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장.
날아간 화살이 박힌 곳을 확인한 내관이 깃발을 흔들며 외쳤다.
“명중이오!”
무건은 겨울에 찬 바람이 쌩쌩 부는데도 여유롭게 화살을 척척 명중시키는 진예 옆에 서서 미칠 듯이 좋으면서도 차마 웃을 수 없는 상황에 빠졌다.
그가 방금 진예가 한 말에 어떤 것부터 물어야 할지 몰라 헤매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석 달 전이라면 제가 읍주로 떠난 직후에 아셨다는 의미입니까?”
미칠 듯이 좋은 것은 진예가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 때문이고, 차마 웃을 수 없는 이유는 자신의 아이가 생겼다는 점을 이제야 알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임신 사실을 안 시기가 석 달 전이라면 무건이 읍주를 출발하던 때와 시기가 맞물렸다. 하여 슬쩍 물으니 듣기 전에 이미 예상했던 답이 흘러나왔다.
“그대가 떠나기 직전이었다.”
그래도 설마 했건만.
무건이 진예의 답을 듣고 한동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진예가 활에 화살을 걸어 놓고 잠시 그의 얼굴을 살폈다.
진예는 설마 무건이 자신에게 화를 낼 거라고 생각은 안 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난처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눈을 마주쳐 오며 무건의 목소리가 방금 전보다 가라앉았다.
“일부러 숨기셨던 것이겠습니다.”
퍽 서운한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건에게 지금까지 숨긴 일이 어디 한두 가지였던가. 진예야 구중궁궐에서 필요하다면 늘 이런 방식을 택하며 살아왔었다.
하지만 무건은 그녀와 달랐다. 언젠가 그 스스로 말했듯이, 거짓을 입에 담은 적이 없는 이니까.
진예는 대꾸하기 전에 다시금 과녁에 집중해 활시위를 당겼다가 놓았다. 그러자 명중이라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그런 뒤에야 진예가 슬쩍 변명을 입에 올렸다.
“이쪽을 걱정하느라 전장에서 방심하면 아니 될 일 아니냐.”
여전히 무건과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였다. 그 당시만 해도 마땅히 그리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한 일이었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아주 빈약한 변명임을 그녀 자신도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옆에서 무건의 깊은 한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하아, 아닙니다.”
하지만 결국 싫은 소리 한 마디 못 하는 그를 보며 진예는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니 억지로 참았다. 대신 머뭇거리며 사과의 말을 건넸다.
“……미안하구나.”
그에 무건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먼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던 게다. 그랬던 만큼 무건의 표정은 금세 사르르 녹았다.
“괜찮습니다.”
그리 답하는 무건을 보며 진예는 이 순한 짐승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드디어 감을 잡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보다, 그럼 지금 이리하시면 감기라도 들까 염려되니 그만 침전으로 돌아가시지요.”
다만 그녀가 활을 다시 드는 것을 보며 무건이 또 닦달을 해 왔다.
“글쎄, 아무렇지도 아니하다는데도 어찌 호들갑이냐.”
진예가 적당히 흘려들으며 표적을 조준했을 때였다. 이번에야말로 무건은 물러서지 않겠다는 양 이를 갈았다.
“당장 그 활 아니 내려놓으면 화살을 몽땅 부러뜨려 버리고 침전까지 안고 갈 겁니다, 진예.”
어째 임신 사실을 숨겼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더 말투가 딱딱해져 있었다. 진짜로 이번 화살을 쏘면 그대로 실행할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을 받은 진예는 하는 수 없이 활을 옆의 내관에게 건넸다.
그러자마자 무건이 성큼 다가와 몸을 붙이더니 무어라 할 새도 없이 진예를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맞은편에 서 있던 박 태감에게 눈짓을 했다.
“박 태감, 일구종을 덮어 주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박 태감이 들고 있던 일구종을 진예의 몸 위에 덮었다.
어째 죽이 잘 맞는 둘을 어이없다는 눈초리로 번갈아 보던 진예가 무건에게 작게 속삭였다.
“연 귀인, 이는 말한 바와 다르지 않느냐?”
무건이 몸을 돌려 황궁의 후원 입구 쪽으로 걸어 나가며 대답했다.
“아니요. 화살을 부러뜨리는 게 핵심이었습니다.”
“…….”
벌써 겨울이라 후원에는 흰 눈이 쌓여 있었다. 진예는 무건이 자신을 놓치지 않으려 꽉 안아 오는 것에 일단 몸을 맡겼다. 그제야 무건은 어깨의 힘을 조금 빼고 고즈넉한 길을 걸어 나갔다.
뽀득뽀득 눈이 밟히는 소리가 나는 가운데, 무건의 듣기 좋은 저음이 더해졌다.
“하여 폐하의 복중에 아이가 있단 말입니까. 그것도 폐하와 제 아이가……?”
묻는 소리가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아마 아직 실감이 나지 않기 때문일 터이다. 진예는 그에게 다시 한번 확인해 주었다.
“그래.”
무건은 일구종으로 덮인 진예의 몸을 내려다보다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덧붙였다.
“태의는 무어라 합니까? 이 작은 몸으로 아이를 낳을 수는 있는 것인지요.”
물음을 들은 진예가 픽 웃었다. 그야 진예의 몸집이 평균보다 조금 작은 편이긴 했지만, 무건 자신이 큰 편이라 그런지 그녀를 너무 연약하게만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래 봬도 진예는 입보다는 몸을 다루는 것에 좀 더 능숙한 편이었다.
진예는 그가 안심할 수 있도록 제 배를 쓰다듬으며 태의가 했던 말을 들려주었다.
“짐의 몸 상태가 좋으니 걱정 없을 거라고 하였다. 배가 불러오는 것을 보니 아이 또한 문제가 없는 것 아니겠느냐.”
“다행입니다. 실로 다행이에요…….”
무건은 진예가 저에게 아이의 존재를 뒤늦게 알린 서운함에 대해선 벌써 잊은 듯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진예는 무건이 저와는 다르게 얼마나 마음이 넉넉한 이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몇 번이나 꺾이고 실망해도, 다시 좋다고 말해 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리 힘들어하면서도 그녀를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도무지 믿기지가 않습니다. 폐하와 제 아이라니.”
무건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진예가 괜히 놀리는 소리를 입에 올렸다.
“왜, 짐이 정말로 석녀라도 되는 줄 알았느냐?”
“말을 해도 꼭 그리 고약하게 하십니다.”
투덜거리며 후원의 문턱을 넘은 무건이 금세 성큼성큼 침전까지 들어갔다. 오는 동안 진예를 내내 안고 왔는데도 그에게선 힘들어하는 기색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회랑을 걷고, 침방에 들어 마침내 침상 위에 조심히 그녀를 내려놓은 무건은 따라온 궁인들을 물리더니 손수 그녀의 머리에 베개를 받쳐 주고 이불을 덮었다.
두꺼운 솜이불로 어깨까지 꼼꼼하게 가린 무건이 이내 침상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고는 극히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배 부근을 문질렀다.
“아이가 폐하를 닮은 여아였으면 좋겠습니다.”
속삭이는 그의 표정이 제법 진솔해 보였다. 진예는 그런 무건에게 살며시 핀잔을 두었다.
“태평한 소리를 하는구나. 그러다 저도 이 어미처럼 황제가 되겠다 나서면 어찌하려고.”
“무엇이 문제란 말입니까? 폐하께서 이리 환을 잘 다스리고 계시는데.”
무건이 반박했지만 진예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비록 저 자신이 여성의 몸으로 황위에 올라 있긴 했지만 그 과정은 물론이고, 그 이후에도 순탄하다 일컬을 만한 순간은 없었다.
이리 힘든 길을 미래에 태어날 아이에게 걸으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아이에게 제 아비와 어미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으려 노력할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나라의 군주로 성장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을 터.
온통 사내들 천지인 장군들과 각료들을 다루기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제아무리 정통성을 지닌 황제라 해도 그들보다 자신이 더 강함을 지속적으로 인식시켜 주지 못하면 허수아비가 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래서 진예는 내심 이 무게를 견뎌 낼 남아를 바라고 있었다. 기왕이면 무건처럼 뚝심 있는 놈이면 좋겠지 싶었다.
한데 무건의 생각은 전혀 다른 모양이었다.
“이제 읍주를 되찾았으니 폐하를 향한 백성들의 칭송이 날로 더해 갈 것입니다. 나머지 두 서식지까지 모두 수복한다면, 폐하께선 이 나라에서 익재를 몰아낸 공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황제가 되시겠지요. 사내의 몸으로 황위에 오른 모든 황제를 다 갖다 대어도 폐하의 치적에는 결코 못 미칠 것입니다.”
칭찬하는 소리가 듣기는 좋았지만 진예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너무나 험난한 길이다.”
“그럼 폐하만큼 강한 아이로 키우면 되는 것 아닙니까.”
“글쎄다. 그대만큼 무모해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어차피 미래에 태어날 그들의 아이가 여아인지 남아인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이런 말씨름이야 무의미한 것이었다. 하여 진예가 농담처럼 말을 흘려버리자 무건도 더는 설득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피차 알고는 있었다. 여아든 남아든, 그들은 상관하지 않고 지금의 이 아이를 다음 대를 이을 황제의 재목으로 키우리라는 것을.
하여 무건이 가볍게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이 아이의 이름은 혹 제가 지어도 되겠습니까.”
“허한다.”
진예가 고민할 것 없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듯 웃는 무건을 보면서, 오늘 임신 사실보다 더 중요하게 준비한 화두를 꺼내고자 입을 열었다. 분위기가 싸늘해질 것을 알기에 진예가 부러 더 친근한 호칭으로 그를 불렀다.
“그보다 무건아, 내 너에게 해 둘 말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폐하.”
무얼 말할지 아직 모르는 무건의 대답은 봄바람처럼 산뜻했다. 하지만 진예의 입에서 한 문장이 마침표를 찍었을 때는 달랐다.
“대례식을 마치면 친정을 준비할까 한다.”
무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무건의 음성이 음산하다고 생각될 만큼 확연히 낮아졌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가 설마 말뜻을 못 알아들어서 물은 것은 아닐 터였다. 단지 진예의 말이 얼토당토않다는 의미의 표현일 뿐.
진예는 그의 속마음을 알아챘지만, 뱉은 말을 정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무건의 눈을 마주 보며, 네가 들은 그 말이 사실임을 똑똑히 인식시켜 주었다.
“돌아올 즈음이면 아이를 낳을 때가 되겠지. 혹은 전장에서 낳을 수도 있고.”
“폐하.”
무건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임을 알았다. 그러나 진예는 아이를 가졌다고 해서 지금처럼 무건의 품에 안겨 옮겨 다니고, 침상에 누워 있기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이를 배고 있다는 사실이 황제로서의 제 소임을 잊는 것에 대한 면죄부가 되어 주지는 않는다. 진예는 제 책임을 어떤 이유로든 방기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황도에 언제까지나 군사들을 대기하게 할 수는 없다. 이래저래 물자가 낭비되니 말이다.”
황도에 3군에 달하는 군사들이 아직도 출전을 위해 대기 중이었고, 익재의 남은 두 서식지에도 각각 황제군의 합류를 기다리는 군사들이 남아 있었다.
황도의 군사들은 얼마간 지하실의 익재들을 처리하는 데 투입되긴 하였으나, 위장군의 지휘 아래 그 일도 어느 정도 마무리된 상태였다. 그러니 이제는 마땅히 본 임무를 하러 갈 때였다.
무건은 당연히 그런 그녀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나 그것이 홑몸이 아닌 폐하께서 직접 거병을 하실 이유가 되지는 않을 터입니다.”
“아니, 가야 한다.”
진예의 단호한 대답에 무건이 미간을 와락 구겼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그녀가 쉽게 고집을 꺾지 않으리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물러설 수 없는 건 무건도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제가 가겠으니 명을 내려 주십시오. 폐하의 휘하에 훌륭한 장군들이 많으니 그들 중 하나를 선봉으로 세우시면 이 연무건이 따라가겠습니다.”
그 나름대로 합당한 대안을 내놓은 셈이었지만 진예는 역시 고개를 저었다.
읍주도 상징성으로 따지면 본래는 진예가 직접 가서 수복했어야 하는 지역이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서둘러 무건을 보낸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남은 두 지역까지 그저 맡겨 놓고 뒤에서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것은 아직 무건이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는, 명분에 대한 이야기였다.
“익재 토벌은 짐이 오랜 기간 준비해 왔던 일이다. 그러니 마무리 또한 짐이 해야 마땅하지 않겠느냐.”
“진예.”
무건이 다시 엄하게 이름을 부르는 것에 진예가 이불 밖으로 손을 꺼내 그의 손을 붙잡았다. 무건을 일깨우듯이 힘이 빠져 있는 그의 손을 꽉 쥐며 진예가 물었다.
“네 정녕 내 뜻에 따라 주지 않을 테냐.”
“…….”
“군주로서의 염원이 담긴 목표다.”
“폐하, 제발.”
거듭 이어지는 말에 무건이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반쯤 넘어왔다는 의미였다. 심지가 굳고 언뜻 고집이 세 보이는 그였지만, 진예가 이리 나오면 결국 물러나는 건 늘 무건의 쪽이었다.
무건이 이번에도 자신의 뜻을 따라 줄 것임을 알고, 진예가 쐐기를 박았다.
“대환의 황제는 멈추지 아니한다. 어떤 이유에서든, 절대로.”
무건이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벌렸을 때였다. 때맞춰 침방 문 너머에 작은 그림자가 비쳤다.
“폐하, 다과상을 들이옵니다.”
무건이 입을 다물고 뒤를 돌아보자 진예가 얼른 상을 들이라 했다. 문이 열리기 전에 무건이 눈총을 주는 시늉을 했지만, 진예는 그저 몸을 일으켜 침상에 걸터앉았다가 천천히 바닥에 몸을 내렸다.
그 뻔뻔한 작태에 한숨을 내쉰 무건이 옆에 놓인 소담한 상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작은 떡 하나를 직접 집어서 진예의 입 앞에 내밀었다.
진예가 어색하게 입을 벌리자 달콤한 떡이 혀 위에서 녹았다. 그녀가 천천히 씹는 것이 뿌듯한지, 무건이 살며시 미소 지었다가 물어 왔다.
“입덧은? 가리시는 음식은 없으신 겁니까.”
질문은 진예에게 했지만, 대답은 상과 함께 안으로 들어온 박 태감에게서 흘러나왔다.
“닭과 돼지 고기만 못 드시고 계십니다.”
어쨌든 진예에게 못 먹는 것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못마땅한 무건이 박 태감을 돌아보며 재차 물었다.
“나머지는 문제없는 건가?”
“그러하옵니다, 마마.”
무건이 다과상에서 이번에는 곶감을 고르더니 반 갈라 진예의 입에 넣어 주었다. 진예는 일단 달달한 음식이 당겨 받아먹으면서도 다 씹기도 전에 나머지 반을 더 밀어 넣으려는 무건에게 한마디 핀잔을 주었다.
“천천히 좀 주거라. 알아서 먹을 수도 있고.”
그러나 무건은 멈추지 않고 과일 중 남부의 것인 여지(리치)를 연신 입 앞에 들이밀었다.
“많이 드십시오. 이 김에 살도 좀 찌우시고요. 어찌 제가 황도를 떠났을 때와 똑같을 수가 있습니까?”
무건이 잔소리하는 모습을 보면서 박 태감이 전례 없이 싱글벙글하고 있기에 진예가 슬쩍 노려보니 얼른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런 뒤에야 재촉하는 무건의 손짓에 하는 수 없이 진예는 또다시 입을 벌렸다. 그녀가 달콤한 여지의 과육을 우물우물하며 중얼거렸다.
“……똑같은 게 나쁜 건 아니지 않느냐? 네가 그러지 않아도 잘 챙겨 먹고 있으니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아이를 배셨는데 같으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태의가 문제없다 하였다.”
계속 딴죽을 거는 진예의 태도에 무건이 그러냐는 듯 말없이 웃었다. 그렇지만 속으로는 그놈의 태의를 매수해서 이상 있다고 말하게 할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진예와는 먹는 걸로는 대화를 이어 갈 수 없겠다 판단한 무건이 곧 박 태감을 돌아보며 질문을 던졌다.
“폐하께서 먹는 양이 늘긴 하셨나?”
“예, 최근엔 조금 느셨나이다.”
조금이라도 늘었다니 다행이었다. 무건이 여기저기서 들은 바에 의하면, 진예는 임신 전에도 음식을 상당히 적게 먹는 편이었다. 신경이 예민한 것만큼이나 먹는 부분까지 제법 까다로운 것이다.
그러니 이 김에 입맛도 적당히 바뀔 테니 먹는 즐거움도 알게 하고 싶었다.
한데 무건이 다시 간식 중 설탕을 뿌린 튀김 과자 하나를 그녀의 앞에 내밀었을 때였다.
진예가 갑자기 인상을 확 찌푸리더니 고개를 뒤로 물리며 작게 헛구역질을 했다. 그녀 나름대로 참으려 했는지 소리는 작았지만, 순간 박 태감과 무건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닭과 돼지 고기만 가린다더니. 가리는 음식 목록에 하나가 더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방금까지 잘 챙겨 먹고 있다던 진예가 괜스레 민망해져 한마디 했다.
“……기름 냄새 때문에 그런가 보다.”
무건은 방금 헛구역질을 일으킨 과자가 든 접시를 턱짓하며 옆의 궁인에게 명했다.
“당장 치우게.”
진예가 못 먹는 음식은 꼴도 보기 싫다는 투였다.
그러고는 무건은 진예의 입이 한시도 쉬지 않게 다과상의 음식들을 먹였다.
본래 다과상을 들이면 상전이 먹고 남긴 음식들을 궁인들이 먹기 때문에 적당히 먹고 남겨 주는 것이 미덕이었지만, 무건이 자꾸 먹으라 하는 바람에 꽤 많이 비우고 말았다.
여러 종류의 음식 중에서도 무더운 남부에서만 자라 겨울철엔 구하기도 힘든 여지가 특히 마음에 들어 그 그릇에 있던 과일은 싹 사라졌다.
계속 음식을 들이민 무건도 무건이지만 제가 다 먹었다는 것에 진예가 조금 난감해하던 차에, 무건이 상과 사람들을 모두 물렸다.
잠시 뒤 둘만 남자 무건이 다시금 아까 전의 이야기로 돌아갔다. 이번엔 제 쪽에서 설득이 가능하다고 믿으면서.
“이리 음식들을 가리시는데 어찌 전쟁터를 가시겠다 하십니까? 이래서야 고된 행군을 버티실 수나 있겠습니까?”
무시한다기보다는 지극한 염려가 어린 말이었다. 그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진예는 고개를 저었다.
먹는 것이 부실하면 확실히 몸을 쓰기에는 어렵겠지만 전장에서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고려하더라도 이번 일은 반드시 그녀의 손으로 이룩해 내고 싶은 것이었다. 무건은 지나친 욕심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해서 진예는 아집으로 비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굽히지 않았다.
복중의 아이가 있다는 이유로 제가 오래도록 바라 왔던 일을 포기하기는 싫었다. 그것은 스스로의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었으므로.
“문제없느니라. 입덧이 계속될 것도 아닐 터이니.”
역시나 하아, 하고 무건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진예의 말을 곱씹듯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던 그가 얼마 안 가 진예의 앞에 더 바짝 다가왔다. 그러더니 두 무릎을 꿇고 그녀의 두 손을 모아 잡으며 간절한 어투로 이야기했다.
“폐하께서 직접 거병을 하지 않으셔도, 이 땅에서 익재들을 몰아내면 그 영광은 마땅히 폐하께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무리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실상 무건에게는 진예가 말하는 대의 같은 것보다는, 그녀 안위가 더 중요했다.
진예는 그런 그의 마음을 잘 알기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진정 그리 생각하느냐.”
“감히 폐하의 앞에서 거짓은 입에 올리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모두가 그대와 같다면 좋겠지.”
환의 황제로서 어떤 선택을 할 때는 그런 감정에 휘둘려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진예의 말에 무건의 입가가 일자로 굳었다. 이어 두 손을 더 꽉 잡아 오는 것에 은근한 압박감이 느껴지긴 했으나 그 또한 그녀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너무 비인간적인 결정이라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아니, 진예에게는 오히려 이것이 더 인간적인 결정이었다.
“4년 전에 익재 토벌을 시작한 이유는 짐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놈들의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함이었다.”
“…….”
“군주로서의 염원이니 하는 말도 했지만, 이번에도 그와 마찬가지다. 아직도 화친왕을 그리는 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마땅히 보여 줄 것이 필요하지.”
황위에 오르기까지도 뼈를 깎는 듯한 고됨이 함께했지만, 오르고 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황제가 된 그녀는 수많은 대신들의 눈초리를 받으며 매일 그 자격을 가리는 시험대 위에 서야만 했다.
조금의 실수도, 어떤 관용도 용납되지 않았다.
그녀의 거병은 말하자면 환의 주인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밝히기 위한 일이었다.
“황제라 하여 아무 증명 없이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황제라 하여 아무 증명 없이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무건이 입술을 움찔했다. 진예가 무슨 의도를 전하고 싶어 하는 건지 이제야 선명하게 보였다. 무건에게는 아주 익숙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증명, 말입니까.”
〈내 마음을 차지하고 싶다면, 너의 쓸모를 증명하면 된다.〉
처음 만났을 때, 진예가 했던 바로 그 말.
그녀를 만난 이후로 연무건의 삶은 척도가 되어 버린 바로 그 말.
사실은 진예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란 의미였다.
천자는 무결점의 존재여야만 한다. 하지만 인간인 이상 황제라 해도 세상의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고, 세상의 모든 이들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거기서 필요한 요소가 정치였다. 정치에는 여러 방식이 있을 터이다. 진예는 이성적이고 평화로운 조율보다는 본능에 입각한 짐승의 논리로 신하들의 위에 군림해 왔다.
진예가 그들에게 내보인 것은 절대적인 강함이었다. 자신이 신하들에게 권리를 줄 수도 있지만, 동시에 빼앗을 수도 있다는 공포를 심는 일.
예를 들어 대장군 정위의 봉토를 몰수하고 백으로 강등시켰듯이, 그리고 화친왕을 결국 제거해 버렸듯이, 마지막으로 위도양을 처분해 냈듯이.
따라서 그녀는 한순간도 약해질 수 없었다. 설령 아이를 배었다 해도, 그것은 단지 개인의 사정일 뿐이었다. 짐승이란 본래 물어뜯는 상대를 가리지 않으니.
“그래, 그대가 지금까지 해 온 것이지. 스스로의 쓸모를 증명하는 일 말이다.”
무건은 어떤 말도 할 수 없었기에 입을 다문 채 그저 진예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진예 또한 그런 삶을 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여태껏 해 본 적이 없었다. 환의 황제로서의 진예는 범접 불가의 위엄 있는 모습으로만 보였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능력 있지만 그만큼 오만하고, 호락호락하지 않으며, 성격이 좋지 못한—아니, 사실은 꽤 나쁜 사람. 어쩌면 그렇게 인간적이지는 못한 황제. 그게 바로 무건이 아는 진예였다.
그런데 방금 전의 한마디가, 그런 그녀의 모습을 전부 뒤집어 놓은 느낌이었다.
연무건은 아직 진예라는 사람에 대해 전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갑작스럽게 눈앞에 들이밀어지자 한마디의 말도 토해 내기가 힘들어졌다.
“무건아.”
“예, 폐하…….”
어쩐지 진예에게 설득당할 것 같은 느낌에 무건의 대답에서는 힘이 빠졌다. 진예는 약해진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이번에는 진예가 무건의 손을 쥐었다.
“그대는 몇 번이나 목숨을 걸고서 짐의 옆에 있겠다며 증명을 해냈다. 그리하여 이리 짐에게 옥가락지까지 끼워 주지 않았느냐.”
문득 무건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한때는 이런 어리석은 것은 싫다던 진예의 손가락에 제가 준 옥가락지가 끼워져 있었다. 몇 번인가 그들 사이를 왔다 갔다 했던 물건이지만, 이렇게 진예가 아무런 저항감 없이 받아들인 적은 처음이었다.
이 현상이 가리키는 바는 명확했다. 일련의 시간을 지나오면서 무건 못지않게 진예 또한 달라졌다는 의미였다.
무건의 눈이 흔들리는 것을 본 진예가 은근한 질문을 던져 그의 마음속 어딘가를 건드렸다.
“짐은 이제 연 귀인과 신념을 하겠다 맹세했다. 그대 또한 마찬가지였지?”
“그렇…… 습니다.”
“긴말 않겠다. 짐은 그 맹세를 믿는다.”
단순히 이 상황을 헤쳐 나가기 위한 임기응변으로서의 빈말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진예는 이제 무건의 진심에 대해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무건이 진예의 마음속에 조금씩 쌓아 올린 탑은 생각보다 견고했다. 이 사내의 곧은 성정처럼.
진예의 말에 무건은 그녀의 앞이라는 것도 순간적으로 잊고 이로 입술을 지분거리다가 이내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폐하께서 이러시면, 제가 어떻게…….”
“무건아.”
부르는 소리에 무건이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아무리 곤란한 상황이라도, 무건은 이처럼 진예를 결코 피하지는 않았다.
진예는 명인의 힘 따위, 여전히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명인으로 인해 생긴 인연을, 무건이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는 사실만은 인정했다. 그러니 진예는 이제 더는 그를 거부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나아가 연무건이라는 사내를, 욕심 내 볼 생각이었다.
“무사히 다녀오면, 우리 각인하도록 하자.”
그녀의 입에서 각인이라는 소리가 나오자 무건은 놀라 굳어 버렸다. 애초에 제가 요구했던 것 중 하나이긴 했지만 실현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무건은 제가 그토록 바랐던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는 것에 가슴이 꽉 메어 왔지만, 동시에 하필 이 시점에 이런 말을 들었다는 사실 때문에 배 속에 돌덩이라도 얹힌 느낌을 받았다.
“그런다고…… 제가 폐하께 순순히 가시라 말씀드릴 것 같습니까? 아니, 이런 건 완전히 반칙이 아닙니까…….”
무건이 힘없이 따지는 말에 진예가 재차 그를 밀어붙였다.
“정말 아니 되는 게냐?”
“진예.”
여기까지 했는데도 선뜻 무건의 입에서 마음대로 하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으니 진예가 이번엔 노선을 바꾸어 탔다.
“그럼 묻겠다. 네가 몇 번이나 목숨을 걸고, 그리도 싫어했던 조 후를 살린 이유가 무엇이었더냐.”
무건은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냐는 듯, 제 두 눈에 원망의 빛을 띠었다. 굴하지 않고 진예가 서둘러 대답하라는 듯 채근하는 소리를 내자 그는 본성이 순한 짐승답게 결국 순순히 답해 왔다.
“……폐하께서, 행복해지시길 바랐습니다.”
솔직한 대답이었다. 돌려 말할 줄 모르는 연무건다운 말이기도 했다. 진예는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마음을 이 진예에게 전부 다 다오. 내 이제 연무건의 것이라면 욕심을 내 보려 하니.”
“…….”
무건이 더는 못 견디겠다는 양, 고개를 돌리더니 눈을 꽉 감았다. 그리고 화가 난 듯, 혹은 정말 난처하다는 듯 신음 같은 말을 토해 냈다.
“폐하께선 정말…….”
중간에 말을 끊긴 했지만 진예는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는 알 것 같았다.
정말 제멋대로이십니다.
그리 무언의 불평을 내뱉은 무건은 벌떡 일어나 나가 버렸다. 밖에서 누군가 대기하고 있었지만, 궁인들의 반응보다 문을 여닫는 무건의 손이 더 빨랐다.
타악.
그답지 않게 신경질이 밴 그 소리를 들으면서 진예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그녀의 거병에는 무건의 허락이 꼭 필요하진 않았고, 설득이 안 되어도 당연히 출전을 준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되니 마음이 좋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기왕이면 무건도 납득을 해 주길 바랐었기에 더더욱.
‘욕심이었나.’
진예는 약간 볼록해진 제 배를 내려다보다가, 손으로 쓰다듬어 보았다. 이 아이도 제 어미가 전장으로 간다는 말에 두려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제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아니, 다른 것은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의 휴식은 이쯤 해 두어야겠다 생각한 진예가 문 쪽을 보면서 밖의 박 태감을 불렀다.
“게 있느냐.”
“예, 폐하.”
“그만 편전에 들어야겠다.”
그러자 박 태감과 궁인 몇몇이 들어와 진예를 일으켜 세워 주고는 밖에 나가기 전에 겉옷을 단단히 걸쳐 주었다.
한데 그때였다. 밖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귀인마마가 다시 드셨사옵니다.”
막 준비를 마치고 나가려던 진예가 눈썹을 슥 들어 올렸다. 안으로 들이라 하자 그 말대로 다시 돌아온 무건이 성큼 침방으로 발을 들였다.
빠른 속도로 걸어오는 그의 심상치 않은 기세에 박 태감과 궁인들이 옆으로 물러났다.
진예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무건을 올려다보았다. 짧은 사이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몰라도 표정이 나갔을 때보다 더 안 좋았다.
안 좋다는 것이, 그러니까 더 화가 나 보인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오히려 불안해 보이고, 안절부절못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왔느냐?”
연무건이 성격상 한마디도 안 지는 놈이긴 해도, 굳이 한 번 더 와서 대거리를 할 녀석까진 아니라는 사실은 안다. 하지만 경계를 올리고 묻자 무건이 깊은숨을 들이켜더니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언젠가 그녀와의 대화는 이렇게 해야 하는 것 아니었냐고 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제 의사 같은 건 별로 안 중요하다는 건 압니다. 그래도 제게 말씀하신 건 어쨌든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이시겠지요.”
“그대는 앞으로 짐의 황후가 될 사람이니.”
대답을 듣고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무건이 잠깐 사이를 두고선 진예를 올려다보았다. 갈팡질팡하는 것은 끝냈는지 그가 제법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저도 같이 출전하는 조건으로. 더 이상은 못 물러납니다.”
“…….”
“왜 대답이 없으십니까. 설마 절 정말 두고 가실 생각이셨습니까?”
눈치 하난 참으로 귀신같지.
사납게 재우치는 소리를 들으며 진예는 얼마 전 위장군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두고 가면 무건이 서운해할 거라던. 위장군의 말대로 무건은 그 소리를 들으면 진짜 폭발할 것만 같은 상태였다.
무건이 크게 양보했으니 지금 필요한 건 봉합이었다. 괜히 ‘진실’을 알려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리하겠다.”
무건이 미심쩍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왜인지 방금 전 질문을 회피한 이유를 너무 잘 알겠다는 듯이.
그렇지만 그도 더 이상 따지지 않고 진예를 그대로 끌어안았다. 무건의 얼굴이 진예의 두꺼운 옷 위로 푹 기대어졌다. 제 아이를 품은 그곳에.
“……폐하께서 잘못되기라도 하면 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게 될 겁니다.”
무건의 낮은 목소리에는 들어왔을 때의 표정 그대로 불안감이 배어 있었다.
“이젠 폐하께서 없는 세상에선 숨도 쉬고 싶지 않습니다. 잘못되는 날은 제가 죽는 날이라는 거, 기억하십시오.”
진예는 괜한 걱정이라고 생각했지만, 제게 매달려 오는 그의 머리를 가만히 감싸 안았다. 그러자 제 마음을 알아 달라는 양 무건의 어조가 더 간절해졌다.
“연모합니다. 그래서 폐하의 앞에선 이리도 약해질 수밖에 없어요. 결국은 따를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알고, 있다.”
이 대답이 무건의 갈증을 풀어 주지 못한다는 사실 역시 알았지만, 진예는 짧은 대답 이후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무건은 이상의 것을 강요하지 않고 그저 그녀의 품에 가만히 안겨만 있었다.
이런 그를, 진예 역시 좋아하지 않는다고 부정할 수는 없었다. 비록 무건처럼 솔직하게 제 마음을 솔직하게 토해 내지는 못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진솔하게 마주 보지 못하고, 저에게 모든 것을 쏟아붓겠다는 사내 앞에서 제대로 된 말 한마디 되돌려 주지 못하는 스스로가 문득 답답하게 느껴졌다.
자신은 대체 언제쯤 무건의 앞에서 거침없는 고백을 읊을 수 있게 될까.
무건은 제가 전부 다 할 테니 그녀에겐 다디단 말을 해 주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고 이 상태가 유지되는 것은 그녀도 바라지 않았다.
이제는 제 마음을 둘러싼 껍데기를 깨부술 필요가 있었다.
진예의 손이 살며시 밑으로 내려갔다. 손끝이 귓가를 스치고, 뺨에 닿자 무건이 기대어 있던 얼굴을 떼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짙은 고동색 눈동자와 눈길이 맞은 순간이었다. 진예는 눈을 지그시 감고는 얼굴을 내렸다.
얼마 안 가 그녀의 예민한 입술에 미세한 떨림이 닿아 왔고, 이어 조심스러운 손길이 진예의 머리를 감싸 끌어당겼다.
* * *
가마에 올라 문이 닫히자마자 무건은 허탈한 마음에 벽에 기대어 늘어졌다.
봉아궁으로 돌아가는 내내 결국 진예의 출전을 용인해 버린 스스로가 싫어졌지만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이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결심한 이상 진예는 무슨 일이 있든 황도를 떠날 것이었다.
전장에서 아무 일도 없기를 바라는 수밖에는 없었다. 물론 동조 현상으로 전이받은 그녀의 힘 덕분에 진예가 어느 정도로 강할지는 짐작이 되었지만, 강한 것과 걱정이 되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좋아하는 만큼 그 대상을 잃지 않을까 하는 공포가 증폭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실제로 무건은 하루에 몇 번씩이나 제 눈에는 한없이 가녀려 보이기만 하는 진예가 어디 다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제는 몸도 무거울 텐데 삐끗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부터 어디서 또 반란이 터지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그저 평범한 사람이 아닌 환의 지존인 그녀이기에, 상상의 영역은 무궁무진했다.
그런데 전장에 나가겠다니.
이래저래 그녀를 지키기 위해선 제가 더 강해지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리 다짐하고 있을 때였다. 바깥에서 홍 내관이 곤란해하는 어투로 말을 걸어왔다.
“마마, 미마이가 침전 앞 문에서 마마를 알현하고자 기다리고 있는 듯하온데 어찌하오리까?”
상념에 빠져 있던 무건이 미마이라는 소리에 허리를 바짝 세워 자세를 추슬렀다.
“가마를 내리게.”
그의 말이 흘러나가자마자 가마가 바닥으로 내려가고 시야가 트였다. 홍 내관의 말대로 곧 미마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심란한 와중에 주의를 돌릴 게 생겼으니 마침 잘됐다 싶었던 무건이 가마에서 내리고는 아이를 불렀다.
“미마이?”
그의 부름과 함께 홍 내관이 눈짓하자, 침전 문 앞에 서서 추위에 발을 동동거리던 미마이가 얼른 무건의 앞에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홍복을 누리소서, 귀인마마.”
아이를 보고 나니 뒤늦게야 제가 황도에 돌아와서 미마이를 미처 신경 쓰지 못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건은 얇은 옷을 걸치고 있어 추위에 떨고 있는 아이를 얼른 안아 들어 올렸다. 체감상 약간 무거워진 무게에 무건이 미마이를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약간 볼살이 올랐나……?’
봉아궁에서의 생활이 이 아이 나름대로 편했던 모양이었다. 다행한 일이었다.
무건이 침전 마당으로 발을 들이면서 살짝 미소 지었다.
“공기가 찬데 여기서 무얼 하고 있었어?”
미마이는 무건의 품에 안긴 게 민망한지 괜히 한번 홍 내관의 표정을 살폈다.
어떤 표정인지 모르겠는 그의 얼굴을 본 미마이는 조금은 안심했는지, 다시 무건에게로 시선을 돌리고 작은 입을 열었다.
“마마께서 어제 돌아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해서, 얼른 뵙고 싶어서…….”
뵙고 싶다는 말을 끝에서 얼버무리며 미마이가 얼굴에 홍조를 띠었다. 그러자 무건이 아이의 등을 가볍게 쓰다듬으면서 침전으로 들어섰다.
온기가 도는 따뜻한 침방에 들어간 무건은 아이를 침상 위에 내려놓고 따라 들어온 홍 내관에게 나가 보라고 눈짓했다.
홍 내관은 썩 내키지 않아 하는 듯했지만 둘만 남겨 놓은 채 밖으로 물러났다. 그 뒤에야 무건이 아이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내가 없는 동안 별일은 없었고?”
미마이가 커다란 눈으로 무건을 올려다보다가 얼른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네, 다들 잘해 주셨습니다. 마마께서 별 탈 없이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요. 그리고 그, 조 후께서도 무사하시다고 들었습니다…….”
마지막 문장을 말할 땐 미마이의 목소리가 확연하게 잦아들었다.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다. 혹여나 조서엽에 대한 이야기가 무건을 불편하게 할까 봐.
안 그래도 익재들과의 전쟁을 치르고, 황도에 와서까지 딱히 조서엽을 생각지 않고 있던 무건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에 미마이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을 짓자 무건은 그 뜻이 아니라는 걸 알려 주기 위해 아이의 손을 잡았다.
손이 닿았을 때 미마이가 잠시 흠칫했지만, 이내 가슴을 가라앉히는 걸 보면서 무건이 짧게 덧붙였다.
“일단 살려 두긴 했어. 미마이, 너와의 약조도 있었으니 말이다.”
사실은 진예를 위한 일이었지만 무건은 그리 덧붙였다. 그러자 미마이가 고맙다는 듯이 까만 눈을 반짝였다.
“감사합니다, 마마. 다행이에요, 정말로요.”
아이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무건은 역시 제 선택이 옳았다고, 그리 생각했다. 애초에 조서엽과의 싸움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했고.
단지 그의 좋지 못한 결말이 못내 찝찝할 뿐이었다.
조서엽은, 또 그 아비인 조춘경은 이후에 어찌 됐을까. 무건도 지금은 답을 알지 못했다.
“그자가 돌아올지 말지는 나도 알 수가 없어. 그 뒤로 제 아비와 봉토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만 들었고.”
“……네.”
미마이의 살짝 풀 죽은 모습에 무건이 부러 활짝 미소 지으며 아이를 가볍게 들어 제 허벅지 위에 올렸다.
“그래, 내가 돌아오면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알려 주겠다고 했었지? 고민은 끝났어?”
무건이 화제를 돌렸다. 아마 미마이도 이에 대해서 알려 주려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미마이가 어떤 결정을 할지 궁금하긴 했지만, 그와 별개로 아이를 궐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씁쓸하기도 했다.
그런데 미마이가 이로 입술을 지분거리더니 곧 무건의 품에 답삭 안기며 속삭였다.
“저는…… 마마의 곁에 남고 싶어요.”
“……내 곁에?”
생각지도 못한 답변이었기에 무건이 되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는 힘 있는 자의 욕망에 휘둘리면서, 사람에게 상처받은 아이였다. 그래서 복잡한 궁궐 생활은 싫어할 거라고 여겼었다.
그런데 미마이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마께선 저에게 나쁜 일 안 시키실 것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다정히 대해 주시고…… 저는 그런 마마가, 좋습니다.”
“미마이…….”
아이의 솔직한 말에 무건은 왠지 가슴 한편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미마이가 불안해하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며 물어 왔다.
“혹시 저는 환의 사람이 아니니 궐에 남아 있으면 아니 될까요?”
무건이 괜한 걱정이라는 듯,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것 때문이라면 진작 내쳤겠지. 전혀 상관없다. 단지 무슨 일을 하게 해 주어야 할지 고민되는 것이지.”
“그냥 시동으로라도 써 주시면…….”
“이미 시중 드는 내관들이 넘치도록 많아.”
“……아.”
미마이가 눈동자를 도록도록 소리가 날 것처럼 열심히 굴렸다. 무어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달싹이는 아이의 모습에, 무건이 아직 솜털이 올라 있는 볼을 다정히 쓰다듬어 주었다.
“이젠 내가 또 고민할 시간이네. 미마이를 곁에 두려면 어찌해야 하는지. 나이가 어린데도 아는 것이 많은 똑똑한 인재이니 내 귀하게 대접을 해 주어야 할 터인데?”
“가, 감사합니다, 마마.”
“걱정 말고 조금만 기다려 줘.”
미마이가 다시금 너른 품에 안긴 채 작은 얼굴을 연식 끄덕거렸다. 자신을 귀하게 대접해 주겠다는 무건의 말에 왜인지 코끝이 시큰해지는 느낌이었다.
역시 그의 곁에 남는 선택을 하길 잘했다.
이렇게 욕심 많은 자들이 드나드는 궐에 남아 있는 것이 두려웠지만, 그래도 무건의 곁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미마이는 문득 아까 전 무건과 닿았을 때 흘러들어 온 기억을 떠올리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무건이 또 전장으로 떠난다는 생각을 하니 급격하게 기분이 저조해졌다.
물론 그 전에 무건이 만약 이곳에서 할 일을 정해 준다면, 미마이는 그가 이곳에 있든 없든 최선을 다해서 환 제국 내 최고의 인재가 되리라고 다짐했다.
* * *
궁인들의 고운 손길이 진예의 짙은 검은 머리에 기름을 먹였다. 점점 윤기를 띠어 가며 위로 올려지는 머리를 거울을 통해 보면서, 진예는 저를 꾸미기 위해 준비된 온갖 장신구들을 내려다보았다.
귀걸이, 목걸이, 팔찌 등 빛을 받아 금빛으로 번쩍거리는 물건들을 보고 있자니 눈이 멀어 버릴 듯했다.
평소 쓰는 양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이것들이 오늘 대례식을 치를 그녀의 몸 어딘가에 걸쳐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화려한 금색 자수가 놓인 검은 대례복을 걸치고, 수많은 구슬을 꿴 면류관을 쓰고, 얼굴을 하얗게 단장한 진예가 마침내 침전 밖으로 나섰다.
바깥은 조금 춥다 싶은 온도였지만 햇볕이 생각보다 따스했다. 길일은 길일인지 다행히 눈은 내리지 않아, 오히려 박 태감의 신수가 훤하다 싶을 만큼 그의 얼굴이 펴져 있었다.
침전 입구 앞에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자 내내 대기하고 있던 박 태감이 입을 열었다.
“연에 올라타시옵소서, 황제 폐하.”
진예는 대답 대신 사방이 뚫린 가마 위에 앉았다. 그러자 연이 천천히 들어 올려지며 침전 일원을 빠져나갔다.
대전으로 향하는 동안 진예는 가벼운 긴장감을 느꼈다. 방금까지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평소와 달리 궐 안에 감도는 조금 흥분감 어린 떠들썩함이 진예로 하여금 새로운 감정을 느끼도록 종용했다.
진예는 제 배 속의 아이가 어떤 모습일지 떠올리며 대례복에 감추어진 제 배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몇 주도 아닌 몇 개월이 지난 지금도 자신의 임신 사실이 거짓인 것만 같았지만, 대례를 위해 대전을 향하고 있자니 드디어 실감이 났다.
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혼인식이었다.
언젠가 무건에게 말한 대로, 그는 자신의 유일한 사내가 될 테니까. 설령 그 자리가 빈다고 해도 다른 이를 또다시 들일 생각은 전혀 없었다.
흔들리던 연이 드디어 대전 일원으로 다가갔다. 문 앞 마당에서부터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황궁 곳곳에서 제자리를 지키고 있던 궁인들부터 말단 관리들까지 오늘의 대례식을 위해 자리를 지키는 중이었다.
진예는 대전 앞의 문을 통과하자 흔들리는 면류관 사이로 대례식을 위해 설치한 화려한 장식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전의 지붕에 연결해 설치한 천막과 그곳에서부터 이어져 대전 앞 문까지 뻗은 줄에 걸린 이날의 축복을 위한 상징이 가득한 장식품들, 어도에 붉게 깔아 둔 천까지.
또한 대전 문 앞의 가장 높은 자리엔 금을 씌운 화려한 봉황 장식을 뒤에 배치하고, 가볍게 떡과 과일 등의 음식을 올려 둔 상이 있었다.
진예는 대전 앞의 높은 기단 위까지 연을 탄 채 이동해 그 가운데 올라섰다. 그러고 뒤를 돌아보니 오늘의 대례식을 위해 열어 둔 황궁의 남문 너머가 보였다.
궁문 안에는 문무백관들이 도열해 있고, 궁문 밖에는 환의 백성들이 모여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황제인 진예에게조차 드문 광경이었다. 하여 숨을 크게 들이켜며 감개에 젖었다.
‘이 진예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틈만 나면 귓가를 쟁쟁히 울리는, 자신에게는 조금의 자격도 없다고 외치던 아비의 목소리가 이제야 완전히 허공에 흩어졌다.
대환의 황제, 진예.
그녀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환의 지존이었다. 그야말로 모두의 환영을 받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춘 군주였다.
앞으로 진예는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제 옆에 설 자신의 반려와 함께 말이다.
그리 생각한 때였다. 궁문 밖에서 진예를 태우고 온 것과 비슷한 연이 모습을 비쳤다.
붉은 황후의 대례복을 사내의 것으로 개조한 옷을 입고서 무건이 황궁 안으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진예와 마찬가지로 어도의 위를 연을 타고 지나온 무건은, 기단 아래에서 멈춘 연에서 내려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진예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다른 이는 아랑곳 않고 자신만을 또렷이 직시해 오는 무건을 보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그러자 무건이 마침내 내관들의 의전에 따라 천천히 기단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긴장할 법도 하건만 그런 것 따위 모른다는 양 무건은 특유의 당당한 발걸음으로 하나하나 올라 마침내 기다리고 있던 진예의 앞에 섰다.
잠시 그를 마주 본 진예가 남쪽을 향해 고개를 돌려 기단 밑에 도열해 있는 이들을 향해 선언했다.
“짐은 귀인 연무건을 환의 황후로 봉함을 온 제국에 선포한다.”
그러자 조용해져 있던 군중들 사이에서 황제와 황후를 연호하며 만세를 외쳤다. 그 소리들을 들으며 진예가 무건에게 손을 내밀었다.
절차에 대해 듣긴 했지만 진예의 작은 손을 내려다본 무건은 그제야 현실감이 든다는 양, 한 번 침을 삼키고는 긴장감 어린 얼굴을 한 채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진예가 매끄러운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네 결국 진실로 이 자리까지 왔구나.”
“무한한 영광이옵니다, 폐하.”
무건이 그녀를 향해 공손히 허리를 굽히자 만세 소리가 더욱 어지러이 울려 퍼졌다.
이어 두 사람은 손을 붙잡은 채 천막 아래 준비된 상석을 향해 걸어갔다. 눈이 부시도록 화려한 봉황 무늬를 병풍처럼 뒤에 세워 둔 그곳의 의자에 두 사람이 각각 앉았다.
그러자 내관과 궁인들이 각각 두 사람에게 작은 술잔을 내밀었다. 진예가 임신을 했기에 본래 합환주가 들었어야 하는 잔에는 그저 맑은 물이 따라져 있을 따름이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일 합환주를 나누지 못하는 서운함은 조금도 없이 잔에 있는 물을 한 모금씩 나눠 마시고는 서로를 보며 웃었다.
특히나 무건은 무엇이 그리도 뿌듯한지, 눈까지 휘어 웃었다.
평소 감정 표현이 제법 풍부한 편인 그였지만, 진예로서도 무건이 이렇게 활짝 웃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천막에 햇볕이 가렸지만 그 자체로 주변이 환해지는 기분이었다.
진예는 잔에 든 물의 마지막 모금을 들이켜기 전, 무건의 앞에 내밀며 말했다.
“황후는 맹세하라. 대환의 황후로서, 그리고 짐의 유일한 사내로서 앞으로도 늘 짐의 옆에 있겠다고.”
“맹세하나이다, 대환 황제 폐하.”
고개를 끄덕이는 무건의 대답엔, 아주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그리고 둘은 마침내 잔을 모두 비워 내며, 진정한 부부의 연을 맺기 위한 절차를 마쳤다.
진예의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엔 무건이 그토록 건네고 싶어 했던 옥가락지가 자리한 채였다.
* * *
“부디 옥체를 보전하소서, 폐하.”
진예가 무거운 갑주를 걸치고 내관들의 부축을 받으며 침전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 친정을 떠날 때 늘 그러했듯 황궁 남문의 성루를 향해 가려는데, 소식을 듣고 온 위장군이 성루의 계단 아래 서 있었다.
지난번에는 개별 행동을 위해 잠시 위장군에게 위치 이탈을 하도록 했지만 본래 그는 궁문의 수비를 지휘해야 하는 자이니 이번에는 전장에 나가지 않았다.
진예는 어딘지 아쉬운 듯, 불안한 듯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인사를 받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위장군. 짐이 없는 동안 황도를 잘 지켜 주시게.”
“소장의 마땅한 의무이옵니다.”
든든한 대답에 진예가 어깨를 두드린 뒤 성루의 계단을 올랐다.
뒤에서 지켜보는 이들이 어쩐지 그녀가 임신한 탓에 불안해하는 것 같았지만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복부를 압박하지 않도록 갑옷도 충분히 느슨하게만 조였고, 생각보다 몸이 무겁지 않았다. 실제로도 태의가 놀랄 만큼 배가 많이 나오는 편이 아니라, 아마도 어미가 힘들지 않게 아이가 도와주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성루 위에 올라선 진예는 먼저 올라와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황후, 무건을 발견했다.
무장을 단단히 한 채 서 있던 그를 보며 진예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에 출전 전이라 그런지 표정이 굳어 있던 무건이 조용히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장군들 역시 허리를 숙이며 예를 갖추었다.
진예는 그들 사이를 유유히 걸어가 성루의 가운데에 두 발을 단단히 디디고 아직 칼집을 씌운 채인 검으로 바닥을 치며 그것을 제 몸 앞에 바로 세웠다. 그녀의 시야 안쪽으로 궁문 앞에 도열해 있는 자신의 군사들이 들어왔다.
선두에는 환의 국호를 새긴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고, 그 뒤로는 이번 전쟁에 참여할 많은 장군들과 휘하의 교위·일반 병사들까지 열에 맞춰 서서 모두들 그녀의 출전 명령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진예는 뺨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을 느꼈지만 추위는 전혀 느끼지 않았다. 황제로서 제가 오랫동안 그려 왔던 순간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익재의 괴멸. 그것만 생각하면 단전에 뜨거운 기운이 돌았다. 진예는 그 결의야말로 자신의 존재를 지탱해 주는 굳건한 기둥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 그녀에게 전장을 나가는 데 대한 망설임이란 있을 수 없었다.
승리는 오로지 환의 황제, 진예의 것이었으므로.
진예는 세운 검을 들어 한 손으로는 검집을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검파를 움켰다. 매끄럽게 검집에서 빠져나오는 햇볕을 받은 검신에 하얀빛이 흘러내렸다.
그것을 휘둘러 앞으로 내밀며 진예가 출전 각오를 외쳤다.
“우리는 지난 300년간 익재라는 괴물들에게 고통을 받으며 살아왔다. 그 때문에 죄 없는 양민들이 고통받고, 그들과의 전쟁을 치르느라 인해 수많은 희생이 있었느니라. 하지만 오늘부로 이 환의 땅에서 모든 익재들을 몰아내기 위한 전쟁을 시작한다!”
황제의 엄숙한 선언에 수많은 이들이 모였지만 순간적으로 묵직한 침묵이 감돌았다.
“누구도 물러서지 마라! 익재들이 점령한 저 땅을 되돌려 받기 전까지, 그리고 마지막 단 한 마리의 익재까지 모두 없애 버리기 전까지!”
짧은 출전 선언이 끝나자 선두에 선 군사들이 깃발을 흔들었고, 이내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황도에 울려 퍼지는 함성 소리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에 미소를 지어 보인 진예가 성큼성큼 성루로 내려갔다.
계단 아래 대기하고 있던 말에 진예가 올라타자, 그녀의 주변에 있던 이들도 함께 말에 올랐다. 그녀를 뒤따라 내려온 무건 역시 마찬가지였다.
곧 무거운 궁문이 천천히 밀리며 활짝 열렸다. 진예가 말고삐를 틀어쥐고 말의 옆구리를 차자, 검은 말의 긴 갈기가 휘날리며 그 사이를 지나갔다.
수만의 군사들이 도열해 있는 곳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진예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하게 빛났다.
* * *
거친 비와 함께 마치 하늘이 깨지는 것 같은 날카로운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던 것은 천만다행으로 그리 오래가지 않고 그쳤다.
근래에 굳이 익재 때문이 아니라도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가 그치고, 땅이 마르기가 무섭게 다시 내리기를 반복하고 있던 터라 반가운 비는 결코 아니었기에 다행이었다.
방금의 비는 기실 날이 어두워져 퇴각을 하려고 하는데 며칠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 있던 우두머리 익재가 갑자기 나와서 뿌려 놓고 간 것이었다.
우두머리가 나타나자 익재들의 저항이 갑자기 거세어졌었는데, 무건이 그 자리에 있었기에 그리 큰 피해는 입지 않았다. 그저 익재들도 마찬가지로 피해 없이 도망쳤다는 사실이 속을 쓰리게 했을 뿐.
이번엔 꽤 길게 공방이 오간 만큼 조금 허무한 전투였다. 하여 힘이 빠져 막사에 돌아온 무건은 잠들기 전에 진예의 막사로 건너갔다. 그러자 마침 그들 군을 쫓아온 태의가 진예의 진맥을 보는 중이었다. 태의 옆에는 그의 조수가 된 미마이가 서 있었다.
일부러 막사 안에 조용히 들어 잠시 진예와 미마이를 지켜보고 있자니 뒤늦게 그의 존재를 인지한 미마이가 먼저 고개를 돌려 무건을 발견했다. 미마이는 그를 보자마자 반색했다가, 아차 하여 허리를 숙이며 예를 올렸다.
“황후마마께 안부 올리나이다.”
그 말에 잠깐 누워 있던 진예가 고개를 돌리고, 침상 옆에 의자를 끌어다 앉아 있던 태의도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무건은 태의에게는 됐다는 눈짓을 한 뒤에 진예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이전보다는 확연히 볼록해진 진예의 배가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는 벌써 봄이었다. 임신 개월 수로 따지면 8개월. 진예와 제 아이가 나올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진예는 아직도 배가 부른 것 외에는 어딜 봐도 살이 찌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것을 보고 있자면 괜히 전투가 길어져 진예가 고생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무건은 죄책감마저 들었다.
다행히 이제 남은 두 서식지 중 하나는 처리했고, 드디어 환에 있는 마지막 서식지에서의 전투를 치르는 중이다.
그런데 마지막 서식지에는 빌어먹을 익재 놈들이 너무 많았다. 단순히 머릿수로 따지면 읍주보다도 많은 것 같기도 했다. 무건은 하루아침에 그것들을 모두 없앨 수가 없다는 점을 알면서도 이따금씩 짜증이 불쑥 솟았다.
그렇지만 무건은 그런 속내를 내리누르고 태의에게 물었다.
“폐하나 아이의 상태는 어떠한 것 같은가?”
태의는 평온한 어조로 대꾸해 왔다.
“폐하와 아기씨 모두 큰 이상이 없는 듯하옵니다.”
“……아무리 그래도 폐하의 배가 너무 안 나오는 것은 아닌가 싶은데?”
전장이긴 하지만 무건은 매일 진예가 먹는 음식을 다 살피고 있었다. 전투 중이라 보지 못했으면 다녀와서라도 무얼 얼마나 먹었나 주위에 물어 꼭 챙겼다.
그런데 양이 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미묘한 상태가 달이 꽤 찬 여태까지도 이어지는 중이었다. 아이가 꽤 컸을 텐데도 그랬다.
한데 무건의 불만인지 불안인지가 섞인 한마디를 듣고, 진예가 얼른 핀잔을 주었다.
“내 진정 아무렇지도 않대도 황후는 어찌 죄 없는 태의를 닦달하느냐?”
그에 무건이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의 머리맡에 무릎을 굽히고 앉더니 진예의 오른손을 두 손으로 잡았다.
“당연히 염려가 되어 그런 것 아닙니까?”
흔한 두 사람의 실랑이가 벌어질 것 같자 익숙해진 태의가 옆에서 이유를 짚어 주었다.
“식사량이 그리 많이 늘지 않으신 데다 활동이 아주 많으시어 그러하옵니다. 하나 폐하의 건강에는 이상이 없고, 오히려…….”
오히려 아주 바람직한 상태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무건은 끝까지 듣지 않고 진예에게 말했다.
“들으셨습니까, 폐하. 더 드시고 움직이지 말라 하지 않습니까.”
진예가 헛웃음을 짓고는 미간을 좁혔다. 눈앞의 사내는 아무래도 제 아이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 난 뒤로 바보가 된 모양이었다.
“저 이야기가 어찌 그런 뜻이란 말이냐. 태의는 들으라. 그럼 복중 아이에게 문제가 생겼느냐.”
“그것은 아닌 것으로…….”
“황후는 들었는가. 아니라지 않으냐.”
지나친 걱정을 경계하는 진예를 앞에 두고 무건은 어쩐지 못마땅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에 진예가 그의 마음을 녹일 만한 한마디를 입 밖으로 내놓았다.
“이제 아이가 내 배를 발로 찬다, 무건아.”
“…….”
예상대로 굳어 있던 무건의 표정이 곧바로 사르르 녹아내렸다. 진예는 피곤한 논쟁을 하는 대신 무건의 손을 끌어다 자신의 배에 갖다 대게 했다.
동그랗게 부른 배를 어루만지고 있자니 무건에게 이유를 알 수 없는 안정이 찾아오긴 했지만, 동시에 걱정도 짙어졌다.
진예는 여전히 전황을 소상히 살피며 3일에 한 번쯤은 직접 지휘했다. 전방에서 싸우지는 않지만 전장은 전장이다. 아무리 갑옷을 느슨히 한다고는 하지만 그 자체로 압박이 가지 않을 수는 없고, 무건은 혹 그녀가 잘못 공격당할까 싶어 두려웠다.
그렇지만 불길한 말을 괜히 입에 올리기보다는 진예의 의도대로 지금의 상황에 집중했다. 이 작은 배 속에 있는 아이의 사랑스러움에 대해 떠올리며.
“아이가 발로 찰 때 놀라지는 않으십니까?”
“괜찮다. 아이도 건강한 듯하니 너무 걱정 말거라. ……그렇지?”
진예의 뒷말은 제 배 속의 아이를 향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미의 말을 들은 모양인지 무건의 손바닥 아래의 배가 꿈틀했다.
무건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진예의 몸이 불편한 걸 생각하면 가슴이 메다가도 아이의 존재를 확인할 때마다 신기하기도 하고 가슴이 뿌듯해졌다.
“힘이 센 것을 보니 사내아이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야 모르는 일이지, 씩씩한 여아일 수도 있고.”
“모쪼록 폐하를 닮도록 하여라, 아가.”
아이를 향한 무건의 말에 작게 웃음소리를 낸 진예가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자 무건이 반사적으로 그녀를 부축해 주면서도 의문을 표했다.
“일어나서 무얼 하시렵니까? 맥진이 아직 안 끝난 것 아니었습니까?”
그 질문에 진예가 태의를 돌아보았다. 맥진이 안 끝났다기보다는 그저 진예에게서 나가란 소리가 없어 둘을 한발 물러나 지켜보고 태의가 허리를 숙이며 대신 답했다.
“마침 맥진은 끝났나이다. 다행히 별다른 징후는 없사오니 그저 몸을 편히 보하시면 될 것이옵니다.”
“알겠다.”
진예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침상 밖으로 발을 빼려 했다. 누워 있는 것은, 특히나 이런 떠들썩한 전장라면 그녀의 성미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면 내 누대로 좀 올라가서 상황을 살피련다. 읏……!”
진예의 발이 바닥에 닿기 전에 무건이 허벅지 밑으로 팔을 집어넣더니, 다른 한 팔로 등을 받치고는 앉아 있는 자세 그대로 그녀를 단숨에 들어 올렸다.
그러고 흔들림 없이 저도 몸을 일으키는데, 안기는 그녀조차 그의 힘이 대체 얼마나 센 건지 짐작이 안 되었다.
익재들과 전투를 치르느라 지친 상태일 텐데, 여하튼 연무건도 웬만한 사내는 아니었다.
진예는 역시나 이 상황에 놀라서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라 하는 막사 안의 사람들을 보며 무건에게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황후, 주변 보기 민망하다.”
그러자 무건이 불퉁하게 대꾸해 왔다. 마치 그런 것에 흔들릴 것 같냐는 투였다.
“민망하기만 하시다니 다행한 일 아닙니까. 소인은 이리해서라도 폐하의 활동량을 줄여야겠습니다.”
“…….”
그러고는 무건이 태의에게 수고했다고 치하하고는 옆의 미마이와도 살짝 눈을 맞췄다. 미마이는 얼른 고개를 숙였지만 입가에는 살며시 웃음기를 띠었다.
무건이 그간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는 아이는 더 이상 진예 때문에 가슴앓이하지 않는 그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왜인지 기뻤다.
그런 미마이를 확인하고는 무건은 막사를 빠져나갔다. 진예는 경험상 내려 달라고 해 봤자 듣지 않을 것을 알기에, 민망함을 참으며 얌전히 안겨 있었다.
어차피 이후 감히 황제와 황후 두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는 간덩이가 부은 자는 없었다. 무건이 막사 밖으로 나가자 주변에 보초를 서고 있던 이들은 물론이고, 지나가던 이들까지 모두 시선을 내리며 옆으로 물러났다.
무건이 알아서 앞길을 트는 병사들 사이를 지나가 진예가 말한 대로 나무로 지어 둔 누대로 향했다.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 사람 키의 대여섯 배는 되는 높이의 꼭대기에 선 뒤에야 무건이 진예를 내려 주었다.
마침 저녁이 찾아오는 중이라 진지 곳곳에 배치된 화로에 하나둘씩 불이 붙는 중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오자, 무건은 제 겉옷을 벗어 진예에게 걸쳐 주고 그녀의 뒤에 서 찬 바람을 제 몸으로 막았다.
묵묵한 그 행위에 진예는 은근한 배려를 느끼며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희미하게 아직 몇몇 익재들과 싸우고 있는 군사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은 마지막 서식지의 반을 점령해 익재들을 구석으로 밀어 넣고 그 앞에 임시 초소를 세운 상황이었다. 당연히 괴멸 직전까지 압박당하고 있는 익재들이 얌전히 있을 리는 없었다. 그들에게는 밤낮이 중요하지 않으니 더욱더.
주요 전투가 끝난 이후에도 간간이 빠져나오는 놈들을 처리하기 위해 작은 전투들이 이어지는 중이었다.
하지만 저 모습도 곧 있으면 끝이었다. 얼마 남지 않았다, 익재의 절멸까지는.
익재의 발원지인 탓에 긴 세월 동안 그 어느 나라보다도 그들에게 고통받았던 환 제국이었다. 그런데 그런 환에서 가장 먼저 그들을 괴멸시킨다는 것은 제법 의미가 있는 일일 터였다.
이 숙원을 완성하면 환이 다른 나라보다 더 부강한 나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다.
진예는 이제 그 이후의 상황까지도 생각하고 있었다.
환의 영토 안쪽이 아닌 바깥으로 뻗어 나가는 상황까지.
그러니까, 제 아비와 동생도 꿈꿨다던 천하통일을 하는 그 순간을 말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대에서 모든 게 이루어지지는 않아도 되었다. 진예는 일어날 확률이 희박한 것에 희망을 거는 이상론자는 결코 아니었으므로.
‘대신…….’
진예는 멀리 전장에서 격렬한 공방으로 쿠웅, 하는 소리가 연신 울려 퍼지는 것을 보며 두 손으로 배를 감쌌다.
오늘의 노력과 희생으로 내일을 그릴 수 있는 것처럼, 무건과 자신의 아이가 그리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둘 터였다.
‘그 정도는 가능하다.’
그렇게 해서 대환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낼 초석을 다지는 것만으로도 제 역할은 충분히 하는 것이다.
한데 생각이 길어져서인지 무건이 문득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진예가 고개를 틀어 그를 올려다보자 무건이 어쩐지 결의가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일 낮엔 총공세를 명하십시오.”
진예는 무건이 선봉에 나서서 우두머리를 칠 생각임을 알아챘다.
읍주에서는 홀로 천여 마리의 익재들을 하루 만에 처리했다고 했다지만, 힘이 폭주해 거의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다고 들었다.
아무리 특별한 능력을 지녔더라도 무건이 또다시 그런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없었으므로, 후방의 지원은 필수적이었다.
진예는 무건의 손을 꽉 쥐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리할 생각이다.”
그를 믿는다는 의미였다. 무건은 그 투박한 표현을 알아듣고는 부드러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정수리에 코를 묻었다. 진예의 감미로운 체향이 그를 기분 좋게 했다.
무건은 깊은 안정감에 기대며 작게 중얼거림을 이어 갔다.
“천만다행이지요. 아이를 낳기 전엔 황도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 아무리 그래도 전장에서 아이를 낳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러고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고집스러움이 담긴 팔로 더 꽉 끌어안는 것에 진예 역시 힘을 빼고 무건의 몸에 기대었다. 그러자 상냥한 온기가 몸을 따스하게 감싸 왔다.
진예의 시선이 문득 하늘을 향했다. 그러자 아직 어둠이 아주 짙게 깔린 것은 아니지만 비가 그친 뒤 맑아진 하늘에 살며시 별빛이 비치는 것이 시야에 잡혔다.
그간은 저런 것을 보아도 별 감흥이 없었는데 이 순간엔 어쩐 일인지 꽤 아름답다고, 그리 느꼈다. 그러한 변화의 이유가 무엇인지 이제는 진예도 알았다.
하여 어차피 서로 얼굴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니 조금, 아주 조금은 솔직해져 보기로 했다.
“……무건아.”
“예, 폐하.”
“짐은, 그대가 있어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녀가 잠시 틈을 두는 사이, 뒤에서 작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말에 긴장이라도 한 모양인지 선뜻 반응을 내놓지 못하는 그였다. 진예는 그런 무건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제 손가락을 넣어 깍지를 끼었다.
“이리 짐의 염원을 이루는 자리에 함께할 이가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이냐.”
“좋습니까.”
“좋다.”
조심스레 반문해 오는 것에 진예가 주저 없이 답해 주니 무건의 손이 잠시 움찔했다. 다음엔 그가 끝을 조금 바꿔, 비슷한 듯 다른 질문을 해 왔다.
“좋아합니까.”
무엇을, 이라는 목적어가 빠진 질문이었지만 충분히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이번에는 진예가 움찔할 차례였다.
진예는 괜스레 민망해져 방금처럼 바로 대답을 돌려주지 못했다. 아직은 조금 서늘한 밤공기 때문인지 순간적으로 뺨에 경련이 일 것만 같았다.
아니, 아니다. 사실은 밤의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온전한 변명일 따름이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살며시 깨문 진예가 그러지 말라는 듯 무건의 손끝이 닿아 오자 이를 떼었다. 그러고도 좀처럼 용기가 나지 않아 한참 만에야 무건이 인내심 있게 기다리는, 아마도 오래간 기다려 왔을 한마디를 어렵게 흘려 냈다.
“……좋아한다.”
그러자 무건이 진예의 몸을 돌려 마주 보게 했다. 무건은 약간 붉게 얼룩진 그녀의 두 뺨을 내려다보다가, 돌연 제가 진예에게 걸쳐 준 겉옷을 도로 거두었다. 그러고는 옷을 진예의 머리 위까지 올려 얼굴을 가리더니 고개를 틀어 입술을 맞추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볼까 봐 가린 것이었다. 하지만 고개만 들면 모두가 볼 수 있는 열린 공간이라 그런지 옷 안쪽에서 이리 입맞춤을 하는 행위가 마치 나쁜 짓을 하는 것처럼 민망하게 느껴졌다.
실제로도 찐덕하게 붙었다 떨어졌다, 다시 붙기를 반복하는 무건의 간지러운 입놀림이 더 선명하게 와닿았다.
그 끝에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들어온 그가 안쪽을 뭉근하게 휘저었다. 달콤한 것이라도 빨아들이는 것처럼 혀를 휘감아 오는 감각이 감질이 날 만큼 은근했다.
그렇지만 숨이 차오르기 전에 떠나간 무건이 입술을 떼어 내고는 진예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얼굴이 가까워 진예의 눈엔 무건의 까만 동공까지도 선명하게 들어왔다.
천천히 눈을 한 번 깜빡인 그가, 나직한 음성으로 속삭여 왔다.
“폐하의 옆자리를, 이 연무건이 채울 수 있어 그저 기쁩니다. 이 상황 전부가 제가 머릿속으로 그렸던 그대로인지라 혹 모든 것이 꿈이면 어찌하나 두려울 정도입니다.”
“……꿈이 아니다.”
진예의 대꾸에 무건이 안심했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어깨에 겉옷을 둘러 주는 손길에 진예가 마음을 내려놓은 것도 잠시였다.
“혹 황도로 돌아가면, 제게 각인을 해 주실 수 있습니까?”
황도를 떠나오기 전에 이미 무건에게 한 번 언급했던 말이긴 했지만 그래도 진예는 듣는 순간 심장이 거세게 박동함을 느꼈다. 각인이라는 말이 주는 긴장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긴장한 것은 그 말을 뱉어 낸 무건도 마찬가지인지 그녀를 보는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마치 변명하는 듯이 말도 길어졌다.
“그리하면 다시 동조 현상이 일겠지요. 물론 두 번째에는 폐하와 제가 또 어떤 부분이 닮게 될지, 그도 기대가 되는 바입니다만……. 저는 폐하와 죽음조차 함께하길 바랍니다. 당연히 전과 다르게 제 몸도 잘 돌볼 것이고, 그리고 폐하도 제가 지킬…….”
뒤로 갈수록 왜인지 자신감을 잃어 가는 모양이었다. 각인에 따른 위험성이 크다는 걸 본인도 알기 때문인 듯했다.
그답지 않게 줄어드는 목소리를 듣던 진예가 작게 미소 짓더니 무건이 말하는 중간에 손을 잡았다.
“그리하자, 무건아.”
말끔한 답에 무건이 말을 멈추고 두 눈 가득 진예를 담았다. 그러다 우는 듯, 웃는 듯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눈꺼풀을 떨었다.
꽤 긴장했던 모양인지 그는 크게 숨을 내쉬더니, 진예를 와락 껴안았다. 다음 순간, 무건은 어쩐지 곧 쓰러져 버릴 사람처럼 비틀거렸다.
“제 평생을 폐하께 다 바칠 것입니다……. 오로지 폐하만을 위해 살겠다, 감히 그리 맹세하겠습니다.”
진예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들렸다. 무건의 목소리에는 금세 울음기가 가득 차올라 있었다.
* * *
다음 날 오시.
전날 누대에서 이야기를 나눈 대로 진예는 환에 남은 익재들의 최후의 서식지에서 마지막 공격 명령을 내렸다.
진예가 이끌고 온 황제군은 대승을 예감하며 총공세를 펼쳤다. 그동안 익재들을 한곳에 몰아넣으며 군사들을 슬금슬금 이동시켜 몇십 일에 걸쳐 짠 포위진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동쪽과 서쪽에서는 방패수들과 공성에나 쓰이는 파쇄차를 앞세워 익재들을 한곳으로 몰아 그들을 압박하고, 익재들이 몰린 북쪽에서는 그 근처에 위치한 절벽에서 궁수들이 화살을 쏘아 댔다.
본래 화살 한 대쯤 머리에 맞든 가슴에 맞든 치명상을 입지는 않는 익재들이었다. 하지만 고통을 피해 남쪽으로 도망치는 익재들을 대기하고 있던 군사들이 해치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난전이 펼쳐졌을 때, 마침내 선두로 나선 무건이 우두머리의 머리를 베어 냈다. 덕분에 한껏 전의가 올라 우렁찬 함성을 내지르는 황제군이 총공격을 쏟아 냈다.
때는 환이 세워진 지 442년째 되는 해의 4월 중순.
환의 역사에 있어 절반이 넘는 세월 동안 함께해 온 질기디질긴 재앙이 완전히 뿌리 뽑히는, 역사적인 전투가 시작된 날이었다.
* * *
최후의 서식지에서 우두머리 익재를 잡고 나서도 나머지 익재들을 정리하는 데는 이레 정도 걸렸다. 숨어서 도망가는 놈들을 추적하느라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질긴 추격 끝에 마침내 마지막 익재까지 죽이고 돌아온 무건은 기진맥진했지만, 지체하지 않고 황도로 돌아갈 것을 진예에게 요구했다.
그의 닦달에 진예는 어쩔 수 없이 진지를 정리하는 것은 다른 이에게 맡기고, 쫓아오는 이도 없는데 쫓기듯이 황도로 철군했다.
그렇지만 무건에게 왜 이리도 호들갑이냐고 투덜거리던 진예도 달포 조금 넘게 걸려 황성으로 되돌아왔을 때는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돌아오고 나서 3일째 저녁, 산통이 시작된 것이었다. 태의가 말했던 시기보다 조금 이른 때였다.
과정이야 어떻든, 산통이 시작되자마자 진예는 곧장 산실청으로 향했다. 초산이라 그런지 통증이 심해 편전에서 산실청으로 옮겨 가는 와중에도 평생 내뱉은 적 없는 신음이 다 흘러나왔다.
그 통증은 사경의 종이 울린 깊은 새벽까지도 계속되었다. 진예가 편전에서 일을 보다가 왔다는 소리에 곧장 와서, 벌써 몇 시진째 산실청 바깥에서 서성이던 무건은 이젠 바깥까지 흘러나오는 진에의 비명에 몇 번이나 흠칫흠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얼굴은 이미 하얗게 떠서 사색이 되어 있었다.
무건이 다시 한번 산실청 밖을 지키고 있는 궁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똑같은 대답이 돌아올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정말 난 들어가면 아니 되는 것이냐?”
궁인이 역시나 송구하다는 뜻을 담아 허리를 숙였다.
“아이를 낳기 전까진 아니 된다는 폐하의 지엄한 명이 있으셨사옵니다. 송구하옵니다, 황후마마.”
대체 이 시간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으니 정말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홍 내관이 옆에서 붉은 등롱을 들고 쫓아다니며 진정하시라 일렀지만 안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때였다. 산실청 안에서 이제까지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폐하, 아기씨의 머리가 보이옵니다! 조금만 더 힘을 내소서!”
그 이야기에 무건이 걸음을 멈칫하고 산실청 입구로 시선을 고정했다. 아이가 나오자마자 안으로 뛰어들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진예의 신음은 계속되고, 또 초조히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무건에겐 거의 영겁에 맞먹는 긴 시간이 소요되었을 때였다.
내부의 소란이 조금 잦아드는가 싶더니 곧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소리를 듣자마자 무건은 건물 안으로 지체 없이 뛰어들었다. 거의 쳐들어간다는 표현이 적절할 만큼 회랑을 지나는 그의 발놀림이 다급했다.
방 앞을 지키던 궁인을 마주한 무건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폐하를 뵈어야겠다. 아뢰어라.”
그런데 궁인이 묻기 전에 안쪽에서 진예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황후는 들라.”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산실의 문이 열렸다. 그러자 궁인들 가운데에 진예가 누워 있는 모습이 보였다.
늘 예민하게 날이 서 있는 평소와 다르게 지쳐 보이는 진예의 모습에 무건은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벌써 아이를 대충 물에 씻겼는지 진예 옆에 서 있던 이가 방금 태어난 핏덩이를 강보에 싸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어여쁜 황녀마마이시옵니다, 황제 폐하.”
그에 진예가 반사적으로 시선을 그곳으로 돌리며 손을 뻗어 아이를 건네받았다.
“여아란 말이냐.”
“예, 폐하. 감축드리옵니다.”
감축드린다는, 진예와 무건 두 사람에게로 동시에 향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무건은 진예가 누워 있는 곳 옆으로 향했다.
조금 전까지 산통을 겪은 탓에 진예의 안색이 무척이나 좋지 못했다. 게다가 지금은 천으로 덮인 하체가 어떤 상태일지는 궁인들이 정리 중인 피 묻은 천만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 면면을 보며 무건은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으나 진예는 그를 올려다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었다.
“황후, 그대가 바라던 대로 황녀다.”
반쯤 주저앉듯이 침상 옆에 몸을 내린 무건이 진예의 말을 들은 건지 만 건지 동문서답을 했다.
“예. 무사하셔서 실로 다행이옵니다, 폐하…….”
무건이 금세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처럼 말끝을 흐렸다. 자신의 얼굴에 닿는 그의 쓰린 눈길을 마주하던 진예가 푹 웃었다.
“나는 그만 보고 아이를 보거라. 누구를 닮은 것 같으냐?”
그제야 무건이 시선을 내려 진예의 팔에 안겨 있는 아이를 확인했다. 얼굴이 무건의 손바닥보다도 작은 아기가 제 손가락은 물 수 있을까 싶은 작은 입술 사이로 울음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이 아니라 그저 사람을 본뜬 예쁜 인형처럼 생긴 그 아이를 들여다보자 이번엔 누군가 심장을 틀어쥔 기분이었다. 무건은 죄어오는 가슴에 숨까지 멈췄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코도 오뚝하고, 입은 앙증맞은 것이 꼭 폐하이옵니다.”
“눈은 그대를 닮은 것 같다.”
진예의 말에 자세히 보니 확실히 눈동자 색도 자신과 엇비슷해 보였다.
아이의 이목구비에는 진예와 무건이 적당히 섞여 있었다. 너무나 신이한 그 존재 앞에서 무건은 이번엔 숨이 벅차 왔다.
그가 어떠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진예가 이번엔 그의 시선을 제게로 돌렸다.
“황후?”
눈길이 맞자 진예의 눈이 살며시 곡선을 그렸다. 반달 모양으로 예쁘게 휘는 그 눈을 보며 무건이 또 정신을 깜빡 놓을 뻔했을 때였다. 그나마 이성을 차리고 있는 진예가 그에게 물었다.
“아이의 이름은 어찌하려느냐? 그대가 짓겠다 하지 않았나.”
무건이 아, 하며 얼이 빠진 소리를 내더니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 순간을 기다려 왔던 무건이 얼른 머릿속을 더듬으며 말을 붙였다.
“날 일 자에 큰 대 자를 쓰는 영(旲). 대환에 빛을 비추는 큰 인물이 되라는 의미로 진영이라 할까 하옵니다.”
“진영?”
성씨가 제가 예상했던 것과 달라 진예가 되물었다. 그러자 무건이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진예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희미하게 웃었다.
“폐하의 후계가 될 아이이니 마땅히 폐하의 성을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가.”
“당연하지 않습니까. 장차 환의 황제가 될 아이입니다. 어찌 제가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려 아이에게 저의 성씨를 물려주려 하겠습니까.”
“…….”
무건이 여기까지 생각했을 줄은 미처 몰랐던 진예가 왜인지 말문이 막혀 지그시 그를 바라만 보고 있는 사이, 무건의 시선이 다시 작은 아이에게로 향했다. 이어 말하는 그의 어조에는 어떤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진영, 이 아이가 폐하와 같이 이 환의 태평성대를 위해 끝없이 고민하는 훌륭한 황제가 될 것이옵니다.”
무건의 말에 동조한다는 듯이 듣고 있던 주변의 궁인들도 허리를 숙였다. 진예는 어쩐지 코끝이 찡해져 잠시 기다렸다가, 무건에게 겨우 답을 돌려주었다.
“그래, 짐이 반드시 그리되게 하겠다.”
“이 연무건 또한 아이를 부족함 없이 가르칠 수 있도록 더욱 정진하겠나이다.”
믿음직스러운 말이었다. 진예는 그가 뱉은 말을 꼭 지키리라고 확신했기에, 마음 놓고 무건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황후, 그대와 짐이 황도로 돌아오면 하기로 약조한 것이 있었지 않나?”
“폐하…….”
진예가 입에 올린 약조가 무엇인지 알아들은 무건이 눈을 크게 떴다. 진예는 흔들림 없는 어조로 그에게 말해 주었다.
“짐은 그대의 변치 않을 진심을 믿는다.”
그리 선언한 진예가 품 안의 아이를 한 번 내려다봤다가 옆의 궁인에게 넘겼다.
“아이를 데리고 나가 씻기고, 박 태감을 불러오도록 하라.”
그녀의 명대로 궁인들이 아이를 제대로 씻기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얼마 안 가 박 태감이 몇몇 내관들을 이끌고 들어오자 진예가 공표했다.
“태감은 들으라. 짐은 지금 황후 연 씨와 각인을 하고자 한다.”
갑작스럽게 각인을 시행한다는 소리가 들려오자 순간 박 태감도 놀랐는지 바로 답을 못 했다. 그러다가 뒤늦게야 허리를 공손히 굽히며 한마디 했다.
“황공하나이다, 폐하.”
황실의 일원, 특히나 황제와 황후 사이의 각인은 중요한 일이라 보통 이렇게 내관들이 둘러싸인 곳에서 하는 것이 절차였다.
“짐의 명인을 드러내라.”
진예의 명을 듣고 박 태감이 옆의 내관에게 고갯짓을 했다. 잠시 후 내관의 도움을 받아 돌아누운 진예의 어깻죽지가 내보여졌다.
내관이 발을 물리자 무건의 시야에 제 이름 석 자가 새겨진 그녀의 몸이 보였다.
그러고 나서야 정말로 진예가 돌이키지 않을 결심을 했다는 사실을 알아챈 무건이 숨을 멈췄다.
내관들의 시선이 온통 쏠린 가운데, 무건이 진예의 명인을 손끝으로 조심히 쓸었다. 가녀린 어깨가 살짝 흔들리는 모습을 본 그가 진예에게 낮게 경고의 말을 했다.
“다시 목숨이 하나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어요.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지금이라도 그만둔다 하면 물러서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진예의 입에서 더는 거부의 말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후회하지 않겠다.”
그러자 진예의 뒤에서 긴장감을 품은 한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내 무건의 입술이 조심스럽게 진예의 몸에 새겨진 명인 위에 내려앉았다.
곧 조금은 따끔한 감각이 느껴져 옴과 동시에 두 사람은 아주 짧은 꿈을 꾸었다.
무건의 손에 쥐어졌던 끊어진 실이 새살이 돋듯 다시 이어지는 꿈이었다.
* * *
“우에엥…….”
영의 울음이 터진 지 벌써 한 시진쯤.
유모의 품에서 잘 자고 있던 아기가 어느 순간 깨어나더니 그 맑고 동그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빼액 울음을 터트렸다고 한다.
소식을 듣고 서재에서 공부를 하다 달려온 무건이 아이에게 따뜻한 타락도 먹이고 변도 살피고 계속 둥기둥기하며 아이를 달래 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백기를 든 무건이 아이를 데리고 가마에 올라타 황궁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무건은 품 안의 조그만 아이가 통통한 볼살이 새빨개지도록 연신 쥐어짜는 눈물을 닦아 주며 얼렀다.
“그래그래. 조금만 참거라, 영아(旲兒)야. 어마마마를 곧 뵐 수 있다.”
그렇지만 영의 눈물은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아이의 울음소리에 어쩐지 평소보다 가마의 속도도 좀 더 빨라져 있었다. 덕분에 서둘러 황궁의 동문을 통과했지만 무건은 그마저 답답하다며 황궁 안에 들어서자마자 그냥 내려 버리고는 마중 나온 황궁 내관을 보며 물었다.
“폐하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내관은 황궁에 들어오자 울음이 조금 잦아든 대신 닭똥 같은 눈물을 울망울망 눈가에 달고 있는 황녀 아기씨의 모습을 보고 난처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무건의 이어지는 채근에 서둘러 진예가 있는 곳을 알려 주었다.
“현재 대전에 드셨사옵니다.”
“대전에?”
주로 편전에 머무는 진예가 웬일로 대전에 들었다는 소리를 듣고 잠시 의아해졌지만, 무건은 다시 “흐에엥.” 울기 시작하는 영의 소리를 듣고 급히 발을 옮겼다.
거의 뛰는 속도에 맞먹게 앞으로 걸어 나가는 무건의 뒤를 홍 내관이 졸졸 따라갔다. 그러면서 홍 내관이 불안해하는 표정으로 아이를 달래는 무건을 살피는데, 아니나 다를까.
“영아, 조금만 기다…… 윽!”
무건이 영의 젖은 뺨을 훑는데, 영이 돌연 제 눈앞을 돌아다니는 아비의 엄지를 가지런한 젖니로 콱 깨물어 버렸다.
깜짝 놀라 손을 뺀 무건이 작은 잇자국이 난 엄지와 저를 노려보는, 이제 겨우 다섯 달쯤 된 아기씨의 앙칼진 눈을 보면서 헛웃음을 지었다.
“이거 아비를 좋아하는 건지 마는 건지 원…….”
성격은 진예를 닮은 게 분명해 보이는 영을 다시금 추슬러 안은 무건이 대전의 동쪽 문을 통과했다.
다행히 영도 어머니와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알아챘는지 점점 얌전해지는 중이었다.
그런데 바쁜 와중이라 옆길로 기단을 올라 대전의 정문 쪽으로 걸어갔을 때였다. 대전 문이 열리면서 박 태감이 먼저 나오고, 이어 진예를 알현하고 나온 누군가가 밖으로 빠져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예의 누군가를 보는 순간, 한눈에 상대를 알아본 무건이 방금까지의 초조함을 잊고 잠시 발을 멈추었다.
무건을 발견하고 행동을 멈춘 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눈이 마주친 건 아주 잠깐이었지만, 순간 무건은 꽤 긴 시간이 지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와중에 상대방이 먼저 두 손을 모아 앞으로 내밀며 허리를 깊이 숙여 예를 갖췄다.
“홍복을 누리소서, 황후 폐하.”
지금 이 시점에, 그것도 이리 예고 없이 찾아올 줄은 몰랐던 뜻밖의 만남이었다. 하여 무건이 좀처럼 반응을 하지 못하고 있자 상대가 다시 매끄럽게 말은 이어 갔다.
“신 조서엽, 황제 폐하께 효기장군으로 복직을 명받아 부름을 받고 잠시 대전에 들었나이다.”
오랜만에 보는 조서엽은 무장을 갖춘 채였다. 마지막으로 봤던 그 형편없던 모습은 사라지고, 예전의 꼿꼿했던 시절의 단정한 모습으로 무건의 앞에 서 있었다.
무건은 그에게 무어라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다가, 이내 한마디를 겨우 떠올렸다.
“잘 왔네, 조 후…….”
어쩐지 그에겐 잘 지냈냐는 물음보다 이 말이 더 필요할 것 같았다.
예상이 맞았는지 서엽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어느 한구석엔 아직 쓰디쓴 애처로움이 배어 있었지만, 또 조금은 마음 편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무건은 그것을 보고는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금 천천히 옮겼다. 거리가 가까워지고 마침내 옆을 지나갈 때, 무건은 백 마디의 말 대신 조용히 서엽의 단단한 어깨를 한 번 손으로 쥐었다가 놓았다.
그러고는 미련 없이 그를 뒤로하고 대전 안으로 들어섰다. 박 태감은 앞서 나가 먼저 진예에게 그들의 방문을 알렸다.
“폐하, 황후마마와 황녀마마가 들었사옵니다.”
대전 특유의 긴장감 때문인지 영은 귀신같이 울음을 그치고 큰 눈만 데록데록 굴리는 중이었다.
이래서야 진예에게 괜한 호들갑을 떨었다며 한마디 듣는 것 아닌가 싶었지만, 일단 열리는 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조금 전 조서엽이 다녀가서일까. 황좌에 앉아 있는 대신 넓은 대전 가운데 서 있던 진예가 몸을 돌려 무건을 맞이했다.
“이 시간엔 어찌 왔는가, 황후.”
그녀는 창을 통해 들어온 은은한 햇빛이 매끄럽게 흘러내리는 금색 천에, 화려한 용 문양이 새겨진 용포를 입고서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거기에 관모를 쓰는 대신 머리를 틀어서 화려하게 머리 장식을 올린 채였다.
그 모습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무건은 진예의 아름다운 모습에 다시금 넋을 놓았다.
쿵, 쿵…….
그녀를 처음 봤던 그때처럼, 무건은 심장이 제멋대로 날뜀을 느꼈다.
아마 몇 번을 보아도, 몇 년을 보아도 진예를 볼 때마다 설레는 이 마음은 가시지 않을 것 같았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무건은 어머니를 보자마자 건너가고 싶어 허우적거리는 아이를 품은 채, 천천히 진예를 향해 걸어갔다.
자신의 유일한 정인이자, 영원한 황제인 그녀를 향해서, 앞으로는 그저 행복만을 알게 해 주겠다고 또 한 번 다짐하며.
그리고 그런 무건의 마음이 전해졌는지 진예는 이내 예쁘게 미소 지으며 아이를 건네받았다.
바쁜 일과 중 그녀를 찾아온 작은 평화의 시간이었다.
미친 사랑의 기록,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