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저녁 식사 시간을 지날 즈음 와인 바에 서서히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는가 싶더니, 한산했던 바는 어느덧 빈틈없이 메워졌다.
저녁을 거르고 도현과 함께 음주를 시작한 지 얼마나 흘렀을까. 술기운이 알딸딸하게 오른 상태로 서은은 완전히 동나 버린 와인병을 멍하니 응시했다. 이곳에 들어선 이후로 벌써 두 병째였다. 겨우 그 정도에 인사불성이 되진 않았지만, 얼굴이 시뻘게져 엉엉 울었다 푸념했다 반복하는 도현은 안주 접시 앞에 엎어져 끙끙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도현아, 괜찮아?”
“그럼요. 근데요 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지 않아요?”
파묻었던 고개를 든 도현의 눈에 닭똥 같은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어떻게, 어떻게에! 그럴 수 있냐고오. 네에? 쌤은, 이해돼요? 아니이. 어떻게에, 나를, 엉? 내가 얼마나 세아한테 잘했는데. 안 그래여, 쌤?”
서은은 팔짱을 끼고 짭조름한 프레첼 조각 따위를 입에 밀어 넣으며 묵묵히 도현의 이야기를 들었다. 벌써 두 시간째 녹음된 음성 파일을 재생하듯 같은 이야기를 반복 중이었다.
도현에게서 연락이 온 건 점심이 지나서였다. 물을 잔뜩 먹은 솜 같은 목소리로 축 늘어져서 ‘쌤, 술 사 주기로 한 거 오늘 사 주시면 안 돼요?’ 하더니, 도현은 기어이 수화기를 붙들고 꺼이꺼이 울었다.
한 번도 그런 적 없는 도현의 울음에 오늘은 가게 문을 일찍 닫고 근방의 와인 바에서 도현을 만났다. 그러나 술판을 벌인 지 30분도 채 되지 않아, 도현은 가슴이 탄다며 와인으로 병나발 불고 짐승으로 탈피했다.
“쌔앰. 내가요. 우리 세아한테 다 해 줘써요. 못 해 준 게 없어. 사 달라는 거 다 사 주고, 해 달라는 거 다 해 주고, 오죽하면 내가 여기, 어? 여기 세아 이름도 문신으로 새겼다구요.”
도현이 셔츠 단추를 주섬주섬 풀어 왼쪽 심장 부근에 하트까지 예쁘게 박아 넣은 이니셜 타투를 보여 주었다.
“왜 그랬어.”
“사랑이 원래 그런 거 아니에요? 사랑하면 세상 좋은 건 다 해 주고 싶잖아요. 쌤은 안 그래요?”
“어. 나는 안 그래.”
건조한 대답에 도현이 울상을 지으며 푸우, 하고 야유했다.
“여자들은 원래 그래요? 원래 그렇게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에, 이렇게 사람을… 어? 등신같이 만드냐고.”
그건 네 사랑이 아직 너무 새순같이 연하기만 해서 그런 거라고. 서은은 대답 대신 와인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대학에 입학해 처음으로 사귀게 된 동갑내기 여자 친구에게 버림을 받았으니, 첫 번째 연애에 첫 번째 실연을 당한 상심이 얼마나 클지 이해가 되었다. 세상을 잃은 듯 슬퍼하는 도현을 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진짜 그래요. 총 맞은 거 같아. 가슴에 구멍이 뻥 난 거 같다구요.”
“너 아직 미필이잖아.”
군대도 안 간 게, 총도 잡아 본 적 없는 주제에 나라 잃은 백성처럼 우는 모습이 가엽고 귀엽고 안타까웠다.
“시간 지나면 다 괜찮아져.”
“다 짰냐고오. 왜 다 그 말만 하냐고오.”
“그런 게 사랑이야.”
서은은 고개를 흔들며 푸딩처럼 흘러내려 엎드리는 도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도현아. 이제 그만 일어나자. 더 마시면 나 너 집에 못 보내.”
“보내지 마. 오늘 같이 있어요.”
“죽을래?”
제가 무슨 말을 하는 줄도 모르고 아무 말이나 횡설수설 뱉어 내는 도현을 보며 서은이 나직한 한숨을 뱉었다. 벌써 시간이 9시 반이었다. 평소라면 가게 문을 닫을 시간이다. 서은은 시계를 확인하고 도현의 가방을 챙겨 재촉했다.
“일어나. 택시 태워서 보내 줄게. 잠은 집에 가서 자.”
“잠깐만요, 쌤. 한 잔만. 아니야. 한 병. 한 병만 더 해요. 응?”
때마침 도현의 전화가 울렸다.
어마마마
비틀거리는 도현을 챙겨 일어서며 서은이 대신 전화를 받았다.
“네, 어머니. 안녕하세요. 저 주서은입니다. 예, 오랜만이에요.”
도현의 어머니에게 집으로 무사히 귀가시키겠노라 약속을 하며 서은은 전화를 끊었다.
“쌤, 쌤은 사랑이 뭔지 알아요?”
“몰라.”
“그럼 사랑이 뭔지 알면 꼭 나한테 전화하기예요. 네?”
“야, 똑바로 걷기나 좀 해 봐.”
술 취한 성인 남자를 부축해 걷는 건 상상을 초월했다. 서은은 업다시피 몸에 걸친 도현에게 끌려가듯 밖으로 나와 미리 불러 둔 택시에 도현을 욱여넣었다.
“기사님, 대치동 리버 팰리스까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쌤, 전화해요오! 쌔에에엠! 사랑해!”
끝까지 진상을 부리며 사라진 도현을 보내고 나니 기운이 쭉 빠졌다. 식은땀에 등이 흠뻑 젖을 정도였다. 서은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닦아 냈다.
발레를 그만두고 상경대에 진학해 과외 생활을 하며 용돈을 벌던 시절, 희숙에게 소개받아 시작한 아르바이트 자리에서 만나게 된 도현이었다. 희숙과 언니 동생 사이인 정란의 아들로, 그렇게 시작한 연은 결국 도현을 같은 학교 후배로 만들고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헤어진 게 뭐라고.”
나라를 잃은 것처럼 술에 몸을 절여 가며 슬퍼하는 도현을 보니 아직 어리긴 어리다 싶었다.
“하아.”
진땀을 뺐더니 술이 다 깼다. 서은은 서늘하게 목덜미를 휘감아 오는 바람을 등진 채로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나는?”
그때 그 시절의 나는 어땠었나, 반추하고 있는데 왜 갑자기 류태한이 생각나는 건데.
“그럼 한번 재 봐요.”
자신만만하게 권하듯 말하던 그 얼굴과 목소리가 선명하게 뇌리를 그었다. 웃기는 일이었다.
“취했냐, 주서은.”
그와 충동적으로 술자리를 가진 뒤로 불쑥 두서없이 치미는 기억이었다. 세수를 할 때도, 꽃을 만질 때도, 잠깐의 여유가 생겨 커피를 한잔할 때도 류태한이 뱉었던 플러팅 같은 말들은 일상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비죽 솟아나 난감하게 만들었다.
“아니야. 아니야.”
서은은 고개를 흔들었다. 떠오르면 멍하니 생각에 잠기게 만드는 사람이었지만 이제껏 그가 던진 질문에 대한 결론이 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게다가 연락도 없지.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류태한 상무님
정직하게 저장된 이름이 휴대 전화 액정에 뜨자, 서은은 흠칫 놀랬다.
호랑이야, 뭐야.
서은은 잠시 액정에 뜬 이름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주영의 결혼식 날 함께 술을 마신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날 태한과 마지막 술 한 병을 모두 비워 내고 식당을 나섰을 때 밖은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먼저 식당을 나선 서은은 처마 아래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두 시간 남짓 식사가 이어지는 동안 대화는 막힘없이 이어졌고,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실은 벌주를 마시듯 술을 넘겨야 할 정도로 곤란했던 순간도 많았던 시간. 적당히 기분이 좋을 정도로 취기가 올랐고, 마음은 조금 느슨해졌다. 그러나 양보는 없다고 말하는 류태한의 마지막 말은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선명하게 남았다.
“마음에 들어서.”
“이렇게는 물러설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속이 후끈하게 달궈졌다. 흔들림 없이 건너오는 시선이 너무 깊었다. 연애에 관해선 헤플지 모르겠다는 속단은 어느새 희미해지고, 정돈되지 않은 머릿속에서 쓸데없는 생각만이 둥둥 떠다녔다. 서은은 후, 하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입술 사이로 흩어지는 숨에 열기가 가득했다.
타닥타닥.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위로 자갈돌 밟히는 소리가 섞여 들었다.
“데려다줄게요.”
계산을 마치고 나온 태한이 금세 곁으로 다가섰다.
“택시 타고 가면 돼요.”
“그렇게 보내기 싫어서 그럽니다.”
지갑을 주머니에 욱여넣은 그가 시선을 내려 공손히 인사하는 서은을 바라보았다. 연한 살구색 원피스 차림에 한 손에는 만개한 부케를 들고, 열기가 돌아 붉어진 얼굴로 물끄러미 응시하는 표정이 티가 나게 굳는다. 잠시 시선이 섞이는 동안 태연하려 애쓰는 말간 눈동자가 흔들리고, 빨갛게 익은 뺨이 떨리고…. 그게 뭐라고 또 태한의 마음 약한 부분을 건드린 듯했다.
그리하여 그의 차를 얻어 타고 오는 내내 얼마나 긴장했나. 태한은 차에서 내리는 서은의 손에 우산을 쥐여 주었다.
“가져가요.”
“집까지 금방이라 뛰어가면 돼요.”
“그러다 넘어져서 무릎이라도 까질까 봐 그럽니다.”
설마 그렇게 추한 꼴을 보이겠냐고, 속으로 빈정거리며 우산을 받아 들었다. 곱게 쓴 우산은 그가 다시 가게로 찾아오면 전할 생각으로 가게에 둔 지 일주일이었다.
“우산 언제 돌려 드릴까요?”
- 제가 가지러 가겠습니다. 오늘은 일이 있어서 안 되겠고, 연락드리죠.
그리고 며칠간 연락이 없었다.
서은은 멍하니 액정을 바라보다 전화를 받았다.
“네.”
- 류태한입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듣기 좋은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 지금 가게 앞인데, 문이 닫혀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네?”
- 우산 찾아가라셔서 왔는데, 다음에 다시 올까요?
정중한 물음에 서은이 한숨 같은 웃음을 나지막하게 터트렸다.
“잠깐 앞에 나왔어요. 금방 갈게요.”
***
한동안 정신없이 회사에 처박혀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도 모르고 지낸 게 일주일이었다. 부서가 바뀌고 책임자로서 진행하는 면세 사업권 확보에 열을 올리다 보니, 입찰 서류 제출을 앞두고 부서 전원이 촉각을 곤두세운 채 마지막까지 정신없었다.
평소라면 저녁에 잠깐 시간을 내어 7시쯤 서은의 가게에서 꽃 한 다발을 사서 복귀했을 테지만, 당장 제출일이 다가오자 도저히 짬이 나지 않았다. 어제까지는 꼬박 사흘을 옷만 갈아입고 나와 일만 했다.
먹는 것도 대충 샌드위치 따위로 때워 가며 일을 하던 차라, 마무리 작업이 완료된 오늘까지는 정말이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모든 에너지를 쏟아 내고 회사를 나섰을 때, 발길이 무작정 서은의 가게로 닿았다.
회사를 나선 시각이 8시 반쯤이고, 평소엔 9시가 넘어 가게 문을 닫으니 오늘은 잠깐 얼굴이라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한 서은의 가게는 문이 닫혀 있었다.
불 꺼진 세븐 어 클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허탈함을 감추지 못해 웃음이 나왔다.
제정신인 거냐.
그렇게 힘들게 일을 하고 제일 먼저 발이 닿은 게 이곳이라는 게, 주인 없는 가게 앞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게, 저답지 않아 웃음이 나왔다.
오후 10시를 향해 가는 시간. 출퇴근은 거의 칼같은 여자이니, 이미 집에 돌아가 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는 꿀 같은 휴식을 방해해선 안 된다고 마음을 억누르면서도 결국 서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욕심이었다. 무슨 명분을 붙여서라도 보고 싶은 욕심.
그때 거리로 진입한 택시가 부드럽게 밀려와 세븐 어 클락 앞에 멈춰 섰다. 택시에서 내린 서은이 태한을 보고 서둘러 키를 찾았다.
“죄송해요. 오늘 오실 줄 몰라서.”
“원래 9시까지는 영업하지 않습니까?”
“수요일은 원래 좀 일찍 닫아요.”
서은은 금방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 우산을 가지고 나왔다.
“여기요. 그날 덕분에 잘 썼습니다. 오실까 봐 계속 가게에 뒀는데….”
“바빴습니다.”
“네.”
이해한다며 웃는 얼굴은 그의 사정 따위는 궁금해하지 않는 듯했다. 그게 괜히 섭섭했다. 태한은 잠시 서은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뺨이 유독 불그스름한 것 같았다. 희미한 술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천천히 고개를 내려 서은의 뺨 가까이에서 숨을 들이켜자, 술 냄새가 섞인 공기가 폐부로 밀려 들어왔다.
“술 마셨어요?”
“아, 약속이 있어서요.”
“혹시 제가 방해한 겁니까?”
“아뇨. 다 처리하고 집으로 가려던 차였어요.”
처리, 라는 단어에 미심쩍게 눈썹을 슬쩍 올린 시선이 어둠 속에서도 예리했다.
“좀 마신 거 같은데.”
“많이는 안 마셨어요. 와인 조금. 아는 동생이 찾아와서요.”
조금은 피곤한 얼굴로 별생각 없이 구구절절 늘어놓던 서은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금세 입을 다물었다.
“속상한 일이 있었나 보죠.”
위에서 아래로 곧게 가로지르는 시선이 서은을 가늠하듯 충혈된 눈에서 상기된 뺨을, 상기된 뺨에서 붉게 부푼 입술을, 그 입술에서 희미하게 열감이 남은 목덜미를 훑고 다시 올라왔다.
서은은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왜 제가 속상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러게요.”
걱정이 담겼던 시선이 전보다 조금 더 깊어졌다. 어두운 흑색 눈동자. 아무리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시선은 항상 진중하다. 그래서 그 눈을 바라볼 때면 괜스레 긴장부터 하게 된다. 모르니까 그렇게 보는 거겠지만, 서은은 저도 모르게 몸이 빳빳하게 굳는 것을 느끼며 애써 입가에 미소를 걸쳤다.
“좋을 때도 마셔요.”
아니, 좋으려고 마신다. 시작이 어떻게 되었든 마지막은 더 나아지길 바라면서.
그럼 됐다는 듯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좀 걸을까요?”
습기를 가득 머금은 여름밤 공기가 몰려왔다. 하늘이 흐렸다. 내일 새벽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질 것 같은 붉은 하늘을 바라보며 걷다가, 문득 서은은 말도 없이 걷는 이 순간이 어색하고 견딜 수 없다 생각했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가슴이 조여들어 신경 쓰였다.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건 지난번 술자리 이후로 처음이었다. 평온했던 일상을 예기치 못한 불청객에게 점거당하면 이런 기분일까.
반면 태한은 너무나 여유로웠다.
“되게 불편해하네.”
“불편하죠, 당연히.”
서은은 고개를 반만 비스듬히 돌린 채로 불퉁하게 대꾸했다.
“이렇게는 물러설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 놓고 이제껏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도 없었으면서. 물론 그의 연락을 애가 타게 기다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우산을 빌렸고, 그걸 돌려주기 위해 연락까지 했을 땐 오겠다는 의사를 비쳐 놓고 아무 연락이 없으니 물건을 언제까지 맡아 둬야 하나, 신경이 좀 쓰였던 것뿐이다.
“하아, 날이 습해요.”
“그러게. 비가 내리겠네.”
그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툭,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졌다. 그러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또다시 툭, 팔등으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다시 뺨으로 툭.
“이러다가 쏟아질 거 같은데 그만 갈까요?”
태한은 대답 대신 손에 쥔 장우산을 펼쳤다. 팡, 하고 경쾌한 소리를 내며 커다란 우산이 태한의 머리 위로 솟는다.
“조금 더 걷죠.”
커다란 우산 속 날씨 따위는 개의치 않는 얼굴이 매끈했다.
서은은 잠시 우산 속에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냥 보기에도 엄청나게 큰 우산인데. 서은이 혼자 그 우산을 썼을 때는 공간이 한참 남았었다. 그러나 태한이 들어가자 그 커다란 공간이 여유 없이 가득 찼다. 한참 크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류태한 씨 정말 크구나.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태한이 뭐 하고 있냐는 듯 턱을 비스듬히 틀어 까닥 고갯짓했다.
“들어와요.”
나직한 목소리에 서은이 어색하게 발을 옮겼다.
들어와요.
그게 뭐라고 또다시 가슴이 떨린다. 서은은 조심스럽게 우산 안으로 파고들어 태한의 곁에 나란히 섰다. 가뜩이나 가득 찬 공간이 서은의 침입으로 발 디딜 틈 없이 협소하게 느껴졌다.
“우산은 제가 들게요.”
“걷는 데만 집중해요. 힘들면 기대도 되고.”
그는 손잡이를 향해 뻗어 온 손보다 조금 더 높게 우산을 들어 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렇게 걷기 시작했다.
천천히 한 걸음, 그리고 두 걸음. 빗속을 걷는 내내 자꾸만 팔이 부딪쳤다. 하얗게 드러난 팔뚝으로 그의 팔이 스칠 때마다 심장이 지끈지끈 어지럽게 뛰었다.
자박자박.
저벅저벅.
보폭이 좁은 서은의 걸음보다 반 박자 느리게 뒤를 졸졸 따르듯이.
“계산은 좀 했어요?”
뜻밖의 질문에 서은의 걸음이 멈칫했다. 고개를 돌려 마주친 그의 눈은 여전히 속을 가늠할 수 없었다. 그저 단단하다는 생각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의 눈이었다.
그 눈을 보며 서은은 그와 연락이 닿지 않는 그 며칠간의 혼란과 부담과 궁금함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알게 된 지 얼마나 됐다고 제가 볼 수 없는 그의 시간이 궁금해졌나. 스스로 물음표를 던져도 답은 나오지 않아 공연히 시간만 흘러갔다. 그런 와중에 또 불쑥 이렇게 찾아온 류태한을 보니 괜히 마음이 뒤틀렸다.
“이해가 안 가요.”
“뭐가.”
“태한 씨 같은 분이 저한테 왜 이러는 건지.”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그가 가진 건 단순한 흥미, 그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뿐이었다. 그래서 사실은 자존심이 조금 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요.”
“그럴 겁니다. 이성이 아니라 감정의 문제니까.”
정작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태한의 표정은 완벽하게 이성적이었다.
시선이 겹치자 묘한 기분이 속에서 바스스 일어났다. 발뒤꿈치가 간지러운 듯도 했다. 서로를 탐색하는 시선 속에 긴장감이 팽팽했다. 조금만 더 고개를 기울였다간 우산 안에서 그에게 빨려 들어갈지도 모르겠다는 위기감이 들어 서은은 재빨리 고개를 피했다.
머리 위에서 소리 없이 웃는 게 느껴졌다. 아마도 그는 단정한 입매를 늘어뜨리고 웃고 있을 것이다. 고개를 돌려 확인할 용기는 나지 않아 서은은 그저 숨을 죽이고 정면을 향해 걸었다.
비에 젖은 길거리는 고즈넉했다.
물기로 반짝거리는 길목, 세상이 온통 비에 젖은 장미 향기로 가득했다. 바람이 지나며 흔드는 자리마다 피어나는 싱그러운 향기. 어느새 시름이 놓였다. 자박자박, 흩어지는 발자국 소리에 기분이 조금은 들떴다. 아직 가시지 않은 술기운 때문만은 아니었다.
부드럽게 밀려와 우산 속에서 휘몰아치듯 둥그렇게 밀려드는 바람이 시원했다.
“실은 내가 처음 세븐 어 클락에 간 건, 그날 맡은 향기가 잊히지 않아서였어요.”
‘그날?’ 하고 고개를 올리자 그가 왈츠를 추듯 느긋하게 걸음을 맞추며 이야기했다.
“창립 기념일 말입니다.”
흑역사로 남은 날이 떠오르자 서은이 미간을 찡그리며 난색을 표했다.
“행사장에서 인사하기 전에 말입니다. 주서은 씨가 내 앞을 스쳐 갔거든. 그때 맡은 향이, 되게 인상적이더라고요. 그래서 궁금했어요. 나중에 꽃을 만지는 사람이란 걸 알고서야 납득했지만.”
“그건 제가 향수를 써서….”
싱거운 대답에 그의 시선이 아래로 가로질러 내려왔다. 눈빛이 닿는 것만으로 뺨이 간지러웠다.
“무슨 향수요?”
“불레이 부 꾸셔 아베끄 모아(Vouley-vous coucher avec moi)라고.”
‘나랑 잘래?’
승원에게 향수를 선물 받을 때 피식 웃어넘겼지만 말하고 보니 낯 뜨거운 이름이다. 이제껏 한 번도 의미를 생각해 본 적 없는 이름이 이렇게 선정적이었을 줄이야. 서은의 뺨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의미를 분명하게 아는 시선이 뜨겁게 엉겨들어서인지도 모른다. 향이 너무나 취향이라 쓰고 있다는 변명 따위는 뱉어 봤자 구차해질 것이었다. 서은은 괜한 말을 했다 생각하며 손등으로 뺨을 훔쳤다.
“근데 그건 정말, 주서은 씨에 대한 호기심에 지핀 불씨 같은 거였고.”
비가 내리면 세상의 모든 향이 짙어진다. 더불어 류태한의 향기도. 그래서 심장이 두근두근, 반응하는 것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데 그가 바람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손잡아도 돼요?”
그리곤 곧바로 그가 손을 움켜쥐었다. 허공에서 달랑이던 서은의 손이 커다란 온기에 감싸였다.
“된다고 안 했는데요.”
“잡았는데요.”
그러니 어쩔 도리가 없다는 눈을 마주치면서 그가 픽 입매를 기울였다.
“아는 사람 만나요. 여기 제 가게 있는 곳이라.”
“그랬으면 좋겠네.”
손을 꽉 쥐고 흔드는 그의 입가로 시원한 미소가 번진다.
쿵쾅쿵쾅.
심장이 요동쳤다. 아직 술기운이 남아 있어서 혈류가 빨라진 건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손가락 사이로 파고드는 감촉이 너무나 선명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색되며 눈앞이 환한 빛으로 혼미하게 번지는 느낌이었다.
아찔함. 이런 기분을 느낀 게 얼마 만인지. 두근거리는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묵인한 채로 휘감긴 손을 슬쩍 놓으려는데, 그 약간의 틈을 견디지 못하고 벌어지는 손가락을 걸어 당기는 태한의 손에서 힘이 느껴졌다.
“아, 저….”
손이 빠지지 않는다. 서은이 당혹스럽게 태한을 바라보았다. 내려온 시선은 마치 놓아주지 않겠다는 의지 같았다. 대신 그가 손가락 사이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밀어 넣으며 깍지를 끼었다. 체온이 더 뜨겁고 은밀하게 맞닿았다.
마음이 일렁인다. 단단하게 휘감아 온 체온만큼이나 뜨거운 눈빛에.
마음이 흔들렸다.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하게 섞여 드는 발걸음 소리에.
두 개의 발걸음 소리가 섞이는 건 각기 다른 향이 섞이는 것만큼이나 관능적인 일이었다.
이대로, 이렇게 좋아해도 되는 건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이미 이 상태로도 충분히 복잡한데. 반쯤 포기한 얼굴로 서은이 시선을 올리자, 그가 난감하게 흐려진 표정 하나하나를 샅샅이 살피며 말했다.
“그게 잘 안 돼요.”
“신중한 사람이라는 거겠죠. 항상 고민하는 얼굴이니까. 그래서 항상, 주서은 씨 여기.”
태한이 제 미간을 손을 잡은 손등으로 톡 건드리며 말한다.
“만져 주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고 말하면 너무 변태 같습니까.”
“네, 좀.”
머쓱하게 웃는 서은의 웃음을 따라 태한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번졌다.
“아아, 그 정도는 변태 같은 거구나.”
바람 소리 같은 웃음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아뇨. 태한 씨 되게 정중해요.”
“아닐걸요.”
장난스레 마주친 눈동자 이면의 알 수 없는 어떤 것. 왜인지 모르게 묘한 말을 듣기 좋은 목소리로 듣고 나니, 괜히 전신이 뜨거워졌다. 타는 듯한 열기 같은 목소리. 맞닿은 손안에서 번지는 부드럽고 끈끈한 감촉. 그의 온기와 뒤섞인 체온. 그 모든 것들을 뜨겁게 온몸으로 뒤집어쓰며 번져 가는 상상을 한다.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 있는지 알게 된다면 감당할 수 없을 것들이 둘 사이를 교란하듯 떠다녔다. 우산 아래서 둘이 있다는 게 이렇게나 긴장되고 가슴이 뛸 일인가 싶으면서도 서은은 이대로 계속 비가 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손이 되게 작네요, 주서은 씨는.”
“태한 씨가 큰 거예요.”
“발도 되게 작아. 그 발로 걷는 게 가능하긴 합니까?”
“저 발 사이즈 230mm거든요? 그렇게 안 작아요.”
“난 300mm 신습니다.”
시선을 내려 제가 신은 구두에 비하면 턱없이 작은 서은의 신발을 보며 그가 귀엽다는 듯 감탄했다.
“류태한 씨가 지나치게 큰 편인 거예요.”
“네, 그런 편이긴 합니다.”
부인하지 않는 그의 눈 속으로 묘한 자신감이 깃들었다. 단단한 얼굴, 단단한 눈빛. 그런 편이긴 하다는, 지나치게 큰 것에 대한 긍정과 묘한 자신감의 근거를 뒷받침하듯 탄탄한 몸을 감싼 질 좋은 슈트로는 그의 건장한 체격을 숨길 수 없다.
우산을 받치고 있는 커다란 팔뚝부터 걸을 때마다 스치는 슈트 아래 터질 것처럼 꽉 조이고 있는 베스트 단추들이 움직임을 따라 주름이 잡혔다 그어지며 선을 만들어 냈다. 재킷 아래로 뻗어 나오는 긴 다리의 허벅지는 그야말로 남성적이었다.
대체 운동을 얼마나 하면 저렇게 몸이 단단할까. 도드라진 체형을 멍하니 바라보던 서은은 나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보니까 어때요. 그래 보입니까?”
멍했던 시선을 올리자 조금 전까지 그녀가 태한을 탐색하던 것처럼 아직 탐색이 끝나지 않은 시선으로 그가 서은을 보고 있었다. 그 눈과 마주치자 서은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서은은 민망함에 고개를 푹 숙였다.
“아뇨.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뭐가 아닌데요.”
나직하고 짓궂은 목소리가 은근하게 집요하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부정과 부인으로 혼란한 서은이 허둥거리자 그가 여유롭게 웃었다. 머리 위에서 흩어지는 웃음소리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땀이 차오르는 손을 빼내려는 순간 서은의 손을 움켜쥐고 있는 그의 손에 조금 더 힘이 실렸다.
“많이 상상하고, 많이 생각해요. 그리고 알려 줘요.”
나직한 목소리가 유려한 곡선처럼 흘러 닿는 시선 끝의 서은의 귓가에 속삭여졌다.
“당신의 계산이 틀렸다고.”
***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빗줄기는 더욱 거세졌다. 도현이는 잘 도착했을까. 마지막까지 여자 친구와 제 이름을 번갈아 부르며 미안하다, 고맙다를 반복하던 도현의 안부를 궁금해하며 서은은 저물어 가는 시간 속에 몸을 맡겼다.
헤드 레스트에 고개를 기댄 채로 얕은 숨을 내쉴 때마다 달큼한 술 냄새가 희미하게 실내로 번졌다. 입술 사이로 토해진 숨이 뜨거웠다.
서울 시내를 가로지르는 차는 고요했다. 태한과 서은을 뒷자리에 싣고도 충분히 너른 공간의 대형 세단은 어느 순간 갑갑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는데, 태한의 어깨가 경계를 넘어온 이후부터였다.
어쩌다가 그와 나란히 좌석 뒤 칸에 앉는 게 자연스러워진 건지. 벌써 두 번이나 얻어 타게 된 뒷좌석에서 목적지를 향해 운전에만 몰두한 기사의 뒤통수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괜찮아요?”
침묵을 깨고, 넌지시 건너온 음성이 부드럽게 이성을 흔들었다.
“네.”
“자꾸 색색거리면서 숨을 쉬니까.”
불편해 보여요. 나직한 음성이 귓가에 닿았다. 건너온 시선이 뺨으로 따갑게 느껴졌다.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지 느껴질 만큼.
불편한 걸 알기는 아세요? 그렇게 묻고 싶은 걸 참고서 서은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차멀미를 하는 편은 아니지만, 술을 먹은 탓인지 속이 조금 울렁거렸다. 그렇다고 갑자기 속을 게워 내거나 기절해 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날연하고 뜨거운 감각이 속에서 어지럽게 뒤섞였다.
둘 중 누구 하나가 들썩이는 순간이 미묘하게 공기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작은 뒤척임 속에서 의식하지 않았던 것들이 기어이 의식되기 시작했다. 뒤척이는 움직임 하나, 숨을 내뱉는 것조차도 조심스러웠다. 시선을 살피다 룸 미러를 향했을 때, 서은을 응시하고 있는 거울 속 눈동자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너무나 뜨겁게 욕망하는 얼굴. 검은 눈이 늘 그랬던 것처럼 또렷하고 짙었다. 한번 섞이면 벗어날 수 없는 덫처럼, 집요한 시선을 마주하는 동안 귓속까지 다시, 맥이 빠르고 크게 울렸다.
둥둥, 둥둥.
몸 안에서 북을 치는 것처럼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댔다. 뒤늦게 서은이 시선을 피했지만, 두근거림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류태한 같은 남자가 그렇게 뚜렷한 감정을 담고 바라보면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이대로는 정말 위험하단 생각을 하며 이성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데, 태한이 암 레스트 뒤편에 있는 냉장고를 열었다.
“마셔요.”
“이런 걸 가지고 다니시네요.”
굳이 먹지 않아도 될 숙취 해소제를, 또 굳이 그는 손수건으로 입술이 닿는 자리를 한 차례 문질러 닦은 뒤 뚜껑을 열어 건네었다.
“적당히 마셔요. 한꺼번에 다 마시면 오히려 역할 수 있으니까.”
세심한 배려가 너무나 자연스러운 남자의 자상함은 잔인할 정도였다.
서은은 두 손으로 캔을 쥐고 꼴깍꼴깍 음료를 삼켰다. 차가운 숙취 해소제가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울렁이던 속이 가라앉았다.
“가는 동안 눈이라도 붙여요. 도착하면 깨울 테니까.”
자상한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잠이 올 리 없었다. 그러나 서은은 일부러 눈을 감았다. 조금이라도 이 긴장이 사그라들길 바라면서.
“바래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집 앞에 도착한 서은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돌연 예의를 차리는 모습이 낯설었던지, 오늘은 현관까지 우산을 쓰고 배웅해 준 그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조심히 가세요.”
어색한 분위기를 견딜 수가 없어 서은이 먼저 돌아서려는 순간, 그가 서은을 붙잡았다.
“주서은 씨.”
손목에 닿는 뜨거운 손길에 서은이 우산 속에서 빠져나가려다 말고 놀란 눈을 들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가만히 전해지는 시선 속에서 서로의 숨이 오르락내리락, 긴장과 함께 흐른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무언가 전하고 싶은 게 있는 듯, 그러나 참아야겠다 마음을 먹은 듯, 하지만 끝내는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을 담고. 보내기가 아쉬운 시선이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그 순간 서은의 손목을 거머쥐었던 손이 순식간에 서은의 뺨을 감싸 쥐었다. 그대로 태한은 고개를 숙여 서은의 입술에 제 입을 맞추었다. 놀라 벌어진 입술 사이로 그의 부드러운 입술이 밀려들었다. 조심스럽게 서은의 입술을 열고 파고드는 혀가 뜨거웠다. 거부할 새도 없이 입술을 포개며 진득하게 빨아들이는 움직임에 서은은 당혹감도 잊었다.
뜨겁고, 달큼하고, 부드러워서.
매끄럽게 파고들어 부드럽게 유영하는 혀끝이 놀랍도록 다정한 것이어서. 아랫입술을 잔뜩 머금고 깊게 빨아들였다가, 깊게 숨을 내쉬며 혀를 얽어 들어오는 그의 기세에 완전히 무장 해제가 된 것 같았다.
정신을 잃을 것 같아.
부서지는 숨결에도 그는 커다란 손으로 서은의 뺨을 더 간절하게 거머쥐며 계속해서 입을 맞추었다. 치아를 건드려 벌리고 능숙하게 파고들어 입천장을 긁고 빠져나가는. 무어라 대답을 할 수도 없게, 그를 밀어낼 수도 없게, 커다란 품이 서은을 압박하듯 가둔 채로 얼마나 정성스레 입을 맞추었을까.
농밀해진 키스에 서은의 눈동자가 혼몽하게 흐려졌다. 색색거리며 그에게 달라붙은 작은 몸이 휘청거렸다. 그제야 태한이 아랫입술을 두어 번 더 빨아 삼켰다가 놓아주었다.
“…하아.”
밭은 숨이 그제야 형편없이 흩어진다. 놀라서 두근거리는 심장이 터질 듯이 뛰어 댔다. 몸에 열기가 마구 솟구쳤다. 사나워진 태한 역시 밭은 숨을 쏟아 내면서도 서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서은은 떨리는 시선을 들어 태한을 올려다보았다. 서은을 건드리느라 짓눌린 그의 코끝과 입술이 마찬가지로 형편없이 붉었다.
“…이러지 마세요. 이렇게… 함부로….”
색색거리며 숨을 몰아쉬는 그가 더욱 짙어진 눈으로 응시했다.
“흔들립니까.”
“…네.”
그래서 심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어수선하게 들뜬 분위기 속에서 그가 아무 말도 못 하는 서은의 입술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러니까 얼른 넘어와요.”
여운을 남기며 웃는 미소가 근사했다.
계산이 틀릴 것 같은 예감이 서은을 뒤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