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예는 무건의 품에 꼭 안긴 채 잠시 가만히 다정한 체온을 느끼다가, 천천히 빠져나왔다. 더 늦기 전에 영을 봐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무건에게 짧게 입을 맞춘 뒤 웃어 주었다. 스쳐 가는 달콤함에 무건은 오히려 제가 더 사르르 녹아들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다급히 숨을 들이켜며 가슴을 내리누르는 것이었다.
‘주책은.’
어쨌든 그는 팔불출에 공처가임은 확실했다.
그리 생각하며 진예는 영이 있을 방의 문을 열라고 눈짓했다. 곧 궁인들이 밀어내는 문 사이로 들어가자 영이 궁인들과 유모 사이에서 바닥을 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이는 저를 닮은 진예가 들어서자 동그랗고 큰 눈을 말똥말똥 뜨며 행동을 일시에 멈췄다. 그러고는 유모가 얼른 들어 올려 주자 두 팔을 진예 쪽으로 뻗으며 입을 뻐끔거렸다.
“으응, 마, 응.”
진예의 손바닥보다도 더 작은 손이 파닥거리는 걸 보면서 그녀가 앞으로 다가가자 유모가 아이를 건네주었다.
태어날 때보다 훨씬 무거워진 영은 뭘 먹고 있었던 것도 아닌 듯한데 입이 침으로 반들반들해진 채였다.
그 모습을 발견한 무건이 얼른 손수건을 꺼내서 진예에게 내밀었고, 진예도 자연스럽게 받아서 아이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 그러자 영이 방싯방싯 웃었다.
영은 하는 일 없이 웃기만 했을 뿐이지만 진예는 그런 아이가 기특해서 이마에 연신 입술을 가져다 댔다.
“잘 지냈더냐, 영아?”
“마아, 우웅, 우…….”
가끔 한 번씩밖에 보지 못하지만 언제나 간절한 엄마의 품이라 그런지 영은 얼른 파고들었다.
그녀의 온기가 마냥 좋은지 영이 통통한 볼을 마구 비볐다.
무건은 진예를 눈에 띄게 반겨 주는 아이를 보면서 왜인지 서운해져 중얼거렸다.
“제 아비는 매일같이 깨물고 난리인데 폐하의 앞에서만 이리 순합니다.”
“그럴 리 있나.”
무건의 말에 진예가 피식 웃어넘겼다. 그때, 진예의 품에 묻었던 얼굴을 살짝 뗀 영이 눈을 세모꼴로 뜨며 무건을 노려보았다.
무건은 아이의 그 발칙한 눈빛을 발견하곤 역시나 눈썹을 꿈틀했다.
엄마 앞에서는 아양을 떨고, 아빠는 골탕 먹이는 아이를 본 무건이 진예의 품에 안긴 영의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으며 고자질을 했다.
“영아의 요 요망한 눈빛을 보십시오.”
하지만 아이는 진예가 눈을 제게 돌릴 때 도로 방싯 웃음 지으면서 애교를 부려 무건을 약 올렸다.
“우, 우웅.”
그에 깜빡 속은 진예가 아이의 등을 얼른 도닥도닥해 주었다.
“그래그래, 영아. 아비가 눈이 멀었나 보구나, 그렇지? 요망하기는, 이리 순하기만 한데.”
눈이 멀기는, 대체 누구의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드물게도 제 아이의 앞에서 이성적인 판단을 못 하는 진예의 모습에 무건은 불손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고 그저 아이를 추슬러 안은 채 침방으로 가는 그녀를 쫓아갔다.
무건이 뒤따르며 진예의 가는 팔이 부러질세라, 아이를 건네받으려 했다.
“무겁지 않으십니까, 제가 안겠습니다.”
“어차피 근방이니 호들갑 떨 것 없다.”
평소엔 함께할 시간이 길지 않은 만큼, 진예는 아이를 마음껏 안아 줄 수 있는 이 시간이 꽤 만족스러웠다.
방에 들어선 그녀가 깊은 침방의 안쪽, 푹신한 침상 위에 아이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엄마를 계속 부르는 영의 볼에 연신 입맞춤을 내렸다.
제게서 나온 아이라 객관성을 잃었을지 모르지만, 어찌 이리 예쁜지 몰랐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실감이 나기도 했다.
진예는 침상에 걸터앉아 잔머리가 솟아오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무건에게 물었다.
“우리 영아는, 그래, 이제 뒤집기는 하느냐?”
한데 마치 질문을 알아들은 것처럼 영이 몸을 뒤채다가 휙 몸을 뒤집는 데 성공했다. 그 뒤 활짝 미소 짓는 모습을 본 무건과 진예에게서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예상하지 못한 때에 발현되는 아이의 잔망스러움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그야말로 하루의 고됨이 씻긴 듯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무건은 분위기가 가벼워진 틈을 타 앉아 있는 진예의 뒤로 다가가 무거운 용포를 벗겨 주었다. 그러면서 안심하라는 듯이 덧붙였다.
“폐하를 닮아 총명한 아이이니 더딘 것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나이답지 않게 아버지를 놀리는 데는 천부적인 재능을 보이고 있었다.
“이 어미가 신경 써 주지 못하고 있는데 기특하기도 하지.”
“마아, 마.”
영이 다시 짧은 팔다리로 기어서 엄마에게 다가오자 마침 용포를 전부 벗어 낸 진예가 아이와 나란히 누웠다.
작은 머리통으로 도리질을 치며 가슴으로 파고드는 아이를 진예가 안아 주고, 그 맞은편에 때마침 누운 무건이 다시 그 둘을 한꺼번에 안았다.
엄마 아빠 사이에서 영은 입을 빠끔 벌려 까르륵, 웃다가 이내 눈을 느리게 깜빡깜빡했다.
무건은 긴 속눈썹이 서서히 내려앉은 것을 보면서 진예에게 속삭였다.
“금세 눈꺼풀이 감기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영아가 오늘 폐하께서 오는 것을 알고 뵙고 싶어 기다린 모양입니다.”
“그런가…… 시간이 늦긴 했지.”
그렇지만 자기 싫은 듯 팔을 허우적거리며 눈을 깜빡깜빡하는 영을 진예가 천천히 토닥여 주었다. 나긋나긋한 손놀림에 아이는 결국 얼마 안 가 곯아떨어졌다.
무건과 진예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말없이 오래간 아이가 잠에 빠져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영은 둘의 시선을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곧 배냇짓을 해 댔다. 그 사이사이로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짓는 모습으로 예측해 보건대, 그 내용은 몰라도 꽤 신나는 꿈의 세계로 놀러 간 것 같았다.
아이가 깨지 않을 만큼 깊게 잠들었다고 생각된 때, 무건이 피곤해 보이는 진예의 위로 이불을 끌어다 주며 말했다.
“폐하께서도 부디 길몽만 꾸십시오.”
무건의 그 말에 진예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고 잠에 빠져들기 전에 들릴 듯 말 듯, 말소리보다는 숨소리가 더 많이 섞인 작은 음성으로 조곤조곤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무건아, 참으로 신기하다.”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다시 동조 현상이 일어나고 그대의 꿈이 내 꿈에 비친 뒤로…… 더는 악몽을 꾸지 않게 되었어.”
순간 무건이 무거워지려던 눈꺼풀을 들어 올려 진예를 바라보았다. 진예는 그 어느 때보다도 편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악몽.
어머니에게 목이 졸리고, 아버지를 죽이는 끔찍한 그 악몽.
그것이 사라지자 진예에게도 드디어 평온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무건은 왜인지 마음이 아픈 동시에, 무한히 안도하게 되었다. 그 악몽을 제가 대신 꾸게 된 건 신의 축복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무건은 이 축복이 계속해서 이어지길 바랐다.
부디 진예가 그 악몽의 행방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기를, 영원히 모르기를…….
“그렇다면 참으로 다행한 일 아닙니까.”
“그러게 말이다.”
혹시 눈치 빠른 진예가 그 악몽을 네가 가져갔느냐 물어볼까 봐 조마조마해하던 무건은 그녀의 대꾸를 듣고 안심했다.
하여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는데, 진예의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짐은 그간 믿지 않았다. 기적과 행운 같은 뜬구름 같은 이야기는 말이다.”
깊은 밤이라 나오는 단순한 주절거림일 수도 있지만, 무건은 그런 진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지그시 응시했다.
진예의 얼굴 한구석에 아주 편안한 미소가 자연스럽게 맺혀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언제나 신경이 예민하게 올라 있던 한때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그리고 달라진 것은 단지 그녀의 표정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짐이 악몽을 떨치게 된 건 아무래도 우리 영아와 나의 황후가 가져다준 행운이 맞는 것 같다.”
“폐하…….”
무건은 그녀의 말에 왜인지 심장이 거세게 죄어드는 기분이었다. 그런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진예가 그간 보여 주지 않았던 진심을 드러냈다.
“무건아, 기억하거라. 삶의 신념을 바꾸게 된 이는 너만이 아니라는 것을.”
무건의 시선이 문득 진예의 손에 가 닿았다. 그곳엔 달빛을 받아 희미하게 빛이 비치는 옥가락지가 있었다.
언젠가 신념을 함께해 달라며, 그녀에게 내밀었던 그 물건이.
“이 진예 또한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러니 그녀의 이 말은, 고백이었다.
“네가, 연무건이라는 사내가 곁에 있어서…….”
연모한다는 단어도 없는, 투박하기 짝이 고백이었다. 그러나 묵직한 울림을 품고 다가온 그 언어가 그녀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달콤한 말임을 무건은 너무나 잘 알았다.
이상의 것은 듣지 않아도 되었다.
진예라는 여인은 연무건을 사랑한다.
또한 반려로서, 영원히 함께할 동반자로서 누구보다도 신뢰했다.
그 어떤 것이 갈라놓으려 해도 결코 깨지지 않을 견고한 신의가 지금의 그들을 하나로 묶어 주고 있었다.
무건은 어쩐지 목이 메었다.
그녀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이때까지, 늘 얼음송곳 위에 서 있는 듯한 초조감으로 제대로 쉰 적 없던 제 마음도 이제는 안식을 취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그는 진예의 중얼거림에 대답해 주는 대신 둥근 어깨를 가만히 감쌌다.
진예와 영. 제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의 존재를 느끼며 무건은 누구에게 향하는지 모를, 아무도 듣지 못할 제 소망을 속으로 읊었다.
영원히 행복한 꿈만 꾸시기를.
나의 황제 폐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