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05-2 (31/41)

“그래, 우선 지한테 자료 넘겼어. 더 정확한 게 필요하니까. 아아, 그래. 음, 수고했다. 알았어, 제대로 갚을 테니까. …그리고 혹시 더 진행될 일 있으면, 나머지도 다른 사람 시키지 말고 네가 직접 움직여서… 아, 응. 그래, 응.”

낮게 소곤거리며 울려오는 말소리에 예민한 신경이 깨워졌다. 옆으로 돌아누우며 가물가물한 눈을 떠 보니,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불빛이 계단 쪽에서 희미하게 어른거리고 있었다. 미련한 짐승처럼 눈꺼풀을 느리게 슴벅이다, 끈질기게 이마를 짓누르는 졸음에 결국 다시 눈을 감고 말았다.

잠시 후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에 이어 가까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침대 속으로 스며들 것처럼 노곤한 기운에 그대로 가만히 눈 감은 채 누워 있으니, 커다란 손이 조심스럽게 머리카락을 훑어왔다. 기분이 좋아 입매를 끌어올리는데, 문득 이마에 옅은 한숨이 와 닿았다.

잠결에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왜 그래.’ 하고 입술을 달삭였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그저 잠투정 정도로 보였으리라. 그리고 그는 옆자리에 눕는 대신 내게서 손을 거두고 다시 발길을 돌렸다.

아직 일이 더 남은 걸까, 피곤해 한숨 쉰 걸까. 우습게도 잠결로 끌려들어 가고 있으면서도 나는 너무 깊이 잠들지는 말자고 굳게 다짐했다.

그리고 정말 깜빡 눈 감았다 뜬 것처럼 짧게 수면 아래 빠졌다가 허우적거리며 깨어났다. 놀라서 급히 창밖을 살펴보자 다행히 아직 세상은 갓난애 엉덩이의 몽고반점처럼 푸릇한 여명이었다.

좀 더 누워 있고 싶기도 했지만 옆자리에 무진이 없었다. 눈가를 거칠게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아래층으로 내려가 보니, 무진이 소파 위에서 무방비하게 잠들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탁자 위에는 내가 읽고 있던 소설책이 뒤집힌 채 놓여 있고, 도넛이 가득 쌓여 있던 쟁반은 텅 비어 있었다.

발소리를 조심하며 다가가, 그의 머리맡 앞에서 무릎을 쪼그리고 앉은 채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고단한 꿈을 꾸고 있는지 어금니를 단단히 문 채 잔뜩 미간을 모으고 있었다. 무릎 위로 턱을 괸 채 그를 빤히 살피다가, 결국 검지 손끝으로 찡그린 미간 사이를 슬그머니 눌렀다.

너는 참 바쁘구나, 가여운 마음이 일렁였다. 내가 도망치지나 않을까 초조해하느라 바쁘고, 또 협박하고 미행 붙이느라 바쁘고, 동시에 해로운 짐승에게 물려가지 않을까 걱정하느라 바쁘고, 그리고 차마 내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일들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묵묵히 해내느라 바쁘고, 무엇보다… 열심히 섹스해 주느라 바쁘다.

“…….”

무릎 위로 이마를 숙인 채 입을 꾹 다물고 몰래 웃었다. 그러나 이내 씁쓸한 기분이 들어 다시 턱을 괴고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제까지 계속될까, 슬금슬금 온몸을 기어 다니는 작은 벌레가 우습게도 내 숨통을 조이고 있었다. 이렇게 가다간 그가 먼저 지쳐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겐 안 되지, 그는 내 우주고 내 새끼며 내 시간, 내 뿌리, 내 열매, 그리고 내 피다.

무릎을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심히 걸음을 옮겨 이불 한 장을 가져와 그의 몸 위에 차분히 덮어 주고, 아침밥 해 줘야지, 팔을 걷으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압력밥솥에서 나는 요란한 소리가 걱정되어 밥은 보통 된장찌개를 끓여 먹는 작은 뚝배기에 안치고, 유난스런 냄새가 걱정되어 생선은 미리 굽지 않았다.

도마 소리 또한 마찬가지라 묘기를 부리듯이 공중에서 채소를 깎다가 손끝을 살짝 베었는데, 반창고를 붙이면 들켜서 싫은 소리나 들을 것이 뻔해, 그냥 흐르는 찬물에 피를 씻어 내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조심하며 주의를 기울였는데도 무진은 평소 일어나는 때보다 좀 더 이른 시각에 깨어나선, 잔뜩 쉰 목소리로 ‘뭐 해…….’ 하고 옆구리를 긁으며 주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부산히 움직이다 말고 황망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나와 인덕션 위에 올려져 있는 냄비 등을 휘둘러보곤 상황을 알아챘는지, 아직 졸음이 담긴 눈을 하고선 히죽 웃어 보였다. 나는 당장 눈살을 찌푸려 보였다.

“바보처럼 그렇게 웃지 마, 얕잡혀 보여.”

“걱정 마, 다른 사람들 앞에선 더할 나위 없이 패악만 떨어 대니까.”

“그건 그것대로 걱정인데.”

뭐 어때, 잠긴 목소리로 대꾸하며 무진은 내 뒤로 돌아와 등을 가득 껴안은 채 목덜미에 입술을 꾹 눌러 왔다. 그리고 무척 기분이 좋은지 턱과 볼에 짧게 입술을 찍어 댔다. 그대로 놔두며 나는 냉장고에서 생선을 꺼내고 프라이팬에 기름을 둘렀다.

“좀 더 자도 되는데.”

“됐어, 다 깼어.”

등 뒤에서 몸을 와락 껴안은 척하며 어쩐지 체중을 기대 오는 듯 무거워져, 아무래도 잠이 덜 깼지 싶어 슬쩍 한쪽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건넸지만, 그는 내 뒤통수에 코를 비비며 웅얼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잠들기 전에 머리를 감지 않았던 터라 머리 냄새가 걱정되었다. 다른 데로 시선을 돌리기 위해 나는 거실 쪽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도넛 같은 거 별로 안 좋아하잖아. 왜 다 비웠어.”

“응, 뭐, 책 읽다 입이 심심해서. 좀 출출하기도 하고.”

“그러고 보면 넌 내가 읽고 있는 책만 훔쳐가, 나쁜 버릇이야.”

“…어떻게 끝나는지 궁금해서.”

다행히 책 이야기를 하는 데에서야 그는 내게서 몸을 떼고는 왜인지 슬쩍 내 얼굴을 살피며 대꾸했다. 어쩐지 착잡해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소설의 엔딩을 묻지 않았다.

“어쨌든 출출하면 깨우지.”

“새벽에 무슨.”

“새벽에도 하고 싶으면 잠든 사람 막무가내로 바지 벗기고 달려드는 주제에 괜한 데서 내숭 떨지 마.”

그리고 엄한 질책으로 쏘아붙이자, 그는 악동같이 웃으며 ‘하긴.’ 인정하곤 다시 덥석 등을 껴안아 왔다. 또 뒤통수에 코를 박고 머리 냄새를 맡을까, 나는 얼른 부산하게 움직이며 말을 이었다.

“하여튼 앞으로는 빵이나 라면 같은 걸로 허기 채우지 마. 밥 정도는 해 준단 말이야.”

“웬일로 뭔가 다정하네―.”

그에 무언가를 눈치챘는지, 의뭉스런 말투로 무진은 어깨 너머로 얼굴을 붙여 오며 빙글거렸다. 레버를 조절하고, 돌아서 그와 마주 선 채 조금 주저하다 말을 이었다.

“뭔진 모르겠지만, 내가 어젯밤에 너 뭐 건드렸잖아. 그래서 갑자기 자려다 말고 일어나선―”

“아닌데? 무슨 착각이야?”

그러나 무진은 여전히 빙글거리는 얼굴로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채 희롱조로 대답할 뿐이었다.

“…면도나 하고 와.”

눈살을 가늘게 하며 그의 얼굴을 샅샅이 살피다, 나도 그저 그의 턱을 밀며 시큰둥하게 말해 버렸다. 그제야 무안한 기색으로 무진은 까칠한 제 턱을 슥슥 매만지며 주방을 나갔다.

딱히 융숭하게 차린 것도 아닌데 씻고 나온 무진은 ‘워어―.’ 하며 이상한 감탄사를 터트렸다. 그런 반응을 보니 밥 차려 주기 싫어 자존심 싸움했던 게 좀 미안해졌다. 한때는 사내놈들 삼시 세끼 밥 차려 주는 건 물론 속옷까지 손빨래해 주었는데, 그에게만 인색하게 굴 필요는 없었다.

마주 앉아 느긋하게 아침 식사를 하며, 무진은 왜인지 문득문득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시선이 마주치면 피식 웃으며 다시 밥을 떠먹곤 하였다.

그 외엔 평소와 다름없이 식탁 아래서 발장난을 걸어오기도 하고 야한 농담이나 지껄이기도 했지만 어쩐지 조금 의기소침해 있는 기미가 엿보여, 아무래도 내가 어젯밤 너무 괴롭힌 건가 생각했다.

식사 후엔 나란히 욕실에 들어가 양치했고, 그가 이끄는 대로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이번엔 속옷까지 그가 골라 주는 것으로 입어야 했다. 이번에도 컬렉션을 그대로 옮겨 온 듯한 한 벌에, 내가 보기엔 너무 멋을 낸 것 같아 쑥스럽고 도무지 취향이 아니었지만, 괜한 입씨름을 하기 싫어 얌전히 있었다.

그러나, 정수리 부분에 털 뭉치가 달린 비니를 씌워 주려는 것에는 기어이 참지 못하고 질색한 얼굴로 고개를 저어 보였다.

“나 한 달 뒤에 서른둘이야.”

“아, 나랑 동갑이네.”

“…김 실장님이 요즘 나 인형 놀이 당한다고 엄청 안타까워하셔. 그것도 하필 제비 같은 모양새로만 뽑아져 나온다고.”

“그쪽도 어지간히 센스가 형편없는 모양이네.”

키득거리면서도 무진은 기어이 내 머리통에 그것을 덧씌웠다. 그리고 이어 자신은 무척이나 멀끔한 슈트에 차이니즈 옷깃의 슬림한 더블 롱코트를 걸치는 것이 다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꽤 멋스러운 모양에 지금 내 꼴은 잠시 잊고 어쩐지 내가 그를 먹여 키운 것처럼 뿌듯한 마음이 스멀스멀 일어나는 것에, 혼자 픽 웃어 버렸다.

“나도 그런 거 입고 싶은데.”

“넌 이런 거 입으면 바닥 끌릴 텐데.”

그리고 힐긋 눈길을 드는 것에 괜한 말을 붙이자, 손목시계를 채우며 희롱조로 대꾸하는 것이다. 이건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는 쪽이라 당장 반박했다.

“딱히 키 때문에 놀림 받은 적은 없는데.”

“아, 넌 비율이 좋으니까. 그러니까 골라 주는 대로 입어.”

“…….”

이번엔 내 손목시계를 챙겨 들고 이리 오라 손가락을 까딱이며 무진은 대꾸했다.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시큰둥하게 그에게 왼쪽 팔을 내밀었다. 묵묵히 내 손목 위로 시계를 감아 주던 무진이 갑자기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차라리 막 웃으면서 기뻐해. 음흉하게 혼자 몰래 흐뭇해하는 게 오히려 칭찬한 사람 더 부끄럽게 한단 말이야.”

“…혼자 몰래 음흉하게 좋아한 적 없어.”

“아― 진짜, 여승재 내숭 떠는 거 완전 웃겨.”

그러곤 기어이 뒤로 돌아 선반에 이마를 박은 채 어깨를 들썩이며 키들거리는 것이다. 귓바퀴가 확 달아올라 그대로 손목시계를 다시 풀어내며 냉큼 돌아서 버렸다.

“넌, 좀 다정한 마음이 생기려다가도 냉큼 지워 내게 하는 재주가 있어.”

“아아, 알았어, 알았어, 이리 와.”

그러자 등 뒤에서 그가 또 덥석 몸을 겹쳐 오며 긴 팔을 둘러와 내 왼손에 마저 시계를 채워 주었다. 그리고 겨우 웃음을 참아낸 칼칼한 목소리로 물어 온다.

“여승재, 너 요즘 무슨 일 하지?”

“…무슨 일 하는지 몰라?”

“아니, 구체적으로 말이야.”

뜬금없는 물음에 고개를 돌리며 되묻자 무진은 고개를 까딱하며 대꾸했다. 니트 소재의 비니가 귓바퀴를 간지럽혀, 손끝으로 긁으며 나는 덤덤히 대답했다.

“뭐… 전체 스케줄 조정하고 정리하고, 퇴사하거나 입사하는 사람들 관리하고, 그 외에 여기저기 SOS 오면 잡다한 일까지 다 맡아 하는데… 건 왜.”

“그럼 실무 천천히 배워 둬.”

“…무슨 실무를 내가 왜…”

그리고 이어진 그의 말에 문득 김 실장으로부터 넌지시 짐작조로 들었던 말이 떠올라,

“아, 안 돼.”

얼뜨기처럼 휙휙 고개를 저으며 질색하자, 무진은 그런 내가 우습다는 듯 픽 웃으며 삐뚜름히 눈살을 찌푸려 왔다.

“무슨 말이 그래, 못 해도 아니고. 뭐 맡기려는지 알고 그래?”

“그나마 십 년 가까이 군소리 않고 밖으로 나돌면서 애들 뒤치다꺼리하고 닥치는 대로 몸 굴리며 일한 대가로 지금 멋대로 전담도 안 맡고 사내 근무만 하는 데에 싫은 소리 안 듣는 정도야. 청승이라 해도 좋고 비굴이라 해도 좋은데, 어설프게 너 등에 업고 윗자리 오르고 싶은 생각 추호도 없어. 그냥 분수 지키면서 살 거야. 그리고 기획사 실무진 학력 엄청 따져. 대학 입학도 못 한 주제에 무슨 실무야, 됐어, 쪽팔려.”

“누가 너 당장 대표 시켜 준대? 그냥 천천히 배우면서 준비해 두란 얘기야. 그리고 너한테 통째로 안 맡겨, 그랬다간 또 무슨 비리 얘기 나오거나 세금폭탄이나 맞지. 고작 월급쟁이밖에 안 될 테니까 꿈 너무 크게 꾸지 마. 그리고 너, 대학 입학도 못한 주제에 어쩌고 하는 거 엄연히 학력차별 발언이야, 못돼 처먹었잖아?”

단호히 거절하는 내가 오히려 야속하다는 듯 무진은 심통 맞은 얼굴을 하고선 말꼬리를 잡으며 돌연 고개를 숙여와 이마를 쿵, 맞부딪치며 타박을 했다. 쓰고 있는 비니 덕분에 충격이 크진 않았다.

“…네가 차별 운운하니까 좀 웃긴데그래.”

이마를 맞댄 채 코앞의 그를 빤히 쳐다보며 나는 조용히 비아냥거려 주었다.

“아, 모처럼 웃겨 보려고. 나가자, 이승현 도착했을 거야.”

무진은 가뿐히 말을 받곤 곧장 내 손목을 그러잡으며 먼저 발길을 돌렸다. 그대로 현관 앞까지 함께 걸어가 준 뒤, 나는 슬금 손목을 빼내었다.

“먼저 나가. 난 아직 느긋해. 커피 한잔 마시고 나갈 거야.”

“모자 벗고 나가려는 거 아니라?”

구두를 골라 신던 무진이 의심에 찬 눈초리로 흘겨보며 물었다. 나는 그의 얼굴 앞에서 무표정히 두 손을 벌벌 떨어 보이며 대답했다.

“아침에 카페인이 안 들어가면 하루 종일 손이 떨려.”

“주인 따라 못된 손이네.”

그에 무진은 짓궂은 얼굴로 내 손을 붙잡아 손가락 끝을 질근 물었다. 아, 하고 얼른 손을 뒤로 물리자 냉큼 다른 손을 가져가 또 손가락을 잘근 무는 것에, 나는 당장 그의 정강이를 툭 걷어차 버렸다. 흥, 가소롭다는 듯 그는 비웃으며 돌아섰다. 실수로 걷어차는 힘이 약했다.

“그……,”

그런데 현관문을 열다 말고 무진이 퍽 머쓱한 얼굴로 다시 돌아섰다. 그리고 밥 먹다 문득문득 그러했듯 어쩐지 서먹하고도 아득한 눈길로 잠시 가만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힘없이 웃으며 심드렁히 말하는 것이다.

“그 소설, 읽지 마. 재미없더라고.”

그래,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얌전히 대답했다. 역시 내가 너무 겁주며 기를 죽인 모양이었다. 착하네―, 희롱조로 말을 끌며 그는 곧장 돌아서서 문을 열고 나갔다.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엘리베이터 앞에 선 그가 문득 이쪽을 돌아보며 ‘모자 벗지 마.’ 하고 위협조로 말했다.

“머리 눌려서 모자 벗으면 우스워.”

시큰둥하게 대꾸하곤 나는 당장 문을 닫았다.

“…아침 수당 없네….”

그리고 현관문에 등을 기대고 선 채 혼잣말을 웅얼거리곤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왔다. 거실 테이블 위에 놓인 소설책이 눈에 띄었으나 건드리지 않았다.

그리고 곧장 커피를 내리려 주방으로 발길을 옮기려는데, 휴대폰 벨이 울렸다. 기욱이었다. 그래 기욱아, 전화를 받으며 생각 없이 어슬렁어슬렁 베란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스, 승재 형… 저 지금 실장님 호출로 기획사 가는 길인데, 어… 승재 형 집 앞 지날 것 같아서요. 어, 아직 출발 안 하셨으면, 같이 타고 가셨으면 해서요…….」

“장기욱, 그쪽에서 기획사 가는 길에 여기 통과 안 하잖아, 인마. 오늘 오전에 케이 스케줄 없어?”

마침 무진을 태운 승용차가 건물 앞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슬쩍 내려다보며 차가 온전히 골목을 벗어나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는 당장 갑갑한 비니를 벗었다. 휴대폰 너머에서 기욱이 어수룩한 목소리로 ‘없는데…….’ 하고 대꾸했다.

“음…… 어디쯤 왔는데.”

「다, 다 와 가는데요……!」

오랜만에 녀석이 태워다 주는 차를 얻어 타고 하루 택시비나 아낄까, 생각하며 물었더니 녀석은 달리 의도를 파악했는지 급한 어조로 조금 큰 목소리로 대답해 왔다. 피식 웃으며 나는 납작 달라붙은 머리를 매만졌다.

“그럼 먼저 가라. 난 커피 좀 마시고 느긋하게 나갈 생각이라. 너, 실장님 지각하면 엄청 화내시는 거 알지? 곧장 그리로 가. 안전운전하고.”

예에……, 무척이나 풀이 죽어 대답한 기욱은 내가 먼저 전화를 끊을 때까지 감감무소식이었다. 결국 먼저 전화를 끊고, 곧장 욕실로 들어가 머리 상태를 확인했다. 역시나 우스꽝스럽게 달라붙어 있었다.

차라리 비니를 쓸까 하다가 도무지 그럴 용기는 없어, 잠시 외투를 벗고 결국 드라이어기로 다시 머리를 만졌다. 그러다 보니 또 시간이 훌쩍 지나가, 커피를 내려 마실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서둘러 집 밖으로 나서야 했다.

골목에선 좀처럼 잡을 수 없는 택시가 다른 손님을 근처에 내려다 주고 왔는지, 대로까지 나가는 길에 문득 서행하며 옆을 지나쳐 왔다. 운이 좋다, 생각하며 손을 들어 보이자 곧장 멈춰 섰다.

뒷문을 열고 들어가 앉자마자 목적지를 말하고 문을 닫았다. 운전기사는 대답 없이 그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출발했다.

대로로 나서자 역시나 잠시 뒤엔 은색 그랜저가 서툴게 뒤를 따라붙는 것이 사이드미러로 희미하게 보였다. 저쪽도 어지간히 피곤하겠다, 생각하며 피식 웃고는 차창 틀에 한쪽 팔꿈치를 괴었다.

그리고 한참을 더 가는데도 어쩐지 나머지 두 대 중 어느 한 대도 주위에 어른거리지 않는 것이다. 딱히 혼잡한 도로도 아니었다. 포기한 걸까. 으음……, 턱을 괴며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다 언뜻, 앞쪽에 비치된 택시 운전 자격 증명서가 눈에 띄었다.

“…….”

나는 룸미러로 운전기사의 얼굴을 확인했다.

운전이 매우 능숙했다. 서두르는 기색도 없었고, 뒤따라오는 그랜저를 어설프게 따돌리려고 하지도 않았다. 정직하게 신호를 지키고, 위반 감시카메라가 없는 데에선 다른 차들과 적당히 속도를 맞추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러니까 아슬아슬하게 신호등이 바뀔 무렵에는 과감히 속도를 내며 커브를 돌았다.

어차피 기획사로 가는 길이었다. 뒤쪽에서 그랜저는 신호에 걸려 깜빡이를 켜고 정지해 있었다. 그는 별 걱정 없이 자연스레 기획사 근처로 차를 몰고 가, 점심시간 즈음 밖으로 모습을 보이는 나를 관찰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려히 뒤를 따돌린 택시는 다음 사거리에서 기획사가 아닌 반대 방향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운전수가 처음으로 룸미러로 나를 힐긋 쳐다보았다.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이미 내가 알아채고 있다는 것을 역시 알아챘을 것이었다. 그는 잠시 길가에 차를 세웠다.

“휴대폰 잠시 맡아 두겠습니다.”

목덜미에 칼을 들이밀며 위협하지 않아서 스릴은 없었다. 나는 외투 속에서 휴대폰을 꺼내어 그에게 건네주었다. 남자는 그것의 액정을 손끝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보낸 메시지를 확인하는 듯했다. 별것 없을 것이다.

모른 척하며 태연히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시늉을 하면서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더 오래 끌고 싶지 않아, 그렇게 하지 않았다.

확인 후에도 남자는 내게 그것을 돌려주지 않고, 그대로 전원을 꺼 버린 뒤 자신의 호주머니에 넣고는 다시 돌아앉아 운전대를 잡았다.

도착한 곳은 서울역이었다. 빈 택시는 길가에 그대로 버려 둔 채 남자는 내 옆으로 나란히 걸으며 역사 안으로 올라갔고, 표도 미리 끊어 놓았는지 곧장 플랫폼 안으로 들어갔다.

옆구리에 역시 총구 같은 건 겨누어지지 않은 상태라, 나는 유난히 말수 적은 친구와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무덤덤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걸음이 조금 늦춰질 때마다 문득문득 마주쳐 오는 시선으로 나는 남자의 우울한 두 눈에서 무서운 허무의 그림자를 보았다.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은 두 눈에 살기를 번득이는 쪽이 아니라 바로 이런 유형이었다. 그런 눈을 하고 있는 사람은 언제든 무슨 일이든 해 버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한때 내가, 바로 저런 눈을 하고 있었다.

정확하게 시간을 계산해 두었는지 플랫폼에 도착하자마자 길게 뻗어 있는 철로 저 멀리에서 무궁화호 열차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나는 애써 도착지를 확인하지 않았다. 남자를 따라 열차 안으로 들어가 나란히 좌석에 앉자, 잠시 후 낡은 열차가 덜컹거리며 출발을 했다.

하행선이었다. 차창 밖으로는 허옇게 헐벗은 들판이 끝없이 펼쳐지다가, 또 뜬금없이 싱싱한 날생선 비늘 같은 강물이 번뜩이며 나타나기도 하였다.

깎아 낸 산줄기를 돌아 달릴 때에는 가장 낡고 느린 무궁화호 열차가 낑낑거리며 좀 더 속도를 줄이는 것이 느껴졌는데, 그래서 금방이라도 기우뚱하고 엎어질 것만 같았다.

내 옆의 남자는 죽은 듯이 숨소리도 내지 않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창밖 을씨년스런 풍경을 감상하는 것 외에는 어떤 생각도 행동도 할 수가 없었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어서 끝을 내고 싶을 뿐이었다.

차갑게 언 레일 위를 육중한 바퀴가 분쇄될 듯 위태로이 내달린 지 1시간 30분가량이 지났을 때, 옆자리의 남자가 고요히 눈을 떴다. 그리고 잠시 후 열차가 힘겹게 멈추어 섰다.

서울역에서 1시간 30분, 조치원 즈음인 듯하였다. 아니,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남자가 일어설 때 함께 일어났고, 열차에서 내린 후부터는 무뚝뚝한 친구들처럼 말없이 외투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나란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무궁화호처럼 낡은 역사 밖으로 나오니, 한창 공사 중인 도로와 그 양옆으로 최대 4층 높이의 오래된 상가 건물들이 늘어져 있었다.

남자는 서두르는 기색 없이 통행이 제한된 도로를 건넜다. 마치 나는 염두에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으나, 나는 곧장 그를 뒤따랐다.

그가 향한 곳은 빨간색 벽돌 건물의 상호명이 우스운 지하 다방이었다. 계단을 내려갈 때는 조금 불쾌한 냄새가 맡아지기도 하였다. 지하에 먼저 도착한 남자는 셀로판지가 덕지덕지 붙은 불투명한 유리문을 당겨 연 채 나를 기다려 주었다. 그가 내게 보인 최초의 호의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곧장 그 역시 문을 닫고 들어섰다. 그리고 허름한 다방 안쪽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아, 여기예요.”

“…….”

다방 안에 다른 손님은 없었다. 장사를 하고 있는 곳인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주인조차 보이지 않았다. 권무형, 무진의 둘째 형은 불 꺼진 난롯가 옆의 솜이 뜯어진 소파에서 정숙하게 무릎을 모아 앉은 채 들어서는 나를 향해 반가운 투로 손을 번쩍 들어 보이며 알은체를 했다.

나는 인사도 없이 그의 맞은편으로 가 앉았다. 그는 그런 나를 인자한 눈길로 잠시 바라보곤, 자신의 앞에 놓인 커피 잔을 눈짓하며 입을 열었다.

“커피를 내가 직접 탔더니 영 못 마시겠어요. 한 잔 대접하고 싶은데 차마 이런 솜씨로는 미안하고… 어때요, 다른 곳에서 주문을 할까요?”

“아니요, 되었습니다.”

카페인이 간절했지만 나는 사양했다. 안타깝다는 듯 남자는 어깨를 으쓱이곤, 지그시 눈길을 던지며 말을 이었다.

“미안해요, 먼 길 오게 만들어서. 따로 여승재 씨와 조용히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 좀처럼 기회가 잘 나지 않아서요. 마침 오늘 이쪽 시의원이 투자를 부탁하며 초청을 했는데, 일전에 기차를 타고 왔을 때 봤던 바깥 풍경이 퍽 근사한 걸 떠올리고, 여승재 씨를 그렇게 이쪽으로 모시면 좋겠다 싶어서 본의 아니게 시간을 뺏게 됐어요.”

“단둘이 얘기할 기회를 찾기 위해 저쪽을 붙이셨습니까?”

나는 한쪽 구석에 우묵한 그림자처럼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는 남자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공격적인 어조는 아니었다. 때문인지 권무형 또한 여전히 담담한 얼굴로 곧장 대꾸를 해 왔다.

“아닙니다. 그건 그냥… 순수하게 여승재 씨가 궁금한 마음에서요.”

“뭐가 궁금하시죠?”

“여승재 씨가 어떤 사람인가… 하고 말입니다. 자주 가는 장소가 어딘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지… 그런 사소한 것들.”

“왜 그런 걸 궁금해하시는 겁니까.”

“글쎄… 뭐라고 할까… 큰형님 내외처럼 나도 흔쾌히 여승재 씨를 가족으로 받아들여야 옳은 걸까… 하는 고민도 있었어요.”

“그리고 어제 이제홍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에서 위기감을 느끼셨겠구요.”

그는 최선을 다해 답변을 고르는 모양으로 느릿한 말투에 눈동자를 이리저리 돌리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깊이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곧장 이어 물었다. 권무형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얼핏 눈길을 떨구며 짧게 웃었다.

“제홍인 어릴 적에 정말 귀여웠죠. 꼭 여자애처럼 작고 예뻤는데 어느새 훌쩍 자랐더군요.”

“오래 마주 앉아 대화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조금 짜증이 섞인 어조가 되었다. 괘념치 않는다는 듯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요, 제홍인 무진이와 오랜 사이고 예전에 여승재 씨와도 잠깐 친분이 있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굳이 따로 만날 필요 있나 싶기는 했죠. 음… 여승재 씨…,”

그러다 돌연 우울한 얼굴을 해 보이며 힐긋 눈치를 살펴 왔다.

“…회장님께는 그저 무진이 옆에서 조용히 있겠다고만 했다면서요…, 그런데, 말이 다르니까… 혹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어서 말입니다.”

“…….”

무척 조심스럽다는 듯 그는 눈썹을 모은 채 내 얼굴을 훔쳐보았다. 달팽이, 점액질, 거미줄. 그제야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기운이 흐트러진 것을 알아챈 그는 싸구려 커피 잔의 테두리를 손끝으로 스윽 매만지며 속삭여 이어 물었다.

“말해 봐요. 기차를 타고 오는 동안, 차창 밖 풍경이 꽤 멋졌죠? 그래, 무슨 생각을 했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 생각도?”

“차창 밖 풍경을 구경하느라요.”

“저런…….”

오기에 찬 내 대답에 그는 안타깝다는 듯 이마에 주름살을 밀며 슬쩍 고개를 저었다.

알 것 같았다. 그가 굳이 나를 낡은 기차로 이동시켜 온 것은 단순히 택시의 차량번호 추적을 피하기 위함뿐만 아니라, 황량한 들판과 캄캄한 강물, 그리고 깎아지른 산의 절벽을 눈앞으로 스치며 내가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고 겁에 질려 괴로움에 젖어 있기를 바라서였다. 무척이나 그다운 방식이었다.

지지 않기 위해 두 눈에 바짝 힘을 주었다. 그는 눈매를 휘며 부드럽게 달래어 왔다.

“잠깐은 형님 내외처럼 여승재 씨를 인정해 보려고도 했어요. 하지만 현실을 생각하자니 도저히……. 게다가 회장님, 굉장히 무서운 분이세요. 난 여승재 씨도, 무진이도 다치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이미 우릴 다치게 했고, 지금도 기회를 노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힘을 쏟는 것에서부터 이미 나는 패배한 것일지도 모른다. 남자는 속상하다는 듯 어깨를 늘어뜨린 채 반박했다.

“왜 내 진심을 곡해하는지 모르겠네요. 정말 여승재 씨가 어떤 사람인가 궁금했을 뿐이에요. 내가 여승재 씨한테 무슨 해를 끼치겠어요. 그럴 이유도 없고, 명분도 없죠. 난 누구도 해치지 않아요.”

그러곤 문득 억울한 꾸중을 들은 아이 같은 얼굴로 시무룩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사실… 여승재 씨 손목의 그 상처…, 그것도 결국 본인이 직접 자해한 것뿐이잖아요. 무진일 괴롭히기 위해서… 내 장난으로 생긴 오해는 둘째 문제 아니었던가요…? 그때 일을 계획하고 터트린 건 여승재 씨 본인이잖아요…, 내게 부탁까지 했죠. 그런데 아직도 날 원망하다니… 불합리하다고 생각해요.”

“…….”

권무진을 상처 입히기 위해, 그에게 복수하기 위해 스스로를 상처 입힌 것. 그건 진실이었다. 마주한 남자의 흐릿한 목소리를 통해 듣는 그 말이 일순 거미줄처럼 머릿속을 헝클어뜨렸다.

평생 지울 수 없는 상흔처럼 그것은 내 아킬레스건이었고 영겁을 무진에게, 모든 게 자신 탓이었다고 못 박는 그 천하제일 머저리에게 되갚아야 할 나의 죄업이었다. 나는 완전히 흐트러져 버렸다.

“그, 그럼 이렇게 하죠. 회장님께 말씀드렸듯이 전 정말 잠자코, 무진이 곁에만 있겠습니다. 나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이렇게 간간이 따로 만나도 좋습니다. 제가 보고라도 하지요. 아니, 무진이 앞에서 용서하고 서로 화해하는 모습을 연출해도 좋아요. 해 보겠습니다. 평생 타인처럼 살 수 없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이만 우릴 놔주세요. 모른 척하세요, 회장님을 설득하는 것도 기어이 어떤 처단을 받는 것도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만―”

“싫은데?”

“…….”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채 남자는 뱀 같은 눈으로 웃어 보였다.

커피가 간절했다. 손이 마구 떨려 왔다. 이런 건 접해 본 적이 없었다. 일만 미터 수심의 블루홀에 빠져 생경한 심해생물을 접한 것처럼 아득한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무언가 단단히 엇나가 있었다. 단순한 적개와 악의가 아니었다.

“무진인… 형수 쪽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직관적이죠. 좋은 아내예요.”

나는 덥석 손을 뻗어 그의 앞에 놓여 있는 커피 잔을 들었다. 그리고 반쯤은 턱 아래로 흘리며 벌컥벌컥 마셔 버리자, 권무형은 재미있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테이블 아래에서 떨리는 손을 바짝 맞잡은 채 나는 칼칼한 목소리를 냈다.

“무진일 좋아하시죠?”

“그럼요. 그 녀석이 아무리 나한테 날을 세워도, 하나뿐인 동생이니까.”

“무진이가 부러우시죠? 거칠고 제멋대로에 품위 없고 불량스러운 안하무인, 저돌적이고 거침없는 망나니 폭군, 그런데도 눈길을 끌고, 기어이 탐이 나고 욕심이 생기죠.”

“음…, 그런 편일까요?”

그는 여유롭게 되물었다. 하지만 눈동자가 흔들리는 순간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좀 더 빠르게 몰아붙였다.

“그런 녀석을 가지고 싶은데, 도무지 곁을 주지 않아 초조하고 불안하고 억울하셨겠죠. 그리고, 그럴 바에야 차라리 싸움을 걸며 괴롭히고 곤경에 밀어 넣고 화를 내게 하는 편이 낫겠다 싶으셨죠. 그러다 자신이 꾸민 일이라는 걸 들킨 후엔 어떤 사달이 나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거칠고 삐뚤어진 것일지언정 무진이 관심을 얻을 수 있으니까, 잠깐, 잠깐이라도, 기쁘셨겠죠.”

“저기, 여승재 씨. 지금 대체 무슨…….”

그는 짜증스럽게 얼굴을 찌푸리며 코가 꽉 막힌 목소리를 냈다. 제대로 호흡은 하고 있을까 싶을 만큼 고요했던 숨이 조금 가팔라졌다. 더해야 했다. 그래서 그가 어디까지를 계획하고 있는지를 알아내야 했다.

“그런 무진이 곁에 제가 있는 게 거슬리고 싫은 마음, 이해합니다. 계속 궁금했습니다, 그때 병원에서 날 알아보자마자 왜 그렇게, 딱히 악의는 없었다는 말로 위장하면서까지 기습적으로 과거의 죄악을 고백했을까. 모두에게 비난받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왜 그랬을까.”

“여승재 씨, 지금 안색이 좀 안 좋아 보이는―”

“우리가 다시 만난다고 하니, 아무것도 모른 채로 결국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게 두려우셨던 거겠죠. 진실을 알고 제가 죄책감으로 영원히 떠나기를 바라셨겠죠. 아닙니까?”

“…….”

순간 숨이 멎은 것처럼 그는 가슴을 크게 부풀린 그대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창백한 피부와 옅은 눈썹, 가늘게 진 쌍꺼풀과 옷깃 위로 길게 뻗은 목덜미가 그를 허약한 석고상처럼 보이게 했다.

“이번엔 무척 즐거우셨겠습니다. 결국 의도한 대로 무진이가 계속 관심을 두고 경계를 해 왔으니까. 오늘 이 일도 결국 무진이가 알기를 바라실 테죠.”

그런데 돌연, 그가 입매를 늘어뜨리며 석고 마스크를 깨뜨렸다. 그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단조롭게 말을 해 왔다.

“무진이, 이번엔 딱히 내게 화를 내지 못할 거예요. 화를 낼 겨를도 없이 절망에 빠질 테니까, 다시는 회복되지 못할 만큼.”

“…….”

“좋은 시간이었어요. 여승재 씨에 대해서 더 진실되고 많은 것을 알게 되어 유익했습니다. 좀 더 빨리 이런 시간을 가졌더라면 좋을 뻔했어요. 다음에 또 뵙죠.”

그리고 그는 힐긋 손목시계를 확인하곤, 다시 나를 부드럽게 바라보며 ‘이 분 다시 모셔다드려요.’ 말을 마쳤다. 구석에서 남자가 부스스 일어났다. 그러곤 여전히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내 옆에 다가와 섰다.

권무형은 몹시 지친 얼굴로 옅은 눈썹을 파르르 모으며 두 눈을 감은 채 낡은 소파 뒤로 고개를 젖혔다. 옆에 선 남자는 두 손을 모두 외투 주머니에 꾹 찔러 넣은 채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하 계단을 오르는 동안엔 짙게 고인 불쾌한 냄새를 피하기 위해 숨을 참았다. 지상으로 올라와 바깥으로 나서자마자 급히 가슴을 부풀리며 숨을 들이쉬었다. 차가운 공기가 막힌 코를 뻥 뚫고 머릿속으로 칼날처럼 찔러 들어왔다. 일순 지독한 두통이 일어 휘청하였다.

남자는 여전히 그런 내게 관심이 없다는 듯이 시선을 두지 않으며 길을 건너고 맞은편 역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따라오는 내 걸음이 조금 늦추어진다 싶으면 여지없이 허무의 눈길로 슥 돌아보곤 하였다.

그는 이번에도 곧장 플랫폼으로 들어가 정해진 순서처럼 마침 도착해 있는 기차에 훌쩍 올라탔다. 역시나 무궁화호, 이건 남자의 취향일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잠시 엉뚱한 생각을 했다.

그리고 우리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덜컹거리며 열차가 움직였다. 또, 하행선이었다. 눈 안쪽으로 뜨거운 물을 흘려 부은 것처럼 안구가 따가워졌다.

차창 쪽으로 나를 먼저 들어앉힌 남자는 여전히 호주머니에 두 손을 깊숙이 넣은 채 자리에 앉자마자 눈을 감고 조용히 호흡했다. 잠시 후 여승무원이 들어와 좌석과 손에 든 PDA를 비교하며 천천히 복도를 지났다. 설핏 눈길이 마주쳤으나 그게 다였다.

그리고 또 잠시 후엔 옆머리가 희끗한 중년의 왜소한 남자직원이 카트를 밀며 복도를 지나갔다.

좌석은 모두 차지 않은 상태였으나 앞쪽의 좌우로 젊은 여자들이 동석한 어린아이들을 야단치고 돌보느라 소란했고, 그 외엔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는 듯한 노인들이 피곤한 얼굴로 잠들어 있거나 커다란 목소리로 전화 통화를 하고 있거나 했다.

나는 슬쩍 곁눈을 떨어뜨려 남자가 두 손을 감추고 있는 불룩한 외투 호주머니를 슬깃 훔쳐보았지만, 이내 창밖으로 시선을 거두었다.

열차는 번들거리는 강물 위를 내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저 앞으로는 깎은 산길 곁으로 철로가 굽이져 뻗어있고, 대부분의 철도길이 그러하듯 이어 드넓고 황량한 벌판이 펼쳐져 있을 것이었다.

차창에 이마를 댄 채 나는 숨을 들이켰다. 들이키고, 또 들이켜 몸속에 커다란 공허를 만들었다. 내 몸은 미련하고 또한 악랄해 스스로도 곧잘 속았다. 그리해 어릴 적엔 종종 다른 시선, 일테면 학교에서의 선생님들 또한 쉽게 속일 수 있었다.

승재야 괜찮니? 열이 펄펄 끓는구나. 그래 네 잘못이 아니지, 저 애들이 먼저 괴롭힌 거지? 가엽기도 하지, 일찍 들어가 쉬렴.

빈속에 들이킨 다 식은 싸구려 커피가 명치를 콕콕 찔러 왔다. 그리고,

“흣……!”

헛구역질이 치밀었다. 남자가 슬쩍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곁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진짜를 내보여야 했다. 숨을 더 크게 들이키자, 역겨운 공허가 풍선처럼 둥실 떠올랐다.

“우욱! 웩……!”

급히 손바닥으로 입가를 틀어막았지만 노란 신물이 옷을 적시며 흘러나왔다.

“우왁! 엄마―, 이 아저씨 더러워―.”

앞좌석에서 어린아이가 불쑥 머리통을 올려 보이며 나를 향해 손가락질해 소리쳤다. 어머! 아이 엄마가 얼른 어린애를 끌어당겼다.

남자는 짧게 한숨을 내쉬곤 꼬고 있던 다리를 풀어 주었다. 나는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틀어막은 채 열차 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있던 여자는 벌컥 문을 열며 엎어질 듯 쏟아지는 내 꼴을 보곤 인상을 찌푸리며 당장 반대편 칸 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여자의 것으로 보이는 휴대폰이 세면대 곁에 놓여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

나는 그대로 세면대 위로 풀썩 고개를 숙인 채 토악질을 했다. 힐긋 옆으로 고개를 돌려보자, 투명 칸막이 문 너머로 남자가 자리에 가만히 앉은 채 우울한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물로 얼굴을 적시고 또 헛구역질을 반복하며 다시 한번 곁눈을 보니, 남자는 등받이 뒤로 고개를 젖힌 채 생각에 잠긴 듯 외딴곳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한쪽 손바닥에 물을 받아 입안을 헹구며, 나는 왼손으로 조심스레 세면대 위에서 타인의 휴대폰을 열고 무진의 번호를 눌렀다. 그러나 두어 번 더 입을 헹구어낼 때까지 무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열차 바퀴가 레일 위를 끙끙 힘겹게 마찰하며 속도를 줄이는 것이 느껴졌다. 산을 돌고 있었다. 통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남자는 대각선 방향의 좌석에서 튀어나온 아이가 기어이 복도에서 장난질을 치고 있는 모습을 지루한 얼굴로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전화를 끊고, 재통화 버튼을 눌러 둔 채로 나는 화장실 문 앞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남자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마침 앞쪽 좌석의 맹랑한 사내애까지 복도로 튀어나와 먼저 차지하고 있던 어린애와 발길질을 하며 장난을 쳤다.

화장실 문을 노크하며 나는 옆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파른 절벽을 끼고 도는 바깥 풍경이 굳게 닫힌 자동문의 작은 창문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 옆으로 강제 개폐장치의 아크릴 판 속에서 빨간색 비상 레버가 위험한 모습으로 번득이고 있었다.

다시 열차 칸 안으로 흘깃 고개를 돌려보자, 나를 빤히 주시하던 남자가 여전히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노크하던 화장실 문에서 손을 거두며 나는 재빨리 옆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곧장 한쪽 팔꿈치를 세워 강제 개폐장치의 아크릴 판을 때려 부수었다.

와아아앙―!

사납게 철로를 짓누르며 굴러가는 바퀴 소리 너머로 어린아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자, 복도로 나와 선 남자의 앞으로 어린아이들과 그 엄마들이 뒤엉켜 있었다.

남자는 짧고 뾰족한 이빨을 드러낸 채 무어라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기어이 호주머니에서 한 손을 빼낸 그는, 그러나 다른 한쪽 손은 절대 밖으로 빼내지 않고 있었다.

나는 곧장 빨간색 비상레버를 힘껏 당겼다. 푸쉬이이이―, 자동문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열차는 마지막으로 산을 돌고 있었다. 곧 벌판으로 접어들 것이었다.

남자가 기어이 어린아이들의 등을 짓밟고 여자들을 사납게 옆으로 제치며 다가오고 있었다. 창밖 끄트머리로 들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흣!”

남자가 칸막이 문을 밀어젖히는 것과 동시에 나는 문고리를 좌측으로 꺾어 내렸다. 힘들이지 않고 문이 후드득 열렸다. 세찬 바람이 억세게 쏟아져 들어와 순간 몸이 안쪽으로 말려들어 갈 뻔하였다.

“안 돼에에에―!”

문을 열어젖힌 남자가 손을 뻗어오며 소리쳤다. 열차가 다시 속도를 내기 전, 나는 두 팔로 머리를 감싼 채 지체 없이 훌쩍 허공으로 뛰어들었다.

아주 잠깐, 그러나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내 몸이 민들레 홀씨처럼 팡― 떠올랐다. 무진아, 화드득 벼락처럼 추락하며 나는 네 이름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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