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일식집은 고요했다.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자갈이 가지런히 깔린 정원을 지나 실내로 들어서자, 입구에서부터 잔잔하게 연주되던 일본 전통 악기 연주곡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미닫이문이 닫히고 그마저도 차단된 개별실은 고요했다.
서은은 류태한과 단둘이 서로를 마주하고 자리를 잡았다. 서먹한 공기가 실내로 흘렀다. 자리에 앉자마자 따뜻한 물수건으로 손을 닦은 태한은 이런 자리가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듯, 능숙하게 서은을 살피며 적당히 분위기를 맞추었다.
“편하게 먹읍시다.”
다소 느긋하게 자리를 잡은 그가 유한 음성으로 말했다.
“주문은 오는 길에 미리 해 놨어요. 분위기 끊기지 않게 한 번에 내 달라고.”
이윽고 똑똑, 노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온 종업원이 식사를 빠르게 준비했다. 테이블 위로 신선하게 손질된 요리가 차려졌다. 먹음직하게 차려진 음식들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그는 호화로운 상을 황송하게 바라보는 서은을 보며 아이스 버킷에 담긴 푸른 병을 집어 들었다.
“사케 괜찮습니까?”
“네, 그럼요.”
메뉴를 선택할 때 아무거나 다 잘 먹는다고 이야기했던 것처럼 서은은 까다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러나 실은 내내 긴장 상태였다. 충동적으로 자리를 제안했지만 정말 그와 단둘이 술을 마시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사실 맥주 한 캔이면 충분했다. 그러나 태한은 차에 태워 서은을 이곳으로 안내했다. 간단히 마시자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건만, 이런 근사한 식당으로 데려온 건 의외였다. 그러나 류태한은 이 모든 게 자연스러운 사람이었다.
태한은 입가에 미소를 띠고 술을 권했다. 오른손으로 병목을 잡고, 왼손으로 손목을 받치며 권하는 동작이 간결하면서도 정중하다. 서은은 재빨리 잔을 내밀었다. 쨍, 긴장한 탓인지 서은의 잔이 유리병에 부딪쳤다.
“죄송합니다.”
고요한 공간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리자 서은이 머쓱하게 웃었다. 민망함에 뺨이 화끈거렸다. 그러나 건너온 시선은 다만 여유로웠다. 술병이 기울어졌다.
“긴장했습니까?”
“조금요.”
“긴장할 일이 뭐가 있다고. 긴장 풀어요. 그런 상태로 마시면 체하니까. 빈속에 술 마시다 체하면 최악입니다.”
컨디션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직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침착한 그를 보니 입 안이 바싹 탈 지경이었다. 어떻게 매사에 저렇게 차분할 수 있을까. 긴장을 놓아야 하는 자리라는 걸 알면서도 차단된 공간에 단둘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몸이 굳는데. 가게에서 태한을 마주할 때처럼.
서은은 두 손으로 받아 든 잔을 내리고 마찬가지로 그의 잔을 채워 주기 위해 몸을 반쯤 일으켰다.
“제가 드릴게요.”
“괜찮습니다.”
호의를 받는 대신 그는 서은에게 손바닥을 보이며 저지하곤, 곧 익숙하게 제 잔을 채웠다. 금세 가득 찬 잔을 들어 그가 내민다. 쨍, 이번에는 맞닿은 소리가 경쾌했다.
“천천히 드세요.”
고개를 돌려 잔을 입에 댔다.
이렇게 불편할 수가. 내색하지 않으려 단숨에 술잔을 넘기는데,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술이 뜻밖에도 달았다.
“와, 이거 뭐예요?”
입 안 가득 퍼지는 꽃 향 섞인 맑은 풍미에 서은의 눈이 대번에 동그래졌다.
“후쿠로쯔리라고, 사케의 종류예요. 향과 맛이 고급스럽죠.”
“맛있어요.”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맛이 부드럽고 달았다. 입 안으로 퍼지는 풍미가 향긋해 순식간에 기분이 전환되었다.
“한 잔 더 마셔도 될까요?”
“물론이죠.”
잔이 채워지고 기울어지며 그렇게 얼마간. 뺨이 익어 가는 줄도 모르고 홀짝거렸다. 그렇게 먹다 보면 취할지도 모릅니다. 나긋한 경고는 잊은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그는 만류하지 않았고, 서은은 잘도 받아먹었다.
“날 밝을 때 이렇게 마시는 것도 나쁘지 않네요.”
다섯 잔을 연거푸 비워 낸 서은이 빨개진 얼굴로 푸스스 웃었다.
“더 마시면 취할 것 같은데요.”
“아뇨, 안 취해요. 제가 원래 알코올 한 방울만 찍어 먹어도 빨개지는 체질이라. 아마 술자리 끝날 즈음엔 볼 만할걸요.”
종알대는 입술도 열이 오른 모양인지 탐스럽게 붉었다. 말랑한 입술을 슬쩍 잇새로 깨물고 풀어진 표정으로 웃는 서은에게 잠시 태한의 시선이 머물렀다.
지금도 상기된 뺨에서 번져 나간 열기가 서서히 번지고 있는데. 새빨갛게 익었을 모습을 상상하는 태한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보고 싶네요.”
“그래도 너무 흉한 꼴은 보이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유쾌하게 대꾸하는 서은이 부드럽게 눈을 감았다 뜨며 웃었다. 은근한 웃음을 머금은 뺨이 동그랗게 씰룩거렸다.
“그것도 보고 싶은데요.”
“글쎄요, 그런 모습을 보실 날이 있을까요?”
만취해서 상대에 대한 경계를 완전히 내려놓은 뒤에야 보일 수 있는 원초적인 모습. 흐트러지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정도 친해지고 허물을 덮어 줄 수 있는 사이여야 마음 놓고 마실 수 있었다. 주량은 제법 센 편에 속했으니, 서은은 걱정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류태한과 있는 내내 흐르는 미묘한 긴장감이 절대 오늘은 술에 취하게 만들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상무님은 술을 잘하시나 봐요. 안색이 변화가 없으세요.”
“난 아직 한 잔밖에 안 마셨는데.”
오, 하고 서은이 입술을 동그랗게 모았다. 태한은 대답을 이었다.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못하진 않습니다. 대개 술을 마시는 경우는 일 때문이라.”
“아… 제가 괜한 자리를 만들었나 봐요.”
대개 술을 마시는 경우는 일 때문이라는 대답에 서은이 머쓱하게 눈썹을 올릴 때였다.
“싫은 건 권한다고 하는 성격 아닙니다.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반듯한 시선을 들고 곧게 응시하는 눈빛이 진실되다. 에둘러 말하거나, 보기 좋게 포장하는 것보다는 솔직하게 직설적으로 꽂는 사람. 그에 대해 많이 알진 못해도 드러나는 면모가 그랬다.
“주 사장님도 약주를 좋아하시죠.”
“맞아요. 저희 아버지 술 참 좋아하시죠. 많이 드시면 안 되는데 아직도 회식이다, 뭐다 일주일에 두 번은 만취해서 돌아오신다니까요. 엄마가 항상 걱정이 많으세요. 이제 연세도 있으신데, 건강이 안 좋아지실까 봐요. 게다가 꼭 그렇게 술을 드시는 날엔 기사를 돌려보내곤 해서, 귀가로 애를 먹을 때가 있거든요.”
잠을 자다가도 새벽녘 희숙에게 전화가 걸려 오면, 잠을 자다 말고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차를 몰고 나가 모셔 오는 일은 흔했다. 어느 날은 즐거워서, 어느 날은 힘겨워서, 어느 날은 그저 묵묵히 취한 상태로 꾸벅꾸벅 길가에 서 있다가, 서은을 보면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우리 딸, 하고 안겨 드는 모습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혹시 요즘 회사 분위기는 어때요?”
조심스럽게 운을 떼는 서은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던 태한이 시선을 부딪쳤다.
“무슨 뜻입니까?”
“음, 이건 그냥 제 개인적인 고민인데요. 사석이니까 편하게 말씀드릴게요. 아버지가 고민이 좀 많으신 것 같아서요. 근데 도통 그게 뭔지는 모르겠고, 자식으로서 왜 그런 거 있잖아요. 그냥 마음에 좀 걸리는 느낌? 제가 뭘 놓치고 있나 싶어서요.”
태한은 계열사 중에서도 주형국과 같은 HSDC 투자 개발 면세 사업부 소속이니 내부에서 무언가 문제가 있었다면 파악하고 있을 것이었다. 내심 기대하는 서은의 똘망똘망한 눈을 바라보며 태한이 대답했다.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말 옮기는 건 경우가 아닌 것 같아서, 다만 따님이신 주서은 씨가 근심할 만한 일은 없습니다. 주형국 사장님은 성품으로나 능력으로나 훌륭한 분이셔서, 많이 존경하고 있습니다.”
뜻밖의 칭찬에 서은이 배시시 웃었다.
“왠지 모르게 황송한 칭찬이라, 아버지가 들으시면 좋아하시겠어요.”
“그게 고민이었습니까?”
“요즘 조금 신경이 쓰여서요.”
부모를 애틋하게 생각하는 눈빛이 조금 전보다 깊어졌다. 이런 식으로 아버지 심중을 파악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어쨌거나 회사 내에서 크게 힘든 일은 없는 듯해 다행이었다. 서은은 남은 잔의 술을 단숨에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상무님도 많이 바쁘시죠?”
“보통의 회사원이라면 다 그렇죠.”
“보통의 회사원은 아니시잖아요.”
해신 오너의 일가. 그 사실을 상기시키는 음성에 태한은 달리 부인하지 않았다.
“의무가 따르는 자리가 쉽진 않죠.”
“맞아요. 의무에는 책임도 따르니까. 저도 요즘 그 의무 때문에 은근히 골머리를 앓고 있어서요.”
“가게를 운영하는 입장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고개를 끄덕여 동조하는 서은의 고민은 분명 사업에서 기인한 문제일 거라고 생각한 태한이 부드럽게 대화를 받았다. 그러나 서은의 입꼬리가 장난스럽게 설핏 기울어졌다.
“그런 게 아니라, 집안 사정이에요. 장녀의 의무라고 해야 하나.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고요.”
“장녀의 의무?”
“아, 상무님은 장남이 아니라 모르시려나?”
뜻밖의 화제로 튀어 버린 대화에 태한의 눈가로 호기심이 스쳤다.
“장녀의 의무라고 하면, 결혼? 그런 겁니까?”
“집에서 빨리 시집가라고 성화시거든요. 갑자기 올해 안에 누구라도 데려오라고 하는데.”
서은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만나는 사람 없습니까?”
“있으면 이런 고민 안 했겠죠?”
서은이 금세 입술을 빙긋 당겨 웃었다. 그 곁에 청초하게 존재감을 발하는 웨딩 부케로 태한의 시선이 꽂혔다.
“아, 이건 의리로 받은 거예요.”
“만나는 사람도 없이?”
“제일 친한 친구의 부탁이라 거절을 해도 막무가내더라구요. 뭐, 이제 슬슬 결혼에 대해서 생각할 때가 됐기도 하고.”
그런 연유로 제가 만든 부케를 고스란히 가지고 오게 된 경위를 설명할 때였다.
“그럼 한시가 급하겠네.”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태한의 눈가로 불현듯 선명한 빛이 치솟았다.
“속설이긴 하지만 부케를 받으면 6개월 안에 결혼해야 한다지 않습니까.”
기분 탓인지는 모르지만 아주 조금, 경계가 허물어지고 이제껏 꾹꾹 억눌렀던 짓궂은 장난기가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지금 제가 굉장히 곤란해졌어요.”
“왜 곤란합니까. 연애를 하면 되지.”
“그게 말처럼 쉬운 일도 아니고, 현재로선 그럴 처지도 아니고요. 상무님은요? 주말에 이렇게 한가로이 낯선 여자랑 술을 드시는 걸 보면 저하고 사정이 피차 다를 것 같진 않은데.”
“저도 아직 계획은 없습니다만, 근데 계속 그렇게 부를 겁니까?”
느긋하게 고정된 시선과 느긋하게 전해지는 낮고 또렷한 목소리. 그렇게 부르는 게 의미하는 바를 파악하지 못하고 그를 물끄러미 응시할 때였다. 거의 변화가 없던 그의 매끈한 얼굴이 미묘하게 흐트러졌다. 남자답게 우직하고 배우처럼 선명한 이목구비에 은근한 불만이 비쳤다.
“내가 주서은 씨 직장 상사도 아니고, 여기서까지 상무님 소리 듣는 건….”
“거북하세요? 하긴 밖에서도 그러면 좀 싫으시겠다.”
이게 가장 적절한 호칭이라 생각한 나름의 배려였는데, 그의 입장에서는 불편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직장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기분인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 문득 다녀 보지도 않은 조직 생활의 압박감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럼 뭐라고 불러 드릴까요? 류태한 씨… 는 너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요. 맞먹는 것 같아서. 아니면 오빠… 아아, 이건 더 아닌 것 같네요.”
걸맞은 호칭을 찾느라 궁리하던 서은은 마치 실언했다는 듯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오빠라니. 그 순간 왜인지 모르게 해인이 연상의 남자 친구와 싸운 뒤 화를 풀어 주기 위해 코맹맹이 소리로 ‘어빵’ 하고 추태를 부리던 게 생각나 닭살이 오소소 돋았다.
물론 서열로 따지면 류태한은 친구인 진한의 사촌 형이니, 오빠가 틀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한마디에 얼어붙은 이 분위기는 어쩔 건데.
서은이 어깨를 부르르 떨며 사념을 지웠다. 과연 저 사람을 그렇게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질 날이 있을까. 아무래도 적당한 거리감을 지킬 수 있는 호칭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할 즈음이었다.
덩달아 긴장이 될 만큼 뚜렷한 시선이 건너왔다. 내내 서은을 응시하는 시선은 차분하고 담담하기 그지없었지만, 눈길이 섞일 때면 왜인지 모르게 마음이 따끔거렸다. 발끝이 저려 왔다. 사람을 꿰뚫어 읽는 것에 능한 눈을 볼수록 긴장이 더해졌다.
“태한 씨.”
문득 정적을 가르고 그가 입을 열었다.
“네?”
“그게 좋겠네요.”
대안을 제시하는 음성은 이제까지의 태도처럼 담백했다.
태한 씨?
적당히 대꾸한 뒤 그가 젓가락으로 스시 한 점을 입에 넣어 씹었다. 정갈하게 입 안으로 밀려들어 가는 도톰한 생선 살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가지런히 입술을 다물고 오물거리는 그가 음식을 삼키곤 냅킨으로 입을 꾹 찍어 닦아 냈다. 그리곤 찻잔에 담긴 따뜻한 찻물을 약간 머금었다.
정갈하고 고요하게.
아주 사소한 움직임이 모여 태한의 이미지를 새겨 가고 있었다. 식사 예절을 엄격하게 배운 것처럼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격식을 갖추는 모습은 솔직히 호감이었다. 잘 자랐다는 인상이 들게 하는 간결한 순간들이 마치 진한과 함께 식사할 때 느꼈던 기시감이 들게 했다. 의식하지 못한 채로 길어진 시선 끝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왜요?”
“아니, 아니요.”
너무 빤히 보고 있었나. 실례라고 느꼈을까 싶어 서은은 재빨리 시선을 거두었다.
“진한이하고 서은 씨, 많이 친하죠?”
“진한이랑은 중학교부터 쭉 같이 나와서요.”
물론 진한을 통해 해신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큰집의 삼 형제, 그러니까 류태한의 형제들에 대한 이야기도 종종 전해 듣곤 했다. 작은집인 자신의 집과는 다르게 엄격한 규율이 존재한다던, 평범하게 집에서 아버지를 내조하는 제 어머니와 다르게 큰어머니는 해신 아트 센터를 지휘하는 관장이자, 해승원의 안주인이라 남다른 격이 느껴진다는 그런 말들이었다.
몇 번인가 해신에서 열린 행사마다, 진한의 말이 틀림없는 사실임을 확인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특히 한 살 많은 류태한은 고등학교 재학 무렵, 스치듯 오가며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기억에 서은은 어떠한 단편으로도 남지 않은 듯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쟁쟁한 집안의 자제들이 모인 학군 중 유일하게 해신을 비롯해 다른 기업의 자제들을 동 시간대에 볼 수 있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들에 비하면 서은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집안의 평범한 학생이었고, 함께 어울리는 승원이나 주영의 배경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실은 태한 씨, 흐음.”
말문을 열었지만, 입에 붙지 않은 호칭은 어색하기만 하다. 서은은 괜히 머쓱한 기분이 들어 목을 가다듬었다. 태한이 궁금하단 듯 의문 어린 시선으로 서은을 응시했다.
“이렇게 따로 계속 자리를 만들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요.”
“왜?”
“아무래도 그런 관계잖아요?”
“그런 관계가 무슨 관계입니까.”
음, 하고 대답을 고르는 서은은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그가 기분 나쁘지 않게 들을지, 아주 잠시 고민했다. 진한을 만나러 해신 호텔 커피숍을 드나들 때에는 아무 생각도 없었지만, 류태한과 이렇게 인연이 닿은 것에 대해서는 생각이 너무 많은 갈래로 뻗어 나갔다. 모두 잡생각이었다. 하지만 서은은 복잡 미묘하게 부유하는 감정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저희 아버지와 같은 직장에 다니고 계시잖아요.”
그러니 더 이상 엮이기엔 곤란한 상대였다. 엄밀히 아버지 회사의 직속 후배이자, 나아가 아버지가 다니는 회사 사주의 아들. 오늘은 아주 우연히 자리가 마련되긴 했지만, 또다시 이런 우연이 있을 거란 보장은 못 했다. 그럼에도 류태한은 처음 그를 보면서 느꼈던 그 이미지 그대로 근사해서, 그 알 수 없는 감정에 묘한 혼란이 일 즈음이었다.
“가끔 생각나면 불러요.”
그런 사실 따위는 개의치 않는 듯 그가 선심 쓰듯 말했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 대수롭지 않은 말 한마디에 서은의 생각이 깊어졌다.
“술이 고프거나, 맛있는 밥이 먹고 싶거나 그럴 때 말입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그저 사석에서 이따금 안부 대신 그런 말을 전하듯 의미를 두지 않고 하는 말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마음에 없는 말은 절대로 할 것 같지 않은 진중함 때문인지 헷갈렸다.
“부르면 나오실 거예요?”
“물론이죠.”
“왜 이렇게 호의적이세요?”
혹시 가벼운 만남을 선호하는 바람둥이일까. 그래도 이상할 건 없었다.
“느낌이 좋아서라고 해 두죠.”
“느낌, 이요?”
“내가 보기엔 산적 같아도 감이 좋은 편이라.”
산적이라는 말에 서은이 피식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 죄송합니다. 태한 씨가 산적 같다고 느껴져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건너온 시선은 웃음을 담고 있지만 명징했다.
온전히 서은에게만 집중하고 있는 그의 얼굴 아래로 떡 벌어진 단단한 어깨가 듬직하게 펼쳐져 있다. 검은색 무지 티 아래로 근육이 예쁘게 붙은 우람한 팔뚝과 핏줄이 불거진 팔목. 산적이라기엔 너무 근사하고 완벽한 몸이었다. 솔직히 좌우로 벌어진 골격이나 두껍게 근육이 붙은 체격은 이상형에 가까웠다.
“그냥?”
그냥, 류태한은 괜찮은 사람이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어 갈수록 이야기가 잘 통하는 것도 그랬다. 적당히 유머러스하면서도 흐트러지지 않고 선을 넘지 않는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이상하지 않나. 이렇게 속도감 있게 깊어 가는 호감은 처음이라 그런 마음을 가진 스스로에게 당혹스러웠다.
맞물린 시선이 깊어졌다. 대답을 기다리느라 뚫어지게 응시하는 태한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이후의 일까지 꿰뚫어 본 듯한 시선에서 무게감이 느껴졌다.
아아, 이대로라면 휘말릴 텐데. 깔려 버릴 것 같은 시선을 피하지도, 어쩌지도 못하고 붙들린 채로 서로를 응시하는 사이, 머릿속의 경보음이 조금씩 선명해져 간다.
“그냥 좋은 분 같다구요.”
“알아줘서 다행이네요.”
피식, 그의 입가로 웃음이 흩어진다. 그가 시선을 거두었다.
뭘 알아줘서 다행이란 건데? 그냥 툭 던지는 말도 어쩐지 쉽게 넘어가지지 않는다. 벌써 술에 취했나? 생각하는 와중에 태한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내가 지금 조금 긴장했습니다.”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 느긋하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가 입을 열었다.
“주서은 씨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뭐라구요. 그 말에 얼어붙은 건 서은이었다. 물잔을 내려놓고 똑바로 서은을 응시하는 시선은 차분하기만 했다. 평생 긴장이란 걸 해 보기는 했을까 싶은 얼굴로 보고 있으면서. 도대체 어디가.
“그래서 줄곧 자리를 한번 마련해야지, 생각했었는데 마침 오늘 운이 좋았네요.”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 온 기회를 잡은 사람처럼 그는 호감을 감추지 않았다.
그래서 일주일을 꼬박, 저녁 7시가 되면 가게를 찾으셨나요. 묻고 싶은 말이 목구멍에서 간질거렸다. 경직된 마음을 강아지풀로 살살 긁는 것 같은 기묘한 간지러움이 속에서부터 피어났다.
정직한 시선을 받는 내내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잠시 멎었던 숨이 다시 붙은 것처럼 쪼그라들었던 폐부가 부풀어 올랐다.
아아. 체할 것 같아.
실내는 끔찍할 정도로 고요했다. 단지 호감을 표하는 솔직한 방법일 뿐인데도, 그의 말 한마디에 머릿속이 엉망으로 헝클어졌다.
서은은 웃는 것도, 웃지 않는 것도 아닌 애매한 얼굴로 물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목구멍으로 찬물을 삼키는데 고정된 태한의 시선 탓에 이게 찬물인지, 뜨거운 물인지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쩔 줄을 몰라 하네.”
그야, 너무 쑥스러우니까.
그 모습이 귀여운 듯 태한은 시선을 떼어 내지 않은 채로 피식 입술을 틀어 웃었다.
“이런 경우 많았을 것 같은데.”
“전혀요.”
예리하게 푹 꽂혀 온 시선에 저도 모르게 진심이 새어 나왔다. 다급히 뱉어 놓고 하지 않아도 될 말이라는 걸 깨들은 서은은 손등으로 입술을 꾹 눌러 막았다. 태한의 눈가로 웃음이 스몄다.
“많았을 겁니다. 그게 아니면 몰라본 놈들이 등신이거나.”
입술이 잇새로 말려 들어갔다. 서은은 힘을 꽉 주고 입술이 새빨개지도록 물었다. 그럼에도 파르르, 의지와는 상관없이 떨리는 입술의 떨림이 멎지 않는다.
또, 가슴이 뛴다.
왜 이렇게 사람을 휘저어요? 애써 웃는 뺨 근육이 희미하게 경련했다. 태한은 잔인하게도 그녀가 동요하는 모습을 끝까지 눈에 담았다.
“술… 한 잔만 더 주세요.”
머쓱한 기분을 지워 내기 위해 술잔을 내밀자 그가 술병을 잡아 들며 물었다.
“내가 어렵습니까?”
어색한 분위기를 술 한 잔에 넘겨 보려는 것도 간파한 모양이다. 술잔을 채워 주는 눈가에 호기심을 넘어선 어떤 것이 일렁였다.
“당연히 어렵죠.”
“오너의 일가에 사주의 아들이라서?”
“네.”
“마찬가지로 주서은 씨도 내 직장 상사의 귀한 따님이시죠.”
“그러니까 어려운 관계라는 거죠, 우리는.”
선을 긋는 음성에 그는 소리 없이 웃었다. 웃음에는 다른 의도가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종잡을 수 없지만, 그래서 헤집어지는 기분이 든 것도 사실이다.
“우리 가끔 이렇게 볼까요?”
“네?”
서은이 술잔을 비워 내고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나쁠 거 없잖습니까. 그냥 가끔 만나서 서로에 대해 알아 가고.”
“왜요?”
“관심이 있으니까.”
너무 대단한 소리를 너무 아무렇지 않게 했다.
그런 눈빛을 한참 전부터 느끼고는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 직설적으로 뱉어 낼 줄은 몰라서 뺨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알고 싶어요, 주서은 씨에 대해서. 주서은 씨는 뭘 좋아하고,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좋아하는 시간이 7시라는 건 알았는데, 그 외에는 뭘 하는지. 그래서 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없이 태한에게 고정된 서은의 말간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그런 것들이 좀, 많이 궁금하더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태한은 느긋하게 웃었다.
서은을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지는 일상.
갑자기 그렇게, 바람에 날린 불티 하나에 순식간에 세상이 집어삼켜지듯이. 속절없이 타들어 가는 마음을 바작바작 태우며 기다리는 건 태한도 처음이었다.
“그렇게 신뢰할 수 없는 눈빛으로 보지 말고.”
“제가요?”
“지금 무슨 도둑놈 보듯이 보잖아요.”
“설마요.”
서은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빙긋 웃어 보이자, 그가 소리 없이 목 끝으로 따라 웃곤 다시 물었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나는?”
정면으로 고개를 들고 부딪쳐 온 시선이 깊어질수록 분위기는 더없이 진지해졌다.
당신이 어떠냐고?
서은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천천히 태한을 다시 꼼꼼하게 뜯어보았다. 탐색하는 시선을 마주 보는 눈동자는 잘 보이고 싶어 긴장했다는 말과 다르게 자신만만했다. 곧게 가로지르는 진실된 눈빛. 결국은 제 뜻대로 될 거라는 자신감을 기저에 깔고, 그래서 여유로우며 재촉하지 않는 느긋함에 서은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이렇게 눈에 빤히 보이는 수작은 걸지 말라고? 아니면 실은 나도 가슴이 뛰어서 혼란스럽다고?
서은은 묵묵히 대답을 기다리는 올무 같은 시선을 바라보며 얕게 한숨을 흘려 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류태한 씨는 근사해요. 제가 만나 본 남자 중에 제일.”
오늘은 술도 마셨으니, 술김에 이런 낯간지러운 말도 해 본다. 서은은 속에서부터 뜨겁게 적셔 오는 감정을 솔직하게 말에 담아 옮겼다.
“끌리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말이고요. 솔직히 지금도 좀 많이 떨리구요.”
흠, 하고 목을 가다듬는 뺨이 더 빨갛게 익었다. 사랑스러운 것을 대하듯 서은의 모습을 하나하나 담아낸 태한은 곧 뒷말이 남아 있는 걸 눈치챘다.
“그런데?”
“생각을 좀 하게 되죠. 아무래도.”
언감생심 꿈꿔 볼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류태한과 만나게 된다면 어떨까 하는 그런 상상을 해 보았던 순간, 머릿속의 계산기는 어떻게든 헤어지게 될 거라는 답을 도출해 냈다. 그러니 그런 시작은 하지 않는 게 현명하다는 것.
“제가 많이 계산적이에요. 손해가 날 것 같으면 빠르게 손절하죠.”
서은이 만남에 관해 방어 기제를 가지고 있다는 건 일찌감치 눈치채고 있던 것이다. 누구에게 어떤 상처를 얼마나 받았는지, 가늠할 수는 없지만 그게 주서은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만큼 커다란 사건이었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럼 한번 재 봐요.”
“네?”
“계산적이라면서. 그럼 실컷 재고, 어떤 결론이 나는지 알려 줘요.”
이상한 남자다.
그러니까 시작하지 말자는 말을 하고 있는데, 실컷 재고 결론을 알려 달라니. 서은의 미간이 슬며시 찌푸려졌다.
“나도 목적 달성에 한해서는 어디서 지지 않으니까. 계산적인 주서은 씨하고 대책 없는 나하고, 어느 쪽이 더 승산 있는지. 궁금하잖아요.”
“굳이 그럴 이유가….”
“마음에 들어서.”
그가 납득이 가지 않는 얼굴로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서은에게 말했다.
“이렇게는 물러설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