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엇.”
평소와 다름없이 간병인이 퇴근을 하는 정오 즈음, 교차 근무를 서듯이 노크도 없이 곧바로 병실로 들어서던 제홍은 침대 곁 의자에 앉아 배달 주문 시킨 초밥을 먹고 있는 정혜주를 보곤 일순 여자 화장실에라도 들어온 것처럼 멈칫 놀라는 기미를 보였다.
그러나 이내 침대 위에서 덤덤히 식사를 하고 있는 나를 확인하곤 대충의 상황을 파악했는지 곧바로 눈매를 휘며 능청을 떨어 왔다.
“와우―, 세기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미인! 꼭 영화배우 정혜주 닮으셨는데?”
“그 정혜주 맞는데?”
한 손에 포장 도시락을 들고 또 다른 한 손엔 나무젓가락을 쥐고 있던 정혜주 역시 갑자기 들어선 그를 낯설어하지 않고 덤덤히 말을 받았다. 제홍은 밉지 않은 태도로 곁눈을 흘기며 말을 이었다.
“에이― 거짓말. 그 정혜주는 나이가 꽤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 눈앞의 미인은 20대 중반… 아무리 많이 쳐줘 봤자 30대 초반인데 무슨.”
“말꼬리가 짧다.”
“안녕하세요, 이제홍이라고 합니다.”
“아, 그 미소년에서 역변했다는?”
“…….”
그러나 만만치 않은 베테랑 여배우의 기세에 단숨에 제압당해 시무룩하게 입매를 늘어뜨리는 것이다. 나는 그녀와 짧게 눈을 맞추며 피식 웃었다.
제홍이 그런 나를 향해 입을 삐죽여 보이곤, 의자 하나를 슬금슬금 끌고 와서는 눈치를 살피며 그녀와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주섬주섬 가방을 뒤적여 수첩과 펜을 꺼내어 정혜주 곁으로 슬쩍 내밀기까지 한다.
“사인해 주세요, 팬이에요.”
“밥 다 먹고.”
“예.”
한껏 카사노바 흉내를 내다가 이내 얼굴을 붉히며 고분고분하게 구는 것이 우스워 나는 웃음을 참다 사레가 들려 얕은 기침을 콜록거렸다. 정혜주가 얼른 물컵을 들어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 들고 물을 삼키는데, 제홍이 잔뜩 원망조의 눈길로 나를 쏘아본다.
“여승, 너 남자가 그렇게 입이 싸면 안 된다, 응?”
“미안.”
당사자 없는 자리서 그를 입에 올려 잠시 키득거린 것은 사실인지라 나는 담백하게 사과했다. 재미없다는 듯 제홍은 ‘흥’ 소리를 냈다. 그리고 다시 정혜주 곁으로 조금 더 의자를 끌어 붙으며 슬쩍 말을 붙였다.
“그런데 정말 영광입니다. 진짜 팬이었어요. 계속 활동…… 복귀하시는 거죠?”
“글쎄, 그건 내 의지만으로 되는 건 아니어서. 아, 그런데 계속 말 놔도 되나? 여승재 친구라니 마냥 어리게 보여서.”
“말씀 놓으세요, 막 대해 주세요.”
“아니 뭐 그렇게까지는.”
그의 의욕적인 대꾸에 정혜주가 슬쩍 고개를 뒤로 물리며 질색하는 얼굴을 해 보이자, 제홍은 얼른 순진한 투로 방실 웃으며 ‘다른 의미는 없고요.’ 하고는, 또 돌연 카사노바 시늉을 해 보였다.
“하지만 너무 어리게만 여겨지진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응? 이왕이면 어린 게 좋지 않나?”
“원숙한 쪽이 좋던데요, 전.”
“아, 난 개인적으로 풋풋한 쪽이 좋더라고.”
“그럼 전 막둥이 동생처럼 편하게 대해 주세요.”
“그런 의미로 여승재가 딱 취향인데, 어리고 예쁘고 고분고분하니 말도 잘 듣고, 순하고 숫기 없어 다른 데 눈 돌릴 위험도 적고.”
그러나 몇 번이나 이리저리 태도를 바꿔 보는 그의 갸륵한 정성에도 불구하고, 정혜주는 나를 향해 흐뭇한 눈길을 둘 뿐이었다. 그에 제홍은 또 나를 힐긋 쏘아보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어릴 때는 그랬던 것 같은데, 얘도 요즘 보니까 많이 변했던데요. 여승, 너 다른 얘기는 다 까발려 놓고 정작 제일 중요한 사실은 뺀 거 아냐?”
“아, 여승재 사내구실 못 하는 거? 알아. 그래서 씁쓸히 입맛만 다시고 있지, 뭐.”
그리고 나를 향한 의심의 추궁에 정혜주의 답변이란 외려 나를 더 씁쓸하게 하는 꼴이었다. 힐긋 눈치를 살피며 숟가락을 놓는 나를 보곤 제홍은 그제야 개운한 얼굴로 낄낄 웃어 댔다. 괜찮다는 듯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며 정혜주는 이어 제홍을 향해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참, 여승재 사내구실 얘기하니 생각나네. 권무진 말이야, 그쪽이랑 어릴 적부터 친한 사이라며. 그럼 어디 한번 말해 봐, 그 자식 왜 여기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지.”
“아, 그…….”
내가 좀처럼 타이밍을 맞추지 못했던 물음을 직설적으로 던져 주어, 나도 넌지시 제홍을 바라보며 숨을 죽였다. 그러나 제홍은 뻣뻣한 태도로 말을 끌다가, 이내 ‘아참’ 하며 가방을 뒤적여 매일 부탁하는 신문을 불쑥 건네주는 것으로 관심을 돌리는 것이다.
“자, 여기, 오늘자 신문. 텔레비전에 뭐 하려나―.”
그리고 앉은 의자를 그대로 질질 끌며 테이블 앞으로 옮겨 가선 냉큼 리모컨을 눌러 텔레비전을 켠다. 그에 정혜주가 나를 힐긋 돌아보곤 다시 그를 향해 ‘저기요―.’ 하고 야호 소리를 내듯 손나팔을 만들어 불렀다.
아무래도 무시하기 힘들었던지 힐끔 뒤를 돌아본 제홍은, 그러나 그녀가 무어라 말을 꺼내려는 찰나 얼른 내게 시선을 고정시키며 먼저 물어 왔다.
“오늘 아침에도 큰형수 오셨어?”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엔 건너뛰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생각하며 고개를 저어 보이자 제홍은 ‘벌써 지치셨나?’ 하고 혼잣말로 빈정거렸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는데.’ 대꾸하며 피식 웃다가, 얼핏 그의 뒤로 보이는 텔레비전 화면에 눈길이 갔다. 건강 관련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었고, 화면 하단으로 속보가 떴다.
《KM금융 4년 전 합병과정 노사대립 중 실종·의문사 진위 여부 떠올라》
“…….”
나는 당장 허벅다리 위에 얹어진 신문을 사납게 뒤적였다. 왜 그래? 정혜주가 목을 길게 빼며 물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며 제홍에게 말했다.
“뉴스… 채널 돌려.”
“뭔데그래―”
뚱한 얼굴로 텔레비전 화면으로 고개를 돌린 제홍은 잠시 그대로 붙박인 듯 움직이지 않다가, ‘홍.’ 하고 내가 다급히 부르는 소리에 그제야 리모컨을 눌러 채널을 돌렸다. 정규 방송엔 모두 자막으로 처리되어 알려질 뿐이었다. NSB로 채널을 고정해 보니, 마침 해당 관련 뉴스가 보도 중이었다.
사건 진행은 6년 전 KM그룹의 차남 권무형과 종합보험사 라이프엔진의 장녀가 화촉을 밝히는 때부터였다. 당시 이미 한 차례의 인원 감축이 이루어졌고, 이후 소문으로만 겉돌던 라이프엔진의 KM금융으로의 합병이 2년 후 확실시되면서 LE카드 직원들의 대규모 정리 해고가 강행되었다.
이 과정 중 노사 충돌이 거세었고, 라이프엔진 본사에서 점거 농성을 하던 노조위원장 박 씨가 화장실에서 음독자살을 했다. 이어 노조간부 정 씨가 실종되었고 최 씨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였으나, 경찰은 이에 관해 단순 자살과 행방불명, 사고사로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최근 사고자 가족들의 재조사 요청으로 인해 밝혀진바, 음독자살로 사망했던 노조위원장 박 씨는 당시 임신 6주차였으며 사고 발견 후 병원으로 옮겨진 그의 피부 조직에서는 일반인이 쉽게 구할 수 없는 의약품 성분이 발견되었다.
또한 실종된 정 씨는 두 달 후 약혼녀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었고, 교통사고사한 최 씨가 몰던 소형 자동차를 들이박은 5톤 트럭은 당시 운전자의 진술과는 달리 도로에 급정거한 바퀴 자국이 전혀 남지 않았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당시 노사 협의를 이끌어 냈던 KM금융과 이전 LE카드의 사측 관계자, 그리고 해당 사건을 수사 발표했던 경찰관들이 소환되었다. KM금융 대표 권무형은 아직 이에 관해 입장 표명을 하지 않고 있었다.
같은 내용이 계속 반복되어 보도되었다. 제홍은 리모컨을 눌러 디스커버리 채널로 돌렸다. 정혜주는 인스턴트커피를 마신 뒤 간호사를 불러 내게 약을 먹이게 했다. 밤을 꼬박 샌 탓에 눈두덩이 움푹 들어가 있었다. 이 나라 땅을 밟자마자 곧장 이곳으로 걸음한 것일 터였다.
나는 그녀에게 이만 돌아가 여독을 푸시라 전했다. 그녀는 병실에 딸린 옆방을 잠시 빌리겠다 했지만, 계속해 사양하는 것에 결국 알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기획사 차량을 부를 수도 없고, 해 뜬 시간에 택시를 태워 보낼 수도 없어서 나는 제홍에게 그녀를 집 앞까지 바래다주기를 청하였다. 제홍은 흔쾌한 태도로 그녀를 에스코트하며 병실 문을 나섰다.
홀로 남은 병실 안에서 나는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방영되고 있는 다큐멘터리를 멍하니 시청했다. 바다 생태계 최강의 폭군, 범고래가 해안까지 올라와 새끼 물범을 낚아채 물고 있었다. 최대 몸길이 8미터, 무게 6톤 이상. 학명 Orcinus orca, 죽음을 부르는 자.
놈은 자신보다 큰 향유고래 무리에 난입해 아수라장을 만들거나 먹잇감의 사방을 민첩하게 공격하곤 했다. 둥글고 순한 인상은 먹이를 제압하기 위해 입을 벌리는 순간 뾰족하게 드러나는 강력한 이빨로 지워져 버린다.
대형 먹잇감은 장시간 추격하며 지치게 한 뒤 집요하게 물어뜯어 공격하고, 작은 먹잇감을 상대할 때엔 순간적으로 돌진해 충돌하여 기절을 시키는 등, 상대에 따라 그 약점을 정확히 간파하는 지능적 사냥법이 단연 발군이었다.
그럼에도 무리의 단결력은 대단해, 먹잇감을 두고 서로 다투는 일 따위는 없으며 육지의 대표적 군집형 맹수인 사자들처럼 포위 대형과 공격조를 나누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사냥 시, 가장 뛰어난 공격력을 가진 성체 수컷은 관망 후 어미의 허락이 떨어지면 사냥감에게 돌진, 단숨에 숨통을 끊어 놓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소름끼치는 점은, 생존을 위해 사냥을 하는 다른 동물과 달리 범고래는 인간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오락성 만족을 위해 사냥을 하는 동물이라는 것이었다.
채널을 돌리고 싶었지만 리모컨이 너무 멀리 있었다. 해안가에서 놀고 있는 새끼 물범을 향해 범고래 한 마리가 파도에 몸을 싣고 다가오는 장면을 고통스럽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문득 노크와 함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석운이었다.
“…제홍이는?”
혼자인 것에 주위를 둘러보며 그가 물었다. 잠시 밖에,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는 내 곁으로 다가와 안색을 살피는 듯했다. 그리고 또 ‘컨디션 어때?’ 하고 물어 왔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말을 대신하였다.
범고래가 크게 입을 벌리는 순간, 어미 물범이 대신 놈의 입안으로 몸을 던졌다. 덥석 닫히는 이빨, 그리고 파도와 함께 놈은 물러갔다.
불현듯 그날 아침 무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주 앉아 밥을 먹으며 아득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씁쓸히 웃어 보이던 그 생경한 얼굴.
그래, 하고 석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발길을 돌리려 하였다. 그러다 언뜻 내가 앉은 침대 오른쪽으로 신문이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는 것을 보곤 멈칫 멈추어 섰다. 그리고 내게 무어라 말을 건네려던 찰나, 또 병실 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석운이 대신 대꾸했다. 문이 열렸다 닫히고, 들어선 사람은 무진의 첫째 형이었다.
“…안녕하세요.”
석운이 먼저 그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이네요, 그는 몹시 지친 얼굴로 힘없이 웃어 보이며 대꾸하였다. 그리고 정중히, 잠시 자리를 비켜 달라고 말했다. 석운은 무심한 얼굴로 나를 힐긋 돌아본 뒤, 그에게 짧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걸음을 옮겨 병실 밖으로 나갔다.
“곧바로 찾아와 살피지 못해 미안해요. 좀 괜찮아요?”
침대 곁으로 다가와 서며 그는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나는 엉뚱한 인사를 했다. 흐리멍덩한 내 상태를 이해한다는 듯 그는 옅게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집사람 통해 안부는 계속 듣고 있었어요. 무진이 친구들이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주고 있다죠. 나중에 톡톡히 감사 인사를 해야겠어요.”
예, 나는 짧게 대꾸했다. 다큐멘터리가 끝이 나고, 시끄러운 로고송을 배경으로 한 광고가 이어졌다. 나는 마주 선 남자의 면도되지 않은 거뭇한 턱을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는 내 오른쪽 자리의 신문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잠시 머뭇거리며 물어 왔다.
“그 녀석한테선 아직…… 무진이, 전화도 오지 않았나요?”
그는 입원 후 무진이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예, 나는 덤덤히 대답했다.
“그 녀석 성격도 참 어지간하죠.”
철없는 동생을 나무라듯 그는 설핏 쓴웃음을 머금은 채 혼잣말처럼 낮게 말하였다. 그러나 이내 깍듯한 태도로 나를 향해 단호히 고개를 숙여 보이는 것이다.
“미안합니다. 위험한 상황에 처할지도 모르겠다고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으면서도 미리 대처하지 못했어요. 여승재 씨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가장 앞장섰으면서 그 책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내 잘못이 커요.”
“아니요, 제가 조심하지 못했습니다.”
퍽 당황했지만 내 목소리는 요란한 광고 소리에 묻혀 그저 담담한 투로만 들렸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문득 눈살을 가늘게 뜬 채 불투명한 막이 쌓인 이쪽의 무언가를 꿰뚫어 보는 듯이 나를 지그시 마주 보았다.
“여승재 씨…….”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내 이름이 이국의 언어처럼 낯설었다. 그가 불러 일깨우는 것은 어디의 나인가, 어떤 나인가.
“무진이가 따로 사람을 붙인 걸 알고 계셨지요.”
“예.”
“…내가 사람을 추가하지 않은 건… 행여 둘째를 더 자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서로 상극인 두 사람이지만, 유일한 교점이… 자신과 반하는 쪽이 거세게 튀어 오를수록 더 극단적으로 치닫는다는 점이니까요. 여승재 씨 입장에선 개운치 못한 불쾌함이 당분간 따랐겠지만, 그대로 잠잠히 마무리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지요. 물론 그 과정을 참아 내기 힘들었을 거란 건 이해합니다.”
“…….”
“하지만 그 상황에선 좀 더 다른… 그러니까, 조금 더 여승재 씨 본인에게 안전하고 효과적인 다른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굳이 그렇게 위험한 선택을…….”
그는 목이 타는지 언뜻 말을 멈추고 괴로운 듯 미간을 찌푸린 채 마른 침을 삼켰다. 그리고 미동 없이 곧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향해 불길한 눈길을 던져 왔다.
“여승재 씨, 혹시 무진이를……,”
“…….”
그는 말을 다 잇지 않았다. 두려운 진실을 외면하듯 고개를 틀며 또 한 번 마른 침을 삼킬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삼킨 말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승재 씨, 혹시 무진이를 자극하려 했습니까? 여승재 씨, 혹시 무진이를 움직이게 하려 한 겁니까? 여승재 씨, 혹시 무진이를… 부추긴 게 아닙니까?
글쎄, 이제는 나도 모호해져 버렸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를 얻은 그 날부터 끊임없이, 끊임없이 그를 부추기며 청승을 가장해 조종을 해 왔는지도 모른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욱 힘을 얻는 눈짓으로 몸짓으로 그리고 옅은 호흡의 힘으로. 여승재 씨, 그가 부르는 나의 이름에서 느껴지는 그 불길한 낯설음이 진짜 나일지도.
“처음 일이 터졌을 땐 어느 정도 관망하긴 했어요. 언젠가 터질 일이었고, 그룹 전체에 미치는 해가 복구 가능할 정도의 안에서는…… 어쨌든 여승재 씨가 지금 이렇게 된 이상, 그 녀석 분이 다 풀릴 만큼 놔두지 않았다간 말했듯이 더 극단으로 치달을 테니까. 그런데 지금은 선을 넘었어요. 더 이상 갔다간 그 녀석 본인에게도 위험해요.”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손바닥으로 거칠게 문지르며 그는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다시 곧게 시선을 맞춰 오며 단호히 말을 이었다.
“무진이, 불러요.”
“…….”
“불러서 이제 그만 멈추게 해요, 여승재 씨. …그렇게 해 줘요.”
그는 마치 내가 무진을 방조하고 있다는 듯이 말하였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도 내가 그러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병실 천장 위로 범고래 한 마리가 넘실거리며 지나갔다. 배가 고프지 않아도 사냥을 하는 유일한 짐승. 돌연 어찔한 기분이 들어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것을 대답으로 알아챘는지 그는 ‘그래요.’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발길을 돌렸다.
“치료 잘 받고 푹 쉬어요. 어서 완쾌하길 빕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느긋하고 완곡한 인사를 끝으로 병실 문을 나섰다. 텔레비전에선 이제 테마기행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었다. 곧이어 또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석운이었다.
그는 애썼다는 듯이 비죽 웃는 얼굴로 내 앞으로 다가와 섰다. 그리고 내가 먼저 말을 꺼내길 기다리는 듯 잠시 가만 얼굴을 보고 섰다가, 내가 고집스레 텔레비전 화면에서 눈길을 떼지 않자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의도하지 않더라도, 그리고 앞으로 마음 변해 돌아서고 싶어지더라도, 이제 넌 완전히 묶인 셈이야. 일전에 제홍이 녀석과 잠시 말하다 말았지만, 차남 쪽과 무진이 균형은 깨졌어. 대신 방금 그분과 새로운 균형이 맞춰지겠지. 그쪽에선 이제 네가 단순한 도우미 정도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이 된 거야.”
나는 그런 일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나를 무엇으로 대하고, 어떻게 대접해 주는지 따위는 알 바 아니었다. 버러지 취급을 받는대도 그의 곁에만 있을 수 있다면 좋다고, 각오되어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나를, 그런 내 위치를 초조하고 안타까이 바라본 것은 무진이었다. 나는 또 그런 그가 안타까울 뿐이었다.
“사실 이번 일까지는 뭣 모르고 파기 시작한 일이었어. 뭔가 나올 것 같다는 막연한 예상이 시작이었고, 그저 그쪽 약점이라면 하나라도 더 손에 쥐고 있는 게 좋지 하는 식이었으니까. 그런데 드러난 사실에 다들 조금씩 얼이 빠졌었다. 덮자 했지. 워낙 민감한 사안이고… 무진이도 적정선이라는 걸 아는 놈이니까. 그런데… 어쨌든 이렇게까지 터진 이상, 그쪽 둘째 형님은 아웃이야.”
“…….”
나는 비로소 텔레비전에서 시선을 거두며 그를 향해 눈길을 들었다. 그제야 관심을 보이는 나를 향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와 선 석운은 고개를 저어 보이며 이어 말했다.
“그쪽 회장님, 절대 안 도와줄 거야. 권무진 그렇게 오랫동안 떨어뜨려 놓은 것만 봐도 알겠지만, 혈연의 정 같은 거 철저히 배제하고 방관을 테스트로 삼는 분이셔. 그게 그분이 걸어오신 길이야. 설령 막대한 로비자금을 쏟아붓고 불법을 저질러서라도 어떤 성과를 냈더라면 또 모르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룹에 타격만 입혀 놓았다, 그걸로 끝이야. 거기 안주인 마님? 누구보다 이쪽 생리, 회장님 성격 잘 아는 분이야.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지.”
나는 형제들 간의 소리 없는 총성이 오가던 저녁 식사 자리에서 노회장의 눈치를 살피며 엄숙한 얼굴로 입을 꼭 다물고 있던 안주인의 작게 다물린 입술을 떠올렸다.
“그렇다고 너, 이제 다 끝났다 하고 마음 놓으면 그거야말로 멍청한 짓거리야. 무진이 아니더라도 첫째 형님 측에서 너 보호하겠지만, 회장님 상대로? 안 돼, 무리야. 자칫 무진이까지 위험해져. 이빨 빠진 호랑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호랑이지. 소문보다 훨씬 무서운 분이야. 일이 아직 진행 중이니까 잠잠하신 거야. 방관이 곧 테스트라고 했잖아.”
다른 생각을 하느라 얼핏 눈길을 떨어뜨리는 것에 내가 안심을 하고 있다 생각했는지 석운은 쌀쌀맞게 주의를 주곤, 흰색 가운의 포켓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무심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무진이 외국에서 10년 넘게 승냥이처럼 살았다고 말한 거, 기억나? 일전에 말한 사모펀드, 그쪽에 발 담근 채 닥치는 대로 사냥하며 지냈지. 비공개로 투자자들 모집한다지만 알음알음 자금 융통해서, 회장님 눈독들이시던 것들로만 골라 기업주식 되팔며 본사에 합병시키고 계열사 지원하고 내부자금 이동수단으로 이용해 왔어. 회장님 지켜보고 계시다는 거 알고 있으니까, 보여 주는 거였지. 이대로 계속 버려 두면 후회하실 거라고, 이렇게나 유용한 놈이라고 말이야.”
“…….”
“사실 그렇게까지 오래 방치할 건 아니었는데… 이건 내 생각일 뿐이지만, 회장님, 그때 무진일 지켜보는 걸 꽤 즐거워하셨던 게 아닐까 싶은데…… 어쨌든 그렇게 되찾으셨는데, 다시 버리기 힘드실 거야. 아까우실 테지. 그만큼 네가 눈엣가시일 거다. 그거 무진이도 알고 있을 테고, 그런데, 아직은 그 놈 한계 있어. 회장님 상대로 게임하게 하면 안 돼. 아깝다고 해서 두 번 내치지 못할 분은 아니야. 그러니까 이번엔 네가 나서야 돼. 무진이가 널 위해서 뭘 했는지, 어떻게까지 했는지 봤을 거 아냐. 이제 네 차례야.”
무테안경 너머의 가로로 긴 외까풀의 눈이 더 가늘게 접혀 졌다. 그리고 그답지 않게 길게 늘어뜨린 말을 끝낸 후련함인지 짧게 한숨을 내쉬곤, 석운은 여전히 가운 포켓에 양손을 넣은 채 어깨를 가뿐히 으쓱여 보였다.
“그러니까 우선 완쾌부터―”
“무슨 말인지 알겠으니까, 우선 나 죽는다고 해.”
나는 단호히 그의 뒷말을 자르며 말문을 열었다. 딱히 그럴 의도는 아니었으나 사뭇 냉랭한 어조였다. 석운은 포커페이스를 흩트리며 당황한 기색으로 되물었다.
“…뭐라고…?”
“검사 도중에 죽을병 발견됐다고 해. …아니, 남자 의사 누구랑 눈 맞은 것 같다고 해, 그래, 그게 낫겠어, 그렇게 전해.”
“…….”
그제야 해석된 의미에 그는 나를 희한하다는 듯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호주머니에서 손을 꺼내어 양팔을 교차시키며 혼잣말을 하듯 심드렁히 말을 건넸다.
“계속 의문이었거든. 그놈, 뻔히 자기가 휘어잡은 채 흔들고 있는 주제에 왜 그렇게 목을 매고 안달복달을 하는지 말이야. 네가 딱히 잘 노는 타입도 아니고. 예전부터 그랬단 말이지. 그런데 좀… 알 것도 같아.”
받아칠 말이 적당치 않아, 나는 그저 멀뚱히 쳐다볼 뿐이었다. 석운 역시 별스럽지 않다는 듯 곧장 발길을 돌렸다.
“장담은 못 하겠지만, 어쨌든 두 가지 다 말은 해 볼게.”
그리고 이쪽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을 남기곤 곧바로 문을 열고 병실을 나갔다.
정혜주를 바래다준 제홍이 돌아왔으나 나는 낮잠을 좀 자겠다 하며 그를 도로 돌려보냈다. 리모컨을 머리맡에 놓아 주고 창가의 버티컬을 내려 준 뒤 제홍은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대로 짧지만 퍽 단잠을 잤다. 그러나 저녁 식사가 들어오는 시간에 맞추어 일어나야 했다. 그리고 간병인이 왔다. 나는 그녀에게 머리를 감겨 달라고 했고, 손이 닿지 않는 등허리도 좀 더 깨끗하게 닦아 달라고 했으며, 물수건을 여러 장 준비해 옆에 놓아 준 뒤 오늘 저녁 역시 일찍 돌아가시라 청했다.
다시 혼자가 되어 나는 병실 문이 언제 열리지 않을까 신경을 곤두세운 채 한 손으로 얼굴을 닦고 로션을 바르고, 겨드랑이와 몸통 앞부분, 그리고 혹시 몰라 사타구니 쪽도 꼼꼼하게 닦아 냈다.
음모가 까끌까끌하게 자라 있었다. 환자복 바지 속에 오른손을 찔러 넣은 채 맨손으로 그 부위를 의미 없이 매만지며 나는 저녁 뉴스를 보았다. 누구와 누구가 줄줄이 소환 언급되었다.
뉴스 후에는 원래 방송될 드라마 대신 급히 편성된 듯한 뜬금없는 시사고발 프로그램이 방송되었다. 4년 전 행방불명되고 사고사 당한 LE카드 노조원들의 가족과 친지들이 손수건으로 눈가를 눌러 찍으며 인터뷰를 했다.
그들은 삶을 사랑했어요. 그래도 인생은 아름답다고, 우리 소박하지만 행복하게 살자고…….
견뎌 보려고 했지만 눈꺼풀이 자꾸만 내리 감겼다. 내 상태를 살피러 온 담당 간호사가 텔레비전을 끄고 흐린 보조등 하나를 제외한 조명을 모두 끄고 나가 버렸다. 가물가물 눈꺼풀을 떠올리며 그냥 놔두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제대로 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삼십 분 간격으로 자다 깨다를 반복하였다. 세 번째로 깨어났을 때는 기어이 머리맡의 리모컨을 가져와 텔레비전을 다시 켰다. 무비 채널에서 성인 영화가 나오는 중이었다. 실눈을 뜨고 구경을 좀 하려다가 이내 또 깜빡 잠이 들어 버리곤 했다.
완전히 잠들지 못한 의식 속으로 금발 여배우의 요란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잠결에도 나는 픽 웃었다. 그리고 달칵, 병실 문이 여닫히는 소리.
“…….”
겨울의 냉기를 가득 묻힌 채 그가 들어왔다. 그 속에서 그의 체취를 맡기 위해 나는 콧방울을 벌름거렸다. 문이 닫히고, 뚜벅뚜벅 걸어오는 구둣발 소리를 들으며 나는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드디어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필 간호사가 하나 켜 둔 보조등이 맞은편 벽 쪽에 위치해 있는 것이라, 불빛을 등지고 선 그의 얼굴이 이쪽에선 어둡게만 보였다. 내가 눈을 뜬 것을 알아챘을 텐데도 그는 더 이상 다가오지 않고 우두커니 그곳에 서 있었다.
그는 미동도 않는데, 그의 발아래에서 이쪽으로 뻗어 있는 짙은 그림자만이 혼자 비틀거리고 있었다. 나는 침을 모아 삼키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죽을병 안 걸렸어. 남자 의사하고 눈도 안 맞았어. 그게… 좀 놀라게 해 주려고.”
“…….”
“내가 여기 누워 곰곰이 생각을 해 봤는데, 기획사 대표 자리 말이야… 월급쟁이로 다른 누구 대체해 앉힐 수 있는 거면, 김 실장님 어떨까 싶은데… 물론 결정은 네가 하는 거지만, 내 추천은 그래.”
“…….”
“정혜주 씨가 귀국했어. 당장은 무리지만 김 실장님하고 같이 복귀 시나리오―”
“입 좀 닥쳐.”
그는 음산한 목소리로 내 뒷말을 잘랐다. 20여 일만의 첫 인사치고는 꽤 상스러우나 익숙지 않은 건 아니라 나는 당황하지 않고 좀 더 친근하게 말을 이어 건넸다.
“여기, 침대 넓어서 빈자리 있는데 옆에 앉아서 같이 영화 볼래? 마침 네가 좋아하는 야한―”
“입 다물라고 했어. 목소리 내지 마. 듣기 싫어.”
“…….”
그러나 이번엔 퍽 신경질적으로 반응을 해 와, 조금 의기소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미동이 없었다. 말한 대로 입을 다물었으나, 몹시 화가 난 듯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점차 거세어졌다. 조금 머뭇거리다, 나는 조심스레 또 입을 열었다.
“…아래쪽에, 거기 털 말이야, 꽤 자라서 만지면 재미있는데 한번 만져 볼―”
“이 새끼가……!”
그러자 기어이 불이 붙었는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무진은 두 주먹을 꽉 말아 쥔 채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내가 우습게 보여?! 내가, 머저리 병신으로 보여?!”
당장이라도 주먹질을 하며 때려눕힐 것 같더니, 고작 머리맡에 우뚝 선 채로 꽉 말아 쥔 주먹은 그대로 늘어뜨려 두고선 목소리만 컹컹 높이는 것이다.
희미하지만 이제 그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나는 길 잃은 아이의 것과 같은 그의 얼굴을 홀린 듯 멍하니 올려다보며 조금 늦게 대답했다.
“…아니.”
“아니, 너 나 그렇게 봤어! 그렇게 취급했어!”
그는 조급증에 걸린 것처럼 당장 내 말꼬리를 물며 소리쳤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속삭여 대답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억울해.”
“그렇지 않고서야, 왜……! 어떻게……!”
“무진아, 미안.”
그리고 사나운 외침 소리를 뒤로 하고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뜬금없는 사과에 무진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씩씩대며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그의 눈과 코와 입술을 찬찬히 살피며 읊조리듯 용서를 구하였다.
“부모도 형제도 없어서 미안. 같은 거 달린 사내놈이어서, 대학 진학 포기해서, 내 약점이 다 네 꺼 되어서, 미안. 내 몸 하나 지킬 힘도 없어서 고작 그렇게… 몸 내던져, 이런 꼴로 돌아와서 미안.”
“…….”
성난 숨소리가 사라졌다. 얼굴은 무표정하였다. 그를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어, 나는 오른팔을 힘겹게 뒤로 뻗어 침대 맡의 조명을 켰다. 그러자 고작 그 정도의 불빛으로도 눈이 부신 듯 무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곤 이내 성마른 손길을 뻗어 와 그것을 도로 꺼 버리는 것이다.
잠시 밝았다 사라진 것에 그의 얼굴이 또 일순 캄캄하게 보였다. 이대로의 밝기에 익숙해지려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눈을 끔벅이는데, 문득 그의 비틀린 턱이 굳게 다물어지더니 이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인다.
나는 급히 눈길을 내렸다. 이어 그가 참았던 숨을 욱 내뱉으며 잔뜩 갈라진 목소리를 냈다.
“승무원이 한둘쯤은 지나갔을 거 아니야.”
“…여자였어. 주위에 앉은 사람들도 다… 노인이거나 어린애거나 아이 엄마거나…”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그 사람들 방패막이로라도 썼어야 할 거 아니야! 네가 다쳤잖아! 못돼 처먹은 주제에 왜 하필 그럴 때만 착한 척하느냐 말이야!”
“돌대가리잖아.”
“네가 죽을 뻔했잖아! 여승재, 네가! 다른 사람 말고, 네가, 여승재……! 나는, 정말, 너 죽는 줄 알았……”
웃기려고, 자존심을 깎아 먹는 농담까지 건넸는데도, 그는 기어이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허물어지듯 털썩 바닥에 무릎을 찧었다. 그러곤 내 어디가 다칠까, 조심스런 손길로 멀쩡한 오른팔을 매만지고 목덜미를 더듬어 맥박이 뛰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내 가슴 위로 얼굴을 기대어 왔다.
그가 가쁘게 내쉬는 뜨건 숨이 얇은 환자복의 가슴께를 적셔 왔다. 나는 한 손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참 더 씩씩대다, 그는 또 조심스럽게 내 왼쪽 가슴 위로 손을 뻗어 왔다.
“살아 있다니까.”
“…….”
“꽤 오래전이지만 군대에서 낙법을 배웠거든. 나름 칭찬도 많이 받아서―”
“입 좀 다물어 봐, 이 새끼야.”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그가 불퉁히 내 말을 잘랐다. 그리고 슬쩍 코를 훌쩍이며 내 왼쪽 가슴 위로 귀를 가져가 붙인 채 잠시 가만있다, 됐다 싶었는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얼굴을 묻고는, 또 심통 사납게 쏘아붙였다.
“뭘 잘했다고 나불거려? 평소엔 묻는 말 아니면 먼저 말도 잘 안 붙이는 주제에. 그래서, 뭐, 칭찬해 달라는 거야? 머리 다쳤어?”
“MRI 한 번 더 찍어 봐야 된다던데.”
“……!”
담담히 대꾸하는 말에 무진은 놀란 듯 번뜩 고개를 들었다. 눈두덩이 불그스름하게 부풀어 있었다. 젖어 있는 속눈썹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말려 올라가는 것이 예뻐 보여, 그것을 빤히 응시하며 나는 덧붙여 말했다.
“뒤늦게 머릿속에서 피가 고이는 경우도 있어서.”
“…너 생일 언제야.”
내가 당장 멍청이라도 되어 버렸다 생각했는지 그는 심각한 얼굴을 하고선 물었다. 오늘인가? 나는 덤덤하게 되물었다. 그러자 무진은 혼란스러운 듯 짙은 눈썹을 마구 꿈틀대다가, 내 얼굴을 좀 더 유심히 살피고서야 장난인 걸 알았는지 ‘이게……!’ 하며 성질을 내고는, 고작 다시 가슴께에 얼굴을 묻어 올 뿐이었다.
“옆에 올라와 누워. 자리 돼.”
나는 손가락 사이로 그의 머리카락을 빗으며 속삭여 말하였다. 함께 편히 눕기에는 당연히 비좁았으나 그와 몸을 닿고 싶었다.
응, 대꾸하며 무진은 당장 일어나 외투를 벗고 침대 위로 올라와 옆으로 누운 채 내 몸에 바짝 붙어 왔다. 언젠가처럼 한쪽 팔뚝을 내 뒤통수 뒤에 받쳐 주기도 했다. 그리고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끄고, 내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이마며 눈꺼풀, 뺨과 입술 등을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로션 발랐어.”
나는 그의 퉁퉁 부은 눈덩이를 빤히 올려다보며 여상히 말했다. 무진은 불긋한 눈매를 찡그리며 키득 웃었다. 그러곤 손끝으로 쓰다듬은 데를 차례대로 다시 입술로 꾹 눌러 주었다.
“자다 깼잖아. 눈 감고 다시 자.”
“…여기 있어.”
“안 가.”
“응.”
하지만 나는 눈을 감지 않았다. 코앞에 있는 그의 얼굴이 신기해 눈꺼풀을 깜빡이는 시간도 아까웠다. 그 역시 잔뜩 상한 얼굴을 하고선 옆으로 누운 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조금 짓궂은 마음이 들어, 나는 오른손을 더듬어 그의 사타구니 쪽으로 가져갔다.
“왜―.”
덤덤히 나와 계속 시선을 맞춘 채로 그는 게으른 어조로 말꼬리를 빼며 물었다. 그러나 바지 앞섶을 가운데 두고 형태가 잡히는 것을 좀 더 쓰다듬자 바로 힘을 얻는 것이 손바닥 가득 느껴진다. 노골적으로 손을 놀리자, 그가 곤란해하는 얼굴을 한 채 잔뜩 쉰 목소리로 다시 묻는다.
“왜 그래.”
“그냥.”
나는 그의 얼굴에서 눈길을 떼지 않으며 심심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무진은 기어이 슬쩍 몸을 뒤로 내빼 버리는 것이다. 멀뚱히 쳐다보다, 그만 손을 거두는 대신 나는 물었다.
“내 꺼 만져 볼래?”
“…….”
잠시 고민하는 얼굴이더니 무진은 이내 말없이 슬쩍 손가락으로 내 바지의 고무줄을 늘이며 안쪽으로 손을 뻗어 왔다. 그러나 별달리 건드리진 않고, 그저 음모가 까슬까슬하게 난 부분을 슥슥 매만지곤 도로 손을 거둘 뿐이었다. 그리고 짧게 한숨을 뱉더니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쪽으로 걸어 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잠시 후 변기 물 내리는 소리에 이어 그가 나왔다. 여기 와, 나는 옆자리를 손으로 두드렸다. 무진은 묵묵히 다시 내 옆으로 올라와 누웠다.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나는 또 그의 바지 앞섶으로 태연히 손을 뻗었다.
“아아― 여승재.”
그는 괴로운 듯이 찌푸린 얼굴을 내 목덜미에 비볐다. 알았어, 대꾸하며 나는 손을 거두었다.
내 머리통 아래로 다시 팔뚝을 대 주며 그가 먼저 눈을 감고 자는 시늉을 했다. 나도 따라 눈을 감았다. 그러다 문득 슬쩍 실눈을 뜨고 그의 얼굴을 훔쳐보기도 하였다. 몇 번 그러다, 진짜 졸음이 밀려와 깜빡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불편한 자세로 둘 다 퍽 깊이 잠들었던 듯하다. 바짝 몸을 붙이고 자던 그가 갑자기 흠칫 몸을 떨며 일어나는 것에 덩달아 깨어났다.
계속 자, 속삭이며 무진은 훌쩍 돌아서더니 벗어 둔 외투 호주머니에서 윙윙거리고 있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음.’ 하고 전화를 받으며 보호자 휴게실로 들어가 미닫이문을 닫는 것이다. 그러나 문틈이 조금 덜 닫혔는지, 낮게 말하는 그의 통화 소리가 희미하게나마 모두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들려왔다.
“응. …어디서. …아니, 데려올 필요 없어. 어디로 가는 배 타려고 했다지? …음. 그럼 그대로 그 배 타게 해. …아니, 왼손 하나 정도 쓰게 해도 되겠지. …음.”
버티컬 사이로 푸른 여명이 실처럼 가느다랗게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에 나는 눈을 감았다.
무진은 발소리를 조심하며 다시 내 옆으로 올라와 누웠다. 그리고 또 내 머리 아래로 팔뚝을 넣을까 말까 고민하는 듯 팔꿈치를 괸 채 물끄러미 얼굴만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
짧게 숨을 내쉬며 나는 반짝 눈을 떴다. 조금 놀란 듯하던 그는 이내 허무한 얼굴로 내 머리를 불쑥 들어 그 아래로 한쪽 팔을 끼운 채 더 바짝 붙어 왔다. 그리고 질끈 눈을 감아 버린다. 나도 따라 눈을 감으며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용히 속삭였다.
“네가 옳아. 정당해.”
“…….”
그가 고개를 드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무진은 내 한쪽 뺨에 자신의 뜨거운 이마를 꾹 눌러 비비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작게 웅얼거리듯이 고백을 해 왔다.
그는 내가 이런 일까지 당했으니 앞으론 자신과 함께 지내는 것을 무서워해 뼈가 붙자마자 도망쳐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어떻게든 붙잡아 놓아도, 자신이 살아왔고 또 계속 살아갈 그 배경의 추악함에 질려 자신까지도 경멸하는 눈으로 쳐다보지 않을까 두려웠다고 한다.
안 그래, 나는 작게 대답하며 그의 손을 찾아 쥐었다. 승재야, 승재야, 그는 반복해 내 이름을 부르며 깍지를 꼈다.
***
“이게 지금 뭣 하는 짓들이지?”
제홍과 석운을 앞세운 채 비틀거리며 병실 안으로 들어서던 찬성이 마주한 우리를 바라보곤 얼굴을 구기며 물어 왔다. 두 눈이 병자처럼 퀭하였다. 하마터면 깁스를 한 내가 그에게 괜찮으냐 물을 뻔했다.
그러나 무진은 심드렁한 얼굴로 ‘뭐가.’ 대꾸하며 밥을 뜬 숟가락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오른손은 쓸 수 있다 했으나 무슨 소리냐 강압적으로 숟가락을 빼앗아 기어이 떠먹여 주는 중이었다. 부득불 얌전히 받아먹는 나를 보곤 찬성은 울 것처럼 얼굴을 찌푸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겨우 일 마무리하고, 이제 집에 들어가 편하게 눈 좀 붙여 볼까 하고 있는데 전화로 급히 불러 와 봤더니…… 지금 이 꼴 보여 주려고 부른 거야? 내 얼굴 누렇게 뜬 거 안 보여? 홍, 나 하루에 두 시간씩 겨우 잤다…….”
그리고 역시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있는 제홍에게 하소연을 하는 것에, 무진은 눈초리를 치켜올리며 따져 들었다.
“넌 문병 한 번도 안 와 봤잖아. 마무리하고 이제 시간 났으니까 얼굴 보러 오라는 거였는데 뭐. 인정머리 없는 새끼, 넌 여승재가 걱정도 안 돼?”
아아, 찬성이 질렸다는 듯 입을 벙긋거렸다. 그를 대신해 제홍이 귓바퀴를 긁적이며 무진을 향해 콧소리를 냈다.
“흐응― 병실에서 고립된 채 혼자 외롭게 지내 봐야 다시는 함부로 몸 안 내던진다고, 이번 기회에 단단히 버릇 잡겠다 하던 게 누구였지?”
“어디서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이 미친놈이?”
얼른 내 눈치를 힐긋 살핀 무진이 당장 그를 향해 야멸차게 쏘아붙였다. 제홍은 빤빤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에 무진이 냉큼 덤빌 듯이 몸을 움찔하자, 이제껏 양손을 가운 호주머니에 꾹 찔러 넣은 채 방관하고 있던 지석운이 ‘다 됐고―,’ 하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내가 앉은 침대 옆자리에 또 하나 놓인 작은 침대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물어 왔다.
“내가 궁금한 건… 이거, 뭐지?”
“침대잖아.”
이번엔 콩조림을 밥 위에 미리 올려 뜬 것을 내 입 앞에 대 주며 무진은 또 심드렁히 대답했다. 퍽 잘 받아먹는 나를 희한하다는 듯 흘깃 쳐다보며 석운은 인내심 깊게 차분히 말을 늘였다.
“그러니까 이게 왜 여기…… 저쪽, 보호자 간병인 머무는 방에 있던 거잖아.”
“퇴원할 때까지 나도 여기서 지내려고. 저쪽 방 좁아서 싫어.”
“네가 혼자 옮긴 거란 말이지?”
“그런데.”
무진은 귀찮다는 듯 건성으로 대답했다. 대화에 참여하고 싶지 않아 나는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켰다. 클레이 애니메이션이 나오고 있었다. 신기해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무진이 또 얼른 밥을 뜬 숟가락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탐탁지 않다는 듯 석운이 팔짱을 엇갈려 끼우며 말을 이었다.
“너 좀 부끄럽지 않아? 아무리 VVIP룸이라지만 여기가 호텔도 아니고, 의사 간호사 들락거리며 진료도 보는데 생뚱맞게 나란히 붙여 놓은 침대가 뭐냐고?”
“뭐가 생뚱맞다는 거야? 병원 측 잘못이잖아? 다른 데는 보호자용 침대도 이런 식으로 나란히 붙여 놓던데, 여기야말로 뭐 이따위냐고? 이거 혼자 옮기느라 허리 나갈 뻔했잖아?”
무진의 터무니없는 괄시에 기분이 상했는지 석운은 기어이 좌우로 고개를 꺾으며 ‘후우…….’ 깊게 숨을 내쉬었다. 참지 마, 옆에서 제홍이 얄밉게 부추겼다.
“환자 보호자 둘 다 편하게 쉴 수 있도록 특별히 나눠 준 공간이야. 다른 데선 당연히 못 봤겠지, 이 병원은 대한민국 최고…… 왜 그래?”
그러나 석운은 끝까지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이성적으로 말을 잇다가, 문득 내 얼굴을 힐긋 보고는 고개를 기울이며 물어 왔다. 뭐야, 하고 무진 역시 내 얼굴을 확인하곤, 내 시선을 따라 텔레비전으로 고개를 돌렸다.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아지는 주인 월레스를 위해 충직하고 똑똑한 개 그로밋은 야채로만 정성스런 아침 식사를 준비하였다. 그로밋이 당근을 써는 도마 아래로 파란색 속보가 떠 있었다.
《KM금융 권무형 사장, 친모와 주치의 통해 정신병력 밝혀. 검찰 소환 불능 의사》
“…….”
개자식, 석운이 조용히 읊조렸다. 그쪽이 낫다는 건가? 제홍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비아냥조로 혼잣말을 하였다. 무진은 관조적인 태도로 그저 픽 웃었다. 그리고 그때,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나락이야, 신경 꺼…….”
비틀비틀 다가오던 찬성이 어느새 구부정한 자세로 옆쪽의 침대 위로 올라앉으며 노인처럼 중얼거렸다. 잠깐, 획 하니 고개 돌려 그를 확인한 무진이 당장 눈을 부라렸다.
“너 거기서 뭐 해.”
“응… 잠깐 눈 좀 붙일게… 떨어져 있는 침대니까 괜찮잖아.”
비스듬히 돌아누우려다 말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고개를 돌린 채 찬성은 힘없이 대답했다. 링거 주사라도 맞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지만 석운조차도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더욱이 무진은,
“뭐야? 안 돼, 잠깐 눈 붙이려면 저기 소파로 가. 야, 거기 눕지 말라고.”
당장이라도 그의 멱살을 잡고 끌어내릴 듯이, 내게 밥을 떠먹이던 숟가락까지 잠시 놓고는 자리를 돌아가며 그를 윽박지르는 것이었다.
잠깐이면 돼, 찬성은 기어이 침대 위로 바짝 몸을 붙이고 버티었다. 그에 석운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성큼 그들 곁으로 다가섰다.
“아, 그러지 말고 침대 다시 저쪽 방으로 같이 옮기자고.”
“무슨 짓이야? 돌았냐?!”
그리고 곧장 침대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리려 하는 것에 무진이 우악스레 침대 위를 내리누르며 목소리를 높였다. 석운은 냉정하게 맞섰다.
“병원 내 설비 함부로 옮기는 거 못 봐줘. 특히나 이건 환자 봐주러 들어오는 의료진들 무시하는 행위야. 제자리로 돌려 놔.”
“환자 보호자가 원한다는데 서비스가 뭐 이딴 식이야? 이 병원이 네 거냐? 왜 이렇게 강압적이야?”
“멋대로인 환자 보호자 상대로는 좀 거칠어질 수밖에 없어. 그리고 여기 나중엔 내 꺼야.”
“그렇대도 아직은 아니잖아? 아니, 그전에 내가 사 버릴 거다, 어쩔 거야?”
“유치하게 이러지 마. 나한텐 안 통하니까.”
그리고 팽팽하게 대치하는 상황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던 제홍이 대뜸 번쩍 손을 들어 보이며 참견을 한다.
“야, 난 어디 붙을까?”
여기! 무진과 석운이 동시에 외쳤다. 나는 그들에게서 고개를 돌린 채 직접 숟가락을 들고 마저 밥을 먹었다.
“찬, 너 자고 싶으면 같이 침대 들어. 홍, 너도 거들어.”
“나는 지금 그럴 힘이……”
“너 거기 안 놔?!”
“얼마나 무거운지 그냥 한번 들어 본 건데?”
그들은 좀처럼 지치지 않았다. 텔레비전 화면 하단에서 파란색 속보란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찬성의 말이 맞았다, 이제 끝났다. 아니, 최소한 무진은 최선을 다해 끝을 냈다.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나는 그가 내게 복수를 선물해 주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것은 그 나름의 나에 대한 염려와 위로였다. 그리고 이제 내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