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유리창 너머의 서은은 행복해 보였다. 꽃을 만지고 하루를 온전히 담아 보내는 테이블 너머 누군가와 즐겁게 떠들며. 당신의 세계는 행복하구나.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며 미소 짓던 태한의 눈동자에 불만이 들어찬 건, 나란히 앉아 소담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남자의 손길이 서은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는 순간부터였다.
지승원.
저 자식은 볼 때마다 거슬린단 말이야.
가게 문을 열고 태한이 불쑥 들어서자, 갑작스러운 등장에 서은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내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연락도 없이 왔어요?”
“언제는 내가 연락하고 왔습니까?”
서은의 곁으로 성큼 다가서며 태한은 경계하듯 승원을 바라보았다. 태한을 보고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한 승원이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중에 연락할게.”
이제껏 사이좋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태한이 오자마자 공교롭게 퇴장하다니. 왜인지 모르게 둘만의 공간에 이물질이 된 느낌이었다. 말 한마디 섞지 않고 사라져 버린 승원을 보니 속에서 욱하고 무언가 치밀었다.
“저 친구는 왜 이렇게 자주 옵니까?”
“원래 자주 들러요. 오늘은 레몬청 준다고.”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유리병 안에 동그랗게 썰린 레몬이 노랗게 가득 차 있었다.
“레몬티 드실래요?”
“됐습니다.”
작고 소소한 것들에서 오는 기쁨. 그에 반해 화려했던 약혼식의 불쾌한 순간이 떠오르자 태한은 저도 모르게 뚝뚝해졌다. 자리를 잡고 앉은 태한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서은은 그의 앞에 턱을 괴고 앉아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약혼식은 어땠어요?”
“피곤했어요.”
“그럼 집으로 바로 가지. 왜 여기로 왔어요?”
주서은 당신이 보고 싶어서.
그래서 무작정 달려온 것인데, 본의 아니게 불청객이 된 듯한 느낌에 마음이 편치 못했다.
“내가 방해했습니까?”
“방해는요. 우리 그런 사이 아니에요.”
“근데 자꾸 거슬려.”
태한이 조금은 사나워진 눈으로 서은을 빤히 바라보았다. 뜻밖에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그런 시선에 서은은 괜히 가슴이 저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승원과 오해를 살만한 짓을 해서가 아니라, 그런 식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눈앞의 남자가 가진 비틀린 질투 때문에. 그러나 서은이 아주 조금 머쓱한 표정으로 대수롭지 않은 듯 이야기했다.
“승원인 그냥 친구예요. 저랑 어려서부터 계속 잘 지내 온….”
“그건 모를 일이지.”
짜증스럽게 튀어나온 대답에 분위기가 서늘해졌다. 약간의 침묵 속에서 서은이 얕은 한숨을 내쉬며 그를 달래었다.
“진짜예요.”
“남자 그렇게 함부로 믿는 거 아닙니다.”
그러나 태한은 무슨 오해를 단단히 한 듯 표정을 풀지 않는다. 심기가 뒤틀린 듯도 했다. 도대체 승원과 저 사이에 오해할 게 뭐가 있어서. 그날 유별나게 굴었던 승원의 태도를 생각하면 견제하는 것쯤은 이해를 하지만 이런 식으로 무작정 오해하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서은은 표정을 지운 얼굴로 나긋하게 말했다.
“친구 사이에 그런 불순한 오해를 하는 게 더 이상한데요.”
“그건 주서은 씨 생각이지. 너무 마음 놓고 있는 거 아닌가.”
“왜 계속 승원이하고 제 사이를 그런 식으로 의심하세요?”
의심이 아니라 질투다. 너무 바빠서 주서은의 시간 모두를 차지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질투. 건물주라서 여유로운 승원은 시간이 날 때마다, 보고 싶을 때마다, 일이 없어도 서은을 만나러 들를 수 있는 반면, 자신은 일에 파묻혀서 겨우 시간을 내야만 서은을 볼 수 있는 게 억울했다.
그런 점이 분하다는 게 우습기도 했지만, 당장 대만으로의 출장을 앞둔 상황에 잠깐이라도 얼굴을 보기 위해 어떻게 일하는지도 모르면서, 이렇게 우연히 발견하게 된 모습에 화가 났다.
아무 잘못도 없는 서은을 상대로 이런 식으로 화풀이를 하는 건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가 났다.
수준을 운운하던 떨거지 같은 것들의 모욕 때문인지, 아니면 지승원이 서은을 대하는 태도에서 느껴지는 애틋하고 특별한 느낌 때문인지, 그런 생각을 하다 단지 서은을 독차지할 수 없다는 점에서 화가 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와중에 승원의 편만 드는 서은을 보니 섭섭한 게 사실이었다.
“주서은 너는 몰라도 너무 몰라.”
“그럼 류태한 씨도 믿으면 안 되겠네요.”
“그게 같습니까?”
섭섭한 마음에 뱉어 낸 말에 서은이 날카롭게 응수했다. 태한의 목소리가 냉랭해지자, 서은이 단단히 화가 난 얼굴로 태한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서은이 이런 얼굴을 한 적은 처음이었다. 다정하게 웃는 얼굴에 치솟는 감정을 보니 마음이 더 혼란했다. 지승원을 위해서 그렇게까지 하는 건가. 서은의 우선순위에서 승원보다 밀려난 기분이 참담했다.
“다를 게 뭐예요? 태한 씨야말로 밤에 와서 자고 아침 되면 쌩하니 가면서. 이건 괜찮은 연애예요?”
서은의 반격에 태한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굳어 서은을 응시했다. 괜찮은 연애냐니. 잠깐이라도 보고 끌어안고 자는 시간이야말로 태한이 하루 중 가장 고대하는 시간인데, 그걸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나. 머리가 뜨거웠다.
“내 친구 문제까지 왈가왈부하시는데, 이런 게 연애면, 더는 힘들 것 같아요.”
묵묵히 듣고 있던 태한의 미간에 금이 갔다.
“제 생활을 존중해 주시지 않으면 어려워요.”
“그만하자는 겁니까.”
날카롭게 튀어 나간 말에 서은은 대답 대신 입술을 꾹 다물었다.
“서은 씨 뜻이 그래요?”
고집스러운 뺨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실룩거린다. 괴롭고 힘이 들 때마다 구겨지는 미간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서은은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차갑게 대꾸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어쩔 수 없는 거죠.”
그렇게나 지승원과의 우정이 중요한가.
나는 그저 밤에 이불속에 파고들 줄만 아는 파렴치한 같은 놈이고.
시선을 주지 않으니, 비틀린 마음임을 알고도 확인을 할 수가 없다.
진심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서은의 태도는 단호했다.
친구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음에도, 이해하는 모든 것들은 찰나의 자존심에 무용지물이 되었다.
이제까지의 인내가 산산이 부서졌다. 방패처럼 쏟아 낸 말 한마디에.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가시처럼 돋친 그 말 한마디에.
“알겠습니다.”
태한은 끝끝내 외면해 버린 서은의 뺨을 한참 응시하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
인천국제공항 제1 여객터미널 면세점 사업권과 도심에 위치한 시내 면세점을 제외하고도 대만의 타오위안 국제공항 면세점 입찰 준비를 위해 출장길에 오른 지 사흘이었다. 국내외로 공격적인 노선을 확보하겠다는 태한의 의지는 평소보다 더욱 타올랐다.
대만 국제공항 면세 사업권은 연 4천억 원에 육박하는 매출 규모를 기록하고 있으나, 자국 기업에게 오랜 기간 독점 운영을 맡겨 왔다. 해신면세점은 마카오와 홍콩, 태국과 일본을 비롯해 아시아 대부분의 면세 사업권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그치지 않고 기반을 조금 더 확장하기 위해 의지를 가지고 독점 시장에까지 문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지난해 해신면세점의 해외 매출 규모는 7,500억이었습니다. 아시아 허브 공항은 이미 확보했지만, 그래도 이곳까지 확보하게 된다면 앞으로 아시아 면세 사업은 물론 세계적인 도약이 더욱 수월해지겠죠. 연간 해외 매출 목표는 1조이며….”
박 실장의 보고가 이어지는 사이, 태한의 머릿속으로 지난 생각이 떠올랐다.
“어느 정도 수준은 맞는 게 좋지 않겠어? 아무리 잠깐 데리고 놀더라도.”
서은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지껄이는 소리를 듣고 생각한 건 하루라도 빨리 제 사람으로 만들어서 제 품에 두고 세상으로부터 서은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밤에 와서 자고 아침 되면 쌩하니 가면서. 이건 괜찮은 연애예요?”
“이런 게 연애면, 더는 힘들 것 같아요.”
그게 정말 서은의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고도, 지금은 가시 같은 자존심이 뾰족하게 솟아나 괜한 소릴 하는 거라는 걸 알고도, 한 공간에서 다정하던 두 사람과 저보다 더 오래 서은에 대해 알았을 그 시간이 부러워 그랬다.
서은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나, 그 손길을 받는 서은이나 서로에게 익숙하고 편해 보여서.
다시금 승원을 향해 다정하게 웃어 주던 서은이 떠오르자 가슴이 형언할 수 없이 지끈거렸다.
“상무님도 아시다시피 MOT 마케팅은….”
정석대로 집안에서 정해 준 사람을 만나라는 사람들의 우려가 이런 거였나 싶다가도, 이는 단지 자연스러운 연인 간의 다툼일 뿐이라고. 서은이 두려워하는 것들이 이런 것에서 오는 격차인가 싶다가도, 결국은 섣부른 제 감정 때문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 태한은 좌절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날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별것도 아닌 제 치졸한 질투 따위로 서은에게 상처를 주었다니. 생각에 잠긴 태한의 이가 바드득 갈려 나갔다.
만일 의무를 지녀야 해서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면 그 대상은 오로지 주서은이었으면 했다.
그래서 내내 서은과 함께하려면 어떤 방법이 좋을지, 주저하는 서은을 어떻게 견인해 올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왔는데.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서은과 가정을 꾸릴 생각에 들뜨고, 그녀에게 프러포즈하는 상상에 웃음 지으며 남모르게 준비하는 주제에, 겨우 이런 치졸한 감정 하나를 이기지 못해 먼저 등을 돌렸다는 사실이 한심해 견딜 수 없었다.
이렇게는 놓치고 말 것이다. 가뜩이나 사랑에는 소극적인 서은에게 이렇게는 결국 류태한도 별 볼 일 없는 사랑을 준 적당한 사람으로 남겨질 일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이대로 정말 괜찮은가.
아니, 하나도 괜찮지 않다.
질투에 눈이 멀었다는 건 너무 유치하지만, 그런 유치한 감정에도 어느새 들끓어 이성을 잃을 만큼 서은을 사랑한다고. 실은 서은에게 화가 난 게 아니라, 서은을 찾아가기 전부터 마음이 뾰족해져 있었다고.
단 며칠을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한 순간도 서은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한껏 인상을 쓰고 시간이 가는 것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던 태한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실장님, 일정 조금만 당깁시다.”
“예?”
사업 계획에 대해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설명하는 박 실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태한을 보았다.
“그래 주세요.”
무슨 일이 있는 건가, 동행하는 내내 신경 쓰이던 차. 박 실장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스케줄을 조정하겠다 대답했다. 시찰 및 주요 스케줄은 소화했으니 나머지는 박 실장이 알아서 마무리를 지을 것이었다.
“오늘은 이만 쉬죠. 남은 거 쉬면서 체크하겠습니다.”
“예.”
“아, 그리고 지난번에 부탁드렸던 거. 좀 더 빨리 받을 수 있을까요?”
“확인하고 준비하겠습니다. 쉬십시오.”
박 실장이 고개를 돌려 나가자, 태한이 넥타이를 풀고 소파에 몸을 가누었다. 휴대전화는 이곳에 도착한 후로 단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뒤적이는 그의 눈동자에 그날 이후 메시지조차 끊겨 버린 서은의 지난 메시지만 되새겨졌다.
보고 싶어요.
언젠가, 웃는 얼굴로 속삭이던.
언제나 웃는 얼굴로 맞이하던.
오늘은 보고 싶지 않았냐는 말에 수줍게 웃으며 대답하던.
활자에서조차 주서은의 목소리와 표정과 웃음이 느껴졌다.
태한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매 순간 모든 곳에 서은이 아른거렸다. 그만큼 그녀가 간절했다.
***
태한과 연락이 닿지 않은 지 얼마가 흘렀는지 몰랐다. 그렇게 먼저 등을 돌리고 감정이 상해 돌아간 뒤로 하루 이틀쯤은 연락이 왔지만, 괜한 오해에 기분이 풀리지 않아 몇 차례 그의 전화를 무시한 이후로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만하자는 겁니까.”
“서은 씨 뜻이 그래요?”
감정적인 목소리에 멈칫, 굳었던 서은이 고개를 저었다.
욱하고 쏟아져 나간 말들이 후회스러워 그냥 참을걸, 싶다가도 승원과의 관계를, 우리의 우정을 그런 식으로 매도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이렇게 끝나는 건가.
두려움 같은 괴로움이 엄습했지만, 만일 그렇다 하더라도 매달리지는 않을 거라고.
어떤 일이든 시작할 때도 용기가 필요하지만 마무리를 짓는 일에도 용기는 필요했다. 아니, 오히려 끝을 맺는 일은 더 열과 성을 다해야 한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내내 찝찝한 마음을 안고 살다, 내내 복기하는 감정 속에서 소용돌이치다 정신을 차리면 결국 제자리였다.
그러니까 왜.
그런 말을 해선.
단순한 연인 간의 싸움이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연인은 아니지 않나. 알고 시작한 일이었다.
다가오는 그를 거부할 수 없듯이.
등을 돌려도 등 뒤에서 몰아치는 바람을 막을 수 없듯이.
도망쳐도 발목을 적시는 파도를 피할 수 없듯이.
본능에 이끌려 관성적으로 그냥 그렇게 그가 불어오는 자리에 있었다.
발끝을 적시고 발등을 뒤덮는 물결처럼 서서히 번져 가는 감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한 번쯤은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그게 훗날 어리석은 선택이 아니길 바라면서.
그러니 다른 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먼 미래까지 내다볼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당장 눈을 뜨고 시작되는 내일, 아침에 다녀올 꽃시장에서 원하는 꽃을 만나지 못하는 걸 걱정하는 편이 더욱 현실적인 일이다.
너무 모질게 뱉어 냈나.
실은 그런 목적이 아니었다는 걸 알고 있는데. 단순한 호기심만으로 서은에게 다가서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고단한 몸을 이끌고 잠시라도 얼굴을 보기 위해 우직한 걸음으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찾아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랑이니까.
사랑이라서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욕심이 나기 시작했던 어느 순간부터, 어느새 제 삶에 스며드는 태한이 더 오래 남아 주었으면 했다.
겨우 이런 사소한 일로 틀어지는 게 우습다고 생각하면서, 우리가 왜 이렇게 유치해져야 하나 고민하면서 결국은 그의 존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오늘은 오늘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기억을 남기는 것으로도 모자란 시간인데, 잘난 자존심 하나 세우겠다고 이러는 꼴이 우스웠다.
음악이 그치자, 서은이 멈추었다. 땀을 흠뻑 흘려 내고서야 깨달은 마음. 다시 그를 만난다면 실은 내 마음도 당신과 같다고, 그 마음을 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역시 서은 씨는 척하면 척이라니까.”
손을 잡고 함께 탱고 속에 스텝을 밟던 김 원장이 마지막으로 몸을 푸느라 스트레칭하는 서은의 어깨를 도닥였다. 춤을 추기에 앞서 몸을 푸는 것도 중요하지만 모든 일은 마무리가 가장 중요한 법이었다. 서은이 연습실 바닥에 두 다리를 뻗고 상체를 숙인 채로 스트레칭을 할 때였다.
“전화 왔다, 자기야. 전화기 갖다 줘?”
그가 말없이 호흡을 가다듬는 서은에게 재빠른 동작으로 휴대전화를 건네었다.
“하아…. 네.”
- 목소리가 왜 그래요?
“아, 지금. 하아, 읏. 아파요. 아아.”
사념을 지우기 위해 몰두했던 한 시간, 알차게 탱고를 추고 이제야 겨우 가다듬는 숨이 거칠었다. 헉헉대며 밭은 숨을 몰아쉬자 수화기 너머로 정적이 흘렀다.
그때 김 원장이 서은의 등 뒤에서 어깨를 누르며 상체를 밀었다.
“아, 잠깐만요. 뒤에서 하는 거 싫다니까.”
“이래야 몸이 더 부드럽게 겹쳐진다니까.”
“아, 흣 전화 좀 받고요. 나중에.”
오늘 되지 않는 건 내일도 마찬가지라며, 무지막지하게 등을 밀어 대는 김 원장의 지나친 배려에 서은이 견디지 못하고 앓는 신음을 흘렸다.
묵묵히 숨을 죽인 채 가만히 듣고 있던 수화기 너머에서 별안간 사나운 음성이 쏟아졌다.
- 주서은 씨. 지금 어디야?
***
현관 앞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는 커다란 어깨. 커다란 체격만큼 커다란 발뒤꿈치로 커다랗게 이어지는 커다란 그림자. 탱고 수업을 마치자마자 집으로 달려온 서은은 현관 앞에 선 태한을 보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다급한 인기척에 고개를 든 태한의 얼굴이 몹시 사납고도 복잡했다.
“미안해요. 많이 기다렸어요? 빨리 온다고 왔는데.”
가슴 깊숙하게 파인 V넥 라인에 몸에 착 붙은 새빨간 원피스는 허벅지부터 사선으로 길게 찢어진 디자인이었다. 매끈한 다리가 벌어진 틈새로 드러나자 서은의 행색을 살피던 태한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옷이 왜 그럽니까?”
“오늘 탱고 수업이 있어서요. 끝나자마자 급하게 오느라 못 갈아입었어요. 들어와요.”
문을 열고 들어간 집 안이 고요했다. 잠잠하고도 아늑한 공간. 며칠간 찾지 않은 곳은 서은의 향기가 잔뜩 배어 있었다. 이제야 조금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다 생각하며 안으로 발을 들인 태한은 얇은 카디건을 벗자마자 등이 훤히 드러나는 과감한 디자인의 원피스에 다시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러고 춤을 춥니까?”
“네.”
빙글 몸을 돌려 서은이 대답했다. 기가 막힌 표정으로 굳은 태한의 얼굴이 볼 만했다.
“오랜만에 가니까 스트레스도 풀리고 재밌더라구요.”
“그러니까. 그런 옷을 입고.”
“태한 씨는 춤출 줄 알아요?”
말문이 막히는 듯 입을 닫고 감정을 억누르는 태한과 다르게 서은이 화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서로 각기 다른 감정들이 북받쳤다.
“그런 식으로 몸을 쓰진 않습니다.”
태한은 인상을 쓴 채 대답했다. 그에게 몸을 쓰는 일은 한계를 넘어서는 정도의 운동이었다. 수영으로 아침에 눈을 뜨고, 주중에는 몇 차례씩 유도와 합기도, 격투기 등으로 대련을 하고도 모자라 매일 저녁마다 퍼스널 트레이너를 통해 근력을 다지는 일. 서은을 만나러 오기 전에도 반드시 지키는 하루 일과 중 하나였다.
그가 춤을 배운 건 어릴 적 서정주가 아들들에게 교양을 위해 발레리노를 섭외했을 때뿐이었다. 그것도 기본 중에 기본만 하고 삼 형제 모두 그만뒀지만.
“아직도 화났구나?”
여전히 덜 풀린 태한을 눈치껏 살피던 서은이 픽 입술을 틀어 웃으며 그의 손을 부드럽게 가져갔다.
“제가 가르쳐 드릴게요.”
무슨 속셈인지, 서은은 빙긋 웃으며 태한의 손을 잡고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지난 감정은 모두 지난 일이라 하더라도, 이런 야한 복장으로 춤을 춘다는 사실에 머릿속이 다시 복잡한 찰나. 태한은 커다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 서은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은 채로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화 안 나요?”
“화나요. 그래서 춤추러 간 거예요. 몸을 많이 움직이면 그때는 잊을 수 있어서.”
서은이 식탁 위에 올려둔 휴대전화로 음악을 틀었다. 구슬픈 기타 선율에 반도네온의 선율이 시작되었다.
손을 놓지 않는 서은의 손길에 못 이긴 척 그가 손을 내밀어 잡자, 서은이 느릿하고 천천히 음악에 맞춰 움직이기 시작했다.
간결하면서도 유기적인 선으로 이어지는 동작이 바람처럼 그를 스친다. 혼자서 살랑살랑, 태한을 바라보며 그의 몸을 긋고 지나는 손길에 굳어 있던 몸이 단단하게 반응했다.
눈을 마주치고, 음악을 따라 움직이는 눈빛에는 여전히 감정이 남아 있다. 즐거워서 추는 게 아니라 화가 나서 춘다는 서은의 말처럼, 격렬하고 뜨거웠던 감정을 태워 낸 눈빛이 닿는 순간 요염하게 느껴졌다.
서은은 태한의 다리 사이로 길게 뻗은 다리를 밀어 넣었다. 서은의 상체가 태한의 허리 아래로 쑥 내려갔다 다시 올라오는 순간 그의 다리 사이로 엉켜들었던 서은의 다리가 뒤로 슥 물러났다. 시선이 마주치면 새침하게 제 시선을 거두어 가고, 태한의 표정이 단단해지면 그의 가슴을 건드리면서.
마치 도발하듯 자극하는 손길이 태한의 몸을 감고 단단한 몸을 만지며 천천히 내려왔다. 그 손길에 심장이 두근, 두근. 느릿하고도 거세게 뛰었다.
서은이 빙글, 발끝을 들고 우아하게 한 바퀴 돌았다. 눈앞에서 붉은 치마가 흔들리며 사라졌다.
두 사람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서로를 경계하듯 응시했다. 태한을 두고 한 바퀴를 빙글 돌고, 다시 그 손에 이끌려 몸이 당겨져 맞붙었을 때. 문득 태한은 조금 더 서둘러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하아.”
맞붙은 서은의 입에서 이제껏 고집스럽게 꽉 다물어 참고 있던 숨이 터졌다. 불시에 태한의 눈이 들끓었다. 태한은 그대로 서은을 품에 안아 올렸다. 서은의 다리가 그의 허리에 휘감겼다. 그는 그대로 서은의 입술을 물어뜯듯 겹쳤다.
뜨겁게 파고든 입술 사이가 달았다. 처량한 음악 속에서 두 사람이 거칠게 서로를 헤집으며 탐하기 시작했다. 맞물린 입술 사이로 파고든 혀가 서은을 아무렇게나 찔러 댔다. 서은은 태한의 목을 끌어안고 얽은 혀를 더 깊게 빨았다.
쿵.
어느새 등 뒤로 벽이 닿았다. 태한은 그대로 서은의 치마를 들어 올리고 허리를 치받듯 밀착했다. 열기가 고인 다리 사이로 단단하게 치솟은 그의 성기가 푹 파고들 듯이 속옷 위로 뭉개졌다.
“아.”
아래에 닿는 느낌만으로 전신에 열감이 퍼졌다. 팽창한 페니스의 흥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아.”
“그땐 내가 미안했어요.”
입술이 부풀어 오르도록 빨아 대던 태한이 달뜬 숨을 색색 뱉으며 속삭였다. 눈을 마주친 채로 그는 삽입을 하지 않는 대신 서은의 다리 사이를 뭉개듯 찍어 올리기만 했다. 맞닿은 곳이 노골적으로 비벼졌다.
서은은 자극이 느껴질 때마다 그의 허리를 더 세게 휘감았다. 밑을 찌르며 그가 강하게 아래를 쳐올렸다. 그 순간 음악이 끝났다.
“음악이… 끝났는데요.”
그럼에도 그는 서은을 내려 주지 않았다. 그대로 침대로 향하려는 그의 어깨를 서은이 다급하게 붙잡았다.
“씻고. 씻고요. 땀 흘려서 더러워요.”
“같이 씻어요.”
뜨거운 물줄기 아래서 하나씩 벗다 말고 그대로 겹쳐졌다. 출장 간 며칠 사이 서은이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그리워서 그 긴 밤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를 정도였다. 이렇게나 갈증이 나다니. 태한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그대로 서은의 젖가슴을 거머쥐었다.
벽에 손을 짚고 선 서은의 가느다란 허리 위로 뜨거운 물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흠뻑 젖은 채로 태한을 받아들이는 서은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태한은 서은의 뽀얀 엉덩이 사이로 하체를 더 밀어붙였다.
터질 것처럼 팽창한 페니스가 금세 서은의 질구를 꿰뚫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읏!”
배 속을 찌를 듯이 파고드는 묵직한 포만감에 서은이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 오늘은 유독 서은에게 닿는 길이 비좁게 느껴졌다.
“주서은 씨. 너무 보고 싶었어.”
젖은 목덜미에 입술을 맞추며 그가 부단히 허리를 쳐올렸다. 퍽, 퍽. 살이 맞닿았다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욕실을 울린다. 서은은 소리를 내지 않으려 입술을 잘근 물었다가도, 그가 치대는 힘에 밀려 결국은 이성을 잃고 신음했다.
“아아, 태한 씨. 아아, 잠시만요. 거기 그렇게 하면….”
내부를 정확하게 자극하는 굵고 단단한 성기에 간신히 서서 버티던 서은의 속살이 움찔거리며 그를 조였다. 안이 황홀할 정도로 뜨겁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태한은 멈추지 않고 거칠게 안을 들쑤셨다. 이런 상태로 멈춘다는 건 하늘이 두 쪽 나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줄기가 태한의 머리를 적시고, 단단한 가슴을 타고 흘러내려 그의 허리 아래 달라붙은 서은의 엉덩이로 흘러내렸다.
퍽.
“하아, 아… 흐읏….”
“큿, 계속 그렇게 소리지를 겁니까?”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이면서도 그는 허리를 유연하게 움직였다. 다리 사이로 질척하게 열기가 고여 든다. 같은 곳을 몇 번이고 쿡쿡 찌르며 태한은 서은의 몸을 뒤덮듯 끌어안았다. 커다란 양손에서 서은의 젖가슴이 출렁였다.
“…흣, 태한 씨. 여기 말고… 침대로 가요.”
“후우, 그게, 읏, 좋겠네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태한은 계속해서 서은의 다리 사이로 치받았다. 아아, 하고 울려 퍼지는 교성 속에서 짓쳐 올리는 움직임이 점차 빨라지는가 싶더니, 그가 성기를 빼내고 사정했다. 거친 숨이 뒤섞이며 다시금 몸이 겹쳐졌다. 태한은 대충 물기를 닦고 서은을 안아 올린 채 침대로 자리를 옮겼다.
타앙.
철제 프레임에 연결된 넥타이가 팽팽해졌다. 태한의 혀가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갈수록 서은의 양손을 묶은 현란한 무늬의 끈이 팽팽해졌다.
“으응… 간지러워요.”
가슴을 빨며 자극하던 태한의 입술이 붉은 자국을 남기며 서은의 몸 위로 흩어졌다. 늑골에 한 조각, 납작한 배에 두 조각, 허벅지 안쪽에 또 한 조각 깊게 남긴 붉은 점들이 점차 개수를 늘려 갔다.
“흣, …제발.”
저항하듯이 몸부림치는 서은의 작은 몸을 짓누르며 태한은 애원에도 멈추지 않았다. 전신이 짓눌리는 압박감과 함께 서은의 몸 위에 올라탄 그는 혀를 내밀어 서은의 살결을 핥았다. 입술을 붙였다 떼어 낸 자리마다 인두로 지진 듯이 뜨거운 감각이 남았다.
뾰족하게 세운 혀끝으로 살갗을 핥아 내리던 그가 허벅지 안쪽을 베어 물었다. 뜨겁게 닿는 입 안으로 살결이 빨려 들어간다. 가슴을 빨릴 때와 비슷한 쾌감이 서은의 머리를 쳤다.
“아, 잠시. 잠시만, …읏!”
저항할 틈도 없이 손쉽게 서은의 다리를 벌리고 그가 깊숙하게 고개를 묻었다. 뜨겁고 질척하게 비부를 물렸다. 혀가 뒤척이며 서은의 다리 사이를 샅샅이 핥았다. 서은이 움찔거릴 때마다 붉게 달아오른 속살이 벌름거렸다. 태한은 일부러 더 노골적으로 구멍을 공략해 간질였다.
“흐응, 으으응… 아… 아아….”
뾰족한 혀끝이 흥분으로 솟아오른 클리토리스를 긁듯이 핥다가 커다란 혀 전체로 빨듯이 핥아 올렸다.
“아아!”
서은이 작은 몸을 부르르 떨며 쾌락에 몸부림쳤다.
“주서은 씨는 몸이 너무 작아.”
야릇하게 번지는 목소리와 입김이 다리 사이로 쏟아졌다. 서은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시근덕거리며 쏟아지는 숨이 서은의 다리 사이를 적셨다. 질척하게 새어 나오는 애액과 뜨겁게 달궈져 가는 체온. 태한은 벌어진 서은의 허벅지를 당겨 제 어깨에 걸쳐 두곤, 조금 더 깊게 음부를 머금었다.
높게 솟은 콧날이 서은의 살점 사이사이를 건드려 지났다.
“읏, 흐읏!”
조금만 스쳐도 자극이 어마어마했다. 머릿속에서 별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눈앞이 하얗게 번쩍거렸다. 쾌락을 견디지 못하고 서은이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그대로 태한의 입술이 집요하게 서은을 따라왔다.
“그만해요, 하아! 그만!”
절규와도 같은 애원에도 그는 자비가 없었다.
쯔읍, 쯔으읍.
아래를 빨아들이는 음란한 소리가 고요한 공간을 가득 채웠다.
“읏, 흐으… 응… 아, 잠… 잠깐… 읏!”
앓는 듯이 흘러나온 서은의 신음에 구멍을 빨아들이는 입술이 조금 더 집요해졌다.
“…응, 태한, 으응, 흣… 태한 씨!”
마침내 철컹철컹, 손이 묶인 서은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그를 불렀다. 그럼에도 끝까지 서은의 살점을 잇새로 물어 당기며 혀를 굴렸다.
“으읏, 으으읏!”
“서은 씨 가만 보면 습관적으로 참아. 알아요?”
“시, 싫어요. 하지… 마. 하지… 으응!”
그럴수록 태한의 입맞춤이 더욱 느리고 집요해진다. 둥그렇게 구멍을 핥는 혀끝이 흥분으로 달아오른 틈새를 비집고 든 건 간발이었다. 안에 고여 있던 체액이 주륵 흘러나왔다. 태한은 입술을 붙여 그 사이를 문질러 핥으며 다시금 뜨거운 혀를 밀어 넣고 서은을 들쑤셨다.
“…으, 읏, …흐읏!”
강한 진동과 함께 서은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한 차례 느낀 뒤에도 몸 위를 스치는 경련이 잦아들지 않았다. 서은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색색 숨을 뱉으며 원망스럽게 태한을 쳐다보았다.
“류태한 씨… 하아… 변태예요?”
“그런가 봅니다.”
그가 체액이 묻은 입술을 손등으로 아무렇게나 훔치며 웃었다. 그리고 기지개를 켜듯 몸을 일으켰다. 떡 벌어진 커다란 몸은 어둠 속에서도 완벽한 비율과 균형을 자랑했다. 아무리 봐도 완벽한 피사체라고, 흐린 시선으로 그를 더듬어 내리며 서은이 마른침을 삼켰다.
태한은 이제야 잠잠해진 서은을 나른한 시선으로 훑어 내리며 음흉하게 속삭였다.
“서은 씨 생각에 머리가 터지는 줄 알았어요.”
그가 손을 댄 밀부에서 끈적한 애액이 질척하게 휘저어진다.
“으응….”
“이 작은 방에서 서은 씨랑 엉겨 붙어 있던 생각 하느라고.”
“아, …흐으읏, …몰라… 흣, …몰라요.”
그는 어둑한 시선을 서은에게 고정했다. 여전히 여유롭고 자신만만한 시선이 음습하게 서은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주서은 씨가 좋아요.”
손가락이 구멍을 헤집고 밀려들자, 서은의 입이 벙긋 벌어졌다.
“우리가 한 섹스가 좋아서가 아니고. 그것보다도. 그냥.”
그가 아래를 휘저었다.
물론 환상적이고 전투적인 섹스를 잊을 수는 없겠지.
점점 손가락 끝이 안의 온도와 같이 뜨겁게 젖어 들었다.
“당신이 좋아.”
서은은 혼몽하게 흐트러진 얼굴로 태한을 바라보았다. 붉어진 얼굴에 열망이 스쳤다.
흐느낄 것 같은 숨소리가 불규칙적으로 흐트러졌다. 주서은의 몸은 솔직했다. 이 순간이 얼마나 좋은지 손끝으로, 시선으로, 체온으로 느껴졌다.
질척하게 울리는 젖은 소리에 태한은 그제야 서은을 향해 느꼈던 갈증이 조금씩 해소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마음이 진정되어 간다. 제게만 반응하는 서은을 볼수록, 마음이 흡족해졌다.
수치 따위를 잊고 태한에게 몸을 내맡긴 서은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군가의 손에, 누군가의 입술에, 누군가의 시선에 이렇게까지 흥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으면서도 이런 꿈같은 순간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않았으면 했다.
“…태한 씨. …들어와요.”
느긋하게 내려다보던 태한이 내내 흉흉하게 치솟았던 페니스를 손으로 추켜올렸다.
“듣기 좋네. 더 해 봐요.”
나직한 목소리를 흘려 내면서 그가 준비했다. 어두운 형상만으로도 충분히 두려운 큼직한 크기의 페니스를 보자 가슴이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요동쳤다.
“…어서요.”
갈구하는 목소리가 탁하게 갈라졌다. 나직하게 속삭이며 음란하게 웃는 남자의 얼굴이 야릇했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그의 손등에 핏줄이 서고, 잔뜩 힘을 준 복부에도 핏줄이 여러 갈래로 찢어져 솟아났다. 한계가 분명할 텐데도 인내심이 강한 몸이었다.
“안아 주세요.”
다시 한번 애원하자, 그가 서은의 다리 사이로 허리를 밀어붙였다. 하체가 밀착하며 젖은 밀부에 둥그런 귀두 끝이 스쳤다. 온몸으로 전율이 일었다. 스치기만 했는데도 기대감에 애액이 질금질금 새어 나왔다.
“빨리, …흣, 빨리요.”
재촉하는 서은을 보며 가볍게 웃는 태한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그가 천천히 성기를 갖다 대고 질척한 비부를 문지르며 자극했다.
“여긴 벌써 엉망이네요.”
장난치듯 그가 슬쩍 허리를 떼어 내면 본능적으로 서은의 엉덩이가 들리며 따라왔다.
“넣어 주길 바라요?”
“제발… 으응… 제발요.”
아래를 문지르는데 벌름거리는 구멍이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것처럼 태한의 귀두를 머금으려 애쓴다.
“아아, 이렇게 보채는 건 안 되죠.”
그가 느긋하게 웃으면서 다시 허리를 뒤로 물렸다. 철컹, 하고 묶인 손이 넥타이를 팽팽하게 당겼다.
“태한 씨.”
“헤어지지 않는 겁니다.”
“흐읏… 지금….”
“대답부터 해요.”
“이것부터… 풀어요.”
“대답하면.”
그가 상체를 기울여 서은과 눈을 맞대고 물었다. 서은의 배꼽 위 가슴께로 쿠퍼액을 흘려 내는 그의 뜨거운 성기가 쿡쿡, 아무렇게나 살을 찔렀다.
“안 헤어… 져. 안, 읏, …헤어져요.”
서은이 홀린 듯이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가 그대로 고개를 내려 키스하며 삽입했다. 입 안으로 밀려드는 혀와 동시에 다리 사이가 벌어지면서 태한이 밀려들었다. 육중하게 가득 채우는 배 속에 머릿속이 아득해진다. 빠듯하게 몸이 꽉 차는 느낌에 숨이 턱 막혔다. 포만감과 함께 입 안을 들쑤시는 열기가 혼란했다.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좋았다. 단단하게 짓누르는 힘 있는 커다란 몸 아래서 천천히 그가 움직였다.
“흐으, 읏….”
허리를 밀어 올리면 작은 몸이 부서질 것처럼 흔들렸다. 몸이 두 동강 나는 것 같은 아픔과 동시에 열락이 서은을 갈랐다.
격통. 감동. 그것을 넘어선 환희와 희열.
천천히 밀어 올리는 움직임이 이전보다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결코 쉽지는 않았다. 코끼리가 밟아도 진동이 없다는 매트리스는 그가 허리를 치댈 때마다 들썩였다. 방 안이 곧 두 사람의 숨결로 가득 찼다.
“하… 아, 하아….”
“후우.”
아래를 콱 치받는 힘에 서은의 몸이 거세게 흔들렸다. 태한은 겹쳐진 몸을 짓누른 채로 하체를 더 깊숙하게 찔러 넣었다. 구멍을 가르고 닿을 수 있는 끝까지. 울퉁불퉁하게 부푼 성기가 몸을 꿰뚫고 안을 아무렇게나 헤집었다. 몸속에 그가 새겨 둔 자극 점을 쿡쿡 찔러 대는 과감한 움직임에 서은이 엉킨 호흡을 아무렇게나 뱉어 냈다.
“서은 씨 또 흥분했네.”
뜨겁게 달궈진 촉촉한 살결이 그를 부드럽게 감쌌다. 동시에 쪽쪽 빨아당기듯 정신없이 그를 압박했다.
“엄청 뜨거워.”
귓가에 속삭이며 귓바퀴를 핥는 혓바닥 역시 뜨거웠다.
“아, 태한 씨.”
그가 귓불을 물고 목덜미를 빨아당겼다. 아래를 치받으면서 핥고, 깨무는 통에 정신이 없었다. 이렇게 좋아도 되는 건가. 두려움이 들 정도로 좋은 느낌이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극락의 쾌감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에워쌌다.
“아, 미칠 것 같아요.”
“후, 허리 흔들지 마.”
“…아아. …태한 씨.”
좋아서 흔드는 허리를 커다란 손이 붙잡았다. 서은의 골반을 붙잡고 푹, 깊게 밀어 넣자 묶인 몸이 경직되었다. 들락거리는 구멍이 끈적거리는 체액으로 범벅이었다. 흥분으로 가득 젖은 따뜻한 몸을 깊게 찌르고 나올 때마다 허연 체액이 페니스를 가득 적시고 허벅지에 흘러내렸다.
“읏, 너무… 너무 깊어요.”
그는 말없이 일정한 박자로 서은의 안을 푹푹 찔러 올렸다. 짓쳐 대는 허리가 아래를 강하게 때리고, 붙었다 떨어지는 사이에도 질 안이 왈칵거리며 조였다.
서은이 몸을 뒤틀 때마다 철컹철컹, 프레임이 흔들리는데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서은을 몰아붙였다.
“하아, …흣, …아아, 아… 그만요!”
온몸이 팍 쪼그라드는 것처럼 뜨겁게 수축했다. 울음 같은 신음을 쏟아 내며 서은이 경련하는 와중에도 그가 허리를 돌려 압박했다. 눈앞으로 불꽃이 하얗고 노랗게 터지다 검어졌다. 미칠 것 같은 쾌락에 목이 쉴 지경이었다.
“조금만 더 해.”
떨림이 잦아들 때까지 잠시 기다려 주던 태한은 이윽고 다시 제 페이스대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은은 흔들리는 몸 위에서 거침없는 그를 보며 가물거리는 의식으로 생각했다.
류태한, 당신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
실내는 고요했다. 태한은 소파에 앉아 고요한 집을 둘러보았다. 매번 서은이 잠든 뒤에 둘러보는 공간은 한결같이 단정했다. 햇살이 따뜻하게 스미는 채광 좋은 창가에 키 높이대로 늘어선 식물들 또한 여전히 귀여웠다.
꼭 주서은 같네.
간밤에 욕심껏 서은을 안고, 늘어진 서은에게 사과의 선물로 준비해 온 목걸이를 걸어 주었을 때. 서은은 눈을 드는 것조차도 힘겨운 듯 지친 얼굴로 그에게 기대 중얼거렸다.
“…미워요. 용서 안 할 거야.”
“마음대로 해. 평생 용서 안 해도 되니까 헤어지지나 마.”
그래도 목걸이는 마음에 들었던지, 손끝으로 계속 만지작거리다 잠이 들었다.
가지런하고 푸릇푸릇하니 화분 속에서 꿋꿋하게 사는 게 서은을 닮았다 생각할 무렵이었다.
삑삑삑삑.
예고도 없이 현관문 도어록이 해제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손에 바리바리 무언가를 싸 들고 들어서던 여자가 반라의 상태로 창가에 서 있는 태한을 발견하곤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미친. 아, 죄송합니다.”
그대로 문을 닫고 줄행랑치듯 나선 여자는 해인이었다.
“…….”
태한은 쿵, 하고 닫힌 문을 가만히 응시했다. 머지않아 다시 도어록 해제 음이 울렸다.
삑삑삑삑.
조금 전 문을 닫고 나간 해인이 믿을 수 없단 듯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여기 우리 언니 집인데?”
여전히 창가에 선 채로 미동도 없이 물끄러미 응시하는 남자는 심지어 당당하기까지 했다.
“누구세요?”
“아.”
태한은 그제야 거실을 가로질러 해인의 앞으로 다가갔다. 커다란 몸에 헐렁하게 걸쳐진 회색 면 트레이닝복처럼 자유로운 남자는, 해신 그룹의 류태한이었다. 단번에 그를 알아본 해인은 넋이 나갈 정도로 완벽한 상반신은 물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사실에 저도 모르게 탄성을 자아냈다.
이러시면 감사하지만.
탄탄하게 정돈된 몸매 위로 울긋불긋 피어나고 어딘가 날카롭게 긁힌 흔적. 시야를 꽉 가로막으나 커다란 덩치를 재빨리 스캔한 해인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내리고 있는 태한을 응시했다.
“설마… 형부세요?”
해인의 머리 위에서 상투스가 울려 퍼졌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태한을 보는 눈동자에 꿈과 희망이 가득했다. 류태한이라니. 리베라 합창단의 거룩한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정말이지 거룩하고 바람직한 장면이었다.
로또라도 맞은 듯 기쁨을 숨기지 못하고 씨익 웃는 해인을 보며 태한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언니는요?”
“자고 있어요.”
그러니 목소리를 낮춰 달라는 듯 조심스럽게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태한의 속삭임을 따라 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이것만 전하고 갈게요. 언니한테는 비밀로 할게요.”
해인이 신도 벗지 않고 현관에 선 채로 태한에게 양손 가득 들고 온 쇼핑백을 건네주었다.
“엄마가 반찬 갖다 주고 오라고 했거든요. 이럴 줄 알았으면 현관에서 벨을 누를걸. 아유, 됐고 저는 얼른 꺼져 드릴게요. 좋은 시간 보내세요.”
해인이 윙크를 찡긋찡긋 날리며 서둘러 돌아 나갔다. 문이 닫히고 눅눅한 바깥 공기가 안으로 잠시 밀려들었다. 태한은 손에 들린 쇼핑백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웃었다.
***
“아. 죽겠다.”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었다. 목이 말라 잠에서 깨었을 때 희미하게 반짝이며 메시지가 들어오는 휴대전화 불빛에 잠이 달아났다. 어젯밤 과연 우리에겐 무슨 일이 있었나. 짐승 같고 정신없었던 간밤을 복기하는 것도 잠시 쏟아진 메시지 폭탄에 기함했다.
언니 나 지금 출발. 엄마가 반찬 갖다주래. AM11:25
곧 도착 PM12:05
대박!! 왜 말 안 했어?
나 너무 심장 뛰어
언니 꼭 잡아
와 드디어 나한테도 형부가 생기다니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엄빠한테는 비밀로 할게 PM12:11
그 사랑 변치 마
절대 헤어지면 안 돼
우리언니 파이팅♡ PM12:12
잇몸만개♡ PM12:15
모두 해인에게 온 연락이었다. 부재중 통화와 메시지, 마지막으로 익살스럽게 웃고 있는 입술을 클로즈업해서 찍어 보낸 사진까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태한이 보이지 않았다. 집에 간 건가?
부디, 그랬으면. 생각하며 문을 열고 나가자 소파에 앉아 휴대전화를 유심히 보고 있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잘 잤어요?”
“네, 아니. 음.”
“서은 씨 동생이 다녀갔어요.”
“네?”
“어머님께서 반찬 갖다 주라고 했다고.”
네에?
네에에?
서은은 식탁 위에 올려둔 희숙이 한 게 틀림없는 반찬통을 바라보며 그대로 굳어 섰다.
“동생이 아주 기운이 넘치던데요.”
“설마 그 상태로….”
“다행히 바지는 입었습니다.”
태한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있었다. 서은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그게 아니라.”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저 상태로 해인이를 봤다고?
아.
아아.
아아아.
서은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신음했다. 태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서은에게 다가섰다.
“몸은 괜찮아요?”
“아니요. 죽을 것 같아요.”
안 그래도 서은은 밤새 자면서도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런 서은이 걱정되어 제대로 눈도 붙이지 못하고 곁을 지키는 순간이 얼마나 따뜻하고 행복했는지.
태한이 선물로 들고 온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마음에 든다고 너스레를 떨다 잠이 들었을 때는 한없이 천사 같았다.
감은 눈꺼풀을 손가락으로 슬며시 쓸어 주면 품 안으로 작은 몸이 감겨 왔다. 이불 아래서 한데 엉켜 맨살이 닿는 기분이 간지럽고 믿기지 않았다. 몸을 움직이려고 하면, 품으로 더 파고드는 서은의 체온이 따뜻하고 애틋해서 가만히 그렇게 안고 있었다는 걸.
“더 자요.”
“잠 다 깼어요.”
서은은 그저 동생이 다녀갔다는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나라를 잃은 백성처럼 그 자리에 주저앉아 멍하니 넋을 잃은 서은을, 태한은 가볍게 안아 올린 뒤 소파로 성큼성큼 다가가 앉았다.
“동생한테 들키면 안 됐나?”
“이런 차림으로는 누구한테든 안 돼요.”
왜 하필 바지만 입고 있었던 건데. 입으라고 여벌로 사다 놓은 옷이 몇 갠데. 빨래까지 해서 가지런히 정리해 둔 태한의 여벌을 떠올리며 한숨을 푹 내쉰 순간.
“오랜만에 같이 아침 맞으니까 좋네.”
그는 진심으로 기분이 좋은 듯 약간은 들뜬 얼굴로 말했다. 휘어지는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며 서은은 다시금 간밤에 그의 아래서 얼마나 헐떡대고 울부짖었는지를 떠올리곤 말문이 막혔다.
“아침이나 먹고 가세요.”
“먹으면 곱게는 못 가는 거 알면서, 먹이려고?”
짓궂게 덧붙이는 그를 가늘게 흘겨보던 서은이 그의 어깨를 한 대 퍽 때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빨리 일어나요. 배고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