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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꿈(2) (11/18)

그러고 무건은 서둘러 제 아이가 있는 방으로 가려 행랑을 건넜다.

잠시 뒤, 아기 특유의 고소한 냄새가 가득한 방 안으로 들어선 무건이 살며시 영이 잠든 침상 앞으로 다가갔다.

이제 생후 다섯 달이 지난 작은 아기는 저를 종일 봐주는 유모의 품에 꼭 안긴 채 얌전히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에 무건은 뜨거운 기운이 가슴속에 고임을 느꼈다. 그의 입술이 끝이 올라가면서 자연스레 호선을 그렸다.

무건은 내관들에게 눈짓해 문을 닫게 한 뒤 침상에 기대어 앉았다. 자신의 숨소리, 옷깃 스치는 소리에 아이가 깰세라 단순히 고개를 까딱하는 행위 하나까지 지극히 조심스럽게 행했다.

이제 밤에 익숙해진 영은 곤히 잠들었다. 그렇지만 무슨 꿈이라도 꾸는지 입을 오물오물하는데, 무건은 작은 입술이 움찔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제 딸이라고 믿기지가 않을 만큼 너무 작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자는 동안에도 꼼질대는 손이나 발은 제 손가락 하나 길이밖에 안 되면서, 속눈썹은 벌써부터 진예를 닮아 눈송이라도 내려앉을 만큼 길었다. 거기에 통통하게 오른 젖살 사이로 보이는 턱은 어찌나 뾰족한지.

보면 볼수록 자신보다 진예를 닮은 구석이 더 많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크면 진예만큼은 아니더라도 환에서 이름난 미인이 충분히 될 수 있을 터였다.

한데 너무 뚫어져라 보고 있었던가. 시선의 무게라도 느낀 것인지 아이가 몸을 뒤채다가, 저를 안고 있는 유모까지 기어이 깨워 버렸다.

유모가 잠결에 아이의 등을 두드리며 재우려고 했으나 아이가 오히려 바동바동하자 눈을 반짝 떴다. 그러고는 바로 무건과 눈이 마주치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무건은 큰 소리를 내지 말라는 의미로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대고는 혹 아이가 다시 잠들까 싶어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잠시 뒤 영이 몸을 휙 뒤집더니 떴는지 감았는지 모를 눈으로 무건을 발견하고는 그를 향해 팔을 허우적거렸다.

“우웅, 우, 빠…….”

그제야 무건이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두 팔을 뻗어 아이를 품에 안았다.

“그래그래, 영아.”

자다가 일어나서인지 아이의 고소한 체향이 한층 짙어져 있었다. 무건은 제 눈에는 한없이 예쁘기만 한 영을 품에 안고서 벽에 기대어 앉았다.

아이를 보러 오길 잘했다. 악몽으로 인해 뒤죽박죽이 되었던 머릿속에 드디어 안정이 찾아온 느낌이었다.

하여 찰싹 달라붙어 와 다시 꾸벅 졸려고 하는 아이를 안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홍 내관이 다가와 물었다.

“혹여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시옵니까, 마마.”

무건이 고개를 들어 홍 내관을 올려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몹시 걱정된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오랜 세월 궐에 머문 만큼 노련한 그는 상전의 기분을 알아보는 데는 귀신이었다.

하지만 설령 홍 내관이라 해도 속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아 무건은 도로 잠든 영을 바라보며 속삭이듯 이야기했을 뿐이었다.

“아니, 영아가 보고 싶어서 잠이 깬 것뿐이야.”

“…….”

홍 내관은 미심쩍어하는 눈초리를 했지만 무건은 아랑곳 않고 영을 들여다보았다.

동그랗고 넓은 이마와 살짝 솟은 부들부들한 머리카락이 너무 예뻐서 몇 번이고 뽀뽀라도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가 이미 잠든 바람에 그저 가슴 저릿한 기분만을 견뎌 내야만 했다.

너무 귀여워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이렇게 수시로 보러 오는 것도 반년만 지나면 불가능했다. 만 한 살이 되면 아이와 따로 살게 된다고 했으니까 말이다.

무건은 입 속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내 너를 어찌 떼 놓을지 모르겠구나, 영아.”

정말 들릴 듯 말 듯 하게 속삭였는데, 아이가 문득 몸을 돌려 무건 쪽으로 더 깊게 파고들었다.

“빠아, 마…….”

잠든 와중 아빠 엄마를 부르며 옹알이하는 모습에 무건은 눈을 휘어 웃었다. 부모가 되면 본래 이런 것인지. 세상에 이렇게 사랑스러운 생물이 또 있을까 싶었다.

……또 있을 리가 없지.

아비의 마음으로 제 딸이 가장 똑똑하고 어여쁘다 생각하던 무건이 영의 작은 손을 감싸 쥐었다.

제 손바닥의 반밖에 안 되는 작은 손이 꼼질거리는 것을 느끼며 그가 바닥에 앉은 그대로,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던 홍 내관이 어쩔 수 없다는 양, 가만히 이불을 덮어 주었다.

아이를 품에 안은 무건은 다행히 날이 밝을 때까지 더는 악몽을 꾸지 않았다.

* * *

짹짹…….

인기척이 나자 땅에 얌전히 앉아 있던 참새들이 포르르 날았다.

새벽에 잠시 내린 비로 아직 땅이 축축했다. 무건은 서늘한 공기를 느끼며 황궁의 후원과 이어지는 봉아궁 후원에 발을 들였다.

가을 내내 떨어진 낙엽을 밟으며 실안개가 낀 후원을 가로지른 무건이 가운데의 작은 섬 위에 누각을 세워 둔 너른 연못 근처에서 멈춰 섰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멀리 물린 채 살며시 떨리던 손을 모아 뒷짐을 지었다. 한동안 정박해 둔 배가 홀로 동동거리고 있는 것만 무심히 바라보던 그가 마침내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자 살며시 고개를 돌렸다.

단정하게 관모를 올리고 흐트러짐 없이 옷을 여민 위장군이었다. 그가 무건에게서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서서 몸을 낮췄다.

“소장, 황후 폐하의 부름으로 귀한 곳에 걸음하였나이다.”

언제 봐도 듬직한 사내가 격의를 갖춰 인사를 해 오자 무건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바쁜 때에 부른 것은 아닌가 모르겠군.”

입에 발린 듯 건네는 말이었지만 위장군은 그 고지식한 성격답게 담담히 대꾸해 왔다.

“그렇지 아니하나이다. 아직 일과를 시작하기 전이오니 괘념치 마시옵소서. 그보다, 이 시각에 어인 부름이시옵니까?”

서둘러 본론으로 화제를 전환하고자 하는 그의 반응에 무건이 그제야 완전히 몸을 돌려 위장군을 마주했다.

근래 황후인 무건과는 그리 엮일 만한 없었던 위장군은 어떤 의도로 부른 것인지 짐작이 안 돼 의문 어린 표정을 지었다.

한데 무건이 운을 띄우는 순간, 대번에 곤란해하는 낯빛이 되었다.

“그대가 선황의 중랑장 중 한 명이었다 들었네. 하면 선황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들여다보았었겠다 싶어 물을 것이 있어 불렀어.”

갑자기 선황의 이야기가 화두로 나오자 위장군이 시선을 피하려 눈을 내리깔았다.

무건의 말대로 위장군은 선황이 죽기 전까지 그의 최측근이었다. 선황에게 대단한 충정을 받쳤느냐 묻는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정도이긴 했다.

그렇지만 충분히 선황을 죽일 때 같이 죽일 수 있었을 텐데 진예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현재의 지위로 올려 그의 진정한 충성을 얻었다.

하여 지금 무건이 꺼낸 화두가 위장군에겐 몹시 불편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진예를 배신하는 행위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선황대의 일을 황후 폐하께서 어찌…….”

썩 반기지 않는 위장군의 마음을 읽었지만 무건은 제 말을 거두지 않았다. 이 정도로 거둘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위장군을 후원까지 불러내 독대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물을 것이 있네.”

“무엇을 하문하려 하시는지는 혜량하기 어려우나, 황제 폐하와 선황에 관련한 것이라면 함구령이 내려졌기에 감히 소장의 입에 올릴 수 없나이다.”

“그 사실은 또한 이미 알고 있어.”

무건의 말에 위장군은 어찌해야 할지 몰라 난처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평소 남이 이렇게 변칙적으로 나오는 데는 안 그래도 면역이 없는데,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멋대로 등을 보이고 물러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무건은 더더욱 추궁할 상대로 그를 선택한 것이었지만.

무건이 위장군의 무거운 입을 열기 위해 본격적으로 압박을 가했다.

“함구령이 내려졌으니, 내 이리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위장군을 금원에 부른 것이 아니겠나?”

“폐하…….”

무건이 황후로 책봉되면서 더는 혼자 있을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차라리 이렇게 사방이 훤히 뚫려 있고, 누구도 함부로 허락 없이 발을 들일 수 없는 금원이라면 말이 새어 나가지 않을 것이었다.

다만 융통성이 조금도 없는 철저한 원칙주의자인 위장군의 입을 열기란 쉽지 않다는 것도 무건은 이미 알았다.

하여 그에게 면죄부를 줄 만한 상황을 열심히 조성했다.

“그대 입으로 전부 말하라는 것이 아니라 본 후의 질문에 그렇다, 아니다 답만 하면 되는 것이야.”

“…….”

“그도 아니 되는가?”

이 상황 자체가 견디기 어려운 듯 위장군은 입을 꽉 다문 채 잠시 숨을 멈췄다. 흔들리는 눈으로 점점 한 걸음씩 거리를 좁혀 오는 무건을 바라보다, 그는 결국 자리에서 완전히 부복했다.

젖은 바닥을 두 손으로 짚고 그가 마지막 방패로 진예를 끌어들였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황제 폐하께서는 무엇도 알기를 원치 아니하실 것이옵니다.”

무건은 이 또한 예상했다는 듯, 위장군의 약한 부위를 파고들었다.

“그대에게도 명인자인 아내가 있다 들은 바 있네.”

소문에 위장군은 그 투박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굉장한 애처가이자 공처가라는 말이 자자했다.

그래서인지 무건이 아내의 이야기를 꺼내자 위장군의 미간이 좁혀졌다. 말려들 수밖에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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