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누군가 입에 미음을 넣어 주는 것이 느껴졌다. 무의식중에 그것을 삼키긴 했지만 반은 밖으로 흐르고, 반은 다행히 목으로 넘어갔다.
무건은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다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온몸이 물에 젖은 듯 무거웠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힘없는 손을 들어 허공을 더듬다가 제게 미음을 건네는 이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
누구의 목소리인지 구분되지는 않았지만 상대는 무건이 움직인 것에 놀라 움찔했다. 그렇지만 아직 정신이 제대로 깨지 않은 무건은 제 한 손에 들어오는 손목을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폐하, 진예…….”
그제야 붙잡은 손목에서 힘이 빠졌다. 그의 모습이 안쓰러워서 그런 것이었지만 다른 의미로 해석한 무건은 그대로 손목을 당겼다.
작은 몸이 순순히 끌려왔다. 그에 무건은 제 팔로 둘러 안았다. 그러다 제가 품에 안은 이가 작아도 너무 작다는 걸 깨닫고 놀라 눈을 떴다.
며칠 만에 눈을 뜬 그는 갑자기 쏟아지는 빛에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다가 겨우 시야를 회복했을 때 제 앞에 있는 이의 이름을 의문을 담아 불렀다.
“……미마이?”
잔뜩 잠긴 목소리가 갈라져 나갔다. 말하고 무건은 쿨럭, 기침을 하다가 신음을 삼켰다. 가만히 있어도 복부와 가슴이, 아니 그 외의 곳도 모두 다 아파서 다시 기절하고 싶어졌다.
그는 엄습해 오는 고통에 누워 있는 침상 위에서 몸을 뒤틀다가 손에 잡히는 대로 이불을 움켜쥐었다.
“어…… 윽.”
스스로도 느껴질 만큼 온몸이 떨렸다. 무건은 고통을 삭이며 마지막 기억을 더듬었다.
알 수 없는 힘으로 상방주의 우두머리 익재를 죽이고 쓰러졌는데…… 그러고…….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제야 무건은 제가 이후 쓰러져 버렸다는 것을 겨우 깨달았다.
심호흡을 하며 고통을 삭이던 그가 미마이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며칠, 며칠이나 지났지……? 상방주는 점령이…….”
말을 잇다가 무건은 문득 난처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소년의 얼굴을 보고서 아, 하고 뭔가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그가 아는 미마이는 환의 말을 못했다. 무건이 머리를 짚으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미안하다.”
이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는지 미마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무건은 뭐라고 말을 이어야 할지 알 수 없어 아이를 빤히 보다가 한 마디만 던졌다.
“조서엽은?”
이전에 조서엽이 미마이가 자신의 사람이라고 했던 말이 기억났다. 그런 미마이가 여기 있다는 건 그도 근처에 있다는 뜻이었다.
무건의 물음에 미마이가 막사의 입구로 시선을 돌렸다.
조서엽은 바깥에 있다.
그럼, 진예도 이곳에 있는 건가?
조서엽이 그녀를 다른 곳에 두고 이곳에 왔을 리 없으니까, 그리 추론하는 것이 합리적일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무건은 당장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정말로 그녀가 왔다면 먼발치에서라도 보고 싶었다.
하지만 팔에도, 허리에도 힘이 들어가질 않아 몸을 그 단순한 동작도 어려웠다. 그러자 지켜보던 미마이가 그의 어깨 밑으로 손을 넣어 도와주었다.
무건은 겨우 침상에 걸터앉긴 했으나 자세 유지가 되지 않을 것 같아 좀처럼 미마이의 팔소매를 붙잡고 놓지 못했다.
“잠시, 만.”
몸 상태가 엉망이었다. 두 다리로 제대로 일어설 수는 있을까? 솔직히 말하면 제힘으로 문밖을 나설 자신이 없었다.
한데 그때, 미마이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러왔다.
“마마.”
정말로 제 귀에만 들릴 만치, 막사의 허술한 입구조차 넘어가지 못할 만큼 조그마한 목소리였다. 그에 무건이 미마이를 마주 바라보았다.
“제가 저번에 드렸던 약은 드셨습니까?”
변성기를 지나지 않은 남자아이의 가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무건은 잠시 멍해졌다. 미마이가 환의 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환의 말을 못하는 것 아니었어?”
그러나 미마이는 잠깐 고개를 돌려 바깥의 눈치를 살피다가 제 할 말을 이어 갔다.
“가지고는 계세요?”
조금 다급해 보이는 어조였다. 무건은 영문은 몰랐지만 아이의 검은 눈동자가 약간 흔들리는 것을 보고는 제 옷 안을 뒤졌다.
하지만 쓰러졌을 당시에 입었던 갑옷이 아니었다. 옷을 갈아입힌 누군가가 친절하게 소지품까지 안쪽에 넣어 줬을 리는 없었다.
무건은 막사 안을 둘러보다가 침상 옆 탁자에 검은 향낭이 있는 것을 보고 손으로 가리켰다.
“저기 있을 거야.”
그에 미마이는 재빨리 향낭을 가져와 환을 꺼냈다. 아이가 동그란 약을 손에 올려놓고 무건에게 내밀었다.
“빨리 드세요.”
무건은 일단 받아 들면서도 저번에 먹었을 때 쓴맛만 났던 걸 떠올리고는 의문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뭔데? 저번에 먹었지만 아무 변화도 안 일어나던데.”
“일어났을 겁니다.”
“……?”
많이 본 건 아니지만 미마이는 여러모로 알 수 없는 말만 여럿 늘어놓는 아이였다.
무건은 미마이의 얼굴과 제 손 위의 약을 번갈아 보다가 일단 환약을 입에 물었다. 물도 없이 씹으려니 쓰디썼다.
하여 인상을 찌푸리고 있으니 미마이가 아까 전 무건에게 먹였던 미음이 든 그릇을 가져와 한 술 떴다.
제 앞에 내밀어진 숟가락을 보고 아이한테 아이 취급 받는 느낌이라 꺼림칙해진 무건은 그냥 제가 그릇을 들었다.
죽이 식기도 했고, 물이 많이 섞여서 그런지 맛도 밍밍했다. 그 와중에 의식 없이 오래 누워 있던 탓에, 목구멍이 닫힌 느낌이라 묽은 죽조차 넘기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살려면 먹어야지.
그런 생각으로 꾸역꾸역 삼키던 무건이 빈 그릇을 침상 위에 내려놓으며 미마이에게 가볍게 농담을 던졌다.
“설마 독약 같은 건 아니겠지?”
한데 미마이의 반응이 생각보다 거셌다. 아이가 고개를 마구 흔들며 부정했다.
“아니에요!”
아이는 입술이 하얘질 정도로 꾹 깨물더니, 작은 손을 꼼질거렸다. 무언가 불안해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저도, 나쁜 짓은 그만하고 싶어요.”
아이의 뼈 있는 한마디에 무건이 제가 무심코 실언을 해 버렸음을 깨달았다.
잊고 있었는데, 미마이는 본래 화친왕의 사람이었다. 그곳에서 정확히 무슨 일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위도양과 지하실을 드나들었고, 그 안에 익재들이 있었으니…….
‘위도양이 익재들을 이끌고 다니는 것이 미마이의 능력 덕분일지도.’
아니, 단지 추측이 아니라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화친왕이 죽기 전에 미마이를 소개해 주면서 모든 것을 조종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아이라고 했었으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화친왕이 그리 믿었다면, 그 이전에도 어른들에게 이리저리 이용당했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생각 없이 말했다.”
무건이 미안함을 담아 그리 전하자 미마이가 이번에도 고개를 흔들었다.
“마마의 잘못은 없습니다.”
“…….”
듣는데 무건은 왜인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린아이의 말이라기에는 너무 성숙한 말이 아닌가 싶었다.
무건은 굳은 표정으로 작은 아이를 보다가 손을 잡았다. 닿는 순간 미마이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흠칫했지만, 그를 뿌리치지는 않았다.
잠시 뒤 미마이의 맑은 검은 눈이 자신에게 향해 눈이 마주치자 무건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고민이 있니?”
질문이 의외인지 미마이는 놀란 듯 살짝 입을 벌렸다.
“저를 도와주실 건가요?”
“네가 원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움직이지도 못하시면서요?”
무건이 픽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몸으로 때워야 하는 거라면 지금은 힘들긴 하겠다.”
몸 튼튼한 것밖엔 장점이 없는 자신이 어쩌다 이런 꼴이 됐는지.
그렇게 자조하면서도 무건은 아이에게 품에 들어오라는 듯이 팔을 벌렸다.
그러자 미마이는 당황한 듯했지만, 무건의 무해한 표정을 보고는 머뭇머뭇 한 걸음 두 걸음 옮겨 그의 두 팔에 안겼다.
무건은 아이가 몸을 제게 기대자 조금 놀랐다. 성숙한 말과는 대비되게 너무 마르고 작은 몸이었다.
그가 제 목덜미에 기댄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속삭였다.
“이렇게 안아 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때도 있으니까. 그렇지?”
아이는 대답 대신 긴장하고 있던 몸에서 힘을 풀었다. 아이의 고사리손이 무건의 옷깃을 살짝 붙잡는 게 느껴졌다.
그에 무건은 외람되게도 진예를 떠올렸다. 그녀에게도 이렇게 위로를 건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면서.
‘하지만 거부하겠지.’
나약한 모습만큼은 절대로 내비치지 않으려 하는 진예이니까.
그래서 보는 이의 가슴을 더 애태우고, 더 저릿하게 하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한데 그때였다. 그의 상념을 깨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마이.”
듣자마자 누군지 단숨에 알아챘다. 조서엽이었다.
미마이가 움찔하며 무건의 품에서 빠져나갔다. 아이는 저를 찾는 목소리에 쫓기는 사람처럼 급하게 꾸벅 고개 숙이고선 뒤돌아 나갔다.
잠시 뒤 예상대로 막사 입구에 다시금 사람 그림자가 드리웠다. 조서엽은 이번엔 무건을 찾았다.
“귀인마마, 깨셨다고 들었습니다.”
“…….”
꽤 오래 만나지 못했는데, 역시나 반가운 인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진예를 사이에 두고 있는 이상 어떻게든 얼굴 맞대는 일이 생길 수밖에 없는 사내.
무건이 마른세수를 하며 딱히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자 채근하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안으로 들어도 되겠습니까.”
굳이 왜……?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무건은 한숨을 섞어 대답했다.
“그리하십시오.”
허락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막사 안쪽을 가리고 있던 천을 걷어 내며 조서엽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소름 끼치도록 단정하고 깔끔한 사내였다. 그리고 못 본 사이 날이 선 느낌이 더 강해져 있었다.
그런 그가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예를 차렸다.
“홍복을 누리소서, 귀인마마.”
피차 반갑게 인사할 사이는 아닐 텐데 조서엽은 얼굴에 철판이라도 깔았는지 덤덤한 모습이었다.
무건은 인사고 뭐고 도로 눕고 싶어졌지만 듣고 싶은 말이 없지는 않으니 마냥 무시는 못 했다.
“오랜만입니다, 조 후. 폐하께선 강녕하십니까.”
인사 한마디만 하고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길게 대화 나누고 싶지 않다는 뜻을 그리 돌려 전하니 서엽이 굽혔던 몸을 바로 세우며 대답했다.
“아마도 그러하실 것입니다.”
“아마도라니…… 조 후와 동행하지 않으셨다는 말씀입니까?”
물으면서 무건은 실망감을 감추기 힘들었다. 또한 당혹스럽기도 했다. 진예가 조서엽을 옆에서 떼어 놨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진예야 다른 호위도 있으니 그렇다 치지만 조서엽은 절대 떨어지려 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래서 한수 지역을 떠나기 전날 잘 지키라는 말도 하지 않았던가.
자신이 모르는 일이 생긴 건가 싶어진 무건이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자 서엽이 뚜벅뚜벅 걸어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의료 도구가 널브러져 있는 막사 안의 풍경을 확인하다가, 미마이가 가져다주고 간 미음 그릇을 탁자 위로 치워 두었다.
무건은 그 행동 하나하나에 왜인지 화가 배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막사 안에 들어왔을 때 느꼈던 날카로운 기운이, 바로 앞에서 보고 있자니 더 예민하게 다가왔다.
그것의 정체는 살기였다.
무건은 아직은 검집에 꽂힌 채로 조서엽의 왼손에 얌전히 쥐어져 있는 칼을 보며 긴장했다. 그러는 사이 서엽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상황을 전해 왔다.
“……폐하께서는 아직 한수 지역에 계신다더군요.”
“비래가 아니라?”
“저마저 속이시고 한수에 남아 있으셨던 모양입니다.”
조서엽의 심기가 뒤틀린 게 그것 때문인가? 진예가 자신을 속였다는 것?
하지만 그게 무건에게 노골적인 살기를 내비칠 일은 아니지 않나 싶었다.
그리 생각하고 있는데, 서엽이 무건을 내려다보며 말을 툭 던졌다.
“어찌 되었든 귀인마마께서 돌아가시지 않아 다행입니다.”
“…….”
무심한 어투로 들려온 말에 무건은 그를 올려다보며 입을 다물었다. 뭐라 대꾸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을 바라보는 조서엽의 눈빛은 꼭 죽었으면 좋겠다는 듯 노골적인 경멸의 빛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놓고 반대의 말을 하고 있으니 어찌 경계가 되지 않을까.
이전에도 썩 좋은 사이는 아니었지만 오늘은 특히나 조서엽의 상태가 이상했다.
한참 말문을 열지 못하고, 그와 눈싸움하듯이 뚫어져라 보고 있던 무건은 문득 한숨을 토했다.
“조 후께서 염려해 주신 덕분에 깨어난 듯합니다. 다만 좀 더 쉬긴 해야겠으니 그만 나가 보는 게 어떻습니까.”
“염려한 적 없습니다.”
“조 후.”
“단 한 번도. 마마의 안위를 염려한 적은 없습니다.”
시비 거는 소리가 상당히 듣기 거북했다. 솔직히 말하면 누군가 칼로 몸 안쪽을 헤집어 놓은 듯이 전신이 아픈 탓에 앉아 있는 것도 버거운 상태인데 저런 소리까지 들어 줘야 하나 싶었다.
무건이 머리가 지끈거려 오는 것에 와락 인상을 쓰며 서엽을 노려보았다.
“말장난을 하고 싶은 거라면 다른 때 하지 그래. 오늘은 받아쳐 줄 기운이 없는데.”
좋은 말로 하면 안 물러날 것 같아 일부러 존대까지 뗐거늘 소용이 없었다. 서엽은 무건의 바람을 무시하고 탁자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그를 마주 보았다.
“이곳의 우두머리 놈을 처리하셨다 들었습니다.”
“말귀 못 알아듣나? 그만 나가라고.”
무건이 명확한 축객령을 내렸음에도 서엽은 여전히 못 들은 척했다. 대신 왼손에 칼을 쥔 채로 슥 팔짱을 꼈다.
아직은 공격할 의사는 없다는 신호. 그럼에도 무건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서엽의 사소한 하나까지 모두 눈에 담았다.
형형한 눈빛, 입가에 비치는 의미 모를 미소, 전체적으로 여유가 밴 몸짓까지.
“제가 마마께서 궁금해하시는 것에 대한 답을 하나 알고 있는데.”
이야기를 듣자마자 무건은 헛웃음을 뱉었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인지.’
서엽이 하고 싶어 하는 말이 무엇인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진예에 대한 것이라면 모를까, 자신이 궁금해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백번 양보해 그런 게 존재한다 해도 조서엽에게 답을 구할 일은 없었다.
한데 이어진 서엽의 말은 그리 생각했던 것을 무색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어떻게 익재를 태워 죽이는 능력을 당신께서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답을 말입니다.”
“조금 당혹스러운 말이긴 하네.”
“별로 궁금하지 않으셨던 모양입니다.”
“…….”
“그게 제가 마마의 안위를 쓸데없이 신경 썼던 이유이기도 한데 말입니다.”
그에게서, 아니 조서엽을 포함한 남에게서 들을 줄은 몰랐던 이야기였다.
서엽이 무슨 말을 지껄이든 그냥 한 귀로 흘려버리려던 무건의 결심이 흐트러졌다.
“그런 이유라면 확실히 호기심이 일기는 하는데…….”
진예가 물었을 때 단순 기연이라고 설명하긴 했지만, 무건도 의문을 품고 있었다. 대체 이 힘이 어디서 생겨났는지.
하지만 무건이 확실하게 알려 달라고 하지 않고 말꼬리를 늘이자 어떤 의도인지 서엽은 금세 눈치챘다.
“그런데 알고 싶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알고 나면 네가 날 죽일 것 같아서. 내 감이 틀렸나?”
그의 물음에 서엽의 입꼬리가 선명하게 휘어져 올라갔다.
“이거, 눈치가 빠르다고 해야 할지.”
“그보단 천한 놈의 살기 위한 본능적인 감각이라고 생각하는 게 어때.”
“뭐, 어느 쪽이든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지요.”
다시 말해 알든 모르든 죽이겠다는 의미였다.
무건은 긴장감에 등허리에 바짝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복부가 욱신거려 큰 숨을 들이켜야만 했다.
과연 이런 몸으로 조서엽의 칼날을 피할 수 있을까?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당장 일어서기도 힘겨운데, 어떻게 해도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조서엽이 어느 정도 무위에 올랐는지 제 두 눈으로 확인한 적은 없었지만, 황제인 진예의 옆에 있는 자였다. 그 사실만으로도 보통 무인이 아니라는 점은 이미 방증된 것이었다.
‘역시 이렇게 되지 않습니까, 진예…….’
진예는 무건이 서엽을 물어뜯는 일을 걱정했었지만, 역시 자신이 가만히 있어도 저놈이 자신을 마냥 내버려 두지 않으리라는 제 예상이 맞았다.
게다가 저로서는 최악의 상황에서 그 예기를 마주하게 되었으니…… 꼼짝없이 당하는 일밖에는 남지 않은 것 같았다.
다만 서엽이 무슨 의도로 이렇게 시간을 질질 끄는지는 잘 모르겠다. 의문점은 그것 하나였다.
“아직도 아니 궁금하십니까.”
그리고 서엽은 답을 알려 주지 못해 안달 난 사람처럼 굴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그의 말대로 알고나 죽자 싶어 무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한번 말해 봐.”
“동조 현상입니다.”
“동조 현상……?”
조서엽의 말을 반복하면서 무건이 그게 뭐였는지 머릿속을 뒤졌다. 최근엔 거의 들어 본 적 없는 단어라 순간적으로 헷갈렸던 것이다.
그러다 명인과 관련된 일이라는 걸 깨닫고는 심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건 각인을 해야 나타나는…….”
“드물게 각인을 안 해도 나타나는 경우가 있지요. 미마이가 그러더군요, 아마 실로 연결되는 꿈을 꿨을 거라고.”
꿈 이야기에 무건이 미간을 좁혔다.
실로 연결되는 꿈.
벌써 몇 개월 지나기도 했던지라 바로 떠올리기 어려웠지만 이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읍주에서, 정말 아주 잠깐…… 뇌리에 스쳐 지나갔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걸 꿈이라고 할 수가 있나?
그런 의문이 들긴 했지만 형태나 용어 같은 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확실히 그때의 무건은 그리 생각했었다.
‘저 실이 진예와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라고.
“맞습니까?”
새로운 사실 앞에서 당황하여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던 무건이 채근해 오는 서엽을 쳐다보며 반문했다.
“그럼 폐하의 목숨이 나랑 연결됐다는 소리인가? 그래?”
무건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서엽은 대답하지 않는 것으로 긍정해 왔고, 무건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 앞에서 헤맸다.
가장 먼저 밀려들어 온 감정은 공포였다.
‘진예도 같이 죽을 뻔했다.’
자신이 그녀의 삶까지 빼앗을 뻔했다는.
무건은 그간 몇 번이나 목숨이 왔다 갔다 했는지 셈해 보다가 간담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눈앞이 암담해졌다.
진예에게 당신이 당장 내일 죽더라도 각인을 했을 거라는 얘기를 지껄이긴 했었지만, 반대가 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당장 이번에도 까딱 잘못하면 숨이 넘어갈 지경까지 가지 않았던가…….
만약 진예의 목숨이 걸린 줄 알았더라면 자신은 절대로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런 마음은 조서엽도 똑같았을 터.
지금에야 무건은 조서엽의 목에 매인 목줄의 정체를 알아챘다.
조서엽이 연무건에게 화친왕을 죽일 칼을 건넬 수밖에 없었던 이유.
어떻게든 살아남으라고 했던 이유.
증오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보면서도, 죽이지는 못한 이유.
싫어하면서도 마치 걱정하는 듯이 행동했던 이유…….
무건은 그간 서엽의 그 행동들을 보면서 단지 진예를 향한 충성심만으로는 가능한 인내의 범위가 아니라고 생각하긴 했었다.
이제 보니 전부 다 동조 현상 때문이었다.
연무건이 죽으면 오랫동안 연모해 왔던 진예를 잃게 되니까. 그리고 그건 조서엽이 맞이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상황이니까.
내내 의문으로 남아 있었던, 중간에 어긋나 있었던 아귀가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나한테 죽지 말라고 했던 거군.”
중얼거리면서 무건은 제 두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상방주의 우두머리를 처리할 때 느꼈던 낯설고도 강력한 힘이 아직 몸속 어딘가를 떠돌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더불어 그게 부서져 내릴 뻔한 자신의 몸을 지탱해 주고 있다는 사실도.
동조 현상에 의해 전이된 게 맞는다면, 진예의 이 능력은 단지 익재를 능숙하게 처리하기 위한 힘인 것만은 아닌 듯 보였다.
그야말로 기연, 그 자체였다.
인간이 가질 수 없는 강함.
진예가 어째서 환 황제 중 역대 가장 강력한 군주라는 이야기가 나오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만한 대목이었다.
“그 말인즉 이 능력도 본래 폐하의 것이라는 이야기고.”
“그렇습니다.”
생각 끝에 그럼 왜 진예는 그 사실을 미리 말하지 않았을까, 하는 당연한 의문이 따라붙었다.
그랬다면 더 조심했을 텐데…….
왜인지 열어서는 안 되는 비밀의 상자를 마주한 느낌이었다. 입 안이 바싹 말라 무건은 침을 모아 꿀꺽 삼켰다.
이제부터는 듣기 싫은 얘기의 연속이 되리라는 사실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떤 말을 들어도 흔들리지 말자고, 그리 다짐하면서도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하며 무건은 의문 부호를 붙였다.
예상대로 첫마디부터 마음에 드는 말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폐하께선 귀인마마와 연결되어 있는 걸 원치 않으십니다.”
“…….”
이런 이야기를 전하는 화자가 하필 조서엽이라는 사실조차 싫었다.
“일자무식이신 마마께서도 그 정도는 이해하시겠지요. 폐하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까요.”
반박 불가한 사실이긴 했지만…… 그래서 더 한 마디 한 마디가 무건의 속을 거칠게 긁어 내렸다.
황제와 어울리지 않는 평범한 사내.
그 사실이 오늘처럼 아프게 다가온 적이 없었다.
모든 걸 가진 여인 앞에 선 자신의 초라함에 가슴마저 시려졌다.
그 사실을 애써 덮어 내려는 아집으로 인해 말은 저절로 삐딱하게 나갔다.
“……해서? 새삼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뭐지? 동조 현상은 어차피 못 끊는 것 아니었나.”
“방법이 있다더군요.”
서엽이 말없이 예고한 대로, 무건의 불안했던 희망은 순식간에 꺼졌다.
무건의 표정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면서 서엽은 쾌감 어린 웃음을 지었다.
드디어 자신이 이 지루하고 긴 싸움에서 승리했다는 의미가 담긴 미소였다.
“이제 제가 폐하의 곁에 없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서엽이 질문했지만 무건은 입 안에 피가 고인 느낌이라, 제때 대꾸할 수가 없었다.
그는 직감했다.
바로 한 걸음 앞이 나락이었다.
한번 발을 빠뜨리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무저갱.
하여 필사적으로 버텨야 하는데, 무건은 그러지 못했다.
그동안 오로지 한 사람만, 제 명인자인 진예만 보며 이곳까지 달려왔다. 이전의 삶을 포기했고, 목숨까지 걸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을 주기 위해 자신을 지탱하던 신념을 버렸다.
이제 그 채점표를 받을 때였다. 바로 제 눈앞에 있었다. 문제는 하나. 그것을 들고 있는 사람이 조서엽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것을 외면해 뒤집어 보지 않을 것인가.
그러지 못했다.
“폐하의 명을 받아서 온 거라 말하고 싶은 건가.”
“그래. 넌 버려졌다, 연무건.”
불안에 쐐기를 박는 말이었다.
조서엽의 말에 심장이 쿵 떨어져 내렸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이 순간 느껴지는 신체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무건은 서엽이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옆의 이불을 움켜쥐었다. 그렇지만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했다.
‘버려졌다.’
무건이 가장 듣기 싫은 말이었고, 또한 가장 두려워하는 말이었다.
자신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진예의 꺼지라는 말 한마디면 그들의 관계는 간단하게 툭 무너져 버린다.
즉, 그 말은 관계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서엽은 안 그래도 파리한 무건의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리는 것을 보다가, 그의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고는 다음 반응을 기다리는 듯이 눈을 똑바로 마주쳐 왔다.
표정에서부터 여유가 느껴졌다. 무건의 절망을 즐길 준비가 충분히 되었다는 듯한 여유가.
그리고 농락당할 걸 뻔히 알았지만 무건은 다음 질문 역시 안 할 수가 없었다.
“진예가, 날 죽이라고 했나……?”
진짜로?
조서엽에게 있어서 진예의 옆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그것이라고?
이미 서엽이 돌려줄 말이 무엇인지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끝없이 부정하고 싶었다.
한데 서엽이 답은 내어 주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그가 불쾌하다는 듯이 씹어뱉었다.
“폐하를 그리 명명하지 마라. 평생, 내 입에는 감히 담아 본 적도 없는 이름이니.”
하지만 무건은 그의 불쾌감 따위 알 바 없었다. 저절로 목소리가 격앙되었다.
“묻고 있지 않나. 폐하께서 날 죽이라 했느냐고!”
“난 폐하의 명으로만 움직인다. 더 이상의 대답이 필요한가?”
심장에 칼이 박혀도 이것보다 더 고통스러울 수 있을까.
돌려 말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무건은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열이 올랐던 몸은 말단에서부터 차갑게 식어 내렸다. 그의 눈에서 이채가 사라지고 어둠이 내려앉았다.
무건의 머릿속에 얼마 전 진예가 했던 말들이 스쳐 지나갔다.
〈짐의 유일한 사내는 연무건이 될 것이다.〉
전부 가정형뿐이지 않느냐고 반박하긴 했지만 그 말 덕분에 안심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이만큼나마 발전한 게 어디냐고.
그래서 조금은 마음을 열어 주고 있다 믿었었다.
한데 다시 문이 닫혔다고, 아니 열린 적조차 없다고 선고를 받은 것이었다.
‘전부, 거짓이었다고……?”
그런 말로 자신을 안심시켜 놓고 사실은 날 처리할 계획을 하고 있었다고?
부술 수 없는, 높고 새까만 벽을 마주한 듯한 암담함이 눈앞을 막았다.
무건은 제 눈가에 열기가 몰리는 것을 느끼며 떨리는 손을 올려 얼굴을 가렸다. 흐트러지는 숨을 가라앉히려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자신을 뒤흔들어 놓는 잔인한 현실 앞에서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았다.
이내 무건이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확인을, 확인을 해야겠어. 나는…….”
그래, 조서엽이 거짓을 지껄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더 합리적이었다.
진예는 결코 호의적이거나 좋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거짓말로 사람을 속이는 이는 아니었다.
무건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침상에서 엉덩이가 떨어지는 순간 비틀거렸다.
억지로 발을 한 발짝 앞으로 내밀었지만 오히려 무리한 행동 때문에 바닥에 툭 주저앉고 말았다.
며칠 동안이나 누워 있었던 탓에 근육이 굳어서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했다. 무건은 제 상태에 충격을 받아 몸을 떨었다.
그런 그의 위로 나직한 한숨 소리가 떨어졌다. 서엽이 앞으로 다가오더니 일으켜 세워 주려는 양 무건의 어깨 밑으로 손을 넣었다.
“어리석은 놈. 여태껏 폐하께서 널 원할 거라는 착각을 하고 있었나?”
빈정거리는 소리에 무건은 서엽을 확 밀쳐 냈다. 그러고는 형형한 눈빛으로 상대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헛소리 마, 조서엽.”
“…….”
서엽은 바닥에 쓰러져서도 기세만큼은 죽지 않은 사내를 무감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면서 무건이 단정적으로 말했다.
“내가 사라져도 넌 안 돼. 너는 어떻게 해도 안 된다고. 그러니 차라리 진실을 말해…….”
그에 심기가 뒤틀렸는지 서엽이 한쪽 눈썹을 슥 올렸다. 그러더니 차가운 말투로 무건의 기대를 무참히 짓밟았다.
“진실은 폐하께선 널 결코 마음에 품지 않는다는 것이지.”
자신을 일부러 난도질하는 말이라는 걸 아는데도 당해 줄 수밖에 없었다. 전신에 힘이 쭉 빠져 버린 무건이 고개를 숙였다.
부상당한 어깨 때문에 두 팔로 지탱하고 있는 것도 힘겨웠다. 하지만 여기서 이렇게 벌레처럼, 기고 있는 것은 정답이 아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사이 서엽이 질문했다.
“반박할 수 있나?”
무건은 움직이기 싫어하는 몸을 어떻게든 일으키려 애썼다. 다시 바닥에 발을 디디고, 몸을 들쑤시는 고통을 견뎌 내며 그가 일어나려는 시도를 했다.
그 과정에서 몇 번이나 몸이 꺾여 도로 바닥에 처박혔다. 그동안 서엽은 더는 도와주지 않고 무건이 하는 짓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위에서 내리꽂히는 시선에 심한 굴욕감이 일었지만 무건은 스스로를 격려했다.
이까짓 고통은, 굴욕은 아무것도 아니다.
진예만, 그녀만 다시 볼 수 있다면 전부 다 감내할 수 있었다.
그는 여러 번의 시도 끝에 마침내 똑바로 일어섰다. 금세라도 다시 쓰러질 것 같은 몰골로, 다리를 덜덜 떨면서 겨우 서엽과 눈높이를 맞췄다.
무건이 주먹을 움켜쥐며 몸을 바짝 긴장시켰다. 목소리에도 힘이 실렸다.
“폐하께서 내가, 이 연무건이 당신의 유일한 사내가 될 것이라 하셨다.”
그러나 서엽이 핫, 하고 면전에서 비웃었다.
“그래, 껍데기뿐인 황후가 될 수는 있겠지.”
“…….”
“폐하께서 후사도 너에게서 보겠다고 했나? 하지만 그게 너를 사랑한다는 맹세는 아닐 텐데.”
조서엽은 진예를 너무 잘 알았다. 어쩌면 그녀 자신보다도 더.
진예가 그에게 떠벌린 것도 아닐 텐데 그녀가 했던 말을 그대로 짚어 내며 무건의 가장 허술한 부분을 찔러 댔다.
서엽이 하는 말이 모두 맞는다는 걸 알고 있기에 무건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하나도 없었다.
“개소리, 마.”
“폐하께선 나에게 또한 약조하셨다. 그 마음에 아무도 들이지 않겠다고.”
무건은 제 앞이 부옇게 하는 것을 감추려 눈을 감았다.
“그게 내가 그분을 아직도 사모할 수 있는 이유지.”
저 사내는 스스로가 사랑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너무나 당당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런 조서엽이 무건은 부러워졌다.
지독한 외사랑.
저렇게는 살지 못하는 자신은 그럼 그녀를 덜 사랑하는 걸까. 거부당하는 스스로의 마음에 미치도록 괴로워하는 자신은, 이기적인 걸까.
어쩌면 진예가 원하는…… 진짜 사랑이란 저런 유일 수도 있는데.
어쩌면 그동안 제가 그토록 갈구해 왔고, 추구해 온 것이 정답이 아닐 수 있다는 통렬한 깨달음이 그의 정신을 갉아먹었다.
무건의 마른 뺨에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턱에 맺힌 그것이 뚝 떨어졌을 때, 무건은 눈을 떴다.
여전히 흐릿한 시야 속에서 서엽이 뒤를 돌며 밖에 있는 아이를 불렀다.
“미마이.”
그러자 긴장된 표정으로 미마이가 막사 입구의 천을 걷어 내며 안으로 들어왔다.
머뭇거리며 들어오는 미마이는 커다란 검은 눈동자에 왜인지 걱정하는 빛을 띠었다. 어린아이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싫었지만 무건은 더 버틸 힘이 없어 휘청였다.
그러자 서엽이 왼팔로 그를 받아 내며 속삭였다.
“이제 그만 동조 현상을 끊어 줘라.”
이제 보니 눈만 부연 것이 아니라 귀도 먹먹했다. 평소 또렷한 그 목소리도 유난히 멀게 들렸다. 바로 앞에서 말하고 있는데도.
“제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놈인데, 목숨을 두 개나 부지하고 있어야 하니 어찌 힘들지 않겠느냐. 편하게 해 주어야지.”
“조, 서엽…….”
“그래, 날 원망하거라. 기껍게 받아들이지.”
무건은 정신을 잃는 와중에도 그의 옷깃을 틀어쥐며 결심했다.
다음이라는 것이 있다면, 자신이 또다시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면 그때는 자신이 먼저 조서엽의 목을 조일 것이다.
반드시, 반드시.
눈을 감기 전 미마이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미안해하는 표정의 아이는 이어 무건의 손을 살짝 잡았다.
그렇게 손끝으로 타인의 온기를 받으며 무건은 검은 어둠의 한가운데에 섰다.
* * *
사방이 온통 검었다. 그곳엔 바람조차 없었다.
꿈.
검은 꿈. 그 속에서 무건은 제 주변에서 살랑거리는 실의 감촉을 느꼈다.
무수히 많은 인연의 실들이 그의 주변에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개중엔 그의 다리나 팔에 감겨 오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그중에서 무건의 관심을 끄는 것은 없었기에 그것들을 헤치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이전에도 ‘꿈’ 속의 공간이 이런 곳이었나 생각해 봤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잠깐 눈을 감았을 때의 일이라 그저 본능적으로 손에 들어오는 한 가닥을 움켜쥐었을 뿐이니까.
‘그러고 보니…….’
무건은 위화감을 느끼고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제야 제가 여전히 실을 쥐고 있음을 깨달았다.
본능적으로 이 실이 진예와 연결되어 있던 그것임을 알았다. 다만 문제는…….
‘안 돼.’
끊어져 있었다. 무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실의 파도 속에서 그는 자신의 명인자를 찾아 헤맸다.
하늘이 나에게 내려 준 인연.
신이 제 인생을 바치라 명령한 사람.
그리고 이제는 무건 스스로의 의지로, 절대로 놓을 수가 없는 단 한 명의 정인이었다.
제 손으로 그녀의 행복을 찾아 주고 싶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진 그녀가 작은 어깨를 편안히 기댈, 풀잎이 무성한 나무 기둥이 되어 주고 싶었다.
무건이 원하는 ‘자격’이란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숨이 차도록 달려도 보이지 않았다. 방향을 잃은 무건은 검은 사위를 둘러보며 미친 사람처럼 진예의 이름을 불러 댔다.
그러나 메아리조차 치지 않는 고요. 자신의 목소리가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도 분간이 가지 않았다.
쿵, 쿵…….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이대로 그녀를 찾아갈 길을 영영 잃어버릴까 봐 두려웠다. 하여 마음을 가라앉히고 처음 자리로 되돌아가려 했지만 무건은 제 앞에 펼쳐진 광경에 막막함으로 숨을 멈췄다.
오로지 실들만이 갈대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 앞에 선 무건의 머릿속에 조서엽이 했던 말이 떠돌았다.
너는 버려졌다던.
널 결코 마음에 품지 않을 거라던, 그 이야기들이.
이곳은 완벽한 악몽 속이었다. 더 이상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더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기이이이…….”
마치 오래된 문이 삐걱거리는 듯한 소리. 익재의 소리였다. 깜짝 놀란 무건이 눈을 번쩍 떴다.
“……!”
완전한 북방은 아니었지만 저녁이라 싸늘한 기온이 그의 옷 안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막사 안이 아니다.
‘어디……?’
막 잠에서 깨어 제대로 정신을 수습하지 못한 무건의 귓가로 솨아아아아, 하며 나뭇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눈을 뜬 곳은 뜬금없게도 어느 산속이었다.
저녁인데도 하늘에는 별 하나 보이지 않았다. 아니, 무건은 곧 그것이 제 착각임을 깨달았다.
“끼이이익.”
“끽.”
그저 익재들이 제 시야를 뒤덮어 하늘이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무건은 제 앞의 익재 한 마리가 흰 이를 드러내며 씩 웃는 모습을 보았다. 놈의 검은 동공이 그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을 보며 무건은 등골로 소름이 쫙 올라옴을 느꼈다.
“뭐, 야……?”
그가 신음처럼 중얼거리자 바로 앞에 있는 익재가 슥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러자 주변에서 날개를 퍼덕이던 놈들도 같이 날았다.
그러자 시야 앞쪽이 훤히 틔었다. 눈앞엔 아주 깊은 골짜기가 패어 있었다. 굳이 앞으로 달려가 보지 않아도 발아래가 깎아지른 절벽이라는 것은 쉬이 예상할 수 있었다.
익재들은 절벽 위를 빙빙 돌며 날았다. 마치 이쪽이 겁을 먹었으면 좋겠다는 양, 포식자의 여유를 뽐내면서 말이다.
무건은 손을 더듬다가 등 뒤의 나무를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쓰러진 이후로 몇 시간이 지난 건지, 아니면 며칠이 지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다행히 몸 상태는 이전보다 훨씬 나았다.
그러나 여전히 최상의 조건은 아니다. 그에겐 무기도 없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마지막 기억은 조서엽이 자신을 찾아와 개소리를 지껄이고, 미마이가 제 손을 잡던 것이었다.
한데 왜 자신이 이렇게 산속에서 잠들어 있었는지, 무건은 이 상황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때였다.
“오랜만이다, 연무건.”
귀에 익은 목소리를 듣고 무건이 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목소리를 듣고 예측한 사람이 그대로 있었다.
키와 골격이 꽤 크지만 탄탄한 근육들이 제법 날렵해 보이는 여자였다. 허리춤에 있는 두 개의 칼이 그녀가 무인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화친왕의 명인자인.
“……위도양.”
현 반란군의 수장인 위도양이었다.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던지 머리를 틀어 올리고, 가볍게 검은 옷을 걸친 도양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 몸집이 작은 익재 한 마리가 침을 흘리며 동동 떠 있는 것이 보였다.
사람과 익재가 함께 다니다니. 기괴한 광경에 무건이 난처해하는 표정을 짓는 와중, 이름이 불린 그녀가 무건을 향해 언뜻 호의적으로 보일 수도 있을 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는 연 귀인이라 불러 드려야 하나.”
빈정거림이 섞여 있는 물음이었다.
열 걸음은 족히 떨어져 있는 그녀는, 등 뒤의 산길을 가로막은 채로 각각의 손에 칼자루를 쥐고 뽑아 들었다.
곧 서늘한 빛은 뿜은 검은 아직은 적의를 드러내지 않고 바닥을 향해 있었지만, 무건은 그것이 곧 제 목을 꿰뚫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동시에 그는 머릿속에 말도 안 되는 그림 하나를 그려 냈다.
막사에서 끄집어내진 자신과 마침 찾아온 위도양.
그녀가 상방주에 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런 전개는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따라서 무건은 이 상황을 ‘그런’ 쪽으로밖에는 해석하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가 그렇게까지 했겠나 싶었지만, 무건이 제 의혹을 확인하기 위해 위도양에게 물었다.
“……조서엽이 날 너에게 넘겼나?”
설마. 설마…….
무건은 믿었다, 아무리 그래도 조서엽이 그러진 않았을 것이라고.
서엽이 제 목숨보다 아끼는 진예를 배신할 리 없지 않나.
한데 위도양의 앙쪽 입술 끝이 찢어질 듯이 길게 호선을 그렸다. 즐거워 미치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이 방금 전 제가 막 깨어났을 때 이를 드러내고 웃었던 익재와 닮았다고, 무건은 그리 생각했다.
“글쎄, 그건 당사자에게 물어야 하지 않겠나? 난 단지 네가 이곳에 있다는 첩보를 듣고 왔을 뿐이야.”
“첩보…….”
모호한 말이었기에 조서엽이 진예를 배신했다는 뚜렷한 증거까진 아니었다.
다만 무건은 저를 이런 처지로 내몰 자는 조서엽밖에 없다, 그리 단정 지을 수 있었다.
‘왜 이런 위험하고 번거로운 방식을 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그가 생각 없이 행동하진 않았을 터이다. 상당히 영민한 자니까.
아마 진예를 배신하지 않고 자신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을 고심하다가 현재와 같은 형태를 생각해 냈을 것이다.
무건은 나무를 짚고 있는 손에 힘을 넣었다. 무기가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위도양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불 보듯 자명했다.
그리고 위도양은 이번의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무건은 이번에야말로 제 앞에 가장 확실한 죽음이 성큼 다가왔음을 느꼈다.
때마침 위도양은 오른손에 든 검을 들어 끝을 무건에게 향했다. 태도에 상당한 자신감이 어려 있었다.
“막 상방주를 떠나려던 참인데, 코앞에 네가 있다 하니 참을 수가 없더군.”
화친왕 진평을 직접 죽인 자는 다름 아닌 무건이었고, 그렇기에 가장 단편적인 복수의 대상이었다.
위도양이 그런 그를 건너뛰고 다른 데로 가려고 했다면, 목적지는 한 곳뿐이었다.
“한수로 가려고 했겠네.”
위도양이 선언했다.
“이곳에서 내가 죽으면 넌 네 명인자를 구하는 것이 되겠지만, 네가 죽으면 난 네 목을 황상의 앞에 갖다 놓을 것이다.”
동조 현상이 끊겨서 다행인 건가.
조서엽의 말대로 두 개의 목숨을 책임지지는 않게 되어서.
내가 죽어도 당신은 살아갈 수 있으니까.
그리고 진예는 위도양이 자신의 목을 앞에 가져다주어도, 잠깐 불쾌해할지언정 슬픔에 잠겨 있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토록 원하는 명인의 저주에서 벗어나게 되어 기뻐할지도. 그것 또한 그녀의 행복 중 하나라면 나쁘지 않은 결말이었다.
여기서 자신이 살아남든, 죽든 간에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무건은 서글프지만 웃을 수 있었다.
“틀려. 네가 내 목을 폐하의 앞에 갖다 놓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거기서 끝이다. 폐하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아.”
단호한 그의 말에 도양이 가볍게 받아쳤다.
“그래? 그럼 우리 둘 다 그냥 죽어 볼까.”
싸늘한 목소리로 위도양이 덧붙였다.
“맨손인 네놈이 날 상대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녀는 무기가 없는 상대를 죽인다는 꺼림칙함도 없는 것 같았다. 오로지 화친왕의 원한을 갚는 일만이 지금의 위도양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었다.
“네놈의 시체는 저 익재들이 맛있게 먹어 줄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무건은 제게 떨어진 사형 선고를 들으며 오히려 침착해졌다.
제 삶의 끝이 이런 개죽음이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연무건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화친왕을 죽인 일은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 진예가 더는 제 동생을 보면서 스스로를 갉아먹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 일이었다.
여전히 그를 죽인 건 잘못된 일이 아니라 여겼다. 그럼에도 위도양의 복수는 정당하다. 무건 역시 진예가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한다면 기필코 상대의 심장에 칼을 꽂아 넣었을 테니까.
무건은 한 걸음씩 다가오는 위도양의 보폭에 맞춰, 똑같이 한 걸음씩 물러났다. 그러자 금세 절벽 끝에 발이 닿았다.
투둑, 하고 발밑에서 밀린 모래가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 밑을 내려다보니 천길 낭떠러지였다.
골짜기 사이에 좁은 계곡이 있긴 했지만 물줄기가 얕고, 날지 않는 이상 사람이 그곳에 떨어질 가능성은 만무했다.
절벽 또한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을 걸 만큼 녹록한 높이가 아니었다. 떨어지다가 심장이 멈춰 죽거나, 땅에 추락해 내장이 터져서 죽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어차피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면 위도양의 손에 죽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진예에게 목을 가져다주겠다고 했으니 몸만 먹나.’
무건은 저를 노리고 있는 익재들을 가만히 올려다보면서 그런 엉뚱한 생각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바짝 다가온 위도양이 무건을 노려보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지옥으로 가라, 연무건.”
검이 휘둘리는 걸 본 무건은 제 심장을 찌르고 들어올 고통을 예상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위도양은 너희들의 대모가 아니다.』
그에 앞서 연무건의 귓가에 제삼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 수 없는 언어였지만 적어도 그게 어린아이의 음성이라는 사실 정도는 인지가 되었다.
무건이 놀라 눈을 떴을 때 시야에 들어온 것은, 당황한 위도양이 뒤돌아보는 모습과.
『공격해.』
연기가 피어오르는 향로를 든 미마이의 인형이었다.
작은 두 손으로 모아 쥔 작은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가 바람을 타고 사선으로 흩어졌다.
어디서, 어떻게 나타난 것인지 모르지만 미마이가 도양의 뒤에 서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긴장을 했는지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로 손을 떠는 중이었다.
무건은 그 모습에 당황하고 있는 한편, 미마이의 명령을 받은 익재들이 위도양에게로 덤벼들었다.
“끼이이이익!”
하늘을 까맣게 덮었던 익재들이 그동안 도양에게 멋대로 조종당했던 분노를 쏟아붓는 것인지, 그녀가 공격 대상이 되자 더욱 우렁차게 소리를 질러 댔다.
콰아앙!
검은 칼날 같은 것이 날아와 본래 위도양이 있던 자리가 움푹 패었다. 도양이 뒤로 재빨리 물러난 것이었다.
그사이 그녀는 양손에 쥔 검을 휘둘러, 달려든 다른 익재의 허리를 끊고 가슴을 베어 내고, 목에 칼을 꽂아 넣었다. 마치 검무를 추듯이 능숙하고도 유려한 동작들이었다.
그렇지만 사방에서 한꺼번에 몰아닥치는 공격을 모두 피할 수는 없었던 탓에 등이 빈 순간, 그녀의 옆에 있던 익재가 한 놈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끼익!”
조종 여부와 상관없이 그냥 도양을 어미처럼 따르는 녀석이라 미마이의 명을 듣지 않는 듯했다.
덕분에 쏟아지는 익재의 공격 속에서 빠져나온 도양이 분노해 외쳤다.
“미마이!”
아이가 그 모습을 보고 움찔했지만 그 틈에 다시 다가온 익재 탓에 도양은 미마이에게 다가오지 못했다.
익재의 검은 피가 금세 땅을 적셨다. 그러나 여러 마리의 익재를 한꺼번에 상대하기에는 도양도 힘이 부치는지, 점점 밀려났다.
그런 혼란한 상황에서 달려온 무건이 미마이의 팔을 끌어당겼다. 강한 힘에 미마이가 흠칫해 돌아보자 무건이 아이를 매섭게 다그쳤다.
“너, 여기는 왜 왔어? 아니, 어떻게…… 무슨 생각으로 온 거야?”
“그게, 조 후께서…….”
미마이는 설마 이런 상황에서 혼날 줄은 몰라 당황해 우물쭈물하며 설명하려 들었다. 하지만 상황이 워낙 급박하게 돌아가니 무건이 말을 끊고 주위를 살폈다.
“일단 여길 빠져나가자.”
미마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 팔로 향로를 꼭 안고 무건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손을 통해 무건의 생각들과 그에 얽힌 여러 감정들이 밀려들어 왔다.
몹시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운 덩어리들이었다.
미마이는 덩달아 불안해져 입술을 깨물었지만, 그런 상태를 모르는 무건은 일단 도양에게서 멀리 떨어진 뒤 도망칠 길을 찾았다.
그리고 그가 방향을 잡고 그곳으로 미마이를 이끌려 했을 때였다.
돌연 위도양을 따라다니던 익재가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크게 포효했다.
“끼아아아악!”
일순 사람은 물론이고, 익재들도 공격을 멈추고 그쪽으로 주의를 돌렸다.
예의 익재는 마치 제 어미를 괴롭히지 말라는 듯이 눈을 부릅뜨며 그르륵, 분노 어린 이갈이를 했다.
그 모습을 보고서 미마이가 긴장해 무건의 손을 더 꽉 쥐었다. 긴장감에 아이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저 익재…… 위험합니다.”
“뭐?”
그 순간 그 몸집만큼 작았던 익재의 날개가 커다래지면서 활짝 펼쳐졌다. 무건은 그것을 보면서 상방주의 익재를 떠올렸다.
마지막 일격을 가할 때, 익재의 날개가 굉장히 커졌던 장면을 말이다.
신익지재(神翼之災).
저주받은 신의 날개를 등에 이고 있는 재앙.
날개는 그들의 급소이고, 동시에 그 강력한 힘의 상징이었다.
날개를 펼친 익재가 제 손으로 도양의 허리를 낚아채 하늘로 올랐다. 도양은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녀석이 자신을 구하려고 하는 행동임을 알아채고는 그 괴물에게 몸을 맡겼다.
미마이는 그 모습을 올려다보다가 숨을 삼켰다. 아이가 무건의 손을 끌었다.
“도망, 도망쳐야 해요!”
무건이 당장 미마이를 안고 달리려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콰과앙!
절벽 위로, 아니 그 익재에게서 사방으로 힘이 뻗쳐 나왔다.
무형의 검은 칼날이 수십, 수백 개가 떨어져 내리며 주변의 익재들을 공격하고 절벽 위를 내리쳤다.
무건은 반쯤 본능에 의해 공격들 사이의 틈을 찾아 간신히 피했다. 그렇지만 그의 옆에 떨어진 검은 칼날이 바닥을 치고 튕겨 올라가면서, 주변이 지진이 난 듯 강한 진동이 일었다.
우르르르르, 땅이 울고 바위가 구르는 소리가 몸까지 떨리게 했다.
게다가 공격당한 익재들의 검은 피들이 머리 위에서 후두둑 비처럼 떨어지고, 팔다리 등이 잘린 익재들이 긴 울음을 울며 절벽 밑으로 추락했다.
그야말로 재앙과 같은 장면이었다.
무건이 미마이를 제 품에 꽉 껴안으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온 산을 울릴 만큼 커다란 비명을 토해 내는 익재에게 안겨 도양이 무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무건이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을 넣었다. 미마이가 자신을 안은 팔에 과도하게 힘이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는 무건의 옷깃을 쥐었다.
그러자 무건이 미마이를 보며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내가 널 지키기가 힘들 것 같다.”
제 목숨도 위험한 처지인 무건이 그런 말을 하자 미마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저한테 무기가 있습니다, 마마.”
그러면서 품 안에서 칼을 꺼냈다. 단도보다는 크고, 평범한 검보다는 작은 칼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고기 정도 썰 수 있는 식칼 크기였다.
무건은 그것을 받아 들어 칼집을 벗겨 내긴 했지만 이게 생명 연장에 도움이 될까 하는 의문을 품었다.
그때, 위도양이 익재를 살살 달래 놓고는 밑으로 뛰어내렸다. 가볍게 착지한 그녀가 미마이를 슥 노려보니 무건이 아이를 제 뒤로 숨겼다.
무건은 이렇게 작은 칼로 상대가 될까 싶으면서도, 일단 이 방법밖에 없으니 검신을 세우며 말했다.
“회포는 나랑 푸는 게 먼저 아닌가?”
그러자 도양도 그런 칼로 뭘 할 수 있겠냐는 듯 픽 비웃는 소리를 내더니 대꾸했다.
“걱정하지 마라. 나도 미마이를 해칠 생각은 없으니까.”
그러고는 회백국 언어로 바꿔 미마이를 향해 물었다.
「……넌 아직 나한테 필요해. 그렇지?」
미마이는 그 안에 조서엽을 왜 따라갔느냐는 질책이 담겼음을 알고는 고개를 숙여 눈을 피했다.
그것을 확인한 도양이 불쾌감이 어린 미소를 짓고는 다시 무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장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무건이 재빨리 아이를 뒤로 밀쳐 내며 횡으로 치고 들어오는 검을 받아 냈지만, 제 칼이 얼마 못 버틴다는 걸 금세 깨닫고는 몸을 틀어 공격을 흘려 냈다.
하지만 쌍검인 만큼 도양의 칼은 쉬지 않고 그의 틈을 찔러 들어왔다. 지난번 상방주의 익재를 처리하느라 다친 왼쪽 어깨가 불편하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이번엔 그녀의 검이 그곳을 노리고 들어오자 무건이 한 걸음 크게 뒤로 물러서며 칼을 쳐 냈다.
미마이가 건넨 칼은 손잡이가 워낙 짧아 조금만 힘을 받아도 금세 놓칠 것만 같았다.
무건은 한 번 칼이 맞부딪칠 때마다 고쳐 잡으며 빠른 박자로 공격해 들어오는 도양의 칼을 받아 냈다.
키기익!
금속이 마찰하는 소리를 냈고, 다시금 도양의 칼이 무건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래서야 공격은커녕 방어조차 제대로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당연히 그 기회를 놓칠 리가 없는 위도양의 검은 점점 더 자신감을 붙였다.
이윽고 도양이 크게 발을 움직여 몸을 낮추고는 칼날을 피하는 무건에게로 훅 가까워졌다. 동시에 허리를 조금 틀었다 되돌아오면서 그 반동으로 오른팔을 휘둘렀다.
아래쪽으로 들어오는 공격에 무건이 크게 뒤로 빠지자 그것을 놓치지 않고 위도양이 제 왼손 검으로 무건의 몸통을 노렸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공격에 무건이 거의 감각만으로 그녀의 검을 막아 내다가 이번에도 칼을 맞부딪쳤다.
그리고.
까앙!
“……!”
허무하게 칼날이 부러져 나갔다. 무건이 재빨리 몸을 뒤로 뺐지만 옷깃이 베여 나갔다.
그렇게 유일한 무기를 잃은 무건의 목에 곧장 도양의 칼이 들이대졌다.
승기를 잡은 도양이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서 끝인가?”
“…….”
무건이 제 앞에서 번쩍이는 칼을 보면서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가 손에 힘을 빼 부러진 칼을 바닥에 버렸다. 그러고는 조금 떨어져 있는 미마이에게 시선을 향했다.
자신을 구하러 왔는데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처지이고, 하물며 같이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 같아 괜히 미안해졌다.
다시금 도양에게 눈길을 돌린 무건이 곤란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미마이를 다시 데려갈 셈인가?”
“당연하지. 내 가장 큰 전력이 될 텐데.”
그 말에 미마이가 향로를 든 손을 움찔했다.
위도양이 데리고 다니는 익재만 갑자기 날뛰지 않았어도 일이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무슨 이런 이상한 상황이 다 있나 싶었다.
‘그렇지만…….’
미마이는 다시 위도양에게 붙잡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동안은 무서워서 용기 내지 못했지만, 나쁜 짓은 더 하기 싫었다.
이제는 아무에게도 이용당하지 않을 것이다.
미마이가 무건을 힐끗하고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다만 도망치려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도망쳐도 제까짓 것은 이 산을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위도양에게 따라잡혀 끌려가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 미마이의 결심을 간파한 건 무건이 먼저였다. 그가 위도양에게 위협당하는 와중에도 미마이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고 아이를 불렀다.
“미마이……?”
그에 미마이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무건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저를 구해 주세요, 마마.”
그제야 위도양도 미마이가 무슨 짓을 할지 알아차리곤 소리쳤다.
“미마이, 너……!”
행동은 무건이 먼저였다. 그녀가 동요한 사이 미마이가 낭떠러지 밖으로 발을 내밀었고, 무건이 놀란 표정으로 아이에게 달려갔다.
그 순간 무건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저 어린아이를 구해야겠다는 일념 외에는.
휘청하며 떨어지는 아이의 작은 손을 무건이 겨우 붙잡았다. 그러다가 미마이가 당기는 힘에 의해 그대로 몸이 쏠려 함께 절벽 밖으로 추락했다.
그 모습을 보고 위도양이 당황해 절벽 앞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무건이 미마이의 머리를 제 온몸으로 감싸 안고 떨어지는 것을 보며 소리쳤다.
“연무건!”
그러고는 발을 굴러 바닥을 쾅, 내리찍었다.
눈앞은 대체 몇 자나 되는지 알 수도 없는 까마득한 낭떠러지였다.
게다가 아래쪽은 그냥 맨바닥. 떨어진 연무건이 결코 살아남을 리 없다. 그리 생각하니 오히려 화가 치밀었다.
저 자식은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했다.
‘그런데 미마이랑 같이 자살을 해……?’
위도양이 칼을 잡은 손을 바르르 떨었다. 그러자 저를 구해 준 어린 익재가 어느새 도로 작아진 날개를 퍼덕이며 다가와 낑낑거렸다.
위도양은 그것을 보면서 인상을 찌푸리다가 뒤돌아섰다.
그때 쿠웅, 쿵, 하고 어디선가 거대한 바위가 곤두박질치는 소리와 함께 발밑이 살짝 진동했다. 그에 도양이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다봤다.
그녀는 제 발밑 곳곳이 할퀴어진 것을 보고는 옆의 익재가 조금 전 이곳 지반을 흔들어 놨던 걸 떠올렸다.
뒤늦게 이곳 절벽이 꽤 위험한 상태라는 걸 깨달은 위도양은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이곳으로 온 게 괜한 시간 낭비였나 싶었지만, 어쨌든 연무건이 죽긴 죽었으니 최악의 결말은 아니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 * *
한수에 지어 놓은 중간 진지로 진예가 온 지 열흘 남짓 지난 날이었다.
분명 모두가 보는 앞에서 비래성으로 향했던 황제가 아파서 한수에 있다는 헛소문이 퍼졌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로 진예가 위장군을 필두로 한 50여 명 남짓 되는 정예를 이끌고 나타나니 다들 어리둥절해 있었다.
그곳은 아직은 평화로운 중간 진지인 만큼 1천여 명 정도의 군사들만 대기 중이었다. 또한 주요한 전장이 아닌 탓에 날이 갈수록 조금씩 기강이 해이해졌던 차, 황제가 나타난 뒤로 분위기가 뒤바뀌었다.
낮밤 할 것 없이 전군에 강도 높은 훈련이 이어졌고, 한 치의 게으름도 용서하지 않는 환경이 되었다.
그리고 진예는 전날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막사 밖으로 나가 쩌렁쩌렁한 기합 소리를 울리며 훈련받고 있는 자신의 군사들을 확인했다.
그 뒤 다들 신나서 식사를 배급받는 모습을 보고는 진예가 자신의 막사로 돌아와 잠시 갑주를 벗고 칼을 내려놨다.
누군가 제 막사에 준비해 놓은 음식들을 먹으려 막 의자에 앉았을 때였다. 의외의 소식이, 아니 사람이 왔다.
“홍복을 누리소서, 황제 폐하.”
위장군이 들어도 되겠느냐고 묻고는 그를 데리고 들어섰다.
그는 막 말을 타고 달려온 듯, 아직 바람의 냄새가 가시지 않은 조서엽이었다. 갑옷을 갖춰 입은 그가 묵직한 발걸음으로 천막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잠깐 진예와 눈을 마주쳤다.
어딘지 감개 어린 표정과 눈빛을 보며 진예는 그가 무슨 소식을 가져왔는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곧 서엽이 한쪽 무릎을 꿇고 진예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안부를 물어 왔다.
“폐하께서 몸이 좋지 않으시다는 소문을 듣고 혹시나 하는 걱정이 들었사옵니다. 강녕하셨사옵니까?”
그에 진예는 위장군에게 나가 보라는 눈짓을 하고, 둘만 남은 뒤에야 입을 열었다.
“전날 저녁까지 짐을 본 조 후가 헛소문이라는 걸 모르진 않았을 테고. ……가까이 오거라.”
그리 받아치면서 진예가 탁자를 마주하던 몸을 틀어 서엽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가볍게 팔꿈치를 탁자 위에 걸치면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진예를 보며, 서엽이 조심스레 발을 옮겼다.
다시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고개를 숙이기 전에 서엽은 오랜만에 보는 진예를 간절히 눈에 담았다.
다행히 어디 하나 흠결 없이, 황궁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인 진예가 제 앞에 있었다.
심연을 담은 듯 짙은 붉은 눈동자, 베일 것 같이 날카로운 분위기…….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고고한 그녀이지만, 그래서 더 눈길이 끌릴 수밖에 없는 자신의 황제였다.
서엽은 그녀를 본 뒤에야 드디어 무건을 제거했다는 기쁨이 올라옴을 느꼈다. 그러나 차마 그것을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기에, 지그시 억누르며 진예에게서 서너 걸음 떨어진 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자 진예는 뻔한 대답이 돌아올 것을 알고도 그에게 하문했다.
“그래, 짐이 내린 명은 잘 수행했느냐.”
“그러하옵니다. 연 귀인마마와의 동조 현상을 끊었습니다.”
서엽의 말을 듣고 진예는 고개를 한 번 작게 끄덕였다.
연무건과의 동조 현상이 끊겼다는 건 사실 진예도 진작 느꼈었다. 이레 전쯤부터 부어올랐던 어깨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가라앉았기 때문이었다.
통증은 동조 현상 탓이었나 보다. 목숨이 연결돼 있는 탓에 명인자인 그가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는 이쪽도 미세하게 그것을 느끼는 것인 모양이었다.
덕분에 어렴풋이 진짜로 끝이 났음을 눈치챘다.
무건에게 더는 제 목숨을 맡겨 놓지 않아도 된다고, 앞으론 그로 인해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고.
다행이었다, 정말로.
그러나 그런 마음을 전부 밖으로 꺼내 놓을 수는 없었다. 진예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해서 상방주의 상황은 어떻던가.”
상방주의 상황은 개략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다만 서엽의 입에서도 그다지 특별한 이야기가 흘러나오지는 않았다.
“상방주에 머물던 익재에 대한 토벌은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위도양 측의 반란군과는…… 아직은 서로 공격하지 않고 대치 중이었사옵니다.”
“위도양은 상방주를 안 떠났더냐.”
“소신이 이곳으로 떠나오기 전에는 그러한 듯싶습니다.”
대답을 듣고 진예는 심기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위도양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쪽은 자리보전하고 있는 연무건이 어떻게 될 것인가 계속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제 목숨과 상관없이 연무건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의미가 꽤 커졌다.
그가 황제의 명인자라는 사실은 백방에 소문이 나 버린 데다, 수년 동안 비어 있던 유일한 내명부의 사람이었다.
더해서, 화친왕을 죽인 자가 무건이라는 건 공공연한 비밀 중 하나였다. 화친왕이 죽은 그날 저녁에 피투성이가 된 연 귀인이 황제의 침전에 들었다더라 하는 것은 풍문을 좋아하는 자들이라면 전부 알고 있을 이야기들이었다.
황제의 명인자이자 유일한 사내이고, 또한 사냥개였다.
전쟁은 단순히 죽고 죽이는 싸움이 아니었다. 행보 하나하나에 명분과 실리가 오가는 것이고, 그리 생각한다면 연무건이 죽었을 때의 상징적인 의미는 명확했다.
그를 잃는다면 이쪽의 타격은 불가피했다.
“짐이 여기 있다 하면 당장 달려올 줄 알았건만.”
비래성을 버리고 정신 나간 짓을 하고 있기에 복수 때문에 눈먼 줄 알았건만, 그리 단순하지는 않았던가.
그렇다면 다음 수는 어떻게 두어야 할 것인가 고민하던 차였다. 진예의 기색을 살피던 서엽이 낮게 중얼거렸다.
“……일부러 위치를 알리신 것이 맞았군요.”
어딘지 기운 빠진 목소리였다.
진예는 그가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 것은 같았지만 긴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
그 얘기는 적당히 끊자는 의도였다. 한데 서엽이 굳이 진예에게 정해진 답을 듣기 위한 물음을 던졌다.
“귀인마마를 구명하시기 위해서였습니까?”
진예는 그것이, 서엽의 도발처럼 느껴졌다. 그 미묘한 속뜻을 예민하게 포착한 진예가 고개 숙인 서엽의 정수리를 내려다봤다.
지금 그의 표정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오랫동안 함께해 온 만큼 서엽의 반항기를 읽지 못할 정도로 아둔하지는 않았다.
진예가 날카롭게 반문했다.
“그 질문의 저의가 무엇이지?”
둘 사이에 정적이 일었다.
떠들썩한 바깥의 소리들이 천막 안쪽으로 흘러들어 왔으나, 안쪽의 정적이 그들 사이의 공기를 더 무겁게 짓눌렀다.
하나 진예는 서엽이 답을 내놓을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대신 그의 변화를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바닥에 댄 서엽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평온했던 숨소리도 조금씩 흐트러지더니, 문득 그가 결심한 듯 큰 숨을 들이켰다.
다음에 그가 한 발언은 단순히 반항기 정도로 치부할 수 있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어째서…… 동조 현상이 끊긴 뒤에도 그가 살아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서엽아.”
그만하라는 의미로 진예가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내면에 있는 무언가를 건드린 듯, 서엽이 입술을 깨물었다.
“합당한 답을 주십시오.”
“그는 짐의 비다. 잊었느냐?”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연무건이 내세울 명분은 명인 하나라는 점도 잘 알고 있나이다.”
그리 말하면서 서엽이 고개를 들어 진예를 바라보았다.
연무건에게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느냐고 묻는 서엽의 눈빛은 무례했지만, 또한 간절했다. 제발 자신이 원하는 답을 들려달라는 의미를 못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노골적이었다.
“혓바닥에 가시가 잔뜩 돋았구나. 대체 무엇이 불만인 게냐.”
진예는 미간에 슬며시 내 천 자를 그리며 그리 물었다. 그러자 서엽이 목울대를 한 번 크게 올렸다 내리고는 긴장된 목소리로 속내를 훤히 까발렸다.
“폐하께서 정녕 귀인마마에게 유일한 사내가 되게 해 주겠다 말씀하셨습니까.”
자신과의 맹세, 누구도 마음에 들이지 않겠다던 그 맹세가 깨졌느냐는 간접적인 물음이었다.
진예는 하, 하고 허무한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연 귀인이 깨어났었나? 그가 그리 떠벌리더냐.”
어떤 경위로 서엽과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따위 낯 뜨거운 말을 제 입으로 하다니 연무건은 여전히 웃기는 놈이었다.
그리 생각하다가 진예는 이상함을 감지했다. 연무건이 깨어났다는 보고는 아직 듣지 못했는데, 하고 말이다.
하지만 서엽의 채근에 진예는 잠시 그 생각을 뒤로 미뤄 두었다.
“답을 내려 주십시오.”
“그래, 그리했다. 짐이 다른 사내를 침전에 들일 일은 없으니.”
그리고 그 ‘다른 사내’ 중엔 조서엽도 포함되어 있었다. 딱히 여느 황제들처럼 주지육림을 즐기거나 여러 후궁들을 끼고 살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다음에 이어지는 서엽의 말이 의미심장했다.
“한데 그 유일한 자가 사라지면 어찌 되는 것입니까.”
“……무슨 의미냐.”
질문을 듣는 순간 진예가 느슨했던 자세를 고쳐 앉았다.
순간 그녀는 방금 전 제가 느낀 이상함이, 단지 기우가 아니었음을 알아챘다. 서엽이 덧붙이는 질문이 그 생각에 확신을 더해 주었다.
“이 조서엽에게도 기회가 오는 것입니까?”
그 말에 담긴 불길함을 감지한 진예가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언성을 높였다.
“똑바로 대답 못 하겠느냐. 무슨 뜻이냐 하문하였다!”
황제의 노성에 바깥의 소란이 잠시 멈췄고, 천막 입구에 그림자가 어렸다. 하지만 눈앞의 사내는 조금도 긴장하지 않았다.
서엽의 목소리는 오히려 차갑다 느껴질 만큼 담담했다.
“연무건은 죽었을 것입니다.”
“무어라?”
“폐하의 명인자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표현을 바꿔 거듭 말하는 것을 듣고 진예는 고개를 기울였다.
제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건가 싶었다.
‘죽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둘 중 어떤 표현도 연무건과는 안 어울리지 않는가.
그는 죽으라 내보낸 읍주에서도 살아 돌아왔고, 여우 같은 화친왕과의 싸움에서도 이겼다. 죽음의 전장에 내보내 달라 자처한 순간엔, 그래, 불안한 감도 있었지만 진예는 그가 정말로 승리를 거머쥐고 그 영광을 제게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연무건이라면, 그놈의 패기라면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사경을 헤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다시 눈을 뜨지 못하는 것 아니냐며 초조해하지 않았다. 결국 살긴 살았으니 그 질긴 명줄을 지닌 놈이라면 일어나리라 여겼다. 그저 위도양이 그사이에 찾아가 죽이는 것만 걱정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조서엽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죽여도 죽을 것 같지 않았던 그놈의 숨이 멎었다고.
진예는 눈앞이 하얘지는 기분을 느꼈다. 현기증? 그런 것은 아니었다.
믿기 힘든 사실을 마주했을 때의 당혹감.
불가사의한 상황을 앞에 둔 자의 혼란스러움.
그런 유의 감정이었고, 그로 인한 잠시간 얼떨떨한 상태였다.
진예는 그렇게 제 상태에 대한 진단을 내리고는 주먹 쥔 손에 힘을 넣었다. 관절부에 하얗게 색이 일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다음 말을 내뱉기가 쉽지 않았다. 연무건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서엽과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근 몇 년간 이 정도의 혼란이 그녀를 찾아온 적은 없었다. 이렇게 말문이 막힌 것도 참으로 오래간만이었다.
하물며 연무건 때문에 이루어지리라곤 결코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
진예는 한참을 헤맸다. 제 상태가 왜 이렇게 그의 죽음 앞에서 뒤죽박죽이 된 것인지 이유를 찾기 힘들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서엽이 가져온 저 소식이 맞는다면, 아니 애초에 조서엽이 자신에게 거짓을 지껄일 리 없으니 진실이라 믿는다면 황제로서 제가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진예는 그야말로 한참 만에, 제 마음의 혼란을 가라앉히고 입을 열었다.
“조 후, 네가 죽였느냐.”
그녀 나름대로는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 채였지만, 예민한 신경을 긁고 나온 음성엔 어쩔 수 없이 음산함이 배었다.
그리고 서엽은 오랜 침묵을 이기고 나온 그 질문에 어떤 답을 내놓느냐에 따라 제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수 있음을 충분히 알아채었다.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으면 진예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칼을 빼 들어 이 자리에서 자신을 죽여 버릴 것이다. 설령 충신을 죽인 매정한 황제라 손가락질을 받는다 하더라도.
말하지 않아도 닿아 오는 진심에 서엽은 목이 메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너무 굳어 있을 이유는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떳떳했다.
조서엽은 한시도 진예를 배반한 적 없었다.
앞으로도 감히 그녀 앞에서 거짓을 제 입에 올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럴 리 있겠사옵니까. 이 조서엽, 단 한 번도 폐하의 명은 어긴 적이 없사옵니다.”
그는 잠시간 찾아온 긴장을 숨기고 평온한 어조로 원론적인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서엽은 진예와 저의 사이에 오갔던 대화를 상기했다.
〈동조 현상을 끊는 날, 제가 연무건을 죽이겠습니다.〉
〈…….〉
〈허락해 주실 수 있습니까.〉
진예가 제 뺨을 내리친 바로 그날의 대화를.
허락을 구한답시고 묻긴 했지만, 서엽은 당연히 진예가 그리하라 이르리라 여겼다.
아무리 질투에 눈먼 자신을 타박했다 하여도 말 그대로 못난 제 모습을 질책했을 뿐, 연무건을 마음에 품어 그리 행동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동조 현상만 끊긴다면 연무건에겐 아무런 가치가 없다.
진예 자신의 목숨이 얽혀 있지만 않는다면, 명인자든 뭐든 그를 갖다 버리라 할 그녀다.
그러나 흔들리는 면류관 사이로 나온 말은 서엽의 믿음, 혹은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었다.
〈윤허하지 않는다.〉
고민의 여지도 없다는 양 단호한 말이었다.
제 앞에 떨어진 칼 같은 언어와 서릿발 같은 눈빛.
그 앞에서 찢겨 버린 듯 가슴이 아려 왔다. 서엽은 욱신거리는 뺨보다 더 고통스러운 심장 부근의 통증을 견디기 위해 잠시 숨까지 멈췄다.
왜?
서엽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진예를 보았다.
〈……어째서입니까?〉
진예는 손등에 턱을 괸 채 덤덤히 상황을 짚어 주었다.
〈연 숙의는 이제 환의 유일한 후궁이다. 누구든 그를 죽이면 짐에 대한 도전이요, 역모가 되느니라.〉
서엽은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조 후 또한 예외는 아니다. 짐이 네 목을 치게 하지 말거라. 내 너를 진심으로 아껴 이르는 말이니.〉
〈…….〉
하나 그 알량한 후궁이란 지위도 결국 폐하께서 내린 것 아닙니까.
그런 말이 튀어나갈 뻔한 것을 입을 다물어 겨우 막았다.
연무건이 황도에 와 누린 모든 것—그러니까 후궁의 지위와 그에 따라 하사받은 궁, 그곳에 있는 내관과 궁녀들까지. 황제의 말 한마디면 전부 거두어질 터였다.
하지만 방금 그 말은, 진예에게 그럴 뜻이 없다는 의미였다.
‘그가 명인자라서입니까.’
그런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서엽은 역시 내리눌렀다.
지진 상처는 이미 나은 지 한참 됐거늘 제 명인이 새겨진 왼팔이 움찔거리는 듯했다.
제 명인을 의식하기 시작하니 마음속에서 치솟는 후회와 자기연민에 왼쪽 가슴에 통증이 번져 갔다.
누군가 그곳을 어루만져 줬으면 하는데, 안타깝게도 진예는 그 ‘누군가’에 해당하진 않았다.
서엽이 입술만 달싹거리다 끝내 수긍도, 반박도 하지 못하고 있자 진예가 한마디 더했다.
〈조 후는 어찌 답을 하지 않는가.〉
〈명심, 하겠습니다.〉
마지못해 나온 대답이었지만 진예는 그거면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렇게 편전을 등지고 나온 뒤, 서엽의 결심은 오히려 굳어졌다.
‘이번엔 폐하께서 틀리셨습니다…….’
조서엽과 연무건의 공존은 어떻게 해도 안 된다.
제 손으로 죽이지 못하는 것이라면, 남의 손을 빌리면 그만이었다.
마침 상방주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연무건, 그를 죽일 때만 노리고 있을 위도양.
완벽한 그림이었다.
서엽으로서도 마지막 기회였다.
상방주에서 우두머리 놈을 처리했다는 연무건이 무사히 진예의 곁에 돌아온 이후부터는, 정말로 날개가 달려 버릴 테니까.
해서 상방주에 도착했을 때, 마음에도 없는 걱정을 하는 척하며 연무건의 막사에 드나들고 그곳의 분위기를 파악했다.
동조 현상을 끊은 뒤엔 무건을 진지 밖의 적당한 곳에 버려두고, 미마이가 위도양의 간자라며 알려 준 놈에게 위치를 흘렸다.
그가 코앞에 있다고 하니 역시나 위도양이 움직였다.
거기까지 했으니 나머지는 그녀의 몫이었다. 죽이는 장면까지는 확인하지 않았지만, 애초에 무기도 없이 정신을 잃은 연무건을 위도양이 순순히 놓칠 확률은 아예 없다고 봤다.
그 과정에서 잠깐 혼자 둔 사이에 미마이가 갑자기 도망쳐 버려 급사들에게 찾아오라고 명해 둔 상태이긴 하지만, 그게 변수가 되지는 않을 터였다.
“짐의 명을 어긴 적이 없다…….”
진예가 자신의 말을 곱씹는 것을 들으며 서엽은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그러하옵니다.”
“한데 어찌 조 후가 연 귀인의 죽음을 확신한다는 말이냐.”
진예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동요도 묻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서엽은 그녀가 거듭 묻는 것만으로도 다른 의미가 있음을 알았다.
다른 의미, 그러니까 연무건의 죽음을 부정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그 전에 저 역시 여쭙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이전에는 죄가 되지 않았던 것이 지금은 어인 연유로 죄가 되는 것입니까.”
“쓸데없는 말로 돌리지 말거라.”
진예가 말을 끊으려 했지만 서엽은 되레 그녀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을 쏟아 냈다.
“이전에 폐하께선 분명 그자를 갖다 버리라, 죽이라 명하셨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그리하면 아니 된다 말씀하십니다. 어찌 그러한 것인지 저에게 이유를 알려 주십시오.”
“…….”
그의 말이 길어질수록 진예의 표정에서 점점 불쾌감이 드러났다.
무건이 나타나기 전엔 제게 저런 표정을 지은 적도, 곁에서 밀어낸 적도 없는 그녀였다. 한데 그가 온 뒤로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되었다.
왜 하필 그 사내인가.
왜, 어째서.
서엽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진예의 변화를 이끈다는 것 또한 몸서리쳐지도록 싫었다.
“또한 폐하께선 명인자가 죽었다는 말에 어이하여 당황을 하셨습니까?”
그에 진예가 작은 입을 살며시 열었다. 아니, 어쩌면 다음 말은 서엽을 향할 게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그 순간, 그의 목 앞에 슥 칼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이상의 무례는 참기 어렵겠군. 귀관은 고개를 숙이고 예를 갖추길 바라네.”
갑자기 난입한 제삼자를 서엽이 곁눈으로 확인했다. 제 목에 칼을 들이댄 이는 모르는 새에 나타난 위장군이었다.
그가 서늘한 눈으로 서엽을 내려다보며 재차 권유했다.
“또한 폐하께서 하문하시니, 신하된 자로서 그에 답을 하는 게 우선 아니겠는가.”
안쪽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 위장군이 들어온 듯했다. 그렇다는 건 바깥에 중랑장들도 대기 중이란 의미였다. 까딱하면 제아무리 서엽이라 해도 곧바로 내쳐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진예가 손짓으로 위장군을 제지했다.
“되었다, 내 다 알아들었으니 칼을 거두거라.”
위장군은 불안해하는 듯했지만 칼을 도로 제 허리춤에 꽂아 넣고는 서엽의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진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탁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제 검을 낚아챈 뒤 서엽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바로 앞에서 멈춰 선 진예는 검집을 씌운 채 칼로 서엽의 발치를 찍어 내리며 그를 내려다봤다.
진예는 지금까지 서엽이 했던 말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그러니까…… 조 후의 말뜻은 연 귀인을 직접 죽이지는 않았으나 갖다 버렸다, 이 말이로구나.”
그러고는 입술을 슥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즐거워서 짓는 웃음은 분명 아니었다. 눈까지 웃고 있지는 않았으니.
외려 그녀의 붉은 눈엔 지독한 화기가 스며들었다.
“맞느냐.”
서엽은 다음 순간 제게 내려질 벌을 각오하며 순순히 인정했다.
“그러하옵니다.”
대답이 흘러나가자마자 제 몸을 내리치는 고통에 서엽은 숨을 참았다.
진예가 검집을 휘둘러 그의 어깨를 내리친 것이었다.
서엽이 몸을 잔뜩 긴장시키고 다음의 매질도 기다렸으나 진예는 반대로 칼을 바닥에 분노를 담아 내동댕이쳤다. 이어 그녀가 힘껏 일갈했다.
“네놈이 진정 미친 것이냐, 조서엽!”
진예의 목소리가 막사 안에 크게 울려 퍼졌다. 보고 있던 위장군도 놀랄 만큼의 기세였다.
감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리 기복이 크지 않은 그녀였다. 이토록 분노한 것은 위장군이 아는 한 처음이었다.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있었던 서엽도 순간적으로 얼어붙을 만큼 진예는 제 화를 참지 못했다. 그녀가 빈손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한계치까지 차오른 노기가 진예의 손을 떨리게 했다.
진예는 거칠게 올라오는 숨을 억누르려 했지만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내 이 자리에서 널 죽일까 봐 저 칼을 뽑지 않는 것이다. 그간 네 녀석이 짐을, 나를 어찌 보필해 왔는지 알고 있으니!”
연무건을 죽이면 그도 죽이겠다고 말했지만 막상 그 상황이 앞에 온 지금, 그녀는 그러지 못했다.
어떻게 그러겠는가.
어린 시절부터 제 옆을 지켜 온 단 한 사람이었다. 껍데기밖에 없는 가족보다도 더 소중한 사람. 평생을 같이 갈 동반자라고 생각했었다.
그가 바라는 애정은 주지 못해도.
조서엽만큼은 제 옆에서 말라 죽더라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제 옆에 남아 있으리라 믿어 왔다.
얼마나 일방적이고 이기적인 감정인지 알았지만, 아니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진예는 그를 버리지 못했다.
제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하는 사내에게서, 그 작은 희망마저 빼앗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고 돌아 도달한 결론이 결국 또다시 제 욕심과 이기심으로 점철된 것이라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상황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진예는 눈앞이 암담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감정을 어떤 단어로 설명해야 적절할까.
연무건의 죽음과 조서엽의 방종함.
도대체 둘 중 무엇이 자신을 더 화나게 하는가도, 사실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진예가 지독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는 명백한 너의 배신이니라.”
그녀의 선언에 서엽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지만, 진예는 듣지 않고 곧장 위장군을 돌아보았다.
“위장군은 연 귀인의 거취에 대해서 알아보라. 당장!”
“명 받드옵니다.”
위장군이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진예는 참았던 한숨을 토해 냈다.
조서엽이 제 손으로 죽이지는 않았다고 하니 혹시나 모른다…….
다른 때라면, 다른 이가 얽혀 있었더라면 빠르게 인정하고 누구에게 벌을 내릴 것인지 생각했을 그녀는 그런 스스로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초조해하고 있었다.
마른세수를 하며 숨을 가다듬는데, 아직 막사 안에 무릎을 꿇은 채 움직이지 않고 있던 조서엽이 그녀를 올려다보며 했던 말을 반복했다.
“연무건은 죽었사옵니다.”
그에 다시 화가 치민 진예가 서엽을 노려보았다.
“닥치고 그만 꺼지지 못하겠느냐!”
하지만 이번엔 서엽도 지지 않았다.
“대체 그의 죽음을 부정하는 폐하의 그 마음은 무엇입니까!”
소리치며 그는 자리를 털고 나가는 대신 진예 앞에 마주 섰다. 서엽의 얼굴은 이미 비참함으로 인해 참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서엽에게는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하는 상황 자체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자신의 눈앞에서 진예가 동요하는 모습을 보아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진예는 여전히 그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고, 명확하게 선을 그을 뿐이었다.
“이 마음이 무엇이든, 네 말대로 연무건이 죽었다면 상관이 없는 것 아니냐.”
“연모인 것인지요?”
불쑥 튀어 나간 질문에 단숨에 따귀에 손바닥이 날아왔다. 제 뺨을 치는 매서운 손길에도 서엽은 기어이 대답을 들어야겠다는 듯이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 고집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진예가 탄식했다.
“조서엽, 네 어찌 이리 못난 사내가 되었느냐?”
“그러는 폐하께선 왜 제 마음을 이리도 몰라주신단 말입니까?”
“짐이 너의 마음의 어디를 이해해야 한단 말이냐. 정녕 네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몰라?”
도대체 이 한심한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리 질투에 눈이 멀었기로서니 해야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도 구분하지 못하다니, 정말로 실망스러웠다.
연무건이 끔찍하게 싫어도 이제는 황제의 사람이었다. 정말로 그렇게 간절하게 제거하고 싶었다면 차라리 정치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지, 이렇게 무모하게 저지르고 볼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말 그대로 대형 사고를 저질러 놓고 서엽은 여전히 제 마음밖에는 볼 줄 몰랐다.
“제 평생을 지켜 온 주군입니다. 이 목숨을 걸고 연모해 왔던 여인입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자격 없는 자가 나타나 차지하겠다는데, 어느 사내가 눈이 안 돌아가겠습니까? 대체 어느 사내가 제정신으로 있을 수가 있습니까?”
“조서엽, 네놈이 끝까지…….”
진예가 말하는 중간에 팔이 확 끌렸다. 예상치 못한 순간이라 진예가 얼떨결에 끌려가자 서엽의 얼굴이 가까워지더니 돌연 입이 맞춰졌다.
입술 위로 체온이 번질 때까지 무슨 상황인지 잠깐 인지하지 못한 진예는 맞닿은 입술과 어느새 제 얼굴을 감싼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끼고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놀람도 잠시, 서엽이 입술과 손을 떼고 작게 중얼거렸다.
“반성하지 않을 것입니다. 소신은 무엇을 잘못했는지 조금도 모르겠나이다.”
여전히 거리가 가까워 더운 숨이 진예의 얼굴 위로 번졌다. 진예를 바라보는 서엽의 눈에 살며시 습기가 고이기 시작했다.
“저는 그저 폐하께서 염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길 바랐을 뿐입니다.”
“…….”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모두가 우러러보는 군주로서 살아가는 그 삶을 지키고 싶었을 뿐입니다.”
말을 이어 가면서 점점 목소리를 떨던 서엽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내 눈꼬리에 작은 눈물방울 하나가 맺혔다.
“하여 가슴이 찢기는 고통도 무뎌질 때까지 견디고 또 견뎌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조서엽이라고 해서 결코 진예의 사랑을 갈구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원했다.
간절히 원하고, 또 원했다.
연모하는 여인을 품에 안을 수만 있다면, 아니 그녀의 마음을 가질 수만 있다면 제 전부를 주어도 아깝지 않았다.
단 하루라도 그녀를 품에 안을 수 있다면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던질 것이었다.
그러나 진예가 제게 그런 감정을 바라지 않기에 단지 인내했을 뿐이었다.
서엽은 눈물을 삭이려 몇 번이나 눈꺼풀을 깜빡이다가, 넘치는 것을 막지 못하고 떨어뜨렸다. 목소리에도 울음이 섞였다.
“대체 연무건 그놈은 지금껏 무엇을 희생했습니까. 그놈이 무엇이 그리 잘났기에 폐하의 마음을 차지한단 말입니까?”
마지막 말을 마친 서엽이 입을 꾹 다물고 진예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숨마저 참고 이제 그녀의 답을 기다렸다.
그에 진예는 눈을 내리깔고 서엽의 시선을 살며시 피했다.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로서도 갑작스러운 이 상황을, 정리할 시간이.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그 아이가 품은 마음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은, 폐하께서도 능히 짐작하시리라 여기옵니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3년 전 익재 토벌이 끝나고, 밀려 있던 황궁의 일에 정신없었던 어느 날이었다.
일찍이 대장군에서 물러난 조서엽의 아비, 조춘경이 갑자기 찾아오겠다는 전갈을 보냈기에 저녁에 방문하라는 의미로 묵칙과 어부를 전달했다.
그러자 다음 날 밤늦게 조춘경이 찾아와 차 한잔을 나누었다. 와중에 그가 조심스럽게 아들인 서엽의 이야기를 꺼냈다.
조춘경이야 관직에서 물러난 입장이라 딱히 나눌 말이 없으니 아들 때문이 아니겠나 싶긴 했지만, 진예는 기울이던 잔을 멈추고 물었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가.〉
설마 혼인이라도 해 주길 바라는 건가 싶었지만, 말하는 어투나 표정을 봐서는 그렇진 않은 듯했다.
조춘경은 그 침착한 성정답게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제 의견을 말했다.
〈폐하를 따라 사지를 가겠다 할 때…… 그 아이는 제 혈육조차 버리려 하였습니다. 그런 것을 단지 충정 때문이라고만 보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해서, 짐이 어찌하길 바라는 것이지.〉
〈폐하께서도 그 아이가 필요하실 터이니 당장 되돌려 달라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서엽이의 마음을 받아 주실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그 아이가 완전히 망가지기 전엔 내쳐 주십시오.〉
듣는 동안 진예는 조춘경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냥 옆에 있게 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내쳐 달라니. 그는 제 아들이 황제의 옆에 있는 것이 심히 못마땅한 듯했다. 보통은 반대일 텐데 말이다.
실제로 황궁에 줄을 못 대 안달인 자들이 천하에 수두룩했다. 한데 조춘경은 정확히 그들의 대척점에 서 있었다. 흥미롭다면 흥미로운 이야기였으나, 한편으로는 입맛이 썼다.
〈그리하여 죽겠다 하면 아비 된 자의 도리를 다해 어떻게든 살려 둘 터이니,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엔 제 품으로 돌려보내 주시기를 간절히 주청드리겠나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 부모와는 너무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인가…….〉
〈그러하옵니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에 조춘경은 곧장 답했다. 진예는 그에 부드럽게 웃었다. 왜인지 대장군에서 물러난 그가 심히 아까워진 데다, 조서엽이 부러워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숨기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지 않은 부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진예도 그가 저를 연모한다는 이유로 너무 심하게 망가지는 건 원하지 않았다. 제 옆에서 썩어 가기보다는 반려를 찾아 나가는 편이 낫다고 여기기도 했고.
〈짐이 그때가 언제인지 알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할 수 있다면, 그리하도록 하지.〉
〈황은이 하해와 같음에 감복하옵니다.〉
기실 당시만 해도 서엽이 그렇게까지 되겠느냐는 생각도 어렴풋이 했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그때의 조춘경에게 선견지명이 있다고밖에는 못 하겠다.
조서엽이 망가지기 직전…… 그러한 때가 있다면, 바로 지금이었다.
슬프지만 인정해야 했다.
이제 자신은 그를 더는 붙들고 있어서는 안 되었다. 진심 어린 애정을 줄 수 있는 게 아니라면 그만 놓아 주어야만 했다.
서로를 위해서.
진예는 마음을 굳게 먹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십수 년을 함께했던 저의 충신을 눈에 담았다.
“서엽아.”
“예, 폐하.”
화가 누그러진 그녀의 목소리에 서엽은 어떤 기대를 한 모양이었다. 순순히 답해 오는 그의 눈빛에 약간의 이채가 감돌았다.
그러나.
“더는 짐을 연모하지 말거라. 하더라도 이제부턴 이리 마음을 드러내지 말아야 할 것이다.”
“…….”
“그저 충신으로만 있어 다오. 그것이 앞으로 이 진예가 너에게 바라는 것이다.”
진예는 그를 앞에 두고 단호히 뒤돌아서며 덧붙였다.
“조서엽, 그대를 효기장군으로 복직시키겠다.”
“조서엽, 그대를 효기장군으로 복직시키겠다.”
고위 관직으로 돌려 놓겠다는 이야기라 언뜻 들으면 벌이 아닌 상을 주는 말이라 착각할 수 있으나, 서엽은 듣자마자 표정이 굳어졌다.
직설적으로 바꿔 말하면 더는 뒤꽁무니 쫓아다니지 말라는 의미였다.
서엽은 단정하게 관모를 올린 진예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분명히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데도 아득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등이 너무나 매정해 보여서, 한동안 말을 토해 내기도 힘겨웠다. 그러던 서엽이 한마디를 겨우 뱉었다.
“저를…… 죽이고 싶으신 겁니까.”
그러자 진예가 그를 흘끗했다. 순식간에 창백해진 안색과 아마도 제가 그러는 줄도 모를 게 분명한 떨리는 손이 안쓰러움을 일으켰다. 하나 진예는 독하게 마음먹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네가 망가지는 꼴을 더는 못 보겠구나, 서엽아.”
그 목소리엔 비록 그를 향한 미안함이 가득 담겨 있었지만.
서엽은 그에 가슴속이 울컥하는 느낌을 받았다. 한 번도 제 주군에게서 감지해 본 적 없는 다정함이, 덜컥 불안감을 일으켰다.
설마 진짜로 그럴까…….
진예는 저를 결코 버리지 못한다고 그렇게 믿어 왔다. 하여 그녀가 고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서엽이 고개를 흔들었다.
“망가지지 않았습니다. 조서엽이라는 놈은 처음부터 이랬으니까요.”
당신을 마음에 품은 그 어느 때부턴가 말이다.
“서엽아.”
다시금 제 이름을 불러 오는 목소리에 서엽은 그녀의 뒤에 주저 없이 무릎을 꿇었다.
이대로 내쳐지면 영원히 그녀 옆에 설 수 없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제 무릎이 닳더라도 그런 일은 있어선 안 되었다.
그때는 정말 가슴이 미어서 죽어 버릴지도 모르니까.
“연모하옵니다.”
처음 황궁의 행랑에서 당신의 가라앉은 눈을 본 순간 마음을 빼앗겼다. 그래서 그 눈에 이채가 감도는 날이 오기를 염원했다.
아직도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서는 하물며 눈물조차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아니다.
사실 그런 명분 따위는 상관없었다. 서엽은 그냥 진예와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서엽은 바닥에 꿇은 두 무릎을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간절한 어조로 그녀에게 애원했다.
“차라리 제 전부를 빼앗고 옆에만 있게 해 주십시오. 평생 더는 빛을 보지 못하고 산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니 제발…….”
제발 옆에 있게만.
저절로 떨리는 목소리에 잠시 목이 멘 사이, 진예가 말허리를 끊었다.
“제발…… 그만하거라.”
무척 지쳤다는 듯한 말투였다.
서엽은 제 머리 위로 떨어진 그 목소리에 목뒤가 싸해짐을 느꼈다.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진예를 올려다보는 그의 얼굴은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이제는 눈앞이 뿌예 진예가 잘 보이지 않았다. 눈을 몇 번이나 깜빡인 뒤에야 그녀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한데…….
“복직도 싫다면, 내 그만 너를 놓아줄 테니 네 인생을 찾아가도 좋다.”
곁을 떠나라 말씀하시면서, 가도 좋다고 말씀하시면서 왜 그리 슬픈 표정을 지으십니까?
오랫동안 옆에서 지켜봐 왔지만 진예의 저런 표정은 처음이었다.
흔들림 없는 목소리와 달리 그녀의 얼굴은 웃음기 하나 없이 확연히 가라앉아 있었다. 언제나 몸에 배어 있는 여유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못된 마음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중적인 감정이 일었다.
진예가 동요도 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저로 인해 저런 표정을 지을 수도 있게 되었구나.
반면에 덧붙인 말은 너무나 뼈아파서, 무릎 꿇고 있는 다리마저 후들거리는 기분이었다.
“……폐하, 놓아준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엔 터무니없는, 너무 하찮은 질문이라는 점을 알았지만 머리가 굳었는지 다른 할 말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진예의 입가에 자조가 어렸다.
“미안하다. 그간 짐이 욕심을 부려 너를 너무 붙잡고 있었던 듯해.”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왜, 갑자기…….”
“네가 이 정도로 망가진 줄은 모르고 있었다. 아니, 외면하고 있었어.”
기실 진예가 지금 하는 말은, 서엽이 그동안 제 아버지로부터 수도 없이 들었던 것들이었다.
네 인생을 찾으라고.
황제로부터 그만 벗어나라고, 그렇게까지 목멜 필요 없다고.
그러나 그 말들은 결코 제 인생의 정답이 될 수 없었다.
서엽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탓에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게 되었다.
“제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어떤 벌이든 달게 받을 터이니 이자를 벌하시고 노여움을 푸십시오.”
“…….”
진예는 대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차라리 아까처럼 마음껏 화를 내면 좋으련만, 서엽을 가엾어하는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것은 분명 제가 원하는 유의 감정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동정심에라도 매달려야 했다.
“저에게, 이 조서엽에게 폐하께서 빠진 인생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건 없습니다. 불가한 일입니다…….”
조서엽의 인생, 삶.
그런 건 따로 있지 않았다. 그저 진예가 제 인생의 전부였다. 그녀가 없는 삶은 이제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제 하루는 온통 자신의 황제에게, 진예에게 맞춰져 있었다. 제 주인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조서엽은 그야말로 충실한 개였다.
제 주인 말고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주인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다만 딱 하나 불가한 일이 있다면 그 곁에서 떨어지는 것뿐이었다.
문득 코가 시큰해졌다. 그러다 모르는 사이 맺힌 눈물이 갑자기 제 옷 위에 툭, 떨어지는 것을 보고서 서엽은 당황했다.
손으로 얼굴을 쓸어 보았다. 이미 뺨이 다 젖어서 엉망이 돼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진예가 저렇게 측은해하는 표정을 지은 건 이 때문이었나…….
서엽은 눈물을 닦아 내고, 멈출 때까지 손으로 제 눈을 가렸다. 하지만 오히려 손바닥 아래로 누액이 흘러넘치자 제 처량한 모습에 비참함을 느꼈다.
아니, 사실은 비참함 때문에 눈물이 흐르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순서 같은 건 하등 중요하지 않았다.
서엽은 이제 두 손을 모아 그녀에게 빌었다. 반성하지 않겠다 했던 조금 전의 말은 진예의 완고함 앞에서 바로 폐기되었다.
“소, 송구하옵니다. 제가 주제를 모르고 감히 폐하의 마음을 탐했나이다. 앞으로 절대 그러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불충은…….”
그런데 애원은 아무런 힘이 없었다. 진예가 무심히 시선을 떼더니 막사 입구 쪽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밖에 아무도 없느냐.”
그녀의 말에 곧장 중랑장들이 막사 안쪽으로 들어왔다. 진예가 서엽을 앞에 둔 채 턱짓했다.
“조 후를, 끌어내라.”
진예가 흔치 않게, 중간에 머뭇거림을 섞었지만 끝내 그 말을 입에 올렸다.
황명이 흘러나오자마자 서엽의 양옆에 익숙한 얼굴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아무런 감흥도 없어 보이는 무표정으로 서엽의 두 팔을 잡았다.
서엽은 당황해 소리를 질렀다.
“폐하!”
정말로 이대로 끌려 나간다고?
믿기지가 않았다. 꿈일 것이다. 현실이 아닐 게 분명했다.
하지만 팔을 억세게 붙잡아 강제로 일으키는 손길에 정신이 들었다. 서엽은 그들을 뿌리치고 도로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폐하, 제발 제가 한 말씀만 더 올릴 수 있도록……. 제발, 제발 저를……!”
말하는 중간에 서엽은 도로 일으켜졌다. 이번엔 아까보다 더 세찬 힘에 의해 뒤로 끌렸다.
그동안 진예 역시 고집스럽게 등만 보여 줄 뿐이었다. 뒷짐을 지고 있는 작은 손이 주먹을 지그시 움켜쥐었다.
“폐하!”
그게 서엽이 본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서엽은 막사 밖으로 강제로 끌려 나갔다. 누가 듣든 안중에도 없이 계속 진예를 불렀지만 그녀는 움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그의 부르짖음이 아주 멀어진 뒤에야 진예가 뒤를 돌아보았다. 분명 비좁은 공간인데 텅 빈 막사 안이 너무 휑했다.
있는 거라곤 탁자 하나와 침상, 무기 외의 최소한의 집기뿐.
황량한 풍경에 진예는 어째서인지 숨이 막혔다. 가슴에 손을 올려 그곳을 지그시 눌렀다가 떼어 냈다. 손끝이 살며시 떨리고 있었다.
서엽이 처절하게 쏟아 낸 감정의 홍수 속에서 진예도 가슴이 쥐어짜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떠나라고 등을 떠밀었지만, 그런 말을 토해 낸 스스로도 마음이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채였다.
진예는 갑갑함에 큰 숨을 들이켜며 탁자 위에 손을 올렸다. 팔의 힘이 빠지면 이대로 몸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가슴에서부터 울컥 솟아오른 무언가가, 목구멍을 뜨겁게 하고 눈앞을 흔들었다. 진예는 몇 번이나 들숨 날숨을 반복하다가 중얼거렸다.
“대체 이 감정이 무엇이란 말이냐, 서엽아.”
분노가 아닌 다른 것은, 제 부모에게서 배운 적 없다. 이리 슬픈 마음은 무어라 이름 지어져 있는 것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사랑도 아니요, 연민도 아니었다.
가슴을 후벼 파는 이 고통의 이름은…….
“……짐의 부덕함 탓이니라.”
진예의 잇새로 힘없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저 외로워서, 그 외로움이 무서워서 너를 붙잡고 있었다.
나는 늘 너의 희생 위에 세워진 그 안락함에 안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지독히도 이기적인 마음이 널 망가뜨린 원흉이 아니었을까.
네가 이럴 줄 몰랐다고 변명하지 않으련다.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틀림없이 이날이 오리라고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외면했을 뿐이다.
이대로도 상관없다고 여기는 안일한 마음으로.
진예는 가만히 서 있어도 점점 거칠어지는 숨에 가슴을 두드렸다. 피가 나지 않는 것이 이상할 만큼 그곳에 강한 동통이 일었다.
어지러운 숨소리 사이로, 귀에 이명이 들려왔다.
〈폐하께선 정녕 그 정도로 개들의 싸움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연무건이 그리 말했던 때에는, 그래, 자신이라면 막을 수 있다고 자만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그대의 말이 맞았다.”
그것은 말 그대로 자만에 불과했음을.
진예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오래전에 메마른 눈물샘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았지만, 쉬어 버린 목소리엔 회한이 깃들었다.
“짐이 틀렸다…….”
스스로의 어리석음이 혐오스러웠다.
* * *
아침 식사를 배급할 때라 소란이 생길 법도 하건만 진예의 막사 안은 물론이요, 바깥도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조용했다.
서로서로 눈치를 보면서 행여나 제가, 혹은 옆의 동료가 입을 함부로 놀리지는 않을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황제 폐하의 심기가 매우 불편하시니 알아서 사리라는 식의 말이 한수에 있는 군사들 사이에 퍼졌기 때문이었다.
위장군은 바로 그 심기 불편하게 하는 이야기를 진예에게 전하고 있었다.
“……해서 인근을 수색하고 있습니다만, 단서가 전혀 없다는 이야기이옵니다.”
이미 식사에서 손을 뗀 진예는 묵직한 갑주를 제 몸에 걸치고 있었다.
그녀는 위장군의 이어지는 보고에도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나, 오히려 그 시중을 드는 이가 손을 멈칫멈칫했다.
상방주의 뒷산을 인원을 동원해 샅샅이 뒤지고 있으나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말이었다.
위장군이 보고를 마치자 그때까지 별말 없이 듣고만 있던 진예가 겨우 한마디 꺼낸 것은 빈정거림이 섞인 말이었다.
“사람이 하늘로 증발한 것은 아닐 터인데.”
위장군은 제 잘못은 아니었으나 송구하다는 듯이 머리를 푹 숙였다.
“짐승이 잡아가거나…… 근처를 떠돌던 익재의 먹이가 됐을 수도 있나.”
경우의 수를 따져보는 그녀의 목소리는 제 비(妃)를 잃은 사람답지 않게 차분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을 할 때 진예의 눈은 살벌한 빛을 띠었다.
“표기장군 장첨에게 이르거라.”
“하명하소서.”
“연 귀인의 뼛조각 하나라도 찾아오라고. 그러지 못하면 황궁에 단 한 발짝도 들이지 못할 것이야.”
표기장군의 지위를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발언이었지만, 그만큼 진예가 조용히 분노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위장군은 놀라는 기색 없이 명을 받고 뒷걸음으로 물러나 막사 밖으로 나갔다. 진예는 천막 안에서 나머지도 마저 모두 물리고 적막해진 안에 홀로 남았다.
몸에 맞게 조인 갑옷이 불편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쉰 그녀는 탁자 앞으로 걸어가 위에 놓인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갑자기 치솟는 분함에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탁자가 부르르 떨렸다.
현재 연무건을 죽였다고 추정되는 위도양은 기습 따위는 고려조차 하지 않는지, 상방주에서부터 오는 길에도 요란한 일들을 곳곳에서 일으키면서 오고 있었다.
진예로서도 최소한의 조치는 취하고 있었지만, 답도 없이 날뛰고 있으니 피해를 완전히 무마하기엔 어려웠다. 덕분에 민심이 서서히 악화되고 있는 중이었다.
‘머리를 좀 쓸 줄 안다는 건 인정해야 할지도.’
게다가 지나치게 대범하고 겁대가리가 없었다.
아직은 전황이 아주 나쁘다고 하기엔 이르지만, 썩 좋은 편도 아니었다.
진예는 제 칼 두 자루를 허리춤에 차고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마자 눈썹이 슥 치켜 올라갔다.
어쩐지 바깥이 너무 쥐 죽은 듯이 조용하더라니.
입구에 조서엽이 서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초췌해진 것을 보니, 진예가 막사 밖으로 나오지 않은 몇 시진 동안이나 버티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그는 진예가 나오자 묵묵히 고개를 숙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예를 갖추지 않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사리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러자 진예가 그를 쳐다보다가 그 옆의 중랑장들에게 시선을 돌리며 일갈했다.
“짐의 막사에서 내치라 한 자가 왜 여기 있느냐?”
그러자 그들이 곤란해하는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보였다.
하루아침에 내쳐졌다고는 하지만 조서엽은 본래 진예가 특별히 무언가 명을 하지 않은 이상에야 한시도 황제와 떨어져 있었던 적이 없었다.
조서엽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그들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라, 진예가 그저 말없이 발을 돌리려 했을 때였다. 서엽이 그녀의 앞길을 막으며 주저 없이 두 무릎을 꿇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소신에게 시간을, 시간을 내 주십시오.”
“…….”
어제와 같이 울음기는 없었지만 서엽이 고개를 푹 숙이며 간절한 어투로 말했다.
어차피 그의 입에서 나올 말들은 뻔했다.
잘못했다, 앞으로는 안 그러겠다,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
그렇지만 또 한 번 그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화를 내든 흔들리든 둘 중 하나가 될 것 같았고, 그것 모두 자신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하여 그의 옆을 그저 스쳐 지나갔다.
무시하겠다는 의도가 깔린 그 몸짓에 조서엽이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에게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달싹거리던 입을 꾹 다물었다.
진예는 그런 서엽이 보이지 않는다는 양 한쪽에서 아직 아침을 챙기는 군사들을 돌아보고는, 촘촘하게 지어진 막사들 사이를 지나갔다.
그녀가 진지의 분위기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저를 따르는 중랑장들에게 말했다.
“근처 지형을 직접 좀 살펴야겠다.”
“하면 위장군을 모셔 오겠습니다.”
진예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중랑장이 떠나기 전에, 마침 다급한 얼굴로 위장군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폐하, 좋지 못한 소식이옵니다.”
진예는 언제나 침착한 위장군답지 않게 그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것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무엇이냐?”
“그것이…….”
위장군은 제가 직접 전하기 주저된다는 듯 머뭇거리다가, 손에 쥐고 있던 접힌 종이를 내밀었다.
진예는 미간을 찌푸리며 종이를 펼쳤다. 글을 읽어 내려가는 그녀의 얼굴이 점차로 굳어져 갔다. 그러다 모두 읽고는 종이를 와락 구겨 버렸다. 진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위장군.”
“예, 폐하.”
대답하면서 위장군이 조금 떨어져 있는 서엽을 슬쩍 확인했다. 그에 서엽의 눈빛이 흔들렸다.
종이 안의 내용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연무건과 관련된 소식인 게 틀림없었다.
‘설마 살아 있는 건가?’
하지만 그렇다면 위장군과 진예가 저런 반응이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이번엔 진예가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 분노가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당장 조 후를 황도로 돌려보내고 사저에 두 달간 구금해 자숙토록 한다.”
차가운 목소리로 내리는 명을 듣고 서엽은 움찔했지만, 적어도 한 가지 사실에는 안심했다.
연무건은 죽었다, 확실하게.
그 벌레처럼 지긋지긋한 놈과의 인연이 드디어 끝이 났다.
하지만 그걸 이용해 또 위도양이 무슨 짓인가를 한 모양이다. 그러니 진예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 터였다.
그런데 진예의 말이라면 절대 충성하는 위장군이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현재 이곳 한수에는 황제에게 직접 간언할 정도로 지위가 높은 자는 위장군뿐이었다.
위장군은 그 의무를 제가 기꺼이 짊어지고, 서엽의 죄를 더 물을 것을 청했다.
“폐하, 이 사안은 그리 가벼운 것이 아니옵니다. 그리하시면 군의 기강이 흐트러질 것이옵니다.”
그에 주변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서엽 또한 제게 내려질 벌을 각오하고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시선을 둔 채 진예가 작게 답했다. 끓어오르는 화를 억누르는 듯한 음성이었다.
“알고 있다.”
“신, 조 후에게 죄에 합당한 중형을 내릴 것을 간언드리옵니다.”
하지만 진예는 고개를 흔들었다.
“명은 거두지 않는다. 황명이니 누구도 반박하지 말라.”
“…….”
단호하게 끊어 내는 진예의 말에 위장군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본래 군주로서의 진예는 누구보다도 상벌이 확실한 사람이었다. 사사로운 감정이 개입되는 걸 스스로도 늘 경계해 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이례적인 일이라 할 만했다.
아니, 사실은 진예로서도 정치적으로 부담이 가는 결정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제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단지 서엽을 향해 한 번도 내비친 적 없던 혐오를 드러냈을 뿐이었다.
“하지만 저자는 당장 내 앞에서 치워.”
존중이라고는 하나 없는 말투에, 서엽은 제가 정말로 진예의 눈 밖에 나 버렸다는 사실을 실감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에 당황하거나 가슴 아파 할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위장군이 일어나 조서엽의 앞에 섰다. 마치 진예를 더 이상 보지 말라는 듯이.
서엽은 그 어느 때보다 엄격한 표정인 위장군을 보며 물었다.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긴 겁니까?”
그러자 위장군이 한마디로 그의 입을 닥치게 했다.
“감히 염치없이 묻지 말게, 조 후.”
“…….”
“끌고 가 황명을 수행하라.”
옆의 군사들에게 고갯짓을 하며 명령을 내린 위장군은 냉정하게 뒤돌아섰다.
그러고 어느새 진지의 한가운데 있는 누대(樓臺) 위로 올라가고 있는 진예의 옆으로 돌아갔다.
중랑장들의 호위를 받으며 그녀는 군화를 신은 발로 묵직하게 누대의 바닥을 디뎠다.
황제군이 깃발이 펄럭이는 그곳은 높이가 꽤 있어 진지 밖까지 훤히 보였다.
그곳에서 약간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위장군을 기다리던 진예가 왜인지 근심이 가득한 그의 얼굴을 보고는 어울리지 않게 변명했다.
“너무 염려 말거라.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리 말씀하지 않으셔도 알고 있사옵니다.”
갑옷에 달린 노란 망토가 가볍게 바람에 흔들렸다. 진예는 진지 앞의 평원과 그 너머의 낮은 산을 바라보면서 방금 전에 당도했던 ‘그 소식’에 대해서 떠올렸다.
상방주 바로 옆에 있는 한 도시에 방이 붙었는데, 반란군이 연 귀인을 잡아 죽였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방이 붙은 곳에 연무건이 입었다는 옷의 천 쪼가리와 함께 단도가 꽂혀 있었다고.
그 천이 진짜로 연무건이 입은 옷의 일부가 맞느냐 아니냐는 의미가 없었다.
연무건은 실제로 죽었고, 그들은 그걸 이용해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아주 손쉬운 방식을 택했을 뿐이다.
기분이 썩 좋지 못했다.
아니, 좋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짜증이 일고 분하고 답답했다.
그리고…… 애석했다.
옆에 있을 때는 귀찮다고만 생각했는데, 연무건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니 어째서인지 가슴 한구석이 싸늘해졌다.
처음 만났을 당시엔, 아니 그 이후에도 죽여 버리겠다는 건 본심이었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에 마음이 어찌 이리 휙 바뀌었는지, 연무건이 정말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미칠 듯한 허전함이 몰려왔다.
서엽도 잃게 되어 더욱 그런 마음이 드는 걸지도 모르겠다.
스스로가 이 정도로 불안하게 흔들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그녀 자신조차 믿기지 않았다.
진예의 입술 사이로 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그대마저 없었으면 어찌 될 뻔했나 싶다.”
“폐하…….”
바람이 영 잔잔하지는 않은 탓에 깃발이 펄럭이는 소리가 제법 컸다. 그 정신 사나운 소리를 들으며, 진예는 제 허리춤에 걸린 검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하나 곱씹는 것도 여기까지다. 망령을 붙잡고 있어 봤자 앞으로 나아갈 수 없지.”
위도양처럼 복수심에 불타 다 파괴하고 다니는 짓 따위는 할 생각이 없었다.
그저 그녀는 자신의 정궁인 연무건을 죽인 위도양을 벌하는 것뿐이었다.
진예의 시선이 구름이 짙은 평원의 끝을 바라보았다.
‘이곳이 네 무덤이다, 위도양…….’
화친왕과 나란히 개죽음을 당하게 해 줄 터였다. 그리고 이번엔 다른 누구의 손을 빌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폐황태자가 된 상황에서 돌아와 황궁을 장악하고, 황제가 되어서 다시 모든 대신들 위에 군림하기까지.
단지 운으로 그 모든 것들을 이룩했다고 생각했다면, 명백히 잘못된 계산이다.
제아무리 익재 수백 마리를 데려오더라도 상관없었다.
전부 다, 이 세상에서 지워 줄 것이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손으로.
그렇게 제 마음속을 다졌을 때였다.
끼이이이이이이익……!
돌연 이질적인 소리가 끼어들며 넓은 평지에 흐르고 있던 평온함을 찢었다.
그에 진예가 하늘을 올려다본 그 순간.
콰아앙!
허공에서 꽂혀 내려진 거대한 검은 창에 의해 진지의 입구가 부서져 나갔다.
순식간에 날아온 공격에 진예도, 그녀의 곁에 있던 호위들도, 그리고 진지 내에 있던 군사들도 일제히 놀랐다.
“모두 대열을 가다듬어라!”
갑작스러운 사태에 우왕좌왕하자 지휘관들이 튀어나와 군사들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한수에 있는 인원은 고작 천여 명 남짓. 심지어 위도양이 이끄는 익재들은 담상성을 점령했었다. 그에 군사들 사이에 공포감이 이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진예는 그런 그들을 내려다보다가 다시금 익재가, 아니 익재들이 우는 소리를 들으며 소리의 진원을 찾았다. 진지의 남쪽에 있는 산등성이에 거멓게 익재들이 날아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끼이이익!”
“끼익!”
그중에서도 가장 선두에 있는 익재가 검은 날개를 활짝 펴고, 꼬리를 길게 뻗은 채 이곳으로 돌진해 오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 주위에 창과 칼처럼 생긴 무형의 기운이 맺히고 있었다.
진예는 그것을 보고 오른손으로 단숨에 제 칼을 뽑았다.
“날개가 저리 큰 놈은 오랜만에 보는구나.”
3년 전 전투에서나 간간이 보던 크기였다. 대개 서식지의 우두머리 정도는 되어야 저만큼이 된다.
진예가 중얼거리는 동안 이쪽으로 돌진해 오는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체액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그 괴물이 표적을 잡았다는 양, 진예를 보자 씩 웃는 것이 보였다.
쐐애애액!
검은 창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진예가 있는 누대의 위로 떨어졌다.
“폐하!”
지붕을 파괴하며 일직선으로 관통한 탓에 순식간에 나무로 만든 누대가 쿠쿵,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그 찰나의 순간 위장군이 진예의 몸을 감쌌고, 그대로 높은 곳에서부터 그들의 몸이 추락했다. 주변에 있던 중랑장들도 균형을 잡지 못한 채 떨어졌다.
그에 놀란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를, 폐하를 보호하라!”
이어 일사불란하게 군사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이어졌다.
추락해 죽을 만큼 높은 곳은 아니었지만 진예를 보호하는 탓에 제대로 균형을 잡지 못한 위장군은 바닥에 부딪힌 충격을 온몸에 흡수하면서 저도 모르게 신음을 뱉었다.
“큭!”
그 덕분에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떨어진 진예가 다급히 물었다.
“괜찮나, 위장군?”
위장군은 몸을 일으키다 어딘가 불편한지 멈칫했으나, 곧 일어나 몸을 꼿꼿이 세웠다. 그는 제 검을 뽑으며 익재들이 날아오는 방향을 마주 보고 섰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저 선두에 있는 놈의 크기가 심상치 않아 보입니다.”
그에 진예가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앞으로 나섰다. 어느새 진예의 오른손에 쥐인 칼에는 미세하게 하얀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위장군이 그것을 확인하고 곧장 진예의 의중을 파악했다. 하여 진예의 주변을 둘러싸려 달려온 중랑장들과 병사들을 손짓으로 막았다.
진예는 아까 전 저와 눈이 마주쳤던 익재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파충류의 몸과 꼬리, 포유류의 팔다리를 합쳐 놓은 듯한 괴상한 놈이었다. 몸체 자체는 작은 걸 보니 태어난 지는 얼마 되지 않은 듯했지만, 날개 크기를 보면 저 ‘재앙’은 필시 진예가 처리해 온 어떤 익재보다도 강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위엔.
“반란군의 수장이다! 진형을 갖춰라!”
위도양을 발견하고 누군가 외쳤고, 위장군과 중랑장들이 진예의 주변을 감쌌다.
위도양이 그 익재의 등에 앉아 있었다. 진예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도양이 작게 웃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그녀가 타고 있는 익재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손을 들어 공격 신호를 보내자, 선두의 익재가 커다란 입을 벌리며 다시 길게 울었다.
“끼아아아악!”
그것이 신호라도 된 듯이 뒤에서 하늘을 검게 물들이며 쫓아오던 익재들이 빠른 속도로 진지 안으로 날아오면서 총공격을 가했다.
마치 몇몇은 불사라도 되는 것처럼 제 몸을 돌보지 않고 순식간에 하강하며 떨어졌고, 머리 위에서는 비라도 쏟아지는 양 색색의 공격들이 떨어졌다.
몸으로 떨어지는 놈들은 방패에 부딪혀, 그리고 칼에 찔려 비명을 질렀다. 훈련받은 군사들은 저희들이 배운 대로 대열을 이루고 익재들의 날개를 찢으며 재빨리 대응했다.
그러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공격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당할 뻔한 순간이었다. 마치 천둥이 내리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날아오던 공격이 파훼되어 나갔다.
혼비백산한 가운데 진예가 그 공격을 막아 낸 것이었다. 그녀는 저를 보호하려는 위장군의 앞으로 나가 제게 달려든 익재를 베어 내며 그 몸을 딛고 높이 도약했다.
“폐하!”
손쓸 틈도 없이 적진의 한가운데로 향한 제 주군을 위장군이 붙잡으려 했지만 놓쳐 버렸다.
그렇게 표적이 위로 올라오자 그녀에게로 시선이 쏠린 익재들이 사방에서 덤벼들었다. 진예가 가장 먼저 제게 돌진하는 익재의 정수리에 검을 박아 넣자 익재가 눈이 튀어나올 만큼 고통스러워하며 타들어 갔다.
귀가 찢어질 듯이 비명을 지르는 녀석을 발로 차 내리며 그 반동을 이용해 다른 녀석의 목덜미에 착지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위도양을 등에 태운 익재를 바라본 바로 그때에, 코앞으로 날카로운 검은 칼날이 날아왔다. 그에 고개를 숙여 가볍게 피하자 뒤에 있던 익재들이 깔끔하게 베여 나갔다.
그 검은 피가 솟구치며 동료가 죽어 나갔지만, 눈앞의 익재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 위에 앉아 있던 위도양 또한 진예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 몸을 일으켰다.
진예가 위도양이 제 칼 두 자루를 양손에 쥐는 것을 보며, 제 발밑의 익재를 군홧발로 힘껏 찍었다.
그러자 콰앙, 하는 소리를 내며 그녀의 발밑에 있던 익재가 바닥에 내리꽂혔다.
작은 몸에서 나왔으리라 믿기지 않을 만큼 강한 힘으로 익재를 밀쳐 낸 진예는 그 힘으로 위로 튕기듯이 뛰어올랐다.
위도양을 태운 익재가 가까이 오지 말라는 양 쉴 새 없이 공격을 쏟아부었다. 이번엔 가시와 같은 형태로 변형되어 저를 쫓아오는 검은 기운들을 칼로 쳐 내며, 진예는 익재의 거대한 날개 사이로 뛰어내렸다.
턱, 하고 발이 닿는 순간 밟힌 익재가 진저리를 쳤지만 제 주인을 떨어뜨리지는 못하는 탓에 저항이 거세지는 않았다.
그에 진예가 균형을 잡고 천천히 몸을 세웠다. 그리고 반란군의 수장이 된, 제 동생의 명인자였던 위도양을 마주 보았다.
“오랜만이다, 도양아.”
여유 있게 웃으면서 격의 없는 인사를 건네는 그녀를 앞에 둔 도양은, 그러나 굳은 표정으로 칼을 세울 뿐이었다.
“편찮으시다더니 아주 멀쩡하십니다, 폐하. 거짓 소문을 여기저기 잘도 뿌리시던데…….”
도양의 대꾸에 진예가 조용히 눈웃음을 그렸다. 그들이 등에 올라 있는 익재 주변으로 기백(幾百)의 익재들이 둘러싸 이쪽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발아래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진예의 군사들이 잔뜩 긴장하고 있었고.
하지만 진예는 그 팽팽한 대치 상황에서 나오는 긴장감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이 느긋한 어조로 물었다.
“해서, 저 익재들로 짐을 어찌할 수 있다고 믿어 여기까지 왔나 보지?”
“글쎄요, 편찮으시든 말든 폐하께서 혼자 상대하긴 어렵지 않을까요.”
그러면서 도양이 제 발밑의 익재를 내려다보았다. 이 녀석은 힘들지 않겠느냐는 의미였다.
하지만 진예는 한 번 픽 웃더니 쥐고 있던 검을 들어 올렸다. 아래로 향했던 검끝이 도양을 겨누었다.
이어 평범한 날붙이에 불과했던 칼날에 향이 피어오르듯이 미세하게 하얀빛이 흘렀다. 그것을 보면서 진예가 중얼거렸다.
“죽음의 문턱에서 얻은 기연이 그리 하찮은 것이었다면, 짐이 대환의 황위를 손에 넣을 수 있었겠느냐.”
그리 말하는 진예의 붉은 눈동자에 위험한 빛이 감돌았다.
“어차피 네 명인자는 짐의 손에 죽을 운명이었다.”
화친왕 진평.
그는 살아 있는 이상 단 하나밖에 없는 황위를 놓고 싸울, 제 영원한 숙적이었다.
어렸을 적, 한때는 그가 차라리 빨리 자라서 황제가 되길 바라기도 했지만 폐황태자 신분으로 황궁에 되돌아와 제 아비와 어미를 끌어내린 뒤부터는 달랐다.
모두가 저주를 퍼부었던 제 삶을 바꾼 이후 진예에게 황제의 자리는 최고 권력자라는 의미, 그 이상이었다.
제가 개척한 이 운명을 그녀는 놓을 생각이 없었다.
한데 진예의 말을 들은 도양이 입가를 비틀며 빈정거렸다.
“그럼 네 명인자도 내 손에 죽을 운명이었나?”
진예의 눈썹이 꿈틀했다. 애써 잊으려 한, 그리고 잊어야 하는 그가 언급되자 심기가 뒤틀렸다.
변화를 알아차린 도양이 좀 더 도발을 해 왔다.
“아마 머리든 내장이든 터져서 아주 고통스럽게 죽었을 거야, 연무건은……!”
말을 끝까지 들을 필요도 없었다. 진예가 가볍게 발을 앞으로 뻗으며 그녀에게로 가까이 다가가 칼을 횡으로 휘둘렀다.
그에 도양이 뒤로 물러난 순간 진예가 도움닫기 해 위로 뛰어오르더니, 정강이로 위도양이 머리를 차 냈다.
“……!”
갑작스러운 공격에 도양이 휘청이며 익재의 등에서 떨어졌다. 그러자 그녀를 태우고 있던 익재가 울었다.
“끼이익!”
진예는 그 소리를 뒤로하고 저도 위도양을 따라 뛰어내리면서 힘을 불어넣은 칼로 허공을 베어 내자, 칼에 맺혀 있던 흰 기운이 검선을 따라 퍼져 나갔다.
하지만 익재가 떨어지는 도양을 향해 날아와 그녀를 낚아채면서 공격을 무위로 돌렸다. 그리고 분노해 진예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가느다랗고 뾰족한 바늘 수백 개가 빗줄기처럼 진예를 향해 쏟아졌다. 동시에 그녀의 등 뒤, 발아래, 머리 할 것 없이 익재들이 달려들면서 퇴로를 차단했다.
멀리서 누군가 그녀를 간절히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진예는 긴장하지 않았다. 대신 칼을 거꾸로 잡아 제 뒤의 익재를 푹 찔렀다.
그러고 힘을 흘려 넣으니 익재가 그대로 터져 버리면서 검은 피와 썩은 살점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에 진예가 사이로 몸을 떨어뜨리며 바늘들을 피했을 때였다.
익재의 품에서 떨어져 나온 도양의 칼이, 진예의 목을 향해 질러 왔다.
카앙!
금속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진예가 제 칼로 도양의 칼을 쳐 진로를 바꾼 것이었다.
도양은 당황하지 않고 몸을 회전하며 제 왼쪽 손에 쥐인 검으로 반원을 그려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진예도 어쩔 수 없이 몸을 완전히 뒤로 빼게 되었다.
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진예의 앞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순간, 비어 있는 오른쪽에서 익재 하나가 입을 벌리며 튀어나왔다.
“끼아아악!”
귀청이 찢어질 듯한 소리와 함께 금방이라도 잡아먹으려 입을 쩍 벌리며 달려드는 놈이었다. 진예는 귀를 막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녀석의 목덜미를 아무것도 들지 않은 왼손으로 거칠게 움켜잡았다.
썩은 살이 물컹하게 잡히는 것에 잠시지만 인상을 찌푸린 진예가 힘을 넣자 닿은 부위에서부터 익재가 하얀 화마에 휩싸였다.
그것을 근처의 익재 쪽으로 집어 던지면서 진예가 또 다른 놈을 지지대 삼아 흐트러졌던 자세를 바로잡고, 어깨를 턱 디뎠다.
그러고 위도양 역시 익재 위에 올라탄 것과 저를 향해 오는 공격들을 확인하고는 주저 없이 몸을 날렸다.
익재들에게서 발산된 수십 개의 힘이 그녀가 있던 자리에 일제히 꽂히면서 뒤에서 고통을 못 견뎌 내지르는 익재의 끔찍한 비명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런 것이 진예의 집중력을 흐트러트리지는 못했다. 진예는 위도양과 검을 맞부딪치기 직전 끼어든 익재의 몸통을 세로로 갈라 버리며 그 사이로 보이는 위도양과 몇 합을 나누었다.
챙, 채앵, 키익!
허공에서 둘의 검이 맞대어지면서 금속성의 소리가 연신 울려 퍼졌다. 쌍검을 쓰는 도양에게 맞추다 보니 빠른 박자로 끊어 치게 되었다.
진예의 빠른 공격에 두어 걸음 물러나던 위도양이 근처로 날아온 다른 익재에게 갈아탄 때였다. 진예가 양손으로 검파를 쥐고서 그녀의 머리 위에서 칼을 힘껏 내리쳤다.
“……!”
쿠우웅!
도양이 그녀의 칼을 받아 내긴 했으나 거대한 파동이 일었다. 검기가 퍼지며 날카롭게 공기를 가르자 주변의 익재들이 뒤로 급히 물러났다.
발밑에 있던 익재가 추락하면서, 도양의 자세가 흔들리자 진예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발로 도양의 어깨를 밟으며 밀어냈다. 그리하여 완전히 무너진 자세를 확인한 진예가 도양의 등을 베어 냈다.
검 끝에 얕게나마 살을 가르는 느낌이 드는 동시에 도양의 입에서도 신음이 흘러나왔다.
“흐읏……!”
검로를 따라 붉은 피가 흩어졌다. 완전히 승기를 잡은 진예가 마침내 싸움을 끝내기 위해 도양의 몸을 가르려 했을 때였다.
검은 칼날이 그들 사이를 갈랐다. 화라락, 허공을 가로지르는 소리에 진예가 급히 자세를 바꿨다.
튕기듯이 뒤로 물러난 진예는 마침내 바닥에 착지했다. 발밑에서 지이익, 하고 모래가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
정신없이 싸우다 보니 어느새 진지 밖이었다.
진지 안에 군사들의 발이 묶여 있는 탓에 그녀 홀로 떨어져 수백 마리의 익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발이 땅에 닿자마자 진예가 뒤로 물러나니 예상대로 방금 전 있던 자리의 흙이 튀었다.
그리고 진예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크게 외쳤다.
“위도양!”
수많은 익재들 사이로 거대한 날개를 펼친 익재가 위도양을 또다시 낚아채 간 것이었다. 그 광경을 보면서 진예가 이를 까득 깨물었다.
그리고 쥐고 있는 검에 기를 불어넣어 그대로 가슴에서부터 다리 사이로 칼을 내려 허공을 갈랐다.
흰빛이 뻗어 나가며 검이 휘둘러진 경로에 있던 익재들이 본능적으로 도망쳤다. 그러지 못한 놈들은 베인 자리에서부터 빛에 타들어 가며 땅으로 추락했다.
갈라진 진형을 확인한 진예는 그 사이로 뛰어들어, 위도양을 필사적으로 보호하는 익재를 표적으로 해 달렸다.
그녀의 검이 비스듬한 반원을 그린 순간, 등을 보이고 날아가던 익재가 커다랗게 포효했다.
“끼아아아아아아악!”
마치 제 어미인 도양을 더는 괴롭히지 말라는 양 녀석이 몸부림치며 꼬리를 흔들자 주변에 수십 개의 검과 창이 만들어졌다.
그것들이 진예의 힘과 부딪치자 서로 소멸되어 사라지며 파동으로 땅이 흔들렸다.
“……!”
지진이라도 난 듯 발아래가 요동쳤다. 진예의 몸도 함께 휘청이는 사이 다른 익재들이 그녀를 붙들어 두려 달려들었다.
워낙 순식간에 펼쳐진 일이라 진예 역시 피할 때를 놓쳤다. 하지만 그때, 몇 놈의 목과 날개가 베어져 나가며 누군가 진예의 허리에 팔을 둘러 뒤로 확 끌어당겼다.
“……윽!”
균형이 흐트러지면서 바닥을 구르다가 몸이 쓸리는 소리가 들렸다.
진예를 감싼 이는 그녀가 다치지 않도록 온몸으로 그 충격을 받아 내면서도 신음 한마디 흘리지 않았다. 외려 아무렇지도 않게 금세 제 자세를 찾고, 그녀를 일으켜 세워 주었다.
“무사하십니까, 폐하?”
그러고 진예를 보호하듯 앞으로 나선 이는 위장군이었다. 그의 더 앞에서는 황제의 다섯 중랑장들이 나서서 익재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진예는 모르는 사이 거칠어진 숨을 가라앉히며 답했다.
“괜찮다.”
그러면서 멀어지는 위도양을 바라보았다. 익재의 등에 탄 도양의 시선도 진예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저절로 욕지거리가 목구멍까지 솟았다.
‘제길.’
때에 맞춰 위도양이 탄 우두머리 익재가 낮게 울음소리를 냈다. 그러자 진예의 앞에 있던 익재들은 물론 진지에서 그녀의 군사들과 싸우던 녀석들도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끼우욱.”
“끼익!”
새 떼처럼 선두로 나아가는 익재의 뒤로 시커먼 무리들이 뒤따랐다. 활공하며 물러가는 그것들을 보면서 진예가 분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완전히 놓쳤군.”
심지어 위도양에게 치명상도 입히지 못했다. 그러니 그녀가 이대로 물러나지 않을 것도 명약관화했다.
이런 식으로 찝찝한 결말이 날 줄은 몰랐다.
하여 짜증이 일려 하는데, 위장군의 침착한 목소리가 그녀의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래도 폐하께서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괜한 걱정이다.”
위장군의 염려 어린 말을 흘려들으며 진예는 피가 엉겨 있는 검을 한번 툭 털었다.
익재들을 베어 내면서 묻은 검은 피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검집에 제 검을 꽂아 넣은 그녀가 뒤돌아섰다.
멀리 입구가 부서진 진지를 확인한 진예가 위장군에게 짧게 물었다.
“아군의 피해는?”
“다행히 그리 크지는 않사옵니다.”
진예가 시선을 크게 끌어 준 덕분에 진지 쪽으로 온 익재는 생각보다 얼마 없었다.
황제가 직접 미끼 역할을 했다는 것에 위장군은 마치 제 책무를 다하지 못한 기분이 들어 마음이 무거웠지만,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이가 진예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진예는 굳어 있는 위장군을 확인했지만 격려의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부서진 진지 쪽으로 걸어가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그만 황도로 돌아가야겠다.”
“회군을 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니, 좌장군을 비롯한 황제군이 이곳 한수에 주둔해 반란군의 진로를 막도록 조치한다.”
이대로 패잔병처럼 전군 철수를 명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황도에 해결해야 하는 문제도 있을뿐더러, 전장에서 황비를 잃었으니 그를 애도하는 기간을 가져야 마땅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진예는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애도라…….’
아직도 연무건이 죽었다는 사실이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심정과 별개로 이제는 한동안 그녀를 괴롭히던 어깻죽지의 고통도 가라앉은 지 꽤 지난 시점이었고, 그를 떠올릴 어떠한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기실 애도를 하려고 해도, 그의 시신조차 찾지 못했으니 여의치 않은 상황이긴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에게서 가락지라도 받아 둘 걸 그랬다.
밀어 대신 정적의 목을 가져온다더니, 정말로 목만 오고 그는 오지 않게 되었다. 이 무슨 우스운 상황인지.
심지어 그런 그를 죽인 위도양을 처리도 못 한 것엔 속이 좀 쓰렸다.
생각 끝에 진예가 씁쓸한 웃음을 지었을 때였다. 위장군이 그녀의 안색이 썩 좋지 못한 것을 보고 걱정스러워하는 어투로 물었다.
“폐하, 어디가 편찮으십니까.”
“……아니다.”
진예가 대답하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익재들이 뒤덮고 있을 때는 어두워도 그저 그렇구나 했는데, 진짜로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궂은비가 쏟아지면 땅이 질척해질 터이니, 황도로 돌아가는 길이 썩 순탄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 * *
솨아아아아아…….
계곡물이 흐르는 소리에 빗소리가 더해지니 제법 그 소리가 거칠었다.
미마이는 쪼그려 앉아 바깥의 찬 공기가 밀려와 불빛을 흔드는 것을 불안하게 보다가, 문득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동굴 벽에 기대어 아직 자고 있는 무건이 보였다. 아무래도 내상이 너무 심했던 탓에 무건은 몸 상태가 오락가락하는 듯했다.
미마이는 그가 식은땀을 흘리는 것을 발견하고는 주저하다가 이마에 손을 댔다. 뜨거운 열기가 손을 타고 들어오는 동시에, 무건이 꾸고 있는 악몽 또한 제게 밀려들어 왔다.
며칠간 무건은 계속 비슷한 맥락의 꿈만 꾸고 있었다. 전부 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려지는 꿈이었다.
개중에는 동조 현상이 끊어질 당시에 꾸었던 그 ‘실’과 관련한 꿈도 있었다.
미마이는 왜인지 죄책감이 든 탓에, 어깨를 흔들며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마마, 마마.”
그러자 무건이 낮게 신음 소리를 흘리더니 살며시 눈을 떴다. 희미하게 적갈색 빛이 감도는 눈동자가 눈꺼풀 사이로 살며시 드러났다.
피로감이 잔뜩 묻어 있는 얼굴로 무건이 눈을 굴려 제 시야가 닿는 곳을 확인하고는, 미마이와 눈길을 맞췄다. 그리고 갈라진 목소리를 입술 사이로 흘려보냈다.
“아직도 비가 오는 모양이구나.”
미마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걱정스럽게 동굴 밖을 바라보았다. 비는 어제부터 내렸지만 그칠 기세가 아니었다.
비 때문에 바깥에 나가기가 곤란해 먹을거리도 떨어진 상태였다.
다행히 잠시 그쳤을 때 미마이가 근처에 밤나무랑 오디나무가 보여 떨어진 열매를 주워 오긴 했지만 당연히 끼니로 때우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일단 차치하고 미마이는 무건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 아직 그의 몸에 힘이 제대로 돌고 있지 않았다.
미마이는 이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물었다.
“여전히 몸은 움직이기 힘드시죠?”
조심스러운 물음에 무건이 한 번 손을 까딱해 보더니 다시 축 늘어졌다. 하지만 미마이가 걱정하는 게 싫었는지 아이의 잡힌 손을 살며시 끌어당겼다.
그게 제게 기대라는 의미 같아 미마이가 머뭇거리다가 무건의 옆에 더 바짝 붙어 앉았다. 그러자 무건이 아이의 등을 토닥여 주며 안심시키려 애썼다.
“조금만 더 쉬면 괜찮아질 거야.”
거짓말.
굳이 생각을 읽지 않아도 무건이 거짓을 읊고 있다는 건 알았다. 그렇지만 미마이는 그의 다정함이 좋아 무건이 이끄는 대로 팔 안에 자리를 잡았다.
따뜻한 마음씨만큼이나 그의 품도 안락했다. 형이나 아버지 같은 사람이 있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며 미마이가 무건의 몸에 기대었다.
두근, 두근, 하고 무건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안정적으로 들려왔다.
‘다행이다…….’
살아 있다, 무건은.
어쩌면 제가 구한 첫 번째 사람일지도 몰랐다.
그동안 늘 누군가를 해치는 일만 해 왔었다. 화친왕의 밑에서도 죽기 싫어서 그랬다지만, 많은 악행을 저질렀더랬다.
지하실에 내려갈 때도, 제 손으로 가둔 익재들의 울부짖음을 들으면서 죄책감에 시달렸었다.
그 생각을 떠올리니 왜인지 우울해져 저도 모르게 불퉁한 표정이 지어졌다. 그러니 무건이 어깨를 쥐어 오는 손길이 느껴졌다.
“난 괜찮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
미마이가 고개를 들어 무건을 올려다봤다. 그러다 우물쭈물하며 물었다. 이런 말을 해도 될까, 속으로 자문하면서.
“그…… 꿈꾸지 않고, 자게 해 드릴까요?”
그에 무건이 미간을 살며시 좁히는 것을 보고 미마이가 흠칫했을 때였다.
“아니.”
무건이 짧게 대답하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미마이는 다시 살며시 저를 도닥이는 손의 감촉을 느끼고 다행히 그가 화나지는 않았음을 깨달았다.
미마이의 생각대로 무건은 미마이를 전혀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다.
어쨌든 미마이 덕분에 목숨을 구한 건 사실이고, 동조 현상을 끊은 것도…… 조서엽과 진예의 의지이지 아이의 탓이 아니었다.
그리고 동조 현상은 차라리 끊어지는 편이 나았다. 그녀와 목숨이 이어져 있다는 걸 아는 상태로는 아마 자신은 매 순간 최선을 다하지 못할 것이다.
그에겐 여전히 목숨을 건 도박이 필요했다.
다만 눈을 감을 때 이따금씩 실의 파도 속에서 헤매는 것은 괴로웠다. 서엽이 제 안에 심어 둔 의심의 씨앗 역시 제 꿈을 먹고 자라는 중이었다.
생각하니 또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려 오는데, 제 손을 꼭 쥔 미마이가 무건의 품에 더 파고들었다.
“그런 생각은 마마답지 않으셔요.”
그런 생각이라…….
뜬금없는 말이기도 했던지라 무건이 눈을 가늘게 떴다. 시선을 내려 제 손을 붙잡은 아이의 작은 손을 확인했다.
무건은 얼마 전부터 어렴풋이 느꼈던 제 짐작을 꺼냈다.
“손을 잡으면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건가?”
동조 현상을 끊기 전에도 미마이는 그의 손을 잡았었다. 아주 슬퍼하는 얼굴로.
하지만 미마이가 무건에게서 손을 슬쩍 떼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접촉면이 어디든 상관없어요.”
“네 능력은 정확히 뭐지?”
“약간의 예지……. 그리고 소리를 들어요.”
물으면서도 아마 대답을 안 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미마이는 의외로 순순히 알려 주었다.
무건은 다행히도 아이가 저를 신뢰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제가 미마이에게 해 준 것이 별것 없는데도, 아이는 그랬다.
상처가 많은 아이라는 걸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아차렸었다. 대단한 능력이 있다고 추켜세우는 화친왕의 말과 달리 미마이는 자신감이 하나도 없어 보였으니까.
미마이는 세찬 빗줄기가 후두두 떨어져 내리는 동굴 밖을 바라보며 부연 설명을 했다.
“저기 앞에 있는 나무의 소리도, 풀잎들의 소리도 들어요. 지나가던 개가 짖으면 무슨 뜻인지 저절로 알게 돼요.”
익재의 소리가 들리고,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무건이 작게 웃으며 단평을 내놓았다.
“세상이 시끄럽겠네.”
“하지만, 많은 걸 알 수 있어요.”
“꿈을 꾸게 하거나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도 말이지?”
정곡을 찌르는 말에 미마이가 흠칫했다. 그 능력을 이용해서 그를 곤란에 빠트린 것이니 당연했다.
미마이가 눈치를 살피듯 조심스럽게 올려다보자, 무건이 아이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리며 미소 지었다.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는 듯이.
미마이는 무건의 다정함이 담뿍 담긴 웃음에 목 부근이 달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투정부리고 싶은 마음이 일어 혼잣말하듯 투덜거렸다.
“오래전에 알게 된 진리 같은 거예요.”
“나보다 더 복잡하게 사네.”
무건의 감상은 간단했다.
아이의 인생은 너무 복잡하게 꼬여 있었다. 자신 같은 평범한 사내의 삶보다 훨씬 더.
어쩌면 더 오랜 기간을 세상에 살아온 자신조차 그 실체를 예상하지 못할 만큼 말이다.
“화친왕이 전에 나한테 그랬었지. 천하를 얻을 수 있게 하는 힘이라고.”
“…….”
“힘들었겠구나. 그래서 너무 일찍 어른이 된 거야.”
미마이는 여러모로 아이답지 않았다. 행동도, 생각도.
무건은 제가 열 살 무렵에 뭘 했었나 떠올리다가, 그만 푹 웃었다. 바지가 다 젖도록 남의 집 논에서 오리랑 뛰어다니다가 벼가 다 꺾였다고 혼난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고작 그 정도 나이일 텐데. 아직 성인이 되지 않았을 게 분명한 아이는 너무 철이 일찍 들었다.
그것이 안타까워진 무건이 아이에게 약속했다.
“내, 황궁으로 돌아가게 되면 꼭 네 자유를 찾게 해 주마.”
아마도 아이가 간절히 원하고, 또 제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미마이가 놀란 것은 그의 약조 때문이 아니었다.
“황궁으로…… 돌아가실 거예요?”
“그러지 않으면?”
무건의 반문에 미마이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왜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냐는 의미가 담긴 반응이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세상 사람들은 연무건이 죽었다고, 적어도 실종됐다고 믿을 것이었다.
공식 석상에도 아직 모습을 드러낸 적 없으니 이대로 숨어 살아도 아무도 모를 터.
그럼 자신을 못마땅해하는 이들로부터 벗어나려 하는 게 오히려 일반적인 선택이리라고, 미마이는 생각했다.
그러나 무건은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양 덧붙였다.
“내 자리는 폐하의 옆이다. 살아 있는 한 바뀌지 않아.”
그야 명인자인 이상, 가령 둘 사이에 아주 깊은 교감이 일어났다든가 동조 현상이 생겼다든가 아이를 낳았다든가 하는 식으로 인연이 완성되지 않는 이상에야 명인의 끌림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의 차이는 있는 법이고, 누군가는 정말 죽기 직전에야 만나는 경우도 있었다.
완벽히는 어려워도 명인자를 피하려고 작정하면 어느 선에서 가능은 하다는 의미다. 굳이 머리를 들이밀 필요 없이.
게다가 미마이가 보기에 무건은 이미.
‘돌아갈 필요까지는 없어.’
그러니까 이건 명인의 끌림 같은 것이 아니라 오롯이 무건의 의지였다.
아니면 이것 또한 명인의 장난질일까. 꼬여 버린 그들의 운명처럼?
만물의 속삭임들을 들으면서 세상의 많은 이치들을 깨우쳤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의 관계만큼은 미마이도 뭐라 섣불리 결론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무건과 진예는 말하자면 궤도 이탈자들이었다.
아이는 무건이 그 가혹한 운명 속에서 더는 다치지 않았으면 했다.
제가 이런다고 해서 과연 무건의 앞길이 달라질까 하는 의문은 들었지만서도.
“하지만, 조 후께서…….”
미마이는 말끝을 흐렸지만 전달하려는 의미가 무엇인지는 명확했다.
조서엽이 당신을 죽이려 할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제아무리 황제의 유일한 비라고 해도 무건은 아직 조서엽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천운이 따르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젠 정말 ‘다음’이라는 걸 상정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건은 물러설 의향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그러니까 그 새끼를 치려면 나도 대단한 것을 들고 가야 하겠지. 그 대단한 사내를 끌어내릴 만한 힘을 얻어야 하니.”
조서엽을 떠올리는 무건의 눈빛은 여느 때와 확연히 달랐다. 제 앞의 흔들리는 불빛을 바라보는 그의 눈엔 살기라 이름 붙여도 좋을 만한 기운이 감돌았다.
곧 쓰러지고 부서질 것 같은 상태인 그를 지탱해 주는 것은 진예를 향한 맹목만이 아닌 듯했다.
대체 무슨 계획인지 몰라 미마이는 그의 손을 잡고 마음을 읽어 내고 싶었지만, 이미 제 능력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밝혔으니 차마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무건의 계획이 썩 일반적인 것은 아니라는 건 명백했다. 자신보다 강한 자를 상대하기 위한 패라는 것이, 어디 하늘에서 불쑥 떨어지는 것은 아닐 테니까.
듣는 미마이가 더 긴장한 탓에, 조심스러운 물음이 나갔다.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에 무건이 미마이에게 어딘지 죄책감 어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미안하지만 날 한 번만 더 도와줄 수 있겠니?”
“무엇을?”
“읍주로 가야겠다.”
황궁이 아니라 읍주?
미마이의 머릿속에 의문이 가득 차올랐다.
무건은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제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기운이 없어 떨리는 손에 힘을 넣어 주먹을 쥐었다.
단순한 동작이었지만 무건은 그로 인해 제가 진정 살아 있음을 느꼈다.
위도양의 칼이 제 목에 들이대진 순간엔 진짜로 끝이라 생각했었다. 화친왕의 명인자인 그녀가 자신을 놓칠 리 없으니까.
이후 절벽에서 떨어지는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자신이 죽고 미마이가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제 역할을 다 한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할 수 있어요……!〉
떨어지는 아이를 낚아채 품에 안은 순간 미마이가 다시 작은 칼 한 자루를 꺼내 그에게 쥐여 주었다.
동조 현상으로 옮겨 왔던 진예의 능력이 무건에게 남아 있을 거라고 했다. 미마이가 건넸던 두 알의 환약은 그걸 위한 포석이었다고.
하여 그 힘으로 절벽을 무너뜨리고, 떨어지는 커다란 바위들을 디딤돌 삼아 조금이나마 반동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남아 있던 익재 몇 놈이 그 혼란한 상황에서 덤벼 주기에 죽기 직전까지 퍼덕이는 녀석들을 제물로 해서 살아남았다.
그야말로 모든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천운이라고밖에는 생각이 안 되었다. 이쯤 되면 차라리 새 생명을 얻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겨우겨우 살았으니 제 삶을 소중히 여기면서 얌전히, 조심스럽게 산다?
무건의 성미에는 전혀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보다 그에게 어울리는 건.
“내 쓸모를, 증명해 내야 하니까.”
한 번 더.
기회가 왔으니, 당연히 잡아야 했다.
〈넌 버려졌다, 연무건.〉
조서엽이 한 그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심지어는 진예라면 그럴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마음 한구석에서는 정말로 못난 마음이 솟았지만.
“폐하만이 아니라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말이야…….”
이번에야말로 그녀가 자신을 내칠 수 없게 연무건의 유일무이한 가치를 증명해 낼 터였다.
기꺼이, 제 목숨을 담보해서라도.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