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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일상 #02 (38/41)

그 후, 일상 #02

“엇, 여승재잖아?”

가게 입구로 들어서며 바삐 지나치는데, 카운터 앞에서 비스듬히 기대서 있던 남자가 문득 그런 내 앞으로 확 쏟아지듯 몸을 기울이며 알은척을 해 왔다.

놀라 급히 멈춰 서며 얼굴을 확인하자, 안무가 T였다. 흐느적거리는 익숙한 얼굴을 맞대고 이쪽 역시 긴장을 풀고 간단히 인사를 나누었다.

“아, 오랜만이네. 몇 번 기획사 들른 적 있는데, 안 보이더라.”

“매일 거기만 있나 뭐. 그런데 몸은 좀 괜찮아? 전에 봤을 때 그 통깁스 무시무시하더만. 언제부터 다시 나온다고?”

“이제 재활 치료 다 끝나서, 다음 주부터.”

“다행이네―.”

진심이 담긴 염려로 눈매를 휘며 그는 장난스럽게 주먹으로 내 어깨를 툭 쳤다. 마침 카운터 안쪽에서 직원이 그에게 카드 영수증을 내밀었다. 건성으로 그것을 건네받으며 T는 일행으로 보이는 이들을 먼저 밖으로 보내고, 이어 안쪽을 휘 살피며 물어 왔다.

“이쪽은 웬일? 누구 만나러?”

“응, 친구들 잠시.”

“으흠, 그렇군. 그럼 다음 주부터 또 잘 지내 보자고요.”

그리고 산뜻한 인사를 끝으로 버릇처럼 이쪽 엉덩이를 툭 건드리며 돌아서는 것에 괘념치 않으며 나는 그저 한 손을 슬쩍 들어 인사를 대신했다.

가게 문을 나서서 일행과 합류한 뒤에도 그는 유리문 바깥에서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한번 해 보인 뒤에야 온전히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경쾌한 기운에 덩달아 기분이 썩 맑아져 나는 혼자 씩 웃으며 가게 안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바로 마주 보이는 곳에 무진을 비롯한 녀석들이 앉아 있었다.

“늦었어, 미안.”

다가가 무진의 옆 빈자리로 앉으며 인사하자, 생크림이나 캐러멜이 듬뿍 얹어진, 이쪽으로서는 보는 것만으로도 어금니가 녹아내릴 것 같은 커피를 마시고 있던 제홍과 찬성이 ‘미용실 다녀왔어?’ 히죽거려 오고, 맑은 허브차를 앞에 두고 신문을 읽고 있던 석운은 그저 힐긋 눈길을 들며 ‘오랜만.’ 하고 짧게 인사를 받았다.

좀처럼 다섯 명이 한꺼번에 한자리에 모이기가 쉽지 않아, 점심시간을 틈타 전화를 돌린 제홍이 급히 불러 모은 것이었다.

먼저 내 몸 상태에 대한 짧은 안부가 오갔고, 일전에 급습한 놈들에게 대접한 저녁 식사에 대한 감사 인사랄까, 대충이지만 퍽 그럴싸하게 만들어지는 내 요리 실력에 대한 평가가 장난조로 이어졌다.

곧 직원이 주문을 받으러 왔고, 나는 옆자리를 힐긋 살피며 무진이 마시고 있는 것과 같은 커피를 주문했다. 그런데 무진의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내내 말없이 서슬 퍼런 기세로 이쪽을 빤히 쏘아보고만 있는 것이다.

또 어디서 고아진 성질이 드글드글 끓고 있을 뿐이겠지 하고 모른 척하려 했는데, 아무래도 같은 자리에 앉아 불편했던지 제홍과 찬성이 어떻게 해 보라는 듯이 턱짓을 하며 눈치를 주는 것에 결국 시선을 맞추며 먼저 말을 걸어야 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 너 내가 눈에 보이긴 해?”

그리고 돌아오는 대꾸가 사뭇 불량하였다. 역시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생각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자, 곧이어 비아냥조의 힐난이 쏟아진다.

“나 뻔히 보는 자리서 그따위로 막 노는데, 안 보이는 데선 어떻게 구는지 훤하다, 어?”

“무슨 소리야, 내가 뭘 언제 막 놀아……?”

어이없는 질책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억울해할 어떤 기억도 없어서 그저 멍하니 바라보자, 그는 본격적으로 따져 묻겠다는 듯이 자세를 틀어 앉으며 서늘한 기세로 물어 왔다.

“아까 그 새끼 뭐야.”

“누구… 입구에서 마주쳤던 사람 말이야? 안무가야, 왜.”

“아, 그 새끼 당장 퇴출이야.”

“미쳤어? 또 무슨 심술이야? 여기 커피에 누가 약 탔어?”

그리고 이어진 심술 사나운 으름장에 기어이 미간이 왁 일그러졌다. 제홍과 찬성이 긴장한 얼굴로 숨을 죽이고, 지석운은 신문을 넘기다 말고 그런 우리를 힐긋 쳐다보곤 다시 태연히 눈길을 내렸다. 쏘아보는 내 눈길에 더 험상궂은 눈초리로 맞서며 무진은 돌연 휴대폰을 꺼내어 들었다. 그리고,

“김 대표, 거기 안무가 하나 있지 왜, 머리 꽁지 묶고 얼굴 흐느적거리는 놈. 그거 당장 그 바닥서 퇴출시켜 버려.”

“무슨 짓이야?!”

당장 악행을 실행에 옮기려는 것에 나는 급히 그의 손에서 휴대폰을 낚아채며 목소리를 높였다.

“멋대로 좀 굴지 마, 너 가끔 그렇게 네 기분대로 애먼 사람한테 행패 부리는 거 보면 진짜 질린단 말이야!”

“그래? 그럼 좀 더 하지 뭐, 너 다음 주부터 다시 나가기로 한 거 취소야. 너 아무 데도 못 나가.”

“…….”

그러나 끝 간 데 없이 패악을 떨어 대는 솜씨에는 피가 싸늘히 식는 기분이었다. 어금니를 악문 채 조용히 숨을 내쉬는 나와 그런 나를 코끝으로 내려다보는 무진을 번갈아 살피던 제홍이 문득 끽― 의자를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나 약속 있는 거 깜빡했다. 먼저 나가 볼게.”

그리고 ‘여보세요?’ 전화 받는 척을 하며 곧장 돌아서 나가 버리는 것에, 찬성은 순박한 얼굴로 ‘어, 가.’ 하고 한 손을 들어 보였다. 제대로 인사할 겨를도 없이 무진을 향해 날 선 시선을 떼지 않으며 나는 싸늘히 쏘아붙였다.

“악랄하고 치졸한 독선자야, 넌. 히틀러, 카다피, 전두환, 김정일, 무바라크.”

“그 새끼가 네 엉덩이 만졌잖아! 너 왜 그거 가만있어?!”

그러한 자신에 대한 평가가 무척이나 과분하다는 듯 무진은 곧장 얼굴을 붉히며 목청을 높여 짖어 댔다. 그제야 그의 성질을 사납게 비튼 진상을 알아챘으나, 오히려 더 기가 막혀 올 뿐이었다.

“무슨 엉덩이를 만져? 그냥 인사처럼―”

“인사?! 넌 인사를 엉덩이로 해?! 너 어느 나라 사람인데?! 찬, 너 말해 봐, 엉덩이 주무르며 인사하는 동네 어디야, 혹시 알아?”

내 변명을 자르며 한껏 빈정거리던 무진은 돌연 맞은편에서 불편한 기색으로 눈치를 살피고 있는 찬성을 향해 물음을 던졌다. 그에 찬성이 얼떨떨한 얼굴로, 그러나 예의 그 거들먹거리는 태도로 삐죽 고개를 내밀며 대꾸를 해 왔다.

“어… 그게 아마, 코 비비며 인사하는 동네는 있을 텐데…”

“엉덩이 말했잖아, 이 덜떨어진 새꺄!”

“…….”

성마른 기세로 무진이 당장 고함을 내지르며 그의 뒷말을 잘랐다. 그 엄한 화풀이에 찬성은 몹시 억울하단 얼굴로 ‘에이씨…….’ 하며 우리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그때 마침 직원이 커피를 가져와 내 앞에 놓아주었다. 다른 손님들이 계시니 조금만 목소리를 낮추어 달라는 청도 함께 하였다.

죄송합니다,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진은 그것이 자신에 대한 사과라고 멋대로 생각해 버렸는지 뚱한 얼굴로 나를 흘겨보며 ‘쯧.’ 하고 혀를 찼다.

“나 갈 거야.”

그리고 기어이 찬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가 말려? 무진은 시비조로 빈정거렸다. 얼굴을 구기며 찬성은 곧장 발길을 돌려 나가 버렸다.

훅훅 숨을 뱉으며 나가는 녀석의 뒷모습을 보니 그제야 좀 무안한 기분이 들었다. 시무룩한 기세로 앞에 놓인 커피 잔을 들고 한 모금 마시자,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무진 역시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너는 내 앞에서만 청렴결백, 아니 무슨 결벽증 환자 마냥 깔끔 떨고 내가 조금만 장난치면 파르르 떨면서 질색하는 주제에, 알고 보니 이거 완전 헤프잖아?”

“뭐, 무슨… 헤퍼? 내가 헤프다고?”

입술을 누르고 있던 찻잔을 당장 떼어 내며 눈매를 찌푸려 보이자, 그는 손가락 하나로 내 턱을 툭 치며 이어 꼬장꼬장한 태도로 잔소리를 덧붙였다.

“너 그따위로 생겨 먹었으면 행동이라도 조신해야 할 것 아니냐 말이야.”

“…나 이따위로 생겨 먹은 거 문제 삼거나 내 행동거지 헤프다 하는 사람, 지구상에서 너밖에 없어. 됐어, 그만해, 쪽팔려.”

딱히 시비조는 아닌 데다, ‘그따위’ 또한 말처럼 나쁜 속뜻은 아님에 나는 까만 커피 잔으로 시선을 내리며 빠르게 속삭여 대꾸했다. 그런 내 턱을 슬쩍 움켜쥐어 고개를 돌리게 하며 무진은 또 퉁명스레 말을 붙여 왔다.

“함부로 엉덩이 만지게 하지 마, 알았어?”

“그러니까 엉덩이 만진 게 아니……! 하아, 그래, 알았어. 조금만 희롱기미 있다 싶으면 나도 가차 없으니까 걱정 마. 대신에 너 아까 전화해서 안무가 퇴출 어쩌고 하며 패악 떤 거 취소야, 나 다음 주부터 출근 못 하게 한단 것도. 어?”

“…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변명으로 기운을 빼는 것도 지쳐 대충 ‘알았다.’ 한 뒤 이어 협박조로 달래자, 그 정도의 타협도 무척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이 얼굴을 구기며 무진은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또 탐탁지 않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쯧’ 혀를 찬다. 틀어진 옆모습이 뾰로통하니 썩 귀염성이 있었다.

“…애들 앞에서 소리 지르고 화내서 기죽었어?”

“안 죽었어.”

“그런 걸로 기죽지 마.”

“안 죽었다고.”

그리고 언뜻 노회장에게 다짐한 것이 떠올라 슬쩍 떠보듯 물어보자, 무진은 퍼뜩 다시 고개 돌리며 눈을 부라려 보였다. 응,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그의 앞으로 내 커피 잔을 슬쩍 밀어 주었다.

“이거 마셔. 네 커피 다 식었겠어.”

“…응.”

다정히 챙겨 주는 것에 또 금세 두 눈에 독기를 푼 무진은 잔을 들어 내가 마셨던 곳을 찾아 입술을 대고는 씩 웃어 보였다. 그런 짓 하지 마, 시선을 피하며 속삭여 핀잔을 주었다.

그런데 그때, 테이블 한쪽 구석에서 묵묵히 신문을 읽고 있던 지석운이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신문을 착 접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너희 꼭 백년해로해라.”

퍽 의미심장한 말을 전하고는 곧장 발길을 돌려 나가 버리는 것이다. 그에 무진이 당장이라도 쫓아나갈 듯 그의 뒷모습을 사납게 쏘아보며 물어 왔다.

“저거 지금 시비 거는 거지?”

“됐어, 그냥 놔둬.”

대충 달래며 나는 다시 그의 앞으로 커피 잔을 밀어 주었다. 무진은 가게 문을 나서는 지석운을 향해 쓸모없이 눈을 부라려 보이곤 ‘쯧’ 혀를 차며 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왜인지 내 눈치를 힐긋 살피며 ‘달아.’ 하곤 히죽 웃는 것이다.

“설탕 안 넣었는데 무슨.”

입맛이 이상해 고개를 갸웃하자, 마셔 보란 듯 그는 직접 내 입술 앞으로 잔을 내밀었다. 그리고 이리저리 잔을 돌려 자신이 마셨던 곳과 꼭 맞추어 입술을 붙이게 하는 것이다. 그대로 입술을 대고 있으니 슬쩍 잔을 기울여 주었다. 진한 커피가 흘러들어 왔다.

“…….”

과연, 달았다.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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