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의 의무 (8)화 (8/13)

08

엘리베이터를 오르는 내내 꽉 붙잡고 있는 손이 뜨거웠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침묵했고, 침묵은 긴장을 불러왔다. 얕게 뱉는 숨소리가 가득했던 엘리베이터를 벗어나 현관문을 여는 순간조차도 가슴이 두근거려 진정이 되지 않았다.

손을 잡은 태한은 무슨 생각일까. 심장이 너무 어지럽게 뛰어 얼굴을 확인할 정신도 없었다.

“들어오세요.”

한 손은 태한에게 맡긴 채 나머지 한 손으로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열어 그를 안으로 안내했다. 쿵,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입구가 다시 고요해졌다.

“치워 두질 않아서 집이 지저분한데.”

뱉어 낸 말과 다르게 그나마 어제 청소를 해 둔 게 다행이라 생각하며 먼저 한 걸음 안으로 들인 순간, 그대로 태한이 서은의 손을 잡아당겨 허리를 휘감았다. 순식간에 몸을 끌어안는 강인한 힘에 서은의 입술이 아, 하고 벌어졌다. 그 순간 태한의 입술이 밀려들었다.

얼마나 열기를 머금고 있었는지 입술이 겹쳐져 닿는 점막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더운 숨과 더운 입술. 순식간에 고개를 틀어 입술을 묻는 중에도 그는 서두르는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분명히 성급하게 밀려온 입술인데도 혀를 밀어 넣어 헤집는 움직임은 부드럽고 느긋하기만 했다.

“으응….”

서은의 목 끝에서 참지 못하고 신음 같은 작은 소리가 새어 나오자, 입술을 빨아들이며 잘근거리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떼어 냈다. 간신히 틈을 벌린 입술 사이로 밭은 숨이 흩어졌다.

“태한 씨… 우선 차부터….”

붉게 상기된 서은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번득였다. 그는 마찬가지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커다란 어깨를 식식대며 말했다.

“먼저 씻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나지막한 목소리에 식지 않은 열기가 배어 있었다.

“전 씻었어요.”

태한은 아직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서은의 머리카락 끝을 가만히 응시하며 속삭였다.

“예. 알겠습니다. 빨리 씻고 나올게요.”

고정된 시선이 은근하게 기울어졌다. 순간 서은의 귀가 홍시처럼 새빨개졌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런 의미가 아니었는데. 구두를 벗고 안으로 들어서는 태한의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서은은 커다란 등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꼭 거사를 앞두고 목욕재계를 한 사람이 된 듯해 민망했다.

“욕실은 이쪽을 쓰면 됩니까?”

“네. 잠시만요.”

서은은 방에서 새 칫솔과 아직 포장도 뜯지 않은 파자마 세트를 꺼내 왔다. 혹시 부모님이 주무시고 가게 될 때를 대비해 구입해 둔 커플 파자마였지만, 아직 한 번도 쓴 적이 없는 것들이었다.

“이거 쓰세요.”

“금방 나올게요.”

그러니 조금만 기다리라는 듯 파자마와 세면용품을 받아 든 태한이 은근하게 시선을 찔러 넣고 씩 웃었다. 문이 닫혔다. 잠시 후 샤워기에서 물줄기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그를 붙잡는 데 용기를 다 쓴 모양인지 감당할 용기가 남지 않았다. 좋아서 붙들긴 했지만 막상 집으로 들이고 보니 머릿속이 엉망이다. 욕실 문 너머에서 물줄기가 쏟아지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심장이 점점 더 터질 듯이 뛰었다. 가슴을 손으로 지그시 누른 채로 멍하니 서 있던 서은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주방으로 들어가 차를 준비했다.

이 밤에 카페인이 들어간 건 피하는 게 좋겠고.

종류별로 정돈된 티백 박스를 곰곰이 바라보며 티를 고르던 서은은 숙면에 좋은 라벤더 차를 꺼내 우리기 시작했다. 아일랜드 식탁 위에 찻잔 두 개를 꺼내 준비해 두고, 초조하게 차오르는 긴장감을 애써 무시했다. 어차피 오늘 여기서 벌어지는 일은 식탁 위에 꽃 피운 수국 한 송이만이 알 것이다.

그때 달칵,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늦어서 차는….”

라벤더로 준비했다는 말을 하려는 순간, 배스 타월을 허리에 둘둘 두르고 머리카락 끝이 젖은 채로 걸어 나오는 태한과 눈이 마주쳤다. 늘 반듯하게 드러내던 이마 위로 머리칼이 쏟아져 내린 얼굴은 평소 보던 것과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그래서 멍하게 넋을 놓자마자 그가 머쓱하게 중얼거렸다.

“옷이 작습니다.”

“네? 아, 네. 아아.”

정신을 차린 서은이 서둘러 새 파자마가 작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어쩔 수 없죠.”

무용지물이 된 파자마를 뒤로한 채 성큼성큼 다가서는 반라의 남자는 위협적이었다. 떡 벌어진 어깨는 운동선수만큼이나 너르고 탄탄했고, 근사한 슈트 차림에도 감추지 못한 체격은 벗고 나서야 진가를 발휘했다.

각이 진 어깨 아래로 늘씬하게 뻗어 있으면서도 균형이 잡힌 몸매. 탄탄한 대흉근 아래로 초콜릿 조각 같은 복근이 선명했다. 군살이 하나도 없는 허리는 통이 넓고 전체적으로 선이 굵은 편이었다. 그 아래로 힘줄이 잔뜩 솟아난 복부. 배스 타월 경계선에서부터 두 갈래로 갈라져 팽창한 힘줄이 몹시 야성적이다.

어디 영화에서나 본 것 같은 유려하고 적나라한 윤곽에 서은의 말문이 막힌 사이, 그가 서은을 잡아당기며 낮게 웃었다.

“그만 훔쳐봐요.”

커다란 상체가 금세 시야를 꽉 메웠다. 맞붙은 하체가 왜인지 모르게 단단하고, 또 단단해서.

“저기, 태한 씨….”

서은은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진 줄도 모르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맥이 뛰는 자리마다 전기를 맞은 것처럼 팔딱거렸다. 긴장감에 몸이 떨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찰나의 침묵과 숨소리조차 너무나 선명하고 또렷했다. 그 순간 태한이 그대로 상체를 숙여 서은에게 키스했다.

구부정한 자세로 서은을 뒤덮을 듯 커다란 품에 당겨 안고는 입술을 겹쳤다. 보드라운 감촉이 통통한 서은의 입술을 문지르며 틈새를 벌리고 들어왔다. 상쾌한 민트 향이 좋았다. 부드럽고 진득하게 입술을 몇 번 빨던 그가 잠시 고개를 떼어 냈다.

“라벤더 티 마셨어요?”

“네. 조금.”

“빨리 재우려고?”

쑥스러워하는 서은에게 눈을 마주친 채로 태한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다시 멈췄던 키스를 이어 가기 시작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더운 숨이 넘어왔다. 입맞춤이 깊어질수록 서은의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쏟아지는 숨소리가 폭죽 같았다. 입술 사이로 터지는 불꽃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화염보다 뜨거운 불꽃이 몸 어딘가에서 산발적으로 터지기 시작했다. 축제였다.

요란하게 들썩이는 그의 품 안에서 그가 헤집으면 헤집히고, 물어뜯으면 뜯기며 그가 당기는 입술 속으로 혀를 내어 주고, 숨을 나누었다. 한참이 지나도 입술을 겹겹이 발라 먹을 것 같은 기세로 서은을 간지럽히던 태한이 뒤늦게 뺨으로, 목덜미로 자리를 옮겼다.

커다란 상체가 그림자를 만들어 내며 덮치다시피 내려오다가, 그대로 서은의 티셔츠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커다란 손이 늑골을 스치고 가슴을 거머쥐었다. 젖가슴이 손안에서 뭉근하게 쥐여 잡혔다.

“읏.”

서은이 작게 신음했다. 그는 움켜쥔 손끝으로 서은의 가슴을 천천히 주무르며 단단하게 솟기 시작한 정점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짜릿한 쾌감이 머리를 치고 지난다. 뒤틀리는 허리를 찍어 누르듯 하체로 밀어붙인 뒤, 그는 계속해서 손을 움직였다.

조금 더 부드러워진 움직임이 아랫입술에 내려앉았다. 녹진하게 빨아들이는 온기에 녹아 사라질 것 같은 부드러움이 입술 사이를 적신다. 태한은 손가락을 굴려 서은을 자극하면서도 혀를 내밀어 치열을 건드리고 다시 그 사이로 얼어붙은 서은의 혀를 능숙하게 얽었다. 단단한 혀가 입천장을 긁고 점막을 핥으며 빠져나갔다.

“하아, 하아….”

참고 있던 숨을 가쁘게 뱉는 사이 헐렁한 티셔츠 안에서 브래지어가 잡아 내려졌다. 출렁하고 쏟아져 나온 살들이 커다란 손안에서 짓이겨진다. 그의 손끝에서 젖꼭지가 굴려졌다. 손가락 사이에 걸린 유두가 스칠 때마다 배 속이 짜릿하게 울렸다.

“하아, 잠시만요.”

서은이 색색거리며 붉어진 얼굴을 들었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평소와 다르게 흐트러진 채였다. 평소답지 않은 건 태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깊고, 어둡고, 뜨거운 눈동자. 흥분했다는 걸 내색하지 않는 침착한 눈과 다르게 그의 허리 아래를 감싼 수건이 지나치게 부풀어 있다. 태한은 그대로 서은을 안아 올렸다.

“차는 나중에 마셔요.”

식탁을 벗어나 그대로 침대까지 입을 맞추며 걸어갔다. 이제껏 고민했던 것들을 단숨에 휘발시키며 뜨겁게 안아 버리는 남자. 오늘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감정에 취한 건 서은이었다. 하지만 가늘게 몸을 떠는 서은에게서 느껴지는 미약한 두려움을 그는 읽은 모양이었다.

“겁나요?”

천천히 침대 위로 서은을 내려놓으며 그가 물었다.

“너무… 좋아질까 봐요.”

마주한 눈동자가 두려움과 기대로 흔들렸다. 태한은 서은의 입술을 느리고 부드럽게 만지작거렸다.

“그건 좋은 일 아닌가?”

“나쁜 일이에요.”

부정하는 서은의 눈동자로 침전된 욕망이 떠올랐다. 태한의 기다란 손가락이 천천히 서은의 입술을 벌리고 가지런한 치열을 건드렸다.

“선 긋지 마요.”

과거에 어떤 상처를 받았든 그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으니까.

조바심을 내는 네게, 나는 그런 형편 없는 사랑을 주려고 하는 게 아니니까.

약속이 필요하다면 약속을 해 줄 것이고, 그보다 더한 것들을 바란다면 들어줄 각오가 되어 있었다. 물론 서은이라면 아무것도 바라지 않겠지만. 미래를 바라는 건 오히려 태한 쪽이 더 절실했다. 태한은 망설이는 서은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고 속삭였다.

“나한테도 쉬운 일 아닙니다. 그러니까.”

입술을 만지작거리던 그의 손이 뺨을 감싸고 내려가 서은의 목덜미를 쥐었다.

“우리 조금만 더 솔직해져요.”

마치 충성을 맹세하는 어느 역사 속 기사처럼 그가 허공에 들린 서은의 고개 아래로 머리를 내렸다. 그대로 서은의 몸 아래로 기어 내려가 티셔츠를 벗겨 내고 입술을 댄다. 살갗을 뒤덮은 더운 열기에 서은이 미약하게 신음했다.

“하아….”

태한은 부드럽고 질척하면서도 뜨거운 것들이 둥글게 부풀어 오른 젖가슴을 입에 담았다. 단단한 혀끝이 유두를 건드리고 지날 때마다, 질척하고 간지러운 혀가 금세 흥분으로 단단해진 정점을 휘감을 때마다 서은은 제 입술을 깨물었다.

잘근잘근. 잇따라 씹히는 느낌에는 결국 한껏 참고 있던 숨이 터져 나왔다.

“하아, 읏.”

충동과 갈등, 열망과 욕망. 이성은 결국 감정 앞에 무릎 꿇어 그의 옷깃을 붙잡아 당기게 만들었다.

오늘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이제는 물러설 기미도, 돌이킬 여지도 주지 않고 밀어붙이는 태한에 서은은 흐느끼듯 신음했다.

“아아… 태한 씨.”

혀끝에 휘감겨 빨리는 아찔한 쾌감에 두 눈을 질끈 감으면, 눈앞으로 새카만 우주가 펼쳐지는 듯했다. 블랙홀 같은 어딘가로 이성과 육체가 뭉텅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눈을 뜨면 여전히 서은의 반응을 살피느라 시선을 떼지 않는 새카만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럴 때는 배 속으로 찌릿한 쾌감이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건 눈을 감으나 뜨나 매한가지였다.

쯔읍, 쯧.

양손에 쥔 젖가슴을 주무르는 손길에 다리 사이가 지끈거렸다. 속옷이 질척하게 젖어 가는 줄도 모르고 그녀가 태한의 뒤통수를 거머쥐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든 손가락이 모근을 당기는 느낌과 동시에 태한의 숨이 뜨겁게 훅 서은의 말랑한 가슴으로 쏟아졌다. 곧 그는 견디지 못하고 조금 더 난폭하게 입술을 찍어 댔다.

믿기지 않았다. 이제까지 정중하기만 했던 류태한이 혼이 나간 사람처럼 젖가슴에 얼굴을 처박고 마음껏 핥아 대고 있다는 게.

“태한 씨. 하아, 흐읏.”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가 잇새로 잘근 서은의 젖꼭지를 씹었다. 날카로운 통증이 쾌감과 함께 척추를 관통했다. 서은의 몸이 파르르 경련했다. 곧 한숨 같은 웃음이 서은의 살갗을 간질였다.

“이제 그만… 그만해요.”

한참이나 물고 빨아 댄 젖꼭지가 통통하게 부풀었다. 겨우 이 정도에 서은의 얼굴은 한낮의 태양 아래서 익은 사람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자꾸 거기만 빨면… 아파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돌린 채로 서은은 애원처럼 중얼거렸다.

손안에 흘러넘칠 것같이 차오르는 큰 가슴. 출렁이는 새하얗고 보드라운 살결에 정신이 팔려 어느 쪽을 얼마나 핥는지도 몰랐다. 혀끝으로 핥아 주는 느낌이나 입술 사이로 물었을 때 느껴지는 젖꼭지의 모양이 희롱하기에 너무 적당해서 잠시 정신이 팔렸었다.

“그럼요. 공평해야죠.”

걱정하지 말란 듯 슬쩍 입매를 휘었던 태한이 이내 밀가루 반죽처럼 주무르고 있던 나머지 가슴을 입에 머금었다. 우물거리는 입술 속으로 새하얀 젖가슴이 뭉텅 빨려 들어간다. 다시 정신이 아득해졌다. 서은은 울 것같이 빨개진 얼굴로 어쩔 줄 모르고 바르작거렸다.

“아아, 아… 흐읏.”

정신이 혼미해지는 가운데 저도 모르게 열리려는 몸에 힘을 꽉 주었다. 침대 위는 열기로 혼탁했다. 뜨거운 태한의 맨살이 닿는 것도 이렇게 어지러운데.

“왜 이렇게 가만있질 못하고.”

“류태한 씨, 읏, …때문이잖아요.”

지분거리던 입술이 멈추자 서은이 색색거리며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씹힌 자리마다 울혈이 울긋불긋하게 맺혔다.

“나 아직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가 선명히 남은 흔적을 슥 훑어 내리며 자연스럽게 다리를 잡아 벌렸다. 그의 손에 붙들려 맥없이 다리가 벌어지자 서은의 눈이 놀라 벌어졌다. 무어라 말할 틈도 없이 태한이 서은의 다리 사이에 코를 묻었다. 깊게 들이켰다 내쉬는 뜨거운 숨결이 속옷 안으로 뜨겁게 닿았다. 아래로 간질간질한 숨이 닿자 녹진해진 구멍이 끈끈하게 젖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아, 태한 씨 거기는….”

혹여나 가슴을 애무했던 것처럼 굴까 봐 수치심과 당혹감에 서은이 다리를 오므리려 애썼다. 그러나 안간힘을 다해도 태한에게는 속수무책이었다. 단단한 손이 허벅지를 받치고 나머지 한쪽 팔에 체중을 실어 벌린다. 그다음 서은의 몸을 쭉 당겨 그의 몸과 밀착했다.

“내가 서은 씨한테 좋은 냄새 난다고 그랬었죠.”

여전히 다리 사이에 코를 파묻고 음미하듯 느리게 숨을 들이켜며 중얼거렸다.

“진짜 좋네. 야릇한 냄새.”

낮은 목소리로 은밀하게 속삭이며 그가 속옷을 옆으로 밀어냈다. 맨살로 공기가 닿는 느낌에 서은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끈끈한 체액으로 젖은 아래를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시선이 닿는 것만으로 아래가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동시에 태한의 엄지손가락이 슥, 젖은 비부를 훔쳐 올렸다.

“아앗!”

손길이 닿자 연한 선홍색 질구가 벌름거리며 투명한 액을 흘려 냈다. 번들거리는 그 사이를 둥그렇게 문지르자 서은이 파닥거렸다. 그대로 서은의 다리를 제 허리 뒤로 넘긴 그가 손끝으로 좁은 입구를 간질이듯 천천히 긁었다. 예민한 살점을 긁고 지나는 느낌이 선연하다. 파지직, 파지직. 신경이 닿은 자리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서은은 되도록 신음하지 않으려 애썼다. 입술을 꽉 다물고 읏, 읏. 참는 소리를 내는 것도 잠시 갑작스럽게 내부로 파고드는 큼직하고 단단한 느낌에 입술이 벌어졌다.

“아아, 태한 씨.”

빠듯하고 좁은 통로였다. 길을 열 듯 안으로 중지를 밀어 넣었던 태한은 경직된 채로 할딱이는 서은을 달래며 검지 하나를 더 넣어 안을 슬슬 넓혔다.

“잠시만요. 아!”

섹스에 잠시라는 게 어디 있다고. 어떻게든 호흡을 끊어 보려는 서은의 가랑이 사이를 정성스럽게 들쑤셨다. 손가락이 안으로 파고들 때마다 뜨거운 속살이 정신없이 그의 손을 짓씹었다. 이런 상태로 서은을 안는다면. 생각만으로 태한의 숨이 거칠어졌다.

“서은 씨 흥분했어요.”

나직한 목소리가 열기로 갈라졌다. 어떻게 아느냐는 듯 당혹스럽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태한은 음흉하게 속삭였다.

“안이 엄청 부드럽고 뜨겁거든.”

귓가에 쏟아진 말에 서은의 목덜미가 붉어졌다. 서은은 고개를 돌리고 색색거렸다. 몸을 내맡기고도 뭐가 그렇게 쑥스러운 건지, 시선을 맞대지 못하는 얼굴을 찬찬히 살피며 서은이 유난히 예민하게 반응하는 내부를 꾹 눌렀다.

“하앗!”

간신히 힘을 풀었던 서은의 몸이 꽉 조여지며 허리가 들렸다 내려앉았다.

“여기가 좋은 거구나.”

이제 학습했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다시 그 자리를 반복적으로 쿡 쑤셨다.

“하아, 하지 말아요.”

“왜요.”

“이상해… 이상해요.”

눈앞이 하얗게 흐려졌다가 순식간에 눈앞으로 불꽃이 튀었다. 머리꼭지에서부터 발끝까지 전류 같은 열기가 끊임없이 흘러갔다. 이러다간 시작도 전에 터지고 말겠다고.

생각은 금세 밀려들어 푹 젖어 버린 질 내를 헤집는 손길에 다시 소멸했다. 몸이 끈적끈적한 액체 괴물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그대로 침대 위로 끈끈하게 눌어붙어 이대로 영혼이고 뭐고 엉망으로 뭉개질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여긴 어때요?”

“읏!”

그는 끊임없이 탐구하는 학자처럼 질척한 질구를 집요하고도 정성스럽게 파고들어 속살을 마구 헤집어 놓았다. 그러면서도 흐트러짐 하나 없는 단정한 얼굴을 하고, 그에 반하는 야만적인 몸으로 서은을 짓눌렀다.

서은의 반응 하나하나를 관음하듯 살피는 시선이 깊었다. 심연 같은 눈이 정확하게 서은의 눈을 헤집을 때면 머릿속에서 어지럽던 것들이 착착 제자리로 정리가 되는 것 같았다. 마치 태한이 원하는 대로. 홀리는 듯하다.

어둠 속에서 빛을 받은 눈동자가 푸르스름하게 빛을 냈다. 안광이 번쩍이는 그 눈을 보며 문득 미친 변태 새끼라 빈정대던 승원의 말이 떠올랐지만, 생각은 금세 서은의 다리를 어깨에 걸치고 몸을 반쯤 접어 밀착하는 태한에 의해 끊어졌다.

그의 얼굴 앞에서 다리가 적나라하게 벌어졌다. 구멍을 벌리고 안을 들쑤시는 손길에 힘이 실렸다. 굵직한 손마디가 내벽 어딘가를 긁고, 볼록하게 솟은 내벽의 무언가를 건드릴 때마다 안에 응집된 열기가 분출될 것 같았다.

“그만해요, …읏… 제발, 흣… 그만.”

“그럼 느껴요.”

저도 모르게 벌어진 허벅지를 달달 떨며 애원하는 서은의 무릎 위로 느긋한 음성이 바람처럼 흩어진다. 곧 촉, 하고 따뜻한 입술이 내려앉았다. 서은의 무릎에 입을 맞추고, 허벅지 안쪽에도 입을 맞춘 그는 마지막으로 입술을 슬쩍 벌려 연한 다리 안쪽 살을 깨물었다.

“…아!”

흥분한 몸에 느껴지는 자극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서은이 통증 끝에 느껴지는 쾌감을 견디지 못하고 들썩이자, 그가 여전히 다리 사이를 들쑤시며 웃었다. 얄밉도록 단정한 눈동자에는 이제껏 알지 못했던 감정들이 억눌린 채였다. 타월이 대충 풀린 그의 하체가 불룩하게 솟았다. 그는 더는 거리낄 것도 없단 듯 배스 타월을 걷어 내었다.

“흐으… 아, 아아… 읏…!”

흐느낌 같은 신음이 점차 가빠지더니 결국 서은은 태한의 팔을 할퀴듯 거머쥐었다. 그의 팔을 꽉 붙잡은 서은의 몸이 짧은 간격으로 거칠게 경련했다.

“하아, 하아, 하….”

절정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몸속이 여전히 뜨거웠다. 손가락을 물고 경련하는 서은의 몸에서 흠뻑 젖은 손가락을 빼낸 그가 티슈를 한 장 뽑아 손을 닦고, 콘돔을 꺼내 뜯는다.

지익, 비닐이 뜯어지고, 부스럭거리며 팽팽하게 고무가 당겨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흉흉하게 치솟은 발기한 페니스에 얇은 겹을 덧씌운 그가 늘어진 서은의 몸 위로 기어 올라왔다.

허공에서 꺼덕이고 있는 성기는 지나치게 크고 단단했다. 핏줄이 얼기설기 돋아난 태한의 허리 아래에서 육중한 페니스가 부풀어 올랐다.

더 커져?

한참이나 큰 사이즈가 조금 더 단단해지는 것을 목격한 서은의 눈동자가 거칠게 동요했다.

저게 어떻게 들어가.

태산 같은 체격에 말보다 단단한 허벅지만큼이나 믿기지 않는 크기였다. 언뜻 서은의 눈가로 두려움이 스쳤다. 그러나 태한은 느릿하고 침착하게 서은의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내렸다.

“겁납니까?”

아니라고는.

경직된 서은에게 시선을 맞춘 채로 그녀의 다리 사이에 태한이 닿았다. 뭉툭하고 뜨겁게 닿는 감각에 서은은 긴장된 숨을 삼켰다.

“아프면 말해요.”

서은의 팔 사이로 굳게 내린 그의 팔뚝을 마치 놀이 기구의 안전바를 잡듯 움켜쥐었다. 힘줄이 툭툭 불거진 손목을 따라 팔꿈치 안쪽을 어루만지자, 갈라진 근육이 잘게 떨렸다. 시선을 내린 채로 그가 천천히 삽입했다. 힘이 느껴지는 단단한 페니스가 질구로 힘겹게 파고들었다.

“…흐읏.”

불에 덴 듯한 열감과 함께 몸이 힘겹게 벌어졌다. 천천히 힘을 실어 허리를 붙여 올리는 움직임을 따라 몸속으로 그가 느릿하게 미끄러져 들어왔다.

“아….”

“…큿.”

뜨거운 기둥이 몸속에 길을 내는 것 같았다. 천천히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부피감에 숨이 막혔다.

몸이 쪼개지는 듯한 격통에 서은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가 입술을 내려 서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아픕니까?”

“…흣, 아파요.”

아프지만 통증 끝으로 희미하게 환락의 열기가 감겨 온다. 그는 연신 눈가에 입을 맞추며 열기가 끈끈하게 엉긴 틈새를 빈틈없이 치댔다.

“그만할까?”

“아니, … 하아, 계속해요.”

눈물이 찔끔 차오를 정도로 아픈 와중에도 서은은 물러서려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멈추지 마세요.”

동시에 쑥, 그가 힘을 실어 서은의 몸으로 커다란 몸을 욱여넣었다. 아아, 탄성과 함께 작은 체구가 흔들린다. 꽉 조여드는 압박감에 몸이 터질 것 같은 건 태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완전히 벌어진 서은의 다리 사이로 하체를 더 밀어붙였다. 밀착한 몸이 쿵, 울릴 정도로 단단한 허리가 다시 아래로 힘껏 처박혔다.

“흐읏, 응, 숨 막혀….”

“후우, 숨, 쉬어요.”

서은이 움츠리면 움츠리는 대로, 벌어지면 벌어지는 대로 태한은 그대로 더 밀고 들어가 몸을 겹치며 힘겨워하는 서은을 달래었다.

푹.

자극당한 내벽으로 열이 오르더니 점차 질척해진다. 도대체 얼마나 더 깊어질 셈인지. 서은의 몸을 뒤덮을 정도로 깊숙하게 몸을 묻고서도 그는 성에 차지 않는 듯 느릿하게 허리를 돌렸다. 몸 안을 꿰뚫고 박힌 축이 거대하게 이동하는 것 같았다.

하아, 내뱉는 숨결에 그의 커다란 몸이 꿈틀거리며 움츠러든다. 몸을 둥글게 말더니, 서은의 오금 뒤로 팔을 밀어 넣는다. 더 벌어진 몸을 내려다보자 수치심에 열이 올랐다.

“왜, 뭘… 보는 거예요.”

다시금 질척하게 젖어 가는 속을 헤집었다. 태한은 오물오물 자신을 짓씹어 삼키는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씩 웃었다. 맞물린 틈새로 희멀건 체액이 비집고 흘러나왔다.

“자꾸, …보지 마세요. 그런 거… 으응… 싫어.”

그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하나하나 뜯어보듯 유심히 지켜보며 흥분하는 얼굴을 보는 건 생각보다 더 수치스럽고 야릇한 일이었다.

서은이 얼굴을 확 붉힌 채로 태한을 밀어내려 손을 뻗은 순간, 태한이 서은의 팔을 당겨 그대로 제 몸 위로 서은을 올렸다. 졸지에 태한과 나란히 마주 보게 되자 시선을 피할 길이 없었다. 그 와중에도 마치 몸을 맞물리듯 그가 은근하게 서은의 몸을 끌어안았다.

“하읏, 류태한 씨 정말 변태네요.”

좁은 비부를 비집고 밀려든 육중한 게 속살을 마구 헤집어 놓았다. 혼이 나갈 정도로 짜릿한 쾌감이 척추를 타고 정수리까지 관통했다.

“아…!”

서은은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다. 곧 아랫입술이 그의 잇새로 뜯겨 나가고 혀가 밀려왔다. 뜨겁게 파고든 혀가 능숙하게 입 안을 유영하듯 헤집었다. 달콤한 키스였다. 누구에게나 이렇게 다정할까. 조심스러우면서도 순간 절제하지 못하는 움직임. 그 사이사이 튀는 듯한 그 충동. 모든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야한 게 누군데.”

“류태한, 읏, 씨가 더 하거든요?”

“내가?”

정말 그러냐는 듯, 눈을 마주친 채로 태한이 허리를 치받아 올렸다. 눈앞이 쪼개지는 것 같은 충격과 함께 몸 안 가득 쾌락이 번졌다. 서은은 태한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단단한 어깨에 뺨을 기대었다.

벌게진 태한의 목덜미와 힘이 잔뜩 들어가 힘줄이 불거진 팔뚝. 그 아래로 이어지는 선들이 시야를 어지럽힌다. 폐부를 가득 채운 열기가 목구멍으로 토해졌다.

“하아, 아. 이렇게는… 너무, 힘들어요.”

아래서 짓쳐 올리는 것보단 차라리 짓눌리는 게 낫다고 생각한 순간, 태한이 삽입한 채로 서은을 침대에 눕혔다. 몸이 반쯤 돌아간 서은의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리고 벌어진 틈을 다시 꽉 채우며 체중을 실었다.

“하아, …무거워요.”

커다란 하체에 짓눌려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간신히 새어 나온 벅찬 중얼거림에 그의 몸이 떨어져 나가는 것도 잠시, 쿵, 아래로 거대한 힘이 치받쳤다.

“아! 태한 씨, 흑….”

그가 한 번씩 몸을 붙일 때마다 좁은 구석으로 밀려나듯 서은의 머리끝이 침대 헤드를 쿵쿵 찧었다. 가구가 밀려 쿵쿵, 벽과 부딪치고, 혼자서 뒹굴어도 불편함이 없던 싱글 사이즈 침대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덜컹거렸다.

“아, 흑… 아아….”

“아프다는 건지, 좋다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 중얼거리며 살살 안으로 파고드는 그가 허리를 치댔다. 큰 그림자가 뜨겁게 열 오른 서은을 내리눌렀다.

“응, 좋아요.”

어느 순간 고통은 쾌락으로 바뀌어 전신을 마비시켰다. 간지럽게 퍼지는 짜릿한 기분에 서은은 참지 못하고 신음했다.

“주서은 씨 앙앙대는 거 귀엽네.”

그가 푹, 계속해서 치받으며 속삭였다.

“숨소리가 이렇게 야할 줄은 몰랐어.”

더 해 봐요. 천천히 허리를 내뺐다 아래를 치받으며 그가 채근했다.

“흐읏, 잠깐만. 잠깐만요.”

“멈추면 안 아플 거 같아요? 아니야.”

그가 다시 깊숙하게 허리를 파묻었다. 다리 사이가 다시 꿰뚫린다. 서은의 늑골이 커다랗게 부풀었다. 배 속 가득 밀려드는 포만감에 숨이 막혔다.

“태한 씨… 진짜… 하아….”

“후우.”

“…짐승이에요?”

“그러게 왜 이렇게 몸이 작습니까.”

도드라진 골반을 붙든 채로 허리를 쉬지 않고 파묻으면서 밑에 깔려 허덕이는 서은에게 조금 더 깊게 큰 몸을 꾸깃꾸깃 욱여넣으려 애쓰는 순간, 우직. 하고 무언가가 어긋나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만요. 침대가…. 으으응!”

그러거나 말거나 태한은 인정사정없이 몰아붙였다.

매트리스가 요란하게 출렁거렸다. 차츰 아래서 무언가 어긋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나, 기묘함은 잠시였다. 이렇게 흔들려도 되나 싶을 정도로 쿵쿵, 벽을 찧는 소리에 서은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러다 풍기 문란죄로 잡혀가도 할 말이 없었다.

드륵드륵. 바닥을 긁는 소리와 쿵쿵, 간헐적으로 벽을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뒤섞였다.

“흐응, 아아. 잠깐만요. 아, 그만요. 지금 기분이 너무….”

견딜 수가 없는지 들썩거리는 서은의 엉덩이가 멋대로 흔들렸다.

“아아… 태한 씨.”

태한 씨,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야릇해 안에 삽입된 페니스가 더욱 단단해졌다.

“왜, 왜 커져요.”

“그러게. 미치겠네.”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고 중얼거리며 그가 다시 퍽, 허리를 쳐올렸다. 몸이 부서질 것처럼 흔들린다. 이대로 몸을 두 동강 내야 그만두려나. 엉덩이 아래로 손을 밀어 넣어 몸을 더 밀착한 그가 허리를 쳐올렸을 때, 빈틈없이 맞물린 속살이 왈칵거리며 수축했다.

뜨거워진 안쪽을 마구 찔러 대는 태한을 견디지 못하고 서은이 몸에 힘을 꽉 주었을 때, 귓가에서 참지 못하고 욕설 같은 한숨을 내뱉는 태한의 신음이 들렸다.

“하아, 조이지 마.”

퍽, 다시금 뻑뻑하게 그를 휘감는 서은을 들쑤시면서 그가 속삭였다.

“…더는, 못해요.”

“그러니까, 힘 빼.”

“아아, 태한 씨. …그만. 그만.”

“나도 한계야.”

애원에도 불구하고 치대는 움직임이 빨라졌다. 엉덩이를 뭉갤 듯이 짓쳐 올리는 움직임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다리가 점점 벌어졌다. 몸이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데도 그는 여전히 서은의 아래에서 치받아 올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직.

심상치 않은 소리가 침대 아래서 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흥분으로 젖은 따뜻한 몸을 깊게 찌르고 나오는 일에만 집중했다.

“아, 읏, 아아!”

“…하아.”

집요하게 들쑤시는 움직임에 결국 서은이 먼저 태한의 품에서 절정에 올랐다. 가늘게 경련하는 작은 몸이 바들거리며 조여들자, 마지막으로 깊게 몸을 묻은 태한이 서은을 끌어안은 채로 흐트러진 숨을 쏟아 냈다.

서로의 몸에 파묻힌 채로 서서히 잦아들었다.

***

- 오늘 배송 하나 갈 건데, 몇 시에 퇴근합니까?

배송 온 침대를 보고 서은의 입이 떡 벌어졌다. 과연 이게 들어갈 수 있을까, 생각했던 사이즈의 침대가 간신히 안방으로 들어갔다. 화장대와 옷장을 두고도 여유롭게 지내던 공간이었는데, 침대 하나가 새로 왔다고 방이 가득 차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이렇게 무식한 사이즈를 보낼 줄이야.

- 퇴근하고 들를게요. 하자 없는지 확인해야 하니까.

태한과 함께 보낸 첫날 밤, 서은이 이사 온 이래로 잠자리를 포근하게 감싸 주던 싱글 침대는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다.

“이건 너무 크잖아.”

방을 가득 채운 침대는 장정 넷이 뛰어도 거뜬할 것 같았다. 하여간 류태한 씨. 침대를 보내도 꼭 저와 닮은 큼직큼직한 걸 보냈다. 엉덩이를 깔고 앉은 매트리스는 흔들림 없이 포근했다.

“폭신해.”

남몰래 침대에 걸터앉은 엉덩이를 퐁퐁, 튀겨 보다가 서은은 배시시 웃었다. 매트리스를 받치고 있던 침대 프레임이 두 동강 날 정도로 격렬하게 흔들렸던 시간들. 그런 뒤 태한은 점점 자고 가는 날이 빈번해졌다.

생각하니 새삼 부끄러움에 목구멍이 간질거렸다. 상상만으로도 속에서 치미는 열기에 서은은 창문을 열고 먼지를 팡팡 털며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총채를 들고 매일 쓸고 닦는 곳들을 다시금 털어 낼 때, 화장대 위에 올려 둔 태한의 물건이 반짝였다. 언제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마도 근래.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에 성급하게 문을 넘어 들어온 그가 흘리고 간 커프스였다.

늘 반듯하던 소매를 떠올리는 서은의 입가로 다시 배시시 미소가 어렸다.

그의 물건이 집에 남아 있다니. 화장실에 나란히 꽂힌 태한의 칫솔과 제 칫솔, 주방에 걸어 둔 머그잔 두 개. 점차 서은의 영역에 그의 흔적이 많아진다. 문득 이런 게 연애인가 생각하며 서은은 지난 시간을 떠올렸다.

처음 함께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샌드위치 가게에 나란히 앉아 점심을 먹으며 몇 입 만에 샌드위치 한 개를 깔끔하게 비워 내는 모습이 예쁘던 남자. 그를 쳐다보고 있노라니 냅킨으로 입을 꾹 눌러 닦은 그가 이야기했다.

“침대는 주중에 바로 배송될 겁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괜찮아요.”

함께 겪은 소란에 서은은 낯을 붉히면서도 극구 사양했다. 혼자 잠들기 적당한 싱글 사이즈 침대에서 그렇게 요란하게 굴었으니, 버티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고도 그 좁은 침대에 커다란 남자와 구겨지듯 몸을 겹치고 얼마나 또 그렇게….

“저 실은, 이렇게 아침을 같이 맞아 본 건 처음이어서요.”

“나도요.”

쑥스러운 고백을 내뱉듯 서은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을 때, 태한이 입술을 기울여 웃으며 대답했다.

주말 오후를 온전히 지내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족 단위로, 연인들끼리 오가는 느긋한 시간 속에서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태한 씨, 있잖아요. 한 달만 만나 볼래요?”

고심 끝에 뱉어 낸 말에 태한은 잠시 잠잠했다.

“한 달은 살아 보자고 해야 하는 기간 아닌가?”

“일단 만나 보구요.”

“별로면 그때 가서 걷어차게?”

“차이고 싶지 않으면 노력을 하시면 돼요.”

솔로몬이 된 듯 명쾌하게 답을 내린 서은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한이 기가 찬단 듯 헛웃음을 흘렸다.

“안 되겠네. 이 여자.”

그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낀 채로 숨을 들이켜는 순간 팽창한 와이셔츠 앞섶이 벌어질 정도로 팽팽해졌다. 깊어진 눈으로 서은을 한참 바라보던 그는 이윽고 생각 끝에 결정을 내렸다.

“그래요. 천천히 갑시다.”

기다리는 것쯤이야, 시간을 더 정성스럽게 쏟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다는 듯. 서은을 보고 싱긋 웃는 그의 눈이 믿음직스러웠다.

“마라톤은 천천히 페이스 조절하면서 가는 거 알죠.”

시작부터 전력 질주했다간 금세 지쳐 나가떨어져 나가기 마련이다.

“난 연애도 그런 거라 생각해요.”

마치 평생을 염두에 두고 전하는 듯한 고백이었다. 그러니 시작에 의의를 둔다고. 어차피 결승점에 도달할 때는 함께일 테니.

언제 이렇게 깊어졌나 싶은 마음으로, 얼마나 깊은지 가늠할 수 없는 눈을 보며 서은은 생각했다. 이 남자는 진심이라는 걸.

“가볍게는 만나고 싶지 않아요.”

끝이 어떻게 되든, 그래도 나눌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나눴으면 좋겠다고.

“이거, 저한테 쉬운 시작 아니에요.”

“마찬가집니다.”

서로에 대해 알지 못하는 상태로, 이렇게 뒤섞여 얼마나 더 혼란할지 모르는 상황 속에 그 길을 한번 걸어 보기로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러더라구요.”

문득 태한이 입을 열었다.

“결혼할 사람을 만나면 그냥, 느낌으로 안대요. 나는 우리가 그럴 것 같아.”

섣부른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태한은 감추지 못하고 속을 쏟아 내었다. 분명 그 속을 쏟아 내기까지 그의 커다란 몸을 빙빙 돌았을 그 말에 웃음이 나왔다.

그 순간을 떠올리며 서은은 손끝에 잡힌 태한의 커프스단추를 굴렸다.

연애를 시작한 뒤로 매일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이곳으로 퇴근해 이른 아침 돌아가는 남자. 하루 중 반은 그와 함께 보내는 것 같았다.

오늘 같은 날을 제외하면 가게로 퇴근해 함께 귀가하기도 했다. 집 앞까지만 바래다준다고 따라와서는 현관까지만, 차 한 잔만 마시고, 그러다 함께 밤을 지새우며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어디에 닿을지 알 수는 없지만, 너무 먼 미래는 생각하지 않기로.

달콤하게 속삭여진 고백에 서서히 물들기로 했다.

***

피로연장은 소란했다. 태한은 피로감이 느껴지는 얼굴로 묵묵히 무리 지어 어울리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오늘은 한선 그룹의 차녀와 선일일보의 장남의 약혼식이었다. 태준의 아내이자, 태한의 형수인 한은성은 제일 그룹의 장녀였다. 쟁쟁한 그룹과 언론의 결합이자 가문의 경사였다.

예의를 다해 자리를 지키고 있는 태한의 얼굴로 언뜻 따분함이 스칠 무렵, 같은 테이블에 앉은 태조의 얼굴로 반가운 기색이 스쳤다.

민정과 함께 팔짱을 끼고 다가오는 여자는 진한과 혼담이 오가고 있는 진송물산의 송현진이었다

“여기 있었네, 잘생긴 형제들. 태조 안녕? 근데 넌 왜 그렇게 지루해 죽겠는 얼굴이니?”

“여기 좋아서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민정의 인사에 태조가 샴페인 잔을 기울이며 웃었다.

“끝나고 우리끼리 한 잔 더 하기로 했는데, 갈 거지?”

“콜.”

“태한 오빠는?”

“너희들끼리 가.”

본식 이후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로 진행되는 피로연이라 해도 격식을 갖추는 자리였다. 뒷말이 나오지 않기 위해서는 행사가 무사히 마무리될 때까지 자리를 지키는 게 예의였다. 그 새를 견디지 못하고 술 약속을 잡는 태조를 눈빛으로 나무라며 태한은 정중히 거절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태한이는 면세점 키운다고 정신없다며? 야, 살살하자, 살살해. 요새 너희가 치고 나와서 업계 분위기 장난 아냐.”

무리 중 누군가의 말에 태한은 그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이번에 대만 뚫을 거라며? 대단하다.”

“뭐,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남자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태한은 글라스에 담긴 샴페인을 목으로 넘겼다. 대만 국제공항은 자국 기업에게 독점 사업권을 주고 있어 해외 기업이 선뜻 파고들기엔 어려운 곳이었다. 국내에도 여러 기업이 몇 차례 도전했으나 그때마다 고배를 마셨다. 그 때문에 해신이 선두에서 정면 돌파하겠다는 발표에 모두가 놀랐다.

“이런 자리에서까지 사업 얘기를 해야 돼?”

민정이 듣기 싫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태한을 빤히 응시했다.

“그렇게 바쁘다면서 요즘 딴 데 정신 팔려 있다며? 태조가 그랬어. 어디서 순진한 애 어떻게 하고 있나 보더라고.”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장난치듯 떠들어 대는 민정의 말에 태한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 곁에서 샴페인 잔을 기울이던 현진이 입을 열었다.

“어느 정도 수준은 맞는 게 좋지 않겠어요? 아무리 잠깐 데리고 놀더라도.”

“맞아. 오빠한테 관심 있는 집안 얼마나 많은데. 아, 맞다. 나 아까 유진이도 봤어. 유진이 알지? 걔 오빠 노리고 있다? 알아?”

진심 같은 건 소용없는 곳이었다. 애초에 마음 같은 건 배제해 버린 대화 속에서 태한은 냉소했다. 묵묵히 태한의 곁에서 힐긋거리며 주변을 살피던 태조가 잠잠했다. 왜? 하고 이번에는 태조의 시선을 염탐하던 관심이 다시금 조잘거리며 시끄럽게 쏟아졌다.

“윤이헌은 왜 그렇게 뚫어져라 보는데?”

막연히 닿은 시선 끝에서 눈이 마주치자 이헌이 고개를 꾸벅 숙여 묵례했다. 태한은 시선만으로 인사하며 그 곁에 선 동생을 응시했다.

“쟤가 윤이서야. 윤이헌 동생.”

민정의 설명이 귓가로 흩어지는 가운데 여리고 늘씬한 미인형의 동생이 머쓱하게 고개를 숙인다. 이런 자리가 어색한 듯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예의를 갖추는 이헌의 동생에게 시선을 주며 태한은 너그럽게 입술을 당겼다.

“쟤네 좀 이상하지 않아? 무슨 사이 아냐?”

“몰라. 관심 없어.”

그러면서도 빤히, 그쪽에서 쉽게 시선을 거두지 못한 태조가 건성으로 대답하며 술잔을 비웠다.

“아무튼 태한 오빠도 곧 가겠다. 현진 언니랑 진한이 약혼식 올리고 나면 분명 오빠 차례일 텐데. 그 전에 열심히 놀아야겠네. 순진한 애들은 적당히 울리고.”

민정의 웃음이 귓가를 스친 순간이었다.

“말 좀 가리지, 한민정.”

“뭘 또 그렇게 정색을 해. 농담이야, 농담.”

“웃음이 나와?”

그러지 말라며 민망한 듯 태한의 어깨를 치고 킥킥대던 민정의 표정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내가 고른 여자야. 적어도 너희보단 낫겠지.”

태한은 샴페인 잔에 남은 것들을 비워 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일어서자 일순 시시덕거리던 테이블이 숙연해졌다. 태한은 황당하게 응시하는 민정과 그 곁에 어울리는 무리를 향해 찬찬히 시선을 찔러 넣으며 이야기했다.

“놀다 가. 태조 너도, 적당히 하고.”

수준이 맞지 않는 이들과는 적당히 거리를 두라는 일침을 한 뒤 태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회장을 나섰다. 차에 오른 뒤에야 갑갑하게 목을 죄고 있는 넥타이를 풀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가면을 쓰고 마주해야 하는 것들. 그 안에서 문득 떠올라 내내 보고 싶던 서은이 간절해졌다.

다만 둘이서. 소소하게 얼굴을 맞대고 웃는 것만으로 마음을 간지럽게 만드는 여자. 속닥거리는 목소리만으로도 가슴에 뜨거운 물결이 일게 만드는 여자. 서은과 함께일 때 느끼던 그 따듯하고 몽글거리는 어떤 것. 그것의 부재를 느꼈을 때 이곳에서의 모든 게 무의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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