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어느 보통의 일상
‘눈 감고, 혀 내밀어 봐.’
‘…….’
여느 때와 다름없는 점심시간이었다. 옥상 한편에서 자리를 잡은 채 무연히 운동장 너머를 내려다보며 전날 편의점에서 챙겨 온 유통기한이 지난 싸구려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우고 있는데, 여지없이 바보 녀석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옥상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같은 반인 이제홍은 그저 짧게 눈길을 스치며 ‘어, 맛있게 먹어라.’ 하고 여상히 지나칠 뿐이었는데, 그의 어깨 위로 불량스레 팔을 걸치고 있던 현찬성은 뻔히 먼저 자리해 있는 나를 향해 한껏 거들먹거리는 태도로 자릿세 운운하며 또 시답잖은 위악을 부리는 것으로 일테면 녀석 나름의 오늘치의 알은척을 해 왔다.
‘좀 가.’
그의 바로 뒤에 서서 걷던 지석운은 그런 놈의 다리를 툭 걷어차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퉁을 주곤, 이쪽으로는 그저 설핏 눈길을 건네며 지나쳐 갔는데, 그 단조롭고도 짧은 시선 안에서 철없는 친우를 대신한 착잡한 사과와 동시에 역시나 오늘치의 담백한 인사를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으로, 한쪽 발로 철제문을 텅―! 밀어 닫으며 권무진이 옥상으로 들어왔다. 그는 앞선 녀석들의 나를 향한 인사와 시비와 시선을 모두 심드렁히 관망하며 다만 벌써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문 채 지포라이터를 찰캉찰캉 손안에서 굴리며 녀석들이 자리한 곳으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
이쪽으로는 언뜻 시선을 흘리지도 않았다. 숫제 이쪽이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그는 조금 무료한 얼굴을 한 채 터벅터벅 지나쳐 갔다.
서로 배를 맞추고 살을 섞는 짓도 이제 그럭저럭 익숙해진 관계였지만, 우리는 굳이 오가며 마주칠 때마다 살가운 인사를 나누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서로 애써 모른 척을 하며 외면하는 것도 아니었고, 단지 둘 다 무뚝뚝한 성향인 데다, 그 기저엔 어쩌면, 조금 겸연쩍은 마음도 영향이 있을지 몰랐다.
어쨌든 이번에도 나 또한 다른 녀석들에게 먼저 그러했듯 흘깃 곁눈으로 들어서는 그를 확인했을 뿐, 딱히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 별다른 말도 걸지 않고 이내 시선을 거둘 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감흥 없는 눈길을 두는 운동장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결이라든가 속눈썹 사이로 얼비치는 햇살의 감촉 같은 것이 어쩐지 낱낱의 조각들처럼 유난스럽게 느껴졌지만, 곧이어 크게 베어 먹은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며 손바닥으로 목덜미를 두어 번 문지르는 것으로 그러한 감각을 가뿐히 누르곤 말았다.
잠시 후 녀석들도 여느 때와 같은 위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어울리지 않는 소꿉놀이를 하듯이 각자 가져온 도시락을 펼쳐 놓는 기척이 들려왔다. 그러나 웬만한 호텔 뷔페 수준의 학교 급식을 마다하고 굳이 옥상을 찾은 목적대로, 순식간에 먹어 치운 뒤에는 이윽고 본격적으로 담배를 빼어 무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녀석들이 밥을 먹는 동안에도 먼저 피워 대는 익숙한 담배 연기가 내내 맡아졌었다. 그리고 동시에 내 한쪽 관자놀이를 뚫을 듯이 집요하게 이쪽을 응시하는 시선 또한.
……없는 취급 해 놓고선.
손에 든 마지막 샌드위치 조각을 입안으로 밀어 넣으며 나는 고집스레 운동장 너머에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씹던 것을 꿀꺽 삼킨 뒤 물을 마시는 것으로 입속을 개운히 정리하는 때였다.
시야의 가쪽에서 부연 담배 연기를 피워 내고 있는 무리에서 돌연 하나가 불쑥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그러곤 지체 없이 성큼성큼 이쪽으로 다가오는 걸음.
머금고 있던 물을 마저 꿀꺽 삼키고, 나는 퍼뜩 손등으로 입술을 문질러 닦은 뒤, 곧게 시선을 내려 포장 껍질 따위의 쓰레기를 부산스레 정리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모아 담은 비닐봉지를 오므려 매듭을 묶는 찰나,
‘아…….’
와락 뻗어 온 손길에 덥석 한쪽 손목이 붙들린 채 그대로 끌어 올려져, 역시나 익숙한 구석 자리로 향하는 거침없는 걸음에 휙휙 끌려가야 했다.
사실, 그것 또한 딱히 새삼스러운 상황은 아니었다. 워낙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기분파인 무진은 어느 날은 불시에 이쪽 교실로 찾아와 대뜸 체육복을―하물며 사이즈도 전혀 맞지 않을― 내놓아라 생짜를 부리기도 했고, 또 어느 날은 복도를 지나다 마주치자 난데없이 ‘인사 안 해?’ 하며 장난조의 시비를 걸어 온 적도 있었다.
그러니까 그를 향한 무심을 빙자한 태연한 외면은, 종잡을 수 없는 그 행동 패턴에 대응하는 내 나름의 방책인 셈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한량없이 제멋대로 구는 그에게 온통 신경을 곤두세운 채 맨살로 무방비하게 깎이고 꺾여, 종내 내가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다만 이 상황은 뭐랄까, 천방지축 망나니에게 예외적인 규칙성이 부여된 행동이었는데, 점심시간마다 옥상에 올라와 혼자 초라한 도시락으로 허기를 채우는 나를 방관한 채 무리와 함께 옥상 다른 한쪽을 차지하고선 역시나 배를 채운 뒤 담배를 한 개비 피운 다음, 여지없이 내 손목을 끌어 잡고 물탱크 뒤쪽으로 데려가 후식처럼 내 몸을 탐하는 순서가 정해진 목차처럼 자리 잡은 것이었다.
그러나 뻔히 예상되는 차례였다 하더라도, 이제 익숙하다고 해서 마음이 조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덜컥 내려앉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기 위해 침착하게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다.
그런데 무진은 다짜고짜 손목을 끌어 잡고 구석으로 몰고 가서는 잠시 말끄러미 마주한 내 얼굴을 구경하다가, 별안간 툭 내던지듯 천진스레 지껄이는 말이 그러한 것이다. 눈을 감고, 혀를 내밀어 보라고.
나는 얼떨떨한 기운으로 당장 아무런 응답도 하지 못했다. 그가 나를 다루는 방식은 언제나 예고 없이 들이닥치고 거침없이 뒤집고 발라내며 기어이 자신의 욕심을 다 채우는 식이었다. 거기에 내 의사가 수렴되는 일은 없었다.
평소처럼 우악스레 턱을 움켜잡고 힘주어 입을 벌리게 한 뒤 입술을 깨물고 항복의 깃발처럼 내밀어지는 혀를 마음껏 취하는 대신, 뜬금없이 먼저 얌전한 청을 해 오는 폭군의 변덕에 나는 의구심으로 미간을 좁힌 채 꼴깍 목을 조여야 했다.
‘어서.’
그러자 과연 이내 눈을 부릅뜨며 턱을 삐죽 내민 사나운 얼굴을 해 보이곤 채근을 하는 것이다. 하긴, 이 또한 결국 단순한 변덕일 뿐이었다. 외려 한결 마음을 놓으며 나는 그제야 천천히 눈꺼풀을 내리고, 곧이어 마른 입술을 서서히 벌렸다.
‘…….’
그런데 그 이상은 선뜻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입속의 혀가 뻣뻣하게 굳어 버린 것만 같았다. 캄캄 어둠 속에서 내 가장 연약한 살덩이를 내어 보이는 일은 기실 더없이 위험천만하고도 오롯한 복종의 의미였다. 바로 이걸 노린 거구나, 하는 생각에 숨이 좀 더 가팔라졌다.
‘여승재.’
여전히 눈은 질끈 감은 채로 그러나 쌕쌕 숨을 내뱉으며 주저하는 것에 무진은 조용히 내 이름을 부르며 부추겨 왔다. 아아, 한숨을 흘리듯 하며 나는 이윽고 아랫입술을 스치며 혀끝을 내밀어 보여야 했다.
좀 더.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거듭 재촉을 했다. 영악한 악마 자식, 미간을 잔뜩 구긴 채 나는 거의 울먹이는 모양으로 혓바닥을 좀 더 빼내었다. 어쩐지 고개가 익숙한 방향으로 멋대로 비스듬하게 기울어졌다. 그러자 순간, 무방비하게 내밀어진 혓바닥 위로 역시나 무언가 닿는 촉감.
‘……!’
흠칫 어깨를 움츠리며 나는 퍼뜩 눈을 떠 버렸다. 바로 코앞에서 무진이 악동 같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놀란 기척 그대로 입안에 도로 담은 설면 위에는 다디단 미감이 분명한 형질로 놓여 있었다. 사탕이었다.
‘무슨 상상을 한 거야?’
무의식적으로 바짝 목을 조이듯 입안에 든 사탕을 빨며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빠르게 눈을 깜빡이자, 그런 나를 빤히 직시하며 무진은 희롱조로 물어 왔다. 혓바닥 위에서 눅진하게 흐무러지고 있는 사탕을 어쩌지 못한 채 나는 고개를 떨구어 버렸다.
‘응? 대체 뭐가 닿을 거라고 생각했지?’
난처해하는 꼴이 어지간히 재미있는지, 그는 끈질기게 얼굴을 더 아래쪽으로 기울여 와 기어이 시선을 낚으며 재차 조롱을 해 왔다. 눈두덩으로 불콰한 기운이 몰려들었다. 그는 즐거워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악마처럼 키득거리며 은밀하게 속삭여 온다.
‘너 되게 나쁜 애구나?’
‘…….’
그는 종종 그런 말을 했다. 하물며 그 자신이 나를 골탕 먹이고 수모를 주는 것도 내가 나쁜 탓이라고, 내게 그 책임을 전가하며 또 다른 괴팍한 능욕으로 터무니없는 보상을 요구하곤 했다.
아무도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특별히 착한 편은 아니지만 또래에게서 종종 보이는 치기랄까 객기랄 게 없어 의도한 말썽은커녕 딱히 장난질을 친 적도 없었고, 대외적으로는 그 얌전한 행동거지가 곧 ‘착함’으로 투영이 되는 것 같았다. 나는 줄곧 반듯하고 조용한 모범생이었다.
나쁜 애라니, 그것도 되게 나쁜 애.
그런데, 그 말이 퍽 마음에 들었다.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될 것 같았다. 그게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쩌면 옥상에서 처음 그의 담배를 손에 쥐었을 때, 그것을 들켜 그에게 난데없는 도둑 누명이 씌워졌을 때부터, 나는 그것을 정말 훔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보다 더, 또 다른 것까지도.
‘여승재, 음탕해.’
‘…….’
어느새 입안의 사탕은 무척 작아져 있었다. 나는 그것을 입천장과 혓바닥 사이에서 천천히 굴리며 단맛을 빨았다. 그리고 마주한 그의 얼굴을 초조하게 바라보다가, 언뜻 한 손을 들어 그의 뺨을 툭 쳐 버렸다. 차마 더 배짱은 없어 고작 펼친 손가락으로 슬쩍 그어 내는 정도였다.
‘……아.’
그런데도 제법 ‘찰싹’ 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가 던지는 모욕적인 우롱을 듣고는 한 박자 느리게 내보인 반격의 속도와 같이, 그 또한 딱히 충격이 가해지지도 않은 주제에 떨떠름히 돌아간 고개를 다시 바로 하고는 뒤늦게 ‘아’ 반응을 해 보였다. 그리고,
‘이게―’
여지없이 감사나운 기세로 두 눈을 부라리며 한 손을 휙 치켜들었다.
‘…….’
‘…….’
나는 움찔 놀라지도, 눈을 질끈 감거나 지레 먼저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그저 입안 가득 번지는 단맛을 삼키느라 목청을 꼴깍이며 마주한 그의 얼굴을 말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왜인지 그가 무섭지 않았다.
그 담담한 반응은 별로 재미가 없었는지, 무진 역시 이내 시큰둥한 기색으로 치켜들었던 손을 내렸다. 그러나 대신하듯, 돌연 내 턱을 덥석 붙잡고는 익숙한 순서대로 손끝에 힘을 줘 입을 벌리게 하곤 이마를 들이박을 듯이 불쑥 고개를 붙여 와 우악스레 입을 맞춰 왔다.
‘아, 으, 응…….’
입술을 질근 물어 당기고, 그것을 또 답삭 머금어 핥다가, 입천장으로 혀끝을 미끄러뜨리며 기어이 서로의 설면을 맞비비고 혀뿌리를 옭아맸다.
감미가 배인 타액이 섞이고, 그는 언제나 그렇듯 물탱크 너머 제 친우들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아니 오히려 들으란 듯이 부러 노골적인 혓소리를 내며 난잡하게 내 입술과 혀를 빨아 댔다.
그 괴망한 의도와는 달리, 그런 혓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어쩐지 배곯은 어린 짐승이 어미젖을 갈급하게 빨아 대는 모습이 떠올랐다. 왠지 안타까운 기분에, 이미 감은 눈을 바싹 더 찌푸리며 콧등으로 앓는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비스듬히 고개를 비틀어 그의 윗입술을 조심스레 핥으며 응할라치면, 그는 쥐고 있는 내 턱을 더 힘주어 붙들어 고정시킨 채 탐욕스런 혓바닥으로 내 입술은 물론이고 턱밑까지 개처럼 삭삭 핥는 것으로 뜻 모를 심술을 부려 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공호흡을 하듯이 턱을 길게 늘어뜨려 벌리게 한 입술 위로 와락 입술을 겹쳐 오며 또 한바탕 입속까지 샅샅이 핥아 내듯 하고서야 비로소 고개를 물렸다.
‘으…….’
요란한 키스에 순식간에 얼얼하게 부어 버린 입술을 손등으로 살살 누르며 나는 달린 것처럼 가쁜 호흡으로 가슴을 들썩여야 했다. 숫제 넋이 빠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언뜻 뭔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입안에 사탕이 없었다.
그새 다 녹아 버릴 만큼 작지는 않았는데……, 싶어 눈길을 들어 보자 무진이 고약한 얼굴로 보란 듯이 턱을 크게 움직이며 자신의 입안으로 가져간 사탕을 아작아작 씹어 보였다. 그러곤 이내 가루로 으깨 버린 것을 꿀꺽 삼킨 뒤, 그로써 앙갚음을 했다는 듯 ‘흥.’ 콧소리를 내며 득의양양해했다.
‘…….’
그 어리석고 교만한 폭군의 얼굴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나는 덩달아 물색없이 불우해진 기분으로 눈길을 떨구어 버렸다. 도무지 납득할 순 없지만, 나를 향한 그의 농락에는 항상 이처럼 응징이랄까 보복과도 같은 기미가 자리해 있었다.
하지만 제멋대로 구는 그에게 속절없이 휘둘리고 꺾이며 무너지고 마는 것은 번번이 나였다. 이미 아무것도 없는 나를 그는 얼마나 더 바싹 말려야 직성이 풀리는 걸까. 기어코 가루로 부수어지고서야…….
‘이번 주말에 시간 비워 둬.’
고작 사탕을, 것도 직접 입에 넣어 줬던 것마저 도로 빼앗아 가 버리는 심술궂은 심보에 혼자 어두운 곳까지 침잠해 있는데, 없던 일처럼 무진은 어느새 또 멋대로 내 교복 상의 단추를 두어 개 풀어낸 채 훤히 드러난 목덜미로 고개를 묻으며 홀가분한 명령을 해 왔다.
‘현찬성네 별장 가서 놀기로 했어. 같이 가.’
‘…….’
나는 입을 꾹 닫아 문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무진은 여상한 손길로 기어이 내 상의를 들추어 맨살을 쓰다듬고, 그대로 더 손을 뻗어 밋밋한 가슴을 매만지며 긴장으로 바짝 선 돌기를 장난감처럼 굴려 댔다. 그리고,
‘이제홍이 아는 여자애들도 부른대. 모델 준비하는 애들이라던데……,’
심드렁한 설명을 더하다 말고 돌연 열기를 띤 채 목덜미의 연약한 살결을 깨물며 혓바닥을 그어 왔다. 나는 입술 안쪽을 질근 문 채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낮게 호흡을 골랐다. 그가 만지작거리는 가슴의 돌기 너머로 수상한 심장 박동을 알아채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과연 무진은 그저 갑작스런 발정으로 몸이 달아, 커다란 양 손바닥으로 내 몸통을 바쁘게 더듬으며 가슴팍 위로 입 댄 흔적을 남기기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그러다 또 불쑥 고개를 들어 보이곤,
‘그래 봤자 네가 제일 예쁘겠지만.’
비식 질 나쁜 웃음을 지으며 말을 맺는 것이었다.
‘…….’
나는 계속 입술 안쪽의 연한 살을 꼭, 꼭, 깨물고만 있었다. 이번에도 무진은 다만 개처럼 내민 혓바닥으로 내 뺨을 길게 핥아 올리고, 귓불을 빨고, 부어오른 아랫입술을 머금으며 조급하게 굴다가, 기어이 내 상의를 턱밑까지 끌어 올린 채 구부정히 자세를 숙여 왔다. 그리고 입맛을 다시며 혀끝으로 가슴의 돌기를 건드리는 순간,
‘…예비종이잖아.’
종이 울렸다. 흠칫하며 뒤로 몸을 빼는 기척 그대로 나는 슬그머니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러자 무진은 마땅한 자신의 것을 빼앗긴 듯이 부루퉁한 얼굴로 볼멘소리를 했다. 시선을 내린 채 옷깃을 여미고 단추를 도로 잠그며 나는 애써 담담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담임이 수업 전에 잠깐 보자고 했어.’
‘상담 기간도 아닌데 무슨, 왜.’
무진은 당장 험상궂게 인상을 구기며 따져 물었다.
뜬금없는 상담 호출의 연유야 뻔했다. 나는 지난 모의고사에서 일생 최악의 점수를 받았다. 그와 어울리기 시작하면서 줄곧 조금씩 성적이 떨어지다가, 1학기 마지막 시험에선 기어이 곤두박질을 치듯이 어이없는 결과를 낸 것이었다. 분에 맞지 않는 명문고교에 재학 중인 성적 장학생의 담임으로서는 당연한 권리와 의무였다.
‘…몰라, 뭣 때문인지는.’
그러나 나는 눈길을 비끼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이마로 닿는 그의 눈빛이 발화 직전으로 아슬아슬하게 들끓는 것이 느껴졌다. 갈게, 속삭이듯 말을 남기고 나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저벅 걸음을 옮기는데,
‘저번에 체육은.’
여전히 바닥에 너부러져 앉은 채 그가 불량스레 고개를 돌아보며 짧게 물어 왔다. 뭐가, 역시나 짧게 되묻자,
‘저번에, 체육도 너 따로 불렀잖아. 담임도 아닌데, 왜.’
두 눈을 치뜨며 서슬 퍼렇게 달구쳐 오는 것이다.
‘…수영 수업, 왜 계속 빠지냐고.’
이번엔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그래서, 그는 조금 누그러진 투로 곧장 이어 물었다. 나는 퉁명스런 기운을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물 공포증 있다고 했어.’
‘물 공포증 있었어?’
그리고 얼핏 어리둥절해하는 물음엔 입을 꾹 다문 채 그저 고개만 저어 보였다. 그럼 왜, 물으려는 듯 의아한 얼굴로 다시 입을 떼던 무진은 그러나 짧게 내 몸을 훑는 시선 뒤로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아,’ 하며 머쓱한 기색으로 공연한 성질을 부렸다.
‘…씨발새끼가 남이 수영을 하건 말건 웬 참견이야….’
‘…….’
그 씨발새끼가 체육 선생이고, 참견의 객체는 남이 아닌 학생이라고 굳이 지적해 줄 필요는 없었다.
나는 도로 발길을 돌려 걸음을 이었다. 뜨거운 햇볕을 피해 그늘진 구석에서 옹기종기 늘어져 있던 다른 녀석들이 무어라 말을 붙여 왔지만, 별로 쓸데없는 말이라 상대하진 않았다.
그리고 옥상 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가 그대로 계단을 내려가는데, 곧이어 뒤쪽에서 덜컹! 부술 듯이 문이 여닫히는 소리와 함께 훌쩍 곁으로 붙어서는 기척이 있었다. 고개를 돌아보자,
‘나도 교무실에 볼일 있어.’
역시 이쪽으론 눈길도 주지 않고 시큰둥하게 말을 남기곤 양손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혼자 먼저 쌩하니 계단을 앞서 내려가 버리는 무진이었다.
‘…….’
나도 좀 더 걸음을 서두르며 소란한 복도를 걸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새 교무실 안으로 들어가 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뒤이어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과연 창가에서 혼자 어슬렁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딱히 볼일도 없이 다른 곳도 아닌 교무실에 들어와 창밖이나 기웃거리고 있는 모양이 신경 쓰이는 듯 떨떠름한 얼굴을 한 교사들이 곁눈으로 그를 힐긋거렸지만, 굳이 말을 붙일 생각들은 없어 보였다.
담임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시선을 낚아 ‘그래, 승재야.’ 하며 나를 불렀다. 좀 더 시간이 있었다면 상담실로 자리를 옮겨야 했을 것이었다.
‘요즘 얼굴빛이 안 좋구나, 어디 몸이 안 좋은 거니?’
옆으로 가 서자, 무릎이 닿을 만큼 의자를 끌어 바짝 거리를 좁히며 담임은 목소리를 낮추어 걱정스런 물음으로 운을 뗐다. 무진은 깐깐한 감독관처럼 그저 창틀과 천장의 규격 따위를 살피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할머니가 편찮으시다거나… 공부에 집중하기가 힘들어?’
묵묵부답이 답답했는지, 담임은 이윽고 본론을 꺼내었다. 아니요, 나는 거의 입모양으로만 대답을 했다. 담임은 사뭇 어려워하는 빛으로 잠시 주저하다가 좀 더 가까이 고개를 붙이며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이어 물어 왔다.
‘아니면… 혹시 누가 괴롭히는 거니?’
‘…….’
어차피 복도와 창문 너머 운동장에서 들려오는 소음들로 이쪽의 대화 소리는 바로 옆자리에서도 제대로 잘 들리지 않을 것이었다. 담임은 조심성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번에도 입을 굳게 다물고만 있었다. 대신, 내내 발치로만 떨어뜨리고 있었던 눈길을 들어 비로소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에 무언가 은밀히 할 말이 있다는 사인으로 받아들였는지, 담임은 초조한 기색으로 퍼뜩 길게 목을 늘어뜨리며 얼굴을 더 가까이 들이밀어 왔다. 그리고 잠시 묵묵한 침묵 속에서 방향 다른 시선이 흘렀다.
‘……아, 그래.’
그런데 자못 심각하게 굳었던 얼굴이 언뜻 희미하게 풀어지는 듯하더니, 왠지 또 금세 스스로를 다그치듯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도로 고개를 물리는 것이다.
‘다시 한번 집중해서 끌어올려 보자. 응, 이만 가 봐.’
때마침 수업 종이 울렸다. 얼핏 내 얼굴로 손을 뻗어 오던 담임은 고장 난 로봇처럼 버벅거리다가 결국 내 한쪽 어깨를 어색하게 두드리는 것으로 격려를 하곤 책상 앞으로 몸을 돌렸다.
분주하게 교과서 등을 챙기는 그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나는 옆구리에 책을 끼고 문을 나서는 교사들과 함께 밖으로 빠져나갔다. 먼저 나갔는지, 무진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조용해진 복도를 혼자 느리게 걷고 있는데, 돌연 뒤쪽에서 불쑥 튀어나오듯 나타난 무진이 그대로 쌩하니 앞서가며 권태로운 음성으로 말을 던졌다.
‘주말에 현찬성네 별장 안 갈 거야. 오피스텔로 바로 갈 거니까 대충 준비해서 와.’
‘…….’
멈칫 걸음을 멈추며 나는 물끄러미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역시 터벅 걸음을 멈추곤 고개를 돌아본다.
‘이제 여름방학이잖아.’
‘…….’
이제 여름방학이잖아, 여상한 알림이 어쩐지 두고 보자는 듯한 선전포고처럼 들렸다. 그리고 그 순간, 여름방학 동안 녀석들의 아지트와 다름없는 오피스텔에서 단둘이 지내며 그에게 꺾이고 또 꺾여 나는 아마도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상해 버릴 것이라는 막연하고도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그러나 고압적이고도 도발적인 그의 눈빛을 고스란히 맞받으며 나는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쭙잖은 오기도, 초탈 혹은 비관적인 체념도 아니었다.
순순한 응낙에 무진은 마땅하다는 듯 오연히 입매를 당기며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몇 걸음 잇다 말고 또 문득 멈춰 서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이번엔 덤덤한 가면 따위 벗어젖힌 듯, 왠지 잔뜩 분에 찬 얼굴로 이쪽을 쏘아보는 것이다.
흡사 소년만화 주인공처럼 두 눈에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서, 나는 얼핏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에 무진 역시 약 올라 죽겠다는 듯 당장 달려들 것처럼 송곳니를 번뜩이며 그르렁거렸다.
아, 나는 기어코 가루로 부수어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거센 불더미 속에서 잿더미로나마 형태도 갖추지 못한 채…….
잠시 후 뒤쪽에서 바쁜 걸음으로 걸어온 담임이 어서 들어가자 등을 밀었다. 나는 순순히 발길을 옮겼다. 옆머리로 매섭게 닿는 무진의 시선은 좀처럼 거두어지지 않았다. 잇몸이 근지러웠다.
***
W-E-L-C-O-M-E
휴대폰으로 led 전광판이라는 애플리케이션을 다운받아 놓았다. 각자의 언니오빠 혹은 ‘내 새끼’의 코빼기라도 볼 수 있을까 하는 염원으로 주야장천 회사 앞을 얼쩡거리는 아이들의 도움을 받았다.
매번 허탕을 치면서도 짙게 선팅한 밴 차량이 지날 때마다 접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소리를 지르며 손에 든 것을 열광적으로 흔들어 대는 녀석들이었다. 그러다 결국 출입문을 오가는 내게 생뚱맞게 들러붙어서는 사인 좀 받아 주면 안 되느냐 씨알도 먹히지 않을 청을 반복하거나, 제법 낯이 익은 아이들은 여지없이 ‘승재 씨, 승재 씨’ 하며 되바라진 농을 걸어오곤 했다.
징글징글한 기분에 보통은 눈길도 주지 않고 휘휘 손을 저으며 그저 빨리 벗어나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마침 그런 녀석들의 손안에서 번쩍이는 휴대폰 액정이 유독 눈에 크게 박혀 왔다.
‘그거…, 어떻게 하는 거지?’
그러고 보니 예전에 콘서트 현장에서도 빈번하게 보이던 것이었다. 따로 구입해야 하는 응원 도구보다야 확실히 실용적이고 눈에도 더 띄긴 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너무 정신 사나운 모양에, 아무리 열렬한 마음을 전하고 싶을지언정 내 평생 사용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게… 번쩍거리면서 움직이게 하는 방법이……”
그러나 순간 짓궂은 장난기도 좀 있었고, 아니 뭣보다, 애틋하고 반가운 마음을 이렇게라도 표현해 보이고 싶었다. 어제저녁부터 나는 좀 들뜬 상태였다.
그리고 마침내 시간이 됐다. 입국장 문이 열리고, 피로한 안색의 사람들이 밀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새삼스러운 긴장감으로 목을 빳빳하게 세운 채 나는 환영 인사가 요란하게 번쩍이는 휴대폰 액정을 가슴 앞으로 올려붙이고 입국장 주변으로 흩어지는 사람들의 얼굴을 바쁘게 살폈다.
과연 그 모양새가 퍽 눈길을 끄는지, 저마다 커다란 캐리어 가방을 끌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사람들이 그런 나를 흘깃하고는 피식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
번쩍거리는 건 끄자. 누구들처럼 낯선 이목을 끌며 즐거워하기는커녕 태연하게 버틸 배짱 같은 것도 없는 팔자다. 들고 있던 것을 슬그머니 내린 채 손끝으로 휴대폰 액정을 연신 눌러 댔다. 그런데 도무지 번쩍대는 기능이 꺼지지 않는 것이다.
기어이 고개를 숙인 채 이리저리 굴려 보며 간신히 작은 창으로 그 사이즈를 줄이기까진 했는데, 이거지 싶던 정지 버튼을 눌러도 역시나 무반응.
공연히 당혹스러워진 기분에 덩달아 눈을 깜빡이며 좀 더 이것저것 눌러 대다가, 성가셔져 결국 애플리케이션 자체를 꺼 버렸다. 그리고 그 찰나, 내려다보고 있는 시선 아래로 방향이 명확한 걸음 하나가 내 앞으로 우뚝 와 선다.
“아, 죄송합니다.”
퍼뜩 옆으로 물러서며 얼핏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바로 코앞에 마주한 얼굴은,
“…승재 오빠.”
경아였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커다란 은테 안경을 쓰고, 체크무늬 해진 셔츠와 운동화 차림이, 뭣보다 제 덩치보다 커다란 짐가방을 곁에 두고 선 모양이 누가 보더라도 오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학생다웠다.
그러나 기껏 먼저 발견해 알은척까지 해 놓곤 녀석은 얼떨떨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 왔어.”
그에 왠지 나 또한 겸연쩍어져, 사뭇 멋없는 인사로 2년여만의 상봉을 맞이하고 말았다. 오랜 비행시간 탓에 가뭇해진 안색을 하고서도 경아는 어딘가 상기된 빛을 띤 채 어물어물 말을 이었다.
“어…, 진짜 나올 줄은 몰랐어.”
“먼 데서 납시는데 친히 응해야지.”
반쯤은 장난이었겠지만, 여승재가 입국 마중을 나오는 것을 스카우트 승낙 조건으로 내걸었다고 들었다. 농담조로 상기시키며 어깨를 으쓱여 보이자 그제야 얼마간 덧없는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오빠는 여전히……,”
경아 역시 한결 개운해진 기색으로 히히 웃고는 어디 좀 보자는 듯 뒤로 슬쩍 고개를 물린 채 내 위아래를 훑으며 감상을 해 왔다. 그러다 이내,
“예쁘네?”
깜찍한 시늉으로 눈을 감추며 제법 희롱을 해 왔다.
“너도 여전히 멋있네.”
나도 곧장 응수해 주었다. 씨이……, 딱히 싫은 내색도 없이 녀석은 약 오른다는 듯 콧등을 찡긋거렸다.
“상한 데 없어 보여서 다행이야. 건강하게 잘 지냈어?”
“…어.”
그러나 기습적인 안부 인사에는 또 금세 낯을 가리듯 쑥스러워하며 흘깃 곁눈을 돌린다. 멀고도 긴 거리와 시간이었지만, 그 정도로 어느새 어색해질 관계는 아니지 않은가. 좀 서운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그 어설픈 태도가 퍽 귀엽게 여겨지기도 했다.
“잘 왔어.”
어쨌든 정말 오랜만이었다. 벅찰 만큼 반가웠다. 애써 감출 필요도 없어, 비로소 싱긋 웃음을 띤 채 양팔을 활짝 벌려 보였다. 그러자 녀석은 퍼뜩 미간을 모은 채 눈살을 접는다. 그리고 언뜻 입술을 삐죽이더니,
“오빠아……!”
울먹이듯 외치며 달려들어 와락 품 안으로 안겨 들었다. 주춤 떠밀리다시피 하며 나 또한 곧장 양팔 가득 녀석을 감싸 안았다.
“기욱이 오랜만!”
바깥으로 나서자, 맞은편 도로에 대기해 있던 밴이 서행으로 길을 돌아 바로 앞으로 와 섰다. 그리고 운전석에서 내리는 기욱을 보자마자 경아는 더없이 쾌활한 인사를 건네며 양손을 번쩍 치켜들곤 하이파이브를 청했다.
“어, 어, 경아야…, 오랜만에, 반가워.”
뻔히 누구를 마중하러 가는 길이다 알려 주었음에도 그러한 경아의 등장에 잠시 어리둥절한 기미를 보인 기욱은 그러나 이내 즐겁고도 겸연쩍은 빛으로 인사하며 두툼한 양손을 어설프게 들어 보였다.
짝짝 손바닥을 마주치며 어린애처럼 신나 하는 녀석들을 내버려 두고 나는 얼른 차 뒷문을 열어 놓은 채 경아의 짐가방을 훌쩍 들어 옮겼다. 그러나 예상보다 훨씬 묵직한 무게를 이기지 못해, ‘읏!’ 덧없는 기합과 함께 도로 털썩 내려놓아야 했다.
“어, 스 승재 형…, 아니, 실장님, 제가, 두세요, 이리 주세요.”
그에 기욱이 퍼뜩 몸을 돌리며 손을 뻗어 왔다. 완전히 물러서기엔 무안해, 녀석이 번쩍 들어 올리는 가방의 끄트머리나마 붙잡은 채 ‘거기 안쪽, 잠깐만,’ 하며 부산스레 차 안으로 들어가 구석으로 그것을 끌어다 놓았다.
“워어―, 여승재 실장님―.”
그러곤 다시 나와 서서 ‘춥다, 어서 들어가 앉아.’ 하며 경아를 먼저 안쪽으로 에스코트하자, 언뜻 놀란 기색을 보인 녀석이 한껏 짓궂은 얼굴을 해 보인 채 놀림조로 내 새로운 직함을 불러 왔다.
기욱은 자신이 더 뿌듯하고 쑥스럽다는 듯 해죽 웃으며 냉큼 운전석으로 가 앉았다. 서로 어색하니까 그냥 원래대로 부르라 말해 둔 터라 계속 그저 ‘승재 형, 승재 형’ 했었는데 뜬금없이 고쳐 부른 것은, 저 나름대로 경아에게 나에 대한 새로운 소식을 알리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냥 직함만 그렇게 붙은 거야. 실상 하는 일은 온갖 자질구레한 심부름꾼 역할이고.”
김 대표의 승진으로 계속 공석으로 남아 있던 마케팅홍보팀의 실장 직무를 떠맡게 된 셈이었는데, 당연히 스스로 무언가 기획하고 수립할 깜냥은 되지 않아, 그저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와 각 부서 간 협업 요청을 근근이 쳐 내고 있는 중이었다.
“워어―, 멋지다, 실장니임―.”
“붕어 같은 얼굴로, 까분다.”
그러한 사정에 나는 여전히 내게 새로 붙은 직함이 어색하고 불편했다. 그런데 경아는 차 안으로 들어가 앉으면서도 나를 힐긋거리며 계속해서 의뭉스러운 성원을 보내는 것이다. 뒤따라 들어가 나란히 앉은 채 차 문을 닫으며 나는 나지막한 핀잔으로 응수해 주었다.
어지간히 외롭고 고된 유학 생활이었는지, 경아는 내 품에 안긴 채 한참을 서럽게 통곡했다. 수고 많았다, 잘 돌아왔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래 주었지만 좀처럼 그치지 않는 울음에, 이윽고 사방에서 수상쩍은 시선들이 흘깃흘깃 던져져 왔다.
‘더 울면 더 못생겨질 텐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오빠가 그런 말 하니까 진짜 얄미워, 씨이…….’
결국 극약 처방으로 간신히 눈물을 거두게 하고는 겨우 밖으로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 덕분에 눈두덩이며 콧방울이며 발갛게 부어서는, 그 모양이 퍽 가관이었다. 그 서슴없는 지적에 녀석은 이번에도 분하다는 듯이 금세 눈을 흘겨 보이며 안전벨트를 맨다.
“어디로 모실까? 지금 먼저 본가로 갈래?”
곧이어 차가 출발을 하고, 룸미러로 기욱이 힐끔 눈길을 건네는 것에 나는 비로소 목적지를 물었다. 경아는 선뜻 고개를 저었다.
“아니, 본가엔 그냥 주말에 따로 잠깐 다녀오려고. 우선은… 내 숙소로 가 볼까? 짐도 좀 풀어야 하니까.”
그러곤 공연히 이쪽 눈치를 살피며 좀 멋쩍은 투로 변명처럼 말을 잇는 것이다.
“숙소가 아니라 이젠 네 거처지.”
전혀 눈치 볼 필요 없다, 나는 단호한 어조로 고쳐 말했다. 애써 웃음을 참는 듯 녀석은 입술을 말아 문 채 도르르 눈을 굴렸다. 그러나 이내 어깨를 움츠린 채 ‘으으으―’ 앓는 소리를 내며 작게 발을 구르는 것으로 요란한 환호를 대신한다.
경아는 기획개발부에서 새롭게 분리된 디자인 콘셉트팀 팀장 직무로 정식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 그야말로 귀하게 모셔진 재원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사측에서 눈독을 들인 케이스는 아니었다. 애초에 그럴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유학 과정을 모두 이수한 경아는 이미 꽤 좋은 조건으로 글로벌 SPA 브랜드의 파리지부에 취업이 결정된 상태였다. 그런데 우연히 웹서핑 중 회사의 공고를 발견하곤, 옛 추억 삼아 익명으로 포트폴리오를 보내 본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그냥 한번’ 제출해 본 포트폴리오가 사내의 각 팀별 디자이너들 사이에선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만장일치로 통과가 된 것이었다.
그리고 뒤늦게 그 익명인의 정체와 사정이 밝혀지고서는 회사에서도 안달을 낼 수밖에 없었다. 국내 거처 마련은 물론, 최고 대우 수준의 연봉 제시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나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언젠가 돌아올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힘든 유학 생활을 마치고 바로 취업까지 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곳에서 아예 터를 잡으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짐작이었다.
“공부는 하고 싶은 만큼 했어?”
차량은 영종대교를 빠르게 통과하고 있었다. 기욱에게 히터 세기를 조금 줄여도 될 것 같다 이르고, 콘솔 박스에서 미리 준비해 놓은 음료를 꺼내어 주며 경아에게 넌지시 소감을 물었다.
“응, 최소한 10년은 버틸 자원은 된 것 같아.”
차창으로 바짝 얼굴을 붙인 채 교량 너머 왕양한 바다 위로 부서지는 햇살을 말끄러미 응시하고 있던 경아는 그대로 씩 웃으며 선선하게 대답했다.
“다행이네.”
그 흔쾌한 대답과 여유로운 미소를 띤 얼굴에서야 나는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혹여나 타국 생활이 외롭고 힘들다는 이유만으로 돌아올 결심을 했다면, 실망할 뻔했다.
“내 새끼들 진짜 다 컸네…….”
“하하! 맞아, 오빠 새끼들 다들 잘 컸지.”
흡족하고도 뿌듯하기까지 한 기분에 느긋하게 기대어 앉으며 혼잣말조로 중얼거리는 것에 경아는 그제야 차창에서 시선을 거두어 고개를 돌아보며 호응해 주었다. 케이와 쌍둥이 녀석들의 활약 또한 외국에서도 익히 듣고 보아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나저나 현준이는 제대하고 아직 뭐 잡힌 건 없나?”
그리고 돌연 거론되는 친숙한 이름에는 아무래도 조금 쭈뼛하는 기분이 든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녀석은 한때 나와 현준의 관계를 은근하고도 노골적으로 성원했던 것이다.
“응, 우선 잡혀 있던 광고 스케줄만 소화하고 있고… 제대하기 전에 기획해 놓은 팬 송 싱글앨범 작업 들어갔고… 그리고 차후 문제는 고민을 좀 하고 있나 봐. 김 실장님… 아니, 김 대표님도 것 때문에 신경 곤두세우고 계셔.”
“으음, 그렇군.”
그런데 짐짓 예사롭게 풀어놓는 그의 소식에 녀석 또한 그저 담백한 호응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러곤 또 문득 새삼스러운 눈길로 이쪽을 훑으며 말을 얹어 온다.
“근데 오빠, 아까 공항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낀 거지만, 스타일이 좀 달라졌다? 무슨 패션 화보에서 튀어나온 줄?”
“뭐…, 나이 먹고 자연스럽게 달라지지……. 이 바닥에서 너무 수수하게만 해 다니면 좀 얕잡혀 보이기도 하고.”
그러나 나로서는 그러한 지적이 무척 오랜만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2년여 전부터 꾸준히, 자의나 자연스러운 변화라기보다는 우격다짐식으로 부득불 장착되어 온 차림새였다.
그래도 이제는 스스로도 그렇거니와 익히 봐 온 주변인들 또한 이런 모양새에 제법 익숙해져, 웬만해선 딱히 더 입을 대는 경우는 잘 없었는데, 오래간만에 지적을 받곤 또 의식을 하게 되자 역시나 겸연쩍은 기분이 인다.
“어, 그 시계는, 설마, 진짜야?”
“어, 아니, 그냥 좀 약간, 다를 수도 있고.”
그리고 외딴곳으로 눈길을 비끼며 목덜미를 슥슥 문지르는 것으로 무안스러운 기분을 누르는데, 그 결에 또 녀석은 내 손목에 채워진 시계로 시선을 박고는 호들갑스러운 반응을 해 오는 것이었다. 긴장감으로 나는 과도하게 뻣뻣하게 굴고 말았다.
“으음.”
그러나 경아는 이번에도 이내 덤덤하게 수긍을 할 뿐이었다. 음, 목을 조이며 나는 열없이 눈길을 떨어뜨렸다. 그런데 돌연 ‘킥!’ 웃음을 터트린 녀석이 의미심장한 혼잣말을 해 온다.
“아아, 이게 바로 인형 놀이 당한다는 거였구나.”
“…무슨…, 대표님이랑 연락했었어?”
생경하지 않은 표현에 뜨끔해하며 곧장 추측해 묻자, 경아 역시 홀가분하게 ‘하하!’ 호탕한 웃음과 함께 대답을 해 주었다.
“이제 그냥 실장님도 아닌 명색이 대표님인데, 귀국 스케줄이랑 정식 입사일 조정하느라 당연히 미리 통화도 하고 메일도 오갔지. 그러느라 자연스럽게 우리 오빠 안부 겸 그동안의 신상의 변화도 언급됐고.”
“아.”
“뭘 나한테까지 숨기려고 하냐? 서운하게.”
“아니 딱히 그럴 의도보단, 그냥…….”
그러곤 사뭇 섭섭하다는 얼굴을 해 보이며 핀잔을 주는 것엔 멋쩍게 대꾸를 하다가 아무래도 핑계지 싶어 그냥 말끝을 흐려 버렸다. 칫, 소리를 내면서도 다행히 녀석은 크게 마음 상하지는 않은 듯 이어 샐쭉한 표정으로 내 옆구리를 쿡 찔러 왔다.
“그런데… 나는 예전에 몇 번 얼핏 스친 게 전부긴 하지만, 분위기 꽤 험악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말이야.”
“뭐…….”
그러나 나는 이번에도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얼버무릴 뿐이었다. 그러다 언뜻 차선을 바꾸느라 백미러를 흘깃거리고 있는 기욱을 흘려 보며 ‘아, 그런데,’ 목소리를 낮추어 말을 바꾸었다. 응? 경아가 곧장 고개를 가까이 붙여 왔다. 기욱이, 운전석 쪽으로 힐긋 조심스런 눈짓을 해 보이며 나는 작게 속삭여 말을 이었다.
“…모르고 있어.”
“아, 응, 알았어.”
그에 경아 역시 퍼뜩 고개를 끄덕이며 어색한 호응을 해 왔다. 그리고 공연히 기욱의 눈치를 살피듯이 두리번거리다가 ‘아, 날씨 좋네.’ 혼잣말을 하며 기어이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이내 참지 못하겠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며 키득거려 댄다.
웃지 마, 그런 녀석의 옆구리를 찌르며 나는 반대편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식 출근은 다음 주부터지? 그전에라도 뭐 필요한 거 있음 언제든 연락해, 바로 튀어 올 테니까.”
현관 안쪽으로 캐리어 가방을 들여놓고, 도어락 비상키를 건네준 뒤 나는 다시 밖으로 나가 섰다. 여독이 쌓였을 녀석에게 당장 본격적인 회포를 풀자 할 수도 없었고, 이쪽으로서도 아직 업무가 끝나지 않은 터였다.
“실장님을 함부로 오라 가라 하면 쓰나.”
과연 오랜 비행에 푹 절여진 얼굴로 히죽 웃어 보이며 경아는 실없는 농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잡다한 심부름꾼 실장님은 그럴 때 써먹는 거라서.”
어깨를 으쓱이며 응수하곤 나는 먼저 현관문을 밀었다.
“외롭고 심심할 때도?”
닫히는 문틈으로 얼른 고개를 빠끔 내밀며 녀석은 덧붙여 물었다. 그럼, 흔쾌한 대답과 함께 그런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나는 곧장 발길을 돌렸다.
“오빠 고마워. 연락할게.”
“그래, 쉬어라.”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건물 밖으로 나가 보자, 기욱이 현관 바로 앞에 차를 대 놓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짐을 챙겨 내리느라 먼저 회사에 들어가라 말해 놓는 걸 깜빡했다.
“어, 기욱아. 나 잠깐 다른 볼일이 있어서, 미안, 너 먼저 회사 들어가라.”
우선 차 문을 열어 안쪽으로 고개를 들이민 채 잔뜩 계면쩍은 얼굴을 해 보이며 말을 건네자, 갑작스러운 변경 사항에 무엇보다 혼란스러워하는 녀석은 이번에도 어쩔 줄 몰라 하며 당혹감을 비쳤다.
“어, 어디 가시는데요? 어차피 가는 길에, 그, 그럼 데려다드리고 들어갈게요.”
“아니, 반대 방향이야. 괜찮아. 바로 들어가, 응?”
거듭 달래고 어르듯 입력을 시키고서야 그런 녀석을 먼저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택시를 잡을까 하다가, 바로 코앞인데 싶어 그냥 곧장 발길을 돌려 조금 바쁜 걸음을 내디뎠다.
과연 얼마 걷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히려 차를 타고 가는 것보다 골목을 가로질러 가는 편이 빠른 것 같았다. 그리고 훅훅 입김을 뱉으며 무척 오랜만인 오피스텔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전혀 면식이 없는 경비원이 다가와 앞을 막아 세웠다.
신분증을 내보이고, 이어 방문 호수에 인터폰을 넣어 확인 절차를 거친 뒤에야 나는 승강기에 오를 수 있었다. 신분증을 돌려주는 경비원에게 이전에 근무하시던 분은 어디 다른 곳으로 옮긴 것이냐 물어보려다가, 그냥 말았다.
현관문 앞에 서서는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아무래도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훅, 호흡을 뱉으며 마침내 벨을 눌렀다. 그러자 잠시 후 안쪽에서 기척이 들리고 곧바로 철컥 문이 열렸다. 그리고,
“어서 와.”
선뜻한 기세로 현준이 얼굴을 내보이며 맞이하였다.
“…어, 그래.”
나는 왠지 좀 얼떨한 상태로 어설픈 인사와 함께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현준은 퍽 편안한 태도로 먼저 발길을 돌리다가 얼핏 다시 돌아보곤 그런 내 상태를 지적해 왔다.
“차 타고 온 거 아냐? 얼굴이 좀 얼었네?”
“아니, 근처에 먼저 다른 볼일이 있어서 그냥 바로…… 아참, 오늘 경아 왔어.”
제대를 한 현준과는 처음으로 단둘이 대면하는 시간이었다. 새로운 매니저를 비롯해 베테랑들로 구성된, 녀석을 위한 팀이 꾸려져 전담되었고, 거기에 당연히 나는 포함되지 않았다. 회사에서 준비한 제대 축하 파티에는 김 대표와 동석해 이미 얼굴을 보고 인사를 나누기도 했지만, 형식적인 대화가 오갔을 뿐이었다.
“경아 누나? 아, 정식으로 스카우트됐다 했지 참. 오늘 왔구나……. 보고 싶네.”
“응, 회사엔 다음 주부터 출근인데, 시간 봐서 쌍둥이랑 케이까지 다 불러 정식으로 회포 풀어야지.”
모든 상황에서 의도해 기피한 건 아니었지만, ‘스카우트 승낙 조건’이라는 회사의 언질이 있기도 전에 흔쾌하게 직접 경아를 마중할 마음을 먹었던 것과는 달리, 녀석을 대함에는 겸연쩍은 주저함이 있었다. 그래도 경아의 귀국 소식과 다른 녀석들을 입에 담고 나니 어색한 기운이 얼마간 증발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시간 맞춰 보자. 그러고 보니 제대하고서도 바로 스케줄 소화하느라 그놈들이랑 제대로 모이지도 못했네. 아, 차 마실 거지? 커피밖에 없다.”
“응, 괜찮아.”
그리고 한결 가뿐해진 채 현준을 뒤따라 주방으로 들어가선 손수 내려 주는 커피를 마시며 제법 손님 대접을 받았다. 커피 잔을 건네는 손이 조금 거칠어진 느낌에 얼굴뿐만 아니라 평소 손발도 꼼꼼하게 관리를 해야 한다 말을 얹고는 여전히 깐깐한 잔소리꾼이라는 핀잔을 받았다.
향이 좋은 커피를 홀짝이면서는 다른 아이들의 근황을 가벼운 수다 삼아 좀 더 이야기하다가, 본격적으로 마주한 녀석의 일정을 주제로 삼은 대화로 들어갔다. 이제 더는 녀석의 전담 매니저가 아니라곤 하지만, 명색이 마케팅홍보 실장이었다.
현준 역시 거리낌 없이 요즘 진행 중인 싱글앨범에 관한 개인적인 고민을 털어놓았고, 제대하자마자 쉴 틈 없이 기획된 일정에 투정 섞인 불평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러게 말이다, 맞장구를 쳐 주면서도 나는 이제 확연하게 달라진 녀석과 나의 거리를 가늠할 수 있었다.
“…한 잔 더 마실래?”
그리고 자신은 절반도 비우지 않은 머그잔을 집어 들고 일어난 현준은 깔끔하게 비운 내 잔을 흘깃 확인하며 멋쩍은 듯 물어 왔다. 아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현준은 잔을 치우고, 대신 새로운 컵에 생수를 따라 들곤 돌아와 마주 앉았다.
“형.”
“응, 얘기해.”
얼마 남지 않은 계약 기간, 제대 전부터 들어온 광고와 미리 기획된 싱글앨범 외에 새로운 장기 스케줄에는 썩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는 것에서 대충 그 복잡한 속내가 짐작되었다. 그리고 뜬금없이 둘만의 면담을 청하는 전화를 받고는, 비로소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정했구나, 직감할 수 있었다.
입대 후 복무하던 때부터 계속 고민해 온 문제였다며 현준은 말문을 열었다. 앞으로도 가수로서 무대에 서고 싶은 욕심은 있지만 배우 활동에 좀 더 역점을 두고 싶고, 아이돌 그룹 출신이라는 커리어가 자신에게는 소중하고 큰 자산이지만, 이미지 변신의 기회를 발판 삼아 자신의 인생에서도 이쯤 해서 한번 터닝 포인트가 필요한 것 같다는 결론에 다다랐다고.
“그린 엔터 쪽이랑… 알아보고 있어. 아니, 그렇게 정했어.”
그린 기획사는 중견 배우들은 물론 스타급 연출자들까지 대거 소속되어 있는 건실한 회사였다. 영리하고 현명한 선택이었다. 잘 골랐다, 납득을 하면서도 선뜻 아쉬운 미련을 털어 낼 순 없었다.
“이쪽에서 재계약으로 좀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 그래도, 아닌 거지……?”
“오오, 여승재 씨가 이렇게 붙잡을 줄은 예상 못했는데.”
넌지시 꺼내 보는 말에 현준은 다소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당연히 붙잡지. 전현준이잖아, 너.”
꼬장꼬장한 기세로 눈살을 찌푸려 보이며 나는 퉁을 놓았다. 그러자 녀석은 또 조금 아연해진 기색으로 눈을 끔벅이다가, 왠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떨구곤 혼잣말조로 ‘고맙네.’ 중얼거렸다. 공연한 심술에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
그래도 꽁꽁 숨기고 있다가 갑작스레 통보하지 않아 줘서, 이렇게 미리 말해 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이래저래 혼자 힘들었을 시기에 함께 고민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은 삼켰다. 그러자 이번엔 녀석이 눈살을 찌푸려 보이며 불퉁한 핀잔을 준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얘길 회사 통해서 불쑥 통보해 버리고 말 사이는 아니잖아, 형이랑 나.”
“…응, 그렇지.”
무안한 기분에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꾸했다. 경아 앞에선 한껏 느른한 기운으로 ‘내 새끼들 다 컸다, 잘 컸다.’ 하며 거들먹거렸지만, 이 녀석은 너무 많이 커 버렸다. 내가 더는 감당하지 못할 만큼. 하긴, 그렇다면 여러모로 녀석의 선택이 옳았다.
“뭐, 형이랑 좀 더 사사롭게 발전할 여지라도 있었으면 그냥 계속 남았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군에서 앞뒤로 바싹 구워지면서 개고생하고 겨우 무사히 제대했는데도 그쪽 사정은 여전한 것 같고……, 그렇다고 어떻게 면회 한번을 안 오냐?”
물색없이 혼자 씁쓸한 회상에 젖어 있는 것에 현준은 짐짓 비아냥조로 너스레를 떨어 오다가 아무래도 속상한 마음을 누를 수 없었는지 불현듯 인상을 왁 찌푸려 보이며 서운함을 피력했다. 움찔하며 고개를 드는 찰나 시선이 맞닿았다가, 나는 넌지시 눈길을 비껴야 했다.
“아니, 일부러 안 간 건 아니고…….”
일부러 가지 않았다. 쌍둥이들이나 케이가 같이 가자 했을 때도 없는 스케줄 핑계를 댔었다.
갑작스러운 입영 결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당사자로서 공연히 얼굴을 비추어 그 심란한 마음을 더 들쑤시고 싶지도 않았다고, 뭣보다, 뒤에 사람 좀 붙이지 말라는 애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누구 덕분에 내내 감시당하는 기분으로 ‘더럽고 치사하다’는 오기가 애먼 데로 향한 탓도 있었다. 어쨌든 서운해할 것이라고는 생각했었다.
“하긴, 별로 보고 싶지도 않았다.”
“…이제 와 뭐 그런 억지를 부려?”
“헛! 이 형 나이 먹고 뻔뻔해졌네?”
“그럼 나이를 공으로 먹었겠어?”
“허!”
그래도 시간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이 센 것 같았다. 얼마간의 몰염치와 어이없음이 동반되었지만, 어느새 우리는 지난 감정들을 서슴없이 꺼내어 농조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다 문득 지금 이런 분위기라면 꼭 예전 그대로라는 느낌이 얼핏 스치기도 했지만, 그 또한 덧없는 미련일 뿐이었다.
“오늘 일정 끝났어? 시간이 애매하네.”
“아니, 다시 회사 들어가 봐야지. 이쪽 대표님이 출퇴근 시간에 얄짤없는 분이시라.”
“하하. 맞아, 실장님… 아니 대표님 꽤 단호해지셨더라. 그럼 이쪽 결정 사항도 나중에 적당히 타이밍 봐서 형이 전달하는 걸로?”
“그래, 내가 맡아서 정리해 줄게. 회사에서도 너한테 고마운 입장이니까 잘 마무리될 거야.”
마지막으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텁텁한 입안을 축인 뒤 나는 그만 외투를 챙겨 들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시 회사에 들어가 봐야 하는 게 사실이기도 하고, 전할 말이 제대로 오간 이상 더 눌러앉아 수다를 떨 명목이 없기도 했다.
나오지 마라 했지만 현준은 ‘문은 열어 줘야지.’ 하며 현관까지 따라 나왔다. 그리고 선뜻 앞서 나가 직접 현관문을 열어 주기까지.
있어라, 단출한 인사와 함께 그런 녀석과 몸을 스치듯 하며 나는 밖으로 나갔다. 아니, 나가려던 참이었다.
“형.”
덤덤히 부르는 소리에 ‘응?’ 대꾸하며 바로 옆에 선 녀석을 돌아보았다.
“예전에, 휴가 나와서 한 번 한다 했었던 거, 기억나?”
어……, 하며 시선을 굴리는 사이 불시에 덜컹 다시 문이 닫혔다. 아, 흠칫 놀란 기척을 덮듯이 녀석이 그림자를 드리우며 현관문으로 나를 바짝 몰아 왔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아니, 마지막 기념 삼아.”
“야, 너 또……!”
그리고 뿌리칠 새도 없이 불쑥 뻗어온 손으로 내 상의를 단번에 훌쩍 위로 끌어 올린 채 드러난 맨몸으로 와락 고개를 숙이는 것이다. 그러나 왠지 움찔하는 기색으로 내 가슴팍 앞에서 멈칫하고는,
“와아…….”
감탄인지 허탈인지 모호한 탄성을 흘린다. 그리고 결국 아무런 성과 없이 몸을 바로 세우며,
“지독하다, 지독해.”
잔뜩 질색한 얼굴을 해 보인 채 주체가 애매한 타박을 해 왔다.
“대체 어떻게 하면 이런 자국이……. 설마 맞고 사는 건 아니지?”
“너야말로 한 대 맞아야겠어? 이거 놔.”
그제야 나는 엄격한 시늉을 하며 여전히 내 옷깃을 붙들고 있는 녀석의 손등을 매섭게 쳐 내곤 당장 뒤돌아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단단히 더 혼쭐을 내 주고도 싶었지만, 당혹감에 어서 이 상황을 넘기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애들이랑 시간 맞춰 보고 연락할게―.”
그리고 성난 걸음으로 빠르게 복도를 걸어 나가는 내 등 뒤에서 현준은 그저 천진스럽게 말을 건넬 뿐이었다. 하든가 말든가, 나는 씩씩대며 곧장 엘리베이터로 올라타 버렸다.
뒤늦게 조롱을 당했다는 자각에 ‘저걸 진짜…….’ 하며 미간을 좁힌 채 혼자 바글바글 끓었지만, 1층에 다다른 그 짧은 시간 동안 또 금세 식었다. 그러나 건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아무래도 착잡해진 기분에 잠깐 구석으로 가 선 채 담배를 빼물었다.
“후우…….”
어쨌거나 내심 노심초사해 하며 녀석과의 재계약에 공을 들이던 김 대표 또한 퍽 상심이 클 것이다, 생각하며 깊게 빨았던 담배 연기를 한숨처럼 길게 뱉어 냈다. 그러다 언뜻 등줄기를 스치는 한기에 흠칫하곤, 앞니로 담배를 질근 문 채 그제야 한쪽 팔에 걸치고 있던 외투를 제대로 껴입었다.
그때 마침 호주머니에서 휴대폰 벨이 울렸다. 퍼뜩 소매로 마저 팔을 끼워 넣고, 한쪽 손가락 사이로 담배를 옮긴 채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어 액정을 확인했다. 양반은 못되시겠다.
“예, 대표님.”
목을 가다듬을 겨를도 없이 퍼뜩 전화를 받자, 휴대폰 너머에서도 역시 곧장 긴박하고도 익숙한 외침이 쏟아져 나왔다.
「여승재에―!」
“예, 저 지금 회사 들어…”
「여승재, 나 살려 줘!」
“예? 그게 무슨, 대표님, 무슨 일 있으세요?”
「나 결국 모가지 잘리나 봐! 어떡해!」
그런데 호들갑스럽고도 난데없는 엄살이 평소보다 한결 더 위급한 기미를 띠고 있었다. 덩달아 덜컥 가슴을 조였다가, 울먹이듯 덧붙이는 말 속에서 범상치 않은 고리를 낚으며 나는 어렴풋한 짐작으로 침착하게 물었다.
“혹시 무진…, 권 전무, 다녀갔어요?”
「아니, 방금 전화 왔어, 지금 이쪽으로 오고 있으니까 대기하고 있으라고. 목소리 완전 깔렸다고, 여승재에, 나 살려 줘어―!」
“…….”
과연. 뻣뻣하게 경직되었던 어깨가 삽시에 축 늘어졌다.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징징 우는 소리를 뒤로 하고 짤막한 언질을 남기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우선 손가락에 끼우고 있던 담배를 가져와 물며 갈급하게 빨아들이고,
“후우…….”
자욱한 연기를 뱉으며 좌우로 길게 고개를 늘어뜨려 근육을 이완시켰다. 때마침 신호가 바뀌어 택시 한 대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급히 휴대용 재떨이로 담배꽁초를 비벼 끄고 나는 도로를 향해 손을 들어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