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장. (7/18)

6장.

황도에 익재들을 가둔 지하실이 있다.

그런 내용의 방이 붙고, 성내에 살던 이들 중 고관대작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성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렇다 보니 성내는 고요하고, 성문 앞부터는 사람들이 평소보다 더 바글바글 얽혀 있었다.

진예는 황성의 남문 쪽에 가까운 성루에서 성안에 들어오려 길게 이루어진 줄과 그 근처에 거의 널브러져 있다시피 한 이들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반투명한 검은 천을 늘어뜨린 모자를 써 얼굴을 가린 그녀의 옆에는 호위를 위해 중랑장들과 박 태감이 말없이 서 있었다.

여름의 한가운데이고 날이 가장 뜨거운 낮 시간인 탓에 상당히 더웠지만, 진예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한동안 그렇게 성루에서 제 백성들을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러다 거슬리는 것이 생겨 뒷짐을 진 손으로 지그시 주먹을 쥐었을 때였다. 다행히 인내심의 한계에 달하기 전에 기다리던 이가 나타났다.

“폐하, 부르셨습니까.”

익숙한 목소리에 진예가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그래, 위장군.”

진예와 함께 황도로 돌아오자마자 위장군은 다시 지하실을 찾도록 금군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혹시나 지하실을 찾지 못했다는 소문이 나면 안 되었기에 주로 사람들이 활동을 멈추는 삼경이 지난 새벽에나 돌아다녔다.

그 와중, 불행 중 다행인 소식이 들려왔다. 진예가 오전에 보고받은 내용을 떠올리며 물었다.

“금위의 시신이 나왔다고?”

“그렇사옵니다.”

이전에 실종된 금위의 시신이 황도의 구석에 있는 폐가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금위들은 2인 1조로 구성되어 지하실 입구를 찾으러 다녔었는데, 그중 하나의 시신만 발견된 상태였다.

이미 시간이 오래 지났기에 많이 부패한 시신이라고 했다.

자신이 한때 함께했던 부하의 시신에 구더기가 끓고 있던 그 광경을 확인하고 온 위장군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게다가 시신이 발견된 상태가 너무 지독했다. 사람의 손을 탄 흔적 또한 명확했으므로, 그 뒤를 쫓을 생각이었다.

보나 마나 지하실과 관련되어 있으니 위도양 측의 일이겠지만…….

그러나 그러한 속마음을 누르고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 그는 담담하게 상황을 일렀다.

“하여 주변으로 좀 더 면밀하게 입구를 찾고 있습니다. 곧 소식을 전해 드릴 수 있으리라 여기옵니다.”

“그곳에 익재가 있을 거라 하였다. 소리를 들었다고 하더군. 연 귀인이…… 말이다.”

갑자기 상방주에서 실종된, 아니 사실상 죽었다고 봐야 하는 무건이 언급되자 위장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숙였다.

“반란군이 수많은 익재들을 이끌고 다니는 이유가 그러한 연유가 아니겠사옵니까.”

그렇지.

진예는 속으로 동의하며 입술 끝을 슥 비틀었다. 화살촉처럼 날카로운 입꼬리에 아니꼬운 웃음이 맺혔다.

사람을 잡아먹는 본능이 있는 익재가 위도양이라는 사람을 지키는 광경을 보았을 때는, 기가 막혔다.

제 적을 놓친 그때를 생각하니 더 속이 불편해진 진예는 화제를 돌렸다.

“현재 한수의 상황은 어떻더냐.”

“좌장군이 직접 지휘하며 반란군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뭐 하나 제대로 해결되는 게 없군.”

아직은 많이 답답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제가 비래까지 가지는 않아서 다행이었지, 안 그랬더라면 황도로의 복귀도 늦어졌을 터다.

물론 위도양을 놓치고, 패잔병처럼 돌아온 모양새라 이미 분위기는 썩 좋지 못했다.

그러자 위로하려는 의도인지 뭔지는 모르겠으나 위장군이 얼른 덧붙였다.

“상방주의 익재들은 모두 정리되어 곧 다음 지역으로…….”

사내들이란 이리 둔감하다.

상방주의 이야기가 지금 진예에게 달가울 리 없었다. 그녀가 위장군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것 또한 연 귀인의 덕이려니.”

“…….”

예상치 못하게 다시 무건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자신이 실언했다는 걸 위장군도 그제야 깨달은 듯했다. 난처함에 입을 다무니 진예가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표기장군 장첨이 황궁에 발을 들일 수 있을 것 같긴 하다던가?”

그녀의 날카로운 물음에 위장군은 더욱 표정이 좋지 못했다. 그는 때마침 도착했던 서신의 내용을 떠올렸다.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주저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황궁에서 말씀드리고자 하였사온데…… 산 중턱의 절벽 아래에 익재들의 시신이 몇 구 발견이 되었다 하옵니다. 그것으로 미루어 보아.”

“연 귀인이 익재들에게 먹혔다, 그런 결론인 게로군.”

진예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가시가 잔뜩 돋쳐 있었다. 위장군은 오늘따라 제 말문이 여러 번 막히는 것에, 역시 자신은 말주변이 없다는 걸 통감했다.

이럴 때 진예를 위로할 수도, 그녀의 걱정을 덜어 줄 수도 없다는 사실에 측근으로서 마음이 무거웠다.

진예는 성루 아래의 상황에서 시선을 떼고는 멀리 황성을 둘러싸고 있는 산맥을 바라보았다.

나무가 우거지는 계절이라 산등성이에 초록이 뒤덮였다. 그러나 그 풍요로운 광경을 보고도 마음은 전혀 가라앉을 기미가 없었다.

외려 위장군의 이야기를 곱씹을수록 머리 한쪽에 뾰족하게 뿔이라도 난 듯 신경이 예민해졌다.

“짐의, 이 대환의 황비가, 익재에게 먹혔다.”

그 얼마나 비참한 죽음인가.

평민으로 태어나서 황제의 명인자로서 황궁으로 들어왔다가, 전쟁에 나가 익재에게 잡아먹힌다.

이보다 더한 개죽음이 또 있을까 싶었다.

“수색은 멈추지 않았사옵니다.”

또 위로랍시고 건넨 말이겠지만 위장군의 말은 진예의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이제는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전혀 모르겠다.

제 비인 연무건은 죽었다.

평생 옆에 있을 줄 알았던 조서엽은 제 손으로 내쳤다.

남은 건 반란군에 대한, 위도양에 대한 분노뿐이었다.

황위에 오른 뒤로 이렇게 기분이 최악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오랜만에 느끼는 이 혼란스러움이,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눈앞에 펼쳐진 일을 안 돌볼 수는 없는 상태이니 머리가 복잡해졌다.

기실 지하실을 찾는 일이 진척이 되든 말든 전장에 남아 있었어도 되긴 했다. 그러나 굳이 황도에 돌아온 것은 제 마음이 이렇듯 번잡한 탓도 있었다.

진예는 다시 성루 아래로 시선을 주었다. 황성 문을 통과하느냐 마느냐 조마조마해하는 제 백성들을 바라보며, 간단히 황명을 전했다.

“저 중에 위도양이 섞여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반드시 성문을 통과하는 자들의 짐은 모두 철저히 수색을 일러야 할 것이다.”

“예, 폐하.”

“또한 매일 황성과 황궁의 주변으로 구덩이가 파여 있진 않은지 확인하거라.”

지난번 황궁에 침입한 익재도 그렇고, 담상성이 점령될 때 땅으로 파고드는 수법을 취했으니 충분히 가능성 있는 안이었다.

위장군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리 일러두겠사옵니다.”

“위도양의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다. 금세 회복을 하여 나타날 것이다.”

“게다가 그를 보호하는 익재는 이미 우두머리 역할을 하고 있었사옵니다.”

위장군의 지적에 그녀가 퇴각할 당시의 상황을 되짚어 보았다.

그때 위도양을 낚아챈 녀석이 우렁차게 우니 근방에 있던 익재들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됐는지 몸집은 작은 놈이었는데, 드물게도 이미 우두머리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익재들은 본래 가장 강한 놈만을 저희들의 우두머리로 인정한다. 자신들을 이끌고 또한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놈이 아주 강력한 힘을 지녔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실제로 진예의 공격을 와해하기도 했었고.

“……거슬리는군.”

그리 맹목적으로 위도양을 따르는 익재의 모습이 단지 미마이의 능력 때문일까, 하는 의문도 들었기에 더더욱.

그녀의 미세한 불안을 알아챘는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위장군이 염려의 말을 건네었다.

“외람되오나 황궁에서 부디 옥체를 보전하시옵소서.”

그러자 진예가 곁눈으로 위장군을 돌아보았다.

“상황이 이런데 짐에게 궁에만 틀어박혀 있으라 하는 것이 그대의 충정인가?”

“폐하…….”

“짐에게 그런 보호는 필요하지 않아.”

딱 잘라 말하며 진예는 몸을 돌려 제 뒤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위장군의 어깨를 짚었다.

그리고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대도 결국 짐의 보호하에 있는 것이다.”

위장군만이 아니라, 환의 모든 백성들은 진예 그 자신이 지켜야 할 대상이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제 옆의 사내들은 전부 다 저를 지키겠다 난리를 쳐 댔지만 말이다.

말을 마치고 진예는 그만 성루에서 내려가고자 계단 앞에 섰다. 위장군이 묵묵히 뒤를 따르긴 했으나 그 눈빛은 어두웠다.

층계를 밟아 내려가는 진예의 뒷모습이 전례 없이 쓸쓸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다만 저 지고한 여인의 옆자리를 채우는 것은 위장군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성루에서 내려온 진예가 대기하고 있던 가마에 막 올랐을 때였다.

중랑장들과 시선을 나누고는 위장군도 갈 길을 가려 하는데, 누군가 그의 복귀를 기다리지 못하고 말을 타고 달려왔다.

“장군!”

큰 소리에 막 출발하려던 가마가 멈춰 섰다. 오는 데 숨이 찼는지 금위가 타고 온 말은 푸르륵, 하며 투레질을 했다.

얼른 말에서 내린 제 부하를 보고는 위장군은 먼저 엄한 표정으로 꾸짖었다.

“폐하의 앞이다. 감히 뉘 안전인데 경거망동을 하는 것인가.”

“송구하옵니다, 장군.”

먼저 혼부터 나니 기가 팍 죽은 금위가 시선을 깊이 내렸다. 그러는 사이 진예가 이야기를 엿듣기 위해 가마의 작은 창을 살며시 열었다.

위장군이 진예의 시선을 느끼며 금위를 다그쳤다.

“무슨 일인가.”

“그것이 시신이 발견된 폐가에 금줄을 치고 살피었는데…….”

“짧게 말을 올리거라.”

“예, 지하실의 입구가…… 입구가 발견된 것 같습니다.”

그러자 위장군의 뒤에 있는 가마에서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거망동할 만한 일이군. 계속 말해 보거라.”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자, 예의 금위는 말소리를 더욱 조심스럽게 내며 제가 아는 사실들을 읊었다.

“아직 들어가 보지는 않았사옵니다만…… 그것이, 바닥에 거의 구분되지 않을 만큼 미세한 균열 있고.”

진예가 뒷말을 받아 이었다.

“폭은 사람 하나가 겨우 들어갈 만큼 비좁으며, 마치 경첩이 삐걱거리는 것 같은 괴물이 우는 소리가 나니.”

진예가 끼어들 줄은 차마 예상하지 못해 잔뜩 긴장한 금위가 말을 살짝 더듬었다.

“그, 그러하옵니다.”

“연 귀인이 묘사한 바와 같군.”

혼잣말을 중얼거린 진예가 가마의 문을 열어젖혔다.

“해서, 그곳이 어디더냐?”

* * *

반상에 적당히 소담한 식사거리가 올라와 있었지만 서엽은 멍하니 특정되지 않은 어딘가에 시선을 둘 뿐, 숟가락을 들지도 않았다.

방문에는 짙은 사람 그림자가 걸려 있어 서엽의 얼굴을 더욱 어둡게 했다.

진예가 두 달간 구금하라고 한 것도 있었지만 제 아비인 조춘경이 한 발짝도 못 나오게 시종들에게 방문 앞을 지키라고 했다.

한데 밖에서 묵직한 발걸음이 들려오더니 이내 썩 기분 좋아 보이지 않는 낮은 음성이 방문을 질러왔다.

“아비다.”

그에 서엽의 시선이 잠시 방문 쪽으로 돌아갔다가 되돌아왔다.

서엽의 입장에서는 전혀 보고 싶지 않았지만 조춘경은 그의 허락은 필요치 않았던 듯 멋대로 문을 열었다.

조춘경의 뒤에 서엽의 어머니가 걱정스러워하는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으나, 곧 문이 닫혀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 한때 대장군을 지냈던 그 명성에 걸맞게 나이가 들어서도 어디 하나 굽은 곳 없고, 헌헌한 거구가 안으로 들어왔다.

서엽은 그에 밥상이라도 뒤엎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으며 물었다.

“어찌 절 찾으셨습니까.”

매정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조춘경은 안색이 납빛이 된 서엽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언제나 단정히 하던 옷깃은 답답했던지 멋대로 흐트러졌고, 안 그래도 군살 하나 없던 녀석이 며칠 사이에 볼살이 확연히 내려 있었다.

조춘경은 제 잘난 아들이 엉망이 된 꼴을 보고 혀를 차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그는 반상을 사이에 두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아들의 앞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못난 아들놈이 식음을 전폐하고 있다는데 그럼 안 들여다보겠느냐.”

염려 섞인 말이었으나 서엽은 무시하고 툭 물었다.

“대인께서 그러셨습니까.”

아비라고 부르지 않고 굳이 대인이라 칭하는 말에 조춘경은 굉장히 서운해졌지만 그런 마음은 숨기고 반문했다.

“무어가 말이냐.”

서엽은 여전히 그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미미하게 화가 밴 소리를 냈다.

“폐하를 뵙고 저를 버리라 주청드리셨냐, 이 말씀입니다.”

정곡을 찌르는 말에 조춘경은 잠시 말이 없었다. 다만 제 아들의 이런 원망을 언젠가 들을 줄 알았기에 변명거리를 준비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치 혼잣말하듯이 중얼중얼하는 제 아들의 모습이 너무나 불안해 보여 저절로 표정이 굳어 갔다.

“요 며칠 할 일이 없어 가만 생각해 보니 폐하께서 하신 말씀이 평소 대인께서 제게 한 말과 똑같더이다. 네 삶을 찾아라, 명인자를 찾거든 떠나라…….”

어차피 숨길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조춘경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래, 이 아비가 폐하를 뵙고 감히 널 내쳐 달라 주청드렸다.”

그제야 서엽이 고개를 슬며시 들어 제 아비를 마주 봤다. 눈빛에서 반항기가 읽혔다.

“어째서입니까?”

“네놈이 하는 짓은 황상을 향한 충정이 아니다.”

조춘경의 단호한 말에 서엽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대인께서 뭔데 이 조서엽의 마음이 충정이니 아니니 하십니까?”

예상은 했지만 서엽의 뻔뻔한 반항에 울컥한 조춘경이 바닥을 탁, 내리쳤다.

“그럼 감히 황비를 갖다 버리는 것이 충정이란 말이냐! 어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려서 아비를 이리 부끄럽게 만들어!”

아무리 은퇴했기로서니 대장군이었던 만큼 조춘경에게 전장의 소식은 누구보다도 빠르게 들어왔다.

그 와중에 서엽이 했다는 짓을 들으면서 얼마나 경악했는지 모른다. 처음엔 현실이 아닌 줄 알았다. 설마 자신의 아들이 이러지는 않았을 거라고.

하지만 떨리는 손에 쥐인 종이에 적힌 글귀는 몇 번을 봐도 같은 의미였다.

자신의 아들이 황제의 유일한 비인 귀인 연 씨를 몰래 빼내서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였다.

“네놈이 전장에서 황비를 반란군의 손에 넘겼다. 그 일로 그놈들은 황비를 죽였다고 온 천하에 떠들어 대며 우리 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백성들을 혼란하게 했어. 그 죄가 얼마나 중한지 알지 못하는 게야?”

감히 황제에게 충성을 다 바친다고 말하는 자로서 벌일 수 없는 일이었다.

조서엽의 말하는 충정은 이미 충정이 아니었다.

“멸문이 되어도 할 말이 없는 중죄다. 그럼 네놈 목숨이 이리 붙어 있는 것에 감사해야지, 감히 폐하의 앞에서 또다시 그 얼굴을 뻣뻣이 들겠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어?”

소식을 들은 진예의 분노가 어마어마했다고 들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위장군이 무릎을 꿇고 서엽을 더 강하게 단죄하라 일렀다고 한다.

사태가 그리 심각한데도 제 아들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조춘경은 답답함에 제 가슴을 치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질책에 서엽은 핑계조차 입에 올리지 않았다. 대신 힘이 빠진 목소리로 순순히 인정해 왔다.

“……제가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 입 다물고 있어야지, 누굴 원망하는 게냐?”

“말씀하신 대로 충정보다는…… 그래, 연모의 정이겠지요. 맞습니다, 그래서 황제 폐하의 신하가 아니라 사내로서 연무건 그놈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겠어서 그랬습니다.”

다시 고개를 떨어뜨린 서엽이 눈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보고 조춘경은 오히려 제 마음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이번 일만큼은 도무지 그의 편을 들어 줄 수가 없었다.

“못난 놈. 네놈이 아무리 정신이 나갔어도 아비를 이리 실망시킬 줄은 몰랐다.”

서엽은 허허한 웃음을 흘렸다. 왜 이리 못난 사내가 됐냐는 진예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 말 또한 폐하께 이미 들었습니다.”

그의 힘 빠진 증언에 조춘경은 미간을 슬며시 좁혔다. 어딜 봐도 눈앞의 제 자식이 도무지 정신 차릴 것 같지 않아서였다.

그렇지만 진예가 약속을 지켜 주었으니, 이쪽도 어떻게든 제 아들을 바로잡아 놔야만 했다.

“폐하께서 황은을 내려 네놈을 복직시켜 주시겠다고 하니 감사히 받들거라.”

서엽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폐하의 옆이 아닌데, 제가 그 자리에 가서 뭐 합니까.”

“서엽아.”

조춘경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제 아들을 불렀으나, 정작 서엽은 방에 들어와서 한 말을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 천천히 제 옷의 왼쪽 팔소매를 올렸다. 소매가 걷어진 자리에 근육이 단단히 뭉친 팔뚝 위의 불로 지진 상처가 드러났다.

이전에 죽은 서엽의 급사를 통해 서엽이 이곳을 지졌다는 소리는 듣긴 했지만, 예상보다 더 지독한 흔적에 조춘경은 조금 놀라고 말았다.

그런 아비의 반응을 보고 서엽이 예상한 대로의 말을 했다.

“제 명인이 나왔던 자리입니다.”

“…….”

당장 누구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조춘경은 꾹 참았다. 지금 다그쳐 봤자 서엽의 반항만 거세질 것이었다.

“미마이가 그러더군요. 잔혹한 운명이라고…….”

“일전에 머물렀던 그 서역인 아이 말이냐.”

들끓는 마음을 애써 내리누르며 조춘경이 차분하게 묻자 서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폐하의 옆을 떠나지 못합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그분 곁이어야만 합니다.”

그간 서엽에게서 너무 많이, 정말 수도 없이 들었던 말이라 조춘경은 이젠 그러지 말라고 닦아세울 기운도 없었다.

해서 과연 변화가 있을까 싶어 그도 이젠 약간 지친 목소리로 대꾸했다.

“대체 명인자가 누구인지 말해 주지 않을 것이냐?”

그런데 변화가 있긴 있었다. 그저 더 무모해졌다는 게 문제였다.

“폐하를 만나게 해 주십시오. 대인께선 가능하게 해 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서엽아!”

조춘경은 저도 모르게 큰소리를 냈다.

제 아들놈이지만 정말 제정신이 아니라는 말밖엔 할 수가 없었다. 두 달간 구금 명령을 받아 놓고 황제를 만나게 해 달라니?

“제 명인자가 누구인지는 폐하께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서엽이 조춘경이 그리도 알고 싶어 하는 진실을 눈앞에서 흔들며 제 요구 사항을 관철했다.

조춘경은 그야말로 눈앞이 암담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니, 그런 고상한 표현보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몰랐다.

그런데 제 아비의 상태는 아랑곳하지 않은 서엽은 그가 방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간절한 눈빛을 띠었다.

그는 반상을 옆으로 치우더니 조춘경에게 가까이로 왔다. 그리고 아비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손을 덥석 잡았다.

“제발, 폐하를 뵙게 해 주십시오.”

조춘경은 아들의 손을 차마 뿌리치지 못했으나 제 아들의 정신 나간 발언에, 세상을 오래 살아온 지혜로도 뛰어넘기 어려운 벽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황궁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놈이 어찌 뵙겠다고 그러느냐.”

완곡한 거절에 서엽이 조춘경을 잡은 두 손을 떨었다.

그에게 죄를 저질러 구금되고, 그로 인해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진예를 보지 못하게 되니 정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매일같이 제 눈앞에 있어도 늘 애탔던 사람이다. 한데 이대로 두 달을 버텨 집 밖으로 나가도, 먼발치에서만 바라봐야 하는 제 처지를 생각하니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진예와 멀어져야 한다니…….

살아도 사는 게 아닐 터였다.

그런 건 서엽이 지금까지 단 한 번 상상해 본 적 없는 삶이었다. 제 삶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니어야 했다.

벌써부터 혀 깨물고 죽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죽은 연무건에 대한 분노는 더 차올랐다. 그의 무덤이라도 있었다면 당장 달려가 관 뚜껑을 열고 다시 난도질을 했을 터였다.

그런데 뒤늦게 제 아비의 존재가 해답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자 서엽은 오랫동안 경계해 왔던 제 아비에게 애원하게 되었다.

“제가 폐하를 안 뵙고 어찌 살아갈 수가 있습니까…….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러고 서엽은 제 아비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금세 울어 버릴 듯한 아들의 모습에 조춘경은 어찌해야 할지 몰라 헤매다가 아들의 떨리는 어깨를 감싸 품에 안았다.

어릴 때 이후로 한 번도 안아 준 적이 없어서 낯설었지만, 여전히 그때처럼 제 아들은 한없이 작았다.

서엽은 아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조춘경에게 제 아들은 언제나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래서 감히 황제에게 찾아가 제 사사로운 일을 논한 게 아니겠나.

“네놈이 이러니 이 아비의 속도 탄다, 서엽아…….”

그렇게 조춘경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아들의 청을 들으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는 제 아들과 들여온 그대로 손도 대지 않아 식어 버린 음식들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장탄식을 쏟아 냈다.

죽네 사네 하는 서엽의 부탁에 차마 답은 내주지 못하고, 조춘경은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마자 서엽의 어머니가 안의 소리를 내내 엿듣고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보였다. 저러다 제 아들이 혹시나 자결이라도 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조춘경은 답답한 마음을 내리누르며 아내를 조용히 안아 주며 속삭였다.

“걱정 마시오, 부인.”

그러고는 본채로 돌아가면서 따라오는 집사에게 운을 띄웠다.

“폐하께 연통을 보내야겠다.”

“준비하겠사옵니다.”

대답을 들으며 조춘경은 제 선택에 헛웃음을 쳤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그게 딱 맞았다.

* * *

이미 들은 대로 금줄을 쳐 놓은 한 폐가에 진예가 들어섰다. 작은 그녀의 주변을 둘러싼 위장군과 금위들이 전부 난처해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의 발걸음을 멈추진 못했다.

가장 먼저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방으로 그녀가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문을 열라며 옆의 금위에게 지시하는 걸 본 위장군이 손으로 가려 문고리를 못 잡게 막았다.

“이는 확인치 않으시는 편이 나을 것 같사옵니다, 폐하.”

진예는 굳이 묻지 않아도 이유는 알 듯했다. 안쪽에서 부패한 냄새가 지독하게 퍼져 나왔다. 하지만 절차상 일단 하문했다.

“어째서냐.”

“좋지 못한 광경이옵니다. 금위들도 보다가 비위 상해 하니 보지 않으시는 편이 나으실 거라 사료되옵니다.”

“수년을 전장에 있었고, 수많은 익재 놈들을 도륙했던 나다. 비켜서라.”

반박할 여지도 없는 말에 위장군이 옆으로 물러났다.

기이익.

곧 문이 열리고 진예가 제 얼굴을 가린 검은 천을 걷어 냈다. 그러자 예의 비위 상하는 장면이 드러났다.

낮 시간이라 창으로 살며시 햇살이 비쳐 안의 풍경이 더 눈에 잘 들어왔다.

폐가답게 사람 손이 닿지 않아 구석엔 크게 거미줄이 쳐진 방 안, 그곳에서 풍기는 지독한 냄새와 선명하게 보이는 끔찍한 광경에 주변의 금위들이 고개를 돌리며 헛구역질을 했다. 그중 몇몇은 위장군의 눈짓에 먼 곳으로 달려가기까지 했다.

“…….”

바닥에 하얀 구더기가 꿈틀거리고 있는 것은 물론이었고, 썩어 버린 시신이 흘러내려 시신이 걸려 있던 벽과 그 밑의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부패한 피가 스며든 벽을 바라보며 진예가 중얼거렸다.

“시신에 못이 박혀 있었군. 목, 어깨, 팔…….”

“그렇사옵니다.”

“전시해 놓듯이 말이야.”

마치 이걸 보고 절망을 느끼라는 양.

하지만 진예로서는 전혀 겁먹을 이유가 없었다. 이렇게 요란한 놈들일수록 속 빈 강정일 확률이 높았다. 패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더 큰 소리를 치는 것이다.

지금까지 위도양의 행태는 늘 그랬다. 자신의 행적을 전부 까발리면서 돌아다니지 않았던가.

자신감의 표현일 수도 있지만 진예가 보기엔 그녀가 가지고 놀릴 수 있는 패는 익재밖엔 없었다.

진짜 반란이 아니라 화친왕에 대한 복수로 시작한 일이고, 이제 와선 목표였던 둘 중 하나는 제거했으니 어차피 위도양에 거창한 패가 필요치도 않겠지만.

“해서 지하실 입구는 어디냐.”

진예가 그만 뒤돌자 얼른 방문이 닫혔다. 위장군이 옆옆에 있는 방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 방의 바닥에 입구가 있습니다.”

그 방은 조금 어둑했다. 안에 들어서자 입구가 잘 보이도록 등잔불을 밝힌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의 미세한 균열이 가 있는 것을 확인한 진예가 물었다.

“들어가 보았느냐.”

그에 위장군이 뒤에 서 있는 금위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그 금위가 상황을 보고해 왔다.

“아직이옵니다. 금위 하나가 실종되어 안쪽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니 일단 깊이만 확인해 둔 상태였나이다.”

발견하자마자 보고를 하러 달려왔으니 그 나름대로 최선의 조치였다 말할 만했다.

“열어 보거라.”

진예의 명에 금위 하나가 지렛대를 가져와 틈에 이리저리 쑤셔 넣었다. 곧 지하실의 입구가 삐걱거리며 열렸다.

그러자 격자로 된 철망이 덮여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 깊이 측정은 격자 사이로 넣어서 했던 것인지, 철망을 걷어 낼 땐 약간의 먼지가 일었다.

딱 한 사람이 설 공간만 뚫려 있는 그곳은 손잡이를 잡고 발판을 밟고서 내려가고 올라오게 돼 있었다.

이미 알고 있던 바대로 입구의 통로를 따라 미세하게 익재가 끼익, 끽 해 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과연 안에 괴물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까딱 손이나 발 중 하나라도 미끄러지면 떨어져서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진예는 제 머리 위의 거추장스러운 모자를 벗었다.

“지하실로 내려가 봐야겠다.”

위장군은 얼른 진예의 모자를 받아 든 뒤 중랑장에게 넘기며 물었다.

“지금…… 직접 말씀이십니까?”

아무리 그래도 지금은 아니지 않느냐는, 염려 섞인 말투였다.

진예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지금이 아니면 짐이 이곳에 또 행차할 일이 있겠느냐.”

이후엔 정신없이 바쁜 황궁에 앉아 보고만 들어야 할 것이다. 그도 아니면 새벽녘을 틈타 와야 할 것이고.

영 못 오는 것까지는 아니겠으나 방금 전의 시신을 본 것도 마음에 걸리고, 낯선 곳에 들어가기엔 그래도 낮 시간이 안전했다.

“하면 제가 앞장서겠나이다. 너희들은 폐하의 뒤를 따라라.”

다행히 단번에 진예의 뜻을 알아차린 위장군이 잔뜩 긴장한 채 방 밖까지 도열해 있는 금위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나 진예는 명을 번복하게 했다.

“따라올 이는 둘 정도면 충분하다.”

위장군은 불안해하는 눈치였으나 근처의 금위 중 그나마 눈에 익은 두 사람을 지정했다.

“너희 둘이 따라오너라. 나머지는 입구 주위에 대기하라.”

“예, 장군.”

위장군은 누군가 건네는 등잔불을 들고서 먼저 입구로 내려갔다. 이어 적당한 간격을 두고 진예도 입구에 몸을 밀어 넣었다.

한데 발판을 밟으며 천천히 내려가는 중 몸을 들이기 전에는 몰랐던 것이 보였다. 손잡이와 벽에 누군가 손에 피가 나도록 긁어 낸 흔적이 보였다.

피는 오래됐는지 검게 변색되어 말랐으나 누군가, 그것도 사람이 이곳에 갇혀 있었음은 충분히 짐작 가능하게 했다.

‘실종된 금위인가.’

그편이 자연스러운 추론일 것이다…….

다만 위장군이 어느새 바닥에 내려섰지만 시신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수직 구간을 지나 니은 자로 꺾인 통로로 들어선 위장군이 외쳤다.

“안쪽에 내려가는 계단이 있사옵니다, 폐하.”

때마침 진예도 수직 구간을 모두 지나, 조금 떨어져 있는 바닥에 뛰어내렸다. 그러고 제가 지나온 통로를 올려다보았다. 키의 열 배 이상은 돼 보이는 높이였다.

그리고 위장군이 말했던 아래로 향하는 계단 앞에는 너덧 명 정도 서 있을 만한 넓은 공간이 존재했다.

제 뒤로 따라오던 금위들도 마저 바닥에 도착하자, 위장군이 하나에게 등잔불을 넘겨 그를 앞세웠다.

계단은 꽤 길었다. 지나가는 동안 어디선가 끊이지 않고 익재의 소리가 들려왔다.

끼이, 끼…….

느릿하고 기운 없는 소리였다.

그것을 들으면서 어쩐지 익재는 몇 마리 없지 않나, 아니 실은 딱 한 마리만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일단 실체를 확인한 건 아니니 진예는 조용히 금위들의 뒤로 천천히 따라갔다.

층계참을 지날 때마다 계단의 폭도 조금씩 넓어지기 시작하더니, 곧 그들의 눈앞에 죄수나 가둬 둘 만한 감옥 같은 것이 나타났다.

사람 서른 명 정도는 충분히 누워 잘 만한 공간에 감옥은 여덟 칸 정도가 있었는데, 이미 안에 있는 것들을 다 빼돌렸는지 텅 빈 채였다.

위장군은 앞으로 나아가더니 각 감옥의 벽과 바닥, 그리고 천장에 붙어 있는 쇠사슬과 그 끝에 달린 검은 고랑들을 확인했다.

그는 일전에 화친왕부의 후원에서 발견했던 무너진 지하실을 떠올리며 신음을 흘렸다.

“지하실에 익재들을 이런 식으로 묶어 놨던 모양이옵니다.”

“생각보다 넓구나.”

다만 비어 있는 듯한데, 아직도 어디선가 익재의 끽끽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 소리의 근원을 확인하러 간 다른 금위 하나가 소리쳤다.

“이곳에, 익재가 있습니다!”

그 말에 불빛을 든 금위가 그곳으로 옮겨 갔다. 진예도 위장군과 함께 따라가자, 지하실 가장 구석에 위치한 쇠창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익재 한 마리가 보였다.

그것을 본 순간 진예는 눈살을 찌푸렸다.

보통 익재들은 그래도 동물의 형상에 가까운데 눈앞의 익재는 곧 흘러내릴 진흙을 뭉쳐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그런 건지 몰라도 날개는 꺾여서 도무지 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간신히 보이는 눈 코 입밖에 움직이지 못하는 녀석은, 쇠창살 바깥을 바라보며 울고 있었다.

“끼이이, 끼…….”

위협적이라기보다는 애처로운 울음소리였다.

팔다리도 따로 없는 이놈을 보면, 누가 봐도 쓸모가 없어서 두고 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보고 위장군이 왜인지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기서 대체 무얼 한 것인지…….”

그에 진예가 앞으로 나아가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설마 저런 걸 주워 왔을 리는 없으니.”

그리고 창살 안을 둘러보면서 다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익재를 키웠나 보군.”

재밌는 발상이었다.

그렇지만 꼭 저런 참혹한 것을 만들어야 했을까?

그런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쇠창살 쪽으로 다가가자 위협을 느꼈는지 진흙덩이가 스스스, 움직여 더 구석으로 움츠러들었다.

“…….”

익재는 인간이 주식이지만, 가끔 풀 같은 것도 뜯어 먹는다. 그리고 사실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생명력이 허락하는 한 꽤 오래 살 수 있다.

저 녀석은 어느 정도 기간인지는 모르겠으나 모르겠지만 꽤 오랫동안 홀로 이곳에 남아 있었던 듯했다.

진예는 겁먹은 괴물―이게 얼마나 위화감 있는 단어 조합인가 고찰해 보는 것은 잠시 차치해 두고―을 보며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그러고 위장군이 말리는데도 쇠창살을 밀며 안으로 들어갔다. 진예의 짙은 그림자가 익재의 위에 드리우자 진흙덩이 익재가 바들바들 떨었다.

진예는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그대로 진흙덩이 위에 칼을 꽂아 넣었다.

“끼…….”

칼끝의 느낌도 물컹했다. 아주 불쾌했다는 소리였다. 익재는 고통스러운 듯 점점 강한 신음을 내질렀지만 저항하지는 못했다.

해서 진예는 그대로 익재의 몸뚱이를 갈라 버렸다. 더 이상 익재의 신음 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진예는 무표정한 얼굴로 도로 밖으로 나와 지하실을 눈으로 한번 훑었다.

그러다 그녀의 눈길이 한쪽 벽에서 멈추자 위장군이 재빨리 등잔불을 들고 그곳으로 가 손으로 한번 만져 보았다.

“……만든 후에 메운 흔적이 있사옵니다. 통로가 있었지만 막아 둔 모양이옵니다.”

그에 진예는 텅 빈 지하실을 눈으로 훑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이 지하실 위치는 위도양이 일부러 알려 준 모양이다.”

지하실 입구를 찾으려고 쓴 시간만 얼마였던가.

이제야 진짜가 나타났나 했는데 완전히 놀아난 꼴이었다.

표정을 굳힌 진예가 위장군의 곁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위장군이 살며시 걸음을 옆으로 물러나 불빛으로 벽을 비춰 주자, 벽에서 한 걸음 떨어진 진예가 들고 있던 검에 힘을 불어넣었다.

그러고 대각선으로 휘두르자 메워 두었다는 그 벽이 쾅,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돌로 촘촘하게 메운 벽에 균열이 가면서 지하에 가루가 날렸다.

하여 뒤에 있는 금위들이 살며시 기침까지 했으나 이 정도로 벽은 뚫리지도, 무너지지도 않았다.

진예는 검기에 움푹 파인 벽을 손으로 만졌다. 손끝으로 살살 긁어내자 부스러기가 후두두 떨어지긴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단단한 벽은 몇 번을 쳐 대든 완전히 부서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미 이곳을 비운 지 꽤 된 모양이옵니다.”

위장군이 진예의 표정을 살피고는 한마디 거들었다. 진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금위들이 실종된 직후나 멀어 봤자 닷새 안쪽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이 입구를 발견하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 금위들의 행동이 제약된 탓도 있고, 그들이 잘 숨겨 둔 탓도 있을 것이었다.

화친왕이야 어렸을 때부터 몸은 약했어도 그녀보다 영악하고 잔머리는 잘 굴렸다. 녀석이 설계했을 게 뻔한 이곳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발견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마 지금처럼 입구 어딘가를 들켰을 때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도 녀석은 미리 다 짜 놓았을 터이다.

어차피 전부 적들의 손바닥 안이었다. 이곳에서 더는 얻어 갈 게 없다고 판단한 진예는 칼을 도로 칼집에 돌려놓고, 마지막으로 지하실의 구조를 한번 눈에 담은 후 뒤돌아섰다.

“화친왕부 쪽의 지하실 구조도를 전부 그려 두었겠지? 이곳도 마찬가지로 처리해서 짐에게 가져오너라.”

“그리하겠사옵니다.”

진예는 제가 방금 죽인 익재의 시신을 한번 확인한 뒤 입구로 올라갔다.

나가서 살펴보니 입구 옆으로 치워 둔 철망에도 피와 함께 부패한 살점이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이 폐가에 전시되어 있는 자의 시체가 워낙 심하게 썩어 버려서 저 살점이 그자의 것인지 아닌지도 구분하기 힘들었다.

다만 저 흔적을 보니 실종된 다른 한 명은 어디에 있고, 어떻게 되었을지에 대한 의문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공무가 많은 그녀로선 이곳에 더 시간을 쏟는 것도 여의치 않았기 때문에 도로 모자를 써 제 얼굴을 가렸다.

폐가 앞에 대기하고 있던 가마에 올라타 문을 닫기 전, 진예는 함께 온 내관을 시켜 위장군에게 황궁 출입증인 묵칙을 건넸다.

“위장군은 특이 사항이 생기면 한시도 지체 말고 황궁에 들어 보고하라.”

일단 사안을 직접 챙기겠다는 이야기였다. 위장군은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두 손으로 내관이 내미는 묵칙을 받아 들었다.

“필히 그리하겠사옵니다, 폐하.”

가마를 타고 황궁으로 복귀하는 길, 진예는 흔들리는 가마의 창을 살짝 열어 평소보다 한산한 황성 외성의 거리를 살폈다.

전쟁이 좀 더 심화되고, 황성의 출입마저 자유롭지 못해 그런가. 시전들을 지나치는 와중에도 어딘지 가라앉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외성에 사는 권세가들조차 몸을 사리고 있는 모양인지 거드름을 피우는 이들 역시 별로 보이지 않았다.

황성 안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이전에 들렀던 한수 지역의 마을보다도 활기가 덜한 모습이었다.

제 치세에 이런 상황이 생기다니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태평성대를 이룩하지는 못하더라도 제 아비보다 더 훌륭한 군주가 되겠다 다짐했었다. 그러지 못한다면 저와 서엽의 손에 피를 묻혀 가며 황위를 찬탈한 의미가 없는 것이다.

진예는 이전의, 거리를 꽉 메웠던 외성의 풍경을 상기하며 그만 가마의 작은 창문을 닫았다.

그러면서 다짐했다.

반드시, 위도양과의 싸움에서 이길 것이라고.

기실 자신이 질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았지만.

* * *

황궁으로 돌아와 저녁 늦게야 침전에 든 진예의 앞에 연통 하나가 내밀어졌다. 진예가 만남을 허락지 않을 이들의 것은 알아서 거르는 태감이 웬일로 가져온 소식이었다.

침전에 달린 전각에 앉아 작은 폭포와 그 아래 연못을 바라보며, 자기 전 가볍게 차를 한 잔 마시고 있던 진예는 연통을 받아 들면서 의례적으로 물었다.

“누가 보냈더냐.”

“조춘경 전 대장군이시옵니다.”

궁인이 따라 준 차를 마시려던 진예의 손이 멈칫했다.

“조 공이……. 그래, 오랜만이로구나.”

얼굴 본 기간이 이미 해를 넘겼다.

보나 마나 서엽의 일 때문이리라 예측되긴 했지만, 진예는 그와의 만남을 거부할 생각은 없었기에 그가 보내온 편지를 기꺼이 펼쳤다.

소신, 이미 관직에서 물러난 지 오래이나 한때 깊은 황은을 입은 자로서 감히 폐하께 뵙기를 청하나이다.

조춘경의 품성에 맞게 힘찬 필체였다. 그러나 정갈함 또한 품은 그 글씨에서 조심스러워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진예는 태감에게 연통을 되돌려주며 말했다.

“내일 자시에 들라 이르거라. 내동문을 통과하거든 즉시 이곳으로 오게 하고.”

“예, 폐하.”

한데 그렇게 답한 태감은 진예가 다시 찻잔을 잡는 것을 보고는 나가려던 걸음을 멈췄다. 그는 전각 앞의 풍경과 그녀에게 각각 한 번 시선을 주더니 이내 한마디 했다.

“날이 많이 더워 옥체를 해할까 우려되옵니다.”

그에 진예가 갑자기 왜 그러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진예는 천성적으로 더위를 많이 타지 않았다.

다만 생각하다 보니 짐작 가는 것이 있어 그녀가 푹 웃었다.

“짐이 외로워 보이는가.”

“……아니옵니다.”

“한데 무엇을 염려하는 것이지? 말벗이 없어 이리 차만 들이켜는 게 못마땅한가.”

이럴 때면 궁인들 대신 서엽이 옆에 있긴 했다.

그렇지 않으면, 최근엔.

진예는 고개를 돌리다 문득 한 장면을 떠올렸다.

이곳 바닥에 굴러떨어졌던 옥가락지와 부끄럽다는 듯이 얼른 잡아 숨기던 손, 그리고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던 한 사내.

그것이 뇌리에 스치자 차 맛이 좀 떨어지긴 해 진예는 잔을 내려놓았다. 그렇지만 말소리에 변화는 없었다.

“쫓아다니던 놈들이 사라져 개운하기만 하니 걱정은 놓아도 된다.”

단지 말뿐이 아니라 진예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저 수년간 누려 왔던 익숙함이 사라진 것에 불과했다. 어차피 누군가의 정에 기대어 살아온 삶은 아니지 않은가.

한데 태감의 쓸데없는 걱정이 이어졌다.

“귀인께서 돌아오실 수는 있겠사옵니까?”

진예가 이번에도 왜 그러느냐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위장군이라면 몰라도 태감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무건을 그리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는 아니었는데. 그래도 죽었다고 하니 심경의 변화가 인 모양이었다.

“돌아오긴 무슨. 이미 죽은 사람 같은 건 빨리 잊어야지, 망령을 그리워해서 무엇 하나.”

제법 매정히 들리는 그녀의 말에 태감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제가 설마 진예의 마음을 잘못 읽은 건가 의심하는 눈치였다.

“그래도 찾으시려는 것 아니셨나이까?”

“그럼 대환의 비를 객사해 장례도 못 치르는 신세로 그냥 둘까?”

“……망극하나이다.”

명분 때문에라도 진예는 반드시 연무건의 시신을 찾아내야 했다.

반란군에 의해 죽고 익재에게 잡아먹혀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던 황비.

무건도 역사에 그리 기록되기를 바라지는 않을 터이고, 진예 또한 그런 오명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태감이 민망하다는 양 고개를 숙이는 걸 보며 진예가 의자를 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얘긴 그만하지. 차도 충분히 마셨으니 짐도 이제 잠자리에나 들어야겠다.”

그 말에 바깥과 이어진 문이 닫히고, 태감도 행랑과 이어지는 문 앞에서 한 걸음 비켜섰다.

작은 발이 행랑을 밟고 지나 침방에 들었다. 그녀 혼자 쓰기엔 지나치게 넓은 침상에 눕는데, 괜히 아까 태감의 말 때문에 그녀의 눈이 쉬이 감기지 않았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었는데.’

따지고 보면 황궁에 고작 몇 달밖엔 없었던 놈이다. 한데 누가 잊기라도 할까 봐 이 평화롭다면 평화로운 황궁에 사건 사고를 많이도 일으키고 갔다.

눈을 감기 전 진예의 머릿속에 무건이 물었으되 답은 주지 않았던 질문 하나가 스쳤다.

〈황후까지는 몇 걸음이 남았습니까.〉

“한 걸음. 이제 한 걸음 남았다.”

허공을 향해 그리 읊조렸으나 이제 와서는 공허한 메아리만 돌아올 뿐이었다.

“네 억울해서 어찌할 것이냐.”

걸어올 자가 사라져 버렸으니, 한 걸음이든 두 걸음이든 소용없어졌다.

“네놈 성미면 무덤에서라도 기어올라 올 성싶건만…….”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눈꺼풀 사이로 스르르 숨고, 이불 위로 다소곳이 모여 있던 두 손에서는 힘이 빠졌다.

* * *

창으로 시퍼런 여명이 스밀 무렵, 곧 있을 황제의 기침 시간에 맞추기 위해 황궁이 다시 부산해졌다.

그 기척에 깬 진예가 살며시 헛기침 소리를 내자 궁인들이 들어와 물을 떠다 주고, 깨끗한 새옷을 가져와 갈아입히고, 적당한 조반상을 준비해 왔다.

늘 같은 황궁의 아침이 밝은 것이었다. 진예는 편전에 들어 조회를 하기에 앞서, 내관들이 서궤에 쌓아 놓은 장계들과 각 지역에서 올라온 보고를 눈으로 훑었다.

상방주의 익재가 모두 괴멸함을 재차 확인함.

상방주의 군사들은 연무건의 시신을 찾기 위한 일부 인력을 제외하고 대부분 다음 익재의 서식지로 이동할 계획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에 간단히 그곳에 보낼 명령서를 작성하고, 다음으로는 읍주에서 올라온 내용을 확인했다.

요즘 읍주는 마치 폭풍 전야처럼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남은 다섯, 아니 이제는 하나가 괴멸했으니 넷이 된 서식지 중 가장 골칫거리인 곳인데 익재가 기어 나왔다는 소식이 한동안 뜸했다.

원래는 간간이 몇 놈이 무리 지어 나와 군사들이나 일반 백성들을 갑자기 잡아먹는 일이 생기곤 했었는데.

이번엔 무슨 일이 적혀 있긴 했으나 기존의 일과 결이 달랐다.

미상의 남자가 금줄을 넘어 읍주로 들어가는 것이 목격됨. 동행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사내아이를 보호 중.

이외의 특이 사항 없음.

각 서식지에는 모두 입구 근처에 상시로 주둔하고 있는 군사들이 있고, 익재들이 대규모로 튀어나오는 경우를 대비하여 인근 지역에 억지력을 발휘할 수 있을 정도의 군사를 보유한 성이 하나씩 있었다. 예를 들어 상방주의 담상성 같은.

그리고 서식지 주변의 그나마 안전하다고 할 수 있는 지역에 금줄을 쳐 둔 채, 그 앞의 작은 초소에서 종일 서식지를 감시했다.

다만 금줄을 쳐 놓은 지역에 종종 취한 놈들이나 호기심이 과한 놈들이 얼쩡대다 들어가는 경우도 있긴 하다고 들었다.

대부분은 들어가기 전에 쫓겨나지만 그래도 해마다 한 번씩은 놓치는 자들이 꼭 생겼다.

기어이 그 안으로 들어가는 무모한 자들의 말로야 당연히 굶주린 익재들에게 물어뜯기는 것이었다. 그런 이들은 시신도 찾지 못하고 신원도 영영 미상으로 남는다.

이번에도 그 경우인가 싶어 진예는 눈살을 찌푸렸다.

좋지 못한 상황이다 보니 이런 안 좋은 소식 하나하나가 그녀의 신경을 건드렸다. 옆에서 두루마리와 서신을 펼치며 보조해 주는 태감도 진예의 표정이 좋지 못한 것을 보고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진예는 옆의 젊은 내관에게 사안의 처리에 관해 말했다.

“사내아이는 하루빨리 되돌려 보내고, 읍주로 더는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감시를 강화하라 이르라. 다시 한번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때는 반드시 문책을 할 것이다.”

그녀의 말을 받아 적은 내관이 진예에게 내용을 한번 보여 주고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박 태감이 이내 다음 일정을 알렸다.

“이제 조회에 드실 시간이옵니다, 폐하.”

“알겠다.”

진예는 열리는 문 밖으로 나가 대신들이 기다리고 있을 곳으로 향했다.

다른 건물로 옮겨 가기 위해 행랑을 지나갈 때, 고개를 숙인 박 태감이 졸졸 쫓아오며 목소리를 낮춰 말해 왔다.

“조 공이 폐하께서 명하신 대로 오늘 자시에 황궁에 들겠다 답을 보내왔사옵니다.”

진예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최근 제 옆에서 사라진 사람의 안부를 물었다.

“조 후는 어찌 지낸다더냐?”

대답을 듣기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진예의 머릿속에 온갖 생각들이 들끓었다.

혹시나 곡기를 끊은 건 아닌가.

아니면 죽는다 난리를 피우고 있지는 않을까.

아니, 그랬다면 조춘경이 지금과 같이 여유 있게 연통을 넣을 게 아니라 바로 황궁으로 달려왔을 텐데…….

그런 생각들이 말이다.

다행히 박 태감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 심각하지는 않았다.

“방에 갇혀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하고 있다 듣긴 했습니다만…….”

“그렇군.”

자결했다는 소리를 듣지 않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떠나면 그리도 죽을 것처럼 굴더니, 단지 관직으로 되돌아가라는 말에 자신이 죽기를 바라느냐고 묻더니.

그 이후로 울면서 애원하던 서엽의 모습이 눈에 밟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제게 온 마음을 바쳤고, 평생을 자신에게만 충성한 가신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서엽의 말과 달리 결국은 살아지긴 하지 않는가. 하여 진예는 그가 서둘러 마음을 접고 정신을 차리기를 바랄 뿐이었다.

다만 그것이 여의치 않으니 조춘경이 자신을 찾는 것이긴 할 터.

‘무슨 부탁을 하려는지.’

서엽이야 전혀 모르는 듯하지만 제 아들에게 끔찍한 조춘경이니 내쳐 달라던 이전이랑 다른 청을 올릴 수는 있겠다.

그러나 서엽에 한해서는 두 사람의 목적이 같으니 어떻게든 합의점을 찾게 되긴 할 것이었다.

드르륵.

상념이 이어지는 사이, 목적한 곳에 도착해 궁인들이 문을 밀어 열었다.

진예는 안쪽에 대신들이 도열해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검은 발로 가려진 옥좌에 앉았다.

그때였다. 황궁 앞까지 말을 몰고 온 위장군이 급히 편전으로 달려왔다.

그로부터 용건을 전해 들은 박 태감은 쪽문으로 들어와 이제 막 조회의 시작을 알린 진예에게 다가왔다.

갑자기 끼어든 박 태감의 존재에 모두들 의아해하는 가운데, 그가 진예에게 조심스레 귓속말을 전했다.

“폐하, 두 번째 시신과 다른 입구를 발견했다 하옵니다.”

진예의 표정이 엄숙해졌다. 곧 그녀가 발 너머의 대신들을 향해 짧게 선언했다.

“정회한다.”

* * *

읍주 앞의 초소.

미마이는 그곳의 작은 의자에 앉아 저녁때에 맞춰 누군가 내준 따뜻한 떡을 입에 넣었다.

그러다가 시선을 느끼고 옆을 돌아보니 여러 명의 사내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서역인 아이를 신기한 듯 바라보던 초소의 병사들은 아이가 큰 눈을 깜빡이자 머리를 슥슥 쓰다듬더니 다시 물었다.

“그래서 저기 있는 익재들을 다 처리하고 돌아올 테니까 기다리라고 했다고? 네 아버지가……?”

그렇게 물은 병사는 읍주로 들어간 사내와 아이의 연령대를 생각하면 어떻게 해도 아버지와 아들 관계처럼 보이지는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아이가 그리 우기고 있으니 일단은 그렇게 지칭해 주었다.

이미 몇 번이나 반복된 물음에 미마이는 이번에도 똑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기다릴 거예요.”

그리 말하고는 미마이는 읍주 방향으로 살짝 열려 있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내가 아이의 손에 떡 하나를 더 쥐여 주었다.

“저기 혼자 들어가서 살아 나온 사람은 지금까지 없단다.”

미마이가 창밖에서 시선을 떼고 그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떡을 쥐여 줄 때 잠깐 맞닿은 손을 통해 무건이 벌써 죽었을 거라고 떠올리는 상대의 생각을 읽었다.

물론 그것이 일반적인 반응이기에 미마이는 기분이 상해 하진 않았다. 그저 무건이 멀지 않은 곳에 쳐진 저 금줄을 다시 두 다리로 무사히 넘어오길 바랄 뿐이었다.

“같이 돌아가기로 했어요.”

함께 황궁으로.

당연히 빈손 귀환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무건이 말했었다. 그래야 자신이 원하는 것과 미마이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며.

하지만 아이의 말이 얼토당토않다 믿는 초소의 병사들은 미마이를 살살 구슬리려 애를 썼다.

“집은 어디니? 널 빨리 돌려보내라는 지시도 내려와서 말이다.”

“물론 그 떡은 다 먹고 가도 된단다.”

어린아이를 아무 데나 갖다 버릴 수는 없으니 그들 나름의 친절을 베풀고 있는 셈이었다.

미마이는 그들이 슬슬 눈치를 주기 시작하자 차라리 저도 읍주로 같이 들어갈걸, 하며 후회했다. 무건이 강하게 반대만 안 했더라면 당연히 그렇게 했을 텐데.

미마이는 김이 올라오는, 폭신하고 달콤한 떡을 베어 물며 무건의 말을 머릿속에서 펼쳐 냈다.

〈최초의 익재를 잡을 거다.〉

최초의 익재.

원래는 인간이었다고 하는 모든 익재들의 어머니.

악신을 등지고 다닌다는 읍주의 주인이었다.

미마이도 두 눈으로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다른 익재들이 그 존재에 대해 떠들어 대는 소리는 많이 들었다.

익재들에게 있어서 그 최초의 익재는 절대적인 지주였다. 익재들은 그녀를 ‘대모’라 부르며 추앙했다.

그 사실을 말해 주자 무건은 빗소리가 들려오는 동굴에서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제가 죽을 가능성보다는 앞으로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말했다.

〈그렇다면 더 잘된 것이지. 그런 존재가 사라지면 익재들도 세가 급격히 약화될 테니.〉

희망이라도 본 듯 엷게 웃으며 뒤에 덧붙이는 말은 거의 허무맹랑한 꿈이라고 해도 좋았다.

〈최초의 익재를 내 손으로 죽이면 역사에 남을 공신이 될 수 있겠지. 그리하면 폐하께서도 더는 날 내치지는 못할 거다.〉

미마이는 그가 말하는 것이 진짜로 이루어질지 미래를 보고 싶어졌지만 그의 예지라는 것은 보통 쓸데없는 것들만 보여 주었고, 정작 원하는 건 별로 안 비쳐 줬다.

물론 상식에 기대어 보았을 때 무건의 계획은 골골대는 상태만 보아도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몸으로는 절대 안 돼요.〉

〈한시라도 빨리 황궁으로 돌아가야 해.〉

만류의 말을 건넸지만 무건은 고개를 저었다. 미마이는 그가 왜 이렇게 서두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가서 무얼 하시게요? 그리 급하신 것도 없으시지 않습니까?〉

시도를 하더라도 몸이 회복되고 난 후에 해야 하지 않을까.

근데 그런 의미라는 걸 모르지 않을 무건은 미마이를 더욱 품에 꽉 껴안으며 단호히 말했다.

〈아니, 모두가 내 존재를 잊기 전에 돌아가야 하는 거야.〉

어깨를 감싼 손에서 긴장감이 느껴졌다. 그도 아직 마주하지 못한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가 더 두려워하는 일은.

〈진예는 아마 날 더 빨리 잊겠지. 그런 사람이니까.〉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것이었다.

말하는 무건의 표정에 웃음기가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 미마이는 제 가슴을 누군가 움켜쥐고 꽉 죄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마…….〉

〈이미 나 따위는 생각 안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아니, 내가 사라졌다는 걸 듣고 과연 눈 하나 깜짝했을까.〉

오히려 후련해하고 있을지도.

씁쓸하게 덧붙이는 말에 미마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조서엽은 아직도 뻔뻔한 낯짝으로 폐하의 옆에 있을 것이고.〉

하지만 그렇다면 무건이 왜 이렇게 매달려야 하는 건지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왜 굳이, 그리 매정한 분 곁으로 가려 하셔요? 명인자라서요?〉

이따금 접촉할 때마다 무건은 온통 진예에 대한 생각밖엔 안 하고 있었다.

요 며칠 진예에게 버림받을 상상을 할 때, 그리고 실이 끊어지는 그 꿈을 꾸고 있을 때 그가 느끼는 비통함이 너무 깊어 미마이는 자신도 모르게 함께 가슴이 아파지곤 했다.

보통 사람은 그렇게 일관되게 하나의 생각만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무건은 정말 제 세상에 오로지 그녀 하나밖에 담지 못한 사람 같았다.

무건은 미마이의 질문에 잠시 틈을 두었다가 답했다.

〈조서엽도, 나도 없으면 혼자 있을 사람이니까.〉

〈……?〉

미마이는 얼굴에 의문을 띄웠다. 진예는 황제이기에 ‘혼자’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리고 내가 그 옆에 있어 주고 싶으니.〉

그렇지만 무건은 그녀가 정말로 외롭다고 믿고 있는 듯했다.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지만 미마이는 바로 이런 게 어른과 아이의 차이인가 하는, 아이답지 못한 생각을 했다.

세상의 진리를 몇 가지 알게 됐지만 그와 별개로 사람의 일부 감정은, 특히나 사랑이라는 것은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따라서 미마이는 그것에서 파생되는 수많은 불합리와 모순에 대해서 이해하기 힘들었다.

진예와의 좋은 순간을 떠올리는지 어느새 부드럽게 풀린 무건의 표정을 아이가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는 사이 무건의 말이 이어졌다.

〈처음 보는 순간 그 자리가 내 자리라는 걸 확신했다. 처음 품에 안았을 땐 내가 폐하의 곁을 채워 주리라 결심했어.〉

생각을 읽어도 될까. 왜인지 혼내진 않을 것 같은데.

그런 충동에 미마이는 잠깐 무건의 손을 잡았다. 무건은 혼을 내긴커녕 약간 한기가 도는 아이의 손을 자신의 커다란 손으로 감싸 주었다. 마음을 읽는 건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이.

가장 먼저 그가 말한 처음 안았을 때의 광경이 제게 밀려들어 오자 미마이는 얼굴을 확 붉혔다.

다음으로 보이는 두 사람의 첫 만남은 무건이 저리 포장해서 말하기엔 너무 무리한 장면이었다.

하나 다음 말을 듣고 미마이는 무건에겐 어떤 확신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분을, 사모해.〉

〈그분을, 사모해.〉

미마이는 스스로가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 생각하면서,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무건이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진심이었다.

진예를 향한 마음은 물론이고, 그녀에게 다가가기 위한 방편으로 최초의 익재를 잡으려 한다는 결심까지 전부.

역사에 길이 남을 공신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진예의 옆에 설 자격을 얻기 위해서.

〈……해서, 제가 무엇을 도우면 되는 건가요?〉

미마이는 여전히 그의 심경이 이해가 가진 않았지만 도와주겠다고 했다.

적어도 무건의 목적은 순수했고, 그렇기에 자신에게도 나쁜 짓을 시키려 하지 않으리라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 아침에 비가 그치고 해가 쨍쨍하게 떴다. 무건도 여전히 상태가 안 좋긴 했지만, 전날만큼은 아니었다.

미마이는 키도 덩치도 저보다 훨씬 큰 무건을 부축해 겨우 하산을 했다. 그리고 그가 바라는 대로 읍주로 향했다.

다행히 무건이 실종된 연 귀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위도양이 방을 붙여 둔 덕에 모두들 죽었을 거라고 확신해서 상방주의 산만 뒤지고 있었고, 사실 행색부터가 엉망이라 썩 귀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읍주로 오는 동안 무건은 천만다행으로 몸을 꽤 회복했다. 미마이가 약초를 구해 와 꼬박꼬박 먹이기도 했고, 그의 몸 안을 도는 기가 무건의 회복에 일조했다.

‘하지만…….’

결코 완벽하게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읍주에 들어가기 직전까지도 미마이는 아직은 안 된다고 그를 몇 번이나 만류했다.

하지만 한시라도 빨리 가야 한다는 그의 앞을 마지막까지 가로막지는 못했다.

생각하다 보니 미마이는 어쩐지 떡의 단맛에 슬슬 질렸다. 씹다 보니 질겨진 떡을 질겅질겅 씹으며 다시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해가 지고 저녁이 되어도 날이 더운 것만 제외하면 금줄 너머는 아직 아무 문제도 없어 보였다.

한데 그 순간, 미마이의 머릿속에 지금껏 보지 못했던 한 장면이 스쳤다.

비가 내리는 밤하늘, 그리고…….

‘……!’

미마이는 숨을 멈췄다.

동시에 창밖으로 눈이 멀 것만 같은 섬광이 일어 초소 안까지 일시적으로 밝아졌다.

번개처럼 눈앞을 환하게 한 그 빛이 지나는 찰나의 동안, 초소 안의 병사들이 모두 행동을 멈췄다.

그사이 미마이는 먹던 떡을 내려놓고 곧장 초소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자 당황한 병사들이 미마이를 불렀다.

“아이야!”

미마이는 초소 문을 열어젖히고 나가 제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힘껏 달렸다.

그렇게 금줄을 넘기 직전이었다.

“안 돼, 이놈아!”

곧 뒤로 쫓아온 병사들이 미마이를 붙잡았다. 그에 미마이가 팔을 뒤틀며 저항했다.

“놔요!”

자신이라면 무건을 도울 수 있을 것이었다, 분명히.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어른들은 미마이의 양쪽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그러고도 아이가 계속 버르적거리자 아예 들어서 어깨에 둘러메 버렸다.

미마이는 저를 어깨에 걸친 사내의 몸 위에서 버둥거리며 소리쳤다.

“안 돼, 안 돼요!”

“가만히 있어. 저 안은 위험해.”

“엄청 강한 익재예요. 그게 나타났다고!”

틀림없었다.

최초의 익재. 모든 익재들의 어머니.

그녀의 등장에 멀리서 익재들이 기세를 올려 끼우욱, 끼욱, 질러 대는 소리가 초소까지 닿았다.

그 선명한 환호를 들은 병사들은 금줄 너머를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이미 겁을 집어먹은 얼굴이었다.

재수 없게도 제가 당번일 때, 익재들이 저 금줄을 넘어올까 봐.

그래서 제가 가장 먼저 죽을까 봐.

그건 미마이를 도로 초소 안에 처박은 병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미마이를 거의 던지듯 내려놓으며 신경질을 부렸다.

“그러니까 더 가면 안 되는 거야, 이 꼬맹이야!”

상대가 의자 위로 던지긴 했지만, 정작 그 의자가 넘어지는 바람에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미마이가 아픈 부위를 문지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쿠르르르릉…….

그때, 하늘이 울었다.

“아…….”

미마이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창을 올려다보았다.

마침 굵은 빗방울 하나가 창문을 가로질렀다. 이어 둘, 셋……. 그렇게 스쳐 지나가는 빗방울들이 점점 늘더니, 순식간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허, 하필 소나기가…….”

누군가 미마이의 뒤에서 탄식했다. 아이를 빨리 내보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게 됐기 때문인 듯했다.

미마이는 그러거나 말거나 창문가에 바짝 붙어 금줄 너머를 바라보았다. 다시금 읍주의 한가운데에 번개가 내리쳤다.

그것을 보며 미마이는 제가 방금 전 보았던 장면이 진짜였음을 알게 되었다.

비가 내리는 밤하늘.

젖은 땅바닥 위에서 무릎 꿇은 무건과 기다란 낫을 든 두꺼비눈의 장난기 많은 악신이 그를 내려다보는 장면.

비록 딱 그 한 장면만 스쳐 간 것이라 결말을 보지는 못했지만, 미마이는 벌써부터 불안감에 사로잡혀 이로 입술을 짓이겼다.

‘제발 살아 돌아오셔야 해요, 마마…….’

같이 황궁으로 돌아가기로 했으니까.

자유가 된다고 해도 이대로 혼자 살아남아 떠돌이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 * *

“꺼어, 꺼…….”

무건은 제 앞의 익재를 노려보며 단도를 쥔 왼손을 익재의 입 안에 처박은 채 더 깊숙이 칼날을 꽂았다.

뒤통수로 칼끝이 비칠 지경이 되자 익재는 더는 그의 팔을 이빨로 깨물어 으스러뜨리려는 시도조차 못 했다.

그에 무건이 칼로 기를 흘려보내자 곧 익재의 머리가 퍽, 소리를 내며 터져 나갔다. 검은 피가 한순간에 사방으로 퍼지며 무건도 그 일부를 뒤집어썼다.

투둑, 소리를 내며 익재의 검은 피가 한가득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사라진 머리 아래의 몸체는 하얀 연기를 올리며 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던 무건은 새삼스레 제가 너무 제 능력에 대해 몰랐음을 깨달았다.

‘별게 다 가능하군.’

그간 써먹은 것은 그야말로 새 발의 피도 되지 않았다. 단지 익재를 태우는 능력이 아니었다. 이 ‘기연’이란 그냥 익재에 대응하기 위한 거의 모든 능력이라 봐도 무방했다.

“끼우욱.”

작게 익재가 우는 소리에 무건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익재의 체액이 얼굴 위로 툭 떨어져 그는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방금 전 그 익재를 끝으로 더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건지, 그의 위로 새까만 익재들이 차마 다가오지는 못한 채 날개만 퍼덕이는 중이었다.

지금 무건의 발아래며, 그가 걸어온 길은 전부 융단이라도 깔아 놓은 듯 익재들의 시체와 검은 피뿐이었다.

이토록 저희들의 수많은 동료들이 죽어 나가니 남은 익재들이 드디어 겁을 집어먹은 듯싶었다.

“끽, 끽…….”

그중에서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어린 익재가 가늘게 울자 어미로 보이는 놈이 퍼덕거리는 녀석을 품에 안았다. 그러더니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익재들은 모성애가 강하니 제 아이에게 해가 되겠다 싶으면 도망칠 거예요.〉

읍주로 오는 동안 미마이가 익재에 대한 이야기들을 잔뜩 해 주었다. 무건으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도 많았다.

가장 의외였던 부분은 역시나 그들의 유대에 관한 이야기였다.

익재는 자기 새끼가 독립하려 하기 전에는 끝까지 책임지려 하고, 새끼 역시 어미를 지키려는 본능이 강해서 독립하고 난 이후에도 어미를 어떻게든 지키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건은 일전에 위도양을 지키려는 익재의 모습을 떠올렸다.

미마이의 명령도 듣지 않고 인간인 위도양을 지키려 제 동료를 공격하던 그 익재를.

미마이도 그 익재가 위도양을 제 어미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로 기이한 관계라고 생각했다. 인간을 제 어미라고 생각하는 익재.

최초의 익재가 원래 인간이어서일까. 그 뿌리가 같기 때문에 그런 착각도 가능한 것인가.

무건은 멀리 날아가는 어미 익재를 바라보며 잠깐 그때의 말을 떠올렸다.

한데 그 뒤로 몇몇 놈들이 따라가더니, 이내 많은 수가 어미 익재를 필두로 해서 읍주의 북서쪽에 위치한 숲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끼이익.”

“끽…….”

무건을 피해 도망치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그에 무건이 그들을 쫓아가려 하자 그의 발 앞에 공격들이 쏟아졌다.

콰쾅! 쾅!

검은 기운이 내리꽂히더니 바닥이 움푹 패었다. 무건이 재빨리 물러나자 가장 말미에 있던 놈이 뒤돌아서서 무건을 향해 마치 꽃잎을 흩뿌리듯이 검은 기운을 쏘아 댔다.

무건이 오른손에 들고 있던 검으로 공격을 쳐 내는 동안 예의 익재는 뒤돌아서서 재빨리 무리에 합류했다.

밤 시간이라 더욱 칠흑처럼 어두운 숲으로 들어선 익재들은 나무 사이사이로 날아다니며 어디론가 향했다.

“끼이익!”

빠른 속도로 나아가는 탓에 나무와 충돌해 떨어지기도 하고, 어두운 곳에선 그들도 앞을 보기 힘든지 서로 부닥치기도 했지만 익재들은 한곳으로 날아갔다.

무건은 간간이 들어오는 공격을 피하며 그들의 뒤를 쫓았다.

저들이 향하는 곳에 분명 그것이 있을 터였다.

그것, 최초의 익재가.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살며시 비치는 달빛에 의존해 무건은 익재들의 뒤를 따라갔다.

숲이 깊어지자 저희들도 나무 사이를 빠져나가기에 바쁜 모양인지 더는 공격이 날아오지 않았다.

대신 끼익거리는 익재들의 소리와 바람 소리 사이로 유난히 높은 음이 숲을 가로질렀다. 그것이 무엇인지 무건은 듣자마자 알아챘다.

지난번 최초의 익재를 마주했을 때.

머리를 쨍 하고 울리는 듯한…….

그리 생각한 순간 무건의 눈앞으로 무언가가 후웅, 하고 묵직하게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것이 무엇인지 인식하기도 전에 무건은 본능적으로 멈춰 섰고, 이내 거세게 땅이 울려 왔다.

쿠구구궁!

마치 거대한 낫이 지나간 것처럼 숲의 나무들이 세로로 베이고 땅이 갈라졌다.

그것을 본 무건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지난번 읍주에서, 저를 튕겨 냈던 그때의 공격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가 긴장한 얼굴을 하고 천천히 공격이 시작된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자 희미한 달빛 아래로 가장 먼저 두꺼비눈처럼 눈꺼풀이 두껍고 게슴츠레한 눈이 보였다.

그 눈은 정확히 무건을 향하고 있었다.

눈 아래,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는 두툼한 입술 사이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또 올 줄 알았다, 네놈.”

“또 올 줄 알았다, 네놈.”

“사람 말을 할 줄 알아……?”

예상 밖으로 사람의 말을 들은 무건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잠깐 주변을 둘러보니 이미 그가 뒤를 쫓던 익재들은 멀어진 뒤였다.

대신 이 장난기 많아 보이는 악의 신 뒤로 검은 날개를 펼친 여인이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에 무건이 왼손에 쥔 단도는 품에 갈무리해 넣고, 오른손에 쥔 검을 더 단단히 부여잡았을 때였다.

두꺼비눈이 바싹 다가와 그를 들여다보더니 거의 무건의 키만 한 커다란 얼굴을 갸웃갸웃해 댔다.

그것을 왠지 징그럽다고 생각한 무건이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나니, 악신이 다시 말을 꺼냈다.

“너 왜 동조 현상이 끊어졌냐?”

“…….”

왜인지 제가 생각하는 근엄한 신과는 거리가 멀어서인지 이런 투시 능력 같은 것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신은 신이라는 건가 싶었다.

그것도 지난번에 아주 짧은 시간 마주쳤을 뿐인데, 단번에 제 변화를 알아차리고 묻다니.

게다가 하필 질문을 해도 제일 듣기 싫은 말로 골라서 했다.

대답하지 않은 무건이 다만 손에 쥔 칼을 세우고 발을 뒤로 한 발짝 빼며 경계하는 자세를 갖추자 악신이 푸하,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얼굴을 더 들이미는가 싶다가, 무건의 몸을 쑥 통과했다.

“……!”

통과하는 그때, 일순 몸이 뻣뻣해졌다.

“어디 보자, 명인자가 죽은 것 같지는 않은데.”

그리 중얼거리며 뒤로 쏙 빠져나온 악신이 도로 무건의 등 뒤에서 몸에 슥 들어왔다.

신이 몸에 잠깐 깃드는 순간, 무건은 처음 느껴 보는 등골이 오싹한 감각에 몸을 굳혔다.

하지만 몸을 지배하는 데에는 딱히 관심이 없다는 양 앞으로 또 빠져나온 악신은 킬킬거렸다.

“이거, 보아하니 어린애 하나가 장난을 쳐 놨네. 응? 쓸 만한 놈 같은데 나한테 소개해 주는 게 어떠하냐?”

쾅!

무건은 대답 대신 기를 불어넣은 칼로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하지만 전혀 베는 느낌이 나지 않았다. 내리꽂힌 공격은 애꿎은 바닥에서 먼지만 날리게 했다.

먼지가 한차례 걷히자 악신이 씩 웃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제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는 걸 안 무건이 인상을 썼다.

그 모습을 보고 악신은 여유롭게 몸을 둥둥 띄우고는 방금 전 제가 쓰러트린 나무 쪽으로 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숲을 가득 메운 나무들보다 더 높이.

하지만 말소리는 가까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선명하게 들려왔다.

“나는 무형의 존재. 네놈의 공격이 안 먹힐 것은 자명하지 않나?”

자세히 보니 악신의 몸은 반투명 재질인지 달빛이 희미하게 투과되는 것이 보였다. 무건은 헛웃음을 쳤다.

“그거 참 불공평하네…….”

만약 그에 비벼지는 인간이 있다면, 그 존재는 이미 신이 아니겠지만.

그런데 두꺼비눈이 슥 휘어지더니, 악신이 이내 아까부터 무건을 지켜보고만 있는 익재를 가리켰다.

“그렇지 않다. 오히려 네놈은 쉬울지도 모르지. 저것만 잡으면 1타 2피. 나도 같이 소멸돼 버릴 테니까.”

무건은 설명을 들으며 둘을 번갈아 보았다. 자세히 보니 악신은 저 익재에게 확실히 묶여 있었다.

높이 날아오른 와중에도 저 익재와 가느다란 실로 연결된 채였다.

무건이 그 실을 따라서 다시 악신을 올려다보자 그가 과장된 몸짓으로 팔을 들더니 두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하며 말했다.

“나보다 더 위대한 신께서, 인간을 끔찍한 괴물로 만든 대가로 영원히 저 몸에 묶어 놓았거든.”

물론 무건으로서는 전혀 안 궁금한 말이었다. 저것이 신이든 뭐든, 최초의 익재와 명운을 같이하든 말든 그의 관심 밖이었다.

“쓸데없이 말이 많으시네. 신이라는 게 원래 다 이렇게 수다스러운가?”

어차피 그의 목적은 최초의 익재를 제거하는 것, 그 하나였으니까.

하여 대꾸하며 팔을 휘둘러 여전히 이쪽을 텅 빈 눈으로 보고 있기만 하는 익재 쪽으로 검기를 날렸다.

쿠웅!

닿기도 전에 막혀 버렸지만.

악신의 커다란 낫이 떨어지며 그의 공격을 와해해 버렸다. 그 낫이 휘둘러진 방향에 있던 나무들은 이번에도 역시나 쓰러져 나갔다.

어차피 유효한 공격이라고는 생각도 안 했다. 무건은 바닥을 가른 낫이 들어 올려지기 전에 도움닫기를 해, 거대한 낫을 뛰어넘고 여인의 형상을 한 최초의 익재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 검을 사선으로 그어 내리려 했을 때였다. 오른쪽에서 악신의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

동시에 바로 코앞에서 섬광이 터졌다.

순식간에 떨어진 그것은 번개였다. 연이어 마치 무언가가 깨지는 듯, 강렬한 천둥소리가 들리며 하늘이 꽈과광 울었다.

그러자 여인의 모습을 한 최초의 익재 역시 낡은 옷을 펄럭이며 마침내 위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상방주의 우두머리 익재보다 훨씬 길고 큰, 검은 날개를 활짝 펴 하늘을 가렸다.

그리고 높은 음으로 길게 울었다.

“끼이이이이이이익.”

그에 무건이 거의 동물적인 감각에 의해 뒤로 뛰어 확 물러서자 그가 있던 자리에 번개가 내리쳤다. 천둥이 이어 울려 오며, 이내 달마저 흐리게 보일 정도로 먹구름이 몰렸다.

곧 비가 한 방울 툭, 어딘가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빗방울이 나뭇잎을 토도도독 치기 시작했다.

“끼이이이익.”

그 사이로 울리는 소름 끼치는 익재의 울음.

그것이 마치 신호라도 되는 양, 무건은 이를 악물었다. 흰 연기가 흐르는 그의 칼이 휘둘러지자 익재의 몸통을 가르려는 듯이 하얀 검기가 날카롭게 날아갔다.

동시에 악신의 낫이 그를 세로로 쪼갤 것처럼 떨어져 와 무건이 몸을 틀어 공격 경로에서 벗어났다.

이번에도 숲의 나무들이 대신 쪼개졌다. 퍼거걱! 격한 소리를 내며 아까보다 더 산산이 조각이 났다.

악신은 멈추지 않고 굵은 팔을 돌렸다. 거대 낫은 후웅, 하고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며 이번엔 무건의 몸을 향해 휘둘러졌다.

둔중한 무기와 커다란 몸에 맞지 않게 날렵한 공격 전환이었다. 무건의 행동을 봉쇄하려는 듯 익재가 그에 호응해 무건의 주변으로 검은 바늘 공격을 쏟아 냈다.

도망칠 틈이 없어진 무건은 칼을 세로로 세워 낫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내 무형의 존재라 이르지 않았던가?”

악신의 빈정거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 말대로 검을 슥 통과해 버린 낫이 무건의 몸 바로 앞을 스쳐 지나갔다.

“……읏!”

베이지는 않았지만 순식간에 튕겨 나간 몸이 쿠웅, 하며 나무에 부딪쳤다. 그 후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머리 위로 날아온 익재와 눈길이 맞았다. 무슨 상황인지 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건의 배에 검은 기운이 떨어져 내려 그대로 관통했다.

“큽!”

익재가 날린 검은 기운은 몸을 통과하자마자 사라졌으나 배에는 날카로운 관통상이 남았다. 무건의 몸이 스르륵 흘러내리며 무릎이 꿇렸다.

칼을 바닥에 꽂으며 몸을 지탱하려 했으나 자세를 제대로 가다듬지는 못했다. 무건은 크게 숨을 토해 냈다. 그러자 피가 올라오려는지 목이 갑갑해졌다.

“하…….”

위를 올려다보는데, 악신이 바로 앞으로 와서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네놈을 쫓아내는데 이런 미래를 봤다, 이 말이지.”

이죽거리는 상대를 보면서 무건은 왼손으로 공격당한 부분을 더듬었다. 질척이는 것을 보니 피가 나는 것 같았다.

게다가 가슴 통증이 심상치 않았다. 벌써 갈비뼈도 몇 대 나간 것 같았다.

도대체가 근래에는 몸이 남아나지 않는 것 같았다. 이쯤 되니 죽으리라는 공포보다는 지긋지긋한 감정이 먼저였다.

스스로가 왜 이렇게 약한가 싶어서.

급격히 기분이 나빠져 무건이 오른손으로 검 손잡이를 꾹 움켜쥐는데, 악신이 그를 부담스러울 정도로 뚫어져라 바라보며 물어 왔다.

“네놈이 여기 다시 나타난 이유가 궁금하긴 한데?”

신이라는 놈이 할 일도 없는 모양이었다. 별 이상한 걸 다 물었다.

하긴, 익재에 묶인 몸이니 얼마나 무료할까 싶기도 했지만.

“너희를 조지려고.”

그래도 어이없는 건 마찬가지라, 무건이 헛웃음을 흘리며 그리 답을 내줬다. 하지만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는지 악신이 미간을 좁혔다.

“그러니까 우릴 조져서 네가 가져가는 이득이 뭐냐는 것이지.”

굳이 보충 설명을 요구하던 악신이 아까와 같이 무건의 몸에 스며들었다. 순간적으로 온몸의 감각이 오소소 일어나는 느낌에 무건이 몸을 뒤틀었다.

“윽!”

기분 나쁜 감각에 욕이 튀어나오려고 했지만 대신 그에게 들어온 악신이 머리를 헤집는 감각에 무건이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얼마 안 가 다시 빠져나온 악신이 가벼운 웃음소리를 흘리며 닿지도 않는 반투명한 손으로 무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시늉을 했다. 기특하다는 듯이.

“아하, 알아 버렸네. 황제 폐하인 명인자한테 예쁨받고 싶어서였군.”

그가 풉 비웃음을 터트리자, 익재가 무건의 옆으로 와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끼우욱.”

녀석의 입술도 호선을 그리고 있는 걸 보면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무건은 입 안에 고인 피를 삼켜 내고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때, 아직도 우릴 처리할 수 있으실 것 같으신가? 아, 그래. 이것도 대답하기 싫겠지.”

혼자 묻고 혼자 답하던 악신이 다시 제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자 무건이 낮은 목소리로 그것을 저지했다.

“……하지 마.”

그에 악신이 몸을 쭉 펴며 인심 썼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대답은 뻔하니 들여다보기도 귀찮긴 하네. 그렇지만.”

과연 저 악신이 말하는 ‘뻔한’ 대답이라는 게 뭔지 무건은 궁금해졌다.

그러나 그것을 말로 꺼내지는 않고 가만히 악신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이 거슬렸던지 악신의 표정에서도 장난기가 거두어졌다.

“제 주제를 모르는 놈들의 말로가 어떻게 될지는 그만 알려 주어야겠다.”

그제야 무건이 생각하는 근엄한 신에 좀 가까워진 듯했다.

악신이 근육이 과도하게 붙은 팔을 돌리며 낫을 들어 올렸다. 후우웅, 하고 낫이 지나갈 때마다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살벌하게 들려왔다.

그에 익재는 무건의 공포에 질린 표정을 구경하고 싶은 듯 옆에서 계속해서 고개를 기웃거렸다.

무건은 시야 끝에 걸리는 그 거슬리는 행동을 애써 무시하며 악신의 낫이 허공을 한 바퀴 도는 광경을 쳐다보았다.

가속이 붙은 낫이 곧 제게 떨어질 것을 상상하며.

그리고 그 살벌한 낫을 제 몸처럼 가볍게 다루고 있는 악신이 무건의 운명을 언도했다.

“감히 신에게 도전한 어리석은 인간아. 그만 죽어라.”

무건의 두개골을 갈라 버릴 낫이 빠른 속도로 떨어져 내렸다.

콰과앙!

“끼이이익!”

동시에 무건의 옆에 있던 익재가 날개를 펼치며 튕기듯이 위로 솟아올랐다. 흰빛이 퍼져 나가면서 익재가 입고 있던 낡은 치마가 찢어져 나갔다.

“……!”

무건이 낫의 날 쪽으로 앞으로 몸을 굴리면서 순간적으로 익재 쪽을 향해 공격을 날린 것이었다.

낫은 몸을 내리쳤지만 정작 무건은 멀쩡했다. 잘못되면 어쩌나 긴장하고 있던 무건도 후, 한숨을 내쉬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제 몸을 통과해 버린 낫을 만지려는 시늉을 하다가 허공을 움켜쥐면서 한마디 했다.

“별거 아니잖아, 너?”

“…….”

그러자 악신의 눈이 부리부리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무건 역시 두 다리로 바닥을 딛고 몸을 똑바로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벌받고 있는 신……이라.”

그럼 자신이 그 형벌을 끝내 주면 그만 아닌가.

무건은 결의 어린 얼굴로 어금니를 꽉 물며 검을 바투 쥐었다. 그러자 검신에 하얀 기운이 다시금 고였다.

그때, 익재의 활짝 펼쳐진 날개가 머리를 적시던 빗방울을 막고 희미하게 남아 있던 달빛마저 가렸다.

그리고 그녀의 위로 이전에 한번 봤던 광경이 펼쳐졌다. 구름 사이로 희미하게 비치는 흰빛.

그 아래로 웃고 있는 듯 보이는 익재의 표정.

최초의 익재가 무건을 향해 손짓하는 순간, 그의 주위로 수십 개의 벼락이 번쩍했다.

동시에 터져 나온 익재의 높은음을 따라 하늘도 노성을 질렀다.

* * *

모두가 시신의 상태를 보고는 기가 질린 표정이 되어 얼어붙어 있었다.

위장군은 그런 부하들의 상태를 보고는 낮게 한숨을 쉬더니 진예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전에 발견했던 곳에서 시신을 옮겨 온 것으로 보이옵니다.”

이번에도 역시 벽에 박혀 전시되어 있는 시신을 보던 진예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번 시신도 만만치 않게 오래된 탓에 마치 푸줏간의 고깃덩이처럼 두 손을 모아 천장에 묶어 놓은 듯했는데, 손목이 썩어 팔은 떨어져 내려 있었다.

그 아래로는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끔찍했으나, 정작 진예의 입에서 나온 반응은 심심했다.

“그래, 구조도와 위치 표시는 준비됐나.”

그녀의 물음에 위장군이 제 옆을 돌아보았다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미간을 와락 구겼다. 그러자 다음으로 시선을 받은 이가 둘둘 말린 종이를 내밀며 변명했다.

“그것이, 구토를 할 것 같다고 밖으로…….”

위장군이 못마땅해하는 손길로 종이를 받아 들며 짧게 명했다.

“데려와라.”

제법 너그러운 편인 제 상관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알아차린 금위는 허겁지겁 제 동료를 찾으러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사이 진예는 위장군이 건넨 구조도와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저번에 발견된 지하실은 황궁과는 조금 먼 서남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길이 이어졌을 거라고 추측되는 벽면이 각각 동·서·북 쪽에 위치해 상(丄) 자 모양으로 표시되었다.

그리고 이번에 발견된 지하실은 황궁과 더 가까운 동남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막힌 벽면이 각각 동·서·남 쪽에 있어서 하(丅) 자로 표시되어 있었다.

거기에 누가 그려 놨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선들을 이어 놓은 것이 보였다.

그리하여 완성된 형태는 윗변과 아랫변만 동서쪽으로 길게 그린, 네 변의 길이가 똑같은 입 구(口) 자였다.

더불어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았지만 그 입 구(口) 한가운데의 정북쪽에는 황궁이, 정남쪽에는 융경궁이 위치했다.

융경궁의 약간 서남쪽에 있는 게 화친왕부였다.

지도를 보는 진예의 깨끗한 미간에 살며시 주름이 졌다. 그것을 보고 위장군이 조심스레 물어 왔다.

“무엇이 걸리시옵니까.”

걸리는 거야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나 진예는 일단 다른 말을 꺼냈다.

“이번 지하실에도 익재가 있었나?”

“한 마리가 있어 소신이 처리하였습니다. 내려가 보시겠사옵니까.”

그에 진예는 고개를 흔들었다. 별말이 없는 걸 보면 특이 사항도 없는 모양인데 굳이 확인할 필요까지 있나 싶었다.

진예는 그보다 머리가 지끈거려 올 정도로 악취가 풍기는 방에서 벗어나 마당에 내려섰다.

내리쬐는 햇볕에 벗었던 모자를 다시 쓰고 집을 둘러보니, 이곳은 폐가라기엔 지난번의 집보다 더 멀쩡해 보였다. 그 부분에 대해 물어보니 한 금위가 제가 알아본 바에 대해 읊어 왔다.

“대략 5년 전엔 양 씨 성을 지닌 일가족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집을 비웠다고 하옵니다.”

5년 전.

그녀가 막 제위에 오른 뒤였다. 진예는 그것이 우연의 일치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이사를 갔다던가?”

“그것은 알 수 없었사옵니다.”

“…….”

추측이 맞는다면 그 일가족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을 터이다.

진예는 그리 불행한 예상을 하며 위장군을 대동한 채 황궁으로 향하는 가마에 올라탔다.

흔들리는 가마에 몸을 맡기며 그녀는 오래간만에 제 동생을 떠올렸다.

〈이 화화는…… 그런 것이 정말로 싫습니다.〉

화화.

제 동생은 스스로를 그리 지칭했다.

빛날 화(華), 화친왕.

선황이 사랑해 마지않았던 아들에게 내린 작호였다. 이 세상의 빛이 되기를 원하며 지은 것일 터였다.

제 별호를 그리 지은 것을 보면 그 한자가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었다는 의미일 터.

“……단순해서 재미없다 해야 할지.”

전혀 새롭지 않고 안전해서, 심심하고 지루하다 했던 그의 말을 상기하며 진예가 가마에 등을 기대었다.

어느새 그녀의 입가엔 미소가 맺혀 있었다.

위도양이 어디 있을지 대강 짐작이 갔다.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그녀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거미줄처럼 화려한 덫을 깔아 놓고서.

진예는 기꺼이 그곳에 걸린 어여쁜 나비가 되어 줄 생각이었다.

* * *

모두가 잠든 깊은 밤, 굳게 닫혀 있던 황궁의 내동문이 잠시 열렸다 닫혔다.

그곳을 통과한 조춘경은 대기하고 있던 내관들과 함께 은밀히 황제의 침전인 인교전에 들었다.

그렇게 침전의 행랑을 걸어 나가 작은방으로 들어선 그는 작은 연못을 바라보며 잠시간의 여유를 즐기고 있는 진예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조춘경은 옛 신하의 도리로 닫힌 방문 앞에서 즉시 무릎을 꿇고 그녀를 향해 예를 올렸다.

“홍복을 누리소서, 황제 폐하.”

“그래, 왔는가. 일어서게.”

진예는 돌아보지 않고 그리 말한 뒤 고운 손길로 제 앞에 앉으라는 양 맞은편 의자를 손짓했다.

벌써 1년 이상 못 본 황제를 대면하게 된 조춘경은 오래간만에 황궁에 들었다는 긴장감을 가볍게 느끼며 그녀 앞에 앉았다.

“고개를 들어도 좋네.”

허락을 듣고 조춘경은 그제야 황제의 용안을 마주했다. 그리고 그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운을 어떻게 띄워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얼굴을 본 지 그리 오랜 세월이 지난 것도 아닌데 진예의 미색이 이전보다 더 도드라져 보였다.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 모인 이목구비가, 확실히 사내들을 온통 홀릴 만큼 아름다웠다.

게다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잘 보이지 않았던 성숙한 느낌이 더해져 여인으로서 꽃이 피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부인도 있는 데다 이제 다 늙은 제 눈에도 아름다워 보이니, 이미 이전부터 그녀를 마음에 품고 있었던 서엽이야 오죽 안달이 날까 싶었다.

조춘경이 불경하게도 그런 그녀의 미색마저 원망스러워하며 잠시 입을 열지 못하고 있으니, 진예가 먼저 말꼬를 텄다.

“그래, 요즘 가내는 평안하신가.”

서엽 때문에 홍역을 치르는 걸 알지만 진예가 모르는 척 그리 묻자 조춘경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폐하의 은덕에 다들 감읍하고 있사옵니다.”

그에 진예의 붉은 눈동자가 잠시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서엽이 황비를 갖다 버리는 말도 안 되는 짓을 해 버렸는데도 서엽에게만 죄를 물었다. 그 처분을 알게 된 대신 몇몇이 제게 그 아비인 조춘경에게까지 죄를 물어야 한다고 주청 올리기도 했으나 진예는 모두 물리쳤다.

그런 상황을 조춘경도 짐작은 하고 있을 것이니, 방금 전의 말은 단순 인사치레라고 할 수는 없을 터였다

다만, 염치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앞에 나선 이유야 아비의 정을 저버리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하여 진예는 그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고자 먼저 서엽을 화제로 꺼냈다.

“그래, 그대가 보기에 조 후가 짐의 곁으로 돌아올 수 있겠는가.”

그러자 조춘경의 낯이 더 납빛이 되었다. 질문이 잘못되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진예는 모르는 척 그를 채근했다.

“왜 대답이 없지?”

“……정녕 돌아오길 바라시옵니까.”

진예는 속으로 아, 하고 짧은 감탄사를 삼켰다. 조춘경은 그녀가 다시 서엽을 제 바로 옆에 두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직 효기장군직이 공석인 것은 그대도 알고 있지 않은가.”

보충 설명을 하니 그제야 조춘경이 고개를 깊이 숙이며 좀 더 편안한 어투로 대꾸해 왔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황은이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제 아들을 그리도 제게 주기는 싫은 모양이었다.

이전에 너무 고생시킨 제 탓인가 싶긴 했지만, 사실 이리 진저리를 치는 조춘경도 특이하다 할 만했다.

물론 애초에 서엽을 사내로서 욕심낸 적이 없기도 하고, 이제는 그 아비의 바람에 따라 서엽을 내쳐 주기까지 했으나 진예는 왜인지 입 안이 써졌다.

서엽이 제 옆에 있는 걸 그동안 너무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왜인지 불편해진 진예는 그의 시선을 피하려 자리에서 슥 일어났다. 조춘경과는 아무래도 서로 마주 보지 않는 편이 이야기하기가 더 편할 것 같았다.

진예는 바깥과 연결된, 열린 문 앞으로 걸어가 조춘경을 등졌다. 그에 조춘경도 일어나 제 뒤에 서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녀의 등 뒤로 사내의 커다란 그림자가 짙게 졌다. 그것을 보며 진예가 천천히 본론을 꺼낼 것을 재촉했다.

“내 이 정도 해 주었으니, 어디 원하는 것을 말해 보게. 갑자기 짐의 시아비라도 되고 싶어졌나?”

그러자 등 뒤의 두 손을 공손히 모은 그림자가 허리를 푹 수그렸다.

“소신이 감히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그저 폐하께…… 외람되오나 도움을 청하고 싶어 이리 찾아왔사옵니다.”

“짐의 도움이라. 조 공이 이리 조심스럽게 구는 것을 보니 보통 일은 아닐 것이고.”

잠시 말을 끊은 진예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아주 번거롭거나, 해서는 안 되는 짓이거나. 둘 중 어느 쪽인가?”

“송구하옵게도 둘 모두이옵니다.”

“들어는 보지.”

검은 그림자의 키가 작아졌다. 진예가 곁눈으로 확인하니 이미 조춘경의 무릎이 바닥에 닿은 채였다.

얼굴까지 확인하지는 않았으나, 늙은 사내의 목소리만 들어도 그 간절함은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제 둘째 아들놈에게 잠시만, 아주 잠시만 폐하를 알현할 기회를 주실 수 있으시겠사옵니까?”

조춘경의 둘째 아들은 조서엽이었다.

황제의 명에 따라 구금에 처한 죄인을 만나 달라 하는 이야기였다. 진예는 어쩔 수 없이 미간을 좁혔다.

“그거 좀, 발칙하고 어려운 부탁이긴 한데.”

“…….”

그녀의 중얼거림에 조춘경은 면목 없다는 듯, 더는 말소리를 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진예는 몸을 조금 틀더니 차마 고개를 들어 자신을 쳐다보지도 못하는 조춘경을 내려다보았다.

“짐에게 그런 청을 하는 연유가 무엇인가.”

“그 아이에게도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되옵고.”

말을 들으며 진예는 의문스러움에 고개를 기울였다.

마음의 정리라니, 조춘경이 입에 담을 유의 것은 아닌 듯했다. 서엽을 내쳐만 주면 어떻게든 제가 알아서 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던 그이기에.

따라서 다음 말이 진짜 본론이라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폐하께만 제 명인자가 누구인지 밝히겠다 하옵니다.”

그답지 않게 약간 목소리를 떠는 것을 듣다가 진예가 조춘경의 말 중 특히나 거슬리는 부분을 짚었다.

“짐에게만?”

조춘경은 그렇다는 말 대신 침묵했다.

진예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조서엽이 저를 보고자 그야말로 별 수작을 다 부린다 싶었다.

그럼 그렇지, 그가 제 아비의 제일 아픈 구석을 찔렀으니 조춘경이 이리 무릎까지 꿇으러 온 것 아니겠나.

조서엽의 명인자라…….

진예도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제 사소한 궁금증이 벌을 받고 있는 서엽을 황궁으로 들일 명분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가 만나겠답시고 구금 중인 그를 황궁으로 불러들이면 꼴이 우스워진다. 황제로서 한 입으로 두말을 하는 셈이 되어 버리니까.

여러모로 말도 안 되는 청이었지만, 또 그렇지 않으면 조춘경이 이 야밤에 직접 나섰을 리 없긴 했다.

진예는 도로 문밖을 내다보았다. 손바닥만 한 작은 폭포에서 쫄쫄쫄 물이 떨어지는 걸 바라보며 그녀는 한동안 고민에 빠져 있었다.

조춘경이 간절히 청하기도 하고, 진예 또한 서엽에 대한 애잔함과 미안함이 뒤섞여 있기에 그를 그냥 되돌려 보내기엔 마음이 무거웠다.

“……짐이 그 부탁을 들어주면 그대는 나에게 무얼 내놓겠나?”

가능성이 열릴 기미가 보이자 조춘경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내 그가 더 바짝 바닥에 엎드렸다.

“이 노구에게 원하시는 게 있으시다면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예를 들어 황궁 월담은 어떠한가.”

마치 준비해 놓은 것처럼, 전혀 예상 밖의 이야기가 진예의 입에서 툭 튀어나오자 조춘경은 제가 잘못 들었나 싶어 반문했다.

“예……?”

갑자기 황궁 월담이라니, 듣기만 해도 불경한 소리였다.

한데 진예가 문밖을 향해 한 번 턱짓하더니,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마치 비밀 이야기를 하듯이.

“저 밖의 내관들도, 궁녀들도 모르게 잠시 황궁의 담을 넘어갔다 오자는 말이네.”

“암행을,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단순 암행은 당연히 아닐 것 같았다. 그랬다면 진예는 심복들을 불러 나갔을 터이다. 예삿일은 아니라 짐작했으나 조춘경은 일단 그리 물었다.

그러고 나니 이 방에 아무도 없는 것이 뒤늦게야 이상하다 생각되었다. 아무리 침전이라지만 황제의 주변에 늘 있어야 할 중랑장들의 기척 또한 이 방에선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바깥의 회랑엔 누군가 있었던가?

황궁에 워낙 오랜만에 왔다 보니 눈여겨보지 않았던 것들이기도 했을뿐더러, 은밀한 만남을 청한 것이니 그저 그럴 수도 있겠다 여겼던 것들이다.

한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라, 일부러 진예가 모두를 물린 듯싶었다. 그렇다면 이미 조춘경이 오기 전에 그녀가 이 질문을 하리라 계획했다는 의미였다.

깨달은 순간 조춘경은 마치 풀지 못하는 족쇄에 묶인 기분이 들었다.

아마 그 감은 맞을 것이었다. 진예의 반응을 보니 확실해졌다.

“짐의 호위에 자신이 없나? 세월이 그대의 칼을 무디게 했던가?”

진예는 답은 내주지 않고, 대신 그렇게 반문했다. 조춘경은 잘못 걸렸다 싶어졌지만 일단 차분히 상황을 짚었다.

“그것은 아니오나, 중랑장들이 있는데 어찌 신을 대동하려 하시는지 의문이 들어 여쭙사옵니다.”

“짐이 간다 하면 모두가 말릴 터라.”

“위험한 곳입니까?”

“짐이 보기엔 위험하지 않아.”

반대로 말하면 남들이 보기엔 위험하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중랑장들도, 금위들도 전부 따돌리고 가려 하는 것이겠지.

조춘경은 벌써부터 손에 땀이 차는 듯했다.

오랜 세월 관직에 머물렀고, 여태껏 세 명의 황제를 섬겨 왔으나 그는 눈앞의 진예가 가장 의뭉스럽고 종잡을 수 없는 이라고 생각해 왔다.

규칙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 같으면서도 예외가 많았다. 또한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마주해도 그걸 능숙히 이용했고, 나아가 그런 것을 즐겼다.

지금과 같이.

“이 정도는 되어야 좀 공평한 교환이 되지 않겠나 싶은데.”

“…….”

“꺼려진다면 굳이 하지 않아도 좋네.”

손해 보는 건 그대가 아니냐, 하는 말이 숨어 있었다.

조춘경은 고민하다가 권포를 쥐고 앞으로 내밀었다.

“부족한 실력이나마 소신이 폐하를 모시겠사옵니다.”

대장군씩이나 되었던 자의 지나친 겸양에, 진예가 피식 웃었다. 그녀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소매 안에 넣어 두었던 것 하나를 꺼냈다.

낮에 위장군이 건넨, 지하실 위치를 표시해 둔 지도였다. 곱게 접힌 그것을 조춘경 앞에 던지니, 그가 진예를 올려다보았다.

진예가 열어 보라는 의미로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니, 조춘경이 조심스럽게 종이를 펼쳤다.

지도 위엔 한자가 쓰여 있었다.

화(華).

부수자인 꽃부리엔 황궁이 걸쳐져 있었고, 그 밑을 가로지르는 세로획 끝에는 융경궁이 있었다. 융경궁 위에는 외성을 가로지르는 큰 강이 하나 흐르는 중이었고, 그 위의 네모진 영역의 오른쪽 위와 왼쪽 아래의 꼭지 부분에는 지하실이 하나씩 위치했다.

그리고 붉은색으로 목표 지점이라 표시해 둔 곳은 세로획과 가로획이 열 십 자로 교차하는 부분이었다.

화(華) 자는 본래 활짝 편 꽃을 상형한 자였다. 그녀가 표시한 부분은 말하자면 꽃의 중심이 되는 곳이었다.

나비가 날아들어 앉았다가 제 몸에 꽃가루를 묻히고 떠나가는.

“그곳으로 가 볼 생각이네.”

“이곳은, 어떤 곳입니까.”

묻는 조춘경의 말소리에 긴장이 묻어났다. 진예는 그 말의 엄중함에 어울리지 않는 평이한 어조로 대꾸했다.

“짐이 지하실의 입구가 있을 거라 추측하는 곳이지.”

그렇다면 누가 봐도 위험한 곳 아닌가.

황도에 방이 붙어 난리가 났으니 조춘경도 당연히 지하실이 어떤 곳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죽은 화친왕을 따르는 반란군 무리가 익재를 가둬 놓았다는 그곳이었다.

이곳을 위험하지 않다고 느끼는 자는 오로지 진예뿐일 것이었다.

진예는 점점 심각해지는 조춘경의 얼굴을 못 본 체하며 무심히 한마디 더했다.

“거기서 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어떤 분이, 말입니까.”

왠지 대답을 알 것 같았지만 조춘경은 물어야만 했다.

“위도양.”

역시나 반란군 수장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조춘경은 지도를 내려놓고 머리를 조아렸다.

“폐하……! 절대 아니 될 말씀이시옵니다.”

“공평한 교환이라 하지 않았던가?”

“제 어찌 사사로운 마음으로 폐하의 안위를 해치겠습니까?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말하면서 조춘경은 진예가 이런 식으로 돌려서 제 청을 거절하는 건가 싶었다. 그러나 이런 완곡한 거절은 진예의 방식이 아니긴 했다.

이상함을 느끼고 있는데, 역시나 황제의 입에선 더 난처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군. 짐은 그대가 있어서 그곳에 가는 게 아니야. 본래 조 공을 대동하지 않은 채 가려 하였으나, 홀로 가는 것은…….”

이유가 뭔가 싶어 조춘경은 뒷말에 집중했다가.

“아무래도 심심하여서.”

맥이 탁 풀렸다.

어처구니없는 이유였다. 그 말은 그냥 가도 안 가도 상관은 없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았다.

조춘경은 진예가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는 제 청을 적당히 거절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적당한 핑곗거리를 내세워 서엽을 만나 주려 하는 것임을 알아챘다.

그렇다고 조춘경은 이 제안을 마냥 마음 편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는 했던 말을 반복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황제 폐하.”

“정 마음에 걸리면 짐이 돌아올 때까지 이 자리를 지키고만 있어도 될 듯하군.”

“폐하.”

어떻게든 가겠다는 말에 조춘경은 등 뒤로 오싹함마저 올라왔다.

진예는 그곳에 가서 본인이 잘못되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그만큼 그녀는 스스로에게 확신이 있었다. 위도양에게는 절대로 지지 않는다는.

“어찌할 텐가. 월담을 돕겠나, 아니면 짐이 월담하는 동안 망만 봐줄 텐가? 이외의 선택지는 없어.”

“…….”

조춘경은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환의 충신으로서 어떻게 해야 눈앞의 황제를 설득할 것인가 궁리해야 했다.

한데 침묵이 길어지자 진예의 발이 조춘경의 옆을 슥 지나쳤다. 그러더니 벽 쪽으로 걸어가 기대어 있던 자신의 칼을 들었다.

오늘따라 착 손에 감기는 그것을 만족스럽게 내려다보며 진예가 중얼거렸다.

“예부터 사내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지. 여인들 또한 사내들만큼이나 인내심이 적은데, 꼭 저희들만 안달이 나는 줄 안다는 말이야.”

빨리 결정을 안 하면 그냥 혼자 가 버리겠다는 뜻이었다.

이리 생각하고 저리 생각해도 진예가 제시한 안 중에서 어느 것도 충신의 도리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으나, 조춘경은 어쩔 수 없이 하나를 선택했다.

“함께 가지요.”

설마 장성한 아들을 둘이나 키워 놓고서 월담 같은 짓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딘지 알게 된 이상 진예를 혼자 보내는 것은 도무지 아니었기에 반쯤 등 떠밀려 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진예는 그의 생각을 짐작하고는 슬쩍 입가를 끌어 올려 웃었다.

그들은 연못이 있는 밖으로 나가 그곳의 낮은 담을 훌쩍 뛰어넘었고, 황궁의 후원으로 들어섰다.

달이 밝은 야밤에 두 사람분의 그림자가 황궁 후원의 담을 넘어섰다.

* * *

비밀 통로를 통해 황궁을 빠져나온 진예는 그 앞에 얌전히 묶여 풀을 뜯고 있던 말에게 다가갔다. 그것에 같이 타야 한다는 말을 듣고 조춘경은 크게 당황했지만 결국 말고삐를 잡았다.

이후 외성을 나서서, 다시 지도에 표시된 곳까지 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조춘경의 신분패를 내밀기만 했으면 됐으니까.

비록 관직에세 은퇴하긴 했어도 무관 최고직인 전 대장군에, 공의 신분인 그의 앞을 막을 자는 황성 내엔 존재치 않았다.

그의 허리에 팔을 감고 뒤에 타 있는 작은 여인을 본 이들이 둘이 어떤 관계인지 의심스러워하긴 했지만, 그게 설마 황제일 거라 생각하는 경우는 역시 아예 없었고.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말고삐를 잡아당기는 손길에 히이잉, 운 말이 곧 멈춰 섰다. 지도에 표시된 위치에 왔으나 별것이 없었다. 낮에 시전이 열리는 곳이었으나 지금은 완전히 빈 상태였다.

해가 떨어진 이후부터는 황성 출입이 금지되기에 귀시고 뭐고, 인적이 아예 끊겨 있었다.

진예는 말 등에서 훌쩍 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말을 근처에 보이는 기둥에 대충 묶어 둔 뒤 밝은 달빛을 따라 근처 민가가 있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모두가 잠든 시각의 불 꺼진 거리는 서늘한 공기를 품고 있었다. 게다가 얼마 전의 황명에 따라 이미 빈집도 꽤 되는 듯했다.

그곳들 사이를 지나며 진예는 뒤따라오는 조춘경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혹시 무언가 튀어나오기라도 할세라 칼 손잡이에 손을 올려놓고 주변을 경계하는 중이었다.

진예가 문이 닫힌 집들 사이를 걸어 다니며 말했다.

“이 근처에 지하실 입구가 있을 것이다.”

“입구를 찾을 아무런 단서도 없습니까?”

되돌아오는 질문에 진예의 눈이 가늘어졌다.

또 폐가에 입구를 만들었을까?

그러기엔 다른 위치와는 달리 이곳은 너무 황성의 중심지였다. 집을 그런 상태로 몇 년이나 놀리면 이상하게 보일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면 위도양은 진예가 찾아오길 기다리고 있을 터. 스스로가 지하실의 일부를 보여 주면서까지 여기에 오게 해 놓고, 아무런 표시도 남겨 두지 않았을 리 없다.

이곳에 표시가 될 만한 건.

“……명패밖에 없지 않겠나 싶은데.”

낙서를 해 놨을 리는 없으니 글자라곤 그뿐이었다. 글자라면 무슨 자를 썼을지. 진예는 생각나는 것을 바로 읊었다.

“화친왕의 화(華)와 음이 같거나…… 아니면 꽃의 의미가 담긴 글자이겠지.”

“사내의 이름에는 잘 쓰지 않는.”

조춘경의 말에 진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조춘경이 생각보다 빠르게 이야기해 왔다.

“하면 이곳이겠습니다, 폐하.”

벌써……?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진예가 그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거리의 초입에 있는 그곳은 근처의 집들 중에도 꽤 규모 있는 편이었지만, 딱히 특별한 것 없는 대갓집이었다. 황성 내에서 이런 곳이야 널렸으니.

담기황(譚祺䑟)

하지만 명패에 쓰인 글자를 보고 진예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고는 가소로움에 웃음을 흘렸다.

“참으로 건방진 것들이 아닌가.”

조춘경은 제가 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황공하옵니다.”

마지막 자인 꽃술 황(䑟)를 파자하면 순(舜) 자와 황(皇) 자로 나뉜다.

순 자는 효행을 했다는 이유로 나라를 물려받은 고대의 임금을 가리키는 한자였고, 황 자는 황제의 황 자였다.

즉 화친왕의 염원 혹은 욕망이 담긴 한자라고 봐도 무방했다.

급격하게 기분이 가라앉은 진예의 표정을 본 조춘경이 대문을 조심스레 밀어 열었다.

기기익, 낡은 나무문이 작게 울며 틈을 보이자 진예가 안에 들어섰다. 조춘경은 이어 바깥의 눈치를 살핀 뒤 문을 도로 닫았다.

치마를 걷어 올리며 마당에 내려선 진예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집 안을 훑어보았다.

역시나 그녀의 짐작대로 원래부터 비었던 곳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마당과 안쪽의 본채 곳곳에 얼마 전까지 사람이 오가며 살았던 흔적이 있었다.

여러 겹으로 겹쳐 있는 물동이를 내려다보다가 본채로 다가간 진예는 누군가 신발 한 켤레 벗어 둔 것을 발견했다. 조춘경도 그것을 보고는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만류의 말을 했다.

“최소한 금위들이라도 대동하시고 다시 오시지요. 오늘은 이 정도로 충분할 듯하옵니다.”

하지만 진예는 그 옆에 신발을 벗어 두고는 마루에 올라서서 조춘경을 내려다보았다.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이곳에서 최대한 멀어지게.”

조춘경도 들어먹으리라 생각하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막상 그런 결론을 진짜로 마주하자 당혹스러웠다.

“소신이 어찌 그리하겠습니까, 폐하.”

“그대가 휘말리면 나도 전력으로 싸울 수가 없어서 말이야.”

“…….”

요는 거슬리니 꺼지라는 말이었다.

조춘경의 귀에는 터무니없이 들렸지만 진예는 진심이었다.

“조 공의 아들이니 잘 알지 싶은데. 폐황태자였던 이 진예가 어찌 황궁으로 귀환했는가에 대해서.”

“하나…….”

“또한 이것은 나와 위도양의 은원과 관련된 일일 뿐, 다른 이가 끼는 것은 원치 않아.”

제법 단호한 말투로 그리 결론 내린 진예는 뒤돌아섰다.

“내 조 후는 빠른 시일 내에 불러들이지.”

과연 조춘경이 제 말을 따라 정말로 이 자리를 뜰지 모르겠지만, 더는 권유하기 힘들었다.

진예는 직접 본채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었다.

불빛이 없어 사방이 어두컴컴했다. 진예는 어둠 속에서 천천히 다른 칸으로 통하는 문을 하나둘씩 열었다.

그렇게 세 번째 칸에 발을 옮겼다. 그리고.

끼익…….

작게 익재의 소리가 들려오자 진예가 우뚝 멈춰 섰다. 잠시 시간을 가지고 집중하니 희미하게 썩은 내가 코끝을 자극해 왔다.

방향을 짐작한 그녀가 제 왼쪽에 있는 문을 열었고, 다시 제 정면으로 보이는 문을 밀어다.

그러자 어둠이 고인 자리에 앉아 있는 인형이 눈에 들어왔다.

위도양이었다.

그 옆에 앉은 익재가 진예를 발견하자 그르륵, 인간으로 치면 가래가 끓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아마 이전에 위도양과 싸웠을 때를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위도양은 녀석의 턱을 긁으며 진정시키고는 진예를 향해 첫마디를 떼었다.

“이 계획을 짤 당시에 화화가 그랬었지. 너라면 여길 바로 찾아올 거라고. 단서가 주어진다면 그날에라도 당장 말이야. 그 말이 맞았네.”

진예는 희미하게 웃고는 뒤의 문을 닫았다. 그리고 한 걸음 도양의 쪽으로 다가섰다.

“잘 틀어막았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황성 안에 들어와 있었구나.”

그러다 이상한 낌새에 내려다보니 발치에 옅게 균열이 가 있는 것이 보였다. 지하실로 향하는 입구가 틀림없었다. 그곳을 가운데 두고 진예와 위도양이 마주했다.

도양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앉아 있느라 저린 발을 풀었다. 바깥의 이야기가 이곳까지 들렸던 듯, 도양이 방금 전 진예와 조춘경의 대화를 곱씹었다.

“너와 나의 은원에 관련된 일이라……. 그래서 혼자 왔나? 네 백성들은 건드리지 말라?”

묘하게 비꼬는 투가 배어 있었다. 진예는 무엇이 문제냐는 듯 가볍게 대꾸했다.

“실제로 그러하지 않나. 단지 진평의 복수를 하고 싶은 것뿐 그대에게 대의 따윈 없어. 그러니 그대 역시 결국 혼자 있는 것 아닌가?”

지난번 한수의 진지를 습격했던 때에도 위도양의 주변에 사람은 없었다.

반란군은 진예를 죽이고 황위에 올릴 사람을 내세우긴 했으나, 아마 위도양은 아무런 관심이 없을 것이었다.

그녀에게 있어 황제의 재목은 결국 화친왕뿐일 테니까. 그가 죽어 사라진 지금은 누가 환의 주인이 되든 상관없을 터.

둘은 서로를 지그시 바라보기만 하고, 아직 칼을 뽑지 않았다.

아주 잠시간의 평화를 즐기려는 듯 도양이 문득 하나의 화제를 꺼냈다.

“싸우기 전에 너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까 싶어.”

그러면서 도양은 제가 등진 벽에 기대어 있던 지렛대를 들었다. 지하실 입구를 열려는 용도였다.

진예는 그녀가 그것을 바닥의 틈에 살며시 끼우는 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받아쳤다.

“썩 흥미가 생길 것 같진 않다만 들어는 볼까.”

곧 바닥이 들어 올려지며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겨우 사람 한 명만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드러났다.

철망으로 일단 막아 두었으나 임시일 뿐이었다. 도양은 그것까지 지렛대로 걷어 내며 말했다.

“이 지하실은 5년 전부터 만들어진 게 아니야.”

“…….”

진예도 이 일을 5년 안에 진행했다기엔 너무 본격적이지 않나, 하고 어느 순간부터 생각은 해 왔기에 그다지 놀라진 않았다.

다만 화친왕 진평이 이리 황성 안에, 그리고 여타의 지역에 지하실을 만드는 게 가능했던 이유는…….

“화화는 선황의 꿈이었던 천하 통일의 대안으로 이 지하실을 만들자는 제안을 했었다. 즉, 지하실이 이리 황성 안에 만들어질 수 있었던 이유에는 선황의 묵인도 있었단 의미이지.”

진예는 지하실을 만든 이유를 듣고 실소를 감추기 힘들었다. 제 아비나 동생이나 전부 스스로의 그릇이 얼마만 한지도 모르고 있었다.

“천하 통일이라. 역시 그들은 그런 꿈을 꾸고 있었나?”

그리 말하면서 진예는 진평이 얼마나 영악한 놈인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살려 달라고 목숨을 구걸하면서 선황이 그녀를 저주했다는 미끼 하나를 던져 준 뒤 황위에 관심 없는 척 황궁을 나가 버리고, 정작 중요한 황성 내에 깔린 지하실의 존재는 철저하게 감췄다.

“그렇게 익재를 잡아들여 조금씩 번식을 시켰어. 처음 잡은 익재는 고작 열 마리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런데 알다시피 익재들은 혼자서도 배태할 수 있으니 지금의 규모에 이른 것이지.”

위도양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진예가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정말 역겨운 종자들이었다.

선황은 천하 통일을 꿈꿨다면서 사람을 잡아먹을 괴물을 키우며 자랑스러워하고, 진평은 끔찍한 괴물들을 관리하며 스스로가 선황의 의지를 이었다고 자위했을 것이다.

“선황은 너에게 조금도 황위를 물려줄 생각이 없었어. 화화 역시 네가 앉아 있는 황좌가 마땅히 제 것이라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해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지? 지금 와서 그런 말들이 날 흔들 수 있으리라 여기나?”

위도양을 응시하며 묵묵히 듣고만 있던 진예가 마침내 한마디 뱉어 냈다. 이런 말을 더 들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자 말소리가 저절로 날카롭게 나갔다.

이제는 죽고 없어져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는 자들이다. 진평이 죽음으로써 진예는 그토록 오랫동안 저를 짓눌러 왔던 부모에 대한 미련까지 전부 떠나보냈다.

새삼스럽게 제 불우했던 유년 시절을 끌어들여 봤자 어떤 타격을 받을 리 없었다.

위도양도 알고는 있는지 어깨를 으쓱이며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그저 네가 가엾어졌을 뿐이야. 부모에게는 단 한 번도 사랑받지 못했는데, 이제 명인자까지 먼 길을 떠나 버렸으니.”

남에게 대놓고 동정을 받으니 기분이 더러워진 진예가 미간을 구겼다.

게다가 제가 죽여 버린 연무건을 스스로 들먹이는 걸 보니 정말로 살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무건이 옆에 있을 때야 귀찮게 여겼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그놈만큼 제게 전부를 쏟아부을 놈이 또 있을까 싶긴 했다.

처음엔 단순히 겁 없고 건방진 놈 같았으나 정말 그녀 외에는 아무것도 탐하지 않을 것을 알게 되었기에, 그에게 유일한 자리를 내주겠다 한 것이었다.

황제라는 감투에 속은 놈이 아니라서.

하지만 그것조차 이제 와서는 제 부모나 동생의 이야기만큼이나 무용했다.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기에.

아직도 그의 죽음이 믿기지는 않지만, 그 소식을 들은 이후로는 어깨의 통증도 일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말이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명인의 짙은 먹색은 흐려지지 않았는데, 그건 그냥 그놈의 질긴 성미 때문인 것으로 치부하기로 했다.

워낙 자기주장이 강한 놈이었으니 그 정도는 봐줄 만했다.

“연무건이 그리 그립진 않은 모양이지?”

이걸 그리움이라 이름 붙여야 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진예는 굳이 위도양 앞에서 인정하지는 않았다.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든 그건 그대가 알 필요 없는 일이지.”

선을 긋는 말에 위도양이 드디어 양손에 하나씩 검파를 쥐었다. 잘 벼려진 두 개의 칼이 스르릉, 소리를 내며 매끄럽게 검집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오른손에 든 칼을 진예를 향해 치켜세우며 건조한 어투로 말했다.

“난 화화를 잃고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조차 잘 기억이 나질 않아.”

“…….”

“평생을 함께할 단 한 사람이었어.”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 형형한 살기가 깃들었다.

“네가 그걸 빼앗아 간 거야.”

주인의 감정에 동조하듯이 옆의 익재 역시 다시금 웅크렸던 몸을 바짝 긴장시키며 크, 크륵 이를 갈았다.

그러나 진예는 아직 제 검을 쥐지 않고 짧게 평했다.

“유감스럽긴 하군.”

도양이 그게 끝이냐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혹은 서둘러 검을 잡으라고, 어서 싸우자는 의미일지도 몰랐다.

그제야 진예는 제 허리춤에 걸린 칼을 뽑았다. 역으로 잡고 뽑은 칼을 제 손아귀에서 천천히 돌리며 그녀가 읊조리듯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대도 알고 있겠지? 최초의 익재는 무당이었다는 걸.”

진예도 황태자 시절 딱 한 번 읍주에 간 적이 있는데 그때 아주 멀리서, 최초의 익재를 본 적이 있었다.

낡은 옷을 하늘거리던 그것은 완벽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그것도 생전에 아주 아름다웠을 여인의 형상.

그러나 실제로는 언어를 제 입에 품을 줄 모르는 괴물이었고, 그 뒤에는 커다란 악신이 따라다녔다.

그것을 본 뒤 진예는 더욱 운명을 믿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신을 섬겨야 하는 이에게 쓸데없이 명인자 같은 걸 내려 주니 그런 비극이 생긴 것이다. 어차피 이어지지 못하는 인연 따위를 내려 주었으니.”

결국 제 명인자를 잡아먹은 인간은 온몸에서 악취를 풍기는 괴물이 되어 버렸고, 그 몸에서 태어난 익재들은 제 어미처럼 사람을 잡아먹으러 떠돌아다니는 존재가 되었다.

그게 과연 이 세상을 평화로이 조율하고자 하는 신이 의도한 것이었을까. 진예는 전혀 그렇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세계의 신이란 그리도 엉터리인 존재야. 한데 그들이 이어 준 운명을 그리도 믿고 있나?”

그런 거대한 모순덩어리를 눈앞에 두고도, 도대체가 왜 모두가 운명론자가 되어 있는지 진예로선 이해할 수 없었다.

한데 그녀의 말에 위도양은 마치 제가 모욕이라도 당했다는 듯이 표정을 구겼다. 이어 도양의 입에선 진예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이어 준 거라고 믿고 있다.”

그에 진예는 잠깐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졌다.

“설령 비극으로 끝났더라도, 잃고 나니 가슴이 메도록 슬펐어도…… 함께하는 동안엔 행복했어.”

“난 그런 네 행복을 깨뜨린 사람이로군.”

진평이 어떤 식으로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었는지는 짐작이 가지 않았지만, 그들 나름의 유대가 있었을 것이다.

진예는 위도양이 한 말을 속으로 되새겨 보았다.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이어 준 것.

연무건도 그런 이유 때문에, 그간의 삶도 신념도 다 버리고 제게 매달린 걸까.

하여 얼굴도 보지 못한 명인자에게 건넬 가락지를 미리 준비하고, 언제든 건넬 수 있게 품에 늘 가지고 다녔던 건가.

그게 어떤 마음인지는 여전히 정확하게 파악하긴 힘들었지만 그 또한 사랑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이냐 묻는다면, 이젠 그렇다고 인정해 줄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온몸으로 증명하려던 이가 바로 옆에 있었으니까.

“생각해 보니, 그래, 짐도 옆에 있던 놈이 사라지니 허전한 것 같기도 하고.”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표가 난다고.

그놈 덕에 조금 시끄러워졌던 황궁이 조용해지니, 이전보다 더 고요하고 어두워진 느낌이었다.

“……복수라는 거창한 변명은 필요 없겠지만.”

진예가 검 손잡이를 어설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넣고는 팔을 앞으로 뻗어 칼끝으로 위도양을 겨누었다.

그녀의 붉은 눈에도 비로소 투지가 서렸다.

“대가를 받아 간다는 정도의 동기 부여는 되겠어.”

위도양의 뒤에 있던 익재 역시 날개를 펼쳤다. 그 모습을 보며 진예가 물었다.

“그럼 잡담은 여기까지 할까?”

“동의한다.”

끼아아아아아아악!

위도양이 대꾸해 오자마자 그녀 옆의 익재가 거칠게 포효해 온 집 안을 울렸다.

이어 검은 날개가 활짝 펼쳐지면서 좁은 방의 문을 뚫고 나갔다.

문짝의 나무살이 처참하게 파괴되어 나가며 본채가 순식간에 엉망이 되었다.

익재는 수호신이라도 되는 양 도양의 뒤에 서서 쿵, 지진이라도 낼 듯이 강하게 발 구름을 했다.

한데 녀석의 포효와 발 구름이 지하실의 익재들을 깨우는 신호라도 됐던 모양이었다. 발밑이 크게 진동했다.

이내 그녀들 사이에 있던 지하실의 입구를 통해 익재가 튀어나와 진예의 앞에서 입을 쩌억 벌렸다.

동시에 입구가 아닌 곳에서도 무언가 거세게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쿵, 쿠웅, 쿵, 쿠우우웅.

마치 발아래에서 천둥이 치는 듯한 그 느낌에 진예가 시선을 밑으로 주었을 때였다.

입구가 아닌 곳에도 균열이 일더니, 틈 사이로 썩은 눈깔이 굴러가는 것이 보였다. 눈이 마주친 순간, 수많은 익재들이 일제히 땅에서 솟아올랐다.

파괴되어 버린 집의 지붕은 이미 잔해를 떨어뜨리고 있었고, 진예의 머리 위를 달빛이 비추었다.

이어 황도의 밤하늘이 저주받은 신의 날개에 뒤덮였다.

* * *

쿠구우웅!

구름 사이에 고여 있던 흰빛이 사방으로 떨어지면서 감옥처럼 그를 가두려 했다.

하지만 상방주의 익재를 상대했을 때 이미 똑같은 걸 경험해 본 무건은 마찬가지로 그 힘을 낚아채려는 듯, 공격이 들어오는 경로에 칼을 가져다 댔다.

기운이 불어넣어진 검에서 두 힘이 마치 하나였던 것처럼 융화되면서 그의 검로를 따라 익재를 향해 날아갔다.

그것을 전혀 예상치 못해 놀란 익재가 소리를 지르며 옆으로 휘청이면서 순간적으로 아래로 내려왔다. 틈을 발견한 무건이 날개를 자르려 뛰어들려 하는데 악신의 눈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실체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갑자기 끼어드는 행동에 무건이 주춤했다.

“잔재주가 많군?”

불쾌하다는 양 한마디를 뱉어 내며 악신이 낫을 내리쳤다. 무건은 다시 한번 악신과 더 가까운 쪽으로 몸을 피하며 최초의 익재를 향해 손을 뻗으며 뛰어올랐다.

날아다니는 놈은 잡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였다.

다행히 손끝에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버석한 머리카락이 잡혔다.

그것을 움켜쥐고 힘껏 당기자 최초의 익재의 입에서 비명이 터지며 뚜둑 머리의 썩은 살점이 떨어졌다.

끔찍한 광경에 무건은 눈을 질끈 감고 싶어졌으나 머뭇거리지 않고 사거리가 더 긴 칼을 힘껏 휘둘렀다.

본래는 가장 성가신 날개를 베어 버리려 했지만 본능에 의해 몸을 튼 익재의 어깨가 대신 베어져 나갔다.

검은 피가 솟으면서 하얗게 연기가 일었다. 타는 고통에 익재가 비명을 지르며 휘청휘청하자 악신이 경악했다.

악신이 최초의 익재 뒤로 돌아오며 다시금 제 무기로 무건의 몸을 베어 내려 했다. 그러나 이미 파훼법을 알아낸 무건은 여유롭게 회피하며, 머리가 뜯기고 팔이 잘려 고통에 허우적거리는 익재에게 한달음에 다가갔다.

그러자 제 능력으로는 익재를 부축하여 일으킬 수 없는 악신이 안절부절못했다.

“안 돼, 안 돼, 안 돼…….”

이미 수백 년을 살아 놓고 더 살고 싶은 모양이었다.

행인지 불행인지 최초의 익재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지르며 날개를 펼쳤다. 음파와 함께 검은 칼날이 퍼져 나오자 무건이 한 걸음 뒤로 물리며 그 칼날을 아래에서 위로 휙 베어 냈다.

검은 칼날이 갈라져 그의 옆으로 피해 가는 동안 익재는 얼른 위로 날았다. 얼굴과 팔에서 검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게다가 최초의 익재가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는지 어느새 저희들의 어미를 지키기 위해 도망쳤던 익재들이 돌아와 그녀를 둘러쌌다.

그러자 악신이 도로 신나서 하하하 웃어 댔다.

“그럼 그렇지. 우린 안 죽……!”

하지만 무건은 제게 쏘아지는 공격을 피하다가 제게 다가온 익재를 발로 밟으며 튀어 올랐다.

그 스스로도 놀랄 만큼 날렵한 동작으로 순식간에 악신의 눈앞으로 다가간 무건이 한마디 했다.

“아니, 죽어.”

그리고 검신이 안 보일 정도로 휘광이 짙어진 칼을 잠시 들어 올렸다가 힘껏 내리쳤다.

번쩍하고 밤의 어둠을 잠시 걷어 낼 만큼의 찬란한 빛이 작열했다.

최초의 익재의 날개가 찢어져 나갔고, 빛에 닿은 익재들 역시 닿은 부위에서부터 하얗게 불붙었다.

자지러지는 익재들의 비명 속에서 무건이 땅에 가볍게 착지했다.

아연실색한 악신의 크기가 줄어 가는 모습이 보였다.

제 앞에서 흰 불꽃에 뒤덮여 기고 있는 최초의 익재의 몸속에 하체부터 흡수되고 있었다.

“싫어, 싫…….”

신의 말로라기엔 너무 하찮은 광경이었다.

무건은 그 추한 모습을 보고 딱히 보고 싶지 않아 온몸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어떻게든 이쪽을 잡겠다며 손 앞에 검은 바늘을 생성해 낸 익재의 머리에 칼을 박아 넣었다.

떨림마저 멈춘 익재의 손, 그 앞에서 생기다 만 바늘이 툭 떨어졌다가 이내 소멸되었다.

솨아아아아…….

비가 내리는 숲속에서 그 광경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무건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고통스럽게 죽어 가는 제 동료들과 이미 죽은 저희들의 대모를 보고 어떤 놈들은 구슬프게 울었고, 또 어떤 놈들은 무건에게서 멀어졌다.

어쨌든 싸움의 의지는 상실한 것을 보고 무건은 익재의 피와 빗물이 묻은 얼굴을 손으로 닦아 내렸다. 그러다가 완전히 움직임을 멈춘 최초의 익재를 내려다보았다.

“…….”

그는 최초의 익재의 목을 칼로 베어 낸 뒤 흉측한 수급을 제 겉옷을 벗어 감쌌다. 그러고 매듭을 꽉 맸다.

그것을 들고 일어서려는데 긴장이 풀려서인지 뒤늦게야 몸이 으슬으슬 떨려 왔다. 복부를 관통한 상처도 아려 와 무건은 제 상의를 찢어 배를 감싸 묶은 뒤에야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래도 미마이의 걱정과 달리 움직이지 못할 정도의 큰 부상은 없어 다행이었다.

머리 위로 굵은 빗방울이 연신 떨어졌다. 최초의 익재가 능력을 끌어모아 내린 비일 텐데, 그것이 죽음을 맞이한 뒤에도 그치지는 않았다.

그는 엉망이 된 숲을 빠져나와 읍주를 가로질렀다.

그런데 그런 그의 뒤를 어린 익재 하나가 끼익, 끼익 울면서 따라왔다.

처음엔 그게 화를 내거나 덤비려고 그러는 건 줄 알았는데, 거슬려서 뒤돌아서니 익재가 살며시 날아올랐다가 눈치를 보고 다시 내려앉았다.

무건은 익재가 눈을 도로록 굴리는 걸 보다가 의문을 떠올렸다.

이 정도면 원래 천지 분간 못 할 정도의 나이인 건가?

다른 놈들은 전부 숲에서 나오지 않았는데 이놈 하나만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어차피 말은 안 통하겠지만 무건이 나직한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난 네 신이 아니야. 어미도 아니고.”

그에게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익재가 앓는 소리를 내며 뒤로 퍼덕거렸다. 무건은 그 모습을 굳은 표정으로 보다가 이내 쥐고 있던 칼을 고쳐 잡았다.

썩은 살을 찌르는 느낌은 언제나와 같이 좋지 못했다. 손끝으로 퍼덕이는 놈이 서서히 움직임을 멈추는 걸 느끼며 그는 심장부에 찔러 넣었던 칼을 뺐다. 그리고 더는 익재의 시신 따위 보고 싶지 않아 칼을 갈무리하며 동시에 뒤돌아섰다.

뒤에서 철벅, 하고 익재의 몸체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무건은 미마이가 기다리고 있을 초소로 향했다.

그가 초소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에 창문으로 계속 지켜보고 있었는지 미마이가 먼저 뛰어나왔다.

아이는 비가 오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달음에 달려오더니 무건의 모습을 보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괘, 괜찮으세요?”

아이가 작은 몸으로 무건을 부축하려는 듯이 옆에 나란히 섰다. 하지만 무건은 기대는 대신 미마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왜 나와 있어, 비 맞게.”

“아…….”

짧은 탄식만 되돌아왔을 뿐이지만, 무건은 제가 너무 걱정을 많이 끼쳤음을 알았다. 아니나 다를까, 미마이가 손을 올려 무건의 목에 살짝 가져다 대더니 울상을 지었다.

“몸이 엄청 뜨거우세요. 열이 나는 것 같습니다.”

“괜찮아.”

대답하며 무건이 초소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에 있던 이들은 모두 헛것이라도 본다는 듯한 눈을 무건에게 향했다.

첫째로 읍주에 들어갔는데 살아 돌아온 것에 놀라고, 둘째로 부상을 입고 검은 피에 푹 절어 있는 것에 놀란 듯했다.

턱 밑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기를 손으로 한 번 훔쳐 낸 무건은 그들의 노골적인 시선을 무시하고 초소 안에 있던 미마이와 제 짐을 챙겼다.

미마이가 얼른 짐을 받아 들려고 했지만 무건이 팔을 바깥으로 빼며 초소 안의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겉에 걸칠 옷을 좀 얻을 수 있습니까?”

그에게서 말소리가 나오자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내 하나가 얼른 의자를 밀고 일어나 근처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던 겉옷 하나를 주워 건넸다.

“아, 아, 여기 있소.”

받아 든 무건은 그것을 걸치고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이를 지켜 줘서 고맙습니다.”

“…….”

생각보다 훨씬 멀쩡한 모습에 옷을 건넨 사내는 여전히 넋이 빠진 표정으로 사내치고도 상당한 장신인 무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아무 말도 못 하는 그를 대신해서 옆의 동료가 질문을 던졌다.

“익재들을…… 죽였나?”

그러자 무건이 다른 사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도 역시 설마, 하는 표정이었다. 무건은 짧게 답했다.

“전부는 아니지만.”

그렇게 끝을 맺으려다 제가 들고 있던, 옷에 감싸인 익재의 수급을 들어 올리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숲 안쪽에서 이곳의 우두머리를 죽였습니다.”

그 뒤 반응을 확인하지 않은 채 무건은 미마이의 손을 잡고 초소 밖으로 나왔다.

뒤에서 황당해하는 목소리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발을 멈추지도, 돌아보지도 않았다.

다행히 짧은 사이에 빗줄기가 제법 잦아들었다. 미마이와 부슬비가 내리는 평지를 걸어 나가는데, 무건은 제 손을 맞잡은 아이가 왜인지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인 것을 발견했다.

“이제 황궁으로 가야지.”

“……네.”

한 박자 늦게 미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을 본 무건이 잠깐 걸음을 멈추고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표정이 왜 그래?”

그러자 미마이가 무건의 품에 갑자기 꼭 안겨 왔다. 무건이 제 옷이 더러운 걸 의식해 주춤하다가 마주 안아 주니 미마이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 앞으로는 아프지 마세요. 제가 금세 치료해 드릴 테니까…….”

말끝을 흐린 아이가 작은 손으로 무건의 옷깃을 꼭 쥐었다. 무건은 제가 아이를 너무 불안해하게 했다는 걸 알아채고는 난처해했다.

“괜찮아. 지금도 아무렇지 않아.”

“거짓말. 다치셨잖아요.”

“…….”

다른 사람이었으면 걱정 끄라고 딱 잘라 말했을 텐데, 미마이에게는 그럴 수 없었다. 무건은 제가 애들에게 약하다는 걸 깨달았다.

고민하던 무건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냥 조그만 아이를 안아 들고는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높아진 시선에 미마이가 깜짝 놀라 움츠러드는 게 느껴졌다.

그런 아이를 데리고 무건은 멀리 마을이 있을 방향으로 나아갔다.

“정말 괜찮아. 아직은 못 쓰러진다. 되돌아가기 전까지는 안 된다는 거 알잖아?”

“마마…….”

진예가 날 반겨 줄지는 모르겠지만.

무건은 속에서 올라오는 불안감을 완전히 억누르지 못했다.

조서엽의 앞에선 아닐 거라고 부정했지만 정말로 진예가 자신을 죽이라고 한 게 맞는다면, 그 사실을 확인하게 되면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있을까.

아니, 사실 더한 불안감은 다른 데 있었다.

제가 진예에게 완전히 잊혔을까 봐.

자신이 없는 동안 진예가 조서엽을 이미 받아들였을까 봐.

그 상황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살이 떨렸다. 만약 다음에 조서엽이 그녀 옆에 있는 걸 발견한다면, 진짜로 조서엽을 죽여 버릴지도 몰랐다.

한데 그런 그의 생각을 읽었는지 미마이가 속삭여 왔다.

“괜찮을 거예요, 마마.”

무건은 입을 굳게 닫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스스로가 한심해진 무건이 쓰게 웃다가 미마이를 고쳐 안았다.

무엇이든, 이제는 돌아가서 생각할 일이다.

그가 황궁에 달할 때쯤이면 읍주에 똬리를 틀고 있던 최초의 익재가 죽었다는 소문이 제국 전역에 퍼질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익재를 죽인 이가 연무건이라는 사실을 알면, 진예는 자신을 절대 못 내칠 터였다. 무엇보다 명분을 중시하는 사람이니까.

그래, 그 점이 중요한 거였다.

드디어 스스로 가치를 증명해 냈다는 사실이.

황궁으로 돌아가 그녀 앞에 무릎 꿇는 일만 남았다.

그는 어느 날엔가 저를 잠시 전율에 떨게 했던 진예의 말을 떠올렸다.

〈짐의 유일한 사내는 연무건이 될 것이다.〉

환 황제의 유일한 사내…….

그녀의 옆자리인 황후 자리를 차지하기까지 단 한 걸음만 남았을 뿐이다.

* * *

가볍게 익재의 등에 착지한 진예가 자신을 향해 동시다발적으로 날아오는 공격을 피해 다시금 다른 놈에게로 갈아탔다.

몸을 유연하게 날리는 그녀의 모습이 옷깃이 펄럭이는 것과 겹쳐 마시 새가 나는 모습처럼 보였다. 그만큼 가볍고 날렵했다.

와중에 덤비는 놈들의 날개를 베어 내어 추락시키고, 손을 뻗어 오는 한 놈의 팔은 그대로 잡아 뽑아 버렸다.

썩어 있는 만큼 익재의 신체는 견고하지 않았다. 간혹 신체가 강화된 놈들만 단단할 뿐이었다.

투두둑, 뜯기는 팔을 던져 버리는 그녀의 과격한 모습을 보고 있자면 누가 괴물이고 누가 인간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제동해 줄 것이 사라진 진예는 차라리 악귀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녀의 칼 밑에서, 손아귀에서 익재들은 처참히 찢겨 나갔다.

그러면서 저를 따르는 익재 위에 올라탄 위도양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가며 진예가 외쳤다.

“언제까지 도망칠 게냐, 도양아?”

그에 도양의 눈이 치켜 올라갔다. 달려들기를 기다리며 자세를 잡는 걸 보며, 진예는 기꺼이 몸을 내던졌다.

채앵! 금속이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진예가 익재의 위에 뛰어들며 위도양의 머리 쪽으로 검을 내리치자, 위도양이 제 검을 교차하여 막았다. 진예는 팔에 힘을 주어 내리누르며 빈정거렸다.

“비겁하게 말이야. 겁이라도 먹었나?”

“그럴 리가.”

도양이 답하며 제 두 자루의 칼을 좁혀 진예의 검을 고정하고는 옆으로 밀어냈다. 그 순간 진예 역시 칼을 비틀어 바깥으로 쳐 냈다.

“그래, 그래야지. 내 너를 직접 베어 주려 힘을 아끼고 있는데 말이다.”

챙, 채앵!

두 사람이 검이 빠른 박자로 맞부딪쳤다. 날고 있는 익재의 위라 균형 잡기가 쉽지 않았지만, 둘 모두 능숙하게 공방을 오가며 호각을 이루었다.

하지만 진예 쪽으로 다른 익재들이 공격을 날리며 틈을 보이자, 한 번 혀를 찬 진예가 검로를 틀었다.

콰콰쾅!

그녀의 검 끝에서 시작된 화광에 몇 익재들이 추락했다. 그렇게 진예가 잠시 주의를 돌린 틈에 위도양이 그녀의 등을 갈라내려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카아앙, 하고 맑은 소리가 나며 칼의 진로가 막혔다. 찰나의 순간 진예가 칼을 뒤로 돌려 막아 낸 것이었다.

진예의 서늘한 붉은 눈이 위도양을 쳐다보았다.

“등을 보여 주는데도 기회를 살리질 못하니 어찌할 것이지?”

“읏!”

압도적인 힘의 차이로 진예가 그녀의 칼을 밀어 냈다. 그렇지만 재빨리 자세를 다잡은 도양이 반격해 진예의 옷깃 일부를 잘라 냈다.

순간적으로 날카롭게 들어온 칼끝에 진예가 익재의 등 밖으로 물러나자, 진예의 발밑에서부터 날카로운 얼음이 솟아올랐다.

피하지 못하고 얼음을 잘라 낸 진예가 다른 익재의 어깨에 착지하자마자, 도양 역시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키이익! 카가앙!

칼이 긁히고 맞부딪치는 소리가 허공에 연신 울려 퍼졌다. 그러나 서서히 도양이 밀리는 모양새가 나오자 진예가 기회를 엿보고 제 밑의 익재의 날개를 찔러 추락시켜 몸을 확 뺐다.

그렇게 위도양의 칼이 허공을 가르는 동안 지나가던 익재를 밟고 튕겨 오른 진예의 검이 위도양의 복부를 날카롭게 베어 내려 했을 때였다.

“끼이익!”

익재 끼어들어서 낚아채며 대신 공격을 받아 냈다. 익재의 팔이 진예의 칼끝에서 슥 갈라지며 검은 피가 흩뿌려졌다.

이어 진예의 검이 위도양과 그녀를 안고 있던 익재의 몸을 찔러 들어갔다.

진예의 검이 닿자 위도양을 안고 있던 익재가 순식간에 하얀 불꽃에 휘감겼다.

“끼아아아!”

익재가 고통이 가득 담긴 비명을 내지르며 휘청였다. 그 와중에도 제 어미를 지켜야겠다는 생각 때문인지 도양을 꽉 안고 놓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도양을 묶어 놓는 일이 되어 버렸다. 진예는 그대로 칼을 오른쪽으로 빼며 도양의 몸을 찢었다.

“크윽!”

복부가 갈라지며 도양의 몸에서도 선혈이 터져 나왔다. 그에 도양이 제 몸을 붙들고 있는 익재의 팔을 베어 내고 녀석을 떼어 냈다.

제 어미에게 버림받은 익재는 제 몸이 타들어 가는 것보다 더 믿기지 않는 듯한 눈을 하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 뒤 도양도 바닥으로 떨어져 굴렀다. 하지만 방심할 틈은 없었다. 진예가 익재들 틈에서 내동댕이쳐진 그녀를 쫓았다.

그 와중에 도양은 비틀거리며 일어나려 했으나, 몸이 푹 꺾이며 입에서 선혈이 쏟아졌다.

“커, 커억…….”

그것을 확인한 진예가 땅에 착지했다. 그러나 쫓아온 익재들은 둘째 치고, 갑자기 익재들이 위도양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서인가 했지만, 아니었다.

진예는 그들이 위도양을 새로운 표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순간적으로 위도양의 얼굴에도 의문이 드리워 있었다.

‘왜……?’

머릿속으로 한 단어를 떠올린 도양의 시선에 저를 어미로 생각하던 어린 익재가 죽어 있는 것이 들어왔다.

진예 또한 그녀의 당황한 표정과 시선이 닿는 곳을 확인하고 나서야 어렴풋이 상황을 눈치챘다.

도양을 지키던 우두머리 익재가 사라지니, 그저 인간인 그녀가 익재의 표적이 된 것이었다.

기실 미마이의 암시가 풀린 지는 오래였다. 그동안 도양이 익재들을 지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저를 따르던 익재가 우두머리였기 때문이었다.

한데 그것이 죽었으니…….

진예는 이번에야말로 끝이라는 생각에 칼 손잡이를 바투 잡았다. 그리고 저를 쫓아오는 익재들을 베어 낸 뒤 몸을 돌려 위도양을 둘러싼 익재들 중 한 마리의 몸에 올라탔다.

그러자 도양이 겨우 몸을 일으켜 칼을 세우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제게 익재들이 달려드는 모습을 응시하며 오른쪽 칼을 뻗었다.

하지만 진예의 눈에 그것은 느릿하기 그지없었다. 이미 치명상을 입은 도양은 제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이대로라면 익재들에게 잡아먹혀 죽을 것이었다. 위도양은 그래서는 안 됐다.

진예는 제 밑의 익재의 머리를 일단 부숴 버리고 칼을 뽑으며 높이 도약했다.

그리고 몸이 떨어짐과 동시에 흰빛이 고인 칼을 내리쳤다.

벼락이 떨어지듯, 위에서부터 흰빛이 꽂혀 내리며 뇌성 대신 익재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도양의 입에서도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아악!”

달려든 익재 중 하나가 도양의 오른쪽 팔을 물어뜯은 것이었다.

팔이 떨어져 나가면서 검도 함께 오른손에 쥐여 있던 검도 바닥에 떨어졌다. 순간 진예의 냉한 눈과 위도양의 고통 어린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도양은 이를 악물더니 어느새 온통 부서져 폐허가 되어 버린 집 안을 가로질렀다.

도망이었다.

“위도양!”

그 모습을 발견한 진예가 그녀를 뒤쫓으려 했지만 도양은 멈추지 않고 거리로 뛰쳐나갔고, 진예는 어디선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익재들에게 다시 둘러싸였다.

익재들은 위도양을 보호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결국은 위도양의 도망에 일조하고 있었다.

금세라도 잡아먹겠다는 듯 저를 보며 침을 흘리는 익재들 사이에서 진예의 표정이 잔뜩 굳었다.

“……건방진 것들.”

그리 중얼거린 진예의 검에 새하얀 휘광이 감겼다.

그리고 모든 것을 불태울 하얀 번개가 땅에서부터 역행해 올라갔다.

* * *

쿠구우웅.

하늘과 땅이 거세게 진동했다. 도양은 피를 뚝뚝 흘리며 겨우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진예가 그녀를 쫓는 익재들을 전부 처리해 준 덕분에, 시간은 걸렸지만 겨우 문을 열고 나올 수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몸을 이끌고 텅 빈 길을 뛰어가는데 문득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불러 왔다.

“그대가 위도양인가?”

묵직한 사내의 목소리에 도양이 앞을 바라보았다.

익숙하진 않지만 낯설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도양은 제 기억을 뒤져 그가 누군지 금세 알아보았다.

“……조춘경.”

전 대장군 조춘경이 서서 길을 막고 있었다. 아직은 칼끝을 내린 채인 그 사내를 보며 도양은 이를 악물고 칼을 쥔 왼손에 힘을 더했다.

싸우려는 생각은 아니었다. 이런 부상을 입고는 조춘경을 절대로 이길 수 없었다. 도망이라도 가면 기적이었다.

그녀의 눈이 바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낌새를 눈치챈 조춘경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며 그녀를 다그쳤다.

“대역죄인이 감히 어디로 도망가려는 것이냐.”

그 순간 목표를 잡은 도양은 조춘경이 아닌 그쪽으로 달려갔다. 생각보다 빠른 판단에 조춘경도 순간적으로 대응이 늦었다.

뒤늦게 제 옆으로 빠져나가려는 그녀 앞을 막으려 했으나, 위도양이 제 칼로 그의 검을 있는 힘껏 밀어 냈다.

그 과정에서 결국 칼을 놓치긴 했지만 도양은 상관하지 않았다. 재빨리 근처에 매여 있던 말에 올라탔다.

히이잉!

거칠게 뛰어오른 탓에 말이 놀랐으나 도양은 몸을 바짝 낮추며 말을 묶어 놓은 끈을 풀고 고삐를 힘껏 쥐었다.

그러고 앞으로 달려 나가는 것을 조춘경이 뒤쫓았다.

그녀와 그녀가 탄 말이 시전 골목을 달렸다. 일직선으로 이루어진 그곳을 빠져나가기 전까지는 그도 따라갔으나 말의 속도를 사람이 이겨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게 도양은 조춘경을 따돌렸으나 표정은 더 간절해졌다.

더는 쫓기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데다 고통을 호소하는 몸 때문에 정신이 아찔해져 왔다.

도양은 제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기에, 필사적으로 말을 몰았다.

중간에 통금 시간을 단속하는 성관들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으려 했으나 간단히 무시하고 황성의 남쪽으로 달렸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그녀가 도착한 곳은 화친왕부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도 내에 있는 유일한 친왕부였던 곳이었다. 그만큼 화려하고 늘 분주하던 곳이었으나 이제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도양은 금군들이 쳐 둔 금줄을 넘어, 안 온 사이 벌써 낡아 버린 듯한 화친왕부의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익숙한 길을 따라 도양은 화친왕부의 어딘가로 향했다. 몇 개의 건물을 지나는 동안 붉은 피가 땅에 툭툭 떨어졌다.

마침내 그녀는 별채가 있었던 곳 앞에서 멈춰 섰다.

화친왕 진평이 죽은 뒤 제 손으로 태워 버린 별채의 잔해를 목전에 두고 그녀는 무릎을 꿇었다.

그가 피를 흘리며 죽었던 그곳에.

연무건의 칼에 찔려 얼굴의 피가 다 빠진 탓에 하얗게 떠 있던 그때의 충격적인 모습이 아직도 그녀의 눈에 선했다.

“화화…….”

하지만 도양은 억지로라도 살아생전 진평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하여 희미하게 웃었지만, 이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미안해요, 화화. 복수는, 실패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처참하게 실패했다. 그녀는 죽음의 공포 때문이 아닌 속상함에 울음을 흘렸다.

자신의 명인자, 진평.

평생 제 손으로 지켜 주고 싶었다. 하지만 죽음을 막기는커녕 그를 죽인 이들을 다 죽이지도 못했다.

연무건은 제가 찌르기도 전에 절벽에서 떨어졌고, 진예는 이기지도 못했다. 상처도 낼 수 없었다.

이렇게 무기력함을 확인하고 나니, 스스로의 무능함에 치가 떨렸다.

“당신의 꿈을 이뤄 주고 싶었는데…….”

자신의 힘으로는 이룩할 수가 없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스스로가 황후에 오르리라 꿈꾼 적은 맹세컨대 단 한 번도 없었다. 단지 진평이 황좌에 앉기를 바랐을 뿐이다.

하지만 모든 걸 실패했다. 불가능함을 제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그 꿈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도, 이룰 방도도 이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어렵게 인정한 도양은 목 놓아 울었다. 아무도 없는 이곳이라면 그래도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열하며 도양은 진평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제 발목에 명인이 새겨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평이 도양을 찾아왔었다.

진평은 짐승 같은 제 아비의 폭압에 억눌려 살던 그녀의 구원자였다. 빛이었다. 이 세상이었다.

그를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해 연모했다. 그 감정은 단지 명인의 끌림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기에, 하늘이 진평을 제게 명인자로서 보내 주었다고 믿었다.

행복했다. 화화의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약한 그를 보며 매 순간 조마조마해했지만, 매일같이 진평의 옆을 지켜 줄 수 있어 진심으로 행복했었다.

그가 저를 보며 웃을 때는 도양도 가슴 저릿할 정도로 기뻤다.

그렇기에 진평과 늘 같은 방향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에게 바라는 것이 생기면 그것은 곧 자신의 바람이 되었다.

도양은 한 번도 진평과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한 적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단지, 그들보다 강하지 못해 실패했을 뿐.

진평과의 지난 추억을 떠올리며 울며 웃던 그녀는 어느 순간 제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어깨를 흠칫 떨었다.

잠시 뒤 차디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기 연민은 끝났나?”

어느새…….

도양은 핏기가 빠져 하얘진 입술을 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익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을 진예와 제가 따돌렸던 조춘경이 그녀와 몇 보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진예는 아직 익재의 검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들고 그녀에게 한 보, 한 보 천천히 다가왔다.

도양은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그 모습이 휘청휘청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더는 제게 가망이 없음을 느꼈다.

진예는 저항 의지를 상실하고 자신을 멍하니 올려다보는 그녀를 향해 작게 중얼거렸다.

“너희들의 꿈은 잘못되었었다.”

“…….”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뼈저리게 후회하면서 눈감거라.”

그 말끝에 도양은 제 가슴을 꿰뚫는 고통에 숨을 갈급하게 몰아쉬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있었지만, 더는 말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진예는 자신의 팔을 꽉 붙드는 손길에서 아직 남아 있는 고집을 느꼈으나, 이내 칼을 뽑아내며 팔을 뿌리쳤다.

뽑힌 칼날을 따라 붉은 피가 튀어나왔다. 이어 위도양의 몸이 바닥 위에 힘없이 툭 쓰러졌다.

진예는 더는 움직임이 없는 시신을 확인하고는 뒤돌아서서 조춘경을 바라보았다.

“목을 잘라라.”

“……예, 폐하.”

* * *

황제의 월담이 이루어진 그 밤이 지나고, 다음 날 오후가 되었을 때 황도에서 가장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에 반란군의 수장이었던 위도양의 머리가 효수되었다.

그리고 며칠 뒤에 황도에 낭보 하나가 굴러들어 왔다.

조반상을 치우고 편전으로 향하는데, 박 태감이 진예가 탄 가마를 졸졸 따라오면서 새 소식을 전했다.

사실이라면 확실히 좋은 소식이긴 한데, 가마 안쪽에 있어서 잘못 들었나 싶어 진예가 상체를 바짝 세우고는 밖의 박 태감에게 재차 확인했다.

“읍주에서 최초의 익재가 죽었다? 확실한가?”

“그러하옵니다, 폐하. 읍주의 군사들이 익재의 시신을 확인하였다고 들었사옵니다.”

읍주의 이야기를 전하는 박 태감의 얼굴이 환했다.

“무당의 옷을 입고 있는 최초의 익재가 맞다고 하옵니다. 다만 그 수급은 사라졌다고 하온데 그 사내가 가져간 것이 아닌가 추측이 된다고 전해 왔사옵니다.”

진예는 듣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며칠 전 읍주로 누군가 들어갔다는 장계가 올라오긴 했지만, 평범한 사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진예는 의심스러우면서도 얼떨떨한 기분이 되어서는 박 태감에게 다음 질문을 했다.

“해서 그자는 어디 있다더냐. 그 말이 사실이라면 마땅히 큰상을 내려야 하는 일 아닌가.”

“그것이, 행방은 알 수가 없다고…….”

박 태감이 말끝을 흐리자, 진예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대체 초소의 놈들은 뭐 하는 놈들이란 말이냐? 드는 놈도 못 잡고, 나는 놈도 못 잡고.”

질책하는 소리에 박 태감은 얼른 허리를 바싹 숙이며 곤란해하는 소리를 냈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마침 도착한 가마에서 내린 진예가 편전에 들어서며 손을 저었다.

“되었다. 쓸데없이 익재의 수급을 가져갔다면 이유는 하나겠지. 그놈은 곧 황도에 나타날 것이다. 나타나거든 어떤 상을 내릴지나 생각해야겠구나.”

“예, 폐하.”

그렇게 대신들이 모인 편전에 들어선 진예는 조회를 매끄럽게 진행했다.

최근 이런저런 복잡한 일을 대충 마무리했다 보니 그다지 예민하게 굴 일이 없었다.

위도양이 죽었다는 소식에 반란군들은 빠르게 무너져, 좌장군이 지휘하는 군사들이 대부분 진압을 한 상태였다.

그리고 위도양의 품에서 발견된 지하실 지도를 바탕으로 진예는 황도에 모아 두었던 군사들을 풀어 그곳의 익재들을 처리했다.

지하실은 황성의 외성 아래에, 황궁을 제외한 거의 전역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의 지역에 퍼져 있었으나 착착 정리되는 중이었다.

또한 표기장군이 이끄는 군사들은 두 번째 익재 서식지로 향해 역시 잘 버티는 중이었다.

아마 완전 정복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예가 황도에서의 일을 대강 정리할 때쯤이면 세 번째 서식지로 향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 와중에 읍주의 골칫거리인 최초의 익재까지 죽었다고 하니 이보다 더 괜찮은 상황이 있을까 싶었다.

덕분에 오늘부터는 걸어 닫아 두었던 황성 문도 열고, 다시 외성에 백성들을 들였다.

거의 모든 일이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었다. 딱 하나만, 빼면 말이다.

조회를 마치고 편전에서 나온 진예는 대기하고 있는 위장군을 데리고서 집무실에 들어섰다.

한동안 금군들을 대동해 지하실을 이 잡듯이 돌아다닌 위장군이 진예에게 앞으로의 진행에 대해 보고해 왔다.

“익재를 정리하는 데에는 보름, 지하실을 메우는 데는 석 달 이상은 걸리지 않을까 싶사옵니다.”

요는 생각보다 지하실 규모가 커서 흙을 퍼 오는 데도 시간이 꽤 오래 걸린다는 것이었다.

편전에서 옥새를 찍으며 진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상소문들을 들여다보는 동안 내내 위장군을 앞에 앉혀 놓고 며칠간 있었던 일에 대해 소상히 들었다.

어스름이 진 뒤에야 집무를 마친 그녀는 침전으로 발을 들였다. 따라오라는 말이 있었기에 위장군도 조용히 그곳의 응접실까지 들어갔다.

진예가 탁자 앞에 앉는 모습을 본 위장군이 몇 발 떨어져 고개를 숙이고 있자, 진예가 손짓해 그를 가까이했다.

“명하실 것이 있으시옵니까.”

“조 후를 황궁에 들여야겠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위장군이 한 치의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아니 될 말씀이시옵니다.”

그에 진예가 위장군을 올려다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준비되었다는 듯이 대답이 튀어나온 걸 보니 어느 정도 예상한 범위 내의 명이었던 듯했다.

얼마 전 조춘경이 다녀간 용건이야 뻔하다고 생각했던 걸까. 다만 드물게 칼같이 자르는 것을 보니 정말 말을 안 들을 모양인 듯했다.

사실 평소에도 위장군은 서엽을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지는 않았었다. 진예가 그를 아끼니 묵인해 왔을 따름이었다.

“내 조춘경과 약조를 하였다.”

“조 후는 현재 폐하의 명으로 구금이 된 자이옵니다. 어찌 죄인을 황궁에 들인다는 말씀이시옵니까?”

원칙주의자 성향이 있는 그다운 대꾸였다. 일을 행할 사람이야 다른 이도 있긴 하지만 가장 믿음직하고, 입이 무거운 자는 위장군이었다. 진예는 그를 어떻게 설득할까 고민하며 대답했다.

“맞는 말이긴 하다만, 짐이 그에게 들을 말이 있다.”

“서신을 써 주시면 그것은 전하겠사옵니다.”

위장군의 흔치 않은 고집에 진예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에 시선을 살며시 피한 위장군이 눈을 감았다 뜨더니 한참 만에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께선 유독 조 후와 관련된 일에만 예외를 많이 두십니다.”

정 안 되겠다면 진예의 뜻에 따르겠다는 의미였다. 진예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조하지. 조 후를 따로 부르는 일은 이번이 마지막이다. 이래도 아니 되는가.”

위장군은 고민하는 듯 입을 달싹이다가 먼저 시간을 제시했다.

“금일 이경(오후 9시에서 11시)이 시작될 즈음이면 되겠사옵니까.”

“충분하다.”

“물러가옵니다.”

이제 막 해가 떨어졌으니 이경까지 여유는 충분하지만 사람 하나를 황궁에 은밀히 들이는 일이니, 소문이 나지 않게 하려면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았다. 위장군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점차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진예는 잠시 뒤에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예상했다.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려 오는 것에 바깥의 누군가를 불렀다.

“게 있느냐.”

곧 궁인들이 들어와 진예의 명에 따라 바깥과 이어지는 문을 열고 바깥이 다 보이도록 성기게 엮은 발을 내렸다. 그리고 어둠이 다가오자 곳곳에 초와 등잔을 켰다.

진예는 서엽이 오기까지의 무료함을 이겨 내기 위해 박 태감을 불러 검토할 상소문들을 옮기게 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서엽을 데리러 간 위장군이 황궁 문을 통과했다는 말을 들은 진예는 일거리를 바닥에 내려 두고 침전 안에 있는 이들을 밖으로 물렸다.

곧 박 태감이 위장군의 방문을 알려 왔다.

“폐하, 위장군께서 드셨사옵니다.”

“들라 하라.”

위장군의 옆에는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사내가 서 있었다. 박 태감이 그에 누군가 하여 눈치를 보다가 침전 밖을 나섰다.

위장군은 태감이 완전히 멀어진 것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서엽의 얼굴을 덮은 검은 천을 벗겨 냈다. 그러고는 밖으로 나가 문 앞을 지켰다.

둘만 남자 서엽이 문을 등지고 앉아 있던 진예의 옆으로 와 예를 갖췄다.

“홍복을 누리소서, 황제 폐하.”

그에 진예가 고개를 돌려 서엽을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들라.”

진예의 명을 듣고 서엽이 천천히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근 한 달은 보지 못한 듯한데, 그사이 부쩍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게다가 곧 눈물이라도 쏟을 듯이 벌써 서엽의 눈시울은 붉어져 있었다.

“그간 강녕하셨사옵니까.”

이런 인사조차 나눌 필요 없이 늘 가까이 있던 그들이었기에, 진예는 그런 서엽의 말이 유독 어색하게 들렸다. 하여 서둘러 본론으로 들어가고자 했다.

“그래. 무슨 일로 짐을 만나고자 하였느냐.”

그러자 서엽은 두 무릎을 바닥에 바짝 붙이고 고개를 푹 숙였다.

“사죄를 구할 기회를 주십시오.”

이런 이야기일 거라고 당연히 예상했지만, 진예는 그래서 더 눈을 차갑게 가라앉혔다.

“폐하의 곁으로 돌아오고 싶습니다.”

이어지는 말을 듣고 진예가 몸을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제 아비를 무릎 꿇게 해 놓고 온 자리이니 조서엽에게 자신을 설득할 만한 무언가가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었다.

* * *

말발굽이 땅거미가 진 지면을 박차고 나아갔다.

무건은 황성 남문을 통과하고 난 뒤, 성문교위의 안내에 따라 잠시 성루로 올라왔다.

그는 흐트러진 옷을 여미며 자신의 소식을 알리기 위해 황궁으로 달리는 그 병사의 모습을 보다가, 뒤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마마께서 타고 가실 말을 가져다 놓았습니다.”

성문 앞에서 신분을 증명하라며 기어이 무건의 허벅다리에 있는 명인을 확인한 교위였다. 진예라는 황제의 휘를 확인한 순간, 그는 즉시 송구하다며 허리를 깊이 숙였다.

죽었다고 알려진 데다 몰골이 황비라기엔 말이 아니었던지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무건은 제 신분을 증명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에 씁쓸함이 몰려왔더랬다.

무건은 부쩍 친절해진 교위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성루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엔 과연 검고 튼튼해 보이는 말 한 마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말의 고삐를 넘겨받으며 무건이 짧게 한마디 했다.

“고맙군.”

그러고 무건이 미마이를 먼저 말에 태우고 있는데, 성문교위가 왜인지 안절부절못하며 아까 물었던 것을 한 번 더 입에 올렸다.

“정말 가마를 타고 가지 않으셔도 되겠사옵니까? 그것도 잠시만 기다리시면 황궁에서…….”

무건은 듣다가 시간이 아까워져 중간에 말을 끊었다.

“기다릴 수가 없어서 말이다.”

“아, 예…….”

미마이의 뒤에 무건이 몸을 훌쩍 올리고는 고삐를 당겼다. 그러자 황궁까지 호위를 하겠다며 나선 몇몇이 그를 뒤따랐다.

어차피 신분 증명할 사람도 필요하니 딱히 입을 대지 않고 무건이 먼저 출발했다. 수 마리의 말들이 어둠 속에서 황성 바닥을 어지럽게 울리며 남에서 북으로 가로질렀다.

금세 별궁인 담람궁의 담벼락을 지나 한 시진 가까운 시간 동안 외성을 달린 말들은 이내 황궁의 동문에 도달했다.

죽었다고 알려졌던 황비가 황성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 나온 내관들은 정말로 문 앞에 무건이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서둘러 황궁 문을 열었다.

미마이가 궁인들과 함께 어디론가 가고, 무건은 등롱을 든 내관들의 뒤를 따라 진예가 있을 침전으로 향하며 오랜만에 제 눈앞에 펼쳐진 황궁의 면면을 눈에 담았다.

이곳으로 다시 오니 그의 가슴속에 묘한 감개가 어렸다.

그리고 마침내 인교문을 지나 불 켜진 침전 앞에 섰을 때,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내관과 궁인 들이 붉은색 등롱을 들고 각자 제자리를 찾아 도열해 있는 가운데, 인교전의 기단 위에는 작은 그림자가 어려 있었다.

멀리서 황제인 진예의 존재를 확인한 무건은 거칠게 올라오려는 숨을 참고 즉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스스로의 귀환을 알렸다.

“귀인 연무건, 대환의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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