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그녀를 잃었다 (1/13)

그녀를 다시 잃지 않으려면

1. 그녀를 잃었다

한때 에메랄드처럼 빛나고 신록처럼 생기 넘치던 그녀의 눈은 이제 감겨서 다시는 뜨이지 않았다.

한때 찬란한 햇살처럼 반짝이던 금발은 이제 푸석푸석해져 아무 빛도 내지 않았다.

한때 말랑말랑하고 부드럽던 그 하얀 살결은 이제 군데군데 문드러져 흘러내리고 있었고,

한때 달콤한 체취가 가득하던 그 몸에서는 썩어 가는 악취가 가득 풍겨 나왔다.

그는 썩어 가는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 미친놈처럼 울부짖었다.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제발 돌아와줘.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제발 다시 돌아와서 나를 보아 줘.

내 곁에 있어 줘.

제발…….

하지만 그가 아무리 오랫동안 후회하며 울부짖고 사죄하여도,

그녀가 다시 눈을 뜨고 웃어 주는 일은 없었다.

.*. *. *. *. *. *.

그는 전생을 기억했다.

모든 것을 다 기억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대부분의 기억은 마치 짙은 안개 속에 가려진 듯 희미해서, 그는 심지어 그 자신이 누구였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무의미하고 지긋지긋하던 잿빛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빛나고 유일하게 따뜻하던 그녀의 자취만은 선명하고도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녀가 누구였는지, 그녀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같은 건 뚜렷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맑게 빛나던 초록색 눈, 밝게 웃음 짓던 표정, 부드럽던 손길에서부터 전해져 오던 따스한 온기, 나비처럼 가볍고 경쾌하던 발걸음,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무너지고 부서져 붉은 피 웅덩이 속으로 가라앉던 그 악몽 같던 모습까지…….

그 모든 것들은 마치 지금 당장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 *. *. *. *. *.

전생에서, 아직 어린 소년이었던 그가 그녀를 처음 만난 곳은 어느 숲이었다.

나무가 그다지 우거지지 않아 햇빛이 제법 밝게 스며 들어오던 숲, 그는 상처투성이로 어느 나무 밑에 기대어 앉아 숨을 몰아쉬며 쉬고 있었다.

피곤했다.

그날도 그놈들에게 두들겨 맞은 후, 오늘 치 맞을 것은 다 맞았나 보다 라는 시답잖은 감상과 함께 숲으로 들어와 쉬고 있던 중이었다.

사실 온몸에 난 상처에서는 별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원래 그렇게 타고난 몸이었다. 통증을 잘 느끼지 못하는.

그러나 그럼에도, 한바탕 죽도록 얻어맞고 나면 온몸에 힘이 빠지고 몸을 가누기 힘들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 번 얻어맞고 나면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 나무에 몸을 기대고 쉬곤 했었다. 사람들이 잘 들어오지 않는 이 숲은 그에게 좋은 휴식처가 되어 주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었다. 그를 꺼리는 사람들과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

그를 꺼려하는 사람들은 그와 마주치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피해 멀리 돌아가곤 했다. 그편이 나았다.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를 발견하면 삐딱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향해 다가왔으니까.

그리고 이어지는 폭력.

사실 별로 아프진 않았다. 그러나 그가 비명을 지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그들을 자극하는 듯했다. 그들은 마치 언제까지 네가 아파하지 않고 버티나 보자는 듯 그를 때리곤 했다.

소년은 그러한 폭력을 그저 지루함으로 견뎌 냈다. 지긋지긋했다. 가끔 폭행이 너무 길어진다 싶으면 일부러 거짓 신음이나 비명을 연기하기도 했다.

이렇게 많이 맞고 있는데 왜 아직도 죽지 않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일부러 안 죽을 만큼만 패는 건가?

아마 그렇겠지. 그리 쉽게 죽이고 무마할 수 있는 그런 신분은 아니었으니까, 그를 정말로 죽이기 위해서는 적 당한 명분과 상황이 필요했을 것이다.

한번은 그들을 모두 때려눕힌 적도 있었다. 그때 소년은 알게 되었다. 그는 어리지만 사실 그를 때리는 대부분의 어른보다 강하다는 것을.

그러나, 그 후 벌어진 일들로 인해 한 가지를 더 배웠다. 그에게 반항할 수 있는 힘이 있을지언정, 반항할 수 있는 권리나 자격은 없다는 것을.

그 후 그는 그냥 아무 반항 없이, 정해진 일과처럼 맞고, 숲으로 와서 휴식을 했다.

이 지긋지긋한 세상은 도대체 언제 끝나는 건지.

소년은 눈을 감고 뒤통수를 나무에 기댄 채 힘들게 긴 숨을 뱉어 내었다.

언제까지 이 아무 의미 없는 세상에 남아 지루한 하루를 또 존재하고 있어야 하는 건지.

소년은 지치고 피곤한 눈을 반쯤 떴다. 초점 없는 눈에 회색빛 세상이 흐리게 들어왔다.

그냥,

아무런 의미도 없는 세상.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 무렵, 그의 시야에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

비슷한 또래의 어린 여자애였다.

보통 이쪽으로는 사람이 별로 들어오지 않아서 이곳에서 쉬고 있는 것이었는데. 눈에 띄기 전에 자리를 옮길까. 하지만 이미 그러기엔 늦은 것 같다.

곱게 차려입은 모습을 보니 어느 귀한 집 따님 같은데, 숲에 들어왔다가 길이라도 잃으신 건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불길하다. 이쪽으로 오는 건 아니겠지.

사람은 귀찮다.

시선으로든 말로든 주먹으로든, 맞아 봐야 별로 아프지는 않다. 하지만 오늘 하루 치 폭력은 이미 충분히 받아 냈으니, 더 이상은 상대하고 싶지 않은데. 제발 그냥 지나가 주었으면.

하지만, 늘 그렇듯. 그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소녀는 그의 모습을 발견하자 화색을 띠고 그를 향해 폴짝폴짝 뛰어오기 시작했다.

한숨이 나왔다.

“저기, 실례합니다.”

다가오면서 예의 바르게 부르는 품새며 말씨가 귀한 집 아가씨가 맞는 것 같았다. 말을 무시하면 또 무시했다고 뭐라고 할지 모르니 무턱대고 무시할 수도 없다. 길을 잃은 것 같아 보이니 대충 길을 알려 주고 빨리 보내 버리는 게 낫겠지.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길을 잃어서…… 헛,”

가까이 다가오던 소녀가 깜짝 놀라 멈춰 섰다.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는 소년이 그저 숲의 정경을 즐기고 있던 것이 아니라 온몸을 다친 채 힘겨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아챈 모양이다.

그러나 소년은 소녀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이 소녀가 빨리 가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대충 손가락으로 숲에서 나가는 방향을 가리켰다.

“나가는 길, 저쪽이야.”

소녀의 시선이 그의 손가락에 한 번 내려앉은 후,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따라갔다가, 다시금 그의 상처 이곳저곳을 배회했다.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리는 것이 제법 많이 놀란 듯했다.

“저기, 괜찮아? 많이 다친 것 같은데, 사람을 불러올까? 도움이 필요한 거지?”

“괜찮아, 필요 없어. 그냥 가. 저쪽이야.”

“아니, 하지만…….”

그는 다시 한번 나가는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눈을 감아버렸다.

그가 아는 모든 사람은 그를 싫어하거나 꺼렸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서 좋은 일이 일어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그도 사람들이 싫고 꺼려졌다. 무시하고 조용히 지나가 주는 것이 가장 고마운 일이었다.

그러니까, 이 소녀도 제발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고 가 주길.

그러나, 그가 아무리 오랫동안 소녀를 무시하고 있어도 그녀의 인기척은 사라지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있어도, 가까이에서 계속 움찔거리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소년은 모르는 척 무시하며 버텨 보았지만, 제법 오랜 시간을 기다려 보아도 그 소녀가 떠나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소년은 한숨을 쉬며 다시 눈을 떴다가,

아?

초록색,

눈앞에 마주친 맑은 초록색에 그대로 멈춰 버렸다.

투명하고 반짝이는 그 무언가가 그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가까운 곳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눈을 마주쳐 버린 소녀가, 멋쩍은 듯 살짝 웃는 소리를 내며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원래 사람의 눈에 색이라는 게 있는 거였던가?

낯설었다. 사람의 눈에서 빛깔을 느낀다는 것이.

소년은 홀린 것처럼 그 초록색 눈망울을 바라보았다. 태어나서 사람의 눈동자를 처음 본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눈 색깔 따위. 의식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다른 이들의 눈을 이리 바라볼 일이 있기는 하였던가?

다른 사람들과 눈을 마주칠 일 자체가 별로 없었거니와, 어쩌다 마주치는 눈은 모두 경멸의 빛을 띠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선명한 초록색으로 밝게 빛나고 있었고,

맑고,

투명했다.

소년은 미처 몰랐으나. 그것은 소년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주쳐 본, 오로지 호의만으로 그를 보는 눈빛이었다. 경멸도, 무시도. 혐오도, 그 어떤 부정적인 감정도 스며 있지 않은.

그는 몇 번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그 맑은 녹색에서 눈을 떼지는 못했다.

그렇게 그 투명한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다 보니, 그녀의 초록색 눈에서부터 시작된 색감은 어느덧 주위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무채색의 세상에 나타났던 무채색의 소녀에게 색이 입혀지기 시작했다.

그는 서서히. 눈부신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는 머리카락도, 촉촉하고 보드라워 보이는 연분홍색 입술도, 머리 위에 곱게 얹혀 있는 하얀 모자와 거기에 달린 초록색 리본, 그리고 그녀가 입고 있는 리넨 드레스의 밝은 연두색까지도 인식하게 되었다.

어두침침하고 우중충한 세상에서, 홀로 풍성한 색을 보이고 있는.

그때, 너무 빤히 바라보고 있었던 것인지, 소녀가 주춤하며 뒤로 살짝 물러서고는, 입을 오물거리며 쭈뼛쭈뼛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너무 많이 다친 것 같은데”

문득 정신이 들었다. 자신이 여태껏 바보처럼 그녀의 눈만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신경 쓰지 말고, 가.”

“하지만. 이렇게 아픈 사람을 놔두고 어떻게 그냥 가.”

“안 아파, 놔둬.”

그건 정말이었다. 아프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소녀는 시선을 소년의 왼팔로 내렸다. 팔에서는 아직도 피가 흘러나오고 있는 길쭉한 상처가 있었다.

무슨 생각인지 그놈들 중 하나가 칼로 찌른 상처였다.

그는 오른손으로 왼팔의 상처를 잡아 소녀의 시선에서 가려 버렸다.

“……나중에 의사한테 가볼 테니까, 가.”

의사를 보러 갈 생각 따위는 없었지만, 일단 소녀가 만족할 만한 대답을 지어내서 내뱉었다.

소녀가 다시 말간 눈을 들어 그와 마주 보았다.

“그럼 일단 이것만 지혈해 줄게. 그건 괜찮지? 나중에 꼭 의사한테 가서 제대로 꿰매야 해.”

“…….”

이상했다. 저 눈동자만 마주치면 뭔가 멍한 정신으로 홀린 듯 바라보게 된다.

딱히 승낙하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눈을 보고 있다가 대답할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하지만 소녀는 그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금방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얗고 작은 손을 바쁘게 움직여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뒤적이다가 이윽고 모자를 벗어 초록색 리본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문득 그녀가 그의 시선을 느끼고는 당황하며 변명을 시작했다.

“아, 이거, 오늘 처음 쓰고 나온 모자라서 깨끗한 거야. 음, 물론 붕대만큼 깨끗하게 소독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은 이런 것밖에 없어서…… 금방 의사한테 갈 거니까 잠깐 정도는 괜찮을 거야.”

그제야 그는 자신이 그녀의 손을 물끄러미 계속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흠칫 시선을 땅으로 내리며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신경 안 써. 괜찮아.”

소녀는 멋쩍은 듯 잠깐 헤헤 웃고는, 그의 왼쪽에 가깝게 다가와 앉았다. 달콤한 향기가 코로 흘러들어 왔다. 처음 느껴 보는 갑작스러운 자극에 당혹스럽고 숨이 막혔다.

그녀가 한 손으로 그의 왼손을 부드럽게 쥐자, 손바닥 안쪽 말캉한 살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체온에 그가 움찔했다.

“앗, 아팠어?”

“……아니…….”

팔이 아픈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건 무슨 느낌이지.

그녀의 손이 닿은 곳에서부터 따스한 온기가 팔을 타고 올라와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심장으로 스며들어 오는 열기에 이상하게 울렁거렸다. 아픈 것 같기도 했다. 아픈…… 어쩌면 이런 게 아픔일지도 모른다. 무언가, 여태껏 느껴 본 적 없는 생소한 신체 반응. 기분이 이상했다.

사람하고 닿는다는 게 이렇게 부드럽고 따듯할 수 있는 것이었나.

소년은 그의 손을 자신의 무릎 위로 올려놓는 소녀의 부드럽고 매끈한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손이라는 게 이렇게 온화할 수 있는 것인지 몰랐다. 그가 아는 손은 모두 거칠고 폭력적이었기에. 뿌리치거나, 때리거나, 잡아당기거나, 밀거나.

소년이 처음으로 겪어 보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동안, 소녀는 다소 서툰 솜씨로 초록색 리본을 그의 왼팔에 꼭꼭 감기 시작했다.

“어쩌다 이렇게 다친 거야? 누구한테 맞았어?”

“……신경 쓰지 마.”

“하지만 이건, 맨손으로 때린 걸로 끝난 것도 아니고, 자상이잖아.”

그녀가 작은 손으로 매듭을 꼼꼼하게 묶고 나서 그를 마주 보았다. 탐해서는 안 될 것을 탐하고 있다가 들킨 것처럼 뜨끔한 소년은 잠시 시선을 피했다가, 이윽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눈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깨끗하고 청명한 눈.

이런 걸 내가 들여다보아도 되는 걸까.

그에게 허락되지 않는 신성하고 깨끗한 것을 함부로 들여다보고 침범하는 그런 느낌.

그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그의 세계에는 없었던.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도움 같은 건 필요 없어.”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습관처럼 그녀를 밀어 내었다. 이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이질적인 무언가가 그의 잿빛 세계를 바꾸고 침범하려 하고 있었다. 불안했다. 가슴이 자꾸 울렁거리려 하는 낯선 느낌이 매우 불편했다.

소녀는 잠시 작은 한숨을 내뱉더니,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시선을 돌려 그의 몸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다른 상처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 눈길은 여전히 따스하고 부드러웠고, 그 표정에는 오로지 걱정과 호의만이 가득했기에, 소년에게는 무척 낯설고 어색했다.

……그녀는 아마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거다.

그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내 정체를 모르니까 이러는 거다. 내가 누군지 알게 되면, 그때는 저 눈빛이 달라지겠지.

빛이 선명한 저 투명한 눈이 다른 사람들의 눈처럼 회색빛을 띤 경멸의 눈동자로 바뀐다면, 그건…… 큰 상실일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래 자신의 세계에 허락되지 않았던 저런 것은, 그냥 잠깐의 착오로 인해 벌어진 오류일 뿐이었다. 이런 오류는 빠르게 정정하고 원래대로 돌아가는 게 나았다.

그럴 것이다. 이 이상한 감정을 가라앉히고, 원래의 무채색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이 침범이 더 거세어져서 돌이킬 수 없게 된 후에 저 빛이 경멸로 바뀌어 버리면, 그건, 더 견디기 힘들 것 같으니까.

그는 툭 하니 자신의 정체를 밝혀 버렸다.

그의 목소리에 그녀가 살짝 놀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다시 눈을 마주칠 것 같았으나 그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색채가 사라져 있을 그 눈동자를 보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호의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경멸이 가득 차 있을 것이…….

그러나, 언제까지 피할 것인가. 어차피 그게 당연한 것이다. 방금 전의 그 이질적이었던 빛이, 온기가, 그쪽이 더 이상했던 거지.

이제 다시 눈을 돌려 보면 그에게 익숙한 부정적인 눈빛을 보게 될 것이고, 그는 그렇게 그의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는, 가라앉은 세계.

그는 애써 기대를 누르며 천천히 고개를 들고 그녀의 눈을 마주했다.

아.

그녀는, 그 밝은 초록색 눈을 부드럽게 휘며 사르르 웃고 있었다.

심장이 일렁였다. 저릿하니 아파 왔다.

“날 걱정해서 알려 주는 거야? 고마워. 근데 걱정하지 마, 난 괜찮을 거야.”

그날. 소년의 잿빛 세계에 균열이 생겼다.

처음으로 빛과 온기, 그리고 통증이 새어 들어왔다.

이제 더 이상 그의 세계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 *. *. *. *. *.

그건 물 밖의 세계를 알지 못한 채 물속에 잠겨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던 자에게, 처음으로 주어진 한 번의 숨이었다.

모르고 있었을 때에는 기대한 적 없었으나, 알고 나서는 놓을 수가 없었다.

소녀는 그저, 평소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던 것처럼 지나가다 발견한 불쌍한 소년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을 뿐이었으나. 소년에게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다.

소년은 그 새로운 세계와 그녀를 구분하지 못했으며, 구분하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에게는 소녀 자체가 새로운 세계였다. 한 번도 허용된 적 없었던, 그러나, 한 번 스쳐 본 것만으로도 갈망하게 된.

서늘한지 모르고 살아왔던 세상은 한 번 온기를 느껴 본 이후 너무나도 차갑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잿빛인지 모르고 보아 왔던 풍경은 한 번 색채를 보고 난 후로 너무나도 우울하고 단조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땅에 발을 딛지 못하고 항상 붕 떠 있던 그의 발이 그 소녀라는 땅에 처음으로 내려 닿은 것만 같았다. 굶주리고 있는지 몰랐던 소년은 소녀의 달콤함을 처음으로 맛본 후 자신이 그동안 굶주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감각이 생소하고도 신기했다.

다시 보고 싶었다.

다시 닿고 싶었다.

다시 마주 바라봐 주고, 웃어 주기를 바랐다. 그 달콤한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래서 그 새로운, 그가 몰랐던 찬란한 세계를 다시 엿보고 싶었다.

다시 그 소녀를 볼 수 있는 방법을 몰랐던 소년은 다음 날 또다시 그 나무 밑을 찾았다. 일부러 그놈들이 다니는 곳에 발을 들이고 그들을 자극해 대놓고 더 맞은 후에 그 나무 밑에 가서 쉬면서 소녀가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나타났다.

이번엔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일부러 이곳을 찾아온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그냥 똑바로 그를 보면서 다가왔다. 처음엔 반가운 표정을 띠고 다가오다가, 그의 상처를 발견했는지 바로 미간을 찌푸리고는 포르르 달려왔다.

손에 든 바구니에 뭐가 들어 있나 했더니, 이번엔 약과 붕대와 음식 몇 가지를 챙겨 왔다.

하, 귀엽기도 하지.

사람에게 이런 감정을 느껴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해 봤었는데.

그 후로 이것은 반복되는 일과가 되었다.

그는 일부러 그들을 자극해 두들겨 맞았다. 이전에는 그저 지루함이었던 그 폭력의 시간들이 이제는 곧 소녀를 볼 수 있다는 희열이 되었다. 충분히 다치지 않은 것 같으면 스스로 상처를 좀 더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하여 충분히 많은 상처가 만들어졌다 싶으면 그는 숲으로 들어가 나무 밑에 앉아 즐거이 그녀를 기다렸다. 올까. 오늘은 올까. 언제 올까. 기다린다는 것. 그 설렘. 그 가슴의 아찔한 술렁임. 모든 것이 낯설고 신선하며, 달콤했다.

소녀는 매일 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종종 약 바구니를 들고 찾아와 다정하게 그를 걱정하며 치료해 주었다. 쉬지 않고 종알거리며.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매번 때릴 수가 있냐, 나쁜 사람들이다, 자신은 자주 올 수 없으니 제발 몸을 사리고, 좀 숨어 다니거나 피해 다닐 수는 없냐는 등. 아픔을 느끼지 않는다고 해서 상처를 늘리지 말아 달라, 큰 상처가 아니라도 곪으면 큰 병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등.

감미로운 노래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잔소리가 귓속으로 쉴 새 없이 들어왔다.

안쓰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부드러운 손이 몸에 닿아 오면, 심장에 아찔한 통증이 울리며, 그의 온몸에 나른한 봄기운이 퍼져 나갔다.

다른 그 어떤 곳에서도 느낄 수 없는 감각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 눈을 반쯤 감으면, 그녀는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거냐고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금 그를 바라보고는 했는데, 그렇게 마주치는 눈빛조차 좋았다.

그가 일부러 더 많이 맞고 온다는 것을 그녀는 상상조차 못 하는 것 같았다. 다음에는 칼자국을 하나 더 만들어 올까, 어디에 만들어 오는 것이 좋을까 따위의 생각을 하며 그녀의 손길을 즐겼다. 하지만 너무 노골적으로 만들어서 들키면 안 될 테지.

아쉽게도 치료가 다 끝나면, 그녀는 주섬주섬 약과 붕대를 바구니에 챙겨 담은 후, 미리 준비해 온 맛있는 음식 몇 가지를 그의 앞에 펼쳐 놓았다. 그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다닐까 봐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것이 사실이긴 했지만.

그리고 그가 그것들을 가능한 한 천천히 맛보는 동안, 그녀는 근처에서 꽃을 따고 나뭇잎을 구경하다가, 기분이 좋으면 홀로 춤을 추기도 했다.

햇빛을 받으며 나비처럼 나풀나풀 춤을 추면, 그녀의 노란 드레스 자락이 만개한 꽃처럼 펼쳐진다.

그러다가 자기처럼 노란 나비를 발견하고는 그 뒤를 폴짝폴짝 쫓아다니는 모습을 구경했다.

참으로 다채롭고 귀여운 생명.

수없이 많은 군중들 속에 숨어 있다고 하더라도, 언제 어디서든 그녀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에게서는 언제나 생기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것이 그녀의 생명력이 찬란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잠시 나비의 뒤를 이리 폴짝 저리 폴짝 쫓아다니던 그녀는, 한 번도 나비에 스쳐 보지도 못한 채 헉헉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소녀는 원체 몸이 약해서, 조금만 뛰어도 금방 지쳐서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는 자리에 주저앉아 한참을 쉬고는 했다.

“……잡아 줄까?”

“아니, 아니야. 그냥 예뻐서 보고 싶었을 뿐이야. 정말로 잡으면 나비가 다치잖아. 그리고 환자는 앉아서 쉬고 있어야지.”

그가 보기엔 고작 그것 좀 뛰었다고 그리 숨을 헉헉 몰아쉬며 힘겨워하고 있는 소녀가 더 환자 같아 보였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수긍했다. 그녀 앞에서 그의 역할은 불쌍한 환자였고, 그는 그 연기에 충실할 생각이었으니까.

.*. *. *. *. *. *.

소녀가 찾아와 치료해 주는 나날이 계속되면서. 소년은 소녀에게서 제법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약을 발라 주고 붕대를 감아 주는 동안 소녀는 계속 종알거렸다.

그중 상당수는 잔소리였지만, 그녀의 주위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일상 이야기도 많았다. 그녀는 종종 부모라든가 형제라든가 유모나 하녀와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사실 소년은 그녀의 주위 사람들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었다. 소년이 아는 부모나 형제라는 존재는 그를 가장 싫어하고 가장 괴롭혔으며 시종들로 하여금 그를 때리도록 사주하는 이들이었으므로, 소녀가 행복한 표정으로 부모나 형제에 관해 이야기하면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유모나 친한 하녀에 관해 들을 때에는, 그의 형제들의 시종들이 그의 형제들에게 어떻게 대하는가를 떠올려 보긴 했으나, 글쎄.

그러나, 소녀의 목소리는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게 만드는 다디단 음악이었으므로, 그는 내용은 흘려 버리고 그저 그 목소리를 감상했다.

그가 평생 들어 본 고함과 욕설들과 달리, 그녀의 목소리는 듣고 들어도 더 듣고 싶었으니까.

그러나 오늘은, 그 감미롭던 음악 한가운데 거슬리는 내용이 귀에 걸렸다.

“이번에 우리 가문에 새로 들어온 남자아이가 있거든.”

그녀가 그 아이를 떠올리며 기분이 좋아졌는지 밝게 웃었다.

“나중에 커서 내 호위 기사가 되어서 지켜 주겠대.”

그녀가 살짝 수줍어하며 말했다. 그토록 바라던 부드러운 손이 자신의 팔에 약을 발라 주는 중이었는데도, 그는 어쩐지 그 손길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좀 부끄럽긴 하지만, 음…… 뭐 아무래도 그런 건 좀, 기대되잖아?”

그녀의 얼굴이 살짝 발그스름해졌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몰라도,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그의 속을 모르는 그녀는 이후로도 계속해서 재잘거렸다. 그 새로 들어온 기사 견습생이 호위 기사가 되겠다고 얼마나 열심히 훈련을 하고 있으며, 얼마나 재능이 있는지 따위의 거슬리는 이야기를.

아아, 그래, 매우 거슬렸다.

부모나 형제의 이야기를 할 때는 그래도 괜찮았는데, 다른 놈 이야기가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매우 거슬렸다. 심지어 그녀가 ‘멋있다’는 표현을 쓰기 시작하자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피하기가 힘들었다.

그는 자신의 말투가 너무 퉁명스럽게 들리지 않도록 애쓰며 입을 열었다.

“그런 거 좋아해?”

“응?”

“기사라든가, 그런 거.”

“아, 음, 뭐,”

그녀가 살짝 당황한 듯 작은 입을 오물거리더니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을 이었다.

“으응. 기사라든가, 토너먼트에서 우승해서 화관을 바치고, 레이디에게 서약을 바치고, 뭐 그런 거…… 아무래도 좀 멋있잖아? 내가 몸이 약해서 그런 것도 있을 거야. 나는 그렇게 강해질 수 없으니까,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동경? 그런 거?”

시간이 지나 그녀가 나풀나풀 떠나가고, 그녀의 연노랑 치맛자락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계속 앉아있었다.

한참을 굳은 표정으로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던 그의 앞에 어디선가 노란 나비가 하느작하느작 날아왔다.

언젠가 그녀가 쫓아다니던 그 나비인가.

나비는 아무 경계 없이 주위를 날아다니며 이 꽃 저 꽃 위에 내려앉으며 햇빛을 즐기고 있었다.

문득 충동이 들었다.

저게 그렇게 예쁜가.

가져 볼까.

그의 매서운 눈이 나비의 뒤를 좇았지만, 나비는 그 눈빛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느긋하고 여유롭게 날고 있었다.

순식간에 그의 손이 나비를 움켜쥐었다.

한순간이었다. 나비를 잡는 일 따위, 그에게는 아주 손쉬운 일이었다. 그저 손을 뻗어 움켜쥐기만 하면 되는.

손 안쪽에서 나비가 바르작거리면서 피부를 간질였다.

잠시 손아귀의 힘을 풀고 살짝 손을 열어 보자 나비는 재빠르게 손가락 틈 사이로 빠져나갔다.

보잘것없는 몸부림에 피식 웃은 그가 순식간에 나비를 다시 낚아챘다.

감히 다시 도망치지 못하도록 약간만 날개를 망가트리는 게 낫겠다.

그가 살짝 손에 힘을 주자, 손안에서 무언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년이 손의 힘을 풀고 주먹을 펼쳐 보자. 완전히 뭉개져 버린 노란 나비의 사체만이 남아 있었다.

.*. *. *. *. *. *.

시간이 지나고 여러 번의 계절이 바뀌며, 만남이 거듭되고 보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그는 더더욱 그녀에게 중독되었다.

볼수록 더 보고 싶었고, 닿을수록 더 닿고 싶었다.

그에겐 그녀가 필요했다.

갈망했다.

그녀를 보게 되면 그 갈증이 해소되었다가, 헤어지고 나면 목이 말라 소금물을 마셨던 사람처럼 갈증이 더 강해졌다.

그러나 그녀를 자주 볼 수는 없었다.

그가 매일 다친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그녀는 무리해서라도 자주 숲으로 오려고 하고는 있었지만, 매일 올 수는 없었다. 허약한 그녀의 몸이 안 좋아져서 저택에 칩거하는 나날이 이어지면 그는 타오르는 갈증에 괴로워했다.

최악은 그녀가 영지로 내려가 이곳에 방문하지 않는 길고 긴 계절이었다. 메마른 사막 위에서 물 한 방울 없이 버텨 나가는 기분이었다.

항상 보고, 항상 닿고, 항상 곁에 있으면 좋겠다.

매일 그를 바라보고, 웃어 주고, 그 따스한 손으로 어루만져 주면 좋겠다.

어쩌다 한 번 잠깐씩 그 시간을 빌려 쓰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그녀의 모든 시간이 그에게 주어졌으면 좋겠다.

다른 그 어떤 놈에게도 잠시도 나눠 주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보지 않고 이곳에 오지 않는 시간 동안, 웬 평민 기사 견습생 놈을 그 밝은 미소로 응원해 주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피가 거꾸로 치솟는 기분이었다.

그딴 기사 따위, 그는 훨씬 더 쉽게 될 수 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그가 훨씬 더 강할 것이다. 기사가 멋져 보인다면, 기사가 되면 된다.

그녀를 온전히 갖고 싶다.

가져야겠다.

가지고 말겠다.

처음이었다. 여태까지 아무것도 탐내 본 적이 없었다. 아무것도 가져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정말 이 하나만은 그의 온 생명을 다해서라도 가지고 싶었다.

결심을 굳힌 그에게 그녀는 이미 그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언젠가 반드시 가질 것이니까. 지금 당장 그의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조만간 가질 테니까.

.*. *. *. *. *. *.

그러나 그는 그녀를 가질 수 없었다. 최소한 지금은.

소녀는 언제나 아무 스스럼없이 그를 대했지만, 사실 그녀는 그가 감히 닿을 수 없는 저 높은 곳에서 빛나고 있는 보석이었다.

고명한 귀족가의 귀하디귀한 아가씨. 성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매일매일 학대를 견뎌 나가고 있는 그에게는 닿을 수조차 없는 높디높은 곳이었다.

그래서 그는 위로 올라가기로 했다.

위에 있는 빛을 움켜쥐려면, 위로 올라가서 꺾는 수밖에.

.*. *. *. *. *. *.

그는 기사 서임을 받았다.

그러나 기사로서의 모습을 그녀에게 보여 줄 수 있었던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그녀가 언젠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토너먼트에서 우승해 그녀에게 화관을 바치고 싶었으나 실패하고, 씁쓸한 마음으로 시합장을 내려오기가 무섭게 그의 아비는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그를 재빠르게 사선으로 보내 버렸다.

어쩌면 예상했던 바였다. 그러잖아도 그가 어디에선가 합법적으로 죽어 버렸으면 하고 바라던 부모 형제들이다. 이미 괴물 같은 놈이라는 평을 듣고 있던 그의 무력은, 당당하게 그를 사지로 내보내는 좋은 명분이 되어 주었다.

그에게도 나쁘지 않은 결정이었다. 오히려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가장 빠르고 쉽게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은 전공을 세우는 것이었으니까. 아비는 그가

살아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고 사선으로 보냈으나, 그는 전공을 세워 돌아오리라.

오랜 시간 그녀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으나, 영원히 그녀를 그의 옆에 두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니 견뎌 낼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그곳에서 죽기를 기대했다. 살아남으면 더 힘들고 위험한 곳으로 그를 몰아갔다. 그러나 그는 매번 살아 돌아오고 또 살아 돌아왔다.

그는 스스로 더 위험하고 가망 없는 곳으로 뛰어들었다. 그럴수록 더 좋은 기회가 생기고 더 빠르게 올라갈 수 있기에.

그가 돌아올 때마다 그의 손에는 더 많은 것이 쥐어졌고, 그의 어깨에는 더 많은 것들이 달렸다.

모두가 괴로워하는 진창이었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바뀌어 나갔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사람들을 죽여 나가는 행위도 그에게는 그닥 끔찍한 행위가 아니었고, 그 주위의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광경도 그에게는 그닥 꺼려지는 광경이 아니었다.

애초부터 죽음이나 부상에 대한 공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의 고통에 무딘 그는 남의 고통에도 무감했고,

한 명을 더 죽일 때마다 그만큼 더 그녀에게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무수히 많은 시체를 만들어 낸 후 막사에 돌아오면, 피 한 방울 튀지 않도록 소중히 품에 간직해 두었던 초록색 리본을 꺼내 들고 그 냄새를 맡았다.

그녀의 향기가 배어 있을 리 없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만약 리본에 배어 있는 체취가 있다면 그건 자신의 냄새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고 있으면 마치 그녀의 체취를 맡는 듯한 착각이 들었고. 그는 그런 환상을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시간이 흘러갔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를 따르면 살아 돌아올 수 있었고, 이길 수 있었고, 정복할 수 있었다.

몇 년이 지나고. 소년은 청년이 되었다. 온몸에 흉터를 가득 달고, 이보다 더 세우기 힘들 정도의 공을 세우고, 그 압도적인 무위와 위업으로 북부 군사력의 지지를 받는 훤칠한 기사가 된 그는, 드디어 작위를 받고 수많은 금은보화를 가득 실은 채 당당하게 왕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제 그의 그녀를 데려올 시간이었다.

전장에서도 곱게 챙겨 가지고 다니던, 그녀의 눈을 닮은 커다란 에메랄드 목걸이를 그 하얗고 가느다란 목에 걸어 줄 것이었다. 손가락 하나하나마다 가지각색의 반지들을 끼워 주고, 그 발목에는 금줄을 돌돌돌 감아 주고, 구름처럼 보드라운 비단으로 온몸을 휘감아, 금은보화가 가득한 방에 들여앉혀 주리라.

그리하여 그녀가 머물고 있던 영지에 당당하게 찾아갔을 때,

그녀는 더 이상 예전의 앳된 소녀가 아니라 활짝 피어난 아름다운 여인이 되어.

애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이쪽은 제 호위기사인……이에요.”

그가 아닌, 다른 남자를 바라보면서.

평민 기사 따위가…….

감히…….

감히,

감히!

.*. *. *. *. *. *.

혼담이 거절당했다.

그녀의 아비라는 자가 이런저런 이유를 댔지만, 결론은 거절이었다.

그녀는 그의 것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그토록 오랫동안 그녀를 보지 못하면서도 참고 지옥 같은 아수라장에서 무자비하게 칼을 휘둘러 댈 수 있었다. 곧 그녀를 가질 수 있으니까. 그녀에게 어울리는 신분이 되어서.

하지만 거절당했다.

어째서?

그는 그녀를 정당하게 가지기 위해 노력했고, 성취했다. 그녀가 있는 곳까지 올라가서 당당하게 데려오고자 했다.

그런데 그녀의 아비라는 자가, 단지 아비라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부당하게 비틀어 버리다니.

결국 또 그놈의 저주받은 출생 때문인가. 빌어먹을, 잘못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뭐든지 다 감내하며 살아왔는데, 유일하게 단 하나뿐인 내 것마저 허용하지 않겠다고?

그는 이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평화롭고 우아하게 데려오려고 했었다. 그녀에게 어울리는 방식으로.

그러나 불공정하게 일이 비틀려 버렸다면, 나의 방식으로 데려오는 수밖에.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것을 되찾아 오는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그에게는 그 어떤 죄악감도 없었다.

그녀가 있는 곳까지 올라 그녀의 손을 다정하게 잡아당기는 일이 틀어졌기에, 그는 이제 그녀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그녀를 꺾어 오기로 했다.

.*. *. *. *. *. *.

왕자들의 계승전이 끝났을 때, 그는 새 왕세자의 오른팔로서 이보다 더 높아질 수 없는 권력을 손에 쥐었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가문을 휩쓸어 그 목들을 광장에 내걸고, 빠져나간 그녀를 뒤쫓아 갔다.

그 빌어먹을 평민 기사 새끼와 같이 도망쳤다는 사실에 분노가 머릿속을 녹여 버리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서늘한 달밤, 홀로 절벽 앞에 주저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를 보는 순간 그 모든 분노는 바람에 날려 사라져 버렸다.

그 기사새끼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고. 버림받고 혼자 수그리고 있는 그 애처로운 모습이라니…….

거칠어진 피부와 헝클어진 머리카락. 여기저기 더러워지고 찢어진 옷자락이 가슴 아팠다. 얼른 따뜻한 성으로 데려가서 장미 향 가득한 대리석 욕조에 몸을 녹여 주고, 광택이 줄줄 흐르는 최고급 실크 드레스로 온몸을 감싸 주고 싶었다.

바스락바스락 낙엽을 밟으며 그녀에게 다가가는 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핏기가 사라지고 바짝 마른 입술, 그리고, 버석하게 잿빛으로 메말라 있는 그녀의 눈동자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 순간, 그는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아마 이때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을 테지만, 이내 그는 그런 감각은 부정해 버렸다.

이제 그녀는 그의 곁에 있을 것이고, 모든 것은 더없이 만족스러워질 것이다.

그래, 그럴것이다.

그는 애써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녀가 휘청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메마른 입술을 움직이며 뭔가 말을 하려다가 말기를 반복하더니, 절벽 쪽으로 뒷걸음질 쳐서 바짝 붙어 섰다.

제대로 균형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것이 무척 아슬아슬했다.

그는 당황하며 멈춰 섰다. 만약 그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추포하러 온 것이었다면 위험은 좀 있겠지만 절벽으로 떨어지기 전에 빠르게 제압하여 끌어오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상대로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은.

“이쪽으로 와.”

그가 나지막하게 말하자, 그녀가 입을 몇 번 더 달싹이더니 이윽고 갈라진 목소리가 자그마하게 흘러나왔다.

“나만…… 나만 데려가.”

“뭐?”

그녀가 생기 없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언제나 맑고 투명하던 초록색 눈은 메마르고 빛이 없었다.

“반역자의 핏줄은 나뿐이잖아. 나만 데려가면 되잖아.”

“…….널 여기까지 끌고 와서 버린 그 빌어먹을 새끼얘기를 하는건가.”

“…….”

그녀가 피 터진 자국이 말라붙어 있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널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혼자 튄 새끼를 살려 달라고 하는건가, 지금?”

“……그래, 반역자의 핏줄을 내다 버린 사람은 굳이 잡아갈 필요 없잖아.”

그녀가, 마치 더 이상 시선을 마주할 힘도 없다는 듯, 천천히 눈을 내렸다.

“나는 죄인이니까, 나는 반항 안 하고 따라갈 테니까……부탁이야.”

몸이 좋지 않아서인지 그녀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흔들거렸다. 그녀의 발밑에 있던 돌이 투둑투둑 절벽 밑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그녀의 발밑의 땅이 그녀의 무게에 조금씩 부스러지는 것을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알겠어.”

“정말이야?”

“약속한다. 너만 데려가겠다. 그러니까 이쪽으로 와.”

“약속한 거야?”

“약속한다.”

그 말에 그녀가 흐느끼듯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가 내쉬더니, 한 발짝을 그의 쪽으로 내디뎠다.

천천히 천천히, 한 발짝 한 발짝.

그녀가 그를 향해서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올라갔다.

너무 오래 걸렸다. 하지만 이제 곧 손에 들어온다. 자신의 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흡족했다.

휘청휘청 천천히 걸어오던 그녀의 몸이 기력이 다했는지, 어느 순간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재빠르게 다가가 허물어지는 그녀의 몸이 채 땅에 닿기도 전에 그녀를 안아 들었다.

……가느다랗고 서늘했다. 그녀를 품 안 가득 안아 들었는데, 따뜻한 체온이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서늘한 감촉에 한기가 돌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곳에 앉아 찬 바람을 맞고 있었던 걸까.

그래도 그의 품 안에 고요히 안겨 있는 그녀의 감촉에, 나른한 만족감이 온몸으로 퍼졌다.

아아, 이 충족감.

이제 나의 품 안에 그대가 안겨 있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나의 품 안에 있을 것이다.

온전히, 오롯이나의 것으로…….

그녀의 머리칼에 고개를 파묻고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

“……주군, 그럼 그 기사 놈에 대한 추격은 멈출까요?”

옆에서 부하가 물어 오는 소리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찾아내서 찢어 버려.”

.*. *. *. *. *. *.

그녀는 가장 화려한 방 안의 부드럽고 푹신푹신한 침대에 오랫동안 눈을 뜨지 않고 누워 있었다.

여러 의사가 오갔지만, 한동안은 아무도 그녀의 눈을 뜨게 하지 못했다. 열이 심하게 올라 의사들을 분주하게 하는가 하면. 다음 날이 되면 체온이 급격히 떨어져 모두를 긴장시켰다.

그래도 의사들이 무언가 하기는 하였는지,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의 상태는 안정되어 갔다. 아직 눈을 뜨지는 못했지만. 체온과 혈색이 어느 정도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왕궁의 뒷일을 처리하느라 종종 자리를 비워야 했지만, 그 외의 시간은 모두 그녀가 누워 있는 침대 옆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면서 지냈다.

어느 사이엔가 푸석푸석해져 본연의 빛을 많이 잃어버린 그녀의 금발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바라보아도 바라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이 지루하고 무가치한 세상에서, 오로지 그녀를 바라볼 때에만 심장이 반응하고 빛이 느껴졌다.

그동안은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었다. 닿고 싶어도 닿을 수가 없었다. 보고 싶으면 그저 머릿속으로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고 또 떠올리며, 그녀는 그의 마음속에서 가장 신성한 환상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이렇게 그의 옆에 있었다. 그의 성 안에. 그가 마련해 놓은 방 안에. 진짜 그녀가. 환상이 아니라 이렇게 만질 수 있는 실제의 그녀가.

그는 머리카락을 지분대던 손을 옮겨 그녀의 뺨에 조심스럽게 대었다.

처음에는 손가락 끝으로, 마치 만지면 사라져 버릴 거품에 손을 대듯 조심스럽게 닿기 시작했으나, 닿아도 그녀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심한 듯, 이내 손바닥 전체로 그녀의 뺨을 감쌌다.

체온이 돌아온 그녀의 뺨으로부터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 왔다. 아아, 그래, 이 온기를 원해 왔다. 오랜 세월 그리워하던 따스한 체온.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쉬었다. 그토록 갈망하면서도 리본 냄새 따위로 대신해 오던 달콤한 체취를 흠뻑 들이마셨다. 취할 것만 같았다.

이제, 언제든 볼 수 있고, 언제든 만질 수 있고, 언제든…….

.*. *. *. *. *. *.

그녀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당혹감이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다는 소식에 서둘러 달려온 그는, 시중들고 있던 하녀들을 모두 물리고 그녀의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본 그녀가 흠칫 뒤로 몸을 물리며 좁은 침대에서나마 어떻게든 그와의 사이를 벌리려고 애쓰는 게 느껴졌다.

그는 침대 옆에 놓여 있던 의자에 앉았다. 늘 그가 앉아 있던 바로 그 의자였다. 그가 그 이상 가까이 오거나 손을 뻗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자. 그녀가 조금이나마 안도하는 것이 보였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창백한 공포가 가득 차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감옥에……갈 줄 알았는데……여기는…….”

겁에 질려 가느다랗게 떨려 나오는 목소리.

“여긴 나의 집이야. 앞으로 너는 여기에 계속 머물 거야.”

“…….”

그녀가 시선을 내리고 침묵을 지켰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부모님은…….”

그녀가 손으로 이불을 꼭 움켜쥐어 구겨트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가족들은 모두……처……형……당했는데…….”

그에게서 아무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그녀가 드디어 바싹 마른 눈길을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왜……?”

“하사받았어. 이제 넌 내 거야.”

그 말에 그녀가 하얗게 굳었다. 그가 의자에서 일어서 침대에 걸터앉자 그녀는 움찔하며 조금 더 뒤쪽으로 몸을 피하려 하였으나, 그는 개의치 않고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녀가 흠칫하며 얼굴을 돌려 손을 피하려 했지만, 이내 그는 두 손을 다 사용해 그녀의 얼굴을 잡고 시선을 마주하게 하였다.

공포에 질린 눈이 바르르 떨며 순식간에 아래로 사라졌다.

그래, 저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시선을 피하는 것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맑게 빛나던 초록색 눈은 어디로 갔을까.

하지만 괜찮다. 이제 시간은 충분하니까. 앞으로 그녀는 계속 그의 옆에 있을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모든 것은 되돌아 올 것이다.

다시금 맑은 초록색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웃어줄 것이다.

“아무 걱정 하지 말고 쉬어. 너는 이곳에서 안전하니까.”

.*. *. *. *. *. *.

최고급 향유를 발라 주고, 부드러운 천으로 휘감아 주고, 영롱한 보석들을 걸어 주었다. 왕실에서 데려온 요리사가 값비싼 향신료를 아끼지 않고 뿌려 조리한 음식들을 풍성하게 먹이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얼굴에 그 말간 미소를 올리지도 않았고, 반짝이는 눈빛을 빛내지도 않았다.

그의 손가락 하나라도 스치려 하면 두려워하며 피하려고 바르작거리는 것이, 새장 안으로 뻗어진 손을 피해 파닥거리는 작은 새 같았다.

그래도 어차피 새장 안의 새였다. 파닥이고 바르작거려 봐야 자신의 새장 안에 있었다. 그러니까 괜찮았다.

이제 그는 언제든 마음껏 그녀를 보고 싶으면 보고, 닿고 싶으면 닿고, 체온을 느끼고, 체취를 맡을 수 있으니까.

지금 그녀는 그의 품 안에 있고, 언제까지고 계속 있을 것이니까. 그 자명한 사실이 매우 만족스럽고 황홀하여, 그녀의 잃어버린 미소쯤은 잠시 뒤로 미뤄 둘 수 있었다.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돌아올 것이니까. 분명 그럴 테니까.

처음에는 뺨을 어루만지던 손이 입술을 어루만지다가 점차 목덜미를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피부는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따뜻하고, 달콤했다.

그녀가 소름이 돋은 피부를 바르르 떨며 몸을 비틀자, 그가 그녀를 더 세게 꼭 끌어안았다. 양팔 가득 느껴지는 부피감이 지극히 만족스러웠다. 나의 것. 나의 그녀. 내 품 안에 안겨 있는.

가끔 그녀가 이곳에 있음에도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서늘하게 들었지만, 그는 이내 그런 불안감을 지워 냈다.

이제 그녀의 모든 시간은 그의 것이었다. 그녀는 항상 그의 곁에 있을 것이다. 그가 원할 때마다, 그가 원하는 곳에. 그러니 그 무엇도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

조금이라도 더 느끼기 위해 그녀의 품 안으로 더더욱 파고 들어갔다. 다디단 피부를 입 안 가득 빨아들여 혀끝으로 음미했다.

더, 더 닿고 싶다. 더 안고 싶다. 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몸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모두 내 것이다.

아아. 황홀하다.

.*. *. *. *. *. *.

“또 나가려고 했다면서?”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다가오자, 그녀가 몸을 떨며 뒷걸음질 쳤다.

“답답해? 저 뒤 화원은 산책하게 해 줬잖아. 그걸로 만족해야지.”

한 걸음 한 걸음 그가 다가올 때마다 그녀가 계속 뒷걸음질 치다가, 뒤에 있던 침대에 걸려 넘어지듯 앉았다.

“나의 사랑스러운 아가씨, 저 바깥은 그대에게 아주 위험해. 안전하게 이 안에 머물러야지. 그래야 내가 지켜 줄 수 있지.”

다가온 그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손에 쥐었다.

“아니면, 밖에 나가서 만날 사람이라도 있었나?”

그녀의 머리카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가 바르르 떠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정중하게 입을 맞추고는 놓아 주었다.

이내 무릎을 굽혀 몸을 숙인 그가 그녀의 발을 만지작거렸다. 얼마 전, 허용된 공간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더 이상 신발을 주지 않았기에. 그녀의 발에는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발에서 흙을 털어 내고, 자신의 옷자락으로 정성스럽게 닦아 내었다. 고급스러운 천이 흙 자국으로 더러워졌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윽고 깨끗해진 발을 살며시 들어 올린 그는 잠시 바라보더니 발등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그 모습은 마치 신성한 여신을 모시는 공손한 사제의 모습과도 같았다.

하지만 이내 그의 커다란 손에 점차 힘이 들어가기 시작하자, 그녀는 두려움에 눈을 감았다.

“이 작은 발로 자꾸 밖을 나가려고 하니…….”

빠각.

“하윽!”

지독한 고통이 발목으로부터 마치 벼락처럼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그녀는 비명도 크게 지르지 못하고 신음했다. 통증으로 인해 온몸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고통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그녀를 그가 살짝 밀어 침대에 풀썩 눕히고는 그 위로 올라왔다.

“당분간은 침대에 얌전히 누워 있자, 나의 말 안 듣는 아가씨. 응? 얌전히 여기 있어.”

방금 발목을 부러뜨린 사람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이 다정한 미소로 그가 그녀를 어르며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녀는 식은땀이 가득 맺힌 얼굴을 돌려 그를 외면하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침실에는 고요가 가라앉았다. 한동안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그녀의 눈은 그저 무척이나 작아지고 멀어진 파란 하늘의 조각을 향해 있었고, 그는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그녀가 너무나도 목이 타게 했다.

결국 그는 그녀의 얼굴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채도가 낮아진 멍한 눈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왜 날 보지 않아?”

“…….”

“왜 웃어 주지 않아?”

“…….”

“뭐가 부족해?”

그녀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강제로 시선의 방향이 그의 얼굴로 맞춰져 있긴 했지만 그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어딘가, 그의 몸을 투과해 저 멀리 아득한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혹은, 아무것도 보지 않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를 끌어안았다.

괜찮아. 아직 웃어 주지 않아도, 자꾸 벗어나려고 해도, 마주 바라봐 주지 않아도, 일단 지금 내 품 안에 있는 것만은 진짜니까.

계속 여기 있을 거니까.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다시 웃어 줄 거야.

.*. *. *. *. *. *.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는 점점 더 인형처럼 죽어 갔다.

그녀는 이제 미소만 잃은 것이 아니라, 울음도 분노도 심지어 공포조차 잃어 갔다. 대부분의 시간을 표정 없는 죽은 얼굴로 멍하니 창문의 창살 너머 저 먼 곳을 바라보며 앉아 있거나, 아니면 잠들었다.

항상 창가의 안락의자나 방 가운데의 소파에 축 늘어져 잠들어 있는 그녀를, 그가 안아 올려 침대로 옮겨 주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점점 더 자는 시간이 늘어나고, 먹는 양이 줄어들고, 생기가 사라지고, 몸은 가늘어졌다. 종종 열이 펄펄 끓어오르며 앓아누웠다가, 되레 몸이 차가워져 걱정시키는 일이 늘어났다.

내로라하는 의사들을 여럿 붙여 놓았지만 그래도 그녀는 하루하루 더 죽어 갔다.

원래부터 워낙 약한 몸이었는데 거기에 충격을 많이 받기까지 해, 지금으로서는 심신을 안정시키고 요양을 해야 한다는 별 도움이 안 되는 말들뿐이었다.

그녀가 원래부터 몸이 약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자주 앓아누웠다는 것도 들어 알고 있었고, 조금만 뛰어도 금방 지치며 주저앉는 것도 많이 보았었다.

그녀의 아비가 혼담을 거절한 명목 중 하나도, 책무가 많은 대귀족가의 안주인이 되기에는 그녀의 몸이 너무 약하다는 것이었으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몸이 안 좋아질 이유가 없지 않나.

특별히 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부상을 입은 것도 아니다. 따뜻한 방 안에 들여놓고 좋은 옷을 입히고, 영양가 가득한 음식과 최고의 약을 가득 채워 놓았는데.

“숲에서 새를 잡아 와 새장 안에 가둬 두면, 숲을 그리워하느라 쇠약해지다가 죽기도 합니다.”

한 의사가 조심스럽게 건넨 말은 신경을 거슬렸으나, 생각해 볼 가치는 있었다. 그로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개념이었지만, 작고 약한 동물이란 그럴 수도 있는 거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어미나 유모 하나 정도는 살려 둘 걸 그랬나.

어찌 되었건, 간신히 움켜쥔 그녀를 죽음으로 놓아 보낼 생각은 없었기에, 그녀의 숲. 그녀의 고향으로 데리고 내려왔다.

숲이 그리워서 죽어 가는 거라면, 숲으로 데려다주면 될 일이다. 새장을 숲 한가운데에 옮겨 주는 것이 뭐 그리 어려우랴. 가끔씩 새장 밖으로 꺼내 줄 용의도 있었다. 물론 그 발에 끈은 묶어 두겠지만.

처음엔 그닥 반응이 없었지만, 어느 날인가부터 그녀는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살아나기 시작하고 가장 먼저 보인 반응이 그를 밀어내는 것이라는 사실은 못마땅했지만, 그래도 시체처럼 아무 표정 없이 죽어 가는 것보다 부정적인 반응이나마 다시 나타났다는 것이 생기의 증거로 보여 그조차 기꺼웠다.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목소리를 작게나마 다시 듣기 시작하고, 앙상하게 말랐던 뺨에 조금씩 살이 차오르는 것을 보면서, 그는 흐뭇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점점 더 회복되면, 따스한 햇살 아래 환하게 웃으며 나풀나풀 나비처럼 춤을 추던 그때의 밝은 그녀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춤은 못 추겠지만.

그래, 잘한 결정이었어, 조금 더 기다리면 완전히 되돌릴 수 있겠군, 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즈음…….

그녀가 사라졌다.

.*. *. *. *. *. *.

파사삭.

그의 손에 들려 있던 펜이 산산이 조각나며 부서졌다.

순식간에 방 안을 가득 채우는 살기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흠칫 뒤로 물러섰다.

하, 도망칠 기회가 보여서 생기가 돈 거였어? 그간 조금씩 살이 오르고 건강이 회복되던 모습이, 도망칠 준비를 하는 거였어?

감히, 누가 감히 나의 것을 내게서 앗아 간단 말인가.

가장 소중한 보물이라 가장 깊숙한 심장부에 넣어 두고 애지중지하던 것을, 감히 누가.

설령 그게 그녀 자신이라 하더라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그냥 꽁꽁 묶어서 상자 안에 넣어 두고 자물쇠로 잠가 두었어야 했는데.

하루 종일 잠들어 있다 하더라도 상관없었을 것을. 평생을 눈을 감고 누워 있는다 한들 뭐가 어떻단 말인가. 내 성 안의 내 방 안, 내 침대 위에 누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했었을 것을.

새장이고 숲이고 다 헛소리였다. 그냥 처음부터 빛 한 줌 새어 들어올 틈 없는 금고 안에 고이 모셔 놓고 재워 두었어야 했던 것을.

그러나, 몸도 좋지 않고 발도 성치 않은 그녀가 혼자 도망칠 수 있었을 리는 없었다. 누군가가 그녀를 빼돌렸다.

누군가…….

예전에 감히 그녀의 옆에 서 있으려 했던 건방진 평민 기사 새끼가 떠올랐다. 진작 해치웠어야 했던 놈인데, 한 번 놓치고 난 후로 행적이 묘연해져 잡지 못했던…….

분노가 거대한 불꽃처럼 치솟아 올랐다. 둘이 손을 잡고 도망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숨을 쉬기 힘들 정도의 격한 감정이 온몸을 휘감았다.

감히 나의 그녀에게 그 더러운 손을 댄 그놈은 그녀의 눈앞에서 도륙을 내 들판에 내다 버리고, 그녀는 묶어 와야겠다. 한쪽 발을 꺾었던 것으로 부족하다면. 이번엔 양쪽 발 모두 망가트리면 그만이다.

.*. *. *. *. *. *.

추적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그 하찮은 새끼가 나름 재능 있는 기사였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도주와 잠적에도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다.

그러나, 발도 성치 않고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연약한 귀족 아가씨를 데리고 도망 다니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테지. 어느 산골 마을의 작은 의원에서 늦지 않게 그녀를 되찾을 수 있었다.

가엾은 나의 아가씨. 앙상해진 그녀는 허름한 진료소의 낡은 병상 위에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정신을 잃고 있는 듯하더니, 인기척을 느꼈는지 힘겹게 눈을 뜨고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얼굴에 절망이 어리더니, 그대로 다시 감겼다.

식은땀으로 푹 젖어 있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러운 손길로 귀 뒤로 넘겨 주는데, 평소 같으면 움찔했을 그녀에게서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완전히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나뭇가지처럼 앙상해진 몸에 물기 하나도 없이 메마르고 갈라진 입술, 지푸라기처럼 거칠어진 머리카락, 그나마 나아졌었던 몰골이 그새 훨씬 더 악화된 것을 보고 그가 혀를 쯧쯧 찼다.

나의 어리석은 아가씨.

얌전히 있었으면 어지간히 잘 챙겨 주고 상하지 않게 지켜 주었을까. 가뜩이나 몸도 약한 사람이 왜 굳이 그렇게 하지 말라는 짓을 해서 몸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이제 다시 데리고 돌아가면 아무 곳에도 가지 못하게 묶어 두고 잘 보살펴 주어야겠다.

그녀의 비쩍 마른 손가락에 키스를 남긴 후, 그는 방문을 닫고 진료실로 나왔다.

한때 환자를 받던 진료실이었을 공간은 피가 낭자했다. 구석에는 의사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고, 그 평민 기사 새끼는 꽁꽁 묶인 채로 바닥에 무릎 꿇려진 채였다. 그 밑으로 피가 제법 많이 고여 있는 것이 출혈이 꽤 있는 듯했다.

저 더러운 놈은 죽여 버려야지.

칼을 뽑아 들고 그놈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놈이 고개를 들고 똑바로 노려보더니 뭐라 뭐라 더러운 입을 놀려 대었다.

퍽.

힘없이 걷어차인 놈이 나가떨어지자, 기사들이 다시 주워 와 그의 앞에 꿇어 앉혔다.

이놈은 쉽게 죽여 주고 싶지도 않다. 칼 놀림을 조심해야지. 잘못해서 한 방에 죽어 버리면 아쉬울 테니.

죽음을 눈앞에 두고 헛소리를 해 대는 놈들에는 익숙하지만, 이놈은 그 더러운 입에 그녀의 이름을 올린다는 것이 참을 수 없게 역겹다.

죽지 않게 힘을 조절해서 입에 칼을 쑤셨다 빼니 왈칵왈칵 피를 뱉어 내고는 좀 조용해졌다.

감히 저 더러운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겠지.

그는 그놈의 손등을 바닥에 대게 한 후 칼로 손등을 푹 찍었다. 그놈이 신음을 입 안으로 참아 내는 것을 보고 피식 웃고는, 칼을 마구 비틀어 후벼 대었다.

놀랍게도, 그놈은 끝까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아까까지는 계속 헛소리하며 입을 놀려 대더니, 이번엔 또 무슨 심보인지.

그는 이어 그 손을 잘라 내고, 그녀를 데리고 떠나려고 했던 그 다리를 베어 내고, 그녀의 목소리를 감히 담았을 귀를 뜯어냈다.

그리고 감히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을 그 눈을 파내려고 그놈의 얼굴을 들어 올렸을 때,

그의 뒤쪽을 바라보던 그놈의 눈이 경악을 담고 커졌다.

“처음부터……이랬어야 했는데…….”

등 뒤에서부터 힘없는 그녀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어째서인지, 무엇인가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뒤에서부터 스며들어 앞으로 점점 더 번져 나갔다.

주위에 있던 기사들이 당황하여 달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믿을 수 없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방 안에 누워 있었어야 할 그녀가 왜 여기에 있는지.

왜 그녀의 가슴에 단도가 꽂혀 있고, 왜 그녀의 상체는 시뻘겋게 물들어 있는지.

왜?

그가 주춤 일어서서 다가가려 하자. 그녀가 가냘픈 손으로 있는 힘껏 단도를 비틀었다.

붉은 액체가 꿀렁꿀렁 쏟아져 나오고, 그녀는 그대로 바닥으로 허물어져 내렸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녀는 언제나 가장 아름답고 깨끗해야 하는데.

따뜻하고 호화로운 방으로 데려가서, 보송보송한 이불 속에 눕혀 주고, 그 손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좋은 것들을 가득 쥐여 주려고 했는데.

그런데 어째서 지금 그대는 그렇게 뻘겋게 물들어 쓰러져 있는가.

도대체 왜?

그는 시뻘건 피 웅덩이 위에 허물어진 그녀를 끌어안고 망연자실해졌다.

옆에서 누군가가 의사를 찾는 소리가 들렸으나, 이 마을의 유일한 의사는 이미 그들이 살해한 후였다.

등 뒤에서 짐승이 울부짖는 것 같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자, 입에서 피를 철철 흘리던 그놈이 반쯤 잘린 혀를 힘겹게 움직였다.

“저주……한다…… 네놈을…… 내 영혼을 바쳐…… 저주할 테다…….”

손안에 남아 있던 노란 나비의 바스러진 사체가 떠올랐다.

.*. *. *. *. *. *.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네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다 들어줄게.

네가 싫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게.

제발 날 떠나지 마.

날 버리고 가지 마.

제발 돌아와줘.

.*. *. *. *. *. *.

그 후의 삶 동안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썩어서 망가져 가는 그녀의 몸을 하염없이 붙들고, 지독하게 후회하고 증오하며, 미친놈이, 미쳐서, 미친 짓들을 벌였다.

그리고 마침내 죽음이 그를 찾아와, 그 지긋지긋하게 끔찍하고 아무것도 없던 텅 빈 세계를 떠나게 되었을 때, 다시금 눈을 뜬 그는 자신이 빈민가 뒷골목의 어린 고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떻게 된 건가? 이건…… 환생……인 건가? 다시 태어난건가?

어째서? 어째서 나는 죽지도 못하고 그녀가 없는 이 지긋지긋한 세계를 다시금 살아가야 하는 거지?

이전 삶과 달리 고통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몸으로 되살아난 그의 삶은 더더욱 비참하고 끔찍했다. 빈민가의 이민족 혼혈 고아는 매일 굶고 맞고 추위에 떠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끔찍한 일은 따로 있었다.

이곳엔 그녀가 없어.

아니, 있다 하더라도, 더 이상 그녀는 내게 그 말간 미소를 지어 주지도, 그 따뜻한 손을 내밀어 나의 손에 붕대를 감아 주지도 않을 거야.

그녀는 바스러져 사라졌으니까.

내가 망가트려 버렸으니까.

살아가는 이유도 의미도 없었다. 하루하루가 고통과 후회였기에, 그저 빨리 이 모든 것이 끝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게 되기를 바랐다.

이번에 눈 감으면, 그냥 깔끔하게 끝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눈을 뜨지 않고 끝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지난 삶보다도 더 끔찍하고 진저리 나는 삶이 끊기지도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두운 골목길 구석에 상처가 가득한 몸으로 쓰러져 있던 그에게, 한 작은 소녀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세상에, 이 상처들 좀 봐, 어쩌면 좋아.”

항상 시끄럽고 지긋지긋하던 소음들 틈에서, 어쩐지 그 목소리만큼은 모든 것을 뚫고 그의 귀에 선명하게 들어와 박혔다. 마치 잔잔하던 수면에 떨어진 물방울처럼. 한 방울의 목소리로 시작된 파동이 온 머릿속으로 퍼지면서 희미하던 정신을 일깨웠다.

“아가씨, 너무 가까이 가지 마세요, 위험합니다.”

“하지만 유모, 이렇게 다친 아이를 어떻게 그냥 두고 갈 수 있어? 저기, 괜찮아?”

소년은 소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걱정이 가득한, 맑은 초록색 눈동자.

아.

그는 한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어떻게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 수 있을까.

전생에 그녀의 얼굴이 어땠었는지 자세하게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희뿌연 안개 속의 무채색 세상 속에, 그녀가 서 있는 곳으로부터 선명한 색채가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는 공포도 증오도 절망도 없고, 오로지 애정과 걱정과 호의만이 가득하여 생생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모든 일이 있기 전, 나무에 기대어 앉아 숨을 몰아쉬고 있던 그에게 자상하게 리본을 감아 주던, 그때의 그녀처럼.

그는 눈을 깜빡였다.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정말인지 믿을 수가 없었다. 너무 오래 그리워한 나머지 환상을 보는 것인지, 아니면 드디어 죽어서 저승에 온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자신이 새로 태어난 것처럼, 그녀도 새로 태어난 것일까?

그리고 기적처럼 그녀가 다시금 그를 구원해 주는 것일까?

다시 한번 기회를 주는 것일까?

그녀가 그에게 그 하얗고 작은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는 홀린 듯이 그의 흙 묻은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따뜻한 체온이, 말랑말랑한 촉감이 그대로 느껴졌다. 살아서 숨 쉬고 있는, 피부 안에 따뜻한 피가 돌고 있는, 실재하는 사람의 손이었다. 맥박이 느껴졌다.

살아 있다.

살아서, 여기에.

그가 그 손을 움켜쥐었다. 그녀가 잠시 놀라 움찔하는 듯했지만, 이내 미소 지었다. 그의 더럽고 갈라진 손이 닿아 그 보드랍고 하얀 손이 더러워질 텐데도 개의치 않았다.

“같이 갈래? 도와줄 수 있는 곳이 있어.”

그녀가 그 맑고 생기가 넘치는 초록색 눈을 상냥하게 휘어 웃으며 말했다. 그가 망가트렸던, 영영 잃어버린 줄 알았던, 그 화사한 미소.

그는 잠시 멍하니 그 미소를 바라보았다.

사라진 줄 알았다. 그가, 그의 손으로 영원히 없애 버린 줄 알았다.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

다시.

“같이…….”

그가 그녀의 말을 입에서 되뇌었다. 단어의 울림이 입 안에 메아리쳤다. 목이 메었다. 눈물이 고였다.

“같이, 가겠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다시는, 그대를 잃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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