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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1/18)

* 본 소설은 가상의 국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작품에 등장하는 이야기 및 기관·인물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는 허구임을 알려 드립니다.

서장.

누구에게나 인연이 있다.

그 인연은 대략 성인이 되는 열여섯 살을 전후한 때에 정해지곤 하는데, 상대방을 찾는 건 생각보다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했다. 평생을 함께할 이의 이름이 각자의 몸 어딘가에 나타났으니까.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새겨지는 인연 된 자의 이름, 그것을 ‘명인(名印)’이라고 한다.

명인은 상대방과의 연이 질길수록 짙은 글씨로 나타난다. 반대로 말하면 이름이 옅게 나타날 때에는 상대방을 찾기도 힘들다는 뜻이었다.

그렇지만 인연이라는 게 늘 그렇듯 언젠가는 연결되기 마련이었다. 명인이 새겨진 이후라면 불특정하긴 하지만 반드시 그 이름의 주인을 만나는 것이 이 세계를 구성한 신이 정해 먹은 규칙이었다.

하지만 혹자는 자신의 운명을 거역하고 다른 이를 찾아 나서기도 했는데, 사실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꿈이었다. 명인이 나타난 순간부터 운명은 그 이름에 속박이 되며, 어떤 식으로든 결국 명인 상대와 이어지기 때문이다.

환 제국의 황제, 진예는 그것이 이 세상을 창조한 신이 내린 가장 강력한 저주라고 생각했다.

인연이니, 사랑이니 모두 끔찍한 말들이 아닌가.

그런 몽상적인 말들은 믿지 않았다.

그런 허황한 언어들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제 어미와 아비 역시 그렇게 신이 맺어 준 인연이었지만, 제 자식 한 번 품에 안아 준 적 없는 매정한 사람들이었다.

사랑이란 완전한 허상.

흔히 말하는 내리사랑 또한, 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런 것을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기에.

하지만 이 세상의 신이 정한 명인의 규칙은 제아무리 황제라 하여도 역시 피할 수는 없었다.

‘……곧인가.’

잘 닦인 거울 앞에 비스듬히 서서 천천히 제 옷깃을 풀어 어깨를 드러내었다. 그러자 매끄러운 살결 위로 먹물을 머금은 듯 까만 글자 하나가 새겨져 있는 것이 거울에 비쳤다.

그곳에 비친 글자는, 연(延)이었다. ‘면류관의 덮개’라는 뜻의.

그러한 글자가 어깻죽지 부근에 나타난 건 넉 달쯤 전이었다. 시일이 지나서 그런지, 처음엔 흐릿했던 것이 이제는 제법 또렷해져 있었다.

그다음의 글씨는 아직 몸에 걸친 옷깃에 가려진 채였지만, 나머지 두 글자 역시 선명하게 새겨져 있으리라. 물론 딱히 더 보고 싶지 않았다.

많고 많은 글자 중에서 어찌 이런 불손한 한자를 쓰는 자가 자신의 인연이란 말인가. 황제인 자신의 머리꼭지에 앉겠다는 의미로 읽혀서 아주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색이 짙어졌다는 건 이제 곧 내 앞에 나타난다는 의미인가.’

자신의 수족인 서엽이 제국 전역을 이 잡듯이 뒤지고 있으니 그럴지도 모른다.

사실 성년이 된 지 한참 지났는데 제 몸에 명인이 새겨지지 않아 이상하다 여겼다. 어찌 되었든 신체 어딘가에 이름이 나타나는 시기는 보통 열여섯 살을 전후한 때. 사람마다 시기의 차이는 있다고 하나, 때가 지났는데도 어디에도 인연 된 자의 이름이 좀처럼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걱정하진 않았다. 딱히 자식을 낳아 대업을 물려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니.

그러나 이렇게 이름이 나타났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연씨 집안이라.”

이 한자를 쓰는 가문이 어디였는지 떠올리느라 잠시 상념에 잠겼을 때였다.

“폐하. 신, 서엽이옵니다.”

진예의 오른쪽 날개인 조서엽이 도착했다.

“들라.”

그림자가 조심스럽게 다가온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마침내 듬직한 서엽의 모습이 드러났다.

등잔의 붉은 불빛에 비친 말간 얼굴이 황제를 발견하자마자 화급히 숙어졌다. 한쪽 어깨가 드러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충성스러운 신하로서 황제의 나신을 보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 서엽이 즉시 사죄의 말을 읊었다.

“무례에 용서를 비옵니다.”

“용서랄 것까지야.”

진예가 조용히 웃으며 옷을 끌어 올렸다.

지나치게 바른 사내였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저 성정 때문에 태자 시절부터 십여 년이 가까운 시간 동안 의심 한 번 하지 않고 서엽을 제 곁에 두었다. 그리고 그 신뢰를 증명하듯 그는 현 황제가 한때 태자위에서 폐위되어 죽음의 위기에 몰렸던 시기에도 배반하지 않고 옆을 지켰다.

게다가 전쟁이 일었을 때 한때는 젊은 나이에 이례적으로 효기장군의 지위까지 올랐는데, 지금은 그 영광된 자리를 박차고 나와 오로지 진예의 명령으로만 움직이는 그녀의 심복이 되었다.

옷깃을 여민 뒤 몸을 틀어 바라보자 서엽이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를 내려다보며 황제가 입을 열었다.

“그대가 돌아왔다는 건.”

“찾았사옵니다.”

서엽은 한동안 변방에 가 있었다. 황제의 몸에 새겨진 이름의 주인이 누군지 반드시 찾아내라는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니 그가 찾았다는 자는, 환 제국 황제의 명인자임이 분명했다.

자신의 인연.

운명이 마음에 품으라 멋대로 명령해 버린 그자.

낯짝을 한번 보러 가긴 해야 했다.

“이번엔 틀림이 없겠다.”

서엽이 천천히 눈을 들었다. 등잔 빛이 반사되어 그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는 게 더 선연히 보였다. 진예는 그 눈에 비치는 당혹감을 읽었다.

당혹감? 실은 그는 황제가 자신의 인연을 찾길 원치 않았던 것일까. 마치 주인 잃은 개의 눈빛을 하는 서엽을 진예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서엽이 다시 고개를 숙이고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혹시…… 이름이, 선명해졌습니까……?”

마치 그것이 지독히도 싫다는 양.

서엽은 진예에게 표정이 보이지 않는 각도까지 고개를 내리며, 눈을 꽉 감았다.

“그래. 진해졌지, 아주 많이.”

“…….”

“어디 있느냐, 나의 정인은?”

서엽이 표정을 굳혔다. 대답이 없으니 황제가 나긋한 목소리로 재촉했다.

“서엽.”

“입궐을 시켜 두었나이다.”

마치 물건을 갖다 놨다는 듯한 말투였다.

미천한 이라는 것인가.

충심이 깊은 그였다. 자신의 절대적인 주인이자,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지존의 상대로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 터였다.

속뜻을 알아차렸지만 진예는 그를 꾸짖지 않았다. 다만 서엽의 옆에서 사뿐히 걸음을 멈췄을 뿐이었다.

“앞서라.”

* * *

〈……너로군.〉

그는 자신을 요란하게 수소문해서 찾아왔다고 했다. 온 동네를 이 잡듯이 뒤졌다고. 하여 동네 사람들이 혹시 무슨 큰일을 저질렀느냐고 헐레벌떡 뛰어왔는데, 얼마 안 가 그자가 나타났다.

이름은 조서엽. 그는 신분을 확인하더니 다짜고짜 마차에 타라고 했다. 그 뒤, 보쌈당하듯 끌려왔다.

생전 그렇게 화려한 마차를 본 건 처음이었다. 모서리를 금으로 장식하고, 빨간 비단을 두른 마차였다. 제 몸에 걸친 천보다 안쪽 의자에 깔린 비단이 더 비쌀 것이 틀림없었다.

픽스공금

그것을 이끌고 온 조서엽은 꽤 높은 신분인 듯했다. 단단한 어깨와 곧은 허리, 정갈한 자세, 그리고 차분한 말씨까지. 잘 차려입은 옷차림을 굳이 보지 않아도 그를 구성하는 모든 것에서 귀태가 났다. 한눈에 봐도 귀한 집에서 나고 자란 느낌이었다.

한데.

〈앞으로 네가 모실 분은 누구보다도 귀한 분이시다.〉

그런 자가 ‘누구보다 귀한’ 사람이라고 했다.

〈행동 하나, 말 한마디, 숨소리 한 번까지. 모든 것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이 먼저, 기꺼이 목을 쳐 주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때마침 보인, 조서엽의 허리춤에 있는 칼을 보고 긴장감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칼은 아마도 굉장히 날카롭게 벼려져 있을 것이다. 비록 칼집에서 꺼낸 걸 본 적은 없지만 그의 곳곳에 굳은살이 박인 손을 보면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지금은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혼자 남았다. 주변의 모든 것이 낯설었다.

‘책이 왜 이렇게 많아…….’

한쪽에는 서책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잘은 모르지만 방 안의 물건 하나하나가 다 값비싼 것들인 듯했다. 앉아 있는 의자마저 번쩍번쩍했다. 이렇게 섬세한 장식이 박힌 의자는 처음 보았다.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자 옆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 몸을 사렸다. 그제야 옆에서 지키고 선 이가 도로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괜히 주눅이 드는 상황이었다.

자신은 평민의 자식이다.

그런 자신이 도저히 발을 들일 수 있을 거라 생각지 못한 곳에 왔다.

‘황궁.’

황궁 문 앞에 서자마자 어마어마한 기백에 압도당했던 그때를 떠올리며 서엽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앞으로 네가 모실 분은 누구보다도 귀한 분이시다.〉

그게 무슨 뜻이었을까.

대체 무슨 이유로 이곳에 끌려왔는지는 모른다. 대역죄를 지은 기억 따위도 없었다. 애초에 평민이 대역죄를 지을 만한 어떤 힘을 가질 수 있을 리 만무하다.

큰 죄도 힘이 있어야 범할 수 있는 것이다. 힘없는 자는 기껏해야 쌀 한 톨 훔칠 여력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런 죄를 짓는다고 해서 황궁에 끌려오진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왜…….

상념을 끊은 건 밖에서 들려오는 굵은 목소리였다.

“황제 폐하 납시오.”

“……!”

황제라고?

순간 머리가 굳어 버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허둥지둥하는 기색을 보이자 옆에서 몸을 붙잡아 왔다. 양쪽에 사람이 붙더니 그들이 양팔을 잡고 일으켰다. 그러고 강제적인 손길로 다시 무릎을 꿇렸다.

내리누르는 억센 힘에 시선이 바닥에 처박혔다.

‘이렇게 안 해도 알아서 엎드릴 수 있다고…….’

마치 예를 모르니, 강제로라도 갖추게 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손길들이었다.

너무한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시야 끝에 검은색 신발이 걸렸다. 그것이 문턱을 넘자마자 주변의 모든 이들이 엎드리며 한목소리로 말했다.

“홍복을 누리소서, 황제 폐하.”

그러면서 옆구리를 툭 쳐 오는데, 따라 하라는 신호 같았다. 그래서 다급히 입을 열었다.

“호, 홍복을 누리소서.”

옆에서 다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제 폐하.”

“……황제 폐하.”

“눈을 올…….”

……리지 마라.

긴장한 나머지 뒷말을 듣기 전에 고개를 번쩍 들어 버렸다. 주변에서 크게 당황한 듯했으나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옆에서 엄한 얼굴을 하고 있는 서엽이었다. 그는 주제넘게 황제의 앞에서 고개를 든 것을 꾸짖는 양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은 금세 시야에서 지워졌다.

그 앞의 것이, 단숨에 시선을 빼앗았기에.

“…….”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황제는 순간적으로 눈이 멀어 버릴 만큼…… 아름다웠다.

생전 처음 보는 붉은빛의 눈동자엔 잡티 하나 없었고, 눈썹은 정갈하면서도 선명했다. 잘못 꺾인 곳 하나 없는 콧대와 선명한 인중, 매끄러운 턱선. 무엇보다 이렇게 눈, 코, 입이 오밀조밀하게, 또 조화롭게 보이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천상의 신이 아닐까.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그 외의 나머지 것들은 보이지도 않았다. 느긋하게 깜빡거리는 눈꺼풀의 움직임마저 가슴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하여 넋을 놓고 빤히 바라보고 있는데.

“무엄하구나.”

붓으로 그린 듯 날렵한 곡선을 그리고 있는 입술을 가르고, 낮게 가라앉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감미로운 음성이었다. 마치 구슬이 굴러가는 소리처럼.

자신을 향하여 예의 얼굴이 서서히 내려왔다. 이내 가느다란 검지가 턱 밑으로 들어왔다.

“폐하.”

옆에서 서엽이 경계하는 목소리를 냈으나 상대는 아랑곳도 하지 않았다. 대신 손으로 턱을 붙잡고는 시선을 맞추게 했다.

진주처럼 윤기 나는 붉은 눈동자에 촛불의 빛이 비치자 신비로운 분위기마저 감돌았다. 그곳에 자신의 모습이 담겼다.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황제는 고개까지 기울이며 이쪽을 찬찬히 살폈다. 그러더니 자신의 이름 석 자를 그 고운 입에 올렸다.

“네가 연무건이냐.”

무건은 넋이 빠진 채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예, 폐하…….”

대답을 들은 진예가 뒤의 서엽에게 물었다.

“이자의 몸 어디에 있다고 했느냐?”

“허벅다리이옵니다.”

“허벅다리라.”

대답을 들은 진예가 그 대답을 곱씹더니 무건의 턱을 놓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주변 이들에게 명했다.

“내 두 눈으로 증좌를 봐야겠으니, 이자를 벗겨라.”

무건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예?”

당황한 그를 앞에 두고 진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뿐인가, 예고도 없이 떨어졌건만 어명을 받은 이들은 한 치도 주저하지 않고 무건에게 다가왔다.

아랫도리를 가리고 있던 바지가 순식간에 벗겨져 버렸다.

“이, 이 무슨……!”

눈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한데 모두가 보는 앞에서 하체가 까발려졌다.

부끄러움에 뭐라도 가려 보려고 했으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지막엔 서엽이 다가왔다. 그는 아무 감정도 실리지 않은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며 칼집으로 툭 치며 다리를 강제로 벌렸다.

수치스러움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서엽의 마지막 행동 덕분에, 무건의 허벅다리에 있는 선명한 글씨가 진예의 시야에 잡혔다.

陳叡

진예.

환 제국 황제의 휘이며, 눈앞에 있는 여인의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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