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의 의무 (11)화 (11/13)

에필로그 01

여름이 한껏 기승을 부리던 주말 오후, 해승원으로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진지하게 교제 중인 사람이 있다는 태한의 고백 이후, 얼굴이나 한번 보자며 미뤄 왔던 식사 자리를 비로소 마련하게 된 날이었다.

뜻밖의 초청에 희숙은 내내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결혼은 급물살을 타고 진행되었다. 잠깐 얼굴만 보자며 마련된 자리가 상견례 자리가 되었고, 식사나 하자고 모인 자리에서 날짜는 이를수록 좋겠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참에 마, 빨리 시켜 버리자.”

“좋습니다.”

“태한이 인마 이거, 어지간히 급했나 보다.”

지체 없이 흘러나온 태한의 대답에 왕회장이 눈치를 주면서 껄껄 소리 내어 웃었다. 형국이 왕회장의 술잔을 받으며 웃음 지었다.

“형국이 니랑 내랑 사돈이 될 줄 알았나.”

“아직 제 여식한테 가르친 게 없어 걱정이 많습니다.”

“이 사람이 겸손은. 주 사장이 자식 농사 허투루 할 사람이가.”

서로의 세월을 아는 만큼 신뢰가 깊었다.

“아들 보내고 우리는 오랜만에 한 잔 더 하자.”

“좋습니다, 회장님.”

“날짜는 어른들끼리 상의해가 정할 테니, 젊은 사람들은 날도 좋은데 이만 가 보거라. 민 실장아.”

화목한 분위기 속에서 태한이 서은을 챙겨 일어서려고 할 때, 왕회장이 민 실장을 불러 무언가를 가져오게 했다. 곧 민 실장이 건넨 지갑을 열어 백만 원짜리 수표를 한 뭉치 꺼낸 왕회장이 넌지시 서은을 불렀다.

“태한이하고 맛있는 거 마이 무라.”

“아닙니다. 이렇게 많이는… 괜찮습니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어른이 용돈 주면 받는기라.”

받아요, 라는 태한의 말에 서은이 머쓱하게 용돈을 받으며 어쩌지 못하고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히는 서은을 보며 왕회장이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모처럼 해승원이 웃음으로 시끌벅적한 날이었다.

갑작스럽게 진행되어 버린 상견례에 정원을 거닐면서도 긴장이 되어 몸이 빳빳했다.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해질 무렵, 태한이 서은의 손을 꽉 움켜쥐고 얼굴을 맞대며 씩 웃었다.

“내가 뭐랬어요. 걱정하지 말랬지.”

집에서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형국과 희숙에게 각각 해승원과 서정주에게서 연락이 왔을 때. 실은 밤잠을 이루지도 못할 정도로 고민이 많았다. 대한민국을 거머쥔 해신 그룹과의 결합은 쉽지 않으리라 예상했다.

그럴 때마다 태한은 걱정 말라 웃으며 서은을 다독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희숙과 함께 백화점에서 옷을 사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를 맞대고 상의해도 뾰족한 묘안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믿으라는 태한의 품에 안겨 하루하루를 보내면서도, 이날이 오기까지 희숙과 마음을 졸였다.

그러나 우려와는 다르게 태한의 결혼을 천천히 준비하고 있었다는 서정주의 말에 모든 게 수월했다. 깐깐하고 차가운 인상을 가진 해승원의 안주인, 서정주는 겉보기와는 다르게 인자한 구석이 있었다. 그건 주형국의 노력으로 쌓아 올린 인생과 함께 노력한 희숙의 인생이 결합되어 만들어 놓은 결과였다.

부모를 닮아 곱고 바르게만 컸다며 서은을 예쁘게 봐준 덕에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무사히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어머니, 저희 이제 가 보겠습니다.”

“오늘 와 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극진한 대접에 제가 정말 감사드립니다.”

여전히 잔뜩 긴장한 서은이 태한의 손을 꽉 잡고 있는 것도 잊고서 허리를 숙였다.

“태한이가 그래서 그렇게 꽃을 사 온 거였어요.”

“네?”

걸음을 옮기는 두 사람 곁을 함께 걸으며 서정주가 태한을 힐긋 응시했다.

“생전 그런 적 없는 녀석이 갑자기 프리지아를 사 왔길래.”

“시작을 응원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그건 그냥 핑계였구나. 정말 첫눈에 반한 거였나. 이제야 이유를 찾은 서은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때 이후로 이 녀석이 부쩍 집으로 꽃을 가져오더라구요. 센터피스도 한 번 가져온 적 있고.”

“아.”

태한과 함께했던 첫 번째 플라워 수업에서 만들었던 생화 리스였다.

“잠잘 시간도 없는 녀석이 왜 이렇게 꽃을 사들이나 했었는데, 서은 씨 이야기 듣고서 이해했잖아요.”

“그런 말씀은 뭐 하러 하세요.”

태한이 민망하단 듯 서정주를 보며 은근히 눈짓하자, 서정주의 얼굴에 보기 드문 미소가 활짝 걸렸다.

“어려운 자리였을 텐데, 고생 많았어요. 아버님이 좋아하셔서 다행이야. 앞으로 우리 태한이 잘 부탁해요.”

“잘 부탁드립니다.”

다시 공손히 인사하는 서은에게 서정주의 시선이 오래 남았다.

욕심 없이 착하게 자랐고 수더분하면서도 가식 없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주 사장 부부의 인품을 익히 알기에 태한의 선택에 반기를 들 생각은 없었다.

쟁쟁한 집안의 탐나는 자리가 수도 없이 들어왔지만, 한 번 마음 먹은 것에 대해서는 고집이 만만치 않은 아들이었다. 무엇보다 애착이 큰 만큼 자식 일에 관심이 많은 서정주가 이 혼사에 우호적이었던 건 태한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틀린 선택을 한 적 없는 아들. 조금은 손해를 보더라도 남을 속이거나 비겁하게 굴지 않는, 자라는 동안 수많은 풍파를 겪어 온 해승원에서 유일하게 서정주의 버팀목이 되어 준 아들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물려준 안목으로, 반려를 찾아내었을 아들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물론 아쉬운 마음이 들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 서은을 직접 만나고 주 사장 부부와 함께 식사하며 그런 감정은 눈 녹듯 사라졌다.

“다음에는 어머니하고 어울리는 꽃 한 다발 들고 찾아뵐게요.”

“마음이 예쁘네. 조심히 가요.”

서정주의 다정한 배웅 속에서 서은은 태한의 손을 잡고 해승원을 나섰다.

후아. 차에 오르자마자 참고 있던 숨을 크게 몰아쉬는 서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뭐가 이렇게 번갯불에 콩 볶은 것같이….”

“원래 결혼은 그렇게 해야 잘 산대요.”

“나 너무 떨려서 죽는 줄 알았어요. 나 뭐 실수한 거 없죠?”

이런 자리는 처음이라, 실수하지 않으려 물 한 모금을 마실 때에도 온 신경을 다했지만 그래도 혹여나 실수한 게 없나 걱정이 되었다. 두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가다듬는 서은을 가만히 지켜보던 태한이 씩 웃으며 서은의 뺨을 감싸 쥐었다.

“와 보니까 어때요.”

“어마어마하던데요.”

해승원에 관해선 말로만 들었지, 이렇게 어마어마할 줄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과연 이게 서울 시내에서 가능한 규모인가 싶을 정도로, 현실과는 동떨어진 공간을 떠올리며 서은이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이번에 알았잖아요. 아, 류태한 씨 재벌 맞구나.”

“뭐?”

“리조트에 온 줄 알았어요. 집이 뭐가 그렇게 커요?”

“음, 그 정도는 아닌데.”

“집에서 카트를 타고 돌아다니는 게 어디 흔해요?”

새삼 그런 것들에서 현실의 벽이 몇 번이나 밀려왔다.

“적응해요. 이제 그게 서은 씨의 삶이 될 거니까.”

말랑거리는 서은의 뺨을 어루만지던 그가 긴 팔을 뻗어 안전벨트를 채웠다.

“이 정도는 제가 할 수 있어요.”

“이런 것도 내가 해 주고 싶어서.”

피식 웃으며 눈이 마주친 김에 가볍게 입술을 물어서 키스하고.

“주서은 이제 나한테 완전히 코 꿰었어.”

“나만 꿰었나. 류태한 씨도 꿰었지.”

그럼 짓궂은 눈으로 흘기면서.

“하고 싶은 일, 나랑 다 해요. 그러자. 내가 그렇게 해 줄게.”

“태한 씨.”

“응.”

당신하고 눈뜨는 아침은 여전히 찬란하고, 앞으로도 더 찬란할 거라고.

“고마워요.”

햇살처럼 반짝이는 눈앞의 남자에게 서은이 길게 목을 빼고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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