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의 꿈
진예는 아이를 낳고 난 지금도 여전히 제 건강에는 아무 이상도 없다고 자신했다. 이제는 죽어 버린 진평이 생전에 잔병치레가 잦았다는 걸 떠올리며 마치 그의 건강까지 제가 끌어다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한 때도 있었다.
그런데 박 태감의 잔소리와 무건의 우는소리에 결국 해산을 한 지 꽤 지난 현재도 이틀에 한 번씩 아침마다 태의가 문안 인사를 들었다.
말이 문안 인사지, 당연히 진맥을 했다. 그러고는 진예가 보기엔 썩 필요 없어 보이는 침도 놓고 갔다.
그래도 오늘은 태의가 순순히 —사실은 진예의 눈총에 알아서 횟수를 조절하는 것뿐이었지만— 물러나려는데, 진예가 먼저 검은 발 너머에서 그를 붙잡았다.
“잠깐 멈추어라.”
아니, 사실은 태의가 아니라.
“미마이.”
태의 옆에 있는 미마이를.
갑자기 호명이 되자 미마이가 흠칫하는 것이 발 건너편에 있는 진예에게도 다 보였다. 아이가 슬쩍 태의의 눈치를 살피는 것에, 진예가 덧붙였다.
“태의는 나가 보아도 좋다.”
말만 나가 보아도 좋다는 것이지 사실상 축객령이었다. 태의는 미마이만 남으라는 진예의 의중을 궁금해하면서도, 굳이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목숨을 버릴 필요는 없었으므로 순순히 물러났다.
“예, 그럼 이틀 뒤에 다시 들겠나이다.”
그리 말하고 태의가 뒷걸음을 치며 밖으로 나가자 진예가 박 태감을 제외한 나머지도 물렸다.
그렇게 방을 비운 뒤에야 진예가 미마이를 제 앞으로 불러들였다.
“이리 오너라, 미마이.”
“예, 예…… 폐하.”
종종걸음인지 무릎걸음인지 모를 어설픈 자세로 미마이가 비틀거리며 다가오자 진예가 발 너머에서 작게 웃었다.
“어찌 그리 긴장을 하는 게냐.”
“그것이, 천자의 앞인지라…….”
제가 생각해도 민망했던 미마이가 양 볼을 발그레하게 붉혔다. 진예는 아이가 진정할 수 있도록 부러 가능한 한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겁먹지 아니하여도 된다. 내 물을 것이 있어 남으라 한 것에 불과하니.”
“하문하소서.”
태의를 따라 가끔 한 번씩 미마이도 문안을 왔었는데 그간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었다. 그러나 미마이는 그 의외성에 의문을 떠올릴 정신도 없었다.
그저 그녀가 무얼 말할지 두렵기만 했다. 혹시 이제는 봉아궁에 드나들지 말라고 하려는 건가……. 그도 아니면 아주아주 가끔 마주치는 서엽에 대해 물어보려는 건가. 그런 생각에 왠지 손까지 달달 떨리던 찰나였다. 다음에 이어지는 말에 순식간에 맥이 풀렸다.
“짐이 가끔 꿈을 꾸는데, 최근엔 평소 꾸던 것과 달라져서 말이다.”
“달라졌다 하심은…….”
설마 태몽이라도 꾸시나.
무건이 최근 진예가 힘들어하는 게 싫다며 둘째는 나중에 갖거나 안 가져도 좋다고 말했었으나, 워낙 짐승과이니 어쩌겠나 싶었다.
그러나 그 생각이 무색하게 이번에도 보기 좋게 예상이 빗나갔다.
“악몽을 자주 꾸는 편이었는데 최근 그것들이 사라지고 가끔 꾸는 꿈 내용이 심히 엉뚱하니, 이유가 아무래도 동조 현상 때문이 아닌가 싶어 묻는다. 동조 현상 중에 이런 것도 있느냐?”
‘아…….’
미마이는 무슨 말인지 맥을 바로 짚었다.
진예와 무건이 각인을 하면서 두 번째 동조 현상이 일어났다. 목숨이 이어짐과 동시에 다시 무언가를 공유하게 된 셈이다.
하지만 동조 현상에 대한 이야기가 이리 늦게 화두로 나온 건 두 사람 모두 처음엔 무엇을 공유하게 됐는지 몰랐기 때문일 터였다.
미마이도 잠시 잊고 있었지만, 두 달 전쯤인가 무건에게서 들은 어느 꿈 이야기가 곧장 연상되었다.
물론 무건이 예의 이야기를 입에 올렸을 때는 이런 어조가 아니었다. 진예보다 훨씬 심각했고, 또한 어두웠다.
그런 거구나.
미마이는 ‘이런’ 현상을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지만 진예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동조 현상 중에 분명 있는 일이옵니다.”
아주 예전에 같은 꿈을 꾸는 각인자들을 본 적이 있긴 했기 때문이다.
미마이의 답에 내내 무엇 때문에 그런 꿈을 꾸는지 몰랐던 것이 겨우 해결되자 진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답을 내주어 고맙다, 미마이.”
“황공하옵니다.”
미마이는 뒷말을 덧붙일까 하다가 이대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무건이라면 진예에게 제가 지금 떠올리고 있는 사실을 결코 알리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마이의 복잡한 속내와 다르게 진예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어딘지 즐거워 보였다.
옆에 조용히 서 있던 박 태감에게도 이런 진예의 모습은 거의 처음 보는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얼굴에 호기심이 어렸다.
진예는 그 엉뚱한 꿈의 실체를 확실히 알게 됐으니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이내 박 태감을 돌아보았다.
“박 태감, 내 서책을 한 권 써야겠으니 내관들에게 종이와 먹을 들이라 하라.”
“예, 폐하.”
“미마이, 너도 그만 돌아가 보고.”
“물러나옵니다.”
편전의 문이 열렸다 닫히기를 두 번 반복한 뒤 진예가 원하던 흰 종이와 먹, 벼루가 방에 들어왔다. 진예는 두껍게 쌓여 있는 종이들을 한번 힐끗하고는, 서궤 위에 검은 가죽 받침을 깔고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깨끗한 종이를 펼쳤다.
그러자 옆으로 궁인이 다가와 그녀의 소매를 조심히 걷어 주었고, 진예는 벌써 수백 번은 봐서 외워 버린 책의 내용을 머릿속에서 꺼냈다.
날카로우면서도 힘 있는 필체로 그녀가 기억을 따라 종이를 채워 나갔다. 진예의 도톰한 입가에는 단아한 미소가 지어진 채였다.
어느 햇살 좋은 아침에 시작된 소소한 소일거리였다.
* * *
창밖으로 조금 서늘해진 바람이 불어오는 깊은 밤이었다. 눈을 감은 무건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몸을 움찔하다가 손에 바짝 힘을 주었다.
식은땀으로 목뒤가 젖어 드는 와중에, 손등의 뼈가 바짝 불거졌다.
누군가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이제는 한 손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익숙해진 얼굴의 여인이었지만, 또한 무건에게는 너무나 낯선 여인이.
죽어, 죽어, 죽어!
앙칼진 목소리로 그리 외치면서도 투명한 눈물을 뚝뚝 흘려 대는 여자는 어찌나 안색이 창백한지 몰랐다.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그래, 마치 죽은 자처럼.
그렇게 생각한 순간 여인의 얼굴 한쪽이 일그러지기 시작하더니 검게 썩어 들어갔다. 무건은 그 아래에서 그녀를 떼어 놓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쉽지 않았다.
날카로운 손톱이 점점 목을 거세게 압박해 왔다. 곧 목뼈를 부러뜨릴 듯이 조여 오는 것에, 무건이 손을 뻗어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밀쳐 냈다.
콰당, 하고 거센 소음과 함께 침대에서 벗어나자 보이는 건.
보이는 사람은…….
방금 전의 낯선 여인이 아니라 자신의 늙은 어미였다. 그 순간 무건은 놀라 번쩍 눈을 떴다.
“헉, 허억…….”
무건은 답답한 목을 감싸며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흔들리던 시야에 달빛이 희게 비친 천장이 보였다. 봉아궁에 있는 그의 침전이었다.
뒤늦게야 꿈에서 깼다는 걸 깨달은 무건은 한숨을 내쉬며 상체를 일으켰다.
진예와의 각인이 시행되고 며칠 뒤부터 희미하게 시작된 악몽은 점점 선명해지고, 심지어는 그의 것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오늘은 마침내 그가 이곳 황궁에 오기 전에 같이 살던 어머니가 꿈에 비쳤다. 찝찝하기 짝이 없는 꿈이었다.
‘어머니…….’
황도에서 먼 변방의 사가에 있을 무건의 어머니는 비록 글도 읽을 줄 모르는 평범한 이였지만, 일찍 횡사한 아비 없이 혼자서 그를 키운 사람이었다.
황궁에 들어온 시점부터 사가와의 연을 끊어야 했으니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해서도, 알아서도 안 되는 일임에도 늘 그리운 존재.
그런데 이러다가는 얼마 안 가 처음부터 어머니가 제 목을 조르는 꿈을 꾸게 되는 게 아닐지 두려워질 지경이었다.
〈아마 그건, 황제 폐하께서 꾸시던 꿈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악몽이 시작되고 얼마 안 되었을 때는 일어나서 불쾌한 기분만 남고 무슨 내용인지 기억나지도 않았었다.
하지만 꿈은 반복되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느 때엔 제가 목이 졸리는 입장이었고, 또 어느 때는 제가 눈앞에서 누군가를 목을 베 죽이거나 혹은 그렇게 죽는 걸 지켜보는 입장이었다.
주기는 처음엔 열나흘 간격쯤 되더니 사흘 간격까지 끌어당겨졌고, 심지어는 모든 꿈이 선명해져만 갔다.
꿈에 비치는 이들의 옷이 아무리 봐도 황실의 것이라, 의심하던 무건이 미마이를 불렀을 때는 이미 석 달이 지난 뒤였다.
미마이는 하나의 가능성을 내놓았다. 동조 현상으로 인해 진예와 같은 꿈을 꾸게 된 게 아닌가 싶다고. 공교롭게도 각인 이후이니 시기가 겹치는 게 맞긴 했다.
그래도 반신반의하고 있었는데, 아침에 태의를 따라 봉아궁에 다녀간 미마이가 살며시 귀띔해 주었다.
아무래도 진예는 무건이 꾸던 꿈을 바꿔 꾸고 있는 것 같다고 말이다.
자신이 꾸던 꿈이 대체 뭔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제 꿈 중엔 이런 끔찍스러운 악몽은 없었으니까. 이에 진예가 시달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다만 오늘은 더 이상 자기 그른 것 같아, 무건이 침상 밖으로 나가 바닥을 디뎠다. 문을 향해 걷는 그는 몹시 지친 듯 몸을 비척댔다. 부쩍 잦아진 악몽에 최근 알게 모르게 심신이 갉아 먹히고 있는 탓이었다.
그가 앞에 서자 문이 드르륵 열리긴 했으나, 밖에 서 있던 홍 내관이 너무 일찍 깬 상전의 모습에 놀란 기색이었다.
무건의 표정이 영 좋지 못한 것을 보고는 홍 내관이 조심히 물어 왔다.
“마마, 무슨 일…….”
있으시옵니까.
그런 뒷말은 어딘지 가라앉은 무건의 목소리에 묻혔다.
“영아를 보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