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단꿈
슈엘의 계절이 바뀌었다.
어느덧 숨 막히는 여름 더위가 가시고, 아침저녁으로 대기에 서늘한 가을바람이 스며들었다. 아침마다 하인들이 빗자루를 들고 나와 길에 떨어져 있는 낙엽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말은, 드디어, 여름 내내 보지 못했던 그녀가 돌아온다는 뜻이었다.
여름 동안 수도에 머물며 루테른 공작성을 비웠던 주인 일가가 오랜만에 돌아오는 날이었다.
성의 모든 사용인은 무척이나 바빠지기 시작했다. 성의 안팎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정돈하고, 부족한 점이 없는지 점검한 후, 옷 태마저 가다듬었다. 저녁에 벌어질 만찬의 준비로 인해 모든 인력이 총동원된 주방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기사들 역시 이날만큼은 훈련을 하지 않고 주군을 맞이할 준비에 바쁘므로 연무장은 비어 있어야 했지만, 한쪽 구석에서 아직 기사라 하기에는 어리나 제법 훤칠하게 자란 두 소년이 대련하는 칼 소리가 요란했다.
캉. 캉. 한참 이어지던 칼 소리는 갈색 머리 소년의 칼이 휙 날아가 버리고 금발의 소년이 연습용 무딘 칼로 갈색 머리 소년의 목을 겨누는 것으로 끝이 났다.
“졌습니다.”
목에 칼이 겨누어진 아젠이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했지만, 숨을 몰아쉬고 있는 젝시온은 이겨 놓고도 전혀 만족스러운 표정이 아니었다.
“딴생각하면서 대충 하는 게 어디 있어! 잠깐만 좀 제대로 해 보자니까.”
젝시온은 칼을 거둬들이며 투덜거렸다.
“지금 네 머릿속이 온통 딴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거라는 걸 뻔히 알긴 하지만, 대련할 때만이라도 좀 집중해 주면 안 되냐? 그렇게 집중력이 떨어져서 어디 기사가 될 수 있겠어?”
“앞으로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흔들림 없이 바로 튀어나오는 정중한 대답이 젝시온을 더욱 흥분시켰다.
“너! 너! 좀 목소리에 진심을 담은 척 연기라도 잘해 봐!”
“저는 언제나 진심으로 도련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녀가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는 오라비니까. 그게 아니었다면 오늘 같은 날 여기까지 끌려오지도 않았을 터였다.
“말은! 네가 모시는 대상에 내가 포함되어 있기는 하냐?”
“당연합니다. 아를레네 아가씨의 친애하는 가족이시니까요.”
아를레네라는 이름을 발음하는 그의 혀에 힘이 들어갔다. 매일 발음해도 언제나 조심스러운 이름이었다.
“쳇, 오늘 같은 날 대련하자고 한 내가 잘못이지. 가 봐라, 가 봐!”
젝시온은 투덜거리며 자신의 칼을 정리해 놓고는 등을 돌리고 걸어갔다. 어차피 젝시온 역시 이제 슬슬 들어가서 씻고 옷을 갈아입어야 할 시간이었다.
아젠은 묵묵히 몇 걸음을 걸어가 땅에 떨어져 있는 자신의 연습용 검을 주워 정리했다. 사실 젝시온의 말이 맞았다. 아젠의 머릿속에는 딴생각만이 가득했고, 대련에는 어찌나 건성으로 임했던지 호흡이 흐트러지기는커녕 땀 한 방울 나지 않은 상태였다.
오늘은 오랜만에 그녀가 돌아오는 날이니까.
그녀를 맞이하기 위해 몸을 정결히 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준비하고 싶었다.
그래서 모처럼 아껴 두고 잘 다려 둔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도 정갈하게 빗고 있던 참인데, 칼에 살고 칼에 죽는 둘째 도련님의 성화에 다시 훈련용 옷으로 갈아입고 연무장으로 끌려 나왔던 참이다.
전생에 수없이 많은 기사들을 보고 상대하고 이끌었던 그가 보기에도, 젝시온은 어느 정도 검에 재능이 있는 편이었다. 이대로 잘 자라면 언젠가는 어느 기사단의 중책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공작가 차남이라는 배경까지 더해질 테니 잘하면 단장까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그런 젝시온이 가장 선호하는 대련 상대는 아젠이었다. 체격도 나이도 비슷하면서 무위는 자신보다 높은 상대. 평소에는 아젠 역시 그가 대련하자고 끌고 나오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으나, 오늘 같은 날에는 귀찮을 뿐이었다.
바람이 불면서 떨어지는 낙엽들이 주위를 스쳐 지나갔다. 그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햇빛이 좋았다.
이렇게 햇빛이 좋은 날이면 늘상 언덕에 올라 하늘하늘 춤을 추곤 하던 그녀가 떠올랐다.
이제 곧,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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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거의 저물어 가면서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모든 사용인이 문 앞에 도열하고, 제일 앞에는 이 중 유일하게 이름에 루테른이라는 세 글자를 가지고 있는 젝시온이 섰다.
아슈네란의 많은 귀족들이 그렇듯. 루테른 공작가의 사람들은 수도와 영지를 정기적으로 오가며 지냈다. 귀족 회의가 진행되고 사교 시즌이 시작되는 여름철이 다가오면 수도로 올라갔다가, 시즌이 끝나면 날이 추워지기 전에 서둘러 따뜻한 남쪽 영지로 돌아왔다.
보통은 온 가족이 같이 움직이지만, 차남인 젝시온의 경우 지난봄 수도에 올라가기 전에 사고를 치는 바람에 벌로 영지에서 자숙하게 되었던 터였다.
이윽고, 말 탄 기사들을 앞뒤로 거느리고 마차들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이게 몇 달 만인가. 그동안 얼마나 참고 또 참았던가.
멀리 작게 보이던 마차의 모습이 점점 커지며 다가오고, 드디어 정문 앞에 마차가 멈춰 섰다. 말에서 내린 기사들이 앞에 있는 마차의 문을 열었다.
두 번째 마차의 문이 열리자, 우아한 귀부인의 손이 마차 밖으로 내밀어졌다. 문을 열었던 기사가 부인의 손을 잡아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에스코트했다. 그러고 나서야, 그가 그토록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작고 여린 손이 마차 밖으로 내밀어졌다.
손을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저손을 잡고 싶다.
내가 잡아야 하는데.
아젠은 그녀의 손을 잡아 에스코트하는 기사를 조용히 쳐다보았다. 들끓는 감정이 밖으로 스며 나오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저 자리에 내가 서야 하는데. 빨리 저 자리에 서서 그녀의 손을 잡고 싶다.
아젠은 아직 견습기사일 뿐, 정식 기사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수도에도 따라가지 못했고, 이런 공식적인 행사에서 그녀의 옆을 지킬 수도 없었다.
기왕 다시 태어날 거라면 왜 몇 년 더 일찍 태어나 더 일찍 기사가 되지 못했는지 안타까웠지만 별수가 없었다. 그래도 슈엘에 있는 동안에는 가장 많이 옆을 지키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다행히 이번 가을이면 정식 기사로 서임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그녀를 수도로 떠나보내고 몇 달을 그리워만 하는 일도, 그녀의 곁을 저리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는 일도 끝이다.
곧이어 마차의 문밖으로 그녀의 얼굴이 나왔다.
세상이 밝아진다. 석양이 눈부시다.
아젠의 얼굴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
노을빛을 받아 붉게 물든 얼굴이 몇 달 못 본 새에 조금 더 성숙해진 듯했다.
약간 피곤해 보이나?
비록 슈엘은 수도와 그리 멀지 않아 마차를 천천히 몰더라도 이틀 만에 올 수 있는 거리였지만. 그녀의 몸은 워낙 약했으니, 이틀 연속으로 하루 종일 마차 안에서 시달리다가 저녁 늦게서나 내리게 된 여정이 몸에 무리를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환하게 미소 짓는 그 얼굴은 눈부셨다.
“젝시온!”
그녀가 그 가벼운 걸음으로 콩콩 뛰어 젝시온에게 뛰어가자, 젝시온도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그녀에게 달려가 덥석 안아 들더니 두어 바퀴를 빙글빙글 돌린 후에 내려놓았다.
“어이쿠. 우리 공주님이 그새 더 무거워졌네!”
아를렌이 그 말에 웃으며 작은 주먹으로 젝시온의 어깨를 팡팡 쳤다. 곧 공작 내외와 장남인 레트비안도 같이 모여 젝시온의 어깨를 두드리며 가족 상봉의 시간을 가졌다.
여기를 봐.
나를 좀 봐 봐.
마치 그 애원을 들은 것처럼, 젝시온과의 인사를 마치고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가 그와 눈을 마주쳤다. 맑은 초록색 눈을 사르르 접어 웃으며 눈인사를 건넨다.
아아.
저 미소를 몇 달 동안 기다려 왔던가.
가족 상봉이 이뤄지고, 사용인들의 인사가 끝나고, 공작 부부와 영식들이 문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을 때, 아젠은 드디어 자기 차례가 되었음을 느끼고 아를렌에게 다가갔다.
그녀도 그가 다가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서서 저를 향해 걸어오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를렌의 앞에 선 아젠은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앉아 그녀의 손에 입을 맞췄다. 민감한 입술에서 오랜만에 느껴지는 그녀의 감촉에 심장이 울렁거렸다.
“무사히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아를레네 아가씨.”
“아젠도 참……잘지냈어?”
“그야 저는 언제나 아가씨를 기다리며 잘 지내었지요.”
아젠이 아를렌을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아를렌은 살짝 부끄러워하며 손을 거두었다. 아젠이 언제나 아를렌에게 낯간지러울 정도로 정중한 기사 행세를 한 점 부끄럼 없이 한다는 것은 이미 공작령 내의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일이었지만, 받는 아를렌 입장에서는 조금 쑥스러웠다.
어쨌든 그들은 아직 제대로 된 레이디도 기사도 아니고, 아직 데뷔도 하지 않은 14세 소녀와 기사도 되지 않은 16세 소년일 뿐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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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성에는 만찬이 열렸다.
수도에 다녀온 사람들과 그동안 슈엘 성을 지켰던 사람들이 모두 한데 모여서 즐기는 만찬 자리는, 매년 공작 일가가 수도를 오갈 때마다 열리는 전통이었다.
물론 신분에 따라 상석에서 말석까지 테이블이 나뉘어 있기는 하였다. 그래도 공작부터 말단 사용인들까지 모두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술을 마시며 다 같이 즐기는 자리는 다른 성에서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비록 아가씨와 가까운 사이이긴 하였으나 아직은 견습기사에 불과한 아젠은, 기사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의 말석에 말단 기사들과 함께 다른 견습기사들과 나란히 앉아있었다.
모두가 흥겹고 시끌벅적했다. 주로 수도에 다녀온 사람들이 영지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에게 수도 이야기를 떠들면, 영지에 있던 사람들은 흥미롭게 들었다.
아젠은 멀리 상석에서 환한 미소를 얼굴에 띄운 채 오물오물 음식을 작은 입에 넣고 있는 아를렌을 바라보았다. 거리가 멀었다. 기사 서임을 받고 나면 이 거리는 많이 줄어들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동안 꽉 막혀 있던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지난 몇 달간은 멀리서조차 보지 못하였으니까.
하지만, 아마 매년 그래 왔듯이, 여독이 많이 남아 있는 그녀는 참석에만 의의를 두고 금방 방으로 돌아가리라.
아니나 다를까, 조금의 식사를 끝낸 그녀는 곧 다른 가족들의 뺨에 쪽 쪽 인사를 남긴 후, 조용히 만찬장을 빠져나갔다. 살랑살랑 치맛자락이 흔들리며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아젠은 홀을 빠져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마치 시선으로 쫓아가기라도 할 듯 하염없이 쳐다보다가, 그녀의 그림자조차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자신의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다.
괜찮다, 내일이면 또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이제 그녀는 이곳 슈엘에 돌아왔으니까. 같은 성안에, 같은 곳에 있으니까.
옆자리에 앉아 있는 기사들과 견습생들은 수도 이야기를 떠들어 대느라 소란스러웠다. 영지에 남아 있던 대부분의 견습생들에게 호화찬란하고 번화한 수도의 이야기는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 주제였다.
“아가씨께서는 친분 여부를 떠나서 사람에게 그런 표현을 쓰는 것 자체를 싫어하신다고. 애당초 요즘 세상에 누가 저주니 주술이니 그딴 걸 믿냐?”
기사가 아직 멋모르는 어린 신입 견습생의 머리에 꿀밤을 때리며 말하자. 견습생이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울상이 되었다.
“하지만. 폐왕자가 태어난 후로 더 이상 적통 왕손이 태어나지 못한 건 사실이잖아요. 그러니까 왕비 전하도,”
“야, 야, 오래 살려면 입조심해라.”
기사가 급하게 견습생의 입을 손으로 막아 버렸다.
“그리고 저주라니. 그런 미신을 누가 믿냐, 100년 전도 아니고. 슬러족인 아젠도 가만히 있는데.”
기사가 말하며 아젠을 흘긋 쳐다보자, 아젠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슬러족이 주술이니 저주니를 할 수 있다는 누명을 쓰고 박해당하던 것은 100여 년 전 일이다. 지금은 그런 미신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고 차별도 많이 줄어들었으며, 특히나 슈엘에 온 이후로는 한 번도 차별받아 본 적이 없었지만, 그래도 이민족 혼혈이라는 꼬리표는 그가 보라색 눈을 가지고 있는 이상 평생 떼어 버리지 못하고 따라붙을 것이었다.
정작.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뒷골목을 헤매고 있었던 아젠 본인은 자신의 출신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지만…….
“그런데, 저주고 뭐고를 떠나, 아가씨께서 그 폐왕자랑 친분이 있으시긴 한 거죠? 그래도 괜찮은 거예요? 두 분 전하께서 폐왕자를 무척 싫어 하신다던데, 괜히 얽혔다가 전하께 밉보이시기라도 하면…….”
다른 견습생이 목소리를 죽이며 물어보자, 기사들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 건 주군과 소공작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실 테니 너네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아라. 그리고 폐왕자가 아니라 카쉬엔 경. 이제 정식으로 기사 서임 받은 기사니까 정식으로 기사처럼 불러 줘야지. 기사들끼리라도.”
“근데 그럼 그 폐왕, 아니, 카쉬엔 경은 신분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다시 왕족이 되나요? 아니면 귀족 기사?”
“그럴 리가. 일단은 그냥 평민 기사 아니야? 성도 안 받았잖아.”
“전하께서 복권에 대한 말씀이 전혀 없으셨으니 아직은 그냥 평민 기사인 것 같은데. 복권할 만한 공을 세운 것도 아니고, 둘베르 공작가에서 그걸 허용할 리도 없고.”
“그래도 그 정도면…… 열다섯 살에 검기를 사용하는 기사인데, 원래 평민 태생이었더라도 그 정도면 작위 주지 않아요? 열다섯 살에 검기라니, 살아생전 검기 한 번 내 보는 것만으로도 황공할 판에…… 너무 대단해서 질투조차 안 나요.”
그렇게 말하는 견습생 본인 역시 열다섯 살이었고, 몇 년 내로 기사 서임을 노리고 있었지만, 검기는 꿈도 꿀 수 없는 상태였다. 기사가 되는 것 자체도 어렵고 힘든 일이었지만, 그중에서도 칼에 검기를 두를 수 있는 상급 기사의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이번 왕실 기사 서임식과 토너먼트의 최고의 화젯거리는 단연, 속칭 저주받은 폐왕자, 카쉬엔이었다.
그 어미의 죄로 왕실에서 버림받아 성도 물려받지 못하고 신분도 그저 평민 사생아에 지나지 않지만, 그렇다고 왕실의 피가 흐르는 이를 성 밖으로 섣불리 내칠 수도 없어. 왕성 구석에 방치된 채 학대받고 있던 폐왕자.
태어나기 전부터 그 어미로부터 왕실의 후계를 끊고 왕국에 피바람을 불고 올 거라는 저주 어린 소리를 듣고 태어난 불행한 소년.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기사가 되겠다고 왕실 기사단 연무장에 나타나더니, 믿을 수 없는 재능을 보이고 단시간에 다른 모든 기사들을 따라잡더니 어느덧 앞질러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실에서는 그를 기사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으나, 폐왕자가 열다섯 살의 어린 나이로 검기를 발현하는 일이 벌어지자 결국 어린 나이에 기사로 서임할 수밖에 없었다. 기사가 된 후에 검기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검기를 사용했기에 기사로 서임된 희귀한 경우였다.
게다가 기사로 서임되기가 무섭게, 마치 벼려 오던 것처럼 바로 토너먼트에 참가하더니 준우승을 거머쥐었다. 비록 우승은 아니었지만, 열다섯 살에 준우승을 한 사람은 역사상 처음이었다.
“그 나이에 검기에, 토너먼트 준우승인데. 앞으로 승승장구하지 않겠어요? 햐, 대단해.”
견습생들이 영예를 차지했을 열다섯 살의 어린 기사를 눈을 빛내며 상상하고 있을 때, 수도에서 그 현장을 관람했던 랄프 경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고작 열다섯 살. 이제 막 기사 서임을 받은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어린 기사. 자기들보다 훨씬 어린 그가 그 차갑고 냉철한 표정으로 검기를 휘두르며 토너먼트장을 장악했던 모습은 정말 대단했다.
같은 기사 입장에서 질투나 열등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나, 그래도 대단한 것은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순수하게 감탄하던 외부 손님들과 달리, 수도 귀족들과 기사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저렇게 어린 나이에 검기를 내뿜다니 대단해.’라는 반응이 아니라, ‘역시 저주받은 재수 없는 놈이라 남다를 줄 알았다.’라는 느낌?
결승전에서 왕실 수석 기사에게 간신히 막혀서 준우승에 머무르자 귀빈석 관중들의 얼굴에 퍼지던 안도감과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들.
그 재능은 압도적이지만, 과연 그런 분위기에서 멀쩡하게 자랄 수 있을지.
그러거나 말거나 견습생들은 신이 나서 토너먼트에 대한 수다를 이어 갔다.
“아무튼 이번엔 우승하지 못했지만, 내년에는 우승하는 거 아니에요? 올해 결승전도 굉장히 치열한 접전이었다고 하던데요.”
“드보락 경은 아쉽겠어요. 우승을 해 놓고도 화제는 준우승자에게 다 빼앗기고…….”
“드보락 경이야 뭐, 솔직히 왕실 수석 기사나 되어 가지고 토너먼트에 나온 건 좀 그랬지. 사실 우승 경력이 이미 몇 번 있고 왕실 기사단장이나 수석 기사까지 하고 있으면 토너먼트에 나오지 않는 게 관례잖아.”
누군가 목소리를 팍 낮춰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거…… 폐왕자가 혹시라도 우승하는 걸 막으려고 전하께서 일부러 출전시키셨다는 말이 있던데, 사실인가요?”
“이 녀석, 그런 데에 관심 두지 마. 그런 데에 너무 관심 두면 너에게 해롭다.”
기사 한 명이 견습생의 머리를 다시금 콩 때려 버리자, 화제는 금방 또 흘러갔다.
“루테른 기사단에서는 언제쯤 우승자가 다시 나올까. 단장님이 단장 되시기 전에 우승한 후로 아무 소식이 없잖아.”
“왕실 기사단 젊은 사람들 중에 대단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심지어 폐왕자도 우리랑 같은 세대라서 우리랑 같이 크면서 우리랑 계속 같이 나올 거 아냐. 우리는 글렀어. 좀더 늦게 태어날걸.”
“얼씨구. 좀 늦게 태어났으면 가능성 있었고? 토너먼트 우승을 걱정하기 전에 기사 될 걱정부터 하시지. 설령 폐왕자가 앞으로 출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넌 좀 무리다.”
“그러고 보니 아젠도 내년부터는 토너먼트 나갈 수 있잖아. 우리 중에는 아젠이 좀 가능한 거 아냐?”
아젠에게로 견습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몰리자, 묵묵히 음식을 먹고 있던 아젠이 고개를 들었다.
“너 이번 가을에 서임받지? 그럼 내년부터는 토너먼트엔 참가할 수 있잖아.”
“그래, 아젠, 너쯤 되면 스무 살쯤에는 가능성이 있지 않겠냐? 우리 루테른 기사단의 희망은 너한테 건다!”
“야, 네가 무슨 권리로 우리 기사단의 희망을 통째로 네 맘대로 걸어? 게다가 아젠이 스무 살이면 폐왕자도 열아홉인데, 한창 때의 폐왕자랑 겨뤄야 한다고.”
정작 본인은 가만히 있는데 다른 아이들끼리 툭탁툭탁하자, 아젠은 대답 없이 하하 웃으며 컵을 입에 가져가 목을 축였다.
“그런데. 아젠, 정말 내년 여름 토너먼트에 참가할 생각이 있는 거니?”
견습생들의 수다는 무시했지만, 기사인 랄프 경이 물어보니 그건 대답을 해야 했다.
“네, 아를레네 아가씨의 명예에 누를 끼치지 않을 것 같다면 참가 신청은 해 볼까 합니다.”
“음, 그래, 뭐 너라면 젊어서부터 경험을 쌓으면 몇 년 후에는 충분히 입상할 테니까.”
입상이 아니라 우승을 하고 싶다. 승리자의 화관을 그녀의 머리에 그의 손으로 씌워 주고 싶다.
기사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토너먼트 우승은 희망하고 있었다. 강한 기사를 동경하던 그녀 앞에 왕국에서 가장 강한 기사가 되어서, 모두가 바라보는 가운데 당당하게 화관을 그녀의 머리 위에 올려, 모두에게 보여 주고 싶다. 그녀의 머리 위에 화관을 올려 주는 사람은 자신 이라고.
물론 이 몸으로 어디까지 가능할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히, 아직 검기도 만들어 내지 못했으니…….
아젠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주먹을 쥐었다.
답답하다. 물론 평생 검기를 만들어 내지 못하는 기사가 수두룩하고, 열여섯 즈음에 검기를 내보인 자는 역사에 손꼽힌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젠은 늦은 것은커녕 오히려 아주 전도유망한 편에 속했다.
그럼에도, 전생에 이미 한 번 해 본 것을 다시 하지 못하고 있는 몸이 너무 답답했다.
전생의 그의 몸으로는 이런 답답함을 느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전생의 그는, 분명, 이보다 일찍 검기를 발현했었다.
아젠은 열다섯 살에 검기를 뿌려 기사가 되고 토너먼트 준우승자가 되었다는, 얼굴 모를 폐왕자를 떠올리며 입술을 짓씹었다.
.*. *. *. *. *. *.
4년 전, 수도의 빈민가 골목길에서 쓰러져 있던 소년은 루테른 공작가의 귀한 고명딸 아를렌에게 구해졌다.
원래 아를렌은 소년을 데려가 치료하고, 깨끗이 씻기고 입히고 먹인 후에, 자신이 후원하는 고아원으로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은혜를 갚게 해 달라고, 곁에 있게 해 달라고 필사적으로 매달린 끝에 슈엘 성에 들어올 수 있었다.
‘아젠’이라는 이름도, 이름이 없으니 이름을 지어 달라는 소년의 부탁에 그녀가 직접 지어 준 것이었다.
부탁을 받은 아를렌은 며칠을 끙끙거리며 고민하더니 서너 개의 이름 후보를 추려서 소년에게 고르라고 했고, 소년은 망설임 없이 ‘아젠을 골랐다.
‘아를렌, 아젠, 발음이 비슷하니까.’
그녀가 지어 준 이름, 그녀와 비슷한 이름. 평생을 가지고 살아갈 이름. 그의 삶에 그녀의 자취가 아주 크고도 진하게 남았다는 사실이 매우 흡족했다. 마치, 그의 삶에 그녀가 서명을 남긴 것만 같았다.
이름을 받은 소년은 소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손을 청했다.
살짝 당황하며 손을 내어준 작은 소녀의 손가락에 촉 하고 입을 맞추며 맹세했다.
“반드시 강한 기사가 되어서 아가씨를 지켜 드리겠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귀여운 짓을 한다며 웃어넘기거나, 혹은 어이없어 했다.
기사는커녕 견습기사조차 아닌, 칼자루 한 번 만져 보지도 못했을 비실비실한 고아 꼬맹이가, 도대체 어디에서 기사들의 예법을 구경하고 따라 하는 건지.
기사가 아무나 하고 싶다고 다 될 수 있는 건 줄 아는가 본데, 어쨌든 아가씨께 은혜를 갚겠다는 그 뜻은 기특하게 보이긴 했다.
하지만, 남들이 어떻게 보건 아젠에게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그는 그녀 이외의 사람을 신경 써 본 적이 없었으니까.
아를렌을 따라 공작령으로 내려온 아젠은 루테른 성의 시종 겸 견습기사가 되었다.
이미 검술의 극에 올라 봤던 경험이 있던지라 남들보다는 훨씬 빠르게 검술을 습득했지만, 몸이 어린 데다가 타고난 골격이며 근육이 전생의 몸과는 많이 달라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또래의 다른 견습기사들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건 확실했다. 견습기사의 신분이지만 이미 웬만한 기사들을 앞질렀고, 루테른 기사단에서 가장 장래가 기대되는 이라는 소리도 듣게 되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초월적인 실력을 갖춰 본 적이 있었던 그의 입장에서는 생각처럼 움직여지지 않는 몸이 답답했다.
하지만 별수가 없었다. 그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것이 칼질이었고, 제일 잘 알고 있는 것이 기사질이었다.
출신도 제대로 알 수 없는 이민족 혼혈 고아 따위가 고위 귀족인 그녀의 옆에 붙어 있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길이기도 했다. 그러니 여기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수밖에.
그리고 그는 자신이 있었다. 한 번 이뤄 본 일이었다. 몸이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두 번 못 할 것이 무엇인가. 어차피 그는 인내심이 강했다. 전생에도 그녀를 가지기 위해 오랜 시간을 인내했다. 이번엔 그때처럼 강압적으로 꺾으려는 이유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에게는 인내는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때에는 그녀와 떨어져서 수년을 인고해야 했다면, 이번에는 그녀의 곁에 붙어 있으면서 노력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종종 그녀의 미소를 곁에서 보고,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출 수 있었다.
리본 하나에 의지하여 그녀의 환상을 기다리던 시절에 비하면 이 얼마나 꿀처럼 달콤한 나날인가.
그는 시간이 생길 때마다 무섭게 훈련하고 연습하고 단련했다. 처음엔 뭘 모르는 꼬마의 겁 없는 치기라고 웃어넘기던 사람들도, 그의 끝없는 노력에 수긍하고 그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아끼고 사랑하는 귀한 아가씨였다. 그 아가씨에게 반드시 호위 기사가 되어 은혜를 갚겠다고 온몸을 내던지며 노력하는 녀석이 기특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가끔 그가 행여나 선을 넘지는 않는지 날카로운 눈으로 쳐다보는 일은 있었어도, 어찌 되었든 보은하겠다고 노력하는 견습기사를 격려하면 모를까 말릴 사람은 없었다.
애초에 기사의 제일 중요한 덕목이란 주군을 향한 무조건적인 충성 아니던가. 그 무조건적인 충성을 공작이나 소공작이 아닌 막내 아가씨에게 바친다는 것이 좀 달랐지만, 공작과 소공작이 오히려 흐뭇하게 바라보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리하여 몇 년의 노력 끝에, 드디어 이번 가을이면 기사 서임을 받게 될 참이었다. 그가 오랫동안 인고하며 기다려 온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다정하고 상냥한 아가씨가 구해 준 사람은 아젠 한 사람만은 아니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수도에서 굶주리고 있던 어린 여자아이 한 명을 데려왔다.
“아가씨는 참, 하루 정도는 더 쉬고 나가시지. 뭐가 그렇게 급해서 벌써 나가시려고 하세요?”
모른 부인은 아를렌의 금사 같은 머리카락을 브러시로 빗어 내리며 투덜거렸다. 그 오른편에서 전속 하녀인 지느 역시 브러시를 바쁘게 놀리고 있었다. 오늘 아를렌은 그 아이를 고아원에 데려다줄 예정이었다.
“어제도 그렇게 늦게 들어오셔서는…… 저녁 시간 거의 다 되어서 도착하셨잖아요. 아직 많이 피곤하실 텐데…….”
“그래서 오늘 늦잠도 자고 푹 쉬었잖아. 벌써 오후인걸.”
“아가씨, 이런 정도는 푹 쉰 게 아니에요. 오늘 온종일 침대에서만 뒹굴뒹굴하셨어야 푹 쉬신 거죠!”
모른 부인의 말에 맞장구치는 지느의 말에 아를렌은 그냥 웃어 버렸다.
“유모 말을 들으면 내가 무슨 저 멀리 여행이라도 다녀오려는 줄 알겠어. 그냥 성내에만 잠깐 다녀오는 건데, 뭐.”
“그제 어제 종일 마차 타셨잖아요. 오늘은 그냥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계셔도 되는데…… 아무튼 아가씨는 다른 사람 걱정하실 때가 아니에요. 아무 일도 안 하고 가만히 누워만 계시면 제 마음이 얼마나 편할까.”
“내가 하는 일은 별로 없는데. 사실 나는 말만 하고 다른 사람들이 다 해 주잖아.”
“그래도 아가씨가 실제로 돌아다니시니까 그렇죠. 어제 돌아오셔서는 오늘부터 이렇게 외출 준비 하시고. 그냥 ‘쟤 고아원에 떨궈다 줘!’ 하고 명령만 하시면 될 것을…….”
“낯선 곳에 갑자기 와서 얼마나 긴장되겠어. 그래도 낯익은 사람이 데려다주는 게 낫지. 어차피 내가 직접 하는 일이라고는 그런 것밖에 없는데…….”
“아유, 우리 아가씨는 너무 착하셔서 탈이야.”
“뭐…… 사실 마냥 착해서 그러는 건 아닌 거 알잖아. 나도 바라는 게 있어서 그러는 건데…….”
아를렌이 눈을 내리깔면서 말을 흐리자, 모른 부인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아유, 아가씨, 사람들에게 오래오래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마음은 누구나 있어요. 근데 그걸 이루기 위해 동상을 세우는 사람이 있고, 고아원을 세우는 사람이 있죠. 그럴 때 동상 말고 고아원을 세우는 사람을 보고 착하다고 하는 거예요.”
“하하, 유모가 그렇게 말해 주니 좋네.”
“맹세코 저는 그저 사실을 말하는 거랍니다.”
유모가 빗질을 끝내자, 곧이어 지느가 향긋한 향유 냄새가 풍기는 아를렌의 머리의 일부를 잡아 곱게 땋아 내리기 시작했다.
“어쨌든 이미 아가씨를 오래오래 기억하고 칭송할 사람들은 넘치고 넘친다고요. 이번을 끝으로 하고 이제 다른 사람들 신경은 그만 쓰세요. 좋은 것만 보고 즐기셔도 모자랄 판에…… 부족하다고 생각하시면 제가 각하께 말씀드려서 광장 중앙에 동상을 세워 드릴 테니까.”
“그럼 나 이제 고아원 말고 동상 세우는 사람 되는 거 아냐?”
“아가씨는 고아원을 세우신 거고, 동상은 제가 만들어 드리는 거니까 괜찮아요!”
“아가씨, 저도 성문 앞에 하나 더 세워 드릴게요. 그러려면 저는 월급을 좀 오랫동안 모아야겠지만요.”
모른 부인과 지느의 이어지는 능청에 아를렌이 다시금 웃었다. 웃는 소리가 듣기 좋아서, 방문 앞에 도착한 아젠은 그들을 방해하지 않고 잠시 문가에 서 있다가, 웃음소리가 그친 후에서야 노크했다.
“아,아젠인가 봐. 들어와요.”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리자 문을 열고 들어간 아젠이 한 손을 심장께에 올리며 인사했다.
“오늘 외출하신다고 하셔서 모시러 왔습니다.”
“응, 이제 거의 다 됐어. 그렇지, 지느?”
“잠깐만요 아가씨, 이것만 꽂으면 끝나요.”
아를렌의 땋은 머리 가닥을 돌돌 말아 위로 올린 후 머리꽂이를 꽂은 지느는, 그러고도 한참을 이리저리 열심히 배치해 보면서 손을 보더니, 이내 흡족해진 표정을 지으며 손을 떼었다.
“다 됐어요! 아유, 우리 아가씨 정말 예쁘기도 하시지.”
아를렌이 미소 지으며 일어나자, 지느가 재빠르게 약병을 챙겨 왔다. 아를렌은 약병을 보고 미미하게 미간을 잠시 찡그렸으나,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얼굴을 펴고는 약병을 받아 들고 뚜껑을 열어 쭈욱 들이마셨다.
“……요즘 건 유난히 더 쓴 것 같아…….”
아를렌이 살짝 투덜거리자 지느가 재빠르게 사탕을 건네며 대답했다.
“그러잖아도 닥터 헤르트가 맛은 좀 더 없을 거라고 하긴 하더라고요. 근데 몸에 더 좋은 거라고 했어요. 뭘 더 넣었다고 했더라……? 근데 외출은 아젠만 데리고 가시는 거예요?”
“응, 성내 고아원만 다녀올 건데. 뭐. 그리고 아젠이 웬만한 기사보다 낫대. 그치 아젠?”
아젠은 말없이 미소 지음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아젠, 너 아가씨 잘 모셔야 한다! 우리 아가씨 손에 모래 한 알 닿으면 안 된다!”
“물론입니다, 모른 부인.”
아젠은 짧게 대답하고 에스코트를 위해 손을 내밀었다. 내밀어진 손에 그녀의 손이 화답하여 와 닿았다. 종종 닿는 손이지만, 그래도 닿을 때마다 심장께가 저릿하다. 그는 손에 부자연스럽지 않게 살짝 힘을 주었다.
.*. *. *. *. *. *.
“아가씨! 슈엘에 돌아오셨군요! 어서 오세요!”
아를렌으로부터 후원을 받고 있는 고아원장 미달로 부인은, 마차가 보이기 전부터 미리 앞에 마중을 나와 있다가, 마차에서 아를렌이 내리자마자 감격에 젖어 인사했다.
“미달로 부인, 오랜만이에요.”
화사하게 웃으며 인사하는 아를렌을 미달로 부인이 에스코트하여 고아원 안으로 이끌었다. 문 앞에는 이미 인사를 하기 위해 준비 중인 아이들이 줄을 서 있었다.
아를렌은 가능한 한 많은 아이들과 눈을 마주치며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받아 주고는, 하나하나씩 선물을 나누어 주었다. 그녀는 대부분의 아이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실 그중 많은 아이가 그녀가 직접 데려온 아이들이기도 했다.
오늘 그녀가 새로 데려온 아이처럼.
그리고, 몇년 전의 아젠처럼.
아이들과 인사를 끝낸 아를렌은, 자기 뒤에 숨어 있던 한 여자아이를 앞으로 이끌었다.
“부인, 이 아이가 지난번에 편지에서 얘기했던 세라예요. 수도에서 만났는데 마땅히 갈 곳이 없다고 하여 데리고 왔어요. 부인께서 좀 돌봐 주실 수 있을까요? 세라, 인사해야지.”
“안,안녕하세요, 미달로 부인…….”
세라라는 여자아이는 살짝 겁에 질린 채 인사했다.
“어머, 아주 귀여운 아이로구나. 만나서 반갑다, 세라. 이리 들어오렴.”
미달로 부인이 덥석 세라의 손을 잡으며 이끌자, 세라는 당황하면서도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부인을 따라 걸었다. 아이들이 새로운 아이의 등장에 관심을 보였다.
“아이들이 모두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네요. 그간 별일은 없었나요?”
“그럼요, 다들 아가씨 덕에 건강하답니다. 아, 이번에 몇 명이 졸업을 하게 되었어요. 닐로는 병원에 취직이 되었고…….”
아이들의 근황을 읊는 미달로 부인을 따라 아를렌이 걸음을 옮겼고, 아젠은 그 뒤를 천천히 따랐다.
슈엘 안은 안전했기에, 아를렌은 간단하게 영지 안을 돌아다닐 때엔 특별히 호위 기사를 대동하지 않고 아젠과 단둘이 다니는 일이 많았다. 실상 아젠이 이미 루테른 기사단의 웬만한 기사들보다 강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호위 기사를 데리고 다니는 것과 비슷하긴 했지만.
아를렌이 세라를 미달로 부인에게 인계하고, 고아원에서 그동안 있었던 일들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설명을 듣고, 그 후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안, 아젠은 그런 아를렌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것은 물론 좋았다. 보고 또 보아도 계속해서 빛나는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지금 그녀의 시선에 자신이 들어 있지 않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곁에서 그녀의 뒷모습이나마 마음껏 누릴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잠시 기다리면, 저 맑은 눈이 자신에게로 돌아올 것을 아니까.
그러나 지금은 임무 중이었고, 단지 그런 감상만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몸이 좋지 않았고, 그녀의 호위 임무에는 외부로부터의 안전뿐 아니라 병약한 그녀의 몸 상태를 챙기는 일이 중요하게 들어 있었다.
‘안색이 좀 안 좋아진 것 같은데…….’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계속 미소 짓고 웃어 주고 있었으나, 고아원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서서히 그녀의 안색이 미묘하게 나빠지고 있었다. 아젠은 그녀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아이들을 헤치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가씨, 이제 슬슬 일어나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몸의 문제라는 것을 그녀도 알 것이다.
아를렌은 잠시 난처한 듯 아젠을 쳐다보고, 미달로 부인과 아이들을 다시 쳐다보았다. 오랜만에 들렀기에 좀 더 머무르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겠지만, 그녀는 자신이 무리하면 주위 사람들이 걱정한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다. 곧 그녀는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설 것이다.
“오늘은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다음에 또 올게요.”
고아원의 아이들과 환하게 웃으며 인사할 때까지만 해도 멀쩡한 척하던 아를렌은 마차 안에 타자마자 휴우 하고 한숨을 쉬며 의자에 털썩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마차 안으로 따라 들어와 문을 닫은 아젠이 걱정스럽게 아를렌을 살피며 미리 마차 안에 준비되어 있던 간식 그릇의 뚜껑을 열고 건네었다. 그녀가 탈진하지 않도록, 언제 어디서든 손쉽게 에너지를 보충할 수 있도록, 특별히 영양에 신경 써서 상비해 두는 것이었다.
“괜찮으세요, 아가씨?”
“응,괜찮아. 좀 쉬면 괜찮아질 거야.”
그녀가 접시에서 작은 타르트 하나를 들어 한 입 깨물어 먹으며 대답했다.
“너무 무리하셨습니다. 그러잖아도 여독도 다 풀리지 않으셨을 텐데.”
“으응…… 그래도 그 아이를 빨리 정착시켜 주고 싶어시. 지난여름 동안 아이들이 잘 지냈는지도 궁금했고.”
아를렌이 대답하기도 피곤한 듯 눈을 감고 벽에 머리를 기대었다.
아젠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그녀의 얼굴을 하얗게 밝히고, 평온하게 감겨 있는 눈꺼풀 아래. 그림자를 드리운 기다란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
매끈한 뺨에 부드러운 솜털이 살짝 비쳐 보였다. 오물오물 타르트를 먹고 있는 연분홍색 작은 입이 조금씩 그러나 쉬지 않고 움직였다.
……저 입술이 어떤 맛이었는지, 잘 알고 있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오물거리는 입술에 멈추었다.
저 촉촉한 입술을 핥고 잘근잘근 씹어 말랑말랑한 촉감을 만끽한 후 그 입을 벌리고 안에 들어가면 얼마나 달콤한지를 알고 있지만,
「감히……!J
피잉. 머릿속이 잠시 까매졌다.
흠칫, 그가 자기도 모르게 뻗어 나가던 손을 멈추었다.
잠시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 채 평화롭게 눈을 감고 여전히 타르트를 먹고 있었다.
그의 손이 천천히 내려왔다. 주먹을 움켜쥐었다가 다시 폈다.
이번에도.
어쩌다가 불순하거나 불경한 생각이 들기라도 하면, 무언가 머릿속에서 제재가 일어나는 느낌이다. 매번. 마치, 존귀하고 소중한 그녀에게 조금의 해도 끼쳐서는 안 된다는 듯, 무언가가 막아선다.
……무슨 현상인지는 모르겠으나, 사실 다행한 일이다. 덕분에 이번 생애에선 아직까지 한 번도 실수를 한 적이 없으니까. 어쩌면 이미 한 번 그녀를 망가트렸던 것을 처절하게 후회했던 전생의 그가 막는 걸지도 모르지. 같은 실수를 다시 하지 않기 위해…….
그래.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되지.
이번엔 반드시, 끝까지, 마지막 순간까지 내게 행복하게 웃어 주는 모습을 잃지 않을 거니까.
한 번 침을 삼키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응.”
방금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전혀 모르는 그녀가 여전히 눈을 뜨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아젠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아까와는 사뭇 다른 손짓이었다. 손가락 끝에 그녀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잠시 망설이던 손길이 방향을 틀어 이마를 향했다. 그리고, 닿았다.
고요했다. 다그닥다그닥 말들이 걷는 소리만 들려오고, 그녀가 숨을 쉬면서 몸이 작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따스한 체온이 손바닥으로 옮아 왔다.
“……열 있어?”
아젠의 손이 이마를 짚은 채 한참을 움직이지 않자, 그녀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물어보았다. 아젠이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손을 떼며 대답했다.
“열이 높지는 않습니다만, 미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많이 불편하세요?”
“음, 아니야. 혹시, 룬달 꽃 언덕에 잠깐 들렀다 갈 수 있을까?”
“……피곤하신데, 집으로 서두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빈말이다. 사실 그녀와 단둘이 하는 외출이 길어지는 것은 그가 더 바라 마지않는 것이다.
“잠깐만 들렀다 가자, 응?”
그녀가 눈을 떴다. 초록색 맑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쳐다본다. 살짝 피곤해 보이지만, 그래도 놀러 갈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것인지 생기가 돈다.
“아가씨께서 바라시는대로…….”
그녀의 얼굴에 사르륵 미소가 퍼졌다.
.*. *. *. *. *. *.
성 바깥, 그러나 별로 멀지 않은 곳에, 늦봄부터 초가을까지 보라색 룬달 꽃들이 언덕 전체를 뒤덮으며 가득 피어 아름다운 꽃 침상을 만드는 언덕이 있었다.
아를렌이 무척이나 좋아하는 곳이었다. 룬달 꽃들이 피어나 언덕이 보라색으로 물들기 시작하면 그녀는 늘상 이곳으로 와서, 따사로운 햇살 아래 보라색 꽃들 사이를 뒹굴며, 흙냄새와 꽃향기를 맡으며 조용히 누워 있곤 했다.
“아, 좋다一!”
언덕 위를 걸어 올라오는 것만으로도 모든 체력을 소진한 아를렌이 숨을 몰아쉬며 보라색 꽃밭 위로 누워 버리자, 아젠은 언덕 위를 크게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나무 둥치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처음에 저런 모습을 보았을 때에는 당황한 적도 있었지만. 이미 몇 년을 보아 온 지금은 퍽 자연스러운 장면으로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전생의 숲에서 보았던 그녀 역시, 저렇게 편하게 드러눕지는 않더라도, 귀족 아가씨답지 않게 폴짝폴짝 뛰어다니곤 했었지.
아젠은 그런 그녀를 방해하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그녀의 가장 소중한 안식처에, 사적인 안식의 시간에, 옆자리를 허락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행복했다. 지금 이 시간만큼은, 그가 그녀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홀로 조용히 누워, 어느덧 주황빛을 품기 시작한 햇볕을 쬐고 있던 아를렌이, 문득 고개를 빼꼼히 들어 아젠을 바라보았다.
“아젠?”
“네, 아가씨.”
“이리 와 봐. 거긴 너무 멀잖아.”
아젠은 망설임 없이 일어서서 그녀의 옆에 가서 누웠다. 바짝 붙어 눕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손은 닿을 수 있지만 몸은 약간 떨어진 거리에.
살짝 망설이던 손가락이 살금살금 움직여서 그녀의 손가락 하나에 닿았다. 잠시 긴장하고 있던 그는 그녀가 손가락을 빼지 않자 안심하고 숨을 내쉬었다.
손가락 끝과 끝의 아주 작은 접촉이지만, 그 작은 접촉을 통해 느껴지는 온기가 온몸으로 스며들어 와 심장을 간질였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손을 움켜쥐고. 그보다 더, 더 닿고 싶었지만, 꾹 참아 눌렀다. 마음 내키는 대로 삼키려다가 완전히 잃어버리는 실수는 다시는 할 생각이 없었다.
천천히, 천천히. 조심조심.
한때 통째로 삼켜 버리고도 느끼지 못했던 평화로운 만족감이, 고작 손가락 하나 닿아 있다고 나른하게 온몸을 녹여 나갔다.
그래, 이것으로 충분하다.
지금은 일단,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존재에 안도하며.
현재의 평화를 만끽하며.
그때에는 몰랐으나, 이제는, 이런 평화가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하늘이 예쁘다.”
“……그렇네요.”
“구름이 하얗고…….”
“솜털 같네요.”
“햇볕이 따뜻해.”
“좋네요.”
“응. 꽃향기도 너무 좋아.”
“그렇지요.”
아젠은 그저 긍정했다.
그녀는 한참을 그렇게 누워서 햇살을 음미하며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팔 하나쯤의 거리 너머에서, 그녀가 한가로이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걱정도 하지 않고, 그저 그녀의 숨소리만 듣고 있는 이 시간이 너무나도 평화로워서, 아젠은 시간이 흐르지 않고 언제까지나 이 시간만이 계속되기를 바랐다.
어쩌면, 과거에도, 그가 줄곧 바라 왔던 것은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다만 과거의 그는 이 따뜻한 공간에 어떻게 속할 수 있는지를 몰랐었다. 그저 어떻게든 어떤 형태로든 그녀를 가지기만 하면 이런 시간들은 자연히 자신의 것으로 따라올 줄 알았었다.
미친 새끼.
그는 순간 떠오른 과거 자신의 모습을 떨쳐 버리려 고개를 털어 내었다. 경멸스럽고 역겨운…….
과거의 일은 떠올리고 싶지 않다. 그건 모두 없어진 일이다. 다시 태어나면서 사라져 버렸다. 그러니 기억할 필요도 없다. 기억하지 않을 테다.
그래, 그딴 더러운 과거는 굳이 떠올릴 필요가 없다. 과거에 저질렀던 죄과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 모든 일이 없었던 것처럼 이토록 따사로운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이고 기적인가.
과거에는 그토록 멀기만 하였던 그녀가 지금 이토록 가까운 곳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며 닿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선물인가.
기적이 일어났으니, 지금은 그 기적을 감사히 즐기고 소중히 여기면 되는 일이다.
그래, 이번엔, 정말로 소중히 여길 거니까.
그때, 어느 사이엔가 숨을 다 고른 그녀가 그를 향해 돌아누우며 팔꿈치로 상체를 살짝 세우고는, 누워 있는 아젠을 반쯤 내려다보듯 바라보며 물었다.
“그간 잘 지냈어?”
아젠은 얼굴에 미소를 띠며 답했다.
“네, 잘 지냈습니다. 아가씨도 수도에서 잘 지내셨나요?”
“응, 잘 지냈지. 뭐야, 좀 자세히 얘기 좀 해 줘. 어떻게 지냈는지.”
“정말로 별다른 일이 없었습니다. 매일 훈련하고 근무하면서 아가씨를 기다렸지요.”
너무 태연하게 말하는 아젠에, 살짝 부끄러워진 아를렌이 말을 돌렸다.
“그동안 슈엘은 어땠어? 별일은 없었어?”
“음……다들 잘 지냈습니다만…….”
무성의한 대답에 아를렌은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그게. 다들 어떻게 지냈는지 자세히 듣고 싶어서 물어보는 건데, 그렇게 대답하면 어떡해.”
그제야 아젠이 머릿속에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지냈는지 떠올려 보며 건성으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기사단은 예년처럼 근무하고 훈련했고…… 젝시온 도련님께서는 종종 기사단을 들르셔서 대련도 하시고…….”
“수업 빼먹고 도망 다니고 그러진 않았고?”
“음,그건 ‘별일’이 아니니까요.”
아젠이 어깨를 으쓱하자 아를렌이 피식 웃었다.
“그러는 아가씨의 수도 생활은 어떠셨나요? 재미난 일이라도 있으셨는지.”
어느덧 일어나 앉은 아를렌의 손이 보라색 꽃들을 어루만지다가 하나둘씩 꺾어 엮기 시작했다.
“응, 세상에, 페모나가 약혼을 했지 뭐야. 우린 아직 어린 줄 알았는데 이제 벌써 혼담이 오가는 나이인가 봐.”
페모나라면, 아를렌이 수도에 갈 때마다 친하게 지내는 친구의 이름이다. 아마 어디 후작가의 영애라고 했던가…….
“상대는 아직 잘 모르는 사람인 것 같던데, 그래도 일단 같은 또래이고, 이제부터 만나 볼 거라고 하니까, 서로 잘 맞았으면 좋겠어.”
그렇구나. 평범한 귀족 영애라면 이제 슬슬 혼담이 오가기 시작할 나이로구나. 아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를렌에게는 그럴 걱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불안한 마음에 가슴께가 콱 죄어 오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페모나와 있었던 일을 얘기하는 아를렌의 손은 어느 사이엔가 부지런히 움직이며 꽃을 엮어 무언가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아젠도 자세를 바로 하여 앉으며 계속 그녀의 달콤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거기에서 세라를 만났는데, 세라 알지? 오늘 고아원에 데려다준 아이. 그 아이도 고아라고 하던데.”
아를렌은 손을 바쁘게 움직여 꽃을 엮어 나가면서 재잘재잘 수도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했는지, 어떤 사람들을 만났는지, 무슨 일들이 일어났었는지. 아젠은 조용히 들으며 종종 ‘그렇군요.’ ‘그랬군요.’ 하고 대답만 했다.
어느 사이엔가 그녀의 손에는 화관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몇 년을 한결같이 룬달 꽃 언덕에 자주 와서 화관이니 꽃팔찌니를 습관적으로 만들다 보니, 아를렌은 물론이거니와 아젠까지도 화관 만들기에 제법 능숙했다.
계속 이런저런 다양한 이야기들을 풀어 나가는 아를렌의 감미로운 목소리를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듣고 있던 아젠의 표정이, 익숙한 이름의 등장에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이번에 카쉬엔이 드디어 기사 서임을 받았어.”
카쉬엔.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선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폐왕자라고 부르는데, 그의 소중한 아가씨는 그 남자를 친근하게 카쉬엔이라고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아마도 그래서일까. 매우 거슬린다. 자신이 그녀와 훨씬 더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어째서인지 경계의 날이 바짝 선다.
그녀가 자주 언급하는 또래 남자라서? 하지만 도리어 그녀와 급이 맞는 다른 귀족 영식들 얘기를 들을 때보다도 저 이름에 더 신경이 곤두서는 것은 왜인지.
그러나 그가 무엇을 어쩌겠는가. 이미 몇 년째 수도에 다녀온 후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등장하고 있던 이름이다.
그리고 그는 감히 자신의 언짢음을 표현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이제 정식으로 기사가 되었으니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정말 다행이야. 그동안 너무 고생이 많았거든.”
“네,정말다행이네요.”
더 이상 그 남자가 다쳤다고 당신이 신경 쓰고 상처를 치료해 줄 일이 없을 테니까.
“토너 먼트에서도 꽤 잘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준우승을 했다고…….
“응, 세상에, 열다섯 살에 기사가 되고, 기사 된 지 일주일 만에 토너먼트 나가서 준우승이라니, 정말 대단하지 않아? 역사적으로도 유례없는 일이라던데! 이제 아무도 그를 무시할 수 없을 거야.”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에 아젠도 어색하게 웃음 지었다. ‘대단하네요.’라고 칭찬이라도 해 주는 게 맞는 걸까.
그래도 준우승이라서 다행이다. 그 폐왕자가 그녀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 모르지만, 만약 우승이라도 해서 혹시라도 그녀에게 화관이라도 바쳤었다면 속이 뒤집어졌을 것이다. 무엇이든 더 이상 참기 힘들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지금 아를렌의 맑은 초록색 눈은 오로지 아젠만을 눈에 담고 있었다. 그러니까, 웃을 수 있다.
“아젠도 이제 내년부터는 토너먼트에 나갈 수 있겠네.”
그녀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미소 지었다.
“승리의 화관을 아젠 경에게.”
그녀가 일어서더니, 방금 막 완성된 화관을 아젠의 머리 위에 정중하게 두 손으로 올려 주었다.
아젠은 조심스럽게 머리 위로 손을 올려 자신의 머리 위에 올려진 화관을 확인하듯 만져 보고는, 천천히 일어섰다.
머리 위에 있던 화관을 손으로 옮겨 쥔 아젠은, 아를렌의 앞에 정중하게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 부드럽게 입 맞춘 후 두 손으로 그녀에게 공손히 화관을 올려 바쳤다.
“저의 레이디, 아를레네 리시아르 델 루테른 아가씨께 승리의 영광을 바칩니다.”
토너먼트 우승자의 세리머니였다.
아를렌은 환하게 웃으며 화관을 받아 자신의 머리 위에 올리고는, 그 자리에서 한 바퀴를 휙 돌아 보였다. 드레스 자락이 만개한 꽃잎처럼 활짝 펼쳐지고,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반짝이는 밝은 금발이 하늘에 나부꼈다.
그녀가 이내 한 손을 아젠을 향해 뻗었다.
“아젠 경. 한곡 추시겠어요?”
그를 향해 내밀어져 있는 그녀의 하얀 손이 눈부셨다.
그녀는 모른다. 그녀가 손을 내민 대상은 그 손을 게걸스럽게 탐하다 못해 잡아먹어 버렸던 짐승이었다는 걸. 이렇게 쉽게 손을 내보여 줄 무해한 동물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그녀가 모르고 손을 내민다면, 그는 이번 생에서는 끝까지 무해한 동물을 연기할 것이었다. 그녀는 평생 그에게 손을 내밀어 주고, 그는 그 손을 소중히 아껴 주며 만끽하면 된다. 그렇게 그녀가 먼저 내밀어 주는 손이, 그가 강제로 잡아챈 손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따뜻하다.
굳은살 가득한 견습기사의 손이 그녀의 손으로 다가갔다.
“영광입니다, 레이디.”
두 손이 닿으며 손가락 사이사이가 엉켰다. 보드라운 살결의 감촉에서 따뜻한 체온이 전해져 왔다. 다른 손을 그녀의 허리에 살짝 받쳤다. 얇은 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손바닥에 그녀의 몸이 느껴졌다.
마주 본 얼굴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의 초록색 눈에 그의 얼굴이 비쳐 보였다. 촉촉하게 젖어 있는 분홍빛 입술이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다.
그들은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바람에 나뭇잎들이 흔들리는 소리가 음악이 되어 주었다. 어느 사이엔가 그녀가 허밍으로 노래를 하기 시작했고, 그 노래에 맞춰 두 사람의 발이 움직였다.
발 닿는 곳마다 꽃들이 흔들리고, 몸이 움직일 때마다 금 타래 같은 그녀의 머리카락이 파도처럼 출렁였다.
노래에 맞춰 그녀가 한 바퀴 빙글 돌며 멀어졌다가 다시 반대로 빙글 돌아 가까워지자, 드레스 자락이 꽃처럼 활짝 펼쳐졌다가 해가 저문 후의 나팔꽃처럼 그녀의 다리를 휘감았다.
노래가 끝나는 시점에 맞춰 아젠이 그녀의 허리를 두 손으로 잡고 그녀를 하늘 높이 들어 올려 빙그르 돌려 주자, 레몬색 드레스가 하늘에 넓게 펼쳐졌다.
하늘을 날며 아젠을 내려다보는 아를렌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그리고 자신의 표정을 스스로 보지는 못하지만, 그는 자기 자신의 얼굴에도 행복이 가득할 거라는 것을 알았다.
이런 시간이 계속되었으면.
남아 있는 시간만이라도 계속 이렇게 행복하게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있다면.
그녀의 남은 시간은 모두 자신의 것이었다.
아니, 과거처럼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하기 위해 그녀를 잡아채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남은 시간 모두 그녀의 곁에서 이 미소를 따스한 햇볕처럼 쬐고 있으리라.
그리고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웃으면서, 아 행복한 삶이었어 하면서 눈을 감으리라.
그렇게 만들어 줄 것이다.
하늘에서 다시 땅으로 내려온 그녀를 마주 보고는. 무도회에서 춤을 맞춘 신사와 숙녀처럼 정중하게 인사했다.
하지만 인사를 마치고 고개를 드는 그녀의 얼굴은 발그레 달아올라 있고, 헉헉 숨을 몰아쉬며 가슴이 위아래로 가쁘게 움직였다. 파르르 살짝 떨리는 것도 보였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아젠의 손이 아를렌의 이마로 올라왔다. 아를렌은 익숙한 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열이 오르는 것 같은데요, 이만 돌아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 아무래도 그렇지?”
그녀도 자신의 몸 상태를 아는지, 이번엔 별다른 저항이 없었다.
아젠은 그녀의 앞에 자신의 등을 보이며 자세를 낮추었다.
“업히세요. 마차까지 업어서 모시겠습니다.”
“아니야, 괜찮아, 걸어 내려갈 수 있어.”
“제가 업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이것도 훈련의 일환입니다. 기사라면 부상당한 동료쯤은 가볍게 업고 달릴 수 있어야 하니까요.”
아젠이 여전히 등을 내보인 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대자 아를렌은 잠시 웃고는, 결국 그의 등에 업혔다. 아젠은 가볍게 그녀를 받쳐 들고 일어섰다.
“나 수도에 있는 동안 많이 무거워졌는데…….”
“그사이에 저는 더 강해졌지요. 아가씨께서 제 훈련을 도와주시려면 좀 더 많이 드셔야 할 겁니다.”
“그래, 그사이에 아젠이 더 커지긴 한 것 같아. 이번 가을에는 기사도 될 거고. 그치?”
“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점점 더 작아졌다. 아무래도 수도에서 내려온 여독이 다 풀리지도 않은 상태에서 오늘 바로 고아원을 방문하고 언덕에서 뛰어놀기까지 하는 것은 무리였던 모양이다.
“방까지 안전하게 모실 테니, 좀 주무세요.”
“으응…….”
그녀의 얼굴이 온전히 그의 어깨에 기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말랑말랑한 볼살이 옷감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의 뒤에 뭉개졌다.
목덜미에 그녀의 작은 숨이 와 닿았다. 따뜻하고 습한 숨결이 내쉬어졌다가 사라졌다 내쉬어지기를 반복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목덜미가 뜨끈뜨끈해지면서 온몸을 열기가 휘감았다.
그를 믿고 몸을 맡기며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 그녀의 무게가, 그 부피감이, 만족스러웠다.
어느 사이엔가 해가 반쯤 저물어 언덕을 내리비추던 주황색 빛조차 약해지고 있었다. 어두워지기 시작한 언덕에, 어디에선가 하나둘씩 반딧불이가 나타나 반짝이기 시작했다. 푸르스름해진 꽃 언덕을 천천히 떠다니며 점멸하는 빛 방울들은 마치 누군가의 영혼처럼 아름다웠다.
“아젠,”
조용하던 그녀가 문득 말을 건네었다.
“네, 아가씨.”
“생각해 봤는데, 내 무덤은 여기에 만들면 좋겠어.”
“…….”
아젠은 아무 대답 없이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가문 납골당은 외로울 것 같아. 잘 모르는 조상님들만 있고…… 거긴 사람들이 자주 오지도 못 할 거잖아. 게다가 어둡고……”
“…….”
“여기 있으면 아버지가 뭐 하시는지도 잘 보이고. 레트 오라버니랑 젝시온 오라버니도 잘 보이고…… 나중에 레트 오라버니가 결혼하면 새언니랑 조카들이 뛰노는 것까지 잘보일거야. 그치?”
많이 피곤한지, 그녀의 목소리는 작고 조용했다.
이미 자신의 수명을 받아들인 지 오래인 그녀는 언제나 담담하게 자신의 예정된 죽음을 말한다. 아젠 역시 가능한 한 덤덤한 척 듣고 있었지만, 들을 때마다 속이 울렁거리고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꽃도 많고…… 사람들이 쉽게 찾아올 수도 있고…….”
“…….”
“나중에, 아버지께 그렇게 좀 전해 드려 줄래?”
“……네. 아가씨.”
“아젠도 가끔 와 주면 좋고…… 와서, 음, 참 좋은 아가씨였었지 하고 기억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아쉽게도, 전 아가씨가 떠나시면 저도 이곳을 떠날 거라서요.”
당신이 없는 세상은 이미 한 번 살아 봤다. 그 지긋지긋하고 끔찍하던 세계에 또 홀로 남겨질 생각은 없다.
“그러니까 저를 많이 보고 싶다면 좀 오래 사시는 수밖에요.”
어쩌면, 다음 세상에서 또 당신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이번 생에서 다시 당신을 만날 수 있었던 것처럼.
어쩌면, 신이 나의 간절한 집착에 손을 들고 나를 당신에게 묶어 두신 걸지도 몰라. 부디 그랬기를 바란다. 설령 그게 당신이 바란 것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이번 삶이, 이토록 만족스러운 삶이 짧을 거라는 것은 아쉽지만,
괜찮다.
그 기간이 길든 짧든. 온 생애에 계속 그녀가 바로 옆에서 웃어 줄 테니까, 충분히 만족스럽다.
어찌 보면 매우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그녀의 수명이 길든 짧든 자신의 옆에만 있으면 만족스럽다는 것은. 하지만 그는 원래 이기적인 짐승이었고. 자기 자신이 쓰레기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아젠의 말을 어떻게 이해한 것인지, 아를렌의 순진한 대답이 조용하게 들려왔다.
“그럼 아젠은…… 수도로 가서…… 왕실 기사단에…… 너는 충분히…….”
점점 느려지고 작아지던 목소리가 어느 사이엔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가 되더니, 곧 고른 숨소리만이 느껴졌다.
아젠은 자신의 몸에 온전히 체중을 넘기고 기대어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그녀를 느끼며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오로지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고요하고 평온한 언덕에 점점이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그의 목을 간지럽혔다. 등 뒤가 따스하다. 그녀의 몸 상태를 생각하면 좀 더 서둘러야 할지 모르겠으나, 좀 더 천천히 좀 더 느긋하게 이 시간을 누리고 싶었다.
오랫동안. 둘이서.
그러나 잠시 후, 언덕 아래에서 누군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아를렌一!”
그 목소리에 그녀가 깨지 않을까 걱정되었지만, 그녀는 이미 곤한 잠에 빠져 있는지 움찔하지도 않았다. 아젠이 언덕을 성큼성큼 뛰어 올라오고 있는 훤칠한 금발의 남자를 향해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공작가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레트비안이었다. 그가 어찌나 성큼성큼 빠르게 뛰어 올라왔는지, 아젠이 몇 걸음 다가가기도 전에 그는 훌쩍 아젠과 아를렌에게 다가왔다.
“아를렌은?”
“잠드셨습니다. 피곤하신 것 같습니다.”
레트비안이 자연스럽게 아젠의 등 쪽으로 다가가 아를렌을 두 손으로 받아 내었다. 등 뒤에서 그녀가 떨어지자 그 빈자리에 찬 바람이 훅 들어와 서늘해졌다.
“아를렌은 내가 데리고 가지.”
레트비안이 아를렌을 받쳐 안자, 아를렌이 잠결에 자신의 오라비의 품으로 파고들다가 가늘게 눈을 떴다.
“으응, 레트 오라버니……?”
“응,우리 귀여운 공주님.”
레트가 아를렌의 이마에 가볍게 촉 입을 맞추며 미소 짓자, 아를렌도 잠시 사랑하는 오라버니를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어떻게 알고 왔어……?”
“우리 공주님이 성에 없기에 모시러 왔지. 집까지 안전하게 모실 테니 안심하고 더 자라.”
레트가 아를렌의 이마에 살짝 볼을 부비자, 아를렌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잠시 그들은 말없이 걸었다.
레트비안의 품에는 아를렌이 새근새근 잠들어 있고, 아젠은 그런 두 사람의 뒤를 두어 발짝 떨어져서 뒤따랐다. 레트의 등에 그녀의 모습이 가려진 채로, 한들한들 흔들리는 머리카락과 치맛자락만이 보였다. 그녀의 무게가 사라진 등 뒤가 다시금 허전하고 추웠다.
아를렌이 곤히 잠든 것처럼 보이자, 레트비안이 그녀가 깰까 조용히 목소리를 낮춰 아젠을 향해 물었다.
“오늘은 어땠지?”
“고아원에 새 아이를 맡기신 후 잠시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셨습니다.”
“아, 그…… 수도에서 데려온 아이 말이지.”
“네.”
“몸은 괜찮았나?”
“특별한 일은 없었지만, 좀 피곤해하시고 열이 약간 오르는 것 같아서 돌아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래.”
그 정도면 굉장히 무탈한 하루였다. 레트비안은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당연한 권리를 행사하듯 그녀를 안고 앞서가는 남자의 등에 아젠의 시선이 꽂혔다.
저 자리는, 설령 정식 기사가 된다 하더라도 대체할 수가 없다.
씁쓸했지만 받아들여야만 했다. 지난 세월 그녀의 바로 옆에서 그녀를 지켜본 그는 이제, 그녀에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배웠기에.
……이제서야.
.*. *. *. *. *. *.
내성 안으로 들어와 아를렌을 무사히 침대에 내려놓은 레트비안은, 한동안 침대에 걸터앉아 아를렌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언제나 사랑스럽고도 안타까운. 하나뿐인 여동생이었다.
살짝 열이 오르려는지, 얼굴이 뜨끈뜨끈하고 손발이 차가웠다.
한참을 그녀를 바라보며 손을 잡아 주던 그는 이윽고 지느에게 이미 잠들어 있는 아를렌의 시중과 간호를 맡기고 나왔다.
밖으로 나온 레트비안을 보고 문밖에 대기 중이던 아젠이 다시금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하자, 레트비안이 가볍게 ‘음.’하고 인사를 다시 받았다.
“이번 가을에 정식으로 기사 서임을 받을 거지?”
“네, 아마도…….”
“그래, 나도 기대하고 있다.”
레트비안은 격려하듯 아젠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후 멀어져 갔다.
아젠은 물끄러미, 멀어져 가는 레트비안을 바라보다가, 이미 닫혀 있는 아를렌의 방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아젠은 전생의 자신과는 모든 면에서 달랐다.
단지 외양이나 출신, 혹은 민족이 다르다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체형도 달랐고, 재능도 달랐다. 그리고 심지어 성격과 표정까지 달랐다.
그것이 달라진 몸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이 따뜻한 슈엘 성의 사람들에게서 받은 영향 때문인지, 혹은 전생에 죽기 전에 했던 뼈저린 후회에서 기인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이게 정말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다른 몸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 비록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고, 전생의 인격이 연결되기는 하였으나, 달라진 몸과 달라진 성격이 그를 이전과 다르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리하여 그는 새로운 기회, 새로운 삶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젠이 기억하는 전생의 그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는 그때 그대로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전생에 그녀의 얼굴이 어땠었는지 자세하게 기억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분명 전생의 그녀도 지금의 그녀처럼 맑게 빛나는 초록색 눈에, 햇살을 모아 만든 듯한 밝은 금발, 크림처럼 달콤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눈부시도록 아름다웠고, 여전히 다정하고 상냥하여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었다. 아젠 자신도 그런 그녀의 손길에 다시 한번 구원받았으니까.
그리고, 여전히, 병약했다.
그녀가 처음에 태어났을 때 온 공작가에는 기쁨과 환희가 가득했다. 이미 후계자가 될 두 아들이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상황에서 부담 없이 얻게 된 딸은 깨물어 주고 싶도록 천사처럼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공작 부부는 물론이고, 두 공자도 여동생이 예뻐서 어쩔 줄 모르며, 한 번이라도 더 아기를 보고 놀아 주려고 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아기가 자라면서 점차 앓아눕는 시간이 늘어나게 되자 서서히 퇴색되기 시작했다.
보통의 아이들이라면 아기 때에는 병치레가 잦다가도 자라면서 점점 더 건강해지기 마련이거늘, 아를렌은 갈수록 약해지고, 자주 앓고, 툭하면 쓰러지기 일쑤였다.
소중한 막내딸을 위해 여기저기에서 의사들을 불러 모았지만. 의사들의 입에서 긍정적인 말은 나오지 않았다.
점점 더 멀리서부터 고명한 의사들을 데려오고, 온갖 귀한 약재를 집으로 사들였지만, 그녀가 건강해지는 날은 오지 않았고, 그녀의 수명을 장담할 수 있는 의사도 없었다.
공작의 얼굴에는 어느덧 수심이 가득했고, 공작 부인의 눈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여동생을 아기 천사라고 여기며 마냥 예뻐만 하던 소년들도 조심조심 유리공예 다루듯 긴장해 함부로 손대지 못하기 시작했다.
유모도 사용인들도 모두 건드리면 깨질까, 언제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까. 항상 안쓰러운 눈으로 아가씨를 돌보았다.
그나마 차도를 보이게 한 명의에게 막대한 재산을 내려 주면서 슈엘에 붙들어 놓고 그녀의 명줄을 붙잡아 놓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리고 어린 아를렌의 눈에도 그런 모습들은 여과 없이 비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으로 인해 눈물짓고 걱정하여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며 자라났다.
다정다감한 어린 소녀는 가족들을 사랑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두 오라버니도, 유모도, 그리고 자신을 돌봐 주는 많은 사람들을……. 그리고 자신이 그 가족들을 슬프게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자신이 그 모든 불행의 원인이라고.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었다면, 혹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건강한 딸이 엄마 아빠의 딸로 태어났더라면, 그러면 우리 가족은 훨씬 더 행복했었을 거라고.
그래서 그녀는, 조금이라도 더 좋은 딸, 좋은 아가씨,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착하고 좋은 딸이 되면, 엄마 아빠가, 가족들이, 그나마 조금이라도 덜 불행하지 않을까 하고.
가족들을, 그리고 주변인들을 그만큼 희생시키면서 부지하는 목숨이니,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어서 갚아야 하지 않을까 하고.
자신이 떠난 후에, 그 아이가 아파서 참 힘들었어가 아니라, 그래도 그 아이가 우리 옆에 잠시라도 있다 가서 참 좋았었지, 라고 기억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부모님께 참 좋은 따님을 두셨었죠, 라고 말해 줄 수 있도록.
그래서 엄마 아빠가 자신을 낳은 것을 후회하지 않으실 수 있다면, 자신이 초래한 불행을 조금이라도 덜어 드릴 수 있다면…….
어린 소녀는 그렇게 바랐다.
그리고, 감히 조금 더 욕심을 부려도 된다면, 혹시라도 신께서 약간 더 관대함을 베풀어 주신다면, 내가 좋아하던 사람들이 그래도 그 아이는 참 좋은 아이였었어, 참 좋은 아가씨였었어 하고 자신을 기억해 줄 수 있었으면…….
그녀를 사랑하고 언제나 바라보고 있던 그녀의 가족들은, 그들의 어린 딸이 좋은 딸이 되기 위해 무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
작고 어린 아이가, 아프다고 투정 부리고 울고 드러누워도 안쓰러울 판에, 아프다 내색하지도 않고 항상 방긋방긋 웃으면서 착한 아이가 되려고 하는 모습은 되레 그들의 마음을 찢어 놓았다.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그녀의 앞에서 눈물짓지도, 과하게 걱정하지도 않고, 항상 웃으며 그녀의 건강에 대해서도 덤덤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녀를 위해 걱정하고 발을 구르고 전전긍긍하는 데에 에너지를 쏟는 것보다. 그녀가 살아가는 귀한 하루하루를 더 행복하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유롭게 자라났다.
그녀는 불편한 사교 모임에 예의상 참석할 필요도 없었고, 다른 귀족가의 영애들처럼 높은 구두를 신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겹겹이 무거운 드레스를 입고 우아하게 걸어 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대신 낮은 굽의 편한 구두와 장식 없는 가볍고 편한 드레스를 입고 자유롭게 성 아래를 오가며, 평민들과 격의 없이 교류했고, 공작과 소공작은 그녀가 번화가를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안전할 수 있도록 외성 내의 치안을 철저하게 관리했다.
그리하여 어느 날 그녀가 신원을 잘 알지도 못하는, 분명 슬러족의 피가 섞인 것이 확실한 보라색 눈의 고아를 빈민가에서 주워 와서, ‘이 애는 제 호위 기사가 되고 싶대요.’라며 성안으로 들여도, 공작가의 그 누구도 그것을 막지 않았다.
뒤로는 그 소년의 뒷조사를 하여 위험이 있는 건 아닌지, 혹은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밀어 넣은 것은 아닌지를 철저히 조사하였을지언정.
그런 의미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아를렌의 예정된 죽음은 아젠에게는 천우의 기회였다.
만약 그녀의 삶이 짧을 것이 예정되어 있지 않았다면, 빈민가의 이민족 혼혈 고아였던 아젠은 고고한 공작가의 고명딸인 그녀의 근처에는 다가가 보지도 못하고 멀리에서 바라만 보다가 삶을 끝냈을 것이기에.
그녀가 고통 없이 오래 살 수 있었다면 자신은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고통받고 오래 살지 못하기에, 그렇기에 그는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있었다.
감히, 더 가까운 자리조차도 넘볼 수 있었다.
그녀의 고통에 슬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감사하고 있는 이기적인 쓰레기가 여전히 이곳에 남아 있었다.
그래도, 그렇다면,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가 행복할 수 있도록 지켜 주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 곁에 있을 수 있으면, 그러면 되지 않을까.
그 정도면, 그녀의 고통을 기회로 삼아 기생하는 이 쓰레기 같은 새끼라도,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명분이 되지 않을까…….
* * *
그해 가을, 루테른 기사단의 정규 기사 서임식이 열렸다.
슈엘에서 몇 안 되는 큰 행사에. 공작 일가와 가신들은 물론, 영지민들도 많이 몰려와 관람하고 있었다.
이번에 견습생에서 기사로 승급된 사람은 세 명이었고, 열여섯 살의 아젠은 그중 가장 어린 나이에 연단에 올랐다. 그는 공작의 뒤편에 자리 잡고 앉아 있는 그의 아가씨를 한번 쳐다보았다. 아를렌은 뿌듯하고 행복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앉은 세 명의 견습생에게 루테른 공작이 다가왔다.
옆에 서 있던 사제가 아젠의 머리 위에 성스러운 물을 뿌리고, 기도문을 읊었다.
아젠은 공작의 손을 잡아 그 손에 정중하게 입을 맞춘 후, 손을 정갈하게 기도하듯 모으고 고개를 조아렸다.
“바에룬에서 온 아젠이 루테른 공작 각하께 칼과 방패를 바치며 맹세하오니,”
그의 앞에 서 있는 주군 루테른 공작이 아닌, 저 뒤에 앉아 있는 다른 사람을 향한, 불경한 맹세문이 시작되었다.
“주군을 충성으로 섬길 것이며, 명예와 영광을 드높일 것이며,”
그가 드높이고 싶은 것은 자신의 명예나 루테른 공작의 영광이 아니었고,
“마지막 한 번의 숨이 다할 때까지 주군을 지키고, 마지막한 명의 적까지 용맹하게 격퇴할 것이며,”
그가 지키고 싶은 사람은 루테른 공작이 아니었으며, 그가 격퇴하고 싶은 적이 있다면 역시 루테른 공작의 적은 아니었다.
“기사의 도리로 약자들을 보호할 것이며, 신께서 내리신 정의를 수호하겠나이다.”
그가 보호하고 싶은 사람은 누군지도 모르는 약자들이 아니었고. 그가 수호하고 싶은 것은 정의가 아니었다.
그는 오로지 한 사람만을 위해 기사가 되었기에.
공작은 칼의 옆면으로 아젠의 왼쪽 어깨와 오른쪽 어깨, 그리고 정수리를 한 번씩 가볍게 두드린 후, 입을 열었다.
“바에룬에서 온 아젠, 루테른의 이름으로 기사로 임명하니, 그 칼로 루테른의 적을 무찌르고 그 방패로 루테른의 땅과 사람을 지키며, 그 숨의 마지막 순간까지 충성을 다할지니, 이 맹세를 심장에 새겨 넣어 기억하리라.”
이윽고, 아젠이 손바닥이 위를 향하도록 두 손을 공손히 앞으로 내밀자, 공작이 아젠의 어깨와 머리에 닿았던 그 칼을 아젠의 두 손 위로 넘겨주었다. 주군으로부터 검을 받음으로써 마침내 그는 정식으로 루테른가의 기사가 되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에 그의 보라색 눈이 비쳐 보였다.
흘끗 아를렌을 다시 한번 보았다. 그녀가 눈에 눈물이 맺혔는지 손수건으로 살짝 눈가를 닦아 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피식 웃음이 났다. 자신이 그녀보다 나이도 많고 덩치도 훨씬 더 큰데, 마치 그녀가 키워 낸 아이의 기사 서임을 바라보기라도 하는 듯 저리 감동하고 뿌듯해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다른 두 명의 견습생 역시 기사 서임을 받은 후, 세 명의 신입 기사들이 자리에서 일어서 뒤돌아 관중들을 향했다. 세 명이 동시에 커다란 동작으로 칼을 휘둘러 미리 허리에 채워져 있던 빈 칼집에 넣자, 모두의 박수갈채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어디에선가 악단이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준비된 콘페티들이 일제히 뿌려져, 구름 한 점 없던 청명한 가을 하늘이 화려한 꽃비로 뒤 덮였다.
아젠은 그대로 아를렌에게로 다가갔다. 기사 서임식을 위해 남청색 기사단 제복을 한껏 차려입은 그는, 정식 기사다운 늠름한 걸음걸이로 그녀에게 당당하게 걸어갔다.
동그랗게 커진 초록색 눈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를렌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청했다.
“루테른 기사단의 기사 아젠, 레이디 아를레네 리시아르 델 루테른께 제 서약을 바치고 싶습니다.”
그녀의 눈이 당황으로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하기 때문에, 그 어떤 기사의 서약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왔다. 아젠도 알고 있었다.
애초에 서약이라는 건 이런 자리에서 선약도 없이 즉흥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미리 레이디를 찾아가 허락을 받고, 서로 합의가 된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형식적으로 서약을 청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를렌은 이미 서약을 청하러 왔던 기사들을 모두 거절했었다. 서약을 한 기사가 레이디를 지키지 못하고 잃는 것은, 설령 그 레이디가 자연사나 병사를 하였다 하더라도 여전히 큰 불명예였기에. 아를렌은 기사들에게 그런 불명예를 얹어 주지 않으려 했다.
그렇지만,
상냥한 그녀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와중에 서약을 거절하여 친애하는 신생 기사에게 큰 망신을 줄 수 없을 테지.
그건 오히려 더 큰 불명예니까. 그렇기 때문에 모든 기사들이 서약을 청하기 전에 미리 합의를 보는 것이기도 했다.
그녀도 왜 아젠이 미리 허락을 구하지 않고 이렇게 급작스럽게 서약을 청하는 것인지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그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아젠은 빙긋이 미소 지었다.
모두가 그들을 주시하며 기대하고 있었다. 아젠이 오랫동안 오로지 아를렌의 호위 기사가 되겠다며 그녀를 쫓아다닌 것을 모르는 사람은 영지 내에 없었다. 모두가, 귀엽고 아름다운 소년 소녀의 로망스의 절정을 현장에서 목격하게 된 것처럼 감격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아젠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 등 뒤의 공작 부부도 뿌듯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은 아를렌이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고 모든 것을 누리기를 바랐으니까. 기사들에게 서약과 추앙을 받는 것도.
어쩌면 젝시온은 ‘저 녀석이 나한테 말 한마디도 안하고 언제 내 동생에게!’라며 펄쩍펄쩍 뛰고, 레트비안은 그 어깨를 지그시 눌러 가라앉히고 있겠지.
아를렌은 주위를 둘러보고, 잠시 당황하고 망설이다가, 결국 고민을 끝낸 듯이 그녀의 머리 위를 장식하고 있던 초록색 리본을 하나 풀어내어. 그의 손목에 묶어 주었다. 받아들인다는 의미였다.
아젠이 그녀의 손에 키스한 후 일어서자,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손목에 묶여 있는 초록색 리본이 바람에 휘날렸다.
아를렌의 얼굴이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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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후, 루테른 기사단에서 온 19세의 기사 아젠이 토너먼트에 참여하여 우승하고, 그 화관을 그의 레이디 아를레네 리시아르 델 루테른에게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