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깊은 여름밤의 더위를 피하려는 요량인지 조그마한 날개를 휘저으며 참새가 포르르르, 황궁 침전에 날아들었다.
연못가에 내려앉은 작은 새는 발로 물을 살며시 밟고, 부리를 수면에 콕콕 찍어 댔다.
한데 그런 평화로운 장면과 어울리지 않게 차가운 목소리가 침전의 응접실 안에 울려 퍼졌다.
“짐이 그대를 다시 곁에 두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서엽은 눈을 꾹 감았다.
진예에게서 이런 말을 들을 거라고 각오하고 오긴 했지만 진짜로 이런 소리가 두 귀에 들어오니 가슴이 칼에 찔린 것처럼 아려 왔다.
하여 잠시 심호흡을 하고 있으니 진예가 그의 쪽으로 허리를 굽히는 기척이 느껴졌다. 서엽이 다시 눈을 떴을 땐 그녀의 얼굴이 가까이 와 있었다.
“내 네가 이럴 줄 알고 진작 말하지 않았더냐.”
밖으로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지만, 목소리를 낮춰 속삭여 오는 것에 서엽은 기묘한 위압감을 느꼈다.
다음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서엽은 목울대를 한 번 크게 움직였다가, 진예의 붉은 눈을 쳐다보며 질문했다.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주인은 개를 배반하는 게 숙명이야.”
“……폐하.”
이전에 그에게 선택권을 주겠다며 서엽에게 했던 말을 그녀가 다시금 꺼냈다.
신하도 정부도 아닌, 물지 않는 개가 되겠다던 서엽에게 진예는 개를 배반하지 않는 주인은 없다고 했다.
그들 사이에서 주인의 배반이란, 진예가 조서엽을 버리는 것이다.
진예는 도로 허리를 세우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가볍게 팔짱을 낀 그녀가 냉혹한 눈빛으로 서엽을 내려다보며 촌평을 내렸다.
“그리고 이젠 조서엽이란 개 또한 그 역할을 끝냈다. 그대 입으로 개는 죽는 순간까지 주인을 배반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그녀의 말에, 눈빛에 서엽은 입 안이 바짝 마르는 듯했다. 연무건을 갖다 버린 것은 지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진예와 멀어지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서엽은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라 헤매다가 한마디를 주워섬겼다.
“실수…… 였습니다.”
진예가 단호히 부정해 왔다.
“아니, 계획한 것이었어.”
“…….”
서엽이 진예를 잘 아는 만큼 진예도 서엽을 잘 알았다.
동조 현상을 끊고 연무건을 죽이겠다는 말에 진예가 그런 일이 생기면 벌하겠다고 대꾸했을 때부터 이미, 조서엽은 머릿속으로 자신의 손을 직접 쓰지 않고 무건을 죽이는 방법을 강구했을 것이다. 그런 것을 단순 실수라 명명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의도하에 벌인, 명백한 배신이었다.
조서엽도 스스로 제가 치졸한 거짓을 읊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터. 진예는 굳이 왜 이런 가식적인 대화를 그와 나눠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간의 정을 생각해 이곳에서 서엽을 기다렸지만, 역시나 쓸모없는 일이었다는 게 확인되자 피로함마저 몰려왔다. 말소리에 저절로 한숨이 섞였다.
“이런 부질없는 이야기로 짐의 시간을 빼앗으려 한 것이었더냐.”
“…….”
진예의 일침에 서엽은 안에 꿀이라도 머금은 듯 입을 굳게 닫은 채 대꾸하지 않았다. 진예는 그에 인상을 쓰며 더 강한 어조로 그를 질책했다.
“너를 황궁에 들이기 위해 조춘경은 짐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한데 이런 한심한 꼴을 보이려 온 것이었다니, 내 너에게 실망이 크다.”
제가 아끼던 신하의 무너진 꼴을 진예는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해서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는데, 서엽이 목소리로 그녀를 붙잡았다.
“그러나 이 조서엽의 충심에 대해서는 폐하께서도 결코 부정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잠시 주춤한 진예가 반쯤 떨어졌던 엉덩이를 도로 내렸다. 정말로, 마지막 정으로 그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 줄 셈이었다.
그럼에도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딱히 기대는 되지 않았기에, 진예는 심드렁히 대꾸했다.
“그래, 인정한다.”
“매번 제 목숨을 걸고 폐하를 지켜 왔나이다. 제가 하는 모든 것은 폐하를 위한 일이었다 감히 말씀드리옵니다.”
진예는 더 말해 보라는 듯 조용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입에 기름칠이라도 한 듯이 서엽의 입에서 말소리가 술술 나왔다.
“연무건을 죽이는 것조차도. 폐하의 뜻에 부합한다 여겼기에 행했던 일입니다.”
여전히 새로운 말은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전혀 흥미가 생기지 않아 진예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어 가는 서엽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에 서엽은 깊게 심호흡을 하더니, 이번에야말로 처음 듣는 이야기를 꺼냈다.
“연무건이 화친왕을 죽인 칼을 누가 건넸다 생각하십니까?”
한 번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점이긴 하지만 일단 화제를 전환한 것에 점수를 쳐줘, 진예가 짧게나마 대꾸했다.
“너였더냐.”
“그러하옵니다. 이 조서엽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게 왜 중요하냐는 듯이 진예가 여전히 무심히 쳐다보는 것에 서엽이 고개를 숙이며 제 충심에 대해서 전했다.
“소신이 어찌하여 그랬겠습니까. 그것 또한 폐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원래라면 연무건 따위, 그냥 황궁에서 알아서 쫓겨나게 내버려 둬도 되었다. 동조 현상에 대해 알지 못하는 한 밖에 나가도 연무건의 목숨을 노릴 자는 없을 것이었다. 있다고 해도 적당히 지킬 놈만 붙여 주면 되는 일.
그럼에도 무건에게 칼을 건넨 건 진예가 그를 통해 화친왕을 제거하길 원했기 때문이다. 서엽도 그편이 이쪽의 손에 피를 덜 묻히는 방법이라고 여겼기에 한동안 그를 지켜보며 도와주기도 했었다.
진예의 명인자가 아니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그랬다. 모든 것은 명인에서부터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서엽은 진예가 가라앉힌 응접실 내의 무거운 기류와 그에서 비롯된 압박감을 이겨 내기 위해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켰다.
그리고 오늘 진예를 찾은 목적이나 다름없는 주제를 꺼냈다. 그는 제 왼팔 손목에 감긴 끈을 풀고 소매를 걷어 냈다.
곧 불에 지져진 팔의 상처가 드러났다. 서엽은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은 이 명인의 비밀을 진예가 알면 어떻게 될까 상상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 명인.”
아마도.
아마도 진예가 자신을 다시 받아 줄 것이라 믿으며.
진실은 그렇지 않다 해도 밝히기 전까지, 그런 희망이라도 품지 않으면 당장 무너져 내릴 스스로를 알기에 그리했다.
“명인자가 누구인지 짐에게만 말하겠다, 조춘경에게 그리 이야기했다지.”
진예의 물음에 서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을 지져 없앤 이유 또한 이 조서엽이 오롯이 폐하께 충성을 다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더냐, 네 명인자는.”
진예의 질문에 서엽이 손으로 제 명인이 있었던 자리를 꾹 쥐었다. 제 운명이 여기서 결정된다고 생각하니 선뜻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심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동안 진예는 인내심을 가지고 자리를 지켰다.
무거운 침묵이 둘을 휘감았다. 하지만 그 정적을 깬 이는 둘 중 누구도 아니었다.
“폐하, 담소 중에 송구하옵니다만 중대한 사안이 생겼사옵니다.”
위장군의 목소리였다. 말의 내용만큼이나 목소리에도 다급함이 배어 있었다.
엄청난 긴장감에 싸여 있던 서엽은 한순간에 맥이 풀려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확인한 진예는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엇이더냐?”
“귀인마마께서 황성 남문을 통과하셨다 하옵니다.”
먼저 의미를 알아들은 서엽의 표정이 굳었다. 진예는 제가 무슨 얘기를 들었나 싶어 눈을 가늘게 했다.
“누가, 통과했다고?”
위장군도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지 대답하는 목소리에 주저함이 배어 있었다.
“귀인 연 씨이옵니다.”
귀인 연 씨.
그리 불릴 이는 대환의 땅에서 딱 한 명이었다. 연무건.
그러나 확인을 받고도 미심쩍어하던 진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그림자가 비치자 위장군이 문을 열어 주었다.
드르륵, 문이 밀리며 다시 닫힌 뒤에 진예가 소식을 전해 왔을 박 태감을 찾아 서둘러 행랑을 건너가 침전 문 앞에 섰다.
방금 전의 소식은 궁에서 몇십 년을 지낸 늙은 태감에게도 놀라운 일이었던지,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박 태감은 상황을 소상히 고하라.”
진예의 질문에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인 박태감이 제가 전해 들은 이야기를 전부 풀어냈다.
“예, 폐하. 황성 남문에 방금 전 한 사내가 나타나 본인이 연 귀인이라 밝혀 왔다 하옵니다. 성문교위가 그를 의심하여 명인을 확인하였사온데, 허벅다리에 폐하의 존함이 있었다 전했사옵니다.”
허벅다리에 자신의 이름이 있다면 위치는 맞았다.
진예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태감을 다그쳤다.
“……확실하더냐? 사실이 아닐 경우 고한 놈은 감히 짐을 능멸한 죗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틀림없는 사실이옵니다. 또한, 귀인마마가 직접 말을 타고 황궁으로 오고 계신다 하옵니다.”
두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가짜라면 보자마자 판별이 날 터. 진예는 가짜라면 그 자리에서 목을 베겠다 생각하며 명을 내렸다.
“궁문을 열고 연 귀인을 인교문으로 들이라.”
“황명을 받드옵니다.”
박 태감은 뒤로 물러난 뒤에 기단 아래의 젊은 내관을 불러 진예의 말을 전했다.
그 뒤 내관들이 무리를 이루어 총총걸음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진예가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를 짚었다.
“이것이 대체 어찌 된…….”
탄식하듯 중얼거리던 진예가 문득 행랑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만에 하나 진짜 연무건이라면, 조서엽이 여기 있어서는 안 되었다.
그녀의 눈이 어디로 향했는지 확인한 위장군이 얼른 반응했다.
“내보내겠습니다.”
“그리하거라.”
위장군이 서둘러 응접실의 문 앞으로 다가갔을 때였다. 또다시 내관 하나가 바쁘게 뛰어왔고, 박 태감의 목소리가 울려 왔다.
“연 귀인께서 내동문을 통과하였다 하옵니다, 폐하.”
“……!”
서엽을 데려갈 준비를 하기 위해 반쯤 응접실 문을 열었던 위장군이 도로 문을 탁, 닫았다. 그러고 그 앞을 지키듯이 섰지만 곤란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진예도 난처함에 그곳에 한번 시선을 주었다가 침전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밖으로 나가자 조금 더운 공기가 훅 끼쳐 왔다. 그리고 천천히 수많은 등롱의 붉은빛이 시야에 들어오면서, 인교전 앞의 광경이 넓게 펼쳐졌다.
궁인들과 내관들이 질서 있게 인교문까지 열을 지어 선 것이 보였다.
그 사이에서 인교문을 통과하는 인형이 있었다.
훌쩍 큰 키에, 커다란 몸집의 사내. 당당한 발걸음으로 거침없이 인교문에 들어선 그가, 곧 멀리서 진예를 올려다보았다.
어디서 구르다 온 건지 꼴이 심히 엉망이었지만, 분명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선해 보이는 눈과 훤한 이마, 보기 좋게 살짝 솟은 광대뼈, 비틀어진 데 없는 곧은 콧대, 햇볕에 조금 탄 듯한 단단한 살결까지…….
진예가 알고 있던 ‘그’ 연무건이 맞았다.
그들의 눈길이 스친 찰나였다.
무건이 즉시 한쪽 무릎을 꿇고 한쪽 팔을 올려 예를 갖췄다.
이어 특유의 굵고 낮은, 듣기 좋은 음성이 인교전에 닿았다.
“귀인 연무건, 대환의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무건이 눈앞에서 움직이고 있는데, 아직도 도무지 현실 같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어떻게 그가 여기 있는 걸까.
진예는 헛것이라도 본 사람처럼 홀린 듯이 앞으로 한 걸음 내밀었다. 그리고 스스로의 귀환을 알린 그를 향해 느릿하게 첫마디를 떼었다.
“……연 귀인은 가까이 오라.”
나직이 황명이 울려 퍼지자 무건이 도열해 있는 내관들 사이를 지나 마침내 인교전의 높은 기단 아래 멈춰 섰다.
붉은 불빛을 등지고 선 무건은 마주 선 제 정인 앞에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신 가슴속에 무언가 벅차오른 듯, 간절한 눈빛을 띠었다.
한참 만에야 무건은 제 정인에게 다시 한번 알렸다.
“돌아왔습니다…….”
드디어, 드디어.
뒷말은 목이 메어서, 가슴이 꽉 막혀 와서 차마 내뱉지 못했다.
“돌아왔습니다…….”
드디어, 드디어.
뒷말은 목이 메어서, 가슴이 꽉 막혀 와서 차마 내뱉지 못했다.
몇 번이나 죽음을 눈앞에 두었었다. 저번 만남이 끝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걸 전부 극복하고 다시 진예의 앞에 선 것이었다.
무건은 당장 기단 위로 올라가 그녀를 껴안고 싶었지만 욕망을 내리눌렀다. 대신 그녀의 앞에 또 한 번 무릎을 꿇었다.
이번엔 두 무릎을 모두 바닥에 내린 그는 읍주에서부터 내내 들고 있던 것을 제 앞에 내려놓았다.
옷에 감싸인 최초의 익재의 수급이었다.
무건은 묶어 둔 매듭을 풀고 여기저기 썩고 뜯겨 상태가 좋지 못한 그것을 모두의 앞에서 드러내었다.
“이 연무건, 폐하께 또 한 번의 가치를 증명하고자 최초의 익재의 목을 베어 왔나이다.”
입에서 그러한 말이 흘러나오자 여기저기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예 또한 무건의 앞에 놓인 머리를 내려다보며 의문 어린 표정을 짓다가, 얼마 전에 읍주에서 올라온 장계를 떠올렸다.
읍주에 혼자 들어갔다는 정신 나간 사내와 그가 데리고 나타났다는 남자아이. 그게 바로 연무건과 미마이였다.
“최초의 익재를 잡았다는 사내가…… 그대였더냐.”
물론 최초의 익재를 평범한 자가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상방주에서 죽었다는 놈이 읍주에 나타났으리라고는 그녀는 물론이요, 아무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었다.
비록 미마이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는 했지만, 동조 현상이 끊기면 능력 역시 사라질 줄 알았는데 그도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무건은 고개를 더욱 깊숙이 숙이며 말을 이었다.
“그러하옵니다. 이 영광을 폐하께 바치겠사오니…….”
한데 진예가 그가 말하는 중간에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대가 어찌 살아 있단 말이냐.”
여러모로 믿기지가 않는 일의 연속이었다.
이쯤 되니 귀신에라도 홀린 기분이었다.
조서엽도, 위도양도 무건의 죽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두 사람이 살아 있을 확률에 대해 전혀 상정해 두지 않았었기에 진예도 당연히 그리 믿었다.
하여 그의 뼛조각이라도 찾으면 장례를 치를 생각만 하던 중이었다.
한데 연무건이 멀쩡히 살아 걸어왔다.
그것도 모자라 최초의 익재를 제가 잡았다며, 가치를 증명하니 어쩌니 하고 있으니 꿈이라도 꾸는 듯했다.
한데 어떻게 살아 있냐는, 그녀의 말을 달리 해석한 무건의 표정이 굳었다.
고개를 숙인 탓에 어두워진 얼굴이 진예에겐 보이지 않았지만, 무건은 미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못다 한 문장을 완성시켰다.
“폐하께…… 이 영광을 바치겠사오니 부디 기쁘게 받아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그러나 다음 진예의 말도 무건을 실망시키기엔 충분했다.
“고생하였다. 봉아궁으로 돌아가 쉬고 있으면 내 그대를 다시 불러들이겠다.”
“…….”
무건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졌다. 그는 진예의 표정이 어떨지 몰라서, 혹시나 자신을 경멸하는 표정으로 보고 있지는 않을까 싶어서 두려워 올려다보지도 못했다.
그야 무건도 자신이 오자마자 진예가 뛰어와 반겨 주리라고 생각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이런 식의 분위기를 예상한 것은 아니었다.
어찌 살아 있느냐니…….
마치 제가 죽길 바랐다는 말처럼 들리지 않는가.
무건은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가슴이 꽉 메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살며시 고개를 들어 보니 방금 전의 한마디가 정말로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의 전부였는지, 진예가 침전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을 돌리고 있었다.
정말로 오늘은 이걸로 끝이겠구나 싶었던 무건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제가, 잘못 돌아왔습니까?”
그 말에 다행히 진예가 멈칫하고 무건을 돌아보았다. 내관들과 궁인들의 시선에 아까와 달리 팽팽한 긴장감이 서렸다.
그중 진예와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던 박 태감이 무례를 범하지 말라는 듯이 눈으로 무건을 타이르려 하였다.
그러나 무건의 시선은 오로지 진예에게만 향했다. 그에겐 그녀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무건이 인교전 앞의 계단을 올랐다.
진예는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와 달리 굳은 무건의 표정을 정면에서 바라보았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그의 앞을 막지 않은 건, 무건이 어울리지 않게 상처받은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단을 다 오른 무건이 진예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 지근거리에서 보니 무건의 꼴이 엉망인 게 더 눈에 들어왔다.
우선 안색이 너무나 좋지 못했고, 옷도 곳곳이 해졌으며, 보이는 곳엔 자잘한 상처들이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발견하고 진예가 내심 당황한 사이 무건이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혹여 제가 돌아오지 않길 바라셨습니까.”
진예는 질문을 듣고야 오해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런 적 없다.”
“하면 저를 잊으셨습니까.”
“그럴 리가 있겠는가.”
단지 안에 서엽이 있어 무건을 들이지 못하는 것뿐이었다. 게다가 누가 봐도 지친 모습이라, 침전에 들이는 것보다는 태의를 불러 주는 게 먼저인 듯 보였다.
그러나 무건은 몰래 주먹을 쥐며 서운함을 토로했다.
“그게 아니라면 어찌 잘 돌아왔다는 말씀 한마디가 없으십니까.”
이거였나.
진예는 그제야 제가 실수했음을 알아차렸다. 돌아와서 기쁘게 제 공을 읊는 그에게 충분히 매정해 보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잘 돌아왔다, 연 귀인. 많이 지쳐 보이니 그만 가서 쉬거라.”
문제라면 이번 말 역시 무건이 기대했던 어떤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제 기대치가 지나치게 높았던 것인지…….
어째서인지 이번에도 저를 밀어내는 듯한 진예의 말에 무건은 입을 꾹 닫았다.
애초에 살가운 사람은 아니긴 하니, 정말 이 정도로 만족해야 하나 싶었다.
하여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기 위해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여전히 작고 아름다운 자신의 정인이었다.
자기 직전이었는지 길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카락과 잘 다듬은 진주 같은 눈동자가 어여뻤다. 선이 매끄러운 얼굴엔 어찌나 이목구비가 잘 정돈되어 있는지.
당장 제 품에 안고 싶고, 닿고 싶었다.
하지만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황제를 함부로 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포기하고 돌아가야 하나 싶었던 때였다.
“…….”
잠시 시선을 준 침전 안쪽에 있던 위장군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위장군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고 기묘한 위화감을 감지한 무건이 진예의 뒤에 선 박 태감을 확인하고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해석하려 애썼다.
그의 기억 속에서 진예의 침전에 왔을 때, 위장군이 와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말인즉…….
“침전에 누군가를 들이신 모양입니다.”
무건은 제가 떠올린 가설을 곧장 입에 올렸다. 말로 하니 어떤 상황인지 더 선명히 정리가 되면서 머릿속이 한순간에 서늘하게 식었다.
무건의 의표를 찌르는 한마디를 들은 진예는 그녀답지 않게 곤란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드물게 감정을 드러낸 그 모습에, 무건은 저 안의 사람이 누군지 바로 알아차렸다.
진예가 이렇게 반응할 사람은 딱 하나였다.
“혹 조서엽입니까?”
질문을 듣고 옆의 박 태감이 먼저 움찔했다. 진예는 무건에게 바짝 다가섰다.
서엽이 침전에 왔다는 것은 위장군과 자신 이외엔 아무도 몰라야 했다. 따라서 목소리를 낮춰 작게 속삭였다.
“……지금은 그대를 상대해 줄 수가 없어. 돌아가라.”
무건은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맞군요, 그가.”
“연무건.”
진예가 그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진정하라는 의미였다.
그에 무건은 거칠어지려는 숨을 내리눌렀다.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 건 어디까지나 상대가 진예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예의 침전에 있는 이가 조서엽이라는 걸 안 이상 이대로 순순히 물러날 수 없었다.
절대로.
“상방주의 익재와 읍주의 익재를 제가 처리하였으니 더한 증명이 필요치는 않겠지요. 저를 지금 침전에 들여 주십시오.”
“지금은…….”
“폐하를 안으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서엽을 내쳐 주시란 말씀입니다. 지금, 당장.”
불가한 요구를 하는 무건을 보던 진예는 진정하라는 의미로 한 번 더 고개를 저었다.
그 표정이 전례 없이 간절한 것에 무건의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었다.
“조서엽이 저를 죽이려 했다는 것은 알고 계시는 겁니까. 그가 폐하의 유일한 비인 이 연무건을 반란군의 손에 넘겼습니다.”
“……알고 있다.”
진예의 대답에 무건의 눈이 흔들렸다.
알고 있는데도 이런다고?
그렇다면 이 상황이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건은 저절로 일그러지는 얼굴을 주체하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진예에게 화난 표정을 보여 주고 싶지 않은데, 감정 조절이 쉽지 않았다.
그는 깊은 곳에서 올라온 한숨을 토해 내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리고 다시 진예를 눈에 담았을 때, 무건이 냉랭한 어투로 툭 뱉었다.
“폐하께서 못 하시겠다면 제가 직접 그를 끌고 나오지요.”
무건은 곧장 몸을 틀어 침전에 성큼 걸어갔다. 돌발 행동에 진예가 놀라 그의 팔을 붙잡으려 했다.
“연 귀인!”
하지만 소용없었다. 진예의 손이 닿기 전에 무건은 거칠 것 없이 황제의 침전에 발을 들였다.
행랑에 다가가니 위장군이 조서엽이 있을 방문 앞을 몸으로 가렸다.
“마마, 이 문을 열면 아니 되십니다.”
무건은 입술을 비틀어 차게 웃더니 그를 밀어냈다. 위장군은 문고리를 잡으며 안 된다고 한 번 더 말렸지만 무건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가 강한 힘으로 문을 밀어 버렸다.
쾅, 소리를 내며 활짝 열린 문 안쪽엔 예상한 그대로의 인물이 있었다.
조서엽.
진예가 앉았을 의자 앞의 바닥에 무릎 꿇고 있는 그를 보고는 무건이 입으로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하…….”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하…….”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그 소리를 듣고는 서엽도 시선을 들어 무건을 올려다보았다.
침묵을 담보한, 숨이 막힐 듯한 긴장감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 무건은 두 주먹을 꽉 쥐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드리워진 발 사이로 흘러들어 온 미세한 바람결이 안에 있는 불빛을 흔들었다.
곳곳에 배치된 불빛 때문에 방바닥에 여러 겹으로 드리운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합쳐졌다가 다시 떨어지기도 하면서 불안하게 휘청거렸다.
그 모습을 바로 옆에서 보는 위장군은 선뜻 어떤 지시도 내리지 못하는 황제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검 손잡이를 잡았다. 유사시 그가 죽여야 하는 쪽은 조서엽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만 볼 뿐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무건의 숨소리는 점점 거칠어졌다.
존재만으로도 제 속을 긁는 이가 바로 앞에 있었다.
평범한 자신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고귀한 신분에, 자신보다 훨씬 오랜 시간 진예와 함께해 온 사내.
게다가 이곳은 침전이었다. 20보만 걸으면 침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진예가 자신이 없는 동안 이 사내를 품었을까.
단지 질문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기분에 휩싸였다.
무건은 눈을 한번 꾹 감았다. 그러다 눈을 떴을 때 그의 눈빛은 한층 서늘해져 있었다.
앉아 있는 서엽의 앞으로 바짝 다가선 무건은 증오스러운 사내의 뻔뻔한 면상을 눈 아래로 내려다보며 적당한 인사를 골랐다.
“오랜만이군.”
그러자 서엽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지긋지긋하다는 양, 비꼬는 투로 대꾸했다.
“살아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총 세 번이었다.
읍주에 갖다 버렸을 때, 그를 죽이러 화친왕부에 갔을 때, 그리고 이번 상방주에서까지.
연무건의 목숨을 거두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도대체가 제 인생에서 일이 이 정도로 꼬인 적이 또 있었나 싶었다. 그가 기억하기로는 단 한 번도 없었을 터였다.
이 얼마나 질긴 악연인지…….
그리고 악연이라고 생각하는 건 무건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입가에 희미하게 실소를 띠었다.
“덕분에 지옥에 갔다 왔다.”
“아쉽습니다. 영원히 꺼져 버리셨으면 더 좋았을 터인데.”
말이 끝나자마자 무건이 눈앞의 잘 정돈된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서엽의 얇은 입술에서 순간적으로 윽, 하는 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무건은 붙잡은 머리를 뒤로 잡아당기며 자연스럽게 제 허리를 굽혔다. 서엽의 턱을 강제로 들어 올린 그가 상대에게 제 얼굴을 바싹 붙였다.
재수 없는 면상에 침이라도 뱉어 주고 싶었지만 일단 참고, 서엽에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돌아왔을 때의 각오는 했으니 그따위 짓을 벌였겠지?”
“글쎄요…… 돌아오실 거라곤 예상하지 못해서 말입니다.”
서엽의 허세 가득한 말에 무건이 비릿하게 웃었다. 문득 상대가 이전에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날 원망하거라. 기껍게 받아들이지.〉
그 말대로 조서엽이 기꺼워 미치게 해 줄 셈이었다.
한순간에 무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거두어졌다. 그는 몸을 세우더니 서엽의 머리채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방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앉아 있던 서엽은 억센 아귀힘에 의해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반쯤 끌려가다시피 했다.
아무렇게나 당기는 힘에 서엽의 몸이 문짝에 부딪혀 쿵, 하고 크게 소음이 일었다.
그에 서엽은 이를 악물고는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무건이 가만두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행랑을 가로질렀다.
저벅저벅 걷는 그의 발소리에 따라 행랑 바닥이 그극, 기우는 소리가 났다.
무건이 일부러 머리를 짓누르며 잡아당기는 탓에 제대로 몸을 세우지도 못한 서엽은 꼴사납게 목줄 걸린 개처럼 끌려가고 있었다.
그런 무건의 행태를 본 위장군이 당혹스러워하는 얼굴로 진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진예 또한 낭패라는 표정을 지었다가 발을 옮겨 무건의 앞을 막았다.
“연 귀인…… 그만두거라.”
그러나 지금 막아선 건 오히려 무건의 화를 부채질한 꼴이었다.
무건은 잠깐 멈칫했으나 이내 서엽의 머리카락을 다 뽑아 버릴 듯이 거세게 비틀었다.
“설마, 방금 전 이자의 말을 못 들으신 겁니까.”
물론 여기서 서엽의 편을 들 경우 무건이 더 미쳐 날뛸 거라는 사실 정도는 진예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어찌해야 그를 진정시켜야 할지 몰라 말을 고르고 있는데, 그사이에 무건이 그녀를 성큼 스쳐 지나갔다.
무슨 고집인지 신음 한마디 내지 않으면서도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고 버티는 서엽의 다리를 무건이 중간에 퍽 발로 찼다.
“윽……!”
무릎이 꺾인 서엽은 결국 무건에게 휘둘리며 침전 입구까지 나아갔다.
결국 서엽이 밖에 모습을 드러내자 가장 앞에 있던 박 태감이 숨을 들이켰다. 그러고는 뒤에서 구경하고 있는 내관들과 궁인들을 꾸짖었다.
“무얼 하는 게냐, 다들 고개를 돌리지 않고!”
얼어붙은 분위기 속에서 무건은 서엽이 몸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빠른 속도로 기단 아래의 계단을 지나 인교전 마당까지 그를 마구잡이로 끌었다.
그러고는 끌려 내려오는 동안 자세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해 비틀거리는 서엽의 머리를 더러운 것이라도 되는 듯 내팽개쳤다.
거의 패악질에 가까운 그의 험악한 행동에 고개 숙인 주변 이들이 힐끗힐끗 곁눈질을 해 대다가, 무건의 눈길이 지나가자 얼른 시선을 내렸다.
모두의 주목을 받는 가운데 서엽은 굴욕감에 고개 숙인 채 온몸을 떨었다.
무건은 그런 그에게 작게 비웃음을 흘리고는 몸을 돌려 진예가 있는 인교전을 올려다보았다.
활짝 열린 문 바로 앞에 선 진예는 서엽을 한번 힐끗하고는, 무건을 지긋한 눈으로 건너다보았다.
저놈을 어떻게 진정시켜야 할지 몰라 난처했다.
그런데 그녀와 눈이 마주친 무건이 흥분으로 흐트러진 숨을 골랐다. 그 뒤 진예의 예상을 깨고 제법 차분한 목소리로 포문을 열었다.
“폐하, 여쭐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답을 내어 주실 수 있으신지요.”
진예는 연무건이 이번엔 또 무슨 수작을 부릴까 싶었다. 늘 그녀는 생각하지 못하는 쪽으로 튀는 무건이기에, 괜히 불안해져 왔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 저 입을 막았다간 더 큰 사달이 날 테니 진예는 일단 수락했다.
“말해 보라.”
무건이 첫 번째 질문을 시작했다.
“조 후는 반란군의 수장에게 폐하의 유일한 비인 저를 넘겨 죽음에 이르게 하려 하였습니다. 그것은 죄가 되지 아니하는 것입니까?”
질문의 형식을 띠고 있긴 하지만 사실상 답을 정해 놓고 하는 말이었다. 진예는 그가 유도한 예의 답변을 읊었다.
“……죄가 된다.”
그에 서엽이 움찔하는 모습을 흘겨본 무건이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갔다.
“한데 이자가 어찌하여 황궁에 들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음입니다. 혹여 그 죄가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인지요.”
“그렇지 아니하다.”
무건의 말이 진예의 귀엔 마치 신문하는 것처럼 느껴져 몹시 거슬렸다. 아마 무건의 머릿속에선 이미 마지막 질문과 그에 따른 요구 사항까지 전부 짜여 있을 터였다.
다음 말에서 진예는 그의 목적이 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하면 이자는 어떤 합당한 벌을 받았습니까.”
해석하면 조서엽에게 벌을 내리라는 것이다.
진예는 무건의 요구를 피할 방도가 없음을 느꼈다. 그 때문에 대답이 다소 느릿하게 나갔다.
“자택에 두 달간 구금하라 명하였다.”
사실 조서엽이 지은 죄에 비하면 턱없이 가벼운 벌이었다. 게다가…….
“아직 제가 죽었다 알려진 지 두 달이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이자가 이 자리에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바로 이게 문제였다.
무결점의 존재여야 하는 천자가 스스로 제 말을 어긴 것.
진예가 한동안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무건은 특유의 곧은 눈으로 진예를 직시하며 그녀의 입에서 말소리가 나오길 기다렸다.
한데 네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무건의 옆에서 흘러나왔다.
“……소신이 구금의 명을 어기고 폐하의 침전을 범하였기 때문입니다.”
서엽의 목소리였다. 말소리에 미약하게 한숨이 섞여 있었다.
그에 진예가 늘어진 소매 밑으로 주먹을 쥐었다.
애초에 황궁이 여염집도 아니거늘 그가 멋대로 들어왔다는 건 누가 듣건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그러니 방금은 서엽이 진예의 곤란해하는 마음을 짐작하고 제가 책임을 다 뒤집어쓰겠다며 끼어든 것이었다.
서엽이 숙였던 고개를 살며시 들더니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니 이자를 벌하시어도 달게 받겠나이다, 황제 폐하.”
“…….”
진예가 선뜻 무어라 하지 못하고 있는데, 무건이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허리를 숙였다. 그는 진예가 예상했던, 마지막 요구 사항에 대한 운을 띄웠다.
“제가 조 후를 직접 벌할 수 있도록 해 주십사 주청드리옵니다.”
이걸 위해 앞의 질문들을 포석으로 깔아 둔 거였다.
분위기로 봐서는 당장 죽여 달라고 할 것 같았던 놈이 그나마 이성을 챙기고서 말했으니 다행이라 여겨야 할지.
다만 그가 원하는 벌도 분명 가볍지는 않을 터.
진예는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나 싶어 골이 아파 오려 했으나 일단 물었다.
“무슨 벌을 말이냐?”
“추초 서른 대를 청하나이다.”
추초(箠楚). 즉, 채찍질을 하겠다는 의미였다.
예부터 형벌 중에 가장 잔인하다 하여 집행에 제한을 둘 정도로 웬만한 사람들은 견디기 어려워하는 것이었다.
진예는 먼저 서엽의 반응을 살폈다. 서엽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어차피 무건의 요구를 거절할 그럴듯한 명분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진예는 마지못해 그가 원하는 답을 들려주었다.
“허한다.”
하지만 제가 듣고자 하는 답을 얻어 내고도 진예의 눈이 서엽에게 잠시 향했던 것을 확인한 무건의 표정은 어둡게 가라앉았다.
무건은 답답함에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이내 고갤 숙였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곧 다가선 금위들에게 서엽은 양팔이 붙들려 일으켜졌다.
인교문 밖으로 끌려가는 와중에도 서엽은 아무런 저항 없이 순순히 발을 옮겼다. 대신 진예를 한번 눈에 담고 가는 모습에 무건은 여전히 속이 뒤틀리는 듯했다.
거기에 어딘지 심란해하는 표정이 된 진예를 살피고 있자니 그는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분명 제가 아닌 조서엽이 내쳐지는 상황인데 어 전혀 통쾌하지가 않았다.
조서엽의 변고에 저렇게 반응하는 진예가 과연 연무건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너무나 궁금하지만 차마 아무에게도 묻지 못할 질문이었다. 원치 않은 답이 튀어나오면 무너져 버릴 자신을 알기에.
얼마 안 가 진예가 무건에게 시선을 돌리고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무건이 먼저 허리를 숙였다.
“봉아궁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연 귀인.”
진예가 불렀으나 무건이 곧장 자리를 떴다.
하지만 진예는 바로 침전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인교문을 나선 뒤 준비된 가마를 타고 떠나는 무건의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무건이 허락 없이 떠나는 뒷모습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매번 제 뒤를 쫓아오기만 했던 놈이 먼저 떠나가 버리니 기분이 이상했다.
진예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다가, 옆의 박 태감을 손짓해 불렀다.
“봉아궁으로 바로 태의를 보내거라.”
“예, 폐하.”
아무리 감정에 서툰 진예라고 해도 방금 전 무건이 왜 도망쳤는지 정도는 알 것 같았다.
상처받은 것이다, 그도.
먼저 잘 돌아왔다는 말 한마디 건네지 않은 그녀에게 말이다.
연무건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진예는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만약 한마디라도 살가운 말을 건넸더라면 그의 행동이 달라졌을까.
진예는 그렇게 자문하다가 문득 어떤 가정도 아무 쓸모가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미 서엽은 무건에게 끌려 나와 감옥에 갇혔고, 상황은 돌이킬 수 없었다.
수개월 만의 만남이라는 것이 무색하게 여러모로 형편없는 재회였다.
* * *
스스로가 비겁자라고 생각한 적은 살면서 이번이 처음이었다.
도망치듯이 봉아궁으로 온 무건은 그 풍경의 낯섦에 한 번 주저하고, 자괴감에 두 번 좌절했다.
처음엔 단지 서운했을 뿐이다, 생각보다 너무 냉랭한 그녀에게.
그런데 저를 죽이려던 조서엽이 진예의 침전에 있는 광경을 눈앞에 두자 순간적으로 스스로를 자제시키질 못했다.
이 감정을 한 단어로 설명하면, 바로 열등감이었다.
자신보다 너무 잘난 어떤 사내에 대한.
그리고 자신은 결코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진예와 가까운 어떤 사내에 대한.
결국 부끄러움을 참지 못한 그는 잠이라는 도피처로 허겁지겁 피해 버렸다.
그간 주인 없는 텅 빈 궁을 지키고 있던 홍 내관이 무건을 보자마자 기뻐하는 기색을 얼굴 가득 띠었지만,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무건은 도무지 호응해 주지 못했다.
거의 정신을 잃은 듯이 잠들어 버렸다. 황도로 돌아오기까지 한시도 쉰 적 없었기 때문에 몹시 지친 탓이 아니라고 하기도 모호하긴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회피성이 짙었다.
덕분에 무건은 자면서도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왜 그랬지, 내가…….’
황궁에서 저지른 스스로의 행동을 후회도 하다가.
조서엽을 안쓰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던 진예의 모습이 떠올라 어쩔 수 없었다고 자기 자신을 달랬다.
황궁에서의 일이 잠든 동안에 몇 번이고 반복되어 꿈에 비쳤다.
그 악몽 속에서 날이 훤히 밝았을 때까지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그를 결국 홍 내관이 먼저 깨웠다.
“마마, 기침하실 시간이 지났사옵니다.”
무건은 식은땀에 흠뻑 젖은 채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쉬지 않고 이어지는 홍 내관의 채근에 씻고 돌아온 무건은 조반을 꾸역꾸역 입에 쑤셔 넣었다. 그러고는 어젯밤 허탕을 치고 돌아갔었다는 태의를 마주했다.
태의는 얼굴만 멀쩡할 뿐 온몸이 엉망이 된 무건을 보고 연신 탄식을 했다.
어깨며 복부, 팔 등 거의 상체 전부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붕대에 둘러싸인 무건의 발을 살피며 태의가 엄중하게 경고했다.
“당분간은 되도록 활동을 줄이시고 절대 안정을 취하소서. 도자기처럼 많이 약해진 상태이시니 또다시 다치시면 그때는 예후를 장담하기 어렵사옵니다.”
도자기 같은 상태라기엔, 바로 어젯밤에도 몸을 아무 이상 없이 썼다.
정작 당사자에겐 전혀 와닿지 않는 충고였으나 무건은 마지못해 물었다.
“당분간이라는 게 어느 정도인가.”
“최소 달포이옵니다. 그동안 매일 찾아오도록 하겠사옵니다.”
대답하며 태의는 뒤틀려 염좌가 온 발목의 뼈를 맞추었다. 다른 데의 부상이 더 심했던 탓에 제 발목이 그런 상태인 줄도 모르고 있던 무건이 신음을 흘렸다.
“흡……!”
그러고 한참을 곳곳에 침으로 찌르고 뜸을 올리며 잔소리를 해 댔다. 하지만 그것들을 모두 한 귀로 흘린 무건은 태의가 돌아가자마자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고 홍 내관을 불렀다.
“게 누구 있는가.”
태의가 경고하긴 했어도 역시 가만있기는 싫었다. 멍하니 있어 봤자 땅굴 팔 일만 생길 뿐이었다.
제아무리 진예 앞에 다시 서기 두렵다고 해도 답답한 상황을 이어 가기에는 그의 성미와 맞지 않았다.
한데 드르르륵, 굼뜨게 문을 열고 들어선 홍 내관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어딘지 의기소침해진 데다, 태의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몰라도 의심과 불신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무건은 삐걱거리는 팔을 옷에 꿰며 혹시 자기를 뜯어말리면 어쩌나 싶어 은근히 눈치를 살피는데, 홍 내관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부르셨사옵니까, 마마.”
“내 위장군을 만나려면 어찌해야 할까 싶어서.”
무건이 황비 쪽과는 크게 인연이 없을 사람을 찾는 것에 홍 내관이 역시나 눈을 슬쩍 치켜뜨며 경계하는 기색이었다.
“위장군은 어찌 찾으시옵니까?”
“물을 것이 있어 그러하니 어디 있는지 알아봐 주시게.”
그러자 홍 내관이 흡, 하고 숨을 들이켜더니 엄숙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태의가 나가면서 적어도 달포는 꼼짝하지 마시게 하라고 하였사옵니다.”
어째 치료를 하면서도 잔소리가 좀 심하다 싶었는데 역시 태의가 홍 내관한테도 제 증상을 줄줄이 읊어 준 모양이었다.
하지만 무건은 옷깃을 정리해 여미며 대수롭지 않아 하는 투로 반박했다.
“안 다치면 그만 아닌가.”
“하지만, 마마…….”
홍 내관은 소심한 성격만치 걱정이 너무 심했다. 무건은 고개를 슬쩍 기울이더니 그를 설득할 만한 패를 꺼냈다.
“그럼 내가 이대로 평생 봉아궁에 갇혀서 폐하와 내외하길 바라는 건가?”
“……그것은 아니온데.”
“서둘러 알아보고 오게.”
후궁이 황제와 내외한다는 건 삶을 썩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무건의 으름장을 듣고 홍 내관은 하는 수 없이 물러가더니,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야 위장군이 황성의 서쪽 모 성루에 가 있다더라 하는 소리를 전해 왔다.
무건은 안절부절못하는 홍 내관의 만류에도 봉아궁을 나서서 말에 올라탔다.
* * *
〈이 연무건, 폐하께 또 한 번의 가치를 증명하고자 최초의 익재의 목을 베어 왔나이다.〉
편전에 앉은 진예는 상자에 담긴 채 제 앞에 놓인 최초의 익재의 수급을 앞에 두고 어젯밤 연무건의 모습을 떠올렸다.
금세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몰골을 하고는 무건은 흔들림 없이 그리 주장했다.
단지 허세가 아니라, 진예가 생각해도 이 정도라면 제법 훌륭한 증명이었다.
“……네 어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진예는 저도 모르게 그리 중얼거렸다.
연무건은 어느새 여기까지 올라섰다.
더는 기회를 달라고 제 앞에 무릎 꿇고 빌던 그 사내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었던 놈이 하나씩 그녀가 원하던 것을 채워 주었다.
처음엔 진예도 당연히 그가 이 정도까지 할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중간에 적당히 떨어져 나갈 줄 알았지.
연무건은 진예가 지금까지 본 누구보다도 지독했고, 끈질겼다.
한데 그때였다. 문밖에 사람의 그림자가 다가왔다.
“폐하, 박 태감이옵니다.”
봉아궁으로 가서 연무건을 데리고 오라고 지시해 둔 터였다. 진예는 얼른 상자를 닫고는 들어오라 일렀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박 태감은 혼자였다. 옆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진예가 슬쩍 눈살을 구겼다.
“연 귀인은? 어찌 혼자인가.”
“그것이, 궁을 비우셔서 모셔 오지 못하였사옵니다. 알아보니 위장군을 뵈러 가셨다고 하옵니다.”
갑자기 위장군은 왜…….
그렇게 생각하다가 어젯밤 조서엽과의 일이 기억나 진예는 한숨을 내쉬며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위장군이 쓸데없는 말을 해서 일을 키우는 사람은 아니니 딱히 걱정되지는 않았지만, 무건이 왜 찾아갔는지는 알 것 같았다.
하필 때가 그렇게 겹쳐서 오해가 눈덩이처럼 커져 버렸다.
“조 후는 어찌 됐다더냐?”
“추초를 받기 위한 준비가 다 되었다 들었사옵니다. 봉아궁에서 추초는 내일 진행하겠다 알려 왔다 하옵니다.”
“……알겠다.”
이래서야 조춘경을 볼 낯이 없었다.
어제 일로 황궁이 발칵 뒤집혔으니 그가 소식을 듣지 못한 것은 아닐 텐데, 따로 연통을 넣었다는 이야기는 없는 것을 보니 이번엔 참을 모양이었다.
다만 그의 속이 얼마나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을지는 눈에 훤했다. 제 아들이 황궁에 들어왔다가 옥에 갇혀서 채찍질을 당하게 생겼으니 어찌 안 그럴까.
그렇다고 또 조춘경을 봐서 서엽을 멋대로 풀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명분이 없을뿐더러, 그때야말로 연무건의 눈이 제대로 뒤집혀 버릴 테니.
일단 무건의 말대로 그가 무언가 증명을 해냈으니 적당한 대가를 쥐여 줄 필요는 있을 것이었다.
또한 서로 평생 안 볼 것도 아닌데 오해하는 시간이 길어져 봤자 좋을 건 없으니, 기왕이면 푸는 게 나을 터이고.
솔직히 자신이 왜 나서서 이런 변명 같은 걸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냥 두기엔 찝찝한 구석이 있었다.
“연 귀인이 돌아오는 즉시 황궁에 들라 이르거라.”
“예, 폐하.”
박 태감이 문을 닫고 나선 뒤 진예는 침전으로 돌아갔다.
일부러 그를 만나려 조회를 일찍이 끝냈던 터라 오래간만에 시간이 비었으니 차라리 잠시 휴식이나 취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궁인들을 불러서 연화탕(목욕탕)으로 향하려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러는 사이 문득 거울에 비치는 어깻죽지의 명인이 시야에 들어왔다.
延武建
그녀의 명인은 한번 칠흑 같은 먹색으로 짙어진 이후로는 전혀 연해지질 않았다.
보통 죽거나 관계가 멀어질 것 같으면 다시 연해진다고 들었다.
하여 무건이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땐 왜 그대로인지 의문스러워했었는데, 그러지 않은 이유가 따로 있긴 했던 것이다.
‘살아 있었다라…….’
궁인들의 조심스러운 손길을 느끼며 어울리지 않게 상념에 빠진 진예는 무건이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 어떤 감정이었는지 곱씹어 보았다.
처음 서엽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을 적에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다만 그건 서엽이 어리석은 짓을 했다는 이유가 더 크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다음엔, 동정했다. 평범한 사내가 괜히 황제인 자신과 엮여서 하지 않아도 될 일들을 하다가 개죽음을 당한 것이었으니까.
그러다가 황궁에 돌아와서 문득문득 빈자리가 느껴진다고도 생각했다. 별로 오래 있지도 않았던 놈이 흔적을 많이도 뿌려 놨다며.
하지만 그게 과연 그리움의 감정이었을까. 아직은 실체가 명확하지 않아 보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제 부모와 동생이 죽었어도 한 번도 그리워해 보질 못했다. 그리움이 뭔지 배우질 못했다.
어차피 늘 혼자라고 생각했었다.
서엽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가 항상 옆에 있었음에도 그 마음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아름답다 말하는 온갖 찬란한 감정들은 오래전에 도려내진 탓에 그녀조차도 스스로의 마음이 어떤지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한번 사라졌다가 온 덕에, 없으면 아쉬운 놈이라는 사실 정도는 연무건이 몸소 증명해 내긴 했다.
‘……아직은 그 정도인가.’
하지만 그녀의 인생엔 그 정도도 아닌 사람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찰박, 소리와 함께 진예의 발이 물에 닿았다. 이내 그녀는 뜨거운 탕옥에 몸을 담그며 고개를 젖혔다. 진예의 검은 머리가 물속에서 꽃처럼 퍼졌다.
물에서 올라오는 훈김을 느끼면서 눈을 감았다.
사실 그녀에겐 이 모든 일들이 벅찼다.
연무건과 조서엽이 제게 간 쓸개 다 빼 줄 듯이 간절히 매달리는 것도.
두 사람이 화합하지 못하고 서로를 죽일 틈만 노리는 것도.
그게 하필 전부 저를 향한 연모의 감정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부터가 단단히 잘못된 일처럼 느껴졌다.
그런 격화된 감정을 조율하는 것보다, 차라리 전쟁에 나가서 익재를 쓸어버리는 쪽이 진예의 입장에서는 더 마음 편했다.
‘대체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것인지…….’
이 싸구려 감정놀음을 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누군가 답을 알아서 찾아 주었으면 좋겠다.
어떤 해법을 들고 오든 이미 늦은 것 같지만.
* * *
서쪽 성루에 있다는 위장군은 무건이 도착했을 땐 이미 다른 성루로 자리를 옮긴 뒤였다.
워낙 바쁜 이이니 무건은 그가 가 있다는 곳으로 다시 찾아가 기다리기로 했다.
동선이 길어질수록, 그리고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뒤쫓아 온 홍 내관의 안색이 점점 검어졌지만 무건은 그의 마음까지 헤아려 주진 못했다.
위장군은 점심때가 되어서야 성루에서 기다리고 있는 무건을 발견하고 난처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무건이 자신을 찾아오리라 예상치 못한 탓에 그는 혹시 더 적절한 사람이 있나 주변을 돌아보다가 무건에게 다시 시선을 주었다.
“……저를 기다리신 겁니까?”
기별 없이 온 데다 도착한 뒤에도 따로 언질을 한 것은 아니라 더욱 놀란 듯했다.
무건은 성루의 난간에 기대어 있던 몸을 세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일로 묻고 싶은 것이 있어 왔네.”
곤란했던 어젯밤의 일을 떠올린 위장군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는 주위의 부관들을 물러나게 했다.
그는 성루 안에 아무도 남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목소리를 낮춰 극히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어제 일은, 신이 먼저 말씀을 드리지요. 결단코 어제가 유일하였사옵니다. 폐하께서는 황도로 돌아오신 이후로 조 후를 찾은 적이 없으시옵니다.”
“하필 재수 없게 걸렸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무건이 팔짱을 끼더니 불쑥 상스러운 말로 대꾸해 오자 위장군은 순간 멈칫했다. 그러다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것이 진정 사실이옵니다.”
위장군이야 거짓말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니 어쩌면 현재 가장 신뢰할 만한 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그런 사람의 확언에 무건은 풍랑을 맞은 듯 불안하게 요동치던 마음 한구석이 조금 진정됨을 느꼈다.
하지만 단지 조서엽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중요한 건 역시 진예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니까.
무건은 어제 분명 진예가 자신을 밀어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해서 입에 올리기 싫지만 이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난,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나?”
위장군은 곧장 고개를 저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그렇지 않사옵니다.”
“폐하께서 내가 죽기를 원했다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거듭 아니라고 부정하는 소리가 돌아오긴 했지만 무건의 굳은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그가 불쑥 다른 화제를 입에 올렸다.
“그대도 폐하와 나 사이의 동조 현상에 대해 알고 있었나.”
“알고 있었사옵니다.”
위장군은 대답하다가 위화감을 느끼고는 미간을 슬쩍 좁혔다. 그간 제가 놓친 사실이 뭐였는지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었다.
생각해 보니 진예와 무건, 두 사람은 동조 현상으로 엮였었으니 한쪽이 죽으면 나머지 한쪽도 죽는다. 반대로 한쪽이 살아 있다면 다른 한쪽도 살아 있다는 의미였다.
그렇기에 진예는 무조건 그의 생사에 대해 인지했어야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간 진예도 무건의 죽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왜?
자연스럽게 질문이 따라붙었다.
그리고 본래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인지 생각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는 위장군을 보며 무건이 쓴웃음을 지었다.
“조 후가 동조 현상을 끊었네. 폐하의 명이 없이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겠지.”
동조 현상을 끊는다는 이야기는 생전 처음 들었지만 위장군은 의문을 뒤로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 이상은 자신이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하지만 무건이 그를 직시해 오며 한 번 더 물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위장군은 곧바로 한 걸음 물러서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리 말씀을 하시어도, 신이 폐하의 의중을 대변하지는 못하옵니다. 변변찮은 말재주로 실언을 할까 저어되옵니다.”
“…….”
“송구하나 일이 다망한 관계로 먼저 물러나도 되겠사옵니까.”
자리를 뜨려는 의도가 없지는 않겠으나 위장군은 정말 바쁜 사람이었다. 무건은 그를 더 붙잡아 놓을 수 없음을 알아차렸다.
“그렇게 하게.”
무건은 계단 아래로 성큼성큼 내려가 버리는 위장군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다시 성루의 기둥에 몸을 기대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얼굴을 덮었다.
“하…….”
본인한테 물어보면 깔끔하게 해결될 일인데 뒤에서 이러는 꼴이 스스로도 우스웠다.
대체 언제부터 제가 이렇게 겁쟁이가 돼 버린 건지.
‘이전엔 잘 지껄였잖아.’
심지어는 면전에서 갖다 버리라는 소리를 듣고도 각인해 달라느니 하는 미친 소리를 해 댔었다.
‘무슨 정신으로 그랬었지?’
그야 그땐, 그렇게 하나 안 하나 똑같았다. 어차피 진예는 연무건을 무조건 거부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어느 정도 손에 쥔 것이 생겨 버렸다. 그리고.
‘이번에 버려지면…….’
정말 끝이니까.
더 이상은 진예에게 갖다 바칠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젠 제 앞에 있는 절벽이 무서워졌다.
무건은 숨을 몰아쉬며 굳은살이 박여 딱딱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이젠 바로 한 걸음 앞이었다.
그곳에 제가 그토록 원하던 목적지가 있을지도 몰랐다. 반대로 영원한 나락이 기다리고 있을 확률 또한 함께했다.
그래서 자꾸만 바보처럼 서성이게 되는 것이었다.
“우습군.”
스스로의 꼴에 신랄한 평을 갖다 박은 무건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도 끝을 영원히 안 볼 수는 없다. 피한다 해서 피해지는 일도 아니고, 원치 않아도 언젠가는 다가올 미래였다.
역시나 뒤에서 이러는 꼴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비겁한 짓이다.
그리 결론지은 무건도 그만 성루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자 홍 내관이 말을 데리고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건은 갈기가 제법 풍성하게 자란 흑마 위에 올라타며 홍 내관이 듣길 원하는 말을 들려주었다.
“돌아가지.”
그렇게 봉아궁에 도착한 무건은 진예가 저를 찾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돌아오면 바로 황궁에 들라는 전언이었다.
그러나 몰려오는 긴장감에 무건은 선뜻 봉아궁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한 시진 가까이 지나는 동안 침전에 틀어박힌 그에게 홍 내관이 문밖에서 간격을 두고 몇 차례나 황궁에 안 가시냐 물었다. 하지만 무건은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
침상에 걸터앉아 제가 가지고 다니던 옥가락지를 손안에서 굴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서서히 창문에 투과되어 들어오던 햇빛이 주홍빛을 띠기 시작하고, 그림자도 서서히 길어진 무렵이었다.
어스름이 되어서야 겨우 결심하고 나온 무건은 황궁으로 향하는 가마에 올라탔다.
진예는 침전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무건은 마냥 반가워만 했던 어제와는 달리 복잡한 표정으로 인교문의 문턱을 넘었다. 그러자 박 태감이 침전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무건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회랑을 지나 나타난 침방의 문이 열렸다.
이곳 역시 몇 번이나 드나들었지만, 이토록 긴장하여 온 적은 처음이었다.
무건은 열린 문 틈으로 움직이기 싫어하는 발을 억지로 밀어 넣고는 진예와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부복했다.
“부르심을 받고 왔나이다, 황제 폐하.”
“많이 늦었군, 연 귀인. 고개를 들라.”
무건은 진예의 말을 따라 정면을 바라보았다.
고운 천으로 짠 붉은 천개 아래, 금색 용포를 두른 진예가 침상에 앉아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진예가 몸을 일으켰다.
무건은 잔뜩 긴장해 어깨를 굳혔다. 가까이 오라 하지 않고 진예가 직접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락사락 천이 쓸리는 소리와 함께 진예의 작은 발이 옷자락 밑으로 보였다가 말았다가 하기를 반복했다.
무건은 점점 다가오는 그녀를 보다가 두어 걸음 앞까지 오자 어째서인지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바로 앞에서 발을 우뚝 멈춘 진예는 그런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툭 물었다.
“봉아궁으로 든 지 꽤 되었다고 들었다만, 짐의 부름을 이제야 들은 건가?”
무건이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진예는 채근하지 않고 인내심 있게 그가 답을 내놓길 기다렸다.
상당히 경직된 듯 보였으나 한참 만에 나온 무건의 목소리에선 진예가 이전에 알고 있던, 연무건 특유의 담력이 엿보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
어제저녁에는 그와 어울리지 않게 주저함이 담겨 있었는데, 마음의 정리가 끝났는지 어느새 번잡함이 사라져 있었다.
“하면 왜 이제야 나타났나.”
무건이 도로 고개를 들어 진예를 마주 보았다. 진예는 그의 눈빛에서 이전의 연무건과 다른 무언가를 느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이전엔 근거도 없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 있던 그였다. 처음엔 그게 진예의 신경을 긁곤 했지만 또 재밌는 부분이기도 했는데…….
지금은 마치 이제야 현실을 깨우친 것처럼, 좀 더 차분해진 느낌이었다.
입에 올린 말도 지금껏 무건이 보인 태도와는 사뭇 달랐다.
“이번엔 어떤 대가를 받을지에 대해 고민하다 늦었습니다. 아무래도 마지막 기회가 될 것 같기에.”
마지막 기회.
진예는 참으로 그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 아닌가 생각했다. 이전에는 기회를 달라고 우겼던 그인데, 지금은 스스로 마지막이란다.
달라졌다고 느끼는 것이 단지 그녀의 감만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진예는 허전함인지 서운함인지 구분하지 못할 묘한 감정을 느끼며 그의 말을 한 번 더 곱씹었다.
“마지막이라. 마치 안 들어주면 떠날 것처럼 말하고 있지 않느냐.”
설마 눈앞의 사내가 그러리라고는 상상한 적 없지만 말을 뱉고 나니 그럴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덜컥 들었다.
하지만 그럼 좀 발칙한 상황이지 않나.
지금까지 원하지도 않았는데 마음껏 이쪽을 들쑤시고, 뒤흔들어 놓고선 떠날 때도 멋대로 정해 버리면?
그런 생각을 하는데 무건이 고개를 흔들며 답했다.
“폐하께서 절 내칠 것으로 예상합니다.”
진예는 그 대답에 푹 웃어 버렸다. 약간의 안도감도 느끼면서.
“무슨 대단한 대가를 받으려 하기에 그리 운을 띄우는 것이냐.”
그러자 무건이 엉뚱한 소리를 해 왔다.
“안아도 됩니까.”
“갑자기?”
허락하기 전에 무건은 이미 몸을 일으켰다. 늘 진예가 생각했던 것보다 한발 앞서는 그이기에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가 진예를 와락 안아 오자 커다란 몸에 그녀가 푹 감싸였다. 커다란 손이 어깨의 둥근 부분을 조심스럽게 덮어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사내의 단단한 어깨에 얼굴이 닿으니 진예에게로 진한 체취가 밀려들어 왔다.
“어제부터 쭉…… 이러고 싶었습니다.”
목소리에도, 그녀를 안은 몸에도 미묘한 떨림이 배어 있었다.
진예는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라 헤맸다. 이런 상황에서 살가운 말을 해 주기엔 너무 낯간지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다 그녀의 눈길이 무건의 옷깃 사이로 비치는 붕대에 닿았다.
“몸이, 엉망인 모양이군. 상방주에서도 많이 다쳤다 들었다.”
아침에 봉아궁에 다녀온 태의도 걸어 다니는 게 신기할 정도라고 했다.
“정말로 못 돌아오는 줄 알았습니다.”
“……고생하였다.”
건넬 수 있는 말이라곤 고작 이것뿐이었다.
안겨 있는 통에 무건이 어떤 표정인지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 그에게는 아쉬운 반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건은 어제처럼 더 반겨 달라고 요구하지는 않았다. 대신 진예의 팔을 붙잡더니 품에서 살짝 떼어 내고는 눈을 맞췄다.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하는 그의 표정이 제법 진지했다. 아니, 단지 그 정도가 아니라, 사실은 조금 슬퍼 보이는 얼굴이었다.
“왜, 동조 현상에 대해 저에겐 말씀해 주시지 않은 겁니까?”
무건을 황궁에 불러 놓고 실제로 그가 오기까지 여러 상황을 가정했었다. 그중에 이를 묻는 것도 포함돼 있긴 했다.
하지만 선뜻 무어라 해야 할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예상했다 해서 늘 그럴듯한 대답을 준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진예가 잠시 침묵하고 있자 무건이 씁쓸해하며 미소 지었다.
“굳이 이유를 들려주셔야 하는 건 아닙니다.”
“그댄 어차피 걸림돌이니.”
한마디를 내보내자마자 진예의 팔을 잡고 있던 손이 움찔했다. 무건의 표정이 허물어지는 게 시시각각으로 보였다.
그러나 진예는 그에게 굳이 변명과 거짓을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만 해결한 뒤 내칠 생각이었다.”
그렇다 해도 너무 솔직한 답이었을까.
무건은 더는 진예를 마주 보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입을 꾹 닫고 무언가 견디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아마도, 아픔을.
그녀의 팔소매를 잡고 있던 무건의 손이 힘없이 스르륵 떨어졌다.
“역시 그랬, 군요.”
당연한 말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단순 생각만 하는 것과 진짜로 듣는 것은 달랐다.
칼에 에인 듯이 가슴에 통증이 몰려왔다. 익숙해졌다고 해서 그녀의 거부가 늘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동조 현상을 끊으러 온 조서엽의 말이 내내 그를 괴롭혀 댔다.
진실은 진예가 그를 절대 마음에 품지 않는다는 것.
황후가 되어도 껍데기뿐이라는 것.
전부 저는 반박할 수 없는 명제들이었기에 더욱 오래 기억 속에 머물렀다.
그렇게 안색마저 창백해져 가는 무건에게 지금은 아니라는 소리가 과연 위로가 될지.
진예는 확신하지 못해 말없이 지켜보다가 나직이 물었다.
“읍주에 갈 생각은 어찌했더냐.”
무건은 지친 목소리였지만 나름대로 성실한 답을 내놓았다.
“……돌아왔을 때 빈손이면 저의 가치를 인정해 주지 않으실 테니 그 수밖에는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런가. 네가 무모한 거야 진작 알고 있었다만, 정말이로군.”
진예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무건이 말을 덧붙였다.
“조서엽에게 지지 않아야 하니, 말입니다.”
그리 말하는 무건의 말투에 가시가 박혀 있었다. 당연한 말이기야 하겠지만 그의 입장에선 조서엽만 생각하면 이가 갈리는 모양이었다.
다만 진예는 이제 와서 뭘 더 이기려 드는 것인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제 손으로 옥사까지 보냈으면 된 게 아닌가 하고.
“투기라도 하는 게냐.”
하지만 무건에겐 아직 충분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찌 안 할 수가 있습니까.”
무건이 다시 고개를 살며시 들어 진예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침전에 켜 둔 은은한 불빛이 비쳤다.
어두움이 깊어져 가는 저녁이라 더 그리 보이는 걸까. 검은 눈동자는 전에 없이 간절함을 띠었다.
“아직도 당신께는 그 사내가 첫 번째 아닙니까. 저는 껍데기밖에 없는 비이고.”
“…….”
“종마 역할밖에는 못 하는…….”
중간에 한숨은 내쉬며 그가 말을 잠깐 끊었다.
조서엽은 나흘 가까이 데리고 있었으니 자기는 닷새라 주장하던 그때의 여유로움과 자신만만함을 지금의 무건에게선 찾을 수 없었다.
“아니, 그것도 어차피 조서엽이 대체할 수 있으니 소용이 없겠군요.”
그는 진정 불안해하는 중이었다. 자신이 버려질 것을.
차라리 뻔뻔하게 나오면 쉬울 텐데, 무건의 약해진 모습을 앞에 둔 진예는 대처하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그간 일부러 방치해 둔 오해들이 쌓여 있는 상태라는 게 발목을 잡았다.
“조 후는…….”
꼬인 실을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몰라 주저하던 진예가 일단 어제 일부터 짚어야겠다 생각하며 입을 열었을 때였다.
무건이 고개를 저었다. 변명은 싫다는 의미 같았다.
대신 그는 이곳에 온 애초의 목적을 꺼냈다.
“이 연무건이 바라는 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최초의 익재를 잡아 가치를 증명한 대가.
굳이 그런 표현을 쓰지는 않는 데에서 진예는 무건의 의도가 무엇인지 짐작했다.
그냥 그는, 사내인 연무건에게 그녀가 해 줄 수 있는 일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다.
무건은 진예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더니 이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곧 그의 입에서 요구 사항이 흘러나왔다.
“각인과 황후의 자리를 원하옵니다.”
“…….”
다만 그 욕심이 과했다. 누가 들어도 그렇게 판단할 것이었다.
순간 진예의 낯이 굳었지만, 무건은 이내 제 품 안에서 눈에 익은 물건을 꺼냈다. 벌써 두 번이나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한 옥가락지였다.
“또한 이 가락지를 받아 주시기를 청하옵니다.”
진예는 제 앞에 내밀어진 것을 내려다보았다.
신념이든 무엇이든 다 바꾸겠다더니, 이것은 차마 버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름밖에 모르는 명인자에게 주겠다며 산 저것이 무건에겐 그토록 의미 있는 물건이라는 의미일 터였다.
하지만 그래서 더 그것만큼은, 받아 들지 못했다.
“그대는 짐이 생각한 것 이상의 증명을 해내었다.”
제법 긍정적인 쪽으로 진예가 말문을 열었으나 무건은 쉬이 긴장을 풀지 않았다. 올려다보는 눈빛이 지긋했다.
“황후의 자리는 짐이 애초에 약조한 것이니 내주도록 하지.”
“나머지 둘은 아니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진예는 고민하다가 길을 조금 돌아가기로 했다.
“그를 원하는 연유를 묻고 싶군.”
“폐하께서도 또한 저에게 증명해 주시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증명인가.”
여태껏 무건은 진예에게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몇 번이나 제 몸을 위협 속에 내던졌다. 그 지난한 과정에서 살아남아, 결국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었다.
“저를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는 증명.”
그런 그가 이제는 진예에게 제 가치를 인정한 데 대한 확증을 요구해 왔다.
“그리고 저로 인하여 신념을 바꾸겠다는 증명입니다.”
말인즉 각인은 버리지 않겠다는 증명, 가락지는 신념을 바꾸겠다는 증명이라는 거였다.
진예는 그가 왜 자기가 내쫓길 거라 예상했는지 충분히 알 만했다. 모두 진예에게는 불가한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무건이 주장하는 바는 간단했다.
“촌에서 살던 이 평범한 사내는 폐하께 저를 증명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단지 가진 것을 내놓은 것만이 아니라,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갖다 바친 사내.
“그간의 모든 삶을 버렸으며, 이 손에 피를 묻히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나이다.”
무건의 헌신은 스스로의 삶을 온통 바꾼 결과였다. 상상해 본 적도, 원치도 않았던 일을 하며.
“앞으로도 이놈은 폐하의 앞에서 이리 무릎을 꿇고 우러러보겠나이다. 폐하께서 또한 다른 증명을 원하신다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모든 일을 할 것이옵니다.”
하지만 한쪽이 일방적으로 전부 쏟아붓기만 하는 관계가 영원히 이어질 리 없었다.
조서엽처럼 연무건 또한 언젠가 망가지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그렇게 되면 진예는 또다시, 상대를 버리는 선택을 할 터였다.
연무건이라는 사내가 원하는 것은 그런 끝이 정해진 관계가 아니라는 의미다.
잠시 말을 멈췄던 무건은 가락지를 가지고 있던 손으로 주먹을 꽉 쥐고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진예와 눈을 똑바로 맞추고,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한 목소리로 진예를 향해 말했다.
“그러나 저는 조서엽과 같은 개가 될 수는 없사옵니다. 그런 것은, 싫습니다.”
듣고만 있던 진예는 그제야 한마디 겨우 꺼냈다.
“……그대가 바라는 것은.”
“진예라는 여인의 사내가 되고 싶습니다.”
황궁에서 가장 은밀한 공간인 침전 깊은 곳에서 그렇게 한 사내의 욕망이 울려 퍼졌다.
“더는 저 침방에서만 사내로 칭하지 말아 주십시오.”
사실 그간은 연무건의 연모라는 말이 한없이 가볍게만 들려왔었다. 즉물적이고, 순수한 만큼 진정성은 떨어진다고 그리 생각했었다.
고작 명인 하나 때문에 어떻게 사랑을 하는가.
운명에 끌린다고는 하지만, 마음의 길이 늘 그쪽으로 나는 건 결코 아니었다. 당장 진예 그녀만 보아도 연무건을 처음엔 그토록 거부해 왔다.
그러니 이름만 보고 연모했다는 그의 말을 신뢰할 수 있을 리가.
하나 지금은 달랐다.
무건은 온몸으로 스스로의 진심을 말하고 있었다. 그녀를 우러러보며, 제 전부를 진예 앞에 펼쳐 놓고서는 이젠 그도 사랑을 받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버려질 두려움을 각오하고서라도.
진예는 그에 대답을 주저했다.
무건이 원하는 것이 그저 계량적인 대가를 주는 정도가 아니라는 사실쯤은 그녀도 알았다.
그러나 진예에게 그런 정해지지 않은 무언가는 너무 어려웠다. 그런 유라면 자신은…… 그에게 어떤 것도 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어떻게 해도 지금의 그녀는 무건이 원하는 답을 내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신 질문을 했을 뿐이었다.
“거절하면 그대는 떠나는가.”
“제가 어찌 그리하겠습니까.”
“하면.”
“폐하께서 거절하시어도 바뀌는 것은 없사옵니다. 이 연무건은 이미 당신께 모든 것을 다 드렸습니다.”
“…….”
“단지 폐하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을 뿐입니다.”
차라리 뭔가를 담보로 걸고 요구를 해 왔다면 화를 내며 제대로 거절할 수 있었을 텐데, 무건은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더 그의 진심이 와닿고.
그래서 정말, 곤란했다.
진예는 손을 살며시 앞으로 내밀어 손끝을 그의 뺨에 대어 보았다. 아파서 그런지 핏기가 조금 빠진 무건의 얼굴은, 그러나 충분히 따뜻했다.
체온에 이끌려 그의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며 손가락을 턱 밑으로 밀어 넣었다. 무건이 손짓에 따라 자연스럽게 고개를 좀 더 들어 올렸다.
“너는 어찌 이리도 내게 매달리느냐.”
듣는 사람 골치 아프게…….
이러지 말고 속물적인 욕망이나 읊어 주면 좋을 텐데, 어려운 숙제를 내놔서는 왜 사람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하는지 몰랐다.
무건은 제게 닿은 그녀의 손이 소중하다는 듯이 따뜻한 손으로 덮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연모, 그것이 아니라면 이럴 이유가 있겠사옵니까.”
단지 이런 말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듯이 말이다.
정말, 대책 없는 놈이었다.
“고작 명인 때문에 그댄 이리 간절해질 수 있는 것인가.”
무건은 고개를 틀어 진예의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그곳에 그의 입술이 꾹 눌러졌다.
쪽, 하고 살며시 입을 맞춘 무건이 이내 깊은 고동색 눈으로 그녀를 짙게 쳐다보았다. 그의 차분한 목소리가 진예는 모르는 어떤 이야기를 전해 오기 시작했다.
“동조 현상이 발현되고, 사라질 때 꿈을 꿨습니다.”
예의 그 꿈을 더듬어 나가듯 무건의 음성이 굼뜨게 흘러나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온통 하얀 실만 넘실거리는 그런 꿈이었습니다. 미마이가 그러더군요. 그 실들은 이 세상 모든 인연을 뜻한다고.”
꿈속에서 어떤 실은 그의 몸속에 스며들고 싶다는 양 달라붙어 왔다.
읍주로 향하던 어느 날, 미마이와 잡스러운 이야기를 나누다가 무건이 그걸 떼어 내느라 좀 귀찮았다는 언급을 했었다. 그러자 미마이가 작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우물쭈물 대답해 왔다.
〈그러지 않으셨으면 새로운 명인이 새겨졌을지도 몰라요.〉
〈그게, 말이 되는 건가?〉
〈간혹 명인이 둘 이상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말, 아주아주, 드문 경우지만.
그렇게 강조하면서.
심지어는 쌍방이 아닐 때도 있다고 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던지라 무건은 집중해서 듣다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완전히 엉터리네. 명인이 신의 뜻이 맞긴 한 건가.〉
〈일단 정해지면 바꿀 수는 없으니까요…….〉
온갖 것의 소리를 들으며 이 세상을 구성하는 진리들을 깨우쳤다는 아이는 신의 뜻이 대체 뭔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하긴, 한낱 인간이 쉽게 알 수 있으면 신의 뜻이라고 칭하기도 어렵겠다만.
그리고 무건도 신의 뜻이 그렇게 제멋대로에, 불완전한 것이라면 굳이 모두가 맹신할 필요는 없겠다고는 생각했다.
비록 저는 진예와의 운명을 믿고 있지만, 실은 그걸 믿는다는 점 또한 자신의 마음에 불과했다.
그러니, 제가 믿는다는 예의 운명이란 결국 그런 것이었다.
“그 꿈속에 넘실거리는 실 중에서 제가 잡고 싶었던 실은 오로지 폐하와 연결된 것이었습니다.”
“무슨 뜻이더냐.”
“저는 이 운명을 제가 선택했다고 믿습니다.”
선택의 의미가 단지 상대를 선택한다는 뜻만을 내포하는 것은 아닐 터였다.
하늘에 의해 상대가 정해졌어도 사랑할지 말지 결정하는 일, 그리고 이후 어떤 방식으로 설계해 나갈지 생각하는 일은 그 운명을 고지받은 인간의 몫이었다.
무건 역시 주어진 운명에서 무엇도 바꾸지 못한다고 믿는 어리석은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그저 그는 진예를 목숨 걸고 사랑하자고 결정한 것이었다.
제 전부를 희생해서라도 그녀가 원하는 모두를 이루어 주자고. 진예의 눈엔 한심해 보이든 말든 하등 상관없이 말이다.
그것이 진예와의 운명을 믿는 연무건의 변이었다.
진예는 들으면서 위도양이 죽기 전에 말했던 그녀의 운명론에 대해 떠올렸다.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이어 준 거라고 믿고 있다.〉
둘의 이야기는 신기하게도 결이 닿아 있었다.
“그러니 당신께서도…… 저를, 이 연무건을 선택해 주십시오.”
운명론을 믿지 않는 그녀에게 신념을 바꾸라는 요구란 결국 이런 뜻이었다.
하지만 평생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조차 없는 진예에겐 너무나 어려운 요구였다. 무건도 물론 그 사실을 알기에 일절 강요하지 않았다.
“이런 요구를 하는 제가 꼴도 보기 싫으시다면 봉아궁에 그냥 저를 평생 처박아 두셔도 기꺼이 견디겠습니다.”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든 무엇도 바뀌지 않는다면서.
“연무건…….”
“폐하께서 제 소원 중 무엇도 들어주지 못한다 하셔도, 괜찮습니다. 저를 찾으신다면 앞으로도 언제든 달려올 겁니다.”
진예는 권모술수가 판을 치는 황궁에서 이런 말을 하는 자는 처음 보았다. 무건은 그만큼 그 스스로에게 일방적으로 불공평한 이야기들을 읊고 있었다.
오로지 연모한다는 그 이유 하나로 말이다.
진예는 가망 없는 자신에게 매달리는, 눈앞의 사내를 가엾다는 듯이 내려다보았다.
“사내들이란 어찌 다 이 모양이더냐. 왜 그대나 조서엽이나, 전부 다……. 대체 짐에게 어쩌라는 것인지 조금도 모르겠다.”
그녀의 심장은 오래전에 굳어 버렸다.
가장 가까워야 했던 부모에게 기대하고, 실망하고, 좌절하고…… 그러다가도 희망이 비치면 다시 일어서는 그 끔찍한 과정들을 되풀이하다가 이내 멈춰 섰다.
어느 누구든 자신을 배신하고 상처 입힐 수 있다는 본능적인 불신.
사람이란 것들에게 기대할 만한 감정은 그뿐이라고, 그런 인식이 무의식에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무건은 정반대의 말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자신을 무한 신뢰해 달라고. 그간 진예라는 사람이 지녀 왔던 모든 신념을 깨부수면서.
하지만 그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이야기이던가. 대체 사내들은 무슨 헛된 꿈을 이리 깊게도 꾸는지 모르겠다.
인생을 좌우하는 요소가 애오라지 사랑만인 것도 아니거늘.
한데 무건이 그녀의 생각을 부정했다.
“사내라서 이 모양인 것이 아닙니다.”
그가 제 얼굴에 닿은 진예의 손을 끌어당겨 목에 감으며, 몸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워져 왔다. 숨소리가 그녀의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들어 올 만큼.
입술이 닿기 직전이었다. 무건이 가늘게 뜬 눈으로 진예를 들여다보며 특유의 듣기 좋은 저음으로 작게 속삭였다.
“진예, 당신도 연모의 정을 품게 되면 이리될 겁니다.”
틀림없이.
그리고 그녀의 입술이 무건에게 삼켜졌다.
거친 파도처럼 단숨에 그의 체온이 그녀를 덮어 버렸다.
따뜻한 체온만큼이나 너그러운 손길이 진예의 얼굴을 살며시 기울였고, 무건 또한 그와 반대 방향으로 제 얼굴을 비스듬히 했다. 그로 인해 결합이 깊어지자 둘은 거의 동시라고 해도 좋을 때에 눈을 감았다. 곧장 젖은 혀가 진예의 입 안으로 침입했다.
간지러운 날숨과 함께 금세라도 사르르 녹을 것만 같이 스며든 무건이 그녀의 입을 열고 안의 혀를 제 것으로 얽어 끌어당겼다.
진예의 어깨에서부터 타고 내려간 손이 가는 허리를 꽉 붙잡아 몸을 겹치게 했다.
그가 벌써부터 흥분한 것이 배 위로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어 둘의 탄탄한 다리가 엇갈렸다.
진예가 천천히 뒤로 물러나자, 무건이 따라오면서 집요하게 그녀의 입술을 탐식해 나갔다.
끼익, 하고 바닥이 기우는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서로의 타액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혀 놀림에 따라 질척한 소음을 일으켰다. 할짝거리는 소리가 넓은 침방에 민망할 정도로 크게 울렸다.
귓가를 자극하는 난잡한 소리에 진예가 잠시 굳을 때마다 무건이 그녀의 부드러운 살을 핥으며 자극을 해 왔다.
하아, 하.
접문이 길어질수록 그들의 숨소리도 점차로 거칠어져 갔다. 겹쳐진 입술 사이로 델 듯이 뜨거워진 숨결이 흘러나오자, 무건은 그녀의 머리를 꾹 누르며 더 깊게 결합해 왔다.
온 신경이 입술에만 몰린 것처럼 작은 움직임 한 번에도 흠칫하게 됐다. 혀의 돌기들이 입천장을 훑으며 깊은 곳의 여린 살을 건드리자 진예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이전의 입맞춤도 이렇게 자극적이었나.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무건의 유연한 혀 놀림에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툭, 하고 어느새 도달한 침상에 다리가 닿았다. 예상치 못하게 진예의 몸이 무너지면서 이불이 푹신하게 깔린 침상 위에 상체가 떨어졌다.
“읏……!”
그에 무건이 혹여 다치지 않도록 팔로 머리를 감싸며 진예의 밑을 받치는 한편, 입술을 붙인 채로 제 몸을 더욱 밀어붙였다.
단단한 가슴이 숨이 막히도록 그녀의 몸을 짓눌렀다. 그리고 허벅지 언저리에 딱딱한 무언가가 닿아 왔다.
금세라도 옷을 끌어 내리고 엉망으로 만들 것처럼 잔뜩 고양된 그를 느끼며 진예가 한쪽 다리를 허리에 감았다.
그런데 그 순간, 무건이 입술을 떨어뜨렸다.
거칠어진 숨을 토해 내며 그가 진예를 내려다보았다. 왜인지 모르지만 당혹감이 서린 얼굴을 확인한 진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찌하여 멈추는 게냐.”
숨소리를 조용히 가라앉힌 뒤에야 무건이 차분히 대답했다.
“……지금 하는 건 비겁한 짓이니. 그러니 다음에, 다음에 불러 주십시오.”
예컨대 제 진심이 이런 것 때문에 희석될까 우려하는 듯했다.
다만 진예는 무건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그간 기회만 온다면 그녀와의 잠자리를 피한 적이 없었던 그였기에.
진예는 그의 목에 감았던 팔을 내리며 손으로 얼굴을 쓸어 보았다.
“이러다 평생 봉아궁에 처박히는 신세가 될 수도 있지 않나.”
단정한 이목구비가 그녀의 손이 닿는 곳마다 살며시 떨리며 흐트러졌다. 마침내 손끝이 살짝 젖은 입꼬리에 닿았을 때, 무건이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폐하께선 그럴 마음은 없지 않으십니까.”
“어찌 그리 확신한단 말이냐.”
“절 황후로 책봉해서 후사를 보셔야 하실 테니까요. 그리고 폐하께선 허언을 하지 않으시는 것으로 압니다.”
이미 황후 자리를 주기로 약속했으니 지킬 것이라고, 그가 그리 믿고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라 진예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잘 파악하긴 했구나. 짐은 너란 놈을 아직 잘 모르겠는데.”
그녀가 웃음 짓는 것을 잠시간 홀린 듯 보던 무건이 얼마 안 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언제나 생각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번엔 무건의 손가락이 진예의 입술에 닿았다. 도톰한 입술을 엄지로 덧그리다가 이내 못 견디겠다는 양 턱을 잡은 그가 다시 짧게 입맞춤을 했다.
하아, 하고 깊은숨을 흘려보내며 입을 뗀 무건이 진예에게도 겨우 들릴 만큼 조곤조곤 속삭여 왔다.
“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말을 수없이 머릿속에서 떠올리고.”
입술이 살며시 열이 오른 볼을 지나 귀로 옮겨 갔다. 진예가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자 금세라도 파헤칠 것 같은 은밀한 손길이 그녀의 옷 위를 훑었다.
용포 위로 솟은 봉긋한 가슴 위를 스쳐 갈 땐 진예는 무의식중에 움찔 떨었다.
“이 얼굴이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이 몸이 어찌 움직이는지 계속 되새기니 어찌 안 그렇겠습니까.”
하지만 애만 태울 뿐 무건은 그 이상의 행위는 하지 않았다. 대신 제 몸을 내려 온몸으로 그녀를 꽉 껴안았다.
“사모합니다, 진예.”
진예를, 하늘이 보내 준 자신의 정인을 눈앞에 두고도 그리움에 가슴이 멜 만큼 연모했다.
그녀가 진정 원하는 바가 있다면 무건은 다시금 목숨을 걸고 전부 다 가져다줄 것이었다. 진예를 위해서는 무엇도 아깝지 않았다.
“폐하께서 절 사랑하지 않아도.”
무건에게 있어 이 사랑은 절대 명제였다.
세상이 무너져도 결단코 바뀌지 않는 것.
무건은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고운 체향을 깊게 들이켰다. 그 뒤 몸을 떼어 내었다.
몸을 압박하던 무게가 사라지자 진예가 무건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말이든 해 주고 싶은데 한마디도 나오질 않았다. 이름조차 부를 수가 없었다. 하여 애꿎은 소매만 잡고 있으니 무건이 주저하다가 몸을 완전히 뒤로 뺐다.
침상 밖으로 그가 빠져나가자 진예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확인한 뒤에야 무건이 허리를 낮추며 작별을 고했다.
“물러가겠나이다.”
“……돌아가거라, 연 귀인.”
다정히 이름이라도 불러 주길 원했을까.
무건은 조금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조용히 발을 물렸다. 그의 그림자가 비치자 밖에서 문을 열었다.
타악, 하고 문이 다시 닫힌 뒤 텅 빈 방 안은 지독한 적막에 휩싸였다.
홀로 남은 진예는 무건이 조금 흩트려 놓고 간 제 차림새를 내려다보다가, 그의 체온이 닿았던 입술을 손끝으로 훑었다.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가 떼어도 무건이 새기고 간 아스라한 감각이 사라지질 않았다. 혀로 할짝이고, 입술로 깨물어도 봤지만 오히려 선명해지는 것에 진예는 한숨을 내쉬었다.
“연무건…….”
작게 그의 이름을 읊조리던 그녀는 어쩐지 어깻죽지가 간지러워져 와 몸을 굽혔다.
너를 대체 어떻게 할까. 네가 바라는 것을 나는 줄 수 없는데.
그런데 보이지 않는 곳에 처박아 두지도 못할 듯했다.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멀쩡히 살아 있는데 그가 눈앞에 보이지 않는 상황을 상상하니 배알이 뒤틀렸다.
한 발짝이라도 가까이 오려고 평생을 다 바칠 것처럼 굴어 놓고, 이렇게 마지막엔 선택권을 전부 떠넘겨 버리다니.
연무건은 비겁했다.
하지만 그마저 자신을 배려하기 위한 결정이란 사실을 알기에 끝까지 원망하지는 못하겠다.
침상 위에 몸을 뉘며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오래도록 눈을 감지 못했다.
대앵, 대앵, 삼경을 알리는 엄숙한 종소리가 멀리서 울려 퍼졌을 때에야 겨우겨우 잠기운이 눈꺼풀 위에 내려앉았다.
* * *
다음 날 바깥의 분주한 발소리와 새벽의 여명에 부스스 몸을 일으킨 뒤에야 진예는 제가 어제 헛짓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애초에 무건을 부른 이유가 오해를 풀기 위해서였는데, 그냥 보내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무건도 묻지 않은 건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일까. 아니면 반대로 너무 궁금하지만 듣기 싫다는 의미일까.
그런 고민을 하면서 편전에 든 진예는 오늘도 서탁에 한가득 쌓인 상소문들과 장계를 확인했다.
무건이 돌아온 지 이틀이 지나니, 예상대로 상소문에 그의 거취를 정하라는 내용이 섞여 있었다.
벌써 5년 반도 넘게 공석인 황후 자리를 서둘러 채우라는 내용이었다.
기실 연무건 외에는 따로 내명부에 있는 이가 없는 데다 황제의 명인자이니, 누군가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이 그녀가 바로 황후로 봉하면 그만인 일이었다. 반대할 대신들이 있을 리도 없었다.
그러나 황후 책봉을 명하는 글을 쓰려다가도 붓끝을 벼루 밖으로 빼질 못했다. 과연 지금 이러는 게 맞는 건가 싶었기 때문이다.
진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옆에서 먹을 갈던 내관이 눈치를 보고 있는데, 마침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박 태감이옵니다.”
진예는 그것을 핑계로 붓을 탁,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더냐.”
“조 후의 추초가 시작되었다 하옵니다. 지켜보러 가실지요.”
권유하는 박 태감의 목소리가 극히 조심스러웠다. 진예는 서엽이 과연 무건의 채찍질을 견딜 수 있을지 걱정되긴 했으나 또다시 괜한 오해를 일으킬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에둘러 가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안의 상소문을 모두 처리했으니 더 가져오너라.”
“예, 폐하.”
곧 문이 열리고 또 두루마리가 한가득 쌓인 서탁이 그녀의 앞에 놓였다.
그것들을 보고 진예는 한숨지었다. 옆의 내관은 오늘따라 영 좋지 못한 황제의 안색을 살피며 적절한 때에 두루마리를 펼쳤다.
하지만 집중이 되지 않는 탓에 내용을 읽었으나 머리에 들어오는 것이 어째 하나도 없었다. 그에 두 번이나 더 눈으로 훑어 내렸어도 마찬가지였다.
정갈한 글씨체이니 악필이라 그렇다는 핑계도 대지 못했다.
결국 벌떡 몸을 일으킨 진예가 문 앞으로 걸어갔다. 박 태감이 허리를 공손히 굽히는 것을 보면서 그녀가 짧게 말했다.
“연 귀인을 보러 가야겠다.”
박 태감은 진예가 입에 담은 말의 의미를 헤아리듯 잠시 틈을 두었다가 답했다.
“가마를 대령하겠나이다.”
* * *
어젯밤 진예를 팔로 꽉 안았던 감각과 둥근 어깨를 감쌌던 감촉을 떠올리며 눈을 뜬 무건은 이 아침이 왜인지 끔찍하다고 생각되었다.
창문으로 뜨거운 여름 햇볕이 스며들어 와 방 안을 환히 밝혔지만 암담함에 눈앞이 깜깜했다.
진예가 무슨 선택을 하든 견디겠다고 결심했지만 사실은 그럴 자신이 없었다.
혹시나 그녀가 자신을 버리면 어떡하나, 어제가 마지막이었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함에게 초조감이 몰려왔다.
그에 깨어난 뒤에도 마른세수를 하며 한참 동안이나 움직이지 못하는 그를 홍 내관이 거의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오늘의 가장 주요한 일정을 알려 왔다.
“조 후의 추초가 준비되었사옵니다. 가마를 대령하였으니 타고 가시지요.”
“……알았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무건은 옷을 갈아입고 머리에 관모를 올렸다. 비녀까지 꽂아 정갈히 차림을 정돈한 뒤 가마에 올라탔다.
옥사 입구에 도착한 무건은 낮인데도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 마침내 조서엽이 갇혀 있는 곳에 다다랐다.
서엽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등을 드러낸 채 뒤돌아서 있었다. 형을 집행하는 동안 저항하지 못하도록 두 손목은 천장에서 내려온 형구에 단단히 채워진 상태였다.
그런 서엽의 모습이 창살 사이로 보이자 무건이 얼굴을 차갑게 굳혔다.
곧 세 갈래로 갈라진 가늘고 긴 채찍이 그의 손에 건네어졌다. 그것을 들고 무건이 기이익, 낡은 소리를 내며 열린 문 안으로 들어섰다.
넓은 공간의 한가운데에 결박된 채 선 사내 뒤로 다가선 무건이 천천히 그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겨우 이틀 사이였지만 지친 듯 고개 숙인 서엽이 보였다. 물을 제때 못 마셨는지 입술이 바짝 말라 하얀 각질이 올라와 있었다.
무건이 앞으로 오자 서엽이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반반한 그의 얼굴을 무건은 냉한 눈빛으로 들여다보며 안까지 쫓아온 이들에게 명했다.
“밖으로 물러나라.”
관원들이 문을 닫고 창살 밖으로 나갔다. 그 뒤에야 무건이 제 손에 쥐인 채찍의 손잡이와 가죽끈을 잡고 비틀며 한마디 했다.
“볼만한 꼴이군.”
“…….”
서엽은 대꾸하지는 않았지만, 지친 기색임에도 여전히 날카로운 눈으로 무건을 쳐다보았다.
죄인의 신세가 된 뒤에도 서엽의 눈빛은 전혀 죽지 않았고, 되레 형형한 색을 띠었다.
그의 몸 곳곳에 밴 고고한 분위기는 어떻게 해도 어그러뜨릴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무건은 속이 뒤틀리는 기분을 느끼며 채찍 손잡이로 서엽의 턱을 받쳐서 들어 올렸다.
“이 천한 놈 앞에서 이렇게 될 줄은 아마 예상하지 못했을 거야. 너도, 그리고 나도.”
서엽이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빈정거렸다.
“황비가 되셨는데도 천것의 말투는 여전히 안 고쳐지셨습니다.”
“그 점은 나도 유감이군.”
대꾸하며 서엽의 얼굴을 내려놓은 무건이 그의 뒤로 걸어갔다. 그리고 말끔한 등을 향해 채찍을 내리쳤다.
촤악!
매서운 소리가 옥사 안에 울려 퍼지며 서엽의 매끈한 등이 곧장 발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서엽은 아파하는 시늉조차 하지 않고 덤덤한 표정으로 견뎌 냈다.
무건은 보기 좋게 근육이 뭉친 단단한 서엽의 뒷모습을 보며 채찍을 다시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이를 갈며 말했다.
“왜 너만 보면 난 이렇게 화를 주체할 수가 없을까.”
그의 중얼거림을 들은 서엽은 능숙하게 무건의 심기를 긁어 내렸다.
“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지. 네놈이 나보다 못난 새끼이니 그렇지 않겠느냐, 읏!”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한번 채찍질이 떨어졌다. 날 선 소리를 내며 얇은 편초가 이번엔 더 세고 깊게 지나갔다.
서엽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픔을 견디려는 듯 어깨에 힘을 넣는 모습을 확인한 무건이 그 위에 또 채찍을 떨어뜨렸다.
“하지만 넌 내 자리를 차지하고 싶잖아. 안 그런가?”
신하인 조서엽은 넘보지 못할 황비 자리를 말이다. 비록 껍데기만이라도 서엽은 진예의 충신이 아닌 사내가 되기를 원하고 있으니까.
거칠게 파고드는 고통에 서엽이 팔을 움칠하자 손목을 속박한 족쇄에 연결된 사슬들이 마찰했다. 철컥거리는 소리가 옥사에 울려 퍼졌다.
서엽은 이를 악물고 입으로는 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살이 깊게 파여 상처가 난 등이 파들파들 떨렸다.
그 상처 위에 다시금 채찍이 스치고 지나갔다. 쫘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살을 가르니 서엽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삼키는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무건이 일갈했다.
“나는 열등감에 똘똘 뭉쳐서는…… 네놈처럼 되고 싶어서……!”
그러나 추한 속내를 끝까지는 드러낼 수가 없었다. 무건은 대신 악에 받쳐 손에 쥔 것을 더욱 세게 내리쳤다.
사실은 단지 조서엽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증오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 사이의 감정이란 결국 한 여인을 둘러싼 병적이라 불러도 좋을 만한, 추악한 질투심이었다.
진예의 유일한 비라고 해도 연무건은 오랜 세월 진예의 옆을 지켜 온 조서엽을 절대 뛰어넘을 수가 없었다.
연무건이 황궁에 나타나기 전까지, 진예와 서엽이 십수 년간 쌓은 유대가 얼마나 깊은지 자신은 헤아릴 수조차 없었으니까.
게다가 조서엽과 연무건은 태생부터 달랐다.
황제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평민인 자신과 귀한 신분으로 태어나 공을 세워 높은 자리까지 오른 조서엽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눈앞에 비교 대상이 있으니 스스로가 더 초라해 보였다. 그리고 그런 이가 저와 같은 사람을 연모하고, 그녀의 눈길을 받고 있으니 더 초조해졌다.
어떻게든 치워 버리고 싶은데, 그럴 능력이 없는 스스로에게 분개하게 되었다. 그 분노는 조서엽에게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한데 무건이 격해진 감정을 드러낸 그때부터 서엽이 신음을 토해 내면서도 낮게 웃음소리를 섞어 내보냈다. 그에 발끈한 무건이 팔을 힘차게 휘둘렀다.
“네놈이, 네놈이…….”
그러나 몇 번을 때리든, 얼마나 세게 내리치든 분이 전혀 안 풀렸다.
“너무 미워서, 너무 증오스러워서!”
정말이지, 미쳐 버릴 것 같다…….
이토록 사람을 진심으로 죽이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미워한 적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스스로의 모습이 너무 낯설고 부끄러웠다.
조서엽에 대한 혐오가 스스로에 대한 혐오가 되고, 다시 또 조서엽에 혐오가 되면서 격한 감정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만 했다.
제 머리를 새까맣게 잠식해 오는 부정적인 감정들에서 어떻게 해도 헤어 나오기가 힘들었다.
짜아악!
찢어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간 서엽의 등에서 피가 주룩 흘러내렸다. 훈련으로 잘 다져진 단단한 몸이었지만 계속된 채찍질을 견디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렸다.
매달린 어깨가 빠질세라 서엽의 상체가 늘어지는 것을 보며 스스로가 너무 흥분했다는 걸 알아차린 무건이 잠시 때리는 것을 멈췄다.
“하아, 하…….”
몇 번이나 채찍을 휘둘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가빠진 숨을 몰아쉬며 무건이 뒤돌아서서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관원에게 확인했다.
이제 겨우 열두 대라고 했다. 아직 절반도 넘기지 못했다.
그때였다. 무건의 앞에서 작게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맞는 도중에도 서엽이 그리했던 걸 떠올린 무건이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왜 웃는 거냐.”
물으면서 이 자식도 정신이 나갔나 싶었다. 한데 서엽이 웃음을 그치더니 무건의 입을 다물게 할 만한 짧은 말을 내어놨다.
“그런 연유라면 매가 너무 달지 않느냐.”
무건이 채찍을 쥔 손에 지그시 힘을 넣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그의 표정을 보지 못한 서엽은 계속 멋대로 지껄였다.
“왜? 네 밑천까지 전부 털었는데도 폐하의 마음을 얻지는 못할 것 같은가 보지? 흐윽……!”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서엽의 등을 할퀴었다. 찢어진 곳에 재차 떨어진 매질에 살이 깊게 패면서 피가 튀어 올랐다. 본래 상처 하나 없던 등이 붉게 속살을 드러내며 갈라졌다.
그 뒤 앞으로 성큼 걸어간 무건이 우악스러운 손길로 서엽의 턱을 꽉 붙잡았다. 서엽이 기분 나쁘다는 양 고개를 비틀어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 했으나 무건은 강제로 들어 올려 눈을 맞췄다.
“날 더 열받게 하지 마라. 정말로 죽여 버릴지도 모르니.”
“내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이리 열받아 할 이유도 없지 않나.”
“조서엽.”
경고하는 의미로 무건이 이름을 불렀으나 서엽은 제 입을 놀리길 멈추지 않았다.
“폐하께선 무엇보다 명분을 중시하시는 분이시지. 그래서, 그 빌어먹을 명인 때문에 네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내가 촌구석에 처박혀 있던 너 따윌 찾아갈 이유도 없었단 사실을 기억하거라.”
“…….”
“명인만 아니었다면 네게 과연 황궁에 발을 들일 기회라도 있었겠나?”
한마디도, 한 단어도 틀린 말이 없어서 무건은 반박하지 못했다.
“연모하지 말거라. 감히 네가 폐하께 품을 감정이 아니니.”
단호한 명령조에 무건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럼 조서엽이란 사내에겐, 자격이 있나?”
“적어도 천한 연무건보단.”
만용을 부리는 것을 보니 서엽도 자신 못지않게 초조한 모양이었다. 웃기지만 무건은 덕분에 내심 안도했다.
그러나 여전히 서엽의 말이 불쾌한 것은 매한가지라, 표정엔 더욱 날이 섰다.
“아무래도 주제 파악이 덜된 건 너도 마찬가지인 듯한데.”
무건이 서엽의 턱을 던지듯 놓았다. 편초를 손으로 팽팽히 당기며 도로 뒤에선 무건이 살벌한 예고를 했다.
“이번에는 웃을 여유가 없을 거다.”
촤아악!
세 갈래의 얇은 가죽끈이 서엽의 등을 힘껏 쳐 내렸다.
붉은 핏방울이 채찍이 휘둘리는 방향을 따라 튀어 오르고, 등을 타고 흘러내려 하체를 가리고 있는 바지를 붉게 적셨다.
이를 악물고 버티던 서엽도 잔인한 채찍질이 거듭 이어지자 견디기 힘든 고통에 등을 휘고, 매달린 팔을 부들부들 떨었다.
천장에 연결된 녹슨 사슬이 기익, 기익 울며 그의 괴로운 몸부림을 대변했다.
채찍은 서엽의 등이 너덜너덜해질 지경이 되도록 멈추지 않았다. 그사이 신음을 참느라 서엽이 깨문 입술 역시 찢어져 피가 배어 나왔다.
처참한 광경에 잔뜩 긴장하여 숫자를 세던 관원은 형이 완료되자마자 얼른 외쳤다.
“서, 서른 대 모두 채워졌나이다.”
관원의 말과 함께 채찍질이 멈추어졌다. 무건의 손에 있던 편초가 바닥에 타악, 내팽개쳐졌다.
무건은 어느새 차오른 숨을 내리눌렀다. 서서히 가슴을 진정시킨 그가 서엽의 엉망이 된 등짝을 쳐다보았다.
적어도 몇 주를 고생하고도 흉이 질 듯이 상처가 깊게 팬 곳도 있었다. 그곳에서 튄 피가 조서엽의 등이며 목뒤는 물론, 무건의 옷까지 엉망으로 만든 뒤였다.
“날 반란군 손에 넘긴 대가를 치르는 건 이 정도로 하지.”
드디어 끝났나 싶어 서엽은 입술을 물었던 이를 떼다가 따끔함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 와중, 고개 숙인 그의 시야에 무건의 발이 나타났다.
무건은 채찍질하느라 과도하게 쓰인 부상당한 어깨를 주무르며 말을 계속했다.
“폐하께서 효기장군으로 복직하라 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서엽이 시선을 들어 무건을 지그시 보았다. 진예 이야기를 하자 서엽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 가는 것을 보면서 무건은 이자도 결국 이거였나, 싶었다.
조서엽이 가장 듣기 싫은 이야기가 말이다.
무건이 그러했듯이 서엽 역시 그녀에게 버려지는 걸 두려워하는 나약한 사내의 눈을 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이딴 채찍질보다 너한텐 그게 더 고통스럽겠어.”
서엽은 숨을 가쁘게 들이켜기만 할 뿐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동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제 앞에선 언제나 여유를 내비치던 서엽이 동요하는 모습을 보자 무건은 비틀린 쾌감을 느꼈다.
이전에 동조 현상을 끊을 때 바닥을 기던 자신을 보면서 비웃음을 흘리던 서엽의 마음이 이랬을까 싶기도 했다.
하여 이번엔 서엽이 그랬던 것처럼 무건이 그를 향해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살아 있는 걸 감사히 여기고 다시는 폐하 곁에 붙어 있을 생각 하지 마라.”
그러고 뒤돌아서서 관원들에게 서엽의 형구를 풀어주라고 눈짓했다. 손목이 풀리자 서엽이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굳이 관심 두지 않고 무건이 밖으로 나서려 했을 때였다. 뒤에서 서엽의 힘 빠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뵙게 해 줘.”
순간 무건의 발이 멈칫했다.
설마 내가 알아들은 그 뜻이 맞나, 잘못 들은 건 아닌가.
그런 생각에 무건이 고개만 돌려 곁눈으로 서엽을 확인했다. 두 손을 바닥에 짚고 고통으로 어깨를 떨던 서엽이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가 곧 몸을 틀어 천천히 무건을 올려다보았다.
형편없이 해어진 입술을 벌려 서엽이 방금 전의 말을 보충했다.
“폐하를 알현할 수 있게…… 도와주길 바란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설마 제정신 박힌 상태에서 하는 말인가 싶어 무건이 인상을 확 일그러뜨렸다.
본래라면 조서엽은 연무건에게 저런 말을 해선 안 되는 인물이었다.
실소를 내뱉은 무건이 발을 돌려 도로 조서엽의 앞에 성큼 다가섰다. 그가 살벌한 눈으로 서엽을 내려다보며 일단 물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개소리가 돌아올 게 뻔하다고 생각했지만, 일단.
“연무건, 넌 나한테 빚이 있지 않나.”
“내가?”
“화친왕을 죽일 칼을 건넨 게 나이니 말이다.”
무슨 소리를 지껄일까 싶었더니, 뻔뻔해도 정도껏이었다.
화가 난 무건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안쪽에 있는 관원들에게 명했다.
“모두들 옥사 밖으로 나가라.”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관원들은 주저하긴 했으나 무건의 말대로 전부 건물 밖으로 빠져나갔다.
마지막 발소리까지 멎은 뒤, 무건이 돌연 서엽의 머리칼을 붙잡아 올렸다.
무건은 머리를 뒤로 잡아당겨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안색인 서엽을 눈 아래로 깔아보았다.
솔직한 심경으로는 정신 차릴 때까지 죽도록 패 버리고 싶었지만 이런 상태인 놈을 상대로 굳이 폭력을 행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대신 무건은 그의 귀에 제대로 쑤셔 박히도록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씹어뱉었다.
“착각하는 모양인데, 그 빚을 쓰레기통에 전부 처박은 게 네놈이다. 방금까지 벌을 받아 놓고선 날 죽이려고 무슨 짓을 벌였는지 벌써 잊었나?”
만약 그가 자신을 위도양에게 넘기지만 않았어도 이 정도의 적개심을 가지진 않았을 터였다.
굳이 화친왕을 죽일 칼을 건넨 일이 아니라도, 조서엽은 진예의 충신이니까.
진예가 그 누구보다도 믿고 늘 곁에 두고 싶어 하는 사람이고, 서로 반목하길 원치 않았기 때문에 비록 짜증 나고 싫어도 그의 존재를 결국 참고 넘겼을지 모른다.
실제로도 진예에게 서엽이 먼저 치지만 않는다면 가만히 있겠다고 했으니 당연히 그 말을 지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들 사이를 누군가가 중재하기엔 너무 먼 길을 와 버렸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만든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조서엽, 그 자신이었다.
서엽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
“별개의, 사안이다.”
한데 굳이 예의 ‘빚’을 받아 내야겠다 우겨댔다. 무건이 황당함에 와락 인상을 썼다.
“별개……?”
이 새끼는 자신에게 조금의 죄책감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발언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울컥한 무건이 그의 머리를 바닥에 내던지듯 놓아 버렸다. 거친 손길에 서엽의 몸이 바닥에 푹 꺾였다.
무건이 그런 조서엽의 턱 밑에 발을 넣어 얼굴을 들어 올렸다.
단전에서부터 차오르는 화기로 인해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끼며 무건이 제 발치의 서엽을 향해 한껏 빈정거렸다.
“이 연무건은 그런 구분 따위 못 하는 천것이라 어찌합니까, 조 후?”
그러면서 턱을 툭 치자 서엽은 굴욕적이라 생각하는 듯 창백해진 얼굴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러나 목울대를 한 번 크게 울렁이며 침을 한 번 삼킨 그가 모멸감을 애써 억누르고 무건에게 애원을 이어 갔다.
“원한다면 분이 풀릴 때까지 때려도 좋다. 얼마든지…….”
“분이 풀릴 때까지?”
워낙 기막힌 소리를 해 대서 무건은 자꾸만 서엽의 말을 반복하게 되었다.
진정성 있는 사과 한마디 하지 않은 자가 설마 맞으면서 반성하겠다는 의미는 아닐 터였다.
서엽의 말대로 진예는 명분을 중시하는 이이고, 이미 한 번 황궁에 서엽을 들였다가 사달이 난 상황에서 굳이 또다시 그를 대면하려 하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애석하게도 지금의 조서엽이 매달릴 사람은 황제의 비인 무건밖에 없었다.
하여 그냥 이쪽의 눈이 뒤집히든 말든, 진예만 볼 수 있으면 다 견디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무건은 굳이 이딴 놈을 패기 위해서 안 그래도 아픈 제 몸을 혹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솔직히 말을 섞는 것조차 시간 낭비라고 여기긴 했으나, 답을 내주지 않으면 계속 악바리처럼 매달릴 것이었다. 하여 결론을 내기 위해 무건이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았다.
커다란 손으로 조서엽의 얼굴을 꽉 붙잡아 올린 그가 짧게 한마디 했다.
“내 분이 풀릴 때쯤이면 넌 죽어.”
“…….”
솔직히 진예만 아니었다면 굳이 채찍질로 서엽을 벌하겠다고 주청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냥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 버려 달라고 했겠지.
무건에겐 눈앞의 사내가 자신과 같은 공간에서 숨 쉬는 걸 방치할 이유가 단 하나도 없었다.
“지금도 필사의 인내로 내가 널 살려 두는 거라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해. 더는 기어오르지 말고.”
그리 뱉어 내자 서엽은 왜인지 조금 충격받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이유가 궁금하긴 했으나 무건은 더 시간을 끌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데 그가 발을 돌리기 전에 서엽이 헛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이젠 내가 너한테 기어오르는 신세가 됐나?”
저거였나.
무건은 픽 웃으며 일부러 존대를 섞어 대꾸했다.
“그래, 이젠 이놈이 조 후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게 됐는데 기분이 어떠하십니까?”
“……더럽긴 하군.”
나직이 중얼거린 조서엽은, 그러나 상체를 부스스 일으키고는 무건이 나가기 전에 그의 다리를 손으로 쥐며 몸을 옮겨 왔다. 무건은 바지 자락을 붙잡는 손에 눈썹을 치켜세웠다.
“폐하를 뵙게 해 줘. 꼭…… 반드시 해야 하는 말이 있다.”
놀랍게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그를 내려다보며 무건이 씨발, 하고 거친 욕지거리를 뱉었다. 그러고는 다리를 확 빼냈다.
“그리도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지옥에나 가서 하는 게 어때.”
이 정도 했으면 그의 드높은 자존심상 더는 안 매달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서엽은 상처투성이인 몸을 겨우 움직이면서도 무건에게 필사적으로 애원했다.
“제발, 제발, 연무건!”
그가 무건의 다리를 다시 한번 두 손으로 움키며 두 무릎을 꿇었다. 비록 굴욕감에 얼굴이 새빨개지긴 했지만 서엽은 진예를 볼 수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다는 듯, 제 자존심을 다 버리고 그리도 무시하던 무건 앞에서 절절하게 빌었다.
“원한다면 무릎을 꿇든 뭐든 하겠다. 그러니 제발……!”
무건은 그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심히 당혹스러웠지만 마음을 바꾸지는 않았다. 이 사내가 요구하는 것은 무건의 입장에선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내가 왜! 왜 그걸 도와줘야 하지?”
연적이고, 그 때문에 저를 죽이려고까지 한 사내였다. 뭐가 좋다고 그를 진예 앞에 갖다 두는 데 일조한단 말인가.
하지만 무건의 마음을 훤히 알고 있을 서엽에게도 이게 마지막 동아줄이었다. 그는 무건을 놓지 않았다.
다리를 붙잡은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이 육안으로도 선명히 보일 정도로 심했다. 그러나 서엽은 무언가 결심하듯 눈을 꾹 감았다.
내키지 않아 하는 표정을 한 그가 마지못해 한마디를 꺼냈다.
“네가 모르는 진실 하나를…… 알려 주마.”
상방주에서도 서엽은 똑같은 이야기를 했었다.
이번엔 또 얼마나 유효한 패인지는 모르겠지만 무건은 전혀 듣고 싶지 않았다. 몰라도 여태까지 사는 데 아무 지장 없었던 것으로 보아, 앞으로 역시 마찬가지 테니까.
“관심 없…….”
하여 거절의 말을 하던 도중, 서엽이 멋대로 예의 진실이란 것을 입에 올렸다.
“난 폐하를 안은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난 폐하를 안은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뭐……?”
분명 서엽이 무슨 소리를 지껄이든 무시하고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무건은 듣는 순간 무의식중에 반문하고 말았다.
애초 결심한 대로 나가기는커녕 뒷말을 재촉하듯이 서엽이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금세라도 쓰러져 버리는 게 아닌가 싶게 핏기가 빠진 창백한 서엽의 얼굴이 비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보는 이로 하여금 애처로워하는 감정이 일게 할 정도로 입술을 떨어 댔다.
도무지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서엽은 무건의 앞에서 결국 제 가장 약한 부위를 드러냈다.
“폐하께서 나를 받아 주신 적이, 없다고…… 했다.”
떨리는 목소리를 들은 무건은 인상을 찌푸린 채로 고개를 기울였다.
믿기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조서엽의 반응을 보면 거짓말이라고 치부하기도 힘들어 보였다.
무건이 혼란스러움에 아무런 반응을 내놓지 못하고 있으니, 그의 다리를 붙잡았던 서엽의 손이 흘러내렸다.
차가운 옥사 바닥에 꿇은 무릎을 손으로 꽉 쥐며 서엽이 굴욕감으로 인해 깊게 잠긴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이었다.
“나한테 흔들리실 일은 없을 거다.”
“…….”
“그러니 폐하를 뵐 수 있게 저를 도와주십시오, 귀인마마…….”
무건은 말없이 그의 앞에서 발을 돌렸다. 창살문을 쾅 닫고 나가 버린 순간 서엽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시야 끄트머리로 그 모습을 확인했으나 무건은 냉정하게 외면하고 옥사 입구로 향하는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 버렸다.
그가 밖으로 나오자 명에 따라 옥사 밖에서 대기 중이었던 관원들이 도로 안으로 들어갔다. 이어 홍 내관이 무건의 더러워진 옷을 보고는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건이 대기하고 있던 제 가마 쪽으로 걸어가며 짧게 말했다.
“봉아궁으로 돌아가지.”
“그것이…….”
한데 홍 내관이 난처하다는 듯이 어디론가 고개를 돌렸다.
뭔가 싶어 그의 시선을 좇은 무건은 이내 화려한 장식이 달린 황제의 가마가 멈춰 서 있는 광경을 발견했다.
눈길이 닿자 그 앞에 서 있던 박 태감이 가마의 입구를 올렸다. 그러자 안에 앉아 있던 진예의 옆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면류가 늘어진 관모 대신 비녀 두 개와 금장을 올려 머리를 어여쁘게 꾸민 진예가 보이자 무건은 순간 숨을 멈췄다.
볼을 살짝 붉게 화장한 그녀를 보니 방금 전 서엽을 상대할 때와 다른 의미로 심장이 요동쳤다.
무건이 가만히 있자, 홍 내관은 물론이고 박 태감이 뭐 하냐는 듯이 엄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뒤늦게야 정신을 차린 무건은 제 차림을 내려다보았으나 엉망이 된 옷을 가릴 방도가 달리 있는 것은 아니었던지라, 하는 수 없이 그 상태 그대로 가마 앞으로 걸어가 예를 갖췄다.
“홍복을 누리소서, 황제 폐하.”
“그래, 연 귀인. 꼴이 엉망이로군.”
“……송구하옵니다.”
“잠깐 안으로 들라.”
진예의 말에 넓은 가마 안으로 들어가 무건이 앉자 박 태감이 도로 문을 내렸다. 그러자마자 무건이 진예를 돌아보지 않은 채로 먼저 입을 열었다.
“조 후는 일단 살아 있으니 너무 염려는 마십시오.”
“……그런가.”
어째서인지 조금 성이 나 있는 듯한 반응에 진예는 조용히 무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이렇다 할 말을 꺼내지 않고 무건이 자신을 돌아볼 때까지 기다렸다.
빤한 시선이 이어졌다. 그에 바깥쪽으로 살며시 고개를 돌리고 있던 무건이 한숨지었다. 그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결국 진예를 마주 보았다.
픽스공금
어느새 굳어 있던 표정이 풀려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조금 퉁명스럽다 느껴질 만한 어투였다.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으신 것이십니까. 하문하시지요.”
아마 그는 서엽에 대해 물으리라 예상하고 있는 듯했다. 한참 잘못 짚은 이야기였기에 진예는 고개를 저었다.
“물을 이야기는 없다.”
“그럼 어이하여 저를 찾으셨습니까.”
“사천감에 길일을 정하게 해 곧 그대를 황후로 책봉할 예정이다.”
“…….”
순간 무건은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딱히 기뻐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진예는 그의 반응을 확인하고는 내심 당혹스러워졌다. 이전엔 황후까지 몇 걸음이나 남았느냐고 물었던 무건이었기에, 어느 정도 반응을 보일 줄 알았다.
“황공하옵니다.”
뒤늦게 돌아오는, 마지못해 덧붙인 것 같은 인사였다. 제 놈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시큰둥한 태도였다. 갑자기 이렇게 나오니 신경을 상당히 건드렸다.
진예는 투정 좀 부린다고 끌려가는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참지 못하고 물었다.
“무엇이 걸리는 게냐.”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무건이 툭 물었다.
“제가 모르는 게 또 뭐가 있습니까?”
“갑자기 무슨 소리지?”
서엽에게 쓸데없는 이야기를 들었나?
반문하자마자 무건이 몸을 확 기울이더니 그녀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댔다.
진예의 눈엔 무건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더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실망감이 배어 있는 낮게 깔린 음성이 그녀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일부러 조서엽을 취한 척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고는 조금 물러나는 것에 진예가 곁눈으로 무건을 확인했다. 무건의 표정이 어떤 상태인지 읽히지 않았다.
하지만 진예는 그와 상관없이 고개를 살며시 들어 올리며 평이하게 대꾸했다.
“그런 거였나. 해서?”
그런 그녀를 무건이 지그시 바라보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굳이 번거롭게 그리 거짓을 꾸미지 않으셨어도 전 폐하의 사냥개가 돼 드렸을 겁니다.”
진예는 여전히 그건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무건에게 있어서 조서엽이 기폭제가 되어 준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어찌 되었든 무건의 이런 작태가 진예는 썩 유쾌하진 않았다. 그녀가 살며시 고개를 돌려 그를 비스듬히 올려다보더니 손을 들어 무건의 잘 깎인 턱을 받쳐 올렸다.
“그 때문에 짐에게 화가 났다?”
네가 감히? 그런 감정이 먼저였다.
제 앞에서 무릎 꿇고 절대적인 헌신을 입에 올린 것이 바로 어제저녁이었다. 꿀 발린 얘기로 이쪽을 들쑤셔서 고민에 빠지게 해 놓고서는,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런 태도로 나오면 듣는 사람이 혼란스럽지 않겠나.
“아니.”
한데 무건이 그 굳은 표정과 전혀 조화되지 않는 얘기를 입에 올렸다.
“기뻐서 미치겠습니다.”
그리고 제 턱을 받친 진예의 손을 끌어다가 손가락에 입을 맞췄다.
진예는 이건 또 무슨 수작질인가 싶어 눈을 가늘게 떴다. 진예의 손을 꼭 쥔 무건의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절 이용하려고 속인 걸 알았는데도, 폐하께 이 연무건이 정말로 유일한 사내라는 걸 알고 나니 소름이 끼치도록 좋습니다.”
말을 마친 무건이 팔을 휘감아 진예의 허리를 확 당겼다. 예고되지 않은 행위에 진예의 자세가 무너지면서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급격히 좁혀졌다.
“……!”
무건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와 그녀와 입술이 닿기 직전에 멈춰 섰다. 짙은 갈색 빛의 눈동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무건이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있었다.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혼란스러워하는 것이었다.
“정말 머리가 돌아 버린 것 같이.”
폐하 탓에…….
그리 속삭인 무건이 다소 거칠게 입을 맞춰 왔다.
“읏!”
입 안을 파고드는 행위에서 조급함이 느껴졌다. 그의 애달아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와 진예는 차마 무건을 밀어내지 못했다.
무건이 갈급한 숨을 쏟아 내며 그녀와 혀를 얽어 왔다. 타액이 혀 놀림에 따라 늘어났다가 진득하게 혀와 혀를 달라붙게 하면서 질척한 소음을 일으켰다.
진예의 모든 것을 차지하고 싶다고 욕심부리듯 무건이 안쪽의 여린 살을 거침없이 헤집었다. 그런가 하면 안쪽 깊은 곳의 예민한 곳을 혀끝으로 건드려 떨림을 일으켰다.
그렇게, 한순간에 강렬히 입 안을 헤집고 떨어진 무건은 진예를 여전히 욕망 어린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꼭 이 자리에서 진예의 옷을 파헤쳐 버릴 것처럼.
그에 진예가 여기까지라는 의미에서 그의 어깨를 살짝 밀쳤을 때였다. 내리누르듯 숨을 크게 들이켠 무건이, 돌연 진예의 머리를 고정하고 있던 두 개의 비녀와 머리 장식을 빼 버렸다.
투둑, 툭.
가마 바닥에 금빛 비녀와 앞쪽에 찔러 넣어져 있던 화려한 봉황 장식이 떨어졌다. 그러자 다른 것으로 고정해 놓지 않은 머리카락 일부가 어깨 밑으로 흘러내렸다.
“가마 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말인즉 아무도 그녀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미였다.
제법 건방진 짓을 한 것에, 진예가 제 머리가 흘러내린 것을 눈 밑으로 확인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무건 역시 희미하게 웃어 보인 뒤 가마 문을 스스로 올려 밖으로 나갔다.
아니, 그러려 했는데 옥사에서 급히 뛰어 나오는 관원을 보고는 멈칫했다.
예의 관원은 박 태감 앞에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는 귓속말로 말을 전했다.
이야기를 듣고 돌아서서는 박 태감의 표정에 난감함이 비치는 것을 보고 무건은 무슨 소식인지 알 것만 같았다.
무건이 가마 안쪽의 진예가 흐트러진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제 몸으로 가리며 박 태감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 공공.”
그러나 박 태감이 침묵하자 진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연 귀인의 말에 답하라.”
그제야 대답이 돌아왔다.
“조 후가 혼절했다 하옵니다.”
거슬리는 놈.
무건이 머릿속으로 짧게 감상을 떠올렸다. 절대 그럴 것 같지 않았던 사내가 제 앞에서 무릎 꿇고 빌던 것이 뇌리에서 불쑥 튀어 올라오자 저절로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무건은 안쪽의 진예를 돌아보았다. 진예는 방금 전의 이야기를 듣고도 별 반응이 없었으나, 마음에 걸려 할 것은 자명했다.
‘정말 이러고 싶지 않지만…….’
조서엽이 어떤 마음으로 매달렸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자신 또한 같은 상황이면 기꺼이 그런 선택을 했을 테니까. 행인지 불행인지 그걸 끝까지 외면해 버릴 정도로 그는 모질지 못했다.
무건이 한숨을 섞인 목소리를 내보냈다.
“……나오기 전에 조 후가 제게 빌었습니다. 폐하를 뵙게 해 달라며.”
더 이상의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진예는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
진예가 지그시 바라보았으나, 무건은 말을 덧붙이지 않고 가마 밖으로 나가 버렸다.
무건의 묵직한 발소리가 충분히 멀어진 뒤, 진예가 가마 안에서 명을 내렸다.
“조 후를 태의원에 보내 치료하라.”
“예, 폐하.”
진예와 서엽 사이엔 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 * *
“마마, 말씀하신 아이를 데려왔습니다.”
봉아궁으로 돌아온 뒤 싱숭생숭한 마음에 후원으로 나가 검술 연습을 했다. 그러다가 홍 내관을 시켜서 미마이를 찾아서 데리고 오라고 일렀다.
그사이 해가 져 목욕을 하고 침전에 든 뒤에야 홍 내관이 돌아왔다. 아이가 황궁에 있었던 탓에 데려오는 데 시간이 다소 걸린 듯했다.
무건은 홍 내관 옆에서 어찌해야 할지 몰라 연신 주변의 눈치를 살피는 아이를 보다가 홍 내관에게 명했다.
“아이를 두고 나가게.”
그러자 홍 내관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어찌……. 아니 될 말씀이십니다, 마마.”
아무리 그래도 후궁의 침전이었다. 황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드나드는 일이 안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무건은 명을 물리지 않았다.
“괜찮네. 내 목숨을 빚진 아이이니.”
그에 홍 내관은 마지못해 아이를 침방에 들여놓고는 문을 닫았다. 그런 뒤에야 무건은 팔을 벌려 미마이를 맞이했다.
“어서 이리 와 보거라, 미마이.”
미마이는 조심스럽게 홍 내관의 그림자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종종걸음으로 무건이 앉아 있는 침상 앞으로 갔다.
다행히 황궁에서 이틀간 잘 보살펴 주긴 했는지 꼬질꼬질했던 미마이의 행색이 말끔해져 있었다.
무건은 그런 아이를 품에 안아 제 무릎 위에 올렸다. 그러고 웃으며 작은 손을 붙잡았다.
“옷이 바뀌었구나. 갑자기 떨어져서 당황했었지?”
무건이 못 보던 비단옷을 입은 것을 보고서 말하자 미마이는 낯설다는 듯이 제 팔을 들어 올리면서 얼굴을 붉혔다. 아이는 고개를 마구 흔들며 대답했다.
“아, 아니에요. 당연한 거였는데요. 황궁에 계신 분들 전부 다정하게 대해 주셨어요…….”
그러고는 미마이가 조심스럽게 무건을 올려다보았다. 유난히 커다랗고 검은 눈동자에 되레 저를 걱정하는 기색이 비치자 무건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제 생각이 읽힌 듯하여 그가 잡았던 손을 놓고는 미마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아이를 부른 이유에 대해 꺼냈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결정은 되었고?”
황궁으로 돌아오기 전, 무사히 귀환하면 아이에게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기로 했다. 하여 물은 것이지만 미마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무얼 해야 할지 떠오르지가 않아서…….”
“그래, 천천히 생각해도 되니까 떠오르면 말해 줘.”
미마이는 작게 미소 지으며 이번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귀여워 무건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 했을 때였다.
“한데 조 후께선, 많이 아프신가요……?”
이런 어린아이에게 황궁의 소문을 흘릴 이는 없을 테니 아무래도 방금 전의 접촉 때문에 알게 된 모양이었다.
무건은 썩 달갑지 않은 주제가 오르는 것이 불편했기에 짧게만 답했다.
“죽을 만큼은 아닌 것 같지만, 아마도.”
사실 혼절했다는 얘기만 들었지, 그 이후엔 따로 알아보지 않아서 서엽이 지금 깼는지 안 깼는지도 몰랐다.
한데 대답을 들은 미마이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미마이가 자신에게 실망했을까. 아이의 미움을 받게 됐을까 싶어 무건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미마이는 무건과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작은 입으로 중얼거렸다.
“조 후께선 원래부터 나쁜 분은 아니에요. 아니, 좋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무건은 이전에 서엽이 아이를 제대로 안 돌봐 주면 어쩌나 걱정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취급이 나쁘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래, 생각해 보면 자신이 적대감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지 조서엽은 결코 악인이 아니었다.
“그래, 알고 있어. 한데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할까.”
질문을 받은 아이가 입술을 지분거렸다. 가까이서 있다 보니 미마이가 고민하는 것이 너무 눈에 잘 들어와서, 무건은 괜스레 죄책감마저 들었다. 그런데 미마이가 꺼낸 말이 심상치 않았다.
“마마, 제게 목숨을 빚지셨다 하셨으니 청을 하나 올려도 될까요?”
“미마이.”
무건이 타이르듯 부드럽게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미아이는 조금 움찔하긴 했지만 제 말을 중단하지는 않았다.
“조 후께서는 예전에 제가 길거리에서 맞아 죽을 뻔했을 때 구해 주셨습니다. 그분 또한 저의 은인이셔요.”
“그래서 청이라는 것은 무엇이지?”
아이는 긴장한 듯 제 두 손을 한데 모아 쥐고는 무건을 올려다보았다. 무건을 담은 두 눈이 제법 간절한 빛을 띠었다.
“그분을 한 번은 살려 주십시오.”
“…….”
무건은 말없이 품 안의 미마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누군가의 목숨을 살린 대가로 또다시 타인의 목숨을 살리려는 마음이란 어떤 것일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아니면 아무리 어른스러워도 결국은 아이이기 때문에 좀 더 단순하게 생각해야 하는 걸까. 단지 ‘좋은 사람’인 조서엽이 죽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일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자 무건의 마음은 더 가라앉았다. 그가 악인이 아니기 때문에, 조서엽을 미워하는 스스로가 더 저질처럼 여겨졌다.
“……내가 그를 죽이는 미래라도 본 건가.”
아이의 청에 바로 알겠다고 말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도 너무나 비겁해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과 조서엽은 악연이 맞았다. 서로에게 득이 될 것 하나 없는 존재. 어떻게 해도 화합 따위는 할 수 없는 그런 관계.
하지만 미마이는 착잡해 보이는 무건의 표정을 보면서도 할 말을 기어이 이어 갔다.
“아뇨. 제 예지는 사실 굉장히 단편적인 것입니다.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말을 흐린 미마이의 작은 손이 무건의 손안으로 들어왔다. 엄지와 검지 사이를 제 네 손가락으로 감싸 쥐며 머뭇머뭇 말을 더했다.
“마마의 마음이.”
아이가 문장을 완성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에 무건이 어설픈 웃음을 지었다.
“이거, 네 앞에서는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정말 곤란하네.”
남에게, 그것도 까마득하게 어린 아이에게 속마음이 까발려지니 기분이 그렇게 좋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방법으로라도 자기 자신을 한 번 자제시키는 것 역시 나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분노하고 미워하는 것만이 답은 아니니 말이다.
무건은 미마이의 손을 잡으며 머루 알처럼 예쁘고 맑은 눈동자를 다정한 눈길로 마주 보았다. 긴장 풀라는 듯이.
“그래, 약조하마. 네 은인을 한 번은 살려 주겠다고.”
“감사합니다, 마마.”
미마이가 그제야 활짝 웃었다.
이리 착한 아이에게 그간 어른들이 나쁜 짓을 시켜 왔다는 현실이 무건은 문득 씁쓸해져 왔다. 하여 일부러 미마이의 머리를 마구 흐트러뜨렸다.
“아직 갈 곳이 없을 테니 거취를 결정할 때까지는 이곳 봉아궁에 있어. 내관들에게 말해 둘 터이니.”
“그 또한 감사합니다.”
미마이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올라왔다. 그러더니 두 팔을 무건의 겨드랑이 밑에 껴 넣으며 푹 안겨 왔다. 아이의 머리통이 그의 가슴에 기대어졌다.
상방주에서 함께했을 때부터 아이는 종종 이렇게 무건에게 매달렸었다. 마치 기억나지 않는 아비의 온기를 그에게서 찾듯이.
미마이는 무건에게 머리를 묻은 채로 작게 속삭였다.
“마마께서도 더는 다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몸도, 마음도요.”
마음이라…….
무건은 아이를 마주 안아 주며 많이 먹지 못해 왜소한 등을 토닥였다.
“폐하께서도 나쁜 사람은 아니야. 그냥, 뭐랄까.”
무건은 홍 내관이 들려주었던 선황 부처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상처투성이인 사람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같이 다쳐야 하는 것이지. 스스로를 다치게 했던 뾰족한 가시 속에 자신의 몸을 숨겨 버리니까.”
그 긴 이야기에서는 빠져 있었지만 가족에 불행을 몰고 온 어떤 존재가 바로 진예라면, 그 불행이 그녀 자신 또한 집어삼켰을 것이었다.
“하지만 가시덤불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건 안에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인 거잖니.”
진예는 불행마저 이미 제 삶으로 받아들여 무뎌진 양 굴고 있었지만, 무뎌졌다는 것은 아프지 않다는 말과 동의어가 아니다.
가시가 살갗을 파고드는데 어떻게 아프지 않을 수가 있는가. 그저 너무 익숙해져서 스스로가 아픈 것마저 잊어버리는 것뿐이다.
그러니.
“그러니 내가 다치는 게 더 나아.”
그녀에게 다시 굳은살을 만들게 하는 것보다.
이쪽은 충분히 더 견딜 수 있었다. 지치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그런 그를 눈을 깜빡깜빡하며 뚫어져라 보던 미마이가 문득 질문을 던졌다.
“누군가를 연모하면 그렇게 되는 걸까요? 저도 그럴까요?”
“그러고 보니 명인이 아직 안 나왔겠구나.”
무건의 몸에 기댄 아이의 머리통이 작게 끄덕끄덕했다.
“하지만 제 명인자가 가끔, 아주 가끔 꿈에 보여요……. 엄청 예쁜 아이가 고운 옷을 입고 웃는 모습이요.”
“설마 벌써 반했어?”
무건의 질문을 듣고 고민하듯 입술을 우물거리던 미마이가, 무건에게 안겼을 때와는 다른 의미로 얼굴을 발그레하게 물들였다.
아직 명인도 안 나왔는데 벌써부터 귀 끝까지 발개지는 것을 보면, 미마이는 무건보다 더 심각한 중증인 듯했다.
“하지만 정말 너무 예뻐요. 얼굴도 하얗고, 눈도 커다랗고, 입술은 진짜 진짜 앵도 같습니다.”
가끔 꿈에 비치는 그녀는 아주 짙은 검정 머리에, 눈은 동공이 또렷하게 보일 정도로 예쁜 갈색 눈인데 분홍색 비단옷을 입고, 나비 떨잠이 있는 비녀를 꽂고 있다면서 미마이는 제 빈약한 언어로 열심히 그녀를 묘사했다.
무건은 웃음이 터지려는 걸 참고 딱 한마디만 했다.
“알겠다.”
싱거운 반응이 돌아오자 미마이는 주먹까지 쥐면서 열심히 제 미래의 명인자―사실 무건은 그 꿈에 비친 사람이 과연 명인자일지는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의 아름다움에 대해 재차 강조했다.
“거짓말이 아니에요. 진짜 어여쁘다고요. 근데…… 혹 성질이 고약하면 어찌하지요?”
뒤늦게 불안함을 내비치며 덧붙이는 말을 들은 무건이 웃으며 아이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폐하보다는 덜 고약하길 바라마.”
‘너무해.’라고 말하는 듯이 살짝 노려보는 미마이를 무건이 그만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침방에서 내보내려 손을 잡고서 이끌었다.
둘의 그림자가 비치자 문이 열리고 홍 내관이 허리를 굽혔다. 무건은 왜인지 불안해하는 미마이를 그의 옆으로 보내며 말했다.
“이 아이를 당분간 빈청에 두게.”
“그리하겠사옵니다. ……넌 나를 따르거라.”
홍 내관이 앞장서자 미마이가 쫓아가다가 한 번 무건을 돌아보았다. 그에 무건은 살짝 웃어 주긴 했지만 마음은 복잡했다.
〈그분을 한 번만 살려 주십시오.〉
그때가 과연 언제일까…….
어쩐지 머지않은 일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 * *
눈을 뜬 서엽은 낯선 풍경과 약초 냄새에 둘러싸여 있었다. 자신이 누워 있는 이곳이 어디인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떠오르는 것이 전혀 없었다.
마지막 기억은 옥사에서 연무건이 뒤돌아 떠나는 모습을 본 것이었다. 그 뒤에는……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아마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정신을 잃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주변이 환한 것을 보면 낮 시간인 듯했고, 그럼 한두 시간 정도만 잠들었다거나 아예 하루 이상 지났다거나 둘 중 하나일 듯했다.
“읏…….”
몸을 일으키던 서엽은 어쩐지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질 않아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이런 것을 보면 아마 높은 확률로 하루 이상 지난 게 맞지 싶었다. 고작 한두 시간 잠들었다기엔 지나치게 몸이 굳어 있었다.
물론 추초를 받기 전에 계속 손목이 천장에 매달려 있었으니 그런 것일 수도 있긴 하다만.
서엽은 침상에서 상체를 세우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옆의 탁자엔 약간의 물이 담긴 대야와 피가 묻은 수건, 그리고 자신에게 탕약을 먹인 듯 바닥을 보인 대접이 올려진 채였다.
그것을 보고 자세히 제가 누워 있는 방 안을 살피니 어딘지 알 듯도 했다. 황궁 내 태의원이었다. 그는 몇 년 전, 익재 토벌 당시 부상을 입고 이곳에서 치료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눈을 뜨니 진예가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하지만 현재 죄인의 신분인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또한 황제의 명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연무건이 말해 준 건가…….’
이 정도면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애원한 게 나름대로 가치 있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제 자존심엔 큰 상처가 났지만, 지금은 그것이 중요하진 않으니까.
그리 생각하다 서엽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문득 등의 통증이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입술을 물려다가 그곳 역시 찢어져 따끔함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곤 그만두었다.
“으…….”
입술 사이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때, 그가 누워 있던 방의 문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비쳤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서엽이 혹시나 제가 아는 얼굴이 왔을까 싶어 고개를 들었지만 아쉽게도 낯선 이였다.
“아직은 일어나시기 힘들 터인데……. 상처 부위를 닦아야 하니 다시 누우시지요.”
옷차림을 보니 태의원 소속 의녀인 듯했다. 그녀는 침상 옆의 탁자에 있던 대야에 깨끗한 물을 붓고, 제가 가져온 하얀 천을 적셨다.
서엽이 그쪽으로 등을 보이며 옆으로 눕자, 곧 상처 부위를 닦는 손길이 느껴졌다. 천이 지나갈 때마다 느껴지는 아릿한 통증에 서엽이 깊은숨을 토해 냈다.
“하…….”
무건의 힘이 원래도 워낙 좋은 데다 같은 곳이 서른 번이나 내리쳐졌으니 아픈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분명 감정이 서린 채찍질이었다.
제가 긁어 대는 말에 일그러지던 연무건의 얼굴을 상기해 낸 서엽은 왜인지 웃음이 나와 어깨를 들썩였다.
그의 뒤에서 상처를 닦고 약을 바르던 의녀가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그를 내려다보았지만 서엽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다가 무건에게 무릎 꿇고 애원하던 때의 굴욕감이 떠올라 좋았던 기분이 도로 바닥을 쳐 웃음을 그쳤다.
스스로도 미쳤다 생각될 만큼 감정이 오락가락했다. 뒤에 있던 의녀도 그가 웃었다가 곧 울 것 같은 표정을 짓자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었다. 서둘러 멀어져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처치를 하는 손길도 빨라졌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서엽은 다 필요 없고, 그저 진예가 보고 싶었다.
미치도록.
보지 못하면 사람이 그리움에 죽어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증명해 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얼마 안 가 의녀가 다 되었다며 훌쩍 자리를 피했다. 그렇게 방 안에 혼자가 되었을 때, 서엽은 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거지.’
비록 황궁에서 내쫓긴 것은 아니지만 진예와의 만남에 기약이 없다는 걸 떠올리니, 지금의 상황이 너무나 끔찍하게 느껴졌다.
“……일어나시오, 조 후.”
한데 모르는 사이에 또 잠들었던 모양이었다. 어느새 방 안에 새까만 밤이 밀려와, 누군가 초를 켜 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앞에, 이번에는 제법 눈에 익은 이가 서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의 위장군이었다.
서엽이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자 위장군이 채근하듯 말했다.
“폐하께서 찾으시네.”
“정말입니까……?”
서엽이 물었지만 위장군은 굳이 대답할 가치가 없다는 양 무작정 한 팔로 그를 부축해 침상에서 일으켰다.
그다음엔 서엽도 호의를 거절하는 의미에서 제가 먼저 바닥에 발을 디뎠다. 위장군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품 안에서 고이 접은 검은 천을 꺼냈다.
“이번에도 이것을 써 줘야겠소.”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마당에 의미가 있는 건가 싶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원래라면 죄인이 황궁의 문턱을 함부로 넘나들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니 서엽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곧 그 천을 벌려 위장군이 서엽에게 단숨에 뒤집어씌웠다. 그러자 시야가 금세 검어졌다.
그의 얼굴과 몸을 완전히 가린 위장군이 서엽을 복도로 이끌었다. 앞이 안 보일 그를 위해 천천히 안내하면서 그가 딱딱한 어투로 한마디 붙여 왔다.
“폐하를 뵙기 전에 옷부터 정갈히 하는 게 좋겠네.”
“알겠으니 서둘러 안내해 주시지요.”
그들이 곧 도착한 곳은 황궁 남문 앞에 있는 빈청이었다. 황궁 안에 딱히 손님이 없어 최소한의 인원만 앞을 지키는 그곳으로 발을 들이자 위장군이 도로 서엽의 시야를 차단했던 천을 걷어 냈다.
앞에 옷이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서엽이 갈아입으려 뒤돌아서는데 위장군이 뒤에서 한마디 건네어 왔다.
“폐하께 올려야 한다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꼭 이런 식이어야 했나?”
위장군의 음성은 크게 고저 없이 들려오긴 했지만 서엽은 그가 이렇게 말문을 튼 것 자체가 예외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본래 입이 무거운 자라 수년간 마주쳤어도 인사 외엔 서로 몇 마디 나눠 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기실 위장군이 자신을 마음에 안 들어 한다는 것은 진작부터 알았지만 꽤 미움을 받게 된 모양이었다.
아마 그가 서엽을 못마땅해하는 이유는 제 아비와 같을 것이었다. 신하임에도 충심이 아닌 연모의 정으로 진예를 섬겨서.
그러나 서엽은 누구도 자신과 진예의 관계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둘의 관계를 위협하는 건 연무건 하나만으로 충분했으니까. 하여 퍽 경계심 어린 말이 튀어 나갔다.
“장군께 훈계를 듣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고 얼른 새 옷을 펼쳐 어깨에 걸쳤다. 한데 위장군의 말이 오늘따라 좀 길었다.
“내 말이 자네에게 그런 식으로 들렸다면 유감이나.”
서엽이 근처의 거울을 통해 위장군을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으나 어투만큼은 좀 더 강해져 있었다.
“없어도 되는 분란을 일으키지는 말게. 자네 때문에 계속 폐하께서 곤란해지시지 않나.”
큰 죄를 지었음에도 가벼운 벌을 내리고, 벌을 받는 와중에 그를 황궁에 들여 논란을 자초했다.
하지만 그가 지적하는 건 비단 이번의 일만이 아니었다. 금군도 뭣도 아닌 조서엽을 바로 옆에 둔 것 자체가 이미 굉장한 특별 취급이었다.
다만 서엽은 여전히 그가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있다는 입장이었다.
“폐하 옆에 얼쩡거리지 말라는 의미라면 그건 좀 월권인 것 같군요.”
“아니, 내 손으로 자네를 폐하의 침전으로 들이는 건 여기까지였으면 좋겠다는 말이네.”
진예의 특별 취급은 조서엽이 그녀와의 관계에서 자신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스스로가 늘 그녀의 예외라는 것.
하지만 연무건에 의해서 그 자리에서 떨려 나가게 생겼다는 사실이 서엽에겐 지독한 모멸감을 일으켰다.
서엽은 옷을 입으면서도 등이 쓰라려 오는 것에 작게 불편한 숨소리를 내뱉고는 위장군의 말에 대꾸했다.
“염려치 않으셔도 될 겁니다. 아마 두 번 다시 없을 터이니.”
적어도 이런 식으로는.
“그렇다면 다행이군.”
짧게 평한 위장군이 옷을 다 갈아입은 그의 위에 도로 천을 드리웠다. 그러고는 그를 진예가 기다리고 있을 침전으로 이끌었다.
‘진예…….’
걸어가면서 서엽은 실제 말소리로는 별로 내뱉은 적 없는 황제의 이름을 속으로 외웠다. 이렇게 연습한다고 해서 제대로 부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얼마 안 가 인교문의 문턱을 지나고, 기단의 계단을 올랐다. 그러면서 서엽은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려 옴을 느꼈다.
심장이 입 밖으로 쏟아질 것처럼, 심한 긴장감이 몰려왔다.
진예와의 마지막.
연무건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조차 없는 일이었다. 그는 여전히 말이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침내 그의 시야가 다시 트였다. 그러자마자 보인 건 제 한 손에 전부 들어올 것처럼 작은 발이었다. 그것을 발견하고 울컥할 뻔한 서엽은 곧 들려오는 소리에 숨마저 멈췄다.
“조 후는 고개를 들라.”
정말 말이 안 된다.
하지만 이 순간이 기어이 와 버렸다.
서엽은 시선을 위로 천천히 올렸다. 그러자 일전과 같은 침전의 응접실 탁자 앞 의자에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는 환 황제의 모습이 보였다.
모두가 잠들었을 저녁이라 머리는 가볍게 비녀 하나만 꽂아 올리고, 약간은 느슨한 침의를 걸쳤다. 그런데도 여전히 제겐 눈이 부시도록, 눈물이 나도록 아름다워 보였다.
평생을 마음에 품을 단 한 사람.
자신의 영원한 황제이자, 제 마음을 지배할 유일한 정인.
바로, 진예였다.
서엽은 벌써부터 제 눈앞이 부예지는 것을 느꼈다.
위장군이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서엽은 진예 앞에 절을 올렸다. 그런데 그가 늘 하던 인사를 건네기 전에 진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정신을 차렸다더니 다행이구나.”
“폐하의 은덕이옵니다.”
적당한 답을 골라 대꾸하는데, 예고 없이 진예의 손이 다가왔다. 그것을 보면서 잠시 얼어 있던 서엽은 턱을 살며시 들어 올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 흠칫했다.
침전에 들어오기 전엔 이렇게 쉽게 가까워질 거라 생각지 못했던 터였다.
그런데 진예는 태연히 말을 흘려보냈다.
“얼굴이 다 상했군. 조춘경이 속상해하겠어.”
그러나 말을 들은 서엽은 제가 예상한 바와 퍽 온도 차가 있음을 깨달았다.
이전이었다면 진예는 조춘경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대신 자신의 어떤 것이 불편해지니 잘 보살피라는 둥의 말을 늘어놓았을 터.
듣는 이에 따라 걱정하는 것인지 아닌지 헷갈리게 했지만 그게 바로 진예가 제 사람에게 취하는 태도였다.
미묘하게 달라진 진예의 말에 서엽은 이제는 정말로, 그녀와 멀어진 걸까 싶었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 누군가 제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아릿함이 몰려왔다.
그때였다.
“지켜 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진예의 입에서 사과의 말이 흘러나오자 서엽은 놀라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사소한 것까지 전부 저를 밀어내기 위한 포석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그는 꿋꿋하게 바른 말을 하려고 노력했다.
“아니옵니다. 폐하께서 곤란에 처하시는 것보다는…… 이편이 낫지 않겠사옵니까.”
그러고 간절한 눈빛으로 진예를 올려다보았으나, 그녀는 되레 서엽에게서 손을 떼고 몸을 세웠다.
진예는 서엽이 벌써부터 눈꺼풀을 파르르 떠는 것을 애써 외면하며 물었다.
“마음의 정리는 다 되었느냐.”
그 한마디가 나오자마자 서엽의 눈에는 순식간에 뜨거운 것이 고이기 시작했다.
“꼭 그런 것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저는 폐하의 곁이 아니면 살 자신이 없사옵니다.”
“서엽아.”
진예가 안타깝다는 듯이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서엽이 원하는 건 동정 따위가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 될 것 같습니다. 그러한 것을 어찌합니까. 왜, 방법도 아니 알려 주시고 그리하라고만 하십니까.”
간곡히 매달리는 서엽을 무감각하게 내려다보던 진예가 입을 닫고 한동안 침묵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무거운 고요가 둘 사이에 내려앉았다.
서엽은 저를 짓눌러 오는 압박감에 입술을 떨다가 윗입술로 아랫입술을 덮어 꾹 물었다.
그 뒤 반투명한 발 사이로 흘러들어 오는 촛불이 과연 몇 번이나 그들의 그림자를 흔들었는지 모른다.
결국 저를 짓누르는 분위기를 이기지 못해 고개를 떨구고 마는 사내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진예는 마침내 길었던 침묵을 깼다.
“연 귀인을 짐의 황후로 봉하고자 한다.”
잔잔한 호수에 갑작스럽게 거친 파문이 인 양, 그녀의 짧은 말이 서엽의 정신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충격을 받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그를 보며 진예는 이제부턴 차라리 거짓말을 하기로 결심했다.
진예와 서엽의 사이에선 거짓말이란 그간 암묵적으로 하지 말자고 정해 둔 규칙 안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 방법이 아니면 서엽은 영영 마음 정리를 못 하고 제 주변을 맴돌 터. 진예로서는 서엽으로 하여금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하게 놔둘 수는 없었다.
그러니 지금부터 그녀가 하는 말은 어디까지나 조서엽을 위한 거짓말이었다.
“너와의 약조는 지키지 못할 것 같아 미안하구나.”
서엽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곧장 알아들었지만 일부러 모르는 척 회피했다.
“어떤 약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바로 인정하기에는 너무나 말이 안 되는 것이었기에.
한데 영영 외면하고픈 그 마음을 알고 있으면서, 진예는 서엽의 귀에 똑똑히 제 말소리를 흘려 넣었다.
“내 연무건을 마음에 들여 보기로 하였다.”
그리 언급하면서 진예는 문득 자신의 말이 정말 온전한 거짓이 맞는가 하는 의문을 품었다.
무건이 그토록 애원해 왔지만 단 한 번도 진심으로 받아들여 보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말로 내뱉고 나니 어떤 구체적인 그림이 제 마음속에 그려지는 듯했다.
상당히 묘한 기분이었다, 그것은.
하여 그녀 역시 약간의 혼란을 얼굴에 내비치는데, 서엽 얼굴에서 순간 표정이 거두어졌다. 전혀 믿기지 않는 말이었기에 그가 차게 대꾸했다.
“설마 저를 떼어 내려 이리 거짓을 입에 올리시는 겁니까?”
“거짓이 아니다.”
진예가 곧장 부정했다. 그러고 역시나, 이번에도 마음이 뒤숭숭해졌다. 반사적으로 튀어 나간 이 말이 그녀의 가슴속에도 이상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설마 진실로 연무건이 제 안에서 의미 있는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일까?
그녀조차도 당혹스러워하고 있는데, 서엽이 고개를 흔들며 정신 차리라는 듯이 소리쳤다.
“제가 한 말이 기억이 나지 않으시는 겁니까. 명인은 저주가 맞다, 속지 마시라 하였습니다!”
금세라도 눈가에 쌓인 눈물을 쏟아 낼 듯한 표정으로 처절하게 외치는 그의 말에 진예가 혼란함에 흔들리던 눈을 바로 했다.
허벅지 위에 올려 둔 손이 둥글게 주먹을 쥐었다.
“그래, 명인은 저주가 맞지.”
진예는 그 말을 부정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다만 지금 그것이 힘을 잃은 이유는 둘 사이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요소가 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명인 때문이 아니다.”
연무건을 곁에 두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그 사내는 진예에게 다가서기 위해 그녀가 요구했던 증명을 몇 차례나 말끔히 해내었다.
그리하여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게끔 스스로의 가치를 알렸다.
그게 아니었다면 진예는 결코 무건을 근처에 얼쩡거리게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니.
〈그러니 당신께서도…… 저를, 이 연무건을 선택해 주십시오.〉
이것은.
〈곧 그대를 황후로 책봉할 예정이다.〉
진예 자신이 ‘선택’한 결과였다.
명인의 농락 따위가 아니라.
한데 서엽은 어느새 붉어진 눈으로 진예를 올려다보며 독한 말을 쏟아 냈다.
“그럼 연무건, 그자에게 홀리기라도 하신 겁니까. 그 사내가 그리도 아랫도리를 잘 놀리더이까. 대체 방중술이 얼마나 뛰어나기에 이리하시는 것입니까?”
진예는 눈살이 찌푸려지는 말에 불쾌한 기분을 숨기지 않았다.
“거기까지 하거라.”
“아니면, 그놈이 익재의 머리를 가져와서입니까?”
그런 이유라면 자신도 하겠다는 양 서엽이 연신 물어 왔다. 하나 이전에도 말했듯, 진예는 조서엽의 마음은 원치 않았다.
시작부터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이었을까. 진예는 아무리 생각해도 서엽을 신하 이상으로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그러니 마음이 동하지 않는 이쪽에 힘을 쏟기보다는 저를 인간적으로 아껴 줄 이에게 최선을 다하길 바랐다.
하여 진예는 서엽을 향해 더욱 단호히 선언했다.
“아니, 그의 진심에 흔들리게 되었어.”
아무래도 말에 힘이 있다는 것이 사실인 모양이다. 거짓이라고 생각하며 시작한 말이 이제는 일정 수준의 진실을 내포하고 있었다.
실제로도 무건이 온몸으로, 온갖 방법으로 쏟아붓는 진심이 달큼하지 않았다면 거짓이었다.
하여…… 더는 제 손에서 떠나보내기 싫어졌다.
본래 그렇지 않은가. 사람이란 짐승은 탐욕이 많아 좋은 것이라면 제 손에 움켜쥐고 놓기 싫어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인지상정이었다.
“그럼 이 조서엽의 마음은 진심이 아니란 말씀이십니까. 제가, 제가 그자보다 더 깊게 폐하를 연모하옵니다.”
그렇지만 서엽은…… 멀어지기로 결심해서일까. 그가 토해 내는 언어들은 그녀에겐 공허하게 들리기만 했다.
“감정이라는 게 어디 비교가 되는 것이었더냐?”
돌아오는 반문에 서엽은 끝이 보이지 않는, 까마득히 높은 벽을 마주한 듯한 느낌이었다. 암담함에 분명 눈을 뜨고 있는데도 눈앞이 까매지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그와 저의 차이가 대체 무엇입니까……. 왜, 왜 제가 버려져야 하는 겁니까?”
마침내 서엽의 목소리에 울음과 미약한 원망이 섞이기 시작했다. 싫다는데도 계속해서 매달리는 스스로가 추해 보일 거란 사실은 아무 상관 없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진예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다만 여전히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 물어도 답을 내 줄 수가 없구나.”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이유라는 그녀의 말이, 서엽에겐 가장 잔인하게 들려왔다.
결국 서엽의 눈가에 매달려 있던 눈물이 툭 떨어지는 모습을 본 진예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한숨은 눈앞의 사내가 한심해 보여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서엽이 얼마만큼의 아픔을 견디고 있을지 짐작이 되어서였다.
진예가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평생을 오롯이 자신에게 바쳐 온 신하를 위해 제 몸을 굽혔다.
여태껏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진예의 행동에 서엽이 놀라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침내 진예가 몸을 낮추자 당혹감 어린 소리가 흘러나왔다.
“폐, 폐하, 어찌…….”
그러는 사이 하얗고 작은 손이 서엽의 얼굴에 닿았다.
약간은 서늘한 온도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핏기가 가신 뺨에 닿자 그 위로 투명한 눈물이 살며시 고였다.
진예는 살면서 처음으로 느끼는, 익숙지 않은 감각에 저도 모르게 손동작을 멈추었다.
‘아…….’
눈물이라는 것이, 조금 뜨거웠다.
그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은 진예는 동시에 제 안의 무언가가 바뀌어 있었음을 겨우 알아차렸다.
진예가 서엽의 얼굴을 감싼 제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와 눈을 마주쳤다.
서엽의 검은 눈동자에 자신의 당황한 모습이 비쳤다. 서엽이 놀란 것처럼, 그녀조차 현재 자신의 모습을 무척 낯설어하고 있는 것이었다.
본래 진예라는 사람은 지금처럼 다른 이의 눈물을 닦아 줘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없는 이였다.
한데 서엽의 눈물을 보면서 저 역시 안타까운 감정을 느꼈다.
‘대체 언제부터…….’
제 부모의 핏물 위에 올려 둔 황좌에 앉으면서, 더는 제 가슴에 감정을 담지 못하리라 결론지었었다.
그런데 지금, 아주 옅은 저릿함이 진예의 심장을 건드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린 감각이었다. 되찾으리라 생각지 못했던, 그리고 되찾고 싶지 않았던.
그런 것은 나약함의 표상이라 여겼으므로.
한데 지금과 같이 제가 아끼는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 줄 수 있는 기반이 이런 감정이라면, 나쁘지는 않은 듯했다.
그렇게 받아들이고 나니 서엽의 뺨을 타고 사람의 온기와 함께 흘러들어 온 색채가, 그녀의 손을 물들였다. 온통 잿빛이었던 제 세상에 조금씩 색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역변이라 해도 좋을 만큼 격렬한, 그렇지만 고요히 찾아온 변화였다.
진예가 손바닥으로 서엽의 얼굴을 감쌌다. 그러자 그녀의 다음 말이 두려워 서엽이 잔뜩 경직되어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었다. 제 옆에 있으면 서엽은 늘 이처럼 초조해만 하면서 말라비틀어져 갈 테니.
“내 그대를 버리는 것이 아니야. 짐은 여전히 조서엽을 아끼고 있다.”
“…….”
“신하로서, 그 누구보다도 그대를 신뢰해. 그것은 앞으로도 절대 변치 않는다.”
감히 누가 조서엽을 대체할 수 있을까. 연무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세상 그 누구도 하지 못한다. 그녀가 인정하지도 않을 것이고.
한데 서엽의 눈에서는 기어이 눈물이 후두두 떨어졌다. 고통을 참는 듯 입을 다물고 콧숨을 몰아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예는 남은 한 손을 그런 그의 어깨에 올려 꽉 잡았다. 마음 단단히 하라는 의미였다.
“그렇게 정리하도록 하자, 서엽아. 더는 짐을 이리 마음 아프게 연모하지 말거라.”
언젠가 했던 말을 그녀가 다시금 입에 올렸다. 하지만 그때는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에서 시작된 말이었다면, 오늘은 달랐다.
서엽의 감정이 그녀에게 파고들어 심장을 거세게 죄어 왔다. 단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괴로운데, 이러한 고통을 서엽에게 더 견디라 하고 싶지 않았다.
“네 이리 아파만 하고 있지 않느냐. 힘들어만 하고 있지 않느냐. 그래서 점점 지쳐 가고 있는 중이지 않으냐. 그런 것이 어찌 사랑일까.”
“폐하…….”
“그만할 수 있다. 그리할 수 있어.”
암시라도 걸듯이 진예가 반복해 말했다. 그러나 서엽은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아파도, 힘들어도, 지쳐도…… 폐하의 곁에 있고 싶습니다.”
굳이 지옥에 남겠다며 서엽이 고집을 부리자 진예는 안타까움에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서엽은 손으로 제 가슴을 누르면서 그녀에게 호소했다.
“폐하께선 이게 어찌 사랑이 아니라고 하십니까. 이것이 어찌 연모의 정이 아닐 수가 있습니까?”
이리도 아픈 것이 어떻게.
이 세상에 이름 붙여진 무수히 많은 감정 중에 이토록 사람을 제멋대로 쥐고 흔드는 감정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인가. 이런 잔인한 존재가 또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서엽의 계속된 물음에 진예가 깊은숨을 토해 내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눈시울이 시큰해져 오는 것을 보면 저도 그에게 동화해 자칫 눈물을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진예가 넘쳐흐르려는 그 감정을 억누르려 잠시 숨을 골랐을 때였다.
“제 명인자 또한…… 진예, 당신인데.”
툭 던져지듯 나온 서엽의 음성에 진예가 고개를 내렸다. 아무래도 제가 잘못 들은 것이겠거니 하면서.
“지금, 무어라 했느냐?”
되물었으나 내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명확한 언어로 무장한 채 해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제 명인자가, 폐하라 말씀드렸습니다.”
“뭐라?”
진예가 반복해 물었다.
그에 서엽은 흐릿해진 시야를 거두어 내고자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 뒤에야 진예의 얼굴에 선명한 당혹감이 떠오른 것이 보였다.
그 표정을 보면서 서엽은 예감했다.
진예는, 아마 이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하여도 이전과 같은 상황으로 돌아가려 하지는 않을 터이다. 이미 내린 결정에 대해서는 번복하지 않는 그녀이기에.
그럼에도 서엽은 이 끝이 어떻게 맺어질지 보고 싶었다.
설령 파국으로 치닫는다 해도, 그 과정에서 아주 적은 가능성이라도 비칠까 싶어서.
“제 명인자의 이름자는 두 자이옵니다. 진예.”
진예의 손이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서엽은 쓰게 웃으며 제 왼쪽 팔을 꽉 쥐었다. 아픔은 가셨지만 짙은 상흔은 남아 있는 그곳을.
“그것이, 이 조서엽이 명인을 지진 이유입니다.”
진예가 전례 없이 동요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혼란스러움에 흔들리는 것을 보고, 서엽은 제 명인자를 직시하며 질문을 던졌다.
“이래도 명인이 의미가 있다고 여기시나이까, 황제 폐하.”
조서엽에게 있어 명인은 아름다운 운명을 위한 축복이 아니었다.
완벽한 신의 농락이었다.
* * *
남들이 으레 그렇듯이 서엽 또한 관례를 치르고 3년이 채 되지 않은 때에 왼쪽 아래팔의 바깥쪽에 명인이 나타났다.
간질간질함이 일지 않았다면 눈치채지도 못했을 만큼 너무나 흐릿한 명인.
자던 중 팔을 긁다가 깨어난 서엽은 몽롱한 눈으로 그것을 발견했다. 그러곤 이름자를 읽고서 잠이 확 달아나 상체를 세웠다.
陳叡
‘진, 예……?’
워낙 흐릿해서 제가 혹시나 잘못 읽은 것일까 봐 눈을 비벼 봤지만 그 이름이 맞았다. 그리고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환의 황태자, 진예.
비록 아비인 황제의 미움을 받아 모두에게 괄시를 받는다 해도 그가 남몰래 마음에 품고 있었던 그이였다.
꿈만 같은 일에 서엽은 제 명인을 몇 번이나 더듬어 확인했다. 그러다 명인이 왜 이렇게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흐릿한가 싶어 아쉬워졌다.
보통 아는 사이에 명인이 나타나면 처음부터 진하다던데…….
설마 동명이인인가 했지만, 황실 사람의 이름에 든 한자는 누구도 함부로 쓸 수 없었다. 만약 이전에 같은 한자를 쓴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의 이름을 바꾸게 했다.
그러니 그녀가 맞을 터였다.
다만 아주 희박한 확률로 아명이나 태명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고는 들었다. 그러니 서엽은 일단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황실에서 자신을 부를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당황할 테니까.’
제 아비에게 말하면 아마 곧장 황제 앞으로 서엽을 데려갈 것이었다.
하지만 진예는 자신이 누군가와 혼례를 올려야 한다는 생각조차 안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진예는 약관이 지난 지 한참 됐건만 명인 따위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가끔 하는 말을 들어 보면 작은 호기심도 없는 듯했다.
〈평생 안 나오면 홀로 살면 되는 것이지. 그런 것이 무어 대수라고 그리 연연하느냐.〉
〈하지만 황위를 물려받으시면…….〉
〈넌 내가 황제가 될 거라 믿는 모양이지?〉
〈…….〉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그녀는 아무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래도 이 명인이 진짜라면, 그렇다면 이제는 자신이 진정 진예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을 터였다.
제 아비를 포함해 무려 여덟의 대장군을 배출한 조씨 가문이었다. 그 정도 권위라면 충분히 황태자를 보위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그녀에게 갑작스럽게 혼례를 올리자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해서 이후로 진예의 명인이 생겼다는 소문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한 달, 두 달, 그리고 석 달…….
기다림이 점점 길어지고 마침내 1년이 지났는데도 진예의 명인은 나오질 않았다.
보통 명인은 동시에 나타나거나, 늦어도 반 년 안에 서로의 것이 모두 나오는 경우가 일반적이기에 이례적이라 할 만했다.
그동안 서엽의 명인도 전혀 진해지지 않았다. 틈날 때마다 그녀를 만나러 가는데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정말 다른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사이에 따로 서엽의 이름이 새겨졌다는 명인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제가 어디 산속에 은신하고 있지도 않은데.
혹시 진예가 명인이 나왔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는 게 아닐까. 눈에 안 띄는 곳에 나타났다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그런 의심이 서서히 싹터 가던 와중이었다. 서엽의 기대를 배반하는 사건이 생겼다.
소문의 진원이 어디였는지는 모른다. 아마 태자전의 누군가였을 것이다. 입이 가벼운 어느 궁인이 외부에 소문을 흘린 모양이었다.
‘황태자 진예에게 명인이 생겼다.’라고.
그 말을 전해 들은 이가 황제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황태자가 관례를 치른 지 시일이 꽤 지났는데, 진예가 혼례를 피하려 명인을 숨기는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단지 진예를 괴롭히고 싶었던 것인지는 불명확하지만 황제는 상소문을 보자마자 그녀를 대전으로 불러냈다.
수십의 궁인과 내관들이 보는 앞에서 진예는 옷이 벗겨졌다. 타인이 그녀의 몸에 손을 대며 곳곳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아무 데도 명인이 보이지 않자 황제는 그녀의 잘못도 아니거늘 종아리에 매질까지 해서 태자전으로 돌려보냈다.
이 사건만큼은 진예도 상당히 충격을 받은 듯 서엽이 소식을 듣고 갔을 땐, 이미 침방에 틀어박힌 채였다.
〈전하……? 서엽이옵니다.〉
방문을 알리고 한참이 지난 뒤에야 진예는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나왔다. 그러고는 태연한 소리를 했다.
〈잘 왔다, 서엽아. 오랜만에 검이나 휘두르러 가자.〉
서엽은 그녀의 뒤를 따라 후원으로 나가면서, 제 달싹이려는 입술을 간신히 단속했다. 그렇지만 정말로 묻고 싶었다.
명인이 진짜로 없느냐고.
당신의 명인자는 이 조서엽이 아니냐고.
맞는다면 내가 평생을 지켜 주고, 사랑해 줄 것이라고, 내 정인은 당신이 유일하다고.
그런 말을 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그녀를 멈춰 세워 제 품에 꽉 안아 주고 싶었다.
그리고 동시에 서엽은 자괴감이 올라와 얼굴을 굳혔다.
아비의 만행에 힘들어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이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너무나 쓰레기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제 명인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물론 서엽은 여전히 제 심장이 그녀를 향해 뛰는 것을 느끼며, 진예가 제 명인자란 사실에 점점 더 확신을 가졌다.
하지만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도, 심지어는 그녀가 황위에 오른 뒤에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제 명인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존재조차 모를 정도로 흐릿했고, 진예의 명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 나타났지만…….
연무건.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이 떠올랐다.
그 세 글자가 그녀의 어깻죽지에 새겨지자, 진예는 제 명인자를 반드시 찾아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마침내 제 급사 중 하나가 변방에서 황제의 명인자를 찾았다는 소식을 전해 온 날이었다. 서엽은 그곳을 향하기 직전, 제 팔을 주저없이 지져 버렸다.
제 명인이 정말로 환 황제인 진예의 이름이 아니라면 제게는 소용없는 것이었고, 설령 그녀라고 해도 연무건과 진예는 쌍방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이따위 것은 분란의 불씨밖에는 되지 않을 터였다.
그렇게 충신 조서엽은 오롯이 진예를 위해 제 명인을 숨겼다.
* * *
긴 이야기를 듣는 동안 진예는 일어나 서엽에게서 조금 떨어진 거리에 뒤돌아서 있었다. 팔을 지졌다는 문장을 들었을 땐 마침내 뒷짐 진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서엽의 말이 끝나자 그녀가 다시금 몸을 틀었다. 그리고 따로 무어라 덧붙이지 않은 채 짧게 명령했을 뿐이었다.
“팔을 드러내라.”
서엽이 곧장 왼쪽 소매를 걷어 냈다. 보기 싫게 흉이 진 모습을 보자 이전에 피가 배어나 그를 꾸짖었던 기억이 났다.
진예가 성큼 서엽 쪽으로 걸어가 그 팔을 붙잡아 올렸다. 어디에도 명인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워낙 흐릿하다고 했으니 흉에 가려지는 것이야 문제라고 할 거리는 아니었다.
다만.
“네 이야기엔 증좌가 없지 않으냐.”
제아무리 조서엽을 신뢰한다 해도 쉽게 믿어지는 주장이 아니었다. 진예는 명인이 그런 식으로 나타난다는 소리를 어디에서도 들은 적이 없었다.
진예가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그리 묻자 서엽이 긴장감에 숨을 들이켰다. 그도 당연히 진예가 바로 믿을 거라고 생각지 않았기에 이 상황을 예상해 준비한 답이 있었다.
“증인은 있습니다.”
“누구더냐.”
“미마이입니다. 그 아이를 찾아 추궁하시면 저와 같은 말을 할 것입니다.”
대꾸하면서 서엽은 그 아이를 찾아내 데려올 때까지 도로 옥사에 갇히나 싶었다.
하나 진예는 무건을 따라온 서역인 아이를 떠올렸다. 그 아이를 말하는 거라면 당장이라도 진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서엽의 손목을 놓고 진예가 문밖을 향해 크게 외쳤다.
“박 태감은 들으라. 당장 미마이란 아이를 찾아 인교전에 들이라!”
“예, 폐하.”
지엄한 명에 곧장 밖에서 분주한 소음이 오갔다.
박 태감은 어린 내관들을 서둘러 내보냈다. 방금 전까지 황궁에 있던 아이를 무건이 데리고 갔다는 소식을 들은 이들은 저녁 늦게 황궁 문을 열고 나가 봉아궁으로 향했다.
그렇게 봉아궁에서 거의 납치하다시피 아이를 급히 데려온 내관들이 인교전으로 되돌아왔다.
아이가 오는 동안 진예는 혼란스러움에 방 안을 서성였고, 서엽은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처럼 고개 숙인 채 잔뜩 어깨를 긴장시키고 있었다.
한 식경이 조금 지난 때에 미마이가 인교전 앞의 문을 통과했다. 박 태감은 즉시 진예에게 아이를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렸다.
“폐하, 미마이를 안에 들이나이까.”
“들이라.”
인교전의 문이 분주히 열렸다. 미마이는 내관들에게 반쯤 등 떠밀려 서둘러 행랑을 통과했다.
진예가 있는 방문이 열리자 미마이는 진예의 얼굴조차 확인하지 않고 일단 무릎을 꿇고 바짝 머리를 조아렸다.
미마이의 시야 끝으로 흑화를 신은 발이 보였다. 그 발이 바로 앞으로 다가오더니 잔뜩 날이 선 진예의 목소리가 미마이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네 지금 한 치의 거짓도 없이 대답해야 할 것이다.”
갑자기 끌려와 그녀가 왜 이러는지, 영문도 모르는 미마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하, 하문하소서.”
그리고 질문을 들었을 때, 미마이는 목덜미가 서늘해져 옴을 느꼈다.
“네 옆에 있는 조서엽의 명인자가 누구더냐.”
“…….”
‘옆에 있는’이라는 단어를 듣고 나서야 미마이는 이 방 안에 다른 인물이 있음을 눈치챘다. 아이는 고개를 살며시 돌려 옆을 확인했다.
과연 누군가의 무릎 꿇은 하체가 보였다. 진예의 말마따나 조서엽인 듯했다.
미마이가 그것을 보고는 당황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진예가 대답을 채근했다.
“어서 답하지 못하겠느냐.”
“그, 그것이…….”
화친왕부에서 조서엽의 손을 잡고 나올 때, 그의 명인에 대해서는 절대 함구하기로 했었다. 그래서 차마 입을 못 열고 머뭇거리고 있는데, 서엽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해도 된다, 미마이.”
본인의 허락을 받긴 했지만 역시나 미마이의 입술은 금세 떨어지진 않았다. 다음엔 무건이 문제였다.
조서엽의 명인자를 밝혔다가는 무건이 곤란해질 수도 있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그는, 무건은 분명히 크나큰 충격을 받을 것이었다.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무수히 많은 고민과 상상이 아이의 머리에서 나래를 펼쳤다.
그렇게 미마이는 제가 토해 낼 진실이 어떤 파급력을 지닐지 생각하느라 한참 동안이나 답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진예는 그런 아이를 더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 주었다. 너무 겁박하면 제 앞의 머리 좋은 아이가 아예 회피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세 사람 사이의 긴장감이 전해지는 것일까. 공기마저 느릿하게 순환하는 기분이었다. 아주 짧은 시간인데도, 미마이의 말이 나오기까지 억겁이 지나가는 듯하다 느껴질 정도로.
꽤 답답하다고 여겨질 만큼의 시간이 지난 때에, 미마이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뒤 떨림을 품은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조 후의 명인자는…… 제 앞에 계신 황제 폐하이십니다.”
그리고 진예는 현기증이 인 듯이 눈앞이 암담해졌다.
“그것이.”
누가 친 것도 아닌데 단지 진실의 무게에 짓눌리는 것만으로도 비틀거리게 되었다. 그녀는 다리에 힘을 주어 겨우 버티며 저도 모르게 소리치고 말았다.
“그것이 어찌 가능하다는 말이냐!”
미마이의 작은 몸이 흠칫했다. 추상같은 외침에 아이가 겁을 집어먹고 덜덜 떨었다. 생각이 머리를 거치지 않은 채 입에서 다급히 쏟아져 내렸다.
“명인은 쌍방이 아닐 때도 있고, 또한 한 사람의 몸에 여러 개가 새겨지는 경우도 있사옵니다. 여러 가지 예외가 있어…….”
예외. 변명처럼 흘러나오는 설명 속에서 그 단어를 잡아 낸 진예가 곧장 반응했다.
“해서 조 후가 그 예외라고?”
“……그, 그렇사옵니다.”
진예의 시선이 서엽에게로 향했다. 이제는 울음을 그친 그가 지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어떻게 할 것이냐는 의미를 담은 눈빛으로.
그러나 이 자리에 어떤 선택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진예는 발을 돌려 제 손으로 방문을 열어젖혔다.
밖에서 안의 소리를 모두 들은 박 태감과 위장군이 사색이 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진예는 이외에도 바짝 엎드려 있는 궁인들과 내관들을 보면서 미간을 구겼다. 잔뜩 예민해진 그녀의 입에서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모두 내보내거라. 전부 다 물러나!”
“명 받드옵니다.”
박 태감의 대답과 함께 인교전 안에 있던 모두가 허리를 굽힌 채 분주히 빠져나갔다.
행랑을 빠져나온 진예는 복잡한 머리를 이고 침방으로 향하려고 회랑을 디뎠을 때였다. 그녀의 시야 끝에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이의 인영이 비쳤다.
순간 멈칫해 버린 진예의 시선이 인교전 정문 너머로 향했다. 인교전 앞의 기단에, 바쁘게 멀어지는 이들 사이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사내가 있었다.
무건이었다.
자려던 중에 나왔는지 가벼운 옷차림이었지만 표정에는 전혀 잠기운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 눈빛이 너무 선명해서 그녀를 곧 뚫어 버릴 듯했다.
아마도 미마이를 쫓아온 모양이었다. 무건의 표정이 안 좋은 것을 보니 이야기를 어느 정도 엿들은 듯했다.
이런 가능성을 미처 생각지 못했던 진예가 난처함에 이를 악물었다. 그러는 사이 무건이 저조한 음성으로 물었다.
“제가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연 귀인.”
허락도, 거절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예상대로 무건은 인교전의 문턱을 넘어서는 순식간에 진예의 앞에 섰다. 그리고 어느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입을 맞춰 왔다.
딱딱한 표정과 다르게 입술이 녹아 버릴 듯 부드러운 접문이었다. 굳어서 입을 벌리지 못하는 그녀를 달래는 것처럼 아랫입술을 빨았다가 떨어지고, 다시 덮어 오는 행위에 진예는 차마 그를 거세게 밀쳐 내지 못했다.
한데 미마이와 서엽을 데리고 행랑을 막 빠져나온 위장군이 그들의 모습에 놀라 얼른 뒤돌아서는 것이 보였다. 그 뒤에서는 서엽이 그녀 쪽을 빤히 보며 얼어붙어 있었다.
그에 진예도 그와 눈이 마주치고 있으니 무건이 그녀의 볼을 감싸고는 슬쩍 밀어 제 쪽을 보게 했다. 깊게 가라앉은 고동색 눈동자로 그녀를 두 눈에 담으며 무건이 속삭였다.
“다른 곳에 눈길 주지 마십시오.”
질투 나니까.
“읏!”
무건의 커다란 몸이 진예를 뒤로 밀어붙였다. 그녀의 등이 벽에 닿자 무건이 그녀의 턱 밑에 손을 밀어 넣어 살며시 들어 올렸다. 젖은 혀가 붉은 입술을 가르며 안쪽으로 밀고 들어왔다.
충격을 받은 서엽이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거친 호흡을 내뱉는 소리를 듣고는, 위장군이 더는 안 되겠다고 판단해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고 침전을 나서려는데 무건이 입술을 떼고는 서엽에게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저를 침방으로 들여 주십시오, 폐하. 제가 폐하의 유일한 사내라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말은 서엽의 역린을 제대로 건드렸다.
“연무건!”
서엽이 참지 못하고 위장군의 손을 뿌리치고 그에게 뛰어들었다. 그것을 당연히 예상한 무건은 흥분한 나머지 어설프게 질러오는 서엽의 주먹을 피하고 팔을 붙잡았다. 그가 서엽을 내팽개치며 호령하듯 소리쳤다.
“뭐 하는 건가, 위장군!”
눈앞에 벌어진 난잡한 광경에 당황하고 있던 위장군이 정신을 차리고 비틀거리며 쓰러진 서엽을 일으켜 세웠다.
“송구하옵니다, 마마.”
서엽은 위장군에게 강제로 끌려가면서 잔뜩 핏발 선 눈으로 무건을 노려보았다.
“폐하를 건드리지 마. 감히 네놈 따위가 넘볼 수 있는 분이 아니다!”
“…….”
“폐하, 안 됩니다. 연무건은 절대 아니 됩니다!”
멀어지기 싫어 버티면서도 악을 쓰는 그 모습을 무건이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단지 진예가 서엽을 볼 수 없도록 제 몸으로 가릴 뿐이었다.
진예는 점점 멀어지는 서엽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며, 과연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하여 진예는 차마 서엽의 꼴을 더 보지 못하고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려 버렸다.
미마이가 머뭇머뭇 무건의 눈치를 보며 인교전을 나가는 것을 마지막으로, 박 태감이 황제의 명에 따라 문을 닫아 버렸다.
전례 없는 혼란 후, 그렇게 순식간에 고요해진 인교전의 회랑에 무건의 퍽 냉정한 목소리가 울렸다.
“저자를 가엾게 여기지 마십시오. 이미 신하로서는 폐하께 넘치도록 신뢰를 받았습니다.”
진예는 그 말에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 옆으로 무건이 팔을 뻗어 오더니 두 팔로 어깨를 감싸 안았다.
뒤에서 그녀를 꽉 조여오며 무건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그저 사내가 되지 못했을 뿐이지요. 그건 폐하의 책임이 아니지 않습니까.”
말을 들으면서 진예는 두 손으로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자 무건이 의도를 읽고 더 가까이 몸을 붙여 왔다. 혹여나 그녀가 쓰러지지 않도록.
그에 진예가 그의 호의에 몸을 푹 기대었다. 그리고 회한이 깃든 목소리로 힘겹게 입을 떼었다.
“조서엽은, 짐의 둘도 없는 충신이었다.”
“미안함으로 사랑을 속삭일 수는 없는 법입니다.”
“하지만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이냐. 왜 저이의 명인자가…….”
서엽이 왜 자신을 놓지 못한다고 말했는지, 어째서 그토록 처절하게 매달려야만 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단순히 명인의 장난질이라고 하기엔 서엽에게 너무나 잔인한 일이었다.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에 무건은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을 넣었다. 언제나 꼿꼿했던 태도만 봐 왔던 무건으로서는, 제가 아닌 다른 사내로 인해 이렇게 약해지는 진예를 보기가 힘들었다.
“해서 흔들리셨습니까? 저자에게 안기고 싶어지셨습니까?”
질투가 났고, 또한 진예에게 버림받을까 두려워졌다. 그래서 말이 사납게 나갔으나 다행히도 진예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다.”
무건은 그녀의 말 한마디에 불안해졌다가 안심하는 스스로가 바보 같았지만 그래도 좋았다. 이렇게 진예를 제 품에 안는 행위를 허락받은 것만으로도 안정이 되었다.
이 세상에서 오로지 자신만 가능한 일이었으므로.
“하면 그것으로 된 것 아닙니까.”
무건이 진예를 품에서 떼어 돌려 세웠다. 그녀의 흔들리는 눈빛을 똑바로 바라보며 무건이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내뱉었다.
“제가 선택한 이 운명을 저는 절대 포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진예라는 여인을 양보하지 않을 것입니다.”
“연무건…….”
“제가 폐하 앞에서만 사내가 되듯, 폐하께서도 부디 제 앞에서만 여인이 되어 주십시오.”
말을 마친 무건이 다급히 그녀와 입술을 맞대었다. 허리를 제 팔로 휘감았다. 두 사람의 다리가 교차하면서 점점 침방에 가까워졌다.
진예의 등 뒤에 문살이 닿아 멈칫하자 무건이 손을 더듬어 문을 밀어 버렸다. 지탱하던 것이 사라지니 진예의 몸이 거의 넘어질 것처럼 뒤로 밀렸다. 그것을 무건이 아슬아슬하게 받치며 침방에 들어섰다.
하아, 하…….
그 와중에 이어지는 입맞춤 사이사이로 그들의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무건은 다시 진예의 작게 벌어진 입술을 빨아들이며 붉은 습지에 제 혀를 밀어 넣었다.
흡, 하고 숨을 삼키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울렸다. 무건이 고개를 기울이며 점점 더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 혀끝으로 민감한 부위를 자극해 왔다. 그러자 턱이 잔뜩 뻐근해지며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동시에 무건의 손끝이 그녀의 잘 여며진 목깃으로 파고들었다. 몸을 가리고 있던 가벼운 천이 사락사락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녀와는 다른 온도를 품은 손이 맨 어깨를 감싸 오기에 이르렀다.
간지러운 감각이 진예의 매끄러운 몸을 타고 내려와 옆구리를 자극할 즈음, 진예의 몸이 다시금 무건과 벽 사이에 끼었다.
자연히 입맞춤이 끝났을 땐 그녀의 옷이 파헤쳐져 있었다. 가빠진 숨에 따라 모양 좋은 가슴이 무건의 앞에서 오르락내리락했다. 사내의 시선이 제 맨몸에 닿는 것만으로도 진예는 벌써부터 배 아래로 뜨거운 기운이 뭉치는 것을 느꼈다.
“너무 급하지 않으냐.”
그리 말하면서 진예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으나 무건은 그녀의 귀를 이로 살짝 깨물며 그가 몇 겹으로 된 치마를 들추어냈다.
드러난 엉덩이를 움켜쥔 그가 얇고 탄탄한 다리 사이로 제 허벅지를 끼워 넣으며 진예의 아랫배를 제 몸에 바짝 붙이게 했다. 그리고 현저히 낮아진 목소리로 그르렁댔다.
“폐하께선 지금 제가 얼마나 인내하고 있는지 짐작이 안 되시는 모양입니다.”
“읏!”
무건의 근육이 단단히 뭉친 허벅지가 문질러지며 예민한 부위를 자극해 왔다. 살이 스칠 때마다 진예의 몸이 아래쪽에서부터 파르르 떨렸다.
무건이 그런 진예의 어여쁜 목선에 입을 내리며 속삭였다.
“머릿속에선 이미 조서엽 앞에서 폐하의 이 치마를 걷었습니다.”
그리하여 몇 번이고 원하는 만큼 제 몸을 멋대로 밀어붙이며 눈앞의 여인이 제 것임을 증명했을 터였다.
그 욕망을 간신히 참고 있었으나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어졌기에, 무건은 어설프게 옷가지가 걸쳐져 있는 그녀의 팔을 끌어당겼다.
“팔 감아요.”
진예가 살짝 상기되어 있는 무건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목에 팔을 감았다. 지금은 그가 몰아붙이는 이 다급한 속도에 맞추어서 파고에 몸을 실어도 좋지 싶었다.
그러자 무건이 그녀의 몸을 들어 옆에 있던 낮은 탁자 위에 올렸다. 커다란 손이 이내 진예의 허벅지를 붙잡았다.
무건은 제 허리 쪽에 묶여 있던 끈을 풀며 방금 전의 자극으로 물기가 고인 그곳을 찾아들어 갔다.
참았다는 말이 사실인지 묵직한 것이 잔뜩 압박을 해 오자 진예가 뒤로 손을 짚으며 상체를 휘었다.
“아……!”
봉긋한 가슴이 눈앞에서 어지럽게 흔들리자 무건은 그 위의 첨단에 입술을 내렸다.
진예의 높아지는 신음이 무건의 흥분감을 더욱 고조했다. 그는 다리가 약한 탁자와 함께 흔들리는 몸을 제 거구로 내리누르며 이내 진예를 완전히 눕혀 버렸다.
깍지를 껴 그녀의 손을 위로 올렸다. 그러자 가슴이 맞닿아 상대의 심장이 뛰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무건의 심장은 금세라도 터질 듯이 박동이 빨라져 있었다. 그는 델 듯이 뜨거워진 숨을 그녀의 귓가에 쏟아 냈다.
“저한테 폐하의 전부를 보여 주십시오.”
칼이 스치는 듯이 날카로운 감각이 진예의 배 안쪽에서 일어났다. 젖은 소리가 점점 거세어졌다.
버티려는 본능에 의해 다리가 그의 허리를 점점 더 꽉 죄었다. 몸이 꺾이는 각도가 점점 더 과도해져 갔다.
“연, 무건……!”
진예가 더는 참지 못하고 그의 등을 손톱으로 세게 긁어 내렸다. 손톱자국이 길게 이어졌지만 무건은 아랑곳하지 않고 더 은밀한 곳을 탐했다.
무건은 저를 감싸 오는 따듯하고 말랑한 감각을 탐닉해 나갔다. 과도하게 흥분한 그의 몸이 번들번들하게 땀에 젖어 갔다.
그리고 그건 진예도 마찬가지였다. 끈적해진 살결이 붙었다 떨어지고, 마찰할 때마다 점점 더 진한 체향을 일으켰다.
무건은 작은 얼굴이며 매끈한 목에 연신 입을 맞추며 진예의 향취에 흠뻑 젖어 갔다.
“진예, 당신을 이렇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을 겁니다……. 부디 흐트러지더라도 제 앞에서만 흐트러지십시오.”
말소리는 다정했지만 벽 끝까지 부딪쳐 오는 그의 몸은 이전보다 훨씬 거칠었다. 진예는 제 밑에서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에 귀를 막고 싶어졌으나, 오히려 거기에 제 신음을 끼얹었다.
그러다가 아직 그의 몸에 걸쳐진 옷의 깃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하면 네놈도 같이 흐트러져야지……?”
“……하.”
무건은 그녀의 도발에 너무 좋아서 욕이라도 내뱉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겨우 그것을 참고 젖은 입술을 부딪쳤다가 떨어뜨렸다.
“그런 말씀을 하시면 제가 참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럼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네놈은 이미 짐승 상태인 듯한데…… 하읏!”
“그러게나, 말입니다.”
대꾸하는 동안 하체로 피가 몰렸다. 이미 안쪽을 빡빡하게 채운 그가, 안에서 움찔거리며 더 커졌다. 그 선명한 감각에 진예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깍지 낀 무건의 손이 그녀의 손가락을 더 꽉 죈 순간이었다. 진예의 안쪽에서 종이에 닿은 먹물처럼 뜨거움이 확 번져 갔다.
순간 무건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힘이 빠진 것도 잠시, 금세 그가 그녀를 추슬러 올렸다.
그녀를 안은 채 상체를 똑바로 세운 그에게는 쉬는 시간도 필요 없는 것 같았다.
어깨에 팔을 걸친 채 저를 내려다보는 진예의 입술에 연신 입을 맞추며 다시금 아래쪽을 빠듯하게 했다.
그가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물소리가 질척질척 울렸다. 그에 진예의 얼굴이 빨개졌지만, 그것마저 사랑스럽다는 듯이 무건이 홍조가 올라온 부위에 입을 내려 달아오른 체온을 즐겼다.
그리고 마침내 침상 앞에서 멈춘 무건이 진예를 내려놓았다. 여기서 설마 끝인가? 진예는 그런 생각을 잠시 했지만 곧 착각임을 알아차렸다.
무건이 그녀를 침상에 들이지 않았다. 대신 몸을 돌리게 해 뒤에서 안아 왔다.
“……!”
단숨에 들이치는 감각에 진예가 허리가 휘청였다. 버티려는 본능에 의해 손으로 침상을 짚고 상체를 낮추었다.
모든 복잡한 생각을 날려 버리는 거친 감각의 파도가 그녀를 덮쳤다.
눈앞이 점멸했고, 다리까지 떨려 몸이 곧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그때마다 그가 그녀의 아랫배에 밑에 끼운 팔에 힘을 주며 진예를 더욱 꽉 끌어당겼다.
무건이 흔들리는 그녀의 어깻죽지를 이로 지분거리기 시작했을 때, 진예의 몸은 완벽히 주인의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흐트러졌다.
그런 그녀에게 온몸을 부딪쳐 가며, 무건이 제 이름자가 있는 그곳에 대고 불경스럽게도 몇 번이나 신음을 흘렸다.
둘 모두 스스로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치솟는 자극에 점점 몸짓이 다급해져 갔다. 처음엔 적당히 물기 어린 소리가 울리던 침방에, 이내 추진 소리가 난잡하게 퍼져 나갔다.
진예의 군살 없이 어여쁜 몸이 제 아래에서 휘어지는 절경을 보며, 무건의 숨소리가 다급해졌다. 그럴수록 진예의 입에서도 더 강하게 당과처럼 다디단 소리가 터져 나왔다.
“흐응……!”
와중에 무건이 그녀의 작은 망울을 건드리자 진예가 안쪽 더 깊은 곳을 열어 주었다. 그렇게 무건은 그녀가 선사하는 지극한 아늑함에 빠져들었다.
하초에서부터 뇌수까지 치닫는 쾌락에 무건도 점점 그녀에게, 그녀의 몸에 도취되어 갔다.
무건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제 정인과 하나가 되고 싶어, 최대한 욕구를 참아 내며 진예의 귓가에 대고 물었다.
“저를 황후로 봉하시겠다 하시었습니다. 그건, 바뀌지 않겠지요?”
“그래, 바뀐 것은 없…… 아!”
“마땅히 그리해 주셔야 합니다. 아니 그러면 이 연무건이 어찌 미칠지 모르니.”
그에 진예가 상체를 살짝 틀었다. 그러자 입에서 고통 때문인지 쾌감 때문인지 모를 신음을 흘리며 무건이 상체를 숙여 침상을 짚고 있는 진예의 손 위로 제 것도 겹쳤다.
그러면서 가까워진 얼굴에 진예가 먼저 고개를 돌려 무건의 입술에 닿았다 떨어졌다.
“네, 놈이, 미치면 어찌 될까 기대는 되긴 한다만.”
말이 끝날 때쯤 다시 제 몸을 날카롭게 관통하는 쾌감에 진예가 목을 젖혔다. 붉은 입술이 예쁘게 벌어지는 것을 보며 이번엔 무건이 그 입꼬리에 제 입술을 꾹 눌렸다.
“조서엽을 죽이고 폐하를 가둬 뒀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럼 위장군이 절 죽일 듯이 쫓아오긴 하겠으나.”
말하는 중간에 진예가 이전보다 좀 더 격한 반응을 보였다. 무건은 그녀의 새로운 자극점을 발견하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런 장면은, 애초에 안 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같은 곳을 여러 번 괴롭혀 주자 평소 하얗던 진예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무건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행위에만 몰두해 갔다.
그렇게 다시금 제 전부를 쏟아 내고 난 뒤, 무건은 잠시 물러나 진예를 침상 위에 올렸다. 그러자 진예가 가슴을 가쁘게 오르락내리락하며 큰 숨을 내뱉었다.
“하아…….”
두 차례의 해일을 선사한 사내를 진예가 쾌감에 흐릿해진 눈으로 올려다보며 그의 목을 끌어당겼다.
말 잘 듣는 강아지라도 되는 양 진예의 손길에 따라 순순히 끌려온 무건이 또다시 안고 싶다는 듯 간절한 눈빛을 보내왔다.
그에 진예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발개진 그의 귓바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나 귀인이든, 황후든…… 지금 그것이 중요한가. 이 침방에 든 이는 연무건, 그대 하나뿐인 것을.”
“……폐하.”
진예가 한쪽 다리로 무건의 허리를 감았다. 그러자 방금 전의 일을 증명하듯 촉촉한 몸이 무건에게 닿았다.
그에 무건은 낮은 탄성을 토해 냈다. 그런 그를 보면서 진예가 살며시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니 그대가 이 밤에 찾아올 짐의 악몽을 물리쳐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악몽. 그 의미를 알아차린 무건은 마음에 돌덩이라도 생긴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진예를 가만히 둘 수 없었다.
“……예, 마땅히 그리하여야지요.”
대답한 무건은 그녀가 원하는 바에 따라 이번엔 더 거칠게 시작했고, 침방에 날카로운 신음 소리가 올랐다.
그 소리는 새벽녘이 지날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 * *
아침이지만 상쾌하기는커녕 방 안의 공기마저 탁하다고 생각되었다.
잠든 지 이제 겨우 한 시진이나 지났을까. 주변이 새벽 여명에 파랬다.
진예는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불편감에 잠에서 깨,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건이 지치는 줄도 모르고 날뛴 탓에 몸이 화끈거리는 것은 물론이고, 다리엔 힘이 빠진 상태였고 허리까지 땅겼다. 게다가 몸 몇 군데가 깨물린 탓에 울긋불긋했다.
하지만 무건이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뒤처리를 하고 잠든 모양이었다. 몸은 제법 깨끗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내내 쏟아부은 것이 살며시 흘러나오는 기분이 들었다는 점이었다.
그에 진예가 슬쩍 미간을 좁혔다.
한차례의 폭풍이 지나가고 잠이 깨고 나니 이게 과연 올바른 도피 방법이었을지, 새삼스레 자기반성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건에게 악몽을 흩뜨려 달라고 했지만 깨어났을 때 상념이 몰려오는 것은 막지 못했다.
〈제 명인자의 이름자는 두 자이옵니다. 진예.〉
〈그것이, 이 조서엽이 명인을 지진 이유입니다.〉
서엽은 어렸을 적부터 십수 년을 함께해 온 자신의 둘도 없는 친우이자 충신이었다. 그랬던 그가 목전에서 눈물을 흘리며 한 고백에 전례 없는 충격을 받았다.
대체 무슨 심경으로 그가 지금까지 제 명인에 대해 숨겼는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는다.
연무건을 자신의 앞에 데려다 놓기 전에 제 팔을 지지는 동안 그는 일말의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것이 충신 조서엽의 선택이었다고.
〈조가(家)의 서엽입니다, 태자 전하.〉
문득 그와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대장군이었던 조춘경 옆에 선 그는 공손했지만 또한 걸출한 가문의 자제답게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그런 그가 진예의 앞에서만큼은 자신을 낮추고, 스스로를 깎으면서 살아왔다.
제힘으로 이루어 낸 영광까지 모두 내팽개치며 오로지 진예를 위해 살겠다고 했다. 역사에 이름 한 줄 남길 수 없는 사람이 되어도 상관없다며.
보통의 헌신이 아니었다. 제 아비마저 질색할 정도였으니.
주인은 개를 배신하는 것이 필연이라고 했지만.
‘그렇지만…….’
그 충성심까지 잊으라는 법은 없다.
서엽에겐 이런 가슴만 아프게 하는 연모 따위 그만하자고 했으나, 적어도 충신으로서의 조서엽은 진예 역시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어떻게 십수 년의 세월이 없었다는 듯이 살아갈 수 있겠는가. 아무리 냉혈한이라도, 그런 것은 불가할 터였다.
그러니 어젯밤의 도피는 비겁한 짓이었다.
서엽을 저리 망가뜨리고 무건을 선택하는 것은…….
아니, 그것은 애초에 선택이 될 수 없다. 누가 봐도 아름답고 훌륭한 짓은 결코 아니었으니까.
연무건도 그런 찝찝한 선택은 원하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아랫배 쪽으로 무건의 팔이 들어왔다.
이내 진예의 몸을 뒤로 당기는 것에, 솔직히 그리 강한 힘은 아니었으나 순순히 끌려가 주었다. 그러고는 누워 있는 무건을 내려다보며 진예가 한마디 던졌다.
“무엇이냐.”
“좀 더 눈을 붙이셔도 좋지 않겠습니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듯한데.”
피로함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그리 말하는 것에, 진예는 고개를 저었다.
“잠이 오지 않아 그런다.”
그에 무건이 상체를 일으켰다. 그는 진예가 알몸인 것을 보고는 옆에 걸터앉더니 먼저 바닥에 떨어진 침의를 주워 올려 펼쳤다.
무건이 팔을 꿰라는 듯 기다리고 있자 진예도 순순히 호의를 받아들였다. 그런 뒤 무건이 대충이나마 손수 옷을 정리해 주며 물었다.
“제가 부족했습니까?”
슥, 슥, 단순히 천이 스치는 소리인데 그의 손길이 다정해서 그런지 듣기가 좋았다. 진예는 허리의 매듭을 묶어 주는 무건의 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것은 아니고.”
밤부터 새벽까지 무건은 그야말로 새하얗게 불태웠다. 더 하라고 해도 몸이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그도, 자신도 말이다.
하지만 어설픈 대답이긴 했기에, 무건의 표정은 썩 좋진 않았다. 나쁘지도 않았지만.
제법 집중하며 허리의 매듭을 마침내 꽉 당겨 마무리한 그가 잠시 그녀를 빤히 보더니, 그 성미대로 정곡을 찔러 왔다.
“하면, 아직도 그 사내가 신경 쓰이시는 겁니까.”
그가 일부러 조서엽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그뿐, 무건은 불편한 주제일지라도 피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진예도 굳이 거짓으로 연막을 치고 싶지 않았다. 방금까지 서엽에 대해서 생각한 건 사실이었으므로.
“부정하지는 않으마.”
너무도 솔직한 대답을 내뱉은 걸까. 제법 단정한 모양새로 묶인 매듭을 쥐고 있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그렇지만 곧 무건이 어깨를 감싸며 진예를 제게 기대게 했다.
“제가 그자의 빈자리를 채울 수는 없는 모양입니다.”
낮은 음성을 들으며 진예는 가슴 한구석이 시려 옴을 느꼈다.
무건의 지적이 맞았다. 그의 말을 듣고 가만히 제 안에 조서엽이 빠져나간다는 생각을 해 보니 갑자기 빈자리가 너무 커 보였다.
황좌에 오르면서 제 속이 도려내진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도려내진 게 아니라 그냥 텅 비어 버린 것이었다. 구멍이 숭숭 뚫려 바닥까지 마른 것이었다.
“폐하?”
무건의 나직한 부름에 진예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살며시 미간을 일그러뜨린 무건이 보였다.
화난 것이 아니라 그녀를 안타까워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그를 보며 진예는 스스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상하고 싶지 않아졌다.
그러나.
“왜 이런 얼굴을 하고 계십니까…….”
“내 얼굴이 어떻기에 그러느냐.”
무건은 대답 대신 조용히 진예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화인이라도 새기듯 꾹 눌러 오는 입술이 조금 뜨거웠다.
듣지 않아도 그가 할 말이 무엇이었을지 짐작이 됐다.
더는 조서엽을 그리워 말라.
제가 옆에 있을 테니 이리 외로워 보이는 표정을 짓지 말라.
무건은 다른 말로 갈무리했다.
“저마저 떠나라 말씀하실 것 같은 표정이십니다.”
“…….”
진예의 붉은 눈이 무건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쓰게 웃음 지었다.
“맞습니까.”
“맞습니까.”
이전부터 느끼던 것이지만 무건은 생각보다 감이 좋았다. 동물적인 감각인지 아니면 눈칫밥을 먹고 산 세월 때문인지 알 수는 없으나.
하지만 ‘버린다.’라.
진예는 그것은 틀린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그녀가 원하는 것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제자리를 찾는 것이지.”
……균형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조화 혹은 안정.
그러나 대답이 충분치 않았던 것인지 뒷말을 기다리는 듯 무건이 제법 지긋한 시선으로 진예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어지는 말이 없자 이내 제가 먼저 입을 열어 물었다.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저의 제자리는 어디입니까?”
그에 진예는 무건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정면을 향했다. 그러자 넓은 침방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얼마 전 이 침방 끝, 제 정면에 보이는 저 문을 열고 평소와 달리 잔뜩 긴장한 채로 걸어 들어왔던 무건이 떠올랐다.
〈이번엔 어떤 대가를 받을지에 대해 고민하다 늦었습니다. 아무래도 마지막 기회가 될 것 같기에.〉
‘마지막’이라는 낯설고도 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입에 올렸던 그가 말이다.
무건이 그렇게 제 나름대로의 독한 각오를 하고 했던 말이기에, 진예 또한 답을 줄 때는 그와의 ‘마지막’을 상정해 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니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그것을 위한 서두였다.
“짐이 그대를 처음 후궁으로 들였을 때, 융경궁을 내주었었지.”
갑자기 그녀가 지나간 이야기를 꺼내자 무건이 의아하다는 양 진예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진예의 말을 따라가기로 결정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폐하께서 어린 시절에 살던 곳이라 들었습니다.”
“어린 시절만이 아니다. 아비가 황위에 오른 뒤에도 줄곧 그곳에 머물렀었어.”
생각해 보면 누구든 이상하게 여길 만한 일이다. 왜냐하면 황자인 진평은 황궁에 기거했는데, 황태자인 진예만 외따로 떨어져 살았으니까.
그러니 모두의 눈에 진예는 당연히 힘없는 황태자로 보일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진예로서는, 그녀 혼자만큼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 시절의 이야기였다.
아직은 제 아비에게 작은 관심을 구걸해서라도 받고 싶어 했던 어느 때의.
솔직히 말하면 떠올리기도 싫은 기억이었지만 지금은 이 이야기를 해야 할 것만 같았기에, 천천히 되새겨 보았다.
다행히 무건은 관심을 보였다. 그가 어두워진 그녀의 낯빛을 걱정스레 들여다보며 물어 왔다.
“그때의 이야기를 해 주시려는 겁니까?”
그제야 진예가 무건과 다시 눈길을 마주했다.
“들어 봤자 불쾌해지기만 할 수도 있긴 하다만…….”
무건은 먼저 이야기를 꺼내 놓고는 말끝을 흐리는 그녀의 말에 잠시 주저했다.
이전에 홍 내관에게 듣긴 했지만 그녀와 관련된 것들은 전부 다 빠진, 두루뭉술한 이야기일 뿐이었다.
지금 역시 그 일부만 알게 될 테지만 그 실체를 들여다보아도 괜찮을까 하는 우려가 들었다.
그러나 무건은 결국 제 오른손으로 그녀의 왼손을 감아쥐었다.
“그래도 듣고 싶습니다. 저는 폐하의 모든 걸 알고 싶으니까요.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진예는 그러겠다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고 이어지는 음성은 아주 담담했지만 내용은 그렇지 못했다.
“몇 년이 지난 일인지도 지금은 잘 모르겠다. 날 독대하겠다 한 적이 거의 없는 부황께서 저녁에 웬일로 날 따로 찾으시기에 이곳 황궁 편전에 들었지.”
모르긴 몰라도 선황이 그녀를 따로 불러낸 지 거의 반년 가까이 지난 시점이었을 것이었다. 어쩌면 더 됐을지도 모르고.
그런데 도착해서 보니 독대가 아니었다. 편전에 들어서자마자 수많은 사람의 눈빛이 제게로 쏟아졌다.
“대전 내관들과 궁인들이 못해도 스물쯤은 모여 있었다. 그곳에서 궁인들이 내 옷을 벗기고 몸에 명인이 있는지 살폈었지.”
“…….”
무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붙잡은 손을 통해 그가 움찔하는 것이 진예에게 전해졌다.
확인하니 벌써부터 화가 난 듯 무건의 표정이 경직되어 있었다.
“하지만 명인은 없었어.”
다만 진예가 이 일화를 꺼낸 목적은 제 아비의 폭압을 고발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뒤의 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서엽의 명인 이야기를 들은 뒤에야, 그녀도 겨우겨우 떠올린 일이었다.
“한데 어제 문득 기억을 더듬어 보다 보니 말이다. 그 이전에 나를 따르던 어린 궁인 아이 하나가 한 말이 떠오르더구나.”
“……무슨, 말입니까?”
진예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싶다던 무건의 목소리에 망설임이 배었다. 형식상 묻고 있지만 답은 듣기 싫다는 듯이.
그러나 진예는 이 이야기를 끝마쳐야만 했다.
“저녁에 침의로 갈아입는데 아이의 표정이 이상해서 물어보니 하는 말이, ‘전하, 오른쪽 종아리 위에 글씨가 쓰여 있는 것 같았습니다.’라는 것이었다.”
무건이 깊은숨을 토해 내는 것이 들렸다. 긴장하여 목이 메는 것 같았다.
“하나 다음 날 아침에 보니 아무것도 없었지. 결국 그 아이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게 되었어.”
당시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여겼던 일인데, 이렇게 생각나는 걸 보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만 매사 분명한 걸 좋아하는 진예답지 않게 그 끝이 두루뭉술한 일화였다. 그래도 무건은 그녀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이 뭔지 정확하게 알아들었다.
몸에 새겨진 ‘글씨’.
명인이었다.
진예의 말인즉 연무건의 명인이 나오기 전, 그것도 몇 년 전인지도 기억 안 나는 아주 오래전에 새겨진 명인이 있었다는 의미였다. 그것도 딱 하루,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짧은 시간 동안 나타났다 사라진.
그리고 하필 이 시점에 그 확실하지도 않은 명인의 존재에 대해 말하는 의미는 단연…….
“사실이었다면, 그것이 서엽의 이름이었다면.”
예상한 그대로의 말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무건의 입이 웃음기 없이 일자를 그렸다.
무건은 그녀가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싫었다. 조서엽을 신경 쓰고 있다는 방증이니까.
하지만 진예는 조서엽의 앞에선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현재로선 그걸 긍정적으로 해석해야 할지, 아니면 부정적으로 해석해야 할지 무건으로선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이제 와 그것이 중요하다 말씀하실 것입니까?”
“과연 명인은 저주라 할 만하지 않으냐?”
제 말엔 대답하지 않고 반문해 오는 것에 무건은 어금니를 지그시 물었다.
사실이라면 실로 만행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야만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무건은 그런 진실인지 거짓인지도 모를 것 때문에 진예가 흔들리지 않았으면 했다.
이런 상황이 너무나도 싫었다.
하여 무건이 진예의 두 어깨를 붙잡아 자신을 마주 보게 했다.
진예는 저를 직시해 오는 무건의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죄를 지은 것은 아니기에.
그러나 이 명인의 장난질에 놀아나는 그와 자신, 그리고 서엽까지도 너무 가혹한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았나 싶었다. 심지어 피해자는 셋 모두였다.
하지만 무건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무건은 일부러 더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 덕분에 폐하와 제가 만났는데 명인이 어찌 저주입니까.”
“…….”
“폐하께 아직도 이 연무건은 아무 의미가 없는 사람입니까?”
진예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이제는 그의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서엽이 무건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했을 때만 해도 자신이 화난 것은 그가 죽어서는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외려 황궁에 돌아와서는 그가 짧은 시간 남겨 둔 기억들에 이따금씩 씁쓸함을 느꼈다.
계속해서 어설픈 부정을 이어 갔지만, 분명 자신은 연무건이란 사내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기실 무건이 현재 이 자리에 자신과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말하는 ‘의미’라는 것은 이미 생겼다고 봐도 무방했다.
따라서 지금부터 그녀가 할 선택은 너무나도 이기적인, 그래서 아마도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유의 것이었다.
진예는 자신의 어깨를 꾹 잡은 무건의 손에서 점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그를 불렀다.
“무건아.”
진예가 이름을 불러 주면 좋아야 하는데, 너무 진지한 목소리 때문일까. 무건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가 불안함에 한 박자 느리게 답했다.
“예, 폐하.”
진예는 아무리 불편한 이야기가 이어져도, 제 말에는 늘 성실히 답해 주는 무건 때문에 조용히 웃게 되었다.
언젠가 생각했듯이, 그가 만약 다른 이를 연모했다면 상대방에게 아주 좋은 사내가 되어 주었을 것이었다.
물론 진예 자신도 무건의 열렬한 헌신이 특별하다는 것은 알았다. 그가 말했듯이 연무건이라는 사내의 모든 삶을 뒤엎은 결과였으니까.
하지만 자신은.
진예라는 사람은, 아직은 그 정도의 용기는 없었다.
연모든, 헌신이든 본래 용기 있는 자들의 전유물이다. 진예는 누군가를 그토록 사랑할 자신이 없었다. 아직은 구멍이 숭숭 난 제 마음에 곧 쏟아져 내릴 작은 감정 하나 채우는 데 급급했다.
그래서 자신이 토해 낼 말의 의미를 너무 잘 아는데도, 무건의 가슴에 대못을 박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황후 자리를 받는 것으로 만족해 주어야겠구나.”
이것이 그녀가 생각하는 무건의 ‘제자리’였다.
무건의 손에서 일순 힘이 확 빠졌다. 진예는 무건의 그런 변화를 예민하게 알아챘다. 그렇지만 저를 향한 눈동자가 떨리는 것을 보면서도 말을 멈추진 않았다.
“네가 요구한 각인을 해 주는 것도, 가락지를 받아 주는 것도 아니 되겠다.”
이 말은 무건에겐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이젠 무건이 그녀에게 마지막을 고해도 할 말이 없는.
그러나 진예는 무건의 마음을 능히 짐작하면서도 이런 말밖에는 해 줄 수가 없었다.
조서엽은 제 둘도 없는 충신이었다. 무건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진예가 가장 아끼는 사내였다.
그들 사이에 배신은 절대 없을 거라 여겼다. 연무건만 없었더라면 아마 서엽은 지금도 충실히 제 옆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런 문제 없이.
그런 조서엽에게, 제 옆자리가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다는 사내에게 그 유일한 자리를 빼앗아 버렸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손으로.
그것은 연무건의 탓이 아니다.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었다.
무건은 진예의 말에 한동안 어떤 반응도 보이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그렇지만 눈에선 무수히 많은 의문들이 쏟아져 내렸다.
왜 이런 결론이냐고.
어째서 조서엽을 치워 버렸는데도 자신은 안 되느냐고.
왜 당신의 마음은 허락이 안 되느냐고.
다 알면서도, 진예는 곧 흘러내릴 것 같은 그의 손목을 꽉 쥐었다. 이 결정이 그녀에게도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도출할 적절한 답안은 이뿐이었다.
“내 서엽이를 저리 만들고 어찌 너를 선택할 수 있겠느냐…….”
제가 아끼는 이의 인생을 망쳐 놓고, 마음 편히 살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어찌 보면 이 사내 또한 이 말도 안 되는 명인의 장난질에 놀아난 가엾은 희생양이었다.
하나 그 과정에서 보여 준 그의 진심은 분명 진예의 마음을 흔들었었다.
〈지네처럼 평생 고개를 쳐들지 못해 하늘을 마주할 수 없다 하여도 상관없습니다.〉
〈이 연무건이 원하는 건…… 하늘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앞에 엎드려서, 빌고 애원하는 것입니다.〉
내세울 것 하나 없던 그때, 한 발짝이라도 가까이 올 수 있는 기회를 달라 애원하던 그였다.
그리고 기회가 오자마자 무건은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필사적으로 해냈다.
생각해 보면 그 자신에게는 이득이 되는 행위들이 아니었다.
그런 그를 계속해서 우습게 볼 수 있을 리가.
정말로 무건이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사람이었다면, 서엽을 버려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도 어쩌면 서엽에게 잘했다고 칭찬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은 본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무건의 비보를 듣고 진예는 분노로 눈앞이 깜깜해졌었다.
그제야 조서엽이 제 옆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현실 또한 깨닫게 되었다.
그때, 마침내 진예는 영원히 깨어나고 싶지 않았던, 아주 깊고 달콤했던 꿈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제가 인식하지 못했던, 아니 외면했던 진실이 거기에 있었다.
그렇게 제 어리석음으로 서엽을 떠나보내 놓고, 단지 외롭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비어 버린 그 자리에 다른 이를 채워 넣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연무건을 대안처럼 활용하기는 싫었다.
그것은 더는 못 할 짓이었다.
“내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
진예의 중얼거림에 무건이 제 잡힌 손목을 보다가, 신음처럼 한마디를 내뱉었다.
“조서엽 때문에, 라는 말씀이십니까.”
“아니, 짐의 탓이다.”
“……폐하.”
무건은 진예의 떨리는 손을 보며 이상한 광경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진예는 그러고 있었다.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을 드러내며.
사실 각인이니 가락지니 하는 말을 꺼낼 때부터 무건은 당연히 이런 상황을 예상했었다. 그녀가 받아들일 확률보다 거부할 확률이 훨씬 더 높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그래도, 작은 가능성이라도 있을 거라고 희망이란 걸 품었었다.
그 말을 하고 봉아궁으로 돌아가서 기다리는 시간이 끔찍하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기대감으로 두근거리기도 했다.
차라리 결론을 내지 않는 날이 이어지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을 정도로.
본래 차가운 현실보다 어리석은 망상이 더 달콤한 법이니까.
그러나 저를 기다리고 있던 결론은 결국 이것이었다.
진예는 그렇게 괴로움에 무너져 가는 무건의 얼굴을 보면서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해져 옴을 느꼈다. 마치 제 어미가 목을 조르던 그때처럼 숨을 쉬기가 힘들어졌다.
그에 조급히 숨을 들이켠 진예가 덧붙였다.
“그리고 짐은, 누구의 진심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고, 삶의 척도를 바꿔 버리는 그런 연모의 정은 진예에겐 아직 너무 버거웠다.
감당 못 할 것이니 내려놓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이 또한 무건에겐 너무 잔혹한 결론이라는 걸 알았다. 그 길었던 여정의 끝에서 주워 든 것이 이토록 하찮다니, 진예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나 허무했다.
“……그러니 이제 다시 네가 선택하면 된다.”
“어떤 선택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황궁에 남아 껍데기뿐인 황후가 될지, 아니면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지.”
제가 말하고는 있지만 두 가지 다 그가 원치 않으리란 사실을 알기에 한 마디 한 마디 토해 내는 일조차 힘에 부쳤다.
그리 대단한 미사여구를 쥐어짜 내는 것도 아니거늘, 상처받아 점점 더 일그러져 가는 무건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어떤 것이든…….”
뒷말을 이어야 하는데.
그런데 말끝을 흐리고 만 그녀를 보던 무건이 숨을 멈췄다.
진예의 눈에 흐릿하지만 투명하게 물기가 차올랐기 때문이었다.
“진예……?”
아직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모르는 듯이, 진예는 그저 인내하듯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무건은 그녀의 눈물을 발견한 순간 단숨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그야말로 머릿속이 하얘져 버렸다.
방금 전까지 제가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두 잊어버릴 만큼 거센 충격이 뇌리를 강타했다.
무건은 당황해 입을 몇 번이나 달싹이다가 마침내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어찌하여 눈물을 비치시는 것입니까?”
질문을 듣고 난 뒤에야 진예는 제 시야 한구석이 흐릿함을 알아챘다. 그에 진예 역시 당황해 고개를 돌렸다.
무건이 그런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걱정 어린 말을 건넸다.
“폐하, 이러지 마십시오.”
눈가가 뻐근해져 와 진예가 눈을 감았다 떴지만, 부예진 시야는 회복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갑자기 차오른 이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이제는 알았다.
“내, 너에게도 서엽이에게도 못난 짓을 하게 되어 그런다.”
죄책감이었다.
무건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못난 짓이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마음이 따르는 대로만 하시면 됩니다.”
연무건이든 조서엽이든 어디까지나 그녀의 선택을 기다리는 입장이었다. 진예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지만,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진예의 몫이었다. 무건은 한쪽을 강요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그로 인해 진예가 괴로워지는 일 또한 그가 전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녀가 행복하지 못하다면, 무건은 당장이라도 눈앞에서 사라져 줄 수 있다.
지금까지의 노력이 전부 물거품이 되더라도 괜찮았다.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그는 이미 기적을 실현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무건은 그 과정에서 분에 넘치는 행복감을 느꼈다. 한 여인을 너무나 사랑하게 되었고,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기회를 얻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자신이 진예에게 받을 대가는.
무건은 진예의 눈에서 곧 떨어질 것만 같은 눈물을 보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몇 번이나 눈물을 닦아 주려 시도했지만, 그러면 오히려 그녀의 눈물샘이 더 꽉 차오를까 두려워 손을 멈칫댔다.
결국 얼굴만 겨우 감쌌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그녀의 약한 모습이 무건을 안달 나게 했다. 그래서 더욱 분명하게 말해 주었다.
“예, 받아들이겠습니다. 더는, 더는 이 연무건도 폐하께서 주시는 것 이상으로는 탐하지 않겠습니다.”
진예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그저 옆의 사내들이 제 분수에 맞지 않게 욕심을 부렸던 것뿐이었다.
무건은 그녀의 얼굴을 보기 힘들어 결국 제 품에 안아 버렸다. 진예의 작은 몸이 제게 기대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숨소리가 평소보다 세게 올라왔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너무 잘 알아서, 무건은 가슴이 다 미어지는 기분이었다.
이 모든 게 제 탓 같았다.
연무건이 진예의 인생에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그녀가 이런 슬픔을 느낄 일은 결단코 없었을 것이다.
그리 아끼는 조서엽을 버릴 일도 없었을 터였다. 저만 아니었어도.
“알고 있습니다. 폐하께 조서엽이 어떤 의미인지 너무도 잘 압니다. 그를 도려내라 하지 않겠습니다. 더는 투기하지도 않겠습니다.”
틀린 건 진예가 아니라 연무건이었다.
정인을 눈물짓게 하는 사내에겐 아무 자격도 없었다.
“그러니 제발, 제발 이 눈물을 거두십시오.”
무건이 제 품에 기댄 진예의 얼굴을 만지다가 손끝이 젖어 오는 것에 그야말로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가 진예를 품에서 살짝 떼어 내고는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이마에, 젖은 눈가에, 열이 오른 뺨에 연신 입술을 맞췄다.
입술로 훑어도 눈물의 흔적은 지워지지 않았다.
무건은 떨리는 손으로 흘러내린 한 줄기 눈물을 닦아 주며 속삭였다.
“이리 우시면 제가 얼마나 못나집니까……. 이 연무건이 얼마나 더 못난 사내가 되어야 한단 말입니까.”
지금도 어디 하나 잘난 곳이 없는 놈이었다. 그런데 제가 연모하는 이에게 행복을 주지는 못할망정 울게 하고 있으니 저 자신이 너무나 초라해 보여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그를 지켜보다 진예가 나직이 이름을 불렀다.
“무건아.”
무건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말씀만 하십시오.”
뭐든 다 들어주겠다는 듯한 그의 태도에 진예는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나 끝내 이런 말 외엔 해 주지 못했다.
“그저 나의 황후로만 남거라.”
무건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리하겠습니다. 그 또한 제가 바라는 바입니다.”
그리고 무건은 고개를 기울여 진예의 입술에 제 것을 갖다 대었다.
절대로 그녀를 떠나는 일은 없음을 알리는, 맹세의 입맞춤이었다.
그제야 진예가 무건을 바라보며 다시 입가에 옅은 웃음기를 띠었다. 이번엔 아까와 같이 쓴웃음이 아니었다.
그 모습에 무건은 그녀가 어딘지 확연히 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전엔 냉혹한 군주이기만 했던 그녀였다. 누구의 보호도 필요 없을 만큼 강했고, 굳이 누군가에게 의존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마치 감정이 없는 듯이, 그런 건 모른다는 양 행동해 왔다. 그것이 무건에겐 언제나 까마득한 벽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 벽이 드디어 허물어진 모양이었다. 진예가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그에게 드러내고 있었다. 낯선 온도였다. 그렇지만 무건은 저도 모르게 그녀를 따라서 다정히 미소 지었다.
무건이 조금 흐트러져 있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절대 떠나지 않습니다, 진예.”
각인을 하지 못해도, 제가 준비한 가락지를 받지 않아도, 심지어는 그녀가 자신을 냉궁에 처박아도 마찬가지다.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어떤 선택을 하시든 바뀌는 것은 없습니다, 아무것도요.”
투박한 답을 듣던 진예가 무건의 마지막 말을 반복했다.
“아무것도, 말이지.”
“예, 아무것도. 이놈은 주제넘게 폐하를 계속 연모할 것입니다. 마음에 품고 내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여전히 폐하 앞에서는 그저 한 여인을 은애하는 사내가 될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 어리석은 사랑을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무건은 진예가 원하는 바가 이러는 것이라면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폐하께선 저를 받아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다 해도 틀린 것이 아니니까요.”
진예는 작게 끄덕였다. 그러나 틀리지 않았다는 무건의 말에도 완전히 마음이 편해지지는 않았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읽고 무건이 진예를 다시금 감싸 안으며 강조했다.
“절대로, 절대로 말입니다…….”
그리 속삭이며 무건은 아직 제게 할 일이 남아 있음을 알아챘다.
최초의 익재의 목을 갖다 바치면서 이제는 제 역할이 다 끝난 줄 알았다. 무엇으로 더 제 가치를 증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그래서 불안했다. 길잡이 역할의 봉홧불 하나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에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조서엽에게 가혹하게 군 원인이 사실은 그런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그를 마주 보고 있으면 스스로의 부족한 부분이 너무나 잘 보였다. 그리고 초조해졌다. 저 사내보다 더 못난 자신은, 그녀에게 쓸모를 증명하지 못하면 언제든 버림을 받게 될 테니까.
〈내 마음을 차지하고 싶다면, 너의 쓸모를 증명하면 된다.〉
진예는 알고 있을까.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했던 그 말은, 이후 연무건의 삶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그때부터 무건은 제 쓸모를 증명하는 일 외엔 무엇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언어에 속박되어 다른 어떤 행위도 해선 안 될 것처럼 여기게 되었다.
그러한 것이 끝나 버렸으니, 삶의 목표를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돌이켜 보면 고작 1년도 안 된 기간이었다.
그러나 짧든 길든 상관없이 무건에게 있어서 진예를 만나기 전의 삶보다 진예를 만난 뒤의 삶이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
더 열정적으로, 더 간절히 살았다.
그리고 깨달은 것이 있다면…….
무건은 진예의 머리에 제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체향이 코 안을 연하게 자극해 왔다. 그리고 이 순간 가장 필요한 안정감이 그의 굳은 어깨를 풀어 주었다.
시작할 땐 오기가 없었다고는 못 하겠다. 자신을 손가락질하며 갖다 버리라던 그녀에게 꼭 제 가치를 증명해서 어떻게든 받아들이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가까워질수록 마음은 이토록 더 안타까워져 갔다. 더 깊이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신이 그에게 내린 운명은 그저 계기이고 기회일 뿐이었다.
그녀를 보면서 애타 하는 이 마음은, 그 스스로가 쌓아 온 감정이었다. 누구의 강요도 없이.
어느새 푸른 새벽의 여명이 거두어져 있었다.
무건은 서서히 일기 시작하는 바깥의 소리와 문가에 비치는 그림자를 보며 결심했다.
진예를 위해서라면, 연무건이라는 사내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 어떤 것이라도.
그녀의 눈물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기를 바랐기에.
* * *
인교전 문 앞에서 서신을 조심스레 건네받은 어린 내관이 이제는 제법 선선해진 바람을 맞으며 분주히 침전 앞으로 걸어갔다.
앞을 지키는 금위의 허락을 받아 안쪽으로 들어서서 박 태감을 찾아 응접실이 있는 행랑으로 몸을 틀었다. 그 과정에서 발소리를 내지 않고 걷기 위해 노력했어도 잠시 방심하는 사이 뒤꿈치가 꿍, 하는 소리가 나자 마침 가까이 서 있던 내관과 궁인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곧이어 마침 보이기 시작한 박 태감이 소리 낮춰 꾸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누가 감히 침전에서 이리 경거망동하는가.”
“송구하옵니다, 태감 어른.”
어린 내관이 얼른 앞으로 나서며 일단 제가 방금 받은 서신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박 태감이 받아 들며 뭐냐는 시선을 주었다. 어린 내관은 긴장한 채 그에게 다가가 귀엣말로 말을 전했다.
“조 후께서 올리신 것이라 하옵니다.”
“…….”
대답을 들은 박 태감의 낯빛이 어딘지 싸늘해졌으나 그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가라 손짓했다.
생각해 보니 조서엽의 두 달간의 구금이 내일로 끝이었다. 분명 제 거취에 대해 논하는 서신일 텐데, 이것을 지금 진예에게 전하기에는 곤란한 감이 있었다.
응접실 앞에 선 태감은 제 그림자를 문에 비쳤다. 그러자 곧 진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인 일이더냐.”
“예, 폐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조 후가 폐하께 연통을 보내왔다 하옵니다.”
“들이라.”
그녀의 말이 끝나자 옆에 서 있던 궁인들이 문을 열었다.
안에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위장군이 앉아 진예와 찻잔을 나누고 있었다. 마침 우려낸 차를 진예의 것에 내리고 있던 위장군이 잔을 채우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진예는 박 태감이 들고 있는 것을 보고는 손을 뻗었다.
“어서 이리 내거라.”
박 태감은 내용을 미리 확인하지 않아 불안하긴 했으나 그녀의 손에 쥐여 주고 옆으로 물러섰다.
진예는 예의 연통을 바로 펼쳤다. 종이에 적힌 내용은 그리 새롭지도 기껍지도 않았다.
효기장군직으로의 복귀는 저에겐 너무나 과분한 일이기에 신중히 결정해야 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이에 잠시 봉토로 돌아가 심신을 안정한 뒤 거취를 정하고자 하오니 부디 불충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마치 봉토에 잠깐 갔다 오면 복귀하겠다는 양 써 놨지만 당연히 실상은 그렇지 않을 터였다.
이런 결론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실망감을 감추기 힘들었다.
진예가 쓴웃음을 머금으며 근처에 있던 호롱불에 종이를 태웠다. 얇은 종이는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가 재가 되어 사라졌다.
진예는 박 태감이 내미는 영견(손수건)으로 가볍게 손을 닦으며 축객령을 내렸다.
“따로 답은 안 할 테니 나가 보거라.”
박 태감이 조심스레 발을 뒤로 물려 나가자 진예가 묵묵히 제 잔을 채우고 있는 위장군에게 시선을 주었다.
“조 후가 돌아오진 않을 모양이로군. 그대의 속이 시원한가?”
당황할 법한 말이었지만 위장군은 차호를 내려놓으며 담담히 답했을 뿐이었다.
“속이 시원하다니, 어찌 그리 말씀하시옵니까.”
“그대야 조 후를 못마땅히 생각하지 않았었나.”
“……안쓰러운 이라고는 여기옵니다.”
“그 정도뿐이지.”
내 말이 틀렸나? 그런 의미를 담아 위장군을 보니 그가 조용히 고개만 숙였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진예가 허탈한 웃음을 내뱉고는 박 태감이 들어와 끊겼던 이야기를 이어 갔다.
“어찌 되었든, 내 대례식을 올리고 나서 보름 뒤엔 다시 출정을 할 생각이야.”
방금 전에 들었을 때는 위장군도 놀랐지만 두 번째 들으니 이게 바로 자신이 모시는 황제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다만 혼례를 올리고 고작 보름밖에 지나지 않아 출정을 한다는 것은 심한 처사였다. 황도에 군사들이 모여 있어서 금세 준비하긴 하겠으나, 황제의 출정이니 신경 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닐 터였다. 대례식을 한 뒤 그 때문에 정신없이 바쁠 것이 자명했다.
“혹 귀인마마도 함께이옵니까?”
조심스레 묻는 말에 진예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이번엔 누군가는 황도를 지켜야 하지 않겠나. 지난번에 연 귀인은 큰 부상도 입었고 말이다.”
“아직 태의가 봉아궁에 계속 드나든다는 이야기는 들었사옵니다.”
“거의 다 나아서 이전보다는 뜸해지긴 했으나.”
한 달 내내 황궁과 봉아궁을 왔다 갔다 하던 태의가 다행히 무건의 회복이 빠르다고 했다. 진예가 보기엔 딱히 본인이 다친 걸 의식하면서 활동한 것 같지는 않은데도.
어쨌든 덕분에 여름내 온몸에 둘둘 말아 놓고 있던 붕대를 풀었을 당시, 무건은 드디어 살 것 같다고 했다.
자연스레 그때 세상 시원하다는 듯이 웃던 무건의 표정을 떠올리고 있는데, 위장군의 대꾸가 들려왔다.
“그래도 그런 연유라면 귀인마마가 서운해하지 않겠사옵니까.”
아.
위장군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진예가 얼른 제 입 앞에서 멈춰 있던 찻잔을 기울였다. 그러곤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았다.
“아니, 연 귀인은 짐이 원하는 대로 따라 줄 것이다.”
무건은 ‘그날’ 이후로 더 이상 각인이니 가락지니 하는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 앞으로는 진예가 주는 것 이상으로는 탐하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맹세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진예 또한 그를 믿기로 결심했고, 실제로도 믿었다. 무건이 자신의 의지에 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
그것이 현재 그들 사이에 새로이 형성된 신의였다.
그녀의 말에 위장군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진예의 시선이 밖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는 눈치껏 일어나 발을 올렸다.
해가 질 무렵이라 노란 햇볕과 함께 바깥에서 바람이 밀려들어 와 코끝을 간질이자 진예가 편안히 자세를 풀었다.
가을의 바람이 제법 기분을 좋게 해 주었다. 이 계절은 빠르게 지나가기야 하겠지만 말이다.
“겨울도 금방 오겠군.”
“출정하실 때쯤이 되면 조금 춥다 싶은 날씨가 될 것이옵니다.”
“이제 대례식도 열흘밖에 남지 않았던가…….”
사천감에서 진예와 무건, 두 사람의 길일이라며 혼례 일자가 적힌 종이를 받았을 때만 해도 상당히 멀어 보였는데 벌써 열흘 앞이었다.
그러니 지금으로부터 한 달 조금 안 되었을 때 그녀는 황도를 떠날 것이었다.
……위장군의 말대로 무건이 서운해는 하려나. 또 자신에게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다고?
그런 의문을 떠올리며 그녀가 탁자 그릇이 소담히 담긴 하얀 원소(경단처럼 생긴 떡)를 집어 반 입 물었다.
그걸 조용히 입 안에서 씹고 있는데 자리에 돌아온 위장군이 진예의 표정을 들여다보고는 한마디 했다.
“시원섭섭하신 듯하옵니다.”
오늘따라 조금 달다 싶어 남은 떡의 반은 도로 내려놓은 진예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지 않아. 드디어 익재들의 서식지를 모두 뿌리 뽑는다는 생각을 하니 섭섭함은 없고 시원하기만 하다.”
선황이었던 제 아비는 여인 따위 황제가 될 수 없다며 저주를 퍼부었었지만, 자신은 이제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환의 군주였다.
또한 환에서 모든 익재들을 궤멸시키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들이 사라지면 주변의 어느 나라보다도 더 부강한 나라로 발돋움할 만한 기틀이 마련될 터…….
여기에 섭섭한 마음 따위 끼어들 여지가 어디 있겠는가.
300년 전 익재가 나타난 이후 전대의 황제 누구도 되찾지 못한 환의 평화를 제 손으로 이룩해 낼 영광의 시기가 눈앞으로 다가왔는데.
한데 대꾸를 들은 위장군이 의미 모를 미소를 짓더니 그녀가 먹다 만 간식을 보며 물었다.
“먹거리가 입맛에 안 맞으시옵니까? 평소 폐하께서 즐기시는 간식이라 들었사옵니다만.”
위장군의 말대로 원소는 평소엔 제 입맛에 딱 맞아 자주 찾던 것이다. 딱히 재료의 종류나 양이 달라졌을 리는 없는데 오늘은 그 단맛이 과하게 느껴져 더 먹고 싶지가 않아졌다.
“차로 배를 채워서 그런가 보다.”
마침 차 수반도 버린 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에 위장군은 발을 올리고 몇 마디 나누지 않은 그 짧은 시간에 바깥의 그림자가 조금 길어진 것을 핑계 삼아 그만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곧 해가 지겠습니다. 소신이 너무 오래 머문 듯하니 이만 물러가려 하는데 허해 주시겠사옵니까?”
“그래, 퇴궐하시게.”
짧게 예, 하고 답한 그가 밖으로 나섰다.
이후 박 태감이 들어와 수발을 들려는 것을 물리치고 그녀 홀로 남아 다시 찻잔을 채우고 비우길 반복했다.
그동안 날이 조금씩 어두워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엔가 조금 피곤해 눈을 감았다. 부드럽게 몸을 감싸 오는 바람에 긴장이 풀려서인지, 그녀는 곧 깜빡 잠들었다.
……바람이 조금 차다.
그렇게 생각은 했으나 눈을 뜨지 못한 어느 때였다. 제 위에 가벼운 천을 덮어 주는 조심스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박 태감인가. 그리 생각하며 살며시 눈을 뜨자 박 태감만큼은 아니더라도 제법 익숙한 인영이 흐릿한 시야에 들어왔다.
“……연 귀인?”
제가 딱히 부르지도 않았던 무건이었다.
언제 온 것인지는 몰라도 구김 하나 없이 단정히 옷을 차려입은 그가 진예에게 얇은 도포를 덮어 주고 막 손을 떼었다.
눈이 마주치자 무건이 입가에 어색한 웃음을 띠었다.
“제가 소란을 일으킨 모양입니다.”
소란은 무슨.
진예가 고개를 저으며 아직 정신이 몽롱해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그러다 눈높이를 맞추려고 그녀가 앉은 의자 옆에 몸을 내린 무건의 뺨에 손등을 갖다 댔다.
“이곳까진 어찌 왔느냐.”
가벼운 접촉을 의도한 것이었지만 무건이 곧장 큰 손으로 그녀의 손을 붙잡아 온기를 전해 주며 답했다.
“뵙고 싶으면 언제든 오라고 허락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자신이 그러긴 그랬다. 제 유일한 비로서 황궁 문을 드나드는 권한 정도는 줘도 괜찮으리라 생각했으니까.
덕분에 이곳 인교전의 문턱이 닳고 있는 것 같긴 했지만, 더는 상소문에 내명부에 새로운 사람을 들이라느니 하는 헛소리를 쓰는 인사들은 싹 사라졌다.
결과적으로 골 아픈 일을 그가 조금 거두어 가 준 셈이니 서로에게 썩 나쁜 거래는 아니었다.
진예가 그리 생각하며 도로 졸음이 와 눈을 감으려 하는데 무건이 안 되겠다는 듯이 몸을 일으켰다.
“이리 찬 바람을 쐬고 계시면서 잠이 들면 어찌하십니까. 침방으로 옮겨 드리겠습니다.”
“연무건…….”
그럴 거면 제 발로 걸어가겠다 하는 짧은 문장이 시작되기도 전에 무건이 진예를 들어 올렸다.
“무얼 하는 게냐?”
“안 놓칠 자신이 있으니 계속 주무시고 계셔도 됩니다.”
그는 자도 된다고 했지만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무게도 못 느끼는지 가볍게 등과 무릎을 받쳐 품에 안아 올린 무건의 행동에 진예는 놀라 잠이 달아나 버렸다.
그사이, 무건이 성큼성큼 문 앞으로 걸어가자 즉시 문이 열렸다. 그가 행랑 양옆에서 고개 숙인 내관들과 궁인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제아무리 저보다 몸집이 작은 여인이라 해도 무게가 안 나가는 것은 아닌데, 무건은 중간에 주춤하는 법 없이 침방 깊숙한 곳까지 금세 도달했다.
침상에 진예를 내려놓은 무건이 그녀의 위에 이불을 꼼꼼히 덮어 주었다. 한데 거기까진 좋았거늘 태연하게 제가 옆에 눕기까지 했다.
“무얼 하는 게냐?”
큰 덩치가 안으로 들어오자 넓은 침상이 급격하게 좁아졌다. 게다가 무건이 어디 이런 상황에서 가만히 있는 위인이던가.
“같이 잠들고 싶어 왔습니다. 아니 됩니까?”
예상대로 그리 물은 무건이 이불을 덮고 있는 그대로 진예를 품에 들였다.
돌연 무건에게서 나는 사내들 특유의 체향이 코에 훅 끼치자 진예가 몸을 돌려 그를 등졌다. 안 보면 좀 나아질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오히려 무건이 더 바짝 몸을 붙여 오며 그녀의 몸에서 나는 달착지근한 향기를 음미하듯 가만히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에 잠이 들기는커녕 달아나 버린 진예가 퉁명스레 한마디를 던졌다.
“신경 쓰인다.”
“오늘은 저도 이리 얌전히 안고만 있을 것이니 염려는 놓으시지요.”
말과 달리 무건의 몸이 어느새 딱딱해진 것이 느껴졌다. 이래 놓고 왜 제 놈이랑 어울리지 않게 참는다는 소릴 하나 싶어 유추해 보다가 진예가 마음에 걸리는 하나를 찾아냈다.
“조 후 때문에 이러는 것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는지 무건이 바로 되물었다.
“그자는 복귀하겠다 합니까?”
“봉토로 떠나겠다더군. 황도와 거리가 가까운 곳이긴 하다만 언제 돌아올지는 모르지 않겠느냐.”
“그렇군요.”
역시나, 하는 느낌으로 그리 추임새를 넣은 무건이 진예의 몸을 더 푹 감쌌다.
진예는 곧 그의 손이 아랫배에 얹어져 괜히 신경 쓰였다. 아니, 손길만이 아니라 목덜미에 닿는 숨소리도 간지러웠다.
몇 겹의 옷을 사이에 두고서 그의 가슴과 닿은 등도, 살짝 얽힌 다리도.
사실은 그와 닿은 모든 곳의 감각이 예민해져만 갔다.
차라리 등을 돌리지 말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 무렵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말소리가 안 들리는 것은 물론, 미동조차 없는 것을 뒤늦게 눈치챈 진예가 나직이 물었다.
“연 귀인? 잠든 게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자는 것을 밀쳐서 바닥에 떨어뜨릴 수도 없고.’
진예는 하는 수 없이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그래도 다행히 곤잠에 빠지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녀의 숨소리가 점차 안정될 즈음, 그제야 눈을 뜬 무건이 고개를 살며시 들어 진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눈을 꼭 감고 있는 얼굴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림자가 질 만큼 긴 속눈썹이 가지런히 내려앉은 모습을 보다가 무건은 제 입술을 물었다.
더는 욕심 내지 않겠다 했지만 사실은 참기가 꽤 힘겨웠다. 이렇게라도 그녀를 보러 오는 걸 허락받지 못했다면 봉아궁에서 미쳐 갔을지도 몰랐다.
무건은 한숨을 삼키며 진예가 깨지 않도록 조심히 침상 밖으로 몸을 뺐다. 회랑으로 나가니 박 태감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돌아가시나이까.”
문이 닫히는 걸 기다린 무건이 등 뒤가 막히자마자 그에게 쏘아붙였다.
“찬 바람 쐬면서 잠드시게 하면 어찌하나?”
“송구하옵니다.”
무건이 하는 지적은 합당했기에, 평소 뻣뻣한 편인 박 태감도 바로 고개를 숙였다. 그에 무건이 한결 누그러진 말투로 물었다.
“자주 이러시는 건가?”
“종종 있는 일이긴 합니다만, 겨울이 다가오니 더욱 유의하겠사옵니다.”
“알겠네.”
한숨 섞어 대답한 무건이 박 태감의 배웅을 받아 침전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인교문 앞에 그가 타고 왔던 가마가 아직 대기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건이 올라타자 봉아궁으로 향하기 위해 가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궁의 궁문을 막 통과한 때였다. 무건이 가마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홍 내관이 무슨 일이냐는 듯이 얼른 다가와 모습을 비쳤다.
가마의 속도가 홍 내관의 종종걸음에 맞춰서 자연스럽게 조금 느려지는 것을 느끼며 무건이 먼저 물었다.
“낮에 보낸 서신에 회신은 왔나?”
낮에 보낸 서신이라 봤자 하나밖에 없으니 홍 내관은 무얼 뜻하는지 금세 알아들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오지 않은 듯합니다. 급하신 것이면 사람을 보내 답을 받아 오게 하겠습니다.”
오지 않았다는 말에 무건은 미간이 일그러지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홍 내관에게 제가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경우도 예상을 못 한 것은 아니긴 하나 안 그래도 불안정한 계획에 변수가 많아지니 반길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무시는 못 할 텐데.’
좋은 이유로든 나쁜 이유로든.
생각하느라 대답이 미뤄지자 빤한 홍 내관의 시선을 느껴졌다. 그에 무건이 현실로 인식을 되돌렸다.
“……되었네. 아직 오지 않았다면 아마 답을 할 생각이 없는 것일 터이니.”
“예, 마마.”
그 말을 끝으로 가마의 문이 도로 닫혔다.
그제야 무건이 표정을 굳혔다.
* * *
아흐레 앞으로 다가온 대례식 준비를 위해 황궁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분주했다.
진예가 황위에 오른 지 6년이 지나서야 황후를 맞이하는 것이기에, 모두들 더욱 긴장하고 있었다. 이전엔 진예의 명에 따라 무건이 숙의의 품계를 받았을 때나 귀인으로 승격되었을 때조차 대례식을 생략했기에 더더욱.
진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대례를 주관하는 가례도감의 관리들이 드나들며 이래저래 준비가 완료된 것들에 대해 보고하고, 그날의 절차들을 논하는 것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주로 편전을 이용하는 편인 진예도 오늘은 대전 앞에서 이루어질 대례식을 위해 오랜만에 그곳으로 발길을 향했다.
그리하여 그녀가 문이 닫힌 대전 앞의 기단에 서서 그날 어찌해야 하는지 듣고 있던 중이었다.
한데 같이 설명을 들어야 할 무건의 황궁 입궁이 늦어진다 싶어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무건을 데리러 간 황궁 내관과 함께 봉아궁의 내관 하나가 얼굴이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한순간에 그쪽으로 끌린 가운데 귀엣말로 사정을 전해 들은 박 태감의 표정 또한 심각해졌다. 박 태감이 다가오기 전, 심상치 않은 기색에 진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더냐?”
박 태감이 평소의 그답지 않게 소식을 어찌 전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그것이…….”
“봉아궁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냐. 연 귀인은 왜 동행하지 않았지?”
물으면서도 진예는 박 태감의 반응으로 보아 예삿일은 아닐 거라 짐작했다.
갑자기 못 일어날 정도로 아프기라도 한 걸까, 하다가 어제저녁 멀쩡했던 무건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 가능성은 배제했다.
혹은 봉아궁 어딘가에 불이라도 났나. 아니면 단순 늦잠?
여러 가지 가능성을 떠올려 봤지만 다음에 들려온 박 태감의 말은 그중 어느 것도 아니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귀인마마가 봉아궁에서 보이지를 않는다고 하옵니다.”
“……연 귀인이 보이질 않는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싶어, 대꾸하는 진예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러자 봉아궁에서 온 내관이 앞으로 나서더니 바짝 머리를 조아렸다.
“그것이, 기침이 늦어지시는 듯하여 침전 문을 열고 들어갔사온데 귀인마마께서 보이질 않아 궁 내를 전부 뒤지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마마의 모습이 어디에서도 보이질 않사옵니다.”
말을 전하는 봉아궁의 내관은 다음에 제게 떨어질 벼락이 무서워 어깨와 손을 눈에 띌 정도로 덜덜 떨었다.
진예는 그것을 보면서도 화가 올라와 목덜미가 뻣뻣해져 옴을 느꼈다. 그녀가 혓바닥 위에 칼을 세워 내관을 추궁했다.
“해서, 고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이더냐. 연 귀인이 누구에게 납치라도 됐다는 것인가? 아니면 제 발로 나갔다는 소리인가?”
어느 쪽이든 전혀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한데 뒤에 들려온 말이 진예의 화를 더욱더 돋웠다.
“아직은 미처…….”
파악이 되지 않았나이다.
문장을 채 다 맺기도 전에 진예가 노성을 터트렸다.
“이 무능한 것들이!”
그녀의 반응에 주변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괜한 불똥이 튈까 가례도감의 관리들은 허리를 깊게 숙이는 한편, 박 태감이 먼저 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조아리자 나머지 내관들과 궁인들 또한 그를 따랐다.
진예는 봉아궁에서 온 내관을 압살이라도 할 듯이 분노 어린 눈으로 내려다보며 화를 쏟아 냈다.
“상전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것이냐! 아침에야 발견하고 나서는 무어라? 아직은 몰라?”
“화, 황공하옵니다, 폐하.”
봉아궁의 내관이 그리 답하니 주변의 이들도 납작 엎드리며 복창했다.
“황공하옵니다, 황제 폐하.”
그럼에도 진예는 쉽게 마음을 억누르지 못했다.
처음 무건이 후궁으로서 융경궁에 들어갔을 때 무시당하고 있다는 소리는 익히 들었지만 외면했었다.
화친왕의 신임을 얻기 위해 매일같이 개구멍을 통과하고 담을 넘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도, 얼마나 해이하길래 그러한가 했지만 역시나 그냥 넘겼다.
당시에는 그의 취급이 어떻든 전혀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뒤 무건이 닷새 동안 진예의 침전에 머물다 가고 나서는 그들의 태도가 나아졌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으니, 적당히 기강이 잡혀 가고 있겠거니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제 상전이 엄하지 않게 대하며 풀어 주니 정신을 못 차린 듯싶었다. 게다가 무건을 황후로 책봉하겠다고 공표한 이후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봉아궁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도 문제지만, 날이 밝은 지가 언제인데 여태까지 납치인지 스스로 사라진 건지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나? 그리고 그러한 사안을 이제야 자신에게 보고했다는 점도 그들의 해이함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또한 시기가…….’
공교롭게도 서엽의 자택 구금도 오늘로 풀렸다. 어제 무건도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대꾸해 온 것을 떠올린 진예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설마, 아닐 것이다.’
그리 부정해 보았지만 무모한 구석이 있는 연무건이라면 가능성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솟았다.
무건이 서엽을 만나러 갔을 가능성이 말이다.
스스로 봉아궁에서 사라졌다는 가정하에, 황도에 아는 사람도 없는 그가 궁 밖에서 몰래 만나야 할 사람이 존재한다면 단연 서엽밖엔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른 가능성은 모두 소거되어 버렸다. 진예는 서둘러 박 태감에게 명했다.
“당장 봉아궁으로 가야겠다. 가마를 대령하거라!”
“예, 폐하.”
당황하는 가례도감의 관리들을 뒤로하고, 그녀는 금세 대전 앞에 준비된 가마를 타고 재빠르게 황궁을 빠져나갔다.
* * *
봉아궁의 궁문을 통과하자마자 예상한 대로 무척 어수선한 분위기가 펼쳐졌다.
진예가 봉아궁의 남문 앞에 있는 교각을 지나자마자 가마를 세우고 내리니 무건의 호위로 붙여 둔 금위들이 튀어나왔다.
진예는 무건이 사라졌다는 침전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며 하문했다.
“연 귀인과 같이 사라진 이는 없나?”
“하나가 있습니다. 홍문익이라는 내관입니다.”
홍문익이라는 이름에 뭔가 떠오를 듯 말 듯 해 진예가 뒤따라오는 박 태감을 흘끗했다.
“짐이 알고 있는 그 홍문익이 맞는가.”
“예, 융경궁에 있던 그 홍 내관이옵니다.”
그나마 다행한 상황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진예가 알기로는 3대 전부터 황궁에서 일해 한때는 내관으로서 최고위직인 사례감의 태감까지 맡았다가, 제 아비가 태어났을 때 황태자궁으로 옮겨 일했다고 들었다. 덕분에 진예도 그에 대해서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아주 잘 알지도 못했지만.
어쨌든 혼자 사라진 것은 아니라니 그다지 좋지 못한 상황치고는 조금 나았다.
봉아궁의 침전으로 들어선 진예가 턱짓을 해 침방 문을 열게 했다. 그러자 침상 앞에서 몇몇 이들과 함께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는 서역인 아이, 미마이가 보였다.
다가가자 그들이 얼른 옆으로 비켜서는 것을 보고는 진예가 먼저 미마이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미마이가 허리를 깊이 숙이며 인사를 해 왔다.
“홍복을 누리소서, 황제 폐하.”
무건이 사라진 것에 미마이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에 진예는 무건이 진짜로 모두에게 비밀로 하고 일을 꾸몄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 네가 어찌 이곳에 있느냐?”
질문에 대한 답은 옆에 있던 봉아궁의 내관에게서 돌아왔다.
“귀인마마께서 워낙 귀히 여기시어 자주 찾는 아이라 혹시 알고 있는 것이 있을까 하여 불렀나이다.”
“하지만 저도 이에 대해서는 전혀 들은 바가 없어서…….”
미마이가 이어서 덧붙이는 말에 진예가 한숨을 내쉬며 침상 위를 확인했다. 그러자 이불이 참 가지런히도 개켜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설마 이 혼란스러운 와중에 궁인 중 누군가가 정리했을 리는 없고, 당연히 본인이 개켜 놨을 터였다.
황궁에서 들었던 말과 달리 납치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는 게 아니라, 이건 그냥 본인이 걸어서 나간 거라고밖에는 파악이 안 되는 정황이었다.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금위 중 하나가 쩔쩔매며 상황을 설명해 왔다.
“외부 침입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정황상 귀인마마가 몰래 봉아궁을 빠져나간 것 같사옵니다.”
진예는 답답함에 또다시 역정을 냈다.
“대체, 호위를 얼마나 허술하게 하면 연 귀인이 담을 넘을 때까지 아무도 모를 수 있는 것이냐?”
“소, 송구하옵니다.”
얼른 고개를 숙이는 금위에게서 시선을 뗀 진예가 침방 안에 함께 들어온 봉아궁의 내관들과 궁인들을 둘러보았다.
“해서 갈 것으로 짐작되는 곳은 어디인가. 설마 이조차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그녀의 추궁에 궁인 아이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그것이, 제가 어제 낮에 귀인마마가 직접 쓴 연통을 전하였사온데 혹여 그분을 만나러 가신 것이 아닌가 하고…….”
궁인 아이는 황제의 앞이라 그런지 목소리를 떨다가 끝내는 긴장감에 말끝을 얼버무렸다. 그에 진예가 짚어 물었다.
“누구였더냐, 그 연통을 받은 이가.”
그러자 예상과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 대답이 돌아왔다.
“조서엽 전 효기장군이십니다.”
“…….”
옛말에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들어맞는다더니 이 상황을 위해 준비된 말인 듯했다.
그나마 무건이 단서를 여기저기 줄줄 흘려 두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싶기도 했다.
마치 저는 괜찮으니 찾지 말라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 연무건과 조서엽의 조합이 위험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진예는 무건이 대체 무엇 때문에 그리 원수처럼 대하는 서엽을 만나러 갔는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설마 이번엔 진짜로 그를 제 손으로 죽이려고……?’
그런다면 서엽이 그리했듯이 제 신의를 배신하는 짓이었다.
제 입으로 더는 서엽을 투기하지 않겠다 했다. 물론 하루아침에 사람을 싫어하는 마음이 사그라지리라고는 진예도 생각지 않았다.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한은 돌에 새긴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그럼에도 무건이 만약 스스로 한 말을 어기고, 굳이 제 곁을 떠난다는 서엽에게 해를 가한다면 진예는 당장이라도 대례식의 중지를 명하고 그를 내칠 의향이 있었다.
진예는 상상만으로도 불쾌감이 올라오는 것에 궁인 아이를 재차 추궁했다.
“연통의 내용은 보았더냐.”
“귀인마마가 신신당부하여 그러지는 못하였습니다.”
그것참, 연무건치고 용의주도했다.
서엽을 만나러 간 것까지는 이제 어느 정도 확실시되었다고 볼 만한데, 문제는 어디로 갔느냐였다.
이번에는 진예도 대체 두 사람이 만나기로 할 곳이 어디일지 특정하기가 어려웠다. 궁 밖으로 나갔다면 범위가 너무 넓었다.
그때,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박 태감이 입을 열었다.
“폐하, 신이 짧은 생각으로 한 추측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진예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박 태감이 신중한 어투로 우선 상황을 짚었다.
“귀인마마는 황도에 대해 해박한 것은 아니오니, 단순 누군가를 만날 목적이었다면 본인에게 익숙한 곳으로 갔을 것이옵니다.”
“해서?”
“조 후의 사저가 아니라면, 홍 내관까지 대동한 것으로 보아…….”
박 태감은 뒷말은 차마 꺼내지 못하고 허리를 깊이 숙였다. 진예는 그가 추측한 장소가 어디인지 눈치채고는 날렵한 눈썹을 꿈틀했다.
그렇지만 박 태감처럼 제 입으로도 그곳이 어디인지 정확하게 말하기가 꺼려져 잠시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이 황도 내에 몇 없는, 연무건에게 익숙한 곳.
조서엽과의 만남을 방해받지 않을, 즉 진예는 발을 들이지 않을 만한 곳.
“융경궁, 이라는 소리로군.”
“황공하옵니다.”
아마 박 태감의 추측대로 서엽의 사저와 융경궁,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열에 아홉의 확률로 융경궁이라 쉽게 추측이 되었다.
제아무리 무건의 배짱이 두둑하다 해도 몰래 나간 주제에 남의 사저에 불쑥 들어갔을 리 없고, 설령 그랬다 해도 이미 조춘경에게서 연락이 왔을 터였다.
다만, 융경궁이라니. 빈속인데도 소화가 안 된 듯 거북해졌다.
진예는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황태자 시절까지 예의 융경궁에 기거했었다. 그러나 황위에 오른 뒤로는 한 번도 걸음하지 않았다. 황궁과 꽤 먼 거리이기도 했고, 그보다 덜 노후했고 더 아름다운 별궁인 담람궁이 그 옆에 있는데 그곳을 찾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좋지 않은 기억으로 점철된 그곳으로 가 제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로 무건이 서엽을 만나러 간 거라면 어떻게든 막고 싶었다.
아니, 이미 만났을지도 모르니 적어도 둘이 마주하면서 일어날 최악의 상황은 벌어지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
어찌할지 결정한 진예가 뒤돌아서 한걸음에 침방을 나섰다.
“말을 대령하거라. 짐이 직접 융경궁으로 향할 것이니.”
이대로 무건이 돌아올 때까지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그녀가 봉아궁의 교각 앞에 당도했을 때, 봉아궁의 남문 입구에 말이 준비되었다.
궁문을 나서자마자 금빛 용포의 소매를 펄럭이며 말에 올라탄 진예는 내관에게 제 칼을 건네받아 허리춤에 채웠다. 그리고 손에 고삐를 감아 거세게 움켜쥐었다.
이후 황제를 호위하기 위해 수십의 금위들이 따라붙었으나 그 누구보다도 진예가 앞서 달려 나갔다.
* * *
융경궁의 뒷동산.
마치 표식처럼 커다란 나무 두 개에 말이 한 마리씩 묶여 있었다. 그중 한 놈이 투레질을 하니 나머지 한 놈은 떨어진 낙엽을 발로 긁어 댔다.
그러던 와중, 멀리서 사시(巳時, 오전 9시에서 11시까지)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인시(寅時, 오전 3시에서 5시까지)가 끝나 갈 무렵 주인들이 그들을 내팽개쳐 놓았으니 벌써 두 시진이 훌쩍 지난 셈이었다.
대애앵, 댕…….
그 목가적인 소리가 그치자 홍 내관이 더는 못 참겠다는 양 무건에게 다시 물었다.
“마마, 정말로 돌아가지 않으실 것이옵니까? 지금쯤이면 봉아궁이 뒤집혔을 터입니다. 대전마마의 귀에도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사옵니다.”
홍 내관은 돌아가면 맞이할 진예의 분노와 그에 따른 뒷수습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관자놀이가 땅겼다. 그런데 이전에 제가 쓰던 침상에 걸터앉은 무건은 여전히 조금도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시(午時, 오전 11시에서 오후 1시까지)가 되면 출발하자고 말했던 것은 그대였어.”
“…….”
무건의 말이 맞긴 하지만, 시간을 그리 제시할 때만 해도 홍 내관은 이렇게 긴 기다림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그 이전에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이쯤 기다린 뒤에 무건이 이리 고집을 부려 더 버티겠다고 할 줄은 몰랐다.
그렇지만 무건은 두 손을 모아 쥐고는 꽉 힘을 넣으며 다시 한번 강조했다.
“할 수 있는 만큼 기다릴 거네.”
그에 홍 내관이 후회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최악은 면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어제저녁 무건의 기색이 심상치 않아 바짝 긴장하고 있던 홍 내관은 천만다행으로 새벽녘에 그가 침전의 창문으로 빠져나오는 걸 발견했다.
그걸 보고 얼마나 가슴을 쓸어내렸는지 모른다. 솔직히 보자마자 큰소리를 칠까 했지만 무건이 하도 간절하게 가야 한다고 하기에 그럼 자신도 같이 데려가라고 했다.
그렇게 융경궁도 결국 개구멍을 통해서 몰래 들어온 상황이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 있었어도 들키지 않은 건, 주인 없는 궁이라 경비가 허술해 가능한 일이었다.
무건은 이곳에서 서엽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그를 반드시 만나야 한다며.
하지만 홍 내관은 무건이 서엽을 만나 할 말이 뭔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이 황제인 진예를 둘러싸고 치열한 기 싸움을 벌였다는 건 황궁 사정에 그다지 밝지 않은 이들도 다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 그들이 개인적으로도 사이가 좋았을 리는 만무했다.
그런데 무건은 서엽을 무조건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마지막 기회를 날릴 수 없다면서.
“……대체 어떤 말씀을 나누실지 귀띔도 아니 해 주실 것이옵니까?”
홍 내관의 물음에 무건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미안하네.”
그러고는 무건은 신경을 바짝 돋웠다.
이미 만나자고 약속한 시간은 한참 지났지만, 제발 조서엽이 나타나 주기를 기원했다.
홍 내관의 말대로 무건이 아무 언질도 없이 사라진 탓에 봉아궁은 발칵 뒤집혔을 터였다. 한 시진을 더 버티겠다는 것도 무리한 일임을 무건 역시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여기서 그냥 돌아가 버리면 자신은 반드시 후회할 것이었다. 그러니 허락되는 한 그를 기다리고 싶었다.
다만 시간이 지나갈수록 초조해지는 것은 맞았다. 무건은 지금까지 버틴 두 시진보다 앞으로 남은 한 시진이 더 길게 느껴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에 저도 모르게 손톱을 튕기고 있었을 때였다. 아주 미세하게 바닥이 기우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
드디어.
무건과 홍 내관의 시선이 동시에 문 쪽으로 돌아갔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바깥에서 문이 열렸다.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무게감 있는 발소리와 함께 한 사내가 침방 안으로 들어섰다.
이내 문 앞에서 멈칫한 그가 곧 무건과 눈을 마주했다. 순간 무건은 숨을 멈췄다.
못 본 사이에 이전보다 더 살이 내려 어딘지 수척해 보였으나, 그 자존심 세 보이는 형형한 눈빛만큼은 전혀 죽지 않았다.
단정한 옷차림과 흘러내린 머리 하나 없이 잘 정리한 머리칼, 그리고 환에서 손꼽히는 무인답게 단단하고 곧은 자세까지.
틀림없는 조서엽이었다.
뒤늦게야 모습을 드러낸 그를 무건이 입을 다문 채로 빤히 보고 있으니, 서엽이 먼저 슬쩍 입꼬리를 올리고는 다소 격의 없는 인사를 해 왔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귀인마마.”
탁, 하고 그가 등 뒤로 도로 문을 닫았다. 그러고 한 걸음씩 천천히 다가오는 서엽을 지켜보던 무건이 먼저 홍 내관에게 명했다.
“홍 내관은 전 밖으로 나가 있게.”
“하지만, 마마……!”
홍 내관이 깜짝 놀라 안 된다고 하기 전에 무건이 먼저 서엽의 허리춤에 있는 칼을 가리키며 그에게 물었다.
“그 칼은 여기 홍 내관에게 넘겨줄 수 있겠나? 불안해하는 것 같으니.”
그에 서엽이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답해 왔다.
“그러지요.”
무건이 눈으로 압박하자, 홍 내관은 하는 수 없이 방 한가운데에 멈춰 선 서엽에게 다가가 칼을 건네받고는 밖으로 나갔다.
방문을 도로 닫을 때까지도 홍 내관은 불안한 듯 몇 번이나 무건을 돌아보았지만 무건은 안심하라는 양 조용히 웃기만 할 뿐, 명을 거두지는 않았다.
이내 무건과 서엽, 두 사람만 남은 공간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들은 눈싸움이라도 하듯이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기만 하고, 아무런 말소리도 주고받지 않았다.
그 침묵이 다소 지루하다고 느껴질 무렵, 무건이 침상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기익, 기익.
그의 묵직한 몸무게에 짓눌려 낡은 나무 바닥이 기우는 소리가 천천히 둘 사이에 울려 퍼졌다.
마침내 방의 한가운데에서 대략 다섯 보 정도를 남겨 둔 채 걸음을 멈춘 무건이 서엽을 마주 보았다.
누구 하나 먼저 손을 뻗어 상대의 목을 졸라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팽팽한 긴장감이 그들 사이에 감돌았다.
얼마 안 가 곧 터져 버릴 것 같았던 그 긴장감을 깨고 무건이 먼저 말을 건넸다.
“늦게도 나타났군.”
“송구하게 됐습니다. 고민의 시간이 길어졌다 보니.”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어투로, 정반대의 말을 입에 올리는 서엽을 향해 무건이 푹 웃었다. 그러고 답이 정해져 있는 듯 보이는 질문을 던졌다.
“어떤 고민이었으려나 궁금하긴 한데.”
“그야, 귀인마마를 죽일까 말까 하는 고민인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 정도도 예상 못 했냐는 양 서엽이 도발을 해 왔다. 그러나 무건은 딱히 표정의 변화가 없이 그저 작게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그도 그런가.”
그러고는 입을 굳게 닫고 서엽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에 서엽이 조용히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데, 무건이 한 발을 뒤로 빼더니 이내 몸을 낮췄다.
행동을 다 하기도 전에 그가 무얼 하려는지 예상한 서엽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으나, 무건은 꿋꿋이 제 목적을 이루어 냈다.
두 무릎을 꿇은 것이었다.
무건이 꿇은 무릎 위에 두 손을 짚고 고개를 숙이자 서엽이 이를 갈았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귀인마마. 보기 민망하니 당장 일어나십시오.”
서신을 받았을 때도, 무건을 만나러 오기로 결심했을 때도, 심지어는 침방의 문을 열고 들어설 때도 서엽으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행동이었다.
방금 전까지 무건이 잘 꺼지라고 비꼬는 장면이 펼쳐지리라 상상하고 있던 서엽은 심히 당혹스러웠다.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도와주십시오, 조 후.〉
무건은 전혀 짐작지도 못한 때에 무릎을 꿇었다.
다만 그때와 바뀐 것이 있다면 둘의 사정이 정반대가 됐다는 점이었다.
이제 진예와 더 가까운 사람은 무건이었고, 무릎이라도 꿇어서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다고 외치고 싶은 이도 서엽이었다.
기회를 달라고. 제발 자신에게도 옆자리를 내어 달라고.
당시에 무건이 눈비를 맞으면서도 왜 그렇게 진예에게 애원을 했는지 서엽은 이제 절절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마음이 곧 지금의 제 마음이었으니까.
그러나 이쪽은 이미 그 최후의 수단마저 다 써서, 모든 가능성이 사라져 있었다.
더는 예전처럼 진예의 옆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무건이 그런 그에게 제안했다.
“우리 이제 싸움은 끝내자.”
“뭐……?”
“아직 나를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미워하는 거 알아. 그렇지만 이제는 그만하자, 조서엽.”
과연 단순히 미워한다는 말로 갈무리가 될 정도의 관계일까, 연무건과 조서엽이?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를 진심으로 죽이고 싶어 했던 그들이었다. 한쪽은 전쟁 중에 반란군의 손에 넘어가도록 상대를 갖다 버렸고, 다른 한쪽은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머리채를 잡아끌어 던져 버리더니 쓰러질 때까지 채찍질을 해 댔다.
그러니 예고도 없이 날아든 무건의 이 휴전 선언은 확실한 변칙인 셈이었다.
아직도 자다가 일어나면 등이 욱신거리는 게 가시질 않았는데 돌연 싸움을 끝내자니 가능한 말인가 싶었다. 서엽은 어처구니가 없어 빈정거렸다.
“얼마 전에 날 채찍질하던 그분께선 어디로 가셨는지 모르겠군.”
그러자 무건이 더욱 허리를 굽혔다.
“미안하다. 내가, 내가 못나서 그랬던 거다.”
대체 어디서 대오각성을 한 것인지는 몰라도 무건의 태도나 말엔 진심이 어려 있다는 점은 확실히 전해져 왔다.
서엽이 알고 있던 연무건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을지언정, 비굴하지는 않았다. 제아무리 짓눌러도 금세 튀어나오던 그였다.
한데 그런 그가 저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 왔던 약점을 스스로 까발렸다.
“네 말이 맞아. 모든 걸 다 쏟아도, 내 밑천을 다 드러내도 그분의 온전한 마음을 얻을 수는 없어. 그래서, 그걸 너무 잘 알아서 너에게 화풀이를 했다.”
“…….”
하지만 말하면서도 괴로운 일이었던지 무건은 고개를 떨군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입술이 하얗게 되도록 깨물었다.
그런 모습을 내려다보는 서엽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어 갔다.
무건의 말을 듣고 싶지 않은 것과는 별개로, 그가 전해 오는 진심이 이 자리에서 뛰쳐나가지 못하도록 발목을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분을 연모해.”
또한 자신의 앞에서, 진예를 연모한다고 지껄이는 눈앞의 사내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서로를 너무나 증오했지만, 모순되게도 그들은 상대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물론 서엽은 그 사실조차 몸서리쳐지도록 싫었다.
“……그래서?”
짧은 물음에 무건은 고개를 들어 서엽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오늘 그를 불러낸 용건을 풀어냈다.
“그분 옆으로 돌아와라, 조서엽. 폐하껜 네가 필요해.”
듣는 순간 조서엽이 실소를 내뱉었다.
“이것 참, 완벽한 헛소리라 진심인지 아닌지도 구분이 안 가는군.”
차라리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그러냐며, 마음이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봉토로 돌아가겠다고 결정하기까지 서엽 역시 무수히 많은 고민을 해야만 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진예의 곁을 끝까지 지켜야 하는 것 아니었냐며 스스로를 질책하고, 갈등했던 그였다.
그러나 무건에게서 이런 말을 들으니 오히려 화가 났다.
게다가 이어지는 말에는 수치심마저 일었다.
“내 말에 거짓은 조금도 없어. 진심으로 부탁하마. ……떠나지 말고 폐하의 곁에 있어 줘.”
저를 직시해 오는 눈빛과 진지한 어투. 거기에 무릎을 꽉 쥔 손까지.
어디를 봐도 그가 거짓을 읊고 있다는 단서는 없었다.
서엽이 이 상황에서 인정할 수 없는 건 그의 말이 진짜인지 거짓인지가 아니었다. 무건이 진심으로 제가 진예 옆에 있기를 바라는 듯이 보인다는 점이었다.
자신의 옹졸한 마음은 아직도 그의 존재를 조금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데, 무건은 공존하자고 말하고 있었다.
저는 할 수 있다고.
그러니 너도 나를 극복해 내라고.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지?’
서엽은 보답받지 못할 제 외사랑이 가엾을지언정, 진예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 그릇되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부족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너무 넘쳐서 문제가 아닌가 싶었다. 제 인생을 다 걸고 그녀를 지키려고 했으니까.
진예를 만난 이후로 단 한 번도 다른 곳에 눈을 돌린 적조차 없다고, 한 점 부끄럼 없이 하늘에 대고 맹세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무건의 말은 단지 그런 차원이 아니었다.
그녀를 가운데 두고 죽도록 싸우던 연적에게 돌아오라고 하고 있었다.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 필요하다는 이유만으로.
말이 되는 건가?
조서엽의 상식으로 도저히 불가한 일이었다.
그의 안에 그런 사랑은 없었다. 그런 희생은 존재하지 않았다.
무건이 그랬던 서엽의 마음에 돌을 던져 파문을 일으킨 것이었다.
분명 제 앞에서 무릎 꿇고 빌고 있는 것은 무건인데, 모순되게도 서엽의 얼굴에 피가 쏠렸다.
서엽은 주먹을 꽉 쥐어 올라오는 화기를 억누르려 애쓰며 물었다.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길래 이러는 거냐.”
그에 무건이 크게 심호흡했다.
조서엽에게 연통을 띄울 때부터 무건은 이 질문이 나오리라 예상했다. 대답까지 연습하고 있었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반복했었는데, 그럼에도 제대로 꺼내기가 힘겨워 말이 느릿하게 나갔다.
그만큼 이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까지 무건 또한 많은 번민을 해야 했다.
그렇지만 진실은 진실이었다. 그 무게에 짓눌릴지라도, 그것이 선사하는 아픔에 제 가슴이 해어질지라도 무건은 실상을 외면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비겁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네 빈자리를, 나는 절대 채워 드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말이 끝나자마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무건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서엽이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린 것이었다.
골이 울릴 정도의 강한 충격에 순간적으로 눈앞이 핑 돌았다. 그에 무건이 머리를 짚기가 무섭게 서엽이 양손으로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자연스럽게 무건의 몸이 조금 들어 올려졌다. 서엽은 분노와 참담함이 뒤섞인 소리를 내질렀다.
“그 자리에서 날 밀어낸 건 다름 아닌 너야, 연무건!”
이런 상황까지도, 무건의 예상 안이었다. 무건은 차라리 눈을 감아 버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대신 사죄했다.
“잘못, 했다. 내 실수였어.”
조서엽이 옆에 있는 게 그냥 한없이 싫었다. 그래서 그를 밀어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서엽과는 공존할 수 없다고,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고 진예에게 강요하려 들었다.
하지만 조서엽을 놓아야만 하는 현실 앞에서 진예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순간 제가 외면했던 현실이 있었음을 알아채 버렸다.
조서엽에게 있어서 진예가 절대인 만큼, 진예에게 있어서도 조서엽은 절대였다.
무건도 살면서 여태껏 몰랐던 사실이었지만 설령 사랑이 아니라도, 그런 관계가 있을 수 있었다.
그만큼 그들 사이에 쌓인 세월은, 유대는, 그리고 신뢰는 남이 끼어들어서 함부로 깨뜨려선 안 되는 것이었다. 그때에야말로 진예의 마음은 공허로 구멍이 뚫려 버릴 테니까.
무건은 진예의 사랑을 간절히 바랐고, 역설적이게도 그러기 위해서는 눈앞의 남자를 인정해야만 했다.
그렇게 사랑을 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진예는. 제가 모든 걸 다 쏟아부어도 채워지지 못할 만큼 마음의 동공이 너무 큰 사람.
연모하는 이에게 있어서 제가 한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마음을 너무나도 아프게 저며 와 무건도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이 길이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길임을 알기에 걸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엔가 미마이에게 말했던 것처럼, 가시덤불에 둘러싸인 사람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제가 다쳐야 하는 법이니까.
“내가…… 잘못했다, 조서엽.”
재차 이어지는 사과의 말에 서엽이 제 분을 못 이겨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고는 무건의 멱살을 놓고 밀쳐 버렸다.
“설마 그 한마디로 너와 나의 관계가 청산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겠지? 아무리 머리가 안 돌아가도 그 정도밖에 안 된다면 실망인데?”
무건은 가시처럼 저를 찔러 오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묵묵히 자세를 바로 했다.
다시 맞을 준비라도 하는 것처럼 아까와 같은 자세를 취하는 무건을 보면서 서엽은 배알이 뒤틀려 옴을 느꼈다.
서엽은 발로 무건의 한쪽 무릎을 툭 치며 물었다.
“그리고 이 조서엽이 너 때문에 밀려났는데 네가 이렇게 초라해지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서엽은 이전에 무건의 앞에 무릎을 꿇기까지 엄청난 굴욕감을 견뎌야만 했다. 그렇기에 다음 무건의 대답은 또한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난 이게 초라해지는 거라는 생각, 조금도 안 해.”
서엽은 이번에도 참지 못하고 무건의 면상을 쳐 버렸다. 무건은 이번에는 비틀거리지 않고 버텨 냈다. 그러고는 이전에 서엽이 했던 말을 스스로의 입에 올렸다.
“……더 쳐, 분이 풀릴 때까지. 대신 떠날 생각 말고 돌아와라.”
서엽이 하, 하고 웃음을 흘렸다.
“이거 상황이 바뀌니 재미있군.”
그때 무건이 어떻게 했는지 더듬던 서엽이 무건의 머리카락을 덥석 쥐었다.
“그럼 나도 네놈이 했던 말을 똑같이 돌려주도록 할까.”
그가 전부 다 견디겠다는 양 덤덤한 표정인 무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작게 뇌까렸다.
“내 분이 풀릴 때쯤이면 넌 죽어.”
“…….”
살벌한 경고에도 무건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여전히 무덤덤한 그의 반응을 살피다가, 서엽이 이내 모든 것이 쓸모없어 보여 그냥 머리칼을 놓아 버렸다.
“겨우 이따위 말을 하려고 날 여기까지 불러냈나?”
쏘아붙이듯 그리 묻자 그제야 무건이 대꾸했다.
“나한텐 이따위 말이 아니야.”
결정이 그리 쉽지 않았던 만큼 말의 무게 또한 무건에게는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서엽에게는 전혀 닿지 않는 말이었기에, 그가 다시금 빈정거렸다.
“성인군자인 척하지 마라, 역겨우니까.”
“조서엽.”
무건이 이름을 부르며 눈을 올려 똑바로 마주쳤다. 서엽 또한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무건이 그들의 공존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만큼이나 서엽은 그들이 절대 공존할 수 없으리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너랑 난 화합 같은 건 안 돼. 왠지 아나?”
그들 사이엔 무건이 간과하고 있는 어떤 것이 존재했다.
서엽은 무건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무건에게 현실을 일깨워 주었다.
“이미 불균형한 싸움이야.”
서엽은 연무건이 자신의 상대조차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이딴 놈이 진예의 마음을 차지할 수 있을 리 없다고, 아니 그녀에게서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얻어 낼 수 없을 거라고.
하지만 무건은 얻어 냈고, 차지했다. 그를 무시하던 서엽을 비웃듯이.
조서엽은 이제, 연무건이 부러웠다.
“네가 말했던 대로다. 난 네놈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미치겠어! 이 조서엽은 허락받지 못한 걸 너는 가졌으니까.”
단지 지금은 자신보다 위고, 벌할 수 있는 지위가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진짜 옆자리에 무건이 서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처럼 진예가 마음을 바꾸면 언제든 내칠 수 있는 이름 없는 누군가가 아니라, 역사에 남을 황제의 유일한 정비.
그리고 제 정인을 품은 유일한 사내.
그것이 조서엽과 연무건의 근본적인 차이였고, 서엽은 그래서 무건과 공존할 수 없었다.
제가 손에 넣고 싶은 걸 가지고 있는 사내를 앞에 두고 어떻게 욕망하지 않을 수 있나. 조서엽에게는 도저히 불가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분을 사모하는 마음은 같지 않나.”
무건의 질문에 서엽이 입가를 비틀었다.
“같지.”
짧은 대답과 함께 그가 무건이 어깨를 붙잡더니 몸을 확 기울였다. 순간적으로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졌다.
그리고 그 순간.
무건은 제 복부에서 느껴지는 갑작스러운 통증에 놀란 표정으로 서엽의 무감한 눈을 마주 보았다.
그러다 아픔이 이는 부위를 확인하려 고개를 내렸다. 제 배에 꽂힌 단도와 함께 그것을 잡고 있는 조서엽의 손이 보였다.
이전에 화친왕을 죽이라며 무건에게 건넸던 그 칼이, 무건의 피로 더럽혀지고 있었다.
서엽이 칼을 끝까지 밀어 넣으며 냉정하게 제 생각을 내뱉었다.
“같아서 너랑 난 끝까지 함께 갈 수가 없는 거다.”
무건은 제 몸에 칼이 박힌 상태에서도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대꾸했다.
“아니, 난 같은 마음이기에 가능하다고…… 믿었어.”
서엽이 돌아오기만 한다면 무건 또한 진예에게 더는 함부로 다가서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녀가 지정해 준 각자의 ‘제자리’를 지키면 서엽과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도 가능하리라고.
그러나 서엽은 이렇다 할 대답 없이 무건의 복부에 박아 넣은 칼을 비틀었다. 몰려오는 격통에 무건이 크흑, 하고 신음을 흘렸다.
그렇지만 무건은 떨리는 손으로 서엽의 두 어깨를 잡았다. 서엽이 저를 찌른 아픔보다도, 그가 다른 선택을 한다는 안타까움이 앞서 무건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진예의 행복을 누구보다도 바랄 테니까. 너도 틀림없이 같은 마음일 거라고…….”
무건의 중얼거림을 듣던 서엽은 피가 제 손을 적시는 찝찝함을 느끼며 일갈했다.
“순진한 놈.”
“너, 넌…… 아니었던 건가.”
무건의 질문을 들으며 서엽은 칼을 뽑았다. 그러고 몸을 일으키자 어깨를 놓친 무건이 두 손을 바닥을 짚고 몸을 떨었다.
복부에서 흐르는 피가 그의 몸과 바닥을 적시는 것에, 무건은 손으로 찔린 부분을 짓눌러 보았지만 당연히 피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그에 서엽이 허탈한 웃음을 토해 냈다. 연무건의 꼴을 보고 있자니 오히려 제가 한없이 추락해 버린 느낌을 받았다.
죽도록 싸우던 자신을 믿고 나왔다는 것에, 그가 기본적으로 얼마나 사람이라는 존재를 얼마나 선하게 보고 있는지 알 만했다.
비록 어리석고 순진한 믿음이었지만, 그래서 조서엽은 스스로의 바닥을 드러내 보이는 듯한 개 같은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그렇지만 이런 끝이 그들 사이에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은 제가 연모하는 이를 한없이 위하다가 배신을 맛보고, 다른 한 사람은 목숨을 걸고 사랑했던 이를 마지막으로 배신하며 스스로의 모든 희망을 무너뜨린 비극. 이러한 것이 그들에게는 가장 합당한 결말이었다.
서엽은 이제는 진짜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자조하며 중얼거렸다.
“아마 네가 죽으면 같은 마음이 될지도 모르겠군.”
무건이 허억, 숨을 들이켜다가 서엽의 다리를 붙잡았다.
“조서엽…… 너, 여기서 이대로 나가면…….”
이어질 뒷말을 예상한 서엽의 얼굴은 기쁨과 슬픔의 경계에 섰다.
제 몸에 칼이 박힌 이 상황에서도 자신을 염려하는 무건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조서엽이라는 인간은 조금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가 스스로가 악인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진예를 사랑하는 마음이 연무건의 것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구분이 안 되었다.
기실 어느 쪽이든 그에게는 뼈아픈 결론이었다.
어차피 돌아가지 못할 강을 건넜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어졌지만.
서엽은 일부러 무건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대신 허공을 바라보며 앞으로의 제 운명을 입에 올렸다.
“난 예비 황후를 죽인 대역죄인이 되겠지. 각오하고 나왔다.”
차라리 이 죄로 진예의 손에 직접 죽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녀의 품에서 죽고 싶다는 것이 그의 마지막 소망이었다.
아마 그마저도 이루어지지는 않겠지만.
“어차피 난 이미 그분의 마음을 얻을 수는 없으니, 이렇게 하는 게 나에겐 너와 나 사이의 ‘균형’을 세우는 법 아니겠나.”
이내 쌔액, 쌔액 하는 무건의 거친 숨소리가 귀에 닿았다. 그제야 시선을 내리니 무건이 제 손으로 입을 막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밑으로 벌건 피가 흘러내리는 광경을 눈에 담으며, 서엽은 방금 전 그의 복부를 찔렀던 칼을 손안에서 돌렸다.
칼을 거꾸로 쥔 그가 무건의 목덜미를 노렸다. 저곳을 찌르면 연무건은 확실히 죽을 것이다. 이 칼에 의해 스러진 화친왕처럼.
무건도 역시 제 죽음을 직감했는지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저 그동안 아주 즐거운 꿈을 꿨다고, 그리 생각하거라.”
그러고 서엽이 칼로 목표 지점을 내리찍으려 했을 때였다.
서엽의 목 앞에 길고 날카로운 검날이 드리웠다. 조금만 움직이면 목에 닿을 만큼 가까이 들이대지는 그것에 서엽이 본능적으로 모든 행동을 멈췄다.
곧 서엽의 시선이 검신을 따라 그 손잡이를 쥔 주인에게로 향했다.
조그만 손과 가녀린 손목 너머로 보이는 금색 용포에, 비녀로 틀어 올린 검은 머리, 그리고 날이 선 붉은 눈까지.
“…….”
냉랭한 표정의 상대를 시야에 잡아낸 순간, 서엽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눈앞에 있는 이는, 환의 황제인 진예였다.
* * *
햇볕이 제법 쨍쨍해지기 시작한 낮때였다. 말을 타고 달려가는데도 아직은 강렬한 햇볕에 용포 안쪽으로는 땀이 흘렀다.
하지만 황성을 가로질러 융경궁으로 향하는 동안 진예는 조금도 쉬지 않았다. 오히려 불안감이 차올라 말을 더욱 빠르게 몰았다. 뒤를 따르는 금위들이 버거워할 정도였다.
진짜로 무건이 서엽을 죽이려고 할까.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융경궁에서 불길한 일이 일어나리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융경궁은, 언제나 제게 불행을 가져다주던 공간이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지워도, 지워도, 결코 지워 내지지 않는 상흔이 덕지덕지 붙은 곳이었다.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융경궁이었지만 기꺼운 일이 일어났던 적은 거의 없었다.
진예는 아닐 것이라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스스로를 달래며 어느새 융경궁 앞에 도착했다.
그러나 진정시키려 했던 마음은 융경궁의 궁문을 보자마자 도로 날뛰었다. 그에 그녀는 여러 가지 잴 것 없이 재빨리 말에서 뛰어내렸다.
궁문 앞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이들이 영문을 몰라 놀란 기색이었지만, 진예의 뒤로 금위들이 연이어 말을 세우고는 그녀를 따라 융경궁 안으로 진입했다.
얼마 안 가 진예와 함께 금위들이 문턱을 넘어 침전의 마당에 들어섰다.
침전 문 앞에 제법 낯이 익은 늙은 내관이 서 있는 것을 발견한 진예가 표정을 굳혔다.
그 앞으로 성큼 걸어가니 황제를 마주한 홍 내관이 기겁해 즉시 허리를 숙였다.
“홍복을 누리소서, 황제 폐하.”
진예는 늙은 내관을 내려다보다가 그의 손에 눈에 익은 모양의 검이 들려 있는 것을 보고는 조금 안심했다.
홍 내관이 들고 있는 건 서엽의 칼이었다. 안쪽에 무건과 서엽이 있는 건 확실시되었으나, 다행히 칼부림은 나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러나 진예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물었다.
“안에 연 귀인이 있나?”
“……예.”
차마 거짓을 입에 올리지 못한 홍 내관이 그리 답하자 진예는 뒤따르려는 금위들을 밖에 세워 둔 채 제 손으로 직접 문을 열고 침전 안으로 발을 들였다.
발을 한 걸음씩 복도를 디뎌 나가는 그녀의 귀에, 곧 아주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처음엔 단지 소음처럼 들리던 말소리는 점점 선명해지면서 귀에 명확하게 흘러들어 왔다.
제일 먼저 인식할 수 있었던 건 무건의 음성이었다.
“……거짓은 조금도 없어. 진심으로 부탁하마.”
그것을 듣고 진예는 제 그림자가 문에 비치기 전, 잠시 멈춰 섰다.
아직은 만난 지 얼마 안 된 것인지 몰라도 의외로 두 사람 사이에 고성이 오가고 있지는 않았다.
또한 제가 상상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무건은 서엽을 죽이려 하기는커녕 그에게 빌고 있었다.
“떠나지 말고 폐하의 곁에 있어 줘.”
제 곁에 남아 있으라고.
이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전개였다. 도착하자마자 무건을 끌어내려던 진예는 문조차 열지 못하고 벽에 붙어 섰다.
그 때문에 마치 도둑이라도 된 듯이 둘의 대화를 엿듣는 형국이 되었다.
“네 빈자리를, 나는 절대 채워 드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저 담담한 무건의 음성을 듣는 순간 진예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왜 이러는지 원인을 모르겠다. 이상하게도 매번 예측이 모조리 빗나가 버린다. 저 연무건에 대해서는 말이다.
하물며 공이 튀는 데도 규칙이 있는 법인데 무건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간 진예가 봐 왔던 그 어떤 유형과도 달랐다.
누구보다도 본능적이었고 솔직했다. 숨기는 것도 없고,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서엽에게 돌아오라 직접 청하리라고는 한 치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이어지는 서엽의 분노 어린 외침에도 무건은 제가 잘못했다는 말을 연신 흘렸다. 그에 진예는 제 마음이 더 안타까워져 왔다.
기실 무건이 저렇게까지 나설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서엽이 떠나는 건 결국 제게 실망했기 때문이고, 눈엣가시 같은 그가 사라지면 무건은 더 좋을 게 뻔했다.
둘 사이의 서열을 정해 달라고, 늘 말해 오던 그였으니까. 서엽이 멀어지면 당연히 제 서열이 더 높아질 테니까.
그런데.
〈그를 도려내라 하지 않겠습니다. 더는 투기하지도 않겠습니다.〉
무건은 제가 한 말을 지키는 데 머물지 않고 원치 않았을 일까지 마다하지 않으며, 스스로가 아니라 오롯이 진예를 위한 선택을 하고 있었다.
연모니 뭐니 떠들어 댔던 무건의 말을 하찮게만 여겼었는데.
당신을 뭐든 하겠다고, 심지어는 앞으로는 주는 것 외엔 탐하지 않겠다고 했던 그 말들도 사실은 반신반의했었는데…….
무건이 그런 그녀의 생각을 보기 좋게 깨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진예는 여태껏 자신이 연무건이라는 사람이 어떤 이인지 다 파악하지 못했었음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생각보다 훨씬 더 솔직하고, 곧았다. 그리고.
‘연모…….’
무건이 제 앞에서 말하던 그 감정의 실체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게 된 듯했다. 결국은 그가 가락지를 내밀며 했던 그 말의 의미와 통하는 것이었다.
〈저로 인하여 신념을 바꾸겠다는 증명.〉
그는 이 순간에도 예의 증명을 해내고 있었다. 진예로 인하여 신념을 바꿀 수 있다고.
언제든지, 몇 번이고.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진예는 아직도 스스로 그런 일을 할 수 있을지 확신도 들지 않지만 말이다.
흔히들 말하는 무조건적인 내리사랑도 아니다. 아니, 내리사랑이라 하여도 제 어미 아비와 같이 마음에 품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과연 저런 간절함이 겨우 명인 하나만 믿고 매달린 결과일 수 있는 걸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제아무리 어리석은 자라 해도, 사랑에 눈먼 자라 해도 저리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진예는 저런 사랑을 한다는 사람은 여태껏 들어 본 적 없었다.
그러니 무건은 애초부터 저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저렇게 스스로 가진 전부를 다 털어 내면서, 밑천을 훤히 드러내면서 사랑할 줄 아는 사람.
무건은 그런 맹목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당연한 것처럼 여겼다.
진예에겐 그 각오가 한때는 너무 가벼워 보였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음을, 아주 무거운 것이었음을 이제는 알아 버렸다.
하지만 가슴이 따뜻해져야 하는 이 순간에, 진예는 누군가 제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답답함과 찌릿한 아픔을 느꼈다.
자신이 없는 곳에서 자신을 위해 간청을 해 주는 누군가가 생겼다는 것. 그 사실이 진예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감정을 바늘처럼 콕콕 찔러 왔다.
어서 깨어나라며, 오랫동안 단단히 걸어 잠가 놨던 마음의 빗장을 풀기를 종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런 사람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모두가 파국을 보는 그런 세계 따위는 종말을 맞이할 것인가.
〈감히 소자는 환의 황제를 시해하는 꿈을 몇 번이나 꾸었나이다.〉
부모와 자식은 서로를 증오하고.
〈네놈한테 제자리가 어디 있느냐.〉
한배에서 난 형제는 서로 반목하고.
행복한 그들 사이에서 홀로 불행에 찌든 한 사람이 결국 모두를 파국으로 이끈…….
그런 기괴한 세계 따위는.
‘그럴 수도 있는 건가?’
자문해 보았지만 답을 찾지 못해 헤매던 그때였다.
“진예의 행복을 누구보다도 바랄 테니까. 너도 틀림없이 같은 마음일 거라고…….”
그녀의 귓가로 다시금 무건의 말이 흘러들어 왔다. 진예는 그 음성에 뒤섞인 고통의 흔적으로 인해 뒤늦게야 상념에서 깨어났다.
밝아진 귓가로 서엽의 냉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죽으면 같은 마음이 될지도 모르겠군.”
“조서엽…… 너, 여기서 이대로 나가면…….”
서엽의 의미심장한 말과 숨소리가 지나치게 많이 섞인 무건의 목소리에 진예가 불안한 예감을 느끼며 벽에 기댄 몸을 세웠다.
그리고 문 앞에 섰다.
설마, 설마…….
문을 열기 전, 그녀의 머릿속에 어떤 선명한 그림 하나가 떠올랐다. 하지만 문을 열기 전까지 진예는 설마 그런 건 아닐 거라고 부정했다.
제가 믿고 있는 서엽이, 그럴 리가 없다며.
그렇게 문을 조금 밀었을 때였다. 마침 어딘지 힘이 빠진 서엽의 목소리가 울렸다.
“난 예비 황후를 죽인 대역죄인이 되겠지. 각오하고 나왔다.”
제 심장도 이렇게 묵직해질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다.
진예는 쿠웅, 하고 떨어져 내릴 듯이 울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차피 난 이미 그분의 마음을 얻을 수는 없으니, 이렇게 하는 게 나에겐 너와 나 사이의 ‘균형’을 세우는 법 아니겠나.”
여유롭게 단도를 돌리고 있는 서엽의 모습과 함께 배를 부여잡은 채 한 손으로 입을 가린 무건이 보였다.
그제야 진예는 무건이 앉아 있는 곳에 피가 고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순간, 진예는 더 이상 지켜볼 것 없이 안으로 발을 들였다.
순간 제가 올 줄 몰랐는지 놀란 듯한 무건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그저 그동안 아주 즐거운 꿈을 꿨다고, 그리 생각하거라.”
아직 진예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한 서엽이 칼을 휘두르려는 그때, 진예 역시 주저하지 않고 제 허리춤의 칼을 뽑았다.
어떤 정신으로 그랬는지는 스스로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를 추동한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했다.
연무건을 여기서, 그것도 서엽의 손에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서엽이 제 손의 단도를 내리찍기 전에 그의 목에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댔다.
굵은 사내의 목을 베어 내기 직전, 진예가 칼을 멈추었다. 곧 서엽이 진예를 돌아보았다.
“…….”
눈이 마주치자 서엽은 그녀에게 어째서 여기 있냐는 눈빛을 보냈다.
융경궁의 침전에 숨이 막힐 듯한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동안 진예는 서엽에게서 잠시도 시선을 떼지 않고 마주했다.
무수히 많은 대신들 앞에서 그들을 호령하는 진예도, 이 순간만큼은 긴장했다.
제 심장이 평소보다 훨씬 더 빠르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마치 귀 옆에 심장이 붙어 있는 듯, 맥박 치는 소리가 제 고막을 마구 두드려 댔다.
그러나 진예는 서엽을 겨눈 칼도, 그를 노려보는 시선도 거두지 않았다.
대신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어 고요를 먼저 깼다.
“……조 후, 지금 대체 무슨 짓을 한 게냐.”
진예는 서엽의 목을 겨눈 것을 그대로 유지하며, 무건 쪽으로 발을 옮겼다.
그러자 밑에서 올라오는 거친 숨소리가 더 선명하게 귓가에 와 닿았다. 굳이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아도 무건의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점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녀의 검은 신발에 무건의 피가 배었다. 이어 전장에서나 맡아 볼 법한 기분 나쁜 피 냄새가 코를 찌르자 표정이 저절로 굳었다.
진예는 서엽의 대답이 들려오기 전까지 머릿속으로 이후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순간적으로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를 떠올렸다.
어찌 되었든 서엽은 이미 제 비인 무건을 찔렀고, 이대로라면 죄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아무리 황제라 해도 막무가내로 서엽을 비호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하지만 서엽은 정말 이젠 모든 걸 다 포기한 게 맞는지, 크게 개의치 않는 모양이었다. 그가 허탈하게 웃으며 대꾸해 왔다.
“지금, 제 앞에서 그자를 보호하려 하시는 겁니까?”
진예는 미간을 구기다가 눈동자만 굴려 무건을 내려다보았다. 바닥에 흐른 피의 양이 결코 적지 않았다. 이대로 계속 놔두면 출혈 때문에 정신을 잃을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였다.
무건은 숨이 가빠 오는지 급하게 들이켜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차라리 진예가 이 자리에서 빠졌으면 하는 눈치였지만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연무건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조서엽을 위해서였다.
진예는 검 손잡이를 바투 쥐며 서엽에게 냉정히 일갈했다.
“네놈이 정녕 미쳤더냐, 조서엽.”
그러나 서엽은 진예가 목에 칼을 들이댄 이 상황에도 이번엔 물러서지 않았다.
“비켜서십시오. 그게 아니면…….”
“그게 아니면? 이번엔 나를 찌를 것인가?”
대꾸를 하면서도 진예는 그건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조서엽은 자신을 절대 찌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어지는 말이 그를 증명했다.
“아니, 저를 폐하의 손으로 죽여 주시지요.”
서엽이 말을 마친 순간 진예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진예……!”
제 밑에서 경악한 무건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서엽 또한 믿기지 않는 현실에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진예의 붉은 눈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신을 타고 흘러내린 피가 손을 뜨뜻하게 적셔 왔다.
예의 피란 조서엽의 것이었다.
진예는 제 팔을 붙잡는 거센 아귀힘을 느끼면서도 다시 한번 그의 복부에 칼을 깊숙이 박아 넣었다.
몸을 관통한 칼에 서엽이 허억, 하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도무지 현실 같지 않은 상황을 마주한 그가 입술을 떨었다.
“폐, 하……?”
“…….”
금세라도 진예 쪽으로 쓰러질 것 같은 몸을 간신히 지탱하면서 서엽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진예는 왜냐고 묻는 듯한 그의 눈을 마주하며 저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녀 또한 이런 날이 올 줄은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도 이런 각오는 되어 있지 않았었다.
그러나 진예는 밀어 넣었던 칼을 단숨에 빼 버렸다. 그러자 칼의 진로를 따라 시뻘건 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동시에 진예가 몸을 빼자 서엽도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차아앙!
손에서 빠져나간 긴 칼이 바닥에 부딪쳐 큰 소음을 일으켰다.
물러서는 진예의 금색 용포는 순식간에 서엽의 피에 젖어 엉망이 된 뒤였다.
진예는 제 앞에 쓰러진 두 남자를 앞에 두고 서서히 뒷걸음을 쳤다. 무건은 제가 찔린 것도 아닌데, 제 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진예는 그런 무건을 향해 고개를 흔들며 작게 중얼거렸다.
“……미안하다, 무건아.”
왜 자신에게 사과를 하느냐는, 의문이 어린 눈을 외면한 진예는 마침내 뒤돌아섰다.
이 순간, 스스로도 정신이 흐릿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런 와중에 어떻게든 발을 놀려 방의 문턱을 넘어섰다.
그러자 짧은 복도의 끝에 위장군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융경궁을 향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디선가 급히 달려온 모양이었다. 그는 피범벅이 된 진예의 모습을 보고 실색해 얼른 앞으로 다가왔다.
“폐하, 어찌 된 일이시옵니까……?”
위장군은 혹여나 그녀가 다친 것은 아닌가 싶어 크게 당황한 표정이었다.
다행히 그녀에겐 아무 이상이 없는 걸 발견한 그가 조금 안심하는 모습을 보며 진예가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짐이…….”
그러면서 다짐했다.
“짐이 연 귀인을 찔렀다.”
이것이, 무건을 향한 제 마지막 배신이 되리라고.
“짐이 연 귀인을 찔렀다.”
그리 거짓을 토해 냈을 때, 진예는 마치 입 안에 피가 고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당혹감으로 물들어 가는 위장군의 얼굴을 보면서도 진예는 거짓말을 이어 갔다.
“조 후를 죽이려 하기에 내 그를 막으려 그리하였느니라.”
분명 무건에게는 죄가 없었다. 오히려 저를 위해서 그리도 싫어하는 사내 앞에서 무릎까지 꿇은 이였다.
그런 그를 제 손으로 벼랑 밖으로 밀어내는 이 기분이란…….
스스로의 치졸함에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이는 또한 무건에게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르는 짓이었다.
분명 안쪽에서 제 말소리가 다 들릴 터였다.
무건은 제 배신 앞에서 어떤 기분이 되었을까.
하지만 이 수 외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조서엽을 살릴 방도는 말이다.
진예는 제 손에 남아 있는, 서엽을 찌르던 그 순간의 감각을 떨쳐 내기 위해 피로 더럽혀진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것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며 위장군은 난처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보다는 그녀의 표정 때문에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진예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마치 곧 눈물이라도 떨어뜨릴 듯한 그녀의 모습을 처음 보는 위장군은 눈을 한 군데 두지 못하고 진예와 침방 쪽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 조심스레 물었다.
“……신이 안을 살펴도 되겠사옵니까?”
진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 떨어지자 위장군은 진예의 발자국이 찍힌 것을 내려다보며, 얼굴을 잔뜩 굳혔다. 그러고는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침방은 말 그대로 엉망이었다. 붉은 피가 벽까지 튀어 있었다. 피 웅덩이 위로 조서엽은 쓰러져 있었고, 무건은 칼을 바닥에 박아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중이었다.
말 그대로 참상이었다. 위장군은 당혹스러운 마음을 일단 접어 두고 흔들리는 무건에게 달려가 재빨리 그 몸을 붙잡았다.
“마마!”
무건의 몸이 힘없이 기울어져 오는 것에 위장군이 뭔가 더 생각할 겨를 없이 그를 지탱했다. 이 상황이 어찌 된 것인지 아직도 정리를 못 한 채로 그가 혼란을 담아 무건에게 물었다.
“이것이 대체 어찌 된 일이옵니까? 이 무슨…….”
그러다 위장군은 무건의 손에 들린 긴 칼을 확인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상당히 많이 보던 칼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손잡이 끝에 달린 주홍빛 술이 달린 장식과 그 손잡이 안쪽에 양각된 황금빛 용 무늬가.
틀림없이 진예가 쓰는 칼이었다.
위장군은 그것을 확인하고 이내 바닥에 떨어진 짧은 단도를 발견했다. 그것은 서엽의 근처에 던져져 있었다.
그가 머릿속으로 상황을 제대로 정리하기 전에 무건이 피가 묻은 손을 떨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어깨에 기댄 채 작게 속삭여 왔다.
“홧김에…… 내가 조서엽을 찔렀네.”
“…….”
“폐하의 칼을 빼앗아서…….”
이야기를 들은 위장군의 눈이 저를 뒤따라 방문 앞으로 온 진예에게로 향했다. 혼란스러운 사건 앞에서 위장군은 동요하고 있었다.
부모를 죽이며 즉위하고, 동생을 죽여 황권 강화를 꾀하고. 그는 황실의 흔한 잔혹사이고, 황위를 차지하는 자의 숙명과도 같은 일이라고 넘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의미가 달랐다. 이는 오로지 그녀이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진예는 그저 위장군의 품에 기대어 있는 무건을 바라볼 뿐,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위장군은 당연하게도 그녀가 분노하지 않는 부분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아니, 그는 애초에 무건이 입에 올린 상황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무건이 진예의 칼을 빼앗아 조서엽을 찌르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위장군이 알고 있는 사람 중 가장 높은 무위에 오른 이가 바로 진예였다. 그런 그녀가 무건에게 순순히 무기를 빼앗겼을 리 없었다.
그러니 거짓인 것이다.
진예의 말도, 무건의 말도 전부.
위장군은 금세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아챘으나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환의 주인인 진예가 거짓된 상황을 원한다면, 그리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자신의 마땅한 의무였다.
위장군이 무건의 옆구리에 난 상처를 확인하고는 그의 얼굴을 살폈다. 안색이 백지장처럼 하얗고 숨도 거친 것이, 무건의 상태도 예사롭지는 않았다.
“금방 의원을 불러 오라 할 터이니 정신을 놓으시면 아니 되십니다, 마마.”
아마 의기가 굳센 무건이니 분명 견뎌 낼 터였다. 위장군이 그리 말하며 그를 침상에라도 눕혀 놔야겠다 싶어 발을 옮기려 했을 때였다. 다급한 숨소리 사이로 무건의 걱정 어린 말이 섞였다.
“조서엽은, 죽었나……?”
“…….”
거짓을 입에 올리면서도 위장군이 믿으리라 생각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위장군은 주저하다가 다시 난처해하는 표정으로 진예를 바라보았다. 그에 진예가 다가와 무건을 대신 부축했다.
위장군이 서엽에게 다가가는 사이, 진예는 무건을 근처의 벽에 기대게 했다. 그러자 무건은 파리한 입술을 깨물며 진예를 마주 보았다.
그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진예는 그의 눈에 담긴 것이 어떤 감정인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염려였다. 무건의 눈 어디에서도 원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진예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자 위장군이 서엽의 옷을 길게 찢으며 상황을 전해 왔다.
“살아 있습니다. ……상처 자체는 상당히 깊긴 하나 절단면이 깔끔하니 출혈만 잘 막으면 괜찮을 겁니다.”
문제는 관통상인 탓에 예의 출혈이 상당하다는 점이지만 그 부분은 진예도 잘 알고 있을 테니 굳이 지적하여 말하지 않았다.
위장군이 서엽의 상처 부위에 천을 덧댄 뒤 긴 천으로 복부를 꽉 동여매자 서엽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대충 처치한 위장군이 밖의 금위들을 부르기 위해 얼른 뛰어 나갔다.
진예는 그가 나간 뒤에야 무건과 눈을 맞췄다. 그녀는 무건의 하얗게 질린 얼굴에 손을 갖다 대며 물었다.
“네 어찌, 거짓을 말하였느냐.”
그러자 무건이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켜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진예의 칼집에 검을 꽂아 주고는 남은 팔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진예의 귓가에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제가 찌른 겁니다.”
“연 귀인…….”
“앞으로도 잊지 마십시오. 폐하께서 바라시는 것이 있으면 그게 바로 이 연무건이 걸을 길입니다.”
투박한 언어였지만 그만큼 절절한 고백이었다. 그것을 들으며 진예는 눈을 감았다.
눈치가 빠른 이이니 제가 위장군에게 거짓말을 한 이유가 무엇인지 뻔히 알 터였다. 그런데도 그에 동조해 준 무건의 마음이 너무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그것은 마치 칼과 같이 날카로웠고, 또한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그러면서도 쏟아지는 물처럼 벅차게 차올랐으며, 솜털처럼 보드랍게 다가왔다.
어찌 이런 모순된 것이 다 있나 싶을 정도로, 온갖 감각이 제 심장을 뒤흔들어 놓았다.
진예에겐 자신의 모든 것을 감당해 내겠다 하는 이 사내를 더는 거부할 방도가 없었다.
그렇지만 이런 것을 왜 이런 참혹한 광경 속에서 깨달아야만 하는지, 왜 항상 저라는 사람에겐 늘 비극이 숙명처럼 따르는지.
마침내 항상 단단했던 그녀의 표정이 무너지자 무건이 그녀의 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슬픈 표정은…… 싫습니다, 진예.”
진예는 알겠다며 끄덕이면서도 끝내 그가 바라는 대로 웃지는 못했다.
그러는 사이 위장군이 보낸 금위들이 방 앞에 도달했다. 그들의 발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그들이 허리를 숙이고는 둘씩 서엽과 무건에게 다가왔다.
먼저 서엽이 업혀 나가고, 진예에게서 조심스럽게 무건을 떼 낸 금위들이 그를 부축해 데리고 갔다. 하지만 그 뒤에도 진예가 피가 고인 침전 바닥을 내려다보며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모든 게 뒤죽박죽이 돼 버린 이 상황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서둘러 판단을 내려야 했지만 지금은 머리가 굳어 버린 듯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일깨우듯 다시 돌아온 위장군이 앞에 서서 허리를 숙였다. 그에 진예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먼저 물었다.
“어찌 처리를 하고 있느냐.”
위장군은 최대한 감정을 절제하며 상황을 담담히 전했다.
“귀인마마와 조 후는 이곳 융경궁의 의관원으로 옮기라 하고, 근처의 의원을 급히 찾아 데려오라 명하였사옵니다.”
황궁과 융경궁의 거리가 꽤 먼 편이니 태의를 부르러 갈 수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진예가 생각하기에도 위장군의 조치가 최선이었다.
진예는 그제야 기대어 있던 벽에서 몸을 떼며 방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짐도 의관원으로 가겠다.”
그러자 불안해하는 눈빛으로 보던 위장군이 그녀의 뒤를 따르며 넌지시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제가 부축해 모시겠사옵니다.”
“괜찮다. 짐은 아무렇지도 않아.”
부축은 무슨. 다친 건 제가 아니었다.
주먹을 쥐며 그녀가 앞서 걸어 나갔다. 밖으로 나서니 침전 안과 달리 햇빛이 눈이 부셨다. 앞에 서 있던 홍 내관은 무건을 쫓아갔는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급하게 쫓아온 박 태감과 몇몇 내관들이 보였다.
진예는 융경궁의 침전에서 마치 짧은 악몽을 꾼 기분이었다. 그 꿈에서 깨어난 진예는 천천히 침전의 마당을 가로질렀다.
그러자 박 태감이 피에 젖은 그녀의 겉옷을 가리기 위해 얼른 손에 든 도포를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며 말을 붙였다.
“폐하, 방금 남문으로 의원이 도착하였다 하옵니다.”
진예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억을 더듬어 융경궁의 의관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이 상황을 정리하기 위한 첫 번째 명을 내렸다.
“우선 대례식을 미뤄야겠다.”
“예, 폐하.”
오늘 일로 많은 일정이 어그러질 터였다.
적어도 무건의 몸이 회복되기 전까지는 대례식을 치를 수 없었다. 다시금 길일을 잡고 준비하는 데도 아마 달포 이상 걸릴 게 분명했다. 대례식 이후에 세워 두었던 출정 계획 또한 미뤄질 것이다.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금세 의관원 앞에 도착한 진예는 곧장 문 앞을 지키는 금위들 사이를 지나쳤다.
도착한 의원이 다행히 재빠르게 대처하고 있는 모양인지 벌써부터 내부의 분위기가 제법 분주했다.
보아하니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방과 그 옆방에 각각 서엽과 무건이 있는 듯했다. 진예는 먼저 서엽이 있는 방을 밖에서 들여다보았다.
의원이 진예가 찌른 환부를 살피며 출혈을 막기 위해 곱게 갠 약초 물을 바르자 서엽이 부들부들 떠는 게 보였다.
지금은 대례식이건 출정이건 모두 부차적인 문제였다. 중요한 건 무건과 서엽, 두 사람을 온전히 살려 내는 일이었다.
다만 저 서엽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 뒤에 또다시 걷잡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불안감을 떨치기 어려웠다.
저렇게 살려 둔다고 해서 서엽이 과연 제대로 살아가려 할지 알 수 없었다. 제 옆이 아니면 죽는다고, 그리 쉽게도 자신의 마지막을 입에 올렸던 그이기에.
진예는 다만 그런 상황까지 가지 않길 바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의원은 방과 방 사이의 문을 열어 건너다니며 환부를 살폈다. 진예는 무건을 진료하는 때에 맞춰 안으로 몸을 들였다.
무건은 긴장이 풀린 모양인지 금위들에게 부축을 받다가 정신을 놨다고 했다. 갑자기 끌려오긴 했으나 의원은 그런 그를 꽤 침착하게 처치를 해 나가고 있었다.
진예는 우선 깨끗한 천으로 무건의 환부를 닦아 내는 모습을 보다가 물었다.
“괜찮겠는가.”
“칼을 박고 비트는 바람에 환부가 깨끗하지 못합니다. 이분은 자칫 파상풍이 올 수 있으니 주의하여야 할 듯하옵니다.”
파상풍이 오면 정말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이다. 진예는 착잡한 마음으로 옆방의 서엽을 턱짓했다.
“저 옆의 사람은.”
“큰 부상이나 다행히 급소를 비켜 갔나이다. 지혈을 해 두었으니 제때 천과 붕대를 갈면서 환부를 깨끗이 하고 역시 파상풍만 주의한다면 예후가 나쁘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알겠다.”
무건이나 서엽이나 이미 사선을 여러 번 넘나들었으니 이번에도 괜찮을 거라는 방심은 금물이었다. 전쟁터에서 수십 번 위기를 넘기고도 손에 난 작은 상처 하나를 어찌하지 못해 죽는 이들도 더러 있었으니까.
의원은 모두가 제게 주목하는 것을 보며 긴장한 듯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최선을 다해 처치했다. 좀처럼 피가 멎지 않는 것에 난처해하다가 이내 출혈이 잡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도로 서엽의 쪽으로 옮겨 가자 위장군이 조용히 열린 문들을 닫았고, 박 태감은 침상 앞에 의자만 가져다 두고는 복도로 나가 섰다.
진예가 의자 위에 몸을 내리고는 기절하듯 잠든 무건을 지켜보았다.
한동안 말이 없는 그녀를 묵묵히 보던 위장군이 문득 바닥에 널브러진 무건의 피에 젖은 옷들을 주워 올렸다. 그러다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진예에게 내밀었다.
“폐하, 이것을…….”
“무엇이더냐.”
보지도 않고 묻던 진예가 위장군의 손에 들린 것을 보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아주 낯이 익은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옥가락지로군.”
무건이 몇 번이나 그녀에게 건네려 했던, 제 명인자에게 주려고 했었다는 바로 그.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위장군은 옥가락지의 표면에 살짝 묻은 피를 닦아 내고는 그녀에게 내밀었다.
“필시 여인의 것으로 보이니 마마께서 폐하께 드리려 준비한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위장군의 손에 들린 그것을 보며 진예가 픽 웃음을 내뱉었다.
“아닌 게 아니라, 내 그를 숙의로 봉했을 때부터 주려 했던 것이지.”
“하면 근 1년이 다 되어 가는 물건이겠습니다.”
위장군은 그녀가 굳이 가락지를 건네받지 않는 의도가 있음을 알아차리고는 퍽 난처해하며 대꾸했다. 왜 이런 것을 그렇게나 끌었냐는 무언의 질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한 반응을 보면서 진예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쉴 뻔했다.
본성대로면 당장 무건을 깨워서 이 소릴 좀 들어 보라고 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이깟 가락지 하나 받느니 마느니 하는 것을 1년 동안 끌고 왔다고 하면 우스워한다고, 보통은 포기했을 거라며.
그렇지만 또 제가 그러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말할 무건의 모습이 훤히 보여 벌써부터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이 가락지를 매일 품에 품고 있는 일 자체도 솔직히 진예의 입장에선 불가사의한 것 중 하나였다. 대체 사람이 얼마나 미련하면 그럴 수 있는가 싶어서였다.
“……나를 만나 이리 시도 때도 없이 다치기만 하니 원망할 법도 하건만 지치질 않는다, 연 귀인은.”
푸념과 같은 그녀의 말에 위장군이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귀인마마께선 결코 그럴 성정이 아니신 것으로 보이옵니다.”
동의했다. 진예는 첫 만남에서 이미 그런 연무건에 대해서 어렴풋이 예상했다.
그래서.
“그래서, 이자가 싫었다.”
연무건을 더 내쳐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주제도 모르고 저와 당당히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그 당시에는 죄가 된다 여겼다. 감히 말대꾸를 하는 것만으로도 분노가 끓어올랐다.
하지만 무건이 명인자가 아니었다면, 황궁의 예를 배우지 못한 자의 무지함이었으려니 하며 너그러이 넘어가 줄 수도 있었을 터였다.
진예는 그가 싫었을 뿐이다.
그냥, 말이다. 그냥.
좋아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을지 모르지만, 싫어함에는 없을 수도 있는 일이니까.
“명인 때문에. 또 하늘이 내게 시련을 주는가 싶어 그냥, 서둘러 내치고만 싶었어.”
“…….”
“하여 나를 향해 보내는 간절한 눈빛도, 입으로 지껄이는 절절한 말들도 전부 얄팍한 것이라 믿고 싶었다.”
무건은 이 말을 듣고 있을까. 실은 자는 척을 하고 있는 것이려나.
뒤늦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의 곧은 두 눈을 보면서는 전할 수 없는 진심이기에, 이런 식으로라도 무건이 알 수 있다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자신은, 진예라는 사람은 이토록 서투른 사람이었다. 스스로의 감정조차 앞에서는 말하지 못하는 겁쟁이였다.
위장군은 그런 진예의 뒤에 서서,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받아들이셨기 때문에 황후 책봉을 논하셨던 것이 아니셨사옵니까.”
진예는 고개를 한 번 흔들었다.
“단지 필요했기 때문이다.”
“…….”
“짐의 옆에 있어 줄 누군가가.”
본래라면 무건의 요구 사항을 받지 못하겠다고 결심한 순간 그를 그냥 황궁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인간의 도리였다.
제2의 조서엽을 만들어서는 안 되니까.
제 옆에서 다른 이의 삶 하나를 썩히는 일은 더 이상 해선 안 되는 짓이니까.
설령 무건이 그것을 원한다 했어도 말이다.
그러나 진예가 그에게 제 옆에 남는 선택지를 열어 둔 이유는, 스스로의 이기심 때문이었다.
제 안의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던 나약함 때문이었다.
“짐은 혼자 있는 밤이 늘 싫었다. 밤마다 찾아오는 꿈속에서 내 어미는 내 목을 수백 번, 수천 번 졸랐어. 그러면 나는, 아비에게 달려가 그를 또 수백, 수천 번을 죽였다.”
“폐하…….”
“하지만 누군가 짐을 죽이려는 공포 때문에 그 악몽이 싫었던 것이 아니다. 차라리 증오하는 눈빛으로 봐 줬으면 좋았으련만 구슬프게 내려다보는 선황후의 눈빛이…… 짐을 항상 쓸모없는 이로 만들었어.”
그 옛날, 어미는 제 목을 조르며 펑펑 울고 있었다.
진예가 만약 사내아이로 태어났다면 선황후가 그리 슬퍼할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제게 쓸모가 있었더라면, 모두가 인정해 주는 당당한 황태자였더라면 그녀는 울지 않아도 됐을지도 몰랐다.
그러니 그녀는 황위에 올라 누구보다 완벽한 황제가 되는 방법으로 제 쓸모를 증명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러고 나니 정작 인정해 줄 사람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인정을 해 줄 아비와 어미를 제 손으로 죽여 버렸으니.
그 모순이 비극을 제 운명으로 만들어 주었다.
“짐은 누구보다도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 마음을 누군가의 충성을 받으면서 채워 왔던 것이지.”
그 누군가란 조서엽이었고, 제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문무백관들이었다.
그들이 제 앞에서 고개를 숙일 때마다 진예는 제 가치를 인정받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표상일 뿐이었다.
“하지만 한순간도, 결코 다 찬 적이 없었다.”
여전히 제 마음은 공허했다.
“서엽이 저리 헌신적으로 짐의 옆을 지켜 줬음에도 채워진 적이 없었어.”
그래서 자신에게 충성하지 않는 자들을 용서하지 못했다. 제 마음의 빈자리가 커질수록 그녀는 더욱 독해졌고, 잔인해져 갔다.
그렇게 지금의 자신이 만들어졌다.
누군가는 강하다, 단단하다 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가장 비겁한 겁쟁이가 그녀의 마음속에 살고 있었다. 그것을 내보이지 않으려 부러 딱딱한 껍데기를 뒤집어썼을 따름이었다.
“하여 서엽이 떠나니 연 귀인을 곁에 두어 다시 그 자리를 채워 보려 한 것이다. 그뿐이었어.”
위장군은 뒤에 서서 그녀의 변을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진예의 대답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어서는 아닐 터였다. 선황과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머문 만큼 그는 진예가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한동안 진예의 말을 곱씹듯이 긴 침묵을 이어 가던 그가 마침내 한마디 겨우 흘려보냈다.
“두려워도 마음을 열어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건 신하로서의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저 진예와는 다른 삶을 살아오면서 제 나름대로의 이치를 깨달아 온 자의 짧은 조언이었다.
“주제넘은 말일지 모르나, 소신이 살아온 세상은 그리 험난하기만 한 곳은 아니었나이다.”
그는 진예의 앞에 다시금 제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에는 무건이 가지고 있던, 결이 잘 정돈된 옥가락지가 놓인 채였다.
“귀인마마께서는 폐하의 곁을 쉽게 떠나시지도, 폐하의 마음을 저버리지도 않으실 것이옵니다.”
그러니 안심하라는 뜻이었다. 세상엔 실은 호의적인 것들도 꽤 되니, 더는 경계를 올리지 않아도 된다고.
진예는 그리 아름다운 언어로 포장하지는 않았으나, 묵직하게 파고드는 위장군의 말을 듣고 조금은 안심해 버리는 스스로를 느꼈다.
이내 고민하다가 그녀가 가락지를 받아 들었다. 조금 서늘한 온도의 그것을 손에 쥐면서 진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 미련한 이지…….”
위장군이 말한 대로였다.
연무건은 결코 쉽게 꺾이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지금까지 눈앞의 사내가 증명해 온 진정한 그의 가치이며 효용이었다.
그리 인정한 진예가 마침내 무건의 커다란 손을 꽉 잡아 끌어왔다. 그리고 언젠가 무건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손바닥에 살며시 입을 가져다 댔다.
따뜻한 체온을 전해 받으며 진예는 가슴을 찌르르 울리는 무언가를 느꼈다. 흔히들 전율이라 말하는 격한 감정이었다.
그에 진예는 깊게 숨을 들이켜며 생각했다.
그녀가 택한 길이 곧 자신의 길이라 말해 주는 이 사내를, 더는…… 밀어내지 못할 것 같다고.
진예는 그렇게 한동안 무건의 체온에 제 뺨을 기대었다. 평소 같았으면 금세라도 저를 안아 왔을 무건은 손만 살짝 움찔거릴 뿐이었다.
위장군은 그 모습을 눈에 담지 않으려 천장을 쳐다보고 있다가, 바깥에서 의원이 부르는 소리에 나갔다.
희미하게 이 말 저 말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다시 돌아온 위장군이 그녀 옆에서 고개를 숙였다.
“처치가 대강 끝난 모양이오니 그만 황궁으로 돌아가 귀인마마를 태의에게 보여야 할 듯하옵니다.”
대강이라도 끝났다니 다행한 일이었다. 한시름 놓은 진예가 그만 무건의 손을 내려놨다.
“알겠다.”
“조 후는 어찌하는 게 좋겠습니까.”
“사저로. 조춘경에게 보내라.”
서엽의 거취에 대해 짚으면서 진예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저 꼴이 된 제 아들을 보는 조춘경의 마음이나 깨어났을 때 서엽이 보일 반응이 예상돼 가슴을 무겁게 했다.
그렇지만 공은 제 손을 떠났다. 이젠 부디 결말이 그리 불행하지 않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위장군도 서엽에 대해서는 무어라 말을 덧붙이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하겠사옵니다. 박 태감이 오면서 가마를 대령해 왔으니 폐하께서는 그를 타고 가시옵소서. 말들은 소신이 추스르겠습니다.”
“그리하도록 하지.”
진예가 그만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돌연 현기증이 몰려와 조금 비틀거렸다. 의자가 끼익, 밀리는 소리가 나자마자 위장군이 당장 그녀를 붙잡았다.
“폐하!”
다행히 넘어질 정도는 아니기도 했거니와, 위장군이 곧바로 부축해 준 덕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너무 긴장하고 있었던 탓에 이러는 걸까. 진예 스스로도 당황하는 사이, 위장군이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혹 어디가 편찮으신 것이옵니까?”
진예는 곧장 고개를 흔들었다. 딱히 최근 몸이 안 좋다는 징후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으니 염려치 않아도 된다.”
그러고 바로 일어서서 복도로 나가는데, 방금 전의 상황이 못내 걸리는지 위장군이 쫓아오면서 한마디 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폐하께서도 황궁에 드시어 진맥을 받으시는 것이 나을 듯하옵니다.”
그리 말하고는 슬쩍 박 태감에게 눈짓까지 하는 것이었다. 진예는 그가 너무 호들갑을 떠는 것 아닌가 싶었지만 박 태감도 옆에서 거들었다.
“최근엔 바쁘시어 태의의 문안도 물리던 참이 아니셨습니까. 위장군의 말대로 하심이 좋을 듯하옵니다.”
본래 이틀에 한 번 정도, 아침에 일어나면 태의의 문안 인사를 받으면서 진맥을 받는 것이 일과 중 하나였다.
한데 제위에 오른 뒤로 병을 앓은 적이 없다 보니, 그다지 필요성을 못 느낀 탓에 박 태감이 지적한 대로 그 절차를 건너뛸 때도 있었다.
대강 가늠해 보니 이번에는 그 기간이 한 달 정도 지나 있었다. 그래서 더 박 태감이 이때다 싶어 말을 붙인 것 같았다.
좀 귀찮아졌다고 생각한 진예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러고는 융경궁 침전 마당에 대령되어 있는 가마에 몸을 실었다.
흔들리는 가마 안에서 진예는 주먹 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결이 고운 옥가락지가 그녀의 손바닥 가운데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 가락지는 아마 무건에게 있어서는 천금보다 더 가치 있는 물건일 터. 설마하니 자신도 이걸 받아 주겠다고 결심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진예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대가 이겼다, 연 귀인…….”
* * *
저녁 어스름부터 구름이 짙게 끼더니 어둠이 몰려옴과 동시에 비가 내렸다.
편전에서 나오던 진예가 황궁의 의관원으로 향하는 행랑을 걸으며 평소 안 타던 으슬으슬한 추위를 탈 만큼 빗기운이 제법 찼다.
그래도 이깟 추위는 별것 아니었다. 방금 전 무건이 깨어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업무를 접고 나온 진예는 박 태감이 쫓아와 조용히 어깨에 걸쳐 준 겉옷을 흔들며 걸음을 재촉했다.
황제가 의관원에 도착하자 잔뜩 긴장한 태의는 그녀의 비인 무건이 누워 있는 방으로 앞장섰다.
복도를 걸으며 진예가 넌지시 물었다.
“앞으로 큰 이상은 없겠느냐.”
“예, 폐하. 환부는 잘 치료가 되었고, 마마께서 본래 회복력도 좋으시니 큰 이상은 없을 터입니다.”
제발 그 몸 좀 그만 너덜너덜해졌으면 좋겠다는 게 태의의 바람이긴 했지만 괜히 쓸데없는 말을 입에 올려 명을 재촉하지는 않았다.
문이 밀리며 시야가 트이자 동시에 몸을 일으키는 무건의 모습이 보였다. 진예의 말소리를 듣고 미리 일어나고 있는 모양이었다.
침상 위에서 가볍게 예를 갖추는 무건을 보고 진예는 사람들을 전부 물린 뒤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아직 통증이 남아 있는지 불편한 기색을 애써 감추는 무건을 내려다보다가, 진예가 누군가 준비해 둔 앞의 의자에 앉았다.
“몸은 괜찮더냐.”
무건은 머뭇거리더니 이내 몸을 돌려 침상에 걸터앉아 그녀를 비스듬히 마주 보았다.
“예, 이 정도는 충분히 이겨 낼 수 있는 것 아시지 않습니까.”
대답이 썩 못마땅했다. 최초의 익재를 잡아 왔을 때도 아무렇지 않은 척했는데, 태의가 진찰을 보고 오더니 몸이 어느 한구석 괜찮은 곳 없이 전부 엉망이라 일렀었다.
사람이니 통증을 못 느끼는 것도 아닐 터. 진예는 무건이 둔감한 건지, 그저 숨기고 싶은 것일 뿐인지 구분이 안 되었다. 둘 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분명하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진예는 저와 정면에서 눈을 안 마주치려 살짝 시선을 비켜 간 무건의 옆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안색이 좋지 못한 그 얼굴을 쳐다보고 있자니 괜스레 속이 답답해졌다.
“네 어찌, 그런 생각을 하였느냐.”
지적하여 말하지 않아도 무건은 무얼 가리키는지 금세 알아차렸다. 그는 진예를 잠깐 눈에 담았다가 고개 숙이며 답했다.
“그자가 없으면 외로워하실 것 아닙니까?”
딱히 대단한 답이 돌아오리라 여기진 않았는데, 역시나였다. 진예는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대꾸했다.
“군주에게 외로움은 숙명이니라. 제아무리 충신이라 하여도 늘 곁에 있을 수는 없는 법이지.”
그에 무건이 진예를 마주 보았다. 진예가 그렇듯 무건도 진예의 말이 썩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애초에 그는 ‘군주’인 진예를 위해서 조서엽에게 돌아오라 이른 것이 아니었다.
“하여 마음에서도 조서엽을 지우셨습니까. 떠나보내셨습니까.”
“무건아.”
“아니 되니까, 하지만 폐하께선 그자를 더 붙잡을 수 없으니 제가 그리한 것입니다.”
정녕 제 마음을 모르냐는 듯이 무건이 단호히 말했다.
참으로 반박할 말 없게 하는 소리였다. 진예가 입을 닫고 지그시 보기만 하자 무건이 미간을 모았다. 화가 아니라 안타까움이 깃든 표정이었다.
그는 조금 누그러진 음성으로, 그러나 제게는 조금 아플 이야기를 흘려보냈다.
“그를 살리기 위해 거짓을 입에 올릴 수밖에 없는 폐하이시니 말입니다.”
진예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저번이 정말 마지막이었다. 아마 이 이상 서엽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도 없을 터다. 기실 그를 다시 보게 될지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이니까.
그러나 그와 별개로 또한 결심했다. 더는 서엽을 위해서 무건을 배신할 일은 결코 없으리라고. 아니, 자신은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눈앞의 사내를 버리는 선택은 하지 않을 것이었다.
한데 그런 그녀의 말이 억지처럼 느껴졌는지, 무건이 덧붙여 왔다.
“저 때문이라면 무리하여 그를 내보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투기하지 않겠다 하였습니다.”
그리 말하면서 정작 표정은 왜 저리 쓴지.
늘 제 감정에 솔직한 무건이 지금은 애써 참고 있었다. 그것이 눈에 훤히 보여서 진예는 목구멍에 피가 고이는 느낌이었다.
저를 위한 일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더는 누군가 제 옆에서 아픔을 견디며 스스로의 목을 조이길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진예는 무건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똑똑히 들려주었다.
“그래, 그대 때문이 맞다. 하지만 이제는 내보낼 것이다.”
“……폐하.”
“내 더 이상의 거짓도, 배신도 없느니라.”
진예는 소매에서 물건을 꺼내더니 손바닥 위에 그것을 올려놓고 무건 쪽으로 내밀었다. 옥가락지였다.
무건은 그것이 진예에게 있다는 사실에 당황해 제 몸을 더듬었다. 이내 제 품에 가락지가 없다는 걸 깨닫고는 진예에게 의문 어린 눈빛을 던졌다.
진예가 무건의 손에 가락지를 쥐여 주며 마땅한 답을 해 주었다.
“짐의 유일한 사내로서, 그대는 모든 증명을 해냈다.”
그리고 몸을 조금 일으켰다. 무건이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진예는 그의 다부진 턱을 손으로 쓸며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후궁이라 이름 붙이기엔 곱상하지는 않지만 분명 사내답게 잘생긴 이목구비였다. 그를 내치고 싶었던 시절에도 이 얼굴은 썩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것을 떠올리면 사실 자신은 이 사내를 아예 싫어했던 것은 아니지 않을까.
“그러니 이번엔 짐이, 마땅히 그대가 요구한 증명을 해내야 하겠지?”
묻고는 진예가 무건의 입술에 제 것을 갖다 댔다. 살며시 맞닿고 떨어지는 그 짧은 순간에, 떨림이 이는 것이 입술을 통해 고스란히 느껴졌다.
다시금 무건의 고동색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왔을 때, 진예는 그곳에 이채가 도는 것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무건이 아직은 혼란이 담긴 목소리로 그녀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진…… 예?”
“맹세하지.”
진예는 가락지를 쥐여 주었던 그의 손에 제 손을 겹치며 앞으로 절대 변치 않을 서약을 했다.
“그대가 배신하지 않는다면 짐 또한 그대를 결코 버리지 않겠다.”
무건은 한순간 숨마저 멈추었다. 진예를 올려다보는 그의 눈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대가 곁에 있는 한, 짐은 유일한 사내인 연무건과 신념을 함께하겠노라.”
무건은 한동안 눈만 깜빡일 뿐, 입술만 몇 번이나 달싹였다.
어디서 머리를 맞은 것도 아닌데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토록 바라던 말이라 그런지 오히려 듣고 나니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진 탓이다.
몇 번이나 진예가 한 말을 입으로, 머릿속으로 곱씹고 나서야 무건의 심장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눈앞이 흔들리고 가슴이 떨려 왔다. 누군가 심장을 거세게 내리찧는 것처럼 쿵, 쿵, 과도하게 뛰어 대는 것에 숨을 참아 봤지만 전혀 진정되지 않았다.
무건이 진예의 손이 닿은 제 손에 놓인 가락지를 내려다보았다. 눈꺼풀이 떨렸다.
몇 번이나 진예와 자신 사이를 오가면서, 결국은 전해 주지 못하리라 여겼었는데……. 정말로 꿈같은 이야기였다. 그래서 더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녀에게 확인했다.
진예가 제 말을 물릴 성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말이다.
“사실, 입니까……?”
무건의 반응을 지켜보던 진예가 주저함 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예부터 천자의 입에 오르는 말은 천금보다 더 귀하다 하였지.”
무건은 허리를 끌어다 와락 안아 버렸다. 그가 진예의 몸에 자신의 얼굴을 묻으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자신이 늘 그리워하는 그녀의 체향이 코 속에 훅 들어왔다.
꿈도, 환상도 아니었다.
‘말이 되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거짓 같지만 진예는 진실이라고 말해 주었다.
무건은 지금의 벅찬 감정을 어떻게 쏟아 내야 할지 전혀 알 수가 없어졌다.
그녀의 고백을 받았는데도 사실이냐고 묻는 말 외에는 떠오르는 단어가 하나도 없다니, 왜 이렇게 멍청한 거냐고 스스로를 한없이 꾸짖고 싶어졌다.
진예는 저를 안은 팔이 살며시 떨리는 것을 느끼며 한마디 덧붙였다.
“더는 그대에게 거짓도, 숨김도 없을 것이다.”
무건은 다시 큰 숨을 들이켜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손이 진예의 위팔을 끌어당겼다. 무건이 양 입꼬리를 올리며 입술을 휘었다.
“예, 예. 연모하옵니다, 폐하.”
그다지 강한 힘은 아니었으나 진예는 순순히 무건의 의도대로 허리를 숙였다.
입술이 살며시 부딪쳤다가 떨어지고, 다시 부딪쳤을 때였다. 무건의 손이 그녀의 목덜미를 감싸 왔다.
진예가 눈을 감고 조금 고개를 틀어 주자 무건이 작은 입의 가운데를 가르며 들어왔다. 이내 입 안에 단것이라도 들었다는 듯이, 그의 혀가 진예의 혀를 부드럽게 감았다.
마치 천천히 음미하는 것 같이, 애가 탈 정도로 느릿하고 조심스러운 행위가 이어졌다. 무건은 몇 번이고 입술을 떼었다 붙이기를 반복하며, 더운 숨을 흘려보냈다.
점점 숨소리가 짙어져 갈 무렵, 무건이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진예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들릴 듯 말 듯 한 나직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연모합니다, 진예…….”
그에 진예 역시 살며시 눈을 떴다. 눈꺼풀 사이로 살며시 비치는 깊고 붉은 눈동자가 참으로 어여뻤다.
그냥 이대로 시간이 멈추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상황이 너무나 황홀해서, 아직도 모든 게 꿈이고, 환상일 것만 같아 두려웠다.
그래서 무건은 진예를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무방비한 상태였던 그녀가 무건에게 이끌려 그의 무릎 위에 주저앉아 버렸다.
진예가 당황해 무어라 하기 전에 무건의 손이 얼굴을 감싸더니, 엄지가 그녀의 눈가를 슥 훑었다. 귀한 보옥이라도 되는 듯이 지극히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무건은 왜인지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금방 사라질 사람을 보는 양 간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저의 가장 큰 바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또 무슨 간지러운 소리를 하려고 이러나 싶어 진예는 푹 웃을 뻔했으나, 참고 반문했다.
“무엇이더냐.”
“폐하의 이 옥안에서 그늘이 걷히는 것입니다.”
예상과는 조금 다른 말이 들려와 진예가 가만히 뒷말을 기다렸다.
“저에게는 말 못 할 아픔이 있는 것 알고 있습니다.”
“……연 귀인.”
진예는 그가 언급한 ‘말 못 할 아픔’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들었다.
누군가 그에게 무슨 말인가를 해 주었던 걸까. 그렇다기엔 궁 안에 함구령을 내렸으니 목숨을 걸고서 자신의 옛이야기를 무건에게 함부로 흘려 댄 이는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안 그런 듯 보이면서도 의외로 눈치가 빠르고 감이 좋은 그이니, 어쩌면 여러 단서를 줍고 또 주워서 희미한 그림이라도 그려 놨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그는 한때, 자신이 살았던 융경궁에 머물렀었으니까.
다만 선황과 선황후에 대한 이야기는 이 시점에 듣기에 무척이나 거북한 이야기였다. 무건이 어떤 이야기를 이어 갈지 몰라서 더더욱 말이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저절로 진예의 표정이 굳었다. 그런데 무건은 당황하지 않았다. 낯에 옅은 연민의 빛이 떠올랐으나 마치 현자라도 되는 양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지도 않았다.
“섣불리 위로의 말씀은 드리지 않을 겁니다. 하루빨리 극복해 내라고도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진예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자문했다.
과연 자신의 그날들은 극복이 가능한 일이긴 할까.
아니, 과연 극복해야만 하는 일일까.
언젠가 서엽에게 말했듯이 그들의 증오도, 그로 말미암은 스스로의 불행도 모두 자신의 삶 그 자체였다.
진예는 또한 알았다, 그 지독한 불행이 바로 환의 군주인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 냈다는 것을. 여태껏 그 미움을 자양분 삼아 자신은 더 강하고 단단해져 왔으니까.
무엇보다 진예는 더는 선황과 선황후, 그리고 화친왕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이전에 위장군에게서 선황의 병명을 듣고 얼마나 허무했던지.
자신의 어린 시절의 행복을 통째로 빼앗아 갔던 선황 또한 결국 제 죽음을 두려워하는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음을 확인하고 나니 참으로 처량하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에게 필요한 일은…… 그 일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었다.
문득 무건이 그녀의 몸을 당겼다. 진예는 그의 얼굴이 닿을 듯이 바짝 가까워져 오는 것을 굳이 피하지 않고 눈을 마주했다.
무건 역시 그 짙은 고동색 눈에 그녀를 한가득 담은 채 엷게 웃음기를 띠었다.
“또한 폐하께서는 억지로 다디단 말을 입에 올리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진예는 저도 모르게 작게 웃어 버렸다. 무건의 말대로 달콤한 말을 지껄여 줄 준비는 아직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제가 그만큼 더 많이 들려드릴 터이니 조금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걸로 너는 충분한 걸까.
아무것도 돌려받지 못하고 그저 쏟아붓기만 해도, 그래도 너는 떠나려 하지 않을까.
그리 물으면 무건은 그렇다고 대답해 주리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이 무건은 제 입술을 움직여 살며시 이마에 내려앉았다.
진예가 그에 다시 눈을 감으니 무건은 화인을 새기듯이 제 입술을 꾹 눌렀다가 이어 눈가에, 뺨에, 코에 나비처럼 앉았다가 떠나갔다.
그리고 윗입술을 살짝 빨고는 고개를 살며시 기울여 더 깊게 입을 맞추었다.
입이 닿을 때 미미하게 스며들어 오는 그의 숨결이 어째서인지 너무나 달아서, 진예는 가슴이 죄어 오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심장 어림에서 시작된 기이한 찌릿함이, 목을 타고 올라와 얼굴이 살며시 뜨겁게 하는 것이 낯설어 진예가 실눈을 뜬 순간이었다.
무건이 다시 그녀의 눈두덩에 입술을 내려 시야를 가렸다. 그러고는 도로 떨어진 무건이 귓가에 속삭여 왔다.
“폐하께 제가 보여 드릴 것입니다.”
“무얼 말이냐.”
“이 세상에, 무조건적인 호의도 있다는 것을.”
무건의 말에 진예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두 눈 가득 무건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의 눈빛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것을 들여다보는 듯이 부드럽고 따뜻했다.
“증오, 불행, 비극. 세상에 나쁜 것도 많지요. 심지어는 이유도 모를 미움을 받을 때도 있고.”
“…….”
“하지만 그와 달리 행운과 기쁨이 찾아올 때도 있지 않습니까. 또, 이유 모를 미움이 있으니 이유 모를 사랑과 연민과 연정 또한 있을 것입니다.”
그의 말은 이전의 진예였다면 믿지 못하겠다며 코웃음을 칠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그녀는 반박하지 않았다.
무건의 표정과 말투가 너무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덧붙였다.
“아무 조건도 없는.”
무건에게 이 운명은 절대였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대체하지 못하는 그 무엇이었다.
그러니 무건은 진예가 자신과의 관계에 있어서 어떤 불안도 느끼지 않길 바랐다.
따라서 그녀가 용기 내어 전한 서약에 무건은 자신 역시 그에 상응하는, 아니 그 이상의 말을 들려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이 연무건 또한 맹세하겠습니다.”
자신의 모든 진심을 담아, 한 치의 거짓도 없이.
“폐하께서 저를 몇 번을 배신하셔도, 떠나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곁에 없으셔도 신념을 함께할 것입니다.”
지금껏 그녀의 옆으로 다가오기 위해 몇 번이나 목숨을 걸었듯이, 이 서약 또한 스스로의 모든 걸 다 걸고 지킬 것이었다.
“폐하의 모든 의심이 거두어질 때까지, 제가 증명해 내겠습니다. 몇 년이든, 어쩌면 평생이 걸린다 해도.”
이제 무건의 가장 첫 번째 바람은, 진예의 세상이 더 밝아지는 것이었다.
햇살 한 번 쬐어 본 적 없는 그녀의 삭막한 마음에 꽃이 피길 바랐다.
그러한 마음을 담아 무건은 다시금 진예의 몸을 끌어당겨, 그 어느 때보다 그녀를 거세게 안았다.
그러자 그때까지 아무런 말이 없던 진예의 손이 등 뒤로 올라왔다.
그에 무건은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무건에게 있어 가장 기뻐해야 하는 순간이었지만, 과한 희열 때문인지 눈가가 뜨거워져 왔다.
하여 북받치는 감정을 삭이고자 숨을 크게 들이켜는 소리를 들은 진예가 넌지시 물었다.
“……우는 것이냐.”
무건은 진예에게 얼굴을 묻은 채로 고개를 흔들었다.
“이 기쁜 순간에 제가 어찌 울겠습니까.”
그렇지만 무건의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진예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다가 그저 더 깊이 그와 포옹했다.
몸이 겹쳐지자 무건의 심장 박동이 몸을 통해 전해졌다. 또한 숨을 쉴 때마다 그의 가슴이 들썩이는 것이 명확히 와닿았다.
그것을 느끼며 진예는 무건이 소리 없이 눈물짓고 있음을 짐작했다.
솔직히 조금 당황스러웠다. 무건은 눈물 같은 건 절대 비치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다. 가진 것은 쥐뿔 없어도 언제나 당당하고, 부끄럼 따위 없었던 그이니까.
“네 어찌 이리 약하게 굴까…….”
무심코 흘려 내보낸 그 혼잣말에 무건이 고개를 들었다. 몸을 조금 떼어 내 눈을 마주쳐 오는데, 얼굴에서 눈물의 기운은 거두어진 뒤였다. 다만 조금 붉어진 눈만이 미약한 흔적을 내보일 뿐이었다.
“아니, 더 강해지는 과정인 것이지요. 아픔이 없는 강함이란 허상이 아니겠습니까. 폐하께서 그러하듯이.”
“정녕 그리 생각하더냐.”
“이 연무건, 감히 폐하의 앞에서 거짓을 입에 올린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제 처지를 잊은 듯이 나불거린 적은 있어도, 무건이 그녀 앞에서 한 순간도 진실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진예가 차갑게 밀쳐 내고, 모든 것을 숨기려 할 때조차도 무건은 그랬다.
그 사실을 상기한 진예의 가슴에 먹이 번지듯 따스한 기운이 퍼져 갔다. 제 안에 이런 온기가 피어날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은 실로 처음이었다.
* * *
진예가 무건이 있던 의관원에서 나와 편전으로 도로 돌아갔다. 그러고 얼마 안 가 검은 발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태의는 발 너머에서도 느껴지는 진예의 위엄에 짓눌려 때아니게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태의가 바닥에 머리를 바짝 조아리며 무건의 상태에 대해 알렸다.
“귀인마마께서 아직은 봉합한 상처가 완전히 나은 때가 아닌 터라, 환부가 다시 벌어질 수 있으니 극히 조심을 해야 할 때이옵니다.”
“적당히 돌아다니려면 얼마나 걸리겠는가.”
“지금도 가능은 하옵니다만, 몸을 격하게 움직이시는 일은 삼가야 할 것이옵니다.”
태의의 대답을 듣고 진예는 슬쩍 눈을 가늘게 좁혔다.
무건을 의관원에 너무 오래 두면 여기저기서 말들이 많아질 테니 빨리 나오도록 하는 게 맞긴 한데, 그가 가만히 앉아만 있을 성미는 아니라는 점이 문제였다.
워낙 튼튼한 놈이니 어디서 또 다쳐도 죽지는 않을 듯하지만, 그렇다고 황제의 유일한 비가 자꾸 다쳐서 돌아다니는 것도 이제는 안 될 일이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고민이 되긴 했지만, 일단 되돌려 보내는 게 먼저이긴 한 것 같아 한숨을 섞은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일단 봉아궁으로 돌려보내도 되긴 하겠군……. 당분간은 매일 들면서 살피도록 하라.”
“예, 폐하.”
그러고 태의를 내보내려 고개를 까딱이는데, 태의가 일어나기 전에 벽 쪽에 물러나 있던 박 태감이 얼른 앞으로 나서며 말을 붙였다.
“밤이 늦긴 하였으나 이왕 태의를 들인 김에 폐하께서도 진맥을 받아 보심이 좋을 듯하옵니다.”
그의 말에 태의가 짐짓 놀라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폐하, 혹 환후가 있으시옵니까?”
진예와 박 태감이 거의 동시에 답했다.
“그렇지 않다.”
“얼마 전에 어지럼증을 겪으셨네.”
“…….”
진예가 발 너머에서 박 태감을 슬쩍 노려보았으나 황궁에서 오래 묵은 능구렁이와 같은 존재인 늙은 태감은 진예의 눈총을 받고도 멈추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런 일로 분노의 화살을 맞는 것보다, 황제를 보필하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게 태감의 존재 이유였다.
박 태감은 덤덤한 어투로 최근 진예에게서 보인 변화들을 읊었다.
“또한 최근 들어 입맛이 없으신지 이전보다 음식을 더 많이 남기시네. 그리고 예년 겨울 때보다 추위를 더 타고 계시나, 기침은 아니 하시고 다른 증상은 없으시지. 몸살은 아닌 듯한데 원인을 모르겠으니 진맥으로 살피도록 하게.”
진예는 들으면서 제가 정말로 그랬냐고 묻고 싶어졌다. 그러나 태의의 앞이니 태감을 다그치지 않고 일단 하는 대로 두고 봤다.
박 태감은 바로 옆에서 하루 종일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본다. 그러니 어쩌면 본인보다 더 예민하게 변화를 알아차렸을 수도 있긴 했다.
어찌 되었든 줄줄이 흘러나온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던 태의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곧 진예의 손목에 실이 묶였다.
이어 발 너머에서 눈을 감은 태의가 팽팽하게 당겨진 실의 끝을 잡고 신중하게 진맥을 시작했다.
그러다 살며시 고개를 갸웃한 태의가 박 태감에게 일렀다.
“혹 직접 진맥을 진행하여도 괜찮겠사옵니까?”
진맥을 하라고 부추긴 박 태감이긴 했지만 태의의 반응에 그가 전례 없이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폐하께 정말로 환후라도 있는 겐가?”
“그것은 아닌 듯하오나…… 확신할 수가 없어 더 자세히 살펴야 할 듯하옵니다.”
태의의 말을 들은 진예는 조금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태의가 만약에 어디가 안 좋다고 하면 그날부터 박 태감의 잔소리가 아주 심해질 것이 눈에 뻔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제 몸에 정말로 이상이 있다면 큰일이긴 하니 이대로 태의를 물릴 수는 없었다.
최근에, 글쎄, 조금 피로를 빨리 느끼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윤허한다.”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자 태의가 잔뜩 굳은 얼굴로 발 너머로 건너왔다.
그는 진예의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하고, 다만 궁인들이 옆에서 걷어 주는 소매 밑의 가는 손목에 손을 가져다 댔다.
파란 핏줄이 다 보일 만큼 새하얀 살결을 살며시 누르는 태의를 진예나 박 태감 외 편전 내에 있는 모두가 집중하여 바라보았다.
신중하게 진맥을 마친 태의가 마침내 질문 하나를 던졌다.
“송구하오나, 폐하. 혹 가장 마지막 달거리가 언제쯤이셨는지 여쭙사옵니다.”
“…….”
진예가 순간 미간을 좁혔다. 설마 제가 잘못 알아들은 것은 아닐 테고…….
‘설마.’
이어 옆에 서 있던 박 태감도 질문을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진예는 기억을 더듬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 기억에는 따로 없구나. 기억하고 있더냐?”
뒷말은 옆의 궁인에게 묻는 말이었다. 옆에서 늘 그녀를 보좌하는 이이니 아마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녀의 입에서 작게 5주 정도 된 것 같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여기까지 들었는데 이어질 말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그야말로 눈치가 없는 것이었다. 태의는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감축드리옵니다, 폐하. 틀림없는 태기이옵니다.”
그의 말소리에 진심으로 기뻐하는 기색이 담겨 있었지만 진예는 상황을 당장 기껍게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그야 무건과 수차례 관계를 가지면서 이런 일이 아예 없으리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심지어는 그와의 사이에서 후사를 보는 것이 언젠가 이루어야 할 제 의무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짐이, 아이를 가졌단 말이냐?”
아무래도 당장의 현실처럼 다가오지는 않았다.
제 배 속에 아이가 생겼다니.
그것도 무건과 자신의 아이가.
“감축드리옵니다, 폐하.”
생각하는 와중에 박 태감이 먼저 고개를 숙이며 그리 말했다. 그러자 편전 안에 들어와 있던 이들 모두가 그 말을 따라 했다.
차라리 조금만 뒤였으면, 아니 아예 이전이었으면 마음가짐이 달랐을 텐데.
하필이면 무건이 몸져누워서 대례식까지 취소된 뒤라 시기가 별로 좋지가 않아 보였다.
게다가 이렇게 되면 대례식과 그 뒤의 출정 계획이 어그러지다 못해, 전면적으로 계획을 다시 잡아야 할 수준이었다.
어쩌면 그토록 염원했던 익재 토벌의 마지막을 제 손으로 이루어 내지 못할 수도 있었다.
진예는 소매 밑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아니, 그럴 수는 없다…….’
아이의 존재는 축복받아 마땅하기는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익재 토벌 역시 중요했다.
황위에 오른 뒤 내내 진예가 마음속에 품어 온 숙원과도 같은 일이었다.
진예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태의는 눈치를 보다가 걸음을 물려 다시 발 앞으로 나갔다. 그러자 진예가 생글생글하며 기뻐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박 태감을 바라보았다.
“박 태감.”
부르자마자 벌써부터 목소리에 흥분감이 묻어나고 있는 박 태감이 흔치 않게 하명을 받기도 전에 앞으로 일을 줄줄이 말했다.
“예, 폐하. 이 일을 봉아궁에 서둘러 알리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겠사옵니까? 귀인마마께서 무척 기뻐하실 것으로…….”
“함구하라.”
진예가 말허리를 끊고 그리 답하자 박 태감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말소리가 급격하게 식었다.
“하오나 폐하.”
진예가 고개를 흔들었다. 영원히 비밀로 하겠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었다.
무건에게 이제는 솔직해지기로 스스로 다짐했으니까.
그렇지만 이건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단지 아이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여기엔 지나치게 많은 일이 얽혀 있었다.
“연 귀인에게는 짐이 직접 알릴 터이니, 며칠만 함구하도록 해.”
“…….”
“오래도록 비밀로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준비가 필요한 것뿐이니 사흘 정도면 될 게다.”
그래, 길게는 아니다.
고민의 시간은 사흘이면 되었다. 그 정도면, 앞으로 어떻게 할지 대략 정리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은 여인이기 이전에 환을 이끄는 황제이기에, 당연히 대의를 함께 가져가야 했다.
긴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다행히 진예의 의중을 어렴풋이 파악한 박 태감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한발 물러섰다.
“……하면 그리하겠사옵니다.”
* * *
비가 땅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의식 위에 덮어씌워졌던 장막이 서서히 거두어졌다. 얼마 안 가 눈이 천천히 뜨이면서 이채를 잃은 흐릿한 눈동자가 눈꺼풀 사이로 드러났다.
익숙한 천장이었지만 왜인지 허전해 보이는 방 안의 풍경에 서엽은 한동안 눈을 깜빡이는 것 외에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코에 흘러들어 오는 냄새는 분명 오래도록 머문 제 방의 냄새인데, 이상하게도 휑한 것에 서엽은 이내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의식을 잃기 전, 다음에 눈떴을 때는 지옥일 거라 생각했는데 지옥보다 더 끔찍한 현실에서 깨어난 것이었다.
그는 불편감이 남아 있는 몸을 일으켰다. 발갛게 충혈된 눈이 바깥에 비가 와서인지 조금 어둑한 방 안을 훑었다.
방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서궤도, 서랍장도 모두 다 사라졌다. 제가 늘 가지고 다니던 칼도 지금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서엽은 헛웃음을 짓다가 손을 올려 제 배를 더듬었다. 그러자 붕대가 단단히 감겨 있는 것이 느껴져 시선을 내렸다. 그곳을 손으로 살짝 누르자 단숨에 통증이 올라와 서엽이 눈살을 찌푸렸다.
진예에게 찔린 부위였다.
역시 그 일이 꿈은 아니었던 것이다.
제가 연무건을 찾아가 그를 찌르고, 진예가 자신을 찔렀던 그 끔찍한 상황이 진짜였다는 것에 서엽은 입술을 물었다.
차라리 그대로 죽어 버렸으면, 진예의 품에 안겨서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왜 이리 자신의 명줄은 긴지.
아니, 진예가 사람을 찔러 놓고 안 죽이는 실수를 했을 리는 없으니 분명 일부러 살려 둔 것이겠지만.
“왜…….”
서엽의 입에서 의문이 흘러나왔다.
진예가 왜 자신을 살려 두었나. 어째서, 그리고 어떻게.
무건을 찌르면서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그를 해한 죄로 목이 날아가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번만큼은 분명 제아무리 황제라 하여도 지켜 주지 못할 일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살아 있는 데다 심지어는 눈을 뜨니 집이라니. 말이 안 되지 않나.
어떻게 된 경위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에 대한 의문에 앞서서 이 상황 자체가 너무나 끔찍했다. 이런 건 사는 게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살고 싶지는 않았다.
차라리 죽게 내버려 두지.
그냥 연무건을 죽이고 저도 목이 잘리게 두지.
대체 이런 삶에 어떤 가치가 있다고 진예는 자신을 이렇게까지 질기게 살려 두는 건가. 어차피 곁에 둘 수도 없다고 하면서, 그러면 그냥 무슨 짓을 하든 버려 두면 되는데 대체 왜…….
“흐, 흐읍…….”
서엽은 고개를 숙이고 금세 울음을 터트렸다. 눈물을 흘리기까지 순식간이었다. 이불 위로 물기가 툭툭 떨어지는 것을 봤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질러 왔다.
“깨어났더냐.”
아버지 조춘경이었다. 서엽이 제 눈물을 수습하기 전에 방문이 활짝 열리면서 풍채 좋은 아비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렇게 깨어나자마자 들어온 것을 보니 아무래도 조춘경이 직접 앞을 지키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서엽은 문을 닫고 안으로 성큼 들어온 그와 눈을 마주쳤으나 따로 안부의 말을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조춘경 역시 뒷짐 지고 서서 그런 아들을 내려다보며 꽤 긴 침묵을 지켰다.
마치 제게 할 말 없냐는 듯이 묵묵히 기다리고 있는 조춘경의 모습을 보다가, 서엽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연 귀인을 제가 죽이려 하였습니다. 칼로 찔렀습니다.”
“…….”
“한데 왜 제가 여기 있습니까. 벌써 목이 잘려 효수되어야 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러기를 바랐다. 차라리 제가 죽어서 모든 것이 끝나기를.
그럼 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날 수도 있었겠지만, 저와 별개로 진예는 조춘경 또한 제법 아끼고 있으니 멸문하는 상황까지는 막아 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심지어는 제 목숨까지 결국은 살려 냈다는 것이 지금의 비극이었다.
“왜, 어째서 제가 살아 있습니까?”
아직도 살아 있다 해도, 옥사 안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곳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으리라고. 무건을 죽이러 가면서 그가 죽지 않을 상황까지는 상상해 봤어도 이런 상황은 조금도 떠올려 보지 않았었다.
조춘경이 그런 제 아들을 착잡한 눈으로 내려다보면서 짧게 답했다.
“폐하께서 널 돌려보내 주셨느니라.”
“…….”
그러니 목숨 소중한 줄 알라는 듯한 말투였다. 그제야 서엽은 이 방에 왜 아무것도 없는지 알아차렸다. 혹여 목매달지 말라는 의미였다.
그에 서엽은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조춘경은 내내 아무 말 없이 지켜보았다. 다시금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가 웃었다가 정신이 나간 듯이 구는 제 아들을 보며, 다만 뒷짐 진 손을 구겨 주먹을 쥘 뿐이었다.
그러나 점점 힘없이 허리를 숙이고 이불에 고개를 묻고서 오열하는 아들을 내려다보는 눈에는 고통이 스몄다. 그도 서서히 숨을 몰아쉬다가 결국 버티지 못하고 돌아섰다.
그는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집사에게 일렀다.
“빈틈없이 잘 감시토록 하게.”
“예, 조 공.”
그러고는 복도를 빠져나갔다.
서엽은 바깥에서 집사와 집 안의 식솔들이 저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지만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러다 탈진할 것처럼 멍한 현기증이 찾아올 무렵이었다. 그의 몸에 둘린 붕대를 갈러 몇몇이 들어왔다. 서엽에게 따로 허락도 받지 않고 멋대로 환부를 들여다보고는 다시 새 붕대를 감아 놓았다.
그동안 서엽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양 축 늘어져만 있었다. 그런 그를 다들 불안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이어 묽은 흰죽이 앞에 내밀어졌다. 그러나 그것을 서엽이 입에 댈 리는 없었다.
이후에도 방문은 닫히지 않고 집사가 내내 감시했다. 그래도 가만히 놔두라는 명을 받았는지, 억지로 밥을 먹이려 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여 서엽 역시 죽이 식는 모습만 힘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반상이 도로 나갔다. 슬슬 밤이 찾아오자 복도 쪽에 불이 밝혀졌다.
수 시간이 지난 후, 서엽은 천장을 치는 빗소리와 복도에서부터 비치는 희미한 불빛을 아무 의미 없이 듣고 보며 서서히 생각이라는 것을 머리에 집어넣었다.
이렇게 대놓고 감시하는 상황에서는 혀를 깨물어 봤자 또 어떻게든 살려 놓을 터이다. 그런 무의미한 짓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서엽이 문득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집사가 바짝 긴장하는 것이 보였다. 상관 않고 서엽이 복도로 발을 내밀자 그가 조금 당황한 얼굴로 앞을 가로막았다.
“도련님, 갑자기 어디를 가시렵니까.”
설마 아비를 보러 가겠단 생각이 불쑥 든 것도 아닐 터인데.
서엽이 이리 빨리 정신을 차리고 일어날 줄은 몰랐던 집사가 그리 물었다. 서엽은 집사와 복도에 앉아 있던 다른 식솔들을 둘러보다가 한마디 툭 뱉었다.
“미안하네.”
“예?”
이어 서엽의 주먹이 집사의 명치에 냅다 꽂혔다. 단숨에 기절해 버리는 집사를 보고 나머지가 당황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서엽은 자신을 막기 위해 달려드는 그들을 가볍게 제압하고 복도를 지나갔다. 나가는 길에 있는 방 중 하나에 제 물건들이 처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서엽은 그중에서 제 칼만 챙겼다.
그의 방이 있는 동상방 바깥으로 나가자 곧바로 빗물이 머리를 적시기 시작했다. 서엽은 상관 않고 신발을 신고서 마구간으로 향했다.
누군가 서엽을 발견하고 조춘경이 있을 본채 쪽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보여 그가 발을 재촉했다.
마구간으로 간 그는 제가 오랫동안 타 왔던 말을 끌었다. 한데 주인의 심리를 읽은 것인지 녀석이 마구간 밖으로 나오면서도 히이잉, 구슬프게 우는 것이었다.
서엽은 녀석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서둘러 대문으로 향했다. 잠긴 대문을 열고 밖으로 막 나가려 했을 때였다. 뒤에서 조춘경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엽아!”
서엽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그대로 대문의 문턱을 넘었다. 그사이 몇몇이 달려와 그를 막으려 했지만 이미 서엽이 말에 올라탄 뒤였다.
“어서, 어서 말을 가져오너라!”
뒤에서 울려 퍼지는 혼란한 소리를 뒤로하고 서엽이 빗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빠르게 달려 나가는 그의 모습에 거리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 옆으로 비켜섰다. 서엽은 말을 거칠게 몰아 황성 남문을 향해 달렸다.
시간이 얼마나 됐는지는 모르지만 늦으면 문이 잠길 수도 있으니 서둘러야 했다.
‘폐하, 진예…….’
서엽은 속으로 제 주인의 이름을 읊조렸다.
수천, 수만 번을 생각해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은 그녀의 곁이 아니면, 살 수 없었다. 살아갈 이유가 없었다.
평생을 진예를 지키며 살아왔다. 그것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갑자기 다른 것을 하라 이르면, 못 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그러니, 그러니까…….
자신의 마지막 역시 이렇게 소모하는 것이 맞다.
그리고 가능하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게 죽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진예가 자신의 존재는 잊지는 않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이 정도의 욕심은 부려도 되지 않나.
어차피 나를 생각하면서 웃지 않을 당신이니 차라리 나의 죽음으로 인해 가슴 찢어지게 울어 줬으면 좋겠다.
너무나 이기적인 소원임을 알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진예에게서 잊힌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서엽은 말을 재촉해 누구보다 빠르게 황성을 가로질렀다. 그런 그의 뒤를 조춘경이 급히 따랐으나 결국 놓치고 말았다.
갈림길 앞에서 말을 멈춘 조춘경은 아들의 자취가 완전히 사라진 것에 망연자실하게 멈춰 있었다.
그러다 점점 차가워지는 빗기운이 소매에 스며들었을 때, 뒤돌아 반대 방향인 북쪽으로 말 머리를 돌렸다.
황궁으로 향하는 조춘경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했다.
* * *
며칠 비가 오락가락하더니 또다시 오후 느지막할 때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편전의 분위기가 왜인지 더 차분하게 가라앉은 듯 보였다.
무건을 불러 오라고 봉아궁에 사람을 보내 놓고, 진예는 상소문들을 차분히 훑고 있었다. 실은 의도적으로 딴짓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생각을 정리하는 데까지는 사실 그리 길게 소요되지 않았다. 박 태감에게 사흘은 함구하라 일렀지만 하루면 충분했다.
역시 자신은 아이만 생각하면서 모든 걸 내팽개칠 수는 없었다. 아이에게는 미안했지만 그러기엔 제가 짊어진 의무는 그만큼 너무나 무거운 것이었다.
다만 제 뜻을 전부 따르겠다고는 했어도 무건이 이를 어찌 받아들일지는 미지수였다.
그가 제 계획을 듣고 안 된다고 하면 무어라 사탕발림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밖에서 내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방금 조춘경 공께서 입궐을 하여 폐하께 알현을 청하고 있사옵니다.”
그녀가 데려오라던 무건의 소식이 아니었다. 얘기를 듣고 옆에 서 있던 박 태감 역시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의외의 방문에 진예가 잠깐 대답이 없자 바깥에서 다시 물어 왔다.
“어찌하오리까?”
무건이 와서 순서를 기다리게 되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조춘경에게 돌아가라 이르기에는 저도 용건이 궁금했다. 분명 서엽의 일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진예가 보던 두루마리를 내려놓고 답했다.
“들라 하라.”
“예, 폐하.”
궁인들이 곧장 진예의 모습을 가리기 위해 검은 발을 내렸고, 문이 열리며 조춘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밖에 비가 내린다고는 하나 조춘경은 일구종도 걸치지 않았던지 무방비하게 젖은 모습이었다. 그에 진예가 슬쩍 미간을 좁히는 사이, 그가 몸을 낮추며 예를 올렸다.
“홍복을 누리소서, 황제 폐하.”
그리 좋지 못한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이 당연해 보였지만, 진예가 일단 물었다.
“연통도 없이 어쩐 일인가.”
“송구하옵니다.”
용건을 바로 꺼내지 않는 것에 진예는 일단 주변에서 사람을 물렸다.
“발을 올리고 모두 나가 보거라.”
그래 봤자 밖에 소리가 다 들리긴 할 테지만 조춘경은 독대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해 고개를 더욱 조아렸다.
방에 두 사람만 남자 진예가 먼저 말꼬를 텄다.
“그래, 조 후는 깨어났는가.”
“…….”
하문하는 소리를 듣고도 조춘경은 지그시 눈을 감을 뿐 당장 대꾸하지는 못했다. 그에 진예가 채근하는 소리를 냈다.
“어찌 대답을 아니 하는가?”
“깨어나긴 하였사옵니다만, 혹 황궁에서는 소식을 알 수 있을까 하여 급히 입궐을 하였나이다.”
심상치 않은 조춘경의 말에 진예는 저절로 신경이 예민해져 옴을 느꼈다. 조서엽을 제집으로 돌려보냈는데, 그의 소식을 갑자기 황궁에서 찾다니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인가 싶었다.
“그게 무슨 뜻인가?”
“……서엽이가 사라졌나이다.”
“사라지다니. 그 몸을 이끌고 어딜 갔단 말이야?”
진예는 말을 하고는 깨달았다. 어째서 조춘경이 제게 왔는지 말이다. 다급해진 그녀가 큰 목소리로 바깥의 사람을 불렀다.
“박 태감!”
“예, 폐하.”
“조 후가 황성 문을 통과하였는지 알아보라! 통과하였다면 어디로 향했는지도. 당장!”
“명 받잡습니다.”
진예의 명에 문밖이 순식간에 소란해졌다. 그사이 조춘경이 허락을 받아 몇 걸음 더 가까이 오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폐하께 여쭐 것이 있사옵니다.”
진예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말을 이었다.
“서엽이가 귀인마마를 찔렀다는 것이 사실이옵니까?”
“……사실이다.”
“하면 또한 여쭙습니다. 어인 연유로 서엽이가 그 꼴이 된 것인지요.”
다친 서엽을 조춘경에게 데려다 두라고 하긴 했지만 아마 자초지종을 일러 준 사람은 없었을 터이다. 진예와 위장군이 자세한 경위를 숨겼기에 더더욱.
그렇지만 이리 직접 물어 온다면 조춘경에게는 솔직하게 말해 주는 편이 나았다. 누군가 안다면 큰일이 날 터이니 본인이 어디 가서 함부로 입을 놀릴 리도 없었다.
“조 후를 살리려면 그 수밖에 없었다. 하나, 그대를 볼 면목이 없군…….”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대충 에둘러 말했으나 조춘경은 바로 알아듣고는 참담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진심을 담아 진예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러고 소식을 꽤 오래 기다린 뒤에야 박 태감이 안으로 들어와 그녀에게 고했다.
“마침 위장군이 남문 성루에 있다가 황궁에 들었는데, 조 후가 통과한 것을 보았다 하옵니다. 어디로 가는지는 자세히 묻지는 못했으나, 서북쪽을 향하는 것 같았다고 하였사옵니다.”
“서북쪽이라면 봉토로 향하는 길도 아니지 않은가.”
진예가 그리 중얼거리며 서북쪽에 뭐가 있나 떠올려 보았다. 그러다 얼굴을 확 굳혔다. 황도의 서북쪽에 서엽이 딱히 갈 만한 곳은 없었지만, 지역적으로 중요한 곳은 하나가 있음을 곧장 떠올린 탓이다.
바로 읍주였다.
무건이 최초의 익재를 잡았다고는 하지만, 그곳은 여전히 위험 지대였다. 시일이 꽤 지났으니 최초의 익재만큼은 아니더라도 또 다른 놈이 우두머리가 되어 그곳에 도사리고 있을 터였다.
깨어나고 아무 의욕이 없을 서엽이 설마 갑자기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다른 곳으로 향했을 가능성은 전무할 터.
틀림없다. 그는 제 무덤으로 읍주를 정한 것이다.
조춘경 역시 같은 추론을 했는지 얼굴이 납빛이 되었다. 그가 다급히 물었다.
“소신, 이만 물러가도 되겠사옵니까?”
“조춘경…….”
진예는 그에게 당장 나가라 이를 수가 없었다. 서엽이 읍주로 향한 게 사실이라면 아무런 방비 없이 갔다간 조춘경도 같이 죽을 확률이 더 높았다.
그러나 조춘경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말했다.
“일전에 아비 된 자로서 그 아이를 어떻게든 살려 두겠다 폐하께 약조드렸사옵니다.”
“…….”
“아비가 어찌 아들을 저버릴 수 있겠나이까?”
그에 진예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물러가게.”
허락을 받은 조춘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다시 허리를 숙이며 엄숙한 목소리로 작별 인사를 올렸다.
“대환의 황제 폐하.”
진예가 고개를 들었다. 애써 표정을 담담히 유지하며 그를 바라보자 조춘경이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불충한 제 아들놈에게 늘 이리 마음을 써 주신 점, 숨이 멎을 때까지 잊지 않겠나이다.”
“어서, 가게.”
“무사히 돌아올 때까지 부디 폐하께서도 옥체를 보전하소서.”
그리 말하고 조춘경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무색하게 미련 없이 떠나 버렸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꽤나 매정했다. 그것을 끝으로 방 안으로 적막이 확 몰려들었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빗소리 속에서 진예는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듯한 느낌에 잠시간 정신을 가다듬기 위한 시간을 가졌다. 그러고는 박 태감을 돌아보았다.
침통한 표정인 박 태감을 보며 진예가 작게 물었다.
“연 귀인은 왔더냐.”
“예, 전 밖에서 기다리고 계시나이다.”
“들라 하거라.”
명을 받은 박 태감이 종종걸음으로 나가고는 오래 지나지 않아 무건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문이 닫힌 뒤 가볍게 예를 차리는 무건을 진예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비가 오는 와중에 내내 밖에서 기다렸을 무건은 옷자락이 미세하게 젖어 있었다. 그러나 불만의 기색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런 그에게 아이의 존재에 대해 알리고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그러다 염려하는 소리를 하면 적당히 받아 주고, 그래도 안 따라 줄 것이냐고 묻고, 그렇게 적당히 넘기려고 했건만.
생각이 길어지는 와중에 진예의 안색이 좋지 못한 것을 본 무건이 먼저 말을 건네어 왔다.
“방금 나간 것이 조 후의 아비라 들었습니다.”
그에 진예는 최대한 감정을 절제한 채, 무덤덤한 목소리로 일렀다.
“조 후가 사라졌다더군.”
“…….”
예상대로 무건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진예는 잠시 입을 다문 채 그를 응시했다.
왜 자꾸 무건에게 못 할 짓만 하는 상황이 오는지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그녀의 말이라면 반드시 지켜 줄 그라는 것을 알기에, 진예는 이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연무건, 그대밖에 믿을 이가 없다.”
그때까지 서 있던 무건이 한쪽 무릎을 꿇고 답했다.
“다만 명하십시오.”
“최초의 익재의 수급을 짐에게 갖다 바친 그대이니 어렵지 않은 명일 것이다.”
아직 그의 몸이 다 회복되지 않은 상태이지만 정말로 믿을 사람은 무건뿐이었다.
“당장 무장을 하고 나가 읍주를 쓸어버려라.”
사실상 조서엽을 구하라는 명령이었다. 무건 또한 그 말뜻을 알아챈 듯, 진예와 눈을 맞췄다. 똑바른 시선이 그녀를 짙게 응시해 왔다.
그렇지만 왜 자신에게 서엽을 구하라 명하냐는 의문 따위는 그의 눈빛에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그저 당연한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처럼 순순히 답해 왔을 따름이었다.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무사히 돌아와서.”
말하면서 진예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무릎 꿇은 무건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가는 동안 그가 시선으로 좇아왔다.
마침내 그녀가 무건의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진예의 붉은 눈이 제 앞의 순종적인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무건에게 아이가 생겼다는 말을 하기에는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 이야기를 하면 무건의 발걸음이 너무나 무거워질 것을 알기에.
진예가 턱 밑에 손을 넣어 무건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무건은 순순히 손길을 받아들이며 시선을 올려 진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대 품에 지닌 가락지를 짐에게 건네는 일이 연무건, 그대의 소임일 것이니.”
무건이 놀란 듯 잠시 숨을 크게 들이켰다. 진예는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마땅히 모두 이행할 수 있겠지?”
질문에 무건이 한 치의 머뭇거림 없이 답해 왔다.
“물론이옵니다, 나의 황제 폐하.”
그리고 진예의 손을 끌어간 무건이 작은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이번에도 역시 제 목숨을 걸고서라도 전부 수행해 내리라는, 깊은 맹세의 입맞춤이었다.
손등 위에 내려앉은 그의 표정은 경건하고도 엄숙했다. 진예는 그런 무건이 입술을 떼어 냈을 때, 이번에는 제 입술을 그의 것에 가져다 댔다가 금세 멀어졌다.
찰나에 스치고 지나간 접문이었지만 무건은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워 미소를 그렸다. 진예를 올려다보는 그의 눈이 부드럽고 따뜻한 빛을 띠었다.
“너무 염려치 마십시오. 말씀대로 폐하께서 원하는 일을 원하는 형태로, 전부 다 이루어 드릴 터이니.”
진예는 자신을 직시해 오는 무건의 곧은 눈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믿는다.”
“예. 폐하의 그 신뢰가 저를 지키는 방패요, 힘입니다.”
“더는 다치지도 말고.”
“노력하지요.”
무건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급한 일이라는 걸 알기에 바로 물러났으나, 뒷걸음쳐 문 앞까지 가는 동안 진예를 바라보는 무건의 눈빛엔 미련이 흘러넘쳤다.
그러나 문턱을 넘었을 때는 곧장 몸을 돌려 봉아궁으로 돌아가는 가마에 서둘러 몸을 실었다.
진예는 뒤늦게 나가 편전의 입구에 서서 무건을 태운 가마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옆에 서 있는 박 태감에게 일렀다.
“표기장군에게 파발을 띄워야겠다.”
“어인 내용으로 보내면 되겠사옵니까.”
“휘하의 모든 군사들과 함께 곧바로 읍주로 향하라 해야겠다. 내용은 짐이 직접 쓰지.”
박 태감이 알겠다는 의미로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 * *
홍 내관은 황궁 내관의 부름을 받고 갔는데 한참 동안 밖에 서 있을 때부터 어째 불안하다 싶었다. 그랬는데 역시나, 봉아궁으로 돌아오는 내내 아무 말이 없던 무건이 비 오는 날에 말을 가져오라 하자 기함한 홍 내관이 심각한 얼굴로 침전에 들었다.
작게 등잔불을 켜 놓은 침전 안에선 무건이 다른 내관들의 도움을 받아 갑주를 걸치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홍 내관이 사색이 되어 있는 사이, 뒤에서 어린 내관 하나가 다가왔다.
“귀인마마, 황궁에서 사람을 보내왔사옵니다.”
불과 한 식경도 지나지 않은 때에 진예를 만나고 왔는데, 다시 황궁에서 사람을 보냈다는 소리에 무건도, 홍 내관도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한시가 급한 상황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진예가 사람을 보낸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기에, 무건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들라 하게.”
곧 어깨에 묵직한 갑옷의 무게가 내려앉는 한편, 젊은 황궁 내관이 들어와 그의 앞에서 예를 올렸다.
“홍복을 누리소서, 귀인마마.”
황궁에서 온 내관의 손에는 두루마리와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무건이 잠시 제 주변의 내관들을 물렸다.
“무슨 일인가?”
“황제 폐하께서 급히 이것들을 전하라 이르셔서 찾아왔나이다.”
입구에 서 있던 홍 내관이 황궁 내관이 들고 있는 예의 물건들을 받아 무건에게 갖다주었다.
급히 전할 것이 뭔가 싶었는데, 내관이 건넨 두루마리에는 읍주로 향하는 최단 거리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아마 서엽이 향할 것으로 예상되는 경로일 터…….
그리고 얇은 종이에는 진예 특유의 예리해 보이는 필체가 채워진 채였다. 요는 읍주로 표기장군을 따라 보내겠다는 내용으로, 그와 그의 군사들이 언제쯤 읍주에 도착할 수 있는지 적혀 있는 것이었다.
내용을 보고 대략 이곳에서 자신이 읍주에 도착할 날짜를 계산하니 얼추 맞을 것도 같았다.
종이를 도로 접으며 무건은 입꼬리를 휘어 웃었다. 딱히 다정한 연서도 아니건만, 급히 준비해서 전한 진예의 마음이 어떠한지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무건이 두루마리와 종이를 황궁 내관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내 잘 확인하였다고 폐하께 말씀 올려 주시게.”
그의 말에 황궁 내관이 공손히 허리를 굽히고는 도로 나갔다.
무건은 이젠 정말 서둘러야 함을 느끼고 적당히 매무시를 갈무리하고는 칼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멍하니 있던 홍 내관이 얼른 그의 옆에 붙어 서며 어딘지 걱정 어린 목소리를 내었다.
“대체 어디를 가시려고 이런 궂은 날에 말을 대령하라 이르시고 무장까지 하시는 것입니까?”
무건은 홍 내관을 거울을 통해 힐끗하고는 짧게 답했을 뿐이었다.
“폐하의 명이네.”
어디로 향하는지는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 테고, 굳이 지금 알려 주어서 안 그래도 걱정을 달고 사는 홍 내관을 지금 당장 뒤집어지게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무장을 하는 것만으로도 홍 내관은 이미 충분히 불안해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 야밤에 돌연 군사를 모아 갈 리는 없을 게 자명하니, 무건 홀로 떠난다는 의미였다.
대번에 홍 내관의 입에서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마께서는 엄연한 후궁이신데 폐하께선 어찌 일개 장군처럼 취급하시는지…….”
“홍 내관.”
“송구하옵니다. 하오나 사실이 아닙니까? 게다가 어찌 황상께서 몸도 성치 않으신 마마에게 위험한 곳으로 가시라 하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중간에 그만하라는 의미로 말을 잘랐지만 늙은 내관의 입에서는 계속해서 우는소리가 나왔다. 무건은 딱히 할 말 없다는 듯 조용히 투구를 들고 뒤돌아섰다.
홍 내관을 무심히 지나쳐 방 밖으로 나서니 뒤에서 다시금 불안감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꼭 마마께서 가셔야 하는 것입니까?”
“당연히 가야 하지. 그럼 폐하의 명을 거역하란 말인가?”
단호하게 자르고 무건이 침전 문 앞에 서 있는 말에 다가갔다. 그러자 봉아궁의 금위들이 무건을 따라 말 위에 올라탔다.
이내 투구를 쓴 무건이 그들을 돌아보며 입을 떼려 했을 때였다.
“마마……! 귀인마마!”
어린 사내아이의 목소리가 가로질러 왔다. 고개를 돌리니 무건이 떠나는 걸 어떻게 안 건지 미마이가 달려오고 있었다.
갑작스레 등장한 아이의 앞을 주변의 금위들과 내관들이 가로막으려 했지만 무건이 손짓으로 그들을 물러서게 했다. 그러자 미마이가 무건에게 다가와 그를 올려다보았다.
상황이 어떤지 알려 준 이가 전혀 없었을 텐데 미마이는 무언가 예견한 듯 걱정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아이는 우물쭈물하다가 비에 젖지 않도록 품에 넣어 놨던 것을 꺼냈다.
두 개의 색이 다른 주머니가 아이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미마이는 말 위에 탄 무건을 올려다보며 먼저 붉은색 주머니를 내밀었다. 받아서 열어 보니 안에 천과 끈으로 위아래를 꼭 여민 작은 대나무 통이 들어 있었다.
“상처에 바르는 약입니다. 매일 바르고 붕대를 가셔야 해요. 그리고 이건…….”
다음엔 검은 주머니를 건네며 미마이가 못 할 말이라는 듯이 뒷말을 흐렸다. 그 안을 들여다보니 검게 마른 잎들이 있었다.
주변에 습기가 가득한데도 주머니를 열자마자 코를 훅 찌르는 냄새를 맡은 무건은 그것이 무엇인지 곧장 알아차렸다. 익재를 몰려들게 한다는 약초였다.
“여전히 냄새가 지독하구나.”
농담처럼 흘린 말인데 미마이에겐 그런 것을 받아들일 여유는 없는 모양이었다. 아이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중얼거렸다.
“마마께 필요하실 것 같아서, 그래서요.”
혹 조서엽의 불행한 미래라도 본 것일까.
저번에 무건이 최초의 익재를 잡았을 때도 그렇고, 함께 있을 때 언뜻 들은 일화들을 종합해 보건대 미마이가 예지력은 그다지 좋지 않은 장면들만 보여 주는 듯했다.
그래서 불행을 몰고 온다느니 하는 오명을 쓴 것이겠지.
무건은 바쁜 와중이긴 하지만 왜인지 풀이 죽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면서 문득 미마이가 일전에 했던 부탁을 떠올렸다.
〈그분을 한 번은 살려 주십시오.〉
길거리에서 맞아 죽을 뻔했던 자신을 살려 준, 은인 조서엽을 살려 달라던 부탁 말이다.
그게 바로 이때구나 싶었다.
들을 당시만 해도 단순히 살의를 누르라는 의미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이제는 정말로 조서엽을 살리러 가는 길에 오르게 되었다.
무건은 아이가 제게 건넨 두 개의 주머니를 품에 갈무리해 넣으며 안심하라는 의미로 웃어 주었다.
“고맙다.”
미마이도 그제야 살짝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다치지 말고 돌아오셔야 해요. 돌아오시면 앞으로 제가 하고 싶은 일이 무언지도 말씀드릴 테니까요.”
“당장 듣고 싶지만…… 조금만 기다려 주겠니?”
무건의 말에 미마이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끄덕했다. 무건은 그 뒤에야 홍 내관을 돌아보았다.
“내 없는 동안 미마이를 잘 보살펴 주게.”
“……예, 마마.”
그러고 고삐를 쥐고 가볍게 옆구리를 차 말을 움직이게 했다. 염려의 눈초리가 따르는 것을 뒤로하고 그가 천천히 속도를 올렸다.
다행히 빗줄기가 서서히 약해지고 있었으나 무건을 배웅하는 홍 내관의 표정은 여전히 침울해 보였다. 그러나 그와 상관없이, 무건은 앞으로의 일을 빠르게 머릿속에서 정리했다.
일단은 먼저 출발한 조춘경을 따라잡아 그와 합류해야 한다. 그쪽은 얼마 안 지났을 테니 금방 가능할 것이었다.
다만 조서엽이 이미 앞서고 있을 텐데 그를 구명하는 게 가능할까. 마냥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건이 본격적으로 출발하기 전, 저를 따르는 금위들을 돌아보며 냉정히 일갈했다.
“늦는 자는 돌보지 않는다. 그대로 누락이니 잘 쫓아오도록.”
“예, 귀인마마.”
그러고 말이 떨어지자마자 무건이 고삐를 비틀어 잡았다. 뒤에서 걱정 가득한 시선들이 쏟아졌지만 더는 미련 두지 않고 빗길을 내달렸다.
어두운 거리에 어지러운 말발굽 소리와 함께 빗물이 첨벙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봉아궁과 가까운 황도의 북문을 향했다. 얼마 안 가 성문이 활짝 열리고, 그 사이를 무건을 필두로 한 한 무리가 거친 속도로 빠져나갔다.
무건은 진예가 건넸던 두루마리에 그려진 경로를 떠올리며 황도의 서북쪽에 위치한, 환에서 가장 위험한 곳인 읍주 쪽으로 말을 몰았다.
최초의 익재가 사라졌다고는 하나, 익재들의 특성상 벌써 그중 가장 강한 놈을 우두머리로 삼아 그곳에 도사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런 곳에 혼자 들어간다면 제아무리 조서엽이라도 죽을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럼 시신조차 찾지 못하게 그들에게 뼛조각까지 모조리 먹혀 버리겠지.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서엽이 대충 어떤 그림을 그리고 그곳으로 갔는지 알 만했다.
모든 걸 포기하고 그리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고 싶은 거다.
‘하지만 그렇게는 못 놔둔다, 조서엽.’
정말로 그리 죽어 버리면 진예의 마음에 생채기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깊게 남을 것이었다.
조서엽은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됐다.
황도 외곽의 마을을 지나며 무건은 문득 아래쪽에서부터 올라오는 미세한 통증에 이를 꾹 물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서엽에게 찔린 부위가 벌써 욱신거렸다.
그렇지만 멈출 수 없었다.
멈추지 않을 것이었다.
조서엽을 살려 낼 때까지, 절대로.
* * *
하아, 하아…….
며칠 비가 오락가락하다가 한동안 날씨가 맑았다. 그렇지만 이전과 다르게 부쩍 내려간 저녁의 기온은 몸을 차갑게 식혔다.
그 때문인지 숨이 차고 몸이 떨려 오는 가운데, 서엽은 말에서 떨어지지 않게 말고삐를 거세게 움켜쥐었다.
아니, 사실은 추워져서가 아닐지도 몰랐다……. 서엽의 몸은 이미 한계치까지 기력을 소모한 뒤였다.
중간에 말은 몇 번 갈아탔지만 그 위에 탄 사람은 밤잠도 설치며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마치 멈추는 법을 완전히 잊은 것처럼.
처음 며칠은 조금이라도 더 나아가기 위해 통금 시간에는 말을 두고 몰래 움직였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도 아닌데, 서엽은 어서 끝을 보고 싶다는 그 간절한 욕망 하나로 움직였다.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는 실제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정신을 잃기도 했다. 하지만 대체 얼마나 끈질긴 목숨인지 객사해 죽지는 않았다. 스스로가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이후부터는 거의 정신력과의 싸움이었다. 몸은 계속해서 축났고, 진예에게 찔렸던 부위에서는 다시금 피가 배어나고 있었다.
서엽은 복부에서부터 시작되는 심상치 않은 통증에 제 몸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은 했지만 조금도 돌보지 않았다.
대신 목적지로 가기 전의 마지막 마을을 멈추지 않고 가로지를 뿐이었다. 그의 거친 승마에, 그리고 엉망이 된 꼴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들 한 번씩 돌아보았지만 그를 막을 수 있는 건 없었다.
이제 곧이었다.
읍주까지는, 제 무덤까지는.
* * *
다행히 조춘경은 예상대로 멀리 가지 않아 그와는 금세 합류할 수 있었다. 문제는 조서엽이었다. 혼자라서 그런지 수소문도 제대로 안 되고, 어쩌다 봤다는 사람이 나와도 예상보다 속도가 훨씬 빨랐다.
정말 밤낮없이 달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데 다행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읍주와 황도의 거의 중간쯤 있는 마을에서 정신을 잃은 조서엽을 잠깐 돌봤다는 사람이 나온 이후부터 거의 다 따라잡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황도를 떠나 나흘이 지난 시점에 알아봤을 때는 발에 날개라도 달렸던 건지 조서엽과 이틀거리 정도 차이가 났었는데, 이제는 거의 한나절 간격으로 줄었다.
그러나 그만큼 휴식이 없는 강행군이라 무건조차 체력이 달리고 있었다. 하여 조춘경의 강권에 하는 수 없이 근처의 아무 주루에 들어와 잠시 휴식을 취할 때였다.
상처 부위에 미마이가 대나무 통에 넣어 주었던 약을 바르고 새로운 붕대로 갈고 있는데, 밖으로 나가서 수소문을 하고 돌아온 금위가 조서엽의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마마, 근처에서 한 시진 전쯤 조 후로 추정되는 이를 본 이들이 꽤 되는 것 같습니다.”
붕대의 양끝을 꽉 묶던 무건이 한숨을 토해 냈다.
“……하, 드디어.”
안도의 한숨이었으나,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다.
이야기를 듣자 하니 며칠 전부터 발견된 조서엽은 거의 거지꼴을 하고 있다고 했다. 많이 지친 탓에 이 정도까지 따라잡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반대로 생각하면 그 상태로 읍주로 들어갔다가는 그는 곧장 익재들의 영양가 있는 먹잇감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시간이 많이 없었다. 금위 역시 그 부분을 바로 지적했다.
“읍주는 이제 반나절 정도만 더 가면 도착할 테니 서둘러야 하지 않을는지요.”
“그래, 바로 출발해야겠다. 혹 표기장군 쪽의 동향은 어떠한가.”
“조금 늦을 수는 있겠으나 때가 어긋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비로소 안심한 무건이 피로를 떨치기 위해 마른세수를 한 번 했다가, 벗어 두었던 갑주를 걸쳤다.
그 뒤 방을 빌리기 위해 주문해 둔 술상을 들여온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주루 밖으로 나갔다.
무건에겐 잠시 쉬라고 했던 조춘경은 주루의 입구 앞에서 여전히 말에 탄 채 대기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꾸벅하는 조서엽의 아비를 보면서, 무건은 며칠간 말 위에서 생활하느라 쑤시는 몸으로 다시금 등자를 밟고 말 등에 올라탔다.
그가 조춘경의 옆으로 말을 천천히 옮기며, 아마도 기다리고 있을 아들 소식을 전해 주었다.
“한 시진 전에 조 후가 이곳 근처를 지났다고 하더군요.”
그러자 조춘경이 무건의 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어 왔다.
“마마께서 피로는 가시셨습니까?”
“……덕분에.”
아마 아들을 한시라도 빨리 찾아 나서고 싶을 텐데 조춘경이 저를 염려하는 말을 먼저 건네 오자 무건은 내심 놀랐다.
그렇지만 황도에서 멀어질수록 조춘경의 표정은 확실히 더 굳어 가고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제 무덤을 찾으러 가는 아들을 뒤쫓는 아비의 심경이 오죽할까.
그래서 무건은 조춘경과 합류한 이후로 조서엽이 언제 이곳을 지나갔다더라 하는 이야기 외에는 그와 몇 마디 나누지 못했다.
점점 희망이 꺼져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조서엽을 뒤쫓는 동안 심경의 변화라도 생겼나…….
무건은 조춘경에게 여러 가지를 묻고 싶었지만 어느 것도 선뜻 입에 담지 못했다. 그 부분을 함부로 건드리기엔 아직 조춘경만큼의 세월을 살아 내지 못한 데다, 자녀도 없기에 아들을 잃기 전의 아비의 마음이 어떤지는 전혀 알 길이 없었다.
그리고 둘의 목적은 조서엽을 살리는 것, 결국 그 하나이니 그를 향해 달려가기만 하면 되었다.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감상에 빠질 때도 아니다.
무건은 긴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따라잡으려면 길을 서둘러야겠습니다.”
조춘경이 말없이 고개만 한 번 숙이고는 먼저 출발했다. 무건은 그를 따르기 전, 아주 잠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침저녁으로는 꽤나 서늘하지만 지금은 햇볕이 꽤 쨍쨍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랬다.
누군가 아까운 목숨을 버리러 가기에는 지나치게 좋은 날씨였다.
심지어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이 흩뿌려졌다는 읍주(泣州)에서 목숨을 버리기에는 말이다.
어쨌든 이젠 거리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엇갈릴 일은 없었다. 단지 너무 늦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아주 잠깐의 휴식의 대가인 듯 다시 몇 시진을 쉬지 않고 달려 마지막 마을을 지났다.
마침내 환 제국에서 가장 위험한 익재의 서식지, 읍주로 들어가기 전에 위치한 너른 평원을 지났다.
장시간의 승마로 모두들 지칠 법도 하건만, 아무도 불평불만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춘경은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눈빛이 생생하게 살아나고 있었다. 무건은 그 모습을 보면서 저도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불 켜진 읍주의 초소가 시야에 선명히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였다.
몇몇이 초소 밖으로 나와 금줄 너머를 보는 모습을 확인한 무건은, 말을 거세게 차며 더욱 속력을 올렸다.
“마마!”
뒤에서 위험하다는 양 금위 중 하나가 소리쳤지만 무건은 멈추지 않았다.
순간 말이 길게 우는 소리를 냈고, 금줄 앞에 서 있던 사내들이 무건과 그 뒤의 사람들을 발견하고는 무건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무건이 전부 무시하고 더 속도를 높이자, 위험하다고 판단했는지 그들이 무어라 소리를 지르며 옆으로 물러났다.
이어 말은 주인의 통제에 따라 뛰어올라 단숨에 금줄을 넘었다.
그렇게 이미 두 번이나 와 본, 황량한 읍주의 평지를 내달렸다. 얼마 안 가 자신들의 서식지에 사람의 존재가 왔음을 알아차린 호기심 많은 익재 몇 마리가 날개를 퍼덕여 다가오는 모습이 무건의 시야에 잡혔다.
그들을 발견한 무건은 커다란 손으로 허리춤에 있던 검의 손잡이를 단단히 잡고 긴 칼을 거침없이 뽑았다.
그렇게 날이 잘 갈린 검신이 모습을 드러낸 때, 빠르게 거리가 좁혀지는 와중에도 익재들을 흔들림 없이 바라보던 무건의 고동색 눈이 문득 위험한 빛을 띠었다.
마침내 칼끝이 둥글게 반원을 그린 다음 순간이었다.
끼아아아악!
허리가 잘린 익재들이 하얀 화마에 휩싸이면서, 그들의 끔찍한 비명이 읍주에 울려 퍼졌다.
* * *
히이이이잉!
익재의 공격에 몸을 관통당한 말이 고통스럽게 울었다. 다행히 위에 타고 있던 서엽은 재빨리 몸을 날렸지만 바닥에 몸이 부딪친 뒤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안 그래도 읍주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부서지기 일보 직전이었던 몸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에 서엽은 어금니를 악다물었다.
제가 생각한 것보다 더 몸이 무거웠다. 칼을 지팡이 삼아 겨우 몸을 일으키자, 방금 전 타고 온 말을 죽인 익재가 바로 앞에서 히죽 웃는 모습이 보였다.
곧 위로 날아오른 그것의 뒤로 세 마리의 익재가 유유히 다가와 모두 같은 표적, 그러니까 서엽을 바라보았다.
서엽은 한 손으로 칼을 잡고 저를 비웃고 있는 익재들을 겨누었다. 그러자 녀석들이 끼욱, 끼욱 울면서 그의 주변을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익재들이 어쩌다 인간을 만나면 흔히 보이는 행동 중 하나였다. 자신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천천히 쾌감을 음미하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서엽은 그런 놈들의 반응을 살피며 그들과 마찬가지로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기실 멀쩡한 상태라면 이길 가능성도 충분히 있는 정도의 마릿수였지만 지금과 같은 몸으로는 어떨까.
그렇지만 이기든 말든 그것은 서엽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단지 이런 만신창이의 몸으로 더 많은 익재들을 자극해 몰려들게 하고,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그들에게 온몸을 먹히는 것만이 그의 목적이었으니.
파악!
싸움은 아무런 징후 없이 개시되었다. 선공은 서엽이었다. 그가 들고 있던 칼을 돌연 창처럼 던져 가장 먼저 저를 발견한 익재의 날개를 꿰뚫었다.
갑자기 급소를 공격당한 익재가 높은 비명 소리를 내지르며 비틀거리는 틈에 달려가, 제 칼을 쥐고 날개를 옆으로 찢어 버리자 검은 진액 같은 물컹한 피가 함께 허공에 쭉 흩어졌다.
비록 진예와 같은 걸출한 힘은 없더라도, 몸이 멀쩡하지 않더라도 다년간 전쟁터를 오가면서 본능에 새겨진 대(對)익재 능력이 그의 검을 이끌었다.
서엽은 그러한 스스로의 본능에 몸을 맡겼다. 온몸이 부서질 것 같았지만, 오로지 이 상황 하나에만 집중하는 그는 더는 고통 따위에 개의치 않았다.
높이 뛰어오른 서엽의 칼이 익재의 목덜미에 꽂혀 들었다.
높이 뛰어오른 서엽의 칼이 익재의 목덜미에 꽂혀 들었다. 이어 칼끝을 몸에 깊숙이 박아 넣은 채로 칼 손잡이를 잡아 내리자 썩은 몸이 허술하게 갈라졌다.
그러나 피를 쏟기는 했어도 그것만으로는 치명타가 되지 못했는지 목덜미가 너덜너덜해진 익재가 꺽꺽거리면서 검은 입을 잔뜩 벌렸다.
진액을 떨어뜨리며 금세라도 잡아먹을 듯 달려드는 놈을 피해 서엽이 몸을 옆으로 틀었으나 그러자마자 등 뒤가 서늘해졌다.
예의 서늘함이란 반쯤 짐승 같은 감각으로 잡아낸 것이라 해도 좋았다. 그러나 지친 몸뚱어리는 그렇게 날렵하지 못했다. 서엽이 뒤로 몸을 돌린 순간, 검고 날카로운 기운이 몸을 관통해 지나갔다.
“……!”
마치 화살처럼 가는 것이었지만 지나가자마자 피가 튀어 올랐다.
방금 공격을 날린 익재는 높이 떠서 다시금 손에서 검고 긴 화살촉을 연이어 뽑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서엽의 시선은 그 너머로 향해 있었다. 그곳엔 어느새 제가 타고 온 말을 씹어 먹고 있는 몇 마리의 익재들이 있었다.
예의 광경을 보며 입 안에 고이기 시작한 피의 쇠 맛을 느꼈다. 이제 곧 제가 저렇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서엽이 근처에서 냄새를 맡고 날아들기 시작한 익재의 무리를 흐리멍덩해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대체 얼마나 굶주렸던지, 인간 하나와 말 한 마리를 나눠 먹기 위해서 스무 마리에 가까운 놈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천천히 칼을 잡은 손에서 힘을 빼는 서엽에게로 다시 한번 검은 화살이 날아와 이번엔 허벅지를 꿰뚫었다.
“으윽!”
날카로운 고통이 스쳐 지나가자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은 그에게 머리를 부숴 버릴 요량으로 팔을 뻗어 오는 익재가 있었다.
끝을 직감한 서엽이 눈을 마침내 감았을 때였다. 말발굽 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어 오는가 싶더니, 바로 앞에서 찢어질 듯한 익재의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끼아아아아아아악……!
그야말로 못 견디는 절정의 고통 속에서 내지르는 그 소리에 서엽이 흠칫 눈을 떴다.
그러자 번개 같은 휘광이 떨어져 순간적으로 시야를 온통 흰빛으로 뒤덮었다. 뒤이어 쿠우우웅, 하고 묵직한 것이 내리치는 소리와 함께 땅이 진동했다.
빛이 거두어지자 모였던 익재들이 이내 하얀 연기에 휩싸여 타들어 가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경로에서 벗어난 운이 좋은 놈 하나가 서엽에게로 검은 칼날 여러 개를 한꺼번에 날리자, 이번엔 서엽의 허리를 굵은 팔이 감싸 왔다. 동시에 허공에 휘둘러진 칼의 끝을 따라 익재의 몸이 대각선으로 갈라졌다.
급히 말에서 뛰어내린 탓에 상대는 서엽을 끌어안은 채로 뒹굴었지만 덕분에 익재가 날렸던 칼날이 바닥을 깊게 가르며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갔다.
명백히 서엽을 보호하려는 행위였다. 순식간에 정리된 소란 이후, 움푹 파인 땅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든 서엽의 시야에 곧 익숙한 인영이 비쳤다.
저를 안고 있는 자는.
“연무건……?”
믿기지 않게도 무건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완전 무장을 하고 나타난 무건이 그의 몸을 받치고 있었다.
다만 구해 준 행위와는 다르게, 내려다보는 눈빛이 제법 서늘했다.
그렇게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그의 품 안에 안겨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서엽이 서둘러 뒤로 몸을 뺐다. 몸을 움직이자 복부에서부터 올라오는 통증에 그가 숨을 다급하게 들이켜며 신음처럼 말소리를 흘려보냈다.
“네가, 어떻게…….”
하지만 말을 맺기 전에 서엽의 날 선 소리가 고막을 쳤다. 돌연 고개가 휙 돌아가며 얼굴이 따끔해져 왔다. 무건이 그의 뺨을 때린 것이었다.
따귀를 친 손이 제법 매서웠다. 바로 화끈하게 열이 올라오는 얼굴을 서엽이 손으로 감싸자, 그 모습을 고깝게 보며 무건이 돌연 그의 멱살을 잡아 비틀어 끌어당겼다.
얼굴이 가까워진 순간, 무건이 다소 거친 인사를 해 왔다.
“정신 차려, 이 새끼야.”
“…….”
갑작스러운 욕지거리였으나 서엽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신 제 멱살을 움켜쥔 무건의 손을 쳐 냈다.
“왜, 네가 여기 있는 거냐.”
그리 물으면서 서엽은 몸을 일으키려다 윽, 하고 신음을 흘리며 도로 바닥을 손으로 짚고 주저앉았다. 부상당한 허벅지가 바들바들 떨렸다. 게다가 복부의 통증이 허리를 못 펴게 하고 있었다.
“흐윽…….”
그 모습을 보고 무건이 소리 내어 한숨을 내쉬더니 제가 먼저 일어나 엉망진창이 된 서엽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서엽을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둘까 싶다가도 진예를 생각하면 도무지 그럴 수가 없어 이를 갈며 말했다.
“폐하께서 날 보내셨다. 네놈을 구명하라고.”
그에 서엽이 바닥의 흙을 움키며 주먹을 쥐었다. 그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를? 왜……. 이미 버리신 거 아니었나.”
직접 칼로 찌르면서까지.
그 순간 자신은 모든 걸 놔 버렸는데, 왜 갑자기 살리려는 것인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것도 하필 증오스러운 연무건을 보내서 말이다.
서엽은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단호히 무건의 호의를 배격했다.
“그냥 모르는 척 꺼져. 너한테도 내가 죽는 게 낫잖아.”
무건이 미간을 좁히더니 툭 물었다.
“이따위 방식으로 죽어서 뭘 어쩌려고.”
서엽이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보자, 무건이 기분 나쁘다는 듯이 입가를 비틀며 씹어뱉었다.
“내가 네 머릿속 상태를 읊어 줄까? 네가 익재들에게 물어뜯겨 죽으면 폐하께선 시신조차 찾지 못하게 된 널 영영 잊지 못할 거야. 어쩌면 널 떠올릴 때마다 눈물을 지으실지도 모르지. 둘도 없는 충신 조서엽을 그리워하며. 그거 하나면 넌 되는 거야.”
“그래, 잘 아는군.”
읊어 준다더니 정말로 머릿속 생각 그대로였다. 서엽이 순순히 인정하자 이번엔 무건의 입에서 하, 하고 실소가 터졌다. 이어 표정을 굳힌 그가 서엽을 향해 신랄한 촌평을 날렸다.
“이기적인 놈. 하지만 내가 그렇게 놔둘 것 같나?”
무건이 주저앉아 일어서지 못하고 있는 서엽의 앞에 도로 제 한쪽 무릎을 꿇어 몸을 내렸다. 그리고 어깨를 잡아 밀며 저를 똑바로 보게 했다.
무건이 그를 응시하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선언했다.
“아니, 네놈은 절대 그리는 못 죽어.”
“연무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무건은 대답 대신 다시 서엽의 옷깃을 틀어쥐고는 바짝 당겼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무건이 노기가 밴 음성으로 뇌까렸다.
“살아, 이 새끼야. 아파도 죽을 만큼 버텨. 죽기 직전까지 버텨! 네가 뭔데 죽으려고 해. 네가 뭔데 죽어서 그분 곁을 떠나려고 해!”
문장이 이어질수록 서엽이 못 견디겠다는 듯이 입술을 떨었다. 그가 눈을 꽉 감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네놈이야 살아서 영원히 폐하의 곁에 남고 싶겠지. 그분의 옆에 있을 수가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말을 이어 가는 중이었다. 또다시 서엽의 뺨에서 불이 일었다. 서엽의 얼굴을 후려친 무건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제정신 차리라고, 개자식아!”
무건은 스스로 흥분으로 숨이 거칠어진 것을 느꼈다. 그렇지만 가다듬을 새 없이 아직까지도 멍청하게 구는 서엽에게 쏘아붙였다.
”폐하께선 너를 살리기 위해 찌르신 거다. 네놈이 날 찌른 걸 숨기려고.”
“뭐……?”
“머리 안 돌아가? 조서엽, 넌 나보다 훨씬 똑똑하잖아. 머리 잘 돌아가잖아. 그런데 어째서 나조차 아는 사실을 이해 못 하는 거냐?”
진예에게 조서엽이 어떤 존재인지만 알면, 너무나 단순하게 추론할 수 있는 것이다. 한데 그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사랑에 눈먼 자는 이토록 어리석었다.
이쯤 되니 무건은 눈앞의 사내가 진심으로 가엾어졌다.
기실 평생 한 사람만 바라보고 있다가, 버려졌다고 생각한 순간 제 모든 것을 놔 버린 서엽의 심정을 모른다 할 수 없었다.
하여 서엽을 더 매섭게 다그쳤다.
”그렇게 살았으니 넌 아직 못 죽어. 절대.”
실은 황명도 황명이지만 무건은 진예가 그렇게 살리고 싶어 하는, 살리라 할 수밖에 없는 이 조서엽을 잃고 눈물 흘리는 모습을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또한 저를 옆에 두고서 이 사내를 도무지 빼낼 수도 없을 만큼 깊숙이 품은 채 매일매일 생각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만약 조서엽이 그의 생각대로 여기서 익재의 먹잇감이 되어 죽어 버린다면, 진예에게 반드시 그런 존재가 될 터였다.
그녀에게 지독한 슬픔과 그리움을 가르쳐 주는 존재가.
무건은 제 전부를 양보하더라도 그것만큼은 막을 것이었다.
“나를 죽이고 싶어? 그래, 씨발, 언제든 찾아와. 네놈이 무슨 짓을 하든 다 받아 주고 그때마다 계속 살아남아 줄 테니까 그 힘으로라도 살아!”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서엽의 표정은 괴로움으로 점점 일그러졌다. 얼굴 근육이 경련하듯 파들파들 떨리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거칠어진 숨에 헐떡여 가슴이 급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 또한 눈에 들어왔다.
무건은 지금 당장 그런 그의 마음을 다잡아 줄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 아니 그렇기에 더 단호히 잘라 말했다.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야. 폐하께 충성을 맹세했으면 목숨까지도 그분의 손에 맡겨야지.”
다행히 그 말의 어디에 자극을 받을 만한 발언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순간 서엽이 잇새로 신음을 흘렸다.
“충…… 성…….”
실은 조서엽의 황제를 향한 충성이란, 진예를 가지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말하자면 서엽에게 충성이란 양날의 검 같은 것이었다. 진예에게 충성하면 할수록 결국은 불충하게 되고, 충성하지 않으면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없다.
하여 그 모순됨에 늘 괴로워했던 서엽이었다. 결국 그가 견디지 못하고 눈에서 눈물을 후두둑 떨어뜨리자 무건이 서엽을 밀쳐 내고는 몸을 일으켰다.
제 앞에서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파들파들 떠는 서엽의 뒤에 어느새 쫓아온 조춘경과 금위들이 있었다.
먼 길을 쉬지 않고 달려온 조춘경이었지만 정작 어디 한 군데 멀쩡한 곳이 없는, 그러나 그토록 바랐던 대로 아직은 살아 있는 아들을 앞에 두고도 말에서 내린 뒤 선뜻 다가서지 못하는 중이었다.
대신 점점 더 귀를 먹먹하게 하는 서엽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착잡함에 입을 꽉 닫고 아들을 지켜보았다.
무건은 그런 조춘경과 서엽을 한 번씩 확인하고는, 한숨을 내쉬더니 조춘경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표현에 서툰 아비를 이끌어 아들을 몸을 낮춰 안게 해 주었다.
그 순간 서엽이 흠칫하더니, 잠시 울음을 멈추었다.
그 순간 서엽이 흠칫하더니, 잠시 울음을 멈추었다. 시선을 돌린 그가 아비를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짓자 조춘경이 서엽을 힘을 주어 제 품속에 깊이 들였다. 묵묵하지만 강한 포옹이었다.
무건은 그제야 제가 지나온 읍주의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멀리, 방금 전 조춘경과 함께 달려온 평원 쪽에 아까는 보이지 않던 불빛이 비치는 것을 보며 그가 말의 등자에 발을 걸쳤다.
단숨에 말 위에 올라탄 무건이 제때 도착한 그들의 선두에서 휘날리는 깃발을 보았다. 멀고 어두워 제대로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 그 깃발엔 환이라는 국호가 적혀 있을 것이었다.
역시 진예의 계산은 틀림이 없다고, 그리 생각한 무건이 자리를 뜨기 전의 마지막 말을 시작했다. 어쩌면 지금 서엽에게 백만의 금화보다 더 귀중한 말일지도 몰랐다.
“내가 네놈이 살길 간절히 원하는 사람을 셋을 알아.”
이전이라면 이런 말 따위 해 주지 않았을 테지만 이제 무건은 정말 진심으로, 그가 제대로 마음을 잡고 살기를 바랐다.
그래서 진예 곁으로 다시 돌아올 힘을 얻기를.
무건은 그렇게 해서라도 진예의 척박한 마음에 하루빨리 햇살을 비추고 물을 뿌려 주고 싶었다.
“하나는 미마이. 그 아이가 은인인 널 살려 달라고 나한테 빌었다. 그리고 네 아비는 너 하나만 보고 황도에서 여기까지 먼 길을 달려왔어.”
둘을 짚은 무건이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말의 옆구리를 가볍게 찼다. 그러자 말이 달리고 싶어 바닥을 발로 긁으며 천천히 한 걸음씩 걸었다.
금세라도 튀어나갈 기세인 것을 고삐를 당겨 잠시 진정시킨 무건은 점차 읍주의 입구로 다가오는 깃발을 보면서 진예가 제게 내린 명이 무엇이었는지 서엽에게 알려 주었다.
“마지막으로 폐하께서는 네놈을 위해 나에게 읍주를 쓸어버리라는 명을 내리셨다.”
진예에게 있어서 이 읍주를 수복하는 일은 그녀의 오랜 염원 중 하나였을 것이었다.
그러나 무건은 알았다. 자신에게 그 명을 내릴 때의 진예는, 그런 대의 따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오로지 조서엽 하나를 위한 군대였다, 저것은.
“내가 여기 있는 이유도, 저기 저 군사들이 여기 온 이유도 너 때문이라는 걸 기억해라.”
진예에게 조서엽이라는 존재는 그토록 특별했다. 아무도 대체할 수 없는 어떤 사람이었다.
명인이 없어도, 굳이 구걸하지 않아도 서엽은 이미 오래전에 진예의 절대적인 신의를 얻었다. 그리고 무건이 알고 있는 진예라면 눈을 감는 순간까지 결코 그를 향한 신뢰를 거두지 않을 것이다.
하여 무건은 새로이 욕망하고 있었다.
진예에게 자신 또한 그런 절대적인 존재가 되고 싶다고.
그런 의미에서 무건은 조서엽이 한없이 부럽기만 했다.
“그러니 엄살 부리지 말고 잘 살 생각이나 해.”
그러고 그가 말의 방향을 틀었다. 서엽을 등진 때에, 뒤에서 힘없는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
아직은 제가 살아가야 할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를 조춘경이 꽉 안았다. 서엽은 아비의 품에 기대어 그의 옷깃을 붙잡고 눈물로 적셨다.
서엽의 잇새로 빠져나오는 음성에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만 얽혀 있었다.
“이젠 아무것도 안 남았어. 네놈이 나한테 빼앗아 갈 것도 없고, 더는 내가 너보다 잘난 것도 없어. 근데 대체 나에게 왜, 어째서.”
무건은 마지막으로 조춘경에게 시선을 한 번 던졌다.
조춘경은 제 아들을 끌어안고 눈물을 닦아 주느라 여념이 없었다. 비록 한마디의 살가운 말도 제대로 건네주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곳까지 달려온 그의 마음은 부모의 사랑이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었다.
무건은 그 모습을 확인한 것을 끝으로 읍주의 안쪽으로 말을 몰아 달려갔다. 품 안에서 미마이가 준 약초 주머니를 꺼냈다.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그것을 입구를 벌려 둔 채 말의 옆구리에 걸어 두었다. 이미 몇 마리를 죽여 들쑤셔 두었으니 얼마 안 가 냄새를 맡은 익재들이 그에게로 새 떼처럼 몰려들 터였다.
그런 그의 뒤로, 표기장군이 이끄는 환의 군사들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야밤이지만 읍주의 경계에 쳐 놓은 금줄을 거두어 내고 안으로 진격해 들어오는 군사들의 함성이 무건의 뒤에서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읍주 탈환의 서막이었다.
* * *
이전에 가 보지 못했던 읍주의 평지를 지나 나타나는 숲, 그 깊은 안쪽에서는 예상대로 기천에 달하는 무수히 많은 익재들이 쏟아졌다.
게다가 최초의 익재가 나타나 가장 큰 서식지로 발전했던 만큼 다른 곳으로 치면 우두머리 역할을 했을 익재가 수십 마리는 튀어나왔다.
익재 자체의 능력으로만 보면 오히려 최초의 익재보다 더한 놈이 새로운 우두머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강력한 익재들에게는 기후를 이용하는 능력이 기본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듯했다. 아무리 무건이라 해도 그런 엄청난 괴물들을 마음껏 가지고 놀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진예의 명령, 그리고 그런 그녀를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는 의지로 무건은 선봉에 서서 열 번에 가까운 시도 끝에 읍주에 있던 두 번째 우두머리의 목을 베어 냈다.
그날은 이미 겨울이 찾아온 어느 날이었다. 고막을 뒤흔드는 뇌성이 하늘을 뒤흔들던 그때, 읍주의 깊은 숲에는 모순되게도 낭만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해의 첫눈이 온 것이었다. 그것도 첫눈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은 함박눈이었다.
펑펑 눈이 내리는 소리가 날 듯한 엄청난 폭설과 더불어 운신을 힘들게 할 만큼의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쳤다.
눈 폭풍이라고 이름 붙여도 좋을 만한 폭설이라 날이 궂었지만 무건은 그에 멈추지 않고 숲의 더 깊은 안쪽으로 들어가 다른 우두머리급 익재들을 마주했다.
이후의 그는 거의 신이 들린 듯한 모습이었다. 거침없이 뛰어올라 맨손으로 익재의 썩은 몸에서 날개를 비틀어 뽑아내고 칼을 내리쳐 머리를 부숴 버리는 무건의 모습은 마치 한 마리의 악귀 같았다 해도 좋았다.
그의 능력에는 더 이상 제한도, 한계도 없었다. 반쯤 이성을 잃고 본능에 몸을 맡긴 채 익재를 처리하는 무건을 보면서 후방으로 지원을 온 아군마저 두려움에 떨 정도였다.
그것은 절대적인 무력이었다.
누구도 함부로 다가가지도 못하는 가운데, 익재들의 비명만 끝도 없이 울려 퍼졌다.
그 광경을 목도한 표기장군 또한 놀라 말을 잇지 못해 한동안 무건의 곁에 다가가지도 못했다.
그렇게 최초의 익재가 사라진 읍주의 새 우두머리를 처치한 날, 무건은 단 하루 만에 1군의 군사가 처리할 만한 대량의 익재를 처분해 냈다.
* * *
겨울의 바람 소리에 잠에서 깬 무건은 천장을 바라보다가 이내 이불을 밀쳐 내고 몸을 부스스 일으켰다. 그러자 공막한 막사 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다 몸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는 밑으로 고개를 내리니 기력을 너무 많이 쏟은 탓인지 침상을 짚은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건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
숲 바깥에 세워 놓은 진지로 돌아온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는 전혀 생각이 안 났다. 아마 중간에 쓰러진 모양이었다.
무건은 침을 삼켜 목소리를 가다듬고 밖을 향해 말했다.
“게 있느냐.”
“예, 마마.”
부름에 무건이 읍주에 도착하고 며칠 뒤 기어이 내관들을 이끌고 전장까지 쫓아온 홍 내관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혹시나 무건이 밖으로 나가겠다 할 때 걸쳐 줄 일구종이 들려 있었다.
그 일구종을 건네받아 어깨에 걸친 무건이 몸을 침상 밖으로 빼며 물었다.
“표기장군께서는?”
“남은 익재들을 소탕하기 위해 군을 이끌고 숲 안쪽으로 가셨습니다.”
“늦잠을 잔 모양이군.”
“무리를 하셨으니 당연합니다.”
무건은 막사 바깥으로 나가 조용한 진지를 걸었다. 어제의 여파인지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쌓인 눈이 제법 돼 발 아래가 푹푹 파였다.
어제 빌어먹을 우두머리 익재 놈이 목이 너덜너덜해지고도 죽기 직전에 사방에 거센 바람과 검은 구름을 몰고 와 번개를 쾅쾅 뿌려 대더니 공력을 전부 쓴 뒤 피를 쏟고 검은 가루가 되어 버렸다. 이후로 날씨가 이 모양이었다. 그 탓에 시기는 분명 초겨울인데 갑자기 한겨울이 된 기분이었다.
무건은 앞으로 손을 내밀고는 손가락에 내려앉은 눈송이 녹는 것을 물끄러미 보며 조용히 웃었다. 그러자 지켜보던 홍 내관이 물었다.
“무엇이 그리 좋으시옵니까?”
“어찌 좋지 아니하겠나. 이제 곧 황도로 돌아가게 될 터인데.”
“모두 귀인마마의 공이시옵니다.”
“다행히 또 폐하와의 약조를 지키게 된 것이지.”
“감축드리옵니다.”
벌써 읍주에 도착한 뒤 두 달이 넘었다. 진예를 보고 싶어서 눈에서 진물이라도 날 지경이었으나 버티고 있었던 것은 이전에 진예가 했던 말 때문이었다.
남아 있는 다섯 곳의 서식지는 이전 대토벌 때 자신이 도착하기 전에 전멸을 해 버려 손을 쓸 수 없었다는 그.
〈알겠느냐. 그곳들에 그대가 짐을 대신하여 대환의 깃발을 꽂아 넣으러 가는 것이다.〉
진예와 신념을 함께하기로 하였으니, 그녀의 목표가 곧 자신의 목표였다. 그렇기에 이곳을 완전 점령해 수복하기 전까지는 감히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전투도 며칠 남지 않았다.
무건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잠시 찾아온 어둠 속, 제 정인의 모습이 눈꺼풀 아래 선명히 맺혔다. 눈물이 나도록 그리웠고, 보고 싶었다.
* * *
300년 전 최초의 익재가 나타나 일대를 휩쓸어 버린 이후, 한 번도 인간이 정착한 적 없는 지역인 읍주.
그곳에 드디어 당당하게 환의 깃발이 꽂혔다.
무건이 하룻밤 사이 읍주의 새로운 우두머리를 잡고 셀 수 없이 많은 익재를 도륙했다는 소식이 황도로 흘러들어 오자, 늘 조용히 가라앉아 있던 황궁마저 기쁨으로 떠들썩해졌다.
본래 남은 서식지 중 한 곳으로 향하기 위해 군을 움직이려던 표기장군도 진예의 명에 따라 황도로 회군하기로 했고, 그와 함께 무건도 곧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리고 무건이 대략 언제쯤 오는지 가늠한 황궁의 능구렁이 박 태감이 진예가 대례식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천감의 사람들을 닦아세웠다.
며칠 뒤 흡족해하는 얼굴로 나타난 그가 진예의 앞에 사천감에서 적어 준 종이를 내밀었다.
“황제 폐하, 사천감에서 다시 길일을 잡아 올렸사오니 살피시옵소서.”
진예는 내관들이 열심히 펼쳐 두고 있는 상소문이 적힌 두루마리들을 확인하다가 그것을 건네받아 펼쳤다. 그러자 예의 길일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었다. 앞으로 스무 날쯤 남아 있는 날이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 궁인들에게 창을 열게 하자 밖에 눈이 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 평화로운 풍경을 내다보면서 이 길일에 눈이 내리면 박 태감의 표정이 가히 구경할 만하겠다 싶었다.
진예가 종이를 도로 박 태감에게 건네며 심드렁히 말했다.
“그대는 원래 연 귀인을 마음에 안 들어 하지 않았었나.”
그래서 은근히 무건을 경계했던 것을 진예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부분을 지적하자 박 태감이 구렁이 담 넘듯이 말을 받아 흘렸다.
“어찌 그런 것이 따로 있겠사옵니까? 소사의 호오는 늘 지존의 마음이 향하는 것에 달려 있사옵니다.”
진예는 가소롭다는 양 입꼬리를 슥 올리고는 태감에게 일렀다.
“가례도감을 재설치하라 이르라.”
“그리하겠사옵니다, 폐하.”
대답을 듣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궁인들이 서둘러 다가와 진예의 팔을 잡아 천천히 부축했다.
이미 몇 번이나 반복된 일이지만 진예는 그들의 이런 호들갑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진예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안 다음 날부터 이리 궁인들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있었다. 태감의 탓이었다. 진예는 됐다고 했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으면 뒤에서 눈을 부라려 대니 진예도 궁인들의 의전을 안 받을 수가 없다.
일어나 걸으려니 박 태감이 뒤를 졸졸 쫓으며 물었다.
“날이 이리 추운데 어디로 행차하시옵니까?”
“안에만 있으니 답답하여 그런다. 잠시 금원을 걸어야 하겠느니라.”
말하자마자 털이 달린 두꺼운 일구종이 그녀의 어깨에 걸쳐졌다.
진예는 제 몸을 포근하게 감싸 오는 온기를 느끼며 회랑으로 나섰다. 바닥이 기우는 소리를 듣던 그녀의 시선이 문득 아래쪽으로 향했다.
지금은 여러 겹의 옷에 감싸여 있지만, 요즘 배가 조금씩 볼록해지는 중이었다. 아직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거의 티가 안 날 정도였지만, 어쨌든.
태의는 그저 진예의 활동량이 워낙 많아서 배가 덜 나올 것이라 했지만, 그 소리를 듣고도 태감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밤잠을 적게 자는 편인데, 이전에는 딱히 신경을 안 쓰더니만 요즘에는 그 부분에 대해서도 유난스럽게 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역시 진예가 문밖으로 나서기 전에 박 태감이 얼른 말을 붙여 왔다.
“눈이 많이 내리고 있사옵니다. 그리하시다가 자칫 미끄러지기라도 하시면 복중 아기씨에게 큰일이 날까 우려되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진예가 더 빠르게 발을 놀리며 빈정거렸다.
“미끄러지긴 누가. 내 지금까지 그러는 걸 평생 한 번이라도 보았느냐?”
“하오나, 폐하…….”
“그만하라. 박 태감이 하루 종일 쏟아 내는 잔소리를 들으면 다들 복중 아이가 태감의 아이인 줄 알 것이다.”
“어찌 그런 말씀을 입에 담으시옵니까. 누가 들을까 심히 염려가 되옵니다…….”
이미 들을 사람은 다 들었는데 무슨.
진예는 그리 생각하면서 하얗게 눈이 쌓인 기단 위로 발을 내디뎠다. 그러고 열려 있는 편전 앞의 문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연 귀인은 언제쯤 황도에 당도한다더냐?”
“이제 닷새 정도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날엔 아침부터 황궁의 남문부터 대전 앞의 문까지 활짝 열어 두도록 하라. 300년 동안 익재들의 땅이었던 읍주를 되찾은 환의 공신들이 오는 날이니.”
“마땅히 그리하겠사옵니다.”
태감의 말을 전해 들은 진예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편전 동쪽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지금이야 아직 초기라 몸이 가볍지만 시간이 지나면 계단을 내려갈 때 조금 힘들어질 수도 있긴 하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나저러나…….’
아이가 생겼다고 하면 무건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왜 늦게 알려 주었느냐고 서운해할까. 그래도 분명 기뻐하는 것이 먼저겠지.
그렇게 생각을 이어 가다가 진예가 미간을 좁혔다. 박 태감 하나만으로도 귀찮은데, 무건이 오면 더한 호들갑을 떨까 싶어 벌써부터 피곤해진 탓이었다.
* * *
닷새 뒤.
개선장군으로서 돌아온 표기장군 장첨과 함께 무건은 황성의 남문을 통과했다. 곧 황궁에 도착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더 다급해졌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말을 몰아 혼자서 먼저 튀어나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그는 표기장군과 백성들의 환영을 받으며 천천히 황도의 내성을 가로질렀다.
읍주에 있을 땐 그곳을 되찾았다는 것이 크게 대단한 일인지 실감이 나지 않았었는데, 황성 안으로 들어와 모두가 환호하는 모습을 보니 그제야 익재가 사람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인지 떠올리게 되었다.
그렇게 황궁 앞에 도착해 말에서 내리니, 남문 앞에서도 멀리 대전까지 보일 정도로 모든 문들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앞에는 언제부터 기다렸던 것인지 고관들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궁인과 내관 들이 대기해 있었다.
환의 깃발을 든 이들을 앞세운 채 나아가는 표기장군을 따라 들어가며 무건은 예상치 못한 광경에 침을 삼켰다.
그러고 보니 황궁에 들어서면서 푸대접은 받아 본 적 있어도 이토록 환영을 받는 건 처음 있는 일이라 기분이 얼떨떨해졌다.
그들 무리는 대전으로 통하는 문 앞의 마당에 어도를 사이에 두고 두 갈래로 갈라져 걸어 들어갔다. 마당에 군사들이 빼곡히 차자 곧 목소리 큰 내관이 외쳤다.
“황제 폐하 납시오!”
그 말에 표기장군을 비롯한 백관들이 황제에게 예를 갖추기 위해 몸을 낮췄다. 무건 역시 마찬가지였다.
얼마 안 가 대전에서 연(가마의 일종)을 타고 나온 진예가 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연에서 내린 그녀는 황색 곤룡포를 걸친 채, 하얗게 눈을 이고 있는 문 가운데에 서서 방금 황궁에 들어선 군사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먼저 눈이 마주친 사람은 무건이었다. 진예가 의도한 것이 분명했다. 그 이후로 그에게서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수많은 이들이 모였지만 조용해진 가운데 진예가 제 군사들을, 무건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짐은 읍주에서 승리하여 돌아온 그대들이 자랑스럽다.”
“망극하옵니다, 폐하!”
치하의 말에 표기장군이 그리 외치자 모두가 따라 외쳤다.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하나가 되어 황궁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에 진예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황궁 안이 도로 조용해지자 진예가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
“짐의 명을 받고 읍주로 향한 연 귀인에게 물으니 앞으로 나와 답하라. 읍주에는 이제 한 마리의 익재도 남아 있지 않다 들었다. 사실인가?”
질문이 끝나자 무건이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의 말에 따라 천천히 앞으로 나갔다.
어도의 왼쪽으로 올라간 무건이 아주 잠시간, 진예를 마주 보았다. 용포를 걸친 채 백관들의 앞에 선 그녀의 위엄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새삼 가슴이 벅차올랐다.
순식간에 쿵, 쿵, 심장이 거세게 뛰는 것을 느끼며 무건이 그녀가 서 있는 문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본 궁이 폐하께 답을 올리나니, 틀림없는 사실이옵니다.”
“짐과의 약조를 지켜 주었구나.”
“오늘의 이 영광은 환의 주인이신 폐하의 공이옵니다. 감축드리옵니다.”
말이 끝나자 다시금 사방에서 감축드린다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사이에서 진예가 천천히 문 앞으로 내려서더니 직접 무건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녀의 걸음이 한 걸음 한 걸음 떼어질 때마다 무건의 심장도 더 크게 두근거려 댔다. 그것을 주체하지 못해 마침내 숨이 멎을 지경이 되었을 때, 진예가 그의 얼굴 앞에 손을 내밀었다.
무건은 소매 밖으로 나온 그녀의 작고 하얀 손등을 발견하고는 진예를 올려다보았다. 진주처럼 색이 선명한 붉은 눈이 무건을 마주 보고 있었던 터라 바로 눈길이 맞았다.
무건은 숨을 참고 천천히 고개를 숙여 모두의 앞에서 진예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엄숙하고도 경건함을 담은 행위였다.
얼마 안 가 입술을 떼어 낸 무건이 아마도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듯한 말을 꺼냈다.
“또 다른 약조를 이 자리에서 지킬 수 있도록 허해 주시겠사옵니까?”
“허한다.”
무건은 그에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로 심장이 멎어 버릴 것 같았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어째서인지 떨리는 손을 품 안에 넣어, 그곳에서 제게 가장 소중한 물건을 꺼냈다. 그토록 제 정인에게 주고 싶었지만, 몇 번이나 거절당했던 비운의 물건.
하지만 드디어 진짜로 그녀에게 건넬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무건은 속에서 끓고 있던 뜨거운 것이 목구멍으로 울컥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옥가락지를 손에 쥔 무건이 이내 진예의 손가락에 그것을 끼워 주었다. 그 순간 모여 있던 사람들의 놀라움 어린 시선을 무건도, 진예도 느꼈으나 그것을 무례하다 지적하지 않았다.
대신 진예는 이전에 돌아온 무건에게 먼저 해 주지 못했던 말을 꺼냈다.
“잘 왔다, 나의 비.”
작게 웃는 모습에 무건도 따라 미소 지은 순간, 진예가 덧붙였다.
“아니, 대환의 황후여…….”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평민 연무건.
그가 역사에 남을 진예의 유일한 사내이자 만인이 우러러 보는 고귀한 자가 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