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7
“도착했대?”
단조로운 메시지 수신음이 울렸다. 이전 것과 같은 모델의 휴대폰 액정을 손끝으로 건드려 메시지를 확인하는 나를 향해 무진이 조금 성마른 어조로 물어 왔다. 바쁜 시간 중에 퇴원하는 나를 보기 위해 잠시 시간을 내어 온 것이었다. 응, 대답하며 휴대폰을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일어서려 하자, 얼른 팔뚝을 힘껏 붙잡아 오며 재차 묻는다.
“어디, 주차장?”
“아니, 1층 현관 바로 앞에… 아…….”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온전히 바닥을 내디딘 왼쪽 다리에 순간적으로 저릿한 통증이 설핏 스쳤다. 기우뚱 몸을 기울며 신음을 흘리자, 무진은 곧장 자신에게 몸을 기대게 하며 부산을 떨었다.
“휠체어, 휠체어 펴.”
“그냥 가벼운 근육 저림이야. 이제 휠체어 필요 없다니까.”
언제나처럼 흰색 가운의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멀뚱히 지켜보고 있던 석운이 그런 무진을 한심스럽다는 눈길로 흘겨보며 말했다. 뒤쪽에서 휠체어와 목발을 챙겨 들고 있던 이승현이 급히 휠체어를 펼치다 말고 내 눈치를 살피곤 다시 묵묵히 접어들었다.
맞아, 근육 저림이야, 대꾸하며 나는 바로 서 보았다. 그리고 먼저 걸음을 옮겨 보는데도 무진은 또 얼른 내 팔꿈치를 붙잡아 왔다.
“통원 재활 치료 기간 잘 지키고, 평소에도 가벼운 산책은 꾸준히 하는 게 좋아. 달리기나 무거운 물건을 든다거나 하는 무리한 힘은 쓰지 말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석운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여러 번 당부했던 사항을 또 한 번 되풀이하였다. 알았어, 무진이 대신 대답했다. 그리고 드디어 병원 건물을 빠져나왔다.
문을 나서자마자 훅 끼쳐 오는 차가운 바람에 오히려 가슴뼈가 쭉 펴지는 기분이었다. 머리카락이 멋대로 헝클어지는 것이 좋았다. 먼지바람이 뒤엉킨 공기가 맛있게까지 느껴졌다.
메시지대로 현관 바로 앞에 검은색 밴이 대기해 있었다. 유명 연예인 누가 타고 있다 생각했는지 현관을 오가는 사람들이 걸음을 늘어뜨리며 이쪽을 힐긋거렸다. 이승현이 다가가 뒷문을 열기 전에 먼저 안쪽에서 드륵― 문이 열렸다. 그리고,
“짠.”
“…정혜주 씨.”
예고 없던 정혜주가 나타났다. 심심해서 같이 왔어, 버릇처럼 콧등을 찡그려 웃으며 그녀는 밖으로 나와 서서 나를 마중했다.
정혜주의 등장에 주변의 사람들이 아예 걸음을 멈춘 채 이쪽을 쳐다보았다. 괜찮아요? 묻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계속 이 나라서 살기로 했는데 뭐.’ 하고 여상히 대답했다. 그런데 돌연 무진이 그녀 앞으로 불쑥 막아서며 심드렁히 따져 묻는다.
“아줌마 왜 자꾸 나타나?”
“누구 없을 때 여승재 몰래 낚아채 가려고 한다, 왜.”
“뭐야?”
그리고 농담조의 대꾸에도 단번엔 발끈하는 것이다. 고개를 내저으며 석운은 ‘들어갈게.’ 하고 먼저 발길을 돌렸다. 고마웠어, 나는 얼른 그를 향해 인사했다. 무진은 한마디도 없었다. 정혜주는 자신을 빤히 쏘아보고 있는 무진의 시선을 모른 체하며 뒤쪽에 선 이승현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거기 휠체어랑은 안쪽에 먼저 넣어 줘요. 여승재, 자, 부축해 줄게.”
그리고 선뜻 내 옆으로 붙어서며 팔짱을 껴 오는 것에, 무진이 덩달아 성큼성큼 그녀 옆으로 다가서며 팔짱을 낀 채 우악스레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어머, 어머, 왜 이래?”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정혜주는 내 팔짱을 풀고 그의 마구잡이의 힘에 끌려갔다.
“추운데 아줌마 먼저 들어가 계시라고. 여승재는 내가 들여보낼 거니까.”
퍽 다정하고도 매너 좋은 에스코트를 하듯이 무진은 그대로 그녀를 밴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때 문득 옆쪽에서 찰칵, 찰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자, 둘러선 채 구경하던 몇몇이 휴대폰을 들이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뭐야, 무진이 험악한 얼굴로 돌아보며 묻자 ‘정혜주 씨 팬인데요…….’ 하고 주춤 물러선다. 흥, 소리를 내며 무진은 당장 문을 닫았다. 그리고 다시 내 곁으로 다가와 서며 한껏 심술궂은 얼굴을 한 채로 속삭여 왔다.
“나 저 아줌마 마음에 안 들어. 너랑 엄청 친한 척하잖아?”
“친한 거 맞아. 꽤 오래됐어. 그리고 아줌마라고 하지 마.”
“…….”
사람들 시선을 끈 것에 신경이 쓰여 조금 쌀쌀맞게 대꾸하자, 무진은 시무룩한 얼굴로 입매를 꾹 다물었다. 힐긋 눈치를 살피며 나는 그의 앞으로 마주 선 채 낮은 목소리로 달래었다.
“회사 들어가. 바쁘잖아.”
뚱한 얼굴로 그런 나를 흘긋 쳐다본 무진은 ‘응.’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조금 늦게 또 말을 이어 왔다.
“집으로 바로 들어가. 냉장고에 당장 먹을 것 채워 놨으니까 배고프면 먹고, 아무것도 하지 마, 계단 오르지 말고.”
“그 정도는 해도 돼.”
“말 들어.”
“알았어.”
얌전히 대꾸해 주자 무진은 그제야 만족스럽게 웃어 보였다.
차 문이 닫혀 버린 후론 주위에 어슬렁대던 사람들도 흥미를 잃은 듯이 다시 각자 발길을 돌렸다. 그들이 온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기다려 나는 밴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무진이 바로 뒤에서 불쑥 먼저 도어 캐치에 손을 뻗었다. 그러나 문을 열기 직전, 문득 등 뒤에서 슬쩍 몸을 붙이며 귓가에 속삭여 온다.
“혼자 씻으려고 하지 마. 괜히 욕실 타일 바닥에서 얼쩡대다 미끄러지면 큰일 나. 저녁에 목욕시켜 줄 테니까, 응?”
“…응.”
도어 캐치를 붙잡고 있는 그의 손등에 도드라져 보이는 힘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는 흐릿하게 대꾸했다. 무진은 내 귓바퀴에 슬쩍 턱을 스치며 곧장 힘주어 도어 캐치를 당겼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안쪽에서 정혜주가 이상한 얼굴을 한 채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진의 부축을 받으며 나는 곧바로 안으로 들어가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는 내가 편안히 몸을 기대어 앉는 것까지 확인한 후, 끝까지 내게 시선을 맞춘 채 씩 웃으며 다시 문을 닫아 주었다.
그리고 그가 한발 물러서자마자 차는 출발을 했다. 아, 하고 나는 뒤늦게 운전석의 기욱을 향해 얼굴을 내밀며 인사했다.
“기욱아, 데리러 와 줘 고맙다.”
“아, 아니에요. 김 실장… 아니, 김 대표님도 스, 승재 형 데리러 가라고 했는데요. 흐흐.”
유난히 조심스럽게 운전을 하며 기욱은 룸미러로 내 얼굴을 힐긋 살피곤 쑥스러운 듯 웃었다. 따라 슬쩍 입매를 휘어 보이는 것으로 답하고 다시 등을 기대어 앉는데, 이번엔 옆쪽에서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꽤 집요하였다. 잠시 외면하다가 참지 못하고 힐긋 곁눈을 주며 ‘왜요……?’ 하고 조심스럽게 묻자,
“아, 여승재 그런 얼굴 하는구나, 싶어서.”
“…….”
기다렸다는 듯 희롱조의 대답이 나왔다. 짙게 선팅된 차창 밖에서야 안쪽을 살피는 것이 힘들지만, 안에서야 밖의 상황을 훤히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었다.
나는 괜스레 무진의 턱이 스쳤던 귓바퀴를 슥슥 긁적이며 외딴 데로 시선을 돌렸다. 흐흥, 웃으며 정혜주는 창턱에 팔꿈치를 괸 채 여유롭게 다리를 꼬았다.
“뭘, 예쁘던걸. 좋―을 때지.”
그리고 왠지 도통한 사람처럼 우스꽝스런 음조를 따 와 혼잣말을 하는 것에, 나도 픽 웃어 버렸다.
“그러다 또 툭하면 별것 아닌 걸로 싸우는데요.”
“그것도 한창 때라서 그래.”
“예전부터 계속 그래 와서요. 둘 다 성격이 모난 구석이 있는 데다 괜히 서로한텐 더 자존심 세워서, 그게 서로 부딪치면 유난히 살벌해져요.”
“상상이 된다.”
그러다 얼핏 연애 상담처럼 이야기가 흘러가 버렸다. 운전석의 기욱이 신경 쓰여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정혜주 역시 구두에서 운동화로 갈아 신으며 잠시 딴청을 피우다가 언뜻 여상한 어조로 무진의 이름을 빼고 뭉뚱그려 물어 왔다.
“그런데, 많이 바쁜가 봐? 웬만하면 직접 집까지 모셔다 주는 줄 알았더니.”
“예. 다른 계열사긴 하지만 큰일 겪고 인원 대체 문제도 있는 데다… 어쨌든 집안 문제기도 하니까요.”
나는 콘솔 박스에서 음료와 생수를 꺼내며 대답했다. 먼저 정혜주에게 음료를 건넸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대신 생수를 가져가 뚜껑을 돌려 따고는 다시 내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한창 떠들썩하다가 순식간에 잠잠해졌네.”
“터질 만큼 다 터졌으니까요. 게다가 터뜨리고 흘려보내 준 게 이쪽이니까… 끝물은 알아서 조용히 처리해 줬다고… 권무진이 말한 바로는요.”
확신이 서지 않아 덧붙이는 말에 정혜주는 의미를 알아채곤 키득 웃으면서도 ‘그쪽이 그렇게 말했다니 맞겠지.’ 하고 대꾸해 주었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목을 축인 후, 나는 낮은 목소리로 설명을 이었다.
“관련자 다 처벌받고… 그쪽은… 구속되는 것 피하려고 어설프게 수 쓰는 줄 알았는데 정말 그런 병력이 있었대요. 어렸을 때부터 그런 진단을 받았는데, 친모 쪽에서 해당 주치의한테 말을 맞춰 두고 덮었다고. 그래서 그쪽은 지금 부산 내려가 경찰 감시하에 입원해 있어요, 본가 어머니가 간병조로 따라가 계시구요.”
음, 하고 정혜주는 별다른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아득한 눈길로 차창 밖 풍경을 구경했다.
아직 크리스마스 장식이 거두어지지 않은 거리가 사뭇 명랑하였다. 가게들은 모두 창가나 문 앞에 ‘Happy New Year!’이라는 익숙한 팻말을 걸어 놓거나 단출히 ‘福’자 하나만을 붙여 두기도 했다.
“…꼭 나한테만 해를 입힌 게 아니더라도 죄 지은 사람들, 뒤늦게라도 처벌 받는 거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계기가 나한테서부터 시작됐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누구는 소환에 불응하다가 옥상에서 뛰어내렸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절 원망할 수도 있고, 결국 복수가 복수를 낳는―”
“여승재.”
그리고 멍하니 멋대로 지껄이는 것을 날카롭게 질책하듯 장혜주가 내 이름을 불렀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리며 나는 얼굴을 찌푸린 채 물었다.
“…저 방금 청승 떨었나요?”
“응.”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는 단호히 대답했다. 그리고 무안해 설핏 웃는 나를 향해 매몰차게 말을 건넸다.
“직접적으로 피해를 당한 사람들을 생각해 봐. 뒤늦게라도 밝혀져서 억울함을 던 거야. 정당한 보상도 이제야 받을 수 있게 됐고. 그 계기가 뭐가 됐든, 옳은 건 옳은 거야. 그 방식을 가지고 괜한 자책 느낄 필요 없어. 그것도 다른 원래의 피해자한테 잔인한 짓이야.”
“예. 그런 생각, 입 밖으로 처음 내 보는 거예요. 그거 잘못됐다고 또 생각하고 있구요.”
“혼자서라도 그런 생각하지 마, 알았어?”
정혜주는 퍽 엄한 표정을 해 보이며 단단히 못을 박았다. 예,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서먹해진 분위기에 잠시 뜸을 들이다, 또 슬그머니 말을 붙였다.
“그런데……,”
“또 뭐.”
“…….”
“안 혼낼게. 여승재가 내 앞에서나 맘껏 청승 떨 수 있지, 어디 가서 또 그러겠어. 말해 봐.”
창틀에 팔꿈치를 얹고 비스듬히 턱을 괸 채 이쪽으로 서늘한 곁눈을 주며 그녀는 한껏 비아냥조로 대꾸해 왔다. 딱히 악의는 없다는 것을 안다. 입술을 질근 물었다 놓으며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애가…, 차남한테 어린 아들이 있거든요, 그 애가 좀 걸려요. 자기 아버지를 잘 따르는 것 같았는데…….”
“아, 이혼했다던가? 뭐 그런 얘기도 슬쩍 나오는 듯하다가 쏙 들어가 버리던데.”
“아니요, 아직은. 결혼 전에 그런 정신병력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그쪽에서 이혼 소송을 냈는데 당분간은 분위기가 어수선하니 좀 미루기로 했답니다. 아이는 엄마가 데려가기로 했고, 지금 같이 처가 쪽에 들어가 있다고.”
“뭐 그런 거라면 괜찮아. 그런 아버지 밑에서 이상한 거 배우며 크는 것보다는 차라리. 있잖아 여승재, 나쁜 아버지는 필요악이 아니라 그냥 악이야. 내가 증인이야, 걱정 마, 아이한테는 잘된 거야.”
“…….”
그녀는 별스럽지 않다는 듯 가뿐하게 말을 마쳤고, 나는 다른 대꾸를 찾지 못했다. 그런 나를 곁눈으로 흘긋 살핀 정혜주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말을 이었다.
“이것저것 어설프게 재고 따지다가 나는 결국 엉뚱하게도 잔뜩 후회할 짓들만 저질러 온 것 같아. 난 여승재가 현명하게, 하지만 좀 더 가볍게 잘 살았으면 좋겠어. 여승재에 대한 내 선택만은 후회되지 않게.”
“…예, 그러겠습니다.”
괜스레 생수통 마개를 돌렸다 도로 닫으며 나는 대답했다. 왜인지 정혜주는 깔깔 웃으며 ‘귀엽긴―.’ 하고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꾹 찔렀다.
집 앞에 도착하자 먼저 내린 기욱은 아무래도 쓸모가 없는 듯한 휠체어와 목발을 현관 안까지 놓아 주었다. 잠깐 함께 집 안에 들어가 차라도 한잔 마시자 하였으나 정혜주는 내가 대접하는 데에 괜한 애를 쓸까 싶었는지 한사코 거절하다가 뜬금없이 운동 가야 할 시간이라는 핑계를 댔다. 그럼 오늘은 감사했다, 안녕히 가시라 인사하며 배웅하고 혼자 집 안으로 들어갔는데,
“…아.”
억지로 데리고 들어오지 않은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하루에 수십 번 계단을 오르내릴 나를 위함이었겠지만, 거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소파가 있었던 자리에 대신하여 침대가 떡하니 놓여 있는 것이었다.
언젠가 2층 거실에 침대가 놓여 있는 것에 제홍이 놀라워하자 그에 찬성이 비아냥거리며 했던 말이―비록 ‘현관문 열자마자 바로’ 정도는 아니지만―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또한 이걸 저 혼자 옮기진 못했을 테니 사람을 불렀을 텐데, 그 사람들은 돌아가는 길에 무슨 말을 했으려나 또 생각하자니 절로 혀가 질근 깨물려졌다.
그럼 원래 있던 소파와 테이블 따위는 어디 갔는가 했더니, 버리진 않고 구석에 아무렇게나 밀어 놓아져 있었다. 함부로 누구를 초대할 수 없을 만큼 희한한 집 안 꼴이었지만, 어쨌든 내 집이란 생각에 비로소 마음이 놓이고 긴장이 풀렸다.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발을 끌며 다가가 그대로 침대 위로 풀썩 엎어져 버렸다. 아아……,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노곤한 기분에 슬쩍 졸음이 밀려오기도 하였다.
“…안 되지….”
그러나 얼른 얼굴을 비비며 다시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호주머니를 뒤적여 휴대폰과 함께 반으로 접은 종이를 꺼내 들었다. 펼친 종이에는 이승현으로부터 몰래 알아 낸 전화번호 두 개가 적혀져 있었다.
그중 하나를 손끝으로 짚어 확인하며 휴대폰 액정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갔다. 그러나 한참 받지 않아 끊으려는 찰나 아슬아슬하게 ‘여보세요.’ 하는 고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른 다시 휴대폰을 귓바퀴에 바짝 가져가 댔다.
“안녕하세요, 저… 여승잽니다.”
조금 머뭇거리며 인사하고 스스로를 밝혔다. 그러자 바로 ‘어머나.’ 하는 톤 높은 목소리가 이어진다. 무진의 큰형수였다.
「여승재 씨? 어머, 너무 놀라서… 이쪽 전화번호 어떻게… 아니, 설마 무슨 일 있어요?」
“전화번호는 무진이 비서 통해 알았습니다. 죄송합니다, 함부로. 별다른 문제는 없고 그저… 퇴원하고 방금 집에 도착했습니다, 그동안 신경 써 주신 것 인사드릴 겸해서…….”
「오늘 퇴원하는 날이었어요? 어머나, 어떡해…, 사나흘 후라고 알고 있었는데… 미안해요, 잘 도착했어요? 몸은 좀 어때요?」
휴대폰 너머 당혹해하는 기미가 여실히 느껴졌다. 자신의 실수에 관대하지 못한 타입인 것 같다. 자책하시라 의도한 일이 아니므로 나는 얼른 말을 이었다.
“회복이 빨라서 퇴원을 좀 앞당겼습니다. 담당의도 괜찮다 하셨구요. 회사 후배가 와 줘서 편하게 잘 도착했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입원해 있는 동안 신경 써 주신 것 감사해 인사드리려고 용기 내 한 전화니까, 너무 미안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퇴원 앞당겨진 것 미리 말씀드리지도 않았구요.”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쉽게 호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 서먹하게만 대하던 내가 이제야 태도를 바꾸어 제법 예의를 차리고 나름으로 살갑게 구는 것을 조금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음흉한 꼼수는 없으니 그 정도로만 여겨 준다면 다행한 일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형수는 사뭇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 왔다.
「그게 아니라 나…, 야심차게 여승재 씨 간병 책임진다 해 놓고선, 뒤로 갈수록 아예 뜸했잖아요.」
“괜찮습니다, 바쁘셨던 거 압니다, 이해합니다. 여기엔 무진이도 있었고, 여기저기 도움 많이 받아 불편한 점 없었습니다. 오히려 매일 오가실 때 너무 무리하시는 것 같아 조금 부담스러웠는데요.”
나는 기어이 내 딴의 농담까지 덧붙였다. 목소리는 어쩔 수 없이 여전히 뻣뻣해서 어쩐지 조금 정색한 투로 들리기도 하였다. 그러자 휴대폰 너머에서 ‘어머.’ 하고 조금 웃는다. 그리고 한결 편안해진 어조로 다시 한번 안부를 주고받았다.
「그럼 당분간은 통원 치료 잘 받아야겠네요. 음… 마침 좋은 사골이 선물로 들어왔어요. 직접 찾아가면 또 부담스러워할 테고, 여기서 내가 사골곰탕 진하게 고아서 사람 보낼 테니, 받아 줄래요?」
“예, 감사히 받겠습니다.”
흔쾌하게 대꾸하자 그쪽에서도 마음을 놓은 듯 ‘다행이다.’ 하고 혼잣말을 하였다. 석운의 증언처럼 좋은 쪽까지는 장담할 수 없으나, 확실히 아주 나쁜 쪽은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해야 할 것은, 그들에게도 나 역시 나쁘지는 않은 사람으로 인식시키는 것이었다.
“사장님께도 안부 전해 주십시오. 그리고 저… 종종 인사드리겠습니다.”
그녀는 또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한참 후에야 ‘고마워요, 여승재 씨.’ 대꾸하곤 전화를 끊었다.
휴대폰을 옆에 놓아두고 나는 곧바로 털썩 뒤로 누워 버렸다. 딱히 업무상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닌, 개인적인 친분을 쌓기 위해 말을 나누고 마음을 여는 과정이 내게는 무척 낯설고 피로한 일이었다.
고작 짧은 통화로 벌써 지친 스스로에 대해 사뭇 자조적인 기분이 들어, 좀 더 그렇게 드러누운 채 천장을 멀뚱히 쳐다보고 있는데 문득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옆으로 손을 더듬어 휴대폰을 얼굴 위로 가져와 확인해 보니, 무진으로부터의 메시지였다.
「도착했어?」
응, 나는 짧게 답장을 보냈다. 그러자 또 곧바로 메시지가 왔다.
「뭐 해?」
음― 잠시 고민하다가, ‘자.’ 하고 역시 간단히 답장했다. 그러자 더 이상 묻지 않는다.
휴대폰을 도로 침대 위에 놓아두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외투를 벗고, 혹시나 하며 다른 방을 둘러보니 침대 외에는 바뀐 것이 없어, 위층의 옷방으로 올라가야 했다.
그전에 먼저 욕실에 들어가 양치질을 했다. 얼굴도 새로 씻을까 했으나, 무진이 당부했던 말이 떠올라 그저 눈곱이 붙진 않았는지 정도만 확인하고 관두었다.
반듯하게 옷이 진열된 진회색 반투명 시스템장 앞에선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전에 입던 슈트들은 심심하다 싶을 만큼 단정하나 조금씩 낡은 것이 눈에 보였고, 무진이 사 온 옷들은 아무래도 너무 멋을 부린 것 같다는 인상에서 쉬이 벗어날 수가 없었다.
결국 이전에 입던 것 중에서 그나마 가장 비싸게 샀던 양복으로 골라 갈아입고, 왼쪽 손목에도 가장 무난한 디자인의 시계를 차고 다시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고 침대 위에 던져 둔 휴대폰과 종이를 집어 들고, 남은 하나의 전화번호를 천천히 확인하며 눌렀다. 신호음은 짧게 갔다. 상대방이 아무런 대꾸가 없어 내가 먼저 말을 건넸다.
“저, 여승재라고 합니다.”
「예, 이승현 씨 통해 미리 전달받았습니다.」
남자는 차분히 대꾸해 왔다.
***
차문을 열어 주는 사람의 안내를 받으며 한 걸음 발길을 옮기다가, 나는 문득 고개를 돌리며 운전석에서 내리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위압적인 분위기는 여전하였다. 머리가 희끗한데도 어깨는 단단하다.
회장 본인도 그러하거니와 차남을 제외한 장남과 무진은 물론이고 어쩐지 주위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 타고난 체격에 운동으로 갖춰진 강인한 남성성이 유별나게 특징적이고, 얼핏 요즘엔 야구에 심취해 있다 하시니만큼 취향이 그런 쪽인 듯한데, 그러면 아무래도 나는 탐탁지 않아하시는 게 당연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내 받아 들어가시면 됩니다. 말씀드렸으니 알고 계십니다.”
그런 생각으로 잠시 얼을 빼 놓고 있으니, 운전석 문을 탕 닫으며 남자가 말을 건넸다. 감사했습니다, 짧게 인사하고 나는 다시 돌아서며 걸음을 옮겼다.
어렸을 적에도 방문을 한 적이 있는 본가는 횡성의 별장에 비하자면은 오히려 소박한 편이었다. 안내를 받아 들어가는 중엔 언뜻 수백 번 곱씹으며 눈물을 쏟아 내고 입술을 물어뜯게 했던 익숙한 장면들이 흐릿하게 눈앞에 난입하기도 하였다.
고개를 짧게 흩트려 옛 기억을 물리치고, 나는 1층 구석 어느 방문 앞에 멈추어 섰다.
“도착하셨습니다.”
나를 안내해 온 젊은 남자가 굳게 닫힌 방문에 대고 허리를 조금 숙인 채로 말을 전했다. 음, 안쪽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대꾸처럼 들려왔다. 남자는 직접 문을 열어 주었다.
나는 양쪽 어깨를 한껏 곧게 펴며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등 뒤로 가볍게 문이 닫혔다. 그리고 바로 맞은편, 단단한 질감이 느껴지는 사각의 오크 테이블 위에 책을 펼쳐 둔 채 무진의 아버지, 노회장이 직선의 시선을 던져 왔다.
별장에서 보았던 모던한 스타일의 엑센느 소파가 맥연히 떠올랐다. 가구는 이렇듯 군더더기 없이 단정하게 떨어지는 것이 취향인 모양이었다. 이전에 입었던 양복으로 골라 입고 온 것이 다행스러웠다.
“…안녕하셨습니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느라 인사가 조금 늦어졌다. 이제야? 하는 투로 회장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앉아 있던 자리에서 불쑥 일어나더니 테이블을 돌아 나와, 바로 앞의 소파로 털썩 가 앉는 것이다.
맞은편이든 옆쪽으로든 와 앉으라는 의미겠으나, 나는 그 곁으로 다가가 그저 멀뚱히 서 있기만 하였다. 회장이 그런 나를 찌푸린 눈매로 빤히 쳐다보았다.
가까이에서 내뿜어지는 기운이 대단했다. 압박 붕대로 흉부를 꽉 조이는 기분이었다. 외부적으로는 최근 차남의 일과 그룹의 문제로 심신의 충격을 받아 요양 중이라는 보도가 있어 인간적인 연민을 조금 느꼈었는데, 그럴 필요 없을 듯했다. 그는 조금도 타격입지 않은 굳건한 성채와 같았다. 석운의 말대로 혈연의 문제에 있어선 오히려 더 냉정해지는 듯했다.
“…오늘 퇴원했습니다.”
잠시 외딴 데로 시선을 준 채 조용히 숨을 고르는 나를 위아래로 훑는 시선에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조금 돌려 보이며 말문을 열었다. 내려다보는 것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시선은 맞추지 않았다.
“할 말이 왔으니 제 발로 찾아왔겠지. 말해. 길게 말하는 것 듣는 것 다 싫어해. 짧게 해.”
그런 내 얼굴을 곧게 쏘아보며 노회장은 고압적으로 말했다. 나는 그의 뾰족한 시선을 애써 피하며 조심히 한쪽 무릎을 굽혔다. 그가 의문으로 고개를 슬쩍 기울이는 것이 느껴진다.
가진 것이 없다는 건 어쩌면 내겐 다행일지도 모른다. 절박할 때엔 서슴없이 온몸을 내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바닥에 두 손을 짚은 채 양쪽 무릎을 모두 꿇고 앉아, 몸을 숙이며 그의 발치에 이마를 붙였다. 그리고 말했다.
“살려 주세요.”
그가 우습다는 듯 너털웃음을 지었다.
“내가 무슨 의산가, 구조원인가.”
“살려 주세요.”
“…….”
그러나 이내 서늘한 기운으로 입을 닫는다. 이내 왼쪽 다리의 팽팽하게 당겨진 근육이 찢길 듯이 아파 왔다. 참아 보려 했지만 ‘으으…….’ 하는 옅은 신음 소리가 콧등으로 흘러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머리맡에서 구원처럼 대답이 떨어졌다.
“알았어.”
당장 고개를 들고 싶었지만, 나는 그의 발치로 좀 더 가까이 이마를 맞대었다. 꿀꺽 침을 삼키자, 회장의 느긋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꽤 똑똑했다지. 하고 싶은 공부 있을 거야. 생활비까지 넉넉히 지원해 줄 테니 떠나. 동유럽 쪽이 좋겠어, 그쪽이 의외로 흥미로운 볼거리가 많아, 재미있어. 그리로 가. 퍽 좋은 기회지 않은가, 살려도 주고, 공부도 시켜 주고, 돈도 주고.”
“…….”
그러곤 내 반응을 살피며 조용히 웃는 것이 느껴진다. 일순 눈앞이 캄캄해져,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나는 입을 열었다.
“잘못했습니다.”
“뭘.”
“그때… 무진일 오해하고 배신하고 상처 입히고, 회장님께도 오해 사게 만들어 결국 10년 넘게 떠나 있게 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후회하며 고통스럽게 살았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오해였지 않나. 그리고 내 분명 기억하기로는, 그때 네 두 눈에 시퍼렇게 불꽃이 튀었던 것을.”
회장은 희롱조로 말을 받았다. 숙인 이마로 열이 고이는 듯했다. 냉정해져야 했다. 한 번 더 침을 삼켰으나 좀 더 탁해진 목소리로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번 일도 제가 잘못했습니다.”
“또 뭐지?”
“조심하지 못했습니다. 일이 닥쳤을 때도, 어쩌면 제가 그분… 둘째 형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잘못했습니다.”
“그건 내 자식 안 치기로 했어, 말 꺼내지 마.”
“…….”
회장은 그제야 진짜 감정을 드러냈다. 무진을 내칠 때에는 차라리 과격한 역정을 표출하였으나, 이번엔 답지 않게 어쩐지 몹시도 억누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좋을 것이 없었다. 나는 찢어질 듯한 무릎을 좀 더 끌어 그의 발등 위로 이마를 얹으며 빌었다.
“무조건 제가 모두 잘못했습니다. 속죄하고 갚아 나간다는 생각으로 살겠습니다. 큰 형님 내외분께도 어긋나는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무진이, 털끝만큼도 해 입히지 않도록 조심하며 살겠습니다.”
“네 존재 자체가 이미 무진이한테는 독이야.”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되지 않겠습니다. 그저 옆에서 조용히―”
“그놈은 벌써 독 삼켰어. 둘 다 버려야지, 별수 있나.”
“…….”
불덩이를 삼킨 듯이 목청이 뜨거워졌다.
“울지 마, 연약하게 보이는 것 딱 질색이야. 고개 들어.”
나도 모르게 눈물을 쏟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고개 들어, 그가 강압적으로 반복해 명령했다. 손바닥으로 젖은 얼굴을 훔쳐내며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소용없었다, 눈물이 한없이 쏟아졌다.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어금니를 악물었더니 가슴이 사정없이 들썩거렸다. 그런 나를 빤히 내려다보며 회장은 못마땅하다는 듯 잔뜩 찌푸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난 네가 마음에 안 들어, 싫어. 무진이 놈 취향 이해가 안 돼. 사내놈이 좋다고 할 것 같으면 진짜 사내놈을 데려와야 할 것 아니야, 이건 계집도 아니고, 어느 쪽으로든 마음에 안 차. 대체 이런 물건한테 왜 그리 목을 매는 거고, 싫증은 또 언제 나는 거야. 기다려 주는 데에도 한계가 있어.”
“…….”
오기랄까, 이젠 새삼 분한 마음도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내가 죽으면 당신 아들이 어떻게 될지 뻔히 눈에 보여 마음대로 죽어 드릴 수도 없다, 이 말이 목청까지 치올랐다. 질근질근 혀를 깨물며 겨우 울음을 죽이고, 젖은 얼굴을 마른 소맷단으로 거칠게 닦아 냈다. 눈가며 뺨이 긁힌 듯 아팠다.
속에 든 독기를 보았는지, 그러나 그것도 그저 가소롭다는 듯 노회장은 내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흐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슬며시 고개를 숙여 오며 목소리를 낮춰 말을 건네 온다.
“무진이도 너도 다치지 않고 서로 곁에 둘 수 있는 방법이 있어.”
분명 내게 이로울 것이 없는 방법임이 예상되었지만 절로 고개가 들렸다. 가까이서 마주한 날카로운 눈빛이 소름끼칠 만큼 형형하였다. 무릎을 꿇고 앉은 나와 바짝 얼굴을 맞댄 채 노회장은 은밀한 투로 말을 이었다.
“너, 두 가지만 지켜. 그럼 눈감아 줄 테니. 우선, 그놈한테 추문 붙게 하지 마. 결혼 시켜.”
“…….”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이혼을 하든, 그건 상관 안 해. 어쨌든 여자 붙여 결혼 시켜. 정신병력 유전 아니냐 비아냥 오가는 중에 어떤 집안 규수인지는 안 따져. 오히려 평범한 쪽이 더 낫겠지. 어쨌든 그저 여자면 돼. 어때, 해 보겠어?”
“…말해 본 적이 있지만… 안 하겠다고…….”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져 나왔다. 자못 실망스럽다는 듯 회장은 부루퉁한 얼굴로 훌쩍 고개를 다시 뒤로 물리곤, 느긋하게 등을 기대앉은 채 곁눈으로 나를 흘겨보았다.
“그렇게 끈기가 없어서야 쓰나. 잘 설득해 봐. 그놈, 네 말이라면 사족을 못 쓰잖나.”
“…….”
무슨 말이든 대답을 해 보려 했지만 입술을 벌려도 더 이상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됐어, 일어나 가 봐.”
그런 내게 이제 흥미가 없다는 듯 회장은 다른 데로 고개를 돌리며 명령했다. 아픈 신음을 흘리지 않으려 어금니를 악문 채 나는 천천히 무릎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지 않는 그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인사했다.
“또 뵈러 오겠습니다.”
“성과 없인 오지 마. 귀찮아.”
마땅찮은 옆얼굴을 힐긋 보이며 그는 심드렁히 대꾸했다. 대답 없이 또 한 번 고개를 숙여 보이고 나는 돌아섰다. 그리고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문득 뒤에서 ‘아참.’ 하고 불러 세운다. 다시 돌아서자,
“한 가지가 더 남았지.”
양쪽 눈썹을 삐뚜름히 치켜올리며 노회장이 나를 쏘아보았다. 이번엔 또 뭔가, 긴장하며 기다리자 단호한 말이 이어진다.
“셰퍼드 훈련시키는 듯이 함부로 앉아라 서라 명령하지 마. 특히나 다른 사람들 있는 데서… 가족들 앞에서도 안 돼. 기죽이지 마, 밖에 나가 큰일 못 해.”
“…예.”
눈길을 떨어뜨리며 나는 고분고분히 대답했다. 회장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를 향해 허리를 깊숙이 숙여 보인 뒤 돌아서서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서며 문을 닫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나를 안내해 왔던 젊은 남자가 이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그러나 나는 걸음을 떼지 못하고 주룩 미끄러져 주저앉아 버렸다. 남자는 곧바로 등을 보이고 돌아섰다.
***
“뭘 멍하니 있는 거야?”
“…아.”
커피를 한 잔 내려놓고는 다 식을 때까지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고 그저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있는 것에 무진이 불쑥 얼굴 앞으로 손가락을 튕겨 내며 주의를 주었다. 퍼뜩 고개를 들자 식탁 위로 걷은 두 팔을 짚고 서 있는 그의 얼굴이 청명하게 마주쳐 왔다.
캘리포니아롤과 무스 초콜릿 케이크의 이상한 조합으로 양손에 든 채 그는 조금 이른 시간에 퇴근하여 집으로 왔다. 그러곤 내내 기분 좋은 얼굴로 싱글벙글이었다.
내게는 접시와 포크 정도를 나르는 것도 허락하지 않아서 몸이야 편했지만, 무얼 위해 이토록 내 힘을 아껴 두려고 하는지가 뻔해, 나로서는 외려 조금 복잡한 심경이었다.
“욕조에 물 다 받아 놨어. 들어와.”
내가 넋을 빼 놓고 커피를 향으로만 잔뜩 취하고 있는 동안 그는 벌써 손 빠르게 내 목욕 준비를 해놓은 모양이었다. 한껏 기대에 부푼 얼굴로 나를 빤히 응시하며 ‘옷 벗고.’ 덧붙여 말한 뒤 그는 히죽 웃으며 먼저 발길을 돌렸다.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으며 나는 다 식어 버린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옷 벗으라니까. 바닥 젖으면 위험하니까 바로 들어와 몸 담가.”
활짝 열려 있는 욕실 문틀에 기대어 안쪽을 슬쩍 들여다보자, 온도를 재 보듯 한쪽 팔을 욕조에 받아둔 물속으로 집어넣은 채 무진이 힐긋 돌아보며 말해 왔다.
이렇게까지 준비해 둔 상태인데 뭐라 말을 보태 봤자 괜한 자극을 줄 뿐이라, 나는 문밖에서 천천히 탈의를 하였다. 그리고 알몸인 채로 들어서는 건 또 어쩐지 무안해, 얼른 손을 뻗어 선반에서 배스 가운을 가져와 걸치고, 슬금슬금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돌아본 무진이 그런 나를 위아래로 훑으며 픽 웃는다.
“여승재 내숭 또 시작됐네. 아, 그전에 먼저 할 거 있지.”
“…….”
그리고 사뭇 의미심장한 얼굴로 불쑥 일어나 스치듯이 입술을 짧게 누르곤, 곧장 선반을 뒤적거리는 것이다. 그가 찾아 꺼내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얼른 고개를 돌리며 배스 가운의 허리끈을 매듭으로 묶었다.
“그거 꼭… 해야겠어? 이제 원래대로 길어서 비벼져도 안 아플 건데.”
“그래도 난 만질만질한 쪽이 좋아. 어차피 네 거기에 입 대고 손 대고 배 맞추는 건 나니까, 내 취향에 맞춰 줘야 하잖아?”
그러나 무진은 셰이빙 크림과 위협적인 날면도기를 양손에 들어 보이곤 억지 주장을 하는 것이다. 나는 슬쩍 한 손을 욕조의 물속으로 담그며 딴청을 피웠다.
“너무 뜨거우면 안 좋을 것 같아서 적당히 식혔어.”
묻지 않은 말을 대꾸하며 무진은 여유롭게 내 뒤로 다가와 섰다. 그러곤 곧장 등허리로 바짝 몸을 붙여 안으며 양팔 안쪽으로 두 손을 감아 온다.
“읏.”
짧은 숨이 급히 마셔졌다. 긴장하는 몸을 위로하듯 그가 턱 끝으로 내 귓바퀴와 목덜미, 그리고 어깨까지를 꾹 눌러 왔다. 그리고,
“새삼 뭘 긴장하는 거야? 내가 언제 상처 하나 내는 거 봤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지껄이며 앞쪽으로 묶어 둔 허리끈의 매듭을 풀어내 버린다. 힘없이 떨어지는 허리끈 다음으로, 닫혀 있던 배스 가운 양쪽 단이 스르륵 벌어졌다. 발가벗은 몸뚱이가 훤히 드러났다. 한 벽면을 넓게 차지하는 거울을 향해 서 있어, 나는 아예 옆쪽으로 고개를 틀어 버렸다.
“이것 봐, 멋대로 자라서 지저분해 보이잖아.”
고개를 튼 쪽으로 바짝 얼굴을 붙여 오며 무진은 불쾌한 감상을 평하였다. 멋대로 자란 것을 질책하듯 무성의한 손길로 아래쪽의 음모를 슥슥 비벼 대기도 하였다. 나는 반대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려버렸다.
곧이어 딸깍, 하고 그가 셰이빙 크림을 짜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듬뿍 발라진 크림 위로 날카로운 면도날이 슥― 스치는 순간에는 절로 어깨가 움츠러든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무진은 희미하게 콧노래까지 부르며 앞쪽의 면도를 모두 끝내고,
“자, 이제 저기 앉아 다리 벌려. 안쪽까지 다 보이도록 엉덩이 조금 빼는 거 알지?”
욕조 옆쪽으로 덧대어진 대나무 선반 위로 힐긋 턱짓을 했다. 형편없이 구겨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마구 문지르며 나는 그 위로 엉덩이를 놓고 앉은 채 양손을 뒤로 뻗어 몸을 지탱하였다.
“무릎 올려야지.”
흐르는 물에 면도날을 헹구며 무진이 여상히 참견해 왔다. 이를 악문 채 양발도 당장 위로 올리자, ‘벌리라니까―.’ 하고 또 말을 보탠다.
“욕하고 싶은데 기죽일까 봐 참는 거야.”
기어이 참지 못하고 매섭게 노려보며 쏘아붙이자, 크림 통을 달깍 흔들며 내 앞으로 무릎을 꿇고 앉은 무진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대꾸했다.
“그 정도로 기 안 죽어, 해.”
“개자식.”
“넌 아는 욕이 그것밖에 없지?”
“씨발새끼도 알아.”
그리고 기껏 야심차게 쏘아 댔으나, 그는 우스워 죽겠다는 듯이 내 사타구니에 얼굴을 박고는 푸하학! 웃어젖히는 것이다. 나는 벽 쪽으로 고개를 틀어 버렸다.
킬킬거리며 고개를 든 무진은 새로 짜낸 크림을 사타구니 안쪽까지 꼼꼼히 발랐다. 그리고 이내 퍽 진지한 얼굴을 한 채로 음낭을 조심스레 다른 한 손으로 쥐고 회음부까지 섬세하게 면도날을 밀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끝났어. 욕조 바로 들어가.”
그리고 비로소 그가 손을 떼며 말을 하자마자 곧장 자세를 틀어 미끄러지듯이 물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배스 가운은 그대로 걸친 채여서 그가 또 그걸 비웃으며 직접 벗겨 주었다.
몹시 수치스럽고 불쾌해져 뚱한 얼굴로 무릎을 세운 채 일렁거리는 물결만 빤히 노려보고 있자, 무진은 태연히 손을 씻고는 ‘몸 좀 불리고 있어.’ 하며 욕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
체온보다 조금 더 높은 정도로 맞추어진 물의 온도가 단단히 뭉쳤던 긴장을 조금씩 풀어 주었다. 아로마 오일도 조금 섞었는지, 천천히 깊게 호흡하고 있으니 좋은 향이 맡아지기도 하였다.
무릎을 곧게 펴고 뒤로 등을 기대어 몸을 길게 늘어뜨렸다. 무의식적으로 한 손이 사타구니 쪽을 매만졌다. 다른 피부와 같이 거슬리는 것 없이 만질만질하게 느껴지는 촉감이 꽤 오랜만이었다.
눈을 감고 좀 더 아래쪽까지 손을 뻗다가 주룩 미끄러지듯이 물속으로 얼굴이 빠졌다. 따뜻하고 편안해서 그대로 잠시 숨을 참았다. 온몸에 힘을 빼자 둥실 떠오르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얼핏 멀리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진동처럼 들려왔다. 무진의 목소리였다.
내게 말을 거는 것인가 싶어 ‘푸하―!’ 참았던 숨을 뱉으며 물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상하네, 하고 다시 들어가려는데 언뜻 멀지 않은 곳에서 희미하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심스레 일어나 욕조 밖으로 발을 내딛고 문밖으로 힐끔 고개를 빼고 내다보았다. 저쪽 벽을 마주 본 채 등을 돌리고 선 무진이 과연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뭐 그건 됐고 말이야, 그나저나 지, 그… 말이야, 여승재… 그, 해도 되냐? …그거 말이야, 그거. 뭐 과격한 건 안 할 거지만, 기본적으로 몸에 무리가 안 될까 해서… 씨발 모른 척할 거야? 무슨 말하는지 정말 몰라? 여승재랑 그―”
“야!”
“……!”
경악스런 대화에 버럭 소리를 치자, 흠칫 어깨를 떨며 얼른 휴대폰을 바닥에 던져 버린 무진이 놀란 얼굴로 돌아보았다. 매섭게 쏘아본 뒤 나는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씩씩대며 물속에서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자, 머쓱한 얼굴을 한 채로 무진이 내 눈치를 힐긋 살피며 욕실 안으로 따라 들어왔다. 그리고 한 손에 들고 있는 초록색 때밀이 수건을 슬쩍 내밀어 보이며 히죽 웃는다.
“이거 구해 놨어.”
“난 때 안 밀어.”
“묵은 때 벗기고 싶다고 직접 말했었잖아.”
“…….”
“팔 내밀어.”
불퉁한 얼굴로 시선도 마주치지 않자, 그는 직접 물속에서 내 한쪽 팔을 집어 올려 욕조 위에 걸쳐 두곤 손바닥에 꽉 들어차는 수건을 끼운 채 슥슥 문질러 왔다.
“아파.”
여전히 그에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그러나 구태여 도로 팔을 가져오지도 않으며 나는 퉁명스레 말을 던졌다.
“응.”
곧장 대답하며 그는 좀 더 힘을 빼고 살살 문질렀다. 자기 몸을 밀어 본 적도 없을 테면서 꽤 능숙하게 힘 조절을 하는 것이 신기해 슬쩍 눈길을 줘 봤더니, 내 팔등 위로 지우개 가루처럼 뭉친 때가 가득이었다.
당장 물을 끼얹어 버리자, 무진이 킥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얼른 내 눈치를 보곤 입매를 고쳐 다문다. 그에 오히려 내가 다 의기소침해져, 묵묵히 손을 움직이고 있는 그의 이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아까… 갑자기 소리 질러서 기죽었어?”
“아니 그냥 놀랐는데. 갑자기 옆에서 자동차 클랙슨 빵 터질 때처럼.”
“…….”
“왜 그래?”
그것이 지상 최대의 과제인 것처럼 부지런히 내 팔의 안쪽 바깥쪽 수건을 문지르던 무진이 슬쩍 눈길을 들며 물었다. 별거 아니야, 대답하며 나는 또 물을 끼얹었다.
왼쪽 팔, 하고 그가 손짓했다. 앉은 채 빙그르르 돌아앉으며 그의 앞으로 왼쪽 팔을 내밀자, 무진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다시 때 밀기에 열중하였다. 나는 그것을 무심히 살피며 간간이 물을 끼얹었다. 그리고 그의 콧등에 맺히는 땀방울을 바라보며 또 넌지시 말을 이었다.
“지석운한테 그런 거 묻지 마. 아니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그런 거 티 내지 말란 말이야. 창피하지도 않아?”
“뭐 어때, 안 하고 사는 사람도 있어?”
“까발리고 하는 사람도 없어.”
반성하는 기미 없이 심드렁히 대꾸하는 것에 다시 쌀쌀맞게 말을 붙였더니, 그는 또 낄낄대며 웃음을 터트렸다.
“의사니까, 단순히 환자 보호자로서 물어본 것뿐이야. 이제 등 밀어야 돼. 나오면 추워, 그냥 있어, 내가 들어갈 테니까.”
그리고 손바닥에 끼웠던 수건을 잠시 벗어 두곤 자리에서 일어나 긴 바지의 밑단을 무릎 위까지 접어 올리는 것이다. 이미 팔뚝 위로 밀어 올린 상의는 물론이고 바지 허벅지 쪽도 흠뻑 젖어 있었다.
“벌써 젖었는데. 넌 왜 안 벗어?”
그것을 힐긋 살피며 참견하자,
“벗은 몸 보고 싶어?”
무진은 히죽 웃으며 당장 웃통부터 벗어젖혔다. 그 탓에 머리카락이 잔뜩 헝클어졌는데, 신경 쓰지 않으며 그는 곧이어 바지까지 마저 벗어 던졌다. 그리고 타이트한 드로어즈 차림으로 곧장 욕조 안으로 들어와 서는 것에,
“…미쳤어….”
소리가 절로 나왔다. 얼굴 앞에 마주한 그의 가운데가 속옷 위까지 삐죽 머리를 밀고 올라올 만큼 잔뜩 발기해 있는 것이다.
“…등 보이고 앉아.”
조금 무안했는지 그는 그저 무뚝뚝하게 말하곤 내 한쪽 어깨를 밀었다.
“뭐 했다고 이래?”
시키는 대로 빙글 돌아앉으면서도 힐긋 고개를 뒤돌아보며 묻자, 놀린다고 생각했는지 무진은 시무룩한 얼굴로 ‘뭐…….’ 하고 말끝을 흘릴 뿐이었다. 그러곤 다시 때밀이 수건을 손바닥에 끼우곤 뒷덜미부터 꼼꼼히 문질러 온다.
묵묵히 등을 맡기고 있다가, 세운 무릎 위로 턱을 괴며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의사한테도 그런 거 묻지 마. 내 몸 상태는 내가 제일 잘 알아. …물구나무서기 같은 것만 안 시키면, 해도 돼.”
“…….”
등허리 가운데서 멈칫했던 손바닥이 이내 힘 조절을 못하고 북북 빠르게 문질러 왔다. 앞으로 몸이 떠밀렸다.
“아, 아, 아파… 살살해. 좀 천천히…….”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벌써 쌀 것 같아.”
“…….”
무진의 초조한 목소리가 욕실 타일 벽을 윙―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