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진예.
〈내 세상 이리 이름이 예쁜 아는 처음 본다.〉
진예…….
〈그러게요, 어머니…….〉
허벅다리에 나타난 그 이름만 봐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신과 평생을 살 수도 있는 운명의 정인이 아름다운 이름을 지니고 있어서 좋았다. 만나면 꼭 잘해 주겠노라, 밥은 굶지 않게 해 주겠노라 결심했다. 얼굴도 보지 않았지만, 고운 이름만으로 평생 그녀만을 바라보며 살 자신도 생겼다.
한데.
〈네가 모실 분은 누구보다도 귀한 분이시다.〉
그것이 환 제국 황제의 이름이리라고는 상상한 적도 없었다.
밥을 굶는 게 문제가 아닌 여인. 그것도 모자라서, 제국 내에서 가장 지고한 여인…….
무건은 그 여인의 침전이라는, 용마루가 없는 전각에 들어왔다.
어디 살이 부러진 데 하나 없는 격자문. 머리가 닿지도 않는 높은 천장. 도대체 몇 걸음을 걸어야 끝에 도달할지 알 수 없는 넓은 내부.
밝아졌다 잦아들었다 다시 밝아지기를 반복하는 작은 화등은 괜히 가슴을 불안하게 했고, 붉은 천개가 드리워진 침대는 괜스레 마음을 흔들어 댔다.
그 와중에 제 눈앞에 있는 여인은, 옷을 스르르 벗어 어깻죽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무건은 괜히 더 그 부근을 몰두해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녀의 오른쪽 어깨에 새겨진 자신의 이름.
그들의 인연을 증명해 주고 있는, 선명한 명인을.
“연, 무…… 건.”
아무리 배운 것 없는 평민의 자식이라도 부모님과 정인, 그리고 자신의 이름 정도는 읽을 줄 알았다.
무건은 진예의 하얀 어깨에 적혀 있는 한자를 신기하다는 듯이 누르며 다시 한번 또박또박 읽었다.
“연무건.”
그리 말하는데 가슴에 묘한 감개가 어렸다. 아무리 봐도 제 이름이 맞았다. 진예가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 이름이 틀림없으렷다.”
“네…… 아니, 그렇습니다…….”
눈을 마주치지 마라.
예를 갖춰라.
옥체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
침전에 들어오기 전에 서엽의 당부가 이어졌으나 무건은 벌써 모두 어겼다. 뒤늦게 그것을 깨달은 무건이 제풀에 흠칫 놀라 밖을 쳐다보았다.
밖엔 저승사자의 그것처럼 아주 검은 그림자가 져 있었다. 조서엽이었다. 그가 이 안의 상황을 엿듣고 있는 것이었다.
그에 은근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데, 진예가 무건의 얼굴로 손을 뻗어 왔다.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한 붉은 눈동자가 무건과 시선을 맞췄다.
“밖의 눈치를 볼 필요 없다.”
작은 입술 사이에서 나오는 나지막한 음성에 무건이 얼굴을 붉혔다.
“진, 진짜 그, 그래도 됩니까?”
무심결에 대꾸했다가 무건은 또 움츠러들었다. 평생 예법 따위 배우지 못해 제가 생각해도 말투가 정말 이상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서당 개 노릇이라도 했어야 하는 건데. 난생처음 배우지 못한 한이 마음에 스며들었다.
그러나 진예는 상관없다는 듯 대꾸했다.
“그럼. 너는 하늘이 맺어 준 나의 정인이 아니더냐?”
목소리는 어찌 이리 고우십니까. 또 눈은 어떻게 이리 아름다우십니까…….
긴 속눈썹이 어떻게 이리 나비 날개처럼 예쁘게 생겼는지 모르겠다. 그것이 펄럭일 때마다 무건의 가슴도 팔랑팔랑 간지러워지고 있었다. 가슴속에 나비 한 마리를 품게 되었다. 덕분에 숨 한 번 쉬기도 조심스러워졌다.
환 제국의 황제, 진예.
그간 자신에게는 멀고도 먼 존재였다.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도, 이름이 뭔지도 관심이 없었다. 황제 따위, 내 삶에 무슨 영향을 끼친다고. 전쟁만 안 나면 그만이다.
그런데 저 멀리 있던 그 사람이, 자신의 정인이라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천하절색이었다.
그래서인지 자꾸만 말을 더듬게 되었다.
“하, 하지만…… 저 같은 천한 것이 어찌 폐하와…… 하, 한 이불을 덮을 수…….”
하지만 문장이 완성되기 전에 찬물이 끼얹어졌다.
“이런, 한 이불을 덮는 것까지는 아직 허락하지 않았는데?”
“……아.”
무건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예를 보았다. 의문이 가득한 눈길이 향하자 진예가 픽 웃더니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사락, 사락.
그녀가 몸을 일으키면서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방 한가운데 덩그러니 앉아 있는 무건에게 일어나라 마라 하는 말 한마디 없이, 진예는 넓은 침실을 사뿐사뿐 걷기 시작했다. 치마 밑으로 검은 신발을 신은 작은 발이 보였다 말았다 했다. 무건은 신기할 만큼 작은 그 발도 넋을 잃고 보았다.
저이의 행동 하나하나에 왜 이렇게 가슴이 뛰는지.
어찌 이리 얼굴이 달아오르는지.
손에 땀이 찼다. 당장 간지러움이 올라오는 부위를 움켜쥐어 이 감정을 가라앉히고 싶은데, 함부로 행동할 수 없으니 일단 참아야 했다. 그것이 못 견디게 괴로웠다.
그때, 정신 차리라는 듯 머리 위에서 진예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황궁의 예 따위 조금도 배우지 못한 너를 내 어찌할까, 아직 고민 중이다.”
방 곳곳에 놓인 등잔의 불꽃이 미약하게 흔들릴 때마다 진예의 그림자도 흔들흔들했다. 무건은 어쩐지 엄숙해진 분위기에 꿀꺽 침을 삼켰다.
“하늘이 정해 준 인연.”
진예가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그따위 것이 어디 대수인가?”
“…….”
“아니 그러하냐?”
무건은 여전히 두 무릎을 꿇고 앉은 채로 진예를 올려다보았다. 무건의 순수한 눈이 당혹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런 그를 내려다보는 진예의 눈은 차가웠다.
“너는 내게 아무 쓸모가 없지 않으냐.”
일자무식인 무건이라도 지금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았다. 어쨌든 그도 생각이라는 걸 할 줄 아는 사람이니까.
무건은 한순간에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떨리는 목소리를 내었다.
“그럼 왜……?”
“왜 이곳에 데려다 놨느냐 묻는 것인가.”
정곡이었다.
진예가 눈을 휘며 웃더니 무건의 앞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고 허리를 굽혀 귓가에 입을 댔다. 작은 목소리가 속삭여 온다.
“그야 마음에 안 들면 그대의 목을 치려고 찾은 것이지. 정인이라 해 봤자, 어차피 죽으면 소용이 없는 것이 아니냐.”
“……폐, 폐하.”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무건이 말을 잇지 못하자 진예가 훗,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 이제 상황 파악이 좀 되느냐? 기특하구나.”
무건은 멈춰 버린 머릿속에 억지로 생각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어떤 결론 하나가 나왔다. 무서운 가정이었다.
“그럼 저는, 오늘 여기서 죽습니까?”
“어떨 것 같으냐.”
무건은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에게는 이미 선택권이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
황제가 죽으라면 죽어야 한다. 평민의 아들인 자신 따위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건의 혼란을 눈치챘는지 진예가 마치 달래듯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아까의 질문에 대한 답을 재촉했다.
“어떨 것 같으냐 물었다.”
무건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죽을 것, 같습니다.”
말을 멋지게 꾸미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하여 솔직하게 말하자 진예가 크게 웃음소리를 냈다.
“걱정 마라, 내 이 공간은 소중하여 피를 묻히길 원하지 않으니.”
내일 아침까지는 살려 두겠다는 뜻인가?
자신을 죽이겠다고 하는 여인 앞에서 무건은 왜인지 남 일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현재의 상황이 도무지 현실 같지 않아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말을 마친 진예가 도로 허리를 폈다. 그녀의 얼굴이 멀어졌고, 무건의 고개도 더 위를 향했다. 진예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내 얼굴을 그리 뚫어져라 봐선 안 된다고 들었을 텐데.”
경고의 말을 들었으나 무건은 마냥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여기서 물러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용기가 불쑥 솟은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말대꾸를 하게 됐다.
“하지만 곧 죽을 거라면, 상관없지 않습니까?”
“제법 당돌하구나.”
“……한 말씀 더 올려도 됩니까?”
“무엇이더냐.”
“그럼 왜 저를 이 방에 들이셨습니까?”
진예가 눈을 내리떴다. 무표정했으나 눈빛에는 제법 이채가 돌고 있었다. 어쩌면 불쾌해하기보다는 재미있어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당장 죽이지는 않을 터.
무건은 그것을 일단 마음대로 지껄일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한밤중에, 정인을 자신의 방에 들이는 자는 정숙지 못한 것이라 배웠습니다.”
진예가 고개를 기울였다. 얼굴에서 웃음기가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
“하여,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지?”
“이 방에선 죽지 않는다면, 날이 밝으면 죽는다는 의미 아닙니까.”
아침엔 침실을 나서야 하니까.
무건은 문살 사이로 비치는 서엽의 그림자를 의식했다.
황제의 옆에 바짝 붙어 있으니 보통 무인이 아닐 것은 분명하다. 어쩌면 이미 이곳을 나서자마자 무건을 죽이기 위해 대기하고 있으란 명을 받았을지도 몰랐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평범한 자신은 분명 목이 뎅겅 날아갈 것이다.
그렇다면.
“그럼 그 전에…….”
무건이 침을 꿀꺽 삼켰다. 목소리를 줄일 생각은 없었다.
비겁하다, 그런 건.
자신은 비겁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당당하게, 당장 이 자리에서 죽더라도.
“당신을 가지고 싶습니다.”
자신의 정인으로 짝지어졌다는 이 여인을 품에 안고 싶었다.
몸 어딘가에 이름이 새겨지면, 운명이라고 했다. 이름이 나타났을 때, 고운 이름을 본 순간 얼굴도 모르는 여인이 좋아졌다. 마침내 아름다운 얼굴을 마주했을 때는 눈이 멀 것만 같았고, 가슴이 뛰었다.
자신이 태어나 본 사람 중 가장 귀한 사람. 그런 사람이 범인(凡人) 연무건에게 하늘이 내려 준 정인이었다.
쿵, 쿵…….
심장이 거세게 박동했다. 당장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이.
말 한마디 내놓고 이토록 긴장한 적은 없었다.
“…….”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작은 바람의 소리마저 귓가에 크게 들려왔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명필의 붓 아래에서 꽃이 피어나듯 진예의 입가에 조용히 미소가 그려졌다.
그때였다.
“그자를 처단하겠습니다.”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건은 너무 긴장한 탓에 굴러가지도 않는 눈동자를 억지로 돌려 밖을 확인했다. 서엽의 그림자가 더 짙고 선명해진 게 보였다. 가까이 왔다는 의미일 터이고, 그 모습을 진예 역시 보았을 것이었다.
진예는 다만 엄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만 불렀다.
“서엽.”
지엄한 황궁 안이었다. 문을 닫은 이상 황제의 처소에서 난 소리에 대해서는 모르는 척 입을 닫고 있는 게 맞았다. 한데 법도를 모를 리 없는 서엽이 끼어들었다.
“감히 지존을 욕보인 죄, 신 조서엽은 그자를 용서할 수 없나이다.”
덤덤한 목소리였지만 얼핏 분노가 묻어났다. 진예가 재미있다는 듯이 쿡, 웃음소리를 내더니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림자가 드리우자 양쪽 문이 열렸다. 곧바로 서엽이 그녀의 앞에 엎드렸다.
“폐하.”
서엽은 충성스러운 신하였다.
하지만 지금 고개를 숙인 모습은, 곧 진예의 발에 입이라도 맞추고자 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사랑하는 여인에게 구애를 하는 사내처럼.
그 모습을 흥미롭게 내려다보던 진예가 한쪽 무릎을 바닥에 내렸다. 그러자 침전 회랑에 남아 있던 모든 이들이 고개를 땅바닥에 닿도록 숙였다.
그들 가운데에서 진예가 손가락을 밀어 넣어 슬쩍 서엽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었다. 조서엽은 연무건을 내치기 위한 가장 쓸 만한 패였다.
모두가 바닥에 고개를 박은 이 와중에도 등 뒤로 연무건이 이쪽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렇게 앞뒤에 쏟아지는 두 남자의 눈길을 받아 내며, 진예는 이 자리의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입술 밖으로 내었다.
“그럼 네가 내 침소에 들 테냐?”
순간 서엽의 눈빛이 흔들렸다.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어찌 그런 불충, 불경한 말씀을…….”
늘 침착한 서엽이 드물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진예는 흐릿해진 그의 말꼬리를 그대로 잡아챘다.
“네 입으로 꺼내진 못하겠지.”
“…….”
“하지만 네 눈이 그리 말하고 있거늘.”
“신 조서엽, 추호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리 없다.”
진예는 단정적인 어투로 말했다. 누구의 반론도 듣지 않겠다는 양, 이미 사실을 다 알고 있다는 양.
서엽의 말문을 차단한 그녀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자마자 아직도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건방지게 이쪽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무건과 시선이 맞았다.
묘하게 거슬리는 시선이었다.
매번 제 발 아래 기던 신하들만 봐 왔던 진예로서는 아주 낯설기도 했다.
그녀는 눈으로는 연무건을 보고, 입으로는 서엽에게 말했다. 방울 소리처럼 선명한 그녀의 목소리가 침전에 울려 퍼졌다.
“조 랑(郞)은 짐의 처소로 들라.”
“조 랑(郞)은 짐의 처소로 들라.”
그리 명한 진예가 먼저 발을 돌렸다.
서엽은 눈을 꾹 감았다. 평생을 모셔 왔지만 진예는 속을 알 수 없는 여인이었다. 지금도 무슨 계획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건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리 없다……?
서엽은 진예의 말을 곱씹으며 몸을 일으켰다. 긴장감으로 등의 근육이 잔뜩 굳었다. 발소리는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진예를 따라 방에 들어선 서엽은 등 뒤로 문을 닫고 안을 살폈다. 서엽의 눈이 다시금 진예의 작은 몸을 포착하였을 때였다. 앞을 가로막는 것이 생겼다.
연무건.
무건이 그와 진예의 사이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무슨 짓이지?”
상대의 예기치 못한 행동에 순간 단정한 서엽의 눈살이 구겨졌다. 하지만 꽤 날이 서 있는 눈빛과 목소리에도 무건은 기죽지 않았다.
“눈을 마주치지 마라.”
“…….”
“이 방에 저를 들이기 전에 당신께서 한 말입니다.”
“감히, 네놈 따위가 나를 가르치겠다고?”
“황궁에서의 법도는 모르나, 가르친 이가 스스로 내뱉은 말을 어기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하더니, 과연 그 말이 맞았다.
서엽은 헛웃음이 나올 뻔한 것을, 상대의 뒤에 서 있는 진예를 보며 겨우 참았다. 자신의 주인 앞에서 무례를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주군이 아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지켜보겠다는 의미였다.
그녀의 뜻이 그렇다면 서엽은 따라야 했다. 그의 충성에는 조건이 없었으므로.
하여 서엽은 언쟁하는 대신 황제의 앞에서 묵례하였다.
“신 조서엽, 폐하의 명에 따라 귀한 곳에 걸음하였나이다.”
연무건이 뒤를 돌아보자 진예가 재미있다는 양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몸을 옆으로 돌리더니 별 대수롭잖게 인사를 받아넘겼다.
“이런 곳에서 그런 치레는 필요 없다.”
짧게 대꾸한 진예의 발이 향한 곳은 연무건 쪽도, 조서엽 쪽도 아니었다. 그녀는 구김 하나 없이 잘 정리된 침대 위에 몸을 내렸다.
그렇게 걸터앉은 그녀가 곧 발끝을 슬쩍 들어 올리더니 두 사내를 도발했다.
“그래, 둘 중 누가 먼저 내 발을 핥아 줄 셈이냐?”
그녀가 말을 마친 순간 무건과 서엽, 둘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
누구도 선뜻 움직이지 않자 진예는 도로 바닥에 발을 내렸다. 그러고 실망했다기보다는 심심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도 없는가.”
재차 이어진 질문에 서엽의 입술이 움칠했을 찰나였다. 진예가 때를 맞춘 것처럼 무건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연무건, 방금 전엔 나를 가지고 싶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분을, 내보내 주십시오. 그럼…….”
진예가 단호하게 말허리를 잘랐다.
“안 된다.”
‘싫다’가 아니라 ‘안 된다’. 기묘한 화법이었다. 무건은 그녀의 의도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다음 행보도 마찬가지였다.
“서엽, 너는?”
“신은.”
가신에게 사내의 역할을 맡기겠다 하는 저 태도의 진의는 무엇이란 말인가. 다만 질문을 받은 서엽은 진예가 자신을 시험하려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폐하를 능멸하는 저자를 처단하는 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
그리고 그의 주군이 이미 자신의 불경, 불충한 감정을 눈치챘다는 것도.
하나 서엽은 당황하지 않고 오로지 충심만을 내비쳤다. 정석적인 답이었다.
“그것이 나의 오른팔인 조서엽의 뜻이냐.”
그녀는 여인이기 이전에 황제였으니까. 자신의 충성을 받아 마땅한 지고한 여인이니까.
“그러합니다.”
“짐이 이 자리에 있는 건 서엽, 그대의 공이 크다. 하여 언제나 신뢰하고 있지.”
그들의 연대는 고작 다른 이의 몸에 이름 하나 새겨졌다고 끊길 것이 아니었다. 진예는 지금 이 자리에서 그것을 증명하려 하는 것이었다.
“그대의 청 하나 들어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
진예의 말을 들으면서 서엽은 마치 쓴 약을 삼키는 기분이 되었다. 황제의 명이 이어졌다.
“검을 뽑아라.”
서엽이 허리춤에 걸려 있던 검집을 잡았다. 곧 잘 벼려진 칼이 스르릉, 소리를 내며 날을 드러냈다.
감히 황제의 침전에서 칼을 들었다. 이보다 더한 신뢰의 증명은 없었다. 그것은 서엽의 칼날을 더 날카롭게 했다. 끝이 무건의 목을 겨누었다.
그 모습을 보며 진예가 가히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나에게 물었지? 오늘 여기에서 죽는 것이냐고.”
무건은 금세라도 자신의 목을 베어 버릴 것 같은 서엽의 칼은 신경 쓰지 않았다. 곧은 눈은 오로지 진예만 담았다. 검은 눈동자에 든 감정은 생각보다 평온했다. 심지어는 쉽게 자신의 죽음을 입에 올렸다.
“죽나요?”
“서엽이 네 목을 자르고 싶다는구나.”
진예가 가볍게 대꾸했으나 무건은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폐하의 마음을 묻는 것입니다.”
“짐의 마음이라.”
이 구중궁궐에서 황제의 ‘마음’을 알고 싶어 하는 자는 없다. 입에서 내뱉어지는 것은 곧 정치적인 결정이다. 때로는 마음에 들지 않아도 결정해야 할 때가 있었다.
모두가 그 사실을 안다. 하지만 누구도 진예의 속마음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어차피 결론엔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니까.
하여 진예는 무건의 말들이 제법 재미있었다. 황궁에 사는 사람들은 하지 않는 발상이었으니까.
그러나.
“살려 둘 가치가 있으면 살릴 만하지.”
심심풀이로 단것을 입에 무는 정도의 재미이다. 그것을 위해 대의를 그르칠 생각은 없었다.
연무건은 그녀가 어떤 지난한 과정을 거쳐 황좌에 올랐는지 조금도 짐작하지 못할 터였다.
수많은 피를 흘렸다. 수없는 희생을 치렀다. 온갖 저주의 말을 들으면서 제 자리를 지키며 버텨 왔다. 아직 쓰러져서는 안 되었고, 오히려 누구보다도 악독해져야 했다.
실제로 어느 때인가는 스스로가 악귀가 되었다고, 그리 생각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악인에 가까워졌다고 해서, 다시 선인으로 되돌아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곧 유약함을 뜻하는 것이었으므로.
기껏 제 몸에 명인 하나가 새겨졌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달라져서도 안 되었다. 자신은 단지 진예라는 이름의 여인인 것만이 아니라, 환 제국의 황제였으므로.
따라서 그녀의 선택은 하나였다.
“연무건, 너에겐 가치가 없다.”
미천한 몸으로 고귀한 이름을 품은 자. 그 사실만으로도 눈앞의 사내는 죽어 마땅했다.
그런데 연무건은 반대의 말을 했다.
“이 몸에 당신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진예.”
“네가 감히……!”
함부로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황제의 이름을 읊자 옆에 있는 서엽이 발끈했다. 진예는 그런 그의 흥분을 경계했다. 가볍게 손을 들어 서엽을 가라앉힌 그녀가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내 몸엔 네놈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진예가 저런 헛소리를 받아 줄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서엽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한편으로는 저따위 놈을 진예가 예외로 둔다는 것에 화가 난 서엽은 검 자루를 쥔 손에 더욱 힘을 넣었다.
“폐하, 당장 이 무례한 자의 혀를 뽑으셔야 합니다.”
“그래, 옥에 가둬 닷새를 굶길 수도 있지.”
진예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덧붙였다.
이렇게든 저렇게든 죽인다는 소리였다. 단지 시간과 정도가 문제일 뿐이었다. 지금 당장이냐, 아니면 천천히냐. 고통 없이 단번에 죽일 것이냐, 끔찍함을 음미하도록 하면서 서서히 숨을 거두게 할 것이냐.
하지만 진예의 잔인한 속내를 능히 짐작하고도 남을 무건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거, 입이라도 놀리고 죽자는 심산이었다.
무건은 자신의 목에 지그시 파고드는 검 앞에서도 담담하게 말했다.
“그 이름의 가치가 죽기 전에 당신을 가지는 일조차 못 할 만큼 하찮았습니까?”
반대로 진예의 표정은 조금 뒤틀렸다. 지금 것은 진예로서도 재미로 넘기기 어려웠다.
“이제 보니 당돌하기만 한 것이 아니구나. 아무것도 없으면서 강한 척을 해.”
“…….”
“혐오하는 부류다.”
그녀가 침대에서 몸을 부스스 세우더니 발소리를 내지 않고 걸어 무건의 앞에 섰다. 예리한 붉은 눈이 무건을 직시했다.
“내 한 가지 조언을 해 주마, 무건아.”
고요한 밤이어서일까. 말투는 평온했고, 목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지만 묘하게 힘이 서린 것처럼 느껴졌다.
“힘이 없으면 벌레처럼 길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니라.”
진예는 무건보다 키가 작고, 어여쁜 여인이었다. 그런데도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황제다운 고고함과 위엄이 담겨 있었다. 눈빛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듯한 압박감이 들었다.
무건은 목울대를 한 번 올렸다 내리며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제대로 목소리가 나올 것 같지 않아 잠시 틈을 두었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이놈은 항상 기었습니다.”
무건은 황제의 앞에서도 말을 가리지 않았다. 애초에 그는 가리는 법을 몰랐다. 범인의 아들인 연무건이 사는 세상은 그랬다.
“높으신 분이 타신 가마가 지나가면 머리를 조아려야 했고, 배가 고프면 지나가던 상인에게도 고개를 숙였습니다. 한데.”
중간에 말을 끊자 진예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뒤에 어떤 발칙한 말이 나오는지 두고 보겠다는 눈초리였다.
“이제 정인의 앞에서도 기어야 합니까?”
역시나 헛소리였다. 제 주제도 모르는 발언이었고.
“짐이 정인임을 허락한 적이 없다.”
“하늘이 허락하였습니다.”
무건의 반박에 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진예는 아니었다. 시야 밖에 있는 조서엽일 터. 그러나 무건은 눈을 돌리지 않고 오로지 진예만 응시했다.
“하늘보다 높은 것은.”
그녀의 붉은 입술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집중하며.
“나다.”
그러니 알 수 있었다.
“짐은 너 같은 놈을 원하지 않아.”
눈앞의 여인이 얼마나 특별한 이인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여인. 그러나 세상에 둘도 없는 여인.
진예는 지금까지 연무건이 본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아름다웠다.
욕심이 났다. 무건은 태어나 처음으로 순수한 소유욕을 느꼈다. 가슴속이 금방이라도 녹아들 것처럼 들끓었다.
하여 자신을 멸시하는 그녀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이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마음을 제가 차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질문을 듣고, 이번엔 서엽이 아닌 진예가 헛웃음을 지었다.
또, 멍청한 질문.
무지하니 부끄러워할 줄도 몰랐다. 진예는 정말, 연무건 같은 놈은 생전 처음 보았다. 애초에 노니는 물 자체가 달랐다. 섞일 수 없는 존재라는 확신이 들었다.
방법을 알려 줘도 어차피 달성하지 못할 자다. 따라서 그녀는 어떤 주저함도 없이 말해 줄 수 있었다.
“내 마음을 차지하고 싶다면, 너의 쓸모를 증명하면 된다.”
그녀가 말하는 ‘쓸모’가 무엇인지 무건은 알지 못할 게 뻔했다.
“하지만 방도가 없겠지.”
그리고 진예는 결코 만만하지도, 친절하지도 않았다.
“그리 무식한 네놈에겐 내 심복의 칼부림조차 아까우니……. 서엽.”
진예가 서엽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서엽이 즉시 반응해 왔다.
“명을 내리소서.”
진예가 오른팔을 들었다. 길고 가는 검지가 무건의 얼굴을 가리켰다.
“이놈을 읍주에 갖다 버려라.”
읍주(泣州).
환 제국에 존재하는 익재(翼災)의 최대 산란지였다.
익재란 이 세상에 나타난 최초의 재앙을 뜻했다.
신이 짝지어 준 운명을 거부하고 떠나려는 제 연인을 끝내 포기하지 못해 그를 씹어 먹고 태어난,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괴물.
저주받은 신의 날개를 제 두 어깨에 달고 다니는 그것을 사람들은 ‘신익지재(神翼之災)’, 줄여서 익재라고 불렀다.
그 재앙 덩어리가 나타나는 곳엔 늘 수많은 사람들의 피가 뿌려졌다.
그것은 읍주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죽하면 무수한 눈물이 흘렀다는 이유로 그곳의 지명이 울 읍(泣) 자를 쓰는 읍주로 바뀌었을까.
평범한 사람이 발을 들이면 온몸을 물어뜯기며 필시 죽는다.
곧, 진예의 명은 무건을 죽이라는 의미였다. 그것도 아주 처참하게.
물론 연무건도 읍주가 어떠한 곳인지 정도는 알았다. 따라서 진예가 명하는 바가 무엇인지도.
그가 지그시 어금니를 무는 사이, 서엽은 흔들림 없이 답했다.
“명을 받드옵니다.”
칼이 거두어졌다. 서엽이 무건을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문 쪽으로 끌려가는 무건의 눈빛이 진예에게 박혀 집요하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 시선을 받아 내며 진예가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네놈이 읍주에서 살아 나오면…… 그래, 그 ‘쓸모’라는 것을 조금은 인정해 주마.”
그러자 무건이 근거도 없이 자신감을 내보였다.
“돌아올 겁니다. 그리고 제가 쓸모를 증명해 내면, 당신의 몸에 각인할 수 있게 해 주리라 약조하여 주십시오.”
……각인?
예상치 못한 단어를 들은 진예가 입꼬리를 조금 끌어 올렸다.
각인이라니. 그리되면 서로에게서밖엔 후사를 보지 못하게 된다. 심지어는 두 사람이 멀리 떨어질 경우 정신이 나가 버리거나 목숨이 위태로워질 때도 있었다. 게다가 각인에 따른 동조 현상 탓에 죽음조차 한날한시에 맞게 된다.
즉, 명인자끼리의 각인은 서로에게의 절대적인 속박을 의미했다. 게다가 일단 시행되면 후회하더라도 죽을 때까지 깨부수지 못한다.
이젠 좀 어처구니없어지려고 할 만큼 황당한 말이었다. 죽으러 가는 주제에 황제의 몸에 각인을 하겠다고 선언하다니, 정말로 머리가 돌아 버린 건가 싶었다.
미쳐도 곱게 미친놈이 아니었다.
해서 가볍게 대꾸했다.
“뭐, 네놈이 대단한 쓸모를 증명할 수 있다면 각인까진 아니더라도 대가는 챙겨 주지.”
한데 그 와중에 무건이 집요하게 물었다.
“어떤 대가입니까?”
“일단 살아남으면 후궁, 정말 쓸모가 듬뿍 있는 거 같으면 황후 자리를 주겠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만인이 우러러보는 고귀한 이가, 역사에 남을 짐의 유일한 사내가 될 테지.”
진예가 픽 웃으며 입이 따르는 대로 움직였다. 사실상 진지하게 하는 약속은 아니었다. 그런데 무건의 눈빛이 달라졌다.
“약조하신 겁니다.”
마치 그것이 제 새로운 목표가 됐다는 양.
물론 진예는 느긋하게 미소 지었다. 어차피 실현될 리는 없으니.
그리고 서엽이 마침내 무건을 밖으로 내쳤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침전의 문이 굳게 닫혔다.
* * *
눈을 감고 있어도 잠기운이 찾아오지 않았다.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요 며칠 정도가 심했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매서운 바람 소리마저 귀에 거슬렸다. 오늘따라 침대는 어찌나 딱딱하니 등이 배기는지 모르겠다.
결국 잠이 들지 못한 진예는 도로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연무건이 제 머릿속을 제대로 헤집어 놓은 게 분명한 듯했다.
몹시도 거슬리는 사내.
배운 것이 없어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는데, 잃을 것 또한 없어서 목숨 아까운 줄을 모른다. 그동안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유의 사람이었다.
〈당신의 몸에 각인할 수 있게 해 주리라 약조하여 주십시오.〉
게다가 아주 건방이 하늘을 찔렀다.
“각인이라니, 웃기지도 않지…….”
명인이니, 각인이니.
그런 것들이 혹자에게는 낭만적으로 보일지 모르겠으나, 머리가 꽃밭인 놈들만 그리 생각하는 것뿐이다. 진예는 그 잔혹함을 이미 눈으로 봐 버린 사람이었다.
여인의 몸으로는 지존이 될 수 없다, 너는 틀림없이 폭군이 될 것이다 저주를 퍼붓던 선황의 목이 서엽의 칼에 베였을 때 그 옆의 황후도 죽어 버렸다. 당연히 그녀는 죽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런데 선황의 목이 갈리는 순간 황후의 목에서도 피가 쏟아졌다. 각인을 하면 필수적으로 따라붙는 동조 현상 탓이었다.
한날한시에 죽는다는 명제는 백년해로 따위의 아름다운 말로 수식될 만한 것이 못 되었다. 연인이 고통스럽게 죽으면 그만한 고통을 각인자 또한 받게 되어 있다.
왜 굳이 자신의 고통을 연인과 나누려 한다는 말인가. 그건 미친 짓이었다. 감내할 가치가 없다.
연무건이 그런 것을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있는 이유 역시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평소 가장 혐오하는 부류였다.
진예는 제 어깻죽지에 새겨진 그이의 이름을 떠올리며 문득 미간을 좁혔다. 제 몸이 더러워진 느낌. 하지만 물로 씻어 낼 수도 없어서 처리할 방도가 없다. 정말로 그가 죽어 버리길 바라는 수밖에.
아니,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
읍주에 간 이상 그가 살아남을 확률은 없었다. 얼마 안 가 수많은 익재에게 둘러싸여 몸이 물어뜯기고, 뼈까지 씹어 먹히겠지.
진예는 애써 딴생각을 억눌렀다. 불안해할 이유는 없었다.
그때였다.
기익, 긱…….
고요하던 문밖에 누군가 오가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눈치채지 못하도록 최대한 발소리를 죽였으나 미묘하게 오래된 바닥이 기우는 소리가 들렸다.
진예는 방문 근처에 비치는 사람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게 누구냐.”
“폐하, 기침하셨사옵니까.”
진예의 물음에 밖에서 조금 당혹스러워하는 태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이 발소리를 낸 탓에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사실이 아니었으므로 진예는 그를 꾸짖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듣기 위해 그를 채근했다.
“누구냐 물었다.”
“방금 전 조 후(侯)께서 드셨사옵니다.”
조 후는 조서엽을 일컫는 말이었다. 후의 작위를 지녔기 때문에 보통 그리 불렀다. 때마침 문 앞쪽으로 그림자가 하나 더해졌다.
“들어라.”
진예의 말이 떨어지자 방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 사이로 서엽이 고개를 살며시 숙인 채로 발을 들이자 도로 문이 닫혔다.
타악.
서엽은 아직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진예의 발끝을 힐끗 확인하더니 그 소리가 나자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본래는 황제의 명 없이는 먼저 눈을 마주쳐서는 안 되지만, 오래전부터 서엽에게만 특별히 허락된 일이었다.
진예는 조금 힘이 빠져 있던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먼저 물었다.
“연무건은 어찌 됐느냐.”
“서둘러 몸을 빼느라 죽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익재의 최대 산란지인 만큼 읍주는 잠시 발을 들이는 것조차 위험한 곳이었다. 익재마다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는 또 다르지만, 그들의 모든 능력치는 대개 사람의 것을 상회한다. 게다가 날개까지 달려 있으니 한번 시야에 걸리면 도망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그들이 나타난 건 대략 300년 전.
사랑하는 연인을 잡아먹고 태어난 괴물에 악신이 깃들었고, 그 즉시 일대가 쓸려 나가 버렸다. 그렇게 아무것도 남지 않은 땅에서 홀로 종족을 번식시킨 최초의 익재가 있는 곳이 바로 읍주였다.
이후 익재들은 몇몇 곳으로 흩어져 다시 산란을 시작했다.
그들이 정착하는 기준이 뭔지는 정확하게 모른다. 그러나 대개 사람이 살기 좋은 평원 지대에 자리 잡고 있어 민가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300년간 인간은 그들과 꾸준히 전쟁을 치렀고, 현재 그들의 세가 미세하게 줄어들긴 했다. 기실 주변국들 중엔 결국 익재와의 싸움에서 패하고 왕조 자체가 멸망한 경우도 있었다. 나머지 국가들도 그들을 막아 내기 위해 막대한 국력을 소모하는 중이었다.
그나마 가장 잘 대응하고 있는 것이 환 제국이었다. 환에는 이제 다섯 개의 서식지만이 남았다. 최초의 익재가 있는 읍주는 여전히 골칫거리였지만, 나머지를 뿌리 뽑는 것은 머지않은 일이 될 것이다.
그 덕분인지 환 제국의 익재들은 요 근래 실제로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몸을 사리는 중이었다. 물론 언제 그들이 다시 기지개를 켤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환에서 그들을 그렇게까지 몰아세우는 게 가능했던 이유는 현 황제인 진예 덕분이었다. 아비가 밀어 넣은 죽음의 길목에서 그녀의 능력이 각성했던 것이다. 그때의 그녀는 그 자리에 있던 익재들을 도륙하고 황궁까지 일시에 장악해 버렸다.
절대적인 힘.
그것이 바로 진예가 지금의 환 제국을 다스리는 기반이었다.
작고 아름다운 겉모습만 보고 우습게 여겨서는 안 되는 여인이었다. 진예를 내내 지켜봐 온 서엽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고, 그래서 그녀를 진심으로 경외하였다.
그리고 그 전부터, 가슴이 저리도록 진예를 연모하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건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곁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다만, 연무건의 존재는 서엽으로서도 확실히 거슬리는 것이었다.
무리해서라도 죽는 모습까지 지켜보고 왔어야 했나. 하지만 그러면 같이 갔던 자들도 무사하지 못했을 텐데……. 잠시 고민하던 찰나였다. 진예가 왜인지 못마땅해하는 목소리로 물어 왔다.
“한데 꼴이 왜 그렇지?”
순간 무슨 뜻으로 묻는지 몰라 서엽이 멍하니 반문했다.
“무슨…….”
혹시 옷이 흐트러졌나 싶어 다급히 제 옷매무시를 살피는데, 진예가 다른 곳을 지적했다.
“왼쪽 소매가 피에 젖지 않았느냐.”
“아…….”
서엽은 그제야 제 왼팔을 들어 그곳을 살폈다. 진예의 말대로 팔 토시가 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토시가 검어서 잘 눈에 띄진 않았지만 눈썰미가 있다면 충분히 구분할 수 있을 정도긴 하였다.
언제 이게 이렇게.
서엽은 난처해져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뭐라 변명해야 할지 당장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까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거짓이었다는 듯, 확인하는 순간 팔에 통증이 몰려왔다. 하여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데, 진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이 오라.”
“…….”
서엽이 천천히 발을 옮겨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진예의 다음 명령이 이어졌다.
“불을 켜.”
서엽이 침대 옆, 곁탁자에 놓인 작은 등에 불을 일으켰다. 그러자 방 안이 환해지며 진예의 얼굴이 드러났다. 붉은 눈동자에 맺힌 기운으로 보건대 썩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혹시 걱정해 주는 건가? 서엽은 잔뜩 긴장한 채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가 다가오자 진예가 하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주저하던 서엽이 그녀의 발 앞에 천천히 몸을 내리고는 팔을 그녀 쪽으로 뻗었다. 긴장한 탓인지, 아니면 고통 때문인지 그의 팔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진예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한 번 더 명했다.
“팔의 상처를 보여라.”
서엽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상처를 보면, 진예가 화를 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하 된 자로서 그녀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그가 천천히 옷고름을 끄르고 상의를 젖혔다. 그 굼뜬 행동이 마음에 안 들었던지 진예가 중간에 그의 손을 밀어내더니 직접 상의를 내렸다.
“폐하!”
어깨 뒤로 넘어가는 손길에 흠칫 놀라는 그를 진예가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불만이냐?”
짧은 물음에 담긴 기운이 퍽 서늘했다. 서엽은 잔뜩 긴장했다. 여기서 잘못 말했다가는 진예의 분노를 사게 되리라. 그는 긴장감에 막히는 숨을 천천히 가다듬었다.
“그런 것이 아니오라, 직접 손을 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보이기 싫어하는 것 같기에 그런 것인데?”
“…….”
“조서엽과 나 사이에 비밀이 생겼다. 좋은 조짐이 아닌 것이 분명하지 않나.”
서엽은 진예의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죄는 느낌을 받았다.
진예는 어디까지나 여인이 아닌, 황제로서 하는 말이다. 자신이 그녀를 결코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바로 이런 면 때문에, 한 번씩 헛된 희망을 품게 된다는 걸 그녀는 알고나 있을까.
그래서 매번 위험한 시험을 하게 되고.
“저의 충심을 의심하지 마옵소서.”
그러면 진예는 늘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들려주었다.
“의심하지 않는다.”
간단히 대꾸한 진예가 이윽고 붕대에 감싸인 서엽의 팔을 꺼냈다. 둘러 둔 붕대는 이미 제 역할을 끝낸 지 오래였다. 벌겋게 물든 그것을 내려다보던 진예는 기묘한 불쾌감을 느끼며 붕대를 풀었다.
그러자 불에 지져진 상처가 시야에 잡혔다.
붉은 속살이 드러난 것을 보면서 진예가 쯧, 혀를 찼다. 붕대를 제때 갈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탓인지 고름까지 올라왔다.
왜 이 지경까지 내버려 뒀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어느 놈이 이런 상처를 서엽의 몸에 냈단 말인가.
“대체 누가 이런 것이냐?”
진예는 그자를 당장 끌고 와 그 손을 베어 버릴 참이었다. 황제가 총애하는 자를 함부로 건드렸다는 것은, 황제를 우습게 본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서엽이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어떻게 말해야 할지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 그러나 진예가 원하는 건 적당히 둘러대는 답이 아니었다.
“함부로 비밀을 만들지 마라.”
경고하자 서엽이 결국 실토해 냈다.
“소신이, 스스로 그리하였습니다.”
한참 만에 나온 대답이라 어쩌면 거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예는 당장 의심하지는 않기로 했다. 대신 힐책하는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조 후, 그대는 짐을 지켜야 하는 소임을 잊은 것인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건…… 그러니까.”
“변명은 됐다. 나가서 제대로 처치하라.”
중간에 말을 자르자 서엽은 눈을 꾹 감았다. 하지만 그건 잠시였다. 그는 조용히 옷을 다시 끌어 올렸다. 평소보다 굼뜬 행동을 보면서 진예는 서엽이 자신에게서 듣길 바라는 말이 따로 있음을 알아챘다.
아프냐고, 앞으로 다치지 말라고.
그런 따스한 말이라도 해 주길 원하는 것이겠지.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진예는 알면서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조서엽은 자신의 충신이다. 그 이외에 그의 가치는…….
없었다.
자신을 향한 연모의 정 때문에 기꺼이 목을 내놓을 수 있는 사내라는 걸 알았지만, 진예는 그의 목숨만 원할 뿐 감정은 원하지 않았다.
그런 감정놀음은 싫었다.
기대하고, 실망하고, 좌절하고. 그러다가도 희망이 비치면 다시 일어서는.
그 과정들이 너무 끔찍했다.
자신에게 필요한 건 그보다는.
〈네게는 조금의 자격도 없다.〉
제 앞에서 그리도 당당하게 선언하던 이들의 입을 닥치게 할 만한 강력함이었다.
사내들만이 권력을 나눠 갖는 이 세상에서, 당신들의 머리꼭대기에 앉아 천하를 호령할 힘을 내가 가지고 있음을 알리는 거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 진예가.
제 목표는 아주 착실하게 이루어져 가고 있었다. 자신의 앞에 무릎 꿇지 않는 자가 없었고, 300년 동안 이 땅을 더럽혀 왔던 익재 또한 거의 뿌리 뽑혔다.
한데 그 과정에 저런 감정 따위, 소용이 있을 리 없다.
하여 일부러 서엽이 방 밖으로 나가기 직전 나직한 목소리로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서엽.”
옷을 단단히 정리하고 물러나던 서엽이, 방문 앞에서 멈칫했다. 그녀의 부름에 어떤 희망을 느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말 그대로 희망일 뿐, 진예는 적절히 그것을 부숴 주었다.
“네 몸엔 아직 명인이 나타나지 않았느냐?”
고개를 숙인 서엽이 입술을 꾹 깨무는 것이 보였다. 진예에게서 이런 질문을 들을 때마다 그는 몹시도 비참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예, 아직입니다. 명인이 나타나지 않는 사람도 간혹 있으니, 딱히 기다리지는 않습니다만…….”
그는 말을 꺼내기조차 무척 괴롭다는 듯이 말끝을 흐렸다. 진예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방금 말엔 거짓이 섞여 있다.
기다리지 않는 것을 넘어, 제발 나오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을 터이다. 나오는 순간 운명이 그곳에 끌려 버리고 마니까.
하여 진예는 그의 정곡을 찔러 주기로 했다. 가슴을 후벼 파는 말이라는 걸 알지만 그들의 관계에선 적절히 필요한 요소였다. 그러니까, 조서엽이 선을 넘게 하지 않기 위한 적절한 경계.
“나오길 원하지 않는 것은 아니고?”
서엽이 고개를 들어 진예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미묘한 원망이 깃들어 있었다.
왜 항상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런 눈빛.
하지만 서엽은 단 한 번도 진예 앞에서 반항한 적이 없었다. 그는 제 주제를 너무나도 잘 알았다. 무조건적인 헌신만이 진예가 원하는 것이며, 그것을 저버리는 순간 자신의 가치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그는 긴말하지 않고 다만 작은 거북함을 비쳤을 뿐이었다.
“물러나옵니다.”
하지만 선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다. 진예는 발을 물리려는 그를 붙잡았다.
“서엽아.”
이름을 부르니 서엽의 눈이 흔들렸다. 솔직히 말하면, 그 안에 늘 희망이 꺼지지 않는 것이 진예는 불편했다.
차라리 네가 나를 연모하지 않기를.
차라리 지금 상황을 못 견디겠으니 그만두겠다 말하기를.
그러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한데 조서엽은 언제나 하지 못했다. 그녀의 곁에 있어 이용당하는 게 오히려 기쁨이라고 말했다.
그런 희생적인 사랑을 하는 느낌은 대체 어떤 것일지 진예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짐은 누군가의 지고지순한 애정을 받는 법도, 주는 법도 모른다. 오래전에 내 마음은 다 비어 버렸어.”
아주 어렸을 적에, 가슴 안에 그런 따뜻한 감정이 생기기도 전에 그런 걸 느낄 수 있는 방법 따위 모두 망각해 버렸으니까.
“짐이 누군가를 마음에 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네 착각이다.”
“폐하를 저주하는 이들은, 이제 이 세상에 없습니다.”
서엽이 고개를 흔들며 하는 말에 진예가 푹 웃었다. 서엽이 왜 이렇게 미련한지 확실하게 실마리를 잡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희망을 품고 있었던 게냐.”
“…….”
서엽의 침묵은 긍정이었다. 사내들이란 이토록 눈치 없고, 어리석었다.
“이 세상에 없지. 하지만 그들의 저주는 이미 완성된 게 아닌가 싶다.”
“어찌 그리 나약한 말씀을 하십니까?”
“나약한 게 아니야. 그게 그냥 이 진예의 삶이다. 그러니 곁에 있는 한 짐은 널 어떻게든 도구로만 써먹을 거다, 서엽. 넌 애정도 받지 못한 채 처참하게 말라 죽어 가겠지.”
어쩌면 자신을 사랑하지 않겠는다는 말보다 이 말이 그를 더 아프게 할지도 모르겠다.
서엽에겐 잔혹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게 현실이었다. 더 이상 감정놀음을 하며 피곤해지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의 사랑에 목말라 있던 자신은, 5년 전에 죽었다.
“어찌 되었든, 재입궐할 땐 제대로 처치한 뒤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당부의 말을 흘리자 서엽이 쓰게 웃었다.
“……이 몸은 폐하의 것입니다. 쓰임을 다할 수 있도록 앞으로 정갈히 하겠으니 너무 심려치는 마시옵소서.”
그 모습이 약간은 지친 듯이 보였다. 그럼에도 바른말만 했다.
“또한 설령 제가 말라 죽어 간다고 해도, 그게 폐하의 곁이면…… 그것만으로도 이 서엽은 만족할 수 있습니다.”
진예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서엽의 발이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문턱을 넘어 사라지자마자 진예는 표정을 굳혔다. 문득 어깻죽지에 바늘에 콕 찔린 것처럼 따끔한 통증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가 거울 앞에 다가서서 어깨를 밖에 내놓았다. 어느새 먹색으로 짙어진 명인이 보였다.
延武建
굳셀 무, 세울 건.
이름의 의미만큼은 꽤 괜찮은 놈이었다.
그런데 아팠던 게 거짓은 아니었는지 명인이 새겨진 주위의 살이 붉게 부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명인이 이렇게 된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던 진예가 눈썹을 들썩였다.
‘드디어 죽어 가고 있나……?’
이 통증은 명인자를 억지로 떼어 놓으려는 데 대한 대가인가.
그렇다면 생각보다는 값싼 것이었다.
진예는 풀어 헤쳤던 옷가지를 다시 여몄다.
* * *
“윽…….”
온몸이 꽁꽁 묶였다. 손목을 아무리 비틀어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도망치지 못하게, 발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심지어 주위에 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입에 재갈을 물려 놔 입을 활용할 수가 없었다.
허락된 것은 오로지 차디찬 땅바닥에서 몸을 뒤트는 것뿐. 하지만 조금만 움직이려고 해도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덕분에 피까지 얼어붙을 것 같은 한겨울의 추위를 앞두고도 등 쪽엔 땀이 흘렀다.
무건은 고개를 비틀어 칼이 어디 있나 확인했다. 아까 전에 우연히 버려진 걸 발견했을 때만 해도 멀어 보이기만 했는데 이젠 대략 어깨 부근에 와 있었다. 하여 몸을 또 꿈틀거려 어떻게든 손끝으로 그것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으윽……!”
그사이에도 그는 추위에 손끝이 굳어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고생도 이런 개고생이 없었다. 저절로 욕이 튀어나오려고 했지만 입술을 제대로 놀리지 못하니 나오는 건 신음뿐이었다.
몹시 낡고 심지어는 이곳에 오랫동안 방치된 탓인지 심하게 녹이 슬기까지 했는데, 괜스레 살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하는 저 칼 때문에 더 열이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서엽이 자신을 땅바닥에 내팽개치며 한 말 때문이었다.
〈어차피 내 손을 더럽히지 않아도 네놈은 살아남지 못하겠지.〉
〈…….〉
위치는 읍주의 초입에서 조금 벗어난 안쪽이었다. 게다가 굳이 익재 때문이 아니더라도 손발이 묶여 있다면 그대로 얼어 죽을 가능성도 있었다.
온몸을 포박한 그대로 땅바닥에 짐짝처럼 내팽개치며 서엽이 당연하다는 듯이 그리 말했었다.
휘오오오, 하고 스산하게 들려오는 바람소리보다 더 차가운 목소리로 서엽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부디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만은 놓지 말거라.〉
당연히 죽으리라는 걸 전제로 하는 말이었다. 그에 무건은 오기가 생겨서 물었다.
〈이러다 제가 진짜 살면 어쩔 겁니까?〉
진예는 이미 면전에서 비웃었고, 서엽도 헛소리라고 생각했겠지만 무건은 정말로 이곳에서 제 두 발로 나갈 생각이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고 해도 좋았다. 원래 무식하고 튼튼한 걸 빼면 남는 것도 없었다.
실패하면 죽으면 되고, 살아남으면 빠져나가면 되는 거다. 죽음 이후엔 어차피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으니 그 꿈이 실현되지 않아도 후회할 수조차 없다. 그리고 죽음 같은 걸 두려워했다면 애초에 진예를 가지고 싶다느니, 각인을 하겠다느니 하는 정신 나간 소리도 하지 않았을 터.
연무건이 반항적인 눈빛을 하고 쳐다보는 것을 빤히 확인한 서엽은 얼마 안 가 답을 들려주었다.
〈그야 별수 있느냐. 살아남으면 폐하께서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주신다 하시니, 기대는 해 보아도 괜찮겠지.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가가 뭐였지? 후궁?〉
〈진짜 쓸모를 인정받으면 황후.〉
〈과연 폐하께서 순순히 내주실지는 모르겠다만.〉
서엽은 마치 진예와 가까운 사이라는 걸 과시하듯 그리 말했다. 으스대는 꼴이 우스워 반박해 주고 싶었지만, 그가 바로 입에 재갈을 물려 버렸기에 때를 놓치고 말았다.
여하튼 그리하여 현재 이 상태였다.
무건은 다시 한번 크게 숨을 들이켜며 몸을 움직였다. 스스로가 애벌레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리하여 한 번 더 진예를 볼 수만 있다면 진짜로 벌레가 되어도 상관없었다.
찾아가자마자 진예가 자신의 목을 베어 버린다고 하여도, 무건은 그녀의 앞에 다시 서고 싶었다.
쓸모를 인정받고 싶었다.
‘반드시…….’
목숨을 걸고 가지고 싶은 단 한 가지가 생겼다.
이 감정이 인연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이어 버린다는 고약한 명인의 장난질인지 뭔지는 알 수도 없었고, 중요하지도 않았다. 중요한 건 그녀의 이름이 제 몸에 새겨졌고, 아름다운 모습이 제 마음에 들어찼다는 점이었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연무건의 인생이 저 여인으로 인해 뒤바뀌게 되리란 사실을.
그녀의 관심 한 조각에 애달아서 언제든 자존심을 내팽개치고 애원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자신처럼 평범한 사내가 걸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는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의 작은 두 발 밑에서 벌레처럼 기며, 애원하고 매달리는 수밖에. 기실 그렇게 해도 봐줄까 말까다. 명인이니 뭐니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을 갖다 버리라 했던 그녀였으니까.
황당한 건 이곳에 갖다 버리라고 한 그 순간에도, 연무건은 그녀에게 빠져들었다는 점이었다.
이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라는 것과 자신이 넘볼 수 없을 만큼 고귀한 사람이라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하늘이 내려 준 자신의 인연이다. 신이 자신에게 사랑하라 명령한 사람이었다.
그는 기꺼이 그 운명에 순응할 계획이었다.
그녀는 반대로 생각하는 듯했지만.
〈짐은 너 같은 놈을 원하지 않아.〉
……원하게 만들 것이다.
그래서 그 빌어 처먹을 황후라는 자리에도 올라 볼 터였다. 만인의 위에 올라서서,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 진예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게 할 터였다.
그때였다. 마침내 손에 뭔가가 툭 걸리자 무건의 표정이 환해졌다. 칼끝이었다. 그는 몸을 좀 더 움직여 칼날 쪽에 제 손목이 묶인 부분을 비볐다.
이것만, 이것만 풀면.
슥, 슥,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 날이 무디지는 않았는지 조금씩 밧줄이 헐거워졌다. 피도 안 통할 만큼 단단하게 묶인 탓에 차가워졌던 손끝에 약간의 온기가 돌았다.
그런데.
“끼욱.”
갑자기 새소리가 들려왔다.
새소리? 아니, 사실 그렇게 예쁜 소리는 아니었다. 굳이 말하면 지저귀다가 한 음을 잘못 낸 것 같은…… 목을 잘못 긁은 소리였다.
무건은 칼에 밧줄을 비비던 걸 멈추었다. 어느새 제 몸에서부터 얼굴까지 서서히 그림자가 지기 시작했다. 무언가가 나타났다. 그것도 사람이 아닌, 다른 생물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무건의 심장에 서늘함이 감돌았다. 왼쪽 가슴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거인의 발이 제 심장을 짓뭉개는 것처럼.
이 불안감의 정체가 뭔지 확인하기 위해 그가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싸라기눈이 바람을 타고 사선으로 하얗게 휘날리는 중이었다. 하늘은 조금 흐릿했고, 태양은 구름에 묻혀 위치만 겨우 파악할 수 있는 정도. 날씨가 썩 좋지 않았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밖에 나오지도 않았을 날씨였다.
아니, 지금은 단순히 날씨 때문에 투덜거릴 때가 아니긴 했다. 흐릿한 태양 아래로 검은 물체가 떠올라 있었다. 날개를 펼친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무건은 그것이 무엇인지 금세 깨달았다.
이 세상에 내린, 가장 구체적인 형태의 재앙…….
익재였다.
익재는 각 개체마다 생김새와 크기, 특성 등이 모두 달랐다.
지금 저 익재의 크기는 연무건보다는 조금 작았다. 특징이라면 뱀처럼 생긴 기다란 전신을 따라 머리부터 꼬리까지 여러 개의 날개가 달려 있다는 점이었다. 그중 몇 개는 제 기능을 하고 있지 않은지, 혹은 필요가 없어서 멈춰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가운데 몸체와 가까운 곳의 날개만 퍼덕이는 중이었다.
특이하게도 예의 익재는 눈으로 추정되는 부분이 없었다. 하지만 녀석은 연무건이 있는 쪽으로 몸을 정확하게 튼 채였다. 눈이 없는 대신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는 데 특화된 녀석일지도 몰랐다.
그때, 익재가 다시 한번 울었다.
“끼우우욱.”
그건 새소리보다는 차라리 오래된 경첩이 끼긱거리는 소리와 유사해 보였다. 듣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 불길한 예감에 맞게 눈앞의 불행은 아주 구체적인 형태를 띠고 찾아왔다.
작은 익재의 울음소리를 듣고 저 멀리서 검은 기운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연무건은 하늘 한쪽이 어둠으로 뒤덮이는 것을 보며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펄럭, 펄럭. 끼욱, 끼이이익.
이곳에 인간이 있다는 신호를 듣고 허기진 익재들이 자신의 몸을 물어뜯으러 오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렇게 멍하니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무조건 죽는다. 어떻게든 두 손 두 발이라도 풀어야 했다.
“제길!”
무건은 욕을 내뱉으며 좀 더 힘을 주어 칼에 밧줄을 비볐다. 다행히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단숨에 풀렸지만.
“윽!”
왼손바닥과 오른쪽 손목을 쫙 베여 버렸다. 그러나 생살이 갈라진 고통에 겨워 주저할 때가 아니었다.
무건은 상체를 들어 올려 앉아 자세를 고친 뒤, 서둘러 제 발에 묶인 밧줄을 풀려고 애썼다. 그 순간에도 익재는 가까워지고 있었다.
역시나 처음 나타난 익재는 어린놈이었는지 그 부모같이 생긴 놈이 어린 익재를 날개로 감싸며 제 품에 넣었다.
무건은 곁눈으로 상황을 살피며 이를 악물었다. 손이 얼어서 매듭을 풀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칼에 잘못 베였는지 상처 난 손과 손목에서 피도 필요 이상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무건은 살아남겠다는 일념하에 밧줄을 풀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마침내.
뚜둑!
그의 손아귀에서 밧줄이 거칠게 뜯어져 나가며 발까지 자유로워졌다. 그 즉시 무건은 칼을 집어 들고 일어났다. 하지만 이곳에 오는 내내 묶여 있었던 탓에 다리에 힘이 돌지 않아 그대로 다시 주저앉아 버렸다. 땅바닥에 꼴사납게 고꾸라져 버린 그의 입에서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큭……!”
발이 찌릿찌릿 저리고 온몸이 아팠다. 하지만 연무건은 고개를 들고 몰려드는 익재의 무리들을 확인했다. 그중 방금 전 제 자식을 품에 넣은 익재가 선두에서 연무건의 멍청한 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부모 익재의 눈과 입은 매우 커다랬는데, 그 형태를 보고 있자니 마치 이쪽을 비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익재는 단순한 괴물이 아니다. 최초의 익재가 사람이었던 탓인지 부패한 쓰레기들을 모아 둔 것 같은 끔찍하고 더러운 외견과 힘을 제외하면, 인간과 유사한 점이 꽤 보였다. 암수는 없었지만 그들에게도 부모 자식 간의 관계가 있었고, 어린아이와 어른 구분이 되었다. 발달이 미숙한 녀석들은 지능이 낮았지만 어른들은 뛰어났다. 제 먹잇감이 있는데도, 저렇게 바로 달려들지 않는 저런 인내심도 가지고 있었다. 쾌락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어차피 평범한 인간의 다리로 익재의 무리에서 벗어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익재들은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심지어는 겁을 먹길 바라는 것인지 이젠 서너 마리 정도가 무건의 머리 위에서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마치 독수리가 사냥감을 낚아챌 때를 살피듯이.
그 시선들에 둘러싸여 무건이 다시금 몸을 일으켰다. 이번엔 좀 더 천천히 시간을 두고 일어나 아까처럼 도로 넘어지는 꼴사나운 일은 면했다.
후우우우우.
스산한 바람 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에 끼우우욱, 또 어린 익재가 우는 소리가 섞였다. 빨리 저 녀석을 잡아먹고 싶다고 칭얼거리는 듯한 소리였다.
“…….”
무건은 오른손에 칼을 꽉 쥐었다. 손목에서 배어 나온 피가 칼을 타고 뚝뚝 떨어지며 땅을 붉게 적셨다. 잘못하다가는 저 익재들에게 물어뜯기기 전에 출혈 때문에 죽을 수도 있었다.
자신에게 보다 더 선명한 죽음의 순간이 찾아왔다는 걸 깨달았지만, 무건은 애써 머릿속을 비웠다. 아니, 죽음의 공포를 비워 낸 자리에 딱 하나의 생각만 집어넣었다.
진예.
그녀를, 다시 찾아갈 것이다. 신이 정해 먹은 운명이라는 게 정말 있다면 자신을 다시 진예의 앞으로 데려다 놔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긴장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찰나의 순간, 꿈이 찾아왔다. 어쩌면 이미 정신을 잃은 게 아닐까 착각할 만큼 꿈속은 검은 어둠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꿈에서 무건은 여러 개의 하얀 실을 보았다. 그중 가장 따스한 빛으로 띠는 실 하나를 제 손에 움켜쥐었고, 그것의 끝이 진예와 연결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무건은 그 빛나는 실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 순간 짧은 꿈에서 깨어난 무건이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마자 빠르게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끼우우우욱!”
“끼욱!”
여러 마리의 익재가 한꺼번에 울면서 제게로 달려들고 있었다. 그중 가장 가까운 녀석은, 처음 봤던 눈 없는 날개 달린 뱀 모양의 익재였다. 그 녀석이 제 바로 앞에서 입을 잔뜩 벌렸다.
허연 이가 박힌 커다란 입에서는 썩은 내가 났고, 검은 진액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무건은 그것을 보는 순간 무의식적인 끌림에 따라 그대로 익재의 입 안에 칼을 쥔 제 손을 거세게 처박아 버렸다. 그러고 제 온 신경을 집중해 익재의 목구멍에 칼을 찔러 넣는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끼에에에에에에엑!”
고막을 찢어 버릴 듯한 끔찍한 비명이 허공에 울려 퍼졌다. 무건의 손이 처박힌 입 안에서부터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며 순식간에 열기가 올라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흰빛에 익재가 타들어 가며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어린 익재의 울부짖음에 주변에 몰려들었던 익재들이 잠시 주춤했다. 익재들은 방금 전 무건이 일으킨 현상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환 제국의 황제, 진예가 지닌 능력과 같은 것이었다.
그들의 예상대로 어린 익재는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무건이 칼을 비틀어 익재의 혀뿌리에 상처를 내고, 혀를 힘껏 뽑아냈다. 그렇게 오랜만에 연약한 인간을 사냥해 맛있게 씹어 먹으려던 어린 익재는 검은 피를 허공에 흩뿌리며 완전한 죽음을 향해 갔다.
검은 연기를 풍기면서 순식간에 썩어 가는 어린 익재의 시체를 내려다보던 무건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혀를 집어 던지며 주위의 다른 익재들을 쳐다보았다. 그런 무건의 눈은 어느새 진예와 같은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명인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동조 현상의 발현.
그것이 연무건을 진예에게 되돌리기 위한 신의 선택이었다.
* * *
쪼로록.
작은 찻주전자에서 우려져 나온 차가 김을 모락모락 피어 올리며 잔에 따라졌다. 태감 대신 제 옆에 서서 서엽이 연신 찻물을 우려내며 그간 있었던 특이 사항을 읊는 중이었다.
“하여 화친왕이 이끄는 상단에 제법 많은 자들이 몰리고 있다는 소문입니다.”
화친왕은 현재 유일하게 남은 진예의 피붙이였다. 그런 그가 조금씩 세를 확장하고 있다는, 썩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를 묵묵히 들으며 진예는 천천히 붉은빛을 띠는 찻물을 음미했다.
그러고 찻잔을 비운 진예가 그것을 내려놓으려 했을 때였다.
챙그랑!
순간 팔이 굳으며 손까지 힘이 쭉 빠지는 바람에 미끄러뜨리고 말았다. 잔이 바닥에 떨어져 깨지면서 소음이 일자 진예의 눈썹이 슥 치켜 올라갔다.
그녀의 심기가 불편해졌다는 걸 알아차린 서엽이 얼른 발치에 떨어진 조각들을 줍기 위해 몸을 낮췄다.
“괜찮으십니까?”
원래 이런 실수를 잘 하지 않다 보니, 걱정이 된 서엽이 진예에게 물었다. 진예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잔을 다시 들이라 하거라.”
“어디 편찮으신 건…….”
“그럴 리가 있나.”
“…….”
단호하게 대답했으나 서엽은 뭔가 걸리는지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나 진예가 지그시 내려다보자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 태감을 찾았다.
그 소리를 들으며 진예는 잠시 눈을 감았다. 얼마 안 가 의자의 팔걸이를 잡은 손끝이 새하얘졌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서엽의 앞에서 차마 드러내지 못했던 표정이었다.
어깨에 통증이 강해졌다. 연무건의 이름 석 자가 새겨진 바로 그곳 말이다. 연무건이 떠난 뒤로 내내 이 상태였다. 금세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던 통증은 점점 심해지고만 있었다. 그것을 느끼며 진예는 입술을 깨물었다.
〈돌아올 겁니다.〉
고작 하루였다, 연무건이 제 눈앞에 있었던 것이.
그런데 그 사내는 하루 만에 누구보다도 강렬한 기억을 남기고 가 버렸다. 매일매일 제 방에 들어오는 내관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잊어버려도, 그의 것이라면 목소리, 눈빛, 말…… 그 어떤 것도 제 머릿속에서 빠져나가지 않을 것 같았다.
“발칙한 것…….”
있으나 없으나 제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녀석이었다.
서엽보다 훨씬 더 골치 아픈 존재.
제 명인자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떠나고 나서도 발악을 하고 있었다. 누가 제 존재를 잊을까 봐 염려라도 하는 것인지.
한데 그때였다.
“폐하.”
태감이 잔을 가져오는 대신 서엽의 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저를 불렀다.
진예가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문밖에 검푸른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제 인시(寅時: 오전 3시부터 5시)의 끝물이라, 아직은 어두운 새벽이었다. 그것을 보면서 진예가 나른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폐하, 급히 나가 보셔야겠습니다.”
어디로? 그런 의문은 잠시 뒤로 미뤄 두었다. 누구보다 진예의 성미를 잘 알고 있는 서엽이 괜한 것으로 자신을 귀찮게 할 리는 없었으므로.
문 앞으로 가자 담담히 고개 숙인 서엽이 보였다. 다만, 그 옆에는 어딘지 낯빛이 어두워진 태감이 서 있었다. 태감의 표정을 들여다본 진예는 썩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서엽이 허리를 깊이 숙이며 목적지를 말해 주었다.
“후원으로 걸음하소서.”
이 고요한 새벽녘에 후원으로.
그 소리를 들으며 진예는 잠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조 후가 나에게 놀러 가자는 것은 아닐 터인데.”
“짐작하시는 대로입니다.”
서엽의 말엔 사실 많은 뜻이 들어 있진 않았지만 진예는 곧 제 의문에 답을 얻었다.
그러자 그녀의 입술이 곱게 미소를 지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태감의 이마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 * *
“폐하!”
모두가 사색이 되어 진예를 만류했다. 그중 선두에서 태감이 진예를 따라가며 그녀에게 거의 애원조로 말했다.
“폐하, 그곳엔 굳이 걸음하지 않으셔도……!”
정작 서엽은 태감이 열심히 외치는 모습을 그저 묵묵히 보기만 했다. 어차피 진예는 ‘그 장면’을 보더라도 눈 하나 깜짝할 사람이 아니었다.
십수 년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환의 황제이지만, 그녀에게도 눈물지을 줄 아는 작은 소녀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의 진예는 제법 필사적이었다. 아비에게 선택받고 싶어 노력했고, 어떻게든 그 마음에 들고 싶어 안달을 냈었다. 하지만 매번 그 꿈을 이룰 수 없었던 어린 소녀는 오기가 생겨 눈물까지 짓곤 했었다.
〈서엽, 내가 어찌해야 아버님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폐하께선 여인이 아니니 꽃을 따다 드릴 수도 없는 것인데.〉
〈……그것은.〉
서엽은 차마 사내로 다시 태어나라 말할 수 없어 매번 대답을 머뭇거렸었다. 할 수 있는 건 눈물을 닦으시라 손수건을 내미는 일뿐이었다. 그러나 진예는 서엽이 내미는 그 손수건을 받은 적이 없었다. 받아 봤자 잠시의 위안만 될 뿐, 근본적인 해결은 할 수 없었으므로.
그때도 그랬었는데 하물며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된 지금에야 약간의 불행이 찾아온다고 해서 영향을 받겠는가. 다만.
예상이 맞는다면 이번이 벌써 네 번째다.
걱정은 그것뿐이었다.
같은 일이 네 번 반복된다. 그것도 좋지 않은 일로. 이젠 누구 하나의 목을 날려 버릴 명분으로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진예의 얼굴엔 여유가 가득했고, 남몰래 웃음까지 비치고 있었다.
그녀가 궁녀와 내관들이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는 곳으로 발을 옮기자 후원에 모여 있던 이들이 걸음을 뒤로 슬슬 물리며 길을 열었다.
위치는 후원의 연못. 연못을 파낸 탓에 그 주변에 검은 진흙이 잔뜩 쌓여 있는 가운데, 그 위에 작은 함이 있는 것이 보였다.
물에 젖은 데다 모서리가 약간 삭은 함은 이미 뚜껑이 뜯겨 나간 뒤였다. 그에 진예가 태감을 말없이 돌아보았다. 엄한 눈길이 그를 압박했다. 당장 내용물을 가져오지 않고 뭐 하냐는 의미였다.
그에 방금까지 열렬히 오지 마시라 했던 태감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고는 하는 수 없이 주위의 궁녀와 내관들을 다그쳤다.
“폐하께서 궁금해하지 않으시냐. 저 함을 가져오너라, 어서.”
명이 떨어지자마자 한 궁녀가 그 앞에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것이옵니다, 태감 어른.”
뚜껑이 열린 함을 보자마자 태감은 망측한 것을 봤다는 듯이 거북한 표정을 지었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폭이 좁은 함에는 두 개의 물건이 들어 있었다. 하나는 노란 종이였고, 또 하나는 줄로 단단히 묶은 아주 작은 항아리였다.
주위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싸늘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노란 종이와 항아리가 황궁 안에서 나타난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저 종이와 항아리의 의미를 모르는 자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을 보는 진예의 눈이 가늘어졌다. 주군의 심기가 흐트러졌음을 알아차린 서엽이 먼저 진예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신이 종이의 내용을 확인하겠사옵니다.”
“그리해라.”
그리고 붉은 글씨로 적힌 그 내용을 본 순간 서엽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그가 굳은 표정으로 진예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진예는 그것을 받아 들고는 엄지와 검지로 집게처럼 종이를 집어 제 눈앞으로 끌어 올렸다.
고개를 슬며시 기울이며 글자를 확인한 그녀가 이내 입술을 귀 끝까지 끌어 올렸다. 붉은 눈엔 오랜만에 웃음기가 올라와 있었다. 진예로서는 즐거움을 표현한 것이었으나, 기실 모두의 등골이 서늘해지게 하는 미소였다.
“이런…….”
진예가 웃는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게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태감이 오지 말라 외치던 것을 들으면서 예상은 했지만,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리니 재미가 없을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이 노란 종이는 선대 황제가 황실 곳곳에 묻어 두었던 것이었다. 그곳에는 네 개의 한자가 크게 휘갈겨져 있었다.
大義滅親
대의멸친.
대의를 위해 부모의 정을 버린다.
이것의 정체는 다름 아닌 선황의 자식이자, 제국의 황태자였던 진예를 저주하기 위한 부적이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진예의 머릿속에 제 아비의 목소리가 울렸다.
〈태자, 너는 그저 도구일 뿐이다.〉
〈…….〉
〈나의 아들을 위해 희생하여야 하지 않겠니? 몇 년만 버티면 된단다. 그러면 편안해져.〉
불과 수년 전, 그때만 해도 살아 있던 선대 황제는 늘 입버릇처럼 ‘몇 년’이라는 말을 읊었었다. 그것의 의미는 명확했다. 그 기간이 지나면 진예는 쓸모를 다한다는 뜻이었다.
한마디로, 그녀의 태자질은 기한이 정해져 있다는 의미였다. 본래라면 때가 왔을 적에 그녀는 황제와 태후가 사랑해 마지않는 둘째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죽어야 하는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듣는 자신 또한 그들의 자식이었다. 어디서 연고도 모르고 주워 온 아이가 아니라 황후와 황제의 이목구비를 닮은 그들의 딸이었다. 그런데 황제와 황후는 저를 거부하고 밀쳐 냈다.
바로 그 어처구니없는 감정이 눈에 보이게 드러나는 상징 같은 것이 바로 이 저주 부적.
이 부적의 존재를 알린 것은 진예가 반정을 일으킨 날, 제일 먼저 그녀의 편에 서겠다며 목숨을 구걸해 온 화친왕이었다. 믿음의 증좌를 보이라 하자 그 녀석이 말했었다.
〈누님께선 황제가 이 황실에 묻어 둔 저주 부적의 존재를 아십니까?〉
〈……누님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사특한 것들이지요. 대의를 얻으시려면 당장 그것들부터 없애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진예는 황제로 등극하자마자 화친왕의 가장 큰 지지 세력이었던 대장군 정위를 불러들여 황궁의 흙을 뒤엎어 부적들을 모두 없애 버리라는 명을 내렸다.
그렇게 해서 발견한 부적들의 수가 이미 백 개를 넘겼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이렇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아비의 부적은 제 존재감을 드러냈다. 마치 죽은 황제의 저주가 계속 이어져 온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이것도 벌써 네 번째. 책임자를 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셈이었다.
진예는 자신을 없애 버리게 해 달라는 내용의 부적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난 더 이상 당신의 망령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아바마마…….’
이 세상에 환 제국을 다스릴 자격을 가진 자는 오로지 자신뿐이었다.
황제, 진예.
굳이 여자라는 수식은 필요치 않았다. 자신의 존재가 바로 환 제국 그 자체였으므로.
하여 진예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저주 부적을 쫙쫙 찢어 버리고는 허공에 날렸다. 팔랑팔랑 노란 종이가 꽃잎처럼 천천히 떨어졌다.
그 광경을 눈에 담으며 진예는 서엽을 손짓으로 더 가까이 불렀다.
“서엽, 어찌하면 좋겠느냐. 의견을 내 보거라.”
신중한 표정으로 듣던 그는 이미 정해진 답을 충실하게 제 입에 담았다.
“이 일의 책임자는 대장군 정위입니다. 입궐을 명하시지요.”
진예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조 후는 당장 대장군 정위를 짐의 앞에 끌고 오라!”
진예의 지엄한 명령에 태감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반면 서엽은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허리를 깊이 숙이며 화답했다.
“명을 받드옵니다.”
대답을 들은 진예는 고개를 작게 한 번 끄덕이더니, 몸을 휙 틀어 편전으로 발을 돌렸다.
이번에야말로 수년 전 같잖은 가족의 정에 휘둘려 차마 제거하지 못했던 제 숙적, 화친왕을 쳐 낼 기회였다.
* * *
“……홍복을 누리소서, 폐하.”
한 시진도 되지 않아 서엽이 대장군 정위를 데려왔다. 어쩌면 데려왔다는 평범한 표현은 이 상황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포박만 안 했다 뿐이지, 이미 반쯤 죄인을 다루는 듯이 서엽이 그를 거친 손길로 끌고 오고 있었다.
편전의 문이 닫히자마자 그는 강제로 무릎이 꿇렸다.
정위는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데다, 작위까지 낮은 녀석의 무례한 행동에 발끈한 듯 눈을 부라렸으나 이내 성질을 내리눌렀다.
편전 가운데 길게 내린 검은 발 너머에서 옥좌에 느른하게 앉아 기다리고 있던 작은 여인 때문이었다. 환 제국의 절대 권력인 진예. 여인이지만 그녀의 잔혹한 성정상, 서엽에게 뭐라고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즉시 목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
하여 마지못해 예를 갖춰 인사하는 것을 보고, 진예가 답했다.
“그간 내 그대의 입궐 소식만 간간이 들었었는데, 그래…… 잘 지냈던가?”
나지막한 목소리였지만 어쩐지 듣는 것만으로도 긴장감을 일으키는 음성이었다. 대장군 정위는 오늘따라 매끈해 보이는 바닥을 내려다보며 숨을 가다듬었다.
“예, 폐하의 성은 덕에 우환이 없사옵니다.”
말을 마치자 검은 발 너머에서 짧게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갑자기 차가운 정적이 찾아오더니, 진예가 낮은 목소리로 일갈했다.
“짐은 그대의 미숙한 일 처리 때문에 우환이 가득한데, 그대라도 마음이 편했다니 다행한 일이야.”
“…….”
제길…….
뒤늦게 제가 실언했음을 깨달은 정위는 두 어깨를 잔뜩 굳혔다. 잠시 후 진예의 단호한 명령이 떨어졌다.
“발을 올려라.”
양옆에 대기하고 있던 내관들이 발을 말아 올렸다. 그러자 정복을 차려입은 진예의 모습이 드러났다.
길게 면류가 늘어진 관모를 쓰고, 검은 곤복을 흐트러짐 없이 제 몸에 걸친 그녀는 옥좌에 비스듬하게 앉아 있었다. 마치 이 상황이 몹시도 지루하다는 듯이 방만한 자세로, 그녀는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정위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미간에는 주름 하나 져 있지 않았으나, 그 눈빛은 평소보다 더욱 날카롭게 벼리어진 채였다. 그런 진예가 제 손에 쥐고 있던 항아리를 정위의 앞에 내던졌다.
차앙!
바닥에 부딪치자마자 작은 항아리가 깨지면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검은 벌레 수십 마리였다. 이미 죽은 지 한참 된.
이미 바싹 말라 버린 그것들이 나오자마자 정위는 인상을 찌푸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야말로 비위가 상하는 장면이었다.
그런 그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보며 진예가 미미하게 분노가 어린 말을 내뱉었다.
“대의멸친. 짐을 얼마나 죽이고 싶었는지는 몰라도 선황의 원혼이 황궁 안에 아직도 남아 있다. 이것이 여태껏 짐의 심기를 흐트러뜨리는 일에 대해서 대장군은 어찌 생각하시는가?”
질문을 던지고 진예는 대장군의 반응을 살폈다. 정위가 긴장했는지 두 주먹을 꽉 쥐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지켜보는 서엽이 진예의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하나 진예는 대장군의 답을 기다릴 뿐이었다.
저것은 진예의 아비인 선황이 진예를 저주하기 위해 무당을 불러 쓴 부적과 함께 황궁 곳곳에 묻어 둔 것이었다. 한 나라의 황제가 무속을 믿었다는 것도 경악스러웠으나, 그보다 더 경악할 만한 건 제 자식을 저토록 지독하게 저주했다는 사실이었다.
하여 진예가 황위에 오를 당시, 황궁의 흙을 싹 갈아엎는 한이 있더라도 저것들을 다 없애라 명령했다. 그리고 정말로 온 황궁을 모두 뒤집었다.
그런데 선황의 원혼이 질기긴 한지 거의 1년에 한 번 꼴로 새로운 것이 발견되었고, 이번이 벌써 네 번째였다.
이번에야말로 정위를 쳐 내거나, 혹은 제 사람으로 만들 기회였다.
당연히, 진예가 선택할 선택지는 하나였다. 정위를 쳐 내는 것.
정위는 진예를 제외하고 딱 하나 남은 황실의 핏줄인 화친왕의 최측근이었다. 굳이 이 일이 아니었어도 근래에 그 장난질이 도를 넘어서 신경을 살살 긁고 있던 참이었다.
한데 눈앞의 영악한 사내는 제 위기를 감지하긴 했는지, 무조건 머리를 조아렸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짐은 이미 많이 참았다. 그간 세 번의 기회를 줬어. 한데 결과는 어떻지?”
“…….”
“짐이 이 옥좌에 올라 있는 것에 불만이 있는 게 아니라면 일을 이리 처리할 수 없지 않나.”
진예는 제 발언이 그야말로 트집 잡기밖에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또한 정위가 반박할 수 없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 정위는 눈을 꽉 감고, 체념한 듯 순순히 답해 왔다.
“불만이, 있을 리 있겠사옵니까.”
“하나 더 이상 입으로만 하는 충성은 신뢰하지 못해. 일이 이리된 이상 짐이 어떤 처분을 내리더라도 대장군이 순순히 받아들이리라 믿어도 되겠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한데 그때였다. 문밖에서 태감의 당혹스러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이리하시면 아니 됩니다……!”
전하.
그 호칭을 듣고 진예는 밖에 누가 왔는지 단번에 깨달았다. 현재 환 제국에는 ‘전하’라 불릴 수 있는 이가 딱 한 명밖에는 없었다.
서엽도 누군지 눈치채고는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그리고 때에 맞춰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활짝 열렸다. 편전으로 멋대로 뛰어든 무뢰한이 제 손으로 문을 연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며 소리치듯 말했다.
“그러나 대장군을 이리 취급하실 수는 없는 법이지요.”
태감은 이미 검을 뽑아 그의 앞에 날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마자 서엽 역시 재빠르게 앞으로 가 예의 사내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으르렁댔다.
“감히 이게 무슨 무례입니까!”
하지만 상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진예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습니까, 누님?”
이리 당당히 말하는 사내는 이 세상에 딱 하나 남은 진예의 피붙이, 화친왕 진평이었다.
부모가 같은 탓에 진예와 묘하게 닮은 이목구비. 화친왕의 그 얼굴을 보면서 미묘한 불쾌감에 휩싸인 진예가 고개를 기울였다.
화친왕은 당장 두 무릎을 꿇고 털썩 앉았다. 진예만이 아니라 모든 내관과 궁녀들이 있는 앞에서 그는 이마를 바닥에 찧듯이 깊숙이 조아렸다.
“대장군께서 큰 실수를 했다고 하여 빌러 왔습니다. 하지만 황제 폐하가 아니라, 누님께 빌고자 합니다.”
친왕의 행동으로 보기에는 체통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진예는 그에게 일어나라 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행동을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옆에 있는 서엽 역시 그에 동조하듯 칼을 집어넣지 않았다.
“대장군을 살려 주십시오. 저의 어릴 적 스승님이라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대장군은 이제 제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대장군 정위는 지금이야 화친왕의 충실한 수족을 자처하고 있지만, 황자 시절 사부 역할을 했던 자였다. 그 탓에 화친왕의 사람이라고 분류되었고. 하지만 진예가 황제가 된 이후에 그 세가 확연하게 줄어든 자 중 하나였다.
한마디로 눈엣가시인 데다, 이젠 이빨 빠진 호랑이가 다 된 사람. 하여 지금 화친왕은 너무 손쉬운 표적이 된 그를 살려 달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겉보기와 그 실체야 많이 다르기는 하였지만.
“누님, 제발.”
뭐가 어찌 됐든 아주 간절하게.
“저를 살려 주세요.”
마치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만 같은 표정으로.
실제로 진평은 눈시울이 조금 붉어진 채 진예를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그의 어깨는 마치 두려움에 빠진 사람처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진예는 과거의 한때를 떠올렸다.
〈저를 살려 주세요, 누님.〉
그때도 꼭 이런 모습이었다. 하여 그 간절한 청을 받아들여, 실제로 지금까지 그를 살려 두고 있었다.
참 어리석었지.
그리 생각한 진예는 웃음이 나올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 냈다. 보는 눈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여기서 웃어 버리면 진예는 애원하는 아우를 비웃어 버린 매정한 사람이 될 터였다.
하여 진예는 대신 조용히 옆으로 손을 뻗어 제 옆의 내관에게 검을 건네받고, 옥좌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청명한 목소리가 편전 안에 울려 퍼졌다.
“화친왕을 제외하고 모두 전 밖으로 물러나라.”
단지 방 밖이 아니라, 전 밖으로 물러나라는 건 아무도 대화를 엿듣지 말라는 의미였다. 그에 태감은 난처해하다가 이내 한 걸음 뒤로 물렸으나 서엽은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진예의 명이라면 서엽은 제 가슴에 칼이라도 꽂을 자였다. 하지만 이번엔 받아들이지 못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폐하, 혼자 계시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 뒷말을 잇기도 전에 진예가 말허리를 잘랐다. 그녀는 서엽을 압박하듯 지그시 바라보았다.
“조 후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물러나라 하지 않느냐.”
재차 엄하게 다그치는 소리에 서엽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그에게 진예가 눈짓으로 정위를 데리고 나가라고 전했다. 끝까지 명을 거부할 수는 없었던 서엽은 결국 화친왕에게서 칼을 거두고는 정위를 끌고 나갔다.
타악.
문이 닫히고, 방 안엔 진예와 화친왕만이 남았다. 얼마 안 가 분주하던 발걸음 소리도 모두 사라졌다. 때를 기다리며 천천히 걸어 화친왕의 앞으로 간 진예가 이윽고 발을 멈췄다. 그러고는 제 발치에 아직도 엎드려 있는 화친왕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본색을 드러내도 되겠지 않느냐, 아우야.”
그 말에 방금까지 연약한 척 바들바들 떨고 있던 화친왕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곧이어 아까의 두려움 섞인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담담한 목소리로 대꾸해 왔다.
“명인이 나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아직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화친왕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진예는 그것을 지금 제 손에 들린 칼로 찍어 내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혹은 저 하얀 목을 그어 버리는 것도 나쁘진 않을 터였다.
다만 그러고 싶다고 하여 모두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제 손을 직접 더럽히는 것은 하수나 하는 짓이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던 예전 그 시절이었으면 모를까, 진예는 이제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고 싶지 않았기에 내면의 충동을 억눌렀다.
그보다 명인이라……. 제 생각보다 소문이 빠르긴 했다.
이제 슬슬 인정할 때가 온 것일지도 몰랐다.
화친왕 진평은 이미 진예의 예상보다 더 덩치가 큰 호랑이 새끼가 돼 버렸다.
5년 전 진예가 이 대정전의 문턱을 넘었을 때, 진예의 몫까지 아비의 총애를 온통 독차지했던 진평은 가장 먼저 황제를 배신하면서 진예에게 목숨을 구걸했다. 그리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후로 황실 일에는 관심이 없다며 돈이 좋으니 장사치나 하겠다고 뜬금없이 상단 하나를 세웠었다.
처음엔 정말로 그렇게 제 뜻을 꺾은 줄로만 알았다. 한데 아니었다. 은밀한 곳에서부터 야금야금 영리하게 제 세를 불린 화친왕에게, 이제 구중궁궐의 문턱을 넘나드는 비둘기 한 마리 날리는 일쯤은 너무 손쉬워졌다.
진예는 이제 슬슬 그 날개를 펼치기 시작한 화친왕이 과연 어디까지 실력 행사를 할 수 있을지 지금은 완전히 알지 못했다. 그것이 현재 황제인 진예가 느끼는 가장 큰 위협이었고, 서엽 또한 가장 경계하는 바였다.
하여 진예는 제 아우를 내려다보며 자신이 서 있는 이 대정전의 바닥에 둘 중 누구의 피가 먼저 뿌려질까 셈해 보며 대꾸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황궁에 눈이라도 달렸더냐.”
자신은 아니었지만.
“황궁에 눈이라도 달렸더냐.”
진예의 물음에 화친왕이 작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제법 여유가 배어났다.
“그야 어디에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하였으니.”
“짐의 곁에 네가 풀어 놓은 쥐새끼가 있다는 소리로군. 한둘이 아니긴 하겠다만.”
“그러니 대장군을 살리시지요.”
‘그러니’ 살려라? 마치 명인이 있는 것이 약점이라도 된다는 양 하는 말에 진예는 심기가 뒤틀렸다.
안 그래도 거슬리던 참이다. 며칠째 명인이 새겨진 부위에서 통증이 가라앉질 않았다. 벌겋게 부어오른 것도 여전했다. 연무건, 아무리 생각해도 그놈은 참 질긴 놈이었다. 죽으나 사나 걸림돌밖에 되지 않는 사내.
한데 이런 상황에서 화친왕까지 나서서 자극을 하니 진예로서도 짜증이 치솟았다. 자연스레 말끝이 더 예리해졌다.
“정위를 살려서 내가 득을 보는 것이 있던가?”
“죽여서 득을 보는 것도 없지 않습니까.”
“왜 없다고 생각하지?”
진예가 반문하며 검집을 씌운 채 칼끝으로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너의 팔을 잘라 낼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가 아니냐.”
진평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가증스러운 위선을 제 혓바닥 위에 올렸다.
“정위는, 나라의 충신입니다.”
사실과 부합하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실제로 정위는 선황이 살아 있던 시절, 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한곳에 있지 못하고 익재들과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나라를 위해 헌신했었다. 덕분에 대장군의 직위에 오르며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진예의 사람이 된 적이 없었다.
진예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선황의 편이었고, 이제는 제 아우인 화친왕의 수족을 자처하는 자였다.
언젠가의 그가 황태자인 진예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이런 가녀린 여인의 몸으로 어찌 황제가 된단 말입니까. 황제의 자리는 만백성의 아비가 되는 자리입니다. 그 위는 전하께서 감히 넘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진예는 깨달았다. 자신은 절대로 정위를 제 편으로 두지는 못하겠구나. 물론 지금이야 진예는 온몸으로 그 말이 얼마나 허황되었었는지 증명해 주었지만, 그 당시에는 어찌나 사무쳤는지 모른다.
어찌 되었든 대장군 정위는, 나라의 충신일지언정 현 황제는 섬기지 않는 고약한 자였다.
“말은 바로 하거라. 나라가 아니라, 화친왕의 충신이겠지. 네가 많이 크긴 컸구나. 감히 말장난으로 날 기만하려 하다니.”
“기만이라니요.”
“그럼, 기만이지. 화친왕이 이끄는 대상단의 호위를 가장해서 대장군 정위가 사병을 키우고 있으니 말이다.”
“…….”
툭 내던져진 듯 나온 진예의 말에 순간적으로 화친왕도 얼른 대꾸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진예는 입에 달콤한 꿀이라도 머금었는지 한마디도 못 하는 그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명인자의 존재를 알리면서 한 수 제가 앞섰다고 생각했다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꽤 당황한 모양이었다.
“왜, 말이 없지? 설마 내 구중궁궐에 있어 아무것도 몰랐을 줄 알았느냐?”
그랬다면 정말로 자신을 우습게 봤다는 의미였다.
이내 화친왕이 바닥을 짚고 있는 손으로 주먹을 꾹 쥐더니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소용없다고 생각한 것인지 애써 부정하지는 않았다.
“제법이십니다, 누님. 조 후가 능력이 좋긴 좋은가 보지요?”
진예는 가볍게 눈웃음을 지었다. 그녀 역시도 제 패를 굳이 감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딱 한 번 귀신에 홀린 듯이 그에게 속은 적은 있었지만, 수 싸움으로 제 동생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은 살면서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었다. 그 옛날, 한심하고 유약했던 그 시절에도 말이다.
“슬슬 기분이 나빠지려고 하던 찰나였는데, 덕분에 잘됐지. 그러게 정위더러 일을 잘 좀 처리하라고 하지 그랬느냐.”
도발하는 말에 진평이 이를 악물었다. 으득, 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제 스승이자 정신적인 지주인 정위를 모욕하자 꽤 화가 난 모양이었다.
“누님, 자중하시지요.”
“너야말로 쓸모없는 발버둥은 치지 말거라. 사람이 물장구를 친다 하여 바닷물의 흐름이 바뀌더냐.”
진평이 잠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는 겨우 호흡을 가라앉히고 핑계를 찾아내었다.
“사병을 모은 건 아직 남아 있는 익재들 때문이었습니다.”
워낙 말도 안 되는 변명이다 보니 진예는 오히려 우스웠다. 당당하게 정위의 목숨을 구걸하러 오기에 대단한 뭐가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던 스스로가 오히려 한심해지는 순간이었다.
“그 거짓말, 한 번은 믿어 주마.”
“거짓이 아닙니다.”
“증명이야 천천히 하면 될 것이고.”
진평은 더 이상 대꾸하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그의 패배였다. 이로써 정위를 쳐 낼 명분을 쌓긴 했지만 사실상 진예에게도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다. 이래서야 찜찜한 기분이 남는다.
현재 화친왕이 이끄는 상단은 어느새 환 제국의 5대 상단 중 하나에 속하게 됐다. 제일 큰 상단과는 당연히 비할 바 못됐지만, 그래도 무시할 정도는 아니었다.
비록 상단주를 다른 사람으로 내세우긴 했어도 그거야 명분을 챙기기 위한 화친왕의 연막일 뿐이었고, 일단 큰손이 돼 버린 그의 밑에 꽤 사람이 모이고 있으니 진예로서는 상황이 못내 거북했다. 그를 구명할 당시만 해도 이런 전개를 생각지 못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래서 혀끝이 더 날카로워졌다.
“그보다 대체 넌 언제쯤 그 역겨운 가면을 벗고 본색을 드러낼 것이냐? 덕분에 짐이 자꾸 매정한 누이가 되어 가고 있는데, 아우로서 이보다 더 불충할 수가 없구나.”
그에 화친왕이 마침내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들어올 때만 해도 비 맞은 개새끼처럼 불쌍한 척을 다하더니, 지금은 아주 발칙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제 스승의 목숨을 살려 달라 빌러 온 제 주제와는 어울리지 않는 눈빛이었다.
“아우로서요? 재미있는 말입니다, 누님.”
이어진 말 역시 완전히 선을 넘는 것이었다.
“이 아우가 어찌 누님을 한시라도 생각지 않겠습니까. 항시 걱정이야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근심이 하나 더 느셨겠더군요.”
“무슨 근심?”
“명인자가 평민이라 들었습니다. 이름이…… 연무건?”
듣기 싫은 이름 석 자가 나온 순간 진예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그녀는 도발하는 상대를 내려다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 이름을 입에 올리다니, 목숨이 아깝지 않은 모양이야?”
“제가 그자를 찾아내면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둘 다 죽일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연무건은 벌써 익재의 먹이가 된 뒤일 테지만 말이다. 아마 뼛조각 하나 남지 않고 익재의 위장에서 모두 다 녹아내렸겠지.
이런 당연한 사실 따윈 말해 봤자 입만 아픈 것이라, 진예가 조용히 보기만 하자 화친왕이 제 목숨이 위험한 줄도 모르고 계속 입을 놀려 댔다.
“혼인, 하십니까? 그리하면 이 아우도 누님 걱정을 한층 덜 터인데요.”
이쯤 되니 어디까지 가나 싶었다. 하여 진예는 좀 더 들어 볼까 하는 마음으로 심드렁히 대꾸했다.
“그럴 리 있겠느냐.”
“명인자와 혼인하지도 않고, 아이도 낳지 않고. 누님께선 후일은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후일이란 다음 대 황제를 말하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당장 진예가 죽으면 황위를 이을 사람은 화친왕밖에는 남지 않았다.
진예 또한 그 문제에 대한 자각은 있었다. 하나 당장의 문제는 아니었다. 친왕 따위가 황제의 방사를 논할 시기는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럼에도 이런 식의 꼬투리를 잡는 이유는 뻔했다. 화친왕은 황제의 자격을 논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5년.
진예가 황위에 오른 뒤 흐른 시간이다. 그동안 후궁도 들이지 않고, 따로 누군가를 안은 적도 없다. 황궁 내에는 혹시 진예가 아예 생식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니냐는 뒷말도 나돌고 있었다.
그런 미친 발언을 감히 황궁 내에서 하는 자는 당연히 없었지만, 적어도 그녀를 반해 뜻이 맞는 자들을 한데 묶는 한 가지 패로서는 유효했다.
진예도 그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단지 당장 신경 쓰지 않는 것일 뿐.
“명인자와만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럼 조 후와…….”
조 후, 조서엽에 대한 이야기가 입에 오르는 순간 진예는 즉시 검을 뽑았다. 그리고 놀라 눈이 커진 화친왕의 머리 위로 그대로 칼을 내렸다.
“……!”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화친왕이 몸이 굳은 순간, 그의 정수리 위로 진예의 칼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툭.
화친왕의 묶인 머리는 그대로 바닥을 굴렀고, 형편없이 잘린 머리카락은 흘러내렸다. 제 머리를 자를 줄은 몰랐던 화친왕은 황당해했다.
환 제국에서 머리를 자르는 것은 중형에 해당했다. 부모가 물려준 신체를 잘라 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한 진예는 도로 칼을 집어넣으며 경고했다.
“재미있는 얘기라도 할까 싶어 계속 들어주려 했더니, 기분이 나쁘구나.”
“…….”
“그 세 치 혀를 더 마음껏 놀려 보지 그러느냐.”
말장난은 이쯤에서 그만하라는 소리였다. 그리 대화를 갈무리한 진예가 큰 소리로 외쳤다.
“태감은 들라!”
그에 전 밖으로 빠져나갈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일사불란한 발소리들이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얼마 안 가 방문이 열리고 태감이 나타났다. 그는 화친왕의 머리카락이 잘린 걸 보고서 잠시 당황한 듯하더니, 이내 문턱 앞에서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진예는 무릎 꿇은 화친왕을 뒤로한 채 도로 옥좌 위에 앉으며 말했다.
“황명을 내리겠다. 받아 적어라.”
내관들이 재빨리 태감의 앞에 붓과 화선지를 가져다주었다.
“명을 내리시옵서.”
“대장군 정위 공의 작위를 백으로 강등할 것을 명하며, 내렸던 봉토 중 남쪽 땅으로 절반을 회수한다.”
받아 적던 태감의 손이 멈칫했다. 작위를 두 단계나 끌어내리고, 게다가 남쪽 봉토로 절반을 회수한다니. 예사롭지 않은 명령이었다. 대장군 정위에게 치욕을 안겨 주겠다는 의미였다. 저주 부적이 발견된 일 때문에 내리는 것치고 과한 처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화친왕이 반발했다.
“폐하, 그 명은……!”
하지만 진예는 단호하게 쳐 냈다.
“분명 살려만 달라고 하였던 것 같은데. 아, 혹 부족하다면 유배를 보내도록 할까?”
“…….”
“왜 대답을 안 하느냐.”
화친왕은 억울해 미칠 것 같았지만 화를 억눌렀다. 애초부터 조건을 잘못 건 제 실수였다. 여우 같은 진예가 그런 것을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하여 예정된 항복의 말이 흘러나갔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것을 들은 진예는 매몰차게 뒤돌아 편전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그녀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던 서엽이 보였다. 저를 발견하자마자 고개를 숙이는 그를 보고 진예는 방금 전 화친왕이 한 말을 떠올렸다.
〈그럼 조 후와…….〉
조 후와 아이를 낳을 것이냐던.
아마 제 쪽의 문제는 아닐 터. 저 조서엽이 제 감정을 질질 흘리고 있기 때문에 그런 소리가 나온 것일 게다. 스스로는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진예는 그를 버릴 생각이 없었다.
조서엽은, 진예에게 꼭 필요한 존재였다. 절대적인 헌신과 배신하지 않는 충정. 그를 대체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조서엽 스스로도 말했듯이 그는 오롯이 자신의 것이었다.
서엽이 뒤를 따르자 진예가 그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물었다.
“연무건은 확실히 죽었겠지?”
화친왕이 저리 날뛰는 것을 보니 조금 불안해져 와 한 말이었다. 분명 쓸데없는 기우이겠지만.
서엽도 진예가 의외의 것을 묻자 다른 의도가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런 평범한 몸으로 읍주에서 살아남을 리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진예가 고개를 흔들며 대꾸했다. 이쯤에서 마무리하려 했으나 서엽은 늘 그랬듯이 그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뛰어난 해답을 도출해 냈다.
“화친왕을 좀 더 철저히 감시할까요?”
오늘 들은 말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소리였다. 진예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하도록.”
* * *
쿠구웅…….
익재의 거대한 몸뚱이가 쓰러져 내리면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곳에서 나는 악취에 무건은 코를 막았다. 그럼에도 냄새는 코끝을 찌르고 들어왔다.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게다가 머리가 핑 돌아 그는 잠시 휘청이기까지 했다.
“윽…….”
그가 머리를 짚으며 눈을 꽉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러고는 검은 연기가 올라오는 익재의 몸에서 그가 한 발짝 물러났다. 이렇게 눈앞에서 익재를 본 게 처음이라 무건도 저 연기가 뭔지는 잘 몰랐다. 그러나 노출될수록 머리가 아파 오는 것이, 아무래도 사람에게는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 같았다.
무건은 땅을 검게 물들이며 흐물흐물 흩어져 가는 마지막 익재의 시체를 보다가 마침내 뒤돌아섰다. 그러고 한 걸음씩, 제가 왔던 길을 따라 넓은 평원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하는 그의 발소리가 울릴 때마다 익재를 처리하는 동안 뒤집어쓴 검은 피와 그 자신의 피가 한 방울씩 땅에 떨어져 내렸다. 스산한 바람 소리가 휩쓰는 대지 위에서 그가 떨구는 핏물들은 빠르게 얼어 버렸다.
가느다란 눈발 사이를 걸어가면서 무건은 자신의 의식이 서서히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아직은 죽기 싫다.
자신은 증명해야 했다. 그동안 누구에게서도 인정받지 못했던 제 쓸모를, 진예에게 증명해 보여야 했다. 증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늘이 날 선택했습니다…….’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현상이 일어났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처음 보는 익재 십수 마리를, 단도 하나로 상대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한 마리의 익재도 처리하지 못하고 분명 목덜미를 물어 뜯겼을 텐데.
명인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이어진다.
그것이 이 세계를 창조한 신의 명령이었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인간의 힘을 뛰어넘기도 하고,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되기도 한다. 최초의 익재도 그 과정에서 태어나지 않았던가.
다만, 그의 몸은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많이 지쳐 있었다. 게다가 다량의 피가 빠져나간 탓인지 갈증이 치솟았다. 하나 익재의 몸에 흐르는 피는 사람에게는 유해한 것이었기에, 그것들의 기운을 머금은 이 땅의 물이 멀쩡할 리 없었다.
그렇게 몰려드는 잡념과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무건은, 한 거대한 그림자를 보았다.
“……?”
아까처럼 여러 마리의 익재가 하늘을 뒤덮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땅에 짙은 땅거미가 드리웠다. 그 근원을 올려다보니 검은 연기를 몸에 휘감은…….
여인?
무건은 한참 위의 허공에 둥둥 떠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한 여자를 발견했다. 그녀는 이제 슬슬 노을빛을 만들고 있는 거대한 태양을 등지고 무건을 무감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단호하게 답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인의 등 뒤에는 검은 날개가 있었다.
저주받은 신의 날개를 등졌다는 익재의 주요 특징. 게다가 몸 주변에 있는 검은 연기는 가만 보니 단순한 연기가 아니었다. 그것 또한 어떠한 형상을 띠고 있었는데, 저것을 무엇이라고 해야 하나.
눈은 두꺼비눈에, 귀는 부처님처럼 커다랗고, 코는 선명한 매부리코다. 흔히 말하는 귀신 같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여인의 옷차림 또한 심상치 않아 보였다. 하늘하늘한 것이, 마치 무당의 옷처럼 보이기도 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무건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익재는 사람의 형상이 아니었다. 아니, 사람과 비슷해 보이긴 했으나 외견에서 뚜렷하게 구분되는 무언가가 반드시 있었다. 그런데 저 익재는 달랐다. 날개만 빼면 사람의 모습과 같았고.
쿵.
무건은 제 심장을 누군가가 거세게 움켜쥔 것처럼, 꽉 죄어 오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제 머리 위의 여인에게서 고막을 찢어 버릴 듯한 높은 음이 터져 나왔다. 무건은 머리를 쨍 울리는 그 소리에 귀를 막았다.
그리고 떠올렸다, 어머니한테서 어렸을 적 들었던 최초의 익재에 대한 이야기를.
〈……그렇게 해서 이 어미의 친구들도 익재들한테 많이 물려가고 말았단다.〉
어느 날 저녁에 등잔불을 끄기 전, 어머니가 해 주었던 말이었다. 무건은 어머니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누워 이 세상의 온갖 위험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익재의 이야기도 나왔고, 어머니가 직접 겪은 끔찍한 일화들도 듣게 되었다.
무건은 무서웠지만 끝내 울지는 않았다. 하지만 괜히 어머니의 옷자락을 꼭 붙잡고, 그 품에 더 깊게 파고들며 물었었다.
〈어머니, 그런 끔찍한 익재는 왜 태어난 거예요?〉
〈최초의 익재는 자신을 사랑하던 명인자를 씹어 먹고 태어났다고 하더구나. 그리고 그 벌로 괴물이 되었다는 게야.〉
무서워요, 어머니.
혹시 겁 많은 아이처럼 보일까 봐, 무건은 차마 제 입 안에 맴도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는 못했다. 그저 무서움도 억누르지 못하는 호기심에, 또다시 질문을 했다.
〈그럼 그 익재는 아주 끔찍하게 생겼겠네요?〉
묻는 무건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아주 미세한 변화였지만 어머니는 무건에게 겁먹지 말라고 등을 두드려 주며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구나.〉
〈그럼……?〉
최초의 익재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며, 등 뒤에 항상 악(惡)의 신을 거느리고 다닌다.
그것이 어머니의 설명이었고.
‘사실이었다.’
쿵…….
무건은 제 심장이 다시금 묵직한 소리를 내며 뛰는 것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제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저 괴물이, 아니 인간이었을 여인이 300년 전 나타났다는 이 세계의 최초의 익재임을 알아챘다.
신을 거느리고 다닌다고 해도 그런 줄만 알았지, 설마 무당의 모습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
그러나 알아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무건은 또한 동물적인 감각으로 느꼈다. 저것은 자신이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단순히 혀뿌리를 뽑고 목덜미를 내리친다고 소멸될 힘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길게,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를 뽑아내던 여인이 곧 소리를 그치고 무건을 향해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그녀의 눈은 검은 눈동자였지만, 사람으로 치면 흰자여야 하는 곳은 새빨갰다. 그 눈을 마주친 순간이었다.
쿠구우우우우우웅!
천지가 진동하며 하늘에서는 번개가 내리치고, 땅에서는 돌이 튀어 올랐다. 그리고 무건은 제 몸을 짓누르는 거대한 압박감을 느끼며 그녀의 뒤에 있는 악신이 기다란 낫을 쳐드는 것을 보았다.
무건은 그 모습을 보고도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곧 낫이 허공에 휘둘리면서 거대한 풍압으로 인해 그의 몸이 튕겨 나갔기 때문이었다.
의식을 잃기 전, 무건은 제 몸을 강타하는 강한 충격에 제 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감각을 느꼈다.
* * *
눈앞에 한 겹 막이라도 쓰인 듯이 시야가 뿌옜다. 무건은 눈꺼풀을 느리게 올렸다 내렸다 했다. 게다가 목에 심한 갈증이 올라왔지만 약간의 말소리를 낼 힘도 없었다. 쌕쌕거리는 숨소리만이 살며시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을 뿐이었다.
그것을 누군가 들은 것일까. 무건이 누워 있는 방의 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소리를 들은 무건이 눈동자만 굴려 그곳을 보았다가 문가에 서 있는 한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전혀 본 적도 없는, 낯선 여인이었다.
“…….”
“…….”
여인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무건을 물끄러미 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상황이 무색하게 상대는 무건이 일어났다는 것만 확인하고 한마디도 없이 도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탁.
눈 몇 번 깜빡일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도로 닫혀 버리는 문을 보면서 무건은 황망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물이라도 달라고 하려고 했는데…….
무건은 순간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서는 인상을 확 찌푸렸다. 의식이 조금씩 열리면서 제 몸에 격통이 밀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무건이 숨을 삼키면서 두 팔로 제 몸을 감쌌다.
“흐윽……!”
그는 저도 모르게 방바닥에 몸을 굴렸다. 다시 기절해 버리고 싶을 만큼 끔찍한 통증이었다. 무건은 바닥을 구르다가 제 손과 손목에도 붕대가 감겨 있는 것을 보았다. 갈려 나간 손톱 끝에는 도톰한 천이 덧대어져 있었는데 그곳에도 붉은 피가 배어 나와 있는 상태였다.
그제야 제가 의식을 잃기 전, 그러니까 읍주에서 빠져나오려고 바닥을 기었던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하늘과 땅이 진동했다. 눈앞을 하얗게 만드는 번개가 내리쳤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보이던 익재.
악신을 거느린, 여인의 형상을 한 날개 달린 괴물.
다른 익재들은 그래도 이 정도면 상대할 만하다고, 그렇게 여유롭게 생각했었는데 그것은 아니었다. 대응할 틈도 없이 튕겨 나왔었다. 멀리 내팽개쳐진 뒤에는 도망쳐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뼈가 으스러지고, 온몸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고통 속에서도 한 가지 생각만 했다. 오직 살아야겠다는 의지 하나만 충만했다.
그때였다. 도로 드르륵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고, 무건의 눈앞에 검은 신발을 신은 발이 나타났다. 발이 무척 큰 것이, 척 봐도 여인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보고서 무건이 멈칫한 순간 낯선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이 녀석인가.”
사내치고는 목소리가 썩 굵지는 않았다. 그리고 역시나 귀에 익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에 작게 대답하는 여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렇습니다, 전하.”
……전하?
마지막 말을 듣고 무건이 고개를 살며시 들었다. 그러자 이쪽을 싸늘하게 내려다보는 사내와 단번에 눈이 마주쳤다.
조서엽과 마찬가지로 귀한 신분임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사내였다. 하지만 서엽과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뭔가 더 여유로운 분위기가 풍겼다.
무건은 그 사내가 입은 소매 폭이 넓은 붉은색 비단옷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설마 다시 황궁으로 돌아온 건가.
그런데 문득 흑화를 신은 발의 주인이 무릎을 내렸다. 그러고는 무건의 얼굴을 붙잡고 눈을 마주치게 했다. 몸을 죄어 오는 고통으로 인해 무건의 미간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상대가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정신이 드느냐? 한 사흘은 사경을 헤매고 있었던 것 같다만.”
그 음성을 들으면서 무건은 제 실낱같은 이성을 붙잡으며 눈앞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
그에게서 묘하게 진예를 겹쳐 보았다. 진예보다 선이 굵었지만 자세히 보니 이목구비가 상당히 닮아 있었다. 누가 봐도 한 핏줄이라고 쉽게 유추할 수 있을 만큼. 하지만 무건은 그를 무어라 불러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연무건은 원래 황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시골 촌놈이었다. 황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사정 따위 궁금하지도 않았고, 굳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제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전혀 아니었다.
무건은 혼미한 정신 속에서 한참을 생각하다가 겨우 말을 꺼냈다.
“무, 물을…….”
목소리가 성대를 거칠게 긁으며 나왔다. 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하다가 결국 힘에 부쳐 말끝을 흐리자 사내가 “뭐?” 하고 되물었다.
“마시고, 싶…….”
말을 잇자 사내를 데리고 들어왔던 여인이 픽 웃는 소리를 내더니 옆에서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물을 마시고 싶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전하.”
해설을 들은 사내가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제 이마를 짚고 하하 웃었다. 그러고는 여인에게 물을 떠오라 시켰다. 잠시 후 그녀가 물이 담긴 대접을 가져와 내밀자, 사내가 직접 그것을 받았다. 사내가 직접 물을 먹일 거라고 생각지 못한 여인이 대접을 도로 받겠다고 손을 내밀었다.
“물은 제가 먹이겠습니다.”
“되었다.”
사내는 곧 죽을 것처럼 창백한 얼굴로 땀을 흘리고 있는 무건을 제 무릎 위에 올리고는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몸이 불편할 테니 내 자비를 베풀어 주마.”
황실 사람들은 말투가 다 이런가.
말투가 비슷해 자꾸 진예가 떠올랐다. 무건은 제 입으로 조금씩 흘러들어 오는 물을 마시며 방의 천장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제집의 낡은 천장과 다르게 깨끗했고, 높이도 높았다. 이 전하라는 사람과 여인이 드나든 문 역시 격자가 반듯하고 누렇게 변색된 흔적 없이 깨끗했다.
이전에 본 진예의 방도 이러했었는데. 다시 그녀를 볼 수 있게 되는 걸까.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 게냐?”
무건의 눈이 흐릿해지는 것을 본 사내가 문득 물었다. 그에 무건이 정신을 바짝 차렸다. 궁금한 것을 그대로 입 밖에 내도 되는 건지 잠깐 고민했지만 어차피 소용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해야 돌려 말할 수 있을지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이기에 더더욱.
“황제 폐하를…… 뵐 수 있습니까?”
그러자 사내가 픽 웃으며 대꾸해 왔다.
“그것이 먼저인가? 내가 누군지는 궁금하지 않고?”
상대의 물음에 무건은 멍청하게 아, 하는 탄식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보고 제대로 된 질문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사내가 먼저 제 소개를 했다.
“본왕은 화친왕이라고 한다.”
친왕……?
친왕이라면 황족이라는 의미였다. 진예와 같은 핏줄인 사람.
무건은 혹시,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황궁 안인가? 밖으로 나가면 진예가 있는 곳을 찾아갈 수 있나? 미약한 희망이 가슴에 들어차자 심장이 작게 요동쳤다. 순간적으로 아픔도 사그라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럼, 여기는 어디입니까?”
하지만 참으로 미약한 희망이었다. 화친왕의 한마디에 무너져 내려 버릴.
“본왕의 사가다.”
답을 들은 무건은 실망했다. 그리고 제 처지를 곧 깨달았다.
그렇지…….
〈이놈을 읍주에 갖다 버려라.〉
진예가 자신을 버리라 했었다. 실제로 온몸을 포박한 자신을 조서엽이 읍주 한가운데 떨궈 놨고. 그랬던 그녀가, 황궁 안의 모든 것을 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을 황제가 순순히 자신을 황궁 안에 다시 들였을 리는 없다. 논리적으로도 아주 단순한 추론이었다.
잔인한 현실을 인식한 무건은 깊이 침묵했다. 심장을 누군가 대바늘로 푹 찌른 듯이 가슴에 예리한 통증이 일었다. 몸 구석구석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가슴의 통증이 가장 거셌다.
왜 이러지.
진예를 처음 본 순간 반했다고는 하나 실상 딱 한 번 봤을 여인일 뿐이었다. 그런데 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마음이 아릴까. 마치 10년을 본 연인처럼. 이게 바로 운명이 이끌린다는 건가.
무건은 풀죽은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그럼 여기는 황궁이 아닙니까?”
그리고 돌아온 것은 대답이 아닌 핀잔이었다.
“이 꼴로 황궁에 가고 싶단 말이냐?”
무건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 심한 부상 때문에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가슴에 심한 고통이 몰려왔다. 그렇지만 가장 아픈 곳은 역시 마음이 다친 곳이다. 그녀에게 거부당하고 있다는 그 사실, 그리고 다가갈 수 없다는 사실 그 자체가 가장 힘들었다.
그럼에도 연무건이 할 수 있는 대답은 딱 하나뿐이었다.
“갈 수 있다면, 당연히…….”
“들어가자마자 목이 베이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곧장 나온 화친왕의 반박에 무건은 울컥했다. 정곡이 찔려도 너무 아프게 찔렸다. 무건이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황제 폐하와는 어떤 관계이시길래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러자 화친왕이 아니라 그 뒤에 서 있던 여인이 발끈했다.
“이 무례한……!”
그녀가 제 주제를 모르고 아직도 화친왕의 무릎 위에 누워 있는 무건을 끌어 내리려 했지만 화친왕이 그 직전에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러고 무서운 줄도 모르고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무건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본왕은 황제 폐하의 아우다.”
그 말에 무건이 화친왕을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과연, 그래서 닮은 거였나.
묘한 안도와 함께 약간의 경계심이 올라왔다.
진예의 아우라면 더욱이 자신을 왜 데려왔는지 의도를 알기 힘들었다. 진예는 연무건이라는 존재를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다. 황제의 명인자가 가진 것도 없는 평범한 사내라는 게 말이 되나. 사실 자신의 마음과는 별개로 무건으로서도 그녀의 운명이 얄궂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거부하는 그녀에게로, 무건은 다시 다가가고 싶었다. 하지만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화친왕이 무슨 속셈인지는 몰라도 지금 무건이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그런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인지, 무건의 눈빛이 달라진 것을 보며 화친왕이 만족스러워하는 웃음을 지었다.
“다행히 이젠 내 자격을 인정해 줄 모양인가 보군. 그럼 다시 묻지.”
화친왕의 다음 말을 기다리던 무건이 눈을 크게 떴다.
“연무건.”
이름을 알고 있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게 당연한 건지, 아니면 이 또한 위험한 사람이라는 징후인 것인지 무건은 판단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황궁에 가고 싶으냐?”
이리 달콤한 제안을 하는 이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조차.
* * *
달이 가장 기울어 있는 그믐날이었다.
누구의 발소리도 들리지 않는 야음. 하지만 서엽은 퇴궐하지 않고 황궁 안의 서가에 머물고 있었다. 진예가 침전에 들어가 잠든 것을 이미 확인한 뒤였는데도 서엽은 황궁에서 멀어질 수 없었다.
서가의 구석에 위치한 책상에 등잔불 하나 밝혀 놓고 앉은 서엽은 정작 책은 읽지 않고 가만히 제 팔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불로 지진 상처는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았지만 다행히 잘 아물어 가는 중이었다.
그렇지만 흉은 분명히 남을 것이다. 평생 지워지지 않을 터였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함부로 비밀을 만들지 마라.〉
비록 황명을 어기고, 말할 수 없는 비밀 하나를 품게 되었으나.
서엽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제가 하는 모든 일은 폐하를 위한 것입니다…….”
자신의 헌신을 오롯이 받을 딱 한 사람, 진예.
그녀를 마음에 품었다. 보답받지 못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알고서 시작한 감정이니 딱히 쌍방통행이 아니라도 괜찮았다. 그녀를 지키는 것이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이고, 곧 조서엽이 존재하는 이유였다.
진예가 더는 눈물짓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역대 환 제국의 황제 중 가장 강한 황제로서 기록되도록, 자신이 그녀를 끝까지 보좌할 것이다. 물론 진예 자신도 충분히 그리될 수 있을 만한 기량을 갖춘 군주였다.
그렇게 한창 생각에 빠졌을 무렵이었다. 그가 기다리던 자가 드디어 서가의 문을 두드렸다.
“조 후.”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서엽은 서가의 문에 은은하게 드리운 사람의 그림자를 확인하고 대답했다.
“드시지.”
말이 떨어지자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문턱을 넘었다. 그리고 한 사내의 그림자가 서엽의 옆으로 다가왔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서엽이었다.
“그래, 화친왕의 동향은 어떠한가?”
“그럭저럭 조용합니다. 정위는 제 가족들을 이끌고 봉토로 돌아갔습니다.”
서엽은 책장을 천천히 넘기면서 보고를 들었다.
정위야 ‘돌아갔다.’라고 하지만 사실상 진예에게 쫓겨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공의 작위와 함께 봉토 절반을 몰수한 것은 더 이상 신하로서 신뢰하지 않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아마 당분간은 수도에 얼씬도 하지 않으리라.
황궁 안에서 부적이 또다시 발견된 것은 괘씸했지만 썩 나쁘지는 않은 결과였다. 그에 서엽이 미미하게 미소를 띠려 하는데 작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런데.”
“……?”
서엽이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칫했다.
“최근에 화친왕부의 내빈각에 못 보던 이가 머물더군요.”
“못 보던 이라니?”
“밖에는 잘 나오지 않아서 저도 자세히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드나드는 이들의 말에 따르면 웬 사내라고 합니다.”
“……여인이 아니라 사내라.”
듣는 서엽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가 작게 중얼거리며 상대의 말을 곱씹었다. 화친왕이야 사실 여색을 즐긴다는 소문은 딱히 없었다. 의외로 주변 정리가 잘되어 있는 데다,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다는 게 오히려 문제라면 문제인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손님이 들었는데, 사내. 그것도 하필 이 시점에.
서엽은 왜인지 가슴속에 불편감이 들어차는 것을 느꼈다. 그렇지만 그것의 실체를 굳이 제 입으로 밝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를 추궁했다.
“누군지 짐작되는 사람은?”
“…….”
상대는 대답을 머뭇거렸다. 서엽이 고개를 옆으로 살며시 돌리며 곁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어서 대답하지 않고 뭐 하냐는 의미였다. 그러자 상대가 고개를 떨궜다.
“조 후.”
단지 자신을 불렀을 뿐이었지만 서엽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서엽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나더러 실수했느냐고 묻는 것인가.”
“…….”
침묵으로 긍정하는 상대의 반응을 확인하고 서엽이 헛웃음을 지었다. 미묘하게 불쾌함이 올라와 말이 날카롭게 나갔다.
“내가?”
“더 적절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제아무리 맞는 말이라고 해도 상대는 서엽이 의심스럽다는 말을 대놓고 하고 있었다. 그것인즉, 화친왕의 집에 머물고 있다는 예의 손님이 연무건이라 확신한다는 의미이리라.
서엽은 속뜻을 알아차리고 설마, 하는 생각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지만 서엽은 아무리 그래도 정말 연무건이 살아남았으리라는 경우는 전혀 상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읍주에서 어떻게 살아남는단 말인가. 팔다리를 묶어 놨는데.
익재마다 특성이 있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사람의 능력치를 월등히 뛰어넘은 존재들이었다. 지능은 다소 떨어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힘도, 반사 신경도 인간의 것을 초월했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사람이 갖지 못하는 특수 능력 또한 있었다.
애초에 연무건처럼 훈련도 안 받은 평범한 사내가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무엇보다 밖은 지금 겨울. 굳이 익재의 습격이 아니더라도, 동상을 입고 얼어 죽었을 날씨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나? 그곳은 읍주다. 어찌 그자가 살아남을 수 있단 말이야.”
“혹시 누군가 그 안으로 들어가서 구했다면 어떻습니까?”
“그조차도 가능할 리 없다. 그자를 두고 입구로 나왔을 때 이미 익재가 냄새를 맡고 그 주변에 몰려든 것을 확인했어.”
“하지만 단정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이야기가 자꾸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답답해하면서 말을 이어 가고 있었다. 진예와 함께 익재들과의 전투를 이미 여러 차례 치러 본 서엽은 그 나름대로의 근거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상대는 이해하지 못했다.
기실 전쟁에 가담하지 않은 자라면 신화처럼 나타난 그 절대적인 ‘악(惡)’에 대해, 그 절대적인 강함에 대해 명확히 이해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300년 전 환 제국에 그들이 나타났을 때는 엄청난 재앙이 땅 위를 휩쓸어 초토화를 해 버렸지만 이미 그것도 몇 대 전의 이야기다.
어느새 익재와의 끊임없는 전쟁은 나라를 다스리는 자의 몫이 되었고, 이미 수년 전부터 환 제국에서는 익재를 꽤 효과적으로 통제하게 되었다.
모두 다 진예의 ‘능력’ 덕분이었다.
하늘이 내렸다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그녀의 특출한 기질 말이다.
“그 재앙을 없애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조차도 전력을 다해야 겨우 눈앞에 있는 네댓 마리를 해치우는 정도야. 한데 수십 마리의 익재가 있는 곳에서 그자가 살아남았을 거다?”
계속된 자극에 서엽의 기운이 사나워졌다. 그러자 상대는 주춤하긴 했으나 결국 담지 말아야 하는 말을 입에 올렸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말이 채 다 이어지기 전에 서엽이 허리춤에서 칼을 뽑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자리에서 일어나 함부로 입을 놀리는 상대의 목에 칼을 들이댔다.
“……!”
고요한 서재에 놀라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색이 되어 얼굴이 하얘진 상대를 서엽이 날카로운 눈으로 압살하려는 듯 노려보았다. 그는 한 걸음씩 천천히, 상대의 가까이로 걸음을 옮겼다.
“그대는 감히 황제 폐하와 같은 능력을 그 미천한 놈이 갖췄다 말하고 싶은 것인가?”
감히 진예와 연무건을 같은 선상에 놓다니, 상대가 미친 것이 틀림없었다. 서엽은 진예를 모욕하는 말만큼은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그게 설령 자신의 수족과 같은 사람이라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잘못 대답한다면 이대로 목을 잘라 버리리라고, 그런 생각까지 미쳤을 때였다.
“하지만 그렇다면.”
제삼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귓가에 꽂히자마자 서엽이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서가의 문이 열린 채였고, 그 앞에 미소를 그린 여인이 서 있었다.
진예였다.
“그놈이 살아남을 수 있지 않으냐.”
당황한 서엽은 순간적으로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머리가 굳어 무슨 말을 들은 건지도 잠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가, 뒤늦게야 정신을 차렸다. 서엽은 재빨리 칼을 도로 집어넣으며 고개를 숙였다.
“폐하, 여긴 어찌……?”
진예는 자신의 뒤에 따라온 이들을 손으로 가볍게 물리고는 서가의 문을 닫았다. 그녀가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책들이 쌓여 있는 책장 사이를 가로지르며 서엽에게 다가왔다.
진예는 서엽의 앞에 있는 이를 한번 힐끗했다가, 서엽이 앉아 있던 책상 앞으로 가 그 위에 올려진 책을 들어 올렸다. 내용보다는 단지 무슨 책을 보고 있었는지 궁금했을 뿐이라, 진예는 심드렁하게 제목을 훑었다. 그러고는 왜 여기까지 왔냐고 눈으로 묻는 듯한 서엽에게 적절한 답을 들려주었다.
“지나가던 중에 큰소리가 들리기에 들러 봤다. 이곳은 네가 자주 밤을 지새우는 곳이니.”
서엽은 딱히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대꾸하기가 힘들었다는 것이 맞았다.
괜스레 심장이 두근거렸다. 진예가, 알고 있었다. 한 번도 이곳에서 마주친 적이 없어서 당연히 드나드는 것을 모르리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이쪽에 늘 관심을 두고 있었던 건가?
바로 이런 면 때문에 서엽은 진예에게 어딘지 늘 기대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이 미묘한 줄다리기. 여전히 마음 한 톨 내주지 않으면서도, 서엽에 대한 소유권은 거침없이 주장하는 저 태도.
하지만 늘 그렇듯이 정말 스쳐 지나가는 한 줄기 바람일 뿐이었다. 그냥 머리카락을 잠시 톡 치고 지나가는 정도에 불과한.
진예는 책을 내려놓으며 다시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화친왕부에 그놈이 있는 것 같다? ……연무건이?”
그리고 그녀의 말투에는 짙은 분노가 묻어 있었다.
칼로 베는 듯한 날카로운 목소리에 서엽의 앞에 서 있던 사내의 목소리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보아하니 진예가 자신의 한 말을 대부분 듣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해서 잘못했다가 경을 치는 것이 아닌가 싶어 더욱이 말이 제대로 나가지 않았다.
“그, 그것이…….”
하지만 진예는 별 관심 없다는 듯 축객령을 내렸다.
“그만 나가 보거라.”
다행이다 싶었던 사내는 제 주인인 서엽의 눈치조차 보지 않고 바로 몸을 물렸다.
얼마 안 가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서가에는 진예와 서엽, 두 사람만이 남았다. 서엽은 바깥에 남아 있는 진예의 수족들이 혹시나 듣지 않을까 조심하는 듯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폐하, 그럴 리 없습니다. 그때 근처에 화친왕의 사람이 있었다면 알아챘을 겁니다.”
진예는 침묵한 채 조용히 서엽을 내려다보았다.
이 순간에도 딱히 그녀는 서엽을 의심하진 않았다. 그로서는 최선을 다해 연무건을 처리했을 것이다. 굳이 황명이 아니었다고 해도, 서엽은 알아서 연무건을 처리하려 들었을 사람이니까. 연무건의 존재 자체를 껄끄러워하고 있었으니 당연했다.
애초에 그는 명인자를 찾아내라는 진예의 은밀한 명을 받았을 때도, 썩 내켜 하지 않았었다.
〈굳이 그자를 눈앞에 두기까지 하셔야겠습니까?〉
그런 말을 하면서.
예컨대 명인자라면 알아서 잘 찾아올 텐데, 나서서 찾아 미리 회초리를 맞을 필요는 없지 않으냐는 논리였다. 그래도 일단 봐야겠다는 진에의 말에 연무건을 제 앞에 갖다 놓기는 했지만.
진예는 역시 그때부터 실수했던 건가 싶어 이전의 일을 곱씹다가, 한마디 했다.
“명인이 더 진해졌다.”
쿵.
진예의 말에 서엽은 제 심장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그의 눈빛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꽤 심각한 얘기였으나 진예의 표정 변화가 딱히 크진 않았다.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명인이 진해진다는 의미가 뭔지.”
서엽은 지그시 주먹을 쥐었다.
무슨 의미인지 당연히 모르지 않았다. 명인이 진해진다는 건, 그만큼 인연 또한 질겨졌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연무건을 데려왔을 당시에도 진예의 어깨에 있는 명인은 이미 완벽한 먹색으로, 굵고 선명했다. 거기서 더 진해졌다고?
서엽은 이제야 제 예상이 틀렸을 수도 있겠다고 예감했다. 착각일지 모르지만 얼마 전 지졌던 팔 부근이 욱신거려 왔다.
“그럴 리 없습니다. 연무건이 살아 있을 리…… 없습니다.”
거듭된 부정의 말에 진예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그녀는 이미 연무건이 살아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이어진 명인 주위에 인 통증. 처음에는 하늘의 뜻을 거스른 대가일 거라고 생각했으나 점차 그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오히려 명인은, 그녀의 어깻죽지를 깊게 파고들며 영역을 확장하는 중이었다.
엿 같은 일이었다. 기분이 더러웠다.
그런 심경이 그녀의 말투에서부터 배어 나왔다.
“서엽, 널 의심하지 않는다. 아마 최선을 다했겠지. 넌 진심으로 그놈이 돌아오는 걸 원하지 않을 테니. 그 알량한 질투 때문에.”
비꼬는 어조. 서엽은 제게 위기가 찾아왔음을 감지했다.
“……폐하.”
“짐이 그대의 충심보다는 연모의 정을 믿는 것이 우습지 않으냐?”
서엽은 참지 못하고 그녀의 앞에 주저앉았다. 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 모습을 진예가 눈 아래로 물끄러미 내려다보자 압박감을 이기지 못한 서엽의 입에서 사죄의 말이 흘러나왔다.
“송구, 합니다.”
“무엇이 말이지?”
다 알면서 굳이 한 번 더 찔러서 기어이 피를 보고 마는 이 잔인함.
잠시 희망을 품으면서도 이런 것 때문에 서엽은 늘 스스로의 밑바닥까지 보게 되었다. 진예 앞에서는 한없이 초라해졌다. 차라리 사내가 아닌 가신으로서 남는 것이 행복하다 느껴지는 이유였다.
“감히 넘봐서는 안 되는 이를 눈에 담고, 마음에 품은 죄를 그리 질책하지 않으셔도 잘 알고 있습니다.”
실로 비굴한 태도였다. 사랑을 구걸할 수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애초에 진예는 그런 틈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 마음, 더 잘 숨기겠으니…….”
서엽의 말끝이 흐려진 틈을 타 진예가 물었다.
“버리지는 말아 달라?”
대답 없는 조서엽을 보면서 진예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자 서엽의 표정이 괴로움으로, 굴욕감으로 일그러졌다. 그 모습을 보니 진예는 이 가망 없는 사랑에 매달리는 사내가 가엾어졌다. 그렇다 보니 연무건을 완벽하게 죽이지 못한 데 대한 화도 조금 가라앉는 느낌이긴 했다.
하긴, 제 명령은 연무건을 죽이는 것이 아니었다. 갖다 버리라는 것이었다. 겉으로만 보면 서엽이 황명을 어겼다거나 혹은 소홀히 했다고 볼 수는 없었다.
설령 연무건이 살아 돌아온다고 해도 뭘 하겠는가. 실상 그녀 자신의 불안감도 실체는 없는 것이었다. 그 녀석이 제 옆에 있는다고 해도 어떤 것도 변화시킬 수 없었다.
다만 한없이 거슬릴 뿐.
마치 벽 틈을 타고 오르는 작은 개미처럼.
단지 그 정도였다.
……그러니 개미는 가볍게 눌러 죽여 줘야지.
현재로서는 그러한 감상이 전부였다. 그래서 그녀의 명령도 가볍게 흘러나왔다.
“그럼 화친왕부에 있다는 그놈이 정말 연무건인지 알아봐라. 네 눈으로 확인하고, 정말 그놈이라면 단번에 목을 베어 버려.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처리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겠습니다.”
대답하면서 서엽이 더욱 바닥을 향해 깊게 고개를 숙였다. 진예는 그에 안심하고 작은 발을 돌렸다.
“하면 연무건의 목이 내 앞에 진상되는 것을 기다리고 있으마.”
밤이 늦었으니 이만 퇴궐하고, 그런 말을 덧붙이려 한 찰나였다. 이 자리에서 대화를 시도할 마지막 기회라는 걸 알아차렸는지, 한마디가 끝나기 무섭게 서엽이 치고 들어왔다.
“한데 폐하.”
진예의 발이 멈칫했다. 나무 바닥이 깊게 눌리며 기익, 소리가 났다.
“연무건이 사라지면…….”
서엽이 말끝을 흐렸다. 주저하는 낌새를 알아챈 진예가 그의 말을 받아 반복했다.
“사라지면?”
재촉했으나 서엽은 한동안 입을 꾹 다물었다. 헷갈렸기 때문이었다. 과연 이 말을 뱉었을 때 ‘선’을 넘게 되는 건지, 아닌지. 넘게 되면 이대로 내쳐질 가능성도 있었다. 그것은 최악의 상황이기에 서엽은 선뜻 모험을 감행하기 힘들었다.
뜻을 알아차린 진예가 한 고삐를 풀어 주었다.
“깊은 밤이라는 것이 으레 그렇지. 술에 취한 것처럼 가끔 입에 올리지 못하던 것도 올리게 되고. 죄를 묻지 않을 테니 말해 보거라.”
그제야 서엽이 작게 숨을 가다듬었다. 위험한 말이지만, 궁금해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한순간이라도 여인이 될 생각이 있긴 하십니까.”
말하면서 서엽은 연무건이 사라지면, 하는 가정을 내놓는 것도 우습긴 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지금 이 나라의 지존을 온전히 ‘여인’으로 보는 사람은 그치밖에 없었다. 진예가 가신이 아닌 사람을 대하는 것도, 황당하지만 연무건이 유일했다.
그 유일한 자리를 자신이 차지하고 싶지만…….
“짐이 누구의 여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냐?”
요원하다.
그래서 진예의 반문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
“조서엽의?”
서엽은 눈을 감았다.
짧은 꿈을 꿨다.
작고 가녀린 그녀의 손이 자신의 몸을 속박해 오고, 자신은 그녀에게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 주는.
제 앞에 있는 저 강력한 군주가 세상에서 가장 여린 여인으로서 제 품에 무너져 내리는.
다른 누구도 아닌 조서엽의 품에 안겨 웃고 울며 밀어를 속삭이는.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차지할 수 있다면,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조서엽은 익재의 먹이로 던져져 온몸을 뜯겨도 좋았다.
〈그럼 그 전에…… 당신을 가지고 싶습니다.〉
죽기 전에 가지고 싶다고. 마지막으로 진예를 여인으로서 제 품에 안고 싶다고.
얼마 전, 연무건이 그리 무모한 바람을 거침없이 읊었던 것처럼.
……그런 건가, 그래서 그놈이.
하지만 자신은 연무건처럼 그리 무모해지지 못한다. ‘신하’인 조서엽이 떠나면 저 여인을 옆자리에서 지켜 줄 이가 없음을 알았다.
아무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는 저 철혈의 여인은, 그래서 너무 외로운 존재였으므로.
망상에서 깨어난 그는 제게서 조금 멀어진, 그리고 저를 향하고 있지 않은 진예의 발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늘 그래 왔듯 그가 내뱉을 수 있는 언어는 사죄의 말뿐이었다.
“불경함을, 용서하십시오. 말씀하신 대로 깊은 밤이라…….”
제정신이 아니라는 말은 차마 덧붙이지 못하고 끝을 흐렸다.
진예는 묵묵히 들으며 답을 잠시 미루었다.
바람 한 점 없는 밤, 고요한 서가. 그간 아슬아슬하게 보였던 서엽은 그 나름대로의 진심 일부를 토로해 냈다. 확실히 그동안 넘지 않았던 선을, 조서엽이 밟았다는 의미다. 진예는 자신도 그 선을 넘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다.
얼마 안 가 어떻게 할지 결정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어쩌면 내가 너에게 기회를 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조금만 당겨도 툭 끊어져 버릴, 삭아 가는 동아줄. 그것을 조서엽의 눈앞에 내렸다.
“……!”
약간의 희망이 보이자 서엽이 움칠했다. 그의 손이 떨리는 것을 확인하며 진예는 확신했다. 그래, 이 사내는 앞으로 자신을 위해 정말로 목숨을 바칠 것이라고.
“꽤 당황한 모양이로군, 조 후.”
서엽이 고개를 들어 진예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이 제법 간절했다.
빛이 없는 희망. 진심이 아닌 걸 알면서, 이용당할 뿐이라는 걸 알면서.
그럼에도 그는 진예가 내린 허술한 동아줄을 쥐고 싶었다. 쥐어야 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어쩌면 서엽 자신보다 진예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잠시간의 아량을 베풀었다. 정신 차리라는 듯 현실을 일깨워 주었다.
“소싯적과 달라진 것이 조금도 없구나.”
아직도 소년의 눈을 하고 있지, 너는.
그리 중얼거리면서 그녀는 마침내 서엽에게서 멀어졌다.
마지막 말을 들은 서엽은 덕분에 뼈저리게 깨달았다. 어째서 자신은 그녀의 사내가 될 수 없는지.
진예는 더 이상 그때의 그 사람이 아니었다.
환 제국의 절대적인 권력자.
군주, 그 자체였다.
* * *
고요한 밤이었지만 진예는 발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침전을 향해 걸었다. 구름에 가려진 달빛이 그녀의 뒤에 길게 그림자를 그려 두었다. 진예는 묵묵히 제 발을 따르는 그것을 보다가 머릿속을 스치는 어느 하루를 떠올렸다.
순진하기 그지없었던 어렸을 적. 지금의 화친왕인 어린 진평을 데리고, 새끼를 낳은 오리를 보러 후원으로 향하는 문의 턱을 넘다가 진평이 넘어져 진예가 벌을 받았다. 벌은 중용장구대전을 10권 필사하는 동안 서가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전 안 다쳤는데…….〉
진평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진예의 편을 잠깐 들어 주었지만 황제는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진예에게 붓과 벼루, 먹을 가지고 가 반성할 것을 명했다.
〈아우를 소중히 여기는 것 또한 군주의 덕목 아니겠느냐?〉
〈…….〉
마치 동생을 제가 해코지했다는 듯한 말투. 억울했지만 진예는 거의 40근에 달하는 벼루를 들고 서가로 향했다. 방금 전 서엽이 앉아 있던 바로 그 자리에.
진예는 그곳에 앉아 밥도 거르며 한자가 빽빽하게 적힌 중용장구대전을 베껴 썼다. 먹 때문에 손도 더러워지고, 한 권 다 썼을 때쯤부터는 팔이 아파 먹을 갈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침에 들어갔는데 땅거미가 질 때쯤 그곳에서 나온 진예를 앞에서 맞이한 이는 서엽이었다. 그는 진예의 손목과 팔이 먹으로 까매진 것을 보고는 벼루를 얼른 받아 들었다.
태자전에 들어서도 진예가 아픈 손목을 주무르는 것을 본 그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더니 이내 물수건과 뜨거운 물을 가져왔다. 서엽은 속상하다는 듯이 진예의 까매진 팔을 닦고, 손목을 찜질해 주며 물어 왔다.
〈괜찮으십니까, 전하.〉
당시에 이토록 다정하게 진예를 돌봐 주는 이는 서엽이 유일했다.
황태자이지만 황제의 눈 밖에 난 아이.
그런 진예를 진심으로 염려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황실 내 권력은 황제의 총애에 비례한다. 제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자는 허수아비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서엽만큼은 늘 진예의 옆에 머물며, 그녀를 위했다. 주변에 있는 유일한 온기였으며, 고립된 진예가 의지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이었다.
진예는 서엽의 염려 어린 질문을 듣고 잠시 아침에 보았던 제 아비의 표정을 떠올렸다.
증오한다기보다는 지겹다는, 혹은 아주 피곤하다는 듯한 표정. 차라리 분노했다면, 그런 힘을 제게 쏟아붓기라도 했더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개선을 바란다는 의미였을 테니까.
그런데 제 아비의 검은 눈동자에 어린 감정은 권태였다.
진예는 그 무감정한 눈빛을 보고 오히려 절망했다. 정말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져서. 한낱 잡초라도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안 괜찮아 봤자 상황은 바뀌는 게 없겠지. 그러니 괜찮다.〉
대답을 들은 서엽의 손이 잠깐 멈칫했다.
〈……저는 전하의 그런 말이 싫습니다.〉
〈그럼?〉
행여 아프기라도 할까 조심스럽게 잡은 손과, 손목에 닿는 따뜻한 온기. 제 앞에 조심히 무릎 꿇고 앉은 서엽이 그녀를 올려다보며 이야기했다.
〈차라리 아파해 주십시오. 제가…… 눈물을 닦아 드릴 수 있도록.〉
진예는 푹 웃었다. 서엽의 이런 점이 그녀는 좋기도 했고 싫기도 했다. 자신에게는 없는 낭만. 가져 본 적 없는 뜨거운 마음. 황실 일원에게서는 물론이거니와 황성을 드나드는 이들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을 서엽은 이렇게 불쑥불쑥 보여 주었다.
그를 보다 보면, 그래, 그래도 희망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은근한 생각도 들긴 했다. 비록 지금은 아비의 눈 밖에 나 버렸지만 노력하면, 내가 그의 말을 잘 따르면 언젠가 두 팔을 열고 자신을 품에 안아 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 말이다.
그래서 진예는 서엽이 제 밑에 깔아 주는 이 안전망이 좋았다. 뿌리치지 않고 서엽에게 농을 걸었다.
〈걱정하는 모습을 보니 네가 나보다 오라버니가 맞긴 한가 보구나.〉
일부러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기 때문에 서엽이 얼굴을 미미하게 붉혔다.
〈예? 갑자기 그런…….〉
〈서엽 오라버니?〉
서엽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손이 떨렸다. 정말로 당혹스러웠는지 제법 귀여운 반응을 보이면서 서엽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이…… 러지 마십시오.〉
놀리는 맛이 있는 반응이었다. 그래서 진예는 한 술 더 떠 보았다.
〈오라버니, 저를 은애하세요?〉
새빨개진 얼굴로 서엽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심지어 손목을 닦아 주고 있던 손도 가누지 못해 수건을 떨어뜨렸다. 그것을 내려다보며 진예는 더는 안 되겠다 싶어 한발 물러났다.
〈어찌 그렇게까지 당황하고 그러느냐.〉
서엽은 입술을 깨물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반박했다.
〈노, 농이 지나치십니다……. 너무 짓궂으십니다.〉
〈네가 이러니까 진짜 날 은애하는 것 같지 않으냐.〉
그때까지만 해도 진예는 서엽의 어떤 감정인지, 그 실체를 잘 모르고 있었다. 대대로 황실과 사이가 좋았던 귀족 가문의 사내. 그래서 단지 충심으로 제 옆에 있어 주는 것이라고, 혹은 황제에게 외면받는 황태자가 가엾어서 잠시 보듬어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말을 했던 것인데.
한데 순간적으로 다시 고개를 든 서엽의 눈은 순식간에 가라앉아 있었다. 그럼에도 그 눈동자에 든 이야기는 더 많아졌다.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있다는 듯 은근한 빛을 품은 검은 눈동자가 진예를 진하게 바라보았다.
방 안에 침묵이 흘렀다.
찰나지만 온 세상이 멈춘 것 같은 고요가 들이쳤다.
그러나 눈에 품은 이야기들을 서엽은 입으로 풀어내지 않았다. 그저 일자로 다문 채 다시 수건을 주워 그녀의 까매진 손목을 정성스럽게 닦아 주었을 뿐이었다.
〈…….〉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진예도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그때 서엽은 이미 깊이 빠져 있는 눈이었다. 너무 어렸을 때라, 한 사람의 맹목이라는 것이 얼마나 강한 힘을 지녔는지 몰랐던 시절이라 눈치채지 못했을 뿐.
진예는 침전으로 돌아가는 문턱을 넘으며 중얼거렸다.
“아둔하고 순진했지…… 그대나, 나나.”
하지만 이젠 속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진예는 이젠 어리석음을 증오했다. 무턱대고 낭만을 믿을 만큼 가슴이 뜨겁지도 못했다.
〈그럼 저는, 오늘 여기서 죽습니까?〉
죽음을 입에 올리면서.
〈그럼 그 전에…… 당신을 가지고 싶습니다.〉
제 욕망을 입에 올리는 그런 어리석음.
전혀 이성적이지 못한 그런 낭만.
연무건을 절대 인정할 수 없는 이유였다.
어린아이 같은 그 순수함이 싫었다. 티 없는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 또한 그러한 눈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끔찍했다.
무지는 용서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예는 반드시 연무건을 죽여야만 했다.
잘 해낼 것이다, 서엽이라면.
진예는 자신을 향한 서엽의 뜨거움을 믿었다. 역설적으로 그것이 그녀의 가장 차가운 판단이었다.
* * *
〈하면 연무건의 목이 내 앞에 진상되는 것을 기다리고 있으마.〉
사실 서엽은 아직도 연무건이 살아 있다는 것이 정말이지 믿기지 않았다. 대체 그 녀석이 무슨 수를 써서 읍주를 빠져나왔단 말인가. 연무건을 버리고 오면서 애초에 그가 살아나올 가능성 따위는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진예의 명인이 짙어지기까지 했단다. 그 말을 듣자마자 서엽은 제 목에 두꺼운 가시가 컥 걸려 버린 느낌을 받았다.
최근 들어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은 거의 없었다.
딱 한 번을 제외하고.
제 몸에 명인이 새겨진 바로 그 순간 말이다.
평소처럼 입궐하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있다가, 아주 희미하게 제 왼팔에 명인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었다.
명인을 보자마자 서엽은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감정도 잠시, 서엽은 너무 이른 시간이라 그의 주변에 아무도 없었기에 다행이라 여겼다. 안 그랬으면 자신을 오랫동안 섬겨 왔던 누군가를 죽여 버렸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는 명인의 흔적까지 지워 버리려 인두를 가져와 제 몸을 지져 버렸다. 달궈진 쇠를 제 몸에 댈 때까지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살이 타들어 가는 순간 고통으로 이를 악물면서도 그는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그것이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랬다.
그리고 다행히 이번에도 가시를 뺄 방법은 있었다.
연무건의 목.
진예가 바라는 그것이 바로 서엽이 가장 원하는 바이기도 했다.
서엽은 서가에서 나오자마자 퇴궐을 하고, 저택으로 돌아가 변복을 한 뒤 다시 담을 넘어 밖으로 나왔다. 검은 옷을 입고 어둠 속으로 뛰어든 그는 얼마 안 가 화친왕부의 담장 위에 섰다.
현재 살아 있는 유일한 친왕의 거처인 만큼 여느 후궁의 거처 못지않은 규모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중앙을 잇는 큰 문만 네 개, 크고 작은 건물은 총 스무 개, 비록 지금은 주인이 없어 방치되어 있긴 하나 위명은 여전한 황후궁의 것만큼이나 깊고 아름다운 후원을 갖췄다.
현 황성 내 유일한 친왕부. 그래서인지 잘 정비되어 있는 데다 경비 또한 꽤 삼엄한 모습이었다.
그곳을 내려다보며 서엽은 연무건이 있을 만한 곳이 어디일지 눈으로 훑었다. 입구에 심겨 있는 거대한 수호수 두 그루,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작은 건물인 내빈각.
손님이 머물 곳이 있다면 바로 저곳이었다.
목표를 정한 서엽은 제 머릿속으로 내빈각 앞을 지키고 있는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제 머릿속에서 상황을 그렸다. 그들을 제압하는 그림이 떠오른 순간 마침내 그는 담에서 뛰어내렸다.
* * *
도대체 황궁으로 가려면 며칠을 기다려야 하는지 기약조차 없었다. 그래도 얌전히 기다린 건 운신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뼈가 부러진 탓에 멋대로 움직이면 장기가 손상될 수 있으니 얌전히 있으라는 의원의 경고를 듣고, 연무건은 겨우겨우 튀어 나가려는 몸의 기운을 억눌렀다.
원래 가만히 누워 있는 성미가 아니기도 해서 무료함에 반쯤 미쳐 버릴 것도 같았지만 목숨이 위험하다는데 날뛸 수도 없는 노릇이긴 했다.
그래도 오랜 시간 휴식을 취한 덕분인지 몸 상태와 별개로 정신은 맑았다. 피곤한 느낌도 없었고.
한참을 천장을 바라보던 그가 이불을 걷어 내며 몸을 일으켰다. 아직 늑골 부분에 미세한 통증이 남아 있어 짧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오랜만에 일어난 탓에 잠시 현기증이 일었지만 무건은 곧 방문 앞에 섰다.
감시하는 자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방 밖은 고요했다. 다행이었다. 사람이 있었으면 자신을 다시 안에 처박아 두려고 했을 테니까.
드르르륵.
아주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지만 그래도 소리를 완전히 죽이기란 불가능했다. 오랜만에 희미한 바깥의 공기를 느끼며 연무건은 문득 의원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래도 부상에 비해 회복이 정말 빠른 편입니다. 아니, 사실 짐승도 이 정도는 안 될 것인데.〉
연무건이 살아 있는 것은 기적이라며 의원이 말하자 화친왕 진평이 좋아하는 것 같지도, 싫어하는 것 같지도 않은 오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짐승의 회복력이라…….〉
그러고는 의원이 나가자 연무건에게 짧게 물었다.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기억이 나느냐.〉
그에 무건은 고개를 흔들었다.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왜인지 진평에게는 모든 진실을 알려서는 안 될 것만 같았기에 그리했다.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화친왕 진평은 위험한 자다.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이고, 황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잡아야 하는 유일한 지푸라기이긴 했으나 마냥 좋은 사람이라고 느껴지진 않았다. 노골적으로 칼을 드러낸 적은 없었지만, 그가 베푸는 호의는 아무 이유가 없어서 오히려 불안하다고 해야 할까.
무건은 살며시 손에 주먹을 쥐어 보았다. 평소보다 힘이 세게 돌았다. 단순히 잘 먹고 잘 쉬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능력인 것이 분명한데.’
익재와 마주한 순간, 정체불명의 능력이 제 몸에 심겼다. 평범한 인간의 신체로는 이룩할 수 없는 어떤 괴력과 반사 신경, 그리고 집중력이 발현된 것이다. 발원이 어디인지도 알 수 없어 그야말로 뜬금없는 능력치라고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무건은 늦은 밤이라고는 하나 그림자 하나 없는 복도의 바닥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혹시 누군가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싶어 점점 발걸음은 조심스러워졌다.
‘어쩌면 이조차 명인의 장난질일 수도 있다.’
명인으로 이어진 이들은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이어진다.
그 와중에 인간이 가질 수 없는 어떤 능력을 얻었다는 사람도 분명 있었다. 애초에 익재조차도 그 탄생이 명인 때문이 아니었던가.
사랑하는 연인을 차지하기 위해, 차라리 식인을 해 버린 미친 사람. 그래서 저주로 인해 문드러진 인간.
그것이 최초의 익재, 그 썩어 버린 본신의 실체다.
따라서 명인은 어느 누군가에게는 지독한 행운이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지독한 불행이 된다.
만약 자신의 능력이 정말로 명인으로 인한 것이었다면 자신에게는 목숨을 구명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행운이고.
아마 진예에게는.
‘불행이겠지.’
그렇지만 무건은 그녀의 그런 생각을 바꿔 놓겠다고 다짐했다. 언젠가 자신을 인정하게, 아니, 그것을 넘어 사랑하게…… 만들겠다고.
마치 원래부터, 아주 오래전부터 몸에 새겨진 것처럼 진예는 자신의 마음속에 너무 손쉽게 들어와 버렸다. 그녀가 황제가 아니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설령 평범한 사람이었어도 지금과 같이 본능적으로 마음이 이끌렸을 터이다.
단지 이름만 보고도 그녀를 마음에 담아 버렸으니까.
마침내 입구에 다다른 무건은 잠시 멈칫했다. 딴생각을 하느라 뒤늦게 알아차렸는데, 아무리 깊은 밤이라 해도 이 정도로 조용한 건 뭔가 이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초기에 부상이 너무 심각해 새벽에 발작을 했을 때도 그렇고, 아무 용건 없이 문이 열릴 때는 즉시 사람이 튀어나오곤 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인기척이 아예 없는 것이 말이 되나?
“…….”
무건은 달빛이 희미하게 비치는 격자문을 노려보았다.
왜인지 눈앞의 문을 열고 나가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그 전에 빨리 발을 돌려서 안으로 되돌아가야 할 듯했다. 그래서 발을 돌린 순간이었다. 돌연 그의 옆에 있던 방의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그의 팔을 잡아챘다.
“누……!”
누구냐고 외치는 소리가 커지려 하는 찰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귀를 질러왔다.
“닥쳐.”
요 근래 많이 들어 익숙한 목소리였다. 잠시나마 무건은 안심하고 작은 손이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곧장 그들이 들어간 방문이 닫혔고, 얼마 차이를 두지 않고 내빈각의 현관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숨어든 방문에 커다란 그림자가 비쳤다.
아주 미세하게 나무 바닥이 기우는 소리와 함께 그림자가 지나가자 귓가에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널 죽이러 온 자인 듯해.”
무건이 눈을 돌려 상대를 확인했다. 처음 이 화친왕부에 왔을 적 자신이 눈을 떴을 때 옆에 있었던, 화친왕의 심복인 여인이었다. 이름은 위도양이었던가. 그녀가 무건에게 조용히 하라는 의미로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고는 물었다.
“뛸 수 있나?”
무건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 여인 역시 자신의 편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살아남으려면 말을 따라야 했다.
대답을 확인한 여인은 조심스럽게 방의 창문을 열고는 무건을 먼저 내보냈다. 무건은 혹시나 큰 소리가 나지 않도록 유의하며 창문턱을 딛고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러자 오랜만에 바깥의 공기가 훅 끼쳐 왔다. 그 사이로 희미하게 피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에 머뭇거리고 있자 금세 따라 밖으로 나온 여인이 무건의 등을 툭 밀었다.
“멍하니 있을 시간 없어. 동쪽으로 가자.”
동쪽?
하지만 무건은 방향 감각을 잡지 못했다. 사방이 건물과 문으로 빽빽했다. 오랜만에 밖에 나온 터라 지금이 며칠이 지났는지,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각이 됐는지도 알 길이 없으니 달의 위치를 보고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그가 멍청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자 여인이 답답하다는 듯이 손목을 잡아끌었다.
“이쪽으로.”
쪽문이라 추정되는 곳으로 그녀가 무건을 당겼다. 무건은 따라가면서도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경계했다.
“……어디로 갑니까?”
“왜, 널 매장하기라도 할까 봐? 걱정 마라, 아직 죽이지 않을 정도의 가치는 있으니까.”
가치.
감정에 호소했으면 오히려 미심쩍었을 텐데 이렇게 말하니 차라리 믿음직했다. 무건은 그녀의 손에 이끌려 가며 뒤를 돌아보았다.
연무건을 죽이러 온 사람.
딱 하나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진예의 오른팔인 조서엽.
자신을 죽이러 온 건 그녀의 의지일까, 아니면 서엽의 의지일까.
조서엽은 제 손으로 무건을 황궁으로 데리고 왔지만 상당히 못마땅해하고 있었다. 그는 충성스러운 신하일 테지만, 진예를 단순히 황제로서만 따르는 느낌도 아니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간절한 눈빛의 의미는 무엇인지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분명했다.
아마도 그는 앞으로 연무건 인생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될 터였다.
“어서 오너라.”
여러 개의 문을 지나 밖으로 나가니 가마가 대기하고 있었다.
도양에게 등 떠밀려 가마의 문을 열자 화친왕, 진평이 그 안에 있는 것이 보였다. 그가 살며시 눈웃음을 치며 무건을 환영했다. 기꺼이 제 옆을 내어 주려고 옆으로 물러나는 진평을 보며 무건은 잠시 안에 들어가도 되는가 생각해 보았다.
황제와 그 아우.
혈연으로 얽혔다 한들 과연 둘의 사이가 썩 좋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만약 그가 이 일을 계기로 자신을 쥐어흔들려 한다면.
‘……어쩌면.’
지금 이 선택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무건은 눈을 감기로 했다.
지금 그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을 화친왕이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결코 넘지 못할 문턱을 넘게 해 줄 힘.
〈황궁에 가고 싶으냐?〉
그 말에 연무건은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대답했었다.
〈가고 싶습니다.〉
지금 가마 안에 있는 저이는 천한 제 신분으로는 감히 범접조차 할 수 없는 그곳을, 살아서 들어가게 해 줄 유일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무건이 발을 디뎌 가마 안으로 들어간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무건이 안착한 것을 확인하고 도양이 가마의 문을 닫았다.
마지막으로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의 눈에는 희미하게나마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무건은 표정을 굳히고 고개를 돌렸을 뿐이었다. 잠시 뒤 가마가 살며시 들어 올려졌다. 그에 무건은 화친왕을 돌아보았다.
한 핏줄임을 증명하듯 진예와 미묘하게 닮은 이목구비. 화려한 미인인 그를 보면서 무건은 머릿속에 진예를 그렸다. 그것만으로도 심장의 박동이 불규칙해지고, 가슴이 떨렸다.
그 흥분을 애써 억누르며 무건이 화친왕을 향해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황궁에 가서 할 일이 뭡니까?”
만약 눈앞의 사내가 진예에게 걸림돌이 된다면, 반드시 제거하리라고 다짐하며.
* * *
후우, 하고 깊게 숨을 들이쉰 서엽이 다소 신경질적인 손길로 제 얼굴을 가리고 있던 복면을 벗었다.
한시가 급한 탓에 넓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발을 옮긴 그가 곧장 진예가 있을 침전으로 직행했다. 하지만 문 앞에서 태감이 그를 막았다.
“아직 기침하지 않으셨사옵니다.”
이제 막 사경(새벽 1시에서 3시 사이)에 들어선 시각이었다.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서엽도 지금은 마음이 급했다.
“아뢰어 주십시오, 공공.”
“시각이 너무 이릅니다. 옷차림도 살피시고, 아침에 재입궐하신 뒤에 말씀 나누시지요.”
태감이 지적하자 서엽이 뒤늦게 제 옷차림을 살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옷으로 두르고 있는 제 꼴이 확실히 황제를 알현하겠다고 나설 만한 복장은 아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는 주저 없이 끈을 풀고 얇은 웃옷을 벗어 바닥에 그것을 던져 버렸다. 안에 입은 정복을 밖으로 드러내며 서엽이 물었다.
“이제 됐습니까?”
태감이 표정을 굳히는 걸 보았지만 서엽도 어쩔 수 없었다.
“급한 일입니다. 어서.”
방금 전 화친왕부에 있다던 그 ‘손님’의 낯짝을 보러 갔는데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텅 빈 방 안에는 온기가 도는 이불과 몇몇 집기들만 덩그러니 남은 채였다. 그리고 주변에 붕대가 널브러져 있었고.
정리가 안 된 방의 풍경을 보면서 정말로 살아 있긴 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 연무건이.
간발의 차라고 하지만 놓친 건 놓친 거였다.
또 한 번의 실수다. 그것도 아주 뼈아픈.
하지만 제 실수를 감추려고 하면 더 큰일이 벌어질 터였다. 한시라도 빨리 진예에게 이 상황을 알려야 했다. 서엽은 진예 역시 그것을 바라고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서엽이 고집을 부리자 태감은 못마땅해하면서도 결국 침전의 문을 열었다. 잠깐 들어갔다 나온 그는 이내 앞길을 터 주었다.
“안쪽으로 드시지요.”
서엽은 곧장 안으로 들어섰다. 불이 켜진 방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보며 저도 모르게 찾아온 긴장감으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이전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서엽은 제 눈앞에 펼쳐질 최악의 상상을 하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며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가자 자다 일어난 탓에 머리를 풀어 길게 늘어뜨린 진예가 보였다.
문이 닫히자 붉은색 천개 너머로 진예가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더 조심스러워하는 기색을 느끼며 그녀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 연무건은 어찌 되었더냐.”
“……놓쳤습니다.”
“놓쳐?”
제가 들은 것이 맞는가 진예가 다시 확인하자 서엽이 낭패라는 표정을 지었다. 눈을 꽉 감고 입의 내벽을 깨물었다. 한마디를 내뱉는 게 힘겨웠다.
“죽여 주십시오.”
“…….”
진예가 괴로워하는 그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연무건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니 잠이 한순간에 달아나는 느낌이었다.
태감이 잠을 깨울 때부터 심상치 않다고 생각은 했다. 하긴, 성공했으면 이 새벽에 찾아왔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번 일의 처리는 정말로 서엽답지 않았다. 진예 못지않게 서엽 역시 평소 실수를 용납하는 부류가 아니었다.
진예는 제 침대 옆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는 칼을 쥐고는 천개 사이로 칼집을 찔러 넣어 천개를 밀쳤다. 시야를 환하게 틔운 그녀가 붉은 눈으로 서엽을 응시하며 물었다.
“하여 조 후의 목숨으로 갚겠다?”
서엽이 그 자리에서 즉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어떤 벌을 내리셔도 달게 받겠습니다.”
“이리 가까이 와 보거라.”
서엽이 숨을 꾹 내리누르며 천천히 무릎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씩,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적정 거리를 가늠했다. 그러고 마침내 멈춰 고개를 푹 숙인 채 눈을 감았을 때였다.
“죽어야 할 정도의 죄면, 죽어도 못 갚는 죄인 경우가 대부분이지.”
“…….”
“화친왕 손에 넘어간 연무건이라…….”
진예의 중얼거림 끝에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차아앙!
놀라 눈을 뜨니 제 옆에 깨진 화병의 조각과 꽃이 흩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물이 흘러와 서엽의 무릎께를 적셨다. 서엽은 무릎 위에 올린 손을 꽉 쥐었다. 압박감에 숨도 쉬기가 힘들었다.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진예가 씹어뱉었다.
“최악의 상황이로군. 내 조 후를 믿어 안심하고 있었는데.”
화친왕이 제 예상보다 발이 빠르다고 느끼긴 했지만 연무건까지 이렇게 쉽게 손에 넣을 줄은 몰랐다. 이렇게 되면 셈법이 아주 복잡해졌다.
그녀가 허공을 노려보고 있으니, 서엽이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헤매다가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이대로, 신을 내치셔도 좋습니다.”
서엽의 말에 진예가 시선을 내려 그의 창백해진 얼굴을 살폈다. 저리 말하는 의도야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어차피 다음 기회 따위는 없었다. 지금 당장 화친왕이 연무건을 데리고 입궐한다고 해도 이상한 상황이 아니었고. 하여 서엽은 이대로 끝이라는 뜻으로 말한 것일 터. 하지만 진예가 비웃음을 흘렸다.
“그럼 넌 목을 매달고 죽을 것 아니냐.”
“…….”
“네가 짐의 곁을 떠나서 살 수는 있겠느냐.”
서엽은 고개를 살며시 들어 진예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부정의 말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조서엽이라는 사내는 자신의 곁이 아니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옆에 있으면 가슴 저릴 정도로 아파하면서도, 결코 떠나지를 못했다. 정말로 내쳐서 평생 제 옆에 나타나지 말라고 하면 며칠 뒤 어디선가 주검으로 나타날지도 몰랐다.
그런 스스로를 모르지 않을 서엽이 긴장감에 억눌린 목소리로 물었다.
“……하면 이제 어찌하는 게 좋겠습니까.”
“글쎄, 시간이 좀 필요하겠구나. 명인자라는 게 알려지면 연무건은 이제 죽이지 못할 테니.”
진예의 말에 다시 서엽이 한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바닥을 짚은 손이 떨리는 게 육안으로도 보였다.
제 못난 판단 때문에 일이 틀어졌다고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분명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서엽은 은연중에 그녀를 명인의 속박에서 풀어주고 싶어 하는 마음을 내비쳤었다. 한데 이렇게 일이 꼬였으니 못내 괴로울 터였다.
그러나 진예도, 서엽도 어리석은 운명론자들은 아니었다. 운명 따위, 없다고 늘 부정해 왔던 것들이다. 해서 과거 진예가 폐위되어 곧 죽을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도 서엽은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그녀를 따라나선 것 아니었겠는가. 자신을 지키겠다고.
그렇게 해서 이 자리까지 왔다. 고작 명인 하나에 발목을 잡힌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더하여 서엽과 진예가 다른 점이라면, 진예는 이미 떠난 일에는 미련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후회할 시간이 있으면 화친왕에게 엿을 먹일 계획을 세우는 게 빠르다.
그리 생각하던 진예가 입가를 비틀어 올렸다.
“하지만 다른 본체는 잡을 수 있지 않겠느냐.”
제 명인자인 연무건이 가까이 있다면 오히려 쉬울 수도 있다.
“화친왕을 말입니까?”
묘안이라도 있냐는 듯 반문하는 그의 목소리에 진예는 잠시 먼 곳을 보았다. 머릿속으로 앞을 어찌할지 정리하고 있는데 밖에서 태감이 그녀를 찾았다.
“폐하.”
목소리를 듣고 서엽이 긴장이 묻은 얼굴을 하며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화친왕 전하께서 입궐하셨사옵니다.”
올 것이 왔다.
그 말을 듣고 진예가 상념에서 빠져나와 피곤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서엽의 어깨를 손으로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새벽에 무슨 용건이라더냐.”
진예의 질문이 이어졌으나 대답 대신 잠시 정적이 일었다. 어떻게 전해야 할지 말을 정리하는 듯 보였다.
얼마 안 가 미미하게 당혹감이 서린 태감의 목소리가 답해 왔다.
“폐하의 명인자를 대동하여 왔다고 하옵니다.”
예상했던 범위의 대답이었다.
이렇게까지 왔는데 피하는 것은 정답이 아니었다. 제 명인자를 맞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하며 진예는 걸음을 옮겨 한쪽에 있는 거울 앞으로 갔다.
검은 머리를 늘어뜨리고 가벼운 옷차림을 한 자신의 모습이 맑은 거울에 비쳤다. 그것을 보면서 진예가 태감에게 넌지시 지시했다.
“갈아입을 옷을 가져오너라.”
잠시 후 문이 열리고 곱게 접힌 곤룡포와 가볍게 할 수 있는 머리 장식을 들고 궁인이 들어왔다. 그에 서엽이 나섰다.
“신이 폐하의 시중을 들겠습니다.”
진예가 승낙의 의미로 고개를 한 번 끄덕이자 궁인이 서엽에게 그것들을 넘기고 도로 나갔다.
서엽이 곧 그녀의 뒤에 서서 천천히 진예의 웃옷을 벗겼다. 행여 고운 살결이 제 손에 닿을까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가슴을 가린 속옷이 나오고 어깨가 드러났다. 그리고 이전보다 한층 진해진 연무건의 이름 석 자가 보이는 순간 서엽이 손을 멈칫했다.
그는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이곳에 자신의 이름이 있었다면.
그랬다면…….
거울을 통해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진예가 나직한 목소리로 서엽의 생각을 끊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말거라.”
저도 모르게 손을 멈추고 있던 서엽은 흠칫했다.
“……제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습니까?”
“짐의 어깨를 지져 버리고 싶다는 얼굴이구나.”
그녀의 지적에 서엽의 왼쪽 팔 근육이 움찔 튀었다.
“그럴 리 없습니다.”
진예의 웃음소리가 이어지자 시답지 않은 농담이라는 걸 깨닫고 서엽은 안도하여 옷을 펼쳤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제 생각이 읽힌 것 같아, 금방이라도 깨질 얇은 얼음판 위에 선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진예가 정곡을 찌른 것일지도 몰랐다. 서엽은 그녀의 몸에 새겨진 이 이름 석 자가 원망스러웠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어찌하여 현실은 이토록 잔혹한 것인지.
왜 이런 것을 견디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인지.
차라리 혀 깨물고 죽어 버리고 싶다가도, 그러다 아무도 없는 아침을 맞이할까 두려워하는 자신을 진예는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라면.
연무건이 그들 사이에 나타난 이후로 균형은 깨져 버렸고, 더 이상 마음을 숨길 수 없을 만큼 감정이 범람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서엽이 그녀의 몸에 곤룡포를 걸치고 머리칼을 정리했다.
이제 다른 누구도 아닌, 제 손으로 일궈 놓은 참상을 마주하러 가야 할 때였다.
* * *
비좁고 불편한 가마 안. 무건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이 불편해 연신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가마에 타자마자 황궁으로 향할 거라는 그의 생각은 맞지 않았다. 화친왕은 무건의 몰골이며 옷차림새며 도저히 안 되겠다며 한밤중에 웬 기루로 무건을 데려가더니 겉모습을 꾸며 댔다. 솔직히 어리둥절했지만 딱히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러고 혼자 있은 지 얼마나 됐을까. 아마 한 식경 정도 지난 때인 듯했다. 볼일이 있다며 어디론가 갔던 화친왕 진평이 다시 가마로 돌아왔다. 그는 약간 과장된 듯한 몸짓으로 안으로 들어서며 무건에게 말을 걸어왔다.
“생각보다 얌전히 기다리고 있군.”
진평이 왜인지 재미있어하는 눈웃음을 흘리며 가마의 문을 닫았다. 무건은 딱히 더운 것도 아닌데 옷이 제 목을 조이는 듯해 깃을 잡아당기며 그를 바라보았다.
“황궁에는 언제쯤 도착합니까.”
진평이 이리저리 저 넓은 소맷자락을 휘적휘적 날리며 돌아다니고 나니 벌써 시간이 꽤 지나 달도 은근슬쩍 기울려고 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암살당할 뻔해서 도망친 자를 태우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터였다. 만약에 연막을 치려고 한 것이라면 아주 훌륭한 계책이었겠으나, 아무리 봐도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성질이 급하구나.”
그냥 그 자체가 무척이나 여유로운 사람이었을 뿐이다. 한시라도 빨리 진예를 만나러 가고 싶은 무건과는 대비되는 태도였다.
덕분에 무건은 잠시 대꾸할 말마저 잊었다.
“…….”
“그리 초조해하면 될 것도 안 되는 법이다.”
그의 말대로 무건은 지금 초조했다. 이미 황궁에서 쫓겨난 뒤로 시간이 꽤 지난 데다가, 조서엽이 방해하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무건은 눈앞의 상대가 정말로 자신을 진예에게 데려다줄 생각이 있긴 한지 의심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진평은 무건에게 바라는 게…….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없다고 하였다.
〈……없다고요?〉
〈대신 내가 너에게 해 줄 것은 많이 있는 것 같구나.〉
거기서 머물지 않고 심지어 도와주겠다는 말까지 했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연무건이라는, 평범한 사람을 말이다.
〈황궁에 들어가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라. 내가 너에게 힘을 실어 주겠다.〉
무조건적 호의는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무건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의 셈속이 뭔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건은 진평이 자신을 황궁 안으로 들여보내는 데 일조하는 대신 무언가 요구할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단편적인 상상이긴 하지만 진예의 물건 중 무언가를 가지고 나오라고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한데 진평은 진심인지 아니면 제 속내를 숨기기 위한 연막인지는 모르겠지만 무건에게 심지어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했다. 이유야 당연히 후자일 것이라고 예상하긴 했으나, 무건이 원하는 것을 이룩하는 일이 그에게 어떤 이득이 있는지 무건으로서는 감히 예측하기 어려웠다.
“전하께서는…….”
익숙지 않은 가마의 흔들림을 느끼며 무건이 나직한 목소리를 내자 진평이 고개를 돌려 이쪽에 집중했다.
“제가 원하는 바가 뭔지는 아십니까?”
“글쎄, 누님의 마음을 얻는 것?”
대꾸하는 그의 말을 들으며 무건은 잠시 침묵했다. 폐하가 아니라 ‘누님’. 의심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듣는 입장에서는 그가 일부러 진예와 가까운 척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느껴졌다.
왜 이렇게 위화감이 들까.
지금까지 평범하게 살아온 연무건에게 고민거리란 언제나 생존에 관한 것이었다. 돈을 버는 것, 밥을 굶지 않는 것, 물건을 싸게 사는 것……. 그런 것들. 제 주변인들도 다 같이 고민하는 그런 일.
한데 진예나 조서엽이나 진평이나 모두 다 굳이 그런 고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아마 그들이 원하는 건, 목표하는 건 연무건이 한 번도 탐내 본 적 없는 것들일 터였다. 그렇다 보니 무건은 그들이 속으로 어떻게 주판알을 옮기고 있는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이런 자신을 이용하는 건 어린애 손목 비트는 것보다 쉬운 일일 터.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순식간에 말려들고 말 것이다……. 무건에게도 그런 정도의 자각은 있었다.
하나 이미 말려든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진평이 제가 가장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겠다고 나선 그 시점부터 말이다.
그래서 그는 천천히 입을 떼었다. 지금의 이 선택이 어떤 후폭풍을 일으킬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천 리 밖을 볼 눈 따위는 애초에 없고, 그렇다면 코앞에 있는 것이라도 주워 먹어야 하지 않겠나.
“저는.”
무건의 선택지는 어차피 하나였다.
자신도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 화친왕을 마음껏 이용하면 되었다.
“폐하께 제 가치를 인정받고 싶습니다. 전하께서 그것을 도와주실 겁니까?”
질문이 끝나자 진평이 슬며시 눈동자를 굴려 그를 곁눈질했다. 진평의 검은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무건은 확 괴리감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진예의 눈동자는 아름다운 붉은색이었다. 석류석처럼 안이 투명하게 비쳐서 너무나 아름다운…….
한데 무건의 말에 뜬금없는 반문이 되돌아왔다.
“그럼 내 양자라도 되겠느냐?”
“…….”
무건은 순간적으로 표정을 완전히 무너뜨릴 뻔했다. 양자라니. 무슨 이런 황당한 말이 다 있나 싶었다. 애초에 양자 운운할 만큼 진평과 무건의 나이 차이는 그렇게 커 보이지도 않았다. 무건이 대꾸를 하지 않자 진평이 이내 픽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네 신분으로는 불가능하다는 뜻을 전하고 싶었을 뿐이야.”
“……제 신분으로는.”
무건은 조용히 그가 짚어 준 단어를 제 입 안에서 굴렸다.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긴 했는데, 굳이 지적을 당하니 꽤 얼얼했다. 그런데 제가 말해 놓고 찔렸는지 진평이 한마디 덧붙였다.
“부모를 원망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당연히 무건에게 전혀 위로가 되는 말은 아니었다. 정말로 앞이 막막해졌다. 거대한 벽이 제 앞을 가로막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벽은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전하.”
밖에서 위도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궁에 당도했습니다.”
“문을 열어라.”
진평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가마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들을 맞이한 건 도양이 아닌, 황궁의 입구를 지키는 병사들이었다. 가마 안에 화친왕만이 아니라 다른 이도 있는 것을 보고 인상을 살며시 찌푸렸다. 이놈은 뭐냐는 의미였다.
물론 그 얼굴이 당혹감으로 뒤덮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황제 폐하를 뵈러 왔다. 폐하의 명인자와 함께.”
“……명인자?”
황궁에 들어갔다 나오기는 했지만, 무건의 존재를 알고 있는 이들은 황궁 내의 극히 일부였다. 아니, 애초에 진예에게 명인이 나타났다는 사실조차 생소해할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역시나 상대는 전혀 영문을 몰라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렇다고 친왕이 이토록 태연히 거짓말을 할 가능성 역시 희박했기에 병사는 주위를 둘러보며 다른 이들에게 들은 것 있냐는 눈짓을 보냈다. 그러나 모두들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서둘러 제 옆의 다른 이에게 눈짓했다. 신호를 알아듣고 재빨리 궁문 안으로 상대가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고 진평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가마 밖으로 나가려 했을 때였다. 검집이 벗겨지지 않은 칼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실례지만 기다려 주시지요. 묵칙(황제의 친필 출입증)도 없이 통과하는 것은 어려우십니다.”
잠시 멈칫한 화친왕이지만 그는 병사를 똑바로 보며 눈썹을 슬며시 치켜세웠다.
“본왕에게 무어라 했느냐?”
“실로 명인자인지 알아본 뒤에 열어 드리겠습니다.”
한마디로 못 믿겠으니 대기하고 있으라는 의미였다. 그에 화친왕이 푹 웃었다. 그가 기어이 가마 밖으로 걸어 나가 상대와 마주 보고 섰다.
“알아보고 열어 드리겠다……? 실례라는 것을 알긴 하니 다행이구나. 감히 내가 누군지 모르고 하는 말이냐. 본왕은 황제 폐하의 유일한 핏줄이다. 이 환 제국에 딱 둘 있는 황가의 사람이란 말이다.”
“그렇지만 명인자라는 말씀은 처음 듣습니다.”
“처음 들으니 본왕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냐.”
날카롭게 꼬투리가 잡히자 상대가 한 발짝 물러섰다.
“그런 것이 아니오라.”
“그런 것이 아니라면 앞을 막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냐. 본왕이 황실에 큰 경사를 몰고 왔다는데.”
상대는 제 일에 충실히 하려는 것뿐인데 진평이 억지를 썼다. 게다가 얼굴이 철면이라도 쓴 것인지 뻔뻔하게 상대를 몰아붙였다. 무건의 존재를 ‘경사’라고 격상하면서까지 말이다.
지켜보는 무건은 솔직히 불안했다. 저런 식으로 해도 되는 건가? 당연히 안 될 것이 뻔하게 보이는데 왜 이곳에서 저런 실랑이를 벌이려고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요란하게 들어가는 게 목적인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였다.
“그래, 그것참 아주 큰 경사로구나.”
“……!”
이곳에서 들을 수 있으리라 전혀 생각지 못했던 목소리. 그렇지만 듣는 순간 무건은 두 귀가 번쩍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가 깜짝 놀라 가마 밖을 보았지만 아슬아슬하게 가려 상대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겨우 보이는 옷자락만으로도, 그 끄트머리가 보이는 것만으로도.
“폐하!”
무건의 심장이 쿵쾅 뛰기 시작했다. 게다가 누군가가 그녀의 존재를 확인해 주자 숨도 쉬기 힘들어졌다.
정말로, 정말로 그녀다.
타고 있던 가마가 바닥에 내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진평도 황제가 직접 이곳에 걸음하리라 예상은 하지 못했던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재빨리 가마 밖으로 나가 그녀의 앞에 고개를 숙였다.
“홍복을 누리소서, 황제 폐하.”
진평의 말이 끝나자 다른 이들도 복창하기 시작했다.
“홍복을 누리소서, 폐하.”
“홍복을 누리소서, 황제 폐하!”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아직 멍하니 가마 안에서 완전히 일어선 것도, 앉은 것도 아닌 어설픈 자세로 있던 무건을 화친왕이 슬쩍 곁눈질하며 쳐다보았다. 그제야 무건은 정신을 차리고 가마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깊어진 어둠 속 동그란 등롱을 든 내관들 사이에서 고고하게 서 있는 환 제국의 황제, 진예의 모습이 보였다. 저녁인데도 머리에 관모를 쓰고 그 뒤로 비녀를 꽂아 머리를 깔끔하게 정리한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눈이 멀어 버릴 만큼 아름다웠다.
귓가가 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무건은 제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어떻게 해야 진정시킬 수 있는지 방법을 알지 못했다. 뒤늦게야 가마에서 내려온 것만으로도 이미 큰 무례를 저지른 그는 더 큰 무례를 저지르고 있었다. 목을 뻣뻣하게 세우고, 딱딱하게 굳어 버린 채 뚫어져라 진예를 바라보았다.
붉은 홍등 사이에서 진예의 눈은 더 붉어져 마치 핏빛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무건은 전혀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보석 같은 그녀의 눈에 빠져들었다. 진예의 눈이 금세라도 그를 베어 버릴 듯이 날카롭게 쳐다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주변인들이 무건을 어찌 정신 차리게 해야 하나 몰라 쩔쩔매는 사이, 결국 진예가 먼저 지적을 했다.
“연무건, 너는 짐에게 예를 올릴 생각이 없느냐?”
그러나 무건의 고개가 숙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는 여전히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듯 멍하니 진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황궁 내에서 어느 누구도 입에 담지 않을 낯선 언어로, 진예에게 인사했다.
“돌아왔습니다.”
“…….”
진예의 얇은 눈썹이 들썩거렸다. 무건이 덧붙였다.
“반겨 주시지요.”
“돌아왔습니다.”
“…….”
진예의 얇은 눈썹이 들썩거렸다. 무건이 덧붙였다.
“반겨 주시지요.”
제 것을 맡겨 놓기라도 한 듯한 당당한 요구에 진예는 기가 막혔다.
아직 굽혀지지 않은 뻣뻣한 허리와 똑바로 마주쳐 오는 눈. 다들, 심지어 제 아우마저도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시선을 바로 하지 못하고 있는데 연무건이 뭐라고 이쪽을 똑바로 봐 왔다.
제 신경을 모퉁이에서부터 살살 긁어 먹는 그를 보며 진예는 미간을 슬며시 좁혔다. 그러다 문득 무건의 옷 사이로 비치는 붕대를 발견했다.
부상이라.
연무건을 갖다 버리라고 한 지 벌써 달포쯤은 지났다. 서엽이 읍주에 그를 데려다 놨을 거라는 것은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무건은 그곳에서 무사히 빠져나와 이렇게 제 앞에 두 발로 서 있었다.
다만 멀쩡한 상태는 아니다…….
그래서 화친왕이 제 앞에 갖다 놓는 시기가 이리도 늦은 건가? 그렇다면 정말로 그가 익재들 사이에서, 모종의 방법을 통해 살아 나왔다는 의미인 걸까.
도대체 어떻게?
생각을 이어 가다가 진예는 조금씩 제 눈치를 보기 시작하는 이들의 시선을 느꼈다. 그중 진평이 특히나 진예를 주시하고 있었다. 덕분에 상념에서 단숨에 빠져나왔다.
진예는 턱을 살며시 들어 올려 무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가 바랐던 말을 툭 던져 주었다.
“그래, 제법 반갑구나.”
이건 진심이었다. 적어도 연무건은 제 입장에선 꽤 흥미로운 생명체였으니까.
게다가 그간 제가 분류해 놓은 여러 인간 군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새로운 부류다. 딱히 어떤 악의도 없고, 제 본능에만 충실한 녀석. 그래서 지금까지 써 왔던 방법으로는 도무지 주저앉힐 수 없는 녀석.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저는 돌아올 거라는 약조를 지켰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당…… 폐하의 차례입니다.”
입에 붙질 않은 탓에 무건이 호칭 실수를 할 뻔했지만 다행히 정정했다. 사소한 실수이긴 했으나 진예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어차피 연무건한테 황제의 지위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그런 것을 신경 쓰는 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황궁 안에서는 정치와 법도에 따라 춤을 춰야 하는 법. 자신은 지금부터 그것을 천천히 가르쳐 줘야 했다. 그리하여 저 거친 녀석을 제 손으로 길들여야만 했다.
어차피 명인자라는 이 빌어먹을 운명을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래서 진예는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질문을 다시 한번 꺼냈다.
“그럼 어디 네가 내 발을 핥아 볼 테냐.”
주변이 조용하긴 했지만, 황제의 입에 오른 저급한 말에 어딘지 주위의 기류가 묘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누군가는 숨조차 멈추고 이런 말을 들은 것조차 황송하다는 듯이 고개를 더욱 깊숙하게 묻었다.
눈치 없는 무건도 그것만큼은 제대로 느꼈는지 눈을 굴려 살며시 옆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화친왕 진평과 스치듯이 눈길이 맞았다. 그 순간, 진평이 고개를 살며시 끄덕이는 것이었다. 어서 받아들이지 않고 뭐 하냐는 듯이.
진예도 물론 그 신호를 보았으나 제 말을 거두지는 않았다. 황제는 결코 두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대신 무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진예를 바라본 무건은 그제야 고개를 숙였다. 다음 말엔 잠깐의 머뭇거림이 들어 있었다.
“……기회를 주신다면.”
“주신다면?”
무건이 깊게 호흡했다. 그러더니 곧은 목소리로 답을 이어 갔다.
“폐하를 본 순간부터 제 바람은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음심.
아주 불충할 뿐 아니라 음험하고, 더럽다. 하지만 그런 말을 무건은 너무나 담담하게, 자연스럽게 입에 올렸다. 진예는 크게 웃을 뻔한 것을 겨우 참아 냈다. 그리고 먼저 발을 돌리며 황궁 문을 지키던 병사에게 시선을 향했다.
“저자가 나의 명인자가 맞다.”
그녀의 선언에 주변 이들이 잠시 동요했다.
황제의 명인자.
척 봐도 예법 따위 알지도 못하는 놈이었다. 귀족도 아니고 심지어 관직 하나 받아 본 적도 없는 사내라는 것이 티가 났다. 그러나 황제의 명인자라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황궁 내에 지각 변동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아니, 틀림없이 일어날 터였다.
한데 그 폭풍을, 진예는 짧은 말로 맞았다.
“들여.”
그러고는 제 사람들을 이끌고 먼저 황궁의 문턱을 넘었다.
문 안쪽엔 그답지 않게 얼굴이 하얗게 뜬 조서엽이 있었다. 진예가 안으로 들어서자 서엽이 살며시 몸을 비키며 문밖의 연무건을 확인했다. 진예의 뒷모습을 따르는, 검은 눈동자를 발견한 순간 서엽의 얼굴이 스스로 어찌할 수 없을 만큼 일그러졌다.
그가 몰래 입 안쪽 살을 깨물었다.
‘연무건…….’
황제의 앞이라 당장 칼을 빼 들 수 없는 것이 한스러웠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당장 저 녀석의 경동맥을 썰어 버렸을 텐데.
“조 후.”
갑자기 부르는 목소리에 서엽이 흠칫했다. 진예가 그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예.”
진예는 따라오라는 듯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명령을 읊었다.
“연무건을 짐의 침소로 데려다 놔라.”
“……폐하.”
왜 하필 그런 말씀을 저에게 하십니까? 그런 의미를 담아 서엽이 진예와 눈을 마주쳤다. 하지만 분명히 그 말뜻을 알아들었을 진예는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며 옆의 태감에게도 다른 명을 내렸다.
“목욕을 할 터이니 물을 데워 두라고 일러라.”
서엽의 입술이 떨렸다.
진예가 설마 연무건의 그 황당무계한 바람을 들어줄 생각인 건가?
그의 머릿속에서 끔찍한 상상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냥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타들어 갈 것 같고, 심장이 멎는 기분이었다.
덕분에 깨달았다. 진예는 지금 자신에게 연무건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죄를 묻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조서엽이 가장 끔찍하게 싫어하는 방식으로.
유배를 보내는 것도 아니고, 관직을 박탈하는 것도 아니다. 대신…… 그가 가장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을 남의 손에 쥐여 주려는 척하는 것이었다.
말도 안 된다. 그럴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서엽은 눈앞이 흐려지는 기분이었다. 떨리는 손을 주체할 수가 없어 손마디가 희어질 정도로 제 검을 꽉 쥐었다.
연무건을 제대로 처리 못 한 건 인생 최대의 실수고, 최악의 굴욕이었다. 과거로 돌아가 한심한 자기 자신을 죽여 버리고 싶어졌다.
한데 그런 서엽을 보며 진예가 쐐기를 박았다.
“왜 조 후는 대답하지 않는가. 할 수 없는 것이냐?”
잔인한 사람.
서엽은 마치 목 안에 피가 고인 것처럼 숨이 답답해져 왔다. 그렇지만 늘 그렇듯 진예가 원하는 대답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있습니다.”
안 그러면 그녀에게 완벽하게 버림받을지도 몰랐다. 그것만큼은 절대로 벌어져선 안 되었다.
* * *
젖은 진예의 발이 찰박, 찰박 바닥을 밟았다. 한겨울인 탓에 맨발로 다니기엔 바닥이 차가웠지만 진예는 추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윽고 몸의 물기를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무거운 정무에서 해방되어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작은 비녀를 꽂아 수수하게 마무리한 그녀는 천천히 침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용한 발걸음으로, 그러나 분주하게 황제의 뒤를 따르는 이들 모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근본도 없어 보이는 놈이 황제의 명인자라며 나타났는데, 심지어 황제가 본인 입으로 자신의 명인자가 맞노라 인정을 했다.
게다가 그를 침전에 데려다 놓으라고까지.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그간 진예는 침전에 사내를 들인 일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오로지 서엽에게만 허락된 일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서엽이 그녀에게 성은을 입었다든가 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단지 진예가 그를 신뢰했기에 어디서든 서엽이 들고 오는 안건을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그러니 황제의 침전 안에 든 사내는 분명 연무건이 처음인 것이었다.
모두들 정말로 진예가 오늘 그 사내와 함께 밤을 보낼지 궁금해했다.
어느 사내든 결코 넘볼 수 없을 것만 같은 환 제국의 여제, 진예. 순순히 그에게 무언가를 허락할 리 만무하건만 어찌된 영문인지 무건을 제 방에 대기시겨 놓고 마치 일을 치를 것처럼 목욕재계까지 했다.
게다가 정복을 벗고 가벼운 옷차림을 한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워 보였다. 굳이 황제의 권위가 없어도 그녀는 여성으로서 이미 누구나 탐낼 만큼의 미인이었다.
마침내 침전 안으로 들어선 진예의 발이 멈추지 않고 연무건이 있을 방 앞에 도달했다. 그곳엔 서엽이 대기하는 중이었다.
진예는 그를 힐끗 확인하고는 굳이 물었다.
“나의 명인자는?”
이미 잘 데려다 놓았을 거란 사실을 알면서.
서엽은 고개를 숙여 바닥을 내려다보면서 한 박자 늦게 답했다.
“안에 있습니다. ……드시지요.”
뒷말은 차마 하기 싫었는데 억지로 내뱉은 기색이 역력했다. 알아차렸으면서도 진예는 그를 위로하거나 하지 않았다. 대신 태감에게 문을 열라 눈짓했고.
“황제 폐하 납시오.”
드르륵.
문이 좌우로 열림과 동시에 연무건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넓은 방 안, 사방의 등잔이 은은하게 밝혀져 어둠을 물러나게 한 그곳에 무건이 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는 진예가 양문 사이로 나타나자, 두 눈을 들어 색이 짙은 검은 눈동자로 진예를 응시해 왔다.
분명 서엽도, 다른 이들도 황제 폐하의 옥안을 똑바로 쳐다봐선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을 터인데도.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으면 그것 또한 연무건답지 않다 할 것이었다.
하여 그 모습을 보며 진예는 흡족해져 입꼬리를 올렸다. 그 순간 무건의 입에서 드디어 제대로 된 인사말이 흘러나왔다.
“홍복을 누리소서, 대환 황제 폐하.”
진예는 안쪽으로 발을 성큼 들여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명했다.
“문을 닫고 모두들 전에서 50보 밖으로 물러나라.”
그리고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이 다시 타악, 닫혔다.
둘만 남은 방 안에서 진예가 발을 느릿하게 옮겼다. 얼마 안 가 다른 이들의 발소리마저 끊기고 온전한 고요가 찾아왔을 때, 그녀가 눈을 내리뜬 채 무릎 꿇은 무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긴장을 한 듯 무건이 어깨에 잔뜩 힘을 넣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발이 바닥을 내리누르는 작은 소리와 함께 진예는 독수리가 사냥감을 물기 전 그 위를 빙 돌며 주위를 살피는 것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처음 봤을 때는 이런 식으로 주의를 기울여 보지 않았기 때문에 몰랐는데, 무건의 몸은 제법 잘 다져져 있었다. 어디서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닐 터인데 승모근도 꽤 단단해 보이는 데다, 팔의 근육도 여느 무관 못지않게 발달해 있었다.
생각해 보면 서엽과 나란히 놓았을 때도 오히려 좀 더 커 보이긴 했다. 게다가 제대로 재 보지는 않았지만 눈어림으로는 육 척(약 180센티미터)이 넘는 장신처럼 보였다.
검이나 창 같은 걸 잡으면 꽤나 쓸 만한 놈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허술한 옷 사이로 붕대가 감긴 몸이 비쳤다. 발견하자 진예가 가느다란 손끝으로 지그시 목을 타고 내려가며 옷깃을 밀었다.
“…….”
진예의 체온이 닿는 순간 무건이 잠깐 흠칫하며 큰 숨을 들이켰다. 그러나 저항은 하지 않았다. 그녀의 손길을 거부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내 손가락이 목을 지나 승모근을 타고 어깨로 미끄러져 내려가자, 무건의 몸에서 미미한 떨림이 일어났다. 그러자 진예가 훗, 하며 입가를 끌어 올렸다.
“무엇을 기대하는 게냐.”
무건은 왜인지 농락당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솔직한 감상을 내놓았다. 참을 수 없는 충동이었다.
“폐하의 손길이 정말 기묘합니다.”
수십 마리의 개미가 타고 올라도 이 정도로 간질거리진 않을 터였다. 답을 듣고 진예는 아예 그의 몸 한쪽을 완전히 드러냈다. 햇볕을 많이 받았는지 속살까지도 조금 검게 타 있었다. 그래서인지 더 건강해 보이는 몸이기도 했다.
한데 그런 그의 단단한 몸이 작은 손 아래에서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무건의 표정 또한 긴장한 것이 제대로 느껴질 만큼 굳은 채였다.
입이나 몸이나 둘 다 솔직한 놈.
“여인의 손이 미친 적이 없는 모양이지?”
다음 질문에 무건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제 마음에 품은 여인 또한 당신뿐입니다. 앞으로도…… 그렇겠죠.”
이쯤 되면 사실 무건의 이런 대답은 진예에게도 당연해지긴 하는 것이었다. 맹목, 집념. 이렇게 강한 놈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사실 살면서 그 개인에게 그다지 도움이 되진 않을 터였다. 왜냐하면 하나 외엔 보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그 하나에 흔들리기도 쉽다는 의미이니까.
그리고 진예는 그것을 지금부터 마음껏 이용해 줄 생각이었다. 어떻게 할지는 아주 쉽게 답이 나왔다. 앞으로는 정해진 길을 적절히 밟아 나가기만 하면 됐다. 궤도 이탈의 변수만 줄여 나간다면, 눈앞의 남자를 자신의 종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렇게 하다 보면, 무슨 꿍꿍이인지는 몰라도 이 녀석을 이용해 자신을 어찌하려는 화친왕의 배에 칼을 꽂아 넣을 수도 있으리라.
진예는 그런 미래를 기대하며 무건의 등 뒤에서 걸음을 멈췄다.
“윗옷을 벗고 붕대를 풀거라.”
무건의 목울대가 크게 위로 올라왔다 내려갔다. 침을 한번 삼켰다가 깊은 숨을 내뱉은 그가 상의를 탈의하고 붕대의 매듭을 풀었다.
아직 내상이 완전히 낫지 않은 탓에 부담이 되긴 했지만 그녀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그래도 진예에게 안 좋은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기에 붕대를 풀면서 혹시나 제 몸에 흉터 같은 게 돋보이지 않을까 걱정했던 무건은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겉으로 보기에 상체는 멀쩡했다. 읍주에서 손목의 밧줄을 푸는 중에 베인 오른쪽 손목엔 깊은 자상이 남아 있었지만 그렇게 눈길이 가는 곳은 아니니 제 기준으로는 몸에 난 것보다는 나아 보였다.
스르륵. 가슴 아래쪽에서부터 복부에 둘러져 있던 붕대가 흩어져 바닥에 떨어졌다. 이내 깨끗한 상체를 드러낸 무건은 다음 명을 기다리기보다는 먼저 물었다.
“이젠 뭘 할까요?”
솔직히 말하면 초조함 때문이었다. 이대로 빨리 진예를 품에 껴안고 싶었다. 그녀의 체향에 금세라도 미쳐 버릴 것 같았기에.
물론 그것은 진예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진예는 그가 어떤 심경인지 능히 예측하면서도 무건의 그리 깊지 못한 인내심을 시험했다. 다른 것으로 화제를 돌린 것이다.
“궁금한 게 있다. 익재들 사이에선 어찌 살아났느냐.”
“……방법이 궁금하신 것입니까, 아니면 제가 살아남은 것에 의구심을 표하시는 것입니까.”
“둘 다라면, 어떤 대답을 할 거지?”
무건은 대답을 고민했다. 대답 여하에 따라서 자신의 가치가 결정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떤 미사여구도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이 살아 나온 이유와 방법은 역시 한 가지로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기연을 얻었습니다.”
“기연…….”
무건의 말을 받아 제 입에서 굴린 진예는 왜인지 안 좋은 느낌이 들었다.
당연히 그 정도의 것이 아니라면 연무건이 살 수 없으리라고 생각은 했지만, 막상 대답을 듣고 나니 영 꺼림칙해졌다.
익재들 사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만한 기연.
진예의 붉은 눈동자에 그림자가 드리우며 색이 짙어졌다. 기분 탓일지 모르겠지만 명인이 새겨진 어깨가 뻐근해지는 것만 같았다. 지금 그곳은 누가 인두로 지지기라도 한 것처럼 연무건의 이름 석 자가 아주 깊게 박혀 있었다. 뼈에라도 새길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명인이 그토록 진해진 것은, 제 짐작이 맞는다면 무건이 읍주에 도착했으리라 예상된 그 무렵이었다.
이 불길한 예감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진예는 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다.
“무슨 기연이냐.”
드물게 당황한 감정을 숨기고.
“어떤 능력인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감히 짐에게 숨기려 하지 말아라.”
무건이 이 정도까지 다 드러내야 하나 순간 고민했으나 진예가 적절하게 끼어들었다. 무건은 하는 수 없이 제가 표현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말을 전했다.
“익재가 타 죽었습니다.”
“…….”
진예는 이 순간, 제가 무건의 뒤에 서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표정 관리가 잘 안 된 탓이었다.
익재가 타 죽는다.
진예는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게 명인자를 없애려는 데 대한 신의 대답인가?
아주 집요해서,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명인의 속박. 그 속에서 간혹 일어나는 동조 현상이라는 것이 있었다. 본래 각인을 한 이들 사이에서 필수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나 간혹 각인 없이도 발생하기도 했다.
동조 현상이란 본질적으로는 명인자의 어떤 부분을 그대로 복사하듯이 가져가게 되는 현상을 뜻하는 말이었다. 사실 그건 일상에선 그리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진 않았다. 대부분 그냥 입맛이 똑같아진다든가, 생활 습관 정도가 같아지는 수준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간혹 불치의 병을 같이 앓는다든가, 생식 기능이 달라진다든가 하는 돌이킬 수 없는 부작용도 일어나긴 했지만…… 일반적인 경우에는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다만.
“그래서 익재를 모두 다 죽여서 빠져나왔다?”
기실 익재를 한 마리만 죽이는 것도 일반인들에게는 어려운 것이었다. 그래서 나라에서 끊임없이 많은 재원을 투입해 익재와 전쟁을 치르는 것이고.
그리고 그 전쟁을 가장 잘 치러 내는 것은 환 제국이었다.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진예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건 아니고…….”
“그럼?”
진예는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다행히 무건은 그녀의 추궁에 다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직 제가 겪은 것이 동조 현상이라고는 짐작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악신을 등지고 있는 익재가 절 읍주 밖으로 밀어냈습니다.”
결론은 별거 아니었지만 진예의 표정은 굳었다.
그의 설명으로 명확해졌다. 그들 사이에 동조 현상이 일어났다.
왜냐하면 익재를 태워 죽이는 능력은 본래 오래전 진예가 얻은 기연이었기 때문이다.
황태자 시절, 제 아비가 마침내 눈엣가시였던 자신을 유배 보냈을 때 익재들이 습격해 왔었다. 그리고 죽기 직전, 진예는 예의 능력을 얻어 익재들을 도륙하고 그대로 황도로 들어와 황위까지 찬탈했다.
진예로서는 그야말로 제 인생의 변곡점을 가져다준 기연이었다. 한데 그것을 연무건도 얻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말이다.
동조 현상은 그 자체로 보면 별거 아니었지만, 명인자들 사이에서 그것이 가지는 의미가 깊은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대답이 됐습니까?”
연무건이 문득 고개를 들어 진예를 보았다. 진예는 얼른 표정을 숨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그러나 속은 복잡해졌다.
이 녀석은 운을 타고난 건가……?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들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의 사내와 각인만 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동조 현상에 따른 부수적인 것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명인자들끼리 수명이 같아진다는 점이었다.
다시 말해, 진예가 더는 연무건을 죽일 수 없다는 의미였다.
이것은 그녀로서도 예상치 못한 범위였다.
명인의 저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다행히 연무건은 그 사실을 아직 짐작지 못하고 있는 듯했지만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리고 방금 전 진예의 인생에서 가장 거슬리는 인물로 떠오른 무건이 제 성미를 오래 참지 못하고 도발을 해 왔다.
“그럼 이제 제 쓸모가 어느 정도 증명은 된 겁니까?”
“네 쓸모?”
무건이 바닥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순식간에 눈높이가 높아진 그가 진예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저번에 그랬죠. 읍주에서 살아 나오면 쓸모를 조금은 인정해 주겠다.”
과연 진예 제가 말했던 표현에서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 진예는 입을 다물었다. 무건이 한 발짝 더 가까이 진예에게 다가오며 물었다.
“조금 인정해 주는 것에 대한 포상은 없습니까.”
이제 둘 사이는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아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가까워졌다. 진예는 그가 살며시 고개를 기울이는 것을 담담히 바라보며 그의 날뛰는 이성을 진정시키려 했다.
“……연무건.”
그러나 소용없었다.
“안아도 될까요.”
무건의 말은 질문이 아니었다. 그는 대답도 듣지 않고 그대로 진예를 두 팔에 가둬 버렸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진예도 순간적으로 놀랐지만 이내 표정을 가라앉히고 가만히 있었다.
이 녀석이 어디까지 갈 것이고, 어떤 헛소리를 할 것인지. 두 가지가 궁금했다.
진예의 몸이 제 품에 들어오자 무건은 온몸을 떨었다. 제 생각보다 훨씬 더 가녀린 몸에 놀랐기 때문이었다. 단단해 보이는 표정과 곧고 당당한 자세 때문에 한없이 커 보이는 그녀였는데, 실상은 아니었다.
무건은 진예의 둥그런 어깨를 제 손으로 감싸며 그녀를 더 깊은 품속으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진예의 귓가에 연무건의 심장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가만히 서 있는 사람의 것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고동 소리가 크고 깊었다. 조금도 변화가 없는 진예의 것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었다.
곧 그 떨리는 몸처럼 긴장감 어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런 가녀린 몸으로, 어찌 대환의 황제 자리에 계십니까.”
그에 진예가 불쾌해하는 말투로 내뱉었다.
“네놈이 지금 짐이 여인이라 모욕하는 것인가.”
무건은 아차 했다. 그런 의미는 전혀 아니었다.
“아니요. 대단하여서 그렇습니다. 정말로 대단하여서.”
그녀에게는 황제의 자리보다 더 걸맞은 자리는 없을 터였다. 무건이 인생을 통틀어 본 그 어떤 여인보다도 진예는 아름다운 동시에 기품 있었고, 압도적인 위엄을 지닌 이였다.
무건의 대답을 들은 진예는 이내 그를 밀쳐 냈다. 떨어진 무건은 그러나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 다음엔 허락을 기다리겠다는 양 얌전히 있었다. 진예가 미간을 슬며시 좁혔다.
“겨우 살아서 돌아온 것 정도로 정말로 네가 뭐라도 됐다고 생각하느냐?”
진예가 일침을 가했으나 무건에게는 그다지 타격이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방금 전까지는 손이 닿는 것만으로도 몸을 떨 만큼 잔뜩 긴장했으면서, 눈을 피하지도 않고 대꾸했다.
“하지만 이 방에 들인 것도 폐하의 뜻 아니었습니까?”
뚫린 입으로 잘도 지껄이는 놈이었다. 딱히 사람을 현혹하는 거짓을 입에 올리는 녀석도 아니니 거리낄 게 없어 당당했다. 문제는 단 하나도 진예의 마음에 드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긴 했지만.
단어 하나까지 조심스럽게 선택해야 하는 황궁에서의 언어와는 다른 것을 구사하는 무건이, 진예는 진실로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진예도 이번에는 일단 연무건의 위치를 깨닫게 해 주기로 했다.
그녀가 무건을 노려보면서 가지런한 손가락을 모아 몰래 주먹 쥐었다.
“그렇다. 그러니.”
그녀의 말이 시작됨과 동시에 무건이 숨을 훅 들이켰다.
“……!”
예고 없이 배 부근에 가해진 타격 때문에 숨이 컥 막힌 탓이었다. 힘 자체가 세기도 했지만, 부상이 아직 다 낫지 않은 터라 순간적으로 무건의 몸이 힘없이 꺾여 버렸다.
그 틈을 타 진예가 제 다리로 무건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목표한 곳에 정확하게 타격이 되면서 윽, 하는 소리와 함께 무건이 저도 모르게 바닥에 주저앉았다.
쿵, 하고 무릎을 바닥에 찧은 무건이 입술을 물었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팠다. 그러나 여기서 아프다고 칭얼거려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그도 알았다.
무건이 이를 악물며 고통을 내리누르고 있는데, 위로 냉혹한 음성이 떨어졌다.
“이제부턴 감히 짐을 내려다보지 마라. 허락하는 건 여기까지다.”
“…….”
그 말 한마디에 무건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녀의 가지런한 발만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는 불합리한 것이었다.
“……계속 이 상태로만 있어야 합니까?”
얼굴을 보고 싶었다. 바로 앞에 있는데 보지 못하니 심장이 쥐어 짜이는 기분이 들었다. 제 스스로도 진예에게 이토록 집착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 감정은 진짜였다.
이미 황궁으로 되돌아오기까지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한데 정작 그녀를 앞에 두고도 계속 참을 인 자를 새겨야 한다니.
내가 당신의 명인자라고, 그만 인정하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다. 하지만 진예가 싫어할 것을 알고, 또 그런 말을 입에 올렸다가는 언제 쫓겨날지 모르니 참고 있는 것뿐이었다. 다만 언제까지 참아야 하는지 기약이 없으니 무건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한데.
“정녕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듣는 것이냐.”
진예가 반문했다. 그리고 무건의 눈앞에, 진예의 허리를 조이고 있던 띠가 풀려 스르륵 흘러내렸다. 곧 가녀린 발목을 가리고 있던 옷이 살며시 느슨해지며 종아리의 윤곽이 드러났다.
쿵, 쿵, 쿵…….
무건은 제 가슴을 북으로 삼아 누군가 쿵쾅 두드리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내 진예의 다리가 살며시 굽혀지는 게 보였다. 무릎이 제 눈앞까지 떨어지자, 진예의 얼굴을 그토록 보길 원하던 무건이 저절로 고개를 더 깊숙이 숙였다. 그러나 진예의 손가락이 그의 턱 밑으로 들어오더니, 그의 시선을 가볍게 위로 올렸다.
곧 진예와 눈이 마주쳤다. 홍옥처럼 매끈해 보이는 그녀의 눈이, 검은 동공이 무건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순진하게 굳어 있는 그를 보면서 진예가 작게 속삭였다.
“상대가 누구든, 제 뜻대로 짐을 차지할 수 있는 이는 없어. 짐이 그자를 차지하는 것이지.”
사근사근한 목소리였지만 둘만 있는 고요한 방이라 유난히 선명하게 귀에 꽂혀 들어갔다. 조금 늦게 그녀의 말뜻을 알아들은 무건의 눈이 흔들렸다.
“진예…….”
지금 이 순간 그의 눈엔 오롯이 진예만 담겼다. 맑은 눈에 비치는 제 모습을 들여다보며 진예가 그의 턱을 붙잡은 채 이리저리 돌렸다.
화친왕이 데리고 있는 동안 관리를 잘해 주었던지 턱도 수염을 깔끔하게 정리했고, 어디 딱히 흠결도 없었다. 이마는 넓고, 순진해 보이는 눈은 동그랗고 컸다. 코는 어디 하나 비틀어진 데 없는 데다, 광대 역시 많이 튀어나오지도 않고 밋밋하지도 않았다.
뜯어보니 제법 수려한 이목구비였다. 그리고 단단한 몸. 아무렇게나 굴러먹은 놈치고는 균형이 잘 잡혀 있었다. 잘만 꾸며 놓으면 제대로 된 물건이 되긴 할 터였다.
품평하듯 그의 온몸을 쭉 살핀 진예가 입술을 위로 휘었다.
“다행히 봐줄 만하게는 생겼구나.”
무건은 다행이라는 듯 가슴을 가라앉혔다. 다시 진예를 끌어안고 싶어 움찔거리는 손을 그는 겨우 억제했다. 진예는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화친왕이 이런 순진한 녀석에게 무얼 명했고, 어떻게 이용할 속셈일까.
그러나 동조 현상까지 일어난 마당에 그를 길바닥에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법이었다. 차라리 옆에 두는 것이 옳았고, 어차피 옆에 둘 거라면 저를 절대로 거역 못 하도록 해야 했다.
진예는 그것을 이룰 가장 손쉬운 방법을 알았다.
그녀가 무건의 목을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돌아왔으니 약속대로 성은을 내려 주지. 널 내 후궁으로 삼겠다.”
무건이 예상치 못한 후궁이라는 말에 멍하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게 뭔지 모르는 것은 아닐 테지만, 자신과 이어지리라 상상한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진예는 황제를 갖고 싶다 하면서 이런 것도 예상 못 한 그가 재미있어 쿡 웃어 버렸다. 여러모로 웃기는 놈이었다.
“첩지는 뭐가 낫겠느냐. 연 미인?”
좀 더 놀려 주니 무건의 얼굴이 미약하게 붉어졌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다가 약간의 주저함을 담아 대답했다.
“아무래도 상관…… 없습니다. 당신 곁에 있을 수만 있으면. 단지.”
“말해 보거라.”
“폐하의 후궁은 몇 명입니까?”
진예는 순간 참지 못하고 크게 웃어 버렸다. 이건 정말 물건이었다. 제 옆에 광대가 있어도 이 정도로 쉴 새 없이 웃기지는 못할 터인데 연무건은 그걸 해냈다.
진예가 소리 내어 웃으니 질문한 무건도 민망해졌는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덩치도 큰 녀석인데 순수한 소동물 같은 표정을 짓고 있으니 보면 볼수록 재미가 있었다.
“아직 없다.”
대답을 듣고 금세 표정이 환해지는 것도 그렇고.
“하면 약조해 주실 수 있습니까. 아무도 들이지 않겠다고?”
제 저급한 욕망을 곧바로 입으로 옮길 수 있는 용기도 대단하다 할 만했다.
진예는 무건을 지그시 보며 손끝으로 그의 가슴을 쓸었다. 민감한 부위를 간질이며 지나가자 무건의 가슴이 움찔하며 목 부근이 발개졌다. 제 놈 딴에는 필사적으로 욕망을 누르고 또 누르는 중이라는 게 보였다.
그러나 참 욕심도 많은 인간이 아닌가. 각인도 해 달라고 하질 않나, 유일한 후궁이 되고 싶다고 하질 않나.
제가 내줄 것은 하나도 없으면서.
“그럼 연무건, 넌 짐에게 무얼 약조할 테냐.”
그게 무건의 최대 약점이었다. 다만 무건은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는 눈치를 보다가 제 가슴 위에 올라온 진예의 손 위에 제 손을 덮더니, 이내 꽉 쥐었다. 그러고는 제 얼굴 쪽으로 끌어당겨 살며시 손바닥에 제 볼을 갖다 댔다.
진예의 체온이 닿자 그가 눈을 지그시 감으며 다짐했다.
“원하시는 제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무얼 시키시든 전부, 하겠습니다.”
손바닥에 무건의 입술이 스쳤다. 한데 찰나에 닿아 오는 뜨거운 체온이, 잠시간 머물다 간 그 간지러운 감각이 진예의 마음 어딘가를 자극했다.
어째서인지는 모른다. 이 자극이 무얼 의미하는 것인지도 잘 알지 못하겠고.
그러나 덕분에 이 녀석은 어디까지 진심인지 알고 싶어졌다.
그가 지껄이고 있는 대로 정말로 모든 걸, 그러니까 그의 남은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짐이 그리 정의롭거나 순수하지는 않을 터인데?”
“알고 있습니다.”
한데 무건이 어떤 주저함도 없이 대답해 왔다. 게다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그럴 리 없다고 서투르게 부정하거나 하지도 않았다.
“저에게 괴물이 돼라 하셔도, 그리할 겁니다.”
의외로 맥을 제대로 짚었다.
한 번도 치열한 정치판을 경험해 본 적 없을 터인데, 겨우 생존은 가능한 정도의 눈치는 있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동물적인 본능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덕분에 진예도 약간은 안심했다.
“그래, 그럼 무건아.”
제가 생각한 계획에 변수는 없을 터였다.
“날 벗겨 보련.”
이 관계를 휘두를 패는 자신이 쥐고 있었다.
무건이 잡고 있던 진예의 손을 당겨 제 목뒤에 두르게 했다.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허리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얇은 옷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몸이 붙었다. 무건은 그녀의 귀에 대고서 나직하게 속삭였다.
“허락, 하신 겁니다.”
긴장한 게 역력하게 드러나는 어투였다. 진예는 여유롭게 그의 머리카락을 제 손가락 사이에 잡고 뒤로 잡아당겼다. 무건의 검은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그녀가 물었다.
“자신이 없나 보지?”
무건은 잠깐 흔들렸지만 이내 그녀의 허리에 두른 팔에 힘을 넣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닙니다.”
더운 숨을 흘리는 입술이 진예의 목에 닿았다. 그는 거칠어지려는 숨은 간신히 억눌렀지만 목소리에서는 흥분감을 완전히 감추지 못했다.
“멈추지 못할 것 같아요.”
“안 멈추면 되는 것이지.”
진예가 부추기는 말을 하자 무건은 주체하지 못하고 그녀의 다리를 휩쓸면서 올라갔다. 두 사람의 체온이 얽혔다. 하체를 타고 올라오는 느낌에 진예가 고개를 젖히자 무건의 입술이 따라오며 그녀의 여린 살결을 입술로 지분댔다.
그러나 무건은 말과 달리 여전히 주저하고 마지막 남은 선은 넘지 않았다. 그에 진예가 제 몸에 닿은 무건의 손을 잡으며 그를 다그쳤다.
“성은을 내리겠다고 했다. 무슨 뜻인지 모르느냐?”
무건은 더 깊숙이 다가오라는 진예의 손길을 따라가며 물었다.
“무슨, 뜻입니까?”
아무래도 성은의 의미가 뭔지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조금 어처구니없어졌지만 진예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저 많은 걸 가르쳐야겠다, 이 정도의 감상을 속으로 읊으며 그에게 더 분명하게 제 뜻을 전했다.
“내 앞에서 사내가 되는 걸 허한다.”
무건이 마침내 한숨을 토했다.
그가 눈을 꽉 감더니 진예를 안은 채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허락한다면 당장 이 자세로 그녀를 탐하고 싶었을 정도로 마음은 급했지만, 걸음은 천천히 옮겼다. 혹시나 그녀를 소중히 대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기 싫었다.
무건은 단전에서 뭉치는 뜨거운 기운을 내리누르며 침대로 걸어가, 진예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진예의 몸에서 천천히 한 꺼풀씩 흘러내리게 했다. 정복을 입었을 때는 이 안에 어떤 것이 숨어 있을지 짐작도 되지 않았는데, 이미 허리끈을 풀고 다리를 드러낸 그녀의 몸은 허술했다.
그 허술함에 이끌려 무건은 천천히 진예를 파헤쳐 냈고, 진예는 어서 오라는 듯이 적극적으로 제 몸을 드러내고는 단단한 몸에 제 몸을 얽었다.
“폐하, 진예…….”
커다란 손이 진예의 쇄골 밑 부드러운 둔덕을 어루만졌다. 진예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은 범접할 수 없는 경이로운 것을 들여다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것을 곧 제 손으로 흐트러뜨린다는 생각에 머리를 뒤흔드는 흥분이 솟았다.
진예의 옷가지가 침대 밑으로 툭툭 떨어졌다. 완전히 드러난 나신 위로 무건의 입이 닿았다. 무건이 입술을 움직이자 이내 진예의 잇새로 살며시 신음이 흘렀다.
“흣.”
여체의 몸이 휘며 고혹적인 곡선을 그리자 무건은 그녀의 몸 곳곳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진예도 그에 응해 무건의 허벅지 위에 올라가며 팔을 목에 둘렀다. 그러자마자 무건은 목울음을 울리며 그녀를 밀어붙였다.
“눈이, 눈이 부십니다.”
둔탁한 감각이 덮쳐 오자 진예도 순간적으로 참지 못하고 숨을 들이켰다. 무건은 그녀의 몸에 제 얼굴을 깊숙이 묻으며 거칠게 성대를 긁었다.
“이 몸의 전부를, 저한테 주십시오. 남김없이, 모든 걸.”
중얼거린 그가 이내 가녀린 몸을 제 위로 끌어 올리며 그녀를 숭앙하듯이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저 짐승처럼 제 본능을 좇아 몸을 움직였다. 얇은 허리가 그의 품 안에서 휘청였고, 부드러운 곡선이 제 앞에서 튕겨 올랐다.
두 사람의 무거운 숨과 높은 신음이 교차하며 침전을 어지럽혔다. 50보 밖으로 물러나 있는 이들 역시 그들의 은밀한 방사를 알아차릴 만큼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그저 환 제국의 황제의 명인자가 그녀의 첫 남자가 된 것에 경의를 표할 뿐이었다.
단 한 사람, 조서엽만 제외하고.
* * *
침전 창문에 차가운 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래간만에 해가 뜰 때까지 잠들어 있던 진예는 귓가에 닿아 오는 거슬리는 소리에 눈꺼풀을 천천히 열었다.
아직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눈이 옆자리를 훑었으나 비어 있었다. 그러나 아쉬워하거나 당황하는 기색 없이 그녀는 몸을 일으킨 뒤 바닥에 떨어진 제 옷을 챙겨 걸쳤다. 그러다 허리에 손이 감겨 오는 것에 미간을 좁혔다.
말할 것도 없이 연무건의 손이었다. 그가 진예를 도로 눕히려 뒤로 당겼다.
“피곤하지 않습니까. 조금만 더 있어요.”
그러나 진예는 무건의 손을 탁 쳐 냈다. 자꾸만 무건이 제 주제를 모르고 툭툭 하는 행동들이 거슬리기 그지없었다. 분명 그들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얘기해 줬는데, 못 알아들은 것 같았다. 혹은 알아들을 의지가 없거나. 아니면 아는데도 딱히 신경 쓰지 않거나. 아마도 세 번째가 가장 유력할 터였다.
진예는 이 제멋대로인 놈을 길들이는 길이 까마득해 보였다.
설마 눈앞의 이 단순해 보이는 녀석이 궁중에서 일어나는 치열한 정치 싸움의 한복판에서 판도를 쥐고 흔드는 일 같을 걸 할 수는 없겠지만, 무건을 손수 이곳에 들여놓은 화친왕 진평은 달랐다.
토끼가 아무리 깡충깡충 뛰어 봤자 영리한 여우에게는 잡아먹히듯, 이런 놈 따위는 진평이 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손쉽게 이용할 수 있을 터.
너무 휘둘리기 전에, 제가 먼저 이 녀석을 휘두를 수 있도록 목줄을 단단히 잠가 놔야 했다.
그러기 위한 최선은 녀석이 절대 거부할 수 없는 먹이를 던져 주는 것, 그리고 이쪽이 어쨌든 제 우위에 있다는 걸 계속 상기해 주는 것뿐이었다.
“짐의 허락이 있기 전엔 손대지 마라.”
성질대로였으면 어차피 딱히 쓸모없는 손일 테니 잘라 버릴 수도 있었다. 그 경고의 의미를 알아채긴 했는지 무건이 결국 손을 물렸다. 대신 몸을 살짝 일으키며 진예에게 반항하듯이 물었다.
“이제 저희는 무슨 관계입니까?”
애초에 ‘저희’라고 묶이는 것 자체가 기분이 상하는 부분이다. 진예는 고운 미간을 슬며시 찌푸렸다.
“꼭 무언가로 정의해야만 하느냐?”
기실 진예는 딱히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부류는 전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스스로의 힘으로 이미 정점에 올라섰다. 그녀에게 황위를 지키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다.
그런데 눈엣가시 같은 눈앞의 남자는 그것을 위협하는 자였다.
“……정의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절 내칠 것 아닙니까.”
게다가 이런 면을 보면 또 주제 파악을 아예 못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아직 몰랐다.
연무건은 이제 빼내지 못하는 가시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옆에 두어야만 하는 녀석이 됐다.
비록 무건이 원하는 형태는 아닐 테지만 진예와 무언가 ‘관계’가 생기긴 생긴 셈이었다. 아직 스스로는 자각을 못 하고 있는 덕에, 그를 빌미로 귀찮게 굴진 않을 터이니 진예로서는 다행한 일이었고.
진예는 몸에 걸친 옷을 정돈하고 허리의 끈을 둘렀다. 그러고 무건의 시선을 피하려 했지만 여전히 무건은 진예의 손길 하나하나 꼼꼼하게 좇았다. 허리끈을 제가 대신 묶어 주기라도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진예는 아예 몸을 돌려 그의 시야를 등지고 무관심한 척 말을 던졌다.
“앞으로 네게 가르침을 줄 사부를 붙여 주겠다. 우선 그 천박한 말투부터 고치거라.”
가볍게 말했지만 황궁 사부의 존재는 단순히 지식을 가르치는 데 머무는 정도가 아니었다. 혹독한 교육에 제아무리 저리 당당한 무건이라도 나가떨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당연히 그런 것 따위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는 무건은 다른 데 초점을 맞췄다.
“그건 절 쫓아내지는 않겠다는 말로 들립니다.”
진예는 끈을 정리하고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하지 않았느냐, 널 내 후궁으로 삼겠다고. 너에게 첩지를 내릴 것이다.”
실은 제일 하위인 미인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어차피 후궁을 앞으로도 만들지 않을 계획이니 더 가까운 데에 두어도 큰 문제는 없지 않을까.
하여 진예가 그에게 내릴 첩지는 그보다 좀 더 높은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의 명인자인데, 아무렇게나 굴려 먹을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다만 이번에도 무건은 떡고물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럼 계속 황궁에 있을 수 있는 겁니까?”
오로지 진예의 옆에 있는 것만이 그의 인생 목표라는 듯.
아니, 인생 목표가 맞긴 한가……. 이렇게 제 목숨까지 바쳐 집요하게 찾아온 것을 보면 그쯤 되지 않고서야 설명할 길이 없었다.
“아니.”
그러나 진예가 단호하게 자르자 무건은 실망했는지 반응하는 데 잠시 사이를 뒀다. 반 박자 늦게 그가 되물었다.
“……그럼?”
“황궁의 동쪽에 발길이 끊긴 폐궁이 하나 있다. 그걸 너에게 내리지.”
폐궁이라고 하나 그렇게 오래 방치된 곳은 아니었다.
그래 봬도 선대 황후였던 진예의 어미가 황태자비로 들어와 처음 하사받은 궁이었다. 그런 걸 생각하면 비교적 최근까지 쓰였다고 하는 게 옳았다. 황도에는 그보다 더 오래 방치되어, 정말로 거미줄이 잔뜩 쳐져 있는 폐궁도 많았다.
진예는 제위에 오르고 5년간 후궁을 전혀 두지 않았기에, 아랫도리가 방탕하고 놀기 좋아했던 선대 황제들이 만들어 둔 그 모든 궁을 쓸 일이 없었다.
그러나.
“그럼 절 자주 찾아 주실 겁니까? 아니면 제가 보고 싶을 때 여기로 찾아올 수 있는 겁니까?”
연무건의 질문에 대한 답은 당연히 ‘아니.’였다.
하지만 진예는 굳이 답을 내주지 않고 그를 힐끗한 뒤 옷을 모두 걸쳤다. 그러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하체 쪽으로 약간의 불편감이 느껴졌다. 살짝 따끔하기도 하고,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생전 처음 느껴 보는 불쾌감이었다. 그에 진예가 멈칫한 뒤로 움직이지 않자 뒤에서 눈치 보던 무건이 문득 침대보에 남은 붉은 흔적을 발견하고는 입술을 꾹 닫았다. 그러고는 진예가 딱히 무어라 한 것도 아닌데 알아서 벌떡 일어나 제 옷을 챙겨 입었다.
“…….”
그동안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무건은 저절로 깨닫게 되었다.
제가 진정한 진예의 첫 사내임을.
처음.
진예랑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지만 그래서 더 무건은 감개에 휩싸였다. 하나 진예에게 굳이 그 부분을 지적해서 제 죽음을 재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에 소중하게 품은 나비가 주책맞게 팔랑팔랑 다시 날갯짓을 하며 속을 간질였다. 무건은 작게 뛰는 심장을 억누르면서 진예의 옆에 발을 디디며 섰다. 아무리 배운 게 없기로서니 어머니나 동네 어르신들 눈칫밥 먹은 세월은 길었는지라 무건은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누굴 부르면 됩니까.”
진예가 눈을 싹 치켜올렸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뜻이었다. 그에 무건이 빙그레 웃기만 하자 진예는 더 따지지 않고 고갯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태감을 불러와라. 내 명할 것이 있다고.”
무건이 문을 열고 나간 뒤 진예는 도로 침대 위에 앉았다.
오랜만에 긴 시간 자서 그런가, 정신이 맑았다. 몸이 조금 불편한 게 거슬릴 뿐이었다.
간밤에 무건이 혹시나 각인을 하자고 하면 어떻게 동조 현상을 풀고 도로 죽여 버릴까 궁리했을 텐데, 다행히 그는 더 우기지 않았다. 제 놈도 감이라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한번 죽을 뻔해서 그런지, 건방지게 굴면서 미묘하게 마지막 선만큼은 넘지 않았다.
“…….”
아니, 사실 이미 많이 봐주고 있다.
다시 황궁 앞에 나타났을 때 그의 목을 베지 않은 게 그 증거였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보고 있었어도, 설령 화친왕이 그를 데리고 나타났다고 하여도 명인자가 아니라고 모르는 척 목을 베어 버렸으면 그만이었다. 실상 그렇게 했으면 자신 또한 이미 산목숨은 아니었겠다만…….
그런데.
〈반겨 주시지요.〉
연무건이 돌아왔다는 말을 한 그 순간 그럴 마음이 식어 버렸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돌이켜 보니 그다지 좋지 않은 현상이었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그사이 어젯밤 침전 밖으로 쫓겨났던 태감이 안으로 들었다. 돌아온 무건은 도로 문을 열고 방 앞에 서성이고 있었다.
태감이 들어오지 않는 것을 불편해하는 것인지, 진예가 아직 옷을 완전히 갖추지 않고 흐트러진 모습으로 있어서 신경 쓰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무건은 문턱에 어설프게 걸쳐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흰 털로 뒤덮인 커다란 개 같기도 했다. 멍청해 보였다는 의미다.
진예는 그의 상태를 무시하고 문에 살며시 비치는 태감의 그림자를 보며 말했다.
“태감은 짐의 명을 받아 적으라.”
단순히 말만 전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태감이 침묵하더니,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다시 나타났다. 옆에 누군가를 대동한 채였다. 곧이어 그의 응답이 돌아왔다.
“하명하시옵소서.”
“짐의 명인자인 연무건을 숙의에 임하며.”
제 이름이 진예의 입술을 통해 흘러나오자 무건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확인했다. 그의 눈에 어떤 희망이 비쳤다. 진예의 눈에는 아주 헛된.
그러나 이것은 앞으로 황궁 정치의 판도를 바꿔 둘 것이다. 후궁 책봉은 진예의 치세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고, 누구도 대처하지 못할 터이다.
말하자면 진예 역시 도박을 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높은 위험이 따르는 만큼 많은 보상이 있을 터.
최소한 화친왕의 목을 가져올 생각이었다. 자신을 위해 괴물이 되겠다는 저 순진한 사내의 손을 더럽혀서.
“융경궁을 하사한다.”
아주 짧게, 틈을 두었으나 태감의 희미한 그림자가 이내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명을 받드옵니다.”
“공표하거라.”
“송구하오나 숙의마마…… 는 어찌하면 좋겠사옵니까.”
환 제국 역사상 남자 후궁은 처음이라 경험 많은 태감조차 호칭을 어색해하는 듯했다.
“융경궁으로 바로 들이라.”
“그리하겠사옵니다.”
진예가 고갯짓으로 무건에게 그만 나가라는 의사를 전했다. 궁으로 가라 하는 것을 보니 일단 지켜보겠다는 의미인 듯했지만 왜인지 쫓겨나는 기분이 든 무건이 발을 옮기지 않고 진예를 바라보았다. 진득한 시선에 진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어냐.”
“제가 언제 또 폐하를 뵐 수 있습니까?”
마음 같아서는 한시도 떨어지기 싫었다. 당연히 진예는 같은 생각이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아무런 설명 없이 내쳐지는 건 퍽 억울했다. 이어지는 그의 말에 그런 심경이 그득 담겼다.
“……저를 불러 주시긴 할 겁니까?”
제 애달픈 마음을 숨기지도 않고 드러내는 그를 보며 진예는 조용히 웃었다. 저 황궁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내가 이곳의 옷을 입으면 어떻게 될지 눈에 훤했다. 대체 어떤 자를 사부로 붙여야 저놈이 정신을 제대로 차릴지, 그런 날이 오긴 할지 좀 궁금해졌다.
아울러, 저놈이 괴물이 되면 어떤 형태를 띨지도.
원래 순수함이란 악마적인 것과 맞닿아 있는 것이니까.
“조만간 다시 볼 수 있을 거다.”
진예가 꽤 긍정적인 답변을 해 오자 무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진예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렇다면 드릴 것이 있습니다.”
“드릴 것?”
받을 것이 아니라 줄 것이라니. 진예는 무건이 또 무슨 돌발 행동을 하려나 싶었다. 무건은 방 밖에 있는 태감의 눈치를 보다가 진예가 앉아 있는 침대 앞까지 다가와 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어울리지 않게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제 품 안에서 뭔가를 꺼내 쥔 그는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진예는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한 박자 늦게 손을 내밀어 보았다. 딱히 무건이 뭘 건넬지 궁금해서는 아니었다. 그냥 어린아이들 소꿉놀이 구경하듯이 박자를 맞춰 준 것뿐이었다.
무건의 온기가 내려앉았다가 사라진 진예의 손바닥 위엔 옥가락지 하나가 올려졌다.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양, 표면이 매끄럽게 잘 정돈된 것이었다. 그것을 손가락으로 돌려 보다가 긴장한 표정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무건에게 진예가 툭 물었다.
“무엇이냐, 이게.”
“명인이 나온 뒤로 늘 가지고 다니던 것입니다.”
“왜?”
“명인자끼리는 언젠가는 반드시 만나게 되니까. ……난 이렇게 당신을 간절히 기다렸노라 말하고 싶었습니다.”
이유를 듣고 나서 진예는 한숨이 나오려고 했다. 이걸 순수하다고 해야 할지, 한심하다고 해야 할지 몰랐다.
“이름 외에 생긴 것도, 성격도, 신분도 모르는데 연모했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냐?”
말하다 보니 연무건의 머리가 얼마나 꽃밭인지 알 것 같았다. 진예로서는 평생을 가도 이해할 수 없는 부류일 터였다.
하지만 무건의 대답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예. 연모합니다. 당신이 설령 오늘만 살 수 있는 아픈 사람이었어도, 그래도 전 기꺼이…….”
그는 얼굴을 내려 손끝에 입술을 맞췄다.
“각인했을 겁니다.”
내일 죽어도 운명을 함께하겠다.
혹자에겐 아름다운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진예에게는 전혀 아니었다. 그가 입에 담은 말 중 한 글자도 공감이 되지 않았다.
그녀가 가볍게 손을 기울였다. 그러자 연무건이 건네주었던 가락지가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도르르르륵…….
긴 소리를 내며 방 안 어딘가로 향하는 그것을 무건이 눈으로 따랐다.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진예가 분명하게 선언했다.
“짐은, 그런 어리석은 사랑은 싫다.”
운명이니, 사랑이니. 그런 정이 넘치는 단어를 진예는 좋아하지 않았다. 태어나서 부모의 정조차 받아 본 적 없는 그녀에겐 연무건이 말하는 무조건적인 사랑은 공허할 뿐이었다.
오래도록 제 옆을 지켜 온 서엽에게조차 내준 적 없는 자리다. 그것을 단지 명인자라는 이유로 순식간에 제 인생에 끼어든 무건이 차지하도록 내버려 둘 리 없었다.
하지만 무건은 그녀의 반응을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더는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꿋꿋하게 다음을 기약했다.
“부름을, 기다리겠습니다.”
아니, 다음 만남을 기다리는 건 오히려 진예였다.
연무건이 조만간 황궁으로 찾아오게 될 테니까.
무건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구석으로 굴러간 가락지를 잠시 보더니, 줍지 않고 발을 뒤로 물렸다.
진예는 태감을 따라 밖으로 나가는 그런 무건의 모습을 보며, 다음에 찾아올 때 그가 어떤 표정으로 나타날지 벌써부터 기대 어린 상상을 했다. 상처받은 모습일까, 아니면 화가 난 모습일까…….
탁.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방 안에 정적이 찾아왔다. 진예는 자신의 시중을 들 이가 오길 기다리며 숨을 돌렸다. 그런데 회랑을 걷는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단지 발소리만 들어도 이제는 누구의 것인지 구분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사이가 돼 버린.
“폐하, 신 조서엽이옵니다.”
조서엽의.
드물게도 서엽의 음성이 귀로 포착해 낼 수 있을 만큼 떨리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태감이 나가자마자 들어온 건 좀 심했다. 진예는 그가 얼마나 초조한 마음일지 능히 예측하면서도 일부러 사이를 두었다. 그러자 채근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폐하.”
조금만 더 시간을 끌었다가는 문을 부수고 들어올 기세였다.
“들라.”
마침내 허락을 얻어 낸 서엽이 곧장 문을 열었다. 꽤 거친 손길이었다. 그리고 급하게 왔는지 역시나 그에게서 겨울바람의 기운이 가시지 않은 채였다. 창문을 투과해 들어온 햇빛에 비친 얼굴은 평소보다 새하얬고, 옷차림도 어딘지 허술했다.
진예가 무건을 자신의 침전으로 끌고 들어온 간밤에, 퇴궐을 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서엽이 저렇게 흐트러진 상태일 리 없었다.
방에 들어선 그가 제법 날 선 눈빛으로 안을 훑다가 마침내 진예의 모습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할 말이 너무 많아 오히려 입이 열리지 않는 상태인 듯했다. 금방이라도 폭발해 버릴 것처럼 불안정해 보이는 그의 모습을 보고 진예는 오히려 몸을 풀었다.
“무슨 일이더냐.”
“……불충을, 용서하십시오.”
서엽은 금세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저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을지 진예는 뻔히 들여다보였다.
후회하고, 자책했겠지. 그러다가 잠시 잠깐 자기혐오에도 빠졌을 것이고.
원래는 조서엽은 저리 약한 사내가 아니다. 귀족 가문의 사내로 태어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란 데다 좋은 교육을 받은 덕에 어디 하나 모자람 없는 자였다. 하지만 서엽은 유독 진예와 얽히면 약해지기도 했고, 반대로 누구보다 손속이 잔인해지기도 했다.
그런 그를 아는 이들은 진예와 조서엽의 관계를 오해하기도 했다.
얼마 전의 화친왕처럼.
“조 후의 불충이라. 연무건을 죽이지 못한 불충을 말하는 것이냐?”
“송구하옵니다, 폐하.”
어젯밤 화친왕부에 가 무건을 못 죽인 걸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는 듯했다. 아니, 어쩌면 제 손으로 그를 황궁으로 데리고 들어온 것부터 마음에 안 든 것일 수도 있다. 사실상 못 찾았다고 하고 죽여 버렸으면 전부 안 일어났을 일이니까.
서엽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쥐고 있는 칼을 손마디가 하얘지도록 꽉 쥐었다. 제대로 달래 주지 않으면 이대로 무너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심지어 자신보다 한참 아래라고 생각하는 연무건이 진예를 차지하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 말았으니까.
대체 어떤 기분일지 진예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굳이 상상하기도 싫었고.
다만 과연 다음 말은 그에게 위로가 될까, 아니면 더 큰 절망을 안겨 줄까 궁금하긴 했다. 그래서 일부러 가벼운 말투로 찔러 보았다.
“됐다. 이제 보니 잘된 것이었어.”
“잘된, 일이라니요.”
“명인자와 동조 현상이 일어난 듯해.”
서엽의 표정이 더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진예를 보면서도 어쩐지 조금 멍한 표정이었다. 서엽의 눈이 천천히 깜빡여졌다. 두 다리로 서서 진예를 직시하고 있지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정답은 후자인 듯했다.
“그게, 무슨…….”
“연무건이 짐의 능력을 베껴 갔다, 이 말이다.”
동조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서엽도 모르는 바는 아닐 터였다. 그의 눈을 한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떠돌아다녔다. 동요하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진예가 그것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전에 없던 부드러운 목소리로 명했다.
“조 후는 짐에게 가까이 오라.”
서엽이 머뭇거렸으나 잠시였다. 천천히 한 걸음, 두 걸음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방에 들어왔을 때의 기세와 전혀 다른,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아슬아슬함이 있었다.
그러나 서엽의 남은 용기는 단 세 걸음까지만이었다. 차마 더 진예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고 방의 가운데에서 멈춘 그를, 진예가 채근했다.
“더.”
다시 한 보, 또 한 보.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그가 다가서고, 마침내 팔이 닿을 만한 범위 안으로 들어오자 진예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순간 너무 놀란 서엽이 손목을 뺄 뻔했으나 다행히 그 정도까지는 가지 않았다. 하지만 서엽의 반응을 보며 진예가 쿡 웃어 버렸다.
“왜 이리 긴장하는 것이냐.”
“제가 너무 큰 실수를 하여…… 폐하께 심려를 끼쳐 드렸습니다.”
본래 진예의 성미대로라면 이미 목이 달아났어도 여러 번 달아났을 것이다. 그것을 봐준 것은 순전히 그 상대가 서엽이었기 때문이다. 진예는 그를 잃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도 딱히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평소 당당하던 서엽이 이렇게 의기소침해진 모습도 썩 보기 좋은 것은 아니었다. 감정을 흘리고 다니니 눌러 줄 필요는 있었지만 이토록 안쓰러울 만큼 기가 죽어 있는 것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하필이면 동조 현상이 일어날 줄 누가 알았겠느냐. 대운을 타고난 놈이다. 하늘이 보하는 놈을 어찌 잡을까.”
“……망극하옵니다.”
서엽은 대답하면서 내내 눈을 한곳에 두지 못했다. 자신을 달래는 진예의 모습이 낯설었을뿐더러, 침전에 고여 있는 미묘한 공기가 그의 신경을 툭툭 건드렸다. 심지어는 진예의 옷차림마저 말이다.
연무건이 그녀를 이렇게 흐트러뜨렸다는 것을, 그 현실을 인정하기가 힘들었다.
그저 진예의 곁에 있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해 왔는데, 아니었다. 그녀 옆에 누군가가 생기니 잠깐만 방심해도 그냥 이대로 정신을 놓아 버릴 것 같았다. 한겨울에 맨몸으로 절벽에 내몰린 느낌이었다.
이 기분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당장 마음 같아선 자신의 목이 달아나더라도 연무건을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진예도 죽는다. 이제는 그를 죽이는 건 상상에서밖엔 실행할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그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져만 갔다. 진예 앞에서 이래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표정을 유지할 방도가 없었다. 불가항력이었다.
예상대로 진예가 엄하게 그를 불렀다.
“서엽.”
그 소리에 서엽은 잠깐 미간을 폈지만 결국 눈을 감았다. 그리고 금세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송구합니다, 폐하. 저한테, 잠시 시간을 주실 수 있습니까.”
“무슨 시간을 말하는 것이냐.”
“한 달만 황도를 떠나 있겠습니다.”
서엽에게서 상상할 수 없었던 이야기가 나오자 순간적으로 진예의 표정도 싸늘하게 굳었다.
“짐을 떠나겠다고?”
어느 순간부터 서엽은 진예와 늘 함께해 왔었다. 진예가 딱히 노력하지 않아도 서엽 쪽에서 먼저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하루만 못 봐도 오히려 불안해하는 사람은 서엽이었다.
그런 그가 감히 제 곁에서 떠나겠다고 하는 말에 진예는 제 신경이 예민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서엽은 진예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말을 이어 갔다.
“봉토로 돌아가 잠시 마음을 추스르고 오겠습니다.”
진예는 서엽의 손목을 잡은 제 손에 힘을 넣었다.
“하루도 못 가 되돌아올 놈이 말만 잘하는구나.”
냉혹한 지적에 서엽이 움칠하는 것이 팔을 타고 전해졌다. 차마 부정할 수는 없겠는지 그는 은근히 대답을 피했다.
“하면 저는 폐하께 어떤 사람입니까.”
진예도 마찬가지로 잠시 입을 닫은 채 그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아무런 말소리가 나오지 않자 서엽은 참았던 한숨을 쏟아 냈다. 그러지 않으면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아서.
보답받지 못하리란 걸 알면서 오래도록 품어 온 마음이지만,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다. 매번 미세하게 상처가 남았다.
그런데.
“짐의 곁에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지.”
진예가 미약한 희망의 불빛을 비추었다. 서엽이 살며시 눈꺼풀을 열었다.
“서엽, 네가 곁에 있어야 짐이 완전해진다.”
“…….”
“하나 그리도 힘들다면 네게 선택권을 주마.”
선택권이라는 말에 서엽의 눈이 진예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언제나 둘 사이의 관계를 이끄는 건 진예였고, 서엽은 늘 끌려다니기만 했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문제가 없었다. 진예의 균형추가 어디로도 기울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그들 사이에 무건이 끼어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진예도 그것을 느끼고 이제부턴 태도를 달리할 생각이었다. 서엽을 견디게 하려면 필요한 부분이었다.
“짐을 위해 평생을 바친 너이니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해 주마. 대신 짐을 떠나겠다는 해괴한 소리는 더 이상 하지 말고.”
진예의 말은 의뭉스럽고, 또 갑작스러우나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서엽은 더 많이 흔들렸다. 실은 진예의 곁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한 달 동안 떠나 있겠다는 말도 사실상 굉장히 충동적으로 내뱉은 것이기에.
해서 진예가 내놓은 당근을 제 입에 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후에 채찍을 맞을지언정 지금의 달콤함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무슨 결정을 하면 됩니까.”
돌아온 진예의 대답은 서엽이 어쩌면 가장 기다려 온 말 중 하나였다.
“짐의 사내가 될지, 아니면 만고의 충신으로 남을지 둘 중 정하거라.”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엽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그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것을 보며 진예는 그가 자신의 곁을 절대 떠나지 못하리라고 확신했다.
그래, 자신에게도 조서엽은 필요했다. 그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배신하지 않고 자신의 곁을 지킬 사내였다.
오래도록 쌓아 온 그들의 유대는 단지 명인으로 엮인 연무건이 끼어든다고 해서 끊어질 것이 아니었다. 끊어져서도 안 되는 것이고.
“물론 사내가 된다 해도 짐이 너에게 첩지를 내릴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게 조서엽과 연무건의 차이지.”
지금껏 진예가 인생의 기로에 섰을 때 늘 서엽이 함께였다. 앞으로도 그러길 원했다. 제 뒤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은 그가 유일했기 때문에.
하여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내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하나만은 분명하게 약속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약조하마. 아무도 내 마음에 들어올 수 없게 하겠다.”
심지어 연무건조차도.
단지 몸을 가져갔다고 해서 모든 걸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다. 제 마음은 오롯이 제 것이니까.
“어찌하겠느냐.”
이제 진예는 서엽의 선택을 기다렸다.
그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리는 기회였다.
서엽은 기대하지 않았던 순간에 제 앞에 툭 떨어진 기회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늘 이 순간을 기다려 왔지만, 준비되지 않은 상황이라 선뜻 고르기가 어려웠다.
기실 연무건이 처음 이곳에 나타나 진예가 자신에게 사내가 될 것이냐 묻던 그때와는 비슷해 보이지만 분명히 달랐다. 당시에는 선택권을 주는 척, 사실은 신하로서의 조서엽을 시험하는 느낌이 강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진짜다. 진예는 지금 서엽의 대답에 따라 앞으로의 행보를 달리할 것이다.
하지만 사내로서의 욕망과 신하로서의 삶. 둘 중 무엇이 중요한가에 대해서는 서엽도 뭐라고 대답하기 힘들었다. 둘 다 각자의 가치가 있었고, 지금껏 조서엽이라는 인간을 구성해 온 가장 큰 두 축이었다.
“설마 둘 다 원하지 않는 것이냐?”
“……그것이, 아닙니다.”
진예가 채근하는 말에 서엽은 고개를 저었다. 둘 다 너무 원하는 것들이라 양자택일할 수 없는 것뿐이었다.
밤새 이곳에 있던 연무건이 밖으로 나오는 모습을 보고 바보 같은 제 자신에게 주체할 수 없이 화가 났었다. 평생을 바쳐 연모한 여인의 마음조차 얻을 수 없는 스스로의 무능함에 깊은 절망을 느꼈다. 눈앞에 통과할 수도, 깨부술 수도 없는 거대한 벽이 생긴 느낌이었다.
그런데 방금 진예의 말 한마디로, 서엽은 그 벽이 녹아내린 기분이었다.
서엽은 제 말을 기다려 주는 진예를 눈에 담았다. 손에 쥐기만 해도 부러질 것 같이 가녀리고 제 두 팔 안에 가둘 수 있을 만큼 작은 여인이지만, 그에게 있어서 진예의 존재감은 언제나 그것을 상회했다. 환의 황제는 제 그릇으로는 품을 수 없는 너무 큰 사람이었다.
서엽은 자신의 팔을 잡은 진예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진예가 준 처음이자 마지막 선택권을 포기했다.
“부디 어느 쪽이든 원하시는 대로 저를 이용하십시오.”
그녀에게라면 평생을 휘둘리며 살아도 상관없었다. 제 삶도, 목숨도 진예의 것이다. 결정권은 오로지 그녀에게 있었다.
절대적인 헌신. 그것이 조서엽이 눈앞의 여인을 사모하는 방식이었다.
서엽은 문득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처음 황궁을 왔을 때를 떠올렸다. 황제를 알현하려 편전에 들어갈 때에 마침 나오던 어린 진예의 얼굴은 제 나이답지 않게 불행해 보였다.
〈조가(家)의 서엽입니다, 태자 전하.〉
허리를 굽히며 살핀 그녀의 모습은 그 시절에도 예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더 눈에 들어온 건 다른 것이었다.
살며시 눈물에 젖은 눈과 제 마음을 숨기려 힘 있게 꼭 쥔 두 손. 하지만 결코 굽지 않은 꼿꼿한 허리와 앞만 바라보는 곧은 눈.
한 몸에 그 상반된 모습을 품은 그녀를 보고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왜인지 힘이 빠져 있는 작은 목소리를 듣고서는 겨우 정신을 차렸었다.
〈조가의 영지는 평온한가.〉
〈전하의 은혜 덕분에…….〉
은혜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진예는 비웃음을 담아 픽 웃었다. 제 감정을 숨길 필요도 없다는 듯이.
그러고는 제 아비의 의례적인 인사를 받고 유유히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자신은 무슨 생각을 했던가.
그녀를 거대한 불행에서 꺼내 주고 싶다.
언젠가는 내가 반드시 진심으로 웃게 해 줘야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진예의 날개가 되어 주고 싶었다.
그날 이후로 조서엽의 삶은 언제나 진예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는 단 한순간도, 진예를 위하지 않은 적이 없노라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그는 허리를 깊이 숙여 바닥에 고개를 박았다.
“신 조서엽은 폐하의 종복입니다. 무는 법을 잊어버린 개입니다.”
“개라.”
“개는 죽는 순간까지 주인을 배반하지 않습니다.”
충성 맹세를 읊는 서엽의 머리 위로 진예의 냉혹한 말이 떨어졌다.
“하지만 주인은 개를 배반할 수도 있지.”
그러나 이 역시 그의 예상 범위 내였고, 오히려 바라는 바였다.
“아니, 배반하는 것이 주인의 숙명이다. 근심 많은 주인에게 충성스러운 개는 쓸모가 너무 많거든.”
“오래전부터 각오한 바입니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말이었다.
진예의 손이 서엽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정말로 서엽이 제 개라도 된다는 듯, 천천히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명했다.
“고개를 들라.”
서엽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턱이 진예의 손에 의해 천천히 들렸고, 호흡이 맞물릴 만큼 얼굴이 바짝 다가왔다.
진예가 엄지로 입술의 마른 표면을 살며시 쓸었다. 순간 서엽의 입술이 작은 떨림을 품었다. 마치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조서엽의 맹목과 연무건의 맹목. 그 둘은 겉보기엔 같은 듯하지만 내용이 전혀 달랐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은 채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충실한 개처럼, 얌전히 앉아 있는 서엽을 내려다보며 진예가 낮은 음성으로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짐의 곁을 떠난다는 어리석은 이야기는 다신 하지 마라.”
“그러겠습니다.”
“제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그런 말은 입에 담아서는 아니 된다.”
“예, 폐하.”
진예는 무건이 나타난 이후로 내내 표정이 좋지 못했던 서엽이 이제야 살며시 미소를 짓는 걸 보며 저도 모르게 조금 안심했다. 여인으로서 사랑해 줄 수는 없지만, 인간적으로 그가 너무 불행하지는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제는 제 손으로 그를 빠져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에 밀어 넣게 될 수도 있었다.
네가 과연 그것을 견딜 수 있을까.
그런 질문을 속으로 던지면서도 진예는 뒤를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앞으로 나흘. 퇴궐하지 말거라, 서엽아.”
그리고 조서엽은 기꺼이 그 수렁에 발을 들였다.
“주군께서 원하신다면, 복종하겠나이다.”
그의 목 쪽으로 진예의 손이 미끄러졌다. 아래로 내려간 그것은 허술한 서엽의 옷깃을 헤쳤다.
“벗어라.”
그 말소리가 흘러나가자 방 밖에 어른거리던 그림자들이 슬그머니 전 밖으로 물러났다.
이후 말소리가 끊긴 침전의 창문을 무언가 투둑, 투둑 두드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황궁의 온 땅을 적셔 나갔다.
해동을 준비하는 겨울의 비였다.
* * *
침전의 회랑 안으로 발을 들인 태감은 며칠째 열리지 않고 있는 문 앞에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깊은 침전 안쪽까지 들릴 수 있게 묵직하고 커다란 음성으로 안에 있을 진예에게 아뢰었다.
“폐하, 희유 공이 폐하께 뵙기를 청하고 있사옵니다.”
“돌려보내거라.”
일절 고민하지 않고 바로 튀어나온 대답에 태감도 금세 포기했다.
“예, 폐하.”
대신 그는 아주 천천히, 자신은 최선을 다했다는 걸 알리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끌며 도로 밖으로 나갔다. 중요하게 알릴 게 있다며 생떼를 쓰면서 두 번이나 아뢰어 달라고 강요한 희유 공도 이번엔 어쩔 수 없이 발을 돌렸다.
비가 내렸다가 싸라기눈이 내리고, 그치고, 다시 비가 내리기를 반복하며 지난 시간이 벌써 사흘째. 그동안 저런 자들이 두 손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아졌다. 그리고 황궁은 지난 5년을 통틀어 가장 소란스러워졌다.
한밤중에 화친왕이 황제의 명인자를 데려오더니 그 명인자가 유일한 후궁이 되었다. 여기까지는 모두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명인자와 밤을 보낸 황제가 아침에 제 수족 같은 조서엽을 침전에 들이고는 사흘째 밖으로 나오지를 않고 있었다.
모든 정무가 멈췄다. 아침마다 조회를 하러 입궐한 이들이 모두 허탕을 치고 돌아갔다. 누군가가 찾아오면 태감은 침전에 이따금씩 보고하러 들어갔지만, 아무도 환의 황제를 만날 수 없어 걸음을 물려야만 했다.
진예의 치세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개인적인 일 때문에 정무를 멈추는 것도, 침전에 사내를 들인 것도.
황궁 사람들의 무거운 입도 하나둘씩 열리기 시작했다. 본래 발 없는 말이 가장 빠른 법이다. 그 소문은 금세 황궁 밖으로까지 빠져나갔다.
황후라도 있었으면 이 지경은 안 되었을 텐데, 상황 정리를 할 만한 사람이 태감뿐이니 터진 봇물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연무건도 유일한 후궁이라고는 하나 그쪽도 궁에 들어온 지 이제 사흘밖에 안 된 사람이다. 제대로 된 후궁 구실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거슬리는 소식이 당도한 것은 그때였다.
“태감 어른, 화친왕 전하께서 입궐하셨다 하옵니다.”
어린 내관이 다가와 진평의 입궐 소식을 전해 왔다. 태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황제의 아우인 진평이 황궁에 입궐했다면 목적지야 뻔했다. 당연히 진예가 있을 이곳 침전으로 직행할 터였다.
예상대로 얼마 안 가 제 수족들을 뒤따라오게 하고 침전 앞의 문턱을 넘는 화친왕이 보였다.
최근 운영하는 상단이 제법 명성을 떨쳐 무슨 바람이라도 든 모양인지 요즘 유난히 옷차림이 현란해졌던 차였다. 한데 오늘은 비가 와 적당히 얌전했다.
눈비를 피하려 털과 모자가 달린 비단 웃옷을 뒤집어쓰고 나타난 그가 침전 앞으로 걸어와 모자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행색을 보니 말을 타고 온 것인지 아니면 걸어온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가마를 타고 고상하게 앉아서 온 것은 아닌 듯했다. 옷이며 머리며 잔뜩 젖어 있던 그가 태감의 인사를 받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폐하께 급히 아뢸 것이 있어서 왔네. 문을 열어 주시게, 공공.”
마치 제가 거절당하리라는 것은 애초에 상정해 두지 않은 듯한 어투였다.
“폐하께 급히 아뢸 것이 있어서 왔네. 문을 열어 주시게, 공공.”
마치 제가 거절당하리라는 것은 애초에 상정해 두지 않은 듯한 어투였다.
그렇지만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드나든단 말인가. 제아무리 황제의 아우이자 이 나라의 유일한 친왕이라 해도 구중궁궐, 특히나 황궁의 문턱은 높은 법이었다. 함부로 넘을 수 없었다.
특히나 진예가 제 침전에 사내를 들인 지금은 더더욱.
“지금은 아니 되십니다. 돌아가시지요.”
단호한 거절이었지만 진평은 물러나지 않았다.
“내 풍문으로는 듣기는 하였네만, 정말로 조 후가 저 안에서 사흘째 나오지 않고 있나?”
“…….”
질문을 받고도 태감은 침묵했다. 듣는 귀는 있으나 말하는 입은 없는 것이 황궁에서 살아가는 자들의 규칙이었다. 게다가 다 알면서도 굳이 묻는 상대가 고약한 것이었고.
“공공.”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단순한 질문인데도 상대의 입이 열리지 않자 화친왕도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어서 아뢰어 주시게. 지금 누님께서 이리 있으실 때가 아니야.”
아무리 친왕이라고 하나 지엄한 황궁 내에서 폐하라 하지 않고 누님이라고 지칭하는 것에 태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제게 먼저 말씀하시지요.”
얼마나 대단한 말을 하려고 이러는지 두고 보겠다는 투의 말에 진평도 조금씩 기분이 나빠지려고 했다.
요 며칠 방문하는 사람들 전부 다 이 태감의 엄호에 발을 돌려야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래도 대놓고 무시를 당하고 있으니 별로 유쾌하진 않았다. 현 황제의 입을 대신한다는 말까지 공공연하게 나돌고는 있는 태감이라고 하지만, 제가 뭔데 황제에게 아뢸 내용을 먼저 듣겠다 나선단 말인가.
그러나 이대로 문전 박대를 당해서는 앞으로의 일이 걱정되니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익재들이 황도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다는 이야기네.”
기껏해야 얼마 전 쫓겨난 정위를 되돌려 달라는 요청 정도가 아닐까 싶었는데, 전혀 생각지 않았던 말이라 태감도 잠시 당황했다.
“익재들이……?”
현재 익재들의 서식지는 전부 황도와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가장 가깝고 위협적인 지대인 읍주도 말을 타고 닷새 정도는 쉬지 않고 달려야 하는 거리였다.
태감이 반응을 보이자 진평이 얼른 몰아붙였다.
“정 백이 알려 왔네. 나만이라도 서둘러 몸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보다 대규모인 것 같았어.”
하지만 정 백, 그러니까 얼마 전 백으로 강등당한 대장군 정위의 이야기가 나오자 태감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 당장 침전에 화친왕을 들이는 건 때에 맞지 않았다.
태감은 괴물인 익재보단 눈앞에 있는 진예가 더 무서웠다. 그녀가 태감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황제이기도 했지만, 지위와 상관없이 실제로도 익재를 눈 한 번 깜짝 안 하고 도륙해 내는 그녀이니 더 두려워해야 하는 존재가 맞았다.
그리고 그런 것을 생각하면 화친왕의 발언은 오지랖 내지 호들갑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하여 그는 감히 환의 황제가 아닌 친왕에게 더 충성하는 정위의 행태를 지적했다.
“전하, 황송하오나 그 또한 정 백의 불충임은 알고 계시는지요.”
“공공, 그런 사소한 것을 따질 때인가? 지금 익재가 이 황도를 불바다로 만들기 위해 온다는데?”
“알겠습니다. 그것은 제가 폐하께 직접 아뢸 터이니 돌아가시지요. 이곳은 황제 폐하의 침전입니다. 젖은 흙발로 드나들 곳은 결코 아니지요.”
진평은 태감의 지적대로 비에 젖은 제 발을 내려다보고 이를 으득 물었다. 이 늙은 태감은 말이 너무 안 통해서 문제였다.
“그 침전에 조 후는 매일같이 드나들고, 이제는 틀어박혀 나오지도 않는데 본왕은 한 발짝 들이는 것조차 아니 된다?”
침전에서 내내 나오지 않는 조서엽의 존재가 자신보다 중하냐고 묻자 태감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이 전부 진예의 사람들이라고는 하나 어쨌든 공개적인 자리였고, 굳이 말하면 어쨌든 황제보다 지위가 낮은 친왕 따위가 황제의 행실을 지적할 계제는 아니었다.
“전하, 자중하시지요.”
“내관 놈도 이제 날 우습게 보는 겐가…….”
중얼거림에 태감이 그를 그만 쫓아내야겠다 결심했을 때였다. 화친왕이 돌연 환하게 웃으며 한발 물러섰다.
“알겠네. 그럼 연 숙의를 보러 가는 것은 문제없겠지?”
태감은 무슨 속셈인가 싶어 미심쩍게 진평을 훑어보았다. 그러나 딱히 더는 피곤한 입씨름을 이어 가지 않기로 했다. 연무건을 궁에 들인 건 애초부터 화친왕이었고, 진예가 후궁으로 맞았다고는 하나 며칠째 전혀 찾지 않고 있었다.
황실에서의 서열은 황제가 중요하게 여기는 순서와 같다. 그런 시각에서 본다면 지금은 태감이 등진 문의 안쪽에 있는 조서엽이 더 중요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어쨌든 현재 태감이 가장 우선해서 지켜야 하는 건 안에 있는 두 사람이었다.
태감이 침묵으로써 동조하자 진평이 살며시 눈웃음을 지었다.
“고맙네, 공공.”
물론 감히 후궁전에 누군가를 함부로 드나들게 한다면…… 문턱을 넘나든 놈이 아닌 황제의 사람으로서 제대로 관리를 못 한 연 숙의가 경을 칠 일이었다.
그를 알면서도 태감은 화친왕의 앞길을 막지 않고 침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뭐가 됐든 익재가 황도로 향한다는 건, 분명 심상치 않은 일이었으니까.
도로 모자를 뒤집어쓴 화친왕은 그런 태감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지금까지 옆에서 말없이 서 있던 도양에게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연무건이 이 황실에서 살아남기가 쉽지는 않겠다.”
하지만 도양에게 연무건은 그야말로 관심 밖의 대상이었다. 진평은 무건이 황실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며 그의 거취에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었지만, 주인으로 모시고 있다고 해서 그와 언제나 지향점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신 그녀는 태생적으로 몸이 약한 제 주인을 걱정했다.
“비를 너무 많이 맞으셔서 혹여 감기라도 들까 걱정이 됩니다. 걸음을 서두르십시오.”
진평은 예상치 못한 때에 들어온 그녀의 잔소리에 픽 웃었다. 이랬다가 정말로 기침이라도 하면 도양에게 크게 혼날 기세였다.
“괜한 걱정은…….”
그는 머쓱하게 한마디 덧붙였지만 도양이 비켜서며 빨리 가라는 듯 길을 터 주자 순순히 침전에서 발길을 돌렸다.
말을 듣고 보니 몸에 냉기가 도는 것 같기도 했다. 제가 너무 겨울비를 우습게 본 모양이었다.
* * *
융경궁.
그곳은 현 황제의 어미, 그러니까 살아 있었으면 태후가 되었을 그녀가 입궁하여 처음으로 하사받은 궁이었다.
선선대 황제 시절 황태자의 명인자로서 입궁했던 그녀는 첫날 그대로 합궁을 하면서 각인을 시행했고, 다음 날 황궁에서는 조금 떨어진 이곳 융경궁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후 융경궁은 전각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고 황도의 궁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후원을 갖추게 되었다.
그녀가 그렇게 이곳을 개조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첫 합방 때 곧바로 진예를 임신하였기 때문이었다.
누구나 사내아이를 바라고 있었고, 당연히 그래야 했다. 하지만 태어난 것은 여아인 진예였다. 그때부터 비극 아닌 비극이 시작되었다.
황실 적장자의 명인자들 사이에 나온 아이는 통례상 여섯 살이 되는 날에 후계로 지목되었다. 자식이 여럿이면 남아가 우선되어 그 아이가 여섯이 될 때까지 기다렸지만, 하나만 있을 때는 여아가 후계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여섯 살이 되는 해까지 선대 황제와 황후는 새로운 아이를 보지 못했고, 운명의 장난처럼 진예가 후계로 임명된 직후에 진평을 임신했다.
후계가 되기 전까지는 여아이기 때문에 홀대받던 진예는 진평이 태어나자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며 온갖 저주를 안고 살아왔다.
어느 날엔가는 제 어미가 자는 진예의 목을 조르며 울고 있었다.
〈왜 하필 네가 태어나서, 왜 하필 네년은 남자아이가 아니었던 것이냐.〉
〈어, 어마마마…… 어마마마, 흐윽.〉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네가 죽으면 우리 진평이가 후계가 될 수 있어.〉
하지만 진예는 살고 싶었다. 동생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정말로 순수하게 죽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기적적으로 제 어미를 밀쳐 내고 빠져나왔지만, 그로 인해 어머니의 손에 상처가 나는 바람에 그날로 아버지에게 가서 지독한 체벌을 받았다.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부모의 폭언과 저주에 노출된 그녀를 지켜 주려고 나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융경궁은 좋지 않은 기억만 남아 있는 곳이었다.
황실에서 오랫동안 일한 사람치고 그러한 비사(祕史)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따라서 융경궁을 하사했다는 사실은, 황제가 이곳에 걸음하지 않으리라 공표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사흘 동안 정리했지만 여전히 방치된 폐궁의 모습을 벗지 못한 융경궁의 대문을 지나면서 화친왕이 중얼거렸다.
“누님도 참으로 고약하지. 그렇지 않으냐, 도양아.”
“…….”
“제 명인자를 이런 좋은 먹잇감으로 던져두고 싶을까.”
“글쎄요, 죽어도 상관없다는 의미 아닐까요. 그리고 명줄은 질겨 보이는 놈이긴 했습니다.”
“놈이라니, 이제 염연한 후궁이다. 그런 말은 쓰면 안 된다.”
“……주의하겠습니다.”
가볍게 도양의 실수를 꾸짖은 진평은 아직 제대로 인원 배치조차 되지 않은 궁의 면면을 살폈다. 사흘이 지났는데 아직 청소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전각이 많았고, 문 쪽에는 심지어 거미줄이 내려오는 곳도 보였다.
애초에 평민 신분이니 해낼 것이라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금 융경궁의 모습은 너무나 혼란해 보였다.
앞으로 어떻게 사람 구실을 하게 할지 고민하던 진평은 무건이 있을 만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와중에 그들을 막는 이는 당연히 없었다.
* * *
방치당하고 있다.
무건도 어렴풋이 그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지난 사흘, 그의 옆을 무표정한 내관 하나가 따라다니고 있었지만 그 외에 찾아오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게다가 폐궁이었던 융경궁을 청소하겠다며 몇몇이 돌아다니는데, 지휘하는 이들 빼고는 전부 무건보다는 한참 어린 아이들이었다. 고사리 손으로 닿지도 않는 곳을 청소하려 애쓰는 모습들을 보고 있자면 워낙 안쓰러워, 한 번은 자신이 도와줄까도 했지만 바로 제지당했다.
〈귀인께선 이런 것에 손을 대서는 아니 되는 법입니다, 숙의마마.〉
할 일이 딱히 없어서 움직인 이유도 있었는데 내관이 특유의 고저 없는 목소리로 그를 엄격히 나무랐다. 심심해 죽겠다고 말해 볼까 싶긴 했지만, 아무 감정도 없어 보이는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똑바로 보는 것을 보면서 바로 꼬리를 말았다.
〈……알겠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도로 침전에 틀어박혀 누군가가 분주하게 회랑을 활보하는 소리만 듣고 있었다.
그리고 화친왕 진평, 그가 찾아온 건 그때였다.
“마마, 화친왕 전하께서 찾아 계십니다.”
별로 반가운 이름은 아니었지만 마침 무료하게 시간만 보내고 있던 무건은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그래서 침전 밖으로 나가 그를 맞이했다.
“잘 지냈느냐, 연 숙의.”
겨울비의 차가운 빗방울이 떨어지는 가운데, 진평이 고운 비단으로 겉을 덮어 만든 일구종(一口钟: 망토)의 모자를 제 얼굴을 드러내려 잠시 걷어 냈다가 도로 쓰며 웃었다. 옆에는 익숙한 얼굴, 도양이 있었다.
무건은 내관이 자신의 어깨에도 일구종을 얹어 주는 것을 받아들이며 진평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오셨습니까.”
“화친왕 전하라고 불러야지.”
“화친왕 전하.”
궁중 사람들은 다들 어찌나 격식을 따지는지 몰랐다. 사가에서는 안 그랬으면서 괜히 빡빡하게 구는 그를 속으로 욕하면서 무건이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이곳엔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글쎄, 그대를 궁으로 들인 것이 본왕이니 책임감 같은 것이 생겼다고 해야 하나. 이리 혼자 있을 걸 아는데 찾지 않는 것이 오히려 도리가 아닌 것이지.”
거짓말.
처음 자신을 구한 이유부터 불순할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는 무건은 그에게 순순히 속아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렇지만 절실할 때 손을 뻗어 준 것 역시 진평이었으므로, 노골적으로 경계할 필요 또한 없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지금 상황이 대화하기에는 썩 좋지 않았다. 무건이 침전 밖으로 발을 내밀자 제 옆을 바짝 따라오는 내관의 눈치를 보았다. 그 모습을 진평이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옆의 내관을 물리거라.”
그러나 무건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이고 있자 진평이 한마디 덧붙였다.
“무얼 어려워하느냐. 물러나라 명하면 되는 것을.”
머뭇거리던 무건은 그제야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내관에게 슬쩍 운을 띄웠다.
“……잠시 멀리 떨어져 주시겠습니까.”
그나마도 명령의 형식이라기엔 한참 모자란 것이었다. 그래서 때아닌 정적이 찾아왔지만, 내관은 화친왕의 눈치를 살핀 뒤 적당히 발을 뒤로 뺐다.
사람 하나 물리는 것도 이토록 어려워해서야. 화친왕은 혀를 쯧, 차고는 무건을 밖으로 이끌었다.
“잠시 걸으며 이야기를 하지.”
그에 무건이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따라가려고 하는데 도양이 앞을 막았다.
“전하, 비가 많이 오는데 안에서…….”
“숙의와 둘이서만 할 말이 있으니 도양이 너도 잠시 여기 있거라.”
“…….”
화친왕의 단호한 말에 도양은 더는 따라붙지 않고 멈췄다. 그 모습은 방금 전 무건의 모습과 분명히 비교가 되는 것이었다.
궁중의 사람들은 각각 지위의 차이는 있어도 전부 상명하복의 체계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다들 명령조가 숨 쉬듯 자연스러워 보였다.
반면 무건에게는 전혀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자신이 살아온 세상에서는 부모와 자식, 이웃밖에는 없었다. 가끔 높으신 분이 나타난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조금만 견디면 됐다.
그런데 이제는 낯선 그것을 자신의 일상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무건은 자신도 아직 익숙하지 않은 융경궁을 걸으면서 생각했다.
언제쯤이면 이들의 언어에 익숙해질까.
아직은 요원해 보였다.
그리고 배려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진평이 편안한 어조로 말을 붙여 왔다.
“넌 이곳 융경궁이 어떤 곳인지는 아느냐.”
어떤 곳……?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는 말이라 무건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의미로 물으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의 발은 융경궁의 뒤편으로 향하고 있었다. 일전에 알아본 바에 의하면 아마도 후원 쪽이었다.
자박자박. 번갈아 울리는 진평과 자신의 발소리가 고적하게 울리는 가운데, 진평이 말을 이었다.
“이곳은 한때 누님과 내가 살았던 곳이다. 어린 시절을 이곳 융경궁에서 함께 보냈었지.”
진예의 이야기가 나오자 무건은 오랜만에 관심을 보였다. 사흘 내내 관심도 없는 것들에 둘러싸여서 안 그래도 답답한 차였다.
“폐하께서 이곳에…….”
중얼거리면서 무건은 조용히 웃었다. 사람 살던 흔적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았지만, 이곳에서 진예의 흔적을 찾았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생겼다.
“폐하의 어린 시절은 어땠습니까.”
아주 불행했다.
진평은 그리 말해 주면 무건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아마 당황하겠지. 짐작도 못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쾌한 말을 입에 담아 무건의 경계를 높일 이유는 없었으므로, 진평은 화제를 돌렸다.
“그건 누님께 직접 듣는 게 낫겠다. 그보다, 언제까지 이곳에 가만히 있을 것이냐.”
마치 다 말해 줄 것처럼 운을 띄웠으면서 딴말을 하자 무건은 아쉬웠지만 일단 그에게 장단을 맞춰 주기로 했다. 어쨌든 진평과 그리 오래 함께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가 서둘러 할 말 다 하게 하고 빨리 떠나게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에서였다. 비록 제 입장에선 좀 회피하고 싶은 주제이긴 했어도.
“……가만히 있지 않으면요. 제가 할 수 있는 게 따로 있습니까?”
“숨만 쉬고 있으면 당할 수밖에 없는 게 이곳의 논리이거늘. 이래서야 네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겠느냐.”
무언가 하기를 부추기는 말이었지만 무건은 그것에 홀랑 넘어가 줄 생각이 없었다. 그녀에게 부름을 기다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니 진예가 자신을 다시 찾아 줄 때까지 서두르지 않을 것이다.
서로 떨어져 산 세월이 스무 해도 훨씬 넘었다. 그것도 너무 다른 세계에서, 다른 방식으로 각자의 삶을 살아왔다. 당연히 오랜 시간이 걸릴 테니 자신이 그녀의 속도를 맞춰 줄 생각이었다.
“제가 어떻게 하든, 앞으로 전하의 도움은…….”
해서 무건이 은근히 회피했지만 진평이 말허리를 끊었다. 그것도 가장 거슬리는 이의 이름을 거들먹거리면서.
“네가 이곳에 있는 사흘간 조서엽이 전하의 침전에서 나오지도 않고 있다.”
순간 제 귀에 가슴이 쿵,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건이 걸음을 멈췄다. 어느새 후원의 입구였다. 그 문턱 앞에서 무건이 굳은 얼굴로 진평을 돌아보았다.
“무슨 뜻입니까, 그게.”
“짐작은 했다만, 소문을 전혀 못 들었나 보지?”
“…….”
진평의 말대로 생소한 이야기였다.
자신의 옆에 다가오는 이들도 드물었을뿐더러, 다들 입이 무거워 하루에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다. 유의미한 대화가 오갔을 리 없었다.
무어라 대꾸할 수 없었던 무건의 입에서는 하얀 입김만 흘러나왔다.
“남녀가 한방에 사흘 밤낮을 같이 있었다. 그림이 안 그려지나? 설마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할 만큼 어리석은 것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본왕이 사람을 잘못 본 것인데.”
무건은 말없이 진평을 빤히 바라보았다. 들으면서 제 머릿속에서 어떤 상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게 완성된 것은 아주 불순한 그림이었다.
이렇다 할 반응이 돌아오지 않자 진평이 정신 차리라는 듯이 이름을 불러 왔다.
“연무건.”
“그러니까, 폐하께서, 다른 사내를 취했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그것도 조서엽을?”
“그래, 그것이다.”
하필이면, 하필이면…….
하필이면 조서엽.
무건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마치 진예를 자신이 가장 잘 안다는 듯이 오만하게 말했던 그가 떠올랐다. 그리고 함께 있을 때 진예를 바라보던 짙은 눈빛도.
그건 틀림없이 여인을 연모하는 사내의 눈빛이었다.
상념이 길어지자 다시 화친왕이 끼어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
이로써 할 말은 많아졌지만 입이 무거웠다. 무건은 수많은 것들 중에서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천천히 운을 뗐다.
“전하께서 얼마 전 말씀하셨습니다. 제 신분으로는 폐하께 인정받지 못할 것이라고.”
원하던 말이 맞았는지 진평이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렸다.
“지금의 저한텐 가능성이 있습니까?”
“지금의 저한텐 가능성이 있습니까?”
그렇지만 이어진 질문에 대한 답은 제법 단호했다.
“없다.”
무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이렇게 말해 주니 현실을 직시하기 쉬워졌다.
“그럼 제가 여기서 화를 내 봤자 약자의 오기밖에는 안 되지 않습니까.”
진예에게는 그런 추잡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가진 것도 없으면서 질투에 미쳐 날뛰는 것보다 지저분한 짓이 또 있을까. 괜한 짓을 했다가는 여기서 더 미움받게 될 터였다.
그런데 진평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이곳에 가만히 앉아 있는다고 하여 해결되는 것 또한 없다.”
“대안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신분, 그것을 네가 만들지는 못해도 받아 낼 수 있지. 다른 누구도 아닌 누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니까.”
궁중의 규칙을 이끌어 가는 논리는 명확했다.
힘 있는 자에게서 힘이 나온다. 그리고 현재 그 절정에 올라 있는 자는 환의 황제인 진예였다.
“그리고 속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황제와 오래 함께하는 자에게 힘이 있을 것이라 믿게 마련이다.”
어렵게 돌려 말하고 있었지만, 직설적으로 정리하면 어서 가서 서엽과 함께 있지 못하도록 훼방 놓으라는 의미였다.
고민하던 무건은 오래 지나지 않아 결정을 내렸다.
가서 무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진예가 정말로 조서엽을 품에 안고 있다면…… 마냥 손 놓고 있기는 싫었다.
적어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싶었다. 자신에게 처음을 주고 후궁에까지 앉혀 놓고서는 다른 사내를 가지는 상황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정도는, 그것이 그녀에게 어떤 쓸모가 있는 행동인지 정도는 말이다.
그래야 자신이 어떤 식으로 그녀에게 효용성 있게 써먹힐 수 있을지 알아낼 수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제가 황궁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은 뭡니까?”
“간단하다. 당장 가마를 대령하라고 명하거라.”
방도를 얻은 무건은 곧장 발을 돌렸다. 본래 한번 결심하면 뒤를 돌아보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만큼 걸어가는 발걸음에 거침이 없었다.
진평과 걸었던 곳을 단숨에 되돌아가 제가 있던 곳까지 성큼성큼 걸어간 무건은 내관과 눈이 마주쳤을 때, 조금 전 진평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무얼 어려워하냐며, 명하면 되지 않느냐고 했던.
“당장…….”
입을 열자 근처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무건에게로 쏠렸다.
“당장 가마를 대령하라.”
이곳에 와 처음으로 흘러나온 무건의 명령에, 그러나 아무도 움직이는 이가 없었다. 모두 놀라 멍해진 탓이었다. 그에 무건의 뒤를 쫓아온 화친왕 진평이 그들을 호령했다.
“다 뭣들 하는 것이냐. 연 숙의가 가마를 대령하라지 않느냐!”
그제야 상황 파악을 한 이들이 분주하게 가마를 찾아 나섰다. 우왕좌왕하던 이들이 곧 무건의 앞에 붉은 비단으로 감싸인 커다란 가마를 대령하고, 그의 앞에서 활짝 문을 열어 보였다.
“올라타십시오, 숙의마마.”
제 첫 명령에 따라 앞에 놓인 가마를 보며 무건은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한 번도 누군가의 위에 군림하여 본 적 없었다. 한데 막상 저지르고 나니 이것이 무척 나쁜 짓처럼 여겨졌다.
이게 과연, 옳은 일일까?
딱히 누군가가 잘못한 거라고 말하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리가 맞았다. 환 황제의 딱 하나 있는 후궁으로서 말이다.
게다가 다른 누구도 아닌 제가 말하지 않았던가.
〈저에게 괴물이 돼라 하셔도, 그리할 겁니다.〉
그녀를 위해 괴물도 되겠노라고.
이것은 단 한 걸음일 뿐이었다. 겨우 이런 데에서 주저한다면 앞으로도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남몰래 꿀꺽, 침을 삼킨 무건은 몸을 낮춰 가마에 올라탔다.
곧 누군가의 손에 의해 문이 닫혔다.
* * *
침전의 문이 열리지 않은 지 사흘째. 그저 무슨 일인가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만 드러났을 뿐, 그 안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오로지 안에 있는 두 사람만이 알았다.
진예는 침대에 앉아 있었고, 서엽은 침대 앞에 무릎 꿇고 앉아 그녀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들은 목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언성 한 번 높이지 않고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둘, 특히 서엽의 옷은 허술하게 풀어 헤쳐져 있었지만 그 외 방의 풍경은 아무 일도 없이 정갈하고 또한 깨끗했다. 진예 또한 무건이 난장을 치고 간 이후로 별 변화가 없는 모습이었다.
“……해서 그 상단의 실질적인 두 번째 주인은 위도양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정확히는 서엽이 화친왕에 대해 제가 아는 모든 정보를 풀어 놓는 중이었다. 진예 또한 어렴풋이는 알고는 있는 것들이었지만, 그와 내내 이야기를 정리하다 보니 새로운 것들도 깨닫게 되고 점점 실체를 갖추어 가고 있었다.
“그 아이라면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중서령의 딸이었지, 아마.”
“그렇습니다. 듣기로는 화친왕에 대한 충성심이 남다르고, 화친왕도 어딜 가든 그이를 대동한다고 합니다.”
“흠…….”
어렸을 적부터 진예가 활이나 검술 같은 무예 쪽에 두각을 드러낸 반면, 화친왕 진평은 안에서 책만 파는 쪽이었다. 그의 몸이 약해 어쩔 수 없이 그런 면도 없지는 않았지만, 본인이 바깥 활동하는 걸 지독하게 싫어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장사치나 하겠다며 황궁을 뛰쳐나간 것부터 의심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5년이나 지난 일이다. 돌이킬 수는 없었다.
대체 무슨 계획인 걸까, 그는.
〈사병을 모은 건 아직 남아 있는 익재들 때문이었습니다.〉
……그 말은 과연 진실이었을까.
생각이 깊어질 무렵, 밖에서 태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아뢸 것이 있어 들었사옵니다.”
며칠 동안 아무도 침전에 들이지 말라 한 명령 때문인지 태감의 목소리가 극히 조심스러웠다. 한데 이번엔 사람이 왔다는 소식은 아닌 모양이었다. 용건을 듣지도 않고 쫓겨날까 싶어 아뢸 것이 있다고 미리 말해 두는 것을 보니 말이다.
그 소리에 서엽도 잠깐 문 쪽을 돌아보았다가 다시 진예에게로 시선을 두었다. 진예는 이번에도 바로 물릴까 고민했지만 혹시나 급한 일일까 싶어 일단 들어 보기로 했다.
“무슨 일이냐.”
“그것이,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화친왕 전하가 폐하께 전해 달라 이른 말이 있는데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진예의 미간에 미세하게 균열이 갔다. 화친왕이 찾아왔다는 사실에 저절로 신경이 곤두섰다.
“말해 보거라.”
“황도로 익재가 무리를 이루어 오고 있다는 말을 정위 백이 알려 왔다고 하옵니다.”
말을 듣고 먼저 반응한 것은 서엽이었다.
“정위가?”
“그렇습니다, 조 후.”
익재의 동향이 좋지 못한 것이야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그러니 둘째 친다 하여도, 그 소식을 하필이면 화친왕의 사람인 정위가 알려 왔다는 것이 걸렸다. 그것도 내쳐지면서 반토막 난 자신의 봉토로 돌아간 이 시기에.
심상치 않다 여긴 서엽이 손으로 바닥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곳에 있는 내내 무릎을 꿇고 있었던 탓에 발이 저려 바닥을 딛는 게 힘들었지만 진예 앞이라 내색하지 않았다.
“제가 나가 봐야겠습니다.”
하지만 뒤를 돌려는 찰나에 진예의 말이 그를 발을 묶었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
일단 멈추긴 했지만 서엽은 진예의 판단에 의아해했다.
“저 이야기가 거짓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하지만 익재가 정말로 황도로 오고 있다면.”
“그런 의미가 아니다.”
진예가 그의 말을 중간에 자르며 고개를 저었다. 화친왕이나 정위나 익재가 황도로 오고 있다고 거짓말을 해 얻는 이득은 딱히 없었다. 오히려 알리지 않고 황도가 쑥대밭이 되기를 기도하는 편이라면 모를까.
무엇보다 이런 유의 소문, 특히 익재에 관한 한 황제인 자신보다 그가 더 빨리 소식을 접할 확률이 높지 않았다.
“태감은 들으라. 그래서 피해를 입은 민가가 있다더냐.”
“아직 장계가 올라온 것은 없사옵니다.”
역시나.
익재들이 마을을 파괴하면서 오고 있는 거라면 지금껏 이렇게 조용할 리 없었다.
하면 문제는 어떻게 정위가, 혹은 화친왕이 그 소식을 먼저 접했냐는 것이었다.
장계가 올라오지 않았다는 말에 서엽도 고민에 빠진 듯했다. 단순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한동안 침묵하던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황도로 향하고 있는데 피해를 입은 곳은 없다니요. 뭔가 이상합니다.”
가장 이상한 것은 화친왕이었다.
이미 침전에 아무도 들이지 않고 서엽과 둘이서만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텐데, 구태여 이 시기에 찾아와 저런 말을 흘리는 데는 이유가 있긴 할 터였다.
정말로 시급을 요하는 일이기 때문이기도 할 테지만, 마치 빨리 밖으로 나오라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제가 깔아 놓은 판에 어서 발을 들이라는 신호 말이다.
그런데 이토록 노골적인데, 그렇다고 안 걸려 줄 수도 없는 덫이었다.
“익재는, 분명 어린아이만큼의 지능은 있는 놈들이었지.”
생각을 이어 가던 진예가 제 머릿속에 맴도는 말을 중얼거렸다.
황위에 오른 뒤로 진예는 자신의 정통성을 의심하는 자들의 눈을 돌리기 위해서 군사를 일으켜 2년에 걸친 대대적인 익재 토벌에 나섰다.
당시 익재의 서식지는 규모의 차이가 있었지만 총 서른세 곳에 달했다. 그중 그때 없애 버린 곳이 대략 스무 곳 정도. 후반으로 갈수록 익재와의 싸움은 힘겨워졌다. 놀랍게도 그들에게도 사령관 역할을 하는 익재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점차 전투 양상이 지능적으로 바뀌어 갔다.
무엇보다 그들이 다른 짐승들과 다른 것은, 복잡다단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함께하던 익재가 죽으면 울부짖으며 때로는 감정적으로 덤벼들기도 하였다. 목표로 한 놈을 찍어 놓고 집요하게 괴롭히기도 했고,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잔인하게 가지고 놀 때도 있었다.
마치 순진한 아이가 즉각적인 희로애락에 반응하는 모습과 비슷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이 조금만 더 진화한다면…….
“폐하,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십니까.”
“…….”
“폐하.”
서엽의 계속된 재촉이 있었으나 진예는 그에게 대꾸해 주는 대신 방문 밖의 태감에게 일렀다.
“알겠으니 태감은 그만 물러나라.”
“……예, 폐하.”
왜인지 태감이 조금 느리게 답해 왔다. 익재가 온다는데도 계속 침전 밖으로는 안 나가겠다는 뜻을 내비친 탓일 터였다. 그간 여러 사람의 발길을 돌리게는 했었지만 적어도 이번에는 나와서 상황을 살필 줄 알았다는 의미일 테고.
서엽 역시 생각이 다르지 않았는지 초조하게 굴었다.
“제가 자세한 상황을 알아보겠습니다. 보내 주십시오.”
“안 된다.”
그러나 진예는 제법 단호한 어조로 허락을 내리지 않았다. 대답이 나오면 당장 나갈 생각이었던 서엽은 의외의 반응에 당황했다. 그답지 않게 말이 빨라졌다.
“안 된다니요.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연무건이 아직 안 오지 않았느냐.”
애초에 침전에 틀어박힌 건 제 손으로 융경궁에 보내 버린 연무건을 다시 황궁으로 끌어들이기 위함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사흘간 모든 정사를 멈춰 놓을 이유가 없었다.
희생한 시간이 길었다. 시간 낭비를 가장 싫어하는 그녀에게 있어서 이미 많은 비용을 지불한 셈이었다. 그만한 가치를 지닌 것을 돌려받으려면 그녀의 계획이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되었다.
어차피 곧이다. 길어 봤자 딱 하루.
화친왕 진평이 이곳에 찾아왔다면 반드시 연무건 쪽도 들쑤시고 있을 터였다. 녀석 또한 그 순진한 놈을 이용할 생각이 머리에 가득할 테니까.
하지만 그녀가 시작한 이 조용한 주도권 싸움을 이해하지 못한 서엽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당장 그것이 중요한 건…….”
그의 말은 완성되지 못했다. 진예가 고개를 들어 그를 꿰뚫듯이 쳐다보았다.
“서엽,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말했던 것이다. 무는 법을 잊어버린 개라고. 짐에게 복종하겠다고.”
서엽의 눈이 흔들렸다. 그랬다, 불과 사흘 전에 한 맹세였다. 진예에게 자신을 원하는 대로 마음껏 이용하라고 했다.
……단지 그녀의 노리개라도 되고 싶어 한 말이었다.
진예는 그의 머릿속에 생각이 많아진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녀가 날카롭게 지적하고 들어왔다.
“벌써 결심이 흐트러진 것이냐.”
서엽이 곧장 부정했다.
“아닙니다.”
그저 진예를 지킬 수 없게 될까 봐 두려운 것뿐이다. 환의 황제라 하여도 결국은 목숨이 하나인 인간이니까.
그러나 서엽은 진예의 뜻대로 머리를 가라앉혔다. 지금껏 그녀의 판단을 의심한 적 없었다. 언제나 옳은 길로 걸어왔다는 점 또한 진예 옆에 항상 있었던 그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러니 오히려 이렇게 그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길이 생겨 기뻐해야 마땅했다.
결국 서엽은 예정된 수순처럼 도로 제자리에 앉았다. 저린 것이 풀리지 않아 다리의 감각이 둔했지만 편한 자세를 찾아 꾀를 부리지는 않았다. 일어날 때 움직임이 어색한 것을 본 진예도 그것을 이미 눈치챘지만 딱히 배려의 말을 흘리지는 않았다.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내내 입에 올렸던 주제로 되돌아갔다.
“위도양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멈추었었지.”
“예, 이 여인은 크게 특별한 건 없습니다만 얼마 전에 데려온 이가 회백국에서 온…….”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드디어 기다리던 소식이 당도했다.
“폐하, 연 숙의가 인교문에 들었사옵니다.”
인교문은 황궁의 침전 앞에 위치한 정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태감의 말은 곧 연무건이 이 건물 앞에 나타났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았다.
진예는 서엽과 하던 말을 끊었다.
드디어 기다리던 이가 왔다.
진예의 생각보다는 약간 이른 시점이었다. 예상치와 다른 점, 이것 또한 연무건을 상대할 때의 소소한 재미였다.
그러나 그녀는 대답하기 전에 방금 전 태감의 말을 다시 곱씹고는,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그것은 바로…….
“연 숙의가 짐을 보고자 하더냐.”
자칫 그냥 넘길 뻔했지만 진예는 태감의 말에서 다른 때와의 미세한 차이를 감지했다.
보통은 누군가가 뵙기를 청한다든가, 용건이 무엇인지 전하는 것이 지금 태감의 방식이었다. 그건 쓸데없는 데 시간 끄는 걸 좋아하지 않는 진예의 성미에 맞춰 길러진 그의 습관이었다.
한데 지금은 ‘인교문에 들었다.’ 그것이 끝이었다. 무건이 무얼 바라고 있는지 딱히 언급이 없었다.
역시나 태감에게서 짐작한 대로의 대답이 돌아왔다.
“말씀은 없으셨사옵니다.”
명색이 유일한 후궁이니 알아서 보고한 것이란 의미였다. 태감으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한 셈이다. 어쩌면 무건을 배려하려는 게 아닌, 진예에게 그만 밖으로 나오라고 그 나름대로의 은밀한 주청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긴 했다.
어찌 되었든 분명한 사실은 연무건이 진예를 만나고 싶다는 식으로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성질 급한 녀석이 또 이건 무슨 변칙일까.
진예의 생각이 길어지자 태감이 대답을 촉구했다.
“어찌하오리까, 폐하.”
“내버려 두거라.”
“밖의 비가 많이 차옵니다.”
비가 내리든 말든 감기도 안 걸리게 생긴 놈이라 조금도 걱정이 되지 않았다. 죽을 고비도 넘기고 살아 돌아온 녀석인데 이깟 비에 맞아 얼어 죽을 걱정은 본인도 하고 있지 않을 터였다.
다만 태감도 마찬가지로 여길 텐데 계속 강권하는 걸 보니 연무건이 불쌍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어서 밖으로 나와 밀린 일 좀 처리하라는 신호가 맞는 것 같긴 했다.
그래도 움직일 때가 아니었다. 아직은, 말이다.
“짐은 연 숙의를 볼 생각이 딱히 없다.”
이보다 명확한 의사 표시는 없었다.
연무건을 안 보겠다.
다시 말해 그 녀석은 그냥 버리는 패라는 의미였다. 황제를 배알하지 못하는 후궁이란 본래 땅바닥의 돌멩이만큼의 가치도 지니지 못하는 법이었다.
웬일로 자기주장을 하던 태감도 이번 말에는 물러났다. 더는 그의 편을 들지 않겠다는 항복 선언이었다.
그림자가 천천히 문에서 사라진 뒤에야 서엽이 물었다.
“연 숙의를 기다리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의도를 전혀 모르겠다는 듯한 말투였다. 연무건이 찾아왔다는 소식에 조금 여유가 생긴 진예는 천천히 침상에 기대며 대꾸했다.
“하나 그게 짐이 맨발로 나가 보겠다는 의미는 아니지.”
그러고 베개에 머리를 기댔다. 오후 시간에 이렇게 침상에 누워 본 경우는 살면서 얼마 없었는데, 생각보다 더 편안했다. 그녀가 쉬려는 걸 눈치챈 서엽이 옆으로 다가와 이불을 끌어다 주었다.
“오수에 드시렵니까.”
“그래. 계속 방에만 있으니 확실히 사람이 게을러지는 것 같구나.”
진예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서엽은 그녀의 괜한 걱정을 듣고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는 오히려 쉬겠다는 진예의 말이 반가운 쪽이었다.
“누가 감히 폐하께 그런 생각을 품겠습니까. 저는 여태껏 폐하께서 제대로 쉬신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그것이 이 서엽의 걱정거리였습니다.”
“걱정도 많다. 내가 쓰러지기라도 할 것 같으냐.”
“태산도 십 년 세월이 흐르면 그 모습을 바꾸는 법입니다.”
낮잠 한 번 자는 것뿐인데 비유가 너무 거창했다. 다만 서엽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단적으로 드러나는 말이었다. 진예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어떤 이야기를 해 줄까, 피곤함이 몰려와 흐릿해진 정신으로 생각했다. 덕분에 평소보다 조금은 감상적인 말들이 입 밖으로 흘러나갔다.
“서엽.”
“예, 폐하.”
“이전에도 말했지만, 짐을 그리 가슴 아프게 연모하지 말거라. 짐은 너에게 줄 것이 없다. 내 마음속엔 네 자리가 존재하질 않아.”
그러나 서엽도 이제 이 정도에는 아파하지 않았다. 내성이 생긴 모양이었다.
“신은 무언가를 바라고 폐하의 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알고 있다. 오랜 세월 그가 진예에게 바친 충성은, 헌신이라는 단어가 아니면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았다. 전쟁에서 올린 공으로 치하받은 영광된 자리마저 버리고 제게 온 이였다. 모두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직위를 내팽개치고, 역사에 한 줄조차 남길 수 없는 황제의 그림자가 되는 삶을 선택했다. 단지 그녀를 지키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지만, 지금은 제가 그를 붙들게 되고 말았지만 서엽의 마음까지 영영 제 것으로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명인자를 찾아 그이를 연모하게 되거든 그 마음, 언제든 거둬 가거라. 내 거기까진 욕심내진 않을 터이니.”
과연 그가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긴 할지, 지금의 모습만 봐선 확신하기 힘들어도 진예 스스로가 서엽을 진정한 사내로서 제 옆에 둘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불을 다 정리한 서엽이 한 걸음 물러나는 모습을 보던 진예가 문득 일전에 그의 소매가 피에 젖었던 광경을 떠올렸다.
“팔은 다 나았느냐.”
서엽은 제 왼쪽 팔뚝을 내려다보더니 몸 뒤로 살며시 숨겼다. 진예의 관심이 그다지 반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흉은 남겠으나 문제없습니다.”
덤덤한 말투였지만 잠시 흔들리는 그의 눈을 보며 진예가 물었다.
“네 명인자의 이름은 두 글자더냐, 세 글자더냐.”
의외의 질문이었던지 순간 서엽이 반응할 때를 놓쳤다. 그가 입을 몇 번 벌렸다 닫기를 반복하더니 겨우 반문해 왔다.
“……어찌 아셨습니까?”
“갑자기 네 스스로 몸을 지졌다고 하는데 당연히 그리 짐작할 수밖에. 한데, 그 명인자의 이름을 보고도 별 감흥이 없었나 보지?”
사실 반신반의했던 것인데 서엽이 저리 반응하니 진짜구나 싶었다. 서엽의 명인자가 정말로 정해졌구나.
그러나 서엽 역시 진예처럼 제 명인자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제 몸을 지져 버린 건 너무 지독한 짓이긴 했다.
누구와는 너무 다른 의미로.
“연무건은 짐의 이름 두 글자에 저리 눈이 멀어 버렸거늘.”
마침 생각난 진예의 시선이 침전 구석으로 향했다. 그러니까 연무건이 건넸던 옥가락지가 떨어져 있는 곳으로. 누군가 들어와 청소를 한 것도 아니라 아직 굴러갔던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뭔가 싶었던지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 서엽 또한 고개를 돌렸다. 뒤져 보면 황궁 내에서는 똑같은 것을 백 개쯤은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평범한 형태의 가락지를 보고 서엽이 의문 어린 눈빛을 띠었다.
“가져와 보거라.”
진예가 침상 밖으로 손을 빼며 말하자 영문은 모르지만 서엽이 주워 와 그녀에게 쥐여 주었다.
진예는 손안에서 그것을 굴리며 옥 특유의 차가운 감촉과 매끄럽게 다듬어진 단면을 느꼈다. 이곳에서야 대수롭지 않은 것인데, 과연 연무건에게는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는 물건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연무건이 언제 제 명인자를 만날지 몰라 몸에 늘 지니고 있었다는구나.”
〈이렇게 당신을 간절히 기다렸노라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리 소중한 이에게 주려고 했으니, 분명 밥 한 끼의 가치보다는 더하겠지.
과연 이 옥가락지는 제 주인을 제대로 찾아온 게 맞을까.
창문을 투과해 들어온 빛이 옥의 표면을 따라 흘렀다. 결이 정갈한 상급의 옥이긴 했다. 황도의 좌판에는 널려 있겠으나 연무건은 변방에 살고 있었으니, 아마 구하기 꽤 힘들었을지도 몰랐다.
“순진도 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름밖에 모르는 연인을 위해 준비할 물건은 아니었다.
진예의 중얼거림을 들은 서엽의 표정이 묘했다. 왜 이런 데 관심을 쏟느냐는 의문이 깃든 것 같기도 했다.
연무건이 당신에게 무슨 의미가 생겼느냐 묻고 싶은 듯이.
맞다. 굳이 이렇게 피곤함을 이겨 가면서까지 관심을 둘 만한 것이 아니긴 하지.
탁.
곁탁자에 내려놓는 소리가 제법 매정했다.
진예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사위를 두드리는 빗소리가 한순간 거칠어졌다. 후둑, 후두두둑. 떨어지는 기세가 겨울비치고 매서웠다.
* * *
말하자면 시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래도 자신을 안 봐 줄 것이냐며.
무건은 비를 막으려고 걸친 일구종마저 다 젖도록 아무 말 없이 꿋꿋이 서 있었다. 옷은 이미 기능을 잃고 그의 몸을 무겁게 했다. 혹독한 겨울의 추위가 뼛속까지 찾아들어 입술마저 떨리게 했다.
하나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태감과 그 옆의 내관들은 어디 비를 피하라는 한마디조차 건네지 않았다. 다시 안으로 들어가 황제에게 무건의 상태를 알려 주는 일도 하지 않았다.
넓은 황궁에서 오로지 혼자였다. 아무도 그의 편을 들지 않았으며, 안쓰러움에 마음 아파하는 이도 없었다.
그럼에도 무건은 세찬 빗줄기 속에서마저 하얀 입김이 다 보이도록 흘려보내면서 한 발짝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이 들여보내 달라고, 보고 싶다고 말한다 해도 만나 주지 않을 진예를 알았다. 이렇게 문 앞에서 기다리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의사 표현이었다.
그리고 이제 겨우 몇 시진 지났을 뿐이다. 서서히 날이 저물고 있었지만 무건은 며칠이 지나든 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을 요량이었다.
그로 하여금 진예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버텨 내서 반드시 증명하고 싶었다.
당신이 날 싫어하는 만큼 나는 당신을 원한다는 것을.
당신에게는 가벼워 보일지 모르는 이 마음이, 나에게는 결코 가볍지 않음을.
이렇게 하나하나 진예의 앞에서 보잘것없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언젠가는 인정받을 것이다.
그녀가 그리 중요하게 여기는.
〈너는 내게 아무 쓸모가 없지 않으냐.〉
쓸모를…….
솔직히 말하면 당장 단단히 닫힌 저 격자문을 부수고 들어가 안에 있다는 조서엽을 질질 끌고 나오고 싶었다. 이미 머릿속으로는 수십 번도 더 그 상황을 그렸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온갖 상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진예는 정말로 그를 안았을까. 자신과 했던 것처럼, 똑같은 방식으로?
그녀가 먼저 조서엽에게 손을 뻗었나.
조서엽은 그녀를 두 팔로 꽉 안고 놓아 주지 않았나.
그렇게 조서엽이 그녀의 어딘가에 제 흔적을 박아 넣었나.
떠올리고 싶지 않았지만 저절로 생각이 그런 쪽으로 굴러갔다. 스스로를 한계까지 몰아붙였던 그 밤에 서엽을 대입해 버렸다. 그날 자신이 얼마나 끓어올랐는지 아는 만큼 단지 상상에 불과한데도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제가 느낀 그 희열을 그와 공유하게 됐다니.
아닐 수도 있지만, 제 망상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사흘 동안 함께 있었다고 하니.
〈남녀가 한방에 사흘 밤낮을 같이 있었다. 그림이 안 그려지나? 설마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할 만큼 어리석은 것은 아니겠지.〉
……그럴 수도 있겠다.
그녀는 말하고 싶은 것이다.
네가 그렇게 의미 있다 여겼던 것이 사실은 이리도 하찮은 것임을.
온몸이 무너져 내릴 듯이 가슴이 아렸지만 이 또한 그가 견뎌야 할 일이었다.
환 제국의 황제다. 원한다면 누구든 취할 수 있었다. 그녀를 오롯이 차지하겠다는 생각은, 사실은 제 욕심에 불과했다.
안다, 아는데.
그럼에도 포기하기 어렵긴 했다. 제가 바라던 그림이 눈앞에서 스러져 내리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더한 오기를 부리고 싶어지기도 했다.
집념과 아집, 그 부정적인 것들이 뭉쳐 신기하게도 그에게 버틸 힘을 주었다. 중간중간 속으로 숫자를 세기도 했지만, 그 수가 너무 커지자 소용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머리를 비우고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했다.
마침내 비가 그치고, 얼마 안 가 해가 져 사위에 깊은 어둠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사물을 분간하기 어려워지기 전에 잠시 태감이 아래의 내관들을 데리고 침전의 불을 켠 뒤 다시 나왔다.
그사이 찬 바람이 불어와 침전 마당에 덩그러니 서 있던 무건은 몸에 오한이 들어 어깨를 떨었다. 비에 흠뻑 젖은 몸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제아무리 철인이라고 해도 내일 필시 몸져눕게 될 것이다. 추위로 손끝이 저절로 곱아 들고, 숨소리가 쌕쌕, 거칠어졌다.
그래도 꼼짝도 하지 않는 무건이나, 밖의 상황을 그릴 듯이 다 예상하고 있는데도 나오지 않는 진예나, 그런 그들을 중재조차 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는 태감이나. 전부 독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냉각된 그 분위기가 깨진 건 밤이 제법 깊어진 이경(밤 아홉 시에서 열 시)의 한가운데쯤 왔을 때였다.
기이익…….
침전의 문에 커다란 그림자가 지더니 안에서부터 문이 열렸다. 그에 고개를 떨구고 있던 무건이 시선을 들어 앞을 향했다. 태감이 문을 열고 나온 이에게 작게 묵례하는 것이 보였다.
안에서 나온 사람은, 조서엽이었다.
안쪽에 켜 놓은 불빛들 때문에 역광이라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특유의 건장한 몸이 서엽이라는 걸 알려 주었다.
비록 진예가 아니긴 했어도 무건은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일부러 과시하려는 듯 옷가지가 흐트러져 있던 그가 천천히 기단을 밟고 내려섰다.
무건의 눈이 서엽의 자세, 걸음걸이, 시선 등 면면을 자세하게 좇았다. 아무리 봐도 평민인 자신과는 너무나 다른 유의 사람이었다. 단지 자연스럽게 걷기만 하는데도 온몸에서 여유와 기품이 넘쳐흘렀다.
침전에 오래도록 틀어박혀 있던 그가 겨우 밖으로 나오자 태감이 반색하며 인사했다.
“이제 퇴궐하십니까, 조 후.”
서엽은 태감을 한번 보다가 무건에게로 시선을 향하며 답했다.
“내일 아침에 다시 입궐하겠네.”
마치 무건을 의식하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태감도 그것을 느꼈는지 무건을 한번 흘끗하고는 서엽에게 허리를 공손히 숙였다. 단순 후작에게 표하는 예가 아니었다. 그것은 명백하게 황제의 사내가 된 이를 경외하는 자의 몸짓이었다.
“밤이 어두우니 귀인께서 조심히 들어가시길 빌겠습니다.”
몇 년을 진예 옆에 있었지만 여태껏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태감의 지극히 공손한 인사에 서엽이 픽 웃더니 무건 쪽으로, 아니 침전의 입구 쪽으로 걸어왔다. 그러고 말없이 무건을 지나치려 했을 때였다. 무건이 자존심을 버리고 먼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저도 이제 조 후, 라고 부르면 됩니까.”
“…….”
그제야 서엽이 멈칫하고 쳐다보았다. 미약하게 한숨을 내쉬는 듯하던 서엽은 몸을 돌려 무건을 똑바로 향했다. 서엽이 눈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비에 흠뻑 젖어 버린 무건의 꼴을 한번 훑었다. 속으로 비웃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서엽은 일단 무건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강녕하셨습니까, 숙의마마. 이러다 고뿔이 드실까 우려가 되옵니다. 그만 융경궁으로 돌아가는 게 낫지 않으시겠습니까.”
이전과 다르게 깍듯한 존댓말이 돌아왔다. 다만 아랫사람을 대하는 양 말속엔 기묘한 위화감이 스며 있었다.
무건은 어금니를 살며시 물었다. 쓴물을 삼킨 것처럼 입 안이 떫었다. 그렇지만 분명 유쾌한 상황이 아님에도 왜인지 웃음이 흘렀다.
“하하…… 이젠 제가 당신보다 높은 사람입니까?”
“글쎄요.”
무건의 물음에 서엽이 모호한 대답을 해 왔다. 사실상 품계로만 따지면 아직도 후(侯)인 서엽이 위이긴 했다.
“비슷해는 졌나 보네요.”
한 끗 차이지.
무건의 대꾸를 들으며 서엽이 그리 생각했다.
내명부의 서열이야 황제의 총애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고, 그나마 후궁도 하나밖에 없는 와중이라 품계가 그다지 중요하진 않았다.
다만 이쯤 대꾸해 줬으면 얼추 다 장단을 맞춰 줬겠거니 싶었던 서엽에게 무건이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다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그에 서엽이 잠깐 방심하고 있는데,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졌다.
무건이 시선을 마주친 채로 천천히 몸을 내리더니 다 젖은 몸으로 추위에 떨면서, 얼어 버린 흙바닥에 무릎을 꿇은 것이었다.
이어진 말은 너무나 의외라 서엽마저도 당황케 하기에 충분했다.
“도와주십시오, 조 후.”
무건의 돌발 행동에 일순 태감도 눈썹을 치켜세웠다. 침전 앞에 대기하고 있던 다른 내관들도 차디찬 얼음 바닥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무건을 신기하다는 듯이 보고 있었다.
아무리 본래 귀한 신분이 아니었다고 해도 이제는 명실상부한 황제의 사람이었다. 함부로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일 위치는 아니라는 의미다.
하지만 무지로 인해 그런 제 처지를 알지도 못한 채 비까지 맞은 처량맞은 모습으로 제 아래에 물을 뚝뚝 흘리며 도움을 청하고 있다니. 그 모습을 본 서엽이 보는 눈이 많은 탓에 차마 화내지는 못하고 최대한 목소리를 낮췄다.
“……뭐 하는 짓입니까, 이게.”
“도와주십시오.”
무건은 일어나지 않고 방금 전의 말만 반복하자 서엽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얼핏 스친 시야 끝에서 아직 닫히지 않은 침전 문 앞에 비치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서엽이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어느새 진예가 따라 나와 밖의 상황을 지켜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밖에 무건이 있으니 필시 서엽과 무슨 일이 일어나리라 예상해 나온 것이었다.
그렇구나.
찰나에 서엽은 깨달았다. 지난 사흘은 지금 이 순간을 위해 희생된 것이다. 자신의 역할이 이런 것일 줄은 서엽도 짐작지 못했기에 당혹스럽긴 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라도 그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렇지만 과연 진예는 연무건이 이렇게 나오리란 걸 예상했을까?
서엽은 아마도 아닐 거라고 결론을 내리며 무건에게 다시 일렀다.
“일어나시지요. 보는 눈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러나 무건은 두려움도, 부끄러움도 몰랐다. 그가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이 소리쳤다.
“이곳에서!”
말하는 무건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시선을 진예에게로 고정했다.
“폐하를 뵐 수 있는 방도를 저에게도 알려 주십시오.”
서엽에게 말하는 척하고 있지만 사실상 진예와 대화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서엽에게 말을 건 것은 단지 그녀에게 제 뜻을 전하기 위한 과정에 불과했다.
진예는 응답하지 않고 대신 팔짱을 낀 채로 문틀에 기대어 있었다. 그녀의 옷깃이 왜인지 헐렁함을 알아챈 무건의 목소리가 조금 흔들렸다.
“보고, 싶습니다.”
눈앞에 있는데도.
그런데도 간절하게 그녀가 보고 싶었고, 그녀에게 닿고 싶었다.
“저도, 그분을 당신만큼 오래 눈에 담고 싶습니다.”
아니, 사실 서엽만큼이 아니라 그보다 더 오래, 훨씬 더 오래. 가능하다면 자신만 그녀를 눈에 담고 싶었다.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금의 자신에겐 불가능한 일임을 알기에 물어야 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제가?”
방법을.
자신은 절대 알 수도, 이룰 수도 없는 그 방법을.
〈신분, 그것을 네가 만들지는 못해도 받아 낼 수는 있지. 다른 누구도 아닌 누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니까.〉
화친왕의 말이 맞았다. 모든 것은 진예에게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니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신은 이곳에서 무릎 꿇고, 빌고, 울며 무엇이든 알아내야 했다.
방도를 손에 쥘 수 있다면 지금 이 순간 스스로가 느끼는 비참함 따위는 전혀 알 바가 아니었다. 자신의 마음에 흐르는 눈물 같은 걸 닦아 줄 여유는 없었다.
한데 그의 간절함을 배반하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안타깝지만.”
진예가 침전 밖으로 한 걸음 나왔다. 그녀가 기단 위에 서서 연무건을 눈 아래로 내려다보았다.
“이 황궁엔 연 숙의의 질문에 그리 친절히 답을 내줄 이가 없다. 이곳이 그리 만만해 보이더냐.”
그렇지만 무건은 그녀가 자신의 말에 반응을 해 준 것만으로도 기뻤다. 그녀의 목소리가 제 귓가에 닿는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 시간이 너무나 귀중했다.
무건이 턱에 힘을 주어서 추위에 자꾸만 떨려 오는 것을 멈추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아니요, 지금껏 제가 접한 그 어떤 곳보다 황궁의 담이 가장 높아 보입니다.”
목소리는 또렷했지만 말뜻엔 명백한 좌절감이 섞여 있었다.
진예는 슬며시 웃음을 비쳤다. 서엽의 앞에서 도와 달라며 무릎을 꿇는 건 신기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들 사이에는 결국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했다.
“잘 알고 있구나. 그 담은 어차피 네가 넘을 수 없는 것이다.”
진예가 딱 잘라 말했다. 그러자 대충 대화가 마무리될 것이라 예상했는지 태감이 어느 사이에 어린 내관을 시켜 가져온 겉옷을 제 손 위에 놓아 그녀에게 보였다.
“……폐하, 송구하오나 밤공기가 차옵니다.”
겉옷을 입을 게 아니면 빨리 들어가라는 의미였다. 진예도 딱히 더 무건과 말을 붙일 필요는 느끼지 못해 몸을 돌렸다.
“되었다, 이만 들어가려니. 조 후도 이제 서둘러 퇴궐을…….”
시키거라.
그리 말하려 했는데 끝난 줄 알았던 무건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진예가 곁눈으로 무건을 확인했다.
“제가 본 그 어떤 이의 것보다 폐하의 등이 가장 멀어 보입니다.”
무건의 말끝에 묘한 한숨이 배어 있었다. 단지 추워서는 아닌 것이, 다음 말엔 자조도 섞여 있었다.
“조만간 다시 볼 수 있을 거라더니, 그 차가운 등을 보여 주겠다는 의미였습니까. 난 네가 절대 차지할 수 없는 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거예요?”
말투가 너무 격의 없는 건 둘째 치고, 이 말을 들었을 땐 진예도 잠깐 놀랐다.
“저거, 생각보다는…….”
똑똑하구나?
저도 모르게 진예가 중얼거린 순간 눈치를 보던 태감이 얼른 겉옷을 펼쳐 그녀의 어깨에 얹어 주었다. 그녀의 목이 드러나지 않도록 단단히 여미고 있는 동안 무건이 선언했다.
“저는 시궁창에서 올라올 겁니다.”
당신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고.
그 말을 들으며 진예는 솔직히 신기해졌다. 무슨 저런 놈이 다 있지? 자신이 지금껏 전혀 봐 온 적 없는 유형이었다.
보통 제가 밟으려 하면 다들 두려워 바짝 엎드렸다. 그런데 저놈은 오히려 튀어 오르려고 하질 않나. 그러면서도 방금처럼 상황 파악은 생각보다 잘했다.
아직 제 주제 파악은 덜 된 듯하지만.
“뭐, 그래……. 발버둥 치고 싶겠지. 하지만 지네가 그토록 많은 다리를 지니고 발발거리며 기어 다닌다고 하여, 땅바닥을 벗어날 수 있느냐?”
“…….”
연무건은 어쨌든 지네 새끼였다. 일대의 벌레들을 포식하는 사나운 놈일지는 모르지만 어쩔 수 없는 숙명처럼 땅바닥밖에는 보지 못하는, 평생 그곳이 전부인 줄로만 아는.
“지네는 언제고 밑바닥만 헤맨다. 그리고 그것이, 이 진예가 정한 연무건의 운명이지.”
연무건은 어서 그 방도를 내놓으라 재촉하고 있지만, 진예는 결코 그에게 마음을 열어 줄 생각이 없었다.
누군가는 명인으로 엮이는 운명이 대단한 것이라도 되는 양 떠들어 대지만, 명인자라 하여 상대방의 모든 걸 마음대로 차지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한데 연무건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라고, 그것이 아니라고.
“이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이놈은…… 항상 기었습니다.”
진예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전에 그가 했던 말이 선연히 떠올랐다.
〈높으신 분이 타신 가마가 지나가면 머리를 조아려야 했고, 배가 고프면 지나가던 상인에게도 고개를 숙였습니다. 한데…… 이제 정인의 앞에서도 기어야 합니까?〉
또 그 말을 저 입에 담는다면 필요 이상의 자극을 해 오는 셈이었다. 정말로 혀뿌리를 뽑아 버릴지도 몰랐다.
진예가 무엇을 어떻게 할지를 셈하며 무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다행히 이번에는 달랐다.
“지네처럼 평생 고개를 쳐들지 못해 하늘을 마주할 수 없다 하여도 상관없습니다.”
무건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더니 긴장으로 표정을 굳힌 채 앞으로 한 걸음 옮겼다. 이전이었다면 옆에 있던 서엽이 당장 그가 진예에게 다가가는 걸 막아섰을 테지만, 이제는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묵인하고 있는데, 명도 받지 않고 후궁의 앞길을 막는 것. 그 또한 이젠 불충이었다.
“땅바닥을 기다 보면 당신의 발끝에는 닿을 수 있을 테니까요. 이 연무건이 원하는 건, 그것입니다.”
무건의 걸음이 기단 아래에서 멈춰 섰다. 그러고 이번엔 두 손을 바닥에 짚고 바짝 엎드렸다. 차가운 땅바닥을 짚은 그의 손에서부터 시작한 떨림이 팔, 그리고 몸까지 흔들었지만 무건은 꿋꿋하게 제 말을 완성해 나갔다.
“하늘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앞에 엎드려서, 빌고 애원하는 것입니다.”
“…….”
“어딘가를 밟고 올라설 생각이 없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기꺼이 폐하의 종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온몸이 썩어 문드러진 익재보다 더 끔찍한 괴물이 되는 길이라 할지라도.
당신이 돌아봐 주기만 한다면.
이토록 먼 거리를 한 발짝이라도 좁힐 수만 있다면.
그런 기회를 내려 준다면.
미친 사람처럼, 당신을 붙잡고 간청할 것이다. 내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이 내려 준 썩은 동아줄을 기쁘게 붙잡을 것이다.
“그러니 제가 당신의 옆에 설 수 있도록 쓸모를 증명할 기회를 주십시오, 대환의…… 황제 폐하.”
너무나도 어리석은 연무건은 이 운명을 굳게 믿고 있으니까.
무건의 말이 끝나자 한동안 정적이 일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고, 발을 움직이지도 않았다.
진예는 입김을 하얗게 내뿜고 추위에 떨면서도 제 할 말을 흔들림 없이 다 토해 낸 그를 담담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제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연무건이 ‘정답’을 내놓았다. 그러니 제 생각대로 되어 기분이 좋아져야 하는데, 왜인지 그렇지가 않았다.
내내 비를 맞아 쫄딱 젖은 몰골하며, 추위에 온몸을 떠는 모습, 이전과 태세를 바꿔 비굴하게 애원하는 말까지. 그냥 원래 뭐 하나 잘난 것 없는 놈이, 밑바닥에 바짝 기고 있는 것뿐인데 뭔가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이상해 보였다.
진예가 목을 답답하게 감싼 겉옷의 단추를 슥 풀었다. 그러고는 시선을 서엽 쪽으로 돌렸다.
“조 후.”
서엽이 기다렸다는 듯이 진예를 향해 똑바로 몸을 돌리며 고개를 숙였다.
“하명하십시오, 폐하.”
“아무래도 연 숙의가 짐의 황후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아주 짙은 것 같은데…… 조 후, 그대가 답을 내 줘도 좋지 않겠는가.”
진예의 말에 무건이 지그시 입을 다물고는 서엽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불공정하다거나 싫다거나 하는 식의 반박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입에서 나올 소리를 기다렸다.
서엽은 잠시 진예가 원하는 답을 가늠하다가 살며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황제 폐하의 유일한 후궁께서 황후가 되는 길, 답은 하나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무건은 해내지 못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음 대 대환의 후계를 확고히 하는 수밖에요.”
돌려 말하고 있었지만 그 의미는 곧 화친왕을 죽이라는 것이었다.
진예는 연무건과의 사이에서 후계를 볼 생각이 없으니, 적어도 제가 뜻하는 대로 다음 대 황제를 지정할 수라도 있게 가장 정통성 있는 황가의 핏줄을 견제해야 했다. 그것이 곧 화친왕이었고, 그녀가 현재 가장 거슬려 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 여우 같은 놈은 쉽게 잡히지 않을 터였다. 저 말의 진의를 아직 파악하지 못했을 무건에게는 더더욱.
하지만 진예가 물었다.
“연 숙의는 들었느냐. 저것이 바로 네가 황후가 될 수 있는 방도다.”
“…….”
아리송한 서엽의 말에 고민에 빠진 무건이 눈을 굴려 서엽과 진예를 번갈아 보기만 했다. 진예가 고개를 슬며시 들며 그를 채근했다.
“그대가 원하는 답을 들었는데 어찌 반응을 보이지 않지?”
무건의 침묵이 길어졌다. 대체 어떻게 해야 저들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게 될지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머리를 굴려도, 원래 무식한 놈이 지금 이 자리에서 저들이 원하는 답을 내놓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애초에 머리 쪽으로는 싸움조차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냥 자신이 늘 하던 대로 단순하고, 무식하게 나가면 되는 일 아닐까.
“…….”
무건이 고개를 들고 진예를 올려다보았다.
겨울바람이 제법 날카로워 얇은 옷을 입은 괜스레 그녀가 걱정되었다. 그렇지만 또한 이렇게 추운데도 흔들림 없이 서 있는 진예가 과연 그녀답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누구나 인정하는 이 나라의 절대 군주.
하지만 무건은 모두 알고 싶었다. 단지 저렇게 위엄 있고 아름다운 그녀의 껍데기만 보고 살고 싶진 않았다.
그녀의 마음 전부를 제가 차지하고 싶었고, 저렇게 단단해지기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알고 싶었다.
지금 말하고자 하는 건 그걸 위한 장치였다.
무건이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
진예는 그가 이어서 무슨 말을 할지 기대하는 눈치였다.
“답을 찾을 테니, 조서엽을 저에게 주십시오.”
이 말은 진예조차 예상을 못 했는지 말이 끝나자 얇은 눈썹을 싹 치켜올렸다. 서엽도 무건이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거냐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진예의 입술 사이로 어울리지 않는 반문이 흘러나왔다.
“방금, 뭐라고 했지?”
무건이 옆에서 저를 사나운 눈길로 보는 서엽을 곁눈질하다가 덧붙였다.
“조서엽을 저에게 달라고 했습니다. 평생은 아니고 한 달…… 아니, 보름 정도만이라도.”
무슨 생각인지 들여다보려는 듯이 진예가 무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무건이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사실 서엽을 제게 달라고 한 이유는 단순했다. 화친왕의 말 때문이었다. 속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황제와 오래 함께하는 자에게 힘이 있을 것이라 믿게 마련이라는.
그렇다면 서엽이 옆에 못 있게 하면 되는 것이다. 기왕 다른 곳에 있는 것, 제 옆이면 조서엽도 더 미쳐 날뛸 것 같았다. 그렇게 원하는 진예에게 못 갈 테니까.
그리고 두 사람을 찢어 놓아야 제게도 어떤 가능성이라는 게 조금이라도 생길 터였다. 다시 말해, 두 사람 사이에 비집고 들어갈 틈이.
물론 진예가 과연 이 말을 들어줄지 안 들어줄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이서 들리지도 않았고 사내의 것도 아니었다. 진예의 웃음소리였다.
무건이 눈만 위로 올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진예가 왜인지 유쾌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처음 황궁에 불려온 이후로 무건이 처음 보는 진예의 진짜 웃음이었다. 지금까지는 비웃음만 쏟아 내던 그녀였는데, 이번에는 정말로 눈매까지 예쁘게 휘었다. 그에 무건이 가슴 뻐근해짐을 느끼고 있을 무렵, 진예에게서 물음이 나왔다.
“그렇게 하면 네가 쓸모를 인정받는 것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에두르긴 했지만 무건의 제안을 승낙하겠다는 의미였다. 즉각 서엽이 반발했다.
“폐하, 절대 안 됩니다!”
진예를 위해서라면 뭐든 했고, 어디든 갔지만 연무건의 옆에 있는 건 아니었다. 그의 입장에서 보기엔 무건이 너무 부당한 요구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진예가 단칼에 거절하리라 생각했는데 이런 반응이 나오다니. 말이 되지 않았다.
진예는 단순 재미를 위해 다른 중요한 것, 자신의 안위를 희생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것도 화친왕이 두각을 드러내고, 익재가 황도를 향해 오고 있다는 지금 이 시점에!
한데 진예가 그의 반박을 틀어막았다.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다, 조 후.”
서엽이 놀라 입을 벌렸다. 자신이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들은 건지, 혹시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잘못 들은 게 아닌지 의심되었다.
“제가 없으면 폐하의 곁은…….”
하나 잘못 들은 게 아니다.
“금군도 있는데 내 신변에 문제가 될 일이 있겠느냐.”
느긋함마저 배어 있는 그녀의 말에 서엽이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기울였다. 머릿속에 물음표만 수십 개가 떠올랐다.
연무건을 제 것으로, 제가 손쉽게 다룰 만한 개로 길들이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알아서 기겠다는 놈인데, 왜 이런 과격한 방식을 용인해 주는 것인지 서엽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황제는 두말을 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이미 결론은 내려진 뒤였다.
“다만 보름은 너무 길다, 숙의. 이레 안에 답을 찾아라. 그러지 못하면 연 숙의는 황후가 되기는커녕, 평생 이 황궁 안에 다시 발을 들일 일은 없을 것이다.”
기간을 줄였다고 해도 무모한 건 마찬가지였다. 서엽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한 제 앞의 사내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시선을 받은 무건은 반대로 살며시 웃었다.
어차피 진예가 거절만 안 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기에 조건부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제가 서 있는 이곳은 시궁창이고, 올라가 봤자 바닥인 마당에 도박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기실 무건을 충직한 개로 만드는 게 목적이니만큼 진예는 그를 진짜 내칠 생각이 없었지만, 순순한 대답까지 마음에 들어 제법 만족스러워졌다. 그녀의 표정이 전에 없이 편안하게 풀렸다.
“조 후도 이 기회에 이레 동안 연 숙의를 많이 가르쳐 놓거라. 언제까지나 저리 상놈처럼 입을 놀리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니.”
그들 사이에서 미치겠는 건 오로지 서엽 하나였다. 진예 옆에서 강제로 떨어지게 된 것으로도 모자라, 제 손으로 왜 연무건을 사람으로 만들어 놔야 하는지. 짜증까지 일려고 했다. 그는 화를 애써 내리누르며 답했다.
“……황명을, 받드옵니다.”
그러고 서엽이 무건의 옆으로 한 발짝 가까이 옮겼다. 빨리 돌아가자는 의미였고, 다행히 진예도 적절하게 서엽의 분노를 조절해 주었다.
“이만 돌아가거라.”
그제야 무건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릎 꿇고 있던 탓에 다리가 아프고 내일 당장 심한 몸살이 걸릴 것처럼 몸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몸을 돌리려는 진예를 보면서 한마디 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이레가 지나면 못 볼 수도 있는데…… 그때까지, 매일 이곳에 찾아와도 됩니까?”
그에 침전 안으로 도로 들어가려던 진예가 살짝 떼었던 뒤꿈치를 다시 바닥에 내렸다. 그리고 다들 들으라는 듯이 크게 중얼거렸다.
“대체 저 천박한 욕망은 언제쯤 거두어지는 것인지.”
무건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는 양 반박했다.
“이젠 시간도 얼마 없고, 남아 있는 것도 목숨뿐입니다. 그런데 말을 가려 해서 제게 득이 되는 것이 있습니까?”
하긴, 그래서 저렇게 무모할 수 있는 것이겠지.
황궁에는 온통 제 소중한 것을 붙잡고 덜덜 떠는 인간들 천지였다. 이미 아무 가진 것이 없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저런 유가 특이하게 보이는 건 이상한 게 아니었다.
그저 삶의 방식이 너무 다를 뿐.
연무건은 이곳 황궁에 절대 어울리는 놈이 아니었다. 그래서 꽤 재미있고 귀엽긴 한데…… 너무 기어올라서는 피곤해진다.
하여 이번엔 좀 짓눌러 줄 작정을 했을 참이었다. 문득 무언가 이상한 기운을 느낀 진예가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콰아앙!
디디고 선 기단의 돌이 튀어 오르면서 거센 충격에 그녀의 몸이 흔들렸다.
“폐하!”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단숨에 이쪽을 향해 누구보다 빠르게 뛰어오는 서엽의 모습이 진예의 시선 끝에 걸렸다. 짧은 순간이지만 그것을 확인하고 진예는 딱히 죽진 않겠구나 생각하며, 제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곳에선 달을 가리며 나타난 검은 물체, 아니, 날개를 펼친 검은 생명체가 썩어 가는 눈동자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