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장충동에 궁궐처럼 지어 올린 해승원은 해신 그룹을 세운 류중환 회장이 기거하는 한옥 안채를 제외하고, 별채가 여럿이었다.
류중환 회장의 안채를 중심으로 그의 장남 류성웅과 며느리 서정주가 기거하는 별채가 있었고, 그 뒤로 세 채에는 그의 장손인 태준 내외, 그리고 나머지 한 채는 태한이 살고 있었다. 막내 태조가 묵는 별채는 그가 한국에 들어올 때만 잠깐씩 사용할 뿐 대부분의 시간은 비어 있었다.
해승원은 건물 주변에 소나무를 빽빽하게 심어 만든 산책로를 가지고 있었다. 안채에서 별채로 건너는 건물 사이마다 호젓한 길이 이어져 있다. 그 길이 모여 안채의 정원에 닿는다. 정원 한가운데는 반달 모양으로 얕게 파인 연못이 한 폭의 동양화처럼 멋스러웠다.
해승원의 자랑이자, 왕회장의 낙이기도 한 그곳을 지나는 길목마다 이른 아침 햇살을 담아낸 반달 모양의 연못 주위로 녹음이 무성했다. 싱그러운 여름 공기가 몸을 휘감았다. 태한은 조용히 걸음을 내디뎌 안채로 몸을 들였다.
“할아버지, 태한입니다.”
“들어 온나.”
문이 열린 곳에는 어머니 서정주가 먼저 자리하고 있었다. 문안 인사를 드리기 위해 찾은 주말 아침부터 곱게 틀어 올린 머리와 흐트러짐 없는 차림을 고수하는 서정주의 곁으로 태한은 곧장 무릎을 꿇고 앉았다.
동물과 물상이 조화로이 새겨진 8첩의 병풍을 등 뒤에 둔 류중환이 서정주의 곁에 앉은 듬직한 태한에게 시선을 건네었다.
“대만은 잘 다녀왔나.”
“예, 다행히 저희가 생각했던 것보다 우호적인 분위기라 긍정적인 반응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말 안 해도 잘하는 거 안다. 피곤하진 않고?”
“괜찮습니다.”
“그럼 됐다.”
회사와 관련된 사항이야 그의 곁에서 병풍처럼 지키고 선 민 실장이 아침마다 꼼꼼하게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평소라면 한 가지의 이야기도 여러 입을 통해 듣는 것을 즐기는 성격답게 인사치레처럼 묻고 또 물었을 테지만, 태한을 보는 그의 얼굴은 신뢰로 가득했다. 누구보다 의무와 책임에 강한 태한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이다.
왕 회장이 태한의 곁에서 조심스레 자리를 잡고 앉은 서정주를 힐긋 넘겨보았다.
“서 관장, 태한이한테 이야기했나?”
“아직 안 했습니다, 아버님.”
“해 주지, 궁금하구려.”
찻물을 입에 삼켜 넣은 류중환이 대뜸 운을 떼자, 서정주가 단정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버님께서 직접 전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태준이가 결혼한 지가 벌써 2년이 됐지 않나.”
“네, 아버님.”
“이제 둘째도 보내야지.”
“예.”
단정한 대답에 태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일찌감치 소문처럼 떠도는 일들이 당사자인 태한의 귀에까지 들어올 정도였으니, 왕회장의 부름에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날이 오늘일 줄은 몰랐다. 류중환의 눈짓에 그림자처럼 선 민 실장이 서류를 꺼내 왔다. 금세 태한의 앞으로 착착착착, 준비된 서류가 펼쳐졌다.
“봐라. 니 결혼 상대들이다.”
하나도 아니고 넷. 이력과 사진이 담긴 파일에 태한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었다. 약혼 상대를 고르는 일이 이렇게 손쉽게 준비되어 있을 줄이야.
“니랑 궁합이 잘 맞을 것 같은 참한 아들이다. 자세히 함 봐라.”
삼 형제 중 맏이인 태준의 결혼을 준비할 때와 비슷한 절차였다. 그러나 방식은 조금 달랐다. 태준은 시작부터 결혼할 집안이 정해져 있었고, 반드시 그 집안과 맺어져야 한다는 일념으로 밀어붙인 케이스였다.
태준은 아무런 잡음 없이 숙명처럼 결혼을 감행했다. 아마도 그게 장남의 의무라고, 부모가 맺어 준 상대와 결혼해 정을 붙이고 사는 태준을 보며 생각했다.
그러나 부모 세대부터 만들어 준 선례를 이어받아 수월하게 결혼을 진행한 태준과 다르게 태한은 아직 결혼에 대해서는 깊은 뜻이 없었다. 언젠가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게 될 테지만, 그렇게 되기까지의 방식이 이런 것이라는 것도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현재로서는 내키지 않는 것들이었다.
태한이 고개를 들었다.
“와. 안 내키나?”
“신경 써 주신 건 감사합니다만, 실은 지금 만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고?”
“주형국 사장님 장녀, 주서은 씨입니다.”
뜻밖에도 담담한 고백에 태한에게로 의외의 시선이 쏟아졌다. 태한은 뜻이 분명한 눈동자로 조용히 류중환의 깊은 눈을 마주 보았다.
“형국이 딸내미?”
“예.”
“진지한 사이가.”
“그렇습니다.”
단호한 태한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왕회장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어떻게 된 일이냐는 듯 그가 서정주를 응시했다, 시선을 옮겨 민 실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서로 시선을 교환한들 태한이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입 밖에 낸 일을 아는 이는 없었다. 태한은 예리하게 닿는 시선들을 굽힘 없는 자세로 응시했다.
“함 데려 온나. 얼굴부터 보자.”
“아버님.”
“와. 태준이는 큰아 딱 세 번 만나고 결혼했다 아이가. 다른 집도 아니고 아버지가 형국이면 아는 바르게 컸을기다. 데려 온나.”
결혼식을 올리기 전 선 자리에서 한 번, 상견례 때 한 번, 약혼식 때 한 번, 그러고도 결혼해서 2년째 사는 태준 부부를 언급하며 왕회장이 더 들을 것도 없단 듯 서류를 걷어 냈다.
시부의 결단에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서정주는 난감하게 웃었다. 집안의 혼사부터 대소사를 결정하는 일에 가장 큰 입김을 차지하는 그녀가 고르고 고른 자리들이었다. 태한에게도 태준만큼이나 좋은 짝을 찾아 주고 싶어 고심했건만, 상황이 예상 밖으로 흘렀다.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곧 인사드리겠습니다.”
의아함이 팽팽한 분위기 속에서 태한의 정중한 목소리만이 또렷했다.
***
문이 닫히자, 끝까지 예의를 갖추고 서 있던 서정주가 고개를 돌렸다. 눈길이 섞이자 태한은 다만 소리 없이 부드럽게 웃을 뿐이었다.
조용한 복도를 지나 두 사람은 안채를 벗어났다. 곧 두 사람의 앞에 해승원의 정원이 펼쳐졌다. 찌르르, 풀벌레 우는 소리가 유난히도 청명한 오후. 서정주는 그림자처럼 조용히 곁을 지키고 선 태한에게 다시금 시선을 건네었다.
“주 사장 딸?”
서정주의 부드러운 물음에 태한은 잠시 서은을 떠올렸다. 처음부터 확신을 가지고 다가섰지만, 서은에게는 아직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해 보였다.
“네. 주서은 씨요.”
마치 오래전부터 준비했던 것처럼 서슴없는 고백에 서정주가 부드럽게 눈을 치켜떴다.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아야 한다 가르친 건 자신이었으나, 아직 확신도 무엇도 없는 상태에서 호기심을 드러내는 아들의 모습은 의외였다. 서정주는 물끄러미 태한을 바라보았다.
동시에 기억을 되짚어 창립 기념 파티에서 만났던 주 사장의 가족을 떠올렸다. 반듯한 주형국과 그의 곁을 빈틈없이 챙기는 단아한 주 사장의 처. 화려하진 않았지만 세련되게 가꾸고 온 둘째 딸의 얼굴도 기억이 났다. 주형국과 그의 처를 반반 섞어 닮은 듯한 외모는 예쁘장하면서도 강한 인상을 남겼었다.
“음악을 한다고 들었던 것 같아.”
“그건 둘째 딸이고요.”
긴말을 덧붙이지 않고 필요한 말만 뱉어 내는 태한을 보며 서정주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애초에 확신이 서지 않는 일에는 나서지 않는 태한이다. 그래서 납득이 갈 만큼 준비를 하고도 혼담을 꺼내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세 아들 중 가장 다정다감하지만 결정에 있어서는 제 주관이 가장 또렷한 게 태한이었다. 권한 사람을 생각해 일부러 만들어 낸 자리를 거절하지는 않겠지만, 뜻이 맞지 않으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을 거란 것도 알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컨트롤하기가 가장 어려운 게 태한이었다. 첫째 태준이야 집안에서 내린 결정에는 당연한 의무인 듯 나서 주었고, 둘째인 태한은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비위를 맞추면서도 고집을 굽히지는 않는다. 셋째인 태조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한배로 아들 셋을 낳았지만, 성향부터 식성, 취향 모든 것들이 달라 대하는 방식이 모두 달랐다. 그럼에도 세 아들 중 서정주의 마음을 가장 잘 헤아리는 아들이 있다면 그건 둘째인 태한이었다.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네 선에서는 이미 결정이 끝난 문제 같은데.”
“예.”
“진심이구나.”
태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그러셨죠. 아버지 처음 봤을 때, 이 남자와 결혼해야겠다 생각하셨다고. 저도 그래요. 처음 본 순간 이 여자랑 결혼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정략으로 약속된 사이였으나, 처음 본 순간 알았다. 그러기 위해 만난 거구나. 태한은 30년도 더 된 그날의 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자에는 통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의외긴 해. 설마 회장님께 직접 그렇게 말씀을 올릴 줄은 몰라서.”
“결혼은 집안에도, 제게도 중요한 일이라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일생을 거는 일. 이왕이면 후회 없는 선택을 하고 싶어요, 어머니.”
주서은을 볼 때마다 가슴 밑바닥이 근질거려 견딜 수 없었던 그 감정. 그것으로 시작해 이제는 서은의 모든 순간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
결심은 흔들림이 없었다. 순간에 지나지 않을 그 찰나를 떠올리는 동안에도 온몸의 혈관이 팽창하는 것 같았다. 생동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해 준 여자는 평생에 걸쳐 주서은이 유일했다.
“어떻게, 자리 좀 마련해 볼까?”
“아닙니다.”
“왜? 주 사장 쪽에 연락하면 일이 좀 수월할 텐데.”
“아니요. 제가 부탁드리기 전까지는 조용히 마음만 써 주세요.”
“그래. 천천히 알아볼게.”
태한은 선심 쓰는 서정주의 배려를 정중하게 받아들였다.
해승원의 주인, 류중환의 신임을 받는 서정주가 나선다면 일이 한결 수월해지겠지만 당장 결혼을 마음먹은 것은 아니니, 어른들이 나서기에는 피차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두 사람의 선택이 아닌, 의무를 가지고 만나는 자리에서 서은에게 부담을 안기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왕회장의 말이 떨어진 이상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 전에 서은의 허락을 구하는 게 먼저였다.
조금 천천히, 시간을 두고 서로를 알아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것보다 중요한 건 미래를 함께하고 싶어 하는 태한과 같은 뜻을 가져 주는 것이다.
고민은 그다음 문제였다.
본격적으로 혼사가 오간다면 어떤 식으로든 그건 서은에게 짐이 될 게 뻔했다. 그러니 최대한 서은의 마음이 이끌려, 제게 확신을 가질 때. 어떤 도움을 받아 무언가를 진행한다면 그때가 되어도 늦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주 사장 사람 괜찮은 거 나도 잘 알아. 그러니 아버님도 별말씀 없으신 거고. 너도 그 밑에서 일을 배웠으니 알겠구나.”
“예.”
주형국은 인품이 넉넉하고 올곧은 성품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사장단 중에서도 류중환이 각별히 아끼는 측근 중 하나였다. 그 사실을 인지한 서정주의 눈매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절대로 허튼짓은 하지 않을 거란 아들에 대한 믿음. 타인에게는 상당히 높은 잣대로 엄격한 그녀였지만, 식구들에게는 어쩔 수 없이 약해지고 마는 해승원의 안주인이었다.
“그런 얼굴 오랜만에 보는구나.”
아들의 얼굴을 꼼꼼하게 살피는 시선이 부드럽게 휘어진다. 태한은 함께 정원을 거니는 서정주에게 은근한 미소를 머금고 시선을 내렸다.
“네가 무언가 큰 결심을 했을 때의 얼굴.”
2년 전, 태준이 태성 그룹의 장녀와 인수합병 같은 정략결혼과 동시에 전자를 맡은 뒤로, 태한은 면세사업부와 해외사업부를 거쳐 HS인터네셔널의 대대적인 총괄조직 개편 후 전략사업부로 투입되었다.
종합생활문화기업을 모토로 HS인터네셔널은 해신 그룹을 모체로 둔 채 합자회사인 HSCD를 설립했다. 조직 개편과 동시에 전략사업부로 투입된 그의 행보는 거침없었다. 모두가 조심스러워하는 적자구조의 사업을 과감하게 정리하고, 보다 빠르게 밀어붙여 선점할 때의 얼굴이었다.
“너무 오래 끌지는 않을 겁니다.”
만일 이 길 끝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면 그때는 그도 군말 없이 집안의 뜻을 따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틀리지 않을 것만 같은 좋은 예감이 들었다.
“알고 있어. 넌 늘 걱정 같은 건 끼치지 않던 착한 아들이었으니까.”
“제가요?”
“그럼. 넌 늘 그랬어. 태조를 생각해 봐. 그 고집에, 그 성격에. 걔가 누구 말을 듣는 애니? 그에 비하면 너는 항상 신사적이었지.”
태한이 설핏 웃었다. 그런 개차반과 비교를 한다면 누구라도 돋보이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가끔 그런 생각도 했어. 알다시피 나도 네 아버지와 정략으로 결혼했고, 네 형도 그랬잖니?”
“네.”
“나는 그게 너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태준이를 보면 생각이 많아지더구나.”
집안의 결합으로 맺어졌지만 애정 하나 없는 부부 사이. 이 집안의 식구로 맺어진 이상 불화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태준의 부부는 점화가 되지 않는 관계였다. 연애가 생략된 관계에 사랑이 싹틀 리 만무했다.
결혼한 지 2년이 되어 가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도, 대외적으로는 멀쩡하지만 둘 사이에 부부간의 정이 없다는 건 제삼자의 눈에도 보이는 것들이었다. 그러니 태한에게는 한 번쯤 선택권을 줘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글쎄, 그래도 내가 욕심이 많아서 둘째 며느리 자리를 포기는 못 하겠지만.”
서정주가 고개를 비스듬히 올려 든든히 곁을 지키고 있는 태한과 눈을 마주쳤다.
“그래도 기회는 한 번 줘 볼까 해. 네 안목을 믿으니까.”
엄격한 인상이 모처럼 부드럽게 휘어졌다.
“고맙습니다, 어머니.”
“이게 네 뜻을 전적으로 따른다는 말은 아니야. 알고 있지?”
“네, 그럼요.”
서로가 아는 것들이었다. 서정주에게는 이미 둘째 아들의 상대로 점찍어 둔 혼처가 있다는 것도, 욕심이 사그라들 리 없다는 것도. 그러나 한 번쯤 시간을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을 해 준다는 점이 고마웠다. 이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라는 걸 알기에.
“가서 쉬어. 출장 다녀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아침부터 너무 오래 붙잡아 뒀구나.”
“예, 좋은 하루 보내세요. 어머니.”
다정한 인사에 느긋해진 서정주가 곧 태한의 어깨를 두드리고 돌아섰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녹음이 우거진 해승원을 가만히 바라보던 태한은 곧 갈라진 길목으로 발을 내디뎠다.
***
함께 쓴다는 건 무엇이든 나눈다는 것이었다.
같은 시간을 함께 쓴다는 건 그 시간을 나누어 추억을 만든다는 것이고, 같은 공간을 함께 쓴다는 건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들을 함께한다는 것이다.
함께하는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일상이 저 혼자만의 것이 아니게 되었을 때, 곁에 있는 존재의 소중함이 절실해졌다.
소중함을 잊고 살다 깨닫게 되는 순간은 늘 놀라웠다.
소풍을 가는 것처럼 들떠 파주의 육송이 공방에 도착했을 때, 초록 잎이 무성한 화원을 종종거리며 걸음이 빨라지는 서은의 뒤를 밟는 태한의 입가로 미소가 맺혔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흔 즈음의 여자가 흰 셔츠에 초록색 앞치마를 유니폼처럼 두른 직원들 사이에서 반가운 얼굴로 달려 나왔다.
“기집애야, 왜 이렇게 오랜만에 온 거야.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여느 때보다 환하게 빙긋 웃는 서은을 얼싸안고는 잘 지냈냐, 어떻게 지냈냐, 더 예뻐졌다 수다스럽게 인사를 나누더니 곧 가게 안에 우뚝 솟은 나무처럼 한 자리를 차지한 태한을 발견하고 응시한다.
“어서 오세요, 류태한 씨죠? 안 그래도 우리 서은이한테 말씀 많이 들었어요. 이렇게 뵙는 건 처음이네요. 육송이예요.”
“저도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서은의 인생 선배이자, 서은에게 그늘에서 벗어나는 법을 알려 준, 살고 싶게끔 노란 히아신스 화분을 안겨 주었던 여자를 향해 태한이 허리를 숙여 깍듯하게 인사했다.
“편하게 계시다 가세요.”
아마 이곳에 있는 동안은 시름이 잊힐 거라며 육송이가 너그럽게 말하며 서은을 보았다.
“서은아, 분홍꿀풀 피었는데 볼래?”
“어디 있어요?”
육송이가 카페 끝으로 난 파란색 문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싱긋 웃었다.
“가 봐.”
걸음이 들떴다. 새파란 문을 통과해 비밀의 정원을 거니는 듯, 숲처럼 펼쳐진 온실을 지나 외부로 이어지는 테라스를 벗어나자, 육송이가 정성 들여 가꿔둔 꽃의 정원이 나왔다.
품종을 채취할 때가 되면 파종하고, 살아가기를 기다리며 마침내 꽃을 피워 내는 순간을 기다리는 일. 오랜 기다림 끝에 피어난 꽃들이 눈앞에서 흔들렸다.
여러 색이 어우러진 꽃밭 사이를 가르는 서은의 걸음이 빨라졌다.
“와, 진짜 예뻐.”
입술 모양으로 꽃을 피워낸 분홍색 꿀풀밭 앞 작은 팻말에는 꽃의 이름과 의미가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
분홍꿀풀, 추억.
“얘는 관화식물이거든요. 특이하게 꽃잎 모양이 입술 모양이에요. 꽃잎이 이렇게 예쁜 분홍색이라 이름도 분홍꿀풀인데, 이름 되게 달콤하지 않아요?”
줄기 끝 수상에 여러 꽃이 화서로 피어난 꽃잎 앞에서 서은이 들뜬 얼굴로 산들산들 목소리를 냈다. 분홍 잎이 만개한 꽃들 사이에서 상기된 뺨이 달아오르는 걸 알까. 꽃보다 더 달콤한 얼굴을 하고 들뜬 채로 조잘거리는 얼굴이 예뻤다.
태한은 아이처럼 흥분한 서은을 지그시 바라보며 바람 같은 서은의 목소리를 가만히 들어 주다가, 열중한 얼굴을 보고 웃었다.
제 키보다 훨씬 큰 사시사철 푸른 상록수들 사이로, 서은의 종알거리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하나라도 더 알려 주고 싶어 얘는 누구, 얘는 어느 계절의 아이, 예쁜 단어를 갖다 붙이며 예쁘게도 말했다. 그러다 문득 막 흙을 덮어 둔 듯한 자리에서 낮게 목을 뺀 식물 앞에서 빙긋 웃었다.
“번식기네.”
“번식기?”
“6-7월이 번식하기 좋거든요.”
“아아.”
그 말에 태한이 말없이 지그시 웃는다. 이어 서은은 눈살을 찌푸렸다. 번식, 이라는 말에 태한의 눈이 반짝 빛난 탓이다.
“주서은 씨는 아는 것도 많네.”
아이처럼 돌아다니는 서은의 뒤를 밟으며 태한은 키가 큰 식물들 사이를 그림자처럼 좇으며 미래를 생각했다.
“가볍게 시작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사람이 마지막에 좌절하면 무너지니까.”
언젠가 지승원이 건방지게 뱉었던 경고를 떠올리며 가장 마지막에 좌절하게 만드는 게 무엇일까 고민했던 어느 밤, 서은의 인생을 책임지기로 했다.
그가 낸 욕심에서 바뀌는 게 있다면 그건 혼자 견뎌 온 삶을 둘이 함께하는 일 정도일 것이다.
사랑하기로 했다.
사랑하지 않는 일은 없기로 했다.
겨우 서른 번밖에 되지 않는 밤. 해가 서른 번 뜨고 지는 동안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기는 서은과 다르게 태한의 마음은 더욱 단단해졌다.
주말에 겨우, 하루를 느긋하게 보내기 위해 자정이 넘은 시간에도 일에 매진하는 내내 생각한 건 하나뿐이다.
주서은을 아내로 맞이해야겠다는 생각. 서은의 집을 나서 다시 제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드는 아쉬움 대신, 돌아간 자리에 서은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서은의 일상에 비집고 들어 하루 중 일부는 흐트러뜨리고, 가령 좁은 방 안에 제 욕심껏 채워 넣은 커다란 침대처럼 불편하게 만드는 일을 늘려 갈 때마다 마음은 간절해졌다.
둘만이 아는 방문 너머의 뜨거운 소란함이 이제 더는 덧없이 흐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성큼 다가서서는 조용하게 밀려온 손이 서은의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었다. 단단한 손마디가 깍지 끼워지는 순간, 서은은 들뜬 와중에 곁에 있는 태한의 존재를 자각했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각인시키는 일에 주저함이 없었다.
파고들고, 파고들며, 파고들어.
서은의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가 본래 제 자리인 듯 끼워 맞춰지는 순간들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게 좋아요?”
바람처럼 파고드는 목소리에 서은은 손을 꽉 쥐고 걷는 태한의 손등에 입술을 꾹 찍어 눌렀다. 충동적이었지만, 고맙다는 말 대신이었다. 슬쩍 시선을 내린 태한이 걸음을 멈추더니 서은의 머리를 덮고 있는 라피아 햇을 젖히고 이마에 입맞춤을 되돌려 주었다.
“나도 좋아.”
네가 좋다면.
햇살처럼 반짝거리는 서은에게 너그러운 시선이 그늘처럼 내려왔다. 서은은 잠시 태한을 바라보다가 까치발을 들어 그의 입술에 쪽, 제 입을 맞추었다.
서은을 위해 시간을 내기 위해 제 시간을 욱여넣고 갈아 넣느라 고생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일이 그렇게 많냐는 질문에 원래 그렇습니다, 대답하면서도 얕은 한숨조차 쉬지 않는 사람이었다. 인내와 책임으로 점철된 삶이 얼마나 어려울까 싶으면서도, 이런 사람이라면 인생을 함께해도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깊어지는 순간들. 예고도 없이 태한의 입술이 서은의 입술을 벌리며 파고들었다.
부드럽고 녹진하게, 바람 같은 태한의 향기가 서은의 꽃향기를 짓누르듯 내려와 뒤섞였다.
견딜 수 없어. 참을 수 없어. 그러니까.
뜨거운 입술이 서은을 간지럽혔다. 달큼한 숨이 부드럽게 밀려와 입 안을 적시고 폐부 깊숙한 곳까지 닿는다. 맞물린 입술 사이에서 흩어지는 뜨거운 숨결 속에서 색색, 목 끝까지 차오른 숨을 간신히 뱉어 내다 서은이 그의 가슴을 슬며시 밀어냈다.
“누가 봐요.”
“보라지.”
한 걸음 떨어진 커다란 몸이 다시 거리를 좁히고 달라붙었다. 그는 상관없단 듯 서은의 허리를 끌어안고 오랫동안 입을 맞추었다. 산들거리는 바람 속에서 밀려오고 밀려나며, 뜨거운 입맞춤은 수줍게 흔들리는 꽃들만이 아는 일이었다.
사랑이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서은의 눈길이 닿는 가게로 들어가 배를 채우고, 그냥 흘러가다 전광판에서 지나치는 영화 티저에 ‘저 영화 재미있대요.’ 하는 말 한마디에 그대로 영화관에 들어가 영화 한 편도 보고 나왔다.
“오늘은 서은 씨 하고 싶은 대로 해요.”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들었던 말을 다시 현관문 안으로 몸을 욱여넣으며 떠올렸다.
“이제 가셔야죠. 태한 씨,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
매번 그러하듯 집에 잘 들어가는지만 보고 간다며 현관까지 따라와서는, 여기까지 왔는데 차 한 잔 안 주고 보낼 거냐며 매정하다고 하고, 차 한잔을 끓이는 사이에 차는 필요 없다는 남자의 태세 전환에 매번 그러하듯 웃음만 나왔다.
그러면서 다시 등 뒤에서 끌어안는 뜨거운 품을 느끼며 목덜미에 입술을 찍어 누르는 복잡한 입맞춤에 서은은 행복해서 웃었다.
“이러려고 온 거죠.”
“알면서 뭘 물어.”
집으로 돌아갈 시간만 되면 떨어지는 게 아쉬워 굼떠지는 태한이 어김없이 여지를 발견하고 파고들었다.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닫힌 방문 너머에서 단둘이 행복했다. 온몸이 서로에게 부서져 내리면서도, 마음만은 영원히 깨어지지 않는 다이아몬드 같았다.
***
고단한 하루 끝에 함께 눈을 감고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새근거리는 행복이 깨어진 건 새벽녘에 걸려 온 전화 한 통 때문이다.
- 언니? 자? 큰일 났어. 아버지 지금 응급실 실려 가셨어.
새벽 2시 즈음, 해인에게 걸려 온 전화 한 통에 정신이 없었다. 응급실로 뛰어 들어가는 서은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었다. 밤낮없이 24시간 돌아가는 병동 안, 온몸에 심전도 기계를 주렁주렁 달고 베드에 누운 주형국의 곁에서 묵주를 만지작거리던 희숙이 울며 도착한 서은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 어떻게 된 일이에요? 많이 안 좋아? 무슨 일인데?”
“아니, 주무시다가 갑자기 가슴이 너무 아프시다고….”
상황을 설명하던 희숙은 곧장 서은을 뒤따라 들어온 태한을 보고 하던 말도 잊었다. 이 새벽, 이 남자가 왜 여기에? 하는 시선은 곧 서은과 한 몸이 된 듯 자연스럽게 손을 쥐는 것을 보고 더욱 혼란해졌다.
“왜 두 사람이….”
상황을 설명하는 것보다 설명을 들어야 하는 쪽은 희숙과 형국인 듯싶었다. 태한을 보고 멍하니 입을 벌린 희숙의 시선과 형국의 예리한 시선이 꽉 그러쥔 두 사람의 손으로 닿았다.
당혹감을 고스란히 드러낸 표정으로 둘을 살피는 희숙은 주말을 함께 보내고 헤어지는 게 아쉬워 지금까지도 함께였을 게 뻔한 태한을 찬찬히 살폈다. 뒤늦게 태한과 손을 잡고 들어섰다는 걸 깨닫고 얼른 손을 놓으려는 딸과 그 손을 더 세게 거머쥐는 해신 그룹의 둘째.
“같이 온 건가?”
혼란함이 가득한 눈길에 서은이 입술을 깨물었다. 평소 태한의 단정한 슈트 차림만 보았을 형국에게 이런 모습으로 인사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류 상무 자네가 서은이랑 만나고 있을 줄은….”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사장님.”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태한은 곧기만 했다. 묵묵히 이 시간까지 귀한 남의 집 자식을 품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죄송스러운 마음은 단단한 책임감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앉아요, 앉으세요.”
희숙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음료라도 뽑아 와야겠다며 자리를 비운 자리는 뜻밖에도 얼어붙었다. 기본적인 검사 결과는 정상으로 나와서 추이를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는 형국은 어째서인지 태한을 내내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오래 바라볼 뿐이었다.
어색한 침묵이 세 사람 사이를 감돌았다. 이럴 땐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어떤 사이라고 말을 해야 하나. 아버지가 그토록 염원하던 연애를 하고 있다고, 내가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고백해야 하나. 그것도 당사자를 앞에 두고 머릿속이 복잡해질 무렵이었다.
“이런 상황에 드릴 말씀이 아닌 건 알지만, 서은 씨와 결혼을 전제로 교제 허락을 받고 싶습니다.”
“…….”
“태한 씨?”
“뭐라구요?”
서둘러 손에 캔 음료를 뽑아 온 희숙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결혼이라니. 서은도 멍하니 태한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인사를 드리게 되어서 송구합니다. 그런데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알기론 류 상무, 결혼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나직한 고백 끝에 형국이 언짢은 얼굴로 태한을 유심히 응시했다.
결혼을 준비한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린데.
혼란한 서은의 시선이 태한에게 향했다.
“자네,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하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묻는 시선에 형국이 태한을 제외하고 모두를 물렸다.
***
병원 복도에 나란히 앉은 모녀는 한동안 말없이 눈을 끔벅이며 서로 눈치만 보았다. 그러다 희숙이 서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아버지가 말씀하시더라고. 류태한 상무가 곧 결혼할 모양이라고. 집안에서 조용하게 결혼 준비를 하고 있다고, 아버지도 극비로 어떻게 들은 모양이야. 반지도 맞췄다고 하고, 그쪽에서는 곧 날짜를 잡을 거라던데. 너 몰랐니?”
머릿속이 새하얬다. 그럴 리가 없는데. 초점 없는 눈을 허공에 걸쳐두고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서은이 대답했다.
“아니야. 엄마가 잘못 아는 거겠지.”
“그런 거면 좋겠구나.”
희숙이 서은의 손을 붙잡아 두드렸다. 더 이상 딸이 상처받기를 원하지 않는 진심이 고스란히 손등을 뒤덮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알아서 할게.
웃는 얼굴로 희숙을 간신히 안심시키고 병원을 빠져 나왔지만, 멀리 가지는 못했다. 심란한 마음이 온몸을 찢고 터져 나오기 직전이었다.
결혼을 한다고? 반지를 맞추고? 극비로 진행하고 있다니. 그럼 나는?
멍하니 생각에 잠긴 채로 앰뷸런스가 드나드는 길목에서 태한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공연히 바닥을 찍어 대는 발끝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마음이 자꾸만 지끈거렸다. 아버지가 알고 있으니 그의 결혼은 틀림없는 사실일 테고, 두 사람이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실망하고 싶지 않아.
상처받고 싶지 않아.
희숙이 부드럽게 쓸어 주던 손등을 손톱으로 긁어내는 내내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떠다녔다.
내일 아침은 함께 맛있는 토스트를 만들어 먹어야지. 저녁엔 가게 문을 일찍 닫고 곧 있을 그의 생일 선물을 사러 가야지. 그가 퇴근하고 돌아오면 근사하게 집밥을 차려 배불리 먹여 줘야지. 무슨 요리를 준비할지, 고민 끝에 메뉴를 정하고 장을 볼 생각에 들떴던 시간 모두가 쓸모없는 일이었다니.
육송이에게 소개를 하고, 앞으로 계속 이렇게 도란도란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정이 들어가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거구나. 그래도 어떻게 사랑하는걸. 그러니 더 사랑해 줘야지, 마음먹은 시간들이 모두, 부질없었다.
그때 서은의 곁으로 발자국이 밀려들었다. 익숙한 운동화는 태한의 것이었다. 서은이 고개를 들었다. 묵묵히 병실을 빠져나온 태한이 물끄러미 서은을 응시했다.
침묵과 함께 닿는 눈길에 서은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함께 병원을 찾았을 때와 다르게 홀로 병원을 빠져나오는 내내 누군가 서은의 마음에 폭탄을 던진 것 같았다.
병원 안에서는 어떻게든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아, 복도를 벗어나는 그 짧은 순간이 영겁 같았다.
복잡한 얼굴로 태한을 올려다보던 서은이 문득 몸을 틀어 걸음을 내디뎠다. 무작정 흩어지는 걸음이 다급했다. 마치 도망치는 사람처럼 속도가 붙은 걸음에 등 뒤에서 서은을 부르던 태한이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걸어와 서은의 앞을 가로막았다.
“천천히 좀 가요.”
오는 길에는 내내 형국의 걱정으로 울던 얼굴이 돌아가는 길에는 더한 혼란으로 뒤덮여 있다. 태한은 여전히 이곳에 들어설 때와 다름없는 눈동자로 서은을 응시했다.
묵묵히 닿는 시선이 평소와 다름없이 자상해서, 평소와 다름없이 침착하고 다정한 그 눈길에 가슴이 미어졌다.
아니라고 해야지.
무슨 말이라도 해 줘야지.
숨통이 터져버릴 것 같은 침묵 속에서 서은이 입술을 떨었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고 있었다. 몸이 바들바들 떨리는데도 도무지 어디가 떨리는 건지 알아채지 못할 만큼. 배신감과 실망이 응집되어 분노로 간신히 그를 마주하고 섰을 때다.
“태한 씨.”
“네.”
“결혼해요?”
여전히 나직한, 여전히 다정한, 그래서 원망스러운 눈길은 일말의 동요도 없이 태한에게 향해 있었다.
“네.”
아니라거나, 당황하거나. 최소한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 그러나 태한은 너무 묵묵히 아무렇지 않은 듯 실토했다.
서은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상실감에 휩싸이는 건 순식간이다. 어떻게 미안해하지도 않아. 서은의 숨이 거칠어졌다.
“알겠어요.”
서은은 다른 이유를 묻는 대신 입술을 꽉 다물고 태한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게 답니까?”
“그럼요?”
여기서 뭘 더 해야 하는데. 이런 것들을 우려했다. 그래서 한 달만 만나 보자고 했고, 그 한 달이 채워진 오늘. 듣게 된 결말이 이런 건데. 그래도 20대의 마지막 생일은 행복하게 보내겠구나, 들떴던 지난날이 우스웠다.
찰나지만 손을 꼭 잡아 주던 희숙의 걱정과 가족의 우려, 그리고 내내 마음 졸이며 몇 번이고 썼다 지웠던 고민들이 이렇게 거짓말처럼 현실이 되는 순간. 흔들리지 않으려 애쓰는 입술이 잘게 떨렸다.
“이제 그만 만나요.”
서은은 여전히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태한을 보며 똑똑히 말했다.
“그래야죠. 어차피 우리는 한 달만 만나기로 했고, 집안에서 정해진 약속 두고 떼쓸 정도로 나 그렇게 절박하지 않아. 그러니까 갈 길 가세요.”
태한은 왜 그러냐는 의문도, 어떻게 알게 되었냐는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평소에도 그랬듯 서은이 하는 말들을 어디까지 하는지 듣고 있을 뿐이었다.
왜인지 그런 담담한 반응이 더 비참하게 느껴져 서은은 입술을 깨물고 등을 돌렸다.
“서은 씨 생각은 어떤데요. 나 좋아하는 거 아니었나?”
걸음을 떼어 내는 순간 다시금 태한의 한마디가 발목을 잡았다. 서은은 아무것도 아닌 듯 이미 끝난 일을 말하듯 빠르게 이야기했다.
“좋아했어요. 그리고 되게 즐거웠어요. 이제 와서 아무 의미도 없겠지만. 오늘도 너무 행복했고, 아니. 요즘 내내 행복해서 내가 착각했나 봐.”
“그러고 보니 서은 씨한테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은 못 들은 거 같아.”
사랑. 사랑하지. 사랑한다.
“나는 주서은 씨가 좋아요.”
늘 그렇게 말해 주던 남자.
나도 당신을 좋아해.
아니, 사랑해.
한 달 만에 그런 감정이 생길 수 있다는 게 너무 놀랍고, 신기하고, 경이로울 정도로 뜨겁게 사랑한다. 그런데 그게 이제 무슨 소용이라고. 마음을 다쳤다는 걸 내색하고 싶지 않아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을 했습니다. 안전하게 가는 길이 무엇일까.”
“서론이 기네요.”
“들어 봐요.”
태한이 그 자리에 멈춘 서은에게 다가왔다. 마주 보려 하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들어 눈을 맞추고 그가 시선을 찔러 넣었다.
어쩐지 날카롭고, 어쩐지 더 단단한 것들이 혼란하게 흔들리는 서은의 눈을 헤집어 마음을 관통했다.
헤집지 마. 흔들지 마. 조금만 더 건드리면 눈물이 툭 터져나올 것 같았다.
“서은 씨가 도와주지 않으면 결국은 아무 소용 없는 일이 될 테지만.”
“불륜이라도 하자는 거예요?”
참다 못해 신경질적으로 뱉어 낸 목소리 끝이 씩씩거리며 떨려 나왔다. 동시에 태한은 한 대 맞은 사람처럼 기가 막힌 얼굴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성격 급하네, 주서은.”
일그러진 미간을 그가 습관처럼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르는 순간, 서은이 그의 손을 쳐 냈다.
“됐어요. 안 할래요.”
“뭔지 들어 보지도 않고 안 한대.”
“나 이런 취급 받으려고 태한 씨한테 연애하겠다고 한 거 아니에요. 비록 한 달, 우리가 만난 시간 그렇게 짧긴 했어도. 나 태한 씨 만나는 동안은 진심이었어요. 그게 아니면 미쳤다고 내가 내 집에 그렇게 매일 당신을 들였겠어?”
이제는 원망에 가까운 진심이 속에서 쏟아져나왔다.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는 마음이 하루 종일 몸속을 떠돌다 이제야 속사포처럼 터져 나왔다.
“더해 봐요.”
“뭘 더해요. 지금 사람 두고 장난해? 나 이제 류태한 씨 더는 안 봐. 꺼져요.”
감정적으로 씩씩대는 서은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렇게 좋아했습니까?”
“꺼지라구요.”
눈두덩이 뜨겁게 젖어 가는 와중에도 그는 그저 입술을 기울여 웃을 뿐이었다. 그 반응에 서은은 구겨진 종잇장처럼 엉망이 되었다. 내가 그렇게 우습지. 내가 그렇게 만만했지. 너무 미워 죽겠어. 피가 밸 만큼 입술을 꽉 물고 안간힘을 다해 그를 할퀴어 본 순간, 그가 천천히 바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의 손안에 한없이 작은 빨간 반지 상자. 뚜껑을 열자 나선형의 링 위에 브릴리언트 컷 다이아몬드가 세팅되어 있고, 한가운데 물방울 모양의 3캐럿 다이아몬드와 그 곁으로 여섯 개의 다이아몬드가 왕관을 연상시키는 디자인의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영롱하게 빛나는 다이아몬드는 어둠 속에서도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바보처럼 멍하니 반지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반지를 내밀며 고백했다.
“이렇게 주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는데.”
“…….”
“내 생각은 주서은 씨 생일 자정에 주는 거였어.”
이제 이틀 앞둔 서은의 생일, 그때까지만 참고 기다리려 했다. 자정이 지나면, 당신의 마지막 20대를 축하하고 새롭게 시작될 30대부터는 어느 순간이든 함께하자고.
그러나 형국의 폭탄 같은 발언에 모든 계획이 다 무너졌다.
“이르다는 생각 안 해 본 거 아니지만, 나도 이게 최선이에요.”
허탈하게 웃는 태한을 담은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성깔 있는 주서은 씨, 당신만큼 미래를 같이 하고 싶은 사람은 없었어.”
“…….”
“결혼해요, 우리. 같이 늙어 가고 싶어.”
다시 머릿속이 쓸려 나갔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벙한 표정으로 태한을 응시하는 사이, 그가 소란한 다툼에 종지부를 찍듯 서은의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넣었다.
“잘 맞네. 이거 공수하느라 고생했거든. 제작이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그럼 집안에서 준비하고 곧 날짜를 잡을 거라는 결혼은 뭔데. 손가락에서 빛나는 반지를 보며 서은이 느리게 눈을 끔벅였다. 시야를 부옇게 흐린 빛무리가 흩어졌다.
“저는 분명… 태한 씨 결혼 준비하고 있다고….”
“맞아요. 서은 씨하고 결혼할 거야.”
서은이 여전히 혼란이 가시지 않은 눈을 들어 태한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집에서는 일찌감치 데려오라고 했는데, 반지가 안 나와서.”
그가 씩 웃으며 상체를 숙여 서은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내가 다른 여자랑 결혼할 줄 알았어요?”
서은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무작정 화부터 낸 좀전의 상황이 민망해 뺨이 달아올랐다.
“왜 진작 말 안 했어요?”
“어디까지 상상했어요?”
“몰라요. 그게 왜 궁금한데.”
“다른 남자 만나는 주서은 볼 때마다 바짝바짝 타는 내 심정 좀 알았으면 해서.”
놀리듯 닿은 음성에 서은의 입술이 비죽거리며 떨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눈가에 그렁하고 차오른 눈물이 툭,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런 줄도 모르고 마음 졸였잖아.”
“집에서 서은 씨 뵙고 싶다네요.”
태한은 양손으로 서은의 얼굴을 잡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엄지손가락으로 쓸어 내며 말했다.
“이게 뭐예요. 이렇게 울리는 게 어디 있어.”
“왜. 귀엽기만 한데.”
태한이 견딜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을 흘리는 서은을 끌어안고 속삭였다.
“더 기다릴 이유가 없어. 나랑 살아요. 잘해 줄게.”
“흐윽.”
다정한 품에 당겨진다. 따뜻한 가슴에 뺨이 닿았다. 무엇이든 담을 수 있을 것 같은 너른 가슴에 눈물을 한 방울 찍고, 안도의 숨을 묻힌다.
“평생 울리지 않을게.”
커다란 몸을 끌어안은 서은을 도닥이면서 그가 약속했다.
주서은 네게 평생, 나를 바치겠다고.
첫눈에 안고 싶다고 생각한 여자는, 비로소 그의 품 안에서 온전해졌다. 한 번도 그런 적 없던 그가 처음으로 안고 싶은 충동을 느껴 궁금했던 여자. 그 호기심이 불어나 관심이 되고, 관심이 사랑이 되어, 이제는 이렇게.
“아버지랑은… 이야기 잘 끝난 거예요?”
“그럼.”
태한이 훌쩍이는 서은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된 건가?”
“예, 결혼 준비하고 있는 거 맞습니다.”
내내 바위처럼 단단하던 형국의 눈동자가 흠칫, 떨리는 것을 보며 태한은 지체 없이 말을 이었다.
“해승원에도 말씀드렸습니다. 서은 씨와 교제하고 있고, 처음으로 이 사람이면 결혼해도 좋겠다고 생각한 사람이라고요. 회장님께서 조만간 자리를 마련하라고 하셨습니다. 조심스럽게 진행되고 있는 부분들은 아직 제가 서은 씨 허락을 못 받아서 그렇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다시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서은 씨가 허락해 주지 않으면 소용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깔끔한 보고처럼 이어지는 고백은 진심이었다.
“서은이가 거절하면 어떻게 할 셈인가.”
“제가 승산 없는 일에 매달리는 거 보셨습니까.”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하는 우려와 플랜 B를 계산하는 형국을 보며 태한은 단호히 약속하고 끝내 허락을 받아 냈다.
그러니 이제 더는 주저할 게 없었다.
태한이 코끝이 붉어진 서은의 이마에 슬며시 입술을 붙였다 떼며 속삭였다.
“주서은 씨 나한테 코 꿰인 거야.”
***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진지하게 할 고백이 있다며 찾아온 승원을 앞에 두고 서은은 마른침을 삼켰다.
진짜 사랑 고백이면 어떻게 거절해야 하지? 뜻밖에도 요란했던 청혼 이후에 받은 승원의 연락에 바짝바짝 마른다는 그를 달래며 승원을 마주한 시간.
고민이 많은 얼굴로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 아이스 커피를 한 잔 비워 내고도 여전히 말이 없었다. 평소답지 않게 뜸을 들이는 승원의 늑장에 서은이 견디지 못하고 침묵을 깼다.
“무슨 일인데.”
하, 하고 한숨을 나직이 뱉었던 승원이 손으로 지그시 가슴을 누르고서 긴장을 털어 냈다.
“오래전부터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
“잠깐만.”
왜인지 모르게 폭탄이 터질 것 같은 기시감이 들어 서은은 승원의 말을 잘랐다.
“우리 좋은 친구지?”
깊게 한숨을 내쉬는 승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닐 거야.
그런 건 아닐 거야.
생각하며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승원을 예의 주시할 때, 입술을 잘근 물었다 놓으며 괴롭게 번민하던 승원이 입을 열었다.
“미안해. 나 결혼한다.”
“뭐?”
서은의 눈이 휘둥그레 벌어졌다.
“누구랑? 너 누구 만나?”
승원이 가장 괴로운 한 고비를 넘겼다는 듯 이제야 후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 있었어.”
“언제부터?”
“1년 전부터. 그리고 애도 생겼다.”
“야, 지승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언성을 높이자, 승원이 목덜미를 긁적이며 서은의 눈치를 살폈다.
“어떻게 1년이나 만나면서 나한테는 말을 안 해?”
“너 심란할까 봐.”
어쩐지 승원의 동생인 하연에게 바쁜 와중에 레몬청까지 만들어 줘서 고마워, 하고 전화를 했을 때 무슨 말이냐며 그런 적 없다고 당황하던 하연의 반응이 미심쩍었다. 그럼 이제까지 얻어먹은 건 뭐였나, 혼란했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주영이랑 진한이도 다 알아.”
“뭐? 왜 나만 빼고?”
왜 셋만 아는 건데. 제일 마지막에 승원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 내심 섭섭해져 저도 모르게 눈가가 축 처졌다.
“네가 진심으로 행복해지는 순간을 기다렸거든.”
같이 행복하고 싶어서. 우린 늘 그랬잖아. 누구 하나 할 거 없이, 모두가 행복했잖아. 그러니 제 자리를 찾아가는 세 사람은 마지막 남은 서은이 행복해지는 순간만을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그래도 그렇지.”
“주영이가 너 잘 살펴보라고 시집가는 날도 얼마나 신신당부를 했는지 아냐.”
“야, 너희 정말… 날 뭘로 보고….”
“그렇게 우리가 네 걱정을 해.”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는 친구라는 건 일찍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럼에도 나직한 친구의 고백에 기분이 묘했다. 코가 시큰거리나. 벌써 임신 5주 차에 접어들어 입덧이 너무 심해 죽겠다던 주영이 더욱 보고 싶은 날이었다. 서은은 뭉클한 감정을 억누르며 괜스레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나는 너희한테 해 준 게 아무것도 없는데. 사는 동안 내내 걱정만 끼쳤네.”
“야, 주서은. 네가 있으니까 아직까지 우리가 이렇게 뭉쳐서 끈끈한 거야.”
넷이 다 함께 모이기는 어려워도, 중간에서 서은이 접착제처럼 모두를 모이게 만들고 챙기게 만들었다는 걸. 그러니 이제까지 사이가 유지되었다 고마워하는 승원의 진심 어린 눈빛에 서은이 울컥했다. 툭하면 어른이 되라며, 더 자라라, 쑥쑥 자라라, 주서은. 하던 눈길에 애정이 가득했다.
“그 사람은 잘 만나?”
“응.”
태한의 안부를 묻자마자 서은의 입가에 미소가 배어난다. 떠올리기만 해도 입술을 기울여 웃게 만드는 사람. 이제야 서은이 진정한 사랑을 찾은 것 같아 안심이었다. 그 순간, 얼굴을 쓸어내리는 서은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서 휘황찬란한 다이아몬드 반지를 발견했다. 승원의 입이 벌어졌다.
“너 그 반지 뭐야? 설마 너도 애 생겼냐?”
“아니거든! 도대체가 머릿속에 뭐가 든 거야? 짐승!”
“야, 솔직히 따지고 보면 나보다는 그쪽이 더 짐승 아니냐?”
“아니거든?”
“맞거든? 덩치부터가 산짐승같이 막 이래서.”
허공에 대고 태한의 덩치를 가늠하며 응수하던 승원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에 전염된 듯 서로 얼굴을 보고 쿡쿡 웃다, 서은은 한바탕 소란이나 다름없던 프러포즈를 나직이 흘려주었다.
“그땐 내가 결례를 좀 했어. 좋은 사람인 거 아는데, 너한테 진심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 덕에 맺어진 거 모르지?”
“적당히 찔러보는 거면 내 선에서 잘라 내려고 했는데.”
서은이 그게 제 의무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응시하는 승원을 향해 픽 입술을 틀어 웃었다.
그렇게 가위질을 한다고 잘려 나갈 사람이 아니라고.
“좋은 사람이야.”
“알아.”
“내가 이제까지 만나 본 사람 중에 제일.”
서은을 사랑하고, 아껴주고, 위해 주고, 안아 주는 사람 중 가장 다정한 사람이었다.
“행복해 보인다, 서은아. 이제는 우리에게 잘 살아가야 하는 의무가 생겼으니까.”
“그래. 우리 같이 행복해지자.”
그것이 우리의 의무라면, 얼마든지 기쁘게 받아들이겠노라고.
비로소 그늘이 지워진 서은을 승원이 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었다.
***
백화점은 한산했다. 서은은 승원과 헤어지고 난 뒤 태한의 손을 이끌고 무작정 아기용품 매장이 가득한 5층을 한바탕 누빈 뒤에 이것저것 세심하게 구경하며 고민했다.
신발 한 짝을 들었다 내려놓는 서은의 손길과 얼굴이 더없이 진지해, 태한은 차마 승원을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묻지 못했다. 약간은 초조한 듯 서은의 반응을 기민하게 살피는 태한의 눈앞으로 하얗고 작은 아기 신발이 슥 밀려들었다.
“이거 어때요?”
듣고 싶은 말은 따로 있는데, 원하는 이야기를 해 주는 대신 묻는 얼굴이 다만 무구해 태한은 혼란했다. 지승원을 만나러 간다고 했을 때는 도대체 무슨 고백을 하나, 마음을 졸였는데. 그런 뒤에 곧장 백화점으로 와서 아기용품을 고르는 저의를 알 수가 없었다. 성심껏 아기 물건을 뒤적이는 서은을 보며 짧은 순간 별생각이 다 들었다.
혹시.
설마 그런 건가.
생각할수록 가슴이 두근거렸다. 태한은 서은의 납작한 배를 가만히 응시했다.
“서은 씨.”
“네, 태한 씨.”
“요새 컨디션은 어때요?”
“괜찮은데요.”
서은이 아기 신발을 하나씩 뒤집어 보며, 싱긋 웃었다.
“혹시 기초 체온이 평소보다 높다거나, 피곤하다거나.”
“좀 나른하긴 해요.”
그러고 보면 간밤에 한껏 섹스를 하고 난 뒤 돌연 딸기가 먹고 싶다고 했다.
설마 그건가.
태한의 가슴이 지끈하고 거세게 울렸다.
“우리 이거 준비해야 합니까?”
그가 약간 상기된 얼굴로 아기 신발을 집어 든 서은의 손을 붙잡았다.
“네?”
“얼마나 필요해요?”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당장이라도 이 매장. 아니, 이 백화점 한 층을 통째로 털어 갈 기세로 태한이 의욕적으로 눈을 빛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임신, 아니에요?”
아기가 신는 첫 신은 어떤 걸 골라야 하나, 오로지 그것을 신경 쓰느라 미처 몰랐던 서은은 이제야 태한이 오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들뜬 얼굴을 보니 이 남자도 콩깍지가 단단히 씌었구나 싶었다.
“졸지에 조카가 둘이나 생겼어요. 승원이, 결혼한대요. 제주도에서. 거기서 식당 하는 여자 만나서 1년간 연애하다가 그랬나 봐요. 그래서 그렇게 제주도를 다녀왔던 거였어.”
다시 생각해도 기가 찬다는 듯 중얼거리는 서은의 곁에서 태한이 한숨을 푹 내쉬며 패자처럼 신발을 내려놓았다.
“난 또.”
안도할 줄 알았는데 잘생긴 얼굴에 오히려 실망이 가득했다.
“왜요? 왜 그런 얼굴인데?”
“아빠가 되는 줄 알았지.”
태한은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서은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
“잠시지만 설렜습니다.”
“나만 있으면 된다더니.”
“욕심이 생겼어요.”
그가 서은의 작은 어깨를 감싸 당기며 속삭였다.
“나도 내가 이럴 줄 몰랐지.”
좋은 변화였다. 우연히 스치듯 만난 사람과의 사이에서 별처럼 떨어진 감정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 뒤 열매를 맺고, 변화를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건.
“태한 씨는 나중에 결혼하면 아이는 몇 명 낳고 싶어요?”
음, 하고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은 금세 과부하에 걸려 정지 직전이었다. 하라는 대답은 안 하고 목덜미가 붉어지는 걸 보니, 아마도 꽤나 깊고 진한 미래가 펼쳐진 모양이었다.
“최소 셋, 은 힘들겠습니까ㅤ?”
“셋?”
“그럼 둘.”
얼른 눈치를 살피고 말을 바꾸는 태한을 보며 서은이 그의 가슴을 툭 치고선 등을 돌렸다.
“노력해 볼게요.”
한 발짝 앞서가는 서은에게 다가서며 그가 은밀하게 속삭였다.
“오늘부터요.”
아무도 들을 수 없게끔 속닥여진 목소리에 서은이 미간을 찡그렸다. 곧 그 주름을 달래듯 살살 문지르며 태한이 태연한 얼굴로 서은의 손을 잡아끌었다.
“안 되겠다. 그냥 지금부터.”
내 마음에 꽃을 피우세요.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당신의 품에서 열매를 맺게요.
성급하게 사람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걸음이 빨라졌다. 손을 맞잡고 누군가에게 쫓겨 달아나듯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에 웃음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