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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05(5권 - 그리하여 어느날 사랑이여 2권) (30/41)

Chapter 05

“이야―, 저 녀석 꽤 하잖아? 혼자는 좀 불안하지 싶었는데, 오히려 팀으로 있을 때보다 더 좋은 것 같은데?”

벽에 걸린 커다란 모니터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김 실장이 감탄조로 말했다. 화면 속에서 케이는 긴 팔을 절도있게 움직여 현란한 춤을 추다가, 이어진 무대에선 중앙에 놓인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기타를 치며 부드러운 음색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엄살떨더니…, 그래도 자기가 뭘 해야 할지는 명확하게 알고 있는 녀석이니까요.”

확정된 스케줄 정리표를 확인받으려 들어와서는 덩달아 물끄러미 화면을 올려다보며, 어쩐지 뿌듯한 마음이 샘솟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음, 하고 같이 고개를 끄덕이던 김 실장이 문득 그런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들고 있던 한약 봉지 귀퉁이에 꽂아진 빨대를 쪽 빨며 말없이 빤히 쳐다보기만 하는 것이다.

좀 무안해진 기분에 마른 코를 훌쩍이며 그가 들고 있는 팩에 힐긋 눈길을 던지자, 마지막으로 남은 것을 쪼르륵 빨며 그가 입을 열었다.

“아, 이거. 겨울만 되면 킁킁거린다고 우리 마누라가 사 줬어. 너도 하나 줄까?”

“아니요, 괜찮습니다.”

“으응, 그러지 말고 하나 마셔 봐, 이게 시커멓게 보여서 무섭기만 하지, 보기와 달리 꽤 맛있거든. 몸에도 좋고 말이야.”

그리고 사양하는 나를 외면하며 극구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테이블 아래서 한약 봉지를 하나 더 꺼내어, 모퉁이를 잘라 내고 빨대를 꽂은 채 내미는 것이다. 그렇게까지 챙겨 주는 것을 모른 척할 수 없어 받아 들고 슬쩍 빨대를 물며 조금 빨아 보았는데,

“……!”

과연 코가 뻥 뚫릴 만큼 쓴맛이었다. 당장 입을 떼며 인상을 찌푸려 보이자, 흥미로운 듯이 눈을 반짝이며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김 실장이 서운하다는 듯 눈매를 접었다.

“에이― 비싼 건데, 건강에도 좋고. 그러지 말고 뜯어 준 거 하난 다 마셔야지. 응? 그냥 한 번에 쭉 빨아, 쭈욱―.”

그리고 기어이 직접 빨대를 다시 물려 준다. 난감한 얼굴로 머뭇거리다, 잔뜩 미간을 구긴 채 그의 말대로 한 번에 쭉 빨아 마셔 버렸다. 입을 떼자마자 콜록콜록 마른기침이 터져 나왔다.

“흐흥. 이래서 난 정말 여승재가 좋더라.”

만족한 얼굴로 김 실장은 빈 팩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케이의 무대가 끝났다. 어, 끝나 버렸네. 아쉬움 없는 목소리로 말하곤 김 실장은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손등으로 입술을 닦으며 나는 그의 자리 위로 들고 온 서류를 올렸다. 대충 훑어보며 ‘그래, 수고했네.’ 평하던 그가 문득 ‘아참.’ 하고 고개를 들었다.

“오전에 체육관에서 연락 왔더라. 마침 우리가 요구한 날짜에 먼저 예약되어 있던 스케줄이 급히 빠져서 우리 쪽에 대관이 가능하다고 말이야.”

“아…, 예.”

입가에 남은 쓴 맛을 손바닥으로 슥슥 문질러 닦으며 나는 눈길을 피했다.

“사실 거의 불가능한 일이어서 아예 다음 시즌으로 연기하는 쪽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하여튼 수완도 좋아, 여승재. 어떻게 구워삶았냐?”

“이쪽 사정 봐줘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그쪽 변경된 스케줄 덕분인데요, 뭘. 운이 좋았죠.”

“하긴, 황금으로도 살 수 없는 시간이렷다. 하늘이 도왔지.”

그런 내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김 실장은 두 손을 머리 뒤로 가져간 채 느긋하게 기지개를 켰다. 그런 그에게 슬쩍 고개를 숙여 보이며 나는 이만 물러나려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뒤에서 또 ‘그런데 있잖아―,’ 하고 말을 걸어온다.

“케이 녀석 활동 시작하는 거 보니까, 괜히 벌써 현준이 생각이 나서 말이야.”

“예, 말씀하세요.”

나는 도로 그의 앞으로 반듯이 섰다. 김 실장은 그런 나를 힐긋 쳐다보며 어쩐지 조금 조심스럽다는 듯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해 왔다.

“그 녀석 살짝 걱정스럽잖아. 제대하고 계속 활동하려면… 신비주의로 나가야 되나? 그런데 여기 처음 들어왔을 때 그 녀석, 여자친구 사귀고 있지 않았었나?”

어떤 상황을 묻는지 알 것 같았다. 괜스레 그의 뒤쪽 벽을 휘 둘러보며 나는 말을 끌었다.

“아… 예, 그런데 현준이, 아닐 겁니다, 그런 거. 그때는 그냥 잠시 외롭고 혼란스러워서……”

“어이, 어이, 그렇게 함부로 말하면 안 되지. 잠시 외롭고 혼란스러워서 몇 년을 그리 해바라기 하나? 모를 때야 단순히 널 굉장히 잘 따르는구나 생각했었다만.”

그러나 김 실장은 오히려 자신이 무엇으로부터 거부당한 듯이 서럽고 억울한 얼굴을 하고선 질책하는 눈길로 나를 흘겨보는 것이었다. 머쓱해진 기분에 나는 그저 벽면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과했다 생각했던지 김 실장은 이내 ‘흠, 흠’ 헛기침을 하곤 말을 이었다.

“아직 전역하려면 한참 남았지만 그 정도 되는 녀석 감당하려면 대충이라도 미리 플랜을 그려 놔야 하잖아. 뭣보다 고민되는 게… 매니저를 어떻게 전담시켜야 하지? 남자? 여자?”

“남자가 더 편할 겁니다. 괜찮을 거예요.”

다시 그와 시선을 맞추며 나는 담담히 대답했다. 그에 김 실장은 ‘그럴까…….’ 하며 턱을 문지르다가, 또 문득 짓궂은 눈매를 반짝 해 보였다.

“가만, 그렇다면 역시, 여승재가 멀쩡한 사내놈 눈까지 멀게 한 마성이란 얘기잖아? 네 자랑하는 거지?”

“아닙니다.”

“아니기인―.”

실장님, 낮게 부르며 나는 그의 빈정대는 말을 잘랐다.

“전 대표 문제로 마음 상하셔서 저한테 풀어내고 계신 거, 저 여기까지 받겠습니다.”

한껏 흥에 취해 목소리를 높이던 김 실장은 돌연 입을 꾹 다물고는 무심한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내 또 헤헤 풀어진 얼굴로 휘휘 손바닥을 저어 보인다.

“에이― 아니야, 아니야. 여승재가 무슨 죄가 있다고 대신 화풀이를 하나? 내가 그렇게 쪼잔한 꽃중년으로 보여?”

“…그렇게는 안 보이시는데요.”

“그렇지? 그렇게 쪼잔하지 않아요, 내가.”

“어쨌든 그날 전 대표 방문, 권무진이 불러들인 것 아닙니다.”

“그럼 그 새끼가 낯짝 들고 감히 여길 어떻게 들어와.”

내 단호한 대꾸에 김 실장은 다시 얼굴을 굳히며 사뭇 맹렬한 눈초리로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남아 있는 전 대표 쪽 사람들…, 그러니까 현재 주주 일부가 알력 다툼하느라 쇼한 거라고 합니다. 무진이…, 지금 대표도 몰랐던 일이고, 자기 선에서 처리한다고 하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행여 다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제가… 실장님 아니어도 제가 절대 못 하게 말릴 겁니다, 어떻게 구워삶아서라도 절대, 전 대표 그 자식 다신 이 동네 얼씬도 못하게 할 테니까……”

“여승재.”

혼자 분에 못 이겨 점차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에, 책상 위로 팔꿈치를 세워 모은 주먹에 턱을 괸 채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던 그가 달래듯이 조용히 내 이름을 불렀다.

“이건 그냥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예.”

퍽 진지한 투로 말을 잇는 것에 나는 의심 없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대꾸했다. 이어 김 실장은 눈살을 가늘게 접으며 조심스레 물어 왔다.

“혹시 조만간 너… 여기 대표 되는 건가?”

“…그게 또 무슨.”

문득 뒤통수가 간지러워져 주춤 한 걸음 물러섰다. 그제야 김 실장은 고개를 갸웃해 보이며 장난스레 눈을 깜빡인다.

“그러니까 너 그쪽으로 시집가면, 아무래도 여기 너한테 맡기지 않을까?”

“시집 안 갑니다.”

최대한 엄격한 투로 대꾸했으나, 그는 손끝으로 내 위아래를 훑으며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그렇지만 너, 오늘도 인형 놀이 당했잖아. 게다가 전 대표 문제 빌미로 시집오라고 협박당할 수도 있는데 말이야.”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앗, 이것 봐, 이것 봐? 벌써 하극상이다, 응? 멋대로 쌩 하니 돌아 나가 버리는… 여승재, 인마……! 같이 고민해 보자니까?!”

나는 곧장 발길을 돌려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가 버렸다.

바람이 찼다. 옥상 문을 열고 밖으로 걸음을 옮기자, 손을 맞잡은 채 시시덕거리고 있던 연습생 남자아이 둘이 나를 보고는 얼른 서로 손을 놓으며 허리를 접어 인사를 해 왔다. 할 일이 있으면 계속 있어라 했는데, 아무래도 불편한지 녀석들은 그저 히히 웃기만 하다가 쪼르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음…….”

김 실장 고민거리 하나 더 늘겠다, 생각하며 담배를 꺼내어 물었다. 난간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라이터 불을 댕기는데, 바람에 불이 잘 붙질 않았다. 비스듬히 돌아선 채 등으로 바람을 막으며 겨우 불을 붙였다.

쓰으으으…… 담뱃잎이 타들어 갔다. 어지간히 어리석은 몸뚱이가 아직도 적응치 못한 니코틴에 취해 잠시 눈앞이 휘청했다. 손가락 사이에 필터를 집은 채 연기를 내뿜으며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바람에 부스스 흩어져 버리는 연기를 눈으로 쫓으며 자연스레 이웃한 빌딩 1층 도넛 가게의 창가 쪽으로 시선이 가 닿았다.

“…….”

그쪽 역시 어지간히 어리석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 정도로 쉽게 물러서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거나.

하지만 또 그렇게 단순히 결론 내리기엔 아무래도 꺼림칙한 부분이 있었다. 난간 위로 한쪽 팔꿈치를 기댄 채 나는 무진의 둘째 형수에 대해 떠올렸다.

가늘지만 선명히 그린 각진 눈썹, 붉은 립스틱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입술, 자로 잰 듯한 보브 스타일의 직모.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쪽을 향해 서슴없이 겨누어진 총구는 이런 방식과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지금 이것은 조용히, 그러나 수줍게 발끝부터 몸을 타고 오르는 작은 거미 혹은 달팽이와도 같았다. 목 부분을 물린다 하더라도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하리라, 그러나 평생을 그리 함께 내 몸에 들러붙어 있겠다는 듯한 강하고 집요한 의지가 느껴졌다.

적개가 아닌 다만 의지로써 끈질기게 달라붙어 온몸 이곳저곳에 회색의 거미줄을 치고 끈끈한 점액질을 남겨, 종래엔 좀비처럼 말라 가게 하려는 것이다.

“피 말려 죽이겠다는 건 바로 이런 건데…….”

언젠가, 재회한 무진이 나를 향해 선뜩한 협박을 했던 말이 떠올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무진 또한 그런 타입의 인간이 아니었다. 잔인하게 깨부수고 걷어차고 마구잡이로 뒤흔들어 결국 나를 쟁취하고야 말았다.

그렇게 돌진해 온다면 그에게 그러했듯 이번에도 힘껏 상대해 줄 수도 있을 텐데, 생각하며 다시 곁눈을 내려 상가 건물을 훔쳐보았다. 어느새 창가 자리는 비어 있었다.

서늘해진 기분에 빈 목덜미를 문지르며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담배를 비벼 끄고 문을 열어젖히려는데, 문득 안쪽에서 누군가 동시에 휙 문을 밀어 오는 것이다.

“……!”

“아이구, 뭘 그렇게 놀라? 누구한테 쫓겨?”

우스울 정도로 흠칫 놀라며 물러서는 나를 보곤, 밖으로 나와 서다 역시 조금 놀란 듯한 안무 트레이너 T가 흐흐 웃으며 농을 걸어 왔다. 쓸데없이 몸을 사린 것이 무안스러워 나는 목덜미를 긁으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니… 갑자기 밀쳐져서.”

“참, 누가 로비서 여승재 만나러 왔다던데?”

“누구?”

그리고 팔뚝을 붙잡으며 알려오는 말에 딱히 로비에서 정식으로 나를 찾는 사람은 없을 텐데 생각하며 고개를 기울이며 묻자, T는 따라 하듯 덩달아 고개를 갸웃해 보이며 입술을 모았다.

“홍? 그냥 홍이라고 하더라? 멀쩡하게 생기긴 했더만.”

“아아. 그래, 고마워.”

뜬금없는 방문이긴 하지만 딱히 놀라운 인물은 아닌 것에 나는 금세 어깨를 늘어뜨리며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만 걸음을 옮기려는데, 길을 비켜나듯 웃으며 훌쩍 물러선 T가 호주머니를 뒤적여 담배를 꺼내다 말고 나를 또 급히 붙잡았다.

“아참참, 그리고 올라오는 길에 보니 김 실장님이 너 찾는다고 눈에 불 켜고 휴게실이며 복도며 막 뒤지고 있더라. 급한 일 같던데.”

“별거 아니야. 그냥… 형수님이 보약 지어 주셨다는데, 약발이 잘 받는지 괜히 기운이 넘치시는 것 같아.”

그러나 이번에도 그리 중요치 않은 정보였다. 심심한 내 반응에 재미없다는 듯 T는 담배를 문 채 ‘흐음.’ 하고 입매를 삐죽이곤 곧장 불을 댕겼다.

“안무가 주제에 담배 좀 줄여.”

여상한 잔소리를 붙이며 나는 다시 발길을 뗐다. 어쭈, 하며 손을 뻗은 T가 버릇처럼 내 엉덩이를 툭 쳤다.

“밥 먹자.”

다행히 김 실장과는 마주치지 않고 무사히 아래로 내려와 보니, 역시나 제홍이 입구 쪽에서 멀뚱히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 하고 다가가 묻자 히죽 웃으며 곧장 한다는 대꾸가 밥 같이 먹을 사람 찾으러 왔단 말이었다.

“심심해서 밖에 나와 밥 먹으려는데 그 놈들 다 바쁘다고 튕기잖아. 밥 사 줄게, 나가자.”

“나도 그렇게 한가한 사람은 아니야.”

“아아― 알지, 알아. 그래도 그놈들만큼 빠듯하진 않을 거 아냐. 제기랄, 알고 지내던 여자애들도 그동안 다 연락이 끊겼어. 조만간 같이 밥 먹어 줄 여자 만들 테니까, 그 전까지 네가 상대 좀 해 줘, 응? 그냥 눈요기할 수 있게 앞에 앉아서―”

“잘 가.”

가치 없는 요구에 냉랭히 인사하고 가차 없이 돌아서 버리자, 그제야 제홍은 ‘아니, 농담, 농담.’ 하며 팔을 붙들고 늘어졌다. 옛날 버릇 못 버리고 그 덩치로 징징거리는 것에 로비를 지나는 사람들이 시선을 주며 웃어 댔다. 질색한 얼굴로 쏘아보자 당장 눈매를 휘며 히히거린다. 경비를 부를까 싶었으나,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에 독뱀처럼 목구멍이 간질거렸다.

“너희 집…, 금융계열이라고 했던가?”

“돈 필요해? 얼마면 되겠어, 최소 이율로 모실게.”

떼어 내는 것을 그만두고 넓게 트인 창밖으로 시선을 붙박은 채 혼잣말을 하듯 낮게 웅얼거리며 묻자, 제홍은 당장 장난스럽게 말을 받았다. 그를 힐긋 쳐다본 뒤 나는 먼저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사 줄 테니까, 시켜 주는 거 먹어.”

“오오―.”

감탄조랄까 희롱조랄까 여하튼 수상한 소리를 내며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 뒤를 새끼오리처럼 뒤따랐다. 그러나 내가 길 건너 맞은편 빌딩에 입점해 있는 다른 식당이나 패스트푸드점도 아닌 1층의 도넛 가게로 들어서자 당장 얼굴을 왁 찌푸리는 것이다.

“뭐야, 도넛 먹으라고? 배고픈데?”

“많이 먹어.”

나는 가뿐히 쟁반과 집게를 떠넘기고 먼저 창가 자리로 가 앉았다. 잠시 투덜대던 제홍은 이내 체념한 듯 쩝 입맛을 다시곤 쟁반 가득 수북하게 도넛과 치즈 크림 바른 베이글 등을 담아 맞은편에 와 앉았다. 그리고 분홍 색소 초콜릿이 입혀진 동그란 도넛을 하나 맛보라며 내미는 것에, 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일 것 같아 나는 냉큼 고개를 저었다.

마실 것이 보이지 않아, 그가 덥석 도넛을 무는 것을 보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주문해 들고 다시 돌아와 앉았다. 고쳐 앉으며 태연히 통유리 창밖으로 시선을 그었지만, 딱히 눈에 띄는 점은 없었다.

제홍은 정말 배가 고팠는지 입술에 슈거파우더를 잔뜩 묻힌 채 빠른 속도로 도넛을 먹어 치우면서도 끊임없이 내게 농을 걸고, 오랜만에 들어온 한국에서 느끼는 변화 등을 늘어놓으며, 또 간간이 외롭다 운운, 여자 타령을 하기도 했다. 계집애 같았던 성격이 자란 몸에 맞추어 카사노바 기질로 변질된 모양이었다.

여전히 수다스럽지만 타인의 기분을 민감하게 캐치하고, 분위기를 맞출 줄 안다. 덩칫값 하느라 더 능청스러워졌고, 저 자신보다는 타인의 아름다움에 심취하게 된 듯했다. 그러고 보면 원래 그런 기질이 다분하였고, 지금의 모습에서야 제대로 맞추어진 것도 같았다.

“정말 왜 나야?”

딱히 어울려 주지 못할 건 없지만, 자타 공인 넓은 인맥 놔두고 하필 재미없는 나를 찾아온 것이 의아스러워 심드렁히 수다를 듣다 말고 문득 물어보았다. 허기가 좀 가셨는지 퍽 기분 좋은 얼굴을 해 보이며 제홍이 대답했다.

“나머지 놈들 엄청 빡빡하게 군단 말이야. 나한테 잔소리까지 해. 아아, 재미없어. 현찬성 그놈까지 배신하고 말이지.”

“…넌 여기서 하는 일 없어?”

“일 배우라고 보내 놓은 거 팽개치고 멋대로 들어와 앉았는데 무슨 일을 주겠어. 일단은 그냥 놀고먹고 있지만, 사실 난 이게 제일 적성에 맞는 것 같아. 경영이니 정치니 아주 지겨워.”

한심스러워하며 묻는 것을 뻔히 알아챘을 법한데도 그는 가감 없이 더욱 한심스러운 대답을 내놓았다. 그 태평하고 솔직한 태도가 이쪽의 기분을 한결 가볍게 만들어 주기도 했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한결같은 그 명랑함이 퍽 마음에 들어 슬쩍 웃음 지으며 고개를 숙이는데, 문득 맞은편에서 그가 ‘어.’ 소리를 냈다. 고개를 들어 ‘왜.’ 묻자,

“아니, 어디서 반사 빛이 조금…….”

눈이 부신 듯 잠시 눈꺼풀을 깜빡이던 제홍은 그러나 이내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어 보였다. 서둘러 창밖으로 눈길을 돌려 보았으나, 여전히 의식되는 점은 없었다.

대화가 끊기는 것이 아쉽다는 듯 제홍은 내 얼굴 곁으로 뻗어온 손가락을 딱 맞부딪쳐 소리 내며 시선을 돌리게 하곤, ‘그리고 말이야―,’ 하고 말을 이었다.

“다들 정말 피곤하게들 살아. 형제의 난, 그게 다 뭐야. 나는 형들이랑 사이도 좋다고. 아버지는 물론이고 본가 어머니, 친척들한테까지 두루 예쁨 받으며 자랐어. 내가 꽤 막둥이거든, 그래서 그런지 우리 영감은 아직까지 내 말이라면 무조건 끔뻑하고 넘어가. 좀 안쓰러워하는 마음이겠지만. 사실 이번에 멋대로 들어온 것도, 그리고 이렇게 빈둥거리고 있는 것도 그저 타지에서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으면, 하고 생각들 한단 말이지. 그러니까 난 괜한 욕심 부릴 생각 없어. 지금 누리는 평화가 좋아. 그냥 적당히 유산이나 물려받고 예쁜 여자 만나서 즐겁게 사는 게 제일 희망 사항이야.”

청산유수로 뽑아내는 수다에 나는 어느새 창밖의 시선을 찾아내는 것도 잊고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늘 없는 인상과 맹랑하지만 음흉하진 않은 태도가 그의 말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었다.

“진짜 무사태평이었네. 다들 너처럼 살면 좋겠지. 그런데, 얼굴 너무 따지지는 마. 다들 그런 건 아니지만, 이쪽에서 지내다 보니 얼굴값이라는 게 진짜 있다 싶으니까.”

정말 솔직하구나 생각하며 멍하니 쳐다보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곤 충고조로 한마디 해 주자, 제홍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너무 예쁜 여자 피곤하지. 주위에 들러붙는 놈들 쳐 내느라 고생이고, 얼굴 하나 무기로 밀어봤자 금방 시들 뿐이고. 그런 의미에서…, 차라리 딱 너 같은 정도가 좋은데.”

그러다 돌연 곧게 시선을 맞춰오며 손가락으로 총을 쏘듯이 손짓해 말을 맺는다. 나는 심드렁히 눈썹을 치켜뜨며 물었다.

“딱 나 같은 정도가 뭔데.”

“사내놈이 몸짓은 나른하고 눈빛은 새침하니 예쁜데도 위화감은 전혀 없고, 다행히 성질머리에 가시 돋아 남자든 여자든 함부로 들러붙을 염려는 없을 것 같고, 우선 이 정도?”

노래 구절처럼 흥얼거리며 대꾸한 제홍은 눈살을 접으며 함박 웃어 보였다. 딱히 놀리려는 의도는 없어 보여, 나는 여전히 심심한 태도로 말을 받았다.

“칭찬으로 듣고 욕 안 할게.”

“그래서 말인데, 나하고는 어때? 생각 없어?”

“…….”

그러나 이어진 뜬금없는 헛소리엔 당장 눈매가 삐뚤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내 얼굴이 웃기다는 듯 제홍은 콧등을 찡그리며 조금 낄낄거리곤, 이내 흥청거리는 홍콩의 밤거리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퇴폐적인 눈빛을 해 보이며 퍽 그럴듯한 미끼를 던져 왔다.

“딱히 위험한 일에 휘말릴 것도 없고, 네 말처럼 그저 태평하고 즐겁게만 지낼 수 있는데 말이야. 말했듯 우리 가족 다 화목하고 내 선택이라면 무조건 찬성표라 너도 흔쾌히 받아 줄 거고… 너한테 진짜 가족을 만들어 줄 수도 있다고. 응? 어때?”

“…….”

나는 대답 없이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빤히 응시하였다. 그 집요한 시선에 제홍의 빤빤했던 얼굴도 점차 무안함으로 어색하게 굳어 갔다. 그리고 기어이 헛기침을 하며 슬쩍 눈길을 피하려는 찰나,

“권무진이 시켰지, 떠보라고.”

퉁, 탁자 다리를 걷어차며 기습적으로 물었다. 그에 놀란 듯 어깨를 흠칫한 제홍은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시선을 흩트렸다.

“…아닌데.”

“배알 없는 자식.”

곁눈으로 흘겨보며 모욕을 주자, 노선을 바꾸어 억울한 듯이 목소리를 높여 온다.

“와아―, 남자의 순정을 무시하네. 그냥 거절하면 될 걸, 이렇게 내 순애보를 모함하고 짓밟을 것까진 없잖아?”

“입방정 그만 떨고 마저 먹기나 해.”

“…….”

그러나 이내 퉁퉁한 얼굴로 얌전히 도넛을 덥석 문다.

***

삐빅, 기계음에 이어 도어록이 풀려나는 소리가 들렸다. 슈거파우더가 잔뜩 묻은 도넛을 한 입 베어 물고, 세워 올린 무릎 위에 책등을 놓은 채 나는 깨끗한 손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곧이어 현관 쪽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왔어.’ 하고 인사를 해온다. 펼쳐진 책장 위로 시선을 박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더니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제야 나는 놀란 기미로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들었다.

“아, 미안. 책 읽느라. 늦었네.”

“응.”

시무룩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며 무진은 탁자 위에 놓인 접시 위로 힐긋 시선을 주었다. 나는 초콜릿 범벅인 도넛을 하나 들어 내밀어 보였다.

“출출해서. 도넛 하나 먹을래? 이가 몽땅 빠져 버릴 것처럼 달고 맛있어.”

“…….”

질색한 얼굴로 무진은 당장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계단을 오르다 말고 여전히 소파 위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나를 돌아보며 시큰둥하게 말을 걸어온다.

“책, 위에서 봐도 되잖아. 그건 그만 먹고.”

그래, 흔쾌히 대답하며 나는 곧장 손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 책을 들고 그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그 순순한 태도에 무진은 미심쩍은 얼굴을 하고선 뒤따라오는 나를 몇 번이고 힐긋힐긋 돌아보았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욕실로 들어가는 길에서부터 허물처럼 옷을 벗어 던지다가, 곧장 침대 위로 올라가 앉은 채 또 책을 펼쳐 드는 나를 슬쩍 돌아보곤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입술에 하얀 거 잔뜩 묻었는데, 몰랐어?”

그러곤 히죽 웃으며 당장 고개를 숙여 오는 것이다. 개처럼 길게 내민 혀로 그가 내 입술을 핥아 내려는 순간, 그러나 나는 ‘아.’ 하며 고개를 틀어 직접 손으로 입술을 슥슥 털어 내 버렸다.

“…….”

원래의 제 것을 빼앗긴 듯 얼굴을 구긴 무진이 허리에 두 손을 짚은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책장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흥, 심통 맞은 얼굴로 그는 이윽고 욕실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타일 바닥 위로 세찬 물살이 부딪쳐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펼친 책을 잠시 옆자리에 엎어 두고 내 휴대폰을 찾아 들었다. 몇 개의 안부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다정한 안부 인사를 다시 보내자, 곧장 특이사항 없는 대꾸가 돌아온다. 무척 편리하고 유용한 기기다.

좀 더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는데, 무진이 말간 얼굴로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나왔다. 그리고 그것 또한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뜨리곤 곧장 침대 위로 털썩 몸을 뻗으며 누워 왔다.

눈 감은 얼굴이 진솔한 피로를 담고 있었다. 허벅다리에 닿은, 아직 끝이 축축한 그의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나는 문득 ‘이것 봐.’ 하고 그의 얼굴 앞으로 내 휴대폰 액정을 들이밀었다. 갓난아이의 넓적한 얼굴이 화면 가득 띄워져 있었다.

“작년에 결혼하면서 퇴사한 여직원이 남자아이를 낳았대.”

“아아.”

실눈을 뜬 채 무진은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엄지 손끝으로 액정을 톡톡 두드리며 나는 말을 이었다.

“갓난아인데 쌍꺼풀이 짙어.”

“그러네.”

건성으로 대답하며 무진은 이어 입을 쩍 벌리곤 하품을 했다. 나는 다음 사진으로 넘겼다.

“벌써 제 부모를 알아보고 눈만 마주치면 방긋 웃는대.”

“개도 먹이 주는 사람이 다가가면 열렬히 꼬리를 흔들지.”

“신기할 정도로 그 여직원을 쏙 빼닮았어.”

“남편 아닌 다른 남자 닮은 것보다야 낫겠지.”

한쪽 팔을 괴고 옆으로 누운 채 그는 지루한 얼굴로 내 티셔츠 아래로 손바닥을 밀어 넣으며 불량한 소리를 지껄였다. 장난감을 만지듯 젖꼭지를 돌돌 문지르는 손길에도 아랑곳 않고, 나는 또 다음 사진을 넘겨 보이며 물었다.

“귀엽지 않아?”

그러자 당장 손을 거둔 무진이 잔뜩 구긴 얼굴을 하고선 벌떡 일어나 앉는다.

“별로. 싫어해, 어린애. 멋대로 먹고 싸고 울고 보채고 시끄럽고 귀찮게 굴잖아, 질색이야. 갑자기 왜 이런 건 보여 주는 거야?”

“그냥.”

나는 태연히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쯧.’ 혀를 차며 다시 눕는 그를 향해 덤덤히 말을 이었다.

“그럼 넌 네 아이도 별로라는 건가? …가지고 싶지 않아?”

“…….”

“나는 내 아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게 진짜 죽을라고……!”

이빨을 드러낸 사나운 얼굴로 무진은 다시 벌떡 몸을 일으키곤, 당장 우악스레 내 머리카락을 틀어쥔 채 베개 위로 풀썩 눌러 엎어뜨렸다. 푹신한 데에 얼굴이 짓눌린 채 나는 담담히 속삭여 말을 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천애 고아였으니까 피붙이 하나라도 있으면 그래도 죽을 때까지 외롭지는 않겠다고…, 부모 형제보다 그쪽이 더 간절했었는데.”

“아아! 그럼 한번 해 보자고, 까짓 하고 또 하다 보면 주먹만 한 애새끼 하나 안 생기겠어?! 오늘 한번 너 죽어 봐.”

내 침울한 고백에 무진은 더 눈이 뒤집혀 씩씩대며 초조하고 억센 손길로 입고 있는 헐렁한 바지와 속옷을 동시에 와락 벗겨 내렸다. 그리고 당장 내 두 다리를 넓게 벌려 양쪽 어깨 위로 걸쳐 올린 채 가운데 자리를 잡고 급히 자신의 아랫도리를 끌어내리는 것이다. 나는 한쪽 발꿈치로 그의 어깨를 지그시 떠밀며 덤덤히 입을 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널 택했잖아. 네 손, 잡았잖아. 같이 살고 있잖아.”

“…….”

거칠게 굴던 동작을 문득 멈추고, 잔뜩 성이 나고 약이 올라 금방이라도 울어 버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선 그는 나를 천하 더 없는 웬수처럼 원망스런 눈길로 쏘아보았다.

그러다 또 돌연 표정을 바꾸어, 속아 넘어간 것이 분했는지 심통 맞은 얼굴로 내 한쪽 발을 가져가 꽤 아프게 발가락을 질끈 물었다. 다른 쪽 발꿈치로 당장 그의 이마를 밀쳐 내며 나는 말을 이었다.

“피붙이에 대한 그리움 같은 거야 원초적인 거고…, 사실 나도 어린애 별로 안 좋아해. 너랑 같은 이유도 있지만 뭣보다 남은 내 인생 희생하며 돌봐야 하는 책임감, 좀 무서워. 그게 단순히 신인 발굴해서 데뷔시키는 정도가 아니니까. 게다가 이제껏 혼자 잘 살아오다 겨우 너 하나 덧붙여진 것만으로도 손 바쁘고 머리 아픈데 뜬금없이 가족 같은 거, 복잡해져서 귀찮고 싫어. 다른 누구 가족관계 속으로 새로 편입되는 건 더더욱 싫고. 오히려 그게 더 정상 아니잖아.”

“…이제홍 이 새끼… 혓바닥 뽑아 버릴 거야…….”

갑자기 허탈해졌다는 듯 무진은 내 가슴 위로 얼굴을 묻은 채 납작하게 몸을 붙이고 누워 왔다.

화목한 가정으로의 편입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은 둘째치더라도, 피붙이 하나 있었으면 하는 바람에 대해 가볍게 말해 버린 건 거짓이었다. 그의 말처럼 하고 또 하다가 어떻게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방법으로 아이가 하나 생긴다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내 남은 인생을 몽땅 그 약하고 어린 핏덩이에게 쏟아 희생할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무진과 맞바꾸어서까지 얻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비교 우위를 차지한 그에게 나머지 하나에 대한 아쉬움을 굳이 솔직하게 털어놓아, 마음 바쁘고 지친 그를 더 초조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

그는 이미 충분히, 천애 고아인 데다 아이도 낳을 수 없는 나의 피치 못할 약점을 채워 주지 못하는 것을 자신의 커다란 약점으로 전환시켜 버린, 이 세상 다시없을 불운한 머저리였다.

“이제홍 너무 믿지 마. 내가 다 이긴다니까.”

나는 잔뜩 허세를 부리며 덧붙여 말했다.

“흐흥.”

금세 퍽 기분이 좋아졌는지 아래로 주욱 몸을 미끄러뜨려 내린 무진은 내 민둥한 사타구니에 얼굴을 비볐다. 이 정도는 무안한 축에도 속하지 못했지만, 달리 걱정되는 바가 있어 나는 슬쩍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밀어 냈다.

“그대로 속옷이랑 바지 다시 끌어 올려. 오늘까지 하면 최소한 보름은 더 고생해. 그럼 아쉬운 건 너잖아.”

“…….”

곰곰이 손익을 따져 보는 듯 무진은 내 얼굴과 사타구니를 두어 번 번갈아 보고는, 결국 쩝 입맛을 다시며 아쉬운 얼굴로 벗겼던 속옷과 바지를 끌어 올려 입혀 주었다. 그리고 한결 느긋해져선 내 옆으로 나란히 누운 채 한쪽 팔을 내 뒤통수 뒤로 찔러 넣어 준다.

“…먼저 자.”

그러나 나는 옆에 놓아둔 책을 다시 얼굴 앞으로 펼쳐 들었다. 그런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그가 퉁퉁한 어조로 물어 왔다.

“그만 자. 뭘 또 읽는 거야?”

“좀 더 읽고 싶어. 요즘은 여유롭게 책 읽을 시간도 없어.”

“…무슨 내용이지?”

찔리는 게 있어서인지 그는 가뿐히 물러서는 태도로 다정하게 꾸며 낸 목소리를 내며 물었다. 눈으로는 인쇄된 글자를 따라 읽으며 나는 심드렁히 입을 열어 대꾸했다.

“주인공 여자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남자친구를 찾아 나서는 내용.”

“딴 여자랑 바람났겠지.”

“그러다 마주한 부조리한 현실에 기어이 미쳐 가는 내용.”

“그럴 땐 두 연놈들 붙잡아 와 사지 절단하고 가둬 둬야지. 여승재, 그 소설 교훈은 이거야, 응? 한눈팔면 큰일 난다.”

“…….”

그러나 고약한 성질은 어쩌지 못해 히죽 웃으며 따박따박 악질 대꾸를 내놓는 것이다. 책에서 잠시 눈길을 거두고 그를 한심스런 눈초리로 흘겨본 뒤, 다시 덤덤히 설명해 주었다.

“7, 80년대 한국이 배경이야. 여주인공 남자친구가 학비를 벌려고 공장에 취직을 했어. 여주인공은 나중에야 알았는데 그 안에서 남자가 조합을 일으키고 노동운동을 이끌었거든. 조합의 중요인사 몇몇이 차례대로 의문사 당하거나 행방불명이 돼. 그리고 뭐… 대충 그림 나오잖아. 그런 얘기야. 거대한 힘이 어떻게 작은 힘들을 억압하고 약탈하며 더 거대해지는지에 대해서.”

“…….”

이번엔 그가 입을 꾹 다문 채 눈살을 찌푸리곤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그의 턱을 밀어 돌리며 가뿐히 말했다.

“너 괴롭히려고 일부러 고른 거 아니야. 그냥 요즘 부쩍 이런 내용이 잘 걸리더라고.”

“너 나하고 있을 때 모습 카메라에 담아서 네 주위 사람들한테 다 보여 주고 싶어. 진짜 악질은 너라고.”

바짝 얼굴을 붙인 채 무진은 퉁명스레 쏘아붙였다. 억울하다, 나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의도한 건 아니라니까. 그런데 한 가지는 약속해 줬음 좋겠어. 파렴치하게 공공의 이익 내세우며 거대 힘에 반하는 힘없는 사람들 막무가내로 쫓아내진 말았으면―”

“아아, 여승재―.”

“어쨌든 요즘 유독 그런 쪽으로 관심이 가서 여기저기 찾아보니까, 실제로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더라. 사람 하나 묻는 거, 일도 아니지. 흔적도 없이 존재 자체를 지워 버리는 식이야. 딱히 옛날 일만으로 치부할 순 없다는 게 내 생각인데, 네 생각은 어때?”

“……아.”

듣기 괴로운 듯 차라리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던 무진이 불현듯 멍청한 소리를 내며 번득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빤히 두 눈을 응시하며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는 것에, 화가 났나 싶어 슬쩍 기세를 죽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게 왜 쓸데없이 찔러 보느냐 말이야, 그럼 더 튕겨 오르는 거 알면서…”

“역시 난 너 악독하게 굴 때마다 허리 아래쪽이 욱신거릴 만큼 흥분돼.”

그러나 무진은 말을 맺기도 전에 덥석 내 양 볼을 눌러 턱을 벌리게 하곤 막을 새도 없이 곧장 깊게 혀를 섞어 왔다. 그대로 무얼 할까 싶어 퍼뜩 몸을 움츠렸는데, 그는 다만 내 입술 위로 ‘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추곤 훌쩍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그러곤 바로 휴대폰을 들고 노트북을 찾는 등 바삐 움직였다.

“찬, 지금 접속할 수 있어? 찾아볼 게 좀 있어. …아, 조금 과격한 쪽이긴 한데, 모아 둬서 나쁠 거 없지.”

멍청한 얼굴로 침대 위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나를 힐긋 돌아보곤 그는 통화를 하며 아래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처리해야 할 일이 떠오른 걸까.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책을 집어 들었지만 글자가 헝클어져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일하는 거야?”

결국 어슬렁대며 아래층으로 내려가 먼저 주방에서 물컵을 들고 나오며 슬쩍 말을 붙이자, 무진은 노트북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심심히 대답했다.

“응. 넌 책 읽는다며. 올라가 마저 읽어. 한눈팔면 큰일 난단 교훈 잊지 말고.”

“…….”

덧붙여진 웃기지 않은 말에 나는 당연히 웃어 주지 않았다. 그는 모니터를 주시하며 혼자 피식 웃고는 돌연 표정을 구기며 ‘뭐가 이렇게 굼떠…….’ 하고 혼잣말을 구시렁거렸다. 그러다 또 휴대폰을 들고는,

“지, 나야. 확인해 줄 게 있어. 이쪽에서 물리는 게 있으면 곧바로 자료 넘길 테니 메시지 수시로 확인해.”

전화가 끊겨 있는 듯한 지석운에게 두루뭉술한 음성 메시지를 남기며 성마르게 노트북 자판을 툭툭 두드려 댔다.

팔뚝까지 내어 주며 어서 자자 보채다가 갑자기 남은 일이 있다며 다급하게 구는 것이 수상쩍기도 하지만, 일과 관련된 문제라면 들어 봤자 이쪽으로선 조언은커녕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할 것이라, 나는 그저 컵 주둥이로 입술을 누른 채 조금씩 기울여 물을 마시며 주변을 어슬렁대고 있을 뿐이었다.

무진은 그런 내가 오히려 수상쩍다는 듯 문득 ‘음?’ 하고 고개를 갸웃하며 눈을 맞춰 왔다.

“왜, 입 맞추고 나니까 내 총 갖고 놀고 싶어졌어?”

“…무슨 총…….”

그리고 퍽 진지한 투로 짐작해 묻는 말에 덩달아 고개를 기울이며 되묻다가, 언뜻 그가 히죽 웃으며 꼬았던 다리를 슬쩍 풀어내는 것을 확인하곤 냉큼 발길을 돌려 버렸다. 뒤에서 그가 질 나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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