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박, 자박. 두 사람의 발소리가 깊은 밤, 달빛이 흐르는 고요한 황궁 안에서 작게 울렸다. 정곡을 찌르는 말에 진예가 답을 유보하자 무건이 재차 물었다.
“동궁으로 천천히 보내면 되는 일 아닙니까.”
“황실의 법도는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
진예의 답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조용히 웃은 무건이 손을 잡아 왔다. 마침 침전의 동쪽 문 앞이었는데, 그가 황궁 후원 방향으로 진로를 틀어 그녀를 이끌었다.
“일단 알겠으니 오늘은 봉아궁에 들어 주시면 아니 되십니까? 본 후, 폐하께서 적어 주신 맹자도 벌써 서른 번은 더 읽었으니 칭찬 좀 듣고 싶습니다.”
갑자기 이 달밤에 왜 찾아와서 한 시진이나 기다렸나 했더니 이거였나 보다. 진예는 무건의 단순함에 오늘도 하, 웃었다.
“결국 목적은 그것이었느냐.”
“예, 합궁을 하고 싶습니다.”
“합궁……이라니.”
민망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에 진예가 뒤를 돌아보았다. 내관들과 궁인들은 전혀 못 들었다는 듯,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따라오는 중이었다.
그 반응에 무건이 잠시 뭔가, 싶어 하다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같이 자고 싶, 아니, 영아랑 셋이서 말입니다. 지금 무슨 음흉한 생각을 하신 것입니까?”
본인이 먼저 음흉한 단어를 써 놓고서는 무건이 순직한 척을 했다. 그에 진예가 미간을 슬쩍 좁혔다. ‘이게?’ 싶었던 것이다.
아침부터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유혹을 해 댔던 그의 모습을 보면 누가 저 합궁이라는 단어를 두고 ‘그런’ 쪽으로 상상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진예는 책을 받아 들고 뜬금없이 불타오른 그때를, 그때 무건의 눈빛과 몸짓을 기억했다.
반투명한 천개 너머로 햇볕이 쏟아지는 침방 안에서, 연무건은 그 어느 밤보다도 열정적이었다.
그러나 주변에 사람도 많은 데다, 밖인 터라 예의 음흉한 단어 하나 가지고 실랑이를 벌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억울했지만 진예는 적당히 넘겼다.
“……아무 생각 안 했다.”
그런데 무건이 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정말이십니까.”
괜히 목소리도 엄숙하게 깔고. 진예가 그에 톡 쏘아 주었다.
“당연하지 않으냐. 황후는 짐에게 대체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인가?”
“글쎄요, 그간 너무 격조했다?”
“…….”
왜인지 뼈가 있는 말을 읊으며 무건이 후원의 문턱을 넘으라며 기다려 주었다. 진예가 그 안으로 발을 들이자 무건이 봉아궁의 후원으로 건너가는 쪽문을 찾아갔다.
곧 내관들이 오래된 나무 문을 열며 봉아궁으로 향하는 길을 터 주었다. 진예는 이번에도 거부하지 않고 봉아궁의 후원으로 넘어갔다.
무건은 억지로라도 진예가 오랜만에 제 궁에 찾아온 것이 좋은지 방금 전보다 밝아진 목소리로 말을 붙였다.
“이리 후원만 건너면 되는데 황궁으로 불러 주시지도 않고, 그렇다고 봉아궁으로 걸음하지도 않고 계시지 않습니까.”
진예는 묵묵히 듣다가 무심한 척 물었다.
“하여 서운하느냐.”
“바빠서 그러신 줄은 아니 재촉할 수 없는 것이 난처할 따름이지요.”
그렇지만 무건도 착각하는 것이 있었다.
말 그대로 ‘척’일 뿐이지 진예는 그에게 진짜로 무심한 것이 아니었다. 제 나름대로, 무건의 말대로 바쁜 와중에도 주의를 기울여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무건에게도, 영에게도. 사실 그 모든 업무를 제쳐 놓고 진예에게도 그들이 가장 중요했다.
아무래도 그 사실을 지금이라도 제대로 알려 주어야 할 성싶었다.
진예는 자신을 침전으로 이끄는 무건의 손을 꽉 쥐었다. 그러자 무건이 발걸음을 늦추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직 무슨 이야기를 할지 짐작하지 못하는 그의 표정은 묘했다. 무건의 얼굴에 비치는 감정이 무엇인지 갈피를 잡기 위해 진예가 그를 유심히 살폈다.
약간의 서운함.
그렇지만 견뎌 내겠다는 의지.
이전이라면 무건의 그런 태도에 안심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썩 기껍지 않았다.
어째서 그는 늘 인내하려고만 하는지.
스스로가 약자라고, 부족하다고만 생각하는 무건은 진예 옆에서 제 맷집만 부풀리고 있었다.
무건이 이렇게 된 데에는 자신의 탓이 없다고는 못 할 터였다. 그녀도 언제까지나 제 마음을 숨기기만 해서는 무건의 불안을 해소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아직은 무건처럼 제 전부를 쏟아 내면서 부딪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진예는 자신의 뒷말을 기다리는 무건을 쳐다보지 않고, 오늘 박 태감이 틈틈이 다가와 보고했던 말들을 머릿속에서 더듬었다.
“오늘 기침은 묘시에 하고, 일어나자마자 영아를 데리고 조반상을 든 뒤에 잠시 태의원에 들러서 미마이를 보러 갔다고 들었다.”
태감은 집무를 보면서 제가 하는 말을 대체 듣기는 하고 있느냐는 표정으로 전했지만, 그녀는 오늘 무건이 뭐 했는지 정도는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듣고 무건은 놀란 듯 발을 멈췄다. 진예는 모르는 척 뒷짐을 지고 계속 침전 쪽으로 걸어갔다.
홍등을 들고 그녀의 뒤를 쫓아오던 내관들이 무건을 지나칠 때가 되어서야 그가 진예의 옆으로 다시 바싹 붙었다. 그에 진예가 마치 시를 외우듯이 느긋하게 무건의 이후 일정을 짚었다.
“돌아와서는 서재에 들어 삼경을 읽고 한 권 베낀 뒤에, 점심을 들고 영아를 데리고선 봉아궁 화원에서 천천히 말을 타다가 활 연습을 했다지?”
“진예……?”
어찌 그리 다 아느냐는 의문이 담긴 목소리가 짧게 그녀를 불렀다. 어느새 침전 문을 통과한 진예는 봉아궁 침전 앞의 낮은 층계를 발로 밟으며 물었다.
“활은 열 중에 대략 여덟아홉 개 정도 맞힐 만큼 실력이 늘었다고?”
침전 문이 열려 자연스레 그 안에 들어가는데, 무건은 그녀의 말이 그리도 의외였는지 앞에 멈춰 서서 머뭇거렸다. 진예가 안 들어오고 뭐 하냐는 양 돌아보자 뒤늦게야 따라붙으면서 그가 겨우 제대로 된 질문을 던졌다.
“제 거취를 전부 보고받고 계시는 겁니까?”
“하면 짐이 황후가 무얼 하는지도 모를 만큼 정녕 아무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가.”
영이 있을 방으로 가기 위해 행랑을 건너는 진예의 발걸음이 조금 급해졌다. 무건은 그런 그녀를 졸졸 쫓으면서도 무얼 말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달싹였다.
“매일 지켜보지는 못해도 이야기는 듣고 있다.”
혼례를 올린 이후 태감은 궁금해하는 진예를 위해 아침, 점심, 저녁 하루에 세 번 정도 무건이 무얼 하는지 소상히 알려 주었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 진예도 무건에 대한 것만큼은 투덜거리거나 거르지 않고 전부 들었다.
무건의 황궁 생활은 숨길 것도 없이 투명하고 단조로운 편이었다. 봉아궁을 벗어나는 일은 거의 없었고, 가끔 진예와 말이 안 통해 저를 찾아오는 대신들이 있으면 짧게 대화를 나누고 적당히 돌려보낸다 들었다.
주요 관심사는 제 딸과 아들 같은 미마이, 그리고 자기 계발 정도. 권모술수를 부리는 이가 아니다 보니 진예도 무건이 하는 일에 딱히 신경 쓸 일이 없었다.
황궁의 평화엔 무건의 존재가 분명 한몫한다는 의미다.
역시나, 무건은 진예의 이 사소한 관심에 목마른 것이 맞았던 듯 감개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영이 있을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진예를 뒤에서 와락 끌어안았다.
“그런 사람, 저 하나뿐인 게 맞습니까? 폐하의 이런 관심을 받는 사람 말입니다.”
딱히 좋아한다, 연모하다 이야기한 것도 아닌데 무건은 이미 들은 사람처럼 굴었다. 누가 보면 육갑 떤다 하겠지만 그는 세상 누구보다도 진지했다.
“그래, 맞다. 둘이 있으면 피곤할 테지.”
진예가 단언해 주자 무건이 그녀를 더욱 세게 조여 왔다. 숨을 크게 들이켜는 행위에도 떨림이 담겨 있었다.
한 아이의 아비가 되고, 황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황후가 되고 나서도 이 사내는 여전히 진예의 눈길 한 번에 가슴 떨려 했다.
세상에 이토록 순수한 이가 또 있을까 싶었다. 그가 욕심내는 것은, 욕망하는 것은 언제나 진예 하나였다.
그 하나를 너무 열렬히 탐하고 있지만, 이제는 진예도 차마 그것이 잘못되었으니 그만하라 할 수 없었다.
그를 보면서 진예는 자신과 목숨을 걸고 싸웠던 한 여인의 말을 이따금씩 돌이켜 보기도 했다.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이어 준 거라고 믿고 있다.〉
그 당시에도 진예는 그녀에게 아무런 반박을 하지 않았다.
명인의 인연이라는 걸 저런 식으로 해석할 수도 있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의지와 상관없이 정해진 인연 아래에서 발버둥 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명인이란 저주일 수밖에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어쩌면 연무건이라는 사내를 만나면서 진예는 조금씩, 조금씩 변화해 온 것일지도 모른다.
절대적으로 믿고 있던 그 견고한 신념을,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무건이 보이지 않게 무너뜨린 것이다.
그러나 무너짐이 언제나 끝을 의미함은 아니란 사실을 진예 또한 깨닫게 되었다. 그 잔해를 밑바닥으로 다져 내고 더욱더 확고부동한 탑을 세우게 되었으니까.
그러니 무건은 좀 더 자신감을 가져도 좋았다. 그는 지금껏 그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진예를 변화시킨 이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