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07-3 (36/41)

***

“으음…….”

식탁 위에 놓인 태블릿 PC의 액정 위로 빤히 고개를 숙인 채 김 대표가 진지한 빛으로 턱을 쓸었다. 그와 나란히 앉은 정혜주는 그것엔 별 관심이 없다는 듯 힐긋 곁눈만 주고는 내 이마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쯧쯧, 멀쩡할 날이 없구나…….’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계획 없이 함부로 또 같이 있는 모습을 보였다간 괜한 말들이 생길 것 같아 급히 기욱에게 두 분 함께 이쪽 집으로 모셔 오라 한 터였다.

“어때?”

조급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무진은 김 대표를 향해 물었다. 인터넷에 퍼진 모든 사진과 말들은 벌써 확인했겠지만, 무진의 제안과 맞추어 고민하며 한 번 더 유심히 살피는 듯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제야 눈길을 들었다.

“절묘하게 잘 찍혔네요.”

“시나리오는.”

“바로 그 시나리오랑 어울리게 말입니다. 마침 봤다고 떠드는 말들도 딱 그쪽이고.”

손끝으로 액정을 톡 두드리며 그는 산뜻하게 대꾸했다. 커피 잔을 기울이며 나는 힐긋 그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당시의 상황을 아는 이쪽으로서는 정말이지 우스우리만치 절묘하게 찍힌 사진이었다.

사진 속에서 권무진은 번뇌하는 얼굴로 곤혹스러워하는 정혜주를 거칠게 끌어당기고 있었다. 현장을 보았다는 사람들의 증언처럼 퍽 그럴듯한 시나리오가 펼쳐졌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정혜주가 자신을 발탁하고 키워 준, 지금은 쇠고랑 차고 있는 이전 대표 개놈한테 홀딱 넘어가서 정신 팔려 있던 그 긴 세월 동안―”

“말 한번 참 예쁘게 한다?”

식탁 위로 양쪽 팔꿈치를 세운 채 다시 한번 무진의 의견을 정리하는 김 대표의 말을 자르며 정혜주가 날을 세웠다. 그에 맞서 김 대표가 힐긋 눈을 흘기며 되물었다.

“그럼, 틀려?”

“…틀린 건 아니지만.”

씁쓸한 얼굴로 금세 인정하는 그녀를 향해 ‘흥.’ 코웃음을 치며 김 대표는 말을 이었다.

“그 긴 세월 동안, 영화배우 정혜주를 몰래 흠모하고 있었던 재벌가의 연하남. 그리고 어느 날 이전 대표 놈이 주식으로 사고치고 튄 사이에, 그 연하 재벌이 해당 기획사를 접수하고 정혜주에게 본격적으로 대시를 한다. 이때가 그 한창, 호텔 커피숍 건으로 말 흘러나왔을 즈음으로 하면 딱이네, 음. 그런데 정혜주는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이전 대표 개놈한테 마음이 있고―”

“계속 그럴 거야?”

언짢은 기색으로 정혜주가 다시 말을 잘랐다. 시나리오잖아,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김 대표는 천연덕스레 말을 이었다.

“그러다 결국 정혜주는 그놈한테 제대로 뒤통수를 맞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심으로 어쩌고 했네 하며 마지막 인터뷰를 남기고 떠난다. 그런데 야비하게 풀려난 개놈이 또 다른 사건으로 이번에야 말로 철창행 뉴스가 나자 다시 돌아온 정혜주. 그리고 그 여자를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는 재벌 연하남. 이 정도?”

“음.”

두 손을 활짝 펼쳐 보이며 정리를 마치는 김 대표를 향해 무진은 만족스럽다는 듯 짧게 고개를 까딱였다. 그리고 또 슬쩍 얼굴을 내밀며 ‘어떻지?’ 하고 물었다. 김 대표는 내가 슥 밀어 주는 커피 잔을 집어 들며 한 모금 마시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포커스를 정신 나간 정혜주와 개놈이 아니라, 미련한 정혜주와 그런 그녀에게 순정을 바치는 연하 재벌남 쪽으로 옮겨 올 수 있으니까… 그쪽이 훨씬 그림도 좋고, 스토리도 살고, 이제껏 흘러나오던 소문이랑도 잘 맞아떨어지고. 괜찮은 것 같은데, 그대는 어때?”

그리고 흘깃 눈길을 돌리며 의견을 묻는 것에 정혜주는 이미 마음을 정한 듯 어깨를 으쓱여 보이곤, 자조적이라고 할 만큼 냉정하게 스스로를 진단하며 가벼운 어조로 대꾸하였다.

“나야 아쉬울 것 없지. 덕분에 예전 스캔들 어느 정도 덮일 테고, 재벌 연하남의 흠모 상대로 이미지 정화되고, 사고 후 복귀한 여배우들 흔히 구질구질한 작부 역할이나 맡으며 컴백하는데, 나 여전히 비싼 배우예요― 콧대 세울 수 있고. 괜찮아, 좋아. 그런데 나 뭐… 더 해야 돼? 혹시 결혼까지 해야 하나?”

“나랑 결혼할 생각 꿈에도 하지 마, 아줌마.”

이어 묻는 말에 무진은 당장 얼굴을 구기며 대답했다. 정혜주 역시 질색한 얼굴로 맞받아쳤다.

“마찬가지야. 아무리 연극이래도 진짜 결혼까지 하자 그랬음 정강이 부러뜨려 놓으려고 했어.”

흥, 콧소리를 내며 두 사람은 불쾌하다는 듯 서로를 흘겨보았다. 그러다 문득 무진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나를 힐긋 쳐다보고는 ‘쩝’ 입맛을 다시며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야. 더는 없어. 이 상태로 쭉 가는 거야, 알겠어? 아줌마는 표면적으로 계속 날 거부하고 있는 거야.”

“아, 그러면 권무진은 계속 날 해바라기하며 다른 여자 쪽으로는 눈길도 안 준다? 그거 되게 로맨틱하긴 한데, 그쪽 인상이랑은 좀 안 어울리잖아? 성형수술이라도 좀 하지그래, 우선 그 미간에 보톡스라도 한 방?”

한껏 빈정거리며 정혜주가 말을 맺자, 공감한다는 듯 김 대표가 낄낄대며 냉큼 말을 받았다.

“눈매 쪽이 더 시급한데 뭘.”

그러나 서늘한 눈길로 노려보는 무진의 눈치를 살피고는 이내 ‘하핫.’ 어색하게 웃어 보인다.

“아니 뭐…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알고 보면 순정남, 이거 그쪽 이미지에도 좋겠네요. 한창 그쪽 그룹 떠들썩했는데 이런 식으로 이미지 쇄신하면 그야말로 일석이조.”

“…바로 진행 가능한가?”

가볍게 쯧 혀를 차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낸 무진은, 그러나 곧 진지한 얼굴을 해 보이곤 물었다. 김 대표 역시 금세 장난기를 지운 얼굴로 씩 웃으며 단호히 대답했다.

“물론. 이미 씨앗은 뿌려졌고, 시나리오대로 살 좀 더 붙여서 부채질해 주면 문제없이 퍼져나갈 테니까 말입니다. 다만 이게 장기적으로 가야 하니까, 간간이 같이 사진도 좀 찍혀야 할 텐데…….”

“그 정도는 하지.”

그리고 슬쩍 떠보듯 말끝을 흐리는 것에 무진은 호쾌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대답했다.

“그런데.”

그때 문득 정혜주가 커피 잔을 달칵 내려놓으며 나를 향해 시선을 옮겨 물어 왔다.

“여승재는 어때? 이거 단순히 내 복귀 시나리오는 아니잖아. 권무진이 그렇게 인정 많은 인간도 아니고, 여승재 예쁜 이마에 붙어 있는 밴드로 보아하니 뭔가 또 발등에 불 떨어진 것 같은데, 여승재 허락은 받고 진행하는 거야, 지금?”

“…….”

시선이 모두 내게 모아졌다. 무진은 생각 못 했다는 듯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입을 벙긋거리다가, 어딘가 몹시 불편한 얼굴을 한 채로 불퉁히 말을 붙여 왔다.

“그런 소문 도는 거 싫다 하면, 안 해.”

그는 고작 이 정도로, 소문 뒤로 나를 숨겨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내게 미안해하고 있었다. 이 눈물 나도록 한심스러워 어여쁜 종족을 어떻게 해야 할까, 피식 웃으며 나는 눈길을 내린 채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짧게 숨을 뱉은 뒤, 정혜주와 김 대표를 향해 곧게 얼굴을 들어 보이며 정중히 말을 건넸다.

“잘 부탁드립니다.”

귀엽긴, 씩 웃으며 정혜주가 말을 받았다. 그런 정혜주를 힐긋 살핀 김 대표 역시 홀가분한 얼굴로 대꾸하였다.

“상부상조하는 건데 뭘.”

“그런데 말이야―,”

그리고 또 정혜주가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 쪽을 힐긋거리며 말을 끌었다. 또 뭐, 김 대표가 덩달아 시선을 돌리며 묻자 정혜주는 거실로 손짓을 하며 말을 이었다.

“아까 들어설 때부터 느꼈는데, 이 집 좀 이상하지 않아? 침대가 왜 거실에 나와 있지? 소파가 구석으로 밀려난 것 보니까 원래 저기 있었던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대답을 바라듯 우리를 향해 시선을 주는 것에, 무진과 나는 서로에게 답을 미루며 딴청을 피웠다. 그런 우리와 정혜주를 번갈아 보던 김 대표가 얼른 능청스럽게 말을 붙여 왔다.

“여승재 너 이상한 데로 시집와 버렸구만?”

그러곤 무진을 향해 의미심장한 얼굴로 히죽 웃어 보이는 것이다. 무진은 흡족한 기색을 띤 채 ‘뭐.’ 하고 한쪽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나와 같이 일그러진 얼굴을 한 채로 정혜주가 뜨악하며 말을 받았다.

“이게 무슨 소리야? 누가 시집을 가? 누구 마음대로? 난 반대.”

“어쩔 수 없잖아, 이미 가 버렸는걸.”

김 대표는 단단히 팔짱을 끼우며 대꾸했다. 정혜주가 그런 그의 어깨를 찰싹 때리며 질책조로 물었다.

“대표직 받고 여승재 팔아넘긴 거야?!”

“아니야, 절대.”

팔짱을 풀지 않으며 그는 단호히 대답했다. 나는 옆자리의 무진을 향해 고개를 돌아보았다. 시선을 피하며 무진은 혼자 씩 웃었다.

“…….”

조금 틀어진 그의 옆모습이 썩 괜찮아, 나는 홀린 듯 손을 들어 그의 한쪽 뺨을 엄지 손끝으로 슥 그어 내렸다.

“안 돼…….”

그 모습을 본 정혜주가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이제 어쩔 수 없다니까, 김 대표가 볼멘소리를 냈다. 무진은 곁눈으로 그런 나를 힐긋 쳐다보며 풀잎 같은 입매를 슬쩍 치켜올렸다.

***

됐다. 반짝 눈을 뜨자마자 창밖 새벽하늘의 몽고반점 같은 푸른 여명을 확인하고 안심했다. 옆자리의 무진은 언제나처럼 어금니를 질근 물고 있는 것 같은 얼굴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치아가 상할 텐데. 조심스레 이불을 거두고 일어나 앉다 말고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손끝으로 턱을 슬쩍 당겨 내리자, 이번엔 입술을 조금 벌린 채 쌕쌕 숨소리를 낸다. 어쩐지 조금 무방비한 얼굴이 되어 귀여웠다.

“…….”

바닥으로 내려선 채 잠시 머뭇거리다, 결국 허리를 숙여 얼굴을 바짝 가까이 대었다. 그리고 그의 마른 아랫입술에 혀끝을 살짝 대어 보곤, 그냥 그대로 바로 섰다. 돌아서서 주방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멈추어 서서 잠시 벽에 이마를 박았다.

주방 안으로 들어가선 전날 밤에 미리 손질해 둔 재료들을 냉장고에서 꺼내어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소리 내서 깨울까, 밥은 뚝배기에 안쳤다.

그리고 다진 마늘과 소고기, 숙주나물, 양파 등을 볶고 국간장과 후추 가루로 간을 한 맑은 소고기국을 만들어 두고, 또 다른 뚝배기에 참기름 조금 넣고 달군 다음, 다진 김치와 오이, 치커리, 새싹, 볶은 버섯 등과 레몬즙에 재워 둔 날치알을 준비해 완성된 밥을 밑에 깔고 그 위로 정갈하게 올려 담아 뚝배기 날치알밥을 만들어 냈다.

손은 그리 많이 가지 않았음에도 꽤 정성 들인 모양이 나는 것에 흡족해 가만 보고 섰다가, 달걀도 올릴까 싶어 냉장고 문을 여는데 문득 거실 쪽에서 ‘여승재에…….’ 하고 부르는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버릇처럼 옆자리를 더듬다 없어 찾는 모양이었다.

뚝배기 위로 빈틈에 노른자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신중하게 달걀을 깨 넣은 뒤 얼른 거실로 나가 보자, 까치집 머리를 한 무진이 얼굴을 찌푸린 채 일어나 있었다.

“뭐야, 게으름뱅이 주제에 일찍 일어났잖아?”

그리고 부은 눈을 느리게 끔뻑이며 씩 웃어 보이곤 그렇게 인사를 대신하는 것이다. 단 하루 늦잠을 잔 것으로 게으름뱅이로 불리어지는 것이 탐탁지 않았지만, 나는 그와 설핏 시선을 스치며 퉁명스레 말을 건넸다.

“밥 먹어.”

“응? 벌써 무슨…….”

그러곤 먼저 다시 발길을 돌려 주방으로 들어가 버리자, 의아한 투로 말끝을 흐리며 그가 터벅터벅 뒤를 따라 들어왔다. 그리고 옆구리를 긁적거리며 ‘뭐 했어?’ 하고 주방 안쪽을 둘러보고는 이내 ‘워어…….’ 하고 쑥스러운 감탄사를 흘렸다.

나는 괜스레 바쁜 척을 하며 냉장고 문을 여닫았다. 그러다 얼핏 시선이 스치자, 그는 헤죽헤죽 웃는 얼굴로 또 ‘워어…….’ 하고 작게 소리를 내곤 했다. 그리고 슬쩍 의자를 빼고 앉는 것에, 나는 ‘아.’ 하고 그의 어깨를 떠밀었다.

“아니야, 먼저 씻어. 뚝배기에 밥 조금 눌러 타야 맛있어.”

“…어.”

고개를 끄덕이며 어수룩하게 대답한 무진은, 물만 축이고 나왔는지 욕실에 들어가 얼마 되지 않아 곧장 다시 돌아와 앉았다. 그리고 수저까지 미리 놓아둔 것에 히죽 웃으며 힐긋 눈치를 살피고는 또 ‘워어…….’ 하고 혼자 작게 감탄사를 흘리는 것이다.

계속 받아 주기에 영 무안해 결국 먼저 숟가락을 들었다. 그러자 그제야 한 숟가락 떠 맛을 본 무진은 헤실헤실 풀어진 얼굴로 물어 왔다.

“별걸 다 만들 수 있잖아? 배운 건가?”

“안 배워도 먹어 본 건 대충 흉내 낼 수 있어. 한창 성장기 사내애들 삼시 세끼 밥해 먹이는 것도 일이었으니까.”

“…….”

그러나 다른 녀석들 얘기에 금세 시큰둥한 얼굴이 되어 콧등을 찡그려 보였다. 먹어, 이르고 고개 숙인 채 밥을 뜨자 후룩 국을 떠먹는 소리에 이어 ‘맛있다.’ 중얼거리는 혼잣말이 들린다. 달리 할 말이 없어 그저 묵묵히 식사를 이어 하다가 문득 눈길을 들어 보았는데, 마주한 얼굴이 유난히 말갰다.

“로션 발랐어?”

“어… 아니.”

뜬금없는 물음에 무진은 넋 빠진 얼굴로 분명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하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을 바꾸었다.

숟가락을 잠시 놓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 선반에서 로션을 손등에 조금 덜어 돌아왔다. 그리고 힐끔 돌아보며 밥을 우물우물 씹고 있는 그의 곁에 선 채 손끝으로 그의 양 볼과 이마에 로션을 찍어 발랐다.

“…….”

“다리 떨지 마.”

순한 태도로 인상 나쁜 얼굴을 맡기고 있던 무진은 곧장 ‘응.’ 대답하곤 다리를 온순히 모으며 한쪽 뺨을 슥 내밀었다.

대충 문질러 발라 주고 있으니, 그런 나를 힐끔거리다 또 시선이 마주치자 무진은 얼른 식탁 위로 눈길을 내리며 아무렇게나 젓가락질해 ‘이거 맛있네.’ 하고 말했다. 집어 올린 것은 날치알과 섞인 치커리였다.

“…유기농이라서.”

“아아.”

대충 말을 받는 것에도 대단한 사실을 알았다는 듯 그는 ‘아.’ 소리를 내곤 이어 다른 쪽 뺨을 슥 내밀었다.

엉뚱한 소리나 주고받으며 식사를 끝내고 나는 그와 함께 욕실에 들어가 나란히 선 채 양치질을 하고, 직접 양손에 헤어젤을 발라 그의 머리카락을 만져 주다가 결국엔 다시 머리를 감게 했다. 그 후엔 또 어슬렁거리며 그를 따라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그가 옷을 갈아입는 모습을 물끄러미 구경하였다.

그동안 무진은 평소대로라면 벌써 몇 번이나 이상한 희롱을 걸어 왔을 테지만, 유난히 다정하게 구는 내가 어색한지 낯설어하는 것도 같았고, 부끄러워하는 것도 같은 태도로 어쨌든 내게 먼저 말을 걸거나 스킨십을 하지도 않으며 그저 얌전히 내 손길을 받거나, 내가 ‘저거, 저거.’ 하고 골라 주는 것으로 순순히 옷을 맞춰 입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손목시계를 차면서야 피식 웃으며 물음을 해 왔다.

“무슨 일이지?”

“그런 너야말로 모처럼 다정하게 대해 주니까 왜 그렇게 어설프게 굴어? 숫총각처럼.”

눈썹을 삐뚜름히 움직이며 나는 한껏 그를 희롱해 주었다. 그러자 그제야 악동처럼 낄낄대며 웃어 대는 것이다.

“아, 그거였어? 하여튼 너 진짜 뒤끝 길어. 꽁해 가지고선.”

“난 커피 마실 거야.”

냉랭히 대꾸하고 나는 먼저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아래층을 향해 계단을 내려가는데, 얼른 뒤따라온 무진이 등허리 뒤로 한 팔을 억세게 감으며 몸을 바짝 붙인 채 한쪽 뺨을 슥 내밀어 보였다.

“로션 직접 발라 줬잖아?”

“…….”

힐긋 쳐다보다 얼른 내민 뺨을 향해 입술을 눌러 박으려 했는데, 그것을 피하듯 무진은 냉큼 반대쪽으로 얼굴을 내빼 버리곤, 허망하게 내밀어진 내 입술에 푸핫! 웃음을 터트렸다.

허리에 감긴 그의 팔을 풀고 나는 먼저 내려가 버렸다. 그리고 곧장 주방으로 들어가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고 있는데, 무진이 외투를 걸치며 ‘나 가―.’ 하고 주방 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커피 안 마셔?”

“커피에야말로 분명히 여승재가 나쁜 약을 넣었을 거라서.”

일찍 일어났다 생각해서 조금 여유롭게 미적거린 탓에 어느새 벌써 출근 시간이었다.

“설사약인데 지금 뺄게.”

“대신 변비약 넣을 것 같으니까 됐어.”

히죽 웃으며 그는 곧바로 돌아섰다. 포트 선을 내리고 얼른 뒤를 따라나서자, 현관으로 향하는 복도에서 무진은 잠시 걸음을 늦추며 ‘신발은 뭐?’ 하고 물어 왔다.

“최상단 왼쪽.”

나는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씩 웃으며 그가 신발장 문을 열었다. 내 좌표대로라면 흰색 운동화였다. 선뜻 그것을 꺼내려고 하기에 당장 말리며 다른 구두를 꺼내 주었다. 비실비실 웃으며 무진은 순순히 그것을 꿰신다가, 또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사나운 얼굴을 해 보이며 으름장을 놓았다.

“이렇게 배불리 먹여 놓고 너 또 뒤로 딴생각하고 있는 거면―”

“죽을라고?”

나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그의 말버릇으로 뒷말을 잘랐다. 그에 무진은 몹시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다가와 내 등허리 뒤로 두 손을 감아 왔다. 그리고,

“아침 수당 받아.”

하며 입을 맞춰 오는 것에 복수처럼 슬쩍 뒤로 고개를 물렸다가, 이번엔 덥석 뒤통수를 붙잡힌 채 입술을 깨물려야 했다. 그러나 이내 물었던 것을 핥고 혀를 빨아 주며 슬쩍 벽으로 밀어붙여 왔다.

그러다 점차 뜨건 숨을 내쉬며 내 헐거운 실내복 안으로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엉덩이를 마구 주무르는 것에, 어서 불 꺼야지 싶어 지그시 어깨를 떠밀었다.

“아침에 배불리 먹이면 이렇게 딴 데 힘 쏟지?”

“…….”

다신 아침밥 먹여 주지 않을까 싶었던지 그는 쩝 입맛을 다시며 온순히 물러났다. 그리고 또 혼자 히죽 웃으며 돌아서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선 채, 괜히 사나운 얼굴을 해 보이며 엄포를 놓는다.

“밖에 나가지 마. 일찍 와서 같이 저녁 산책 할 거니까.”

알았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유순히 대답했다. 그에 무진은 안쪽으로 불쑥 얼굴을 들여와 내 앞머리를 뒤로 넘기며 드러난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곤, 또 얼른 뒤로 물러나며 곧장 문을 닫았다.

나는 그대로 잠시 현관에 선 채로 삐죽 선 앞머리를 슥슥 빗어 내렸다.

***

“말씀드렸지만, 이런 방식은 회장님께는 전혀―”

“저기.”

차를 세운 운전석의 남자가 언짢은 투로 말을 건네는 것에 나는 룸미러로 그의 얼굴을 확인하며 먼저 말을 잘랐다. 룸미러를 통해 그가 내게 눈을 맞춰 왔다.

“제가 어떻게 부르면 되죠?”

“…비서실장입니다.”

“실장님, 염려해 주시는 건 잘 알겠습니다. 따로 필요할 때 도움을 청하겠습니다.”

“…….”

퍽 당돌한 태도에도 그는 당황해하는 기색 없이 룸미러로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곧이어 뒤쪽으로 자세를 조금 튼 채 짧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맞받아 머리를 까딱여 보인 뒤 고개를 돌리자, 기다렸다는 듯 곧장 밖에서 차 문을 열어 주었다.

이제 어느 정도 낯이 익은 젊은 남자는 내가 밖으로 나와 서자 역시 짧게 고개를 숙여 보이곤 익숙한 듯이 나를 집 안으로 안내하여 들어갔다.

역시나 서재였다. 회장은 안으로 들어서는 나를 눈짓으로도 힐긋 확인하지 않았다. 그저 심드렁한 얼굴로 책상 위에 올려 둔 노트북 화면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발 빠른 김 대표가 벌써 이곳저곳에 자료를 뿌리고, KM그룹 홍보실 언론 팀에서도 이승현의 지시 아래 움직이고 있을 것이었다. 지금쯤 KM그룹 삼남의 지고지순한 짝사랑 이야기로 웹상이 떠들썩할 것이다.

“당장 손끝이라도 댈까 냉큼 데리고 도망쳐 나가서는 부랴부랴 준비한 게 고작… 언 발에 오줌 누기로군.”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회장이 비아냥조로 혼잣말을 하였다.

“둘째 놈 사건으로 더럽혀진 그룹 이미지 꽤 그럴듯하게 감싸는 동시에 서로 인지도 올리고 뒷소문 덮고… 그렇게 널 감추고… 음, 나름 머리는 썼다만 오히려 장기적으론 마이너스야. 언제까지 그 소문 뒤에 숨을 수 있을 것 같나. 차라리 그 여배우와 잠깐이라도 결혼 생활을 하게 하지그래. 아들딸 상관없이 아이 하나 생긴다면 더없이 좋구.”

“…둘 다 설득할 수 없었습니다. 서로 사이가 나빠서요.”

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대꾸했다. 그는 그제야 나를 향해 눈길을 들었다. 그의 시선이 짧게 내 이마의 반창고를 스치는 것이 느껴졌다. 드러나도록 가르마를 바꾸어 탔다. 이런 영악한 의도를 알아챘을 것이다. 노회장은 우습다는 듯 픽 웃었다. 그리고 비스듬히 턱을 괴며 말을 건넸다.

“말해 봐 한번, 어떻게 그놈을 꼬여 냈지? 어떻게 계속 그 사나운 놈을 감당하고 있는지 말이야.”

“…무진이가 회장님께도 얻을 수 없었던 것을 줍니다.”

“잠자리 기술이 훌륭한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하는 말에 그는 노골적으로 비웃으며 희롱해 왔다. 나는 숙연히 말을 이었다.

“다정한 부모처럼 타이르고 달래는 식입니다. 저도 가져 보지 못한 존재라서 소꿉놀이하듯이, 그렇게 서로 위로가 되곤 했습니다.”

“…….”

삐뚜름하게 휘어졌던 회장의 입매가 굳게 다물렸다. 그를 곧게 바라보며 나는 좀 더 단정한 자세로 담담히 이어 말하였다.

“가끔은 그 애가 훗날 가지게 될 어린애처럼 다투고 화해하고 놀기도 합니다. …언 발에 눈 오줌이 다시 얼기 전에 무진이 마음이 식으면, 그때 조용히 떠나겠습니다. 지금은… 당분간은, 하자는 대로 따르고 싶습니다. 약속드립니다, 각서라도 쓰겠습니다, 탈 없겠다 싶을 때가 되면 제가 알아서 떠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언젠가 그의 마음이 정말 그렇게 되어 버릴까, 아무래도 그렇겠지, 하는 생각에 거추장스럽게도 눈시울이 확 뜨거워져 버렸다. 그러나 연약한 것을 질색하는 회장을 앞에 두고선 얼른 고개를 떨어뜨려야 했다.

“헌데 오늘은 왜 무릎을 안 꿇지?”

그런 나를 더 짓밟아야겠다는 듯이 그는 잠시 나를 빤히 노려보다가 문득 불퉁한 어조로 물어 왔다. 나는 그대로 몸을 숙이며 무릎을 굽히려 하였다. 그러나 돌연 그가 또 말을 붙여 왔다.

“약속한 것 지켜.”

“…….”

“셰퍼드 훈련시키듯이 함부로 굴지 마. 사람들 앞에선 당연하고, 둘이 있을 때도 마찬가지야. 기죽이지 말란 말이야.”

“…예.”

“나가. 그리고 앞으론 부르기 전엔 멋대로 찾아오지 마.”

그리고 귀찮다는 듯 손을 휙휙 내저으며 다시 심드렁한 얼굴을 노트북 화면으로 옮겨 갔다. 무릎을 꿇으려다 말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바로 선 채, 나를 보지 않는 그에게 허리를 깊게 숙여 보인 뒤 나는 이윽고 발길을 돌렸다.

젊은 남자를 앞세우고 다시 밖으로 나가자 흰색 크레파스로 빗금을 친 듯이 눈발이 부옇게 날리고 있었다. 작게 내쉬는 내 한숨이 뚜렷한 형체를 띠며 공중에 떠올랐다. 그제야 손발이 사시나무처럼 떨려 왔다.

양손을 외투 호주머니에 꾹 찔러 넣은 채 정원을 지나쳐 나를 태우고 온 자동차 앞에 서자, 운전석에서 회장의 충직한 비서실장이 밖으로 나와 직접 차 문을 열어 주려 다가왔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알아서 돌아가겠습니다. 감사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 얼굴을 잠시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알았다는 듯 한 걸음 물러서며 짧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나는 그대로 혼자 걸음을 옮겼다.

대문 가까이 다가가자 두툼한 패딩 점퍼의 가슴 포켓에 무전기를 꽂은 남자가 쪽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온전히 밖으로 나가 서자,

“이 새끼 진짜 더럽게 말 안 듣네.”

대문 바로 앞에 대기해 놓은 차체에 비스듬히 등을 기댄 채 무진이 마주 서 있었다.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착한 얼굴로 거짓말을 해? 것도 이렇게 뻔히 드러날 거짓말을?”

“…발랐는데.”

“뭐?”

“입술에 침 발랐다고. 기억 안 나? 직접 발랐잖아.”

“…….”

불량스레 얼굴을 구긴 채 나를 질책하던 무진은 히죽 웃으며 자신의 앞으로 다가가 대꾸하는 내 능청스런 말에 와락 더 인상을 찡그렸다. 나는 그와 마주 선 채 호주머니 속에서 양손을 꺼내어 그의 얼굴을 감싸 보았다.

이제 막 도착해 나와 섰는지 얼굴이 그리 차갑진 않았다. 다행이다, 생각하며 나는 그대로 그를 지나쳐 길게 뻗어 있는 내리막길로 터벅터벅 혼자 걸음을 옮겼다. ‘이씨…….’ 하고 성질을 내며 그가 냉큼 옆으로 따라와 붙었다.

“어딜 가는 거야? 안 타?”

“좀 걷고 싶어서.”

뒤쪽에서 이승현이 천천히 차를 몰며 우리를 뒤따라오고 있었다.

“너 또 무릎 꿇었지.”

“아, 그건 진짜 아니야. 맹세해.”

내 다리를 흘깃하며 묻는 말에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어 보이며 대답했다. 그러나 무진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억센 손길로 내 멱살을 덥석 움켜잡으며 으름장을 놓는 것이다.

“얌전한 척하지 마. 누가 속을 줄 알아? 못돼 처먹은 돌대가리 주제에.”

딱히 아프게 하려는 험악한 행동은 아니었으므로 애써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얌전히 멱살 잡혀 그와 얼굴을 가까이 맞댄 채 나는 덤덤히 입을 열었다.

“내가 너보다 성적 좋았다니까. 그나저나 너 이렇게 계속 농땡이 부려도 돼? 제대로 일 안 해서 월급 못 받아 오면 안 된단 말이야, 3개월 동안은 나도 돈벌이가 없는데, 혼자서라도 열심히 벌어 와야지 내가 계속 맛있는 밥도 만들어 줄 수 있는 거잖아.”

“…점심시간이야.”

그러자 또 금세 설득당한 무진은 시큰둥한 얼굴로 그렇게 대답을 해 왔다. 단단히 쥐고 있던 멱살도 스륵 놓아주었다. 숨을 탁 놓으며 나는 내 옷깃을 먼저 털고, 다시 돌아 걸음을 걸으려다 말고 그의 어깨 위에 쌓인 눈도 툭툭 털어 주었다.

그런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던 무진 역시 문득 손을 들어 내 속눈썹에 붙은 눈송이를 조심스레 톡 건드려 치워 주었다. 그러곤 또 무슨 생각을 했는지 혼자 비실비실 웃으며 나란히 걸음을 맞춰 왔다.

“너 솔직히 말해 봐.”

“어, 뭐.”

“나 안 예쁘냐?”

“…모르겠는데.”

뜬금없는 물음에 잠시 멈칫하곤 눈길을 피하며 새침으로 대답하는 것에 그는 또 당장 얼굴을 구겼다.

“치사한 새끼, 뭐가 이렇게 야박해? 난 너 예쁘다고 천 번은 더 말한 것 같은데.”

“그건 사실이니까.”

“…하긴.”

“…….”

나는 아무래도 그를 당해 낼 수 없을 듯했다. 조금 기가 죽어 시무룩하게 양손 모두 외투 호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묵묵히 걸음을 옮기며 괜히 코를 훌쩍였다.

“감기 걸렸어?”

그러자 무진이 또 얼른 앞으로 얼굴을 내보이며 물어 왔다. 그냥 좀, 대답하며 외딴 데로 시선을 돌리는데 문득 그가 얼굴을 불쑥 붙여 왔다. 그리고 막을 새도 없이 내 콧방울 아래를 혀로 날름 핥는 것이었다.

“무, 무슨 짓이야, 더럽게……!”

기함하며 와락 그의 어깨를 떠밀며 소리쳤다. 그러나 무진은 뒤로 주춤 물러서면서도 악마처럼 낄낄 웃어 댔다.

“아아― 여승재 더러운 거 먹었다―.”

“……!”

눈발 속 그의 얼굴이 문득 다가오는 봄처럼 흐드러져 보였다.

언젠가 떠날 것이라고, 나는 오늘도 마음속으로 너를 배신하는 각오를 다졌다. 그러나 기실, 세 번이나 자신의 신을 부정하고도 천국으로 가는 열쇠를 얻을 수 있었던 베드로를 나는 종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대로 내 앞으로 뻗은 길이 지옥으로 곤두박질친다 할지라도, 그를 배신할 순 있을지언정 이 마음의 정체를 부정할 순 없을 것이었다.

“같이 가자, 여승재―.”

그를 향한 마음에 온전히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 나는 점점 더 거세어지는 눈발을 온 얼굴로 맞으며 주먹을 꼭 말아 쥔 채 빠르게 앞서 걸어가 버렸다. 뒤에서 그가 놀림조로 내 이름을 부르며 따라왔다.

“어이, 여승재―. 승재야―.”

무진아, 무진아.

“예쁜 내 승재야―.”

예쁜 내 무진아.

나는 응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어이 그가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바람에 눈송이가 가볍게 일렁였다. 거역할 수 없는 정념이 끝없이 치밀어 올랐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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