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새벽의 여명이 틈새로 비쳤다. 그리고 며칠 새 익숙해져 버린 사내의 체향이 코 안에 흘러들어 오는 것에 진예는 밤새 있었던 일을 기억해 냈다.
제 어깨를 감싼 단단한 팔과 등에 바짝 붙어 있는 커다란 품. 게다가 두 사람분의 다리가 아직도 얽혀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제 안에 자리 잡은 심지가 이미 곤두선 게 뒤늦게나마 느껴졌다. 그 곤욕스러운 감각에 진예는 몸을 움직이려다가 틈이 없다는 걸 깨달아 포기하고 몸에서 다시 힘을 뺐다.
……닷새 동안 지치지 않을 자신이 있다더니, 허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아직 자고 있는 줄 알았던 연무건의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
“항상 너무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십니다. ……황제란 다 이런 것입니까.”
나직하니, 잠이 다 안 깬 음성이었다. 곁눈질로 보니 깨기 싫다는 듯이 무건은 눈을 꼭 닫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다른 데 가지 말라는 듯이 저를 더 꽉 조여 오는 것을 느끼며 진예가 핀잔을 두었다.
“정무를 돌보는 것이 쉬운 줄 아느냐.”
“쉬워 보인다 하진 않았습니다.”
곧바로 반박해 오는 무건의 말소리에는 어쩐지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
“제가 사는 동네에서는 마루에 누워 있으면 그걸로 근심 걱정이 사라졌는데, 이곳에서는 아니 그렇습니다. 이렇게 껴안고 잠이 들 때도 당신을 잃을까 봐 노심초사하게 돼…….”
말하면서 서서히 눈을 뜬 그가 여전히 몽롱함이 가시지 않은 시선으로 진예를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말이 끝날 때쯤 진예의 턱을 감싸 살며시 돌리더니 입을 맞춰 왔다.
입술 위로 내려앉은 제법 감미로운 감촉과 함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의 몸 위로 무건의 손이 올라왔다.
조금 열기가 도는 손바닥으로 진예의 체온을 올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행태에 진예가 놀라 몸에 힘을 주자 무건이 윽, 하고 짧은 신음을 토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불을 일으키며 곧 입술을 뗐다. 가느다랗고 투명한 실이 톡 끊어지기 전에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폐하께서 혹여나 부서질까 봐 걱정이 됩니다.”
그에 진예가 쿡 짧게 웃음소리를 냈다. 정말로 어이없고 웃기는 소리였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것이냐. 네 목이나 잘 간수하거라.”
“이 미천한 놈은 지존을 걱정하면 아니 되는 것입니까.”
“누가 봐도 짐보다 약한 놈이 걱정된다 하니 그런 것 아니냐.”
진예의 지적에 연무건이 눈이 가늘어졌다. 제 자존심을 긁어 버리는 그녀의 발언에 무건이 양손으로 진예의 가느다란 손목을 꽉 붙잡았다.
“‘누가 봐도’는 아닐 텐데요?”
발끈한 어투로 그리 물은 무건은 진예의 몸을 안은 채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자 둘의 더 결합이 더 공고해졌다. 그 순간 진예는 눈앞의 짐승 새끼를 잘못 건드렸음을 깨달았으나, 너무 늦은 뒤였다.
눈뜨자마자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격이었다. 그는 진예의 몸이 출렁이는 것을 양 손목을 꽉 잡고 몸으로 감싸 저지하면서도, 하반신으로는 더 무람없이 굴었다.
“읏……!”
낮 시간에야 진예가 나가서 정무를 보고 있었으니 둘째 치더라도, 닷새 내내 연무건이 진예를 안아 댔으니 몸이 금세 풀렸다.
차진 소리가 고요한 새벽녘 침전의 공기를 마음껏 흩트려 놓았다. 무건은 붉은 천개 너머의 문을 살폈다. 비록 사람 그림자가 제대로 안 보였지만 아무도 없으리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았다.
무건은 제 품 안에서 진예의 목이 달아오른 걸 보고 그곳에 입을 맞추어 흔적을 남겼다.
순간 따끔한 통증이 일자 진예가 움찔하며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연무건이 흔적을 남긴 건 비단 이곳만이 아니었다. 며칠 밤 내내 그녀의 온몸 곳곳에 제 소유권을 주장하듯이, 여린 살결을 깨물어 댔다.
옷을 갈아입히고 몸을 씻겨 주는 궁인들은 보고도 놀란 기색조차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분명 황궁 내에 공공연한 비밀처럼 떠돌고 있을 터였다.
연 숙의가 황제의 몸에 흠결을 내 놓았다고.
일반적인 경우라면 목을 내놔도 시원찮을 죄목이었다. 하지만 제가 어떤 짓을 했는지도 자각이 없는 사내는 진예의 귀에 계속해서 음담패설을 흘려 넣었다.
“지금도 저 밖의 궁인들이 다 듣고 있겠지요, 폐하?”
호기심 많은 누군가가 저 문을 열고 들어와도 좋을 터인데.
그리 들릴 듯 말 듯 속삭이며 이번엔 귀를 살짝 깨물어 왔다. 아픈 것보다도 입김 때문에 간지러워 진예가 흠칫하며 대꾸했다.
“네 이 음탕한 언사를…… 모두에게 알리고 싶다?”
“과연 그뿐이겠습니까.”
무건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진예가 허리를 뒤로 확 꺾었다. 감전되는 것처럼 전신을 훑는 감각에 허벅지가 움찔 튀었다. 그녀의 탄탄한 다리와 달리 녹아들 것처럼 부드러운 것이 저를 감싸는 느낌 때문에 무건도 뜨거운 숨을 쏟아 냈다.
“황제 폐하의 총애가, 이 숙의 연무건에게만 향해 있음을 만인에게 알려 주십시오.”
“욕심은…….”
진예의 말끝이 흐려졌다. 제 안 깊숙한 곳이 다시 한번 젖어 드는 느낌에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것을 무건이 뜨뜻해진 몸으로 다정하게 품에 안아 주었다.
진예는 무건의 팔을 내려다보다가 살며시 그 위에 손을 얹었다. 등에 붙은 가슴만이 아니라 그의 팔마저 거세게 맥동하고 있었다.
그것을 느끼며 진예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탈력감 때문인지, 이러고 있으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이곳에 와 노심초사하게 된다고 말했지만, 반대로 진예는 꽤 편안함을 느꼈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닷새라는 꽤 긴 기간 동안 보상이라는 명목 아래 무건이 침전에서 뒹굴고 있는 걸 봐줬다.
무건도 별생각 없어 보였지만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시간이 영원하진 못하리란 것을. 그는, 그리고 진예는 이제 결코 녹록지 않은 바깥세상을 돌아보아야 할 때였다.
진예는 다리에 힘을 넣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대 밖으로 빠져나갔다. 침대의 곁탁자 앞에 선 그녀는 첫날 무건이 제 손에 껴 놨던 반지를 빼 탁, 소리가 나도록 그 위에 내려놓았다.
그 행동을 본 무건이 미세하게 남아 있던 잠기운이 달아난 표정을 지었지만 진예는 별 새삼스러운 것을 다 본다는 양, 냉정하게 그를 일깨웠다.
“벌써 만 닷새가 지났다.”
“…….”
“네가 모든 약조를 지킨 것에 대한 대가로는 충분하겠지?”
방금 전까지 제 품에 안겼던 여인이 이럴 줄은 예상 못 한 모양이었다. 무건은 눈을 굴려 곁탁자 위에 놓인 반지를 확인했다가, 표정을 가라앉혔다. 목소리도 같이 까라졌다.
“참으로 칼 같으십니다.”
무건은 말하면서 그 칼에 찔린 마음에 조금이나마 생채기가 났음을 느꼈다.
그야 제멋대로의 착각이긴 하지만, 몸을 겹치는 동안 잠깐은 그녀가 좋아했다고 여겼다. 아니, 설령 그것이 착각이 아니었더라도 마음의 동요까진 가져오진 못한 모양이었다.
하긴, 그리 쉽게 흔들리면 진예답지 못한 것이긴 했다.
그녀는 여인이 아니라 환의 황제였다.
스스로의 입으로 늘 그리 말해 왔다. 고작 몸정 하나 때문에 제 신념을 굽힐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연무건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지 않았나. 그래서 진예의 앞에 기꺼이 무릎을 꿇고 섬기기로 했다.
제 명인자는 그래야만 사랑할 수 있는 여인이었다.
무건은 그 사실을 잠시 잊은 제 허술한 마음을 탓했다. 하여 스스로를 다그치려 마른세수를 하고 있는데, 진예가 침대 위에 개어 있는 옷을 제 어깨에 걸치며 한마디 던졌다.
“이 진예의 사내가 되려면 마땅히 그에 익숙해져야 하지. 아니 그러한가, 연 숙의.”
잔인하다 여겨질 만큼 날카롭게 찌르고 들어오는 말이었다. 무건은 진예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렇다면 다음 임무는 무엇입니까.”
미친 사냥개가 되어 달라 했으니 다음 목표가 있으리라 짐작하고 물은 것이었지만, 진예는 모호한 말로 얼버무렸다.
“글쎄, 그거야 그대가 알아서 찾아내야 하지. 지름길을 계속 가르쳐 줘서야 재미가 없지 않으냐.”
정해진 것이 있다는 것인지 없다는 것인지 솔직히 자신의 무식한 머리로는 분간이 안 갔다. 다만 왜 하필 이 순간에 원수 같은 조서엽의 말이 떠오르는지 잘 모르겠다.
〈황제 폐하의 유일한 후궁께서 황후가 되는 길, 답은 하나 아니겠습니까. ……다음 대 대환의 후계를 확고히 하는 수밖에요.〉
그때의 답은 화친왕을 죽이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지금은…….
아니, 제가 떠올린 ‘그것’이 진예가 원하는 답일 리 없다.
무건은 잡념을 떨쳐 내려 저도 진예를 따라 옷을 걸쳤다.
닷새가 지났다는 말은 축객령이나 다름없었다. 알몸으로 쫓겨나기 전에 옷이라도 제대로 걸쳐야겠다는 생각으로 한 일이었다.
그러나 자꾸만 무덤덤하게 제 옷을 갈무리하고 있는 진예에게로 눈길이 갔다. 저 옷 안쪽에 자리 잡은 뜨거움을, 연무건은 이미 알고 있었다.
또한 그곳이 꽉 차서 넘치도록 제 것을 몇 번이나 쏟아 냈다.
솔직히 말하면 그러면서 진예가 결코 원치 않을 그런 ‘욕망’이 없었다고는 못 했다.
명인자끼리는 본래 아이가 쉽게 생긴다고 들었다. 각인을 하고 나면 서로의 아이밖에는 가지지 못한다.
그 사실을 알 텐데도 진예는 연무건을 밀어내지 않았다.
생기지 않으리라 판단한 것인지.
아니면 생겨도 너와는 상관없다는 것인지.
아마도 후자가 유력할 테지만 무건으로서는 진예가 자신에게 다른 여지를 준 게 아니냐고, 그리 착각할 수밖에 없는 신호였다.
무건은 스스로의 갈팡질팡하는 이 마음이 정녕 그릇된 것이냐고, 그리 묻고 싶었지만 답은 워낙 뻔한 것이라 애써 삭였다. 한데 진예가 이쪽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슥 돌려 무건을 확인하고는 물었다.
“어찌 그런 표정으로 보느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질문을 받고 무건은 제 얼굴을 서둘러 수습했다. 사실은 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몰랐지만 괜스레 제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괜히 말이 길어졌다.
“그냥, 폐하께서 무얼 원하시나 궁금하여서 생각이 깊어진 탓에…….”
변명처럼 토해지는 말은 진예에 의해 허리가 잘려 나갔다.
“왜, 네 씨물을 받았으니 네 아이라도 낳아 줄까 봐?”
……들켰다.
직접적인 물음에 당황한 무건이 대꾸하지 못하고 옷을 들었던 손을 떨어뜨렸다. 그 꼴을 보고 진예가 조소를 흘렸다.
“바라는 바가 많구나. 지나쳐.”
정말로 욕심 많은 사내였다. 변변찮게 교환할 것도 없으면서 진예의 모든 것을 가지고 싶어 했다.
아니, 어찌 보면 연무건으로서는 이미 큰 희생을 치렀는지도 모르겠다. 제가 살아왔던 삶. 그것을 통째로 버리고 황궁에 기어들어 온 것이니까.
거기에 진예를 위해 기꺼이 제 순결한 손에 피를 묻혔다.
그런 것치고 손에 쥔 대가가 한없이 적은 것에 후회하고 있을까, 너는.
진예는 언뜻 비참함을 내비치는 그의 표정을 보면서도 무건과 자신 사이에 뚜렷한 경계를 그었다.
“설령 생긴다 하여도 네 아이인지 아닌지는 어찌 증명할까.”
“…….”
무건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다른 가능성을 상기시켜 주자 입술을 꾹 물었다. 본인이 자각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서엽의 존재를 알려 줄 때마다 연무건의 눈빛이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런 무건을 들여다보며, 마침 옷매무새를 적당히 단정히 한 진예가 다시 침상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무건의 앞에 앉아 다시 그에게 옷을 쥐여 주었다. 순간 손이 스치자 무건이 움찔하며 잡고 싶어 하는 욕망을 내비쳤으나 실행하지 않고 얌전히 옷을 제 몸에 걸쳤다. 그리고 옷을 걸치라 한 게 곧 나가라는 의미임을 알아들은 무건은 순순히 침대 밖으로 나갔다.
방금 전 잠이 깼을 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썩 좋아 보이던 그의 주변 공기가 묵직해진 느낌에 진예가 떠보듯이 물었다.
“조서엽을 찢어 죽이고 싶으냐.”
무건은 한 박자 느리게 답했다.
“……그럴 리가요.”
물론 거짓이었다.
무건은 역시나 절대로 조서엽과는 함께하지 못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진예에게 화친왕이 그랬듯, 연무건에게는 조서엽이 제 열등감을 자극하는 기폭제 역할이었다. 그는 연무건이 스스로의 힘으론 절대 얻을 수 없는 신분을 쥔 자다.
태생적인 고귀함, 몸에 밴 기품, 근거 있는 자만.
전부 제겐 없는 요소들이었다.
그러니 차라리 조서엽 쪽에서 먼저 싸움을 걸어 준다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진예와 조서엽은 이미 오랜 세월을 함께해 온 동지나 다름없었고, 거기에 제가 어설프게 끼어들어 조서엽을 쳐내려 해 봤자 자신이 튕겨 나가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진예는 개들의 서열을 끝내 정해 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조서엽의 판정승이라고 봐도 무방한 것이다. 제 손에 익숙한데 아직 무뎌지지도 않았다면 새 날을 갈아 끼우지 않는 것을 더 선호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그만 융경궁으로 돌아가거라.”
진예의 말에 무건은 어찌해야 다음 만남을 기약할 수 있나 궁리하다 곁탁자 위에 놓인 옥가락지를 바라보았다.
“이 가락지는, 제가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그것을 왜.”
진예가 곧장 의문을 담아 반문했지만 무건은 그게 이 옥가락지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진짜로 그저 궁금할 뿐이다. 왜 연무건이 이것의 의미를 스스로 포기하려는지.
하여 무건은 이미 허락을 받은 셈 치고, 그 옥가락지를 집어 들었다.
“생각해 보니 대환의 황제께 제가 너무 하잘것없는 물건을 드린 듯합니다. 당신께 어울리는 것은 가락지보다는 칼이요, 밀어보다는 정적의 목일 터인데.”
아니 그렇습니까, 하고 묻는 듯이 무건이 진예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이놈이 다시 폐하께 어울릴 만한 선물을 준비할 기회를 주십시오.”
진예가 그 말에 입 끝에 미소를 매달았다.
나가라는 말에 마냥 의기소침해하지만은 않으리라 예상했지만, 이렇게 또 침전을 나가기 전에 즐거움을 선사해 주려 하다니 흥미로웠다.
이번에는 연무건이 쥔 패가 정말로,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기에 더더욱.
무슨 속셈인지 짐작이 안 된 진예가 고개를 살며시 기울였다.
“무슨 생각이냐?”
“저도 그 답을 빠른 시일 내에 찾을 터이니, 그 선물이 무엇인지 궁금해서라도 연 숙의를 다시 찾아 주시지요.”
한마디로 아직 준비는 안 됐으나 어쨌든 준비할 테니 불러 달라 배짱을 부리는 것이었다. 이 또한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자만이 할 수 있는 발상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황제인 진예가 왜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하겠는가. 고작 후궁 얼굴 한 번 보자고. 하여 진예는 단숨에 초 쳤다.
“틀렸다. 선물은 바치는 놈이 와야지.”
하지만 무건은 오히려 그게 자신이 원하던 바라는 양, 표정이 풀어졌다.
“하면 제가 언제든 찾아와도 되는 것입니까?”
순진하게 묻는 말과 순해 보이는 표정을 진예가 빤히 마주 보았다.
저건 아직도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미친개보다는 주인만 보면 반가워서 꼬리 살랑살랑 흔드는 개새끼에 가까워 보였다. 몸집이 좀 심하게 커 언뜻 보면 꽤 위협적으로 보이긴 한다만.
진예는 저런 놈이 어찌 그 여우 같은 화친왕을 죽일 수 있었는지 아직 믿기지 않았다.
사람을 죽이고도 저런 눈빛을 내비칠 줄 아는 이는 또한 아직 본 적이 없었기에 낯설었다.
그래서 연무건이 준비할 다음의 선물이 기대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짐을 만족시킬 만한 답을 찾는다면 언제든. 물론 정답이 아닐 때는 감히 후궁 따위가 허락 없이 황궁에 발을 들인 데 대한 처벌을 각오해야겠지.”
“어떤 처벌입니까.”
“글쎄, 명색이 후궁이니 호갑투(손톱 보호용 장신구) 낀 궁인의 매서운 손에 따귀를 백 대 정도 맞게 해 볼까? 아마 네 그 낯짝이 너덜너덜해질 테지.”
그리하면 연무건의 제법 볼만한 얼굴에 흉이 질 테니 제 손해인가.
진예는 그리 생각했으나, 정작 대답을 듣고 무건은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으면 한 번쯤 각오해도 괜찮을 만한 처벌이라 여겼다.
어찌 되었든 만족할 만한 답을 얻어 낸 무건이 고개를 숙였다.
“한 달 안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이쪽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먼저 기한까지 정해 버리는 것에, 진예가 어깨를 으쓱했다.
“짐은 진심으로 늘 자신만만한 게 연 숙의의 장점이라 생각한다. 근거가 없어서 문제다만.”
“칭찬으로 듣지요.”
픽스 공금
당연히 제 나름대로 최고의 칭찬을 해 준 셈이었지만 굳이 거기까지 알려 주진 않았다. 무건이 희미하게 웃음기를 띤 것을 보니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무건은 마침내 물러나려 슬슬 뒤로 발을 빼다가 마지막으로 할 말이 생각나 멈칫했다. 진예가 먼저 그에 반응했다.
“용건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냐.”
“생각해 보니 화친왕에 대해 아직 말씀드리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벌써 시일이 좀 지났으니 너무 늦은 것 아닌가 싶긴 했지만 진예가 말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것에 할 말을 이어 갔다.
“조 후를 통해 지하실에 대해서는 전해 들으셨을 텐데, 그곳의 입구를 발견해 열었을 때 어렴풋이 익재들의 소리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끼익거리는 그 소리가 실제로 익재들의 것인지는 눈으로 확인하지는 않았으니 틀릴 수도 있겠으나, 무건은 열에 아홉의 확률로 제 짐작이 맞을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무건의 말을 듣고도 진예는 동요가 없었다.
“놀라지 않으십니다.”
“어느 정도 짐작은 했던 바라.”
짐작은 하고 있더라도 그곳에 정말로 익재가 있다면 너무 위험한 것 아닌가?
무건은 진예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어 순간적으로 채근하는 듯이 말하게 되었다.
“하면 당장 화친왕부를 수색하는 것이…….”
그런데 진예가 무건의 말이 다 완성되기 전에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연 숙의는 닷새 내내 이곳에 있었으니 모르겠군.”
“……?”
“그 입구가 있을 친왕부의 별채는 이미 전소했다. 위도양을 비롯한 몇몇 이들은 황도를 벌써 빠져나갔지.”
진예의 말이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나온 바람에 모르는 사람이 들었으면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갈 만했다.
그러나 화친왕부에 달포쯤 왔다 갔다 했다 보니 무건은 진예가 읊은 것들이 사실은 제법 심각한 상황을 방증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제 손으로 화친왕을 죽이고 나왔지만 별채에 불을 지르진 않았다. 그곳이 불이 붙을 만한 무엇가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면 친왕부의 불은 방화에 의한 것이란 의미이다.
그리고 위도양은 화친왕의 명인자이자, 화친왕 다음가는 실세. 그런 그녀가 단지 도망을 목적으로 황도를 빠져나가지는 않았을 거란 짐작은 충분히 가능했다.
그런데 이제 고작 닷새가 지났을 뿐이다. 상황이 빠르다고 느끼는 것은 자신만이 아닐 터였다. 안 그랬다면 진예가 그들이 황도를 빠져나갈 때까지 가만히 보고만 있었을 리 없으니까.
무건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시선을 한곳에 두지 못했다.
화친왕의 죽음에서 비롯된 일들이니 저도 한 발 담근 상황임은 분명했다. 다만 뒤에 이어질 일들이 무엇인지 제 머리로는 전혀 짐작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묻기 전에 진예가 먼저 의문을 풀어 주었다.
“전쟁이다.”
* * *
묵묵히 침전 밖으로 무건을 안내하는 태감의 뒤를 따라 침전 회랑을 걷는 내내 무건의 표정은 펴질 줄을 몰랐다.
〈전쟁이다.〉
그 말 또한 진예의 입에서 너무 쉽게 흘러나와서 도무지 현실감이 없었다. 그러나 진예는 이런 상황을 예상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었던 것일까, 그녀는.
무건은 지하실로 통하는 문을 열었을 당시를 떠올렸다. 사람 몸 하나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아주 작은 통로였다.
확실히 그곳이 지하실의 유일한 통로라고 보기엔 상당히 무리가 있었다. 화친왕의 별채를 태웠다는 건 그쪽 통로를 막았다는 의미 역시 있을 터, 또 다른 통로가 있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그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통로는 더 이상 화친왕부에 없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화친왕부의 별채에 위도양과 미마이가 드나들었을 이유가 없으니까.
종합해 보면 화친왕은 죽기 전에 이미.
이미 진예를 칠 계획이었을 것이다. 비록 자신의 죽음이 그 계획에 포함되지는 않았을 테지만.
“숙의마마!”
정신 차리라는 듯 크게 울려 퍼지는 소리에 무건이 고개를 들었다. 넋을 빼고 걷고 있었는데 벌써 침전 문 앞이었다.
태감이 어서 가라는 듯이 옆에서 허리를 숙이고 있었고, 침전의 기단 아래에서 낯익은 얼굴들이 만면에 화색을 띠며 기다리는 중이었다.
누군가 하니 융경궁의 내관들이었다.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는지 몰라도 그들은 무건이 나오자마자 늙은 홍 내관을 필두로 하여 그를 태우고 갈 가마의 문을 열었다.
‘지금까지는 이렇게 먼저 알아서 하는 일이 없었는데……?’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무건은 당황했다가 이내 납득해 버렸다.
이게 바로 황제의 위력이었다. 단지 관심을 표하는 것만으로도, 눈길을 주고 제 방에 들이는 것만으로도 궐 내의 구도가 바뀌었다.
무건이 속으로 웃으며 기단을 내려갈 때였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숙의마마.”
자신의 내관들에게 놀라 그쪽만 신경 쓰고 있었는데 침전 앞에 기다리고 있던 이가 더 있었다. 재수 없는 말투에서도 알 수 있듯, 조서엽이었다.
얌전히 가마 앞에서 허릴 숙이고 있는 홍 내관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의 얼굴이 보이는 것에 무건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진예를 볼 때마다 마지막엔 이 조서엽과 마주쳐야 한다는 사실이 그의 기분을 항상 잡쳐 놓곤 했는데, 이번엔 더 그랬다.
닷새 동안 아무 생각도 못 할 만큼 실컷 진예를 품에 안았었는데, 마지막엔 결국 찬물을 뒤집어썼으니 더 그럴지도 몰랐다.
진짜, 진예는 이쪽 정신을 오락가락하게 할 만한 밀당의 귀재였다.
그래서 더 잡힐 듯 안 잡히는 그녀의 앞에서 안달 나 버리는 것이지만.
당연히 진예도 그 사실을 알고 하는 짓일 터였다. 그것이 연무건과 조서엽의 사이를 더욱 긁어 놓고 있다는 점조차도.
다만 화친왕을 죽일 때 어쨌든 그들은 한마음이었다. 경계 속에도 기묘한 연대가 숨어 있었다.
이것 역시 진예의 계획 안일지는 잘 모르겠다.
무건은 기묘하게 이전보다 훨씬 지쳐 보이는 서엽을 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간 격조하였습니다, 조 후.”
그러면서 그의 한 발짝 뒤에 있는 아이가 눈에 띄어 확인하고는 저도 모르게 놀라 표정이 흔들렸다.
무건도 한 번 본 적 있는 아이였다.
〈신뢰의 증표로 이 미마이를 너에게 주겠다. 이 아이를 데리고 융경궁으로 가거라.〉
모든 것의 마음을 읽고 조종할 줄 안다는 그 서역인, 미마이였다.
약간 콧대가 꺾인 데다 유난이 눈이 깊고 또렷해 보이는 눈, 살짝 굽슬거리는 머리까지. 환에서는 보기 드문 워낙 특징적인 외모라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분명 화친왕이 데리고 있었고, 사실 위도양이 움직였다는 말에 이 아이도 당연히 그녀를 따라갔으리라 생각했다.
한데 어떤 경로로 조서엽이 데리고 있는지 짐작을 할 수가 없어 무건은 혼란스러웠다.
“이 아이가 왜 여기에…….”
당혹감이 그대로 배어난 목소리에 미마이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에 무건이 더 자세히 아이를 들여다보았다.
이전엔 어두운 곳에 있어서 몰랐는데 환한 곳에서 보니 아이의 왜소한 체격이나 어디 한 군데 살이 제대로 붙지 않은 마른 체격이 눈에 걸렸다. 그 정도는 단지 체질일 수도 있지만 옷소매 아래로 보이는 얇은 손목을 보고는 바로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곳엔 어린아이가 달고 있으면 안 되는 오래된 멍 자국들이 보였다. 얼마나 꽉 움켜쥐었는지 손 모양으로 난 멍도 있었고, 어딘가에 부딪혔는지 동그란 피멍도 살짝 보였다.
화친왕부에서 그다지 대접이 좋지 못했었던 모양이다. 아니, 그것을 넘어서…….
무건이 아이를 빤히 보고 있는데 조서엽이 한 발짝 옮겨 미마이를 제 뒤로 숨겼다. 그에 자연스럽게 무건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화친왕부에 있던 아이가 어찌 조 후의 옆에 있습니까?”
그러자 조서엽은 무표정한 얼굴로 개도 안 믿을 거짓말을 내뱉었다.
“그 밤에 혹시나 다른 일이 벌어질까 하여 친왕부에 대기하고 있다가 사정이 딱하여 거둔 아이입니다.”
무건은 어처구니가 없어 푹 웃었다. 그냥 그런 아이라면 황제의 앞에 보이려 데려왔을 리가 없었다.
무건은 미마이의 능력이 뭔지는 정확하게 몰랐지만 심상치 않은 기운을 지녔다는 점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화친왕이 죽기 직전 자신을 가만히 보는 시선에서, 왜인지 속이 벌거벗겨지는 듯한 기묘한 감각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조서엽과 미마이의 조합은 그래서 상당히 불길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무건이 무어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 그저 한마디만 덧붙였을 뿐이었다.
“조 후께선 그 아이를 너그러이 다뤄 주셨으면 하는군요.”
이용하지 말고.
그런 속마음을 뒤에 숨기며.
그러자 서엽이 미마이를 슥 내려다보고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물론입니다. 이 아이도 이제 조가의 사람이 되었으니.”
과연 정말로 그리 취급이 좋을까.
무건은 미마이를 다시 힐끗하고는 안타까움에 미간을 좁혔다. 왜인지 저 초췌한 몰골이 걸렸다. 웃지 않는 입매와 자꾸만 고개 숙이는 저 태도도.
괜찮다면 차라리 자신이 시동으로 데려가는 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싶었지만 지금 그러는 것은 과도한 참견이었다. 괜한 분란을 일으키는 일이었고.
한데 그의 시선이 계속 그곳으로 향하는 게 못내 불편했던지 서엽이 돌연 작별을 고했다.
“그럼 그만 돌아가시지요, 숙의마마.”
‘이제는 내 차례니까 빨리 꺼져.’ 뭐, 그런 의미였다. 알아듣고 무건은 제 창자가 뒤틀리는 기분이었지만 의례적인 인사를 건넸다.
“다음에 융경궁을 한번 찾으시지요. 조 후 덕분에 이제 제법 차를 잘 우려내게 되었습니다.”
“예, 조만간 찾아뵙지요.”
빈말이라도 저런 말은 안 할 줄 알았는데.
무건은 그리 생각하며 뒤돌아 먼저 가마에 훌쩍 올라탔다. 조서엽은 그의 가마가 침전 앞의 문턱을 넘을 때까지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배웅했다.
그리고 그사이, 어느새 편전에 들기 위해 정복을 갖춘 진예가 침전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무건이 떠나고 고개를 든 서엽이 그것을 발견하고 기단 아래에서 깊숙이 허리를 숙이고 칼같이 예를 갖췄다.
“홍복을 누리소서, 황제 폐하.”
인사를 받은 진예가 천천히 자신의 내관들과 궁인들을 이끌고 기단 아래로 내려섰다.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조서엽의 앞에서 걸음을 멈춘 진예가 시선도 주지 않고 물었다.
“며칠 얼굴을 보지 못한 사이에 많이 상했구나.”
“…….”
조서엽은 그에 대꾸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연무건이 담람궁의 침전에서 뒹구는 동안 서엽은 진예를 만날 수가 없었다. 침전에 들지 못하는 것은 둘째 치고, 편전에서조차 진예는 그가 하는 알현 요청을 전부 물리쳤다.
무건과 서엽이 붙어 있어 봤자 득이 될 것 없다는 판단하에 한 일이었겠지만 매일 찾아와도, 고작 멀리서 진예가 어디론가 가는 것밖에는 볼 수가 없으니 조서엽은 미쳐 버릴 것 같았다.
게다가 진예가 침전에 내내 무건을 두고서 새벽까지 정사를 치른다는 소식을 듣고 정신이 나가 버리는 줄 알았다. 진예의 침전에 뛰어들지 않기 위해 정말로 저 자신을 많이 눌러야 했다.
그제야 진예에게 자신을 마음껏 이용하시라 했지만 서엽도 말할 당시에는 생각지 못했던 조건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디 자신을 계속 옆에 둬 달라는 그런 조건이.
한데 진예는 그런 서엽의 생각을 읽고 있을 텐데도 달래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옆에 있는 아이는 누구냐. 생김새가 기이하구나.”
“화친왕이 데리고 있던 회백국의 역술인 아이입니다.”
그제야 진예가 서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미마이를 가늠했다.
이제 열 살 좀 넘었을까.
너무 작고 말라서 솔직히 나이 가늠이 잘 안 되었다. 어쨌든 아직 성장기도 제대로 맞지 않은 아이인 것은 분명했다.
어째 말만 들었을 때 예상했던 모습과는 전혀 맞지 않았지만, 어딘지 신비로운 분위기를 뿜어내는 아이였다.
“이 아이가 위도양이 데려왔다는 그자인가?”
“그렇습니다, 폐하.”
“한데 이곳까지 들인 연유가 무엇이냐.”
아침부터 들이기엔 너무 눈에 띄는 아이였다. 황궁에 서역인이 들었다는 이야기가 이 아이의 이목구비에 대한 묘사와 함께 온 동네방네 발 없는 말을 타고 퍼질 것이었다. 진예는 며칠간 보지 못한 것에 대해, 조서엽이 제 나름대로의 승부수를 띄운 것임을 눈치챘다.
화친왕의 사람이기도 했고, 서엽이 별것 아닌 일로 이리 처신하는 것은 아닐 터. 진예는 아이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때에 맞춰 서엽이 고개를 살며시 들어 진예를 마주 보았다.
“이 아이가 폐하께서 명하신 것에 대한 답입니다.”
돌려 하는 소리에 진예가 잠시 그에게 무엇을 명했었는지 더듬었다. 수많은 것들이 있었지만, 역술인이라는 특이성을 감안한다면 짐작 가는 것은 하나였다.
진예의 날카로운 빛을 띠는 붉은 눈동자가 미마이를 응시했다.
곧 그녀의 입에서 허락의 말이 흘러나왔다.
“편전으로 따라오너라.”
* * *
황제의 명에 따라 내관과 궁인은 물론이요, 황제의 말과 행동을 빠짐없이 기록하는 좌사서·우사서와 편전 안에 숨어 있던 금위들까지 그 모두가 편전에서 멀어졌다.
정확히 독대는 아니었지만 참으로 오랜만에, 이리 모두를 물린 채 서엽과 마주했다.
본래는 내려져 있었어야 할 검은 발마저 올려 모습을 훤히 드러낸 진예는 옥좌에 앉아 서엽과 그 옆의 미마이를 내려다보았다.
회백국에서 왔다는 어린아이는 진예를 좀처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편전 바닥에 바짝 엎드려 시선을 필사적으로 내리깔고 있었다. 바닥을 짚고 있는 손은 덜덜 떨리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 옆의 서엽은 오히려 이때만을 기다려 왔다는 듯이 진예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간 보지 못한 시간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그의 태도가 썩 보기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진예는 용인해 주었다. 진예 나름대로, 그 정도는 봐줄 수 있을 만큼은 서엽을 아끼고 있었으니까.
바늘 하나 떨어지는 것까지 알아챌 수 있을 만큼 고요한 편전 안. 그곳에서 마침내 마지막으로 내부에 남아 있던 금위 하나의 인기척까지 사라졌을 때였다.
넓은 공간에 짙게 내려앉은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진예였다. 면류관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서엽을 응시하는 가운데, 목소리가 조곤조곤 울려 퍼졌다.
“그래, 조 후가 짐의 명에 대한 답을 가져왔다. 그것이 저 아이란 말이냐.”
진예의 질문에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있던 서엽이 고개를 숙이며 엄숙히 답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그 명이라는 게…….”
어떤 명령에 대한 것인지 이미 예측은 하고 있었지만 진예는 확인차 운을 띄웠다. 말끝을 흐리니 곧 서엽이 그녀가 예상했던 그대로의 말을 읊었다.
“일전에 동조 현상을 끊을 방도를 알아보라 이르신 바로 그것이옵니다.”
듣고 진예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드물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조금 고민이 되었다.
마냥 기뻐해야 하는 건가. 그러기엔 참으로 시기가 공교로웠다.
그렇다면 언짢아해야 하는 건가. 그러기엔 분명 제가 내린 명령이었다. 서엽에게 방법을 찾으라 했을 당시에는 정말로 연무건이 거슬렸고,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든 깨고 싶었다.
다만 서엽이 이렇게 빨리 그 방도를 찾아올 줄은 몰랐다.
최소한 몇 년은 걸릴 거라 여겼다. 아니, 죽을 때까지 결국 찾지 못할 수도 있을 거라고, 그래도 어쩔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정리하자면 말을 꺼낸 진예조차 딱히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 벌어진 셈이었다.
진예는 곰곰이 고민을 이어 가다가 물었다.
“그래, 사술을 이용하는 것인가?”
말하면서도 조금 꺼림칙했다. 불쾌하게도 이 순간에 제 아비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전 황제는 딸인 진예를 저주하기 위해 무당을 불러 황궁 곳곳에 부적을 묻었다. 그것을 발견했을 때 자신은 어떤 생각을 했던가. 사특한 것을 황궁까지 끌어들였을 정도로 미쳤다고, 그리 속으로 아비를 욕했다.
한데 연무건과 동조 현상을 끊기 위해 사술을 쓴다면 제 아비가 한 짓과 무엇이 다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진예로서는 아주 유쾌하지 못한 일이었다. 증오하는 아비를 떠올리게 된 것 자체가, 그와 자신이 동일 선상에 오르게 된 것 자체가.
한데 이번엔 묵묵히 듣고 있던 미마이가 답해 왔다.
“명인은 분명한 하늘의 뜻이라 사술로도 결코 끊어 내지 못합니다. 하지만 동조 현상은 명인자와 비슷해지고 싶은 사람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으로, 오랜 기간 쌓여 하나의 규칙이 된 것일 뿐입니다. 간단한 이치만 파헤치면 충분히 다룰 수 있는 일이니, 각인이 시행된 게 아니라면 굳이 사술까지 쓰지 않아도 됩니다.”
사술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거부감이 덜어지는 기분이었다. 한편으로는 미마이가 또릿한 목소리로 환의 말을 술술 내뱉자 놀랍기도 했다.
“환의 말을 할 줄 아는구나.”
중얼거리듯 흘린 말에 이번엔 서엽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미마이는 아주 어릴 적부터 환의 백성으로 살아왔습니다, 폐하.”
“……그렇군.”
진예는 잠시 머릿속으로 미마이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명인은 분명한 하늘의 뜻이라 끊어 내지 못한다.
연무건과의 인연이란 결국 그런 유인가 싶었다. 지금까지 그와의 관계가 이리 굴러온 것은 자신이 주도한 일이라고 여겼지만, 사실은 하늘의 농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연무건이라는 이상한 놈에게 흥미가 생겼다는 점은 부정하지 못했다. 살면서 한 사람에게 이 정도로 휘말린 적도 처음이었다.
진예의 검지가 옥좌의 팔걸이를 천천히 톡, 톡 두드렸다.
지금 와서 동조 현상을 깨기 싫어진 것은 당연히 아니다. 연무건과 한 목숨이 돼 버린 이 상황은 결코 기꺼운 것이 아니었으므로.
한쪽이 죽으면 다른 한쪽도 동시에 죽는다니. 진예 자신이야 여러 호위도 있고, 스스로도 죽지 않을 자신이 있다 치지만 연무건은 까딱 부주의하면 목이 날아갈 수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이 또한 핑계일지 모르겠으나, 정말로 시기가 좋지 않았다.
팔걸이를 두드리던 진예의 손이 문득 멈췄다.
“한 가지 더 묻겠다. 동조 현상을 끊으면 그로 인해 생긴 능력은 어찌 되는 것이냐.”
“그것은 저도 알지 못합니다.”
정작 중요한 질문에서는 제대로 된 답을 얻지 못한 진예의 미간에 균열이 일었다. 이리 되면 판단이 더욱 어려워져 버린다.
어떤 결론을 내야 하는지 몰라 진예가 드물게 갈팡질팡하는 사이, 그 기색을 알아차린 서엽이 나섰다.
“하문하실 것이 더 남아 있지 않으시다면 미마이는 내보내도 되겠습니까.”
그 말에 진예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서엽이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있어 보이는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미마이가 나가면 그와의 이리 완벽한 독대는 실로 오랜만이다. 아마 이전에 그를 제 침전에 사흘 동안 둔 뒤로 처음일 터였다.
과연 셋이서도 할 수 없는 말이 무엇인가는 쉽게 짐작이 되었지만, 진예는 고개를 끄덕여 허락을 표했다.
“내보내거라.”
그에 서엽이 거의 바닥에 눌어붙을 듯이 바짝 엎드려 있는 미마이를 일으켜 함께 밖으로 나갔다가 얼마 안 있어 돌아왔다.
서엽은 스스로 편전의 문들을 여닫고는 발밑에 깔린 금색 천을 밟으며 걸어 들어왔다.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숨 막히는 정적에 휘감긴 편전을 가로질렀다. 그가 한 발짝 한 발짝 신중하게 옮기는 것을 진예는 말없이 바라보며 과연 그의 첫마디가 무엇일지 짐작해 보았다.
마침내 서엽이 편전 한가운데 우뚝 멈춰 섰다. 옥좌와 그 사이의 거리는 여전히 멀었지만, 서엽은 그곳에 앉아 허리를 곧게 펴고 진예를 올려다보았다.
“동조 현상을 깨는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이십니다.”
서운해하는 마음이 말소리에 그대로 배어났다. 그러나 진예는 이런저런 쓸데없는 말이나 늘어놓으면서 피곤하게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다.
“돌리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하거라.”
한 고삐 풀어주자 곧바로 꽤 신랄한 말이 서엽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간 연 숙의에게 마음을 뺏기기라도 하셨습니까. 하여 동조 현상을 끊고 싶지 않아지신 것입니까?”
“짐이?”
“그런 것이 아니라면 어찌 기뻐하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듣다가 진예는 하마터면 크게 웃을 뻔했다.
방금 전에 명인은 하늘의 뜻이라는 미마이의 말에 마음이 뒤숭숭해지긴 했지만 연무건에게 마음을 빼앗겼느냐니, 이리 우스운 말이 어디 있는가. 하필 그 말이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조서엽에게서 나왔다는 것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헛소리를 하는 걸 보니 며칠 못 봤다고 서엽이 많이 초조해진 모양이다.
연무건이 자신의 침전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그를 만나지 않은 건 말 그대로 개들끼리 으르렁거리는 걸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그 이상 혹은 그 이하의 의미는 없었다.
결코 연무건을 아껴서가 아니었다. 애초에 아낄 이유가 없었고, 그렇게 귀중하게 취급할 요량이었다면 화친왕부에도 보내지 않았다.
진예는 서엽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꽉 쥔 주먹을 발견했다. 시선이 그곳에 닿자 뒤늦게 서엽이 손을 푸는 게 보였지만, 굳은 표정은 여전했다.
다른 이들 앞에서는 늘 침착한 서엽이 진예 앞에서는 제 마음을 전혀 숨기지 못했다. 아니, 오늘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동요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 앞으로 바짝 다가온 경계선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 안에 거침없이 발을 들였다.
“자그마치 닷새 동안 연 숙의가 폐하의 침전에서 나오지 않았다 들었습니다. 연유가 무엇입니까.”
마치 추궁하는 듯한 말투였다.
여태까지 느긋하게 듣고 있던 진예가 그를 기점으로 눈썹을 치켜세웠다. 붉은 눈에 순식간에 서늘한 기운이 들어찼다.
“그대가 감히 짐의 내밀한 잠자리를 궁금해하는 것인가.”
진평 또한 죽기 전에 저를 찾아와 연무건을 받아들이라느니 말라느니 하는 식의 같잖은 훈계를 해 댔었는데, 이쪽은 연무건이랑 밤에 어떻게 뒹굴었는지에 관심을 보였다.
아무리 서엽이라도 절대 발을 들여서는 안 되는 영역이었다.
한데 그것을 잘 알고 있을 서엽이 정말로 질투에 눈이 멀어 버린 것인지, 진예의 은밀한 경고에도 제멋대로 움직이는 입을 봉하지 않았다.
“궁금합니다.”
“…….”
“대체 연무건, 그 사내가 무어라 속삭였기에 이자가 평생을 바쳐도 곁을 내주지 않으셨던 폐하께서 이리 흔들리시는지.”
서엽의 조용조용한 말이 편전의 공기를 바꿔 놓았다.
진예는 그 어느 때보다도 냉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서엽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이내 옥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숨 막히는 정적이 가득 메워진 편전 안, 진예가 천천히 서엽을 향해 발을 옮겼다.
사그락사그락 소리를 내며 용포의 옷깃이 스치는 소리마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것이 묘한 긴장감을 일으켰지만 서엽은 제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진정시키며 다가오는 진예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진예가 서엽의 앞에서 발을 멈춘 순간.
짜악!
그의 뺨을 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편전의 고요를 갈랐다.
진예의 손은 작았지만 그만큼 매서웠다. 맞자마자 서엽의 왼쪽 뺨이 발개졌다.
오랜 세월 함께했지만 지금껏 진예에게 맞아 본 적은 없었던 서엽은 첫 손찌검에 충격을 받아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앞에 선 진예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그래서 더 지독하게 차가워 보였다.
한데 진예가 다시 손을 올리더니 아직 정신을 수습하지 못한 서엽의 얼굴을 또 한 번 내리쳤다.
날카로운 소리가 귀를 찌르면서, 맞은 서엽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그런 그의 얼굴이 제자리를 찾기도 전에 다시 한번 따귀가 내리쳐졌다.
서엽이 입술을 꾹 깨물며 얼굴을 도로 세우니 매서운 손길이 다시 떨어졌다. 네 대쯤 맞으니 얼굴에 감각이 사라진 것 같았다.
서엽은 어깨까지 떨며 다시 진예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또 한 번.
그렇게 총 다섯 대를 내리친 진예가 그제야 손을 내렸다. 하지만 서엽은 고개를 돌린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서엽의 뺨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단정한 얼굴에 진예의 손자국이 벌겋게 남아 살며시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서엽은 제 눈에 고이려고 하는 눈물을 흩어 놓고자 눈을 한번 꽉 감았다가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진예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뺨 위로 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그렇지만 방금 제 말을 물리진 않았다. 외려 한마디 덧붙였다.
“연무건을, 마음에 품게 되셨습니까…….”
“조서엽.”
진예가 맞고도 정신을 못 차린 그의 이름을 엄히 불렀지만 서엽은 입을 놀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가 이 조서엽보다 더 소중해졌습니까.”
진예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어리석은 사내를 어찌해야 할지 진예는 도저히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주 풀이하기 어려운 도식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아마 상대가 조서엽만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서 그를 내쳐서 이 복잡한 문제 따위 돌아보지도 않고 당장 치워 버렸을 터였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차라리 정치적인 문제라면 바로 답을 낼 수 있었을 텐데, 그녀는 이런 감정싸움에는 능하지 않았다.
게다가 왜 자신의 모든 행동이 ‘그런’ 쪽으로 연결되는지도 솔직히 이해 불가였다.
진예를 제외하곤 모든 사람들이 그놈의 사랑이라는 감정을 너무 크게 생각하고 있었다. 마치 그것이 없으면 숨도 쉴 수 없다는 양.
대체 왜 이렇게 모두가 그런 쓸모없는 감정에 목매다는 것인지 전혀 공감이 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지질 않았다.
진예는 저밖에 안 보인다는 듯 두 눈에 오로지 자신만 담은 채로 안쓰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보며 머리를 짚었다.
“……그럴 리 있겠느냐. 흔들리지 않았다.”
조금도, 조금도 말이다.
연무건은 전혀 특출한 데 없는 사내였다. 그저 오기와 악으로 똘똘 뭉친 놈일 뿐이다.
〈한 달 안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허풍만 잔뜩 든.
평범한, 아니 아주 보잘것없는 녀석.
제 명인자만 아니었다면 애초에 그 존재조차 몰랐을 인간이다.
“하나.”
그렇지만.
“짐이 후궁을 침전에 들이는 데 조 후의 허락이 필요하진 않을 터.”
“…….”
“선을 넘지 말거라, 서엽아. 아무리 너라도 더는 허락지 못하니.”
연무건을 제가 어떻게 다루든, 그에 대한 간섭은 사양이었다. 더군다나 제 후궁과 침대 위에서 뒹굴든 바닥에서 뒹굴든 조서엽에게 그 의미가 뭔지 친절하게 설명해 줄 의무 또한 없었다.
내밀하고 사적인 영역이다. 몇 년을 함께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공유받을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 동조 현상을 당장 끊지 않으시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곧 전쟁이 날 것이다.”
전쟁이 나는 것인지, 아니면 전쟁을 내는 것인지 선후 관계는 모호하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은 죽은 화친왕이 저질러 놓고 간 일이다.
황궁에 침입한 익재를 시작으로 녀석도 어차피 이쪽을 치려고 호시탐탐 노렸을 터였다. 그러니 진평이 죽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위도양이 움직인 것 아니겠는가.
연무건 또한 화친왕부의 별채에 있던 지하실에 익재가 있는 듯하다 했다. 황도 안에 그 괴물들이 산다는 사실만으로도 전쟁을 일으킬 명분은 차고도 넘쳤다.
그리고 연무건이 진평의 목을 따려 왔다 갔다 하는 동안 진예도 가만히 앉아만 있지는 않았다.
익재를 쓸어버리겠다 결심한 그다음 날부터 제국의 충신들에게 밀지를 보냈다.
“각지에 군을 보내라 일렀으니 얼마 안 가 병력이 모이겠지…….”
능력이 심히 아까운 여인이지만 위도양도 제 명인자의 곁으로 돌아가게 하고, 이 기회에 익재와도 전투를 치를 예정이었다.
남아 있는 다섯 개의 서식지를 모두 뿌리 뽑은 뒤 읍주에 있는 최초의 익재까지 제 손으로 직접 제거할 것이다.
자신이 황좌에 앉아 있을 때 치를 마지막 전쟁이었다.
이를 끝으로 환을 위협하는 모든 것을 제거한다면…… 진정한 태평성대를 이룩해 평화를 후대에 물려주는 것 또한 허무맹랑한 꿈은 아닐 터.
그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이 따르겠지만, 전장에 흐르는 피에 대한 책임은 지도자인 황제의 몫이다.
제위에 오르고 5년밖에 안 돼 대규모 전쟁을 두 번이나 일으킨, 피에 미친 황제라 역사에 기록되겠지만 그것 또한 진예에겐 기꺼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연무건이 가질 존재 가치는 하나였다.
“전쟁이 일어나면 폐하의 것을 베껴 간 연무건의 능력이 필요하다, 그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것입니까?”
“도움이 될 것은 분명하니 말이다.”
“…….”
“애초에 전쟁이 일지 않으면 더 좋겠지만, 치러야 한다면 한 명이라도 더 구명하는 것이 옳다.”
진예의 말을 듣는 서엽은 더욱 비참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무건에게 효용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마도 그는 주장하고 싶을 것이다.
연무건이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자신도 할 수 있다고, 제 몸을 다 바쳐서 그가 할 일을 대신하겠다고.
하지만 동시에 서엽은 깨달을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는 연무건이 아니다.
대체가 불가능했다.
허벅지 위에 올려진 서엽의 주먹 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 모습이 진예의 시야에 고스란히 들어왔지만 진예는 외면했다.
조서엽에게 마지막 선택권을 주었을 때 이미 그의 고통을 외면하겠노라고 결심했던 바였다. 가시밭길을 걷겠다 한 자는 다름 아닌 그 자신. 동정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서엽은 진예를 마주하기 괴로운 듯 고개를 푹 숙이고는, 신음처럼 말소리를 흘려보냈다.
“정녕 그 이유 때문이 맞습니까…….”
진예는 그런 서엽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오랜 세월 지켜봐 온 조서엽의 모습 중에 지금이 가장 못나 보였다. 아니라고 하는데도 이미 어떤 확증이라도 가진 사람처럼 굴었다.
제 행동의 어디에 문제가 있기에 서엽이 이리 초조해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답답하기까지 했다.
“아니면? 조 후는 기어코 짐이 연무건을 연모하고 있다는 말이라도 듣고 싶은 것이냐?”
“하면 저를, 닷새간 보지도 않으신 연유가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예컨대 조서엽보다 연무건을 더 중하게 여겨서 저를 홀대하는 것이 아니냐는 항변이었다.
계속 같은 말에서 맴돌기만 할 뿐 대화가 진전이 안 됐다. 서엽과 이 정도로 말이 안 통한 적은 처음이라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진예는 입을 굳게 다물고 몸을 휙 돌렸다. 말도 안 통하고 맞아도 정신을 못 차리는 상태이니 더 마주해 봐야 답이 나오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뒤돌아선 그녀가 가만히 제 옥좌를 노려보았다.
생각해 보면 이 모든 일이 결국 제 명인으로 인한 것이었다.
차라리 명인 따위 나타나지 않았다면 조서엽이 이리 불안해할 이유가 없었다.
명인이 나타났어도 상대가 연무건과 같이 평범한 놈이 아니라, 권문세가의 아들이었다면 진예도 적당히 좋은 가문과 결합한다 치고 그러려니 하며 받아들였을 터였다. 그랬다면 조서엽의 태도도 지금과는 사뭇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늘이 명인이라는 것으로 저를 손바닥 위에 두고 농락하는 기분이었다.
하긴, 제 운명이 어디 그리 순탄한 적이 있긴 했던가. 생각해 보면 부모마저도 제대로 된 자들이 아니었지 않은가.
다시금 그들 사이에 꽤 긴 침묵이 찾아왔다. 그동안에도 서엽은 진정하지 못하고 거친 숨소리를 삼켜 댔다. 어쩌면 또 우는 것일지도 모른다.
조서엽은 진예보다 오히려 마음이 여리고 정신력이 약한 편이었다. 좀 더 인간적이라는 표현을 붙여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서엽은 매번 확인받고 싶어 했다.
“……저를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폐하.”
지금처럼.
그러면 진예는, 이럴 때만큼은 주저하지 않고 그가 원하는 답을 내주었다.
“버리지 않는다.”
그러지 않으면 서엽이 모래처럼 단숨에 무너져 내릴 것을 알기에 그랬다.
한데 오늘은 그가 한발 더 나아갔다.
“폐하를 보지 못하면, 그리되면…… 저는 죽습니다.”
진예가 고개를 돌려 서엽을 확인했다. 눈가가 붉어진 그의 두 눈엔 예상대로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보지 못하면 죽는다.
일전에 내쳐 달라는 그에게 제가 한 말이긴 했지만, 정작 서엽이 자기 입으로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정말 금세라도 바스라질 것만 같이 위태해 보였다.
다만 이 순간에도 그는 사랑을 구걸하진 않았다.
“폐하께선 분명 제 마음을 받아 줄 수는 없지만 아무도 마음에 들이지 않겠다, 저에게 분명 그리 약조하셨습니다. 기억하십니까.”
“기억한다.”
“그 한마디가 이 조서엽을 버티게 하는 힘입니다.”
서엽은 제 몫을 달라 구걸하는 대신 아주 이기적인 소망을 읊었다.
“그러니 결코 연무건을 연모하지 말아 주십시오.”
제게 주지 못할 거면 남의 몫도 남겨 두지 말라고.
“그자를 벌레처럼 봐 주십시오.”
서엽은 마치 피를 토해 내듯 그리 내뱉었다.
그의 감정은 단순히 무건이 서엽을 질투하고 경계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제 모든 것을 걸고 지켜 왔던 여인에 대한 최소한의 소유권 주장이었다.
하지만 최소라고 하여 그 마음이 작다는 의미가 아니다. 물러날 데 없는 마지막 한 칸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 그 자체다.
차지하지 못하는 것까지는 견딜 수 있다. 그러나 진예가 곁에 없으면 죽는다.
말하자면 조서엽에게 있어 이 상황은 생존 싸움 같은 것이었다.
“신은, 감히 폐하의 몸에 손댄 그놈을 마음속에서 수백 번은 도륙 냈습니다.”
현실에서 그는 연무건에게 스스로를 살릴 칼을 내주었지만, 상상 속에선 달랐다.
단 한 번도 마음 편히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처절한 고통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죽게 했다.
한데 가만히 듣고 있던 진예가 천천히 발을 옮겨 도로 옥좌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면류관의 구슬 사이로 비치는 그녀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서엽의 말을 들으면서 어떤 기분 나쁜 깨달음이 머릿속에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진예는 옥좌에 도로 앉으며 양 팔걸이를 꽉 잡았다.
“……짐은 이미 개와 주인의 숙명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개는 주인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한다.
주인은 개를 무조건적으로 배신한다.
그런 숙명을.
그리고 그 말을 내뱉은 시점에 이미 진예는 그를 배반했다.
왜냐하면 그때 이미 연무건은 그녀에게 있어 벌레 같은 존재에서는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그 가치를 책정한 순간부터 이미.
설령 서엽의 바람대로 제가 연무건을 벌레 취급 한다고 해도, 좌절할 놈은 아니었다. 하늘을 보지 못하고 땅바닥만 기어도 상관없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서엽은 지난번에 주어졌던 마지막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었다.
절대로.
“짐의 정부가 되지 않겠다 한 것은 조서엽 그대였지.”
그 시점에서 이미 조서엽은 연무건에게 밀려 버렸다고 봐도 무방했다.
진예의 말을 듣고 나서야 서엽도 그 사실을 깨달은 모양인지, 진예를 바라보는 시선이 흔들렸다.
격하게 요동치는 눈동자에 후회가 깃들었다. 서엽은 입술을 여러 번 열었다 닫았다 하며 달싹이다가 이내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하면 이제라도 제게 폐하를 품에 안을 기회가 남아 있습니까.”
가망성이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묻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진예의 대답 또한 단호했다.
“늦었다.”
대답을 들은 서엽은 두 눈을 꾹 감았다. 깊은 숨을 들이켜자 가슴 깊은 곳이 찌르르 아려 왔다. 편전에 고여 있는 농도 짙은 공기가 제 온몸을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제 마음을 거세게 압박해 오는 그 감정이 서엽은 절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현기증이 찾아온 것처럼 새까만 어둠이 그의 앞을 가렸다.
이제 조서엽은 어떻게 해도 연모하는 저 여인과 제가 바라는 형태의 관계로 나아갈 수는 없을 터였다. 그것은 통렬한 깨달음이었다.
서엽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그러자 방금 전 진예에게 맞았던 뺨이 욱신거렸다. 덕분에 제정신이 빨리 돌아왔다. 제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명확해졌다.
서엽의 눈이 다시 서서히 뜨였다. 눈꺼풀 사이로 드러난 검은 눈동자에 어떠한 결의가 떠올랐다. 그의 시선이 옥좌에 올라 있는 진예에게 똑바로 향했다.
“하면…… 한 가지만 확언해 주십시오.”
“무엇이냐.”
“동조 현상을 끊는 날, 제가 연무건을 죽이겠습니다.”
“…….”
“허락해 주실 수 있습니까.”
답을 요구하는 서엽의 눈엔 연무건을 향한 살의가 가득했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진예는 자신이 바란다고 해도 제 여인이 될 수 없는 이였다. 차지하고 싶다는 욕망은 일찌감치 접었었다.
그렇다고 해서 갖지 못하면 망가뜨리겠다는 유아기적인 생각을 할 만큼 어리석지도 않았다. 서엽은 진예가 언제나 아름답고 완벽한 자신의 황제로 남아 있길 바랐다.
다만 그런 그녀를 누군가가 독차지하게 둘 수는 없는 법이다. 따라서 남는 선택지는 하나였다.
다가가는 존재를 전부 제거하는 것.
즉, 연무건을 죽여야 조서엽이 산다.
그것은 절대 명제였다.
* * *
한편 때아닌 내관들의 마중을 받아 가마를 타고 융경궁으로 돌아온 무건은 이전과 달리 일사불란하게 저를 맞이하는 궁인들을 보며 난감함에 땀까지 흘렸다.
황제의 총애를 원한 게 아니라 그저 진예와 함께 있고 싶어서 담람궁의 침전에 내내 머물렀던 것인데, 아무도 그것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듯했다.
그동안 무건에게 말을 걸기는커녕 무언가 이야기해도 무시하기 일쑤였던 융경궁의 궁인들은 그가 융경궁의 전각에 들어설 때까지 알아서 모셨다.
늘 제 손으로 열던 방문도 오늘은 내관들이 옆으로 밀어 주는 것을 보며 무건은 기분이 묘해졌다.
그에 생각이 많아진 무건은 융경궁의 작은 침전 침대에 걸터앉아 멍하니 시간을 죽였다.
창문에 투과된 아침의 은은한 햇살이 그의 손에 내려앉았다. 그것을 잡으려는 것처럼 괜히 몇 번 손장난을 치다가 이내 주먹을 꽉 쥐었다.
사실은 할 생각이 너무 많고 복잡해서 정리가 제대로 되질 않았다.
처음 황궁에 와 진예를 만난 지 석 달은 지났다. 벌써라고 해도 좋고, 아직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동안 제 평생에 겪지 못한 온갖 파란을 다 겪었다. 죽을 뻔도 했고, 누군가를 죽이기도 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전쟁이 일어난다고 한다.
그저 제 명인자를 쫓아왔을 뿐인데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큰일에 휘말리고 있었다.
무건은 한숨을 푹 내쉬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비볐다. 마른세수를 몇 번을 해도 머리가 가벼워지진 않았다.
‘앞으로 무얼 어떻게 해야…….’
지금까지는 간신히 요행으로 헤쳐 나왔지만 앞으로도 그리되리란 법은 없었다.
하지만 진예를 다시 보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선 이곳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누구 말마따나 뺨 백 대만 맞고 쫓겨날 수는 없으니까.
그런 한심한 사내가 아니라 진예에게 좀 더 제대로 된 무언가가 되어 보이고 싶었다. 처음엔 농담처럼 나온 말이었지만 황후가 되고 싶다는 욕망도 진짜였다.
단지 명인자라는 허울만 쓴 자가 아니라, 정말로 그녀의 유일한 사람이 되고 싶었으니까.
그에 문득 침전 한쪽에 있는 거울을 보다가 제 품을 뒤졌다. 진예에게서 도로 가져온 옥가락지와 진평이 예전에 주었던 익재를 끌어들인다는 향낭이 끄집어져 나왔다.
그것을 손 위에 두고 가만히 노려보고 있을 때였다.
“숙의마마.”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의 늙은 내관이 그를 불렀다. 갑작스러운 부름에 흠칫한 무건이 손에 있던 것들을 도로 품에 넣었다.
“……무슨 일입니까?”
보통 방에 들어오면 아무도 관심을 둔 적이 없었다. 때에 맞춰 식사나 다과만 들여보내는 정도라 사육당하는 건가 싶었을 정도였다. 한데 아직 식사 때도 아니다.
용건이 짐작이 안 되어 물어보니 잠시 뒤 답이 돌아왔다.
“폐하께서 마마께 사람을 보내온 듯하옵니다.”
진예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에 무건이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보내온 사람이라니. 처음 있는 일에 가슴까지 뛰어 서둘러 제 손으로 방문을 열었다.
손님은 밖에 있다는 말에 침전 밖으로 나가니 웬 사내 둘이 보였다. 무건보다 나이 스물은 족히 많아 보이는 이들이었다.
한 명은 옆구리에 책을 끼고 있었고, 한 명은 허리춤에 칼을 차고 있었다. 하나는 문관이고 다른 하나는 무관임을 쉬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다만 둘 모두 스치듯 본 적도 없는 낯선 얼굴이었던지라 무건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주춤했다. 그러는 사이 거의 아버지뻘인 그들이 먼저 무건에게 허리를 굽히며 관등 성명을 읊었다.
“의랑 복진, 숙의마마를 뵙사옵니다.”
“집금오 도웅, 숙의마마를 뵙사옵니다.”
복진이 문관, 도웅이 무관 쪽이었다. 물론 직위를 들어도 뭐 하는 자들인지 짐작은 안 됐고, 다만 옆의 내관이 대단한 것을 본다는 듯한 표정인 걸 보면 꽤 지위가 높은 자들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이게 뭐 하는 상황인가 싶었는데, 다행히 복진 쪽이 먼저 설명을 해 주었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고 앞으로 숙의마마의 교육을 맡게 되었사옵니다.”
“교육……?”
중간에 들린 단어를 곱씹던 무건이 아, 하고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오래돼서 잊고 있었는데 진예가 제게 이 융경궁과 숙의 첩지를 내릴 때 그런 말을 하긴 했다.
〈앞으로 네게 가르침을 줄 사부를 붙여 주겠다. 우선 그 천박한 말투부터 고치거라.〉
그 이후로 언질조차 없기에 그냥 넘어가는 건가 싶었는데, 보낼 사람을 정하느라 늦은 거였나…….
무건은 난처해하는 표정으로 앞의 둘을 보았다. 진예가 선별해 보냈을 테니 만만한 자들은 아니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방증하듯 둘 다 꼿꼿한 자세며 고집 있어 보이는 표정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이들을 통해서 앞으로의 할 일을 찾으라는 건가.
무건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짓고 말았다.
진예는 세상에서 가장 냉혹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 서릿발 같은 눈빛 속에도 녹아들 듯 따뜻한 곳이 있었다.
〈받아 본 적 없는 사랑을…… 어찌 주겠느냐…….〉
단지 주는 방법을 잘 모를 뿐이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무건은 진예가 보냈다는 이들을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사부님들.”
* * *
푸드드득!
도양은 바위 위에 앉아 짙은 밤하늘 아래 깊은 산속의 나무 사이로 날아가 사라지는 비둘기를 올려다보다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러고는 제 발 아래 펼쳐진 광경을 확인했다.
우득, 우드득. 뼈가 씹히는 소리와 함께 검은 괴물들이 죽은 지 얼마 안 된 시신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 있던 몇몇은 그 광경을 보다가 다른 곳으로 달려가 토악질을 하기도 했고, 옆에 있는 이들은 적어도 고개를 돌리고 있었지만 도양은 달랐다. 그 모습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내려다보며 옆의 사내, 정위에게 말했다.
“해서 탁 후께서는 언제쯤 합류를 하신답니까.”
정위는 위도양이 들고 있는 향에서 나는 기분 나쁜 냄새에 슬쩍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거리가 있으니 적어도 보름은 걸릴 거네.”
화친왕이 죽었다는 소식이 날아들고 엿새째 되는 날 위도양이 화친왕부의 군사들과 운영하던 화도 상단을 이끌고 정위에게 찾아왔다.
〈연 숙의와 황상을 죽이고 우리 손으로 새 황제를 옹립하지요, 정 백.〉
그녀가 원하는 건 제 명인자인 진평에 대한 복수였다. 그런 도양이 정위에게 찾아온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정위는 진평을 지지하고 있었고, 아직도 진예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여 그들은 굳이 화친왕이라는 고리가 없어도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진예의 부름을 받고 황도로 향하던 군사 한 무리를 세뇌한 익재를 이용해 도륙한 참이었다. 방금 날아간 비둘기는 이 소식을 황도에 처박혀 있는 황제에게 전할 것이다.
진예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유쾌해진 도양이 미소 지을 무렵이었다. 이번엔 정위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한데 미마이가 조서엽의 손에 넘어갔다고 들었네.”
상당히 껄끄러운 주제였기에 도양이 눈살을 슬며시 찌푸렸다.
“화화가 죽은 날, 아무래도 조 후가 친왕부에 침입해 그 아이를 빼돌린 것 같습니다.”
“그 아이가 없어도 저놈들을 다루는 데 지장은 없나?”
질문을 받고 도양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다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이 향초도 계속 만들 수 있고, 익재가 모두 죽지 않는 한은…… 문제없지요.”
하필 진예의 가장 가까운 심복인 조서엽이 데려간 게 문제긴 했으나, 어차피 황제가 그 아이를 이용해 익재를 다룰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일단 익재는 포획하는 과정부터가 문제다. 지금 이렇게 익재를 다루는 그들도 시행착오만 몇 년을 겪었다. 미마이의 능력이 있다고 해서 전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소리다.
그리고 진예, 그녀의 성정을 고려하면 익재를 다 죽이면 죽였지 이용할 생각은 안 할 것이 자명했다. 미마이를 보아도 그 아이가 익재를 다룰 능력이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할 가능성도 농후하다.
그도 그럴 것이 미마이는 처음 몇 가지는 쉽게 보이려는지 술술 내주지만, 결코 제 전부를 알려 주진 않는다. 모든 걸 내주면 위기 상황에서 제 목숨을 살릴 방도를 잃는다는 걸 잘 아는 영특한 아이였으니까.
우드드드득.
요란하게 울리는 소리가 문득 거슬린 도양이 미약하게 한숨을 내쉬고는 익재들을 향해 한마디 했다.
“그만 먹고 가자.”
그에 정신 팔린 몇 놈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끼욱, 하면서 쇳소리를 내며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별로 귀엽지도 않고 징그럽기만 한 그 괴물들을 보며 도양이 덤덤히 이리 오란 손짓을 하자 익재들이 그녀의 머리 위로 날았다.
그것을 보고 도양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뒤돌아섰다. 그녀는 말없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으나 정위를 비롯한 사람들은 물론 많은 수의 익재들이 밤하늘을 까맣게 덮으며 뒤따랐다.
도양은 그곳을 완전히 떠나기 전 다시 제가 지켜보던 광경을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남몰래 희열에 들끓어 활짝 웃음을 지었다.
방금 전 제가 앉아 있던 그 자리 앞, 깊은 계곡엔 2천의 군사가 남김없이 몰살당해 있었다.
진예가 전쟁이 일 것을 예견했는지, 아니면 화친왕이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이쪽을 칠 계획을 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지방의 귀족들이 하나둘씩 군사를 차출해 황도나 다른 큰 군사 요충지로 보내고 있었다.
저들은 그중 가장 가까운 읍주 옆의 도시로 향하던 이들이었다. 그들의 동향을 보고받고 길목에서 기다리다 익재를 이용해 덮친 참이었다. 그리고 저 꼴을 만들기까지 단 한 시진밖엔 걸리지 않았다.
아마 시신에서 흘러나온 붉은 피는 저 졸졸 흐르는 계곡 물을 따라 하류로 흘러들 것이다. 내일쯤 그것을 본 사람들이 생길 터이고, 상서롭지 못한 일에 백성들 사이엔 곧 공포심이 퍼질 것이다.
저 참상을 보고받은 진예는 분노에 차오를 테지.
전쟁을 열 선전포고로는 충분했다.
* * *
진예가 군사를 차출해서 보내라 밀지를 보낸 곳은 대략 60여 곳.
공작, 후작, 백작 3등작에 따라 황실로부터 봉토를 부여받는 이들이 다스리는 크고 작은 영지가 100곳 이상 되었지만 그곳의 주인들이 환의 황제에게 무조건 호의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더욱이 이전 황제와 황후를 죽이고 등극한 진예이니, 알게 모르게 화친왕 진평을 뒤에서 돕던 이들도 꽤 되었고 어설프게 중립을 유지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을 제외한 60명에게 군사 차출을 명한 것이었다.
그렇게 온 군사들이 오늘부터 속속들이 황도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상황을 편전의 옥좌를 가린 검은 발 앞에 선 태감이 줄줄 읊고 있었다.
“……계봉에서 1천, 한서에서 2천, 원진에서 1500의 군사가 들어 총 1만 3천의 군사가 모였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숫자에 듣고 있던 편전에 든 관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바로 앞에 서 있는 조서엽이야 이미 들은 바가 있어 덤덤했지만, 다른 이들은 갑작스러운 전쟁 이야기에 탄식을 하기도 하고 놀라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들은 검은 발 뒤에서 옥좌에 앉아 조용히 상소문들을 읽어 내려가는 진예를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기를 반복했다.
현재 각지에서 군사를 차출하는 명분은 남은 다섯 개의 익재 서식지를 전부 쓸어버리고 백성들의 안전과 평화를 구가하겠다는 것이었으나 시기를 봤을 때 속내는 더욱 복잡했다.
진예를 제외하고 황실의 거의 유일한 핏줄이었던 화친왕이 죽고 거의 기다렸다는 듯이 치르고자 하는 전쟁이다. 대외적으로는 돌연사라고 공표됐지만 화친왕이 황제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것은 기정사실.
화친왕이 죽은 날 저녁 진예의 후궁인 연 숙의가 피를 뒤집어쓰고 담람궁의 침전에 들었다는 소문은 이미 파다하게 퍼졌고, 비밀이라고 하기에도 어색했다.
그런 상황에서 익재와 전쟁을 치르겠다는 건 화친왕을 죽인 것에 대한 불만을 틀어막고 황권을 더 공고히 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다만 진예가 제위에 오르고 2년 동안 익재와 전쟁을 치렀다. 이제 겨우 3년 잠잠해져 있었을 뿐인데 다시 전쟁이라니.
그러나 이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반박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화친왕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가지는 상징성과 그녀가 이전 전쟁에서 입증한 익재 토벌 능력은 반대할 명분을 차단하고 있었다.
태감의 말이 끝나자 진예가 읽고 있던 상소문을 옆의 내관에게 건네 그 앞의 서궤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시선을 들어 편전에 든 대신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하여 짐이 직접 3군의 병사를 데리고 나서고, 나머지 지역에서 1에서 2군의 병력을 대기시킬 계획이오.” (*1군당 대략 1만 명)
황제가 직접 거병을 하겠다는 말에 나서서 말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차피 익재를 토벌하는 데 있어서 그녀보다 더 적합한 자는 없었으니까.
“남아 있는 익재의 다섯 서식지는 남쪽에 있는 것부터 없애고 마지막으로 읍주를 되찾는 것으로 할까 하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사실상 통보를 하는 와중이라 문무대관들의 대답은 전부 같았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편전에 든 모든 이들이 한목소리로 대답하는 것에 진예는 심드렁히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는 것으로 화제를 마쳤다.
10만 정도의 군사를 움직이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쉬운 과정이었다. 대신들의 입장에서야 하루아침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만큼 진예가 이미 알아서 철저하게 준비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다만 앞으로 각지에 원하는 수만큼의 군사가 모이기까지는 한 달은 족히 걸릴 것이니 전쟁이 발발하는 데는 실질적으로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 한 달 동안 당연히 놀고먹을 수는 없는 법이다. 익재 토벌로 대신들의 눈을 가리고 진예가 할 일은 따로 있었다. 연무건이 알려 온, 화친왕부에 이어져 있었다는 황도 땅 아래 지하실의 존재를 파헤치는 것이었다.
황도에 익재가 득시글거린다는 사실을 알려 봤자 혼란만 가중될 게 뻔해 진예는 그 존재를 공표하지 않았다. 대신 금군을 시켜서 화친왕부 일대를 수색하게 하고 있었지만 아직 이렇다 할 진전이 없는 상태였다. 별채와 연결됐다던 입구는 별채가 전소된 시점에 벌써 막혔고.
만약 일이 이렇게 계속 답보 상태를 유지한다면, 그러니까 익재 토벌을 위해 거병할 때까지 지하실의 입구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상황이 복잡해질 수도 있었다.
진예는 앞으로의 일을 머릿속으로 계산하며 대신들에게 해방을 알렸다.
“오늘 조회는 여기까지 하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대신들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런 뒤에야 진예도 몸을 일으켜 느긋한 발걸음으로 편전을 가로질렀다. 한데 밖으로 나가는 그 잠시를 기다리지 못한 태감이 문 너머에서 진예를 불렀다.
“폐하, 박 태감이옵니다. 폐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들어도 되겠사옵니까.”
“들라.”
허락이 떨어지자 편전의 문이 열리고 고개 숙인 태감이 편전 가운데 발을 멈춘 진예에게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는 한껏 긴장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진예의 옆으로 와 귓속말을 전했다. 이야기를 듣는 진예의 표정이 점차로 굳어 갔다.
내용인즉 북쪽에 위치한 비래 지역에서 읍주로 향하던 군사 2천이 몰살당했고, 그 피가 강을 타고 하류에 있는 마을에 흘러갔다는 소식이었다.
마지막으로 태감은 작은 쪽지를 진예에게 건넸다. 그곳에는 눈에 익은 글자가 적혀 있었다.
大義滅親
대의멸친.
진예의 핏줄은 이제 아무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니 이 말의 의미는 하나로밖에 해석이 되지 않았다.
화친왕에 대한 복수.
그것을 보며 진예의 붉은 입술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반역을 하겠다는 것이로군.”
서둘러야겠어.
그리 중얼거린 진예는 쪽지를 떨어뜨려 밟아 버렸다. 이어 흑화에 밟힌 쪽지는 형편없이 구겨졌고, 진예의 뒤를 따라 나오는 궁인들의 발밑에서 찢겼다.
어둠이 짙어진 밤인데도 가득 찬 달이 발치를 훤히 밝혔다. 시각은 삼경의 허리쯤 왔을 때, 싸늘하다 싶은 공기가 코끝에 감도는 봄밤이었다.
진예는 서엽과 위장군을 양쪽에 대동한 채 담람궁의 후원을 통해 궁에서 몰래 빠져나왔다.
그녀의 옷차림은 그저 어느 집안의 아가씨처럼 수수하고 가벼웠다. 그러나 작은 키와 전체적으로 선이 가는 몸임에도 발걸음이 진중해서인지 조그마한 발이 앞으로 한 발짝씩 나아갈 때마다 기묘한 묵직함이 있었다.
그렇게 진예를 필두로 세 사람분의 발소리가 사람이 오간 흔적이 거의 없는 높은 동산을 가로질렀다. 한데 그러던 중 진예는 문득 시야 끄트머리의 조금 환한 빛을 발견하고 고개를 돌렸다가 융경궁의 담을 마주해 잠시 발을 세웠다.
별궁인 담람궁과 융경궁이 후원의 동산 하나를 두고 위치해 있었다는 걸 진예는 그 담을 확인하고서야 떠올렸다.
어렸을 적 부모와 함께 살았지만 안 좋은 기억만 있는 곳이다. 그래서 한 번도 걸음을 들인 적 없는데, 이제 저곳에서 같이 살았던 이가 자신 외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제가 모두를 그리 만들었다.
“폐하……?”
그녀가 막 감상에 빠지려 할 때쯤 몇 걸음 떨어져 있던 서엽이 뒤로 다가왔다.
진예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언덕 위에서 내전을 둘러보다가 밤이 깊은데 여태 불이 켜져 있는 그곳이 어디인가 가늠했다. 아마도 서재가 위치해 있을 곳이었다.
연무건과 서재라니, 도저히 어울리는 조합이 아니다. 그야 낮에 하늘 천 땅 지라도 가르치라고 의랑을 보내 두긴 했다만 딱히 그 까막눈을 걷어 낼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근데 궁인들까지 다 잠들었어야 할 이 시각에 서재에 불이 켜져 있다니.
연무건이? 그 녀석이 진짜로 공부라도 하고 있다고?
진예는 속으로 떠올린 의문을 입 밖으로 내었다.
“연 숙의가 본래 저리 잠이 없느냐.”
“…….”
질문을 받은 서엽의 표정이 굳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진예에게 답을 내줄 이는 본의 아니게 무건과 이레 동안 함께한 서엽뿐이었다.
그는 잠시 틈을 두었다가 마지못해 이야기했다.
“지나치게 없으시기에 불을 켜 두면 궁인들이 잠들지 못하니 끄시라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어찌 잠을 못 든단 말이냐.”
“소신이 연유를 찾기는 어렵사옵니다.”
위장군을 의식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분히 불편한 이야기를 하기 때문인지 서엽은 평소보다 딱딱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러자 진예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궐에 와 긴장이라도 한 모양이지.”
연무건이 살던 지역은 황도와 멀리 떨어진 북방의 변경이었다. 그나마 여름을 제외하곤 늘 서늘한 곳이라 들었다.
평생 제가 살던 터전을 버리고 황도로 왔으니 어지간히도 힘들 것이다. 전혀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 모두 낯선 사람뿐이니까.
제 앞에선 그런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지만 그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을지도.
좀처럼 불이 꺼지지 않는 서재에 시선을 두고 진예가 그리 잔생각을 이어 갈 때였다. 돌연 그녀의 어깨 위로 묵직한 겉옷이 내려앉았다. 고개를 돌리니 서엽이 뒤에서 진예에게 제 옷을 벗어 준 것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서엽의 어둡게 가라앉은 검은 동공이 시선을 내리며 진예의 눈길을 살며시 피했다.
“……밤공기가 찹니다, 폐하.”
진예의 발을 돌릴 핑계치곤 참으로 비루했다. 진예는 지난번 편전에서의 설전 이후로 서엽의 표정이 내내 좋지 못한 것이 걸렸다. 표정만이 아니라 행동도 묘하게 위축되었다. 지금도 제 어깨에 겉옷을 걸쳐 주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대체 뭐가 서엽을 이리도 몰아세우는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가 서엽에 대해 모르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요즘은 그것을 확신하기가 어려웠다.
연무건이 그리도 위협적인 존재인가, 그에겐.
아니면…….
진예는 서엽의 뜻대로 일단 가던 길로 발을 옮겼다. 제 뒤를 따라오는 조심스러운 발소리를 들으며 서엽이 제게 숨기는 것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명인.’
서엽에게 명인이 분명 나왔는데 그는 아직도 제 짝을 만나지 못한 듯 보였다. 그뿐인가, 팔까지 지지면서 제 명인을 가리고 없는 듯이 행동했다.
‘도대체 누구기에.’
사실 명인은 정말로 제멋대로라, 낮은 확률이지만 같은 성별인 사람이나 핏줄끼리 이어지는 때도 종종 있었다. 그 외에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의 태명이 적힌다든가, 명인이 없어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무명씨였다든가. 생각지도 못한 여러 예외가 발생했다.
마치 하늘은 완벽하지 않음을 증명하듯이. 혹은 하늘이 인간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음을 알리듯이.
서엽도 그런 경우인가.
그렇다 해도 그가 이리 초조해할 이유는 되지 않았다.
한데 서엽이 명인에 대한 것은 진예에게 한사코 숨기고 있으나 말하라 명령하기도 모호했다. 그것은 서엽이 제 침전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궁금해하는 것과 같이 아주 사적인 영역이었으니까.
물론 제가 물어보면 마지못해 대답할 서엽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 그어 놓은 금을 밟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뿐더러, 그렇게 되면 저 사내는 더 거침없이 선을 넘어 버릴 것이다. 빌미를 제가 제공할 수는 없었다. 그건 조서엽에게 쓸데없는 희망만 주는 일이니까.
차라리 이 상태가 낫다.
이런 답보 상태가 차라리.
그리 정리하는 동안 동산의 가장 꼭대기에 도달했다. 그러자 황도에 유일했던 친왕부, 화친왕부가 훤히 모습을 드러냈다.
진예의 시선이 화친왕부의 구석에 있는 전소된 전각 쪽으로 향하자 옆에 있던 위장군이 건조한 어투로 상황을 보고해 왔다.
“친왕부의 송한각을 중심으로 일대를 파내고 있습니다만 말씀하신 지하실의 입구를 더 찾을 수는 없었사옵니다.”
송한각은 무건이 말한 지하실 입구가 있었다던 별채를 가리켰다.
“원래 입구를 통할 수는 없는 건가.”
“지하실의 구조가 어떻게 돼 있는 것인지 짐작이 안 되나…… 아무래도 일부 지역을 폭파해 완전히 매몰해 버리고 통로를 막은 듯합니다. 후원 쪽에 일부 땅이 꺼진 지역이 있었습니다.”
“지하실이 친왕부의 바깥까지 이어져 있을 가능성이 높겠군.”
“그러하옵니다.”
대답을 들으며 어쩐지 목 부근이 서늘해지는 것 같아 서엽이 제 어깨에 걸쳐 준 옷의 깃을 잡아서 좀 더 몸을 푹 감쌌다.
듣다 보니 제가 아우인 진평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저런 지하실은 언제 만든 것이며, 그가 황위를 노린 건 구체적으로 언제부터였단 말인가.
〈저를 살려 주세요, 누님.〉
목숨을 구걸했던 그때부터……?
아니면 부황이 진예를 제쳐 두고 그를 차기 황제로 지목하려 했으니 그 전부터인가.
대체 그 지하실의 규모가 어느 정도 되는지조차 짐작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난감했다.
‘그렇다고 온 황도의 땅을 다 뒤집을 수는 없는 것인데.’
마음먹으면야 못 할 것도 없지만 대신들의 반대와 백성들의 원성을 살 것이 불 보듯 자명했다.
진예는 고민하다 위장군에게 다시 물었다.
“지하실이 어느 정도로 깊이 있는지는 추정되는 바가 있는가.”
“그것이, 안 그래도 후원의 꺼진 땅을 40자(12미터) 정도 파 보았으나 나오는 것이 없었사옵니다.”
그럼 관개 수로나 하수로를 만들겠다는 식의 핑계를 대어 땅을 뒤집기엔 지하실의 깊이가 너무 깊었다.
그리고 그 정도로 일을 요란하게 벌이면 적, 그러니까 위도양 측도 전부 알게 될 테고 그럼 다시 다른 곳을 매몰해 버릴 수도 있었다.
진예는 눈썹 사이에 미세하게 힘을 넣었다. 어린아이를 이용해 먹는 것인 데다, 아무래도 역술인 같은 자를 가까이하는 것이 꺼려졌지만 안 좋지만 이 경우엔 어쩔 수 없었다. 나머지는 허무맹랑한 데다 발견 가능성도 떨어졌으니까.
“조 후.”
“예, 폐하.”
진예가 부르자 서엽이 기다렸다는 듯이 반응해 왔다. 그는 벌써 진예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한 모양이었다.
“내일 아침, 미마이를 대전에 들이거라. 저 지하실에 대해 알고 있는지 물어야겠다.”
“그리하겠습니다.”
그러고는 서엽이 위장군의 눈치를 살피다가 진예의 앞으로 슬며시 발을 옮겼다. 진예가 뭐냐는 표정으로 보고 있으니, 서엽이 단정한 손으로 진예에게 걸쳐 주었던 옷을 정리해 더 단정히 여며 주었다.
“밤바람이 무척 찹니다, 폐하. 그만 돌아가시지요.”
감히 황제의 앞에 선 그의 무례에 진예 뒤에 서 있는 위장군이 무척 거슬려 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지만, 진예가 따로 언급이 없으니 가만히 있었다.
서엽이 옷깃을 모두 정리하고 손을 물리자 진예는 픽 웃다가 발을 돌렸다.
“위장군은 일단 그 후원의 꺼진 곳을 더 파내서 어느 정도 깊이인지 알아내거라.”
“그리하겠사옵니다.”
옆에서 조서엽도 한마디 보탰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미마이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 믿어야지. 그리고…….”
진예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허리를 슬쩍 늘였다. 그녀의 표정이 무척 고까운 것을 생각하는 듯이 불쾌하게 뒤틀렸다.
“아무래도 계획을 둘로 나눠야겠다.”
위도양의 움직임이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이대로 느긋하게 있다가는 그녀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게 돼 버린다. 이대로 때를 기다리고 있으면 이쪽의 손실만 점점 커질 터였다.
위도양에게 딱히 원한은 없지만 이쪽으로 향한 칼끝을 회피할 이유 또한 없었다.
진예가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토끼몰이를 해야겠군.”
벌써부터 풀이 무성하게 일어난 바닥을 밟았다. 사박사박 발아래에서 풀 밟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습기 섞인 밤바람을 맞으며 진예는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금세라도 지상에 쏟아질 것만 같이 많은 별들이 떠 있었지만 그것을 보는 진예의 마음은 버석하기만 했다.
앞으로의 긴 전쟁이 끝나고, 그러면 그다음엔 뭐가 있을지.
매번 죽고 죽이는 짓만 해서 그런지 그게 아니면 마땅히 무얼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 * *
〈날이 밝으면 미마이와 함께 찾아뵙겠습니다.〉
침전에 든 뒤 서엽이 그리 예고하며 문을 닫고 나간 이후에도 몇 번이고 잠이 들었다 깨기를 반복했다.
겨울바람처럼 그리 거센 것도 아닌데, 창문을 간간이 흔드는 바람소리마저 거슬려 결국 진예는 눈을 떴다.
넓은 침전 안에서 그녀의 작은 그림자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침전의 회랑까지 전부 다 불이 꺼져 창을 투과해 들어온 미세한 달빛이 창문 살의 모양을 침전 바닥에 그려 냈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그 무늬를 아무 의미 없이 들여다보던 진예는 문득 양미간을 좁혔다. 침전 바닥에 미세하게 못 보던 얼룩이 진 것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아주 흐릿하긴 했지만 분간하기로는 핏자국 같았다. 무건이 들어오면서 남긴 것인 모양이다.
이젠 저런 방식으로까지 거슬리게 하는 건가, 하다가 진예는 아까 전 동산에 오를 때 보았던 융경궁의 모습을 떠올렸다.
곧 그녀의 입에서 말소리가 흘러나갔다.
“게 있느냐.”
분명히 잠들었으리라고 생각했을 황제가 갑자기 부를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터였다. 짐작했던 대로 조금 늦게 대답이 돌아왔다.
“폐하, 부르셨사옵니까.”
“잠시 들거라.”
그녀의 말에 살며시 문을 여닫은 태감이 종종걸음으로 들어왔다. 야밤도 아니고, 새벽녘에 왜 갑자기 부르는지 몰라 그의 얼굴에 난처해하는 기색이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침전 한가운데에서 걸음을 멈췄을 때는 능숙하게 허리를 굽히며 진예의 말을 재촉했다.
“어인 부름이시옵니까.”
“융경궁에 보낸 의랑은…….”
“……?”
진예가 입을 열었다가 말을 끊자 태감이 의아해하는 빛을 띠고 눈을 살며시 올렸다가 다시 얼른 내렸다. 진예의 표정이 별로 좋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말을 멈춘 이유는 간단했다. 의랑에게서 연무건에 대한 말이 뭐가 나왔나 물으려 했는데, 생각해 보니 의랑을 보낸 지 아직 열흘도 채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 안에 까막눈이었던 연무건에게 어떤 대단한 변화가 일어났을 리는 없었다.
태감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답답한 숨을 내쉰 진예가 말을 정정했다.
“아니, 융경궁의 서재에 아직도 불이 켜져 있는지 알아보고 오거라.”
그러자 태감이 머뭇거리다가 드물게 반문했다.
“그것만 알아보면 되겠사옵니까?”
마치 다른 것 더 원하는 게 있지 않느냐는 듯한 투였다. 진예는 제 옆에 너무 오래 있어서 자신을 너무 잘 아는 태감을 보며 순간 실소했다.
“혹 잠들었으면 침전으로 옮기라 이르거라. 아니라면…… 짐이 가 보겠다.”
그녀의 말에 태감이 살며시 미소를 띠더니 명을 받들겠다, 짧게 대답하고는 걸음을 물렸다.
다시 침전에 홀로 남은 진예가 침대 위에 누워 가만히 천장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할 일이 없기로서니 왜 이 야밤에 융경궁에 가겠다고 한 건지 스스로도 잘 이해가 안 되었다.
그렇지만 연무건을 교육하라고 의랑과 집금오를 보내 놨는데 며칠 지났는데도 딱히 무어라 말들이 없었던 게 갑자기 떠올랐다. 그들이야 진예가 묻지도 않고, 아마도 관심도 갖지 않을 테니 언급을 안 한 것일 테지만.
한데 융경궁의 서재에 밤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었던 게 뇌리에 꽤 강렬하게 박혀 버렸다. 그 짐승 새끼 같은 연무건이 서책을 끼고 있는 모습이 어떤지 그림이 잘 안 그려진 탓일 터이다.
“폐하, 박 태감이옵니다.”
오래지 않아 태감이 되돌아왔다. 들어오라 하니 그가 안쪽 깊숙이 와, 누워 있는 진예에게 조용히 알아본 바를 전했다.
“아직 서재에 불이 켜져 있었사옵니다. 숙의마마 또한 깨어 계신 듯한데 걸음하시겠나이까.”
“…….”
들으며 기분이 오묘해진 진예가 대답을 하지 않자 태감이 묵묵히 기다리다가, 공기가 조금 답답해졌을 때쯤 재차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갈아입을 옷을 들이라 이르리까.”
진예는 여전히 답을 내지 않았다.
왜 하필 지금 그런 것이 떠올랐는지 모르지만, 서엽이 얼마 전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결코 연무건을 연모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러고 보니 제가 그 말에는 대답을 했던가.
머릿속이 몽롱해서 그런지 가물가물하니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았다. 며칠 지나지 않은 일인데도 말이다.
진예는 기억을 뒤지다가 결국 찾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되었다. ……융경궁에 금덩이를 숨겨 둔 것도 아니니.”
생각해 보니 오히려 갔다가 불쾌한 일만 뇌리에 되살아날 것 같아 뒤늦게 꺼려졌다. 이젠 그곳에서 함께 살았던 이들도 다 죽어 버린 마당에 괜히 그곳에 갔다가.
그랬다가.
진예는 제 목이 조금 졸려 오는 듯한 느낌에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태감이 예민하게 반응해 왔다.
“폐하, 옥체가 불편하시옵니까.”
“아니, 공기가 답답해 그런 것이다.”
“창을 조금 열어 두리까.”
“그리하거라. 날도 좋으니.”
곧 창문이 살며시 열리며 깨끗한 공기가 침전에 밀려들어 왔다.
그렇게 해 두고 나서 태감은 천천히 발을 물려 사라졌고, 진예는 여전히 천장을 보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이전엔 천장에 고인 저 어둠이 자신을 집어삼킬 것 같았던 때가 있었다. 때때로 어둠은 익재보다 더 무서운 괴물이었다.
이제 그런 두려움은 없었다. 모후가 저를 해치려 하는, 그런 끔찍한 밤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진평도, 결국은 연무건의 손에 죽지 않았나.
이것이 진예에겐 제자리였고, 균형이었고, 평정이었다.
진예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 * *
“……하여 대전의 태감이 마마께 송구하다 전해 달라 하였사옵니다.”
융경궁의 홍 내관이 서재에 들어와 난처해하는 얼굴로 말을 전했다. 의자에 기대어 앉아 가만히 듣던 무건은 환한 등잔불과 그 아래의 서책을 멍하니 들여다보며 생각에 빠진 듯 침묵했다.
대전의 궁인이 와 이곳 서재 상황을 묻고는 곧 폐하께서 오실 테니 준비해 놓으라고 했었는데, 결국 안 온다고 하니 미안하다는 전언이었다.
솔직히 새벽녘이라 아직도 깨어 있었다는 것에 걱정도 됐지만 무건은 진예가 이곳에 찾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살짝 설레기도 했었다. 그 탓에 실망한 건 사실이긴 했어도 누군가를 원망할 일은 아니다. 무건은 홍 내관을 향해 살짝 미소 지었다.
“폐하께서 그리 결정하셨으면 어찌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러자 칼 같은 대꾸가 돌아왔다.
“하대하시옵소서.”
“……아닌가.”
어색하게 정정했지만 홍 내관이 잘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건은 그제야 책을 덮고 의자에 기대어 뻑뻑한 눈을 감았다. 그 위를 손가락으로 덮어 문질렀다. 순식간에 노곤함이 그의 몸을 덮쳤다.
“숙의마마.”
무건의 모습을 보며 홍 내관이 걱정되었는지 조심스럽게 불렀다. 그에 무건이 눈감은 그대로 말했다.
“잠들지 않았다네.”
홍 내관이 걱정스러워하는 어투로 염려의 말을 전했다.
“내내 너무 무리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러다 저번처럼…….”
“쓰러질 정도는 아니야.”
단호한 말로 끊으며 무건이 눈을 도로 떴다.
어차피 튼튼한 것 외엔 별다르게 능력도 없는 몸이었다. 어차피 진예가 찾아 주지 않는 이상 볼 수도 없는 답답한 상황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먹고 자며 밥버러지처럼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건 스스로가 견딜 수 없다.
그래서 진예가 제게 사부들을 붙인 이후로 매일 몸이 견디는 한 무어라도 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이 가르쳐 준 것을 상기하며 복습했다. 홀로 있을 때도 책을 펼치고, 검을 꺼내 들었다.
무건은 제 앞의 낡은 책을 내려다보다가 겉표지에 손을 내려 살살 문질렀다. 세월에 무뎌진 종이가 매끄럽게 만져졌다.
“그러고 보니 이곳 융경궁에 황제 폐하께서 기거하셨었다고.”
“그렇사옵니다.”
“홍 내관은 그 시절에도 궐에 있었겠네.”
“……예, 하문하실 것이 있으십니까.”
“어떠했던가, 그 시절의 폐하는.”
질문을 받고 홍 내관은 말없이 시선만 밑으로 내렸다. 대답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무건은 그것이 단지 좋고 싫음 때문이 아닌 황제가 함구령을 내린 사안이기 때문이란 사실을 금세 눈치챘다.
하지만 홍 내관은 진예의 이야기가 아닌 다른 것을 입에 올렸다.
“원하신다면 붕어하신 선황과 선황후, 고 화친왕에 대한 것이라면 들려드릴 수 있사옵니다.”
“아침이 밝을 때까지도 안 끝나겠군.”
“다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셔도 좋을 이야기들이옵니다.”
무건은 다시 책장을 펼쳤다. 며칠 새 서른 번쯤은 똑같은 내용을 들여다보았다. 덕분에 글씨들이 제법 눈에 익었다. 글씨의 의미도 서서히 깨우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첫 줄을 읽기 시작하자 홍 내관도 천천히, 그 한 귀로 흘려도 좋을 이야기를 시작했다.
선황후가 궐에 들어왔을 시절부터의 이야기였다. 오랜 세월 궐에서 늙어 온 내관은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며 조리 있게 그 당시의 상황을 펼쳐 놓았다.
새벽녘 특유의 망연한 기운과 조곤조곤한 음성이 뒤섞이며 무건을 그의 입담 속으로 끌어당겼다.
무건은 이야기꾼의 편안한 음성을 배경 삼아 들으며 피로함을 서서히 거두어 냈다.
홍 내관이 펼쳐 낸 이야기는 재미있지도, 재미없지도 않았다. 다만 그 속의 모두는 근심 없이 행복해 보였다. 어떤 길로 가든 동화 같은 결말을 기대할 수 있는 그저 그런 이야기 같았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선황제와 선황후를 야위게 했고, 알 수 없는 것이 그들 사이에 억지로 암운을 끼워 넣었다.
그것을 듣는 무건의 얼굴은 점점 굳어만 갔다. 어느 시점부터인가는 더 이상 그의 앞에 놓인 책이 다음 장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날이 밝아 감에 따라 개연성 하나 없어 보이는 그 이야기도 점점 끝을 향했다. 결국 밤을 꼬박 새웠지만 무건의 얼굴에선 어느새 피곤함이 가셔 있었다.
그렇게 아침때가 되어서야 겨우 마지막 마침표를 찍은 그 기괴한 이야기는, 결국 이 융경궁에 살던 모두가 죽고 없어지는 잔혹한 결말이었다.
그것을 모두 들은 무건의 눈빛에는 어느새 깊은 연민의 감정이 비쳤다.
홍 내관은 관련하여 한마디도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동화같이 행복해질 뻔했던 그 줄거리를 비극으로 비튼 존재가 누구인지 너무도 잘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명인자, 진예였다.
* * *
편전에서의 조회가 끝난 뒤, 진예는 행랑으로 건너가 서쪽 전각에서 조용히 서엽과 미마이가 오기를 기다렸다.
검은 발을 내린 뒤 서궤 앞에 앉은 그녀는 그들이 오는 동안 내관들이 가져다 놓은 상소문들과 장계들을 훑었다.
개중에는 위도양에 대한 소식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용인즉 그녀가 이끄는 화도 상단이 정위가 다스리는 영지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군사 2천이 몰살당한 계곡에서 흘러들어 간 핏물 때문에 하류 지역에 사는 백성들이 동요하고 있으니 어떤 조치들을 취할 것인지 나열한 내용도 눈에 띄었다.
내용을 전부 읽고 옥새를 찍어 옆의 내관에게 건네어 제쳐 둔 뒤 새로운 어명을 빈 두루마리를 펼쳐 적었다.
읍주로 향하는 군사들의 이동은 멈추고, 정위가 다스리는 영지로 이어지는 보급로를 차단해 들어가는 모든 물물을 검열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반란군의 존재를 공식화해 화도 상단과 거래하는 이들에게 죄를 묻겠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곳에도 옥새를 찍었을 때였다. 때마침 조서엽이 대전에 들었다.
“폐하, 조 후가 폐하께 알현을 청하였사옵니다.”
“들라 하라.”
문이 열리며 두 사람분의 그림자가 비쳤다. 내관이 자연스럽게 서궤를 옆으로 빼며 그녀의 앞을 틔워 주자, 늘어진 검은 발과 바닥의 사이로 서엽과 미마이의 발이 보였다.
“앉거라.”
곧 그들의 무릎이 꿇렸다. 진예는 미마이의 야윈 손이 허벅지 위로 올라오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들어 반투명한 천에 비치는 두 사람의 눈과 마주쳤다.
서엽이 먼저 자연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듣자 하니 미마이가 숙의마마께서 화친왕을 죽이기 직전까지 함께 송한각에 있었다 합니다.”
무건과 함께 있었다는 말에 진예는 잠깐 그가 그 자리에서 어땠는지 묻고 싶어지는 마음을 애써 참아 냈다. 당장 중요한 주제는 아니었다. 기실 알지 못해도 상관없는 일이었고.
대신 진예는 옆의 내관에게 눈짓으로 나가라 일렀다. 그에 내관이 두루마리들이 한가득 올려진 서궤를 들고 나선 뒤에야 대화를 이었다.
“그래, 그럼 이전에도 송한각에 드나든 적이 있더냐.”
약간의 떨림을 품은 어린 사내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하실로 가기 위해 수시로 드나들었습니다.”
열심히 숨기려 할 줄 알았는데, 미마이가 바로 본론을 꺼내 버리자 오히려 진예가 내심 놀랐다. 하지만 쉬지 않고 이어지는 다음 말에서 실망감을 감추기 힘들어졌다.
“지하실은 깊이도 깊은 데다 아주 여러 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저도 몇 개의 방인지는 잘 모르고, 미로 같은 곳이라 방책 없이 들어가면 길을 잃기 십상입니다. 해서 그곳의 지도가 있는데…….”
“지도는 누구의 손에 있느냐.”
“돌아가신 화친왕 전하와 위 저저께서만 관리했습니다.”
당연한 말이긴 하니 진예는 실망하지 않았다.
“해서 그 지도를 너도 본 적이 있느냐.”
“있습니다.”
미마이의 목소리에서 이제 떨림은 어느 정도 거두어졌다. 처음엔 어전이라 잠시 당황했을 뿐, 말을 해 나갈수록 어느 정도 침착함을 되찾았다.
하지만 검은 발 밑으로 보이는 미마이의 손에서 주먹은 풀리지 않았다. 그것을 보면서 진예는 아이의 말을 계속 들었다. 영특한 아이는 진예가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지하실은 정사각형 모양과 같이 단순한 구조가 아닙니다. 오히려 개미굴처럼 방과 방은 좁고 긴 통로로 이어져 있고, 대체로 두세 개의 방과 연결되어 있긴 하지만 방들의 모양이 비슷해서 가면 갈수록 어디인지 헷갈리게 됩니다.”
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자신도 지도가 없으니 그곳이 정확하게 어떤 구조인지 잘 모르겠다는 의미였다. 진예에겐 마치 그 말이 자신을 더 추궁하지 말라는 의미로 들렸다.
상당히 방어적인 발언. 고작 열다섯 전후한 어린아이의 말이라기엔 숨기는 것이 많았고, 직관적이지도 못했다.
연무건과의 대화가 되레 더 단순하다 할 만하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진예는 스스로에게 핀잔을 두었다.
‘이제 별거를 다 연무건과 비교하는군…….’
어쩌면 그의 방식에 익숙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따져 보면 무건과 딱히 오래 대화한 적도 없고, 그의 얼굴을 본 시간이 제 인생에서 그리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아닌데 이상한 일이었다.
다만 연무건이 어떻든 간에 지금은 쓸데없이 그를 떠올릴 때가 아니었다. 진예는 미마이에게 다음 질문을 건넸다.
“……통로는 대체로 어느 정도 길이지?”
“제 걸음으로 50보 정도 걸어야 하는 곳도 있고, 200보를 걸어야 하는 곳도 있었습니다.”
아무리 아이의 걸음이라도 200보라면 생각보다 길었다. 진예는 어제 멀리서 보았던 화친왕부의 모습을 떠올렸다. 마침 서엽도 한마디 보탰다.
“송한각에서 후원의 땅이 꺼졌다는 그곳까지 적어도 100보 정도는 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할 것이다.”
화친왕부는 진예도 두어 번밖엔 가 본 적이 없었다. 기억을 더듬느라 대답이 느릿하게 나갔다. 그리고 이번엔 미마이에게 서엽이 물었다.
“미마이, 하여 그곳은 뭘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이더냐.”
미마이는 이번 대답엔 잠시 틈을 두었다. 진예가 아이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얼굴은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작은 손에 힘을 꽉 준 나머지 손마디가 하얘진 것이 보였다.
“그곳에선 익재를 키웁니다.”
“키워?”
“그게, 닭장처럼…… 각 방에 있는 철창에 갇혀 때때로 아이도 낳습니다…….”
덤덤했던 아이는 익재 이야기를 하자 급격하게 동요했다.
익재를 두려워하는 건가.
일반적이라면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배어나는 감정이 단순히 공포만은 아닌 듯했다.
미마이는 역술인이라고 했다. 화친왕과 위도양, 두 사람이 가까이한 아이이니 보통의 능력을 가진 것은 분명 아닐 터.
얼마 전 황궁에 난입했던 익재들을 고려하면 그 지하실의 익재들을 조종하는, 아니 적어도 그렇게 하는 방도를 아는 이는 미마이일 것이라 보는 편이 합리적인 추론일 터였다.
진예는 익재의 손목에 ‘화화(華華)’라 쓰여 있었던 점을 생각해 냈다.
그것도 저 아이가 새겼을까.
그러나 그 부분에 대해서 진예는 일부러 언급을 피했다.
“익재가 그곳에서 번식을 하고 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인간과 달리 익재는 짝이 없이 혼자서도 번식을 했다. 가둬 놓고 아이를 낳게 하고 있다면 미마이의 닭장이라는 표현도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상상만으로도 구역감이 치솟는지라, 진예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예전에 전투를 치르다 한 번, 우연히 익재가 아이를 낳는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온갖 체액이 보호막처럼 뒤엉켜 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질척하고 더러운 광경이었다. 막 태어난 놈에게서도 시체 썩는 고약한 냄새가 났었다. 절대로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만한 고운 풍경은 아니었다.
한데 그런 것까지 이용했다 하니, 그 힘에 대한 열망이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 가능했다.
하긴, 권력이 코앞에 있다고 믿었을 테니 화친왕 진평의 입장에선 그런 것에 매달릴 만한 동기가 더욱 강했을 터였다.
진예는 대답을 듣고 한동안 곰곰이 생각을 이어 가다가 그만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하였다, 미마이. 이만 나가 보아도 좋겠구나.”
어차피 이 이상으로는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진예는 사실상 축객령을 내렸다. 그러자 미마이의 주먹에서 드디어 힘이 풀리는 게 보였다.
서엽은 예상보다 일찍 미마이를 내보내는 것에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짓는 듯했지만 명을 물려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눈치가 빠른 아이는 허리를 깊숙이 숙여 바닥에 머리를 대고 절을 했다.
“강녕하시옵소서, 폐하.”
그러고는 일어나 천천히 발을 뒤로 물려 밖으로 나갔다. 조심스러운 몸짓이었지만 또한 어딘지 도망치고 싶어 하는 아이의 조급한 마음이 진예의 눈에는 선연히 보였다.
문이 완전히 닫힌 뒤 진예가 몸을 일으켜 저를 가리고 있던 검은 발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서엽이 그녀를 올려다보며 의문 어린 말을 던졌다.
“어찌 미마이에게 전부 묻지 않으신 겁니까.”
역시나 질문을 참았다는 게 서엽에게도 느껴진 모양이었다. 진예는 그에 방금 전 미마이가 빠져나간 방문을 지그시 바라보며 답했다.
“아이의 반응을 보니 고문이라도 해야 입을 열 기세였다. 경계가 심하더군.”
“……그렇긴 합니다만.”
“묻더라도 진실을 말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하면 여태까지 한 대답들에도 거짓이 섞여 있겠습니까?”
진예는 좌우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의 것들은 이미 파악해 놓은 것들과 대략적인 사실이 일치하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연 숙의 또한 지하실에서 익재의 소리를 들었다고 내게 일러 둔 바 있으니.”
“숙의마마가 지하실에 들어가 보았단 말씀이십니까?”
“아니, 입구를 열어 보기만 하고 들어가진 못했던 모양이더군.”
그건 좀 아쉬운 일이긴 했지만,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연무건이 만약 진짜 안으로 들어갔다면 살아 돌아오지 못했을 확률이 높았다. 더욱이 미마이의 말대로 지하실이 미로 같은 구조라면, 누군가 죽이러 들어가지 않아도 알아서 굶어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랬다면 동조 현상으로 이어진 자신 또한 죽었을 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밖에서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인식하자마자 태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장군께서 드셨사옵니다.”
진예가 허락하자마자 위장군이 열린 방 문 사이로 성큼 발을 들였다. 그리고 진예의 얼굴을 보자마자 흠칫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다급한 어조로 보고를 시작했다.
“폐하, 화친왕부의 후원에서 무너진 지하실과 다수의 죽은 익재가 발견되었습니다.”
말을 들은 서엽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진예가 틀림없이 그곳에 가 보리라 예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위장군의 질문이 이어졌다.
“걸음하시겠습니까?”
하지만 진예의 대답은 달랐다.
“아니.”
급히 보고하러 온 위장군도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잠깐 머뭇거렸다.
“그럼…….”
“죽은 익재들의 손목을 모두 잘라 가져오너라.”
그 말에 서엽과 위장군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진예는 굳이 그곳을 보러 갈 필요가 없다 여겼다.
이런 대낮에 자신이 가면 너무 눈에 띄게 된다. 그리할 요량이었으면 화친왕부의 조사를 금군에게 명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제야 의도를 알아차린 위장군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명, 받잡습니다.”
그리고 다시 들어왔을 때처럼 밖으로 빠르게 나갔다.
* * *
정말로 완연한 봄이긴 한지 부드러운 바람이 얼굴을 감싸듯 스치고 지나갔다. 무건은 이름 모를 꽃향기도 스며 있는 그 바람을 맞으며 화친왕부를 내려다보았다.
융경궁의 뒤편에 있는 동산에 올라 살피니 화친왕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한 달이 넘도록 이 동산을 넘어 드나들던 곳이긴 하지만, 늘 야심한 저녁에만 왔다 갔다 해서 그런지 훤한 대낮에 보고 있자니 조금 낯설기도 했다.
특히나 제가 마지막으로 화친왕부를 갔던 때와 달리, 친왕부 자체가 조금 모습이 바뀐 뒤였다.
〈그 입구가 있을 친왕부의 별채는 이미 전소했다.〉
과연 진예가 했던 그 말대로 별채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재만 남았다.
불이 옮겨붙었었는지 옆의 전각과 그 뒤의 화단도 타는 등 꽤 거대한 흔적이 남아 있어 멀리서도 확연히 구분이 가능했다.
한데 뒤늦게 그를 허겁지겁 쫓아와 뒤에 선 홍 내관이 숨을 몰아쉬었다. 그에 무건이 뒤를 돌아보니 곧 몸을 편 그가 무건에게 걱정스러워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숙의마마, 정말 이리해도 되겠습니까. 곧 사부님들께서 오실 시간인데…….”
역시나 첫마디가 잔소리인 것에 무건이 난처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낮잠을 즐기는 척해 놓고 혼자 몰래 융경궁 뒤편으로 빠져나오려다가 홍 내관에게 딱 들키고 말았다.
발견하자마자 자신을 도로 전각으로 끌고 들어가려는 것을 무건은 한 번만 봐달라며 거의 빌다시피 했고, 홍 내관이 그럼 동행하겠다고 억지를 부려 일이 이렇게 된 것이었다.
무건은 속으로는 융경궁에 또 다른 개구멍이 있나 걱정하며, 겉으로는 애써 그의 불안을 달래려 노력했다.
“괜찮네, 홍 내관. 하나만 확인하고 금방 돌아올 터이니.”
“그 하나가 무엇입니까? 쉬운 일이라면 이 노구 또한 능히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단호하게 하는 말에 무건이 푹 웃었다. 홍 내관의 능력을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왜인지 본인의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것이 생겼다.
“저곳에 금위들이 있다고.”
“예, 벌써 며칠째 화친왕부의 후원을 뒤집고 있다 하옵니다.”
저곳인가.
무건은 마치 공사라도 하는 것처럼 땅을 깊고 넓게 파 놓은 곳을 확인했다. 그곳을 보면서 머리에 모자를 푹 눌러썼다. 검은색의 반투명한 천이 늘어져 무건의 얼굴을 살며시 가렸다.
동산의 길을 따라 내려갔다. 홍 내관의 말대로 곧 융경궁에 방문자가 올 것을 생각하니 발걸음이 급해졌다.
그를 졸졸 따라오면서 홍 내관이 무건에게 듣고 싶어 할 거라 생각하는 말들을 읊어 주었다.
“폐하의 명으로 후원에서 금위들이 무언가를 찾고 있다는 듯하옵니다.”
“그리고 아침에 위장군이 황궁에 들었고.”
“그렇사옵니다.”
홍 내관은 궁궐에서 생활한 지 벌써 40년 가까이 됐다고 했다. 황궁에도 아는 사람이 많아 그는 온갖 소식을 물어 왔다.
물론 이전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고, 서엽이 융경궁에 머물다 간 이후로 서서히 말문이 트였다. 그리고 진예와 닷새간 지내고 오니 다른 사람인 양 완전히 태도가 달라졌다.
황제의 사랑을 받는 후궁의 가능성을 점친 것인지…….
물론 무건은 그것이 나쁘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언젠가 들었던 진예의 말마따나 궐 내에는 자신이 살던 세상과 다른 생활 양식이 존재했다. 자신이 모시는 마마들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일, 그것은 궐 내에 살아가는 내관들이 가장 바라는 숙원이다. 그리고 그런 욕망을 가진 것은 앞의 홍 내관도 마찬가지였다.
자신 또한 진예를 가지고 싶다는 목표 하나로 살아가고 있는 처지에, 그런 그들을 순수하지 못하다 나무랄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홍 내관의 태세 전환은 고마운 일이었다. 무건에게도 한 명쯤의 편은 필요했으니까.
무건은 익숙한 길을 따라 동산을 내려가 저자로 스며들었다. 떠들썩한 거리의 풍경을 보고 있자니 왜인지 고향이 떠올라 순간적으로 마음이 쓰라려 왔다.
생각해 보면 너무 갑작스럽게 서엽에 의해 황궁까지 끌려왔다. 이후에 어머니가 제대로 된 설명을 듣긴 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무건조차 황궁에 당도해 진예를 보기 전까지는 스스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있었으니 아마 그리 친절하게 설명은 못 들었으리라고 짐작은 됐지만 말이다.
곧 무건은 화친왕부 앞에 섰다. 하지만 들어서지 말라는 의미로 화친왕부는 금줄로 둘러싸여 있었다.
무건과 홍 내관은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개중 담이 낮은 곳을 찾았다.
“정말로 괜찮겠습니까, 숙의마마.”
무건이 담을 넘어갈 것을 눈치챈 홍 내관이 불안해했지만 무건은 당연히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폐하께서 혼내 봤자 날 내치지는 않겠지.”
어차피 내쳐도 어떻게든 돌아올 거고.
그리 생각했지만 홍 내관은 안절부절못했다.
“마마, 참으로 큰일 날 소리를 입에 담으십니다…….”
그에 무건은 픽 웃고는 손끝에 닿을락 말락한 담장의 위를 붙잡고 담장 벽에 발을 디뎠다.
“그럼 이곳에서 기다리게, 홍 내관.”
“숙의마마!”
당연히 자신의 등을 밟고 올라가리라 생각했던 홍 내관은 무슨 도둑놈처럼 담을 훌쩍 뛰어넘는 무건을 보며 경악했다.
그러나 무건은 순식간에 안으로 들어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한자가 적힌 현판을 발견했다.
內賓閣
내빈각. 자신이 화친왕부에 와 치료를 받았던 바로 그곳이었다.
그러고 보니 위도양이 거의 매일 드나들며 자신을 살폈고, 서엽에게서도 구해 준 셈인데 본의 아니게 그녀의 등에 칼을 꽂아 버렸다.
‘다음에 만나면 그땐 적이겠지.’
아마도 반란군의 수장이 된 모양이니.
무건은 입 안이 씁쓸해진 것을 느끼며 방향을 잡고서 후원으로 뛰어갔다.
제아무리 홍 내관이라 해도 진예가 함구령을 내린 것을 떠벌리고 다닐 수도, 알아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너무 무식한 방법이긴 했지만, 진예의 서엽처럼 자신의 사람이라고 부를 만한 이가 딱히 존재하지 않으니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후원까지 담을 넘을 일은 없었다. 비스듬히 열린 후원의 문 틈으로 몸을 슬쩍 들이며 아까 전 동산 위에서 봤던 위치를 가늠해 걸어갔다.
봄이라 그런지 잎이 파릇파릇 솟은 나무들이 꽤 있어서 적당히 그늘을 밟으며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상당한 깊이로 땅을 파내고 그곳을 둘러싼 금위들을 발견했다.
아침에 위장군이 진예를 찾아갔다더니 과연 무언가 발견하긴 한 모양이었다. 다들 분주하게 무언가를 옮기는 중이었다. 너무 늦지는 않은 셈이다.
그 광경을 보고 잠깐 심호흡을 한 무건이 일부러 인기척을 내며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가장 먼저 금위들에게 이것저것 명령하던 위장군이 돌아보며 반응했다.
“누구냐.”
무건의 건장한 체격과 얼굴을 가린 모습에 순간적으로 방해하는 이가 왔다고 생각했는지, 위장군의 주위로 금위들이 몰려들었다.
그에 무건은 모자에 달린 천을 걷어 내며 얼굴을 드러냈다. 그러자 위장군은 잠시 묘하게 낯익은 그의 얼굴을 살피다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숙의마마……?”
“그렇습니다.”
무건이 답하자 위장군이 손짓으로 금위들을 뒤로 물리고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경계의 빛이 뚜렷했다.
“여긴 숙의마마께서 함부로 걸음할 곳이 아닙니다. 어찌 오신 것인지 모르겠으나 발을 물리시지요.”
“알아볼 것이 있어 왔습니다. 잠시면 됩니다.”
“무엇입니까.”
무건이 발을 옆으로 빼자 위장군 또한 그 앞을 가로막으며 엄한 목소리로 추궁하듯 물었다.
그에 무건이 위장군을 빤히 보다가 용건을 꺼냈다.
“이곳에서 지하실이 발견된 것 같습니다. 맞습니까.”
위장군이 미간을 슬쩍 찌푸리며 여전히 경계하는 투로 대답했다.
“숙의마마께 말씀드릴 수 없는 부분입니다.”
제대로 된 대답은 아니었지만 무건은 다음 질문을 이어 갔다.
“익재가 발견됐습니까.”
“역시 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용건이 그런 것이라면 썩 물러나십시오, 무력을 쓰기 전에.”
“잠시만 들여다보는 것도 불가한 것입니까?”
“숙의마마, 이 위장군은 황제 폐하의 명으로만 움직이는 자이옵니다.”
한마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의 말은 황제의 명과 같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후궁에게 품계는 사실상 의미가 없다고는 하나 황제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필하고 금군 전체를 통솔하는 위장군의 위상이 그와 비교해 부족하다고 말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무건은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았다. 대신 그를 마주한 채 품 안에서 말없이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그러자 위장군이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향낭입니다.”
무건이 순순히 그것을 내주자 위장군이 받아 들어 그 이상한 냄새를 맡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 물건이 이곳과 무슨 상관이기에.”
“익재들을 끌어들인다는 냄새입니다.”
“…….”
“저 지하실 안에 익재가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무너져 내린 것을 보니, 죽긴 죽었을 것 같긴 한데.”
위장군은 무건의 말에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무건은 그가 더는 자신의 입을 막지 않고 있다는 것만으로 일단 들어 볼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음을 알아차렸다. 그것이 바로 궐 내에 살아가는 이들의 화법임을 이제는 알았다.
무건은 위장군에게서 도로 주머니를 돌려받고는 그를 피해 앞으로 걸어갔다. 위장군은 뭘 할지 지켜보겠다는 듯이 몸만 틀어 무건을 시선으로 좇았다.
무건의 갑작스러운 난입으로 하던 일을 멈춘 금위들도 상관의 명이 없으니 일단은 무건의 앞을 열어 주었다.
무건은 거의 50자 정도는 파낸 거대한 구덩이 앞에 서서 모자를 벗어 땅에 내려놓은 뒤 그곳을 자세히 살폈다. 무너진 지하실의 잔해가 구덩이 주변부에 쌓아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파낸 곳에 익재들의 사체가 나온 것이 보였다.
그들 중 대부분의 손목이 잘린 채였다. 뭔가 싶어 보니 구덩이 옆의 큰 나무 상자에 익재들의 잘린 손이 넣어져 있었다.
‘이것도 진예의 명인가?’
기실 무건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몰랐다.
이곳까지 달려온 건 세 가지의 빈약한 근거에 의한 것이었다.
자신이 알아낸 지하실의 존재와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한 추측.
홍 내관이 전해 준 아주 작은 단서들.
그리고 지난날 황궁을 범했던 익재들의 존재.
그것들을 조합해 낸 그 나름의 결론을 도출한 결과다.
그러니 무건이 이곳에 온 건 그저 그런 감 하나로 아주 희박한 확률의 도박을 하는 셈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에 희망을 걸지 않으면 무건은 제게 진예에게 다가갈 기회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을 알기에, 당연히 이곳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직 무너진 지하실이 전부 바깥으로 나온 것은 아니었다. 무건은 그것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나 발견된 익재가 일부인지 전부인지는 모르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 말이 끝난 순간이었다.
구덩이의 구석 쪽에 있던 돌 하나가 덜컥, 소리를 냈다. 작은 소리였지만 들은 이들은 모두 긴장하며 몰려들었다.
그것을 보며 무건은 제 예상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덜컥.
덜컥, 덜컥, 덜컥, 덜컥.
곧 돌이 육안으로도 보일 만큼 크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뒤늦게 눈치챈 위장군이 달려왔다.
“물러나십시오, 숙의마마!”
위장군의 외침에 금위들이 무건을 보호하기 위해 둘러쌌다.
그와 동시에 구덩이의 쌓인 흙을 뚫고 검은 물체가 불쑥 튀어나와, 포효하며 날개를 펼쳐 하늘로 올랐다.
신익지재(神翼之災).
날개 달린 신의 재앙.
그것과 세 번째 조우를 한 무건의 입엔 희미하게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익재가 튀어나오면서 마치 비가 내리듯 흙이 쏟아졌다. 그것을 맞으면서 무건은 익재를 올려다보았다.
눈앞에 보이는 익재는 마치 도마뱀같이 생긴 놈이었다. 한데 다친 것인지 익재의 날개에서 검은 진액, 익재의 피가 투둑투둑 떨어졌다.
다들 그것을 피하면서 조금씩 물러났다. 위장군을 포함한 몇몇만이 무건을 지키려는 것인지 자리를 유지하며 칼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무건은 익재의 분노 어린 눈이 자신을 향해 있음을 알았다. 향낭의 존재 때문인 듯했다.
〈그 냄새 때문에 아마도 그다음엔 네놈을 노렸을 것이다. 내빈각에 머무는 내내 그 약초를 태워 네놈의 몸에 배게 했었으니까.〉
즉 이 향낭의 냄새는 진짜로, 익재를 끌어들이는 그런 냄새가 맞는 모양이었다.
교활한 화친왕이라면 그 순간에도 자신을 속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그것을 시험해 보기 위해 온 것인데…….
그리 생각한 순간 익재가 날개를 접으며 자신을 물어뜯기 위해 달려들었다. 쐐액, 하고 마치 화살이 날아오는 듯한 소리가 날 만큼 빠르게 떨어졌다.
“숙의마마!”
위장군의 외침에 무건이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그가 방금까지 서 있던 그곳에 콰앙, 하고 익재가 떨어지며 몸체가 땅에 거세게 부딪혔다.
흙이 튀어 오르면서 주변의 이들이 그곳에서부터 멀리 떨어져 흩어졌고, 위장군은 무건의 몸을 잡고 끌어당겨 더 뒤로 물러나게 했다.
그러고는 무건을 자신의 뒤로 숨기며 익재를 경계했다. 한데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했던 익재는 바들바들 떨며 제대로 일어나지 못했다.
그것을 보며 위장군이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무건에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여 왔다.
“……날개를 다쳐 잘 움직이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저것은 저희가 잘 처리하겠으니 서둘러 궁으로 돌아가십시오. 폐하께는 마마께서 이곳까지 걸음하셨다는 말은 따로 아뢰지 않을 터이니.”
바꿔 말하면 당장 꺼지지 않을 경우엔 진예에게 고해바치겠다는 의미였다. 무건의 입장에서는 협박 아닌 협박이라, 한 귀로 흘려버렸다.
대신 익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융경궁에서 나올 때 챙긴 허리춤의 칼을 더듬어 잡았다. 칼집과 손잡이를 각각 잡고 잘 벼려진 검을 슥, 뽑았다.
근래에 알게 된 사실 몇 가지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본래 후궁에게는 무예를 배우게 하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진예는 어쩐 일인지 무관을 그의 사부로 보냈다.
무건은 그것을 제멋대로, 아니 어쩌면 그녀의 방식에 맞춰 해석했다. 진예는 연무건이 교양을 갖추는 것을 원하기도 하지만, 또한 칼을 들기를 원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미친 사냥개’가 되라고 하지 않았던가.
단순히 옆에서 왈왈거리는 번견이 아니라, 주인보다 미리 앞으로 나가 적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그런 사냥개가.
무건이 칼을 뽑는 모습을 보고서 위장군의 표정이 굳었다. 옆에 있던 금위들도 무건을 거의 정신 나간 사람 보듯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살폈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사이 이미 읍주에서 많은 익재들을 잡아 본 경험이 있기에 무건은 여유로웠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최초의 익재를 보았을 땐 그 압도적인 기운에 저절로 몸이 떨렸지만, 지금의 익재는 아니었다.
그리 말하고 무건이 아직도 끼익, 끼이익 울며 날개를 좀처럼 펼치지 못하는 익재를 보았다. 가만 보니 날개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다른 곳에 다친 곳은 딱히 보이지 않았음에도 힘을 못 쓰는 것을 보니 어쩌면 날개가 저들의 약점일지도 모른다.
한데 앞서 나가는 무건을 위장군이 어디 감히 나서냐는 듯 사나운 손길로 팔을 잡아 막았다.
“숙의마마, 설령 약해졌더라도 저것은 위험한 존재이옵니다.”
때마침 익재가 사나운 눈을 부릅뜨고 다시 커다랗게 입을 벌리며 무건을 향해 울었다.
끼이이이이이익……!
날개의 상처 때문에 못내 고통스러운 듯했지만 지하실에 있다가 죽어 버린 자신의 동류들의 죽음에 분노하는 양 비틀거리며 몸을 움직였다.
고통을 이겨 내려 힘을 주어 내려딛는 것인지, 파충류의 다리처럼 생긴 익재의 다리가 바닥을 짚을 때마다 쿵 쿵 지면이 울렸다.
그것에 위장군이 양손으로 칼을 고쳐 잡았다. 익재가 뛰어들면 반격하려는 것이었다.
무건은 그 모습을 보면서 이전에 익재를 상대하던 진예를 떠올렸다. 그러면서 자신의 머리를 깨부술 기세로 입을 벌리는 익재를 보며 발을 내디뎠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익재의 품에 먼저 달려들어 찢어 발겼던 진예의 움직임이 어땠는지를 상기했다.
몸은 마치 새가 날아가는 듯이 가벼워 보였으나 내리치는 칼은 빨랐고, 또한 묵직했다.
머릿속으로 그때 봤던 그녀의 모습에 자신을 덧입히며 무건은 검은 아가리를 벌리는 익재의 머리를 옆으로 피한 뒤 그 어깨 위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한번 높이 뛰어오르며 칼을 돌려 역방향으로 잡았다.
그리고.
끼아아아아아아악!
무건의 묵직한 몸무게를 실은 칼이 내리꽂혀 익재의 날개를 꿰뚫자 치이이이익,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익재가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친왕부가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고막이 터질 것 같은 소리를 견뎌 내며 무건은 칼을 뽑고 허우적거리는 익재의 머리 한가운데에 다시금 칼을 찔러 넣었다.
곧 익재의 비명이 그치며 치이이익, 타는 소리와 함께 몸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위에 올라타 있던 무건은 잠깐 휘청했지만, 이내 머리에서 칼을 뽑고 바닥에 내려섰다.
워낙 순식간의 일이라 위장군은 물론 금위들 대부분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싶어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무건은 칼을 다시 칼집에 꽂아 넣은 뒤, 그런 그들을 둘러다보았다. 그리고 아까 바닥에 내려놓았던 모자를 도로 써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말했다.
“더 튀어나오는 놈이 없는 걸 보니 하나뿐이었던 모양입니다.”
“…….”
“제 용건은 끝입니다, 위장군.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러자 위장군이 구덩이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더는 덜컥거리거나 하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위장군이 걸리는 건 그 하나만은 아니었다.
“숙의마마, 송구하오나 방금 그것은…….”
위장군이 방금처럼 익재가 타들어 가는 광경을 본 경우는 예외 없이 하나뿐이었다. 진예가 익재를 잡을 때 이외에는 본 적이 없었다.
하여 어찌 된 연유인지 물으려는데 반투명한 검은 천 너머의 무건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 표정을 발견한 순간 위장군은 본능의 경고에 의해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러자 무건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위장군은 제 부하들 중에도 제가 알아챈 것을 혹시 또 깨달은 자가 있을까 하여 당장이라도 추궁하고 싶어졌지만 이 자리에서는 꺼낼 수 없는 말임을 알았다.
무건이 있는 이 자리에서는.
특히나 그가 진실을 모르고 있는 거라면, 그조차 진예의 뜻이라 보는 것이 옳았다.
위장군은 잠시간의 갈등을 그리 봉합하고 대답했다.
“……아닙니다. 일단 금위 하나를 붙여 드릴 테니 궁으로 속히 돌아가십시오.”
“호위는 됐습니다.”
“하나.”
“저잣거리를 통하는데 금위가 붙어 있으면 분명 눈에 띌 것입니다.”
눈에 안 띄려면 일단 저 모자부터 벗어야 하는 것 아닌가. 오히려 민얼굴을 내보이는 편이 덜 이목을 끌 듯한데.
그런 생각은 했지만, 일단 이해해 주기로 했다.
사실 후궁이라는 곱상한 말을 덧붙이기 민망할 정도로 무건은 훌쩍 큰 키에 몸도 좋고, 얼굴도 제법 단정하게 생기긴 해서 뭇 여인들 마음깨나 흔들어 놓게 생기긴 했다.
물론 환의 황제를 흔들어 놓는 것은 어림도 없겠지만 말이다.
위장군은 불안하긴 했지만 어차피 이곳과 융경궁 사이의 거리가 짧기도 하고, 익재를 저리 처리할 정도면 별일은 없겠지 싶어 한발 물러났다.
“그럼 부디 무사히 돌아가시옵소서, 숙의마마.”
그리고 무건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환의 주인인 황제의 유일한 후궁에게 하는 경의의 표현이기도 했지만, 또한 그녀와 목숨을 함께하는 이를 향한 진심 어린 기원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까와 달리 상당히 공손해진 그 태도와 말투에 무건은 의문이 들어 위장군을 물끄러미 보았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뒤돌아섰다. 갑자기 왜 친절해졌냐고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
지금 무건에겐 그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드디어 진예에게 다가갈 길이 하나 열렸다.
화친왕이 죽고 위도양이 반군을 구성하면서 지금 전쟁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 버렸다.
하나는 익재 토벌, 다른 하나는 반군 제압.
그 때문에 중앙인 황도로 지금도 계속 군사가 모이고 있었고, 나머지 익재 서식지를 중심으로 또 그 근처의 군사들이 움직이는 중이었다.
하지만 위도양의 반군이 읍주로 향하는 군사 2천을 가는 길목에서 전멸시켜 버렸다.
……저를 가르치러 오는 집금오가 그리 말했었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꽤 복잡한 상황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제아무리 진예라 해도 둘을 동시에 진행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일 터였다.
무건은 내빈각 방향으로 되돌아가면서 제 허리춤에 도로 꽂은 칼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하지만 자신이 읍주에서 얻은 이 능력.
이것이라면 진예에게 분명히 도움이 될 터였다.
‘고작 가락지 하나 내주는 것보다…….’
솔직히 말하면 그 사실을 스스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에 가슴 한구석이 아려 왔지만, 진예의 방식과 어긋난다면 기꺼이 바꿀 것이다.
그것이 연무건이 정인을 제 마음에 품는 방법이었으니까.
* * *
위장군이 다시 담람궁으로 든 것은 이미 해가 다 저문 시각이었다. 저녁 수라를 간단히 들고 슬슬 침전으로 향할까 하는 때에 위장군이 내동문을 통과했다는 말을 듣고 진예는 편전 동편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달칵.
커다란 상자를 열자마자 예상대로 악취가 풍겨 왔다. 진예는 코를 막고 싶어지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물었다.
“이것이 전부더냐.”
“그러하옵니다, 폐하. 이름이 전부 왼 손목에 적혀 있기에 왼쪽만 잘라 왔습니다.”
진예의 명대로 위장군은 화친왕부 후원에 매몰되어 죽은 익재들의 손목을 잘라 커다란 상자에 넣어 가져왔다.
수를 세어 보니 대략 서른 마리 정도였다. 지하실 한 칸에 서른 마리. 진예의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수다. 간단히 계산했을 때 네 칸만 되어도 벌써 백 마리가 넘었다.
하지만 고작 네 칸의 규모는 절대 아니리라. 미마이의 말에 따르면 미로처럼 엮여서 지도까지 있다 하였다. 그러니 수십 칸은 된다고 봐야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진예는 상자 안의 손목들을 보았다. 손만 덩그러니 서른 개가량 담겨 있는 건 상당히 비위 상하는 장면이었지만 확인할 것이 있으니 눈을 피하진 못했다.
위장군의 말대로 손목에는 어김없이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 이름들이 각각 무엇이라 적혔는지 확인하는 것을 서엽이 서궤 옆에 앉아 도왔다.
“화화(華華)라 쓰인 것이 대부분이고, 위도양의 이름이 적힌 것이 셋, 나머지 하나는 이름이 없습니다.”
“이름이 없다……?”
하필이면 딱 하나만 이름이 없다는 것이 이상해 진예가 지적하니 위장군이 잔뜩 어깨를 굳히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이름이 없는 것은 마지막까지 살아 있던 놈의 손목입니다.”
“자세히 말해 보라.”
“구덩이를 파 지하실을 전부 드러냈다고 생각했고, 익재들도 전부 죽은 줄 알았사온데…….”
위장군이 어울리지 않게 말끝을 흐렸다. 진예가 가만히 보는 것으로 그의 말을 재촉하자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숙의마마가.”
하지만 더 말을 잇기도 전에 진예의 미간에 금이 확 그어졌다. 연무건은 이 자리에서 나와서는 안 되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서 연 숙의가 어찌 나오느냐.”
“연유는 모르나 숙의마마가 화친왕부의 후원까지 걸음을 했습니다.”
“……해서?”
진예는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 오는 느낌이었다.
그래, 융경궁에 혼자서 벌써 열흘은 족히 처박혀 있었으니 연무건도 좀이 쑤시긴 할 터였다. 하지만 후궁이 겁도 없이 금위들이 어명을 수행하고 있는 곳까지 가다니 당장 끌려와 벌을 받아도 할 말 없는 일이었다.
“검은색 비단 주머니를 가지고 오셔서 그것이 익재들을 끌어들이는 향기라 말씀하셨습니다.”
그에 이번에는 서엽이 먼저 반응했다. 그가 진예에게 무건이 가지고 있던 예의 주머니에 대한 존재를 상기시켜 주었다.
“아마 화친왕이 준 향낭일 것입니다.”
그리고 뒷말은 위장군의 귀에도 닿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이었다.
“또한 그 안의 약초는 미마이가 조합한 것입니다.”
설명을 듣고 진예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또, 미마이다.
고작 두 번 봤을 뿐이지만 미마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능력이며, 행동이며…… 전부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 그 능력이 어떤 유인지도 잘 모르겠으나, 누구에게든 이용당하기 쉬운 악마적 재능임이 틀림없었다.
화친왕 진평에게도 그래서 붙들려 있었던 것이겠지.
어찌 되었든 미마이가 화친왕부의 사정을 전부 알고 있는지는 아직 가늠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쪽에서 핵심적으로 활용한 인력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였다.
한창 제 부모의 품속에서 보호받아야 할 그런 어린아이가 이용당했다는 것이 진예에게는 그다지 유쾌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다만 이 자리에서 중요한 주제는 아니니 일단 넘겼다.
진예는 위장군의 뒷말을 재촉했다.
“계속 말해 보거라.”
“하여 숙의마마가 파 놓은 구덩이 앞에 가니 살아 있던 익재 하나가 밖으로 튀어나와 마마에게 달려들었사옵니다. 하지만 날개를 다쳐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그것을 마마가 직접 처리해 일단락되었나이다.”
언뜻 들으면 아무 문제가 안 되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아니,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게 아니라 그냥 날개를 다친 익재 하나만이 특이 사항인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진예는 위장군이 연무건의 입장을 생각해서, 혹은 진예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금위들이 알아서 처리했다고 해도 됐을 이 말을 구태여 꺼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예는 악취 나는 상자를 그만 닫았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방 안에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진예가 위장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붉은 눈이 방 안을 밝힌 등잔불에 비쳐져 어둡게 빛났다.
“위장군.”
“예, 폐하.”
“그 자리에 있는 금위들에게는 모두 함구령을 내렸겠지.”
“그러하옵니다. 또한 다행히 눈치챈 이들은 신 외에는 없다 사료되오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이옵니다.”
위장군은 진예와 연무건의 동조 현상에 대해서 간파한 것이었다.
서엽을 제외하면 박 태감과 함께 위장군이 가장 진예와 가까운 위치에 있는 자였다. 그리고 어디서나 황제를 숨어 지켜보고 있는 다섯 명의 중랑장.
그들은 진예의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연무건이 익재를 처리하는 모습을 보고서 동조 현상에 대해 떠올리지 못했다고 한다면, 오히려 그 말의 진위를 의심할 만한 일이었다.
다만 위장군이 이 말을 꺼낸 경위는 단순했다. 그가 고개를 푹 숙이며 진심 어린 충심으로 진예에게 간언했다.
“폐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지금이라도 당장 숙의마마를 비로 맞이하십시오. 이대로는 제대로 된 호위를 하기 어렵사옵니다.”
“…….”
일단 연무건에게 궁을 하나 온전히 하사하긴 했지만, 사실 진예가 만약 후궁을 여럿 두었다면 지금과 같은 취급은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다.
연무건은 현재 고작 빈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진예가 첩은 물론 무건 외엔 비빈을 아무도 두지 않았다.
황제의 유일한 후궁이다 보니 궁 하나를 온전히 쓰는 것이었다.
그리고 선황제대에는 사실 그 명인자인 황후 외에도 비빈이 열 명 남짓 있었다. 그때 입궐한 궁인들이 아직 대부분 출궁하지 않아 인력들이 남아돌았다. 그래서 빈의 취급에 어울리지 않게 꽤 많은 인원을 융경궁에 배치했다. 당연히 연무건 본인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호위 인력의 경우 마음대로 늘릴 수 있는 성격의 것이 못 되었다. 황제 외의 존재에게 무력을 주는 일은 늘 경계해야 하기에, 각 후궁들에겐 반드시 정해진 수의 호위만을 붙였다.
그런 면에서 보면 비와 빈의 취급은 천지 차이였다. 위장군은 지금 바로 그런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었다.
동조 현상이 일어났다면, 무건의 목숨은 더는 그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가 죽으면 진예도 죽는다.
행여 누군가 진예를 해치려 한다면 허술한 연무건 쪽을 암살하거나 독살하는 방향으로 계획을 짜도 무방해지는 부분이다.
그러니 연무건 쪽의 호위가 허술해지면 그만큼 황제의 호위에도 구멍이 뚫리는 셈이었다. 위장군의 걱정은 당연했다.
진예가 대답이 없자 위장군이 다시 한번 머리를 조아리며 강조했다.
“소신이 충심으로 드리는 진언이오니 부디 새겨들어 주십시오.”
“연무건을 비로 맞이해야 한다…….”
위장군의 말은 이치에 어긋나는 점은 없었다. 하여 진예가 고민하듯 중얼거렸다. 그러고 서엽을 곁눈으로 살피니 예상대로 표정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일단 알겠으니 그만 나가 보거라. 짐도 이제 슬슬 침전에 들 때이니.”
위장군 또한 서엽의 얼굴을 힐끗 보고는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늘 그렇듯 뭐라 더 덧붙이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그럼 물러나옵니다.”
위장군이 나간 뒤 진예도 몸을 일으켰다. 서엽도 나무 상자에 천을 덮어 두고는 그녀의 뒤를 따라 일어섰다. 그러고는 벌써 방문 앞에 선 그녀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숙의마마를 비로 맞이하실 것입니까.”
진예가 태감에게 문을 열라 명하려던 걸 멈추고 서엽을 돌아보았다. 그가 불빛을 등지고 있는 탓에 표정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서엽의 상태를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요즘 그의 일그러진 표정이나 금세라도 울 것 같은 그런 얼굴을 보는 건 흔했으니까.
하지만 진예는 그 이유 때문에 해야 할 말을 가리지는 않았다.
“글쎄, 위장군이 저리 간언을 하니 고민하는 척은 해야 하지 않겠느냐.”
서엽은 딱히 반응을 보이진 않았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이미 들은 것만 같았다.
지난번에 미마이를 들여서 동조 현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을 때, 그 자리에서 바로 그것을 깼다면 오늘 일은 안 일어났을 거라고.
아니, 동조 현상이 끊겼어도 능력이 없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 적어도 위장군이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지만 진예는 제 결정을 딱히 후회하진 않았다. 위장군이나 금위들이, 연무건이 힘을 쓰는 걸 봤다는 사실은 유감이었으나 거기까지였다. 그것으로 인한 위기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연무건이 무슨 이유로 화친왕부에 갔는지 궁금했을 뿐이다.
하여 진예는 문밖으로 나가 태감에게 명했다.
“연 숙의를 침전으로 불러들이거라.”
설마 제가 먼저 연무건을 부르는 일이 생길 줄은 몰랐지만.
그리고 그런 진예를 뒤따라 편전 밖으로 나온 서엽은 그녀의 명이 있기 전에 먼저 고개를 숙였다.
“……소신, 이만 퇴궐하겠나이다.”
“그리하거라.”
진예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더 못 견디겠다는 양, 반쯤 도망치듯이 빠르게 멀어졌다.
* * *
침전의 응접실에 앉아 옆 칸과 통하는 문을 열어 두고 잠시 따뜻한 차를 즐겼다. 지붕이 없는 옆 칸의 커다란 나무 아래 파인 인공 연못에서 붕어들이 헤엄치는 모습이 수면에 비치는 것을 보며, 진예는 제 옆에 있는 듯 없는 듯 가만히 선 태감에게 말을 걸었다.
“박 태감, 그대가 보기에 조 후의 상태가 어떠한가.”
나직한 목소리로 묻는 말에 태감이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진예가 여태껏 다른 이에 대해서, 이토록 개인적인 질문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태감은 진예가 질문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잘 파악이 안 돼 잠시 머뭇거렸다. 분명히 원하는 답이 따로 있을 텐데, 무어라 말해야 이 상황을 잘 넘길 수 있을지 몰랐다.
“조 후가 어떠하냐 하심은…….”
“짐의 눈에만 불안해 보이느냔 말이다.”
진예의 이어진 말에 태감은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지금의 박 태감은 진예가 황태자였던 시절부터 함께해 온 이였다. 당연히 조서엽이 누굴 맘에 품고 있는지 알고 있었고, 그는 늘 위태해 보였다. 그러나 연무건이 온 뒤로 더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금세라도 황궁에서 화풀이로 무슨 일을 저지르거나 스스로 목을 졸라 죽거나 둘 중 하나를 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이 적나라한 말을 어찌 전해야 할지 태감은 고민했다. 다행히 진예가 질문을 거두어 갔다.
“짐이 괜한 것을 물었군.”
“조 후에게 마음이 쓰이십니까, 폐하.”
“……조 후는, 짐의 단순한 동반자 그 이상이다.”
진예가 빈 찻잔을 내려놓고는 연못 한쪽에 작은 돌을 이용해 만들어 놓은 인공 폭포를 들여다보았다. 마침 그 밑에서 놀던 붕어 한 마리가 퐁, 튀어 올랐다가 들어갔다. 그것을 보고도 진예는 아무런 감흥도 들지 않았다.
“짐이 황후를 들인다 하여 조 후를 버릴 수 있겠는가. 황태자 시절을 견딜 수 있었던 이유의 5할은 그에게 있는 것을. 또한 모두가, 짐조차 포기한 때에 조 후가 와 짐을 구명했다. 그것을 잊으면 짐승 새끼인 것이지.”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조 후는 모든 영광을 버리고 폐하의 첩으로라도 들어온다면 기뻐할 자라 여겨지옵니다.”
“……그리하면 짐이 조춘경의 얼굴을 어찌 보느냐.”
조춘경은 조서엽의 아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일찍이 대장군의 지위까지 오른 호걸이었으나 아들이 효기장군에 오르자 젊은 이들에게 자리를 내주겠다며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한데 바로 그 아들이 진예가 벌인 익재 토벌 전쟁이 끝나고 얼마 안 있어 역시 지위를 버리고 진예의 심복 노릇만 하고 있으니 속 터져 하고 있다는 후문이었다.
“하나 그것 외에 조 후가 바라는 것은 없을 것이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한 이야기다, 그것은.”
단호한 진예의 말에 태감은 조서엽이 조금 안타까워졌으나 말을 아꼈다. 대신 다른 주제로 주의를 돌렸다.
“숙의마마께서 많이 늦으시는 듯하옵니다. 차가 벌써 식어 가는데……. 나가서 알아보고 오겠사옵니다.”
“그리하거라.”
태감이 종종걸음으로 문으로 다가가 열었을 때였다. 그는 곧장 난처해하는 표정이 되었다. 무건이 이미 회랑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림자가 안 져서 몰랐는데, 문 쪽에서 살짝 비켜서 서 있었던 듯했다. 무건의 썩 좋지 못한 표정으로 미루어 보건대 조 후에 대해 한 이야기를 벌써 다 들어 버린 듯했다. 그렇다 해도 딱히 특별할 것은 없는 이야기라 문제 될 만한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테지만.
태감은 곧장 안쪽에 있는 진예에게 무건이 왔음을 알렸다.
“폐하, 숙의마마가 들었사옵니다.”
열린 문을 그대로 통과한 무건이 진예의 앞으로 걸어가자 뒤에서 문이 알아서 닫혔다. 진예는 방금 전 이야기를 무건이 엿들었을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딱히 불편해하는 기색 없이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앉거라, 연 숙의.”
무건은 탁자 앞의 의자에 앉아 방을 한번 훑었다. 융경궁의 침전에도 있으니 이곳에도 손님맞이 방이 따로 있으리라 생각은 했는데, 처음 오는 곳이다 보니 낯설었다. 생각해 보면 그녀와는 매번 침방에서만 있었다.
무건은 가벼운 옷차림으로, 머리를 풀고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살며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제 얼굴이 붉어지기 전에 그는 진예가 시선을 두고 있는 인공 연못을 함께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먼저 부르셨다기에 거짓인 줄 알았습니다.”
“짐은 연 숙의를 먼저 부르면 안 되는 것이냐.”
“그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다만 제가 먼저 찾아오지 않으면 안 볼 것처럼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쓸데없는 일로 찾아오면 뺨 백 대를 때리겠다고.”
그러자 진예가 픽 웃으며 진심인지 농담인지 모를 이야기를 했다.
“그 얼굴 아까워서 어디 때리겠느냐. 후궁 얼굴에 손 대 봤자 짐의 손해지.”
“제 얼굴이 마음에 드신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마음에 안 들었다면 두 번째 찾아왔을 때 다시 내치라 일렀을 것이다.”
그 말을 하면서 진예는 무건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장난을 치듯 말하긴 했지만 무건의 얼굴은 실제로 제법 볼만하긴 했다.
기본적으로 선해 보이는 강아지 같은 인상인 데 반해 사내답게 전체적인 선은 굵었다. 눈썹도 진하고 콧대도 높아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햇볕에 살짝 탄 살결은 탄탄해 보였고, 군살 없이 말랐는데도 야위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 선이라 적당했다.
한데 시선이 너무 오래 머문 탓인지 무건이 살며시 입술을 깨무는 것이 보였다.
“…….”
무건은 진예와 있으면서 처음 느껴 보는 간질간질한 분위기에 어떤 대꾸를 해야 할지 몰라 속으로 말을 고르고 있었다.
이러고 있자니 진예와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그때 너무 긴장한 나머지 심하게 말을 더듬으면서 어떻게 한 이불을 덮느냐 물었었다.
바보 같은 일화였다. 애초에 그때의 진예는 그런 것 따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무건은 먼저 설레발치지 않도록 노력했다. 더욱이 이곳에 들기 전에 한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그녀의 말이 마냥 좋게만 들리진 않았다.
하여 화제를 일부러 돌렸다.
“하나 그런 것으로 제가 폐하의 마음을 차지할 수는 없겠지요.”
진예의 손이 빈 찻잔을 잡는 것이 보였다. 그에 무건이 찻주전자를 들어 그녀의 잔을 채워 주자 아지랑이처럼 훈김이 올라왔다.
진예는 무건이 따라 준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가 입을 놀리는 동안 찻잔을 기울여 차로 목을 축이면서도, 그의 얼굴을 지긋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황후를 들인다 하여 조 후는 버릴 수 없다, 그런 말씀을 하신 이후에.”
“딱히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듣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하신 말씀도 아닐 것입니다.”
진예는 여전히 당돌한 데다, 그동안 궁궐에서 밥 좀 먹었다고 더 눈치도 빨라진 그를 보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해서 그에 대한 연 숙의의 해석은 무엇이냐.”
“조 후의 존재에 불만 갖지 말라…….”
말하면서도 무건은 그 사실이 못내 불편한 듯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진예는 잔을 내려 두며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하게 대꾸했다.
“바로 알아들었다.”
“…….”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짐은 명인자인 너를 버릴 것이다.”
무건의 목울대가 한 번 크게 출렁였다. 당연히 진예라면 그리하리라고 여겼지만, 직접적인 말로 확인받는 일은 단지 생각에서만 머무는 것과는 의미가 달랐다.
무건은 누군가 제 심장에 칼이라도 꽂아 넣은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짐작, 했던 바입니다.”
“조 후와 행여나 자리싸움 하려 하지 마라.”
“제가 폐하의 유일한 후궁으로 남아 있기만 한다면…… 그리하겠습니다.”
대답하면서도 무건은 제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조서엽에게 싸움을 걸겠다고 결심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지는 않을 요량이었다.
그 싸움은 서로 목덜미를 물어뜯으며 한쪽이 쓰러질 때까지 싸움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무건이 생각하기에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하늘에 태양이 떠 있고, 숲에 나무가 있고, 사람이 밥을 먹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진예가 그것을 하지 말라 이르고 있는 것이었다.
가능할까.
무건은 스스로에게 묻고 스스로에게 답했다.
불가능했다.
하지만 입에는 다른 말을 올렸다.
“그리고 앞으로 폐하의 침전엔 오로지 이 연무건만 들여 주십시오. 조서엽도 안 됩니다. 그리해 주시면 그에 대해서 더는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제가 말해 놓고도 이런 조건은 그녀로선 무리한 게 아닌가 싶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황제를 혼자 차지하려 든다는 게 말이 되나. 또한 진예는 연무건과 조서엽 사이의 균형을 원한다. 지금 무건의 발언은 그에 절대적으로 반하는 일일 것이다.
하여 당연히 안 된다고 할 줄 알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진예가 덤덤한 어투로, 고민하지 않고 화답해 왔다.
“그리하도록 하지.”
무건은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되물었다.
“사실입니까……?”
진예는 이번엔 고개만 한 번 끄덕이고는, 무건을 마주 봐 왔다.
진예의 긴 속눈썹이 드리운 눈이 느릿하게 깜빡였다. 눈꺼풀이 닫히고 다시 열릴 때, 살며시 드러나는 붉은 눈동자에 무건은 홀리듯 시선을 빼앗겼다.
그리고 나긋하게 이야기하는 음성을 듣는 순간 다시 한번 제 심장의 주인이 진예였음을 깨달았다.
“짐의 유일한 사내는 연무건이 될 것이다.”
“짐의 유일한 사내는 연무건이 될 것이다.”
그리 말하는 진예의 얼굴은 건조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무건은 그 한마디만으로 심장이 두근거려 주체하기 힘들어졌다. 그의 눈이 진예의 조곤조곤하게 말을 이어 가는 입술에 집중되었다.
“누군가 짐의 황후가 된다면, 그 자리엔 오로지 나의 명인자만 오르게 될 것이다.”
그토록 바라 왔던 말들이었다.
한데.
“짐의 사내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건 연무건의 차지가 되겠지.”
진예의 말은 절절한 사랑 고백이 전혀 아니었다. 무건은 들을수록 그 사실을 더욱 선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의 말을 속된 말로 바꾸면 옆자리를 줄 테니 까불지 말라는 의미였다.
절대로 마음을 탐하진 말라는 경고이기도 했다.
하여 진예의 말이 한 마디 더해질 때마다 서서히 심장 박동이 다시금 진정되어 감을 느꼈다.
무건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떤 대답을 듣든 썩 기분이 좋아질 것 같진 않았지만, 일단 궁금했으니까.
“후사 역시 저에게서 보실 것입니까.”
“태어난다면 그리되겠지.”
“전부 가정형이군요.”
“그렇다.”
냉정하게 대답하고 진예는 의자에 앉은 채로 몸을 틀어 연못이 있는 옆 칸을 바라보았다.
달이 밝은 날은 아니었지만, 응접실에 켜 둔 등잔 불빛이 그곳까지 비춰 연못의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것이나 작은 폭포수가 떨어지는 것에 따라 표면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이제 막 잎이 푸릇하게 난 나무 아래의 풍경이 제법 평화로웠다. 그 모습을 보며 진예는 조금 식은 차를 입에 댔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시선에 진예는 제 옆얼굴이 다 따가울 지경이었지만, 연무건에게 눈길을 주지 않은 채 그저 다음 말을 기다렸다.
“폐하께선 정녕 그 정도로 개들의 싸움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
진예로서도 어느 정도는 예상을 했던 반응이었다.
조서엽도 연무건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와중에, 연무건에게 조서엽을 건드리지 말라는 이야기가 제대로 먹힐 리가 없었으니까.
다만 예상했다고 해서 그것이 진예가 원하는 방향인 것은 또한 아니다. 진예는 분명 두 사람이 억지로라도 공존해야 한다고 믿었다.
한데 조서엽은 제 생각보다 훨씬 자신을 사모하는 마음이 깊었고.
“조서엽을 누구보다 잘 아는 분은 폐하이시리라 생각합니다. 그자가, 정녕 저를 죽이지 않으실 거라 여기십니까?”
연무건은 제 생각보다 훨씬 눈치가 빨랐다. 거의 짐승의 본능적인 감각에 가까워 보였다.
질문을 받고 진예는 그의 촉이 제법 정확하다는 걸 알았다. 그의 말대로였다. 조서엽은 동조 현상이 끊기면 연무건을 제 손으로 죽이도록 해 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직 동조 현상은 끊기지 않았다. 진예 스스로 원하기 전까지는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터였다.
‘아마도.’
“아직은 죽이지 않겠지.”
“조서엽이 아직은 저를 죽이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는 말로 들립니다. 그리고 폐하께선 그 이유를 저에게 먼저 말씀해 주시진 않겠지요.”
어울리지 않게 조금 화가 난 듯한 어투였다.
무건이 진예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그녀와 마찬가지로 바깥의 연못에 눈길을 향했다. 그리고 때마침, 연못 위로 새로운 파동이 일었다.
왜 달이 이리 어두운가 했더니, 비가 내리려 했던 모양이었다. 아직은 거세지 않았지만 톡, 톡, 연못 위를 두드리는 소리가 아주 느릿한 박자로 비의 시작을 알렸다.
“반대로 말하면 그 이유가 사라지면 그자가 제 목덜미에 칼을 꽂겠죠. 제가 화친왕의 목에 칼을 꽂은 것처럼.”
무건은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바깥을 바라보며, 딱딱한 어조로 결론을 내렸다.
사실 진예와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게 썩 기분 좋진 않았지만, 차라리 다행이라고 여겼다. 방금 전의 거짓말을 계속하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라고.
정말로 조서엽이 저를 죽이려 달려들 때, 반대로 그를 죽이지 않을 자신이 없었으니까.
연무건은 언제든 조서엽의 목덜미에 칼을 내리꽂을 준비가 돼 있었다.
“이 미천한 놈이 그런 것에 겁을 먹으리라 여기진 마십시오, 진예.”
이름을 불렀지만 진예는 무례하다 지적하지 않았다. 대신 무건을 곁눈으로 쳐다보았다. 붉은 눈동자에 비치는 눈빛은 이미 전부 다 꿰뚫고 있다는 듯이 날카롭고 서늘했다.
“네놈이 그럴 놈은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한데 저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역시 조서엽을 지키고 싶어서입니까. 제가 말 잘 듣는 개를 물어뜯을까 봐?”
말해 놓고 무건은 제가 한 말이 정답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진예가 자신이 아닌, 조서엽을 지키려 하는 사실에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올라왔다.
자신과 운명으로 엮인 명인자가, 제 앞에서 다른 사내를 비호한다는 것에 화가 나 저절로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그런 제 얼굴을 감추려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진예가 자신을 어떻게 대하든, 그녀에게 역정을 내고 싶지는 않았다.
다행히 귓가에 내려앉는 빗소리가, 그와 함께 밀려드는 조금 차가운 기운이 무건의 마음을 어느 정도 가라앉혀 주었다.
무건은 이내 지금까지 진예가 했던 말들을 짧게 축약했다.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있으면 네 것이니 얌전히 기다려라…….”
이마를 짚었던 손을 떼고 그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진예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진예 또한 시선에 이끌려 그에게로 눈을 향했다. 그러자마자 무건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가합니다. 이 연무건은 그 자리에 있게 할 것입니다. 이놈이 폐하를 본 순간 가진 욕심이란, 그런 것입니다.”
기실 욕심이라 이름 붙이기에도 너무 고상했다. 차라리 모든 걸 집어삼키고자 하는 탐욕이라 부르는 편이 적절할 터이다.
진예는 그런 그의 말을 들으면서 무건이 바로 그 욕심이란 것을 입에 처음 올렸을 때를 상기해 냈다.
〈이 방에선 죽지 않는다면, 날이 밝으면 죽는다는 의미 아닙니까.〉
순해 보이는 얼굴로, 잔뜩 긴장을 해 목소리를 조금 떨면서도.
〈그럼 그 전에…… 당신을 가지고 싶습니다.〉
죽기 전에 제 음심은 풀어 놓고 죽어야겠다고 말했다. 조서엽의 칼날 앞에서도 살려 달라 목숨을 구걸하는 게 아니라 돌아오겠다고, 돌아오면 대가를 달라고 말했다.
그때부터 연무건이 평범한 놈은 아니라고 생각하긴 했었다. 그리고 그 비범함이, 현재 연무건을 이곳에 앉게 했다.
“원하신다면 무릎이 닳도록 꿇을 수 있습니다. 이마가 깨지도록 조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 것이 없다 말씀하지는 마십시오.”
“어찌 이리 욕심이 많을까, 네놈은.”
대답하면서 진예는 눈앞에 검은 장막이 씌워진 듯한 갑갑함을 느꼈다. 해답이 보이지 않는 문제 앞에서 헤매는 기분이었다.
조서엽은 연무건의 밥그릇을 뺏기 위해 목덜미를 노리는 중이다.
연무건은 일단 욕심만 충족시켜 주면 배부른 척은 하겠지만, 밥그릇을 뺏는 놈이 나타나면 역시 물어뜯는다.
서엽 쪽을 진정시키면 될지도 모르지만, 진예가 봤을 때 그쪽은 통제 불능이었다. 따귀를 맞아도 정신을 못 차리는 놈을 무슨 수로 진정시키나.
한데 이쪽, 그러니까 연무건이 은근슬쩍 진예가 허락하지 않은 영역에 발을 들이려고 했다.
“그리고 전 폐하의 몸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원합니다.”
복잡한 계산식을 앞두고 잠깐 상념에 빠져 있던 진예는 그 말을 듣고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짐의 마음이라? 네가 말이냐.”
가락지를 알아서 가져가기에 그쪽은 이미 포기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마음이 어디에도 없다 말씀하지 마십시오. 제가 찾아낼 것입니다.”
……아니었던 모양이다.
진예는 무건의 말이 우스워 입가에 비소를 비쳤다. 스스로도 어디에 있는 줄 모르는 마음을 남이 어찌 찾아 주나 싶어서였다.
제 마음속은 오래전에, 모조리 다 타 버렸다. 일말의 아름다운 감정이 남아 있었다면 피붙이들이 전부 그렇게 비명횡사하지는 않았겠지. 그리고 조서엽이 그토록 애타게 자신에게 매달릴 때 이미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그런 현실을 모르고 나비처럼 폴폴 날아가 버릴 환상을 좇는 연무건이…….
“당신의 빈 곳은 전부 제가 채워 드릴 겁니다. 어디든 말입니다.”
조금 불쌍하기도 했다.
진예는 순간적으로 스쳐 가는 그 감상에 스스로 놀랐다.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생각해 보면 이전에도 그에게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여인을 만났다면 꽤 좋은 사내가 됐을지도 모르겠다고.
한데 그 깨달음이 하필 이 순간에 찾아온 건 왜인지 좋은 신호는 아닌 듯했다.
연무건이 제 마음을 갖겠다 어쩐다 헛소리를 지껄이는 이 순간에는 더욱이.
그런 진예의 복잡한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무건이 노골적으로 서엽을 배제할 것을 요구해 왔다.
“그러니 조서엽에게서 안정을 찾지 마십시오. 그자는 그럴 자격이 없으니.”
“그러는 네놈은 자격이 넘친단 말이냐.”
“지금은 없으나 폐하께 제 쓸모를 증명한다면 생기지 않겠습니까.”
뭣도 없으면서 당당한 것 하나는 일관됐다.
진예가 무건을 바라보며 표정을 굳혔다.
옆 칸을 향해 열린 문 사이로 빗소리가 어지럽게 울리고, 흘러들어 오는 바람에 응접실의 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낮에 화친왕부에 찾아갔다 들었다. 그럼 그 또한 그 쓸모라는 걸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나?”
생각해 보면 연무건은 황궁에 든 이후로 그 외의 이유로는 움직인 적이 없었다. 진예가 아니면 쓸데없이 누군가를 만나지도 않았고, 융경궁 밖으로 발을 내밀지도 않았다. 진예의 이 추론은 거의 당연한 것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무건은 진예의 이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옷깃 사이로 손을 넣어 검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더니 끈을 풀어 주둥아리를 열었다.
검은색의 바짝 마른 약초가 역한 냄새를 풍겼다. 이 냄새는 서엽이 가져와 얼마 전에 맡았던 것이었다.
미마이가 만들었다는 바로 그 약초였다.
“화친왕이 익재를 끌어들이는 향기라 했던 것입니다. 화친왕부에 익재가 남아 있을까 해서 확인하러 갔었습니다.”
“남아 있었더라도 짐의 금위들이 알아서 처리했을 텐데?”
“정말로 냄새에 이끌리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니 그와는 상관없지요.”
하는 말을 듣자 하니 저 적은 양으로도 효과는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익재들은 보통의 인간보다 거의 모든 신체 능력이 월등했다. 사람에게도 맡아지는 향기를 익재들이 못 맡을 리는 없었다.
또한 결과적으로 무건이 예의 익재를 처리했다고 위장군이 말했었으니 화친왕부로 찾아간 소기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했다고 봐야 할 터.
“하여 그것으로 네가 쓸모를 증명할 방도를 알게 됐느냐.”
진예의 물음에 무건이 주머니를 오므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찾은 답은 무엇일지.
진예는 무건에게 신경을 집중했다.
불빛이 흔들리는 탓일까. 오히려 무건의 작은 움직임 하나까지 더 신경 쓰게 되었다. 무건은 탁자 위에 올린 손으로 살며시 주먹을 쥐었다.
“익재를 토벌하는 전쟁을 선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위도양이 반군을 일으켰다는 이야기 역시.”
“그것이 후궁인 연 숙의와 무슨 상관이지?”
후궁은 황제의 사람이다. 하지만 그들의 의무에 칼을 드는 것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당연히 전쟁에도 차출되지 않았다.
하여 날카롭게 대꾸했지만, 진예 역시 연무건을 이번 전쟁에서 어느 정도 써먹을 생각이긴 했다.
무건이 그 부분을 정확하게 짚었다.
“폐하께서 둘 모두 동시에 지휘하긴 어려우실 테니 제가 익재를 토벌하러 가겠습니다.”
정확했지만, 때가 어긋났으며 원하던 형태도 아니었다.
미친 소리를 들었다 싶은 진예가 한동안 표정을 굳힌 채 연무건을 노려보았다. 방금 그 말은 제 주제를 너무나 모르고 하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진예가 연무건을 전장에 끌고 가겠다고 생각한 건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임무를 위함이었다. 그를 제 곁에서 따로 떼어놓거나, 군을 내어 주거나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한데 지금 무건은 군사를 움직이는 일을 본인에게 맡기라는 개소리를 지껄이는 중이었다.
제정신이 아니다. 어리석은 데다 무모한 발언이었다.
“……연 숙의는 전장이 놀이터인 줄 아는가? 짐에게는 그대가 아니더라도 훌륭한 장군들이 많은데 짐이 그런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무엇이지?”
“아마 읍주에서 홀로 걸어 나올 수 있는 이는 흔하지 않겠지요.”
진예는 쥐고 있던 찻잔이 으스러져라 손에 힘을 넣었다. 손마디가 하얗게 올라왔다. 무건에게 정신 차리라며 따귀라도 날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어차피 미친놈은 맞아도 제정신으로 못 돌아온다는 사실을 얼마 전 조서엽을 통해 배우지 않았던가.
탁, 소리가 나도록 찻잔을 세게 내려놓은 그녀가 무건에게 차갑게 일갈했다.
“익재들을 태워 죽이는 그 능력을 과신하는 모양이군. 고작 그런 능력으로 군사들을 통솔할 수 있을 리 없다.”
“통솔하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 자리에 적합한 다른 자를 따로 선봉으로 세우십시오. 폐하께서 보내시면 그자를 믿고 따르겠습니다.”
기이하게도 말을 듣는 동안 진예의 머릿속으로 몇몇 적임자들이 스쳐 갔다. 그렇다는 것은 순간적으로 설득당했다는 의미였다.
사실 두 가지 전투를 동시에 이끌어 가기엔 무리가 따랐다.
먼저 처리해야 하는 쪽은 굳이 말하면 반군이다. 그 중심축인 위도양과 정위를 죽이면 오합지졸이 될 테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터였다.
다음으로 진행해야 하는 건 익재 토벌. 다만 반군이 익재를 조종하여 이용하니, 일을 동시에 진행하지 않으면 그들의 세력이 줄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기에 두 가지의 경중을 따지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황도도 문제다.
화친왕이 남겨 둔 지하실. 입구를 찾기는커녕 지금은 그 지하실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그 안에 몇 마리의 익재들이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 것 하나 단숨에 해결될 문제들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셋 다 한꺼번에 해결하기는 어렵고, 한쪽에 발이 묶여 있으면 다른 하나에 문제가 생길 것이다.
“그리하는 것으로는 제 쓸모를 증명하기 어려운 것입니까?”
고민하는 진예에게 무건이 다시금 물었다.
지금 무건이 하는 말은 진예가 충분히 원하는 전개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진예는 무건을 무턱대고 밖으로 내보낸다 생각하니 꺼려졌다.
동조 현상이 밝혀지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뒤늦게 그가 죽어 저도 같이 죽어 버릴까 봐 염려되어서도 아니었다.
……어차피 그를 전장으로 내보낼 때는 동조 현상을 끊어 버리겠다고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지금이라도 당장 숙의마마를 비로 맞이하십시오.〉
〈숙의마마를 비로 맞이하실 것입니까.〉
서로 상반된 이야기를 하던 두 사람의 말이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꼬였다.
진예는 관자놀이가 지끈거려 옴을 느끼며 이 주제를 일단락하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장의 충동으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생각해 보겠다.”
그런데 무건은 바로 이 자리에서 답을 들어야 하겠는지 진예를 채근해 댔다.
“생각해 볼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저를 써먹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안일 텐데요.”
“연무건, 이것은…….”
그리 간단히 결론을 내릴 것이 아니다, 그리 말하려 했지만 무건이 탁자 위에 올라와 있는 진예의 손 위에 제 손을 덮었다.
그의 긴 손가락이 진예의 작은 손을 휘감아 왔다. 그리고 제 각오가 그리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리려는 듯, 힘을 꽉 쥐었다.
무건의 단단한 악력과 함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따뜻한 체온이 밀려들었다. 덤덤히 제 할 말을 이어 가는 목소리는 생각 외로 부드러웠다.
“제가 익재를 토벌하면 그 영광은 전부 폐하께 돌아갈 것입니다. 혹여나 제가 전사해 실패하더라도…….”
제가 죽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꺼려지긴 하는지 무건은 한 박자 말을 쉬었다.
“그리하면 진예, 당신이 원하는 대로 명인에서 해방될지도 모르지요.”
한마디로 진예는 손해 볼 것 하나 없는 제안이라는 의미였다.
말을 마치고 무건이 살며시 미소 짓는데, 묘하게 씁쓸해 보였다. 진예는 그 표정을 보고서 형언할 수 없는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단지 하나의 감정이 아니었다. 뭐라고 이름 붙여야 할지 모를 것들이 뒤섞여 있었다. 진예는 먼저 그중 하나가 연민이라는 걸 깨달았고, 그다음엔 아주 약간의 미안함이 섞여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리 내 곁에 있고 싶다는 말이냐.”
“그래야만 당신이 날 돌아봐 줄 테니.”
진예는 자신의 손을 꽉 쥔 손을 내려다보면서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이 사내는…… 달랐다.
지금껏 만났던 그 어떤 사람과도 달랐다.
“저를 죽음의 전장에 밀어 넣어 주십시오.”
무건이 중얼거리며 진예의 손을 제 앞으로 끌어가 조심스레 입을 맞췄다. 그의 두 눈이 가지런히 감겼다. 입술로 그녀의 체온을 음미하는 무건의 표정은 상황과는 상반되게 평온해 보였다.
“당신에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이 진예의 가치라.”
한 사내가 제 목숨을 버릴 만한 가치.
무건이 한 말을 곱씹던 진예가 물었다.
“그것이 무엇이냐.”
무건의 눈꺼풀이 들어 올려지며 그의 검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불빛에 비쳐 맑은 홍채에 붉은빛이 맺혔다. 그런 그가 손을 놓고 곧은 눈동자로 진예를 응시하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진예가 앉은 맞은편 자리로 걸어와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것을 내려다보는 진예의 시선이 흔들리는 것을, 곧장 고개를 숙인 탓에 무건은 보지 못했다.
“하늘이 정해 주었으나, 하늘보다 높은 나의 명인자이십니다.”
그 말을 끝으로 방 안엔 짙은 정적인 감돌았다.
진예는 그의 뒤로 내리는, 봄치곤 거센 빗줄기를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응접실 한쪽에 거치되어 있던 칼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무건의 앞으로 돌아와 예리하게 벼려진 칼을 뽑았다. 그 소리에 등이 서늘해진 무건이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진예의 칼끝이 무건의 옷깃 사이로 들어와 비단옷의 상의를 단숨에 세로로 잘라 버렸다. 무건의 맨몸이 드러나며 품 안에 있던 검은 주머니와 진예에게 주었다가 도로 가져왔던 옥가락지가 도로로록 굴러 나왔다.
그것을 본 무건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굴러가는 가락지를 붙잡았지만 이미 늦었다.
“아직도 그것을 가지고 있었더냐.”
“…….”
“미련하게도.”
진예의 지적에 무건은 가락지를 꽉 쥐며 대꾸했다.
“미련하더라도 이것이 연무건이 방식이었습니다.”
“과거형이로군.”
“원하신다면 제 모든 걸 버리고, 바꿀 것입니다. 전부 폐하의 뜻대로 맞춰 나갈 것입니다. ……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진예가 앞이 다 뜯어진 옷을 내려다보았다. 두 번 다시 못 입을 만큼 깔끔하게 잘려 버렸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침전을 나서기 전에 연무건에게 새 옷이 내려질 터였다.
“연 귀인. 이제부터 네놈에겐 그게 더 어울리겠군.”
이젠 단지 유일한 후궁 정도가 아니었다. 빈(嬪)이 아닌, 비(妃). 진예의 유일한 정궁이었다.
의미를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들어 자신을 올려다보는 연무건의 눈동자에 어떤 기대감이 떠올랐다.
“앞으론 감히 짐의 명인자를 천것이라 일컫는 자들을 용서하지 말거라.”
진예의 칼이 이번엔 그의 허벅지 쪽으로 향했다. 오른쪽 사타구니의 천을 잘라 내니 연무건의 몸에 있는 명인, 진예의 이름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 명인이 남아 있는 한.”
명인은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불에 지져 가린다고 해도 실제로는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무건은 진예의 말을 듣고 드디어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서게 되었음을 인식했다. 가슴에 뜨거운 기운이 고였다.
그는 손바닥이 아프도록 쥐고 있던 옥가락지를 느슨하게 놓았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무건의 입에서 대답이 나오자 진예는 그제야 칼을 칼집에 꽂아 넣었다. 그러고는 칼집 끝으로 무건의 턱을 받쳐 들어 올렸다. 자연스럽게 상체가 똑바로 세워지면서 찢어진 옷 사이의 몸이 훤히 드러났다.
탄탄해 보이는 가슴 근육이며, 군살 대신 근육으로 감싸인 배가 제법 감상할 거리가 되었다.
“찢어진 옷을 입은 꼴도 볼만하구나.”
“하나 이 꼴로는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됐으니 어찌합니까.”
지껄이는 꼴을 보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만했던지라 진예가 칼을 거두고 뒤돌아섰다. 그러고 칼을 제자리에 던져두려고 하는데 그 전에 연무건이 뒤에서 덜컥 끌어안았다.
무건이 자연스럽게 진예의 손에서 칼을 빼 가 대신 거치대 근처에 대충 던져 놓고는, 그녀의 손등을 겹쳐 잡았다. 한 팔으로는 얇은 허리를 감싸며 자신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진예를 제 품에 푹 안아 버린 무건이 고개를 숙여 머리 위에서 속삭였다.
“폐하의 몸으로 가려 주셔야 할 성싶은데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네놈은, 정말 지치지도 않는군.”
“연모하는 사내란 본래 그러한 것입니다.”
나직한 음성이 제법 다정했다. 그녀를 안은 팔은 조심스러웠고, 품엔 따뜻한 온기가 돌았다.
“무엇도 멈출 수가 없는 법이지요.”
하지만 그가 하는 말을 듣자 어찌하여 조서엽이 생각나는지 알 수 없었다. 진예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런 건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무건이 미간을 좁혔다. 단지 눈빛과 목소리만으로 진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는 정확하게 알아차렸다.
“조서엽을 가엾게 여기지 마십시오. 이 자리에 있는 건 이 연무건이니.”
말하면서 무건이 손을 내려 그녀의 허벅지를 타고 내려갔다. 잡힌 손목이 벽에 눌리고, 진예의 몸도 따라 무건과 벽 사이에 끼었다.
굵고 긴 손가락이 옷 안으로 파고들었다. 매듭이 툭, 풀어지는 소리가 나며 스르륵 하고 진예의 하체를 갑갑하게 했던 천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그 과정이 두어 번 반복되고 나서야 미열이 진예의 가는 허벅지에 닿았다. 무건은 진예의 귓바퀴를 입술의 섬세한 주름으로 훑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연민하는 마음조차 저에게 쏟아 주십시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역시 저에게 토해 내셔도 좋습니다.”
말하면서 흘러나오는 입김이 간지러워 진예의 귀가 발갛게 달아오르자 무건을 그곳을 살짝 깨물었다가 혀로 핥았다. 동시에 무건의 손끝엔 진득한 액체가 고였다.
“연무건…….”
진예의 목소리에 약간의 흥분감이 섞였다. 무건은 불빛이 약해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가 진 것을 보고 아쉽다고 생각했다. 붉게 달아오른 진예의 모습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보다 제 마음을 전하는 게 더욱 중요했다. 무건이 못내 사랑스럽다는 듯이 진예의 옆얼굴에 입맞춤을 쏟아 내며 말을 이어 갔다.
“전부, 전부 제가 받아 낼 터이니…….”
‘나한테 의지해요.’
그런 뒷말은 무건은 차마 하지 못했다. 그녀가 원하지 않을 말이었으니까.
전하지 못하는 마음이 쓰라렸다. 누구에게도 기대려 하지 않는 진예의 모습이, 무건은 아팠다.
그러나 눌러 참아야만 했다. 억누르고, 또 억눌러서 진예가 연무건이 지닌 이 연민을 모르게 해야 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과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저를 하찮은 대통 정도로 여기셔도 개의치 않겠습니다.”
“고약한 취급을 자처하는구나.”
“그것이 이 연무건만이 해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미천했던, 이자만이.”
조서엽도 안 되고, 다른 누구도 못 하는 것이다.
그녀가 가진 모든 감정을 감싸 안고, 자신이 대신 무너져 내려 주고 싶었다.
허락해 줄까, 진예는.
그런 생각을 하며 무건은 진예를 제 품에 꽉 껴 넣었다.
잠시 지나가는 비는 아니었는지 그들의 등 뒤로 빗소리가 여전했다. 이제는 제법 많이 내려 처마를 타고 내려오는 소리 또한 귀를 거슬리게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차진 소리가 몸 안에서부터 울려 왔다. 무건이 밀어붙일 때마다 진예는 억눌린 신음을 내보냈다.
그에 무건이 돌연 그녀의 얼굴을 붙잡고 돌려 입맞춤을 했다. 진예의 입술이 벌어지고 두 개의 혀가 섞였다.
불편하게 뒤틀린 자세였지만 무건은 진예를 조금도 봐주지 않았다. 거칠게 몰아치는 쾌감에 진예의 혀가 움찔했다.
“하아……!”
더는 참지 못하고 그녀가 거친 신음과 뜨거운 숨을 연신 무건의 입 안에 토해 냈다. 혀를 섞는 질척이는 소리와 신음이 번갈아 울렸다.
그 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에 무건이 입술을 살짝 떼었다. 그가 메어 오는 목을 가다듬고 짙은 한숨을 내쉬더니 진예에게 한마디 했다.
“이러다 밖의 내관들이며 궁인들이 다 듣겠습니다.”
하지만 말과 달리 무건은 진예의 허벅지 밑으로 팔을 껴 그대로 다리를 들어 올렸다.
“……연무건!”
벽에 기댔다고 하지만 한 다리로 버티고 있으니 진예의 다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무건은 그 떨림마저 감미롭게 느꼈다.
“빗소리가 클까요, 아니면…….”
폐하의 신음 소리가 클까요.
묻는 형식을 취했지만 무건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빗소리에 묻힐 만한 정도가 아니었다.
탐닉이 깊어질수록 다행인지 불행인지 바깥의 비도 거세어졌다. 무건은 그러나 그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두 사람은 빠르게 절정으로 치달아 갔다. 머리가 핑 도는 듯한 탈력감과 함께 무건이 먼저 탄식했다.
거친 행위에 진예가 약간 비틀대자 무건이 그녀의 몸을 잡아 지탱해 주었다.
한동안 꽉 껴안은 채 그는 가만히 숨을 골랐다. 그리고 양팔로 진예를 받쳐 들어 올렸다.
갑작스럽게 발이 땅과 멀어지자 진예가 놀라 흠칫했다.
“뭐 하는…….”
“그야, 이곳은 침방이 아니지 않습니까.”
“…….”
다행히 진예는 내려 달라고 하지는 않았다. 아마 다리가 떨려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무건이 미소 지으며 그녀의 몸을 옷으로 소중하게 감싼 뒤, 문 앞으로 걸어갔다.
사람 그림자가 비치자 딱히 말이 없었는데도 바깥에서 먼저 문이 열렸다.
회랑엔 박 태감을 비롯한 많은 수의 내관과 궁인들이 서 있었다.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그들을 보다가 무건이 말없이 발을 옮겼다.
두 사람분의 몸무게로 밟는지라 나무로 된 바닥이 평소보다 더 길게 울었다.
조급한 마음 때문인지 왜인지 상당히 길게 느껴지는 행랑을 가로질러 침방이 있는 전각으로 들었다.
무건이 끝까지 진예를 안은 채 침방으로 발을 들인 뒤, 다시 궁인들이 알아서 문을 닫았다. 더불어 침전에 있는 모두가 입과 귀도 닫았다.
* * *
짹, 째액.
풀이 제법 올라온 수호수 위에 앉은 작은 새 한 마리가 울었다.
그리고 교각을 넘어 편전 일원 앞에서 멈춰 선 가마의 문이 열리고, 금색 용포를 입고 면류관을 쓴 진예가 그 밖으로 발을 내었다.
한동안 익숙해진 담람궁의 편전과 다른, 더 웅장한 편전의 모습을 확인하고 진예가 가운데 길을 밟아 앞으로 나아갔다.
어도를 걸어 편전으로 향하는 진예의 발걸음은 가벼웠고, 또한 당당했다. 그 뒤를 따르는 내관과 궁인, 그리고 금위들도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의 황궁으로의 복귀였다. 침전 일원의 보수 공사가 모두 끝나고, 경비를 강화했다는 위장군의 말을 듣고서야 진예는 황궁에 다시 발을 들였다.
“황제 폐하 납시오.”
이윽고 편전의 옆문이 열리고, 가장 깊은 안쪽의 옥좌로 올라섰다. 검은 발 뒤로 황제의 그림자가 비치자 조회를 위해 모여 있던 대신들이 일제히 일어나 황제의 황궁 복귀를 환영했다.
“홍복을 누리소서, 황제 폐하.”
진예는 앉기 전에 넓은 편전 안을 한 차례 둘러보았다. 딱히 결원은 보이지 않아 조용히 옥좌에 앉았다.
그녀의 앞으로 두루마리가 잔뜩 쌓인 서궤가 준비되어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잔뜩 올라온 상소문을 보고 진예가 옆으로 손을 내밀자 내관이 공손하게 옥새가 담긴 상자를 건넸다.
하지만 그것을 열기 전에 진예가 먼저 입을 열었다.
“경들은 들으시오. 오늘로 숙의 연무건을 귀인으로 봉하여 짐의 정궁으로 임하며, 그 거처 또한 융경궁에서 봉아궁으로 옮기겠소.”
황궁으로 복귀한 뒤 내리는 첫 황명인 만큼 그 의미는 남달랐다. 게다가 고작 몇 달 만에 빈으로 들인 이를 정궁으로 삼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봉아궁은 황궁의 서편에, 그것도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궁이었다. 황제의 복심이 어디로 향하는지 짐작할 만한 대목이었다.
대신들 몇몇의 시선은 진예가 아닌 조서엽에게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서엽의 얼굴은 거의 납빛이 되어 있었다.
“또한.”
한데 진예의 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연 귀인은 편전에 들라.”
그 말에 놀란 대신들이 편전 정문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자 문이 열리며 정말로 앞에 선 연무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빈이 조회에 참여하는 것은 거의 없는 일이라 대신들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무건이 편전 안으로 발을 들인 뒤 옥좌에 앉은 진예를 향해 경의를 표했다.
“홍복을 누리소서, 황제 폐하. 귀인 연무건, 폐하의 명을 받고 귀한 곳에 걸음하였나이다.”
무건의 등장에 서엽은 꿋꿋이 그곳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고 앞만 바라보았다. 주먹 쥔 그의 손이 멀리서도 보일 만큼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연무건과 눈이 마주치면 그를 죽이고 싶은 충동에 휩싸일 듯했다. 서엽은 필사적으로 그것을 참아 냈다.
그리고 대신들은 연무건이 편전에 들 이유가 무엇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다가 이어지는 진예의 호명에 하나씩 앞으로 나섰다.
“표기장군 장첨.”
“예, 폐하.”
“전장군 왕원.”
“부름을 받드옵니다.”
“두 사람은 읍주를 포함한 다섯 개 지역의 익재 토벌을 연 귀인과 함께 나선다.”
익재 토벌이라는 말까지는 적당히 듣고 있던 표기장군 장첨의 얼굴이 연 귀인이라는 말이 나오자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폐하, 어찌 귀인마마를 전장에……?”
대놓고 항명을 하기는 어려워 표기장군이 말끝을 흐리며 의문 부호를 달자 진예가 답했다.
“연 귀인이 출전을 자청한바, 짐이 그것을 윤허하였다.”
편전이 고요해졌다. 다들 연무건과 진예의 결정을 이해하지 못한 탓이었다. 아무리 봐도 연무건은 익재의 서식지로 들어가자마자 몸이 찢기게 생긴, 아주 평범한 사내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예의 명은 점점 구체성을 갖춰 갔다.
“표기장군에게 5천의 군사를 내줄 것이니, 해당 지역의 군사들과 힘을 합쳐 익재들을 괴멸시키라.”
반박은 받지 않겠다는 듯, 진예는 다음으로 넘어갔다.
“좌장군 백악, 진동장군 조돈…….”
무관 일곱의 이름이 나열되면서 이번에도 한 명씩 앞으로 나섰다. 그 뒤 진예가 그들을 내려다보며 덧붙였다.
“이상은 짐과 비래로 향해 위도양과 정위의 반란군을 진압하고, 익재 토벌에 합류한다.”
사실상의 전쟁 선포였다.
호명된 장군들을 포함한 대신들은 한목소리로 답했다.
“황명을 받드옵니다.”
편전의 한가운데 있는 연무건 역시 마찬가지였다.
* * *
유난히 길었던 조회는 점심때도 훌쩍 지나 끝이 났다. 진예조차 조금 지쳤다 느껴질 만큼 갑론을박도 많이 오갔다.
다들 반란군 진압이나 익재 토벌 관련해 한마디씩 했다. 특히나 무건이 전장에 나가는 것에 불만들이 대단했다. 그것을 간신히 가라앉힌 뒤에야 다들 물러났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진예는 편전 밖으로 나와 침전으로 향했다. 그런 그녀의 뒤를 말없이 따르던 조서엽은 내내 조용히 있다가 진예가 침전에 들어 식사를 마치고 나서야 무거운 입을 열었다.
상이 나가고 방이 비었을 때, 서엽이 진예의 앞에 불쑥 무릎 꿇고 앉더니 물었다.
“폐하께서 친정을 나서시면 황도가 비는데 괜찮겠습니까? 아직 지하실의 입구나 규모가 다 규명이 되지 않은 상태가 아닙니까.”
아마도 연무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데에 진예가 내심 의외라고 생각하며 답했다.
“더욱이 위도양이 지하실을 완전히 버릴 리는 없으니, 짐이 친정을 가면 황도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겠지.”
“다른 계획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글쎄, 짐과 위도양 중에서 누가 더 영악한가의 싸움 아니겠느냐.”
진예가 답하며 슬며시 미소를 비쳤다.
익재들을 다루고 있으니 잠시 우위는 점할 수 있을 테지만, 그게 전부 아닌가 싶었다. 지하실이 조금 염려는 되나 어차피 그것들도 무한의 존재는 아니다.
그런데 서엽은 어차피 저도 따라갈 것이면서 걱정이 되는지 다른 제안을 하나 더해 왔다.
“괜찮으시다면 미마이도 대동하시는 게 어떠하십니까.”
다만 진예로서는 영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미마이는 진예가 보기에 아직 너무 어렸다. 책사로 데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진예가 노골적으로 불편해하는 기색을 비쳤다.
“그 어린아이를 말이냐.”
“하지만 한때 화친왕과 위도양이 가까이한 아이입니다.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 아이가 과연 도움을 주고 싶어 할지는 잘 모르겠다. 지난번에도 내내 의뭉스러운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진예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엽의 권유이기도 했고, 도움은 주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리도 중요한 아이라면 위도양을 흔들어 놓을 패 정도로는 사용이 가능하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알겠다, 그리하도록 하지.”
“그럼 함께 갈 수 있도록 준비시키겠습니다.”
“알겠다. 더 할 말이 있느냐.”
진예는 자연스럽게 말을 맺었다. 용건이 더 없다면 이만 다시 편전에 들 생각이었다. 아직 남은 일을 처리할 게 많았다. 모르긴 몰라도 바깥에서 태감이 언제 나오나 싶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래서 일단 먼저 일어나자 서엽이 진예를 올려다보았다. 진예의 예상과 달리 그는 볼일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서엽은 진예의 발이 이미 저에게서 돌아가 버린 것을 확인하고 쓰게 웃었다.
“요즘 부쩍 폐하와 멀어진 기분입니다. ……제 착각이겠지요.”
중얼거리는 소리에 진예는 발을 멈칫했다. 그렇지만 서엽을 돌아보지는 않았다.
서엽은 용무늬가 그려진 그녀의 매정한 등을 바라보다가 저도 일어섰다. 두 개의 그림자가 만나지 못하고 나란히 평행으로 비쳤다.
진예는 그 그림자가 더는 다가오지 않는 것에 안심했으나 그다음 말을 듣고 흠칫했다.
“어제 전 퇴궐하지 않았습니다.”
“…….”
어제 서엽이 언제부터 안 보였는지 진예가 기억을 뒤졌다.
연무건을 침전에 불러들이라 한 뒤에 그가 먼저 가 버렸었다. 그러고 진예는 줄곧 침전의 응접실에 앉아 있고, 밖에 나가지 않았으니 누군가 아뢰지 않았다면 그가 퇴궐했는지 남아 있는지 모르긴 했을 터였다.
문제는 어제저녁의 날씨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서엽의 그림자가 고개를 숙였다. 뒤에서 회한이 어린 음성이 넘어왔다.
“저녁내 비를 맞으면서 다른 사내가 든 침전 앞에 서 있으니, 지난번에 귀인마마가 얼마 비참했을지 알겠더이다.”
한겨울도 아니고, 비 조금 맞은 것뿐이지만 말입니다.
그리 작게 덧붙이는 소리가 스스로를 비웃는 소리처럼 들렸다.
“하지만 이젠 저에겐 그런 날밖엔 남지 않았겠지요.”
서엽이 두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렸다. 간간이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아니, 어쩌면 마른세수가 아닐지도 몰랐다.
그의 상태가 정확히는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목은 이미 젖어서 쉬어 있었다.
“이미 미쳐 버릴 것 같은데, 더는 견디기가 어려운데, 근데, 그래도…… 폐하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진예의 옆에 조서엽이 있는 건 숨 쉬는 것처럼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당연해서 그것이 아니면 그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진예는 인식하지 못한 때에, 조서엽이 품은 연모의 감정은 벌써 손쓰지 못할 지경까지 와 버렸다. 너무 깊게 박혀서 뽑아내기도 힘든 습관이었다.
어떻게 해야 그만둘 수 있는지, 조서엽은 방법을 몰랐다. 어디에서도 그런 것은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런데 진예가 저를 밀어내려 하니 밧줄 하나 없이 벼랑 끝에서 등이 떠밀린 기분이었다.
두려웠다.
동시에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밀려왔다.
지금 연무건이 제 눈앞에 나타난다면 진예가 죽든 말든 정말로 그의 목을 잘라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딘가에 이 감정을 풀지 않는다면 제가 새까맣게 타서 재가 되어 버릴 듯했다.
“이런 저를 조금이라도 가엽게 여기신다면, 한시라도 빨리 연무건과 동조 현상을 끊어 내십시오. 저도 제가 언제까지 참아 낼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습니다.”
무척 지친 듯한 어조였지만 진예는 그 속에 담긴 그의 감정을 충분히 읽어 냈다. 하나 조서엽의 희망 사항을 당장 이루어 주는 건 진예로서도 위험도가 높았다.
“지금은 아니 된다.”
“……알고 있습니다. 반란군을 진압할 때까지는 저도 어떻게든 견뎌 보겠습니다. 하나 그 이후엔 모릅니다.”
다행히 말미는 있다 이건가.
진예는 그의 서글픔이 가득 밴 말을 들으면서 반대로 서늘하게 식어 버린 머리로 분석했다.
“이후엔 폐하의 명을 거역해 버릴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걸 원치 않으신다면 저에게 먼저 그를 끊어 내겠다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하도록 하지.”
서엽이 원하는 말을 들려주는 것이야 어렵지 않았다. 무건과 동조 현상을 끊고 싶은 것은 진예도 마찬가지였다. 고민도 없이 그러겠다 답한 진예는, 그러나 적절한 채찍도 한 번 휘둘렀다.
“하나 조 후도 잊지 말거라. 지난번에 짐이 한 대답 말이다.”
동조 현상을 끊는 날 연무건을 죽이는 걸 허락해 달라던 말에 대한 대답.
상기시키자 서엽이 잠시 휴지를 두었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폐하께서 하신 말씀은, 잊지 않습니다.”
“다행이군.”
대화가 끝나고 나서야 서엽이 진예의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표정은 제법 잘 수습되어 있었지만, 눈가가 붉었다.
그가 웃음기 하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진예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출전 준비를 해야 하니 오늘은 정말 일찍 퇴궐해 보겠습니다.”
“그리하라.”
살살 뒤로 걸음을 물려 밖으로 나가는 서엽을 진예는 눈으로 좇다가, 문이 도로 닫힌 뒤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군.”
조서엽이건, 연무건이건.
심지어는 자신조차도.
모든 게 엉망이었다.
제자리고, 균형이고, 평정이고.
잠시의 착각이었다.
……전부 흐트러지고, 어그러져 버렸다.
진예는 답답한 느낌이 들어 목깃을 잡아당겨 느슨하게 하려다 멈칫했다.
어젯밤의 연무건이 떠오른 탓이었다.
* * *
비래.
대장군이었던 정위의 영지 중 하나인 그곳은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인 데다, 사계절 내내 이어지는 혹독한 추위 탓에 예로부터 방어에 특화된 곳이었다. 그만큼 취약한 부분은 보급로가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황제의 명 하나로 비래 성은 단숨에 고립되고 말았다. 이젠 반란군이라 완전히 낙인을 찍혀 버렸으니 아마도 그들을 도와주러 오는 이들은 없을 터였다.
완전한 고립무원 상태가 되어 버렸으나 도양은 이미 예상했던 바라, 전혀 위기감이 생기지 않았다.
해가 중천에 뜬 대낮, 도양은 폐허 위에 발을 디디며 매끄러운 입술 위로 미소를 그렸다.
약초를 태워 나는 하얀 연기가 그런 그녀의 손에서 피어올라 실바람을 타고서 선이 고운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꽃향기처럼 달콤한 냄새와 역한 냄새가 뒤섞여 나는 기괴한 향이 코를 찔렀지만 도양은 그조차 흡족하게 여겼다.
으드득, 으적.
그녀의 주변에서 익재들이 저마다 먹잇감을 붙잡고 포식을 하고 있었다. 이미 배부르게 먹은 몇 놈은 오리 새끼가 어미를 쫓듯이 도양의 걸음을 따라 여유롭게 날았다.
그 뒤로는 정위와 도양의 군사들이 따르는 중이었다. 처음엔 비위가 상해 멀리 달려가 구토하던 이들도 어느새 이 광경에 익숙해진 모습들이었다.
도양은 밤사이에 익재들에 의해 처참하게 파괴된 작은 마을의 한가운데를 지나갔다.
어제만 해도 멀쩡했던 집들이 너덜너덜해져 나무판자들이 거리를 나뒹굴었고, 모두들 익재로부터 도망치다가 죽거나 잡아먹혔다.
그렇게 엉망이 된 면면을 들여다보며 도양이 중얼거렸다.
“보급로를 차단하면 무엇 하나. 우리 주력군은 사람을 아닌 것을…….”
익재라는 괴물은 오히려 길거리에 널려 있는 사람들을 먹는 데다 무기도 필요하지 않았으니, 굳이 보급로에 얽매일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말을 듣고, 뜻을 함께하는 이들조차 오싹함을 느꼈다.
정위는 이 잔인한 풍경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도양의 비위가 대단하다 생각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이제 어쩔 건가, 위 저저.”
도양은 걸어가다 파괴된 집 안에서 굴러 나온 과일을 주워 흙을 털며 정위의 말에 대답했다.
“어찌하긴요. 이대로 상방주까지 갑니다.”
상방주는 비래 지역과 가장 가까운 익재의 서식지였다.
고맙게도 그곳 근처에 진예가 집결해 둔 군이 있을 테니 점령하여 진지를 손에 넣고, 서식지에 있는 익재들 또한 제 지배하에 둔다. 그것이 도양의 계획이었다.
아마 순조롭게 진행될 터였다.
황제가 예상했던 시점보다 훨씬 빠르게.
그녀가 가장 분노할 방식으로.
그렇게 상방주를 손에 넣고, 가장 마지막엔 황제의 영역에 침범해 그녀를 베어 낼 것이다.
그 과정에서 연무건 또한 진평과 똑같은 방식으로, 단도를 목에 찔러 넣어 고통 속에서 허덕이게 하다 죽일 것이다.
각오를 다지며 도양이 흙을 털어 낸 과일을 껍질째 깨물었다. 그러자 손에 과즙이 주륵 주륵 흘러내렸다. 하지만 다 익지 않아 신맛이 나는 것에 그녀가 눈썹을 실그러뜨리고는 도로 땅에 던져 버렸다.
그때였다.
컹!
그녀의 과일을 주워 먹었던 집의 잔해에서 웬 개새끼 하나가 튀어나왔다.
주인이 죽어 분노했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사냥개 기질이 있는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를 드러내며 아르르, 소리를 내는 그것에 도양이 무심히 시선을 주었다. 눈이 마주치자 개가 사나운 기세로 도양에게 달려들었다. 아마도 다리를 향해.
하지만 그 순간, 도양의 뒤에 있던 익재 한 마리가 그녀의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리고 짧게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 * *
봉아궁으로 옮기고 얼마 되지도 않아 난데없이 황실 내 유일한 비인 무건이 출전하게 되자 그를 따르는 내관들과 궁인들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내명부의 사람이 이렇게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전장에 나간 적은 손에 꼽았다. 그나마도 싸우러 나서는 경우는 전무하다 봐도 무방했고, 대개 황제가 너무 아끼는 바람에 따라 나가 진지에서 함께하는 정도였다.
한데 무건은 그런 경우도 아니었을뿐더러 황제가 동행하지도 않았다.
홍 내관은 궁인들과 함께 무건의 무장을 도우면서도 내내 불안해했다.
“……제가 입궐을 한 지 어언 40년입니다만, 이리 비빈마마께서 전장에 나가는 것을 본 적은 처음이옵니다.”
무건은 거추장스럽다 느껴질 만큼 무거운 갑옷을 입고 팔을 돌려 보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새로운 경험도 하고 잘됐지 않나.”
“이리하다 존체가 상하시면 어찌합니까.”
“너무 걱정 말게. 내 폐하의 명인자로서 황후가 되려면 당연히 살아 돌아와야 하지 않겠는가.”
장난처럼 말하긴 했지만 그건 무건의 진심이었다.
절대로 죽지 않는다.
진예를 두고 전장에서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었다.
그녀에겐 전사하면 명인에서 해방될 수 있을 거라느니 하는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절대.
‘이놈은 하늘이 내린 운명을 완성시킬 것입니다, 폐하…….’
당신이 부정하는 그 운명을 말이다.
어느새 결의가 어린 무건의 얼굴을 보고 홍 내관이 거의 울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귀인마마.”
마지막으로 무건은 궁인으로부터 투구를 건네받고는 곧장 발을 돌려 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의 발걸음은 매정하리만치 단호했다. 무건은 여간한 경우가 아니면 작별의 시간은 짧게 갖는 게 좋다는 주의였다. 괜히 걱정과 미련만 늘어날 뿐이니까.
봉아궁의 침전을 나서자 그 앞에 내관들이 벌써 그가 타고 갈 말의 고삐를 잡고 서 있었다. 그리고 무건과 함께 출전 명령을 받았던 표기장군 장첨과 전장군 왕원이 그를 데려가기 위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서둘러 가시지요, 귀인마마.”
“잘 부탁드립니다. 표기장군, 그리고 전장군.”
무건은 그들과 깊이 허리를 숙여 맞인사를 하고는 봉아궁의 동문을 통해 나가 황궁으로 향했다.
말을 타고 거리를 달려 마침내 황궁의 남문에 도착했을 때, 무건은 제 예상보다 더 엄청난 수의 군사에 잠시 숨을 멈췄다.
총 2군의 군사가 황궁의 남문 앞에 길게 도열해 있었다.
가장 선두에는 환 황실을 상징하는 금색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고, 각 부대를 이끄는 장군들이 완전 무장을 한 채 출전 준비를 마쳐 있었다.
무건은 표기장군의 명령에 따라 그들 사이에 자리 잡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다 모두의 눈이 위로 향해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그도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역시나 금색 깃발이 휘날리는 남문의 지붕 아래, 사람 그림자가 비치는 것이 보였다. 거리가 멀었지만 무건은 예의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진예.
환의 황제이자 자신의 명인자…….
진예는 친정에 나서기 위해 온몸에 갑옷을 두르고 있었다. 작고 여리게만 보였던 그녀의 몸은 무거운 갑옷을 능히 견뎌 냈다. 가슴과 어깨를 활짝 펴고 흐트러짐 없이 꼿꼿한 자세로 서 있는 진예의 모습에서 무건은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반란군과의 전쟁이 얼마나 지속될지 모른다. 그들을 진압해 내면 익재를 토벌하는 쪽에 합류한다고는 했으나 적어도 몇 개월, 어쩌면 1년도 넘게 보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 사실을 상기하며 무건은 제 정인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기 위해 그곳에 주의를 집중했다.
진예의 시선이 황궁의 남문 앞에 모인 군사들의 모습을 훑었다. 2만에 가까운 수가 모여 있음에도 모두가 소란을 억제하고 숨을 죽여 황제의 명령을 기다렸다.
이윽고 진예가 입을 열었다.
“전군은 들으라.”
진예 특유의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커다랗게 외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인력이라 일컬어도 좋았다.
“오늘부터 짐과 짐의 군사들은 저 북쪽의 땅 비래에서 일어난 반란군을 제압하고, 하늘의 저주를 받은 익재들을 대환에서 몰아내는 영광된 임무를 수행할 것이다.”
침착한 말씨였지만 그래서 더 모두가 진예를 올려다보며 한 마디 한 마디에 집중했다.
“앞으로의 전투는 대환에, 우리의 후손들에게 영원한 평화를 가져다줄 성전이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파괴적인 재앙, 익재를 몰아내는 것은 모든 국가가 꿈꾸는 이상이었다. 그리고 그 꿈에 가장 가까운 것은 바로 진예가 다스리는 환 제국이었다.
그녀는 황위에 오르자마자 치렀던 2년간의 전쟁을 머릿속에 상기하며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모두 앞으로만 나아가라. 죽음의 순간까지 칼을 놓치지 말라!”
외치는 진예의 손에서 마침내 칼이 뽑혀 나왔다. 잘 벼려진 날카로운 칼끝이 하늘을 향했고, 태양 빛을 받아 눈이 부시도록 빛났다.
“그리하면 대환의 황제인 짐 또한 이 칼로써 그대들을 지키는 방패가 되어 줄 것이다!”
진예의 출전 선언이 끝나자 군사들 사이에서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5년 전에 시작한 전쟁에서 진예는 이미 서른세 곳에 달하는 익재들의 서식지 중 다섯 곳만 남기고 모조리 쓸어버린 전적이 있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익재 토벌 전쟁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거의 유일한 군주였다.
그런 황제를 믿지 않는다면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진예가 사령관으로 있는 한 누구도 패배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것이었다. 오로지 승리만이 그들의 앞길에 펼쳐질 테니까.
선두의 금색 깃발이 흔들리며 힘차게 펄럭였다. 그에 맞춰 군사들도 각자의 무기를 흔들며 함성을 내질렀다.
“황제 폐하 만세!”
“황제 폐하 만만세!”
진예가 아래로 내려와 활짝 열린 남문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함성은 더욱더 커졌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진예가 말을 타기 위해 올라타던 중, 순간적으로 무건과 시선이 맞았다.
찰나에, 진예의 눈길이 그에게 머물렀다. 하지만 무건에겐 그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두근, 두근…….
주변의 시끄러운 소리보다 자신의 심장 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미친 듯이 박동하는 심장이 제 귓가를 어지럽혔다.
마치 그녀를 처음 만났던 그 순간처럼.
무건의 각오도 그때와 같았다.
‘……전 반드시 살아 돌아옵니다.’
아니, 그녀도 부정하지 못할 전공을 올리고 돌아올 터였다.
그리하여 진예를 완전히 제 품에 안고야 말 것이다.
진예의 마음속에 온전히 제가 박혀 들어갔으면 했다.
그렇게 연무건은…… 역사에 남을 그녀의 유일한 사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