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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일상 #01 (37/41)

그 후, 일상 #01

해면 위로 붉은 해가 푸른 여명을 밀며 떠오르고 있었다. 잠시 온 바다가 화염에 휩싸인 듯 붉었으나 이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제 색을 찾으며 밝아졌다.

나는 따뜻한 물을 반쯤 채운 욕조 속으로 들어가 몸을 적시며 15층 아래로 펼쳐져 있는 바닷가의 향락한 빛의 변화를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윽고 날이 다 밝자, 넓게 트인 통유리 창 너머로 환히 쏟아져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바닥과 벽면 전체에 박힌 골드 타일이 황혼처럼 아스라이 번쩍여, 측량할 수 없는 시간 속으로 들어온 듯이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일찍 일어난 보람이 있었다.

예고 없는 주말여행이었다. 무진은 내내 바빴고, 나는 통원 치료를 받는 것 외에는 딱히 고정된 스케줄 없이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매일 아침밥을 차리고, 간간이 장남 내외에게 안부 인사를 전하고, 미뤄 두었던 책을 욕심껏 읽고, 간혹 몰래 김 대표에게서 일거리를 얻어 와 스케줄표 따위를 정리하고, 케이와 용훈과 기욱을 불러 저녁을 사 먹이거나, 새로운 시에프 촬영에 들어간 정혜주에게 응원조로 스태프 수만큼의 커피와 간식을 배달시켜 주었고, 또 어느 저녁 무진이 바보 무리들을 말없이 집으로 데리고 오면 마뜩잖은 얼굴로 밥을 차려 주는 정도.

회장에게선 도무지 먼저 연락이 오지 않아, 미운 정이라도 붙이고자 인사차 두 번 더 찾아갔었는데, 첫 번째는 식사 시간과 맞물려 다행히 허락을 얻고 함께 자리해 식사하였으나, 두 번째는 무척 심사가 불편한 때였는지 인사는커녕 시선도 받아 주지 않고 불퉁한 얼굴로 책이나 보고 계시기에, 나 역시 곁에 앉아서 들고 간 책을 반쯤 읽다가 대뜸 ‘함부로 찾아오지 마.’ 하는 핀잔을 받고서야 일어나 집으로 돌아왔었다.

‘꽃꽂이라도 배워 볼까…….’

왠지 문득 자조적인 기분이 들어 픽 웃으며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더니 무진은 무척이나 진지한 태도로 ‘응, 그거 좋네.’ 하고 대답했었다. 그 태도에 희롱이나 비아냥의 기운은 일절 묻어 있지 않아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일테면 주부 우울증 같은 게 슬쩍 덮쳐 오려던 찰나였다. 이제 통원 치료 기간도 모두 끝나 가고 다시 내가 바빠지면 주말엔 시간을 맞추기 힘들 것이니 가까운 곳에라도 잠시 바람을 쐬고 오자 하는 말에 반대할 리 없었다.

1박 정도에 먼 곳은 무리일 테고 그저 이전에 갔었던 횡성의 별장일까 생각했는데, 승용차가 도착한 곳은 서울역이었다. 이승현은 다시 차를 몰고 혼자 돌아갔다.

부산행 KTX 표를 끊는 무진의 곁에서 무심히 ‘너 의외로 소박하네.’ 했더니, 꼬아 들었는지 그는 또 대뜸 열차 한 칸을 전부 사들이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특실조차 남아 있지 않아 우리는 겨우 4인석의 남은 두 좌석 티켓을 얻을 수 있었다.

맞은편에는 가는 내내 코를 골며 자는 군인과 휴대폰 게임에 열중한 중학생 남자애가 앉았는데, ‘제대로 여행 가는 기분이네.’ 말하면서도 무진은 칙칙한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해 달라는 듯이 미간을 구긴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도착하자 역 앞에 미리 호텔 측에서 보내 온 승용차가 대기해 있었다. 번화가나 시장 혹은 아쿠아리움 같은 데를 둘러보고 싶었으나 무진은 흔쾌해하지 않는 듯한 데다 아무래도 너무 북적일 것 같아 포기했고, 결국 곧바로 호텔로 들어와 로브스터 따위나 잔뜩 먹었다.

허기를 채우자 한결 나른해져 역시 앉은 그 자리에서 커피를 주문해 마셨고, 그러고 나니 어느새 창밖으로 석양이 내렸다. 이대로 그냥 보내기엔 아무래도 아쉬워 쭈뼛대다가 ‘좀 걸을래?’ 했더니, 무진 역시 서먹한 기운으로 ‘응, 뭐.’ 하고 일어났다.

그리고 무척이나 춥고 쓸쓸한 겨울밤의 해변을 우리는 각자 외투 호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어깨를 맞대고 묵묵히 걷기만 했다. 그러고 있자니 또 뜬금없이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이다.

흥겹게 노는 것에는 영 재능 없는 두 사람이 주말에 기껏 기차를 타고 부산까지 와서는 이리도 심심하게 보내는 것이 우스웠다. 같은 생각이었는지 무진 역시 픽 웃으며 ‘추워, 그냥 들어가자.’ 했다.

오션 뷰가 좋은 스위트룸은 무척 근사했다. 기분이다, 하고 나는 먼저 옷을 벗었다. 기차 타고 부산 내려와 우리가 가장 열심히 한 것은 결국 섹스였다.

침대에서 그의 위에 올라가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맞으며 허리를 돌리고, 함께 들어간 욕실에선 씻는 둥 마는 둥 물줄기를 맞으며 서서 하고, 잠시 쉴 겸 발코니에서 야경을 보며 와인을 마시다가 슬쩍 눈이 맞았으나 피하려다 결국 잡혀 또 했다.

그 덕에 탈진한 상태로 평소 취침 시간보다 빨리 뻗었고, 덕분에 해뜨기도 전에 눈이 먼저 떠진 것이다.

“빨리 일어났네.”

역시 마찬가지인 무진이 베드가 있는 칸막이 너머에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 그대로 생수병 하나만 한 손에 들고 나타나 탁한 목소리로 아침 인사를 건네 왔다.

응, 대꾸하며 나는 욕조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먼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생수병을 쥐여 주며 무진은 욕조 안으로 들어오려는 듯 ‘좀 비켜 봐.’ 했다.

“싫어, 비좁아.”

그러나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더니, 시큰둥한 얼굴로 잠시 쏘아보다가 곧장 발길을 돌려 뒤쪽의 건식 사우나실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아침부터 사우나하면 어지러울 텐데 싶었는데, 역시나 무진은 잠시 후 벌게진 얼굴로 씩씩거리며 나와선 우격다짐으로 욕조 안으로 들어와 앉았다. 싫은 얼굴로 결국 등 뒤의 자리를 내주었더니 심술이 났는지 귓바퀴를 조금 아프게 깨물었다. 그러곤 이내 편안히 등을 기대고 앉으며 양팔 가득 내 몸을 껴안아 준다.

그대로 잠시 함께 청명한 바닷가를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등 뒤에서 점차 발기하는 것이 느껴졌다.

“안 돼.”

“…알아.”

냉큼 뒤를 돌아보며 엄포를 놓자, 무진은 몹시 억울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러나 대신 내 등허리에 노골적으로 발기한 양물을 문지르며 귓바퀴 뒤로 훅훅 뜨건 숨을 뱉어 내는 것이다.

어설프게 도망치려다 신경을 건드려 잡힐 바에야 차라리 이 정도는 대 주고 말자 싶어 나는 꿋꿋하게 모른 척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뒤 좀 대 봐, 넣진 않을 테니까.”

기어이 흉측한 요구를 해 왔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사이, 역시나 또 우격다짐식으로 그는 멋대로 내 몸을 일으켜 앉히곤 앞쪽으로 숙이게 하였다.

이제야말로 조심해야 할 때이므로 나는 잠잠히 양쪽 무릎을 받치고 욕조 앞으로 몸을 기울인 채 뒤를 내보여야 했다. 무진은 곧장 내 둔부 사이에 사타구니를 바짝 댄 채 등허리를 감싸 안았다.

“아침 식사는 나가는 길에 하자.”

그리고 삽입하는 시늉으로 아랫도리를 슥슥 문지르며 여상히 말을 건네는 것에, 단단히 욕조를 붙잡고 버틴 채 나는 오기로 슬쩍 비아냥거려 주었다.

“아침 차려서 대령해 주는 거 좋아하잖아. 그게 재벌가의 가풍 아니었던가?”

“건 또 무슨 소리야?”

점차 빠르게 아래를 비벼 대며 그가 묘한 열기를 띤 목소리로 되물었다. 반쯤 채운 욕조 속 물이 그의 사나운 움직임에 찰랑거리며 튀어 올랐다. 엉덩이 살을 함부로 주무르다 양쪽으로 한껏 벌리곤 가운데 골에 귀두를 끈질기게 마찰시키는 것을 모른 척하며 나는 애써 덤덤히 말을 이었다.

“왜, 저번에… 아… 그, 횡성 별장에서도 아침에, 안 내려가고… 으… 그, 방으로 식사 배달됐었잖아… 아, 하지 마, 난 됐으니까.”

그러나 허리 안쪽으로 뻗어온 손으로 이윽고 이쪽 음경을 잡아 쥐고 쓰다듬는 것에는 목소리가 거칠게 긁혀 나왔다.

잡아떼는 내 손길을 성마르게 물리치고 무진은 손끝으로 내 선단을 간질이며 ‘으음…….’ 하고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거칠게 허리를 철벅이면서도 여유롭게 ‘아아, 그거.’ 하고 말을 이었다.

“아니야, 그런 데선 당연히 아침 식사 같이 하지. 그날은 내가 먼저 일어나서 밑에 내려가 우리 식사는 올려 달라고 해서―”

“뭐, 뭐야……?!”

이어진 대답에 기함하며 나는 퍼뜩 몸을 세우고 돌아선 채 날을 세웠다. 그러나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무진은 그저 ‘응?’ 하고 고개를 갸웃하고는, 얼핏 마주한 아랫도리를 흘깃 살피곤 이내 씩 웃으며 허리를 바짝 안아 붙였다.

“아, 시, 싫어……!”

그리고 발기한 두 개의 성기를 커다란 손으로 겹쳐 잡은 채 마구 흔드는 것에 기겁하며 거부했지만, 곧 입술이 막혀 버렸다.

“이쪽 좀 봐. 바다 좋네.”

“…….”

야트막하게 깎인 절벽이 해안도로와 접해 있었다. 바로 역으로 가는 것이 아닌지, 무진은 호텔에서 준비해 준 차량을 직접 운전했다.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창틀에 팔꿈치를 괸 채 암석뿐인 조수석 차창 밖으로만 고개를 돌리고 있자, 결국 먼저 말을 걸어 왔다. 그래도 냉랭한 기운을 풀지 않으니 기어이 밉살스럽게 픽픽거리며 지껄여 온다.

“뭘 또 그런 걸로 삐져?”

“삐진 거 아니야. 그저 네 그 무신경함에 질릴 뿐이지.”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고 쏘아붙였으나 그는 별스럽지 않다는 듯 그저 ‘흥.’ 웃을 뿐이었다. 부아가 치밀어 나는 곧장 획하니 그를 향해 고개 돌리며 몰아붙였다.

“깨웠어야 할 거 아니야, 안녕히 주무십시오 인사하고 분명 다 같은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제일 어린 것들이 아침에 못 일어나서, 아니, 나만 못 일어나 너 혼자 내려가선 우리 식사는 방으로 올려 달라 했는데, 그거 어떻게 생각들 하셨겠느냐 말이야.”

“그냥 긴장 많이 해서 잠을 설쳤구나 생각했겠지.”

“너 질려.”

“아, 난 하나도 너 안 질리는데.”

그러나 무진은 천하태평으로 흥얼거리며 대꾸하는 것이다. 나는 당장 질색한 얼굴을 해 보였다.

“기막히고 진력나.”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언제 어디서 얼마나 해 대는지에만 귀 기울이고 있는 줄 알아? 뭐 그렇게 쩔쩔매고 그래?”

“넌 알아달라는 듯이 매번 너무 노골적이잖아. 광고해?”

“애써 숨길 것도 없지.”

“질려.”

“흥.”

그리고 대화 단절. 그러나 미간을 모은 채 꽁해 있는 것은 이쪽뿐, 무진은 여유롭게 운전을 하며 그저 ‘아― 경치 좋다.’ 하고 혼잣말을 지껄여 대곤 하였다.

그리고 얼마쯤 더 달렸을까, 더 이상 바다도 보이지 않고, 어느새 작은 마을 길을 통과해 낮은 산길로 진입하고 있었다. 그때부터는 자세를 바로 하며 정면을 주시하였다.

무진 역시 더 이상 희롱이나 시비는 걸어오지 않고 묵묵히 운전을 할 뿐이었다. 그리고 높은 지대에 넓게 펼쳐진 초원으로 접어들자 서행을 하다가, 동유럽식의 흰색 석조 건물 앞에서 정차를 하였다. 특수 의료원 본관이었다.

뜬금없는 부산행에 조금은 예상하고 있었다. 이제 재활치료에서도 더 이상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리고 어울리지 않게 하필이면 기차로 이동이라니, 권무진의 어설프고 순진스러운 수작이랄까 배려랄까.

“잠깐 내리지?”

어쩐지 착잡해진 기분에 꼼짝도 않고 앉아 있으니, 먼저 내린 무진이 바깥에서 이쪽 차창을 노크하며 말을 건넸다. 안전벨트를 푸느라 미적거리자 먼저 차 문을 열어 주기도 하였다.

밖으로 나와 서자 멀리서 불어오는 해풍에 머리카락이 사납게 흐트러졌다. 담배를 찾으며 머리를 쓸어 넘기자, 무진은 곧장 그런 내 팔을 잡아끌어 걸음을 옮기며 휴대폰을 들었다. 도착했습니다, 그는 짧게 통화를 마쳤다.

건물 안쪽에서 흰색 가운을 입은 두 명의 중년 의사가 먼저 나와서 우리를 맞았다. 그들은 무진에게 반갑게 악수를 청하였고, 곧바로 바쁜 듯이 훌륭한 의료진과 좋은 환경, 최신식 장비 따위에 대해 소개를 하였다. 그러나 그런 설명을 건성으로 넘기는 무진의 기색에 이내 ‘2층 테라스에 계시답니다.’ 하고 안내를 했다.

실내는 무척 쾌적했다. 조금 들뜬 얼굴을 한 환자들의 곁에는 꼭 간병인이 한둘쯤 붙어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자 복도에 벌써 두어 명의 경찰복을 입은 남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원장은 그들을 무진에게 소개한 후 물러섰고, 이후부터는 경찰관을 대동하여 복도 끝의 테라스로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차남과 그의 어머니가 함께 앉아 있었다.

흰색 테이블 위에 어린애들이나 가지고 놀 법한 마술사 카드를 펼쳐 놓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남자는 다가서는 무진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곧장 환히 안색을 밝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옅은 푸른색의 환자복을 입은 남자의 두 손에는 번쩍이는 형구가 채워져 있었다.

“실외 활동 중에 간혹 폭력성을 보여서요.”

뒤쪽에 서 있던 경찰이 설명을 붙였다.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을 알아듣지 못한 듯, 남자는 그저 함박웃음을 띤 얼굴로 무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수줍은 듯이 발을 끌며 천천히 다가서다, 얼핏 무진의 곁에 서 있는 나를 향해 시선을 주고는 ‘아, 여승재 씨.’ 하고 퍽 여상한 투로 알은체를 해 왔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나는 선뜻 인사하지 못했다. 그러자 돌연, 같은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험상궂은 얼굴을 해 보이며 남자는 갑자기 내 발치로 퉤! 하고 침을 뱉는 것이다.

“…….”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결국 뒤쪽에서 두 명의 경찰이 그의 양팔을 붙잡고 실내로 걸음을 옮겼다. 퍽 얌전히 따라가던 남자는 복도를 걸으며 어린애처럼 훌쩍거리기 시작하다가 이내 몸부림을 치며 괴성을 질러 댔다.

청렴한 얼굴 뒤에 숨어 그토록 잔인한 죄를 저지른 남자가 고작 그 정도의 압박감에 저렇게도 순식간에 무너져 알맹이를 드러낸 것이 믿기지 않았다. 억압된 병증이란 저리도 무시무시한 것일까.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시큰둥한 얼굴로 그를 슬쩍 돌아본 무진은 이내 그가 앉았던 의자에 가 앉았다. 그리고 마주한 어머니와 간단한 안부 인사를 주고받고는 곧장 외투 안에서 가져온 서류를 내미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 등기부 등본인 듯했다.

그래, 고맙다. 안주인은 그것을 대충 살피고는 짧게 인사했다. 앞으로도 필요한 것 있으시면 저한테 연락하세요. 무진은 투박한 어조로 말했다. 고맙구나, 안주인은 한 번 더 인사했다. 고요한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소문이나 시선 때문이겠지만 노회장은 안주인을 내치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고립시켜 두는 것에 무진이 대신하여 어떤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은 그 나름의 화해나 용서의 제스처가 아니라, 다만 관계의 우위를 점령하였다는 증명으로써 뿐임을 안다.

“인사했던가?”

좀 더 그럴싸한 연극을 하고 싶었는지, 그는 문득 목각처럼 멀뚱히 서 있는 나를 돌아보곤 예의를 갖추지 않음에 질책을 해 왔다. 눈빛은 맑았다.

나는 그의 옆자리에 앉아 맞은편의 안주인을 향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신가 물을 수 없어서 말인사는 말았다.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네요, 결국 그녀가 먼저 말을 붙였다. 예, 대답하고는 또 묵묵. 그런 내가 우스웠는지 무진은 힐긋 시선을 스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의 사정은 짐짓 모른 척하며 그저 넓게 트인 바깥 풍경을 구경하였다.

한참 어색한 침묵만 감도는 서먹한 분위기 속에서, 이번에도 역시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잘 통제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몸이 아픈 것과 같은 이치인데 감추고 덮으려 했던 건 어미 마음이에요. 결국 그게 독처럼 퍼져 결국 저 아일 삼키고 주변까지 다치게 했어요. 내 잘못이에요, 사과합니다.”

“…….”

그러나 그녀는 내 한쪽 어깨를 비껴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고운 얼굴이었다. 흐트러짐 없는 그 꼿꼿한 기운이 그녀로서는 마지막 자존심일 것이었다.

나는 뻔뻔치 못해 용서는커녕 위로조차 전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도 그저 ‘예.’ 하고 짧게 대꾸하자,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지 무진이 돌아와 곁에 서며 ‘이만 가지 뭐.’ 했다. 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돌아서는 길, 표면적인 어머니로서 그녀는 무진에게 깍듯한 인사를 받았다. 나는 먼저 차 안에 들어가 앉았고, 현관 입구에서 원장에게 붙잡힌 무진은 십여 분 더 늦게 들어왔다.

내가 운전할까? 뒤늦게 아차 싶어 물었으나, 이미 운전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며 무진은 ‘흥.’ 하고 비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별다를 것 없는 얼굴로 들어선 길을 다시 운전해 나가는 것에, 나 역시 창틀에 팔꿈치를 괸 채 멍하니 바깥을 구경하다가, 문득 획 하니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뜬금없는 말을 붙였다.

“사실 너 안 질려.”

“그럴 줄 알았어.”

“…….”

좌측으로 핸들을 돌리며 무진은 심드렁히 대꾸했다. 나는 다시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문을 조금 내리자, 먼 곳에서 불어온 해풍이 앞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무심히 나는 내 환한 이마를 매만져 보았다. 상처를 꿰매 준 여의사의 말이 맞았다, 솜씨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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