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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꿈(7) (16/18)

물론 무건은 그런 취급에 불쾌해하지 않았고, 손길을 피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쓰다듬기 쉽게 고개를 살며시 숙여 주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진예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제가 이젠 좀 잘난 놈이 되긴 한 겁니까?”

그러자 진예가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는 듯이 단호하게 답해 왔다.

“당연하지.”

진예는 이어지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실어 말했다. 아무도 제가 뱉는 이 말들을 부정할 수 없을 거라는 양.

“누가 감히 대환의 황제인 이 진예의 하나뿐인 반려를 무시하겠느냐? 게다가 그대는 최초의 익재를 죽이고, 서식지를 수복한 환의 공신이 아닌가.”

“폐하…….”

그동안 진예는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무건을 칭찬한 적이 없었다. 하여 무건이 얼떨떨해하고 있는데, 진예가 덧붙였다.

“그리고 장차 황태자가 될 영이의 아비이기도 하지. 짐의 말이 틀렸느냐.”

“……맞습니다.”

그래, 맞다. 그들 사이에는 이제 사랑스러운 아이의 존재도 있었다. 진예와 무건의 관계는 단순한 명인자가 아니라 하나로 묶인 부부요, 가족이었다.

‘가족, 이라.’

순간적으로 떠올린 그 사소한 단어가 마음에 들어 무건이 속으로 곱씹고 있을 때였다. 진예가 정신 차리라는 듯이 숙어져 있던 무건의 얼굴을 손으로 붙잡고 들었다.

그녀의 손길이 시키는 대로 고개를 들어 정면을 본 무건에게 진예가 확고한 목소리로 전했다.

“누구의 앞에서도 고개 숙이지 마라. 눈을 피하지도 마라. 그대는 이 진예가 정한 유일한 반려이니, 그 또한 그대의 마땅한 의무다.”

마땅한 의무. 진예의, 아니 대환 황제의 반려로서 당연히 견지해야 하는 자세.

진예는 무건에게 그의 위치를 일깨워 주는 동시에, 다시 한번 확실히 한 것이었다. 연무건이야말로 자신의 하나뿐인 정인이라는 것을.

그러니 너의 불안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무건은 그에 제 얼굴을 받치고 있는 진예의 손을 감싸 쥐었다.

“정말 폐하는 못 당해 내겠습니다.”

무건은 진예와 함께 있을 때면 늘 경이롭기만 했다. 그의 눈에 그녀는 언제나 특별했다. 지금처럼 짧은 순간순간조차 진예는 아무렇지 않게 스스로의 대단함을 증명했다.

이런 진예를 누가 감히…….

무건은 악몽이 떠올라 미세하게 표정을 굳혔다가 몸을 틀어 진예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만지면 고운 백사로 흩어질 것만 같은 흰 손을 끌어당겨 손가락 끝에 입을 맞추었다.

“폐하께선 어찌 이리 강하시단 말입니까.”

그런데 단순 칭찬하는 이 말에서, 아니 저를 바라보는 부드러운 눈빛에서 진예는 부조화를 발견하고는 불쑥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더냐, 무건아.”

하지만 진예가 제 이름을 스스럼없이 불러 주는 것이 그저 좋아서, 무건은 고개를 흔들어 부정했다.

“없습니다, 아무 일도. 이 평화로운 황궁에서 무슨 근심이 생길 리 없지요.”

무건은 악몽 같은 건 전혀 두렵지 않았다.

다만 진예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언제나 확인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리고 진예는 오늘 그것을 제대로 알려 주었다. 무건은 그녀와 함께한 모든 날을 소중히 기억 속에 품고 있었지만, 오늘은 특히나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폐하의 옥안을 영원히 볼 수 있을 터인데.”

하지만 그리 말한 무건이 진예의 약지에 끼인 반지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아쉬운 소리를 했다. 이미 둘만 있어도 되는 시간을 한참 초과했다. 그걸 진예도 알고 무건도 알았다. 그 때문에 등 떠밀리듯이 말소리를 냈다.

“행여나 오늘 절 또 보고 싶으시거든 꼭 불러 주셔야 합니다.”

“그리하마.”

대딥은 이리하지만 진예는 부르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의 외로움에 무뎌 돌보지 않는 이니까. 거기에 이 잠깐의 일탈도 그녀에겐 일을 과중하게 할 일 중 하나였다.

무건은 어쩐지 쓴 물을 들이켠 듯한 표정이 되었으나, 순리대로 밖의 박 태감을 불러다가 점심상을 들이게 한 뒤 진예와 함께 마지막 여유를 즐기고 밖으로 나갔다.

인교전 앞에는 벌써부터 그의 수족인 홍 내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건은 왜인지 허해진 마음을 손에 들고 있는 책 하나로 가득 채우며 봉아궁으로 향했다.

“흐에에엥…….”

봉아궁에서는 영이 유모 품에 안겨 눈물과 묽은 타락죽을 반씩 섞어 먹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야 무건은 현실로 강제로 끌려 나왔다.

그는 눈가가 발개진 채 안 그래도 젖살이 안 빠져 통통한 볼이 더 부어 있는 영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아이가 얼른 아버지에게 오고 싶어 먹을 것도 무시하고 두 팔을 허우적거렸다.

“빠, 흐에, 빠아아.”

평소엔 짐승처럼 깨물어서 잇자국을 내 놓더니 몇 시진 안 보였다고 아비의 소중함을 알게 된 모양이었다.

무건은 아비 된 자의 도리로서 입가에 하얀 죽을 묻힌 영을 웃으며 안아 들었다.

“빠아.”

“그래, 영아 아바마마가 왔다.”

무건이 곁의 유모에게 손수건을 건네받아 영의 입가를 살짝 닦아 주며 아이를 둥기둥기해 주었다.

그를 닮아 눈동자에 짙은 갈색 빛이 도는 영의 눈은 창문을 통해 환히 들어온 하얀 햇살을 받아 어여쁘게 반짝였다.

존재 자체만으로 사랑스러운 아이의 모습에 무건이 볼에 입을 맞춰 주려 눈높이를 맞춰 주었을 때였다. 주변에 서 있던 내관들과 궁녀들이 깜짝 놀라 누군가는 무건을, 또 누군가는 영을 불렀다.

“황후마마!”

“황녀마마!”

영이 갑자기 잘 정돈된 그의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잡고 당긴 것이었다.

“빠……!”

그 순간에 집중하는 영의 표정은 통통한 볼살 때문인지 작은 악마 같았다. 게다가 어찌나 악력이 센지 마구잡이로 당기는 힘에 머리카락이 뽑혀 나가는 것 아닌가 싶게 아팠다.

무건은 제가 이번에도 거리 조절에 실패했음을 깨달았다.

육아 내공이 전무한 초보 아빠에게 시련은 필연인 걸까.

딸의 고약한 성질머리의 연원에 대해 무건은 오늘도 깊이 고찰했다.

결국은 결론이 안 났지만. 아니, 결론을 모르겠다고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었지만.

* * *

“폐하, 밤이 깊었사온데 그만 침전에 드시는 것이 어떠하시옵니까.”

어두움이 몰려와 기어이 등잔불까지 켜 놓고 상소문을 훑고 있을 때였다. 문득 들려오는 박 태감의 걱정 어린 소리에 진예가 고개를 들었다.

피곤함 때문인지 순간 눈앞이 흐릿하게 보였다. 제가 생각해도 요 며칠 무리했다 싶은 진예가 몇 번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무건에게 책 한 권을 가져다준 이후로 내내 정신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으니 피로가 쌓이는 것은 당연했다.

박 태감의 권유를 받아들이기로 한 진예가 밖을 향해 말했다.

“그리하겠다.”

그러고 일어나 문 앞으로 다가가자 천천히 문이 열렸다. 대기하고 있던 박 태감이 추운 날씨에 밖에 나가야 하는 황제를 위해 곧장 어깨 위로 겉옷을 걸쳐 주었다. 그러고는 뜻밖의 말을 전해 왔다.

“한 시진 전부터 편전 밖에서 황후마마가 기다리고 계시나이다.”

한 시진 전부터? 이야기를 들은 진예가 미간을 살며시 좁혔다.

“한데 어찌 진작 고하지 않았더냐.”

“마마가 방해되고 싶지 않으니 고하지 말라 하시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 시진 동안 황후를 밖에 세워 두는 것이 말이 되느냐.”

“송구하옵니다, 폐하.”

궁인들이 문을 열고, 그 사이로 무건을 발견한 진예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이제는 바깥바람이 제법 매서워졌는데, 겉옷도 걸치지 않은 무건이 기단의 계단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진예가 꾸짖는 눈으로 다시 태감을 쳐다보자 그가 송구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진예가 밖으로 유유히 걸어 나가며 마침 열린 문과 새어 나오는 불빛에 고개를 돌린 무건에게 한마디 했다.

“건방지게 편전 기단에 엉덩이를 대고 앉는 놈이 어디 있단 말이냐.”

반가운 마음도 있고, 염려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입에서 나온 말은 핀잔이었다. 이제는 진예의 화법에 익숙해진 무건이 일어나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폐하, 이제야 돌아가십니까.”

서운해하는 말도, 표정도 없이 무건이 그리 평연히 대꾸하자 진예가 눈썹을 슬쩍 치켜올렸다.

“이리 밤이 깊었는데 황후는 예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인가?”

“오랜만에 영아가 일찍 잠들었기에 폐하와 잠시 걸을 수라도 있을까 하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진예가 뒤에 있는 박 태감에게 손짓만으로 가마를 물리라는 뜻을 전하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무건이 자연스럽게 옆으로 붙었다.

진예가 황궁 침전 쪽으로 발길을 돌리며 제 아이의 소식을 은근히 떠보았다.

“영아도 이제 백 일이 지났으니 슬슬 밤낮을 구분할 줄 알게 되었나 보구나.”

“그래도 아직은 새벽에 깰 때도 있어서 잘 돌봐야 합니다.”

종종 무건이 낮에 데려오기도 하고, 진예도 업무를 일찍 마치게 되었을 때 찾아가 들여다보지만 봉아궁에서 품에 끼고 있는 무건보다는 아이에 대해 신경 쓰기가 어려웠다.

아쉬움도 있긴 했지만 이 또한 제위에 오른 자의 숙명 같은 외로움이었다.

그래도 영에겐 무건 같은 좋은 아비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진예는 아이가 정이 많은 아비의 곁에서 행복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황궁의 법도가 또 그리 녹록하지만은 않기는 했다.

“……곧 동궁에서 따로 살아야 할 터인데 아비 품이 그리 따뜻해서야 되겠느냐.”

아무리 늦어도 1년이 지나면 영은 궁인들에게 둘러싸여 슬슬 부모님과 떨어져 홀로 지내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무건이 종종 안 그러면 안 되냐고 은근히 떠보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제 품이 따뜻한 것이 문제입니까, 아니면 아이가 동궁으로 가는 것이 문제입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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