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의 의무 (6)화 (6/13)

06

드라이어 바람이 멎었다. 허공으로 치솟아 오르던 머리카락이 언제 그랬냐는 듯 열기를 품고 가라앉았다.

“흔들립니까.”

왜 또 생각이 나서.

그러길 바라는 새카만 눈동자가 또다시 머리 한가운데 푹 꽂히는 기분이었다. 입술에 닿았던 부드럽고 뜨겁던 감촉. 입 안을 조심스레 적시는 그 열기에 머릿속이 녹진녹진하게 익어 버리는 것 같았다. 잘근 물었던 입술을 핥았다가 다시 포개어 말캉한 입술로 자근자근 눌렀다가, 어쩔 줄 모르고 움찔거리는 서은의 혀를 낚아채는 류태한의 은밀한 온기가.

“미쳤어.”

중얼거리며 서은은 거울 속 넋이 나간 제 모습을 응시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어느 순간 태한의 기억을 어느 하나만 떠올려도 곧 기억은 연쇄 반응처럼 낱낱이 떠올랐다.

팔을 스치며 걸었던 어두운 골목 어딘가.

커다란 손에 거머쥐어졌던 손목과 목덜미 어딘가.

낮게 웃는 그 시선에 홀로 잠 못 이루며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지그시 누르고 있던 어둠 속 어딘가.

서은은 고개를 흔들며 채비나 마저 하자고 생각했다.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따사로운 걸 보니 오늘은 날이 좋으려나 보다. 대충 화장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향수를 뿌리려는 순간, 서은이 다시 멈칫했다.

‘나랑 잘래.’

향이 너무 좋아서 끌렸다는 그의 말이 생각났다.

도자기를 구워 만든 듯한 새하얀 보틀에 신화에 나오는 뱀과 선악과를 연상케 하는 무늬. 호리병 모양의 작은 향수병을 보니 괜히 마음이 심란했다. 언젠가 승원이 여행을 다녀오며 사다 준 향수였다. 이젠 평생에 걸쳐 애용해 온 향수를 뿌릴 때도 그가 생각나다니.

서은의 입가로 기가 찬 웃음이 흩어졌다.

“나 왜 이러냐, 정말.”

오늘은 가게에서 태한과 플라워 수업을 약속한 날이었다. 집 앞에서 그와 입술을 겹친 다음 날, 태한은 아무렇지 않게 전화를 걸어 물었다. 수업을 들을 수 있는 제일 빠른 시간이 언제냐고. 토요일에는 해인의 음악회가 있는 날이었다. 그래서 주중에 금요일 딱 한 자리가 남았다는 말에 그가 고민 없이 퇴근 후에 오겠노라 말했다.

향수병을 만지작거리던 서은은 마음을 달리 먹었다.

무슨 일이야 있겠어?

늘 뿌리던 향수일 뿐인데. 허공에 분사함과 동시에 방 안 가득 싱그럽고 풍부한 꽃향기가 가득 찼다. 향긋한 꽃 냄새는 금세 서은의 머리로, 어깨로,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하루가 다르게 해가 길어졌다. 평일 오후 7시, 여전히 밝은 하늘을 바라보며 여름이 무르익고 있음을 실감한다. 소슬한 거리로 활기가 모여들기 시작한 시간, 서은은 서쪽 하늘 저편으로 희미하게 오렌지빛이 스미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업을 앞두고 준비는 일찌감치 마쳤다. 테이블에 오늘 간단하게 진행할 생화 리스 재료와 컨디셔닝을 마친 꽃을 가지런히 꽃병에 분리해 놓아두고 창가를 응시하고 있을 때 낯익은 인영이 어렸다. 태한이었다. 계단을 두 개씩 성큼성큼 밟아 오른 그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미안합니다. 좀 더 여유롭게 오려고 했는데 너무 촉박하게 도착했네요.”

7시 정각 5분 전. 그는 회사에서 나오자마자 막 달려온 듯한 모습으로 가게를 가로질렀다. 성큼성큼 보폭이 큰 그가 다가설 때마다 햇볕을 잔뜩 머금은 것 같은 바람 냄새가 났다.

“아직 5분이나 남았는걸요.”

“좀 더 일찍 와서 차나 한잔할까 했죠.”

능글맞은 웃음과 함께 태한이 입구에 설치된 간이 세면대에서 손을 닦고 다가왔다.

“식사는 하셨어요?”

“아뇨. 저녁은 가끔 건너뛸 때가 많아서. 서은 씨는요?”

“저도 아직이요. 겉옷 주세요.”

그럼 끝나고 함께 저녁을 먹자고 할까, 생각하며 자연스럽게 그의 겉옷을 받아 드는데 어쩐지 태한이 묘한 얼굴로 응시했다.

“왜요?”

“아닙니다.”

그의 입가로 왜인지 모르게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오늘은 생화 리스를 만들어 볼까 해요.”

“첫 수업인데 난이도가 생각보다 높군요.”

테이블을 한번 슥 둘러본 태한이 생각보다 많은 생화 양에 어깨를 으쓱였다.

“어렵지 않을 거예요. 초보분들도 한 타임 만에 충분히 가능한 작업이거든요. 기본적인 밑 준비는 제가 먼저 해 두었어요.”

서은이 겁내지 말라며 그를 독려했다.

“한 타임이면.”

“두 시간이요.”

“짧을 것 같은데.”

그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재빠르게 소매의 커프스단추를 풀고 셔츠 소매를 둘둘 걷어 올리며 덧붙였다.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셔츠 아래로 갈라져 나온 팔뚝의 핏줄이 그가 움직일 때마다 불끈거렸다. 손등의 힘줄은 또 어떻고.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는데 그가 앉은 것만으로도 테이블이 가득 차는 느낌이다.

서은은 테이블을 가득 차지하고 있는 태한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두근거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웃었다.

“시간은 충분해요. 그럼 시작해 볼까요?”

오늘 만들 생화 리스는 플라워 수업 중에도 인기가 높은 수업이었다. 한 타임만으로도 센터피스나 벽에 걸어 두는 장식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작품을 완성할 수 있다 보니, 문의가 많았다.

평소에는 문의를 받을 때 좋아하는 컬러나 꽃에 대해 묻기도 하지만, 오늘은 태한의 이미지와 어울리는 블루와 퍼플 계열의 꽃들로 준비했다.

간략한 순서와 주의 사항에 대해 설명을 하고, 수업에 사용할 꽃들에 대해 빠르게 알려 주었다.

오늘 수업에 사용할 꽃은 하늘하늘한 꽃잎을 가진 연보라색 스카비오사와 그린 계열의 냉이초와 유칼립투스, 청보라색 델피늄과 보랏빛 수국, 연핑크 버터플라이와 세 가지 종류의 장미였다. 도넛 모양의 플로랄 폼과 기본 재료 그리고 꽃에 대해 빠르게 설명하자 태한이 난감하게 웃었다.

“어차피 말해 줘도 모릅니다. 그냥 하면서 설명해 줘요.”

“우선 유칼립투스부터 꽂아 보시겠어요? 동전 같은 잎사귀가 많이 달린 이게 유칼립투스예요. 이건 많이 보셨죠? 아우트라인을 그린 계열의 식물로 잡아 줘야 하거든요.”

“이렇게요?”

서은의 움직임을 진지하게 살피며 그는 투박한 손으로 오아시스에 초록 식물을 꽂아 넣었다.

“잘하셨어요. 굉장히 소질이 있으시네요!”

고작 이파리 몇 개가 솟은 줄기 하나 꽂은 걸 가지고 뭘 이렇게나. 손바닥을 짝 치며 칭찬하는 들뜬 음성에 태한이 어깨를 으쓱했다.

“다음은 원형의 플로랄 폼을 사 등분 했다고 머릿속으로 생각하면서, 크기가 큰 꽃부터 배치하는 거예요.”

서은이 시범 삼아 가지를 짧게 쳐 낸 수국을 오아시스에 푹 꽂아 넣었다.

“넣을 때는 꽃이 빠지지 않도록 과감하고 단단하게 꽂아 주셔야 해요.”

“이렇게 말입니까?”

“아니, 이 정도 느낌으로.”

곁에서 지켜보던 서은이 태한의 손을 잡고 힘 있게 꽃을 꽂아 넣었다. 푹, 안으로 깔끔하게 파고든 보랏빛 수국이 싱그럽게 흔들렸다.

“그다음 사이사이에 작은 꽃들을 태한 씨가 원하는 대로 배치해 주세요.”

손등을 스치고 간 가느다란 손끝이 차갑고 보들보들했다. 태한의 입가로 미소가 돋아났다.

“리스는 어느 각도에서 봐도 균형감이 느껴져야 하거든요. 원형 안쪽으로는 줄기를 더 짧게 잘라 넣어야 모양이 무너지지 않아요.”

크기가 큰 꽃은 정면에, 사이드에는 작은 꽃들을 채우는 동안 마치 작은 정원이 손안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재미있는 작업 같습니다.”

“그럼요. 꽃을 만지는 게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 일인데요.”

“굉장히 차분해지네요.”

혹여 잘못 다루면 꽃이 다칠까 봐, 잘못 꽂으면 꽃들이 불편하게 부대낄까 봐. 마치 아이 다루듯 조심스러운 손길이 이어졌다.

“하루 종일 이렇게 꽃을 만지고 있으면 무슨 생각이 들어요?”

“좋아요. 그냥 좋다는 생각 말고는 안 드는데.”

“서은 씨를 보면 꽃을 정말 사랑하는 게 느껴져요.”

“음, 아마 제일 힘든 시간에 함께해서일 거예요. 제가 예전에 발레를 관두고 되게 죽어 지낸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는 정말, 내가 죽어 있었다고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는 시간이었어요. 아침에 눈뜰 때, 아니. 아침도 아니었어요. 오후 느지막이 눈을 뜨고 가만히 숨죽여서 살다가, 그렇게 밤새 뜬눈으로 지새우고 세상이 희미하게 밝아지면 잠이 들곤 했거든요.”

“뭐 하면서요?”

“그냥 숨만 쉬었어요. 그때는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생각도 하기 싫은데 뭔가를 할 의지도 당연히 없었죠. 그때 친구 소개로 꽃을 배우게 됐어요.”

완전히 칩거 생활에 익숙해져 있을 무렵, 좁은 집에서 서은을 끌어낸 건 뜻밖에도 승원이었다. 승원은 말없이 서은을 데리고 플랜테리어 전문가인 육송이의 화원에 서은을 내려놓았다.

“친구가 식물이 엄청나게 많은 화원에 데려다주면서 그러더라구요. 죽이든 살리든 네 마음대로 해. 난데없이 무슨 소리야, 하면서 들어갔는데 신기하게 거기 있는 동안은 조금 안정이 됐어요. 그리고 그날 돌아오는 길에 작은 화분을 하나 받아 왔거든요? 선생님이 꽃 한 번만 키워 봐요, 그러면서 초록색 줄기가 작게 솟은 화분을 선물이라고 줬어요.”

“그래서?”

“처음엔 그냥 물도 대충 주고, 볕도 제대로 안 줬어요. 근데 어느 날 되게 좋은 향기가 나는 거예요. 이게 뭐지? 하고 찾아봤더니, 화분 안에서 꽃이 피려고 애쓰고 있더라고요. 그날부터 조금씩 정성을 들였던 것 같아요.”

해가 저물어 가는 느지막한 오후에 알게 되었다. 온몸을 찢고 몸속에 박힌 꽃잎을 세상 위로 밀어 올리는 여린 줄기의 의지를.

살고 싶다.

나는 살고 싶다.

그리하여 꽃을 피우고 싶다.

동서남북으로 찢어진 봉분 같은 틈새로 실낱같은 희망을 밀어 올리며 안간힘을 다하는 그 한 송이에 조금은 다정해지기로 했다.

마른 흙에 물을 적시고 힘겨워 늘어진 줄기에 사랑을 쏟았다. 버려진 시간을 다시 그러모으고, 부서진 나날을 다시 얼기설기 기우기 시작한 어느 봄밤.

“그래서 꽃은 피웠습니까?”

“네, 아주 예쁘게요.”

용기를 뜻하는 노란색 히아신스가 꽃을 피웠다.

“노란색 히아신스였어요. 나를 위해서 너 그렇게 애썼구나. 그러고 나니까 그냥 그 사소한 모든 것들이 소중해 보이더라구요.”

꽃 한 송이가 전한 건 희망이었다.

“그래서 꽃을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했어요.”

다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싶었다. 꿋꿋하게 견디며 가장 아름다운 순간 마지막으로 피었다 지더라도, 다음 꽃을 피울 언젠가를 기다리며 남은 계절을 잘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싶었다.

“제가 너무 수다스럽죠?”

마치 친구를 대하듯 꽃에 대해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담담했다. 태한은 동그란 플로랄 폼에 꽃이 채워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슬쩍 고개를 들어 서은의 표정을 응시했다.

식물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이 그런 뜻이었구나 생각하며 말간 뺨을 응시하는데, 마찬가지로 태한의 작업물에 집중하고 있는 시선이 아주 잠깐 교차했다. 서은이 눈을 반으로 접어 다정하게 웃었다.

“수업하다 보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거든요. 그럼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기도 하고, 그래서 도움이 되기도 해요.”

소매를 걷고 꽃을 만지는 태한의 눈동자가 고민 끝에 날카로워졌다. 푹, 조심스럽고도 과감하게 꽃을 꽂으며 열중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혹여 이전처럼 끈적하게 굴면 어쩌나 하는 생각은 기우였다.

“그런 것 같아요.”

“어, 여기는 조금 더 기울여서.”

서은이 태한의 손을 붙잡아 사이드의 꽃을 꾸욱 밀어 넣곤 빙긋 웃었다.

“영업을 잘하시네.”

“영업이 아니라 레슨인데요.”

서은이 어이없는 웃음을 피식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수업 내내 계속 이렇게 옆에 붙어서 자꾸 건드리는데 집중을 할 수가 있어야지. 남자들도 많이 옵니까?”

“그럼요. 여자 친구 생일이나 기념일에 선물하려고 찾으시곤 하죠.”

무언가 탐탁지 않은 듯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태한이 질문을 바꿨다.

“서은 씨 생일은 언제예요?”

“저요? 저는 7월 11일이요.”

“신기하네. 나는 12일인데.”

반가운 우연이라는 듯 그가 잠시 눈을 맞추고 싱긋 웃었다.

어디로 흐를지 모르는 대화였지만 분위기는 점점 더 편해졌다.

우습게도 운명같이 느껴지는 순간. 그런 게 있다면 이런 것과 근접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아주 조금 마음을 간질였던 것도 같다.

“7월 12일 꽃말 아세요?”

태한이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곁에 선 서은을 바라보고선 모른다고 했다.

“참을 수 없어.”

뜻밖의 의미에 태한의 눈썹이 슬며시 일그러졌다.

“딱 류태한 씨 같죠.”

“그럼 7월 11일은 뭔데요?”

“나는 당신의 것.”

일순 정적이 찾아왔다. 익히 알아 왔던 정보를 건넨 것뿐인데 졸지에 고백을 해 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피식, 태한의 입가가 기울어졌다. 조금 전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구겨졌던 눈썹이 다정한 눈매를 따라 미끄러져 내려왔다.

반드시 그러길 바라는 눈동자가 너무도 선명해서.

“좋은 날에 태어났네.”

가슴이 뛰었다.

혼잣말 같은 나직한 목소리가 마음을 뒤흔들었다. 배 속이 간질간질 부드럽게 일렁이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동당거리는 심장쯤은 무시했다.

그러나 애써 표정을 정돈해도 서은의 반응을 하나하나 살피는 예리한 시선이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서은이 제게 고정된 태한의 뺨을 양손으로 잡아 그의 시선을 리스 위로 떨어뜨려 놓았다.

“집중하세요, 회원님.”

그리곤 곧바로 서툰 손길을 대신해 서은이 꽃 한 송이를 꽂아 넣었다.

자꾸만 가슴이 두근거렸다. 태한은 기분 좋은 감정을 숨기지도 않고 흡족하게 웃었다. 의미심장하게 기울어지는 입꼬리를 보면서 발뒤꿈치가 간질거리는 것을 억지로 참아 냈다.

“선생님을 따라가려면 한참 먼 것 같은데. 금요일마다 올까요?”

“…….”

서은은 능글맞게 수작을 부리는 태한을 가늘게 흘겼다. 마주친 시선이 다시금 기울어진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다만 그렇게.

서로를 보는 시선 사이로 시간이 느릿하게 흘러갔다.

겨우 이 정도로도 붉어지는 솔직한 여자. 그런 서은을 보며 태한은 생각했다. 서은을 만나고부터 주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지나는 길목에 늘어선 나무와 잎사귀 위로 피어난 꽃을 보면 어김없이 당신이 생각난다고.

흔들리는 꽃잎을 보며 생각했다.

당신도 어서 내게 그렇게 흔들려 주기를.

쏟아지는 빗속에서 입술을 나누었던 순간을 암묵적으로 피하는 서은을 떠올리느라 겨우 며칠이 영겁처럼 더디게 느껴졌다고.

서은은 태한이 행동하면 곧바로 반응하는 여자였다. 솔직한 감정은 솔직한 표정에 모두 다 드러난다. 그래서 어렵지 않았다. 만일 진심을 다해 밀어냈더라면 물러섰겠지만, 얽히는 혀끝에 말려드는 주서은의 말캉했던 혀. 그녀의 뜨거운 입 속에서 어설프게 엉겨 붙던 그 순간의 아찔함이. 어쩔 줄 모르고 벌어진 입술이 끝내 그의 입술을 물어 당긴 순간, 실은 그대로 서은을 눕히고 싶었다.

몇 시간도 몇십 분도 아닌 아주 짧은 뒤섞임. 생각만으로도 하체에 피가 몰렸다. 태한은 저도 모르게 거칠어진 숨을 얕게 내쉬었다.

“태한 씨.”

“서은 씨.”

동시에 서로를 부르고 눈이 마주쳤다.

“먼저 말씀하세요.”

“내일 뭐 합니까?”

그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던지, 서은이 금세 곤란해진 얼굴로 하하, 어색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왜 웃어요?”

“계산기에 과부하가 걸려서요.”

열심히 계산 중이어야 마땅할 계산기가 과부하라니. 그건 주서은도 내내 태한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태한이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었다.

“어디까지 계산했는데요.”

“음.”

서은은 잠시 뜸을 들이며 생각했다.

어디까지.

그를 만나서 불이 붙고, 연애를 하고, 그러다 결혼을 하는 과정. 거기까지 그려 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아버지는 어떻게 되는 건지, 허락이 떨어지긴 할까. 마지막은 불투명하고 불분명했다.

좋은 마음만으로 관계를 이어 나갈 수 없다는 건 이미 경험해 본 일이었다. 일방적인 선택으로는 결코 관계가 오래갈 수 없다는 걸. 현실을 알고 있는 얼굴이 차츰 차분해지자, 태한의 시선이 불안하게 깊어졌다.

“더는 무모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요.”

서은은 태한이 무어라 덧붙이기도 전에 다른 질문으로 그의 말을 막았다.

“류태한 씨 되게 능숙한 거 아시죠?”

“내가?”

그럴 리 없단 듯 가늘게 눈을 뜨고 웃던 그가 조금은 기가 찬 얼굴로 물었다.

“어디가 어떻게, 뭐가 능숙한데요?”

“경험이 많아 보여요.”

“경험?”

여자 경험을 뜻하는 걸까. 애매해진 얼굴을 보며 서은이 태한의 리스에서 비죽 솟아난 가지 하나를 놓치지 않고 다시 꽂아 넣었다. 그 순간 그의 손가락이 서은의 손가락을 얽었다.

“이런 거 말이죠.”

그의 손에 걸린 손가락을 빼내려는 순간, 태한이 조금 더 빨랐다. 그는 벗어나려는 서은을 더 빤히 바라보면서 느긋하게 웃었다.

움직일수록 손을 쥐는 힘이 거세질 거다. 손에 닿는 면적은 더 넓어질 거고, 그렇게 품 안까지 당겨 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점차 서은의 손가락을 건드리는 면적이 넓어진다. 마디를 긁고 손등을 긁다가 이렇게 한순간에 확.

손을 거머쥐며 손바닥 안쪽을 문지르는 엄지손가락이 뜨거웠다. 혹여나 서은의 기분이 상할까 눈치를 살피면서도 뜻대로 하고 싶은 건 하고 마는 그를 보며, 서은은 아득한 감정에 빠지는 것 같았다. 그냥 이렇게 휩쓸려 가도 상관없을 것 같은 그런 기분. 헤어나고 싶지 않은 듯한 그런 모호한 감정을 삼키며 서은이 정중하게 그의 손을 밀어냈다.

“헷갈리게 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빨리 답을 찾아야지.”

조금만 더 시간을 끌었다간 넘어갈 것 같아서.

서은은 시선을 외면했다.

마음속 깊은 곳이 이미 복잡하게 엉켰지만, 복잡해지지 않으려 애썼다.

“왜 이렇게 귀찮게 하나 싶죠?”

“적당히 재미있어서 그런 거면 선을 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나긋하게 웃으며 하는 소리에 뼈가 있었다. 태한은 허리를 곧게 세우고 곁에 선 서은을 가만히 응시했다.

“혹시 그날 기분 나빴습니까?”

언급하지 않았으면 했던 날을 언급해 버린 태한은 진중했다. 그러나 이렇게 거절 의사를 내비쳐도 전혀 타격받지 않은 듯이 단단하기만 하다.

그런 점들이 두려워서. 자꾸만 다가오는 당신이 마음에 들어오는 게 두려워서. 생각하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당신을 벌써 좋아하게 된 것 같아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끌림을 적당한 선에서 끊어 내야 한다는 게 서은을 혼란하게 만들었다.

아직 시작은 하지 않았으니, 이쯤에서 멈춘다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안일하게 하면서.

“그건 아니에요.”

반은 솔직하고, 반은 또 감춘 채로 서은이 대답했다.

“그럼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물어봐도 됩니까?”

이제까지와 다르게 태한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빠졌다. 짓궂게 능글거리던 표정이 시간이 갈수록 진지해진다. 흔들림 없는 그의 시선에 서은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흔들지 말라고 말하며 흔들리던 눈동자가 그때처럼 단숨에 혼란해졌다. 금방이라도 넘어올 것 같은 얼굴을 하고 그대로 달아나던.

그 모습이 확연히 태한의 눈으로 파고들었다.

“류태한 씨 대단한 분이에요.”

“난 그냥 평범한 사람입니다.”

“적어도 저한테는 그래요.”

부담스럽다는 말을 정중하게 돌려 말하는 서은의 뜻을 단번에 알아들은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만남에 경중을 둘 수는 없지만, 맺을 수 있는 관계와 맺지 않아야 할 관계. 두 가지는 분명히 다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너가의 후계를 이끌어 갈 사람에게 어울리는 상대가 최소한 어느 정도인지는 상식선에서 인지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러니 서은은 지금 태한이 자신을 적당한 유희 정도로 여긴다고 생각하고 선을 긋는 것이다. 계산을 하겠다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였다는 걸 깨달았다.

“한순간 즐겁자고 어리석은 선택은 하고 싶지 않아요. 조금 더 멀리 내다보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짐작이 가죠. 그런 끝이 정해져 있는 만남을 굳이 시작하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그런 말을 하는 와중에도 단정한 얼굴이 자꾸 눈에 밟혀서.

맥없이 웃음을 흘린 태한은 회유도, 무엇도 아닌 말을 툭 뱉었다.

“근데 어떡하죠? 나는 무모한데.”

느리게 깜빡이는 서은의 눈동자로 갈등 같은 게 스쳐 지났다.

“그렇다고 주서은 씨를 뭘 어떻게 해 보려고 여기서 이렇게 노닥거리고 있는 건 아니고.”

그럴 시간도 없는데 일부러 시간을 내서 온 건 그저 한 번 더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서은과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워서. 함께 있다 보면 웃을 일이 많아서. 그런 일련의 것들이 짤막하게나마 좋은 기억을 남겼고, 좋은 기억은 좋은 인상을 남겼다.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은, 그냥 그런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서은은 다르다. 이미 머릿속으로 그와의 만남 이후 벌어질 현실적인 문제들까지 생각해 본 모양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생각이 깊은 여자였다.

가볍게 만나건 진지하게 교제를 하건, 결국 헤어지면 지저분한 스캔들로 남게 될 것이고 그건 당사자뿐만이 아니라 주변에 엮인 사람들의 삶까지도 얼룩질 것이라는 걸.

하지만 태한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래서 내일 뭐 합니까?”

궁금한 건 단지 그뿐이라는 듯, 개의치 않는 물음에 서은이 희미하게 한숨을 쉬었다. 얕게 헛웃음을 흘렸던 것도 같다.

“약속이 있어요.”

“무슨 약속.”

“동생 연주회요.”

“아. 반도네온 한다는 동생.”

주서은의 동생 주해인이 이끄는 밴드와 함께 여는 반도네온 연주회. 티켓은 이미 주형국을 통해 며칠 전 전해 받았다. 이미 일정을 꿰고 있는 태한을 조금 놀란 얼굴로 응시하고 있을 때, 가게 문이 열리며 매달린 풍경이 경쾌한 소리를 냈다.

“어서 오세….”

얼른 태한에게서 한 발짝 떨어진 서은이 입구로 들어서는 손님을 향해 인사를 하다 말고 그대로 굳어졌다.

한영웅이었다.

***

깨끗하게 치워진 테이블 위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가게로 한번 찾아가겠다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이려니 했다. 그런데 정말 가게로 온 영웅을 보며 서은은 가슴 속이 냉정해지는 것을 느꼈다.

“무슨 일이야?”

갑작스러운 영웅의 등장에 태한과의 수업은 부득이하게 서둘러 정리해야 했다.

미안한데 조금만 빨리 끝내도 될까요, 라는 물음에 태한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영웅의 존재를 신경 쓰여 했다. 이상할 정도로 묵묵한 시선에도 영웅은 굳이 권하지도 않은 자리를 잡고 앉아 서은이 끝나기만을 꿋꿋하게 기다렸다.

“오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무턱대고 오는 거 민폐야.”

“사과하려고 왔어. 지난번에 주영이 결혼식에서 보고 계속 마음에 걸리더라고.”

영웅이 머리를 쓸어 올리고 얕게 한숨을 흘리며 말했다.

“그땐 내가 너무 어렸어. 그래서 너한테 상처를 주고도 그게 내 잘못이 아니었다고, 그건 그냥 어쩔 수 없는 사고였다고 우겨 왔던 것 같아.”

“그래서.”

차분하게 이야기를 듣는 서은은 고요했다. 분노도, 미련도, 후회도 그 어떤 감정도 비치지 않고서.

“내가 좋은 일을 앞두고 보니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너한테 그때 분명 잘못했던 거니까. 잘못한 건 인정하고 사과부터 해야겠다, 그런 생각.”

“용서를 구하러 온 거라면 이미 너무 늦었어. 나는 이제 너한테 어떤 감정도 없고, 너와는 아무 관련도 없어.”

“그래, 알아. 아는데 이 말은 하고 싶었어.”

서은이 피식, 냉소했다.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사람 찾아와서 수년도 지난 일을 들먹이며 억지 사과를 하는 이유가 뭘까.

“네 마음 편하자고 구하는 용서야.”

“나는….”

“그냥 모른 척 살지. 그게 피차 좋았을 텐데.”

“네가 그러고 산다니까 자꾸 생각이 나서.”

생각만 하지.

“사과하고 싶었어.”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는 그의 눈가로 은연중에 연민이 떠올랐다. 동정, 안타까움. 그래서 왔구나. 그냥 단지, 말 한마디에 죄책감을 덜어 내고 싶었을 뿐이구나.

“늦었어, 영웅아. 그리고 다 잊었고.”

서은이 흔들리지 않는 눈을 들고 분명하게 말했다.

“네 눈에는 내가 불쌍해 보였나 보네.”

“너 누구보다 발레 사랑했잖아. 나 때문에 실패했고.”

그래서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서려고 했고, 들어가지도 않는 발을 토슈즈에 구겨 넣으며 울기도 했다. 이제 다시는 무대에 서기는커녕 무용을 할 수도 없을 거라는 주치의의 말을 듣고도 포기하지 않던 꿈이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공연을 보러 찾아가고, 언젠가는 나도 다시 뛸 수 있지 않을까. 열망에 눈이 멀어 시들어 가는 동안에도 손에서 놓지 못하던 순간 속에서 서은을 망치는 건 욕심이었다.

받아들이기까지 쉽지 않았고, 받아들이고도 다시 사는 건 더 어려웠다. 그럼에도 마음을 다스리며 텅 빈 가슴에 다시 물을 주기 시작했다.

갈아엎은 토양에 씨를 뿌리고 해를 내리며 더디게 자라는 생명이 움틀 때까지. 단단해진 시간이었다. 그러니 이건 실패한 인생이라 할 수 없었다. 그 누구도 서은의 삶을 그렇게 단정 지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어금니를 꽉 물고 깊게 숨을 내뱉은 서은이 다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은 다른 걸 더 사랑해. 살아 보니 그렇더라. 내가 더 살아 보지 않아서 몰랐던 거지, 세상에는 하고 싶은 일이 무궁무진해. 선택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고, 그건 오로지 내 의지로 결정되는 문제야.”

그러니 뜻밖의 사정으로 진로를 변경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이제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지금 사는 이 삶이 충분히 즐겁고 행복하다고.

“이제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그래도, 미안했다. 그때.”

“다시 보는 일 없었으면 좋겠어.”

끝이 좋아야 좋다는 건 거짓말이다. 끝이 좋으려면 누군가 하나는 손해를 봐야 하므로.

좋지 않아도 괜찮은, 상처로 끝인 것들을 이젠 모조리 떠나보내기로 했다.

오늘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됐을지라도 마음은 후련했다.

다만 이로 인해 고뇌할 다른 얼굴이 떠올랐을 뿐이다.

“내일, 거기서 봅시다.”

복잡한 마음 위로 둥둥 떠다니는 음성을 털어 내고 서은은 쉬고 있던 탱고 수업에 다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

너른 체육관으로 펑, 펑. 매트 위로 둔탁하게 패대기쳐지는 소리와 함께 짐승의 포효 같은 우악스런 괴성이 울려 퍼졌다.

“일어나.”

단조로운 음성과 함께 손을 내민 건 새벽에도 빈틈없이 정갈한 태한이었다. 그런 태한의 손을 붙잡고 비척이며 일어서는 이는 밑으로 하나 있는 동생 태조였다.

“죽여 버릴 거야!”

“그래. 해 봐.”

씩씩거리며 여과 없이 분노를 드러내는 태조가 분을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곧 기민한 움직임에 커다란 덩치가 다시금 허공으로 넘어갔다. 힘으로 친다면 아직 혈기가 왕성하고 팔팔한 20대 초반인 동생이 우세할지 모르겠으나, 운동은 힘이 아닌 기술로 하는 것이다. 더구나 이런 대련은 더더욱.

학창 시절 유도 선수를 지냈어도, 그놈의 더러운 성질머리를 고치지 못해 끝내 금메달은 손에 쥐지 못했던 동생을 바라보는 시선이 차기만 하다.

태한은 술 냄새가 진동하는 동생을 자비 없이 넘겨 버린 손으로 다시 그를 일으켜 세웠다. 술기운에 어지러운 와중에도 씩씩거리는 기세가 활화산 같았다.

“대체 무슨 일인데 아침부터 이러는 건데!”

태조는 대답 대신 그저 고요히 손을 내밀어 덤비라 자세를 잡는 태한을 짜증스럽게 응시하다, 곧 죽일 기세로 달려들었다. 새벽부터 사람을 깨워 체육관으로 데려오더니 벌써 두 시간째 이 짓거리였다.

태조가 그의 단단한 허리를 손으로 움켜쥐고 안쪽에서 다리를 걸었다. 그러나 그대로 밀려드는 다리를 피해 순식간에 태한이 그를 엎어 쳤다. 커다란 덩치가 공중을 날아 바닥으로 쿵 떨어졌다.

“씨발!”

분노 섞인 고함이 쩌렁쩌렁하게 체육관 안을 울렸다.

“그만하자고. 술 먹다 새벽에 들어온 게 이렇게까지 할 일이야? 모처럼 친구들 만나서 놀 수도 있지, 씹.”

“모처럼은 아니지. 너 이번 주에 처음 들어왔잖아. 오늘 토요일이야.”

일주일 중, 월, 화, 수, 목, 금요일까지 어디서 뭘 하고 노는지도 모를 정도로 요란하게 지내는 태조는 그래도 일말의 양심이라는 건 아직 티끌만큼은 남았는지, 아니면 주말을 맞은 기념으로 기분이 그런 건지 밤새 퍼마시고 술이 떡이 되어 귀가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아마도 태조는 밤새 어디서 놀다 들어온, 올바르지 못한 제 행실을 타이르는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잘생긴 얼굴로 짜증이 덕지덕지 붙었다. 한 번만 더 하면 그땐 진심으로 죽여 버린다고 덤비던 어린 날이 생각나 태한이 픽 웃음을 터트렸다.

“뭘 웃어. 긁냐?”

도발하듯 일어선 태조가 흐트러진 도복을 욱여넣으며 이를 갈았다.

“얌전히 처박혀 있으니까 내가 동네북처럼 좆같이 보이지? 이놈의 집구석, 지긋지긋해서 빨리 떠 버려야지.”

“어차피 출국 얼마 안 남았잖아.”

“그러니까. 일분일초도 아껴서 놀아야 되는 금쪽같은 내 시간을 여기서 이렇게, 형한테 몸빵이나 해 주고 있어야 되냐고.”

“서로 건강해지고 좋지.”

지랄, 짓씹어 뱉는 얼굴이 살벌하게 번득였다.

“어디서 뺨 맞고 죽일 것처럼 애먼 사람한테 화풀이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그가 지나치게 고요한 태한을 가늠하며 말했다.

“거울 좀 봐. 그게 사람 새끼 얼굴이냐?”

불만 가득한 불평이 귓가를 스치자 그제야 태한은 고개를 돌려 유리창에 비친 제 얼굴을 확인했다. 사람을 죽일 것처럼 화풀이…. 그랬던가. 서늘한 얼굴 속 새카만 눈동자는 동생의 말대로 날카로운 적의가 또렷했다.

왜.

이런 얼굴이었을까.

생각 끝에 다시금 세븐 어 클락을 방문했던 낯선 남자가 떠올랐다. 그를 보고 당황하던 서은과 이윽고 서둘러 수업을 종료하면서도 불편함을 감추지 못하던 그 순간의 모든 장면들이 되살아났다.

무슨 일일까. 가늠하는 동안에도 서은을 향한 남자의 시선은 마치 오랫동안 알아 온 것처럼 익숙하기만 해 신경에 거슬렸다. 동시에 으득, 다문 잇속으로 이가 갈렸다.

그러나 곧 길게 숨을 골라 내며 싸늘한 표정을 정돈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형 요즘 여자 만나?”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땀으로 흥건했다. 턱 끝으로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을 아무렇게나 슥 닦아 낸 태조가 말없이 묵묵한 태한을 가만히 응시했다.

훈련이나 다름없는 고된 운동에 전신이 벌겋게 달아오른 건 마찬가진데, 지나치게 고요한 태한이 평소와는 많이 달랐다.

그러고 보면 태한이 이상해진 건 한 달 전쯤, 그룹의 창립 기념 행사를 지낸 이후부터였다. 갑자기 퇴근길에 꽃을 들고 와서 안겨 주질 않나, 꽃 이름이 뭔지 아냐며 좆밥인지 뭔지 중얼거리며 피식 웃던 게 생각난다.

어머니인 서정주와 조부인 회장님이야 태한의 행동에 감동하며 역시 믿을 건 그밖에 없다 칭찬했지만 태조는 달랐다. 여름이면 정원 뒤편에 설치해 둔 해먹에 누워 유유히 여유를 즐기며 빈둥거리는 태조에게까지 꽃다발을 건네 미친 건가 싶었다.

“난 형이 하도 안 하던 짓을 하길래 일이 많아서 돌아 버린 건가 했지. 어떤 여잔데?”

“꽃 같은 여자.”

“좆같은 여자?”

서늘한 시선이 허공을 갈라 와 꽂혔다. 슬쩍 이를 사리문 표정이 금세 살벌해졌다. 인상을 쓴 태한을 보며 태조가 장난스럽게 키득거렸다.

“품위를 지켜야지, 태조야. 상스럽게 굴지 말고.”

“품위 운운할 거면 밥이나 처먹이고 해. 아침부터 씨발, 이게 무슨 개고생이야. 배고파 죽겠어. 나가자.”

일부러 더 긁으려 역정을 내는 태조를 보며 태한이 매무새를 정돈했다.

“먼저 가서 먹어.”

“뭐 하려고?”

“난 운동 좀 더 하고.”

운동을 더 한다고? 얼굴을 일그러뜨린 태조가 기함했다.

“맨날 일 많아서 시간 없다고 새벽에나 들어오면서 무슨 운동을 더 한다고? 그럴 시간에 잠이나 자.”

그랬다. 일이 넘쳐서 없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운동을 하고, 오후 7시쯤이면 꽃 가게에 일부러 들러 꽃을 사고. 그런 뒤에는 다시 회사로 돌아가 밤새 일을 하는 것으로 모자라, 주말까지도 일을 싸 들고 와 온종일 일만 하던 사람이었다.

목적한 바를 달성할 때까지는 물러서지 않는 태한의 성격을 알기에 그러려니 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하다 생각했다. 일에 미치지 않고서야 그렇게까지 몸을 갈 이유가 있나. 혹여 학업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면 저 수순을 밟아야 하는 건가 싶어, 이대로 미국에 눌러앉을까. 태조를 고민까지 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런데 그런 혹사도 모자라 운동을 더 한다니.

“오후에 중요한 약속이 있어. 몸 좀 더 만들어야 돼.”

벌어진 유도복을 가다듬는 몸은 끔찍할 정도로 완벽했다. 육안으로도 굴곡이 분명한 단단한 몸이었다.

“괴물.”

태조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다른 사람은 다 제쳐도 류태한은 안 되겠다 생각했다.

“먼저 들어간다.”

건강하고 지독한 삶을 응원하듯 격려하는 척 태한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다 움켜쥔 순간이었다. 막판에 한 번 넘겨 보려 기술을 거는 순간, 태한이 또다시 순식간에 동생을 허공에 날렸다.

“아, 씹. 한 번을 안 져 주네.”

“어림없지.”

그가 손등으로 흐르는 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어림없다.

그렇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씩씩대며 멀어져 가는 동생의 발걸음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을 무렵, 그가 바닥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눈부시게 조명을 밝힌 체육관 천장에서 시야 가득 쏟아져 들어오는 빛무리. 눈앞이 하얗게 바래고, 동시에 머릿속도 새하얗게 탈색되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순간에도 머릿속에 선명히 떠오르는 얼굴 하나.

주서은.

끌리면서도 주저하고, 선을 그으면서도 동요하는 그 여자를 오늘은 어떻게든 넘어오게 만들겠노라고.

거절당하는 건 계산에 없듯 적당히 물러서는 것도 계산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오늘은 서은을 작정하고 당겨 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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