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장. (3/18)

2장.

300년 전에 돌연 나타난 익재는 무슨 조건이 어떻게 맞은 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 폭발적인 개체 수 증가를 보였다.

그렇게 해서 환에 만들어진 수십 개의 서식지.

그들은 육식을 했고, 지상에 있는 인간을 제외한 동물 중 가장 지능이 뛰어났기 때문에 자연계의 최상위 포식자가 되어 버렸다. 무엇보다 그들을 위협적으로 보이게 하는 건, 뛰어난 무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힘을 바탕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인간 또한 위협했다.

스러진 국가만 몇 개였던가. 왕조의 역사조차 끝나 버린 나라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300년 가까이 그들과 싸워 나가면서 인간과 익재 사이에는 기묘한 균형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환 제국에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투를 치름에 따라 서식지의 수가 늘고 줄기를 반복했다.

이젠 최초의 익재가 탄생한 읍주를 포함하여 서른세 개의 서식지만 남은 상황. 그중 개체 수가 워낙 많아 위협적이라 평가받는 서식지는 읍주를 포함해 네 곳이었다.

“폐하께서 찾아 계십니다.”

황제의 수족인 태감이 황태자인 진예를 찾아온 때는 점심 무렵이었다.

오전에 사부가 왔다 갔고, 홀로 활을 쏘는 걸로 시간을 때우던 참이었다. 황제가 직접 독대를 하자는 말을 전한 것은 1년도 더 된 일인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꼭 필요한 때가 아니면 황제는 결코 먼저 그녀를 찾지 않았다.

이번에 찾은 이유도 익재의 서식지 중 하나에 문제가 생긴 것 때문이라 예상되었다.

난리가 난 곳은 원봉이라는 곳이었는데 며칠 전 굶주린 익재 천여 마리가 한꺼번에 튀어나와 주위의 마을 두 개를 하룻밤에 초토화해 버렸다고 했다.

규모는 크긴 해도 얌전히 있던 놈들인데, 갑자기 행동을 개시해서 대비가 안 된 통에 더 피해가 컸던 듯했다.

과연 제 아비가 무슨 말을 할까, 여러 가지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하며 진예는 태감의 뒤를 따라 편전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과연 제 아비가 마지막으로 찾았던 게 언제였던가 가늠해 보았다.

하다 보니 제 기억을 꽤 많이 되짚어야만 했다.

저번 기억은…….

〈태자를 벗기거라.〉

그리 말했던 아비의 차가운 얼굴이 떠올랐다.

갑자기 불러내더니 자신의 몸에 명인이 생겼는지 안 생겼는지 확인해야겠다며 궁인들에게 옷을 벗기라 했다.

이유인즉 일반적으로 보면 명인이 나올 때가 한참이 지났는데, 진예가 혼례를 피하려 일부러 숨기는 게 아니냐는 말도 안 되는 상소문이 올라왔다고 했다. 제 아비는 그걸 또 일리 있다고 생각해서 제 딸의 옷을 벗겨 본 거였고.

심히 굴욕적이었다. 궁인들이 제게 달라붙어 옷을 벗기고 알몸이 된 그녀를 내관들이 살피는데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러나 제 아비는 결국 없다는 확인을 받고 나서야 한마디 했을 뿐이다.

〈끝까지 쓸모없는 것.〉

〈…….〉

명인도 제때 안 나와서 대를 이을 아이조차 낳지 못한다는 힐책이었다.

진예는 옷을 다시 입으면서도 자신이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밖으로 나올 수 있는 말은 사죄의 말뿐이었다.

〈송구하옵니다, 황제 폐하.〉

아바마마라 부르지도 못했다.

그런 친근한 단어는 그들 부녀 사이에서 허락된 것이 아니었다.

“…….”

진예는 편전의 회랑을 지그시 밟아 나가면서 떠오르는 안 좋은 기억에 표정을 굳혔다.

“폐하, 태자 전하께서 들었사옵니다.”

닫힌 문 앞에서 태감이 황제의 허락을 기다리는 동안 진예는 제 위에 걸친 검은 곤룡포를 살폈다. 옷깃에 흐트러짐이 없는지, 소매가 구겨지지는 않았는지.

곧 안에서 제 아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라 하라.”

드르륵, 문이 양쪽에서 열렸다.

적당히 환한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 환의 황제를 향해 허리를 굽히는 동안 진예는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아무래도 오늘 황제가 보자 한 이유는.

“홍복을 누리소서, 황제 폐하.”

‘끝’을 보기 위함인 것 같았다.

편전의 가운데에는 검은 발이 내려와 있었다. 그 너머에 제 아비의 그림자가 크게 져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진예가 발 앞으로 다가가 머리를 조아리며 제 잔혹한 아비가 이번엔 어떤 명을 내릴지 짐작해 보았다.

원봉 지역의 급박한 상황에 대해서는 그녀도 이미 들었다. 그쪽의 군수(郡守)가 본인들의 힘으로는 안 된다며 긴급 지원 요청을 했다고 한다.

아마도 자신에게 그곳에 가라고 할 것이다. 너무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황태자를 처리해 버리기에 말이다.

딱히 부모로서의 따뜻한 인사 따위 바란 건 아니었지만, 문이 닫히자마자 황제는 진예가 예상했던 그대로의 말을 꺼냈다.

“군사 3천을 내줄 테니 태자는 원봉으로 가 익재들을 섬멸하거라.”

냉혹한 명령이었다.

예상했다고 해서 악재가 호재가 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진예는 살며시 미간을 좁혔다. 바로 그러겠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어금니를 지그시 물었다.

원봉에서 쏟아져 나온 익재는 천여 마리. 실제로 그곳에 서식하고 있는 익재가 못해도 2천 정도는 될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었다.

개중에 약한 개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익재는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난 육체와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여 100마리의 익재를 상대할 땐 적어도 300의 군사를, 1천 마리의 익재를 상대할 때는 4·5천의 군사를 파견하는 편이었다. 익재도 집단생활을 하기 때문에 머릿수가 많아질수록 상대하기 까다롭다는 게 정설이다.

한데 고작 3천의 군사를 끌고 가서 2천의 익재를 쓸어버리라는 건 그냥 죽으라는 의미와 같았다.

표현만 다르게 했을 뿐 아비가 제게 목을 내놓으라고 한 것과 같았다. 대놓고 사지로 떠밀고 있었다.

진예가 대답하지 못하고 있자 황제가 채근을 해 왔다.

“설마 못 하겠는 것이냐.”

“…….”

진예는 깊게 숨을 삼켰다.

못 하겠다고 하면 황족의 의무를 저버렸다 어쨌다 꼬투리를 잡으며 태자위에서 끌어내리려 할 터였다.

대체 얼마나 자신의 딸을 증오하고 있으면, 수천 군사의 목숨을 담보로 자신을 없애려 하는 걸까.

진예는 편전의 잘 닦인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문득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이곳에 발을 들이는 것도 마지막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황제 앞에서 언제까지나 답을 내놓지 않을 수는 없는 법. 답하는 목소리엔 체념이 배어 있었다.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대답하는데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어차피 언젠가는 죽을 목숨이라면 익재한테 물어뜯기든, 황제에게 목이 졸려 죽든, 아니면 누명을 써서 사약을 먹든 똑같은 것이긴 했다.

하지만 진예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맺혔다.

꼭 이런 식이어야만 했나.

꼭 이렇게 잔인하게 자식을 내쳐야만 속이 시원한 걸까.

……그런 것 같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힘들었다.

제 아비는, 아니 제 부모는 진예를 학대하면서 자신들이 어깨에 짊어진 책임의 무게를 견디려 하는 것 같았다.

다만 그 화풀이 대상은 점점 지쳐 가고, 안쪽에서부터 썩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황제와 황후도 그걸 알지만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딸은 동정받을 가치가 없으니까.

그들은 진예를 위해서 결코 눈물 흘리지 않는 자들이었다.

진예는 그 당연한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는 스스로를 한심하게 생각했다. 그러다 용건이 대충 끝난 것 같으니 일어날까 고민하던 차였다. 검은 발 밑으로 무언가 툭 던져졌다.

뭔가 하고 보니 단도였다. 바닥에 던져지면서 검집이 살짝 벗겨져 날의 일부가 드러났는데, 새로 만든 듯 검신이 예리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짐의 명은 원봉에 있는 익재들의 섬멸이다.”

한 번 더 자신의 명령을 강조하는 아비를 진예가 시선을 들어 올려다보았다. 검은 발 너머의 황제가 지엄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하나의 명을 더했다.

“그 명을 완수하지 못할 것 같으면 패배한 군사들을 끌고 올 생각은 하지 말고 차라리 명예롭게 자결을 하거라. 그게 짐의 두 번째 명령이다.”

“…….”

그러니까, 이번엔 절대로 돌아오지 말라?

이제는 속내를 숨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진예가 일단 좀 더 가까이 가 황제가 던진 단검을 주웠다. 그러면서 희미하게 비치는 제 아비의 몸을 쳐다보았다.

자세한 것은 보이지 않았지만 손목이 이전과는 다르게 메마른 듯 보였다. 몇 개월 전 연회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천하를 호령하던 제 아비도 늙긴 늙은 족속인 모양이었다. 그 꼴을 보자 왜인지 좀 웃음이 나올 것 같아 입을 억지로 꾹 다물었다.

지금까지 제 아비와 어미는, 정말로 노골적으로 자신을 죽이고 싶어 했다.

단순히 생각만 해 온 것이 아니다. 어미는 제가 자는 동안 목을 졸랐었다.

〈죽어, 죽어! 제발 죽어 다오.〉

〈흑, 허억…….〉

황후에게 목이 졸리던 때, 짧은 순간 제 손끝에 칼이 닿기도 했지만 차마 죽일 수는 없어서 맨손으로 그녀를 겨우 떼어 냈었다.

그리고 간신히 그 손길에서 벗어나 방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진예의 앞에 얼마나 충격적인 장면이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진예가 밖으로 뛰쳐나오자마자 궁인들이 놀라 숨을 삼키고 있었다. 뭔가 하고 궁인들의 손을, 아니 그 손에 들린 무언가를 보고서 등 뒤가 오싹해졌었다.

〈그, 그것이 무엇이냐……?〉

제가 헛것을 보고 있는 줄 알았다. 궁인들은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등 뒤로 물건을 숨겼다.

그 물건의 정체는 저를 어딘가에 매달 끈이었다. 자신을 죽이고 자살로 위장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날 이후로 진예는 며칠 밤 동안 두려움에 덜덜 떨며 밤잠에 들지 못하기도 했다. 편히 눈을 감아 버리면 누군가 자신을 죽이러 올 것 같았다.

그래도 선황대에 후계자가 된, 법도에 맞는 정통한 후계자였기 때문에 후폭풍을 두려워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다행히 과격한 방법을 쓴 건 그때가 딱 한 번이었다.

다만 정치적으로 가까운 이들을 모두 꼬투리를 잡아 유배 보내거나 하는 등 그녀를 결국 고립시켰다. 무엇 하나 조금 잘못하기만 하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벌을 내리면서 황제의 뜻이 황태자에게는 없다는 의중을 계속 내비쳤고, 덕분에 진예는 황태자이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허수아비가 되기에 이르렀다.

애초에 같은 황궁 안에 있는데, 아비와 어미의 얼굴을 1년에 몇 번 볼 수 없다는 것 자체부터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살았지만 숨을 쉴 수 없었다.

이렇게 보니 제 손을 더럽히기 싫으니 차라리 자살을 하길 원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자결하라고 하는 건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했다는 의미일 터.

그간 자신을 처리하지 못해서 답답했긴 했던 모양이었다.

진예는 제 가슴 안에 뭉쳐 있는 어떤 덩어리가 숨을 조여 옴을 느꼈다. 그러나 진예가 칼을 제 품에 갈무리한 뒤 담담히 대답했다.

“두 번째 명 또한, 받들겠습니다.”

“두 번째 명 또한, 받들겠습니다.”

그리 말한 진예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 너머에서 제 아비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드디어 자신을 쳐내게 됐으니 행복해서 가슴 터지기 직전이지 않을까.

자식의 죽음에 행복해하는 아비라…….

어떤 느낌일까, 그건.

인생을 살면서 그다지 찬란한 감정을 느껴 본 적 없는 진예에게 이해되지 않는 단어들이 몇 개 있었다.

행복, 기쁨, 만족.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그런 감정들.

이래 봬도 황제와 황후 사이에서 난 정통한 황태자였다. 누구보다도 귀한 신분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결코 영광되지 못했다. 언제나 부족함밖에는 알지 못하고 살아온 삶이었다.

행복보다는 불행이, 기쁨보다는 슬픔이, 만족보다는 결핍이 진예의 삶에서 더 가까웠다.

진예는 제 품 안에 단도를 밀어 넣고는 지난번 연회 이후로 벌써 몇 달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제 아비의 얼굴을 흐릿하게 떠올렸다.

그때 황제의 검었던 머리가 제법 세서 눈이라도 이고 있는 줄 알았다. 그리고 그 모습과 방금 전의 말라 버린 손목이 연결되자 어떤 답 하나가 나왔다.

‘……그런가.’

제 아비는 지금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명이 다하는 게 아닐까 싶어서. 그래서 이렇게 초조하게 구는 것이다.

저희들이 못내 사랑하는 아들 진평이 대를 이어야 하는데, 혹시 그게 마음대로 안 될까 봐. 그것을 두려워할 만큼 지금의 황제는 많이 노쇠해진 모양이었다.

진예는 천천히 긴장하여 침을 넘겼다.

‘죽어?’

제 아비가 죽는다면. 그 명인자이자 각인자인 황후도 죽는다.

그런 생각을 하니 왜인지 억울해져 왔다. 이건 마치 순장조가 된 느낌이었다.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제 무덤에 같이 끌고 가겠다는 심보라니.

정말 둘째, 진평에 대한 지고지순함이란 이토록 깊은 것이었나 보다.

진예는 저를 닮은 제 동생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렸을 적에 손가락을 꼼질거리던 것이 꽤 귀엽긴 했는데.

하지만 진예는 그 아이를 사랑할 수 없었다. 진평은 죄가 없지만, 또한 죄가 있었다.

늦게 태어난 죄.

이쯤 되면 진예 역시 한마디 하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을 듯했다. 어차피 제 아비에게 별 타격은 주지 못할 테니, 유언 같은 거라고 봐도 좋았다.

진예는 제 옷깃을 정리하고 고개를 똑바로 쳐들었다. 그러고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한데 폐하, 이럴 거면 왜 저를 여태껏 살려 두셨습니까?”

누가 뭐라 하든 그냥 죽여 버리면 좋을 텐데.

황제니까, 결국은 자식을 덮은 죄조차 스스로의 손으로 덮어 버릴 수 있었을 터였다.

한데 황제는 그리하지 않았다.

발 너머에서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상관은 없었다. 하고 싶은 말만 하면 됐으니까.

진예는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애쓰며 말을 이었다.

“차라리 여아라는 걸 알고 나서 바로 죽여 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아, 설마 다음 대를 이을 사내아이가 안 태어났을 수도 있으니까……?”

중간에 깨달은 진예가 비꼬는 투로 말을 잇자 황제가 엄격한 목소리를 냈다.

“태자.”

그만하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진예는 멈추지 않았다. 황제의 명을 받아 당장 전장으로 떠나면 돌아오지 못할 게 뻔한데 마지막 할 말조차 다 못 하고 갈 생각을 하니 더 억울할 것 같았다.

그런데 하다 보니 아예 모든 의욕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제 안에서, 슬그머니 분노가 머리를 내밀었다.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이 실렸다.

“정말 역겹습니다. 바로 옆의 제 자식조차 제대로 돌볼 생각이 없으면서, 만백성의 아비라면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위선이.”

“…….”

“강녕하시란 말씀은 차마 못 하겠습니다. 오늘 제 말을 뼈에 새기며 죽기 직전에 처절하게 후회하며 돌아가십시오.”

“네 이년, 네가 감히…….”

패륜적인 말을 입에 담자 황제가 쿵, 손잡이를 내리쳤다. 하지만 황제가 분노 어린 일갈을 시작하기 전에 진예가 얼른 받아쳤다.

“감히 소자는 환의 황제를 시해하는 꿈을 몇 번이나 꾸었나이다.”

“태자, 네가 지금 미친 것이냐! 당장 이 자리에서 목이 달아나고 싶은 게야?”

미친 것은, 아니 미쳐 있던 것은 당신이겠지.

그리고 황제라 하나 당신도 결국은 명분 하나에 목숨을 거는 겁쟁이일 뿐이다.

그리 속으로 중얼거리며 진예가 고개를 숙였다.

“소자는 이만 물러나옵니다.”

방 밖으로 나가자 밖에서 둘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태감이 못마땅하다는 듯 진예를 날카로운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황제의 명에 따라 일단은 태자전으로 돌아가 굳어 있는 표정의 궁인들에게 시중을 받아 무장을 마쳤다.

어깨에 걸쳐지는 갑옷의 무게가 유난히 무거웠고, 칼이 손에 쥐어지는 감각이 유난히 둔했다. 제 주위를 마치 비를 품은 검은 구름이 감싸고 있는 것처럼 머리는 안개가 낀 양 흐리멍덩했다.

하여 잠시 넋을 놓았을 무렵이었다.

“전하, 조서엽 장군께서 오셨사옵니다.”

밖에서 들려온 말이 진예의 정신을 반짝 깨웠다.

“……서엽이?”

태자전 밖으로 나서자 그 말대로 서엽이 대기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역시 온몸에 갑옷을 두른 완전 무장 상태였다. 아직 쓰지 않은 투구를 손에 든 채 그가 고개를 숙였다.

“곧바로 출전하시면 됩니다, 전하. 모두들 대기하고 있습니다.”

진예가 어금니를 으득 깨물며 고개를 돌려 편전 쪽을 노려보았다.

군사 3천이라 하길래 누군가 같이 보내겠거니 하긴 했지만, 그게 설마 서엽일 줄은 몰랐다.

서엽은 저래 봬도 환 제국이 400년간 명맥을 유지하는 동안 여덟 차례 대장군을 배출해 온 무인 가문의 둘째 아들이었다. 비록 장자는 아니라 해도 그 가문의 명성을 생각해 보면 저와 함께 사지로 딸려 보낼 인물은 전혀 아니었다.

저 황궁에 앉아 있는 노망 난 늙은이가 정말로 머리가 어떻게 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서엽이 그녀의 행동을 보고는 조용히 웃었다. 그도 분명 이번 출전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텐데, 죽으러 가는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침착한 목소리를 냈다.

“저는 전하를 보필할 수 있어서 기쁠 뿐입니다.”

진예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리석구나.”

서엽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진예와 관련된 일이라면 제 목숨 아까운 줄도 몰랐다.

“전하께선 어떻게든 살아 돌아올 생각만 하십시오. 이 서엽의 시체를 밟고서라도 사십시오. 그러면…… 그러면 됩니다.”

“…….”

제 아비와 정반대의 말을 읊는 그를 보며 진예는 씁쓸해졌다. 하지만 겁을 먹고 도망치려 하지 않았다.

자결까지 명한 마당에, 이번엔 살아 돌아와도 황제는 자신을 어떻게든 몰아내려 할 터.

그렇다면 차라리 앞만 보고 가는 게 맞았다.

진예가 서엽을 지나가며 손으로 어깨를 툭 쳤다. 잘 따라오라는 의미였고, 서엽도 그에 호응하듯 믿음직하게 그녀의 뒤를 따랐다.

도개교를 건너 황궁 밖으로 나갔다. 서엽의 말대로 문밖엔 길게 도열해 있는 군사들이 있었다. 모두 아까운 목숨들이었다. 죽을 것을 예상하고 있어서 그런지 맨 앞의 녀석조차 표정이 좋지 못했다. 당연히 전체적인 사기는 최악일 터…….

진예는 제 앞에서 펄럭이는 깃발을 한번 확인하고는 말 위에 올라탔다.

그러고 제 뒤를 따르는 서엽을 보는데, 저도 모르게 말고삐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적어도 서엽만큼은.

저 어리석은 사내만큼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려면 황제의 명을 거역하고, 자신도 살아야 했다.

* * *

한 달 반이 지났다.

황제의 최측근인 태감은 무장을 해제하지도 않고 들이닥친 진예를 보고 난처해하며 조회 중인 편전의 문을 열었다.

“태자 전하 납시오…….”

어쩐지 힘이 없는 말투였다.

진예가 살아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본인이 데려갔던 3천의 군사 중에서 단 300만 남은 채로.

진예가 도착했을 때 예상대로 원봉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그곳 군 지휘부 중 3분의 1이 이미 전사한 뒤였고, 쑥대밭이 되어 버린 원봉의 마을들에서는 익재가 미쳐 날뛰고 있었다.

시시때때로 굉음이 울리면서 무언가가 파괴되어 나갔다. 처음 며칠은 그나마 간신히 탈출한 몇몇이 마을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점점 그 수가 줄어들었다.

안에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지만, 군대는 쉽게 진입하지 못했다. 그나마 전선을 유지하는 정도가 할 수 있는 전부였으나 그것도 언제 밀릴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원봉의 군수는 하필이면 진예가 온 것, 그리고 그녀가 이끌고 온 군사가 3천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알고 난처해했다.

그러나 진예는 미리 알고 있었다. 황제가 원봉을 아예 버릴 생각은 없다는 걸.

제 아비가 얼마나 겁쟁이인데, 그럴 리가 없었다.

예상대로 힘겹게 버티고 있으니 일주일 뒤 추가 병력 2만이 왔다. 하지만 그때 진예는 이미 익재와의 교전에서 패한 뒤였고, 또한 지휘부로서 신뢰를 잃은 상태였다. 새로 2만의 군사를 이끌고 온 이가 군열을 가다듬으면서 지휘부 역할을 했다.

힘이 빠져 버린 진예는 자연스럽게 배제됐고, 괜히 사기 빼지 말고 그만 돌아가도 되겠다는 태수의 말에 떠밀리듯 원봉을 떠나왔다. 사실 함께 간 서엽도 부상을 입어서 진예로서는 굳이 버티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이후의 전투 향방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패잔병을 이끌고 퇴각하는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사실 그녀가 이끄는 군사들이 완전 궤멸하지 않은 게 오히려 다행인 편이었지만, 10분의 1밖에 남지 않았으니 그게 그거였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황도로 돌아옴으로써, 패전하면 자결하고 영영 돌아오지 말라는 아비의 명을 어긴 셈이 되었다.

아직 무장도 채 풀지 않은 진예가 안으로 들어서자 예상대로 조회 중이던 대신들도, 그 가운데에서 조회를 이끌던 황제도 모두 차가운 눈초리를 보냈다.

하지만 진예는 뻔뻔하게 그들 사이로 나아가고는 황제 앞에서 예를 올렸다.

“홍복을 누리소서, 폐하.”

그녀의 입가에는 어울리지 않게 살며시 미소가 맺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뻔뻔해져야만 했다. 어차피 황제가 자결하라 명을 내렸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얼마 없었다. 기껏해야 저 밖을 지키고 있는 태감 정도.

하여 진예는 황제의 분노가 쏟아질 것을 알면서도 고개를 뻣뻣하게 세워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일전에 불렀을 때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검은 발을 내린 황제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한데…….

진예가 제 아비의 모습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살며시 눈살을 찡그렸다.

“…….”

드러난 황제의 얼굴은 이전보다도 더 힘이 빠져 있었다. 머리는 새하얗다 못해 푸석푸석해 보이기까지 했고, 못 본 사이 살도 많이 내렸다.

마치 죽을병이라도 걸린 듯한 모습이었다. 자신을 혼낼 때는 늘 추상같았고, 거대해 보였던 제 아비는 이제 손목도 가늘어져 제가 붙잡으면 금세 부러질 듯했다.

딱히 슬프지는 않았다. 한발 더 나아가 저렇게 쓸모없어질 거면 빨리 죽어 버리면 낫겠다 싶기도 했다.

언제나 자신에게 ‘쓸모’에 대해서 설파하던 사람이니까.

한데 황제의 기는 아직 꺾이지 않은 듯했다. 아니, 그건 어쩌면 오기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황제라고, 그가 날카롭게 분노를 토해 냈다.

“태자, 네가 감히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살아 돌아왔느냐!”

노기 어린 목소리가 서릿발 같았다. 편전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사실 진예에겐 너무 익숙한 것이었다.

홀대 따위에 기죽을 그녀가 아니었다. 진예가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원봉은 후속군이 잘 처리할 것 같기에. 무려 2만의 군사를 보내시지 않았습니까.”

그에 황제가 이를 갈았다. 사실은 진예가 그 전에 죽길 바랐을 텐데, 그 속내를 제법 잘 숨기면서 받아쳤다.

“그렇다면 그들과 목숨을 걸고 함께 싸워 승전보를 올리고 와야 할 것을.”

“이미 군사들은 소자를 신뢰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원봉의 태수 또한 제가 그곳에 남아 있길 바라지 않았고, 저 또한 군사들의 사기를 고려해 퇴각하였습니다.”

쾅!

진예의 대답을 들은 황제가 옥좌의 손잡이를 내리쳤다. 그의 명백한 분노에 편전이 숨죽인 듯 조용해졌다.

진예도 이젠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이며 눈을 감았다. 다음에 터져 나올 명령이 무엇일지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태자를.”

황궁 밖으로 내치라고 하겠지.

하지만 황제는 오히려 제 예상을 뛰어넘는 결론을 내렸다.

“태자위에서 폐위하고 읍주로 귀양을 보내거라.”

……뭐?

명을 듣고 진예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황제와 눈이 마주쳤다.

황제는 좋아 죽겠는 걸 간신히 표정에는 드러내지 않고 있었지만, 눈에 담겨 있는 희열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그걸 보면서 진예는 표정을 싸늘하게 굳혔다.

그럴듯한 명분이 생기니 이렇게 단숨에,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황태자 폐위를 명하고 있었다.

게다가 읍주가 어떤 곳인가. 그곳으로 유배를 가라는 말은 사약만 안 내렸지, 그냥 죽으라는 소리와 마찬가지였다.

……아비는 내 죽음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구나.

심장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황제의 말이 이어졌다. 엄중하게 말하는 척했지만 자신의 명령이 정당한 것임을 알리기 위한 핑계를 늘어놓는 것에 불과했다.

“감히 백성들을 지켜야 하는 황실의 의무를 저버리고, 적을 두고서 전장에서 등을 돌리고 온 그 죄가 크다.”

진평이 똑같은 상황에 놓였다면 어땠을까. 아마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잘했다며 칭찬했을 게 불 보듯 뻔했다.

그렇게 비교하면서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자꾸만 떠올랐다.

동생을 향한 지독한 편애.

그리고 자신을 향한 지독한 증오.

그것에 평생을 시달려 온 그녀로서는 당연했다.

못난 생각이었지만, 어렸을 때 진평이 잘못한 걸 대신 혼났을 때는 차라리 진평이 제 동생이 아니었으면 하고 바랐던 적도 있었다. 눈물을 흘리며 훌쩍이는 아이를 보면서 너 때문에 내가 이렇다고 화를 쏟아 내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나도 사내아이였다면, 너처럼 사랑받았을 텐데.

어쩌면 어미의 품에 안겨 웃을 수 있고, 아비의 두 손을 잡고 목말을 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나 자신은 부모 앞에서 언제나 감히 여인으로 태어난 죄인이었다.

진예는 어차피 통하지 않을 것을 알았지만 미약하게 반박했다.

“……소자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고 여깁니다.”

그러자 황제는 더욱 흥분했다.

“감히 네가 짐에게 말대꾸를 하는 것이냐? 여봐라!”

황제의 부름에 문밖의 내관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황제의 지엄한 명이 이어졌다.

“당장 황태자를 끌어내라. 황궁이 어지럽구나!”

그 즉시 진예의 뒤로 내관들이 다가와 팔을 붙잡았다. 진예는 저항 없이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에 내관들이 잠시 주춤했을 때였다. 그녀가 제 아비를 눈에 담으며 최후의 발언을 했다.

“이젠 황제 폐하가 세상 그 누구보다도 밉습니다.”

“내게도 네가 기꺼운 딸은 아니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돌아오는 대답에 진예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간 그래도 늘 착한 척하느라 남들 앞에서는 저런 발언을 하지 않았었는데, 황제도 드디어 마지막이라고 껍데기를 깨고 본성을 드러냈다. 그래서 진예도 제 마음속에 있는 빗장을 풀었다.

“저 그저 아비와 어미의 사랑을 받고 싶었던 평범한 딸이었을 뿐입니다. 한데 그것조차 내주지 못하는 당신들의 편협한 마음이 내 존재조차 허락하지 않은 것뿐이지.”

차라리 원봉으로 보내기 전에 자결하라고 칼을 내미는 대신, 그때라도 제 아비가 하찮은 동정 한 톨이라도 던져 주면서 태자위에서 물러나라 했으면 그리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진예는 아비 어미의 관심에 목말라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목을 조른 어미의 손에 상처가 났다는 이유로 아비가 궁인을 불러와 제 뺨 수십 대를 내리치고, 제 등을 정신을 잃을 때까지 채찍으로 수없이 때려 댔을 때도 죄송하다는 말만 읊어 댔다. 제 부모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것에 대한 원망은 조금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게 자식의 도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끝내 제 부모는 자신을 사랑해 주기는커녕 미안해하지도 않았다.

돌이켜 보면 이리도 양심 없는 자들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러니 이젠, 죽기 직전이지만 그래도 이제는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틀린 건 내가 아니라 당신들이다.

적어도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안다면, 황제와 황후는 자신을 이토록 방치해서는 안 되었다.

단지 따뜻한 눈길 한 번, 다정한 말 한 마디 바랐던 나에게…… 이토록 잔혹하게 굴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지나친 욕심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현실을 부정했던 것이다.

자식의 마음을 제물로 삼아서.

“죽는 순간까지 당신들을 저주할 것입니다.”

말하고 나니 지금이라도 그들을 원망하면서 죽게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을 마치자 편전 안이 술렁였다. 아주 소수의 몇몇은 진예를 안타까워하는 눈으로 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그녀의 방자한 입을 다물게 하여야 한다고 외쳤다.

그 소란 속에서 진예는 내관들에 의해 편전 밖으로 끌려 나갔다.

* * *

강제로 편전 앞마당에 내팽개쳐진 진예는 대기하고 있던 이들에 의해 땡볕 아래에서 그 즉시 무장 해제되었음은 물론, 옷과 관모까지 벗겨졌다. 그러던 중 아비에게 받은 단도가 바닥에 떨어졌다.

〈차라리 명예롭게 자결을 하거라.〉

과연 당신이 요구하던 그 죽음이 정말로 명예로운 것이었을까.

금장으로 장식된 화려한 그것을 보면서 진예가 하하, 웃었다. 울고 싶어지는 상황인데 왜인지 울음은 안 나오고 계속 헛웃음만 흘러나왔다. 마치 우는 법을 잊어버린 듯이.

고개를 드니 눈이 어지러울 정도의 강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너무 강렬해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대로 모든 걸 포기한 진예는 내관들이 이끄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 얼마 안 가 목에 도류가가 채워지고, 나무 창살이 둘러쳐진 수레 위에 올라가게 됐다.

그렇게 황궁을 떠나려고 하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태자 전하!”

목소리의 주인은 서엽이었다.

서엽은 퇴각 당시 상당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래서 황도에 도착하고 입궐하지 않고 그대로 본인이 사가로 돌아갔는데, 아마 소식을 듣고 급하게 황궁으로 달려온 모양이었다. 그 증거로 의복이 엉망이었다. 그가 당황한 표정으로 뛰어와 수레에 붙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믿을 수 없다는 표정과 말투였다. 그라도 이런 결말은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불운한 황태자를 향한 마지막 배려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수레는 굴러가지 않았다. 진예는 차라리 빨리 떠나갔으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러나 서엽에게 마지막 인사는 할 수 있어서 다행이긴 했다. 서엽은 늘 함께해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진예는 죽으러 가는 사람답지 않게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다. 무능하니 어쩔 수 없는 것이지.”

그러자 서엽이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진예와 눈을 마주했을 때, 예상치 못하게 눈물을 주룩 흘렸다.

지금껏 그가 우는 모습을 본 적 없는 진예가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 스스로도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지 얼른 마른세수를 하며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이 서엽이 전하의 마지막 호위를 하겠습니다.”

허무맹랑한 소리였다. 당연히 안 된다고, 그리 말하려 입을 벌렸을 때였다.

“허락해 주십시오.”

그가 선수를 쳤다. 나무 창살을 잡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제발…….”

“제발…….”

너무나 간절한 요청이었다.

서엽은 사실 여기서 발을 돌려 그냥 집에 가면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살아갈 수 있었다. 진예가 죽는다고 해서 그에게 해가 갈 일은 전혀 없을 것이었다. 그 반대라면 모를까.

그것을 본인도 모르는 바가 아닐 텐데 무모하게 애원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진예는 그의 어리석음에 화가 났다. 그래서 그의 간절함에 비례해 더 거칠게 말이 튀어나갔다.

“서엽, 네가 정녕 미친 것이냐.”

그러나 서엽이 나무 창살을 꽉 붙잡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유배지가 읍주라고 들었습니다. 제가, 제가 어떻게 그곳에 전하를 혼자 보내겠습니까.”

‘가면 죽는데.’

그런 뒷말이 숨겨져 있었다.

그것도 익재한테 산 채로 온몸을 물어 뜯겨 죽을 터였다. 살면서 느낄 수 있는 가장 끔찍한 고통을 느끼면서 눈도 감지 못한 채 심장이 멎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서엽이 따라온다는 소리가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것이었다. 듣고 있던 주변의 관원들도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예는 저 눈먼 놈을 보며 한숨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아 냈다. 그리고 냉정하게 거절했다.

“필요 없다. 그만 꺼지거라.”

그러나 명을 듣고 순순히 물러난다면 조서엽이 아니었다. 그는 진예에 한 한 세상 누구보다도 고집불통이었다.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제 마지막…… 소원입니다. 허락해 주시지 않으면 차라리 이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자결하겠습니다.”

죽겠다는 소리에 진예가 엄하게 소리를 질렀다.

“서엽!”

하지만 진예의 분노도 서엽을 흔들어 놓지 못했다. 서엽은 이대로는 절대 놓지 않겠다는 양, 손마디가 새하얘질 만큼 힘을 주어 잡았다.

“혼자 보낼 수 없습니다. 싫습니다. 절대로, 절대로 싫습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태자 전하.”

진예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 차마 더 눈을 마주치지 못해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까지 자신에게 이유 없는 헌신을 쏟아붓는 그를 보고 있자니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게다가 이 순간 왜 하필 그가 했던 말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아파해 주십시오. 제가…… 눈물을 닦아 드릴 수 있도록.〉

하지만 서엽, 네가 틀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눈물은 나오지 않는다.

그때도, 지금도 이미 안쪽의 샘이 바싹 말라 버린 지 오래였다. 가슴은 잠시 저릿해질 수 있어도 네가 닦아 줄 눈물은 결코 흐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더는 반박의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반쯤 허락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보다 못한 관원 하나가 이만 출발해야 한다고 했을 때, 서엽은 관원들 모두에게 자신이 가져온 금자 주머니들을 내주며 제가 관원으로 변복해 따라가겠다고 했다.

눈앞에서 관원들을 돈으로 매수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창살 안에 있는 진예는 그가 관원으로 위장하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 * *

진예의 가는 길은 초라했다. 읍주까지 수레를 이끄는 관원 몇 명, 그게 전부였다. 옆에 서엽이 있었지만 큰 위로가 되지는 못했다.

죽음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딱히 진지한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마지막으로 제 부모에 대한 모든 기대를 접고 가게 되어, 솔직히 좀 후련했다. 그동안의 일을 되돌아보니 제가 얼마나 미련스러웠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아주 어렸을 적에 그런 일도 있었다. 사서삼경을 다 외워서 사부에게 칭찬받아 신나서 아비에게 달려갔었다.

그때 제 아비는 그리 말했었다.

〈말하지 않았느냐, 결코 네 아우보다 잘나서는 안 된다고!〉

동생보다 뛰어난 게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딴 걸 깨우친다고 네가 대환의 황위를 차지할 수 있을 성싶으냐.〉

욕심낸 적도 없던 황위에서 멀어져야만 한다고 말했다.

눈치가 조금이라도 빨랐다면 그때부터 그냥 망나니처럼 살았을 텐데. 애초에 불가능한 것을 기대하고 목매달면 안 되는 거였다. 부모의 사랑, 그따위 게 다 뭐라고. 결국은 이렇게 되어 버리는 건데.

스스로가 지독히도 한심해 보였다.

진예는 저도 모르게 쓰게 웃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수레가 덜컹이기 시작했다. 뭔가 하니 산길에 들어선 것이었다. 황도에서 읍주로 가는 길에 넘어야 하는 두 개의 산 중 하나인 듯했다.

진예가 주변을 살펴보았다. 여름이라 그런지 나무들이 제법 우거져 있었으나 그 사이로 비치는 햇볕이 유난히 쨍쨍했다. 그리고 너무 조용했다. 수레를 끄는 소리와 관원들의 발소리만 자박자박 번갈아 울리는 중이었다.

그 단조로운 소리들을 들으면서 진예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고, 마침 서엽도 살며시 수레 옆으로 다가와 그녀에게 알려 왔다.

“전하, 이 산의 동쪽과 북쪽에 익재의 서식지가 있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싶었지만 진예는 심드렁히 대꾸했다.

“녀석들이 우리 냄새를 맡고 오거든 날 두고 가거라. 다들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게 아니라.”

남의 귀가 있으니 서엽이 말끝을 흐렸으나 아무래도 익재가 나오면 혼란을 틈타 도망가자는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제야 진예는 깨달았다.

이 사내는 아직도 자신이 살아남으리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해 따라 나선 것이었다.

그러나 목숨을 부지한다고 해서 황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진예가 미친 거냐는 의미를 담아 그를 곁눈질했다. 이쯤 됐으면 서엽도 포기할 때가 되었다. 이건 아무리 봐도 충심이 과했다. 잘못하면 단지 서엽 하나만 위험해지는 게 아니라 그의 가문 자체가 몰락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한데 서엽은 정말로 진예를 살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살아만 계시면 됩니다. 그럼 다음이 있지 않습니까.”

다음이라.

진예는 자신이 살아남아서 노릴 만한 ‘다음’이라는 것이 뭔지 생각해 보았다.

아마 지금의 자신이라면 황궁으로 돌아가 놀란 제 아비의 저승사자가 돼 줄 것이었다. 그리고 그토록 그가 막고자 했던 일, 그러니까 자신이 그 황위를 찬탈해 버리는 짓을 하면 제 평생을 빼앗아 온 것에 대한 분풀이가 될 듯했다.

실제로 그 일이 벌어지면 얼마나 통쾌할까.

그러나 상상에서 그칠 일이었다. 이미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서엽의 말대로 익재가 나올 확률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나온다 해도 이 자리에서 몰살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게다가 녀석들이 나타나면 죽을 확률이 가장 높은 건 자신이었다. 구류돼 있는 데다 무기조차 없는 맨손이지 않은가.

지금 서엽이 바라는 미래는 허황하기 그지없었다.

“네놈이나 살 생각을 하거라. 날 읍주에 데려다 놓고 황도로 가면 너라고 무사할 성싶으냐.”

“무사하지 않겠지요.”

“그런데?”

“그 모든 걸 두고 봐도 제겐 전하가의 안위가 가장 중요합니다.”

다른 상황이었다면 기뻐해야 할 대답이었지만 진예는 그렇지 못했다. 그러나 덕분에 잠시 꿈을 꾸었다.

정말로 기적이 일어나 이 자리에서 살아남고 제가 다시 황궁을 돌아오는 그런 날이 오면, 그래서 제가 환의 정점에 서면 이 사내만큼은 어떻게든 제 곁에 두리라고.

자신의 평생에 이와 같은 충성을 보인 이는 이전에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가정은 이 자리에선 그다지 의미 있지 않았다. 가능성이 한없이 희박하니까.

그런데 서엽이 목소리를 낮춰 한마디 했다.

“그리고 익재는 반드시 나타납니다.”

듣고 진예가 눈을 치켜올렸다.

“뭐……?”

서엽이 제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붉은색의 작은 주머니였다. 향낭같이 생겼다. 아니, 아마도 향낭이 맞을 터였다.

진예는 이것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몰라 눈으로 물었다. 서엽은 대답해 주지 않고 그것을 다시 품 안 깊숙이 넣었다.

분명 저것에 이상한 무엇이 있는 게 틀림없는데, 서엽은 더 언급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위험한 짓거리를 하려고 저러는 것일까?

진예는 무던한 그의 표정을 보면서도 금세라도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아 불안했다.

한데 그때였다.

끼이이이이익,

조용하던 산속에 작은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낡은 경첩이 우는 듯한 그 소리에 순간 진예는 등 뒤로 소름이 쫙 돋았다.

작은 소리였지만 그것은 분명 잘 알고 있는 무언가의 소리였다.

무언가.

바로 익재였다.

진예만 눈치챈 것은 아닌지 수레를 이끌고 앞서가던 관원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걸음을 멈췄다.

“익재의 소리요.”

그리고 수레도 잠시 멈춰 선 그때, 서엽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다음에 펼쳐진 광경이 충격적인 건 익재가 튀어나왔기 때문이 아니었다.

앞서가던 관원의 목에 칼이 꽂혔다.

그 칼을 쥔 자는 서엽이었다.

“……!”

불시에 당한 그 관원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서엽이 단숨에 박아 넣었던 칼을 도로 뽑자 피가 흩뿌려지며 관원의 몸이 쓰러졌다.

처음엔 무슨 상황인지 인지하지 못한 다른 관원들은 제 동료가 눈을 홉뜨고 죽은 걸 보고 뒤늦게 소리를 질렀다.

“이게 무슨 짓……!”

그러나 누구도 서엽에게 달려들지는 못했다. 때마침 구취 나는 썩어 버린 입을 벌리며 익재가 펄럭, 거대한 날개를 펼치며 머리 위에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끼이이이익!

흡사 익룡처럼 생긴 그것은 소름 끼치는 비명을 내질렀다.

아마도 꽤 굶주린 놈인 것 같았다.

방금 전의 비명은 제 먹잇감이 한곳에 몰려 있는 데 대한 기쁨의 소리일지도 몰랐다.

‘정말로 익재가 나타났다.’

진예는 나무 창살 너머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익재를 보면서 눈을 크게 떴다.

감정 동요가 별로 없는 그녀로서도 이 상황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익재의 등장으로 방금 전 제 동료가 죽었다는 건 까맣게 잊은 관원들은 우왕좌왕했다. 순식간에 두려움에 빠져 누군가는 몸이 굳은 채 덜덜 떨었고, 또 누군가는 이 자리에서 도망치려 제 소임을 잊고 어디론가 달려갔다.

그리고 익재가 내려앉았을 때, 가장 먼저 노린 것은 서엽이 목에 칼을 찔러 넣은 죽은 관원이었다. 익재가 이미 사냥이 완료된 먹잇감을 입에 물며 기쁨에 포효했다.

그리고 그 혼비백산한 상황 속에서 서엽은 지나치리만큼 침착했다. 그는 이번엔 도망가는 관원 중 하나를 붙잡아 목을 그어 버리고 그 품 안에서 수레와 도류가를 잠근 열쇠를 꺼냈다.

이미 이 상황을 예상한 듯 너무나 침착한 대처였다.

그사이 익재는 제 가까이에 있던 관원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고 퍼걱, 하고 딱딱한 것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너무 잔인해 진예는 차마 그 꼴을 보지는 못했으나 피가 자신이 있는 곳까지 튀었다.

그 짧은 틈에, 모두가 도망치기 바쁜 가운데 진예가 갇힌 수레 옆으로 다가온 서엽은 다급한 손길로 수레를 열고 도류가를 그녀의 목에서 풀어 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목을 잡아 안쪽에서 빼내며 빠르게 말했다.

“빨리 가셔야 합니다, 전하. 여긴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진예는 얼떨결에 끌려 나오면서도 서엽에게 욕을 했다.

“서엽, 무슨 미친 소리냐? 당연히 같이 가야지.”

서엽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일단은 먹는 데 정신이 팔린 익재를 힐끗 보다가 진예의 몸을 돌렸다.

“곧 따라갈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익재 한두 마리쯤은 상대할 수 있습니다.”

아니, 틀렸다.

서엽은 지금 부상 중이었다. 지난 원봉에서 전투 때 심한 내상을 입어서 이틀 정도 피를 쏟아 냈었고, 아직 다 낫지 않았다.

한데 그들이 꾸물거리는 사이 굶주린 포식을 하던 익재가 이쪽으로 눈을 돌렸다. 진예는 익재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했음을 알았다. 괴물이 입으로 먹이를 으득으득 씹으며 눈을 굴리더니 이내 손을 휘둘렀다.

쿠웅!

동시에 제가 있던 자리가 움푹 파이면서 돌이 튀어 올랐다. 서엽이 그것을 예상해 그녀의 몸을 붙잡고 뒤로 구르지 않았다면 제가 죽는 줄도 모르고 숨이 끊어졌을 터였다.

서엽은 더 이상 주저하지 말라는 듯 곧장 진예의 등을 떠밀었다.

“어서 가십시오, 어서!”

하지만 그 순간 진예의 눈에 들어온 건 방금 전 서엽이 열쇠를 빼앗은 관원의 시체와 그가 차고 있던 칼이었다.

그때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저 익재를 죽이고, 서엽을 살리고, 그래서 그의 말대로 자신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하면, 그래, 허무맹랑하지만 그의 말대로 언젠가는 ‘다음’이 올지도 모른다.

다음.

저에게 냉혹한 목소리로 죽음을 명하고, 저를 평생 괴롭혔던 아비의 목숨을 끊는 것.

그가 그리도 소중하게 여기는 아들 대신 환 제국의 황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

그리하여…… 자격이 없다 말한 제 아비의 뜻을 거스르고 환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사람이 되는 것.

그런 ‘다음’이 말이다.

한순간에 그 미래를 본 진예는 서엽의 떠밀리는 힘을 받아 그 자리에서 움직였다.

서엽은 정말로 진예가 도망치는 줄 알았는지 곧장 뒤를 돌아 제 검을 치켜세우며 익재와 마주했다. 그러나 진예는 그가 바라는 대로 해 주지 않았다. 떠나는 대신 재빨리 그 시신에 다가갔다.

그녀가 죽은 관원의 허리춤에서 칼을 뽑고, 몸을 돌려 익재에게 뛰어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뒤늦게야 그것을 발견한 서엽이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전하!”

짧은 순간이었지만 진예는 제 몸이 무척 가벼운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두 손으로 검 손잡이를 잡고 그대로 익재의 가슴 부근을 노려 찔러 넣었다. 손을 통해 익재의 썩은 육신을 꿰뚫는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검이 완전히 통과되자 진예는 곧장 땅을 박차 위로 도약하며 그것의 어깨를 갈라 버렸다.

익재의 검은 피가 그녀가 휘두르는 칼의 궤도를 따라 긴 선을 그리며 튀어 올랐다. 그리고 칼로 베인 육신에서 희미한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진예가 칼의 방향을 바꿔 내리꽂기 직전, 진예의 눈동자 색이 달라져 있었다.

핏빛을 연상케 하는 붉게 물든 눈이 익재의 정수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에 쥐인 칼에선 사람의 눈을 멀어 버리게 할 것 같은 거친 백광이 터져 나왔다.

역행하는 번개처럼 하늘을 꿰뚫고 내려온 빛이 곧 익재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콰과과과광!

그녀의 검에서 뻗어 나온 흰 빛줄기가 대지를 내리찍었다. 그러자 하늘이 울었다. 굉음이 온 산을 뒤흔들었다.

환 제국의 황태자, 진예.

그녀는 죽음 직전에 운명을 바꿀 각성의 때를 맞이했다.

* * *

진예는 이후 제 동료가 죽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녀석이 먹다 남긴 시체를 탐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근처에서 몰려든 익재들을 남김없이 도륙해 냈다.

제가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 엄청난 힘이었다. 서엽 역시 이런 상황은 생각지 못했는지 그녀가 익재를 상대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익재를 죽여 갈수록 진예는 그들을 처리하는 것 자체에 몰두해 갔고, 그 수렁에서 겨우 정신을 차린 건 이미 밤이 깊어진 뒤였다.

아니, 어쩌면 딱히 정신을 차린 건 아닐지도 몰랐다.

온몸에 익재의 검은 피를 뒤집어쓴 것을 수습할 생각도 하지 않고 진예는 그대로 환 제국의 황도로 돌아갔다.

옆에는 단 한 사람, 서엽밖에 없었지만 황궁에 나타나 그곳을 마음껏 짓밟고 마침내 대전을 넘보는 그녀를 막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뛰어든 게 제아무리 새벽녘이라 하지만 단 두 사람이 황궁을 뒤집어 놓은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우왕좌왕한 가운데 가장 먼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은 이는 진평이었다.

세상에서 아들을 가장 예뻐하던 황제와 황후를, 진평이 누구보다 빠르게 배신했다.

“이 진평, 누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바닥에 바짝 엎드려 부들부들 떨며 하는 말을 들은 순간 진예는 미친 듯이 웃었다.

쓰레기 같은 부모에 쓰레기 같은 자식이었다. 솔직히 그 순간에는 이 정도면 황제를 죽이지 않아도 분풀이는 됐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진평이 이 황실에 저를 저주하는 부적들이 곳곳에 묻혀 있다는 것을 알리고, 저는 더 이상 황위를 넘보지 않고 장사치나 되겠다며 선언을 해 목숨을 부지했다.

덕분에 진예는 더욱 손쉽게 황위를 찬탈할 수 있었다. 평생을 저를 짓눌러 왔던 황제와 황후를 황궁의 마당으로 끌어내 내팽개쳤다.

한때 제 목을 졸라 죽이고 자살로 위장하려던 황후는 진예의 압도적인 무력과 악귀 같은 모습에 눈앞에서 무릎을 꿇고 벌벌 떨었다. 황후가 진예의 앞에서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이, 이 어미가 사람을 잘못 보았다. 네가, 네가 황제의 재목이니라. 그, 그러니 폐하와 날 살려…….”

하지만 황제와 황후는 이미 각인으로 엮여 죽음까지 함께하는 운명 공동체였다. 두 사람의 합이 맞아야 그나마 비벼 볼 만했을 텐데, 늙은 황제는 자존심은 있었는지 침전 마당에 처참하게 내던져진 와중에도 황후와 다르게 끝까지 그녀를 저주했다.

“너 따위가 감이 이 황궁을 넘보다니,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성싶으냐! 하늘이 너를 벌할 것이다. 네년이 이 환의 황제가 된다니 400년의 왕조가 막을 내리겠구나!”

목에 핏대까지 세우고 발악하는 그 모습을 보는 진예의 얼굴에서 표정이 점점 사라졌다. 그러자 서엽이 황제의 목을 베었고, 황후 역시 그대로 숨이 멎어 버렸다.

제 어미와 아비가 죽는 광경을 보고도 진예는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그간 부딪히고 마모되고 또 부딪히고 마모된 탓에 그들에 대한 일말의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역시 우는 법을 잊어버린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아파하는 법을 잊어버린 가슴은 너무나 평온했다.

그렇게 제 부모를 제 손으로 쳐내 버린 뒤, 다음 날 아침 자신의 시대가 열렸음을 만백성에게 알렸다.

하룻저녁 사이에 섬기던 황제가 죽고 새로운 황제가 등극한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황궁에 피를 흩뿌려 놓은 모습을 본 겁쟁이들은 새로운 황제에게 복종했다.

반발하는 대신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진예가 직접 군사를 이끌며 한 달 뒤부터 시작한 대규모 익재 토벌 덕분에 백성들의 지지까지 생기자 입을 다물었다.

자연스럽게, 아무 문제 없이 시대가 바뀌었다.

하지만 진예는 어느 순간 제 안의 무언가가 고장 났음을 느꼈다. 황제의 자리를 지키고, 익재들을 도륙해 내는 것 외에는 무엇에도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자신을 제위에 올려 둔 그 각성의 대가는 어쩌면 제 감정이 아니었을까 생각됐을 만큼, 그냥 마음이 통째로 도려내진 것 같았다.

메말라 버린 가슴은 누군가의 슬픔이나 기쁨에 공감하지 못하게 됐다.

애정, 사랑.

그런 감정은 애초에 제 마음속에 들어온 적도 없었으니 피어나지 않는 것 또한 당연했다.

그러나 진예는 그것이 문제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않았다. 이대로가 좋았다. 쓸데없는 감상을 늘어놓을 시간에 익재 한 마리 더 잡아 죽이는 게 유익하게 느껴졌다.

그게 부모의 사랑을 바랐던 어린 황태자와 환의 황제 사이의 극명한 차이점이었다.

* * *

콰아앙!

디디고 선 기단의 돌이 튀어 오르면서 거센 충격에 그녀의 몸이 흔들렸다.

“폐하!”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단숨에 이쪽을 향해 누구보다 빠르게 뛰어오는 서엽의 모습이 시선 끝에 걸렸다. 짧은 순간이지만 그것을 확인하고 진예는 딱히 죽진 않겠구나 생각하며, 제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곳에선 달을 가리며 나타난 검은 물체, 아니, 날개를 펼친 검은 생명체가 썩어 가는 눈동자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익재.

땅에서 튀어나온 게 그 괴물임을 확인하고, 진예가 한 첫 번째 생각은 이 녀석들도 이제 땅을 파고 들어오는 법을 배웠나 하는 것이었다.

‘쉽게 대응이 안 될 테니 이 상태로 저것들과 전쟁이 나면 꽤 골치 아파지겠다.’

그 정도의 감상이 전부였다.

그녀는 익재 놈이 제게 몸을 부딪칠 듯이 달려드는 걸 보면서 뒤로 걸음을 물리며 기단 밑으로 뛰어내렸다. 무거운 기단을 뚫고 나온 것도 그렇고, 땅을 파고들어 온 것도 그렇고, 공격을 위해 몸을 날리는 것도 그렇고. 이 익재는 아무래도 신체가 극단적으로 단단한 놈인 듯했다.

쿵!

녀석이 떨어진 자리에 거대한 돌덩이라도 떨어진 듯 땅이 움푹 파이면서 기단의 돌들이 부서져 나갔다.

한데 단순히 진예를 해치려는 목적만은 아니었는지, 그와 동시에 매복해 있던 익재 네 마리가 땅에서 한꺼번에 튀어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익재가 이렇게 아무런 징후도 없이 황궁으로 스며들어 온 경우는 처음이라 진예도 잠시 놀랐다.

“이게 무슨…….”

집단행동이 놀라운 건 아니었다. 그건 원래 저 ‘재앙’의 습성이었으니까.

다만 이 녀석들의 지능이 이 정도로 올라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얼마 전 태감은 분명 익재로 인한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냥 이곳 하나를 목적으로 하고 왔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지금 이 행동의 의미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때마침 서엽이 나타나 그녀의 앞을 막았다. 그가 칼끝을 가장 먼저 나타난 익재를 겨누며 말했다.

“제가 엄호하겠습니다, 폐하.”

하지만 진예가 고개를 저었다.

“저놈은 내가 상대해야 한다.”

본능적으로 그렇게 느꼈다. 저 단단한 돌덩이 놈은 필시 서엽의 검으로도 뚫어 내지 못할 터였다.

진예가 자신의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던 금위의 칼을 빼앗아 들었다. 그러자마자 다섯 마리의 익재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쐐애액!

날개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유난히 날카로웠다. 진예는 제게 가장 먼저 뛰어들어 자신을 압살하려고 드는 돌덩이 녀석의 움직임을 피하며 녀석의 몸에 스치듯이 상처를 냈다. 그러고 녀석의 어깨를 디디며 두 번째 녀석의 팔을 갈라 내려 했을 때였다.

자신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는 익재 두 마리가 보였다. 둘은 초능력형인지 한 마리의 입에선 음파가 흘러나왔고, 다른 한 마리의 손에선 검은 기둥이 쏘아졌다. 한데 그 공격 방향이 제가 아닌 다른 곳이라는 걸 인식한 순간, 반쯤 본능적으로 진예의 몸 또한 그쪽으로 튀어나갔다.

콰과과앙! 쾅!

순식간에 공격 진형의 한복판에 뛰어든 진예가 기를 흘려 넣은 검을 가로로 길게 휘둘렀다. 그러자 파공음이 울리며 허공에서 공격이 파훼되었다. 그리고 그 틈을 타 서엽이 음파를 쏘던 익재의 목을 떨어뜨렸다.

정말 간발의 차이였다. 진예가 공격의 대상이 되었던 이를 뒤돌아보았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상황에 무건이 당황한 듯 얼어 있었다. 아니, 애초에 무슨 행동을 할 수 있을 만큼 몸이 자유로운 상황이 아닌 듯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가만히 있어도 추위에 떨고 있던 놈이었으니까.

진예가 그의 상태를 확인하고 슬쩍 미간을 찌푸리다가, 저 이외에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 듯 달려드는 돌덩이 놈을 보고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손이 무건의 팔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그제야 무건도 정신을 차렸는지 비틀거리면서 그녀가 이끄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

덕분에 이번에도 간신히 피했으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다른 익재들의 공격이 이번엔 진예가 아닌 무건에게 진로를 돌렸다.

몇 놈은 그를 금세라도 찢어발길 듯이 아가리를 벌리거나 손을 휘두르며 뛰어들었고, 다시 한번 뒤의 녀석에게서 검은 기둥이 떨어져 내렸다.

무건도 이번에는 그 공격들을 피하기 위해 제 몸을 날렸다. 땅바닥으로 구르면서 간신히 피하긴 했지만 아직 다 붙지 않은 갈비뼈가 다시 욱신거리며 아파 왔다.

그사이에 진예가 순식간에 한 놈의 팔을 자르고 허리를 갈라 버렸다. 그리고 연이어 돌덩이 놈이 몸을 땅에 육중한 몸을 떨어뜨리자마자 그것의 등을 밟고 올라가 칼을 박아 넣고 날개를 찢어 버렸다. 그러자 고막을 찢어 버릴 듯한 괴성이 울려 퍼졌다.

끼아아아아아아악!

익재들은 날개에 신경이 촘촘하게 엮여 있어 날개를 공격 받을 때 가장 고통스러워했다. 진예는 그 비명 소리에 귀를 막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그대로 칼의 진로를 돌리면서 높이 뛰어올랐다가 내려오면서 검은 기둥을 쏘아 대던 놈의 목을 베어 버렸다. 그리고 제 등 뒤의 녀석을 세로로 가르려던 차에.

퍼억!

힘을 얼마나 세게 넣은 건지 빠르게 날아온 창이 그 익재의 단단한 머리에 박히면서 새하얀 연기가 일어났다. 그렇게 제 눈앞에서 익재가 눈이 튀어나올 만큼 고통스럽게 눈을 부릅뜨며 비명을 지르면서 죽어 갔다.

그것을 확인한 진예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 창이 날아온 방향을 확인했다. 던진 사람은.

“연무건…….”

진예가 신음처럼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부상이 도졌는지 그는 제 팔로 몸을 감싼 채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공격을 당하는 순간 타 버린 익재라…….

정말로 제가 가진 능력을 복사해 간 것이 맞는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한 진예는 기분이 썩 좋지 못했다.

저 사내가 앞으로 죽음을 함께할 사람이라니.

제 인생에 저보다 더 거슬리는 자가 있을까 싶었다.

기분이 저조해진 진예는 아직 날개가 찢긴 고통에 허우적대고 있는 익재의 머리에 칼끝을 박았다. 그러자 바닥에 검은 피가 흩어졌다.

그러고 나서 주변에 더 이상 익재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진예가 바닥에 칼을 집어 던졌다. 그러자 서엽이 다가와 물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진예는 그저 더럽혀진 옷을 털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렇지 않다.”

무건 쪽으로 도로 시선을 돌렸다. 저놈은 아무래도 평온하지 못한 듯했다. 예상대로 비틀대던 무건이 이내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아, 흑…….”

진예가 심기가 불편하다는 의중을 내비치며 표정을 굳히자 눈치를 보던 내관 하나가 그에게 다가갔다.

“숙의마마, 어디가 편찮으십니까.”

무건은 가슴 부위가 고통스러운 듯 그곳을 손으로 누르며 가쁜 숨을 내뱉었다.

“괜, 괜찮습니다.”

목소리가 떨리는 걸 보니 상태가 무척 안 좋아 보였다.

저러다 쓰러지지.

아무도 안 믿을 거짓말을 하는 모습에 진예가 고개를 슬며시 기울였다. 겸양의 말이긴 하겠지만, 저러면 이곳에선 돌봐 줄 사람이 아무도 없을 터인데.

하지만 진예에겐 제 명인자를 걱정하는 것보단 일단 이 상황을 정리하는 게 먼저였다. 그녀가 태감을 불러 명했다.

“당장 별궁으로 처소를 옮기겠다. 황궁은 보수할 수 있도록 하고, 돌아올 때까지 익재들이 어디로 침입했는지 알아보고서 경비를 강화하거라.”

“명 받잡습니다.”

그러고 마지막으로 죽인 익재를 내려다보았다. 익재의 시신에서는 늘 그렇듯 검은 연기와 악취가 올라왔다. 그다지 반가운 것들은 아닌지라 진예의 미간이 저절로 좁혀졌다.

하지만 시신에서 나는 썩은 내보다 더 거슬리는 게 있었다.

그간 익재들이 황궁으로 쳐들어온 역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이들이 나타나고 얼마 되지 않았던 때의 일들이고, 근 50년간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옛날에도 이렇게 땅굴을 파서 들어온 사례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안다. 근처의 서식지에서 살던 익재들이 황도를 파괴하다가 밀고 들어온 경우라면 모를까.

하여 혹시 몰라 이번엔 금위들을 가까이 오게 했다.

“익재 놈들의 사체 또한 확인하고 특이 사항이 있거든 보고하라 하거라.”

“예, 폐하.”

명을 마친 뒤에야 진예가 걸음을 옮겨 무건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내관이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무건의 손이 떨리는 걸 발견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무건이 고개를 살며시 들어 진예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진예가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양 입을 달싹거리다가 이내 힘겹게 음성을 내뱉었다.

“……괜찮으십니까, 폐하.”

물론 아주 가소로운 질문이긴 했다. 익재 앞에서 아무것도 못 해서 오히려 도움을 받은 쪽은 무건이었으니까.

하지만 굳이 거기까진 지적하지 않고 진예가 태감을 돌아보았다.

“태의를 부르거라.”

그녀답지 않게 잠깐 고민하다 뒤늦게 덧붙였다.

“연 숙의 또한 별궁에 옮겨 두고.”

그 말에 태감은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고, 서엽은 난처해 보이는 얼굴을 했다. 그리고 연무건은 그냥, 멍청했다.

무건은 굳이 진예의 명령이 어떤 의미인지 확인하려 들었다.

“그럼 제가 폐하와 같은 곳에 있게 되는 겁니까?”

“…….”

진예는 그의 옆을 지나치려다가 멈칫했다. 그러고 안색이 안 좋은 연무건을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명인자.

무시하고 싶지만 이제는 괜히 혼자 뒀다 죽을까 싶어 멀리 떨어뜨려 놓지도 못하고, 아프면 알아서 돌봐 줘야 하는 처지가 돼 버렸다.

귀찮은 녀석이었다. 그나마 사지는 멀쩡했고 얼굴도 관상용으로 두고 볼 만하니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궁인들 중 웬만한 사람은 다 그 정도는 충족하고 있었다. 연무건만의 특출한 점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특이한 건 무슨 말을 할지, 어떤 행동을 할지 예상을 못 하겠어서 그나마 좀 재미있다는 정도? 물론 그것도 언젠가는 무뎌질 테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진예는 일부러 대답을 주지 않고 인교문의 문턱을 넘었다.

그러자마자 이미 대령된 가마에 몸을 실었다. 가마의 문이 닫히기 전 진예가 말했다.

“담람궁으로 간다.”

담람궁은 황도의 남쪽에 있는 별궁이었다.

환에 있는 모든 궁궐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정평이 나 있는 곳이기도 했다.

* * *

담람궁은 황궁을 쓰지 못할 이유가 생기거나 피신을 해야 할 때 주로 쓰는 궁이었다. 진예가 제위에 오른 뒤에는 처음 온 곳이었지만, 상시로 관리되어 왔던지라 딱히 불편한 점 없이 들어설 수 있었다.

궁인들이야 오밤중에 서류니 뭐니 옮기느라 바빴고, 아픈 놈도 하나 끌고 오다 보니 시간이 더 걸렸다만.

그리고 그 아픈 놈에게서 의외의 소식이 들어왔다.

짧은 잠을 취하고 일어난 아침이었다. 막 식사를 마친 뒤 차를 마시고 있던 중 서엽이 난처해진 표정을 지으며 들어와 그녀에게 무건의 소식을 알려 왔다.

그가 “쓰러졌다.”라고.

진예는 어처구니가 없어 김이 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그 말을 곱씹었다.

“쓰러져?”

“예, 폐하.”

눈빛도 건방지고 맷집도 좋아서 멀쩡할 줄 알았던 건 자신의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연무건이 담람궁으로 오다가 정신을 잃었다는 소식이었다.

불빛이 없는 곳에서 봐도 구분될 정도로 안색이 확연히 안 좋긴 해서 이곳으로 옮기고 태의를 부르라고 미리 말해 둔 것이긴 하다만, 진짜로 쓰러질 줄은 몰랐다.

그렇지만 숨은 붙어 있으니 진예로서는 나쁜 건 아니었다.

그녀가 훗, 웃으며 중얼거렸다.

“뭐, 살아만 있으면 상관없긴 하지.”

같이 죽을 일은 없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서엽이 목소리를 낮춰 말해 왔다.

“……정말로 동조 현상이 일어났더군요.”

어제 익재가 연무건의 창에 맞아 타 죽은 것을 보고 하는 소리일 터였다. 읍주에서 살아나올 방법은 그뿐이니 어렴풋이 추측은 하고 있었지만, 실체를 보고서 서엽도 조금 충격받은 모양이었다.

진예도 그렇게 좋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초조해하지도 않기로 했다.

아마 연무건은 높은 확률로 그 힘이 동조 현상에 의한 것인 줄은 모르고 있을 터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화친왕도 아마 그쪽으로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을 거란 사실이고.

만약에 화친왕이 무건과 진예 사이에 동조 현상이 일어났다는 걸 알았다면 연무건을 다시 진예의 곁에 데려다 놓는 짓 따윈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제 옆에 두고 언제 죽일지 궁리를 했겠지. 그보다 더 손쉽게 진예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그 부분에 있어서는 이쪽이 정보를 하나 더 쥐고 있는 셈이니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호재라 할 만했다.

그러나 항상 좋지는 않을 터. 언젠가는 반드시 제 발목을 잡긴 할 것이니 미리 경계는 해 두어야 했다.

대나무가 그려진 작은 찻잔을 든 진예는 한 김 식은 차를 목으로 넘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오늘 날씨를 읊는 듯한 평이한 말투로 서엽에게 말했다.

“동조 현상을 끊을 방법을 알아보거라.”

“……예?”

갑자기 툭 던져진 그녀의 말에 서엽은 잠시 당황한 듯했다.

여유로운 말투이긴 했지만 사실 말도 안 되는 명령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런 반응은 의외로운 것이 아니었다. 지금껏 이미 일어난 동조 현상을 깼다는 말은 세상 어디에서도 들은 적 없었다.

비단 동조 현상만이 아니다.

생긴 명인은 없애지 못하며, 일어난 동조 현상은 되돌리지 못하고, 새겨진 각인은 지우지 못한다. 그게 이 세상의 말도 안 되는 ‘운명’이 돌아가는 방식이었다.

그러니 만약 그 방도를 찾는다고 해도 사술(邪術)에 가까울 것이다. 황제라면 결코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그런 유 말이다.

예상대로 서엽이 자신없어하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런 게 있겠습니까……?”

“없겠지. 그러니 조 후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냐. 없을 것 같으니까. 하지만 너라면 세상 어딘가에서 방도를 찾을 때까지 포기하진 않겠지.”

조서엽은 그런 미련한 사내이니.

서엽도 부정하진 않았다. 그렇다는 건 일단 어떻게든 찾아보겠다는 의미였다.

그때였다. 곤란함이 잔뜩 밴 태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숙의마마께서 깨셨다는 내용의 전갈이옵니다.”

진예는 다음 찻물을 우려내고 다시 잔에 따랐으나 잔에 입을 대기 전에 손을 멈췄다. 연무건이 쓰러졌다길래 내심 심각한 것인가 했는데, 다행히 금방 깨어난 것 같았다.

한데 태감의 말이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챈 그녀가 밖을 향해 물었다.

“알겠다. 한데 송구한 건 또 무엇이냐.”

단순히 연무건이 깨어난 소식이라면 별것 아닐 터인데, 목소리에 자신감도 없고 앞의 추임새가 이상했다. 그래서 물은 것인데 태감이 목소리를 낮춰 말을 마저 전했다.

“……숙의마마께서 조 후에게 돌아오라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대답을 듣자마자 진예는 와락 웃어 버렸다. 미처 예상치 못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하하! 방금 뭐라고?”

“이레 동안 빌렸으니, 조 후가 마땅히 숙의마마의 곁을 지켜야 한다며…….”

문을 열고 본 것도 아닌데 땀을 뻘뻘 흘리고 있을 태감의 모습이 눈앞에 선히 보였다. 게다가 안쪽에 있는 서엽의 굳은 표정도 꽤 볼만했다.

진예는 이런 보기 드문 상황을 시시때때로 만들어 주는 무건이라는 존재가 흥미로웠다. 그놈은 정말 물건이었다.

“참으로 맹랑한 놈이 아니냐.”

“지나친 만용이 아니라요?”

“이 정도야 귀여운 수준이지.”

진예가 미소를 지으며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고 굴렸다. 그러다가 천천히 목으로 넘기며 속을 데웠다.

따스한 기운에 의해 몸이 풀어지니 어제의 연무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이 연무건이 원하는 건, 그것입니다. 하늘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앞에 엎드려서, 빌고 애원하는 것입니다.〉

살며시 비틀거리는 걸음. 떨리는 몸. 그렇게 가까이 다가와 무릎 꿇던 사내.

그가 곧은 목소리로 입에 담은 그 말.

조금은, 마음에 들었다.

아니, 사실은…… 꽤 많이 흡족했다.

분명 어디 하나 잘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내인데, 어째서인지 연무건은 꺾어 놓는 맛이 있었다.

왜일까.

진예도 그 이유까지는 아직 찾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분명했다. 처음 자신을 똑바로 보던 곧은 눈이 유난히 거슬렸고, 감히 황제인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정인이라 일컫는 시건방진 입이 싫었다.

돌발 변수.

살면서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한, 황궁의 규칙에서 벗어난 자.

그럼에도…….

〈저에게 괴물이 돼라 하셔도, 그리할 겁니다.〉

이상하게 그 사내가 제 앞에서 하는 맹세의 말을 들을 때마다 살면서 크게 느껴 본 적 없는 비틀린 쾌감이 몰려왔다.

어쩌면 이게 그 명인이 부여하는 ‘운명’이라는 것의 영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정말이지, 믿기 싫지만.

그러나 동조 현상까지 일어난 걸 눈앞에서 본 마당에 그 영향이 아예 없다고 부정하는 것은 진예로서도 현실 도피밖에는 되지 않는 일이었다.

차라리 그냥 인정하고, 그것을 이용할 방법을 생각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어차피 연무건 또한 제게 휘둘려 주겠다고 나서는 판인데, 그것을 아깝게 흘려보낼 이유 또한 없는 것이었고.

진예가 밖의 태감에게 물었다.

“연 숙의가 거동은 할 수 있다더냐?”

“그것까지는 전해 오지 않으셨사옵니다.”

“그저 눈뜨자마자 서엽을 불렀다?”

대답을 듣고 진예는 또 피식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무건이 깨어나서 제일 먼저 찾은 게 자신이 아니라 서엽이라니, 이 얼마나 재미있는 광경인지 모르겠다.

도대체 서엽을 제 곁으로 불러들여서 뭘 어쩌자는 것인지도 조금 궁금해졌다. 서엽이 순순히 제게 도움이 될 일을 해 주진 않으리란 것 정도는 눈치챘을 터인데.

하여 진예는 찻잔을 탁, 내려놓고는 태감에게 명했다.

“하면 연 숙의에게 이르거라. 짐이 곧 그곳으로 갈 터이니 몸을 정갈히 하라고.”

진예가 직접 가겠다고 할 줄은 몰랐는지 서엽이 움찔했다.

“연…… 숙의마마께는 저 혼자 가도 충분…….”

‘연무건’이라고 하려다가 급히 말을 바꾼 서엽이 머뭇머뭇 말을 이어 갔다. 그에 진예가 단숨에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갔다.

“짐이 보고 싶구나.”

그 한마디에 서엽의 눈빛이 흔들렸다.

지금껏 진예가 ‘사람’에게 이 정도로 흥미를 보인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무건이 제 발로 찾아오게 하겠다며 일도 미뤄 놓고 침전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을 때부터 심상치 않다고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진예가 계획한 일이 있겠거니 하며 납득했다. 서엽이 사흘 동안 침전에 머물다 문득 왜 이런 연극을 하느냐 물었을 때 그리 대답했기 때문이었다.

〈간절해져야 더 쉽게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장 간절해질 때는 손닿을 거리에 있는데 갖지 못할 때지. 손에 넣은 줄 알았는데 사실은 제 것이 아니라 했을 때 더 집착하게 되는 법이고.〉

〈…….〉

〈집착은 사람의 눈을 까맣게 가린다. 그리고 그때, 평소에는 도무지 상상도 하지 않았던 무언가를 할 수 있게 되는 법.〉

즉, 진예가 연무건에게 바라는 건 완벽한 ‘지배’라는 의미였다. 그것을 위해 대외적으로 서엽이 진예의 ‘사내’가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한데.

‘보고 싶다…….’

서엽은 그것이 진예와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제 생각과 상관없이 현실은 돌아갔다.

진예가 거동하겠다는 뜻을 받든 태감이 곧 발을 뒤로 물렸다. 진예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후궁이 아플 땐 몰골이 어떠할지 가히 기대가 된다는 표정이었다.

* * *

자박, 자박.

진예를 중심으로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아침을 알리는 새소리 사이에 섞였다. 방금 전 편전에서 막 벗어난 진예는 발걸음을 서두르진 않았다. 무건에게 준비하라 일러 둔 지 얼마 안 된 만큼 그에게 시간을 주기 위함이었다.

전날 내렸던 눈비와 찬 바람 탓인지 바닥은 조금 얼어 있었다. 신발을 신었는데도 발이 조금 시리다 느껴질 만큼 차가웠다.

어제는 더 혹독했을 텐데 근 반일 동안 침전 앞 마당에 세워 두었으니 어쩌면 무건이 쓰러지는 게 당연하긴 한가. 아니면 그의 부상이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심각했던 것일까.

그런 잡생각을 하며 무건이 있는 건물에 발을 들였다. 방 밖에서부터 이미 희미하게 탕약 냄새와 함께 여러 약초를 태운 냄새가 뒤섞여 났다.

누군가는 포근하다 느낄 만한 냄새였지만 진예는 그다지 좋아하는 유가 아니었다. 하여 표정을 굳히고 있으니 옆에서 태감이 눈치를 보다 지레 겁먹고 미리 설명해 왔다.

“숙의마마께서 목숨이 위태롭지는 않다고 전해 들었사옵니다.”

마치 무건은 무사하니 걱정하지 말라는 듯한 말이었다. 그에 진예가 곁눈질로 태감을 슥 보았다.

“어디가 문제인지 듣긴 했더냐.”

“그것이, 내상이 워낙 심각하시다고 전해 들었나이다.”

어제 때문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진예는 얼마 전 무건이 제 침전에 들었을 때 몸에 붕대를 감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풀었을 당시 약간의 멍이 보이긴 했지만 겉으로 보기엔 심각하지 않았고, 그 이후에도 아무렇지 않아 했다. 오히려 몸을 밀어붙이며 짐승처럼 날뛰었기에 당연히 큰 문제는 아닐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는 심각한 모양이었다.

일단 오겠다고 예고를 해 놨는데 놈이 마중 나오지 않은 것부터가 이상했다.

아니, 사실은 아직 무건에 대해 잘 모르겠다. 아프지 않았어도 그는 지금처럼 안쪽에서 배짱 좋게 버티고 있었을지도. 늘 예상 밖의 반응을 보이는 그이니까 말이다.

어찌 되었든 그녀는 약초 태운 냄새가 자욱한 복도를 지난 뒤 무건이 있다는 방 앞에서 발을 멈췄다. 황제 폐하 납시오, 소리와 함께 곧장 문이 열렸다.

그리고.

“……!”

무건을 발견한 이들은 모두 재빨리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오로지 진예만 그를 똑바로 보며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평소보다 문이 느릿하게 드르르륵, 소리를 내며 닫혔다.

“무얼 하는 게냐?”

침대 앞에 서 있는 무건은 거의 알몸이었다. 가슴에 도로 붕대를 감았고, 급소를 가린 고(袴, 속바지)를 입고 있긴 했지만 그 외에는 맨살이 다 드러나 있었다.

진예는 침대 위에 어설프게 접혀 있는 옷을 보면서 그가 제 스스로 벗었다는 걸 알아챘다.

군살 없는 와중에 근육이 잘 붙은 어깨와 팔, 그리고 허리가 제법 균형 잡혀 있었다. 보통보다 훨씬 큰 키라 그런지 유난히 길어 보이는 다리 역시 탄탄해 보였다. 다른 건 몰라도 몸만큼은 웬만한 무장 못지않았다.

저절로 그곳으로 시선이 끌리는 건 당연했다. 진예의 발이 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분명 그냥 길바닥을 뒹군 놈이었을 텐데 이렇게 보니 꽤 쓸 만해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시골구석에 사는 평민의 아들이 아니라, 조서엽 같은 귀족 가문의 아들이었다면…… 그의 삶도 꽤 그럴듯하지 않았을까. 저도 모르게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한데 질문을 들은 무건은 몸을 진예 쪽으로 틀더니 방에 들어온 것이 진예뿐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영 의외인 첫마디를 던졌다.

“조서엽은 어디 있습니까.”

진예의 눈이 잠깐 문 쪽을 향했다. 들어올 때 딱히 신경을 쓰진 않았는데 아마 복도에 아직 남아 있을 터였다. 목소리가 커져 새어 나가면 그대로 다 들을 수 있을 만한 자리에 서서, 주인 잃은 개처럼 문만 바라보고 있을지도 몰랐다.

무건의 말에 괜히 의식이 되긴 했지만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진예는 대신 농을 걸었다.

“짐보다 그를 먼저 찾는다라. 왜, 당장 서엽을 들이길 원하나?”

당연히 마음에도 없는 말이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무건도 극구 사양이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를 저한테 달라는 건 같은 곳에 있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그걸 몰랐다 말하지 마십시오.”

“모르는 것은 아니긴 하지.”

전날 그가 했던 말이 아직 뇌리에 박혀 있긴 했다.

〈조서엽을 저에게 주십시오.〉

워낙 예상치 못한 말이라 진예도 잠깐 당황하긴 했었다. 다만 왜 그 말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또 왜 연무건은 그런 말을 했는지 곧 파악할 수 있었다.

그냥 연무건이 워낙 단순해서였다.

즉각적으로 원하는 대로 토해 내는 말들. 정치적 의도 따위 애초에 없지만 온갖 술수가 난무하는 황궁이기에 어쩔 수 없이 의도를 파악하게 되는데, 무건은 그것을 모두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린다.

흙탕물에서 미꾸라지가 헤엄치며 아예 진흙탕으로 만들어 버리는 형국이었다. 그런데 뒤돌아보고 나면 정작 미꾸라지 놈은 손해 보는 게 아무것도 없다. 웃기는 현상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제어할 수 없는 이 사내가 몹시 불편했다.

“하나 네가 감히 그런 말을 할 처지는 아닐 터인데.”

진예는 연무건이 침대에 허물처럼 벗어 놓은 옷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상의를 펼쳐 그에게 던졌다.

어깨에 부딪쳤다가 떨어지려는 그것을 무건이 받아 들자 진예가 한마디 했다.

“후궁의 질투가 너무 노골적이라 보기가 좋지 않구나. 어디 천박하게 궁인들이 다 보는 앞에서 그런 꼴을 하고 있었던 것이냐.”

무건이 그에 제 몸을 내려다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불만스러워하는 말 없이 순순히 옷에 제 팔을 꿰었다.

허리끈도 없어 옷깃을 제대로 여미지 않아 오히려 더 시건방져 보였지만.

“못났다 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리고 겁도 없이 진예에게 더 바짝 다가와 얼굴을 들이미는 것이 아무리 봐도, 오기 전에 보고받은 환자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거의 얼굴이 맞닿을 만큼 가까이 온 그가 목소리를 낮춰 진예에게 속삭였다.

“정인을 앞에 둔 사내의 눈에 다른 것이 보일 것 같습니까?”

햇볕이 훤한 아침에 듣기엔 지나치게 야릇한 말이었다.

진예도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놈이라면 얼마든지 낮에도 위험해질 수 있었다. 허락만 떨어진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진예의 옷깃을 파헤치고 제 입술의 흔적을 온몸 곳곳에 남겨 둘 터였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밖의 서엽에게 똑똑하게 들으라는 듯이 몰아붙이겠지.

진예는 시선을 슥 내렸다. 벌어진 옷깃 사이로 그의 몸이 살며시 흥분해 있음이 충분히 느껴졌다.

그것을 발견하고 진예가 눈앞의 이놈을 어떻게 가라앉힐 것인가 잠시 고민한 순간이었다. 무건은 그녀를 밀어붙이는 대신 다른 선택을 했다.

“…….”

무건이 그녀의 앞에 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 와중에 진예의 손을 잡아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다친 데는 없습니까.”

진예를 곧게 올려다보는 눈빛이 꿰뚫을 듯이 강했다. 그러나 말투는 녹아들듯이 부드럽다. 진예는 그 괴리감이 의미하는 바가 뭔지 몰라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이건 뭐 하는 수작이지?”

“우리가 ‘대화’라는 걸 하려면 제가 이리해야 하는 것이었잖아요?”

일전에 분명 진예가 건방지게 내려다보지 말라 한 전적이 있긴 했다. 그러나 이리도 쉽게 제 앞에 무릎 꿇으리라곤 생각지 못했기에 솔직히 당혹스러웠다.

이 눈앞의 짐승이 위험하지 않다는 신호인 건가?

미쳐 날뛸 줄 알았던 때에 한 번씩 스스로를 꺾고 들어왔다. 늘 기면서 살아야 했던 평범한 사내의 관성 같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연무건 또한 멀쩡한 사내이니. 단지 인내하고, 억누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순간에도 도발적인 행동만은 멈추지 않았다.

무건이 붙잡았던 손을 가져가 손가락 끝에 입술을 맞췄다. 그의 입꼬리가 살며시 호선을 그렸다.

“폐하께서 원하는 건 뭐든 할 것입니다. 유일한 후궁 자리를 지켜 내고, 언젠가 황후 자리에 올라야 하니까.”

황후 자리.

애초에 진예가 먼저 꺼낸 말이긴 했어도 사내놈이 그런 자리에 욕심을 내고 있으니 좀 웃겼다.

“글쎄, 그 자리를 이리 무릎을 꿇고 자신을 낮춰서 차지할 수 있을 것 같으냐.”

“황후라 하여도 결국은 폐하의 옆자리입니다. 마땅히 그리하여야지요. 짧은 시간이지만 그게 이 연무건이 파악한 당신의 방식인데, 틀렸다 말씀하실 것입니까?”

반박할 데가 없는 무결점 대답이었다.

전날에도 느꼈지만 제 생각보다는 주제 파악은 제대로 하는 놈이라 제 명줄은 오래 잡고 있을 것 같았다. 동조 현상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그와 한배에 타 버린 진예로서는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나온다고 해서 순순히 예뻐해 줄 의무가 그녀에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연무건은 제 인생에 갑자기 끼어든 불청객이었다. 그런 자를 달가워할 이는 세상에 없었다.

진예는 무건을 내려다보다가 시선 끝에 걸린 그의 붕대 감긴 가슴팍과 기묘하게 하얀 입술을 보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행색이나 안색을 보면 아픈 것이 분명한데 멀쩡한 척 꾸미고 있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됐으니 기분이 아주 좋은 건 아니었다.

게다가 이곳에 들어왔을 때부터 달갑지 않은 냄새가 후각을 자극해 몹시 피곤했다.

“약초 냄새가 진동을 하는군.”

그리 말하고 진예가 엄지로 그의 입술을 만졌다. 상당히 메말라 있었다. 사내의 것이라 얇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손가락이 닿자 움칠하는 것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다친 것은 오히려 그대 쪽이니 짐을 걱정할 처지가 아니다. 후궁이 이리 골골대서야 황후 자리를 넘보기는커녕 네가 말한 유일한 후궁의 의무를 수행할 수나 있겠느냐.”

심지어는 지난밤에 익재가 나타났을 때 구해 준 쪽은 무건이 아닌 진예였다. 지적을 받은 무건은, 그러나 무안해하지 않았다.

“그 ‘의무’라는 게 뭡니까?”

“그 답을 이레 안에 찾겠다 한 것은…….”

진예가 말하는 도중 무건이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진예가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났고, 무건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진예의 입술에 제 것이 아닌 낯선 체온이 닿았다.

진예는 눈을 크게 떴다. 무건의 얼굴이 기울어지며 입술 사이로 혀가 파고들었다. 무방비했던 잠깐의 사이를 놓치지 않고 그가 두 손으로 진예의 손목을 붙잡고 그대로 침대 위로 밀어붙였다.

털썩, 하고 두 사람의 몸이 침대 위로 떨어졌다. 무건의 몸이 진예의 몸 위로 올라오면서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가슴이 맞닿았다.

벌써부터 무건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거센 쿵쾅거림이 맞닿은 부위를 통해 선명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아, 하는 거친 숨이 진예의 입 안을 금세 뜨겁게 데웠다. 동시에 두툼한 혀가 안쪽을 휘저으며 깊게 녹아들었다. 부드럽게 진예의 혀를 끌어당겼다가 입천장을 누르는 혀 놀림에 읏, 하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타액이 섞이는 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질척하게 메워 나갔다. 그만큼 둘의 몸은 더 깊게 겹쳐졌다.

그리고 무건이 쥐었던 손목을 느슨하게 하고 제 손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을 때였다. 진예가 거부하는 뜻으로 그의 손목을 붙잡자 무건이 흠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무건이 입술을 뗐다. 그리고 거칠어진 숨을 깊게 들이켜며 진예를 내려다보았다.

진예 역시 붉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뭐 하냐는 의미의 눈빛이었다. 그것을 본 무건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이 잠깐이지만 흔들렸다.

진예가 방금 입맞춤한 사람답지 않게 지나치게 건조한 표정으로 보고 있으니 그도 긴장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내 추스른 그가 미소를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진예의 뒷말을 이었다.

“그 답을 찾겠다 한 것은 이 건방진 입이었다. 그리 말씀하실 생각 아니셨습니까.”

하여 진짜 바라는 대로 건방진 짓거리를 해 줬다는 말이었다. 진예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연무건.”

아픈 놈만 아니었으면 걷어차고 가 버렸을지도 몰랐다. 한데 진예의 마지막 남은 너그러움에 무건은 고마워할 줄도 몰랐다. 그녀의 얼굴 양옆에 손을 짚으며 그가 연신 말을 쏟아 냈다.

“제가 이리 돌발 행동을 하니 당황스러우십니까. 지금껏 폐하의 옆에서 이런 사람은 저밖에 없었겠지요.”

“알긴 아니 다행이구나.”

“예, 제가 ‘유일한’ 사람이니 다행이지요. 어찌 되었든 폐하께서 절 잊을 일은 없게 될 터이니.”

‘유일한’이라는 말이 이따위로 활용된다는 데 진예는 꽤 놀랐다. 누가 들으면 진예의 정인 또한 무건인 줄 오해할 만한 발언이었다. 이제 보니 연무건의 뻔뻔함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뻔뻔한 것은 말뿐이긴 했다. 무건은 진예가 붙잡자마자 이성을 붙잡고 멈췄고, 잠시지만 상처받은 듯한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울리지 않게도.

지금도, 목소리에서 자신감이 조금 떨어져 있었다.

“어쨌든 폐하께서 저에게 종마 역할을 원하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겠습니다.”

차라리 그런 역할이라도 맡겨 줬으면 좋겠다는 듯한 어조였다. 그러나 그의 자신감을 심어 주겠다는 이유로 빈말을 할 진예가 아니었다.

“그렇지. 그런 역할은 너 아니라도 얼마든지 있으니.”

지금껏 진예가 하지 않았던 것일 뿐, 사실 언제든지 그녀가 원하는 사람으로 불러다 성은을 내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무건이 자신을 유일한 후궁으로 삼아 달라 했지만 그 약조를 지킬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한데 진예의 말을 듣고 무건은 좀 더 비틀린 해석을 내놓았다.

“제가 아닌 사람……. 예를 들어 조서엽?”

“…….”

이건 진예가 의도한 반응은 명백히 아니긴 하였다. 이 순간 진예의 머릿속에서 서엽은 잠시 밀려나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서엽은, 아니, 사실은 세상 그 누구도 진예에게는 사내로서 의미를 가지지 않았다. 지금껏 그녀를 여인으로서 품에 안은 이 또한 연무건 하나였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그의 말대로 유일하다면 유일한 셈이다.

그렇지만 사흘간 서엽이 제 방에 나가지 않았고, 그간 무슨 일이 있었을 거라 생각하고 있는 무건이야 오해할 만한 발언이긴 했다.

진예가 그 오해를 풀지 않고 물끄러미 무건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가 침대 위의 이불을 제 손에 꾹 구겨 쥐었다. 화가 올라오는 것을 참는 듯 무건이 입을 꾹 다물고 한동안 침묵했다.

잠시 뒤 흘러나온 무건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거칠어져 있었다.

“그 붉은 천개 아래에서 그자가 폐하의 이 작은 귀에 뭐라고 속삭이더이까?”

명백한 질투. 즉각적이고도 선명한 감정이었다.

진예는 그 반응을 보며 실제로 서엽은 어땠던가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더는 버티기 힘들다며 진예의 곁을 떠나 있겠다고 했던가. 그러나 그는 진예의 사내가 되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저 주인을 무는 법을 잊어버린 ‘개’가 된다 했다.

절대적인 충성 맹세였다. 깨지지 않을 언약이었고, 연무건이 말하는 연모의 정보다 단단한 그 무엇이었다.

그러나 진예는 제가 기억하는 그 말이 아닌 다른 것을 입에 올렸다.

“은애한다고.”

“…….”

무건의 눈이 찌를 듯이 강렬하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진예의 손이 올라가 그의 굳은 턱을 감쌌다. 손가락으로 말끔한 턱을 타고 올라가 귀를 건드리자 무건의 귀 끝이 살며시 붉어졌다. 은근히 자극하는 손길에 무건이 느릿하게 호흡했다. 본능밖에 모르는 짐승이 서서히 예열을 하듯이.

그러나 무건은 이 상황에서도 진예를 더는 함부로 건드리지 않았다. 아마 그것이 무건이 그 나름대로 제 정인을 아끼는 방식인 듯했다.

보고 있자니 안쓰럽긴 했다. 자신이 아니라, 그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다른 여인을 만났다면 연무건은 꽤 좋은 사내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순수하게 사람을 연모할 수 있는 이가 또 있을까. 앞뒤 재지 않는 데다 행동에 어떤 계산도 깔려 있지 않았다.

하지만 진예는 그런 사랑에는 호응해 줄 수 없는 처지였다. 가능했다면, 애초에 조서엽을 그리 밀어내지도 않았을 터.

“제 품에 더 오래 안겨 달라고 말했지.”

실제로는 그날 밤 무건이 열에 들떠 한 말이었다.

〈이대로 제 품에 오래도록 안겨 있어 주십시오…….〉

예상대로 무건은 제가 한 말을 그대로 돌려받으니 화가 난 듯 미간을 확 일그러뜨렸다. 단순한 녀석이었다.

“귀가 녹아들 듯이 달콤하더구나.”

결국 참지 못하고 무건이 툭 물었다.

“이 연무건보다 더?”

“천한 연무건보다 더.”

진예의 답을 들은 그가 제 귀를 만지작거리는 손을 떼어 내며 도로 손목은 잡아챘다. 그러고는 자신의 사타구니 쪽으로 끌어당겼다.

진예. 곧 그녀의 손끝이 닿은 곳은 그녀의 이름자가 새겨진 바로 그곳이었다.

황궁에 처음 왔을 때는 적당했었는데 그동안 이곳에 새겨진 무건의 명인 또한 진예의 것만큼이나 진해졌다. 아니, 단순히 진해진 정도가 아니라 마치 인두로 지진 양 깊게 파였다.

그런 자신의 명인을 떠올리며 무건이 진예의 손끝을 그곳에 닿게 하고는 선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몸에 당신의 이름을 품고 있는 사람은 조서엽이 아니라 이 연무건입니다.”

운명을 믿고, 그것이 바로 하늘의 뜻이라 여기는 무건은 당당했다. 그러나 더 말해 보라는 듯 빤히 쳐다보기만 하는 진예를 보며 으득 어금니를 물었다.

“……절 이렇게 자극해서 폐하께서 얻는 게 무엇인지 알려 주시죠. 모르고 당하는 것보단 알고 당하는 편이 덜 화가 날 듯하니.”

안 당해 주겠다는 말은 결코 안 한다. 얼마 안 봤지만 그게 또 연무건다웠다. 그리고 그 정도야 진예도 충분히 알려 줄 만한 정보였다. 나아가 굳이 연무건을 보러 온 목적이라고 해도 좋았고.

“맹목, 충성.”

“…….”

“짐을 위한 미친 사냥개가 되어 다오, 무건아.”

이름을 불러 줘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무건이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 어떤 대꾸를 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가, 마음에 안 드는 듯했지만 다시 둘 사이에 서엽의 이름을 올려 두었다.

“조서엽 또한 사냥개 아니었습니까.”

조서엽이 사냥개라.

그보다는 오히려 번견에 가까웠다. 사냥개 노릇을 안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성정상 그는 다른 이를 물어뜯기보다는 이쪽을 지키는 데에 좀 더 능숙했으니.

그러나 지금은 굳이 무건과 서엽의 속성이 어떠한가에 대해 언쟁을 할 필요는 없는 시점이었다.

“앞에서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사냥개를 경계하지 않는 자는 없지.”

서엽이 진예의 사람이라는 걸 모르는 이는 적어도 황궁에 드나드는 이 중엔 단 한 명도 없을 터였다. 노출된 패는 본래 이동이 자유롭지는 못한 법이었다.

다행히 그 뜻을 알아차린 무건은 고민하는 듯하다가 물었다.

“하면 제가 물어야 할 자는 누구입니까.”

목소리는 꽤 진지했으나 사실 진예는 그가 진짜로 각오하지는 않았다고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눈앞에 있는 사내는 눈빛이 너무 맑고, 순수했다.

조서엽도 사실 꽤 착한 부류의 인간이었지만 그는 전장에서 수많은 피를 묻혀 본 이였고, 심지어는 선황의 목을 치기도 했다. 때로는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는 이였다.

둘 사이에 있는 가장 근본적인 차이였다. 연무건이 아직 ‘괴물’이 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고.

대답하지 않고 있으니 무건이 진예에게 재촉했다.

“이 멍청한 연무건이 이레 동안 답을 찾지 못하면 폐하 역시 쓸 만한 사냥개를 잃게 될 텐데요.”

쓸 만한 사냥개라기엔 아직 조건 충족이 다 안 되긴 했다. 그렇지만 진예는 그 점을 지적하진 않았다, 아직은.

“제법 똑똑해졌다만…… 그 답을 듣는다 해서 네가 실행에 옮길 수 있겠느냐.”

“일단 말씀을 주시지요.”

진예가 그린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근래 가장 거슬리는 자가 누구인지 입에 올렸다.

“화친왕이다.”

제 유일한 피붙이 진평.

답을 들은 무건은 역시나 말을 잇지 못했다.

제 놈을 황궁에 되돌려 놓은 녀석이 화친왕이니 어느 정도는 예상하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혹은 아무리 그래도 가족인데, 하는 생각인 걸까. 제아무리 원수 같아도 피가 이어진 사이에서는 그럴 리 없다는?

무건은 머뭇거리다가 이내 힘없는 목소리를 뱉어 냈다.

“화친왕이라면 폐하의 아우가 아닙니까.”

사이가 썩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그리 뒷말을 중얼거리는 걸 보면 후자가 맞는 모양이었다.

진예의 예상대로 답을 내 줘도 당장 실행하러 가겠다는 말은 안 하는 걸 보니 무건의 ‘각오’라는 건 역시나 막연한 것이었음이 분명했다.

진예가 그런 무건에게 빈정거렸다.

“왜, 선량해 보이는 자는 물기 싫으냐?”

“그런 것이 아니라.”

무건이 곧장 부정했으나 뒤이은 말을 제대로 내놓지 못했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설마 화친왕이 자신을 도와줘서 주저하는 걸까. 진예는 무건의 반응을 천천히 뜯어보았다.

여전히 진예를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눈이며 표정에 혼란스러움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 사람 역시 폐하를 그리 생각하고 있는 겁니까?”

아니면 남매끼리 서로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상황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

그야 평범한 삶을 살아온 무건에게 단지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로 가족을 죽인다는 행위는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는 일일 수는 있겠다.

하지만 연무건의 순진한 생각과 달리 이미 진예는 제 아비와 어미를 밟고 이 자리까지 기어 올라온 이였다.

다만 일반 백성들에겐 적당히 양위가 된 양 퍼뜨리긴 했으니 무건은 그에 대해 짐작을 못 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저런 반응이 영 의외인 것은 아니었고, 하겠다 안 하겠다 당장 결정하리라 기대하지는 않았던 진예였기에 그리 실망하지 않았다.

“역시 괴물이 되기엔 네 눈은 아직 너무 순하구나.”

진예의 일침에 무건이 한쪽 주먹을 꾹 쥐었다. 진예는 그런 그의 기색을 살피다가 무건의 몸을 밀어내며 침대 밖으로 발을 뺐다.

몸을 일으키며 그녀가 무건을 내려다보았다. 무건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황궁에서 평생을 살며 온갖 인간 군상을 다 경험한 진예에게 무건의 표정을 읽기 어려운 때가 있는데, 지금이 그러한 순간이었다. 방금 전까지 화친왕을 죽이라는 말에 혼란스러워하는 듯했던 기색이 걷히고, 어느새 그가 진예의 표정을 읽어 내듯이 빤한 시선을 보내왔다.

뭐지?

잠깐 진예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으나, 불편해 못 참을 정도의 질문거리는 아니었으므로 적당한 말로 그들 사이의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이레 동안 몸 잘 추스르며 조 후에게 그 방도를 잘 캐내 보거라.”

“……그러지요.”

뭔가 켕기는 대답이긴 했으나 진예는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림자가 비치자 양쪽으로 문이 열렸다. 그러자마자 예상대로 서엽이 나타났다.

서엽은 진예의 옷이 들어갔을 때와 달리 살며시 흐트러진 것을 알고 표정을 굳혔다. 그러나 그 외에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조용히 허리를 숙였다. 진예는 그런 서엽의 어깨를 도닥이며 지나갔다.

“연 숙의를 잘 가르쳐 놓도록. 기대하마.”

“예, 폐하.”

담담한 대답을 들으며 진예는 건물 밖으로 빠져나갔고, 서엽은 안쪽으로 들어가 연무건에게 예를 갖췄다.

“숙의마마, 조서엽이옵니다.”

그 인사 소리를 들으며 진예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서엽의 표정이 평소보다 더 냉랭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절대로 제 위가 될 수 없다 생각했던, 심지어는 저보다 한참은 신분이 낮았던 사내에게 존대를 하는 저 상황에 서엽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두 남자를 붙여 놓는 게 불안하긴 했다. 누구 하나가 선을 잘못 밟으면 그대로 칼부림이 날지도 모르겠다.

막연히 그런 생각을 하며 진예는 마당에 내려섰다. 그러자 태감이 다가와 진예에게 말을 건넸다.

“폐하, 지난밤에 황궁에 나타난 익재들에 대해 심상치 않은 점을 발견했다는 보고이옵니다.”

진예는 그에 편전으로 빠르게 발을 돌리며 물었다.

“새로운 능력이라도 나타났더냐.”

“그런 것은 아니옵고.”

태감이 졸졸 쫓아오는 와중에도 조심스럽게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그것을 보며 진예는 그리 좋은 징조는 아닌 것 같다, 생각했다.

* * *

진예가 편전에 들어서서 자리에 앉자마자 금군의 지휘권자인 위장군이 독대를 요청했다. 허락을 받고 안쪽으로 들어온 그는 작은 검은 상자를 손에 들고 있었다.

위장군이 그것을 제 앞에 내려놓은 것을 본 진예는 슬며시 미간을 좁혔다. 이미 열기 전부터 희미하게 썩은 내가 났다.

그것은 익재의 냄새였다. 신체 일부를 잘라 가져왔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위장군은 설명보다는 직접 열어 보기를 청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신이 그 의미를 예단하기 어렵사옵니다.”

예컨대 자기는 잘 모르겠으니 직접 보고 판단하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진예는 그것이 겸양의 말이라는 걸 눈치챘다. 정말로 모른다면 애초에 어전에 이리 당당히 내놓을 리 없었다. 그 말인즉 너무 큰 일이니 제 입에 올리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혹시나 그 짐작이 틀렸을 때 책임을 회피하려는 의도도 없진 않을 터였다.

진예는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상자에 손을 뻗어 고정하느라 꽂아 놓은 쇠막대를 뺐다. 그러고 뚜껑을 살며시 여는 순간 악취가 더 진해져 저도 모르게 불쾌감에 신음을 흘렸다.

그렇게 역겨움을 참으며 겨우 확인한 것은 아마 익재의 팔 부위 같았다. 그곳에 한자 두 개가 새겨져 있었다.

華華

빛날 화 두 글자. 그 크기는 손톱보다도 작았다.

“이것이 무엇이냐.”

“죽은 익재의 팔이옵니다. 이번에 황궁을 범한 익재들의 팔에 모두 그 한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모두.”

“그렇사옵니다, 폐하.”

말해 봤자 입만 아픈 사실이지만 익재들은 사람의 언어를 알지 못했다. 당연히 한자를 쓰지도 못했다. 하면 이것은 사람이 흔적이라는 의미였다.

게다가 이 한자는 화친왕의 ‘화’ 자와 같은 글자다. 물론 특별한 글자는 아니고 아주 흔히 쓰는 한자이긴 하지만 굳이 이 시점에 나온 것은 분명 수상한 일이었다.

더욱이.

〈황도로 익재가 무리를 이루어 오고 있다는 말을 정위 백이 알려 왔다고 하옵니다.〉

그런 일이 있었으니.

아니, 단지 수상한 정도가 아니라 화친왕이 얽혀 있다고 보는 것이 맞을 터이다. 진예는 이 예감이 단지 기우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겉으로 보면 한없이 순해 보이는 놈이었지만 실체는 그렇지 않았다. 울먹이면서도 저에게 그리도 사랑을 쏟아부어 준 선황제와 선황후를 가장 먼저 배신한 놈이었다.

그때는 진예도 깜빡 속아 넘어갔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런 짓을 눈 한 번 깜짝 안 하고 해낼 수 있는 담대함이 쉽게 나오는 것은 아닌 법이고, 무엇보다 그 옆에 있는 정위가 진예와는 대척점에 서 있었다.

정위는 화친왕 진평의 사부로, 부모보다 더 가까이 늘 그의 옆에 있었던 데다 선황 때부터 황태자인 진예 대신 진평을 제위에 올려야 한다고 굳게 믿던 자였다. 그 믿음이 진예가 황제가 되었다 해서 누그러졌을 리 없었다. 다만 숨죽이고 있었던 것일 뿐.

그리고 그런 자를 내치지 않고 가까이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는 언급할 가치도 없었다.

“위장군은 이에 대해 어찌 생각하는가.”

진예의 질문에 위장군은 어깨에 잔뜩 힘을 넣었다. 긴장하고 있는 듯했다.

“제 짧은 소견이 도움이 되겠습니까.”

“듣고 판단할 테니 말해 보거라.”

“서식지에서 황궁까지 오는 동안 피해가 있었다는 보고는 받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고, 이 팔의 흔적은 사람의 손을 탄 흔적이니 이는 곧 익재를 사람의 뜻대로 조종하고 있다는 의미로 읽힙니다.”

진예의 생각과 정확히 같았다.

문제는 익재를 사람의 의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은 지금껏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했다면 대체 어떻게?

문제는 그 방법이었다.

그때, 얼마 전 진평이 찾아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사병을 모은 건 아직 남아 있는 익재들 때문이었습니다.〉

사병을 모은 건 익재 때문이다. 분명히 그랬다.

그때는 더 볼 것도 없이 거짓말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만약 아니라면. 예컨대 그 말을 반대로 해석할 여지도 있었다.

‘사병을 모은 건 익재를 다루기 위해서,’

……라는 의미로.

정확하게 익재들을 어찌하겠다는 말은 없었으니 말이다.

복잡해져 오는 머리와 악취에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진예는 피곤하다는 목소리로 축객령을 내렸다.

“잠시 혼자 있어야겠다.”

“물러나옵니다, 폐하.”

위장군이 자리에서 일어나 뒷걸음질 쳐 밖으로 나갔다. 드르륵, 문이 조심스레 밀리는 소리를 끝으로 넓은 방 안에 진예가 홀로 남았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던 그녀는 제 앞에 놓인 상자를 보다가 뚜껑을 탁 닫았다. 냄새도 모양도 역겨워서 도무지 더는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상자를 한쪽에 밀어 놓은 진예가 낮게 중얼거렸다.

“화화…….”

새겨 넣으면서 설마 이후에 발견 못 하리라 여겼다면 이쪽을 너무 쉽게 본 것이다. 진평도 그 정도로 아둔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한자를 왜 새겼는가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 중 하나였다.

이쪽을 향한 경고, 혹은 본인이 알아보기 위한 표식.

어느 경우든 몹시 불편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익재를, 그들의 힘을 이용할 방도를 그가 쥐고 있다는 것이니까.

거기까지 떠올린 진예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자신은 모르고 화친왕은 아는 무언가가 있다.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정위의 존재도 못내 거슬렸다. 저번에 그냥 아무것도 못 하도록 몰락을 시키거나 명분이 생긴 김에 목을 날렸어야 했다.

그리고 화친왕 진평의 옆에 따라다닌다는 위도양이라는 여자. 진예도 본 적이 있었다. 평범하게 생겨서 그다지 눈에 띄진 않았기에 단순 호위일 거라 생각했는데, 서엽의 말에 의하면 진평이 운영하고 있는 상단에서 꽤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했다. 그리고 다른 나라와의 교두보 같은 역할을 한다 했던가.

진예는 검지의 손끝으로 책상 위를 두드렸다. 톡, 톡. 작은 소리가 느릿하게 이어졌다.

‘내가 너무 황궁에만 틀어박혀 있었나…….’

제위에 오르고 2년 가까이는 익재와의 전투니 뭐니 하면서 황궁 내에 있기는커녕 황도에조차 머무는 시간이 길지 않았다. 하지만 그동안 떠돌면서 솔직히 진예도 밖으로 나돌아 다니기 조금 지쳤고, 돌보지 못했던 정사도 더 꼼꼼히 확인해야 했기에 익재 토벌 전쟁 이후로는 거의 운신한 일이 없었다. 실상 황제였기 때문에 전국 각지의 소문은 가장 먼저 접하는 편이었고, 그렇기에 굳이 황궁 밖으로 나갈 필요성 역시 크게 느끼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너무 주변국들의 소문에 취약해진 게 아닌가 싶기는 했다.

특히 익재에 대해서는, 환 제국에 가장 많은 서식지가 있긴 하지만 다른 나라도 피해 규모나 그들에 대한 연구에 대해서는 뒤처지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히 살필 필요가 있었다.

어쩌면 저 상자 속 익재의 팔에 새겨진 글자가 제 예상대로 진평의 소행이 맞는다면 뒤통수를 제법 얼얼하게 맞는 셈이 되는 거였다.

단순히 익재를 두려워하며 처리하는 걸 넘어서, 그것을 이용한다. 그 힘을 제 손에 넣는다.

몇 번 두드리던 진예의 손이 펼쳐지며 타악, 내리누르듯 책상을 쳤다.

‘위험하다.’

그리 생각했을 때였다. 태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화친왕 전하께서 드셨사옵니다.”

“뭐라……?”

상자를 열어 본 시점에 이미 다시 나타나서 들쑤셔 놓으리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시점이 너무 일렀다.

진예의 반응을 들은 태감이 난처해하며 다시 고했다.

“화친왕 전하께서 드셨사옵니다.”

진예는 제 옆의 상자를 힐끗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저것은 지금 이 자리에선 아무 의미 없는 것이었다. 결정적인 증거라 하기도 힘들었다.

“들라 하라.”

허락의 말이 떨어지자 곧 화친왕 진평이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은 화려한 노란 비단 옷을 입고서 허리에 장신구를 주렁주렁 매달고 나타난 그가 안쪽으로 발을 들이며 예를 올렸다.

“홍복을 누리소서, 황제 폐하.”

저를 모두들 닮았다 떠들어 대는 이목구비의 아우였다. 그래서인지 어렸을 때 부모가 그를 편애하면 할수록 더욱 부러워했던, 제 열등감을 자극하던 녀석.

더 이상은 열등감 같은 못난 감정을 느끼지는 않지만, 거슬리는 것은 매한가지다.

진예는 그의 뒤로 나타난 위장군을 한 번 보고는 화친왕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대답은 영 의외의 것이었다.

“바깥에 동백꽃이 움트려 꽃망울이 맺혔다기에 누님과 후원이나 걸을까 하여 찾아왔습니다.”

“…….”

때아닌 한가한 소리를 지껄이는 것에 진예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진평이 고개를 살며시 들며 눈웃음을 지었다. 그런 아우의 반응을 보던 진예가 입꼬리를 올렸다.

“내 아우가 참 착하기도 하지?”

“황궁에서 벗어나 여유를 벗 삼아 살다 보니 누님 생각뿐이옵니다.”

입에 기름칠도 하지 않고 거짓말을 술술 지껄인 진평이 가볍게 기침을 몇 번 했다. 기침 소리가 깊은 걸 보면 연극을 하는 건 아니고, 진짜로 고뿔이 걸린 듯했다.

“감기라도 걸린 게냐.”

“어제 비를 제법 맞아서요.”

그러게 어제 침전 앞에 왜 세워 뒀냐는 의미였다.

무건은 쓰러지고, 진평은 감기에 걸리고. 말하다 보니 기분이 나빠졌지만 진예는 너그러움을 가장했다.

“태의원에 탕약을 준비하라 일러두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한 방울 입에 대지도 않고 갖다 버릴 놈이 말만 잘했다.

진예가 몸을 일으킨 뒤 진평을 지나쳐 곧장 편전 밖으로 나섰다.

제 누나를 위해 찾아왔다는 진평의 말은 거짓이었지만, 어딘가에 꽃망울이 맺혔다는 말은 진실일 터였다. 낮에 부는 바람은 어제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것을 느끼며 진예는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진평이 익재를 다루는 법을 알게 됐다면, 그 해결책은 간단했다.

이젠 다섯 군데 남은 익재의 서식지. 그 모든 곳을 뿌리 뽑고 이 환 제국의 땅에서 그 괴물들이 더는 살아갈 수 없게 괴멸시키는 거였다.

이용할 생각조차 할 수 없도록.

마지막 한 마리까지.

마침 겨울도 끝나 가고 있으니 때가 적절했다.

그리고.

‘동조 현상…….’

그 자체가 달갑지는 않지만 익재와의 전투가 벌어지고, 전장이 확장된다면 지금은 밥버러지에 불과한 제 명인자도 어느 정도 쓸모가 생기긴 할 터였다.

진예는 그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연무건의 쓸모라.

자신이 부정해 왔고, 그 녀석이 그토록 바라 마지않을 일을 제 손으로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황후 자리를 내준다는 것이 결코 제 모두를 내준다는 의미는 아니었으므로.

따지고 보면 고작 자리 하나일 뿐이었다.

연무건의 진짜 목적이 황후 자리인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것을 차지하면 제 마음도 차지할 수 있는 것이라 멋대로 착각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망상은 언젠가는 깨진다.

그리 생각을 마무리하고는 진예가 뒷짐을 지며 뒤돌아섰다.

고작 후원 잠깐 나가는 것에 불과했지만, 어제의 난리로 인해 호위가 대폭 강화되었다. 주변에는 금위들과 내관, 궁인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 사이로 진평과 그를 따라다니는 위도양이 보였다.

왜인지 도양 쪽으로 시선이 가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설마 자신을 보는 건가 싶었는지 주위를 돌아보다가 고개를 살며시 숙여 눈을 피했다.

〈위도양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멈추었었지.〉

〈예, 이 여인은 크게 특별한 건 없습니다만 얼마 전에 데려온 이가 회백국에서 온 역술인이라 하옵니다.〉

〈역술인? 무당을 말하는 것이냐.〉

〈무당이라기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 같은 게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얼마 전 서엽과 위도양에 대해 나눈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때는 사람 마음을 읽는다니 너무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냐며 넘겼지만 이쯤 되니 그 또한 의미심장해 보였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

그리고 조종당하고 있는 익재들.

모두 그녀의 조력으로 만들어 낸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진평이 황궁을 떠나기 전부터 위도양이 꽤 오랜 시간 진평의 곁에 머물렀다는 건 진예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왜 붙어 있는지는 사실 잘 몰랐다.

그렇지만 사람 사이라는 것이 기묘하여, 무언가 이유가 있지 않다면 또한 그리 쉽게 오랜 인연을 이을 수 없는 법이다.

남녀 사이라면 특히나.

‘……너도 그런 것인가.’

연모의 정.

저 여인도 혹시 그런 감정에 매달리고 있는 중일까.

한데 너무 빤히 바라보고 있었던 것인지, 어느새 제 옆으로 다가온 화친왕 진평이 핀잔을 주었다.

“그러다 도양의 얼굴이 뚫어지겠습니다.”

그제야 진예가 도양에게서 시선을 떼며 자연스럽게 덧붙였다.

“아름다워서 눈길이 가는구나.”

변명이라고는 해도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 급조한 티가 났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같은 여인의 얼굴이 아름다워서 눈길이 간다니.

듣던 진평 역시 약간 어처구니없는지 눈썹을 까딱였다. 마치 ‘무슨 속셈이세요?’라고 묻는 듯이.

“그야 도양이 어여쁘긴 합니다만, 어디 누님만 하겠습니까?”

그리고 그 말에서 제 아우의 평소보다 훨씬 더 날 선 경계를 느꼈다. 말투에서부터 짙게 느껴지는 그 감정에 진예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너도 그런 거군.’

화친왕 진평이 저 아이를 마음에 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조서엽이 자신에게 그러하듯이.

또 연무건이 자신에게 그러하듯이.

그놈의 연모라는 감정을 품고 있는 것이다.

때론 제 전부를 걸고 지켜 주고 싶게 하고, 때론 제 모든 걸 희생해서라도 가지고 싶어서 안달 나게 하는 그것.

진예는 곁눈으로 다시금 도양을 확인했다. 진예도 느낄 만큼이니 제 주인의 감정 상태를 눈치챘을 터.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얼굴 표정이 약간 달라져 있었다.

미묘한 변화였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모를 정도로 둔하지 않았다.

“…….”

진예는 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속으로 조소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전부 다 어리석게도 정 하나에 이끌려 달려간다. 그것 때문에 평탄하게 흘러갈 제 인생이 망쳐져도 아랑곳도 하지 않았다.

……대체 그 사랑이라는 것이 뭐길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지?

그것을 처음으로 가르쳐 줘야 할 부모를 제 손으로 영영 몰아냈으니, 이제는 물어볼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쉬우냐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 대답하겠다.

그냥 이대로 살아갈 뿐이다, 아무에게도 기대지 않고.

그것이 진예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의 방식이었다.

조금 외로워도 괜찮았다. 옆에 누군가를 둠으로써 발목 잡히고 싶지 않았다. 한 푼어치로도 환산할 수 없을 만큼 하찮은 것에 목매달며 일희일비하는 감정 따위 평생 몰라도 된다.

오래전, 기억도 나지 않은 때에 제 마음의 철창은 이미 굳게 닫혔다.

그것을 풀 열쇠는 이미 사라졌으며, 되찾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난 이렇게 당신을 간절히 기다렸노라 말하고 싶었습니다.〉

설령 하늘이 멋대로 짝지어 준 명인자가 제 삶에 끼어들었다고 해도.

진예는 도양을 보지 말라는 듯 옆에서 제 시선을 가리는 화친왕에게서 몸을 돌려 후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실 꽃이 피든 말든, 그 또한 그녀에게는 관심 사항이 아니었기에 어서 이 시간이 지나가길 바랄 뿐이었다.

연무건과 있을 때와 달리 한 마디 한 마디 속내를 읽어야 하는 황궁의 화법은 확실히 피곤한 구석이 있었으므로.

* * *

진예가 나가자마자 예정된 대로 조서엽이 들어왔다. 하지만 뭘 해야 하는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는지 한동안 우두커니 서서 무건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일단 옷차림부터 추스라고 하더니 도로 밖으로 나갔다.

얼마 뒤 돌아온 그와 함께 온 궁인들이 방 한가운데에 있는 상 위에 다기들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향긋한 향을 풍기는 다섯 가지 정도 되는 찻잎들이 준비되었다.

서엽의 말인즉 황궁에서의 예법은 다도(茶道)에서부터 나온단다. 무건은 일단 그가 말한 대로 다기들 앞에 앉긴 했지만 상황 자체를 조금 이해하기 힘들었다.

조서엽은 무인 아니었나.

기껏해야 뭘 가르친다고 해도 칼 다루는 방법 정도겠거니, 하면서 너무 쉽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솔직히 어느 방면이든 몸을 쓰는 건 꽤 자신 있었기에 기대도 하고 있던 바였다.

한데.

〈조 후도 이 기회에 이레 동안 연 숙의를 많이 가르쳐 놓거라. 언제까지나 저리 상놈처럼 입을 놀리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니.〉

그때 진예가 한 말 때문인지 조서엽은 뜬금없이 예법부터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가 교자상 옆에 서서 무표정하게 무건을 내려다보며 엄격하게 일렀다.

“일단 폐하 앞에선 그 해요체는 금물입니다.”

우선 평생 쓰던 말투를 고치라고 종용했다.

뭐, 제 말투를 고치는 건 둘째 치고 무건은 시골 놈인 저와 다르게 정갈하고 똑 부러지는 그의 말소리를 멍하니 듣다가 한마디 했다.

“조 후께서는 이젠 둘만 있을 때도 존대를 쓰십니다?”

“숙의마마, 그것은 형식 없는 상놈의 어투입니다.”

가차 없이 들어오는 지적에 무건은 반박할 말을 잃었다.

상놈이라 상놈의 말을 쓰는데, 이제는 다른 말을 쓰라고 하니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이후 압존법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신나게 떠들어 댄 조서엽이 다음엔 찻잎이 담긴 다기의 뚜껑을 열라 하더니 냄새를 맡게 했다. 기본적으로 흙냄새와 닮았지만 찻잎들 각각의 향이 조금씩 달랐다.

그렇지만 살기 위해 먹는 방법밖에는 배운 적 없는 무건은 그것들을 우려 마시면서도 솔직히 맛의 차이를 거의 느끼지 못했다. 그냥 혀가 죽을 듯이 뜨거웠다. 하지만 서엽은 그에게 호록호록 소리가 나게 마시면 안 된다며 거듭 강조했다.

마침내 조용히 마시는 법을 터득한 무건이 다기를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그러고 서엽을 올려다보았다.

아까부터 서엽은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무건을 보고 있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교자상 앞에 서서 제 정면만 보고 있었다. 어디 특정한 것을 보고 있나 했지만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는 것을 보니 그도 아니었다.

실질적으로 서엽이 무건을 좋아할 이유는 하등 없고, 무건 역시 그를 그리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지만 이 태도는 좀 너무했다.

하여 무건이 먼저 말꼬를 텄다.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십니까.”

서엽의 시선은 여전히 허공을 향해 있었다. 무건은 차라리 이편이 낫긴 한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에게 물었다.

“폐하께선 어찌 아우를 죽이려 하십니까.”

그제야 서엽이 눈을 내려 무건을 확인했다. 그는 닫힌 문을 한번 힐끗하고는 답을 주었다.

“화친왕이 숙의마마를 이곳에 데려다 둔 이유와 같습니다.”

화친왕이 자신을 이곳에 데려다 둔 이유.

솔직히 무건은 정확하게 알지는 못했다. 그냥 자신을 이용해서 무언가를 하려는 속셈이라는 것만 알 뿐.

하지만 화친왕이 황제인 진예에게 누군가를 이용해 무언가를 하려 한다면, 그것이 ‘위험하지 않은’ 일이 될 확률이 아주 낮다는 것 또한 알긴 하였다.

“……화친왕이 폐하를 죽이려 합니까.”

“황실의 일원으로 태어나 제위에 오르지 않겠다 생각하는 것 또한 그들의 의무에 반하는 일이긴 하지요.”

“…….”

그러니까, 황위 찬탈.

화친왕이 그것을 꿈꾸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진예의 말대로 얼마 전 ‘다음 대 대환의 후계를 확고히 하라.’라는 서엽의 요청은 화친왕을 죽이라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는 게 명확해졌다.

하지만 그렇다면 의문이 따라온다.

진예는 자신에게 ‘사냥개’가 되라고 했지만, 화친왕의 목적은?

화친왕은 자신을 진예에게 보내서 무엇을 하려 했을까. 그것이 가장 흐릿했다. 얼마 전 찾아왔을 때도 직접적으로 진예에게 무엇을 해 달라 부탁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차가 식습니다.”

침묵이 길어지니 서엽이 그 말로 무건의 의식을 깨웠다. 샛길로 빠지려는 차였던지라 ‘때마침’이라고 해도 좋았다.

하긴, 화친왕의 속셈이 어떠하든 무슨 상관일까. 자신은 자신의 길만 잃지 않으면 되었다. 그리고 지금 연무건이 가야 할 길은 하나였다.

진예.

모든 것을 걸고 그녀를 지키는 것.

그리고 다시 남은 제 모두를 제 정인에게 바치는 것.

그것만 잊지 않는다면 남들이 어떻게 흔들든 관계없었다.

무건은 차호에서 꽤 길게 우러난 차를 잔에 따랐다. 흙색처럼 검은 차는 조금 씁쓸했다.

조금 전 배운 대로 잔을 소리 없이 내려놓으며 무건이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조 후께선 폐하를 오랫동안 모셨으니 누구보다 그분을 잘 아시겠습니다.”

“…….”

“어떤 분입니까, 그분은?”

물을 때 이미 쉽게 답을 내놓으려고 하지 않으리라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였다. 서엽이 시선을 도로 허공으로 돌리며 목석처럼 딱딱하게 대답했다.

“제가 꼭 답을 드려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에 무건은 속으로 웃었다. 제가 황궁의 화법을 모르는 만큼 서엽이나 진예는 천한 놈들의 화법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물론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그러니 매번 재미있어하거나 당황하거나 둘 중 하나겠지.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무건은 예상했다.

“정부보다는 후궁이 좀 더 잘 알아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분의 겉도 속도 말입니다.”

도발을 들은 서엽이 후, 하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지금까지의 존대를 집어치우고 사나운 눈으로 무건을 내려다보았다.

“이거, 마마라고 존대해 주니 주제를 모르고 기어오르시는군.”

툭 내뱉은 서엽이 제 허리춤에 찬 칼을 검집째로 손에 쥐더니, 휙 소리가 날 만큼 빠르게 휘둘러 무건의 목 아래에 찔러 넣었다.

그가 무건의 얼굴을 들어 올리며 추궁했다.

“그 천한 입으로 다시 한번 지껄여 보거라. 뭘 어쩐다고?”

역시나 서엽의 역린은 진예였다.

하필 그의 역린이 제 정인이라는 것에 좀 화가 났지만 지금은 그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를 자극해서 뭐든 얻어 내야 했다.

무건은 일단 그의 칼끝을 손등으로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의 옆을 지키고 있으니 서엽도 훌륭한 무인일 테지만, 기세라면 자신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무건이 그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폐하의 전부를 알고 싶다고 했습니다. 겉이든 속이든. 당신 같은 정부 따위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다시 한번 강조하는 말에 서엽이 이를 으득 깨물었다. 눈빛만큼은 무건을 당장 베어 버릴 듯 날카로웠다. 살기라 해도 좋았다.

“입에서 흘러나온다고 다 말이 되는 줄 아느냐. 감히 네놈이 폐하를 모욕하다니 죽고 싶은가 보지?”

그러나 무건은 가볍게 그를 비웃었다.

“어차피 죽이지도 못할 거면서 위협은 왜 합니까?”

“……!”

콰창!

그 순간 교자상 위에 있던 다기가 쓸려 나갔다. 젖은 찻잎이 바닥에 흐트러졌고, 그 와중에도 깨지지 않은 동그란 찻잔은 구석까지 도로로록 소리를 내며 굴러갔다.

무건의 말은 틀렸다. 다른 놈이 이 정도 도발을 했으면 후궁이든 뭐든 서엽은 이미 칼을 뽑아 눈앞의 목을 베어 버렸을 터였다.

그만큼 눈앞이 새하얘졌지만 진예의 안위를 위해 차마 죽이지는 못하는 자라 간신히 참은 거였다.

서엽이 잠시 흥분으로 거칠어진 숨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무건을 노려보며 더는 건드리지 말라는 양 경고조로 멋대로 작별을 고했다.

“오늘은 더 할 말이 없으니 물러가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다시 오지요.”

그러나 무건이 그의 손목을 콱 붙잡아 발을 멈추게 했다.

“대답하지 않고 어딜 갑니까.”

서엽은 목구멍 너머로 씨발, 욕을 삼켰다. 그가 손목을 확 빼내며 무건을 다시 마주 봤다.

“……알아보긴 했다만 이거 생각보다 더 미친놈이군.”

그리고 본래 이런 유의 말싸움에서는 개싸움에 능한 무건이 한 수 위였다. 무건은 흥분한 서엽과 달리 여유롭게 맞받아쳤다.

“미쳐 보인다니 다행이긴 합니다. 폐하께서 저에게 미친 사냥개가 되라고 했으니까요.”

“하면 그대로 실행이나 할 것이지…….”

“아니, 그런데 궁금해서 말입니다.”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오는 무건의 무례함에 서엽이 미간을 확 구겼다.

그것을 보면서 무건은 높으신 분들은 원래 이런가 싶었다.

어찌 되었든 목표만 이루면 다 좋은 결과론적인 사람들.

심지어는 진예를 연모하는 조서엽조차 그리 다르지 않은 듯했다. 조서엽이 그녀를 좋아하는 것은 다분히 불쾌한 일이었지만, 이런 부분을 발견하는 것 역시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천하를 다 가진 폐하께서 왜 저리 초조해하시는지 알고 싶어서요.”

무건의 말이 이런 말을 할 줄 전혀 예상지 못했던지 서엽이 반문했다.

“……뭐라고?”

“바로 옆에 있으면서 느끼지도 못했습니까?”

물으면서 무건이 조서엽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가 제 귀에 똑똑하게 쑤셔 박을 수 있도록 또박또박 말을 읊어 주었다.

“아무것도 가지기 싫다는 건 사실 다 가지고 싶다는 말이랑 같은 거야. 부족한 것 없이 다 가져 본 조 후께선 아마 이런 말, 이해할 수 없겠지만 이 시골구석에서 자란 천한 연무건은 그게 뭔지 너무 잘 알지.”

“…….”

“사실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는 환경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스스로를 납득시켜야 하니까 필요 없다 말하는 것뿐. 이 세상에 아무것도 필요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살아 있으면서 욕망이 없는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건이 며칠 그녀를 보면서 느낀 것은 깊은 ‘결핍’이었다.

〈짐은, 그런 어리석은 사랑은 싫다.〉

제 이득은 철저히 계산하면서 그렇게 아무 감정 없다는 듯이 말하며 행동하는 그녀에게서 위화감을 느꼈다.

사랑이 싫다니.

낭만주의자의 변론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무건은 세상에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관심과 무관심 중에 더 좋은 것은 당연히 관심이고, 기왕이면 더 따뜻한 것을 원하는 게 인간의 본능이었다.

이건 단지 자신이 진예에게 거부당하고 있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저…….

“하여 제가 묻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폐하께 혹시 그 ‘다 가진 사람’이 화친왕인지?”

스스로조차 돌보지 않는, 아니 돌볼 생각 자체를 못 하는 그녀의 황폐한 마음이 안타까워졌다.

진예가 명인자가 아니었더라도 그리 느꼈을 것이다. 그 비어 버린 마음을 무엇으로든 채워 주고 싶다고.

그러기 위해 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서엽은 예상대로 아무런 대답도 내놓지 못했다. 무건은 그것이 긍정의 의미임을 알아차렸다.

답을 찾아낸 무건은 서엽의 팔을 놓고 제 옷에 구겨진 곳은 없는지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이레까지 갈 필요도 없었네.”

소매를 다듬고는 그가 서엽을 지나쳤다. 서엽은 지금껏 제가 깨닫지 못한 것을 지적한 무건의 말에 조금, 충격을 받은 듯했다.

무건이 굳이 그의 당혹감을 달래 줄 이유는 없었으므로 차갑게 말을 이었다.

“내일부터 오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상놈의 말투는 알아서 고칠 테니까요.”

그리고 자신은 화친왕을 찾아갈 차례였다.

진예가 말한 미친 사냥개가 될 시간이 왔다.

* * *

별궁인 담람궁은 환 제국에서 가장 아름답다 평가받는 만큼, 사실 비상시에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가끔 격무에 시달리던 황제들이 잠시 쉬고 싶을 때 회피 목적으로 찾아오는 곳이기도 했다.

그 역할에 걸맞게 후원이 담람궁의 면적 반 이상을 차지했다. 엄중해야 하는 편전 옆에도 유희를 위한 호수와 전각들을 지어 놨지만 후원 일원은 궁인들조차 함부로 발을 들일 수 없는 곳. 따라서 그 사치스러움은 더했다.

실상 담람궁은 진예도 아주 어렸을 적에 몇 번 와 봤을 뿐 황위에 오른 뒤에는 별 인연이 없던 곳이라, 기억에 남은 것이 그다지 존재하지 않았는데 이리 와 보니 얼마나 제 선조들이 방탕하게 놀았는지 알 만했다.

가운데 정자를 지어 놓고서 둘러 앉아 술잔을 돌려 마실 수 있도록 폭이 좁은 물길을 낸 것도 있었고, 인공 폭포를 만들어 놓고 그 위에 누각을 지은 것도 있었다.

지나다니다 보니 낚시 목적인지 잉어를 풀어 놓은 깊은 호수도 있었는데, 언뜻 보면 누각처럼 생긴 배가 띄워진 채였다. 진예는 저 배 안에서 제 후궁을 여럿 끼고 놀았을 선조도 있었을 것이라는 데 제 백성들의 한 달 치 식량을 걸어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얼마나 한량처럼 놀았을지 뻔히 보이는 것들이라 솔직히 말하면 진예는 기가 질릴 참이었다.

어쩌면 눈이 다 녹아서 바닥이 질척해 조금 기분이 나빠서 더 안 좋은 점만 보이는 걸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그런 후원 역시 금원(禁苑)이라, 궁인들과 내관들 그리고 위도양까지도 더는 들어오지 못하고 진예를 지킬 최소한의 금위들만 20보 이상 떨어진 거리에서 따르고 있었다.

진예가 넓은 후원을 반식경 정도 걸었을 때쯤이었다. 잎이 없는 버드나무 가지가 늘어져 있는 호숫가를 지날 무렵 화친왕 진평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고서야 진예가 그를 돌아보았다.

화친왕이 코가 빨개진 채 소매로 제 입을 가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진예는 어릴 적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도 조그만 녀석이 만날 감기를 달고 살았었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부터 넌 몸이 꽤 약했었지.”

그의 기침 한 번이면 어미는 큰일이라도 난 듯이 안절부절못했다. 궁 안에 있던 궁인들이 전부 진평을 수발들기 위해 모여들었고, 조금만 더 아프다 싶으면 아비 또한 정무를 뒤로하고 방에 찾아왔었다.

멋모를 때는 진예도 동생이 걱정되어 찾아갔던 적이 있었다. 혹시나 누가 많이 아프다고 전해 주기라도 하면 눈가에 살며시 눈물을 매달고 문틈으로 몰래 살피기를 수차례였다.

그러다가도 제 부모에게 둘러싸인 화친왕을 보면서 질투를 한 적도 있었다.

‘제가 아플 때는 찾아오신 적 없었잖아요…….’

제 아비 어미 앞에서는 입 밖으로 내밀지 못하는 그 말들을 삼키면서, 뺨을 부풀리며 혼나지 않기 위해 제가 있어야 할 자리로 되돌아갔다.

당시엔 몸이 안 좋은 것조차 제 몫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면…… 그러면 저도 어미의 따뜻한 손길 한번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면서.

참으로 못난 기억이었다. 그리 한심했으니 결국 부황과 그런 결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진예는 그것이 꽤 큰 비극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큰 병은 없이 잔병치레만 좀 했으니 다행이지요. 요즘엔 꽤 괜찮아졌습니다. 이 감기도 어제 비를 맞지 않았으면 걸리지 않았을 거고요.”

반면 화친왕에게는 늘 희극이 따른다 할 만했다.

부황과 모후가 있을 땐 있는 대로 평탄하게 살았고, 사라진 세계에도 그는 잘 적응을 해 나가고 있었다.

영악해서인 걸까.

진예는 뒷짐 진 손에 힘을 주어 꾹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그가 기다리고 있을 화제를 먼저 꺼내 줬다.

“그렇지, 어제 선물은 잘 받았다.”

그러자 진평이 고개를 기울이며 천연덕스레 대꾸해 왔다.

“선물? 흠, 제가 뭘 보냈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나는군요.”

“잘린 팔을 들여다보니 네 이름이 적혀 있더구나.”

“아, 그 선물 말입니까.”

편전에서 이미 그것을 ‘잘 받았다.’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냄새가 숨길 수 없을 만큼 지독했으니까.

진예는 그의 가식 어린 행동 하나하나를 살피면서 걸음을 멈춰 세웠다.

어제의 비 때문에 눈이 내린 흔적이 없어졌지만 호수에는 아직 살얼음이 남아 있었다.

얼음 사이사이로 비치는 맑은 표면에 두 사람분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잘 받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정 백이랑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던 것인데.”

진평은 애써 회피하지 않고 속내를 그대로 드러냈다. 알아도 몰라도 그다지 상관없는 정보라는 양.

너무도 여유로운 태도였다. 진예로서는 상당히 거슬리는 면면이었다.

“선물 준비가 처음이라 그런지 서투르더구나.”

“어차피 놀라실 거라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고작 익재 몇 마리 나타난다고 진예가 죽을 것 같았으면 이미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을 터였다.

“그래서, 그 선물을 보낸 목적은?”

“목적 같은 거창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요즘 선황제, 선황후 폐하께서 제 꿈에 그리도 자주 나타나더이다.”

“…….”

그야 명분이 따로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핑계가 꿈이라니 너무 하찮아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게다가 진예가 제위에 오르고 나서는 거의 금기어에 가까워진 선황과 선황후를 입에 올리다니, 제대로 고삐가 풀린 모양이었다.

‘준비가 다 됐다, 이건가?’

그간 화친왕을 너무 방치해 둔 모양이었다. 진예의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그는 제 설계를 완성해 가고 있는 듯했다.

그렇지만 초조해하지 않아도 된다.

진예는 지금껏 단 한 번도, 그보다 자신의 능력이 처진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한 보 걸어 나가면 자신은 두 보를 걸어가면 되는 일이고, 그가 백 리를 내다보면 자신은 천 리를 내다보면 된다.

이번에는 진예가 스스로 다시 한번 그들 사이의 금기어를 꺼냈다.

“내 직접 대의멸친의 꿈을 이뤄 드렸는데도 뭐가 그리 억울하신지 모르겠구나.”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의 손으로 직접 자식을 버리고 이 세상을 등지게 해 드렸는데. 그리고 필요하다면 화친왕 역시 얼마든지 그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말 속의 가시를 알아차린 진평이 작게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게 말입니다. 하여 꿈이 금방 지겨워지더이다.”

그는 이런 당연한 말을 하는 것조차 피곤하다는 양, 어딘지 무료해 보이는 말투로 말을 술술 이어 나갔다.

“그러나 그 자리는 순리대로라면 이 화화(華華)의 것이었을 터이니, 제자리로 돌려 놔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치 재밌는 장난감 하나 가지고 놀고 싶다 칭얼대는 것처럼.

황좌의 무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한없는 가벼움에 진예는 조소했다. 이런 아이의 어디가 그리도 황제에 어울렸다 한 것인지, 진예는 이해되지 않았다.

진예가 비틀어진 것처럼 그 역시 본질적으로 어딘지 비틀려 있었다. 진평의 눈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저 유희 거리에 지나지 않는 듯했다.

자신보다, 훨씬 더 위험한 녀석이었다.

“화화…… 귀여운 별칭이로군.”

“그렇지요? 도양이 지어 준 것입니다.”

진예는 그와 오늘 나누는 화제 중 도양에 대한 것이 그나마 가장 흥미롭다 여겼다.

“그 아이를 꽤 아끼는 모양이다. 늘 떨어지질 않던데.”

적당히 장단을 맞춰 주니 진평이 제 왼쪽 팔 소매를 걷었다. 팔꿈치에 가까운 곳에 세 글자의 한자가 쓰여 있었다.

“제 명인자입니다.”

……위도양이라고.

도양이 호위처럼 따라다니기에 주종 관계라고만 생각했지, 명인자인 줄은 몰랐다. 서엽에게서도 들어 본 적 없는 사항이니 알고 있는 자가 극소수일 거란 유추가 가능했다.

각인은 했을까.

그러지 않는 게 나았을 텐데.

진평이 소매를 도로 잘 추슬렀다.

“절 제 주인처럼 따라서 좀 문제이긴 합니다만, 차차 나아지겠지요. 기다리는 중입니다.”

“글쎄, 기다릴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구나.”

반사적으로 튀어나간 대꾸에 진평이 과연 그럴까, 그런 의문을 담아 고개를 슬며시 기울였다. 진예는 그 근거 없는 자신감에 재를 뿌려 주었다.

“네놈한테 제자리가 어디 있느냐. 황궁을 떠난 지 벌써 5년이다. 네 자리는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아. 착각하지 말거라.”

“없으면 만들면 되는 것이고……. 게다가 누님께서도 이 화화의 선물 덕분에 황궁을 벗어나 이곳에 피신을 오시지 않았습니까.”

“두려워서 피한 줄 착각하는 모양이로군.”

진예는 구더기를 무서워할 위인은 아니었다. 언제든 제 발로 밟아 죽일 자신이 있었다. 그저 뒤처리가 귀찮고, 제가 더러운 꼴을 보지 않아도 얼마든지 처리할 방도가 있으니 나서지 않는 것에 불과했다.

한데 진평이 소매로 입을 가리고 기침을 했다. 기침 소리 사이로 희미하게 웃음소리가 섞여 있었다.

“누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힘만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전부가 아닙니다.”

그리 일침을 놓은 진평의 말투는 마치 무지한 아이를 일깨우는 듯한 어조로 변해 갔다.

“그래서 당신께서 지배하는 이 세상이 전혀 새롭지 않은 것이에요.”

“…….”

“안전하지만 심심하고, 심지어는 지루하지.”

진예가 제 아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진평이 양쪽 입꼬리를 당겨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이 어딘지 소름 끼치는 구석이 있다 했는데, 자세히 보니 눈이 웃고 있지 않았다.

진평이 어딘지 서늘해 보이는 검은 눈동자로 진예를 바라보며, 느릿하게 읊조렸다.

“이 화화는…… 그런 것이 정말 싫습니다, 누님.”

듣는 진예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허황한 헛소리에 흔들리기엔 그녀가 살아온 삶이 그리 녹록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라를 호오(好惡)에 의해 다스린다면 그게 바로 폭군의 표상이라 할 만했다.

게다가 ‘지루하다’……?

진예는 제가 죽지 않기 위해 아비를 죽였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군주로서 인정받기 위해 2년 동안 전장을 떠돌았다.

걸어온 길이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하지만 진예는 또한 알았다. 제가 가시밭길을 걸어야지만 제가 다스리는 나라가 평온해진다. 당장의 편함을 위해 그 길을 피하면 자격 없는 자들이 난립하며 황궁은 순식간에 투견장처럼 변할 터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진예의 눈에 가장 자격이 없는 자는 화친왕이었다.

“이제 보니 네 녀석도 꽤 돌아 버린 놈이로구나.”

“누님께서도 썩 평범하진 않으시니까요. 그 핏줄이 어디 가겠습니까.”

그놈의 저주스러운 핏줄.

그것만 아니었다면 사실 진예도 평범하지 않은 범주에서 벗어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가정 또한 이제 와서는 의미가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황가의 핏줄이었고, 이미 황제의 자리를 차지했다. 환의 황제이기 때문에 여태껏 살아남은 것이었으며, 그것이 아니면 자신의 본질을 잃게 되는 셈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선황과 선황후의 그림자는 그녀를 평생 따라다닐 터였다.

그것 또한 자신의 숙명이었다.

너무 무거워서 때로는 내려놓고 싶은.

그러나 이제는 목숨보다 더 중요해진 자신의 모든 것.

하니 진예는 진평의 지루함을 풀어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가 겨우 맞춰 놓은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그리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칼을 뽑아 들 생각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 제 품에 있는 비수를 전혀 숨기지 않았다. 어차피 부딪침은 오래전에 예고된 것이고, 누가 먼저 목덜미를 물어뜯느냐의 문제이긴 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때 화친왕이 문득 고개를 돌려 추위에 헐벗은 후원의 모습을 돌아봤다.

“……안타깝네요. 이 아름다운 담람궁의 후원에 아직 꽃이 피지 않았다니.”

이쯤에서 대화를 마무리할 모양이었다. 진예로서도 피곤한 대화를 계속 이어 나갈 이유가 없었으므로 도로 호수 쪽으로 몸을 틀었다.

“마음에 안 들면 그만 꺼지거라. 나도 조만간 선물이나 하나 준비해 보내 줄 터이니 부디 그것으로 마음을 달래 보도록 하고.”

진예가 한 말을 들은 진평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선물이야 늘 좋지만, 조 후는 저도 좀 무섭습니다. 얼마 전에 아무도 모르게 들어와서 내빈각을 헤집어 놨지 뭡니까?”

아무도 모르긴. 다 알고 기어이 무건을 황궁까지 데려와 놓고선.

뻔뻔한 소리를 지껄이는 그에게 진예가 빈정거렸다.

“지루함을 떨쳤을 테니 다행 아니냐.”

“그렇긴 합니다만…….”

이러다가 또다시 같잖은 대화가 길게 이어지는 것 아닌가 싶었던 찰나였다. 진평이 말하는 도중 가까운 곳에서 희미하게 발소리가 섞였다.

땅을 묵직하게 누르는 것이, 필시 짐승의 것은 아니었다. 진예가 신경을 예민하게 돋웠다.

“누구냐.”

먼저 발소리가 난 쪽을 돌아본 것은 화친왕이었다.

그의 표정이 묘해진 것을 곁눈으로 확인하고 진예 또한 고개를 돌렸다. 얼굴을 보기 전에 굵은 저음이 먼저 귓가에 흘러들어 왔다.

“홍복을 누리소서. 황제 폐하, 그리고 화친왕 전하.”

연무건의 목소리였다. 그가 두 손을 모으고 깊이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이곳에 나타나서는 안 되는 자를 발견한 진예가 눈썹 사이를 좁혔다.

“감히…….”

저절로 목소리에 분노가 배었다.

“후궁 따위가 짐의 허락도 없이 금원에 발을 들이느냐!”

그녀가 큰소리를 내자 뒤늦게야 금위들이 와 무건을 둘러쌌다. 진예가 완전히 몸을 돌려 무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소리친 것을 듣고 무건도 잠깐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그는 지금 이곳 후원의 담을 넘은 행위가 얼마나 무례한 것인지 모르는 무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지, 알 리가 없었다. 아무도 연무건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을 테니.

하지만 황제가 머무는 궁의 후원은 허락되지 않은 자들은 들어올 수 없는 내밀한 공간이었다.

게다가 화친왕이 옆에 있었다. 진예의 계획에 두 사람이 지금 만나는 경우는 없었다.

진예는 앞으로 한 발짝 내밀며 무건에게 서릿발처럼 차갑게 일갈했다.

“앞에서 내관들이 막지 않았을 리는 없을 터인데 이리 왔다면 설마 하찮은 이유 때문은 아니겠지, 연 숙의?”

무건은 잠깐 고개를 들어 진예의 얼굴을 살폈다가 도로 시선을 바닥으로 향했다. 예상보다 훨씬 엄한 반응에 제가 심각한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인지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겁을 먹고 물러난다면 연무건이라 할 수 없었다. 그는 발을 뒤로 물리는 대신 금위들이 경계하는 한가운데에서 진흙 바닥에 두 무릎을 댔다.

“……잘 모르겠습니다, 하찮은 이유인지 아닌지.”

“고하거라.”

“그 옥안을 뵙고 싶어 왔나이다.”

진예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이놈이 정녕 미친 건가 싶었다. 엄격한 분위기라는 점을 눈치챘으면, 적어도 그럴듯하게 받아들일 만한 다른 변명이라도 짜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임기응변이 없는 놈도 아니니 충분히 다른 변명을 떠올리는 게 가능했을 터였다.

한데 무건은 머리를 굴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유가 고작 그것이다?”

“오로지 그것이옵니다.”

거듭된 무건의 대답에 옆에 있는 화친왕이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빛냈다.

그런데 담백했던 말투와 달리 무건이 긴장했는지 침을 삼켰고, 목울대가 천천히 오르내렸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있는 듯 입술을 몇 번이고 달싹였지만 쉽게 뒷말을 잇지 못했다.

거기서부터 진예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제가 아는 연무건은 어떤 상황이 닥치든 이만큼 긴장할 녀석이 절대로 아니었다. 워낙 뒤가 없는 놈이라 앞밖에 볼 줄 모르니까.

진예가 말없이 내려다보며 그의 뒷말을 기다렸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인가 하고.

“이 연무건은 폐하의 명인자입니다. 한데 어찌 이리 홀대만 하십니까…….”

앞부분만 들어도 개소리였다.

심지어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제 놈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처연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연무건이 처연?

무슨 이런 이상한 광경이 다 있나 싶었지만 실제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중이었다. 조서엽이 잠깐 사이에 쓸데없는 걸 가르쳐 놨나 의심이 싹텄다가 금세 사그라들었다. 뒷말이 더 가관이었기 때문이다.

“어제도 하루의 반을 침전 앞에 눈비를 맞으며 서 있었습니다. 거기에 갑자기 나타난 익재 때문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는데도 한 번을 봐 주시지 않으니 이리 찾아올 수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조서엽이 유능하긴 하지만 그에게도 이 정도의 헛소리를 가르치는 능력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건은 지금 약간의 사실을 섞어 완벽한 거짓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불과 한 시진도 안 된 때에 진예가 직접 무건을 찾아간 바 있으니까.

무건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는 진예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리 바보라도 이런 말을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을 리 없을 텐데, 왜 이런 거짓말을 하는지 의도가 가늠되지 않았다.

그러다 진예는 제 옆의 화친왕의 존재를 의식했다.

‘이 녀석 때문인가.’

금위들은 속여 봤자 소용없다. 내내 진예를 따라다녔으니 그들은 진실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다. 거짓으로 넘길 수 있는 자는 이 자리에 오로지 화친왕, 진평뿐이었다.

그러나 왜 하필 이 시점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연극을 해야 하는 것인가.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진평을 속여서 해가 되는 것은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진예는 미심쩍어하면서도 무건의 거짓말에 동참해 주었다.

“버러지 놈이 짐의 명인자라는 이유 하나로 기고만장하는구나.”

그러자 무건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진예와 똑바로 마주쳐 오는 눈은 억울하다는 뜻을 한껏 내비치는 중이었다.

“왜, 명인자인 제가 아닌 조서엽입니까……?”

“…….”

이번 질문에는 쉬이 답하지 못했다.

연무건의 말에서 약간의 진심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거짓을 입에 담는 와중에도 무건은 기묘하게 제 마음을 섞어 드러내고 있었다.

자신을 선택해 달라고.

자신은 서엽과 공존할 수 없다고.

하지만 진예로서는 허락하기 어려운 그릇된 주장이었다. 그들은 공존해야 했고, 자신은 어느 한쪽으로 무게 추를 기울일 생각이 없었다.

“연 숙의가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듯하구나. 투기는 후궁의 덕목이 아닐 터인데, 가려도 모자랄 판에 짐의 앞에서 드러내는 것이냐?”

“천한 놈 또한 욕심내는 법은 알고 있으니까요.”

반항적인 말과 함께 무건은 진예가 그어 놓은 선을 세게 밟았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할지 알고 있을 텐데?’

눈으로 그리 물었지만 연무건은 똑바른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하여 그가 바라는 바겠거니 하며 진예는 본래 성질대로 축객령을 내렸다.

“역겨운 소리 더는 듣기가 힘들다. 금위는 무얼 하느냐. 어서 숙의를 끌고 가거라!”

그녀의 날카로운 외침에 금위들이 무건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자 무건은 그들이 잡는 것을 뿌리치고 바짝 엎드렸다.

“오늘 저녁엔 저를 찾아 주십니까?”

“…….”

진예는 금위들에게 빨리 내보내라고 고갯짓만 했다. 그러자 도로 금위들이 그의 양팔을 붙잡았고, 무건은 내쳐지면서도 질투에 눈먼 흔한 후궁 연기를 해 댔다.

“폐하, 폐하! 오늘은 꼭, 꼭 저를……!”

……왜 저렇게 필사적이지?

자신을 부르며 후원 밖으로 끌려 나가는 무건을 보았지만 진예는 끝까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뜬금없이 나타나서는 쓸데없는 짓을 하니 왜 저러나 싶었다. 의미도 모르겠고 그냥 추하기만 했다.

물론 저 연무건이라면 꿍꿍이속이 있을 터였다. 최근 진예가 예측할 수 없는 거의 유일한 인간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럼에도.

“어처구니가, 없군…….”

연무건이라는 인간을 제대로 아는 자가 보면 아무도 속지 않을 이 시대의 발연기라 할 만했다.

한데 무건은 끌려가는 도중에도 그 어설픈 한 편의 연극을 끝맺지 않고 이어 갔다.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진예에게 제발 자신을 찾아 달라며 소리친 것이다.

시끄러운 녀석…….

후원에 오려는 건 어쨌든 고요를 즐기려는 목적도 있는 것인데, 그걸 제대로 깨 놓은 무건이었다. 그에 진예는 조금 피곤해진 한편, 이상하게 긴장이 풀어짐을 느꼈다. 헛소리를 지껄이는 진평 때문에 날카롭게 벼려졌던 신경이 살며시 느슨해진 기분이었다.

그런데 무건이 설계한 게 무슨 이상한 계획인지는 모르겠지만, 속이려 한 대상이었던 진평은 오히려 방금 전보다 표정이 심각해져 있었다.

그것을 발견하고 진예는 진평에게 시선을 두었다. 그러자 진평이 안타까워라도 하는 양, 무건이 사라진 곳에 시선을 둔 채 작게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어제 융경궁에 찾아갔는데 연 숙의가 좀 침울해 보인다 했습니다.”

“뭐?”

진예는 그게 말이나 되냐는 뜻으로 반문한 것인데, 진평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예컨대 ‘나는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등과 같은.

반응을 들은 그가 조금 전 드러냈던 자신의 명인이 새겨진 자리에 손을 갖다 댔다. 하지만 의도한 것은 아니고, 무의식중에 나온 행동인 듯싶었다.

위도양과의 첫 만남이라도 떠올리는 건가.

진평의 시선은 무건이 사라진 자리도 아니고, 진예도 아닌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숙의의 말대로 그가 누님의 명인자 아닙니까. 어차피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기왕이면 서둘러 받아들이시는 편이 낫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그리 덧붙이며 잠깐 딴생각을 하는 듯했던 진평이 진예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어째서인지 꽤 진지해 보였다.

그러나 진예는 제 아우가 진심 어린 조언을 하는 거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믿을 만큼 순진하지는 않았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쌓이다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영향을 주는 법이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언젠가는 꽤 거대한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다. 그리고 진평은 능히 그런 것까지 계산을 하며 내뱉을 놈이었다.

그런 그가 진예에게 어차피 비웃음밖에 사지 않으리라는 점을 알 텐데도 지금 이런 언급을 하는 이유는 말하자면 은밀한 경고인 셈이었다.

명인의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저놈이 당신을 배신할 수 있겠습니다, 하는.

그리고 그건 무건의 연기에 진평이 속아 넘어갔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았다.

‘설마…….’

진예는 이게 연무건이 촌극을 벌인 연유인가 싶었다.

아니면 무건이 그리 멍청한 행동을 할 리 없었다. 이외의 다른 가능성은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더하여 이건 진예에게는 전혀 해 될 게 없는 상황이었다. 진예의 계획 속에서 두 사람이 여기서 만나는 일은 존재치 않았다. 그런데 무건이 나타났고, 시기를 단단히 꼬아 놓았다.

진평은 방금 전 진예가 보내겠다는 ‘선물’이 무건인 줄 전혀 모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머리를 쓸 줄 아는 놈이라고?’

믿기지가 않았다.

그런데 연무건이 간 크게 금원에 발을 들이며 화친왕 앞에서 거짓 어린 읍소를 한 결과 만들어진 상황이라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화친왕이 이곳에 온 것도 얼마 되지 않았으니, 알고 왔든 모르고 왔든 그를 속이려는 계획은 급조한 임기응변인 셈…….

진짜로 다 의도한 거라면 연무건에 대한 평가를 재고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지금은 그 모든 것을 일단 뒤로 미루고 무건이 시작한 연극의 끝맺음을 지어야 할 때이지만.

“명인자를 받아들이든 말든 그건 짐의 내밀한 일이다. 친왕이 상관할 바가 전혀 아닐 터인데?”

날카로운 반응을 되돌려주자 진평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했다는 듯, 당신이 어디 바뀌겠냐는 듯.

“……그렇긴 하군요. 그럼 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누님.”

애초에 설득할 마음도 없었기에 그는 쉽게 발을 물렸다. 진평이 허리를 숙여 이번엔 진짜로 그만 가겠다는 뜻을 비쳤다. 그에 진예가 그에게도 나름의 경고를 해 줬다.

아무래도 자신의 미친 사냥개가 그의 목덜미를 물 준비를 하는 것 같으니.

“혹여 딴마음 품을까 싶어 미리 말해 두는 것이데, 연 숙의를 가지고 장난질을 할 생각은 애초에 하지 말거라. 네 목이 날아갈지도 모르니.”

그것을 또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진평이 여유 만만하게 대꾸했다.

“연 숙의를 꽤 아끼신다는 의미처럼도 들립니다만……. 고삐 풀린 망아지에 대한 걱정입니까?”

“마음대로 해석하거라.”

“다음에 뵐 때까지 평안히 지내시지요, 누님.”

너야말로.

진예는 천천히 멀어지는 진평을 보며 속으로 그리 중얼거렸다.

그가 조금 멀어진 뒤 몸을 돌려 다시 맑은 호수를 내려다보았다. 저벅저벅, 고적한 후원을 자신감이 배어 있는 발소리가 가로질렀고, 그녀의 주위에 금세 정적이 밀려들었다.

얼음이 낀 호수에도 일렁임은 있었다. 진예가 잠시 머리를 비운 채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때 작은 실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에 얼굴이 미미하게 발개졌을 무렵, 20보 밖에 물러나 있던 위장군을 손짓하여 가까이 불러들였다.

“태감에게 연 숙의가 지금은 뭘 하고 있는지 알아보라 이르거라.”

잠시 뒤 다시 위장군이 나타났을 땐 태감과 함께였다. 태감이 조심스러운 말투로 그녀에게 아뢰었다.

“숙의마마께서는 융경궁으로 돌아가셨나이다.”

“태의의 치료는 다 되었던 건가.”

“듣기로는 늑골 부위의 골절이 워낙 심하니 앞으로 근 한 달간은 무리하여 움직이면 아니 된다 일렀을 뿐 별다른 이야기는 없었다 하옵니다.”

무건이 읍주에서 기어 나온 게 적게 쳐서 3주는 되었을 터인데 앞으로 한 달을 더 기다려야 한다면 회복에 꽤 오랜 기간이 소요되는 셈이었다.

“한데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무엇이냐.”

“숙의마마께서 화친왕 전하와 독대를 하고 있다 하옵니다.”

들으면서 진예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과연 둘 중 진짜 영악한 놈은 누구인가.

아마 그리 오래지 않아 가려질 터였다.

* * *

좁은 가마의 벽에 툭, 머리를 기대자 몸도 저절로 흘러내리듯 힘이 빠졌다. 금위에게 끌려 나오면서 거칠게 다뤄진 탓에 다 낫지 않은 가슴 부위에 통증이 몰려왔다. 그것을 가마에 타기 전까지 겨우 참아 냈던 무건이 더는 견디지 못하고 팔로 제 몸을 감싸며 인상을 썼다.

숨이 조금씩 엇박자를 내며 흘러나가고 들이켜지기를 반복했다. 천천히 평상을 되찾긴 했으나 가히 살면서 겪은 최악의 몸 상태라 할 만했다. 어제 계속 눈비를 맞은 영향도 없다고는 못 할 것 같았다.

손이 희미하게 떨리는 게 느껴져 무건이 힘을 넣어 주먹을 꾹 쥐었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담금질했다.

‘견뎌.’

고작 이깟 것도 이겨 내지 못하면 황궁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터였다. 이곳은 자신이 여유롭게 살아가던 시골구석과는 달랐다.

철저한 약육강식. 질서 있는 듯 보이나 그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오로지 정점에 서 있는 포식자의 힘 하나뿐. 화려하게 겉을 포장해 두었지만 연무건 제 눈으로 보기엔 오히려 짐승들의 규칙에 가까웠다.

황제 앞에서는 문무백관이 고개를 숙인다. 황궁 내의 궁인들부터 시작해 궁문을 지키는 무관들까지 그 수많은 이들이 오로지 황제의 의전을 위해서 그 자리에 있는 것이며, 드넓은 궁은 작은 창 하나마저 한 사람의 편의에 맞춰 구성되어 있었다.

그 속에서 연무건이라는 가진 것 없는 자가 제 자리를 찾으려면 철저한 복종만이 답이다.

하지만 그 수준에 가만히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그때, 무건은 가마가 천천히 내려가는 것을 느끼고 기대었던 몸을 똑바로 세웠다. 곧 땅에 닿은 가마의 문이 열리며 융경궁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내관들의 말에 따라 가마에서 내렸지만 따라오겠다던 화친왕은 아직이었다. 잘됐다. 마음의 준비가 다 된 것은 아니었으니까.

한데 화친왕보다 더 골 아픈 자가 무건이 들어가야 하는 전각 앞에 서 있었다.

흐트러진 곳 없는 단정한 옷차림과 꼿꼿한 자세, 무표정한 얼굴. 그러나 뭇 여인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할 만큼 수려한 이목구비의 사내.

누군지 알아챈 순간 무건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조 후?”

무건이 네가 왜 여기 있냐는 의미를 담아 보았으나 조서엽은 천연덕스럽게 허리를 숙였다.

“퇴궐을 하려다 보니 황제 폐하께서 이레 동안 숙의마마의 곁에 있으라 명하신바, 신이 그를 사사로운 감정으로 어길 수는 없는 법인지라 이리 기다리고 있었사옵니다.”

“…….”

제 입으로 앞으로 찾아오지 말라고는 했어도 당연히 순순히 물러나리라 생각은 안 했다. 그래도 오늘 용건은 끝났다고 스스로 말했으니 나타난다 해도 내일 정도가 아닐까 싶었는데, 제가 조서엽을 과소평가한 듯했다.

무건이 침묵한 채 바라보고 있으니 서엽이 더욱 공손히 허리를 굽히면서도 퍽 건조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이자는 눈과 귀가 없는 셈 칠 터이니 괘념치 마시지요.”

하긴, 이 정도 철면피가 아니라면 진예의 곁에 그리 오래 머물지 못했을 터였다. 그것도 그토록 지독한 외사랑을 품은 채로.

뭐라고 설득하려 해도 어차피 들어 먹지 않을 자라 무건은 깔끔하게 포기하고 먼저 발을 옮겨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내관들이 종종걸음으로 분주히 따르는 가운데, 서엽이 그 뒤를 바짝 붙었다.

칼을 들고 있는 서엽의 손이 무언가를 꾹 참는 듯, 거세게 움켜쥐어져 있었다.

* * *

거세를 해서 그런지 몰라도 내관들의 손은 웬만한 여인들의 손가락보다도 더 가느다랬고, 손등은 더 보들보들해 보였다. 그 손들 여러 개가 흠 하나 없는 깨끗한 다기를 상 위에 분주하게 펼쳐 놓았다.

왔다 갔다 하며 발소리라거나 달그락거리는 소리 한 번쯤 날 만한데 오랜 세월 궁에서 살아온 내관들은 기척을 숨기는 데 능했다. 문을 지나는 발걸음 소리도, 다기들을 내려놓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무건은 늙은 내관이 다과상을 들일까요, 하는 질문을 한 후에 제 앞에 펼쳐진 광경에 솔직히 가만히 앉아 있기가 너무 힘들었다.

제가 살던 집에서는 이렇게 상전처럼 대우를 받은 경우가 없었다 보니 저도 모르게 안절부절못하게 됐다. 하지만 이 또한 변화된 환경에 연무건이 적응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무건은 의자에 앉아 아무도 모르게 제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손으로 주먹을 꾹 쥐었다.

그런 그를 옆에 선 서엽이 말없이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는 묵묵히 기다리다가 마침내 내관들이 발길을 끊고 문을 닫았을 때, 뚜껑이 닫힌 다기들을 하나하나 열어 보며 담긴 찻잎들을 살폈다. 무건이 종류를 잘 모르니 먼저 확인하는 듯했다.

서엽은 먼저 우롱차의 찻잎을 차호에 넣고 쌓여 있을 먼지를 씻어 내며 무건에게 나직이 물었다.

“마마께서 어찌 화친왕과 독대를 하신단 말입니까.”

무건은 서엽이 한 손으로 천천히 행하는 행동들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하면 안 되는 것입니까.”

서엽이 씻은 물을 차반에 따라 버리는 동안 차향이 은은히 올라왔다. 꽤 향긋한 냄새에, 무건은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아 주먹 쥐었던 손을 천천히 펼쳤다. 서엽은 그 모습을 힐끗 확인하고는 무슨 목적으로 하는지 모를 말을 흘렸다.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후궁이 친왕과 사사로이 대화를 나누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지요.”

혼내는 건지 뭔지.

목소리가 워낙 담담해서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무건은 오히려 진예보다 서엽이 알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예와 함께 있을 때는 그녀 외엔 아무것도 돌아보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한데, 그것 말고는 솔직히 무엇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무건은 한참을 그 말의 의도를 고민해 보았다. 내일 온다던 조서엽이 뜬금없이 융경궁으로 돌아온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이상한 일투성이였다.

어차피 조서엽은 진예를 위해서만 움직이는 자이니, 그걸로 미루어 생각해 보면…… 답은 하나긴 했다.

“……퇴궐하려다 다시 온 게 설마 화친왕 때문이었습니까? 왜요, 제가 그에게 넘어갈까 봐?”

따지듯 물었으나 상대는 크게 개의치 않아 했다. 서엽이 대답은 하지 않고 차호의 뚜껑을 열고선 조로록, 물을 따르고 얼마 우려 내지 않은 채 무건의 잔에 따랐다.

서엽이 마시라는 듯 손짓하는 것에, 무건이 빤히 보다가 이내 찻물을 입에 머금었다. 솔직히 문외한이라 차 맛은 잘 모르겠고, 뜨겁기만 했다. 혓바닥 데여서 말 좀 그만하라는 의도가 아닌가 싶게.

무건이 살며시 인상을 쓰자 그제야 서엽이 입을 열었다.

“마마께 그럴 배짱이 없는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배짱이 없는 게 아니라 그럴 마음이 없는 것이다.

무건은 제가 폄하당한 것 같아 기분이 나빠졌지만 괜스레 반박하는 것까지는 참았다.

잠시 말을 끊은 서엽은 제 잔에도 찻물을 따르고는 긴 손가락으로 잔을 감싸며 마셨다.

날 때부터 귀한 신분이었어서 그런지 똑같은 차를 마시는데도 서엽은 확실히 행동 하나하나에 기품이 배어 있었다.

황궁에서의 예법은 다도에서 나온다.

그리 말했던 서엽이 마치 다음에는 이렇게 마시라고, 훈수를 두는 것 같이 시범을 보이는 것에 무건은 마지못해 그를 유심히 보았다. 잠시 후 빈 잔을 내려놓은 서엽이 평이한 어조로 말을 이어 갔다.

“화친왕에게 넘어가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 아니라, 함부로 위험해질까 하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화친왕은 뱀의 새끼입니다. 마마께서 그를 당해 내실 수 있을 거 같습니까?”

질문을 받았지만 무건은 저자가 뱉은 말의 속뜻이 제가 이해한 것과 같은 게 맞나 한참 생각해야 했다. 제가 예상했던 범위 내의 말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건이 말없이 보고만 있자, 서엽이 채근해 왔다.

“여쭙고 있는데 어찌 답을 내놓지 않으십니까.”

그제야 무건이 설마, 하는 마음을 품으며 얼버무렸다.

“아니, 조 후께서 설마 날 걱정하는 것인가 하고…….”

연무건을 걱정하는 조서엽이라.

아무리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조합이었다. 그런 가능성이 어떻게 생기지? 한데 지금 조서엽이 한 말은 분명 ‘그런’ 것이었다.

위험해질까 봐 경고하는 거다? 어처구니없지만 서엽이 진짜로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다.

무건은 문득 서엽의 왼손에 잡혀 있는 칼을 들여다보았다. 저 칼이 여태까지 안 뽑히고 얌전히 있는 것 역시 수상했다.

“날 죽여 버리고 싶었던 거 아니었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그 칼을 뽑아서 내 목이라도 벨 사람이 왜 가만있나 싶긴 한데?”

“…….”

정곡을 찔리긴 했는지 무건이 비꼬듯이 쏟아 내는 말에도 서엽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무건이 픽 웃었다.

“폐하에 대한 충심이 보통이 아닌 건 잘 알았습니다?”

“상놈의 어투는 쓰지 말라 일러 드렸습니다.”

“말투는 알아서 고치겠다고…….”

탕.

갑자기 서엽이 다과상을 내리치며 무건의 말허리를 끊었다. 그러고는 사납게 노려보는 모습에 무건도 잠시 그의 얼굴에 시선을 빼앗겼다가, 뭔가 이상하다 싶어 눈을 내렸다.

그러자 다과상과 서엽의 내리친 손 사이에, 겉이 시커먼 단도가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손잡이엔 요란하지는 않은 정도의 고풍스러운 무늬가 음각되어 있었다. 손잡이와 칼집이 맞물리는 부분에 금장이 되어 있는 것 외에는 딱히 화려해 보이지 않는 수수한 단도였다.

예의 단도와 서엽을 번갈아 보던 무건이 의문스러워하는 눈빛을 보냈다.

“……뭡니까.”

서엽이 무건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곧 그의 입술이 귓가에 다가와 낮게 속삭였다.

“맨손으로 화친왕을 죽일 것은 아닐 터이니 건네는 것이다.”

그야 맞는 말이긴 했다.

안 그래도 화친왕을 처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였다. 구중궁궐엔 무건에게 도움을 줄 이가 별로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늙은 내관에게 부탁하자니, 소문이 발이 달린 양 빠르게 퍼지는 곳이라 역시 꺼려졌다.

서엽에게 구해 달라 하는 방안도 잠시나마 떠올리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서엽에게는 자신을 도울 이유가 전혀 없다고, 가장 넘어서기 어려운 벽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서엽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이걸로 그의 멱을 따거라.”

그러면서 서엽이 단도를 무건의 쪽으로 밀어냈다. 무건은 선뜻 잡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의도가 보이지 않는 호의. 받아들여도 되는 것인지 헷갈렸다.

“당신이…… 왜 날 돕습니까?”

단지 진예를 향한 충정 때문만이라고 하기엔 이유로 한없이 부족해 보였다. 오히려 그는 진예 앞에서 무건을 치워 버려야 이득을 보는 자였다.

‘혹시 함정?’

화친왕이 준비하고 있는 무언가를 그가 알고 있거나 혹은 무건이 그를 죽이려는 걸 대비하게 해 주고 있나? 그래서 이미 자신이 무조건 죽는 상황이라 예측해 등 떠밀어 주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했지만 곧장 부정당했다.

“위기가 와도 어떻게든 살아남아. 무조건. 절대로 죽어서는 아니 된다.”

왜?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이럴 이유가 없어 무건은 혼란스러웠다.

단도의 손잡이를 손끝으로 살며시 쓸어 보았다. 겉면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의 표면이 매끈했다. 안에 있는 칼날도 아주 예리하게 갈려 있을 거라고 쉽게 예상되었다.

무건은 그 칼을 제 손에 움켜쥐었다. 보기보다 묵직한 무게를 느끼며 그가 서엽을 쳐다보았다.

“화친왕을 죽이는 게, 폐하께 이만큼이나 중요한 겁니까? 조 후께서 연적인 날 도와줄 정도로……?”

사실은 진예에게 화친왕을 죽이라는 이야기를 듣긴 했어도, 자신의 손을 타지 않아도 되는 일이 아닌가 잠깐 의구심을 가졌었다.

한데 이걸 보니 뭔가 다른 목적이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진예가 속내를 다 말해 주진 않은 건가. 이건 또 다른 시험인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무슨 목적인지 쉽게 유추가 되질 않았다. 무건은 제 멍청한 머리를 탓하다가 아, 하며 겨우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제가 화친왕을 죽이면서 알아내야 하는 게 있습니까?”

서엽의 답은 모호했다.

“있을지도 모르지.”

반대로 없을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서엽이 쓸데없는 심리전을 걸어온 셈이었다. 일단 무건의 추측은 있다는 데 좀 더 무게가 실렸다.

잘은 모르겠지만 진예가 화친왕의 무언가를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황제의 아우를 자신이 죽였다고 동네방네 소문낼 일은 아니니 어차피 이곳 융경궁에서 그를 찌를 계획은 애초에 배제해 놓고 있었다. 다만 이젠 그냥 길바닥에서 죽이는 것 역시 안 된다는 의미였다.

무건은 단도를 들어 올려 마침내 제 품 안에 넣었다. 위험한 무기가 제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긴장감에 입이 굳게 닫혔다.

하지만 진예가 원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뭐든 한다.

설령 그게 지옥으로 향하는 길이라 해도 무조건 걸어야 했다.

결심을 한 걸 서엽 역시 눈치챘는지, 그는 몸을 펴며 떨어져 나갔다. 그러곤 뒤돌아 문을 열고 그대로 나가 버렸다.

그 매정한 뒷모습을 보면서 무건은 생각했다. 아직 날 못마땅해하는 건 분명하다고.

탁.

문이 도로 닫히는 소리를 끝으로 방 안에 홀로 남게 되었다. 무건은 어째서인지 긴장으로 제 심장 박동이 빨라졌음을 느꼈다.

쿵, 쿵…….

그러나 다행히도 귀를 울리는 그 소란스러운 소리가 서서히 가라앉은 뒤에야 기다리던 이가 왔다.

“숙의마마, 화친왕 전하께서 뵙기를 청하시옵니다.”

그 말을 들은 무건의 눈이 스르르 풀리고, 어깨가 내려앉았다.

지금부터는 오로지 제 정인을 기다리는 것밖에는 할 줄 모르는, 어느 누구보다도 불쌍하고 무지한 사내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 * *

“화친왕이 융경궁에서 퇴궐하였사옵니다.”

기척 없이 편전 안으로 들어온 위장군이 알려 온 소식에 밤늦게 지방에서 올라온 장계를 살피던 진예가 손을 멈칫했다.

“……조 후는?”

“조 후께서는 아직이옵니다.”

돌아오는 대답에 진예가 의외라고 생각했다.

낮에 분명 궁인들이 연무건의 거처에서 깨진 다기들을 줄줄이 가지고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서엽과 연무건 사이에 큰소리가 났다는 것이었다.

들었을 때 별생각은 안 났다. 그냥 역시나, 했을 뿐.

한데 서엽이 융경궁으로 가 제 옆에 붙어 있을 때처럼 이 야심한 시각에도 계속 잘 무건과 공존하는 듯하니 약간은 신기했다. 피차 안 좋은 일은 아니니 다행이었다.

진예는 지금 펼쳐져 있는 걸 마지막으로 봐야겠다, 하면서 글씨를 읽어 내렸다. 등잔불에 의지해 무수히 많은 한자를 보고 있자니 눈이 무척이나 피로했다.

마지막 장계의 내용은 읍주에 대한 것이었다. 익재들이 남아 있는 다섯 개의 서식지에 대해서는 길어도 한 달, 짧으면 보름 정도의 간격으로 보고가 올라왔다.

‘이상 무(無)’ 정도의 짧은 내용만 적힌 경우도 많았지만 가끔은 가슴 서늘해지는 보고도 올라오긴 했다.

어차피 마침 오늘, 익재들을 전부 처리해야겠다는 결심이 섰으니 더욱 눈길이 갔다.

그런데 이번에도 이상 없다는 내용이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렇지 않았다. 진예의 눈이 장계의 중간쯤에서 멈췄다.

삼경쯤 익재들 십수 마리가 민가 위를 지나간 것을 목격하였다는 자가 있음.

사실 확인 중이나 그 실체가 명확하지 않음.

들여다보고 있자니 저절로 미간이 좁혀졌다.

읍주는 황도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위협적인 지대였다. 혼자서 씨를 뿌리기 시작했으니 모든 익재들의 부모라 할 만한 최초의 익재가 있어서 그런지 읍주의 녀석들은 특히나 더 유기적인 집단행동을 하는 경향을 보였다.

게다가 최초의 익재의 능력은 악신(惡神)을 다루는 것. 말만 못 했지, 지능 역시 거의 인간의 것과 비슷하다고 봐야 했다.

한데 그 읍주에 안 좋은 동향이 포착됐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준비도 하지 않은 채 내일 당장 출전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골치 아프군…….’

게다가 화친왕 진평이 익재를 다룰 수 있다는 건 거의 확정된 셈이다. 이 동향 역시 그와 관련된 쪽일지도 몰랐다.

익재의 파괴적인 속성상 그들이 얌전하게 민가 위를 지나간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놈들이었다면 막대한 군사력을 쏟아부어 그 경계를 지킬 필요조차 없다고 할 것이다.

진예가 한동안 그 장계만 뚫어져라 보며 천천히 눈을 깜빡이고 있으니, 편전 한편의 어둠 속에 숨어 있던 태감이 한 발짝 다가왔다.

“폐하, 밤이 많이 늦었으니 그만 침전에 드시지요.”

그 말에 진예는 장계를 덮어 옆으로 밀어 두었다.

“그러지.”

순순히 몸을 일으키자 태감의 표정이 환해졌다.

진예는 편전의 바닥을 밟아 나가며 방금 전 제게 화친왕과 서엽의 소식을 전했던 위장군에게 뒤늦게 물었다.

“화친왕이 퇴궐하고 연 숙의는 무얼 하고 있더냐.”

“침전의 불이 꺼졌다 하옵니다.”

바로 잠들었다는 의미였다. 김이 새는 대답이었다.

“태평한 놈…….”

그리 중얼거리며 진예는 후원에서 오갔던 무건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오늘 저녁엔 저를 찾아 주십니까?〉

거짓 사이사이에 비쳤던 녀석의 진심을.

다만 제 예상이 맞는다면 오늘 연무건을 찾는 것은 안 될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편전 밖으로 나가는데 어린 내관 하나가 빠르게 다가왔다.

내관이 태감에게 귓속말을 전하고는 종이를 건네니, 태감이 그것을 들고 다시 진예에게 다가왔다.

진예는 제 앞에 내밀어진 것을 받아 들어 펼쳤다. 글씨는 서엽이 쓴 서체였지만 내용은 연무건이 썼을 법한 것이었다.

모든 것은 나의 황제를 위한 거짓이니, 이자를 신뢰한다면 그 증표를 보내 주십시오.

그것이 연무건을 살리는 방패가 될 것입니다.

편지의 내용도 웃기지만 이것을 서엽이 써 줬다는 것에 더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연무건과 조서엽, 둘이 생각보다 잘 공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서로 으르렁대기만 할 줄 알았더니.

물론 서엽이 일방적으로 인내하는 형국이라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진예의 목숨까지 달려 있으니 죽이지 못해 협조할 뿐, 속은 썩어 문드러지는 중일 터였다.

그러나 물지 않는 개가 되겠다 한 것은 서엽 본인이었다. 동정의 여지는 없었다.

“증표라…….”

진예는 침전으로 돌아가면서 고민했다.

이따위 편지는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었지만 점점 단순 무식한 무건의 방식에 흥미를 붙이고 있었다.

봐 달라고, 쉬지 않고 자신을 봐 달라고 비굴하게 애원하는 주제에 기어오를 듯한 눈빛을 하고, 늘 뭔가 하나를 요구하며 제 비굴함에 대한 보상을 받으려 든다. 내쳐지는 와중에도 되돌아오면 쓸모를 인정해 달라고 하고, 복종하겠다 하면서도 안고 싶다 말하고, 두 무릎을 꿇으면서도 입을 맞춰 온다.

되돌아보면 무건이 손해 보는 건 하나도 없었다. 진예가 봐 온 어떤 모사꾼보다도 영민했다.

깊은 밤이라 피곤함으로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침전 방 안에 들어온 진예는 궁인들의 도움을 받아 정복을 벗은 뒤 머리 장식을 풀었다. 조심스러운 손길들을 느끼면서 진예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가거든 태감에게 종이와 먹을 가져오라 이르거라.”

“예, 폐하.”

궁인들이 뒷걸음질 쳐 물러가자 진예는 침대 옆의 곁탁자 앞으로 걸어가 섰다.

얇은 손가락이 서랍의 고리에 끼워졌다. 드륵, 하며 매끄럽게 서랍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곧 원하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연무건이 건넸던 옥가락지였다. 이걸 제 손으로 다시 찾을 줄 몰랐지만 이 정도야 가벼운 유희거리였다.

제 손에는 약간 큰 그것을 집어 들었을 때였다. 명했던 대로 태감이 종이와 먹을 가져왔다. 내관들이 종종걸음으로 걸어와 작은 책상을 침전 가운데 놓았다.

무릎 꿇고 앉은 내관이 먹을 슥, 슥 갈기 시작했다. 진예는 책상 앞에 앉아 소매를 거두었다. 하얗고 얇은 손목이 드러났고, 손에 가볍게 붓이 쥐어졌다.

그대가 내밀었던 이 증표를 되돌려 보내니, 돌아와 이를 다시 짐에게 바치는 것이 그대의 마땅한 의무임을 잊지 말라.

먹이 마를 때까지 기다리다가 태감이 다가와 종이를 접은 뒤 얇은 끈으로 그것을 묶었다. 그리고 완전히 매듭짓기 전에 반지를 끼워 넣었다.

“연 숙의에게 전하거라.”

예상했던 행보였지만 태감은 잠깐 움찔했다. 황제의 마음이 연무건에게 없다고 여겼는데 편지의 내용은 정인들 사이에서나 통할 법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자리의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해서는 함구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진예의 서슬이 누구에게든 떨어질 것이다.

방을 나서는 태감의 발이 분주했다.

* * *

〈후원의 입구에 닿기 전에 화단의 돌을 치우면 보이는 입구가 있다. 용건이 생기거든 궁인들의 눈을 피해 그곳으로 빠져나와 본왕을 만나러 오거라.〉

무건은 화친왕이 알려 준 방법을 상기하며, 소위 말하는 개구멍을 통해 융경궁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자신을 주시하고 있던 많은 눈들에서 겨우 벗어난 무건은 오랜만에 밤의 시원한 공기를 깊게 들이켰다.

폐부까지 스며든 겨울 끝물의 공기를 잠시 음미하던 무건은 천천히 융경궁에서 멀어졌다. 한 걸음 한 걸음 그의 발이 무겁게 지면을 디뎠다.

그의 손엔 얼마 전 진예가 편지와 함께 전했던, 끈에 걸린 반지가 꽉 쥐어져 있었다. 그 감촉을 느끼면서 무건은 단단한 각오를 다졌다.

〈돌아와 이를 다시 짐에게 바치는 것이 그대의 마땅한 의무임을 잊지 말라…….〉

서엽이 굳은 표정으로 읽어 주던 그 편지의 내용을 되새기며 자신의 품 안에 있는 단도를 의식했다.

두근, 두근…….

화친왕의 사가에 가까워질수록 토할 것 같은 긴장감이 몰려왔다. 무건은 거칠게 뛰는 제 심장을 느끼며 느릿하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중압감을 이겨 내기 위해 오로지 하나만 생각했다.

진예, 나의 황제.

속으로 이름을 읊조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꽉 죄어왔다.

앞으로 연무건이 살아가는 데 있어 모든 행동의 척도는 그녀가 될 것이다.

제 몸에 새겨진 하늘의 뜻을, 세상 그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받들 예정이었다.

친왕부의 대문 앞에 선 무건은 아직 닫힌 문을 보면서 마지막으로 심호흡을 했다.

‘예정된 가시밭길.’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앞으로는 더한 폭풍에 휘말리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는 손에 있는 반지를 힘을 주어 꾹 쥐었다가 이내 품 안 깊숙이 집어넣었다.

그리고 곧 신호에 맞춰 살며시 열리는 화친왕부 대문의 문턱을 넘어섰다. 화친왕의 오른팔인 위도양이 먼저 그를 맞이했다.

“오랜만입니다.”

“드십시오.”

위도양은 어딘지 무건을 경계하는 듯했지만 별말 없이 화친왕이 기다리고 있는 별채까지 앞장섰다.

불이 켜진 전각. 그곳에 있는 안쪽 방의 문이 열렸을 때, 화친왕 진평의 모습이 무건의 시야에 잡혔다.

마침 작은 술상을 들여놓고 무건이 별채에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진평은 그를 보자마자 사르르 미소를 지었다.

“왔느냐, 연 숙의.”

몸을 살며시 기울인 방만한 자세로 앉아 있는 그에게선 여유가 넘쳤다. 비단 옷을 두른 진평이 제 손바닥만 한 술잔에 담긴 술을 들이켜며 무건을 올려다보았다.

무건은 언뜻 달콤해 보이는 그 얼굴을 확인하고는 앞에 바짝 엎드려 간절함을 담아 입을 열었다.

“예……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화친왕 전하.”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화친왕 전하.”

무건의 말에 화친왕이 가볍게 눈을 휘어 웃더니 상 위에 있던 잔을 내밀었다.

“받거라.”

무건이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두 손으로 그것을 받아 들자 잔에 술이 가득 따라졌다. 김이 풀풀 올라오는 맑은 술이었다.

그것을 입에 가져다 댔을 때에야 뒤에서 위도양이 문을 닫고 물러났다. 기익, 기이익. 바닥이 기우는 소리가 천천히 멀어졌다. 그 아득한 그 발소리를 들으며 무건이 술을 쭉 목으로 넘겼다. 제법 독한 술인지 넘어가는 동안 목구멍이 타는 듯이 뜨거워졌다.

그러고 잔을 내려놓는데 무건은 취할 정도로 술을 즐겨 본 적이 없는 탓에 자신이 혹 주정을 하게 될까 불안해져 왔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무건은 스스로를 다그치며 눈을 들어 진평을 바라보았다. 진평 역시 그와 눈을 맞추고는 흡족해하는 어투로 먼저 말꼬를 텄다.

“그래, 무슨 도움이 필요한지 어디 들어 볼까?”

무건은 제 입 안에 맴도는 쓴맛을 지우려 침을 모아 꿀꺽 삼켰다. 목울대를 천천히 올렸다 내린 그가 이내 엄숙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황제 폐하를 제가 차지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아직 진평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그는 흐음, 하고 짧은 감탄사만 낼 뿐이었다.

연무건을 황궁 안에 데려다 놨던 화친왕 진평.

황제인 진예가 불편해할 것을 알면서도 무건을 황궁에 박아 둔 건 불순한 의도가 있어서라고밖엔 생각이 안 되었다. 그런데 그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아니, 요구했지만 ‘마음대로 하라.’라는 게 전부였다.

진평은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진예에게 거부당하리라는 것을. 하지만 그는 무건의 반응까지는 예측하지 못했고, 그렇기에 자신의 목에 들이밀어지고 있는 칼날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무건은 화친왕 진평의 눈을 더 철저하게 가릴 생각이었다. 그의 앞에서 무건이 자신의 옷소매를 살며시 걷어 냈다. 그러자 오른쪽 손목에 아직 남아 있는 칼에 베인 흉터가 밖으로 드러났다.

“이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읍주에서 연 숙의를 구해 왔을 당시에 나 있던 상처였지.”

진평은 은근히 무건에게 행한 제 공을 강조했다. 알아서 고마움을 느끼길 바라고 있는 것이다.

무건도 그 속내를 빤히 들여다보았으나 그가 내린 은혜를 폄하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실제로 진평 덕분에 목숨을 구한 측면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자신이 가질 감정은 적당한 고마움뿐, 진평을 위해 불길에 뛰어들 생각은 애초에 품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무건은 진평의 앞에서, 진평이 원하는 말을 기꺼이 지껄여 주었다.

“그녀가 저를 해치려던 흔적입니다.”

“그녀, 라…….”

진평이 무건이 입에 올린 호칭을 곱씹었다. 하지만 고치라는 말은 하지 않고, 살며시 눈길을 피하며 도로 제 술잔을 채워 입가에 가져갔다. 무건의 말소리가 이어지자 다시 시선을 주기는 했으나 어딘지 서늘해 보이는 눈길이었다.

“읍주에 버려졌을 때 제 손은 꽁꽁 묶인 채였습니다. 그대로 있으면 얼어 죽을 상태였던 데다 익재들이 오면 잡아먹힐 것이기 때문에 서둘러 풀어내느라 칼에 베였죠.”

“그렇군.”

진예에 대한 원망을 살짝 내비쳤지만 그다지 관심이 없는 모양인지 진평은 심드렁하게 대꾸해 왔다.

‘이 방향이 아닌가?’

말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머리를 써야 하는 이런 대화는 자신에겐 난도가 상당히 높은 셈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입을 멈추면 화친왕은 자신이 머리를 굴리고 있다는 걸 금세 눈치챌 터였다.

무건은 자연스럽게 시간을 벌려고 일부러 천천히 소매를 내렸다. 그러고 오른 손목의 자상 위를 왼손으로 덮어 이내 꽉 쥐었다.

진예가 자신을 죽이려 해서 생긴 상처는 맞지만 무건은 이것 때문에 그녀를 원망할 생각은 딱히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에게 되돌아가기 위해 자신이 몸부림친 흔적이라, 새롭게 가슴에 새기게 된다.

난 이토록 당신을 바라고 있노라고.

하지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가는 건 비슷한 듯 다른 말이었다.

“그녀가 저를 버릴 수 없게 할 힘이, 필요합니다. 힘이란 본래 또 다른 힘에서 나오는 것이니…….”

“내 힘을 너에게 나누어 달라?”

“그렇습니다.”

진평이 술을 홀짝이는 작태에서도 지루함이 배어났다. 자신의 수를 읽히지 않기 위해 그도 연기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이런 대화 흐름을 원하지 않는 것인지는 불분명해 보였다.

조서엽이 말하길 화친왕은 ‘뱀의 새끼’라고 했으니까.

“안타깝게도…… 전에도 말한 적 있지.”

그리고 뱀이 낳으면 그 새끼도 결국은 뱀이다. 진평이 슬슬 혀를 날름거리기 시작했다.

“네 신분으로는 누님을 차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의도적인 후려치기.

무건은 굳은 표정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내렸다. 그러다 마침 진평이 내려놓는 술잔이 빈 것이 보여 화등잔 위에서 데워지고 있는 술 주전자를 들었다. 진평에게 따라 주고, 자신의 잔도 채웠다.

그러고 다시 진평과 눈을 마주쳤다. 독한 술을 큰 잔으로 두 잔이나 마셔서 그런지 등잔 불빛에 비치는 그의 얼굴이 살며시 달아오른 것이 보였다. 그래서인지 눈빛은 더욱 나른해 보였다.

“본왕에게도 네놈을 환골탈태하게 할 능력은 없다. 그건 환의 황제인 누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니.”

중요한 것은 누님이 아니라 환의 황제인 듯했다. 무건은 슬며시 내비치는 그의 욕망을 읽고는 제 기분이 가라앉음을 느꼈다.

명백한 진예의 적.

하지만 그가 단순히 황위 찬탈만을 목적으로 하는 자였다면 무건은 이 자리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와 상관없이 무건에겐 그의 목숨을 거두어야 하는 자신만의 이유가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계획은 성공해야만 했다.

“전하께선 저에게 명령하는 법을 가르치셨고, 조서엽을 폐하의 곁에서 떼어놓으라는 말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전하의 조언대로 해 나가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놈에게 아직도 환골탈태의 가능성이 없다면 어찌하면 좋습니까?”

“‘차지한다.’라는 것은 어떤 의미이지?”

답을 구하는 무건에게 진평도 반대로 선문답을 요구했다. 이 질문은 예상하지 못했다. 예상했다 하더라도 진평의 마음에 드는 말을 들려주지 못했을 것 같았다.

다행히 진평도 무건에게서 정답을 듣길 원했던 것은 아닌지 제 할 말을 이었다.

“본왕에게도 네놈과 같이 명인자가 있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본래 열여섯 살이 지나면 대부분 정인자의 이름을 알게 되니.

“누구입니까?”

“우리 도양이지. 한데 제아무리 운명의 상대가 내게 오는 게 정해진 길이라 해도 원하는 시점에 갖는 것이 정녕 가치 있는 것 아니겠더냐.”

“…….”

방금 발언은 무건에겐 마치 자신이 원하는 시점에 위도양을 손에 넣기 위해 진평이 무슨 짓을 했다는 의미처럼 들리기도 했다.

‘설마…….’

무건은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지만 그 부분을 따져 물을 때가 아니었으므로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러자 술기운이 도는지 진평이 쿡, 가볍게 웃으며 빈정거렸다.

“네놈 역시 그것 때문에 답답하고 미치겠지? 당장 누님을 갖고 싶어 내게 이리 찾아온 것이 아니냐.”

“시기보다도 폐하께서 제게 마음을 열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껍데기만 갖는 것은 제가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그런 것이라 해도 본왕이 도움을 줄 수 있지.”

“……어떻게.”

무건은 진평의 말에서 점점 이상함을 느꼈다. 말하다 보니 아무래도 눈앞의 화친왕이 그렇게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놈은 아닌 듯 보여 당혹스러웠다.

뭐든 마음대로 통제해야 직성이 풀리는 부류인가?

그런 의문이 들었을 때, 진평이 다시 한번 술을 들이켜고 빈 잔을 술상에 탁 내려놓았다. 독한 술기운에 머리가 띵해진 모양인지 그가 고개를 한번 흔들었다.

곧 그에게서 결정적인 한마디가 나왔다.

“이 세상 모든 것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조종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모든 것의’……?

“그게, 무슨.”

당황한 표정을 짓자 진평이 얼굴을 쑥 들이밀었다. 너무 거리가 가까워졌다. 지독한 술 냄새에 무건이 몸을 뒤로 뺐으나 멱살이 잡아채졌다.

품 안에 있던 칼을 들킬까 싶어 무건이 잠깐 긴장했다. 다행히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꺼내서 화친왕의 목덜미를 찔러 버릴 수 있을 만큼은 될 듯했다.

진평은 지나치게 가까웠으며, 무방비했다.

순간적으로 칼을 꺼내 그의 달아오른 목덜미에 꽂는 상상을 했다.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하여 저도 모르게 손을 움찔한 순간이었다. 진평이 샐쭉하게 웃었다.

“한데 다 알려 주기엔 아직 본왕이 겁이 많아서 말이다?”

“…….”

명줄이 길군.

말했다면 곧바로 실행에 옮겼을 텐데.

진평으로서는 당연한 경계이기도 했기 때문에 무건은 실망하지 않았다. 조금 더 공을 들여야 할 필요가 생겼을 따름이다.

이미 화친왕의 운명은 죽는 것으로 결정되었고.

“제가 무엇을 증명하면 됩니까.”

진평이 멱살을 놓고 살며시 밀치더니, 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러고는 제 긴 소매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무건의 품에 던졌다.

툭.

가벼운 검은색 비단 주머니 하나가 무건의 허벅지 위에 떨어졌다.

“그것을 누님과 가장 가까운 곳에 놓아 두거라.”

비단 주머니를 들어 올렸다. 안쪽에서 살며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무게 또한 가벼운 것으로 봐서는 식물의 잎 같은 것일 듯했다.

혹시나 싶어 코에 주머니를 갖다 대자 처음 맡아 보는 향기가 깊숙이 코를 찌르고 들어왔다. 향긋한 향료가 섞여 있는 것 같긴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역한 냄새였다.

한 번 숨을 들이켜고는 인상을 찌푸린 무건이 주머니를 술상 위에 올려 두었다.

“기묘한 향이 나는군요. 무엇입니까? ……폐하께 해가 되는 것입니까?”

향기를 많이 맡으면 몸에 안 좋은 독초 같은 건가 싶었다. 그러나 진평이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표정이 꼭 자기가 그런 하수나 할 법한 짓을 할 것 같냐고 묻는 듯했다.

“무엇인지는 알 것 없다. 누님께 위험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 정도는 알려 주마.”

누가 봐도 수상하다 여길 만한 제안을 해 놓고서 정작 위험하지는 않다?

무건은 그의 말을 절대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건 누가 봐도 합리적인 추론이기 때문에 여기서 수긍하면 외려 진평의 의심을 살 터였다.

“한데 제가 이걸 그분의 곁에 두어야 하는 이유가 뭐란 말입니까?”

따지자 진평은 예상대로 미련 없이 무건의 앞에 놓인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싫다면 그만 가거라.”

그러고 손을 거두어들이려는데, 무건이 진평의 손목을 잡아 막았다. 진로가 막히자 진평이 눈을 가늘게 좁히며 일침을 놓았다.

“확신이 없는 놈은 쓸모가 없다.”

아마 진평은 생각나는 대로 지껄인 것일 텐데, 이번 말은 무건에겐 꽤 아팠다. 진예나 조서엽이나, 그리고 진평도 그놈의 ‘쓸모’를 어찌나 중시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의 생활 방식에 익숙해져야 하는 건 결국 이쪽이다.

무건은 진평의 손목을 쥐고 있는 아귀에 힘을 더 넣자 사내치고 상당히 얇은 손목이 한 줌에 들어왔다. 그에 아픈 듯 진평이 미간을 샐그러뜨렸지만 무건은 놓아주지 않았다.

“여기서나 저기서나…… 이놈의 쓸모를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네가 살던 세상과 우리가 사는 세상이 다른 이유다.”

누가 혈연관계 아니랄까 봐, 진예와 진평 두 사람은 은근히 비슷한 구석이 있는 듯했다. 이목구비도 그렇고, 하는 말도 그렇고. 황실 사람들이란 다 이런 건가?

물론 제아무리 비슷한 구석이 있어 봤자 죽었다 깨나는 일이 생기더라도, 설령 하늘이 무너지더라도 무건이 진평을 어디 한 구석 좋아하게 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평 또한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왜 연무건이 진예에게 헌신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어째서 진예를 미워할 수 없는지에 대해.

그는 결코.

게다가 지금 진평이 하고 있는 말은 사실 자신이 연기하고 있는 연무건이 원하는 바와도 한참 먼 것이었다.

“하지만 폐하께서도 저에게 더 가까이 오려거든 쓸모를 증명하라 일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전하께 저의 쓸모를 증명하면, 폐하와 저는 더욱 멀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맹점을 지적하자 진평이 무어 그런 걸 그리 걱정하냐는 말투로 건들거렸다.

“나에게 증명하면 누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겠다. 본왕이 네놈을 황궁에 데려다 놔 준 것처럼 말이다.”

“…….”

그런 게 가능하다고?

무건은 어떻게 저렇게 확신할 수 있는지 몰라 미심쩍은 마음을 거두지 못하고 그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러자 진평이 좀 놓고 얘기하자는 듯이 손목을 흔들었다. 그제야 무건이 풀어주니 힘만 더럽게 세다고, 작게 투덜거린 진평이 주머니를 도로 무건의 눈앞에 보였다.

“이걸 두는 곳은 일정한 장소라도 괜찮고, 사람이라도 상관없느니라.”

마치 악마의 속삭임 같았다.

아주 조금만 도와주면 돼. 네가 원하는 것을 줄게.

과연 진평이 생각하는 교환의 대가는 무엇일까. 이쪽의 교환 대상은 그의 목숨인 터인데.

무건은 다음 대답을 고민하다가 진평에게 물었다.

“하면 이것을 제 품에 지니고 있어도 되는 것입니까?”

“……원하던 답은 아니지만, 가능은 하지.”

“그럼 제가 가지고 있겠습니다.”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위험한 물건일 게 뻔하니 진예의 곁에 두는 것보다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이 맞았다. 그러고 위험을 완전히 제거할 때까지 진예를 한동안 안 보면 그만이다. 정말, 미치도록 힘들겠지만…… 그녀의 안전이 우선이었다.

진평은 약간 떨떠름해 보이긴 했으나 손에 힘을 풀어 다시 툭, 주머니를 떨어뜨렸다.

“그리하거라.”

그러고는 무건에게 술을 권했다. 방금 전 제 손으로 따른 이후로 조금도 술이 줄지 않은 제 잔을 무건이 덥석 잡았다.

진평이 원하는 대로 단숨에 많은 양을 한꺼번에 마시자 빈속이라 그런지 더 빠르게 취기가 올랐다.

배 속에서 열기가 훅 솟구쳐 순간적으로 머리가 핑 돌아 무건이 숨을 크게 들이켜며 손으로 제 머리를 짚었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 시야가 어지러워져 오는 것을 보니 아무리 많이 잡아도 두 잔 정도 더 마시면 한계일 듯했다. 하여 미리 엄살을 떨어 두었다.

“제법 독합니다, 술이…….”

그러자 진평이 하하 웃는 소리를 냈다. 그것이 귓가를 쟁쟁하게 울렸다.

“연 숙의가 본왕의 손님으로 있을 때는 운신조차 제대로 못해 이리 편히 회포를 풀 기회도 없지 않았느냐. 마음껏 즐기도록 하거라.”

제 놈은 유쾌할지 모르지만 무건으로서는 몹시 거슬리는 말과 웃음소리였다. 제 눈앞에서 긴 소매를 펄럭거리는 모습조차 눈엣가시처럼 걸렸다.

살며시 젖은, 얇고 붉은 입술이 제 앞에서 열렸다 닫히는 것조차 얼마나 간사해 보이는지.

‘……네 최종 목적은 뭐지? 황위?’

일단 환의 황위에 오르길 소망하는 것은 맞긴 할 터였다. 하지만 왜인지 제 눈앞의 사내라면 거기서 그치지 않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함부로 위험해질까 하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화친왕은 뱀의 새끼입니다. 마마께서 그를 당해 내실 수 있을 거 같습니까?〉

뱀의 새끼…….

조서엽이 했던 그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상당히 적절한 비유처럼 느껴졌다. ‘저건’ 사람 새끼라기엔 너무 간교한 존재였다.

무건은 미약하게 냄새를 흘리는 주머니를 입구를 꽉 닫고 품에 넣었다. 손끝에 안쪽의 칼이 툭 걸렸다. 그것을 꺼내 당장이라도 저 뱀의 아가리를 칼끝으로 꿰어 내고 싶다는 충동이 다시금 일었다.

그렇지만, 아니다. 지금 진평을 죽이면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이 향낭의 정체도, 마음을 조종할 수 있다는 그 방도 역시.

간신히 살의를 억누르며 옷깃을 여민 무건이 술 주전자 옆에 접시 가득 부려진 갈색 월병을 입에 물었다.

단맛이 혀에 감돌자 조금이나마 정신이 맑아져 왔다. 하여 태연하게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세 치 혀를 굴릴 수 있게 되었다.

“한데 이대로 가면 언제쯤 절 다시 불러 주실 겁니까?”

방금 생각났다는 양 지나가는 말처럼 그리 묻자 화친왕이 한쪽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비웃음을 띠었다.

“미안하다만, 본왕이 의심이 좀 많아서 말이다. 언젠가 부를 터이니 얌전히 기다리고 있거라.”

제길.

역시나 진평은 아직 자신을 완전히 신뢰하는 건 아니었다. 저보다 한참 아래로 보고 있을 테니 경계가 느슨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역시 그 정도 자각도 없으면 여태껏 진예 옆에서 목숨 부지하고 있지 못하긴 했을 터였다.

보란 듯이 한 방 먹이고 여유롭게 월병을 씹는 진평을 보면서 무건이 순진한 척 물었다.

“기약도 없이요?”

“사람이라는 것이 그렇지.”

“……?”

“하루든 한 달이든 버틸 기간을 주면 그간은 조심하거든. 그리하면 진심을 알 수가 없어. 본왕이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다.”

맞는 말이다. 설령 1년이 걸리든, 2년이 걸리든 그가 기간을 말해 줬다면 무건은 어떻게든 버티겠다고 결심했을 터였다.

그렇다고 진평이 당장 눈앞에 써먹을 만한 좋은 패가 있는데, 묵혀 두고 있을 위인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하면 그가 저렇게 배짱부리는 이유는 단순했다.

어차피 급한 쪽은 연무건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거사야 진예가 저리 버티고 있으니 하루 이틀에 끝나지 않으리란 것은 기정사실이고, 진예를 차지하고 싶어서 애달아 화친왕부까지 기어들어 온 자는 무건이었다.

그러니 단순히 버티기만 해서는 안 되고, 신뢰를 증명할 만한 무언가를 직접적으로 하라는 이야기였다.

‘당신의 마음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건은 제 의도를 숨기고자 굳이 시기까지 조율해 가며 인내심 있게 기다리겠다 타협하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길어지면 화친왕이 어떤 수작질을 더 시도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쓸데없는 변수만 늘리는 짓이었다.

진평의 예상대로 시기가 빠르면 빠를수록 웃는 건 이쪽. 무건은 기꺼이 범의 아가리에 제 손을 집어넣기로 했다.

그가 조금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고 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주시하는 진평의 눈길을 받으며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하면 내일 다시 전하를 찾아뵙겠습니다.”

진평의 얇은 눈썹 한쪽이 치켜세워졌다.

“내일?”

“예.”

무건은 바닥을 핥기라도 하듯 더 바짝 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진평이 의심을 한다면, 그 의심조차 이용하겠다는 심산이었다. 이쪽을 의심하면 할수록 그를 부추기며 더욱 굽히고 기어서, 연무건의 마음이 어떠한지 도저히 판단하지 못할 만큼 흔들어 놓으면 그만이다.

뱀이 제 배 속에 숨겨 놓은 독기를 토해 낼 때까지.

“전하께 쓸모를 증명하면 폐하와 가까워진다 하셨습니다. 이놈이 진실로 원하는 건 폐하와 가까워지는 것이니, 곧 전하께 신뢰를 얻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바닥밖에 보이지 않아 진평이 어떤 표정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천천히 손가락으로 술상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톡, 톡…….

공기가 답답해졌다 느낄 정도로 꽤 길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고민.

당연하게도 진평은 아직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하지만 말은 달라졌다.

“생각보다 똑똑한 녀석이구나.”

말속에 뼈가 있다. 주제 파악을 잘한다는 의미일지도 모르지만, 더욱 경계해야 하겠다는 다짐일지도 몰랐다.

어느 쪽일까. 전자라면 이쪽의 기회는 더 빨리 찾아올 것이다.

제발, 좋은 쪽이기를.

연무건은 이 싸움을 길게 끌고 싶지 않았다. 속전속결. 그래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자신이 쓸모를 증명할 사람은 결국 진예이기에, 이곳에 오래 발목 묶여 있을수록 제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기간이 길어질 따름이었다.

하여 스스로를 더더욱 낮추고, 나는 감히 당신을 넘볼 수 없는 존재임을 강조했다.

“높으신 분들께서 정치를 하시는 동안 이 연무건은 생존을 위한 처세를 배웠습니다. 밥을 굶지 않기 위해 무릎 꿇는 법을 알아야 했고, 맞지 않기 위해 바짝 기어야 하는 법을 터득해야 했습니다.”

당신들이 살던 세상과 내가 살던 세상은 이리도 다르다.

하지만 당신들은 알지 못하는 그 미지의 세상에서 온 연무건이라는 자가, 이곳의 규칙을 깨 나갈 터였다.

오로지 자신만이 알고 있는 방법으로.

“배부른 자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많은 것을 가지려는 욕망보다는 이 천한 놈이 살기 위해 발버둥 쳤던 간절함이 더하지 않을까요?”

무건이 고개를 들어 진평을 바라보았다.

진예와 비슷한 이목구비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그녀가 더 보고 싶어졌다. 후원에서 화내던 진예와 마주한 뒤로 벌써 며칠을 머리카락 한 올도 보지 못했다.

문득 제 가슴께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손바닥을 통해 희미하게 품 안에 든 옥가락지가 느껴졌다. 진예가 새로 준비해 준 것도 아니고, 단지 되돌려 준 물건일 뿐이었지만 이것만으로도 무건은 커다란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드디어 황궁에도 자신이 돌아갈 자리가 생겼다.

진예가 그에게 확실한 방패를 세워 주었다. 그러니 반드시 화친왕을 죽이고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 터였다.

무건은 의지가 깃든 목소리로 단 하나의 진심을 드러냈다.

“진예를, 나의 정인을 이 연무건이 가질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세상에 태어나 품은 첫 번째 욕망입니다.”

그제야 화친왕 진평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의 가는 눈이 살며시 휘어지며 웃음기가 스몄다.

“마음에 드는구나.”

‘지금이다.’

무건은 서둘러 말을 이어 붙였다.

“그러니 부디 은인께서 이놈을 많이 도와주십시오. 화친왕 전하를 믿고 따르겠습니다.”

조금이나마 벽을 허문 진평이 술 주전자를 기울여 무건의 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한 잔 더 하거라.”

“감사합니다.”

김이 올라오는 잔을 내밀어 와 무건은 공손하게 두 손으로 받았다. 한데 진평이 뭐가 그리 재밌는지 큭큭거리며 그의 말투를 지적해 왔다.

“이럴 땐 망극하옵니다, 하는 것이다.”

개자식.

무건은 속으로 욕을 삼키며 무구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망극하옵니다.”

이따위 연극, 사실 적성에 맞지 않았다. 빨리 때려치우고 싶었다.

세 잔쯤 되니 술 냄새가 슬슬 역해졌지만 무건은 이번에도 단숨에 잔을 비웠다. 내내 데워 놔서 그런지 이번에도 머리가 멍해져 왔다.

자리에서 일어났을 땐 잠깐 비틀거렸고, 어느새 도로 나타난 위도양이 그의 팔을 부축하고 있었다.

그래도 필사적으로 정신의 끈만큼은 놓치지 않기 위해 애썼다. 방을 나서는 순간까지 전하만 믿겠다느니, 저에게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느니 하는 진평을 위한 역겨운 헛소리들을 내뱉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도 방을 나서기 전, 진평의 말 한마디에 제 더러워진 입이 씻긴 기분이었다.

“내일도 다시 오거라.”

뒤통수에 대고 그리 하는 말을 듣고 무건은 이 싸움이 길게 가진 않으리란 확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 * *

차디찬 밤바람을 맞으면서 융경궁으로 되돌아오는 동안 술기운이 서서히 가라앉았지만 머리가 몽롱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여 길을 잃을 뻔했는데, 융경궁으로 들어가는 개구멍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누군가, 그러니까 조서엽이었다.

무건이 멀리서 그를 보고 멈칫한 순간, 서엽이 먼저 성큼성큼 다가와 무건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고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에, 건조한 어투로 한마디 툭 뱉었다.

“술 냄새가 지독하십니다.”

이 인간이 왜 자신을 마중 나와 있는지 몰랐다. 무건은 솔직히 거북했다.

팔을 비틀어 빼려고 했지만, 역시 무인이라 그런지 서엽은 순순히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외려 겨드랑이 쪽에 제 어깨를 끼워 부축하는 것에 무건이 하는 수 없이 기대면서도 의문을 담아 물었다.

“……뭡니까.”

“혹시나 싶어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술 냄새를 맡고 이미 짐작했겠지만 무건은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 굳이 덧붙였다.

“화친왕은 아직 안 죽었습니다.”

“벌써부터 마마께 그런 기대를 걸 정도로 어리석지 않습니다. 폐하께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역시나.

서엽은 무건을 융경궁과 통하는 개구멍에 밀어 넣고는 뒤따라 통과한 뒤 도로 무건을 부축해 줬다. 침전으로 들어갈 때는 서엽이 제 등을 밟으라고 내주는 것에 조금 당황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그러고 침대에 드러누워 눈을 감은 채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고 있는데, 방 안으로 들어온 서엽이 가까이 와 제 손을 무건의 이마에 얹었다. 마치 열을 재는 듯한 그 손길이었다. 잠이 들 뻔했던 무건은 너무 깜짝 놀라 순간적으로 튕기듯 일어났다.

조서엽은 곧장 손을 거두긴 했지만, 방금 이상한 짓을 해 놓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쪽은 술기운이 확 깨 버렸는데.

무건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서엽을 보다가 겨우 다시 물었다.

“방금 뭐 한 겁니까, 조 후?”

“……폐하께서 절 보내신 건 숙의마마를 보필하라는 의미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날 이렇게 취급한다고?”

“무례했다면 사과드리지요.”

서엽이 작게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고 무건은 제 머리를 헤집었다. 이레 동안 서엽을 빌리겠다 하여 그를 여기에 데려다 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라 대거리를 할 수도 없었다.

“대단한 충정이네…….”

빈정거려 보았으나 서엽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화제를 자연스럽게 돌렸다.

“화친왕과는 별일 없으셨습니까.”

아마 자신을 마중 나온 이유가 이거였겠거니 싶었다. 방금 머리를 짚은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불편한 마음을 숨기고 무건은 제 옷 안에 넣어 가져온 주머니를 꺼내 그에게 보여 주었다.

진예에게 갈 상황이 아니니 조서엽에게 상황을 공유할 필요가 있었다. 마음에 안 드는 자이지만 전략적 동맹 같은 거라고 해야 할까. 지금으로서는 그에게 말하는 것이 곧 진예에게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걸 폐하와 가까운 곳에 두라고 해서 일단 내가 가지고 있겠다 했습니다.”

서엽은 검은 비단 주머니를 건네받고는 무건이 그랬던 것처럼 코를 바짝 대고 냄새를 맡았다.

“언젠가 맡아 봤던 향이군요.”

그러곤 고개를 갸웃하며 안쪽에 있는 것을 살폈다.

안에 있는 건 바짝 말라 검게 변한 잎들이었다. 워낙 말라비틀어져 원래는 어떤 식물이었는지 짐작이 안 갔다.

“뭔지 알고 있어요?”

“기억이 안 납니다. 잎은 몇 개 가져가지요.”

시원찮은 대답에 무건은 쯧, 하고 혀를 찼다. 안쪽에서 잎 몇 개를 꺼낸 서엽이 주머니를 되돌려 주자 일단 도로 품 안에 넣으며 덧붙였다.

“앞으로 매일 화친왕부에 찾아갈 생각입니다.”

서엽은 잠깐 사이를 두긴 했지만 격려의 말을 건넸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말을 순수하게 들을 수가 없었던 무건이 미심쩍다는 투로 물었다.

“진심입니까?”

“숙의마마께서 돌아가시지 않았으면 하는 것은 한 치의 거짓 없는 제 진심입니다.”

그러니까 대체 왜……?

황궁으로 돌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죽이려던 그 마음은 어디로 갔느냐고 묻고 싶었다.

“조 후.”

한데 나직이 그를 불렀을 때, 조서엽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용건 없으면 더 이상은 말 걸지 말라는 분위기였지만 무건은 굳이 그가 편한 대로 내버려 두지 않았다.

“당신은 왜 폐하를 그리도 간절히 연모하는 겁니까?”

질문을 들은 조서엽의 미간에 주름이 가는 것이 보였다. 무건도 알고 있었다, 이 질문이 그에게는 가장 듣기 싫은 질문이라는 걸. 품속에 소중히 넣어 놓은 그 감정의 밑바닥을 보여 달라는 뜻이니까. 역시나 서엽의 혓바닥에 날이 섰다.

“그런 걸 숙의마마께서 어찌하여 궁금해하십니까.”

무건은 잠시 서엽의 냉랭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저 날카로운 눈빛이 진예의 앞에서는 허물어지는 걸 보았었다. 게다가 조서엽이 바치는 저 절대적인 충성이 단지 설레는 마음만으로 가능할 거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의 깊은 감정에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무건은 그것이 아마도 연민이리라 예상했다.

“조 후의 눈빛을 보면 폐하를 너무도 안타까워하는 것 같아 제가 모르는 폐하의 과거가 그리도 아픈가 싶습니다.”

“신이 그것을 숙의마마께 말씀드릴 이유는 없는 것으로 압니다.”

“하나 저도 알고 싶습니다. 폐하께서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 과거엔 어떤 사람이었는지. 처음부터 저리 차갑지는 않으셨을 테니까요.”

그리고 왜 화친왕은 그녀에게 있어 ‘다 가진’ 사람이 되어 버렸는지.

지금의 진예만 봐서는 그들의 관계가 어째서 그리 비틀렸는지 쉬이 짐작이 가지 않았다. 단지 저 조서엽이 그녀를 연민할 만큼 안타까운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만 헤아릴 수 있을 따름이었다.

하여 중얼거리듯 흘려보낸 소리에 서엽이 쥐고 있던 칼의 손잡이를 꾹 잡았다. 그리고 무언가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충고 한 말씀 올리지요.”

“말씀하십시오.”

“폐하께 인간적인 면모를 강요하지 마십시오. 그분께선 이미 질릴 정도로 겪어서 무뎌지셨을 따름이니.”

그러고 조서엽은 발을 돌렸다.

“물러가겠습니다.”

무건은 그런 그가 문밖으로 나설 때까지 빤히 쳐다보았고, 서엽 또한 그 집요한 시선을 느꼈으나 뒤돌지 않았다.

탁.

문이 닫히자 회랑에 있던 내관과 궁인들의 시선이 서엽에게 쏟아졌다. 분명 바깥에 있었던 조서엽이 갑자기 침전 방 안에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모두들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당황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서엽은 그들의 의문에 답을 주지 않고 무거운 발을 질질 끌며 밖으로 나갔다.

바깥의 달은 밝았지만 검은 구름이 스치고 있었다. 하여 지상에 내려앉은 희미한 달빛에 의지해 침전 앞의 마당을 지나쳐, 문턱을 넘었다. 그리고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곳에 이르렀을 때 서엽은 걸음을 멈추고 근처의 담벼락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가 마른세수를 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

무건을 보면 볼수록 자괴감이 들었다. 그렇다고 이젠 그를 제 손으로 죽일 수도, 다른 이의 손에 죽게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진예의 목숨이 그에게 달린 한 서엽은 지금처럼 무건에게 그를 지킬 칼을 내줄 터였고, 제 온몸을 던져 저 사내를 구해 낼 터였다.

자신을 덮친 그 모순적인 비극에 서엽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이제 희망은 하나였다.

〈동조 현상을 끊을 방법을 알아보거라.〉

반드시.

반드시, 찾아내고야 말 것입니다.

나의 황제 폐하…….

* * *

점차로 날이 따뜻해지더니 이제는 웃옷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만큼의 날씨가 되었다. 어전 회의가 끝난 뒤 밖으로 나서니 제법 선선한 공기가 진예를 맞이했다.

뒤를 따르는 내관 하나가 겉옷을 들고는 있었지만 진예는 손을 들어 그것을 입지 않겠다 하면서 밖으로 나섰다.

눈과 비로 질척해졌던 마당도 바짝 말라 그 위로 발을 내리니 바삭,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편전 앞의 문을 지나는데, 옆에서 서엽이 모습을 드러냈다.

“폐하, 신 서엽이옵니다.”

진예가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왼편을 확인했다.

단지 한 주 정도 못 봤을 뿐인데 서엽은 몹시도 피로해 보였다. 물론 언젠 그가 고생을 안 했겠느냐마는, 예상대로 연무건이 옆에서 정신을 꽤 갉아먹은 듯한 모습이었다.

진예는 며칠 만에 나타나 자연스럽게 제 뒤를 따라붙는 서엽에게 무얼 말해야 할지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어 툭 물었다.

“벌써 이레가 지났느냐.”

“……예, 폐하.”

다른 때보다 더 반겨 주길 바랐던 것일까. 서엽은 진예의 건조한 인사를 받고 주춤하다가 대답했다. 말 사이에 약간의 한숨 소리가 섞여 있었다.

진에는 그의 아쉬움을 느꼈지만 달리 달래 주지 않고 다음 화제로 넘어갔다.

“연 숙의는 어찌 지냈더냐.”

“밖에서 드릴 말씀은 아닌 듯합니다.”

돌아오는 대답에 진예가 걸음을 멈칫했다.

“편전으로 되돌아가야겠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뒤에 서 있던 내관과 궁인들이 양쪽으로 갈라섰다. 그 사이를 진예가 통과해 편전으로 향하자 궁인들이 급하게 편전 문을 도로 활짝 열어 주인을 맞이했다.

궁인들이 분주하게 문을 열어젖히는 가운데, 진예가 행랑을 지나 편전의 서쪽으로 들어서자 태감이 물었다.

“폐하, 다과를 들이리까.”

“되었다. 모두 전 밖으로 물러나 있도록 하거라.”

서엽과 독대를 하겠다는 뜻을 비치자 태감이 서둘러 내관과 궁인들을 뒤로 물리고 편전 밖으로 물러났다.

진예는 작은방의 가운데 있는 탁자 앞에 서엽과 앉아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 연무건이 어찌하고 있더냐.”

서엽은 대답을 하기 전에 문득 방 안에 있는 금위의 존재를 눈치채고 머뭇거렸다. 병풍 뒤에 하나, 천장의 보이지 않는 위치에 넷이 더 있었다.

보통 자신과 독대할 때는 진예는 금위들까지 모두 물릴 때가 많았는데, 이번엔 아니었다. 바로 입을 연 것을 보니 진예는 사람을 더 물릴 생각이 없는 듯했다.

저들이 둘이 나누는 이야기를 옮길 리는 없겠지만…….

서엽은 다른 이의 존재에 은근한 압박을 느끼면서 진예와 조금 떨어진 자리에 서서 보고를 올렸다.

“매일 밤 화친왕부에 찾아가고 있습니다.”

“그 정도는 짐 또한 파악하고 있다. 정말로 각오를 하긴 한 모양이더구나.”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것…….”

서엽은 대답하면서 얼마 전 무건이 화친왕 진평에게서 받아 온 것을 꺼냈다. 바짝 마른 검은 잎이었다. 향긋함과 지독함을 동시에 품고 있어 결국은 기괴해진 냄새가 나는 정체불명의 약초.

탁자 앞에 그것을 내려놓자 진예의 붉은 눈에 약간의 이채가 돌았다.

“무엇이더냐.”

“저도 알아보고 있으나 아직은 정확하게 무어라 단정 짓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화친왕이 이것을 폐하와 가까이 두라고 했더다군요.”

진예는 흠, 하는 짧은 감탄사를 내뱉고는 그것을 손으로 집었다. 잎 하나가 손톱보다도 작은 그것을 제 코로 가져갔다가 후각을 강하게 자극하는 냄새에 무의식중에 인상을 썼다.

“냄새가 기묘하군. 해서, 연 숙의가 나한테 가져다준다더냐.”

기실 그런 핑계가 있었다면 연무건은 지금까지 시간을 끌 것 없이 당장 제 앞에 나타났을 텐데 수일째 자신을 찾는 척도 하지 않았기에 진예도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역시 서엽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본인이 가지고 있겠다 하니 화친왕이 또 그리하라 하였다 합니다.”

위험한 물건임을 본인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겠지. 자신이 가지고 있겠다 한 이유도, 진예 앞에 나타나지 않는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터였다.

덕분에 진예는 연무건이라는 놈 역시 인내할 줄 안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고는 괜히 웃음이 나왔다.

볼수록 웃기는 물건이었다.

그리고 뭐, 연무건 나름대로 목숨은 잘 부지하고 있는 것 같으니 되었다.

그리 생각하며 진예가 서엽이 아닌 다른 이를 호명했다.

“동 중랑장, 게 있느냐.”

방 한쪽에 있던 병풍 뒤에서 한 사내가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서엽이 그 순간 입술을 움칠했으나 말소리는 꺼내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진예는 약초를 쥐고 있는 손을 내밀며 중랑장에게 명을 내렸다.

“위장군에게 이것을 전해 어떤 식물인지 알아보라 이르거라.”

“명 받드옵니다.”

중랑장이 그녀가 내민 것을 공손히 받아 들고는 다시 병풍 너머로 숨어들었다. 잠시 뒤 방 안에서 그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 과정을 지켜보는 서엽의 표정이 오묘해진 것을 알아챈 진예가 먼저 지적했다.

“조 후, 표정이 왜 그러느냐.”

손으로 가볍게 탁자를 치는 소리가 들리자 서엽이 흠칫 표정을 바꾸었다. 그는 뒤늦게야 진예가 자신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진예의 붉은 눈이 서엽의 심장을 꿰뚫을 듯이, 차갑게 바라보고 이었다. 아니, 차가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냥, 진예의 눈은 언제나 저랬다.

서엽은 제가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아, 아닙니다.”

대답을 듣고도 진예가 살며시 고개를 기울였다. 서엽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한 행동이었다.

조서엽은 비단 연무건만 질투하는 게 아니었다. 진예의 사소한 하나까지 제가 챙기기를 원했다.

애초에 황제의 일거수일투족 전부를 혼자 챙기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에 말로 드러낸 적은 없었지만 종종 씁쓸해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게다가 며칠 떨어졌다 왔으니 지금은 그 마음이 더할 것이다.

하지만 진예는 모르는 척했다. 그의 저 어리석은 감정에는 전부 눈을 감아야 할 때였다. 그래야 조서엽이라는 사내가 언젠가 저를 향한 마음을 버릴 테니까.

다행히 느리지만 어쨌든 평상을 되찾은 서엽도 정신을 차리고 보고를 계속해 나갔다. 다음 주제는 진예로서도 생소한 것이었기에, 꽤 흥미롭게 들을 수 있었다.

“하여 연 숙의가 화친왕의 신임을 얻기 위해 친왕부에 드나들다가 또한 다른 것을 발견한 모양입니다만…….”

“말해 보거라.”

“화친왕이 즐겨 드나드는 별채가 하나 있는데, 그 밑으로 지하실이 있는 것 같다고 합니다.”

이거군.

요 며칠 진예는 평소보다 더 기분이 저조해져 있었다. 떨어져 있어 본 적이 거의 없는 제 수족인 서엽도 융경궁에 가 있는 데다, 화친왕과 접촉을 이어 가고 있는 연무건에 대한 보고를 들을 때마다 답답하기도 했고 아슬아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엽의 마지막 말을 들으니 제 아우가 제 목숨을 아끼지 않고 미쳐 날뛰는 이유가 뭔지 곧 알 수 있으리란 생각에 기분이 꽤 좋아졌다.

더불어 그리도 순수했던 연무건이 어떤 모습의 미친 사냥개가 되어 나타날지도 몹시 기대되었다.

* * *

화친왕부는 황궁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경비가 삼엄한 축에 속했다. 일례로 무건이 잠시 볼일을 본다 하며 밖에 나오기만 해도 꼭 두셋 정도의 인원이 따라붙었고, 보이지 않는 곳곳에 감시의 눈이 있었다.

며칠 지나고 나서야 무건은 화친왕과 독대할 때마저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음을 겨우 깨달았다. 처음 만났을 때 만약 화친왕을 죽였다면 자신 또한 더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터다. 그때 살의를 참았던 것이 차라리 천운이었다.

다만 답답한 상황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화친왕은 의외로 빈틈이 없었고, 매일같이 무건을 친왕부에 드나들게 하면서도 쉽게 둘만 남는 상황을 만들어 주지는 않았다.

과연 이렇게 해서 속전속결이 가능해질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무건도 왕부 내에서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융경궁에도 있는 개구멍이 친왕부에 없을 리 없다고 생각해 며칠 동안 찾아 헤매 안쪽과 통하는 통로를 발견한 것이다. 그리하여 야음을 틈타, 사람들의 눈을 피하면서 화친왕부를 휘저은 결과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융경궁에서 화친왕부로 온 첫날 만난 바로 그 건물의 밑에 지하실이 있는 듯했다.

그것을 알아차린 계기는 의외로 별것 아니었다. 인적을 피해 별채의 뒷마당을 걷다가 완전히 불이 꺼진 별채에 위도양과 웬 서역인이 드나드는 것을 보았다.

손에는 불이 붙지 않은 향로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들어간 뒤 별채는 고요해졌지만, 그들이 나올 무렵 별채의 방이 아주 잠깐 밝아졌다가 도로 어두워졌다.

사실 처음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라 며칠 지켜보고 머리를 열심히 굴린 뒤에야 깨달았다. 지하실의 존재를.

눈치챈 순간부터 결코 그것이 별것 아닐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예가 원하던 화친왕을 죽이는 것 외의 다른 단서가 바로 그곳에 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통로는 별채의 안쪽에 있는 모양이었다. 몰래 드나들기만 해서는 접근하기 어려운 장소였다.

그리하여 무건은 다른 깨달음을 얻었다.

‘화친왕을 죽여야만 들어갈 수 있다.’

연무건에겐 그 지하실의 수문장이 화친왕인 셈이었다.

그리고 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때가 왔다.

토도도독, 토독…….

화친왕부에 매일 드나든 지 드디어 달포가량 지난 때, 길고 길었던 겨울이 끝나고 봄을 알리는 밤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었다.

차오르고 있는 달이 구름 사이로 숨어 유난히도 어두운 밤, 무건은 이슬비에 젖어 화친왕의 별채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몸에는 조서엽이 내준 단도를, 머리에는 화친왕을 향한 살의를 품은 채 입으로는 간사한 세 치 혀를 놀릴 준비하고서 화친왕 진평의 앞에 섰다.

진평은 이곳에 드나든 첫날처럼 녹색 비단옷을 걸친 채 무건을 환대했다.

“연 숙의, 이리 와 앉거라.”

마침내 내디딘 지옥으로의 첫걸음이었다.

무건은 일구종을 벗어 내며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진평의 얼굴을 보는 건 점점 역겨워져만 갔지만, 그에 비례해 자연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 또한 익숙해졌다.

한데 오늘은 진평의 옆에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무건에겐 낯이 좀 익은 이였다. 위도양과 별채, 아니 별채와 이어진 지하실에 드나들던 어린 서역인이었다.

그 서역인은 무건이 방 안에 들어섰을 때부터 이쪽의 행동 하나하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유심히 살피면 무건이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조차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했다.

그에 무건도 매부리코에, 인상이 강한 상대를 빤히 바라보다가 진평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분은?”

“미마이라고 부르는 자네.”

“미마이.”

이곳에서 쓰지 않는 낯선 조어였다. 그 이름을 읊조리자 예의 미마이라는 이름의 서역인이 고개를 숙였다. 무건 역시 마주 인사를 하고는 자리에 앉으면서 감각을 돋워 주변의 기척을 살폈다.

‘둘, 둘 정도인가……?’

그렇다면 화친왕과 서역인 아이까지 총 네 명.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았다. 서엽만큼 뛰어난 무인이었다면 모를까, 화친왕을 만날 때마다 감시의 눈이 있다는 걸 눈치채는 것도 나흘이 지나서야 겨우 알았다. 만날 때마다 술을 퍼마신 영향도 있긴 하겠지만, 제 능력이 아직 그 정도밖에는 되지 않는다.

무건은 일구종을 한쪽 구석에 접어 벗어 두면서 이곳에서 화친왕을 죽이고 자신이 살아 나갈 경우의 수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지하실에까지 접근할 시간은 없을지도 모른다.’

위도양이 언제든지 들어올 수 있도록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다. 그 외에도 화친왕부에는 많은 호위 인력이 있었다.

아마 지하실을 발견한다 해도 안에 들어가면 그만큼 시간이 끌릴 테니 점점 더 위험해질 터였다.

그러나 진예가 뒤의 일을 도모하게 하려면 여기서 어떻게든 더 많은 정보를 알아내야 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쯤 되니 조서엽에게라도 미리 알리고 올 걸 그랬나 후회도 되었지만, 무건도 친왕부에 들어서고 나서야 별채로 향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화친왕도 제 나름대로 조심성 있게 일을 실행하고 있는 셈이라고 볼 수 있었다. 느슨한 듯하면서도 늘 적당한 경계를 유지했다.

무건은 일구종을 한쪽으로 밀어 둔 뒤 고개를 들어 진평을 마주 보았다. 그 면상을 보면 늘 심기가 뒤틀리기만 했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긴장이 되었다. 손끝이 말려드는 느낌이었다.

‘떨지 마…….’

눈앞의 사내는 어떻게든 제거해야 하는 인물이었다.

진평은 진예와 이 세상에 공존해서는 안 됐다.

언제든지 그녀를…… 무너뜨릴 수 있는 사람이니까.

무건은 제 긴장도 풀고, 화친왕의 경계도 흐트러뜨릴 겸 먼저 채워져 있던 자신의 잔을 들어 입에 댔다.

“친왕부에 와서 전하 말고 다른 분을 뵙는 것은 처음입니다.”

가볍게 말의 포문을 열자 진평이 미마이라는 자를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는 연 숙의에게 소개해 줄 때가 된 것 같아서 말이다.”

“어떤 자이기에…….”

“그보다 일전에 주었던 향낭은 잘 가지고 있느냐.”

물음을 들은 무건은 반쯤 마신 술잔을 내려놓고 품 안에서 검은 비단 주머니를 꺼냈다.

“마침 정말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의아해하던 차였습니다.”

무건이 잘 가지고 있다는 것에 흡족해졌는지 진평이 입꼬리를 둥글게 말아 올렸다.

“황도에서는 별 쓸모가 없는 것이다.”

“황도에서는?”

무슨 뜻이냐는 의미를 담아 반문하니 화친왕이 말해 줄까 말까, 이쪽을 떠보는 듯이 시간을 끌었다. 괜히 상 위의 먹을 것들을 살피다가 과일 하나를 집어 들어 제 입에 넣으며 애태우는 그를 보고 무건은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이 향낭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그제야 진평이 픽 웃으며 답을 내 주었다.

“그 안의 약초…… 그 향기를 맡으면 익재들이 환장하고 달라붙는다.”

“…….”

순간적으로 표정이 무너질 뻔했던 무건은 간신히 제 얼굴 근육을 제자리에 두었다. 하지만 대답을 듣자마자 진평을 당장 죽여 버릴까 고민했다.

무건은 분노를 내리누르며 제가 기억하는 어느 날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설마, 이전에 황궁을 덮쳤던 익재들이…….”

“처음엔 누님을 노리고 갔을 텐데, 그 냄새 때문에 아마도 그다음엔 네놈을 노렸을 것이다. 내빈각에 머무는 내내 그 약초를 태워 네놈의 몸에 배게 했었으니까. 물론 사람의 후각으로는 맡지 못할 만큼 아주 희미한 냄새였겠지만 익재 놈들은 사람보다 훨씬 후각이 뛰어나니 상관없었겠지.”

들으면서 무건의 머릿속이 점점 차게 식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 흥분해 버릴 것 같아 제 잔에 남은 술 반 잔을 마저 비웠다. 하지만 술기운보다 제 화가 더 센 모양인지, 평소와 같은 어지러움은 전혀 찾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진평이, 뱀과 같은 혀를 놀려 댔다.

“화가 나느냐.”

그러고 보면 그날 진예의 침전에 찾아가라 부추긴 것도 진평이었다.

무건은 그날의 익재가 진예가 아닌 저를 노린 것이었다는 데 차라리 안심했지만, 역시나 썩 유쾌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저를 죽이려 하셨습니까.”

“누님이 있으니 절대로 죽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

진평이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보란 듯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덕분에 익재 놈들이 명령보다 본능에 좀 더 충실하다는 것은 알게 됐지. 좋은 실험이었다.”

면전에서 상대를 가지고 실험했다고 말하면서 거들먹거리는 꼴이라니. 당하는 입장인 무건의 눈엔 아니꼬워 보일 수밖에 없었다.

무건은 그런 제 마음을 굳이 숨기지 않고 진평에게 적대감을 드러냈다.

“해서 저에게 지금 그것을 알려 주시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반쯤 따지듯이 묻는데, 진평은 더 열받으라고 부추기는 것인지 무건의 아픈 곳을 마구 찔러 댔다.

“벌써 한 달이 훌쩍 넘도록 누님의 부름을 받지 못하고 있다 들었다.”

“…….”

“후궁이 황제의 부름을 받지 못한다니. 그래서야 냉궁에 있는 것과 뭐가 다른 게냐, 응?”

마음만 먹었으면, 정말 못 참겠으면 무건은 진예가 있는 침전으로 뛰어들었을 것이다. 아니면 저번처럼 그녀가 있는 전각 앞에서 종일 기다리며 애원이라도 했겠지.

하지만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눈앞의 화친왕, 진평의 눈을 가리기 위함이었다.

달포 동안 매일 밤 진예를 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융경궁을 홀로 빠져나와 화친왕부에 드나들었다.

그간 진예의 동향은 소식으로만 간간이 들었다. 여전히 그 옆에 서엽이 있음에 질투가 일었지만 차라리 다행이라 여겼다. 진예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서엽의 옆이라면, 적어도 그녀는 안전할 테니까. 역설적이게도 서엽 때문에 다른 이가 범접치 못할 테니까.

솔직히 말하면 무건의 인내도 거의 한계치에 달하고 있었다. 기왕이면 오늘 그를 제거해야 하는 이유였다.

‘그래…… 하루라도 빨리 냉궁에서 나가야지.’

네놈의 목을 짓밟고.

무건은 사뭇 원망과 분노가 배어나는 어투로 진평에게 대꾸했다.

“전하께서 이놈에게 길을 열어 주신다고 한 것을 믿었고, 그것만 보면서 여태껏 버텼습니다.”

“그래, 오래 버텼다.”

추임새를 들으니 더 열이 들끓었다. 진평이 뭐 때문에 자신의 원망을 이리도 부추기는지 모르겠지만, 무건은 계속해서 말을 쏟아 냈다.

“하지만 저를 계속 이리 이용만 하실 것입니까? 저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습니다. 제 앞에…….”

더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 말을 이을 참이었다. 진평이 불쑥 끼어들었다.

“이제 본왕 사람이 되거라, 연 숙의.”

무건이 말을 더 잇지 못하고 굳었다.

진평이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무건은 그와 눈을 똑바로 마주 보다가 혼란함에 눈을 굴렸다.

……그런 건가?

이 지루한 기다림을 언제쯤 완벽하게 끝낼 수 있는지, 화친왕은 왜 시간을 끌고 있는 건지 답을 찾는 중이었는데 이제야 감이 잡혔다.

화친왕은 무건을 어디에 효용성 있게 쓸 수 있는가가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미 그 효용은 정해져 있고, 얼마나 이쪽을 심리적으로 한계까치 몰 수 있는가가 중요했던 것이다.

그 결과가 한 달 동안의 방치. 진예는 어차피 찾지 않을 것이니 무건의 한계치가 깨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시기가 왔다고 생각했을 때, 자신 또한 너를 이용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우위에 오른 뒤 썩은 지푸라기를 내미는 것이었다.

천한 놈의 열등감을 자극하여 제 손 위에 올려 둔 뒤 이용하는 계획.

하지만 안타깝게도 화친왕의 패인은 그곳에 있었다.

연무건은 애초에 그렇게 열등감에 사로잡혀 누굴 원망하는 놈이 아니었다. 무릎 꿇으라면 기꺼이, 누구에게라도 무릎 꿇을 수 있었고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진평은 드디어 제 패를 꺼내 드러내었다. 그가 제 옆에 가만히 앉아 있는 서역인을 턱짓했다.

“하면 신뢰의 증표로 이 미마이를 너에게 주겠다. 이 아이를 데리고 융경궁으로 가거라.”

어딜 가도 튀는 외모라 걸림돌만 안 되면 다행일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 들긴 했지만 무건은 얌전히 저 서역인의 쓸모에 대해 물었다.

“무슨 뜻입니까.”

그리고 제가 원하는 답이 서서히 구체성을 갖추기 시작했다.

“모든 것의 마음을 읽고 조종하는 방법.”

화친왕이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고 있는 서역인 아이의 어깨를 쳤다.

“바로 이 미마이니라.”

무건이 미마이 쪽으로 눈을 옮겼다. 사내아이답지 않은 왜소한 몸집의 서역인인 미마이는 그들의 대화 내용을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 더욱 시선을 피하며 얇은 눈꺼풀을 살며시 떨 뿐이었다.

그 모습은 아주 평범하기 그지없어 보였지만, 진평은 그를 아주 유용한 무기로 취급했다.

“이 아이가 네가 누님의 마음을 차지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아마도 진예의 심장을 찌를 용도의.

무건은 미마이라는 이름의 심약해 보이는 사내아이와 진평을 번갈아 보다가 이윽고 진평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감격한 어투로 감사함을 읊었다.

“드디어 저에게 답을 내 주시다니, 이날만을 기다려 왔습니다.”

진평으로서는 무건의 감읍함은 이미 예정된 일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뿌듯하긴 했는지 무건에게 휘적휘적 손짓했다.

“이리 가까이 와 술잔을 받거라.”

무건은 그에게 다가가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개밥 그릇을 던져 주듯이 진평이 그의 손 위에 술잔을 놓고 쪼로록 투명한 술을 천천히 흘려 냈다. 그러면서 기분이 좋긴 한지 묘한 박자를 실어 읊조리듯 말을 했다.

“네놈은 아마 황궁에 들기 전엔 이런 귀한 술도, 심지어 여기 옆에 있는 월병조차도 평소엔 입에 대지 못했겠지.”

“그렇습니다.”

“하나 이제 이 화화가 널 도와 누구보다 귀한 이가 될 수 있도록 해 주겠다. 믿고 따르거라.”

거들먹거리는 말이 기분 나쁠 법했지만 무건 역시 이날만을 기다려 왔기에 말소리에 진심으로 기쁨이 묻어났다.

“달포 전 화친왕부에 발을 들였을 때 이미 맹세드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놈을 믿지 아니하신 건 다름 아닌 전하이십니다.”

“그래서 서운하더냐.”

“미마이를 저에게 주신다니 다 풀렸습니다.”

제 위장에 술을 쏟아붓고 무건은 진평의 잔도 채워 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고는 미마이를 돌아보자 어느새 이쪽을 또 뚫어져라 보고 있던 서역인 아이가 흠칫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무건 때문에 겁을 먹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증거로 긴 소매 밑에 살며시 가려진 두 손이 한데 모아져 꼼지락대고 있었다. 무의식적인 습관일지도 모르지만 그보다는 두려움의 표시에 가까워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왜인지 안쓰러워진 무건은 저 아이까지 죽일 필요는 없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무건으로선 진평을 제거하기 전에 방 안에 머릿수를 하나라도 줄이는 게 이득이었기에 그는 미마이를 어떻게 내보낼까 궁리했다. 그러다 사뭇 들뜬 어조로 진평에게 물었다.

“저 아이를 당장 데려가도 되는 것이라면 채비를 시켜야 하지 않을까요?”

진평은 이젠 무건을 완전히 얕보기 시작했는지 곧장 수긍해 왔다.

“그도 그렇군.”

한 고삐가 풀리니 이지가 흐려진 모양이었다. 그는 의심도 하지 않고 무건의 의도대로 움직여 주었다.

진평은 서역 말로 미마이에게 간단히 명했다.

「나가서 떠날 준비를 하거라.」

그에 미마이가 다시 고개를 들어 무건을 보았다. 진흙 속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흑진주처럼 검은 눈동자가 반짝이는 것 같았다. 미마이는 그 영롱한 눈만 봐도 꽤 총명해 보이는 아이였다.

마음을 읽고 조종할 수 있는 이라 했으니 어쩌면 미마이가 자신의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친왕 진평을 죽이겠다는, 그 속마음을 말이다.

하지만 무건이 어떤 역심을 품고 있는지 알든 모르든 미마이는 일단 진평의 명에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진평은 술잔을 들어 잠시 주의를 흐트러뜨렸으며.

사락, 사락.

가볍게 옷깃 스치는 소리가 울리는 것을 들으며 무건도 잔을 입 쪽으로 가져가면서 그런 진평에게 미소 지어 보였다.

아니, 그러다가 마침내 뒤의 문이 완전히 닫혔을 때.

타악!

묵직한 술잔이 무건의 손에서 미끄러지면서 맑은 술이 흘러내렸고, 다음 순간 그는 품에서 꺼낸 날카로운 단도를 치켜들었다.

예상하지 못했기에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한 진평은 눈을 뜬 채 단도의 예리한 끝이 자신의 목덜미에 박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단숨에 달려든 무건의 손 아래로 핏줄이 뜯어지는 감각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동시에 붉은 피가 그의 얼굴에 튀어 올랐다.

“커억……!”

진평이 완전한 비명을 내지르기도 전에 칼을 뽑아내자 목덜미에서 피분수가 쏟아졌다.

다만 그것을 맘 편히 감상할 시간 없이 무건은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천장에서 떨어져 내린 두 호위들의 검을 피하고, 한 녀석의 뒤쪽으로 달려들었다. 그대로 닭 모가지를 부러뜨리듯 목을 잡고 비틀며 칼로 베어 버렸다. 그리고 그 시신을 방패 삼아 다른 놈에게 다가가 던져 버린 뒤 상대가 당황한 사이 뛰어들어 그를 위에서 덮쳐 내렸다.

쿵, 하고 제 몸무게로 상대를 짓이긴 무건은 칼로 머리 한가운데를 찍어 내렸다. 세 번째 놈을 죽일 때는 무건도 차마 볼 수 없어 눈을 질끈 감았지만 제 얼굴과 옷에 피가 후두둑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순식간에 셋을 처리한 무건은 화친왕 쪽을 확인하기 위해 칼을 뽑아내고 몸을 돌렸다.

천천히 눈을 뜨니 뒤늦게야 화친왕이 피가 흐르는 제 목을 부여잡고 바닥을 뒹굴고 모습이 있는 시야에 잡혔다. 그가 무건의 배신에 충격을 받은 듯, 숨이 넘어가면서도 뚝뚝 끊기는 단어를 내뱉으며 의문을 표했다.

“커흑, 윽, 연, 무건, 왜, 왜.”

피에 젖은 진평의 손이 바들바들 떨며 무건의 발목을 잡았다. 진평이 필사적으로 눈을 들어 붉은 피를 뒤집어써 흡사 야차 같은 모습이 된 무건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억울하다는 양, 자신이 이 꼴이 된 이유를 알려 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에 무건은 진평을 차갑게 내려다보며 잡힌 발목을 살며시 뒤로 뺐다. 진평은 힘없이 무건을 놓쳤다. 고개도 푹 떨구어졌다. 그럼에도 바닥에 기대어 여전히 의문 어린 눈동자에 자신을 비추는 것을 보고 무건이 한마디 했다.

“진예에게 있어서 다 가진 사람이 바로 당신이니까.”

“그게, 무, 무…….”

무슨 말이냐고 묻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진평은 중간에 각혈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것을 보며 무건은 진평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이 있는 한 진예는 영원히 자신이 완벽하지 못하다고 느낄 테지.”

아직 그 결핍이 어떤 연유로 일어났는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어쨌든 진평은 진예가 손에 넣지 못한 무언가를 가진 자였다. 정확히는 진예가 애써 필요 없다 말할 수밖에 없는, 사실은 간절히 차지하고 싶어 하는 ‘애정’이라는 것을.

그리고 화친왕이 살아 있는 한, 진예는 그것을 계속 외면하려고만 할 것이다. 텅 비어 버린 마음을 채울 생각도 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 버릴 터였다.

그것이 연무건이 화친왕을 향해 칼을 든 이유였다.

무건은 진예가 이자를 보면서 제 불행을 곱씹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런 가치 없는 감정에 매달려 혹여나 그녀가 흔들리지 않았으면 했다.

그게 진예가 내세운 정치적 이유보다, 그녀에게 당장의 쓸모를 증명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었다.

한데 그의 생각을 비웃듯이 진평이 목을 울려 웃었다.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다시 왈칵 피를 쏟아 내면서도 이마에 핏발을 세우며 버텼다.

“그, 그래 봤자…… 누님이, 너 따위에…….”

“마음을 내주진 않을 거라고?”

“받아 본 적 없는 사랑을…… 어찌 주겠느냐…….”

무건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하관에 힘이 들어가 이가 꽉 맞물렸다.

방금 진평의 말에서 진예가 겪은 과거의 편린을 들여다본 느낌이었다. 정말 너무 작아서, 숨겨진 것의 부피가 어느 정도인지조차 짐작지 못하겠지만.

그리고 그 모두를 알고 있을 진평은, 죽어 가면서도 제가 옳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네놈은, 쓸데없는…… 짓을 한, 것이야…… 내 말을, 따랐…… 으면, 쉬, 웠.”

중간에 말소리가 끊겼다. 뻐끔거리던 입이 힘없이 멈춰 버렸기 때문이었다.

무건은 과다 출혈로 인해 허여멀건 얼굴로 눈을 뜬 채 죽어 버린 진평을 한동안 멍하니 보았다.

진평의 마지막 말 때문에 안 그래도 가라앉아 있던 기분이 더 깊은 아래로, 아래로 까라졌다.

받아 본 적 없는 사랑…….

방금의 말을 곱씹으며 무건은 손을 뻗어 조심스레 진평의 눈을 감겨 주었다.

그렇게 식어 가는 진평의 시신을 옆으로 밀어 두고 무건은 방 한쪽에서 불을 밝히고 있는 등잔을 잡았다. 그러고 지하실의 입구를 찾기 전에 혹시 몰라 바깥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아직은 누구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조심조심 발을 옮기며 무건이 바닥과 벽면을 살폈다. 그러다 진평이 앉아 있던 방석을 옆으로 밀어내자 나무 바닥이 갈라져 있는 것이 보였다.

‘정말로 수문장이었군.’

사람 하나가 몸을 세워 겨우 쑤셔 넣을 수 있을 만큼 작은 정사각형 모양의 입구였다. 다만 손잡이 같은 것이 따로 없어 무언가 끼워서 들어 올릴 것이 필요해 보였다.

무건이 주변을 둘러보며 마땅한 것이 있나 찾아보다가 서랍장 옆에 세워진 길고 얇은 막대를 발견했다. 짐작하기로는 딱 저 입구를 여는 용도로 쓰는 것이 맞는 듯했다.

무건은 막대를 틈새에 끼우기 전, 다시 바깥의 동향을 살폈다. 지금 상태에서 지하실로 들어가는 건 지나치게 위험하다. 게다가 서랍장을 밟고 올라가야 하는 작은 창문이 아니면 퇴로가 없었다.

일단은 열어 보기만 하자. 그리 결심한 무건이 막대를 틈에 끼웠고, 그것을 지렛대 삼아 바닥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철창으로 가려진, 아주 가파른 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사이로.

끼익.

끼이이이익.

끼…….

경첩이 기우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아니다.

사실 이건 그런 일상적인 소리가 아니었다. 무건이 바로 얼마 전에 들었던. 아니, 보았던.

“익재……?”

무건의 입에서 신음처럼 괴물의 이름이 흘러나왔을 때였다.

방문 밖에서 흐릿하게 들리는 누군가에 기척에 무건이 흠칫했다. 그는 서둘러 입구를 도로 닫고는 막대를 제자리에 놓아두었다. 그리고 한쪽에 밀어 놨던 일구종을 손으로 낚아챈 뒤 빠르게 서랍장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아마도 위도양일, 누군가의 기척이 방문 앞으로 완전히 다가오기 전에 창문을 열고 바깥으로 뛰어내렸다.

밖에는 아직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무건의 몸을 씻겨 줄 만큼 거센 빗줄기는 아니었다. 보슬보슬, 미약한 바람에 휘날리는 연약한 빗방울을 맞으며 무건은 서엽이 건넸던 단도를 품에 갈무리했다. 그리고 제가 아는 뒷구멍을 통해 화친왕부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가 입구를 통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을 잃은 화친왕부에서 고함이 터져나오고 소란스러워졌다. 무건은 그 소리와 빠르게 멀어졌다. 긴 다리가 속도를 내어 빛 하나 없는 어두운 밤길을 가로질렀다.

이제 환의 황제이자 자신의 명인자에게 되돌아갈 때였다.

담람궁을 향해 달려가는 무건의 손엔 어느새 진예가 되돌려 주었었던 옥가락지가 들려 있었다.

* * *

하아, 하아…….

자정을 향해 가는 깊은 밤. 거친 호흡 소리와 함께 궁 안으로 커다란 신형이 나타났다. 이미 옷은 붉은 피로 범벅이었고 그 위로 일구종을 입었으나, 그 역시 피에 푹 절어 버린 것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 흉한 꼴임에도 묵칙(황제의 친필 출입증)을 앞세워 담람궁의 내동문을 통과한 무건은 한참을 달린 탓에 진정되지 않는 숨을 내뱉으며 진예가 잠들어 있을 담람궁의 정가운데, 침전으로 빠른 걸음으로 향했다.

이전에 딱 한 번 왔을 뿐인 곳이었고, 그나마도 오랜만에 발을 들인 것이지만 무건의 발에는 거침이 없었다.

마치 거대한 인력에 이끌리듯이 반쯤 본능에 따라 그녀가 있을 곳으로 발이 움직였다.

흐트러지는 빗물 사이에서 무건은 겨울비가 내리던 날, 하루의 반을 기다렸던 것을 떠올렸다. 그때 제 귓가를 때리는 거친 빗속에서 진예에게 했던 약속을 이제야 지키게 된 것이었다.

이제야 그녀의 걸림돌을 자신이 치웠다.

그리도 천하다 손가락질받던 연무건이 자신의 쓸모를, 다름 아닌 황궁에서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진예에게 가까이 다가갈 기회를 드디어 잡게 되었다.

그 사실에 기분이 좋을 법도 했지만 무건은 굳은 표정으로 걸었다. 제 손안에서 단단한 옥가락지가 손바닥을 아플 만큼 파고들어도 주먹을 꽉 쥔 채 풀 줄을 몰랐다.

무건은 제 발아래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을 걷다가 마침내 침전 앞 문턱을 넘었다. 그러자 제 앞에는 별세상이 펼쳐졌다.

하늘도 고귀한 이를 알아보는 것인지 구름마저 상서로운 모습으로 휘감고 있는, 용마루가 없는 금빛이 도는 붉은 지붕을 인 거대한 전각. 그 아래 문 앞에서부터 전각 앞까지 촘촘히 대기하고 있는 내관들과 궁인들.

아직 전각의 주인이자 환의 지존인 진예는 예상과 달리 잠이 들지 않았는지 거대 전각의 모든 창에 불이 밝혀진 채였다.

그 가운데 머리 위에 거대한 비 가리개를 든 궁인과 붉은 홍등을 들고 있는 내관을 옆에 두고 서 있는 태감이 보였다.

깊은 밤, 황제의 침전 앞에 사내가 나타나자 태감의 눈이 이쪽을 향했다. 그에 무건이 똑바르게 깔린 어도(御道)의 오른쪽 길을 한 발짝씩 내디디며 넓은 마당을 가로질렀다.

그가 가까이 다가설수록, 무건의 몰골이 말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 태감의 표정이 점차로 굳어 갔다.

태감은 무건이 기단을 밟기 전에 앞으로 나와 그를 제지했다.

“숙의마마, 이 야심한 시각에 어인 일이시옵니까.”

그에 무건은 발을 멈칫했지만 눈으로는 아직 불이 훤한 침전의 문을 응시했다.

“이 연무건이 왔다고, 폐하께 아뢰어 주십시오.”

태감의 눈이 무건은 위아래로 쭉 훑다가 못마땅하게 미간이 구겨졌다. 아무리 봐도 무건의 옷을 적신 것은 피였다. 심상치 않은 모습이었고, 황제의 앞에서 보이기엔 명백히 부적절한 것이었다.

“몰골이 말이 아니시옵니다. 융경궁으로 돌아가셔서 폐하의 부름을 기다리시지요.”

과연 진예가 눈앞의 사내를 찾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찾지 않으리라고, 태감은 생각했다.

그러나 무건은 단 한 걸음도 물리지 않았다.

“하나…….”

그리고 그의 반박이 나오기 전에 태감의 뒤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 숙의를 안으로 들이십시오, 공공.”

침전 안에서 나온 조서엽이었다.

그가 어느새 열린 침전의 문 앞에 서서 무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건의 모습만 보고도 이미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전부 알아차린 듯했다.

하지만 서엽의 발언을 이해하지 못한 태감이 미심쩍다는 듯이 물었다.

“폐하께서 윤허하신 것이 맞습니까?”

“틀림없이 들이라 하실 것입니다.”

황제의 입에서 나온 말을 전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조서엽은 진예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는 자였다. 태감으로서도 그의 말은 영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결국 본인이 직접 진예의 뜻을 확인하기 위해 침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사이 조서엽이 기단을 밟고 내려섰다. 이윽고 두 사람의 어깨가 스치려는 순간, 서엽이 걸음을 멈췄다. 그가 내용과 달리 무감한 목소리로 무건에게 속삭였다.

“잘 살아 돌아오셨습니다, 숙의마마.”

“…….”

“보아하니 다치신 데도 없으신 것 같습니다.”

“덕분에.”

짧은 대답을 듣고 나서야 서엽이 입술 양끝을 올려 웃음을 띠었다.

“첫 쓸모를 증명하신 것, 감축드리옵니다.”

은근히 비꼬는 투에 무건이 그에게 눈을 향했다.

역시나 이 사내는 자신에게 전혀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가 지키길 바라는 것은 정말 무건의 ‘목숨’만인 듯했다.

대체 넌 무슨 속셈이지?

그렇게 생각이 들었을 때, 표정이 한껏 굳은 태감이 밖으로 나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안으로 드시옵소서, 숙의마마.”

그 말을 듣고 무건은 계단을 밟으며 일전에 그가 건넸던 그의 호의를 반납했다. 품 안에서 화친왕의 피가 묻은 단도를 꺼내 서엽의 손에 쥐여 준 것이었다.

투박한 손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희미한 핏자국에 서엽이 불쾌하다는 양 표정을 굳혔으나 결국 둘은 말없이 엇갈렸다.

무건은 마침내 침전 정문에 도착해 금위들에게 몸에 혹시 칼 같은 것은 없는지 철저하게 수색당했다.

그 순간에도 태감은 저 흉한 사내를 정말로 침전에 들여도 되는지 몰라 난처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황제의 허락이 떨어졌으니 이곳엔 더는 진예의 유일한 후궁인 연무건을 막을 이가 없었다.

얼마 안 가 금위들이 물러나며 태감 역시 발을 옆으로 물려 앞을 틔워 주었다. 환의 주인을 만나러 가도 된다는 허락의 행동이었다.

문 앞에 선 무건은 아직 화친왕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던 그 생생한 감각이 잔존해 있는 주먹을 꾸욱 쥐었다. 평소와 달리 이채가 사라진 눈을 한 그의 발걸음이 천천히 침전의 문턱을 넘었다.

회랑을 디디며 나아가는 그의 발에는 기묘하게 조심성이 없었다. 그러나 진예가 기다리고 있을 방의 문이 열릴 때까지 그것을 지적하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드르르르륵…….

늦은 밤이라 문도 피곤해하는 것인지 유난히 게으르게 소리를 끌며 열린 문을 지난 무건의 눈에 얼마 안 가 붉은 천개가 천장에서부터 늘어진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얇은 천사 사이로 살며시 모습을 가린 환의 지존이 그곳에 몸을 일으키고 앉아 있었다. 희미하게 비치는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무건은 천천히 몸을 낮추더니 무릎을 꿇으며 경의를 표했다.

“홍복을 누리소서, 대환의 황제 폐하.”

굵은 저음이 고요에 휩싸여 있던 침전을 묵직하게 울렸다.

“왔느냐, 연 숙의.”

깊은 곳에 앉은 진예는 오랜만에 보는 무건을 그녀 나름대로 환대하여 주었다.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연무건의 모습을 보며 무언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엄숙함이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이라 여겨 왔는데, 아니었다.

지금껏 그저 그가 입지 않았을 뿐.

낯설지만 어색하지 않은 태도였다. 그런 연무건이 진예의 앞에 나타나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하고 있었다.

귀족의 사내는 아니지만, 자신 또한 충분히 진예의 옆에 설 수 있는 사내임을 주장하려는 듯이.

진예는 멀리 앉아 무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밖을 향해 명했다.

“문을 닫거라.”

타아악.

무건의 뒤로 활짝 열려 있던 문이 닫혔다.

거대한 침전의 문. 그리고 병풍처럼 화려한 문살. 그것을 등지고 있는 무건의 모습은 황제의 면전에 나타나기에는 실로 적절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그것도 아직 마르지도 않아 그 선연한 붉은색이 약간의 소름마저 일으킬 만큼 섬뜩했다.

진예가 무어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사이 무건이 먼저 입을 열었다.

“화친왕을 죽였습니다.”

침대를 짚고 있던 진예의 손이 조금 움찔했다.

저 말의 진위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런 거짓을 입에 올릴 이가 아니니까. 다만 이건 예상하던 때보다 훨씬 이르지 않나.

겨우 달포가 지났을 뿐이다. 정치질도 할 줄 모르고, 황궁 생활을 오래한 능구렁이도 아니고, 심지어는 칼조차 제대로 잡아 본 적 없는 평민이 대어를 잡았다.

자신의 미친 사냥개가 되라고, 물어뜯을 이는 화친왕이라 말했던 것은 진예였지만 이토록 빠르게 일을 실행할 줄은 그녀조차 예상하지 못했다. 결심이야 하겠다 싶었지만 실행까지는 반년은 족히 걸릴 거라 여겼다.

하지만 반년이 뭔가. 그를 비웃듯이 저 사내는 두 달도 채우지 않고 자신의 앞에 섰다.

저 얼굴이며 옷이 피에 잔뜩 젖은 모습만 봐도 그가 정말 제 아우를 죽였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지만 진예는 재차 물었다.

“사실이냐.”

“사실입니다.”

무건이 담담하게 전하는 말을 들으면서 기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순리대로 돌아갔다는 생각뿐이었다.

진평은 언젠가 제거해야 하는 걸림돌이었다. 위험하지는 않지만 지나다니면서 자꾸만 발로 툭툭 차게 되어 묘하게 거슬리는 그런 존재.

진예는 그것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연무건에게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생각했었다. 그러니 지금의 이 상황은 그녀가 바라던 대로의 최상의 결과인 셈이었다.

더불어 연무건에게도 나쁘지 않은 결과였고.

“이로써 이 연무건이 폐하께 쓸모를 한 번 증명하게 되었나이다.”

화살촉처럼 날렵한 진예의 입꼬리가 붓으로 그린 듯이 매끄러운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렇군. 부정할 수 없겠어.”

그녀의 입에서 처음으로 인정의 말이 나왔다. 무건이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는 진예와의 거리를 드디어 좁혔다는 데에, 그러나 흥분하지 않았다.

제 몸을 적신 피의 무게를 느끼며 감정을 절제한 목소리로 진예에게 물었다.

“황후까지는 몇 걸음이 남았습니까.”

만인의 우러름을 받아야 하는 고귀한 황후의 모습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하고 건네는 질문이었다. 사내의 몸으로, 살육의 흔적을 잔뜩 두른 채로.

하지만 저것은 진예가 또한 지극히도 원하는 연무건의 작태였다. 대꾸하는 목소리에 흡족함이 묻어났다.

“연 숙의가 궁금한 것이 그뿐이더냐.”

“이뿐이겠습니까.”

계속해 보라는 뜻으로 진예가 가만히 기다리자 무건이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거친 도발을 입에 올렸다.

“이 천한 자가 다시 지존을 범할 기회가 왔는지, 그것이 가장 궁금하옵니다.”

진예는 투명한 천개에 둘러싸인 채 그 너머의 연무건을 바라보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천한 언어로, 가장 난잡한 욕망을 읊는 저 사내가 어찌나 자신의 구미를 당기는지 모르겠다.

수십 번의 달콤한 말을 읊어 대는 모사꾼도, 수백 번의 애절한 언어를 전하는 사랑꾼도 저자와 같지는 않을 터였다.

화친왕을 죽였다고 했다. 저 굽힐 줄도 모르는 몸으로, 저런 순한 눈을 하고 누군가의 피를 제 몸에 뒤집어쓴 일조차 처음일 것이다. 한데 두려움에 떨지도 않고, 명을 내린 자를 찾아와 충성을 입에 올리지 아니한다.

그는 바닥만 헤매겠다고, 하늘을 마주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말했지만 행동은 정반대였다.

지금까지 바닥을 기는 짓밖에는 해 본 적이 없으니 이젠 한없이 기어오르기만 하리라 결심한 자 같았다.

그럼에도 연무건의 행동이 모순되어 보이지 않고, 미워 보이지도 않는 이유는 연무건이 한 방향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곳을 돌아보지 않는다.

다른 이에게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는다.

오로지 진예 하나였다.

저런 저급한 말을 지껄이는 대상은 그녀에게만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진예는 자세를 바꿔 다리를 꼬고 팔짱을 꼈다. 가늘고 탄탄한 다리가 얇은 옷깃 사이로 살며시 비쳤다. 작은 오른발이 살며시 허공으로 떠올랐다.

“짐을 범하겠다? 그런 피투성이의 몸을 하고 말이냐.”

무건은 진예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역시나 제멋대로의 논리를 펼쳤다.

“하나 이 또한 폐하께는 달가워할 일인 줄로 아옵니다.”

어떠한 근거도 없었다. 한데 기이하게도 틀린 말은 아니다. 일단 결심했다면 그런 것을 진예가 꺼릴 리 없었다.

마침내 진예에게서 허락이 떨어졌다.

“연 숙의는 다섯 보 앞으로 다가오라.”

뒤꿈치가 닿을 때마다 무거운 몸무게에 짓눌려 침전의 바닥이 살며시 기우는 소리를 냈다. 그 묵직한 발소리를 내며 무건이 진예의 다섯 보 앞에 멈춰 섰다.

진예가 시선을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일어선 그는 진예가 한참을 고개를 들어야 할 정도로 장신이었다.

“몸은 다 나았더냐.”

그녀의 물음에 무건은 당장 대답하는 대신 옷깃을 풀었다. 허락도 없이 하는 행위는 무례하다 할 만했으나 진예는 묵인해 주었다.

젖은 옷을 벗어 나가는 손길엔 이전과는 달리 여유가 배어 있었다. 어차피 쫓겨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인 듯했다.

엉망이었던 옷가지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근육으로 다져진 어깨와 팔이, 햇볕에 조금 탄 듯한 상체가 드러났다.

마침내 상의가 전부 탈의되자 평범한 무인들이라면 오히려 저 사내에게는 못 당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단단한 몸이 바로 세워졌다.

그에게 아파서 쓰러지기까지 했던 흔적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보시는 바대로입니다.”

그리고 연무건의 허락되지 않은 행위는 이어졌다.

다섯 보 앞으로 오라는 명을 어기고 한 발짝 앞으로 다가선 그가 무릎을 꿇어 몸을 낮췄다. 그리고 제 손에 가득 들어오는 진예의 작은 발을 살며시 잡으며 그 위에 입을 맞췄다.

“나의 황제 폐하.”

손길은 금세라도 깨질 유리를 다루듯 몹시도 조심스러웠고, 발등에 내려앉는 체온 또한 적당히 뜨거웠다. 하지만 천천히 눌리는 입술이 진예의 발에 진한 감각을 남겼다.

고개 숙인 얼굴이 서서히 눈을 감았다. 제게 전해지는 진예의 작은 온기라도 길게 음미하려는 듯, 온 정신을 제 손과 입술에 집중했다.

마치 아주 그리워하던 것을 드디어 제 손에 넣은 양,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몹시도 진중했다.

진예는 그런 행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무건의 입술이 떨어져 나간 순간 제 손으로 피가 번들거리는 그의 턱을 낚아챘다. 꽉 쥔 손길에 멈칫한 무건이 그녀와 눈길을 마주했다.

무건의 검은 두 눈에 가득 진예가 있었다. 만인이 고개를 숙이는 그녀의 앞에서 이렇게 한 점 거리낌도 없이 눈을 마주쳐 오는 이는 이제껏 없었다. 저를 연모한다 말하는 조서엽조차 이리하지는 않았다.

처음엔 멋모르고 그랬을 수도 있지만 이제는 예법을 몰라서라고 할 수 없었다. 그냥, 연무건이 그러한 사내인 것이다.

제 놈도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때부터 그러했던, 아니 어쩌면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쭉 그래 온 성정이라고 봐야 했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의 이 꼴은 심했다. 진예는 문득 제 손으로 붉은 피가 번지는 것을 보고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게 있느냐.”

문 옆으로 물러나 있던 검은 그림자가 문살 사이로 비쳤다.

“예, 폐하.”

“세숫물을 들이거라.”

이미 태감이 준비를 시켜 뒀던 듯 곧바로 문이 열리고 잔뜩 긴장한 궁인 하나가 수건과 깨끗한 물이 담긴 대야를 들고 들어섰다.

“연 숙의의 옆에 두고 물러가거라.”

진예의 명이 이어지자 종종걸음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온 아이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무건의 옆에 가져온 것을 내려왔다. 황제인 진예가 두렵기도 하고 피투성이로 어전에 나선 무건이 무섭기도 한 것 같았다.

궁인 아이는 내려놓자마자 주위에 시선을 돌리는 법 없이 오로지 바닥만 보며 뒷걸음질로 되돌아가 나갔다.

다시 둘만 남은 뒤 진예가 제 앞에 놓인 대야를 눈짓하자 무건이 헛웃음을 지었다. 아주 잠깐 진예가 자신을 닦아 주는 상상을 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편이 진예다웠기에, 무건은 군말 없이 제 손으로 수건을 적셔 얼굴과 몸을 닦았다. 한데 그러는 동안에도 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집요한 모습을 보고 진예가 한마디 했다.

“지금까지 네 녀석처럼 짐에게 건방지게 군 놈은 없었다.”

무건이 부드럽게 웃었다. 다른 때였으면 모를까, 적어도 이 밤엔 진예가 쉽게 축객령을 내리지는 않으리란 믿음에서 나오는 여유였다.

그는 제 몸을 다 닦고 방금 전 접촉으로 피가 묻은 진예의 발과 손을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수건으로 조심스럽게 훔쳐 내며 물었다.

“하여 거슬리십니까. 저를 내치고 싶으십니까.”

그러자 진예가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짐이 어찌 그리하겠느냐? 말 잘 듣는 개로 길들여야지.”

아니 그러하냐, 그리 작게 뒷말을 속살거린 진예가 제 손으로 그의 손등을 잡자 무건의 손힘이 풀렸다. 붉게 물든 수건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이어 진예가 무건의 손을 끌어당겨 제 목을 감게 하더니 자세를 기울여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나른하게 뜬 눈으로 무건을 바라보며 진예는 그와 입술을 잠깐 부딪쳤다 떨어졌다.

그리고 고개를 기울여 다시 입술을 겹치려 하는 순간, 무건이 진예의 목을 당기며 그녀를 확 끌어안았다.

커다란 손이 어깨를 감싸고 억센 팔이 허리를 안았다. 진예의 몸이 반강제로 무건의 몸에 부딪히며 침대 밖으로 벗어나졌다.

입술이 깊게 맞물리자 두 사람은 정신없이 혀를 섞었다. 진예가 무건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어 고개를 기울이게 했고, 무건은 그에 응해 진예의 입 안을 더욱 파고들었다. 혀끝으로 치열을 훑어 들어가 안쪽 깊은 곳의 예민한 부위를 건드리자 진예가 숨을 들이켰다. 그러면서 상체를 붙여 오는 것에 자극받은 무건은 제 몸을 진예에게 밀어붙였다.

자연스럽게 바닥에 등을 붙인 진예는 무건의 아래에서 흐트러져 갔다. 옷과 부드러운 살결 사이에 굵은 손가락이 끼어들어 가 옷깃을 밀었다. 둥그런 어깨와 둔덕이 드러나자 무건은 젖은 입술을 내렸다.

턱을 지나 살결이 여린 목에 쪽, 쪽 소리가 날 만큼 꼼꼼하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그것이 마침내 쇄골 아래의 둔덕에 닿자 진예는 간지러움으로 그의 머리를 붙잡은 손에 힘을 넣었다.

민감한 부위에 혀끝이 닿으니 진예의 입술 사이로 하아, 하고 탄식이 흘러나왔다.

불을 밝혔다고는 하나 어두운 탓에 굴곡이 진 곳에 짙은 그림자가 어렸다. 그리고 그 어두움에 이끌려 입술로 빨아들이고, 무건의 이가 그곳을 살며시 깨물자 진예가 그의 머리를 안았다.

부들부들한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감겼다. 사내놈이 이래도 되는 건가 싶게 감촉이 좋아서, 아니 사실은 허리를 꽉 안은 두 팔과 제 몸에 흔적을 남기는 그의 잔망스러움이 만족스러워 진예는 몸을 잔뜩 긴장시키면서도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무건이 얼굴 위치를 조금씩 옮겨 입술 표면으로 간질일 때마다 진예의 살결 위로 섬세한 떨림이 일었다. 그것을 입술을 통해 느끼며 무건이 나직이 속삭였다.

“조서엽이 아닌 저를 개로 삼으십시오. 비루먹은 개의 이빨이 더 질긴 법이니.”

그러자 진예가 매끄러운 입술을 올려 웃으며 그의 머리를 붙잡아 젖혔다. 그에 강제로 고개를 쳐들리자 진예가 화등의 빛이 비춰 더욱 붉어 보이는 눈으로 무건을 내려다보며 일침을 놨다.

“어느 개가 이리 방자하게 주인의 몸에 올라타느냐.”

“하면 어찌할까요?”

못 말리겠다는 듯 푹 웃은 무건이 대답도 듣지 않고 그녀의 허리를 붙잡고 안아 단숨에 몸을 일으켰다. 그에 진예가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자마자 등이 침전의 한쪽 벽에 부딪혔다.

쿵, 하는 소음이 잠시 일었다. 무건은 그녀를 자신의 몸과 벽 사이에 끼워 지탱하며 진예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까 전의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이번엔 무건이 자신의 목에 팔을 두르게 했다. 그리고 제 앞에 있는 진예의 목에 살며시 입술을 누르며 지분거렸다.

“이리 불경한 자세라 하여도 폐하를 올려다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까?”

“내려다보진 말라 했으니 그 방도밖엔 없지 않느냐.”

어찌 되었든 허락의 말이었다. 무건의 손이 더 대담해졌다. 진예의 옷가지가 꽃잎처럼 힘없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툭, 툭, 소리와 함께 진예의 새하얀 나신이 연무건의 눈앞에 노출되었다.

무건은 제 몸을 더욱 바짝 붙여 맞붙은 부위를 통해 그녀의 감촉을 느꼈다. 딱딱한 말을 읊는 입술과 달리 매끄러우면서도 부드러운 살결에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무건은 제 아랫배에 살며시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진예에게 다시 물었다.

“하여 어떤 개가 더 좋습니까. 이 개입니까, 저 개입니까.”

굳이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그의 작태에 진예가 즐거움이 밴 어조로 대꾸했다.

“짐의 앞에서 개가 되겠다는 사내가 어찌 이리 많을까.”

“그야, 폐하의 탓 아니겠습니까.”

무건의 손이 허리 아래로 내려갔다. 제 손에 가득 들어오는 도톰한 것을 움켜잡으며 더욱 단단히 몸을 밀착했다.

“이 붉은 눈이 저를 볼 때마다 광인이 될 것 같습니다.”

체온이 맞붙자 잔뜩 예민해진 몸이 달아올랐다. 진예가 그를 다시 끌어안으니 무건이 그녀의 목 아래를 이로 연신 깨물어 대며 흔적을 만들어 나갔다.

“아무것도 보이질 않아. 당신에게 온통 주의를 다 빼앗겨서.”

즙이 나올 것 같은 과실을 물어 무건이 그 달콤함을 입 안에서 음미하니 진예의 입에서 탄성이 쏟아졌다.

“하…….”

“그저 이 몸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 외엔 무엇도 떠오르질 않습니다.”

그가 입을 난잡하게 놀렸다. 그때마다 흣, 하고 진예가 짤막한 소리들을 흘려 냈다. 진예는 점점 제게 빠져드는 그의 몸짓이며 감촉에 저 역시 취해 감을 느꼈다. 무건의 목소리에는 점차로 숨기지 못하는 흥분감이 섞여 들어 갔다.

“이 연무건이 어찌 살아왔는지도 이제는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녀를 만난 이후의 세상이 연무건의 전부가 되었다.

그녀의 몸과 마음을 온통 제가 차지하는 것 외에는 무엇도 중요하지 않아졌다.

달아오른 몸이 조금씩 끈적해지기 시작했다. 그에 무건이 마침내 그녀에게 틈 없이 붙었다. 진예는 제 아래에서 올라오는 거친 감각에 뻐근함을 느꼈다. 목을 두른 팔에 힘이 들어갔다. 몸 안쪽이 타오르는 듯했다.

가는 허리가 무건의 품 안에서 휘청였다. 그럴수록 무건은 더 깊게 빠져들었다. 뇌수가 녹아 버릴 듯한 쾌감에 이젠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진실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이전의 평범한 삶에서는 겪어 보지 못한 달콤함이었다. 어린아이가 한번 엿가락을 맛보면 입에서 떼어 놓질 못하듯이, 무건도 그랬다.

“당신을 가지려면, 읏, 무릎을 꿇고 개가 되어야 한다 하니 어느 사내가 그러지 않고 배깁니까.”

진예가 점점 거칠어지는 눈앞의 짐승을 내려다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다 버티지 못하고 신음을 내질렀다. 박자가 점점 빨라졌다. 음탕한 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히고, 침전의 엄숙함을 흩트려 놓았다.

땀방울이 흘러내려 온몸을 적셨다. 그럴수록 감각은 더 섬뜩할 정도로 선명해져 갔다. 안에 칼이라도 들어온 듯했다.

전에도 이랬던가. 진예는 이전과는 또 다르게 다가오는 파고에 몸을 맡기면서도 눈앞의 사내가 실로 위험하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찾아온 절정에 그녀도 휩쓸려 버렸다. 단전에 뜨거운 것이 퍼져 나갔다.

두 사람분의 거친 숨소리가 깊숙한 침전 안에서 교차하여 울렸다. 무건은 진예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로 달아오른 숨을 토해 냈다. 그것에도 델 것만 같아 진예가 민감해진 몸을 움찔하자 무건도 함께 어깨를 들썩이면서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진예를 올려다보며 그녀와 손을 겹쳤다.

손 사이에 묘하게 차갑고 딱딱한 것이 느껴져 그곳을 보니 그제야 무건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끈이 걸려 있는 게 보였다. 어째서 이제야 눈치챘을까 싶을 만큼 두꺼운 옥가락지가 그 끈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

무건이 끈을 진예의 손가락에 옮겨 걸어 주며 말했다.

“저는 모든 약조를 지켰습니다.”

진예는 제 손바닥에 들어오는 가락지를 보았다.

“그래, 제법이구나.”

처음 무건이 건넸을 때의 절절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간절히 기다렸고, 오늘만 살더라도 각인했을 거라던.

지금은 그런 말 대신 진예를 제 커다란 품에 푹 안은 뒤 진예의 귓가에 얌전하지 못한 소리를 흘려 넣었다.

“그럼 대가가 그만큼 커야지요. 이놈이 이 옥안을 한 달하고 근 보름이 다 되도록 보질 못했는데.”

대가가 뭔지는 말을 듣는 도중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무건이 진예를 안은 채 침대로 직행했다. 그가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진예는 자극에 저절로 제 허벅지가 떨리는 걸 느꼈다.

천개를 밀치며 거리낌 없이 침대 안쪽에 들어가 앉은 무건은 연결된 그대로 진예를 제 위에 올려 두고 입술을 훔쳤다. 가까워진 거리에 살과 살을 통해 가슴의 두근거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무건의 심장 박동은 이미 평소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어, 금세라도 튀어나올 듯이 거세진 뒤였다. 그것을 느끼며 진예는 그의 짙은 접문을 받아들였다.

그에 조급증이라도 생긴 듯 무건은 진예의 뒤통수를 붙잡아 꾹 누르며 입 안을 마음껏 휘저었다. 진예에게 주도권을 줄 틈을 주지 않겠다는 양 연구개를 찌르며 안쪽이 얼얼해질 만큼 그녀의 입을 탐식했다.

그 행위에 틈이 막혀 숨이 차오를 때쯤 진예가 상체를 밀어내며 무건을 침대에 풀썩 눕혔다. 그리고 손으로 가슴을 내리누르며, 잠깐 당황한 듯한 무건의 맹한 얼굴을 들여다보며 진예가 한마디 했다.

“짐의 후궁이 이리 서툴러서야 되겠느냐.”

무건은 자존심이 상한 듯 인상을 찌푸리더니 말꼬리를 잡았다.

“서툴러요?”

“그럼 서투르지. 짐을 가지고 싶다는 네놈의 욕망을 전혀 숨길 줄도 모르지 않으냐. 흡사 짐승과도 같은 상태인 듯한데?”

진예의 지적에 무건이 씩 웃고는 그녀의 상완을 잡고 끌어당겼다. 하여 진예의 상체가 자연스럽게 굽혀지자 그 아름다운 곡선을 제 두 손에 가득 그러쥐었다. 그리고 다시 단단하게 돋워진 심지에 불을 붙였다.

“읏……!”

스치고 지나가는 감각에 진예의 몸이 푹 꺾였다. 그것을 번들거리는 눈으로 올려다보며 무건이 선언했다.

“숨겨야 사람 새끼가 될 수 있다면 지금은 사람이길 포기하지요. 말씀대로 짐승이 맞습니다. 그러니 어서 개들의 서열을 정해 주시지요.”

스스로 개가 되겠다 말한 사내는 진예의 살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금세라도 터뜨릴 듯이 잡으며 이미 한 번의 절정으로 물이 흘러넘치는 연못 속을 손쉽게 파고들었다.

무건은 제 앞에서 환상처럼 흔들리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천박한 욕망을 까발렸다.

“그자가 은애함을 입에 올렸다 하셨습니까. 제가, 이 연무건이 더 깊습니다. 그러니 폐하의 유일한 명인자인 이놈에게 더 오래 안겨 있으셔야 합니다.”

그가 몰아붙이는 힘에 진예는 연신 숨을 삼키며 대꾸했다.

“억지를, 부리는구나?”

“억지가 아닙니다. 조서엽을 사흘 내내, 아니 나흘 가까이 데리고 계셨으니 이놈은 닷새입니다.”

제 마음대로 기간까지 정해 버리는 ‘개’의 행태에 진예는 그만 어이가 없어서 웃어 버렸다. 하지만 무건은 당당하게 그리하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읊어 댔다.

“닷새가 지나면 폐하께서 이 연 숙의를 가장 총애한다는 소문이 궐내에 다 퍼져 있겠지요?”

하필 또 맞는 말이다.

진예는 무건의 단단한 몸이 계속해서 부닥쳐 오는 것에 벌써부터 약간은 버겁다고 느끼면서도 눈앞의 사내를 골려 주었다.

“왜, 첩지라도 새로 내려 주랴? 다음엔 무어로 할까, 연 귀인?”

“그야 바로 황후는 어려우실 테니, 그리라도 해 주신다면 기쁘게 받들겠습니다.”

먼저 황후 운운한 건 진예였지만 써먹는 건 어째 연무건이 더 잘했다.

웃기는 놈…….

진예는 그렇게 생각하며 무건의 위에서 무너져 내렸다. 밤은 생각보다 길었다.

* * *

새벽녘의 여명이 창문을 통해서 방 안으로 스며들어 와 눈가를 비췄다. 푸르스름한 빛이 살며시 닫힌 눈꺼풀 사이로 들어오는 것에 무건은 천천히 눈을 떴다.

사실은 눈만 감고 있었다 뿐이지, 잠들지는 않은 상태였다. 잠들려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무건은 부스스하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러자 제 옆에서 잠든 진예가 보였다. 반쯤 엎드려서 자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조용히 웃다가 그녀의 손가락에 걸어 주었던 끈이 보여 그것을 빼내 단단히 동여맨 끈을 풀었다.

이 옥가락지는 몸에 진예의 이름이 새겨지고, 그녀가 나타나면 무얼 어떻게 해 줄까 몇 날 며칠을 고민한 끝에 산 것이었다. 없는 형편에 어떻게든 돈을 끌어모아 저잣거리에 나서서 제 눈엔 가장 고와 보이는 것으로 골랐다.

당시만 해도 최선을 다해서 구한 셈이긴 했지만, 지금 와서 보니 명인자가 이리 고귀한 여인인 줄 알았으면 훨씬 좋은 것을 준비하려 노력했을 걸 그랬다는 아쉬움만 남았다.

그래도 무건은 잠든 그녀의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그리고 허리를 깊게 숙여 진예의 이마에 조용히 입을 내렸다.

제 입술에 닿는 그녀의 체온에도 무건은 왜인지 가슴이 저릿해졌다.

“연모합니다, 진예…….”

나의 황제.

이름을 봤을 때부터 이미 마음에 품었다는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지금도 그 마음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아니,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커져 버렸다…….

그는 진예를 만지고 싶고, 안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내리누르며 속삭였다.

“이 연무건이 전부 채워 드리겠습니다.”

몸도, 마음도.

그녀의 빈 공간으로 자신이 파고들 것이다. 다시 해가 완전히 뜨면 진예는 지난밤의 뜨거움을 잊고 도로 차가운 말들을 내뱉겠지만, 포기하지 않을 터였다.

다만 조서엽, 그자는…….

〈위기가 와도 어떻게든 살아남아. 무조건. 절대로 죽어서는 아니 된다.〉

무건은 서엽이 이전에 했던 말을 떠올리다가 미간을 좁혔다. 대체 그 사내는 무슨 속셈인지 알 수 없었다.

진예를 향한 충성 때문인가 싶다가도 그리 판단하기엔 찝찝한 면이 있다. 조서엽은 처음엔 분명 자신을 죽이고 싶어 했고, 지금도 진예의 옆에 자신이 붙어 있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듯했다. 한데 이제 와서 목숨은 부지하길 원하다니.

‘다른 이유가 있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그가 자신을 살려야만 하는 마땅한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방심은 금물이었다. 그 뭔지 모를 이유라는 것이 사라지면, 조서엽은 언제든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댈 자일 테니까.

아니, 사실은 언젠가 반드시 그리하리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조서엽과 연무건은 고분고분 섞일 수 없는 존재였다.

진예가 있는 한.

* * *

“퇴궐이 늦으셨습니다, 도련님.”

사가의 대문을 넘은 서엽은 들어서자마자 저를 맞이하는 목소리에 옆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조가(家)의 오랜 수족으로 일해 온 집사가 눈에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자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것을 보고 서엽은 건조하게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이보다 늦은 적도 많은데 무어 호들갑인가.”

“주인어른께서 찾으십니다.”

웬일로 기다리고 있나 했더니.

서엽은 피곤하긴 했지만 뻐근해진 목을 주무르며 집사를 따라 제 아비가 있을 본채에 들었다. 그러자 방에 등잔 하나 밝혀 놓고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제 아비가 보였다.

그리 좋은 관계가 아닌지라 서먹한 인사말이 나갔다.

“부르셨습니까.”

그 앞에 가 앉으니 대답으로 생각보다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엽아.”

“예.”

“내 이제부터 하는 말에는 거짓으로 대답하진 말아야 한다.”

서엽은 제 아비가 왜 뜸을 들이나 싶었다. 일단 계속 말씀하시라는 의미로 얌전히 앉아 있으니 당혹스러운 말이 흘러나왔다.

“명인이 나왔다 들었다.”

“…….”

“어떤 이냐.”

서엽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저절로 신경이 예민해져 오면서, 이제는 분명 다 아물었을 왼팔이 욱신거리는 듯했다.

제 명인을 발견했을 때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했었다. 이후에 지질 때는…… 그때는 잘 모르겠다. 고통에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는 것만으로도 안간힘을 써야 했으니까.

아니면 가능성은 희박해 보이지만 황궁의 누군가가 입을 함부로 놀린 걸까. 그것도 아니면 제 부상을 보고 진예처럼 지레짐작을 했나.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상정해 보다가 서엽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음산해졌다.

“누가 그런 말을 고했습니까.”

“그것이 중한 게 아니다. 서엽이 너도 어서 혼처를 찾아야지.”

“저에겐 혼처를 찾는 것보다 중합니다. 말씀해 주시지요.”

“서엽아.”

이대로 가면 실랑이가 길어질 것 같았다. 서엽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제 아비는 그 이야기의 출처를 말해 주지 않을 테니 괜스레 진력을 소모할 필요는 없었다. 대신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제 명인은 지워졌습니다.”

“그것을 지워졌다고 할 수 있느냐.”

애초에 명인의 속박을 없앨 방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상처로 가린다고 해도 실제로는 사라진 게 아니었다. 하지만 서엽은 우겼다.

“아무 데도 없습니다.”

“…….”

여지를 남겨 두지 않는 준엄한 말씨에 서엽의 아버지는 할 말을 잃은 듯했다. 서엽은 그런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재차 강조했다.

“행여나 쓸데없는 기대는 하지 마시지요. 제가 있을 곳은 폐하의 곁이 유일하니까요.”

혼처라니 웃기지도 않지. 서엽은 진예의 곁을 떠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진예는 언제든 명인자가 나타나면 등 떠밀 준비를 하고 있는 듯했지만 결국 조서엽을 완전히 배제하진 못할 터였다.

하지만 아비는 그런 서엽을 한심해했다. 그가 제 앞의 서궤를 내리치며 역정을 냈다.

“네놈이 그리한다고 해서 폐하께서 돌아나 봐 주실 것 같으냐. 도대체, 도대체 네 인생을 얼마나 망치고 싶은 게야!”

서엽의 아버지는 이전부터 서엽이 진예만 따라다니는 것을 못마땅해하고 있었다. 앞뒤 재지 않고 진예의 일이라면 목숨을 갖다 바치지 못해 안달이다. 게다가 제 출셋길을 스스로 막고 관직에서 물러나 뒤꽁무니만 따라다니고 있으니 아무리 상대가 황제라 하여도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네놈이 폐위된 황태자를 따라간다 했을 때 내 심정이 어땠는지 짐작이나 하느냐. 이 아비는 그날 아들 하나를 잃을 뻔했다.”

실제로 읍주로 따라가서 죽거나, 죄인인 폐황태자의 뒤를 봐줬다는 이유로 돌아와서 경을 칠 뻔했다. 전장에 나가서 부상을 입고 돌아와서는 도로 폐황태자를 구명을 해야 한다며 나서는 서엽을 보고, 서엽의 아비는 정신 차리라며 아들의 뺨을 때리기도 했었다. 고작 여인 하나 때문에 가족을 다 죽일 셈이냐고 묻는데도 서엽은 무작정 달려 나갔다. 조서엽은 그만큼 진예에게 미쳐 있었다. 아무도 이해 못 할 만큼 깊은 연모의 정이었다.

그렇지만 서엽은 반성을 몰랐다. 반성할 줄 알았다면 눈먼 사랑이라고 할 수 없을 터였다.

“하나 결국 그분께서 이 나라의 지존이 되지 않았습니까.”

서엽의 아버지는 장탄식을 쏟아 냈다.

“……그만큼 충성했으면 되었다. 몇 년을 네 인생을 다 포기하고 폐하께 바쳤으면 되었어. 이젠 네 삶을 찾아야지.”

설득이 안 된다는 걸 알기에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역시나 서엽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듣다가 몸을 일으켰다.

“말씀 다 하셨으면, 나가 보겠습니다.”

“서엽아.”

“주무십시오.”

서엽은 제 아비에게 허리 굽혀 인사한 뒤 문을 쾅 닫고 나와 버렸다. 본채 마당을 밟는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안 그래도 연무건이 진예의 침전에 드는 것을 보고 온 참이라 기분이 안 좋았다. 다른 사내에게 제가 연모하는 여인이 안겨 있을 거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비의 핀잔을 들으니 더 짜증이 치솟았다.

아무래도 화풀이할 곳이 필요할 듯해 검술 연습을 할 겸 서엽이 제 방이 아닌 뒤뜰로 향하려 했을 때였다. 그림자가 그에게 불쑥 다가왔다.

“조 후.”

익숙한 목소리에 서엽이 발을 멈칫했다. 몇 년째 정보 수집을 해 오거나 중요 심부름을 하는 등 제 밑에서 수족으로 일하고 있는 급사 중 하나였다.

하지만 적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누구도 상대하고 싶지 않았던 서엽이 돌아보지 않고 답했다.

“무슨 일인가. 급한 게 아니라면 다음에 다시 오시지.”

그러고서 무시하고 걸어가려 하는데 상대가 급히 그의 발을 붙잡았다.

“얼마 전에 알아보라 하셨던 이 물건이 무엇인지 찾아냈습니다.”

그제야 겨우 서엽이 그를 돌아보았다. 급사의 손에는 얼마 전 무건에게서 받아 온 정체불명의 약초가 올려져 있었다.

화친왕이 무건에게 들려 보낸, 괴이한 향이 나는 검은 잎.

그것을 보고 나니 서엽은 상대를 두고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게 됐다. 그가 서둘러 말하라는 듯 채근하는 눈빛을 보내자 급사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기억나십니까. 아주 예전에 조 후께서 구했던 약초와 같은 것입니다.”

답을 들은 서엽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직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상대가 왜 이리 돌려 말하나 싶기도 했다. 하여 궁금한 부분을 짚어 되물었다.

“내가 구했던?”

곧 상대가 조심스러워하는 이유가 드러났다.

“5년 전에 조 후께서 폐하를 구명하셨을 때 찾으신 바로 그 물건입니다.”

5년 전.

그 말에 서엽은 진예를 잃을 뻔했던 그날을 상기해 냈다. 폐위 소식과 함께 날아온 갑작스러운 유배 소식에 서엽은 그녀를 어떻게 해야 구명할 수 있을지 궁리하다가 그 물건을 꺼냈었다.

길거리에서 불길하다는 이유로 맞아 죽을 뻔했던 서역인 꼬마 아이를 구해 주고 받은 것이었다. 언젠가 필요할 거라며 건네주었는데, 익재를 끌어들이는 향기라고 했다.

받고서 좀 어처구니가 없어서 서엽도 한마디 했었다.

〈은인에게 이런 물건을 주다니……. 이러니 사람들이 불길하다 하는 것이다.〉

그러자 그 아이는 퉁퉁 부은 얼굴로 소리 없이 웃기만 했었다.

아이를 그 꼴로 만든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 서역인 아이는 ‘불행을 일으킨다.’ 하였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은 서엽은 그것이 아닌 불행을 보는 눈, 즉 예지를 지닌 아이인 듯했다.

하여 그날 서엽은 아이에게서 받은 그 물건을 꺼냈다. 익재가 무서운 존재인 만큼 그가 취할 수 있는 이득은 명확했다. 사람들이 혼비백산하는 와중 틈이 생길 것이고, 몇 놈의 시신과 자신의 몸을 내주면 잠시나마 진예를 살릴 시간이 생길 것이었다. 길은 이것밖엔 없었다.

그리고 그 계획을 눈치챈 지금 눈앞의 급사는 서엽을 한사코 말렸었다. 제발 목숨만큼은 버리지 말라며.

‘그런 건가…….’

그래서 이 냄새가 낯설지 않았던 것이다.

하면 화친왕의 밑에 있다던 회백국에서 온 역술인이 바로 그 아이와 동일인이라는 소리였다.

미마이.

서역에서 온 역술인이라는 이야기만 들었지, 특징이나 나이 같은 것을 알 수 없어 대체 그이가 누군가 했는데.

서엽은 급사에게서 잎을 도로 건네받으며 재차 확인했다.

“같은 것이 분명하겠지?”

“그렇습니다, 조 후.”

서엽은 잎을 제 옷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급사를 바라보며 문득 다른 주제로 운을 띄웠다.

“알아보느라 고생했네. 한데 내 하나 더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서엽이 곁눈으로 본채와 이곳, 그리고 제 방이 있는 동상방 사이의 거리를 가늠해 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본채에는 그다지 걸음을 하지 않는데 이곳에서 기다린 이유가 뭔가?”

“예?”

뜬금없는 이야기에 상대는 당황한 듯했다. 서엽은 그에게 한 발짝 다가서며 위협하는 듯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내 방까지는 거리가 꽤 먼데.”

그제야 속뜻이 심상치 않은 걸 파악한 급사에게서 당혹스러움이 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조 후.”

“내 아버지에게 명인에 대해 고한 자가 그대인가. 그래서 내가 본채에서 나올 것을 짐작하고 있었고?”

급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서엽은 변명을 들을 것도 없이 자신의 말이 맞으리라 확신했다. 눈앞의 사내는 서엽이 부리는 급사 중에서도 가장 실력이 뛰어나 심지어는 가족보다도 가까이 두었다. 할 일이 없을 때는 호위를 목적으로 자신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이였다.

서엽은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어디까지 봤지?”

“……명인자의 이름은 보지 못했습니다.”

에두른 대답이었지만 서엽은 정말로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의 말대로 아비는 서엽의 명인자가 누군지까진 모르는 눈치였다. 알았다면 가만히 앉아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명백히 서엽이 원하던 상황은 아니었다. 단지 ‘최악’이 아닐 뿐.

서엽은 제 앞의 사내를 보며 아까보다 더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알았다면, 모든 것을 함구했어야지. 안 그런가?”

“송구…….”

제가 절대로 범해서는 안 되는 실수를 했다는 걸 뒤늦게 인지한 급사가 급히 사죄의 말을 꺼내려 했다.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 전에, 서엽이 무표정한 얼굴로 허리춤에 있던 칼을 뽑아 그의 몸을 사선으로 베어 냈다.

“……합니다.”

뒤늦게 맺어진 말과 함께 급사의 몸이 풀썩 쓰러져 내렸다. 안뜰의 흙바닥에 금세 시뻘건 피가 스며들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서엽이 중얼거렸다.

“혹여나 지옥에 가서 너무 걱정하지는 마시게. 자네의 식솔들은 내 잘 거둬 줄 터이니.”

그러고 서엽은 품 안에서 흰 천을 꺼내 사자(死者)의 얼굴 위로 던졌다.

기분이 최악으로 곤두박질친 서엽은 생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신을 한번 휙 털고 뒤뜰로 가려던 것도 그만둔 채 제 방으로 향했다.

연무건이 진예가 있는 침전에 들어서고, 제 아비는 자신의 명인의 존재를 알게 되고, 제 수족은 죽게 되고…….

여러모로 개 같은 하루였다.

그나마 화친왕이 죽고 미마이가 어디 있는지 확인하게 되었으니 아주 약간의 위안을 삼을 수 있을 따름이었다.

잠시 뒤 본채 앞의 앞뜰이 떠들썩해지더니, 곧 둘째를 당장 데려오라는 엄격한 고함 소리에 하인들이 다급히 서엽의 방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아무리 열어 달라 애원해도 서엽의 방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에 결국 강제로 문고리를 뜯어내고 들어섰으나 안엔 사람의 그림자조차 존재치 아니하였다.

* * *

한편 무건이 사라지고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위도양이 별채로 들어서 화친왕의 시신을 발견한 뒤 화친왕부는 발칵 뒤집혔다.

화친왕 진평의 죽음.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그 일에 모두가 우왕좌왕하는 중이었다. 졸지에 주인을 잃은 친왕부의 질서를 바로잡아 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모두가 소식을 듣고 별채 앞에 모이고, 또 몇몇 측근들이 안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처음 진평의 시신을 발견했다는 위도양이 아직도 화친왕의 시신을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며 모두가 숨을 죽였다.

위도양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한동안 제 주변에 누가 오기나 했냐는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칼에 찔린 자국이 남아 있는 목덜미, 그리고 바닥을 온통 적셔 버린 붉은 피.

그녀는 한 식경이 지났지만 여전히 진평의 시신을 끌어안은 채였다. 도양은 차갑게 식어 가는 진평의 몸을 더듬고 흔들어 대며 그를 다시금 불렀다.

“전하, 전하…… 화화.”

하지만 이미 눈을 감은 진평은 대답이 없었다. 그녀의 손이며 옷이 붉게 물들어 가고 있을 따름이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바로 한 시진 전만 해도 제 앞에 살아 있던 사람이었다. 연무건이 나타나기 전에 이제 슬슬 그를 제 사람으로 만들어도 되지 않겠느냐며 웃고 있었다.

바로 이 방에서.

술을 한 모금 천천히 들이켜며 하는 그의 말에 도양은 신중론을 제기했었다.

〈아직은 시기상조가 아닐까요, 전하.〉

도양은 처음 봤을 때부터 연무건이 그리 만만한 자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단순히 힘이 세 보인다든가, 아니면 읍주에서 제 발로 살아 나왔다든가 하는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특출하게 어디가 뛰어나다든가 하는 느낌은 없었으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언뜻 순진해 보이지만 심지 곧아 보이는 눈이었다. 그리고 길바닥에서 굴러다니던 놈치고 그렇게 어수룩하다 느껴지지가 않았다.

게다가 황제 때문에 더 불안했었다.

진예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다. 진평도 인정했듯이 그녀는 명인자라고 해서 아껴 주고 거둬 줄 사람이 아니었다. 철저하게 제 이득을 계산해 필요한 관계가 아니라면 명인자라도 내팽개칠 여인이었다.

그런 황제가 처음으로 제 침전에 사내를 들였고, 후궁으로 삼았다. 다른 이라면 명인자라는 핑계만으로도 그럴 만하다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도양은, 적어도 진예만큼은 그런 ‘상식’이 통용되는 여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진예의 행동에 대한 해석도, 연무건에 대한 평가도 전부 도양의 근거 없는 감에 의한 것이었다. 그래서 진평은 믿지 않았고, 결과가 이런 것이었다…….

죽음이라니, 대가가 너무 크다.

눈을 감은 진평의 모습이 점점 흐릿해졌다. 이내 도양의 눈에서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새겨져 있을 진평의 팔을 꽉 쥐었다.

〈각인은 내 황제가 되면 하자.〉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사람이 된 뒤에 각인을 하자는 말에 기다리고 있었다.

진평은 자신의 명인자였고, 마음의 주인이었다.

몸이 약한 그를 평생 옆에서 지켜 주고 싶어서 호위를 자처하며 진평의 곁을 맴돌았다. 그가 원하는 일은 전부 다 했고, 앞으로도 그가 원하는 바를 전부 다 이루어 주겠노라 다짐했다.

명인자라는 이유 하나만을 갖다 붙인, 단순 맹목이 아니었다.

진평은 위도양의 인생을 바꿔 준 구원자다.

그리고 다시는 만나지 못할, 제 유일한 연인.

도양은, 이토록 무력하게 그를 보낼 수 없었다.

연무건.

반드시 진평의 앞에 무릎을 꿇리고, 도륙을 내줄 것이다. 진평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을 맛보며 숨을 거두게 할 터였다.

도양은 굳어 버린 진평의 몸을 느끼며 고개를 숙여 색이 바래어 가는 입술 위로 제 입을 내렸다. 하지만 이전처럼 뜨겁지 않았다.

그 슬픈 감각을 느끼고, 다음 순간 고개를 든 도양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그런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친왕부의 수족들을 돌아보았다.

“미마이를…….”

말소리를 내는 그녀의 입술에 진평의 피가 묻은 탓에 얼굴이 한층 더 섬뜩하게 보였다. 그에 더 긴장한 이들이 도양에게서 터져 나올 첫 번째 명령을 기다렸다.

“미마이를 당장 끌고 오너라!”

별채 밖까지 다 들릴 만큼 커다란 목소리였다. 그 엄격한 명령에 별채 안에 있는 이들은 물론이고 밖에 있는 이들까지 전부 제 방으로 돌아간 서역인 아이를 찾으러 몰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미마이는 반쯤 죄인처럼 두 팔을 장정들에게 붙들린 채, 도양의 앞에 무릎 꿇렸다.

미마이가 잡혀 오고 나서 도양은 한참을 아이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차가운 얼굴 앞에서 미마이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고 고개를 숙였다.

별채의 방 안은 완전히 어질러져 있었다. 곳곳에 피가 묻어 있었고, 화친왕 진평과 호위 둘의 널브러진 사체는 끔찍한 상태였다.

게다가 진평의 피를 몸 곳곳에 묻힌 귀신 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 위도양. 그 앞에서 미마이는 어깨를 바들바들 떨었다.

미마이는 사내긴 하지만 고작 열다섯밖에 안 된, 아직은 세상이 무서운 아이였다. 말을 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도양의 분노에 영양이 부족해 바짝 마른 가느다란 팔이 떨렸다. 혹시나 중간에 자리에서 빠져나와 끝까지 진평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벌을 받는 게 아닌가 싶어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여 잘못을 빌어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도양이 주변 이들을 돌아보며 드디어 입을 열었다.

“모두들 나가 있거라.”

그 한마디에 사람들은 전부 발을 물렸다. 살아생전 진평은 위도양을 누구보다도 신뢰했고, 화친왕이 이끌던 상단에서뿐 아니라 친왕부에서도 두 번째 실력자라 인정받는 이였다. 진평이 없는 지금, 그녀의 말을 따르지 않을 이는 없었다.

곧 별채에 미마이와 도양, 두 사람만 남자 도양은 천천히 발을 옮겼다. 제 발이 젖어 드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피가 흥건한 바닥을 밟으며 그녀는 별채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러고 무건이 탈출할 때 빠져나갔던 창문 아래의 서랍장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도양은 그곳에 세워져 있는 쇠막대를 손에 쥐며 미마이에게 익숙할 회백국의 언어로 말을 건넸다.

「그리 겁먹을 필요는 없다, 아이야.」

뜨거운 분노보다는 냉철함이 배어 있는 말투였지만 그래서 더 긴장을 자아내는 말소리였다. 도양은 제 행동 하나하나를 자세히 좇는 미마이의 큰 눈을 보면서 그 앞에 쇠막대를 던졌다.

채애앵!

바닥에 떨어진 그것을 보고 미마이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도양이 그것을 보며 물었다.

「지하실로 함께 내려갈까?」

묻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지만 결국은 명령이었다. 미마이에겐 거부권이 없었고, 결국 아이는 쇠막대를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마이는 주변을 두려워하는 눈으로 살피며 지하실의 입구가 있는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아까 전 분명 진평이 깔고 앉은 곳이었는데 방석마저 치워진 것을 보고, 미마이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렸다. 연무건이 이 별채 아래 지하실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이다.

그러나 미마이는 그에 대한 별다른 언급 없이 쇠막대를 틈새에 끼워 지렛대 삼아 작은 입구를 열었다. 그러자 가로막고 있는 철창이 나타나 그 역시도 막대를 이용해 들어 올렸다.

미마이가 입구를 전부 열자 벌써부터 피 냄새를 맡았는지 안의 녀석들에게서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끽.

끼이이익.

끼욱, 끽, 끼이익.

언제 들어도 불쾌한 울음소리였다. 언뜻 새가 지저귀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그렇게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니었다. 계속 듣고 있으면 팔에 오소소 돋기도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였다.

익재들의 울음소리…….

그것을 들으며 미마이가 도양을 쳐다보자 도양이 등잔을 들어 올리며 먼저 들어가라는 뜻으로 고갯짓을 했다.

미마이는 긴장하여 크게 한숨을 쉬고는 작은 입구 안으로 두 발부터 넣었다.

지하실로 통하는 통로는 미마이의 작은 몸으로도 비좁다 느껴질 정도였다. 발을 천천히 내려서 발판과 중간중간 벽에 붙어 있는 손잡이에 의존해 어느 정도 내려가자, 천천히 시야가 트이기 시작했다.

미마이는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참에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위도양이 등잔을 든 채 뒤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도양이 훨씬 더 쉽고 빠르게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 먼저 방향을 틀어 더 깊숙한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위도양이 곧이어 따라와 작은 등잔불로 칠흑 같은 어둠을 조금 물러나게 해 주었다. 그 빛에 의존해 제 발밑을 확인하면서도 미마이는 벽을 더듬어 천천히 지하실로 나아갔다.

끼이익, 끽…….

지하실에 가까워질수록 익재들의 울음소리 또한 커져 갔다. 미마이는 그 소리를 사이로 그들의 절규를 들었다.

- 배고파.

- 풀어 줘.

- 나가고 싶어.

- 엄마, 엄마……!

- 살려 줘.

- 우리 아빠는 어디 있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최강의 괴물들이 내는 소리라기엔 지나치게 구슬퍼 보이는 요청들이었다. 태어나자마자 이곳에 갇혀 묶여 있는 어린 익재들이 제 부모를 찾는 소리 또한 들렸다.

미마이는 조금 죄책감이 들기도 했으나 슬며시 손을 들어 두 귀를 막았다. 그리고 마침내 계단이 끝났을 때 지하실의 입구가 보였다.

뒤따라온 위도양이 입구 근처의 횃대에 등잔불을 옮겨붙이자 그 일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걸 단순히 ‘지하실’ 정도로 격하하여 지칭해도 될지 모를 만큼, 실상 이곳의 규모는 이미 화친왕부의 영역을 한참이나 넘어섰다.

총 100여 개 구역으로 나뉜 이곳은 미로처럼 복잡한 구조였고, 지도가 없으면 원하는 곳으로 향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 각각의 구역에는 날개가 묶인 익재들이 수십 마리씩 갇혀 있었다. 익재들의 날개를 묶는 이유는 간단했다. 날개가 그들의 급소였기 때문이다. 저곳을 묶이면 익재들은 대개 힘을 쓰지 못했다.

미마이는 입구로 발을 천천히 한 걸음씩 옮기며 양쪽 철창 안에 묶여 있는 익재들을 곁눈으로 힐끔힐끔 보았다. 제각각 천장에 매달려 검은 체액을 뚝뚝 흘리며 이쪽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금세라도 철창 밖으로 빠져나와 그를 잡아먹을 것 같은 모습에 미마이가 흠칫흠칫하자 뒤에서 위도양이 한마디 했다.

「엄살 부리지 말고 안쪽으로 들어가.」

「어, 어디로……?」

미마이가 두려워하는 눈으로 그녀를 보며 묻자 위도양이 단호한 어조로 대꾸했다.

「아직 각인되지 않은 녀석들을 찾아.」

「네…….」

미마이가 주변을 둘러보면서 다른 구역으로 넘어갔을 때였다.

털푸덕!

마침 무언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와 미마이가 걸음을 멈췄다. 방금 철창 안의 익재 하나가 제 새끼를 낳았는데, 아직 날지 못하는 그 새끼가 바닥에 떨어진 거였다.

끼욱, 끽.

날개를 달달 떨면서 이제 막 눈을 뜨는 어린 익재를 보고 미마이는 고개를 돌려 위도양의 눈치를 한번 살폈다. 그러자 위도양이 그 어린 익재를 눈짓하며 말했다.

「각인해라.」

「……불을.」

미마이가 불을 달라 요청하자 위도양이 들고 있던 등잔을 내밀었다. 그에 미마이가 품에서 주머니를 꺼내 그 안에 있던 검은 잎 하나를 불에 태웠다.

그러자 냄새를 맡은 어린 익재가 고개를 들고선 끼욱, 하는 소리를 내며 철창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그것을 보고 미마이가 작은 손을 뻗어 방금 태어난 어리숙한 익재의 팔을 붙잡았다. 순간 천장에 매달린 어미 익재가 울부짖었지만 미마이는 신경 쓰지 않고 도양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내 이름을 새겨. 위도양.」

「…….」

미마이는 싫다고 거부하진 않았지만 조용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정말 괜찮겠냐는 의미였다.

익재들의 팔에 위도양의 이름을 새기고, 이 익재들을 푸는 순간 환의 황제에게 선전포고를 하게 되는 셈이 되었다.

그리고 환의 황제는 이깟 익재들 따위 단번에 도륙 낼 수 있을 만한 위력을 지닌 이였다. 위도양이 이 익재들의 지배권을 손에 넣는다고 해도, 황제에게 대적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었다. 본인이 가시밭길을 자처하는 셈이다.

‘하지만 물리지 않겠지.’

짝을 잃은 명인자의 운명이란 그런 것이니까.

명인자끼리는 어떻게든 연결된다.

한쪽이 죽으면 다른 한쪽을 죽여서라도, 혹은 다른 한쪽을 부활시켜서라도…… 함께하게 한다.

미마이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이곳 모든 익재들의 지배권을 화화에게서, 나에게로 넘겨.」

말하면서 위도양은 제 품 안에서 가느다란 침 같은 것을 꺼내 등잔불에 달군 뒤 미마이에게 건넸다.

미마이는 눈앞에 내밀어진 그것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여기서 도양의 명령을 거부하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다. 죽일 수는 없으니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여서 본인이 원하는 바를 이루려 할 터였다.

신의 저주를 받은 아이 미마이.

부모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들에게서 버림받은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잃어버린 것인지도 잘 모른다.

어쨌든 기억이 나지 않는 어느 때 그는 환 제국에 굴러들어 왔다. 그리고 미마이는 서서히 자신이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불행을 몰고 오는 능력이라 했고, 또 누군가는 그것을 천하를 가지게 할 힘이라고 했다.

어찌 되었든 그를 ‘사람’으로 봐 주는 이는 별로 없었다.

화친왕 진평이든 위도양이든 그를 도구 취급 했다.

하지만 그마저의 가치도 없으면 미마이는 자신이 언제든 버려지게 되리란 사실을 알았다. 그건 무서운 일이었다.

저주받은 아이로서 이 마을 저 마을 떠돈 세월이 길었다. 굶어 죽거나 얼어 죽기 직전까지 간 적도 몇 번이나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진짜로 죽지는 않았지만, 몇 번이나 죽음을 코앞에 둬 본 어린아이는 이젠 다시는 길바닥으로 내몰리는 경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았다.

그랬기에 미마이는 위도양이 내민 침을 받았고, 그것으로 익재의 검은 팔에 새겨 넣었다.

위도양의 이름 석 자를.

그리고 사술(邪術)로써 속삭였다.

『들으라. 앞으로 너의 대모(大母)는 위도양이다.』

익재들은 기본적으로 집단행동을 하고, 그 나름대로의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명령 체계 또한 갖추어 놓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도 가장 근원적이고, 절대적인 존재가 있었는데 바로 최초의 익재였다.

익재는 그 최초의 익재를 자신들의 언어로 ‘대모’라 불렀다.

따라서 미마이가 익재들을 조종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그 절대적인 존재를 다른 이로 치환해 놓는 것.

그의 명령을 들은 어린 익재가 곧 도양을 향해 끼익, 울었다. 썩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지만 도양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미마이가 익재의 팔을 놓고 일어났다. 그는 잠깐 사이 제 손에 들러붙은 익재의 검은 체액을 보고서 잠시 눈을 찌푸렸다가 위도양에게 자신의 주머니를 건넸다.

「이제 이것들을 태우며 걸으세요.」

* * *

자박자박.

새벽의 여명이 막 땅을 밝히기 시작할 무렵에야 미마이는 젖은 땅을 밟으며 방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수많은 익재들이 위도양에게 홀리는 광경은 기괴했지만 정작 도양은 꽤 만족한 것 같았다. 다행히 자신에게 화친왕이 죽은 것에 대한 벌을 내리진 않을 듯했다.

물론 그것과 상관없이…… 환은 전란에 휩싸일 터였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고, 익재들의 피로 땅은 상처를 입을 것이다.

그 생각에 조금 우울해진 미마이는 이대로 차라리 오래도록 잠들고, 평화가 찾아왔을 때 다시 깨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제 방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오랜만이구나, 미마이.”

“……?”

미마이는 제 방에 이미 누군가가 와 있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미마이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희미한 빛으로 불청객의 존재를 식별했다.

제 낡은 이불 위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그이는 온통 검은 옷을 두른 사내였다. 눈을 제외하고는 얼굴을 가리고 있어 누군지 알아볼 수는 없었다. 한데 목소리는 분명 귀에 익었다.

미마이는 상대에게 누구냐고 묻는 대신 바깥을 먼저 살폈다. 다행이라고 하기엔 모호하지만 다들 아직 화친왕 진평의 죽음을 수습하기에 바빴다. 거기에 위도양이 각지에 흩어져 있는 진평의 지지자들을 불러들이기 위해 사람을 보냈다.

겨우 미마이 따위에게 신경 쓸 여력이 그들에겐 없다는 의미였다.

미마이는 등 뒤로 문을 닫으며 회백국 언어가 아닌 환의 언어로 대답했다.

“네, 정말로 오랜만입니다. 조 후…….”

그 말에 상대가 픽,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더니 얼굴을 가린 복면을 벗어 냈다. 드러난 얼굴은 미마이의 짐작대로 조서엽이었다.

미마이는 그의 수려한 이목구비를 보고는 잠시 두 손을 꽉 쥐었다. 조서엽의 소식은 늘 듣고 있었지만 그가 자신을 찾아올 것은 예상치 못했다.

긴장감에 눈을 맞추지 못하는 아이를 보며 서엽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 발짝 다가갔다.

“어찌 알아보았느냐.”

그 질문에 미마이는 우물쭈물하며 대답했다.

“은인의 목소리를 못 알아챌 정도로 아둔하지 않으니까요.”

짧은 만남이었지만 조서엽과의 인연은 미마이에게 아주 많은 영향을 미쳤었다. 단적인 예로 그를 만난 뒤 자신의 능력을 숨겨야 한다는 걸 깨닫고, 우선 환의 말을 할 줄 모르는 척하기 시작했다.

실상 기억도 나지 않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환의 저잣거리에 굴러다녔기 때문에 이곳 언어를 모른다는 것은 말도 안 됐지만, 특징적인 외모 때문에 사람들은 전부 쉽게 속아 넘어갔다.

그것은 화친왕도, 위도양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그들이 회백국의 언어를 알기는 했어도, 완벽한 의사소통이 되는 건 또 아니었다. 어릴 적 떠나왔다는 것을 핑계로 회백국의 언어에도 서투른 척했으므로.

어찌 보면 서엽은 미마이의 실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사람 중 하나였기에 그를 다시 마주치면 어쩌나 싶어 은근히 불안해했었다.

그런 그가 어딘지 자상해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대꾸해 왔다.

“은인은 무슨. 게다가 벌써 6년은 더 됐거늘.”

미마이는 서엽을 유심히 보다가 불쑥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신체 접촉을 한 것은 아니지만 눈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어째서 서엽이 자신을 찾는지 어렴풋이는 알 것 같았다.

아니, 사실은 그 짐작이 무조건 맞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서엽의 앞에 아주 복잡한 문제가 놓였다는 점만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조서엽이 안고 있는 문제는 미마이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제 능력 외의 것이었다. 그것은 신의 영역이었다.

한데 서엽이 미마이의 손목을 턱 잡아 왔다. 강한 힘은 아니었지만 그의 손길엔 반드시 자신이 데려가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회백국에서 온 서역인이 누군가 궁금해하던 차였는데, 너라는 사실을 알고 이리 찾아온 것이다.”

“……왜.”

“나와 함께 가자, 미마이. 내게 네 능력이 필요하다. 물론 황제 폐하께도.”

“제 능력……?”

미마이는 서엽이 입에 올린 황제 폐하라는 말도, 자신의 능력이라는 말도 불편했다. 하여 움직이고 있지 않으니 서엽이 그를 달랬다.

“여러 가지로 물어볼 것도 있고, 또 네가 도와줬으면 하는 것도 있다.”

“…….”

“네가 화친왕이 없는 이곳에 있어 봤자 반란군의 끄나풀밖에 더 되겠느냐. 나와 같이 황궁에 들자꾸나.”

그것은 맞는 말이었다. 방금도 미마이는 위도양에게 힘을 쥐여 주고 왔다. 이곳에 계속 머물면 그와 같은 일을 앞으로도 수없이 반복해야 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업보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쌓일 터였다. 종내에는 환 제국을 망친 원흉으로서 저자에 목이 걸릴지도 모를 일이다.

무수히 많은 사람이 저로 인해 죽는 일은 미마이 또한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미마이는 서엽에게서 풍기는 위협적인 향기 또한 두려웠다.

미마이가 선뜻 결정하지 못하고 있자 서엽이 낌새를 눈치채고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이냐.”

미마이가 무서워하는 것과는 별개로 서엽의 말투는 시종 부드러웠다. 어린아이를 상대로 실력 행사를 하려는 기색은 없었다.

미마이는 괜히 미안함이 들기도 해,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이 아닙니다.”

대답하면서도 미마이는 자신이 지금 거짓말을 하는 걸까, 생각했다.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겁이 났다. 하지만 믿는다면 겁이 날 이유 또한 없지 않은가.

“그럼 무엇 때문에 이리 주저하느냐.”

미마이는 제 손목을 붙잡은 서엽의 손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몸이 닿아 있으니 보지 않아도 되는 조서엽의 내밀한 무언가가 보였다.

예전에는 이런 것들이 보이거나 들리면 도무지 참지 못하고 입 밖으로 내뱉곤 했었는데, 그것이 제 목숨을 위험하게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로는 습관을 간신히 고쳤다.

하지만 미마이는 이번엔 도무지 참지 못했다. 이것이 정녕 조서엽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신에게 너무나 큰 위협이 되는 문제였다.

어쩌면 말하는 순간 이 자리에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서엽은 악인이 아니다. 어렸을 적 사람들에게 맞아 죽을 뻔한 위기에서 구해 준 좋은 사람이었다.

그것 하나만 믿고 미마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조 후의 명인의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상대로 이야기를 들은 서엽의 표정이 굳었다. 미마이는 심각해진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진지한 어투로 물었다.

“그래도 전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인가요?”

“…….”

어려운 질문이었는지 서엽은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미마이는 그의 손에서 손목을 슬쩍 떼 내었다. 더는 서엽이 마음 한구석에 숨겨 놓은 은밀한 이야기를 훔쳐 듣고 싶지 않았다. 이미 알게 된 사실만으로도 말도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보기만 해도 모질고 끔찍스러운 운명이었다. 조서엽에게도, 그리고 그 명인자에게도. 단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불행이 예고된 인연이다. 그래서 조서엽 역시 숨기려는 것일 터였다.

하지만 미마이가 알게 되었다. 그가 서엽 본인을 제외하고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의 명인자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미마이는 이 또한 비극의 서막처럼 느껴졌다.

“조 후에게서 피 냄새가 납니다.”

서엽은 방금 전 제가 소중히 여기던 인연을 직접 끊고 왔다. 본의 아니게 그 사실을 ‘보게’ 된 미마이가 그것을 지적하자 서엽이 굳은 표정으로 미마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를 마주 보며 미마이는 서엽이 자신에게 청할 도움이 제 예상과 달리 그 부분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다행인 건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서엽은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듯, 한동안 침묵했다.

그는 미마이의 동그란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이내 제 눈을 감았다. 그로서는 아주 치명적인 비밀을 미마이와 공유하게 되는 셈이니 고민이 되는 듯했다.

그러나 서엽도 결국은 미마이의 ‘능력’을 포기하지는 못했다.

누군가가, 아니 화친왕 진평이 천하를 가지게 할 힘이라 평가했던 그것을 눈앞에서 놓지는 못했다.

서엽이 천천히 눈을 뜨고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여 왔다.

“네가 영원히 함구한다면, 눈감아 주겠다.”

미마이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에겐 아주 많은 비밀이 있으니 하나 더 생기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차피 위도양의 곁에 계속 있어 봤자 미마이에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배신이라 말하겠지만, 사실 도양에겐 원하는 것을 이미 손에 쥐여 준 뒤였다.

더는 화친왕 무리들에게 도구로 이용당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몇 년간 이 넓은 감옥에 갇혀 생활했다.

그들은 자신을 소중하다 말하면서도 함부로 대했다. 허락이 없으면 이 방 한 칸조차 제 의지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서엽이라면 자신을 조금 다르게 대해 주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도 있었다. 뭐가 됐든 이곳의 생활보다는 나을 것이다.

승낙의 말을 들은 서엽이 그에게 다시금 요청했다.

“나를 따르거라, 미마이.”

“예, 조 후.”

확실한 승낙의 말에 서엽은 아이를 꽉 안았다가 두 팔로 작은 몸을 받치고 들어 올렸다. 미마이는 혹시나 떨어질세라 그의 옷깃을 꽉 붙잡았다.

그렇게 조서엽은 화친왕부에서 미마이를 훔쳐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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