하던 그녀가 문득 한 편지 봉투에서 멈췄다. 아젠은 물어보지 않아도 그게 누구의 편지인지 알 것 같았다. 한기가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어머.’ 하고 작은 탄성을 질렀다.
“카쉬엔이 나를 기억하고 있었나 봐.”
그녀의 입가에 작은 호선이 그려지며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이렇게 성공하고도 잊지 않아 주다니, 고맙네.”
잊어 줬으면 좋았을 텐데.
아젠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를렌이 도와준 수많은 사람들 중에 유독 저 이름만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드는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본능적으로 저 이름에서는 위험을 느꼈다. 피하고 싶었다.
그녀는 천천히 방으로 걸어 들어가 테이블 앞에 앉아, 페이퍼 나이프를 우아하게 쥐고 편지 봉투를 열었다. 편지 내용이 들여다보이는 거리는 아니었지만, 아젠은 얼핏 그 편지의 내용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은 볼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가 하던 찰나,
“음…… 조만간 방문하고 싶다는데.”
“…….”
어쩐지 목이 칼칼해져서 침을 한 번 삼켰다. 숨이 조금 답답하다.
“아버지께도 정식으로 방문 요청을 넣었다니 아버지께서 결정하시겠지만, 화제의 인물이 개선하고 처음 방문하는 곳이 우리 영지라니. 다들 놀라겠는 걸.”
그녀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저 오랜만에, 많이 달라졌을 옛 친구를 만날 거라는 생각에 살짝 설레는 것같아 보였다.
“아젠에게도 소개해 줄게. 아무래도 기사들끼리 통하는 게 있을 테니.”
그녀가 환하게 웃자, 아젠은 속마음이 어떻든 그저 같이 마주 웃음 지을 수밖에 없었다.
.*. *. *. *. *. *.
아를렌이 가족 식당으로 내려갔을 때에는 이미 다른 식구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언가 이야기하고 있던 식구들은 아를렌이 식당으로 들어서자 잠시 대화를 멈추고 웃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맞이했다.
“아를렌 왔구나.”
아를렌은 가벼운 걸음걸이로 종종종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셨어요.”
쪽, 아버지의 뺨에 비쥬를 하며 아를렌이 인사를 하고는, 이번에는 어머니의 뺨에도 쪽, 비쥬를 남겼다.
“무슨 얘기를 하고 계셨어요?”
어머니가 부드럽게 아를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아를렌이 미소로 화답하고는 이번엔 레트비안의 자리로 움직였다.
“레퀴에스 공작이 방문하고 싶다고 해서 그 얘기를 하고 있었어.”
“아…….”
쪽. 한 번 더 비쥬가 이어지고 남매간에 애정 어린 눈빛을 교환하고 나서야 아를렌은 자리에 앉았다.
아를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가족이었고, 매일 모든 식구들을 만나 인사할 수 있는 저녁 식사 시간은 그녀에게 매우 소중한 시간이었다.
비록 기사가 되어 왕실 근위대에 입단한 젝시온은 더 이상 식사 자리에 없지만, 그는 종종 편지를 보내와 자신의 존재를 알려 왔다.
“그러게요, 저도 오늘 서신을 받았어요. 한번 방문하고 싶다고.”
“아, 그러고 보니 너는 그 폐, 레퀴에스 공작하고 친분이 있었지.”
“네. 어렸을 때 일이지만요.”
모두가 조용히 식기를 들고 움직이기 시작하고, 곧 아를렌이 들어오기 전까지 하고 있다가 끊겼던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아무래도 기존 정치계에는 아무도 친분이 있는 사람이 없으니, 친분을 다지고 파벌을 파악하고 싶은 거겠죠. 어쨌든 우리 가문이 제법 세력이 있는 공작가니 친분을 만들고 싶은 게 아니겠습니까.”
아들의 말에 공작이 흐음…… 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쨌든 아직도 전하께서는 레퀴에스 공을 탐탁지 않아 하시는데…… 일단 이번 방문은 허용하겠지만 공작이 무슨 입장을 가지고 방문을 원하는 건지는 좀 알아봐야겠구나.”
“레퀴에스 공이 전하께 충성을 맹세하고 숙이고 들어오고 싶어서 방문하는 것일 수도 있고요. 아무래도 그러려면 우리 집안이 역시…….”
공작과 공작 부인, 소공작 세 사람이 정치적인 이야기를 이어 나가자, 아를렌은 끼어들지 않고 조용히 음식을 입으로 옮겼다.
어린 시절 보았던 소년은 그저 가엽고 안타까웠다. 힘을 가지고도 대항하지 못하고 두들겨 맞고, 박해받고, 멸시받고, 항상 상처투성이로 조용히 나무 밑에서 쉬고 있던 소년.
그러고도 아무 죄 없이, 그저 잘못 태어났다는 이유로 척박한 북쪽 땅으로 쫓겨나 사지를 전전했던 소년.
이제는 훌쩍 커서 완연히 건장한 성인이 되어, 개선장군으로 돌아왔겠지.
그 모습을 생각하면, 자신이 보태 준 것이 하나도 없는데도 왠지 대견하고 뿌듯하면서도, 앞으로는 정치적인 행보가 갈라질 테니 어린 시절처럼 친하게 지낼 수는 없겠구나 하는 아쉬움도 남았다.
이제 더 이상 힘없이 어린 소년 소녀가 아니라, 가문 대 가문이 될 테니까.
‘커 버린다는 것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네.’
아를렌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데 아를렌,”
갑자기 불려 온 자신의 이름에 퍼뜩 정신을 차린 아를렌이 고개를 들고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공작 부인은 이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잠시 고민하는 듯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둘베르 공작가의 둘째 영식, 알지?”
“아, 네. 마쉘 말씀이시죠.”
“그게 말이다. 혹시 너와 만나 볼 수 있겠냐고 의향을 물어보던데…….”
공작 부인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었다. 옆에서 공작이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불편한 기색을 내보였다.
“아……괜찮아요, 거절해 주세요.”
아를렌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밝은 목소리로 얘기하려고 하였다.
“전 평생 여기서 어머니 아버지랑 같이 살 건데요.”
“그래……."
공작 부인은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자신의 딸이 말하는 ‘평생’ 이라는 단어가 긴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식당에 있는 모두가 알았다.
공작이 옆에서 ‘거 괜한 소리를 왜 꺼내서…….’ 하며 살짝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부인이 발을 밟기라도 했는지 몸을 움찔하더니 조용해졌다.
“하지만 아를렌, 음, 만약에 네가 생각이 바뀐다면 말이다.”
공작 부인은 안타까운 눈빛을 숨기려 애쓰며 자신의 사랑스러운 딸을 바라보고 말했다.
“우리는 정말, 신분 같은 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단다. 네가 사랑하고, 너를 아껴 줄 사람이면 괜찮아.”
“그래그래, 신분쯤이야 우리가 얼마든지 만들어 줄 수 있지. 네가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데려오면 작은 작위 하나 쥐여 주고 영지 하나 내어주는 건 하나도 어렵지 않다.”
아까는 아내를 타박하던 공작이 이제는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말했다.
가뜩이나 병약하고 오래 살기 어려워, 마냥 보듬어 주고 싶은 딸이다. 고위 귀족과 혼사를 치러 떠나보낼 생각도, 정치나 사교계에 휘말리게 할 생각도 전혀 없는 공작이었다. 아를렌의 몸은 그런 일들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튼튼하지 않았으니까.
특히나, 작위를 이을 귀족과 혼인을 한다면 반드시 적통 후계를 생산해야 할 텐데, 아를렌의 몸이 임신과 출산을 절대 버텨 낼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주치의가 단언한 지 오래였기에.
하지만 딸을 공주님처럼 아껴 주고, 공작이 딸을 위해 내걸 온갖 제약 조건을 모두 지켜 줄 수 있는 데릴사위라면 굳이 마다할 필요가 없었다.
예를 들면, 후손을 절대 바라지 않을 거라는 조건이라든가.
그런 면에서, 상대의 신분 따위는 문제가 아닌 정도가 아니라, 고위 귀족이라면 오히려 곤란했다.
“영지라니, 그럼 아를렌을 지금 다른 곳으로 보내겠다는 말씀이세요?”
레트비안이 눈을 치켜뜨며 아버지에게 되묻자, 공작이 서둘러 변명했다.
“아니 그냥 영지에서는 수입만 받고, 사는 건 계속 여기서 살면 되지. 그래, 저기 크레인 쪽 영지를 주면 여름마다 거기 해변으로 놀러 가는 별장으로 쓰면 되겠구나. 아를렌이 어렸을 때 거기 바닷가를 좋아했었으니.”
“크레인은 해변은 아름답지만 수입이 별로 없어서 영지로는 좋지 않습니다. 거기는 별장만 아를렌에게 넘기고 영지로는 차라리 베리오 쪽이 관리하기도 편하고 수입이…….”
두 부자 사이의 대화가 점점 어느 영지를 주는 것이 더 좋을 것인가로 발전해 나가자, 아를렌이 웃으며 부자의 말을 끊었다.
“영지 관리라니, 생각만 해도 고생스러운걸요. 저는 그냥 여기에서 내내 어리광만 부리면서 살고 싶어요. 너무 오래 빌붙어 있는다고 구박하지 만 말아 주세요.”
사실 아를렌 자신조차도, 지난번 열병을 앓을 때 이번엔 정말 끝이로구나 하고 포기했었다. 여태까지 살아 있는 것만 해도 원래 기대했던 것보다 오래 살아남은 것이었다.
언제 끝날지 모를 목숨, 애꿎은 사람의 인생까지 휘말리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꾸 떠오르려고 하는 누군가의 얼굴을 씁쓸하게 지워 냈다. 이미 많이 엮여 버렸지만, 이보다 더 강한 끈으로 발목을 묶어 두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은 이미 자신이 너무나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줄 예정인, 크나큰 죄인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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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누워 있었다.
마치 눈 뜬 시체처럼, 아무 표정 없이. 생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퀭한 눈은 그저 허공을 향해 있었을 뿐,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듯했다.
그리고 그는 그런 그녀의 몸을 부둥켜안고 먹이를 물어뜯는 짐승처럼 탐하고 있었다.
그 시체같이 죽어 가고 있는 그 몸조차도 황홀하고 또 황홀하여 게걸스럽게 탐하고 있는 그 자신의 모습이 지독히도 혐오스럽고 역겨웠다. 하지만 그래도 마치 마약에 중독된 병자처럼 멈추지 못했다.
그러던 그의 손에 무언가 축축한 것이 왈칵 묻어났다.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 보니 그녀의 몸은 시뻘건 핏물로 온통 뒤덮여 있었다.
방금 전까지 향긋한 체향이 가득하던 그녀의 가슴에는 단검이 깊게 찔려 있고, 비릿한 피가 꿀렁꿀렁 쏟아져 나와 쉼 없이 흐르기 시작했다.
안 돼. 안 돼. 안 돼一!
그는 미친놈처럼 흘러나오는 피를 손으로 받아서 다시 그녀의 가슴으로 밀어 넣으려고 했다.
어느 사이엔가 그녀의 몸이 무너져 내리며 악취와 함께 짓물러지기 시작했다. 그 하얗던 몸은 썩어 가고, 검붉은 피와 시꺼먼 시체 썩는 물이 뒤섞인 웅덩이가 점점 커져 갔다.
미친 듯이 피를 다시 가슴의 상처 속으로 밀어 넣으려 애쓰고 있는데, 문득 뒤에서 소름 끼치는 낮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핏줄이 터진 보라색 눈이 분노와 증오로 희번득하더니, 기괴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주한다, 네놈을. 내 영혼을 바쳐 네놈을 저주할 테다.」
“헉!”
아젠은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범벅이었다.
“헉…… 헉…….”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주위를 둘러보며, 이곳이 슈엘의 공작성이고, 기사 아젠의 방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데에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래. 이곳이 현실이다.
악몽은 악몽일 뿐, 그건 이제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은 일이야.
그건…….
제기랄, 제발 잊어버려. 이제 그 일은 없던 일이고,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니까.
아젠은 머리를 거세게 흔들어 털어 냈다. 마치 그렇게 하면 그 모든 기억이 털려 나갈 것처럼.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니까 괜찮아.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니까.
그는 몇 번이나 속으로 되뇌고 또 되뇌고 나서야 간신히 침대에서 일어섰다.
문득 거울에 비친 자신의 보라색 눈을 바라보자, 꿈에서 보았던 그 섬뜩한 눈빛이 떠올랐다.
「저주한다, 네놈을…….J
쨍그랑一!
주먹을 맞은 거울이 핏방울을 머금은 채 와장창 깨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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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엘은 유명한 손님의 예정된 방문으로 인해 시끌벅적했다.
루테른가의 입지가 입지인 만큼, 그간 고위 귀족이 방문한 적은 많았고, 심지어 왕족의 방문을 받은 적도 종종 있었다. 그래서 방문할 손님의 신분이 공작이라는 것은 사실 별다른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극적인 소문의 중심이 된 화제의 인물의 방문은 또 다른 방향에서 사용인들을 설레게 했다. 게다가, 개선한 후로 처음으로 방문하기로 선택한 곳이 슈엘 아니던가.
그리하여 루테른 공작성은 손님맞이에 한 치의 부족함이 없도록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였다.
공작 일가를 비롯. 기사와 사용인들도 성문 앞에 서서 손님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젠 경, 괜찮아요?”
아침부터 안색이 그닥 좋아 보이지 않는 아젠을 흘끗 뒤돌아보며 아를렌이 걱정했다.
“괜찮습니다.”
“정말로 안 좋아 보이는데…… 들어가서 쉬어도 괜찮아요.”
“아닙니다.”
“그럼 나중에라도 힘든 것 같으면 들어가서 쉬는 거예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를렌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몇 번 더 아젠을 돌아보았지만, 이내 포기하고 다시 앞을 보았다.
멀리 작게 보이는 기사의 무리가 점점 더 크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젠은 지끈거리는 두통을 참으며 아를렌의 뒤쪽에 약간 떨어져서 서 있었다.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과거에도 악몽은 종종 꿔 왔다. 그것이 잠들어 있는 동안 꾸는 악몽이든, 아니면 깨어 있는 동안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이든. 과거의 자신이 저질렀던 끔찍한 죄과는 종종 그를 괴롭혀 왔다.
그래도, 아를렌의 옆에서 10년을 지내면서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바로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며, 해사하게 웃으며, 아름답게 살아 있었으니까. 바로 자신의 앞에.
그래서 악몽은 그저 어쩌다 가끔 떠오르더라도 털어 내고 앞을 보면 되는, 과거의 잔상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요즘 들어 악몽의 빈도도 높아지고, 그 진득한 끔찍함도 더 선명해졌다.
거울을 볼 때마다 자신의 보라색 눈이 악몽 속의 보라색 눈과 겹쳐져 거울도 보지 않게 된 지가 며칠이었다.
그러고 보면…… 전생의 그 기사 놈도 보라색 눈이었던 건가.
아니면 그냥 악몽 속에서 나 자신의 눈을 투영하여 그렇게 착각한 것인가.
전생의 그 기사 놈의 눈 색 따위, 기억나지 않는다. 그딴 놈은 제대로 쳐다본 적도 없었거니와 어차피 봤었다고 해도 색을 느끼지는 못했었을 것이다.
그녀의 싱그러운 초록색 눈을 제외하고 다른 놈들의 눈 색 따위 신경 써 본 적 없었으니까,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어찌 되었든, 지금 그는 아가씨의 호위 기사로서 몸 상태를 잘 관리해야 했다. 특히나 압도적인 무위를 가지고 있는, 신경에 매우 거슬리는 강력한 손님이 찾아오는 이때엔 더더욱.
그래서 아젠은 아무렇지 않은 척 당당하게 서 있었다. 안색까지 연기할 수 있으면 더 좋으련만.
그러나, 아무리 아무렇지 않게 서 있으려고 해도,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저 기사의 무리가 점차 더 크게 보이기 시작할수록, 심장이 점점 더 크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이제 손님들은 제법 가까워져 제일 앞에 있는 기사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무심한 듯 당당한 풍채에 멀리 있어도 위압감이 느껴졌다. 바람을 받아 크게 펄럭이는 검은 망토가 눈에 들어왔다. 짧게 깎은 흑발이, 거대한 흑마가 눈에 들어왔다.
저자가 아마 그 카쉬엔이 라는 자이리라.
속이 울렁거리고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기시감.
아젠의 눈이 급히 아를렌을 찾았다. 연한 초록색 모직 드레스를 입고 손님을 바라보고 있는 아를렌의 뒷모습이 보였다.
초록색 드레스를 입고 저 멀리 성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환상처럼 아름답던, 그러나 실재하던 여자.
그리고 성 바깥쪽에서부터 다가가며 그녀의 모습에 전율하던 남자…….
그걸 어디에서 본 거지?
언제적 기억이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젠이 다시 시선을 다가오는 손님들에게 옮겼다.
가장 앞에서 말을 타고 있는 흑발의 기사는 이제 많이 가까워져, 그 얼굴이 선명히 보였다.
갈망으로 가득 찬 그 검은 눈은, 그의 아가씨를 삼켜 버릴 듯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탐욕스러운 검은 눈이 자신과 무심결에 살짝 마주쳤을 때,
쨍?!
등골을 타고 소름 끼치는 냉기가 확 올라와 머리를 덮치더니, 이명이 심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누군가의 비명과 고함 소리가 아우성쳤다.
안돼. 안 돼. 안 돼一!
비명 소리로 머리가 가득 차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지독하게 어지러웠다. 눈앞이 캄캄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속이 뒤집어지며 이유 없는 토기가 밀려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젠이 반사적으로 손으로 주위를 허우적거리며 뒤로 빠졌다.
시야가 계속해서 점멸했다. 흐리게 보였다 안 보였다를 반복했다.
어렴풋이, 놀라서 동그랗게 커진 채 자신을 쳐다보는 그녀의 맑은 눈이 보였다가, 순식간에 회색빛으로 말라 죽어 가던 그녀의 눈과 겹쳐졌다.
안돼……안돼…….
구토가 올라왔다.
아젠은 비틀거리며 뒤쪽으로 빠졌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겠지만 정신없이 허우적거리며 뒤편으로 도망쳤다.
도망쳤다. 도망치고 싶었다.
아니야, 아니야!
땅을 짚고 엎어져 웩웩 모든 것을 토해 내고 또 토해 냈다.
지독하게 역겹고 혐오스러운, 끔찍한, 그 무언가를, 마치 토해서 비워 내면 없어질 것마냥 한없이 토해 냈다. 먹은 것을 모두 토해 낸 빈 위장에서 초록색 위액까지 쏟아져 나왔다.
넋을 놓은 그가 자신의 위장에서 쏟아져 나온 토사물과 위액들을 멍하니 보고 있으니, 그것은 끈적끈적하고 비린내 가득한 검붉은 피로 바뀌었다가, 썩어 가던 그녀의 시체에서 흘러나오던 악취 가득한 검은 물들로 바뀌었다.
“하…… 하, 하, 하…….”
그의 몸이 자신이 쏟아 놓은 토사물 위로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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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엘 외성의 정문으로부터 말을 탄 무리가 터벅터벅 들어오기 시작하자, 슈엘 사람들은 모두 몰려나와 소문의 개선장군을 구경했다.
거대한 흑마 위에 훤칠한 20대 초반의 젊은 장군이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단단한 몸을 감싸고 있는 검은 제복에는 구김 하나 없었다. 아직은 겨울의 냉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서늘한 바람에 검은 망토가 나부꼈다.
짧은 흑발 아래 조각 같은 얼굴을 장식하고 있는 검은 눈은 아무 표정 없이 냉랭한 듯했지만, 멀리 보이는 루테른 성을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뒤를 따르는 기사들 역시 전장에서 오래 살아남은 사람들 특유의 피 냄새가 스며 나오는 듯했다. 얼굴에 흉터가 있는 이들이 절반이 넘었다. 몇몇은 같이 가는 동료 기사들과 유쾌하게 떠드는 가벼운 분위기의 이들도 있었지만, 감히 다가가기 힘든 위압감이 있었다.
뒤에는 화려한 짐마차들이 따르고 있었다. 구경 나온 사람들은 과연 저 짐마차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쑥덕였다.
그들은 대로를 따라 그대로 내성 문까지 직진하였다. 공작성 문 앞에는 손님맞이를 위해 공작 일가를 비롯 사용인들 상당수가 나와 도열해 있었다.
카쉬엔의 눈이 한 명에게 고정되었다. 지난 6년 동안 지독히 갈망해 오던 한 사람.
싱그러운 숲을 보는 듯한 맑은 녹안, 빛을 자아 실로 만들어 낸 듯한 금발, 언제나 그린 듯이 얼굴에 자리해 있는 부드러운 미소.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았던 앳된 소녀의 모습과는 같은 듯하면서도 다른, 완연한 여인의 모습.
카쉬엔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꿀꺽, 목울대가 움직였다.
6년 동안 그토록 그리워하고 그리워하며 머릿속으로 상상만 하던 사람이 정말로 눈앞에 서 있었다. 환상도 상상도 아닌, 진짜 만질 수 있는 실물이.
북부에 있었던 지난 시간 동안, 어쩌면 자신이 환상을 그리워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막상 만나 보면 그때의 일들은 모두 자신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냥 그녀도 수많은 평범하고 지루한 회색 사람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아니었다.
그녀는 6년 전보다 더욱더 눈부시고 아름다웠다. 물씬 여인의 내음을 풍기며 화사하게 웃고 있는 그녀는, 주위의 그 어떤 사람도 사물도 보이지 않게 흐려 버리고 오로지 그녀 혼자만이 빛나는 듯했다.
저것이 바로, 그토록 내가 바라오던 것…….
고삐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당장 달려가서 힘껏 끌어안고 품에 넣었으면. 이대로 곧장 가져왔으면.
하지만 참아야 했다.
이미 오랜 시간을 참아 왔다. 조금 더 참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작위를 받아 귀족이 된 것은 정식으로 청혼하고 우아하게 손에 넣기 위해서였다. 전장의 방식이나 그의 방식이 아닌, 그녀에게 어울리는 방식으로.
지금 잠깐 참으면 앞으로 평생 손안에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이제 와서 갑자기 망쳐 버리는 바보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오로지 그녀만이 보이고 있던 카쉬엔의 눈에, 어떤 한 기사가 비틀거리며 자리를 빠져나가는 모습 따위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그녀가 잠시 당황하여 주위의 하녀에게 뭐라고 지시를 내리는 것을 보며, 그녀의 옆모습까지 감상했을 뿐.
그저, 그녀가 정말로 저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이 중요했을 뿐.
마침내 말이 문 앞까지 당도했을 때, 그는 망토를 펄럭이며 말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다른 기사들도 일제히 말에서 내렸다.
“슈엘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레퀴에스 공.”
“환대해 감사합니다, 루테른 공.”
이전에 보았을 때에는 국왕에게 신임받는 고위 귀족과 왕실에서 경멸받고 박해받던 폐왕자의 관계로, 절대 나란히 설 수도 없는 관계였던 두 사람은, 마치 원래부터 대등한 관계였던 양 아무 어색함 없이 인사를 주고받았다.
루테른 공작과 인사를 주고받은 카쉬엔은, 예의를 갖추어 루테른 공작 부인의 손에 살짝 입 맞추어 인사했다. 그리고 레트비안 소공작과 인사한 후, 마침내 그녀의 앞에 섰다.
6년 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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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요, 각하.”
호칭이 바뀌었다.
그래도 해사하게 웃는 그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그녀가 하얀 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이 손을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그는 자신의 희열을 감추며 덤덤한 듯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찌릿하게 가슴이 울렸다. 아, 이 실재하는 촉감. 환상으로는 절대 느낄 수 없었던…….
그의 입술이 그녀의 손가락에 닿았다. 입술에 그녀의 보드랍고 따스한 피부가 생생하게 눌렸다.
“영광입니다.”
……놓고 싶지 않다.
하지만 괜찮다. 지금 놓아 줘도, 곧 데려올 테니까.
이제 곧 내 것이니까.
그는 아쉬움을 감추며 손을 놓았다. 이제 조금 있으면 저 손을 계속 잡고 있게 될 테니까.
“그럼 우선 들어가시죠. 일단 여독을 풀어야 할 테니 방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루테른 공작이 안으로 손님들을 이끌자, 카쉬엔도 아를렌에게서 시선을 떼고 루테른 공작에게로 향했다.
“일단 짐을 풀고 휴식을 취하신 후, 성내를 좀 안내해 드리도록 하지요. 레트비안이…….”
“아,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성 안내는 영애께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아를렌이요?”
루테른 공작이 일순 경계하며 멈춰 서자, 카쉬엔이 수려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저에게는 모든 것이 낯선지라…… 영애와는 어릴 적 친분이 있어 조금 더 편할 듯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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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들이 각자의 처소에 짐을 푸는 동안. 아를렌은 일단 방으로 돌아와서 지느를 기다렸다. 잠시 기다리자 지느가 방으로 종종 걸어 들어왔다.
“아젠은 어땠어?”
아침부터 안색이 좋지 않더니, 손님을 기다리다 말고 비틀거리며 사라진 아젠이 걱정이라, 지느더러 얼른 쫓아가 보라고 해 놓았던 참이다.
“그게, 몸이 확실히 좋지 않았던 것 같더라고요. 닥터 헤르트를 불러서 진찰했어요.”
지느는 자신이 본 광경은 숨기고 대답했다. 구토하고 기절해 있더라는 말을 굳이 전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면 아가씨는 분명 당장 기사 숙소를 향해 뛰쳐나가려 할 것이 뻔했으니까.
“그렇게 안 좋았어? 닥터 헤르트는 뭐래?”
“그냥 요새 너무 무리한 것 같다고…… 하지만 따로 병이 있거나 아픈 건 아니래요. 잘 쉬면 금방 나을 거랬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건 사실이었다. 육체적인 무리에 정신적인 충격까지 겹쳐서 그런 거라는 의사의 말에 도대체 이 평화로운 영지에서 무슨 충격을 받았던 것인지 의아하긴 했지만, 어쨌든 무리해서 그런 거라는 말은 사실이었으니까.
지느의 축소된 대답에 아를렌이 잠시 안도했지만, 이내 의문을 가졌다.
“……무리를 했다고?”
“그러게요. 왜 갑자기 무리를 했을까요? 근래에 별다른 일도 없었던 것 같은데…….”
어쩌다가 무엇을 무리했다는 걸까.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에도 안색이 안 좋았지만. 그전에도 요 며칠간 안색이 그리 좋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물어봐도 항상 괜찮다고만 해서 괜찮은 건가 싶었던 자신이 너무 무심했던 걸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좀 더 깊이 물어봤어야 했는데.
아를렌이 움직이려는 참에, 지느가 말을 이었다.
“지금은 자고 있어요. 닥터 헤르트가 자게 놔두라고 했어요. 나중에 깨어났다고 하면 알려 드릴게요. 일단 지금은 손님께 성을 안내해 드리실 거라면서요.”
“으응.”
지느가 두툼한 숄을 하나 가져와 아를렌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날씨가 좋긴 하지만 오래 돌아다니기엔 아직 쌀쌀하니까요. 무리하지 마시고 힘들다 싶으면 중간에라도 돌아오세요. 소공 작님께 부탁드려도 되니까요.”
“응,그럴게. 고마워, 지느.”
아를렌이 환하게 웃으며 지느를 돌아보자, 지느는 가슴이 뭉클했다. 우리 아가씨는 몸이 안 좋으신데도 어쩜 이렇게 상냥하고 예쁘실까. 분명 레퀴에스 공작님도 우리 아가씨에게 홀딱 반하실 것이 틀림없다니까.
비록 지느는 뒤에서 몰래 아젠을 응원하고 있기는 하지만, 자고로 레이디란 가능한 한 많은 귀공자의 구애를 받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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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을 두드리는 작은 노크 소리에 문을 연 카쉬엔은, 문 앞에 서 있는 아를렌을 보고 다시 한번 숨을 삼켰다.
그의 눈길이 마치 그녀라는 기적을 감상하듯 그녀의 눈에 한동안 머물러 있다가, 매끈한 코와 촉촉한 입술, 하얀 목덜미로 천천히 움직이고는, 다시 마지막으로 초록색 눈으로 돌아왔다.
언제나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하던 저 맑은 초록색 눈.
그녀가, 환상이 아닌 진짜 그녀가, 자신을 데리러 왔다는 사실에 가슴이 떨렸다.
“……아를렌…… 레이디 루테른.”
메일 것 같은 목을 간신히 붙잡아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가, 뒤늦게 예의를 갖췄다.
“레퀴에스 공작님, 방은 괜찮으신가요?”
그녀가 화사하게 웃으면서 묻자, 그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훌륭합니다.”
“다행이네요. 성을 안내해 드릴까 하고 왔는데, 지금 괜찮으실까요?”
그가 대답 대신 에스코트를 위해 팔을 내밀자, 아를렌의 부드러운 손길이 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의 팔뚝에 와 닿았다. 마치 불이 닿은 듯 뜨겁게 느껴졌다.
“그럼 일단 홀부터 안내해 드릴게요, 공작님. 오늘 저녁에 그곳에서 만찬이 있으니까요.”
카쉬엔은 그녀의 작은 손을 거세게 움켜쥐고 싶은 욕망을 내리누르며, 발걸음을 떼었다.
곁에서 걸어가는 그녀의 정수리에서 달콤한 향이 느껴졌다. 저 금사 같은 머리에 코를 대고 깊숙이 숨을 들이마시면 마치 미주를 들이켠 듯 황홀하리라. 하지만 아직은 거기까지는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직은.
손을 통해, 그녀가 바로 옆에 이어져 있었다. 손이 닿은 채로 걷는다는 것은 그냥 피부가 접촉한다는 것과 달랐다. 그녀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싶어 하는지, 어떤 속도로 가고 싶어 하는지, 손을 통해 그녀의 생각이 전해져 왔다.
그녀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포만감이 들었다.
“이름을…….”
“네?”
“이름을. 예전처럼 카쉬엔이라고 불러 주면 좋겠는데. 말도 편하게 하고. 예전처럼.”
아를렌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카쉬엔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때는 그냥 우리 둘 다 어린아이들이었지만, 이제는 공작 각하가 되셨고, 성인이니까요.”
아를렌의 얼굴에 살짝 당황이 비쳐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로 카쉬엔이라고 부르는 음향은 아주 달콤했었기에. 아무에게도 불리지 않았었던 저주받은 이름이 그녀의 입을 통해 나오면 무엇보다 아름다운 노래로 변하였었기에.
6년 전의 그녀는 확실히 상처받은 자에게 약했었지.
“전장에 있는 동안, 내내 그리워했거든. 평화롭던 그때 그 시절을…….”
지난 6년 동안 끝없이 갈구하고 열망했던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다만 그리워했던 것이 평화가 아니라 오로지 그녀였을 뿐.
“아…….”
“알겠지만 그곳은, 그닥 견디기 쉬운 곳은 아니었으니까.”
사람을 베어 버리는 것은 그 무엇보다 쉬웠지만, 네가 없었기에.
그녀가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보였다.
“그럼, 둘이 있을때만…….”
“그걸로 충분해.”
아를렌이 살짝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표정을 풀고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카쉬엔,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야. 환영해.”
순간 그의 가슴이 아릿하게 술렁였다.
그래, 이것이다. 그의 심장을 아릿하게 하는, 세상에 유일한 단 하나. 이 지긋지긋한 세상에서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빛.
이것을 가지기 위해 기사가 되었고, 이것을 가지기 위해 전장을 누볐다. 이것을 가지기 위해서라면. 그는 무엇이든 할 생각이었다. 무엇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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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젠이 정신을 차린 것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쓰러져 있는 동안에도 여전히 악몽에 시달렸던 것 같지만,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았다. 그러나 차라리 기억나지 않는 게 나았다. 어차피 무슨 내용이었을지는 뻔했으니까 .
여전히 머리가 어지러웠고 이명이 남아 있었지만, 쓰러지기 전보다는 훨씬 나았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야, 자신이 방에 누워 있음을 깨달았다. 아마 그때 쓰러진 후 누군가 자신을 발견하여 옮겨 놓았으리라.
협탁 위에 물과 약으로 추정되는 것이 놓여 있고 자신의 옷차림도 바뀌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한차례의 구완이 이미 지나간 모양이었다.
침대 건너편에 놓여 있던 거울이 보인다. 이미 유리는 형편없이 깨져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그저 거미줄 같은 조각들만 보였다.
일단 물을 마시고, 약을 먹었다. 무슨 약인지는 몰라도 먹으라고 갖다 놓은 것이겠지.
정신을 차려야 했다. 자신은 그녀를 지키는 호위 기사였고, 그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일단 정신을 차리고 강해져 야 했으니까.
아까처럼 형편없이 쓰러져 버려서는 안 된다. 특히, 그자들이 성에 들어와 있을 때엔…….
도대체 왜 쓰러진 건지,
그 남자의 눈을 보는 순간, 갑자기 몰려온 비명과 두통은 무엇인지.
왜 이렇게 본능적으로 그자가 꺼려지는지.
왜, 이렇게,
불길한지.
무심코 시선을 아래로 내린 아젠의 발밑에 끈적끈적한 검붉은 피 웅덩이가 내려다보였다.
‘정신차려, 이건 카펫일뿐이야.’
심호흡을 몇 번 하고 정신을 가다듬은 아젠이 모습을 정돈하고 다시 방 바깥으로 나가려던 참에, 낯익은 하녀 한 명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머, 아젠 경, 일어나셨군요. 다행이에요.”
“리나 양.”
“닥터 헤르트가 오늘은 푹 쉬는 게 좋을 거라고 했어요. 협탁 위에 약 놔뒀었는데, 약은 드셨어요?”
“먹었습니다.”
“그럼 오늘은 좀 쉬세요. 아가씨는 어차피 오늘 외출 안 하실 것 같으니까요. 소공작님께서도 오늘 하루는 임무에서 빠지고 푹 쉬고, 필요하면 내일하고 모레도 쉬어도 된다고 하셨어요.”
“……아가씨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음, 손님께 성을 안내해 드린다고 들었는데, 어쩌면 온실에 계실 거예요. 아까 지느가 아가씨께서 오래 돌아다니시기 힘드시니 온실에 티 테이블을 마련해 두라고 지시하는 걸 들었거든요. 하지만 오늘은 호위할 필요 없으니 쉬라고 하셨…….”
그 말에 묵묵히 일어서서 방을 나서려는 아젠을 보고 하녀가 재빠르게 붙잡았다.
“앗,저기,”
아젠이 하녀의 얼굴을 바라보자 하녀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지느가, 아가씨께는 아젠 경이 쓰러졌었다는 얘기를 전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당연히 그럴 생각입니다.”
아젠이 예의 바르게 웃어 보이자 하녀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옷자락을 놓았다.
아젠은 온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직 몸 상태가 좋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지금 당장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아니, 보아야만 했다.
그녀가 안전하고 행복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자를 볼 때마다 해일처럼 덮쳐 오는 불안감의 정체를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이윽고 온실에 다가갔을 때, 온실 안에 들어가지 않고도 아젠은 유리 벽을 통해 안에서 평화롭게 티타임을 즐기고 있는 그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를렌이 남자 한 명과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있고, 그 근처에 지느와 낯선 사내 한 명이 서 있었다.
그녀는 괜찮아 보였다. 표정은 온화했고, 별다른 문제는 없어 보였다.
평안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마음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다.
그래. 그녀는 괜찮다. 그 모든 것은 이미 사라져 버린 과거의 일이고, 그저 그의 악몽이었을 뿐이다.
앞에 마주 앉아 등을 보이고 있는 흑발의 사내는 아마 레퀴에스 공작, 그자이리라.
다행히 이번에는, 눈을 마주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아까의 일이 이상했던 것인지, 그자의 등을 본다고 해서 갑자기 쨍하고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 몰려오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젠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그는 무언가 점점 더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저 모습이 낯익은지.
왜 다른 시각에서 이런 모습을 보았던 것 같은지.
이 원치 않는 기시감은 무엇인지.
어째서 이다음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 알 것 같은지.
아를렌이 찻잔을 들어 입에 살짝 대었다가 내린 후, 뭐라고 이야기한다.
레퀴에스 공작이 무언가 이야기했는지, 아를렌이 미소 지어 화답하고 뭐라고 대답하고는, 살짝 손을 내저어 거절한다.
대화는 계속 이어진다. 공작은 계속해서 설득하고, 그녀는 난처해하면서 계속해서 거절한다.
그러나 공작은 그녀의 거절을 개의치 않고 옆에 있던 보좌관에게 손을 내밀고, 보좌관은 그 손에 고급스러운 작은 상자를 하나 건네준다.
아젠은 그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아니, 알 리가 없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알고 있을 리가 없다.
저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초록색 목걸이는 아닐 것이다.
유리처럼 투명하게 반짝이는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와 비슷한, 아름다운 에메랄드 목걸이. 흠집 하나 없는 커다란 에메랄드 주위로 그녀의 머리카락과 닮은 금장식이 휘감고 있고, 그 옆으로 다이아몬드들이 금으로 만들어진 체인 사이사이마다 수없이 끼워져 반짝이고 있던, 그 목걸이일 리가 없다.
마치 귓가에서 심장이 뛰는 듯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자가 상자를 열자. 그녀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사양하려는 듯 두 손을 내저었지만,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자가 뭐라 말을 하자, 난처한 듯 입을 다물었다.
곧 그자가 상자 안에 들어 있던 무언가를 들고 일어서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뒤로 다가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뭐라고 말을 하자, 그녀가 잠시 당황하고 머뭇거리더니, 이내 머리카락을 그러모아 들어 올려 준다.
그자가 그녀의 목 주위로 손을 올려 목걸이를 채워 주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그자의 몸에 가려서 어떤 목걸이인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저것이 꼭 그 초록색 목걸이 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다이아몬드 목걸이일 수도 있고, 사파이어 목걸이일 수도 있었다. 목걸이는…… 원래 여인에게 많이 선물하는 품목일 뿐이니까.
어느 사이엔가 손안에 파고든 손톱으로 피가 흐를 만큼 주먹을 꽉 쥐고 있던 아젠은, 자신이 전혀 모르는 목걸이의 모습이 드러나기를 기다렸다.
그자가 자리로 돌아가려는 듯 천천히 몸을 움직이자, 드디어 그 목걸이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목에, 낯익은 커다란 에메랄드 목걸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올가미처럼 걸려 있었다.
빛이 꺼진 회녹색 눈으로 바라본다.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는데…….J
그녀가 가슴에 단도를 박아 넣는다.
온 세상이 핏빛으로 변한다.
아젠은 멍하니 목걸이를 계속 바라보았다.
보고 싶어서 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넋이 나간 채로 그 목걸이에 붙잡힌 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 숨을 쉬지 않고 있었는지 그는 인식도 하지 못했다.
그녀와 그자는 무언가를 도란도란 얘기하며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평화로운…….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그녀가 햇빛 가득한 여름 녹음 같은 눈을 휘어 보이며 웃는다.
생기 넘치는 눈.
그는 한동안 넋을 놓고 멍하니 그 비현실적인 평화로운 정경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녀는 문득, 유리 벽 너머에 서 있는 자신의 호위 기사를 발견할 것이다.
“어, 아젠 경? 언제 와 있었어요? 들어와요!”
반갑게 불러들이고는. 몸이 괜찮은지 물어보겠지.
“몸이 안 좋다고 하던데, 괜찮아요? 약은 먹었어요?”
그리고 그에게 인사를 시켜 줄 것이다.
“레퀴에스 공작님,”
애정을 가득 담은 눈으로 자신의 호위 기사를 바라보면서.
“이쪽은 제 호위 기사인 아젠 경이에요.”
그자와 눈을 마주친다.
그 시꺼멓고 어두운 암흑 같은 눈과.
아아, 그래.
저건,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