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의 의무 (13)화 (13/13)

에필로그 03

그리하여 웨딩드레스를 다섯 벌이나 구입했다는 전설의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새하얀 히아신스 부토니에를 가슴에 매달고 하객을 맞이하는 늠름한 신랑 곁에 태준과 태조가 을 든든히 지키고 섰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서정주와 류성웅 그리고 그들 슬하의 삼 형제가 나란히 선 모습에 결혼식은 잠시 일대 혼란이 일어날 정도였다.

비로소 두 사람이 부부가 되는 날. 신랑이 된 태한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아이고, 류 상무. 축하하네. 주 사장이랑 사돈이 될 줄이야.”

“감사합니다.”

반기는 인사 속에서 태조 역시 예의를 갖추어 허리를 굽혔다. 오늘만큼은 형제가 한마음이 되어 듬직하게 자리를 지켰다. 빈틈없는 외모에 빈틈없는 매무새. 선망이 담긴 시선이 가는 곳마다 뜻하지 않게 따라붙었다.

“그렇게 좋냐? 입이 귀에 걸렸어.”

태조는 곁에서 하루 종일 웃느라 턱이 빠질 것 같은 태한을 힐긋 응시하곤 팔불출 같은 모습에 고개를 흔들었다.

“형수는 어쩌다가 형 같은 사람을 만나서.”

“사랑의 결실이지.”

“사랑이라니.”

믿을 수 없다는 듯 태조가 인상을 구겼다.

“다음에는 네 차례야.”

“웃기고 있네.”

“너와는 상관없는 일 같지? 나도 네 나이에 그랬어.”

정략결혼에 군말 없이 임하는 태준을 보며 저런 결혼은 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던 태한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적당히 연애하고, 헤어짐이 아쉬워 안타까워지는 사람을 만나거든 결혼을 하겠노라고. 소망 같은 결심은 주서은을 만나 이루었다.

그러나 결혼 따위에는 애초에 뜻이 없는 태조의 표정이 심드렁했다.

“네게도 그런 사람이 나타날 거야.”

“퍽이나.”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럴 일은 없을 거라며 태조가 빈정거렸다.

이다음은 태조 차례겠구나. 태한의 결혼이 결정 난 이후로 수도 없이 들어온 말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될 수 없는 말이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해 본 적도 없는데 결혼이라니.

더구나 그저 의무만이 숙명인 듯 살아가는 첫째 형 태준만큼 책임감 있는 인간도 못 되었다. 그렇다고 둘째 형 태한처럼 타인을 목숨 내놓듯 사랑할 수 있는 감정에 솔직한 인간도 되지 못했다.

어차피 누구를 만나도 정착할 수 없다면, 그저 자유롭게 사는 길밖에는.

그러니 잘 알지도 못하며 떠들어 대는 남들의 시답지 않은 말쯤은 가볍게 흘려들으며 태조는 성스러운 태한의 결혼식을 위해 고요히 침묵했다.

사랑 같은 건 성가실 뿐이라 생각하면서.

신부 대기실에 앉은 서은은 스퀘어 네크라인으로 단아한 이미지를 최대한 살리면서도 고급스러움을 강조한 첫 번째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물론 본식과 피로연에는 각기 다른 드레스를 갈아입을 예정이었다. 드레스를 피팅하는 날, 아내를 향한 열정을 주체하지 못한 태한과 그의 유혹에 넘어간 죄로 찢어진 드레스 한 벌은 옷장에 가보처럼 고이 간직되어 있었다.

서은이 아름다운 순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잠에서 깨어날 때, 졸음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퉁퉁 부은 눈을 부스스 뜨고 잘 잤어요, 라고 물을 때라던 태한의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매일 아침 눈을 떠 제일 먼저 보는 게 웃음기 가득한 태한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결혼식만큼은 제 아내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걸 증명하고 싶다며, 그러니 드레스를 여러 벌 갈아입는 수고로움을 부탁받은 차.

대기실 한구석에 장식처럼 걸린 여벌의 드레스에도 머릿속은 하얗기만 했다. 결혼식이 이렇게 떨리는 거였나. 새벽같이 일어나 생애 가장 아름다운 신부가 되기 위해 준비를 하는 내내,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손에 들린 부케를 꽉 쥔 채로, 두근거리는 긴장 속에서 반가운 얼굴들을 향해 정신없이 웃고, 이따금 울컥하는 감정을 삼킬 뿐.

“형수님.”

하객들이 다녀간 자리 뒤로 중저음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울렸다. 고개를 들자 시동생이 될 태조가 빙긋, 미소를 머금고서 다가왔다.

학업을 위해 미국으로 날아갔다, 급하게 결정된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며칠 시간을 내어 귀국한 태조를 제대로 보는 건 이번이 네 번째였다.

“많이 긴장되시죠?”

“아, 네. 결혼은 처음이라.”

서은이 두서없이 말을 뱉어 놓고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난감하게 웃는 얼굴이 금세 온화해진다. 작고 귀여운 인상에 미소가 스미자 포근한 기운이 느껴졌다. 어쩐지 다람쥐 같은 형수의 어디를 보고 형이 꽂혔는지 알 것 같다 생각하며 태조는 깍듯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결혼 축하드립니다. 형이 형수께 제대로 인사 올리고 오라고 해서.”

등 떠밀어 오게 되었다는 말을 솔직하게도 전하는 태조의 눈동자에 거짓은 없었다. 매사에 난감할 정도로 솔직한 동생이 집안의 숨겨진 폭탄 같은 존재라던 태한의 말이 떠올랐다. 숨겨진 폭탄으로 치부하기엔 위험할 정도로 잘생긴 미모였다.

“고마워요, 도련님. 그래도 도련님이 축하해 주니까 용기가 나네요.”

“형은 입이 귀에 걸렸어요. 팔불출이 따로 없어요.”

“그 사람이 원래 그래요. 너무 다정하고, 너무 자상하고, 정말 좋은 사람인데…. 미안해요. 내가 말이 너무 많죠? 긴장했나 봐.”

횡설수설하더라도 오로지 태한에 대한 칭찬뿐인 서은을 보며 태조는 이래서 부부가 되었구나, 깨달았다.

“행복하십쇼. 아마 신혼여행 다녀오시면 저는 한국에 없겠지만, 시간 되시면 놀러 오시고요.”

“네, 꼭 그럴게요. 제가 나중에 꼭 시간 내서 미국 갈게요.”

“그래요.”

태조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어딘가에 소속되어 규정하는 것들에 묘하게 반감을 느끼는 돌연변이 체질이라며, 태조를 정의하던 태한의 목소리가 서은의 뇌리를 스쳤다. 워낙 귀하게만 자라 아쉬움을 모른다며, 어디 내놓기 부끄럽다던 태한의 걱정보다 직접 만나본 태조는 더 괜찮은 사람이었다.

어쩐지 좋은 식구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듣던 것보다 훨씬 바르고, 깍듯한 태조를 보며 서은은 긴장으로 달달 떨리는 미소를 지었다. 그 눈을 마주한 채로 태조가 진심으로 미소 지었다.

***

버진 로드 끝에 서 있는 태한을 보자 서은의 눈동자가 수줍게 피어난 꽃망울처럼 가늘게 떨렸다. 형국의 손을 붙잡고 길게 펼쳐진 새하얀 히아신스 꽃길을 거닐며 태한에게로 향하는 길.

어김없이 넘치는 외모를 남발한 신랑은 입이 귀에 걸렸다는 소문처럼 하얀 이를 드러내고 시원하게 웃었다.

천천히 다가서는 서은의 손을 형국에게 건네받기 전, 큰절을 올려 진심을 다해 마음을 전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태한을 형국이 부둥켜안아 다독여 주었다.

“우리 서은이 잘 부탁하네.”

“제가 잘하겠습니다, 장인어른.”

마침내 서은의 손이 태한의 손으로 건너왔다. 손끝이 닿고 천천히 서은의 손이 태한의 팔과 겹쳐졌다. 천천히 한 걸음. 또 천천히 한 걸음.

둘만의 미래로 나아가는 걸음을 축하하며 박수가 울려 퍼졌다.

축사와 함께 정해진 식순이 차례로 이어졌다. 식순에도 없는 형국의 편지 낭독이 있을 때는 서은이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펑펑 흘렸다. 커다란 손으로 눈물이 하염없이 번지는 서은의 뺨을 거머쥐고, 연신 쓸어 주며 내가 행복하게 해 줄게. 나를 선택한 걸 후회하지 않게 해 줄게. 잘 살자, 서은아. 끊임없이 태한이 속삭였다.

“아름다운 가을날, 아름다운 두 사람이 진실한 사랑으로 운명을 나누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귀빈 여러분들은 진실된 혼인의 증인이 되어 축복해 주십시오.”

훈훈하고 애틋한 분위기를 지나 엄숙한 식장 안에서 마침내 서약이 시작되었다.

“신랑 류태한 군과 신부 주서은 양은 앞으로 살아갈 모든 날에 결혼의 의무를 다하여 고락을 함께하고 서로를 위할 것을 맹세합니까?”

저물어 가는 하늘 아래서 두 사람이 손을 잡았다.

“네, 맹세합니다.”

“맹세합니다.”

나직한 고백처럼 두 사람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이제 두 사람은 여기 모인 증인들 앞에 성스러운 부부가 되었음을 맹세했습니다. 이에 주례는 이 혼인이 진실되게 이루어졌음을 엄숙히 선언합니다.”

환호 속에서 태한이 서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가볍게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는 순간, 태한이 조금 더 깊게 입술을 물어 맞추었다. 생각보다 길어진 입맞춤에 좌중이 술렁였으나, 태한은 개의치 않았다.

“사랑해. 매일매일 더 사랑할게.”

더 일찍 알아 더 사랑해 주지 못한 게 유일한 아쉬움이라던 태한이 남은 날을 걸고 고백했다.

“사랑해요.”

서은은 태한에게 눈을 맞춘 뒤 그에게만 간신히 들릴 정도로 화답했다. 다시금 태한의 입술이 서은의 이마 위로 내려앉았다.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온기 사이로 두 사람이 눈을 맞대고 행복하게 웃었다.

계절이 깊어 가는 어느 멋진 날, 결혼의 의무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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