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화친왕부에서 지하실 두 칸의 존재가 확인되었지만 더는 진전이 없었다. 며칠을 허비한 이들은 결국 2인 1조로 나누어서 다른 지하실 입구를 찾기 위해 삼경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리면 흩어졌다.
삼경이 지나면 통행금지를 잘 지키는지 감시하는 성관들이 순찰을 하는 탓에 그들은 몸을 숨기며 돌아다녀야 했다. 아무에게도 들켜선 안 된다는 환 황제, 진예의 은밀한 명을 받은 탓에 당당하게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그렇게 또 성과 없이 며칠이 지난 뒤였다. 지하실의 입구는 그야말로 어디에 있을지 알 수 없기에 황도 내의 인적이 드문 산속이나 풀숲은 물론이고, 비어 있는 건물이나 폐가에까지 들어가 열 수 있는 것은 모두 확인했다.
그리고 어느 한 조가 마침내 지하실의 또 다른 입구를 발견했다. 황궁과 화친왕부의 중간쯤이라고 할 수 있는, 낮이면 장이 열리는 어느 거리의 낡은 폐가에서였다.
그것을 발견한 금위가 동료를 손짓해 불러 신음처럼 말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만큼 바닥의 결에 맞춰서 잘도 입구를 감춰 놨다.
“평범한 데 있을 것 같지는 않더라니…….”
“이게 그 입구가 맞긴 한가?”
둘은 바닥을 들어 올려 입구를 열고도 한참을 그곳을 살폈다.
그 입구는 정사각형 모양에 몸을 세워야만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아주 작은 개구멍같이 생겼다. 그리고 내려갈 수 있도록 손잡이를 설치해 둔 것까지.
진예의 비인 연 귀인이 그림을 그리고 설명을 붙여 둔 바로 그 모습과 일치한다는 걸 알아차린 이들의 표정은 곧 심각해졌다.
깊은 곳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끼이이이…….
끼…… 이이.
과연 살아 있는 생물에게서 나는 소리가 맞는가 싶게 오싹한 소리였다. 마치 금속이 긁히는 듯한 소리.
그들은 그 의문의 소리를 한참 듣다가 서로 눈빛을 나누었다. 한 사람은 바깥에서 기다리고, 다른 한 사람은 지하로 내려가 상황을 살피기로 했다.
용감하게도 입구를 발견한 이가 지하실로 천천히 내려갔다. 작은 불빛을 피워 어두컴컴한 그곳으로 내려가면서 잔뜩 긴장한 그는 이내 계단이 이어지는 것을 보고 환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로 지하실과 이어지는 곳이라 확신한 그의 얼굴엔 드디어 임무를 완수했다는 만족감이 가득했다.
그런 그는 계단을 내려가기 전에 자신이 내려왔던 곳을 올려다봐 아직 입구가 열려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점점 깊은 곳으로 향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입구를 열었을 때부터 나던 소리는 점점 커졌고, 그는 이내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살아 있는 것의 소리였다. 바로 익재의.
그것을 깨달은 사내의 등허리를 타고 소름이 쫙 내달렸지만, 긴장한 것도 잠시였다. 그는 이제 지하실로 향하는 통로에 진입해 벽을 더듬어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지하실 입구에 도착했을 때, 그는 많은 수의 익재들을 발견하고 얼어붙었다. 철창 안의 익재들이 썩은 눈으로 지하실에 오랜만에 발을 들인 인간에게로 일제히 고개를 돌리며 울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끼익, 끼우욱.
끼아아아!
몇몇은 철창 안에서도 날개를 묶인 채 천장에 매달려 입을 잔뜩 벌리며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그에 들어올 때의 용감함을 잊어버린 사내는 손을 달달 떨었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철창 안에서 마침 철퍽, 하는 소리를 내며 막 태어난 새끼가 바닥에 떨어지자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이곳은 미친 곳이었다.
그는 뒤돌아서 본인이 왔던 길을 달려가기 시작했다. 통로를 지나 후들거리는 다리로 재빨리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수직으로 떨어지는 입구로 향하는 곳 아래 섰을 때, 그는 입구가 닫혀 있는 것에 이상함을 느꼈지만 일단 위로 열심히 올라갔다. 지하실과 거리가 꽤 멀어졌음에도 여전히 그의 온몸은 떨렸다. 손잡이를 잡고 올라가는데도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애를 먹었다.
하지만 그는 입구를 밀어 밖으로 나가려 했을 때 절망감을 느꼈다.
입구가 열리지 않았다.
덜컹, 덜컹, 덜컹, 쾅, 덜컹, 쾅, 덜컹.
밖의 동료에게 열어 달라 소리쳤지만 문은 꼼짝을 하지 않았다. 그에 사내의 목소리가 더 크고 절박해졌다. 손으로 문을 두드리고, 밀고, 그러면서 다시금 문을 열라고 애원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무서운 침묵은 계속되었다.
한편 입구 위에서 기다리던 금위는 정체불명의 누군가에게 이미 둔기로 머리를 맞고 쓰러진 뒤, 지익 직 끌려가고 있었다.
폐가라고 생각했던 집의 방문이 열리고, 마치 집어삼켜지듯이 짙은 어둠에 잠식되어 버렸다.
* * *
타탁, 타닥.
막사의 입구 근처에 장작을 쑤셔 넣어 피운 불에서 불티가 튀었다. 몇몇 군사들은 그 근처에 서서 지휘부 막사를 지키는 중이었다.
황도에서 출발한 2만 군사들의 진군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열흘을 꼬박 행군해 상방주까지 닷새 거리에 있는 한수 지역에 도착해 있었다.
한수 지역은 위도양의 반란군이 둥지를 틀었던 비래와 익재의 서식지 중 하나인 상방주로의 갈림길이었다. 이제 이곳에서부터 진예가 이끄는 1만 5천의 군사와 표기장군이 이끄는 5천의 군사가 갈 길을 달리해야 했다.
그리고 그곳에 중간 진지를 세워 지휘부 막사에 장군들을 모아 둔 채 보고 및 회의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밤늦은 시각이지만 진예는 아직 무장을 채 풀지 않고 가장 상석에 앉아 묵묵히 지도를 보았다. 그녀의 표정엔 큰 전투를 앞둔 사람답지 않게 긴장감이라곤 없었다.
지도 위에는 깃발 모형이 총 네 군데에 올라가 있었다. 비래에는 검은 깃발, 황도에는 붉은 깃발, 한수에는 노란 깃발과 파란 깃발이었다.
여러 장군들 중에서도 가장 앞에 앉아 있던 표기장군이 일어서서 우선 황도의 붉은 깃발을 가리키며 설명을 시작했다.
“타 지역에서 군사들이 이동해 대략 1만가량 황도에 모였사옵니다.”
본래 진예는 3군의 군사를 이끌고 비래로 향하려 했으나 위도양이 일찍 설치기 시작하면서 계획을 바꿨다. 1만 5천을 비래에, 5천은 상방주에 분배하고 황도에 대장군과 함께 1만을 남겨 이후의 전개에 따라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하거나 후속군으로 쓸 예정이었다.
그러니 황도에 모였다는 1만의 군사는 일단 그녀의 의도에 맞게 분배된 셈이었다. 다만 표기장군이 비래에 있던 검은 깃발을 남쪽으로 옮겼다. 여기서부터가 문제였다.
“그리고 비래에 있던 정위 백과 화도 상단의 위도양이 조금씩 남하하고 있는 상황이옵니다.”
그가 머뭇거리며 덧붙이지 못하는 말을, 듣고 있던 진예가 차가운 목소리로 대신 했다.
“그자들이 익재들을 이끌고 민가를 부수고 있다고?”
그러자 이번엔 표기장군의 맞은편에 앉은 좌장군 백악이 답했다.
“공교롭게도 그러하옵니다, 폐하. 벌써 파괴된 마을만 10여 곳이 넘습니다. 하여 그 지방의 태수인 교교호 백이 2천의 군사를 보냈습니다만…… 전멸했다 하옵니다.”
“위도양의 남하는 계속되고 있나?”
“예, 폐하.”
진예의 눈이 가늘어졌다.
비래 지역은 환 제국의 영토 중에서도 거의 최북단에 가깝게 위치한 곳이었다. 그리고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예로부터 천혜의 요새와 같은 지역이었고.
다만 추위와 지형 때문에 오히려 보급로 확보가 어려운 탓에 우선 그곳을 고립시키고자 했었다.
그런데 점점 남하하고 있다고 하니 자신이 상대의 움직임을 잘못 예측했음을 깨달았다. 아마 일반적인 ‘인간’의 군대라면 유효했을 텐데, 위도양이 이끄는 녀석들은 인간을 잡아먹는 괴물이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움직이며 민가를 공격하고 있다는 건…….
‘양민들 따위는 알 바 없다 이것이냐.’
진예는 이를 꽉 물며 다시금 지도를 확인했다.
위도양이 현재 있는 지역에서 남서쪽으로 이동하면 황도로 향하는 길이 열린다. 하지만 그 앞에 아주 거대한 산맥이 가로질러 있다.
그것을 타고 오르내릴 가능성도 분명 존재하지만 왜인지 그럴 것 같지 않았다. 황도로 오면 제아무리 익재가 있다고 해도 당연히 힘든 싸움이 펼쳐질 것이다. 그것을 위도양이 모를 리는 없을 터.
동쪽으로 가면 오히려 더 평탄한 길이 있기에, 반대쪽이지만 그곳에 더 눈이 갔다. 예의 동쪽 지역은 표기장군의 군대가 향하는 상방주였다.
“폐하,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고민이 깊어진 탓에 진예가 입을 열지 않고 있자, 표기장군 장첨이 먼저 그녀의 의중을 물어 왔다.
“우선 교교호에겐 더는 군을 파견하지 말라 이르거라. 그리고 이곳들에 사는 백성들은 모두 남쪽이나 북쪽으로 대피시키거라.”
진예가 쥐고 있던 지휘봉으로 현재 위도양이 있는 지역에서 상방주까지 일직선을 그리며 말했다. 그것을 보며 표기장군이 의문 어린 표정을 지었다.
“정위 백과 위도양이 상방주로 향할 것이라 보시는 것이옵니까? 하면 여기서 군을 나누는 계획은…….”
“짐은 여전히 비래로 향할 것이고, 인원 배분 또한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자 지금껏 조용히 있던 진동장군 조돈이 무거운 어조로 물었다. 아무래도 진예의 계획이 이해되지 않은 탓이다.
“하나 이리되면 저희 군이 허탕을 칠 가능성도 없지 않을 듯 보입니다, 폐하. 이미 정위와 위도양은 비래성을 버린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진예는 고개를 저었다.
“비래성을 버렸을 리는 없다. 본인들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요새를 쉽게 내팽개칠 리가 있나. 만에 하나 그렇다고 해도 위도양은 짐이 있는 곳으로 쫓아오게 될 것이다.”
진예의 말에 표기장군도 조금 난처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봐도 상방주로 향한다면 거리가 꽤 있는 편이라 비래로 되돌아갈 가능성은 정말로 희박해 보였다. 그래서 장첨은 저도 모르게 따지는 투로 묻고 말았다.
“어찌 그리 확신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러자 진예가 의자의 등받이에 푹 기대며 웃었다.
“위도양이 절대 뺏기기 싫어할 패가 있기 때문이지.”
위도양이 정말로 상방주로 가든 혹은 황도로 가든 큰 상관은 없었다. 단지 그녀가 이동하는 동안 황제군이 먼저 비래로 향해 그곳을 점령하고, 위도양을 끌어들이면 되는 일이었다.
진예는 여태껏 그녀의 옆에 가만히 서서 회의 내용을 듣고만 있던 조서엽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서엽이 재빨리 한 발짝 멀어지며 고개를 숙였다.
“하명하소서, 폐하.”
“그대가 가지고 있는 경로로 소문을 퍼뜨리라. 황제군에 서역인 아이 미마이가 있다고, 그리고 그 아이가 짐의 지극한 총애를 받고 있다고 해 볼까. 전장에서 매일매일 짐의 막사에 드나들고 있다……. 그 정도의 소문이면 적당하겠군.”
서엽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소문의 내용이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반응을 지켜보던 진예가 짧게 덧붙였다.
“그리고 황제군의 선봉에서 계속 흰 연기가 오르더라, 하는 얘기 또한 함께 흘리거라.”
그제야 서엽이 확답을 내었다.
“명 받드옵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회의를 파할 것을 선언한 진예가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밖으로 나가자 막사 앞의 군사들이 잔뜩 긴장해 있는 것이 보였다. 진예는 그것을 못 본 척하며, 자신의 막사로 향했다.
이제는 봄도 반쯤 지나왔지만, 황도보다 북쪽이라 그런지 저녁에는 제법 쌀쌀했다. 하여 서엽이 말없이 그녀의 갑옷 위로 망토라도 둘러 주려 했을 때였다. 무언가를 발견한 그의 손이 멈칫했고, 서엽의 눈이 오른쪽으로 향했다.
오른쪽, 그곳은 미마이의 막사였다.
방금 전 귀인 연무건의 그림자가 비친.
한데 그것을 본 것은 진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서엽을 한번 곁눈으로 힐끗하고는 농을 던졌다.
“이거 황제가 아니라 귀인과 추문이 나게 생기지 않았느냐.”
하지만 서엽은 굳은 얼굴로 심각한 말소리를 냈다.
“……살펴보겠습니다, 폐하.”
그러고는 미마이의 막사로 다가간 그가 단숨에 막사의 입구를 가리고 있는 천을 젖혀 버렸다.
사나운 손길로 시야를 가리고 있던 걸 걷어 내며 막사 안으로 들어선 서엽은 전장에서까지 무건의 모습을 보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좁은 막사 안, 침구 위에 미마이와 무건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미마이는 아마도 방금 배급받았을 음식을 먹는 중이었고, 무건은 아직 무장을 풀지 않은 채 그런 아이를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몹시도 거슬리는 그 광경을 발견하고 서엽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예서 무얼 하고 계십니까, 귀인마마?”
“조 후.”
서엽과 눈이 마주친 무건이 마침 잘됐다는 듯이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고 서엽에게 오려는 듯해 보였으나, 미마이가 고개를 들어 어디 가냐는 얼굴로 무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아이의 회색빛이 감도는 검은 눈동자가 자신에게 닿자 무건이 아이의 머리를 슥 쓰다듬어 주었다.
그의 손이 미마이에게 닿는 것을 본 서엽이 순간 쥐고 있던 칼을 더 꽉 움켜쥐었다. 그것을 보고 서엽이 단단히 화났다고 생각한 무건이 변명을 입에 올렸다
“……배급을 못 받아서 서성거리고 있길래 도와준 것뿐입니다.”
다른 사람이 그런 호의를 베풀었다면 순순히 고맙다고 말했을 서엽이었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말이 곱게 나가질 않았다.
“귀인마마께서 어찌하여 그리하셨단 말입니까?”
반문하는 목소리에는 명백히 빈정거림이 들어 있었다. 말속의 가시를 느낀 연무건이 눈썹을 들썩였다.
“데려온 사람이 아니면 이런 곳에서 어린아이를 돌봐 주는 사람이 없을 터이니.”
그러게 끼어드는 게 싫으면 알아서 잘 챙기지 그랬냐는, 은근히 힐책하는 말에 서엽이 그의 앞으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러곤 낮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앞으로 서로 엮이지 않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귀인마마나 저나. 한데 이런 짓을 하는 이유가 뭡니까.”
“조 후와 상관없이 한 일입니다.”
“미마이는 제 사람입니다.”
“…….”
서엽의 딱 자르는 말에 무건이 고개를 돌려 미마이를 내려다보았다. 다행히 화친왕부에서보다는 취급이 나아졌는지, 아이는 그 짧은 사이에 확실히 살이 올라 있었다.
다만 아무리 봐도 저런 아이를 전장으로까지 데려와야 하나 하는 의문점이 남았다. 물론 서엽이 진예의 허락 없이 대동하지는 않았겠지만…….
한데 문득 미마이가 손을 뻗더니 무건의 바지 밑단을 잡고는 끌어당겼다. 그에 서엽과 무건의 표정이 서로 다른 의미로 굳었다.
무건이 서엽의 눈치를 보며 주춤하다가 몸을 돌려 미마이의 앞에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왜?”
짧게 묻자 미마이가 자신의 옷 안쪽을 뒤적거리더니 주머니 하나를 꺼낸 뒤 무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무건은 그게 손을 내밀라는 의미임을 알아차리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미마이의 돌발 행동은 미리 이야기가 된 부분이 아니라 서엽도 그 상황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주머니에서 나온 물건은 동글동글한 모양의 환약 두 알이었다. 영문 모르고 받아 든 무건이 그것을 들여다보자 미마이가 입을 열었다.
「위기가 찾아왔을 때 드세요.」
다만 회백국의 말이라 무건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해서 서엽을 올려다보니 불친절한 어조로 해석해 주었다.
“위기가 있을 때 드시랍니다.”
선무당 같은 말에 무건은 잠깐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미마이는 화친왕이 그리 자신만만하게 모든 것을 꿰뚫고 조종할 수 있는 아이라 밝혔었다. 이런 걸 건네는 데는 뭔가 이유가 있으리라 여겼다.
무건은 옷 안쪽에 넣은 뒤 이내 도로 일어섰다. 그러자 서엽이 비켜서며 천막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러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무건은 걸음을 멈칫했다. 진예가 미마이의 막사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궁에서와 달리 무거운 갑옷을 차려입고 노란 망토를 걸쳤다. 하지만 위화감 하나 없이 여전히 위엄 있는 모습이었다.
서엽을 보고도 진예가 왔으리라곤 예상 못 한 무건은 그녀의 등장에 난처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황성을 떠나오기 전 남문에서 한번 눈을 마주친 이후, 행군하는 내내 진예는 무건에게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사 주변을 돌아다니며 보초를 서던 병사들도 전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인 모습을 확인한 무건은 즉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니었다.
“홍복을 누리소서, 대환 황제 폐하.”
“그래, 연 귀인. 짐의 비가 남의 막사를 함부로 드나드는 모습이 그리 정숙해 보이진 않는 듯한데?”
“심려 끼쳐 드려 송구하옵니다.”
무건의 순순한 모습을 눈 밑으로 내려다보고는 진예가 훗 웃었다. 보내 놓은 사부들이 예를 가르치긴 했던 것인지, 단순히 보는 눈이 많기 때문인지 고분고분해진 연무건이 낯설었던 탓이다.
그러고 보면 연무건은 볼 때마다 조금씩 바뀌는 것 같았다. 처음엔 마냥 건방지고 무모하기만 하더니.
진예는 쓸데없는 감상을 떠올리며 별말 없이 제 막사 쪽으로 발을 돌렸다. 그에 무건은 진예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눈빛을 가라앉혔다.
내일이면 서로 갈 길이 달라지니 마지막으로 몇 마디 나누고 싶었는데, 역시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한데 진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따르고 무얼 하는 건가, 짐의 비는.”
“……!”
무건이 흠칫 고개를 들자 진예가 꾸짖는 소리를 냈다.
“눈치가 없는 것이냐.”
“아닙니다, 따르겠습니다.”
서둘러 일어난 그가 진예를 뒤쫓아 금위들이 둘러싸고 있는 그녀의 막사로 들어갔다.
진예는 먼저 막사 한구석에 비치된 탁자 앞 의자에 앉아 잔뜩 조인 갑옷을 살며시 풀었다. 그제야 조금 숨통이 트였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쉰 그녀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 몰라 열 걸음쯤 떨어져 서 있는 무건에게 시선을 주었다.
“평소대로면 이미 앞으로 와서 손이라도 잡았을 놈이 왜 그러고 있느냐.”
“……밖에 듣는 귀가 많지 않습니까.”
“짐은 존중해 주려는 의미다?”
“가까워지면 못 참을 겁니다.”
“결국은 짐승 새끼라 이거군.”
“…….”
피식 웃음을 흘리며 진예의 적나라한 말에 무건이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진예는 손을 한 번 까딱였다.
“그래도 가까이 와 보거라, 무건아.”
작호가 아닌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말에 놀란 무건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한동안 대꾸를 하지 못하고 있다가 입을 꾹 깨물며 앞으로 가 무릎을 꿇었다.
그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진예가 장갑을 벗고는 얇은 손가락으로 그의 턱을 받쳐 올렸다. 눈이 마주치자 무건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진예가 중얼거렸다.
“쓸데없이 긴장을 하는구나. 전장의 분위기에 압도당하기라도 한 것이냐.”
“그런 것이 아니오라, 결의가 흐트러질까 그렇습니다.”
그답지 않게 잔뜩 긴장하여 하는 대답이었다. 진예가 묵묵히 듣고만 있자 무건이 말을 이었다.
“혹여나 폐하의 곁을 떠나기 싫어질까 봐.”
진예로서는 연무건도 참는 것이 있다는 점이 신기했다.
이 사내는 아무것도 눈치 보지 않을 줄 알았다. 첫 만남부터 기어오르던 모습을 생각하면 이렇게 고분고분한 편이 오히려 특이하다 할 만했다.
그래도 여전히 간절한 연무건의 눈빛이 부담스러워진 진예가 그의 얼굴을 놓고는 탁자 위로 시선을 주었다.
그곳엔 환 제국의 전 국토를 그린 지도가 있었다. 진예는 비래를 포함해 익재의 서식지 다섯 곳을 표시해 둔 그 지도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일러 둘 것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짐은 이미 이전 전쟁에서 익재와 수많은 전투를 치렀었다. 한데 다섯 개의 서식지가 남아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
물으면서 진예는 그 당시의 상황을 떠올렸다.
당시 환 제국 곳곳에 있던 익재의 서식지를 황도의 동쪽에서부터 시작해 비교적 작은 규모의 서식지부터 쓸어버렸다.
다행히 성공한 전쟁으로 회자되고 있지만 실상 수많은 희생이 따랐으며, 오랫동안 익재들이 살아왔던 그 황폐한 땅을 복구하는 데도 이후에 많은 재원을 쏟아부어야만 했다.
그리고 이 다섯 곳을 손에 넣지 못한 건…….
무건은 고개를 흔들며 솔직하게 답했다.
“알지 못합니다. 이전의 전, 나라의 큰일보다 제 밥 한 끼가 중요했던 평민이었으니.”
“다섯 곳의 경우 짐의 군사가 도착하기 전에 선발대가 전멸하거나 버티지 못하고 회군한 경우였다.”
다른 서식지들에 비해서 익재들의 수가 월등히 많았다. 더불어 읍주의 경우 최초의 익재라 알려진 존재가 사령관 역할을 하며 그 익재들을 통솔했다.
선발대로서 읍주로 출발했던, 무려 3천의 군사의 피가 그곳에 뿌려졌다. 선발대 전멸 소식은 군사들이 사기를 한꺼번에 깎아 먹었다. 더는 진군할 수 있는 사정이 아니었다.
그런 사정으로 남은 서식지가 지금의 다섯 곳.
자신이 환의 황제로 있는 동안, 언젠가는 다시 그곳으로 향하리라 마음먹었었다. 그녀의 예상보다는 시기가 훨씬 앞당겨지긴 했지만.
그래도 이번엔 무건이 있으니 적어도 상방주만큼은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진예는 고개를 든 채로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무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알겠느냐. 그곳들에 그대가 짐을 대신하여 대환의 깃발을 꽂아 넣으러 가는 것이다.”
무건이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반드시 승리해서 폐하께 모든 영광을 바치겠습니다. 다만…… 갑자기 이런 말씀을 어찌하시는 겁니까.”
무건의 물음에 진예는 답을 내주지 않았다. 무건은 답을 채근하는 대신 다른 질문을 더했다.
“입을, 맞춰도 되겠습니까.”
진예는 말없이 그의 앞에 손등을 내밀었다. 앞으로 오래 못 만나니 깊은 입맞춤이라도 해 줄 줄 알았던 무건은 역시나 제 기대를 완벽하게 채우기엔 요원하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이 때문에 더 안달이 나 버린다는 걸, 진예는 결코 모를 터였다.
조금 모자랄 정도로 채워지니, 그 간극을 메우고 싶어서 오히려 갈증이 점점 더 심해졌다.
그러나 지금은 이 정도가 적당하다.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며 무건은 내밀어진 진예의 손을 잡고 손등 위에 입술을 내렸다.
눈을 감고 그녀의 체온을 오롯이 입술로만 느꼈다. 입에서 쏟아 내는 말은 늘 차갑기만 한 진예이지만 손에는 온기가 존재했다.
손만이 아니다. 자신에게 안겨 있을 때의 진예는 너무 뜨거워서 항상 이성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평소엔 굽힐 줄 모르는 것처럼 한없이 꼿꼿한데, 제 품에 안기면 바르르 떨며 무너지는 몸. 움켜쥐어진 작은 손이 움찔하는 그 감각마저 사랑스러웠고, 맞닿은 살을 통해 전해지는 긴장감에 도무지 멈출 수가 없어졌다.
그녀의 안에 자신을 묻고 있으면 무엇도 상관없어졌다. 적어도 그때만큼은 진예는 환의 황제가 아닌 자신의 여인이었고, 연무건 또한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평민이 아닌 그냥 사내였다.
가슴 저리도록 원하는 그 무엇이 진예가 품은 그 작은 샘에 있었다.
들뜬 희열.
그리고 자유로움이.
중독된 것처럼 다시 찾을 수밖에 없다. 이게 바로 명인의 끌림인가 싶다가도, 단지 끌림 그 자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울림이 자신의 마음 깊은 곳을 흔들어 놓았다.
무건은 그때의 감각을 몸에 되새기며 그녀의 손에 입을 댄 채로 작게 중얼거렸다.
“이런 건 아무렇지 않게 허락하시면서, 마음은 내주지 않겠다 하시니 더 미치겠습니다…….”
“짐의 탓을 하고 싶은 것이냐.”
들려오는 진예의 말에 무건은 입술을 떼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전장에서 철갑옷을 두르고 있는데도 처음 만나 제 눈을 사로잡았던 그때 그대로, 진예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처음 만난 이후 제가 가슴속에 품은 작은 나비. 그것이 여전히 팔랑거리며 심장을 간질였다.
하지만 아마, 정말 아무 희망도 보지 못했다면 나비의 날개는 이미 부스러져 가루가 되었을 것이다.
“아니, 이라도 없었으면 지금까지 버티지 못했겠지요.”
“…….”
무건이 순순히 진예의 손을 놓고 담담히 제 할 말을 읊었다.
“하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일도 많으나 지금은 참고 다시 만났을 때 하겠습니다. 그때는 폐하께서도 저를 조금은 너그럽게 봐 주시길 기대해도 되겠습니까.”
“다시 만난다면.”
진예는 말허리를 끊었다가 말을 잇는 대신 손을 뻗어 무건의 뺨에 손을 댔다. 그러자 손끝이 닿은 부분에서부터 그녀의 체온이 퍼졌다. 무건이 움찔했다.
마치 마비가 된 듯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눈만 커다랗게 뜬 채로 말없이 진예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서 무슨 말인가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진예의 조곤조곤한 음성이, 조용한 막사 안에 울려 퍼졌다.
“짐의 유일한 비가 아니면 누구를 가까이하겠는가.”
그에 무건의 눈과 입술이 휘었다. 그가 제 뺨으로 뻗어진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얼굴을 손바닥에 부드럽게 비볐다.
어떻게 검을 잡나 싶을 정도로, 제 손바닥의 반절밖에는 안 되는 그녀의 손바닥에 연신 입을 맞추었다. 한데 그녀의 손가락이 돌연 무건의 턱을 받쳐 올렸다. 진예와 무건의 시선이 맞추어졌다.
그 순간 둘 사이에 짧은 정적이 스쳐 갔다. 잠시 후 입술이 맞닿았다. 진예가 먼저 입을 맞춘 것이었다.
“……!”
너무 놀란 나머지 반응을 못 하는 사이 진예의 혀가 입술 사이로 들어와 입 안을 휩쓸었다.
무건은 바보같이 반응하지 못하고 있다가 숨을 한 번 날카롭게 삼켜 내고는 두 손으로 진예의 어깨를 붙잡았다.
진예의 팔 역시 무건의 어깨에 걸쳐지면서 손이 뒤통수를 감쌌고, 그들의 얼굴이 엇갈리면서 접문이 더 깊어졌다.
녹아들 듯이 달큼한 입맞춤이었다. 무건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저도 모르게 입술을 떨었다.
그렇게 짧은 전율이 지나갔을 때, 아쉽게도 진예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다시 열리는 눈꺼풀 사이로 진예가 방금 전 입을 맞췄다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건조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무건은 안심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때까지 강녕하십시오, 폐하.”
“…….”
진예는 대답하지 않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에 무건이 푹 웃으며 물었다.
“인사, 안 해 주십니까.”
무건의 재촉에도 진예는 그저 제 손을 도로 허벅지 위에 올려 두며 무감한 작별 인사를 건넸을 뿐이었다.
“연 귀인 또한 짐에게 반드시 승전보를 가져오너라.”
“목숨을 바쳐서라도.”
무건이 일어나 진예에게 깊이 허리를 숙였다. 진예가 고개를 들라 할 때까지 꽤 오랫동안 자세를 펴지 않은 그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겨 막사 밖으로 물러났다.
나오는 순간 아쉬움에 깊게 한숨을 내쉰 무건이 몸을 돌리자마자 막사 입구 옆에 서 있는 서엽과 눈이 마주쳤다.
서엽이 먼저 말없이 꾸벅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본 무건은 살며시 미간을 좁혔다.
마음에 안 드는 사내다. 하지만 진예를 향한 그의 충정과 연모는 진심이라는 걸 무건은 잘 알았다. 제가 죽을지언정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진예를 배신하지 않을 자라는 사실 또한.
무건은 자신의 막사 쪽으로 발을 돌리며 그에게 당부했다.
“……손끝 하나 안 다치게 잘 지켜.”
그에 코웃음을 친 서엽이 그의 등 뒤에 대고 대꾸했다.
“마마께선 잘 모르시겠지만 평생을 해 온 일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놈보다는 잘할 거라는 빈정거림이 숨겨져 있었다.
무건은 그의 비꼬는 말을 들으며 속이 뒤틀리는 느낌을 받았지만 이내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 * *
서엽이 막사에 들었을 때, 진예는 여전히 탁자 앞에 앉아 지도를 보고 있었다. 한데 그녀의 옆모습을 본 순간 서엽은 발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어두운 막사 안에 여유롭게 앉은 진예는 평소 자신이 보아 왔던 자신의 황제가 맞았다. 그러나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에, 어딘지 쓸쓸해 보이는 눈빛은 왜인지 낯설었다.
서엽은 그것이 곧 그녀의 기분이 저조하기 때문이라는 걸 알아챘다. 지휘부 막사에서 위도양이 양민들을 학살하고 있단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그녀의 기분은 가라앉아 있는 듯싶었다.
연무건과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렇지만 막사 밖으로 언뜻 흘러나온 대화도 별로 특별하지 않았고, 연무건 역시 이상한 징후는 보이지 않았는데.
물론 그놈에게서 진예의 변화의 이유를 찾는 것 자체가 기분이 나쁘지만…….
진예가 원래도 그렇게 들뜨거나 하는 경우가 없긴 해도, 서엽은 미묘한 차이를 감지하고는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진예가 먼저 제 앞에 앉으라 손짓하며 말했다.
“잘 왔다, 조 후.”
서엽은 조심스럽게 의자를 끌어다 앉고는 진예가 보고 있던 지도를 확인했다. 앞으로 향할 목적지엔 붉은색으로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고, 지휘부 막사에서와 마찬가지로 깃발 모형이 각 부대의 위치에 올려진 채였다.
그것을 보고 서엽은 진예가 회의 때 이야기하지 않은 다른 계획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표정이 심각했던 게 이것 때문이었나.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부자연스러운 면이 있긴 했지만 서엽은 더 깊게 고민하진 않았다.
“명하실 것이 있습니까?”
“아무래도 조 후는 미마이와 함께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이 좋겠다.”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진예의 말에 서엽의 눈이 커졌다. 그는 즉시 부정했다.
“그게 무슨…… 안 됩니다, 폐하!”
지휘부 막사에선 황제가 미마이를 끼고 논다는 듯이 소문을 퍼뜨리라더니, 진예는 그와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저 말은 분명 자신을 이곳에 두고 홀로 전장에 가겠단 뜻이었다.
당혹스러워 일단 급히 외쳤던 서엽이 진예가 자신을 흘끗하는 시선을 보고는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혹시라도 미마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이 들통나면 위도양이 비래로 갈 리 없지 않습니까?”
너무 모순된 명령 아니냐는 지적에 진예는 그 정도는 별거 아니라는 양 딱 잘라 말했다.
“위도양이 비래로 오지 않아도 상관없다.”
“다른 계책을 쓰려 하신다는 겁니까?”
“위도양이 남하하면서 마을들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이유가 무엇인 것 같으냐. 본인의 동선이 다 드러나는데.”
진예는 반란군을 표시한 깃발을 흔들며 말했다. 그야 아주 간단한 논리였기 때문에 서엽은 곧장 대답했다.
“공포를 심어 주려 실력 행사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양민들은 동요할 겁니다. 그들은 제 목숨을 지켜 주지 않는 군주를 믿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의 반란군에게 어차피 대의명분은 없어. 그런 놈들이 뭉쳐 봤자 오합지졸이지.”
“…….”
“그리고 위도양은 환을 차지하는 게 목적이 아니다. 짐과 연무건의 목을 노리고 있는 것이지.”
진예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확실히 위도양이 반란을 일으킨 명분은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새로운 왕을 세우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복수가 목적이었다.
원래라면 사람이 모여도 금세 흩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것은 위도양이 조종하고 있을 익재들의 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진예는 그 부분을 지적하고 있었다.
“위도양은 일부러 여기 있으니 자신을 찾으러 오라고 짐을 도발하는 것이다.”
“해서 어찌하시겠단 말씀이십니까.”
전부 맞는 말이긴 했지만 서엽은 저도 모르게 딱딱한 어조로 반문했다.
솔직히 진예가 왜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는지 아직 이해되지 않았다. 다른 계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도 안 돼 그저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러나 진예는 서엽의 혼란과 불편함을 감지했을 텐데도 말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가볍게 황제군 깃발을 들어 비래 지역 위에 탁, 내려놓았다.
“황제군은 비래로 가서 일단 그들의 기반을 무너뜨린다. 사실상 전투로서의 가치는 떨어지지만 상징적인 의미는 분명할 터.”
이번엔 위도양의 깃발이 한수와 상방주로 향하는 갈림길인 원봉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위도양의 기점은 이곳이다. 여기서 상방주로 가거나 이곳 한수로 오거나 선택하겠지.”
“그때 미마이의 위치를 흘리실 겁니까.”
“물론.”
듣다 보니 희미하게나마 감이 잡힌 서엽이 묻자 진예가 고개를 한 번 위아래로 끄덕였다. 그러고는 지도 구석에 세워져 있던 깃발을 하나 더 한수 위에 놓은 뒤 곧바로 상방주로 옮겼다.
“하나 조 후는 위도양이 도착하기 전에 미마이와 함께 상방주로 향한다.”
“……어째서입니까?”
정말로 희한한 계책이었다. 위도양이 틀림없이 도로 돌려받으려 할 미마이의 위치를 기껏 한수로 알려 그들을 끌어들이려 하고는 상방주로 향하라니.
아무리 되짚어 봐도 답이 나오지 않아 물어보니 진예가 지금까지의 이 긴 계책에 대한 목적을 알렸다.
“조 후는 상방주로 가서 승전보가 울리자마자 연무건과 짐의 동조 현상을 깨거라.”
“조 후는 상방주로 가서 승전보가 울리자마자 연무건과 짐의 동조 현상을 깨거라.”
“……!”
서엽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진예는 그런 그의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다. 대신 서엽의 위치를 표시하던 깃발을 다시 바깥으로 빼냈다.
“왜 그리 놀라는 것이냐. 그대가 그토록 바라마지않던 일이었을 터인데.”
“망극하옵니다, 폐하.”
“이게 조서엽에겐 망극할 일인가.”
묻는 진예의 목소리가 유난히 건조했다. 그녀는 서엽의 표정을 들여다보며 슬쩍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마치 가소롭다는 듯이.
그에 서엽은 가슴 한쪽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꼈지만 언급하지 않았다.
진예가 자리에서 일어나 뒤돌아섰다. 피곤하다는 듯이 한숨을 쉰 그녀는 틀어 올린 머리의 비녀를 뽑고 관모를 벗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자 답답함에서 조금이나마 해방된 진예가 한결 풀린 목소리로 작게 읊조렸다.
“돌아오면 무슨 표정을 지을지 모르겠군.”
“……연 귀인 말씀이십니까.”
서엽이 그리 반문하는 소리를 듣자 진예의 손이 허리춤에 걸려 있던 칼의 손잡이를 잡았다. 곧 매끄럽게 뽑힌 그녀의 검이 일자로 세워졌다.
검신을 따라 불빛이 흘러내렸다. 진예는 나른한 눈으로 그것을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참으로 독한 놈이지. 저리 악바리처럼 짐의 곁에 붙어 있겠다 할 놈이 조서엽 말고 또 있을 줄은 몰랐다.”
“…….”
연무건의 맹목과 조서엽의 맹목. 분명 비슷한 듯 보였지만 결이 다르긴 했다.
조서엽의 것은 오랜 세월 쌓여 묵은 반면에 연무건의 것은 한순간의 불꽃과 같이 아직 생생했다.
그래서 연무건은 더 뜨겁고, 더 간절해 보였다.
제 손마저 델 것처럼.
지칠 줄도 모르고 바라는 것도 많았다. 그런데 또 그만큼 갖다 바치려 했다. 가진 것 하나 없으면서, 원하는 걸 만들어서라도 갖다주려 했다. 손 하나 까딱하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할 수 있는 환의 지존을 상대로 말이다.
지극히 건방지고 발칙한 놈.
제 손으로 이쪽의 빈 부분을 채워 주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끝없이 도전했다.
그 노력이 가상해 보이지 않는다면…… 거짓이었다.
날의 상태를 훑던 진예의 눈이 돌연 날카로워졌다. 그러더니 제 뒤에 앉아 있는 조서엽에게로 몸을 돌리며 검 끝을 향하게 했다.
서늘한 날이 서엽의 목 앞에서 멈췄다. 서엽은 그러나 당황하지도, 무서워하지도 않았다
진예가 그런 그를 들여다보며 황명을 더했다.
“조 후는 앞으로 그 목숨이 다할 때까지, 짐의 유일한 비인 연 귀인에게 예를 갖추거라.”
조서엽은 제 미간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으나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그럼에도 진예의 이 이해 못 할 태도에 불편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연무건을 보호하시겠다는 겁니까?”
“그를 정궁으로 맞이한 이유를 조 후는 아직 깨닫지 못했나?”
“……폐하.”
진예는 서엽에게 그가 외면해 왔던 불편한 진실을 깨달으라고 촉구하고 있었다. 서엽이 신음처럼 그녀를 부르고는 말을 잇지 못하고 침묵하자, 둘 사이에 당겨진 실처럼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숨조차 멈추고, 시선을 고정한 채 서엽은 자신이 말하기보다는 진예의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진예가 한마디 했다.
“연무건은, 짐의 유일한 사내가 될 자다.”
서엽은 그 말이 지닌 파급력을 버텨 내고자 어금니를 꽉 물고 다리에 힘을 넣었다. 그러지 않으면 현기증을 못 견디고 쓰러지기라도 할 것 같았다.
창백해진 그의 얼굴을 보고도 진예는 제 말을 정정하지 않았다. 아니, 본래 황제란 하늘의 자식이자 무결점의 존재다. 뱉은 말을 주워 담은 경우는 결코 없었다.
제 숨이 컥 막혀 버린 듯한 기분에 서엽은 침을 삼켜 숨통을 틔운 뒤 겨우 대꾸했다.
“……폐하께선 분명 그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 주지 않겠다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고 이어서 하고 싶은 말이 한가득이었지만 서엽은 그 한 문장만 토해 내곤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진예는 그런 그에게 칼같이 반문했다.
“짐의 마음이 그리 중요한 적이 있던가? 이 자리에서 결정할 수 있는 모든 건 결국은 이해에 의한 것이거늘.”
그녀의 혀에는 자비가 없었다. 무슨 뜻인지 단번에 이해해 버린 서엽의 표정이 그 스스로의 의지에 반해 일그러졌다.
동조 현상을 깨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감격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서엽은 말을 더듬지 않기 위해 여러 번 입을 달싹거리다가, 이내 한 마디 한 마디 곱씹듯 천천히 물었다.
“어느새…… 그가 폐하께 필요한 사람이 되었단 말입니까?”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온다면.”
“…….”
“그리한다면 그도 쓸모가 생기겠지. 무슨 의미인지 그대도 알고 있지 않나?”
연무건의 가치가 어디에서 발휘되는지는 서엽도 뼈가 저릴 정도로 잘 알았다.
그놈의 명인.
하늘의 선택이니 뭐니 하는 빌어먹을 저주.
진예도 분명 그리 생각할 텐데도, 이제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서엽은 그 변화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본능이 먼저 그것을 알아챘다.
하지만 그것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에 침묵하고 있자 진예가 먼저 말을 이었다. 다음에 나온 문장은 그야말로 확실한 확인 사살이었다.
“조서엽은 불가한 것을 연무건이 할 수 있으니 말이다.”
황궁의 침전, 그 깊은 곳에 있는 붉은 천개를 걷어 젖힐 수 있는 자와 없는 자.
진예는 지금 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서엽의 숨소리가 깊어졌다. 흥분하지 않기 위해서는 필사의 인내가 필요했다. 그는 제 앞에 들이밀어진 칼날을 보며 가슴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그만큼 목소리도 한껏 까라졌다.
“저도, 드릴 수 있습니다.”
연무건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전부.
그것이 설령 목숨이라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그는 진예를 위해서 생사를 몇 번이나 오갔었다.
한데, 진예가 딱 잘라 부정했다.
“조서엽의 것은 짐이 원하지 않아.”
서엽은 제 얼굴에서 피가 싹 빠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그의 목소리에서 기운이 빠졌다.
“제 명인, 때문입니까?”
“아니. 너에게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서엽아.”
그녀가 오랜만에 자신의 이름을 불러 줬지만 전혀 기쁘지가 않았다. 오히려 서러움이 울컥 밀려와 서엽은 다시 꼴사납게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것은…… 아, 알고 있었습니다.”
힘겹게 이어진 말은 결국 더듬더듬 나가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의 확실한 거절의 말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진예를 차지하는 건 이미 포기했다고, 그저 옆에만 있어도 된다던 스스로의 말은 사실은 거짓이었을까. 실은 가슴 안쪽에서는 여전히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고 있었던 걸까…….
만약 정말 희망이 있긴 한 거라면 가시덤불로 둘러싸여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손이 해져 만신창이가 되고 난 뒤에야 잡을 수 있는 것일 테니.
서엽은 방금 전 제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마치 자기 자신을 타이르듯이.
“알고…… 있습니다.”
진예는 그런 그를 지켜보다가 조용히 칼을 거두었다. 그러자 서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다분히 충동적인 짓이었다. 그랬던 만큼 진예 또한 놀라 잡힌 순간 입을 작게 벌렸다. 서엽은 입술을 한 번 잘근 깨물더니 그녀의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그렇지만…… 폐하께서 그놈을 옆에 두리라 생각했다면 저를 안아 달라 애원이라도 했을 것입니다.”
“조 후.”
진예가 뒷말은 하지 말란 의미로 그를 나직이 불렀으나 서엽은 멈추지 않았다.
“둘 중 선택하라 하셨을 때 역사에 이름 한 줄 남길 수 없는 폐하의 정부라도 되겠다 대답했을 것입니다.”
팔을 붙잡은 손을 밀어내려 진예가 그 위를 제 손으로 덮었다. 하지만 서엽은 놓지 않겠다 말하는 대신 손에 힘을 넣었다. 황제를 향한 지나친 무례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이대로 물러나면 못 견딜 것 같았다.
진예의 우선순위에서 제가 연무건에게 밀리다니.
그런 상황은 평생 가도 오지 않을 거라 자신만만해했었다. 그런데 그것을 눈앞에서 부정당했다.
어떻게 이성을 차릴 수 있을까.
이런 비상식적인 상황 앞에서.
하지만 서엽의 손에 붙잡혀 있던 팔이 순간 확 빠져나갔다. 진예가 그를 마주 보며 날 선 목소리를 냈다.
“착각하고 있다면 정정하거라. 연무건이 사라진다 해서 조 후의 자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
그러고 진예는 제 팔을 털고는 덧붙였다.
“흥분한 듯하니 이 정도 무례는 넘어가 주도록 하지.”
아. 조서엽은 속으로 짧게 탄식했다.
그녀 나름대로는 특별 취급 해 주는 것이었지만 이 순간엔 어쩐지 이조차 비참하다 생각되었다.
때마침 진예는 이젠 뒤돌아서서 요대를 풀고 갑옷을 벗었다. 그만 나가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철컥, 하고 무거운 갑옷을 내려놓는 무정한 소리를 들으며 서엽은 그녀의 뒤에 대고 질문을 던졌다.
“제가 제 명인자에게 어서 꺼져 버렸으면 하고 바라십니까.”
진예의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리 생각한 적 없다.”
제가 듣고 싶은 말이었지만 말의 내용보다 그녀의 무미건조한 말투 때문에 서엽은 가슴이 저릿해졌다.
두 사람은 정말 오랜 세월을 함께해 왔지만, 서엽은 아직 진예가 저를 잘 모른다고 생각했다.
조서엽이란 놈은 진예를 언제까지고 사랑할 수밖에 없다.
사랑해서 끝없는 좌절의 늪에 빠지더라도 다시 눈을 뜨면 그녀를 찾게 될 것이다.
그것은 숙명이었다.
그것이, 조서엽에게 내려진 신의 명령이기도 했다.
“제 명인자는…… 있어도 없습니다.”
또한, 없어도 있는 것이었다.
그리 말하고 서엽은 진예의 뒤로 가 껴안고 싶은 욕망을 간신히 억눌렀다.
한 번도 실행해 본 적 없었지만 지금껏 꿈속에서, 상상 속에서 이 어깨를 몇 번이고 안았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서엽은 그것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그저 참아 냈다.
조서엽에게 허락된 행동과 말은 얼마 없었다.
“명인은 저주가 맞습니다, 폐하. 그러니 속지 마십시오.”
이런 부정적인 말 외에는.
그 말을 들은 진예가 어떤 표정인지 보지 못했지만, 서엽은 이것만큼은 진예도 자신과 똑같이 판단하고 있으리라 여겼다.
“충고, 잘 들으마.”
다만 그리 여기긴 해도 짧은 대답, 심지어 충분히 긍정적인 대답을 들은 서엽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연무건의 존재가 못내 걸렸다.
혹시나 하는 가정이 맞을까 봐 그랬다.
“동조 현상은 반드시 끊어 드리지요. 그것은 이 조서엽의 염원이기도 하니.”
아직, 진예가 자각을 못 한 것뿐이 아닐까 하는 그런 가정. 하지만 아주 불쾌한 예감이라 외면하고만 싶은 서늘한 예감이었다.
말을 하는 동안에도 그 때문에 서엽은 시시각각 자신감을 잃어 갔다.
그는 그 불안감을 한 손으로 주먹을 꾹 쥐어 날려 버리려고 애썼다. 그러다 이내 두 손을 모아 권포를 쥐고 허리를 숙였다.
“소신이 멀리 있는 동안 부디 옥체를 보존하소서.”
“조 후는 임무를 수행하고 무사히 돌아오라.”
“명심하겠사옵니다, 폐하.”
이대로 퇴장하는 건 어쩌면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자 도망치려는 심리 때문일 수도 있었다. 스스로도 비겁하다 느꼈으나 어찌 되었든 서엽은 대화를 마무리 짓고 서둘러 막사 밖으로 몸을 뺐다.
서엽이 나간 뒤 막사 안에는 일순 정적이 일었다. 바깥의 소란스러움 사이에서 천막으로 한 겹 막을 덧씌워 그 안에 가만히 있자니 진예는 오히려 감각이 둔중해지는 기분이었다.
‘명인은 저주다…….’
서엽이 남기고 간 그 한마디를 입 안에서 몰래 굴리며 진예는 제가 벗어 둔 갑옷과 천막 구석에 고이 모셔진 투구를 바라보았다.
금장이 둘러진 채 투구의 머리 부분에 붉은 술이 달린 황제의 갑주는 거추장스럽다 여겨질 만큼 화려하고 또한 무거웠다. 이런 걸 두르고 있으면 오히려 적의 표적이 되기 쉽지 않나 싶을 정도로.
진예는 필요 이상으로 저조해진 제 기분을 떨쳐 내려 긴 머리를 쓸어 올렸다. 거추장스러운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지만 당연하게도 그것만으로는 썩 숨이 트인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연무건이나 조서엽이나 둘 다 어리석은 건 마찬가지다.
연모의 정이 무엇이라고, 인생을 걸고 목숨마저 주저 없이 바친단 말인가.
모두 늪에 빠질 뿐이다.
쓸모없는 감정에 붙잡혀 바닥도 보이지 않는 깊은 늪으로 끌어당겨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늪을 만든 자는 대체 누구일까.
〈차라리 명예롭게 자결을 하거라.〉
그리 말하며 제게 칼을 건넨 아비인가.
아니면.
〈폐하를 저주하는 이들은 이제 이 세상에 없습니다.〉
조서엽의 말대로 이제는 스러져서 그 뼛가루조차 남지 않았을 망령들에 사로잡힌 스스로인가.
그 씁쓸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했다. 그야말로 답이 나오지 않는 의문이었다.
그녀의 입가에 자조의 기운이 슬며시 비쳤다가 사라졌다.
진예는 저도 모르는 사이 잔뜩 굳어 있던 표정을 풀었다. 일자로 그어져 있던 입술의 꼬리가 살며시 위로 올라갔고, 나른하게 풀려 초점이 흐릿했던 눈은 또렷해졌다.
뒤를 돌아 막사의 입구를 바라본 그녀가 이내 밖에 있을 누군가를 불렀다.
“밖에 뉘 있느냐.”
그러자 입구 앞에 서 있던 병사가 즉각 답해 왔다.
“예, 폐하.”
“좌장군을 불러오너라. 짐이 급히 찾는다고.”
알겠다는 대답과 함께 다급한 발소리가 이어 들려왔다.
좌장군 백악이 오는 동안 진예는 도로 탁자 앞에 앉아 느긋하게 몸을 늘어뜨리고 팔짱을 꼈다. 그녀의 붉은 눈이 펼쳐진 지도를 훑었다.
머릿속에 앞으로의 계획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일이 진행되면서 점차 뚜렷한 형상으로 나타나긴 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결과를 예상하기란 어려웠다.
해낼 수 있을까.
그런 의구심을 갖다가 이내 진예가 픽 웃었다.
‘마치 겁쟁이 같지 않은가…….’
화친왕 진평도 쉽게 처리했는데 위도양이라고 다를까.
이런 싸움에서는 누구에게든 이길 자신이 있었다. 늘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해 댔던 그녀였으니까.
그러니 토끼 한 마리 잡는 것쯤이야.
“폐하, 소장 백악이옵니다. 부르심을 받고 왔나이다.”
“들라.”
무거운 갑옷과 군화가 철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막사 입구로 체격 건장한 좌장군 백악이 들어섰다.
그는 진예가 무장을 벗고, 머리까지 푼 채로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서 잠시 당황한 듯 행동을 멈췄다.
갑주를 벗고 가는 몸을 드러낸 자태는 전장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을뿐더러, 진예가 지닌 특유의 분위기가 그를 당혹케 했기 때문이었다.
황제로서 대신들을 통솔하고 군대를 이끄는 절대적인 지도력과 더불어 꼿꼿함, 그리고 강인함에 어우러진 기묘한 쓸쓸함과 가냘픔.
진예에게서밖에 느낄 수 없는 그 부조화에 좌장군이 한번 크게 숨을 들이켜고는 진예의 앞으로 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는 진예의 시선이 지도에 못 박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자신을 부른 이유가 따로 있음을 재빨리 알아챘다.
“어인 일이시옵니까.”
진예는 아주 지근거리에서만 들릴 만큼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그 내용은 좌장군의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그대에게 내릴 밀명이 있어 불렀다.”
“밀명이라 하심은……?”
좌장군 역시 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제야 진예가 고개를 돌려 좌장군을 내려다보았다.
“그대가 아무래도 군을 통솔해야겠다.”
“……예?”
“황제군의 깃발을 들고 말이야.”
좌장군은 잠시 이해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진예는 그런 그를 보며 답답함을 느끼긴 했지만 반응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얼마 안 가 진예의 말뜻을 알아들은 좌장군의 얼굴에 난처함이 배었다. 그만큼 목소리나 말투도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그 말씀의 진의가 소장이 생각하는 바가 맞을지 모르겠나이다.”
황제가 이끌지 않는 황제군.
좌장군이 감히 황제를 참칭할 방도도 없지만,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다만 황제가 이끌지 않는 황제군이라는 그 표면적인 형태보다 더 심각한 것은 예의 사라진 황제는 어디로 가는지였다.
하지만 진예는 제 계획을 좌장군에게 딱히 일러 줄 생각이 없었다. 짧게 좌장군의 의문에 답을 해 줬을 따름이었다.
“아마도 맞을 것이다.”
덧붙이는 말을 기다렸으나 한참이 되어도 진예에게서 부연 설명이 덧붙여지지는 않았다.
좌장군은 북쪽 지역이라 서늘한 날씨인데도 등 뒤로 땀이 흐르는 기분을 느꼈다. 막 들어왔을 때와 달리 머리가 싸늘하게 식었다.
지금 이건 확실히 보통 일은 아니었다.
밀명이라는 말의 무게에 걸맞게 진예는 말도 안 되는 계획을 꾸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좌장군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소장의 짧은 생각으로는 폐하의 명을 혜량하기 어렵나이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비래성만 잘 공략하면 그만이니까.”
“그러한 문제가 아니오라…….”
일부러 주의를 흩뜨리려 하는 것이 분명한 진예의 말에 좌장군이 반박을 하려던 중이었다.
무릎 꿇은 그의 앞에 칼날이 드리우더니 발치에 칼끝이 콰악, 박혔다.
그에 좌장군의 목울대가 일순간 울렁였다. 긴장감에 숨조차 멈춘 그때, 진예의 칼보다 더 날카로운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깊은 생각은 필요 없다. 할 수 있는가, 없는가. 그것만 대답하라.”
“…….”
물론 거부권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명령이라는 것은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
결국 좌장군은 예정된 항복의 말을 내었다.
“좌장군 백악, 황명을 따르겠나이다.”
그러자 진예가 희미하게 웃었다.
“하면, 지금부터 짐의 말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수행하라.”
“하명하시옵소서.”
* * *
다음 날 새벽, 해가 뜨기 전부터 말발굽 소리와 분주하게 움직이는 군사들의 소리가 뒤섞여 났다.
한수에 펼친 중간 진지에서 황제군이 먼저 떠나고 있는 것이었다.
붉은 술이 휘날리는 투구를 쓴 진예가 그 선봉에 섰고, 그녀 옆에 좌장군이 따랐다.
황제군을 상징하는 금색 깃발이 바람에 휘날리며 1만이 넘는 군사들을 이끌고 점점 멀어져 갔다.
이곳보다 훨씬 북쪽인 비래는 남쪽의 땅들이 여름일 때도 초봄의 날씨에 가깝다. 현재의 경우 아마 저녁때는 눈이 내릴 수도 있을 만큼 추울 것이었다.
비래보다도 더 북쪽인 환의 변방에서 살던 무건은 그 혹독한 추위에 대해 잘 알았다. 제게는 익숙해졌지만 진예에게는 아마도 그렇지 않을 터.
뒤이어 상방주를 향해 출발하는 군의 대열 사이에서 무건은 말고삐를 꽉 쥐었다. 그리고 표기장군의 호령에 따라 진군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이 진지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모습을 진예가 멀리 낮은 산 위의 절벽에서 지켜보았다.
차가운 기운이 섞인 바람을 맞으며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뒤로는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위장군과 다섯 중랑장이 함께였다.
진예는 한수를 떠나는 환의 군사들 사이에서 제 비인 연무건을 찾으려다가, 너무 먼 거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내 포기했다.
그러고는 제 뒤에 있는 자들을 향해 물었다.
“조 후는 어찌하고 있는가?”
대답은 가장 앞에 있는 위장군이 했다.
“폐하의 명대로 미마이와 함께 한수의 진지에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하였사옵니다.”
“그래.”
지금까지의 모든 건 계획대로였다.
앞으로의 진행이 어떻게 되는지 살피면서 이제는 진예 자신이 지루한 기다림을 견디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토끼의 덫을 놓은 이곳에, 위도양이 나타나는 그때에 대한 기다림 말이다.
아무리 빨라도.
“달포 정도인가…….”
그리 중얼거린 진예는 어깨에 달린 금색 망토가 바람에 나부끼자 그것이 거추장스럽다는 듯 떼어 버렸다.
이내 그녀의 발이 뒤쪽을 향했다.
그때였다. 훈련받은 커다란 전서매가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목적한 사람을 찾지 못해 근처에서 뱅글뱅글 크게 돌던 매를 발견한 위장군이 휘파람 소리를 휘익 냈다. 그러자 소리를 듣고 가까이 온 녀석이 그의 팔에 내려앉았다.
매에게 먹이를 주고 발에 묶인 서신을 풀어낸 위장군은 그것을 펼쳤다. 짧고 굵은 내용을 확인한 그가 미간을 좁혔다.
금위 2명 실종.
생사 알 수 없음.
입구의 위치는 묘연함.
황도에 남은 금위들이 보낸 서신이었다. 위장군이 난처해하는 표정으로 진예에게 그것을 보였다.
“폐하, 이것을.”
금위 둘이 실종이라지만 사실상 죽었다고 봐도 무방할 만한 내용이었다. 그것을 보고 진예도 눈썹을 들썩이기는 했지만 그 이상의 흥분한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진예는 오히려 부하를 잃은 위장군의 어깨를 툭 치며 건조하나마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안타깝게 됐구나. 나중에라도 그 시신을 찾아 위로해 주어야지.”
“……송구하옵니다.”
“어차피 입구를 쉬이 찾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허술하게 내버려 두었을 리 없지 않으냐.”
애초에 그 지하실은 화친왕과 위도양이 오랫동안 설계해서 황도에 뿌리 내리게 한 곳이었다. 황제조차 모르게 은밀히 행했다면 그만큼 엄청난 공을 들였다는 의미다.
그것도 명인자인 화친왕의 숙원이 담긴 곳. 그를 죽인 복수를 하겠다고 날뛰는 위도양이 그런 곳을 버려 둔 채 황도를 무계획적으로 떠난다는 것은 엄청난 모순이었다.
다만 말은 그래도 아무렇지 않게 넘기기는 어려웠다. 지하실의 존재감은 눈엣가시 정도는 가뿐히 넘어섰다. 진예의 입장에서 반드시 없애 버려야 하는 것이었다.
어느새 슬며시 구겨진 서신을 그녀가 제 뒤에 선 중랑장 하나에게 넘겼다.
“태워 버리거라.”
“예, 폐하.”
그러고는 좁은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변복을 한 뒤 근처 마을로 가 민심이나 살필 예정이었다.
이전의 전쟁이 끝난 뒤로 너무 구중궁궐에만 머물렀던 탓에 그동안 양민들의 삶이 어떠한지 소홀히 살핀 면도 있긴 했지만, 잠시 눈속임으로 모두의 시선에서 벗어났으니 여유를 찾기 위함도 있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군주처럼 보이는 진예 역시 결국은 인간이었다.
연무건과 조서엽, 두 사내 사이에서 감정 소모를 하고 있자니 그동안 머리가 복잡해진 것도 사실이다.
머리든 마음이든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중랑장 둘이 앞서 나가 헤쳐 주는 길을 지나가면서 진예가 제 뒤를 따르는 위장군에게 물었다.
“위장군, 그대는 부인과 각인을 했나.”
갑작스럽게 날아온 개인적인 질문에 위장군은 잠깐 머뭇거렸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제 목숨이 폐하께 있는데 어찌 그리했겠습니까?”
“……그렇군.”
적당한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명인자라고 해도 각인을 하고 말고는 반반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명인자끼리의 각인은 상대를 가장 강력하게 구속하는 방법이다.
동조 현상으로 인해 한날한시에 죽게 되는 데다, 각인이 되는 순간부터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둘 중 하나나 둘 다 원인 모를 병을 앓거나 하기 때문이었다. 아이도 둘 사이에서밖에는 낳지 못하게 되고.
한데 연무건은…….
〈당신이 설령 오늘만 살 수 있는 아픈 사람이었어도, 그래도 전 기꺼이…… 각인했을 겁니다.〉
운명에, 그리고 사랑에 목숨을 건 놈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그런 태도를 취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맹목적이다.
그래서 그냥 못 배워 먹은 미친놈인가 싶다가도, 의외의 면모를 계속해서 보여 주니 발에 툭툭 걸리는 돌멩이처럼 신경이 쓰였다.
자박자박 낙엽과 나뭇가지가 발밑에서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진예가 그것을 내려다보며 고민에 빠져 있는데, 문득 위장군이 먼저 물어 왔다.
“혹여 귀인마마 때문에 고민이 되시는 것입니까?”
위장군은 본래 일 외의 말은 따로 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한데 진예가 말꼬를 터서 그런지 예상치 못한 질문을 해 왔다.
내심 놀란 진예가 이런 것까지 이야기를 나눠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겉으로 드러나나?”
“제가 어찌 주제넘게 그 부분을 입에 올릴 수 있겠습니까? 다만 폐하에 대한 충심이 아니었다면 후궁의 몸으로 귀인마마께서 전장에 나오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점잖게 돌려 말해 충심이지, 연무건은 실상 진예의 마음을 얻겠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뛰어든 것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무모한가.”
그래서 도무지 어디로 튈지를 모르겠다.
예측이 안 되니 그냥 속수무책으로 휘말리기만 했다.
실제로 연무건의 등장 이후 진예와 조서엽 사이의 관계도 심상치 않게 흐르고 있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흙탕물을 만든다더니, 딱 그 형국이다.
진예가 약간의 한숨을 섞어 중얼거렸지만, 어째서인지 위장군은 희미하게 미소를 띠며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 모습으로 미루어 보건대 위장군이 연무건을 은근히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 보였다. 단지 제가 섬기는 황제의 명인자라거나 후궁이기 때문은 아닐 터였다.
‘미워할 수 없는 놈이다, 이건가…….’
그런 말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세상에 진짜로 믿을 놈이 어디 있다고.
전부 다 돈과 권력에 의해 흔들릴 인간들만 수두룩했다. 진예는 인간의 순수성을 믿지 않았다. 그녀 자신조차 그다지 순수하지 않다 생각했으니까.
그러니 목숨을 걸고 자신의 마음을 증명해 내겠다 하는 것은 얼마나 허황한 이야기인가.
이제 서엽이 그를 찾아가 동조 현상을 끊어 내면 무건의 순수하다 믿었던 그 마음까지 부스러져 내릴 것이다.
맹목에 어울리는 감정은 차라리 미움과 증오였다.
산이 그리 높지는 않았기 때문에 내려오는 것은 금방이었다.
진예는 서엽과 미마이, 그리고 적당한 수의 병사들이 남아 있을 중간 진지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불이 피어오르는 것을 확인하고는 시선을 돌렸다. 그곳을 등에 진 그녀가 민가가 있을 곳으로 발을 향했다.
황도보다 추운 날씨라 그런가, 아니면 수일 동안 많고 많은 이들 사이에서 내내 시끄럽게 지내서 그런가.
평소에는 그저 귀를 스쳐 지나갔을 바람소리조차 좀 더 스산하게 들려왔다.
* * *
콰앙!
파쇄차의 마지막 공격에 의해 비래의 성문이 드디어 부서져 나갔다. 방어를 하고 있던 군사들은 이미 혼비백산해서 흩어졌으며, 그 사이로 황제군의 깃발과 함께 선봉에 있던 이들이 일제히 말을 타고 들어섰다.
좌장군은 패잔병들의 뒤를 쫓으며 외쳤다.
“반란군들을 모두 잡아들여라!”
그러자 기세가 오른 황제군이 비래의 병사들을 포위했다. 하지만 성문을 부수기 전에 도망을 쳤는지 그들을 지휘하던 장수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에 좌장군이 귀찮아지겠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가 휘하의 장군 하나에게 다시 명을 내렸다.
“숨어 있을 지휘관들을 잡아들이게.”
그러자 명받은 이가 좌장군 옆에 황제의 갑주를 두르고 있는 이를 스치듯 몰래 보았다가 얼른 고개를 내렸다.
“명 받들겠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지휘하에 있는 군사들을 이끌고 더 깊은 성 안쪽을 향했다.
한겨울 같은 추위를 뚫고 도착한 황제군에 의해 비래는 쉽게 정리되었다. 예로부터 워낙 점령하기 힘든 곳이라 악명 높았던 비래였기에 좌장군은 긴장했지만 정위가 자리를 비워서 그런지 공성은 생각보다 수월했다.
아니, 오히려 어리둥절할 만큼 공략이 쉬워 함정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공성은 고작 3일이 걸렸고, 이쪽의 피해도 얼마 없었다. 성문을 부수려 진격하던 파쇄차 두 대가 불탄 건 꽤 쓰라렸지만.
하여 좌장군은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뭔지 콕 집어 말하기 어려웠다. 괜한 불안감은 떨치고 그는 성안을 가로질렀다.
전쟁으로 인해 다들 두려움으로 몸을 숨겼는지 한산해진 거리를 지나가며 그가 칼을 들고 외쳤다.
“이대로 내성까지 밀고 들어가 각 성문과 각루를 점령한다!”
그의 뒤로 무수히 많은 군사들이 따르며 순식간에 성안으로 밀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말발굽 소리가 어지럽게 울려 퍼졌고, 남문을 시작으로 외성과 중성·내성에 존재하는 18개의 성문들에 점령되었다는 의미로 황제군의 깃발들이 하나둘씩 꽂혀 나갔다.
게다가 중성의 성문들은 이미 지휘부가 도망쳐 화살 한 자루 날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비래성이 황제군의 손에 떨어지는 듯했던 때였다.
휘익!
중성에서 내성으로 통하는 문 앞으로 다가갔을 때 화살이 쏟아졌다. 다행히 그것을 미리 대비하고 있던 터라 방패병들이 앞서 화살을 막아 냈다.
좌장군은 제 옆의 황제가 다치지 않도록 보호하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성문 위에 낯익은 얼굴이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보고 좌장군이 이를 갈았다.
“탁 후, 그대가 어찌 비래에 있는가!”
일찍이 정위를 따르며, 화친왕의 편에 섰던 탁문이었다. 그가 아직 내성을 지키고 있었다.
“이미 이곳은 모두 점령된 것이나 마찬가지네. 어서 황제 폐하께 예를 갖추시게!”
그러나 탁문은 냉랭한 얼굴로 내려다보며 좌장군의 외침엔 아랑곳하지 않고 대신 스스로 활을 잡았다.
그 활이 제 옆의 황제에게 향하는 것을 보면서 좌장군이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활이 날아온 순간 어찌할 줄 모르는 말 위의 작은 인영에게로 몸을 날렸다. 둘은 그대로 땅바닥으로 굴러떨어졌고, 황제 대신 황제의 말이 화살에 맞아 울며 날뛰었다.
흥분한 말의 발길질을 피하기는 했지만 좌장군의 말까지 따라 놀라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머지 말들도 동요하는 것을 진정시키느라 휘하의 장수들이 난처해하고 있었다.
말들의 울음소리 사이에서 좌장군이 인상을 찌푸리며 제 품 안의 ‘황제’를 내려다보았다.
전혀 드러나지 않도록 투구를 쓴 탓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체격도 진예와 비슷했지만 누가 봐도 그녀는 아니었다.
〈대역을 붙여 줄 테니, 그저 옆에 두기만 하면 된다.〉
그러고 황도에 있는 줄 알았던 위장군이 평범해 보이는 여인 하나를 데려왔다.
하지만 황제가 아무런 지휘도 하지 않으니 몇몇이 이상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듯했다. 그렇다고 해서 앞에서 황제가 아니지 않느냐 묻는 이는 전혀 없었지만.
좌장군은 아무리 생각해도 진예가 왜 이런 일을 벌이는지 이해하기 힘들었으나 일단 품 안의 여인을 일으킨 뒤 탁문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뒤쪽에서 공포에 질린 외침이 들려왔다.
“이, 익재다!”
그제야 뒤늦게 하늘에 그늘이 졌다는 걸 깨달은 좌장군이 위를 올려다보았고, 때마침 썩은 육체에서 흘러내린 진득한 진액이 좌장군의 어깨 위로 툭 떨어졌다.
등골이 오싹해진 좌장군이 반쯤 본능에 의해 칼을 뽑은 그때, 수많은 익재 중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쿠구궁!
이어 거대한 파공음이 땅을 울렸다.
* * *
시간이 몇 시인지도 잘 모르겠다. 다만 알 수 있는 건 아침이 오기까지는 아직 멀었다는 사실이고, 달빛 외에는 의존할 빛줄기 하나 없는 칠흑 속에서 낮과는 달리 꽤나 차가운 바람을 견뎌 내야 한다는 점이었다.
쿵, 쿠웅.
멀리서 거대한 것이 떨어져 부서지는 듯한 굉음이 들려오는 동시에 푸드드득, 하고 작은 새가 하늘로 재빨리 날아올랐다. 이후 눈을 멀게 하는 거친 백광이 번쩍였다.
그 강렬한 빛을 피하려 몇몇 병사들과 바위 뒤에 숨은 무건은 눈꺼풀 너머가 어두워지자 도로 눈을 뜨며 낮췄던 몸을 조금 일으켰다.
상방주의 익재 중 아무래도 강한 빛을 내뿜는 녀석이 있는 듯했다. 어쩌면 천둥 번개 같은 것을 다루는 놈일 수도 있겠다. 빛이 뿜어져 나올 때마다 대지를 울리는 소리가 동반되었으니까.
무건은 바위 너머를 살피다가 마침내 여러 무리의 익재를 발견하고 숨을 꾹 참았다. 익재들 중 가운데 있는 놈이 누가 봐도 그 무리의 우두머리였다.
이전에 봤던 최초의 익재는 온전한 사람의 모습이었는데, 그 우두머리 놈은 어딘지 사람과 닮았으면서도 팔처럼 생긴 것이 총 네 개였다. 심지어는 꼬리도 있었다. 녀석은 날개를 펄럭이며 제 영역을 침범한 인간을 찾으려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을 확인한 무건은 눈이 마주치기 전에 도로 바위에 몸을 숨기며 앉았다.
평지에 거센 바람이 지나가며, 멀리 있는 갈대밭에서 으스스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야말로 을씨년스러운 날씨와 상황이다.
게다가 지금 자신의 능력으로 과연 저놈을 잡을 수 있을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심호흡을 하며 칼자루를 쥔 손에 더 꽉 힘을 넣었다.
‘그래도 해내야 한다.’
그렇게 다짐을 하고 있는데 옆에 있는 병사들 역시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순간, 무건의 머릿속에 진예의 목소리가 다시금 울려 퍼졌다.
3년 전 전투 때 지금 남아 있는 다섯 곳의 익재 서식지에서는 선발대가 전멸했었다는 것.
그래서 진입하지 못하고 회군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그곳들에 그대가 짐을 대신하여 대환의 깃발을 꽂아 넣으러 가는 것이다.〉
진예를, 제가 섬겨야 하는 황제를 대신하여 자신이 이곳에 왔다는 것.
그 사실들을 하나하나 짚은 무건이 어금니를 물며 입을 굳게 닫았다.
오늘로 상방주에서의 전투도 벌써 엿새째를 맞이했다.
기실 처음 3일 정도는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았다. 노장인 만큼 노련하다는 표기장군의 명에 따라 익재를 처리하며 상방주로 온 5천의 군사들은 서식지 안쪽으로 점점 진격해 나갔다.
익재들이 딱히 빛을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보통은 밤에 주로 활동하기 때문에, 이쪽은 낮에 상방주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하여 하루하루 활동 면적을 넓혀 가면서 군사들을 남쪽에서부터 동쪽과 서쪽으로 대략 백여 명을 한 조로 해 조금씩 군사들을 흩어 놓았다.
최종적으로는 북쪽으로 나아가 상방주 자체를 포위하여 추후에는 사방에서 덮칠 계획이었다.
그것을 떠올리긴 했으나 무건은 예의 계획 자체가 꽤 난도가 높았음을 깨달았다. 첫째로 상방주에 있는 익재들은 생각보다 수가 많았고, 대체로 뭉쳐 다녔다. 강한 힘을 과신해 혼자서 다니거나 하는 습성이 없었다.
지금도 저 빛을 내뿜는 익재를 필두로 한 무리에 최소 30마리 정도는 있는 듯 보였다.
그리고 이쪽은 현재 겨우 10명이다.
들키는 순간 죽는 거라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여기서 처리하지 못하면…….’
익재들이 본대를 치러 갈 수도 있었다.
그럼 최악의 상황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진예가 말했던 선발대 전멸의 상황이 반복될지도.
그도 그럴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던 계획은 결국 사흘째부터 조금씩 틀어졌다. 익재도 나름대로 머리를 쓸 줄 아는 놈들이었다.
어린 익재라면 모를까, 다 큰 놈들의 지능 수준은 인간의 어린아이와 비슷하거나 더 높았다. 그중에서 특출하게 똑똑한 놈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이쪽이 전술을 펼치면 저쪽도 그에 대한 대응을 충분히 내놓을 수 있다.
그것을 증명하듯 방금 전 갑작스러운 익재의 야간 공격으로 피해가 발생했다. 저 빛을 내뿜는 익재의 지휘하에 그들은 아군 사이로 파고들어 대열을 갈라 버렸고, 그 결과 몇몇 부대가 고립되었다.
그중 하나가 마침 야간 순찰을 돌던 무건이 있는 부대였다.
애초에 인간과 익재 사이의 힘 차이는 명확하니 이쪽의 전력을 나눠 버리고 고립된 놈들을 죽여 나가면 자신들이 이길 수 있다는 판단하에 저지르는 일인 듯했다.
실제로 야간 공격 때문에 이미 꽤 피해가 발생해 버렸다. 무건과 함께 순찰을 돌던 병사들 중 후미에서 따라오던 이들이 익재에게 잡아먹힌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부대장까지 잃었다. 그 이중고 탓에 대열은 더 이상 유지되지 못했다.
아무래도 상방주의 익재들이 특히 파괴적인 이유는 빛을 쏘아 대는 저 능력 때문인 듯했다. 일시적으로 시야를 가려 필연적으로 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저 무리만이 아니라 상방주에 있는 모든 익재들의 수뇌가 바로 저놈일지도…….’
예측이 사실이라면 저놈을 죽일 경우 상방주를 쉬이 점령할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마 쉽지 않을 터였다.
쿠우웅!
무건이 어찌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동안 또다시 굉음이 위협적으로 울려 퍼졌다.
이번엔 어떤 동물인진 알 수 없지만 늑대 같은 것이 길게 우는 소리가 함께 들려오고, 곧 흰빛이 번쩍했다. 너무 강한 빛이었기에 무건은 눈을 한 번 더 질끈 감았다.
땅의 깊은 진동도 느껴졌다. 일대에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어지럽고 몸이 마구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는 사이 익재 놈들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들키는 건 한순간이다.
긴장감에 심장이 뛰었다. 괜히 딴생각을 하면서 마음을 진정시키려 해도 귓가의 쿵쾅거리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제 옆의 병사들도 마찬가지일 터. 누군가는 공포에 휩싸인 표정으로 칼을 꾹 쥐고 있었고, 또 누군가는 연신 익재 쪽을 힐끗거리다가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열이 오를 만큼 숨을 참는 이도 존재했다.
다들 익재에게 들키면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공포감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것이다.
무건은 바위 뒤에서 벌벌 떨고 있는 제 동료들을 돌아보다가 저 자신을 타일렀다.
‘생각을 해, 생각을…….’
그래야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릴 수 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다고, 믿어야 했다.
익재를 태워 죽이는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읍주에서도 살아 나왔을 정도이니 보통의 능력은 분명 아니었다.
문제는 이렇게 움츠러든 자신의 모습이다. 진예에게 죽음의 전장에 밀어 넣어 달라며 고난을 자처했으면서 이 정도 각오밖에 안 되었다는 것이 조금 우습기도 했다.
무건은 심호흡을 하다가 이내 결심했다. 그가 옆에서 자꾸 불안하게 바깥을 흘끗대는 병사의 어깨를 쳤다.
깜짝 놀란 상대가 비명이라도 지를 기세이기에 무건이 얼른 상대를 품으로 끌어들이며 손으로 감싸 입을 막아 버렸다.
‘쉿.’
검지를 올리면서 입으로 그리 속삭이자 예의 병사가 간신히 비명을 내리누르는 기색이 눈에 보였다. 그제야 무건이 그를 풀어 주고는 주변의 병사들을 손짓해 모았다.
다른 이들이 조심조심 오리걸음으로 몸을 낮추며 다가왔다.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무건은 부디 저쪽에 청각 특화형 익재가 없기를 바라면서 목소리를 낮췄다.
그의 손이 이곳 바위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갈대 지대를 가리켰다.
“여기 계속 있어 봤자 죽음을 기다리는 꼴밖에 되지 않으니 저곳으로 뛰어가 몸을 숨겨야겠습니다.”
그러자 한 사람이 잔뜩 긴장해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물어 왔다.
“그런다고 익재 놈들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저놈들 수가…….”
이쪽은 10명 남짓, 저쪽은 30마리가 조금 넘는 정도.
일반적으로 사람 두셋 정도가 익재 1마리를 상대할 수 있다고 하니 턱없이 부족한 수가 맞았다. 도망이라도 칠 수 있다면 기적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무건은 그들에게 애써 희망을 불어넣었다.
“때를 잘 맞추면 됩니다. 저 빛을 쏘는 익재와 옆에 있는 놈들은 모두, 눈이 안 보이거나 불편한 것 같으니까요.”
“그것을 어찌 아십니까.”
“아까부터 공격하는 곳을 보면 전부 새가 내려앉거나 동물들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니 제 짐작이 맞는다면 갈대 사이에 숨어 위치를 교란할 경우 살아남을 가망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무건은 바위 뒤의 상황을 다시 살폈다. 무리는 흩어지지 않고 다들 뭉친 채로 남아 있는 인간들이 어디 있을지 계속 탐색하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제가 하는 말이 맞기를 기도하며, 그가 뒤의 말을 이었다.
“저놈이 다음에 공격을 할 때 일단 갈대밭으로 달려갑시다. 직선으로만 달리면 되니, 설령 빛 때문에 눈을 감게 되더라도 상관없을 겁니다.”
그러자 누군가 한마디 했다.
“다음엔 우리를 노리면 어쩌지요……?”
겁에 질린 표정과 목소리였다. 어둠 속이 아니었다면 창백해진 얼굴이 고스란히 보였을 것이다.
질문이 나오자 자리에 있는 모두가 침묵했다. 고요해진 만큼 차가운 바람이 더 폐부 깊숙이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잠깐 분위기가 싸늘해진 가운데, 무건이 말했던 익재의 세 번째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번엔 땅이 먼저 진동하며 사방에서 작은 바위들이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엄청난 충격파와 함께 그들이 모여 있던 바위가 부서져 나갔다.
바위를 등지고 앉아 있던 무건의 몸이 단번에 흔들렸다. 힘에 밀려 쓰러질 뻔했지만 땅을 짚으며 재빨리 정신을 수습한 무건은 제 옆에 있는 병사의 등을 떠밀며 외쳤다.
“갈대밭으로 달려!”
그에 겁을 먹고 덜덜 떨던 이들도 살고자 하는 의지 하나로 앞만 보고 미친 듯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갈대밭으로 달려가는 발소리가 어지럽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눈이 부신 흰빛이 대지를 덮었다.
무건은 빛에 눈이 멀기 전에 눈꺼풀을 꾹 닫고 갑옷 속을 더듬었다. 숨겨 두었던 물건, 검은 향낭이 손에 잡혔다.
얼마 안 가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그러자 달려가지 않고 남아 있던 무건은 그 자리에서 뒤돌아섰다.
향낭의 입구를 봉해 놨던 끈을 풀자 기묘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역시 그리 좋지 않은 냄새다.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무건은 방금 전 바위를 부순 익재와 마주했다.
얼굴은 이곳을 향하고 있으나 눈을 감고 있는 그 녀석과.
“끼우우욱…….”
계속 숨어 있어서 화가 제대로 났는지, 아니면 밤이라 그런 건지 익재의 소리가 이전보다 더 스산하게 들려왔다.
팔이 네 개에 날개가 돋은 익재.
눈을 감고 있는 것을 보니, 역시 눈이 안 좋을 거라는 제 예상이 맞았다.
‘다행인 건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무건은 어느새 땀이 차오른 손에 힘을 넣고 쥐고 있던 칼을 고쳐 잡았다.
그러자 시커먼 익재들이 일제히 몰려들어 검은 회오리를 만들듯 그의 주변을 둥글게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끼이이익.”
“끽.”
그들이 무건을 사이에 두고 무슨 의미의 말을 주고받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새로운 먹잇감을 발견한 데 대한 기쁨을 표출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어서 겁을 먹으라 강요하는 것처럼 녀석들은 무건의 주위를 뱅글뱅글 돌았다. 그러면서 내는 낡은 고철이 부딪는 듯한 그 소리들이, 무건은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비웃는 소리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찌 됐든 그러한 부분이 무건에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저 저와 함께 있던 이들이 무사히 도망치기를 기원하면서 이 익재들 무리에서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고민했다.
우선 제 손에 쥐고 있던 향낭을 바닥에 툭 던졌다. 그러자 약간의 잎과 함께 이전에 한수 지역에서 미마이가 건넸던 환약 두 알이 굴러 나왔다.
환약의 존재를 잊고 있던 무건은 잠깐 당황해했다.
‘위기에 빠졌을 때 먹으라고 했지.’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인 것 같긴 했지만 효능이 뭔지도 모르는데 무턱대고 먹기에는 좀 찝찝했다. 그렇지만 곧 이곳이 난장판이 될 텐데 바닥에 구르게 내버려 두기에도 모호했다.
무건은 환약들이 굴러가다 멈추는 것을 보고 일단 칼을 든 오른손에 힘을 넣고 검신을 세웠다. 그리고 다음 순간.
휘익, 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그가 먼저 싸움을 열었다. 눈앞에서 낄낄대는 놈의 가슴팍을 찔러 그대로 등허리를 뚫고 나갈 때까지 칼끝을 밀었다.
단숨에 펄럭이던 날개까지 관통한 그의 검은 그대로 수평으로 그어져 오른쪽으로 흘러나왔다.
촤아악!
실제로 무건이 행한 검술은 무척 단순했지만 위력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그대로 익재의 몸을 찢어 버리자 고막이 터질 것 같은 비명 소리가 상방주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끼아아아아악!”
앞에서 여유를 부리던 익재가 몸과 날개가 찢기자 바닥에 털푸덕 떨어졌다. 그사이 무건은 동료가 당한 것에 분노해 뛰어드는 놈들의 공격을 피하려 일부러 발을 미끄러뜨리며 아래로 몸을 낮췄다.
바닥에 왼쪽 어깨를 부딪치며 몸을 굴렸다. 아픔을 느낄 새는 없었다. 대신 그는 목적했던 대로 미마이가 주었던 환약을 얼른 손에 넣으며 몸을 굴려 제 주위를 감쌌던 검은 폭풍의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러자마자 무건의 머리를 노린 공격이 위에서부터 떨어졌다.
콰앙!
그야말로 벼락처럼 떨어진 그것을 간신히 피하며 무건은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릴 시간조차 그에겐 허용되지 않았다.
일어서자마자 익재들이 일제히 그의 몸을 찢어 버릴 듯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것에 대응하려 무건이 검을 세운 순간이었다. 다시금 백광이 번쩍이는 바람에 반사적으로 눈이 감겼다.
그 짧은 사이에 무건의 목으로 예리한 손톱이 지나갔다. 반본능에 의해 그로 인한 치명상은 피했지만, 발밑에서 검은 창 같은 것이 솟아올랐다.
보자마자 무건이 뒤로 도약해 물러났으나 이번엔 마냥 피하지는 못했다.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창이 통과하면서 그의 행동에 제약을 주었고, 그러자마자 연계 공격이 쏟아져 내렸다.
얼음으로 이루어진 거대 송곳이 그의 머리를 노리고 쇄도했다. 어떤 놈은 직접 몸을 날려 부딪쳐 오려 했다.
찰나에 포착한 그 광경을 본 무건도 이대로 끝나나 싶었다. 그래도 포기하기는 싫었다. 그는 제 어깨 아래에 걸친 검은 창을 끼고 몸을 돌렸다.
“크읍……!”
그러자 머리에 꽂힐 뻔했던 얼음 송곳은 그대로 왼쪽 어깨를 관통했다.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은 고통이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정신이 바짝 돌아왔다.
칼을 쥐어야 하는 오른손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그는 저를 향해 달려드는 익재 쪽으로 칼을 들고 있다가 놈의 다리를 푹 찔렀다.
흰 연기가 올라오는 것을 보고 그는 곧장 칼을 도로 빼내며 다시 몸을 바로 세웠다.
어깨를 관통한 송곳 때문에 왼팔과 왼손이 덜덜 떨렸다. 모양만 얼음은 아니었는지 벌써부터 녹기 시작한 송곳에서 피가 섞인 찬물이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무건은 잇새로 흘러나가려는 신음을 참으며 다시금 제 표적을 칼끝으로 가리켰다.
눈이 감겨 있는 익재.
저놈을 어떻게 해야 도륙 낼 수 있을까.
사실 상방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렇게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할 줄은 몰랐다. 무건은 이 순간 제 각오라는 것이 얼마나 얕았는지 새삼 깨달았다.
‘하지만 돌아갈 거다.’
여기서 이런 식으로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었다.
죽더라도 진예의 품에서 죽고 싶었다.
제가 지금껏 쌓아 온 모든 삶을 버리고 선택한 그녀였다. 제 허벅다리에 새겨진 이름을 본 순간 연무건이라는 놈은 스스로에게, 그리고 하늘에 맹세했다.
제가 가진 것 전부를 주겠다고. 마지막 하나까지 남김없이.
그것엔 목숨마저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무건이 얻고 싶은 건 반려의 따뜻한 포옹과 사랑이었다.
명인자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이어진 관계만이 아니라, 기왕 한평생 함께할 거라면 진정성을 담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하면 진예는 허황한 이야기라며 또 비웃겠지만…….
‘그래도, 반드시.’
돌아가서 진예가 약속했던 그 너그러움의 실체를 확인하고 싶기도 했다.
무건은 부들거리는 왼손에 힘을 넣었다. 그리고 제가 노리는 익재에게 뛰어들면서 그가 손을 올려 환약 하나를 입에 물었다.
깨물자 쓰디쓴 맛이 확 올라와 코까지 찌릿해졌다. 뭐에 쓰는 물건인지는 모르겠지만 미마이가 설마 독약을 주지는 않았으리라 믿었다.
어쨌든 환약의 효과는 아니겠고, 아마 쓴맛 때문이겠지만 먹으니 정신이 확 들었다.
그 순간 제 우두머리 앞을 가로막는 뱀과 닮은 익재가 자신을 먹으려 입을 쩍 벌리는 것을 보고 옆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자 녀석의 몸이 유연하게 휘면서 다시금 목덜미 쪽을 노렸고, 다른 놈들도 사방에서 무건에게로 달려들었다.
끼익끼익, 제 놈들끼리 성을 내며 무건 하나를 잡아먹기 위해 일제히 몰려든 것이었다.
무건은 그에 상체를 뒤로 살짝 물려 뱀 익재의 공격을 피하고 대신 왼팔로 놈의 몸에 매달렸다. 왼쪽 어깨 때문에 순간적으로 힘이 빠질 뻔했지만 그 전에 간신히 그 위에 올라탔다.
순식간에 그의 탈것이 된 익재가 몸을 뒤틀었으나 빠른 속도 덕분에 무건은 손쉽게 다른 익재 한 마리를 베어 내고는 뱀의 머리 쪽에 검을 힘껏 박아 넣었다.
검은 피가 파악 튀며 그의 시야를 순간적으로 가렸지만 치명상이라는 건 익재의 비명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끼아아아! 끽!”
익재가 제 속도를 못 이겨 앞으로 몸이 쏠리는 사이 무건은 검 손잡이를 잡고 버티다 녀석이 땅바닥에 머리를 박자 앞으로 구르며 검을 뽑았다.
익재의 검은 피가 솟구치며 무건의 검이 그리는 반원의 선을 따라 흩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무식하게 몸으로 달려들던 익재들이 주춤하기 시작했다. 무건의 움직임이 이미 저희들이 알고 있던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벗어났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탓이었다.
치이이익…….
무건의 바로 앞에 있는 뱀형 익재의 머리에서 흰 연기가 피어오르며 살이 타는 냄새가 났다.
그때, 뒤에 있던 우두머리가 낮게 울었다.
“끼욱, 끽.”
“끼…….”
그것을 시작으로 몇몇이 같이 울기 시작했다. 무건은 무슨 상황인지 몰라 더 바짝 긴장했다. 저들의 방식으로 뭔가 대화를 하는 것 같은데, 무슨 내용인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무건이 다음에 이어질 공격에 대비해 두 손으로 칼을 쥐고 중단세를 취했다.
어느새 왼쪽 어깨의 얼음 송곳은 이미 다 녹았지만 뚫린 곳에서 다량의 피가 흘러나와 팔은 물론이고 손까지 붉게 적셨다.
그럼에도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대화를 이어 가는 와중에 하나둘씩 다시 무건에게로 시선을 돌리는 익재들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 바위처럼 동그랗게 생긴 놈 하나가 갑자기 날개를 촥 펼치더니 빠른 속도로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고 무건은 제 어깨를 찌른 놈이 저 동그란 놈이라는 걸 깨달았다.
놈의 머리 위로 얼음 송곳 대여섯 개가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달빛에 비치는 얼음의 싸늘하고도 예리한 빛에 오싹해진 무건이 저도 모르게 옆으로 몸을 날렸다.
파박, 팍! 파악!
화살 쏠 때의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내리꽂힌 얼음 송곳은 방금 전 무건이 서 있던 곳에 꽂혔다. 다행히 송곳을 만드는 시간이 좀 걸리는 것인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날아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상대를 도망치게 하는 데는 충분했다. 무건은 몇 개는 칼로 쳐 내기도 하며 점점 뒤로 물러났다. 그동안 무건에게 달려드는 돌진조는 더 이상 없었다.
‘근접전은 피하기로 한 건가……?’
그럴지도 몰랐다. 차라리 몸을 날리는 놈은 쉬운데, 익재가 허공에 날아올라 송곳을 쏴 대니 답이 없었다.
무건은 달리며 그것들을 피하면서도 주위를 둘러보며 어떻게 해야 할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 근처의 커다란 바위와 그 옆의 나무를 보고 그곳으로 힘껏 달려갔다.
도착하자마자 재빨리 바위를 디딘 그가 튼튼한 나뭇가지를 붙잡고 나무 위로 올랐다. 나무 위에 서면 저 송곳을 쏘는 놈과 얼추 눈높이가 맞을 것 같다는 계산 때문은 물론 아니었다.
다른 익재 놈들을 발아래 두기 위해서였다.
무건이 제 머리 위로 또다시 쇄도해 오는 송곳들을 피하며 구경하고 있는 익재 놈들을 향해 몸을 던졌다. 무리들 사이에 있으면 저 송곳 공격을 못 쓸 거라는 계산하의 행동이었다.
뛰어내리면서 무건은 다음의 상황을 그렸다.
가장 표적으로 삼기 쉬운 놈은 일단 정수리를 찍어 없애고, 그 어깨를 디뎌 도약한 다음 다른 놈의 날개를 찢어 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건 단지 그의 생각일 따름이었다.
콰광!
그 전에 무건의 몸 쪽으로 아까 전 커다란 바위를 부숴 버렸던 힘이 스쳐 갔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는 듯이 적절한 때에 맞춘 공격이 무건의 복부를 강타한 것이었다.
당연히 저놈의 공격은 위에서 아래로만 내려찍는 공격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방심의 대가는 컸다. 역행하는 번개처럼 땅에서부터 대각선으로 솟은 힘은 빠르게 몸을 관통해 지나쳤다.
찰나였지만 장기를 뒤흔드는 거센 충격이 그의 온몸을 덮쳤다.
이어 사방이 흰빛으로 물들며 그의 시야를 뒤덮었다.
대처하지 못한 때에 들어온 공격이라 무건의 시야가 회복되기까지 다소간 시간이 필요했다. 그사이 무건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다가 목으로 울컥 올라오는 피를 바닥에 쏟아 냈다.
“커, 으윽…….”
손으로 막아도 흘러나오는 피에 무건이 몸을 떨었다. 잠시 후 희미하게나마 시야가 돌아왔다. 무건은 피범벅이 된 손과 바닥을 보면서 미간을 구겼다.
그가 팔로 통증이 몰려오는 배를 감싸며 몸을 일으켰다. 현기증이 일어 비틀거리다 무릎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도로 쓰러졌으나 다시금 일어선 그가 앞을 바라보았다.
방금까지 싸웠던 익재 무리가 더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갈대밭 쪽을 확인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몰라 무건은 어리둥절했다.
‘도망?’
설마 이쪽에 이렇게 치명상을 입혀 놓고?
무건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앞으로 가 아까 전 제가 죽인 익재들 사이에서 일단 향낭을 회수했다.
무건은 아직도 왼손에 쥐고 있던 환약을 그 안에 밀어 넣고는 눈앞이 흐릿해져 잠깐 눈을 감았다.
그러고 아주 짧은 시간 눈만 깜빡였다고 생각했는데 코끝을 스치는 바람에 의식을 차렸을 땐 저도 모르는 사이에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무건은 막혔던 숨을 기침과 함께 쏟아 내며 팔로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입 안에 고였다가 흘러나온 피에 모래 바닥이 푹 젖은 것을 발견하고 그의 표정이 굳었다.
“아…….”
제가 생각해도 이 정도로 피를 흘리는 것은 심상치 않았다. 게다가 내상으로 인해 몸이 금세라도 부스러져 내릴 것처럼 아팠다.
순간 겁이 덜컥 났다.
이번에야말로 진짜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합리적 이성에서부터 시작된 공포는 생각보다 강했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박동하기 시작했고, 어깨가 떨렸다.
죽음도 두렵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읍주에 내던져졌을 때는 단지 정말로 벼랑 끝이었어서, 잃을 것이 없어서 막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연무건과 지금의 연무건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이전엔 오기로 똘똘 뭉쳐 어떻게든 살아남자고, 죽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반드시 돌아갈 곳이 생겼다.
그러한 명제가 머리에 박힌 순간 제가 겁쟁이가 되었음을 무건은 뼈가 저리도록 깨달아야만 했다.
〈짐의 유일한 사내는 연무건이 될 것이다.〉
비록 전부 가정형의 말들뿐이라 고약을 삼킨 꼴이 되었을지언정 그 말에 가슴이 뛰지 않았다면 거짓이었다.
구중궁궐에도 결국은 연무건의 자리가 생겼다. 그걸 빼앗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 거의 역변이라 해도 좋을 만큼의 변화 앞에서 자신의 마음가짐이 달라지는 것은 필연이었다.
“하…….”
무건은 작게 웃으려다 한숨처럼 바람 빠진 소리만 내고 말았다.
꼭 살아 돌아가기로 했다.
그리고 진예를 대신하여 이곳 상방주에 대환의 깃발을 꽂기로 했다.
이제는 두 가지 목표 중 어느 것 하나 내려놓지 못했다.
무건은 피가 섞인 침을 목으로 넘겼다. 내상으로 숨쉬기조차 편치 않았다. 게다가 워낙 강한 빛을 정면에서 쬐어서 그런지 아직도 눈앞이 가물가물했다.
어쩌면 또 정신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지만, 부상을 치료라도 하려면 어떻게든 본대 쪽으로 가야 했기에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만신창이가 된 몸이 휘청거렸다. 평지에 부는 바람에도 등이 떠밀리는 느낌이었다. 그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입과 어깨에서 피가 뚝뚝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다만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고통 속에 헤매던 처지라, 왜 이렇게 익재가 기만술을 펼치며 한꺼번에 사라졌는지까지는 그의 생각이 미처 미치지 못했다.
그것이 무건의 결정적인 패착이었다.
쿠르르르릉…….
갑자기 머리 위에서 하늘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건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달이 보이지 않을 만큼 짙은 먹구름이 잔뜩 껴 있는 걸 아무 생각 없이 보다가, 그 사이로 빛이 술렁이는 걸 발견하고서는 정신을 차렸다.
자세히 보니 먹구름 아래로 눈을 감은 익재 한 마리가 있었다. 한쪽만으로도 웬만한 사람 몸보다 훨씬 긴 날개가 어둠 속에서 활짝 펼쳐진 것은 마치 지옥의 신이 호령하는 모습 같았다.
“뭐, 무슨…….”
무건은 신음처럼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이미 늦었다.’
지금 이 공격은 피할 수 없었다.
어차피 공격 영역 밖으로 달려갈 힘도 없지만 이제 와서 인간의 다리로 벗어날 수 있을 리도 만무했다.
어차피 의미 없겠지만 무건은 오른손에 쥔 칼을 세웠다. 반쯤 굳어 버린 왼쪽 팔도 들어 양손으로 검파를 잡자 그와 동시에 상방주의 검은 하늘을 가르고 흰 빛기둥과 벼락들이 떨어져 내렸다.
넓은 범위에 한꺼번에 떨어진 벼락과 빛기둥에 무건이 서 있던 곳이 낮 시간보다도 더 환해졌다. 강렬한 빛 때문에 오히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이었다.
천둥이 치는 소리, 돌이 깨지고 날아다니는 소리, 그리고 주변의 소동물들이 놀라 달아나는 소리만이 그곳에 있는 전부처럼 보였다.
그렇게 몇몇 익재들을 죽인 연무건을 제 능력을 쏟아부어 처리한 상방주의 우두머리는 날개를 다시 작게 접고 유유히 제 동료들 곁으로 가려 했다.
하지만 그때, 익재의 날개가 뒤에서 날아온 하얀빛에 의해 세로로 찢겼다. 갑작스러운 일에 상황 파악을 못 한 익재는 날아가다가 몸이 휘청한 후, 제가 알 수 없는 뭔가에 당했음을 깨닫고선 뒤늦게 찾아온 끔찍한 고통에 높은 신음을 내질렀다.
픽스공금
날개에 촘촘히 엮인 신경이 끊어지자 온몸의 힘이 빠져 상방주의 우두머리는 그대로 바닥에 추락해 버렸다.
그 뒤로, 꽤 멀찍이 떨어진 곳에 무건이 서 있었다.
무건 역시 제가 무의식중에 한 일이 뭔지 이제야 깨닫고는 놀란 얼굴이었다.
익재가 쏟아 낸 공격을 제 검으로 낚아채 되돌려 준 것이었다.
“…….”
무건은 땅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익재에게 다가가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역시나 날개가 작게 치익, 하는 소리를 내며 타는 중이었다.
단순히 낚아채 되돌려 준 게 아니라 어쩌면 제 능력 중 하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었다.
‘단순히 태우기만 하는 게 아닌가……?’
사실은 제가 가진 힘이라는 게 더 대단한 무엇이었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무건이 손으로 입을 막았다.
“……웁.”
목구멍으로 울컥 넘어온 피가 손가락 틈새로 흘러내렸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어질어질해질 정도의 출혈량이었다.
더 이상 생각할 것 없이 무건이 바닥을 기는 익재의 머리에 검을 박아 넣었다. 악취가 나는 피가 바닥에 흩어지며 얼마 안 가 그 익재는 죽음을 맞이했다.
무건이 이젠 정말로 본대로 돌아가자며 발을 돌렸다. 그러나 몇 걸음 걷던 그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눈을 뜬 채로 고꾸라진 무건이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 바닥을 손으로 짚고, 흙을 움켜쥐어 봤지만 더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제 거친 숨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여기서 죽으면 안 되는데…….’
이곳의 우두머리를 죽였으니, 틀림없이 곧 상방주에서 승전보를 울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진예한테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기로 했다.
황제 앞에 자신이 행한 모든 영광을 바치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내기로 하지 않았나.
몇 걸음 남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무건은 멀어지는 의식을 붙잡지 못했다.
깊은 어둠이 눈앞에 내려앉았다.
눈꺼풀이 닫히고 잠시 청각이 살아 있는 동안, 희미하게 익재들이 울부짖는 소리와 사람들의 발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 * *
한수 지역 인근의 가장 큰 도시로 들어선 진예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지런히 거리를 휘젓고 다녔다.
통행금지를 알리는 삼경의 종소리를 듣고 나서도 그녀는 야간에 몰래 열리는 시장, 좌판이 귀신처럼 나왔다가 사라진다 하여 이름 붙은 귀시(鬼市)를 구경하겠다며 한참을 돌아다녔다.
아무리 황제라 하여도, 아니 오히려 그런 신분이기에 귀시를 직접 본 건 처음이라 꽤 흥미로운 지점이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도저히 안 되겠다며 그만 들어가 주무시라는 위장군의 권유에 마지못해 여관에 들어선 진예는 곧장 잠들었다.
마을에서 가장 큰 여관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황궁보다 못한 건 당연했으나 다행히 그리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전장에서는 훨씬 불편한 잠자리도 많았으니까.
하지만 얼마 안 가 그녀는 잠에서 깼다. 홧홧해져 오는 어깨의 통증 때문이었다.
처음 느꼈을 때는 그냥 간지러운 정도였는데, 점점 동통이 몰려와 참지 못하고 결국 몸을 일으켰다.
이불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방 밖에서 동 중랑장의 목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어디가 불편하시옵니까.”
어쨌든 ‘폐하’라는 말은 뺐지만 극존칭인 건 마찬가지였다. 진예는 그에 픽 웃다가 다시 어깨가 아파 이를 꾹 물었다. 마치 대바늘 여러 개를 찔러 넣은 듯 예리한 통증이었다.
“들어와 보거라.”
그녀의 말에 방문이 살며시 열렸다. 진예가 눈짓으로 불을 켜라는 신호를 보내자 문을 닫고 들어온 중랑장이 불을 켰다.
그는 진예의 안색이 안 좋은 걸 보고는 놀라 침상 앞으로 달려왔다. 동 중랑장이 방 밖에서 했던 질문을 것을 재차 입에 올렸다.
“어디가 불편하신 것이옵니까?”
“어깨 쪽이 아프구나. 좀 살펴봐 주거라.”
말하다가 진예는 그곳이 제 명인이 새겨진 곳임을 깨달았다. 잠시 모호한 표정을 지은 진예가 살며시 제 옷을 헐렁하게 하자 동 중랑장이 난처해하는 와중에도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어깨를 드러냈다.
“폐하의 명인이 있는 곳 말씀이시옵니까?”
“……그래, 어떠하냐.”
진예의 물음에 동 중랑장은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짧게 말을 돌렸을 뿐이었다.
“서둘러 의원을 찾아오겠나이다.”
“…….”
에둘러 하는 대답이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는 깊이 허리를 숙이고는 급한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그에 진예는 손으로 명인 위를 만졌다가 따끔함에 눈살을 찌푸렸다. 살이 잔뜩 부어올라 있는 것이 손끝으로도 느껴졌다.
이전에도 비슷한 현상을 겪은 적이 있었는데 이번엔 그보다 더 심했다. 푹 잠든 와중에 잠이 달아났을 정도이니.
어차피 의원을 불러와도 이렇다 할 방도를 내 주지는 않겠지만, 이왕 깼으니 진예는 가만히 앉아 기다렸다.
그런데 잠시 뒤 나타난 건 동 중랑장이 아니라 위장군이었다. 폐하라 부르는 대신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진예가 들어오라 하자 그가 방문을 열고 발을 들였다.
진예에게 고개 숙인 위장군이 습관처럼 방 안을 한번 훑고는 먼저 안부를 물었다.
“몸이 불편하시다 들었사옵니다.”
“별것 아니다. 그보다 무슨 일이더냐.”
“비래 쪽의 소식이 왔습니다.”
말을 하는 위장군의 표정이 덤덤했다. 별 내용 없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진예가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에 서신이 들어왔다. 아마도 비래에서 황도를 거쳐 다시 온 것일 테니 시간이 좀 지난 소식일 것이었다.
탁문 후(侯) 합류.
비래 중성 점령 후 내성 앞에서 대치.
‘……탁문이.’
아직도 죽은 화친왕이나 정위에게 충성할 자가 존재하기는 할까 싶었는데 있긴 한 모양이었다.
진예는 눈을 내려 서신을 더 읽다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익재 등장. 약 2천여 마리 추정.
“익재 등장……?”
이건 예측하지 못한 부분이라 진예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위장군이 고개를 숙였다.
“난관에 봉착한 듯하옵니다만, 훌륭한 지휘관이 가 있으니 능히 이겨 낼 수 있으리라 사료되옵니다.”
“병력을 더 보내야 하진 않겠느냐.”
“걱정이 되신다면 그리해도 되겠으나 가장 가까이서 차출할 수 있는 병력은 상방주의 병력입니다.”
추가 병력을 보내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의미였다. 다만 비래로 간 병력이 1만 5천이니, 고작 2천의 익재를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긴 했다.
진예는 알겠다고 끄덕이고는 서신을 도로 그에게 돌려주었다.
“하면 상방주의 소식은 아직이더냐.”
“차분히 진행 중인 것으로 아옵니다.”
그거야 당연한 일이다. 진예가 궁금한 것은 따로 있었지만 위장군은 그쪽의 소식을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눈치가 없는 것인지 따로 덧붙이는 이야기가 없었다.
그래서 먼저 연무건은, 하고 불쑥 그리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러나 어깨가 아픈 것이 아무래도 썩 좋은 징조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연무건이 읍주에서 멀쩡히 돌아온 뒤로 저번에 아팠던 이유가 동조 현상으로 이어지느라 그랬나 하고 무심코 생각했었지만, 이미 완성된 시점에서 이럴 이유가 없지 않나.
‘아니면.’
아니면 그때처럼 치명상을 입었나……?
그런 생각을 진예는 아닐 거라고, 애써 떨쳐 냈다.
둘은 아직 각인도 안 한 상태였다. 각인하지 않은 명인자들끼리 이렇게 상대의 상태에 따라서 일일이 반응한다는 이야기는 전혀 듣지 못했다.
잠자리를 가지던 중 갑자기 각인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지만, 벼락 맞을 확률보다 낮을 만큼 아주 희소했다.
그리고 애초에 명인자 둘 중 하나가 모르는 각인이라는 게 생길 수 없었다.
흔히들 말하기를 각인자들끼리는 모를 수 없을 만큼 기묘한 감각을 공유하게 된다고 한다.
진예는 아직 연무건과의 사이에서 그런 감각을 느낀 적 없었을 뿐 아니라, 두 사람은 멀리 떨어져도 멀쩡히 잘들 사는 중이었다.
“무어가 그리 마음에 걸리시옵니까?”
그녀의 침묵이 길어지자 위장군이 지켜보다가 물어 왔다. 진예가 고개를 흔들었다.
“마실 물이나 좀 가져다줄 수 있겠느냐.”
“다만 하명하시옵소서.”
위장군은 그리 대답하고는 어디선가 대접을 얻어 물을 떠왔다.
서늘한 기운을 품고 있는 대접을 건네받는데 어깨의 통증이 팔까지 타고 내려오는 느낌에 진예가 흠칫했다. 그러나 위장군은 아무런 표도 내지 않고 묵묵히 기다렸다.
통증이 조금이나마 가라앉길 기다리던 진예가 곧 목으로 물을 넘겼다. 약간 답답했던 기분이 풀리는 느낌에, 한숨을 내쉬자 위장군이 도로 대접을 가져가면서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귀인마마를 마음에 걸려 하시는 듯하온데, 파발이라도 띄워 소식을 알아보리까.”
그에 진예가 픽 웃었다.
“내 많이 물러진 모양이야. 그대에게도 속내를 들키는 것을 보면.”
“……그렇지 않사옵니다. 물러지는 것이 아니라 외려 단단해지는 과정일 것입니다.”
일전부터 입이 무거운 위장군이 한마디가 더 많았다. 진예가 가만히 바라보자 그가 얼굴이 보이지 않을 만큼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말을 이었다.
“소신이 외람된 말씀을 올려도 되겠사옵니까.”
“해 보거라.”
“선황을 섬겼던 신이 염치없게도 폐하의 곁에 남아 있는 이유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위장군의 말에 진예가 미간을 구겼다. 황제가 된 이후 그녀의 앞에서 감히 선황과 선황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금기에 가까웠다. 일부러 긁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래도 언제나 제 곁을 지켜 주는 위장군이라면 다행히 목숨은 몇 개쯤 있는 셈이었다. 하여 진예는 내심 불편해진 마음을 숨기긴 했으나, 목소리는 가라앉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이 안 되는구나.”
“주제넘은 생각이나 구중궁궐에서 죄 없이 말라 가는 황태자를 가엾이 여기지 않는 자가 있었겠사옵니까?”
진예가 지난 대 황태자이긴 했어도, 반정으로 얻어 낸 황위였다.
지금의 위장군은 선황 때 중랑장의 지위에 있었다. 황제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지만, 어디에도 모습을 비쳐서는 안 되는 그런 존재 말이다.
진예는 그의 충심을 믿었지만, 반대로 왜 그 충심을 자신에게 바치는지는 잘 알지 못했다. 작금의 이야기는 그에 대한 답이었다.
“선황께서는 많은 것을 두려워하시는 나약한 분이셨습니다.”
“…….”
“사람의 마음에 미움이 어찌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 그것이 발생하는 원인도, 그것을 다스리는 방법도 모두 다를 것이옵니다.”
위장군의 화법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진예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최대한 돌려 말했지만, 결국은 진예를 향한 미움이 선황의 나약함에서 비롯된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진예는 대꾸하지 않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고작 그런 것 때문에…….
그런 것 때문에, 선황과 선황후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해 이해해 주고 싶지는 않았다.
폐황태자가 되기 전 선황을 시해하는 꿈을 꿨다는 것은 단지 반항심에 한 말이 아니라, 진실이었다.
현실에서 억눌린 걸 꿈에서라도 분풀이하지 않았다면 제 아비와 어미가 원했던 대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지도 모르겠다.
위장군의 말을 들을수록 진예는 부어오른 제 어깨보다 뒤틀린 마음이 더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짜증이, 났다고 해야 할까.
진예가 이젠 그러한 심경을 숨기지 않고 표정을 굳혔으나 위장군은 이 자리에서 모두 말해야겠다고 결심했는지 머뭇거리지 않았다.
“제가 본 선황의 모습에서 자랑스러운 아비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나이다. 그 시절 그러한 군주를 모신 일이 부끄럽지 않다 할 수 있겠습니까.”
측은지심에서 시작된 충심이라…….
배신만 하지 않는다면 어떻든 상관은 없었기에 여태껏 이유를 묻지 않았던 것이지만 솔직히 말하면 자존심은 상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진예는 이불 안에서 몰래 주먹을 쥐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타일렀다.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사실은 오랫동안 풀지 못한, 아니 해결하기도 전에 그냥 끝나 버린 선황과의 은원에 관한 문제였다.
진예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 뜨더니 단 한 번도 입에 올린 적 없지만, 늘 마음 한구석에 의문으로 남아 있던 질문 하나를 꺼냈다.
“……선황은 죽기 전에 무슨 병에 걸렸었느냐.”
서엽과 함께 황궁으로 돌아와 목을 베었을 당시, 사실 선황의 모습은 이미 반시체의 모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머리는 하얗게 셌고, 몸은 야위어 팔이 제 손으로 붙잡기만 해도 곧 부러질 것처럼 가늘었다.
그러한 모습이라는 건 제게 자결하라며 칼을 내밀었을 때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분명 죽을병에 걸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나.
솔직히 말하면 아비의 마지막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제가 이런 하찮은 사람 때문에 그리 억눌리고 살았나 싶어 인정하고 싶지 않았었다.
그래서 늘 외면해 왔던 궁금증이었다.
수년이 지난 지금에야 그 답을 알게 되었다.
“등창에, 패혈증이셨습니다.”
진예가 헛웃음을 지었다.
알고 나니 상당히 허무했다. 제가 죽이지 않았어도 얼마 안 가 수명을 다했을 거란 소리인데.
“가만히 놔둬도 죽었겠군.”
“붕어하시지 않았다 하여도 태평성대를 이루지는 못했을 것이옵니다.”
“진정 그리 생각하느냐.”
“신이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위장군의 목소리는 고저 없이 차분했지만 그래서 더 믿음이 가긴 했다.
그때 동 중랑장이 의원을 데리고 왔는지 바깥에서 작은 인기척이 들려왔다. 그러나 지금의 대화에 끼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문을 두드리지 않고 금세 다시 멀어졌다.
그 뒤 위장군이 사죄의 말을 읊었다.
“신의 마음이 외람되었다 꾸짖으신다면 벌을 달게 받겠나이다.”
“벌은…….”
벌은 무슨, 그만 됐다. 그리 말하려고 하는데 위장군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던지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렇다고 해도 제 충심을 무르다 이르지는 않으실 거라 여기옵니다.”
진예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아직 바닥에 머리를 깊게 묻고 있는 위장군을 내려다보았다.
말을 하도 빙빙 돌려서 하마터면 진예조차 화제를 놓칠 뻔했다.
왜 갑자기 선황제에 대한 말을 꺼냈는지 눈치챈 진예가 뒤에 올 말을 기다렸다.
“귀인마마의 소식을 알아보라 이르리까?”
진예는 아마 그의 명인자는 아주 좋은 사람인 모양이라고, 그리 생각하며 한번 튕겼다.
“고작 한마디 듣겠다고 서두가 너무 길지 않았느냐?”
“마음이 따르는 대로 하셔도, 아무도 나약하다 이르지 않을 것이옵니다. 그런 자가 있다면 소신이 직접 목을 베지요.”
이렇게까지 나온다면야 딱히 궁금함을 절제할 이유는 없었다.
“파발을 띄워라.”
“예.”
* * *
탁문의 저항이 생각보다 거세어 황제군이 비래 내성까지 점령하는 데는 보름가량이 걸렸다.
서식지가 그리 가까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디선가 익재들이 끝없이 튀어나와 좌장군도 처음엔 당황해 헤맸었다.
그러나 며칠 지나니 상황이 바뀌었다. 결론적으로 탁문이 익재들을 이용한 건 자승자박의 패였다.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일부 익재들이 피아 구분을 못 하고 탁문의 군사들까지 같이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황제군은 생각보다 큰 피해를 입지 않고 비래성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었다. 탁문의 목이 비래에서 가장 유동 인구가 많은 저잣거리에 높게 걸렸다.
이후 황제군은 정위 백이 비래에 몰래 만들어 둔 지하실의 존재를 발견했고, 그곳에서 익재를 번식시키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정위는 천하의 몹쓸 역적으로 낙인찍혔다…….
“위 저저, 이건 그대가 말한 것과 다르지 않은가!”
그리고 그러한 소식이 회합에서 나오고, 내내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있던 정위는 위도양이 그에 대해서는 무어라 한마디도 없이 회합을 파하자 마침내 위도양의 처소에 들이닥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잔뜩 흥분해 얼굴까지 시뻘게진 채로 씩씩거리며 그녀를 쫓아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소리쳤다.
위도양은 황제군이 비래로 올 확률이 극히 낮다며 익재들도 있고, 탁문 후가 합류했으니 빼앗기지 않을 거라고 호언장담했었다.
비래성은 정위의 핵심 근거지였기에 비워 두는 것이 솔직히 꺼려졌지만, 정위도 진예가 비래로 진격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위도양이 익재들과 함께 마을 수십 개를 파괴하며 양민 학살을 일삼고 있으니 당연히 이쪽에 이목이 끌릴 거라 여겼다.
하지만 진예는 그런 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 비래로 군사들을 이끌었다.
진예가 앞에 나타나면 익재들을 이용해 그녀를 죽이고 황도로 가 황위를 찬탈한다는 계획이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황위를 누가 차지할 것인가도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었는데…….
이래서야 모든 계획이 흐트러지지 않는가.
하지만 위도양은 정위의 이런 반응을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여유 만만했다.
그녀는 밖의 시위(侍衛: 우두머리의 호위)에게 눈짓해 문을 닫게 하고는 정위를 방 안 깊은 곳으로 이끌어 일단 서궤 앞에 앉게 했다.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시고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정 백.”
심각한 상황임에도 너무나 태연한 그녀의 반응에 한순간 기운이 빠진 정위는 일단 그 말대로 일단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위도양도 그 맞은편의 방석에 일단 몸을 내렸다. 그러자 요즘 한창 그녀 뒤를 오리 새끼처럼 따라다니는 몸집이 작은 익재 한 마리가 눈치 없이 날개를 접고 그 옆에 앉았다.
풍겨 오는 악취에 표정이 안 좋아진 정위가 괜히 시비를 걸었다.
“대체 그놈은 뭔데 자꾸 위 저저를 따라다니는 건가?”
“아…….”
도양은 그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는지 그제야 작은 익재에게 시선을 주었다. 어쩐지 반응이 조금 둔했다.
곧 서궤 밑에서 함 하나를 꺼낸 그녀는 바짝 마른 고기 하나를 제 옆에 있는 익재의 입에 넣어 주었다.
“글쎄요. 열흘 전인가 태어난 놈인데, 눈 떴을 때 처음 본 게 저라서 그런지 제가 제 어미인 줄 아는 모양입니다. 이 녀석들에겐 아비는 없지만 어미는 있으니까요.”
“끼우욱.”
익재가 기분 좋다는 듯이 울자 위도양의 입이 살며시 호선을 그렸다.
그 광경을 본 정위는 썩은 계란을 입에 문 표정이 되었다.
그렇다 해도 옆에 달고 다니는 건 다른 문제 아닌가?
정위는 누군가 제게 옆에 종일 저런 악취 나는 놈을 달고 다니라고 하면 단 한 시진도 견디지 못하고 두 손을 들게 되리라 생각했다.
저런 모습을 보면 역시 저 위도양도 딱히 제정신은 아닌 게 분명했다. 어디 머리 한 곳이 고장 난 게 아니라면 저런 짓을 할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일단 머리가 꽤 비상한 데다 결단력도 있고, 무엇보다 황상을 제거한다는 목적이 같으니 손을 잡긴 했지만 목적만 완성되면 어차피 저 여자도 처분의 대상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위도양이 정위에게로 시선을 옮기더니 물었다.
“해서, 정 백께서는 비래성이 점령돼서 불안하신 겁니까?”
“그야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정위의 말에 도양은 살짝 눈웃음을 쳤다. 그게 마치 저를 비웃는 것 같아 정위는 기분이 상했지만 그녀의 대꾸를 기다렸다. 무어라 변명할지 들어나 보자는 심산이었다.
도양은 그런 정위의 날 선 시선을 받아 내며 슬며시 팔짱을 꼈다. 그녀는 비래 하나쯤 내주는 것은 전혀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탁문 후가 죽은 건 안타까웠지만 거기까지였다.
“황도만 손에 넣으면 그깟 변방쯤이야, 그다지 가치가 높지 않은 거점입니다. 그보다 지금 중요한 건 이곳 원봉과 한수 지역이지요. 황도로 가는 지름길이니까요. 아니 그렇습니까?”
황제도 그리 생각했기 때문에 한수에 중간 진지를 세워 둔 것일 터다. 마찬가지로 위도양도 앞으로의 진로를 결정할 겸, 거점으로서 자리 잡게 하기 위해 원봉에 도착해 여러 밑작업을 해 두는 중이었다.
마침 원봉엔 화도 상단이 그동안 닦아 둔 기반 또한 있었다. 화친왕은 황궁에서 물러난 뒤 한동안 지방 곳곳으로 돌아다니며 상단의 거래 경로를 확보하고 물품 이동 거점들을 곳곳에 세워 두었는데, 그중 하나가 원봉이었다.
도양은 죽은 제 명인자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자 다시금 잔뜩 신경이 예민해지는 스스로를 느끼며 정위가 늘어놓은 쓸데없는 걱정들을 들었다.
“지하실이 들킨 것은 어찌할 것인가? 게다가 공들여 잡아들인 익재 놈들이 전부 죽은 것 같은데.”
들을수록 왜 이런 것까지 피곤하게 일일이 설명해야 하는가 생각하긴 했지만, 도양은 일단 적당히 받아쳐 주었다.
“황도의 지하실도 아닌데 무슨 상관입니까? 그리고 차라리 잘 들켰습니다.”
“무슨 의미인가?”
“어차피 한수의 지하실은 규모도 작아요. 하지만 그 몇십 배에 이르는 규모의 지하실이 황도에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난번 계곡에서 군사 2천을 몰살해 피가 섞인 물을 하류로 흘려보낸 것과 같다.
소문에 독을 타는 것.
어차피 반란군으로 낙인찍힌 마당에, 더 이상 이쪽에 합류하려 하는 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비래성도 황제군에게 손쉽게 빼앗긴 데다, 누구도 제2의 탁문 후가 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니 양민들 사이에 공포라는 독을 퍼트려 황실에 대한 신뢰를 깎아 먹고, 나아가 그들 군사들의 사기를 조금이라도 떨어뜨리는 심리전은 필수적이었다.
어차피 황제는 이쪽의 군사력에 대해서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민심을 잃는 것은 달랐다.
한데 정위가 맘 약한 소리를 하고 나섰다.
“위 저저, 그런 짓을 했다가는 황도는 당장 아비규환이 될 걸세. 설마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이 안 가는 것은 아니겠지?”
자칫 잘못하면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위도양도 그 부분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지요?”
도양이 태연히 대꾸했다. 정위가 그녀의 반응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반문했다.
“무어라?”
“어차피 황도를 손에 넣으려면 그곳에 있는 것도 전부 다 쓸어버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럼 당연히 일단 혼란을 일으켜 뒤흔들어 놓아야지요.”
“하지만 그건 단지 황실만이 아니라 환을 무너뜨리는 일 아닌가!”
겁쟁이.
그런 단어를 속으로 삼킨 도양이 눈썹을 들썩였다.
“그럼 설마 황상만 죽이면 끝날 줄 아셨습니까? 순진하십니다.”
“위 저저!”
정위의 목소리가 커지자 위도양의 옆에 앉아 있던 익재가 끼이, 하고 목을 울렸다. 그에 정위가 움찔하는 것을 보고는 도양이 진정하라는 양 익재의 입에 다시 말린 고기를 넣어 주었다.
그 과정에서 익재의 이가 제 손가락을 살짝 깨문 것에 위도양은 기분이 저조해졌다. 그 영향 때문인지 그녀의 말이 빈정거리는 투로 나갔다.
“서로 목적이 다르다는 걸 이제야 아셨다니…… 눈치가 없는 것인지.”
거의 속삭이는 말에 가깝긴 했지만서도.
그러나 제대로 알아들은 정위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방금처럼 언성을 높이진 않았지만 그의 목소리엔 화가 배어 있었다.
“돌아가신 화친왕 전하의 목적은 그런 것이 아니었을 텐데?”
이런 말까지 하는 건 내키지 않았지만, 상대가 먼저 화친왕 진평을 들먹였으니 도양도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화화가 죽은 것입니다.”
그로서는 영 의외의 발언이었는지 정위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도양은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어느 때보다도 잔뜩 예민하게 신경을 돋워 날카롭게 말을 이어 갔다.
“애초에 고작 황상만 죽이면 되는 것이 아니었어요. 생각해 보십시오. 저 황궁에 있는 건 전부 그년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들이고, 백성들 또한 황제 폐하의 은혜 덕분에 하루하루를 잘 살아가는 것이라고 떠들어 대지 않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황상이 죽었으니 우리를 따르라 하면 그러겠습니까?”
“…….”
진예가 황위를 손에 넣었을 때와는 달랐다. 어쨌든 그녀는 정통한 황태자였고, 선황이 어떻게 죽었는지 일반에는 공표도 안 하고 잘 양위를 받은 척했다. 결정적으로, 그녀에겐 진실을 아는 자들의 입을 막을 힘과 명분이 충분했다.
하지만 반란군이라 이미 낙인찍힌 이쪽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다르게 접근해야만 했다.
황제를 죽이는 것만이 제일 목표가 될 수 없다.
“그냥 이 나라 전체를 뒤엎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 결론을 내린 도양이 정위에게 동의를 구했다.
“제 생각이 틀렸습니까, 정 백?”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분명한 반대였다.
“난 그런 무모한 계획에는 동의할 수 없네.”
“어찌하여서요?”
도양이야 이런 정위의 반응을 예상 못 한 것은 아니었으나, 예상하는 것과 기분이 나쁜 것은 별개였다.
한데 분위기 파악이 썩 느린 정위가 눈치 없이 제 개똥 같은 정의에 대해 피력하려 들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위 저저의 그 발언은 이 나라를 불바다로 만들고 싶다는 말과 같네.”
“그런 게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완전히 미쳤군.’
정위의 표정이 딱 그랬다. 말로는 뱉어 내지 않았지만 도양을 그런 눈으로 보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평소에도 그는 그랬다. 화친왕 생전에조차 정위는 도양을 경멸스러워하고, 제 밑으로 깔아 보곤 했다.
그런 시선을 느낄 때마다 그의 눈깔을 뽑아 버리고 싶은 충동을 몇 번이나 느꼈던지. 그런 마음은 최근에 특히 더했다.
저 사내가 뒤집어쓰고 있는 역겨운 위선의 가면 때문이었다.
도양은 부러 그에겐 관심이 없다는 양 괜히 서궤 위에 손을 올려놓고 최근 제대로 다듬지 못한 손톱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저 사내가 이 방에서 사라지고 나면 시원하게 깎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왜요, 다음 대 황제는 되고 싶지만 손가락질은 받고 싶지 않은가 보지요?”
심드렁한 어투로 한 말이었지만 정위는 잠깐 당혹스러워하다가는 이내 표정을 수습을 해내고는 대꾸했다.
“다음 대 황제라니, 나는…….”
“허수아비를 두고 청정(聽政: 임금이 신하의 말을 듣고 정사를 처리하는 것)을 할 생각이시지 않았습니까? 그게 황제가 되는 것과 무어가 다릅니까.”
도양이 일부러 말을 잡아 늘이며 느릿하게 말했다. 그동안 정위가 어떤 얼굴을 하는지 궁금해서였다.
그녀가 고개를 살짝 숙인 채로 눈만 올려 그를 쳐다보았다. 역시나 정위는 마치 자신이 학이라도 된다는 듯이 고고한 표정으로 위도양을 제 눈 밑으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저놈이나 자신이나 한 바구니에 담긴 달걀 같은 처지였다. 언제 깨질지 순서만 정해지지 않았을 뿐, 남들 보기엔 똑같이 생겨서 구분도 못 할.
“왜 그런 표정으로 저를 보시지요? 어차피 서로 더러운 속내를 가진 자들끼리 숨길 게 어디 있습니까, 정 백.”
어떻게든 진흙탕 속으로 안 들어오려 발버둥 치는 정위가 안쓰럽고 추하게 보였다.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한 그가.
한데 정위가 주제 파악을 못 하고 포탄을 내던졌다.
“오늘로 확실해졌군. 위 저저와 나의 목적은 아무래도 맞지 않는 것 같네.”
그가 말을 이어 가는 와중에 슥 미소를 비쳤던 위도양이 말이 끝나고 고개를 들었을 땐 난처해하는 표정을 꾸몄다. 도양의 눈썹이 실그러졌다.
“이제 와서요? 그런 말을 하려면 마을을 파괴할 때 날 막아섰어야지. 여태 지켜보고만 있다가 대의가 있는 척해 봐야…….”
쾅.
서궤를 세게 내리치는 소리가 그녀의 말허리를 끊어 먹었다. 도양의 표정이 딱 굳었지만, 그대로 몸을 일으키느라 시선을 내리고 있던 정위는 그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그가 몸을 바로 세우고 도양을 내려다보며 딱딱하게 관계의 종결을 선언했다.
“난 여기까지인 것 같군. 그만 빠지도록 하겠네.”
정위의 이 배짱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여기서 빠져 봤자 어차피 정위는 갈 곳이 없었다. 제 근거지인 비래로 돌아간다 해도 이제는 반겨 줄 이 하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아마 이쪽에서 붙잡아 주길 원하는 모양인데.
‘그런 것은 패가 많을 때의 이야기이지.’
한배를 탄 순간 정위 또한 모든 것을 걸고 배수진을 친 셈이었다. 비래성까지 황제군에게 빼앗긴 그가 이제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도양 또한 그를 붙잡을 용의는 전혀 없었다. 다만 옛정을 생각해 안타까운 척은 해 주었다.
“화화가 가장 믿었던 사람이 정 백이었었는데…….”
“자네 앞길을 막지는 않을 테니 붙잡지 말게.”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이빨 빠진 호랑이 따위, 뭐가 아쉽다고 제가 붙잡겠습니까?”
도양의 비웃음 섞인 말에 정위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 눈을 덤덤히 마주 보며 도양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옆의 익재가 고개를 쭉 빼며 날개를 꿈틀거렸다. 이어 끼이잉, 하고 우는 것이 어디 가느냐고 묻는 소리 같았다.
정위나 도양이나 둘 다 그곳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서로에게 집중했다.
“다만 화화의 명인자인 절 배신한다는 건, 화화를 배신한다는 의미라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착각하는군. 전하의 명인자였다는 것이 대단한 감투라도 되는 줄 아는가?”
“착각은 정 백께서 하시는 것이겠죠. 아직도 자신이 대장군인 줄 아는 가엾은 분…… 안타깝게 생각하긴 합니다.”
도양의 비꼬는 투에 정위가 발끈했다.
“나와 칼을 맞대자는 것인가, 위 저저?”
정위의 말에 도양이 훗, 하고 코웃음을 쳤다. 가소롭다는 속내를 딱히 숨기지 않고 비웃음을 흘리자 정위의 목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도양은 햇빛 쨍쨍한 대낮이라, 때가 그리 좋지 않다 생각은 했지만 제 옆의 작은 익재의 앞으로 손을 내렸다. 그러자 익재가 코를 킁킁거리다가 이빨로 또 손가락을 지분거렸다.
도양이 손을 올리자 자연히 녀석이 날개를 가볍게 퍼덕이며 허공에 떴다. 익재가 앉아 있던 자리에 악취가 나는 검은 진액이 고여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도 딱히 불쾌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눈앞의 사내가 더 거슬렸으니까.
도양은 익재의 턱을 쓰다듬으며 아까 스쳐 갔던 화제를 끌어왔다.
“그래, 이 아이가 왜 따라다니느냐 물으셨습니까?”
자기 얘기를 하는 걸 눈치챘는지 익재가 호응하듯 “끼이이…….” 하고 울었다. 정위가 눈을 굴리며 조금 불안해하는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도양의 살며시 미소 띤 얼굴이, 가볍게 힘이 풀린 눈이 어딘지 모르게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아주 편리해. 익재는 사람을 씹어 먹을 때 시체조차 남기질 않거든. 덕분에 존재감 없는 한둘쯤 사라져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아.”
이야기를 듣던 정위는 곧 도양이 말하는 그 ‘한둘쯤 사라지는 일’이라는 것이 이미 실제로 일어났음을 알아챘다.
“위 저저…….”
“물론 정 백이야 안 보이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하긴 하겠지만…… 감히 지금 나에게 그런 의문을 던지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 그렇습니까?”
정위는 손으로 허리 근처를 더듬었다가 낭패라는 표정을 지었다. 칼을 두고 온 상태였다. 그러나 도양은 달랐다.
허리춤에 걸린 칼집을 손에 든 도양이 닿기만 해도 베일 것 같은 날 선 칼을 천천히 뽑았다. 어차피 독에 든 쥐를 잡는 일인데, 조급해할 일은 없었기에 다소 굼뜨다 생각될 만큼 느긋했다.
행동도, 말투도. 전부 다.
정위는 그 모습을 보며 한 발짝씩 뒤로 물러났으나, 그만큼 도양도 느릿하게 앞으로 나아가며 말했다.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어. 그렇잖아, 당신이 황상을 부정하는 이유는 아무리 들어 봐도 여자라는 것밖에 없던데……. 온갖 좋은 소리를 다 갖다 붙이긴 했지만, 거기엔 그럼 어떤 대단한 명분이 있는가?”
질문을 내뱉고 도양은 픽 웃음을 흘렸다.
“그렇지 않아.”
가볍게 한마디를 툭 내뱉자마자 방 안에 약간의 소란이 일었다.
“으윽……!”
경량의 얇은 검신이 전부 뽑히자마자 칼끝이 정위의 왼쪽 가슴 위쪽을 푹 찔러 들어갔다. 그리고 위도양은 제 몸을 밀어붙이며 정위를 방 한쪽 벽으로 밀쳐 냈다.
콰악, 하는 소리와 함께 칼끝이 곧 사람의 몸이 아닌 다른 것에 도달했다. 새하얬던 벽에 붉은 피가 배어나기 시작했다.
“당신은 그냥 나약한 여인 따위가 자신의 머리꼭지에 앉아 있는 것이 싫은 것뿐이니까.”
아무리 그래도 진짜로 찌를 줄은 몰랐던 정위는 갑작스러운 공격에 충격을 받은 듯 눈을 크게 떴다.
위도양은 그런 그에게 더 몸을 가까이하며, 똑똑히 들으라는 양 귓가에 말소리를 쑤셔 넣었다. 그에 따라 그녀의 칼도 점점 비틀어졌다.
“하지만 참 모순되기도 하지. 그런 황상을 잡겠다고 여인인 나의 힘을 빌리려 하다니 말이야.”
정위가 신음을 흘리며 손목의 힘줄이 잔뜩 일어날 만큼 손목을 거세게 붙잡았으나 위도양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외려 그녀의 칼이 점점 정위의 심장에 가까워졌다.
“잘난 것이라고는 가운뎃다리 하나 있는 것밖에 없는 주제에 그동안 훈계질하는 꼴이 참으로 같잖았습니다, 정 백.”
“크윽…… 위도양…….”
“그동안 내가 많이 참은 줄이나 알고 가라고.”
마지막 말을 마친 위도양이 칼을 빼내며 뒤돌아섰다. 그러자 정위의 가슴에서 피가 솟았고, 거대한 몸이 쿵 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자 도양의 옆에 있던 어린 익재가 검은 입을 벌리고 진액을 뚝뚝 떨어뜨렸다. 위도양은 제 욕구에 눈을 빛내면서도 어미의 허락을 기다리는 익재의 모습이 꽤 흥미롭다 생각하며 서궤 앞에 도로 앉았다.
“머리카락 한 올 남기지 말고 다 먹으렴.”
“끼이.”
우드득, 우득.
얼마 안 가 뾰족한 이빨 아래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양은 그 앞에서 거울 함을 펼쳐 놓고 마른 천으로 피가 튄 곳을 느긋한 손짓으로 천천히 닦았다. 더럽혀진 옷을 옆으로 밀어 둔 그녀는 가위로 손톱을 톡톡 깎은 뒤 새 옷을 펼치며 중얼거렸다.
“비래라…….”
1만 5천의 황제군이 그곳으로 향했고, 진예가 미마이를 끼고돈다는 풍문까지 흘러들어 오고 있어 고민이 되긴 했으나 비래와 이곳 원봉은 너무 멀었다.
게다가 상방주에 있다는 연무건을 죽인 뒤에 쫓아가는 편이 훨씬 효율적일 터였다.
그때였다. 밖에서 시위가 도양이 원하는 정보를 물어 온 듯했다.
“대가, 방금 상방주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마침 나가려 했던 도양이 일어나 문을 향해 걸었다. 그러자 어린 익재가 얼른 도양의 뒤를 따라붙으며 또 작게 울었다.
“끼, 끼이.”
자세히 보니 벌써 이 방에 있었던 다른 한 명의 존재는 깨끗이 사라진 뒤였다.
방 한가운데까지 흘러온 붉은 피와 바닥에 흐트러진 옷을 제외하고.
* * *
잠시 원봉에 머무르는가 했던 위도양이 상방주로 향한다는 소식이었다. 또다시 가는 길에 익재를 이용해 마을을 덮쳤지만 다행히 미리 관군들이 사람들을 대피시켜 큰 피해는 없었다.
하지만 위도양은 조금 돌아가도 상관없다는 양 이번엔 다른 곳을 쳤다. 상방주의 익재들로부터 주변을 수호하고 있던 담상성을.
익재를 상대하는 데 특화된 곳이라는 사실이 무색하게 담상성은 엿새 만에 불타올랐다. 위도양을 지휘관으로 하여 움직이는 익재들은 가히 파괴적인 힘을 발휘했다. 지상에서는 장거리에서 공격하는 익재들이 주의를 끄는 와중에, 땅 밑으로 파고든 나머지 익재들이 성안으로 들어가 뒤집어 놓았다.
다른 곳도 아닌 상방주의 익재들을 억제해 오던 담상성에서의 패전 소식에 백성들은 크게 동요했다. 그 주변 지역의 집이란 집은 전부 텅 비어 버렸다는 소식이었다.
“……하여 상방주에 있던 군사들이 현재 반군과 대치 중이라 하옵니다.”
진예는 식은 차를 앞에 두고 가만히 위장군의 보고를 들었다.
돌아가는 상황이 본래 예상보다 심각했다. 위도양이 담상성을 치는 돌발 행동을 하는 것은 진예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게다가 단 며칠 만에 함락되리라고는 더더욱.
탁자 위에 올려진 그녀의 손이 지그시 주먹을 쥐었다.
중요한 판단을 내릴 때는 흥분을 경계해야 했다. 진예는 잠시 사이를 둬 위장군의 보고를 충분히 곱씹고 나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상방주의 군사들은 얼마나 남았나.”
“표기장군이 이끌던 군사 5천과 상방주에 주둔하고 있던 군사 3천, 그리고 주변 지역에서 차출한 2천 정도의 군사를 합해 대략 1만의 병력이옵니다.”
“좌장군도 상방주로 향하고 있을 것이고.”
“그러하옵니다.”
하지만 비래성과 상방주의 거리가 머니 도착했을 땐 이미 상황이 나쁜 쪽으로 흘러간 뒤일 가능성도 낮지 않았다.
게다가 담상성의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상방주엔 이미 문제가 생겼다. 진예는 복잡하게 꼬여 가는 상황 앞에서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며 하나씩 상황을 짚어 나갔다.
“조 후는 어찌하고 있지?”
“상방주의 익재들이 거의 정리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흘 전 출발한 것으로 보이옵니다.”
호재 하나.
하지만 상방주의 승리는 뼈아픈 것이기도 했다.
“연 귀인은 아직도 사경을 헤매는 중이라 하더냐.”
“그것 또한…… 그러하옵니다.”
진예의 입에서 결국 한숨이 터져 나왔다.
연무건이 다 죽어 간다는 소식이 온 지 벌써 수일이 지났다. 상방주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익재를 처리하였으나, 그도 치명상을 입어 좀처럼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놈이 무모한 걸 몰랐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휘관으로 보낸 것이 아니니 얌전히 있을 것이라 믿었다. 표기장군에게도 혹시 모르니 미리 잘 살피라고 했고, 사실 그녀의 언질이 아니라도 황제의 유일한 비이자 명인자이니 다들 알아서 사리게 했을 것이다.
한데 상황인즉, 하필 익재와 전투를 치르다 고립이 된 상황에 저 혼자 나서서 익재들과 싸움을 치렀다는 얘기였다.
이쪽의 목숨이 같이 엮인 줄 모르니, 조심성이 전혀 없었다. 제게 가진 건 목숨밖에 없으면서 그조차 소중히 여기지 않는 연무건에게, 그의 어리석음에 화가 났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반드시 승리해서 폐하께 모든 영광을 바치겠습니다.〉
지금까지 약속한 것은 전부 지킨 그라서.
이번에도 그러기 위해 제 나름대로는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일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진예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한구석에서 연무건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튀어나오려 하자 인상이 써졌다.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그놈 때문에 상황이 꼬여 머리가 다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앞에서 그녀의 반응을 살피던 위장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전보다 상태는 호전되셨다 들었사옵니다.”
“여전히 눈은 못 뜨고 있지만 말이지.”
뒤틀린 심기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말에 위장군이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그대가 송구할 게 무언가. 그나마 연 귀인이 명은 질겨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무덤에 같이 들어갈 뻔했다.
하지만 이제 곧 그런 불안감도 끝나긴 할 것이다. 조서엽이 미마이를 데리고 상방주에 도착하면 동조 현상을 끊어 줄 테니.
진예는 그리 생각하며 식은 차로 입 안을 축였다. 바로 빈 잔을 내려 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뒷짐을 지고 방 안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답답함에 차라리 밖에 나가고 싶었지만 중요한 이야기를 누가 들을지 모르는 곳에서 함부로 의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렇게라도 몸을 풀면서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우선 연무건의 일은 조서엽이 도착하면, 최악의 상황은 면하겠지만.
〈폐하께선 정녕 개들의 싸움을 그것으로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동조 현상이 끊긴 이후에는, 연무건이 그리 물었던 대로 더 머리 아픈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충분해 보였다.
무엇보다 서엽은, 무건이 그녀의 옆에 있는 것을 결코 원치 않았으니까.
그리고 위도양도 지금으로선 상당한 위험 요소였다. 조서엽이 도착하기 전에 위도양이 연무건을 죽이려 들 가능성도 충분히 높게 점쳐졌기 때문이다.
연무건이 쓰러지지만 않았어도 상황이 훨씬 나았을 텐데…….
“아니 가 보십니까.”
그녀의 고민이 길어지는 것 같으니 위장군이 그리 물어 왔다. 진예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 늦었다.”
자신이 이제 와서 상방주로 가 봤자 도착할 즈음엔 연무건의 거취는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결론이 나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행해야 할 일은 결국 하나였다.
진예가 발걸음을 우뚝 멈춰 세웠다.
“위도양 측에 짐의 위치를 흘려라.”
스스로를 위험에 노출하는 것이었다.
이쪽이 허술하다는 걸 알면 위도양은 반드시 시선을 돌릴 터였다. 어떤 방식으로든.
반란군의 시선이 분산만 돼도 다행이고, 위도양이 자신을 치기 위해 직접 나선다면 더욱 좋다.
그리고 진예는 위도양이 후자를 선택할 확률이 높다고 봤다. 이 전쟁을 길게 끌어 봤자 점점 입지가 좁아지는 건 결국 위도양 쪽이었으므로.
“한수 지역에서 황제가 갑자기 몸이 좋지 않아졌는데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것을 우려해 대역을 내보냈다.”
기실 대역을 내보낸 건 애초부터 이런 각본으로 꾸미기 위함이었다.
위도양이 상방주에 제 예상보다 빠르게 진군한 탓에 시기가 맞지 않아 몇 가지 패는 포기해야겠지만, 이편도 나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정확한 위치는 숨기고 적당히 목격자 몇 명만 흘려주어도 되겠군.”
그러나 위장군이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지금은 위험합니다. 반란군 측 전력이 생각보다 강하옵니다.”
“전력이 어떻든 언젠가 맞붙어야 하는 상대이니 도망쳐서는 아니 되는 것이지.”
상대할 놈들을 눈앞에 두고서 피하는 것은 진예의 방식이 아니었다. 또한 휘두르는 칼은 방패로 막는 것보다 칼로 맞서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뒤에 선 위장군이 대답을 머뭇거리자 진예가 그를 돌아보며 채근했다.
“그리고 지금이 아니면 연무건이 죽는다.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칼날을 피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나흘 전 이곳에서 출발했다면 조서엽이 상방주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했을지도 모르는 시기이기도 했지만, 이럴 때일수록 정확하지 않은 것에 희망을 거는 일은 경계해야 했다.
진예가 한 말들을 곱씹는 듯 위장군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는 자못 심각한 얼굴로 꽤 길게 고민했다.
황제의 안위를 지키는 더 좋은 방안이 없나 머릿속에서 치열하게 생각을 이어 가고 있을 것이었다.
진예는 그런 그의 진중한 성격을 알기에 묵묵히 기다렸다. 한참 뒤에야 위장군의 입에서 긍정의 말이 흘러나왔다.
“명을, 따르겠사옵니다.”
진예는 거침없이 다음 명령을 더했다.
“또한 비래에서 지하실이 발견되었으니 필시 위도양이 황도의 지하실에 대한 소문을 뿌릴 것이다. 담상성을 손에 넣은 지금보다 더한 적기는 없으니.”
“아직 입구조차 발견하지 못하였으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입구를 발견하여 익재들을 처리 중이다. 그리 방을 붙이라 하거라.”
담상성은 위도양이 먼저 움직인 탓에 허무하게 빼앗겼다. 다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려면 위도양보다 한발 앞서야만 한다.
황도의 지하실의 존재에 대한 소문을 막을 수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먼저 알리는 편이 나았다.
큰 혼란을 피하기 위해 적절한 거짓을 섞긴 해야겠지만 말이다.
“더하여 성 내의 백성들은 밖으로 피신토록 하고 황성의 성문들을 걸어 잠가 허락받은 자들 외에는 드나들지 못하도록 한다.”
“예, 폐하.”
“서둘러야 할 것이다.”
진예의 말에 위장군이 급히 방 밖으로 나섰다.
그렇게 혼자가 된 뒤 적막한 방 안에서 복잡해진 상황을 되짚어 보던 진예의 미간에 금이 갔다.
그녀는 잠시 생각이 느슨해진 틈을 타 아파 오는 어깨 때문에 벽에 손을 짚고 숨을 쏟아 냈다.
“하…….”
다녀간 의원조차 원인을 모르겠다고 고개를 저은 이 통증은 시작된 그날부터 조금씩 나아지긴 했어도 아직 불쑥 심해질 때가 있었다.
마치 연무건이 저를 좀 생각해 달라고 주장하듯이 말이다.
“……질긴 놈 같으니.”
꼭 떨어져 있을 때도 신경 쓰이게 했다.
하긴, 그러지 않으면 연무건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진예는 입술을 깨물고 아픔이 가라앉길 기다렸다. 그러고는 침상 앞으로 다가가 베개 쪽에 놓아둔 칼을 들었다.
황도에서 출발하기 전 매끄럽게 간 칼을 뽑아 이리저리 살피던 그녀는 손잡이를 쥔 손에 가볍게 힘을 불어 넣었다.
그러자 가는 검신을 타고 미약하게 흰 빛이 고이다 연기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그것을 보면서 진예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래. 어떻게든 살아남거라, 무건아.”
위도양의 칼날과 조서엽의 비수 속에서.
‘그리하여 네가 다시 돌아오면 그때는…….’
네가 바라 마지않는 사랑을 줄 수는 없어도.
적어도 이 칼이, 주인의 유일한 사내를 지키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