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서은은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다시 공연장 입구로 시선을 들었다. 사람들이 밀려드는 입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서성인 지 한참이었다. 드나드는 사람들은 온통 모르는 얼굴뿐이었다. 공연 시작을 알리는 방송과 함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입장하기 시작했다.
“누구 기다리냐?”
“어, 아니.”
승원과 함께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해 대기실에 있는 해인을 격려하고 나온 뒤로 줄곧 이 자리였다. 공연 시간이 가까워져 가는데도 어째서인지 태한은커녕 닮은 사람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내일 거기서 봅시다, 라는 말에 저도 모르게 기대를 했나 보다.
해인의 신신당부에도 불구하고 주영과 진한은 각자의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주영은 결혼 후 시댁에서 있는 첫 행사에 참여하느라 미안하단 연락을 해 왔고, 진한이는 일과 관련해 제주도에 체류 중이었다. 승원은 그런 진한을 만나러 제주행이 예약되어 있었지만, 해인의 공연을 보고 난 뒤에 비행기를 타겠다며 동행해 주었다.
사정이 있을 테니 참석하지 못하는 건 유감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왜인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뭐 해, 들어가자.”
안으로 들어가자 재촉하는 승원의 말에 서은은 결국 공연장으로 발을 돌렸다.
***
마지막 입장을 알리는 방송 소리에 내부를 가로지르는 걸음에 속도가 붙었다. 성큼성큼 홀을 가로질러 티켓을 확인하고 공연장 안으로 들어선 태한은 빠르게 시선을 돌려 서은을 찾았다.
공연장은 다행히 생각만큼 크지 않았다. 생각보다 작은 규모에 안도하며 태한이 천천히 사위를 살피며 걸었다. 좌석이 듬성듬성 비어 있는 것도 다행이었고, 그 사이에 주서은의 동그란 뒷머리가 유난히 예쁜 게 다행이었다.
여기저기 두더지 게임처럼 솟아난 관람객들 사이로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곧게 등을 펴고 앉아 있는 서은의 뒷모습. 우측에는 이미 누군가가 앉아 있었고, 좌측 통로 쪽은 다행히 비어 있었다. 태한은 새하얀 목덜미를 응시한 채로 서은에게 다가갔다.
“앉아도 됩니까?”
곁에 앉은 누군가와 작게 이야기를 나누던 서은이 고개를 돌린다. 태한을 발견한 동그란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오셨어요?”
“와야죠. 보기로 했잖아요.”
그는 서은의 왼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승원의 시선이 태한에게 물끄러미 닿자, 서은은 서둘러 두 사람을 소개했다.
“이쪽은 제 친구예요.”
“지승원이라고 합니다.”
탐색이나 다름없는 태한의 시선에 승원이 빠르게 덧붙였다.
“저 진한이 친굽니다.”
제 동생이 누구와 어울리는지 관심도 없는데 사촌 동생의 친구가 누구인지 알 리 만무했다.
몇 번씩 오가다 만난 적은 있을지 몰라도, 그런 관계를 되짚어 생각할 겨를 따위는 없었다.
“류태한입니다.”
태한은 다만 의아할 정도로 자신을 경계하는 승원을 고요히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서은의 앞을 지나 건너온 승원의 손이 마치 평화 협정을 맺듯 태한의 손을 맞잡았다. 꽈악. 움켜쥔 손안에서 단단한 힘을 느낀 승원의 미간이 슬며시 일그러졌다.
태한은 아무 표정의 변화도 없이 승원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도발처럼 느껴지는 손안의 악력에 다시 그의 손을 꽉 움켜쥐어 되돌려 주려는 순간 태한의 손이 거두어졌다.
천장에 달린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무대 위로 모습을 드러낸 해인이 박수갈채 속에서 익살스럽게 웃으며 인사했다.
“이제 공연이 시작하려나 봐요.”
“잘 볼게요.”
서은의 귓가에 작게 속삭이곤 태한은 붉은 시트에 몸을 편히 기대었다. 곁에서 서은이 수줍은 듯 입꼬리를 올린다. 슬쩍 시선만 건네 살핀 하얀 뺨이 귀엽게 실룩거리고 있었다. 태한의 입술이 느른하게 당겨졌다.
화려한 조명이 쏟아지는 무대 위에서 해인은 열정적으로 반도네온을 연주했다. 평소 해인을 생각하면 상상할 수 없는 진지함이었다.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혼신을 다하는 해인이 반짝거렸다.
가슴을 벅차오르게 하는 반도네온의 아름다운 선율.
양손을 이용해 71개의 태클라를 만져 연주하는 반도네온은 탱고의 영혼이자, 악마의 악기로 불리는 악기였다. 142개의 음은 현란하고도 화려하게 선율 위를 항해한다.
유명 애니메이션의 헌정 곡으로 시작된 해인의 웅장한 자작곡이 자랑스럽게 공연장 가득 울려 퍼졌다. 고조되는 선율 속에서 심장이 거칠게 울리기 시작했다.
가슴으로 감동적인 파문이 뜨겁게 일었다. 오케스트라와 함께 격정적인 멜로디가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귓속으로 울려 퍼지는 선율은 몹시 전투적이고, 아름다웠다. 대기실에서 아직 손이 안 풀렸다며 징징대던 동생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무대 위의 해인은 그저 흠결 하나 없는 완벽한 아티스트였다. 자랑스러운 해인의 모습에 가슴이 뭉클했다. 완전히 연주에 열중한 동생의 손끝에서 이토록 아름다운 음악이 탄생하다니, 연달아 곡이 연주되는 동안 서은은 공연에 푹 빠져들었다.
툭.
눈물이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얼마나 심취해 있었을까.
메들리로 이어진 연주곡이 끝남과 동시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귓속을 가득 채운 환호 속에서 서은은 투둑, 흐르는 눈물을 닦아 냈다. 가슴이 뜨거웠다. 사람들의 열망과 응원, 감동과 탄성. 그 모든 게 한데 모인 이 장면은 마치 허공에 몸이 붕 떠 있는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무대 위에서 싱긋 웃으며 다음 곡을 준비하는 해인의 진중하고도 열정적인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서은은 박수를 보내던 손을 꽉 맞잡고 숨죽여 눈물을 흘렸다. 다시 고요한 공연장에 연주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흐릿한 눈앞으로 새하얀 손수건 하나가 밀려왔다. 태한의 것이었다. 그 순간 서은의 오른편에서 손 하나가 휙 파고들어 서은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대충 슥 닦고 돌아갔다.
감히 어디다 손을 대.
혼란스럽게 흔들리는 서은의 눈을 바라보는 태한의 시선이 승원에게 넘어갔다. 서은의 뺨을 훔치고 간 주제에 팔짱을 끼고 느긋하게 무대를 바라보는 얼굴이 태연하다. 그 모습을 주시하는 눈동자가 냉정해졌다.
그 순간 서은이 태한의 손이 움켜쥐고 있던 손수건을 슬쩍 당겼다. 손가락 사이를 부드럽게 빠져나가는 느낌. 동시에 태한이 서은의 손을 거머쥐었다.
둥둥둥둥.
고조되는 선율 속에서 가슴이 울린다. 새카맣게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체온이 겹쳐졌다. 물기가 마르지 않은 눈동자에 놀라움이 스쳤다. 그러나 태한은 태연히 서은의 손을 쥐고 공연을 관람했다. 현란한 멜로디가 범람하는 곳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함께 범람했다.
공연이 이어지는 동안 간혹 서은의 어깨가 떨렸지만, 태한은 그 어깨를 도닥이는 대신 묵묵히 잡은 손등을 엄지손가락으로 쓸어 주었다.
부디 서은의 곁에 앉은 지승원이 이 모습을 목격하길 바라면서.
***
혼돈의 도가니였다.
평소답지 않게 서은의 곁을 견제하는 승원이나, 서은의 그림자처럼 따라붙은 승원을 신경 쓰는 태한이나.
도대체 이게 무슨 조합이란 말인가.
서은은 긴장이 팽팽한 테이블 위를 바라보았다. 세 사람이 꼭짓점을 찍듯 둥그런 테이블에 삼각을 이루고 앉아 식사하는 모습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공기에는 날이 서 있었다. 칼과 나이프를 든 두 남자 때문이다.
태한은 그렇다 쳐도, 지승원 너까지 왜 이러는 건데.
공연이 끝나자마자 밥을 먹으러 가자는 승원의 말에 한 수 보탠 건 태한이었다.
“저녁은 제가 대접하죠.”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레스토랑에서 이렇게 살벌하게 피가 뚝뚝 떨어지는 스테이크를 칼질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공연을 볼 때와 마찬가지로 좌로 우로 눈을 굴리며 분위기를 살필 무렵이었다.
“음식은 입에 맞아요?”
“네, 맛있어요.”
“지승원 씨는?”
“고기가 고기죠.”
에이징 룸에서 8주간 숙성시켰다는 스테이크는 입 안에서 살살 녹는 와중에 질문에 온도 차가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마찬가지로 심드렁하게 대꾸하면서도 승원은 군말 없이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스테이크를 와구와구 먹었다.
“그런 것치곤 잘 드시는군요.”
“내 거 더 먹을래?”
서은이 슬쩍 제 접시를 양보하려 하자, 태한이 가로막았다.
“필요하면 더 주문하면 됩니다. 남기지 말고 먹어 줘요.”
서은의 몫을 사수하는 것도 사수하는 것이지만, 서은의 작은 관심 하나까지 승원에게 넘어가는 꼴이 못마땅했을 뿐이다.
“고기는 이 정도로 충분하고.”
승원이 줘도 안 먹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더는 못 먹겠는 건 서은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계속 식사를 하다간 얹히고 말 거다. 서로 잘 알지도 못할 텐데,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팽팽하게 견제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어 불편함 속에서 입에 넣은 고기를 꼭꼭 씹어 삼킬 때였다. 가방 속에서 전화가 울렸다.
“나 잠깐 해인이랑 통화 좀.”
서은이 휴대 전화를 들고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본격적인 탐색전이 노골적으로 시작되었다.
승원은 태한과의 통성명 이후로 줄곧 경계 상태였다.
갑작스럽게 나타나 자연스럽게 서은의 곁을 파고드는 남자. 한눈에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걸 압도적인 피지컬과 자연스럽게 뿜어내는 기세만으로 파악했다.
“만약에 오늘 너한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있지? 단단히 미친 변태 새끼야. 그런 놈은 꼭 조심하도록.”
창립 기념 행사에 서은을 데려다주던 날, 이럴 줄 알고 신신당부했는데 미친 변태 새끼와 식사라니. 경계를 풀 수 없었다.
“서은이하고는 창립 기념 행사에서 보셨죠?”
“네. 그때가 처음은 아니지만.”
“그래도 알게 된 지는 얼마 안 됐을 텐데. 아, 그날 호텔까지 제가 데려다줬습니다.”
느긋한 음성과 함께 넘어온 시선 속에는 도발이 명백하다. 마치 우위를 선점한 듯한 시선에 태한은 승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테이블 위를 건너간 시선은 서은과 있을 때와 달리 온화한 빛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승원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무신경한 표정으로 마저 질문했다.
“서은이와는 무슨 사이입니까?”
“초면부터 질문이 직설적이군요.”
질문의 저의를 파악하기 위해 부드럽게 대꾸했을 때, 승원이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태한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서은이가 보기보다 상처가 많습니다. 대학교 2학년 때 사고가 있었는데, 알고 계십니까?”
서은이 한국대 무용과에 진학해 들뜬 마음으로 방학을 맞아 캠퍼스 커플이 된 영웅과 바다를 보러 떠나던 길이었다. 도중에 합류한 학과 친구 여럿과 함께 음악을 틀고 도로를 달렸다. 세상 무서운 게 없는 것처럼, 면허를 딴 지 얼마 안 된 호기로움에 모든 걸 맡겨도 좋을 날이었다.
함께인 것만으로도 두려울 게 없는 평범한 여느 날처럼 불행은 남의 이야기인 줄 알았을 것이다.
“운전이 미숙했던 운전자가 전방의 장애물을 뒤늦게 발견했어요. 조수석 방향으로 핸들을 꺾었다는데, 앞 범퍼가 허리까지 밀고 들어왔죠. 하반신 마비가 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라고.”
뜻밖의 이야기에 태한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당시 동승자들은 모두 경미한 부상으로 끝났지만, 서은이는 무릎이 골절되고 엄지발가락이 모두 으스러졌습니다. 학교를 휴학하고 재활을 거쳐 회복까지 반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어요.”
발끝은커녕 두 다리로 제대로 서지 못했던 날, 서은은 처음으로 소리를 내어 울었다. 하늘이 내린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죽기 살기로 매달리는 세계. 그런 곳에서 하루 이틀도 아니고 반년 이상을 쉬었다는 건, 앞으로의 가능성도 없다는 뜻이라며 울던 서은을 기억한다.
“책임을 진다고 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가 곧 결혼한대요.”
태한의 뇌리로 꽃 가게로 찾아왔던 남자와 내내 불편해하던 서은의 모습이 스쳤다.
“학교 자퇴하고 귀를 닫고, 눈을 감고 그렇게 20대를 보냈어요.”
애초에 발레를 모르고 살았던 사람처럼 서은은 연이 닿은 모든 이들과 연락을 끊고 관심을 차단했다. 승승장구하는 동기와 서은을 버리고 날아오르는 영웅을 보며 열등감에 휩싸이는 스스로가 싫다고 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발끝으로 서지 못하는 자신과 다르게 무대 위를 백조처럼 휘젓고 다니는 상상만으로 마음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무너진다고.
좌절은 사람을 좀먹게 만들었다.
“서은이요. 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한 앱니다.”
한영웅을 다시 만나 끊어 낸 뒤에야 비로소 긴 터널을 다 빠져나온 것 같다고, 이제야 후련하다는 서은을 생각하며, 승원은 다시 서은의 세계에 침범하려는 눈앞의 남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극복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때마다 제가 곁에 있었습니다.”
태한의 입가로 가벼운 웃음이 스쳤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그러니 적당히 시작해서 적당히 들쑤시다 적당히 놓아줄 거라면.
“가볍게 시작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내가 왜 그런 소릴 지승원 씨한테 들어야 하지?”
글라스를 내려놓는 태한의 목소리에 짜증이 서렸다. 여전히 정중하지만 눈동자 속으로 서늘한 날이 섰다.
“그쪽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아니까요.”
진한의 약혼 소식을 전해 들었다. 진송물산 쪽과 약혼이 결정 난 진한을 보며, 그들의 혼사는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것을 다시금 실감했다. 사랑이 없어도, 감정이 없어도 혼인 선서 하나로 부부가 될 수 있는 세계. 물론 그 선서 이면에는 서로가 나눠 가질 이권이 끝도 없는 영수증처럼 이어질 테지만.
서은은 승원과 같은 입장이었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 평범하게 사랑받으며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다.
반면 눈앞의 남자는 해신의 기둥인 해신 그룹의 차남이다. 호화로웠던 해신 그룹 장남의 결혼식은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었을 정도였다. 대한민국을 쥐락펴락하는 재벌가에서 서은을 받아 줄까. 상처만 남기고 끝나겠지. 그걸 분명히 알고 있을 텐데 자꾸 서은의 곁을 맴도는 남자의 저의가 의심스러웠다.
친구의 사촌 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에게는 존대가 최고의 예의라는 듯, 승원이 불신으로 얼룩진 시선을 빤히 건넸다.
“진심입니까?”
“취조합니까?”
태한이 빙긋 웃었다. 살얼음 같은 미소였다.
“결말이 뻔히 보이지 않습니까?”
“뭘 근거로 그렇게 단정해. 응?”
건방진 충고에 태한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승원의 눈썹이 그제야 처음으로 슬쩍 일그러졌다.
“그쪽 입장 같은 건 관심 없고, 철저하게 서은이 입장에서만 보면 그래요. 난 서은이가 다시 상처받을까 걱정이 되고.”
언제까지 서은의 곁에 남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서은에게 내가 언제까지 네 뒤치다꺼리나 하고 있을 순 없지 않냐고 농담처럼 건넬 때마다, 서은은 천년만년 이러고 살면 되지. 푸스스 웃으며 대답했다.
“친구로서 걱정이 돼서 그럽니다. 사람이 마지막에 좌절하면 무너지니까.”
“글쎄요. 친구라면 너무 주제를 넘었고.”
태한은 이미 선을 넘은 승원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렇긴 하죠. 저한테 서은이, 아주 특별합니다.”
여유롭게 웃는 얼굴에 날이 팽팽하다. 섬뜩할 정도로 서늘해진 얼굴은 금방이라도 테이블을 엎어 버려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침착했고 섣불리 흔들리지 않는다.
“지승원 씨 생각은 잘 알겠고, 무슨 말인지도 잘 알겠습니다. 근데 나는 이런 생각이 드네요. 지승원 씨가 아주 건방진 참견을 하고 있다고.”
더는 봐주지 않겠다는 듯, 태한이 손안에서 빙글 돌린 나이프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난 내 문제에 이물질 끼는 건 질색이거든.”
“글쎄요. 누가 이물질이 될지는 끝까지 가 봐야 아는 거겠죠. 지켜보세요.”
“그러든가.”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스테이크를 입에 밀어 넣고 경고하는 승원에게 태한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피하지 않는 두 개의 시선이 다시금 허공에서 대립할 때였다.
“미안. 통화가 조금 길어져서…. 해인이가 오늘 두 분 와 주셔서 고맙다고 전해 달래요. 정신이 없어서 따로 인사를 못 했다고. 근데….”
서로 칼만 겨누지 않았지, 당장이라도 멱살을 쥘 것 같은 이 분위기는 뭔데.
서은은 혹시 제가 없는 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평소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 승원은 보란 듯 스테이크 접시를 깨끗하게 비웠고, 평소 먹성이 좋아 보이는 태한은 스테이크를 반 이상 남겼다. 뭔가 이상하단 생각에 태한을 바라본 순간, 그가 냅킨으로 입술을 꾹꾹 찍어 내며 싱긋 웃었다.
“다음에 동생분과 함께 식사나 하죠.”
“네, 해인이한테 전해 둘게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승원이 냅킨으로 손을 닦고서 일어났다.
“다 먹은 것 같은데 이만 일어나자.”
체하겠다. 중얼거리며 지갑을 꺼내 든 승원이 카운터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오늘 식사 맛있었어요. 고마워요, 태한 씨.”
서은이 인사를 하며 뚱하게 선 승원의 옆구리를 찌르자, 승원이 언짢은 얼굴로 ‘잘 먹었습니다.’ 작게 인사했다.
“겨우 이 정도로요.”
날아오는 인사 속에서 태한이 느긋하게 웃었다. 먼저 계산을 하기 위해 카운터로 간 승원을 보며 여유로울 수 있었던 건 주문이 끝남과 동시에 미리 그가 계산을 마쳐 두었기 때문이다. 얻어먹었다는 사실에 비로소 불쾌감을 드러내는 승원을 보며 이제야 조금 통쾌했다.
“가는 길은 제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아냐. 내가 바래다줄게.”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승원이 태한을 견제하듯 서은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태한의 눈썹이 서늘하게 구겨졌다.
“너 그러다 비행기 시간 늦어.”
“그럼 다음 거 타면 되지. 뭐 어디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제주돈데.”
“제가 바래다주겠습니다.”
태한은 서은을 제 곁으로 당기며 정중히 말했다. 태한에게 몸이 끌려가자, 서은의 어깨에 걸치고 있던 승원의 팔이 맥없이 추락했다. 다시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동시에 딩, 엘리베이터 도착 음이 울리며 문이 열렸다.
“나는 태한 씨 차 타고 갈게. 넌 그냥 가.”
“잠깐 들렀다 갈 시간은 돼.”
“됐거든. 괜히 서두르지 말고 가서 제시간에 비행기나 잘 타.”
“그렇게 하시죠.”
태한까지 거들고 나서자 결국 승원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걸음을 돌렸다. 서은에게 등을 떠밀려 차에 오르면서도 승원은 마지막까지 경계를 풀지 않았다.
“들어가면 연락해. 문 꼭 잘 잠그고. 요새 변태 새끼가 도심에 드글드글 하다더라.”
일부러 짓씹어 뱉으며 승원은 태한을 빤히 응시했다. 모욕처럼 도발하는 공격적인 태도에 서은의 뺨이 화끈거릴 정도였다. 태한은 그러거나 말거나 승원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서은을 데리고 돌아섰다.
“독특한 친구네요.”
“원래 저런 애가 아닌데 오늘 좀 컨디션이 안 좋은가 봐요. 애는 착해요. 걱정이 좀 많아서 그렇지. 잔소리도 많고.”
“서은 씨를 좋아하나 보죠.”
“네?”
은근하게 떠보는 시선에 서은은 진심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지승원과 친구 이상의 감정이라니. 생각만으로 소름이 끼쳐 오한이 서릴 정도였다.
“농담이 지나치시네요.”
서은은 태한이 열어 주는 조수석에 오르며 아무래도 승원이 장난을 쳐도 단단히 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글쎄. 그러면 좋겠지만요.”
문을 닫고 운전석으로 돌아가는 그가 왜인지 모르게 서늘했다.
돌아가는 내내 태한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하다가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공연도 잘 보고, 식사도 잘 했는데. 뭐가 문제였을까. 생각하는 사이 금세 서은이 사는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태한 씨.”
“예.”
“혹시 승원이랑 무슨 일 있었어요?”
내내 그게 신경 쓰여 오늘 밤은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은 얼굴로 서은이 고개를 빼고 태한을 바라보았다.
“서은이가 생각보다 상처가 많습니다.”
“가볍게 시작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런 충고를 해 올 때는 주제넘은 참견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승원이 무슨 심경으로 처음 식사하는 자리에서 무례할 것을 알고도 그렇게 이야기했는지를 알 것 같아 내내 마음이 얹힌 기분이었다.
“내가 가볍다고 생각해요?”
“네?”
“내 마음이, 내 태도가 서은 씨한테는 가볍습니까?”
이제껏 서은을 대할 때마다 뱉어 낸 한마디 한마디는 모두 뱉어 내기 전까지 몸속을 맴돌다 그렇게 간신히 비집어 낸 말이었다.
감정은 어느새 새빨간 울혈을 남겼다. 흐려지기까지 시간이 걸리고, 지워지기도 전에 더 빨간 울혈이 곳곳에 맺혔다. 그렇게 온통 붉어져 가는 시간 속에서 망설였던 건, 서은에게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서은과 함께하는 순간마다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 배려와 관심이, 기다림과 서은을 향한 마음 모두가 가볍게 느껴졌다니. 태한으로서는 억울한 일이었다.
상대에게 물들어 가는 일에 시간의 길이는 중요한 게 아니라고.
그럼에도 너무 빠르게 돌아가는 감정의 시계를 늦추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는데, 오해 따위를 사는 이 순간에 문득 짜증이 치밀었다.
“갑자기 왜 그런 소릴 하세요?”
느릿하게 눈을 끔뻑이면서도 태한의 기분을 살피는 눈빛은 기민하다. 그러니까 계속 이렇게, 상대를 살피고, 거리를 두며 다가오는 것들을 밀어낸 게 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한 거였다니.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부분이 이제야 다시 보이는 것들도 짜증이 났고, 그 점을 타인에게 지적받아 인지했다는 사실도 짜증이 났다.
주서은을 향해 요동치는 감정 하나에 눈이 멀어 발견하지 못한 것들이 유감스럽고 이미 서은의 곁에 저보다 더 서은을 잘 아는 누군가가 있다는 게 신경 쓰였다. 그러나 도통 이 진심을 어떻게 건네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비스듬히 내린 시선 끝에서 서은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서은을 가만히 바라보던 태한은 점점 복잡하게 흐려지는 서은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태한 씨. 잠깐만요.”
태한은 당황하는 서은을 조금 더 깊게 끌어안았다. 맞닿은 체온이 순식간에 뜨겁게 서로에게 옮겨붙었다. 심장이 펄떡거리며 울리는 게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로 선명하게 뛰었다. 그 울림이 전해지자 덩달아 마음이 떨렸다. 커다란 진폭 안에서 서로가 흔들리는 것처럼 발밑부터 세상이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태한은 서은을 놓지 않았다.
“잠깐만 이러고 있어요.”
나직한 목소리가 서은의 귀에 내려앉았다. 등을 감싼 단단한 팔이 위로하듯 천천히 서은을 쓸어내렸다. 작은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은 투박했다. 그러나 다정했고, 그 손길에서 느껴지는 진심이 다시금 서은의 마음을 툭 건드렸다.
“나는 서은 씨가 나를 좀 더 편안하게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물론 나도 집으로 돌아가면 매번 후회해. 좀 더 다정한 말을 해 줄걸. 좀 더 웃게 해 줄걸.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서은은 아무 말도 없었다.
“주서은 씨가 날 볼 때 어떤지 알아요? 이 남자가 나한테 왜 이러나. 이 남자는 이러면 안 되지 않나. 류태한의 연애는 이런 식이면 안 되지 않나. 항상 고민이 가득해.”
그래서 신경이 쓰였다. 어차피 끝날 연애로 시간을 허비하는 건 서로에게 좋지 않은 일이라 생각하는 서은의 눈을 볼 때마다. 입 밖으로 한 번 낸 적 없는 말들이 그 눈동자에 가득 비칠 때마다. 그래서 계산을 운운하고, 무모한 길을 택하고 싶지 않다며 에둘러 말할 때마다.
“몇 번 보지도 않았는데 이런 소리 하는 거 진정성 없게 느껴질 수 있다는 거 압니다. 그런데 나는 머뭇대는 성격이 아니에요. 하고 싶은 말은 해야 하고, 전하고 싶은 건 반드시 전하고 말죠. 내가 서은 씨에게 자꾸만 왜 이러는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한다면 나는 해 줄 말이 딱 하나뿐이에요.”
눈이 마주쳤다. 태한의 시선이 깊어졌다.
“첫눈에 반했다는 진부한 말.”
이제까지 툭툭, 아무렇지 않게 찔러 낸 것들이 분명 가볍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진부한 말이 세상에서 제일 달콤하게 들렸다.
“그게 사실이기도 하고.”
“…….”
“처음 본 순간부터 끌렸어요, 서은 씨에게.”
그는 서은을 마주한 뒤 처음으로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묵묵히 전해지는 고백 속에서 가만히 숨을 죽인 서은을 바라보며 그가 손을 들어 갑갑한 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런 경우는 나도 처음이라.”
얕은 한숨에 진심이 담겼다.
“그냥 좋아요. 주서은 씨가.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마음이 쿵, 저변에서부터 깊고 크게 울렸다.
곧게 가로지르는 그 눈빛이 심장을 태우고 머리끝을, 손가락 끝을, 발끝을 태운다.
“조금 더 일찍 알아서 조금 더 많이 좋아할걸. 그럼 해 줄 말이 더 많았을 텐데요.”
그것만으로 충분한 말이었다
서은은 침묵 속에서 무게감 있게 전해지는 진심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마음 어지럽혔다면 미안해요. 근데 오늘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는 서은의 동그란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한 걸음 물러서서 서은을 향해 손짓했다.
“들어가요.”
***
아직도 가슴이 떨려 진정되질 않았다. 서은은 의지와는 상관없이 바들바들 떨리는 손끝을 멍하니 응시했다.
“처음 본 순간부터 끌렸어요, 서은 씨에게.”
“이런 경우는 나도 처음이라.”
차례를 기다리면 제 것이 되는 삶을 살아온 태한에게 실패하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게 된 서은의 삶은 이젠 동기를 넘어 목적이 된 듯했다. 실은 서은도 마찬가지였다. 내내 머릿속에 들었던 류태한이 오늘은 마음에 더 많이 들어와 버렸다.
집 앞에서 이마에 입을 맞추고 한참을 서 있던 태한을 떠올리며 서은이 다시 멈칫했다. 집으로 돌아와 샤워기 아래서 한참을 서 있는 동안에도 태한의 고백이 씻겨 내려가지 않았다.
“그냥 좋아요. 주서은 씨가.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곱씹을수록 태한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날아와 가슴을 쳤다.
그의 마음이 얼마나 진심인지는 그의 행동, 말투, 눈빛에서 고스란히 묻어났다.
“나라고 다를 줄 아나.”
좋아하는데 이유가 없다는 태한의 말처럼 서은 역시 그랬다. 좋아하는 이유를 찾는 것보다 좋아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는 게 더 쉬울 정도로. 태한과 함께하는 시간 매 순간이 즐거웠다.
장난처럼 손을 두드리는 것도, 아무렇지 않게 곁을 차지하고 에스코트해 주는 순간에도, 아쉬움에 쉽사리 발길을 떼어 내지 못하는 그 순간들까지. 가슴이 떨리지 않은 순간은 없었다. 다만 그 떨림을 억누르는 건, 한 겹만 벗겨 내면 뚜렷한 현실감 때문이다.
넘어오지 마세요.
건드리지 마세요.
그 선을 밟지 마세요.
왜냐하면 내가 잡고 싶어져요.
그런 마음을 겨우 감추고서, 서은은 메시지가 들어와 불빛이 반짝이는 휴대 전화를 거머쥐었다.
그 새끼 조심해. 문 잘 잠가라.
그 새끼가 뭐야.
메시지를 확인한 서은이 픽 웃으며 냉장고 앞에 섰다. 승원이까지 이러는 걸 보면 제가 없는 사이 분명 무슨 일이 있긴 있던 모양이다.
“아. 맥주가 없네.”
서은은 텅 빈 냉장고를 허탈하게 바라보다 지갑을 들고 집을 나섰다.
편의점에 들러 맥주 다섯 캔을 사서 봉지를 달랑거리며 돌아오는 길, 슬리퍼를 끌던 서은의 발걸음이 멈춘 건 오피스텔 입구로 향하는 길목 벤치를 우연히 목격한 뒤다.
평평한 나무 벤치에 앉은 모습이 몹시 익숙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구부정하게 몸을 숙인 채 고뇌하는 남자. 저렇게 큰 덩치를 가진 사람은 서은이 아는 사람 중 태한 말고는 없었다.
“태한 씨?”
천천히 다가가 그를 불렀을 때, 깊게 한숨을 뱉으며 시름에 잠겨 있던 태한이 고개를 들었다. 손안에 얼굴을 파묻었던 태한의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였다.
“왜 아직도 안 갔어요?”
“아.”
서은을 발견하고 잠시 당황한 태한은 서은의 손에 들린 맥주 봉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제 사랑이 성급해서 혹시 서은에게 부담이 됐나 고민하다 보니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그러나 서은은 들어가기 전보다 훨씬 홀가분한 느낌이었다.
이 사랑엔 승산이 없나. 그렇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고백을 듣고도 조용히 곁에 앉아 맥주 한 캔을 까서 건네는 여자를 보니, 문득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태한은 이제까지 알던 것과는 다른 혼란한 얼굴로 잠시 서은을 바라보았다.
“마셔요.”
“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마시는 겁니까, 나빠서 마시는 겁니까?”
일전에 좋을 때도 마신다는 서은의 말을 빌리며 태한이 물었다.
“글쎄요. 그냥 날이 좋아서.”
시원한 바람이 밀려들었다.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잠시 눈을 감았던 서은이 고개를 돌려 태한을 바라보았다.
침묵 속에서 천천히 시간이 흐른다. 서로에게 시선을 견준 채로. 말없이 나누는 그 눈빛 속에 나누지 못한 마음이 뜨겁게 일렁였다.
서은은 맥주를 한 모금 삼키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잠깐 들어와서 차라도 한 잔 마시고 가실래요?”
서은의 제안에 태한의 몸이 움찔 굳는가 싶더니, 이내 그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합니다. 차만 마시고 갈 자신은 없어서.”
깔끔한 거절에 서은의 목덜미가 붉게 달아올랐다. 태한은 갑갑한 듯 넥타이 매듭에 손을 밀어 넣고 느슨하게 풀어냈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는지 고뇌하는 얼굴이 마음에 걸려 도무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위로를 전할 것도, 그렇다고 알랑거리며 그를 웃게 할 자신도 없지만. 힘이 들 때 가장 위로가 되었던 건 다만 곁에서 묵묵히 존재하는 것이었다는 걸 되새기며 서은은 입을 열었다.
“류태한 씨.”
나직한 부름에 건너온 시선은 어느새 뜨거워졌다. 서은은 그 시선을 똑바로 견준 채로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해 줄까요?”
이렇게 덩치가 큰 남자를 달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빙긋, 싱겁게 웃는 순간 그가 까슬까슬한 입술을 잘근 물고 억눌린 숨을 뱉어 냈다.
이 남자는 끌리고 있구나. 나처럼. 원하고 있구나.
완강하게 이끌려 품에 안기는 것보다 더 뜨겁고 강한 시선이었다.
“들어가요. 모기한테 뜯기기 전에. 오늘은 푹 쉬고, 잘 자고 일어나서 연락….”
마지막까지 억눌러 낸 태한이 서은을 데려다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선 순간이었다. 서은이 그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차… 마시고 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