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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꿈(4) (13/18)

하지만 오늘은 괜한 말로 싸우고자 온 것이 아니었으니 진예는 너그러이 속아 주기로 했다.

“하여 위장군에게서 그 답을 얻었는가?”

“이제 막 이야기를 나누려 하였는데 폐하께서 걸음하셨습니다.”

그의 배짱이나 임기응변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일찍이 알아봤지만, 무건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참 잘했다.

진예가 저절로 비틀리려는 입술을 애써 현상 유지를 해 놓고는 옆에서 무척이나 곤란해하고 있는 위장군을 돌아보았다.

“짐이 때를 잘 맞췄나 보군. 위장군은 그만 가 보게.”

“예, 폐하.”

연무건과는 달리 거짓말이라고는 조금도 못 하는 위장군은 가슴이 들썩이는 게 다 보일 만큼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사람들이 멀찍이 떨어지고, 둘만 남자 진예가 먼저 연못가에 두 발을 딛고 섰다.

가을의 끝물이라 조금 서늘하긴 해도 물이 언 것은 아니라, 투명한 연못의 표면에 두 사람이 깨끗하게 비쳤다.

진예는 무건이 제 옆에 서는 것을 느끼며 괜히 넣어 둔 서책을 의식해 소매를 만지작거리다 말을 붙였다.

“그런 정세가 궁금하면 짐에게 직접 묻지 않고, 왜.”

“하면 어인 연유이신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계획을 말하면 그대가 앞장서겠다 할까 싶다만.”

“본 후도 이제는 침착함에 대해서 많이 배웠사오니 염려 놓으시지요.”

무건이 고개까지 숙이며 하는 말에 진예가 픽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연무건이?”

“…….”

침착함이란 단어랑 네가 어디 어울리느냐는 반문이었다. 무건도 말문이 막혔는지 이번에는 반박하지 않았다.

진예가 그런 그를 보고 슬쩍 눈을 휘다가, 거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가 궁금하다며 입에 올렸던 질문에 답을 내 주었다.

“주변국들에 환의 군사들을 파견해 서식지들을 없애 줄까 하는 중이다. 물론 그에 대한 대가도 받아 내야겠지?”

“……!”

별것 아니라는 양 흘러나온 소리였으나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무건이 눈을 크게 떴다. 놀란 그의 표정을 돌아보며 진예가 날렵한 입매로 매끄러운 호선을 그렸다.

“어찌 그리 놀라는가. 영아를 차기 황제로 키워 낸다고 황후의 입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기왕 황위에 올릴 거라면 천하일통의 꿈이라도 꾸게 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무건은 잠시 가슴이 죄어 오는 듯한 기분에 숨을 참았다.

천하일통. 말을 듣는 순간 확실히 진예의 배포는 제가 쉽게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싶었다. 누군가 방해하고 억제하지만 않는다면 그녀가 꿈꾸는 이상엔 한계가 없었다.

무건은, 당연히 진예가 걸음걸음을 모두 함께할 생각이었다.

“예, 마땅히…… 마땅히 그리해야지요.”

제법 감명을 받았다는 그의 반응을 본 진예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 황후도 내조를 잘해야 할 테지?”

내조……?

맞는 말이지만 막상 그 단어를 들은 무건이 민망해하던 차였다. 진예가 소매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빼더니 웬 책 하나를 꺼냈다.

노란 표지에 적힌 제목은 유교 경전인 맹자였다.

휙 던지듯이 건네는 그것을 얼떨결에 받아 들기는 했지만 무건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책과 진예를 번갈아 보았다.

“갑자기 이걸 어찌?”

그의 맹한 반응을 확인한 진예가 턱을 슥 들어 올리며 여유로운 어조로 답을 내놓았다. 어쩐지 마음이 즐거워 그녀의 입가에서 미소가 살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내 요즘 꿈을 꾸는데 하도 기이하여 미마이에게 물어보니 동조 현상 때문이라지 않느냐? 아마 그대가 꾸는 꿈이 짐에게도 비치는 것이겠지.”

무건은 여전히 뭔지 모르겠다는 양 눈만 크게 깜빡일 뿐이었다.

“그것이 맹자와 무슨 상관입니까?”

“스스로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도 기억을 못 하는가.”

진예가 반문하자 말하느라 살짝 벌어졌던 무건의 입술이 움찔했다.

이전엔 어떤 꿈을 꾸었었지?

진예의 악몽이 제 침방을 찾아든 이후로는 온통 그 생각으로만, 정확히는 그것이 주는 불쾌감으로만 머릿속이 가득 차 있었다.

이렇게 금방 잊어버린 걸 보면 이전의 꿈이 그리 특별하진 않았던 모양이지만 막상 질문을 받으니 마땅한 답을 내놓아야 할 듯한 압박감에 휩싸였다. 말을 하지 않으면 진예가 악몽이 제게 왔음을 알아차릴 것만 같아서.

하지만 정말 조금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상황을 피할 임기응변도 지어낼 수가 없어 무건은 결국 시인했다.

“……깨면 보통 잊어버려서 말입니다.”

한마디를 겨우 내놓은 무건은 일부러 진예와 눈길을 맞췄다. 혹여나 눈치채더라도 난 아무렇지 않다고 말해 줄 거였다.

하지만 그간 숨긴 것 때문에 실망하면 어쩌지. 저 얼굴에서 미소가 잠깐이라도 거두어지면.

그런 건 싫은데.

무건이 책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그렇게 힘이 들어간 팔과 어깨가 잔뜩 굳었을 때였다.

진예의 말에 맥이 풀린 무건은 하마터면 뒤로 넘어갈 뻔했다.

“꿈속에서 그대가 사서삼경을 읽고 있더군.”

“…….”

드물게 진예의 표정에서 장난기가 배어났다. 부끄러움에 무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의지에 반해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자 그가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툭 떨궜다.

“그리도 똑똑해지고 싶었더냐.”

“아니, 그게.”

제길, 연무건…….

무건은 속으로 스스로를 욕했다.

왜 그런 이상한 꿈을 꿨지? 그리고 대체 왜 기억도 못 하고 있었지? 그야 기억 못 할 만큼 하찮은 꿈이 맞긴 한데…….

단지 생각이 읽힌 게 아니라 제 머릿속 구조까지 그녀 앞에 훤히 드러낸 기분이라 한없이 창피했다. 진예도 제 황후가 어찌 이리 단순한 인간인가 싶지 않을까.

그러는 사이 진예가 선명한 웃음소리를 내며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영아의 아비로서 아주 바람직한 자세다. 하여 짐이 맹자에 이리 직접 주해를 달아서 가져왔느니라.”

‘직접’이라는 말에 무건이 상념에서 확 빠져나왔다. 그가 고개를 살며시 들자 진예가 눈썹을 들썩이는 게 보였다.

어서 안 펼쳐 보고 뭐 하냐는 신호처럼 느껴져, 무건이 손에 쥔 책의 표지를 살며시 들쳤다. 그러자 정갈하지만 힘 있는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책 안에는 친절하게 주해도 달려 있었다.

전혀 예상 밖의 선물을 받은 무건이 방금 전의 부끄러움은 순식간에 잊고 멍하니 진예를 바라보았다.

“실로 이걸 직접 쓰셨단 말씀이십니까?”

진예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쁜 와중에 시간을 꽤 들여 적은 것인데, 무건의 반응이 제법 만족스러웠다. 무건의 눈빛이 감동에 젖은 것이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짐의 손으로 직접 적었다.”

“저를 위해서요?”

“그래, 그대를 위해…….”

뒷말은 무건에게 삼켜졌다. 물러날 틈도 없이 다가온 그가 단숨에 입을 맞춰 왔다.

저도 모르게 휩쓸렸던 진예는 허리를 안아 당기는 힘에 정신을 차렸다. 그렇지만 무건이 억센 손으로 어깨를 쥐며 몸을 붙여 와 떨어지지 못하도록 했다. 도톰한 입술을 벌리고 들어온 진득한 혀는 그녀의 것과 부드럽게 엉켰다.

할짝, 하는 소리가 작게 귓가를 자극하자 진예가 눈을 꽉 감았다. 열기를 품은 숨이 입 안에서 섞이면서 하얀 뺨에도 살며시 홍조가 돌기 시작했다.

사이로 새어 나오는 미약한 숨소리, 떨어졌다 붙기를 반복하며 젖어 가는 입술, 그리고 감질나는 혀 놀림까지.

이제 무건은 어떻게 해야 진예가 자신을 원하게 될지 잘 알고 있었다.

진예의 입술과 눈꺼풀에 미약하나마 떨림이 일었을 때, 무건이 비로소 입술을 물렸다. 침으로 반들반들해진 탓에 투명한 실이 이어졌다가 이내 떨어졌다.

진예는 평소보다 짙은 무건의 눈동자를 보다가 숨을 작게 삼켰다. 마치 금세라도 그녀를 벗기고 몰아붙일 것만 같은 욕정이 드러나는 눈빛이었다.

상태가 제법 위험해 보였다. 하여 진예는 무건의 어깨를 손으로 밀어 보았지만, 눈앞의 짐승은 밀쳐지기는커녕 되레 허리를 더 옥죄어 왔다.

“진예…….”

단지 이름만 속삭여 왔을 뿐이지만 목소리에 밴 희열이 아직 안개가 걷히지 않은 이른 아침에 실로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제야 진예가 주변의 내관과 궁인, 금군들을 곁눈질로 살피니 하나같이 고개를 숙이거나 옆으로 돌아 시선을 멀리 돌리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야 아침부터 그를 찾아온 건 자신이 맞기는 하지만…….

‘이런 그림이 그려질 수 있다고도 예상하긴 했었는데.’

그래도 겨우 책 한 권 건넸을 뿐인데 그 예상이 이렇게 딱 들어맞을 줄은 몰랐지. 자신이 이번에도 무건을 너무 과소평가했다.

그야 매사 그녀의 생각을 간단히 뛰어넘는 무건의 탓이 없지는 않겠지만서도.

진예는 난처해하는 어투로 일단 그를 마주 보고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다 보는 앞에서 무얼 하는 것이냐. 실로 민망하다, 황후.”

하지만 당연히 무건은 기세를 가라앉히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저도 감정을 주체 못 하겠다는 양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초조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왜 이런, 도발을 하십니까?”

말하는 중간에 참지 못하겠다는 양 뜨거운 한숨마저 내보냈다.

진예는 이놈이 날뛰는 건 어쩔 수 없는 수순이겠구나 하고 느끼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건 진짜로, 도발이라고 칭하기엔 너무 뜬금없지 않나?

사실 진예는 아직도 이 남자의 감정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안 됐다.

“……고작 책 한 권 건넨 것이 그대에겐 도발로 느껴진다니 놀랍다.”

연무건이라는 사람엔 밑천이 있을지언정 그의 사랑엔 밑천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진예의 말에 무건이 눈을 휘어 웃으며 물었다.

“해서, 왜 맹자만입니까? 나머지는 어딜 가고요.”

“꿈에서 그대가 읽고 있던 게 맹자였어.”

“그럼 꿈에서 중용을 읽고 있으면 그도 적어 주실 겁니까?”

“황후가 원한다면야…… 못 해 줄 것은 없다만.”

대답하면서 왠지 다음 말이 어떤 것일지 예상이 됐다. 그것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꿈을 꾸러 가고 싶습니다,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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